금검지(金劍誌) 와룡생(臥龍生) 1. 폭풍의 서막 가을이 마악 문턱을 넘어선 팔월의 어느날 밤... 굽이굽이 흐르는 상강(湘姜) 줄기는 단계촌(丹桂村) 옆의 장벽호 (長碧湖)로 쌀쌀한 바람을 안은 채 흘러들고 있었다. 장벽호는 은색의 월광(月光)으로 가득했다. 출렁이는 물결 위에 부서져 내리는 달빛과, 호변에 빽빽이 서서 무성한 잎사귀의 그늘 을 드리우고 있는 많은 수목들, 마치 한 폭의 훌륭한 풍경화를 연 상시키는 맑고 맑은 풍경이 장벽호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산들거리는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계자나무의 향기 를 뚫고 유유히 호수 위를 미끄러지는 한 척의 나룻배. '삐이걱, 삐이걱...' 노젓는 소리만이 고요한 호면에 퍼져 나갈 뿐 배 위는 무거운 침 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뱃머리에는 오륙십 세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잔잔한 수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고 그 곁에는 사십여 세쯤 된 중년 부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 부인의 품에는 한 소년이 잠들고 있었다. 부인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소년을 내려다 보더니 어깨에 둘렀던 커다란 목도리를 끌러 소년의 몸을 덮어 주었다. 노인은 부인과 소 년을 힐끗 보더니 탁자 위에 놓인 차를 잔에 따라 목을 축였다. 노인은 흰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입 을 열었다. "영은 잠들었소?" "네." 부인은 엷은 미소를 띠었다. 맑고 어글어글한 눈, 오똑한 콧날, 나비를 문 듯한 입술, 약간 갸름한 턱이 하얀 살결과 새카만 머리 칼과 어울려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특히 웃을 때, 반달처럼 휘는 눈꼬리며 붉은 입술이 살짝 들리며 엿보이는 백옥같은 이는 매력적이다. 노인은 취한 듯한 시선으로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 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달을 쳐다 보며 긴 탄식을 불었다. "삼십 년의 공명이 진토와 같구나!" 노인의 어조는 매우 침통했고 가늘게 떨고 있었다. 부인은 노인의 침울한 모습에 잠간 시선을 던졌다가 소년을 내려 다 보며 말했다. "밤이 깊었어요. 이제 들어 가는 것이 좋겠어요. 영아가 감기라 도 들면 또 고생이니까요."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뱃사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공, 뱃머리를 돌리게." 이 때였다. 휘황찬란한 등불로 장식한 커다란 배 한 척이 나는 듯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배는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곧장 노인이 탄 나룻배를 향해 달려 왔다. "......" 노인이 의아한 눈길로 그 배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그 배는 이 미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와서 금방 부딪칠 듯했다. 나룻배의 사공 이 급히 뱃머리를 돌려 그 배를 피했다. 이때 다른 사공이 삿대를 휘두르며 큰 배를 향해 소리쳤다. "야, 눈깔은 시장에 팔고 다니냐? 내 배와 부딪히려는 심사가 뭐 야?" 큰 배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들리지 않고 여전히 달려오던 속력대 로 밀어 닥쳤다. 사공은 급히 삿대로 큰 배를 밀어 냈다. 두 배는 아슬아슬하게 비켜 나갔다. "저런 육시랄 놈이... 귀머거리, 벙어리에 장님만 탔나?" 화가 치민 사공이 다시 큰 배를 향해 욕설을 퍼붓더니 노인을 돌 아보며 씨익 웃었다. 자기가 저처럼 큰 배를 밀어 낸 자신의 솜씨 가 어떠냐는 표정이었다. 노인은 뒷짐을 지고 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배가 충 돌할 뻔했는데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겁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것을 본 사공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큰 배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야! 너희들 모두 죽었냐?" 그러나 여전히 큰 배에서는 아무 응답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호변 을 향해 줄곧 달리고만 있었다. 호변은 한 길씩 자란 풀밭이었는데 그 배는 풀밭 속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노인은 그 배를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저 배에는 사공이 없는 모양이군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보아서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노인은 풀밭에 깊숙이 박혀 버린 큰 배를 바라보더니, 사공을 돌 아보며 분부했다. "사공, 배를 저 배 가까이로 접근시키게." 중년부인은 노인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며 막으려고 했으나 사공은 이미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나룻배가 큰 배 옆으로 다가 갔다. 노인은 큰 배 주위의 동정을 살피더니 몸집이 큰 사공에게 말했 다. "괴상한 배로군, 저 배에 올라가 보게." 사공은 삿대를 내려놓고 큰 배로 올라갔다. 사공의 모습이 선실 안으로 사라졌다 싶었는데 별안간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뒤이어 사공의 커다란 몸집이 무엇에 튕긴 듯 솟구쳐 나오더니 호수 속으로 첨벙 뛰어 들고 말았다. "......?" 노인은 안광을 빛내며 큰 배를 노려보더니 훌쩍 몸을 날렸다. 이 때 부인의 품에 안겨 자고 있던 소년이 깜짝 놀라 깨었다. 큰 배로 옮겨 탄 노인은 갑판에 서서 선실을 바라 보며 헛기침을 한 번 하 고는 큰 목소리로 물었다. "안에 누구 없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노인은 선실을 들여다 보았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띈 것은 칼자루에 달린 황색의 검수(劒穗) 였다. 그 칼은 사람의 등을 뚫고 선실의 벽에 박혀 있었다. "으음!" 칼에 찔린 사람은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노인이 가벼운 한 숨을 내쉬며 선실로 들어서자 순간 우뚝 걸음을 멈추며 얼굴을 잔 뜩 찡그리고 말았다. 선실 안엔 처참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탁 자와 의자가 마구 흩어져 뒹굴고 바닥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한편 문 옆에는 중년 남자가 등허리에 타박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음... 누가 이런 몹쓸 짓을......" 이때 노인의 시선은 또다시 멈추었는데 검정색 장삼을 걸친 거한 이 열 손가락을 벽에 꽂은 채 서 있었다. 얼른 보기에는 벽을 끌어 안고 서 있는 것 같았으나 그 사나이는 이미 숨이 멎은 지 오래되 었다. 열 손가락이 벽에 박혔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거한은 몸에 이렇다 할 상처는 보이지 않았고 입과 코에서 피 가 쏟아져 나온 것 뿐이었다. 휘황찬란한 등불은 이 세 개의 주검 을 싸늘한 음영을 이루며 비치고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덜 컹덜컹 흔들고 있었다. '처참하고 무서운 광경이다.' 노인은 으스스한 전율을 느끼고 급히 몸을 돌려 선실 밖으로 나 가려고 했다. 이때 어디선가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응...?' 노인은 다시 몸을 돌리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선실을 둘러 보았 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노인은 급히 밖으로 뛰쳐 나가려고 했다. 이때 다시 가늘고 긴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음...? 사람의 신음을 듣고 내가 어찌 이대로 발길을 돌릴 수 있으랴. 우선 살펴보기나 하자.' 노인은 잠시 주춤거 리다가 몸을 돌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 섰다. 그는 선실 구석구석을 살펴 보다가 어두운 구석에 쓰러져 있 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남색 비단옷을 입은 부인이었는데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여인네까지 이런 참변을......" 노인은 여인이 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급히 선실 밖으로 뛰어 나가 사공들을 불러 들였다. 조금 전에 물로 뛰어 들었던 사 공과 다른 사공 한 명이 큰 배로 올라 왔다. 노인은 창문을 하나 뜯어 내어 그 위에 여인을 눕혔다. 두 사공 이 들것을 들자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여인은 괴로운 신음을 뱉으며 창백한 얼굴로 고통에 찬 신음을 뱉어 내며 허공을 향해 팔을 내저었는데 그녀가 팔을 흔드는 바람 에 상처에서 다시 선혈이 솟았다. "으으으....." 여인은 몹시 괴로운 듯 입술을 꽉 깨물더니 지그시 눈을 감아 버 렸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사공들이 여인을 나룻배로 옮겼다. 그때 큰 배에서 새카만 연기 가 자욱이 피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선실에서 불길이 활활 솟아 올랐다. "빨리 이곳을 떠나자!" 노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룻배는 머리를 돌리며 멀어 져 갔다. 간간이 신음을 뱉으며 누워 있던 여인이 다시 눈을 뜨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큰 배가 이미 화염 속에 싸인 것을 본 여인 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인의 두 눈에 제일 먼저 들어 온 것은 공작의 무늬가 그려진 천정이었다. 방 안을 둘러 보니 고급 화장대와 커다란 거울, 은으로 만든 등, 사군자가 그려진 병풍이 차례로 눈에 들어 왔으며 자신은 비단금침 을 덮고 있었다. '상당한 부잣집인 모양이구나,' 문이 살며시 열리며 중년 부인이 들어 왔다. 첫눈에 매우 고아한 인상을 풍기는 부인이었다. 부인은 여인을 보고는 놀라움과 반가움 을 띄우며 말했다. "아, 깨셨군요." 여인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미천한 몸을 살려 주셨는데......" 여인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온몸이 욱신거려 도저히 몸을 일 으킬 수가 없었다. 부인이 급히 여인을 만류하며 말했다. "괜찮으니 그대로 누워 계셔요." 여인은 반듯이 몸을 눕히며 처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만일 부인께서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이 큰 은혜를 무엇으 로 갚아야 할지...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뇨? 그런 생각은 마시고 마음 푹 놓으세요. 저희 집은 식 구가 단출해서 거소가 매우 조용합니다. 그다지 넉넉한 형편은 아 니지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마우신 말씀만 아직 부인의 존함을 모르는데요" 부인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소씨(簫氏)입니다." "아, 소부인이시군요." "호호, 그렇게 높여서 호칭하진 마세요. 제가 몇 살 정도 더 먹 었을 것 같은데... 차라리 우리 아예 언니니 아우니 하는 편이 어 떨까요?" 여인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부인께서 이처럼 아껴주시니 제가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호호, 또 그런 말씀... 상처가 매우 깊으니 말을 너무 많이 하시 면 좋지 않아요. 제 남편이 성내(域內)로 약을 지으러 갔으니 곧 돌아오실 거예요." 여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생면부지인 제게 이토록 대해 주시니 이 몸은 한번 죽었다 깨어 난다 해도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을 것 같군요." 여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뜨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실례지만 한 마디 여쭙겠습니다. 제가 탔던 그 배는 어떻게 되 었나요?" "완전히 전소되었어요. 정말 무서운 불길이었어요." 여인의 표정은 무슨 생각에 골똘히 잠긴 듯 했다. 소부인은 그녀 가 타버린 배를 아까와하는 줄 알고 그녀를 위로했다. "재물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지요. 배는 생각지 말고 우선 몸을 생각해야지요." "부인의 호의는 정말 고맙습니다." 여인의 상처를 살펴본 후 밖으로 나가는 소부인의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인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여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다. 침상 머리맡에서 일렁이 는 촛불 속에 소부인 이외에 또 한 명의 풍채 좋은 노인이 앉아 있 었다. 눈을 뜬 것을 본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전신에 아홉 군데나 중상을 입고서도 이렇게 생명을 부지하다니 정말 노부(老夫)에겐 뜻밖이었소." 여인이 조용한 어조로 감사를 드렸다. "선배님의 구원을 받아 이 몸이 삶을 얻었으니 정말 고마움을 말 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허허, 무슨 은혜랄 게... 내가 의술을 조금 알지만 이런 중상에 대해서는 치료할 능력이 없소이다. 단지 부인께서 잘 견디어 다행 히도 이젠 큰 위험은 벗어났소이다. 상처가 완쾌되는 대로 한동안 휴식을 취하면 곧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거요." "......" "이 탕약은 노부가 심혈을 기울여서 지은 것이니 아무 생각 마시 고 한숨 푹 주무십시오. 내일 아침에 노부가 다시 와서 진맥하겠소 이다." 노인은 말을 마치고는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노인이 나가자 소부인이 약그릇을 받쳐들고 다가앉으며 낮은 음 성으로 말했다, "우리집 양반은 겉으로는 냉정하게 보이지만 마음은 무척 인자하 답니다. 평소 남에게 겸손을 보이지 않는 성격이니 아우님은 너무 흉보지 마세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서 약이나 드세요." 여인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미천한 제가 어찌 부인과 대등한 칭호로 불릴 수 있습니까? 운 고(雪姑)라고 하오니 천한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소부인은 가벼운 미소를 띄며 말을 받았다. "아우님은 중상을 입어 비록 혈색은 없지만 매우 아름다워요. 내 짐작에 아우님이 명가의 출신인 것 같은데.." 운고는 말없이 손을 내밀어 약그릇을 받았다. 며칠 지나자 운고의 상처는 깨끗이 아물고 걸을 수도 있었다. 그 동안 그녀는 소부인의 입을 통해 소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대강 들 었다. 소대인은 정의 어사(御史)란 관직에까지 올랐으나 간신의 모함 때문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 무림 인물에 의해 구 출되어 이름을 숨기고 은거생활을 했다. 조정에 환멸을 느낀 소대 인은 낚시나 화초 가꾸기로 소일했다. 그들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운고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는데 한 달이 지났을 때에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동안 운고와 소부인 사 이는 친형제나 다름없이 가까워졌지만, 운고는 한 번도 자신의 신 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소대인의 식구는 퍽 단출했다. 그들 부부와 아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소씨 일가를 따라다니며 살림을 도와준 소복(簫福)과 일꾼과 시녀 하나씩 뿐이었다. 소대인이 고용했던 두 사람의 사공은 며칠 전에 고향으로 떠나버렸다. 집은 휑뎅그렁하게 크고 식구는 몇 명 안 되어 집안은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런 기운마저 감돌았다. 어느날, 그러니까 운고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며칠 후였다. 소 부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끝낸 운고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의 몸도 완쾌되었는데 할 일이 없으니 무료하군요. 영아를 저 에게 맡겨 주시겠어요? 제가 그 애의 공부를 돌봐주면 따분하지 않 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소부인은 잠시 미간을 모으며 생각하더니 응낙했다. "동생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기꺼이 영아를 맡기겠어." 대답은 이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무엇인가 망설이는 눈치같아서 운고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말았다. 이튿날 소부인이 아들을 데리고 별당으로 왔다. 운고는 이 집에 오래 머물면서 아직까지 한 번도 소영(簫映)을 본 적이 없었다. 소 대인도 몇 번 보지 못했으며 소부인과 시녀만 자주 보았을 뿐이었 다. 소영은 운고에게 큰 절을 했다. 희멀건 얼굴에 눈빛은 총명하 게 빛났고 야무지게 다문 입에는 꿋꿋한 의지가 엿보였다. 서로 인사가 끝나고 소영을 찬찬히 뜯어 보던 운고가 미소를 지 으며 입을 열었다. "언니, 안심하세요. 제가 보기에 이 아이는 비범한 재질과 선천 적인 총명함을 지니고 있어요. 아마도 장래가 형부보다 훨씬 위일 거예요." 소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분은 무슨 일을 하든 너무 정직해서 남의 미움을 산 게 탈이 었어. 그분은 권세를 증오하게 되어 영아에게 가르치는 공부도 시 가와 불도, 성점(星占) 같은 것 뿐이었어. 아예 벼슬 자리에는 내 보내지 않으실 작정이었지. 이 애는 비록 어리지만 온통 기기묘묘 한 것만 배웠다네." "형부께선 잘못 가르친 것이 아니에요. 영아가 나중에 관직에 나 가든 안 나가든 그런 학문을 모두 배워 두는 것이 좋아요." 소부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영을 바라 보며 자애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영아! 앞으로 운 이모의 가르침을 잘 들어야 된다." 소부인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 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 로 나갔다. 그녀를 배웅한 후 운고는 소영을 데리고 서재로 들어 갔다. 이 글방은 보통 방보다 두 배나 크고 나무 탁자와 대나무 의 자를 제외하면 찻그릇밖에 없었다. 창문을 열면 바로 화원이며 국 화가 만발해 있었다. 운고는 앞에 앉은 소영을 찬찬히 훑어 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 다. '이 아이는 나를 만났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스무 살까지도 살지 못했을 것이다.' 운고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 후 소영을 향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어라고 했지?" "소영이라고 합니다." "음, 이름이 썩 좋구나! 장차 명성을 얻어 인간 세상을 주름잡을 수 있겠다. 네가 아무쪼록 너의 가문을 번창시키기 바란다." 소영은 어글어글한 눈으로 아름다운 운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 더니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저를 진맥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 말씀 이 저는 스무 살밖에 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저에게 잡학(雜學)만 가르쳐 주셨어요. 몇 년 후에 저를 데리고 명 산절경을 구경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제가 일찍 죽더라 도 여한이나 없게 하자는 것인 듯합니다." 운고는 소영의 지나치리 만큼 태연스럽고 어른스러운 말투에 당 황스럽기조차 했으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런 말을 어머니에게 들려 준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절대로 어머니에게 말하지 말라고 아버지가 당부하셨 으니까요. 어머님이 만약 이 일을 아신다면 실심낙담해서 깊은 신 병을 얻을 것이라고..." "영아, 넌 죽음이 두려우냐?" "조금도 무섭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말씀하시길 생사는 하늘에 달린 것이라 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답니다." "그러나 죽음에도 종류가 있다. 태산처럼 무거운 것이 있고 새털 처럼 가벼운 것이 있다. 인간으로서 생사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이 좋지만 역시 강한 생명욕이 있어야 옳다." 소영을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부모님을 상심시켜 드리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순간 그렇게 부드럽고 온화스럽던 운고의 표정은 갑자기 돌변하 면서 차갑고 엄숙한 기운이 겹겹이 돌고 있었다. "영아! 네가 만일 내 말을 어기지 않고 듣는다면 너는 죽지 않을 수도 있다." 비록 나이 어린 소영일지라도 웬지 모를 숙명처럼 다가오는 운고 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번쩍 두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정말입니까?" "물론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내가 어떤 것을 가르쳐 주던 네 부모님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소영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처졌다. 그는 두손을 깍지낀 채 심사 숙고 하는 표정이더니 단호히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그 결심은 변하면 안 된다." 운고는 소영의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그후 두 달이 지났다. 그 동안 운고와 소영이 글방의 문을 닫아 걸고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영의 허약했던 몸이 눈에 띄도록 건강해지는 것을 보고 소부인은 그저 기뻐할 뿐 이었다. 동짓달 스무 사흘이 되는 날, 소부인이 화장을 하고 있는데 소영 이 헐레벌떡하며 안방으로 뛰어 들었다. "어머니 ! 운이모가 떠나 버렸어요." "뭐라고?" 소부인은 크게 놀라 소영을 돌아 보았다. 소영은 마른침을 삼키 더니 편지 한 장을 건네 주었다.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아무도 모르게 떠나 버렸어요." 소부인은 아연실색한 채 편지를 받아 들더니 급히 읽어 내려 갔 다. <이 몸의 생명을 구해 주시고 두터운 사랑으로 계속 동생처럼 대 해 주신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있는 힘껏 영아 를 지도함으로써 다소간의 은공을 보답코자 하려 했지만 제게 갑작 스런 일이 생겨 떠납니다. 도리상 인사를 드리고 가야 마땅할 줄 아오나, 감히 무례를 무릅쓰고 한 통의 서신으로 하직 인사를 드리 게 됨을 죄스럽게 생각합니다. 부인의 은덕을 영원히 마음에 간직 하고 보답해 드릴 날이 있기를 빌겠습니다. 아쉬운 심정을 안고 떠 나야 하는 저를 너무 야속하게 생각지 마시고 넓은 아량으로 용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댁의 건강과 행운을 빌며 소부인에게 전합 니다. 운고 올림> 편지를 읽은 소부인은 한숨을 깊이 내쉬며 걱정스러운 말로 중얼 거렸다. "이렇게 하면 되나... 여자의 몸으로 추운 겨울에..." 이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소대인이었다. 그를 본 소부인은 급히 입을 열었다. "여보, 이 편지를 보세요. 운고가 남기고 떠났군요." "볼 필요 없소. 예측했던 일이니까." 소대인은 편지를 받더니 펴 보지도 않고 발기발기 찢어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소부인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이 편지는 남겨 두어선 안 되오." "왜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결코 길조는 아니오. 이 일은 기왕 지 난 것이니 더 얘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성격이 괴팍하고 강인한 소대인의 말에 부인을 입을 다물고 더 묻지 않았다. 소대인은 비록 강호에 몸을 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의 예리한 통찰력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소영은 소대인과 부인의 말을 듣고 있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면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보기엔 운이모는 절대로 나를 버리고 떠나진 않을 거예요. 언젠가 반드시 돌아 오리라고 믿어요. 전 그분을 다시 볼 수 있을 겁니다." 소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랬다. "영아! 어린 아이가 뭘 안다고 함부로 말 참견을 하느냐?" 소영은 그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지만 그의 믿음을 꺾을 수는 없 었다. '그 여자는 반드시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설사 당장은 돌아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 소영은 날마다 문 앞에 나가서 운고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한 번 결심한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고야 마는 그의 성격은 소대인 을 닮았다. 살을 에일 듯한 무서운 강추위가 계속되었지만 소영은 눈만 뜨면 문 앞에 나가 운고를 기다렸다. "얘야, 네가 정신이 있니, 없니? 한 번 떠나버린 사람이 쉽사리 돌아 올 듯 싶으냐? 그러다기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소부인이 몇 번이나 타이르고 야단도 쳤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먼산 바라기처럼 문 앞에 버티고 서서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있 었다. 그런 어느날이었다. 이 날은 새벽부터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는데 불과 스무 걸음 앞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눈발이었다. 소영은 이 날도 아침부터 눈이 휘날리는 들길을 바라 보며 대문간 처마 밑에 서 있었다. 그의 마음은 이 겨울 하루가 열흘이 되는 듯 길게만 느껴졌다. '왜 빨리 안오실까?' "도련님, 이제 그만 들어 가세요. 대설이 길을 덮고 매서운 날씨 라 길가는 행인마저도 없사옵니다." 소영이 뒤를 돌아보니 소복이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 다. 소영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걱정은 말고 너나 어서 들어 가라!" 이 때였다. 집 앞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소영이 얼굴이 활짝 펴지 며 눈이 빛났다.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왔다! 왔어. 난 벌써 알고 있었지. 운이모는 절대로 나를 버리 지 않아." 그의 음성은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소복은 어리둥절한 표정으 로 소영의 시선을 쫓았다. 과연 한 사람이 눈보라를 헤치며 다가 오고 있었다. 나타난 사람은 몸매가 호리호리한데 걸음에 중심을 잃은 듯했다. 긴 머리카락이 푸른색 옷자락과 함께 바람에 펄럭이 고 있었다. '여자구나!' 소복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여자는 거리를 좁혀 왔다. 얼굴 모양새를 자세히 볼 수 있는 곳까지 여자가 다가 왔을 때 소 영은 실망한 안색을 짓고 말았다. 다가 온 것은 나이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랗고 갸날픈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뼛 속까지 얼릴 듯한 추위와 눈보라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금방 쓰 러질 듯 지친 모습이었다. 소영은 적이 실망해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 가려고 했다. 이 때였다. "아아......"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더니 소녀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소녀는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맥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펑펑 쏟아지는 눈은 소녀를 아예 덮어 버릴 듯 사정 없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고 서 있던 소영이 급히 소녀에게로 달려 갔 다. 그는 소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이봐요, 어서 일어나세요! 내가 일으켜 줄 테니... 우리 집에 가서 추위를 피하세요." 그러나 소녀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창백 한 소녀의 얼굴은 섬세하게 만든 조각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소영이 소녀를 부축하자 소복이 달려 오면서 말했다. "도련님, 이런 풍설(風雪)속에서는 벌써 심장이 얼었을 것입니 다." "설마 쓰러지자마자 죽기야 하겠느냐? 설사 죽었다 하더라도 시 체를 묻어 주어야 되지 않겠느냐? 어서 부축이나 해라." "도련님, 요 며칠 동안에 주인과 마님은 심기가 편치 않는데 만 일 이 소녀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 간다면 아마 주인께서는......" 소영이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어떻다고? 그런 걱정은 네가 할 일이 아니니 어서 이 아가씨를 안으로 모셔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소영의 고집을 잘 아는 소복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소녀를 부축했다. 소녀를 안으로 부축해 들어 가면서 소영은 생각했다. '이 아가씨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인 듯 친숙한 느낌이 드는데... 하지만 요즘 부모님이 운고 이모 때문에 고민하고 계시 니 내 방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겠다. 만일 부모님이 아시는 날 이면 소복의 말마따나 몹시 노하실 거야.' 안으로 들어 서자마자 뜻밖에도 소부인과 마주치고 말았다. 소영 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얼른 말했다. "이 소녀는 눈보라 곡에서 길을 찾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눈 위에 쓰러졌습니다. 몸을 녹이고 나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정신이 드는대로 곧 돌려 보내겠습니다." 소부인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 보더니 한숨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몹시 가련하게 보이는구나. 며칠 동안 간호를 해주고 이번 폭설 이 멎거든 보내 주도록 해라." 그러자 마음이 놓인 소영은 소부인의 팔을 잡으며 기쁨에 찬 음 성으로 말했다, "저는 어머님이 크게 꾸중하실 줄 알았습니다." 소부인은 소영을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몸을 돌렸다. 눈은 지칠 줄 모르고 내렸으며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댔다. 세상을 온통 눈 으로 덮어버릴 듯 하늘은 기승을 부렸다. 밤이 꽤 깊었다. 화로 가 에는 소영과 그의 부모가 소녀가 누워 있는 침상에 둘러앉아 소녀 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상 쪽에서 뒤치락거리는 소리와 가벼운 신음소리가 들리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이미 눈을 뜬 소녀가 방안 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혈색이 되살아 난 그녀의 얼굴은 매우 아 름다워 보였다. "아, 깨어나셨군!" 소영은 기쁨으로 가득 찬 탄성을 질렀다.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얼굴을 붉혔다. "어때? 정신이 드나?" 소부인이 침상 곁으로 다가서며 몸을 일으키려는 소녀를 저지시 켰다. 소녀는 맑은 시선으로 소부인을 올려다 보더니 나직한 음성 으로 말했다. "소녀를 살려 주신 은혜를....." "은혜는 무슨... 피곤할 테니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도록 해라. 정신이 깨어났으니 이젠 안심이다." 소녀는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소부인이 눈짓으로 만 류하자 입을 다물었다. 이튿날 소영과 소녀 그리고 소영의 부모는 화롯가에 둘러앉았다. 기력을 회복한 소녀의 얼굴은 선녀도에나 나옴직한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딸이 없는 소부인은 소녀를 가까이 대하고 있는 것이 매우 기쁜 모양이었다. 소녀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자애스러운 어조로 입 을 열었다. "어쩌다가 무서운 폭설 속을 혼자 다녔지? 이름이 무엇이냐?"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글썽이며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소녀의 성은 악(岳)가이고 이름은 소채(小彩)라고 하옵니다. 어 머님을 찾아 천리 길을 헤맸으나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온 천하를 헤맸는데 어머님의 음성은 메아리조차 들을 수 없고... 만일 주인 님들이 아니었더라면 눈 속에 묻힌 채 한맺힌 고혼(孤魂)이 되었을 것입니다." 악소채는 말끝을 맺으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를 본 소부인도 콧날이 시큰함을 느꼈으나 소대인은 오히려 냉 정한 어조로 물었다. "자당의 행방은 알아 냈나?" 악소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쩍어 내며 머리를 저었다. "어머님의 행방을 찾아 역경을 무릅쓰고 헤매는 소녀에게는... 멀다면 하늘 끝이며 가깝다면 눈 앞에 계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사 옵니다." "아가씨의 효심이 지극하군... " "소녀가 어머님을 찾고 싶은 일념으로 꽉 차 있는 나머지 함부로 지껄인 것을 주인께서는 곱게 보아 주십시오." 악소채를 넋을 잃은 듯 바라 보고만 있던 소영이 갑자기 눈을 빛 내며 입을 열었다. "이 아가씨는 운이모를 많이 닮은 것 같은데요?" "뭘 안다고 또 끼어드느냐?" 소대인의 핀잔에 소영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소부인 은 소영의 말을 듣고 악소채를 새삼스럽게 훑어 보더니 약간 놀란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영아의 말이 틀리지는 않는데..., 이 아가씨는 운 고와 비슷하게 생겼어." 소대인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글방으로 가겠다면서 몸을 일으켜 나갔다. 소대인이 나가자 소영은 시무룩하 던 표정을 풀며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운고 이모가 얼마 전에 떠나 버렸으니... 만일 아가 씨가 며칠만 일찍 왔더라면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중명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운이모는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소영은 악소채를 바라 보며 자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악낭자! 만일 갈 곳이 없다면 우리 집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운 고 이모가 올 때까지 있어 보면 내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 을 것입니다." "머물도록 허락만 해 주신다면... 소녀가 도련님과 부인의 시녀 가 되어 모시겠습니다." 악소채가 눈을 내리깔며 말하자 소영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오. 난 이렇게 컸으니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치 않아요. 다 만 우리 어머님을 조금 보살펴 드리면 돼요." 악소채는 고개를 들어 소영을 바라 보더니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소부인에게 날아갈 듯 절을 하더니 무릎을 꿇고 앉으며 입 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소녀를 거두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악소채가 머물기를 원하고 소부인이 이를 응낙하니 누구보다 기 뻐한 것은 소영이었다. 그는 기쁨에 가득찬 시선으로 악소채를 바 라 보았다. 세월은 흘러 하나의 연륜(年輪)이 더 그어지고 새해의 아침이 밝 아 왔다. 운고에게서 내가상승좌식(內家上乘座息)을 배운 소영의 신체는 나날이 건강해졌다. 정월 초하루 아침. 새 옷으로 갈아 입은 소영이 밖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푸른 옷을 입은 악소채가 비를 들고 정원에 쌓인 눈을 쓸고 있었다. 악소채가 눈을 치우는 모습은 매우 경쾌하고 민첩했다. 소영이 지켜 보고 있는 사 이에 그녀는 넓은 정원을 깨끗이 청소했다. 눈을 다 치운 악소채는 소영을 돌아 보며 생끗 웃었다. "도련님, 일찍 일어나셨군요." 부서져 내린 아침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더욱더 아름답고 싱싱하 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운고 이모와 닮았을까? 저 고운 눈매와 검은 눈썹, 차가우리만큼 날카로운 콧날, 곱게 빚어낸 듯한 입술과 윤곽 이 뚜렷한 턱,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칼이며 홍조를 띤 피부 색깔, 긴 목과 늘씬한 몸매...정말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도록 전 신이 아름다움으로 뭉쳤구나. 양귀비가 이토록 아름다웠을까?" 소영은 넋을 잃은 듯 악소채를 바라 보았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 고 매력적이었다. 소영이 뚫어지도록 자기를 쳐다 보자 악소채는 얼굴을 살짝 붉혀 수줍은 미소를 띠며, 은쟁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한 음성을 가만가만히 밀어 냈다. "도련님은 왜 저를 그렇게 바라보세요? 그러다가 제 얼굴에 구멍 나겠어요." 소영은 멋쩍은 듯 씨익 웃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낭자는 운고 이모와 너무도 닮았어요. 낭자가 몇 살만 더 먹었 다면 나는 분간하지 못했을 거예요." 소영은 악소채를 조석으로 대하면서 차츰 정이 들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다시 대문 앞에서 운고를 기다리는 습관이 시작되었다. '악소채가 아무리 운고 이모를 닮았다 해도 운고가 나에게 베풀 어준 자애와 배움을 잊을 수는 없다.' 소영은 운고에게서 친어머니와는 또 다른 애정을 느꼈다. 운고는 소영에게 깊은 애정과 함께 상승내공의 좌식지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아직 좌식지법의 묘를 터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날이 몸이 건강해지는 것은 모두가 그 운고 이모의 덕분이다.' 운고에게 향한 소영의 존경과 그리움은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 을 정도였다. 그는 반드시 돌아 오리라고 믿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 며 날마다 기다림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운고 이모는 반드시 돌아온다.' 이것은 하나의 커다란 신념으로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 다. 운고에게로 향한 마음은 신념을 넘어서 신앙과 같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한동안 상념에 젖어 있던 소영은 운고와 함께 지내던 글 방으로 들어갔다. 글방에 들어 선 소영은 새삼스러운 감개를 느꼈다. '운고 이모와 함께 지내던 방... 나는 며칠 동안 이 방에 들어오 지 않았었구나. 탁자와 의자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운 고 이모는 왜 돌아 오지를 않을까?' 이 때였다. '쨍그렁!' 하며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들려 왔다. 소영이 몸을 돌려 보니 악소채가 방문을 부여잡은 채 창백한 안 색으로 서 있었다. 그녀가 떨어뜨린 찻잔과 쟁반은 산산조각이 되 어 방바닥에 흐트러졌다. "왜 그래요?" 소영의 목소리에 마치도 악소채는 꿈에서 깨어난 듯 얼굴을 들더 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도련님, 그 운고란 분이 바로 이 방에 계셨었나요?" 흥분과 놀라움에 가득 찬 악소채의 태도는 소영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나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었다. "이 왼쪽 방에 계셨었지요. 이곳은 운고 이모와 내가 공부하던 글방이지요." "그 분이 도련님에게 잘 대해 주었던가요?" "너무 잘 대해 주었지요. 그래서 아직까지 잊지 못하고 날마다 기다리고 있답니다. 꼭 돌아 오리라고......" "그렇게 되길 바라겠어요." 악소채는 눈물을 쏟을 듯한 얼굴이 되더니, 급히 몸을 굽혀 깨진 그릇 조각들을 쓸어 모아 들고 나가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악소채의 행동에 멍하니 있다가 소영은 급히 창 문을 열었다. 어느새 악소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눈에 덮인 후원 과 몇 그루의 동매(冬梅)만이 보였다. 눈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의 향이 창문 안으로 한 아름 가득 몰려 들었다. 매화꽃 향기 에 취하기도 전에 소영의 시야에 하나의 그림자가 뛰어들었는데 그 것은 뒷모습이 악소채와 닮았는데 빠른 동작으로 화원 속으로 잠입 한 것이다. '추적해 보자!' 소영은 몸을 날려 창문을 넘었다. 급히 달려 가 보니 눈 위에 사 람의 발자국이 있었다. 소영은 호기심과 의아심을 안고 발자국을 따라 달려 갔다. 울창한 화록림(花木林)을 지나 한 곳에 이르니 발 자국은 그곳에서 온데간데 없이 끊어진 게 아닌가! '이상하다. 하늘로 날아갔단 말인가!' 소영은 사방을 둘레둘레 훑어 보다가 하나의 커다란 구멍이 눈 위에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의 앞에서 불과 세 걸음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후원은 굉장히 넓기 때문에 화옥을 가꾸는 일꾼조차도 와보지 않은 곳이었다. 더욱이 소영으로서는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소영 은 그 구멍 앞으로 다가섰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오래 묵은 우물이었다. 그런데 그 우물 속에서 여자의 흐느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소영은 우물 가장자리를 짚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캄캄해서 아 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울음 소리는 계속 흘러 나왔다. 사람의 애 간장을 도려내는 듯한 처량한 소리였다. 소영이 시력을 집중하여 한참 들여다보니 차츰 우물 속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물속에는 악소채가 꿇어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앞에 또 한 사람이 역시 꿇어앉아 있었다. 울음소리는 악소채의 입에서 흘러 나오고 다른 여인은 목조각처 럼 미동도 않고 있었다. '이상하다. 악소채가 왜 우물 속에 들어가 울고 있으며 맞은편에 있는 저 여자는 누구일까?' 소영은 짙은 의혹에 휩싸인 채 얼어붙은 듯 엎드려 들여다 보고 있었다. 손발이 눈 속에 잠겨 몹시 시려왔지만, 우물 속의 광경이 너무 기이해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흐흑... 이 소녀가 한 걸음 늦어 다시는 살아 계신 어머님의 모 습을 볼 수 없으니... 흐흑......" 순간 소영의 가슴이 섬뜩했다. '악소채의 어머니라면 혹시?" 소영은 운고의 생각을 번개처럼 떠올리며 무의식중에 몸을 움직 였다. 눈에 묻혀 얼어버렸던 팔이 그가 몸을 움직이는 순간에 균형 을 잃으면서 휘청했다. "아아... 악!" 그의 몸은 중심을 잃고 우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 떨어지는 순간 본능적인 동작으로 그의 두 손은 우물의 벽을 더듬거렸다. 우물 속 에서 반 바퀴 뒤집히며 그의 몸은 곧장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지는 그의 몸을 악소채의 손이 부축했으나 중력을 다 받아낼 수는 없어 그의 몸은 악소채의 품에 안겨 버렸다. 악소채의 품에 안기는 순간 소영은 혈관을 달음질치는 듯한 짜릿한 쾌감을 느꼈 다. 코로 스며드는 체취와 뭉클한 여체의 탄력이 신비한 황홀감으 로 그를 감싸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안겨 있고 싶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급히 악소채의 품에서 몸을 끌어 냈다. 가슴이 마구 뛰고 불을 뒤집어쓴 듯 목덜미가 달 아 올랐다. 소영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살폈다. 악소채 앞에 목조각처 럼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운고였다. 그녀는 얼굴을 푹 숙인 채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운이모!" 소영은 반가움에 목이 메어 더 말을 못하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 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악소채의 손이 소영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도련님, 고정하세요. 제 어머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이 말을 들은 소영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으며 눈 앞이 캄 캄해졌다. 피가 머리끝으로 왈칵 몰리는 것 같았다. '죽다니... 그럴 리가... 이렇게 눈 앞에 앉아 있는데......' 소영은 믿기지 않는듯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운고를 바라 보다 가 악소채를 향해 물었다. "운이모가 바로 낭자의 어머니요?" 악소채는 눈물을 닦으며 울먹거렸다. "예, 어머니에요." 소영은 다시 운고를 바라 보았다.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 는 그녀는 도저히 죽었다고 믿을 수 없는 산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 다. 소영은 악소채가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노한 음성으 로 소리쳤다. "닥쳐! 내가 어리다고 전혀 죽은 사람을 보지 못했는 줄 아나? 운이모는 평소에도 이따금 저런 모습으로 휴식을 취했어. 멀쩡히 산 사람을 보고 왜 죽었다고 그러지?" "도련님은 모르고 계십니다. 저의 어머님은 내공이 깊으며 시체 를 생시처럼 보전하는 영단을 복용하셔서 생생한 모습 그대로 계시 는 것입니다." "흥, 그 말도 믿을 수 없어. 운이모가 왜 이 우물 속에서 돌아가 시겠어? 운이모! 운이모......" 소영은 운고를 향해 높은 소리로 불러 보았다. 그러나 들려 오는 것은 우물을 정정 울리는 메아리뿐이었다. 악소채는 복받치는 설움 을 깨물며 숙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머님은 도련님에게 영원히 대답을 못할 것입니다. 도련님은 관가 출신이기 때문에 무림의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릅니다. 소 녀가 그 일을 상세하게 설명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 들려 줄 수 없습니다." 소영은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악소채를 바라 보며 물 었다. "운이모가 정말 돌아가셨어요?" 악소채는 다시 눈물을 쏟고 말았다. "돌아가셨어요. 소녀가 만일 며칠만 일찍 왔더라면 어머님을 만 나 뵐 수 있었을 텐데... 차디찬 시체를 만나야 하다니......" 소영은 악소채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운고의 코 앞으로 손을 가 져 갔다. 그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돌아가시지 않았을지도 몰라.' 소영은 운고의 얼굴에 손을 댔다. 순간 그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이 그의 손끝을 통해 심장으로 찌르고 들 더니 머리끝까지 쭈뼛하게 했다. '돌아가셨어!' 소영은 천길이나 되는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을 느 꼈다. 심장 가득 슬픔이 응어리지더니 목구멍으로 울컥 치밀었다. "운 이모!" 소영은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꺼번에 주위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 듯한 절망감과 괴로움이 그 의 심장을 휘젓고 있었다. "도련님, 어서 울음을 그치세요. 정말 어른들이 아시면 어쩌려고 요." 악소채도 소리를 죽여 흐느끼며 소영의 울음을 멈추게 하려고 했 다. 소영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이를 악물며 삼키려고 했으나 좀처 럼 마음의 격동을 누를 수가 없었다. 소영이 울음을 그치고 돌아 보니 악소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허공을 응시한 채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소영은 옷소 매로 눈물을 닦으며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운 이모가 정말 돌아가셨군요. 나는 부모님께 말씀드려 장례를 치르도록 하겠어요." "아니에요, 어머님이 소녀에게 남긴 유서가 있어요. 그 유서에 쓰여진 대로 해야죠." 소영은 멀거니 시선을 악소채에게 두었다가 운고에게로 옮기며 중얼거렸다. "도무지 모를 일 뿐이군. 운이모는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돌 아가셨고 낭자는 부모님에게 이 일을 숨겨 두려고 하고......" "어머님의 유서는 소녀가 이미 읽었어요. 도련님은 이상하게 생 각지 마세요. 어머님는 도련님 댁에서 입은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 하고 계시며, 절대로 이 일을 도련님 댁에 관련시키지 말라고 하셨 어요. 안전한 곳으로 시신을 운반하려는 소녀의 마음을 그대로 받 아 주세요." "어느 곳으로?" "도련님은 강호의 일을 잘 모릅니다. 제가 설명드려도 이해하시 기가 어려우실 겁니다." "그렇다면... 곧 떠납니까?" 악소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던 소영이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도 따라가겠어요." "네? 도련님이...? 그건 안 됩니다. 길이 무척 멀고 험해서 소녀 를 따라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악소채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소영은 또 눈물을 흘렸다. "운이모가 생전에 나에게 대해 주신 온정을 생각하면... 내가 장 송하지 않는다면 도리에 어긋납니다." "도련님의 호의는 고맙습니다." 악소채는 몸을 일으키더니 소영에게 공손히 예의를 표시하려 했 는데 소영은 급히 손을 들어 그것을 저지하며 말했다. "운이모께서 나를 자식보다 더 귀하게 대해 주셨으니 낭자는 나 의 누님이나 다름없습니다. 앞으로는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마 세요." "그럼 어떻게 부를까요?" "제 나이가 몇 살 적으니 동생이라고 부르세요." "그건 소녀가 감당할 수 없어요." "감당치 못하다니... 낭자는 나보다 몇 살 위이고, 내가 낭자의 어머님에게 이모라고 했으니 남매가 되는 것이 도리잖아요?" 소영이 강경한 어조로 말하자,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악소채는 한숨섞인 어조로 말했다. "도련님이 그토록 고집을 부리니... 명령에 복종하는 의미에서 받아 들이겠어요." "그럼 이제부터는 누나라고 불러야지. 그런데 누나... 나를 데리 고 가는 거지?" 악소채는 소영의 귀여운 태도에 웃음이 나왔으나 그것을 삼키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신중히 생각해야 돼요." "누난 날 싫어하고 있어?" "무슨 말이지? 내 생명의 은인인데 내가 싫어하다니......" "그럼 왜 나를 데려가는 것을 꺼려하고 있어?" "갈 길이 멀고 위험한 데다가 동생은 귀한 집 독자이고... 만일 내가 데리고 간다면 부모님께서......" 악소채의 말을 가로막으며 소영이 힘있게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도 못 되어 죽을 거라고 말씀하셨으니 심 하게 말리시지는 않으실 거야. 다만 어머님이 염려스러운데... 어 떤 방법으로 어머님을 설득시킬까?" 악소채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떠나더라도 준비를 해야 되기 때문에 오늘은 갈 수 없으니 동생 은 밖으로 나가 잘 생각해 봐요." 소영은 악소채가 혼자 떠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긴 했으나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내가 우물만 지키고 있으면 시체를 몰래 운반할 수는 없겠지.' 고개를 들어 보니 위로 방석만한 하늘이 보였다. 어떻게 빠져나 가야 할지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일 누가 밖에서 밧줄을 내려 주면 모를까 어떻게 나가지?" 악소채는 소영의 천진스러움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띄며 말했다. "두 눈을 감고 있으면 내가 밖으로 나가게 해 줄게." "여길?" "날개가 달렸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글쎄 눈이나 감고 있으라니까." 소영은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속으로 궁리했다. '어떤 방법으로 날 우물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는 것인가? 옳지, 눈을 감는 척하고 살짝 살펴 보자.' "조심해요." 한 마디 소리가 들리더니 악소채의 두 손이 소영의 허리에 닿았 다. 순간 소영은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공중으로 붕 떠올려졌 다. 그가 얼른 눈을 떴을 때는 온통 눈으로 뒤덮인 주변과 살을 에 일 듯한 찬바람이 피부를 할퀴고 지나갔다. 뒤따라 올라온 악소채가 우물 밖으로 솟아 올랐던 소영의 몸을 가볍게 받아 우물 곁에 내려 놓았다. '신기하다. 어떻게 해서 악소채에게 이런 묘술이 있을까?' 소영은 너무도 신기하고 놀라와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모습을 바라 보며 악소채가 엷은 미소를 머금더니 물었다. "무서웠어?" "조금. 그러나 지금은 괜찮아. 그런데 누나! 나를 떼어 놓고 혼 자 도망치면 안 돼. 난 이모의 주검을 장송할 의무가 있단 말야." 소영은 악소채가 신기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무래 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짐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데려가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이 아시면...... " "그건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어떻게?" "난 이모님을 장사 지내고 곧 돌아 올 테니 너무 염려 마시라고 부모님에게 편지를 써 놓고 가면 되잖아." 소영의 태도는 너무도 진지했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 가 눈동자에 짙게 배어 있었다. "할 수 없군. 오늘밤 삼경(三更)에 내가 찾아가겠어." "정말? 약속했다? 그럼......" "소영은 손을 한 번 흔들더니 몸을 돌이켜 달음질쳤다. 그 뒷모 습을 바라 보며 악소채는 중얼거렸다. "소영이 뛰어 가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 보지 않는 것은 나를 믿 기 때문이다. 유서에 어머님은 저 애를 잘 보살피라고 하셨으나 함 께 집을 떠나라는 말씀은 없으셨다. 소씨는 우리 모녀에겐 은인인 데 영아를 외면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를 데리고 가면 그의 부모 님께 도리가 아니고......"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궁리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여 졌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 온 소영은 떠날 채비를 차렸다. 부모에게 편지를 써 놓고 몇 가지의 옷을 싸서 침상 밑에 감추어 두었다. 소영은 집을 떠나 먼 곳에 가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여행에 대 한 이야기는 소대인에게 여러 차례 들어 왔다. '어서 밤이 왔으면 좋겠다. 시간은 오늘따라 더디게만 가는구나. 악소채와 함께라면 여행은 참 재미있을 거야.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겠지. 언제쯤이나 집에 돌아 올 수 있을까? 부모님은 나를 어 떤 표정으로 맞으실까? 후훗, 몹시 노해서 '너는 내 자식도 아니 다.' 라고 하실까? 아냐, '객지에서 고생은 없었니? 그래 어떤 것 을 보고 왔니?' 하고 무척 반기시며 눈물이 글썽거리실 거야. 그런 데 시간은 왜 이렇게 더디가......" 소영은 침상에 걸터앉은 채 초조하게 시간을 기다렸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에 가슴이 설레어서 안절부절을 못했다. '밖으로 나가서 누나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창밖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다. 2. 폭풍에 휘말리는 공자 "동생!" 소영은 그 소리를 듣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 침상 밑에서 옷보따 리를 꺼내 들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악소채는 소영의 손에서 보따 리를 받아 들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동생을 안고 가겠어." 그녀는 말을 마치더니 소영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허리 에 팔을 감았다. 소영의 몸이 번쩍 들리는 순간 이미 그를 옆구리 에 낀 악소채는 나는 듯 달리기 시작했다. 소영의 귓전에는 쌩쌩 바람 스치는 소리만 들리고 하늘과 별과 나무숲과 논밭이 휙휙 스쳐 지나가며 빙글빙글 돌았다. 커다란 독 수리를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높은 담을 가볍게 뛰어 넘어 얼마를 달리니 하얀 눈으로 뒤덮인 논밭과 하늘에 얼어붙은 별밖에 안 보였다.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 은 소영의 뺨을 할퀴며 지나갔다. 소영은 얼굴을 악소채의 가슴에 묻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겼을 때와는 또 다른 황홀감과 안락함이 전신이 스며들었다. '이대로 어디까지든 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누나의 이런 기술은 무슨 무공이라고 하는 것일까? 나도 어서 무공을 배워 헛되지 않게 세상을 살아야겠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악소채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속 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마차에 타요." 소영이 얼굴을 들어 보니 검은색 포장마차가 한 대 눈위에 머물 러 있었다, 악소채는 마차의 휘장을 들치고 소영을 내려 놓았다. "안에 침구가 준비되어 있어요. 동생은 피곤할 테니 푹 쉬어요." 그러고는 휘장을 내렸다. 마차 속에는 바람 한 점 들어 오지 않 고 퍽 안온했으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누나는 안 들어와?" "난 마차를 몰아야 되니 염려 말고 쉬어요." 덜커덩하는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가 털털 흔들렸다. 마차의 진동에 몸을 맡긴 채 소영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비볐다. 한 참이 지나니 그의 얼었던 몸이 녹으며 피로가 엄습해 왔다. 이때 휘장 밖에서 악소채의 음성이 들려 왔다. "조심해요. 어머님의 시신을 건드리지 말고......" 그 소리에 소영은 눈을 떴다. 마차 속의 어둠은 이미 그의 눈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 보니 한 옆에 흰 천으로 덮은 운고 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무섭니?" "조금도 무섭지 않아. 운 이모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인데 뭐..." 악소채의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마차 의 진동이 빨라졌다. 속력을 내어 마차를 몰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영의 신체는 허약했다. 운고에게서 상승내공을 배워 많이 좋아졌 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허약체질이 쉽사리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하루 한나절을 추위와 마차의 진동에 시달린 그의 몸은 천근 만 근 되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감자마자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버 렸다. 뒤숭숭한 꿈 속을 헤매던 그는 가냘픈 울음소리를 잠결에 듣 고 눈을 떴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마차 안을 살펴 보았다. 운고의 시체 앞에서 악소채가 소리를 죽여 가며 흐느끼고 있었 다. 시체 옆에는 한 장의 편지가 놓여 있는데, 밑에 부분은 접혀 있고 윗 부분은 악소채의 몸에 가리어 가운데 몇 자만이 보였다. <... 크게 울리지도 웃기지도 말고 마음을 격동시키지도......> 휘장이 걷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글씨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저것은 운이모의 필적이 분명한 걸 보니 그녀의 유서인 모양이 구나.' 소영은 고개를 들어 좀더 자세히 보려고 했다. 그러나 소영의 기 척에 놀란 악소채는 급히 편지를 치우며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잘잤어?" 그녀는 비통한 표정을 감추려고 애써 웃어 보였는데 그 모습이 소영에게는 오히려 더 가련하게 보였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서 운고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었 다. 악소채는 소영의 어깨를 잡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무엇을 하려고 무릎을 꿇지?" "운 이모의 명복을 빌어 드리려구요." "고맙지만 공연히 속만 더 상하지... 정오도 한참 지났으니 배가 고플 텐데 뭘 좀 먹으러 갈까?" 소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마차 아래로 뛰어 내린 악소채는 손을 내밀며 소영의 손목을 잡아 부축했다. 마차는 개울과 밀림 사이에 멎어 있었다. 평평한 돌을 걸어 놓고 그 위에 물고기를 잡아 구워 놓은 것을 발견한 소영은 놀랐다. "어머님 생전에 요리 만드는 법을 배워 두었는데 맛이 있을지... ..?" 고기를 집어 먹으며 소영은 솜씨가 매우 좋다고 칭찬했다. 그러 나 양념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요리가 맛이 있을 리 없었다. 반 은 입에 발린 소리이고 반은 신기한 생각에서 칭찬한 것이다. 악소채는 소영의 칭찬을 듣더니 만족한 듯 웃었다. 그녀는 사람의 이목에 운고의 시체를 내놓는 것이 싫어 주막에 들지 않은 것이다. 악소채 는 소영을 다시 마차에 태우더니 몇 그루 큰 나무에 그림 도 글씨도 아닌 이상한 기호를 그려 넣었다. 소영은 궁금했으나 묻 지는 않았다. 며칠 후 두 사람과 운고의 시체를 태운 마차는 큰 고을에 들어 섰다. 시각은 한낮인지라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소영은 배 가 몹시 고팠지만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 주막엔 들지 않고 황야에서 숙식한 것이 이상하지만 ... 누나에게도 어떤 생각이 있어서 그랬겠지.' 소영의 배고픔과 마찬가지로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한 말 두 필 도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히히힝!' 두 필의 말은 일어서려고 발버등을 쳤으나 좀처럼 일어서지 못했 다. 이것을 본 악소채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소영을 향해 말했다. "우리 뭘 좀 먹고 가요." "난 벌써부터 배가 고팠어." 소영은 기뻐하며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두 사람은 한 객점으로 들어 섰다. 들어 서면서 악소채는 사환에 게 말먹이를 잘 주라고 일렀다. 두 사람이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자,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 며 두 필의 말이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먼 길을 달려 온 모양으로 두 필의 말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말에 탄 사람들 은 등에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별안간 앞에 달려 오던 사내 가 말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급 히 달리다가 우뚝 말을 세우는 솜씨에 길가던 사람들이 시선을 모 았다. 앞에 가던 말이 갑자기 멈추자 뒤에서 쫓아 오던 사람과 말은 곧 장 앞의 말을 덮칠 것 같았다. 이때 앞의 사내는 몸을 홱 돌려 뒤의 사내에게 일격을 가했다. "... 앗?"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필경 뒤에 쫓아 오던 사람 은 그 일격을 피하지 못하고 뻗어 버릴 것으로 예측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 들의 이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뒤에 쫓아 오던 사내는 앞의 사내가 갑자기 말을 멈추며 일격을 가하자 몸을 옆으로 돌리며 손으로 가볍게 방어해 냈다. 동시에 그 가 타고 있던 말은 앞의 말 옆에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싱긋 웃더니 말에서 뛰어 내려 악소채 와 소영이 타고 온 마차를 보더니 서슴없이 객점으로 들어 섰다. 그들은 객점을 둘러 보다가 악소채를 발견하자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긴장했죠?" 악소채가 약간 불쾌한 어조로 묻자 한 사내가 그녀의 앞으로 다 가서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낭자께서 남긴 암호를 보고 급히 쫓아 왔는데......" "무슨 일이 있으면 잠시 뒤에 얘기하기로 해요." 악소채가 손을 저으며 말하자 사내는 무슨 말인가 급히 할듯하다 가 입을 다물었다. 소영은 두 사내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나이는 삼십여 세쯤으로 검은 옷을 입었고 한 사내는 등에 짧은 칼을 짊어졌으며 다른 사내 는 한 쌍의 판관필(判官筆)을 메고 있었다. 두 사내는 평범한 사람들 같지는 않았는데 악소채를 몹시 존경하 고 두려워하는 듯했다. 칼을 진 사내는 한참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더는 참을 수 없 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낭자의 행적이 이미 폭로되어 강적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일순 악소채의 표정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 다. "알았어요. 빨리 식사를 하는대로 이곳을 떠나도록 해요." 두 사내는 몹시 시장했던지 정신없이 먹어댔다. 객점 안에는 많 은 손님들이 있었지만 두 사내의 우람한 체격에 눌려 이따금 힐끗 거릴 뿐 똑바로 쳐다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식사를 끝낸 네 사람은 함께 객접을 나섰다. 판관필을 멘 사내는 마차의 뒤를 따르고 칼을 진 사내가 악소채와 교대해서 마차를 몰 았다. 악소채가 마차를 모는 동안 혼자 시체를 곁에 두고 앉아 심 심하기 짝이 없었던 소영은 그녀가 곁에 앉게 되자 한결 마음이 흐 뭇했다. 그러나 악소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걱정거리가 생긴 모양이구나.'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악소채가 그에게 얼굴을 돌리며 불렀다. "동생!" "왜요? 무슨 일이......" "우리의 행적이 이미 적에게 폭로되었으니 커다란 일이 벌어질 거야. 생사를 예측하기 힘든 일전이 붙을 텐데. 동생은 강호인(江 湖人)이 아니니 이런 위험에 말려들 필요가 없어요. 우선 동생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주려는데 어떨는지?" "어디가 안전하죠?" "동생은 아직 어리고 무공을 할 줄도 모르니... 강호의 일에 대 해서 지금 자세히 들려 줄 수는 없고 우리와 같이 있지만 않으면 어디에 있든 안전해요." 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싫어요. 나는 누나하고 같이 있겠어요. 제아무리 큰 위험이라도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나는 어차피 스무 살 안쪽에 죽을 몸으로 앞으로 겨우 팔 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금 죽는다 해도 상관 없어 요." 악소채는 소영을 강제로라도 떠나 보낼 수 있지만, 그녀의 어머 니가 써 놓은 유서를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소영을 잘 보살펴 주어라. 그 애는 선천적으로 신체의 결함이 있어서 아무리 상승내공을 닦아도 단시일 내에 허약체질이 고쳐지 지는 않을 것이다. 이 년 안에는 그를 크게 울지도 웃지도 마음이 격동하게도 하지 말아라. 이 년이 지나면 그의 내공은 깊이 충족시 킬 수 있으며 선천적인 신체의 결함을 고칠 수 있다. 만일 그를 상 심시키거나 격동시키면 생명에 지장이 생길 것이니 내 말을 명심해 서 그를 보살펴라.' '만일 소영을 강제로 떼어 놓으면 분명 크게 상심할 텐데.' 악소채가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데 소영이 답답함을 참지 못해 입을 열었다. "누나, 무얼 생각하고 있어?" "응? 으응... 동생이 꼭 나하고 같이 있고 싶다면 두 가지의 약 속을 지켜야 해요." "무슨 일인데요?" "첫째, 어떤 일에 부닥치더라도 내 허락을 받기 전에는 절대로 입을 열지도 말고 경거망동을 해서도 안 돼요." "그건 문제 없어.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앉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아무리 기쁘거나 슬픈 일을 당해도 울거나 웃어도 안 되어요." "그건 왜요?" "소영은 이해할 수 없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묻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만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사람을 시켜 집으로 돌려 보내겠어요."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말에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얼른 대답 했다. "좋아. 전부 다 듣겠어요." "그럼 이제부터 휴식하고 있어요." 악소채는 휘장을 들치고 마부석으로 나갔다. 휘장이 다시 내려지 고, 밖에서는 악소채와 칼을 진 사나이가 무슨 이야기인가 주고받 는 모양인데 소영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얘기일까?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굉장히 빠 른 속도로 달리고 있구나.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소영은 긴장과 흥분에 마음을 설레였다. 험한 산길을 달리는지 몹시 털털거리던 마차가 갑자기 멈추면서 악소채가 휘장을 들치고 들어 왔다. 그녀는 운고의 시체를 안더니 낮은 음성으로 소영에게 말했다. "어서 날 따라와요." 악소채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서 명령조로 말했는데 그 말은 상대 방으로 하여금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들어 있었다. 소영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소영이 마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 보니 울창한 수림에 둘러싸인 첩첩 산중 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산봉우리를 떠받치며 큰 산맥이 줄줄이 엎드려 있고 수목과 잡초 틈바구니를 비집고 괴상하게 생긴 바위들 이 솟아 나와 있었다. 소영이 험준한 산을 둘러 보고 있는데 악소채가 운고의 시체를 안고 한쪽으로 달려 갔다. 멀지 않은 곳에 한 채의 오막살이 집이 보였다. '저 집으로 가는 모양이구나.' 소영도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대숲을 벗어나니 그 초가의 문앞 이었다. '똑, 똑!' 악소채가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안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한 집 앞에서 악소채는 침착하게 기 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안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구냐?" 악소채는 반가운 표정을 얼굴에 스치더니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 다. "후배 악소채입니다." 안에서는 잠시 조용하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침통하게 말하 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십 년 동안 손님을 접견하지 않았다. 비록 네가 곤우 (故友)의 딸이라 하더라도 나는 역시 만나고 싶지 않으니 그냥 돌 아가거라." "후배의 모친은 이미 돌아가셨으며 유체(遺體)가 이곳에 있습니 다. 노선배님은 저의 어머님을 보아서라도 파계(破戒)하셔서..." 악소채의 말은 중간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방 안에서 죽장(竹杖) 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해!" 뒤이어 죽장으로 문을 밀어 화다닥 열어젖히고 한 노파의 모습이 나타났다. 노파는 비쩍 마른 몸집에 창백한 안색에 온통 주름살로 덮인 얼 굴을 하고 있었는데 눈은 감고 있었다. 노파를 보자 악소채는 급히 운고의 시체를 내려 놓더니 공손하게 절을 했다. "후배가 노선배님께 인사드리옵니다." 노파는 나무로 깎아 세운 조각처럼 버티고 선 채 미동도 하지 않 았다. 소영은 마음이 몹시 불쾌해졌다. '이 할망구는 너무 거만하구나. 인사를 하는데도 거들떠도 안 보 니......' 소영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쳐다 보고 있는데, 노파는 나뭇가지처럼 뼈만 앙상한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나는 이미 너를 만나 주었다." "노선배님께서 파계하여 후배를 만나 주시니 매우 감격할 뿐입니 다." 악소채가 공손히 말하자 노파는 싸늘한 음성을 혈색 없는 입술 사이로 밀어 냈다. "네가 나보고 한 번 만나달라고 간청하기에 내가 만나 주었는데 어서 가지 않고 무얼하고 있느냐?" "후배가 부탁할 일이 있사오니 부디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노파는 여전히 막대기처럼 서서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찬바람이 횡횡 도는 듯한 태도였다. 소영은 극도 의 불쾌감으로 당장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악소채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공손한 태도로 애원하듯 말했다. "모친께서 중상을 입고 돌아가시면서 유서를 남겼는데, 후배보고 시신을 형신(衡山)에 계신 한 분의 지인(知人)에게로 장송하라고 그러셨습니다." 노파는 여전히 굳어 버린 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후배의 기억으로 노선배님은 저의 모친과 생전에 각별한 교우관 계가 계신 것으로 압니다. 작년에 모친께서 저를 데리고 이곳으로 노선배님을 뵈려 왔었으나, 노선배께서 일체 사람을 접견치 않으셔 서 문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돌아간 일이 있습니다." "......" "이제 모친은 돌아가셨고, 유언을 따라 후배가 모친의 시신을 형 산으로 모시러 가던 중이오나......" "......" "뜻밖에도 적의 추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후배는 천 번 죽어도 미련이 없으나 모친이 유체가 손상당할까 그것이 염려될 뿐입니다. 노선배님께서 모친의 영구를 잠시 맡아 주신다면 그래야만 후배는 마음 놓고 적과 싸을 수 있겠습니다." 노파는 여전히 쌀쌀한 음성이긴 했지만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 다. "네 모친을 봐서 시신을 칠 일 동안만 받아 주겠다." 악소채는 감격스러운 듯 다시 넙죽 절을 하면서 말했다. "노선배님의 넓은 은덕을 후배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돌아가 신 어머님께서도 이 은공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악소채는 몸을 일으키고 소영을 가리키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후배는 이 동생을 남겨 두어 돌아가신 어머님의 영구를 보살피 도록 하겠습니다." 노파는 냉랭한 어조로 거절했다. "이 오두막집에는 단 한 번도 남자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설혹 삼척동자라 하더라도......" 소영은 시종 노파의 냉정한 태도에 불쾌해 있었다. 노파가 다시 악소채의 청을 한 마디로 거절하자 그는 눈썹을 곤 두세우며 소리쳤다. "난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요! 이따위 집에서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을 거야." 노파는 아무 소리도 없이 몸을 돌리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파가 사라지자 악소채가 소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 고집부리지 말아. 지금 우리는 매무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어. 추격해 오는 사람들의 무공은 상당히 고강한 편이라 나도 그 들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는데 동생까지 보호할 능력이 없단 말이 야." 소영은 이미 어떤 위험이라도 감내하겠다는 각오가 단단했는데 악소채의 말에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난 무섭지 않아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어 보이는 소영의 태도에 악소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애의 고집도 상당하군! 저토록 죽음을 두려워 않고 따라가길 원하니......' 악소채는 소영을 떼어 버릴 것을 단념하고 운고의 시체를 안았 다. 시체를 방 안에 안치한 후 노파에게 인사를 했으나 여전히 노 파는 냉랭한 표정이었다. 악소채가 노파의 집을 나와 산비탈을 뛰어 내려 가자 소영도 헐 레벌떡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뛰면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흥, 나를 떼어 버리고 혼자 가려고 하지만 어림도 없다. 지옥에 들어 간다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따라가고 말 테다.' 소영이 쫓아 오는 것을 본 악소채는 아무 말도 하진 않았으나 피 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차 앞에서는 두 사내가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악소채가 나타나자 그들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악소채는 소영에 게 손짓을 해서 마차에 올라타라고 했다. 소영이 올라타자 그녀는 무거운 어조로 두 사내에게 지시했다. "자, 갑시다! 지체하지 말고 있는 대로 속력을 내요." 마차는 덜컹거리며 다시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쫓는 듯 무서운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굉장히 빠르게 달리는구나. 이렇게 달리는 것을 보니 쫓아 온다 는 적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지?' 소영은 악소채를 옆눈길로 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심하게 흔들거리는 마차는 이따금 엉덩방아를 찧게도 만드는데, 악소채는 아무리 크게 몸이 흔들려도 눈을 뜨지 않았다. 석상이 마차에 실려가는 모습 그대로였다. 마차가 불과 백 장쯤의 거리를 달렸을 때였다. 갑자기 우뢰같은 고함이 뒤에서 들려 왔다. "마차를 멈춰라!" 소영은 흠칫 놀랬으나 악소채는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동요의 빛도 나타내지 않았다. '어떤 놈들인가?' 호기심을 누를 수 없는 소영은 마차의 뒷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았다. 자욱한 먼지 속에 질풍처럼 달려 오는 세 필의 말이 보였 다. '저 세 필의 말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멀리서 달려 온 모양이구나.' 마차는 멈출 생각은커녕 더욱 속력을 내어 달리고 있었지만 쫓아 오는 세 필의 말을 떼어 놓을 수는 없었다. 쫓기는 마차와 쫓아 오 는 말과의 간격이 점점 좁혀들었다. 맨 앞장을 서서 달려 오는 말 위에는 검은 옷을 입은 거한이 허 리를 잔뜩 구부린 채 말 등에 찰싹 달라 붙어 있었다. 그 뒤에 쫓 아오는 두 사람은 마차가 일으키는 먼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마차와 그 사람의 거리가 일 장쯤으로 좁혀들었을 때였다. 갑자 기 그 거한이 한쪽 손을 쳐들며 말등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 사람의 몸은 튕기듯 말등에서 솟아 오르더니 마차 앞으로 휙 날아 들었다. "야! 빠르다." 소영은 창 밖으로 상반신을 살짝 내놓고 그 거한의 동작을 주시 했다. 그 거한은 제비처럼 앞으로 날아 말을 향해 오른손으로 일격 을 가했다. 이때 마부석에 탔던 사람은 등에 칼을 짊어진 사내였 다. 그는 거한이 마차의 앞을 가로막으며 마차를 끄는 말에게 공격 을 퍼붓는 순간, 왼손으로 급히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끼이익!' 질풍처럼 달리던 마차는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옆으로 반 바퀴나 휙 돌았다. 그와 동시에 칼을 쥔 사내는 채찍으로 거한의 오른손을 향해 후려 갈겼다. 채찍이 날아 오자 거한은 급히 몸을 돌리며 뒤로 육, 칠 보 물러 섰다. 그는 짧은 턱수염에 흑색 장삼을 입었으며 머리가 희끗희끗 한 오륙십 세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이들 두 사람이 서로 공격하고 반격하며 몸을 쓰는 동작이 하도 빨라 소영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신나는 구경거리다, 두 사람의 동작이 어쩌면 저토록 빠를 수 있을까? 무슨 요술을 보는 것 같은데' 소영은 이미 무서움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찬 눈으로 그들 두 사람의 다음 동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그의 어깨를 잡아 마차 안으로 끌어들이는 손이 있었다. 악 소채의 손이었다. 소영은 악소채를 바라 보며 들뜬 목소리를 냈다. "누나, 참 재미있어요. 저 사람들이 싸우는 동작이 어찌나 빠른 지... 어떻게 몸을 날리고 어떻게 손을 뻗쳤는지 잘 보이지가 않을 정도예요." 소영이 재미가 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 얼굴이 상기되어 들뜬 목 소리로 떠벌이자 악소채는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하는 싸움인데 재미있는 구경이라니 동생 도 참... 다시는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지 말아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돌연 마차 뒤에서 '쨍!' 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터져 나와 고막을 울렸다. 금속성끼리 부딪치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아직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사그 라들면서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악소채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마차 밖에서 벼락이 떨어지든 지진이 일든 관계치 않 겠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마차 밖에서는 참 재미있는 싸움이 벌어졌을 텐데... 쫓아 온 세 거한과 마차를 호위하는 두 사람이 날쌔게 몸을 날리고 공격 하며 칼을 마구 휘두를 거야. 누가 셀까?' 소영은 호기심이 잔뜩 일어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몸을 창 밖으 로 내밀고 구경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악소채의 꼼짝하지 말고 있 으라는 말에 참고 있을 뿐이었다. 이 때였다. 말 울음소리가 고막을 때리며 마차가 크게 진동하더니 덜컹 멎었 다. 그제서야 악소채가 눈을 뜨고 몇 번 깜빡이더니 다시 감았다. '무슨 일일까? 말이 죽었나? 마차 바퀴가 부서졌나? 누가 부상이라 도 입은 것일까?' 소영은 궁금증을 더 참을 수 없어, 악소채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 다가 휘장을 살짝 들쳤다. '아! 싸움이 붙었구나.' 소영은 가슴이 쿵쿵거리도록 흥분을 느꼈다. 마차를 몰던 사내와 마차를 멈추려던 거한이 서로 맞붙어 격투를 하고 있었다. 사내는 등에 지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 마차에서 내려서 싸우고 있었다. 그의 공격을 거한은 맨손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 '저 거한은 등에 무기가 있으면서도 왜 맨손으로 싸우는 걸까?' 무공을 모르는 소영으로서는 사내가 싸늘한 검광을 허공에 뿌리 며 칼로 공격하는데 거한이 맨손으로 대항하는 것이 이상하게만 생 각되었다. 소영은 마차의 뒷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의 결투는 더욱 치 열했다. 마차를 호위하던 사내는 판관필 두 개를 양손에 갈라 들고 두 명의 거한을 상대하고 있었다. 두 거한은 손에 무기를 들었는데 그것은 칼이 아니었다. 한 손에는 가느다란 금철사로 된 채찍을 들 었고 또 한 손은 칼처럼 생겼으나 칼이 아닌 괴상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두 거한은 무기를 휘두르며 판관필의 사내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 붓고 있었다. 사내는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두 사람을 상대로 방 어와 반격을 섞어가며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휘익!" 금채찍이 허공에 무수한 광선을 뿌리며 판관필에게 덤벼들었다. 판관필이 옆으로 대여섯 걸음 비켜 서자 이번엔 괴상한 무기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협공했다. 판관필을 든 사람은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두 사람의 공격을 피해 내고 있었으나 점점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아차 ! 저러다가 거한들에게 당하겠다.' 소영은 머리를 끌어들여 악소채를 바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돌부처처럼 앉아 움직이지 않으며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마차 밖에선 처참한 결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누나는 전혀 무관 심한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니...... 누나는 무공이 너무 약해 도와줄 수 없어서 그러는 모양이야. 우리편이 이긴다면 괜찮 지만, 만일 패하는 날이면 저 세 놈의 괴한들이 우릴 그대로 살려 두지 않을 텐데.' 소영은 악소채를 크게 믿고 있었다. 악소채는 분명 무서운 무공 을 지니고 있어 어떤 상대라도 당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무공이 강한 두 사내가 악소채의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았기 때 문이었다. 그런데 악소채가 조금도 싸움에 가담할 생각은 않고 꿀먹은 벙어 리처럼 앉아만 있자 소영은 적잖이 실망을 느낀 것이다. '누나가 너무 예뻐서 두 사내가 굽실거렸나?'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귓청이 떨어져 나 갈 듯한 외침과 가벼운 비명이 동시에 들려 왔다. '아니......?' 소영은 급히 마차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칼을 든 사내가 왼쪽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고 있었다. '이상하다... 칼을 쥔 사람이 맨손잡이를 못 당하다니......?' 칼을 쥔 사내는 맨손의 노인에게 일장의 공격을 받는 순간 급히 그것을 피해 내려 했었다. 그러나 그의 무공은 상대방에 비해 너무 도 약했다. 상대방이 오분의 힘으로 공격한 장풍(掌風)을 피해 내 지 못하고 왼쪽 어깨에 부상을 입은 것이다. 노인의 일격을 감당하지 못한 사내는 두 눈을 부릅뜨며 이를 부 드득 갈더니 다시 공격해 들어 갔다. "흐흥, 네 놈이 명재촉을 하는 모양인데... 좋다!" 노인은 코웃음을 치며 오른손을 턱밑까지 끌어 올리더니 사내를 향해 살짝 뒤집었다. 그러자 강한 장풍이 사내의 심장을 겨누고 맹 렬하게 휘몰아쳤다. "으흐?" 사내는 급히 몸을 뒤로 뽑아 내며 칼로 심장을 막았다. 이때 뒤에서는 판관필을 든 사내가 두 거한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해 그들을 수세에 몰리게 만들었다. "이상하다!"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악소채가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숙여 마차 밖의 정세를 살펴 보았다, 그녀 는 다섯 사람의 결투하는 광경을 살펴 보더니 소영을 향해 물었다. "동생, 무엇이 이상해요?" 소영은 악소채가 비로소 눈을 떠 싸우는 광경을 지켜 보며 말을 걸자 반가운 생각에서 얼른 대답했다. "저 늙은 거한은 칼을 든 아저씨한테 계속 몰린 것 같았는데 일 격에 아저씨를 물리쳤어요." 소영이 본 결투 장면은 전혀 상상외였다. 수세로 몰리던 판관필 의 사내가 오히려 두 거한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으며 역시 궁지에 몰리던 노인이 일격으로 칼을 든 사내를 부상시킨 것이 소영에게는 의외였다. 소영의 말을 들은 악소채는 눈샙을 약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동생은 무공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승 패를 예측할 수도 그 원인을 알 수도 없는 거예요." 이 때였다. 무섭게 내지르는 기합소리를 듣고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밖으로 쏠렸다. 그 기합소리는 노인의 입에서 터진 것이며, 그와 거의 동시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손으로부터 칼이 맥없이 떨어졌다. 노 인의 거센 장풍을 막아 내지 못해 칼을 떨어뜨린 것이다. 노인은 왼손을 훌떡 뒤집더니 사내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사내 는 이미 부상을 입은지라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일장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아!" 소영은 형세가 너무도 다급함을 보고 크게 소리치고 말았다. 이때 그는 귓전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검은 그림자 하나가 눈 앞 을 스쳤다. 번개처럼 몸을 날린 악소채는 몸이 아직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 서 한 손을 앞으로 홱 뿌렸다. 그녀의 손에서 뻗친 장력은 노인이 사내를 향해 뻗친 장력을 절 단하며 그 여세가 노인에게로 몰려 갔다. "으악!" 노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며 그의 몸이 뒤로 몇 걸음 튕겨 나갔 다. 그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왼팔이 밑으로 축 쳐졌다. 이 모든 동작과 사태는 너무도 돌발적이었기 때문에 소영은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잘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저 번쩍이는 빛과 바 람소리와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였다는 것만 느꼈을 뿐이었다. 그러 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누나가 저 흉악한 늙은이를 일격으로 무찔렀다.' 손에 땀을 쥐고 긴장했던 그는 새로운 흥분과 기쁨으로 얼굴이 달아 오르고 있었다. 노인을 일격으로 격퇴시킨 악소채는 땅에 사 뿐히 내려서며 사내에게 빠른 어조로 물었다. "중상을 입었소?" "아니... 약간의 상처 뿐입니다." 사내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러나 사내 는 비록 중상은 아니지만 급히 치료를 받아야 될만큼 상처가 깊었 다. 악소채는 사내를 훑어 보더니 허리를 굽혀 칼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칼을 마차 안으로 던지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서 마차에 들어 가서 휴식을 취하시오. 잠시 뒤에 다시 떠나 야 될 테니까." 말을 마친 악소채는 몸을 홱 돌리더니 노인을 향해 오른손을 뻗 치며 달려 들었다. 노인은 왼팔의 곡지혈(曲池血)을 이미 악소채의 장력에 의해 찍혔기 때문에 그 팔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악소채가 공격을 가하자 그는 오른 팔을 급히 휘둘렀다. '이 여자는 몸을 쓰는 동작이 바람 같고 단 일격으로 나를 부상 시켰으니 나보다는 훨씬 무공이 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노인은 있는 힘을 다해 악소채의 공격을 막아 냈 다. 악소채는 노인의 앞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면서 상대방의 현기혈(玄機穴)을 찍으려고 했 다. 오른손을 뻗쳐 반격을 하던 노인은 겁을 잔뜩 집어 먹고 급히 손을 거두어 들였다. 동시에 무기를 뽑으려고 했다. 그러자 악소채는 굽혔던 손가락을 쭉 뻗으면서 상대방의 오른손 을 쩍었다. "으으......"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의 오른 손목은 악 소채에게 혈도(穴道)를 집혀 이미 마비되어 버렸으며 피가 얼굴로 몰려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노인이 신음을 뱉으며 뒤로 물러 섰으나 악소채의 몸이 두 걸음 빨랐다. 그녀는 상대방의 앞에 바싹 다가 서며 연속적으로 손을 써 서 순식간에 네 곳의 혈도를 찍어 버렸다. "으아악!" 노인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더니 그 자리에 털색 주저앉았다. 사 지를 몇 번 버둥거리던 그는 태질당한 오징어처럼 축 늘어져 버렸 다. 악소채가 눈깜짝할 사이에 노인을 처리하는 것을 본 소영은 감 탄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 보니... 누나는 굉장한 무공을 지니고 있구나! 누나가 마 차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상대의 무공이 형편 없었기 때문이었구나. 상대가 되지도 않는 졸개하고 싸우기 싫어서 였어.' 소영이 기쁨과 감탄을 누르지 못해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는데 악소채의 몸이 공중으로 훌쩍 날았다. 그녀는 마차 뒤로 달려 가더 니 판관필을 들고 두 거한과 싸우고 있는 사내에게 나직이 말했다. "뒤로 물러나시오." 사내가 뒤로 물러 서자 악소채는 두 팔을 활짝 벌리더니, 두 명 의 거한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마차를 추격해 온 세 사람 중에 서 방금 악소채에게 혈도를 찍힌 노인이 가장 무공도 세고 우두머 리였다. 우두머리가 가볍게 패한 것을 본 두 거한은 악소채의 무공 을 겁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서운 상대다.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겠다.' 두 거한은 진기(眞意)를 전신에 끌어 모았다. 그러나 악소채는 이들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했다. 몸이 오른쪽으로 나는가 하는 순 간, 그녀의 몸은 반대쪽으로 날며 금채찍을 든 거한의 손목을 후려 치고는 뒤이어 가슴을 가볍게 쥐어박았다. '으악!' 금채찍이 땅에 떨어지고 뒤이어 거한의 몸이 쿵 쓰러졌다. 이것 을 본 한 명의 거한은 아연실색하여 멍청히 서 있다가 갑자기 악소 채에게로 몸을 날렸다.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식으로 거한은 악소채의 등을 향해 공격했 다. 그가 내려친 무기가 악소채의 오른쪽 어깨를 베는가 싶었는데 순간, 그녀의 몸이 한 바퀴 팽그르르 돌았다. "으윽!" 거한은 고통에 찬 신음을 뱉으며 뒤로 비틀비틀 물러섰다. 그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짐과 동시에 악소채의 옷자락이 펄럭이더니, 거 한의 몸은 푹 거꾸러졌다. 몇 번 손을 쓰지도 않고 가볍게 두 거한 을 쓰러뜨린 것을 본 소영은 손뼉을 치면서 환호성을 터뜨렸다. "누나, 잘했어요! 정말 대단한 실력이야. 놀랐어!" 소영의 환호성을 듣고 악소채는 고개를 돌려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잠깐 뿐이었고, 하늘로 시선을 던지며 심각 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소영이 악소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어 보니 두 마리의 하얀 비둘기가 빠르게 날아 가고 있었다. 그 비둘 기는 마차 위를 지나 금방 사라졌다. 비둘기를 바라 보던 악소채는 급히 얼굴을 돌려 판관필을 든 사 내에게 말했다. "우리의 행적이 이미 폭로되었으니 적은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절대로 놓아 주지 않을 거예요." 사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소영이 급히 말했다. "누나의 무공이 이렇게 대단한데 적이 추격한다고 겁낼 것이 없 잖아요? 누나의 일격이면 아무리 황우 장사라 해도....." "동생은 강호의 일을 몰라요. 이 누나의 보잘것 없는 무공은 반 딧불이나 촛불과 같아요. 나보다 무공이 열 배는 더 강한 어머님도 내상(內傷)을 입고 돌아가셨는데 하물며 나 같은 풋나기로서는..." "운이모가 내상을 입고 돌아가신 거예요? 언제 누구와 싸웠어요? 왜 내가 전혀 몰랐을까요?" 악소채는 놀라서 묻는 소영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판관필을 든 사내를 돌아 보며 말했다. "저 세 사람을 한데 묶어서 숲 속에 버리세요. 그리고... 제일 튼튼한 말 한 마리를 골라 마차를 끌게 하세요." 사내는 악소채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멀리 떨어 진 곳에 높은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왜 저곳으로 마차를 몰라는 것인가?' 소영은 악소채에게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마부석에 올라 탄 사내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악소채가 마차 안으로 들어 서자 마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짝!' 하고 말채찍 소리가 울릴 때마다 마차의 속도가 빨라졌다. 삐걱 거리며 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 돌이 바퀴에 깔려 으깨어지는 소 리, 말발굽소리가 한데 어울리며 마차가 요란스럽게 달렸다. 마차 안으로 들어 선 악소채는 품에서 두 알의 약을 꺼내더니, 눈을 감 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내에게 내밀었다. "약을 드세요." 사내는 약을 받아 삼키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통증을 삼키고 있 는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악소채는 사내의 왼쪽 어깨와 오른손의 상처를 훑어 보더니 소영 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숙한 표 정으로 소영을 뚫어져라고 바라 보았다. "누나..." 소영은 품고 있던 궁금증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 었다. "누나, 아까 물어 본 것에 대답해 줘요. 운이모에 대한 얘기 말 야....." 악소채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마차의 진동에 몸을 맡기고 있었 다. 진동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는 그녀의 몸에는 가벼운 피곤이 쌓 인 듯했다. 악소채는 묵묵히 소영을 바라 보고 있더니, 가벼운 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입술 사이로 조용히 밀어내는 음 성에는 물기가 촉촉히 배어 있는 듯했다. "어머니는 동생의 부모님들에 의해 목숨을 건졌지만... 그러나 생기(生氣)는 이미 없어졌던 거예요. 왜냐하면 내상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 "그건 이상한데, 운 이모는 우리 집에서 몇 개월이나 계셨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어요. 만일 중상을 입었다면 어떻게 그토록 오 래 살아 계실 수 있었지요?" 소영이 악소채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하자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 쉬었다. "동생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해요. 어머니는 내공(內功) 이 매우 깊기 때문에 목숨을 구원받은 후 가까스로 운공(運功)을 하셔서 상세(傷勢)를 당분간 덮어 둘 수 있었던 거예요. 또한 갖고 계시던 한 병의 영약(靈藥)으로 생명을 연장시켰던 것이에요." "......" "행동이나 표정은 건강한 사람과 같지만 속으로는 날마다 발작하 는 고통을 참고 있었어요. 내가 두 달만 일찍 찾아 갔었다면 어머 니의 내상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누나가 치료할 줄 알아요?" "조금은... 우선 어머니의 운공조식을 도우며 명의를 모셔다가 치료해 드릴 수 있었지요. 그런데 내가 그만 늦어서... 어머니는 이미 내공을 완전히 잃으셨기 때문에 먼 길을 다닐 수가 없었거든 요. 그렇게 급히 돌아가시다니......" 악소채는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영도 가슴이 뭉클함을 느끼며 질문했다. "운 이모께서는 몇 개월 동안이나 생명을 연장하고 계셨는데 왜 누나가 나타나기까지 기다리지 않았지요?" "상세가 너무 중해서 약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계셨었는데, 그 약 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에요. 이미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하직하시기로 결심하신 것이지요. 그래 서 유서를 써 놓고 그 우물 속에서 눈을 감으셨어요." 평소에 자기를 끔직이 아껴주던 운고가 우물 속에서 외로운 임종 을 맞이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랬었군요. 운이모는 우리가 상심할까봐 일부러 편지를 남기 고... 난 그것도 모르고 날마다 문간에서 운이모가 돌아오시리라 믿고 기다리고만 있었으니......" 소영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코를 훌쩍 들이마셨 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해도 그의 두 뺨으로 흘러 내리는 눈 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악소채는 소영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자 고개를 돌려 외면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심시키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동생네 가족에게 화가 미칠까 봐 몸을 숨기셨던 것이지요." 소영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또 하나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 "누나는 어떻게 우리 집을 찾아 왔어요?" 악소채가 소영에게로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어머님께서 단계촌 밖에다 나만이 알아 볼 수 있는 표식을 해 놓으셨어요. 나는 어머님을 찾으러 사면 팔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뒤 늦게야 그 표식을 발견한 것이지요." "하하! 그랬구나. 그럼, 누나가 글방에 들어 섰을 때에도 운 이 모가 남긴 표식을 발견했던 모양이군요?" 악소채는 소영의 총명함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나는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어머님이 남긴 표식을 보고 놀랐어요. 어머님이 우물 속에서 임종을 맞겠다는 표식이거든 요. 나는 그만 너무 놀란 나머지 차쟁반을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악소채의 두 뺨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급히 옷자 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어머님의 유서에는 동생 얘기가 많이 있었어요. 동생은 이미 어 머님에게서 상승내공의 좌식법을 배웠지만, 아직 그 오묘한 깊이까 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만일 상승내공을 운공할 때에 조그마 한 착오가 생긴다면 동생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허약체질을 영원히 메꿀 수 없어요. 그렇게 되면......" "동생은 스무 살에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 찍 죽을 위험성도 있어요. 유서 속에서 어머님이 동생을 잘 보살펴 주라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나는 동생과 함께 온 것이에요.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동생이 아무리 애원해도 데려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아무튼 나는 얼마 더 살 수 없어요. 왜 안 데리 고 오겠다는 거지요?" "앞날을 비록 짧지만 아직 육, 칠 년의 세월은 있어요. 하지만 동생이 날 따라 오면 예측할 수 없는 위험 때문에 언제 목숨이 끊 길는지도 모르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 때였다. 이들 두 사람의 대화를 끊으며 들려 오는 커다란 한 숨 소리가 있었다. 소영이 뒤를 돌아 보았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사내가 힘들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흐... 후욱! 흐... 후욱!" 호흡이 목구멍에 꽉 막혀 끄르르 구르다가 힘들여 후우 숨을 내 쉬고 있는 사내는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곧 임종을 맞게 된 사람이 마지막 숨을 모으는 모습과 흡사했다. '갑자기 왜 저럴까? 금방 죽을 것 같은데......' 소영이 놀라고 있는데 악소채가 급히 손을 뻗더니 사내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그 순간 사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호흡이 차츰 정상으로 되돌아 오기 시작했다. 얼굴의 붉은 기운도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을 본 소영은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 기도 했다. 금방 숨이 멎을 것 같은 사람이 악소채가 등을 한 번 가볍게 때리자 다시 되살아나는 것은 그야말로 괴상한 일이었다. 소영은 갸웃거리며 사내의 땀에 젖은 얼굴을 바라 보다가 악소채를 돌아 보며 물었다. "누나, 이 분이 왜 그래요?" "응, 무공을 닦은 사람은 진기를 몸에 돌리며 자기의 상처를 자 기가 치료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극히 힘들고 위험한 방법으 로 이 사람도 내공을 하다가 그만 맥이 엇갈렸던 것이지요. 내가 급히 손을 써서 엇갈린 맥혈(脈穴)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죽었을까요?" "글쎄 죽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완전히 폐인이 되고 말았을 거 예요." 소영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이제 보니 무공을 배우면 이렇게 많은 위험성이 있군요." 사실 소영은 막연한 호기심을 가지고 악소채를 따라 나왔다. 추 격해 온 거한들을 악소채가 힘 안 들이고 처치하는 것을 보고는 내 심 욕심이 생겼다. '참말 무공을 배워 두면 좋겠다. 마구 날아 다닐 수도 있고, 칼 을 가지고 덤벼드는 사람을 맨손으로 무찌를 수도 있으니, 나도 얼 른 무공을 배워서 으쓱거리며 다녀야지.' 특히 악소채가 번개처럼 빠르고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몸을 날려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남자들을 손가락으로 찍어 땅에 쓰러뜨리는 모습은 소영의 가슴을 마구 부풀게 했었다. 그러나 방금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사내가 자기의 진기를 자기가 이기지 못하고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한 것을 보고는 여태껏 부풀었던 마음에 작은 먹구름을 덮었던 것이다. '무공은 의외로 위험하구나. 남을 죽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살리 기는 힘든 모양이지?' "무공을 배워 두면 그밖에도 위험이 많아요. 남의 시기를 받아 항상 적이 생기고 원수가 생기고 섣부른 무공을 지니느니 아예 아 무것도 모르는 것이 나아요." 악소채의 말은 일리가 있다고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정상적인 호흡을 되찾으며 휴식을 취하던 사내가 천천히 눈 을 떴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악소채에게 말했다. "악 낭자께서 두 차례나 제 목숨을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만 일 악 낭자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악소채는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는 여유를 보였지만 뒤에 쫓아 오는 적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 는 눈치였다. 마차 안은 바람소리와 말발굽소리만이 침묵 속을 간간히 비집고 들어 올 뿐이었다. 3. 고난의 행군 얼마나 갔는지 한참 후 마차가 갑자기 멈추면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낭자, 이 마차가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소이다." 악소채는 휘장을 들치고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주위는 자욱한 안개 속을 뚫으면서 해는 막 서산을 넘어 가고 있었다. 소영도 마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 보았다. 첩첩히 겹친 산중에서 유독 높이 솟은 봉우리가 눈에 띄었다. 그 봉우리 위에 쌓인 눈이 저녁 햇살 을 받으며 보옥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신비 하고 장엄한 경치에 가슴이 탁 트이는 듯 상쾌한 어조로 말하였다. "정말 아름다운 경치로군요." 악소채는 소영이 앞길에 대난이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마냥 즐 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부모가 내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내가 그를 보호하지 못한 다면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 간단 말인가?' 그녀는 사방의 지세를 살피고 난 다음 앞장 서면서 말했다. "우리 마차를 버리고 걸어 갑시다." 소영은 보위하는 사나이 두 명에게 부축을 받으며 산봉우리 몇 개를 넘었다. 악소채가 어떤 절벽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오늘밤은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군요. 적당한 곳을 찾아 자리 를 마련하세요. 나는 나무를 해 올 테니." 소영은 줄곧 부축을 받으며 걷고 기어 오르는데 전신경을 쏟았기 때문에 주위의 형세를 살피지 못했는데 비로소 숨을 돌리고 사방을 살펴 보았다. 그들이 머문 곳은 지세가 곧고 지극히 험준하였다. 한쪽엔 천 길 의 깎아지른 절벽 위로 높은 봉우리가 솟아 있었고, 삼면은 백 길 이 넘는 깊은 골짜기였다. 모두가 놀라운 광경이었다. 길이라고는 그들이 걸어 온 좁은 길뿐이었다. 시선을 돌리니 자 기를 부축해 오던 그 두 사나이들은 헐떡거리며 숨을 돌리고 있었 는데 그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소영은 두 사람에게 눈길을 주며 조용히 물었다. "아저씨들의 성씨는 무엇입니까?" 칼을 등에 진 사나이가 대답했다. "공자님이 저희들을 아저씨라고 호칭하시니 황송하오이다. 저는 장건(張乾)이라고 합지요." 판관필을 등에 꽃은 남자가 뒤를 이어 자기 소개를 했다. "저는 하곤(何坤)이라고 합니다. 공자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 까?" 그 말에 소영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소영이라고 해요. 아저씨들은 소채 누님과 어떤 사이신가 요?" 장건이 가벼운 기침을 하고 대답했다. "우리들은 악낭자의 부하들이외다. 공자님! 앞으로 일이 있으시 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분부하십시오." 소영은 다시 물었다. "우리 소채 누님은 어떤 인물입니까?" 장건과 하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똑 같이 대답했다. "그것은 공자님께서 악낭자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악소채가 마른 소나무 가지를 한아름 안고 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어조로 소영에게 말했다. "소영, 조금 전의 그 싸움을 보았지요?" "네, 누나의 무공이 그처럼 높은 것에 놀랐어요. 참으로 부러워 요." 악소채는 나지 막하게 말했다. "그 놈들은 졸개에 불과하고 고수가 곧 뒤따라 올 거예요. 그 놈 들의 영구(靈鳩)가 우리를 뒤쫓고 있으니까 오늘 밤에는 아마 혈전 을 한 차례 겪어야 될 거예요." 그러자 소영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누님, 걱정할 것 없어요. 생사는 운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악소채는 잔잔히 웃었다. "동생은 담이 크군요." "이런 일이 없다고 해도 나는 몇 해 더 살지 못할 거예요. 누나 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안계를 넓혀 주었으니 비록 며칠 일찍 죽 는다 해도 한이 없어요." 그러자 악소채는 정색을 하고 소영에게 물었다. "동생의 안전을 위함이 아니면 나도 이렇게 험한 요지를 선택해 서 적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동생이 앞으로 내 말대로 하기 싫다면 따라 갈 것 없어요." 소영은 당황해서는 다급하게 물었다. "내가 누나 말을 언제 안 듣겠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좋아요. 이따가 강적이 여기까지 쫓아왔을 때 동생은 절 대로 나가선 안 돼요. 저 바위 밑에 숨어 있어요. 내 어머님의 혼 령이 도우시면 오늘밤 우리들은 강적을 섬멸하고 곧 출발할 수 있 어요." 그때 장건이 끼어들었다. "강적이 영구를 놓아 우리 종적을 수탐하는 것을 막을 수 없소이 다. 우리의 종적이 저 놈들에게 발견되면 아마 숨기 어려울 것이외 다. 그러니까 반드시 저 영구를 처지할 방법부터 고안해 내야 될 줄로 압니다." 그의 말에 악소채가 대꾸했다. "그놈들이 줄곧 우리들을 뒤쫓고 있으니까 오늘밤엔 따라 올 것 이 분명해요. 오늘밤에 그놈들을 처치한다면 우선 한시름 놓게 되 지요. 뒤의 그놈들이 영구로 우리 종적을 수색한다고 해도 최소한 삼, 사 일은 걸릴 거예요." 장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낭자께서 사태를 파악하시는 재주는 언제나 귀신 같으십니다. 언제나 틀림이 없다니까요." 그러자 하곤도 끼어들었다. "제가 모르는 일이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말해봐요! 어떤 일인데?" 하곤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낭자는 조금 전에 따라 오는 그 세 놈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 셨는데 그들 셋을 살려 주는 것은 적에게 수색의 단서를 주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악소채는 고개를 저었다. "그 세 놈을 죽인다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놈 들을 살려 주어서 우리의 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적을 현혹시키는 방법이 필요해요." 악소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시선을 장건과 하곤에게 차례로 돌 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큰 싸움에 대비하여 우리들은 푹 쉬도록 합시다." 그러자 장건과 하곤이 동시에 말했다. "낭자께서는 신중을 기하여 조처하시오. 따라 오는 놈들이 결코 함부로 다룰 놈들이 아닌 것 같소이다." 악소채는 머리를 뒤로 비스듬히 기대며 길게 찬숨을 짓더니 나지 막하게 소영을 향해 말을 하였다. "동생! 동생은 푹 자도록 해요. 조금 후면 큰 싸움이 벌어질 텐 데 그 때는 자려고 해도 잠을 잘 수 없을 테니까......" 악소채의 부드러운 말 속에는 따뜻한 마음씨가 담겨 있었다. 소 영은 악소채가 자기에게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대했다가 갑자기 냉 정해지곤 해서 어리둥절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공경하고 좋아하였으므로 곧 그녀의 말대로 눈을 감고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둠의 장막은 그들을 감싸고 황량한 산야는 차갑고 적막했다. 더구나 사방에서 들려 오는 이리의 울음소리와 부엉이의 울음소리 가 밤의 요기(妖氣)를 돋우어 한결 공포감을 자아냈다. 그때 갑자기 쉬익! 하고 하늘을 가르는 소리가 나자 악소채의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 소리가 들려 왔다. "적이 벌써 다가왔군요. 동생은 이제부터 바위 뒤에 숨어 꼼짝하 지 말아요!" 소영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그 바위 뒤로 가려고 몸을 돌리려는 데 악소채가 자기의 오른팔을 붙들었다. 얼굴에 수심과 고통이 가 득 차 있어서 소영은 깜짝 놀라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누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악소채는 진심으로 걱정되는 듯 찬찬히 타일렀다. "적은 무공이 고강할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흉악하며 손이 매워 요. 동생이 그들의 눈에 띄면 살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에요. 그 러나 난 적을 막으려고 동생까지 돌봐 줄 겨를이 없을 테니까 싸움 이 아무리 맹렬해도 절대 구경하겠다고 몸을 드러내서는 안 돼요. 그 놈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해야 해요. 알았죠?" "잘 알았어요. 아무 염려 마세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악소채를 안심시키며 재빨리 바위 뒤에 숨었다. 악소채는 소영이 몸을 숨기는 것을 보고 나서 안색을 고치 며 장건과 하곤에게 말했다. "오늘밤의 싸움은 일반 무림 동지들과 무술을 겨루고 초식을 교 환하는 것이 아니고 사느냐 죽느냐의 결판이 나는 싸움이오. 당신 들은 수단껏 독수를 써서 적을 한 놈이라도 더 처지해야 합니다." "낭자, 안심하십시오. 우리 형제가 목숨을 걸고 힘껏 싸우겠습니 다." 이때 갑자기 부엉이의 울음소리 같은 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 다. 그 소리는 몹시 빠른 기세로 순식간에 절벽 아래에 도착하였 다. 악소채는 이미 적을 방어할 계획을 짜 놓고 있었으므로 각각 절벽 형세를 따라 삼각형의 방어전을 구사하였다. 악소채는 허리춤에서 두 손가락 넓이에 넉 자 여덟 치의 연검(軟 劍)을 뽑아 냈다. 그리고 느릿느릿 걸어서 절벽가로 가더니 왼손을 품 속에 넣어 은침을 한 웅큼 꺼내어 손에 쥐었다. 절벽 아래에서 음침하고 늙은 목소리가 힘차게 울려 왔다. "이 어린 것들아! 너희들은 벌써 포위당했다. 독안에 든 쥐나 다 름 없는데 그래도 우리와 맞서 볼 테냐? 그래도 싸워볼 생각이라면 이 노부의 수단이 악랄하다고 원망은 말아라." 장건은 악을 쓰며 대들었다. "요 쥐새끼같은 놈들아,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지 말고 용기가 있 다면 올라 와라. 따끔한 맛을 보여 줄 테니......" 그러자 절벽 아래에서 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람의 그림자 하 나가 마치 영악한 원숭이가 나무를 기어오르듯 쏜살같이 절벽 위로 달려 올라 왔다. 본시 적들은 악소채의 뒤를 따라 여기까지 당도했 으나 어두운 밤이라 그 일행이 머문 곳을 알지 못하여 작전상 욕설 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대답하면 그것으로 있는 곳을 확인하려는 속셈이 었다. 그런데 장건이 화가 치미는 바람엔 이성을 잃고 계략에 넘어 간 결과가 되었다. 악소채는 살기를 띠고 절벽 끝에 꼼짝 않고 대기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절벽을 올라 서자 잽싸게 은침 한 뭉큼을 맹렬하게 쏟아 냈 다. 거리가 가까운 데다가 악소채가 때린 은침의 공력이 강했기 때 문에 명중시킬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위급한 중에도 살 짝 엎드리며 그것을 피해 냈다. 순간 악소채는 흠칫하며 가슴이 서 늘해짐을 느꼈다. '이 놈이 절벽을 오르는 솜씨와 은침을 피하는 신법만 보더라도 분명히 강적이구나.' 그때 갑자기 장건의 호통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어서 쨍그랑! 하고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악소채가 급히 돌아 보니 장건 이 혼자서 칼을 휘두르며 흑의인과 싸우고 있었다. 그 흑의인의 손 에서 번쩍이는 은광은 외문(外門)의 무기 한 쌍이었는데 양은만자 탈(養銀萬子奪)인 괘(卦), 쇄(鎖), 구(句), 봉(棒)으로써 바로 장 건이 쓰는 칼의 살성(殺星)이었다. 무기로만 따진다면 장건이 열세였다. 더구나 대체로 이런 무기를 쓰는 사람은 무공도 반드시 독창적인 조예가 깊을 것이라고 짐작되 었다. 그러나 장건은 넘치는 예기로써 힘껏 싸웠다. 그는 칼을 번뜩이 며 공격하는 초식만 사용했다. 그는 칼을 바로 치고 옆으로 후려치 고 하며 민첩하게 공격하여 혹의인으로 하여금 조금도 우세를 차지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하곤이 지키고 있는 곳에서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몸매가 대나무처럼 바싹 마른 대머리 노인이 어느새 절벽을 기어 올라 하 곤의 판관필과 대적하고 있었다. 이 대머리는 아무 것도 손에 든 것이 없었으나 삼 초를 겨루는 동안에 벌써 판관필을 봉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전개한 것은 대응 조공(大應爪功)에 공수입백도(空手入白刀)라는 끔찍한 공력을 곁들 인 초식이었다. 어느새 절벽 위에는 강적 두 사람과 악소채와 맞붙기 직전이었 다. 악소채가 장검을 휘두르자 검빛이 번쩍이면서 마치 은꽃을 연 상케 했다. 그 흑의인은 냉소를 터뜨리며 두 팔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그의 옷소매에서 검은 빛의 강환이 두 개 튀어 나왔다. 그것은 한철(寒鐵)로 만든 용호쌍환(龍虎燮環)이었다. 그 흑의인은 소매 속에서 이 강환 한 쌍을 감추고 있다가 날린 것이다. 쌍환이 교차하며 악소채의 검을 향해 봉하려고 들었다. 쨍하는 소리가 울리고 환과 검이 맞부딪쳤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순간 악소채의 검날이 휘어지며 번개처럼 상대방을 향해 짓쳐들 었다. 그녀의 이 장검은 본래 강(剛) 중에 유(柔)가 있고 유 중에 질긴 데가 있어 초식의 변화는 자연히 상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원래 그 흑의인은 용호쌍방을 날려 상대가 초식을 발휘하지 못하 게 봉해 버린 다음 그 여세를 이용해 공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런데 뜻밖에도 악소채의 장검에 강환이 맞고 떨어지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미처 초식을 바꾸지 못한 채 공중으로 몸을 날려 재빨리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다. 캄캄한 야음 속에서도 그의 모습은 나는 듯 보였고, 그의 몸이 절벽으로 떨어질 때 그의 팔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역력히 보였 다. 악소채는 단 일 초로 강적을 절벽 아래로 후퇴시킬 수 있으리라 고는 전혀 예측치 못했던 일이라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또 다 시 절벽 아래에서는 키가 큰 사나이 하나가 번개같이 달려 올라 왔 다. 악소채는 날쌔게 팔을 휘둘러 그녀의 검끝에 씌워진 강환 한 쌍을 뽑아 사람을 죽이지는 않고 그저 이 일격으로 기선을 제압하 려는 것 뿐이었다. 쌍환이 출수함과 동시에 그녀의 장검이 날카롭 게 뒤따라 갔다. 그런데 그 강환 한 쌍이 상대의 사나운 장풍에 부딪쳐서 되돌아 오는 것이 아닌가? 악소채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영사(靈蛇)같은 그림자가 공중을 날았다. 그것은 키 큰 사나이가 휘두르는 기형의 사두연편(蛇頭軟鞭)이었 다. 악소채는 재빨리 연검을 휘둘렀다. 순간 전세는 수세에서 공세 로 바뀌며 적의 공세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삼 초를 교환한 다음 악소채는 적의 무공이 고강함을 깨달았다. 그의 연편은 변화무쌍했으며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놀라 왔다. 그녀는 연검을 굳게 잡고 사납게 내리쳤다. 검꽃이 튀기며 곧장 상대의 연편을 덮어 씌워 갔다. 속전속결를 끝내야만이 되는 싸움이었지만 검은 천으로 복면한 적의 무공은 고강했을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펼치는 초식이 그 야말로 놀라웠다. 악소채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이 놈은 어째서 자기의 본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 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 때 갑자기 기합 소리와 함께 쨍그랑! 하며 무기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악소채가 싸우면서 재빨리 돌아 보니 하곤의 판관필 중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두 개의 판관필을 사용해도 그 대머리 노인을 상대하기가 힘든데 한 개만 남았으니 사태는 더없이 위태롭게 되었 다. 시선을 장건에게 돌렸다. 그는 양은만자탈을 사용하는 남자와 막 상막 상하의 판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팔을 빠르게 휘두르며 연달아 절묘한 초식을 세 번 펼쳤다. 그 찰나 차가운 검광이 번개처림 하늘을 식 혔고 복면인의 기세를 눌러 잇달아 세 발자국 물러서게 했다. 이 때 한편에서는 대머리 노인이 계속 독수를 사용하여 벌써 하곤을 누르고 있어서 하곤은 좌우로 이리저리 피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하곤은 자신의 생사를 걸고 악소채의 신변을 위해 결사적으로 싸 우고 있었다. 그러나 쌍방의 무공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힘에 겨워 자연히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하곤의 마음에 확고한 목적이 있어서 그 굳은 의지로 지금까지 지탱한 것이다. 시간이 점점 흐름 에 따라 하곤은 더 이상 도저히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 갑자기 악소채의 날카로운 기합소리가 들리며 번개처럼 빠 른 검이 대머리 노인의 눈을 쏘았다. 그러나 그의 무공은 과연 훌 륭했다. 대 머리 노인은 뒤로 돌아 보지도 않고 오른손을 재빨리 저어 맹렬한 내력을 뻗쳐서는 악소채의 검세를 막으며 옆으로 번개 같이 몇 자 날아 피했다. 악소채의 일 초는 하곤을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이때 복면인이 또다시 사두연편을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 쉬익! 하고 매섭게 바람을 가르는 채찍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순간 맨 끝의 사두가 벌어지면서 괴상한 소리를 냈다. 악소채의 그 연검은 넉 자 여덟 치인데 비해서 그 복면인의 사두 연편은 일곱 자가 훨씬 넘는 듯했다. 그것을 내두르자 사위는 눈이 어릿어릿한 채찍 그림자로 꽉 찼다.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복면인이 채찍을 휘드 르며 기선을 빼앗자 사두연편의 위세는 더욱 맹렬해졌다. 악소채는 전력으로 장검을 휘드르며 겹겹이 싸인 채찍 그림자 속 에서 반격을 전개했다. 그녀의 신기한 검기가 퍼져 나가면서 포위 망을 뚫고 날아 가더니 삼합도 못 되어 열세를 만회했다. 그 복면인은 속으로 감탄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악가(岳家)의 검술에 대한 명성은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악소채는 그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장검을 돌연 빙하 개동(氷河開凍)의 초식으로 바꾸며 복면인에게 달려들자 세 송이의 검꽃이 환상을 일으키며 그 복면인의 대혈 세 곳을 각기 습격하였 다. 그녀의 날카로운 초식을 피하면서 잽싸게 그는 철판교(鐵板橋) 의 초식을 전개했다. 그녀는 검초를 폭포의 급류처럼 연달아 전개하면서 상대에게 반 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검이 번개처럼 난무하며 검광을 뿌렸다. 그 복면인은 그녀의 검 그림자에 눌려 갈팡질팡 뒹굴기만 하고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 러나 복면인은 무공도 비범했다. 그는 등을 땅에 붙인 채로 손발을 퉁기고 차면서 전신을 풍차처럼 쉬지 않고 돌렸다. 그녀는 검초로 상대를 해칠 수는 없었으나 사나운 검초를 계속 휘둘러 복면인으로 하여금 그 검망을 돌파하고 나가게 허락하지도 않았다. 복면인은 또 한 차례 기를 쓰고 저항하더니 갑자기 사두연편을 넣고 오른손을 품에 넣어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는 기합을 지르며 비수를 연거퍼 휘둘러 그녀의 검세를 봉해 버리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악소채는 역시 검세를 가다듬어 그가 자기의 검세를 뚫고 들어오 지 못하게 하면서 냉랭한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너는 어째서 얼굴을 보이지 않느냐? 나는 벌써 여러 차례 그대 를 위험한 고비에서 놓아 주었다. 만일 계속해서 얼굴을 보이지 않 는다면 나에게도 생각이 있으니 내 수법이 악랄하다고 욕하지는 말 아라." 악소채는 아까부터 적의 음성과 초식의 수법에서 이 복면인을 자 기와 잘 아는 사이일 거라는 느낌을 받았으나 다만 물증이 없다는 것이었다. 복면인은 비수를 휘둘러 장검을 막으면서 땅에 떨어져 있는 사두 연편을 집으려고 했다. 그러나 악소채의 빠르고 면밀한 공세로 인해 추호도 기회를 얻지 못하여 그것을 집어 들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다시 몇 초를 겨루고 있을 때 저쪽의 정세가 또 다시 역전되었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하곤이 몇 번 비틀 거리더니 급기야는 틸색 주저 앉는 것이 아닌가. 하곤은 조금전에 악소채의 원조로 땅에 떨어진 판관필을 재빨리 주워 들어 쌍필로써 용기를 내어 대머리와 계속 맞붙어 싸웠었다. 그러나 무공의 격차가 심한 까닭에 다시 대머리 노인에게 주도권 을 빼앗기고 말았다. 대머리 노인은 좌장을 번쩍 휘둘러 하곤의 쌍 필을 제압해 놓고 그 틈을 타 우장으로 하곤의 어깨를 때렸다. 그 장력이 너무 날카로왔기 때문에 하곤은 중심을 잃고 그 자리에 주 저앉았던 것이다. 왼쪽팔도 이미 마비되어 쓸 수 없게 되었고 손에 들었던 판관필 도 놓쳐 버렸다. 그 순간 대머리 노인은 또 다시 좌장을 들어 하곤을 치려고 하였 다. 비록 악소채가 이때 강적과 겨루고 있지 않다 하더라고 손을 써서 구출하기에는 너무나 때가 늦었다. 그때 갑자기 예리한 기합소리가 터져 나오며 하곤의 오른손에서 판관필이 날았다. 그는 생사를 걸고 나머지 기력을 다 모아 판관필 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 기세는 말할 수 없이 강력했다. 대머리 노인은 자기의 장풍으로 적이 죽게 될 것에 회심의 미소 를 지었는데 뜻밖에도 강한 반격을 받았으니 어찌 멈칫하지 않을 수가 있으라! 그가 이렇게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 악소채는 한편으로는 상대와 겨루며 한편으로는 재빨리 품 속에서 은침 한 웅큼을 꺼내어 그를 향해 출수했다. 그때 갑자기 악소채와 겨루던 상대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동 시에 귓가에 가늘고도 매우 똑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빨리 가서 사람을 구하시오!" 악소채는 흠칫 놀라며 소리의 주인을 찾아 보았다. 그러자 그것 이 뜻 밖에도 상대인 복면인이 말한 것임을 알고 다시 놀랐다. 그 러나 미처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는지라 곧 몸을 날려 장검을 번쩍이며 곧장 대머리 노인을 향해 짓쳐 들어 갔다. 대머리 노인은 황급히 하곤이 던진 판관필을 피했다. 그러나 연 달아 느닷없이 날아드는 악소채의 은침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이 잇달아 날아 오는 암기는 가늘고 작으며 그 수량이 또한 많아 서 이러한 야음에는 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팔이 따끔하며 은침 두 개가 박혔다. 깜짝 놀라며 피하려던 차에 이번에는 악소채의 예리한 칼날이 벼락같이 다가 왔다. 그러나 이 노인은 무공이 비범하며 암기를 맞고도 당분간은 정신 을 잃지 않았다. 잽싸게 옆으로 몸을 날려 그녀의 습격을 피해 냈 다. 악소채는 번개같이 달려 들어 그 대머리 노인의 아랫배를 힘껏 걷어 찼다. 그러자 비참한 비명과 함께 노인의 몸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다시 "휙!"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사두연편이 곧바로 휘몰아쳐 왔 다. 악소채는 재빨리 검을 휘둘러 그 연편을 퉁겨 내고 공세를 취 했다. 그런데 조금 전의 그 모기소리만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빨리 장건을 도우시오. 그리고 그의 상대를 죽이시오. 그 놈을 살려 두어서는 안 되오." 악소채는 그가 장건의 이름을 똑바로, 거침없이 부름에 자기의 추측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장검을 기봉등교(起鳳騰較)의 초식으로 휘두르며 곧장 양은만자탈을 사용하는 사나이에게 달려 들었다. 그녀의 검풍이 밤공기를 찢는 예리한 소리와 함께 밤하늘 에는 찬란한 은무지개가 난무했다. 장건은 그 사나이에 비해 무공은 약간 떨어졌으나 필사적인 신념 으로 위급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는 자신의 안전도 염두에 두지 않고 칼을 재빨리 놀려 그 사나 이의 요혈을 향해 찔러댔다. 만약 그 사나이가 결사적을 달려드는 장건의 공세를 막기만 하고 손을 쓰지 않는다면 결국 장건은 그의 양은만자탈에 맞아 죽는 것과 동시에 장건의 마지막 칼에 그도 역 시 죽든지 아니면 중상을 입으리라. 그 사나이는 우세를 완전히 차지하고 기선을 잡고 있었으므로 장 건을 살상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형세는 계속 장건에게 불리해지자 악소채는 쏜살같이 칼을 내리 치며 장건의 약세를 응원했다. 그 사나이는 악소채의 공격을 받고 장건에게서 물러나며 동시에 역병천남(力屛天南)의 초식으로 뻗쳤던 수를 거두어 들였다. 순간 양은만자탈이 춤추며 은빛을 발산하여 몸을 지켰으며 악소 채가 찔러 오는 검을 막아 버렸다. 악소채는 그가 검세를 봉해 버리자 왼손으로 재빨리 일장을 때리 고 동시에 오른발로 나는 듯이 그를 향해 걷어 찼다. 그 사나이는 옆으로 피해 일장과 발길질을 한꺼번에 모면했다. 그리고 재빨리 눈을 돌려 복면인을 보았다. 그는 사두연편을 든 채 자기를 돕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복면인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따지듯이 외쳤다. "유향주(劉香主)!" 그러자 유향주라고 불린 복면인이 차디차게 웃으며 대답했다. "왜? 이제야 의심이 생겼어?" 악소채는 공력을 모아 날카로운 공세를 연달아 삼 초를 공격했 다. 그 사나이는 그 기세에 눌려 허둥지둥 하느라고 복면인과 말할 틈도 없었다. 복면인은 다시 냉랭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애석하게도 네가 안 것이 좀 늦었구나." 사태가 이쯤 되자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한 그는 싸울 의욕을 잃었다. 악소채는 공력이 강하여 그가 전심전력을 기울여 대항해도 막기 어려운 노릇인데 이렇게 투지마저 잃었으니 결과가 어떻게 되 리라는 것쯤은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그 사나이는 비호같은 악소채의 검에 맞아 선혈을 토하면서 마지 막으로 악소채의 일장에 증상을 입고 고꾸라졌다. 유향주라고 불린 복면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놈이 내 본색을 알아 냈으니 살려 둘 수 없소. 빨리 처치하 시오." 옆에 서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장건이 성큼 앞으로 나서서 칼을 번쩍 내려 쳤다. 그 사나이는 장건의 칼에 맞고 차참하게 숨을 거 두었다. 장건이 그 시체를 발길로 차서 절벽 아래로 밀어 버렸다. 그제서 야 악소채는 서서히 돌아서서 그 복면인에게 몸을 굽히고 입을 열 었다. "도와주신 은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복면인은 악소채의 인사말을 듣자 복면을 천천히 벗었는데 어둠 속에 그 수염이 바람에 날렸다. 네모진 얼굴이었으며 입이 크고 왼 쪽 뺨에 매우 깊은 칼자국이 있었다. 악소채가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과연 유노선배님이시군요. 후배는 노선배님의 편법을 보고 곧 알아 냈어요." 그 사람이 어색한 듯이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이라는 호칭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낭자가 만일 저를 다시 용서하시어 받아들이신다면 내 이름을 직접 불러 주시 오." 장건이 칼을 내던지고 곧장 달려와서 그를 부등켜 안았다. "문기(文奇)형 오랜만이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십여 년 간을 만 나 보지 못했구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하근도 한 마디 했다. "십여 년 만에 뜻밖에 이런 산중에서 만나게 됐군요!" 그의 상처도 가볍지 않아서 반가움에 억지로 일어서기는 하였으 나 달려 올 수는 없었다. 유문기는 조심스럽게 일러 주었다. "둘은 좀 목소리를 낮추시오. 조심을 하는 것이 좋을 거요." 악소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밤 당신의 도움에 깊이 감사하는 바입니다. 과연 당신은 신풍개(神風幇) 안에서 그 지위가 낮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유문기가 곧 대답했다. "현재 신풍단하의 향주올시다." 악소채는 다시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옛날 우리 어머님이 당신을 문하에서 쫓아 냈는데도 당신은 그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우리를 도와 주셨군요." 그러자 유문기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낭자는 옛일을 다시 들추실 것 없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나의 잘못이었으니까요. 내가 계율을 범한 것을 생각한다면 사실 죽어야 마땅합니다. 낭자의 자당께서 나를 살려주신 것은 정말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운 은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소이다......" 그는 잠시 밤하늘에 시선을 던지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후 오늘날까지 참으로 숱한 사연이 많아서 한 마디로 말하기 가 어렵군요. 그리고 더구나 현재의 정세가 긴박하니 낭자에게 지 난 일들을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을 양해하여 주십시오."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옛날 일은 과거사가 되어 버렸어요. 당신이 우리 악가문에서 나간지도 벌써 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 다. 그러니 나에게 이처럼 공손히 예의를 하실 필요는 없어요." 유문기는 고개를 저었다. "자당께서 그렇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내 목숨이 어찌 여태껏 붙어 있겠습니까? 지금 이 정세는 평상시와 다르며 일 각이 천금 같소이다. 그러니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말할 여유도 없 습니다. 그리고 나도 여기 더 이상 있을 수 없으며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중요한 일을 낭자에게 알려 드려야겠소이다." 악소채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신풍방 이외에도 여러 무림 고수들이 낭자를 뒤 쫓고 있습니다." 악소채가 탄식을 하며 입을 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유문기는 계속 말했다. "낭자가 자당의 검학진전을 모조리 얻으셨다 하나 혼자의 힘으로 는 그 파의 고수들을 막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러니 그것에 대비하 여 반드시 조처를 강구하셔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위를 살피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해질 무렵 내가 영구의 전서를 받았는데 신풍방주는 단하 의 사대호법(四大護法) 고수를 대동하고 자기가 직접 달려 올 모양 입니다. 이번 일을 대단히 중시하는 눈치더군요." 악소채는 잠잠히 듣고만 있을 뿐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유문기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침울한 심중을 털어 놓았다. "본방의 비밀을 누설하면 신사(神蛇)에게 물리는 고통의 벌을 받 아야 합니다. 그러나 낭자의 자당님께 받은 은정을 생각하여....." 장건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신풍방은 강호에서 일어난 지 불과 십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명성은 자자합니다, 신풍방의 방주는 어떤 인물이외까?" 그러자 유문기는 부끄러운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신풍방에 들어간 지 벌써 십 년이 되었는데 아직 방주의 얼굴은 보지 못했소. 그러나 그 단하의 사대호법은 모두 절기를 지 니고 있는 사람들이라오. 아! 신풍방주 자신이 직접 달려 오는 모 양인데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도와드릴 수가 없겠소." 이때 쉬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자 유문기의 안색은 당황한 빛이 역력 했다. 유문기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감추면서 입을 열었다. "신풍방의 영구는 그 추종술(追踪術)이 당대 무림에서 으뜸갑니 다. 낭자가 그 비둘기의 추적을 피하려거든 무슨 수를 써서든 저 비둘기의 눈을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리고는 급히 장건은 돌아보며 말했다. "장형, 어서 저에게 상처를 입히세요. 나는 가야하니까요." "무엇이요?" 유문기의 말뜻을 알아들은 악소채가 재빨리 장검을 날려서 유문 기의 왼팔을 긋자 곧 피가 솟아 나왔다. 유문기는 자기의 상처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상처가 너무 경해도 그들의 눈을 속일 수가 없소이다. 이만하면 됐으니 과히 걱정 마십시오. 그럼 낭자께서는 부디 몸을 보중하십 시오.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그리고는 획 몸을 날려 절려 아래로 내려 갔다. 악소채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유문기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긴 탄식을 불며 밤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로 시선을 던졌다. 장건과 하곤은 그러한 악소채를 조웅히 지켜만 볼 뿐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서 있었다. 그들은 악소채가 결정짓기 어려운 일을 당 하여 주저할 때마다 이런 표정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며 생각에 잠 겨서는 말이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악소채는 비로소 결정을 내린 듯 시선을 하곤에게 돌렸다. "당신의 상처는 어때요?" "조금 쉬니까 많이 회복된 것 같습니다." 악소채는 다소 안심이 된 듯 재차 그에게 물었다. "그럼 길을 걸을 수 있겠군요?" 하곤은 사실 그럴 만한 원기는 회복되지 않았으나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갈 수 있습니다." 악소채는 품에서 옥으로 만든 조그만 병을 꺼내더니 그 속에서 환약 두 알을 화곤에게 건네 주었다. "자아 ! 이 환약 두 개를 복용하고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하곤은 그 환약을 먹고서는 운기조식하였다. 악소채는 연검을 허리에 차고 천천히 걸어서 바위 뒤로 갔다. 소 영은 바위를 등지고 앉아서 조식중이었다. "동생!" 소영은 악소채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 놈들은 모두 누나에게 얻어맞고 도망갔어요?" "모두 도망갔어요. 무섭지 않았어요?" 그러나 소영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웃었다. 악소채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가만히 소영을 쳐다 보더니 입을 열었다. "동생은 집에서 호강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처럼 흉악하고 위험한 고난의 날들을 보내게 되니 정말 견디기 어려울 것이에요." 소영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에요.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아요." 악소채는 그의 전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고 분명히 체질이 약해서 이런 산속의 혹한을 견디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손을 내밀어 소영의 두 손을 꼭 감싸 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춥지요?" 소영도 더 이상 부인하지 않았다. "손발이 좀 시리군요." "이제부턴 밤새 길을 걸어야 하는데...... " "그것 참 좋군요. 길을 걷노라면 몸이 좀 훈훈해지겠지요." 악소채는 가볍게 부인했다. "산길이 몹시 험난하고 눈이 쌓여 있어서 무공을 지닌 사람이라 도 걸어가기 힘든데 동생이 무슨 수로 걸어가겠어요? 내가 저 장건 에게 동생을 업고 가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소영은 내심으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마지못한 듯 입을 다물었 다. 악소채는 허리에서 명주띠를 끌러서 소영을 장건 등에 업히고 나지막하게 위로해 주었다. "무서워할 것 없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늘 곁에 있으니까 요." 악소채는 말로는 소영을 위로했지만 근심 걱정이 태산같았다. 왜 냐하면 이번 길은 위험하고 고통스러우며 참으로 생사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곤이 운기조식을 모두 마치고 앞으로 나섰다. "장형 ! 내가 앞장서겠소이다." 그러나 악소채가 그의 말을 막았다. "당신들은 내 뒤를 따르며 그 소공자를 잘 보호하도록 하세요." 하곤은 두 손에 판관필을 들고 장건의 뒤를 바싹 따랐다. 그는 조식을 하고 악소채가 준 환약을 먹었으나 상처가 여전히 욱씬거리 고 아팠으며 걷기가 매우 불편했고 장건은 소영을 걸음이 느렸다. 그러므로 일행의 전진은 더디고 마음만 급했다. 소영은 장건의 널찍한 등에 업힌 채 사방을 돌아 보았다. 눈에 덮힌 산봉우리가 어둠속에서도 완연히 보였다. 이러한 경치는 신비 하고 웅장하여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찬 바람이 칼로 에이는 것처럼 얼굴을 스쳤지만 그의 흥미를 감소시키지는 못했다. 악소채는 앞장을 서서 길을 인도하며 절벽을 내려가 어떤 산골짜 기로 접어들었다. 장건은 벌써부터 그녀의 지혜가 뛰어나고 일거일동이 모두 신중 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묻지 않고 따르기만 했다. 골짜기 안은 바람이 거의 없었고 산꼭대기처럼 춥지도 않았다. 악소채는 묵묵히 한동안 걷다가는 걸음을 멈추고 두루 돌아 다니면 서 백설이 쌓인 위에다 발자국을 잔뜩 남겨 놓곤 하였다. 이렇게 여러 번을 되풀이하는 것을 본 소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참다 못해 물어 보았다. "누님, 어째서 그렇게 하십니까?" 그러자 악소채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뒤쫓아 오는 적의 눈을 속이려고 그러는 것이지요." 소영은 눈을 껌벅이며 생각을 하더니 크게 소리쳤다. "알겠어요! 발자국을 여기저기 남겨서 적들에게 우리의 방향을 찾아 낼 수 없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군요." 악소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 발자국을 남기는 것은 다만 쫓아오는 사람들의 눈은 현혹케 하는 것에 불과하지 적의 추적을 벗어 버리지는 못할 것이 에요." 악소채는 길 옆의 대나무 두 개를 꺾으면서 말했다. "당신들은 여기서 잠시 쉬고 있어요." 그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는 상당한 거리까지 발자국을 없앴 다. 그리고 이만하면 족하다고 생각을 한 그녀는 좌우 양손에 대나 무를 한 개씩 짚고 장대 두 개가 지탱하는 힘을 빌려 공중에서 재 주를 넘더니 소영이 쉬고 있는 곳을 향해 되돌아 왔다. 이 장대 두 개의 길이는 모두 한 길이 넘는 것이어서 한 번 짚고 뛸 때마다 두세 길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그녀가 멀리서 오는 모 습은 마치 큰 새가 올랐다 내렸다 하며 하늘을 날아서 오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그런 방법을 이용해서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거뜬히 그들 이 기다리는 곳까지 돌아 왔다. 그리고 두 팔을 휘둘러 힘껏 손에 든 장대를 내던지니, 두 개의 장대는 휭 바람을 일으키며 멀리 날 아가 버렸다. 소영은 그녀의 묘기에 넋을 잃고 있다가 탄식하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본 악소채가 곧 물었다. "동생 어째서 한숨을 내쉬지요?" 소영은 감탄을 금치 못하는 듯 부드러운 어조도 대답했다. "누님의 기막힌 묘기에 부러움을 느껴서 그럽니다." 그 말에 악소채가 웃으며 말했다. "동생도 힘써 배우면 동생의 타고 난 재주와 지혜로 후일에 나보 다 더 뛰어나게 성공할 것이 틀림없어요." 그러나 소영은 다시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이십 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니 누나의 큰 기대를 저버리게 되겠군요." 하며 어두운 얼굴을 깊이 숙였다. 악소채는 이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난치병을 갖고 있어 이맥삼혈(二 脈三穴)이 폐쇄되어 통하지 않아 피가 전신을 순환할 때 지장이 많 다고 했지. 어머님의 태을신공을 받았으나 근기(根氣)가 안정되기 전에는 지나치게 걱정을 해도 안 되고 너무 즐거워 해도 안 되며 몹시 울거나 웃는 것도 생명에 위험이 있다든데......' 그녀는 이러한 생각을 되새기고 있다가 소영을 바라 보며 부드럽 게 위로해 주었다. "동생,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누나의 말대로 하기만 한다면 이 십 세는커녕 백 살 이상 살 수 있으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엄숙해졌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이십 세까지 살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운 이모의 고생도 허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에요." 소영은 깊이 깨달은 듯이 다그쳐 물었다. "누나! 나도 무공을 익힐 수 있을까요?" 그 물음에 악소채는 그의 용기를 일깨워 의욕을 복돋아 주려는 생각에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말고! 어머님의 유서에 동생의 체격과 재주가 남다르다고 적혀 있어요. 동생이 힘써서 배우기만 한다면 절기를 지니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소영은 두어 번 큰 눈을 껌벅이더니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떠올 랐다. 장건과 하곤은 이곳에서 쉴 동안에 한 차례 조식을 한 후 심신이 많이 호전된 듯하였다. 악소채는 두 사람을 힐끗 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운이 좀 났어요? 절벽을 기어오를 수 있겠어요?" 장건, 하곤이 동시에 대답했다." "지장 없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어서 갑시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절벽을 기어 올라 갔다. 장건과 하곤도 오랫 동안 강호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라 경험이 풍부했다. 그러나 악소채의 이런 행동은 두 사람을 매우 당혹하게 했다. 그 들은 의아해 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우리를 데리고 산골짜기로 들어 온 것은 적의 추적을 피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왜 또 갑자기 절벽을 기어 오르려고 하 는 것일까?' 그들은 물어 보지 못한 채 악소채의 뒤를 따라 기어 올라 갔다.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었으며 더구나 엄청나게 쌓인 눈 때문에 힘 들었다. 그들이 절벽꼭대기까지 올랐을 때는 지쳐서 기진맥진하였 다. 이 꼭대기는 불과 서너 길 둘레의 넓이밖에 되지 않았는데 괴 상한 돌이 깔려 있었으나 그나마 거의 눈속에 파묻혀 있었다. 악소채는 바람을 피할 만한 곳을 골라 눈을 치우고 소영에게 말 했다. "이 꼭대기의 밤바람에 견뎌내기 어려울 테니 이 옷으로 몸을 덮 어요!" 하며 부드러운 옷을 꺼내서 소영에게 덮어 주었다. 소영이 자기 몸에 둘러진 옷을 만져 보니 솜처럼 부드럽긴 하였으나 매우 얇은 것이었다. "누나는 나를 정말 위해 주시는군요." 소영이 감격해서 말하자 악소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장건과 하곤에게도 얼굴을 돌리며 부드럽게 말했 다. "당신네들도 지금 운기조식을 하세요. 아마 날이 밝으며 또 한 차례 싸움이 벌어질 테니까요." 하고 잠시 말을 끊더니 곧 이어서 자기의 작전을 이야기했다. "위에서는 영구가 수색을 하고 아래서는 강적이 쫓아 오고 있으 니 우리들은 멀리 가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현재의 계책으로는 잠 시 적의 예봉을 피하는 것 뿐입니다. 이 산봉우리는 여러 산 중에 서 홀로 높이 솟아 있고 형세가 험하므로 설혹 적에게 발견된다 하 더라도 험준한 지세를 의지해서 막을 수 있지요. 만일 적이 속아서 멀리까지 유인되면 더욱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 높은 곳에서 내 려다 보면서 적의 정세를 살피면서 다시 적을 물리칠 계책을 세웁 시다." 그 말에 하곤이 감탄해 마지 않았다. "낭자의 계책에 우리들은 탄복할 따름입니다." "따라 오는 적은 신풍방 이외에도 고수가 매우 많다고 하니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그들이 서로 싸우도록 조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만히 앉아서 어부지리를 거둘 수 있으며 틈을 타서 피신할 수도 있지요." 장건과 하곤은 비록 나이가 많은 편이지만 지혜로움은 악소채와 비견될 수가 없었기에 그녀의 의견에 묵묵히 순종할 뿐이었다. 추운 밤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눈과 바람 속에 있으려니 몸은 점점 더 얼어 오는 듯 하였고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소영은 악소채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운고 이모가 전수해 준 좌 선법대로 운기조식하고 있었다. 그는 운고가 전수해 준 것이 무림의 절정공력인 태을신공인 줄은 모르고 있었지만 희미하게나마 한 번씩 좌식(坐息)을 할 때마다 추 위를 막는 힘이 매우 강하여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악소채는 그것을 방관만 하였다. 그가 운기조식하면서 점점 몰아 지경으로 들어 가는 것을 보고는 그녀는 남몰래 속으로 기뻐했다. 이런 상태로 발전한다면 소영이 쉽게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기 매문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동쪽 하늘에 희미하게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악소채는 장건과 하곤을 눈여겨 보았다. 두 사람의 안색이 어제 보다 훨씬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밤새껏 운기조식하였으므로 심신이 팔 부쯤 회복되었다. 그들은 충직한 눈으로 악소채를 바라 보았다. 그때 느닷없이 개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악소채는 가슴이 섬뜩했다. 그녀는 이상하게 느끼고, '추운밤 깊은 산 속에 큰 눈이 이렇게 길을 막았는데 어디서 온 개가 저렇게 짖을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비둘기 나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 왔다. 악소채는 벌떡 일어서며 낮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당신들은 소영을 잘 보호하세요!" 하고 번개같이 몸을 날려 물을 차는 제비처럼 날아갔다. 그녀는 한쪽 우뚝 솟아 있는 큰 바위로 날아가서 몸을 숨기고 아래를 내려 다 보았다. 그러자 희끄무레한 새벽 빛에 비둘기 두 마리가 잽싸게 산허리를 날아 가더니 곧장 깊은 골짜기로 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또 다시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새벽 공기를 진동시켰다. 그리고 절벽 밑으로 달려 오는 세 그림자가 있었다. 그녀는 내공이 정묘하여 시력인 뛰어났다. 크고 검은 개 두 마리 와 한 사람 오는 것이 보였다. 그 개들은 굉장히 빨라서 순식간에 절벽 밑에 당도했다. 마침 날이 완전히 밝아져 동쪽 하늘에 붉은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악소채의 눈에 비친 사람은 남빛의 긴 옷을 입었고 나이가 아주 젊어 보였다. 청색 융모자를 눈썹까지 눌러 썼기 때문에 얼굴의 절반이 가리워 져 있었다. 검은 개 두 마리는 놀랄만큼 거대했다. 키가 거의 사람만큼이나 컸다. 개들이 절벽 위를 쳐다 보며 기어 오르려고 덤볐다. 그 남빛 옷을 입은 사람이 가죽끈을 단단히 붙들 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개들은 절벽 밑에서 껑충거리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쉬익!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골짜기 멀리에 사람의 그림자 둘이 나타났 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눈깜짝 할 사이에 이쪽으로 달려 오고 있었다. 4. 금궁(禁宮)의 비밀은...? 악소채는 생각했다. '저 남빛 옷을 입은 사람은 분명히 우리들의 뒤를 추적해 온 모 양인데 어째서 절벽 위로 올라 오려고 하지 않을까?' 그녀가 이렇듯 의아해 하고 있는 사이에 벌써 그 두 사람은 절벽 밑에 도착했는데 그들은 칼을 지닌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개를 끌 고 온 남색의 사나이는 길 복판에 서 있었는데 두 마리의 개를 묶 은 가죽끈이 굉장히 길어서 두 사람의 길을 방해하는 꼴이 되어 버 렸다. 그들 두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그 개의 임자를 재빨리 훑어 보 더니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인 것을 알아 본 듯 곧 공수 일례 를 하고 정중히 말했다. "길을 비켜 주시오." 그 남색 옷의 사나이는 차가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노려 보면서 갑자기 가죽끈을 약간 흔들었다. 그러자 개들이 갑자기 무섭게 짖 어대며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칼을 휘두르며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남색 옷을 입은 사람은 다시 가죽끈을 흔들었다. 그러자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던 개들이 공세를 멈추고 두 사람의 칼을 피했다. 이 어 뒷발을 딛고 사람처럼 꼿꼿이 일어서더니 사나운 발톱으로 그들 을 할퀴려 들었다. 두 남자는 옆으로 피함과 동시에 넓이가 넓은 귀두도(鬼頭刀)를 재빨리 휘둘러댔다. 개들과 두 사내가 절벽 아래에서 격전을 벌였다. 크고 검은 두 마리의 개는 그 남색 옷을 입은 사람으로부터 가죽 끈의 조종을 받아 진퇴와 공방을 했는데 무학의 기술이 엿보였다. 두 남자가 칼로 저항하는 것도 허사가 되어 도저히 두 마리의 개 를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자 남의인이 가죽끈을 놓아 버렸다. 그러자 개들은 일제히 덤벼들면서 두 남자의 주위를 빠르게 맴돌 았다. 당황한 두 남자는 결사적으로 칼을 휘둘렀으나 도저히 개들 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절벽 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악소채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림의 고수하고 싸우는 것을 보면 저 개들은 보통 개가 아니 다. 남색 옷을 입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개들을 저토록 훌륭하게 훈련시켰단 말인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두 남자는 귀두도로 간신히 개 의 공세를 물리치고 옆으로 허둥지둥 물러났다. 순간 남색 옷의 사나이가 개를 향해 나지막하게 쉿, 하는 신호를 하자 그 개들은 빠르게 산모퉁이를 돌아 간 두 남자의 뒤를 쫓아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색 옷의 사나이는 절벽 위를 힐끗 쳐다 보더니 갑자기 팔을 휘 두르고 두 길이나 높이 날아 올랐다. 그는 서슴없이 절벽 위를 향 해 기어 올라 왔다. 그런 그의 동작은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 듯이 보였고 또한 놀랍도록 빨라서 눈깜짝할 사이에 벌써 산정 가까이에 다다랐다. 악소채는 그가 어느 편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 손을 써서 막아야 할 것인지 곧 결정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잠깐 주저하는 사이에 그 남색 옷의 사나이는 벌써 절벽 위로 올 라 왔다. 그리고 악소채는 똑바로 쳐다보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악 낭자이시죠?" 장건, 하곤이 벌떡 일어서더니 칼과 판관필을 들고 일제히 달려 왔다. 악소채는 손을 저으며, 장건과 하곤을 저지했다. "당신들은 물러가 있어요!" 그들은 순순히 한 길쯤 밖으로 물러서서 지켜 보고 있었다. 남색 옷의 사나이는 오른쪽 눈이 모자에 가려 있어서 왼쪽 눈만 보였다. 그 사나이는 차가운 어조로 재차 입을 열었다. "나는 낭자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낭자가 나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소이다." 악소채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으나 이 사나이를 언제 봤는지 도무 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색 옷의 사나이는 여전히 냉랭한 어조였다. "귀인은 사소한 일을 잘 잊는다고 하니 낭자가 나를 기억하지 못 해도 별 상관이 없소이다. 내가 온 것은 낭자하고 장사 이야기를 하려는 것 뿐이니까." 그 말에 악소채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귀하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므로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해도 알아보기 힘들겠어요. 그러니 본 얼굴을 보여주시면 어떨지 요?" 그러나 그 사나이는 잘라 말했다. "필요 없소이다. 나의 반쪽 얼굴은 보기 흉하니 볼 생각은 마시 오." 그는 약간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저 낭자와 흥정을 하려는 것 뿐이니까 내 얼굴을 알고 모르고는 우리 장사의 손익과는 관계가 없소이다." "무슨 흥정인데요?" 남색 옷의 사나이는 또박또박 말했다. "악낭자는 자기의 처지를 잘 알고 있겠지만, 지금 신풍방의 고수 들이 죽자하고 쫓아 오는 이외에 적지 않은 무림의 인물들이 꼬리 를 물고 달려 오는 중인 것을 낭자도 잘 알고 있을 것이외다." 악소채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알려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군요." 남색 옷의 사나이는 신중한 말씨로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악가문의 검술은 그 명성이 대단하나 두 주먹이 손 넷을 못 당 한다고 낭자는 여자이며 혼자 무공도 모르는 어린애를 하나 보호해 야 하니 자연 처지가 매우 위험하군요." 장건이 옆에서 듣다가 화를 버럭 내며 말참견을 했다. "낭자 이외의 우리는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당신 말이 맞소. 당신들 두 사람은 마차를 몰고, 보통 사람을 위협하는 것쯤은 가능하겠소마는 쫓아 오는 무림의 고수들과 겨룬 다면 내가 두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목숨을 잃거나 얻어맞기 알맞을 것이외다." 장건과 하곤이 일제히 분통을 터뜨리며 덤비려고 하자 악소채가 가운데로 나서서 그들을 제지했다. "우리들의 거래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어서 말해 보세요." 남색 옷의 사나이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낭자와는 이야기가 잘 통하군요. 내가 이상 더 타협하기를 질질 끈다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죠. 내가 낭자를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해드릴 테니 낭자의 자당을 한 번 만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악소채의 얼굴에는 순간 슬픔이 가득 번졌다.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그 부탁은 이미 늦었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벌써 세상을 뜨셨습 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태연히 대답했다. "그 분이 아직 세상에 살아 계신다면 내가 감히 뵙겠다고 하지도 못할 것이외다." 그 말에 악소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다만 자당님의 유해가 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죽은 사람의 유해를 무엇 때문에 보려고 하십니까?" "지금은 시간이 급합니다. 다만 낭자는 그것에 대한 승낙 여부나 속히 말씀하여 주십시오." 악소채는 반문했다. "당신이 위험한 고비를 모면케 해 주신다면 당신의 말씀대로 할 것이나 만일 이 위기를 벗어나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요?" 그러나 그 사나이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점은 걱정 마시오. 나는 실패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럼 우리 어머님의 유해를 보기만 하고 그 외에 절대 아무 것 도 건드려서는 안 되요." 잠시 머뭇거 리던 남색 옷의 사나이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내가 낭자를 위급한 지경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는 것은 무수한 강호의 고수들과 원수를 맺는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하는 일인데 그 런 헐값은 너무 밑지는 것이 아닐까요?" 악소채는 남색 옷의 사나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속으로는 이 사람 의 내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말투로는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현재 강적이 사방에서 엿보는 험악한 처지에서 이 사람의 행동을 보니 분명히 절지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남색 옷의 사나이의 차가 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장사는 본시 이익을 보는 것이 목적이외다. 나의 이 얼굴이 잘 생기지 못했기 때문에 손님들의 환심을 사지 못합니다만 신용은 매 우 두텁습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속이는 법이 없습니다. 뚜렷한 간 판 하에 에누리가 없지요. 낭자의 현재의 처지는 사면초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거래에 동의만 한다면 안전지대까지 탈출할 수 있을 것이외다. 그러나 거부한다면 낭자 혼자 힘으로 이 곤경을 무슨 수로 벗어나겠습니까?" "그래요. 현재 우리들의 처지는 매우 위험해요. 그러나 최후의 경우에는 전사할 뿐입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낭자를 뒤쫓는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아마 자당께서 세상을 떠 나신 줄 모를 것이외다. 그래서 악낭자는 물론이고 자당에게도 대 항할 계산을 하고 있소이다. 낭자의 행방을 탐지하는 날에는 그 격 전의 치열함이란 상상도 못할 것이외다." 악소채는 모친의 유서에 융통성과 임기응변하는 지혜가 필요하며 너무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녀가 자기의 태도를 결정지으려는 찰나 어디선가 나지막하고 둔중하게 윙윙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악소채는 놀라서 눈을 가늘게 뜨고 먼곳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남색 옷의 사나이는 태연하게 웃었다. "낭자, 염려하지 마시오. 딴 사람이 아니라 우리편이외다." 그리고는 품에서 쇠뿔로 만든 자그마하고 묘하게 생긴 나팔을 꺼 내서 세 번 불었다. 악소채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정말 밉살스럽구나. 호각을 불면 물론 동료를 부를 수 있겠지만 근처에 적도 부르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분명히 주 위를 긴장시켜서 나를 굴복시키려는 수단일 것이다.' 호각소리가 뚝 그치자 다시 절벽 위에는 본래의 고요를 되찾았 다. 그 사나이는 돌아서서 멀리 겹겹이 둘러 선 산봉우리들을 바라 보았다. 조금도 악소채를 경계하는 빛이 없었다. 악소채는 순간 가 슴이 설레였다.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속으로 계산을 했다. '우선 이 사람의 기분을 맞추면서 시간을 끌어 보자.' 먼산을 바라 보던 남색 옷의 사나이는 돌연 가벼운 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의 형님이옵니다. 흥정은 그 분이 훨씬 잘 하시지요. 그 분과 이야기해 보십시오." 악소채는 마음에 짚히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두 사람이 머리에 떠올랐다. "노선배님들은 중주이고(中州二賈)시죠?" 그 사나이는 돌아 보지도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그렇소이다. 내가 바로 냉면철필두구(冷面鐵筆杜九)이외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핫핫! 하는 큰 웃음소리가 함께 절벽을 쏟살같이 기어 올라 오는 사람 이 있었다. 그 사람은 둥근 얼굴에 혈색이 좋았고, 배가 불룩 나오 고 복신을 신고, 푸른 명주옷을 길게 입었으며 겉에는 큰 꽃무늬가 있는 검정 비단 마고자를 걸쳤다. 그는 만면에 화기가 도는 매우 복스러운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절벽 위로 올라서자 곧 포권을 해 보였다. "제가 좀 늦게 와서 여러분을 오래 기다리게 했소이다." 두구가 가볍게 기침을 하고 그에게 말했다. "형님, 마침 잘 오셨소이다. 악낭자와 흥정을 하려는 참인데 형 님이 가격을 의논해서 결정하십시오." 형님이라고 불린 사람은 또 서슴없이 웃더니 대답했다. "그래요? 좋소. 우리들의 이익을 조금 보면 되니까......" 악소채에게 정중히 절을 하고 조용히 말했다. "저는 금산반상팔(金山盤商八)이라고 부릅니다." 악소채는 마주 응하며 공손히 말했다. "중주이고께서 함께 왕림하시는데 제가 미처 영접을 못했군요." 그녀의 상냥한 인사에 상팔은 또 유쾌하게 웃었다. "천만에 말씀이외다. 장사꾼은 돈 버는 것이 제일이지요. 두구 동생은 언제나 장부 기록만 하고 수금을 할 뿐이어서 상무를 의논 하는 것은 본시 전문이 아니외다. 혹 잘못된 점이 있으면 양해해 주십시오." 한편 소영은 정좌하고 앉아 눈을 감고 조식하고 있었는데 두구가 불어대는 호각소리에 깨어났다. 그리고 그의 괴상한 복장을 보더니 매우 불쾌한 인상을 받았는지 외면하고 보지를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나타난 상팔의 부드러운 인상에는 호감이 갔다. 상팔은 여전히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악소채에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속임수를 쓰지 않으며 신용이 두터워서 천하에 소문이 나 있지요. 낭자께서 승낙하셔서 우리의 거래가 성립되면 곧 제 말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악소채는 그에게 말했다. "두 노선배님은 온 천하를 두루 다니셔서 명성이 무림에 자자한 데 이렇게 뜻밖에 제가 오늘 뵙게 되었으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상팔은 빈틈없는 장삿속으로 온화한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 았다. "저는 신용을 생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업은 갈수록 커 지고 있지요. 수 년 동안 순풍에 돛단 배같이 잘 되어 가고 있소이 다." 악소채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머님이 생전에 중주이고는 절세의 무공을 지니고 있으나 정사 (正邪)의 사이에 끼어서 일에 모두 관여하여 놀랄만큼 돈을 우려낸 다고 말씀하셨지. 이 두 사람을 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겠지만 태 생이 장사꾼이라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관념이 매우 희박하겠구 나.'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상팔은 다시 계속 말했다. "우리 형제는 언제나 영업에 관한 상담만 하고 시비는 묻지 않습 니다. 그리고 남이 위급한 틈을 타서 억지로 우려내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악 낭자의 현재의 처지는 벌써 생사의 경계점에 당도했 소이다. 제가 방금 소식을 들었는데 좀처럼 강호에 나타나지 않는 신풍방의 방주 이외에도 지금 낭자를 죽이려고 뒤쫓는 무림 고수들 이 줄잡아 열 명쫌은 되오이다. 물론 그들은 이 삼류에 속하는 자 들이지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 형제 말고는 악낭자가 아무리 대가를 많이 지불한다 해도 이번 일에 끼어 들어서 장사를 할 사람 은 없소이다." 상팔은 침까지 튀겨가며 열변을 토했다. "낭자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무림의 고수들이 포위한 공세를 뚫기 어려을 것이외다. 만약 낭자께서 손상을 입게 된다면 자당의 유해를 보호할 기력이 어디 있겠소이까? 그러니 현재 긴박한 상태 를 참작하셔서 이 거래는 꼭 성립시키도록 하십시오." 악소채는 그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역시 이치에 어긋난 말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팎을 모두 좋게 할 계획이란 참으로 짜내기 어려웠다. "낭자가 위기를 모면한 후 우리는 자당의 몸에 지닌 유물을 한 가지 얻고자 합니다. 만일 낭자의 몸이 적에게 상하면 자당의 유해 도 보전하기 어렵소이다." 악소채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어머님의 유물을 남에게 경솔하게 줄 수는 없습니다. 두 노선배 님의 호의는 참으로 감사합니다만...... " "하늘을 속여서 우려낸 것은 땅에서 토해 내야 하는 법. 영업을 못할 지언정 인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 형제는 절 대로 억지 장사는 안합니다. 그럼 이로써 작별이외다." 그는 돌아서서 두구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동생 갑시다! 이 거래는 깨졌소." 그러더니 그는 앞장서서 절벽 밑으로 달려 내려갔다. 곧 두구도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신법은 놀랍도록 빠르고 교묘했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절벽 사이를 평지처럼 달려 내려서 눈깜짝할 사이에 절벽 아래로 내려섰다. 하곤이 두 사람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 보면서 길게 한숨 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중주이고는 과연 소문대로구나." 장건이 차갑게 냉소했다. "우리 무림 사람들은 가난과 천대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자연을 벗삼고 인간의 시비를 상관치 않는데 저 두 사람이 재물만을 쫓아 다닌다면 무공이 제아무리 높다한들 존경을 받기는 어려울 거야." 말하는 사이에 벌써 그들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악소채는 그들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라 보면서 앞으로 곧 전개될 참혹한 악투를 생각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탄식했다. 소영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굳은 안색이 악소채에게 무한한 신뢰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죄 없는 어린 아이가 계속되는 여독에 시달리고, 생사를 예측하기 어 려운 점을 생각하면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다. 악소채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 정하게 말을 걸었다. "동생, 미안해요. 나 때문에 고생할 뿐만 아니라 생사를 예측하 기도 어려운 형국이나......" 이 말에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누나의 무공은 고강하니까 그 놈들이 절대로 맞서지 못할 거예요. 누나와 함께 있으면 천군만마 속에 빠지고 도산검림 속에 포위된다 해도 무섭지 않아요." "내가 적의 손에 죽거나 상해서 동생을 보호할 수 없게 된다면 동생도 해칠 텐데?" 여전히 소영의 태도는 태연했다. "절대로 그릴 리 없어요. 만일 누나가 죽으면 나도 혼자 살기를 원치 않아요." 그는 어려서 잡학(雜學)을 배우면서 사람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 를 많이 들었을 뿐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악소채는 몹시 격동되어 가슴이 뭉클했다, 자기가 소영을 지킬 수 없다면 같이 죽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자 가슴에 무거운 납덩어리가 든 것처럼 무거웠다. 그 때 갑자기 눈같이 희고 튼튼한 한 쌍의 비둘기가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악소채는 재빨리 돌을 집어 들어 번개처럼 던 졌다. 그 돌팔매는 적중해 비둘기 한 마리가 공중에서 떨어지고 나 머지 한마리는 잽싸게 날개를 접고 산골짜기로 사라졌다. 험악한 대전이 눈앞에 임박했음을 알아차린 듯, 하곤이 악소채를 돌아 보며 말했다. "낭자, 우리들의 행방이 탄로났소이다. 앉아서 적을 기다리느니 보다는 전력을 다해서 일찌감치 포위를 뚫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 다." 그러나 악소채는 머리를 저었다. "너무 늦었어요. 내가 적을 잘못 파악해 위기에 빠지게 됐군요." 묵묵히 앉아 있던 장건도 한 마디 했다. "낭자, 여기는 산봉우리가 연달아 있으니 몸을 숨길 곳이 많을 것입니다. 일찍 이곳을 떠나 숨을 곳을 찾는 것이 낫겠는데요." 돌연 소영은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무림의 고수들이 왜 우리를 기를 쓰고 쫓아오는 것이죠?" "바로 우리 어머님 때문이지." "아이구 참! 운이모는 벌써 세상을 떠났는데 왜 그러죠? 가령 생 전에 운이모가 그 사람들과 원수진 일이 있다손 치더라도 죽으면 모든 것이 허사인데 어찌 이토록 악착같이 쫓아 올까요?" 악소채는 자기 때문에 소영을 고생시킨다 생각하니 자책감이 일 었다. 이 부호의 집에서 자란 죄없는 소년이 벌써 강호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는 것에 죄스러운 마음이 생겼 다. 그녀는 미소를 띠며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은 강호의 흉계를 잘 몰라요. 이들 중에서 내 어머님과 생 전의 원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금도 은원이 없는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왜 우리들을 이렇게 괴롭히며 쫓아 올까요?" "그들은 어머님의 유물을 빼앗으려고 그러는 것이에요." 그러나 소영은 잘 이해가 안가는 듯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이었 다. 악소채는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로 소영을 안고는 옆으로 몇 자 건너 뛰더니 그를 삐죽이 나온 바위 뒤에 내려 놓았다. "동생, 조심해요. 꼼짝 말고 이곳에 있어야 돼요." 그녀는 몸을 날려 절벽가로 갔다. 이 때 장건, 하곤 두 사람도 총총히 일어나서 제각기 칼을 뽑아 들고 절벽가로 달려 갔다. 악소채의 기합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 왔 다. 소영은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바라 보니 누군가가 절벽 밑으 로 굴러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악소채는 장검을 뽑아 들고 절벽가로 우뚝 서 있었으며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소영은 문득 눈길이 절벽 있는 곳으로 갔다. 등에 칼을 멘 남자가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커다란 새처럼 공중에서 자기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 깜 짝 놀랐다. 입도 떼지 못하고 있는 소영의 눈에 빛이 번쩍 하더니 칼이 번뜩였다. 소영이 볼 사이도 없이 그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낭떠러지로 굴 러 떨어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악소채가 장검을 든 채 옆에 서 있었는데 그 장검에는 희미하게 핏자국이 보였다. "누님의 동작은 비호 같군요, 그 사람은?" "다시 오지 못할 거예요. 아아! 오늘의 혈전은 이미 시작됐군요. 내가 죽이는 수만큼 적은 줄어들지요." 그때 저쪽에서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장건과 하곤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적들과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품 속에서 금침을 한 웅큼 꺼내 들더니 소영을 보고 웃으 며 말했다. "동생, 내 금침 수법이 어떤가 구경해 봐요." 그녀는 솜씨 좋게 힘껏 내던졌다. 그러자 장건, 하곤과 싸우고 있던 두 사람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금침 두 개씩을 맞고 손발이 마비되어 한 사람은 장건의 발길에 채여 굴러 떨어졌고 또 한 사람 은 하곤의 판관필에 사혈을 찍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누나! 참으로 신기하군요. 정말 놀라운데요." 소영의 칭찬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큰 냉소가 들려 왔다. "그까짓 금침 수법이 무엇이 신기하냐? 이 노부의 자모신담(字母 神膽)의 맛을 좀 볼래?" 악소채가 소영의 몸을 막으며 목소리가 난 쪽을 주시했다. 절벽가에 몸집이 장대하고 흰 수염을 날리는 어떤 노인이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등에는 청강(靑鋼)으로 된 일월륜(日月胤)을 한 쌍 짊어지고 있었으며, 두 손에는 오리알만한 철담(鐵膽)을 한 개 씩 들고 있었다. 그의 풍채는 매우 웅장했으며 위엄이 얼굴에 가득했다. 장건이 그를 보고 소리쳤다. "위력 있고 명성이 높은 성수청담 초곤산(聖手靑膽 楚崑山), 그 대가 강호의 조무라기들처럼 남의 위기나 이용할 줄은 정말 몰랐 다." 초곤산은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느릿느 릿 입을 열었다. "노부가 손질을 안해도 여러분은 이번 위기를 피하기 어렵소. 남 에게 시킬 바에야 내가 손을 쓰는 편이......" 그는 곧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는지 변명하듯 말했다. "더구나 우리들의 목적으로 삼는 그 물건은 매우 중요하오. 만일 그것이 타인의 수중에 들어 간다면 강호를 해치는 우환이 되지 않 겠소?" 악소채는 얼음장같은 표정으로 차디차게 내뱉았다. "초대협의 삼십삼초 용호윤법과 자모철담이 중원 무림의 추앙을 받는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오늘 이곳에서 뵙게 되 었군요." 그녀는 미간에 살기를 잔뜩 띠고 곧 달려들 것만 같은 태도였다. 아름다운 악소채의 얼굴에는 강적의 잇달은 압박에 분통이 터져 서 끝까지 싸워 보려는 결의가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초곤산은 몇 번 마른 기침을 하더니 천천히 철담을 거두어 넣고 악소채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 그녀는 잔뜩 노기 띤 표정으로 눈썹을 추켜 올리고 검을 겨누고 있었으나 초조한 빛이나 들뜬 기운이 없는 차분한 태도였다. 분명 히 상승 검술의 전진을 지니고 있었다. 초곤산은 자기 일생의 협명 을 생각했다. 이 어린 여자와 겨루어 이겼다 하더라도 사내답지 못하고 또한 반대로 진다면 평생의 명예가 수포로 돌아간다. 그는 마음을 정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낭자는 악운고와 어떻게......?" 악소채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어머님이오." 그러자 초곤산은 태도가 바뀌었다. "실례했소이다. 악낭자이었구려. 노부는 자당과 몇 번 만난 인연 이 있소이다." 악소채는 그가 장건의 말을 듣고 뉘우치는 자세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욕심은 있으나 역시 대협다운 마음을 잃지 않고 있구 나.' 초곤산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더니 묻지도 않는 말에 대답하였 다. "노부는 자당의 검법에 대해서 항상 탄복하고 있었소! 한 번도 가르침을 받지 못했으니 참으로 유감이오." "노 선배님의 소원은 영원히 실현되지 못하겠군요. 나의 어머님 은 벌써 세상을 뜨셨으니까요." 초곤산은 호탕하게 웃더니 손을 저었다. "낭자는 다른 사람은 속여도 노부는 속이기 어려울 것이오. 노부 는 자당을 뵙고 검법 몇 수만을 교수받으면 그만이니 속이지 마시 오." 악소채는 비로소 그의 속셈을 깨달았다. '이잔 나를 뒤쫓아온 본심이 변하지 않았고, 그저 자기의 신분을 고려해서 나하고 직접 손을 쓰지 않으려는 것 뿐이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서 냉랭하게 말했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신 일은 노선배가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요. 악가문의 검법을 보고 싶으면 내가 상대해 드릴 수 있어요." 초곤산은 또 다시 주저하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잘라 말했다. "노부가 이런 나에게 낭자와 손을 쓰고 싶지는 않소." 악소채는 지금 자신의 위치가 확실히 사면초가 격이 되어버리고 만 것을 알았다. 도망칠 가망도 없다면 차라리 힘껏 싸워서 한 놈 이라고 더 거꾸러뜨리면 가슴에 분이라도 풀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했다. 그녀는 넉 자 여덟 치의 장검을 번쩍 들어 검광을 일으키며 외쳤 다. "노선배님은 정말 나하고 겨루고 싶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노부가 이 나이에 낭자와 겨룬다면 강호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 겠소? 이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악소채는 야무지게 쏘아붙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오신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 "천하에서 자당을 해칠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을 것이 오. 그래서 노부는 아직 자당이 살아 계시다고 확신하는 것이오." 악소채는 다시 암암리에 궁리를 했다. '이 사람은 정말 완고하고 용렬하여 다루기가 힘들겠구나.' 그 때 또다시 하곤의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쌍필을 휘두르며 적에게 달려 가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청색 경장을 한 두 사나이가 넓적한 귀두도를 들고 절벽을 기어 올라 왔다. 장건이 하곤의 뒤를 쫓아 달려 갔다. 각각 두 사람은 맞붙어서 싸우기 시작하였다. 쌍방은 처음부터 결사적인 초식을 전개했다. 악소채는 조용히 새로운 적들의 무공을 눈여겨 보았다. 적이라고 맞설 가치도 없을 정도의 무공이었으나 얼른 해치우고 싶었다. 초곤산은 악소채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 다. "적들은 모두 신풍방의 졸개들이오. 낭자가 저들에게 손을 쓸 마 음이 있다면 노부는 결코 그들을 돕지 않겠소이다." 악소채는 초곤산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날쌔 게 검을 휘두르며 그 청의 경장의 사나이들에게 달려들었다. 한편 소영은 가볍게 걸음을 옮겨 초곤산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는 손을 모아 공손히 절을 하고 입을 열었다. "노백부님." 초곤산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명스럽게 물었다. "꼬마는 또 무슨 일인가?" 소영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는 태연한 얼굴로 바짝 다가갔다. "어째서 노백부님은 우리 누나의 말을 믿지 않으시죠?" 초곤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 누나가 누구인가?" 소영이 악소채를 손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분이 우리 누나예요. 운 이모는 정말 돌아가셨어요. 왜 그 말을 안 믿으세요?" 초곤산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소영에게 말했다. "악 낭자는 다른 사람을 속여도 이 노부를 속이진 못한다. 나는 강호에 수십 년 간 몸을 담고 참으로 많은 고수들을 만났지. 일윌 청강륜 한 쌍으로 악도를 죽인 것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녹림 에서는 노부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도망간단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겨우 열 두어 살밖에 안 된 소년임을 깨닫고 가벼운 탄식을 했다. "아아! 무림의 대사를 너에게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나쁜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까 백부님은 아주 좋은 사람이겠네 요?" 초곤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양자강 남북 무림에서 노부의 이름을 부를 때 초대협 이라고 존칭을 붙이지 않는 사람이 없단다." 소영은 큰 눈을 반짝이며 다그쳐 물었다. "노백부님은 그렇게 좋은 사람인데 어째서 우리 누나를 괴롭히세 요?" 초곤산은 서슴없이 말하는 소영의 말에 흠칫하며 어물거렸다. "그것은... 응, 그것은 말야....." 소영은 그가 매우 거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뻐했 다. '이 노인은 정말 재미있구나. 풍채도 당당하고, 아무리 봐도 나 쁜 사람 같지는 않으니 잘 좀 사귀어야겠다!' 소영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뵙기엔 노백부님은 나쁜 사람 같지 않아요." "그래, 노부의 협명은 천하에 퍼져 있지. 언제나 곤경에 빠진 사 람을 도와 주니까 나쁜 사람은 절대 아니란다." 소영은 재빨리 그 틈을 타서 물었다. "그런데 노백부님은 왜 우리 누나의 물건을 뺏으려고 했지요?" 소영의 물음에 초곤산은 난처한 표정이 되어 공연히 수염만 손으 로 만지작 거리며 겨우 이유를 둘러댔다. "그건 그 물건이 세상과 관련되니까 그렇단다. 그것이 나쁜 녹림 인물의 수중에라도 들어 간다면 천하에 해독을 너무 크게 끼칠 우 려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노부가 꼭 뺏어야 한단다." "그렇다면 우리 누나는 나쁜 사람인가요?" 그는 소영을 귀여운 듯이 바라 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 악낭자는 강호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니까 좋다 나쁘다는 평 은 아직 이르지만 그러나 그녀의 어머님 악운고는 존경할 만한 사 람이었다." 소영은 완고하게 잘라 말했다. "우리 운이모님이 좋은 사람이니까 저 누나도 좋은 사람일 거예 요." "네 말이 맞다. 좋은 부모에게 나쁜 자식이 없는 법이야. 악운고 가 무림에서 명성이 쟁쟁했으니까 그녀의 딸도 물론 나쁠 리가 없 지." "맞아요. 그럼 노백부님. 우리 누나가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그 물건을 누나가 보관해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초곤산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한동안 소영을 바라 보더니 다시 고집을 세웠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진귀한 물건을 끝까지 보관할 수 있겠느냐?" "노백부님, 도대체 무슨 물건인데 누나가 그렇게 많은 고생을 겪 으면서 피해다녀야 하며 또한 그 많은 사람들이 누나의 뒤를 쫓나 요? 아아, 전에 저의 아버님은 구슬을 품은 것이 죄라고 하시며 진 귀한 보배를 지니게 되면 화를 면할 수 없다고 제게 일러 주셨어 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 말씀이 이해가 되군요!" 초곤산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우리 무림인들은 본시 재물을 경멸한단다. 악낭자가 간직한 것 이 황금이나 구슬이라면 노부가 이치럼 쫓아올 리 만무하며, 신풍 방같은 흑도 인물들도 그렇게 악착같이 뒤쫓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청의 사나이 하나가 악소채의 장검 에 가슴을 꿰뚫려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절벽 밑으로 굴러떨어졌 다. 그것을 힐끗 바라 보고 소영은 다시 화제를 돌렸다. "황금이나 구슬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입니까?" 초곤산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다. "그것은 보통 진귀한 물건이 아니다. 천하의 어떤 재물과도 비길 수가 없지." "글쎄 그것이 도대체 무어냐 말입니다." "금궁(金宮)의 열쇠." "금궁의 열쇠? 금궁의 열쇠......" "그렇다. 금궁의 열쇠는 천하 무림 인물들이 서로 다투어 가며 한결같이 차지하고 싶어 하는 물건이란다." "그 금궁의 열쇠는 어떤 것인가요?" "그것은 말이다. 열쇠인데......" 그러자 소영이 흥이 깨진 듯이 중얼거렸다. "에이! 나는 또 무어라고... 겨우 열쇠였군요. 그게 뭐 대단한가 요? 그까짓 열쇠라면 얼마든지 있는데......" 초곤산은 소영은 철없는 태도를 귀여운 듯이 바라 보며 웃었다. "물론 열쇠이긴 하지만 그것이 수십 년 동안 감추어졌던 무림의 비밀을 열 수 있는 열쇠이므로 보통 열쇠와는 다르지. 이때 갑자기 등뒤에서 악소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동생! 빨리 와요. 길 떠나요." 소영이 자리를 털면서 초곤산에게 말했다. "노백부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우리 누나는 절대로 백부님 을 속이지 않습니다. 정말 운 이모는 죽었어요. 부디 믿어 주세요." 소영은 휙 돌아서서 악소채에게로 달려 갔다. 악소채는 몸을 날려 소영의 옆으로 내려서며 물었다. "동생, 저 사람이 동생을 해치지 않았나요?" "아니예요! 우리는 참 재미있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자 악소채는 가볍게 한숨지며 말했다. "저 초대협은 신분이 매우 높으시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시 니까... 그러나 강호는 험악해서 언제 어디서 속임수를 쓸지 몰라 요. 그러니 다음부터는 함부로 남에게 접근해서는 안 돼요." 초곤산은 악소채가 소영에게 해를 입지 않았는가 물어볼 때 순간 적으로 격분했지만 악소채가 한편으론 자기를 칭찬하기에 화가 다 시 풀렸다. 그는 웃는 얼굴로 악소채에게 말했다. "과연 악낭자의 말이 옳소. 노부가 강호에서의 명예를 생각하더 라도 이 천진난만한 소년를 어찌 상하게 하겠소?" 악소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성격은 몹시 완고하여 자기의 협명과 지위에 구애되 어 체면 때문에 나하고 맞서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이 사람의 이 러한 점을 잘 이용해서 강적을 하나 덜어 보자.' 이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초곤산을 향해 상냥한 목소리로 그를 추켜올렸다. "우리 어머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노선배님이 저와 겨루기를 사양 하시고 큰 아량으로 저를 놓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을 마치며 악소채는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초곤산은 그녀가 이처럼 자기를 믿는 태도를 보이니 더 이상 어 찌 할 도리가 없었다. "천, 천만에... " "저는 이만 작별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악소채는 소영을 데리고 암암리에 내공을 운행하여 재빨리 산을 내려 갔다. 초곤산은 멍청히 서서 바라 보다가 네 사람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문득 제정신이 들었다. 그는 그 금궁의 열쇠를 몇 마디의 상냥한 말과 공손한 태도로 인 해 경솔하게 포기할 수 없다고 깨닫고 허겁지겁 뒤를 쫓기 시작했 다. 악소채는 소영을 대동하고 쏜살같이 달리다가 십리는 족히 왔 을 무렵에야 비로소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장건과 하곤을 돌아 보았다. 여전히 따라오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이마에는 흥건히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악소채의 곁으로 따라온 장건은 소매로 이마의 땀을 쓱쓱 문지르 며 물었다. "낭자,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악소채는 그들을 향해 대답했다. "우리들의 처지는 매우 위험해요. 지금 당장은 형산(衡山)의 심 연곡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요." "주모(主母)님의 유해를 어찌 돌보지 않을 수 있소이까? 저희들 이 생명을 걸고라도 주모님의 유해를 호송하겠소이다." 그 말에 악소채는 머리를 흔들었다. "첫째는 적의 시선이 모두 내 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 째는 그 곳이 매우 안전하거든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쫓아오는 강적들을 어떻게 벗어나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악소채는 지체하지 않고 방향을 잡은 다음 소영을 데리고 곧장 서남쪽으로 갔다. 그들 일행은 험악하고 협소한 골짜기를 택해서 가급적 자신들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다행히 반나절을 걷는 동안 길을 막거나 쫓아 오는 무리들이 없었다. 짧은 겨울 해가 기울어 가면서 눈덮인 산봉우리는 서서히 저녁 노을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는데 그 광경은 신비한 아름다움 그 자 체였다. 그런데 갑자기 고요하고 아름다운 심산에 쉬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악소채가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전벽의 바위 밑으로 몸을 숨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의 세력이 이 대산의 산봉우리에 두루 퍼져 있는 것 같군요. 신풍방에는 영구도 있으니까 낮에 적의 이목을 피하는 것은 어려울 듯하니 방향을 미리 정해 두고 밤이 된 다음에 다시 길을 재촉하기 로 하지요." 사실 그들은 반나절이나 험한 골짜기를 달려 오다시피 했기에 내 공이 정묘한 악소채를 제외하고는 모두 몹시 피곤해서 휴식이 필요 했다. 소영은 악소채에게 반은 안기고 반은 끌려서 길을 걸었지만 살을 에이는 듯한 매서운 바람에 몸이 얼어서 감각이 없었다. 악소채는 자신의 내공으로 그를 도와서 기혈의 순환을 촉진시켜 온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영구는 다른 곳으로 분명 적들을 따돌린 모양이었다. 소영은 악소채의 도움으로 얼었던 몸이 점점 따뜻해졌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누나, 그 금궁의 열쇠는 누나가 지녔어요?" 악소채는 흠칫 놀라더니 곧 머리를 저어 부인했다. "아니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동생, 춥지 않아요?" "아뇨, 춥지 않아요! 그런데 누나, 그 금궁의 열쇠는 도대체 어 떤 보물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뺏으려는 걸까요?" "그건 과거에 무림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에요. 수십 년간 무 림의 많은 고수들은 그 금궁의 열쇠를 찾고 있었지요. 그 열쇠는 절대적인 비밀과 관계되기 때문이에요." 소영이 넋을 잃고 듣다가 갑자기 졸랐다. "누나, 그 옛날 이야기를 해줄 수 없어요?" 악소채는 가만히 탄식하였다. "이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모 든 것은 사실이에요. 이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간 사람들이 많 아요. 소림(小林), 무당(武當), 아미(峨嵋), 화산(華山) 등 사대문 파(四大門派)조차도 그 와중에 끌려들었지요. 정확한 연대는 나도 잘 모르지만 대략 사십 년 전쯤이겠지. 그때 무림들 사이에서 자리 싸움이 치열했는데 서로 무림의 패권을 경쟁한 결과 기인 열 명이 두각을 나타냈대요. 이 열 사람의 기인들은 모두 재주가 비상해서 자기들이 각기 연마한 무공은 다르지만 서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어서 삼 년마다 모여서 한 번씩 겨루어 보았지만 십팔 년이 지났 음에도 여전히 승부를 가릴 수 없었다는군요." 한창 이야기가 재미있는 대목으로 들어가다가 악소채는 갑자기 말을 뚝 끊었다. 소영은 부지중에 마음이 다급해져 바싹 다가앉으 며 재촉했다. "누나,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악소채는 처량하게 웃더니 다시 차분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들은 승부를 가릴 수 없게 되자 무공으로는 남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가만히 속삭였다. "누가 왔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써 개짖는 소리와 함께 그들을 향해 송 아지만한 큰 개 두 마리가 달려 오고 있었다. 그 검은 개들은 악소채와 한 길쯤 떨어진 곳까지 달려 오더니 우 뚝 멈추었다. 동시에 곧 커다란 너털웃음소리가 들리며 그 개의 뒤 를 따라 상팔이 뚱뚱한 배를 안고 나타났다. 상팔이 포권하고 공손히 절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찮아도 낭자를 만나려고 하던 참인데 여기서 만났소이다그 려." 악소채의 뒤에서 장건과 하곤이 일제히 일어서서 칼을 뽑아 들고 대적할 태세를 갖추었다. 악소채가 얼음장같이 차갑게 대꾸했다. "나를 만나서 무슨 교훈을 주시려고요?" 그러자 상팔은 느물느물하게 대답했다. "우리야 장사꾼들이니까 낭자를 만나 거래를 하려는 것이지요." "호의는 고맙지만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나와의 흥정은 포기하시는게 좋을 거예요." 악소채의 차가운 태도에도 그는 여전히 웃었다. "나는 한번 눈독들인 이익은 절대로 놓치지 않소이다." 이 말에 악소채는 격분하여 안색이 싹 변했다. "뭐라고요? 당신들은 무공의 강함을 믿고 손을 쓰겠다는 말씀이 오?" 상팔은 두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장사에는 신용이 가장 중요하외다. 만일 강하다고 강탈을 한다 면 중주이고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지 않겠소이까?" 악소채는 냉랭하게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어서 가세요. 제가 노선배님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함 을 용서하세요." 상팔은 끄떡도 않고 가볍게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다시 늘어붙 었다. "나는 단지 서너 마디만 하고 돌아가겠소이다. 신풍방을 위시하 여 중원과 강남일대의 무림 고수 외에도 소림 무당의 고수들이 꼬 리를 물고 뒤쫓아 온다는 소식이외다. 현재의 상태로 보아서는 적 은 점점 늘어날 뿐 줄어들지는 않소이다. 만일 낭자가 이 거래의 성립을 승낙하지 않으신다면 나중에 후회하셔도 소용이 없을 것이 외다." 악소채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했다. "승낙할 수 없어요." 상팔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우리 장사꾼은 거래를 강요하지 않소이다. 그럼 나는 이만...." 큰 개 두 마리는 컹컹하고 사납게 짖더니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갔다. 상팔도 그 개들의 뒤를 따라 나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악소채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뚫어지게 그 쪽을 바라 보고 있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중주이고는 영견(靈犬)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그들의 추 적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겠구나..." 장건이 입을 열었다. "낭자는 과히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주이고는 낭자가 끝까지 그 들에게 거절하신다면 그 두 사람은 절대로 억지로 뺏으려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악소채는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저들의 태도로 봐서 그들은 꼭 얻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 어요. 가령 억지를 쓰지는 않는다 해도 우리를 궁지에 몰아 넣은 다음 실속을 차릴 수도 있어요." 소영이 느린 걸음으로 앞으로 나서며 악소채에게 물었다. "우리의 뒤를 악착같이 쫓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 금궁의 열쇠 때문인가요?" 악소채는 뜻밖에도 노한 소리로 잘라 말했다. "그런 일에 쓸데 없이 참견하지 말아요!" 소영은 그녀의 쌀쌀맞은 태도에 흠칫하며 무안하여 얼굴을 붉혔 다. "누나, 노여워 마세요. 다음부터는 묻지 않을 테니까요." 악소채는 그를 돌아 보았다. 그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으며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그만 자기의 실수를 깊이 뉘우치며 손을 천천히 내밀어 소영을 가만히 안아 주었다. "누나가 마음이 초조해서 말이 좀 거칠었어요. 그러니 마음에 두 지 말아요. 동생이 묻는 그 금궁의 열쇠가 어디 있는지 나도 몰라 요." 소영은 부지중에 또 무엇인가 물으려고 하다가 곧 입을 다물었 다. 악소채는 그의 심중을 알고 방긋 웃었다. "아마 어머님에게 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은 정말 나빠요. 똑똑히 알지도 못하고 그 금궁의 열 쇠를 누나가 지니고 있는 줄 오해하고 있으니까요." "이제 그만 출발해요!" 그녀는 이미 강적의 추적을 모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가슴을 죄며 숨어 다니는 것보다는 차라리 싸우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녀는 소영의 손을 꼭 잡고 가슴을 펴고 앞으로 전진했다. 비둘 기 몇 마리가 날개 소리도 요란하게 그들의 머리 위를 스치고 날아 갔다. 장건과 하곤이 머리 위를 바라 보며 무어라고 소리쳤으나 악 소채는 들은 척도 않고 담담히 걷기만 했다. 5. 끊임없는 추격(追擊) 악소채, 소영, 장건, 하곤 네 사람이 막 산모퉁이를 돌았을 때 돌연 그들의 앞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세 명의 장한이 나타났다. 그들 세 사람은 커다란 칼을 뽑아 들고 마치 이정표처럼 길 가운데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악소채의 눈에는 대뜸 살기가 돌며 입가에는 쓴웃음이 스쳤다. 곧 소영이를 내려 놓고, 위풍당당한 태도로 소리쳤다. "비켜라!" 뜻밖에도 세 명의 장한들이 길을 비켜주는가 싶었는데 악소채가 그들의 가운데로 들어 서자 일제히 날카롭고 재빠르게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세 장한의 공격엔 다분히 살기가 감돌았다. 악소채는 재빨리 신 형을 날려 그들의 금검이 몸에 닿으려는 찰나 왼손을 휘둘러 장한 들의 혈도를 찔렀다. 세 장한들은 차례로 검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쓰러지면서 아픈 팔을 움켜 쥐고 몸부림쳤다. 악소채는 그들의 행동에는 아랑 곳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일행에게 길을 재촉했다. 소영은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들어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하 였다. '나는 언제쯤 누나처럼 훌륭한 무공을 지닐 수 있을까?' 소영은 악소채가 옆에다 끼고 길을 달리는 바람에 힘든 줄도 몰 랐다. 이렇게 얼마 동안 산길을 달렸다. 어느덧 악소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조금씩 맺혔고 하늘에는 등 근 달이 둥실 떠올랐다.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목탁 소리가 처량하게 밤공기를 가르며 들 려 왔다. "딱, 딱, 따르르 딱..." 악소채는 눈을 빛내며 신형을 날려 목탁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 았다. 산골짜기를 따라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가사를 입은 한 승려 가 염불을 외며 걸어 오고 있었다. 승려는 오른손엔 선장(禪杖)을 들고 왼손을 가슴께로 올리며 악소채 일행을 향하여 크게 몸을 굽 혔다. "여시주(女施主)는 분명 악운고시겠지요?" 악소채는 자못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저의 돌아가신 어머님의 존함이에요. 그런데 대사께서는..." 승려는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소승은 강호에 발 디딜 기회가 적어 미처 낭자를 알아보지 못하 였소. 널리 용서하시오." 악소채는 더욱 어리둥절하여 내심 경계를 하며 말했다. "그런 사소한 일로 탓할 것은 없습니다. 대사께서는 어찌하여 우 리들의 길을 묶어 놓으십니까?" 중은 잠시 불호를 외우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승은 숭산 소림에 있는 본원(本院)의 지광(智光)이라고 합니 다. 명령을 받고 낭자의 자당을 만나 뵈려던 길이외다." 악소채는 버들잎 같은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나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무슨 할 말이 있으 면 나에게 해주세요." 지광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불호를 몇 번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소승이 미처 찾아 뵙기도 전에... 낭자의 자당 께서는 항상 금궁지약을 지니고 계셨는데 그것을 낭자는 알고 계신 지요?" 승려의 질문에 악소채의 표정은 즉시 냉랭하게 변하였다. "난 몰라요." 지광대사는 악소채를 빤히 쳐다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금궁의 열쇠는 우리 절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소이다. 그것 은 나에게도 매우 중요하여 만약 여시주가 그것을 고의로 숨기려거 나 거짓말을 한다면 해가 될 뿐이외다." 지광대사의 은근한 위협에 악소채는 빈정거리는 투로 대답하였 다. "호호호... 소림사는 무림에서 인격과 무예가 절예하다고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대사께서는 그것을 믿고 나를 누르려 하시는 것인 가요?" 지광대사는 그녀의 말에 대답을 못하였다. '이 계집은 정말 대담하고 말도 잘 지껄이는구나. 그러나 나는 소림사 달마원의 팔대 고수 중의 하나가 아닌가? 어찌 한낱 계집애 에게 손을 쓸 수 있으랴. 더욱이 금궁의 열쇠가 저 계집의 수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덤벼들 수도 없지 않은가.' 지광대사는 한동안 말 없이 악소채와 그 일행을 번갈아 쳐다 보 았다. 소림파는 한때 무림에서 그 이름이 유명무실할만큼 실세를 잃은 적이 있었는데 달마대사가 문파를 개창(開創)한 후 그가 무너지는 소림파의 기틀을 바로 잡고, 또다시 무림의 군주가 되어 천하를 호 령하였다. 달마대사는 꾸준하게 노력하여 근래에 와서 팔대 고수를 만들어 냈으며 그로 인하여 소림사의 위용은 차츰차츰 번창하고 옛날과 같 은 커다란 세력으로 굳어 가고 있음을 악소채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속으로 손익을 계산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저 늙은이와 싸운다면 소림사와 대항하는 격이 될 것이니 오늘은 그냥 이 자리를 피해야 되겠구나.'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재보느라고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마침 내 지광대사가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무공을 써서 낭자를 쓰러뜨리고 금궁의 열쇠를 빼 앗는다면 강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므로 낭자와 크게 다투지는 않 겠소이다. 그러나 이 금궁의 열쇠는 본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 건이어서 소승이 특별한 명을 받고 이렇게 내려온 것이라오. 그러 니 내가 낭자의 몇 마디 말만 듣고 어찌 그대로 돌아 갈 수 있겠 소?" 악소채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하였다.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나는 갈 길이 바쁜 몸이에요." 지광대사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낭자의 지당께서 돌아가셨다 함은 강호에서는 금시초문이오. 그 래서 소승은 한 번 낭자의 자당을 직접 만나 뵈었으면 하오이다." 악소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거짓말을 했을까봐 그러는 거예요?" "아니, 아니오이다. 다만, 자당의 시신이라도 한 번 보여 주시겠 소?" 지광대사는 끈덕지게 악소채를 괴롭혔다. 악소채의 가슴 속에서 는 불같은 격정이 용솟음쳤다. 그녀는 날카롭게 지광대사를 쏘아보 면서 입을 열었다. "모친을 이미 입관하였으니 대사의 청은 들어 줄 수가 없으니 섭 섭하게 생각지 마세요." 지광대사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단념한 듯 입을 열었다. "소림사의 규칙은 매우 엄하다오. 그래서 내가 낭자의 말대로 돌 아 간다면 아마 나를 의심할 것이오. 수고스럽겠지만 여시주께서 저와 함께 숭산으로 올라 가셨으면 합니다." 악소채는 깜짝 놀랐다. "내가 만약 가지 않겠다면?" 그녀의 대답에 지광대사는 선뜻 신형을 움직여 뒤로 몇 발 물러 서더니 오른손에 들고 있던 선장을 쳐들어 보였다. "그럼 낭자는 무공을 써서 나의 이 선장을 이겨야 되오. 만약 낭 자가 이긴다면 난 깨끗하게 물러나겠소이다." 악소채는 입술을 깨물며 검을 움켜 쥐고 지광대사에게 외쳤다. "대사는 명사의 고승답게 약속대로 시행하셔야 합니다." 지광대사는 씁쓸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출가인은 헛된 말을 하지 않소이다. 여시주의 검이 선장을 벤다 면 틀림없이 길을 비켜 드리겠소." 그녀는 대사의 선장에 차가운 일별을 던지며 동시에 검을 휘둘러 두병범월(斗柄犯月)의 초식으로써 선장을 비껴쳤다. 그녀의 마음은 매우 급하고 초조하였다. 그녀가 펼친 두병범월은 무서운 힘으로 지광대사를 압도할 듯했으나 역시 마음에 허점이 있 어 빗나가고 말았다. 지광대사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피하며 선장을 곧장 올려 쳐 악 소채의 장검을 정면으로 막아 내고는 다시 방어자세를 취했다. 악 소채는 그의 저의를 알았다. '저 늙은이가 위신때문에 방어만 하는구나.' 그녀는 장검으로 연속 삼장을 쳐냈다. 지광대사는 악소채의 연속 적인 공격을 교묘하게 피하며 내심 크게 놀라 신형을 주의하여 움 직였다. '악가의 검술이 강호에서 단연 으뜸이라는 것이 과연 맞군! 이 계집은 아직 어린 나이지만 벌써 검술의 진전(眞傳)을 터득하고 있 는 것으로 보아 무시할 상대가 아니다.' 그는 악소채의 검술을 내심 두려워하며 수세에서 갑자기 무서운 공세로 바꾸어 선장을 맹렬히 휘둘렀다. 순간 허공을 가르는 날카 로운 소리가 주위를 뒤흔들었다. "쨍! 쨍!" 악소채의 장검과 지광대사의 선장은 가끔 요란하게 부딪쳐 사방 으로 불꽃이 튀었다. 악소채는 마치 제비처럼 신형을 날리며 장검 을 휘둘렀지만 지광대사의 선장에 쫓기어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지광대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선장을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사람 주위는 온통 장영속에 싸여 보이는 것이라고는 달빛에 가끔 번쩍 빛을 발하는 검과 희고 검은 그림자뿐이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려 왔다. "얏!" "엇?" 지광대사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눈을 감고 입 속으로 뇌었다. '이제 끝났구나. 내가 너무 심하게 어린 계집을 다루었나 보군, 저 계 집은 아마 내 선장에 크게 다쳤을 것이다.' 이때 지광대사의 귓전에 맑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대사! 비켜 주시오." 지광대사는 깜짝 놀라며 눈을 치켜뜨고 상대를 보았다. 상대는 바로 자신의 선장에 맞아 크게 상처를 입었으리라 생각하던 악소채 였다. 소영은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 두 사람에게서 조금의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더구나 두 사람이 모두 웃고 있어서 승부가 어 떻게 된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광대사가 몇 발 뒤로 물러 서며 예를 올리는 것이 아닌 가! "악가의 검술은 과연 성명(盛名)에 거짓이 없구려. 여시주가 이 겼으니 약속대로 길을 가십시오." 악소채는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띠며 따라서 예를 올린 후 위세 도 당당하게 소영을 데리고 골짜기를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장건 과 하곤 두 명도 덩달아서 어깨를 우쭐거리며 지광대사의 앞을 지 났다. 소영은 얼마 동안 걸은 후 곧 악소채에게 다그쳐 물었다. "조금전 싸움은 누나가 이긴 건가요?" 악소채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 늙은 중의 무공은 매우 높아요. 나는 모험을 하여 그의 일 초를 역이용하여 이긴 것이지요." 그제서야 소영은 기쁜듯 손뼉을 쳤다. "나는 누나가 다칠까 봐 무척 걱정을 하였어요. 그런데......" 소영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악소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가 비록 한 수를 실패하였지만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예요. 그가 만약 다시 싸움을 건다면 승부를 예측하기가 어려워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네 사람은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자정이 거의 되었을 때에는 골짜기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골짜기를 막 빠져 나왔을 때 별안간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려 왔 다. 악소채는 아연 긴장하며 웃음소리가 난 방향을 보았다. 골짜기 끝의 조그만 벼랑 밑 숲속에서 일곱 명의 괴한이 그 모습 을 나타냈다. 그녀는 적의 존재를 확인하자 곧 왼손을 들어 소영을 옆으로 끌 어 안고는 오른손에 장검을 쥐고 일곱 명의 괴한에게로 뛰어 들었 다. 장건과 하곤도 양쪽으로 달려나가며 장검을 휘둘러 악소채의 뒤를 엄호하였다. 악소채의 검은 허공에 원을 그리며 기묘한 초식을 전개했다. 적 과 마주치는 순간 이미 두 명의 괴한이 그녀의 검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소영의 눈에는 악소채의 검기가 종횡무진하여 그 검영은 마치 자 욱하게 깔린 안개같았다. 다시 잠시의 격전 중에 악소채의 날카로 운 외침이 들렸으며 그와 함께 연이어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은 몇 명의 괴한들은 악소채의 무공이 생각밖으로 뛰어나자 적 지 않이 놀라면서 내심 후회를 하였다. '이런 줄 알았으면 싸움을 걸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이대로 도망친다면 나중에 명령을 어긴 형벌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도망을 친다면 거기에도 역시 죽음과 같은 형벌 이 있음을 알기에 동료의 죽음을 보면서도 악착같이 달려 들었다. 악소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날카로운 초식을 구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어렵지 않게 다섯 명의 괴한이 쓰러졌다. 남은 괴한 들은 잔뜩 겁을 먹고 슬금슬금 뒷걸음으로 길을 비켰다. 악소채는 그들을 더 쫓지 않고 그냥 칼을 거두었다. 사방에서 피 투성이의 괴한들이 죽어 넘어져 있고 혹은 괴로운 신음소리를 애처 롭게 지르고 있었다. 소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그 광경을 외면 하였다. 악소채는 재빨리 칼을 제자리에 꽂고는 소영을 업고 산길을 달려 갔다. 그녀의 신형이 얼마나 가볍고 날쌨던지 소영의 귓전을 스치 는 바람소리는 마치 화살이 날으며 내는 소리와 같았다. 얼마를 달려 다시 조그만 산봉우리를 넘었을 때 악소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소영을 땅에 내려 놓고 잠시 숨을 돌렸다. 악소채는 말없이 소영을 바라 보다 수심에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만약에 안전하게 이 고비를 뚫고 나간다면, 어디든 조용 한 곳에서 동생과 지내면서 동생의 그 태을신공을 훌륭하게 연마시 켜 완전히 터득케 해주고 싶어요. 그 때까지는 어렵더라도 참고 지 내요." 소영은 그녀의 품에 안기며 단호히 말했다. "나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리고 언제까지나 누나와 함 께 지내겠어요." 악소채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지요?" 소영은 얼굴에 굳은 결심을 나타내며 말했다. "나는 누나와 항상 같이 있겠어요. 누나가 나를 떼어 놓기 전에 는 내 스스로 누나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아니 누나가 나를 떼어 놓는다고 하여도 나는 물러나지 않을 생각이에요. 천하를 방랑하고 고산을 넘으며 강을 건너서라도 누나와 같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어 요." 악소채는 방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무척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러나 소영은 발을 구르며 그녀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싫어요. 싫어! 제가 무공을 빨리 연마해서 누님을 지금처럼 귀 찮게 하지는 않겠어요. 누나보다 더 빨리 길을 갈 수 있어요." 악소채는 이런 소영의 말에 내심 기뻐하며 그를 품에 꼭 끌어안 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이때 돌연 등 뒤에서 커다란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네 이년, 오늘 내 맛 좀 보아라, 조그만 계집애가 내 부하를 다 섯이나 죽이다니!" 악소채는 깜짝 놀라며 소영에게 등을 내밀며 말했다. "동생! 또 적이 추격해 왔으니 어서 내 등에 업혀요." 소영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안 돼요. 나를 또 업으면 누나의 행동에 지장이 있어요." 악소채는 한 번 입맛을 다시고는 곧 소영의 혈도를 짚어 기절시 킨 다음 자신의 허리끈을 풀어 그를 업은 후 튼튼하게 둘러 메었 다. 그 사이에 벌써 상대는 가까이 다가 섰다. 악소채는 다가 서는 적을 향하여 날카롭게 외쳤다. "어느 놈이냐? 나의 앞길을 막는 자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따름 이야!" 상대는 그저 "흥!" 하는 코웃음을 보내며 천천히 악소채의 주위를 돌았다. 소영은 악소채에게 혈도를 짚혀 점차 정신을 잃어가면서 상대가 누나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악소채의 혈투 에는 아랑 곳없이 조용한 꿈나라로 가버린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맡에서 악소채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동생, 이제 정신이 들어요?" 소영은 악소채의 음성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악소 채를 쳐다 본 순간 소영은 하마터면 소릴 지를 뻔하였다. 악소채가 소영을 바라 보는 눈은 피로에 지쳐 붉게 충혈되어 있 었으며 그녀의 흰 옷은 온통 피로 얼룩져 보기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편, 장건은 그의 왼쪽 어깨에서부터 온통 선혈로 흠뻑 젖어 있 었으며 하곤 역시 극도의 피로에 지친 듯 소영을 보고도 말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광경은 소영이 아니라 어느 누가 보더라도 처참하기 짝이 없이 눈길을 돌리지 않을 사람이 없으리라. 소영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려 했지만 괴한이 쫓아 왔다는 것만 기억날 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악 누나와 다른 두 명은 그 한 사람의 괴한에게...' 소영이 이러한 생각을 하며 악소채를 쳐다 보았을 때 그녀는 이 미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소영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 아팠으며 몸이 마 치 지옥에 떨어진 듯 몽롱한 착각마저 들었다. 소영은 아직도 잠을 자지 않고 장건을 보살피는 하곤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하곤의 앞으로 다가가 그를 위로하려는데 돌연 하곤이 깜짝 놀라며 소릴 질렀다. "누구냐?" 그리고는 소영에게 손을 뻗쳐 공격했다. 그는 정신이 없어 상대 의 모습을 자세히 보지 못하고 무작정 소영을 땅으로 내동댕이질 쳤다. 소영이 놀라 소리쳤다. "하곤 아저씨! 나예요. 소영이에요." 하곤은 그제서야 자신이 쓰러뜨린 상대를 보았다. 그는 소영이 얼른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것을 보자 황급히 일으켜 주었다. "공자, 놀랐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공자, 내가 공자 를 놀라게 하였다는 것을 만약 낭자께서 아시면 저는 큰 벌을 받게 됩니다. 공자, 낭자에게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소영은 고개를 돌려 장건을 쳐다 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너무 염려마세요. 그런데 저 장건 아저씨는 깊은 상 처를 입은 것 같은데......" "팔 한쪽이 잘렸습니다. 다행히 낭자께서 영단을 지니고 계셔서 그것으로 지혈시키고 또 저렇게 편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소영은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을 잃었다, 하곤이 가벼운 한숨을 내 쉬고 천천히 말했다. "공자께서 어찌 험악한 강호를 알겠습니까? 비록 한쪽 팔을 잃었 지만 설사 두 다리를 잃었다 해도 우리의 갈 길은 빨리 재촉하여야 합니다." 소영이 그제서야 눈썹을 곤두세우고 말했다. "하곤 아저씨!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비참한 것 같아요." 하곤의 입가에는 잠간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하곤은 잠시 말을 끊고 장건을 힐끗 쳐다 보고 다시 말을 이었 다. "내 일생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우리 편에서도 화를 당하 였지만 이것도 무림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 커다란 견식이 되었습니 다. 낭자의 검은 신기에 가깝도록 움직여 연속 삼십팔 초의 험한 고비를 넘겼으며 낭자에게 쓰러진 괴한들만 하더라도 사십 명쯤 됩 니다." 소영은 악소채를 새삼스럽게 쳐다 보았다. 하곤은 잠시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악소채를 쳐다 보며 긴 한숨 을 내쉬었다. "낭자의 모친이 살아 계셨을 때에는 악가의 검이 강호를 주름잡 아 누구나 막론하고 모두 우리를 얕보지 못하였습니다. 낭자의 모 친이 계셨다면 절대로 어제 같은 아니 지금까지의 수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제의 싸움에 낭자는 한시도 수중에서 검을 떼어 놓지 않았으며 몸도 수시로 움직였습니다. 공자를 업고 말입니다. 낭자 가 사십여 명을 거뜬하게 물리친 것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강호의 사람들도 악가의 검술을 새삼 깨달을 것이니 이 얼마나 대견스럽습 니까?" 소영은 아직도 자고 있는 악소채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 영은 나무에 기대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악소채를 진심으로 존경 하였다. '악 누나는 괜히 나 때문에 고생만 하는구나. 내 기필코 누나의 은공을 갚을 거야.' 하곤이 소영의 등을 어루만져 주면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조금만 참으십시오. 낭자와 저희들을 믿으십시오." 하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영이 입을 열었다. "하곤 대협, 그럼 우리는 이제 적의 추격을 벗어난 것인가요? 위 험한 고비를 다 넘긴 것이에요?" 하곤은 잠시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공자의 손과 발입니다. 제게 대협이라는 호칭을 쓰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이번에 우리를 추적하는 것은 강호의 흑과 백 의 모든 무리들입니다. 그들이 끝까지 우리를 추적한다면 우리가 하늘 끝까지 도망한다 하여도 그들을 피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소영은 내심 크게 실망하며 타그쳐 물었다. "지금 악 누나의 피로도 회복되지 않았으며 또 장건 아저씨는 팔 이 잘렸으니 이제 만약 그들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죽음을 면치 못 하겠네요?" "아닙니다. 지금은 비록 낭자의 피로가 크지만 낭자의 신정(神 情)과 행동으로 보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만 지금의 상황으로 보 아 우선 낭자가 진기를 회복하고 장건의 상처가 나을 때까지 어떻 게 처신을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곤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산모퉁이에서 냉랭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 웃음소리를 타고 모습을 나타낸 것은 검은 도포를 입은 아주 여윈 신체를 가진 두 괴한이었다. 하곤은 크게 놀라며 곧 몸을 날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곤은 비 록 무공에 있어서 고수는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강호에서 떠돌아 다 니면서 보고 들은 경험으로 두 괴한이 나타나자 조금도 당황하거나 굽힘이 없어 재빨리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음! 저 두놈의 걸음이 무척 무거우며 또한 놀랍도록 태연하니 분명 강호의 고수임이 틀림없구나.' 하곤은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강적임을 직감하고 또다시 큰 소 리로 괴한들에게 외쳤다. "무엇하는 놈들이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악소채를 깨우기 위함이었다. 두 명의 흑의 괴한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서 서 차가운 눈초리로 하곤을 노려 보았다. 하곤은 힐끔 고개를 돌려 악소채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악소채 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소영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하곤에게 다가 오는 것이었다. 하곤은 내심 크게 걱정이 됐다. '이놈들은 얕볼 수 없는 놈들이고 낭자는 아직도 잠을 자니 이 일을 어찌 한다...? 더군다나 공자가 멋모르고 다가 왔으니!' 그는 짐짓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고 그들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 려 하였다." "두 분은 어느 문파의 사람들이오?" 오른 쪽에 있는 괴한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신풍방!" 그가 단지 이 세 글자를 말하는데 어찌나 냉랭하게 내뱉았던지 하곤과 소영의 귀에는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이 하는 말처럼 들렸 다. 하곤은 내심 크게 놀랐다. "신풍방의 이름은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소. 그러나 두 분을 본 기억이 없구려. 두 분의 성명을 밝혀 주시겠소?" 하곤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연방 등 뒤의 악소채가 깨어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들은 잠시 얼굴을 마주보더니 피식 싱거운 웃음을 나누었다. 조금 전에 입을 열었던 괴한이 대답했다. "신풍방주의 명을 받고 온 철판좌비(鐵判左飛)라고 하오." "나는 원혼방횡(寃魂方橫)이오." 하곤은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끌려고 하였다. "두 분의 이름이 아주 좋소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좌비가 입을 열었다. "나는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으니 어서 길을 비켜라." 그리고는 왼손을 휘두르며 날카롭게 하곤을 공격했다. 하곤은 별 안간 좌비가 달려들어 당황했으나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하면서 재빨리 판관필을 휘둘러 좌비의 혈도 를 찔렀다. 그러나 철판좌비의 동작은 매우 민첩하여 하곤은 미처 좌비의 장력을 피하지 못하고 오른손 팔목을 맞아 판관필을 떨어뜨 렸다. '아, 몸이 피로에 지쳐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구나.' 하곤은 나머지 판관필로써 획분음양(劃分陰陽)의 초식을 전개시 켜 두 괴한에게 달려들며 입으로는 크게 악소채를 불렀다. "낭자, 빨리 일어 나세요!" 이 때서야 그들은 악소채가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음흉한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돌연 방횡이 하곤 에게서 약간 거리를 두고 옆으로 비켜 서더니 몸을 비호같이 날려 하곤의 옆을 지나갔다. 그는 곧장 앞으로 달려가 잠자고 있는 악소채를 찾아 내고는 두 눈을 번득이며 천천히 악소채를 향하여 걸어 갔다. 옆에서 보고 있던 소영은 악소채의 위험을 느끼고 그 괴한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우리 누나를 해치지 마시오!" 소영이 손을 뻗어 방횡을 잡으려 하자 그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 며 소영의 손목을 뿌리쳤다. 소영은 쇠방망이에 맞은 듯 심한 통중을 느끼며 쓰러져 뒹굴었 다. 그러나 악소채는 여전히 죽은 듯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횡은 한 발 한 발 악소채의 바로 앞까지 다가 서더니 조금도 주 저없이 무쇠같은 주먹을 들어 악소채의 머리를 향하여 세차게 내리 쳤다. 소영은 그 때까지도 악소채가 눈을 뜨지 않자 그만 울음을 터뜨 리고 말았다. "누나!" 방횡의 주먹이 막 악소채의 머리에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눈을 번쩍 뜨며 몸을 굴려 수 척이나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검을 겨누었다. 그녀의 검은 눈은 저녁 노을을 받아 붉게 빛났다. 악소채는 벌써부터 잠에서 깨어 있었으며 하곤의 대화와 소영의 외침을 모두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악소채는 왼손에 금침을 한 웅큼 집었다. 방횡은 잠시 소영에게 정신이 팔려 악소채의 거동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였다. 방횡이 악소채의 머리를 향하여 두 번째 주먹을 내리친 것과 악 소채가 몸을 피하며 금침을 날린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방횡 은 미처 그녀의 금침을 피하지 못하고 팔과 다리의 여러 곳에 혈도 를 찔렸다. 방횡은 혈도가 막히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이때 또다시 악소채의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목을 향하여 옆으로 비스듬히 내려 뻗치자 내심 놀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방횡이 도망할 길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마침 소영이 주먹 을 불끈 쥐고 방횡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소영의 손목을 휘어 잡고 악소채의 날카로운 칼날을 방패로 삼았다. 원혼방횡은 성격이 흉악하고 거칠 어 대뜸 소영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는 곁에 있는 바위에도 집어 던지려고 하였다. 악소채가 너무 놀라 무어라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돌연 옆의 숲속에서 우렁찬 외침소리가 들렸다. "방횡! 던지면 안 돼!" 그리고는 누군가가 번개같이 달려 나와 방횡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중주의 두 상인 중에 첫째인 금산반(金算盤) 상팔(商八)이었 다. 상팔은 악소채를 빤히 쳐다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악낭자, 인생은 이렇게 돌고 또 도는 것이 아니겠소? 서로 살아 있으니 또 만나게 되는구려. 그 동안 잘 있었소?" 그의 말은 예상외로 부드러웠다. 한편, 하곤은 왼손에 남은 판관필로 철판좌비와 계속 싸우고 있 었으나 워낙 힘이 딸려 좌비의 회광반조(灰光反照)의 초식에 왼손 의 곡지혈(曲池穴)을 맞아 왼손의 판관필마저 땅에 떨어뜨리고 말 았다. 하곤은 이제 지칠대로 지쳤으므로 더 이상 좌비와 상대할 기력이 없었다. 좌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막 하곤의 천령요혈을 찌르 려는 찰나였다. 돌연 누군가가 잽싸게 날아 와 그의 팔을 발길로 걷어 찼다. 그 사람의 동작에는 조금의 소리도 없었으며 또한 눈에 띄지도 않았으 므로 좌비는 겨우 발길질을 면했을 뿐이었다. 그는 상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상대는 좌비의 외침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을 바라 보던 하곤은 자신도 모 르게 소리를 질렀다. "엇! 저 사람은......" 그는 중주의 두 상인 중 둘째인 냉면철필(冷面鐵筆) 두구(杜九) 였다. '저 두구는 나와 적인데 어찌하여 나를 도와 주었을까?' 하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두구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장삿속은 비록 철저하지만 절대로 약한 자는 속이지 않소이 다. 또한 내가 장사를 하지 못할망정 의리는 있는 놈이니 좌비는 잠시 기다리시오. 나는 하곤과 잠시 협의할 일이 있소이다. 만약 하곤과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시 자리를 피하여 줄 터이니 그 때는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좌비는 강호에 경험이 없기 때문에 중주의 두 상인을 미처 알아 보지 못하고 두구에게 호통을 쳤다. "어느 놈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내 일을 방해했으니 우선 너부 터 혼좀 내 주겠다." 그는 오른손을 휘두르며 무섭게 일장을 뻗혀 공격했다. 두구는 어깨를 조금 움직이는 것 같더니 재빨리 삼사 척 비켜 서며 부드러 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말했소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필요 없는 싸움에는 끼어 들고 싶지가 않소. 난 그져 장사꾼에 불과하오. 그러니 당신 은 너무 성급하게 행동하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좌비는 상대의 부드러운 말솜씨와 자신의 공격을 태연하게 피하 는 것으로 보아 얕볼 수 없는 적수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공격을 멈추고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상대의 역습에 대비하며 힐끗 고개를 돌려 방횡을 쳐다 보았다. 그곳에는 방횡이 조그마한 어린 아이를 머리 위에다 올려 놓고 어떤 사람에게 혈도를 잡혀 꼼짝 못하고 있었다. 좌비는 놀라움과 분노가 함께 치솟아 눈을 크게 부릅뜨며 방횡이 있는 곳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좌비가 몸을 날리는 순간 두구가 한 발 앞서 그의 앞길을 막았다. 그러므로 자연 두 사람은 사정 없이 크게 부딪쳤다. 두구는 부딪 친 순간에도 별로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좌비 는 그대로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이때 방횡의 혈도를 잡고 있던 상팔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악 낭자, 청산에 있으면서 어찌 불 땔 나무가 없겠소? 낭자와 우리의 협상이 이루어진다면 낭자도 그리고 우리도 모두 이익이 되 오. 그러나 만약 협상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린 옆에서 구경이나 하 겠소." 악소채는 장검을 꽉 움켜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상팔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강호에서 수십 년 간을 장사하여 왔지만 모든 흥정을 그 자리에서 결정지어 왔었소. 그러나 낭자와의 흥정은 너무나도 어렵 고 길어서 이제는 우리들도 지칠대로 지쳤소. 악 낭자, 내가 만약 이 손을 놓는다면 낭자의 동생은 필경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악소채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흥정을 하려는 것이에요?" 상팔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소. 낭자의 총명한 판단에 감사드리오. 낭자가 우리와 원만하 게 흥정을 이룬다면 우리는 낭자를 돕겠소." 그는 장삿속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다. 악소채는 소영의 신상이 매 우 걱정이 되었다. "내 동생은 무공을 몰라요. 내 동생이 적의 수중에 있으니 어찌 마음 놓고 협상을 하겠어요? 나는 여자의 몸이지만 한 번 말한 것 은 절대로 어기지 않아요. 그러니 어서 내 동생을 적의 수중에서 풀어 주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팔이 말을 받았다. "아니오. 우리는 낭자와 협상을 하기 전에는 두 분 모두 손님이 오." 악소채는 불끈 분노가 치밀었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음 을 깨닫고 소영을 쳐다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죠?" 상팔은 입을 크게 벌리며 좋아했다. "그것은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낭자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지 금 낭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금궁의 열쇠를 지킬 수 없을 것이 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수중에 빼앗기기 전에 우리와 협상으로 그 물건을 흥정합시다." 악소채는 벌써부터 짐작을 하였던 터라 별로 새삼스러운 말은 아 니었다. 그녀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는 그 금궁의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그러자 상팔은 대뜸 눈썹을 무섭게 치켜뜨고 말했다. "나는 장사꾼이오. 그런 엉뚱한 거짓말로 나를 속이려는 생각은 아예 마시오. 만약 정말로 낭자가 모른다면 한 마디 대답만 해 주 시오." "무슨 대답을 하란 말이에요? 나는 정말로 금궁의 열쇠를 모르는 데......" 상팔은 잠시 생각하더니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소. 낭자가 금궁의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모른다 해도 우리는 낭자에게 더 이상 묻지 않소. 낭자는 문서로 우리에게 금궁지약을 넘겨 준다고 하시오. 그럼 우리의 협상은 끝나는 것이 오." "좋아요! 그렇게 하기로 해요." 악소채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상팔은 크게 머리를 숙여 그녀에 게 인사를 하고 곧 큰 소리로 밑에 있는 두구에게 말했다. "둘째, 우리는 악 낭자와 협상이 되었네." 그리고는 돌연 방횡으로부터 소영을 빼앗아 땅으로 내려 놓고는 방횡의 혈도를 누름과 동시에 그의 옆구리를 세차게 차 버렸다. 방횡은 마치 공이 날아가듯 가볍게 허공으로 치솟더니 칠팔 척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이를 보고 있던 좌비는 대뜸 겁을 집어 먹 고 방횡을 부축하여 슬금슬금 도망을 하였다. 두구는 몸을 돌려 아직까지도 두 팔목의 요혈을 부여 잡고 쩔쩔 매고 있는 하곤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하곤의 두 팔을 머리 위로 높이 세우게 한 다음 등 뒤로 가 서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하곤은 그의 일장이 자신의 명문혈(命門穴)을 가볍게 두드리자 즉시 전신의 혈맥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악소채는 재 빨리 소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동생!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누나 염려하지 마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상팔은 소영을 조금 전에 뺏아 안을 때 이미 암암리에 내력을 운 기하여 소영의 혈맥을 풀었다. 소영이 뛰어내리는 것을 본 상팔은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공자는 다행히 상처를 입지 않은 모양이구려." 이 말에 악소채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금궁의 열쇠가 정말 어디 있는지는 고사하고 그 물건을 본 적도 없으니 이번 장사는 두 분이 밑진 것이 분명하군요." 상팔은 여유만만하게 미소를 띠었다. "나는 비록 수많은 풍파를 겪었으나 밑지는 장사를 해 본 적은 없었소. 이 점만은 낭자께서 염려하지 마시도록." 두구도 냉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장사에는 절대로 외상이 없었소이다. 다만 악 낭자와의 이 장사는 너무나 엄청나기에 이제까지의 전통을 깨고 외상을 허락한 것이외다. 그러나 낭자는 증명서를 한 장 근거로 남겨 주셔야겠소 이다." 이렇게 말하며 허리춤에서 황색 보자기를 꺼내서 풀었다. 거기에 는 횐 비단으로 만든 장부책과 붓, 그리고 벼루 등이 들어 있었다. 두구는 장부책을 펼쳐 악소채의 앞에다 밀어 놓고서 먹을 부지런 히 갈았다. 악소채가 그것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 말을 믿는다면서 어찌 이다지도 귀찮게 굴지요?" 상팔은 잠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금궁의 열쇠가 낭자의 몸에는 없으나 낭자는 그것이 있는 곳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는 또 한바탕의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하하하. 낭자는 다만 이 장부에 몇 자 적기만 하면 되오." 옆에서 잠자코 있던 두구가 벼루와 장부를 들고 악소채에게 다가 섰다. "신풍방주가 보낸 조금 전의 두 괴한은 절대로 그냥 물러서지 않 을 것이오. 시간이 몹시 다급하오. 어서 결단을 하시오." 악소채는 그가 내미는 장부를 훑어 보며 말했다. "그럼 이 장부에 무어라 써야 되죠?" "그것은 매우 간단하오. 이제부터 내가 부르는 대로 쓰기만 하면 되오." 악소채는 붓을 받아 들고 그대로 한참 동안을 생각했다. '약속은 했다지만 이 글을 정말 써야만 되나......' 그녀가 이런 착찹한 심정으로 망설이고 있는데 돌연 상팔의 커다 란 소리가 들렸다. "낭자, 받아 쓰시오. 보중인 악소채가 직접 약속을 하겠소. 모친 이 보존하고 있는 금궁의 열쇠를... " 악소채는 그가 부르는 대로 적어 내려 가다 갑자기 붓을 놓고 외 쳤다. "잠깐만!" 악소채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에 이 글을 다 받아 쓴다면 당신들은 나에게 무엇을 주겠어요? 당신네들 말대로 흥정을 하려면 나도 무엇을 받을지 알 아야 해요." 그녀의 제의를 들은 상팔의 표정은 어쩐 일인지 매우 부드러웠 다. "좋소. 우리가 금궁의 열쇠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미처 그 생각 을 못하였구려. 미안하오이다." 상팔은 잠시 두구와 귓속말로 무어라 상의를 하고서 입을 열었 다. "황금 천 냥에 비단 백 필, 명주(明珠) 열 알, 그리고 철도 끊을 수 있는 보검과 또한 낭자와 일행을 안전한 곳까지 안내하겠소." 악소채는 무엇보다도 자신과 소영, 그리고 다른 두 명의 안전이 더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수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그 금궁지약 때문에 나를 여기까지 쫓 아 왔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그들은 내가 어디로가든 나를 귀찮게 굴 거예요. 진정 당신들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나요?" "그것에 대해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그 많은 무림 고수들은 우리가 금궁지약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는 낭자에게 괴롭히지 않을 것이오." 악소채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럼 만약에 당신들이 금궁지약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어 요?" 그러자 옆에 있던 두구가 불쑥 나서며 참견을 하였다. "우리 형제는 벌써부터 수소문을 펴놓아 어느 정도 금궁의 열쇠 의 행방을 알고 있소. 낭자가 고의로 글을 써 주지 않는 일 이외에 는 우리들에게 어려움은 없소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상팔이 말을 이었다. "그 금궁의 열쇠는 무림의 여러 대문파에서 잔뜩 신경을 곤두세 우고 찾고 있소. 그러나 낭자에게는 조금도 간직하고 있을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주 보잘것 없는 물건이오." 두구가 싸늘한 표정으로 악소채를 쳐다 보며 말했다. "낭자! 어서 쓰시오. 시간이 급하오." 악소채는 버들잎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날카롭게 두구를 쏘 아 보았다. "너무 그렇게 서둘지 마세요.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글을 쓰기 전에 몇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두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상팔은 얼굴 가득 히 웃음을 띠며 여유를 보였다. "좋소. 낭자는 또 무엇을 물어 보겠다는 것이오? 궁금한 것이 있 으면 말하시오. 나는 낭자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겠소이다." "그럼 이야기해 보겠어요. 첫째 당신들의 말과 다르게 그 금궁지 약을 내 모친께서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이 글을 무효로 하여 주시겠 어요?" 악소채의 말이 끝나자 두구는 돌연 험악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움켜 쥐며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상팔이 손짓으로 제지하 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속하겠소. 다만 낭자의 글에 거짓이 없다면 말이오." 그의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악소채는 입을 열었다. "이제 하나만 남았어요. 금궁의 열쇠는 내 물건이에요. 당신들이 빼앗아 간다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팔이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말 했다. "아니오, 아니오, 중주의 형제 상인은 절대로 남에게 강요는 안 하며 또한 억지로 빼앗지도 않소. 이번 장사도 낭자가 먼저 승낙한 것이오. 우리는 낭자에게 금화를 주고 또 비단을 주며 더군다나 쇠 를 끊을 수 있는 보검까지도 주는 것이오." 악소채는 고개를 흔들었다. "필요 없어요. 나는 다만 훗날에 그 금궁의 열쇠를 되찾을 수 있 는 조건만 들어 주면 돼요." 상팔은 잠시 생각하더니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우리 형제가 죽지 않고 또 금궁이 열려 있지 않았다면 열쇠의 가치는 상실하지 않은 것이오. 그렇다면 언제나 낭자는 우리에게서 다시 금궁지약을 되찾아 갈 수 있소이다. 그러나 낭자는 힘으로써 뺏어야 되오. 낭자가 우리 형제를 무너뜨린다면, 다시 말하여 이 장부책을 없애 버린다면 금궁지약을 되찾을 뿐 아니라 우리 형제들 을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을 것이오." 상팔의 긴 이야기를 듣자 악소채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상팔에게 예를 올렸다. "고맙습니다. 그럼 당신들의 말을 믿겠어요." 말을 마치면서 악소채는 다시 붓을 들어 다음 글을 쓸 준비를 하 였다. 상팔은 얼굴 가득히 미소를 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증인 악소채가 직접 약속을 함. 모친이 보존하고 있는 금궁의 열쇠를 중주쌍고에게 팜. 우선 계약금 조로 명주 열 알을 받았으며 나머지 황금 천 냥과 비단 천 필, 그리고 쇠를 끊을 수 있는 보검 은 금궁의 열쇠를 인계한 후 받기로......> 악소채는 여기까지 쓰고는 돌연 붓을 멈추며 말했다. "나는 이런 물건이 필요 없어요." 상팔은 몹시 당황해 하며 다시 붓을 들어 악소채에게 건네주었 다. "안 되오. 낭자는 받지 않으려 하지만 난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소. 낭자, 어서 다음 글을 써 주시오. 이와 같이 물건을 계약 함을 문서로써 증명함이라고....." 악소채는 억지로 글을 마쳤다. "됐소. 수고했소이다. 낭자. 이 장부가 남아 있는 한 우리들은 정당하게 낭자의 금궁지약을 소유할 수가 있소." 악소채는 말할 수 없이 우울했으므로 다시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 지도 않았다. 그녀는 암석에 몸을 기대고 소영의 손을 살며시 쥐었 다. 그리고는 지친 몸을 가눌 길 없어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 았다. 두구는 고개를 돌려 상팔을 불렀다. "형님! 우리는 여기에서 기다려야 합니까?" "악 낭자는 약속을 지킬 것일세. 아우는 영단을 꺼내서 저 꼬마 와 부상한 두 친구에게 한 알씩 나누어 주게. 그리고 우리들도 이 기회에 좀 쉬세." 두구는 곧 품속에서 빨간 영단을 세 알 꺼내서 하곤에게 두 알을 건네주었다. "친구, 이 두 알의 영단은 진신보원단(鎭神保元丹)으로 약효가 아주 강하오. 한 알은 저 팔에 상처를 입은 친구에게 주시오." "공자! 이 약을 먹게나." 소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쳐다 보더니 날카롭게 쏘아 붙였 다. "안 먹겠소!" 두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시 말했다. "공자, 이 약을 먹으면 소제의 몸에 아주 좋다네." 그러나 소영은 고개를 흔들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난 절대로 안 먹겠소. 그 약이 설사 백 년을 사는 약이라 하더 라도 난 싫소." 두구는 내심 분노와 감탄을 느꼈다. '이 조그마한 놈이... 그러나 이 놈의 패기로 보아 그 용기는 실 로 가상하군. 후에 이놈은 아주 큰 인물이 되겠다.' 그는 쓴 웃음을 띠며 영단을 품 속에 집어 넣었다. 6. 신풍방주(神風幇主)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서 총총한 별무리 사이로 이제 막 달이 떠 오르고 있었으며 그 달빛을 받은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묘한 감정을 일깨웠다. 지금 이곳에는 여섯 명의 사람이 있으나 누구 하나 크게 인기척 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들리는 것은 무심한 산새들의 울음소 리뿐이었다. 악소채가 움직이는 것 같더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수면을 취해서 진기를 많이 회복하였다. 한 번 크게 기지개를 켜고 는 사방을 살폈다. 소영의 바로 옆에서 두구가 코를 골며 잠에 빠 져 있었고 그 건너편에 상팔의 모습이 보였다. 상팔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운기를 조식하고 있었다. 악소채는 상팔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두 상인의 무공이 고강하기도 하지만 저들의 상술 역시 매우 교묘하다. 아마도 강호의 인물중 가장 부자일 것이다.' 천고 이래 무림의 인사들은 재물을 경시하였으며 의를 바탕으로 명성을 떨치며 강호를 유협하였다. 그러나, 중주의 형제 상인은 무 공이 높은 인물이면서도 무협으로서의 명성보다 상인으로서의 명성 으로 강호를 유협하니 자연 여러 금전관계로 사람으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었다. 그들은 흙먼지를 뒤집어 쓰는 일이라도 돈이라면 꺼리지 않고 덤 벼들었다. 이러한 상인이 어찌 악소채의 금궁지약을 놓치겠는가? 악소채가 물끄러미 상팔을 내려다 보고 있노라니까 시선을 느꼈 는지 그가 눈을 떴다. "악 낭자, 깨셨군요." 악소채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너무나 피로해서 그만 잠이 들었어요. 두 분을 너무 오랫 동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악소채는 운기조식하고 있는 소영에게로 다가갔다. 깊은 밤에 불어 오는 바람은 살을 에일 듯이 차가와서 소영의 공 력으로써는 도저히 참아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몸을 가늘게 떨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운기 조식에 전념하였다. 악소채는 이러한 소영이 측은해 보였다. "동생! 춥지 않아요?" "누나, 걱정 말아요. 난 조금도 춥지 않으니......" 옆에서 듣고 있던 상팔이 입을 열었다. "정말 공자의 굳은 의지에는 놀랐네. 만약에 공가 필요하다면 범 틸로 만든 외투를 주겠네." "나는 필요 없소." 상팔은 엷은 미소를 띠며 다시 말했다. "낭자! 소형제의 의지가 놀랍구려." 악소채는 힐끗 상팔을 쳐다 보며 냉소를 터뜨렸다. "당신들이 강호에서 수 십 년간 장사를 하면서 모은 돈은 아마 강호를 사고도 남을 만큼 많겠지요." 악소채는 원래 상팔을 비꼬고자 한 말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상 팔의 표정은 조금도 변치 않았으며 도리어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모은 재산은 강호를 살만큼 많지는 않소이다. 그러나 무 림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우리 형제를 따르지 못할 것이오." 악소채는 내심 의아해 하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자신의 모욕도 모르고 도리어 웃음을 띠고 있으니..' 그녀는 소영을 일으키고 그 옆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장건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의 상처는 좀 어때요?" "이젠 괜찮소. 이 정도라면 충분히 길을 떠날 수 있소이다." "퍽 다행이군요. 그럼 길을 떠나기로 해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재빨리 소영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하곤은 두구가 준 영단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했더니 과 연 정신이 맑아지며 온몸에 진기가 되살아 났다. '중주쌍고는 돈만 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영험한 영단도 만드 나 보군.' 하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라 아주 가볍게 판관필을 휘두르며 악소채의 뒤를 바싹 따랐으며 뒤늦게 잠에서 깨어난 두구가 다급하 게 뛰어와 악소채의 길을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악 낭자! 우리들과의 약속을 잊으셨단 말이오?" 악소채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잊지 않았어요." "악 낭자가 잊지 않고 있다니 다행이오. 악 낭자는 갈 길이 바쁘 다고 하셨으니 굳이 그곳까지 갈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당의 유 해가 있는 장소를 알려 주시오." 악소채는 불끈 분노가 치솟았다. "신풍방의 강적들이 잠시 후면 이곳으로 달려 올 거예요. 그러니 우선 이 위험한 곳을 빠져 나간 다음에 알려 주겠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상팔이 말참견을 하였다. "여보게 동생. 우리는 악 낭자를 귀한 손님으로 모셔야 되네. 그 렇게 손님을 푸대접해서야 어디 장사가 되겠나?" 그는 말을 끝내고 어깨를 조금 움직여 악소채의 앞으로 달려나가 며 괴상한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긴 휘파람 소리가 막 그칠 즈음 갑자기 건너편 숲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후 숲에서 두 마리의 거대한 개가 달려 나와 상팔에게 꼬리 를 치며 매달렸다. 악소채는 미간을 찡그리며 그 두 마리의 개를 쳐다 보았다. '음, 이 놈들은 저 개를 이용하여 나를 쫓아 왔구나.' 그녀는 내심 감탄하며 소영을 등에 업었다. 상팔은 두 마리 개를 앞세우고 계곡을 빠져 질풍같이 달려 나갔 다. 뒤를 이어 악소채와 두구가 달렸으며 하곤은 장건을 부축해서 는 그 뒤를 따랐다. 얼마후 계곡을 벗어나자 상팔이 걸음을 멈추고 두구에게 말했다. "동생, 자네는 악 낭자를 따라가며 낭자를 보호하게. 난 먼저 앞 질러가 앞의 동태를 살피겠네. 우리의 앞길에 신풍방의 몇몇 고수 만 만나지 않으면 길은 매우 평탄할 것이야. 그러니 우선 그 늙은 괴물을 먼저 피하기로 하세!" 그러자 두구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금궁의 열쇠가 강호에 나타나지 않으면 악 낭자를 뒤쫓는 무리 들이 수 없이 많을 것인데 언제까지 낭자를 보호하자는 것은 아닐 테지요." 상팔은 계속 길을 달렸다. "괜찮네. 우리가 이 포위망만 뚫고 나가면 그 다음 일은 매우 쉽 게 될 것일세." 상팔은 말을 끝내고 앞을 바라 보니 벌써 악소채와 일행은 삼십 여 장 밖에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두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빨리 낭자를 따라 가세." 그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큰 산봉우리를 두 개나 넘었다. 악소채의 등에 업혀 있는 소영은 이제 조금도 추운 줄을 몰랐다. 그는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서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 보았 다. 그의 뒤에는 두구가 하곤과 함께 장건을 부축하며 따라 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비록 누나를 괴롭혔지만 의리는 지키는군. 또한 누 나가 저 사람들을 어렵게 생각하니 저들의 무공도 얕볼 수 없을 거 야.'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앞의 산모퉁이에서 또다시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개짖는 곳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질풍처 럼 악소채의 일행에게 달려 오는 것이었다. 악소채는 재빨리 장검을 움켜 쥐고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뒤따라 오던 두구와 다른 두 사람도 표정을 굳히며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잠시 후 상대는 어둠을 뚫고 악소채의 바로 앞까지 와서는 크게 기침을 하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악 낭자! 나요, 상팔이오!" 이렇게 말하면서 악소채의 앞으로 다가선 그는 무엇에 바쁘게 쫓 긴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입을 열었 다. "악 낭자, 큰 일이 생겼소이다. 우리가 악 낭자와 흥정한 이번 장사는 어쩌면 크게 밑질 것 같소." 악소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중주의 형제 상인이 두려워할 인물이라면 아마 강호에서도 크게 명성을 떨치는 고수이겠지요?" "낭자의 말이 맞소이다. 나는 조금 전에 앞길의 동태를 살피다가 근래에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두 명의 고수를 보았소. 분명 그들도 금궁의 열쇠를 찾으려는 것일 거요." 상팔은 말을 마치고 또다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악소채는 이런 그의 모습이 내심 재미있어 넌지시 비아냥거렸다. "당신은 그가 그렇게도 두려워요?" 하고 물으니 상팔은 약간 미간을 찡그리고 대답하였다. "지금의 무림에서 우리 형제를 당할 사람은 단 몇 사람 뿐이오. 그러나 지금은 낭자를 보호하여야 할 입장이니 굳이 싸움을 걸고 싶지는 않소이다." 악소채가 다그쳐 물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내 생각은 그들과 부딪치고 싶지 않소." 그의 말을 듣던 악소채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정색을 하면서 물었다. "당신은 아직까지 어떠한 인물을 만났는지 말하지 않았는데..." 상팔은 그제야 생각이 난다는 듯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대답했 다. "그들은 수 년 전에 강호에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들이오. 아마 낭자가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자당에게서 얘길 들었을 것이오." "그가 어떤 인물인데요?" 상팔은 악소채의 물음에 대답도 않고 몸을 돌려 자신이 돌아 왔 던 길로 다시 달려 가며 입을 열었다. "악 낭자! 가면서 이야기합시다. 시간이 급하니까." 그는 말을 끝내고 힐끗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악소채가 좀처 럼 움직이려는 기색을 안 보이자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악 낭자! 낭자와 우리는 이미 문서로써 계약을 한 것이 있소. 앞으로 적을 맞이하게 되면 낭자는 우리를 도와 길을 뚫어야 되오." 그래도 악소채에게서 별다른 기색이 없자 이번에는 소영을 가리 키며 말했다. "낭자나 다른 두 일행의 안위는 별로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낭자 의 등에 업혀 있는 소제는 특히 주의해서 보호하시오. 우리들은 막 상 싸움을 하게 되면 그에게 보호의 손을 뻗치지 못할 것이오." 상팔의 이 몇 마디 말은 과연 즉시 악소채로 하여금 길을 떠나게 만들었다. 악소채가 걸음을 옮겨 놓는 것을 본 상팔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 며 말을 덧붙였다. "악 낭자, 낭자가 만약 조금만 도와 준다면 지금의 포위망을 아 주 쉽게 뚫을 수 있소이다." 이때 문득 그녀의 머리에 계약서라는 형식의 글이 생각나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상팔을 쏘아 보았다. "당신들은 무공이 높아 그 명성은 자자하지만 당신들의 인간성과 그 행실로 보아 나의 숭앙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에요." 상팔은 갑자기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하하하... 낭자, 미안하오. 내가 낭자에게 미처 앞에 있다는 두 고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구려." "그들은 누구예요?" 상팔은 악소채를 물끄러미 바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 낭자, 낭자는 혹시 주승(酒僧)과 반개(飯介)라는 칭호를 들 어 본 적이 있소?" 악소채는 그의 물음에 크게 놀랐다. '주승과 반개, 두 고인들은 무림에서 의로운 일만 하는 분들인데 정말 그들이 금궁의 열쇠를 노리고 있을까? 아니야. 그들은 다른 일로 이곳을 지나는 중일 거야......' 그녀는 표정을 짐짓 의아하게 바꾸고 입을 열었다. "다만 그들의 이름만 들었을 뿐 만난 적은 없어요." 악소채의 등에서 업혀 있던 소영이 궁금한 듯 입을 열었다. "누나, 그들은 왜 그런 이상한 이름을 써요?" 그러자 상팔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공자, 그들은 중이라네. 그러나 그들은 술과 고기를 마 음대로 먹으며 그 중의 하나는 술을 말할 수 없이 많이 먹는 인물 이오. 언제인가 황학루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술먹는 시합을 할때 삼 일 동안 계속 술잔을 놓지 않고 술을 먹었는데 그 중만은 끄떡 도 하지 않더라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주승이라고 부른 다네." 소영은 재미난 듯 손뼉을 치면서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러면 또 하나 반개라는 중은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인가요?" 상팔은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공자의 말이 맞네. 그는 한 끼에 한 말도 부족하다네." 소영이 재차 물었다. "그럼 그 두 중은 무공이 높습니까?" 상팔은 두 손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대답했다. "아주 훌륭하다네." "그럼 그 사람과 우리 누나를 비교하면 누가 높을까요?" 상팔은 눈길을 돌려 잠깐 악소채를 보고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 다. "그들이 훨씬 강하네." 소영은 얼굴 가득히 수심을 띠었다. "그럼 그들도 아저씨들처럼 우리 누나를 괴롭히려는 것이지요? 그 금궁의 열쇠라는 것 때문에..." "공자! 그리 걱정하지 말게나. 그들이 이곳까지 온 것은 아마 어 디 다른 곳으로 가려고 지름길을 택한 것 같으네. 그리고 나 역시 도 그들이 금궁지약을 뺏으러 오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악소채는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달려 나 갔다. 상팔은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크게 당황하여 잽싸게 걸음을 옮 기면서 외쳤다. "낭자, 내가 길을 안내하겠소." 이때 장건은 많은 출혈로 인해 거의 빈사상태가 되었다. 하곤 역시도 지쳐서는 장건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겨도 그를 부 축할 힘이 없었다. 이때 장건은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끼며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장건이 곧장 앞으로 쓰러지는 순간 돌연 하곤의 옆을 스치는 세 찬 바람소리가 났다. 하곤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그것은 맨 뒤에서 뒤를 살피며 따라 오던 두구가 장건이 쓰러지 는 것을 보고 몸을 날려 그에게 달려 간 것이었다. 두구는 재빨리 장건을 부축하고 혈도를 짚어 출혈을 멈추게 한 다음 품 속에서 영단을 꺼내서 장건에게 먹였다. "빨리 삼키시오." 장건이 영단을 입안에 넣기가 무섭게 두구는 대뜸 그를 등에 들 쳐업고 앞으로 내달렸다. 악소채는 등 뒤의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오?" 두구는 계속 그들에게 달려 가며 대답했다. "장건이 졸도를 하였소. 그의 상처가 다시 심해져 출혈이 심했었 는데 내가 응급조치로 그의 혈도를 막아 버렸으니 얼마 동안은 괜 찮을 거요. 어서 길이나 갑시다." 악소채는 고개를 숙여 두구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다시 앞으로 맹렬히 달려 갔다. 산길을 돌아 얼마나 달렸는지 그 거리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어느덧 훤하게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갑자기 앞에 가던 두 마리의 개가 요란하게 짖어대는 소리가 들 려 오더니 이어 우렁찬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개 눈깔은 사람을 무시한다고 들었는데 너같은 개새끼가 정말로 이 늙은이를 무시하는구나." 그의 말소리는 악소채 일행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상팔은 내심 크게 놀랐다. '큰일났구나. 강적을 피하여 일부러 길을 돌아 왔는데도 어떻게 저 늙은 거지를 만나게 되었을까?' 그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나는 곳을 바라 보았는데 그곳에는 작은 골짜기가 있었으며 그 골짜기 입구에 사당이 한 채 있었다. 악소채도 상팔의 눈길을 따라 쳐다 보았다. 사당 바로 앞에 오래 된 소나무가 하나 솟아 있었고 그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무엇 을 하는지 열심히 손을 움직이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마치도 걸레 조 각같아서 여기저기 맨살이 비쳤다. 자세히 그의 거동을 살펴 보니 그는 밥을 하려는지 불을 지피려 고 했다. 상팔은 천천히 거지 노인 앞으로 걸어가면서 입을 열었다. "진형! 오랜만이오." 그러자 그 누더기 옷을 걸쳐 입은 노인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상형은 복이 많아 갈수록 장사도 잘 되는가 보군." 상팔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담고 그의 말을 받았다. "진형 덕택에 많이 남고 또 적게 밑져 그럭저럭 지내고 있소이 다." 그의 말이 끝나자 곧 거지 노인은 두 마리의 개를 가리키며 물었 다. "저 개는 상형이 키우는 것이오?" "그렇소. 얼마 전에 서성에까지 장사를 갔다가 모두 밑지고 단지 저 두 마리의 개만 데리고 왔소이다." "상형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저 두 마리의 개도 이 늙 은이의 차림을 보고 매우 못마땅한가 봅니다." 상팔은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짐승이 무엇을 알겠소? 대신 내가 이렇게 진형에게 사과를 드리 겠소." 그는 손을 들어 포권을 한 다음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거지 노인은 상팔의 예는 쳐다 보지도 않고 뒤에 오는 악 소채에게 눈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상형! 이제 보통이 아니구려. 저렇게 예쁜 처녀도 팔러다니니." 악소채는 불덩이 같은 분노가 치솟았으나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 다. '저 거지에게 상팔까지도 굽신대는 것을 보니 필시 보통 노인은 아닌가 보구나. 더군다나 상팔은 저 노인과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 고 그럼 혹시 조금 전에 두려워하던 두 고수 중에서 하나인 반개가 아닐까? 모친에게서 가끔 반개의 이야기는 들었으나 실제 보지는 못하였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어디 좀더 동정을 살펴 보자.' 그녀가 여기까지 생각하였을 때 상팔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 다. "하하하... 진형도 농담을 잘 하시는구려. 저 낭자는 우리의 귀 한 손님이오." 이 때 물끄러미 그들의 행동을 바라 보던 두구가 갑자기 장건을 땅에다 내려 놓고서 성큼성큼 거지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입을 열첬다. "우리 형제의 장사는 매우 바쁘오! 그러니 진형과 오랫동안 이야 기를 할 시간이 없소이다.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고 다음 한가한 시 간에 이야기합시다." 그리고 다시 상팔에게 말했다. "형님, 어서 우리 길이나 갑시다." 거지 노인은 두구의 말을 듣고서 파안대소했다. "허허허... 이제 보니 둘째의 성질이 매우 급하군. 참을성이 없 어." "그럼 진형은 고의로 우리 형제를 괴롭히겠다는 것이오?" 거지 노인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답했 다. "어찌 감히 그러겠소. 이 늙은이는 지난 몇 년 동안 운수가 나빠 서 하루 세 끼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소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많은 보화와 부귀를 얻으며 지냈으니 한 번 정도 장사에 실패를 하 여도 끄떡 없을 것이오. 어떻소? 형제들은 옛정을 생각해서 나에게 찌꺼기라도 남겨 주시겠소?" 두구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거지 노인을 쳐다 보았다. "진형께서 우리 형제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탁 터 놓고 말하여 보 시오." 그러자 거지 노인은 대답 대신에 불쑥 손을 뻗어 솥 속에 있는 밥을 한 웅큼 집어 입으로 가져 갔다. 거지 노인은 밥을 씹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가난뱅이는 부자와 싸움을 하지 않소이다. 만약 그들과 싸운다 면 필시 가난뱅이가 지기 마련이오. 이 늙은 거지는 잠잘 곳도 마 땅치 않고 또한 무공이 뛰어난 고수들을 잘 알지도 못하오. 하지만 갑부는 돈을 써서 여러 고수를 살수 있을 게 아니오?" 거지 노인은 말을 하면서도 연방 손으로 밥을 집어 먹었다. 상팔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우리 같은 밝은 사람은 어두운 일에는 아예 손을 대지도 않소. 진형! 진형이 이곳에 온 것은 필경 그 금궁의 열쇠를 위해서겠지 요?" "그것도 나 역시 얻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어디 이런 늙은 거지 에게 복이 있어야지. 당신 같은 사람은 돈이 많으니까 혹시...." 상팔은 가슴이 뜨끔하였으나 짐짓 온화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진형은 누구를 도와주러 온 것이오?" "이 늙은 거지는 반평생을 혼자 강호에서 떠돌아 다녔소. 만약에 정말로 내가 도와 줄 일이 있다면 그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겠 소?" "저는 우선 한 가지 일을 이야기해야 되겠소이다." 이제 상팔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고 심각해졌다. 거지 노인은 고개가 끄덕일 뿐 밥만 집어 먹었다. 상팔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힐끗 악소채를 쳐다 보았다. "저 악낭자의 자당께서 가지고 있는 금궁지약은 이미 우리에게 팔렸소이다. 진형께서 금궁의 열쇠 때문에 이곳에 오셨다면 유감스 럽게도 조금 늦으셨습니다." 거지 노인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물었다. "그럼 벌써 상형이 그 금궁의 열쇠를 수중에 넣었단 말이오?" "그렇소이다. 그러나 저는 아직까지 금궁지약(禁宮之藥)을 본 일 이 없소. 다만 저 악 낭자가 우리에게 팔겠다고 약속을 하였을 뿐 이오." 거지 노인은 움직이던 입을 멈추고 한참 동안 악소채를 쳐다 보 았다. "이 악 낭자가 악운고의 딸이오?" 그러자 상팔보다 먼저 악소채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저의 모친이신데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지 노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 쳤다. "아! 늦었구나. 악 낭자, 정녕 자당께서 돌아가셨단 말이오?" 악소채는 새삼스럽게 다시 치밀어 오는 슬픔을 느꼈다. "어머니는 이미 여러 날 전에 돌아가셨어요." 거지 노인은 돌연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한숨을 내쉬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 늙은 놈은 평생에 남에게 빚을 진 일이 없었는데 오직...." 그는 채 말을 끝내지도 않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상팔에 게 얼굴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 늙은 거지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단지 하늘의 뜻이오. 내 가 그동안 당신들 형제와 다툼이 없었던 것은 내가 당신들의 금은 재화에 뜻이 없어서였소. 그러나... 그러나 이 금궁지약만은 분명 재화와는 다르오. 그래서 나도 지금 신경을 써 왔던 것이오. 나는 절대로 당신들 부자들과 다투는 것은 싫소이다." 옆에서 듣던 두구가 싸늘한 웃음을 띠며 거지 노인의 말을 받았 다. 그의 표정은 매우 표독스러웠다. "늙은 거지야! 그런 약은 수작은 부리지 마라. 기왕에 우리 형제 를 괴롭히려면 그렇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 강호에 서 우리 형제의 세력은 이삼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야. 우 리는 그동안 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모두 물리쳤어. 이제 너같은 늙 은 거지를 무서워할 우리가 아니다. 네가 기어이 무공으로 덤벼들 겠다면 기꺼이 받아 줄 테니까 서슴치 말고 덤벼 보아라. 내 일찍 부터 반개라는 이름을 들어 오던 차에 오늘 너의 실력을 보고 싶구 나." 거지 노인은 입가에 쓴웃음을 흘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둘째의 무공이 높다는 것은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네. 나도 오 늘에서야 둘째의 무공을 보게 되어 기쁘기 한이 없군." 상팔은 겉으로는 거지 노인을 공경하는 척 했으나 속으로는 음흉 한 수작을 꾸미고 있었다. '저 늙은이는 이제 쉽사리 자리를 비켜 주지 않을 것 같다. 그러 니 일찌감치 손을 써서 결정을 내려야 되겠구나.' 반개도 내심 꿍꿍이속이 있었다. '내 비록 무공이 뛰어나다 하더라도...저 두 놈은 그래도 강호에 서 고수격인데 쉽게 당해 낼 것 같지가 않군. 그러나 혹시 악....' 상팔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거지 노인에게서 몇 발 뒤로 물러 났다. 그는 두구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둘째야! 저 늙은이의 무공은 매우 높고 날카로우니 주의하여야 한다." 그러나 두구는 재빨리 왼손으로는 자신의 가슴을 보호하고 오른 손은 길게 내뻗으며 몸을 옆으로 돌려 거지 노인에게 덮쳐 갔다. 그의 손이 막 거지 노인의 명치에 닿으려는 순간 거지 노인은 왼쪽 발을 살짝 들어 몸을 한 바퀴 돌려 가볍게 첫 번째 공격을 피하고 는 근처의 산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웃었다. "허허허......" 이때 거지 노인의 웃음을 받아서 맞은편 작은 숲 속에서 또 하나 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허허허......" 거지 노인과 또 하나의 웃음소리는 묘한 화음이 되어 산을 뒤혼 들었다. 상팔과 두구의 놀람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으며 악소채도 호기심을 가지고 괴정체의 웃음소리가 난 숲을 주시하였다. 잠시 후 숲 속에서 하나의 흰 그림자가 마치 밤하늘의 유성처럼 쏜살같이 일행에게 달려 왔다. 그가 가까이 오자 대뜸 일행의 코를 찌르는 술냄새가 바람을 타 고 날아 왔다. 그는 키가 크고 신체가 건장했는데 머리를 빡빡 깍 은 중이었는데 그는 흰색의 장삼을 걸쳤으며 목에는 염주를 걸고 있었다. 그 중은 취기가 서려 붉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중주쌍고를 번 갈아 쳐다 보더니 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또 어떤 조무래긴가 했더니 중주의 부자 나으리들이시군." 이렇게 말하면서 왼손을 등 뒤로 가지고 가 잠시 뒤적거리더니 조그만 술병을 꺼내 들었다. 그는 거지 노인이나 악소채 일행은 안중에도 없는 듯 연거푸 술 을 들이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커! 이것 참 맛 좋은 술이로구나. 정말 술은 내 인생이야." 그러자 선뜻 그 중의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깜빡 그것을 잊었소. 반개와 주승은 마치 한 몸처럼 떨 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승은 취한 눈초리로 상팔을 잠시 노려 보더니 몸을 가누지 못 하고 비틀거렸다. "두 분 장사가 그 동안 잘된 것을 축하하오이다." 상팔은 마음이 꺼렸으나 짐짓 웃음을 띠고 말했다. "덕택에... 주승의 염려로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주승은 오른손으로 상팔을 가리키며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허... 그럭저럭 지낸다? 그러나 오늘만은 당신들이 계산을 잘못하여 장사가 많이 밑질 것 같소." 두구는 차가운 눈빛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 둘이 상대를 하겠단 말이오? 그렇다면 우리 형제는 몇 수 정도로 일을 끝낼 수 있소이다." "두구!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시오. 우리 두 늙은이 말고도 다른 사람이 또 있소." 상팔은 주승의 대답을 듣고 내심 가슴이 뜨끔하였다. '저 중은 비록 술에 취하여 몸을 비틀거리지만 그의 기지와 총명 은 보통 사람을 넘는 것 같군! 조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되자 태도를 바꾸어 두구를 나무랐다. "동생! 그렇게 어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네." 그리고 주승에게 손을 모으며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저는 주승의 이해를 바라겠소이다. 동생은 성격이 워낙 급해서 그런데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다른 사람은 누구시옵니까?" "허허허... 나는 술만 있으면 모든 것이 부럽지 않소. 그리고 저 늙은 거지는 배만 부르면 되고. 우리 두 늙은이는 필경 부자들의 안중에도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상팔은 주승의 말에 가시가 돋혀 있는 것을 느끼고 걱정이 되었 다. '이제 두 명이 되었으니 더욱 상대하기가 어렵게 되었구나. 저 두 늙은이와 서로 자웅을 겨루면 아마 백여 수가 되어도 승부는 나 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시간만 끌 것이 아니라 빨리 맞부딪쳐 버려 야..... ' 상팔의 계산은 역시 장삿속이었다. "우리 형제는 두 분을 오래 전부터 숭앙하고 있었소이다." 주승은 입가에 엷은 웃음을 흘리며 비웃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장사가 잘 되어 수많은 재화를 거두어 들이는 것은 귀 찮은 사람을 묘하게 떼어 버리는 재질이 있기 때문인가 보구려." "아니오이다. 그저 정직하면 재물이 생기는 것으로 우리 형제는 바로 그것을 신념으로 삼고 장사를 하오이다. 더구나 우리가 번창 하는 것은 강호의 많은 친구들이 우리를 신용하여 뒤를 밀어주기 때문이오." 그러자 갑자기 주승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두 분은 이것을 모르고 있구려. 날마다 산에 오르면 언젠가는 범을 만나게 되오. 오늘 두 분은 범을 만난 격이니 어쩌시겠소?" "두 분이 만약 우리들을 괴롭힌다면 우린 정말 큰 수난을 면치 못하는 것이오. 그런데 아직도 뒤에 있다는 인물들을 밝히지 않았 소이다." 주승은 한동안 악소채를 뚫어지게 바라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 었다. "그렇게 알고 싶소? 나와 저 늙은이 이외에도 또 다른 무림의 고 수들 이 금궁의 열쇠를 얻으려고 몰려들고 있소." "그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소. 그 정도를 두려워할 우리가 아니 오." 반개가 입을 열어 말참견을 하였다. "신풍방의 고수들이 바로 뒤쫓고 있는데도?" 이번에는 두구가 말참견을 했다. "신풍방의 고수들은 이미 몇 명 만나 보았으나 그들은 모두가 형 편없는 놈들이오." 주승이 또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신풍방의 고수라도 물론 당신들의 생각 밖이겠지요. 신풍방 중 에서도 이번에는 방주인......"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일행의 옆 절벽 위에서 몇 마디의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게 섯거라!" 그러자 주승은 웃음을 거두고 재빨리 반개의 옆으로 가서 책상다 리를 하고 점잖게 앉았고 상팔은 눈빛을 날카롭게 번쩍이며 절벽 위를 주의깊게 살폈다. 그리고는 무엇을 보았는지 눈썹을 곤두세우고 악소채에게 다가가 서 조그맣게 말했다. "악 낭자! 일이 복잡하게 되었소. 낭자는 저기 커다란 암석 옆으 로 몸을 피하시오. 우리는 저들과 사생결단을 내야 할 판이니...." 절벽 위에서 번쩍이던 그림자는 순식간에 일행의 시야에 그 모습 을 드러냈다. 그들은 몇 사람인지 계속 나와 일행에게 달려 오는 것이었다. 악소채는 재빠르게 소영을 등에 업고 상팔이 가리켰던 건너편 암 석으로 달려 갔다. 그곳은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은신처였다. 상팔은 곧 주위에 흩어져 있는 적의 세력을 눈여겨보고 내심 두 려운 마음으로 두 마리 개의 목에 걸려 있던 긴 쇠사슬을 풀어 주 었다.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밤길에 편리한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었으 며 수중에 검을 움켜 쥐고 있었는데 검은 달빛을 받아 번쩍였다. 상팔과 두구는 유리한 지형을 골라 서로 등을 맞대고 적을 맞이 할 태세를 갖추었다. 소영은 암석 뒤에 숨어서 적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그들은 모두 이십 명으로 중주이고를 포위만 하였지 좀처럼 공격 하지 않았다. 아마 누구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절벽 옆 골짜기에서 두 줄기의 불빛이 보이더니 질풍같 은 기세로 일행에게 달려 왔다. 그 두 개의 불빛은 너무나 밝아 눈 이 부셔 등불과 함께 나타난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소영은 바위에서 조금 더 몸을 내밀고 그를 쳐다 보더니 흠칫 놀 라며 자기도 모르게 악소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의 모양은 마치 장례의 행렬 같았기 때문이었다. 등을 들고 있는 두 명은 모두 키가 크고 얼굴은 뼈만 남은 귀신 같았다. 그리고 그 등불 뒤에는 또 신체가 건장한 네 명의 괴한이 옷소매 를 어깨까지 걷어 올리고 따라 왔다. 또한 그 뒤에 또 네 명이 따 랐다. 그들은 먼저 네 명보다는 조금 지위가 높은 듯 전신을 검은 비단 옷으로 감싸고 허리에는 갖가지 색의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소영은 앞으로 벌어질 싸움을 상상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악소채는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귓속말로 말하면서 손을 꼭 쥐었다. "동생! 두려워할 것 없어요." 소영은 악소채를 쳐다 보며 생각하였다. '여자인 누나도 두려움을 모르는데 하물며 사내 대장부가 체면과 위신도 없이 이게 뭐람. 나도 누나처럼 용기를 갖자.' 소영은 악소채의 손을 살며시 빼고 고개를 내밀어 다시 눈 앞의 광경을 응시하였다. 중주이고는 강호를 떠돌아 다니며 벌써부터 신풍방의 실력이나 또 방주의 무공을 많이 들었으나 실제로 방주를 보지는 못했다. 두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님, 이들이 이렇게 나타난 것은 무슨 생각으로...... " "동생, 너무 두려워 맙시다, 신풍방이라는 세 글자만 보아도 그 들이 거짓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의 속임수를 역이용하여 승리를 거두세. 잠시만 기다리면 저들이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 알 테니까 동생은 경거망동하지 말게." 이때 등불을 높이 쳐들고 있던 두 사람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어깨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뒤따르던 네 명의 장한 이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을 앞으로 모으며 양쪽으로 갈라섰다. 그동안 밝은 불빛 때문에 자세히 보지를 못하여 아무 것도 없는 듯하였으나 이제 막 네 명의 장한이 양편으로 갈라서면서 어깨에 메고 있던 커다란 신상(神像)을 내려 놓는 것이었다. 신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높이가 칠, 팔 척 정도로 머리 는 말만큼 컸으며 짙은 남색을 띠고 있었다. 그 신상의 얼굴 모양 은 매우 괴상망측스러워 코는 돼지코 같았고 입은 메기입같이 큰 것이 무엇을 집어 삼킬 듯 크게 벌리고 있었는데 송곳같이 날카로 운 이가 여러 개 드러나 있었다. 또 하나 괴상한 것은 그 신상의 팔이 네 개나 되었다. 앞의 두 팔은 한데 모아 가슴에 세우고 뒤의 두 팔은 제각기 다른 것을 들 었다. 왼손에는 영패(令牌)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장검을 움켜 쥐고 있었다. 이때 또 다른 네 명의 장한이 나타났다. 그 검은 옷에 원색의 허리띠를 두른 네 명은 바로 신상 앞까지 다가와서는 일제히 허리를 굽혀 중주이고에게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그 중 왼쪽 끝에 있던 사람이 성큼성큼 중주이고에게로 다가왔다. 상팔은 신경을 그에게 곤두세우고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의 허리에 두른 원색의 띠에는 단전호법(壇前護法)이라는 글씨 가 새겨져 있었다. 그 사나이는 중주이고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번 갈아 날카롭게 쏘아 보더니 몸을 돌려 악소채가 숨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두구는 재빨리 달려 나가 그의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서라!" 그리고는 오른팔을 뻗어 그의 가슴을 향해 장력을 날렸다. 그 흑 의 장한은 가볍게 몸을 옆으로 날리면서 왼손을 휘둘러 두구의 장 력에 정면으로 맞섰다. 두 사람의 장력은 펑! 하는 소리를내며 허공에서 부딪쳤다. 두구는 그 여파로 주춤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저 놈의 장력이 보통이 아니로군.' 이때 그 흑의 장한도 역시 가슴이 뜨끔한 장력의 여파를 맛보았 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의 말은 간단했으나 차갑기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상팔이 두구 대신 대답했다. "하하하... 우리들은 중주의 형제 상인이오. 형제가 같이 장사를 하오니 당신들이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모두 말하여 보시오. 내 당 신들이 마음에 들어 아주 싸게 팔겠소. 비단이오? 아니면 금은보화 요? 가격은 이 자리에서 바로 한 마디로 정할 터이니 어서 말해 보 시오." 흑의 장한은 중주의 형제 상인이라는 말에 눈을 번쩍이며 상팔에 게 몇 발 다가서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방의 방주께서 보내신 두 고인을 당신들이 해쳤나 보군." 두구가 피식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쓸모없는 고인은 마땅히 없애야 되오." 흑의 장한은 그의 대답에 관심이 없는 듯 고개를 돌려 상팔에게 물었다. "저 낭자의 성이 악가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느 사이에 암석 뒤에서 튀어 나왔는지 악소채가 말을 받아 대답하였다. "그래요. 내가 악소채예요. 무슨 전할 말이라도 있어요?" 상팔은 내심 깜짝 놀라며 재빨리 말참견을 하였다. "악 낭자는 우리 손님이니 무슨 볼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물어 보시오." 흑의 장한은 냉랭한 미소를 띠며 두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신상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 갔다. 상팔은 기회를 틈타 두구에게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동생, 오늘의 정세는 매우 험악하겠구려. 우리는 이렇게 많은 적을 상대하여 싸워 보기는 처음이야." 그는 고개를 돌려 잠깐 주승과 반개를 쳐다 보고 다시 말을 이었 다. "저 주승과 반개는 우리와 뜻이 같으니 우리를 도와 주지는 않을 것이네. 그러나 이러한 형세로서는 너무나 우리의 힘이 딸리니 묘 수를 써서 저들 두 늙은이의 도움을 받아 이 포위망을 뚫어야 되 네." 상팔은 다시 주승과 반개를 쳐다 보았다. "내 생각으로는 저 두 늙은이가 금궁지약보다도 악 낭자의 신변 을 더 염려하고 있는 것 같네. 저 술취한 중놈은 워낙 총명한 두뇌 를 가졌으니,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얻자는 속셈일세. 그러니 우선 악 낭자를 이 싸움에 끼어들게 하면 자연 주승과 반개도 그녀를 구 하려고 뛰어들 것일세." 두구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팔은 신상이 있는 곳을 쳐다 보았다. 그곳에는 네 명의 흑의 장한들이 신상 앞에 무릇을 꿇고 앉아 고 개를 숙이고 무슨 분부를 기다리는 듯하였다. 소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괴상하게 생긴 신상을 쳐다 보았다. 그런데 돌연 신상의 왼팔이 서서히 밑으로 움직이며 들고 있던 영패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소영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누나... 누나, 저것 봐요. 저게 움직여요." 그러나 악소채는 아무 대답 없이 그냥 소영의 손을 꼭 잡으며 신 상을 주시하였다. 신상의 왼손이 다시 원래 대로 올라 가면서 돌연 그 보기 싫게 벌려진 입에서 여자의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악소채는 그 말을 들으려고 온 신경을 귀에 모았다. 상팔과 두구도 커다란 의아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그 목소리를 들 으려 하였으나, 그 맑은 음성은 조용하고 짤막하게 끝났다. 신상의 분부를 받은 네 장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오 른쪽 흑의 장한 혼자서 중주이고에게 다가서는 것이었다. 두구는 재빠르게 몸을 날려 그의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우리 형제는 강호를 돌아 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괴물을 보았소. 그런 엉터리 속임수로 우리들을 속이려면 아예 말을 꺼내지 마시 오. 당신들은 우리 상인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소? 어디 당신들의 의견을 들어 보아 우리 장사나 흥정하여야 되겠소이다." 흑의 장한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러나 조금 전의 장한과는 대조 적으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방주께서 결단을 내리셨소이다. 당신들이 본방의 두 고인들을 해한 것은 다시 논하지 않고 다만 저 악 낭자만 우리에게 넘겨 주 면 당신들의 생명을 건져 주겠다 하였소." 상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방주의 속임수에도 허점이 있구려. 가격이 너무나 엄청나서 우 리는 이런 흥정은 하지 않겠소이다." "흐흐흐... 그렇다면 당신들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 되오." 상팔은 무엇이 우스운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장사를 하려면 먼저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법이오. 방주께서는 너무나 욕심이 많으셔서 우리 전문적인 상인보다 한 수 더 높게 나오시는구려. 그러나 우리는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소이 다." 그러자 흑의 장한도 돌연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경주(敬酒)를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시겠다면 할 수 없지!" 흑의 장한은 손을 번쩍 들어 머리 위에서 몇 번 움직이니 곧 여 덟 명의 장한이 달려 와 귀두도를 번뜩이며 두 사람을 포위했다. 그 여덟 명의 장한이 달려 온 동작으로 보아 그들도 무공이 높은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흑의 장한이 뒷걸음으로 거리를 넓히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스스로 택한 일이니 거절하지 마시오." 상팔은 그의 말이 끝나자 곧 품 속에서 금빛 찬란한 주판을 꺼내 어 한 번 휘두르니 요란한 굉음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친구! 잠깐만 기다리시오." 상팔의 말에 흑의 장한은 자못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유언이라도 있소? 그렇다면 어디 유언이나 들어 봅시다." 7. 생명의 은인 상팔은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금은 낯설었지만 점차 친하게 될 수도 있지 않소? 내 아직 당신 의 존함을 여쭙지 못하였으니 실례가..... " 흑의 장한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난 신풍방주의 단전호법인 초혼수(招魂手) 상명(常 明)이외다." 그러자 두구가 말참견을 했다. "이번의 빛은 잊지 않고 기억하겠소. 훗날 만날 기회가 있으면 그때 꼭 갚으리라." "아마 두 분은 오늘밤 살아서 나가기는 어려울 거요. 그래도 훗 날 보자고 하겠소?" 상팔은 그의 뒷말은 듣지도 않고 자신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여덟 명의 장한을 훑어 보고는 두구에게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 다. "동생, 무기를 꺼내게. 저놈들의 칼끝은 극독이 묻어 있으니 각 별히 조심하게." 두구는 곧 품 속에서 빛이 나는 원권(圖圈)과 한 개의 철필(鐵 筆)을 꺼내들었다. 상팔은 손에 쥔 금빛 주판을 흔들면서 외쳤다. "당신들 중에 누가 먼저 나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겠소? 아니면 여 덟이 한꺼번에......" 그의 주판은 조그맣지만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알이 진주로 되어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달빛을 받아 찬란히 빛났다. 두구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철필로 왼손의 원권을 힘껏 쳤다. 탕! 무딘 쇳소리와 함께 그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내 생각으로는 당신들 모두가 한꺼번에 덤벼드는 게 좋겠는데." 그러나 돌연 여덟 명의 장한이 두 패로 나뉘어져 네 명이 한 사 람을 맡았다. 그들은 상팔과 두구를 에워싸며 천천히 포위망을 좁 혀 갔다. 소영은 두구가 왼손에 들고 있는 원권을 유심히 바라 보더니 매 우 궁금한 듯 하곤에게 물었다. "아저씨! 두구 아저씨가 들고 있는 원권도 무기가 되나요?" "공자! 저것은 일종의 괴기한 외문(外門)병기로써 호수권(護手 圈)이라고도 부르네. 병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무공이 뛰어나 저렇게 작은 병기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네." 소영은 그의 말에 이해가 간다는 듯. "오! 저런 것으로......" 이 때 상팔의 뒤에 있던 두 마리 개도 주인의 싸움을 알았는지 땅에 엎드려 곧 달려들 기세였다. 귀두도를 치켜 들고 두 사람의 칠팔 척 정도 앞까지 다가 온 여 덟 장한은 그 이상 더 가까이 오지 않고 우뚝 멈춰었다. 상팔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힐끗 주승과 반개를 쳐다 보았으나 그들은 싸움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 서로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상팔이 초조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돌연 이장 밖에 서 있던 상 명이 진기를 두 손에 집중시키면서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상팔의 앞에 있던 두 장한이 휘파람의 여운을 따라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두 명이 몸을 날리자 나머지 여섯 장한들도 제각기 차가운 검광 을 허공에 그리며 두 사람을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그러자 상팔도 손에 든 금주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리고 맨 선 두의 장한이 내려 친 칼날을 막았다. 순간.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은빛 섬광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두구의 오른손에 있는 철필과 왼손의 호수권은 밤하늘의 허공을 가볍게 꿰뚫면서 내려 쳐 오는 네 개의 귀두도를 막아 냈다. 그는 상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대뜸 철판을 휘둘러 역습을 하였다. 일차 공격에 실패한 여덟 명의 장한들은 무슨 약속이나 한 듯 동 시에 몇 발 뒤로 물러나 다시 공격을 하지 않았다. 상팔은 적들이 한 번 공격을 한 후 다시는 공격을 하지 않자 내 심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음! 저 놈들의 이번 공격은 우리의 실력을 시험한 것이었구나. 저런 수법을 기문진식(奇門陳式)이라고 하지. 상대의 무공과 자신 의 무공을 시험하여 비교해 보자는 수작이렷다? 엉큼한 놈들이군. 과연 신풍방의 명성은 뜬소문이 아니었구나.' 상팔은 그들이 모르게 전음입밀을 이용하여 두구에게 말했다. "이제 상대는 기문진식을 전개할 것이네. 조금 전의 공격은 우리 를 시험하였던 것으로 적들은 아직 진세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 네. 놈들이 서 있는 방향을 따라서 팔괘(八卦)를 취하고 있으니 절 대로 행동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되네. 내가 저 진을 깨뜨리는 방법 을 알아낸 후에 둘이서 같이 맹공격을 하며 적진을 뚫기로 하세." 이렇게 되자 쌍방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대치하는 격이 되었다. 얼마 동안을 대치 상태로 있었다. 이때 두구의 불같은 성격은 착잡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여 왼발 을 크게 내디디며 몸을 돌려 철필로 봉황점두(鳳凰點頭)의 초식을 전개했다. 그의 철필은 바위도 뚫을 듯한 무서운 기세로 여덟 명의 진기를 흩어 놓았다. 두구는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적이 공격하면 호수권으로 막아 내 고 적이 물러서면 즉시 철필로 뒤를 위협했는데 그 처신이 무척 신 중하였다. 상대의 칼에 맹독이 묻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선 자신의 신변을 확고하게 보호하면서 틈틈이 기회를 노려 재빠르게 공격했다. 그 움직임은 마치 나비와도 같고 때로는 날아 다니며 쏘는 벌과도 비슷했다. 상팔은 적의 빈틈을 찾아 내어 일격에 끝내려고 했으나 두구가 먼저 손을 썼으므로 그의 계획은 무너지고 말았다. 상대는 두구가 예상 외로 무서운 기세로 공격을 해 오자 그들도 생사를 가리지 않고 맹렬히 반격을 퍼부었다. "쨍그랑!" "펑!" 굉음이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며 은빛 섬광이 수없이 허공을 스쳤 다. 상팔은 정세가 변하였으니 자연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밖에 없었다. 악소채는 중주쌍고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중주쌍고의 명성은 과연 허세가 아니었군. 저 여덟 명의 장한들 의 공세가 무척 사납고 악랄한 데도 중주쌍고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직 바람소리로만 적의 움직임을 포착하는구나." 그녀가 중얼거리는 동안 벌써 그들이 싸움은 십여 수를 넘었다. 여덟 장한의 공격은 갈수록 날카로와지고 여덟 개의 귀두로는 사방 에서 종횡으로 중주쌍고를 파고들었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은 차가운 바람을 타고 허공을 갈랐다. 쌩! 중주쌍고는 이제 여덟 개의 짙은 검광에 싸여서 멀리서 보면 일 편의 백광만 보이고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무의식 중에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끝나는군. 오늘밤 그 뚱뚱이와 홀쭉이 형제는 죽음을 면치 못하겠구나." 그는 고개를 들어 먼동이 터오는 하늘을 쳐다 보았다. 순식간에 먹구름은 달을 삼켜 버리더니 얼마후 함박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 다. 싸움터는 눈깜짝할 사이에 온통 은빛 세계로 변했다. 한참 동안 요란한 기합 소리와 더불어 칼과 주판, 철필이 부딪치 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어이쿠! 소영은 악소채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누나! 누가 다친......" 그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비명소리를 듣자 악소채가 몸을 날려 싸움터로 달려 갔기 때문이었다. "누나... 위험한데......" 소영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악소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크게 소리치며 불렀다. "누나! 돌아와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흰 그림자가 돌연 그에게 달려들 었다. 소영은 잽싸게 피했는데 어느 결에 그의 몸이 누구인가에게 안겼다. 그 흰 그림자는 바로 악소채였다. 악소채는 소영을 옆구리에 바짝 끼어 안고 돌아 왔던 길을 달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상팔과 두구는 맹렬한 기세로 무기를 휘둘렀다. 소영은 악소채에게 안긴 채 사방을 둘러 보며 적을 살폈다. 적은 이제 일곱 명이었는데 악소채의 출현에 크게 놀란 듯 이내 귀두도 를 십자검법으로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소영은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졌음을 느꼈다. '누나는 나 때문에 어려운 싸움을 하는구나. 나만 없다면 누나는 쉽게 적을 물리칠 수 있을 텐데......' 소영은 결심이 서자 큰 소리로 외쳤다. "누나! 어서 나를 내려 주어요." 악소채는 그가 상처를 입고 그러는 줄로 알고 깜짝 놀라서 물었 다. "왜 그래요? 어디 다쳤어요!" 그녀는 이렇게 물으며 잠깐 소영에게 정신을 판 순간이었다. 왼 쪽 어깨가 갑자기 섬뜩했다. 적의 칼날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그 일장은 매우 날카로워 어깨를 베고 다시 그녀의 가슴을 향하 여 뻗쳐 왔다. 아앗! 악소채는 갑작스런 공격에 비명을 지르며 몇 걸음 물러섰다. 가 까스로 그녀는 상대의 재차 공격을 피했다. "누나 많이 다쳤어요?" "괜찮아요. 동생은 아무 일 없어요?"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며 아픔을 참는 듯 작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소영은 죄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큰 소리로 애원하다시피했다. "누나! 어서 나를 내려 주어요! 응? 난......" 고수들이 유일한 무기는 정신통일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정신을 다른 곳에 쓰게 되면 자연 자세부터가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악소채는 그의 외침을 듣자 다시 다급하게 물었다. "동생! 어디 다쳤어요?" "난 퍽....."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옆구리가 마비되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 다. 소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따뜻한 햇볕이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 다. 그는 누운 채 사방을 살폈다. '어? 내가 왜 이런 곳에 누워 있을까? 누나는 어디에?' 소영은 상체를 일으켜서 다시 주위를 살펴 보았다. 자신은 짚 위에 있었고 주위는 먼지가 겹겹이 쌓여 마치 흉가를 연상케 했다. 옛날에 절이 있던 장소 같았다. 그러나 신상의 모습이 다 헐고 무너져서 예전에 무슨 신을 모시던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신단의 한 구석에 두 사람이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옆에는 죽장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찌그러 진 솥이 보였다. 두 사람은 고역을 치른 듯 머리와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 다. 그들은 모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운기조식중인가 보군.' 소영은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쓰러 졌다. 그러자 등을 돌리고 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소영을 쳐다 보 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공자, 이제 정신이 드나?" 소영은 그제서야 두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그들은 주승과 반개 노인이었다. "네. 그런데 노승께서는 저의 누나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소영의 물음을 받아 거지 노인 반개가 대답했다. "자네 누나는 이미 두 장사꾼에게 구원을 받고 어디론가 갔네. 그러니 걱정할 것은 없네. 편히 누워 있게나." 반개는 힐끗 주승을 쳐다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자네 생명을 구하느라 하루 밤낮을 꼬빡 이곳까지 달려 왔네, 살려거든 될 수 있는 한 움직이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말게." "허허허... 지금 자네가 만약에 죽기라도 한다면 영원히 누나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 주승은 전음입밀의 묘수로 반개에게 말했다. "거지 형, 상팔과 두구, 그 두 놈이 악 낭자를 무사히 구출했을 까?" 반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글쎄? 내 생각으로는 그들도 무사히 그 포위망을 뚫었으리라 믿 는데 그놈들의 무공또한 우리와 별 차이가 없는 놈이니....." 소영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그들은 마치 이야기를 주 고 받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막 열려는데 절 밖에서 무서운 발자국 소리가 들 려 왔다. 소리에 이어 밖에서 누구인지 성큼성큼 절 안으로 들어 섰다. 바람에 날리는 그의 긴 수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엄을 느 끼게 하였다. 그 도사는 얼굴이 보름달같이 둥굴었고 넓고 큰 청색 도포를 입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불진(佛塵)을 들고 등에는 커다 란 보검을 메었다. 그 도사의 걸음은 구름을 타고 나는 듯 옮기는 맵시가 매우 가벼 웠다. 그 뒤를 이어 열 예닙골 쯤으로 보이는 도동(道童)이 따라 들어왔다. 주승과 반개는 힐끗 바라 보고 상대의 정체를 알았으면서도 이내 눈을 감고 운기를 조식하는 시늉을 했다. 소영은 한눈에 그 도사가 악인이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저 중년 도사 처럼 첫인상이 매우 좋아 저런 분 밑에서 무공을 연마해 보았으면......' 소영은 그를 따라 들어온 도동을 자세히 살폈다. 도동은 검은 도 포를 입고 있었으며 혈색은 마치도 복사꽃 같았다. '저 도사와 도동은 무슨 일로 이곳에 왔을까?' 중년 도사는 소영과 다른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듯 곧장 신단 앞으로 다가가서는 손에 든 불진을 휘둘러 먼지를 날려 보냈다. 그 불진이 일으킨 싸늘한 회오리 바람이 소리도 없어 근처의 바 닥을 깨끗하게 쓸었다. 도사는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 있었으며 도동은 바로 뒤에 서서 그를 지켜 보고 있었다. 소영은 그의 행동에 의아심이 생겼다. '저 도사는 보통 인물이 아니로군. 저 등에 지니고 있는 보검으 로 보아도 그렇고 조금 전에 불진을 휘두른 솜씨를 보아도... 그런 데 주승과 반개는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서로 모른 체 할까? 만약 저 도사가 두 노인을 모른다면 이곳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 이고 또 저렇게 태연하지도 않을 것이 아닌가.'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허허허...볼품없는 절이긴 하지만 잠시 들어 가서 쉬어야겠다." 먼저 들어 선 사람은 횐색 장삼 차림으로 총명함과 기지가 넘쳐 보이는 이십여 세의 청년이었다. 그가 몇 걸음 안으로 들어 서자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눈을 부라 리며 들어 섰다. 그는 얼굴색이 무척 검고 귀가 아주 작았다. 그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띠고 안으로 들어 서다가, 이미 대 전에 다섯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눈을 뜨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서서 한참 동안 다섯 사람을 훑어 보고서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장께서는 오늘 어인 일이십니까?" 그러자 이제까지 눈을 감고 있던 중년 도사가 천천히 눈을 뜨며 미소를 지었다. "성형은 집에서 행복만 누리고 지내면서 강호의 일에는 조금도 간섭을 않더니 뜻밖에 여기서 만났구려." "하하하... 저는 벌써부터 짐작하였습니다. 무림에 금궁지약이 나오면 강호의 모든 고수들 특히나 소문도 없이 숨어 살고 있는 사 람들이 모두 들먹거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중년 도사는 얼굴 가득히 난색을 띠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명령을 받고 온 것 뿐이지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 오." 흰 장삼을 입은 청년은 고개를 돌려 주승과 반개를 쳐다 보며 말 했다. "두 분은 도장보다 먼저 오셨습니까? 아니면 후에 오셨습니까?" 중년 도사가 대답했다. "나보다 먼저 와 계셨소." 반개는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있고 싶었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게 되자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이거 정말 재미있군. 우연하게 중, 도사, 선비, 그리 고 이 늙은 거지까지 모이니 마치 회의를 하는 것 같군 그래." 선비라고 불리는 청년은 곧 소매를 걷어올리고 그 속에서 조그마 한 술병을 꺼냈다. "내 이럴 줄 알고 좋은 술을 한 병 준비해 왔소이다. 한 잔씩 나 누며 반 노인의 말씀대로 서로 이야기나 합시다." 그러자 제일 먼저 달려들며 입을 연 것은 주승이었다. 그는 벌써 이틀 동안이나 술구경을 못한 터였다. "술? 좋지? 좋아, 어디 한잔마셔 볼까...... 청년 선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병을 조금 치켜들었다. "이 매화주는 백 년 동안 묵은 것이외다. 도형께서는 술을 좋아 하셔서 웬만한 것은 양에 차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 술은 딱 한 잔 이상은 더 먹지 못할 것이오." 벌써 대전 안에는 술의 향기로 가득차 주승의 코끝을 유혹했다. 청년 선비는 품 속에서 술잔을 꺼내서 한 잔 따랐다. 병에서 나 오는 술빛은 녹색이었다. 주승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벌 떡 일어섰다. "소승이 성형의 술을 좀 동냥하겠소." 청년 선비는 돌연 대전이 떠나갈 듯한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이 매화주를 좀 달라는 것입니까?" "그렇소. 조금 전 성형은 술을 나누어 먹자고 하지 않았소?" "내가 근 삼 년 동안 강호에 나온 적이 없었는데 오늘 따라 모처 럼 길을 나선 것이 이런 인연을 만들었군요. 오늘의 인연을 축하하 는 뜻에서 내가 술을 올릴 터이니 노형께서는 너무 서둘지 말고 잠 시 기다려 주시오. 우선 다른 분부터 한 잔씩 마신 후에 남는 것은 모두 노형이 드십시오." 주승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반 병 정도의 술로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한 잔씩 마시고 나면 무엇이 남겠소?" "아! 이 술은 나도 겨우 반 잔 정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 중에 술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그 분은 냄새만 맡아도 취하니 너무 염려 마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중년 도사가 입을 열었다. "난 술과 인연이 없으니 사양하겠소." 청년 선비는 야릇한 미소를 띠며 즉시 술잔을 중년 도사에게 넘 겼다. 좌중의 시선이 술잔을 따라 움직였다. "도형께서는 마시지 못하시거든 냄새나 맡아 보십시오. 아마 강 호의 어디를 가더라도 이 매화주와 비교할 만한 좋은 술은 없을 것 이오." 중년 도사는 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던지 마지못해 술잔을 받았다. 그는 술잔에 가득 담긴 녹색 매화주를 천천히 코 끝으로 가지고 가 냄새를 맡았다. "과연 좋은 술이군. 내 술은 못하나 짐작컨데 이 술은 사람의 마 음까지도 취하게 할 것 같소이다." 중년 도사가 칭찬을 늘어놓자 주승이 다시 말참견을 했다. "만약 내가 술맛을 보면 더 좋은 평을 할 수 있을 텐데..." "도형께서는 어찌 그렇게 급하시오? 제가 아까 말한 대로 남는 술은 전부 드리겠으니....." 대전에서는 정말 우스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승은 술을 달 라고 조르고 청년 선비는 못 먹는다는 중년 도사에게만 자꾸 술을 권하니 자연 언성이 높아지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청년 선비는 중년 도사의 완강한 사양에 쓴 웃음을 지으며 걸음 을 옮겨 중년 도사와 함께 들어 온 흑의 도동에게 다가섰다. "도형께서 한 잔 드시겠소?" 그러자 흑의 도동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술냄새도 맡지 못합니다." 청년 선비는 또다시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무당(武當) 파의 문규(門規)가 엄하군. 그렇다 면 더 권하지 않겠소이다." 그는 말을 하면서 청년 선비는 반개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맞은 편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래도 반개가 별다른 표정을 보이 지 않자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나 곧 웃음을 띠며 술잔 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래 전부터 진형의 대명은 익히 들었소이다. 제 매화주를 한 잔 드십시오." "이 늙은 거지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오직 밥만 좋아하였지 술과 는 인연이 없소이다, 호의는 고맙소만 사양하겠소. 섭섭히 생각지 마시오." "저의 이 매화주는 이것 뿐이오. 만약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어 느 곳에서도 보지도 못할 것이오. 너무 사양만 하지 말고 한 잔 드 시오." "나는 정말 먹지 못하니 이 잔을 주승 도형에게나 주시오." 그는 말을 끝내고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주승이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다가 왔다. "물건은 확실히 필요한 사람에게 팔아야 하는 법이오. 이 노승은 술을 생명처럼 알고 있으며 설사 그 술에 극독을 섞었다 하더라도 나는 술을 먹겠소. 난 술을 먹고 죽는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겠 소." 청년 선비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공을 바라 보다가 돌연 호탕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렇소이다. 이 값진 술은 임자가 따로 있는 것 같소 이다. 자, 여기 술병과 잔까지 드리리다." 그는 주승에게 술병과 잔을 건네 주었다. 주승은 술병을 받자마자 병째 들이켰다. "아, 과연 술 맛 좋구나." 주승의 말은 청년 선비에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승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먼지가 쌓여 있는 마루 바닥에 털썩 주저앉 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분들은 모두 나를 의심하는구나. 내가 술에 무슨 독이라도 넣었을까 봐......" 그의 말은 혼자서 중얼거린 것 같기도 하였고 또 다른 사람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때 중년 도사가 몸을 일으키더니 소영이 누워 있는 곳으로 다 가왔다. 그는 눈을 빛내며 소영을 한참 동안 내려다 보더니 부드럽 게 물었다. "소시주는 몸이 불편하시오?" 소영은 그에게 퍽 좋은 인상을 받고 있었으므로 웃음을 띠며 고 개를 끄덕였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가! 그러나 조그마한 상처라도 잘못하면 생명까지 잃게 되 네. 좀 보여 주겠나? 내가 치료하는 방법을 조금 알고 있으니." 소영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악의가 없다고 생각하고 시비 를 가리지 않았다. "네, 좋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선배님께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중년 도사는 여전히 소영의 앞에 우뚝 서 있을 뿐 그의 상처를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반개가 소영에게 다가서더니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 애는 이미 이 늙은이가 몇 번 손을 써 보았소. 그러나 별다 른 효과가 없구려. 도장께서 만약 구해 주신다면 늙은이도 감사드 리겠소이다." "빈도(貧道)는 다만 조금의 의술을 깨우쳤을 뿐이외다. 내 생각 에 이 소시주의 병세는 선천적인 것 같소이다. 그것이 근래에 와서 받은 외상의 충격으로 악화되었소이다." 반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영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렇소. 이 소시주는 양명위경(陽明胃經)에 태을혈(太乙穴)을 점격당하였소. 이것은 중상을 입으면 칠일 이내에 생명을 잃고 경 상은 반신불구가 되는 무서운 것이오. 난 의술에 대하여 잘 모르고 다만 그 중세만 알고 있을 뿐이오." "진형의 말씀은 일리가 있소. 그러나 빈도는 부끄럽게도 소지주 를 치료할 능력이 없소이다. 만약 진형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소 시주를 무당산으로 데려가 장문(掌門) 사형에게 보이고 싶소. 그러 면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이외다." 중년 도사는 소영을 힐끗 쳐다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빈도의 사형은 의술이 능통하며 반드시 소시주의 상처를 치료할 것이니 용단을 내려 주시오." 반개는 돌연 싸늘한 눈빛을 띠면서 중년 도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운양자(雲陽子)! 이 늙은 거지는 평생을 두고 많은 고난을 겪으 며 꿋꿋이 살아왔는데 이제 나보고 조그마한 일로 남에게 의지를 하란 말이오? 그건 절대 안 되는 말이오." 그러나 운양자라고 불린 도사는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미소 떤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빈도가 설령 다른 마음이 있다 해도 소시주의 병을 치료해 준다 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겠소? 그러니 너무 좁게 생각지 마시 오." 반개는 한참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돌연 눈을 번쩍 뜨며 대답했 다. "좋소. 데리고 가시오." 운양자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른손을 들어 흑의 도동을 불렀 다. 도동은 달려가 가볍게 소영을 업었다. 운양자는 나지막한 목소 리로 도동에게 명하였다. "가라!" 도동은 즉시 비호같이 빠른 동작으로 대전을 나섰다. 이때 돌연 청년 선비의 외침 소리가 대전을 가득 메웠다. "운양 도형! 잠깐 서시오." 그가 손짓을 하자 옆에 있던 키가 작고 얼굴이 검은 장한이 앞으 로 달려 나가 흑의 도동의 길을 막았다. 운양자가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성(成)형은 이 빈도를 무시해 버리겠다는 것이오?" "아니오이다. 난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소이다, 강호에서 운양 도형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소영은 흑의 도동에게 업혀 있으면서 험악하게 변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운양자는 불진을 몇 번 휘두르며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성형이 나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면 반가운 일이오." 청년 선비는 운양자의 옆을 바짝 따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운양 도형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것은 도형의 보검과 불 진이 무서워서 그러는 것은 절대로 아니오. 다만......" 그는 말을 하며 계속 뒤따랐다. 운양자는 내심 불쾌한 마음이 있었지만 짐짓 웃음을 띠었다. "성형, 무슨 이야기요? 내 귀담아 들으리다." 청년 선비는 대답을 않고 소영을 주시하였다. "운양 도형께서 달려 이 공자를 데려가려는 것은 정말로 치료를 하려는 것입니까?" "그렇소." "내가 보기에는 굳이 데려갈 필요가 없겠는데......" 청년 선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나에게 의술의 재능은 비록 뛰어나지 않지만 저 정도의 상처는 능히 고칠 수 있으니 여기서 고칩시다." "빈도는 이미 진형의 승낙을 얻어 이 소시주를 데리고 가는 길인 데 어찌 성형이 중간에 나서서 귀찮게 하오?" 청년 선비는 바보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도 사람의 생명을 구해 주는 것을 무엇보다도 기쁘게 생각하 는 사람이오. 오늘 모처럼의 기회이니 내가 이 공자를 고치게 해 주시오." 운양자는 이제 음성까지도 날카롭게 변하였다. "빈도의 의술로도 이 시주의 상처를 치료할 수가 없어 부득이 무 당산으로 데려 가는 것인데 어찌 성형은 그리 큰 소리를 치시오? 성형은 자신의 의술을 너무 높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아니오. 그것은 도형의 생각이오. 난 무림의 도동들에게서 의술 을 인정받았소. 그래도 나의 의술을 못믿겠단 말이오?" 두 사람은 계속 걸음을 옳겨 이제는 그들이 만났던 절도 멀리 보 였다. "빈도가 성형의 명성을 듣기로는 다만 백수서생(百手書生)이라는 호칭은 들었어도 의술에 능하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외다." "그것은 도형이 요즘 강호 소식을 듣지 못한 때문이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대뜸 운양자의 옷 소매를 붙잡고 외쳤다. "아참, 그것을 생각 못했었군. 운양 도형께서 정 나를 믿지 못하 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의술을 시험해 보시겠소?" 운양자는 소영을 바라보면서 심각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어린 시주라 하지만 사람의 목숨은 무엇보다 귀한 것. 또한 죽음은 한 번뿐인데 어찌 성형에게 환자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겠소?" 청년 선비는 자신의 뜻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자 한 가지 묘책을 짜냈다. 그는 표정을 바꾸어 부드러운 말로 물었다. "이 공자는 무당파의 문하요?" "무당 문하는 아니지만 이미 부탁을 받았소." 청년 선비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부탁 받았소?" 운양자는 화가 치밀었지만 싸울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꾹 참았 다. "성형도 옆에서 보지 않았소? 빈도가 진형의 부탁을 받고 나온 것을... 이제와서 무슨 엉뚱한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오?" 청년 선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운양 도형! 난 그때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으므로 미처 그 것을 듣지 못했소이다. 그러니 정 그 공자를 데려 가고 싶으면 다 시 절로 돌아가 내 앞에서 진형의 대답을 들으시오." 운양자는 청년 선비의 고집에 할 수 없이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 다. 가던 길을 되돌아 다시 주승과 반개가 있는 곳으로 달려 갔다. 그들이 다시 대전으로 들어서자 반개는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웬 일이오?" 청년 선비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승을 찾았다. '내 술을 얻어 먹었으니 그는 틀림없이 내 편을 들어 주겠지.' 주승은 신단 모퉁이에서 술병을 가슴에 얹고 코를 골면서 세상 모 르고 자고 있었다. 그는 미 간을 찌푸렸다. '저 술꾼을 믿고 왔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반개에게 부딪쳐 보 자.' 청년 선비의 표정은 매우 부드러워졌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허리를 굽혀 반개에게 예를 올렸다. 청년 선비는 예를 마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대협, 조금 전에는 제가 너무나 경솔하게 행동하여서 죄송스 럽습니다. 어른께서는 혹시 강호에서 저의 의술에 대해서 들은 바 가 없습니까?" 그는 반개가 대답할 여유를 주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진형께서는 만약 저의 의술을 믿어 주신다면 제가 즉시 이 자리 에서 저 공자의 상처를 치료하겠습니다." 반개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였다. 소영은 그 청년 선비를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 보았다. 비록 이 목구비가 반듯하고 두 눈에서는 신광이 번뜩이고 있었지만 그의 마 음은 매우 엉큼하게 보였다. 소영은 재빨리 입을 열어 반개의 그릇된 생각을 일깨워 주려 하 였다. "진 아저씨! 전 이 사람에게 치료받지 않을 테예요. 저는 도장 어른을 따라 가겠어요. 아저씨도 조금 전에 대답을 하셨잖아요." 청년 선비는 눈을 부라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무당산은 이 곳에서 천리 길인데 아마 자네 상처로는 그곳까지 가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네. 그래도 가겠다는 것인가?" "난 가다가 죽어도 저 도장 어른을 따라 가겠어요." 그러자 청년 선비의 안색이 분노로 인하여 붉게 변하면서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반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공자는 이 늙은 거지가 운양 도형에게 부탁한 것이니 만약 앞으로 다시 어느 누구라도 간섭을 한다면 그것은 나와 주승에게 도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가만 있지 않겠소."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운양자와 청년 선비를 번갈아 보았다. 운양자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청년 선비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백수서생!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오늘 못다한 말은 다음 기회로 미룹시다." 청년 선비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도형! 내가 졌소. 무사히 무당산에 도착하기를 바라오." 그의 말 속에는 무서운 가시가 돋혀 있었다. 운양자는 그의 말에 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손을 모아 다시 반개에게 예를 올리고 대전을 나섰다. 소영을 업고 있는 도동의 나이는 어렸다. 그러나 걸음은 무척 가 볍고 빨라서 앞서가는 운양자의 뒤를 바짝 쫓았다. 소영은 차가운 바람이 귓전을 스쳐 지나가고 또한 얼굴에도 덮쳐 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동의 등에 얼굴을 묻었 다. 얼마를 그렇게 달렸다. 갑자기 도동이 걸음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은 궁금한 생각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자신의 바로 눈앞 을 험준하고 매우 높은 산봉우리가 가로막고 있었다. 운양자는 사오 척 앞에서 불진을 흔들며 주위를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도동에게 돌리며. "얘야, 소시주를 내려 놓고 여기에서 잠깐 쉬자. 요기를 해야겠 다." 하고 소영을 염려하자 흑의 도동이 이마에 흐른 땀을 씻으며 물 었다. "사부님, 그 백수서생이 뒤를 쫓아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건 염려 말아라. 그 놈은 우리를 쫓아올 생각은 하지 않을 것 이다. 만약 그가 따른다면 반개와 주승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제서야 도동은 천천히 소영을 내려 놓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 다. 운양자는 도동의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얘야. 그렇게 힘드냐?" 운양자는 옷소매에서 음식을 꺼내 들고 소영에게로 다가왔다. "소시주, 두려워할 것 없네. 빈도는 절대로 소시주에게 해를 입 힐 사람이 아니네. 시장할 터이니 어서 먹게나." 소영은 그가 내미는 음식을 받아 먹으며 내심 많은 생각을 하였 다. '이 도장은 내 병을 고쳐만 주려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다른 무엇을 얻으려는 것 같다. 그러나 난 조금 전의 백수서생이라는 청 년에게는 내 몸을 맡기고 싶지 않다. 설령 이 도장이 나쁜 사람이 라고 하여도 나는 이미 결정한 일이니 조금의 후회도 없다.' 그의 머릿속은 희망과 고뇌가 뒤범벅이 되어 어지러웠다. 잠시 후 몇 개의 산을 넘고 몇 개의 개울을 지나 잠시도 쉬지 않 고 길을 재촉하니 소영을 업고 있는 도동의 피로는 극도로 달하였 다. 이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그 다음 날이 거의 기울 즈음 갑자기 소 영의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고 주체할 수 없는 진통이 일어났다. '내가 이렇게 죽더라도 내 자신이 자청해서 길을 따라나선 것이니 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누나를 만나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그는 미처 생각을 끝맺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 버렸다. 소영은 얼마가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 몸에 뜨 거운 두 손으로 쉬지 않고 그의 몸을 치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상처는 이 따금씩 뜨끔뜨끔 아파왔다. 이윽고 그는 가슴이 후련하고 정신도 맑아져 마치 새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번쩍 두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하얀 수염을 길게 늘이고 상투 를 튼 얼굴이 등근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자기의 시선과 마주치자 얼른 미소를 띠며 계속 손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주물렀다. 소영은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려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 노인의 바로 뒤에는 자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운양자가 매 우 숙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소영이 미소로 인사를 하는데 돌연 온 몸이 뜨거워지며 노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잠시 후 노인이 긴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손을 거두어 들이며 소 영을 바라 보았다. "소시주! 지금은 좀 어떤가?" 소영은 그 노인의 엄숙한 위풍에 눌려 공손히 대답했다. "네. 좀 나은 것 같습니다. 노도장께서는 운양 도장의 사형이시 지요? 무당파의 장문(掌門)이시구요?" 백염(白炎) 도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빈도는 무위(無爲)라고 하네. 소시주의 병세는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제 막혔던 혈맥을 터 놓았으니 아직 말을 많이 하지 말게. 소시주가 완전히 나으면 그때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하 세나." 소영은 백염 도인의 겸손한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 다. 그는 쑥스러운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의 악 누나는 어디에 있나요? 누나는 무사한가요?" 무위도장은 무어라 대답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소영을 쳐다 보 더니 손짓으로 운양자를 내보냈다. 이제 넓은 실내에는 무위도장과 소영만이 남았다. 무위도장은 몹 시 피로한 듯 눈을 감고 운기를 조식하였다. 소영도 잠을 청하였다. 거의 반나절을 자고 난 후 소영은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이제는 옆구리의 상처도, 가슴의 불 같은 뜨거움도 깨끗이 사라 진 느낌이었다. 그는 다시 주위를 살피려고 눈길을 돌리다가 바로 자기 옆에 앉 아 있는 무위도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도 내 곁에 있었구나!' 소영은 무슨 죄를 진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돌려 그 의 시선을 피했다. 밖은 벌써 어두웠다. 소영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침상에서 내려 가려는데 무위도장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밤도 깊고 바깥 날씨는 무척 추우니 밖으로 나가지는 말아라. 넌 조금 전에 약을 먹었으니 이 단실(丹室) 안에서 마음대로 몸을 움직여라. 그래야만 약효과도 더 빨라진다." 무위도장은 이제 말을 놓았다. 그러나 소영에게는 이것도 과분하 였다. '무당파의 장문인은 그 인품이 숭고하여 나같은 어린아이에게도 가볍게 대하지 않는구나.'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직도 흰 연기를 내고 있는 화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무위도장은 뒤에서 쳐다만 보고 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그 화로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나는 흰 연기가 계속 나왔다. 소영은 그 연기를 내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몇 걸음 더 다가가서 그 화로 속을 들여다 보려고 했다. 그 러나 그곳에서 나오는 열이 어찌나 강한지 깜짝 놀라서 뒤로 몇 걸 음 물러났다. '저 화로에는 도대체 무엇이 타고 있길래 저토록 뜨거울까? 또 저향기를 담은 흰 연기는......' 소영은 다시 화로로 다가가 고개를 숙여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 는 빨갛게 불길이 솟아 오르는 가운데 청색 유진이 움직이고 있었 으며 흰색 연기는 그 이상한 물체 밑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소영은 돌연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옛날에 아버지께서도 저렇게 연단(煉丹)하고 계셨는데......' 그는 고개를 돌려 무위도장에게 물었다. "노도장님께서는 연단하고 계십니까?" "허허... 잘 알아맞히는구나. 너를 위하여 약을 만들고 있지." "제가 먹을 약을 만들고 계시다니요?" "그래. 앞으로 삼 일만 지나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소영은 적잖이 놀라며 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노도장님! 도장님은 어째서 처음 보는 저를 이처럼 아껴 주시는 것 입니까?" "우리 무당파는 자비로서 사람을 구해 주고 있다. 어찌 너라고 외면하겠느냐? 감사를 하려거든 운양도장에게 하여라." 소영은 얼마 동안 무위도장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 뒤에 무뚝뚝 하게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요. 노도장께서는 자 비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저에게서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무위도장은 마치 소영의 입에서 이처럼 대담한 말이 나오리라고 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자 한동안 멍하니 소영을 바라 보기만 하고 무어라 말을 못했다. 무위도장은 미간을 찡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빈도가 너를 치료하여 준 것은 다른 또 하나의 이유가 있을는지 몰라도 너의 생명을 건져 주고 또 너를 훌륭한......"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위도장은 말을 멈추고 외쳤다. "누구냐?" 문 밖에서 낮은 대답이 들렸다. "제자, 급한 일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들어 오너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검은 수염을 기른 귀가 큰 중년 도사가 들어 왔다. 검은 수염의 도사는 운양자와 나이는 비슷하게 보였으나 무위도 장에게 대하는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무엇이냐?" "누군가 산에 올라왔습니다." 무위도장의 안색이 약간 변하였다. "어떻게 생겼더냐?" "저는 그 자의 얼굴을 보지 못하여 무어라 말씀드릴 수 없음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별것은 아니지만 혹시 사부님께서 걱정하 실까 염려되어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알았다." 소영은 그 중년 도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 있는 곳으로 달 려갔다. 그러자 무위도장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소영은 눈을 빛내면서 무위도장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악 누나가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나가 알아 보겠어요." 그는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8. 몰려오는 무림의 고수들 밤하늘에는 별무리와 조각달이 한데 어울려 잔잔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소영이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밤도 깊고 날씨도 차가우니 소시주께서는 안으로 드십시요." 소영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쳐다 보니 어느 사이에 달려 왔는지 한 도동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소영의 옆에 서 있었다. 소영은 상대가 나이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알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들어가지 않겠소. 참견 마오!" 그 소년 도인은 십 팔세 정도로 보였는데 나이에 비해 무척 기품 이 있어 보였고 등에는 한 자루의 보검을 메고 있었다. 그는 소영이 외치는 소리에 잠깐 주춤하더니 곧 표정을 싸늘하게 바꾸면서 불쑥 손을 뻗쳐 소영을 팔목을 잡으려고 했다.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큰 소리를 치시오! 소시주께서 정히 말 을 듣지 않으시겠다면 빈도가 수고하여 드리리다." 소영은 재빨리 옆으로 피하며 호통을 쳤다. "야, 이놈아! 난 절대로 들어 가지 않겠다는데 네가 왜 상관을 하느냐? 그 알량한 무공을 뽐낼 것이냐?"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년 도인은 번개처럼 빠른 동작으로 소영 에게 덮쳐 갔다. 미처 소영은 피하지도 못하고 손목을 잡혔다. 그는 보기와는 달리 무척 동작이 빨랐으며 또한 내공도 적지 않 은 듯 했다. 소영은 그에게 잡힌 팔목이 저려옴을 느꼈다. 소영은 다시 소년 도인에게 대들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동자야! 그 시주를 자기 마음대로 다니게 내버려 두어라." 그러자 소년 도인은 소영의 손을 놓고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소영은 등 뒤의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앞을 향해 성큼성큼 걸 음을 옮기며 주위를 살펴 보았다. 주위에는 갖가지 사철나무들이 파란 잎을 흔들며 달빛을 받아 출렁일 뿐 사위는 어두워 분간할 수 가 없었다. 소영은 걸음을 문을 찾았으나 이 정원은 얼마나 큰지 아무리 찾 아도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나무들 뿐이었다. 소영은 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사방으로 뛰어 다니며 문 을 찾았다. 다시 반대쪽으로 달려 갔으나 그곳도 아니었고 또 왼쪽 으로 달려 가도 무성한 나무들 뿐이었다. 소영은 코끝이 시큰해지면 슬픔이 복받쳤다. "악누나! 누나!" 적막한 밤을 깨뜨리는 소영의 외침을 절규에 가까웠다. 소영은 다시 소리 높이 악소채를 부르며 정원을 지나 숲을 뚫고 곧장 앞으 로 내달렸다. "악 누나... 악 누나..." 그가 밤길을 달리면서 부르는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절 한 감정을 느끼게 하였다. 얼마나 뛰었는지 숨이 턱까지 차고 전신에 힘이 풀려 더 뛰지를 못하고 소영은 그 자리에 털색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돌연 저 멀리서 악소채가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것이 어 렴풋이 보였다. 그는 환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소영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겼 는지 결사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악 누나! 잠깐만 기다려요. 악 누나!" 그에게 뚜렷이 나타났던 악소채는 다시 멀어져 갔다. 얼마 후 얼굴에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번쩍 눈을 뜨고 몸을 일으 키려 하였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이곳은 숲속인가 본데 왜 이런 곳에.." 소영은 사방을 살폈으나 주위는 울창한 숲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보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운양 자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자신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운영자는 소영의 놀라는 표정을 보더니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소시주, 그렇게 놀라지 말게. 이제야 깨어났나?" 소영은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앉았다. "여기가 어딥니까?" "여기는 바로 삼원관(三元觀)의 뒷산이네." 소영이 고개를 들어보니 과연 숲 너머로 커다란 전각이 높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운양자는 몸을 일으켜 소영의 곁으로 다가 서며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나?" "괜찮아요. 그런데 도장께서는 저의 악 누나를 만나셨습니까?" "아니, 만나지 못했네. 그러나 자네 누나가 자네를 그리워 한다 면 언젠가는 이곳을 찾겠지!" 소영은 실망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다그쳐 물었다. "그럼 어제 저녁에 왔던 사람은 저의 악 누나가 아닙니까?" "아니었네, 소시주. 우리 장문 사형이 비록 무공의 경지가 높고 의술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항상 한 곳에만 계시면서 시끄러운 세 상을 등지고 사신다네. 그래서 본 제자들도 그분을 뵙기가 무척 힘 들다네. 그런데 소시주는 장문 사형의 눈에 들어 손수 치료하시고 또 자네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영의 끼어 들었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의술입니까? 저의 악 누나도 저의 병을 고칠 줄 압니다." "허허허... 자네 말대로 자네 누나가 독특한 의술을 지녔다 하더 라도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지 않는가? 어떻게 자네 혼자 서 이 넓은 천지를 돌아 다니며 누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못했다. 운양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만약에 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이같은 일을 저지른다면 자네 상처는 다시 재발하여 죽게 되네. 더군다나 장문 사형의 미움 을 받으면... 자네가 살고 싶으면 상처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얌전 히 있게." 소영은 내심 느끼는 것이 있어 무슨 결심을 한 듯 입술을 깨물었 다. '그렇지! 우선 내 몸부터 돌보고 다음에 누나를 찾아도 늦지는 않다.' "도장께서는 저보고 말을 잘 들으라고 하셨는데, 그러기 전에 우 선 제 청을 한 가지 들어 주시겠습니까?" "어디 말해 보게나. 빈도가 들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거절하지 않겠네." 무당파는 강호에게서도 이름난 문파로서 정의를 위하여 평소에 무림 동도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무위도장과 운양도 장은 모두가 무당파에서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귀인들로 서 무공의 뛰어남은 물론 인품도 뛰어났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숭앙을 받는 무위도장과 운양도장이 어린 아이를 이용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될 수 있으면 소영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다. 소영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언제든 우리 악 누나가 이곳으로 나를 찾아 오면 틀림없 이 저에게 알려 주시고 또 악 누나와 같이 이곳을 떠나게 해 주시 겠어요?" 운양자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을 하더니 무슨 결심을 한 듯 눈을 빛내면서 대답했다. "좋네. 빈도가 자네의 청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지!" 그러자 소영의 표정은 매우 밝아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악 누나는 반드시 나를 찾아 올 것이다." 운양자는 그의 말을 듣고 내심 짚이는 것이 있어 부끄러운 마음 이 들었다. '부득이 자네를 이용하는 것이니 너무 섭섭히 생각지 말게나.' "허허허... 아직까지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하군. 어젯밤에 자 네가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나도 자네를 찾느라고 무척 애를 먹었 네. 그리고 자네가 지쳐서 기절했을 때 나의 내공으로 자네 운기를 되살려 생사의 지경에서 구해 내었네. 벌써 자네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과연 행운아일세. 지금 자네의 체력은 좋지 않으 니 내가 업고 가지!" 운양자는 소영을 가볍게 등에 업었다. 소영은 이미 말썽을 부리 지 않기로 약속을 하였으므로 그의 호의를 뿌리치지 않았다. 운양자는 곧 길을 재촉하여 관중으로 달려 나갔는데 몇 개의 커 다란 정원을 지나 청색으로 된 담을 지났다. 커다란 세 개의 관중에서 유독 이곳만이 담이 높았으며 좌원(座 院)의 입구는 청의 도동이 지키고 있었다. 소영은 주위를 살폈다. 운양자는 문앞에 다가서자 소영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소시주! 여기서부터는 걸어 들어 가야 되네." 두 사람이 원문을 지나치려는데 그곳에 서 있던 청의 도동이 운 양자에게 다가 서면서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삼사숙님! 장문 사존께서 손님을 접대하고 계시니 조금 기다리 셨다가 들어 가십시오." 운양자는 청의 도동을 날카롭게 쏘아 보며 물었다. "어떤 손님인데 나까지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가?" "제자는 모르옵니다. 그러나 장문 사존께서 그 손님에게 무척 겸 손하게 대하셨으며 특별히 저를 시켜 이곳에서 아무도 안으로 들여 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삼사숙께서 무슨 바쁜 일이 있으시다면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안으로 들어가 여쭈어 보겠습 니다." "아니다. 내가 잠시 후에 다시 오겠다." 운양자는 소영이의 손을 잡고 원문을 나서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어떤 손님일까? 나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다니.'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도 길을 재촉하여 좌원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대전에 도착하였다. 무위도장의 대전에 비하면 비길 데 없이 조그맣고 위용도 없어 보였지만 오히려 깨끗하고 경치가 좋아 소영의 마음에는 흡족한 곳 이었다. 운양자가 먼저 성큼성큼 내실로 들어 가면 손짓을 하였다. 소영은 주위의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들에 정신이 팔려 그의 손 짓을 못보고 그냥 그대로 서 있었는데 운양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그렇게 보는가? 어서 방으로 들어 오게. 이곳에는 더 볼 것이 많네." 운양자의 내실은 무척 깨끗하였다. "어서 들어와 편안하게 앉게나. 이 방안에 있는 물건은 마음대로 보아도 좋네. 그러나 절대로 만지지는 말게나." 소영은 방안으로 들어 서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건너편 벽에는 보검과 도포를 걸어 놓았으며 그 아래 조그만 탁상 위에는 세 개의 금화살이 놓여 있었다. 그 한쪽 구석에는 흰 비단으로 덮혀진 백혹 소반이 있었다. 운양자는 무척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소영을 아랑곳하지 않고 운 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소영은 어린아이였다. 운양자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가만히 걸음을 옮겨 탁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 다. 그 세 개의 금화살에는 각각 정교한 무의가 새겨져 있었으며 무척 아름다웠다. '이 금화살을 사용하는 사람은 무공과 지위가 높은 사람같군. 이 촉에 새겨 있는 도안은 누가 보더라도 아주 정묘한 솜씨인데.' 금화살의 커다란 촉에는 무슨 꽃을 새겨 놓았는데 장미 같기도 하고 백합 같기도 하였다. 그는 백색 비단으로 덮여 있는 백옥 소반으로 다가섰는데 백옥 소반의 둘레에는 금화살의 꽃무의와 똑같은 것이 수놓여 있었으며, 특히 탁상에 덮여 있는 비단에도 빨간 실로 똑같은 꽃무의를 수놓 은 것이 이채로웠다. 소영은 자꾸만 호기심이 생겨 자꾸만 손이 탁상으로 올라갔다. '이 탁상에는 무엇이 있기에 이렇게 덮어 놓았을까? 만지지 말라 고는 하였지만 지금은 눈을 감고 있으니 이 기회에..." 소영이 살그머니 손을 들어 막 백색 비단을 들추려 했다. 이때 돌연 등 뒤에서 차가운 외침이 들렸다. "손대지 말게." 소영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음성이 들렸던 곳을 보았다. 내실의 출입 구에서 십오, 육세 정도의 도동이 서 있었다. 소영은 불쾌했다. 얼마 동안 그를 쏘아 보고 있으려니 옆에서 운 양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소시주,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말게나. 그 백색 비단 밑에는 독약이 있네. 모두가 자네를 위한 것이라네." 소영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리 를 잡고 앉으려는데 다시 문 밖의 도동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장문 사존께서 사부님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손님은 가셨느냐?" "제자는 청학(靑鶴) 사형의 전갈을 받고 왔기 때문에 손님이 가 셨는지는 자세히 모르옵니다." 운양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려 소영에게 물었다. "소시주도 같이 가겠나?" 소영이 대답도 하기 전에 도동이 입을 열었다. "장문 사존님께서 저 시주님도 함께 오라고 하셨습니다." "알겠다." 도동이 예를 올리고 물러가자 그는 소영의 손을 잡고 내실을 나 서며 부드러운 음성을 말했다. "소시주, 사형 앞에 가서는 예를 갖추게. 혹시 손님이 소시주가 아는 사람이라도 아는 체를 하지 말게나. 알겠나?" 두 사람은 곧 무위도장이 거처하는 단실에 당도하였다. 그곳에는 무위도장 혼자 있었는데 그의 표정은 심각하고 수심에 쌓여 있었 다. 운양자는 대뜸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운양자는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린 후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장문 사형을 뵙겠습니다." 무위도장은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운양자와 소영을 번갈 아 쳐다 보며 자리를 권했다. "사제! 어서 앉게. 너도 자리에 앉거라." 운양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장문 사존께서 무슨 지시라도 있으십니까?" 그는 무위도장의 표정 속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위도장은 무당파의 모든 무공의 절기를 터득하였으며 인품이 높아 악을 모르고 헛된 욕심을 갖지 않았다. 무림에 나간다면 필시 커다란 명성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이곳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원한을 살 만한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제자들에 게도 될 수 있으면 산을 내려 가지 못하게 하며 선(禪)을 일깨워 주었다. 운양자는 처음으로 무위도장의 수심에 쌓인 표정을 보고 내심 크 게 걱정을 하였다. '조금 전에 찾아온 손님 때문인 것 같군. 무슨 일일까? 너무 심 각한 것 같아 감히 무어라 위로의 말을 못하겠구나. 혹시 무당파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나 아닐까? 아니지, 아닐 거야......' 운양자의 머리속은 여러가지 잡념으로 매우 어지러웠다. 잠시 동 안 침묵이 흐른 후에 무위도장이 소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무 겁게 입을 열었다. "무림의 아홉 개 문파와 서강, 서북에 있는 웅주들은 모두 금궁 (金宮)의 열쇠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며 그 금궁의 비밀을 알려고 목숨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빈도도 역시 그 열쇠와 비밀을 알고 싶지만 무림의 일에 뛰어 들어 인명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했 다. 그것은 무림에서 일찍이 없었던 보물이지만 선한 사람들에게는 화가 되고 있다. 어느 누구라도 금궁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 무림 의 수많은 고수들에게 적이 되고 만다. 어제의 절친한 친구가, 형 제가 심지어는 사제지간도 적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명리(名利), 두 글자는 확실히 무서운 악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소영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런 말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 이때 무위도장은 잠시 숙연해지더니 혼자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 갔다. "빈도는 금궁에 있는 보물에는 욕심이 없지만 선사조(先師祖)의 유해는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는 선사조의 명예를 위 해서라도 부득이 나서야 되겠다. 빈도는 억지로 너를 위압하지는 않겠다. 이 문제는 네가 결정할 일이다." 소영은 어리둥절하여 무위도장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 보았다. "조금 전에 빈도는 무림의 몇몇 고수들과 소림사의 두 고승들을 만났다." 그의 말에 운양자는 크게 놀랐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아왔습니까?" 무위도장은 소영을 손짓으로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이 소시주 때문이네." 운양자의 표정은 엄숙했다. "사제! 그들을 원망할 수는 없네. 그들은 그 금궁과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인물들이네. 사대 문파의 가보가 들어 있고 또 여섯 고인들의 절기를 지닌 보물과 열 명의 무림선배들의 생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이 들어 있네. 지금이라도 열 명의 선배들과 관계만 맺을 수 있다면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금궁의 열쇠를 찾을 수 있네." 무위도장은 다시 소영을 가리켰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이 소시주와 관계가 있네." 그러자 운양자가 손을 흔들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 소시주는 무공도 없고 또 아직 상처도 다 낫지 않았 는데 어찌 그들이 괴롭히게 둘 수 있습니까? 사제는 외면할 수 없 습니다." 그는 소영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소시주 만약에 무림의 누군가의 손에 가게 된다면 그들은 이 소 시주를 이용하여 악운고와 악소채를 위협하여 소시주의 몸과 금궁 의 열쇠를 바꾸려 할 것입니다. 그래도 장문 사존께서는 소시주를 내보내시겠습니까?" 무위도장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 다. "그래서 내 미리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이 일은 소시주가 결정 하여야 할 일인데 어찌 우리의 생각만으로 결정을 하겠는가?" 운양자는 대뜸 소영의 손을 힘차게 쥐며 말했다. "소시주, 이일은 소시주가 결정해야 되겠네. 소시주가 만약 여기 를 떠난다고 하여도 우리는 막지 않겠으며 다행히 이곳에 남는다고 하면 우리 무당파의 명예를 걸고 소시주를 안전하게 보호하여 주겠 네." 소영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무당파는 정당한 문파이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중주쌍고와는 다르구나.' 운양자와 무위도장은 조용히 소영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영은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히고 하나에서 열까지 신중하게 생각하였지만 웬일인지 쉽게 결정되지가 않았다. '저 운양도장의 말대로 다른 사람에게 잡혀 괴로움을 당하는 것 보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좋겠는데. 그러나 내가 선뜻 저 사람 들의 말에 따르면 훗날 악 누나가 나를 찾으로 왔을 때 저 사람들 이 그것을 이유로 트집을 잡을 것이 두렵군. 더구나 저 사람들은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때 운양자가 다그쳐 물었다. "소시주,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나?" 무위도장도 그의 말을 거들었다. "네 생각을 한 번 듣고 싶구나." "두 분 도장님들은 저하고 약속을 하시겠어요? 훗날 저의 악 누 나가 이곳으로 저를 찾아 올 때 누나를 따라가게 해 주겠습니까?" 무위도장과 운양자는 서로 얼굴을 쳐다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 다. "두 분 도장께서는 나쁜 마음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며, 또 제 생 명을 건져 주신 은혜를 생각하여 이곳에 남을 생각이오나 만약 제 부탁을 들어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부득이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운양자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시주! 자네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들처럼 인자하게 잘 대하여 줄 것 같은가?" 소영은 고개를 흔들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된다면 저는 죽음으로써 그들의 흉계를 무너뜨리겠어요. 그럼 그들 이 저를 미끼로 우리 악 누나를 괴롭힐 수 없을 거예요." "무척 총명하군. 빈도는 너의 조건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마." 소영은 눈을 빛내면서 즉시 무위도장 앞에 무릎을 끓었다. "처음에 절에서 도장님을 뵙고 무척 인자하고 어지신 분이라 생 각했어요." 무위도장은 그의 거짓없는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운양자에 게 말했다. "소시주는 이제 우리 손님이니, 본관의 모든 제자들에게 일러 앞 으로 어느 누구도 무당산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게나. 혹시 무림의 규칙대로 정식으로 나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우선 나에게 알리라고 하게." 운양자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고 물러나자 무위도장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소영을 보면서 물었다. "너는 지금 강호의 인물들이 온통 너의 행방을 찾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느냐?" "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벌써 수십 년 동안 무당파의 제자들에게 엄명을 내려 무림 의 인물들과의 접촉을 끊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소시주의 안전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무림의 모든 인물들에게 칼을 겨누게 되었 다. 그렇다고 강호를 시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그들 을 막기만 할 것이다. 나는 너를 위해서......" 그가 말끝을 맺으려 할 때였다. 돌연 밖이 소란해지고 종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무위도장의 표 정은 일순 냉랭함이 감돌았다. "벌써 귀찮은 손님이 찾아 온 모양이군."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였다. "내 어찌하다 어린 나이에 이러한 풍파를 겪어야 하나? 나를 서 로 빼앗으려고 무림의 고수들이 혈안이 되어 서로 살생을 하다니.' 문밖에서 젊은 제자가 외쳤다. "장문자존께 아뢰오. 관문 밖에서 강남의 사공자(四公子)가 장문 사존님을 뵙자고 합니다." 순간 무위도장의 안색이 약간 당황하는 빛을 띠었다. 그러나 곧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들을 청선각으로 안내하여라." 그는 소영을 뚫어지게 바라 보며 말했다. "소시주 나는 평생 동안 정당한 일이 아니면 하지를 않을 사람이 다. 너는 그들 앞에서 삼지관에 있겠다고 말하여라. 그러면 그 다 음 일은 내가 너를 대신하여 처리하겠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시주, 나와 같이 사공자를 만나 보러 가자." 무위도장은 소영의 손목을 잡고 청선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시주, 지금 청선각에서 기다리고 있을 강남의 사공자는 무공 이 뛰어난 무서운 놈들이다. 아직까지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그놈의 무공은 비화상인(飛花傷人)할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소시주는 무공이 없으므로 만약에 그들이 손을 써서 나와 소시주를 공격한다면 소시주의 생명이 위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 곁을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소시주를 구할 수 있다. 알겠느 냐?" "네. 전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장님의 말씀을 명심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소시주는 무척 용감하고 말도 잘 듣는구나." 소영은 백석으로 포장된 길을 따라 청선각으로 가면서 주의를 살 펴 보았다. 삼지관은 분위기는 살벌했으며 여기 저기에 도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세 개의 중전원(重殿阮)을 지나갔는데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이며 커다란 화원이 보였고 그 화원 중앙에 빨간색 누각이 세 워져 있었다. 누각에는 큼지막하게 청선각이라고 씌어 있었으며 주 위에 샘물 흐르는 소리와 울창하게 솟아 있는 소나무 숲에서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소영의 어지러운 마음속을 달래 주 었다. 그 청선각은 조금 큰 연못 가운데에 지어진 것으로서 그곳을 잇 는 다리가 하나 있었다. 다리에는 두 명의 도동이 서 있다가 무위 도장을 보자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손님은 벌써 도착하였고 지금 운양사숙께서 손님을 맞고 계십니 다." 무위도장은 다리를 지나며 소영에게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시주, 명심하여라. 내 곁에서 절대로 떨어져 있지 말아라."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긴장된 마음을 진정하며 누각 안으로 들어 갔다. 강남의 사공자는 운양자와 무슨 이야기인지 열심히 하다가 무위 도장이 들어 서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실은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네 명의 공자가 보내는 날카 로운 눈빛은 무위도장을 덮쳐 누를 듯한 기세였다. 그들 중 제일 왼쪽에 있는 공자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무당산을 찾은 것을 용서하십시오." 무위도장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그들에게 예를 올린 후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빈도가 직접 네 분을 만나지 못하고 사제를 먼저 보낸 것을 크 게 허물하지 마시오.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왼쪽에서 서 있던 공자도 허리를 굽혔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도장 선배의 명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오늘 에야 도장 선배를 뵈옵게 되었으니 우리들의 소원을 이룬 것 같소 이다." 무위도장은 그 말에 가시가 돋혀 있음을 느끼고 내심 괘씸하게 생각했다. "저 놈들이 벌써부터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빈도는 원래부터 게으른 탓으로 강호에 잘 나서지 않아 미처 시 주의 명성을 존경하지 못하였소이다, 오늘 뜻밖에도 네 분이나 한 꺼번에 만나니 기쁘오." 이번에는 오른쪽 끝의 공자가 입을 열었다. "도장 선배는 세외(世外)의 고인이므로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 처럼 강호를 헤매지는 않을 것이오." "원 별말씀을... 너무 겸손하지 마시오." 무위도장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빈도가 비록 강호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사공자 명성은 익히 들 었소이다. 그런데 서로 인사가 늦었구려." 이때 왼쪽에 앉아 있던 공자가 앞으로 나서면서 먼저 입을 열었 다. "우리를 소개하여 드리리다. 저는 일진풍(一陣風) 장평(張萍)이 라고 하오이다." "오독화(五毒花) 왕검(王劒)이오." "유월설(六月雪) 이파(李波)요." "한강월(寒江月) 조광(祖光)이외다." 그들은 각각 자기 소개를 하였다. 무위도장은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고맙소이다. 이렇게 만나......" 조광은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 보면서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 다. "우리 사형제는 도장 선배께 몇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왔소 이다." "오, 그래요? 그럼 말씀해 보시오. 빈도는 귀를 기울여 듣겠소이 다." 그러자 장평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도장 선배의 뛰어난 안목으로 이미 우리 사형제의 무 공은 짐작하셨을 것이오." "여러 번 들었소이다." 왕검이 겸손하게 말했다. "별 말씀을......" 그는 무위도장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물론 강호의 소문에 우리 사 형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나쁜 평이 있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소 이다. 그러나 우리 사형제는 절대로 그렇지 않소이다. 사람의 선과 악은 신념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오?" 무위도장은 웃는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소영은 왕검의 말에 상대의 의도를 직감하였다. '저 놈들이 나를 끌고 가려고 자신들의 자랑만 하는구나. 어리석 게도 자신을 높여 말하다니.' 이때 장평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강호의 소문을 어찌 전부 믿을 수 있겠소. 한낱 헛소문 에 불과하니 도장 선배께서는 믿지 않으시리라 믿겠소." 하고는 잠깐 주위를 훑어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요전에 운양 도형께서 조그만 어린아이를 인질로 붙잡아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이 정말인지 알아 보려고 왔소이다." 운양자는 울화가 치밀어 막 입을 열려는데 무위도장이 저지시켰 다. 이때 두 번째의 왕검이 소영을 바라 보며 말했다. "도장 선배께서는 무당파의 장문인이시니 조금도 거짓말은 안 하 시리라 믿소이다." 그의 말에는 다분히 무위도장을 조롱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위 도장은 조금의 반응도 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제위께서는 너무 사실 무근한 말씀을 하셨소이다. 사실은 빈도 의 사제가 중병에 걸린 동자를 데리고 왔습니다만... 그것은 인질 이 아니라 구원이외다." 조광이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도장 선배는 그 동자가 누군지를 알고 계시오?" 무위도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악가의 검법은 온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어찌 모르겠소. 악운고를 만난 적은 없으나 그의 무공은 일찌기 알고 있소이다." 조광이 말을 받았다. "그 동자가 바로 악운고의 아들이오." 그러자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소영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누가 그렇다고 하던가요? 난 소영이라고 합니다." 강남의 사공자는 의외의 말에 모두 눈을 빛내며 소영을 쳐다 보 았다. 왕검이 부드럽게 물었다. "소영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럼 악소채는 자네하고 어떤 관계인가?" "내 누나요." 옆에서 조광이 끼어 들었다. "자넨 소가이고 그녀는 악가인데 어찌 누나라고 하는가?" 소영은 얼른 대답할 말이 없어서 잠시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까 장평이 음험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자네가 소영이라도 좋고 악영이라도 좋네. 아무튼 악운고와 관 계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지 않나." 풍, 화, 설, 월 사형제는 항상 행동을 같이 해 왔고, 또 깊은 뜻 을 가지고 이곳에 왔으니 서로의 의사가 상통할 수밖에 없었다. 왕검이 농담을 하듯이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강호의 아홉 문파들이 일찍부터 우리 사형제를 흑도라는 이름의 문파로, 진정 흑도의 인물들은 우리 사형제를 가리켜 백도라고 하 였소이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사형제를 꺼린 겁장이들이 지은 이 름일 거요." 그는 이 몇 마디의 말로써 무위도장에게 많은 뜻을 암시하였다. 자신들의 행동은 선과 악에 구애받지 않고 또한 흑도와 백도의 어느 문파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무위도장은 재빨리 그의 말뜻을 짐작하였지만 운양자는 그가 엉 뚱한 말을 하고 있다고 눈치챘다. "왕형의 말씀은 무척 이해하기 어렵소이다. 좀 쉬운 말로 해 주 겠소?" 이파가 대답했다. "우리 형제들이 이렇게 온 것은 다만 저 공자 때문이오." 그의 음성은 무척 음험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공포감 을 느끼게 하였다. 운양자는 참을 수 없는지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네 분은 어떻게 하시겠소?" 조광은 손에 들었던 찻잔을 천천히 탁상 위에 내려 놓으며 말했 다. "우리 사형제는 쓸데없이 나돌아 다니지를 않소이다. 무당파는 항상 정직한 일로 온 무림의 선망이 되고 있는데 이제 어린 동자를 인질로 데려다가 괴롭히고 있으니 그것은 무당파의 명성을 더럽히 는 일이오. 만약 강호에서 그것을 알게 된다면 무당파는 물론 도장 선배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소? 그러나 다행히 그 동자를 우리에 게 넘겨 준다면 지금보다 더 큰 명성을 얻게 될 뿐더러 우리 사형 제와도 친구가 될 수 있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양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 서 일어났는데 무위도장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 끌었다. "사제, 참게." 무위도장이 강남의 사공자에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분의 성의는 매우 감사하오. 우리 무당파를 염려하여 주시 는......" 무위도장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밖에서 떠들 색한 음성이 들려 오더니 청의 도동이 누각 안으로 달려 왔다. 그는 무위도장에게 예를 올린 후 한 장의 빨간색 종이 쪽지를 전 하였다. 무위도장은 재빨리 그것을 받아 쥐고 펴 보았다. <조주(曺州) 초곤산(礎崑山) 배(拜).> 무위도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청의 도동에게 말했다. "귀빈을 한 분 초대하는 것과 열 분 초대하는 것이 무엇이 다를 까! 어서 이곳으로 모시고 오너라." 풍, 화, 설, 월, 등 네 명은 갑자기 나타난 또 하나의 상대를 매 우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새로 나타난 놈은 누구일까? 늙은이 말투로 보아 예사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일에 방해자는 아닐지 모르겠군. 점점 일이 묘하게 되어 가는데.' 그들은 점점 자신들이 불리해지자 마음이 다급하여 조광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장 선배, 지금 찾아 온 분은 어느 고인이시오?"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시오. 자연히 알게 될 터이니......" 그러자 조광이 무위도장 앞에 놓여 있는 빨간 종이에 장풍을 일 으켜 재빨리 집어 들었다. "미안하오이다. 우리 형제들은 성질이 급해서... 우리들도 그분 의 이름을 알아야 조금 후에 당황하는 결례를 면할 수 있지 않겠 소?" 운양자는 내심 조광의 손바람의 절기에 감탄하였다. '오래 전부터 이 사공자들에 대해 절세 무공에 대해 소문을 들어 왔 데 이제 보니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군. 조금 전의 일수 휘장(徽 章)만 보더라도......" 운양자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길을 돌려 무위도장을 보았으나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조광이 종이에 써 있는 글을 보려고 손에 펴는 순간 왕검이 그가 재빨리 잡아 챘다. "하하하... 난 또 누구라고. 초곤산이 었군." 이파가 뒤따라 말했다. "바로 성수철단 초곤산이란 말인가?" 왕검이 손뼉을 치면서 대답했다. "그래 그 사람 아니면 또 누가 초곤산이란 이름을 쓰겠나?" 장평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초영감의 그 삼십육초 용호윤법(龍號輪法)은 깔볼 수 없는 것이 네." 왕검이 뒤따라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로는 그 늙은이가 두 철단을 가지고 사람의 눈을 어지 럽히는 정도로는 우리 사형제에게 신통치 않을 것같소." 무위도장은 그들이 아무리 떠들고 약을 올려도 눈을 감고서 마치 잠을 자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에 운양자의 주먹은 자꾸만 불끈불끈 주어졌다. 그러나 무위 도장 앞에서 추태를 부리지 않으려고 억지로 참고 있었다. 잠시 후 조금 전의 그 청의 도동이 훤칠한 몸집에 흰 수염을 가 슴까지 늘어뜨린 노인을 안내하며 들어 왔다. 그 노인은 조금도 주 저하는 기색이 없이 누각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 섰다. 그는 어깨에 청강일월륜(靑鋼日月輪)을 메고 있었다. 무위도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를 표했다. "초대협께서 이곳까지 와 주셨으니 빈도는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초곤산은 겸손한 태도로 허리를 굽히며 그 특유의 냉랭한 음성으 로 입을 열었다. "별 말씀을...제가 오히려 무위도형의 신세를 지는 것 같소이다." 그는 말을 끝내고 주위를 훑어 보다가 소영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내며 반갑게 말했다. "너 정말 여기에 있었구나." 소영도 반갑게 그를 맞았다. "네. 초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그래. 난 언제나 이렇게 떠돌아 다니지만 밥은 굶지는 않지." 그러자 장평이 큰 소리로 초곤산에게 말했다. "초영감! 너무 거만하군. 우리 사 형제를 알겠는가?" 그제서 야 초곤산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 보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철단을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이어 갑자기 허공에 큰 원을 그리자 둔탁한 금속성이 울렸다. 그 는 오른손으로 강남 사공자를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풍, 화, 설, 월......" 왕검 큰 소리로 외쳤다. "아직 우리 사형제를 잊지 않고 있구나." "그렇소. 소문에 들어......" 초곤산이 몇 마디 하려는데 왕검이 그의 말을 막았다. "흥! 늙은이 말조심 하시지!" "네가 감히 노부에게 욕을 하다니... 반드시 따끔한 맛을 보여 주마......" 옆에서 보고만 있던 조광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롭게 외쳤 다. "늙은이! 우리 사형제를 모독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네 운은 오 늘로 마지막이다. 섭섭하게 생각지 마라." 강남의 사공자는 초곤산을 무당파가 보는 앞에서 때려 눕히면 앞 으로의 일에 더욱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왕도가 소리쳤다. "늙은이! 어서 덤벼 봐라." 그러나 초곤산은 청선각을 둘러 보더니 씁쓸한 웃음을 띠며 누각 밖으로 나갔다. "이 청선각은 우리의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찌 우리들의 싸움으 로 피해를 입히겠느냐? 만약 나와 싸우고 싶다면 밖에서..." 이때 장평의 비웃는 말이 들렸다. "어리석은 늙은이군." "노부는 너희를 겁내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다만 이 누각을..." 무위도장은 그의 언어와 행동이 모두 무당파를 위한 것이리라 생 각하고 내심 그를 돕고 싶었다. 그래서 무위도장은 두 손을 들어 모두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모두 먼 곳에서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 오셨으면서 이 렇게 만나자마자 싸워서야 어디 체통이 서겠소이까? 자, 모두 마음 을 가라앉히고 차나 드시면서 천천히 이야기 합시다." 초곤산도 그의 본뜻을 알아 차렸다. "도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장평이 코웃음을 쳤다. "이제보니 대명 높고 위세가 당당하다던 초곤산도 별것이 아니로 군. 자꾸 엉뚱하게 피하기만 하니......" 장평은 초곤산의 비위를 건드렸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이파는 내심 한가지 계략을 짰다. '저 늙은이는 워낙 고집에 세어서 여간해서는 싸움에 응하지 않 을 것 같군. 그러니 그의 말대로 밖으로 나가 싸우면서 기회를 보 아 소영이라는 꼬마를......'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곧 실행에 옮겼다. "저 영감은 강호에서 이름난 고집장이니 별 도리가 없다. 그의 말대로 청선각 밖으로 나가 저 영감의 높은 콧대를 꺾어 놓자." 장평이 음흉한 미소를 띠며 초곤산에게 몇 발 다가섰다. "늙은이 기어이 싸울 텐가!" "좋다. 밖에서 싸운다면 내 목숨을 걸고라도 끝까지 싸우겠다." 초곤산은 벌써 청선각의 문을 나서고 있었으며 그 뒤를 이어 강 남의 사공자와 무위도장, 소영과 운양자가 뒤따랐다. 바로 이때, 청선각의 다리를 다급하게 건너 오는 도동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두 장의 빨간 종이가 또 들려 있었다. '또 누가 찾아 왔나?' 9. 보이지 않는 싸움 장평은 재빨리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이 또 몇이나 왔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지금 초노인과 겨 루는 것은 적당치 않다.' 그런 마음이 들자 그는 곧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초곤산, 귀빈이 또 왔으니 우리들은 손님을 영접하는 것을 등한 시 할 수 없지 않소? 우리는 나중에 싸워도 늦지 않을 것이오." "그것도 그렇군." 무위도장이 손님의 명함을 펼쳐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흥! 오늘은 정말 귀빈들이 구름같이 모여 드는군. 어서 그 분들 을 들어 오시라고 하여라." 그 도동은 공손히 절하고는 큰 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왕검이 그 붉고 큰 명함을 바라 보며 무위도장에게 물었다. "도장님, 이번에 오신 분은 어떤 고인이시오?" 무위도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 두 분 말씀이오? 그들의 명성은 아마 당신들 풍, 화, 설, 월 사공자 못지 않을 걸요?" 조광이 짐짓 점잔을 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 명함을 우리 형제에게 보여 주시겠소?" 무위도장은 안색이 싹 변하더니 입가에 냉소를 띠며 말했다. "보시오. 시주가 꼭 보시려거든 강제로 하시지는 마시오." 무위도장은 말하면서 소매를 가볍게 털었다. 그 틈에 내공을 발 휘하여 명함 두 장을 번개처럼 조광에게 날려 보냈다. 조광은 무예가 높고 담이 컸다.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오른손 식지와 중지를 조금 벌리고 날아 오는 첫 번째 명함을 살짝 받으려 고 했다. 그가 첫 번째 명함을 잡으려고 할 때 그 날아 오던 명함의 속도 가 약간 느려졌다. 조광은 그제서야 그 명함 두 장이 빙글빙글 돌면서 날아 오는 것 을 깨닫고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러나 손가락을 이미 내밀었으니 다시 거두기도 멋쩍어서 그대 로 뱃심 좋게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두 손가락이 명함에 닿자마자 그 명함은 선회하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며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다른 쪽으로 날아가 버렸 다. 왕검이 눈살을 찌푸리며 동시에 왼손을 슬쩍 들어 명함의 선회 하는 힘을 제거했다. "멋진 수법이시군요." 장평은 오른손으로 명함을 슬쩍 가로챘다. 그 명함의 선회하는 힘은 먼저 조광에게 부딪치고 다시 왕검이 몰래 발한 내력으로 인 해서 흔들리는 바람에 그 힘이 완전히 소실되진 않았으나 줄 끊어 진 연처럼 힘없이 장평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조광은 한 차례 고배를 마시어 손가락이 얼얼하게 아팠다. 그는 두 번째 명함이 눈앞에 날아 왔을 때에는 좀더 신중을 기했다. 그는 함부로 다루지 못하고 오른손으로 급히 내밀어 먼저 내경을 발해서 명함의 기세를 막고 왼손을 쫙 펴서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명함은 그의 장력에 부딪치자 획 선회하면서 위로 석 자 쯤 솟아 오르더니 쏜살같이 되돌아 갔다. 이파가 냉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저어 매우 강한 내공을 펼쳐서는 명함의 힘을 꺾어 억지로 방향을 바꾸게 하여 창 밖을 향해 날려 보냈다. 이것을 본 운양자가 소매를 툭 털자 소매 밑에서 내경이 솟아 나 와 창 밖을 향해 날던 명함은 획! 소리를 내며 다시 되돌아 왔다. 초곤산이 재빨리 명함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휙! 휙!" 장풍이 명함에 부딪쳤다. 다른 사람들이 내력을 발할 때에는 소매를 털어 가리기도 하고, 경력을 발하여 명함의 방향을 바꾸게도 하고, 선회시키기도 했는 데, 이 사람은 손을 들어 내력을 쳐냈기 때문에 그 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장평을 위시한 몇 사람의 내력으로 때린 명함이 왕복하고 선회하 며 한참 동안 오락가락했다. 이윽고 그들의 내력이 서로 부딪쳐 힘이 다 소실되어 떨어지려고 했을 때, 돌연 초곤산의 장풍이 획획! 소리를 내며 명함을 말아 올리자 회오리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 럼 곧장 그 기세에 말려 올라 갔다. 무위도장이 손을 내밀어 일초를 전개하면서 웃었다. "여러분, 실컷 갖고 노셨지요?" 그 명함은 제비가 집 속으로 날아 드는 것처럼 무위도장의 수중 으로 곧장 날아 갔다. 이 한 차례 벌인 내공의 암투를 통해서 그곳에 모인 호걸들은 내 심으로는 무위도장이 우세하다고 느꼈다. 무위도장은 명함을 잡아 옆의 대나무 탁자 위에 놓더니 옷깃을 여미고 앉았다. 장굉은 명함 한 장을 잡았으나 두 번째 명함이 날아 다니는 동안 세 동생이 다칠까 염려되어 언제든지 출수하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 문에 미처 그것을 볼 틈이 없었다. 무위도장이 두 번째 명함을 회수하자 장평은 그제서야 그 명함을 펴 보았다. <절북 향양평 선기서려 주인 우문한도 배(浙北向陽平璇璣廬主人 宇文寒濤拜)> 장평은 명함에 새겨진 글을 보고 한동안 얼떨떨해서 아무 말 없 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것을 본 왕검이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형님, 어느 고인이 왔습니까?" 왕검이 명함을 들어 보이자 이파와 조광도 목을 늘이고 들여 다 보더니만 일제히 멍청해지는 것이었다. 그들이 놀라서 넋을 잃고 있을 때 도동이 벌써 도포를 입은 두 손님을 안내하고 들어 왔다. 무위도장은 빙긋이 웃고 앞에 서서 들 어 오는 사십 세 가량의 유사(儒士)를 향해 합장을 하며 정중히 인 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우문 형님. 빈도는 형을 사모한 지 이미 오래 되었소이다." 그 중년의 선비는 답례를 하고 웃으며 말했다. "도형께서는 무위도장이시지요? 이렇게 소제가 이 청수(淸修)의 장(場)을 더럽힌 죄 널리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 선비는 남색 긴 옷을 입었고 수염도 점잖게 길렀으며 안색도 불그레하게 윤이 나는 것이 마치 어린애같은 인상이었다. 그의 태 도는 우아하고 속된 느낌이 조금도 없었으며 손에는 길이가 석 자 에다 폭이 두 자 가량되는 금빛 그림의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 온 사람은 수염이 없었으며 얼굴이 흰 유생 이었는데 그가 바로 백수서생 성영(百手書生成英)이었다. 문쪽으로 눈을 돌렸던 운양자가 입가에 냉소를 띠며 입을 열었 다. "성형! 참 빨리 오시는구려." 성영은 강남 사공자와 초곤산을 쓱 훑어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천만에. 한 걸음 늦었소이다." 우문한도는 들고 있던 금색 상자를 천천히 내려 놓더니 웃는 얼 굴로 말했다. "소제는 오늘 이곳을 방문한 것이 십 년만의 외출이 되오이다." 도장이 마주 웃으며 반가운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문형이 십 년 만에 향양을 떠나서 우리 관(觀)에 왕림하셨으 니 빈도는 진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이오." 우문한도도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도장 말씀이 무겁소. 이 우문한도는 산림 속에 숨어 사는 보잘 것 없는 야인에 불과하며 위엄과 명성이 현세의 고인과 견주기 어 렵소이다. 더구나 도장은 무당 장문의 어른이시며......" 그는 옥함을 꺼내어 무위도장에게 내 놓았다. "도장을 만나 뵙게 되어 소제는 무한히 기쁩니다. 보잘것 없는 박례품이오니 도장께서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무위도장은 합장하며 사양했다. "이 빈도가 이런 후의를 어찌 감당하겠소? 이곳에 오신 것만도 영광으로 생각되는데 더군다나 예물까지 주시니 어찌......" 우문한도는 웃으며 다시 권했다. "제 경의가 이것으로는 부족하오. 만일 도장이 받아 들이지 않으 신다면 소제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것이외다." 이 우문한도는 십 년 전에 강남의 무림도에 출연했었는데 불과 반 년 동안에 강호의 반을 휩쓸어 일시에 명성을 크게 떨쳤었다. 흑, 백 양도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이름만 들어도 머리를 흔들었 다. 그런 까닭에 그가 은거한 지 십 년이 지났으나 그의 여세가 아 직도 강호에 남아 있어서 조금 전에 강남 사공자가 그 명함의 이름 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무위도장은 강호에 나다녀 본 적은 없었으나 우문한도의 이름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가 두 손으로 옥함을 받들고 있는데 더 이상 사양을 하는 것은 예의에 벗어날 뿐 아니라 약세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무슨 생각에 이것을 주는지 헤아릴 길이 없었 으나 이 옥함은 틀림없이 보통 물건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위도장은 진기를 모아 암암리에 경계를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옥함을 받았다. 그는 옥함을 받아드는 순간 그 속에서 무엇인가 요동하는 것을 촉감으로 느꼈다. 그 옥함 속에는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잔뜩 들었 던 것이다. 그는 더욱 경계를 하면서 남몰래 공력을 운행하여 받쳐 들고 있 었다. 우문한도는 그가 옥함을 받더니 곧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성영을 돌아 보며 말했다. "영야! 우리가 이곳에 온 뜻을 전해라." 성영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숙님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는 머리를 들어 대청 안을 한 번 돌아 보더니 웃는 낯으로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소제가 이번에 우문 사숙님을 따라 이곳에 온 것은 운양도형과 중대한 거래를 하려고 온 것이외다." 무위도장은 옥함을 든 채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성영의 말이 끝났는데도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 럼 단정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의 멀굴을 매우 장엄하게 보였다. 성영의 말이 끝난 후 운양자가 입을 열었다. "성형은 본시 우문형의 사질이었구려. 빈도는 실례가 많았소이 다." "운양도형은 소제에게 불만이 있소?" "천만에! 성형은 주정뱅이 중이나 거지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데 어찌하여 우리 무당산까지 오신 것이오?" 이 말에 성영이 뭐라고 욕을 하려고 했을 때 우문한도가 얼음장 같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영아! 말을 다 했는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으니 말을 알아 듣게 끔 해야지?" 성영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읍하고 나서 일동에게 말했다. "두 분 도장이 못 들으신 것 같으니 내가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 소. 내 사숙의 뜻은 귀파와 연합해서 그 금궁의 열쇠 행방을 수색 하자는 것이오." 그 말에 초곤산이 거침 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 일은 매우 어려울 것 같소." "왜요? 초형도 한몫 낄 생각이시오?" 그러자 장평이 나섰다. "우리 사형제도 있소이다." 성영은 힐끗 그들을 훑어 보더니 고소를 머금고 운양자에게 말했 다. "똑똑히 들으셨지요? 강호에서는 그 물건을 탐내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소이다. 귀파가 나의 사숙과 연합하지 않는다면 아마.." 무위도장이 번쩍 눈을 떴다. 정기 어린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일 순 번개같이 성영의 얼굴에 박히더니 이내 담담한 웃음을 띠고 입 을 열었다. "우리 무당파는 아직 그 금궁 열쇠의 단서를 잡지 못했소. 허나 두분의 호의는 고맙게 받겠소이다." 성영은 시선을 소영에게 돌리더니 따졌다. "도장 뒤에는 현재 인질이 있지 않소. 소제가 알기로는 저 공자 를 이 곳에 둔 것은 악소채를 제발로 걸어 들어 오도록 유인하자는 속셈으로 해석되는데 그렇지 않은가요?" 무위도장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무공을 모르는 죄없는 시주를 여러분은 괴롭힐 생각이군요?" 성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악소채를 그물에 걸리도록 유인하여 그녀를 굴복시켜 금궁의 열 쇠를 내놓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성영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크게 웃는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어느 분이 금궁의 열쇠를 논하고 계시오? 그러나 그것은 우리 형제가 벌써 계약을 해 놨소이다." 말이 끝나자 마자 곧 누군가 성큼성큼 들어 왔다. 뚱뚱한 몸에 명주옷을 입고 검은 비단 마고자를 입은 상팔이었다. 그의 뒤에는 키가 크고 수척한 두구가 여전히 융모자를 깊숙히 눌러 쓴 채 따라 들어왔다. 두구는 눈 하나만 내 놓은 모습으로 그곳에 모인 군호들을 훑어 보더니 차디차게 내뱉았다. "현인 기재들을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서 다행이오." 상팔이 미처 다른 사람들이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두 손을 모아 두루 인사를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생의 동생이 한 걸음 앞서 함부로 지껄인 것을 여러분은 널리 양해해 주십시오." 소영이 중주이고를 보자 소리쳤다. "당신들은 우리 누나를 어디로 데리고 갔지요?" 그러자 상팔이 태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공자! 걱정 말게나. 누나는 지금 안전한 곳에서 상처를 치료받 고 있네. 누나가 줄곧 공자의 신변이 걱정되어 몹시 안타까워하고 있기에 특별히 내가 동생을 데리러 왔네." 소영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니! 누나가 부상을 당했어요?" 여전히 상팔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약간 상처를 입었을 뿐이니까 며칠 치료하면 되니, 걱정할 것 없네." 이때 성영이 코웃음치며 물었다. "장사 잘 되시오?" 상팔은 곧 가벼운 기침을 하더니 시치미를 뚝 떼고 공손히 대꾸 했다. "성형, 염려해 주셔서 감사하외다. 우리의 영업이라야 손익이 반 반이니 그저 쓸쓸히 지낼만 하지요." 두구는 소영을 바라보며 냉랭히 말했다. "어서 이리 오게. 곧 가야 하니까." 무위도장은 강호에 잘 나타나지 않지만 하나의 문파를 관장하는 것은 물론 비범한 공력이 있기 때문에 그가 영도하는 무당파의 위 명은 천하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므로 두구는 그를 경시하지 못했다. 그는 소영이가 무위도장 에게 꼭 붙어 서 있는 것을 보고 감히 가서 그를 끌어 오지 못했 다. 소영은 악소채가 부상당했다는 말을 들으니 그만 가슴이 두근거 리고 더욱더 간절하게 보고 싶어졌다. 그는 무위도장을 쳐다 보고 물었다. "내가 저 사람들을 따라 가도 됩니까?" 무위도장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장문인의 신분을 생각하여 경솔히 대답을 못하고 눈을 감은 채 못 들은 척하고 가만 히 앉아 있었다. 운양자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나가 정말 동생을 생각한다면 왜 직접 와서 동생을 데려 가지 않겠나?" 이 말은 사실상 중주이고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소영은 생각했다. '누나는 처음부터 중주이고를 싫어 했는데 어찌 저들에게 심부름 을 시켜 나를 데려오게 했을 것인가?' 그는 이렇게 생각하자 머리를 저으며 똑똑히 대답했다. "우리 누나가 직접 오기 전에는 나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겠어 요." 두구는 냉소하며 다시 말했다. "우리 형제가 온 이상 빈손으로 물러 갈 리가 있겠는가? 믿든 안 믿든 공자는 우리를 따라 가야 한다." 소영은 원래 그에게 호감이 가지 않았던 터라 곧 노해서 소리쳤 다. "나는 당신들을 따라 산을 내려가지 않겠어요. 그러니 어쩔 테예 요?" 상팔이 다급하게 달랬다. "공자! 오해 말게나. 우리들은 진정 누나의 명령으로 왔네." "그렇다면 왜 우리 누나가 직접 오지 않았나요?" 상팔은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첫째로 누나는 몸이 아직 회복되지 못했네. 그리고 또 둘째로는 현재 보다시피 무림의 인물들이 모두 누나를 추격의 목표로 삼고 있지 않나. 적이 사방에 있는데 섣불리 나타났다가는 당장에 벌떼 같이 덤벼들 것이라서 못 오는 것이네." 소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정말로 우리 누나가 당신들 보고 나를 데려 오라고 했다면 반드 시 누나의 친필 편지라도 있어야 하지 않아요?" 두구가 나서며 냉랭히 받았다. "중주이고의 금자 간판이 있는데 또 무슨 편지가 필요하단 말인 가?" 오랫동안 한 마디도 없었던 우문한도가 갑자기 냉소하며 입을 열 었다. "두 분의 글자 간판은 아마 오늘로 쪼개 버려야 할까 보오." 이 말에 두구가 천천히 돌아 서며 비꼬았다. "귀하의 입심도 굉장하구려." 우문한도는 담담하게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내 말을 두 분은 믿지 않으시오?" 대단치 않게 말하는 중에도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었다. 상팔은 중년 선비에게 시선을 돌리며 그의 정체를 기억속에서 더 듬었다. 두구가 물었다. "나는 언제나 사악한 것은 믿지 않소! 귀하의 성함은 무엇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젖혀 천정을 바라 보며 대답했다. "향양평 선기서려의 우문한도요." 상팔은 이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그러나 그는 내색은 하지 않고 짐짓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 우문형이셨구려. 모르고 실례가 많았소이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차갑게 응했다. "겸손해 하실 필요 없소이다. 마침 두 분이 저의 보잘것 없는 이 름을 아신다니 악소채의 행방을 일러 주시기 바라오." 상팔은 빙긋이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데 우 리 중주이고는..." 우문한도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귀 형제가 보물을 모으는 버릇은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소. 선 기서려에는 몇 가지 진귀한 물건이 있으니 제가 두 분께 드리고 싶 군요." 듣고 있던 강남 사공자는 우문한도가 위세로 협박하고 이익으로 유인하여 중주이고와 연합하려는 것을 보고 내심 낭패를 느꼈다. 중주이고 형제만 해도 다루기가 매우 힘드는데 만일 우문한도와 연 합하면 대항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만 마음이 조급해져서 비꼬아 주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무위도장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께서 오늘 왕림해 주셨으니 빈도는 정성을 다해 대접함이 마땅하오만 무당의 삼원관은 조용한 수양(修養)의 장소이니만큼 빈 도는 시끄럽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오." 또 무위도장은 시선을 돌려 우문한도를 보며 말했다. "우문형이 후한 예물을 주신데 대해 참으로 감사하외다." 우문한도는 웃으며 대꾸했다. "시시하고 보잘것 없는 물건을 관주께서는 소납해 주시려오?" 무위도장은 돌연 안색이 변하더니 엄중히 입을 열었다. "선기서려 안에 무수한 보배가 있다는 말은 빈도도 일찍이 들어 서 알고 있소. 이 목함 속의 예물은 대단히 귀중한 것 같은데 빈도 는 이 자리에서 열어 볼까 하오. 오늘 왕림하신 귀빈들도 함께 견 식을 넓히심이 어떠하오?"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경의가 부족해서 현인들 앞에 웃음거리가 될까 염려되오." 무위도장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문형은 매우 겸손하시구료." 그는 말을 잠시 끊더니 다시 조용히 군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주의하시오." 무위도장은 옥함을 왼손에 조심스럽게 들었다. 무위도장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를 보고 호걸들은 모두 부지중에 공력을 모으고 암암리에 경계를 했다. 옥함 속에서는 먼저 녹두알만한 눈에 푸른 빛을 발하는 황금색의 지네가 천천히 머리를 쳐들었다. 상팔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금지네다." 우문한도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았소, 바로 금지네요." 호걸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정신을 모아 옥함을 주목했다. 금지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움직이더니 "휙!"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 나왔다. 무위도장은 천천히 옥합을 내려 놓고 냉랭하게 우문한도에게 말 했다. "우문형, 참 귀중한 예물이구려." 우문한도는 히죽이 웃으며 대꾸했다. "감사하오. 이 금지네는 매우 드문 종류요. 제가 묘강의 독물을 잘 길들이는 기인과 교제가 매우 두터운데 그가 일부러 찾아 와서 저에게 이 금지네를 준 것이외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금지네는 근 백 년의 도행(進行)이 있어 백독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매우 얻 기 어려운 물건이라고 하오." 상팔이 나서며 물었다. "우문형이 말씀하시는 그 묘강의 기인은 금화부인이오?" 우문한도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맞소. 바로 금화부인이오. 귀 형제는 그녀를 아시오?" 상팔이 점잖게 말했다. "남의 부인을 우리 같은 장삿군이 어찌 사귈 수 있겠소? 이름을 들은 것 뿐이외다." 우문한도는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돌연 손뼉을 딱 치며 동시에 입으로는 낮고 무겁게 "쉭!"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는 마치도 가락과 박자가 있어서 유파(流派)가 있는 듯 싶었다. 지네가 대청안을 이리저리 날자 순식간에 금빛이 상하로 춤추듯 대청 안에 가득하였다. 무위도장은 대청 가득히 발산하는 금빛을 주목하며 큰 소리로 외 쳤다. "금지네는 맹독을 지녔소. 여러분, 모두 조심하십시오." 우문한도가 돌연 길게 소리를 내며 왼쪽 팔을 들었다. 금지네는 그 소리를 따라 날개를 접고 우문한도의 왼쪽 팔에 내려 앉더니 눈 을 감고 엎드렸다. 무위도장이 밖을 향하여 손짓하자 곧 푸른 도포를 입은 도동이 뛰어 들어 와 몸을 굽혔다. 무위도장은 우문한도의 팔에 앉은 금지네를 주목한 채 말했다. "어서 주연을 마련해라!" 그 도동이 공손히 대답하고 급한 걸음으로 달려 나가자 우문한도 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도형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구려." 무위도장은 역시 담담하게 대꾸했다. "빈도는 응당 주인의 도리를 다하는 것 뿐이오." 우문한도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도형은 자연을 벗삼아 살면서 헛된 명예를 구름처럼 여기고 조 화로움을 중시 여기는 젊은 소제와 약간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무위도장이 조용히 말했다. "빈도가 어찌 우문형을 따르소?" "도장께서 깊은 뜻을 품으시고 헛된 명예 따위를 위해 검을 뽑아 다투기를 즐겨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인들은 모르고 있소이다. 그네 들은 도장께서는 겁이 많고 일을 무서워 하신다고들 말하지요. 핫 핫핫... 그럴 때마다 참으로 소제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세인의 논평에는 인(仁)과 지(智)가 나타나는 법이오. 빈도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세인이야 어떻게 보든 빈도 는 개의치 않소이다." 우문한도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도형의 말씀에 소제의 옹색한 소견이 확 풀리는구려." 시선을 돌려 천천히 강남 사공자와 중주이고를 훑어 보더니 갑자 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도형은 관대한 아량을 지니고 계시지만 강호에는 시대의 요구를 모르는 간사한 무리들이 참으로 많소이다. 허울 좋은 권각법(拳脚 法) 몇 초를 가지고 헛된 명예를 조금 얻었다고 안하무인 격으로 굴며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고 간덩이가 커 서 망련된 짓을 하는 자들이 많소. 오늘의 일만 보더라도 도형은 소제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거외다." 두구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흥! 참으로 큰 소리는 잘 치시는군!" 그러나 우문한도는 두구 쪽은 쳐다 보지도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 다. "도형은 명예를 위해 세인과 다투실 마음이 없으시겠지만 그 금 궁의 열쇠가 대단한 것인 줄은 잘 아시겠지요? 소제의 수양은 도형 의 청정무위(淸淨無爲)에는 따르지 못하겠지만 십 년 간 선기서려 를 한 발도 떠나지 않았소. 이번에는 그 금궁의 열쇠가 강호에 출 현했다는 소문 때문에 불가불 진상을 조사하려고 다시 강호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이외다. 그러나 뜻밖에 삼산오악(三山五岳) 도깨비 들 대부분이 벌써 손을 대었군요. 소제는 도형을 언제나 공경하고 앙모했기 때문에 불원천리하고 찾아 왔소이다. 도형과 합작해서 그 금궁의 열쇠가 강호의 조무래기들의 손에 들어 가지 않도록 보호할 작정이오." 이 때까지 잠자코 듣기만 하던 장평이 크게 웃으며 말참견을 했 다. "참으로 도량이 넓군! 매우 광명정대도 하시고!" 그러자 왕검도 나섰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강호의 조무래기들인 셈이군 그래! 허울 좋 은 권각 몇 초와 쥐꼬리만한 명예를 조금 얻었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욕을 먹었구먼!" 이파도 나서며 냉랭하게 말했다. "사마소(司馬昭)의 마음과 책략은 누구나 아는 바이오. 그러나 제까짓게 뭐길래 한 손으로 천하 영웅의 이목을 가리겠다고 하는지 어처구니가 없군." 조광도 한 마디 했다. "여기가 어디며 지금이 어느 때고? 무위도장을 설득시켜 그의 선 봉이 되는 자야말로 간사한 자라고 불러 마땅하오. 우리 형제는 감 히 못 따라 가오." 강남 사공자는 주거니 받거니 각기 한 마디씩 풍자의 재주를 모 조리 발휘했다. 우문한도는 분노해서는 매서운 눈초리로 강남 사공자를 쏘아 보 며 말했다. "네 사람의 명성은 분수에 지나친 것같소. 적악(積惡)이 무수하 니 죄를 따진다면 주살(誅殺)시켜야 하고 벌써 죽었어야 하지." 장평이 웃으며 대꾸했다. "천만에! 우리들은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했소. 그래서 앞으로 한 오십 년은 더 살려고 하오." 우문한도는 크게 웃었다. "그러나 네 삶의 이름은 이미 귀적(鬼籍)에 올라 있으니 아마 더 살기는 어려울 거요." 오른손으로 왼팔을 두드리자 금지네가 날아서는 곧장 장평에게 달려 들었다. 강남 사공자는 오랫동안 강호에 나다님으로써 견문과 경험이 풍 부했다. 그들은 우문한도의 팔에 있는 금지네를 경계하고 있다가 그가 팔을 두드리는 것을 보자 재빨리 등에 멘 장검을 뽑았다. 금지네는 매우 빠르게 날았다. 눈깜짝하는 사이에 번개처럼 장평 에게 달려 들었다. 장평은 속으로 몹시 놀라며 당황했다. 그는 장검을 휘둘러 방어했다. 그러자 돌로 친 듯한 소리가 나며 달려 들던 금빛이 물러났다. 장평이 형성한 검꽃에 금지네가 맞은 듯했다. 장평은 냉소하며 말했다. "금지네가 쉽사리 내 목숨을 해칠 수 있을까?" 본심 그는 이 금지네가 무서운 독물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곤충에 지나지 않으므로 장검에 맞았으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빛이 물러갔다고 생각을 하자마자 또 획하고 되돌아 오더니 대청 한가운데를 선회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속으로 몹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검은 적어도 백 근의 힘이 있는데 어째서 이런 지네 한 마 리를 처치할 수 없을까? 설마 이 지네는 강철로 만든 것은 아닐 테 지?' 그 금지네의 움직임을 보고 장평 혼자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대 청에 모여 있던 사람 모두가 적지 않게 놀랐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이 작은 지네가 장검에 맞고도 아무 일 없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금지네의 선회도는 점점 빨라져서 잠시 후에는 금빛과 가벼운 날개소리만이 대청에 가득 퍼졌다. 금빛이 지날 때마다 엷고 검은 공기가 발산되는 동시에 이상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대청에 모여 있던 호걸들은 모두 험악한 싸움의 경력이 많은 사 람들이라 그 엷은 흑기를 보고는 벌써 의심을 품고, 그 비린내를 맡고는 곧 암암리에 공력을 운행하여 호흡을 막고 그 중독을 예방 했다. 왕검, 이파, 조광은 장평의 안전이 염려되어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반원형의 검진을 형성했다. 이것은 본시 강남 사공자가 강적과 대항할 때 쓰는 검진이었는데 그것을 지네에게 사용했던 것이다. 금지네가 발산하는 흑기가 점점 많아지고 짙어지자 비린내도 따 라서 증가했다. 우문한도는 조용한 표정으로 열심히 금지네를 바라 보았다. 갑자기 소영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대청에 모인 군호들은 각자 운기하여 방비하면서 금지네의 거동 만 뒤쫓고 있었다. 그래서 무공을 모르는 소영을 소홀히 했던 것이 다. 그들은 소영의 비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 몇몇이 일제히 쓰러진 소영이 곁으로 달려 갔다. 무위도장은 냉소를 띠고 벌떡 일어나더니 넓은 도포자락을 탁 털 었다. 그러자 곧 놀랍게도 경력이 옷에서 쏟아져 나왔다. 소영에게 로 달려 가던 호걸들이 몸을 움찔 움츠리더니 각자 권각을 전개하 여 그의 장력을 막아 내고 각기 제자리로 돌아 갔다. 소영에게 달려 가던 사람은 초곤산과 두구 및 성영이었다. 두구 와 성영은 소영이 기절하고 쓰러지는 것을 보자 마음이 동해서 이 틈에 소영을 납치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초곤산만은 위인이 구질구질하고 외고집이었지만 의협심 은 강했다. 그는 지난달 높은 산정에서 소영과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후로 그가 귀엽고 마음에 꼭 들었다. 그래서 소영이 기절하는 것을 보자 그를 구하려고 달려 갔던 것 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무위도장의 일격을 받고는 대항할 수 없다고 느끼고 원위치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무위도장은 일초로 세 사람을 물리치고 곧 소영을 안아 일으켰 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환약을 한 알 꺼내어 급히 소영의 입에 넣 었다. 상팔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문형! 참으로 악랄한 수법이오! 표면으로는 강남의 사공자와 대항하면서 이면으로는 이 대청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중독시켜 당신 마음대로 요리하려는 계획이었구려... 엉큼한 속임수를 쓰지 마시오." 우문한도는 히죽이 웃으며 대꾸했다. "천만에! 상형은 참으로 의심이 많소이다." 돌연 이상하고 낮은 "쉭!" 소리를 내면서 금지네는 또 다시 그의 왼팔에 내려 앉았다. 그러자 우문한도는 조금 전처럼 다시 오른손을 왼팔을 툭 쳤다. 곧 금지네는 머리를 들더니 다시 곧장 강남 사공자를 향해 습격 해갔다. 금지네는 세상에 드문 영특한 독물이지만 결국은 동물이기 때문 에 사람을 습격하여 독을 뿜는데는 방식이 고정적이었다. 갑자기 상대를 바꾸어 습격하여 독을 뿜게 하려면 꼭 그 놈을 소 환했다가 새로 지시를 해야한다. 왕검은 다시 달려드는 금지네를 보고 냉소하며 말했다. "이것을 강철로 만들었나? 이까짓 지네 한 마리를 보검으로 찔러 죽이지 못할게 뭔가?" 왕검은 장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금지네는 살짝 날개를 접더니 아래로 급강하하여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재빨리 기어 왕검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나 왕검은 그것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파가 재빨리 일장을 발했다. 무서운 장풍이 금지네에게 맹습했다. 왕검은 그 틈에 석 자나 뛰어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 었다. 조광이 왕검의 맞은 편에 서게 되었다. 금지네의 방향이 빗나가 는 틈에 왕검이 얼른 피한다는 것이 조광과 마주보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금지네는 장풍을 피해 번개같이 날아 들어 조광의 검을 든 오른 손을 습격했다. 갑작스런 변고에 조광은 그만 손을 쓸 틈을 갖지 못하고 엉겹결에 그 지네를 손으로 쳤다. "찰싹!" 하는 소리가 나며 바로 금지네의 몸에 맞았다. 순간적인 일장이었으나 매우 사나운 힘이 있기에 금지네는 일곱 여덟 자 정도 멀리 밀렸다. 그러나 그놈은 날개를 한 번 흔들더니 다시 달려 들었다. 장평과 이파가 일제히 검막을 쳐 내어 금지네를 막았다. 왕검이 낮은 목소리로 조광에게 치하를 했다. "동생의 그 일장은 참 훌륭했소..." 무심코 조광의 왼손을 보니 새끼 손가락과 무명지가 검은 빛으로 변해서는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그만 입이 딱 벌어져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중독되었소!" 그 말에 우문한도가 히죽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당신은 중독되었지요. 금지네의 독은 천하에 으뜸이오. 그리고 전신에 굳은 가시가 돋아 있소. 당신이 그것을 손으로 때린 것은 고통을 자초한 것이오." 왕검이 자세히 보니 조광의 손가락은 벌써 새까맣게 변해 점점 독기가 퍼지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몹시 떨려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참 무서운 맹독이구나." 왕검은 장검으로 재빨리 조광의 중독된 두 손가락을 잘라 버렸 다. 그러자 선혈이 뿜어 나왔다. 조광은 아픔을 참고 이를 악물었다. "왕형 고맙소. 소제의 중독된 손가락을 잘라 주었구려." 이때 금지네는 장평과 이파가 쳐 놓은 검막을 돌면서 달려 들고 있었다. 왕검은 조광과 더 말할 겨를이 없어 황급히 장검을 휘둘러 지네 의 공세를 막았다. 장평은 땅에 떨어진 조광의 두 손가락을 슬쩍 보았는데 벌써 완 전히 먹물처럼 변해 있었다. 그는 크게 놀라며 조광의 앞으로 다가 가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빨리 상처를 싸매도록 하시오." 이파는 옆으로 옮겨 서며 장평, 왕검과 함께 삼각형을 만들었다. 석 자루의 검이 교차하여 엄밀한 검망(劍綱)을 형성해 조광이 상 처에 바르고 싸맬 수 있도록 하였다. "형님들, 동생이 위치로 가게 해주시오." 조광이 손을 치료하고 말했다. "괜찮겠소?" 장평이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러나 조광은 태연히 대답했다. "손가락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왕검이 몸을 비켜 조광의 위치를 비워 주었다. 네 사람이 연합해 서 휘두르는 검광이 눈부시게 빛났다. 칼날이 번개처럼 돌아가고 사방에 가득 찼다. 그리고 그와 동시 에 금지네도 지칠 줄 모르고 점점 더 빠르게 날았다. 대청 안의 호걸들은 이런 정세를 보고 한결같이 놀랐다. 금지네 의 맹독에 놀랐을 뿐 아니라 제법 영묘한 공격을 하는 데는 두려움 마저 느꼈다. 이때 대청 안에 가득 찼던 흑기가 점점 소실되었고 비린내도 점 차로 사라졌다. 무위도장은 머리를 숙여 품에 안고 있는 소영을 내려다 보았다. 아직도 그의 미간에는 희미하게 흑기가 서려 있었다. 남몰래 마음 이 초조해졌다. '이 아이의 중독은 간단하진 않구나. 특별한 방법을 써서 해독을 해야겠군.' 그는 시선을 돌려 우문한도를 주목했다. 그는 뒷짐을 지고 강남 사공자가 지네와 싸우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이미 웃음이 가시고 뽐내는 빛도 없었다. 무위도장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우문형! 어서 손을 멈추시오. 빈도가 드릴 말이 있소." 그러자 우문한도는 무위도장을 돌아 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물었 다. "도형께서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소제는 공손히 듣겠소이다. " "우문형의 금지네의 맹독은 빈도들이 잘 보았소이다." 우문한도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소제에게 저 네 명의 악한 무리를 용서해 주라는 말씀이오?" "첫째는 빈도가 물어볼 말이 있고 둘째는 우리 무당산에 온 분은 모두 손님인 셈인데 빈도는 삼원관에서 유혈 참극을 보고 싶지 않 소이다." "도형이 그리 말씀하시는데 소제가 어찌 명령을 어기겠소이까?" 우문한도는 나지막하게 "쉭!" 소리를 냈다. 그러자 강남 사공자의 검광 밖을 날던 금지네가 몸을 획 돌리면 서 그의 왼팔에 내려 앉았다. "네분의 죽음은 벌써 눈 앞에 닥쳤소. 오늘 무위도형께서 내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니 이쯤에서 그만두겠소. 네분이 무당산을 떠나는 시간이 곧 죽는 시간일 것이오." 강남 사공자는 무림에서 명성이 적지 않았는데 이렇게 작은 지네 한 마리를 이겨내지 못한 것은 고사하고 조광이 손가락까지 끊기는 소동을 벌였던 것이다. 네 사람은 이 일 때문에 사기가 꺾였다. 그들은 이제까지 남에게 굴복한 적이 없었기에 이번 일은 참으로 모욕적이었다. 장평이 말했다. "우리 사형제는 여태껏 오늘같은 모욕을 당하기는 처음이오. 이 빚은 우리가 죽도록 잊지 않겠소." 왕검도 말했다. "독물을 사용해서 이긴다는 것은 남아답지 못하오. 우리는 선기 서려 주인의 진실한 무공을 볼 기회를 바라고 있겠소." 우문한도는 냉소했다. "네 분이 정 불만이라면 물론 직접 상대해 드리겠소. 결국 당신 들이 내게 패하여 편안히 죽도록 만들어 주겠소이다." 이때 네 명의 도동들이 술과 요리를 들고 들어 왔다. 무위도장은 다시 품 속의 소영을 들여다 보았다. 아직도 두 눈을 꼭 감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무위도장은 많은 수양을 쌓은 사람이라 매사에 침작했다. 속으로는 초조하나 얼굴에는 여전 히 조용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점잖게 말했다. "여러분은 강호의 유협들이기 때문에 저의 삼원관에 모이시기가 어려우니만큼 빈도가 주인된 도리를 다함이 마땅하겠소. 지금부터 여러분은 여기 오신 목적과 피차간의 원한은 잠시 잊으시는 것이 좋겠소. 다시 또 싸우신다면 진정으로 빈도를 멸시하는 것으로 생 각하겠소이다." 그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도동들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술을 쉬지 않고 따랐다. 우문한도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도형께서 하실 말씀은 무엇이오?" 입으로는 무위도장에게 말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줄곧 소영의 얼굴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무위도장은 그가 암암리에 독수를 써서 소영을 더 상케 할까 염려되어 남몰래 내공을 운행하고 암경을 짜 내서 몸을 가로막고 소영을 보호했다. "빈도는 우문형에게 부탁드릴 일이 있소이다." 우문한도는 갑자기 자기 앞에 매우 강한 암경이 마치 담처럼 가 로막는 것을 느끼고 흠칫 속으로 놀랐다. '이 들창코 늙은이는 과연 놀라운 재능이 있구나. 벌써 진기를 모아 적을 막는 상승 내공을 숙달하고 있으니...' 우문한도는 곧 진기를 모아 공수례(拱手禮)를 하고 웃으며 말했 다. "도장께서 제게 할 말이 무엇인지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제 힘 이 닿는 데까지는 도와 드리리다." 우문한도는 공수하는 기세를 빌어 남몰래 내력을 발했다. 그러자 다섯 손가락에서 무형의 날카로운 화살 다섯 줄기가 솟아 나오더니 곧장 앞으로 나갔다. 무위도장은 다섯 줄기의 사나운 지풍이 곧장 뻗어 오는 것을 느 끼고 역시 암암리에 놀랐다. '이 선기서려의 주인은 경시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무위도장은 웃으며 말했다. "빈도는 이 금지네의 독을 푸는 방법을 가르침받고 싶소이다." 우문한도는 숨을 길게 내쉬더니 웃으며 말했다. "저 공자의 독을 풀려고 하신다면 소제가 힘써 보리다." 그는 무위도장 옆에 놓여 있는 옥함을 집어 들고 입술로 나지막 하게 "쉿!" 하고 두 번 소리를 냈다. 그러자 팔에 앉아 있던 금지네는 순순 히 옥함 속으로 날아 들어 갔다. 무위도장은 다시 간청했다. "우문형의 호의는 참으로 감사하오. 그러나 누를 기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만 해독 방법만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우문한도는 옥함 뚜껑을 덮고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 다. "소제의 그 묘강 친구가 일러 준 바로는 이 금지네는 천하 독물 의 으뜸이며 대단히 드문 종류의 지네라고 하더군요. 다행히 그 묘 강의 친구가 소제에게 이 금지네를 줄 때 환약 세 알을 주더군요. 소제가 처음 금지네를 길들일 때 부주의하여 한 번 물렸었는데 그 때 한 알을 먹고 지금 두 알이 남았는데 이 금지네와 함께 그 약을 소제가 이곳에 왔던 기념의 표시로 도형께 드리겠소이다." 하고 말하더니 품 속을 더듬어 작고 묘하게 생긴 옥병을 꺼내서 금지네를 담은 옥함과 함께 내밀었다. 무위도장은 그 옥병에서 환약 한 알을 꺼내면서 웃는 낯으로 말 했다. "이것을 주시니 대단히 고맙소. 빈도는 해옥환 한 알이면 족하 오. 나머지 한 알과 금지네는 거두어 두시오." 대청 안의 군호들은 금지네의 강함을 보았으므로 모두 부러워했 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무위도장은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들 은 속으로 매우 아깝다고 생각했다. 운양자는 속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독물을 갖는 것은 싫더라도 그 독물을 받아서 없애 버려야 합니 다. 그래야만 우문한도가 그 독물로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 할게 아닙니까?' 우문한도는 웃으며 대답했다. "도형은 일파의 장문 어른으로서 덕망이 매우 높은 분이라 이런 독물을 싫어하시는가 봅니다. 이렇게 굳이 사양하시니 소제도 끝까 지 강권은 하지 않겠소이다." 그는 천천히 돌아가서 금색 상자를 열고 그 옥합을 넣었다. 무위도장은 천천히 일어서서 손님을 청하여 술좌석으로 안내했 다. 강남의 사공자는 크게 패배를 당했으나 뱃심 좋게 술좌석에 앉 았다. 주연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는 중주이고는 줄곧 소영을 주 목했다. 그가 두 눈을 꼭 감고 계속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 니 술 맛도 나지 않았다. 무위도장은 소영을 한시도 자기 품에서 내려놓지 않고 품에 안고 있었으나 중독을 치료하지는 않았다. 술이 세 순배 돌았을 때 두구가 참다 못해 냉랭하게 물었다. "도장께서 이 공자의 중독을 치료하지 않으시려면 우리 형제가 데리고 가게 하는 것이 어떻소?" 우문한도가 웃으며 말참견을 했다. "그런 걱정은 당신이 할 필요가 없지 않소?" 하고 내뱉듯 말했다. 무위도장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먼 길을 여기까지 오셨고 빈도는 예로써 접근하여 주 연을 베풀어 드렸으니 무당파의 예의는 다 하였소......" 하더니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곧 당당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빈도는 볼 일이 있어 이만 실례하겠으니 여러분은 술과 요리를 마음껏 드시고 안녕히들 돌아 가십시오. 그럼 이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두구가 한쪽 눈으로 그를 무섭게 쏘아 보며 차디차게 말 했다. "우리 형제가 천 리 길을 마다 하고 여기까지 달려 온 것은 밥과 술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소." 운양자가 옆에서 그 말을 받았다. "귀형제는 또 무슨 요구가 있으시오?" 상팔이 나서며 운양자에게 말했다. "귀파는 강호에서 평소부터 명예가 매우 높소이다. 교묘하게, 혹 은 완력으로 강탈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은 줄로 아오. 우리 형제는 남의 부탁을 받고 소영을 영접하여 데려가려고 왔소이다." 운향자는 재차 물었다. "두 분은 누구의 부탁을 받고 오셨소?" "악소채요. 우리 형제는 그녀와 약속했으니 꼭 소영을 데려다 주 어야 하오. 도형은 억지 말씀을 해서는 안 되오. 소제의 말은 절대 로 허튼 소리가 아니외다." 두구가 이렇게 말하자 우문한도가 또 다시 말참견을 하고 나섰 다. "핫핫... 중주이고는 드디어 사람 장사까지 하게 됐구려." 상팔이 우문한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내뱉았다. "우리 장사는 손익을 따질 뿐 거래의 종류는 따지지 않소!" 우무한도는 암암리에 생각을 했다. '이 두 사람은 명성이 자자하고 오랫동안 강호에 떠돌아 다녀서 식견이 풍부하다, 섣불리 건드려서 그들 형제와 먼저 격투를 하게 되는 판국에는 무당파가 앉아서 어부지리를 얻을 테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이렇게 생각한 그는 본시 마음이 깊은 사람이라 곧 헛기침을 두 어번 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상팔이 무위도장을 보고 다시 요청을 했다. "도형께서는 우리 형제의 얼굴을 봐서라도 소영을 우리가 데리고 가게 해 주시기 바라오." 운영자가 나서며 다시 대답했다. "상형이 악소채와 약속이 있다고 해도 그런 부탁은 너무 경솔한 것이외다." 상팔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우리들은 원래 손익을 중요하게 따지지요. 귀파의 사람을 거저 내어 달라기만 한다면 도리가 아니지요. 우리들은 물론 그만한 대 가를 드리겠소이다." 그 말에 그만 무위도장의 눈썹이 꿈틀했으나 곧 마음을 억눌렀 다. 상팔은 품 속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들더니 히죽이 웃었다. "이 주머니 속에는 우리 형제의 박례품이 들어 있소. 도장께서 소납해 주시기 바라오." 운양자는 사형의 미간에 격노한 빛이 서린 것을 보고 그 뜻을 짐 작하여 차갑게 거절했다. "빈도는 귀형제와 걷는 길이 같지 않은데 어찌 이것을 받겠소이 까? 도로 넣으시오." 두구는 마침내 술상을 밀어 제치고 벌떡 일어서서 화난 소리로 말했다. "형님, 이 흥정은 성립되지 않겠소. 우리는 그저 무공을 사용해 서 강탈해 갈 수밖에 없소." 묵묵히 쏘아 보던 무위도장이 냉랭하게 말을 던졌다. "두 분이 소영을 강탈해 갈 자신이 있으면 어서 해 보십시오!" 그러자 상팔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우리 형제는 명함을 드리고 방문했으며 도장께서는 정중한 예의 를 갖추고 우리를 영접해 주셨소. 그러니 강탈을 하려고 해도 지금 은 손을 쓸 수가 없소이다." 무위도장이 곧 대답했다. "좋소이다. 빈도는 언제든지 교훈을 기다리고 있겠소. 두 분 뿐 만 아니라 오늘 산에 올라 오신 분들 중에도 누구든지 이 사람을 강탈할 자신이 있으면 손을 써서 맞서 보시오." 상팔이 두구를 잡아 끌고 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우리 형제는 먼저 작별하고 가세." 상팔은 말을 마치고 대청을 떠나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가버리고 말았다. 강남 사공자도 일제히 손을 가슴에 모으고 공손히 인사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하오!" 운양자가 그들에게 말했다. "천만에요. 네 분은 한 번 도전하실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장평이 웃으며 대꾸했다. "강남 사공자는 남에게 뒤떨어져 본 적이 없소." 무위도장은 그들에게 말했다. "네 분 천천히 가시지요. 빈도가 전송 못함을 용서하시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문한도가 초곤산을 돌아 보며 비꼬듯 물었다. "노인은 술과 밥을 실컷 잡수셨는데 아직도 뭘 더 바라오?" 초곤산은 발끈 노해서 소리쳤다. "당신이 나를 간섭할 수 있소?" "나를 아직 모르시는군!" 우문한도는 벌떡 일어나더니 곧장 초곤산에게 달려 들어 번개처 럼 일지(一指)를 날렸다. 초곤산은 그가 이처럼 비호같이 덤빌 줄 몰랐고 또한 그의 출수 가 놀랍도록 신속했으므로 바로 응전하지 못하고 그 기세에 눌려 뒤로 다섯 걸음 물러섰다. 우문한도는 일지를 공격해서 초곤산을 물리치고는 그가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당장 돌아서서 원 위치로 되돌아 와 재빨리 앉았 다. 초곤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오른손을 들어 일장을 날렸다. 성영이 슬쩍 그것을 받으며 나섰다. "이까짓 무공으로는 우리 사숙의 적수가 못 되오. 내가 몇 수 상 대해 드리리다." 그리고는 오른쪽 다리로 한 차례 걷어 찼다. 초곤산은 곧 그 다 리를 칼날 같은 손으로 재빨리 때렸다. 성영은 가볍게 코웃음치며 발을 들어 잇따라 세 번을 걷어 찼다. 그 기세는 기막하게 빨랐다. 초곤산은 또 두 발을 물러섰다. 무위도장이 소매를 떨쳐 장력을 밀어 내며 성영을 물리쳤다. 그 리고 냉랭이 그에게 말했다. "꼭 손을 쓰셔야만 되겠다면 모두 이 삼원관을 떠나시는 것이 가 장 좋겠소이다." 우문한도가 히죽이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소제가 몇 마디 중요한 말씀을 도형과 상의하려 하는데 이 늙은 이가 여기 있으면 지장이 크오. 그러니 영아에게 맡겨 없애는 것이 좋겠소!" 이 말에 초곤산은 극도로 격분했다. 그는 악을 쓰며, "좋다! 네가 나를 멸시하고 큰소리를 쳤겠다!" 하고 몸을 날려 결사적으로 달려 들었다. 무위도장이 또 소매를 털어 맹렬한 암경을 펴내어 초곤산을 막으며 전음술로 그에게 속삭 였다. "초대협! 당신은 결코 저 작자의 적수가 아니오. 그가 독수를 쓰 려고 하지 않는 까닭은 마음에 꺼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오.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한두 가지쯤은 참아 주기를 바라는 바이오." 초곤산은 강호에서 명성이 매우 높았다. 무위도장은 강호의 출입 이 잦지는 않지만 초곤산의 인격의 정도를 대강 알고 있었다. 초곤산은 몹시 참기 어려웠지만 무위도장의 깊은 호의를 알았기 때문에 곧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소제는 이로써 작별이오." 그곳 대청 안에는 무위도장과 운양자 그리고 우문한도 및 성영, 네 사람만이 남았다. 무위도장이 자기 품 속에 늘어져 있는 소영을 들여다 보며 다급 하게 재촉했다. "이 시주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여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소. 우문 형, 무슨 말씀인지 어서 말해 보시오." "도형에게 한 마디 묻겠소. 도형은 귀파의 힘으로 금궁 열쇠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자신하시오?" 무위도장은 일소에 붙이며 대답했다. "우리 파에서는 그 열쇠를 아직 갖지 못했소. 천하의 무림 동도 들은 틀림없이 우리 무당파를 오해한 모양이더군요. 그래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오." 우문한도가 냉소하며 다시 말했다. "제가 이번에 향양평 선기서려를 떠나 온 것은 따로 중대한 일을 도장과 의논하려고 생각한 때문이오. 그 금궁의 열쇠는 천하의 무 림동도들에게 의심받지 않게 하기 위한 구실로 삼은 것 뿐이오." 무위도장의 안색은 점차로 엄숙해져 갔다. 그는 천천히 못을 박 았다. "빈도는 복잡한 말에 익숙치 못하오. 그러니 우문형은 말을 어렵 게 돌리지 말고 분명하게 말씀하시오." 우문한도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띠더니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지금 무림의 대부분은 소림일문을 무림 구대문파(九大門派)를 영도하는 우두머리로 받들고 있소. 그러나 소제는 귀파의 무공을 가장 으뜸이라 생각하여 감복하고 있소이다. 강유를 겸비하고 안팎 이 모두 정돈되었으니 현문정종(玄門正宗)이라고 할 만하오." 무위도장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우문형은 너무 과찬이 심하구려. 우리 파는 그 말을 감당할 수 없소." 돌연 우문한도가 정색을 하고 무위도장에게 몸을 굽혀 경례를 하 더니 말했다. "소제는 남의 부탁을 받았소. 도형께서 성회(盛會)를 주최하시도 록 청하고 싶소이다." 무위도장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어떤 성회를 말이요?" "도형이 승낙하신다면 제가 말씀드리기 쉽겠소이다." 무위도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제의했다. "우문형이 먼저 말씀하시오. 빈도가 한 번 생각해 보리다." "이 일은 상당히 중대한 일이라 먼저 승낙을 하지 않으면 마음대 로 입을 열기 곤란하오." 그는 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제가 약간은 말씀드릴 수 있소. 도형이 주최하신다면 일 년 이내에 현재의 상태가 곧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것이외다." 무위도장은 긴 눈썹을 움직이며 묵묵부답인 채 대청 밖으로 시선 을 던지는 것이 매우 착잡한 생각에 젖어 있는 듯 했다. 우문한도는 그를 힐끗 바라 보더니 벌떡 일어나 공수례를 올리며 말했다. "일이 매우 중대하니만큼 도형은 며칠 더 생각해 보시오. 며칠 지나서 소제는 다시 찾아 뵙도록 하겠소이다." 그는 웃으면서 돌아서서 나갔다. 10. 풍전등화(風前燈火) 운양자는 대청 밖으로 총총히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무위도장에게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사형! 그가 말한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진상이 무엇인지는 나로서 도 단언하기 어렵네. 관중의 이삼양대(二三兩代)의 제자들을 전부 동원시켜 엄중히 경계하라고 명령을 하게. 오늘밤 강적이 산을 범 할 것일세." 운양자는 사형의 신중하고도 엄숙한 표정을 보자 의문이 생겼으 나 물어 보지 못하고 급한 걸음으로 그곳을 물러났다. 무위도장은 곧 이어 대청을 나와 곧장 단실로 달려 가서 우문한 도가 준 해독약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한동안 이리저리 살펴 보 면서 사용하기를 꺼려했다. 그는 소영을 침대 위에 눕히고 그의 혈도를 몇 군데 찌르면서 중 얼거렸다. "불쌍한 애야. 우선 잠깐만 쉬어라. 나는 너에게 함부로 약을 쓸 수 없단다. 너는 내공의 힘만으로 천천히 네 몸의 독을 몰아내야 한다." 그때 침착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 왔다. "사형께서는 한낱 어린애에게 이처럼 친절하심은 너무 과분하지 않습니까?" 이 말과 함께 늠름한 몸매에 남빛 명주옷을 입은 준수한 청년이 느린 걸음으로 들어 왔다. 무위도장은 그를 보더니 담담하게 웃으며 칭찬해 마지 않았다. "동생의 무공은 더욱 정진되었구려. 언제 단실 밖으로 왔는지 나 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소." 그 청년은 웃으며 대답했다. "소제가 방금 둘째 사형을 만났는데 제자들을 요소요소마다 배치 하시느라고 매우 바쁘시더군요. 설마 우리 삼원관에 사고가 발생한 것은 아니겠지요?" 무위도장은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동생, 이번에 관(關)을 닫고 연마한 공부가 성공했겠지요?" "칠분의 실력 뿐입니다. 사형의 큰 기대에 어긋났습니다." 무위도장은 이 준수하게 생긴 사제에게 매우 다정할 뿐 아니라 특별히 공대를 했다. 이것은 그의 장문인으로서의 존귀한 신분으로 볼때 참으로 상례에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칠분의 실력이라면 매우 얻기 힘든 것이오." 남의 청년은 침대에 누워 있는 소영을 보면서 말했다. "이 공자는 중독되었습니까?" "그렇소. 그러나 다행이 중독이 심하지는 않으므로 약을 쓰지 않 고도 구할 수 있었소." "그 내력핍독(內力逼毒)법은 진기를 많이 소모하는 일이므로 사 형의 공력이 아무리 심후하더라도 가벼이 실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 고 생각합니다." "음... 며칠내에 강적이 산을 침범할 것이므로 나는 운양사제가 혼자의 힘으로는 모든 사채를 살피기가 어려울 것이라 염려되었는 데 사제가 이렇게 와 주어서 다행이오." 그 청년은 호기있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 사람들이 올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 "모두 강호에 다녀간 이름을 날리던 고수들이었소. 사제는 아직 강호를 출입하지 않았으므로 말해도 모를 것이오." 그 청년은 천진스런 태도를 끌지 않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올해 몇 살입니까?" 무위도장은 뜻밖의 물음에 흠칫 놀라더니 곧 천천히 대꾸했다. "스물 셋이오." "제가 몇 해 동안 무공을 연마했습니까?" "많지도 적지도 않은 이십 성상(星霜)이오." 남의 청년은 대뜸 그 말을 받았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입니다. 그러나 소재의 무예가 어떤지 모르 겠습니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마음에 잡념이 없이 극구 노력하여 그동안에 세 번이나 폐관(閉關)하여 수업을 했소. 그러므로 실제 경험이 약 간 부족한 것 이외에는 동생의 둘째 사형을 능가할 것이오." 그 청년은 한참 생각하더니 별안간 어떤 중요한 일이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대사형, 소제는 마음에 간직했던 말을 지금까지 장문 사형에게 물어 보지 못했는데 오늘 물어 봐도 괜찮습니까?" "말해 보시오." "사부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십팔 년 전이오." "사부님께서 별세하신 지 십팔 년이라면 그때 대여섯 살이었을 텐데... 그때 사부님이 무공을 가르쳐 주셨다면 얼마간이라도 기억 을 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저는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암만해도 소제의 무공은 대사형께서만이 전수해 주신 것 같군요." "그렇소. 내가 사부님 대신 무예를 가르친 거요. 그때 사부님은 병환중에 누워 계셔서 친히 동생에게 무공을 가르치실 수 없었소." "그랬었군요. 대사형께서 저에게 무공을 전수하셨는데 어째서 저 는 사부님의 문하로 들어 갔습니까?" 그의 나이로 무위도장의 문하 제자가 된다고 해도 많은 것은 아 니었다. 무위도장의 수석 제자도 벌써 삼십대였다. 연령으로 따진 다면 그보다 열 살이나 위인 것이다. 무위도장은 온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림의 계율은 항렬을 가장 중히 여기오. 동생은 사부님이 직접 무당 문하에 거두기를 승인하신 제자요. 병환 때문에 내가 대신 무 예를 가르쳤지만 항렬의 선후를 경시할 수 없었소." 남의 청년은 한숨을 쉬더니 다시 물었다. "대사형, 저는 경험을 많이 쌓아야겠지요?" "그것은 물론이오." 그 청년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소제는 이십 년 간 무공을 연마했으나 아직 남과 일초도 싸워 본 적이 없었는데 마침 관에서 나온 오늘 우리 삼원관에 일이 생겼 으니 가장 좋은 실습 기회입니다. 장문 사형! 소제에게 강적과 싸 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동생은 이 단실을 수호하는 책임을 지시오." 그 청년은 약간 불만인 듯이 말했다. "대사형의 이 단실은 중심부인데 누가 감히 침범을 하겠습니까?" "만일 내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단실이야말로 가장 요긴한 목표물이 될 것이오. 이 산을 습격하는 고수들의 목적은 모두 이 단실에 있는 것이오." "그것 잘 됐습니다. 그럼 소제는 가서 칼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는 무위도장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한 번에 두 길이나 솟구 쳐 달려갔다. 무위도장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 라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소영을 일으켜서 앉히고 자신 은 느린 걸음으로 단실 안을 왔다갔다 서성거렸다. 잠시 후 그의 머 리에서는 안개같은 백기(白氣)가 피어 올랐다. 그는 걸으면서 내공을 운기한 것이다. 그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한 줄기 엷은 백기가 손가락에서 나오 더니 소영의 임맥(任脈)의 근원인 중극혈(中極穴)을 찍었다. 기절한 채 몸을 벽에 기대고 앉았던 소영이 갑자기 몸서리를 쳤 다. 강한 경력이 그의 경맥을 뚫고 들어가 체내에 격렬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런 후에도 여전히 벽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일지를 찍은 후, 무위도장의 머리 위가 갑자기 흩어졌으며 그의 안색에 피곤한 빛이 역력했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침대로 다가갔다. 소영을 눕히고 자신은 책 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했다. 무위도장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어둑했다. 단실 입구에서 운양자와 남의 청년은 무위도장이 눈뜨기만을 기 다리고 있었다. 운양자가 입을 열었다. "관의 이삼양대 제자들은 모두 오행검진(五行劒陣)으로 수비태세 를 완료했습니다. 사형께서는 시찰하시겠습니까?" 무위도장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네. 동생이 대신 명령하게나. 금종(金種)의 명령이 있기 전 에는 적을 추격해서는 안 되며 요소에 적이 범치 못하도록 하면 그 만이네." 운양자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장문사형의 말씀은 그들이 들러 오는 것을 방관만 하라는 뜻입 니까?" 무위도장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 침범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삼산오악의 도깨비들이네. 난 장문이 된 후 제자들에게 마음대로 남들과 대적해서는 안 된다고 엄중히 명령하고 또 그 약속을 받았네. 우리 무당파의 수백 년에 걸친 위력은 대단하다고 자부하네." 무위도장은 두 사제를 번갈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 사람들은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는 인물이며 또한 성품과 유 파가 복잡한 각문 각파의 인물들이지. 삼원관의 제자들은 대부분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 그들에게 전력을 다해서 적을 막으라고 명 령한다면 틀림없이 모두들 용기 백배하여 앞을 다투어 공을 세우려 고 탐내기 때문에 질서가 문란해질 것이네." 그는 다시 말을 끊고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운양자에게 말 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먼저 공을 구하지 말고 실수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며 모든 제자 중에서 무공이 각별히 고강한 사람 열다섯을 선 출하여 삼조(三組)의 오행진을 조성하여 강적을 막아 내면 되는 것 일세." 운양자는 존경심으로 가득 찬 태도로 말했다. "사형의 생각은 과연 치밀하고 상세하십니다. 소제가 감히 따를 바가 못 됩니다. 그럼 분부대로 곧 시행하겠습니다." 운양자는 포권을 하고는 총총히 사라져 갔다. 한편, 남의 청년은 오른손에는 장검을 들고, 왼손에는 가죽 주머 니를 들고 있었다. 그 주머니의 수는 일곱 개였는데 여덟치 두 푼 길이의 단검이 주머니 수만큼 꽂혀 있었다. 무위도장이 그 단검을 보고 엄숙하게 말했다. "사제, 그 주머니의 단검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아오?" "네, 천 년 묵은 한철(寒鐵)로 연제(煙製)한 것입니다." "알고 있으니 됐소. 그 검은 비할 데 없이 예리하오. 돌이나 금 도 자를 수 있는 것이오. 검끝마다 예리한 바늘이 두 개 있어서 내 가의 기공을 전적으로 파괴한다오. 제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사람 이라도 이것을 막거나 받기 어려운 것이오. 이 물건은 가장 악독한 것이니 절대로 남용해서는 안 되오." 그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신중하게 대답했다. "소제,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무위도장은 인자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 일곱 개의 단검 이름을 알고 있소?" "소제는 그것의 명칭을 칠휴검(七休劒)이라 알고 있습니다." 무위도장의 얼굴은 잠시 숙연해졌다. "왜 칠휴라고 하는지 아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대답했다. "이름의 뜻을 해석하면 칠휴라는 두 글자는 칠절(七絶)의 뜻을 포함한 것 같고, 또 그 칠절을 풀이하면 칠정육욕(七情六慾)이 이 검을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줄로 압 니다. 소제의 이 해석이 통달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동생은 절반만 말했을 뿐이오. 이 겁에 칠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그 원뜻은 이 검이 악독하다는 것을 표시하는 외에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계하는 것이오. 은사께서 별세하시던 날 나에게 이 칠휴검을 주시면서 이것을 동생에게 주어서 사용케 하라는 분부 가 있으셨소. 아무쪼록 동생은 이 검을 절대로 남용하지 마시오." 청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제 삼가 장문사형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극악한 상대 외 에는 결코 이 검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동생이 은사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이 형은 안심이오." "동생은 이 형을 위해 호법하시오." 말을 마치자 무위도장은 곧 다시 방안을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후 무위도장의 머리 위에는 또다시 안개같은 백기가 피어 올 랐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그러자 백기 한 줄기가 뻗쳐 나오더니 곧 바로 소영을 향해 찍어 갔다. 이번에는 독맥(督派)의 근원인 하극혈(下極穴)을 향해 찍었던 것 이다. 그 임독(任督), 두 맥은 신체의 음양이 맥의 중추요, 임맥의 총음(總陰)이다. 회음곡골(會陰曲骨)의 중추에서 일어나서 관원(關 元), 석문(石門), 기해(氣海), 음교(陰交), 신궐(神闕), 수분(水 分), 하완(下腕), 자궁(紫宮), 화개(華蓋)등을 거쳐서 이십사혈을 두루 통해 간다. 독맥은 독양맥(督陽脈)의 바다이다. 하극에서 일어나서 명문(命 門), 양관(陽關), 현주(玄柱), 척중(脊中), 중추(中樞), 뇌호(腦 戶)등 이십혈을 거치는데 신체의 혈맥이 중추인 것이다. 소영의 몸이 또다시 경미한 파동을 일으켰다. 무위도장의 머리 위에 서렸던 백기가 다시 또 흩어졌다. 이번에는 그의 안색이 처음보다 더 피곤해 보였으며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남의 청년이 무위도장 곁으로 다가 왔다. "소제가 사형을 좀 돕겠습니다." 그러나 무위도장은 낮고 무거운 소리로 거부했다. "나를 도울 필요는 없소. 오늘밤에 동생은 강적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무위도장은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서 먼저와 같이 책상다리를 하 고 앉더니 눈을 감고 다시 운기조식에 들어 갔다. 남의 청년은 앞으로 있을 적과의 대결에 약간 긴장되어 있었다. 시각은 어느덧 벌써 이경이 되었다. 그때 갑자기 종소리가 심야의 정적을 깨뜨리며 들려 왔다. 남의 청년은 이 소리를 듣자 곧 경종임을 알았다. 분명히 삼원관 에 벌써 적이 침입한 모양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칠휴단검을 몸에 지니고 장검을 손에 들고 단실 밖으로 나갔다. 그때 종소리가 다급하게 아홉 번 계속해서 울렸다. 그것은 긴급 경고 신호였다. 적은 삼원관에 침입해서 이미 백병전이 벌어진 모 양이었다. 침상에 누워 있던 소영은 혈도가 뚫리면서 정신이 돌아 왔다. 무위도장이 왼손을 소영의 현기(玄機) 요혈에 대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라. 내가 네 독을 몰아 냈으니 혹시 불편 한 곳이 있으면 말해 봐라." "꼭 토할 것만 같군요." "그럼 잘 됐다. 토하고 싶으면 실컷 토해 버려라. 절대로 그것을 억지로 참고 있어서는 안 되니까." 무위도장은 암암리에 진기를 손바닥에 모았다. 그러자 곧 뜨거운 힘이 솟았다. 그는 소영의 현기혈에 손을 대고 나직이 말했다. "나의 이 핍독의 힘으로 너의 천생의 삼음절맥(三陰絶脈)이 터지 기를 바란다." 소영은 삼음절맥이 어디를 말하는지 모르지만 그의 몸은 항상 쓰 리고 아픈 곳이 두 군데 있었다.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서 그러 는 것 같았다. 이 고통은 오래 전부터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경미했기 때문에 과히 마음에 두지 않고 지내 왔다. 악소채의 모친 인 악운고가 그에게 앉아서 운기조식하는 법을 가르쳐 준 다음부터 그 진통은 더욱 심해진 것 같았고, 한차례 운기조식할 때마다 그 고통이 따라서 발작했다. 그러다 한참 후에는 천천히 아픔이 사라 지곤 했었다. 지금 무위도장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흐름이 몸과 혈에 침투하여 사지백체로 퍼져 올때 그는 본능적인 반응으로 부지중에 운기하여 그 혈맥을 뚫고 들어 오는 열기의 흐름을 인도했다. 무위도장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소시주, 너는 무공을 연습한 적이 있었느냐?" "없어요! 본래는 운이모가 내게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었는 데 뜻밖에 상처가 재발하여 돌아가셨어요."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안할 말을 했다고 깨달은 듯 황급 히 입을 다물었다. 무위도장은 천천히 소영의 현기혈에 댔던 오른손을 거두며 물었 다. "아직도 토할 것 같으냐?" "아니요. 가슴에 맺혔던 비린내가 저절로 사라진 것 같아요." "네 삼음절맥이 굳어 버릴 뻔 했구나. 만일 전부 굳어졌다면 천 년 묵은 인삼왕과 만 년 묵은 영지(靈芝)가 있다고 해도 너를 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소영이 오른손으로 침상을 붙들고 일어나 앉았다. "제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래 살기 어렵다고 하셨어요.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어야 하니 몇 해 일 쩍 죽었다고 원통할 건 없지요." 무위도장은 놀랐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죽음을 담담하게 귀의로 여기는 호기(號氣)를 가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는 곧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나 네 삼음절맥은 아직 전부 굳어지지 않았으므로 희망이 있단다. 허나 나의 진기 내력만 가지고 네 혈도를 뚫자면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 오늘밤의 이 시끄러운 폭풍이 지나면 나는 금침 과혈술(金針過穴術)을 시험해서 너를 고쳐 보겠다. 나는 방금 네 몸의 진기로 너의 몸 속의 독을 한 군데로 몰아 놨는데 열두 시간 내에 악화되지 않을 것이다." 소영은 의아한 듯 물었다. "오늘 낮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었지 않아요? 아아! 알았어 요. 그들은 나를 이용해서 누나를 협박하고 금궁의 열쇠를 뺏으려 는 것이지요?" 무위도장은 또 다시 웃었다. "나는 너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천하의 고수들이 모두 무당 산에 모인다고 해도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시주, 악운고는 정말 죽었느냐?" "제 두 눈으로 보았어요." "그분은 상처가 재발해서 죽었다고 소시주가 말했지? 누구에게 부상당했는지 알고 있느냐?" "그것은 몰라요." 소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 왔 다. 그 웃음소리는 먼곳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이상 하게도 날카로와서 소영은 부지중에 두 번이나 몸서리를 쳤다. 무위도장이 낮은 소리로 당부했다. "소시주, 여기 있거라. 내 허락 없이는 절대 이 방을 나가서는 안 된다." 소영은 악소채와 함께 포위망을 돌파하는 싸움을 경험했었다. 그 는 본시 무공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도와주지는 못하고 항상 남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곧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알았어요." 잠시 후 남빛 옷을 입은 씩씩한 청년이 들어 왔다. 장검을 잡은 그의 표정은 매우 엄숙했다. 그는 무위도장에게 예를 갖추며 다급히 보고 했다. "장문형, 저 웃음소리를 들으셨습니까?" "그 사람의 무공은 매우 높은 모양이오!" 그때 갑자기 날카롭게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남의 청년은 재빨 리 돌아 서더니 쏜살같이 단실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 소리는 수 장 밖에서 났으나 무위도장은 벌써 적이 단실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또 갑자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밤중에 삼원관에 침입을 했으면 본얼굴을 보여야지 어찌 복면을 하고 있소? 떳떳치 못한 짓을 하면서 무슨 영웅이란 말이오?" 냉혹한 목소리가 응했다. "너같은 애송이가 나의 성명을 물을 수 있나?" 소영은 무위도장을 슬쩍 돌아 보았다. 그는 대항할 뜻이 없는 듯 했다. 소영은 침상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밖을 내다 보았다. 어둠 속에 는 도동 둘이 장검을 들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키가 큰 검은 옷차 림의 사나이를 막고 있었다. 그 사람은 검은 헝겊으로 얼굴을 가리 고 두 눈만 내 놓고 있었다. 그 흑의인에게 따지고 있는 사람은 바 로 그 남의 청년이었다. 남의 청년은 흑의인이 고자세로 나오자 격노한 듯 소리쳤다. "귀하는 겹겹이 수비하는 여러 곳을 돌파했으니 틀림없이 무공이 강한 듯 하오. 그러니 내가 몇 초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흑의인은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나하고 상대할 처지가 못 된다. 어서 무위도장에게 나오라 고 해라!" 남의 청년은 장검을 휘둘러 검광을 뿌렸다. "귀하가 내 검을 이기고 나서 내 사형을 만나도 늦지 않소." 무위도장은 여전히 침상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밖에서 벌 어지고 있는 전투에는 무관한 듯 의연한 태도였다. 흑의인은 그의 말에 반문했다. "네가 무위도장의 사제라고? 나는 정진노도사(淨塵老道士)에게 너 같은 제자가 있다는 말은 아직 못 들었는데." 정진노도사란 무위고장의 사부요, 무당파의 선대 장문인이었다. 이 흑의인의 말투에 조금도 존경의 뜻이 없었으므로 남의 청년은 분통이 터졌다. 그는 기를 쓰며 대들었다. "당신은 감히 선사를 경시하겠소?" 그는 말을 뱉으면서 장검을 내리쳤다. "멋진 천녀산화(天女散花) 초로다." 흑의인은 소매를 털어 장력을 쏟아 내 검세를 누르면서 물었다. "공자, 자네 이름이 뭔가?" "전엽청(展葉靑)이라 하오. 다시 몇 초 내 검을 받아보시오." 그는 눈부신 절초를 연달아 발휘했는데 차가운 검날이 난무했다. 잠깐 사이에 연달아 팔초를 공격했다 흑의인은 여유만만하게 소매를 털고 손가락으로 찍었다. 암경이 넘쳐 흘러 그의 검을 모조리 봉해 버렸다. 전엽청은 처음 겪는 실전에서 이런 고수를 만나 속으로 놀랐으며 또한 격노했다. 절학을 모조리 발휘하려고 하는데 흑의인이 사뿐히 뛰어 다섯 자를 물러나며 칭찬했다. "내력이나 민첩한 동작이 자네의 둘째 사형 못지 않네. 그러나 전투 경험이 부족하군." 그의 어조에는 늙은 체 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적의는 조 금도 없었다. 단실에서 무위도장이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제는 더 이상 등(登)대협에게 무례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오. 어서 장검을 거두시오." 순간 전엽청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우선 검을 거두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무위도장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세우고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 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등형이 이렇게 오셨소? 우리는 아마 오래 만나지 못했었지요?" 흑의인이 무위도장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참으로 태평하구려. 강적이 주위를 압박하고 큰 싸움의 서막이 벌써 올랐는데 어쩌자고 단실에 앉아서 혼자 청정(淸淨)을 누리고 있소." 무위도장은 웃으며 대꾸했다. "빈도는 벌써부터 등형의 왕림이 있을 줄 알고 있었소. 그래서 위기에 당황하지 않고 있지요." 흑의인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그런 소리 마시오! 나는 그런 말에 넘어 가지 않소." 흑의인은 성큼성큼 단실 안으로 들어 갔다. 전엽청은 그것을 보자 미간을 찌푸리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참으로 방자하구나. 장문 사형에게 함부로 지껄이다 니!' 무당파 장문의 지위는 무림 중에서 가장 숭고한 지위이다. 무위 도장의 인격이 인자하기도 하지만 무당 문하의 제자들이 그를 대하 는 태도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대사형이 그러한 그를 융숭히 대접하는 것을 보는 전엽청 의 마음은 불쾌했다. 그러나 무어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도 무위 도장의 뒤를 따라 단실 안으로 들어 갔다. 흑의인은 미처 무위도장이 권하기도 전에 아무 데나 걸터 앉으면 서 입을 열었다. "나는 악서(岳西)를 지나오면서 상당히 많은 무림인사들이 무당 산으로 달려 오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한걸음에 달려 왔소. 그러나 와서 보니 내가 공연한 걱정을 한 것 같구려." 무위도장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십여 년 만에 만나도 등형은 여전하구려. 성미가 급하긴..." "한평생 못 고칠 거요." 흑의인은 잠시 무위도장을 바라 보다가 다시 계속했다. "들창코 노도사! 당신 이번 일을 너무 쉽게 보지 마시오. 그들이 고양이 새끼나 강아지 같은 삼, 사류의 무리들이라면 나도 여기까 지 달려 와서 소식을 전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이곳으로 몰려 오는 사람들 중에는 은거한 지 이미 오래된 노마두도 몇 명 있는데, 명 성으로나 무공으로 당신 못지 않을 거요. 흥, 그 때는 후회해도 늦 소!" 무위도장은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띠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여기 있으니 아무런 걱정도 없소이다." 흑의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흥! 들창코, 당신과 우리 노대(老大)는 어쩌면 그렇게 똑같소?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서두르지 않는 것이......" 무위도장이 손짓해 부르자 곧 도동 둘이 향차를 올렸다. 흑의인은 얼굴을 가린 흑건을 벗고 차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한 쪽 구석에서 소영은 이 흑의인은 자세히 뜯어 보았다. 온 얼굴에 수염 투성이었고 커다란 눈에 네모진 얼굴, 짙은 눈썹과 높은 코를 하고 있어 인상이 매우 사나왔는데 그 후리후리한 키와는 잘 어울 리지 않았다. 무위도장은 전엽청을 돌아 보며 웃었다. "동생, 어서 이리로 와서 인사를 드려요. 이 분이 바로 천하에 유명한 종남쌍협(終南變成)의 등이협(登二俠)이시오." 전엽청은 공손히 손을 맞잡고 절을 했다. "등형은 무공이 매우 고강하시더군요. 과연 명성이 헛된 것이 아 니외다." 등이뢰(登二雷)는 두 손을 흔들며 계속 지껄였다. "인사할 것 없네. 자네의 이 들창코 사형은 우리 노대하고 서로 의사가 상통하는 사일세. 단실에 마주 앉아서 도나 법을 이야기한 다면 아마 사흘 밤낮도 모자랄 것일세. 내 노대나 자네의 들창코 사형은 궁기가 심하고 예법을 너무 따지기 때문에 나는 십 년 남짓 무당산에는 발걸음도 비치지 않았다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래위로 전엽청을 훑어 보며 말했다. "여보! 들창코 도장, 당신은 언제 이런 사제를 두었소? 어째서 내가 조금도 몰랐을까?" 무위도장은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선사의 유언으로 그는 무공만을 익히면서 지금까지 혼자 뒷산에 있었소. 얼굴 내미는 일이 아주 적기 때문에 모두들 모를 뿐 아니 라 무당 문하의 제자들도 자기들에게 사숙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 는 매우 적소." 전엽청은 등이뢰가 입을 열 때마다 들창코 노도사라는 것이 몹시 불쾌했다. '내 사형은 일파의 장문 어른이신데 매번 이렇게 들창코 노도사 라고 마구 불러대니 체통이 뭐가 되나.' 그러나 무위도장이 그 말에 조금도 불꽤한 기색을 보이지 않자 자기로서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등이뢰가 눈길을 돌려 소영을 발견하고는 급히 물었다. "이 공자는 또 누구요?" 무위도장은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그 시주 말씀이오? 하핫! 참으로 많은 무림 고수들이 오늘밤 우 리 무당산을 습격하는 것이 모두 이 시주 때문이라오." 등이뢰의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소영을 몇 번이나 훑어 보고 물었 다. "아니 이 공자 때문이라고? 이 공자가 무림의 어떤 원한과 관련 되었단 말씀이오?" "단순히 무림의 은원에 관련되었다면 이렇게 큰 시비가 벌어지지 는 않았을 거요." 등이뢰가 갑자기 답답한 듯이 소리쳤다. "궁금해서 미치겠으니 빨리 가르쳐 주시오!" 무위도장은 마침내 정색을 하며 소영이 금궁의 열쇠에 관련된 사 건을 쭉 설명했다. 이때 갑자기 외치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 왔다. 전엽청이 재빨리 날려 번개처럼 달려 나갔다. 등이뢰가 그의 뒷 모습을 힐끗 보더니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의 저 작은 사제의 무공이 쓸만하오. 내가 보기엔 그의 장 래는 절대로 당신 못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검끝을 너무 추켜 드 는 것이 흠이오... 오늘밤 침범하는 적 중에 함부로 대적하기 어려 운 마두가 둘 있소. 내가 가서 그를 응원하겠소이다." 무위도장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번개같이 밖으로 사라졌다. 소영이 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도 꼭 무공을 배우겠어요. 그래서 그들의 버릇을 고쳐줘야겠 어요." 무위도장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시주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하군. 그렇지만...." 갑자기 음침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나는 북천존자(北天尊者)요. 마침 이 앞을 지나 가다가 풍문에 금궁의 열쇠가 강호에 출현했다고 하기에 들렸소. 방안의 그 공자 가 바로 찾고 있는 금궁의 열쇠의 유일한 단서로구려. 옛날 내가 관을 폐쇄하는 기간이어서 그 무술 대회에 참여하지 못해 지금까지 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소." 순간 말소리가 뚝 끊겼다. 소영이 두리번거려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무위도장 을 돌아 보았을 때 그의 이마에 땀이 솟아 있었다. 이때 갑자기 단실 안의 화롯불이 흔들리며 미풍이 얼굴을 스쳤 다. 문 쪽을 보니 어느새 단실 안에 세 사람이 들어 와 있었다. 가운데 선 사람은 용금포(龍錦袍)를 입었으며 흰 수염이 가슴까 지 늘어졌고, 양쪽에는 흰 옷을 입은 중년 선비 둘이 서 있었다. 무위도장이 벌떡 일어나며 합장을 하고 입을 열었다. "존자께서 오시는 것을 모르고 멀리 나가 영접을 못했소이다." 가운데 노인이 입가에 웃음을 띠고 말했는데 그 목소리가 조금 전에 들려 온 소리와 같았다. "내가 이곳을 지나다가 풍문에 금궁의 열쇠가 다시 강호에 나타 났다고 하기에 들렀소이다. 옛날엔 마침 관기를 맞았기에 그 성회 에 참여치 못해서 수십 년 간을 유감으로 여겨왔소." 그는 말을 하다가 소영을 날카롭게 쳐다 보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그 금궁의 보물을 가질 마음은 없으나 한 번 금궁에 들어 가서 옛날 친구들 중에 아직도 살아 있는 자가 있는가 살펴 보고 싶소이다." 무위도장은 꼼짝도 안하고 서 있었으나 암암리에 수십 년 간 연 마한 현문강기를 충분히 운공하며 정신을 차려 경비하고 있었다. 북천존자는 무위도장이 묵묵부답인 것을 보자 약간 안색이 변하 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금궁의 열쇠는 바다에 던진 돌처럼 수십 년 간 소문에 그쳤 고 시종 숨은 전설이었소. 나도 세 번 중원에 들어 가서 남몰래 금 궁의 열쇠를 찾아 보았으나 끝내 그 행방을 알아 내지 못했소. 그 런데 이번에 다시 소문을 들었으므로 이렇게 방문을 한 것이오. 나 는 무수한 고수들이 이곳 무당산으로 모여드는 것을 봤으니 그 소 문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바이오." 무위도장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담담한 표정으로 소영을 가리 키며 말했다. "소문의 그 금궁의 열쇠를 찾는 유일한 단서는 바로 이 시주요. 노선배의 뛰어난 안목으로 이 시주를 보시오. 그러면 아실 거외다. 무공을 배운 사람들이 터무니 없는 말을 강호에 퍼뜨리며 풍파를 야기시킨 것이오." 북천존자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소영을 자세히 훑어 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차가운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나를 속이면 어떤 결말이 나는지 알지요?" 무위도장은 가슴이 섬뜩했다. "그것을 빈도가 왜 모르겠소이까?" 북천존자는 차디차게 선포했다. "만약 나에게 한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탄로나면 그 때에는 일 문을 섬멸하고 닭이나 개까지도 남기지 않겠소. 무당 일파는 영원 히 강호에서 흔적이 없어지는 것이오. 그럼, 나는 이만 작별하겠 소!" 11. 화원(花院)의 혈전 소영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 보았으나 그들 세 사람은 눈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이들의 공력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고강하구나! 만일 내가 저 만큼의 무공을 지닐 수 있다면 악 누나에게 신세질 필요도 없고 누 나가 운이모의 원수를 갚는 일도 도와 줄 수 있을 텐데.' 소영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무위도장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 더니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는 급히 무위도장의 뒤를 따라 갔다. "도장님, 괴로와하지 마십시오. 이번에 생긴 분쟁은 모두 저 때 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제가 이곳을 떠난다면 그들은 이곳으로 찾 아와서 어르신네를 괴롭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위도장은 고개를 돌려 소영을 바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집이 무척 세구먼!" 갑자기 그는 눈을 치뜨며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는 고함을 치는 것과 동시에 밖으로 몸을 날려서는 전광석화처럼 빠른 동작으로 맹렬한 일장을 가했다. 그의 장풍은 숲을 향해 허공을 가르며 날아 갔다. 그러자 한 사람의 그림자가 훌쩍 뛰어 올랐다.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무위도장의 장풍을 막으 며 이 장 가량이나 뒤로 날아 갔다. "무당파의 장문(掌門)은 과연 명성에 손색이 없소. 훌륭한 장풍 이오." 괴한은 무위도장을 향해 냉정하게 지껄이더니 몸을 날려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무위도장은 그 괴한을 쫓아 갈 생각은 하지 않고 화목 사이에서 무엇인가 양팔에 하나씩 끌어 안고서는 몸을 돌렸다. 이어 발로 땅 을 한 번 딛더니 허공을 비스듬히 날아 단실로 되돌아 왔다. 무위도장이 양팔에 안고 들어 온 것은 청색 도포를 입은 두 사람 의 도동(道童)이었다. 두 사람의 등에 짊어진 장검이 그대로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적과 대적도 못해 보고 혈도를 찍힌 모양이었 다. 무위도장은 두 도동을 내려 놓고 한동안 그들의 몸을 뒤척거리며 살펴 보더니 갑자기 두 손을 높이 쳐들어서는 두 도동의 오른쪽 어 깨에 있는 운문혈(雲門穴)을 내려 쳤다. "후유!" 숨을 돌리고 무위도장을 발견한 그들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에 넓죽 업드렸다. "제자들이 불민하여 본문(本門)의 체통을 손상시켰으니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일어나거라! 나는 너희들을 탓하지 않겠다. 그는 너희들의 상대 가 아니었다." 무위도장은 두 도동이 누구에게 혈도를 쩍힌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필경 북천존자에게 혈도를 찍혔을 것이다. 북천존자의 무공은 나도 적수가 못 되거늘 하물며 이 어린 제자들이 어찌 상대 가 되겠는가?' 무위도장은 두 도동에게 말했다. "단실 밖의 숲에는 적지 않은 무림 고수들이 잠복하고 있다. 너 희들은 곧 단실 밖으로 나가되 일 장 안에서만 경계를 해라. 숲속 에 잠복한 사람들이 단실을 침범하지 않는 한 너희들은 일체 그들 의 거동에 상관하지 말아라." 두 도동이 나가자 무위도장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허공을 응시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소영은 마음이 무거워지며 지난 일들이 꼬리를 물 고 떠올랐다. '나는 어째서 이토록 운이 없단 말인가? 내가 세상에 태어나던 때에 아버지는 간신의 모함에 걸려 관직을 박탈당하고, 나에게 태 산같은 정을 베풀어 주던 운이모는 눈에 덮힌 우물 속에서 고인이 되었으니... 그 뿐인가? 나를 보살펴 주던 악 누나는 생사조차 모 르게 되었고, 이곳 무당산에 온 지 삼 일도 못 되어 무당파에 심려 를 기치고... 어차피 나는 이 곳을 떠나야겠다.' 소영은 답답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무위도장에게 말을 던졌다. "저는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숨김없이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그래 물어보아라." "도장께선 말씀하셨지요. 제가 이곳을 떠나겠다면 절대 막지 않 겠다고...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그렇다. 나는 막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도장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만 일 무공을 배울 수 있다면 후일 반드시 오늘의 은공에 보답하겠습 니다." "너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지금은 강적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서 삼원관 안에는 구석구석 까지 살기로 메워져 있다. 너는 아무런 무공도 지니지 않았으며 더 욱이 몸에 침투한 독이 완전히 제거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어 디를 가겠다는 것이냐?" "그래도 전 떠나겠습니다." 소영은 단호하게 말한 후 성큼성큼 걸어 가자 무위도장이 번쩍 몸을 날려 소영의 앞을 가로 막았다. "네가 만일 무공을 터득하고 싶다면 나는 나의 모든 힘과 성의를 다해서 너를 키워 주겠다." "저에 대한 후의는 감사하지만 저는 무당파의 문하에 들어 갈 생 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소영이 무위도장의 옆으로 비켜 서며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돌 연 한 청년이 앞에 섰다. 장검에 핏자국이 있고 이마에서는 줄줄 땀방울이 흘러 내리는 것 으로 보아 치열한 격전을 벌이다 달려 온 모양이었다. 소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러자 청년이 왼손으로 소영의 손목을 붙잡으며 격한 어조로 말했다. "진퇴(進退)도 모르는 아이로군. 무당파의 장문인이 어떠한 신분 이신데... 너를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너를 훌륭하게 키워 주려는 것이다. 너는 감사해야 마땅하거늘....." 무위도장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욕심이 생기면 지혜가 닫히는 법이다. 나는 수십 년 동안을 문 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지 말라고 일러 왔는데... 무림 친구들이 이런 풍파를 일으킬 줄은 미처 몰랐구나." "일은 저 때문에 벌어진 것이니 제가 무당산을 떠난다면 그들은 자연 이곳을 물러나서 다시는 삼원관을 찾아 오지 않을 것입니다." 소영이 무위도장의 말을 받자 무위도장은 탄식처럼 입을 열었다. "네 말은 맞다만......" "혹시 도장께서도 저를 인질로 삼아 나의 누나를 협박하여 금궁 의 열쇠를 뺏으려는 것이 아닙니까?" "나 역시 금궁의 열쇠가 보고 싶지만 너를 인질로 이용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도장께선 왜 저를 놓아 주지 않으시려는 것입니까?" "삼원관은 지금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로 변해 있다. 무공도 모르 는 네가 어떻게 빠져 나가겠다는 것이냐?" "사람들은 모두 저를 인질로 이용하려는 목적을 품고 이곳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잡더라도 절대로 해치지는 않을 것 입니다." "네가 무당문하에 들어 온다면 삼 개월 안으로 너의 삼음절맥 (三陰絶脈)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겠다. 너의 천재적인 골격은 손쉽 게 나의 모든 무공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영은 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도장께선 그 북천존자와 비교해서 무공이 어떻습니까?" 무위도장은 소영의 말에 불쾌했다. 그는 말없이 소영을 노려 보더니 신경질적으로 명령했다. "사제, 그를 놓아 주오!" 청년은 무위도장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기에 소영의 손목을 놓 아 주었다. 소영이 다시 앞으로 걸어 가려고 했는데 이때 옷자락이 펄럭이는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몇 명의 사람이 그의 앞에 사뿐히 내려 섰 다. 왼쪽에 내려 선 두 사람은 절북 향양평의 우문한도와 백년서생 성영이었다. 이들의 오른쪽에 선 사람은 중주이고인 상팔과 두구였 다. 이들 두 사람도 무기를 쥐고 있었으며 상팔의 왼손에는 금빛이 번쩍이는 주판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두구는 은권(銀圈)과 철필 (鐵筆)을 들고 있었다. 이들 네 사람이 나타나자 남색 옷을 입고 있는 그 청년은 눈을 부릅뜨며 앞으로 공격해 나갔다. 그는 장점을 휘두르며 네 사람을 한꺼번에 후려칠 듯한 기세였다. "돌아 오시오!" 무위도장이 호통쳤다. 청년은 아무 소리도 없이 뒤로 물러섰다. 무위도장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네 사람을 훑어 보며 한 걸음 앞 으로 나서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여러분은 엄중한 경계망을 뚫고, 수차의 저지를 헤치고 이곳 단 실까지 온 것으로 보아 과연 지니고 있는 무공을 짐작할 수 있소이 다." 상팔이 웃으며 대답했다. "귀파의 제자들이 전력을 다해 우리를 저지했다면 어찌 우리가 이곳까지 올 수가 있었겠소?" "그 말이 맞소이다. 만일 귀파의 여러 제자들이 필사적인 저지를 했다면 우리는 엄중한 방어력을 뚫고 들어 올 수 없었을 것이오." 우문한도가 상팔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무위도장은 엷은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날카로운 시선은 여전히 네 사람을 훑어 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무공은 고강하오. 나는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여러분을 저지하지 못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소. 여러분의 공력으로 보아 필 경 적지 않은 나의 제자들을 살상했을 것 같군요." "하하, 우리 형제는 세 겹의 방어망을 뚫고 오긴 했지만 다행히 피차 아무런 상처로 입지 않았소." 상팔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우문한도도 얼른 대답했다. "나는 귀파의 제자들의 혈도를 짚지 않을 수 없었소. 천하에 명 성을 떨친 귀파의 오행검진(五行劍陳)을 쉽사리 뚫을 수 없었기 때 문에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었소." 이때 여러 곳에서 격투를 벌이고 있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간간 히 들려 왔다. 무위도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 다. "백 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 무당파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오늘 적잖은 무림의 고수들이 이곳을 찾아 왔소." 무위도장의 말이 끝나고 잠시 동안 침묵이 짙게 깔렸다. 상팔과 두구가 서로 눈짓하더니 냉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 장삿군은 약속대로 이곳을 찾아 왔소. 도장께서는 어떻게 하실는지 모르지만... 우리 장삿군의 안면을 봐서 우리가 사람을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상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문한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 다. "흥, 상형께서는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시는구려. 내가 이곳에 있 는 한 그렇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오. 만일 상형이 손쉽게 그 를 데려간다면 내 체면은 무엇이 되겠소?" 그러자 이번엔 두구가 우문한도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우문형, 형이 우리의 일에 기어이 끼어들겠다면 할 수 없 소. 각 자의 수단에 맡길 수밖에......" "하하하, 이 일은 우리 중주이고에겐 대단히 중대하므로 우리 형 제가 이번 장사에서 손해는 볼 수 없지." 상팔이 두구의 말끝을 이어 어떤 도전이라도 받겠다는 뜻을 표하 자 우문한도가 발끈했다. 그가 상팔을 노려 보며 입을 열려는데 청년이 큰 소리로 말을 꺼 냈다. "여러분, 천지가 넓은데 설마 뼈 묻을 곳이 없겠소? 여러분이 만 일 다투시려면 될 수 있는 한 우리의 삼원관에서는 싸우지 마시오" "만일 빈도의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무림의 고수들이 또 이곳 에 나타날 것이오. 그러니 네 분께서는 잠시만 더 기다려 보시오." 무위도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번개처럼 나타난 세 개의 검 은 그림자가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별똥이 떨어지듯 빠르고 날카 로운 동작이었다. 중주이고와 우문한도, 성영, 네 사람은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 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나타난 세 사람은 모두 똑같은 차림이었 다. 검은 헝겊으로 얼굴을 가려 눈만 반짝였고, 손에는 무기를 들 고 있었다. 세 명의 복면괴한이 나타나자 무위도장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싸늘한 눈초리와 경공술로 보아 상당한 공력을 지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어느 문파의 출신이기에 제자들의 저지를 뚫었 을까?' 무위도장이 이런 생각을 하며 세 복면괴한을 노려 보고 있는데, 또 두 사람이 바람을 뚫고 나타났다. 그 두 사람은 홍색 도포와 백 색 도포를 입고 있었으며 그들은 각기 타혈제(打穴霽)와 뱀대가리 처럼 생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청년은 두 사람의 앞에 검광(劍光)을 뿌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누구냐?" 말과 함께 두 사람을 향해 장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백색 도포를 입은 사람이 지팡이를 쳐들어 청년의 공격을 막아내며 말했다. "노부는 삼음수(三陰手) 조전(趙全)이오." 청년은 강호에서 활약한 경험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알고 있 는 이름은 두 사람의 사형(師兄) 정도였다. 조전보다 명성이 높은 사람이라도 그는 알 리가 없었다. 청년은 여전히 칼을 번뜩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음수이든 양수이든 우리 삼원관 안에 들어 온 이상 용서 할 수 없소." 무위도장은 청년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 다. '오늘 형세를 보아하니 처참한 결투를 면치 못하겠구나.' 조전은 청년이 앞을 가로막으며 비켜서지 않자 눈을 부릅뜨며 소 리쳤다. "담이 매우 크구나. 누구의 문하생인지 이름을 대라!" "흥, 나는 무당 문하생인 전엽청이오." "그래? 너는 노부의 상대가 못 된다. 네가 격투를 원한다면 너의 사부를 모셔 오너라." 조전은 전엽청의 나이가 어려 보여 무위도장의 제자라고 생각했 던 것이다. 상대가 자기를 무시하자 전엽청은 눈을 부라리며 입을 열었다. "나의 사형 무위도장도 무공과 신분이 상당히 높은데 함부로 당 신이 손을 쓸 수 있겠소? 당신은 먼저 나의 손에서 장검을 떨어뜨 린 다음 사형을 찾는 것이 순서일 거요." "무위도장이 네 사형이냐?" 조전이 놀란 듯 묻자 전엽청은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소. 왜 그러시오." "그리고 보니 내가 너를 너무 무시했군! 그렇다면..." 말을 끝내기가 바쁘게 조전은 지팡이를 번쩍 쳐들더니 전엽청의 가슴을 향해 찔러 갔다. 그러자 전엽청은 급히 장검을 휘둘러 그것을 옆으로 쳐냈다.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쳤다가 떨어졌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공력을 시험하기 위해 가볍게 공격하고 막 아낸 것이었다. 전엽청은 상대방의 지팡이를 옆으로 밀어 내긴 했지만 오른팔이 약간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이 늙은이의 공력은 매우 세구나.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다.' 전엽청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조전 역시 속으로 놀라고 있 었다. '이 사람은 젊은 나이에 내공이 이토록 강하다니... 무당파가 무 림에 날린 명성이 허언이 아니었구나.' 일초를 서로 주고받은 두 사람은 모두 속으로 놀라며 상대방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게 되었다. "무당파의 명성은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오늘 노부는 무당 파의 무공을 몇 수 배워가야겠다." 말을 마치고 조전은 지광이를 들어 전엽청을 향하여 쭉 뻗쳤다. 전엽청의 심장을 향하던 지팡이 끝은 그의 배꼽과 왼쪽 어깨를 향 해 춤추듯 움직이며 한꺼번에 세 곳의 혈도를 찍으려고 했다. '상대는 무시할 수 없는 강적이다. 더군다나 내가 사용하는 장검 은 상대방의 쇠지팡이에 비해 가볍기 때문에 무기끼리 맞부딪치는 것은 위험하다.' 번개처럼 이런 생각을 머리에 떠올린 전엽청은 몸을 옆으로 휘청 꺾으며 동시에 장검으로 비스듬히 상대방의 복부를 그어 내렸다. 조전은 교묘하게 파고드는 칼끝을 피해 급히 뒤로 물러서면서 지팡 이를 마구 휘둘러 전엽청의 다음 공격을 방어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애송이한테 몰려 뒤로 물러서다니 창 피한 일이다.' 조전은 분노와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 오르며 성난 이리처럼 펄쩍 펄쩍 뛰었다. 순간 그의 손에 들려있는 지팡이가 수백 개의 그림자를 만들며 전엽청의 좌우, 정면으로 덤벼들었다. "흥?" 전엽청은 코웃음을 치더니 장검을 좌우로 흔들며 지팡이의 그림 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휘두르는 검광은 사방을 비추며 수백 개의 칼이 공중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지팡이의 그림자와 검광이 서로 얽히자 싸늘한 공기가 휭횡 퍼져 나가고 있을 뿐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위도장은 눈을 부릅뜨고 이들의 결투를 지켜 보았다. 그는 두 손에 진기를 모아쥐며 전엽청이 위기에 처하면 재빨리 구해주려고 마음을 먹었다. 붉은 도포를 입고 금관을 머리에 쓴 세모꼴 눈의 사내는 자기 동 료와 전엽청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 다. '무당파에 무위도장과 운양자를 재외하고 이토록 무공이 높은 고 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무당파에는 확실히 고수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세모꼴 눈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 사내 뿐만 아니고 곁에 서서 구경하고 있는 중주이고와 우문한도도 속으 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름도 없는 한낱 젊은이가 조전을 맞아 조금도 굴하지 않고 팽 팽히 맞서다니 이건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이들 여러 사람의 놀라워하는 시선을 받으며 조전과 전엽청은 공 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삼십여 합이나 겨루었지 만 누가 강하고 약한지 승부를 가려 낼 수가 없었다. 약간 초조한 표정으로 이들을 지켜 보고 있던 붉은 도포의 사내 가 무위도장을 바라 보며 시비를 걸었다. "매우 흥미를 느끼시는 표정인데...나하고 몇 초 나눠보겠소?" 무위도장은 그 사내를 노려 보더니 서서히 다가 서며 입을 열었 다. "좋소이다. 몇 초 지도받겠소." 이 때였다. 우렁찬 목소리가 공중에서 쏟아졌다. "사형, 잠깐 기다리십시오! 소제간 먼저 그를 상대하겠습니다." 가볍게 몸을 날리며 들어 선 것은 운양자였다. 그의 뒤에는 열두 명의 도인이 바짝 따라 오고 있었는데 운양자와 도인들은 모두 장 검을 움켜 쥐고 엄숙한 표정이었다. 운양자는 홍색 도포를 입은 사내의 앞으로 다가 서더니 장검을 밑으로 내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빈도는 무당의 문하인 운양자요. 내 사형과 대면하기 전에 먼저 나에게 몇 초의 지도를 해 주시오." 홍색 도포의 사내는 운양자를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차가운 음성 으로 말했다. "나는 독화정가(毒火井伽) 라는 사람이오." 운양자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름은 많이 들었소. 오늘 이렇게 만나 뵈니 반갑소. 주인은 손 님에게 양보해야 되는 법. 독형께서 선수를 쓰시오." 독화정가는 타혈궤를 번쩍 쳐들더니 천외래운(天外來雲)의 초식 을 펼쳐냈다. 그의 손에서 타혈궤가 획! 하고 바람소리를 내며 운 양자의 현기혈을 향해 날아 왔다. 운양자는 입을 비쭉거리더니 장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의 장검 은 무지개빛 검광을 그으며 일직선으로 독화정가의 오른팔을 향해 들어 갔다. 독화정가는 급히 오른팔을 끌어들여 운양자의 공격을 피하며 콧 방귀를 뀌었다. "흥, 훌륭한 검법이군!" 그는 왼손을 앞으로 쭉 뻗치며 몸을 훌쩍 날렸다. 그의 손에서 타혈궤가 밑으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것은 갑자기 용수철에 튕긴 듯 솟구쳐 올라 갔다. "흥!" 운양자는 즉시 몸을 뒤로 빼냈다가 옆으로 살짝 돌며 장검을 휘 둘렀다. 장검을 앞으로 찔렀다가 도로 빼내고, 다시 찌르고 하며 계속 옆으로 천천히 돌았다. '기상한 초식이구나!' 운양자는 장검을 수레바퀴처럼 돌리며 그 공격을 방어했다. 또한 선 자리에서 몸을 빙빙 돌리며 좌우 정면으로 파고드는 타혈궤를 교묘하게 막아 냈다. 두 사람의 공방전이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를 보고 있던 우문한도가 나직한 음성으로 무위도장에게 말했다. "도장, 나의 힘이 필요하다면 조금 빌려 드리겠소." 무위도장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머리를 저었다. "성의는 고맙지만 아직은 손을 빌릴 정도가 아니오." 이때 운양자를 따라 들어 온 열두 명의 도인들이 서서히 움직이 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느새 오행검진을 형성하여 적의 침입을 기 다리고 있었다. 무당의 오행검진과 대림라한진(帶林羅漢陣)은 천하에 명성을 떨 치고 있었다. 일단 검진의 포위 속에 들면 안전하게 벗어나기 힘들 었다. 이 열두 명의 도인들은 모두 운양자가 문하의 제자 중에서 특별 히 가려 뽑아 모두 검술이 뛰어난 사람들이며 이십 년 이상이나 무 공을 닦은 사람들이었다. 열두 명의 도인는 오행검진과 대림라한진에 대해서는 매우 숙달 되어 있었다. 이들은 순식간에 두 개의 진을 형성하여 여러 사람들 을 포위하고 있었다. 검진이 펼쳐진 것을 느낀 두구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검진을 펼치는 것을 보니 무당파는 결사적으로 소영을 보호하려 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되면...' 두구는 곁에 있는 상팔에게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형님, 오늘 이곳에 나타난 사람들은 비록 적지는 않으나 무당의 적수는 되지 못할 것 같소. 그러니... 우리는 이들의 결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상팔이 대답했다. "그렇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세. 먼저 손을 쓴다면 우리에게 불리한 것일세. 저 세 사람을 보게." 상팔은 검은 복면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을 눈짓하며 말을 이였다. "복면으로 얼굴을 감싼 저 놈들은 어떤 인물인지 정체를 알 수가 없네. 만일 저 놈들이 손을 뻗친다면 이곳은 벌집을 건드린 듯 큰 혼란이 생길 것일세. 우리는 기회를 틈타 꼬마를 빼앗을 테니 잘 기억해 두게. 자네는 꼬마를 가로채고 나는 길을 뚫고... 절대로 오행검진에 포위되지 않도록 주의하게." 이 두 사람은 전음술을 써서 소영을 납치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검은 복면 세 사람은 줄곧 묵묵히 서 있었다. 그들은 삼각형으로 서로 등을 맞대고 선 채 싸우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전엽청과 조전의 격투는 절정에 이르렀다. 두 사람의 동작은 더 욱 민첩해졌고 검과 지팡이는 계속 부딪치며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 고 있었다. 검법을 전개하는 데에는 전엽청이 훨씬 우세했다. 그의 검은 교묘하게 조전의 급소로 파고들며 상대방을 교란시켰 다. 그러나 공력면에 있어서는 조전이 한수위였다. 그의 지팡이가 한번 휘날릴 때마다 무서운 살기가 전엽청의 전신으로 덮쳐 들었 다. 두 사람은 전심전력을 다해 싸웠으나 여전히 막상막하의 팽팽 한 힘로 맞설 뿐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우문한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자리를 살펴 보았다. 이미 사 경이 가까와지는 시간이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따로 있으며, 소영이란 꼬마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전엽청과 운양자는 앞으로 백 초 이상을 더 싸울 수 있는 힘이 남아 있고, 약속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으니... 얼른 싸움을 끝내도록 해야지.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되고 헛수고 만 하겠다.' 마음이 초조해진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세 사람의 복면 괴인에 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 세 사람에게 시비조로 말을 걸었다. "당신네 세 분은 마치 지옥의 사자같은데... 시치미를 떼고 있지 만 역시 금궁의 열쇠에 눈독을 들이는 것이지요?" 세 명의 복면괴한은 싸늘한 눈초리로 우문한도를 쏘아 보더니 맨 앞엔 섰던 사람이 응수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무공이 고강해 보이는데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신분 을 속이는 것은 졸장부나 할 치사한 행동이라고 생각되지 않소?" "우리 일에 참견할 필요는 없소." "하하, 그럴 수는 없소이다. 나는 반드시 당신들의 얼굴을 봐야 만 하겠소." 말과 동시에 우문한도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더니 앞에 있는 괴한 의 얼굴을 향해 재빠르게 뻗쳤다. 괴한은 장검을 추켜 들어 우문한 도의 복부에서 면상까지 그어 올렸다. 칼을 쓰는 솜씨가 지극히 빨 랐다. '예상 밖이구나! 무서운 검술을 지녔는데...' 우문한도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장검을 피했다. 괴한은 그 자리 에 선 채 우문한도를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저 세 놈은 도대체 어느 문파의 출신일까? 방금 칼을 쓰는 동작 으로 보아 정가나 조전보다 무공이 뒤지지는 않겠는데...' 괴한의 일격을 피해 뒤로 물러 선 우문한도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과연 빠른 검법이오. 내가 몇 수의 지도를 받아야겠소." 우문한도는 오른손을 살짝 뒤집으며 맹렬한 장풍을 날렸다. 그러 자 괴한은 재빨리 장검을 치켜들었는데 장풍은 장검에 부딪치며 산 산조각이 나서 부드러운 미풍으로 변해 괴한의 옷자락을 가볍게 흔 들었을 뿐이었다. 또한 괴한의 장검은 장풍을 막아 냈을 뿐만 아니라 싸늘하기 그 지없는 검풍을 우문한도에게 날리는 것이었다. '이 놈은 내공을 검끝에까지 몰아 넣을 수 있구나!' 우문한도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급히 쌍장을 뻗어 검풍을 막았 다. 괴한은 우문한도의 장풍을 장검으로 막으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는 보이지 않는 진동이 흐르고 있 었다. '상대방의 장력은 너무도 엄청나구나! 쉽사리 만날 수 없는 강적 이다.' 속으로 은근히 겁을 먹고 있는 판인데 또다시 상대방이 맹렬히 쌍장을 날리자 그는 검으로 그것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 서 급히 몸을 옆으로 빼며 왼손으로 장풍을 날려 우문한도의 장풍 을 맞받았다. 그러자 나머지 다른 두 괴한도 급히 삼각형의 진열을 흐트리고 나란히 섰다. 동시에 왼손을 앞에 선 동료의 등에다 갖다댔다. 이것은 내공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세 사람의 공력이 한 사람의 손을 통해 나갈 수 있게 하는 일종의 합장(合掌) 수법이었다. 세 괴한의 힘을 합한 장풍이 우문한도의 장풍과 맞부딪치자 펑! 하고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우문한도의 몸이 뒤로 밀 려났다. '이 때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주이고는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재빨리 몸 을 움직였다. 먼저 상팔이 금주판을 휘두르며 소영에게로 몸을 날 렸다. 이것을 본 무위도장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두 분은 정말 무당파를 무시할 작정이오?" 무위도장은 노기찬 소리로 버럭 고함치며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그러자 폭풍같은 바람이 상팔을 향해 몰아 닥쳤으나 상팔이 금주 판을 앞으로 뻗치며 막아 냈다. 그는 이윽고 껄껄 웃어젖혔다. "하하하, 도장은 과연 무서운 공력을 지니셨소이다." 이때 상팔의 뒤에 서 있던 두구는 상팔과 무위도장이 서로 대치 하는 순간을 틈타 훌쩍 몸을 날렸다. 그는 왼팔로 소영의 몸을 잡 아채 안으로 몸을 날려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놈!" 무위도장은 벽력같은 호통을 치며 옷소매를 급히 휘저으니 그의 몸은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독수리처럼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때 상팔이 역시 몸을 솟구치며 금주판으로 무위도장을 공격했 다. 무위도장이 오른손을 한 번 휘두르자 그는 옆으로 칠팔 척이나 날아가다 뚝 떨어졌다. 또한 무위도장도 진기를 너무 소모했기에 더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상팔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무위도장에게 말했다. "무당 장문인의 공력은 과연 훌륭하오. 나는 적수가 못 되오." "흥, 만일 당신들에게 사람을 뺏긴다면 무당파가 무슨 면목으로 강호에 발을 디딜 수가 있겠소?" 무위도장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상팔에게로 달려들어 혈도를 찍 으려고 했다. 상팔은 뚱뚱했으나 동작은 빨라서 급히 몸을 돌려 피하며 입을 열었다. "소영은 우리 형제와 관계가 매우 깊소.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없 이 수단을 강구하게 된 것이오. 도장의 오른손에는 이미 극독(極 毒)이 퍼지고 있을 것이오. 만일 억지로 운기를 해서 계속 손을 쓴 다면 십 초 안에 독성은 전신에 퍼질 것이니 자중하시오." 무위도장은 상팔의 말에 깜짝 놀라며 급히 일장을 날렸다. 거센 장풍을 견디지 못하고 상팔의 몸은 다시 두어 걸음 뒤로 미끄러졌 다. 상팔과의 간격을 재니 과연 무위도장의 손가락에는 무수한 흑 점이 박혀 있었다. "나는 이미 도장의 공력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도장의 내 공은 매우 깊어 보통의 암기 독물로는 도장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했소. 그래서 주판알에다 독침을 숨겨 두었던 것이오." "음......" 무위도장은 이를 갈며 상팔을 노려 보았다. 금방 집어 삼킬 듯한 무서운 눈초리에 상팔은 어깨를 움찔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독물은 서역(西域)의 천산파(天山派)에서 나온 것이오. 가늘 기는 쇠털같고 예리한 끝은 쇠와 돌도 뚫을 수 있어 아무도 막아 낼 수 없소. 도장께서는 이런 독침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 었겠지요?" 무위도장은 손에 통증을 느끼자 급히 왼손으로 오른팔의 혈맥을 찍었다. 그리고는 심장 부근의 몇 군데 혈도도 찍었다. "나는 오른팔을 잘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당신들 중주 이고의 협박에 넘어 가지는 않을 것이오." 이때 왼팔에 소영을 안고 밖으로 빠져 나가려던 두구는 오행검진 에 갇혀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철필을 휘두르며 미친 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검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이것을 본 상팔 은 마음이 매우 초조해졌다. '오행검진에 걸려들었구나. 내가 그토록 주의하라고 수차 일렀건 만...' 상출은 적이 실망했으나 경험이 풍부하고 지모가 뛰어난 그는 여 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무위도장에게 말했다. "귀파는 명문이오. 무당산 삼원관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다 알 고 있소. 오늘 도장이 이곳에 소영을 붙들어 둔다 하더라도 많은 무림 인물들이 끊임없이 이곳으로 찾아들 것이오. 도장은 우리 형 제들처럼 행적을 감추거나 방랑길을 떠날 수 없는 일파의 장문이 오." "더욱이 그 금궁의 열쇠가 소영의 몸에 있는 것도 아니오. 우리 형제는 악소채와 약속했소. 소영의 신변을 보호하여 그들 남매를 상봉시켜 주겠다고... 우리는 이 약속을 지키려는 것 뿐이오. 만일 우리가 약속을 어긴다면 중주이고의 위신은 땅에 떨어져 다시는 신 용을 찾을 수 없게 되잖겠소?" "강호에서는 소문이 소문을 낳아 마치 소영을 데려가면 누가 손 쉽게 금궁의 열쇠를 내 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악소채는 이미 우리 수중에 있는데 소영이 무슨 이용 가치가 있겠소? 도장께 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옳고 그름을 판단해 보시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무위도장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일리가 있지만 나는 소영을 보호할 의무가 있소. 어찌 나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의무와 약속을 저버릴 수 있겠소." "도장! 우리 형제는 다만 재물이 탐날 뿐이오. 사실 우리가 모아 놓은 재물은 이미 처치 곤란이오. 사람은 알몸뚱이로 태어나서 빈 손으로 죽는 것인데 많은 재물이 무엇에 필요하겠소. 그러니 우리 는 이미 장사를 그만해도 되지요. 허나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는 법. 더욱이 이번 일은 우리는 여태껏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 물을 모았으나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누구와의 약속을 깨뜨려 본 적은 없었소. 그러니..." "......" "나는 오늘 도장과 약속하겠소. 그 금궁의 열쇠가 우리 형제의 손에 들어온다면 금궁에 있는 보화를 도장에게 한몫 드리겠소." 무위도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도장, 그렇게 웃어 넘길 가벼운 일이 아니오. 우리 형제는 다만 재물을 탐낼 뿐이지만... 목숨을 뺏겠다는 사람도 있음을 알아 두 시오." 상팔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 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위도장과 상팔 두 사람이 돌아 보니 조 전이 지팡이를 거꾸로 쳐든 채 뒤로 비틀비틀 물러서고 있었다. 조전의 비명소리를 들은 정가는 재빨리 운양자에게 두세 번의 공 격을 퍼부으며 삼장 가량 공중으로 솟아 올랐다. 그와 동시에 왼손 을 등 뒤로 돌려 청동 막대기를 뽑으려고 했다. '저 청동관(靑銅管) 속에는 독화가 숨겨져 있다는데... 만일 저 놈이 독화를 뿌린다면 온전히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급함을 느긴 운양자는 진기를 모아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졸장부야! 네가 감히 독화를 사용하려고 하다니..." 운양자의 동작은 매우 빨랐으나 몸을 날린 정가에 비해 한 발 늦 었다. 정가는 이미 청동 막대기를 뽑아 들고 있었다. '큰일이다!' 운양자가 흠칫하는 순간 어디서인가 한 줄기 강한 장풍이 정가에 게로 몰아닥쳤다. "으윽!" 정가는 신음과 함께 몸을 뒤틀더니 청동 막대기를 놓치며 땅으로 내려 섰다. 그가 손을 뻗쳐 그것을 집으려는 것을 본 운양자는 재 빨리 그의 머리 위로 덮쳐 내렸다. 운양자가 빠른 공격으로 덤비자 정가는 청동 막대기를 집을 생각 을 포기하고 급히 뒤로 재주를 넘으며 피했다. "청산에 있으니 불을 피할 걱정은 필요 없소. 우리는 갑시다." 조전이 소리치자 정가는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이때 한 도인이 장검을 휘두르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어디를......" 다섯 자쯤의 거리에 있던 조전이 도인을 향해 음풍장(陰風掌)을 뻗쳤다. 도인은 음풍장에 얻어맞고 전신이 싸늘해지는 느낌과 함께 뒤로 몇 걸음 미끄러지고 말았다. 운양자는 왼발로 땅에 떨어져 있는 청동 막대기를 차 올려 왼손 으로 받아든 다음 장검을 입에 물었다. 이때 도인이 조전의 음풍장 을 맞고 그의 앞으로 뒷걸음치고 있었다. 운양자는 급히 오른손으로 그를 부축하며 귓속말을 했다. "빨리 운기조식하여 상처를 치료하시오." 도인을 땅에 앉힌 다음 고개를 돌려보니 정가와 조전은 이미 도 망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눈깜짝할 사이에 어둠 속으로 사 라졌다. '무당파는 과연 무섭구나. 강적 두 명을 저토록 혼비백산해서 도 망치게 만드니... 더욱이 이 무위도장의 공격에는 놀랐다.' 상팔은 조금 전에 무위도장이 일장을 날려 정가로 하여금 청동막 대기를 떨어뜨리게 한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상팔은 무위도장을 바라 보더니 품에서 환약 하나를 꺼내 들었 다. "이 약은 그 독을 없앨 수 있소. 도장께서는 속히 복용하시오. 운기를 하여서 독침을 꼼짝 못하게 만든 다음 지남철로 독침을 묻 어 내면 되오. 도장의 공력이면 하루 이틀에 회복될 수 있을 것이 오." 상팔은 환약을 무위도장에게 던져 주며 말을 이었다. "도장은 조금 전에 상승내공의 무형장력(無形掌力)으로 독화정가 의 청동관을 떨어뜨렸을 때 독침의 독이 그 틈을 비집고 도장의 혈 도를 뚫었을 것이오. 급히 약을 복용해야 하오." 여기까지 말하더니 갑자기 음성을 낮추었다. "저 우문한도를 조심하시오. 도장은 강호를 널리 돌아 다니시지 는 않지만 오늘의 일로 인해 명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오. 명성이 높아지면 시기하는 무리도 많은 법이니 절대로 목숨을 가볍게 여기 지 마시오. 나의 건방진 조언은 여기서 맺겠소. 그럼 나는 가보겠 소이다." 말을 마치고 상팔은 금주판을 휘두르며 몸을 날렸다. 그는 곧장 오행 검진을 향해 돌진했다. 운양자는 장검을 번쩍이며 상팔의 뒤를 추격했다. 그의 검이 싸 늘한 검광을 뿌리며 상팔의 등을 향해 찍어 내렸다. "쨍!" 상팔이 급히 휘두른 금주판과 운양자의 검이 부딪치며 금속성을 퉁겨 냈다. 검광과 금빛찬란한 금주판의 빛이 공중을 뒤덮었다. '중구이고는 장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무공도 뛰어나구나. 과 연 소문대로군! 독화정가에 비해 오히려 강적이다.' 상팔은 금주판을 좌우로 흔들어 철럭철럭 주판알 소리를 내며 힘 겹게 운양자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운형, 과연 검술이 놀랍소. 가히 무위도장의 사제답소." "상형의 무공도 매우 고강하오. 도망칠 생각을 말고 힘을 써 보 시오." 운양자는 한 마디 비꼬며 다시 공격을 가했다. 검끝은 상팔의 상 하, 좌우로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이러다간 당하겠는데...' 상팔은 금주판으로 운양자의 공격을 막아내며 반격할 틈을 노렸 으나 운양자의 검법에는 바늘 구멍만한 헛점도 없었다. 무위도장은 상괄이 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약을 삼킨 그는 운양자를 향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사제, 오행검진을 해산시키고 그를 놓아주게." 운양자는 놀란 표정으로 무위도장을 돌아 보았다. 무위도장이 다 시 눈으로 지시하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장검을 높이 쳐 들었다가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두구와 상팔을 가두었던 오행검진이 활짝 흩어졌다. "도장, 감사하오." 상팔은 금주판을 흔들며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소영을 업 고 두구가 따라 나갔다. 운양자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그들의 모 습 역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삼원관 주위에는 몇 겹의 방어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것을 뚫 고 들어 올 때 상팔과 두구는 많은 애를 먹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 이 나가는 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형식적으로 길을 막았다가 곧 터 주곤 했다. 상팔과 두구는 삼원관을 빠져 나가 계속 달렸다. "무당파의 오행검진은 과연 날카롭구나." 두구가 뒤를 돌아 보며 두려움과 안도가 섞인 어조로 말하자 상 팔도 긴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했다. "두제, 이번 장사가 끝나면 우리도 손을 씻고 자취를 감추는 것 이 좋겠네. 무공의 높이는 한이 없어." 상팔이 금주판을 품 속에 집어 넣고 다시 산을 내려 가자 그 뒤 를 두구가 바싹 쫓았다. 두 사람이 한참을 달리자 어느새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 당산을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상팔이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려 두구의 등에 있는 소영을 바 라 보며 물었다. "두제, 그 꼬마는 어찌된 일이지?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아, 이 꼬마 말이오? 내가 이 아이의 혈도를 찍었소." 두구가 소영을 납치했을 때 소영은 마구 발버등을 쳤었다. 두구 는 오행검진에 둘러싸여 사면 팔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소영의 혈도를 찍었던 것이다. "아우. 그 꼬마를 내려 놓고 혈도를 풀어줘야지." 상팔의 말에 두구는 소영을 땅에 내려 놓더니 그의 혈도를 풀어 주기 시작했다. 소영은 두 군데의 막혔던 혈도가 풀리자 눈을 떴다. 소영은 자기 를 바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 벌떡 일어났다. 그는 사방을 한 번 훑어 보았다. 무당산의 높은 봉우리는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고 그 위에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소영은 저주가 담긴 어조로 말했다. "결국 당신들이 나를 납치했군요." "공자, 자네는 그 몇몇 무당파 괴물들이 우리를 당할 수 있을 것 으로 생각했나?" 두구의 말에 소영은 냉소했다. "흥! 무슨 계교를 썼겠지.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도대체 당 신들은 나를 납치해서 어쩔 셈이에요?" "자네가 만나고 싶어하는 악소채에게 데려다 줄 것이네." 소영은 악소채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 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당신들의 무공은 정말 훌륭해요. 결국 나를 삼원관에서 뺏아 왔 으니." "우리 중주이고 형제가 수십 년 간 지켜온 금자초패(金字招牌)를 자네는 빛좋은 개살구로 알았던가?" 두구가 어깨를 들썩이며 자랑스럽게 말하자 소영은 가시돋힌 말 을 그에게 던졌다. "흥, 너무 우쭐댈 것 없어요. 당신네는 무공이 높다고 자랑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당신들이 옳지 못한 생각으로 사람을 해치니 오 히려 웃음거리일 뿐이지요." "이놈아! 네가 감히 우리에게..." 두구는 오른손을 번쩍 들더니 소영의 어깨를 향해 내리쳤다. 그 것을 상팔이 손을 뻗쳐 옆으로 밀어 내며 소영에게 말했다. "공자, 자네는 담도 크구먼?" "무엇이 두렵겠어요? 기껏해야 죽음밖에 더 있겠어요?" 소영이 어깨를 확 펴며 서슴없이 대답하자 상팔이 껄껄 웃었다. "허허, 고집이 굉장히 세구나." "고집이 아니라 본연의 자세지요." "히야, 요것 봐라! 주등이는 살아서... 너는 살아도 죽은 것 같 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해 보았나?" 두구가 눈을 부라리자 소영은 더욱 가슴을 활짝 펴며 씩씩하게 말했다. "그것이 무엇이 두렵겠어요? 한 칼에 죽는 것이나 백 번의 난도 질을 당하나 역시 죽는 것은 마찬가진데. 나는 조금도 죽음이 두렵 지 않아요. 당신네들이 칼로 내 사지를 저민다 해도 눈하나 깜짝하 지 않을 것이오." 이 말을 하는 소영의 얼굴에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죽 음을 초월한 숭엄한 표정이 깃들여 있었다. 두구는 소영에게 말로 당할 수 없자 얼굴에 노기를 띠며 소리질 렀다. "좋아. 너처럼 고통과 두려움을 모르는 놈은 단단히 혼을 내 다 시는 버르장머리 없는 주둥이질을 못하게 하겠다. 내가 오늘 너에 게 고통을 주기 않으면 너는 점점 건방진 생각이 머리끝까지 기어 오를테니 어디 맛좀 봐라!" 두구는 오른손을 쳐들더니 두 개의 손가락으로 소영의 정수리를 향해 찍으려고 했다. 소영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손가락으로 소영의 정수리를 찌르려던 두구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손을 멈추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자신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나 두구가 너같은 어린놈과 다툰다면 무슨 면목으로 강호에 얼 굴을 내밀겠는가. 참자, 참아..." 그것을 본 상팔이 껄껄 웃으며 소영에게 말했다. "공자. 우리는 추호도 자네를 해칠 생각은 없네. 어서 나에게 업 히게. 갈 길이 바쁘니..." "난 아직 두 다리가 멀정하니 혼자 걷겠소." 소영이 내뱉듯이 말하고는 쏜살같이 달려 내려 갔다. 그것을 본 두구가 급히 소영의 등덜미를 잡으려 하자 상팔이 말렸다. "그가 혼자 뛰게 놔 두게." 소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렸다. 숲갈을 지나 계속 칠, 팔 리 길을 달렸는데 무공을 지니지 못했고 체력이 빈약한 그에게는 고역이었다. 소영은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도저히 더 뛸 수가 없었다. '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기는 싫다.' 소영은 옷소매로 땀을 씻으며 계속 달렸으나 결국은 다리가 휘청 하더니 무릎이 꺾이며 앞으로 거꾸거지고 말았다. 뒤따르던 상팔이 얼른 소영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소영의 얼 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입술은 경련이 일었다. "공자, 힘들지?" 소영은 가쁜 숨을 몇 번 몰아 쉬더니 거의 발악적인 음성을 토해 냈다. "나를 놔 주시오. 갈 수 있소." 소영이 상팔을 뿌리치며 뛰어 가려고 하자 두구가 눈살을 찌푸리 며 소영의 등덜미를 잡았다. "형님, 이 꼬마는 고집이 세군요. 이 고집은 꺾을 수는 없을 것 같으니 혈도를 찍어서 데려가는 것이 좋겠소." 그는 상팔의 승낙도 기다리지 않고 소영의 수혈(睡穴)을 찍어 버 렸다. 소영은 상팔의 품으로 맥없이 쓰러지며 의식을 잃었다. 한참 후, 물 흐르는 소리가 가물가물 들려 왔다. 거센 물줄기가 굽이치며 흐르는 소리, 뱃전을 두드리는 소리, 웅웅거리는 사람의 말소리. '여기가 어딜까?' 상팔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공자, 이제 정신을 차렸나? 배가 고플 텐데 먹을 것을 줄까?" 소영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오?" "여기는 장강(長江)이네. 우리는 지금 한 척의 대선(大船)에 타 고 있네." 소영은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고 눈 앞이 아물거렸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 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소영은 판자벽을 짚으며 더듬더듬 선실 을 나서니 차가운 강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소영의 품을 파 고 들었다. 안개가 낀 듯하던 소영의 머리는 차츰 맑아지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선 눈부신 태양이 부서져 내리고 있 었으며 멀리 수평선에는 하나의 흰 점이 가물거리고 있었는데 그것 을 자세히 보니 한 척의 돛단배였다. '아! 강(江)도 하늘도 넓기만 하구나!' 소영은 기지개를 켰다.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 이때 그의 뒤에서 상팔의 부드러운 음성이 다가 왔다. "강바람이 세니 자네는 몸의 중심을 잘 잡아야 되네." 소영은 상팔을 힐끗 돌아 보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상팔의 얼 굴은 피로한 기색 이외에 또 다른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어린 녀석이 무슨 생 각이 저토록 깊을까? 너무 어른스럽다.' 상팔은 소영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 서며 물었다. "공자, 무엇을 그토록 생각하나?" "나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는 비록 당신들의 비열한 인품을 좋아 하지는 않지만, 당신들이 악당이라고 할 수도 없군요. 그러니 ... 내가 후일에 고강한 무공을 지닌다 해도 당신네들을 죽이지는 말아야겠다고... " "하하하, 재미있는 생각이군. 자네는 누구에게 무공을 배울 생각 인가?" 소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음성이 끼어 들었다. "공자, 아마도 자네에게 우리를 이길만한 무공을 가르쳐 줄 실력 자는 없을 것이네." 갑판으로 걸어 나오는 것은 두구였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소 영은 누구에게 무공을 배우면 이들 중주이고보다 뛰어날 수 있을지 자못 의문스러웠다. '악 누나? 무위도장? 무위도장의 무공 가지고는 안 될 테고... 아! 있다. 무위도장이 이름만 듣고도 긴장하던 그 북천존자가 좋겠 다.' 소영은 두구와 상출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북천존자는 어때요?" "북천존자? 자네는 그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나?" "공자, 엉터리같은 소리 치우게. 북천존자는 이미 승천한 지 오 래네." "당신들은 믿지 못하나요? 북천존자가 살아 있으며 내가 그 분에 게서 무공을 배우겠다는 말을......" "물론, 믿을 수 없지." "좋아요. 믿지 못하겠다면 그만 둡시다." 소영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잘라 말하자 상팔이 미간을 찌푸리 며 물었다. "자네는 정말로 북천존자를 만났던 적이 있었나?" "물론이오.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들에게 거짓말을 하겠소?" 이 때였다. 멀리서 한 척의 작은 배가 화살처럼 빠르게 달려 오 고 있었다. 물결을 헤치며 큰 배를 향해 다가 오는 작은 목선은 그 빠르기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부딪칠 듯 달려들었다. ".....앗!" 목선에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솟아 오르더니 곧장 소영을 향해 덮쳐 왔다. 12. 붕새를 타고 세외고원(世外孤園)에 닿다 "이놈!" 작은 목선에서 뛰어든 괴한이 소영을 잡아 채려고 덤비자 상팔은 크게 호통을 치며 일장을 날렸다. 그 일장은 괴한과 소영에게 태풍 처럼 불어 왔다. 상팔의 장풍을 맞은 소영이 미처 몸을 가눌 사이도 없이 강물 속 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그러자 괴한도 그 뒤를 따라 강으로 뛰어들 었다. 중주이고는 무공이 뛰어나긴 했지만 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었다. 소영이 물에 빠지고 괴한이 그 뒤를 쫓아 뛰어드는 것을 보 고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내 실수다." 상팔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소영이 빠진 곳을 내려다 보았으나 거센 물결이 파도를 일으키고 있을 뿐 소영과 괴한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다. 목선에는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걸친 사람이 등을 돌린 채 단정 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한 손에는 노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는 턱을 받치고 있었다. "저 삿갓을 쓴 놈은 정파(正派)출신이 아닌 모양이니 우리는 우 선 저 놈을 납치해야겠소." 두구가 턱으로 삿갓을 쓴 사람을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상팔은 상대방의 무공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해 두구를 말렸다. 그러나 두구의 몸은 이미 일장 높이로 치솟고 있었다. 공중으로 솟아 오른 두구는 허공에서 두 다리를 구부리고 한 바 퀴 돈 다음 쏜살처럼 목선을 향했다. 두구는 목선으로 뛰어내리며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손가락 을 세워 삿갓 쓴 사람의 목덜미에 있는 혈도를 찍으려는 순간 삿갓 을 쓴 사람은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해 강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방금 치솟았다가 떨어지는 두구의 동작은 지극히 빠르고 묘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방이 훌륭 하게 피하는 것을 본 두구는 깜짝 놀랐다. '나의 이 일초를 피하다니... 의외의 강적이군.' 두구는 아직 공중에 떠 있는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목선으로 내려 섰다. 그런 다음 즉시 진기를 보아 버티고 섰다. '나는 물에서는 어린애다. 이놈이 갑자기 뛰어 나와 물로 끌고 들어 간다면 큰일인데 큰 배로 되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두구는 즉시 내가의 절학인 대력천금추(大力天金墜)의 신법을 전 개했다. 그가 두 다리에 힘을 주자 목선은 거대한 암석에 눌린 듯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뱃바닥의 두 곳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 며 물줄기가 하늘에 치솟았다. 배가 가라앉을 때 뿜어 오르는 물줄기의 힘을 빌어 공중으로 몸 을 솟구친 두구의 모습은 얼핏 보기에는 한 마리의 잉어가 물결을 차고 펄떡 뛰어 오르는 것 같았다. 두구는 공중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곧 큰 배의 갑판으로 가볍게 뛰어 내렸다. 그는 갑판을 딛으면서 두 손으로는 가슴을 보 호한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삿갓을 쓴 사람이 물 속에서 기습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는 큰 배로 옮겨 타면서도 계속 주위를 경계했다. 원래가 세심한 그의 성격은 좀처럼 실수가 없었다. 그가 강호에 이름을 떨치게 된 데에는 그 조심성이 한몫 하였다. 큰 배로 돌아 온 두구와 배에 버티고 서 있던 상팔은 조금도 소홀 히 하지 않고 강을 살폈으나 소영의 모습과 두 괴한의 모습은 나타 나지 않았다. 단지 작은 목선만이 불룩한 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형님, 그들은 이미 물 위로 솟아 나온 것이 아닐까요?" 두구의 말에 상팔이 버럭 화를 냈다. "우리 형제는 소경이 아닌데 어째서 그들이 솟아 나오는 것을 보 지 못했겠느냐?" "그렇다면 그들이 아직 물 속에 있다는 이야기인데... " 두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 두 괴한은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쫓아 왔을 것이오. 그 러니...... 그들은 물에서는 귀신일 거요. 하지만 소영은 물 속에 서 오랫동안 견딜 수 없을 텐데... 그들이 소영을 죽일 생각이 없 다면 어째서 아직까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요?" 상팔이 무겁게 대답했다. "그건 모를 일이네. 그러나... 그들이 올라 오지 않는다 해서 우 리가 뛰어들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이 물 속에서 오래 견디나 우 리가 배 위에서 오래 견디나 두고 보자고." 상팔은 사공을 불러 배가 제자리에서 돌게끔 했다. 그런 후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의 얼굴에는 노기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두구는 오랫동안 상팔과 붙어 다녔지만 지금처럼 침통해 하는 상 팔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고통스런 표정을 짓 고 있던 상팔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아우, 자네는 빨리 하류로 가서 살펴 보게. 그 두 괴한은 소영 을 데리고 하류로 가서 상륙했을 거네. 이곳에서 멍청히 서 있기는 너무도 억울해." 두구는 허리를 굽혀 예를 하고는 훌쩍 몸을 솟구쳤다. 제비처럼 날아 오른 두구는 저 만큼에 떠 있는 목선 위로 뛰어 내렸다. 목선은 가라앉을 염려가 없었다. 수면과 갑판 사이에 공간이 있 어 오히려 안전하게 떠 있었다. 그러나 배가 뒤집혀 있기 때문에 노를 저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차피 노를 저을 줄 모르니 배가 엎어져 있는 상태가 오 히려 유리하다. 우선 침몰할 염려는 면했으니까......' 두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강한 장풍이 목선을 때렸다. 큰 배에 타고 있던 상팔이 보낸 장풍이었다. 장풍을 맞자 목선은 파도를 뚫고 쏜살같이 내달렸다. 두구는 상팔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두 손에 진기를 모아 쥐 었다. 두구가 장풍으로 강물을 때리자 목선은 다시 계속 달렸다. 양손으로 번갈아 가며 장풍을 날려 목선 뒤의 수면을 때리니 배는 힘 안 들이고 하류를 향해 미끄러져 갔다. 엎어진 목선과 함께 두구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상팔은 다 시 수면을 주시했다. '괴한들아, 머리카락만이라도 보여 봐라. 눈에 띄는 즉시 네 놈 들을 콩가루로 만들 테니...' 상팔이 잔뜩 벼르며 굽이치는 강물 위게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척의 배가 그의 시야에 들어 왔다. 이 쪽으로 다가오는 그 배는 돛을 높이 달았으며 천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상팔은 두 손에 암기를 움켜 쥔 채 두 눈을 부릅뜨고 그 배를 주 시했다. 천막 배는 빠른 속도로 달려 왔는데 상팔이 시력을 집중해 서 살펴 보았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발견하지 못했다. 천막 배는 돛에 바람을 가득 안은 채 차츰 멀리 사라져 나중에는 아예 시야에 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배가 지나간 강물에는 여전히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겨울 하늘은 저녁 노을을 깔며 강 위에 낮게 내려앉았다. 제법 차 가운 바람이 피부를 할퀴고 시계(視界)는 차츰 어두워졌다. 상팔의 안색은 차츰 초조가 지나쳐 짜증기가 서리고 있었다. 황 혼이 강 위에 짙게 깔린 즈음에야 작은 범선을 빌려 타고 두구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물결치는 소리와 차가운 바람만이 두 사람의 마음을 무겁고 스산하게 만들고 있었 다. 두구의 안색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입술 은 까맣게 타 있었다. 상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두구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 섰다. 두구가 실의에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찾지 못했소."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분위기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두구가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참으로 이상한 일이잖소? 그 놈들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이오? 수정궁(水晶會) 속으로라도 들어 간 것인 지......" 상팔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두구는 울화가 치미는지 눈을 부릅뜨고 화풀이라도 하듯 소리쳐 물었다. "갑갑하오. 형님은 그 놈들이 도대체 어느 문파의 출신같소?" 상팔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들의 내력을 짐작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무 공이 어느 정도인지도 추측하지 못하였네. 하지만 삿갓을 쓴 놈이 자네의 일 초를 피하는 것을 보면 무공이 훌륭한 놈인 것이 틀림없 는데..." 상팔이 목소리를 낮추어 중얼거리듯 말 끝을 맺었다. "그 놈이... 자네의 공격을 맞고 물에 빠져 버린 것인지도 모르 지." 그러나 두구는 삿갓을 쓴 괴한이 분명히 그의 공격을 피해 내고 물 속으로 뛰어든 것을 알고 있었다. '강호에 수십 년 동안 굴러 다니면서 이토록 답답한 꼴을 당하기 는 처음이구나.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것이 아니라 아예 밥그릇째 뺏겨 버린 꼴이니......' 배는 물결을 따라 하류 쪽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몇 번이나 상 팔과 두구를 돌아 보며 망설이던 사공이 담을 크게 먹고 조심스럽 게 물었다. "두 분께서는 어디서 내리시겠습니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상팔이 무서운 눈으로 사공을 노려 보았 다. 그러더니 한 손을 들어 강물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그러자 펑!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물기등이 솟아 오르며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것을 본 사공은 목을 자라목처럼 움츠리며 더 말을 못했다. "으하, 으하하하..." 갑자기 상팔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두 손으로 허리를 움 켜 잡고 고개를 젖힌 채 숨넘어갈 듯 웃었는데 그 웃음은 공허하고 자학적이기조차 했다. "형님, 왜 그토록 웃으셨소? 갑자기 내장 속으로 개미라도 기어 들어 갔던가요?" 두구가 빈정거리며 묻자 상팔이 쓸쓸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수십 년 간 피땀 흘려 쌓아 올린 금자초패가 이름없는 두 괴한에 의해 하루 아침에 무너지다니... 하도 어이가 없고 너무 허전해서 웃음밖에 안 나오네." "형님의 심정 이해하오. 나도 동감이니까. 하지만 소영과 그 괴 한은 거센 물결 속에서 죽었을 테니 우리가 누구에게 당했단 말은 어패가 있잖소?" "흥, 결과적으로 소영은 우리 손에 없잖아. 이미 약속을 했는데 소영을 잃었으니 무슨 낮으로 악소채를 대할 수 있겠나?" 중주이고는 강호를 떠돌아 다니며 수단 방법을 총동원해서 장삿 속을 채웠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익만 있다면 살인까지도 밥먹듯 해치웠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 번 약속한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킨다는 원칙을 목숨보다 중히 여겼다. 이 신용을 하나의 커다란 원칙으로 삼아 온 이들에게 이제 약속이 깨지게 생겼으니 상팔의 분노도 무리가 아니었다. 상팔의 노한 기세에 질린 듯 한동안 말이 없던 두구가 입을 열었 다. "우리가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고 신의를 지켜 왔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형님, 지금은 사정이 틀리 오. 소영을 데려갈 수 없으니 악소채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볼 면 목이 없소. 악소채에게서 궁금의 열쇠를 달랄 면목은 더욱 없지요. 그렇다고 금궁의 열쇠를 포기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일은 이미 순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되었으니 형님은 너무 자 신의 위신만 생각하려 들지 마시오.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시 강호에......" 상팔은 소리를 꽥 질렀다. 금방 달려들 듯한 상팔의 기세에 두구 는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한숨을 내쉬던 상팔이 문득 두구를 주시하며 침통한 어조로 말했 다. "아우, 우리는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친형제보다도 두터운 우애 를 나누어 왔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내 몸처럼 지켜 온 위명과 신용이 하루 아침에 무너졌으니 이제 더 이상 형제의 정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네. 나는 이미 갈 길은 작정했지만, 아우보고 함께 가 자고 강요하지는 못하겠네..." "형님, 무슨 말씀을 하시오? 중주이고는 저울추와 저울눈을 뗄 수 없듯이 우린 서로 떨어질 수 없소. 형님이 우리의 갈 길을 말하 시오." "좋네!" 상팔이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과연 내 동생일세. 그럼 이렇게 하세." "어떻게요?" "우리의 초패가 이미 무너졌으니 강호에 나설 면목은 없네. 이제 부터 우리 두 사람은 강호에서 사라지는 거야. 악소채를 만나자는 얘기도 꺼내지 말고 변장하세. 그래 가지고 소영의 행방을 찾는 것 일세. 소영을 찾는 날까지 우리 중주이고의 이름은 없는 것이네." "만일 소영이 죽었다면?" "하하, 소영이 죽었다면 우리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우리 세찬 강 물속에 이름을 장사지낸 것이지..." 두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소영이 아직 세상에 살아 있다면 우리 형제는 언젠가 다 시 명성을 되찾을 수 있겠군요." "그렇지, 우리가 소영을 악소채에게 보내 줄 수만 있다면, 중주 이고의 명성은 강호에 더욱 높아지지." "좋소. 우리가 악소채와 약속할 때 확실한 기한을 정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군요. 몇 년이 지나더라도 우리 약속을 지키면 되니.." "사공, 배를 육지에 대시오!" 상팔은 뜻이 결정되자 속히 소영의 행방을 찾는 일이 중요했던 것이다. 사공이 긴 삿대로 강바닥을 찌르며 조심스럽게 배를 물았다. 강 변과 거리는 차츰 줄어들어 삼 장쯤 밖에 안 되었다. 이때 상팔이 발을 한 번 두르더니 육지를 향해 훌쩍 날아 갔다. 그것을 본 사공이 놀라고 있는 사이 두구가 그 뒤를 따라 몸을 날 렸다. '앗! 뱃삯도 안 주고...' 그들을 부르려던 사공은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 있던 갑판에는 어느새 놓아 두었는지 어린 아이 주먹만한 황금이 번쩍이고 있었다. 사공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져서 황금 덩어리를 덥석 집어 들었 다. 그가 돌아 보았을 때 이미 두 사람은 멀어져 가고 있었다. 강 변에는 부서진 돌조각과 진흑뿐이었다. 마을은 보이지 않았고 세 그 루의 버드나무가 머리를 풀어 헤친 귀신처럼 어둠 속에 서 있을 뿐이었다. 상팔은 나무에다 지력(指力)으로 글자를 새겨 넣었다. <병인(丙寅)년 이월 이일, 소영이 이곳에서 강에 빠지다. 중주이 고인 상팔, 두구씀> "이 글은 우리 형제가 악소채에게 주는 대답이며, 금궁의 열쇠를 뺏으려는 또한 무리들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던져 주는 것 이다." 상팔의 말에 두구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소. 우리는 이제부터 많은 무림 인물들을 청해다가 그 꼬마 의 행방을 같이 찾도록 합시다." 두 사람은 어둠이 짙게 깔린 강변에 서서 별이 돋기 시작한 하늘 을 바라 보았다. 갑자기 상팔이 크게 고함을 지르더니 어둠 속으로 치달렸고 그 뒤를 두구가 급히 따라 갔다. 어둠이 두 사람의 모습을 완전히 삼 켜 버렸다. 한편 상팔의 장풍에 견디지 못해 물 속으로 떨어진 소영은 전신 이 저려오는 듯한 차가움을 느꼈다. '이젠 끝장이구나!' 몸이 밑으로 가라앉으며 떠내려 가자 소영은 눈앞이 캄캄한 절망 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본능적으로 팔다리 를 마구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체가 허약하고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소영은 숨이 막혀 더 견딜 수 없게 되어 그대로 물을 들이키려고 했을 때, 누군가의 손이 그 의 등덜미를 잡으며 대나무 하나를 입에 물려 주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만큼 가슴이 답답해 올때 대나무가 입에 물 려지자 소영은 길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대나무의 한쪽 끝은 강 물 밖으로 약간 솟아 있었기 때문에 숨을 쉬는데 별 지장이 없었 다. 대나무를 통해 입으로 숨을 쉬니 약간 답답하긴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몸은 괴한에게 잡힌 채 계속 끌려 가 고 있었다. 강물은 몹시 더럽고 거기에다 파도까지 치고 있어서 상팔이나 두 구는 이들이 수면 밑을 헤엄쳐 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 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소영은 전신이 얼어오는 듯했다. 그 가 물에서 나왔을 때는 전신이 굳어져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의식도 가물가물해져 갔다. 소영이 제정신이 돌아 왔을 때 그의 몸은 작은 선실에 눕혀져 있 었다. 두꺼운 솜이불이 덮혀 있어 몸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선실 안에는 등불이 켜져 있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 사람은 오십여 세쯤 되어 보였으며 도롱이를 걸치고 있었고, 마주 앉은 사람은 사십여 세의 거한(巨漢)이었다. '보아하니 이 사람들은 나쁜 사람일 거야. 목적은 역시 금궁의 열쇠에 있을 테지. 나에게 금궁의 열쇠에 대해 물어 볼 것이 틀림 없어.' 소영은 불안과 긴장에 쫓기다가 다시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 들 었다. 허약한 체질로 물 속에서 몇 시간을 보낸 그는 전신이 피곤 으로 덮혀 있었다. 소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창을 통해 들어 온 햇빛이 선실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도롱이를 걸친 사람이 식사를 가지고 들 어왔다. 마침 시장기를 느끼고 있던 소영은 밥그릇을 끌어 당겨 허 겁지겁 퍼먹었다. 하루가 지났다. 어둠이 선실을 메워 이제 등불을 켤 시간이구나 하고 소영이 생각하고 있는데 검은 옷을 입은 거한이 들어와 불쑥 입을 열었다. "다 왔다!" 한 마디 짧게 내뱉더니 그는 소영을 번쩍 들어 등에 업었다. 선 실 밖으로 나서자 배에서 훌쩍 뛰어 내려서 빠른 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소영을 업은 거한은 한 마리의 다람쥐처럼 절벽을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소영이었지만 깎아지른 절벽을 기어 오르는 것에는 위태위태한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절벽을 올라선 거한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더니 어둠컴컴한 동 굴 속으로 들어 섰다. 거한은 한참 동안 동굴 깊숙이 들어 가더니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거한이 손을 뻗치자 삐이걱!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며 돌 문이 열리고 석실(石室)이 나타났는데 가벼운 기침 소리가 들리더 니 한쪽 벽의 문이 열렸다. 나타난 사람은 푸른 옷을 입은 소년이 었다. 소년이 나타나자 거한은 그에게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공자의 명령을 다행히 완수했노이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거한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실내에는 소 영과 소년, 두 사람뿐이었다. "소제(小弟)무서워하지 마시오." 소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소영은 가슴을 활짝 펴 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나는 두렵지 않소." "소제의 담은 크구려. 부친께서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소제를 이 곳으로 모시게 한 것이오.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는데 솔직히 대 답만 하면 절대로 손을 대지 않겠소." "무엇이든지 물어 보시오." "그럼 나를 따라 오시오." 소년은 손짓을 하더니 앞장섰다. 방금 소년이 나타난 문으로 들 어 서니 다른 석실이 나타났다. 이 방은 매우 컸다.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침상이 놓여 있고 그 침상에는 호랑이 가죽이 깔려 있었다. 침상 위에 한 노인이 누워 있는데 병자인 듯했다. "아버님." "나를 일으켜다오." 소년은 조심스럽게 노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노인의 몸에 솜이불 을 감아 벽에 기대 앉게 한 소년은 옆으로 물러섰다. 노인은 나뭇 가지처럼 뼈만 앙상했으나 뼈대가 매우 굵었다. 그는 퀭한 눈으로 소영을 한동안 훑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 다. "자네는 악운고를 알고 있나?" "물론 알고 있소. 그 분은 나의 이모요." "강호에는 악운고가 금궁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말이 떠도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물론 사실이오." 소영의 대답이 너무도 솔직하고 깨끗한 데에 노인은 놀라는 표정 을 지었다. 그로서는 상상 외였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천하의 무림 인사들이 눈독을 들이는 금궁의 열쇠를 얻 었으니 악운고에겐 많은 적이 있겠군. 지금 그녀는 어디 있는가?" "죽었소." 소영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자 노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노인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급하게 물었다. "그것이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그렇소. 운이모는 비록 죽었으나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과 조금 도 다름이 없었소. 말을 하면 대답할 것 같았는데..." 소영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인은 큰 타격을 받은 듯 전신을 가볍게 떨며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음, 결국은... 그녀에게 자식이 있나?" "낭자 한 분이 있소." "알았네. 자네는 이제 그만 가서 편히 쉬게나. 강호에선 곳곳에 포위망을 펼쳐 놓고 자네 뒤를 쫓고 있네. 그러나 이곳에는 자네를 해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안심하게나." 노인이 손짓을 하며 나가라고 했다. 소영은 궁금한 것이 많아 입 을 열어 물어 보려고 했으나 소년이 그의 오른팔을 잡아 끌었다. "소제, 휴식할 방으로 안내하겠소." 소영은 그에게 끌려 밖으로 나가며 생각했다. '저 노인은 운이모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금궁의 열쇠를 뺏으려 고 나를 납치 한 것으로 알았는데." 소년은 소영을 끌고 한동안 걷더니 한 석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 었다. "이 석실이 소제가 휴식할 방이오. 들어가서 쉬시오. 무슨 일이 있으면 소리를 한번 지르시오. 그러면 사람이 나타날 것이오." 소년은 소영이 몹시 귀찮다는 듯 몸을 돌렸다. 소영이 석실 안으로 들어서자 소년의 음성이 들렸다. "소제는 될 수 있는 한 얌전히 있으시오. 도망치거나 이것 저것 만지며 함부로 돌아다니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말이 멎자 급히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려 왔다. 소영은 한동안 멍 청히 서 있다가 이윽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흥, 너는 나에게 아무 것도 보지도 건드리지도 말라고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뿐이다. 어서 보라는 말이 나 다름없지..." 소영은 석실에서 나와 사방을 한번 둘러 본 후 벽을 더듬거리며 동굴을 따라 걸음을 옮겨 놓았다. 한참을 걷자 어디서인가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 려왔다. '이상하다. 동굴 속에서 물 소리가 들려 오다니... 이 굴 속에는 많은 석실의 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 그 석실마다 필경 신기한 것들 이 많이 들어 있을 것이다. 아무튼 동굴 끝나는 데까지 가보자.' 소영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그 의 손에 불쑥 튀어 나온 돌이 짚혔다. 그 돌을 더듬어 보니 어디에 끼인 듯했다. 소영은 돌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돌은 약간 건들거렸다. 소영 은 흥분을 느끼며 손에 힘을 주어 그것을 밀어 보았다. 별안간 눈부신 광선과 함께 차가운 습기가 얼굴로 몰려 들어 눈 을 감았다. 눈을 뜨니 앞을 막았던 벽이 되어 활짝 열려 있었다. 돌문 밖에 는 웅대한 폭포가 무서운 기세로 떨어져 내리면서 그것은 하나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소영은 넋을 잃은 듯 한동안 서 있다가 돌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 다. 소영이 석벽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돌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 어 보니 밑에는 까마득한 계곡이었고 높은 산 위에는 곧장 폭포수 가 계곡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만 리의 길을 걸으면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더 니 이 말은 과연 틀림이 없구나.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어찌 책에 서 볼 수 있으랴.' 소영이 한참 폭포수에 정신을 팔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 서 싸늘한 음성이 튀어 나왔다. "흐흐흐. 네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구나!" 말소리가 멎기도 전에 한 줄기의 장력이 소영의 등 뒤에서 다가 오고 있었다. "앗!" 소영은 미처 돌아 볼 겨를도 없이 동굴 밖으로 몸이 날아가 까마 득한 계곡을 향해 곧장 떨어지고 있었다. 소영의 몸은 폭포수에 쓸려 아래로 떨어져 내려 갔다. 동굴에서 몸이 밀려 나온 순간 소영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무엇인가 움 켜 쥐려고 본능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이때 그의 손에 무엇인가 잡혔다. 그것은 무슨 덩쿨 같았는데, 그것을 잡은 덕분에 소영의 몸은 반 바퀴 회전해서 머리가 뒤로 올 라 오게 되었다. 그러나 손에 잡힌 것이 끊어져 밑으로 떨어지던 소영은 두 발에 강한 충격을 받으며 무엇인가에 의해 몸이 떠받쳐 졌다. 그와 동시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불쑥 튀어 나온 바위를 딛고 있 었다. 과히 크지 않은 바위 주위에는 하얀 대에 홍색이 도는 버섯 이 무수히 돋아 있었다. 그의 몸은 절벽의 중간 쯤에 튀어 나온 바위에 올라 앉게 된 것 이었다. 폭포의 넓이는 이 장쯤 되었으며 소영의 몸은 습기에 의해 흠뻑 젖어 있었다. '위로는 하늘이 보이지 않고 밑으로는 땅이 안 보이고... 나는 실로 사람이 생전 발을 디딜 수 없는 곳에 머물러 있구나. 그런데 이 절벽에는 풀 한 포기 돋아 있지 않은데 어찌하여 이곳에만 버섯 들이 돋아 있을까?' 소영은 버섯이 돋아 있는 부분을 손으로 눌러 보았다. 그것들은 손가락이 푹푹 들어 갈 정도로 물렁거렸다. '아하, 버섯이 돋아 난 부분은 바위벽이 아니라 흙벽이구나. 그 래서 버섯들이 자랄 수 있는 모양이지!' 소영은 차츰 허기를 느꼈다. 물에 젖은 몸이 으시시 떨리고 뱃속 에서는 연방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게 되겠구나.' 소영은 배고픔을 더 참을 수 없게 되자 버섯 한 송이를 꺾어 입 에 넣었다. 입 안에 싸아한 향기가 퍼졌다. 버섯을 씹으니 달콤한 맛이 돌았다. 소영은 의외로 버섯이 달고 향기로운 것에 놀라며 칠, 팔 송이를 거푸 다 먹었다. 순식간에 허기가 깨끗이 가셨다. 소영은 동굴과 폭포 속에서 하 루 해를 보낸 셈이었다. 밤이 되니 추위는 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대로 얼어 죽는 고통 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될 것 같았다. '차라리 이 고통을 당하느니 밑으로 뛰어 내릴까? 참, 운이모가 가르쳐 준 상승내공으로 추위를 견뎌 보자.' 소영은 절벽 가까이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상승내공의 운공을 조 식했다. 차츰 몸에 열이 퍼져 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소영은 버섯으로 허기를 채우면서 쓸쓸하고 지루한 하루하루를 삼 일 간이나 보냈다. 그러나 소영의 손에 닿을 만한 버섯은 모두 따 먹었기 때문에 이제 허기를 메울 방법이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 신만 차리라고 했겠다.' 소영은 덩쿨의 한 끝을 바위에 매고 다른 한 끝을 허리에다 맸 다. 줄을 타고 조심스럽게 밑으로 내려가 한 아름의 버섯을 따 올 렸다. '당분간은 이렇게 살 수 있겠다. 그러나 버섯의 수는 한계가 있 고 나는 달리 양식을 구할 수 없으니 결국 이 버섯이 다 없어지는 날 나는 굶어 죽게 되었구나. 더욱이 이 바위 위에서 조금만 정신 을 잃어도 밑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귀신도 모르게 죽고 마는 것인가?' 소영은 여러가지 방법을 궁리해 보았지만 답답한 마음만 커질 뿐 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다. 사는 날까지 살다가 죽을 수밖에.' 소영은 체념적인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바위 밑에 있는 버섯을 다 따 먹었을 때에는 이미 열흘을 폭포 안에서 보낸 셈이다. 버섯은 좌우 양쪽과 머리 위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 는 소영의 손이 도저히 미칠 수 없었다. '그렇지! 이 절벽이 물렁거리니 어떻게 기어 오를 수 있겠다.' 소영은 한 가닥 기쁨을 느끼며 오른손 손가락을 높이 쳐들어 절 벽을 찔렀다. 손가락은 절벽에 깊숙이 박혔다. 소영이 팔에 힘을 주니 그의 몸은 가볍게 위로 끌어 올려졌다. 소영은 왼손을 놀려 여러 송이의 버섯을 딴 다음 바위로 내려 왔다. 그가 몸을 돌려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휘익!" 하고 거센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폭포 위에서 밑으 로 화살같이 떨어지고 있었다. 소영이 놀라는 사이에 그 검은 물체 는 소영이 딛고 있는 바위에 떨어졌다. 그것은 사뿐히 내려 앉는 동작으로 바위에 올라 앉았지만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소영은 급히 손을 뻗쳐 그것을 잡았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한 마리의 커다란 새였다. 큰 새는 소영이 붙잡아 주자 비로소 폈던 두 날개를 접으며 바위 위에 앉았다. '이 새는 굉장히 크구나. 책에서 이런 새가 있다는 것을 읽었는 데 그렇지. 이 새가 바로 붕새(鵬鳥)로구나.' 소영은 전설에나 나오는 붕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 추지 못했다. 소영이 붕새를 살펴 보고 있자니 그 새는 갑자기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숨을 가쁘게 몰아 쉬는 것으로 보아 중병에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아깝게도 병에 걸린 모양이구나.' 소영이 측은하게 생각하며 버섯을 주려는 순간 붕새가 먼저 소영 의 손에서 버섯을 쪼아 먹었다. 붕새는 한 입에 버섯을 삼키더니 다시 소영의 발 앞에 있는 버섯 을 집어 삼켰다. 순식간에 붕새는 버섯을 먹어 치웠다. 그런데 버섯을 다 먹어치운 붕새가 갑자기 정신이 드는 듯 고개 를 번쩍 쳐들더니 우렁차게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그 소리가 어찌 나 큰지 소영은 깜짝 놀랐다. 귀가 멍멍하고 머리 속까지 띵 했다. '간이 떨어지겠다. 그런데 이 버섯에 무슨 신효가 있는 모양인데 ... 그랬구나. 나는 십여 일 동안 이곳에서 버섯만 먹으며 습기찬 절벽에 기댄 채 살아 왔는데 점점 피곤과 추위를 잊으며 지냈다.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 버섯은 틀림없이 병을 고치고 힘 을 주는 약효가 있는 모양이구나.' 이때 붕새가 날아 가려는 몸짓을 했다. 소영은 붕새의 날개를 잡 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새가 지금 날아 가면 언제 또 올지 모른다. 나는 이 새를 이 용해서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번개같이 이런 생각을 떠올린 소영은 사람에게 하듯 말했다. "붕새야! 너는 새 중의 왕이니까 나를 업고 충분히 날 수 있지? 나를 이곳에서 좀 빠져 나가게 해다오." 소영은 말을 마치고 재빨리 붕새의 등에 올라 탔다. 그러자 붕새 는 힘차게 비상했다. 붕새의 기세는 놀라웠다. 소영을 등에 업은 채 거센 폭포를 뚫고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나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소영의 귓전에는 쌩쌩거리는 바람소리 만 들릴 뿐 눈 아래 펼쳐진 풍경은 좀처럼 분간해 볼 수가 없었다. 소영이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바라 보며 감탄하고 있는 순간 갑자기 그의 몸이 미끄러지며 눈 아래의 경치가 빙그르르 돌 았다. "앗!" 깜짝 놀란 소영은 급히 붕새의 목을 힘껏 껴안았다. 붕새는 날개를 접은 채 공중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깊은 계곡에 내려 앉았다.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 이외에도 여러가지 꽃나무로 덮여 있으 며 이름모를 풀들이 잔디처럼 곱게 깔려 있었다. 소영은 붕새의 등에서 뛰어 내려 잠시 사방을 둘러 보다가 거대 한 소나무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 소나무는 수천 년은 묵은 듯 크고 가지가 무성했다. 큰 소나 무 앞으로 다가 서던 소영은 눈을 빛내며 손뼉을 쳤다. 한 채의 집 이 큰 소나무에 기댄 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 집안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기쁨에 소영은 문이 떨어져 나갈 듯 문을 힘껏 밀고 들어 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집 안의 주인은 저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들리지 않았다. 소영은 잠시 망 설이다가 고개를 디밀어 안을 들여다 보았다. 어두컴컴한 방은 직사각형을 이루었고 아무런 가구도 보이지 않 았다. 다만 안쪽 깊숙한 곳에 하나의 나무 침상이 놓여 있을 뿐이 었다. 그 침상 위에는 흰 망사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돌부처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소 영이 가까이 다가갔으나 그 사람은 여전히 굳어진 자세로 앉아 있 었다. '이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 사람이 들어서는 데 도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소영은 답답함을 누르다 못해 큰소리로 말을 걸었다. "후배 소영이 노선배님의 수양하시는 것을 방해해 드려 죄송합니 다." 그 사람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돌부처 그대로였다. 상대방이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입을 열지도 않자 소영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그는 상대방을 한동안 노려 보다가 한쪽 귀퉁이로 걸어 갔다. 소 영은 구석진 자리에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 운공을 조식하기 시작 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상승내공의 좌법은 집에서 할 적보다 훨씬 힘이 덜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의 구석구석에서 힘이 용솟음치 고 있었다. 소영이 운공조식을 끝냈을 때는 이미 어둠이 방안에 깔려 있었 다. 고개를 돌려 바라 보니 침상 위의 사람은 여전히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다. '정말 괴상한 사람이군, 생각 같아서는 확 떠밀고도 싶지만... 오히려 간섭을 안 받으니 마음은 편하다만 이건 너무한데...' 소영은 그 사람을 노려 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배도 고프고 갈증이 나서 그대로 앉아 있기가 괴로왔다. 소영은 성큼성큼 꽃나 무 숲으로 들어 섰다. 그곳에는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 과일이 나 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새큼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인간 세계가 아닌 타계(他界)에 들어 선 듯한 느낌이구나. 무릉도원이란 극락세계는 이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과일로 배를 채운 소영은 문득 붕새 생각이 났다. 그러나 붕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구나. 내 생명을 구해 준 정말 고마운 새 인데." 소영이 다시 큰 소나무 집으로 들어서 보니 침상 위의 사람은 아 직도 앉은 자세 그대로였다. 소영은 그의 앞으로 다가 서며 정중한 어조로 인사를 했다. "후배는 우연히 이곳에 들어 오게 되었으나 달리 갈 만한 장소가 없어 할 수 없이 노선배님의 거처에서 신세를 져야겠습니다." 소영은 상대방의 승낙을 기다리지 않았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굳어진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에게서 어떤 반응을 기다린다는 것은 자신만이 우스워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소영은 한쪽 벽에 등을 기대 앉으며 눈을 감았다. 십여 일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소영이 잠에서 깨어 눈을 떠 보니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고 침상 위의 그 사람은 여전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흥, 당신이 전혀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좋아, 내 고집 도 당신 못지 않을 테니...' 소영은 주인에게 차가운 조소가 담긴 눈빛을 보내며 방을 나섰 다. 햇빛은 사방 백여 장쯤 되는 계곡을 메우며 출렁거리고 꽃나무 숲은 빨갛게 타오르는 불밭을 이루었다. 소영은 얼마 동안 걸어 두 개의 높은 봉우리 밑에 다다랐다. 그 런데 양쪽 봉우리로 올라 가는 능선 사이에 거대한 바위가 놓여 있 었다. 그 바위 옆으로 돌자마자 하나의 돌문이 나타났다. '웬 돌문일까? 이곳에도 어떤 석실이 있는 모양이지?' 소영은 강한 호기심과 약간의 흥분을 느끼며 돌문 앞으로 다가 섰다. '좋아. 여기 이런 석실이 있으니... 만일 이 석실에 주인이 없다 면 나는 돌부처 같은 사람에게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겠다.' 소영은 기뻐하며 열려진 돌문의 틈으로 손을 넣었다. 힘을 주어 밀자 돌문은 가볍게 열렸다. 버섯 때문에 소영에게는 놀라울 정도 의 기력이 생겼는데 자신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석실은 천연적인 동굴에 인공적으로 바위벽을 깎아 만든 것으 로 사방 이 장 정도의 넓이 밖에 안 되었다. 소영은 자세히 안을 들여다 보았다. 석실 속에는 황색 도포를 입 은 사람이 벽과 마주 앉아 있었다. '여기도 사람이 있구나!' 소영은 황색 도포를 입은 사람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벽과 바짝 붙어 앉아 있었기 때문에 옆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이 사람이 몸을 움직이기 전에는 얼굴을 볼 수 없겠구나. 수양 하고 있는 사람의 방에 들어 온 것만도 실례이니 그냥 나갈까?' 소영은 잠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 보고 있다가 공손하게 말 을 걸었다. "후배 소용이 무의식중에 이곳까지 들어 와 수양하고 계신 노선 배님의 정신을 산란케 하여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소영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은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 았다. 문틈으로 들어 온 바람에 옷자락이 펄럭이지 않았다면 하나 의 조각품으로 착각될 정도였다. 소영은 은근히 화도 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큰 소나무 집에 있는 사람과 비슷한 자세로 앉아 있는 이 황색 도포의 사람은 그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되었다. '어찌하여 이 계곡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모양일까? 귀머거 리, 장님, 벙어리에 앉은뱅이까지 겹친 병신들이란 말인가?' 13. 신비한 이인(異人)들 한 가지 생각이 소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사람들이 음식을 드는 것도 보이지 않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내가 문을 열고 들어 가도 아무런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니 ... 그들이 만약 살았다면 절대로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죽은 사람이란 말인가?' 그러나 소영은 다시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중얼거렸다. "이 산골짜기에는 틀림없이 벌레나 개미가 있을 텐데... 만약 이 들이 진짜 죽은 사람이라면 벌레나 개미메들이 몰려들 텐데...' 이 두 사람이 죽었든 살았든 각각 그 까닭이 있을 것이지만, 소 영은 전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운고이모의 죽은 모습 도 역시 이처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으며 얼굴은 꼭 산사람 같았음을 상기했다. 이들 양인이 첩첩 산중에 들어 와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모두 가 일신에 절세의 무공을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었다 하더라도 운고이모처럼 시체가 영원히 썩지 않고 보 존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소영은 비록 총명하긴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지라 이 광경을 보자 그 두 사람이 고독하게 심산유곡에서 죽어가도 제사지내 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노선배님들, 당신들은 어찌하여 이처럼 심산유곡 동굴에서 돌아 가셨습니까? 딱하게도 제사지낼 사람 하나 없으니... 이 깊은 산골 에는 제물도 없고 지전(紙錢)마저 없습니다. 야생의 과일을 따다가 제물로 차려 놓고 당신들의 제사를 드려 존경하는 마음을 표시하겠 습니다." 소영은 말을 마치고 동굴에서 뛰어 나왔다. 곧 야생 과일을 몇 개 따서 노인의 앞에다 차려 놓고 엎드려 큰절을 하면서 말했다. "노선배님, 소영이 당신의 영전에 절을 올립니다." 그는 처음에는 이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산과일을 따다 놓고 제 사를 지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우울해졌다. 왜냐하면 이곳 사면이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으므로 자신도 영원히 이 심산유곡을 빠져 나갈 수 없어 마침내는 이곳에서 늙어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 니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악소채와 다시는 만나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 니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결국 소영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성격이 강해 서 생사에 관한 큰 일을 당하더라도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때만은 슬픔이 복받쳐 올라 한 번 울음을 터뜨리니 눈물 이 샘솟듯 흘러 내리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감정의 충동을 도무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마치 조각처럼 앉아 있던 황포인(黃袍人)이 소영의 애절한 울음 소리에 감동된 듯 가볍게 탄식을 발하며 약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손을 내밀어 소영의 하극혈(下極穴)을 찔렀 다. 황포인이 혈도를 찌르자 곧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 황포인 은 소영의 혈도를 찌른 후 한 곳을 응시하고 오랫동안 무슨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미 그를 구해 준 이상 이제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지." 그는 양손을 내밀어 소영의 전신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백 년에 한 번 나타날 정도로 귀한 골격이군. 무예를 배우기에 적격이겠는데 아깝게도 태어날 때부터 삼음절맥의 결함을 타고 났 구나." 황포인은 잠간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그도 그렇지. 그가 만약 삼음절맥의 중세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 와 같은 좋은 체격으로 이미 누군가의 문하로 발탁되어 갔겠지. 어 찌 이 노부의 차례까지 돌아 왔겠는가?" 이 석실 안에는 그와 소영, 두 사람뿐이다. 그는 갑자기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서로 각자의 절학을 터득하기로 약속했는데, 내가 만약 이 아이를 구해 주면 틀림없이 시간을 소모하여 그들보다 뒤떨어질 것이다.' 그는 생각이 이에 이르자 소영에게 깊은 원망이 싹트기 시작했 다. 그는 다시 이러한 의심마저 하게 되었다. '혹시 그들이 고의로 이 아이를 보낸 것이 아닐까? 나에게서 신 공을 연구할 시간을 뺏기 위해서 말이야. 정말 그렇다면 이 계책이 야말로 악랄하기 짝이 없군. 흥, 그렇다면 이는 내 신공의 수련에 지장이 되니 빨리 처치해 버려야지.' 그러나 그의 손이 소영의 천령요혈(天領要穴)에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아까 창자가 끊어지도록 울었다. 눈물이 메말라 피를 흘릴 지경이었는데 결코 거짓이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내가 죽 은 줄로 오인하고 많은 과일을 따다가 내게 제사까지 지내 주지 않 았는가. 그 행동이야말로 얼마나 갸륵하고 기특한가! 내가 만약 이 대로 이 애를 죽인다면 난 천벌을 받을 것이다. 나와 생명부지이면 서 그처럼 갸륵하게 대해 주었으니 정이 얼마나 두터운 아이인가? 차라리 내 일신의 무공을 그에게 전수하여 그로 하여금 내 무공을 계승케 한다면 내가 죽더라도 살아 있는 거나 마찬가지의 결과가 될 것이 아닌가...' 황포 노인은 차츰 살기를 지우더니 만면에 인자한 웃음을 띠고 기절해 있는 소영을 바라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인연인지 이 노부조차도 모르겠구나." 황포노인은 두 손을 움직여 소영의 전신을 가볍게 주물렀다. 그 의 손이 닿자 소영의 전신에선 한동안 뚝뚝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 고 여러 줄기의 흰 기운이 그의 손바닥과 손끝 사이에서 피어 올 랐다. 그 흰 기운은 갈수록 농후해져 순식간에 소영의 전신을 뒤덮 었다. 이것은 마치 짙은 안개와도 같았다. 이 황포 노인은 수십 년 동안 수련을 쌓아서 얻어진 진원(眞元) 의 기를 사용하여 소영이 날 때부터 걸려 있는 삼음절맥을 풀어 주 기 시작했다. 소영은 비록 혈도가 찔려 있었지만 내장의 공력은 아 직 꺼지지 않아 여전히 강력한 반응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신의 근육과 피부가 황포 노인의 손길이 옮겨 감에 따 라 조금씩 경련을 일으켰다. 잠깐 동안에 황포 노인의 얼굴에는 땀 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그 땀방울은 비오듯이 주르르 흘러 내렸 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태가 오 랫동안 계속되었다. 이윽고 소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자 그는 비로소 두 손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품 속에서 한 개의 백옥병을 꺼내서 병마개를 딴 다음 한 알의 환단을 꺼내서 손바닥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는 다시 수중의 단환을 바라 보며 매우 아까운 듯한 표정을 지 었다. 이윽고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소영의 입을 벌리고 그 단환 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얘야! 한숨 푹 쉬어라." 그리고는 일장을 쳐 소영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러자 소영은 두리번거리다가 황포 노인을 발견하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러나 그는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또 깊은 잠에 빠 져 버리고 말았다. 소영이가 깨어났을 때는 석실의 한 모퉁이에는 불길이 활활 타오 르는데 그 위에 두 마리의 크고 살진 산닭이 놓여 있었다.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소영의 곁에는 흰 수염이 앞가슴까지 닿는 황포노인이 소 영을 바라 보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소영은 팔 다리를 쭉펴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전신이 가볍고 홀가분해진 듯했다. 마치 탈태 환골(脫胎換骨)이라도 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황포노인을 바라 보며 속으로 이렇게 뇌까렸다. '이제 보니 이 노인은 죽은 게 아니었구나.' 이때 황포노인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얘야, 이제 깨어났느냐?" "어르신네는 살아 계셨군요?" 소영은 지금 이 노인이 인자한 웃음을 띠고 자기를 쳐다 보고 있 지만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황포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살아 있었지." 소영은 탄식하듯 말했다. "어르신네는 이 골짜기에서 사신 지 꽤 오래되셨지요?" 황포노인은 지나 온 날을 회상하는 그윽한 눈길로 소영을 바라 보며 짧게 말했다. "아마도 삼십 년은 되었을 게다." 소영은 깜짝 놀랐다. "삼십 년이라구요? 그야말로 굉장히 긴 세월이군요." 황포노인은 휴우! 하고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수십 년이란 세월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노부가 이 산골짜기에 들어 올때 너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게 다. 노부가 이미 이렇게 늙었지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란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분은 그와 같은 연 령에도 아직 생에 대한 애착심이 대단하구나!' 소영은 몸에 질병이 있었으므로 스무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어렸을 적부터 그의 부친이 말해 왔다. 그래서 소영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생사를 가볍게 생각하 고 있었기 때문에 황포노인의 그와 같은 태도에 의아심을 느낄 정 도였다. 황포노인은 소영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자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무얼 생각하고 있느냐?" 소영은 갑자기 질문을 받자 약간 당황하는 빛을 띠었다. 차마 자기가 생각했던 것을 솔직히 말할 수는 없어 말머리를 돌 렸다. "노선배님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보니 그 나무 집에 앉아 있던 사람도 틀림없이 살아 있는 사람이겠군요?" 황포노인이 잠깐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그 사람도 보았구나." 소영이 얼른 대답했다. "저는 그 사람이 얼굴에는 두꺼운 비단을 드리우고 나무 침대 위 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으므로 살아 있는지 어쩐지를 알지 못 했어요. 하지만 어르신네께서 이처럼 살아 계신 것을 보니 그 사람 도 반드시 살아 있을 것만 같아요." 황포노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의 판단이 들어 맞았다. 내공이 지극히 깊은 경지에 이른 사 람은 구식지법(龜息之法)을 배워 호흡을 오래도록 멈추고도 견딜 수 있단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이제 보니 무공을 배우면 기막히게 이로운 점이 많군요." 황포노인이 얼른 입을 열었다. "너도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소영은 잠깐 망설이다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배우고 싶어요. 전 세상에서 제일가는 무공을 배우고 싶어요." 황포노인은 또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너는 사람을 바로 찾아 왔다. 현재 무림에서 노부의 무공을 누룰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황포노인은 비록 백발이 성성했지만 심산에 오래도록 파묻혀 있 었으므로 고독에 젖어 마음은 마치 어린애 같았다. 소영은 눈을 가만히 내리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왜, 그대는 노부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소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네께서는 무공이 매우 높아 적수가 없다고 하시는데..." 황포노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누가 나의 상대가 없다고 했느냐! 다만 많지 않다는 것이지." "그럼 어르신네를 이길 사람이 있긴 있군요?" 황포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누구든 잘 해야 나와 막상막하를 이룰 수 있을 뿐이지. ......"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그럼 어르신네는 북천존자는 어때요?" 황포노인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 마두는 무공이 아주 높아 명성을 얻은 지 이미 오래지." 소영은 순간 실망의 빛을 띠었다. "그럼 어르신네는 그를 이기지 못하는군요?" 황포노인은 눈썹을 추켜 올렸다. "뭐라고? 노부는 다만 그 노마두의 흉명을 들어서 알고 있을 뿐 이지, 그와 싸워 본 일은 없다. 이 승부의 판가름은 그 누구도 예 측할 수 없는 일이지..." 황포노인은 공명심이 대단한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 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노부의 생각으로는 그가 내 적수는 되지 못하리라 본다. 기껏해야 팔 푼 정도 상대할 수 있다고나 할까?" 소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황포노인도 빙그레 웃었다. "정말이지." 소영은 고개를 들어 황포노인을 쳐다 봤다. 그 시선에는 존경의 빛이 서려 있었다. "어르신네는 저를 제자로 맞아 주시겠습니까?" 황포노인은 손을 가로저었다. "안된다. 나는 너를 제자로 삼을 수는 없다." 소영은 이 말을 듣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제 말이 어르신네의 귀에 거슬리는 점이라도 있었는지요?" 황포노인은 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만일 이 세상에서 제일 으뜸가는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나 를 스승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네가 만일 이류의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어서 나에게 절을 하고 스승으로 섬겨라." 소영은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는 어르신네의 말씀을 통 이해할 수가 없군요. 좀 분명히 말 씀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황포노인은 하하! 하고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것까지 알려 줄 수는 없어. 모든 걸 다 너에게 일러 주면 싱 거워질 테니까...." 그는 말을 마치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환희에 넘치는 듯 얼굴이 밝아졌다. 소영은 도무지 그 말뜻을 알아 차릴 수가 없어 잠시 머리를 짜내 며 심사숙고했다. 황포노인은 웃음을 그치고 소영의 이와 같은 모습을 물끄러미 바 라 보고 있었다. "그럼, 우리 한 가지 일을 상의해 보는 것이 어떨까?" 소영은 고개를 쳐들었다. "네, 무엇이든 말씀해 보십시오." 황포노인이 입을 열었다. "네가 세상에서 으뜸가는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나를 스승으로 섬길 수가 없다. 어쩔 테냐?" "글쎄요.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황포노인은 타이르듯 말했다. "그 생각은 이제 그만 둬라. 네 머리가 깨질 정도로 생각해 보아 도 너는 그것을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있다. 우리는 아무런 친척 관계도 아니며 또한 전부터 아 는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 너에게 무공을 전수해 준다면 나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냐!" 소영이 반문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노부가 조금 손해 보는 셈 치고 너를 양자로 삼겠다." 소영은 그 말에 또 어리둥절했다. '노인께선 나를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 그런데 부자와 사제는 결 국 비슷한 경우인데 어째서 손해를 본단 말인가?' 황포노인은 소영의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자 웃으면서 말했다. "노부가 만약 그 이유를 너에게 알려 주지 않으면 너는 일평생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아 내지 못할 것이다. 후후... 노부는 연령 으로 따진다면 너의 할아버지 뻘이 된다. 그런데 너를 양자로 삼으 니 손해를 보는 셈이 아니고 뭔가?" 소영은 그제서야 피식 웃었다. "알고 보니 그렇군요." 황포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네가 먼저 나의 조건을 승낙해야만 너를 양 자로 삼을 수 있다." "무슨 일인데요?" 황포노인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노부의 무공을 배운 이후에 무공이 제아무리 높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평교(平交)로서 사귀어야 한다. 결코 노부로 하여금 손 해를 보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소영은 노인의 말뜻을 알아 채고 얼른 일어서서 읍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소영은 총명한 아이인지라 이 노인이 말이 많은 것을 보고, 혹시 라도 마음이 변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읍을 올린 다음 에도 계속해서 큰 절을 했다. 황포노인은 단정히 앉아서 소영의 삼배구고(三拜九叩)의 큰 절을 받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부자로 호칭해야 하겠구나." 소영이 얼른 대답했다. "의부의 말씀이 옳습니다." 황포노인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너, 이녀석... 역시 노부가 진원을 소비해 가면서 너의 삼음절 맥을 뚫어 준 보람이 있구나." "그렇다면 영아의 삼음절맥이 뚫렸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뚫렸지. 만일 통하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단명의 양자를 두겠느냐?" 소영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의부의 태산같으신 은혜 정말 갚을 길이 없습니다." 황포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내 할 말이 있다." 소영은 몸을 일으켜 황포노인의 앞에 가서 앉았다. "의부께서는 무슨 교훈이 계시온지요?" 소영이 말끝마다 의부라고 부르자 황포노인은 마음이 흐뭇해져 소영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이 의부가 연마한 무공은 동자일원공(童子一元攻)인데 만약 네 가 나를 따라 이 무공을 배워 기초를 습득케 된다면 너는 영원히 아내를 맞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노부의 양 손자가 자연 끊어진 다.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그런 것이라면 영아는 두렵지 않습니다." 황포노인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안된다. 나는 동자일원고를 연마했기 때문에 하나의 강적을 세 워 몇 십 년 동안 싸워 왔는데도 여태껏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무공은 순강지맹(純剛至猛)의 길을 걷고 있어 너무 강하면 또한 꺾이기 쉬운 법이니 내 양자를 그와 같은 경우에 처하 게 할 수는 없느니라."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의부가 자기를 깔보는 듯한 생각이 들어 무 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황포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강하면 꺾이기 쉽다지만 지극히 강하면 도리어 유해지는 법. 그 러나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면 적어도 수십 년 동안 고된 훈련을 겪어야만 되는 법이다. 하지만 인생의 수명은 한정된 것. 네가 강 하게 유를 터득할 수 있는 날에는 너는 노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렇기 때문에 이러한 무공을 배워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소영은 깜짝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몇 십 년 동안을 배워 내가 정말로 노인이 된다면 악누나도 역 시 백발이 되어 버릴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악누나를 업신여 기던 사람들도 다 죽어 버릴 것이다.' 황포노인은 소영이 생각에 잠겨서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녀석아, 이제 좀 겁이 나느냐?" 황포노인이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노부는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 하지만 녀석아! 내가 너를 양 자로 삼은 이상 나는 너를 무림의 훌륭한 한 송이의 꽃으로 만들어 놓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훗날 네가 강호에서 활약할 때 남의 경시와 멸시를 받게 되어 노부의 위명을 크게 손상시킬 것이 아니냐." 소영이 답답한 듯 입을 열었다. "영아는 우매하여 의부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황포노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네가 우매하다고 탓할 수만은 없다. 노부가 분명히 말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지. 그런데 이 심곡에는 의부를 제외하고도 또 다른 두 분의 절세 고인이 은거해 계신단다." 소영이 그 말을 가로막았다. "그 나무 집 안에 흰 망사로 얼굴을 가리신 분 말이지요?" "그렇단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경공과 암기와 지법으로 무림에서 이름을 날렸을 뿐이지 내공에 있어서는 그저 다른 사람의 자극을 받아서 배운 정도라고 할 수 있지." 소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이 심곡에 또 다른 고인이 있단 말씀입니까?" 황포노인은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 세 사람 중에 너는 두 사람을 본 셈이다. 하지만 이 사 람의 거처는 괴이한 곳에 있어서 너는 그 사람을 찾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황포노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녀석아! 한번 알아 맞춰 보려므나."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의부는 동굴 속에 살고, 또 한 분은 나무 집에 사는데, 그 사람 의 거처는 더욱 괴상하다고 했으니 도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소영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이렇게 말했다. "나무 위에 살고 계시지요?" 황포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틀렸다, 틀렸어. 공중에 살고 있단다." 소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공중에요?" 황포노인은 다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그렇단다. 우리들 세 사람은 여기에서 수십 년 동안 살면서 일 정한 시기에 언제나 한 번씩 무공 시합을 가져 왔단다. 그러나 시 합은 수없이 거듭했지만 언제나 그 실력이 서로 비슷하여 승부를 가려 내지 못했단다." 그는 흥이 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무엇을 생각했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표정마저 흐려졌다. "이 녀석아! 너는 내가 어째서 수십 년 동안 이곳에서 나가지 않 는지 그 이유를 아느냐!" 소영은 이 말을 듣자 갑자기 금궁의 열쇠에 관한 생각이 났다. 무수한 무림의 고수들이 그것을 뺏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입으로 는 모두가 금궁의 비밀을 캐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기실은 모두가 마음 속에 사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 금궁 속에서 선배들이 남겨 놓은 무공을 얻어서 무림을 주름잡고자 하는 것이 다. 소영은 틀림없이 자기의 의부도 이름을 얻기 위해서 수십 년 동안 심산유곡에서 고행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부는 틀림없이 명리를 얻기 위해서 이 심산유곡에서 수십 년 이라는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황포노인은 한숨을 휴우! 내쉬었다. "녀석아! 너는 절반만 알아 맞추었다. 내가 수십 년 동안 이곳에 서 조용히 살게 된 동기는 그 명리 이외에도 한 가지 그럴 만한 사 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다 얘기하자면 한없이 길어질 테니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어차피 우리 부자는 앞으로 그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이 있을 테니까..." 황포노인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네가 조금 전 내 앞에서 통곡을 할 때까지도 나는 그 이름 하나 를 위해 집착해 있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 마치 막혔던 그 무엇이 시원하게 활짝 터진 듯한 느낌이야. 과거를 돌아 보건데 그 모두가 우습고 슬픈 일들 뿐이었던 것 같구나." 이 몇 마디의 말은 황포노인이 이미 선(禪)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영은 아무리 총명한 두뇌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도무지 그 말뜻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황포노인은 침통한 표정으로 묵묵히 입을 다물고 흰 수염을 쓰다 듬고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녀석아! 쇠뿔은 단김에 빼라고, 우리 지금 당장 그 가난뱅이 수 재를 찾아 가자." 황포노인은 소영을 데리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바깥에 나오니 태양이 빛나고 온갖 꽃들이 피어 있으며 골짜기를 흘러 내 리는 시냇물 소리가 들렸다. 그야말로 이 골짜기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왔다. 황포노인은 몸을 뒤로 젖히며 길게 숨을 들이 마시고 동쪽을 가 리켰다. "영아야, 보이느냐? 바로 저곳이 가난뱅이 수재가 살고 있는 곳 이란다." 소영은 시력을 집중해서 의부가 가리키는 곳을 주시했다. 과연 동쪽의 낭떠러지 밑에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 다. 황포노인은 소영을 끌고 달리면서 말했다. "상승의 무공을 배우려면 우선 내공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느리라. 가난뱅이 수재가 연마한 것은 현문정종내공(玄問正宗內攻)이니 네 가 그의 내공과 검술을 전수받아 거기에다 또한 나의 장법과 유선 자(柳仙子)의 경공, 지법까지 곁들인다면 너는 오 년 이내에 강호 에 유협하러 갈 수 있다." 황포노인의 달려가는 속도는 신기하리 만큼 빨랐다. 소영의 귀에 쌩쌩! 하는 바람소리만 들려 왔다. 또한 절벽과 나무들도 번개처럼 빨리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그들은 그 몇 마디 말을 하는 사이에 어느덧 흔들거리는 사람의 그림자 가까이에 도착했다. 소영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 흔들거리는 그림자는 등나무 덩쿨로 엮어 만든 침대였다. 그 위에 한 사람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소영은 자못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의부님, 저 분은 밤낮 저 덩쿨로 만든 침대에 앉아 있습니까?" 황포노인이 윽박질렀다. "녀석아! 너는 그가 혹시 떨어질까 봐 걱정이라도 되느냐?" "예, 큰 비바람이라도 만나면 그 산봉오리에 매달아 놓은 덩쿨이 어떻게 지탱을 해 나가겠어요?" 황포노인은 하하 하고 크게 웃어 젖혔다. "그 점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 그는 그 위에 수십 년 동안 앉아 있었지만 아직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소영은 전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의 바위 위에서 며칠 보낸 일이 있었지만 그 바위는 단단하여 이 등나무로 만든 침대와는 비할 바 가 못 되었다. 하물며 이처럼 험악한 환경 속에서 수십 년을 살아 왔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황포노인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가난뱅이 수재야! 그 신공을 터득했느냐?" 허공에 걸려 있는 침대 위에서 낭랑한 음성이 전해 왔다. "왜 그러시오? 남형은 손이 근질근질하신가?" 황포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노부가 패한 걸로 해두자. 우리는 이제부터 시합할 필요가 없게 됐다." 이 말은 침대 위에 있는 사람의 예상을 크게 뒤엎은 듯했다. 그 는 잠시 침묵을 지킨 뒤 탄식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남형의 무공은 이 동생보다 못하지 않았는데....." 그 침대와 땅과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의 대화는 똑똑히 서로 알아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한숨 쉬는 소리까지도 똑똑히 들을 수 있어 마치 바로 옆에서 말을 주고 받는 것 같았다. 황포노인은 갑자기 소영의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속삭이듯 말했 다. "저 가난뱅이 수재는 외화내강(外和內剛)하니, 너도 말할 때 조 심해야 한다." 황포노인의 성격은 매우 고고하고 거만했다. 그래서 명리를 위하 여 이 심산유곡에서 수십 년을 은거해 오면서 통속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오직 소영을 위해서 스스로 싸움에 졌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 줄기의 길다란 덩굴이 침대에서 떨어져 내려 왔다. 이 어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남형이 이처럼 동생의 체면을 위해 주시니 감격해 마지 않소이 다. 그 꼬마를 올라 오게 하시구려." 황포노인의 말을 듣고 가난뱅이 수재는 곧 그가 자기에게 무슨 부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긴 덩쿨을 내려서 소영을 받아 올리려 했다. 왜냐하면 황포노인의 가장 아픈 곳을 찔러 소영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 놓게 하고자 함이었다. 황포노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나 짐짓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얘야, 올라 가거라." 그리고는 서서히 발길을 돌렸다. 소영은 의부의 그 착잡한 웃음 속에서 한없는 처량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멍청히 황포노인의 뒷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더 늙어 보였 다. 황포노인은 힘없는 걸음으로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소영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덩쿨이 이미 머리 위에 닿아 있 었다. 소영은 손을 들어 덩쿨을 잡고 위를 향해 기어 올랐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 년 묵은 석균(石菌)을 복용했고, 게다가 황포노인이 혼신의 진기로써 삼음절맥을 뚫어 놓았으므로 기력이 매우 증강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덩쿨을 잡고 올라 가는 속 도도 아주 빨라져 눈깜짝할 사이 이미 사, 오 장의 높이까지 올라 갔다. 이때 위애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잘 잡고 있거라!" 덩쿨이 위를 향해서 올라 갔다. 소영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치 사나운 파도 속으로 기우 뚱거리며 달려가듯, 허공에서 말을 타고 달리듯 아슬아슬하고 몽롱 한 가운데 몸은 이미 침대 위에 올라 가 있었다. 소영이 정신을 차리고 바라 보니 침대 위에는 엷은 남색 장삼을 입고 유건을 쓴 중년문사 차림을 한 사람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소영을 바라 보고 있었다. 소영은 조금 전 의부가 이 사람은 외화내강한 사람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곧 허 리를 굽혀 절을 했다. "소영이 노선배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중년문사는 인자한 빛을 띠며 말했다. "거기 앉거라." 소영이 얼른 대답했다. "후배는 서 있어도 좋습니다." 소영은 꼿꼿이 서 있었다. 중년문사는 담담하게 웃었다. "틀림없이 그 남일공(南逸公)이 내 흉을 보았기에 네가 이처럼 서먹서먹해 하는구나." 그러나 소영은 잠자코 있었다. 중년문사는 소영을 한참 동안 훑 어 보더니 웃음을 거두었다. "꼬마야, 네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이 험한 세상에서 기이한 연 분이라 할 수 있구나. 더군다나 여기에 온 시간도 가장 알맞은 시 간이니 말이다." 소영은 곧 대답했다. "후배는 저의 의부와 노선배님을 만나 뵌 것을 퍽 다행으로 생각 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는 틀림없이 이 심곡 속에 묻혀서 죽 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주고 받는 말에는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 같았 다. 중년문사는 갑자기 낭랑한 음성으로 웃었다. "뭐라고? 남일공이 너를 양자로 삼았다구?" 소영은 의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기에 대답을 얼버무렸다. "예, 바로 저를 여기에 데려다 주신 분입니다." 중년문사가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 황포노인이 남일공이다. 그런데 그가 무엇 때문에 너를 여기 데려 왔는지 알겠느냐?" 소영이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저더러 노선배님께 부탁하여 내공과 검술을 전수받으라고 하셨 습니다." "내가 만약 너에게 무공을 전수하지 않으면 너의 의부는 틀림없 이 목숨을 내걸고 나와 싸우려 할 텐데....." "노선배님께서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후배의 재질이 둔하여 가르칠 가치가 없다면 쓸데없이 심혈을 기울이실 필 요가 없습니다." "중난문사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너의 재질이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내가 오히려 너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 것인가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 게다." 소영은 비록 총명한 머리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말 속에 숨어 있는 뜻을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멍하니 중년문사를 쳐다 보고만 있었다. 중년문사는 가볍게 탄식을 했다. "얘야, 너무 생각하지 말아라. 나이 어린 네가 어찌 모든 사리를 다 알 수 있겠느냐?" "후배는 우둔하오니 노선배님의 많은 지도를 바랍니다." 중년문사의 두 눈동자 속에서 갑자기 두 줄기의 정광이 번쩍였 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남일공은 나와 수십년 동안 무공을 겨뤄 왔지만 시종 승부를 가 려 내지 못했다. 그는 본래 유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하 찮은 명리를 위해 이 심산유곡에서 수십 년 동안 살아 왔다. 비록 산 속에는 월력(月曆)이 없어 세월이 구름처럼 흘러 간다고는 하지 만 수십 년의 세월이란 개인의 생명에 있어서는 짧은 기간이 아니 다. 그는 이제와서 너를 위하여 그처럼 이기기 좋아하던 마음을 버 리고 나에게 패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한마디야말로 실로 그에 게 있어서는 죽음보다도 더 괴로운 말이었을 것이다." 소영은 덮어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문사는 이어 말했다. "그는 이 일을 나에게 부탁하기 위해서 명리를 포기하였으니, 선 자에게 가서도 부탁하지 않을까?" 소영이 말을 받았다. "의부께서 제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중년문사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 세 사람은 비록 배운 것은 각각 다르지만 제각기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수십 년 동안 심신유곡에 파묻혀 세 상과는 인연을 끊고 다만 각기 능력껏 무공을 연마하여 서로 일인 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유곡을 나가려고도..."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만약 어르신네들 세 분께서 승패를 판가름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이 유곡을 떠나지 않겠군요?' 중년문사가 대답했다. "그렇지,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 서로 맹세를 하고 약속을 했지. 누구든 두 사람을 이기는 사람이 먼저 이 유곡을 빠져 나갈 수 있 고, 나머지 두 사람은 다시 또 시합을 해서 승리를 거둔 사람이 두 번째로 이 유곡을 나갈 수 있도록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도 첫 번 째 이긴 사람이 나간 지 삼 년 후에야 가능하다." 소영이 의아한 듯 반문했다. "그럼 두 번씩이나 패한 사람은 영원히 이 유곡을 나갈 수 없겠 군요?" "맞다. 그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이곳에 파묻혀 있어야지." 소영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도박의 방식은 너무도 잔인하다. 단 혼자서 일생 동안을 이 심곡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외롭고 잔인한 일이다. 그 러니 무공이 진전되기를 일념으로 바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로군.' 중년문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몇 년은 반 년마다 한 번씩 시합을 했다. 공평을 기하기 위해서 각기 번갈아 가면서 겨루었지만 여태껏 승패를 가려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너의 의부는 장법에 특징이 있고, 유선자는 지법 에 자신만만하며, 나는 또한 검술로써 자부했기 때문에 매번 시합 이 끝날 적마다 세 사람은 모두 기진맥진해서 다음 시합 때는 두 사람을 누루리라고 자위를 하면서 헤어졌지." 중년문사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러나 오 년 동안 십여 번의 시합을 거듭하였지만 상대를 압도 하기란 실로 어렵다는 것을 세 사람 모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일 년에 한 번씩 시합을 열기로 합의했다. 다시 오 년 후에 는 삼 년에 한 번씩 시합을 열기로 갱신하여 그 긴 세월이 우리 세 사람의 불타는 경쟁심 밑에서 흘러 가 버렸던 것이다." 소영은 생각했다. '승패를 끝내 가려 낼 수 없다면 각기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증 거인데 왜 자꾸만 시합을 했을까?' 중년문사는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 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 유곡에 은거해서 많은 세월을 보람 없이 흘려 보냈지 만 또 그 반면에 좋은 점도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 세 사람 의 무공이 놀라울 정도로 진전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모르던 숱하게 많은 절예를 터득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강호에 나간다면 족히 무림을 호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침통한 표정으로 다 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두 체력의 한계점에 이르렀다. 지난 수십 년 동안에 두뇌와 기지를 다 짜내어 몇 초의 심오한 수법을 창출해 내기는 했지만 이제는 정신이 몹시 피로해 있다. 육신은 비록 아무 렇지 않은 것 같지만 마음 속에는 항상 피로가 일어 부대끼고 있 다. 그래서 요즘은 이미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을 느끼고 있다." 중년문사는 또 긴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무공 시합 날짜가 눈깜짝할 사이에 임박해 오니 감히 무 공의 수련을 멈추고 휴식을 취할 수도 없다." 중년문사는 한참 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듯 먼산을 바라 보고 있 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의 선천적인 체질이 비록 너의 의부만은 못하지만, 내 가 수련한 내공은 현문 중의 상승심법이므로 내가 몸을 잘 요양만 하면 백 살이 넘도록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명리에 눈이 어두 워서 자신의 처지를 잘 알면서도 요양을 하지 않고 몸에 무리를 일 으키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활을 떠난 화살과 마찬가지로 스스 로 걷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의 의부나 유선 자도 다를 리 없다. 결코 그들도 이 세상에 그다지 오래 남아 있지 는 못할 것이다." 소영은 이 말을 듣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제 보니 이들은 모두 죽음을 느끼고 있구나!' 중년문사의 두 줄기 예리한 시선이 소영의 얼굴에 다시 집중되었 다. 그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네가 때를 맞추어 왔다고 한 것이다. 내가 만약 몇 년 만 더 빨리 왔더라도 그 때는 아직도 우리의 경쟁심이 여전 히 불타고 있을 때였으므로 너는 결코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며, 몇 년 늦게 왔다면 너는 세 구의 백골만 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 는 정말 때를 맞추어 우리들에게 죽음이 닥쳐오기 직전, 명리에 대 한 애착심이 차츰 식어갈 무렵에 이곳에 온 것이다." 돌연 일진의 산바람이 불어 와서 침대가 흔들리는 바람에 소영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중년문사는 재빨리 수중의 덩굴을 아래로 내던져 당황해 하는 소 영의 몸을 휘감아서 다시 침대 위로 끌어 올렸다. 중년문사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겁나는가?" 겁에 질린 소영이 대답했다. "약간..." 중년문사는 다시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만약 우리 세 사람의 무공을 다 배우게 된다면 천하에 너 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만약 마도(魔 道)에 들어 선다면 세간의 일대 화근이 되지 않을까?" 소영은 신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노선배님의 그와 같은 우려는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 야 좋겠습니까?" 중년문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삼 개월 후 우리 세 사람이 무공을 겨루게 된다. 그때 내가 너의 의부와 상의해서 방법을 강구하여 너의 몸에 제한을 가 하겠다. 그렇지만 지금은 우선 내가 너에게 내공의 기초법을 가르 쳐 주겠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내 몸에다 제한을 가한다?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기이한 일이 구나!' 중년문사는 소영에게 좌식지법(坐式之法)을 전수한 후, 몸을 일 으켜 침대에 매달아 놓은 덩굴을 밞으며 걸어 내려 갔다. 소영은 그것을 보자 감탄해 마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아래로 뛰어 내려 가는 것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 니 이 덩굴을 밟으며 걸어 가는구나!' 이 침대와 지면과의 거리는 삼십여 장이나 되어 아무리 훌륭한 경공의 소유자라도 뛰어 내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중년문사는 눈깜짝할 사이에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소영은 혼자 침대에 남게 되었다.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혹시 침대가 뒤집혀 떨어지지나 않을까 해서 겁이 났다. 또한 침대를 매 달아 놓은 덩쿨이 끊어질까 두렵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별 수 없었다. 그런 잡념은 무서움만 불러 일으 킬 뿐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총명한 소영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년문사가 가르쳐 준 비결을 따라 운기행 공을 시작했다. 날이 저물어서야 중년문사는 침대로 돌아 왔다. 그는 몇 개의 신 선한 과일과 잘 구운 한 마리의 산닭을 들고 왔다. "이건 네가 이틀 동안 먹을 음식이다." 중년문사는 소영에게 그것을 넘겨 주고는 다시 몸을 돌려 어디론 가 가 버렸다. 밤이 되자, 산바람이 더욱 강하게 불어 침대를 더욱 요란하게 흔 들어 대므로 소영의 마음은 겉잡을 수가 없었다. 소영은 다시 운기행공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혹 침대에서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잡념을 떨어버릴 수가 있었다. 계속 이틀 동안 중년문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영은 음식을 다 먹어 치웠다. 만약 중년문사가 곧 돌아 오지 않는다면 배고픔을 참는 수밖에 없 다고 생각했다. 찬란한 저녁 노을이 산봉우리에 덮인 백설을 비치니 아름답기 그 지없는 정경을 이루었다. 소영은 그 정경에 끌려 배고픔을 잊어 버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 는 사이에 이와 같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석양은 지고, 저녁 노을이 찬란하게 산봉우리를 물들이는구나. 그렇지만 아깝게도 이런 아름다운 정경은 오래 가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누나!" 그러는 사이 언제 나타났는지 백설봉에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 검은 그림자는 상당히 빨라 눈깜짝할 사이에 계곡에 도착했다. 소영이 자세히 보니 그 검은 그림자는 자기를 여기까지 태워다 준 대붕(大鵬)이었다. 소영은 이를 보자 기뻐서 크게 소리쳤다. "붕형(鵬兄), 붕형! 어서 나를 데리고 내려 가서 생과일을 좀 따 옵시다." 그러나 그 거대한 새는 소영의 외침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양쪽 날개를 접으며 계곡 밑으로 갔다. 소영이 그 새가 땅에 내려 선 지 점을 대략 짐작해 보니 밑에 있는 나무 집과 가까운 거리임을 알 수 있었다. '새는 아무래도 사람이 아니니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겠 지...' 어느새 그 찬란했던 저녁 노을도 사라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 다. 하늘에는 하나 둘 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년문사는 여전히 돌아 오지 않았다. "오늘 밤에도 돌아 오지 않겠구나." 소영은 체념하면서 다시 운기행공을 하기 시작했다. 14. 손가락을 남기고 간 화상 해는 변함없이 뜨고 져서 어느 새 다시 사흘이 지났다. 소영은 꼬박 사흘을 굶고 지냈다. 배가 고플수록 그는 운기행공에 전념했 다. 하지만 그것도 힘든 일이었다. 소영은 비록 남달리 강인한 체 력과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다지만 갈수록 심해져 가는 허기는 마침 내 고통으로 변했다. 또한 배고픔 못지 않게 한낮의 태양의 폭사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영은 오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모든 잡념을 버리 고 무아(無我)의 경지로 몰입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소영은 자기의 존재를 잊다시피 하고 오직 운기행공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미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느날, 소영이 좌식(座息)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갑자기 강렬한 향기가 물씬 풍겨 오는 것을 느꼈다. 소영이 고개를 돌려 보니 중년문사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소영 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잘 구워서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닭 한 마리를 들고 있었다. 소영은 그것을 보자 빼앗아 한 입에 삼컥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 꼈다. 이윽고 중년문사는 산닭을 소영에게 건네주며 미소를 지었다. "꼬마야, 고생 많았지?" 소영은 그 동안에 겪은 배고픔과 태양열의 폭사에서 받은 고통이 뼈저린 것이었지만, 짐짓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큰소리를 쳤다. "배고픔의 고통이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중년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늘은 너에게 큰 일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우선 근육을 단련하 고, 배고픔을 참아 인내심을 기르며 심신을 연마해야 한다. 얘야, 네 무공의 발전은 나의 예상을 뒤엎을 정도로 빠르게 진전되는구 나. 음식을 들어라." 그러나 소영은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하마터면 굻어 죽을 뻔 했는데.' 소영은 닭을 받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소영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중년문사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 다. '그가 이제 또 갔으니 언제 돌아 올지 모르겠구나. 나는 또다시 배고픔을 참아야지. 중년문사는 이번에는 나흘만에 구운 닭 한 마 리와 많은 과일을 가지고 왔다. 소영의 내공은 점점 깊어져서 선좌(禪座)하는 시간은 점차 길어 지고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은 줄어 갔다. 빠른 것이 세월이라고 눈깜짝할 사이에 삼 개월이 지나 갔다. 소영은 이 삼 개월 동안에 일찍이 겪어 보지 못했던 위험을 맛보 았다. 모진 바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번개와 눈보라. 이 속에서 침대는 마치 성난 파도 위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기우 뚱거리고 흔들렸던 것이다. 소영은 혹 침대가 광풍에 뒤집히지나 않을까, 혹시 떨어져 죽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침대를 매달아 놓은 덩굴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아슬아슬한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야말로 생사의 간두에서 배 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영은 이처럼 위험에 직면할 때마다 선정법(禪定法)으로 스스로 의 존재를 망각하려고 애썼다. 소영은 그 때마다 이 놀랍고도 무서 운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뿐인데, 실은 그것이 현문 상승내공 신법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대혜정력(大慧定力)이었던 것이다. 소영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이와같이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서 소영은 상승내공을 닦 는 법칙을 -거꾸로 심(深)에서 담(淡)으로 들어 가는 경지를- 짧은 삼 개월 동안 그 기초를 다질 수가 있었다. 드디어 소영은 선정무아(禪定無我)의 경지에서 깨어 났다. 전신 의 뜨거운 피가 순조롭게 잘 돌아 허공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었다. 그러나 아래로는 깊은 골짜기 자칫 잘못하여 실수라도 범하 게 된다면 골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질지 누가 알겠는가. 그는 이와같이 움직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단전에 잔뜩 모인 진기를 몸 속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날아 가고 싶던 충동도 이 흐르는 진기를 따라 가라앉아 버리고 다시 안정을 되찾 을 수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공의 기초를 처음 닦는 사람이 직면해야 할 큰 도 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패가 달린 위험한 고비에서는 보통 사 부나 동문의 사형 등이 옆에서 본신의 진기를 끌어 올려 그 가슴 속에 용솟음치는 충동을 억제해 주는 게 관례였다. 이 한 줄기의 힘을 혈맥으로 돌려주지 않으면 그 충동의 힘은 틀 림없이 신체의 각 부분에 퍼져 그 영향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형태는 신경질이나 짜증으로 나타난다. 그렇지 않고 안으로 그 영향이 나타난다면 혈도를 파괴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곧 도가가 일컫는 주화입마(走火人魔)인 것이다. 즉 죽지 않으면 폐인이 되는 것이다. 소영은 강력한 삶의 의지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힘도 빌리지 않은 채 스스로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한 줄기의 진기를 천천히 경맥으로 유도했던 것이다. 중년문사는 언제 돌아왔는지 소영의 곁에 와 있었다. 그는 두 눈 에 이상한 빛을 발하며 소영을 바라 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 며 소영에게 칭찬의 말을 늘어 놓았다. "꼬마야! 너의 체질은 보통 사람과 다르구나.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한 차례의 험한 관문을 통과했으니 말이다." "무슨 험한 관문 말입니까?" "너는 아까 날아갈 것만 같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느냐?" "예, 정말 그랬어요. 그러나 저는 침대에서 떨어질까봐 겁이 나 서 억지로 그런 충동을 눌러 버렸어요." 중년문사는 소영에게 설명해 주었다. "어지러움을 평정하는 것, 그게 바로 나의 현문 상승심법의 비결 인 것이다. 얘야, 너는 무의식 중에 요체(要諦)를 터득했구나." 소영은 무엇을 자기가 터득했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 다. "그 말뜻을 후배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중년문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걸린 조각달을 바라 봤다. "지금은 너에게 그 뜻을 말해 줄 시간이 없다. 어서 가자!" 중년문사는 손을 내밀어 소영의 허리를 껴안고는 덩쿨을 따라 잽 싸게 걸어 올라 갔다. 소영은 중년문사에게 끌려 가면서 밑을 내려다 보니 어지러워 현 기증이 났다. 소영은 곧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자 몸은 잽싸게 허공을 날고 얼굴엔 강한 바람이 스침을 느꼈다. 그는 또한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중년문사가 자기를 껴안고 있으므로 중량이 배로 증가된 셈이다. 그래서 만일 덩쿨이 그 중량을 지탱하지 못하고 끊어진다면 자신은 뼈다귀도 찾 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중년문사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 다. 소영은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눈 덮힌 산봉우리 위에 와 있었다. 이 봉우리는 지름이 이 장 정도 되어 보이는 넓이였다. 눈은 얼 음으로 변해 미끄러워 걸어 다닐 수가 없었으며. 거울처럼 맑아 달 빛에 반사되어 온통 대낮같이 환할 정도였다. 거기서 왼쪽으로 일 곱 자 가량 떨어진 곳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얼굴이 아름다운 중년 부인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 오른쪽에는 황포노인 남일공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을 감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년문사도 소영을 내려 놓고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는 아무도 소영을 상대 해주지 않았다. 소영이 일어나서 몇 발자국 걸어 보려고 했지만 너무도 미끄러워 발을 붙이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이때 남일공이 눈을 뜨고 소영을 바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장형(莊兄) 수고 많았구려." 중년문사가 대답했다. "다행히 일을 그르치지 않았소. 영랑(令朗)은 확실히 이 소제 (小弟)의 내공심법의 요결(要訣)을 받았소이다. 만약 소제가 오늘 밤 죽지 않는다면 삼 년 이내에 소제의 의발(衣鉢)을 전할 수 있소 이다." 유선자가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오늘 밤에 승부를 가려 내지 못한다면 아마 시합할 기회 가 다시는 없을 것같군요." 중년문사가 냉랭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소제 역시 동감이오." 남일공이 말을 받았다. "이 장형의 내공과 검술은 나보다 한 수 높기 때문에 나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소." 유선자가 냉소를 터뜨렸다. "그럼 나는 이길 수 있단 말이군요." 그녀는 오른손을 날려 일치를 펼쳐 냈다. 그러자 질풍같은 지풍 이 곧장 남일공의 앞가슴을 향해 기습해 갔다. 남일공도 왼손을 내 밀어 일장을 뻗쳐 지풍과 맞섰다. 순간 두 사람 다 한 차례 흔들렸고 제각기 뒤로 반 걸음씩 밀려 났다. 유선자가 냉랭하게 말했다. "오 년이란 세월 동안 당신의 장력은 적지 않게 강해졌군요." 그녀는 양손을 연거푸 날려 오지(五指)를 펼쳐냈다. 남일공이 말을 받았다. "원 별 말씀을... 당신의 손가락의 공력은 소제보다도 훨씬 진보 했소이다." 남일공은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양손을 연방 휘둘러댔다. 그 때마다 강력한 장풍이 산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다섯 줄기 의 지풍을 막아 냈다. 소영은 의부를 향해 걸어 가고 있었다. 워낙 미끄러운 얼음판이 라 그는 다리를 제대로 가눌 수가 없어 몇 자 안 되는 거리이지만 절반밖에 가지 못했다. 이때 이미 유선자와 남일공의 싸움이 시작됐던 것이다. 두 사람 의 지풍과 장력이 맞부딪치며 소용돌이를 이루고 그 여세가 소영에 게까지 파급되어 소영은 더 걸어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 자리 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이때 두 사람의 싸움은 더욱 더 치열해졌다. 유선자는 일지에 일 지를 이어 남일공에게 지풍을 날려 보냈고, 남일공은 완전히 수비 에만 치중하여 양손을 좌우로 뻗쳐 내면서 유선자의 지력을 유인하 여 해소해 나갔다. 소영은 이때 견디다 못해 의부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 이 한창 결투를 벌이고 있으므로 혹 의부의 정신을 흐트려 놓지나 않을까 싶어 감히 부르지는 못했다. 고개를 돌려 중년문사를 보니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서 눈 앞의 격렬한 싸움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때 갑자기 한 줄기의 강렬한 힘이 휩쓸려 왔다. 소영은 그 강한 힘에 부딪혀 곧장 골짜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 갔다. 남일공은 소영이 추락하는 것을 보자 화가 나서 무섭게 대갈일성 을 내뱉고는 획획! 두 장을 휘둘러 유선자를 공격했다. 남일공은 이렇게 반격을 가할 힘은 있었지만, 소영을 구할 힘은 없었다. 소영은 미끄러지면서 양손을 마구 휘둘렀지만 잡을 만한 물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때 중년문사가 팔을 뒤로 젖혀 잡아채자 강력한 흡인력이 생겨 떨어지는 소영의 몸은 도로 봉우리 위로 끌어 올려졌다. "노선배님, 고맙습니다." 그러나 중년문사는 이 말에 대꾸는커녕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말 한 마디 할 시간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소영이 그를 자세히 바라 보니 달빛이 비친 그의 머리 위에는 흰 기운이 서려 있었고, 얼굴빛은 장엄하고 엄숙했다. 그의 공력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러므로 아 까 자기를 구해준 것도 너무나 위험한 순간에 처해 있었으므로 그 가 돌봐 주었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소영은 다시 그들의 무공 시합에 눈길이 가자 은근히 의부가 걱 정스러워서 차라리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오히려 보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영은 운기조식을 하며 몰아의 경지에 돌입하여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결투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녕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진기가 균형을 쏜 어 시종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참다 못해 소영은 다시 눈을 떴다. 이때 남일공과 유선자의 싸움은 아까처럼 격렬하지 못했다. 그들 은 서로 마주보고 선 채 천천히 일 초씩을 공격해 냈다. 하지만 이 평온해 보이는 싸움 방식이 실은 지극히 험악한 결투라는 것을 어 린 소영이 어찌 알았으리! 일지 일장의 공격은 전신의 공력을 모으지 않은 것이 없었고, 더 우기 각자 내력으로써 상대방의 지력과 장풍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 이라, 만약 어느 쪽이든 공력이 조금치라도 부족하면 즉시 부상을 입게 되며, 가벼운 경우엔 불구가 되지만 무거운 경우에는 목숨마 저 잃게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각각 십삼 초를 공격한 후 갑자기 공격을 멈추 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각달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때 유선자가 냉랭하게 물었다. "장산패(莊山貝) 당신은 이 구년 동안에 검술이 어느 정도 발전 하셨는지!" 장산패는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은 불초의 거물과 겨루어 보시려 하오?" 유선자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검을 뽑으시오." 장산패는 품 속에서 다섯 치 팔 푼이 되는 단검을 꺼내 검집을 벗기면서 입을 열었다. "유선자, 조심하시기 바라오." 유선자는 그 말에 한바탕 냉소를 터뜨렸다. "마음대로 펼쳐 보시오. 결코 나에게 부상을 입히지 못할 테니." 장산패의 단검이 겨우 작은 비수의 크기에 불과한 것을 보자 소 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의 보검이 그렇게 작아서야 어찌 상대방을 해칠 수 있으리 오!' 소영이 생각에 잠겨 있는 찰나에 갑자기 장산패가 수중의 단검을 펼쳤다. 그러나 단검은 어느새 장산패의 수중을 벗어나 허공에서 한 바퀴 맴돈 후 유선자에게로 날아 갔다. 그러자 소영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단검을 암기로 사용하는구나..." 유선자는 손을 날려 단검을 향해 일지를 펼쳤다. 그러자 단검은 지력의 진동을 받아 공중에서 두 바퀴나 돌았다. 단검은 다시 유선 자를 향해 날아 갔다. 그것을 본 유선자는 다시 지력을 마주 찔러댔다. 그러자 단검은 마치 날개가 돋친 듯 허공에서 오락가락했다. 장산패는 손바닥에서 다시 한줄기의 암경(暗經)을 발해 냈다. 그 리고는 단검을 도로 빨아들이듯 장을 휘두르자 단검은 공중에서 동 그라미를 그리면서 뱅뱅 맴돌았다. 장산패가 또다시 오른팔을 휘두르자 단검은 곧장 서북쪽을 향해 날아 갔다. 이 한줄기의 은빛이 번개처럼 바위에 가서 부딪치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남일공이 말했다. "장형의 검슬은 과연 많이 발전했구려!" 장산패는 손을 뻗쳐 단검을 거두어 들였다. "남형은 과분한 칭찬을 하시는구려." 유선자가 말했다. "이 검술이 아무리 무림의 독보라고 해도 나 유선자에게는 상처 를 입히지 못할 것이오." 남일공이 그 말을 받았다. "그 일이 뭐 그리 대단하오? 유선자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 한다면 소제 또한 절대로 상처를 당하지 않을 것이오." 장산패는 길게 한바탕 한숨을 내쉬더니 의미심장하게 입을 뗐다. "과연 두 분의 말씀이 옳소이다. 소제가 또다시 오 년을 수련한 다 해도 두 분을 누르기는 어려울 것이외다." 유선자와 남일공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감개무량했 다. 수십 년 동안 시합을 해 오면서 비록 뚜렷한 승패의 판가름은 없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 속에 언제나 장산패가 자기네들 두 사람 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남일공이 침묵을 깨뜨렸다. "장형께선 너무 겸양해 할 것 없소. 장형이 나를 완전히 패배시 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나는 내력에 있어서 장형보다 뒤 떨어져 있음을 알고 있소. 만약 하늘이 다시 우리들에게 수십 년을 더 연장해 준다면 장형은 반드시 천 초 이내에 나를 누룰 수 있을 것이오." 장산패가 말을 받았다. "별 말씀을... 남형께선 소제를 너무 추켜세우고 있소이다." 유선자가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남일공, 그대는 패배를 시인했구려?" 남일공이 말을 받았다. "소제의 말은 모두가 사실이외다." 유선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제 오 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오?" 유선자는 장산패를 흘겨 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우리가 모두 죽으면 장산패 당신은 수고도 하지 않고 이익 을 보는 셈이구려." 그녀의 말 속에는 자신과 남일공은 앞으로 오 년을 넘길 수 없다 는 것을 표시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장산패는 아직도 그 전도를 예 측할 수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남일공이 입을 열었다. "나의 예상으로는 앞으로 삼 년을 넘기기도 힘들 것같소." 남일공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어 말했다. "아아! 기실 나는 오 년 전에 이미 패배를 시인했어야 했소. 장 형의 검술 한 가지를 두고 말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에 미치지 못하 오." 그러나 유선자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그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 음은 기실 남자들보다도 더했다. 유선자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무공이란 넓고도 깊소. 한 사람의 짧은 생애 동안에 어찌 모두 배울 수가 있겠소. 장산패는 검술에 있어서는 우리들보다 강하지만 장력과 지공(指功)에 있어서는 우리들보다 한 수 낮은 것만은 사실 이오." 장산패는 미소를 지었다. "유선자의 말이 옳소이다. 우리 세 사람은 수십 차례 무공 시합 을 했지만 시종 막상막하의 국면을 이루어 왔소. 두 분께서 다음 오 년 뒤의 약속을 지키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소제도 역시 그런 느 낌이 드는군요." 장산패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정색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소제도 요즘 한 달 동안의 신체 변화에 대해 일종의 위기 감을 느끼고 있었소. 앞으로 우리가 과거와 같은 무공 시합을 한다 면 우리 세 사람은 모두 기진맥진하여 아마 몇 개월을 넘기기 어려 울 거요." 남일공이 맞장구를 쳤다. "나 역시 동감이오." 그러자 유선자는 장산패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 보다가 다시 남일공을 쳐다 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께서는 명리의 쟁탈에 의욕을 잃었군요." 장산패는 이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유선자의 지법 경공은 세상에서 필적할 자 없으니 소제가 앞으 로 삼십 년을 더 고련(苦鍊)한다 해도 역시 유선자의 솜씨에는 미 치기 어려울 것이외다." 남일공도 말을 거들었다. "유선자의 삼원련제(三元聯第), 만천화우(漫天花雨), 오봉조양 (五鳳朝陽)의 암기수법은 소제도 감히 바라 볼 수 없는 것이오." 유선자는 음! 하고 신음 소리를 한마디 내뱉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눈깜빡할 사이에 빙판을 미끄러져 내려 갔다. 장산패는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남형, 생사의 판가름이 곧 나려는 순간에 호승의 마음을 버리게 된다면 우리 세 사람에게는 막대한 이익이 있소이다. 그렇게 된다 면 우리들은 앞으로 삼 년간은 거뜬히 살 수 있을 것이외다." 남일공은 소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 양아들을 잘 보살펴 주어 고맙소." 말을 마치고 남일공은 느린 걸음으로 봉우리 아래를 향해 내려 갔다. 장산패가 대답했다. "소제 역시 일생 동안 피나는 수련을 거쳐 얻은 무공을 시체와 함께 이 유곡에 묻어 버리고 싶지는 않소. 남형께선 안심하시오." 소영은 갑자기 일어서서 크게 외쳤다. "의부님!" 소영은 뒤쫓아 가려 했다. 그러나 이 산봉우리에 덮힌 얼음이 미 끄러워 소영은 겨우 두어 걸음 걷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 았다. 그러나 그의 달려 나간 힘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 사람은 비록 쓰 러졌지만 그 여세에 의해 아래로 계속 미끄러져 내려 갔다. 이때 남일공이 오른손을 한 번 번쩍 들자 한 줄기의 강한 힘이 밀려 나와 소영의 몸을 저지하여 위로 끌어 올리게 했다. 다시 끌려 올라 가는 소영의 귓전에는 남일공의 이와 같은 말이 들려 왔다. "녀석아, 무공의 기초를 닦는데 있어 가장 금해야 할 일은 마음 이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네 일생의 성취에 관계되 는 때이니만큼 조금도 나를 그리워하지 말고 너의 장 스승을 잘 모 셔 무공을 터득해라. 그가 터득한 현음의 정종심법을 전수받게 되 면 너는 평생토록 그 진가를 누리고도 남을 것이다." 그 음성에는 자애의 정이 충만되어 있었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콧잔등이 시큰해지며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의부가 보이지 않았다. 장산패는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소영의 등줄기에 있는 명문혈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꼬마야, 어서 마음을 가라앉혀라." 소영은 한 줄기의 뜨거운 힘이 장산패의 손바닥에서 흘러 나와 자기의 체내로 고루 퍼지는 것을 느끼자 다급히 운기하여 그것을 맞이했다. 장산패가 말을 이었다. "얘야, 너의 의부 남일공은 고고하고 오만한 인물이었다. 당시 우리가 무공 시합을 하게 된 것도 바로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산 속에서 수십 년을 살다가 보니 성격도 많이 변해 갔다. 과거에 그는 살생을 자행하여 무릇 그의 손에 걸려든 사람이라면 목숨을 빼앗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불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그 가 만년에 자애의 마음을 일으켜 이처럼 사랑할 줄은 미처 몰랐구 나. 얘야, 너는 그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알고 있 는 것을 모두 너에게 전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세 사람의 절학을 네가 모두 전수받기를 바라고 있다." 장산패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의부의 마음은 그처럼 간절하지만 그렇게 쉽게 될는지는 의 문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전력을 다하여 너를 일류 고수로 만들려고 애를 쓰겠지만, 네가 과연 얼마나 배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너의 역량에 달려 있다." 소영은 장산패의 손바닥에서 흘러 나오는 뜨거운 힘이 점차 강해 져서 자기의 체내로 밀려 옴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말을 하고 싶 었지만, 한눈을 팔다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장산패는 계속 말했다. "나는 너의 훗날 무공의 성취에 제한을 가하고 그리하여 네가 무 예를 배운 다음에도 건방진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너의 한 곳의 혈도를 찔러 평생토록 임(任), 독(督) 양막을 통하지 못하게 하자고 너의 의부와 상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까 전음입밀로써 내 의사를 밝혔더니 너의 의부가 뜻밖에도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 다." 장산패는 여기서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또한 그는 과거에 자기가 너무도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 중에 는 죽음을 당해야 마땅할 악인도 많이 있었지만 적지 않은 호인들 에게도 부상을 입혔으므로 너의 손을 빌어 착한 공을 많이 쌓게 함 으로써 자신의 피비린내 나는 죄가를 다소라도 속죄하고 싶다고 했 다. 네 의부의 마음가짐이 이러니 나도 하는 수 없이 그 뜻에 따르 기로 했다." 소영은 비록 무슨 말이든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스며 들어오는 뜨거운 힘이 너무도 벅차므로 그것을 용해하려면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장산패는 여전히 말을 계속했다. "지난 며칠 동안의 네 무공의 성취는 내 예상을 크게 뒤집어 놓 았기 때문에 나 역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세상에 만약 너의 의부와 유선자, 나의 무공을 함께 겸해 지닌 자가 있다면 그는 반 드시 천하무적일 것이다." 이윽고 소영은 체내로 스며 들어 오는 뜨거운 힘을 혈액순환을 따라 경맥 사이로 흐를 수 있도록 제어(制御)할 수 있었다. 장산패는 침통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소원이 있다. 네가 무공을 배운 다음에 나를 대신해서 사람 둘을 찾아 주기 바란다. 한 사람 은 나의 형님이고, 또 한 사람은 나의 여자 친구이다." 소영은 이 때는 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후배가 이 유곡을 나갈 수 있다면 틀림없이 노선배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힘껏 두 분을 찾아 보겠습니다." 소영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물었다. "혹시 그분들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아! 이일은 말은 쉽지만 막상 행동에 옮기려면 힘드는 일이란 다. 그들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며 혹시 금궁 속에 갇혀 있을는지 도 모르니까?" 소영은 금궁이란 두 글자를 듣자 한 차례 가슴 속이 떨려 하마터 면 기(氣)를 어지럽힐 뻔했다. 장산패는 내공이 정심(精深)한지라 이를 깨닫고 즉시 진기를 끌 어 올려 한 줄기의 강대한 열류(熱流)를 소영의 체내로 침투시켜 제거된 기를 경맥 속에 다시 돌아가게끔 해 주고는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얘야, 우리가 이처럼 말을 하는 것은 행공하는데 있어서 매우 방해가 된다. 어서 잡념을 떨쳐 버려라. 내가 너를 도와 몇 군데 진기가 가기 어려운 혈맥을 뚫어 보겠다." 갑자기 그의 손바닥 안에서 강한 열기가 흘러 나왔다. 소영은 자칫하다간 기가 흐트러져 맥박을 상하게 할 위험성이 있 었기 때문에 심신을 모아 잡념을 없앴다. 이때 만약 잘못해서 맥박이 상하게 되면 죽는 수도 있으며, 그렇 지 않으면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최소한 몇 개월 간은 좌식해서 조 리를 해야만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영은 정신 집중을 해서 운기행공을 하여 외래의 열기를 융화시켜 경맥 속으로 흘려 보냈다. 소영은 차츰 몰아지경에 빠졌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이 절봉(絶峰)은 숱한 산봉우리 중에서도 가장 높으며 봉우리 위 에는 일년내내 태양이 비친다. 그런데도 한 자가 넘을 정도의 두께로 얼음이 얼어 수천 년을 내 려 온 것이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얼음 위에 비치자 금실을 드리운 듯 찬란한 빛이 반사되어 먼 산의 적설에도 금빛 노을이 깔린 듯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경색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소영은 기쁨에 넘쳐 소리를 질렀다. "노선배님, 이와 같은 경치는 일 년에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요?" 그러나 메아리만 울려올 뿐이었다. 소영은 혼자서 생각했다. '그렇군, 그는 나 혼자 그 침대 위에 남겨 두고 일심전력으로 내 공을 연습하라고 했었지. 지금 또다시 나를 이 절봉 위에 남겨 놓 았으니 필시 무슨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럭저럭 때는 정오가 가까왔다. 태양은 더욱 강렬하게 내려쬐었 다. 소영은 너무도 강한 햇빛을 받자 몸의 피부와 근육이 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산봉우리에는 지금 극단의 추위와 더위가 교차되고 있었다. 강렬한 햇빛과 차가운 얼음- 소영은 지금 이 한랭의 침투를 막기 위해 열심히 내공을 운기하 고 있었다. 그는 비록 장산패의 현문 상승심법을 터득하여 내공의 기초를 어 느 정도 닦아 놓긴 했지만 어떻게 운기를 해야만 한랭의 침입에 대 항할 수 있는가는 아직 몰랐다. 그는 추위와 열이 몰려 오자 그 고통을 덜기 위해 오직 지금까지 배운 내공을 극히 자연스럽게 운공함으로써 외래의 침입에 저항하 였다. 날이 저물자 광풍이 무시무시하게 휘몰아쳤다. 얼음으로 덮힌 이 절봉에 바람이 더욱 맹렬해지자 마치 산이라도 날아 갈 것처럼 소 영에게는 느껴졌다. 그래서 소영은 이렇게 생각했다. '바람의 기세가 이처럼 맹렬하고 절봉 위에는 잡을 만한 물건이 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혹 봉우리 아래로 한없이 떨어져 내려가지나 않을까?' 소영은 그렇게 허망하게 떨어져 죽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이란 위험한 조건에 처할수록 더욱 생에 대한 애착심이 생기는 법이다. 드디어 소영은 주먹으로 얼음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끝내 그는 빙판에 다 구멍 한 개를 뚫었다. 그래서 그 구멍을 잡고 엎드려서 긴 밤을 세웠다. 몸에 닿았던 부분의 얼음이 신열에 의해 녹아서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바지를 흥건히 적셨다. 그의 웃도리는 이미 그가 낭떠러 지 바위 틈에서 천 년 묵은 석균을 따 먹을 때 찢어서 끈을 만들어 사용해 버린 뒤였다. 빠른 것이 세월이라 소영은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서 어느덧 백 일을 보냈다. 말하자면 백 번의 뜨거운 대낮과 차가운 밤이 지나갔다. 장산패는 며칠마다 한 번씩 반드시 그를 보러 왔다. 그는 그 때 마다 그에게 음식을 갖다 주고는 내공심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 나 소영을 봉우리 아래로 데리고 가겠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소영 역시 꾸준히 참아 나갈 뿐 그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고난과 험악한 환경 속에서 소영의 생명력은 낮에 는 강렬한 태양과 맞서고, 밤에는 추위와 싸워 그의 내공의 진보는 신기하리만큼 빨랐다. 어느 날 밤, 푸른 하늘은 한결 드높아지고, 중천에는 달이 걸려 있으며, 산바람이 산들산들 불어 오고 있었다. 소영은 봉우리 꼭대기를 한 바퀴 빙 돌았다. 발 밑에 낮은 산봉 우리들이 점점이 늘어 서 있었다. 갑자기 상쾌함을 느낀 소영은 공 연히 하늘을 우러러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매우 강인한 아이로구나!" 소영이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등뒤 육, 칠 척 떨어진 곳에 남색 옷을 입은 중년부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백 일 전에 소영이 보았던 유선자였다. 소영은 곧 포권을 하고 읍을 했다. "후배 소영이 유 노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유선자는 미소를 지었다. "얘야, 너는 그 얼음 봉우리 위에 있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소영은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오늘 밤으로 꼭 백 일이 되옵니다." 유선자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 가난뱅이 수재가 공(孔), 맹(孟)의 독에 걸려서, 큰 사명을 맡은 자는 필연코 먼저 육신의 고통과 기아를 맛보아야 한다며 너 를 이 절봉에 남겨 두고 고생을 시키는구나. 나는 믿지 않는다. 태 양의 폭사와 비바람의 강타를 당하지 않으면 상승무공을 배울 수 없다는 말을... 가자, 나를 따라 내려 가자. 내가 그에게 보여 줄 테다. 이런 고생을 하지 않고도 상승무공을 배울 수 있나 없나를." 소영은 난처했다. '나의 의부는 장 노선배님을 따라 무공을 배우라고 하셨다. 그런 데 지금 내가 그 분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냥 내려 가 버릴 수가 있 겠는가?' 이때 소영의 귀에 다른 음성이 들려 왔다. "얘야, 스승을 놓치지 마라. 너의 백 일 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도다. 어서 그를 따라 가거라." 그 음성은 소영의 귀에 익었다. 바로 장산패의 음성이었다. 소영은 다시 유선자에게 포권을 하고 절을 올렸다. "노선배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유선자는 이어 말했다. "나는 그 가난뱅이 수재에게 현문의 건청기공(乾情氣功)을 배우 지 않고도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어야지......" 유선자는 소영을 데리고 이 절봉을 내려 갔다. 잠시도 쉬지 않고 그들은 유곡 아래에 있는 그 큰 소나무 밑의 나무 집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이 나무 집의 풍경은 소영이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부드러운 색깔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수놓은 이불하며 상당히 호화스러운 분위기였다. 유선자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얘야, 이곳이 마음에 드느냐? 그 산봉우리보다 좋으냐?" 소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죠." 유선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난 너를 이처럼 좋은 곳에서 절기를 배울 수 있게 해 줄 테다." 소영은 이로부터 안정된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호승의 마음이 십분 강한 유선자는 소영에게 무공의 연습 을 시키는데 있어서는 말할 수 없이 엄격했다. 소영은 편안한 생활을 누리면서 어느덧 일 년이란 세월을 흘려 보냈다. 그의 수라지력은 유선자의 엄격한 지도를 받아 커다란 진 전을 보였다. 유선자는 경공과 수라지력, 암기로써 일세를 떨치던 인물이었다. 소영은 일 년 동안에 그녀의 무공을 거의 다 배웠다. 소영은 그 동안에 의부와 장산패는 통 만나 보지 못했다. 그 두 사람은 비록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유선자가 엄격하여 그들을 만 날 틈을 주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이었다. 소영이 무공 연습을 마치고 바깥을 내다 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남일공과 몸에 붉은 가사를 입은 어떤 화상이 나무 집 바 깥 잔디 위에서 각기 오른손을 마주 들어 내력을 겨루고 있는 장면 이 눈에 띄었다. 장산패는 단검을 쥐고 한 옆에 서서 쌍방의 결투를 주시하고 있 었다. 유선자 또한 나무 집의 벽에 기대선 채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영은 의부를 부르고 싶었지만 만일 이때 고함을 질렀다가는 의 부의 정신이 흐트러져 상대방에게 부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에 소리쳐 의부를 불러 보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눌러 버렸다. 이때 아주 낮은 음성이 들려 왔다. "꼬마야, 이리 오너라." 장산패의 음성임을 소영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소영은 유선자 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천천히 장산패에게로 걸어 갔다. 유선자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소영은 모든 광경이 의아스럽기만 하여 장산패에게로 다가가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노선배님, 제 의부의 형세가 위태로우니 노선배님이 가셔서 대 치해 주십시오." 장산패는 엄숙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의부의 내력은 대단한 것이니 아직도 얼마간은 더 지탱할 수 있다." 장산패는 비록 소영과 말은 주고받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남일공 과 그 화상에게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소영은 혼자서 이렇게 생각했다. '의부와 장산패, 유선자의 무공은 각기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수 십 년 동안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나의 의부가 저 홍의 화상에게 패한다면 역시 유선자나 장산패도 그의 적수는 되지 못할 것이다.' 눈부신 아침 햇빛이 유곡의 입구에 비쳤다. 남일공과 홍의 화상 은 이마에 땀방울이 번졌다. 하지만 남일공의 모습은 더욱 볼품 사 나왔. 땀방울이 흘러 내려 황포를 흥건히 적실 지경이었다. 소영은 그 광경을 보자 뜨거운 피가 끓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 다. 소영은 곧 장산패의 수중에 있는 단검을 빼어 들었다. 장산패는 아무런 대비도 하고 있지 않아 칼은 비록 빼앗겼지만, 그의 무공은 워낙 높았으므로 재빨리 오른손을 휘둘러 소영의 오른 손목의 맥박을 누르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녀석아, 어디다 쓰려 하느냐?" 소영이 격렬한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저는 의부를 도와 저 홍의 화상을 죽이려고 합니다." 장산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의 의부도 그를 누르지 못하는데 네가 가 보았자 헛된 죽음만 당할 뿐이다." 소영은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저는 비록 그를 이기지 못하지만 제 의부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 습니다." 장산패는 낮은 음성으로 타일렀다. "얘야, 충동을 이겨내야만 된다. 오늘의 일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심어 놓은 씨를 거둘 뿐이란다. 그리고 이 일은 유선자와 너의 의 부 사이에 관련된 일이다. 너는 비록 깊은 효심에 그대로 보고 있 기가 어렵지만 그러나 네가 나서 봤자 그 홍의 화상의 일격을 감당 해 내지 못한다. 그리고 또 내가 나선다면 유선자의 반감을 사게 되어 잘 되려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될지도 모른다." 말을 마치고 장산패는 오른손에 약간 힘을 주어 소영의 수중에 있는 단검을 빼앗았다. 소영은 장산패의 말뜻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노선배님께서는 저의 의부가 그 홍의 화상에게 부상을 입는 것을 보고만 계실 작정입니까?" "일 년 동안 나는 너의 의부와 석실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 누고 해서 우리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졌다. 그래서 만약 내가 꼭 나서야만 할 상황에 다다른다면 오늘은 아마 피를 보고야 말 것이 다." "왜요? 그럼 유선자도 그 홍의 화상을 도와 준단 말입니까?" 장산패가 천천히 대답했다. "유선자의 심정을 나 역시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일 년 동 안 나와 너의 의부는 과거에 고달프게 무학을 연마하던 모든 생활 을 버리고, 달밤에 마주 앉아서 시를 읖조리기도 하고 석실에서 천 하 대세를 토론하여 시간을 보냈지만 무공은 오히려 진경을 보였 다. 그걸 볼때 우리가 그동안 갖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공 을 터득하려고 급급한 것은 오히려 빨리 하려다가 도리어 늦어지는 결과를 빚어 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직 괴로운 수련으로 만 초월의 경지에 이르려고 한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면 오히려 멀 리 내다 볼 수 있다는 것을 저버린 결과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간 의 그 미묘함을 너에게 말로써 다 일러 줄 수가 없으니 안타깝구 나." 장산패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 속에선 번개같은 빛이 흘러 나왔다. 소영이 고개를 돌려 보니 남일공은 부르르 떨며 몸이 뒤로 반 자 가량 젖혀진 것이 아닌가. 남일공은 그 홍의 화상의 심후한 내력에 배겨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남일공은 갑자기 다시 몸을 일으켜 열세를 만회했다. 쌍방은 다 시 막상막하의 국면을 이루었다. 장산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의 의부는 저 화상에게 패하는 꼴을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서 전력을 다해 반격을 가하는구나." 소영이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의부께서 저 화상을 물리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소영에게 말했다. "영아야! 네게 두어 마디 일러 줄 말이 있다. 너는 전력을 다하 여 이 말을 꼭 실천해야 하느니라."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무슨 말인데요?" 장산패가 대답했다. "내가 출수를 하거든 너는 곧 너의 의부의 석실로 돌아 가거라. 그 석실 안엔 내가 직접 기록한 한 권의 책자가 있는데 너의 지혜 와 총명함으로 너의 의부와 나의 무공의 진수를 모두 터득할 수 있 을 것이다." 이때 갑자기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손을 멈추시오." 나무 문에 기대 섰던 유선자가 곧장 몸을 날려 싸우는 장소로 날 아 갔다. 장산패는 순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됐다, 됐어. 유선자가 나서기만 한다면..."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남일공의 몸뚱이가 일 장 정도 높이 날아 올라 가더니 땅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유선자가 두 사람 이 결투하는 장소를 향해 달려 갔는데 그녀의 몸이 채 목적지에 닿 기도 전에 이미 변화가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진기를 끌어 올려 방향을 바꾸어 남일공이 떨어지는 곳을 향해 화살같이 날아 갔다. 그녀의 경공은 천하에 으뜸가는 것으로써 그녀의 그림자가 한 번 번쩍이자 남일공의 몸뚱이가 떨어져 내리는 속도보다도 더 빨리 남 일공의 몸뚱이가 떨어져 내리는 장소에 도착하여 양팔을 벌여 남일 공을 품 안에 받아 안았다. 이때 장산패가 성난 목소리로 대갈일성했다. "마음이 시커먼 영웅이로군. 상대방이 채 방비도 하기 전에 암수 를 쓰는 것이 영웅이 할 짓인가?" 이 외침과 함께 흰 빛이 번쩍이더니 장산패는 곧장 그 홍의 화상 을 향해 덮쳐 갔다. 알고 보니 홍의 화상은 유선자가 손을 멈추라 고 고함을 질러 남일공이 내력을 거두어 들이는 순간을 이용하여 별안간 전신의 공력을 다해 일장을 뻗쳐 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 일공은 방비할 겨를 없이 뜻밖에도 강한 내력의 진동을 받자 내장 이 상하면서 몸이 날아 간 것이다. 장산패는 노여움이 머리 끝까지 치밀었으므로 그가 일단 출수하 자 검의 기세는 대단히 강하여 사람보다 먼저 무서운 검기(劍氣)가 허공을 가르며 도착했다. 홍의 화상은 손을 뒤로 돌려 일장을 쳐냈다. 한 줄기의 강력한 진력이 밀려 나갔다. 장산패는 단전의 진기를 늦추어 앞으로 달려 나가던 몸을 갑자기 멈추고 수중의 단검을 휘둘러 송이송이 검꽃을 그려 냈다. 이들이 발해 낸 검기와 장력이 부딪치자 그 홍의 화상은 뒤로 두 어 걸음 물러섰고, 장산패도 역시 몸이 흔들려 비틀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홍의 화상은 냉소를 터뜨렸다. "수를 빙자하여 승리를 거두려 하나 빈도는 물러나야겠소." 그러면서 몸을 돌려 유성처럼 달려 갔다. 장산패는 그가 설마 몸을 돌려 뺑소니를 칠 줄은 몰랐으므로 멍 하니 서 있을 동안 화상은 이미 삼, 사장 밖으로 달아났다. 장산패는 뒤쫓기엔 늦은 감이 있어 즉시 진기를 모아 단검을 던 졌다. 그러자 한 줄기의 흰 빛이 번개처럼 빠르게 곧장 홍의 화상 을 향해서 날아 갔다. 홍의 화상은 순간 고개를 돌려 일장을 쳐내 검을 향해 장풍을 몰 아쳤다. 단검은 공중에서 맴돌다가 두어 번 곤두박질치더니 비스듬 히 한 옆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홍의 화상은 몸을 굽혀 잽싸게 뛰어 갔다. 소영은 홍의 화상이 마치 토끼처럼 재빨리 뛰어 가는 것을 보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장 노선배님, 화상 놈이 도망갑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어 소영이 고개를 돌려 보니 장산패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서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 었다. 소영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장 노선배님 역시 부상을 당했단 말인가?' 소영은 조심스럽게 장산패에게 다가갔다. "장 노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장산패는 그제서야 눈을 뜨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얘야, 아까 내가 던져 낸 일검을 보았느냐?" 소영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얘야, 그게 바로 검도에서 가장 높은 심법(心法)인, 어검술(馭 劍術)이란 것이다. 단지 나는 화후(火候)가 부족해서 몸과 검을 합 일시키지 못하여 적을 구 장 안에서 부상시키지 못했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겉으로는 잠자코 있었지만 속으로는 크게 회의를 느꼈다. '무기를 던지는 것이 검도 중에서 상승심법이라 할 수 있단 말인 가?' 장산패가 이어 입을 열었다. "그 화상은 비록 너의 의부에게 부상을 입혔지만 그 역시 성한 몸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소영이 고개를 돌려 보니 유선자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오른 손으로 남일공의 등줄기를 누르고 그의 상처를 치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산패가 또 말했다. "얘야, 우리 저만큼 가 있자. 유선자의 내공이 심후하고 그 분은 또한 두 분의 선배께서 남겨 놓은 고귀한 영단을 가지고 있으니 그 녀가 도와 준다면 너의 의부는 무사할 것이다. 우리는 차라리 아랑 곳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장산패는 소영을 이끌고 단검이 떨어진 곳을 향해 걸어 갔다. 소영은 마음 속으로는 의부가 걱정되었지만 그렇다고 장산패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어 그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장산패는 단검을 주워 들면서 느릿느릿 말했다. "그 화상의 무공은 과연 높고 깊군. 내가 전력을 다해 일격을 가 했는데 겨우 그의 손가락 두 개를 잘랐을 뿐이니..." 소영이 그 말을 듣고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푸른 잔디위 에 피투성이가 된 두 개의 손가락이 떨어져 있었다. 장산패는 잘라진 두 개의 손가락을 집어 들고는 말했다. "이건 무명지와 새끼 손가락이군. 아깝군, 아까와." 소영은 의아해서 물었다. "무엇이 아깝단 말씀입니까?" 장산패가 대답했다. "아깝게도 나의 화후가 약간의 차이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일 분의 화후만 더 있었더라도 오늘 그 화상은 목숨을 붙이고 도망 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손바닥 하나쯤은 남겨 놓고 갔을 텐데... 그 어찌 아까운 일이 아 니겠는가!" 소영은 물었다. "노선배님의 이 검술은 몇 분의 화후가 있습니까?" 장산패가 이어 대답했다. "아직도 까마득하다. 이제 겨우 기초를 닦았다고 할 정도니까." 소영은 이 말이 무슨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느냐?" 소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이 어검술을 인간 세상에 전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절기는 보통 무공과는 달라서 모든 사람에게 물려 줄 수는 없다. 만약 재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 연마한다면 평생을 두고 연습 하더라도 나처럼 적을 부상 입히는 데만 그칠 뿐 치명상을 입히지 는 못한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만약 악 누나를 도와 천하의 무수한 영웅들과 겨루자면 이 와 같은 상승의 무공을 익혀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소영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후배가 그 절기를 배울 수 없을까요?" 장산패는 그제서야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너의 체격은 백 년 만에 한 번쯤 날까말까한 훌륭한 체격이다. 게다가 무공을 배우기에는 가장 알맞는 재질을 소유하고 있으니 네 가 만약 수련을 한다면 십 년 내에 틀림없이 대성할 것이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귀가 솔깃해졌다. "노선배님, 거에게 그것을 배울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 오." 장산패는 고개를 쳐들어 먼 하늘가에 떠도는 구름조각을 바라 보 았다. 이윽고 장산패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이 어검술은 검도 중의 절정이라고 생각된다. 만 약 검도 중에 이 절기보다 높은 무학이 있다면 내 견식이 좁은 탓 이라고나 할까?" 소영이 맞장구를 쳤다. "저의 의부께서도 노선배님의 내공은 현문정종이며 검술은 탁월 하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산패는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네 의부의 말이 옳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그만큼 알고 있다는 것 뿐이지 무공의 성취는 아닌 것이다." 장산패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쳐들어 먼 하늘을 우러러보고는 긴 탄식을 불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훌륭찬 인재는 아니다. 게다가 약관이 지나서 부터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비록 훌륭한 스승은 모셨지만 큰 성과는 얻지 못했다. 나는 은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괴로 운 수련을 거듭해서 내 체질의 둔함을 보충하려고 했지만 결국 별 성과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두 줄기 눈빛을 소영에게 못박았다. "얘야, 내 말을 알아 듣겠느냐?" 소영은 맨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곧 다시 고개를 가로저어 부인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장산패는 잔디 위에 떨어져 있는 잘라진 두 개의 손가락을 가리 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홍의 화상의 손가락이 잘린 원한은 이미 너의 장부에 기재되 었다. 우린 이 유곡에서 수십 년을 지내 오는 동안 아무런 승패의 판가름은 내지 못했지만 마음 속에는 한 가지 자부심을 가지고 있 었다. 수십년 간을 조용히 살면서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다고... 그래서 무림에서는 유독 우리 세 사람만이 지존이라고..." 장산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오늘 이 홍의 화상과의 일전은 나로 하여금 마음 속에 간직했던 그 조그만 자부심마저도 사라지게 했다. 뿐만 아니라 너 에게 강적 하나를 만들어 준 셈이 되었구나. 이후 네가 강호에서 행협할 때 그 화상은 절대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노선배님과 유선자 선배님도 그를 누르지 못합니까?" 소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보니 이곳을 삼성곡이라 부르는구나. 아마 그들이 지은 이 름이겠지....' 장산패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다시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가 훗날 네게 분풀이를 한다는 것이다." 소영은 말을 받았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만약 그를 누르지 못한다면 다시 삼성곡으 로 달려 오겠습니다." 장산패는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마 우린 그 때까지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이때 유선자가 황급히 달려 왔다. 장산패가 몸을 일으켜 마주 걸어가면서 다급히 물었다. "남형의 상처는 어떻소?" 15. 삼성곡을 떠나 강호로 유선자가 장산패를 바라 보며 말했다. "관계 없소. 그가 그처럼 비겁한 사람일 줄은 미처 몰랐소. 후일 다시 그를 만나면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오." 장산패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가 숨어 들어 온 것은 분명 당신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였으리 라 생각되오." 장산패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더 잘 된 일이오. 남형이 비록 약간의 상처 를 입었지만 그로 인해서 당신들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수십 년 간의 원힌을 풀 수 있었으니 그만한 상처쯤은 오히려 약과라 할 수 있겠소." 유선자는 시선을 소영에게로 돌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가난뱅이 수재, 당신이 보기엔 영아의 천품이 어떤 것 같소?" 장산패가 대답했다. "지극히 훌륭한 천품으로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오." 유선자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를 성취시켜 주지 않는단 말이 오?" "나는 남형의 부탁을 받아들여 이미 나의 모든 배운 바를 그에게 전수했거늘 또 무엇을 더 성취시키란 말이오?" 유선자가 다시 물었다. "당신이 그처럼 그를 아낀다면 무엇 때문에 그를 제자로 거두어 들이지 않는 거요?" 유선자는 시선을 소영에게로 돌리며 나무라듯 말했다. "바보같은 아이로구만. 빨리 사부님에게 절을 하지 않고 무얼 꾸 물거리고 있느냐?" 소영은 그녀의 말대로 큰 절을 올렸다. 유선자는 애교있는 음성으로 웃으며 말했다. "영아는 비록 남 사형(師兄)의 양자이지만, 또한 당신의 제자이 기도 하니 후일 그가 뛰어난 인물이 못 된다면 당신이 잘 가르치지 못한 탓으로 돌리겠어요." "그러니 유선자께서 많이 도와 주어야겠소." "나도 모든 힘을 기울여 그를 가르치겠소." 그녀는 웃으며 몸을 날려 이 장 밖으로 뛰어 나갔다. 장산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워하게 되면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고, 사랑하게 되면 뼈라 도 깎아 주려고 하니 이 여인은 정말 상반된 두 가지의 감정을 지 니고 있구나." 장산패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소영을 돌아 보며 말했다. "너의 의부를 보러 가자." "네." 두 사람은 그곳을 나왔다. 남일공이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서니 남일공은 나무 침상에 누워 있었다, 유선자가 침상 곁에서 남일공 의 혈도를 주물러 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도 유선자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남일공의 안색을 살펴 보며 장산패가 입을 열었다. "남형의 상처는 대단한 것 같지는 않소. 그러나 사, 오 일은 요 양을 취해야 될 것 같군요. 나는 소영을 데리고 그동안 남형의 석 실을 좀 빌려 써야겠소." 열심히 남일공의 사지를 주무르던 유선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제자를 데리고 있고 싶으면 얼마든지 데리고 계세요." "고맙소. 그럼, 두 분에게 방해가 될 것 같으니 나는 이만 돌아 가겠소이다." 장산패는 유선자에게 웃음을 보이며 몸을 돌렸다. 소영도 유선자와 남일공에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오 일이 지났다. 남일공은 유선자와 함께 석실로 소영을 보러 왔다. 소영은 마침 중요한 행공(行功)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장산패는 남일공의 안색을 보고 대번 그가 이미 건강을 회복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형매(師兄妹)는 수십 년 동안 얽매이고 있던 시비를 완전히 제거해 버린 모양이구나. 애석한 것은 나이가 이미 화갑(花甲)을 넘어 황혼에 다가선 것이 안타깝도다.' 장산패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남일공의 얼굴에는 흐뭇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소영이 열심히 무공을 닦고 있는 것 이 지극히 흐뭇했던 것이다. 남일공은 곁에 서 있는 유선자를 향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린 장형이 소영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것을 방해해선 안 되겠 소. 지금 영아는 매우 열심이니까." "정말 열심이군요." "자, 방해가 안 되게 돌아갑시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미소를 지으며 나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 보 며 장산패는 의미있는 미소를 던졌다. 세월은 거침없이 흘렀다. 한 해가 지나고 오 년이 흘렀다. 그동안 소영은 열심히 무공을 닦았고 유선자와 남일공은 이따금 씩 석실로 소영을 찾아 와 무공의 진전을 위해 여러 가지로 지도를 해 주었다. 소영의 무공은 장산패와 남일공, 유선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급진전을 보았다. 온갖 비결과 절기도 몸에 지니게 된 것이 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아직 무공의 기예만 터득했지 위력이 강 하지 못하다는 것 뿐이었다. 소영의 무공이 정상에 오를 만큼 발전했을 무렵의 어느날이었다. 이날, 소영은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검술을 닦고 석실로 돌아 왔다. 소영이 석실로 들어서니 장산패가 책상다리를 한 채 눈을 지 그시 감고 있었다. 소영이 앞으로 다가가자 그는 눈을 번쩍 뜨고 소영을 주시했다. "사부님, 무슨 훈계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영아야! 네가 이 산 속에서 몇 년이나 지냈는지 알고 있느냐?" "오 년 정도 되었을까요?" 사실 소영은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 는 무공을 닦는 데 전심전력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산 골에는 낮에도 해를 보기 어려웠고, 기후의 변화도 쉽사리 느껴지 지 않았던 것이다. 장산패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았다. 오 년이 지났다. 이제 너도 강호에 나가 많은 것을 보 고 판단하며 경험을 쌓을 시기가 되었다." 소영은 장산패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 으며 급히 대답했다. "소제는 아직 무공을 다 배우지 못했습니다." "무슨 소릴... 배움엔 끝이 없다. 네가 다시 오 년을 더 배운다 해도 역시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장산패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미 너는 우리 세 사람의 절학을 모두 터득했으니 더 배울 것 도 없다. 혼자서 열심히 연습만 한다면 무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 는 영웅이 될 것이다." 소영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근 반 년 동안 의부와 유선자께서 나타나지 않고 집에만 앉아 계시더니... 이제 보니 이 세 분의 스승들은 모두 노쇠해진 모양이 구나.' 소영은 새삼스럽게 장산패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굵은 주름이 진 이마와 파뿌리처럼 하얗게 센 머리, 그리고 혈색이라고 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 '아! 늙으셨구나!' 소영은 가슴이 뭉클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목메인 음성 으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저는......" 장산패는 손을 흔들어 소영의 말을 막으며 냉정한 어조로 말했 다. "너의 의부와 유선자가 본 집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가서 뵙 고 인사를 드려라.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 다." 소영은 끓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길 없어 눈물을 줄줄 쏟으며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장산패가 꾸짖었다. "사내놈이 마음이 그리 강하지 못해서 무엇에 쓰겠느냐. 값싸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어서 가거라!" 소영은 더 대꾸할 수 없어 세 번 절하고 석실을 나왔다. 남일공과 유선자는 나무 침상에 나란히 걸터 앉아 있었다. 남일 공의 안색은 금방 죽어가는 사람처럼 누렇게 떠 있었다. 늙은 것은 남일공만이 아니다. 유선자의 아름답던 얼굴도 주름살 투성이로 변 했고 혈색도 좋지 못했다. 소영은 다시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들어서자마자 눈 물을 줄줄 흘리는 소영을 본 남일공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영아, 울지 마라. 사람이란 언젠가 한 번씩은 헤어지기 마련이 란다. 너는 이미 이곳에 온 지 오년이 지났으니 이제 바깥세상을 구경토록 해라." 남일공은 나무 침상 머리에 있는 노란색의 보따리를 손가락질하 며 입을 열었다. "저것은 너의 유 노선배가 평생토록 아끼던 것이다. 네가 이곳을 떠나 길을 가는 동안에 도움이 될 테니 가져 가도록 해라." 소영은 울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영아는 오 년 동안 무예를 배우는 것에만 정신이 쏠려 자그마한 효도도 하지 못했습니다. 원컨데, 삼 일 동안만 여유를 주십시오. 의부님과 유노선배님에게 자그마한 정성이라도 바칠 수 있게 해 주 십시오." 유선자가 서글픈 미소를 띠며 머리를 흔들었다. "얘야, 너에게 효심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몹시 기쁘구나. 그러나 너를 떠나 보내려고 생각한 것은 이미 반 년 전부터이다. 그러나 너의 의부와 사부,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의논에 의논을 거 듭한 결과 반 년을 늦췄던 것이지. 네가 한 시간 정도 더 머물겠다 면 그것마저 만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선자는 잠시 말을 끊고 소영을 자비스러운 눈으로 바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노란 보따리에는 한 장의 지도가 있다. 그것은 너의 사부께 서 친히 그렸으며 네 앞길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한 벌 의 장갑이 있다. 그것은 천 년 묵은 뱀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며 내 가 늘 지니고 다니던 것이다. 창과 칼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한두 알의 영단을 주겠다. 이것은 죽음 앞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 는 것이니 잘 간직하고 빨리 떠나라." 유선자는 보따리를 들어 소영에게 내 주었다. 작은 노란색 보따 리를 받아 든 소영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문 앞에서 머뭇거 렸다. 그러자 남일공이 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바보같은 놈! 무슨 미련이 남아 있다고 머뭇거리고 있느냐." "의부님, 유노선배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러자 유선자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대문을 닫았다. 문이 닫 히자 소영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문에다 대고 세 번 절했다. '의부님, 유노선배님, 부디 몸 성히 계십시오. 그리고 오래오래 살아 계십시오. 영아가 후일 다시 뵈올 수 있을 때까지...' 소영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 기던 그는 문득 장산패가 생각났다. '아! 사부님에게 미처 하직 인사를 드리지 못했구나.' 소영은 즉시 석실로 달려 갔다. 석실의 문을 밀치고 들어선 그는 멍청히 서서 방안을 둘러 보았 으나 그곳에는 이미 장산패가 없었다. '사부님도 어디로 떠난 것일까? 아니, 가까운 곳에 잠깐 나가신 것인 지도 모르지. 기다릴까? 그럴 수는 없어. 내가 기다리고 있다 간 사부님이 크게 노하셔서 꾸중하실 것이 틀림없다. 그냥 떠나자.' 소영은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석실을 나왔다. 석실에 대고 세 번 절을 하며 중얼거렸다. "사부님, 그동안의 은혜는 평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가르침 을 올바른 일에만 사용하여 은혜의 만분지 일이라도 갚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소영은 몇 번이나 석실을 돌아 보며 걸음을 옮겼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한 마음은 발길을 무겁게 만들었다. '언제나 다시 만나 뵐 수 있을까?' 절벽 앞에 당도한 소영은 다시 석실 쪽을 돌아 보고 석별의 눈길 을 보내고는 백 척이 넘는 절벽을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무공의 절학을 터득한 그에게는 절벽을 오르는 것쯤은 식은 죽 먹듯 쉬운 일이었다. 절벽 위 산봉우리에는 여전히 얼음이 두껍 게 덮혀 있었다. 얼음 위에 서니 그의 그림자가 비췄다. '나는 오 척의 어린애가 아니다! 이미 신장은 칠 척으로 늘었고 나이도 열일곱이나 되었구나.' 소영은 실로 감개무량했다. 악소채를 따라 집을 나올 때부터 이제까지 지내 온 일들이 주마 등처럼 눈 앞을 스쳤다. 소영은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삼성곡이 온통 꽃밭을 이루고 있 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저 삼성곡에는 사시사철 꽃이 만발하고 계절의 변화 가 없구나. 이곳은 얼음이 어는 겨울인데... 불과 지척지간에 저토 록 딴 세계를 이루고 있다니..." 소영은 삼성곡을 향해 세 번 절을 하며 마음 속으로 빌었다. '세 분 노인들은 부디 만수무강 하옵소서, 태산 같으신 은혜 마 음 속 깊이 간직하며 소영은 물러갑니다.' 삼성곡의 꽃밭이 시야에서 사라질 후에야 비로소 그는 앞을 바라 보며 걸음을 빨리했다. 이튿날 해가 뜰 무렵 소영은 장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굽이치는 강물을 바라 보니 다시 뭉클하게 감개무량을 느꼈다. '오 년 전, 나는 이 강물에 빠졌었지. 그 때는 꼭 죽는 줄만 알 았는데... 전화위복이 되어 이제 절세의 무공을 몸에 지녔으니 악 누나와도 떳떳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악 누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런지.....' 소영은 강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강물을 스치며 멀리멀리 달려 가던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 왔다. 소영은 계속 걸었다. 얼마를 걸었는지 해는 이미 중천에 높이 떠 있었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걷던 소영은 향긋한 술내를 맡고 걸음을 멈추었다. 한 채의 커다란 객점이 그의 열 걸음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배가 몹시 고프니 우선 시장기를 해결하고 보자.' 소영은 성큼성큼 객점으로 들어섰다. 객점 안은 손님들로 초만원 을 이루고 있었다. 빈 자리가 없었다. 소영의 행색은 몹시 초라했 다. 오 년 전에 입고 있었던 작고 낡은 옷에다가 맨발로 짚신을 신 고 있었는데 그가 손수 등덩쿨로 엮어 만든 것이다. 그것도 이미 다 닳아 형편없었다. 초라한 행색으로 들어 서는 소영을 거들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영은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고 이층으로 올라 갔다. 이 충으로 올라 선 소영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북적거리는 아래층 과는 달리 이층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고 손님도 없었다. '아래층은 궁둥이를 붙일 한 치의 자리도 없는데 이층은 이토록 깨끗하고 사람도 하나 없으니 이상한 일이다.' 소영은 아무데나 앉아 요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탁자로 걸어 갔다. 이때 하인이 급히 뛰어 올라 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인은 이층으 로 올라 서더니 날카로운 시선으로 소영을 노려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혹시 주 어르신네께서 초청한 손님이시오?" "주 어르신이라니... 어떤 주 어른이란 말이오?" 하인은 그제서야 소영을 대하는 눈길이 싹 달라졌다. 얼굴에 핏 대를 세우며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감히 어물정하고 이곳에 스며들다니.....냉큼 꺼지지 못 해?" 소영은 어리둥절했다. 금방 공손하게 나오던 하인이 갑자기 잡아 먹을 듯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퍼붓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왜 그러시오?" 하인은 소영을 아래 위로 다시 한번 훑어 보았다. 그 초라한 차 림새는 하인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꼴로 보아 주 어른이 초청할 만한 기인이거나 아니면 시골의 거 렁뱅이임에 틀림없었다.' 하인은 소영을 거지라고 단정하자 울화가 치밀었다. 거지에게 공 대했던 것이 창피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놈! 나갈 테냐? 안 나갈 테냐?" 하인은 소영의 앞으로 다가서며 주먹으로 소영의 가슴을 후려쳤 다. 소영은 하인이 갑자기 덤벼들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 에 진기를 모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오 년 동안 세 사람의 기인 들에게서 절학을 배우며 단련한 그의 전신은 그야말로 돌덩이였다. "아얏!" 하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의 주먹이 소영의 가슴에 닿자 두꺼운 철판을 때렸을 때처럼 손이 찌 르르 저려오며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렸던 것이다. 그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며 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소영에게 넙죽 큰절을 했다. "나리,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리도 너무 성질이 급하 십니다. 소인이 눈이 삐어 나으리를 몰라 뵈었기로 이토록 화를 내 시다니...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소인이 즉시 따끈한 술을 가져오 겠습니다." 하인은 급히 몸을 돌려 나가려다 말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리, 나으리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행동을 주 어르신네에게만은 제발 말씀하지 마십시오. 만약 어르신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그는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쓸며 황황히 아래층으로 내려 갔다. 소영은 그 꼴이 우스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참, 주 어른이 누구인지 자세히 물어 볼 걸 그랬구나.' 소영은 무엇인가 짐작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주 어른이란 자는 굉장한 거부이거나 아니면 무림의 영웅일 것이다. 만일 그가 무림 인물이라면 아무래도 내가 악 누나를 찾으 려면 무림 인물과 친해져야 할 것이다. 수중에 노자도 없고 배는 고프고 갈 길은 정해지지 않았고 하니 기다려 보자.' 소영은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조금 전의 그 하인이 올라 왔다. 머리를 붕대로 동여 맨 그 하인은 차 쟁반을 들고 있었다. "나리, 우선 차를 드십시오." 하인은 찻잔을 소영이 앉아 있는 창가의 탁자에 놓고 내려 갔다. 소영은 창문을 통해 아래층의 우굴거리는 술꾼들을 바라 보며 생각 했다. '악 누나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중주이고를 만나는 것이 가장 빠 른 길일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겠지.' 이때 쿵쿵거리며 계단을 올라 오는 사람이 있었다. 들어 선 사람 은 머리와 수염이 하얀 노인이었다. 체구가 당당하고 혈색이 좋았 다.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의 얼굴에는 무엇인가 깊은 걱정을 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노인의 뒤에는 십오, 육세 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뒤따르고 있었다. 소녀는 이목이 수려하고 푸른 옷에 몸매가 날씬했으나 역 시 짙은 우수의 그림자가 눈에 깃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탁자에 조용히 앉았다. 노인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허 공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소녀는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아 쥔 채 눈을 내리깔고 그림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인은 새로 들어 온 두 사람에게 차를 날라다 주더니 공손히 허 리를 굽히며 물었다. "어르신은 혹시 주 어르신데의 초청을 받은 귀빈이십니까?" 노인은 싸늘하게 코웃음만 칠 뿐 하인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하인은 이미 소영에게 단단히 혼이 났었기 때문에 감히 더 물을 용 기가 나지 않아 허리를 굽실대며 물러서고 말았다. 노인은 실내를 한 번 훑어 보더니 소영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불 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무서운 눈길이었다. 소영은 속으로 약간 섬뜩함을 느끼며 창 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소영의 곁으로 노인이 다가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제의 고명이 무엇이오?" 소영은 머리를 돌려 노인을 바라 보며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는 소영이라고 합니다." 소영은 노인을 노선배님이라 부르려고 했으나 문득 의부가 일러 주던 말이 생각났다. '너는 무림의 어떤 인물이든 절대로 노선배라고 부르지 마라. 그 들은 모두 너와 동렬의 항렬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나보 다는 후배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생각난 소영은 말을 중간에서 끊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쳐 말했다. "노형은 저에게 무슨 하교(下數)가 있습니까?" 노형이란 소리에 노인의 눈썹이 위로 치켜졌다. 아직 나이도 어 린 소년이 노형이란 언사를 쓰는 당돌함에 놀란 것이다. 놀란 것은 노인뿐만 아니었다. 다소곳이 앉아 있던 소녀도 호기심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소영을 유심히 바라 보더니 중얼거렸다. "세상엔 동명이인(同名異人)도 많구나. 여기 이 소영이 그 소영 일 수는 없을 텐데... 이름이나 체구로 보아서는 그 소영일 수도 있겠고....." 소영은 속으로 흠칫하여 급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소영이라니요? 그렇다면... 노형께선 그 다른 소영이란 자 를 만나 보았단 말씀입니까?" "나는 그를 만나 보지는 못했소. 그러나 오래 전부터 그의 대명 을 들어 알고 있소." 소영을 지켜 보던 노인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老夫)는 팔수신룡(八手神龍) 단목정(短木正)이오." "단목정....." 소영은 순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대방의 이름을 묻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구나. 예의가 아닌데' 단목정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 놓더니 오른손을 소영에게 내밀며 말했다. "오늘 뜻밖에도 소대협을 만나게 되었으니 영광이오." 소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대방의 신분을 확실히 모르고 악 수를 교환한다는 것은 아직 나이 어린 그에게는 선뜻 내키지 않았 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대방이 손을 내밀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주잡았다. "앞으로 노형의 많은 지도를 바라겠습니다." 소영의 다섯 손가락은 단목정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그런데 차츰 단목정의 손에 힘이 주어지고 있었다. 소영은 강호에 경험도 없었고 상대방을 경계하는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전혀 무방비상태였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손아귀에 힘을 가하는 것을 느끼자 암암리에 손 가락에 진기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손은 쇠처럼 단단한 힘을 지니 게 되었다. 단목정은 소영의 손에 힘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놀랐 다. '소문에 듣던 대로 소영은 과연 훌륭한 무공을 지녔구나. 산에서 내려 온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던데.....' 단목정은 소영의 손을 놓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소대협의 위명은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소. 이 늙은이가 그만 미심쩍은 생각을 잠시나마 해서 미안하오." 그의 말투는 매우 공손해졌다. 소영도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노형의 무공 내력은 저보다 훨씬 위이십 니다." 소영은 겉으로는 겸손을 표하며 속으로는 의아심을 품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 노인이 나보고 소대협이라고 부르니... 아마 다른 소영과 나를 혼동하고 있는 모양이지?' 단목정은 찻잔을 들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 가려고 했다. 이것을 본 소영이 급히 불렀다. "잠깐! 노형은 잠깐만 더 계십시오. 제가 아직 하교를 받을 일이 남아 있습니다." 단목정은 소영에게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소대협, 무슨 물을 말씀이라도 있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으로 강호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런데....." 단목정이 소영의 말을 가로채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이 늙은이와 농담을 하려는 것이오. 진심으로 하는 소 리요?" "농담이라니요...이건 어디까지틀 진심으로 궁금히 여기는 것입 니다." 단목정은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며 소영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고 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그렇다면... 소대협은 진짜 소영이 아닌 모양이군요." "아니라니요? 나는 진짜 소영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마 노형이 알 고 있는 그 소영이 저로 가장하고 소영 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이로 군요." 단목정은 점점 의아한 표정이 되며 소영을 날카롭게 훑어 보았 다. 그러나 어떻게 진짜 가짜를 구별할 수가 있겠는가. '두 소영을 한데 모아 놓고 식별하라면 또 몰라도... 이 소년도 몸에 일신의 절기를 지녔음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말 만 믿고, 너는 진짜이고 그 자는 가짜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네 가 가짜다 할 수도 없고.' 단목정은 가볍게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만일 소영이 진짜와 가짜가 있다면 그건 또 우스운 일이군요. 그러나 노부는 의혹심만 생길 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러니까 소영이라는 또 한 사람에 대해 알고 계신 대로 좀 들려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소영의 말에 단목정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문대로 얘기하지요. 그 소영은 인품이 준수하고 무공이 고강 해서 섣불리 상대할 자가 없다더군요. 나이도 소대협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소. 지금 소대협은 낡아빠진 옷에 다 떨어진 짚신을 신고 있지만 간직하고 있는 지품과 무공을 숨길 수는 없소. 그러니 노부 가 두 사람의 소영이 있다는 것을 어찌 믿고 이해할 수 있겠소?" 이 때였다. 아래층에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리며, 여 러 사람이 한데 몰려 이층으로 올라 오고 있었다. 단목정은 굳은 표정으로 층계 쪽을 힐끗 보더니 가볍게 몸을 돌 려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틈나는 대로 다시 얘기합시다." '저 사람의 경공술이 매우 높구나.' 단목정이 바람처럼 몸을 날려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본 소 영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바로 이 순간 계단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 었다. 얼른 보아도 십삼, 사 명은 되어 보였다. 나타난 사람들의 차림은 가지각색이었다. 경장을 한 사람, 장삼 을 입은 사람, 도포를 입은 사람, 평복으로 차린 사람 등. 그러나 그들은 안광이 날카롭고 몸매가 균형이 잡힌 것이 모두 무공을 지닌 무림 인물들임에 틀림없었다. 단목정과 소녀는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지 않으려고 이리 저리 얼굴을 움직이며 피하고 있었다. 소영은 대담하게 그들을 마주 쏘아 보았다. 소영이 조금도 굽히 는 기색이 없자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뛰어 나왔다. 사십여 세쯤 되어 보이는 그는 소영의 앞으로 다가서며 냉정하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우리 장의 둘째 장주(二壯主)님의 초청을 받 았소?" 소영은 그 사내를 훑어 보았다. 머리통은 고구마처럼 끝이 뾰족 하고, 턱은 자귀로 깎아 낸 듯 민판인 것이 별로 호감이 안 가는 인상이었다. '둘째 장주가 어떤 인물인지 내가 어찌 알겠나?' 이렇게 대답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누르며 소영은 씹어뱉듯 한 마디 던졌다. 16. 적과 아를 구분하지 못하다 "난 소영이오" "네에?" 그 사내는 소영이란 말에 놀라며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서더니, 급히 두 손을 모아 쥐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알고 보니 소대협이셨군요." 소영은 그 사내의 태도에 의아심이 일어났다. '신기한 일이다. 소영의 이름이 이토록 위력을 지녔다니...그 가 짜 소영이 강호를 온통 뒤흔들고 다닐만큼 무공이 센 모양이지?' 소영은 우습기도 하고 의혹으로 머리 속이 띵 하기도 하였으나 역시 태연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대답하였다. "별말씀을... 괜찮소." 그 사내는 아첨에 가까운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둘째 장주께선 소대협의 행방을 몰라 초청을 하지 못했으니 너 무 노엽게 생각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소." 소영이 이렇게 사내에게 대답하는데 또 말소리가 들려 왔다. 이 번에 이층으로 올라온 사람은 화려한 복장을 한 청년이었다. 그 청 년은 두 소년을 좌우에 거느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청년을 본 이층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길을 터 주었다. 이들 모두가 그 청년을 매우 공경하는 듯했다. '어떤 인물이길래 저토록 후대를 받을까? 마치 일국의 왕자와도 같이.....' 소영이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데 그와 이야기를 주고 받던 중년 사내가 황망히 그 청년에게로 다가갔다. 사내는 청년에게 나직하게 몇 마디 보고하는 듯했다. 머리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청년이 소영을 바라 보더니 미소를 머금고 다가 왔다. 소영과 너댓 발자국쯤의 거리까지 다가선 청년 은 공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소제 주조룡(周兆龍)은 소형이 이곳에 계신다는 것을 미처 몰랐 소. 소형이 이곳으로 오실 때 미리 나가서 영접하지 못한 것을 양 해하시오." 미목이 수려하고 고상한 인품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주조룡을 바 라보며 소영은 속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하, 이 자가 바로 아까 하인이 얘기하던 둘째 장주라는 사람 이구나.' 소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조룡의 인사에 대답했다. "너무 과분한 말씀이오. 나는....." 소영은 잠깐 망설이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귀지(貴地)에 왔으며 모든 것이 생소하고 더욱 이......" 이 때였다. 갑자기 주조룡의 눈빛이 확 달라지더니 손을 내밀어 소영의 오른손을 꽉 움켜 잡았다. 소영은 조금 전에도 단목정에게 손을 잡혀 당했던 일이 있었으나 주조룡이 급히 손을 쓰는 데에는 임기응변을 하기가 곤란했다. 주조룡은 고의로 절기를 발휘하여 소영을 잡으며 힘을 주었던 것 이다. 그러나 소영은 주조룡이 손을 뻗쳐 오는 순간 이미 그 기미 를 알아 차렸다. 주조룡이 손을 쓰는 동작이 매우 빠르기는 했지만 소영은 암암리에 진기를 모으고 겉으로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정면 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주조룡이 쥔 소영의 오른 손목은 바로 맥혈(脈穴)이 있는 급소였 다. 그는 소영의 맥혈을 짚으면서 악한 마음까지 먹고 있었다. '만일 이 놈이 정말 소영이라면 내 공격을 피해 낼 수 있을 것이 고, 그렇지 않다면 내 공력에 의해 당장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강호의 경험이 없는 소영으로서는 주조룡의 속셈을 알 리 가 없었다. 소영이 주조룡의 속셈을 알아 차렸다면 즉시 상대방의 공격에서 벗어나는 수법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소영은 손목에 진 기를 모으며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주조룡은 소영이 피할 생각도 하지 않자 속으로 코웃음을 쳤으나 차츰 소영의 손목에 뜨거운 진기가 흐르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가 쥐고 있는 것은 사람의 손목이 아니라 강철 같았다. '놀라운 일이다. 이 놈이 지니고 있는 내공은 굉장한 것이구나.' 주조룡은 급히 소영의 손목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소형이 강호에 위명을 떨칠 때부터 은근히 흠모하고 있었 소. 그러나 그동안 만날 기회가 없어 사뭇 안타까웠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쁘고 영광스러운 마음 무엇이라 표현 할 길이 없구려." 주조룡은 너털웃음을 한바탕 터뜨리더니 몸을 돌려 손을 흔들며 무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그러자 고구마 머리의 사내가 주조룡에게 말했다. "검문쌍영(劍門雙英)과 당가(唐家)의 셋째 자매께서 아직 도착하 지 않으셨습니다." 주조룡은 손을 저으며 기분이 매우 좋은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을 기다릴 필요는 없소." 그 사내는 주조룡의 말을 듣더니 난처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오늘의 연회는 원래 먼 곳에서 오시는 세 사람의 손님들을 위해 서 마련하신 것이 아닙니까? 헌데..." 주조룡이 그 사내의 말을 가로 막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원래는 그런 목적이었지만 여기 계신 소형의 피로를 풀어 연회로 바꾸겠소." 그 사내는 더 말대꾸를 하지 않고 문 앞에 선 하인에게 말했다. "술상을 차려라!" "예! 이미 준비되었으니 곧 올려 오겠습니다." 하인들은 분주하게 아래 위층으로 오르내렸다. 순식간에 연회석 이 마련되었다. 주조룡은 소영을 상석으로 앉혔다. 소형은 몇 번 사양하다가 마 지못해 그가 이끄는 대로 앉았다. 주조룡은 소영의 곁에 붙어 앉았 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주조룡은 소영에게 말을 걸었다. "소형은 세상을 떠돌아 다니며 마치 머리는 보여도 꼬리는 보이 지 않는 것 같은데 오늘 이렇게 만나다니 반가운 마음 표현할 길이 없구려." 소영은 자기가 강호에 이름을 날린 가짜 소영이 아니란 것을 해 명하고 싶어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좋을지 물라 갈피를 잡 지 못하였다. '모든 것을 밝히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귀찮을 테니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소영은 술잔을 들며 주조룡에게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주형, 너무 겸손하시군요." 소영은 사실 주조룡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타당한 것도 같았다. '어떤 놈인지 내 이름을 도용한 것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일 것이 다. 그가 내 승낙도 없이 내 이름을 도용했으니 내가 그의 명예를 좀 빌려쓰는 것도 무방하겠지. 더우기 지금의 행세로는 사실을 해 명하는 것보다 는 이대로 있는 것이 좋겠다.' 이런 생객이 들자 소영은 마음이 개운해질 수 있었다. 주조룡은 몇 십 년 간의 지기나 만난 듯 소영에게 여러 가지로 접근하며 친 구로 사귀고 싶은 심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주조룡이 소영에게 친밀하게 대하자 군호(群豪)들도 소영에게 차 츰 호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소영은 이런 대우를 받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갑자기 왕이 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어리둥절하면서도 몹시 흥분되었다. '이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구나. 더군다나 주조룡이 이토록 극진 하게 대해 주다니... 생전 처음 인정이라는 것을 느껴 보겠구나. 역시 사부님이나 의부의 말씀대로 강호에 발을 딛길 잘했구나.' 소영은 마음 깊이 주조룡에 대하여 감동까지 느끼고 있었다. 이 렇듯 군호들이 소영을 둘러싸고 흥겨워하고 있는 반면 한쪽 귀퉁이 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단목정과 푸른 옷의 소녀는 매우 처량하게 보였다. 주조룡은 이곳에 들어 서면서 군호들에게 그 두 사람을 건드리지 말라는 눈짓을 했었다. 그래서 이들은 술을 들고 안주를 씹으며 왁 자지껄 떠들어대기는 했으나 아무도 단목정과 소녀를 건드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군호들이 두 사람에게 무관심을 표시하는 반면 주조룡은 은근히 그들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주조룡의 시선에는 싸늘한 살기가 들 어 있었으나, 단목정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아예 외면을 한 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비록 겉으로는 아무 것도 표시하지 않았지만 끊임없는 냉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만일 소영이 강호에 떠돌아다닌 경험이 많고 주조룡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면 주조룡이 어떤 속셈을 품고 있는지를 눈치 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영은 아직 너무 단순했고 경험이 없었다. 또한 그는 군 호들에게 둘러싸인 채 떠받들리고 있어 마음이 한껏 흥분해 있었 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술잔을 주고 받는 사이 돌연 땀을 뻘뻘 흘리며 경장한 사나이 하 나가 이층으로 뛰어 올라 와 바로 주조룡을 향해 읍하고 급히 말했 다. "둘째 어른께 보고합니다. 검문쌍영(劍門雙英)이 이미 귀주성 밖 에 다다랐습니다." 주조룡은 손을 들어 저으며 짧게 대답했다. "알았다." 경장의 사나이는 다시 읍을 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 갔다. 그 사 나이가 사라진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 후줄 근한 옷차림에 얼굴은 온통 먼지 투성이의 한 사나이가 급히 이층 으로 뛰어 들어 와 입구에서 허리를 굽힌 채 말했다. "둘째 어른께 보고합니다. 사천 당삼(四川唐三) 낭자의 가마가 이미 성 밖 삼 리쯤에 당도하였습니다." 주조룡은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다. 내가 친히 나가 맞으리라." 그 사나이는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 갔다. 주조룡은 소영을 주시하고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잠시 후 소형에게 무림에 이름을 떨친 대 영웅을 몇 분을 소개 해 드리기로 하겠소." 주조룡은 한바탕 호탕하게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들은 무림에 그 이름을 떨친 영웅들이지만 소형의 명성과 비 교한다면 많은 차이가 나지요." 소영은 황송하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주형께서 그렇듯 칭찬하시니 감당키 어렵습니다." 소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어디선가 나직한 탄식 소리 가 들려 왔다. 소영이 흠칫 머리를 돌리자 푸른 옷을 입은 소녀가 어느 틈엔가 벌떡 일어나 일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것은 옷소매 자락에서 뻗쳐 나온 세 줄기로 된 빛이었는데 조용하면서도 재빠르게 주조룡의 등 뒤로 대혈(大穴)을 세 군데나 노리고 뻗어 나갔다. 돌연한 변화에 소영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들어 일장 을 쳐 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주형, 조심하시오!" 주조룡은 소영의 고함소리에 깜차 놀라 어깨를 약간 휘청거렸지 만 이미 그는 삼척(三尺)이나 밖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소영의 이 일장은 황망히 쳐 낸 것이라서 손을 쓰는 속도가 전광석화 같이 빨랐다. 주조룡이 몸을 돌려 바라보았을 때 그 세 줄기의 흰 빛은 이미 장풍에 밀려 한쪽으로 비뚤어져 벽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그 푸른 옷을 입은 소녀는 자기가 쳐 낸 세 자루의 독을 묻힌 비 도가 소영의 장력에 밀려 이 척 밖으로 비뚤어져 날아 가는 것을 보자 속으로 놀라는 한편 원망을 하였다. 그것은 소영의 내가벽공의 손바람이 너무나 날쌔고 치밀한데 놀 랐고 또한 그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한 데에 원망스러워 싸늘한 웃 음을 지으며 다시 한 쌍의 옷소매를 일제히 들추어 네 줄기의 금빛 을 쏘았다. 그중 두 자루의 빛은 소영의 앞가슴을 향해 날아 갔고 두 자루는 주조룡을 향했다. 소영은 두 손을 일시에 내밀어 휙 휘둘렀다. 놀랍게도 두 줄기 금빛을 한꺼번에 수중에 받아 들였다. 주조룡은 감히 모험을 못하 고 오른손을 휙 내둘러 녹색 빛을 뿜어 내었다. 그 녹색은 그의 몸에 다가 온 금빛에 부딪쳐 쨍그렁! 하는 날카 로운 금속성을 발하며 저만큼 떨어져 나갔다. 소형은 수중의 금빛 을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양쪽에 톱날같은 철가시들이 무수하게 돋아나 있는 단검과 비슷한 물건으로 푸릇푸릇한 빛을 띠었다. 이때 이층에 있는 군호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제각기 팔수신 룡(八手神龍)과 푸른 옷을 입은 소녀를 향해 덮쳐 갔다. 주조룡은 나직한 탄식과 함께 소영에게 말했다. "소형의 무예가 높고 담이 커서 나로 하여금 실로 감복케 하였 소. 이 금검 양쪽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서 비록 철사장 공부를 연마한 사람이라도 막아내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또한 극독이 묻 혀 있어서 명중당하는 사람은 살아나지 못할 것인데 소형은 놀랍게 도 두 손가락의 힘으로 금검의 검신을 정확하게 나꿔 채다니..." 주조룡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제발 그런 위험스런 장난은 하지 마시오." 소영이 수중의 금검을 놓고 눈길을 돌리자 주조룡은 한 자루의 취옥으로 만든 자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길이가 약 한 자 두 치쯤 되며 은은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주조룡은 소영이 말을 하기도 전에 나꿔 채듯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취옥척은 일종의 보검으로 천 년이나 갈고 닦은 옥으로 만들 어 쇠나 바위도 능히 벨만큼 단단하오. 만약 소형께서 원하신다면 나는 이 취옥척을 기꺼이 드릴 용의가 있소." 소영은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주형, 내가 어찌 그런 보물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감당..." 그때 갑자기 요란한 기합 소리가 짤게 두 번 들려 오고 절벽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듯한 쿵쿵 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소영과 주조룡은 급히 소리나는 곳을 주시했다. 그제서야 그들이 아직도 싸움 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팔수신룡(八手神龍)과 푸른 옷을 입은 소녀를 향해 덮쳐들던 주 조룡의 군호들 중에 이미 사오 명이 쓰러진 것이 보였다. 팔수신룡의 공격은 마치 전광석화와 같이 빨랐고 매정하기 이를 데 없이 날카로왔다. 그가 쳐낸 일장이 마치 불기등을 뿜어내듯 회 오리바람을 몰아가며 군호들을 파리 쫓듯 몰아내고 있었다. 군호들은 사면 팔방에서 공격해 들어 가고 있었지만 한 발자국도 팔수신룡과 푸른 옷을 입은 소녀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주조룡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자기는 싸움에 상관이 없 다는 듯이 장내의 싸우는 형세를 지켜 보고 있었다. 팔수신룡의 공격은 더욱 날카롭고 빨라져서 그가 손바닥을 훽훽 뿌리칠 때마다 번개치듯 불꽃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또다시 두 사 람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주조룡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그들을 바라 보고만 있었다. 소영은 군호들 중에 부상자가 점점 늘어 가자 참기가 어려웠던지 돌연 한 발자국 크게 내어 디디며 몸을 굽히고 팔수신룡을 향해 공 격해 들어 갔다. 소영이 공격에 가담하자 두 사나이가 옆으로 비켜 서며 소영이 자유자재로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소영이 공격할 태세를 갖추자 팔수신룡은 벌겋게 충혈된 채 노기 를 띠며 벼락같이 외치면서 휙! 일장을 정면으로 쳐 왔다. "이 노부의 일장을 받아라!"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날카로웠던지 소영은 흠칫 놀랐다. 소 영은 아직 남과 대적해 본 경험이 없었으므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 다. 더구나 팔수신룡의 일장이 매섭고 살기를 품은 듯 날카로워서 감히 맞받아 내지 못했다. 그래서 소영은 오른손을 비스듬히 비껴 내리며 일시에 다섯 손가 락으로 팔수신룡의 맥문을 향해 후려 쳤다. 그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지풍이 얼마나 세었던지 팔수신룡은 돌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다섯 개의 비수가 날아가듯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팔수신 룡을 향해 마구 돌진해 갔다. 팔수신룡은 재빨리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아, 난화불혈수(蘭花拂穴手)로구나. 정말 놀라운 솜씨로다." 소영은 팔수신룡을 노려 보며 대답했다. "그렇소." 소영이 채 대답도 끝맺기 절에 돌연 한 줄기 금빛이 번쩍이며 왼 쪽 늑골을 찔러 왔다. 어느 틈에 팔수신룡이 가한 무기였다. 싸늘 한 바람이 먼저 그의 전신을 휩쌌다. 소영은 깜짝 놀라 몸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눕히며 발을 돌려 일 장을 쳐 냈다. 그것은 무의식중에 가해진 일장이었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금빛 찬란한 단검이 비스듬히 반대쪽 으로 날아 갔다. 그 서슬에 푸른 옷을 입은 소녀가 황망히 두어 걸음 물러서며 왼 손으로 오른쪽 발목을 움켜 쥐었다. 소영이 쳐 낸 금빛 단검이 푸 른 옷을 입은 소녀의 발목을 향해 날아 간 것이었다. 소녀의 두 눈에는 삽시에 눈물이 가득했다. 안색이 파리해지며 허둥거리는 것으로 보아 상처가 필시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 금빛 단검은 푸른 옷을 입은 소녀의 발목을 적중시킨 것이었다. 소영은 섬뜩하여 속으로 매우 당황했다. 마악 사과의 말을 하려 고 몸을 바로 잡는 순간, 돌연 팔수신룡이 도포자락을 휘저었다. 한 조각의 금성 은빛이 방안 가득히 수놓아지며 소영을 향해 맹렬 히 공격해 들어 오고 있었다. 그러자 주조룡이 황급히 외쳤다. "소형, 암기를 조심하시오!" 소영은 주조룡의 고함소리에 놀라 재빨리 몸을 돌려 팔수신룡의 거동을 노려 보았다. 팔수신룡은 암기의 수법이 무림에서 독보적인 존재이며 손을 휘두르는 사이에 비도, 화살, 금침 등등 열 몇 가지 에 달하는 암기를 오뉴월에 소나기 퍼붓듯 공격하는 비법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수많은 온갖 암기들이 소영의 전신을 향해 급소를 노리며 제각기 날아 들었다. 소영은 크게 놀라며 생각했다. '단번에 이렇듯 많은 암기를 쳐 내다니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노릇이구나.' 소영은 더 지체하지 않고 힘을 모아 일장을 쳐내며 뒤로 휙 몸을 날렸다. 한 줄기 맹렬한 불꽃이 일어나자 날아 오던 암기들은 마치 빗나간 화살처럼 사방으로 퉁겨져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고 말았다. 팔수신룡은 너무나 민첩한 소영의 묘기에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 다. 마침내 한숨을 길게 뽑아 내고 푸른 옷을 입은 소녀를 향해 소 리쳤다. "아가, 우린 그만 돌아가자." 팔수신룡은 황급히 소녀를 안아 일으켜 왼팔에 부축하고 오른손 으로 재빨리 일장을 쳐 낸 뒤 창문을 뚫고 몸을 날렸다. 소영은 약간 허릴 굽혀 몸을 날려 창 앞으로 다가갔다. 주조룡이 당도하여 뒤쫓으려는 소영을 제지하며 말했다. "소형, 궁지에 몰린 적은 쫓지 않는다는 말이 있으니 그들을 쫓 지 맙시다." 소영도 구태여 쫓을려는 것이 아니라는 듯 주춤하면서 팔수신룡 이 소녀를 끌어 안고 뛰어 내린 이층을 바라 보고 있었다. 팔수신 룡은 그의 오른손으로 아래층을 내려 가는 층계를 집고 힘을 주어 몸을 날렸다. 한 채의 지붕 위로 뛰어오른 그는 마치 놀란 기러기 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소영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주형, 저 두 사람은 주형과 무슨 원한이 있습니까?" 주조룡은 미소를 지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이 강호 무림의 원한 시비는 정말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요. 저 두 사람을 나는 알지도 못하는데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하는지 모르겠소. 오늘 다행히 소형이 구해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 으면 나는 아마 벌써 그 독이 입혀진 칼에 살아나지 못하였을 것이 오." 주조룡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부상당한 사람들을 아래층으로 옮겨 갑시다. 소형! 내가 검문쌍영을 소개해 드리겠소. 몇 사람을 더 안다는 것은 별로 해로 울 게 없으니." 소영은 아무 말 없이 주조룡을 따라 이층 계단을 내려 갔다. 마 악 객점의 문 앞에 이르자 두 필의 비대한 건마(健馬)가 이미 밖에 당도하였고 그 말 위에는 엷은 회색으로 경장을 차리고 검은색 도 포를 입은 두 사나이가 타고 있었다. 주조룡은 소영의 손을 놓고 두 손을 모아 가볍게 읍해 보이고 말 했다. "제는 조금 전 자객을 만나 두 형을 멀리 마중나가지 못하였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말 위의 두 사람은 훌쩍 뛰어 내려 읍을 하며 놀랍다는 투로 말 했다. "주형 너무 겸손의 말씀이오. 그래 그 자객은 잡았소?" 주조룡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객은 이미 도망쳐 버렸으니 두 분께서는 심려치 마시오." 나이가 비교적 많고 검은 수염을 기른 사나이가 앞장을 서며 말 했다. "애석하게도 우리 형제가 한 발 늦게 왔군요. 만일 한 발만 일찍 당도했더라면 그들이 도망치기는 어려웠을 것이오." 그러자 좀 젊어 보이는 사나이가 말을 이었다. "누굽니까? 감히 그렇듯 대담하게 주형께 무례를 저지른 사람이. ......" 주조룡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무공이 출중하여 우리 장문의 장정 일곱 명을 순식간 에 쓰러뜨리고 중상을 입혔습니다. 만일 이 소형께서 도와주지 않 았더라면 나는 아마 벌써 그 자객의 독을 입힌 비도에 크게 부상당 했을 것이오." 주조룡은 소영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아! 두 분께 소개해 드린다는 것을 깜박 잊었군요. 이 분은 바 로 근래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소대협, 소영입니다. 소형은 비록 나이는 많지 않으나 무예는 놀랍게도 뛰어나십니다. 이미 그 명성이 무림에 두터운 인물이지요." 검은 수염의 사나이는 소영을 슬쩍 훑어 본 뒤 주조룡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 약간 김빠진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대명은 익히 들어 왔소이다." 소영은 단번에 싸늘한 감이 깃들어 있음을 느쪘으나 아직 상대방 이 자기를 얕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므로 두 손을 모아 정 중하게 답례를 하며 말하였다. "과찬의 말씀을." 주조룡은 검은 수염의 사나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바로 검문쌍영 중의 첫째 분인 추풍검 배백리(追風劍 裵百里)이며 이분은 둘째이신 무영검 담동(無影劍譚銅)입니다." 소영은 다시 손을 모아 읍하고 말하였다. "앞으로 두 분의 많은 가르침을 바라겠습니다." 배백리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형제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주조룡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형은 먼 길을 오시느라고 시장하실 것으로 생각되오. 이층에 이미 주안을 마련해 놓았으니 어서 올라 가 피로를 푸십시다." 배백리는 주조룡이 소영에게 매우 다정하게 대하는 모양을 보고 가슴 속이 섬뜩함을 억제치 못하고 잠시 생각했다. '주조룡은 항상 자부심이 큰 사람이었는데, 이 녀석에게 이토록 다정하게 구는 걸 보아 이놈은 결코 보통놈이 아닌 게 틀림없다.' 검문쌍영은 근 이 년 동안을 집안에서 두문불출 누구도 만나지 않고 일종의 비법을 연마하느라고 강호에 나오지 않알기 때문에 명 성이 무림에 크게 알려진 것을 듣지 못했다. 더구나 소영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근래의 일이니 검문쌍영이 알 턱이 없었다. 검문쌍영은 좀 꺼림찍한 생각을 하며 큰걸음으로 안으로 향했다. 담동이 배백리의 뒤를 바짝 따라 소영의 곁에 다가갔을 때 슬그 머니 손가락을 퉁겨 날카로운 한 줄기 지풍(指風)을 소영의 무릎 사이 양관혈(陽關穴)을 향해 찔러 넣었다. 이 돌연한 공격에 소영은 당황하여 재빨리 몸을 피했다. 털끝만 큼도 생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지풍을 피하자 담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형 정말 놀랍도록 빠른 신법이오." 소영의 무공은 운기폐혈(運氣閉穴)로 한 줄기 지풍정도는 막아낼 수 있었지만 대적의 경험이 없는 터라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담동의 눈엔 하찮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자 주조룡은 소영이 화를 내고 자기와 결별을 하고 가버릴까 두려워 암중에 전음지술(傳音之術)을 발휘하여 속삭이듯 말했다. "소형 나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별로 개의치 마시오. 이 두 사람 은 오 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오. 언젠가 기회가 있을 때 소 형께서 한 두 가지의 절기를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면 그들도 형께 겸손할 줄로 알고 있소이다." 이 전음지술은 입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 는 수법이므로 평범한 무공을 지닌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 단 전음지술을 터득하면 아무리 적은 소리로 지껄이더라도 고함소 리 만큼이나 크게 들을 수 있으며 몇 리 밖에서 지껄이는 소리도 곁에서 들려 오는 것처럼 청취할 수 있는 것이다. 소영은 검문쌍영의 소행이 괘씸하여 반격하려던 참인데 주조룡이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참기는 했지만 답답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어 담동의 뒷통수를 노려 보았다. 가까스로 험한 공기가 가라 앉았다. 한편 이층의 흩어진 연회석은 벌써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주조룡은 먼저번 연회석으로 소영과 검문쌍영을 안내하였다. 모두 자리를 잡고 돌려 앉자 배백리가 먼저 술잔을 들어 소영에 게 건 네 주었다. "소형, 우린 처음 만났으니 먼저 제가 한 잔 올리겠소이다." 소영은 그들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그가 내미는 술잔을 받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이때 돌연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것이었 다. 귓전을 스친 것은 암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암기는 은빛으로 은은히 비치는 은침으로, 소영이 들고 있는 조그만 술잔 속으로 떨어졌다. "호호호...."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곳을 바라 보자 그녀는 붉은 옷을 입고 이 층 입구 나무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 묘령의 소녀는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천천히 입을 열 었다. "잘들 하오. 손님이 아직도 다 모이지 않았는데 당신네들끼리만 술을 마시다니... 어디 그중에 어느 누가 담이 커서 저 술을 마실 수 있나 두고 보아야겠군요." 그녀는 손을 들어 소영이 들고 있는 술잔을 가리켰다. 주조룡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삼낭자, 정말 날쌘 경공이옵니다. 우리들이 미처 알아 내기도 전에 이층으로 올라 오셨으니..." 그러자 홍의 소녀는 돌연 웃음을 거두고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둘째, 장주께서는 편지로 나를 부르고서 이제는 모른 체하니 어 찌된 일이오? 정말로 나 당삼고를 모욕하시겠어요?" 주조룡은 다시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었 다. "삼낭자, 그게 무슨 말씀이오? 소인이 어찌 사천당문의 절기를 모르겠소. 삼낭자를 기다리던 중 뜻밖에도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 낭자의 마중을 나가지 못하였소." "무슨 의외의 일이오?" "자객을 만났소이다." 당삼고는 눈빛을 빛내고 주위를 쭉 훑어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검문쌍영에게 머물렀다. "이곳에는 두 분의 명검객이 계시니 자객이 침입하였다 하여도 그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을 것이오. 그는 아마 죽거나 크게 다쳐 도망을 하였겠지요?" 이제까지 탁상 앞에 앉아 있던 배백리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일어나 당삼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천당문의 암기는 강호에 이름을 떨쳐 오래 전부터 존경하여 오던 터였소. 그런데 오늘에서야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더할 수 없 는 영광이오." 당삼고는 약간 고개를 숙여 겸손의 뜻을 표했다. 그녀는 비록 여 자의 몸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강호에 유협하였기 때문에 상대의 눈 치를 알아 차리는 것이 매우 빨랐다. "원 별말씀을... 그런데 당신은 내 암기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니 웬 일이오." 배백리는 불같이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태도가 오만한 당삼 고의 이야기를 듣고 더 참지 못하였다. "낭자의 암기가 천하 제일이라지만 우리 검문쌍영의 안중에는 하 등의 값어치도 없소." 당삼고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날카롭게 배백리를 쏘아 보았 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쳐 사나운 불꽃이 튀기자 곧 주위 분위 기가 살벌하게 바꿔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주조룡이 손을 저으며 입을 열려는데 그보다 조금 먼저 당삼고의 말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만약 당가의 암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저 암기가 든 술을 먹을 수 있겠소?" 배백리는 남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당삼고의 제의를 거절할 수 가 없었다. 소영이 탁상에 도로 내려 놓은 술잔에 들었던 맑은 술 은 어느새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 배백리는 머리 끝이 주뼛하게 치솟는 것을 느끼면서 짐짓 미소를 보였다. "낭자의 암기가 아무리 독하기로 이 한 잔의 술을 먹고 본인이 죽을 것 같소?" 당삼고는 담담히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배백리는 은연중 불 같은 화가 치밀어 암암리에 문력(門力)을 모았다. '어디 너 먼저 맛을 보아라.' 이런 생각으로 탁상에 놓인 술잔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잔 속 의 술은 돌연 한 줄기의 물기둥이 되어 공중으로 솟아 오르는 것이 었다. 술이 잔에서 모두 솟자 배백리는 거세게 손바람을 일으켜 곧장 담삼고의 앵두같은 입술로 날렸다. 배백리가 전개시킨 문력은 아주 기묘하여 가느다란 물줄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는 당삼고의 앞으로 달려 나가며 날카롭게 외쳤다. "답례를 안하면 실례가 될 터이니 먼저 낭자가 드시오." 이층의 군호들은 배백리의 놀라운 내공과 이에 맞서는 당삼고의 암기를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주시하였다. 당삼고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입술을 조금 열어 가볍게 바람을 불어 냈다. 그녀의 입술로 향하던 술 줄기가 그대로 방향을 돌렸 다. 방향을 바꾼 술은 다시 배백리에게 뻗어지고 배백리는 장력으 로 그것을 쳐 내니 다시 당삼고에게 날아 갔다. 두 사람의 상승 내 공은 그 실력이 막상막하였다. 그래서 쉽게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사태가 험악해 지자 주조룡이 배백리에게서 술잔을 받아 들어 두 사람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술줄기를 잡았다. "자, 이제 그만들 두시오. 두 분의 상승내공은 충분히 구경하였 으니 우리 술이나 듭시다. 앞으로 더 길게 나가면 괜한 일로 의리 만 상하게 될 테니까." 배백 리는 당삼고의 무공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계집애가 저토록 고강한 암기를 지녔으니 가히 당가의 실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군.' 당삼고도 상대의 내공에 깊은 두려움을 가졌다. '백화산장의 주, 둘째 장주가 어째서 검문쌍영에게 태도를 공손 히 취하나 했더니 과연 높은 무공을 지닌 자들이로구나. 무림에서 는 이들의 검술만을 알고 있는데 내공까지도 대단하니 모두가 놀랄 만하구나.' 이렇게 서로 상대를 두려워하게 되니 자연적으로 반감도 어느 정 도 사라졌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 웃었는지도 모르게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 다. "허허허... 낭자, 미안하오이다." "호호호... 서로 수를 배웠군요." 주조룡은 회심의 미소를 띤 채 당삼고를 연회석으로 안내하여 소 영의 건너쪽 자리에 앉혔다. 소영은 맹랑한 상대를 유심히 살펴 보며 자신을 생각하여 보았 다. '저 여자의 내공이 고강한데 나에게도 그런 내공이 있을까? 난 아직까지 내공을 쓰지 않았으니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 어야지.' 더 생각을 하려는데 주조룡이 입을 열었다. "삼낭자에게 친구 하나를 소개시켜 드리겠소." 당삼고는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인데요? 소개를 시키더라도 우선 내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세요." "아주 강호에서 유명한 인물이오. 그러니 삼낭자께서도 그분의 명성을 많이 들었을 것이오." "그래 그가 누구란 말이오?" 주조룡은 천천히 손을 들어 소영을 가리켰다. "바로 낭자의 앞에 앉은 분이오. 그분의 대명은 소영이라고 하 오." 당삼고는 그제서야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상대를 유심히 쳐다 보았다. 소영은 낡은 옷에 얼굴이 온통 먼지로 뒤덮여 있어 꼴불견 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체는 매우 늠름하게 보였으며 먼지 투성이 의 얼굴도 자세히 살펴 보면 영준함이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소영이라는 사람은 검술이 귀신같고 용모가 단정하여 귀공자답다더니 뭐 그렇지도 않군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이라든가 먼지 투성이의 얼굴은 지금까지 듣던 것과는 틀린 것 같소." 소영은 여자에게 이같은 말을 듣자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지금 나는 밥얻어 먹기도 바쁜데 무슨 복으로 좋은 옷을 입고 다니겠소. 더군다나 나는 항상 떠돌아 다니는 신세인데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러나 이런 생각만 하였지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저 싱겁게 히죽 웃어만 보였다. 당삼고는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소이다." 검문쌍영은, 뜻밖에도 당삼고가 말과는 달리 부드러운 태도로 소 영을 대하자 대뜸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소영에게 시비를 걸려고 했으나 쉽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 당삼고는 곁눈질로 소영을 쏘아 보고는 탁상에 놓인 술병을 들어 그의 잔에 가득히 술을 따랐다. "소 상공의 허술한 차림이야말로 천하 군호의 풍채이오이다. 조 금 전에 저의 가벼운 말을 진심으로 사과드리는 뜻에서 한 잔 올리 겠으니 받아 주시오." 그녀는 여러 사람의 시선에는 아랑곳 없이 소영에게 애교를 떨었 다. 소영은 마음 속으로 감사의 뜻을 밝히고 그녀의 잔을 정중하게 거절하려 하였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오지 않 고 오히려 정반대의 말이 튀어 나왔다. "고맙소이다. 저도 감사의 뜻으로 낭자에게 한 잔 올리겠소." 소영이 술병을 들자 당삼고는 서슴없이 잔을 집어 그의 술을 가 득히 받았다. 두 사람의 뜨거운 시선이 잠시 엇갈렸다. 먼저 소영이 술잔을 비우자 당삼고도 술잔의 술을 한방울도 남기 지 않고 마셨다. 이 광경을 주의 깊게 보고 있던 주조룡은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술병을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서 천리를 불사하고 길을 달려 오셔서 저의 체면을 세워 주셨으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그래 서 오늘은 간단하게나마 제가 한 잔씩 올릴 터이니 사양마시고 받 아 주시오." 주조룡은 매우 침착하고 예민하여 검문쌍영과 소영의 관계가 미 묘하게 되어 가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재빠르게 화제를 돌린 것이었다. 검문쌍영은 마지못해 건배를 했다. 당삼고는 항시 자기 멋대로 세상을 살았으므로 처음에는 허술한 옷차림의 소영이 안중에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주조룡에게 소영이라는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 보니 청수하기가 비할 데 없고 강건한 기백이 늠름하여 호감을 느 꼈다. 더군다나 당삼고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별과 같이 반짝이는 소영 의 서늘한 눈이었다. 그의 눈은 마치 호수와 같이 맑았다. 그가 눈을 맑게 떴을 때는 상대를 집어 삼킬 듯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고 흐렸을 때는 상대의 마음을 뒤흔들게 만드는 몽롱한 빛을 보였다. 당삼고는 어려서부터 강호를 유협하였지만 강호에서는 당가의 무 술을 족히 알고 있는 터라 어느 누구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였다. 그녀는 한 번 소영의 용모에 호감을 가진 이상 다른 사람의 이목은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서로 술잔을 주고 받기까지 하였으니 그녀에게는 보통 일이 아니 었다. '이왕이면 가까이 가서 앉자.' 당삼고는 소영의 건너 쪽에 앉아 있다가 조금도 주저할 것 없이 소영의 옆으로 옮겨 바싹 붙어 앉았다. 소영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 앉자 여자 특유의 향긋한 체취에 그만 정신이 아찔하였다.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집안의 소저이기에 이토록 대담할까?' 이때, 담동이 몸을 일으키며 못마땅한 눈초리로 당삼고를 잠시 동안 쏘아 보고는 소영에게 눈길을 돌려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소형, 저도 소형께 술 한 잔 올리겠소이다." 그는 소영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을 끝내자마자 잔을 들어 소영에게 건넸다. 소영은 담동의 날카로운 암수(暗數)를 알고 있던 터라 암암리에 공력을 모아 예기치 못한 급습에 대비하면서 그가 내미는 술잔을 받으려 했다. 이때 돌연 소영의 팔을 밀치고 곱고 하얀 팔이 먼저 술잔을 가로 챘다. 소영과 담동이 깜짝 놀라는 것과 동시에 당삼고의 호들갑스 런 웃음 소리가 들렸다. "호호... 소상공은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니 제가 대신 마시겠소 이다." 담동은 암암리에 다섯손가락에다 공력을 모아 소영이 술잔을 받 을 때 그의 혈도를 찌르려고 했던 것이다. 당삼고의 손길이 얼마나 빨랐던지 담동이 술잔을 거두기 전에 벌 써 잔을 잡아 버렸다. 소영은 자신을 대신하여 담동의 암수를 받아 내려는 그녀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슬그머니 손을 거두고 말았 다. 담동은 내심 불 같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후일을 생각하고 억지로 참았다. 그는 짐짓 부드러운 표정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낭자께서 저와 수를 겨루어 보시겠다면 응해 드리겠소이다. 그 러나 이 술잔은 소형에게 올리는 것이니 낭자께서는 다음 잔을 기 다리시오." 당삼고는 술잔을 들고 그대로 버티었다. "어쨌든 이 잔은 제가 이미 들었으니 술을 부어 주어야 되지 않 겠소?" 담동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천천히 술을 따랐다. 그러나 다섯손 가락에 모았던 공력을 쓰지는 않았다. 주조룡은 좌중의 분위기가 갈수록 험악하게 변하자 재빠르게 선 수를 쳤다. "대장주께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길을 떠납시다." 그는 말을 끝내면서 손뼉을 두 번 가볍게 쳤다. 곧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이십여 장한들이 일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검문쌍영은 절호의 기회를 놓친 분한 마음 때문에 그 자리에서 좀처림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당삼고는 얄밉도록 귀여운 미소를 흘리면서 자리에서 일 어나 소영의 옆을 바싹 따랐다. 음식점 밖에는 벌써 이들이 타고 갈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조 룡은 예의를 갖추느라고 우선 검문쌍영과 소영에게 말을 권하였다. 그리고 당삼고가 눈길을 돌려 그녀가 탈 말을 찾자 주조룡이 부드 럽게 말했다. "낭자에게는 가마가 준비되어 있소이다." 당삼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나도 말을 타겠소." 주조룡은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그러실 줄 미리 알고 준비시킨 말이 있소. 낭자의 성격으로는 갑갑한 가마를 탈 것 같지가 않기에..." 주조룡이 음식점 뒤로 모습을 감추자 당삼고는 소영에게 다가가 서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소상공, 검문쌍영은 당신을 해칠 간계를 꾸미고 있소. 그러나 저와 함께 가면 그들은 소삼공을 제대로 해치지 못할 것이오." 그때 마침 주조룡이 말을 끌고 나와 당삼고에게 고삐를 넘겨 주 었다. 당삼고는 몸을 날려 가볍게 말에 올라 탄 뒤 채찍으로 소영 의 말 궁둥이를 때렸다. 소영이가 탄 말도 깜짝 놀라며 주조룡이 달려간 길을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당삼고는 곧 말을 몰아 소영의 뒤를 바싹 따랐다. 두 필의 말이 일으키는 흙먼지는 그들의 뒷 길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칠, 팔 리를 달려 서로 나란히 말을 몰게 되자 당삼고가 먼저 입 을 열었다. "이봐요.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면서 말을 몰고 있어요?" 소영은 힐끗 그녀를 쳐다 보고 무뚝뚝하게 대답하였다. "어느 사람을 생각하고 있소이다." 당삼고는 눈썹을 치켜 뜨며 다그쳐 물었다. "어떤 사람이오? 남자요? 아니면 여자요?" 소영은 이렇게 말을 몰면서 엉뚱하게도 지난 날 헤어진 악소채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내 옆에 나란히 달리고 있는 여자가 악 누나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도 든든하고....' 그가 눈길을 돌려 옆의 상대를 보았으나 그녀는 역시 악소채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요." 당삼고는 의외의 대답에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소영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성품이라 태연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말 해 버린 것이었다. 당삼고는 입가에 쓴 웃음을 흘리며 힐끗 소영을 쳐다 보았다. "그 여자는 분명 저보다 예쁘지요?" "낭자가 어쩌면 더 예쁠지 모르오. 그러나 내 누나는 낭자에게 없는 청고한 풍모를 지니고 있소." 당삼고는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며 눈빛을 빛냈다. "당신은 누나를 생각하고 있었군요." 그녀의 말을 받아 소영이 입을 열었는데 갑자기 앞에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조룡이 급히 말을 몰고 달려 왔다. "몇 사람의 무림 동도가 산장을 침입하려 하는 것 같소. 그러니 두 분께서는 걸음을 조금만 늦추시오. 제가 먼저 장(莊)으로 들어 가 그들을 내쫓고 두 분을 맞이하겠소. 원래는 두 분이 장으로 들 어 가실 때 성대한 환영을 베풀려고 하였는데 부득이 실례를 범하 게 되었소." 주조룡이 말을 끝내면서 말고삐를 돌리려 할때 소영이 그를 부르 며 말했다. "귀 장에 불법으로 침입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도 돕고자 하오. 우리도 손님인데 모른 척 할 수 있겠소." "사소한 일로 어찌 손님께 폐를 끼치겠소." 그러자 소영의 표정은 벌써 어떤 결심을 보이고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그렇게 사양하지 마시오." 당삼고도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소영의 말을 이었다. "체면과 도리를 찾을 때가 아니오. 어서 말을 달려 쓸데없이 피 를 흘리는 것을 막읍시다." 주조룡은 그제서야 마지못해 응낙하며 질풍처럼 앞으로 달려 갔 다. 세 필의 준마는 하늘이라도 뚫을 기세로 얼마 동안 길을 달리 다가 진흙 길에서 벗어나 소로로 접어 들었다. 세 사람이 길을 온 통 메우고 있는 백화꽃 사이로 천천히 말을 몰아 가는데 갑자기 꽃 더미 속에서 세 명의 청의 동자가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세 사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숙연히 고개를 숙였다. 주조 룡은 그들 청의 동자 앞에까지 와서는 말을 멈추고 뒤따르는 소영 과 당삼고에게 입을 열었다. "다 왔소이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갑시다." 세명의 청의 동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말고삐를 잡고 어디 론가 모습을 감추었다. 소영은 장산패를 따라 다니며 수 년 동안 무공을 배워 그의 무공 을 모두 이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역리(易理) 오행의 이치도 터득 하였다. 지금 백화가 만발한 꽃밭을 보자 대뜸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이 백화꽃들이 질서 정연하게 심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꽃밭에도 오행의 수(數)가 깃들어 있구나. 더군다나 오색의 꽃과 그윽한 향기가 모두 숨은 뜻이 있는 것 같다.' 소영은 손에 닿는 꽃송이 하나를 꺾으며 빙그래 웃음을 띠었다. "둘째 장주, 이 나무와 꽃 속에는 우기진(寓奇陣)이 포함되어 있 으니 정말 고명한 수입니다." 순간 주조룡의 미간 사이에는 한 줄기의 놀란 기색이 스치고 지 나갔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 띤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그만 장난이니 너무 놀리지 마시오." 소영은 짓궂은 마음으로 다음 말을 꺼냈다. "정기의 변화가 무상하니 만약 이 꽃과 나무에 반오행(反五行)을 더 장치한다면 더욱 커다란 묘기가 있을 것이오." 주조룡은 내심 감탄하였다. '이 사람은 아직 나이도 어리면서 이미 무공의 절기를 거의 모두 터득하였으니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강호의 견식이 부 족하니 백화산장과 강호 무림 사이의 반목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할 테지.'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힐끗 소영의 옆 얼굴을 쳐다 보았다. '이 자를 일찌감치 죽이거나, 백화산장의 편이 되게 하여야 되겠 다. 대장주에게 상의하여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소영은 주조룡이 아무 말도 없이 걸음만 재촉하는 것을 보고 내 심 후회가 생겼다. '괜히 입바른 소리를 하여 주조룡의 반감만 사게 되었구나. 앞으 로 강호에 발을 디며 놓을 징검다리가 되는 셈인데 벌써부터 그들 의 반감을 사게 된다면 일이 어렵게 되겠지....' 그는 짐짓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둘째 장주, 제가 아무렇게나 한 이야기이니 너무 탓하지 마시 오. 그렇다고 산장의 숨은 비밀을 알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니." 주조룡은 손을 저었다. "아니오. 소형은 너무 과분한 말씀을 마시오. 저는 어떻게 하면 소형께서 산장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소 이다." 잠시 동안을 그대로 지나자 백화진은 그치고 이제는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길이 나타났다. 세 사람이 소나무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서니 그곳에는 한 채 의 아름다운 정각이 당삼고의 눈길을 현혹시켰다. 세 사람이 그 정 각을 옆으로 하고 조그만 풀밭을 지나자 뜻밖에도 넓다란 길이 나 타나고 그 앞에 대궐같은 집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영과 당삼고는 똑같이 중얼거렸다. '오, 저것이 백화산장이라는 곳이군. 말로만 듣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웅대하구나.' 그들이 길로 내려서 대문께로 향하자 커다란 대문이 소리도 없이 양쪽으로 열렸다. 대문이 열린 사이로 열두 명의 흑의 대한이 줄지 어 서 있었다. 소영은 그들을 보고 버럭 의심이 생겼다. '저놈들은 나를 해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군.' 대한들은 똑같이 청색의 천으로 머리를 싸매고 무릎께에는 흰 천 으로 옷을 졸라 매어 경장을 하였다. 더욱 살벌한 느낌을 주는 것 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칼 머리마다 이 척 길이의 붉은 띠를 늘어 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당삼고가 갑자기 손을 벌리며 입을 열 었다. "둘째 장주 고맙소이다. 이렇듯 큰 환영을 베풀어 주시니 우리가 어찌 마다 하겠소." 옆에서 잔뜩 의심을 품고 있던 소영은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구나. 이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예(禮)인 줄을 모르고 괜 히 의심을 가졌었으니. 다행히 묻지 않아 더 큰 창피를 모면하였구 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조룡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허허... 응당 그래야 되지 않겠소? 소형과 낭자께서 처음으로 이곳에 오셨는데 이 정도의 예도 없어서야 어찌 얼굴을 들겠소?" 서로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에 세 사람은 거의 문 앞에까지 당 도하였다. 그러자 일렬로 늘어 섰던 열두 대한들은 돌연 검을 뽑아 허공에서 몇 번 휘두르고는 곧장 검 끝을 땅으로 내렸다. 오른손으 로는 검을 내리고 왼손으로는 앞가슴을 짚었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들의 모양은 누가 보아도 보기 좋은 태도였다. 소영은 얼떨결 에 대한들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 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른쪽에 서 은은한 주악 소리가 들렸다. 문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조그 만 정자에서 열두 명의 소녀들이 제작기 다른 피리와 장고를 불고 있었다. 세 사람은 백화산장의 대청을 향해 걸었다. 대청 안은 매우 호화 롭게 꾸며졌다. 넓직한 대청 구석에까지 붉은 양탄자를 깔아 놓았 으며 벽은 백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주조룡은 대청 가운데 놓여 있는 커다란 탁상으로 두 사람을 안 내하고는 허리를 굽히며 자리를 권하였다. "두 분께선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곧 대장주를 모시고 오겠소이 다." 소영은 의자에 앉은 채로 주위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기둥과 벽 마다 아름다운 그림이 걸려 있었다. 양쪽 벽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 어 밖의 풍경이 그대로 눈에 들어 왔다. '길을 오는 도중 주조룡은 이곳에 무림 동도가 침입했다고 하였 는데 어째서 이렇게 조용할까? 그렇다면 어느 누가 잘못 알고 헛소 문을 퍼뜨린 것이 아닐까?' 주조룡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소영의 내심을 직감적으로 눈 치챘다. 그는 대장주를 부르러 가려던 발길을 멈추고 소영의 건너 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대장주를 부르러 간 사이 말 많은 당삼고가 소영에게 백화 산장의 비밀을 이야기 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내 비밀까지 말한 다면 소영을 끌어 들이려던 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주조룡은 대신 시녀를 시켜 대장주께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리게 했다. "제가 이곳을 떠나면 손님들께 실례가 될 것 같아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삼고가 냉랭하게 말했다. "백화산장의 장주가 이렇게 자신을 비굴하게 만들 줄은 미처 몰 랐소이다." 주조룡의 얼굴빛은 붉게 변하였다. "저는 소형과 오늘이 초면이지만 어쩐 일인지 오래 전부터 친하 게 지내 온 친구 같소이다. 그래서 소형에게 조금이라도 섭섭한 마 음을 주고 싶지가 않아서요." 소영이 곧 이어 말을 받았다. "주형의 따뜻한 보살핌에 감사드리오." 그의 말이 끝나자 세 명의 백의 소녀가 들어 와 탁자에다 향차를 따라 놓았다. 향차의 맛은 생각보다 달고 맛이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산중에 서 기거했기 때문에 그저 씁쓸한 엽차나 먹었을 뿐이었다. "좋은 차요." 주조룡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소영이 하찮은 차 한잔에도 감탄을 금치 못하니 이곳에서 좋은 차와 음식을 주면 절로 마음이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수 월하게 그를 이곳에 잡아 둘 수 있을 것이다.' "소형께서 칭찬을 하시니 저도 반갑소이다. 그 차는 특별한 손님 을 위해 만든 국화향이란 차요." 소영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데 당삼고의 말소리가 먼저 들렸 다. "둘째 장주, 귀 장에서는 아무런 경계의 빛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오?" "강호에서는 비록 시비를 면키 어려우나 우리 백화산장에서만은 원한을 맺지도 풀지도 않소이다." 당삼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주조룡을 쏘아 보았다. "흥! 당신은 대답을 회피하는 것 같군요? 무림에서 어느 누가 당 신네 두 형제를 모르고 있겠소?" "낭자는 저의 초청을 받아들여 먼 길을 왔지만 그대신 소형을 알 게 되었으니 과히 손해는 없지 않소? 훗날 두 분께서 강호에 나가 시면 서로 도와 무림의 군주가 될 수도 있을 것이오." 당삼고는 소영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소영은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계속 주위 를 둘러 보는 것이었다. 당삼고는 은근히 울화가 치밀어 소영에게 무어라 핀잔을 주려는 데 돌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상대는 언제 들어 왔으며 홀 연히 당삼고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상대는 양귀비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십오 세 정도의 소녀였 다. 그녀는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대장주께선 망화루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조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영에게 눈길을 돌렸다. "소형, 수고스럽지만 망화루로 올라 가셔야 되겠소이다. 대장주 께서는 요사이 몸이 불편하셔 이곳까지 오시지를 못하시나 보오." 소영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말을 받았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시오. 저는 예의로라도 응당 대장주를 찾아 뵈옵겠소이다." 주조룡은 직접 두 사람을 안내하였다. 세 사람이 대청을 나와 오 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얼마를 가니 돌연 눈 앞에 청석으로 쌓아 만 든 높은 누각이 나타났다. 누각의 매 층마다 한 명씩 장한이 지키 고 있어 경계가 삼엄함을 느끼게 하였다. 그 높은 누각은 매우 튼튼하게 보였으며 위로 올라 갈수록 조금 씩 좁아졌다. 소영은 암암리에 누각의 층을 세어 보았다. 누각은 각 층마다 창문이 나 있어 밖으로 보아서도 언뜻 볼 수 있었다. 누 각은 십삼 층이었다. 그들이 십이 층까지 올라 서자 마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백 발이 성성했으며 턱에 난 흰 수염은 가슴까지 늘어져 있었다. 주조 룡이 앞으로 나서며 정중히 포권하고 입을 열었다. "형님을 뵈옵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영에게 가벼운 예를 하였다. "노부는 이곳 백화산장의 장주로 있는 심목풍이오. 소형께선 이 곳까지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겠소." 소영은 정중한 예로 답하였다. "아, 심형이시군요. 미처 몰라 뵈온 것을 허물치 마십시오." 옆에서 보고만 있던 당삼고도 내심 깜짝 놀랐다. '백화산장의 명성은 수없이 들어 왔지만 이곳의 장주가 누구인지 는 전혀 몰랐었는데... 오늘에서야 뜻밖에도 심목풍이 대장주로 있 다는 것을 알았구나.' 그녀는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소녀는 조모님을 통하여 가끔 들은 적이 있소이다. 노선...." 당삼고는 심목풍에게 노 선배 라고 부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조룡이 그와 의형제를 맺고 있으니 심목풍에게 노선배 라고 부르면 덩달아 주조룡에게도 그런 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 말끝을 흐렸다. 심목풍은 그녀의 난처한 처지를 알아 차리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 렸다. "허허허... 나와 당노파는 수차 만난 경험이 있고 서로 친근하게 지 내었소. 그러니 낭자와도 무공의 높고 낮음은 제쳐 놓고 친구로 지내는 것이 좋겠소." 소영이 불쑥 앞으로 나서며 말참견을 하였다. "그 말이 맞소. 저는 항상 남과 무공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제일 싫어하오." 그는 불현듯 남일공이 자기에게 일러 준 말이 생각났던 것이었 다. "너는 강호에 나가서 어느 누구와 이야기를 하더라도 평배(不輩) 로 대하거라.' 심목풍은 조금도 안색을 변치 않고 소영의 말을 받았다. "평배로 지내자, 그것도 좋소. 우리 서로 허물없이 지내기로 합 시다." 잠시 후 심목풍이 손뼉을 두 번 치자 삐거덕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문이 열리자 홍의를 걸친 아름다운 소녀 네 명이 꽃방석을 들고 나와 방 가운데로 둥글게 놓았다. 심목풍은 소영과 당삼고를 향하여 앉기를 권하였다. "두 분 먼저 앉으시오." 두 사람이 서로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자 심목풍도 맞은편으로 앉으면서 주조룡에게 입을 열었다. "동생도 이리로 앉게." "감사합니다." 주조룡은 깍듯이 예를 올리고 심목풍의 옆에 단정히 앉았다. 소 영은 그들이 주고 받는 말과 행동하는 것을 보고 내심 느끼는 것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형제지간이라면서도 주조룡이 심목풍에게 대하는 태도는 사부와 제자 사이의 관계 같구나.' 망화루의 꼭대기인 십삼 층에서는 부드러운 말소리가 새어 나왔 다. 서로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에 조금전의 네 소녀가 제각기 조 그만 쟁반에다 찻잔을 들고 들어 왔다. 그녀들은 네 사람 앞에다 공손히 찻잔을 내려 놓고는 물러가지 않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심목풍은 커다란 눈을 굴려 소영 과 당삼고를 번갈아 쳐다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이렇게 일찍 찾으실 줄은 미처 몰라 마땅한 준비가 없었소이다. 그러니 허물치 마시고 이천 년 된 송삼차나 드십시오. 제가 두 분을 환영한다는 뜻에서 성의를 표하는 것이오." 그는 말을 끝내고 자신이 먼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소영은 송삼차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손을 뻗쳐 찻잔을 들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옆에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녀가 생각났 다. "아가씨 일어 나시오. 어찌 그렇게 앉아 있소?" 그러나 홍의 소녀는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 일어나려고 하지 않 았다. 소영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다시 말을 꺼내려는데 주조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형, 차가 식소이다. 어서 드시오." 소영은 마지못하여 그대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심목풍이 소영을 뚫어지게 바라 보며 말했다. "소형, 소형은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무림 에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 분명 소형의 몸에는 절기가 넘쳐 흐를 것 같소." 소영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도 아직 가짜 소영이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구려. 지 금까지의 명성은 가짜 소영의 것이지 내것이 아니오.' 그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심목풍이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소형께서 지니고 계신 절기를 한 두가지 보여 줄 수 있겠소?" 옆에서 주조룡이 말참견을 했다. "소형의 무공은 제가 직접 보아서 잘 알고 있으니 몇 가지만이라 도 형님께 보여 주시오." 소영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심목풍이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결코 소형에게만 절기를 보여 달라는 것이 아니오. 소형이 끝나면 나도 몇가지 재주를 보여 드릴 터이니 너무 이해 관계를 따 지지 마시오." 궁지에 몰리게 된 소영의 머리 속은 마치 커다란 돌에 세차게 부 딪친 것 같았다. '무엇을 보일 것인가? 내가 알고 있는 무공이라면 심목풍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터인데.' 심목풍은 소영의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짓궂은 말 만 지껄였다. "소형, 무슨 무기로 하시겠소? 아무 것이나 말씀하시오. 여기에 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소이다." 이제 소영에게는 막다른 골목이 눈 앞에 닥쳤다. 소영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사방을 둘러 보는데 언뜻 찻잔이 눈에 띄었다. 네 명의 소녀들은 소영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빈 찻잔을 거 두고 한쪽 벽에 나란히 서 있었다. 소영은 조금 전에 자기에게 찻잔을 올렸던 소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그 찻잔을 좀 빌려 주시겠소?" 소녀는 눈길을 돌려 심목풍의 표정을 살피고는 천천히 소영에게 로 다가서며 공손히 두 손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소영은 찻잔을 오른손에 받아 들고 심목풍에게 말했다. "제가 혹 실수를 하더라도 너무 비웃지 마시오." 소영은 찻잔을 보자 옛날 유선자가 보여 주었던 회선지력(回線地 力)의 절기가 생각났다. 남일공, 유선자 그리고 장산패에게서 무공 을 배웠다고는 하나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달하고 있 는지를 몰랐다. 당삼고는 안타까운 마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영에게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형제, 저 심목풍은 무공이 아주 고강하여 무림에서도 두려워 하는 인물이오. 만일 실패를 한다면 도리어 안하느니만 보다 못하 오." 소영은 그래도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 다. 소영은 단전에 내공을 모아 돌연 찻잔을 들고 있는 손목을 들 썩였다. 그러자 조그만 찻잔은 왼쪽의 창문을 뚫고 밖으로 날아 갔 다. 찻잔이 날아 간 시간을 따진다면 벌써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가 들렸어야 하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조룡은 눈살을 찌푸리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심목풍은 눈을 감은 채 그저 무표정이었다. 그의 속마음은 언제나 음흉하여 십여 년 동안 그와 같이 지낸 주조룡 조차도 아직까지 심목풍의 본 마음 을 모를 지경이었다. 망화루는 쥐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소영은 내심 다급한 마음이 생겼다. '혹시 암공을 잘못 써서 찻잔이 앞으로 곧장 날아 간 것이나 아 닐까? 그렇지 않으면 방향을 잘못 잡아 도중에서 떨어진 것일까?' 그때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물체가 창에서 날아 들어 와 소 영에게 덮쳐 갔다. 당삼고는 너무 의외의 일에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소형제, 위험하오!" 그와 동시에 날아 오는 검은 물체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자 소영 이 재빠르게 손을 뻗쳐 검은 물체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삼낭자, 놀라지 마시오. 이것은 조금 전 내가 밖으로 던졌던 찻 잔이오." 당삼고는 그의 말을 듣고 더 한층 놀라 잠시 동안 어리둥절하였 다. 망화루에서는 계속해서 감탄이 새어 나왔다. 한참 후 주조룡이 입을 열었다. "소형의 절기에 놀람을 금치 못하겠소이다. 저는 오늘에서야 무 공에 대하여 다시 한번 눈을 뜬 것 같소이다." 당삼고가 흐뭇한 웃음을 띠며 주조룡의 말을 이어 칭찬하였다. "우리 당가의 세대는 암기로 이름이 났지만 아직까지 이런 절기 는 처음 보는 묘기요." 소영은 그들의 칭찬을 들으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여러분의 분에 넘치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소영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내려 놓자 세 사람의 시선 이 그 찻잔으로 쏠렸다. 그 자개 찻잔은 창문을 뚫고 밖으로 나가 얼마 후에 돌아 왔는데도 어느 한 군데 상처가 나거나 깨진 곳이 없었다. 심목풍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서 있는 시녀를 손짓으로 불러 다른 하나의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찻잔을 세 사람에게 보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는, 이제 내 재주를 보실 차례요. 소형의 재주가 너 무나 비범하였기 때문에 내 것은 별 칭찬을 못 들을 것 같소." 그는 주위를 굽어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이 찻잔으로 조그만 재주를 부려 보겠소." 소영과 당삼고는 호기심을 가지고 아무 말 없이 그가 들고 있는 찻잔만 바라 보았다. 심목풍은 왼손을 쭉 펴고 그 위에 찻잔을 올려 놓았다. 그는 등 이 조금 굽은 것이 커다란 흠이었지만 용모나 체격은 훌륭하였다. 특히 그의 손가락은 마치 여자의 것처럼 섬세하고 매우 희었다. 그가 장심(掌心)을 돋우자 희었던 손이 차츰 붉게 변하였고 손바 닥 위의 찻잔도 똑같이 붉은 기를 띠었다. 심목풍의 손바닥은 잠시 후 붉은 기운이 사라졌으나 찻잔은 본래의 색으로 돌아 오지 않고 회색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심목풍은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왼쪽 손바닥에 놓인 회색 찻잔을 유심히 살펴 보더니 가볍게 입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그 찻 잔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어졌다. 심목풍은 소영의 놀라는 표정을 보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부끄럽소이다. 조그만 재주를 가지고 두 분을 뵈었으니." 그리고는 시녀들에게 술상을 차려 오도록 지시했다. 주조룡은 심목풍을 한참 동안 바라 보더니 소영에게 다가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형께서는 정말로 우리 산장의 귀빈이오. 망화루에서 술상을 벌인 것을 수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요." 소영은 그의 과장된 이야기를 듣자 은근히 반감이 생겼다. '이 곳이 그리 귀한 곳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을 품고 소영이 무어라 반박을 하려는데 갑자기 아름다 운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피리 소리는 북쪽 문에서 들렸으며 잠 시 후 두 명의 소녀가 조그만 피리를 불면서 모습을 나타냈다. 두 소녀는 계속 피리를 불며 방안으로 들어 와 네 사람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양쪽으로 갈라섰다. 두 소녀의 피리 소리가 멎자 곧 이 어 성찬이 차려진 커다란 상이 들어 왔다. 모두가 자리를 잡고 몇 순배가 돈 후 당삼고가 먼저 일어섰다. "술좌석에서 먼저 일어나서 매우 죄송스럽소이다. 그러나 워낙 몸이 불편하여서...." 그녀는 원래 술을 못하기도 했지만 실은 주조룡과 마주앉아 술잔 을 기울이기가 싫었던 것이다. "저도 이만 가 보겠소이다." 심목풍이 몇 번 만류를 하였으나 소영은 끝내 술좌석을 떠났다. 그의 생각으로는 당삼고가 없는 자리에서 두 명의 장주와 더 이야 기를 한다면 자신의 약점만 잡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심목풍은 문 앞까지 따라 나오며 두 사람을 배웅하였다. 주조룡 은 두 사람을 안내하여 망화루 밖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소형께서 만약 절기를 숨기지 않으신다면 저에게도 몇 수 가르 쳐 주시겠소?" 소영은 그의 물음에 언뜻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것은 유선자에게만 있는 절기로써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이 알 게 된다면 그분에게 불복하는 결과가 될 터인데! 그렇다고 한 마디 로 거절할 수도 없고....'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당삼고의 음성이 들렸다. "둘째 장주는 욕심도 많구려. 소형께서 갖고 있는 절기는 사부의 허락 없이는 아무에게도 전수시키지 못한다오." 그녀는 언제나 소영을 도와주었다. 지금도 소영이 대답을 못하고 당황하자 재치있는 말솜씨로 그 난관을 벗겨 준 것이었다. 주조룡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당삼고를 쏘아 보았다. 그는 다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영에게 말을 던졌다. "소형은 너무 난처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제가 농담으로 몇마디 한 것 뿐이오이다." 소영은 그에게 미안함을 느꺼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일 부러 화제를 돌렸다. "주형, 검문쌍영은 어디로 갔소?" 주조룡은 절기를 배울 기회를 놓쳐 잔뜩 부아가 났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문쌍영은 두 분들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하여 지금쯤은 편히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오." 세 사람은 말을 주고 받으면서 쉬지 않고 걸음을 옳겨 이제는 망 화루가 멀리 보이게 되었다. 당삼고는 조그만 꽃밭을 지나면서 웬일인지 얼굴을 붉혔다. 그녀 는 조금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주막을 나오면서 소영에게 큰소리를 쳤지만 이제 보니 그가 나 보다 무공이 월등히 높은 것 같군.' 백화산장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몇 개의 꽃밭과 담을 지나자 작은 누각이 나타났다. "저 곳이 두 분께서 묵으실 누각이오." 그곳에는 주조룡이 가리킨 누각 이외에도 여러 개의 누각과 정자 가 있었다. 주조룡은 누각으로 다가서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은 난화정사(蘭花精舍)라고 하오. 소형의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소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누각 주위는 온통 난꽃으로 뒤덮였으며 누각 안에도 예쁜 화분이 있었다. 화분에 담긴 각양 각색의 난꽃이 향긋 한 꽃냄새를 풍겨 주었다.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토록 과분한 대접을 하시는지 모르겠소이 다. 나는 이런 것을 원치 않소." "소형께서 이곳이 마음에 드신다면 언제까지라도 이곳에 묵으셔 도 되오." 주조룡은 눈길을 돌려 문 옆에 서 있는 두 시녀들에게 입을 열었 다. "너희들은 이 분을 잘 모셔야 된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허술한 점이 있어 이 분의 꾸중을 듣게 될 때에는 엄벌에 처할 테다." 두 시녀는 가늘게 어깨를 떨며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둘째 장주님의 분부 명심하여 거행하겠사옵니다." 주조룡이 다시 소영에게 말을 이었다. "소형, 무엇이든 필요하면 두 시녀들을 시키십시오. 그녀들은 소 형의 손과 발이 되어 줄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물러가겠으니 편안 히 쉬십시오." "고맙소이다." 주조룡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당삼고에게 말했다. "삼낭자께서 기거하실 곳은 난화정사의 서쪽 끝인 매화각이니 그 곳으로 갑시다." 당삼고는 아쉬운 눈빛으로 한참 동안 소영을 쳐다 보다가 힘없이 주조룡의 뒤를 따랐다. 당삼고가 묵을 누각에도 꽃이 만발해 있었 다. 백화각이라는 이름 그대로 앞 뒤가 모두 갖가지 매화꽃으로 뒤 덮혀 있었으며 누각의 모양도 난화정사와 비슷했다. 그들이 매화각에 도착하자 안에서 시녀가 마중을 나왔다. 주조룡 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낭자, 소형의 인품이 어떻소?" 당삼고는 어려서부터 강호에 발을 딛어 많은 풍파를 겪었기 때문 에 비록 낭자의 몸이지만 남자의 성격과 비슷했다. 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움을 몰랐다. "음... 그는 영준하고 수려하여 당신과는 대조도 못할만큼 사내 대장부답소." 주조룡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낭자는 무슨 까닭에 자꾸만 나 를 꼬집기만 하시오. 혹시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당신이 만약 나에게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당가의 열여덟 가지 압독을 맞고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테니 말이오." 주조룡은 조금도 안색을 변치 않고 다그쳐 물었다. "낭자는 그 열여덟 가지 암기 중에서 몇 가지를 알고 계시오?" 당삼고는 얼굴을 붉혔다. "주 둘째 장주는 비웃지 마시오. 내 열의가 부족한 탓인지 아직 까지 열두 가지만 알고 나머지는 모르오." "훌륭하오. 여자의 몸으로 열두 가지나 알고 있으니. 그 정도만 가지고도 충분히 강호를 위협할 수 있겠소. 그런데 당가의 암기와 팔수신룡 단목정과의 사이는 어떤 관계요?" 당삼고는 잠시 생각을 하고 나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 단목정을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듣자하니 암기로써 강호에 이름을 날려 팔수신룡이라는 칭호를 듣 게 되었다더군요. 그 외에 더 이상은 모르오." 주조룡은 돌연 심각한 얼굴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삼낭자, 저에게는 한 가지 섭섭한 일이 있소.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아, 뱉아 버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 같소." 당삼고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혹시 소영 때문이 아니오?" "낭자의 추측이 꼭 맞지는 않았소." 그는 무슨 수수께기를 하는 것처럼 천천히 말을 꺼냈다. 17. 심목풍을 의형으로 삼았으나... 당삼고는 곧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어째서 그렇지요?" 주조룡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이 일은 소영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관계가 깊으며 백화산장의 소생과도 인연이 있으니 삼낭자께선 그중 하나만 맞춘 것이 아니 오?" "그럼 당신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나는 삼낭자와 협정을 하나 맺고 싶소이다." 당삼고는 얼굴을 붉히며 다그쳐 물었다. "무슨 일로...?" 주조룡은 히죽이 웃고 나서 입을 열었다. "삼낭자와 소영과의 개인 관계는 더 이상 묻지도 않겠으며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겠소이다. 오히려 내가 두 사람을 도와 주고 싶은 데..." 그가 말끝을 흐리자 천성이 호탕한 당삼고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크게 꾸짖었다. "무슨 말인지 간단하게 한 마디로 말해 보시오!" "그야 간단하지요. 삼낭자께서는 소영과 함께 우리 백화산장 내 에서 일어나는 일에 일체 상관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오." 당삼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만일 그 분이 나에게 백화산장에 대하여 물어 본다면 나는 잡아 뗄 수도 없는 일인데..." "사실 삼낭자께서 백화산장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백에 하나 정 도이지만 그것도 우리에게는 화가 되오. 그러니까 앞으로 소영이 그것을 묻거든 나에게 물어 보라고 하시오." "만일 내가 그분에게 모든 이야기를 틸어 놓는다면 어떻게 하시 겠소?" 주조룡은 잠간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곧 웃는 표정으로 바꾸면서 대답했다. "그러면 나도 소영에게 낭자의 나쁜 이야기를 해 버리겠소." 당삼고는 얼굴을 붉히며 다급하게 물었다. "내가 무슨 나쁜 일을 했길래....?" "물론 삼낭자가 지금까지 나쁜 일을 하진 않았지만 낭자가 나쁜 일을 저지른 것처럼 헛소문을 퍼뜨리면 그만이요." 당삼고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소. 당신의 뜻에 따르지요." 주조룡은 만족한 듯 회심의 미소를 띠며 읍한 뒤 방을 나갔다. 소영은 두 사람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곧바로 안으로 돌아 와 잠을 청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십오 세 가량의 시녀 두 명이 들어 왔다. 그 중 한 시녀가 찻잔을 들고 소영에게로 다가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리 차를 가져 왔습니다." 소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내미는 찻잔을 받았다. "수고했소. 낭자." 그러나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조그맣게 말했다. "나리께서 저희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장주께서 아시면 오히려 저희들이 혼나게 되옵니다. 앞으로는 이름을 불러 주세요. 저는 은란이라고 하오며 이 애는 금란이라고 하옵니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소영은 그녀의 그러한 모습이 귀엽게 생각되었다. "좋소이다. 낭자께서 정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그대로 따르겠소 이다." 옆에 있던 금란이 소영에게 말했다. "목욕물을 데워 놓았으니 나리께서는 어서 목욕을 하십시오." 소영은 그제서야 자신이 벌써 며칠 동안 목욕을 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지요.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길을 안내해 주시겠소?" 금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곧 앞장을 서서 소영을 목욕탕으 로 안내했다. 소영은 주쩌없이 욕탕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막 옷을 벗으려는 데 언제 들어 왔는지 금란이 손을 뻗어 소영의 옷을 벗기려 했다. 소영은 기겁을 했다. "아니, 낭자는 무엇을 하려는 거요?" 이에 뒤따라 들어 온 은란이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입을 열 었다. "나리께선 옷도 벗지 않고 목욕을 하시나요?" 소영은 두 손을 저으면서, 완강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낭자들이 나가지 않는데 내 어찌 옷을 벗을 수 있겠소." 금란은 무엇이 우스운지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리, 소녀들은 나리의 목욕을 도우러 왔사옵니다." "그럴 수가... 나는 어린애도 아닌데 무슨 시중을 들겠다는 것이 오? 어서 밖으로 나가시오." 옆에서 듣고 있던 은란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녀들의 시중을 철저하게 들지 않으면 장주께 꾸중을 듣습니 다. 소녀들을 생각하시와 어서..." 소영은 짐짓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남녀는 어디까지나 유별인데, 더군다나 목욕탕에까지... 나는 목욕을 안하겠소." 그러자 두 시녀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피식 싱거운 웃음을 띠었다. "그러시다면 소녀들은 물러가겠습니다." 소영은 그제서야 마음 놓고 옷을 벗었다. 그는 오랜만의 목욕으 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상쾌했다. 내실로 돌아 오니 벌써 침상에는 호화스런 비단 금침이 깔려 있 었다. 소영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라는 표정을 보이자 금란이 미 소띤 얼굴로 가까이 다가 왔다. "나리, 장주께서 가리를 위하여 새 옷을 내리셨사오니 입어 보시 와요." 시녀가 앞으로 내미는 것은 하얀 비단 바탕에 붉은 실로 아름다 운 수를 놓은 호화스런 옷이었다. 소영은 그 옷을 한 번 쳐다보고는 시녀들을 밖으로 나가게 하였 다. 소영이 새 옷으로 갈아 입고 난 후 은란이가 옥쟁반에 인삼주 를 한 잔 받쳐 들고 들어 왔다. 그녀는 술잔을 들어 소영에게 가까 이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새 옷을 갈아 입으시니 더욱 준엄하게 보이네요. 소녀는 나리를 모시게 된 것을 평생 영광으로 생각하겠어요." 금란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가볍게 예를 드리며 말했다. "나리께서는 나이도 젊으시고 영준하시며 더군다나 문무를 겸비 하고 계시니 소녀들의 존경을 받고도 남사옵니다. 백화산장에서는 이곳 난화정사로 손님을 모시는 법이 없사오나 특별히 나리만은.." "그렇다면 이 곳에는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소?" 은란이 말을 받았다. "소녀가 알기로는 이 난화정사를 제외하고도 매화각, 무단정, 그 리고 취죽헌 등 세 곳이 있어요. 이 곳 백화산장에는 귀빈이 많이 찾아 오나 손님을 난화정사로 모신 예는 없사옵니다. 그러나 금년 에는 두 번이나 손님을 모시게 되어 전례를 깨뜨린 것입니다." 소영은 그녀의 말에 커다란 의혹이 생겼다. '그럼 어째서 주조룡은 나를 특별하게 대할까? 그와 나는 단지 몇 번 정도의 인사로 평범하게 사귀었는데...' 소영은 모든 것이 의혹에 싸인 것 같아 그녀에게 다그쳐 물었다. "낭자는 항시 이곳에 기거하는 모양 같은데..." 두 시녀는 소영에게 단단히 반한 모양이었다. 금란이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렇사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이 난화정사에서만 손님을 모시 고 있으며 또 다른 곳에서는 그곳대로 시녀들이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전번에 여기 들린 손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겠구료?" 두 시녀들은 한참 동안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은란이 먼저 생각난 듯 대답했다. "산장 내에서의 비밀을 밝혀서는 안되지만 나리의 인품을 믿고 이야기하여 드릴 터이니 먼저 소녀와 한 가지 약속을 하셔야 됩니 다." 소영은 그녀의 입을 열게 하려면 무슨 약속이라도 할 결심이었 다. "무엇인지 어서 말해 보시오." "나리께서는 저희들과 한 말을 절대 비밀로 하셔야 해요. 어느 누구에게도 말씀하시지 마세요." 소영은 별로 어려운 약속이 아니라 얼굴 가득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란은 입술로 깨물고 잠시 사이를 두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분의 이름은 우문한도라고 하옵니다." 소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문한도... 우문한도...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소영은 계속 우문한도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의 이름은 곧 생각 날 듯 하면서도 다시 지워지곤 하였다. 은란은 그의 표정을 보고 대뜸 물어 왔다. "나리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나요?" 소영은 어깨를 크게 움찔하며 놀랐다. "아, 그 우문한도라는 인물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그 자의 인상이 어떻소?" "겉보기로는 사십여 세쯤 되어 보였고 검은 수염이 배까지 내려 와 있었어요. 그리고 그 분의 특징은 온종일 장식이 교묘하게 되어 있는 조그마한 상자를 들고 있었죠. 걸어 다닐 때도, 식사를 할 때 에도 그리고 잠을 잘 때에도 항시 손에 들고 있었지요. 아마 그 상 자 속에는 무슨 중요한 보물이라도 있었나보죠?" 소영은 번뜩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벌써 오 년 전..삼원관에서 있었던 사건에서 그 우문한도가...' 금란은 소영의 수심에 가득 찬 표정을 보고는 웃음을 지어 보이 며 말했다. "나리, 무슨 근심이라도 있사옵니까?" 소영은 쓴웃음으로 시녀들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낭자, 내 더 이상 낭자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소이다. 어서 가서 편히 쉬도록 하오." 잠시 후 은란이가 몸을 굽혀 예를 올리고 내실을 나가면서 말했 다. "나리께서는 소녀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두 시녀가 나가자 소영은 문을 걸어 잠그고 침상 위에서 책상다 리를 하고 앉아 운기를 조식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여 러 가지 잡념으로 인하여 정신통일이 잘 되지 않았다. 소영이 얼마 동안 잡념에 싸여 몸부림을 치고 있으려니 조그맣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소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은란이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나리, 밤에 비가 올 것 같사옵니다.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하십 시오. 소녀가 옷을 벗겨 드리겠어요." 하고 안으로 들어 섰다. 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내가 벗고 자리다." 은란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가 켜 놓은 촛불이 온 방안을 환하게 비쳐 주었다. 소영은 조그마한 창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는 하늘을 쳐다 보 았다.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깔려 있어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 으며 이제라도 곧 억수같은 소나기가 내릴 것만 같았다. 소영은 침대로 돌아 와 털썩 몸을 눕히고 곰곰히 오늘 하루의 일 을 생각하여 보았다. 잠시 후 번개빛이 비치면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소낙비 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영은 가뜩이나 잠이 오지 않아 엎치락 뒤치락하는 중인데 소낙 비가 쏟아지는 소리에 이제는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을만 큼 답답하였다. 시간은 어느덧 이경이 지났다. 점점 밤이 깊어 가자 그는 침상에 서 내려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정원을 나갔다. 갑자기 싸늘한 바람 이 스치고 지나갔다. 두 시녀들이 잠이 깰까 봐 가만히 걸음을 옮 겨 망화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십삼층의 망화루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심목풍이 아직도 잠을 안 자고 있나 보군.' 다시 걸음을 옳겨 놓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번개불이 번쩍 비쳤 다. 그때 소영은 십여 장 앞에 흰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진기를 크게 들이 마시면서 근처의 담에 바 싹 몸을 기대고 주시하였다. 상대가 거의 자신의 앞으로 다가서자 불쑥 앞으로 나서며 낮게 소리쳤다. "누구요?' 그러자 상대는 간드러지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예요. 당삼고... 당신은 소영이시죠." 그제서야 소영은 긴장을 풀고 몇 발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웬일이시오? 이렇게 비가 오고 밤도 깊었는데..." 당삼고는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하며 처마 밑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성을 좀 낮춰 주세요. 두 시녀가 깨면 시끄러워지니까요. 그 런데 당신은 어찌하여 이곳에 나와 있나요?" 소영은 피식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난 잠이 오지 않아서요." "저도 그래요. 잠도 안 오고 또 당신에게 할 이야기도 있어서예 요." 소영은 정색을 지어 보였다. "깊은 야밤에 처녀 총각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러오? 내일 아 침에나 할 것이지!" "당신은 사내 대장부로서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시나요?" "우리는 서로 뜻이 통하는 사이지만 이렇게 밤중에 만나면 다른 사람의 이목도 있지 않겠소? 혹 쓸데없는 헛소문이나 퍼지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삼고가 입을 열었다. "우리 강호 사람들은 무슨 규칙이 그렇게 많을까요? 만일 제가 세속의 평범한 여자였다면 어떻게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겠 어요? 너무 규칙을 찾지 말아요." 당삼고는 귀엽게 양볼의 보조개를 보이면서 말했다. "우리 빗속을 거닐어 볼까요?" 소영은 얼른 대답을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이 낭자는 본시 무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나보다 견식이 넓을 터 이니 낭자에게 물어 보면 혹시....' 그는 이런 생각이 들자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꽃밭이 있는 곳 으로 돌렸다. 비에 흠뻑 젖은 당삼고의 몸은 어두운 밤에 보는 그 녀의 몸은 더욱 육감적으로 보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연 발하게 할 정도였다. 당삼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소영의 왼손을 잡았다. "우리 저쪽 꽃밭으로 가요." 하늘에는 아직까지 짙은 먹구름이 깔려 있었지만 비는 그쳤고 가 끔 싸늘한 바람이 불어 와 두 사람의 옷을 뚫고 차갑게 스며들었 다. 당삼고는 옷이 젖어 있기 때문에 추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두 사람이 꽃밭으로 발을 들여 놓으려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돌연 한 줄기 붉은 빛이 하늘로 칠, 팔 척 가량 치솟는 것이었다. 그 물체는 공중에서 퍽! 하는 폭발음을 내며 터져 사방으로 불꽃 이 날렸다. 그러자 백화산장 근처는 마치 대낮같이 환하게 밝아졌 으며 곧이어 두 개의 등불이 허공에서 흔들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소영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표정을 짓자 당삼고가 그의 팔을 잡아 끌며 입을 열었다. "백화산장으로 침입하는 사람이 있나 봐요. 그들이 우리에게 시 비를 걸지 않는다면 우린 모른 체 합시다." 소영은 그녀에게 끌려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다그쳐 물었다. "낭자, 우리가 이곳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어떻게 모른 체 한 단 말이오?" "우리가 괜히 그들의 중간에 끼어 들어 손을 쓰게 되면 주조룡의 의심을 받게 돼요." 소영은 더욱 크게 의아심이 생겼다. "그건 왜 그렇소?" "주조룡은 우리가 백화산장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을 꺼려하고 있기 때문이죠." 소영은 그제서야 모든 것을 깨닫고 다시는 더 묻지 않았다. 당삼고는 등불이 사방으로 움직이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 보더니 소영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것이 무슨 신호인 모양이에요. 이곳을 침입한 사람들은 무공 이 퍽 높은가 봐요. 쉽게 격퇴되지는 않을 것 같군요." 그리고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았어. 저 침입자들은 아까 낮에 이곳의 지리를 눈에 익혀 두 었다가 야밤을 이용하여 들어 왔을 거예요. 아마도 저 망화루를 공 격할 것 같군요." 소영은 눈을 돌려 망화루를 쳐다 보았다. 과연 그 근처에는 점점 많은 불길이 모여 들고 있었다. 소영은 궁금한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망화루로 뛰어 가고 싶었지만 당삼고가 잔뜩 팔을 쥐고 있어서 어 떻게 할 수가 없었다. 소영이 고개를 돌려 막 입을 열려는데 건너편 꽃밭에서 자기를 부르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나리, 소나리."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의 음성이 들렸던 곳으로 다가섰다. 소영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은란과 금란이었다. 두 사람 모두 경장 차림인 것으로 보아 그들도 싸움터에 나가는 것이 분명했다. 금란은 소영의 팔을 잡고 있는 당삼고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 보더니 이내 부드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은란이 말을 이었다. "소녀들은 싸움터에 나갑니다. 재미있는 구경을 하시지 않겠어 요? 소녀가 모시겠습니다." 망화루 옆에서 사방을 훤하게 비추던 불빛이 서서히 꺼지자 소영 은 잔뜩 호기심이 생겼다. "주 둘째 장주께서도 말씀이 있었다니 우리도 구경이나 가 봅시 다." 그러자 은란이가 앞으로 몇 발 나서며 말했다. "나리께서 흥미가 있으시다니 저희들도 반갑습니다. 제가 길을 안내하지요."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재빨리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망화 루의 주위에는 여러 장한들이 제각기 예리한 무기를 쥐고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바로 초롱불 옆에 망화루를 올려다 보고 있 는 주조룡의 모습이 보였다. 은란은 걸음을 재촉하며 재빠르게 그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크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소 나리와 삼 낭자께서 오셨습니다." 주조룡은 소영과 당삼고를 반갑게 맞았다. "두 분의 흥취를 깨뜨려서 죄송스럽소이다." "천만에요. 그런데 이 산장을 침입한 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 까?" "이미 저 망화루 안으로 들어갔소이다." "주형, 어째서 그들을 막지 않았소?" "하하하... 그들이 저 망화루를 한 번 들어가 보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소. 저들의 마지막 소원이라 들어 주었소이다." 소영은 한 발 한 발 층계를 올라가며 주의깊게 사방을 살폈다. 일 층에 다다르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장한이 어깨에 큰 상처를 입 고 쓰러져 있었다. 주조룡은 혀끝을 몇 번 차더니 곧 걸음을 옮겨 이 층으로 올라 갔다. 이 층을 지키던 장한도 책상다리를 한 자세로 두 눈과 입술 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삼 층으로 뛰어 올라 갔다. 삼 층의 장한도 역시 어깨 에 상처를 입고 큼직한 기둥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 층의 장한도 전신에 칼을 맞고 넘어져 있었으며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은 마루바닥을 적시었다. 오 층에서는 창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 왔다. 주조룡은 소영의 소매를 잡아 끌면서 길을 재촉했다. "소형, 그 자가 지금 오층에 있는 모양이니 올라 가 봅시다." 소영은 쓰러져 있는 장한을 보자 그를 살려 주고 싶은 생각이 불 현듯 일었다. 그래서 그는 주조룡의 손을 뿌리치고 쓰러져 있는 장 한에게로 다가갔다. "이 사람의 상처가 몹시 심하니 우선 이 사람부터 구해 줍시다." 주조룡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품 속에서 조그마한 영단을 꺼내어 장한에게 먹였다. 소영은 오른손을 치켜 들어 그의 혈도 네 곳을 찍어 주었다. 잠시 후 그 장한은 상반신을 일으키며 감사의 눈빛으로 소영을 쳐다 보았다. "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누워 계시오." 소영은 그를 치료한 뒤 다시 오 층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혈투 가 벌어지고 있어 검꽃이 사방으로 튀기며 냉랭한 칼 빛이 두 사람 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육 층으로 올라 가는 층계의 입구에는 희고 긴 수염을 앞 가슴까지 내린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무표정하게 서 있었으며 그 노인의 옆에는 삼십 세 정도의 장한이 긴 칼을 움켜 쥐고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매우 침착하여 주조룡 일행을 보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앞만 바라 보았다. 그러나 옆에 있던 장한은 세 사람을 보자 대뜸 긴 칼을 휘두르며 길를 막아섰다. 주조룡은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안심하시오. 당신에게 손을 쓸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그 횐 수염의 노인은 냉랭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넌 그래도 무엇을 조금 알고 있는 놈이로구나." 이때 소영은 일행의 맨 앞에 있었다. 그 때문에 그 장한이 휘두 른 장검이 그의 가슴을 겨누고 닥쳐 왔다. 소영을 왼손으로 재빨리 축수(蓄修) 쟁지력(錚指力)을 쏟아 장한 의 검을 때렸다. 장한이 후려치던 장검은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 를 내며 건너편 벽으로 날아가 버렸다.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눈살을 조금 찌푸리며 굵은 음성으 로 입을 열었다. "음 대단한 일지탄공(一指彈功)이구려." 소영은 곧 그의 말을 받아 말했다. "일지탄공이 아니올시다." 그러자 그 노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소영의 무공에 놀라운 표정을 나타냈다. 그 장검 을 휘두르던 장한도 소영의 지력에 놀라 한동안 멍청하게 소영을 쳐다 볼 뿐이었다. 노인은 돌연 냉랭한 표정으로 모습을 바꾸더니 오른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마루 바닥에 내리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그의 외침은 마치 청천벽력과도 같이 실내를 뒤흔들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계속되던 요란한 싸움소리가 멎으면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맹렬한 싸움을 벌인 까닭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숨이 가빠서 헉헉거렸다. 한 사람은 이십 세 정도의 경장을 한 청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사십 전후의 장한으로 모두 장검을 움켜 쥐고 있었다. 청년 무사는 허리를 굽히며 노인에게 물었다. "스승님,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신지요?" 청년에게서 스승이라고 불리운 노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백화산장 내에는 고수들이 많아서 네 평생 아비의 원수는 못 갚게 되었구나." 그러자 그 청년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자식된 도리로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다니 말이 되옵니 까... 차라리 죽음으로써 아버님께 사죄를 하렵니다." 그리고는 장검을 들어 목을 찌르려고 하였다. 노인은 즉시 손을 뻗쳐 한 줄기 암경으로써 청년의 팔꿈치에 있 는 곡지혈을 때렸다. 그 청년은 손목이 저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검을 떨어뜨렸다. 노인은 위엄 있는 표정으로 청년에게 꾸짖었다. "네가 이 스승 앞에서 죽는 꼴을 보이려고 하느냐?" 노인은 음성을 가라앉히고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그 검을 집어라. 집으로 돌아 가자." 청년은 말없이 검을 집어 들고는 노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소영에게 예를 갖추어 물었다. "기협의 고명은 어찌 되옵니까?" "소생은 소영이라고 하오이다." 노인은 조금 놀라는 기색을 보이더니 곧 말을 이었다. "아! 소대협이로군요. 오늘 저녁의 가르침은 평생 잊지 않겠습니 다. 청천이 변치 않고 천지가 개벽을 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요." 노인은 지광이를 마루 바닥에 굴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 놓았 다. 주조룡은 길을 비켜 주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서는 천천히 가십시오. 밖에는 제 부하들이 세 분을 산 장 밖으로 모실 것입니다." 그러자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삼 년 안으로 꼭 다시 찾겠소." "좋습니다. 백화산장은 밤낮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으니 언제라도 찾으십시오." 노인은 얼굴 가득히 노기를 띠면서 소영에게 말했다. "내가 벌써 십여 년이나 강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으나 이미 소대협의 무공에 대하여서는 많은 소문을 들었소이다. 뜻밖에도 이 곳에서 만날 줄이야." 소영은 내심 생각되는 것이 있어 노인에게 다그쳐 물었다. "노형의 성함은 어찌 되십니까?" "강호의 무명 소졸이올시다. 내가 말해 보아야 소대협께서는 알 지 못할 것이오." "소생은 워낙 강호의 경험이 적어 노형을 알지 못합니다." "허허허... 소대협 말 한번 잘 하였소이다." 노인은 재빨리 층계를 내려 갔다. 세 사람은 마치 폭풍같이 순식 간에 소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주위가 조용해지 자 소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주조룡에게 물었다. "저 세 사람은 어떠한 인물이오?" "강호에는 미친 놈들이 많은 법이니 소형께서는 그냥 모른체 하 시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러니 소형께서는 그냥 모른 체 하시는 게 좋을 것이오." 옆에서 듣고만 있던 당삼고가 입을 열었다. "그 노인은 전설 중의 파협상대해(跛俠常大海) 같이 보이는데." 주조룡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 보면서 말을 받았다. "그런 이름은 생전 처음으로 들어 봅니다." 소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파협상대해... 그 사람은 협명을 가졌으니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 당삼고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미리 주조룡과 약속을 한 것 이 있어 짐짓 엉뚱한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그저 어머니에게서 그 분의 이름을 들었을 뿐으로 그 노인 이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주조룡은 그녀에게 회심의 미소를 던지며 그녀의 말에 덧붙여 입 을 열었다. "소형의 대명은 이미 무림을 뒤흔들어 놓은 터라 그 세 명은 사 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도망을 쳤을 것이오." 그는 힐끗 소영을 쳐다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세 명이 찾아 와 시끄럽게 하는 통에 소대협과 낭자의 단꿈 을 깨워 놓았구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 어서 편히 쉬시오." 소영은 그의 말대로 난화정사를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당낭자는 왜 비오는 한밤중에 나를 찾아 왔을까? 그 수염을 가 슴까지 내린 노인은 어느 파의 누구일까? 내가 보기에 악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청년은 어찌하여 망화루에 복수를 한다는 것일까?' 그가 정사로 들어서자 벌써부터 기다리던 금란과 은란이 반갑게 달려 오며 무릎을 꿇고 옷을 벗겼다. 금란이 귀엽게 웃으면서 소영 보다 앞서서 내실로 들어 갔다. "나리께서는 밤참 생각이 없으신가요?" 그녀의 물음은 애교가 넘치는 묘한 음성이었다. 소영은 과히 싫 지 않은 음성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아니오. 낭자나 어서 쉬도록 하시오." 금란은 손을 모아 예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지만 은란의 발은 움 직일 줄을 몰랐다. 그녀는 잠시 동안 그대로 서서 소영을 바라 보 더니 옆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나리 아무 염려 마시고 어서 주무셔요. 소녀가 여기서 나리를 보살펴 드릴 터이니...." "처녀 총각이 어찌 긴긴 야밤에 한 방에 같이 있을 수 있겠소? 낭자가 그곳에 있으면 내가 잠을 못 잘 것 같소." 은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원망스런 눈빛을 소영에게 보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무슨 이 야기를 하려다 그냥 나가 버렸다. 소영은 몸이 피곤했던 까닭에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 단꿈을 꾸 고 눈을 떠 보니 벌써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하여 온 방에 비쳤다. 그가 벌떡 몸을 일으키고 창문을 열어 젖히자 문 밖에서 두 시녀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나리, 밤새 안녕히 주무셨어요?" 소영은 방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안녕하셨소? 이곳 백화산장은 무슨 규칙이 이렇게 많소?" 은란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소녀가 나리 곁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으면 정주님께 꾸중을 듣 는답니다. 그러나 장주님의 지시보다도 소녀들은 나리를 위한 일이 라면 죽어도 웃으며 하겠어요." 소영은 더이상 시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내실을 빠져 나왔다. 상쾌하고 맑은 공기와 향기로운 꽃냄새를 맡으니 자연 심 신이 상쾌하였다. 어제 저녁의 먹구름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하늘 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보다가 언뜻 십삼 층의 망화루를 보 았다. 그러자 어제 저녁에 일어났던 사건이 떠오르면서 어제보다 더한 의문이 생겼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에 당낭자가 그 노인의 이름을 댈때 주조룡의 눈빛이 이상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는데... 그럼 당낭자도 주조룡과 한 패가 되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소영의 의문을 크게 사고 있는 것은 심목풍과 주조룡 의 관계였다. 그들이 형제지간이라고 하지만 주조룡이 심목풍을 대 하는 태도는 사제지간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여기까지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낭랑한 웃음소리 가 들려 왔다. "하하하... 소형! 더 주무시지 않고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시중 드는 두 계집애가 마음에 들지 않았소?" 소영은 내심 깜짝 놀라며 그 웃음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 다. 언제 나타났는지 소영의 등 뒤에 있는 조그만 나무 숲에서 푸 른 장삼을 걸친 주조룡이 천천히 걸어 오고 있었다. "주형, 밤사이 안녕하셨소이까? 저의 시중드는 시녀들은..." 이때 소형의 눈에는 금란과 은란의 모습이 들어 왔다. 이들과 오 척 정도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서 있는 그녀들은 소영의 다음 말을 두려운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소영은 그녀들이 측은하게 보였다. "아주 일을 잘 해주어서 더 바랄 것이 없었소이다." 주조룡은 만족스런 웃음을 띠며 소영에게 말했다. "대장주께서는 어제 저녁, 소형이 적을 물리쳐 주신 데 대해 감 사를 드리겠다며 소형을 모셔 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소영은 내심 대장주라는 인물이 괘씸하게 생각되었다. '그가 정말로 나에게 감사를 드린다면 직접 찾아 올 것이지 나보 고 오라고 그래?'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망화루를 향하여 걸음을 재촉했 다. 망화루로 가는 길에 주조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장주께서 몸이 불편하여 부득이 소형을 모셔 가는 것이오. 소 형은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마시오." 소영은 그의 간악한 수작에 감탄하였다. '이놈은 모든 일에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나를 떠보려는 구나' "주형께서는 혹시 대장주께서 왜 나를 부르시는지 알고 계시오?" "대장주께서는 망화루에서 신병을 고치려면 심신을 수양한 이래 아직까지 그곳으로 빈객을 모신 예가 없소이다. 소형께서 직접 대 장주를 만나 보시면 곧 알게 될 터인데 무엇을 그리 바쁘게 묻습니 까?" 망화루는 어제 저녁의 격투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끔 이미 말끔 히 치워져 있었으며 부상을 당한 장한들도 다른 사람으로 대치하여 놓았다. 주조룡은 소영을 데리고 곧장 십삼 충으로 올라 갔다. 십삼 층에 올라 가니 벌써 문 앞에 심목풍이 나와 있었다. 소영은 손을 모아 허리를 굽혀서 예를 올렸다. "소생을 부르심에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신가요?" 심목풍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소형께서 어제 저녁 우리 산장에 침입한 적을 물리쳐 주신 것을 감사드리려고 하오이다." "그런 사소한 일에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소영은 커다란 호기심으로 심목풍이 묵고 있는 내실 주위를 훑어 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동쪽 벽에 쳐 있는 여덟 자 넓 이의 황색 휘장이었다. 심목풍은 넓직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소영에게 건너편 의 자리를 권하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면서 소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주 이사람이 어제 저녁 소형의 기지와 높은 무공에 감탄하여 가 능하다면 소형과 손을 잡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길래...." 소영은 직감적으로 그들의 뜻을 알았으나 짐짓 되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주조룡이 대답해 주었다. "대장주께서는 소형과 굳게 손을 잡고 백화산장을 위하여 함께 일하자고 제의하셨소이다. 소형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소영은 미소를 던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인 아직까지 나이가 어리고 배움 또한 떨어지는데 어찌 선배 님들과 형제를 맺을 수가 있겠습니까? 소인은...." 주조룡은 소영의 말을 받아 다시 한 번 부드럽게 권하였다. "소형, 무엇을 그렇게 겸손해 하시오? 옛날에 유씨와 장씨가 도 원에서 손을 잡고 재난을 이겨 낸 이야기는 천고의 미담으로 잘 알 려져 있지 않소." 소영은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모든 의혹에 쉽싸여 생각에 잠 겼다. '심목풍과 주조룡이 오늘 따라 갑자기 내 무공을 치켜주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정말로 내 무공이 높아서일까? 나는 비록 삼위 이인에게 무공을 배웠지만 내가 지닌 무공의 높이가 얼마나 되는 지 아직 알지 못한다.' 소영이 생각를 잠겨 있는 동안 주조룡은 벽에 쳐있는 황색 휘장 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도원 결의의 화살이 정묘하게 그려져 있 었고 그 그림 앞에는 네 가지 색의 예품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조그만 계단처럼 만들어 놓은 자리에는 큰 술사발과 두 개의 붉은 초가 화상 양쪽에 꽂혀 있었다. 심목풍과 주조룡은 벌써 형제의 의를 맺을 준비를 하여 놓았던 것이다. 주조룡은 정색을 하며 소영에게 물었다. "소형께서 우리 형제를 믿으신다면 솔직하게 모든 이야기를 하여 주시겠소?" 소영이 심목풍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심목풍은 잠간 어두운 신색을 보였다. "형제의 의를 맺는 일을 어찌 강제로 하겠소. 소형 마음대로 하 시오." 두 사람의 쏘는 눈빛이 일제히 소영의 입으로 쏠렸다. 주조룡은 소형과 형제를 맺는 것을 무척 바라는 눈치였지만 심목풍은 태연한 표정이니 소영으로서도 그의 심중을 알 수가 없었다. 소영은 한참 동안 생각을 하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크게 헛기침을 하였다. "음! 두 분께서 이토록 소인을 추켜 주시는데 더 이상 사양을 하 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주조룡이 손뼉을 치면서 다그쳐 물었다. "그럼 소형께서는 승낙하는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는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형장께서 모든 것을 지도하고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아무 대꾸도 없이 무표정한 태도를 보이던 심목 풍이 만면에 희색을 띠며 입을 열었다. "소형제 안심하시오. 이제 우리는 생사를 같이 나누는 형제가 되 는 것이오. 형제의 일이라면 모두가 발벗고 나서서 일하겠소." 그가 말을 끝내고 손뼉을 가볍게 두 번 치자 흰 옷을 입은 소녀 가 다가와 붉은 초에 불을 붙이고 사라졌다. 심목풍은 향을 하나 집어 들고서 촛불에 대고 불을 붙였다. 그리 고 향긋한 냄새를 짙게 퍼뜨리며 타고 있는 향을 금향로에 꼽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표정은 매우 위엄이 있어 보였으며 두 손을 가슴께로 모으는 동작은 신중하였다. "심목풍은 올해 사십팔 세입니다. 오늘 주조룡과 소영, 이렇게 세 명이 형제 결의를 맺겠습니다. 만약 마음을 달리 가지고 형제의 결의를 깨뜨리는 자가 있으면 천벌도 달게 받겠사오니 우리 형제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옷소매 속에서 예리한 비수를 꺼내어 팔목 을 베었다. 그리고 흘러 나오는 피를 술잔에다 섞으며 고개를 돌려 주조룡과 소영을 재촉하였다. "형제들도 맹세를 하시오." 두 사람도 역시 심목풍과 똑같은 방법으로 팔목에서 피를 내어 술잔에 섞었다. 심목풍은 세 사람의 피가 섞인 술잔을 들어 먼저 서슴없이 마시고는 주조룡과 소영에게 돌렸다. 심목풍은 기분이 매우 좋은 듯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우리는 이제 형제가 되었으니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전부 터 놓고 이야기하세." 소영은 언뜻 악소채가 생각났다. "소제가 지금 한 가지 어려운 일에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심목풍이 다그쳐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 형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것도 하겠다 고 약속하지 않았나." "두 사람의 행방을 찾고 싶어서요." 주조룡은 항시 눈치가 빨라 상대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인데? 이름을 대야 큰 형님께서 대답을 하실 게 아닌 가?" "중주이고를 찾아 보려고 하는데요." 소영의 좁은 소견으로 볼때 악소채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은 오 직 중주이고뿐이라고 믿었다. 심목풍은 큰 눈을 껌벅거리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 년 전에 중주이고들이 자취를 감추자 강호 사람들은 그들이 죽었거나 많은 재화를 모아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들 믿고 있네. 허 나 내 눈은 절대 못 속이네. 그들은 여전히 강호에 떠돌아 다니면 서 기묘한 약물을 이용하여 모습을 다르게 바꾸고 있을 뿐이지." 그는 말을 끊고 소영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소영이 귀를 기울이 고 듣는 것을 보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중주이고가 얼굴을 바꾸고 강호에 나타난 것은 분명 그들이 무 엇을 찾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큰 손해를 입어 수십 년 동안 자기들 이 쌓아 놓은 명성이 손상될까 두려워 암암리에 적을 찾고 있는 것 일 테지." 주조룡은 호기심이 생기는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중주이고는 우리 백화산장과 어떤 거래가 있었나요?" "아니야. 과거에 몇 번 만난 적은 있었지만 마음이 맞지 않아 서 로가 서로를 건드리지 않기로 하였지." 소영은 조금씩 의문이 풀려 연거푸 물었다. "큰 형님께서는 지금 중주이고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심목풍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근 이년 동안을 백화산장 밖으로는 한 발도 나가지 않았다 네. 그래서 지금 강호의 사정과 중주이고의 행방에 대하여서는 전 혀 모르고 있지. 하지만 이 형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주이고의 행방을 찾아 삼제에게 실망을 주지는 않겠네." 소영은 그의 말이 무척 고마왔다. "감사합니다. 큰 형님....." 심목풍은 소영의 말을 끊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삼제가 중주이고를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영이 대답을 못하고 얼마 동안 얼굴을 붉히며 쩔쩔매자 심목풍 은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일을 열었다. "자, 이제 형제들은 돌아 가도록 하지. 난 이제부터 행공을 할 시간이니까...." 주조룡은 망화루를 내려 오면서 소영에게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하려는 눈치였으나 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소영을 난화정사까지 바 래다 주었다. 그는 난화정사로 돌아 와서도 그칠 줄 모르는 의혹 때문에 배고 픈 줄을 몰랐다. 18. 산 사람의 재기(再起) 소영은 여러 가지 잡념을 잊으려고 냉수도 마셔보고 운기도 조식 하여 보았지만 여전히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권주성의 주막에서 팔수신룡 단목정이 주조룡을 해하려던 일이 새삼 생각났다. 그때 얼굴이 예쁘장하고 몸매도 날씬한 소녀가 소 영에게 보냈던 원한의 눈빛과 격노한 표정 등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리고 어찌하여 파협상대해 같은 점잖은 도인이 백화산장과 원 한을 맺었을까?' 이같은 모든 의문이 구름처럼 가슴 속 깊이 파고 들어 좀처럼 쉽 게 사라지질 않는 것이었다. 이때 내실의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당삼고가 사뿐히 들어 왔다. 소영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침실에는 손님이 들어 오실 데가 못 되오니 우리 밖으로 나갑시 다." 당삽고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예절이 그렇게도 많아요? 밖이든 안이든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지장이 있어요?" 그녀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내실을 나와 정원으로 나섰다. 그 녀는 소영이 뒤따라 나오자 대뜸 정색을 하며 물었다. "오늘 아침에 망화루에 갔었지요?" "낭자는 그것을 어떻게 알고 계시오?" "제가 우연한 기회로 당신이 그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우연히 보 았지요. 어째서 아침 일찍 심장주가 당신을 불렀어요?" 당심고는 맑은 눈동자로 소영을 빤히 쳐다 보았다. "그분은 나보고 의형제를 맺자고 하였소." 당삼고는 놀라는 얼굴로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래서 응낙하셨어요?" "그가 자꾸만 권유하기에 어쩔 수가 없었소." "응낙하셨군요?" 당삼고는 얼굴 가득히 실망의 빛을 띠며 고개를 돌렸다. "사제지간은 부자와도 같은 관계이며 결맹한 의형제는 살아 있는 동안 모두 큰형의 명령을 들어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제 당신 은 심목풍과 주조룡의 명령을 받게 되었으니 당신의 앞날이 걱정되 는군요." 소영은 마음이 꺼림칙하였다. "만일 그들이 시키는 일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그만 아니겠소." 당삼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려 인기척을 살피고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심목풍이 사람을 죽이라고 시키면 가겠어요?" "그거야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를 알아 본 후에 ......" 당삼고는 소영의 귓전 가까이 입을 대고 말았다. "만일 좋은 사람이라면?" 그녀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소영은 다시 마음 속 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악인이 된 것 같은 열 등감이 생겼다. 당삼고는 그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못하자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당신이 심목풍에게 명령받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 쁜 사람인지 분별하지 못할 때에는?" 소영의 가슴은 이제 방망이질을 하듯 크게 두근거렸다. 당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서로 아는 사이인데 당신이 보기에는 제가 좋은 사람같 아 보여요. 아니면 나쁜 사람으로 보여요?" 소영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날카로운 눈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소생은 낭자와 오래 사귀지는 못하여 감히 망언을 할 수가 없구 려." "그럼 두 의형이 지금이라도 당장 제 목을 베어 오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런 것은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라....." 소영은 입술을 꽉 깨물며 재빨리 걸음을 옮겨 정원을 나서려 하 였다. 그러자 당삼고가 황급히 달려 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옷자 락을 붙들었다. "안 돼요. 어디를 가겠다는 거예요?" 소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면서 대답했다. "내 망화루로 가서 그들에게 확실한 것을 물어 보겠소." "그에게 물어 보기 전에..." 당삼고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입에 가져 가며 말했다. "쉬! 누가 오고 있어요." 소영은 그대로 서서 인기척이 나는 곳을 바라 보았다. 과연 경장 을 한 한 무리의 장한들이 이곳으로 몰려 오고 있었다. 그 장한들 은 난화정사에 가까이 다가와 한 줄에 다섯 명씩 다섯 줄로 줄을 지어 섰다. 그중 맨 앞에 서 있던 다섯 명이 소영에게 다가 왔다. 소영은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당삼고에게 물었다. "저 사랍들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오?" "긴장할 것 없어요. 당신을 잡으러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 가 저들을 맞이합시다." 두 사람은 난화정사의 외실로 들어 갔다. 잠시 후 다섯 명의 장한들이 차례차례 들어 서더니 일제히 예를 올렸다. 그리고 그 중 제일 왼쪽에 있던 장한이 정중하게 입을 열 었다. "소인들은 명을 받들고 셋째 장주께 왔습니다." 소영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무슨 일이오?" 이번에는 제일 오른쪽에 있는 장한이 대답했다. "저희들은 명을 받들어 죽을 때까지 세째 장주를 모시게 되었습 니다." 소영은 애매한 생각이 들어 그 자에게 다그쳐 물었다. "누구의 명을 받았소?" "둘째 장주께서 대장주님의 전갈이라고 저희들에게 명령하셨습니 다." 소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고는 손을 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우선 물러가 있소. 내가 둘째 장주를 만나 본 뒤 결정 짓겠소." 다섯 장한들은 일제히 예를 올린 후 질서있게 밖으로 나갔다. 소 영은 그들이 전부 밖으로 나가자 눈길을 돌려 당삼고에게 물었다. "삼낭자, 저 사람들이 왜 이곳에 왔을 것 같소?" 당삼고는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뻔한 일이지요. 당신은 이미 백화산장의 세째 장주가 되었으니 당신을 보호하고 수행할 사람들이지요. 다섯 사람 모두 내, 외공을 전수받은 고수들이에요." 이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금란이 차 쟁반을 들고 들어 왔 다. 그녀의 눈빛은 매우 싸늘하게 당삼고를 쏘아 보고 있었다. 당삼고는 모르는 척하고 다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제 말에 대답을 너무 빨리 하셨다고 생각되면 저를 따라 오시지 않겠어요?" 그리고 재 빨리 전음지술의 술법으로 속삭였다. "저 시녀가 저에게 의심을 가지고 있나 봐요. 그러니 당신은 지 금 제가 둘러댄 말에 맞장구를 쳐 주세요." 소영은 이렇게 당황해 하는 그녀가 도리어 이상스러웠다. '삼낭자는 심목풍을 보고 난 후부터 백화산장에 대하여 잔뜩 겁 을 집어 먹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금란이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서 찻잔을 내밀었다. "셋째 나리, 차 드십시오." 소영은 그녀가 내미는 찻잔을 받으며 물었다. "어째서 나보고 셋째 나리라고 칭하는 거지?" 금란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냈다. "잘 알고 계시면서 물으시네요. 백화산장에서는 벌써 나리께서 대장주와 의형제를 맺은 것을 벌써 다들 알고 있사옵니다."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금란이 재빠르게 다음 말을 이었다. "둘째 장주께서 이미 가호로 이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으니 조금 있으면 모두 모여 들어 커다란 잔치를 벌일 것입니다." 소영은 잔치를 벌리게 된다는 말에 의아심이 생겨 금란에게 물었 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잔치까지...." 금란이 대답을 하려는데 돌연 문 밖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 더니 주조룡이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그런 대사를 어찌 경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거만한 걸음으로 소영의 앞에까지 다가오더니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을 꺼냈다. "삼제, 큰 형님께서는 자네를 크게 아끼시는 마음에서 강호의 무 림 고수들을 비롯으로 초청하여 일차 영웅대회를 열어 삼제의 명성 을 하루 아침에 알리려고 하시네." 소영은 점잖게 사양하였다. "저에게 무슨 재주가 있다고 그런 가분한 잔치를 열겠다는 것이 오?" "큰형님의 명이신데 어찌 동생되는 우리가 마다할 수 있겠소?" 주조룡은 이렇게 못박아 놓고는 옆에 있는 당삼고에게 눈길을 돌 렸다. "삼낭자의 조모님께서도 귀빈 중의 한 사람이시오." 당삼고는 가볍게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주조룡을 날카롭게 쏘아 보았다. "심대장주께서 우리 당가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니 무어라 감사 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에는 삼낭자도 조모와 같이 참석하여 주시오." 당삼고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다그쳐 물었다. "둘째 장주께서는 저를 쫓아 내려는 것입니까?" "원 천만의 말씀을...." 당삼고는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 형제께서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시려나 본데 저는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주조룡과 소영은 그녀를 문 밖까지 배웅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 다. 주조룡은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큰형께서는 높은 무공을 연마하시다가 불행히도 역효과를 내어 강호에서 발을 뗀 지 꼭 칠 년이 되었지. 이제 병도 낫고 무공도 완성하셨으니 그 기쁨이야 어떠하겠나? 더군다나 삼제를 얻었으니 백화산장이 생긴 이래 최대의 경사가 아니겠나?" "큰형께서 몸이 낫고 무공이 원만히 이루어지셨다니 정말 큰 경 사로군요. 그러나 소제가 의형제를 맺었다는 것은 대단치 않은 것 같은데..." 주조룡은 손을 흔들어 소영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삼제의 무공은 강호에서 아마 단 몇 명 밖에 적수가 되는 사람 이 없을 것이네." 갑자기 정사 밖에서 황급한 발소리가 들리며 떠들석한 인기척이 들려 왔다. 두 사람은 민첩하게 움직여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곳 에는 붉은 옷을 입은 장한이 검은 옷을 입은 동료를 부축하면서 정 원을 가로질러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흑의 장한의 왼쪽 어깨는 예리한 칼에 맞은 듯 상처가 나 있었고 그 주위에는 선혈이 낭자해 한눈에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주조룡은 제자리에 앉자 흑의 장한을 날카롭게 주시하였다. "삼제, 그를 눕히게. 우선 휴식을 취하게 해야 될 것일세." "이 사람은 어깨에 중상을 입어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 같소." 소영은 말을 끝내면서 오른손으로 장한의 등에 한줄기 열력을 뻗 어 상대의 명문혈(命門穴)을 자극시켰다. 잠시 후 소영의 심후한 내공을 받은 흑의 장한은 체내의 피가 순 환되는지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주조룡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고 얼마를 애쓰던 그의 입에서 모기소리 만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둘째 장주...." 주조룡은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다그쳐 물었다. "어떻게 해서 부상을 당하였나?" 흑의 장한은 안간힘을 다하여 말을 이었다. "소인... 강반의... 검에... 그만... 맞았습니다." 순간 주조룡은 그에게 바싹 다가서며 다시 다그쳐 물었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그 자는 소인에게 백화산장에 있는... 사람이냐고 묻고는... 다 시 대장주의 이름이... 혈령수... 심목풍이냐고... 묻더군요. 소인 은 그자의 말투가... 너무 거만하여 몇 마디 욕을 하여 주었... 습 니다. 그랬더니... 그 자가 갑자기 검을 뽑아....." "너는 그 자의 공격을 가만히 서서 받기만 하였느냐?" 흑의 장한은 몹시 괴로운 듯 얼굴을 크게 찡그리고 대답했다. "그 자의 검은 너무도 빨라 갑자기 검광이... 번쩍하더니... " "그 자의 일격에 당했단 말이냐?" "일 초도 못 되지요. 그가 오른손을 검으로 가져 가는 것을 본 순간... 검광이... 번....." 주조룡은 차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자의 인상은 어떻더냐?"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그는 무... 척 젊....." 흑의 장한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더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정신 을 잃고 말았다. 주조룡은 황급히 손을 뻗쳐 자신이 마시려던 찻잔 을 집어 들어 흑의 장한의 얼굴에 뿌렸다. 흑의 장한은 이내 희미하게 눈을 떴다. 주조룡은 기회를 놓칠세 라 다그쳐 물었다. "그럼 그자의 이름은 알고 있느냐?" ".....소.... 영이라고...." 주조룡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뭐라고? 소영이라고?" 흑의 장한은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몸을 뒤틀며 몇 번 몸부림을 치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소영은 흑의 장한의 얼굴을 헝겊으로 가려 주면서 주조룡에게 힐 난하듯 내뱉았다. "만일 주형께서 너무 조급하게 구시지 않고 그에게 운기를 조식 할 여유를 주었다면 혹 그의 목숨은 건졌을지도 모릅니다." "삼제, 그는 너무도 큰 상처를 입은 데다가 또 먼 길을 달려 와 서 출혈이 많았네. 그를 그대로 쉬게 하며 운기를 조식시켜 준다고 하여도 살아 날 가망성은 희박하였다네. 삼제의 말대로 하였다면 지금의 그 말도 미처 듣지 못할 뻔하였지 않았나." 소영은 그의 말을 듣고 내심 놀랐다. '주조룡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온화하고 인자한 것 같은데 마 음은 어쩌면 저렇게 악할까? 몇 마디의 말을 듣기 위하여 사람의 생명을 그렇게... " "삼제, 강호에 나서려면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되네. 옛말에 담 이 적으면 군자가 아니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못 된다고 하지 않았나?"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소제가 몇 마디 물어 볼 것이 있소." "무슨 말인가?" 소영은 그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조금 전에 혹의 장한이 소영이라는 이름을 댄 것 같은데, 그 소 영이 진짜 소영일지도 모르지 않소?" 주조룡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삼제는 소영이 아니고 가짜란 말인가?" "물론 소제의 이름은 분명히 소영이지만 그 자도 소영이라 하니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소." "세상에는 동명인이 많다네. 그런 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으니 삼 제는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소영은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소제는 지금 곧 강반(江畔)으로 달려 가 그 자를 만나 보아야 되겠소. 그자가 무슨 이유로 남의 이름을 쓰고 있는지 따져 보아야 겠소." 주조룡은 소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삼제, 갈 것 없네. 가 보아야 그는 벌써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 이니..... " "그럼 그 자가 우리 편을 죽인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으란 말이 오?" "삼제의 생각은 어떠한가?" 소영은 다시 한 마디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자를 찾아야죠." 주조룡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삼제의 의견대로 하지!"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문 밖에 대기하고 있는 홍의 장한을 불렀 다. "이 시체를 아무도 모르게 묻고, 빨리 나와 삼제가 탈 말을 준비 해 놓아라." 소영은 그가 두 필의 말을 준비하라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며 의 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둘째 형도 가시겠소?" "삼제의 무공은 천하 제일이지만 강호의 경험이 적어 간계한 적 을 만나게 되면 크게 어려움을 당한 것일세. 내가 삼제를 따라 가 면 도움이 될 것일세." 그들이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 받은 사이에 장한이 잽싸게 뛰어 와서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리고는 앞장섰다. "두 분 장주님의 떠나실 준비가 다 되었사옵니다." 소영은 그들의 빠른 동작에 내심 감탄하였다. 주조룡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삼제, 이곳에는 모든 무기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삼제가 마음껏 말해 보게." "검을 쓰겠소." 주조룡은 앞의 장한에게 일렀다. "세째 장주께 보검을 한 자루 올려라." 그러자 그 장한은 꽃밭 사이를 지나 나는 듯이 사라졌다. 두 사 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산장의 대문으로 갔다. 그곳에는 벌써 십 여 명의 장한이 경장을 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주조룡이 그들을 보며 손을 흔들자 곧 홍, 황, 청, 백, 흑, 다섯 가지 색의 옷을 제작기 입은 장한들이 앞으로 달려 오더니 두 사람 에게 큰 예를 올렸다. 그는 만족스런 웃음을 띠며 소형에게 말했다. "삼제,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를 도와 주는 사람이 있어야 되네. 마치 붉은 꽃에 푸른 잎을 달 듯이 말이네." 그는 다섯 명의 장한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다섯 명이 제각기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모두 조를 표시하는 것이네. 일 조에 다섯 명씩 모두 이십오 명이니까 삼제를 돕기에는 충분하지 않는가? 큰 형님께서는 삼제에게 자신이 특별히 가르쳐 길러 낸 무사들을 맡기면서 삼제의 성공을 바라고 계시니 우리 힘껏 노력하여 큰형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도록 해 보세." 주조룡은 소영의 다음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계속 말을 이었 다. "우리 백화산장의 모든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무공을 지니고 있네. 태산북두(泰山化斗)와 같이 어렵게 보이는 소림사도 실은 절 안의 모든 군중이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 리도 그들에게만 미명을 빼앗길 수가 없어 암암리 준비를 해 온 것 이라네. 지금까지 삼제의 시중을 듣고 있던 금란과 은란 두 시녀들 은 산장 내에 어떤 시녀들보다 지혜와 무공이 뛰어난 계집이지. 훗 날 삼제의 뒤를 따르며 모든 계획이나 방안을 짜내어 삼제에게 많 은 도움을 줄 것일세." 그때 돌연 서쪽 담 모퉁이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한 필의 건장한 말이 일행이 있는 곳을 질주해 왔다. 그 말 등에는 흑 의 장한이 역으로 걸쳐서 사지를 땅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말 등 에 사지를 늘어뜨리고 걸쳐 있는 흑의 장한은 이미 죽어 있었다. 주조룡은 눈살을 잔뜩 찌푸르며 백의 장한에게 물었다. "어디를 다쳤지?" "눈썹 위에 치명상을 입었사옵니다." "그래? 그 자는 장내로 들여 보내고 우리는 빨리 길을 뜨자." 주조룡은 말을 끝내고 먼저 말에 올라 탔다. 이어 소영과 이십오 명의 장한이 모두 말에 올라 떠날 준비를 마쳤다. 소영은 주조룡의 곁으로 말을 몰아 다가서며 근심스럽게 물었다. "둘째 형, 우리는 단지 한 명의 적을 찾으러 나가는데 이렇게 많 은 인원을 데리고 간다면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오?" 주조룡은 말 위의 이십오 명을 한 번 훑어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그렇기도 하군. 그럼 삼제의 제안대로 몇 명만 대동할까?" 그는 고개를 돌려 옆에 오 조의 우두머리인 장한에게 명했다. "너희 다섯 명만 우리 뒤를 따라라." 다섯 명의 장한은 말 위에서 손을 모아 예를 올리고는 대기하고 있던 이십 명을 장내로 돌려 보냈다. 주조룡은 무엇에 쫓기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삼제, 어서 나가세. 우리 장내의 사람이 또 하나 죽었으니 이제 는 나도 더 참지 못하겠네. 필시 그놈이 이 근처에 있을 것이네." 소영의 뒤를 이어 주조룡과 다섯 장한이 달리니 그들의 위풍은 근처의 산을 뒤흔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들이 조그마한 숲을 지 나 평평한 골짜기에 들어 섰을 때 갑자기 주조룡의 외침이 들렸다. "삼제, 잠깐만 기다리게." 소영이 급히 말 꼬리를 잡아 당기니 말은 놀라 앞발을 높이 쳐들 며 멈추었다. "둘째 형, 무슨 일이 있소이까?" 다급하게 반문하는 소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조룡이 옆으로 다 가오며 왼쪽을 가리켰다. "저기 우리 장내의 첩자가 오고 있으니 그자를 만나보세."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를 보았다. 그는 머리에 갓을 쓰고 대나무로 만든 옷을 입은 어부 차림의 사나이었다. 그는 뽀얀 먼지 를 일으키며 계속 일행의 앞으로 질주해 오더니 귀신같은 솜씨로 달리는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는 땅으로 내려 서자 곧 주조룡에게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리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자는 삼유만에 있는 줄로 아뢰오." 그는 이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는 곧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그 러자 조금 전에 달려 왔던 말이 질풍처럼 달려 왔다. 그는 옆으로 지나치는 말에 가볍게 몸을 날려 올라 타고는 다시 어디로인가 사 라졌다. 소영은 첩자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쳐다 보며 생각했다. '음, 그 자는 비밀을 지키려고 하는구나.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몇 마디 말만 전하고는 다시 가 버리니... 더군다나 그의 말타는 재주 는 천하 제일이겠는걸.' 주조룡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삼제, 삼유만으로 가세."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길을 비켜 주면서 말했다. "둘째 형, 그 길은 좁으니 둘째 형이 앞장서시오." "하하... 삼제는 이런 곳에서도 양보를 하는가." 주조룡은 과히 싫지 않은 듯 회심의 미소를 띠며 앞장서 좁은 황 토길로 접어 들었다. 삼유만으로 가는 길은 좁기도 하지만 황토길 이라 말발굽에서 일어나는 뽀얀 먼지가 일곱 사람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누가 몇 명이 달리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얼마를 달리자 조그만 강이 나타났다. 주조룡은 말고삐를 다소 늦추며 손을 들어 강기슭에 있는 커다란 숲을 가리켰다. "삼제, 저곳이 바로 삼유만이라는 곳일세." "그렇다면 어째서 그 자가 이런 곳에 있을까?" 소영의 눈에는 흙탕물로 잔뜩 흐린 강과 진흙 구덩이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조룡은 소영의 어깨를 탁 치며 강둑에 있는 세 그루의 버드나 무를 가리켰다. 그 버드나무는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이제는 고목 이 되어 줄기의 반은 썩어서 애처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세 그루의 나무 중에서 가운데 나무 바로 밑에는 조그만 상이 놓여 있고 그 상에서는 향을 피우는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이때 잔잔한 바람이 그 연기를 날려 일행에게 다가 왔는데 그 냄 새는 아주 향기로운 것이다. 주조룡은 대뜸 입을 열었다. "향기다. 가까이 가보자." 일행이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상에는 맛있게 만들어 놓은 안주와 조그만 술병이 놓여 있었다. 소영이 말에서 내려 제사 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길이 상 위로 옮겨짐과 동시에 순간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상에서 얼마 높지 않은 나무 줄기에 조그만 판자가 박혀 있었고 거기에 몇 자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소영은 호기심이 일어 그 글을 읽어 보았다. <망제 소영 영패! 단장인 봉입> 그는 깜짝 놀라 뒤로 몇 발 물러섰다. "이 세상에 도대체 내 이름을 쓰는 자가 몇 명이나 되는 건가? 하나는 귀신 같은 칼 솜씨로 강호를 떠돌아 다니고 있어서 이렇게 그를 찾고 있는데 오늘 또 다른 한 사람의 제사를 보게 되다니..." 소영이 놀라며 당황하는 표정을 본 주조룡은 재빠르게 말에서 뛰 어 내리며 물었다. "삼제, 어찌된 일인가?" "나도 모르겠소." 소영은 비록 심목풍과 주조룡, 두 사람과 형제를 맺었지만 과거 를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소영이 악소채와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많은 수난을 당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주조룡의 머리가 아무리 총명하고 상대의 눈치를 간파한다 하여 도 소영의 숨은 과거 사건만은 알아 내지 못하는 터였다. 소영이 손을 뻗쳐 그 표를 떼려고 하자 주조룡이 가로막았다. "삼제, 떼지 말게. 강호의 암수는 어느 곳에도 있는 것일세." "저 영위에 무슨 암기라도 있단 말이오?" "그거야 내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조심을 기해야 될 것이네." 주조룡은 그 영위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삼제 이제야 알겠네. 이 영패는 벌써 몇 번 써먹은 것이네. 여 기의 못구멍을 보게, 자꾸만 빼고 또 박고 하여서 크게 자국이 나 있네." 소영은 그 말에 의외의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주 조룡이 손뼉을 탁 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삼제, 필시 상대는 이 영위를 찾으려 이곳에 나타난 것일세."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입술을 지 그시 깨물며 손을 뻗쳐 영위를 떼려고 하였다. 이때 일행의 등 뒤에서 맑고 낭낭한 음성이 들려왔다. "손대지 마시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주조룡을 향하여 한광이 번쩍 날아 들었다. 주조룡은 벌써부터 주위에 경계를 하고 있었으므로 별로 크게 당황 하지 않고 몸을 낮추며 오른손을 돌려 그 한광에 정면으로 녹광을 뻗쳐 냈다. 펑! 하는 광음과 함께 한광과 녹광은 허공에서 충돌하여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소영은 민첩하게 몸을 돌려 상대의 다음 공격에 대비하였다. 소 영의 눈에 들어 오는 상대는 이목구비가 청수하게 생긴 십오, 육 세 정도의 동자였다. 그 소년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언 제 뽑아 들었는지 장검을 움켜 쥐고 있었다. 백화산장의 다섯 장한 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돌연 나타난 적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그 소년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섯 장한을 쏘아 보고 있었다. 소영은 소년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강가에서 상팔의 장력에 맞아 강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이 문득 떠 올랐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잠시 손을 멈추시오!" 그리고는 몸을 날려 버드나무 줄기에 달려 있는 영패를 떼어 버 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소년은 오른손을 날려 세 개의 한광을 날리 며 동시에 장검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소영은 재빠르게 영패를 잡 아채면서 왼손을 뻗어 일장의 장력으로 그의 암기를 막았다. 그러 나 그 소년이 장검을 휘두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여 소영이 몸을 피해 내지 못하고 흠칫 놀라는데 돌연 주조룡의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그의 보검이 소년의 장검을 재빨리 막았다. 소영은 땅으로 내려 서고는 곧 영패의 뒤를 젖혀 보았다. <성화 십일 년 이월 이일. 소영이 이곳에서 빠져 중주이고가 제 사를 지내다.> 그는 눈을 감고 옛일을 더듬었다. '하여튼 저 소년은 내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니 나와 아무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그러나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니 그에게 자 세한 것을 물어 보아야겠다.'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그 소년과 주조룡은 몇 차례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막상막하여서 어느 누가 하수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청의 소년은 날카롭게 장검을 휘두르며 주조룡의 급소를 내려 쳤 으나 주조룡은 가볍게 옆으로 피하며 역습을 하려 하였다. 소영은 상대의 신상이 위태로운 것을 직감하고 그들에게 끼어들 며 크게 외쳤다. "둘째 형, 잠깐 멈추시오. 소제가 저 소년에게 몇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소." 주조룡이 옆으로 물러서며 길을 비키자 청의 소년은 장검으로 가 슴을 막고 몸을 솟구쳐 소영의 앞으로 날아 왔다. 그는 노기충천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빨리 그 영패를 돌려 주시오!" 소영은 그의 표정과 행동을 보아 영패가 그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고 생각하였다. "영패를 돌려 줄 터이니 내 물음에 거짓없이 대답하여야 된다." "그거야 당신이 묻는 말을 들어 보아야죠." "이 영패에는 소영이라는 이름이 씌어 있는데 너는 그 사람을 아 느냐?" 청의 소년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오." "그럼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 그의 제사를 지내지?" "제가 하는 것이 아니오." 소영은 그에게 한 발 바싹 다가섰다. "네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냐?" "우리 상공께서죠." "그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지?" 청의 소년은 자꾸만 다그쳐 묻는 소영이 괘씸한 생각이 들었던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말이 많소? 어서 영패나 돌려 주오." 그는 손을 뻗쳐 소영이 들고 있는 영패를 빼앗으려 했다. 소영은 어깨를 약간 움직여 뒤로 세 발 물러섰다. 청의 소년은 실패하자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장검을 휘둘렀다. 소영은 여유있는 웃음을 보내며 청의 소년에게 입을 열었다. "자, 어서 내 물음에 대답이나 하여라. 그러면 이 영패를 주겠 다." 소년은 소영을 한참 동안 쏘아 보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이리 주시오. 당신이 그 영패를 가지고 나를 놀린다면 당신을 포함해서 모든 일행을 죽이고 말겠소." 주조룡이 앞으로 썩 나서며 소년을 꾸짖었다. "조그만 놈이 겁도 없이 입을 놀리는구나." 소영은 더 이상 지체하면 다시 싸움이 붙겠다 싶어서 소년에게 영패를 건네주었다. 소년은 영패를 받아 들고 매우 기쁜 표정으로, "당신들은 내게 영패를 돌려 주셨으니 나도 좋고 당신들도 목숨 을 건졌소이다. 조금 후에 우리 상공께서 나오시면 내 당신들을 칭 찬하리다." 소영은 고개를 돌려 주조룡을 보며 말했다. "둘째 형, 이 일은 여러가지 의문점이 많소. 그러니 상공이라는 인물을 만나 몇 마디 물어 볼까 하오." 주조룡도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쾌히 승낙하였다. 소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청의 소년을 보니 그는 영패를 품 속에 넣으며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 "소제, 잠깐 물어 볼 말이 있네." 그러나 소년은 비호같이 빠른 걸음으로 강변을 향하여 질주해 가 는 것이었다. 소영은 노하여 큰소리로 소년을 꾸짖으며 뒤를 따랐 다. 주조룡도 소영의 뒤를 따라 강변으로 달려 갔다. 소년은 마치 태풍과 같이 강변을 달려 남쪽으로 사, 오 리의 거리를 두고 도망 갔다. 청의 소년이 커다란 바위돌을 넘어 조금 달리니 벌써부터 대 기하고 있던 조각배가 눈에 들어 왔다. 소년은 재빠르게 배에 오르 더니 곧 닻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가 배에 올라 서자 배 안에서 다 른 한 동자가 모습을 나타내며 노를 들었다. 소영은 그들이 닻을 올리고 다시 노를 젓는 사이에 그들의 배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 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려 조각배로 덮쳐 갔다. 노 를 들고 있던 동자가 소영에게 황소천군(黃掃千軍)의 일초로써 돛 대를 휘둘렀다. 소영은 몸을 움츠리고 머리 위로 스치는 돛대를 재빨리 잡았다. 그가 몸을 낮추며 돛대를 잡은 동작은 일순에 이루어진 것으로써 보통 사람의 눈으로서는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도 무척 빠른 사람인 지라 소영이 잡고 있는 돛대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 소영의 몸은 강물에 빠지게 되 었고 조그만 조각배는 그 힘으로 인하여 강가운데로 미끄러져 나갔 다. 소영은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려 돛대가 물에 닿 는 순간 돛대를 박차고 몸을 솟구쳤다. 그러나 배는 이미 강변에서 이미 강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 었기 때문에 소영을 미처 배 안으로 내려서지 못하고 강물에 빠졌 다. 소영은 센 물살을 주체하지 못하고 밑으로 떠내려 갔다. 그러 자 주조룡의 외침이 다시 들려 왔다. "삼제 이 줄을 잡게!" 그가 던진 밧줄은 정확하게 소영의 손을 휘감았다. 강변에서 주 조룡이 힘껏 밧줄을 잡아 당기자 그 여세를 이용하여 소영은 몸을 솟구쳐 간신히 강둑에 올라 섰다. 소영은 두 손을 불끈 쥐며 주조룡에게 물었다. "저 배를 쫓을 방법이 없겠소?" "그들이 배를 모는 여세로 보아 우리에게 배가 있다고 하여도 저 들을 쫓지 못할 것이네. 오늘은 이만 장으로 돌아 가세. 저들이 오 늘 하루종일 도망간다 하더라도 백 리 안에만 있다면 잡게 될 걸 세." 소영은 강변을 천천히 걸으면서 곰곰히 생각했다. '내 제사를 지내는 상공이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저 두 소년은 칼쓰는 무공과 돛대를 휘두르는 힘으로 보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배운 내가의 고수 같은데 어찌하여 내 제삿상을 준비하였을 까?' 여러 가지 생각을 굴리다가 힐끗 고개를 돌려 주조룡을 보니 그 도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주조룡이 입을 열었다. "삼제, 영패에 새겨진 소영이라는 이름은 분명 자네인가?"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그렇소. 중주이고가 써 놓은 그 영패는 분명 소제를 가리키는 것이오." 주조룡은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삼제, 무림의 인물 중에서 자네 제사를 이곳에서 지내 줄 사람 이 누구인가. 절세의 무공을 지닌 고수들은 별로 많지 않네. 소년 의 무공이 뛰어나고 처음 보는 초식을 쓰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한 번 기억해 보게." 소영은 쓴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림에서 소제의 제사를 지내 줄 만한 사람은 없는데..." 그리고는 돌연 무슨 생각이 났는지 걸음을 우뚝 멈추며 외쳤다. "둘째 형, 그 청의 소년은 혹시 무당 문하가 아닐까요?" "무당 문하는 천하에 정평은 있으나 지금처럼 그렇게 예리한 검 초는 쓰지 못하네." 주조룡은 소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자, 이제 골치아픈 생각은 그만하고 어서 장으로 돌 아가 피로나 푸세." 그는 둑으로 올라 와 먼저 말을 잡아 타고 오던 길을 되돌아 달 려 갔다. 19. 중주이고와 만나다 그 백화산장으로 통하는 큰길에는 평상시의 정적을 뒤엎고 연달 아 부산한 쾌마의 행렬이 오가고 있어 무엇인가 긴박한 사건이 벌 어진 듯했다. 소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둘째 형님, 백화산장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주조룡이 웃으며 대답했다. "큰 형님께서 수 년 간 휴양해 오다가 요즘 체력이 완전히 회복 되고 자네가 동맹을 하여 큰형님으로 하여금 무림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게 하였기에 특별히 쾌마를 보내 방방곡곡에 소식을 전하고 이 기회에 백화산장에서 영웅대회를 열어 셋째 동생의 가맹을 경축 하고 심목풍이 다시 강호에 나왔다는 것을 널리 무림에 알리려는 것이라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랬었군요. 그렇다면 큰 형님은 왕년에 강호에서 명성이 높았 겠군요?" "우리는 이미 생사를 함께 하기로 동맹을 맺은 형제이니 우리 백 화산장에 숨은 비밀을 자네에게만 굳이 감출 필요가 없겠지." 주조룡은 지그시 소영의 얼굴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동생, 큰 형님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큰 풍파가 일어나 그 일대 의 무림 인물들은 일찌감치 멀리 피했었다네." "그럼 이 몇 년 간 큰 형님께서 강호를 떠나 무림의 일에 전혀 관계치 않았던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나요?" 주조룡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큰 형님의 내공은 정심하거늘 어찌 병이 생길 리 있겠나?" 소영은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랬군요. 그럼 큰 형님께서 두문불출하신 것은 절기를 연마하 기 위함이었겠군요?" 주조룡은 소영을 적극적으로 믿고 있는 듯했다. 그는 담담히 웃 으며 대답했다. "큰 형님께서 통 나오지를 않았던 것은 물론 절기를 연마하기 위 함이기도 했으나, 사실은 그 기회를 이용해 부상당한 곳을 휴양하 기 위함이었다네." 소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휴양하다니요? 큰 형님이 누구에게 부상을 당했습니까?" "그것은 이미 십여 년 전의 일이니 그때 동생은 어렸을 때였네. 큰 형님이 비록 남에게 부상은 입었지만 그 싸움은 차츰으로 대대 적으로 강호를 진동시켰으며 비록 패하기는 했으나, 역시 영광스러 운 패배였다네." "큰 형님께서 암습을 당하신 겁니까?" 주조룡은 고개를 저었다. "큰 형님의 무공은 고강하고 이미 강기로서 호신할 수 있는데 누 가 그를 암습할 수 있겠는가?" "그럼 어찌 패했습니까?" "그 싸움에 참여한 고수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아홉 개의 큰 문파 중 네 파의 장문인들이 친히 고수들을 이끌고 상대하였었지. 또한 각처의 채주(寨主), 방주, 교주들이 상대했고 큰형님은 거듭 열 세 판을 승리하여 소림사의 나한삼승(羅漢三僧)과 무당파의 운양자, 종남의 등이협(終南鄧二俠), 그리고 아미(娥媚), 청성(靑城) 두 파 의 장문인을 격파하여 정말 온 천하를 놀라게 했고 나중에는 소림 사의 달마원주지 십방대사(達磨院主持十方公大師)에게 패배를 당했 지만 역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소영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평소에 들은 바로는 소림일파는 바로 무림안의 정대문파이거늘 큰 형님이 그 소림파와 싸웠다니 필시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닐 것이 다.....' 그는 번뇌로 가슴이 끓어 올라 더 이상 이 문제를 생각하기 싫었 다. 백화산장 안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충만되어 있었다. 각처의 화 수진(花樹陳)속에는 모두 무기를 휴대한 경장차림의 사나이들이 삼 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어 마치 대적을 맞이하는 듯하였다. 주조룡은 난초꽃이 가득한 호화로운 난화정사(蘭花情舍)로 소영 을 들여 보낸 다음 작별인사를 하고 나갔다. 금란, 옥란은 벌써부터 집 밖에 나와서 소영을 영접할 준비를 하 고 있었다. 그녀들은 소영을 상냥히 맞이하였다. 옥란은 한쪽 무릎 을 꿇어 소영의 신발을 벗겨 주며 공손히 말했다. "셋째 나리, 이 몸은 금란 언니와 함께 장주님의 명을 받들어 오 늘부터 셋째 나리를 모시고 시중들게 된 옥란이옵니다." 소영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게는 너무 과분한 처사로군." 옥란은 웃으며 말했다. "저와 금란 언니는 셋째 나리를 모시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여 기고 있습니다. 오늘부터는 나리 곁에서 모든 시중을 들어 분부대 로 거행하고 난화정사의 다른 손님은 접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 발 나리께서 이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천한 우리 자매에게는 다시 없는 영광입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애절한 갈망의 기색이 가득하였다. 소영은 가볍 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희들이 그다지도 나를 보살피려고 하니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 이다." 두 몸종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똑같이 말했다. "그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까?"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낯으로 그녀들을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어서 일어들 나거라." 소영의 부드러운 말과 태도에 그녀들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선뜻 일어서며 말했다. "나리의 은혜는 태산과 같사옵니다." 소영은 마음 속으로 여전히 강호의 영패(靈牌)에 대한 일을 궁금 하게 여기며 말했다. "나는 곧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하고 싶은데 별일이 없으면 깨우 지 마라." 이날 밤 이경쯤 되었을 때 소영은 흑색의 경장으로 차려 입고 스 승 유선자가 하사한 천 년 묵은 교피(蛟皮) 장갑을 끼고 적수공권 무기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가만히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그 두 몸종이 소영의 일거일동에 대해 모 두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을. 그가 방을 나서자 그 곳에는 이미 경장을 한 두 시녀가 검을 휴 대한 채 서 있었다. 금란이 그를 보자 곧 입을 열었다. "셋째 나리! 저희들도 수행하오리까?" 소영은 얼떨떨한 느낌으로 거절했다. 옥란은 등에 꼭 장검을 풀더니 소영에게 주며 말했다. "지금 이 백화 산장에는 풍운이 긴박하오니 나리께서도 무기를 휴대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괜찮다. 나는 다만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 나왔을 뿐이니 개의 치 말라." 소영은 곧장 산장 밖으로 나갔다. 화원 안에는 밤샘하며 경비하 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들은 모두 소영이 산장의 셋째 장주임을 알고 있는 터라 누구 하나 감히 그를 막지 못했다. 소영은 돌연 진기를 끌어 올려 곧장 삼류만(三柳灣)을 향해 줄달 음질치기 시작했다. 소영은 몸을 굽힌 채 살금살금 그 세 그루의 늙은 버드나무 밑으 로 접근했다. 그는 진기를 모아 버드나뭇가지 하나를 잡고 늘어지 더니 껑충 뛰어 올라 무성한 잎사이로 몸을 날렸다. 그곳에 몸을 숨긴 채 가만히 밑을 내려다 보았다. 그 금빛 향로 속에는 이미 향불이 꺼져 있어서 그동안에 사람이 오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소영이 계속 몸을 그 자리에 숨긴 채 한참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기미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 밤엔 나타나지 않을 것 같군...." 돌연 강에서 노젓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영은 흠칫 고개를 들었 다. 저만큼서 한 척의 작은 배가 쏜살같이 달려 와 순식간에 강변 에 이르렀다. 몸을 도사리고 자세히 바라 보고 있던 소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조금만 일찍 떠났더라면 배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배에 서 내려 둑으로 올라 왔다. 앞장 선 사람은 낮에 이곳에서 보았던 바로 청의 동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장검을 비스듬히 등에 매고 두 손으로는 영패를 받쳐 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역시 낮에 본 청의 동자가 고금을 받쳐 들고 바싹 따르고 있었으며. 제일 뒤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남색 장삼에 흰 신을 신었는데 오른손에는 접는 부채를 들고 있었다. 소영이 문득 눈길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번쩍하 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소영은 검은 그림자가 도대체 어떠한 인물 들인가 하고 몹시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배에서 내린 세 사람은 이미 나무탁 자 곁에 당도하였다. 제일 앞에 있던 동자는 선뜻 소영의 영위(靈 位)를 탁자 위에 걸어 놓고 세 가닥의 향불을 꺼내 불을 붙이더니 배향을 하고 향로에 꽃았다. 향을 피우느라고 불을 켰을 때 그 불빛에 비친 남색 장삼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나이는 이십 안팎이며 고운 얼굴 에 검날같은 눈썹이 지극히 준수하여 귀동자답게 우아하였다. 남색 장삼의 사람은 손에 들었던 부채를 내려 놓고 의복을 가다 듬더니 손을 모아 영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일 년 전에 이곳에 이르러 우연히 소영의 이름이 나무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일시적인 충동으로 소영의 이름을 함부로 빌려 썼사오니 소영의 영혼이 지하에서 이 일을 알고 계시다면 내 가 당돌하게 이름을 빌려 쓴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오." 소영은 그제야 납득이 가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하였 다. '이렇게 된 일이었구나. 나는 또 이 세상에 정말 소영이 또 있는 줄 알았지.....' 그 남색 장삼을 입은 사람은 계속 말하였다. "저는 비록 소형의 이름을 당돌하게 도용했으나 절대로 소형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을 자부합니다." 소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관없네! 다만 자네가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마음껏 내 이름을 사용하게나.' 남빛 장삼의 사나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고 이 영패를 갖고 이곳에 당도하여 소형께 제사를 지내는 바이오. 오늘이 칠 일째 되는 날이라 내일 아침에 저는 곧 이 영패를 가지고 떠나 그 부탁한 사람에게 돌려 줄 것이오. 제발 오늘 밤에는 나의 정성을 헛되이 하지 말고 소형 께서 영적을 나타내어 내게 한 말씀만 해 주시오. 부디 부탁한 그 사람에게 나도 이야기해 줄 수 있게끔 말이오. 아아! 소형!...' 남빛 장삼의 사나이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다시 말을 이 어 갔다. "소형! 당신께서는 이미 죽었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도 당신을 사 모하고 있는 낭자가 하나 있소이다. 그녀는 형씨를 위해 슬퍼하며 조석으로 형씨의 영패 앞에서 눈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오. 이것 을 형의 영혼이 알고 계신다면 역시 황천에서 고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오." 소영은 도대체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 고 있는 것일까 어리둥절했다. '언제, 누가, 나를 사모하는 아가씨가 있었단 말인가? ' 그 남색 옷의 사람은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소형을 사랑하는 그 낭자는 당신을 위해 애도하는 곡을 한 곡조 만들었다오. 오늘 밤에는 제가 이 곡을 연주하여 소형의 영혼을 위 로해 드리겠소이다." 곧 고요한 밤공기를 울리는 거문고의 구슬픈 가락이 흘러 나왔 다. 듣노라니 마디마디 신금을 울리는것이 마치 흐느끼는 것도 같 고 호소하는 것 같기도 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슬픔을 자아 냈다. 소영은 거문고의 구슬픈 가락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렸다. 구슬같은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렀다. 갑자기 그 애수에 젖은 소리가 뚝 그쳤다. 동시에 두 청의 동자 는 잽싸게 장검을 뽑아 들고 날카로운 눈길로 사방을 살폈다. 남색 옷의 청년이 퉁기던 거문고가 슬픔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갑자기 줄 두 개가 툭 끊어졌던 것이다. 연주하던 청년은 긴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소형의 영혼이 이곳에 당도하여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는가 보 군요." 그는 눈물을 닦으며 말하였다. "당신을 사랑하는 낭자는 단장의 슬픔을 새기며 이 유수단혼(流 水斷魂)의 한 곡을 만들어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오. 당신이 만약 지하에서 이것을 알고 계신다면 그녀가 당신만을 위해 일생 동안 애상에 젖어 세월을 보내게 내버려 두지 마시오." 소영은 그말에 크게 감동되었다. '이 사람은 제법 훌륭하군. 다만 남의 부탁을 받았을 뿐인데 어 쩌면 이토록 훌륭하게 일을 수행하고 있을까?' 그때 다시 그 청년의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당신을 위해 이처럼 상심하고 있는데 소형도 그녀를 좀 생각해 주어야 되지 않소이까? 만약 소형의 영혼이 약간의 영적을 보여 주어 나로 하여금 그녀의 신뢰를 받게 해주신다면 나는 비록 보잘것 없으나 일생을 통해 그녀를 도와 그 애상을 위로해 주고 싶 소.' 소영은 이제서야 이해가 갔다. '옳지! 이제 알고 보니 네가 애타게 내 영적을 바라는 것은 너의 사랑을 이룰 수 있게끔 하려는 수작이었구나.' 갑자기 남색 옷의 청년이 일어나더니 바닥이 온통 진땅인데도 불 구하고 꿇어 앉으며 말하였다. "저는 소형의 이름을 빌려서 저의 전력을 기울여 소형의 명성을 빛내고 만인들이 존경하며 세세대대로 접하게 하여 저도 영원히 소 형의 화신이 되고자 하오." 소영은 속으로 다시 생각했다. '너는 나를 위하여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닌데 무슨 소리냐?' 여전히 그 사람은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형께서 만약 나의 소망을 들어 주신다면 한 마디 말이라도 영 적을 보여 주십시오." 이때 아까의 두 그림자가 사방을 조사해 보고 돌아 와 그 사람을 좌우로 호위하고 섰다. 남색 옷의 청년은 두 동자에게 차가운 목소 리로 말했다. "너희들이 검을 뽑아 들고 마치 대적이나 상대하듯 서 있으니 소 형의 영혼이 왔다가도 놀래 도망을 가겠다. 어서 그 검을 거두지 못할까!" 두 동자는 그의 말대로 재빨리 검을 집어 넣고 땅에 꿇어 앉았 다. 문득 이런 생각이 소영의 머리를 스쳤다. '차라리, 시원히 정체를 나타내어 그 낭자가 누구인데 나를 사모 하고 있는가 알아 볼까?' 그가 미처 행동을 결정짓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느닷없이 멀 리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살그머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 었다. 탁자 앞의 세 사람은 소영의 영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 어서 그림자가 다가 오고 있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모양 이었다. 소영은 키가 훌쩍 크고 깡마른 그림자가 이미 그들 세 사람의 등 뒤에 당도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다가 온 사람은 행동을 늦추었 다. 그는 남색옷의 청년을 몹시 경계하는 듯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혹시나 세 사람을 놀라게 할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소영은 차츰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구해야 할지 또는 그대로 방관해야 할 지 순간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소리없이 다가 온 그림자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살기는 조금씩 더 증가되었다. 이때 강쪽에서 또다시 노젓는 소리와 함께 작은 배가 다가 오고 있었다. 세 사람에게 다가가던 깡마른 그림자는 그 소리에 흠칫 놀 란 걸음을 멈추었다. 이 급작스러운 변화는 소영을 몹시 당황케 하였다. 강변에 당도 한 작은 배에서 가냘프고 자그마한 사람의 그림자가 강변으로 내려 섰다. 자세히 보니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전신에 경장을 한 여자였 다. 등에는 비스듬히 장검을 메고 있었으며 땅에 내려서자마자 곧 남색 옷의 청년을 향해 달려 왔다. 소영이 순간적인 일이라 자세히 살펴 보니 그 검은 그림자는 납 짝하게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가? 두 번째 나타난 청장한 소녀의 출현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도망 갈 여유가 없었던지 그 검은 그림자는 졸지에 납짝하게 엎드리고만 있는 듯했다. 그 경장을 한 소녀는 일장을 내려 치며 소리쳤다. "내가 샅샅이 당신을 찾았으나 눈에 띠지 않더니 이런 곳에 숨어 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네가 이렇게 헛된 수작을 하는 바람에 소영의 영혼이 놀래서 도 망갔구나. 내가 여지껏 정성들여 기도해서 그의 영혼이 이제 곧 당 도할 것인데 너 때문에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경장의 소녀는 노기 띤 음성으로 소리쳤다. "무슨 잠꼬대야? 보아하니 귀신에게 단단히 홀렸구먼!" "설사 내가 귀신에 홀렸다 하더라도 네가 나서서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일순 경장의 소녀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더니 대뜸 소리 내어 울부짖으며 나무탁자를 걷어 찼다. 탁자 위에 놓인 향로와 고 금은 한꺼번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흩어졌으며 제사상도 나동그라 졌다. 소영은 그녀의 발길질을 보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 소녀의 무공이 제법인걸...' 옆에 섰던 두 동자는 넋을 잃은 듯 놀라서 자기의 주인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고금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도 몸을 날려 받으려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한 동자가 비로소 입을 열고 더듬거렸다. "도련님, 그 고금이...." 그러자 남색 옷의 청년이 말했다. "어서 집어 와라. 곧 떠날 테니." 동자는 황급히 달려 가서 그것을 집어 왔다. 다시 다른 동자가 말했다. "도련님! 소영의 영패도 가지고 가야 합니까?" 그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영패가 만일 없어진다면 너는 더 살 생각을 말아라!" 그 동자는 그만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소영의 영패가 고금보다 더 중요하다니 참 뜻밖이로군.' 그는 곧 몸을 날려 버드나무 앞에 떨어진 소영의 영패를 주워 왔 다. "그것이 누구의 영패냐? 어디 보자." 경장의 소녀가 동자에게 호통을 쳤다. 이 소녀도 매우 높은 신분인지 동자는 난처하여 영패를 받쳐 들 고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했다. 소녀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오냐! 너희들까지도 나를 우습게 아는구나?" 그 동자는 당황하여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아가씨 오해 마세요. 소인 어찌 감히 아가씨를....그러나 저는 감히 도련님의 승낙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청년은 잠시 망설이더니 차갑게 말했다. "그녀에게 보여 드려라!" 동자가 명령대로 걸어가 두 손으로 공손히 영패를 바쳤다. 경장 의 소녀는 그것을 받아 들고 힐끗 보더니 동자에게 물었다. "소영이가 누구냐?" "소인은 모릅니다. 도련님께 물어 보십시오." 경장의 소녀는 장검을 뽑아들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흥! 소영이고 나발이고 내 우선 두 토막을 내버리겠다!" 동자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아가씨 왜 이러십니까? 제발..." 경장의 소녀는 눈에 불을 켜며 따져 물었다. "이 소영이라는 자는 남자냐? 여자냐? 어서 대답해라." 동자는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아가씨께서 만약 그 영패를 두 토막내신다면 도련님께서는 분명 소인을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방금 도련님이 하신 말씀을 아가씨 도 들으셨지 않습니까?" "소영은 틀림없는 남자입니다!" 그러자 경장의 소녀는 선뜻 그 영패를 팽개치고 말했다. "흥, 남자 녀석이 뭐가 그렇게 진귀하다고...." 그 동자는 땅에 내동댕이쳐진 영패를 황급히 주워 들고 옷소매로 정성껏 흙을 털면서 천천히 주인 곁으로 다가 섰다. 남색 옷의 청 년은 영패를 받아 들고 냉랭히 말했다. "검동(劍童) 너는 영패를 보호하는 임무를 완수치 못했으니 그 죄를 어떻게 보상할 생각인가?" 검동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말했다. "소인,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좋아! 그럼 네 뺨을 스스로 때려라." 검동은 손을 들더니 찰싹찰싹 자기의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검동의 얼굴이 순식간에 퉁퉁 부어 올랐다. 그 경장의 소녀는 거북한 느낌이 들어 발을 동동 구르며 날카롭 게 외쳤다. "그만 둬라!" 검동은 잠시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 보다가 또 때리기 시작했 다. 경장의 소녀가 울부짖었다. "좋아! 당신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금동, 검 동 저 놈들까지도 합세하여 나를 업신여기는구나." 그 남색 옷의 청년은 선뜻 손을 들더니 말했다. "이제 그만!" 검동은 마침내 손을 멈추었으나 그의 양 볼은 비참하게 부풀었고 입가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경장의 소녀는 목놓아 한참을 울부짖었으나 남색 옷의 청년은 그쪽은 바라 보지도 않았다. 소영은 나무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 보며 슬며시 이런 생각을 했다. '보아하니 저들은 매우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구나! 그런데 어 째서 저 친구는 저렇게도 냉정할까? 저 여자도 매우 앙칼지지만 저 남자의 마음은 너무나 냉혹하구나.' 경장의 소녀는 한동안 울어 봐도 그가 위로해 주지 않자 더욱 소 리 높여 울어대며 욕설을 퍼부었다. "너희들은 바보같이 뭘 보고 섰어? 어서 멀리 꺼져 버려라!" 남색 옷의 청년은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곧 차갑게 대꾸했다. "좋아! 나더러 어서 꺼지라고?" 그들은 소영의 영패를 안고 작은 배에 오르더니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배가 정말로 사라져 버리자 그 소녀는 진짜로 서러운 듯이 엉엉 목놓아 울었다. 조금 전까지 울었던 것은 목적이 따로 있었던 지 날카롭고 듣기 싫은 것이었으나 아무도 보는 이가 없자 울음은 차츰 구슬픈 소리로 변했다. 소영은 갑자기 동정심이 생겼다. 그가 막 나무에서 뛰어 내리려 고 몸을 움직였을 때 이제까지 땅에 납작 엎드려 있던 깡마른 그림 자가 다시 소녀의 뒤로 다가갔다. 소영은 매우 긴장되었다. '이 여자가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간에 당당한 남자가 은 밀히 그녀를 암습하려는 것은 정당치 못한 행동이다. 이런 것을 어 찌 내가 강건너 불구경처럼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소영은 선뜻 버들가지 하나를 꺾어 그것을 세 토막을 내서 손에 단단히 들고 암암리에 내력을 운기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만약 그 깡마른 사람이 울고 있는 소녀에게 암습을 가한다면 곧 삼원연제(三元聯第)의 수법으로 그것을 던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어찌된 일인가? 사건은 크게 소영의 상상을 벗어나고 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깡마른 남자는 소녀의 등 뒤에 이르자 발을 딱 멈추고 입을 열었다. "낭자, 울지 마오." 그는 될 수 있는 한 음성을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듣기에 는 얼음장처럼 냉랭하였다. 소영은 이 음성이 귀에 익은 듯하다고 느꼈다. 그는 곧 그가 누 군가 열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경장의 소녀는 울음을 뚝 그쳤다. 그녀는 재빨리 일어서더니 몸을 돌려 검을 겨누고 수비하면서 그 다가온 깡마른 사람에게 냉 랭히 소리쳤다. "누구요?" 그러나 그는 조용히 말하며 두어 발 더 다가 섰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소." 경장의 소녀는 재빨리 장검을 떨쳐 한 가닥의 싸늘한 광채를 그 리며 말했다. "어서 비키시오! 더 이상 내게 다가 왔다가는 후회할 것이오. 내 보검이 무정하다고 탓하지는 마오." 그 깡마른 사람은 돌연 소리를 높여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오늘밤 나는 남자의 모든 일을 직접 보고 들었소." "당신이 보고 들었다는게 어쨌다는 거요?" "그 사람은 낭자에게 실로 지나치게 대하더군요." "그것은 우리들의 일이니 당신이 상관할 필요는 없소!" "그는 벌써 낭자를 자기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더군요. 만약 이것을 내가 강호에 널리 퍼뜨린다면 낭자는 앞으로 무슨 낯 을 들고 강호에서 활약하겠소?" 마침내 그 소녀는 소리를 빽 질렀다. "네가 감히..." "다 큰 처녀가 남자에게 사랑을 요구했으나 상대방은 거들떠 보 지도 않고 가버렸으니 이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구려. 하하하..." 그 소녀는 악을 쓰며 대들었다. "닥쳐! 네가 끝까지 이렇게 나를 희롱한다면 내 너를 한 칼에 죽 여 입을 봉해 버릴터이니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소영이 보기에도 그 깡마른 남자는 음침하고 험악하여 여러가지 수단으로 그녀를 누르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여자 역시 그를 죽여 입을 봉해 버리겠다니 독살스럽게 여겨졌다. 깡마른 사람은 냉소하며 말했다. "아마 낭자는 내 적이 못 될걸." 그러자 그 소녀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잔소리 마라!" 소녀가 검을 휘두르며 대들어도 그는 몸을 옆으로 살짝 돌릴 뿐 반격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낭자! 낭자가 만약 나와 함께 행동을 한다면 다시 찾을 수 있을 뿐더러 또한 무림에서도 대대적으로 기염을 토할 수 있어 곧 우상 으로 받들리게 될 것이오." 소녀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움 직였는지 장검을 다시 거두며 천천히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합작을 한단 말이오?" "낭자는 다만 나의 말대로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려 몇 가지 놀 랄 만한 일을 해 치우면 되오." 그녀는 다급하게 물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오." "소영!" 깡마른 사람은 한 마디로 대답했다. 버드나무 위에서 듣고 있던 소영은 커다란 충격을 느끼며 속으로 재빨리 생각했다. '좋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뜻밖에 날리는구나. 소영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신통할 줄은 몰랐는걸... 아까 그 청년이 빌려 쓰고 있을 뿐 아니라 이 경장의 소녀를 위협하며 또 내 이름을 도용하자 는 사람도 있는걸 보니....' "아까 그 사람도 소영의 이름을 빌려쓰고 있었소." "아까 그 사람이라니?" "바로 낭자의 정랑 말이오." 경장의 소녀는 깜짝 놀라며 부인했다. "그는 남옥당(藍玉黨)이라고 하오." "바로 그렇소. 그 남옥당이 소영의 이름을 도용해서 절세의 미인 하나를 유인해 냈으므로 낭자를 싫어하게 되었소이다." 그 경장의 소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다그쳐 물었다. "그 여자가 그렇게도 아름답게 생겼소?" "그렇구 말구요. 절세 미인이라오." 소녀의 물음에 깡마른 사람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대답 했다. "내가 비교해 보건데 하나는 봄의 난꽃이며 하나는 가을의 국화 로서 제각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남옥당의 눈으로 볼때 낭자 보다는 훨씬 예뻐 보일 것이오." 그 말에 그녀는 발끈 성을 내며 소리쳤다. "당신은 그도 아닌데 어찌 그가 보고 느낀 심정을 알고 있다지?" "뻔한 일 아니오? 만약 남옥당이 낭자를 더 예쁘다고 여겼다면 낭자를 버리고 그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지." 경장의 소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더니 냉랭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 기필코 그녀를 찾아내어 도대체 나보다 얼마나 예쁜가 봐야 겠군." "그 여자의 무공은 매우 높아 낭자가 설사 그녀를 찾더라도 그녀 의 적수가 되지 못할 뿐더러 낭자는 도저히 그녀를 찾을 수 조차 없을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녀를 알고 있소?" "그것보다도 낭자 우선 대답을 하시오. 나와 합작을 하겠소?" "나는 이대로 그녀를 찾아도 되는데 어째서 내가 이미 죽은 소영 의 이름을 빌려야 한단 말이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소!" 깡마른 사나이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좋소! 낭자가 정녕 싫다면 나 역시 억지로 권하지는 않겠소. 그 럼 이것으로 작별이오!" 그러자 그녀는 마음이 다급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자 다시 물었다. "당신은 아직 말을 완전히 끝내지 않았소!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 며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단 말이오?" 그는 냉소를 띠며 대답했다.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저 멀리 하늘 끝 세상 밖의 선경에 있을 것이며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면 또한 수시로 낭자 앞에 나타날 수 도 있지!" 경장의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낭자가 만약 내 말을 듣고 나와 합작한다면 우리는 각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제각기 이익을 볼 수 있죠? 옳지! 그 여자가 아름답게 생겼다니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는 모양이군." 깡마른 사람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는 취미는 많지만 유독 여색을 싫어하는 사람이오!" "그럼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는 다만 그녀의 몸에 지닌 한 가지 물건만 가지면 되오. 그러 니 그 외의 것은 낭자가 마음껏 처분해도 좋소." "그녀가 지닌 물건이란 무엇이오?" "너무 꼬치꼬치 묻는군. 합작을 않겠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물색 해야 되니 속히 확답을 하시오." 그녀는 길게 탄식하더니 대답했다. "좋소! 하겠소. 그러나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되오. 그녀를 죽이건 살리건 내 의사에 맡기는 것이오." "그야 물론이오. 나는 평생 동안 남들과 약속을 많이 해 왔으나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소." "그럼 여기서 잠깐 기다리시오. 내 가서 응용할 물건을 가지고 올 테니......" "잠깐! 내가 사전에 낭자에게 한 가지 다짐할 게 있는데 낭자도 이것을 잘 생각해 보시오. 그 여자를 찾아 내기 전까지는 낭자는 내 명령에 따라야 하오." 그녀는 그것을 승락하고 곧 몸을 솟구쳐 작은 배에 오르더니 노 를 저였다. 깡마른 사람은 그녀에게 소리쳤다. "낭자! 빨리 돌아 와야 하오. 나는 오래동안 기다릴 여유가 없으 니까." 그녀는 노를 저어 멀어져 가며 큰소리로 대답하며 사라져 버렸 다. "나는 내가 타고 온 큰 배에 가서 나의 일용품을 가지고 와야 하 며 또한 큰 배의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기다릴 필요없이 돌아가라 고 해야 하오." 깡마른 사람은 천천히 걸어가 강변으로 가더니 강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소영은 진기를 끌어 올려 살그머니 나무 위에서 뛰어 내려 깡마른 사람의 등 뒤로 다가갔다. 만일 소영이 그를 암습할 생각말 있었다면 손을 들어 쉽게 해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소영의 경공은 유선자의 전수를 받아 그의 몸 짓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기에 그 사람은 미처 깨닫지를 못 했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거리다가 부지중에 뒤를 돌아 보았다. 그는 뜻밖에도 자기의 등 뒤에 소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대적을 겪어 온 경험으로 위급한 시기에 임기웅변하는 수완이 비범하였다. 그는 오른손을 재빨리 세워 자기 의 앞가슴을 옹호하고 잽싸게 옆으로 석 자 가량 피하면서 냉랭히 외쳤다. "누구냐?" 소영은 침착한 소리로 대답했다. "소영이라 하오!" 깡마른 사람은 흠칫 놀라며 외쳤다. "뭣이?" "명실공이 진짜 소영이니 만약 나를 찾으려 한다면 굳이 남을 시 켜 가장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그 사람은 겨우 심신을 가다듬고 말하였다. "소영은 벌써 강물에 빠져 고기밥이 되었거늘 어찌 진짜 소영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나는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 나를 속이려 하 지마라." 소영은 냉랭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난 또 누구라고? 이제보니 바로 자네였군. 그래, 그동안 찾 을 길 없던 자네를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깡마른 사람은 더욱 놀라며 황급히 물었다.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아는가?" "누구는 누구야? 바로 중주이고의 둘째가 아닌가." 그는 말을 끊은 듯 멍청해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정말 오 년 전에 이 강물속에 빠진 소영이란 말인가?" 깡마른 사람은 얼굴을 쌌던 검은 복면을 선뜻 벗으며 말했다. "마침 잘됐군! 내가 바로 두구라네. 자네가 정말 죽지를 않았다 면 변장을 할 필요가 없으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군!" 소영이 다시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중주이고는 항상 그림자처럼 함께 행동을 하니까 아마 그 상팔 역시 이 부근에 와 있겠군, 그를 만나게 해주게나." "그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야. 그러나 중주이고도 항 상 남의 명령에 움직이질 않네. 더구나 자네가 진짜 소영인가의 여 부도 나는 아직 확인 못하고 있지 않나?" 소영은 다시 두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자네가 믿을 수 있나?" "자네가 그날 강에 빠졌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 보게나." "그야 어렵지 않지!" 소영은 곧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자 두구는 아 래위로 소영을 자세히 뜯어 보더니 입을 열었다. "과연 틀림없는 소영이구먼. 우리 형제는 자네 때문에 오 년 동 안이나 강호에 변장을 하고 다녔네. 하하하... 그러나 오늘부터는 떳떳이 나타나도 되게 되었네." "어서 나를 상팔에게로 안내하게... " "그렇게 조급하게 굴 것 없네." 소영은 노성을 질렀다. "내 마음은 지금 몹시 급하다네 기다릴 틈이 없으니 데리고 갈 것인가 안 갈 것인가?" 두구는 여전히 얼음장 같이 냉랭한 말투로 대꾸했다. "오 년 동안 자네는 아마 훌륭한 스승이라도 만났던 모양이군." 소영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시험해 볼 작정인가?" "물론 자네의 가르침을 받아 봐야지!" "그럼 우선 나의 일장을 받아 봐라." 그는 오 년 전에 중주이고의 무공이 공강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세는 비록 느렸지만 십분의 공격을 전개하였다. 쌍방이 팽팽하게 맞서자 소영은 장심에 모았던 잠력을 갑자기 내뻗었다. 두구는 소영과 접촉하는 찰나에 이미 그의 무공이 매우 놀랍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피하기엔 이미 때가 늦어 하는 수 없이 정면으로 그의 일장을 맞받았다. 한 줄기의 맹렬하기 그지없는 경력이 곧장 밀려 와서 두구의 몸 이 기우뚱하더니 절로 세 발짝 물러서 버리게 했다. 소영은 천천히 장세를 거두었다. 두구는 숨을 깊이 들여 마셔 단 전으로 보내며 복받치는 혈기를 억제하고 있었다.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저버리지 않는다더니 자네도 북천존자의 문하로 들어 가게 되었군." 소영은 급히 상팔을 만나려는 일념만으로 상세한 것은 물으려 하 지도 알고 다만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 두구의 뒤를 바짝 따랐다. 얼마 후에 두구는 한 외딴 초가집 앞에 당도하였다. 그 초가집의 대문은 꽉 닫혀 있었으며 집안에는 등불도 켜지 않 았는지 깜깜했다. 두구는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형님 계시오?" 이윽고 대문이 활짝 열리며 대나무 삿갓을 쓰고 어부차림을 한 흰 수염의 노인이 나타났다. 20. 장사꾼들을 아우로 삼다 흰 수염의 노인을 앞세우고 방안에 들어서자, 두구는 촛불을 켜 며 말했다. "형님 오늘부터 우리는 얼굴을 가리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소. 우리가 찾던 소영.... 그는... 죽지 않았소." 그가 왈칵 피를 토하고 방마닥에 쓰러지자 문을 열어 준 흰 수염 의 노인은 싸늘하고 번쩍이는 눈길을 소영에게 보내며 물었다. "자네가 정말 오 년 전에 강물에 빠졌던 소영이란 말인가?" 소영은 즉시 손가락을 뻗쳐 쓰러진 두구를 향해 쩍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흰 수염의 노인이 자기의 얼굴에서 흰 수염을 떼어 내자 혈색이 좋은 동그스름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쓰러진 두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자네가 상처를 입혔나?" "그렇소. 조금 전 강변에서 그와 일장을 겨루었소." 상팔의 얼굴에는 의혹의 기색이 서리며 재차 물었다. "단 일장에 자네가 그를 진상(震傷)시켰나?" "그렇소. 그러나 그의 상세는 본래 중상은 아니었소. 다만 그는 고지식해서 즉시 운공조식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곳까지 오는 동 안 혈기가 평온을 유지할 수 없어서 피를 토하게 된 것이오." 상팔은 몸을 숙여 두구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우선 사람을 구하는 일이 시급하니 우리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세." 소영은 대문에 기대선 채 대꾸했다.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당신은 이제 도망가지 못할 것이오." 상팔은 자세히 두구의 몸을 관찰하고 나서 말하였다. "자네는 허공을 사이에 두고 혈(穴)을 찍을 수 있나?" "그게 뭐 대수롭다고....." 상팔은 한알의 환약을 꺼내 두구의 입속에 넣어 주며 말하였다. "동생! 자네는 잠시 운기조식을 하게. 나는 소영과 이야기를 좀 나누어야겠네." 소영은 차갑게 대꾸했다. "서로가 생각이 틀리니 별로 이야기할 것도 없겠군. 오 년 전에 내가 당신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는군."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어 말했다. "자아, 어서 우리 악 누나가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 주시오." 상팔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의 무공은 실로 훌륭하네. 그러나 만약 정말 자네가 우리 형제를 죽이려고 해도 아마 실현은 되지 않았을 것일세. 소영은 노기를 띠고 상팔을 노려 보며 말했다. "그까짓 일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소. 묻는 것은 다만 나의 악 누나의 행방뿐이니까." 상팔은 고개를 흔들며 말하였다. "나도 모르겠네. 자네가 강물에 빠져 버렸음으로 인해 우리 형제 는 악소채에게 약속을 어긴 결과가 되버려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 지. 벌써 그녀를 본 지가 오 년이나 되네." 소영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만약 우리 악 누나가 무슨 변을 당했다면 당신들을 육시처참 해 도 내 마음 속의 한을 풀 수 없을 것일세." 소영은 잠시 상팔을 똑바로 노려 보더니 이어 말했다. "우리 악누나를 가둔 사람은 당신들이지? 내 말이 터무니 없진 않겠지?" 상팔은 솔직히 대답했다. "그래, 악 낭자는 내가 데려다가 안전한 곳에 모셔 놓았던 것이 네. 그때 우리 형제는 소영을 데리고 와서 그녀에게 상면시키고 그 금궁의 열쇠와 교환하자고 약속을 했던 것이네. 그런데 불행히도 자네는 물에 빠져 실종되고 우리 형제는 그 부근과 좌우 십리의 강 변을 오랫동안 찾아 보았으나 끝내 자네를 찾지 못했지. 우리 중주 이고를 강호에서 발을 내딛고 무림 친구들이 무게있게 받아 준 것 은 바로 일생 동안 남과의 약속을 어긴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지. 그런데 자네의 행방이 묘연해진 뒤 우리의 간판은 스스로 손상된 거나 다름없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네. 그러니 무슨 낯으로 돌아가 악소채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소? 잔말 말고 빨리 안내하오!" 상팔은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악 낭자의 비밀 거처에는 우리가 다만 반 년의 양식 밖에 마련 해 놓지 않았었는데 자네를 끝끝내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그녀 를 볼 낮이 없었다네. 그러나 그녀를 굻어 죽게 할 수는 없었기 때 문에 자네가 강에 빠진 후 오 개월만에 우리 형제는 변장을 하고 슬쩍 가 보았지. 양식이라도 보내 주려고....." 그의 말을 가로막고 소영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네들도 약간의 양심은 남아 있었군." 상팔은 마른 기침을 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우리 형제가 그 비밀 거처로 가 보았을 때는 이미 악 낭 자는 철장을 부수고 자취를 감추었더군! 우리 형제는 변장을 한 채 찾아 다녔지만 여전히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네." 소영은 마침내 냉랭히 말했다. "우리 악 누나를 찾기 위해서는 당신들도 관련이 깊으니 수고스 럽지만 나와 함께 가 주어야겠소."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백화산장! 앞으로 삼 년을 기한으로 만약 그 삼 년 내에 우리 악 누나를 찾을 수 있다면 물론 당신들 두 사람을 석방시켜 줄 것 이고...." 두구는 어느새 정신이 들었는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놀란 소 리로 외쳤다. "백화산장?" 소영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렇소. 백화산장으로 가자는 말이 뭐 그리 놀라운가? 만약 삼 년 안에 악 누나를 찾아 내지 못한다면 나는 두 분을 죽일 수 밖에 없소." 두구는 완전히 원기를 회복하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조금 전에는 자네를 얕보아 자네의 일장을 이겨 내지 못했 으나 역시 항복할 마음은 없네." 소영은 그를 노려 보며 되물었다. "그럼 한 번 더 시합을 해 보겠다는 말이오?" "물론 한 번 하지!" "이 방안은 너무 비좁군. 우리 밖으로 나가서 겨룹시다!" 상팔은 두구를 막으며 말했다. "잠깐! 설사 싸우더라도 역시 사전에 이야기를 분명하게 매듭진 다음에 하도록 하세." "무슨 말인데... 어서 말해 보시오." "자네는 그 심목풍을 잘 알고 있나?" 소영은 순간 망설였으나 이내 대답했다. "나와 동맹을 맺은 형님이오." "그는 어째서 자네를 제자로 삼지 않고 의형제로 맺었나?" "그런 일은 당신이 상관할 필요가 없소." "자네가 그 심목풍에게 무예를 배웠다면 물론 훌륭하겠지. 오 년 이란 세월은 별로 길다고 할 순 없지만...." 상팔은 소영을 잠시 바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설사 그가 전력을 기울여 가르치고 자네가 타고난 천부적 자질 로써 그의 전술을 힘껏 받아 들였다 할지라도 진력(眞力)과 내공 방면에서는 우리 형제보다 강하다고 할 수 없네. 일대 일로 싸운다 면 혹 자네가 이길 기회도 있겠으나 만약 우리 형재가 합세한다면 자네는 여지없이 패배를 당하고 말 것일세." 두구가 말했다. "그리고 설사 심목풍이 직접 이곳에 와서 우리와 싸운다 해도 백 초 이내에 우리 중주이고를 이겨 낼 수는 없을 것일세." 소영은 그들의 말을 듣자 언뜻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 두사람의 말투로 보아 심목풍 형님에 대해 몹시 두려워하는 듯하구나. 그리고 보니 형님의 명성은 과연 강호를 진동시켰나 보 다.' 상팔은 소영이 미처 입을 열 겨를도 주지 않고 말했다. "자네가 현재 처해 있는 형세를 잘 생각해 보게나. 내 말은 모두 자네를 위해서 하는 얘기일세." "내가 누구에게 무예를 배웠든 그것은 당신들이 상관할 바가 아 니오. 만약 내가 당신들을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조금 전에 강변에 서 두구를 죽였을 것이오." 두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슬그머니 속으로는 그것을 수긍하고 있었다. '말이야 틀림없지... 만약 그가 강변에서 나에게 몇 수만 더 공 격을 가했다면 나는 중상을 입은 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화를 당했을 것이다.' 이때 상팔이 조용이 말했다. "인기척이 나고 있다." 상팔이 재빨리 촛불을 꺼버리자 삽시간에 방 안은 암흑으로 변했 다. 모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밖의 동정에 신경을 썼다. 소영은 공력을 모아 경계하며 어둠속에서 안력을 최고로 발휘하 여 중주이고의 암습을 경계했다. 상팔은 문틈으로 밖의 동정을 가 만히 살피고 있었고 두구는 벽을 등지고 서서 한쪽 창문에 몸을 바 싹 붙였다. 그때 급히 다가 오는 발소리가 가까와지더니 다시 점점 멀어져 가고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왔었소?" "신풍방의 방주가 부하 고수들을 이끌고 왔었네." "신풍방주가 어째서 이곳에 갑자기 나타났을까?" "아마 소영을 찾고 있을 것이네." "나를 찾다니?" 두구가 대답했다. "그게 아니고 찾는다면 역시 그 가짜 소영을 찾는 것이지." "그 가짜 소영이 우리 형제마저 속였으니 생각하건데 그에게 속 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일세." "그들이 가짜 소영을 뒤쫓고 있는 것은 역시 그 금궁의 열쇠 때 문이오?" "금궁이 열리지 않는 한 소영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일세. 악소채의 행방이 묘연해진 이 마당에 그 소영이란 존재는 금궁의 열쇠를 추격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로 되었다네." 소영은 차디차게 웃었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게 그 악 누나의 행방을 추궁해야겠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네." 소영은 냉정하게 말했다. "여하튼 내가 물을 수 있는 것은 당신들 뿐이니 정녕 악 누나의 행방을 말하지 않겠다면, 하는 수 없이 백화산장으로 좀 가줘야겠 소." "만약 우리 형제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겠나?" "그것은 두 분이 결정할 문제가 아닌가?" 상팔은 웃으며 말했다. "매우 당돌한 말투로군. 우리 중주이고는 수십 년 간 장사를 하 여 겨우 인정받던 신용을 하루 아침에 상실하고 더구나 오 년 간이 나 변장을 하고 다닌 것만도 이미 상당히 밑지고 들어 가는 장사인 데 아직도 자네는 받을 빚이 있다고 생각하나?" "만약 악 누나를 찾을 수 없는 날에는 당신들 두 생명으로 보상 해야지." "장사는 본전을 따지는 데 자네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 "바로 이 한 쌍의 손으로서!" 상팔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거 좋군. 우리 형제도 물론 모셔 드려야지." "이 방안은 너무 비좁아 싸움에 지장이 있다." "북쪽으로 삼사 리쯤 가면 한 채의 황량한 절간이 있는데 우리 그리로 가는 것이 어떻겠나?" "빠를수록 좋으니 어서 그리고 가자." 소영이 이렇게 동의하자 상팔은 선뜻 뛰쳐 나가며 외쳤다. "내가 앞장 서겠다." 세 사람은 연방 솟구치며 질풍같이 북쪽을 향해 줄달음쳐 갔다. 상팔은 앞장을 서서 절간으로 뛰쳐 들어 가 곧장 대전 뒤의 음산한 넓은 뜰로 돌아 갔다. 뒷마당은 상당히 넓었으며 마당 한가운데만 둘레가 서너 길 되는 황토가 드러나 있었다. 상팔은 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방속에 두 개의 관이 놓여 있다. 만약 우리 형제가 자네의 손에 죽게 된다면 수고스럽지만 자네가 우리의 시체를 저 관속에 거두어 이 황토 흙 속에 묻어 주게." 소영도 상관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당신들에게 수고를 끼칠 일이 있소." "힘이 닿는 데까지는 처리해 주겠네." "만일 다시 우리 악 누나를 당신들이 만나게 되거든 내가 이곳에 서 죽었다고 알리지 마시오." 두구가 나서며 매정하게 대답했다. "우리 중주이고는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들어 줄 수 없다." 소영은 이들의 무공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만약 둘이 한꺼번에 덤빈다면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고 속으로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의 유언대로 행하는 것이니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좋아! 이것으로 우리의 거래는 결정됐네." "두 사람이 함께 공격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하나 겨루어 볼 건가?" 상팔은 두구를 쳐다 보더니 말했다. "내 우선 혼자서 가르침을 받다가 만약 소영이 정말 나를 격파할 수 있다면 우리 형제가 한꺼번에 합세하는 것이 어떨까?" 소영은 호기 있게 말했다. "좋소. 내가 중주이고의 합세한 공격을 두려워 했다면 감히 이곳 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오." "그럼 어서 공격을 하게. 우리는 둘이니까 우선 자네에게 삼 초 를 양보하겠네." 소영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잠깐! 또 한가지 사전에 분명히 해둘 게 있소." "무엇인가? 귀를 씻고 경청하겠네." "다름 아니라 당신들 형제는 일세의 명리를 위하여 지금 생사를 판가름하는 싸움을 벌리고 있지만 나는 지금 당신들을 죽일 생각은 없소. 만약 내가 다행히 당신들을 이긴다면 당신들의 생명은 남겨 둘 테니 나를 도와 악 누나를 찾는 일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여 주시오." 상팔은 큰 소리로 웃었다. "보아하니 소영 자네는 우리 형제를 이길 자신이 대단한 것 같 군!" "우리 형제가 만일 자네의 손에 일제히 패배를 당한다면 한평생 자네의 명령에 복종하겠지만 만약 우리 형제가 승리를 거둔다면 자 네도 역시 한 가지 일을 약속해야겠네." "무슨 일이오?" "자네의 악 누나를 찾은 후 우리를 도와 금궁의 열쇠를 얻어 내 야 하네." 소영은 선뜻 대답했다. "좋소! 조심하구려!" 소영은 재빨리 일장을 내뻗쳤다. 상팔은 몸을 옆으로 번쩍 날리 며 탈포양위(脫布讓位)의 일식으로 그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한 줄기의 거센 장풍이 그의 몸을 스쳐 옷자락을 펄럭이게 하자 그는 속으로 흠칫 놀라며 중얼거렸다. '요놈 봐라. 과연 장력이 센데.' 소영은 일격이 헛되자 곧이어 몸을 숙이며 앞으로 나와 두 손으 로 좌우를 일제히 협공했다. 이 일격은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상팔은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일식으로 몸을 살짝 돌려 다시 그 의 공격을 피했다. 소영이 번쩍 몸을 솟구치니 그의 쌍장은 마치 그림자가 형태를 따라 다니듯 바싹 접근해 와서 이번에는 잡아채는 듯한 수법으로 다섯 손가락이 상팔의 오른쪽 손목을 낚으려하자 상 팔은 적잖이 놀라며 암암리에 생각했다. '정말 잽싼 수법이군!' 그는 황급히 풍회약류(風廻弱柳)의 초식을 전개하여 발 끝에 약 간 힘을 주어 신형을 가볍게 솟구쳐 소영의 일격을 피해 갔다. 상팔은 비록 삼 초를 피해 냈지만 몸은 이미 한 길이나 밖으로 밀려 나 있었다. "이번에는 당신이 반격을 해야지?" "염려 말게." 상팔은 외치며 몸을 날려 앞으로 뛰쳐 나왔다. 그리고 오른쪽 주 먹으로 소영의 앞가슴을 노리고 공격했다. 주먹이 소영에게 접근하 자 갑자기 다섯 손가락을 짝 펼치더니 신룡탐조(神龍探爪)의 초식 으로 변화시켜 소영의 어깨를 낚아 챘다. 소영은 몸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다만 어깨를 살짝 피하고 오른손을 번개같이 제쳐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 잽싸게 어깨를 향 해 지풍을 발했다. 상팔은 아연실색하여 물러서며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난화불혈수(欄花拂穴手)!" "맞았소! 과연 견식이 넓구려." 소영은 왼손을 다시 뻗쳐서 다섯 손가락을 꼿꼿이 펴고 어깨를 향해 공격을 가했다. 상팔은 함부로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경도열안 (驚濤裂岸)의 일초를 기합소리와 함께 내리쳤다. 소영은 이미 예측한 바 있어서 대뜸 오른손을 휘둘며 그 일장을 맞받고 왼손은 비스듬히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빼고 나머지 손가락 을 반쯤 굽혔다가 가볍게 퉁겨 내며 상팔의 왼쪽 어깨의 결분(缺 盆) 당문(黨門) 중부(中府) 삼혈(三穴)을 향해 찍었다. 이 난향사사(蘭香沙射)의 일초는 역시 십이난화 불혈수(十二蘭花 拂穴手)중의 절초로써 상팔은 강적과 많이 상대해온 사람이었지만 이것만은 곧 웅변할 겨를이 없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그의 오른손 은 이미 소영의 장력과 정면으로 접촉을 하고 있었으므로 피할 수 조차 없었다. 다급한 나머지 대뜸 진기를 끌어 올려 왼쪽 어깨를 힘껏 내려서 공격을 뿌리쳤다. 그의 응변은 신속했지만 한 발 늦어 중부혈을 소 영이 퉁겨낸 지력에 명중당했다. 두구는 상팔이 당한 것을 보자 그를 즉시 돕지 않는다면 삼초 안 에 곧 패배할 것이라고 직감했다. "나의 일장을 받아라!" 그들 중주이고는 소영과는 정반대로 싸울수록 마음이 더욱 설레 었다. 두구가 먼저 소영의 번개같은 장법에 휘말렸다. 그는 재빨리 오른손으로 비스듬히 폐문추월(閉門推月)의 일 초를 뻗어 내어 소 영의 맹렬한 장세를 봉쇄하려 하자 뜻밖에도 소영의 왼손은 빈틈 을 이용하여 두구의 앞가슴을 공격해 왔다. 두구의 방비는 허술하여 이 일장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 불가 피하게 뒤로 물러서며 피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소영은 두구의 앞가슴을 향해 뻗쳐 오던 장세를 갑자기 거두며 왼손을 날쌔게 제쳐 불혈수를 전개하더니 오른쪽 어 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구는 비노와 소락의 두혈도가 대뜸 절단 되는 것을 느꼈으며 오른팔의 힘이 곧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상팔은 몹시 놀란 나머지 돌연 백조조봉(白鳥朝鳳)의 일장을 뻗 쳐 내어 무수한 장영(掌影)을 형성하여 소영의 머리를 향해 번개같 이 덮쳐 내렸다. 소영은 대적한 경험이 없어 상대방의 장세가 내습하는 것을 보자 약간 당황했다. 그는 몸을 재빨리 돌려 피하며 왼손으로는 만천성 두의 일초로써 공세를 봉쇄해 버렸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로 상팔의 장세에 오른쪽 어깨를 명중당하고 말았다. 소영은 장산패(莊山貝)에게 건청기공(乾淸氣功)을 전수받아 호신 강기를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상팔의 일장이 어깨에 적중 하자 즉시 한 가닥 반진(反塵)의 힘이 솟아 올라 그는 부지중에 외 쳤다. "호신강기(護身强氣)!" 소영이 스스로 놀라 왼손으로 일격을 찍어 내자 수라의 지력(修 羅指力)은 물줄기 같이 뻗혀 나와 상팔의 천지대혈(天地大穴)을 명 중시켰다. 그러자 상팔이 몸은 두어 번 휘청거리더니 그만 쓰러지고 말았 다. 이것을 본 두구는 경악하여 외치며 상팔에게 달려갔다. "형님!" 그의 오른손은 마비되어 힘을 쓸 수 없었기에 왼손을 잡아 일으 켰다. 소영도 오른쪽 어깨에 상팔의 일장을 맞아 뼈가 으스러질 듯 아팠다. 그의 호신강기는 다만 삼분 정도의 경지밖에 터득하지 못하여 이 일전에서 세 사람은 모두 부상을 입었다. 그 현문의 강기는 무림의 지고하기 그지없는 절학이었으므로 중 주이고는 소영이 정녕 강기로서 호신을 하였으니 부상당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영은 암암리에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함부로 그를 움직이게 하지 말게. 그는 나의 수라지력을 맞았으 니 자네가 구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 상세를 완화시킬 수 없을 뿐 더러 오히려 그의 생명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일세." 두구는 안색이 금시 변하여 신음하듯 외쳤다. "수라지력?" 두구는 상팔을 가만히 내려 놓고 천천히 물러섰다. 소영은 공력을 운공하여 아픔을 참으며 한편으로는 유선자에게서 전수받은 독자적인 수법을 전개하여 상팔을 위해 수라지력에 찍힌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는 상팔의 혈도를 풀어주면서도 자기의 아픔을 참느라고 온 몸 이 흠뻑 땀에 젖었다. 옆에 서서 지켜보던 두구는 그가 상팔을 위해 정성껏 혈도를 풀 어주느라고 온몸에 땀을 자아내는 줄만 알고 감격하였다. 상팔은 혈도가 풀리자 몸을 일으켜 앉아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소영은 많은 문파의 장점을 겸비하였소. 나는 오늘밤 정말 크게 견식을 넓히게 된 셈이오." 그는 다시 길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나는 평생을 남들과 지혜와 무예를 겨루어 오면서 오늘 처음으 로 패배를 당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같이 이렇게 비참하게 패배를 당한 적은 없었소." 그는 고개를 돌려 두구를 바라 보며 다시 말했다. "동생 오늘 일을 어떻게 하겠나?" 두구는 상팔의 말뜻을 몰라 망연히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상팔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나는 이미 소형에게 약속하기를 만약 우리가 진다면 일생동안 그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네. 나는 약속을 이행하겠으나 동생까 지 복종하라고는 강요하지 않겠네." 한참 후에야 두구는 입을 열었다. "형님의 뜻은 그럼 정말 그를 따르며 평생을 두고 그의 명령에 복종할 생각이시오?" 상팔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형이 일단 입밖에 낸 말을 언제 한 번이라도 어긴 일이 있었 느냐? 그렇지만 동생은 그에게 전혀 약속을 하지 않았으니 이 약속 에서 벗어날 수도 있네." 두구는 마음속으로 난처하여 그 둘레를 몇 바퀴나 맴돌더니 입을 열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소?" 상팔은 여전히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동생이 지금 나와 의리를 끊고 절교하여 이 순간부터 서로 남남이 된다면 동생은 내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이오." 두구는 고개를 쳐들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쏜살같이 달려나갔 다. 소영은 가벼운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한 마디의 언약이 일생을 좌우하는 것이니 그가 당신을 떠나 가 버린 것을 탓할 수도 없구려." 상팔은 고개를 저으며 확고하게 대답했다. "제 동생은 절대로 흐리멍텅한 사람이 아니외다. 설사 그가 내 곁을 떠난다 해도 역시 분명하게 매듭을 짓고 떳떳하게 상쾌하게 떠날 것이오. 다만 이 일이 너무 중대하므로 그는 당장에 결정을 짓지 못하는 것 뿐이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소형께 한가지 부탁을 하고 싶은 일이 있소!" "내 능력이 미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아 주겠소." "만약 내 동생이 나와 의형제의 의리를 끊고 절교를 하고 떠나기 로 결심을 한다면 소형은 나를 봐서라도 그를 막지 말아 주시오." 바로 이때 비호같이 달려 온 두구가 그들의 둘레를 두어 바퀴 돌 더니 다시 질풍같이 가 버렸다. 소영은 두구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선뜻 가슴을 펴고 말하였다. "상형, 너무 난처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무림의 사람은 명예를 생사보다 중하게 여기오만 만약 상형이 이 약속을 후회하고 있다면 그 때문에 고민할 것 없이 저 두구와 함께 서슴없이 떠나 가시오." 상팔은 이 말을 듣자 눈속에 무한한 감격의 빛을 띠었다. "나 상팔은 일생을 통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은 없었소. 무림 안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중주이고를 무시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소. 나는 이것을 자부심으로 갖고 살아 왔소. 지금 목이 날아가는 한이 있더러도 나는 그 신념을 저버릴 수는 없소이 다." 이때 두구가 다시 돌아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님! 동생은 한참 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이제야 비로서 결정 을 내렸소이다." 상팔은 하하 웃더니 곧 말하였다. "나는 방금 소형과 이야기를 해 두었네. 그는 이미 동생을 막지 않겠다고 언약을 했다네. 우리 형제가 그간 심혈을 겨루어 모아 놓 은 재물은 지금부터는 동생이 혼자서 갖고 잘 살아가게." 두구는 상팔의 말을 가로막고 입을 열었다. "동생은 거듭하여 생각해 보았소. 나는 형님을 따라 하늘 끝이든 바다 속이든 어디든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뜻을 같이 하여 떠나지 않겠소." 상팔은 선뜻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는 친히 약속을 하지 않았으니 구태여 일생 동안 남의 명령 을 받고 사는 고역을 치를 필요가 어디 있겠나? 동생! 자네는 이 일에 너무 얽매어 생각하지 말게나."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형님께서 약속한 것이니 내가 약속한 것과 같소." 뜨거운 우정이 깃든 말이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그 말 은 이상하게도 차가운 말투로 들렸다. 상팔은 가벼운 탄식을 하며 말하였다. "이 못난 형 때문에 자네까지 해를 입는군그래." 소영은 돌연 앞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예의를 표시하며 입을 열 었다. "두 분이 저를 도와 악 누님을 찾는 일에 협력해 주신다니 저는 감격할 따름이오. 그러니 앞으로 우리는 형제로서 서로 칭호하며 그런 명령이니 복종이니 하는 일은 집어치웁시다." 상팔은 소영의 말에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소형의 연세는 많지 않으나 그 기백과 도량은 보통 사람이 감히 따라갈 수 없도록 훌륭하오. 소형이 그렇게 말을 해 주는 이상 저 는 이 시각부터 소형을 우리의 큰형님으로 모시겠소이다." 소영은 황급히 사양했다. "저의 이런 나이로 어찌 감히 형들의 맏이 노릇을 하겠소." 상팔이 다시 말했다. "무림에서는 강자가 높은 법이며 또한 원래 그 지위에는 나이가 상관 없으니 어서 동생의 인사를 받으시오." 그는 다짜고짜 장삼을 젖히고 엎드렸다. 두구도 곧 상팔을 따라 땅에 엎드려 배례했다. 소영 역시 황급히 큰절로서 답례하였다. 의식이 끝난 후 두구가 곧 입을 열었다. "큰형님. 동생의 입장으로서 몇 마디 당돌한 말씀을 드릴 것이 있는데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소영은 쾌히 대답했다. "강호의 견식은 내가 두 분만 못하니 이 방면에서 많은 가르침이 있길 바라오." "원 별말씀을..." 두구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 보더니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이어 말을 시작하였다. "우리의 오늘밤 약속은 일생 동안 봉행할 것이나 이 약속은 어디 까지나 큰형님 단 한 분의 명령이지 큰형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건 간에 그 자들에게까지 행할 수는 없소이다." 소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하였다. "그야 당신들 뜻대로 하시오." 상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한 마디 묻지 않고는 못 배기겠소이다. 당돌한 말씀이오나 큰형님의 그 무공은 심목풍에게 배운 것이오니까?" 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나에게 무예를 전수해 주신 세 분의 노선배님께서 는 모두들 이미 오래 전부터 강호에서 은퇴한 분들이라 이름을 대 어도 아마 두 분은 모를 것이외다." 소영은 아직 어린 나이로서 자기보다 나이가 횔씬 많은 상팔과 두구에게 사실 동생이라고 부르기가 난처한 노릇이라 서슴없이 동 생이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오질 않아 매우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상팔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형님께서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만 두십시 오. 그러나 지장이 없으시다면 그분들이 누구신지 이야기해 주십시 오." 상팔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짧은 오 년 동안에 소영이 이처럼 훌륭한 무공을 터득한 데 대하여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가득 하였던 것이다. 소영이 엄숙하게 말하였다. "이미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말해도 상관없지만 그대신 두 분은 이것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오." 두구가 결연한 태도로 대답했다. "큰형님 걱정마십시오. 소제들이 어찌 감히 함부로 형님의 신상 에 관한 말을 남에게 이야기하겠소?" 두구의 음성은 항상 얼음장 같이 냉랭하였기에 설사 천하에서 가 장 부드러운 말이라 할지라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언제나 냉정하게 들렸다. 소영은 마침내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무공은 의부인 남일공(南逸公), 은사 장산패(恩師莊山貝), 그리고 또 한 분 고모인 유선자(姑母柳仙子) 이렇게 세 분의 기인 (奇人)에게서 배운 것이라오." 상팔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아니! 그 세 분께서 아직도 세상에 살아계신단 말씀이오?" 소영은 금시 어두운 표정이 되더니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분들은 삼성곡(三聖谷)속에 은거하고 있소." 그는 세 노인과 작별할 당시의 정경을 생각했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며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이 목이 메었다. 상팔은 그의 표정을 곧 살피고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는 세상에서 지극히 드문 기우를 만나 그 세 분으로 부 터 제각기 다른 절예를 전수받았으니 그 성과가 무학의 상례를 벗 어난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두구도 그의 말을 받아 이야기했다. "심목풍의 그 흉악한 명성을 이미 강호를 진동시킨 바 있으니 큰 헝님께서는 그와 교분을 맺는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상팔도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곧 입을 열었다. "심목풍과 주조룡은 음침하고 악랄하여 비겁한 수단으로 남을 해 치는 것을 특기로 삼고 있으니만큼 그들이 형님과 교분을 맺는 것 은 아마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것입니다. 아아! 형님의 일을 동생 이 묻지 않는 것이 원칙이거늘 이것만은 형님의 안위에 관계되므로 형님께서 각별히 조심하길 바라며 이런 말씀을 당돌하게 드리는 바 입니다." 이번에는 두구가 나서며 말했다. "우리의 오늘밤 일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군요. 혹시 그들 이 형님을 의심할지도 모르니...." 소영이 입을 열 겨를도 없이 다시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근래에 와서 강호에는 매우 큰 파문이 일어난 듯하지만 우리들 은 오로지 심혈을 기울여 그 남옥당의 행방을 쫓아 악 낭자를 찾아 내어 마음 속의 짐을 말끔히 해결한 다음 곧 조용히 정세를 분석하 여 형님을 보필하겠소이다." 소영이 그 말에 황급히 물었다. "뭐라고? 그 남옥당이 나의 악 누나와 연관이 있단 말이오?" 두구가 곧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뚜렷한 것은 아직 알아 내지 못하여 뭐라고 확실한 말씀을 드릴 수 없지만 며칠만 참고 기다려 주신다면 저희들은 기 필코 확실한 소식을 보고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 남옥당은 큰형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강호에 나온 지 불과 일 년 남짓한 사이에 이미 강호를 진동시켰다오. 그 남옥당의 출신은 마치 수수께끼와도 같이 내력이 확실치 않소. 그러나 검초의 매서 움과 날카로움은 무쌍을 이루고 있소. 이 소제는 친히 그가 싸우는 것을 보았지만 언제나 이초를 넘기지 않고 검을 뽑아 공격하자마자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부상을 입히곤 하였소. 큰형님도 차후 그자 를 만나게 되면 조심하시기 바라오. 소제는 아까 그 낭자와 강변에 서 약속한 것이 있어 먼저 실례하겠소이다." 그는 재빨리 몸을 솟구쳐 두어 번 날더니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상팔은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자 다시 소영을 향해 입을 열었 다. "형님을 만나기 전에는 저희들은 온 정신을 기울여 악낭자의 행 방을 찾는 데만 집중하였으나 지금부터는 강호의 동정을 유심히 살 펴야 되겠소이다. 형님은 현재 절세의 흉악한 인간들과 한 곳에 살 고 계시니 매사에 경계를 게을리 마시고 조심하십시오. 동생은 이 만 떠나겠소이다." 소영은 다급히 그를 막았다. "우리는 차후 어떻게 만나야 하오?" 상팔은 돌아 서며 대답했다. "우리들이 만약 형님께 일이 생기면 자연 형님을 찾아 가 소식을 전달할 것이오. 그러나 만약 형님께서 분부를 내릴 일이 생기면 암 기(暗氣)를 사용하십시오." 곧이어 상팔은 매우 세밀하게 신중을 기하여 소영에게 암기를 일 러주었다. 그는 소영에게 암기를 일러준 다음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고개를 돌려 그 동쪽의 월낭방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만약 강호에서 놀라운 변동이 생겨 저희들에게 연락이 잘 닿지 않든가 저희들이 곤란한 일이 생겨 형님을 만날 수 없게 될 때에는 형님께서 저 월낭방으로 들어 가 남쪽을 향한 관 속에서 저희들의 보고문을 꺼내 읽어 주십시오. 그러나 이런 연락 방법은 역시 비상 수단으로서 평상시에는 경솔히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럼 저는 이 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는 공손히 절을 한 후 몸을 돌려 떠나 갔다. 소영은 상팔의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 보자니 마음속에는 묘한 감정이 용솟음쳐 올랐다. 상팔과 두구는 재삼 자기의 처경(處境)이 험악하다고 경고하며 소영으로 하여금 일종의 막연한 경각심을 자 아 내게 하였다. 그날 주조룡과 동맹을 맺은 것은 확실히 인정과 형세의 억압으로 마지 못하여 수락한 것이지만 사후에 생각해 보니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수법에 말려든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진 것... 후회한들 무엇하랴! 다만 앞으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한 가닥의 깊은 생각은 적지 않은 견식을 갑자기 중진시킨 듯 했다. 소영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긴 한숨을 토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낡은 절간을 떠나 곧장 백화산장으로 향하였다. 소영은 급히 달렸다. 백화산장이 가까와졌을 때에야 비로소 걸음 을 늦추었다. 별안간 한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번쩌 사라지는 것이 눈에 띄었 다. 소영은 흠칫 놀라며 내심 누굴까? 하고 눈여겨 살폈으나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깊은 밤중에 황급히 길을 달리며 더구나 큰길로 가지 않 는 것이 수상했고 방향으로 보아 틀림없이 백화산장으로 달려 가는 듯했다. 소영이 그의 뒤를 쫓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 서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그는 재빨리 돌아 보았다. 한 필의 쾌마가 전광석화와 같이 달려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암암리에 감탄하였다. '훌륭한 솜씨로군!' 그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쾌마는 이미 그의 곁에 다달았다. 말 위에는 온몸을 검은색으로 경장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소영이 그 자의 모습을 미처 똑똑히 보기도 전에 그가 먼저 호통을 쳤다. "누구냐?" 그는 말과 함께 기다란 가죽 채찍을 곧장 후려쳐 왔다. 소영은 화가 치밀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이자는 매우 경솔하군. 상대방이 적인지도 친구인지도 똑똑히 알지 못하고 다짜고짜 공격을 펼치다니...' 소영은 선뜻 왼손을 들어 재빠르게 그 채찍을 잡아 챘다. 그러나 말 위의 사람의 무공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곧 그 채쩍을 거두 었다. 그가 탄 건마는 놀랄 만한 속도로 그가 채찍을 거두자 소영 에게서 이미 두 길 남짓이나 달려 갔다. 소영은 울화통이 터져 대번에 진기를 끌어 올려 경공을 전개하여 쾌마의 뒤를 쫓으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쾌마는 갑자기 회 전하더니 다시 소영을 향해 달려 왔으며 마상의 사람도 채찍을 휘 둘러댔다. 이번에는 소영도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터라 오른손을 번개같이 제쳐 파운적성(破雲摘星)의 일식으로 다섯 손가락을 합쳐 채찍을 잽싸게 잡았다. 소영의 이러한 쾌속 정확한 수법은 말 위에 앉은 자로 하여금 지 극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그는 다음 순간 냉랭히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놓아라!" 그 소리와 함께 싸늘한 광채가 번쩍이며 소영의 오른쪽 손목을 향해 찔러 왔다. 이 동작도 매우 빨라 장검을 바싹 찔러 왔던 것이 다. 소영은 다시 놀랐다. '빠른 검초구나!' 그는 속으로 감탄하며 오른손을 대뜸 당겨 채찍을 더욱 끌어들여 왼손으로 난향암송(蘭香暗送)의 초식으로서 다섯 손가락을 반쯤 굽 혀 그 자의 완맥(腕脈)을 향해 퉁겼다. 말 위의 사람은 두려움을 느낀 듯 소영의 난화불혈 초식에 비록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으나 재빨리 채찍을 놓아 버리고 선뜻 말에서 뛰어 내렸다. 소영은 지체없이 오른쪽 발을 들어 곧장 그의 중궁(中官)을 걷어 차며 달려들어 왼손으로 번개같이 사 장을 뻗어 냈다. 남일공의 그 연쇄적인 번개 장법은 무림의 절초로써 공격의 신속 함과 변화와 급작스러움은 세간의 장법 중에 으뜸이었으므로 교장 을 공격하자 말 위에서 뛰어 내린 상대는 계속 너댓 자나 밀려 갔 다. 그 사람은 말에서 뛰어 내릴 때 장검으로 이미 가슴을 옹호하 며 자기가 선수를 써서 공격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소영의 동작이 더 빨랐기에 대뜸 사장을 뻗어 내어 선수를 잡아 그 사람이 반격할 틈조차 주지 않았을 뿐더러 방 비할 겨를도 없게 하였다. 허나 말에서 뛰어내린 자도 확실히 비범한 무공을 갖고 있었다. 소영이 사장을 받고 재빨리 피하여 그 기세가 약간 누그러진 틈을 타서 곧 반격을 개시했다. 그는 장검을 휘둘러 싸늘한 광채를 이리저리 유전시키며 송이 송 이 검꽃을 펼쳐 내어 소영을 두 발자국이나 뒤로 물리쳤다. 소영은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서로 아무런 원한도 없이 어찌 이렇게 악랄한 공격을 펼치나 생각하니 한 번 혼 을 내줘야겠다고 단단히 별렀다. 그가 손을 뻗쳐 공격을 취하려는 찰라 갑자기 귀에 익은 호통 소 리가 들려 왔다. "손을 멈춰라! 서로 한집안 식구다." 소리와 함께 한 줄기 쏜살같이 달려 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러 자 그 장검을 쥐고 공격하던 사람은 선뜻 물러서서 검을 거두고 숙 연히 선 채 입을 열었다. "이숙께서 당도하신줄 모르고 조카가 맞이하지 못함을 죄송합니 다." 그는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그 말에 소영이 흘깃 그를 돌아 보 니 달려 온 사람은 바로 백화산장의 둘째 장주 주조룡이었다. 주조룡은 손을 저으며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이분이 바로 자네의 소삼숙이시라네. 어서 인사드리게." 그러자 장검을 쥔 사람은 흠칫 놀라며 소영을 바라 보았다. 그는 멍하니 소영을 바라 보더니 잠시 후 비로서 손을 앞에 모으고 정중 히 절하며 말하였다. "조카 단굉장(單宏章) 소삼숙께 인사드리오." 소영은 그를 찬찬히 바라 보았다. 단굉장은 약 이십사, 오 세 가 량 되어 보였으며 얼굴은 숯검정을 칠한 듯 시커멓고 번들거렸다. 범눈에 쭉 찢어진 입이며 짙은 눈썹은 보기만 해도 용맹스러운 모 습이었다. 단굉장은 소영보다 나이가 훨씬 위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공손 히 소삼숙이라고 불렀다. 소영은 약간 멋적은 생각이 들어 답례를 보내며 말했다. "너무 과분하구려...." 주조룡은 단호하게 말했다. "장유(長幼)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배분(輩分)의 예의절차는 엄 격히 지켜야 함으로 삼제는 겸손할 필요가 없네." 단굉장은 줄곧 범눈을 크게 뜨고 소영은 훑어 보고 있었다. 소영 은 가벼운 기침과 함께 말하였다. "단 조카, 너무 예의를 차리지 말게나." 주조룡은 미소를 띠고 소영에게 설명해 주었다. "단 조카는 바로 큰형님의 수제자로서 백화산장을 떠나 이 년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서 돌아 오는 길이오. 삼제가 동맹한 일을 그가 몰라 언짢은 행동을 했었다면 널리 양해해 주게." 소영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소제 역시 경솔한 점이 있는데 어찌 단 조카만 탓하겠소?" 단굉장은 몸을 숙이며 말하였다. "소질은 삼숙을 물라 뵙고 당돌한 행동을 하였으니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 소영은 얼굴이 화끈하여 다급히 대답했다. "잘못은 쌍방이 다 있으니 이 일은 덮어 두기로 하세." 주조룡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옛 말에도 모르고 한 짓에는 잘못이 없다고 했으니 조카도 너무 미안해 하지 말게. 자네의 이 소삼숙은 무공이 절세하니 차후 자네 도 삼숙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게나." 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형님, 저를 너무 과찬하지 마십시오. 이 단 조카의 무공도 소제 보다 떨어지지 않을 것이외다." "피차 한 집안 식구이너 삼제도 너무 겸손해 하지만 말고 잘 지 도하게." 주조룡은 다시 단굉장을 돌아 보며 말했다. "조카는 형님의 분부대로 이번에 밖에 나가 많은 성과를 올렸으 리라고 믿네." 단굉장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다만 요행히 분부에 어긋남이 없었을 뿐입니다." 약간 주저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의 스승님의 상세는 회복되었는지요?" "자네의 스승은 비단 상세가 완전히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연마하여 시종 터득하지 못했던 혈영신공(血影神功)도 이 상세를 치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원만하게 터득하였으며 동시에 몇 가지 절학도 연달아 터득하였다네. 그리고 또한 자네의 소삼숙 이 동맹하여 서로 돕고 있으며 자네도 이렇게 성과를 이루고 돌아 왔으니 곧 백화산장은 금화영유(金花令諛)로서 천하 무림을 호령할 수 있게 되었네." 그 말에 단굉장은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상처를 치료하시는 이 몇 해 동안 산장 내의 일을 이숙께서 혼자 맡아 처리하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겠습니다." 주조룡도 웃으며 대꾸했다. "하여간 무사히 넘긴 셈이지." 단굉장이 다시 말했다. "소질은 먼저 돌아 가 그간 밖에서 겪은 일을 스승님께 보고해야 겠습니다. 두 숙부께서는 천천히 오십시오." "자네의 스승님은 지금 망화루(望花樓)에서 귀한 손님을 영접하 고 계시는데 삼제가 보이질 않아 장중에선 이미 열 여덟 필의 쾌마 를 보내어 백 리 이내를 뒤져 자네 소삼숙의 행방을 찾고 있는 중 인데 상상외로 자네들 숙질은 이곳에서 싸움을 하고 있었으니..." 주조룡은 소리 높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형님께서는 귀한 손님 접대를 늦출 수 없어 삼제를 기다리지 않 고 이미 연회를 개최했으니 우리도 역시 속히 돌아 가도록 하세." 소영은 주조룡과 나란히 달리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손님은 어떤 인물인데 망화루에서까지 연회를 베푸는 것입니까?" "우리가 장내에 당도하면 형님께서 자연 삼제를 소개할 것이나 궁금해 할 필요 없네. 속히 가 보기나 하세." 그들 세 사람의 빠르기는 마치 유성과도 같이 넓다란 대로 위를 줄달음질쳐 갔다. 단굉장은 비록 소영과 이미 몇 수 겨루어 그의 무공이 확실히 비 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속에는 불만이 남아 있었다. '스승님도 참... 설사 동맹을 맺은 사람을 모셔 오더라도 역시 나이가 좀 지긋한 사람과 해야지 이렇게 새파랗게 젊은 사람과 했 으니, 앞으로 나는 숙부의 대우를 깍듯이 해야 하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군.' 그는 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리며 마음의 울화를 발산할 길이 없어 전력으로 진기를 끌어 올려, 줄달음치기 경공으로라도 소영을 눌러 보려고 생각했다. 그는 곧 경공을 전개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주조룡과 소영을 앞질 렀다. 주조룡은 그 교활한 단굉장의 속셈을 알아 채고 곧 소영의 손목 을 놓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삼제, 우리도 속도를 빨리하세." 소영의 경공은 왕년에 경공으로써 강호에서 일절로 꼽히어 따를 자가 없던 유선자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소영은 적극적으로 경공을 전개하지 않고 시종 주조룡의 뒤를 따르며 세 사람은 일정한 거리차를 두고 전광석화와 같이 백 화산장으로 치달았다. 단굉장은 갑자기 멈추고 암암리에 한 모금 진기를 운용하여 조식 을 취하며 슬쩍 뒤를 돌아 보았다. 주조룡과 소영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렸으며 자기와의 거리차는 불과 두 자밖에 안 되었다. 주조룡은 약간 홍조를 띠고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나 소영은 조 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그는 부지중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나와 주이숙은 모두 전력을 다하여 달려 왔으나 소삼 숙은 다만 보통으로 달려 온 것 같구나. 다행히 거리가 멀지 않아 뚜렷하게 우열(優劣)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만일 장거리였었다면 아마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 될 뻔했구나.' 그는 저절로 소영에게 대해 약간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주조 룡은 이미 소영의 무공을 알고 있는 터라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 고 가볍게 웃으며 말하였다. "조카, 이번에 밖에 나가 이 년을 있다 오더니 경공에 많은 진전 을 보았군. 참으로 기쁘고 축하할 일일세 그려." 단굉장은 멋적은 얼굴로 대답했다. "소질은 급히 스승을 만나 보고 그간의 경과를 보고할 생각으로 당돌하게 앞질러 왔습니다. 두 숙부님께서는 괘씸하다 여기지 마십 시오." 주조룡이 웃으며 말했다. "조카의 무공이 진보된 것을 보고 우리는 숙부의 입장으로 기뻐 할 따름일세. 어찌 탓할 리가 있겠는가?" 그들은 망화루로 향했다. 높이 솟은 망화루 위에는 등불이 휘황 히 켜져 있었으며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려 왔다. 주조룡이 망화루로 앞장서 들어 가자 단굉장은 한편으로 몸을 비 켜 소영을 앞세우고 맨 나중에 들어 갔다. 소영은 살짝 누각 안을 살폈다. 누각의 출입구마다 모두 무기를 든 파수군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소영은 오늘밤의 손님은 신분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세 사람이 곧장 십삼 층으로 오르자 그 곳에선 이미 연회가 한창 베풀어지고 있었다. 네 명의 아름다운 시녀가 양쪽에서 시중을 들 고 있었으며 상좌에는 화려한 금꽃을 수놓은 흰 비단옷을 입은 아 름다운 부인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약 사십 세 가 량 되어 보이는 푸른색 경장을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으며 그의 검 은 수염은 매우 탐스럽게 앞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혈색은 매우 좋 아 마치 동자와도 같았다. 소영은 그 사람이 매우 낮익다고 생각하였다. 마치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를 훑어 보자 그의 발밑에는 금빛이 찬란한 상 자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언뜻 그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옳지, 이 사람은 바로 우문한도구나!' 그는 곧 눈길을 돌려 주인 자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심목풍이 앉 아 있었다. 주조룡은 성큼 두 발짝 다가서며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형님, 삼제를 찾아 왔소이다." 그 말에 심목풍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힐끔 바라 보더니 자기 곁 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어서 이리와 앉게나." 주조룡은 스스로 아랫자리에 앉았다. 단굉장은 선뜻 무릎을 꿇으 며 말하였다. "제가 이제 돌아 와 스승님께 문안드리옵니다." 심목풍은 그를 바라 보고 입을 열었다. "네가 돌아 왔구나. 그래 밖에 일은 어떻게 됐느냐?" "스승님의 분부에 어긋남이 없이 봉행하였습니다." "알았다. 너는 내려가 쉬어라." 단굉장은 몸을 일으켜 뒷걸음을 치며 층계 있는 곳까지 물러가더 니 공손히 절을 했다. "그럼 제자는 물러 가겠습니다." 그는 곧 몸을 돌려 층계를 내려 갔다. 심목풍은 흰 비단에 금꽃 을 수놓은 옷을 입은 아름다운 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이 바로 금화부인이라네. 멀리 묘강(苗疆)에서 오셨지. 삼 제 자네가 금화부인에게 한 잔 따라 올리겠나?" 소영은 곧 술을 따라 그녀에게 올렸다. "소제는 소영이라 하옵니다, 부인의 많은 지도를 바랍니다." 금화부인은 앵두같은 입술을 살짝 벌려 웃음을 띠고 말했다. "소문에 듣기로 중원에는 영수(靈秀)들이 많다 하거늘 오늘 밤 소형제를 보게 되니 과연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구려." 그녀는 백옥같은 손을 내밀어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받아 마셨 다. 심목풍은 소영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의 아우는 비록 무공이 약간의 경지를 이루고 있긴 하나 강호 의 견식은 별로 없소. 앞으로 부인이 그에게 묘강의 절예를 좀 지 도해 주시오." 금화부인은 요염한 자태를 여지없이 과시하며 상냥하게 말했다. "만약 영재가 흥미를 느낀다면 나도 아낌없이 전수해 주겠소." 그녀는 비록 심목풍과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으나 눈은 줄곧 소영의 늠름한 모습에 못박혀 있었다. 심목풍이 다시 말했다. "내가 삼제를 대신하여 부인에게 감사를 드리겠소." 그는 곧 눈길을 우문한도에게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삼제, 이분이 바로 선기서여의 주인 우문한도 선생이라네." 소영은 곧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정중히 인사를 하고 말했다. "오래 전부터 명성은 들어 왔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참 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우문한도는 술잔을 들고 웃으며 말하였다. "소형은 강호에 나온 지 불과 일 년 남짓한 사이에 이미 위명을 날리고 무림을 진동시켰소이다. 오늘 밤 이렇게 본인을 만나게 되 니 실로 반갑소이다." 21. 묘강(苗彊)에서 온 독녀(毒女) 우문한도는 일찍이 무당산 청선각(廳蟬閣)에서 소영을 만나 본 적이 있었으나 그 당시의 소영은 어린아이였다. 그러니 어찌 그가 소영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으랴! 심목풍은 우문한도가 소영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을 듣고 그저 웃기만 했다. "우문형이 너무 과찬하시는구려." 심목풍은 먼저 입을 열어 지껄이며 소영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소영은 이와 같이 엉뚱한 일을 아무리 변명해 봐야 설명할 방법이 없음을 알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우문한도가 천천히 손에 든 술잔을 내려 놓으며 입을 열었다. "심형의 신공이 이미 성취되었으며 금화부인도 먼 묘강에서 달려 왔으니, 이미 시기는 성숙할 대로 성숙한 것 같소. 오직 심형의 안 배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심목풍이 대답했다. "소제가 일찍이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말하지 못 했습니다. 이제 두 분께서 오셨으니 두 분의 고견을 들려 주십시 오."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저는 중원 무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오. 그러니 두 분의 주 장대로 하십시오." 심목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문형께서는 근래 몇 년 동안 대강남북을 편력하면서 무림의 형세를 파악하셨으니 아마 자신을 갖고 있으리라 봅니다."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지금 여러 대파(大派) 중에서 무당파의 무위도장을 제외하면 나 머지는 모두 마치 꿈에 취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때 금화부인이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우문선생은 몇 차례나 무당산에 가셨는데 아직도 설복시키지 못 했단 말이오?" "그 노도(老道)는 제가 그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얘기를 하 려고 하면 그는 다른 말로 얼버무려 넘기거나 숫제 모르는 척하면 서 기껏 만들어 놓은 분위기를 짓밟아 버리곤 했지요. 몇 차례 만 나긴 했지만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심목풍이 말참견을 했다. "그 노도는 자신이 정대문파(正大門派) 중의 인물이라고 자부하 고 있으니 물론 우리와 손을 잡지 않으려 할 것이오." 우문한도가 이때 미소를 띠면서 자신있게 말했다. "그 문제라면 심형께서는 안심하셔도 좋소. 그는.... 한 달 안으 로 반드시 백화산장에 찾아 와서 구원을 청할 것이오." 심목풍이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구원을 청한다고?" "그렇소. 반드시 구원을 청해 올 것이오. 소재가 며칠 전 무위도 장을 만났을 때 금화부인께서 독물(毒物)을 슬쩍 사용했소. 그 독 물은 비록 효력을 발생하는 시간은 늦지만, 그 대신 한 번 발효하 기 시작하면 매우 무서운 극독이어서 금화부인의 독문해약(毒門解 藥)이 아니고는 그 독을 풀어 낼 길이 없소. 그러니 소제의 짐작으 로는 반드시 한 달 안에 찾아 올 것이라고 보오." 심목풍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 무위도장은 자부심이 워낙 강한 사람이라 독으로 말미암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백화산장으로 구원을 청하려 올 것 같지는 않 습니다." 금화부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 무위도장이 가령 철근강골(鐵筋鋼骨)로서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무신경한 사람이면 모르지만 그도 또한 인간의 혈을 가진 사 람이라면 도저히 그 뱀이 물어 뜯는 듯한 고통을 참지는 못할 것입 니다."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차고 쌀쌀한 빛이 떠오르며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듯한 맑은 두 눈에서 두 줄기의 냉랭한 빛이 쏘아졌 다. 그리고는 우문한도를 응시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 그런데 무위도장이 하필 백화산장으로 구원을 청하러 오리라는 것을 어떻게 아시오?" "부인께서는 그 문제에 대하여 안심하십시오. 내가 무당산을 떠 나올 때 무위도장에게 얘기해 주었으니까." 금화부인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 무위도장에게 암암리에 나의 금사(金蛇)를 시방(施放)했다고 일러 주었단 말이오?" 우문한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그다지 총명하진 못하지만 또한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저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무위도장은 기색이 좋지 않으며 혹 괴 질(怪疾)에 걸린지도 모르니 만약 앞으로 어떤 이상이 있거든 우선 재가 백화산장에 기거하고 있으니 곧 서슴지 말고 사람을 보내라고 말입니다." 심목풍이 다그쳐 물었다. "그 무위도장은 무척 총명한 사람인데 우문형의 이야기가 그처럼 노골적으로 나왔다면 당장에 눈치라도 채지 않았을까요?" "그 노도가 당장에 눈치 챘는지도 알 수 없지만 한편 생각해 보 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도 같았습니다. 그는 나를 배웅하면서 전혀 그러한 말은 하지 않더군요." 금화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이 금사로서 무위도장을 암습한 후 오늘까지 며칠이 경 과되었지요?"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오늘로써 꼭 칠 일이 경과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사의 효과는 언제쯤 발작하는 겁니까?" "벌써 발작을 했을 텐데... 아무리 내공이 깊다 하더라도 발작한 지 이틀은 견딜 수 있지만 만약 그들이 빨리 그것을 발견했다면 오 늘 안으로 사람을 보냈을 것이오." 금화부인은 갑자기 한바탕 깔깔대고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만약 삼일 안으로 사람을 보내오지 않을 경우 할 수 없 이 무당파와 손잡을 생각은 버려야 하오." 심목풍이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부인의 의사는?" "그 때는 이미 무당파는 장문인의 장사를 치르느라고 정신이 없 을 거요. 그러니 자연 강호에 발을 뻗을 여유가 없게 되지요." 심목풍은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일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만약 무위도장이 생명을 잃는다면 무당파의 제자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 히려 일을 망치는 결과가 된다.' 심목풍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비록 오래 전부터 묘강의 절애가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었 지만 기실 얼마만큼 무서운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금화부인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한 인간이 절기를 갖는다면 호숭심에 사로잡히게 되죠. 그러나 진정한 무공으로써 승리를 획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언젠가는 그것도 또한 허망 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소영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이러한 생각을 했다. '저토록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는 이유는 뭘까?' 소영은 이들이 지금 무슨 일을 도모하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 다. 그리고 그 첫 희생자가 무위도장이 아닌가 하는 것도.... 심목풍이 갑자기 술잔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 "부인의 고견에 감탄했소. 저는 아직 세상 일을 잘 모르기 때문 에 부인의 교훈을 받는다면 많은 이익이 있을 것 같소." 금화부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소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옥 같 은 손을 내밀어 술잔을 권했다. 소영은 하는 수 없이 술잔을 들어 입술에 댔다. 세 사람은 다같 이 건배를 했다. 술이 세 순배 돈 후 우문한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심형, 침입자가 칠 층까지 쳐들어 온 것을 보니 반드시 평범한 인물같지는 않습니다." "이제, 내려가봐. 만약 온 자가 무당파의 사람이라면 곧 이 자리 로 데리고 오도록...." 이 말을 듣자, 주조룡(周兆龍)은 급히 술잔을 내려 놓고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 갔다. 이윽고 그는 신선과 같은 위풍을 지닌 도사 를 데리고 올라 왔다. 그는 바로 운양자였다. 그를 보자 심목풍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공손히 인사를 하고 웃음 띤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또 누군가 했더니 운양도형이셨군요. 제대로 영접하지 못해 매우 죄송합니다." 심목풍이 자리에서 일어나 영접하는 것을 보자 소영도, 우문한도 도 각기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오직 금화부인만이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못 본 척했다. 운양자가 앞으로 두 걸음 나서며 심목풍에게 인사를 했다. "우리가 헤어진지도 십여 년이 되었구려. 그러나 심장주의 풍체 는 여전하군. 정말 축하해마지 않소." 심목풍은 그의 태연한 표정과 조금 전에 격투를 한 흔적이 조금 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자 은근히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자 기에게 깍듯이 대해 주는 것을 보자 그도 흐뭇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분은 바로 무당파에서 그 이름이 쟁쟁하신 운양도형이시다. 삼제는 어서 인사를 드려라." 소영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소생은 소영이라고 합니다. 도장께서 많이 지도해 주시기 바랍 니다." 운양자는 이 말을 듣자 약간 놀라운 기색이었다. "소공자였군요. 빈도가 몰라 봐서 죄송하오." 운양자는 말을 마치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손을 내밀어 웃음 떤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문시주께서는 과연 여기에 계셨군요. 빈도의 사형을 구할 수 있겠군요." 그는 말을 하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강호의 규칙으로 본다 면 이와 같은 행동은 자기의 공력을 과시하는 뜻이 되는 것이다. 우문한도는 이런 태도를 보자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 늙 은이가 너무 초조해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구나 생각하고 자신도 손을 내밀며 큰 소리로 웃었다. "며칠 전 제가 무당산을 방문했을 때 도장은 계시지 않더군요." 인사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는데 운양자의 뜨거운 손바닥을 우문한도는 견뎌 낼 수가 없었다. 운양자는 체면을 차리듯 잠깐 악수를 한 후에 즉시 내공을 거두 고는 우문한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빈도의 사형은 우문시주에게 감복해마지 않습니다. 그래서 빈도 로 하여금 우문시주에게 잘 가르침을 받도록 재삼 분부하셨소." 한편 심목풍은 의구심이 들었다. '이 노도의 언행은 이상하다. 아무래도 무슨 딴 뜻이 있는 것 같 다.' 모두들 자리에 앉자, 심목풍이 금화부인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묘강의 기인 금화부인이오. 혹시 도장께서 안면이 라도 있으신지?" 운양자는 금화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빈도는 부인의 대명을 이미 오래 전부터 익히 들었습니다." 금화부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방금 도장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귀장문의 옥체가 편찮으신 것 같 은데." "부인의 짐작이 맞았습니다. 패장문인은 갑자기 괴질에 걸려 백 약이 무효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감히 빈도가 실례를 무릅쓰고 예 까지 찾아 온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그 말을 듣자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비록 그 병세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치료법은 잘 모르 고 묘약도 지을 줄 모릅니다. 하지만 도장께선 안심하십시오. 이 백화산장 안에는 가끔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드나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위도장의 옥체는 이 우문한도에게 맡기십시오." 운양자는 손을 들어 예를 표했다. "우문시주께서 이처럼 도와 주시겠다니 빈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금화부인이 갑자기 냉소를 터뜨렸다. "도장께서 여기 온 뜻은 다만 약을 구하기 위함이오?" 운양자가 대답했다. "빈도가 여기에 오기 전에 장문사형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우문한도가 급히 반문했다. "영사형(令師兄)께서 무슨 말씀이라도 있었습니까?" "없었소. 폐사형께서는 그 약을 구할 수 있다면 구하고 만일 구 하지 못한다면...." 모두들 그의 말이 잠간 멈춰지는 것을 보자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금화 부인만은 냉랭한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만일 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만일 구하지 못한다면 다만 교환할 길밖에 없소." 금화부인은 다그쳐 물었다. "무당파에 무슨 세상에 드문 보물이 있길래 장문인의 생명과 바 꾼단 말이오?" 운양자의 표정은 무척 엄숙했다. "그야 물론 고귀한 보물이 있지요. 그러나 그 조건으로 여러분들 이 어떤 방법으로 폐장문인을 치유할 것인가를 빈도가 먼저 들어야 겠소." 금화부인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다만 그 보물의 가치가 무위도장의 생명보다 높다면 난 약물을 써서 병을 고쳐 줄 수가 있소. 또 한편으로 그 보물이 그만한 가치 가 없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선택할 길이 있소." 운양자가 다그쳐 물었다. "그 두 가지 길이란 무엇이오?" 금화부인은 대답했다. "그 한 가지 길은 귀파와 백화산장이 손을 잡고 힘을 합하여 심 장주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오. 다른 한 가지 길이란 바로 도장이 이 길로 무당산으로 되돌아 가서 귀파 장문인의 장사를 지낼 준비 를 하는 것입니다." 운양자는 순간 안색이 돌변하여 마치 발작이라도 할 듯했다. 그 러나 그는 곧 억지로 참고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 삼의 방법은 없습니까?" 우문한도가 급히 말참견을 했다. "도형께서 너무 급히 서두를 건 없습니다. 천천히 타결을 지어 봅시다. 반드시 피차간 손해를 입지 않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금화부인이 냉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제삼의 방법이란 도장의 그 진귀한 보물을 보는 것이지요." 금화부인은 말을 마치자 갑자기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품 속에서 푸른 합(盒)을 꺼내어 계단 입구의 문 위로 던져 버렸다. 합은 즉시 깨졌다. 그 푸른 합이 깨어지자 그 속에서는 여덟 마 리의 시커먼 거미가 나왔다. 순식간에 계단 입구에다 주망(蛛網)을 쳤다. 등불 아래 바라 보 니 거미줄에서는 푸른 빛이 무섭게 번쩍였다. 금화부인은 백옥 같은 하얀 손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들은 이 검은 거미들이 얼마나 무서운 독물인지는 모르더 라도 그 주망에서 비쳐 나오는 녹색 빛의 이상한 점은 알아 볼 수 있겠지요?" 금화부인은 잠간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내가 굳이 저 거미들로 하여금 물게 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께 서는 저 거미줄에 몸이 닿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생명을 잃을 것입 니다." 금화부인은 의기양양해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중원무림에서는 우리 묘강의 여자들이 벌레를 잘 구사한다고 말 하고들 있지만 그밖에도 우리는 백 가지 독을 펴낼 수가 있지요." 돌연 소영이 입을 열었다. "그 거미줄에 무서운 독이 있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사람을 상하 게 할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잖아요?" 이 말이 만약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금화부인은 반드시 대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영의 입에서 나왔으므로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금화부인은 조금도 노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소제께서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필시 무슨 고견이라도 있는 것 같군요." "그 거미들이 비록 무서운 독을 갖고 있다지만 행동이 느리니 어 찌 사람을 따를 수가 있으며 그 가느다란 실 같은 거미줄은 일진광 풍도 이겨 내기 힘들거늘 어찌 장력의 일격을 막아 낼 수 있단 말 이오?" 금화부인은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질문이에요. 무척 세밀하게 생각해 본 모양인데... 묘강의 특산 독거미는 그 독이 비길 데 없이 강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력 역시 강인해 일단 그들이 만든 주망은 단단하기 이를 데 없소. 소 제께서 만약 믿기지 않는다면 일장을 쳐서 한 번 시험해 보시지."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운양자는 지난날 나에게 생명을 구해 준 은혜가 있다. 오늘의 형세는 이미 험악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 만약 내가 오늘 밤 그의 한 팔이 되어 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는 오늘 밤 무사히 이 망화 루(望花樓)를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갑자기 심목풍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나의 삼제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침착하지 못하니 부인께서 직 접 일장을 시도해 주시오." 심목풍은 무척 교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이 거미줄이 보통 거미줄과는 전혀 다르다고 눈치챘지만 소영의 내공이 매우 깊고 장 력이 또한 강하기 이를 데 없으므로 만약 그가 일장을 쳐내 그 거 미줄을 격파하고 거미를 상하게 한다면 금화부인의 체면을 크게 깨 뜨리는 바 되어 그녀가 노할 것을 우려했다. 지금 금화부인은 한인의 풍속과 습관을 전적으로 흉내내고 있지 만 아무래도 그녀는 묘강의 출신이므로 한인처럼 아량이 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 반면에 또한 소영이 일장을 쳐내서 거미들을 상하게 하지 못 한다면 그것 또한 거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목풍은 소영을 가로막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도 금화부인은 담담하게 웃으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심장주께서 직접 일장을 시험해 보시구려." 심목풍은 그 말에 약간 놀랐다. 그러나 곧 고개를 들려 운양자를 바라 보며 웃음 띤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혈맹 친구이므로 만약 일장에 거미줄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운양도장께서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내 생각으로는 운양도장께서 일장을 시험해서 그 결과를 꺾는 것이 가 장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심목풍은 이처럼 음험하고 악독했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으니 그 화근을 운양자에게 떠 맡기자는 속셈이었다. 금화부인은 그 서늘한 눈동자를 깜빡거린 후 웃음을 지으며 말했 다. "그렇군요. 도장께서 직접 시험하여 옆에 사람의 눈을 번쩍 뜨이 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운양자는 지금 장문사형의 신상을 위해서 어떤 굴욕이든 참아야 만 했다. 그는 고개를 쳐들어 거미줄을 바라 본 후 천천히 오른손 을 위로 쳐들었다. "그렇다면 빈도는 당신들의 말을 따르겠소." 그는 우장을 휘둘려 사분의 내공을 발출했다. 한 줄기의 장력이 곧장 밀려 갔다. 운양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방안에 모인 여 러 사람들은 이 별것 아닌 거미줄이 장력을 막아 내리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의 변화가 나타났다. 운양자의 일장이 주망에 적중하 자 거기에 붙었던 거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갑자기 거미줄을 뽑 아 내면서 공중을 타고 발장한 곳으로 천천히 움직여 오고 있었다. 그 주망은 장력이 적중되자 진동을 받아 한 번 기복을 일으키고는 천 만 뜻밖에도 끄떡없이 건재한 게 아닌가! 이때 금화부인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도장 조심하시오. 만약 독사(毒絲)가 붙거나 거미에게 물리면 영사형의 상세보다도 더 위험하게 됩니다." 그동안 그 여덟 마리 검은 거미는 이미 주망을 확대시켜 사방 벽 과 천장을 향해 퍼져 가고 있었다. 또한 이 검은 거미들의 행동은 겉으로 보기엔 비록 느린 것 같았 지만, 주망 속에서 행동할 때는 기가 막히게 빨랐다. 이리하여 독사는 점점 넓게 확대되어 운양자에게 접근해 오고 있 었다. 운양자는 드디어 오른손을 쳐들어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등에 꽂힌 장검을 뽑았다. "부인께서는 나중에 빈도가 그들을 해쳤다고 원망은 하지 마시고 즉시 이 독물을 제거하시오." 금화부인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도장께서 만약 그들을 해칠 자신만 있다면 마음 놓고 죽여도 좋 소." 운양자가 대꾸했다. "그렇다면 빈도가 시험좀 해 봐야겠소." 말하고 있는 순간에 한 마리의 거미가 서서히 운양자에게 다가왔 다. 이를 운양자가 오른손을 휘둘러 재빨리 장검으로 쳐내자 한 줄 기의 장력이 밀려 나와 운양자의 장검 위로 돌아쳤다. 운양자의 장검이 그 거미에게 명중되려는 찰나 갑자기 장검이 밑 으로 처지며 하마터면 운양자는 장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때 심목풍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도장께서 폐장에 온 것은 영사형의 생명 때문에 온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공을 과시하러 온 것입니까?" 운양자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강호의 소문에 이 혈영자(血影子) 심목풍의 무공은 무척 고강하 다고 했는데 과연 틀리지 않는 말이군.' 그러나 운양자는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심대장주의 탄지진검(彈指震劍)의 공력은 과연 평범하지 않군 요." "부인, 어서 그 독거미를 제지하십시오. 조금만 더 있으면 온 집 이 주망에 둘러 쌓았겠소이다." 금화부인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이 거미들은 비록 독이 대단하긴 하지만 결국 동물인지라 사람 처럼 총명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도장께서 뒤로 두 발자국만 물러 서면 거미들은 습격한 사람을 찾지 못하여 저절로 멈추어 버리고 다시는 주망을 확대하지 않습니다." 우문한도가 이때 너털웃음을 지었다. "도장께선 뒤로 두 발자국만 물러 서십시오. 지금 생사에 관한 대사를 논해야 할 계제에 몇 마리의 거미를 가지고 고집을 부려서 야 되겠습니까?" 운영자는 그렇잖아도 지금 사형의 생명이 사경에 처해 있으므로 마음이 초조한 터였다. 그가 여기에 온 목적은 오직 약을 구하자는 것이다. 그는 비록 우문한도가 비꼬는 말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참는 도리밖에 없었다. 운양자는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다. 이때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검은 거미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과연 그 몇 마리의 거미는 방금 운양자가 서 있던 자리에 이르자 그 습격한 사람을 찾지 못하여 자동적으로 멈춰 버렸다. 이때 심목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인의 독거미는 저에게 위력을 보여 주었소. 확실히 신통한 동 물임에는 틀림없소. 그러나 이 몇 마리의 독물이 주흥을 깨뜨릴 뿐 만 아니라 분위기를 흐려 놓을 것 같으니 빨리 그것들을 거두어 주 셨으면 좋겠소." 금화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대장주의 눈은 과연 다르군요. 이 거미들은 절독무비할 뿐만 아 니라, 신통하기 그지없으니, 만약 없애 버린다면 너무 아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심목풍은 약간 놀랐다. '독망(毒綱)은 이미 방의 절반을 다 덮었다. 계단의 입구도 이미 독망에 봉쇄될 지경이다. 만약 빨리 이 독망을 거두지 않으면 감금 당하고 말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독한 것은 부인의 마음이 다. 그녀는 이 기회를 빌어 우리를 함정 속에 빠뜨리려는 심산이 다.' 심목풍은 무척 용의주도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마음 속으로 이 미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러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 다. "뭐라구요? 그렇다면 이 독거미를 거둘 수 없다는 말입니까?"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만 그중 어느 방법이 좋을지 몰라서 망설 이는 중입니다." 심목풍이 급히 말을 받았다. "부인께서는 우리들이 그 두 가지 방법을 다 말씀해 주십시오." 금화부인은 말을 이었다. "그 첫째 방법은 나의 백선아(白線兒)에게 저 거미들을 한꺼번에 삼켜 먹어 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십 여 년 동안 이나 심혈을 기울여서 키워 온 것이 허사가 돼 버리며,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이 특이한 독거미는 구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 문에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신기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백선아란 무엇입니까?" 금화부인은 요염한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소제께서 한 번 보시겠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품 속에서 길이가 한 자 정도에 직경이 반 치쯤 되는 옥 합을 꺼냈다. "바로 이거예요." 소영은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금화부인은 다 시 옥합을 거두어 버리면서 웃음을 띠고 입을 열었다. "내가 마음이 좁아서 보여 주지 않으려는 게 아니오. 다만 백선 아의 성질이 무척 사납기 때문에 혹시 소제를 해칠까 싶어서 그러 는 거요." "두 번째 방법은 뭡니까?" "매듭은 지은 사람이 풀기 마련입니다. 도장께서 그 거미들을 노 하게 했으니, 역시 도장께서 그 거미들에게 뭘 좀 먹여 줘야겠어 요." 심목풍이 다그쳐 물었다. "무엇을 먹어야 될니까?" 금화부인은 갑자기 깔깔 웃으며 대꾸했다. "가장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한 쪽 팔입니다. 만약 도장께서 팔 이 아깝다면 손가락을 세 개 짤라서 줘도 됩니다." "빈도가 만약 거절한다면?" 금화부인 역시 날카로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도장의 심장을 먹여줄 수밖에 없지요." 금화부인의 어조는 악독함이 서려 있었다. 이때 심목풍이 운양자를 바라 보면서 한 마디 하였다. "운양도형은 먼 곳에서 왔으니 손님이시고 심목풍은 장의 주인으 로서 어찌 귀빈에게 그렇게 대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저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심목풍이 두 손을 들어 손뼉을 한 번 치니 푸른 옷을 입은 아름 다운 여종이 곧 들어 왔다. 그러자 심목풍은 정색을 하며 그 여종 에게 물었다. "네 이름은 뭐냐?" 푸른 옷을 입은 여종이 공손한 말씨로 대답했다. "쇤네는 하화(荷花)라고 부릅니다." "본 장주가 너에게 뭘 좀 빌리겠는데 들어 주겠는가?" "장주의 명령을 쇤네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좋다. 그렇다면 너의 왼팔을 잘라라." 하화가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쇤네는 망화루에 온 후 조금의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점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다." 심목풍은 주조룡을 바라 보며 물었다. "이제, 단도를 갖고 있나?" 주조룡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품 속에서 단도를 꺼내서 공손 한 태도로 심목풍에게 바쳤다. 심목풍은 단도를 받아 상 위에 놓으 면서 말했다. "네가 직접 베어라." 소영은 이 광경을 보자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올랐다. 그는 매우 격정적인 음성으로 외쳤다. "큰형! 아무 이유없이 왜 그녀에게 자기의 팔을 자르라고 합니 까?" 심목풍은 왼손으로 살짝 소영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삼제는 간섭하지 말게. 그렇다고 운양도형에게 한쪽 팔을 자르 라고 할 수는 없잖나....." 하화는 이미 자기에게 떨어진 명령을 거역할 길이 없음을 알자 입을 한 번 깨물고 나서는 상 위에 단도를 집어 들었다. "장주의 명령을 쇤네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운양자가 장검을 들어 하와의 수중에 있는 단도를 누르면서 황급히 말했다. "아가씨, 잠깐만 기다리시오. 빈도가 몇 마디 할 말이 있소." "어서 말씀하시오." 운양자가 말했다. "빈도가 저질러 놓은 일인데 어찌 소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겠 소. 이 빈도가 한쪽 팔을 자르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소만, 우선 장주께서는 해약(解藥)부터 먼저 주십시오." 이때 금화부인이 말을 가로챘다. "해약이 있긴 하지만 심대장주에게는 없소." 운양자가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부인에게 있군요?" 금화부인은 의기양양해서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나를 빼놓고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해약을 가진 사람이 없을 것 이오." 운양자가 곧 말을 받았다. "보아하니 빈도의 장문 사형은 부인께서 독물을 사용하여 암습한 것에 틀림없군요?" 금화부인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도장께서 꼭 알고 싶다면 사실대로 말해주지...." "빈도는 귀를 기울이겠소이다." "독물은 비록 나의 것이지만 그러나 우문 선생의 손을 빌어 몰래 방출한 것이지요." 운양자의 표정은 복잡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 다. "부인께서 만약 해약을 주신다면 빈도는 이 자리에서 한쪽 팔을 자르겠소." "이 일은 그 일과는 전연 별개의 것이니 어찌 도매급으로 의논 할 수가 있겠소?" 순간, 피가 튀며 하화의 왼쪽 팔이 어깨에서 사라졌다. 소영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금화부인을 노려 봤다. "난 여태껏 거미가 사람의 팔을 먹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소." 소영은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하화의 왼팔에 피가 흐르는 것을 막았다. 심목풍은 천천히 그 잘라진 팔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그 팔을 금화 부인에게 주면서 은근히 말했다. "이 팔은 쓸만한지 모르겠습니다." 금화부인은 그 팔을 한참 동안 노려 보더니 태연하게 대꾸했다. "물론 쓸 수 있지요." 그리고는 소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제께서는 여태껏 본 일이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제 잘 보 세요." 금화부인은 그 잘라진 팔을 위로 쳐들어 곧장 거미줄을 향해 던 졌다. 그 순간 재빨리 여덟 마리 거미들이 잘라진 팔을 향해 움직 였다. 그 거미들의 동작은 무척 빨랐다. 순식간에 여덟 마리의 거미들 은 팔에 달라붙었다. 그 백옥같은 팔은 점점 줄아 들었다. 여덟 마 리의 검은 거미들이 재빨리 잘라진 팔의 피를 빨아먹어 버린 모양 이다. "흡혈귀와 같은 거미로군!" "그렇소. 흡혈의 거미에요. 이건 천하에 가장 독이 많다는 기이 한 거미지요. 소제는 비로소 좋은 구경을 했지요?" 소영은 속으로 무척 경탄해 마지 않으면서도 그녀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게 되었다. '이 여인의 심장은 정말 독벌의 침이나 독사의 이빨보다도 악독 하군.' 그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비꼬듯 말했다. "오래 전부터 금화부인께서는 묘강에서 백독을 펼쳐내는 데 제일 고수라는 말을 들어 왔으나 오늘에야 그것을 목격했소이다." 금화부인은 이 말을 듣자 섬섬옥수를 쳐들어 이마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심대장주께선 저를 크게 과찬하셨습니다. 이 몸이 비록 변방에 살고는 있지만 그러나 자주 중원무림의 인물과 왕래가 있으므로, 일찌기 심대장주께서는 절세의 무공을 갖추었다고 들어왔습니다. 몇 초 전개하여 이몸에게 보여주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비록 묘강의 오랑캐라 하지만 매우 아리따운 용모에 목소 리도 무척 아름다왔다. 살결도 흰눈 같아서 어디를 보나 중원 여자 의 기풍이 넘쳐 흘렀다. 심목풍은 속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무공을 보여달라는 저의가 무엇일까? 이 여인은 요염하 고 사람을 매혹하는 데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진기한 동물을 몸 에 지니고 있다. 그뿐더러 그녀의 무공은 여태껏 본 일이 없지만 그녀는 보기에 무척 기지가 있어 보이며 또한 침착하니 반드시 비 상한 절기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 없으리라.....' 심목풍은 속으로 은근히 경계를 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짐짓 태 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저의 보잘 것 없는 미약한 무공이 오히려 부인의 두 눈을 어지 럽힐 것입니다. 다음 날도 있으니 적당한 기회에 부인에게 보여드 리겠습니다. 이 자리에선 귀빈이 와 계시므로 제가 만약 이 자리에 서 무공을 보여 준다면 아마 자랑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 다." 금화부인은 이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심대장주의 말씀이 옳군요. 그럼 다른 일을 의논합시다." 하화는 비록 소영에게 혈도를 짚혀 유혈은 멈추었지만 아픔은 참 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화산장의 규칙이 매우 엄격하므로 결코 신음소리를 내 지는 않았다. "넌 이제 물러가서 쉬어라." "대장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녀는 단정한 태도를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상처의 아픔이 뼈속까지 스며들어 아름다운 몸매가 일그러지고 걸음이 비틀거렸 다. 운양자는 그녀의 비틀거림을 보자니 무척 가슴이 아팠다. 심목풍은 운양자를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무당파는 강호에서 으뜸가는 지위에 있습니다. 도장께서는 무당 파 안에서 무위도장의 다음 가는 신분이니 무위도장께서 도형을 폐 장에 보내실 때는 아마 전권을 맡기셨겠지요?" 운양자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빈도는 폐장문의 명령을 받고 온 바, 다만 해약에 관해서만 권 리를 가지고 있을 뿐 다른 일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을 회피하겠습 니다." 심목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영사형께서 불행히도 서거한다면 무당파의 장문인의 지위 는 당연히 도형에게 물려지겠지요?" "각문 각파는 모두 자기들의 규칙이 있는 법이오. 장문의 지위를 어떻게 계승하든 간에 그것은 다른 문파의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오." 심목풍이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제가 도형을 도와서 무당파의 장문인이 되게 한다면 도형 은 어떻게 하시겠소?" 운양자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파 내에는 인재가 무척 많소. 설사 폐장문 사형께서 독이 발 작하여 서거하신다고 하더라도 역시 빈도가 장문의 지위에는 오르 지 못할 것이니 이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소." 심목풍은 아무리 명리를 붙여서 유인해도 운양자가 백화산장에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자 안색이 변했다. "좋소. 그렇다면 우리 영사형의 생사에 관한 문제를 의논합시 다." "그것이 바로 빈도가 여기에 온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 도형께선 성격이 무척 오만하기 때문에 우리와는 얘기할 생 각이 없는 것 같으니 부인께서 직접 이 도형과 해약 문제를 의논하 십시오." 그러자 금화부인이 웃음을 띠면서 응수했다. "심장주께서 직접 결정을 지으십시오. 어떤 결정에도 따르겠습니 다." 심목풍이 마지못하는 척하면서 말을 받았다. "부인께선 저에게 너무 무거운 책임을 전가하십니다." "도장께선 무슨 보물로 영사형을 구할 해약을 교환하시겠소?" 운양자가 침울한 목소리로 즉시 대답했다. "아마 보통 보물로서는 장주께서 수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목풍이 이 말을 듣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무위도장이 어떠한 인물이라고! 물론 웬만한 보물과는 바꿀 수 없는 생명이지요." "삼기진결과 해약을 바꾸는 것이 어떻소?" 심목풍이 이 말에 깜짝 놀랐다. "삼기진결이 무당파에 있습니까?" 운양자는 역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죠. 하지만 폐사형의 말씀에 의하면 이 책의 무공은 본 파의 법통(法統)과는 합칠 수 없으며 너무도 극단적이기 때문에 조 금만 실수하여도 큰 피해를 입을 위험성이 있으므로 본파의 제자들 은 배우기를 꺼려하고 있소. 그뿐더러 배워서 성공한 사람이 여태 껏 한 사람도 없는 실정이오." 심목풍은 이 말을 듣자 좋다구나 하고 떠벌였다. "무위도장의 고집이 여간 아니군요. 또한 귀파의 무학은 정종(正 宗)이라 믿으니 거기에다 잡하무공을 뒤섞어 놓기 싫은 모양이지 요?" 운양자가 말을 가로챘다. "빈도는 다만 그 책의 가치를 말한 것 뿐이오." "삼기진결은 비록 무림 삼보에 들어 갈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귀장 문인의 생명에 비교한다면 그 가치가 약간 부족한 것 같소." 운양자는 한참 동안 잠자코 무엇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거기에다 옥선자의 그림을 합치면 어떻겠소." 심목풍은 순간 눈을 빛냈다. "뭐라구?" 심목풍의 귀는 무척 밝다. 운양자의 말소리 또한 컸다. 그러므로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다 분명히 들었는데 유독 심목풍만이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심목풍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헛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운양자가 다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옥선자 그림!" 심목풍은 그제야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반문했다. "진짜인지 모르겠소?" "그 옥선자의 그림이란 천하에 오직 한 폭 밖에 없는 것인데 그 야 물론 틀림없소." 금화부인이 말참견을 했다. "옥선자가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한 폭의 그림이 뭐 그리 대단 하단 말이오?" 심목풍이 말을 가로챘다. "부인께서는 잘 모르십니다. 그 옥선자의 그림은 중원 무림에서 는 진기한 것으로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 그 림은 백여 년 전에 화성 시천도(時天道)가 직접 그린 것이며 정말 신필이어서 그림속의 옥선자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합 니다. 그런데 그 시천도의 성격이 하도 괴팍하여 죽기 전에 자기의 그림을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오직 인간 세상에 전해 내려 오 는 것은 일폭반화의 그림뿐이라고 합니다." 소영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일폭반화의 그림이란 뭡니까?" 심목풍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시에 시천도가 그림을 태울 때 오직 옥선자의 그림 한 폭만은 태우지 않았으므로 이것이 바로 오늘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한 폭의 그림이며, 또 한 폭의 그의 그림을 뺏으려고 옆에 숨어 있던 무림의 고수에 의하여 타다 남은 반 폭의 그림을 탈취당했다는 것 인데, 그러나 시천도는 그림을 잘 그릴 뿐만 아니라 무공도 무척 높아서 당시의 무림 인물로써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불과 삼, 오 인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네. 그래서 시천도는 타나 남은 반 쪽의 그림이 탈취되어 바깥으로 나가자 매우 화가 나서 필생의 공 력을 집중하여 일장을 쳐내 숨어 있던 무림의 고수를 죽여 버렸다 고 하네."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은 너무 괴팍스러운 분이군요? 뭣 때문에 자기의 그 뛰 어난 그림을 세상에 남겨 놓지 않으려 했을까요?" 심목풍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만약 시천도가 많은 그림을 이 세상에 남겨 놓았다면 조금도 그 것은 진귀한 보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 시천도는 일생 동안 에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이 모두 십 폭의 명화뿐으로 혹 그것이 전부 남았다고 하더라도 많은 숫자가 아닐 텐데..." 심목풍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문형께선 선기서려(璇璣書廬)에 은거하여 만권의 서적을 독파 했으며, 또한 명산대첩을 유람하여 수만리의 여행을 함으로써 많은 견문을 넓혔으니 그 시천도가 남긴 반 폭의 그림에는 무엇이 그려 져 있는지 아십니까?" 우문한도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그것은 한 폭의 중성봉월도(衆星鳳月圖)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시천도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그린 조각달은 불 타 버리고 다만 열두 개의 별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심목풍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우문형은 과연 박학다식하군요. 그 시천도가 인간 세상에 남긴 반 폭의 그림이 바로 중성봉월도입니다. 헌데 약간 우문형의 말씀 가운데 틀린 점은 별이 꼭 열한 개 반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 니다." 이때 소영이 갑자기 물었다. "그 시천도는 장력을 쳐내서 숨었던 무림의 고수를 죽였다면서 왜 바깥으로 나가 버린 반 폭의 그림은 되찾지 않았습니까?" 심목풍이 역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당시 시천도는 중병에 걸려 숨을 거두려는 찰나였고 게다가 대노하여 필생의 공력을 집중하여 일격을 쳐 냈으므로 기진맥진하 여 쓰러졌다고 하네. 그 반 폭의 중성봉월도는 바깥으로 날아간 후 일진의 폭풍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하는 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시천도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 발은 문에 걸린 채 몸이 바깥에 쓰러져 있었다고도 하네." 소영은 다시 물었다. "그 시천도가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그림을 다 태우는데 하필 이면 왜 옥선자 한 폭만 태우지 않았을까요." 심목풍이 역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 옥선자의 그림은 그가 반생에 걸쳐서 그린 것이기 때문에 인 간 세상에 남겨 놓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불태워 버리기도 아까왔던 모양이야."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이 옥선자의 그림에은 사랑의 고사가 담겨져 있 다고 합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그림의 주인공은 실제로 있었 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충분히 근거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 됩니다. 왜냐하면 시천도가 제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상 상력 만으로는 그처럼 생동하는 옥선자의 윤곽을 그려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운앙자는 이때 장문 사형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이야기를 더 참고 들을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 "두 분의 그 박식한 담론을 빈도는 더 듣고 싶지만 그러나 폐사 형의 생명이 위험에 빠져 있으니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습니 다. 이 두가지 세상에 드문 보물로써 해약과 바꾸고자 하니 심장주 께서는 빨리 결정을 지어 주십시오. 그래야만 나도 안심을 할게 아 닙니까?" 심목풍은 금화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으로는 삼기진결과 옥선자의 그림이라면 무위도장의 생 명보다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부인의 의사는 어떠하신지?" 금화부인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 몸이 무리한 청을 하나 하려는데 장주께서는 들어 주실수 있 는지요?"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부인께서는 서슴지 말고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면 절대로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자 금화부인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이 몸은 원래 아무런 요구도 없으니 해약을 주든 안주든 간에 오직 두 분에게 맡겨 버릴 작정이었는데 두 분께서 하도 옥선자의 그림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므로 슬며시 호기심이 일어서...." 항상 태연한 표정을 애써 짓던 심목풍도 이 때만은 안색이 돌변 했다. "부인께서는 그 옥선자 그림을 달라는 말씀입니까?" 금화부인이 천천히 대답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장주께서는 하사하시겠습니까?" 갑자기 방안은 물을 끼얹는 듯 조용해졌다. 갑자기 금화부인은 깔깔거리며 웃더니 소영에게 넌지시 말을 건 넸다. "소제, 나의 백선아 위력을 한 번 보시겠소?" 소영은 속으로는 그녀가 무척 미웠지만 그러나 호기심을 참지 못 하여, 다그쳐 물었다. "백선아가 뭡니까?" 금화부인은 아까 품 속에 도로 집어 넣었던 옥합을 다시 꺼내면 서 호탕하게 웃었다. "소제 잘 보세요!" 금화부인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한 줄기의 흰 빛이 옥합에서 쏟 아져 나와 공중에서 한 바퀴 선회를 한다음 방바닥에 내려졌다. 소영이 자세히 바라 보니 뜻밖에도 그것은 한 마리의 작은 뱀이 었다. 그 뱀은 하반신은 또아리를 틀고 대가리를 치켜 들어 입에서 붉은 혀를 속속히 내밀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뱀을 주시했지만 뱀은 조금도 겁내는 빛이 없었다. 금화부인은 이때 다시 품 속에서 연한 푸른 빛깔의 자합 (磁盒)을 꺼내어 뚜껑을 열고 주망 위로 던졌다. 그러면서 기합을 질러댔다. 그러자 뼈밖에 남지 않는 팔에 붙어 있던 여덟 마리의 독거미가 그 괴이한 기합소리를 듣고는 모두 자합 속으로 움직여 들어 갔다. 그런데 아직도 자합 속에 들어 가지 못한 한 마리의 독거미를 향 해 금화부인이 다시 나직이 이상한 기합소리를 내자 그 독거미는 갑자기 얼어 붙은 듯이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이때 다시 흰 빛이 번쩍이더니 방바닥에 있는 백사가 돌연 비약 하여 주망 위에 달라 붙었다. 그러자 남아 있던 독거미는 긴 다리 를 쭉 펴며 아주 성난 빛을 띠었다. 이 순간 백사는 혀를 날름 내밀어 독거미를 삼켜 버렸다. 이 광 경을 본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돌변했다. 금화부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천천히 걸어 나가 자합 의 뚜껑을 닫은 후 남은 일곱 마리의 독거미를 품 속에 도로 넣었 다. 그리고 이 작은 백사는 한 마리의 독거미를 삼킨 후 갑자기 기 운이 나서 꾸륵꾸륵 하는 소리를 두 번 지르고 온몸에 비늘을 곤두 세웠다. 이때 금화부인이 다시 손짓을 하자 백사는 곧 원래의 자리로 돌 아와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빨간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사람을 가려 내어 물려는 것 같았다. 소영은 잠깐 놀라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작은 백사가 이처럼 사납게 구는 것을 보니 막아 내기가 힘 들겠구나.' 심목풍이 금화부인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부인의 청을 받아드리겠습니다." "대장주께서는 과연 넓으신 도량을 갖고 계십니다. 이 몸은 반드 시 그 보답을 해드리겠습니다." 금화부인은 옥합을 번쩍 쳐들어 다시 이상한 기합소리를 발했다. 그러자 그 작은 백사는 천천히 옥합 안으로 들어 갔다. 심목풍은 침울한 표정을 감추려고 억지로 웃음을 터뜨렸다. "운향도형, 그럼 우리 약속합시다. 그런데 그 옥선자의 그림과 삼기진결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운양자가 천천히 대답했다. "지금 빈도에겐 없습니다." 심목풍이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그점은 이 심모도 이미 짐작했던 바입니다. 그렇다면 도장께서 교환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디까지나 공평한 방법을 취합시다." 이때 금화부인이 말참견을 했다. "만약 열두 시간 안에 영사형에게 해약을 복용시키지 않으면 그 무서운 독이 심장에까지 파고 들어 가므로 그 때는 아무리 해약이 있어도 그 분의 생명을 구해 내지는 못합니다." 운양자는 이 말을 듣자 방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습니까?" 심목풍이 얼른 대답했다. "사 경이 지나고 아직 오 경은 채 되지 않았습니다." 운양자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정오를 기하여 빈도가 한 척의 작은 배를 타고 삼류만(三 柳灣)의 강상에서 기다리겠소. 서로 사람을 많이 데리고 갈 필요 없이 각각 한 척의 작은 배를 타고 강심으로 나가서 서로 교환하도 록 합시다." "좋습니다. 그러면 몇 명 정도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각각 네 명이 넘지 않도록 합시다." "그럼 도장의 의사대로 하겠습니다." 운양자는 냉랭하게 우문한도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우문 선생이 폐사형에게 암습을 했다는 것은 뜻밖이군요." 우문한도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강호에서는 각자 자기의 재능껏 싸우는 것이 아니겠소? 영사형 께서 비록 나에게 잘 대해 주었다고 하지만 그 이번에는 반드시 다 른 뜻이 있었을 것이지 오직 정의(情義), 두 자로써 대해 주었다고 만은 할 수 없는 것이오." 운양자는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만약 폐사형께서 무슨 불행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우문 선생은 악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소." "도형께선 너무 심하시군요!" 운양자는 다시 심목풍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그럼 빈도는 이만 작별하겠소." 이때 심목풍이 주조룡에게 당부했다. "운양도장을 배웅해 주시오." 주조룡은 그 말이 떨어지자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도장, 어서 나가시지요." 운양자는 방안의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나 가버렸다. 이때 금화부인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외쳤다. "잠간만, 그 거미줄을 조심하십시오. 거미줄에는 독이 잔뜩 묻어 있으므로 두 분께서는 거기에 닿기만 하면 생명을 끈게 될 것입니 다." 심목풍이 다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부인께서 좀 수고스럽지만 두 사람이 나갈 수 있도록 거미줄을 거두어 주십시오." 여전히 계단 입구에는 거미줄이 출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대장주의 거처에 이 독거미줄이 처져 있으면 훨씬 보호가 될 텐 데요? 기껏 쳐놓은 것을 다 없앤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 아닙니까?" 심목풍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백화산장은 비록 동장철벽(銅牆鐵壁)은 아니지만, 그러나 적을 막아낼 수 있는 방비는 충분합니다. 부인의 뜻은 감사하지만..." 금화부인도 미소 띤 얼굴로 사뿐사뿐 걸어 나가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몸은 장주를 위해드리는 것보다 오히려 명령에 따 르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 독거미줄을 다 제거하겠습니다."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금화부인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어 떤 방법으로 그 독거미줄을 제거하는지,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그 제거 방법을 알아 두려는 것이었다. 금화부인은 품 속에서 한 자 정도 짧은 황금색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는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한 줄기 남색 불꽃이 일어나더니 어느 새 독거미줄이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22. 음모와 음모가 난무하다 금화부인은 마치 방안의 사람들에게 손에 든 무기를 보여 주기 싫은 듯 재빨리 금검을 다시 품 속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는 웃으 면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선 이제 나가도 괜찮습니다." 주조룡이 먼저 한 발 앞섰다. "제가 도장께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운양자는 주조룡을 따라 성큼성큼 계단 아래로 내려 갔다. 금화 부인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 오면서 입을 열었다. "대장주께선 정말 해약과 교환하시려는 겁니까?" 심목풍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강호에서는 비록 권모술수가 통한다고는 하지만 약 속만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만약 그 운양자가 삽기진결과 그림 을 정말로 가지고 온다면 우리도 약속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금화부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다른 약으로 속여서 교환한다면?" 심목풍이 그 말을 듣자 담담하게 웃었다. "무당파의 명성은 수백 년 동안 강호를 주름잡아 왔습니다. 부인 께서는 방금 운양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각각 한 척의 작은 배를 타고 강심에서 교환하자는... 그들이 얼마나 용의주도한지 가 히 짐작이 갈 것입니다." 금화부인은 역시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령 내가 다른 약을 가지고 해약이라고 속인다면 대장주께서도 알아 보기 힘들 것입니다." 심목풍은 그 말에 약간 놀랐으나 곧 담담하게 웃어 넘겼다. "부인께서는 중원무림의 인물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특히 무당파의 인재를 멸시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우문한도는 혹시 두 사람이 말다툼이라도 할까 싶어서 말참견을 했다. "심형께서는 이미 십 년 전부터 중원무림을 영도해 왔고 부인께 서는 또한 묘강의 영수이시니 두 분께서는 각각 패주(覇主)이십니 다." 우문한도는 말을 잠깐 그쳤다가 다시 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형세로 보아서는 서로 힘을 합하여 피차 양보하 고 인내해야 됩니다. 더군다나 지금 우리들은 마치 호랑이 등에 타 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로 내려 올 수도 없고 계속 타고 있을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우문한도는 가볍게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금화부인을 바라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이미 운양자 앞에서 우리가 무위도장을 암습한 것을 시인했으니 무당파와 적으로 맞서겠다는 거나 다름 없게 되었습니 다. 거듭하는 말이지만 무당파의 위세는 실로 대단하여 소림, 아 미, 청성 등의 대파와 서로 내통하여 상호 협조하고 있으므로 만약 부인께서 심대장주와 손을 잡지 않는다면 적들에게 좋은 기회를 주 는 거나 마찬가지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심목풍이 이 말을 듣자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소제가 충심으로 존경하는 바입니 다." 금화부인은 잠깐 동안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별안간 웃음을 지으 며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의 말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갑자기 말을 중단합니까?" 우문한도는 가볍게 한 번 기침을 하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는 정말 놀라운 재질을 가졌군요. 제가 말하려는 것은 부인과 심형 두 분 중에서 누구든 대국을 주재할 수 있는 한 분을 뽑아야만 무슨 일을 하든 머리와 끝이 있으면 모든 것을 통솔해 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목풍이 급히 말을 받았다. "부인께서 마땅히 맹주 자리에 오르셔야 합니다." 금화부인이 잠깐 동안 무엇을 생각하더니 심목풍을 바라 보고 입 을 열었다. "대장주께서는 너무 겸양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몸은 어디까 지나 손님이니 대장주께서 반드시 맹주가 되셔야 합니다." 이때 우문한도가 웃으면서 말참견을 했다. "두 분의 재지(才智)와 무공으로 본다면 마땅히 두 분이 다 대국 을 주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허나 제 생각으로서는 어느 모로 보든지 심형이 주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 면 부인께서는 비록 절세의 무공을 소유하고 있으며 재지가 뛰어나 지만 묘강에 오래 계신 연고로 중원 무림의 형세에 대해서 잘 모르 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 역시 심형이 낫다는 것입니다." 금화부인이 말을 거들었다. "이 몸도 역시 동감입니다. 심대장주께선 더 이상 사양하지 마십 시오." 심목풍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분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저는 두 분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응답을 들은 후에야만 제가 두 분의 뜻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금화부인은 잠자코 우문한도를 응시하자 우문한도가 다급히 물었 다. "심형께서 무슨 고견이 있으신지 서슴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 오." "대국을 끌고 나가기란 천 리 길을 걷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 이며 더욱이 중요한 것은 명령이 제대로 움직여져야 되는 것이오. 저의 재지는 평범하여 혼자서 이 중책을 감당해 나가기는 어려운 것 같소. 그러므로 중대한 사건을 결정지을 때마다 두 분께서 반드 시 참석하여 주시고 같이 대책을 연구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금화부인이 한 마디 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그 말을 듣자 심목풍이 잔잔한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일이 만약 결정되면 절대로 변경할 수는 없으며 두 분이 먼저 준행해야만 규칙이 설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맹기(盟旗)를 만들려 고 합니다." 이때 금화부인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옥선자의 그림만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겠지요?" 심목풍이 교활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부인께서는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제가 기와 그 옥선자의 그 림을 드리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찌 도로 뺏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문한도가 말참견을 했다. "심형의 말씀이 여러가지로 옳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책임을 지 고 그 맹기를 설계하겠습니다." 심목풍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소제가 사람을 보내 지난날의 친구와 부하들, 그리고 몇몇 저명한 고인들을 초청하여 한바탕 군영대회(群英大會)를 거행 코자 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동맹에 가입하 도록 권유할 작정입니다." 우문한도가 이 말을 듣자 기쁜 듯이 한바탕 껄껄 웃어젖혔다. "심형께선 다시 강호에 나온 것만으로도 이미 무림을 한바탕 진 동시켰는데, 게다가 이번에 군영대회까지 연다면 반드시 각대 문파 의 주목을 끌게 될 것입니다." 심목풍이 그 말을 듣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문형 너무 과찬해 주셨습니다."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군영대회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차차 치밀한 계획을 짜도 록 하고 지금 당장 눈앞에 둔 이 일을 심장주께선 속히 결정해야 합니다." 심목풍이 반문했다. "운양자와의 약속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노도가 오직 한 척의 작은 배와 네 사람밖에 참 가시키지 못하게 하니 장주께서는 그 네 사람으로 어떤 사람을 보 내야 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심목풍이 곧 대답했다. "부인께서 수고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문형이 부인을 모셔 동행 하십시오." 우문한도는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심형께서 참가하시지 않습니까?" 심목풍은 역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전 가지 않겠습니다. 그대신 이제와 삼제를 보내겠습니다." 금화부인이 곧 입을 열었다. "백화산장의 비밀이 이미 폭로됐으니 장내에는 수시로 강적이 습 격해 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장주께선 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 상 책일 것입니다." 심목풍이 역시 교활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부인의 재지는 과연 놀랍군요.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실 줄 믿 습니다. 자아, 그럼 우리 축배를 듭시다." 심목풍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금화부인 도 따라서 술잔을 높이 쳐들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리고는 웃으 며 입을 열었다. "장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심목풍은 다시 주조룡과 소영을 바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와 삼제는 이제 내려가서 쉬게. 그리고 내 명령에 따라 부 인을 수행하는 정오의 약속에 나가도록 준비하게." 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누 아래로 내려 갔다. 그는 이 밤 중에 망화루에서 놀라운 사실이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 다. 자신은 파 놓은 함정에 빠져 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영은 격분과 우울을 가슴에 안고 난화정사(欄花情舍)로 돌아 갔다. 금란과 옥란이 이미 성장을 하고 난화정사 밖에서 소영을 기 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의 불쾌한 표정을 보자 그녀들은 웃음 을 거두어 버리고 잠자코 소영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 갔다. "셋째 나리 저희들 때문에 노하셨습니까?" 소영은 고개를 흔들어 보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어서 물러나 있거라. 나는 조 용히 좀 쉬고 싶다." 두 비녀(婢女)는 그의 성질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하지 않 고 천천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소영은 촛불을 끄고 옷을 입은 채 누웠지만 여러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바로 이 때였다. 한 마디 매우 낮은 음성이 들려 왔다. "삼제 잠들었나?" 매우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소영은 즉시 심목풍의 목소리임을 알아 채고 급히 일어났다. "큰형입니까?" 문이 열리는 순간 불빛이 환하게 비쳐 들었다. 금란이 등불을 들 고 재빨리 들어 와서 촛불을 켰다. 심목풍이 뒷짐을 지고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 오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 정오의 약속에는 금화부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소영은 허리를 약간 굽히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심목풍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옥선자의 그림은 일대 화성인 시천도의 명화이며 진귀하기 이를 데 없다. 기실 그 가치로 삼기진결보다도 훨씬 높은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것이 금화부인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야." 소영은 어리둥절해서 심목풍을 쳐다 보며 되물었다. "그러나 큰형께서는 이미 그 옥선자의 그림을 금화부인에게 준다 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 소영이 미간을 찡그리며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저더러 그 그림을 빼앗아 오라는 겁니까?" 심목풍은 소영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금화부인이 필요하다. 그녀는 무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특히 온몸에 독물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금 세상에서는 둘도 없는 귀중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도움 이 큰 방수(幇手)이다." 소영은 양미간을 찡그렸다. "큰 형께서는 방금 그 옥선자의 그림을 되찾고 싶다고 하시면서 저더러는 또 금화부인의 손에서 빼앗지 못하게 하시니 도무지 어떻 게 하라는 건지 종잡을 수 없군요." 심목풍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우리는 절대로 그 옥선자의 그림을 잃어서는 안 되지. 그리고 또한 그것을 금화부인의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와서도 안 돼. 다만 삼제가 그것을 금화부인의 손에서 편취(編取)하면 안 될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편취라고요?" 심목풍이 웃으며 대답했다. "천하 만물은 반드시 서로 극제(剋制)할 수 있도록 조물주께서 창조하셨다. 금화부인은 극독을 구사할 수 있고 지혜가 남달리 뛰 어나 오직 삼제를 빼놓고는 아무도 그녀를 굴복시킬 수가 없는 것 이다." 소영이 말을 받았다. "큰형께선 저를 놀리지 마십시오. 저의 재지와 경력은 모두가 금 화부인에게 뒤떨어지거늘 어찌 그 옥선자의 그림을 금화부인의 손 에서 편취할 수 있단 말이오?" 심목풍이 옳다구나 하고 말을 받았다. "바로 그점이야. 삼제가 강호의 경험이 없고 때묻지 않았기 때문 에 금화부인이 삼제를 의심하지 않는단 말이야." 심목풍은 잠간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역대의 무림중에서 확실히 많은 절세의 재녀(才女)가 나타났었 다. 그 얼굴은 꽃같이 아름답고, 마음은 무척 독하고 수법도 악랄 하여 그 재지가 남자를 능가했지만,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녀들이 백년대업을 성취하여 무림의 일파를 이루어 놓은 여자들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었던가? 그녀들이 제아무리 남자를 주무르고 손 안에서 요리할 수 있다고 자부하더라도 결국은 정에 약해 평생을 그르치 고, 끝내는 한을 머금고 인생을 그르치기가 일쑤인 것이다." 심목풍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더우기 묘녀들의 정감은 한인들보다도 강하고 깊다. 그러므로 삼제가 만약 그녀에게 정을 준다면, 옥선자의 그림은 쉽게 되찾아 을 수 있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심목풍은 가볍게 한 번 기침을 하고 나서 소영의 말을 받았다. "삼제는 자신의 맹세를 기억하고 있는가?" 소영이 대답했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다. 이 큰형의 명령은 만 번 죽더라도 수행해야 한 다. 더군다나 그 금화부인은 선량한 여인이 아니다. 그럼 난 이만 가겠다." 소영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제가 바래다 드리지요." 심목풍은 손을 들어 소영의 어깨를 몇 번 툭툭 쳤다. "이 큰형은 너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장차 나의 대업을 이을 사람도 너밖에 없다." 심목풍은 말을 마치자 천천히 돌아 서서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멀어져 가는 심목풍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속으로는 한층 더 깊은 번뇌에 빠져 버렸다. 금란과 옥란은 수장 밖에서 꽃나무 사이를 거닐고 있는 소영을 바라 보며 그의 생사에 관해서 걱정하 고 있었다. 이 두 비녀는 어릴 때부터 백화산장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이곳의 규칙과 특히 배반자를 징벌하는 참혹한 수법을 잘 알고 있었다. 소 영의 지금 표정이 매우 불쾌한 것 같으며 반발하는 기미가 엿보이 므로 그는 어쩌면 죽음을 면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었다. 두 비녀는 비록 같이 자라나서 자매의 정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피차의 마음 속에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금란이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셋째 나리는 퍽 마음이 편치 않는 것 같다." 옥란이 마침 입을 열고 무슨 대꾸를 하려고 하자 갑자기 주조룡 이 화려한 옷을 입고 서둘러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옥란은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너는 어서 가서 둘째 나리를 영접해라. 내가 셋째 나리에게 알 려 드리겠다." 두 비녀가 아직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주조룡이 급히 달려 오면 서 고함을 쳤다. "삼제 일어났나?" 소영은 몸을 돌려 손을 맞잡으면서 대답했다. "예, 일어났습니다." 주조룡이 다시 외쳤다. "금화부인과 우문선생은 이미 대청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삼제 빨리 준비해라. 우리도 갈 때가 됐다." "준비할 것 없습니다. 자아, 갑시다." 두 사람이 대청 안으로 들어가니 과연 우문한도와 금화부인이 기 다리고 있었다. 우문한도가 두 사람을 향해 공수를 하며 인사를 했다. "이장주와 삼장주께서는 수고가 많습니다." 주조룡이 인사에 답했다. "피차 한집안 사람이니 우문형께서는 너무 겸손해 할 필요 없습 니다." 금화부인은 경장을 했다. 흰 저고리와 흰 바지를 입고, 흰 비단 으로 머리를 감고 흰 저고리의 앞섶에는 역시 두 송이의 금화가 수 놓아져 있었다. 금화부인은 이미 사십이 넘었지만 내공이 심후하고 화장술 또한 놀라와서 그렇게 차리고 나서니 불과 이십 전후의 처녀 같았다. 그녀는 고운 눈썹에 화장을 쉽게 하였으므로 은근한 아름다움의 전형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을 물 같이 서늘하게 생긴 눈동 자는 정말 사람의 혼을 태앗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마 중원무림에서도 이처럼 아름다운 미인은 찾기가 힘들 것이 다. 소영은 비록 그녀에게 접근하여 옥선자의 그림을 편취하고 싶 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심목풍의 몇 마디 말이 계속 그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어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금화부 인에게 포권을 하고 인사를 했다. 금화부인은 예의 그 별빛 같은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묘례(苗禮) 로써 인사에 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웃음을 띠면서 이렇게 말했다. "소제께서는 예의 범절이 너무도 놀라 이 누이가 오히려 감당하 지 못하겠군요."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누가 너의 동생이라던? 혼자서 찧고 까불게.' 그러나 소영은 금화부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잠자코 있었다. 소영은 지난날 결의한 맹세 때문에 속으로 매우 괴로왔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목풍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주조룡이 이때 미소를 띠면서 입을 열었다. "바깥에 이미 말을 준비해 두었으니 부인과 우문형이 먼저 말에 오르십시오." 네 사람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대청을 빠져 나왔다. 대청 밖에는 이미 대한이 말고삐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주조 룡이 맨먼저 말 위에 올랐다. "제가 부인과 우문형에게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그들은 말에 오르자 산장을 빠져나온 후 곧장 삼류만을 향해 달 려갔다. 금화부인은 계속 소영의 곁에서 소영과 나란히 말을 달렸다. 금 화부인의 시선은 줄곧 소영의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햇빛을 받고 가는 소영의 커다란 눈동자가 별빛같이 반짝였으며 얼굴 빛은 붉고 발랄하여 무척 건강해 보였고 늘씬한 허리에 균형잡힌 체격은 영웅 의 기개를 충분히 발휘함과 동시에 보는 이로 하여금 흠모심을 불 러 일으키게 했다. 금화부인은 그를 바라 본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젊은이는 온 천하를 헤메고 돌아 다녀도 몇 사람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네 필의 말은 질주하여 단숨에 수십 리를 달려 갔다. 어느새 물 결이 세차게 일고 있는 장강의 강변에 도착했다. 주조룡이 먼저 말을 멈추고 하류에 희미하게 보이는 한 그루의 나무를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저기가 바로 삼류만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배를 타고 물결따 라 내려 가며 밥 한 끼 먹는 사이에 곧 도착될 것입니다." 금화부인은 말에서 내려 강 안을 살펴 보았다. 이미 한 척의 작 은 배가 정박해 있었다. 배 안에서 도롱이를 입고 어부 차림을 한 대한이 마중나오며 주 조룡을 향해 인사를 했다. "배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둘째 장주께서는 분부를 내리십 시오." 주조룡이 손을 휘두르면서 말했다. "빨리 가거라. 여기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러자 어부 차림을 한 두 대한은 다른 한 척의 고깃배에 올라 타고 노를 저어 가버렸다. 이때 금화부인이 소영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소제, 백화산장의 잠복 세력이 무척 많군요." 주조룡이 얼른 말을 받았다. "사실대로 말씀드린다면 귀주(歸州)의 백리 안에는 이르는 곳마 다 백화산장의 매복이 있습니다." 금화부인이 담담하게 한 번 웃고 나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순간, 갑자기 아름다운 몸이 뛰어 오르는가 싶더니 마치 나는 새처 럼 소주(小舟)위로 날아 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주조룡은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이와 같이 생각했다. '이 여마두는 정말 보통 인물이 아니구나. 백독을 사용할 줄 알 뿐만 아니라, 무공에 있어서도 경이적인 조예가 있군. 방금 비조처 럼 날아가는 경공만 보아도 무림에서는 그 유가 드물겠다." 그 작은 배와 이들의 거리는 일장 정도여서 다리나 무릎을 꺾지 않고는 도저히 소주에 올라 갈 수 없었다. 아주 심후한 내공과 뛰 어난 경공이 없이는 날아서 단숨에 뛰어 오를 수 없는 것이다. 소영도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 모아 몸을 돌리면서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한 바퀴 선회하면서 소주로 날아 갔다. 금화부인은 그 광경을 바라 보자 미소를 지었다. "날쌘 경공이군요." "변변치 않습니다. 부인께서 많이 지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문한도와 주조룡도 함께 소주에 올라탔다. 주조 룡이 소영에게 말했다. "삼제가 키를 잡으시오. 제가 노를 저을 테니....." 소영은 대답을 한 후 고물로 갔다. 금화부인은 줄곧 소영만 바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소영이 키를 잡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소제는 키를 잡아 본 적이 있습니까?"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습니다." 금화부인이 어깨를 약간 움직이는 순간 그녀는 한가닥 향기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소영의 곁으로 날아 갔다. 그녀는 다시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누나가 도와 주면 어때요?" 소영은 속으로는 비록 그녀를 미워했지만 심목풍의 부탁이 생각 나서 맘에도 없는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금화부인은 섬섬옥수를 뻗쳐서 키를 잡았다. 그리고는 애교가 담 뿍 담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제는 너무 사양하지 마세요. 앞으로 우리가 힘을 합하게 될테 니. 다만 소제가 이 누나를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묘강의 절기 를 모두 가르쳐 주겠소." '수치도 모르는군. 누가 너의 그 뱀을 가지고 노는 기술을 배운 다고 했나?' 그러나 소영은 짐짓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 못난 재질이 부인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금화부인이 말을 받았다. "이 누나는 사람을 잘못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소제가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삼 년 안에 이 누나의 절기를 다 배울 수 있을 것이 오." "별말씀을...." 주조룡이 두 손으로 계속 노를 젓자 작은 배는 강안을 떠나 미끄 러져 나갔고 금화부인이 키를 틀어 방향을 잡자 배는 물결을 따라 강하류로 내려 갔다. 소영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 보면서 오 년 전의 일을 생각 했다. 그때 강물에 빠졌던 일을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태양이 하늘 가운데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정오가 가까와 진 모양이었다. 주조룡이 천천히 노를 젓자 소주는 삼류만의 강물 위에 뜬 채 머 물렀다. 금화부인은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노도가 뜻밖에도 약속 시간을 어기는군. 우리들을 강 가운데 서 이처럼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잠시 후 혼을 내줘야겠어." 우문한도가 웃으면서 말했다. "부인께서는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무위도장의 생 사에 관한 문제이므로 절대로 저쪽에서 약속을 어기지는 않을 것입 니다. 지금은 아직 오시가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멀리서 조그마한 배 한 척이 파도를 헤치며 달려 오고 있었다. 선두에 서서 바람에 도포자락을 날리며 등에는 장검을 꽂고 있는 중년 도장이 바로 운양자였다. 금화부인이 키의 방향을 돌리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빨리 접근합시다." 주조룡은 대답을 하면서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소주는 재 빨리 움직여 상대방의 배로 접근했다. 운양자는 햇빛을 바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는 태양을 한번 쳐다 보았다. 아직도 정오가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더 사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금화부인은 냉소를 지은 후 입을 열었다. "도장이 일각이라도 늦게 오면 귀장문인의 사망의 위험은 그만큼 빨라지는 것입니다." 이때 두 척의 배는 불과 이, 삼 척의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배 위에는 아무것도 가리는 것이 없었으므로 양쪽의 선상을 서로 환하 게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소영이 상대방의 배 안을 자세히 살펴 봤으나 역시 네 사람 밖에 없었다. 선두에 서 있는 운양자의 뒤에는 나이가 이십칠, 팔 세 가 량 되어 보이는 경장을 갖춘 젊은이가 있었다. 그 젊은이는 매우 영준하게 생겼으며 늠름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 다. 그는 또한 허리에는 백색 영웅대(英雄帶)를 매고 거기에다 일 곱 자루의 단검을 꽂고, 등에는 한 자루의 장검을 메었으며 그 장 검에 있는 홍색의 칼끈을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소영은 그 젊은이가 바로 오 년 전에 무위도장의 단실에서 보았 던 전엽청이라는 것이 언뜻 머리에 떠올랐다. 그밖에 두 사람은 고물에 앉아 있었다. 그중 앞에 앉은 사람은 수염이 마치 가시처럼 쭈뼛쭈뼛하게 돋혀 뺨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모가 난 얼굴에 회색의 경장을 했다. 또한 뒤에 앉은 사람은 긴 은빛 수염을 가슴에까지 드리운 유건 을 쓰고 남색 장삼을 입었으며 살결이 무척 고와 어딘지 모르게 문 사의 냄새가 풍겼다. 우문한도는 처음에는 양미간을 찡그렸으나 곧 웃음을 터뜨리면서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종남이협이 이번 성회에 참가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우문한도는 마음이 음흉하므로 혹시 금화부인과 주조룡이 종남이 협을 알아 보지 못할까 싶어서 먼저 종남이협의 이름을 밝혀 주므 로써 금화부인과 주조룡에게 강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 미리 대비케 하자는 심산이었다. 그러자 그 유건을 쓰고 남색 장삼을 입은 문사 차림의 노자는 천 천히 가슴에 닿는 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담담하게 웃었다. "나와 무위도장은 수십 년 동안 사귀어 온 친구인데 그 깊은 정 의를 보더라도 물론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이때 짧은 수염이 뺨에 가득한 무섭게 생긴 대한이 냉소를 터뜨 리며 말했다. "우문한도, 무위도장은 너에게 인후하게 대해 주었거늘 너는 어 찌 인면수심으로 암암리에 독물을 사용하여 그를 상하게 하였나?" 우문한도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때 금화부인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의 약속은 여러분이 해약을 교환하기 위해서 한 것이오? 아 니면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바탕 싸우자는 것이요?" 전엽청이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둘 다 될 수 있으니 하고 싶을 대로 하시오." 운양자가 고개를 돌려 낮은 음성으로 꾸짖었다. "사제,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야."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금화부인을 향해 말했다. "오늘 약속은 물론 부인의 해약을 교환하는 것이 목적이지요." 금화부인은 이미 일어서서 뱃머리 쪽으로 서서히 걸어 나갔다. "도장께서는 삼기진결과 옥선자의 그림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운양자가 대답했다. "삼기진결과 옥선자의 그림은 빈도의 몸에 지니고 있지만 해약은 어디에 있습니까?" "해약은 물론 내가 갖고 있지요. 그러나 도장께서 먼저 그 삼기 진결과 옥선자의 그림을 나에게 보여 주어야만 내가 그 진부를 가 려낸 다음 해약을 드리겠습니다." 운양자는 이 말을 듣자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부인은 그와 같은 방법을 불공평하다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금화부인은 냉소를 터뜨렸다. "교환하고 싶지 않다면 그만 두십시오. 나는 더 이상 말하고 싶 지도 않으니...." 금화부인은 갑자기 돌아 서서 손짓을 했다. "우린 되돌아 갑시다." 전엽청이 쟁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을 뽑으면서 고함을 질렀다. "게 서 있거라!" 금화부인이 다시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네가 어쩌겠다는 거냐?" 전엽청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해약을 주고 싶지 않다면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하라." 금화부인은 전엽청을 한 번 훑어 본 후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 다. '중원 무림에 이렇게 많은 영준한 인물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 군!'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소영에게 반해 있었으므로 전엽청에 게 정을 두지는 않았다. 그녀는 곧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너의 그 별것 아닌 몇 초의 검술을 믿고?" 전엽청이 다시 말로써 반격하려는 것을 운양자가 가로막았다. "부인께서 그다지 옥선자 그림과 삼기진결이 보고 싶다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운양자는 말을 마치자 품속에 흰 비단을 꺼내면서 높이 말했다. "부인, 우선 옥선자 그림을 감상하십시오." 금화부인은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밝은 햇빛 아래 바라 보니 절세무비한 가인이 흰 비단 폭에 그려 져 있었다. 옥선자는 비단옷을 입고 얼굴에는 미소를 담뿍 띤 채 마치 바람 을 타고 날아 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 폭의 그림이라기 보다는 살아 있는 한 사람의 미인이 거기에 있었다. 금화부인은 고개를 숙여 물 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와 그림 속 의 미녀를 비교해 보았다. 순간 자신이 추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미모를 자부 해 왔지만 그림속의 미녀와 비교해 보니 자신의 아름다움은 한 군 데도 없었다. 우문한도와 주조룡도 넋을 잃고 그림을 바라 보고 있었다. 소영 도 역시 그림을 우러러 보며 맘속으로 선녀같은 여자라고 생각했 다. 전엽청은 그림을 바라 보다 화가 났는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림을 들고 있는 운양자의 표정은 경건하고 엄숙했다. 선미에 앉아 있던 노자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내뱉듯 소리를 질렀다. "그만 거두시오!" 운양자는 재빨리 그림을 거두어 집어 넣었다. "여러분께서는 잘 확인하셨지요?"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화성 시천도의 이름은 과연 허전이 아니군요. 이 옥선자 그림이 야말로 천하 제일의 보배라고 할 수 있소." 주조룡이 덩달아서 말했다. "꼭 베어 먹고 싶도록 예쁘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 같군 요. 이 그림은 천하의 미녀들로 하여금 자신을 추녀라고 느끼게 하 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소." 이때 금화부인이 흥하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아무리 그림 속의 여자가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 나 한 폭의 그림에 불과한 것, 어찌 감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과 비 교할 수 있으리오." 주조룡은 갑자기 그 말에 정신이 돌아 온 듯 맞장구를 쳤다. "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운양자는 다시 품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이 삼기진결도 아마 네 분에게 실망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운양자는 노란 비단으로 된 책의 표지를 젖히며 책을 높이 쳐들 었다. 이들의 시선은 굉장히 예민하여 캄캄한 밤중에라도 물건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으므로 그 책에 씌어진 글자가 비록 작지만 이들 은 분명히 읽을 수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무공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몇 줄 읽어 내려 가자 이 미 그 책에 게재된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아 챘다. 금화부인은 그것을 보자 눈썹을 치켜 뜨더니 곧 상대편의 배 위 로 뛰어 올라 가서 그것을 탈취하려는 기색이었다. 이를 본 우문한 도는 전음입밀(傳音入密) 방법을 써서 그녀를 제지했다. "부인, 경거망동은 하지 마십시오. 그 종남이협은 무림에서 오랫 동안 이름을 날려온 골치아픈 인물입니다. 가령 싸움을 하게되면 우리가 설마 패배하지야 않겠지만 아마도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 만은 빼앗아 오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왜 부인께서는 가짜 약 으로써 두 가지의 보물과 교환하지 않고서...." 운양자는 책을 덮어 버렸다. "여러분께서는 이미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을 보셨으니 빈도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지요?" 이때 금화부인이 품 속에서 한 개의 옥병을 꺼내어 운양자에게 보였다. "이 병속에는 세 알의 단환이 들어 있는데 이 단환은 독을 풀어 낼 수 있는 것으로써 두 시간마다 한 알씩 복용하는 것입니다. 그 렇게 세 알을 다 복용한 후에는 독상이 완쾌됩니다. 그러니 도장께 서도 상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을 동시에 공평하게 교환합시다." 운양자가 그 말을 듣자 담담하게 웃었다. "부인, 그러한 교환방법은 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금화부인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시간에 똑같이 물건을 교환하는 것이 어찌 불공평하단 말 이요?" 운양자가 역시 담담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은 부인께서 이미 확인하셨습니다. 확실 히 진짜이며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부인의 병속에 든 해 약이 반드시 진짜라는 것을 빈도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금화부인이 말을 받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겠소?" "빈도의 사형은 지금 여기서 오 리 밖에 있는 한 채의 초옥에 계 시니, 부인께서 수고스럽지만 같이 가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실 제 그 약을 복용해 본 결과 빈도의 사형을 구해 낼 수만 있다면 빈 도는 그 자리에서 즉시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을 드리겠습니다." 이때 우문한도가 불쑥 나섰다. "도형의 말씀은 약간 결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약속한 것은 강심 에서 물건을 교환하기로 했고 도형께서 직접 네 사람씩 대동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금화부인 한 사람만 데리고 가 려고 하고 또한 영사형께서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시니 이 점에 대해서 도형은 어떻게 변명하시겠습니까?" 운양자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받았다. "우문선생께서 금화부인의 옥병에 든 약이 진짜 해약이라는 것을 증명만 해 주신다면 빈도는 지금이라도 교환에 응하겠소." 우문한도는 그 말을 듣잘 말문이 막힌 듯 머뭇거렸다. "이건... 이거...." 하고 머뭇거렸다. 이때 전엽청이 냉소를 터뜨렸다. "폐사형께서 만약 무슨 불행이라도 당한다면 우문선생이야말로 맨 먼저 생명을 배상해야 할 사람이오." 이때 운양자는 상대방의 네 명 중에서 금화부인이 우두머리라는 것을 눈치 채고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빈도는 이미 옥선자 그림과 삼기진결을 가지고 성의를 다하여 해약과 교환하려 온 것입니다. 그뿐더러 빈도는 수백 년간 이어온 무당파의 신용과 명예를 걸고 부인과 맹세하겠습니다. 절대로 무슨 계교나 음모로써 부인을 함정으로 유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금화부인이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설사 함정이 있더라도 나는 겁나지도 않소." 소영이 이때 갑자기 입을 열었다. "도장의 말씀이 무척 공평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금화부인은 이 말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는 애교가 담긴 목소리로 반문했다. "소제, 뭐라고 했지?" 소영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피차간에 적으로 돼버렸으니 상대방이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금화부인이 깔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소제의 의사는 우리가 그 무위도장을 진짜로 구원하여 살려내야 마땅하다는 거요?" 소영은 이 역시 침중한 목소리로 대닫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약속한 일을 어찌 어길 수가 있겠습니까?" 금화부인은 또 한번 깔깔 웃어젖혔다. "좋소. 그럼 소제의 의사대로 합시다." 그녀는 손짓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도장께서 길을 인도하십시오." 운양자가 소영을 느긋이 바라 보고 있었다. 순간 소주는 강안을 향해 미끄러져 갔다. 주조룡은 노를 저어 운양자가 탄 배를 뒤따르면서 소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삼제, 우리는 이번에 오직 금화부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되 어 있는데 어째서 삼제는 함부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는가?" 소영은 할 말이 있었지만 참아 버렸다. "둘째 형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다시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금화부인이 이때 소영을 돌아 보며 미소를 던지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무슨 말이든 서슴치 말고 해요. 잘못해도 아무 상관 이 없으니까." 두 척의 소주는 급류를 따라 질주하여 순식간에 강안에 닿았다. 운양자가 먼저 강기슭으로 뛰어 올라 가면서 엄숙한 음성으로 말 했다. "부인에게 수고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금화부인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무위도장께서 용담호열(龍潭虎熱)에서 조리를 하고 계시더라도 이 몸은 역시 겁내지 않고 갈 것입니다." 전엽청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무척 거만하군!" 금화부인은 그 서늘한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을 받았다. "만약 네가 믿기지 않는다면 한 번 시험해 보시지?" 이때 운양자가 음성을 높여 전엽청을 꾸짖었다. "사제,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야." 운양자는 다시 금화부인을 바라보며 웃음을 띠었다. "부인께선 농담으로 들어 주십시오." 현문 고인 운양자는 사형의 안위를 크게 생각한 나머지 웬만한 것은 참기로 했다. 종남이협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은 황량한 강안이라 인가라곤 없었다. 운양자는 앞에서 길을 인도하며 진기를 끌어 모아 재빨리 달리고 있었다. 얼마쯤 달렸을까? 조그마한 잡목숲을 하나 지나니 다 쓰러져 가 는 모옥이 한 채 나타났다. 운양자는 모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폐사형이 이 모옥 안에 계시니 부인께서 어서 들어 갑시다." 운양자는 옆으로 비켜 섰다. 금화부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 갔다. 운양자는 즉시 우문한도를 가로막으며 금화부인의 바로 뒤를 따 랐다. 다 쓰러져 가는 모옥의 주위에는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 있었 다. 그러나 방안은 깨끗했다. 한 개의 죽상(竹床)위에 두꺼운 요를 깔고 긴 수염에 검정색 도 포를 입은 무위도장이 눈을 지그시 감고 들어누워 있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죽상의 양쪽에는 칼을 찬 도동(道童)이 한 사람씩 지키고 서서 침통한 표정으로 짓고 있었다. 소영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무위도장을 바라 보자 갑자 기 오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만약 무위도장이 전력을 다해 도와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미 우문한도와 강남 사공자들에 납치되어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영은 생각을 이어 갔다. '사나이 대장부란 반드시 남에게 한 방울의 은혜를 입으면 샘물 로써 보답해야 한다. 내 어찌 이제 죽어가는 무위도장을 눈 앞에 두고 보고만 있겠는가? 그를 구해야 한다.' 소영은 무위도장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강호에 발을 디딘 지 불과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무림 중에서 가장 흉악하고 음흉한 사람을 만났으므로 그들의 음모와 교활한 웃 음 속에서 강호의 많은 경험을 쌓을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짧은 한 달 동안이지만 평탄한 강호에서 수십 년을 살아 온 것 만큼이나 경험을 쌓을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는 십분 주의를 했지만 겉으로는 추호도 그런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운양자는 죽상 앞을 막아 섰다. "이분이 바로 빈도의 장문 사형이오. 이미 이틀 동안이나 혼수상 태에 빠져 있으니 부인의 영단만 믿겠소." 말이 끝나자 금화부인은 품속에서 천천히 옥병을 한 개 꺼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흰 단환을 한 개 쏟아 냈다. "우선 이 단환을 복용시키십시오." 운양자는 자세히 바라 보았다. 과연 그 옥병은 조금 전의 것과는 달랐다. 운양자는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금화부인은 과연 음흉 하고 교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양자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단환을 받으면서 다짐을 받았다. "부인, 이 약은 틀림이 없겠지요?" 금화부인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의심스럽다면 복용시키지 마십시오." 운양자는 담담하게 웃음을 지었다. "빈도가 꼭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군요." 금화부인이 말을 재촉했다.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부인의 해독 단환은 우리에게 거저 주는 것이 아니고, 두 가지 의 절세적인 보물과 바꾸는 것입니다." 금화부인이 말을 이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오." 운양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 조금 전에 강상에서 꺼낸 옥병은 지금의 그 옥병과 빛 깔이 달랐으니 빈도가 어찌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있겠소?" 소영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운양자를 칭찬했다. '이 운양자는 과연 천하에 둘도 없는 인물이구나. 무공 뿐만 아 니라 두뇌 또한 저처럼 치밀한 것을 보면.....' 그러나 주조룡은 반대로 운양자를 무척 욕하고 있었다. '이 노도야말로 정말 골치아픈 존재로군!' 금화부인은 품속에서 다시 두 개의 옥병을 꺼내어 침상 곁의 탁 자에 올려 놓았다. "나는 백 가지 독을 사용하여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소. 그러나 해독약만은 세 가지뿐이오. 물론 이 세가지 해독약은 어느 것이라 도 금맹의 독을 풀 수 있소. 당신이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당신 스 스로 한 병을 택하시오." 운양자는 세 개의 옥병을 번갈아 쳐다 보며 미소를 띠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하였다. "만약 빈도가 가짜 삼기진결 한 권과 옥선자의 화상을 준비하여 부인에게 내밀며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부인께서는 어느 것을 택하시겠소?" 금화부인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이놈은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그가 정말로 가짜를 준비하여 놓 았나 구경이나 하자.' 이런 생각으로 그녀는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노도의 말씀이 정말이라면 어디 구경이나 하고 싶군요." 운양자는 옆에 있는 우문한도를 힐끗 쳐다 보며 의미심장하게 대 꾸했다. "음모는 오직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소. 빈도는 다시 그대들에게 속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노란 비단으로 싸여 있었으며 두께나 크기도 진짜 삼기진 결과 똑같았다. 운양자는 두 권을 금화부인의 앞에 나란히 놓았다. "부인은 이 두 가지 책 중에서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여 어느 하 나를 선택하시겠소?" 금화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자세히 두 권의 비단책과 두 장의 그 림을 살펴 보았다. 아무리 뚫어지게 살펴 보아도 모두가 한결같이 똑같아 도저히 진가를 구별할 수 없었다. 금화부인이 어떻게 할 줄을 몰라 멍청히 서 있기만 하자 옆에서 소영이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전엽청은 책을 빼앗으러 오는 줄로 알고 재빨리 몸을 날려 책과 그림의 앞을 막아 섰다. 그러나 소영은 말했다. "세개의 옥병 중에서 어느 것이 금맹의 독을 풀 수 있는 진짜 약 이오?" 금화부인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맨 왼쪽, 백색 옥병에 들어 있는 백색 약이오. 그러나 그들 이 믿지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구려." 소영은 그녀가 가리킨 백색 옥병을 집어 들고 다시 물었다. "부인, 이것이 틀림없소?" 그러자 금화부인의 안색이 약간 변하면서 대답 대신에 소영에게 되물었다. "소형제, 무엇 하려는 것이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저 삼기진결 때문이요. 이렇게 두 사람 이 서로 속임수를 써서 쌍방을 속이려고 하면 두 사람 모두 이익이 없을 것이오." 소영은 힐끗 운양자를 쳐다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부인에게 부탁을 하겠으니, 우선 금맹의 극독을 풀 수 있 는 약을 그들에게 줍시다." 금화부인은 예상외로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며 대답했다. "좋소, 소형제. 이 누나는 당신의 뜻에 따르겠소. 당신은 그 병 을 놓고 그 다음에 있는 남색 병을 드시오." 소영은 내심 그녀를 경계하였다. '이 여자는 과연 간계가 무서운 사림이로구나." 그는 즉시 비취색 병을 집어 운양자에게 건네주었다. "도형께서는 이 병의 약을 조금 꺼내어 장문인에게 시험삼아 먹 여 보시오." 운양자도 역시 이렇게 서로 대치만 한다면 서로 이익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우기지 않고 병을 받았다. 그는 금화부인의 말은 믿지 못하였으나 소영은 예외였다. "소대협의 명성은 무림을 휩쓸고 있으므로 빈도는 믿을 수가 있 겠소." 그의 말 뜻은 모든 책임을 소영에게 맡기는 짓이었다. 소영의 그 의 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자 가슴이 섬뜩하여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저 운양자는 나를 믿고 남색 병에 들어있는 해독약을 두위도장 에게 먹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저 약에 해독약 대신 다른 독약이 들어 있다면 무위도장은 그렇게 되면 난 죄인이 되는 것이겠지!' 그는 여러 가지 잡념으로 마음이 긴장되어 뚜렷한 확답을 할 수 없었다. 금화부인은 무엇이 즐거운지 아름다운 얼굴 가득히 웃음을 담고 소영에게 입을 열었다. "소형제,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나요? 설마 이 누나를 의심 하는 것은 아닐 테죠?" 소영은 내심 생각했다. '당신은 교활하면서도 남자에 못지않게 악랄한 여자요.' "아니오. 어찌 부인을 믿지 않겠소?" 운양자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곧 병마개를 열어 한 알의 단약을 꺼내어 직접 무위도장에게 먹였다. 소영은 눈살을 조금 찌푸리고 무위도장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주조룡은 소영이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 몹시 못마땅하였지만 여러 사람의 이목이 있어 속으로만 끙끙 앓고 내색은 보이지 않았 다. 전엽청, 종남이협 그리고 운양자, 이렇게 네 사람의 시선은 무 위도장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23. 가짜 소영과 대결하다 초라한 초막(草幕)에 얼마 동안 침묵이 흘러 차츰 긴장된 분위기 로 바뀌었다. '정말 무위도장이 깨어날까? 금화부인이 속이지 않았을까?' 초가에 있는 사람들은 무위도장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시는 모두 가 일대 격전을 벌이리라 마음먹었다. 그들은 제각기 암암리에 공 력을 모아 놓고 있었다. 금화부인의 앙큼한 흉계와 교활한 성격은 그아름다운 자태와 혼 동이 되어 그녀의 진심을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무위도장이 두 팔을 뻗치며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소영의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다소 풀렸다. "보아하니 이 약은 가짜가 아닌 것 같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돌연 부드러운 여자의 말이 그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소제, 병에 남아 있는 나머지 두 알을 마저 무위도장에게 복용 시키시오."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 보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지금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듯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나 금화부인만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아, 금화부인이 전음입밀 술법으로 나에게만 말을 하였구나.' 소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운양자에게 외쳤다. "빨리 나머지 약을 다 복용시키시오." 운양자는 힐끗 소영을 쳐다 보더니 두말없이 나머지 두 개의 단 약을 꺼내어 무위도장에게 먹였다. 전엽청은 운양자가 소영의 말을 믿고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 비위 에 거슬려 눈섭을 칼날같이 곤두세웠다. 그러나 운양자는 주위의 이목을 생각하여 내색하지 않았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때 홀연히 초막 밖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이곳 은 몹시 황량한 벌판이었으며 이 초막은 오랫동안 사립문을 닫아 버렸다. 더군다나 이 근처에는 관도도 없었다. 만일 길이 험하여 그저 길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곳으로 들어 올 리가 없었다. '필시 이 초막으로 오는 모양이다.' 초막에 있는 군호들은 한 사람도 동요되거나 몸을 움직이지 않았 다. "검동, 너는 이 초막 안을 살펴 보아라." 소영은 그 음성을 듣고 대뜸 상대를 알아 챘다. '오! 저놈은 내 이름을 팔고 다니는 남옥당이로구나. 이번에는 '진(眞)', '가(假)'의 소영이 마주치게 되는구나.' 이때 전엽청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종남이협은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를 하였다. 소영은 그들이 틀림없이 전음입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우지끈!" 사립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 오 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십사, 오 세 정도의 어린동자였다. 그는 마루로 올라 서서 방문을 힘껏 발로 차 부수었다. "꽈당!" 힘없이 방문이 넘어 가자 안에 있는 여러 군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 왔다. 동자는 이 초막 안에 이렇게 여러 사람이 들어 있으리라고는 전 연 생각치 못했다. 초막 안의 군호들은 그가 문을 부수고 모습을 나타내도 엄숙한 표정으로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 검동이라고 불린 동자는 눈길 을 돌려 초막의 모든 군호를 훑어 보더니 어깨를 움찔하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저 사람들은 모두가 내외의 무공이 훌륭한 고인이로구나. 그러 나 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한데... 서로 진기를 모으고 제각기 상 대를 경계하고 있으니... 마치 각기 다른 적들이 한데 모여 무슨 협상을 하는 것 같구나.'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또다시 맑고 냉랭한 음성 이 들려 왔다. "검동, 안에 사람이 있느냐?" 동자는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보검을 들어 방어태세를 갖추며 다 급하게 대답했다. "사, 상공께 아, 알립니다. 이 초막 안에는 사, 사람들이 꽉 차 있습니다." 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밖의 인물은 역시 냉랭하게 크게 물으며 관심을 보였다. "흥! 모두 어떤 사람들이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은 알겠어요. 전날 강변에서 소..." 여기까지 입을 열던 동자는 주인이 소영의 행세를 하며 강호를 유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간신히 말을 끝냈다. "그 영패를 빼앗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밖의 인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도대체 왜 그러느냐? 오늘따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색옷을 입고 등에는 보검을 지닌 늠름한 체격의 청년이 들어 왔다. 종남이협과 우문한도는 그와 충돌을 피하려는지 순순히 길을 비 켜 주었다. 소영은 지금 막 들어 온 청년을 보았다. 과연 자신의 이름을 팔 고 다니는 남옥당이 틀림없었다. 남옥당도 동자에 못지 않게 놀랐다. 그는 날카롭게 주위를 십여 명의 군호를 일일이 살폈다. 금화부인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힐끗 상대 를 보았다. 그녀는 남옥당의 늠름한 체격에 마음이 동하여 내심 음 침한 생각을 하였다. '중원 무림에는 실로 호남이 많구나.' "보아하니 당신들은 무심코 이곳에 온 것 같은데...." 갑작스런 그녀의 물음에 모두들 놀랐다. "만약 고의로 이곳에 왔다면 어떻게 하겠소?" 우문한도는 남옥당의 말에 괘씸한 생각이 들어 진기를 두 손에 끌어 모아 쥐며 분노를 참느라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건방진 놈, 이곳에 다른 적수가 없었다면 그냥 당장...' 금화부인은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아름다운 미소를 보냈다.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이름이나 알 수 있겠소?" 남옥당은 주위 사람들을 다시 훑어 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 했다. "소영!" 그러자 초막 안의 모든 군호들은 깜짝 놀라 눈길을 남옥당에게로 집중했다. "호호호... 소영? 중원 무림에서는 웬 소영이 그렇게 많소." 남옥당은 잔뜩 비위가 상했다. "무엇이 우습단 말이오?" 그는 말과 동시에 돌연 몸을 옆으로 돌려 금화부인을 덮쳤다. "어린 놈이! 어찌 이토록 건방지냐?" 그녀가 뻗은 천외래운(天外來雲)의 일초는 남옥당의 장력과 정면 으로 부딪쳤다. "펑!" 두 장력이 충돌한 기세는 굉장히 강렬했다. 초막 안의 군호들이 깜짝 놀라 모두 뒤로 몇 걸음씩 물러섰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크게 놀란 것은 남옥당의 장력이 더 우세해 우문한도가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남옥당은 일장을 나눈 후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왼발을 번쩍 들 고 덮쳤다. 남옥당은 소영을 다음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지금 상 태로서는 소영이 몸을 피하지 않는다면 필시 두 사람은 충돌하게 될 것이다. 만일 몸을 피한다면 남옥당이 내려서는 곳은 삼기진결 책과 옥선자 그림을 손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곳이었다. 소영은 이 짧은 순간에 몇 가지 단안을 내렸다. '남옥당과 맞서 그가 덮쳐 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저놈 에게 삼기진결과 옥선자의 그림을 넘보지 못하게 하고, 특히 무위 도장에게 조금이라도 귀찮게 굴면.... ' 남옥당은 어느새 소영의 바로 앞에까지 날아와서 구부렸던 왼발 을 쭉 뻗어 소영의 어깨를 걷어 찼다. 소영은 미리 공력을 모아 놓고 상대할 준비를 하고 침착하게 오 른쪽으로 비켜 서면서 오른발을 들어 한 바퀴 맴돌았다. 몸을 돌려 남옥당의 일격을 피한 후 곧 반격을 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금화부 인이 왼손을 휘둘러 일장을 뻗쳤다. 그녀의 일장은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며 남옥당의 맥문을 향해 일 직선으로 뻗쳐 갔다. 남옥당은 당황하여 황급히 뻗었던 발을 거두고 오른손을 크게 펼 쳐 금화부인의 급습을 간신히 막았다. 남옥당은 방바닥으로 내려서 자마자 이번에는 주조룡을 향해 오른발을 휘두르며 덮쳐 갔다. 그 의 공격이 너무나 돌연한 것이라 주조룡은 제대로 막아 보지도 못 한 채 훌쩍 몸을 날려 간신히 피하였다. 그것은 남옥당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남옥당은 소 영의 방어 태세가 엄밀하여 허점을 찾지 못하고 무조건 왼발을 뻗 어 공격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금화부인의 역습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직 감적으로 형세의 불리함을 느껴 우선 궁여지책으로 궁지에서 빠져 나갈 생각을 했다. '저놈들은 대적이니 좀더 넓은 장소를 만들어야 마음 놓고 자웅 을 겨루어 볼 수 있겠다.' 그는 생각하며 무심코 주조룡에게 공격을 보냈던 것인데 주조룡 은 몸을 피하며 상대의 발이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재빨리 오른손 을 뒤집어 교구연환(巧狗連環)의 일초를 날렸다. 이때 금화부인은 남옥당이 자기에게 공격을 하는 줄로 알고 왼손 을 흔들어 운봉무쇄(雲封霧鎖)의 일초를 보냈다. 그는 양면 공격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먼저 금화부 인의 운봉무쇄를 몸을 굽혀 가볍게 피하고는 오른손을 써서 낭당초 암(浪撞礎巖) 초식을 뻗어 주조룡의 교구연환과 정면으로 맞섰다. "펑!" 충돌음은 고막을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의 공력은 모두 육, 칠침분의 진력이었으므로 그다지 큰 세력은 아니었다. 주조룡이 내심 남옥당의 공력에 감탄하고 있는데 금화부인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정말로 그대는 무공이 평범하지 않군." 그녀는 말을 끝내고 허리를 낮게 굽히며 왼손을 날카롭게 휘둘렀 다. 그러자 남옥당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무서운 형상을 보이더니 곧 두 손을 가슴 앞에 세웠다. 금화부인은 날렸던 장력을 급히 거두어 들이며 얼굴 표정을 싸늘 하게 바꾸었다. 주조룡은 계속 두 번이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차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강호의 많은 군호들이 모인 곳에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 그는 이런 결심으로 품 속에서 조그마한 벽왕척(碧王尺)을 꺼내 들었다. 우문한도는 그가 끝까지 손을 쓰리라 직감하고 남옥당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주조룡의 앞을 지나며 전음입밀의 술법으로 말렸다. "주형,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놓치게 되오. 저 놈의 공 력은 고강하며 또 밖에는 몇 명의 고수가 더 있는지 모르는 일이 오. 그러니 저놈과 쓸데없이 충돌을 하면 도리어 주형이 불리하게 될 것이오." 주조룡은 재빠르게 말을 받았다. "우문형의 말이 맞소. 저놈은 훗날 복수하기로 합시다." 남옥당은 다시 한번 주위를 훑어 보고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있는 놈들은 모두 놀라운 무공을 지닌 고수들이로군. 그 러나 모두가 적인지, 친구인지 모르겠으니 괜히 일만 크게 벌여 놓 을 것이 아니라 나도 한몫 끼어들어 구경이나 해 보자.' 그는 금화부인이 장력을 거두는 것을 보고 자신도 더 이상 공격 을 하지 않았다. 금화부인은 전음입밀로써 소영에게 말했다. "소제, 저놈은 성격이 거칠고 무공도 높아 자꾸만 건드리면 우리 가 불리하게 되오. 그러니 저놈이 귀찮게 굴지만 않는다면 소제도 그대로 버려 두시오." 소영은 미소를 띄워 대답을 대신했다. 다시 금화부인이 무어라고 말을 하려는데, 이제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누워 있던 무위도장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전엽청은 기쁜 마음에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 "대사형....." 운양자가 눈짓으로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하였다. 금화부인이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아름다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사형께서도 정신을 차렸으니 어서 약속대로 하시오." 그녀는 오른손을 뻗어 탁상 위에 있는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을 집으려 하였다. 그러자 전엽청이 수휘오현(手揮五弦)의 초식을 전 개시켜 그녀의 앞을 막으며 말을 꺼냈다. "부인, 뭘 그리 서두르시오. 잠시 후에 찾아 가도 될 것인데!" 그의 말이 막 끝날 즈음 금화부인이 다섯 손가락을 굽혔다가 펴 자 다섯 줄기의 지풍이 전엽청의 가슴을 향해 뻗어 나갔다. 전엽청은 오른팔을 밑으로 내려 덮쳐 오는 지풍을 비스듬히 쳐내 고 옆으로 비켰다. 곧이어 왼손을 휘둘러 영운봉일(迎雲捧日) 초식 으로 금화부인의 손목을 잡으려 하였다. 두 사람의 장세는 별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장력이 맞부딪치려는 순간 제각기 또다른 초식을 전개시키니 싸움은 잠시 의 여유도 없었다. 금화부인은 돌연 장세를 바꾸어 전엽청도 더는 어쩔 수 없어 그 대로 맞장력을 쏟았다. 금화부인과 전엽청은 서로 장력을 날렸으면 서도 내심 충돌을 바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장력이 거의 맞닿아 충돌하려는 순간 차가운 검광이 번쩍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검기 를 사방으로 뿌렸다. 운양자가 장검을 휘둘러 두 사람의 장세를 떨 어뜨려 버린 것이었다. 운양자는 두 사람이 다음 장력을 쓰기 전에 나서며 입을 열었다. "부인, 잠깐만 참아 주시오. 빈도가 말한 것을 어찌 어기겠소? 저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은 모두 부인 것이오. 그런데 무얼 그리 급하게 서두르는 거요." 그녀의 분노는 이미 극에 달해 있었으나 주위의 강적 때문에 마 지못해 참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남옥당의 눈빛이 갑자 기 무섭게 불타는 것 같았다. '오! 저것이 옥선자 그림이로구나. 그리고 저 책은 삼기진결..."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별안간 침상에서 가벼운 신음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누워 있는 무위도장이 전신을 격렬하게 떨며 괴로 운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전엽청은 재빠르게 등에 있는 장검을 빼 들었다.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내심 매우 걱정하였다. '큰일 났구나. 금화부인이 준 약이 독약이라면 나와 무당파는 씻 을 수 없는 원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나는 무위도장을 도와 주 려고 한 것이었는데.... 이 교활하고 악독한 여마두를...' 소영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금화부인을 쏘아 보려는데 다시 침 대에서 기침 소리와 함께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위도장은 화색이 돌며 자리에서 앉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잠시 둘러 보더니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 왔다. 평시 침착하였던 운양자 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무위도장에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대사형 몸은 어떠십니까?" 무위도장은 그를 보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네." "우문형, 그동안 별일 없었소?" 우문한도에게 물으며 앞으로 몇 발자국 내딛었다. 우문한도는 엷은 미소를 띄었다. "제가 죽지만 않는다면 언제든지 기다리겠소이다." 운양자는 품속에서 한 권의 비단책과 한 장의 그림을 꺼냈다. 그 는 금화부인에게 그것을 내밀며 냉랭하게 말했다. "부인, 빈도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오. 저기에 있는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은 모두 가짜요. 그러니 부인은 조금 전에 그것을 수중 에 넣었다 하더라도 필요가 없었을 거요. 자, 여기 진짜가 있소." 그녀는 운양자가 내미는 책과 그림을 받아 들며 구슬을 굴리는 듯한 맑고 고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고맙소이다. 내 일찍부터 도장의 인품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 새 삼스레 도장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소." 운양자는 얼굴을 붉히며 변명을 했다. "할 수 없는 일이었소. 빈도는 만일을 위하여 부득이 가짜를 준 비하였으며 그것을 오늘 써먹은 것이오. 절대로 부인을 속이려거나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니 과히 섭섭하게 생각치 마시오." 금화부인은 책과 그림을 번갈아 살피면서 물었다. "그럼 도장은 이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이 진짜인 것을 증명할 수 있겠소?" "부인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확인하여 보시구려." 그녀는 모근 군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느 끼고 조심조심 책과 그림을 확인하고는 품 속에 집어 넣었다. 가짜 소영인 남옥당이 눈길을 계속 책과 그림에 쫓던 중 금화부 인이 품 속으로 넣자 대뜸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여보시오! 그 옥선자 그림을 나에게 팔지 않겠소?" 금화부인은 의외의 물음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미소를 띄며 남옥당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이것을 살 능력이 있소?" "값을 말해 보시오." "나는 한 쌍의 눈을 원하오. 설사 당신이 이 그림을 수중에 넣었 다 하더라도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할 것이오. 그래도 사시겠소?" "흥! 배짱이 크구려. 당신이 그것을 정 팔지 않겠다면 수를 써서 라도 빼앗겠소." "그래요? 그럼 어디 빼앗아 보구려." 남옥당은 입술을 깨물더니 몸을 날려 초막 밖으로 달려 나갔다. "왜, 못할 것 같소?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만 다음에는 틀림없이 내 손에 넣고 말겠소." 그녀는 생각했다. '저놈을 쫓아 싸움을 한다면 무당파에게 커다란 이익만 주게 되 겠지. 나도 오늘은 참아야겠다.' "이제 우리의 일은 끝났으니 어서 갑시다." 소영은 무위도장과 운양자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그냥 주조 룡을 따라 초막을 나갔다. 일행이 초막 대문을 막 나서려는데 전엽청의 외침이 들려 왔다. "우문한도! 그 자리에 서라." "왜 그러시오? 만약 전형께서 무당의 절학을 몇 수 가르쳐 주시 겠다면 저는 기꺼이 받아들이리다." 그는 어느새 장검을 빼어 들고 우문한도 앞으로 다가섰다. "초막 안은 좁으니 우리 밖으로 나갑시다." 우문한도는 문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옆에 들고 있는 금상자를 가리켰다. "전형, 이 금상자를 알고 계시오? 내 오늘 무당의 절학과 내 금 상자를 시험해 보겠소." 두 사람이 문을 나서려는데 운양자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사제, 들어 오시오." 전엽청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사형, 무슨 분부라도 있습니까?" "설사 다른 사람들이 의를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우리 무당파는 남에게 신임을 끊어서는 안 되오. 오늘의 일은 약과 책을 바꾸는 일이었으니 다른 충돌은 마시오." 운양자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우문한도에게 말했다. "우문형, 어서 갈 길을 가시오. 오늘 이후에 언제 어디서라도 다 시 만나면 오늘의 빚을 갚기로 합시다." 우문한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른 걸음으로 금화부인의 뒤를 따라 갔다. "좋소. 나는 언제든지 당신을 기다리겠소." 그들이 조그만 산모퉁이를 돌아 평탄한 길에 나섰을 때 주조룡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제일 중요한 보물을 수중에 넣었으니 될 수 있으면 충돌 을 피하고 빨리 백화산장으로 돌아가야 하오. 부인과 우문형의 생 각은 어떻소?" 금화부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며 주조룡을 빤히 쳐다 보았다. "왜 묻소? 당신은 이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을 가지고 묘강으로 갈 것이 두려워요?" '당신같은 여인은 교활하고 악독하여 언제 어떻게 마음이 변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의심이 가서 그렇소.' 주조룡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짐짓 웃음을 띠며 대답했 다. "부인은 농담도 잘 하십니다." 금화부인은 그의 내심을 모두 알고 있는 듯 능청스럽게 말을 꺼 냈다. "당신은 나를 무척 경계하는구려. 내가 이번에 중원으로 발을 들 여 놓은 것은 중원의 명산과 청수를 구경하며 심신을 수양하고 다 른 한편으로는 중원무림의 고수들을 만나 보기 위해서였소. 지금 당신이 나에게 묘강으로 돌아가라고 하여도 나는 가지 않을 몸이니 절대 안심하시오." 그녀의 말은 비록 부드럽고 상대를 안심케 하였지만 그 말의 본 뜻은 주조룡을 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치미는 울화를 참을 길 없어 내심 금화부인을 욕하였다. '저 여마두는 의심이 많고 악독하여 뭇사람들을 속이기는 하여도 속지는 않으니.... 얼굴이 잘났다고 아무에게나 추파를 던지는 계 집이 큰소리를 치다니!' 그는 다시 억지 웃음을 보였다. "부인은 여걸 중에서도 으뜸가는 분이오. 이번에 동쪽으로 오셔 서도 중원무림에 명성을 떨칠 것이오." 금화부인은 그의 칭찬이 기쁜 모양이었다. "주 이장주, 당신은 말재주도 좋구려. 그것은 너무나 과분한 칭 찬이오." 그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돌려 주조룡을 빤히 쳐다 보면서 물었다. "소문에 듣기로는 심대협께서 나와 우문선생과 손을 잡은 뒤에도 다른 고인 한 사람을 모셔 왔다고 하는데 그분이 누구요?" 주조룡은 고개를 저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저도 잘 모르며 또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산장의 규 칙이라서 말씀드릴 수 없소이다. 부인께서 직접 대장주를 만나 보 시고 물으신다면 아마 자세하게 일러주실 것이요." "당신과 심장주는 서로 형제간이라고는 하나 그를 사부같이 두렵 게 대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주조룡은 자꾸만 자신의 약점을 파고 드는 그녀가 얄미워서 안달 이 날 지경이었다. '저 계집은 항상 날카롭게 상대의 약점을 꼬집는구나.'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인은 잘못 알고 계시는구려. 우리 중원 인물들은 항상 선, 후 배의 차이가 뚜렷하오. 형제지간도 역시 마찬가지로 형은 동생을 사랑하고 보살피며 동생은 형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이 예로 되어 있소. 내가 두려워한다는 소문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오." 금화부인은 돌연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소영에게 말을 붙였다. "소제, 당신도 심장주를 두려워하고 있소?" 소영은 칼날같은 눈썹을 약간 추켜세우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예의로 보아서도 어른은 존경하여야 도리가 아닙니까?" 금화부인은 명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그렇지. 어른에게는 존경해야지." 그녀는 갑자기 말을 끊고 표정을 어둡게 바꾸었다, 소영과 주조 룡은 의아하여 그녀가 주시하고 있는 오른쪽 숲길을 바라 보았다. 그곳에는 남옥당이 버티고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태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히 불쾌하게 했다. 그의 양편 에는 십사, 오세 정도의 청의 동자가 서 있었다. 왼쪽 동자는 커다 란 비파를 들고 있었고, 오른쪽의 동자는 장검을 공손하게 받쳐 들 고 있었다. 우문한도는 나지 막하게 말했다. "모두 주의하시오. 저놈은 보통 인물이 아니니... 저놈이 바로 소영이라고 했지 않았소." 금화부인은 소영에게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소제, 당신의 이름이 소영이 아니오? 그런데 어째서 또다른 소 영이 나타났단 말이오?" "천하에는 동성동명이 많을 것이오. 그러므로 저 사람과 나와는 전연 아무런 관계도 없소." 그 때까지도 하늘만 보고 있던 남옥당이 깜짝 놀란 듯 다그쳐 물 었다. "뭐라고? 당신도 소영이란 말이오?" 소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소. 내가 정말 소영이오." 남옥당은 냉랭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그럼 둘 중에 누가 가짜 이름을 쓰고 있단 말이오?" "전날 밤 당신은 무릎을 꿇고 내 영패에 빌면서 당신을 도와달라 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어찌 그렇게 거칠게 대하시오?" 소영은 이야기를 하면서 연방 웃음을 띠었다. 남옥당은 그의 웃 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노기 띤 음성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웃는 것이오?" 소영은 화를 내면서 덤벼드는 그가 더욱 우스웠다. "하하하... 어찌 당신은 웃는 것까지도 참견을 하시오?" 남옥당은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단호한 결심을 나타냈다. "당신이 자꾸 웃으면 우리들의 일에 장애가 되오. 나는 분명 소 영이오. 오늘 부득이 우리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이 세상에서 없어 져야 될 것이오."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당신은 나와 사생결단을 내겠단 말이오? 우리는 서로 아무런 원 한관계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사생을 가리는 결투를 하자는 것이 오?" 오른쪽에서 검을 들고 있던 동자가 냉랭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공자님의 이름물 함부로 도용하는 자는 죽어 마땅하오." 소영은 어린 동자에게까지 무시를 당하자 불같은 분노가 치밀었 다. 그는 동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핏대를 올리며 남옥당에게 소리 쳤다. "그런 엉터리 수작 부리지 마라. 네가 언제부터 그 이름을 썼는 지 몰라도 난 세상에 나면서부터 소영이라 불렸다. 네놈이 내 이름 을 도용하면서 강호를 위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어찌 그렇게 뻔뻔스러우냐?" 소영은 말을 끊고 남옥당에게 바싹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눈앞에서 누가 죽을는지는 아직 예측하기 이르다. 나도 이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네 사정을 봐 줄 수가 없다." 소영은 어깨를 움직여 남옥당에게 덮쳐 갔다. 이때 주조룡이 재빠르게 두 사람의 사이로 뛰어들면서 싸움을 말 렸다. "삼제, 잠깐만 기다리게." 그는 고개를 돌려 남옥당에게 정중히 예를 올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백화산장에 있는 주조룡이라 하오." 남옥당은 그의 예도 받지 않고 거만스럽게 대꾸했다. "그렇소? 당신의 이름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소. 당신은 그곳의 둘째 장주로 있다고 하던데... 내 얼마 전 당신의 산장에 있다는 졸개 몇 명을 본보기로 혼내 주었소이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니 오늘은 그 복수를 해 보시겠소? 저 소영이라는 놈과 함께 덤비시 오." 주조룡은 내심 그의 두둑한 뱃심에 감탄하였다. '역시 강호의 소문대로 냉면날수(冷面捺手)가 틀림없군.' 그는 될 수 있으면 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더군다나 진짜와 가짜 소영의 싸움인데 이유없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구려." 남옥당이 말을 받아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돌연 앞길에서 한 필 의 준마가 쏜살같이 일행을 향하여 달려 왔다. 말 위에 사람은 금 화령기(金花令旗)를 높이 쳐들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대장주께서 여러분들에게 빨리 장으로 돌아오라고 명하셨소." 그는 전갈을 하면서도 계속 말을 달려 남옥당의 등 뒤로 부딪쳐 갔다. 백화산장의 제자들은 건방져서 언제 어느 곳에서도 말을 달 릴 때 앞에 사람이 있어도 말고삐를 잡지 않았다. 주조룡은 그런 행동을 말리려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말과 남옥당이 한 자 정도의 사이에 이르렀을 때 남옥당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동시에 검광이 번쩍이고 사람과 말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남옥당은 눈깜짝할 사이에 사람과 말을 죽였다. 그러나 그 는 언제 넣었는지 뽑았던 칼을 칼집에 넣고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검술에 주조룡은 물론 소영, 금화부인, 우문한도, 모두가 감탄해 마지 않았다. '아, 저놈의 검술은 귀신같구나.' 금화부인은 고개를 돌려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이것은 어느 파의 검법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나 역시 모르겠소. 어느 파의 독문 비기인지." "둘째형, 비키시오." 소영은 앞으로 나서며 몸을 옆으로 한 바퀴 돌려 주조룡의 옆을 지나쳤다. 주조룡은 재빠르게 손을 뻗쳐 소영을 잡으려 하였지만 소영이 너무나 빠르게 몸을 돌려 지나쳤으므로 헛짚고 말았다. 그는 소영의 뒷모습을 보며 크게 감탄하였다. '삼제는 어디서 저런 신법을 배웠을까? 마치 번개 같구나.' 주조룡이 이렇듯 생각하고 있는데 금화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우문한도에게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 소영의 무공은 무척 고강하군. 주조룡은 아마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인데 어째서 형이란 소리를 하고 있을까? 그가 쓰는 신법으 로 보아 아마 상승 무공을 익힌 것 같소." 우문한도는 소영에게 시선을 두며 대꾸하였다. "소영은 필시 심목풍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을 것이오. 만약 저 상대의 검에 그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심목풍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금화부인은 그의 말에 느끼는 바가 있는지 대뜸 몸을 날릴 기세 를 보였다. "그렇지." 그녀는 허리를 굽혀 해연약파(海燕掠波)의 신법으로 주조룡의 머 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휙!" 그녀가 허공을 날자 긴 치마가 바람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소영의 뒤로 바싹 다가서며 힘있게 외쳤다. "소제, 안심하고 싸우시오. 이 누나가 뒤를 지켜 주겠소." 소영은 남옥당의 검법을 보았으므로 천천히 검을 뽑아 적의 허점 을 노렸다. 그는 금화부인의 말은 들었으나 상대에게 공격할 기회 를 주지 않으려고 대답도 못했다. 남옥당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두 눈빛만은 날카롭게 소영 을 쏘아 보면서 소영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쏘아 보고만 있을 뿐 어느 누가 먼저 손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남옥당은 눈에 살기를 띠고 있으면서도 검을 빼지 않은 채 버티 고 서 있었다. 소영은 참을 수 없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검을 뽑지 않는 거요? 남옥당은 소영의 말에는 아랑 곳하지 않고, 큰 눈을 부릅뜨고 쉴새없이 소영의 아래위를 훑어 보 았다. 그는 소영에게서 허점을 찾아 내어 단 일격에 승부를 결정지 으려고 하였다. 소영은 상대의 급습에 대비하면서 버티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눈에 서려 있는 살기는 더욱 짙어만 갔다. '저들은 진기를 십 분 이상 모아 서로 빈틈을 노려 일격에 결판 을 내려고 드는군.' 그녀는 장승처럼 서서 상대를 노려 보기만 하는 두 사람의 모습 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 저들은 높은 절기를 지니고 있군. 서로 상대에게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으니...' 소영은 지금까지 적과 대치하여 이렇게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경험 부족으로 자신을 보호할 진기 를 모으지 않고 내보낼 진기만을 모았기 때문에 이제는 물러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쌍방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신경전으로 대치만 한다면 소영이 먼 저 공격을 해야만 될 형편에 놓여 있었다. 만약 모험을 피하고 공 격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아 놓은 진기가 몸 속에서 터져 내상 을 입게 될 것이다. 남옥당은 계속 똑같은 자세로 한결같이 소영을 쏘아 볼 뿐이었 다. 벌써 얼마나 지났는지 두 사람의 긴박한 분위기를 옆에서 구경 하는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크게 내지 못하고 관전하였다. 소영은 전신을 약간 떨며 얼굴이 붉어지고 그의 옷자락은 바람도 없는데 펄럭였다. 남옥당의 안색도 갈수록 심중해졌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두 동자도 사태의 심각함을 느끼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소영은 아직도 상대에게서 빈틈을 찾지는 못하였지만 가득 모은 진기를 주체할 수가 없어 외침과 함께 장검을 휘날리며 남옥당에게 덮쳐 갔다. 남옥당은 재빠른 동작으로 등의 검을 뽑아 뻗쳐 오는 소영의 검 을 머리 위로 받아 쳤다. 두 사람의 차가운 검광이 주위에 안개처 럼 깔렸으며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쨍!" 붙어 있던 두 사람이 다시 사이를 두고 떨어졌다. "쨍그렁!" 다시 어느 쪽에서 먼저 공격을 하였는지 사방으로 불꽃이 튀기며 쇠의 마찰음이 들렸다. 이제는 누가 누구인지도 분간조차 못할 정 도였다. 다만 두 개의 그림자만이 붙었다. 다시 떨어지고 또 붙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사이를 두고 멀리 떨어졌다. 검기가 점차 가시자 소영 의 모습이 먼저 띄었다. 그는 몹시 창백한 표정으로 손에는 반쯤 잘려나간 검을 들고 있었다. 남옥당의 장검도 두 동강이 나 있었 다. 그의 날카롭게 빛나던 살기는 사라졌으며 피로한 기색이 역력 했다. 두 사람의 검법은 몇 초의 자웅을 겨루는 동안 서로의 공격 이 엇비슷하여 마침내 검을 동강낸 것이었다. "당신의 검술은 과연 비범하오. 앞으로 일 년 안으로 틀림없이 백화산장을 찾아서 다시 당신을 만나 보겠소." 남옥당은 잠시 동안 동강난 검을 움켜 쥐고 소영을 쏘아 보더니 검을 땅에다 푹 꽂았다. 소영과 금화부인 등은 의외의 일에 서로 얼굴만 바라 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남옥당은 흘끗 주위의 사람들을 쳐다 보고는 뒤에서 기다리고 있 는 두 동자에게 말했다. "얘들아, 가자!" 남옥당이 앞장섰고, 그 뒤를 두 동자가 따랐다. 24. 관 속의 소녀와 피를 뽑는 철관 주조룡은 남옥당과 두 동자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바라 보며 우 문한도를 향해 말했다. "지금 저 자는 지칠 대로 지쳤으니 공력이 약해지지 않았겠소? 이 기회에 그를 죽였어야 했을 텐데... 지금 저 놈을 놓아 주는 것 은 호랑이를 산으로 올려 보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소이다." 우문한도는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이놈은 나를 메어 놓으려고 하는구나. 어디 두고 보자.' 우문한도는 주조룡에게 되물었다. "주형은 왜 그를 쫓지 않소?" '이놈은 과연 죄가 많고 간사한 놈이로구나.' 주조룡은 내심 이렇게 생각하면서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겨 장한이 숨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금화영기를 주워 들고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대장주께서 우리들에게 빨리 장으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보낸 것 으로 보아 장에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 보니 어서 돌아갑시다." 네 사람은 급히 길을 재촉하여 단숨에 백화산장으로 갔다. 넓은 대청에는 여러 사람이 무슨 중대한 이야기를 하는지 서로 귓속말 을 주고받으며 앉아 있었다. 심목풍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네 사람이 들어 오는 것을 보 자 반가이 맞으며 금화부인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부인, 그리고 우문형,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금화부인은 형식상의 인사를 보냈다. "다행이 염려 덕분에..." "부인께서는 교환할 물건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금화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목풍은 만면에 희색을 띠고 네 사람을 둘러 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바삐 돌아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소. 여러분들은 얼 마동안 편히 쉬셔야 되겠지만 중요한 일이 있어 부득이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셔야겠소. 여러분께서 널리 양해하여 주실 것을 바라 오." 그는 소영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는 근심스럽게 물었다. "삼제, 왜그러나? 몸이 불편해서 그러나?" 소영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도에서 강적을 만나 한바탕 싸움을 하고 왔소이다. 큰형님의 전갈을 받고 운기를 조식할 틈도 없이 바쁘게 달려와서...." 심목풍이 눈썹을 치뜨며 다그쳐 물었다. "어떤 상대인가?" "가짜 소영이오." "그럼 승부는 어떻게 되었나?" "삼제와 그가 충돌하여 몇 수 겨루다가 수중의 장검이 둘다 부러 져서 더 이상 승부를 못 내었소이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영이에게 말했다. "삼제, 수고했네, 어서 자리에 앉아 쉬도록 하게나." "큰형님, 감사합니다." 심목풍은 금화부인과 우문한도에게 자리를 권하고 먼저 앉았던 수석 자리로 돌아 갔다. 그는 자리에 앉아 대청 안의 여러 사람들을 한번 둘러 보고는 점 잖게 입을 열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분들은 우리 백화산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들이시오. 부인과 우문형도 이제는 우리와 손을 잡았으니 두 분 도 오늘의 일을 알아야 되겠기에 급하게 부른 것이오." 금화부인은 건너편에 줄지어 앉아 있는 군호들을 힐끗 쳐다 보더 니 심목풍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은 어떠한 인물이오?" 심목풍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리고 말소리를 조금 낮추고 건 너편 군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각자 신분을 밝혀 주시오." 그들은 모두 경장을 하고 청색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 매고 있었 다. 금화부인은 하나하나 그들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그들의 얼굴 이 온통 먼지로 덮여 있는 것으로 보아 먼 길을 달려왔으리라는 짐 작만 갈 뿐 별다른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심목풍의 말이 떨어지자, 곧 오른쪽의 끝의 장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승의 이름은 법혜(法慧)라고 하오. 지금은 소림 나한당(羅漢 堂)에 있으며 예명은 상좌삼승(上座三僧)이외다." "호호호... 이렇게 자기가 말하고 싶은 대로 자신을 소개하니 어 찌 믿을 수 있겠소?" 심목풍은 의외의 말에 잠시 대답할 말을 찾더니 손뼉을 탁 치며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럼 당신들은 각자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을 꺼내어 보이 시오." 그러자 법혜라고 자칭한 흑의 장한은 힐끗 금화부인을 쳐다 보고 는 머리에 동여 매었던 청색 수건을 풀어 젖혔다. 수건이 벗겨지니 반짝반짝 빛나는 중의 머리가 드러났다. 그는 잠깐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더니 곧 다시 머리를 싸맸다. 이 어서 그 다음의 장한이 일어섰다. "빈도는 무당 문하에 있소."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등에 꽃고 있던 장검을 재빠르게 뽑아 칼 끝을 쥐고 손잡이를 금화부인에게 내밀어 보였다. 자세히 그 칼자 루를 살펴 보니 그곳에는 작은 글씨로, '무당지검(武堂之劍)' 즉 무당의 검이라고 정묘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세 번째의 장한이 벌떡 일어섰다. "소승은 아미(峨媚) 문하에 있소이다. 법명은 자정(慈正)이라고 하오." 그는 품 속에서 황포 주머니를 꺼내 무엇인가를 우문한도에게 건 네 주었다. 우문한도는 그것을 한참 동안 들여다 보더니 미소를 띄 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이것은 아미파의 독문 암기요. 내가 알고 있기로는 삼능주표(三能珠標)라 알고 있소." 이어서 네 번째 장한이 일어났다. "빈도가 거처하고 있는 곳은 청성(靑成)이고 도호는 목진(木塵) 이외다." 목진이라는 장한은 오른손을 번쩍 쳐들어 수중에 들고 있는 버들 잎같은 단도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우문한도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것은 청성 문하의 유엽검이 아니오? 도형은 청성파에서 중책 을 맡고 있는 것 같은데...." 목진은 자리에 앉으며 겸손을 표했다. 다음 다섯 번째 장한이 불쑥 일어서 오른손을 휘둘러 커다란 원 을 그렸다. "소인은 금곤오(金昆五)라고 불리오. 곤륜 문하에 있소." 금화부인이 아름다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곤륜 문하의 천정(天定)장법을 전개시키는 것으로 보아 틀림 없겠구려." 여섯 번째가 일어났다. "이름은 흔적(痕跡)이라고 하오. 개방에 있소." 우문한도는 내심 크게 놀랐다. "이거 실례했소이다. 귀하께서는 개방의 사대 장로 중의 한 분이 시지요?" 흔적은 금전을 꺼내 들고 손장난을 쳤다. 다음 일곱 번째 사나이는 작달만한 키의 장한이었다. 그는 자리 에 일어났으나 사 척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소인 피진산(皮進山)이라 하오. 지금은 신풍방의 장리 형당(形 堂)이오." 그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신물을 보이지도 않고 자리에 앉았 다. 우문한도는 피진산을 웃음 띤 얼굴로 쳐다 보며 냉랭하게 말했 다. "신풍방은 강호에서 두각을 나타낸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모든 것이 신비에 싸여 있소. 그러므로 피형께서 증명할 수 있는 신물을 보인다 하여도 우리들은 모를 것이오." 피진산이 자리에 앉자 여덟 번째의 장한이 일어나자 갑자기 심목 풍이 손을 흔들며 저지했다. "이제 됐소이다. 앉으시오." "부인, 이 정도면 안 되겠소?" 금화부인은 나머지 사람들을 훑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대장주의 능력과 명성을 크게 승양하는 바이오. 나머지 사람 들도 모두 이름난 문파 중의 인물들이리라 믿겠소이다." 심목풍은 자신을 칭찬함에 마음이 흡족하여 미소를 감추지 못했 다. "그렇소. 적을 알고 자신을 평하면 백전백승의 원칙이 따르는 것 이오. 천하의 각파에는 모두 내 심복이 있소. 그래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환하게 알 수가 있단 말이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 보고는 손뼉을 쳐서 여러 장한 들을 자신에게 주목시켰다. "지금 무림의 사태는 매우 긴박하므로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오래 지체할 수 없소이다. 그동안도 수고하였지만 앞으로는 더욱 신중하 고 정확하게 일하여 주시오. 자! 어서들 돌아가시오." 대청 안의 군호들은 일제히 두 손을 보아 예를 올린 후 쏜살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이제 넓은 대청에는 소영의 일행 몇 사람과 심목풍만이 남았다. 심목풍은 금화부인을 넌지시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각 문파에 첩자를 두고 있다는 것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모 르오. 그들은 오 년에 한 번씩만 이렇게 모이게 되어 있소. 그래서 오랜만에 그들이 모인 이 자리에 부인과 우문형을 모셔서 계획을 상의해 볼 생각이었소. 그러므로써 우리들의 우의가 더욱 굳게 뭉 치는 것이 아니겠소?" 금화부인이 맑은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받았다. "심대장주께서 벌써 오래 전부터 강호에 군림하여 심복을 모든 문파에 잠입시킨 것에 저는 깊이 탄복하오이다. 지금 그들은 모두 중요한 자리에 있으니 심대장주께 큰 도움을 주고 있을 게요." "부인에게도 마찬가지로 도움이 되는 것이오." 심목풍은 말을 멈추고 몇 번 기침을 하였다. 소영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가벼운 기침이지만 예전에는 없었던 일인데... 몇 년 전에 무공 연마를 하다가 역효과를 보아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다는데 혹시 그 것이 또...." 심목풍은 기침을 끝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는 교환할 물건을 살펴 보셨소? 그 운양자란 놈은 흉계 가 많은 놈이라 신중을 기해야 하오." 금화부인은 무엇이 우스운지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모두 살펴 보았소. 아마 틀림이 없을 것 같소." 그녀는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을 품 속에서 꺼내며 말을 이었 다. "이 삼기진결은 심대장주께서 거두어 들이시고 이 옥선자 그림 은......." 그녀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그 옥선자 그림은 이미 부인의 소유가 되었으니 부인께서 간직 하시오." 심목풍은 삼기진결을 소영에게 보이며 책을 던졌다. 소영은 그동안 운기를 조식하며 눈을 감고 있었지만 각대문파에 서 모인 심목풍의 첩자들이 자기 소개를 하는 것을 하나도 빠짐 없 이 듣고 있었다. 그는 심목풍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얼떨결에 삼기 진결을 손에 받아 들었다. 소영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책을 다시 심 목풍에게 내밀어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심목풍이 먼저 입을 열었 다. "이 삼기진결은 우리 백화산장과 부인 그리고 우문형의 공동 물 건이니 잘 간직해야 되네. 삼제는 그 책을 책임지고 간직하게나." 소영은 그의 표정이 심각하고 이미 자기에게 보관할 뜻을 굳힌 것 같아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책을 품 속에 넣었다. 금화부인이 부드러운 눈으로 소영을 바라 보며 말했다. "소제는 그토록 절세의 검기를 여태까지 써먹지 않았소? 실로 경 탄을 금치 못할 검술이오." 심목풍이 조급한 표정으로 금화부인의 이야기와는 뜻이 다른 말 을 불쑥 꺼냈다. "부인, 나는 아직도 아까의 이야기를 자세히 모르고 있소. 그러 니 어느 분이든 나에게 그 초막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 주시겠소? 무당파에서는 운양자 외에 또 누가 나왔소?" 우문한도가 미소를 띄고 대답했다. "종남이협과 무당의 일위 제자 한 사람이 왔었소이다." 심목풍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종남이협도 이 일에 참견을 하였단 말이오?" "그렇소. 나는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고 무척 애썼습니다만 그들 이 굳이 교환 장소에 참석하겠다고 우겨 어쩔 수가 없었소이다." 금화부인이 말을 이어 받았다. "그 종남이협은 상대하기 몹시 어려운 사람들이오." 다시 우문한도가 그녀의 말에 종남이협에 대해 설명했다. "종남이협은 강호에서만 삼십여 년을 떠돌아 다니며 수많은 명성 을 떨치고 있소이다. 그중에서 갈천의가 가지고 있는 철골풍화선 (鐵骨風火禪)은 초기가 뛰어나고 변화가 만 가지나 되는 무서운 것 이라오." 그는 주위 사람을 훑어 보며 자신의 이야기에 모두가 귀를 기울 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다음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옷소매에 수화(水火) 암기를 숨기고 그 날카로운 독으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인물이오. 아직까지 무림에서 그 들을 대적할 자는 없소. 만일 그들이 전력을 다하여 무당파를 도와 준다면 우리에게 두명의 강적이 더 생기는 결과가 되는 것이오." 금화부인이 냉랭한 미소를 흘리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렇게 그들의 무공이 뛰어나다면 그들과 겨루어 봐야지." 그녀는 눈길을 돌려 우문한도를 뚫어지게 쳐다 보며 부드럽게 말 을 이었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소?" "저의 능력이 닿는 한 전력을 다하여 돕겠소이다." "수고스럽겠지만 다시 그 초막에 들러 주시오. 종남이협이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 주시오. 내일 아침에 백화산장 앞에서 자웅을 겨루자고 말이오." 우문한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부인은 왜 그들과 겨루려는 거요?" "그 갈천의의 풍화선을 구경하고 싶소이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심목풍이 끼어들었다. "부인, 우리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내가 초청한 사람도 아 직 오지 않았으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이틀만 참으시오." 금화부인은 약간 언성을 높여 대꾸하였다. "내 소견은 심대장주와 다르오이다. 무위도장의 몸이 아직 완전 히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무당파에는 영도자가 없을 것이오. 그러니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내일 아침에 종남이협을 누른 다음, 그 기세를 이용하여 무위도장을 사로잡아 무당파를 우리 백화산장의 수중에 넣자는 것이오. 그래도 내 일을 막으시려오?" 심목풍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부인, 내가 알고 있기로는 무위도장과 운양자는 몹시 교활한 인물들이라 설사 옥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명성을 더럽힐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금화부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보기싫게 일그러졌다. "그럼 이 기회에 무당파의 영도자를 제거해 버립시다. 새는 날개 가 없으면 절대 날지 못하는 법이오. 그러니 우선 무위도장과 운양 자를 죽여 손쉽게 무당파를 굴복시키기로 합시다." 소영은 그녀의 제의를 듣고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저 여인은 정말 독과 약을 곁들인 인물들이로구나.' 심목풍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 을 열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 "좋소이다. 부인께서 그 계획에 절대 자신이 있고 또 종남이협을 누를 수 있다면 나도 부인의 계획대로 따르겠소이다." "그러나 소식을 전하러 우문형에서 가실 필요는 없소." 그는 우문한도를 쳐다 보며 금화부인의 부탁을 일소해 버렸다. 금화부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무당파 사람들은 우문선생과 무슨 큰 원한이라도 있는 것 같았 소이다. 우문선생이 제의를 한다면 무위도장이나 운양자도 절대로 거절은 하지 않았을 것이오." 심목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말이 맞소. 종남이협들도 수십 년간 강호에서 지낸 인물 들이므로 부인의 제의에 무슨 이유를 붙여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 오." 심목풍은 그제서야 확정된 결정을 얻었는지 돌연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곧 청의의 아름다운 소녀가 다가 왔다. "대장주님, 무슨 분부가 있사옵니까?" "민첩한 무사를 몇 명 뽑아 내 명기를 갖고 흩어져 있는 첩자들 을 만나 보게 하도록 하여라. 그들에게 무위도장의 행적을 탐지하 라고 이르기만 하면 된다." 시녀는 아름다운 음성으로 대답을 하고 급히 대청 밖으로 나갔 다. 그리고 잠시 후 심목풍에게 돌아와서 결과를 알렸다. "대장주님의 말씀대로 열여덟 명의 날쌘 장한과 말을 내어 각처 로 보냈사옵니다. 심목풍은 흐뭇한 미소를 띄며 다시 시녀에게 일렀다. "너는 어서 당치(堂値)부자에게 종남이협에게 도전장을 한 장 써 보내라 하라" 시녀의 동작은 매우 민첩했다. 잠시 후 시녀가 갖고 들어 온 도전장을 훑어 본 심목풍은 그것을 금화부인에게 넘겼다. "부인, 한 번 읽어 보시오. 읽어 보시고 고칠 곳이 없다면 그 곳 에 장소와 시간을 쓰시고 부인의 서명을 하시오." 금화 부인은 그 도전장을 대략 읽어 보고는 즉시 붓을 들어 몇 자 써 넣었다. 심목풍은 도전장을 시녀에게 건네 주었다. "이것을 당치의 책임자에게 전해라. 만일 오늘 자시 안으로 종남 이협에게 전하지 못할 시는 그의 목을 대신 바치라고 하여라." 심목풍은 시녀가 대청을 나서자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아! 피곤하군, 부인과 우문형도 피로할 테니 어서 숙소로 돌아 가 편히 쉬시오." 세 사람은 내일의 큰일을 위하여 그대로 헤어졌다. 소영은 난화정사로 돌아와 그대로 침상에 몸을 눕혔다. 남옥당과 몇 수 겨룬 까닭에 진기는 물론 정신까지도 혼미한 상태였다. 그는 누운 채로 품속에서 삼기진결을 꺼내 머리맡에 올려 놓고 금화부인이 보낸 도전장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금화부인의 표정을 보니 종남이협을 누를 자신이 있나 본데... 무위도장은 나를 살펴 주고 보호해 준 일이 있으며, 운양자도 역시 내 생명의 은인인데.... 내 그들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면 바로 이 기회가 좋겠군. 무위도장에게 빨리 이 소식을 알려 사전에 준비를 하게.....' 이런 걱정을 하며 몸을 뒤척이고 있는데 살며시 문이 열리고 금 란이 조그마한 쟁반에 오지그릇을 들고 들어 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백합탕이 담겨 있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소영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던 참이라 백합탕으로라도 잠 시의 즐거움을 맛보고 싶어 주저없이 받았다. 금란은 귀엽게 웃으며 다가섰다. "셋째 나리께서 마다 않으시니 소녀의 마음은 기쁘옵니다." 소영은 갑자기 악소채가 등을 두드리며 머리를 쓸어주던 옛날 일 이 새삼 그리워 그대로 눈을 감고 옥란이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 다. 금란은 옥수저로 백합탕을 조금씩 떠서 소영에게 먹였으며, 옥란 은 그의 머리를 매끈하게 빗겨 주었다. 소영은 얼마 동안 악소채를 생각하던 중 문득 당삼고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당낭자는 그동안 나를 찾지 않았느냐?" 소영의 갑작스런 물음에 두 시녀는 크게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멍하니 바라 보기만 하였다. 소영은 곧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다. '저들은 나를 무척 두려워하는군. 내가 너무 심하게 대하였나? 이제부터는 신경을 써서 부드럽게 대해 주어야겠다.' "나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앞으로는 절대 화를 내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지내라." 옥란이 앞으로 나섰다. "소녀들은 셋째 나리를 모시면서 전보다 많이 편해졌사옵니다. 소녀들은 평생 종으로 살아야 될 몸입니다. 그러므로 셋째 나리께 서 저희들을 때리시면 맞고, 또 꾸중하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셋째 나리께서는 소녀들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시와 소녀들을 거절하 지 마시옵소서. 그것으로써 저희들은 더 바랄 것이 없사옵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좋다. 내가 이 백화산장에 있는 한 너희들을 내 곁에서 절대 떠 나게 하지 않겠다." 옥란은 어린애처럼 기쁜 마음을 감출 길 없어 손뼉을 치며 좋아 했다. "셋째 나리, 감사하옵니다. 만약 나리께서 이곳을 나가실 때에도 소녀들을 데리고 가신다면 더욱...."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러자 소영은 더 욱 마음이 흐뭇해졌다. "내가 강호에 유협하며 두 처녀를 데리고 다닌다면 뭇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느냐?" "저희들을 남장시켜서 서동(書童)으로 보이게 하면 되지 않사와 요?" 소영은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기로 하지." 그러자 옥란과 금란은 소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이들에게 별로 잘 대해 주지 않았고, 지금까지 별로 관심 을 두지 않았는데 이토록 나를 지극해 생각해 주니 더 바랄 것이 없구나.' 소영은 갑자기 망화루에서 한쪽 팔을 잘린 하화라는 시녀가 머리 에 떠올라 두 시녀를 일어서게 했다. "너희들은 안심하여라. 난 한 번 약속한 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 도 지키는 사람이다." 옥란은 언제 눈물을 흘렸는지 얼룩진 얼굴로 금란의 손목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저희 두 소녀는 정성을 다하여 셋째 나리를 모시겠음을 맹세하 옵니다." "그런 이야기는 구태여 할 필요가 없고, 당낭자의 소식이나 알려 주려므나." 옥란은 머뭇거리며 무어라고 대답을 못하고 금란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소영은 직감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그쳐 물었다. "당낭자가 어떻게 되었느냐?" 그러자 마지못하여 금란이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옥란 동생은 너무나 나쁜 소식이라 감히 대답을 못해 드리는 것 입니다, 당낭자는 대장주의 명령으로 옥에 갇혔사옵니다." 소영은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뭐라고? 무엇때문에 그랬느냐? 그녀는 손님인데..." 금란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세째 나리, 조용히 말씀하십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옥란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언니가 말씀 드리세요. 소녀는 밖에 나가서 동정을 살피겠사옵 니다." 소영이 손을 흔들어 만류하려 하였으나 벌써 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으므로 금란에게 시선을 던지며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금란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연방 주위를 둘러 보며 말했다. "자세한 것은 소녀도 모르오나, 아마 셋째 나리와 관계되는 일 인 것 같사옵니다." 소영은 안색이 붉으락 푸르락해져 다그쳐 물었다. "나와 관련이 있다면 좀더 자세하게 알아야 되겠다." 금란은 황급히 앞으로 다가서며 두려운 빛으로 물었다. "셋째 나리, 누구에게 알아보시려 합니까?" "이장주에게 묻겠다." "물어 보셔야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장주께서도 당낭자 를 풀어 줄 수 없을 것이와요." 소영은 그녀의 이야기에 의아심이 생겨 캐묻고 싶었지만 우선 눈 앞에 닥친 일이나 해결하고 싶었다. "그럼 대 장주를 찾아가지." 금란은 고개를 흔들면서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주께서 당낭자를 옥에 가두셨으니 웬만해서는 그녀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옵니다. 셋째 나리께서 대장주께 물어 보셔야 별 소 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 난 그 일에 참견을 못한단 말이냐?" "참견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사옵니다." 소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게 소리쳤다. "안 돼! 이 일은 반드시 개입해야 되겠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어 찌하여 초청한 손님을 옥에 가두느냐 말이다." 금란은 바싹 소영에게 다가서며 안타깝게 만류했다. "셋째 나리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저희 산장에서는 어 느 누구라도 감히 대장주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옵니다. 나리께서는 비록 대장주의 신임을 받고 계시지만 대장주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알겠다. 네 말을 참고로 삼겠다. 그러나 필시 무슨 커다란 내막 이 숨어 있는 것 같으니 절대 모른 체 할 수가 없다." 금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소영을 빤히 쳐다 보며 물었다. "나리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소영의 눈살이 크게 찌푸러졌다. "무엇이 두렵겠느냐? 나는 대장주가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한다 고는 생각치 않아." "소녀는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살아 그동안 귀로 듣고 눈으로 보 아온 것이 많사옵니다. 그러나 나리께서 굳이 대장주께 물어 보신 다면 더 이상 말리지 않겠사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라겠습니 다." "그래.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너희들은 염려말고 있어라." 그러자 금란은 탐스런 양 볼에 눈물을 흘렸다. "번쩍이는 창 칼은 손쉽게 피할 수 있으나 급습해 오는 화살은 방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금란이 무릎을 꿇자 소영은 재빠르게 그녀를 일으켰다. "왜 자꾸만 그러느냐? 나도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면 진흙 속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옥란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 왔다. "금화부인이 오십니다." 소영은 급히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놓았던 삼기진결을 집어 들어 품 속에 넣었다. 소영이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금화부인이 벌써 문앞에 다가 왔다. "소제 안에 있소?" 그녀는 금란과 옥란에게 미소를 띄며 천천히 들어섰다. "이 두 낭자도 괜찮지? 소제는 항상 복이 많은가 봐." "부인께서는 농담도 잘하십니다. 어찌 소녀들을 그토록 치켜 세 우십니까?" "누가 너희들과 농담을 한다 하였느냐? 나는 진심으로 너희들을 칭찬했을 뿐인데." 두 시녀는 금화부인의 위치를 생각해서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소영은 그들의 심각한 분위기를 직감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금화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웬일이오? 이곳은 침실이니 부인께서 들어 오실 곳이 못 되오. 밖으로 나갑시다." 금화부인은 무엇이 우스운지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호호호... 남녀가 유별이라면 저 두 계집은 어찌 이곳에 들어 와 있소? 그들은 여자가 아니란 말이오? 난 이곳이 좋으니 여기에 서 이야기합시다." 소영은 그녀의 완강한 고집에 작은 의자를 내밀어 앉기를 권했 다. 금화부인은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부인께서 이곳을 찾은 용건이 무엇이오?" "소제는 이 누나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 소?" 소영은 너무나 의외의 물음에 무어라 대답을 못하고 잠시 머뭇거 렸다. "소제는 이 누나가 내일 아침 종남이협과 대결을 한다는 것을 알 고 있소?" "부인에게 들었지 않았소?" 금화부인은 얼굴을 붉히며 소영을 뚫어지게 쳐다 보며 말했다. "부인이라면 다른 사람을 부르는 말이오." "그럼 어떻게 칭하란 말이오?" "나는 소제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나를 무어라고 불러야 되 겠소?" 소영은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렸으나 짐짓 화제를 돌렸다. "그럼 내일 아침 싸움에서 부인을 도와달라는 말이오?" 금화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필요 없소. 나는 혼자서라도 종남이협을 물리칠 자신이 있소. 그러나 어떤 실수로 상처를 당할는지는 모르오. 소제의 큰형과 우 문선생에게서 종남이협은 높은 절기를 지녔다고 들었소. 특히 그 첫째 갈천의가 지니고 있는 풍화선은 무척 독한 암기를 지니고 있 으며 무수히 많은 변화를 발한다고 하더군... 그러니 누나도 할 수 없이 그에 맞설 준비를 해야 되겠소." 소영은 자신이 생각하였던 것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꺼내자 호기 심이 일었다. "제가 부인에게 무엇을 도와드려야 되겠소?" "뭐 별다른 것이 아니오. 내 대신 한 가지 물건을 보관하고 계시 오." "무엇인데요? 귀중한 것이오?" 금화부인은 품 속에서 옥선자 그림을 꺼내며 말했다. "옥선자 그림이오." 소영은 의외의 일에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뭐 그렇게 당황할 것은 없소. 이 옥선자 그림은 큰형이 직접 누 나의 소유라고 말한 것이오. 그래서 내일의 싸움에서 만약 누나에 게 무슨 불행한 일이라도 생기면 소제가 가지시오." 소영은 의아심을 감출 길이 없어 받지도 않고 생각했다. '부인은 왜 이것을 심목풍에게 주지 않고 나에게 맡기는 것일까?' 금화부인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오. 누나가 심대장주나 우문선생에게 이 그림을 맡기지 않는 것은 그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오. 누나는 아 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소제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소." "그건 터무니 없는 오해요." 금화부인은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웃음을 띠었다. "소제가 설령 누나에게 이것을 되돌려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 나는 후회하지 않겠소." 그녀는 말을 끝내며 옥선자 그림을 소영에게 불쑥 내밀었다. "소제, 어서 받으시오. 그리고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살펴 보시오." "살펴 볼 필요도 없소. 가짜는 아닐 테니....." 소영은 착잡한 심정으로 옥선자 그림을 받았다. 그동안 서로 친 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자신을 믿고 중요한 물건을 맡기 는 그녀가 어쩐지 외로와 보였다. '내일 아침 결투에서 만약 그녀가 다친다면... 될 수 있으면 싸 움을 말리고 싶은데.' 소영은 이런 생각으로 금화부인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녀도 눈동자를 고정시켜 소영을 의미 깊은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잠시 후 금화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잘 간직하시오. 내일 누나가 죽지 않는다면 찾아가겠소." "그렇다면 할 수 없이 부인의 명령에 따라야 되겠군요. 하하..." 금화부인은 소영의 농담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주위를 훑어 보았다. 얼마 전까지 뒤에 서 있던 두 시녀는 어느 새 밖으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소영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조금전의 두 시녀는 심목풍이 소제에게 준 계집이오?" "아니오. 그녀들은 항시 이 백화산장에 있으며 난화정사를 맡을 것이오." 금화부인은 더욱 나직히 말했다. "소제는 이곳에 가맹한 지 얼마나 되었소?" 그러자 소영은 깜짝 놀라 잠시 대답을 못하였다. '이 부인은 정말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로구나. 내가 백화산장에 가맹한 일은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그것을 알았소?" 금화부인은 소영을 흘겨 보았다. "누나는 두가지 일로써 짐작을 하였소." "어떤 일이오?" "첫째는 소제의 무공을 보고 알았소. 소제는 그들과는 전연 다른 초식을 쓰고 있소." "또 다른 하나는?" "동물은 같은 종족이 모여 살아 가고 있소. 심대장주나 주조룡이 가지고 있는 교활한 성격과 흉계가 바로 대답이오. 소제에게는 조 금도 그런 것이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선을 따르고 있는 것이 그들 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오. 만약 소제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 는다면 틀림없이 심대장주는 손을 써서 소제를 죽이든가 자기 앞에 굴복시킬 것이오." 소영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듯 크게 두근거렸다. "소제, 안심하시오. 지금은 그들도 소제를 이용할 때이며, 소제 도 그들을 긴요하게 이용할 수도 있소." 그녀는 주위를 다시 살피고는 소영의 귀 가까이에서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소제는 그 두 시녀들을 조심하여야 되오." 소영은 의아심이 일어 다그쳐 물었다. "그것은 왜 또 그렇소?" "오늘 초막에서 소제는 겉으로는 백화산장을 위했고 안으로는 운 양자를 도와 무위도장의 생명을 구하였소. 그 일은 나도 눈치를 채 었으니 어찌 교활하기 그지없는 주조룡과 우문선생이 그것을 몰랐 겠소? 그때 나는 소제의 본 뜻을 알아차리고 더 속이지 않고 진짜 해약을 가르쳐 준 것이었소." 소영은 한층 더 놀랬지만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자 신의 약점을 메우러 애썼다. "무림에서는 신의가 앞서는 것이오. 부인이 진짜 해약을 주었으 므로 그쪽에서도 진짜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을 준 것이 아니겠 소? 그러니 심형께서 그것을 알고 계신다 하여도 나를 탓하지는 않 을 거요. 그러나 나에게 두 시녀를 조심하라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소." 금화부인은 입가에 쓴 미소를 띄며 소영을 잠시 쳐다 보더니 천 천히 말을 이었다. "소제는 너무나 순진하여 사람을 대할 때 별다른 경계심이 없어 서 탈이오. 앞으로 강호에 떠돌아 다니려면 이런 일을 허다하게 많 이 부딪치게 될 것이오. 두 시녀는 소제를 감히 해하지 못할 거요. 그렇다고 대장주도 소제를 해치지 못할 것 같소?"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날려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잠시 주위를 살폈다. 아무 기척도 없자 그녀는 천천히 걸어 들어 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누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소제의 시중을 드는 두 시 녀가 정도 이상으로 소제에게 친절을 베풀 것이오. 그렇게 해서 소 제의 신임을 얻어 놓은 뒤...." 소영은 가슴 한구석이 섬뜩하였다. '이 말은 정말 맞구나.' 금화부인 계속 말했다. "심대장주가 소제의 신임을 얻은 두 시녀를 이용하여 함정을 만 든다면 틀림없이 빠질 것이오. 누나는 백 가지 독을 치료할 수 있 으면 또한 독을 쓰는데도 자신이 있소" "대장주가 소제를 길들이지 못하겠다든지 혹은 소제의 명성이 높 아져서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었다고 생각될 때에는 언제든지 두 시녀에게 명령하여 소제의 음식에 독을 넣고 그 해약을 미끼로 소제를 자기 마음대로 흔들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소." 소영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내심 느끼는 바가 있었다. '심목풍은 하화라는 시녀의 팔을 자르게 한 적도 있었으니 나에 게도 그렇게 안하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하지. 부인의 이야기가 어쩌 면 맞을지도 모른다. 심목풍은 잔악하고 무슨 일을 하든 수단 방법 을 가리지 않으니 만약 내가 필요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형제 결의 도 무시하고 손을 쓸지도 모르는 일이다.' 금화부인은 다시 입을 열어 그의 생각을 전가시켰다. "그때 가서 소제가 후회를 해야 이미 엎지러진 물이오. 이 누나 는 오직 소제를 위하여 미리 알려주는 것이니 될 수 있는 한, 두 시녀를 멀리하시오." 그녀는 머리에 꽂혀 있는 옥비녀를 뽑아 소영에게 내밀며 말했 다. "소제, 이 옥비녀는 천하에도 둘도 없는 것이오. 이것을 몸에 지 니고 있으면 갖은 재난도 물리칠 수 있으며 백독을 알아 낼 수가 있는 것이오. 앞으로 차를 들때 우선 이 옥비녀로 시험해 보시오. 만약에 차에 독이 들어 있다면 비녀는 즉시 흑색으로 변하게 될 것 이오." "이런 진귀한 물건을 어찌..." "아니오. 이것은 소제의 생명에 관계되는 일이니 어서 사양말고 받으시오." 소영은 할 수 없이 옥비녀를 받아 쥐고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그럼 부끄러운 마음으로 부인의 성의를 받겠소. 그러나 자꾸만 짐이 무거워지는 것 같소이다." "소제는 다만 누나가 아껴주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되오." "누나는 더 이상 소제를 귀찮게 하지 않고 이만 물러가겠으니 편 히 쉬시오." 그녀는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 난화정사에서 사라졌다. 소영은 묘 한 기분에 싸여 그녀를 쫓아가 몇 마디 물어 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그냥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 보았다. 백화산장에서 생기고 있는 흉계와 음모를 소영으로서는 어쩔 도 리가 없었다. 더욱이 강호의 경험이 워낙 부족하여 이런 난관을 쉽 게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소영이 그녀가 주고 간 옥비녀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문 밖에 서 낮은 기침 소리가 났다. 그는 재빨리 옥비녀를 품 속에 넣고 문 을 열었다. 그곳에는 심목풍이 점잖게 두 손을 등 뒤에다 지고 몸을 벽에 기 대고 서 있었다. "큰형님께서 오신 것을 미처 몰라 뵈어 마중을 나가지 못하였습 니다." 심목풍은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서더니 조금 전에 금화부인이 앉았던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방안을 두루 살펴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제, 여기에 금화부인이 왔었나?" "네, 왔었습니다. 큰 형님께서 조금만 일찍 오셨으면 만나실 수 있었을 텐데..." "그럴 필요는 없네." 심목풍은 손을 저으며 점차 표정을 심각하게 바꾸었다. 소영은 이러한 것으로 보아 큰일이 생겼음을 짐작하였다. 이때, 심목풍의 긴 한숨소리가 들렸다. "삼제, 그대는 묘강에서 독충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 나?" "몇 번 들었습니다." 소영은 삼성곡에 있을 때 장산패에게서 강호 각지의 자세한 내력 과 묘강이 독충을 기른다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은 적이 있었다. 심목풍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럼 삼제는 금화부인이 바로 그 독충을 기르는 사람이라는 것 을 알고 있나?" 소영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그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 독충을 사용할 때 대부분이 식사와 차에다 넣 네. 그러나 금화부인은 사람의 살갗과 닿는 순간 독충을 옮겨 상대 를 상하게 할 수가 있네. 그동안 내가 너무 바빠 그것을 알려 주지 못했네." 소영은 자신의 앞가슴을 남에게 얻어 맞는 것처럼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멍청히 심목풍을 쳐다 보기만 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 이 한데 엉켜 도저히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가 없었다. 심목풍은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방면에 있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네. 다행히 수일 안 으로 의술에 능통한 친구가 이곳에 오게 되었으니 그분에게 물어 보면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네. 바로 그 독충을 없애고 또 해독하는 약을 만들기 위하여 일부러 묘강에서 십 년 간 생활한 사 람이니 그분에게 자네를 보이면 자네가 금화부인의 독충에 물렸는 지 여부를 대번 알 수 있네." 그는 금화부인과 똑같은 행동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밖으 로 나가려 하였다. "그가 도착할 때까지 삼제는 조심해야 하네." 소영은 그를 급히 불렀다. "큰형님, 잠깐만...." "삼제, 무슨 일인가?" "금화부인이 소제에게 옥선자 그림을 맡겼습니다." 심목풍은 차가운 미소를 떠오르더니 곧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꾸 었다. "그녀는 그대에게 보관만 시킨 것인가?" "금화부인은 내일 아침에 종남이협과 싸움을 하기 때문에 소제에 게 맡긴다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내일 싸움에 이긴다면 다시 이것 을 찾고 패하면 소제더러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나? 그럼 잘 보관하고 있게나. 그녀가 내일 싸움에서 어떻 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심목풍은 옥선자 그림을 손아귀에 넣고 싶었지만 짐짓 태연한 척 하며 소영의 눈치를 살폈다. 강호의 견식이 부족하고 거짓을 모르는 소영은 엉큼한 꾀에 속아 한 발 한 발 깊은 함정에 빠져 들어가 그의 계책에 걸려 들고 말았 다. "그 그림을 지금 소제가 갖고 있으니 큰 형님께서 구경을 해 보 시겠습니까?" 심목풍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마지못하는 척 입을 열었다. "옥선자 그림은 소문만 들었지 아직 보지는 못했네. 어디 보여 주겠나?" 소영은 서슴지 않고 품 속에서 그림을 꺼내 심목풍에게 건네주었 다. "나는 원래 자네에게 명하여 금화부인이 가지고 있는 이 그림을 속임수를 써서라도 뺏으려고 했네. 그러나 그녀의 독충이 무서워 이제까지 말을 못한 것이네. 금화부인이 이미 이곳에 찾아와서 이 것을 맡겼다니 이제는 할 수 없이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겠네. 그러 니 내가 이것을 잠시 가지고 가 자세히 감정을 한 다음 내일 아침 에 틀림없이 보내 줄 테니 나에게 빌려 줄 수 없겠나?" 소영은 의외의 말에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큰형님께서는 이것을 망화루로 가지고 가겠다는 말씀입니까?" "풍문에 듣기로는 이 그림이 매우 정묘하다고 했네. 내가 이곳에 서 감상을 하다가 금화부인이라도 들어 오면 곤란하지 않겠나?" 소영은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큰형님께서 그 그림을 갖고 가신 후에 금화부인이 돌아와 다시 그 그림을 내 놓으라고 하면 소제의 입장이 난처하게 됩니다. 그러 니 소제가 산장을 나가 그녀를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심목풍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자네가 산장 밖으로 피해 나간다면 더는 말리지 않겠네. 그러나 어디 먼 곳으로 가지 말고 속히 돌아오게나." 소영은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 소영은 비록 강호의 견식이 없어서 상대에게 속았지만 지혜는 있었다. 무의식중에 심목풍에게 옥선자 그림을 넘겨 준 후 곧 그의 간계에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소영은 이미 그림을 수중에 들고 있는 심목풍에게 무어라 말을 하여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없음을 느끼고 묘한 꾀를 짜냈다. '이왕 속은 것이니 사후 대책이나 세워야겠다. 어서 이곳을 나가 중주이고를 만나 물어 봐야 되겠다.' 소영은 심목풍의 대답이 떨어지자 재빠르게 산장을 빠져 나가 곧 장 북쪽으로 내달렸다. 그는 큰 길을 피해 들과 산으로 경공술을 전개시켜 질풍처럼 길 을 재촉했다. 전날 상팔과 결투약속을 할때 그가 가리켰던 조그만 절이 생각났다. '그곳으로 가면 중추이고를 만날 수 있겠다.' 그곳을 방향을 잡고 얼마쯤 내달리니 과연 한 채의 초라한 절이 눈에 들어 왔다. 절은 아주 황폐하고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되서 주위에는 잡초 가 무성하고,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는 미행하는 사람이 있나를 살폈다. 별다른 이상이 없자 진기 를 모아 팔보간섬(八步懇蟾)의 신법을 전개시켜 연속 몇 번을 치솟 으니 절의 담을 뛰어 넘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절의 문은 썩어 있었으며 그 주위는 온통 먼지가 덮여 있어 삭막 한 기분을 자아 냈다. 더군다나 양편에 큼직한 관이 놓여 있어 더 욱 기분이 나빴다. 소영은 상팔이 만약에 강호에 사변이 일어나 그에게 연락할 수 없을 때에는 사방 안으로 들어 와 남쪽에 있는 관을 열고 그 속에 있는 자기의 글을 읽으라는 말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는 이 기회에 그의 시신을 꺼내어 보리라 생각하였다. 천천히 남실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살폈다. 남쪽에 놓여 있는 관 을 한참 동안 눈여겨 보고는 내력으로써 가볍게 관뚜껑을 밀어 보 았다. 관뚜껑은 쉽사리 열렸다. 소영은 그 관속을 들여다 보았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관 속에 사람이 반듯하게 누워 있는 것이 아닌 가. 전신이 온통 흰 천으로 덮여 있어 몸차림이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신체가 작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여인이 아니면 조그만 동자라 짐작되었다. 내심 무서운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송장이 썩은 냄새는 나지 않 았다. '만약 이것이 여인의 시체라면 나는 너무나 당돌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중주이고의 서신을 찾으려고 온 것인 데 엉뚱하게 남의 시체를 건드릴 수야 없지.' 소영이 관뚜껑을 닫으려는데 언뜻 종이 쪽지가 흰 천 사이로 보 였다. '아, 저것이로구나.' 그는 놀라움과 기쁨에 넘쳐 손을 뻗쳐 그 종이 쪽지를 집으려 하 였다. 그의 손이 거의 흰 천에 닿으려는 순간 호통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건드리지 말아라." 그 호통은 크지는 않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 차가운 감이 깃들어 있어 소영의 가슴을 섬칫하게 했다. 상대는 언제 나타났는지 대문 앞에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전신에 검은 도포를 걸치고 얼굴은 여위어 마치 귀신같은 형상이었다. 소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상대의 기습에 대비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 관 속의 시체와 당신은 어떤 사이요?" 흑의 대한은 대뜸 한 발을 내딛으며 냉랭한 눈빛으로 소영을 쏘 아 보았다. "당신은 참견할 것이 못 돼." '죽은 사람에게 물어 볼 수는 없으니 다시 물어 보아야겠군.' 소영은 이런 생각으로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었다. "귀하의 존성 대명은 어떻게 되옵니까?" 흑의대한은 소영의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관이 있는 곳으로 다가 와서는 힘 안 들이고 한 손으로 그 관뚜껑을 닫아버렸다. "귀하께서 만약에 한 발만 더 앞으로 나선다면 소인은 부득이 손 을 쓰겠소이다. 무례 한 놈이라고 원망하지 마시오" 그러자 흑의 대한은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소영의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허허허... 당신은 아깝게도 나를 굴복시킬 기회를 잃어버렸소." "우리는 아직 한 초도 겨루지 않았소. 그런데 어째서 기회를 잃 어버렸다 하오." 흑의 대한은 옆의 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이 관 옆에서 떠나지만 않았다면 나는 당신에게 공 격을 하지 못했을 것이오." 소영은 그제서야 상대가 관뚜정을 닫을 때 무의식중에 자기가 뒤 로 두 발이나 물러섰음을 느꼈다. 흑의 대한은 두 눈에 살기를 띠 며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스스로 손을 쓰겠소? 아니면 내가 대신 손을 쓸까?" 소영은 얼른 그의 말뜻을 알아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어떻게 손을 쓰란 말이오?" "당신이 손을 쓰시겠다면 내가 독이 묻어 있는 칼을 주지. 그 칼 에 묻은 독은 피를 보면 사정없이 핏속으로 파고 든다네. 당신이 몸의 아무 곳이나 조금 베면 당신은 편안하게 죽을 수 있으며 시체 는 언제까지 썩지 않지." 소영은 불같은 분노를 억제하고 짐짓 웃음을 보였다. "그럼 당신에게 손을 쓰라고 하면?" "그 때는 당신에게 고통이 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을 생포하여 날마다 조금씩 살을 베어 내어 칠 일 후에야 죽게끔 만들겠다. 그 렇게 칠 일 동안 고통을 받는 것보다...." 소영은 흑의 대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내뱉았다. "나는 스스로 손을 쓰기도 싫고 또 당신이 손을 쓰는 것도 싫소. 두 가지 모두 싫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흑의 대한은 의외로 기쁜 표정으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방법이 있지! 서로 좋은 방법이 있고 말고, 당신은 보기와 같이 참으로 영리하군." "무슨 방법이오." "당신은 틀림엄이 훌륭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것 같은데 내공이 깊을 사람일수록 그 효과도 크지." 소영은 더욱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크게 외쳤다. "당신은 나를 놀리는 것이오? 무슨 엉터리 수작을 꾸미려는 것이 오?" 흑의대한은 엷은 미소를 흘렀다.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지 마시오. 당신은 필시 내 딸을 살릴 수 있으리라 믿소." 흑의대한의 말은 갑자기 공손해졌다. "만약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내 힘이 닿는 한 도와 줄 수 있 소. 말해 보시오. 내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오?" 흑의 대한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애는 바로 이 관 속에서 들어 있는 것은 내 딸이오." "그녀는 아직 살아 있소?" 흑의 대한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관에 눈길을 박았다. "내 딸의 병세가 요 며칠 사이에 더욱 심해져서 이제는 죽은 사 람과 마찬가지요. 나는 그 애의 혈도를 몇 곳 점하여 최후의 원기 를 흩어지지 않게 해 놓았소." "그럼 당신의 의술은 보통이 아니겠구려?" "그렇소. 노부의 자랑같지만 의술에 있어 나를 따를 인물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소영은 유심히 상대를 살펴 보았다. 그의 얼굴 근육은 굳어져 버 린 듯 두 눈동자만 움직이고, 또한 입이 움직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보아도 살아 있는 사람같지가 않았다. '이런 괴상망측하게 생긴 사람이 의술에 뛰어나다니... 정말로 사람의 생김새를 보아 모든 것을 판단할 수가 없구나.' 소영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흑의 대한이 말을 이었다. "나는 본래 이곳에서 친구를 만나러 왔었소. 그런데 갑자기 딸이 발작을 하여 부득이 황폐한 절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되었소."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의 딸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았소." "그것은 염려없소. 다만 당신은 내 딸을 도와 주겠다고 약속만 하면 되오." "좋소. 승낙하겠소." 흑의 대한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품 속에 손을 집어 넣어 잠시 뒤적거리더니 한 개의 자그마한 옥잔과 가느다란 철관(鐵管)을 꺼 냈다. 소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의 행동을 주시하였다. 흑의대한은 철관을 소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당신의 피를 조금 내어 보시오. 당신의 혈액을 봐야겠소." "피를 내란 말이오?" "내 피로써 당신의 딸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피를 드리 겠소." 소영은 그가 내민 철관을 받아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독이 묻어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서슴없이 왼쪽 팔맥의 동맥을 짚어 그 철관을 찔러 넣었다. 흑의 대한은 재빠르게 옥잔을 대었다. 그러자 흑의 대한은 손을 흔들며 소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됐소! 그만하시오." 그는 소영의 물음에는 대꾸도 없이 옥잔의 피를 한참 동안 들여 다 본 다음 혀를 내밀어 피를 핥아 보더니 크게 외치는 것이었다. "좋은 피야! 과연 좋은 피야!" 소영은 가슴이 싸늘해져서 흑의 대한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 보 았다. '사람 몸의 피는 모두 같거늘... 설마 내 피가 다른 사람과 틀리 지는 않겠지.' 25. 빗겨가는 구원의 손길 흑의 대한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물결처럼 나타났다. "다르다. 전혀 다르다. 내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의 피를 맛보았지만 당신의 피가 가장 좋소." 소영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강호의 경력이 얕은 그는 흑의 대 한의 말이 과상하게 들렸다. "보아하니 노선배님은 의술이 매우 높은 것 같은데요...." "물론, 노부의 의술은 자랑할 만하지. 현세에 천하를 다 뒤져도 나보다 의술에 정통한 사람은 없을 것이오." 흑의 노인은 옥잔을 내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딸의 병세도.... 노부의 의술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죽었을 것이 오. 그애의 목숨이 천 개라 할지라도 소용없었지." "노선배께서 그토록 놀라운 의술을 지니셨는데 어째서 따님의 병 을 고치지 못하십니까?" 흑의 노인은 소영의 질문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노부가 비록 의술에 정통해 있지만 양약(良藥)을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소. 그런데 마침내 약을 찾았소." "그 약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황폐한 이 사당 안에 있소!" 소영은 눈이 휘등그래져서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흑의 대한은 껄껄 웃었다. "딸은 비록 중병에 걸려 초췌해졌지만 아름다움은 그대로 간직하 고 있네. 내 딸의 얼굴을 한 번 보겠나?" "조금 전에 제가 아무 것도 모르고 따님에게 실례를 했지만... 어찌 또 실례되는 일을 하겠습니까?" 소영이 거절했으나 흑의 대한은 관뚜껑을 열면서 말했다. "노부가 옆에 있으니 봐도 괜찮네." 소영은 관을 들여다 보려고 허리를 구부렸다. 이 때였다. 흑의 대한이 손을 뻗쳐 소영의 허리에 있는 경문혈 (京問穴)을 찔렀다. "아차!" 소영은 재빨리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왼쪽 팔 천정(天井) 과 곡지(曲地)의 두 혈도가 마비되고, 뒤이어 오추(五樞)와 유도 (由道)두 혈도가 찍혔다. 전신의 다섯 군데에 혈도를 찍힌 소영은 꼼짝할 수가 없어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다가 땅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하하, 너는 뜻밖에도 이처럼 공력을 지녔구나. 내공의 힘이 굉 장한데... 하지만 아깝다. 아까와...." 소영은 다섯 군데의 혈도를 찍혀서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아혈(啞穴)은 찍히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그는 격분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비겁하다! 내가 조심했어야 하는 것인데... 너의 말에 속아 암 습을 당하다니... 사나이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진 않지만 너무 억울 하다..." "흐흐...... 꼬마야, 딸이 무서운 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지켜 보 며 약이 없어 애태우는 부모의 속을 알아다오. 어쨌든 네가 내 딸 을 살려 준 은인이기에 먼저 감사하겠다." "여보시오! 입에 발린 소리는 치우시오. 나보고 당신의 딸을 살 려달랄 생각이 있으면 좋게 의논할 일이지, 비겁하게." "허허, 이런 일은 의논해서 될 일이 아니야." 흑의 대한은 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네 몸의 피를 내 딸에게 주입시켜야 병을 완전히 고칠 수 있다. 피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소영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치료 방법이 있었나? 전혀 듣지 못했는데...." "흐흐, 노부가 현세의 초인적 의사라는 것을 잊은 모양이군. 이 런 일은 노부에게는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이다." "노부는 네 시진 안에 내 딸에게 피를 넣어 주어야 한다. 내 딸 의 혈맥 속에 네 피가 뛰고 있을 테니 너는 죽었어도 산 것과 다름 없으니 너무 원통하게 생각지 마라." 흑의 대한의 입에서 네 시진이란 말을 들은 소영은 한 줄기 희망 이 솟았다. '나는 은사에게서 운기충혈(運氣衝穴)을 배웠다. 만일 한 시각만 내 몸에 손을 대지 않는다면 나는 스스로 혈도를 풀 수 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흑의 대한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실은 너를 죽이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긴 하다. 너에게 보혈약 을 칠 일 간 먹인 후 피를 뽑으면 네 생명은 살아날 수 있지. 하지 만 방금 노부가 너의 혈도를 찍으며 보니 너는 이미 놀라운 내공을 지니고 있어. 만일 너를 살려 준다면 반드시 화를 당할 것 같아 아 예 없애 버리려는 것이다." "나의 피로 당신의 딸을 살리는 것은 좋지만 나의 생명까지 뺏으 려 들다니 정말 악독한 의사로군." "흐흐, 무림의 사람들은 노부를 독수약왕(毒手藥王)이라고 부른 다. 이 칭호가 괜히 붙여진 줄 아나?" 소영은 은근히 진기를 조식하며 혈도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그러 나 독수약왕은 이러한 소영을 그대로 놔 두지 않았다. 품 안에서 한 개의 은침(銀針)을 꺼내 들고 한 발 다가섰다. "노부는 비록 너의 사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네가 운기충혈의 내공을 할 줄 알 것 같기에 미리 손을 써야겠다." "뭐라고!" "흐흐, 독수약왕이 그처럼 쉽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말과 동시에 손을 뻗쳐 소영의 천돌혈(千突穴)을 은침으로 찔렀 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천돌혈은 임맥(任脈)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너는 이제 운기할 능력이 없어졌다." 소영은 한 조각 희망마저 무너지자 소영은 무거운 한숨만 내쉬었 다. '뜻밖에도 나는 적과의 싸움에서 죽지 않고 전신의 피를 남에게 쏟아 주고 죽게 되었구나.' 독수약왕은 웃으며 관 속에서 자기 딸을 안아 일으켰다. 그는 소 녀를 안고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뒤에 다시 들어 왔다. "자, 내 딸의 생명을 구해 줄 은인에게 가 보실까?" 그는 소영을 안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소영을 안고 들어선 곳 은 바로 옆방이었다. 이 방에는 가구와 몇 가지의 괴상한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독수 약왕은 소영을 방바닥에 내려 놓았다. 소녀는 깨끗한 요위에 눕혀 져 있었다. '이제 바랄 것은 중주이고가 이곳에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뿐 이다.' 소영이 낙담하고 있는 사이에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독수약왕은 두 개의 철관을 꺼냈다. 철관 사이는 가죽으로 연결 되어 있었다. "흐흐흐. 네가 편하게 죽고 싶으면 노부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 이 좋다. 만일 끝까지 노부를 화나게 하면 너는 죽을 때까지 고통 을 면치 못할 것이다." 소영은 분노가 치밀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당장 뛰어 일어나 독 수약왕을 일격에 때려 죽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안 타까울 뿐이었다. 독수약왕은 소녀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두 손으로 소녀의 옷고름 을 풀었다. 백설같은 소녀의 피부가 옷깃 사이로 살짝 드러났다. 독수약왕은 소녀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거칠게 호흡을 내는 것으로 보아 무척 힘드는 모양이었다. 잠시후 독수약왕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것 은 소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소녀는 쌕쌕 약한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녀가 숨을 쉬자 독 수약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오늘 밤만 지나면 너는 건강해진다. 이 애비가 이제부터 는 너를 데리고 전국의 명승고적을 유람하며 즐거움을 마음껏 안겨 주마. 너는 이제 행복해질 것이다." 소영은 가슴 속에서 뭉클 치미는 것이 있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더니 독수약왕도 약독한 수 법으로 내 생명을 끊으려고는 하지만 역시 자애스러운 어버이로구 나.' 소녀의 호흡이 점점 높아지더니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아 갔다. "아버지, 여기가 어디에요?" "여기는 우리가 타인에게서 임시로 빌린 집이다. 너는 어서 운기 를 조식하여 나의 내공을 받아들이도록 해라. 혈맥이 완전히 유통 되면 즉시 내가 네 병을 고쳐 주겠다." 독수약왕이 갑자기 입을 다물며 숨소리를 죽였다. 그의 손이 미 끄러지듯 소녀의 혈도를 찍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 는 발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순간 소영의 가슴엔 쿵쿵거리며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누구든 상관없다. 사람만 나타난다면 나는 큰소리로 구원을 청 해야겠다.' 그러나 소영은 또다시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버렸다. 독 수약왕의 손이 그의 아혈을 찔러 버린 것이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와지고 있었다. "이 며칠 동안 우리가 계속 달려 왔어도 용두대가(龍頭代歌 : 두 목, 큰형)와 연락이 되지 않으니...." 그 음성을 들은 소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두구의 음성이 었던 것이다. 두구의 말을 받아 입을 연 사람은 상팔이었다. "그 심목풍은 매우 간교하고 음흉한 놈이지. 그놈은 어떤 악독한 짓도 다 할 수 있는 놈이야." 두 사람의 음성은 소영을 미칠 듯한 아타까움 속으로 몰아 넣었 다. '중주이고가 바로 문 앞에 있으니 내가 작은 신음소리만 내도 알 아 듣고 달려 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사 지가 멀쩡하면서도 움직일 수 없으니 절망이다. 형제를 바로 앞에 두고도 나는 찍소리 못하고 죽게 되는구나.' 소영이 절망과 안타까움에 속을 태우고 있는데 다시 두구의 말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심목풍이 우리 소대협을 살해한단 말이오?" "살해는 않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손아귀에 틀어 쥘 것이네. 그놈 은 흉칙스럽고 비상한 놈이야. 그놈이 하는 일은 곁에서 보면서도 모를 정도야." "옛날 그놈이 소림파의 고승(高僧) 네 명을 죽이는 것을 나는 목 격했었네. 그 수단이 어찌나 교묘하고 잔인한지 그가 사람이라면 그렇게는 못할걸세." "그러니 우리가 무슨 대책이든 빨리 세워 소대협의 소식을 알아 내야 하지 않겠소?" 초조한 듯한 두구의 소리는 소영을 감격시켰다. 두구의 말에 대답하는 상팔의 음성이 들렸다. "그렇지. 우리는 속히 소대협의 소식을 알아 내야 하네. 보아하 니 다른 방도는 없을 것 같고..... 백화산장으로 가서 모험을 할 수밖에 없겠네." '백화산장은 겹겹이 경계망인데 당신들이 어떻게 뚫겠소? 지금 눈앞에 있는 문을 열기만 하면 나를 만날 텐데....' 소영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독수약왕은 소영이 진기를 끌어 모으는 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손 을 놀렸다. 그는 소영의 현기혈(玄機穴)을 찍으며 전음입밀(傳音人 密 :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들리지 않게 의사를 전달하는 수법)을 사용해 소영에게 말했다.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심장을 뚫어버릴 테다." 소영은 희망을 끊어버린 채 울분만 씹었다. "이 편지를 관(棺) 속에다 두고 갑시다. 만일 소대협이 이곳에 온다면 우리의 행방을 알 수 있도록 해야지요." "그게 좋겠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방문 앞을 떠났다. 그들이 기척이 완전히 사 라지자 독수약왕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만일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면... 그 때는 내가 너무 잔인 하다고 욕할 시간도 없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뒷창문을 훌쩍 뛰어 넘어 밖으로 사라졌다. 독수약왕은 잠시 후 들창문을 넘어 들어 왔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중얼거렸다. "중주이고는 평생을 다른 사람과 손잡고 일했던 적이 없었는데 .... 그 놈들이 어떻게 해서 용두대가란 자를 받들고 있을까?" 독수약왕은 소영을 힐끗 바라 보았다. "오늘 밤 누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를 빌겠다." 그는 철관을 집어 들고 한동안 만지작거리더니 소영의 곁으로 다 가앉았다. '아! 이제 내 피를 뽑으려는 모양이로구나!' 소영은 전신에 전율을 느꼈다. 그의 예상대로 독수약왕은 예리한 철관의 끝을 소영의 왼팔 혈관에 꽂았다. 독수약왕은 엄숙한 표정 으로 숨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철관의 다른 끝을 소녀의 오른팔에 찔렀다. 그러자 소영의 피가 철관을 통해 소녀의 혈관으로 빨려 들어 가 고 있었다. '결국 나는 몸에 피 한 방울도 남기지 못한 채 죽고 말겠구나.' 죽음을 각오하고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소영이었지만 막상 피가 빨려 나가는 것을 의식하니 공포와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독수약왕은 소영과 소녀의 얼굴을 주의해 보고 있더니 갑자기 오 른손을 뻗쳐 소영의 가슴을 눌렀다. "네 혈도가 마비되어 피가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구나." 그는 손바닥을 통해 뜨거운 기류를 소영의 심장으로 밀어 넣었 다. 그러자 소영의 왼팔로 전신의 피가 한데 모여 뭉클뭉클 뿜어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영은 크게 놀라 진기를 모으려고 하였으나 마음뿐이었다. 산송 장이나 다름없는 그로서는 한 움큼의 진기도 모을 수 없었다. 독수약왕은 소영의 심장에서 손을 떼더니 소녀의 오른손을 잡으 며 그녀의 심장에 귀를 대었다. 잠시 그런 자세로 있던 독수약왕은 감개무량한 듯 떨리는 음성으 로 중얼거렸다. "얘야, 나의 귀여운 딸아, 칠 년 동안 너는 계속 죽음의 문턱에 서 지냈다. 그 고통이야 얼마나 컸겠니? 하지만, 나 역시 너에 못 지 않은 걱정과 고통으로 날을 지새웠단다. 그러나 이제 안심이다. 이 청년의 피가 마침 너에게는 영약이 된 것이다. 오늘 밤만 지나 면 너는 완전히 건강해진다." 독수약왕은 기쁨을 못 이겨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얘야, 내일부터 우리 부녀 사이에는 온통 행복뿐이다. 나는 너 를 데리고 네가 가고 싶다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감개무량한 듯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소영의 콧날이 시큰해졌 다. '좋은 아버지다. 딸에게는 둘도 없는 아버지다. 하지만 나는 뭐 냐? 피를 뽑혀 죽게 되다니.... 저들 부녀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지 만 너무 억울하구나.' 독수약왕은 다른 철관을 꺼내더니 소녀의 왼팔에 꽂았다. "얘야, 이제 젊은이의 싱싱한 피가 네 심장에서 혈관으로 마구 뛰어다닐 수 있게 나쁜 피를 뽑아야겠다." 그는 철관의 한쪽 끝을 입에 물더니 힘껏 빨았다. 입으로 빨아 낸 피를 그릇에 뱉아 내고 다시 피를 빨고, 이런 동작을 반복하며 소녀의 몸에서 나쁜 피를 뽑아 내고 있었다. '내 몸의 피는 지금 엉뚱한 사람의 심장으로 들어가는구나. 이제 나는 사라지고 소녀의 몸속에 내 피만이 남겠구나. 얼마나 지나면 나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 사라진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소영은 허공에 둥둥 뜬 것 같은 묘한 기분 속에서 한 방울씩 빨 려 나가는 피를 마음 속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이 때였다. 요란한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뒤이어 날카로 운 여자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 계집애야! 만일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 칼로 토막토막 잘라버리겠다." 이 음성은 소영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금화부인이다. 금화부인이 나타났다.' 소영은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뻤으나, 그 기쁨은 순간적이었다. '나는 움직일 수도 소리를 칠 수도 없다. 중주이고는 문 앞에까 지 나타났다가 사라졌으며, 금화부인이 아니라 사부님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잖은가?' 금화부인의 말에 대답하는 다른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부인께선 시녀를 오해하지 말아요. 시녀는 매복했던 사람에게서 셋째 나리가 이곳으로 왔다고만 들었을 뿐이어요. 셋째 나으리의 행방은 정말 몰라요. 셋째 나으리에게 시녀가 받은 은혜 태산같은 데... 만약 그분이 돌아가신다면 시녀도 뒤를 따라...." "흥, 한 마디 묻겠는데 너는 너의 셋째 나으리를 좋아하지?" 금화부인의 질문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시녀는 비천합니다. 감히 그런 망상을 하겠어요? 자주 나으리를 뵈오며 평생을 곁에서 시중들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분에 넘치 는 영광이지요." "내가 보기엔 네 소원이 이룩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너를 죽 이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대장주에게 알려 네가 병신에게 시집가도 록 만들겠다." 옥란의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 시녀는 셋째 나으리에게 조금도 외람된 생각을 품지 않고 있습니다. 제발 시녀를...." "나는 일단 꺼낸 말은 세상 없어도 실행하는 성미니까... 내일 당장 너의 대장주에게 얘기하겠다." 두 여인의 말이 뚝 그쳤다. 이때 독수약왕은 이미 수혈을 중단한 채 밖의 동정에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그는 단검을 움켜 쥐고 문을 노려 보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 사당에는 두 개의 빈 관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곳 에 그가 무엇하려고 오겠느냐? 다른 곳으로 가서 찾아 보자." 두 여인의 말소리는 다시 끊어졌고 멀찌감치 사라지는 기척이 잠 시 들려 왔다. '그들이 여러 곳으로 날 찾아다니고 있는데....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그냥 돌아가다니... 얇은 문짝 하나가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갈라 놓았구나.' 소영은 이제 더 생각할 기력조차 없어 어둠만을 주시하고 있었 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독수약왕이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소영에게 물었다. "그 두 여자가 너를 찾으러 온 것이냐?" 그는 소영의 얼굴을 바라 보더니 철관을 소영의 혈관에 다시 꽂 았다. 이때 문 밖에서 다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두 사람 이상 되 는 듯했다. '누구일까? 백화산장까지 갔다가 되돌아 온 사람들일까?' 소영은 정신이 번쩍 들어 신경을 모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말 한 마디도 없이 문 앞을 스쳐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약왕은 잠시 망설이더니 철관의 한쪽을 소녀의 팔뚝에 꽂았 다. 그는 매우 다급해져 몸을 날려 뒷창문을 넘어 갔다. 소영은 피가 혈관을 통해 빨려 나가는 것을 의식하며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들었다. '이제 그만이다. 부모님과 나는 영영 사별이구나. 오 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악소채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때였다. 소녀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켰 다. 인기척을 느낀 소영은 몸을 돌려 소녀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댁은 누구예요? 저의 아버지는 어디 가셨나요?" 소녀의 맑은 음성이 소영의 고막을 헤치고 들어 왔다. 소영은 무 엇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어 입술만 달싹달싹 움직일 뿐이었다. 소영의 왼팔에서 철관이 뽑히며 소녀의 탓하는 음성이 들렸다. "아버지가 또 사람을... 나를 완전히 살려 낼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 아버지는 왜 쓸데없는 짓을 하실까?" 소녀의 얼굴이 소영의 얼굴 앞으로 다가 왔다. 참으로 눈처럼 희 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정말 미안해요. 제 아버지는 의술이 높다고 자부하면서도 소녀 를 고치지 못했어요. 오직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젊은이의 피 와 소녀의 피를 바꾸는 방법밖에 없다며 피를 찾아 돌아다니셨지 요. 저는 이따금 혼수상태에 빠져서는 며칠씩 깨어나지를 못하기 때문에 제 힘으로 막을 수 없을 때도 있답니다." 소녀는 말을 멈추고 소영의 얼굴을 바라 보더니 물었다. "왜 아무 말씀도 안하세요? 알았어요. 저의 아버지가 당신의 혈 도를 찍었겠군요." 소영은 말을 못하니 눈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소녀에겐 댁의 혈도를 풀어드릴 능력 이 없어요. 저는 아버지에게 댁의 혈도를 풀어드리도록 전하겠어 요. 우선 당신의 상처를 치료해 드릴게요." 소영은 왼팔에 붕대가 감기는 것을 느꼈다. '이 소녀는 정말 힘이 약하군. 밥그릇 하나도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없겠다. 그런데 그처럼 악독한 아버지 밑에 이토록 따스하고 아 름다운 딸이 있다니... 이 소녀의 병은 꼭 이런 방법으로밖에 고칠 수 없을까?' 소영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나는 선천적으로 삼음절맥(三陰絶脈)의 절증(絶症)에 걸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증이 고쳐졌고 높은 무공도 배웠다. 이 소녀가 아직까지 죽지 않을 것을 보면.... 반드시 세상에는 소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있을 것이다.'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독수약왕이 바람처럼 창문을 넘어 들어 왔다. 그는 소녀와 소영을 보고 깜짝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얘야! 너 언제 깨어났니?" "깨어난 지 오래되었어요. 제가 저분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드렸 는데... 아버지, 어서 저분의 혈도를 풀어 주세요." "안 돼!" "아버지.... 어버지가 정말 저의 청을 거절하시면 전...." 소녀는 금방 혀라도 깨물고 죽어버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독수약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탄식했다. "사람의 뜻으로 하늘의 뜻을 어길 수 없다더니... 너는 일생 동 안을 절증과 싸우며 고통을 받아야 할 운명인 모양이구나." 독수약왕은 가볍게 손을 놀려 소영의 아혈을 풀어 주었다. 소영은 아혈이 풀리자 즉시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따님이 병세를 수 년 동안 끌어 오면서도 죽지 않는 것을 보니 반드시 고칠 의약이 있을 것이오." 독수약왕은 이제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선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 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서글픔이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내 의술이 높기 때문에 저 애의 생명을 이제까지 유지시킨 것이 오. 아무런 약도 없소." "그렇지 않소.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영약도 많소. 당신 이 약왕이라는 칭호는 듣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약을 알지는 못할 거요." "노부가 못 고치는 병은 천하의 어떤 명의도 못 고칠 것이오." "아버지, 이분은 아직 몇 곳의 혈도가 풀리지 않았는데 왜 풀어 준 후 얘기하시지 않아요?" "얘야, 너는 이 젊은이의 무공이 얼마나 높다는 것을...." 독수약왕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재빨리 손을 놀려 소영의 혈도 를 풀어 주었다. "그분의 무공이 어때요?" 소녀가 묻는 순간에 소영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독수약 왕이 급히 물러서면서 소영에게 말했다. "내 딸은 허약하고 또한 선량하니 당신과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 소. 우리 나가서 대결하지. 내 딸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 소영은 전신에 진기를 돌려 보았다.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을 발 견한 그는 희미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급히 서둘 것은 없다. 내가 당신하고 싸울 것인지 아직 결정하 지 않았으니까." 소녀가 고개를 돌려 소영에게 말했다. "두 분이 싸우면 안 돼요. 반드시 한 분은 크게 다칠 거예요. 저 의 아버지가 당신을 해치려고는 했지만 모두가 저 때문이에요. 제 가 건강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고... 당신이 아버지에게 분풀 이를 하고 싶거든 우선 저에게 보복하세요. 더욱이 저의 아버지는 매우 고강해서 당신이 상대할 수 없어요." 소영은 천돌혈에 꽂혀 있던 은침을 뽑아 내며 독수약왕에게 말했 다. "당신같이 잔인하고 흉악한 사람에게 이런 선량한 딸이 있다니 놀랍소. 부녀간에 일선일악(一善一惡)을 나누었으니 두 사람이 하 늘과 땅 사이로군." "네가 감히 이 노부를 훈계할 생각이냐?" 독수약왕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소영을 향해 손가락을 뻗쳐 혈 도를 찍으려고 했다. 소영이 가볍게 옆으로 두 걸음 비켜 서자 독수약왕은 깜짝 놀라 며 소리쳤다. "나가자! 우리 밖에서 나가서 대결하자! 내 딸을 상하게 하지 마 라. 그 애는 일생에 나쁜 짓이라고는 한 번도 안했다." 소영은 소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제 보니 독수약왕이 갑자기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군. 내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이 소녀를 처치할 수 있기 때문이구나. 딸 걱정 이 되어 기가 죽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소영은 피식 웃으며 그 자리에 앉았다. 이것을 본 독수약왕은 얼 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만일 이 소녀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눈 한 번 깜빡이는 일보다 쉬울 것이다." 소영이 조롱하듯 말하자 독수약왕은 당황하며 애원했다. "그 애의 몸은 무척 허약하다. 네가 슬쩍 밀기만 해도 생명이 끊 어질 것이다. 제발 그런 짓은 말아라." "하하, 당신이 딸을 사랑하는 마음의 절반만 가지고 세상 사람들 에게 의술을 베푼다면... 당신은 신수약왕(神手藥王)이라는 칭호를 듣고도 남았을 텐데....." "내 딸에게 손을 대지 마라. 우리 타협하자." 소영은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잠이 들어 있는 듯 했다. '이럴 수가 있나? 방금까지도 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순식 간에 깊은 잠에 빠지다니 정말 약한 소녀로구나.' 이때 독수약왕이 급히 등불을 켜들고 소영의 앞으로 다가 왔다. "네가 만일 내 딸에게 손을 대어 죽인다면..... 나는 반드시 만 명의 소녀를 죽여 불쌍한 내 딸의 생명을 보상하겠다." "당신의 딸을 죽인 사람은 나인데 어째서 애매한 소녀들을 죽이 겠다는 거지?" "내가 만 명의 소녀들을 죽이겠다는 것은, 그녀들이 내 딸의 동 반자가 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야 내 딸이 혼자서 심심하지 않지. 그런 후에.... " "그런 후에?" "다시 너를 죽여 복수한 다음 천하의 무림인물들을 모두 독살시 키고 말겠다." 소영은 독수약왕의 끔찍한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독수약왕은 자기 딸을 살펴 보더니 아무 이상이 없음을 발견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독수약왕은 격동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더니 말을 이었다. "불쌍하게도 내 딸은 네 생명을 구해 준 대신 자기 자신은 다시 또 벼랑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소영이 몸을 일으키며 독수약왕에게 말했다. "우리 밖의 풀밭으로 나갑시다." "왜?" 독수약왕이 의아해서 묻자 소영은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좀 교훈시켜야겠다." "뭐라고?" 독수약왕은 고함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너의 무공이 대단한 것은 나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내 상대가 못 된다." 소영은 소녀와 훨씬 떨어진 곳에 있는 문 가까이에 서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딸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당신은 감히 나에게 덤 비지 못하지. 허지만 나는 연약한 소녀를 방패로 삼고 살지는 않 소. 자, 지금 내가 멀찍이 떨어졌으니 당신 딸을 다칠 염려는 없 어." "어린 네가 그토록 호기로운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제 노부도 너 하고 어린애같은 싸움은 하기 싫다.....이제 가도 좋다." 소영은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이 나의 혈도를 찍고 내 몸의 피를 뽑았으니 이대로 끝날 수는 없지." "흥, 너는 정말 노부와 한번 맞서 보겠다는 것이냐?" 소영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 그의 시선이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소녀의 백합처럼 흰 얼굴 에 머물렀다. '가련한 소녀... 너무도 착하고 가련한 소녀로다.' 소영은 독수약왕에게 정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은 내 몸의 피를 빼내어 죽이려고 했으니 마땅히 응분의 댓 가를 받아야 하오. 허나 당신의 딸은 내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니. ... 은혜와 원한이 서로 비긴 것으로 하고 그만 두겠소." 소영은 몸을 돌려 문 앞으로 걸어갔다. 독수약왕은 그를 잡지 않 았다. 소영은 관이 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두 개의 관이 뚜껑이 열린 채로 놓여 있었다. 관 속을 살폈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중주이고는 이 관 속에다 편지를 남겨 두었을 텐데 지금은 뚜껑 이 열려 있고 편지는 사라졌으니... 남겨 두었던 편지는 누군가 꺼 내간 모양이구나.' 소영은 누가 편지를 꺼내 갔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 금화부인과 옥란이가 왔었으니 그녀들이 꺼내 갔을 것 이다. 중주이고가 나를 찾으러 백화산장으로 갔을 텐데... 그 철통 같은 경계망을 뚫고 들어갈 수가 있을까? 설혹 들어 갈 수가 있다 고 하더라고 그들의 무공으로는 다시 빠져 나올 수가 없을 텐데.' 소영은 초조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지금쯤 상팔과 두구가 심 목풍의 손아귀에 잡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급히 몸을 날렸다. 백화산장을 향해 달리던 소영은 문뜩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뇌 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도 소용없다. 나는 백화산장의 셋째 장주라는 신분이다. 중주 이고가 위기에 처해 있다 해도 나는 그들을 구할 수 없다.' 소영은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꺼림직했다. 백화산장의 어귀에 다다른 소영은 걸음을 멈추며 한숨을 내쉬었 다. 선뜻 들어 설 수가 없었다. 이 때였다. 주조룡이 앞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큰소리로 물 었다. "삼제! 어디를 갔었소." 소영은 당황하는 기색을 얼른 감추며 대답했다. "말도 마시오. 전신의 피를 모두 빨려 말라 죽을 뻔 했소이다." 늘 차가운 표정의 소유자인 주조룡의 얼굴에도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급한 어조로 물었다. "삼제, 무슨 말이오. 죽을 뻔하다니 어느 놈이 감히 삼제에게 손 을 대어 죽이려고 했단 말이오?" '일의 경과를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거짓말을 꾸며야 할 텐 데...' 소영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심목풍은 알고 보니 흉악하기 그지없는 위인이다. 더욱이 몇 마 디의 유혹과 위협으로 옥선자의 그림을 나에게서 빼앗았다. 나는 아무래도 발을 잘못 디딘 것이다. 겉으로는 형제처럼 대해 주지만 언제 나에게도 손을 쓸지 모른다.' 소영의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중주이고가 아까 사당 밖에서 심목풍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나를 염려하는 그들의 마음은 거짓이 없을 것이다. 심목풍은 과거에도 무림에서 널리 알려진 악당이었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모든 무림 영웅들이 그를 원수처럼 미워하게 되었던 것이지. 나는 어쩌다 이 런 악의 무리들이 득실거리는 함정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을까?' 실로 심목풍은 매우 간악하고 무서운 인물들이었다. 그는 많은 무림 사람들을 죽여 원한 관계를 맺어 놓고, 더 발붙일 수가 없게 되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었다. 지금 그는 다시 강호에 나설 야욕 을 품고 여러 가지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그의 부하들은 무림의 각 문파마다 잠복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또한 심목풍은 많은 악당들과 손을 잡았으며 무림 을 진동시킬 커다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가까 운 것에서부터 착수하기 시작했는데 소영은 멋도 모르고 거기에 끌 려 들었던 것이다. 소영이 거짓말을 꾸미려고 머리를 짜고 있는데 주조룡이 약간 짜 증섞인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삼제, 왜 대답은 않고 답답한 표정으로 있소? 삼제가 누구를 만 났으며 왜 피를 뽑을 뻔 했는지 나에게 얘기해 줄 수 없소?" 소영은 한참 궁리에 몰두해 있다가 주조룡이 되묻는 바람에 얼떨 결에 사실대로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무슨 독수약왕이라고 합디다. 소제가 잠깐 실수를 해 서 그에게 혈도를 찍히고 말았소. 그는 나의 몸에서 피를 빼어 자 기 딸의 난치병을 고치겠다고 합디다." 소영은 사실대로 말해 놓고 아차했지만 이미 뱉어진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소영의 말을 들은 주조룡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독수약왕이라고? 그는 놀라운 무공과 의술을 지녔다고 큰형님에 게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큰 형님과 매우 교분이 두터운 사이 라오. 그래 그 사람은 동생을 어떻게 풀어 주었소? 동생의 신분을 밝히니 바로 풀어 줍디까?" "아니오. 그의 딸이 소제를 구해 주었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소영의 머리에 백합처럼 흰 얼굴에 소녀가 떠올랐다. 그는 주조 룡에게 그 소녀가 있는 곳을 알려 줄 마음은 없었으나, '이미 나는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더 숨겨도 소용 없는 것이 다.' "북쪽으로 가면 사당이 하나 있소. 아직 그곳에 그들 부녀가 있 을지는 모르지만...." 소영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랬었군, 큰형님께서는 삼제의 안부가 걱정되어 이미 열 두패 의 사람을 풀어 놓았소. 사방으로 삼제의 행방을 찾으라고 명령해 서 풀어 놓았는데... 지금 큰 형님이 망화루에서 삼제를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갑시다." "가서 대장주님께 사과드리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큰 형님은 늘 엄숙한 표정이며 우리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누구 든지 그분을 존경하고 있소. 그러나 큰형님은 삼제만은 몹시 아끼 고 계시지. 큰형님은 삼제를 몹시 아끼고 계시오. 삼제는 참으로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을 조심해야겠소." 주조룡도 소영에게만 항상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표정은 매우 차갑고 엄숙했다. 소영은 주조룡이 아니꼬왔으나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큰 형님을 만나서 소제가 사과도 하고 벌도 받겠소." "강호의 일은 매우 위험이 많고, 지금은 무림의 질서가 문란해 져서 더욱 위험하오. 삼제는 강호에 나온 지 얼마 안 되고 경험도 얕아 악독한 무리들의 손아귀에 잡힐 염려가 많소. 그러니 앞으로 는 절대로 혼자 나돌아다니지 마시오." 소영은 다시 분노가 치밀었으나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둘째 형의 말씀이 옳소. 하나 소제는 부모님을 보려고 은사님을 떠나 산을 내려 왔소. 뜻밖에도 도중에서 주형을 만나 큰형님에게 소개되었고 의형제를 맺어 두 분 형님께서 수제를 아끼고 호의호식 을 시켜 주어도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심정은 어쩔 수 없소. 소제는 내일 두 분을 작별하고 부모님을 뵈러 고향으로 갈 생각이오." 이 말에 주조룡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큰 형님께서 삼제에게 거는 기대가 큰데 삼제가 백화산장을 떠 나다니 허락지 않을 거요." "사람의 본분은 무엇이오? 첫째,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 되잖겠 소? 두 분 형께서 정녕 소제를 동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동생이 지닌 효심을 외면할 수가 없을 것이오." 주조룡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곤란하니 큰 형님 앞에서 삼계가 직접 말씀 드리시오." 잠시 후, 두 사람은 망화루에 다다랐다. 등불이 대낮처럼 주위를 밝히고 있는 망하루에 심목풍이 혼자 창 가에 앉아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중주이고가 이미 이곳에 들어왔다면 이렇게 조용할리 가 없을 텐데... 심목풍도 저토록 태연한 안색이고...' 소영은 주조룡의 뒤를 따라 십삼 층의 망화루로 올라 갔다. 두 사람이 들어 서자 심목풍은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자리에서 일어 섰다. "둘째, 셋째 어서 앉으시오." 주조룡과 소영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심목풍은 두 사람의 인사 를 받더니 소매 속에서 한 폭의 그림을 꺼냈다. 그는 그 그림을 소 영에게 내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 옥선자의 그림은 내가 이미 감상했소. 살아 있는 사람을 그 대로 화폭에 옮긴 듯한 그림이오. 그러나 전설처럼 사람이 움직이 진 않더군. 삼제가 잘 간직하시오.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되오. 만 일 이것을 파손시키거나 잃어버리면 금화부인에게 변명할 길이 없 지 않소?" 소영은 그림을 받으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항상 차갑고 엄숙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무섭게 대하던 심목풍이 오늘따라 온화해진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큰형님, 이 그림은 잘 간수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벌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벌을 받다니?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러나?" 소영은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는 심목풍의 태도에 점점 의아스러 움이 커졌다. 그리고는 주조룡을 힐끗 바라 보다가 심목풍에게 시 선을 돌리며 말했다. "제가 혼자서 백화산장의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하, 아우는 삼장주의 신분인데 행동의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 지. 더군다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 동의도 했지 않았던가? 아마 삼제는 나를 너무 완고한 사람으로 보았던 모양이지?" "큰형님께서 사람들을 풀어 제 행방을 찾으셨다는데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심목풍은 소영의 말을 막으며 역시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아우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나는 이제 안심했소. 그런 사소한 일 을 캐낼 필요가 없소."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들 가서 쉬도록 하오." 소영은 급히 입을 열었다. "제게 어려운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청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해 보게." 심목풍이 다시 의자에 앉으며 묻자 소영이 입을 열었다. "제가 무공을 배우기 위해 집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부모님을 만나 뵙고 싶은 심정이 태산보다 높은데... 집에 좀 한 번 다녀오고 싶습니다." 심목풍은 쾌히 승낙했다. "물론 그래야지. 자식의 도리로서 부모님을 만나 뵙지 않을 수야 있겠나? 그것이 뭐 그리 어려운 부탁이라고 망설인단 말인가?" 심목풍이 선뜻 승낙하자 소영이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소영은 용기가 생겨 주저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제가 부모님을 뵙고 싶은 생각은 오래되었으나 오늘 갑자기 심 해졌습니다. 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 가고 싶은데... 내일 떠나도 되겠습니까?" "허허, 타관생활 몇 년에 젖생각이 나는 모양이군? 다녀 오게. 내일 점심때 내가 송별잔치를 베풀어 주겠네." 소영이 감격해 하자 심목풍은 기분이 흡족한 듯 껄껄 웃었다. "원칙적으로 따지지면 내가 도리어 미안할 뿐이야. 삼제와 같이 부모님을 뵈어야 하는데... 그러나, 지금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내 가 며칠씩 이곳을 비우고 떠날 수는 없고... 내일 충분한 예물이나 준비해 줄 테니 아우는 안심하고 내려가 쉬게." 심목풍이 친형처럼 부드럽게 대하니 소영은 마음에 깊은 감격을 느꼈다. '이처럼 경우를 알고 우애가 두터운 분을 어찌 흉악하다고 할 수 있겠나?' 주조룡이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그는 급히 심목풍에게 인사 를 하고 망화루에서 내려 왔다. 주조룡이 소영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큰 형님께서는 삼제에게는 정말 커다란 은혜와 아량을 베풀고 계시군. 삼제는 부모님을 만난 후 속히 돌아오는 것이 좋겠소. 큰 형님에게 너무 걱정을 끼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니까." "돌아오는 것은 소제가 부모님을 뵈온 뒤에 결정할 것이오." 소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주조룡에게 은근히 물었다. "오늘밤 우리 백화산장을 염탐하러 온 사람은 없었소?" "없었소. 그런데 삼제가 갑자기 왜 그것을 묻소?" "금화부인이 종남이협에게 도전한 것은 무당패 때문에 일어난 일 이 아니오? 무당파에서 우리의 행동을 살피러 이곳에 염탐군을 보 낼 것 같기에 한 소리지, 별다른 뜻은 없소." "그런 추측은 현명하군. 그러나 그 따위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 구 염탐군을 들여 보낼 수 있겠소?" 두 사람은 서로 막사가 갈라지는 곳에서 인사를 나누고 소영은 곧장 난화정사로 돌아 왔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니 금란과 옥란이 대청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소영을 발견한 그녀들은 뛸 듯이 반 가운 표정을 지으며 댓돌 아래로 내려 섰다. "드디어 돌아오셨군, 저희들이 얼마나 찾았는지...." 옥란이 응석부리듯 말했으나 소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은 중주이고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대청으로 올라 선 소영은 두 소녀를 보고 물었다. "오늘 밤 누가 우리 백화산장으로 염탐하러 오지 않았느냐?" 26. 미인도와 절세무공 소영의 물음에 먼저 대답한 것은 은란이었다. "시녀는 금화부인을 따라 나리를 찾으러 다녔습니다. 돌아온 후 에 염탐군이 들어 왔단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금란이 뒤이어 대답했다. "시녀는 계속 이곳에 있었으나 아무런 경보도 듣지 못했습니다." 두 소녀의 말을 들은 소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백화산장의 경계망은 개미 새끼 한 마리 뚫지 못할 만큼 빈틈이 없어 중주이고가 이곳에 발을 들여만 놓아도 즉시 발 각될 텐데 아무런 경보도 울리 않았다니..... 그 두 사람이 이곳에 온다는 것을 농담삼아 했을 리는 없고... 너무 경계가 심해 위험할 것 같으니까 도중에서 포기하고 돌아선 것일까? 그랬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나으리, 무엇을 좀 잡수시겠습니까?" "그만 두어라. 난휴식을 취해야겠으니 너희들은 가서 자거라." 그녀들은 소영의 눈치를 보며 무엇인가 매우 망설이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갔다. 그녀들이 나가자 소영은 즉시 무릎을 꿇고 앉아 운기를 조식하기 시작했다. '내 몸의 피가 많이 뽑혔으니 공력에 어떤 영향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운기조식을 해 보니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독수약왕은 계속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소영의 피를 많이 뽑 지 못했다. 그러나 소영은 무척 많은 피를 뽑힌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영이 운기를 한참 조식하니 이미 그의 전신에 새로운 진기가 가득 찼다. 그는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 듯한 무아지경에 빠져 들 었다. 소영은 침상에서 급히 내려 와 방문을 열었다. 금란과 은란이 등 에 장검을 지고 대청 밖에서 기다리고 었었다. "금화부인이 왔었느냐?" "안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장주님이 오셔서 나으리와 함께 결투 구경을 가겠다고 하셨는데... 시녀가 말렸습니다. 나리께서 곤히 주무시는데 깨우기가 죄스러워 이 장주님이 들어 가지 못하도록 막 았습니다." 은란의 대답에 소영이 급히 물었다. "간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한 시진쯤... 아니, 한 시진도 채 안 되였습니다." "그렇 지금쯤 결투 승부를 가려 낼 수 있겠군." 밖으로 뛰어 나가려던 소영은 은란을 돌아 보며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넌 방금 무어라고 했지...." "시녀가 이장주님이 들어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서글픔이 가득했다. 그녀는 이미 죽어야 될 몸이라 이장주님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은란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이 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소영의 가슴이 뭉클했다. "난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구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은란은 눈물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금화부인과 종남이협의 결투는 벌써 시작되었을 겁니다. 나리께 서는 어서 가보십시오. 시녀는 이미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 다. 어떤 형벌과 고통도 두렵지 않으니 나으리께선 너무 마음쓰시 지 마십시오." 소영은 두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 보았다. 그녀들의 눈은 붉 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두덩은 부어 있었다. '밤새 잠도 안자고 운 모양이구나.' 소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이장주가 강제로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느냐?" "은란이가 장검으로 막으며 못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장주가 분 노를 안고 갔으니... 그분이 대장주에게 말하며 은란은 아마..." 금란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자 은란이 체념적인 웃음을 띠며 말을 받았다. "나라께선 더 캐묻지 마십시오. 시녀들도 더 이상 말씀드리기 괴 롭습니다. 나으리는 어서 결투 장소에나 가 보십시오. 모두들 모였 을 것입니다." "너희들도 경장을 입고 검을 지녔으니 구경할 수 있다." "시녀들은 비천한 신분인데 어찌 그런 구경을 할 수 있겠사옵니 까?" 소영은 잠시 두 시녀를 바라 보더니 결심한 듯 강한 어조로 말했 다. "너희들도 나하고 같이 구경하자." "시녀들은 사양하겠습니다. 나리께서는 몸조심 하십시오." "짧은 동안이었지만 나으리의 시중을 들며 그것을 지상의 행복으 로 여겼었는데...이제 저희들이 없어지면 나으리의... 시중은..." 은란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두 소녀의 어깨가 가냘프게 들먹이고 있었다. "난 이제야 좀 깨달은 것 같다." 소영의 말을 금란이 받았다. "시녀들은 가기 싫은 것이 아니고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알았다. 은란아! 너는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소영이 은란에게 묻자 그녀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나으리 같은 성인군자는 시녀가 일찌기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 는 이제 죽어도 원통하지 않습니다." "금란아!"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나으리만 무사하시다면 시녀 백 번 을 죽는다 해도...." "알았다. 너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보다 더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이미 죽음을 초월했으니 어서 나를 따라 구 경가자." 금란과 은란이 동시에 대답했다. "시녀들은 죽음이 조금도 무섭지 않으나 저희들 때문에 나으리에 게 화를 입힐 수는 없습니다." "나도 두렵지 않으니 어서 날 따라라." "나으리의 정에 우리 시녀들은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대 장주님의 명령을 절대로 거역하지 마십시오." "이 이상 말하지 마라. 나도 생각이 있으니 어서 일어나라!" 소영은 두 시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은란, 나으리께서 이처럼 우리들을 데려 가시겠다고 하니 따라 가자. 어차피 죽음을 면할 길 없으니 또 무엇을 두려워하고 망설이 겠니?" "좋아요. 우리가 죽기 전에 나으리의 뜻을 거절할 수는 없어요." 두 소녀가 따라 나설 뜻을 보이자 소영이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 다. "어서 눈물을 거두어라. 남들이 보면 내가 너희들에게 손을 댔다 고 오해할 것이 아니냐? 두 소녀는 서로 마주보며 울다웃다 했다. 소영과 두 소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백화산장을 나섰다. 산장 에서 삼 리쯤 떨어진 곳의 넓은 풀밭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세 사람이 그곳으로 가서 보니 이미 치열한 싸움이 벌이지고 있 었다. 한 그루 버드나무 밑에는 종남이협의 둘째인 등일뢰(登-雷) 가 누워 있었다. 그 곁에는 운양자와 전엽청이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전협 청의 눈두덩은 무엇에 얻어터진 듯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등일뢰는 이미 움직일 수 없을만큼 중상을 입은 모양이구나. 전 엽청도 일전을 치른 모양이지?' 소영은 가까운 곳에 있는 주조룡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뒷짐 진 채 우문한도와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뒤에는 네 명의 소년이 서 있었다. 소영의 뒤에 서 있 던 은란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으리, 저 네명의 소년을 보십시오. 두 소년은 흰 옷을 입었고 두 소년은 빨간 옷을 입었지 않았습니까?" "그렇군. 무엇하는 사람들이냐?" "바로 대장주의 팔대혈영화신(八大血影化身) 중의 네 명이에요. 이 싸움은 무당파가 질 것이 뻔해요. 금화부인을 이겨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전멸을 면치 못할 거예요. 저 네 명의 소년들이....." 은란은 뒤를 돌아 보는 주조룡을 발견하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주조룡은 금란과 은란이 소영과 함께 나온 것을 보고 놀란 표정 을 지었다. 그는 두 소녀를 뚫어지게 노려 보던 소영게게 손짓을 했다. "삼제, 이리 오시오." 소영은 주조룡의 곁으로 다가서서 목례를 하고는 싸움판으로 시 선을 던졌다. 치열한 결투장면에 정신을 뺏긴 그는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갈천의는 철골로 된 부채를 들고 금화부인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 이고 있었다. 그의 철부채가 펼쳐졌다 접혔다 하며 여러 가지 변화 무쌍한 초식을 펼쳐 냈다. 그럴 적마다 금화부인의 앞에 붉은 빛 검은 빛인 수만 개의 부채 그림자가 뿌려졌다. 갈천의의 부채에는 한쪽엔 붉은색이, 한쪽엔 흑색이 칠해져 있었다. 금화부인은 왼손에 커다란 독지네를, 온른손엔 가늘고 긴 독사를 쥐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독지네와 독사는 대가리 를 흔들며 갈천의를 물려고 덤벼들었다. 특히 독사는 혀를 낼름거리며 몸을 사렸다가 앞으로 확 덤비는 동작이 지극히 민첩했다. "독지네와 독사로 무기를 대신하다니... 정말 기상천외의 전술이 군." "삼제는 한 발 늦게 왔기에 흥미있는 싸움을 보지 못했소." "흥미있는 싸움이라니.... 등일뢰가 금화부인의 독사에게 물리기 라도 했단 말이오?" 소영의 물음에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아니오. 등일뢰는 자기의 권법(拳法)이 천하무적이라고 자부하 여 병기를 버리고 맨손으로 덤볐었소." "그럼 금화부인도 맨손으로 등일뢰를 격퇴시켰단 말이오?" "그렇소. 등일뢰가 자신만만하게 덤볐으나 금화부인의 장력에 의 해 쓰러졌소. 종남이협의 위명도 이번 일전으로 끝장일 것 같소." 소영은 금화부인의 초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 여인은 백 가지의 독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무공도 실로 놀 랍구나. 저 여자가 심목풍과 손을 잡고 날뛰면 정말 무림을 휩쓸만 하겠다.' 소영은 금화부인의 무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때 우문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삼장주의 무공이 고강하고 안목이 예리하니 저들의 숭부를 예측 할 수 있을 것이오. 이번 결투가 누구의 승리로 끝날 것 같은지 짐 작할 수 있겠소?" 소영이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 보았으나 쌍방이 모두 빈틈 없는 공격과 수비를 취하고 있어 누가 이길는지 예측키 어려웠다. "지금 같아선 두 사람이 백중지세를 유지하고 있군요. 금방 승부 를 가리진 못할 것이고 적어도 백 초가 넘어야 승부를 가릴 수 있 을 것 같은데." "우문형께서는 어떻게 보시오?"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이 결투는 반드시 금화부인이 승리할 것이오. 백 초까지 끌고 갈 싸움이 못 되지요." "어떻게 확인하시오?" 우문한도는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흘리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갈천의는 지금 복수할 생각으로 싸움에 나서자마자 전력을 다하 고 있소. 그는 신미한 공력을 발출(發出)하고는 있지만 마음이 너 무 조급해서 침착성을 잃고 있소. 이것은 무공의 대기(大忌)인데,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녔다 하더라도 침착하지 못하면 패하게 되 오. 그런데 갈천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격노해 있소." "상대는 교묘한 전술의 대가인 금화부인이오. 갈천의가 고전하다 가 패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지요." 소영은 우문한도의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갈천의가 이겼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우문형의 말은 이치에 맞소. 허지만 갈천의는 수세에서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소." 우문한도는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금화부인의 무공은 그 초식마다 신묘하며, 손에 쥔 독지네와 독 사 또한 매우 민첩하고 영리하오. 이 두마리의 독충은 금화부인의 부족한 무공을 메꾸어 주고도 남을 만하오. 갈천의가 공세를 버리 기 전에는 어렵소. 그가 수비에만 치중한다면 버틸 수 있겠지만.." 무공이 높은 일류 고수들이 싸움을 할때 심신이 흩어지면 그것은 이미 패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갈천의는 초식을 바꾸어 수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것은 갈천의의 커다란 실수였다. 갈천의가 초식을 공격에서 수비로 바꾸어 두 손 이 가볍게 좌우로 흔들리는 순간 독지네와 독사가 갈천의를 향해 좌우에서 덤벼들었다. "아차!" 갈천의는 급히 두 걸음 물러서며 협공을 피해 냈다. 그러나 금화 부인의 두 번째 공격이 숨쉴 사이도 없이 퍼부어졌다. 금화부인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갈천의의 앞가슴을 향해 뻗어 왔 고 그와 동시에 일 척 가량 길게 늘어난 독사가 갈천의의 얼굴을 물려고 덤벼들었다. 갈천의는 손에 들고 있던 철부채로 독지네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독사의 공격을 막아 낼 수가 없었다. 꼼짝 못하고 독사에게 물리게 되려는 찰나에 번개처럼 몸을 뒤로 젖혔다. 그와 동시에 발로 땅을 차니 그의 몸이 한 바퀴 팽그르르 돌며 오 척이나 뒤로 날아 갔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간신히 모면한 것이다. 소영은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세 사람의 기인에게서 여러 가지 무공을 배웠으며 각 문파의 무공의 장단점을 자세히 들어 알고 있었다. '공격을 취하던 갈천의가 우문한도가 일부러 크게 한 말을 듣고 공격 초식에서 수비를 취했구나.' 소영은 우문한도의 간교에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짐짓 태 연한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장담할 수 없소. 만일 갈천의가 수세에 치우치지 않고 강 력한 공격을 취한다면 결국 두 사람 모두 부상을 입게 될지언정 한 쪽만이 패하지는 않을 것이오." 갈천의는 소영이 큰 소리로 하는 말을 듣고 한 줄기 섬광처럼 뇌 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내가 우문한도의 말에 넘어 갔구나.' 그는 급히 몸을 날려 마주쳐 오는 금화부인에게 덤벼들었다. 철 부채가 펼쳐지며 밑에서 위로 치솟았다. 분수박룡(分水博龍)의 초식을 발출했다. 금화부인은 갈천의가 뒤 로 넘어지며 후퇴하는 순간 일격으로 요절을 내 버리려고 덤벼들고 있었다. '이놈이 이렇게 갑작스런 반격을 가할 줄은 미처 몰랐다.' 금화부인은 급히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 다. 두 사람의 몸이 바싹 붙었다가 동시에 뒤로 오 척씩 떨어져 나 갔다. 눈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물러선 금화부인의 왼쪽 어깨에서 피 가 흐르고 있었다. 또한 갈천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으며 그의 오른손 무명 지는 퉁퉁 부어 오르고 있었다. 이 일전에서 두 사람은 모두 부상을 입고 말았다. 어깨에 상처를 입은 금화부인은 저려오는 통중을 억지로 참으며 갈천의를 향해 싸 늘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미 나의 적련사(赤練蛇)에 손가락을 물렸어요. 당신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극독을 막아 낼 수는 없어요. 당신은 두 사진 안에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서 뒹굴게 될 것이오." 갈천의는 손가락을 힐끗 바라 보며 역시 차가운 음성을 금화부인 에게 던졌다. "흥, 나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당신 걱정이나 하시지?" "뭐라고요?" "나의 풍화선(鳳火扇)에는 열 두 개의 독침이 들어 있소. 나는 독침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당신처럼 악독한 인간에게는 사 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소." "뭐라고요?" 악독한 인간이란 말에 금화부인은 얼굴이 빨개지며 한 걸음 앞으 로 다가섰다. 갈천의는 손을 흔들어 그녀의 행동을 제지시키며 말을 이었다. "내가 부채로 당신 어깨를 갈겼을 때 이미 열 두 개의 독침이 당 신에게로 날아가 박혔소. 당신은 어깨에 독침을 맞았으니 열두 시 진 안에 죽게 될 것이오." 금화부인도 말도 못하고 분노에 몸을 떨고만 있었다. 우문한도가 소영을 돌아 보며 원망하듯 말했다. "만일 삼장주의 한 마디만 없었더라면 갈천의는 금화부인의 독사 에 물려 죽었을 테고 이처럼 양쪽이 모두 부상당한 참극도 빚어지 지지 않았을 것 아니오?" 소영은 우문한도의 힐책을 듣자 불끈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만일 우문형이 갈천의를 속여 나를 격분시키지 않았더라면 갈천 의와 금화부인은 아직까지도 백중지세의 용호상박전을 벌여 승부를 가릴 수 없었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노해 부르짖었다. "삼장주는 의식적으로 갈천의를 도와 주었소?" "피차 일반 아니오." 이 때였다. 고함소리와 함께 전엽청이 장검을 들고 바람처럼 달 려 나오며 소리쳤다. "우문한도! 이번 참극은 모두 네 탓이다. 어찌 내가 가만히 울분 을 누르고 있겠나?" "뭐라고...?" 우문한도가 전엽청을 노려 보며 날카롭게 반문하자 전엽청은 그 와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서며 말을 이었다. "비겁한 자를 놔두는 것은 역시 비겁한 일이다. 너는 선기서려의 주인으로 문무겸비한 무림의 고수라고 들었는데 하는 짓은 지극히 옹졸하구나. 오늘 내가 혼좀 내 주겠다." 우문한도는 전엽청의 욕설을 듣고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는 강호에 이름이 높은 신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전대협은 무당파의 걸출한 인재로서 말씨가 매우 거칠구려. 하 지만 내가 전대협의 지도를 어찌 거절할 수 있겠소? 영광으로 생각 하겠소." 우문한도는 금상자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것을 본 소 영 크게 외치며 두 사람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소영이 뛰어들자 우문한도는 생각했다. '이놈이 나 대신 전엽청과 함께 결투하려는 모양이구나. 좋다. 이놈의 무공이 놀라와 눈의 가시인데... 아예 오늘 전엽청과 함께 결투하다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삼장주께서 만일 무당파의 검술을 시험해 보겠다면 제가 양보할 수밖에 없소이다." 소영은 전엽청에게 말했다. "당신이 누구하고든 꼭 싸워야 되겠다면.... 잠시 기다린 후에 하셔도 늦지 않을 텐데요?" 전엽청은 소영이 자기에게 도전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검을 움켜 쥐고 눈을 빛내며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 상황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겠으니 나 전엽청이 어찌 싸 움을 마다 하겠소? 그러나 먼저 당신의 고견을 들어 보겠소." "그럼 잠깐 기다리시오." 소영은 눈길을 돌려 갈천의와 금화부인을 바라 보면서 입을 열었 다. "무학은 옛날부터 계승해 오며 여러 가지 형태로 분리되었소. 각 문파마다 독특한 절기를 지니고 있으니 누구든 세상에 자기의 적수 가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직접 목 격해서 알잖소?" 운양자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뛰어 나왔다. 그는 소영을 바라 보며 말했다. "삼장주의 의견이 옳소이다." 소영은 금화부인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 헌데 동생은 갈천의의 생명을 정말 구해 줄 생각인 가!" 소영은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물론이오. 동시에 부인의 생명도 구해 주겠소. 만일 나를 믿으 신다면 그 적련사독의 해독제를 나에게 주시오." 금화부인은 갈천의와 소영을 번갈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이 꼬마가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이럴까? 필경 내가 지니고 있 는 해독제와 갈천의가 가지고 있는 해독제를 바꾸려는 것이겠지?' 금화부인은 어깨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억지로 참고 있었기 때문 에 소영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소영에게 약을 주었다. "좋소. 동생을 믿어 보겠소." 금화부인은 품속에서 검은 환약 하나를 소영에게 건네주었다. 소영은 약을 받아 들더니 이번에는 갈천의를 바라 보며 물었다. "갈대협도 그 풍화선의 독침을 제거할 방법이 있겠지요?" "물론이오. 허나 종남의 두 형제는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했 소." "그래서요?" "동생이 이미 중상을 입어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데 나 갈 천의가 명색이 형인데 어찌 혼자 삶을 도모하겠소." 소영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갈대협의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소. 그렇다면....갈대협은 금화 부과 같이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오?" "금파부인과 같이 죽을지언정 아우가 저 지경인데 나 혼자서 구 차하게 연명하고 싶지는 않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돌려 나무 그늘에 누워 있는 등일 뢰를 바라 보았다.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는 듯했으나 약물에 중독된 것은 아닌 듯 했다. '약물 중독이 아니라면 금방 숨이 넘어 갈 사람이라도 구할 수는 있다. 단순한 장력에 의해 내상을 입었을 테니 나에게도 방법이 있 지.' 소영은 갈천의를 바라 보며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갈대협, 염려 마시오. 저 분이 중독을 입지 않고 장력에 의해 중상을 당한 것이라면 내게 치료할 방법이 있으니 믿으시오. 갈대 협께서 입은 독은 빠르게 발작하니 먼저 그 약을 드십시오." 소영이 갈천의에게 약을 던져 주는 것을 본 우문한도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주조룡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주형, 삼장주께서 적을 도와 주고 있소이다. 세상에 먼저 적부 터 치료를 하라고 약을 주고 자기 편을 나중에 돌보는 사람이 어디 있소?" 주조룡은 날카로운 눈으로 소영을 쏘아 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형, 만일 갈천의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금화부인만 죽는 결과가 되지 않소? 갈천의를 믿을 수 있소?" "조형은 왜 간섭하지 않으시오?" 우문한도는 여전히 대답 없는 주조룡의 태도에 비위가 상했다. 갈천의는 소영에게서 약을 받아 들더니 금화부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나의 그 독침은 혈관을 따라 심장을 침투하기 때문에 시간을 오 래 끌면 위험하오. 즉시 어깨에 있는 사주혈도(四週穴道)를 폐쇄해 야 되오. 그러면 일단 독침이 움직이는 것은 막을 수 있소." 금화부인은 즉시 어깨의 혈도를 막았다. 갈천의는 소영을 돌아 보며 말발굽처럼 생긴 자석을 하나 꺼내 들었다. "우선 금화부인에게 이것을 주어 어깨의 독침을 뽑으라고 하시 오. 그런 뒤에 내가 해독약을 줄 테니 복용하면 될 것이오." "그러지요. 갈대협께서도 어서 그 약을 복용하시오. 그래야만 독 이 전신에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소영은 손을 내밀어 갈천의에게서 자석을 받아 들었다. 갈천의가 약을 먹는 순간 소영은 재빨리 손을 뻗쳐 그의 아혈(啞 穴)을 찍었다. "미안하오. 갈대협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오. 갈대협은 그 자리에 앉아 운기를 조식하시오. 그래야만 전신에 독이 퍼지지 못할 것이 오." 갈천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겉으로 보기에 는 몸이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 같았으나 그는 사지의 혈도를 찍혀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소영은 금화부인의 곁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이 자석으로 빨리 독침을 뽑아 내시오." 금화부인은 성격이 모질고 고집이 센 여자였다. 평소 같으면 그 녀는 누구의 도움도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입장이라 자신의 고집만 내세울 수 없었다. 그녀는 소영에게서 자석을 받아 들더니 왼쪽 어깨의 옷을 찢어 냈다. 그녀가 자석을 어깨에 대니 대여섯 개의 독침이 묻어 나왔 다. 소영이 그 자석을 받아 드는데 우문한도가 성큼성큼 다가서며 물었다. "부인의 몸에 확실이 독침이 있소?" 소영은 자석을 받아 들면서 금화부인의 혈도 두 군데를 찔렀다. 이때 우문한도가 다가서자 전엽청이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 왔다. "우문한도! 네가 만일 이 기회를 틈타 어떤 음흉한 수단을 저지 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거다." 사실 우문한도는 갈천의에게 손을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전엽청 이 미리 눈치 채고 달려들자 흠칫했으나 재빨리 손을 뻗쳐 갈천의 에게 일장을 날렸다.그는 천회래운의 초식을 전개했다. 소영은 연환섬전장법을 사용해 우문한도의 공격을 피했다. 소영의 이 일장에 우문한도는 이미 반격할 능력을 잃었다. 기겁 을 하도록 놀라며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우문한도의 놀라움은 컸다. 그는 강호에서 많은 고수들과 겨뤄 보았지만 이토록 빠른 초식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이놈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이런 장법을 배웠을까? 빠르기 가 번개 같아 숨쉴 톰도 없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으니...' 그는 소영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멍하니 서 버렸다. 이때 주조룡은 소영이 우문한도에게 손을 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놈이 갑자기 미쳤나?' 주조룡은 급히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런데 소영의 공격이 이번 에는 전엽청에게로 돌려지고 있었다. 소영은 우문한도가 갈천의를 공격하려는 것을 물리치며 생각했다. '만일 내가 가만히 있으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소영은 전엽청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우문한도가 갈천의를 해치려는 것을 보고 전엽청이 급히 손을 쓰려는 데 소영이 우문한 도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영이 갑자기 자기 편을 치다니.' 이윽고 소영이 자기에게도 일장을 날리자 그는 급히 몸을 비키며 몸을 휘둘렀다. 그의 장검은 전광석화처럼 소영의 오른손목을 향해 찔러 갔다. 전엽청은 감히 덤벼들 생각을 포기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놀라움은 극도에 달했다. '이처럼 빠른 초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전엽청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놀란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 다. 운양자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전엽청을 어린애 다루듯 몰고 가던 소영이 갑자기 공격을 멈추더 니 뒤로 물러섰다. 그는 물러서면서 전엽청에게 말했다. "우리가 만일 싸움을 계속한다면 갈천의와 금화부인의 생명을 건 지지 못할 우려가 있소. 귀파의 사람들은 나를 믿어 주시오. 나는 아무도 해치고 싶지는 않으니 내가 하는 것을 지켜 보기나 하고 어 서 물러서시오," 전엽청은 소영에게 계속 몰리다가 소영이 공격을 멈추는 것을 보 고 장검을 거두었다. '싸움의 판도를 읽고 있으면서도 내 체면을 세워 주느라고 일부 러 공격을 멈추었구나.' "당신은 약속을 지키실 분 같으니 물러서겠소." 그가 물러서자 소영이 좌우를 둘러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제발 제가 하는 일에 간섭을 말아 주시오! 모두 뒤로 일 장 이상씩 물러섰으면 좋겠소."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돌아보고 수군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넓은 풀밭의 중앙에는 소영과 금화부인, 갈천의만이 남게 되었다. 소영은 갈천의에게 다가서서 그를 일으켜 세우더니 금화부인의 곁에 앉혔다. 그리고는 자신은 두사람의 사이에 끼어 앉았다. 소영은 자석을 땅에다 놓고 두 손을 번개같이 움직여 두 사람의 다리를 찔렀다. 그들의 혈도를 찔러 놓고 나서 그는 입을 열었다. "두 분의 다리와 옆구리의 경문혈(京門穴)은 이미 나에게 찔렸 소. 당신들은 도망갈 수가 없게 되었소. 그러나 두 분의 공경은 잃 지 않았으니 손을 드는 순간 상대방의 혈도를 찍을 수는 있소." 소영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만일 두 분께서 서로 죽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서로 손을 쓰시 오. 손만 쓰면 누구든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을 것이오." 두 사람은 소영의 얼굴만 바라볼 뿐 입을 열지도, 손가락을 움직 이지도 않았다. 잠시 기다리며 그들의 표정을 살피던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손을 쓰지 않는 것을 보니 깊은 원한관계가 있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 "좋습니다. 대답을 안하시는 것은 원한이 깊지 않다는 것으로 간 주하겠소. 그렇다면 서로 죽일 필요도 없소." "강호의 시비는 사소한 감정 때문에 생기는 일도 적지 않소. 한 두 마디의 불쾌한 언사로 인해 죽음에까지 이르니... 서글픈 현상 입니다.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면 깨끗이 해결되고 무림의 평안과 질서가 지켜질 것이오." 두 사람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엄숙한 어조로 갈천의에게 말 했다. "갈대협은 이미 해독약을 잡수셨는데, 만일 상세가 좋아졌으면 고개를 끄덕이시오. 아무런 효과도 없으면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주시오." 갈천의는 소영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소 영이 그에게 다시 말했다. "그 환약이 효과가 있다니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갈대협도 해독 약을 주시오." 갈천의는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땅에 놓으면서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았다. 소영은 약병을 집어 들며 물었다. "한꺼번에 세 알을 복용하라는 뜻이오?" 갈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약병을 열고 세 알의 약을 꺼내 금화부인의 손바닥에 얹 어 주었다. "어서 먹으시오. 부인은 비록 백 가지의 독을 사용할 줄 알지만, 그러나 세상의 모든 독을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오." 금화부인은 고개를 들어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 보더니 약을 입으 로 털어 넣었다. 소영은 약병의 뚜껑을 닫은 후 갈천의에게 돌려 주며 금화부인에 게 말했다. "등대협도 역시 중독시켰소?" 금화부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장력에 의해 내상을 입은 것이겠군요?" 금화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양손을 바람처럼 날려 두 사람의 막혔던 아혈을 풀어 주었다. "이제 두 분의 아혈이 풀렸으니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하시 오." "동생, 주조룡이 뒤에서 동생의 일거일동을 지켜 보았으니 장에 돌아 가면 반드시 심목풍에게 고자질을 할걸세." 소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역시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내가 강호에 처음 나왔고 경험이 없어 한 발자국 잘못 딛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소. 나는 심목풍의 행위를 요즈음에 와 서야 알고 그에게 증오를 느끼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그는 나의 큰형이오. 어쩔 수 없이...." 소영의 표정을 훔쳐 보며 갈천의가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 역시 그들 세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였다. "심목풍은 십여 년 전 무림을 휩쓸며 천인공노할 살육을 일삼았 소. 그는 방방곡곡 피를 뿌리고 무림 영웅들과 원한을 맺었소. 보 다 못한 소림파의 장문인(掌門人)께서 직접 팔십 명의 고승을 데리 고 나한진(羅漢陣)을 펼쳤었소." "그래서요?" "심목풍은 진 속에 갇히는 몸이 되었소. 허나 그놈은 원래 재능 이 뛰어나서 진을 뚫고 탈출했소. 그로 인해 많은 부상을 입긴 했 지만... 그 후 어디 가서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더니 십 년 만에 다 시 강호에 나타나다니... 분명 또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을 텐데. ...아무튼 놈이 다시 강호에 나타난 일은 전혀 뜻밖이오." 소영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윽고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는 한 알의 영단을 꺼내 들었다. "이 영단은 나의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오. 효능이 신비해서 죽음 직전에 놓인 사람도 활로를 찾아 주는 약이오. 등대협에게 먹이면 곧 회복될 것이니 받으시오." 소영은 영단을 갈천의에게 주고 나서 두 사람의 다리 혈도를 풀 어 주었다. 갈천의는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이 커다란 은혜를 결코 말로만 갚지는 않겠소.우리 종남의 형제 가 죽지 않는 한 반드시 은혜를 보답해 드리겠소." 갈천의가 자리를 뜨자 금화부인이 소영에게 말했다. "동생, 남들은 모두 자리를 떴는데 왜 혈도를 풀어 주지 않나?" 소영은 피식 웃으며 금화부인이 혈도를 풀어 주었다. "부인의 이제 악행을 그만 삼가하시오. 무림의 복리 질서와 평화 를 위해 노력하시는 것이 휠씬 보람된 일이 아니겠소?" 금화부인은 눈을 샐쭉해 보이더니 배시시 웃으며 일어섰다. "장차 내가 할 일은 나중에 얘기하세. 오늘 나는 동생 덕분에 생 명을 건졌으나 동생을 적으로 대해야 옳을지 벗으로 대해야 옳을지 모르겠네." 금화부인은 농담처럼 말했으나 소영은 엄숙하게 대답했다. "적이든 벗이든 그거야 부인이 결정할 일이지요." "호호호... 동생은 어린 나이로 뜻밖에도 일대의 영웅다운 패기 를 가지고 있군." 그러나 금화부인은 갑자기 음성을 낮추었다. "동생은 심목풍과 같은 인물은 아니네. 내 예측이 틀림없다면... 심목풍과 동생은 장차 서로 죽이고 살리는 원수가 될 것이네." "그것은...." 소영은 말을 꺼냈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주조룡과 우문한도가 달려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문한도가 금화부인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부인의 상처가 좀 나았습니까?" "걱정해 주어서 고맙군요." 주조룡이 소영에게 따지듯 물었다. "삼제가 갈천의를 구해 준 것은 무엇 때문이오?" 소영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동시에 금화부인의 목숨도 소제가 구했소." "큰형님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아마 삼제는...." 주조룡은 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소영은 불쾌한 심정을 누르며 대 꾸했다. "둘째형께서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오. 큰형님께서 벌을 내리신다 하더라도 소제가 받을 테니까...." 주조룡은 불끈 치미는 화를 누르며 몸을 돌렸다. 이때 멀찌감치 서 있던 금란과 은란이 눈에 띠었다. 그는 화풀이 라도 하듯 큰 소리로 외쳤다. "두 계집년이 정말 간도 크군. 감히 여기까지 나오다니...." 소영이 급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소제가 억지고 데려 온 것이니 그녀들을 나무라지 마시 오." "삼제는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백화산장의 많은 규칙을 모 를 것이오. 하지만 두 계집은 빤히 규칙을 알면서도 일부러 범했 소." 이때 소영은 주조룡의 등 뒤에 서 있는 네 소년을 바라 보고 있 었다. 네 소년 중 둘은 빨간 얼굴이고 둘은 흰 얼굴이었지만 아무런 표 정도 없었다. '이 네 소년은 마치 조각처럼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군.' 소영은 표정 없는 네 소년에게서 싸늘한 한기같은 것을 느꼈다. "큰형님께서 두 시녀를 소제에게 거느리게 하며, 소제를 시중들 라고 했으니 소제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소. 만일 주형께서 그녀들 을 벌주겠다면 차라리 소제에게 벌을 주시오." 주조룡은 소영의 얼굴을 아니꼽다는 듯 바라 보더니 내뱉듯 말했 다. "이 일은 내 주장만 내세울 수도 없으니 큰형님더러 처리하라고 하겠소." 주조룡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기왕 삼제가 그녀들을 데려 왔으니 내가 생각엔 큰형님께서도 그녀들을 용서할 것 같소. 그러니 삼제는 너무 근심치 마시오." 주조룡은 붉은 색의 작은 기를 꺼내더니 그것을 높이 쳐들고 흔 들자 무표정한 얼굴로 못박은 듯 서 있던 네 소년이 몸을 훌쩍 날 리더니 바람처럼 달려 갔다. '날쌔고 빠른 신법이구나.' 소영은 네 소년이 사라진 백화산장 쪽을 바라 보며 속으로 감탄 했다. 이때 풀밭에는 무당파의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종 남이협과 함께 이곳을 떠난 것이다. 또한 금화부인을 따라 우문한도도 사라졌기 때문에 이곳에는 소 영과 주조룡, 금란과 은란 네 사람뿐이었다. 네 소년이 사라지자 주조룡은 붉은 기를 품 속에 집어 넣으며 말 했다. "우리도 이제 돌아가세." 주조룡이 걸음을 옮기자 소영은 그의 옆에서 걸으며 입을 열었 다. "둘째형, 소제의 마음속에 이해할 수 없는 의문점이 있는데...물 어야 좋을지 묻지 말아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삼제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의문은 방금 사라진 네 소년에 대 한 것이오?"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네 소년은 우리 백화산장의 제자요?" "그들의 신분은 매우 특이하오. 우리 산장의 제자라고 할 수도 있고 제자가 아니랄 수도 있소." "그것이 무슨 뜻이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큰형님께서 직접 데리고 있는 심복이 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큰형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소." 소영은 더욱 어리둥절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점점 어려운 얘기구려." "실은 나도 자세히 모르오. 삼제가 그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다면 큰형님에게 직접 물어 보는 것이 좋겠소." "둘째형께서 모르신다면 할 수 없구려. 이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큰형님께 물어 볼 필요는 없잖소?" "그렇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어서 갑시다. 점심때 큰형님께서 삼제에 대한 송별연을 베풀겠다고 하셨으니... 나도 삼제에게 예물 을 하나 주겠소." "형제들 사이에 예물이 무슨 필요가 있소?" "하하하, 그렇지 않소." 주조룡은 갑자기 걸음을 빨리했다. 소영은 그와 한걸음 떨어져서 걸었다. 그 뒤를 금란과 은란이 풀 죽은 모습으로 따랐다. '곧 떠날 테니 짐을 챙겨야겠다.' 백화산장으로 들어선 소영은 곧장 난화정사로 달려 갔다. 방으로 들어선 소영은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준비가 끝난 그는 그제서야 금란, 은란이 문 밖에 줄곧 서 있었다는 것을 의식했다. 금란과 은란은 여전히 장검을 메고 경장차림 그대로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녀들은 소영의 짐을 챙겨 주고 세 숫물을 떠 오고, 법석을 피웠을 것이다. 소영이 일어서자 두 소녀는 공손히 절을 했다. "시녀들은 이제껏 나리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나리께서 먼 길을 평안히 가셔서 곧 부모님을 뵈오시기를 빌겠습니 다." 그녀들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 보는 소영의 마음은 찌르르했 다. '이 삼기진결과 옥선자 그림은 연회석상에서 심목풍에게 돌려 주 는 것이 좋겠다.' 소영은 짐 속에서 책과 그림을 꺼내려다가 손을 멈추었다. '백화산장에는 지금 음모와 살기가 가득 차 있다. 심목풍이란 인 간은 또 얼마나 악독한가. 내가 이곳에 계속 머문다는 것은 고름 속에 깨끗한 피를 섞는 것과 다름없다. 나도 곧 나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소영은 이번에 아예 백화산장을 하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향에 잠시 다녀오겠다는 구실은 내가 이곳에서 빠져 나가는데 에 안성마춤이다. 어떻게 하든 이곳에서 떠나기로 하자.' 막상 백화산장을 떠나기로 결심하니 옥선자의 그림을 그대로 주 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내가 일단 떠나면 다시 되돌아 오지는 않을 테니 언제 이 그림 을 볼 수 있겠는가. 이 기회에 자세히 한번 보는 것이 좋겠다.' 소영은 그림을 꺼내 탁상 위에 펼쳐 놓았다. 그림에는 무엇이라 고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 한 송이의 빨간 꽃을 들고 있 었다. 여인은 입술을 약간 벌려 흰 이를 드러내고 요염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소영은 그림을 자세히 훑어 보았다. 보면 볼수록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왔다. '옛말에 색(色)이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색에 유혹된다더니 그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 사실었군. 만일 이 그림 속의 여인이 살아 있는 사람이였다면 커다란 화를 초래할 만 한 요녀가 되었을 것이다.' 이때 그림의 화심(花心 : 꽃술이 있는 부분)이 약간 튀어 나온 것이 보였다. 소영은 그림 밑에 모래알이라도 들어 있는 줄로 생각 하고 손가락으로 화심을 눌렀다. 옛말에 꽃은 꽃나무만 심었다 해서 피지 않으며, 나무는 심지 않 아도 스스로 자란다는 말이 있다. 시천도(時天道)가 한 폭의 그림 을 남긴 후, 많은 사람들이 옥선자의 그림에 심취했다. 반면에, 그 림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천도가 옥선자의 그림을 남긴 것은 그 그림이 잘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천도가 옥선자를 남긴 것은 다른 뜻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 들은 옥선자에 대해 구구한 추측과 낭설을 퍼뜨렸다. 또한 옥선자 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도 말하기를 즐겨했다. --시천도는 나이가 아직 어릴 때에 아름다운 소녀를 사랑하게 되 었다. 그는 천성이 수줍어서 소녀에게 말 한 마디 붙여 보지 못하 고 짝사랑으로 가슴만 불태웠다. 세월이 흘러 시천도와 소녀는 모 두 총각 처녀가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문이 들 렸다. --소녀가 시집 간다. 이 말은 시천도를 천길 벼랑 밑으로 떨어뜨 렸다. 그는 역류하는 듯한 분노와 절망을 안고 소녀에게로 달려 갔 다.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소 녀는 나 하나만을 사랑하고 있을 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천도는 소녀에게로 달려 가 따지려고 했으나, 막상 소녀를 본 순간 말문을 열지 못했다. 남편될 사람과 나란히 앉아 행복에 겨운 웃음을 나누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시천도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 주고 말았다. 시천도는 절망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서고 말았다. 소녀, 아니 이미 성장한 여인은 결혼을 해서 멀리 떠났다. 그러 자 시천도는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그렇다. 그림을.... 그녀의 모습을 그림에 담자. 그리고는 그녀 의 혼을 그림속에 담자. 그녀는 갔지만 나는 그녀를 보내지 않는 다.' 그림에 몸매, 피부 색깔과 호흡까지도 그림 위에 생생하게 되살 아났다. 시천도는 그림을 품에 안고 잠시도 떼어 놓을 줄을 몰랐 다. 비통에 잠겨 있던 시천도는 그림 속에 사랑하는 여인을 담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단순히 그림만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무공은 천하에 적수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깝게도 무공을 전수해 줄 만한 인물을 발견할 수 없으니.... 차라리 그림 속에 무공의 비결을 넣어 후세에 누군가 나타나서 계승시키도록 해 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한 그는 옥선도 속에 무공을 집어 넣었다. 물감에 무공을 용해시켜 그것을 그림 속에 기묘하게 집어 넣었다. 물론 이 것은 피나는 노력과 탁월한 기술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옥선자의 그림 속에는 시천도의 여인과 무공의 절학 이 한꺼번에 승화되어 남겨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옥선자를 따라 다니는 많은 전설 중에 대표적인 것 이었다. 이 전설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그림을 보고자 하 는 호기심으로 몰아 넣었다. 비교적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은 첫 번째의 전설을 믿었다. --아무리 초인적인 재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 그런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그것은 한 여인에게 쏟았던 사나이의 순수 한 정열, 그것이 자신도 모르는 영감의 작용에 의해 그림으로 나타 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의 전설을 믿는 사람들이 의견이었다. 이와 반대로 비교적 이성적인 사람들은 두 번째의 전설에 더 많 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천도는 뛰어난 재질과 무공을 지녔다. 당시에 무공이나 그림 으로 그와 상대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제자를 없어서 자기의 재질과 무공을 안고 그대로 죽기는 아까왔다. 그래 서 옥선자의 그림에 무공을 넣어 남겨 놓은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전설을 믿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 두개의 전설은 모두 자기 나름의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옥선자의 그림이 신비한 것만은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림 속에 무공을 넣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시천도의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어찌 한 폭의 그림 속에 그 많은 무공의 비결을 담 을 수 있겠는가? 그림 속에 상승무공을 암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면서 아울러 무공의 비결을 담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옥선자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으 며,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이 그림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시천도의 무공을 알아 낼 수 있을까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심목풍은 옥선자의 그림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자 회심의 미소 를 지었다. '흐흐흐, 옥선자의 그림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 왔구나. 좋다. 이 그림 속에 담겨져 있는 비결을 캐내어 시천도의 무공을 고스란 히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 심목풍은 옥선자의 그림을 놓고 세밀히 살펴 보았다. 거의 한나 절이나 걸려 그림을 살펴 보았으나 아무런 특이점도 발견할 수 없 었다. 심목풍은 크게 실망하고, 옥선자의 그림을 소영에게 주었던 것이 다. 소영이 옥선자의 그림을 펼쳐 놓고 볼 때에 만일 심목풍처럼 등불 밑에서 아무렇게나 그림만 감상하고 그림의 화심 부분을 햇빛 에 비쳐 보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을 것 이다. 햇빛이 들어 오자 화심이 약간 튀어 나온 것을 발견한 소영은 별 다른 의심없이 손가락으로 그것을 눌렀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화심을 누르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지 고 말았다. 그림 속의 붉은 화심을 누르자 그 화심이 옆으로 밀려 나며 떨어지는 게 아닌가. 소영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떨어진 화심을 뒤집어 보았다. 그곳 에는 바늘 끝으로 살짝살짝 찍어 놓은 것 같은 자국이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소영은 시력을 집중해서 그것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의 가슴 이 쿵쿵 뛰며 목덜미가 달아 올랐다. '글씨다. 무공의 상승내공을 쓴 글씨다.' 소영은 한 자 한 자 상세히 읽었다. <그녀의 왼쪽 치마자락을 들쳐 보아라.> 이 글귀는 소영에게 커다란 놀라움과 흥분을 안겨 주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그림 속에 뜻밖에도 괴상한 비밀이 들어 있군. 그런데 어떻게 그림 속의 치맛자락을 들출 수 있을까?' 소영은 손가락에 묻어 있는 화심을 그림 위에 떨어뜨려 놓고, 그 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치맛자락을 들출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이 때였다. 누군가 다가노는 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급히 뒤를 돌아 보았다. 이때 방문이 드르륵 열리며 바람이 몰려 들었다. 그림 위에 있던 화심이 바람에 밀려 창밖으로 날아 갔다. 방문 앞에 나타난 사람은 심목풍이었다. 그는 방문을 열어 놓은 채 방 안을 예리한 눈초리로 살펴 보고 있었다. 27. 축골독단(縮骨毒丹) 심목풍은 소영을 바라 보는 눈빛에는 추호도 악의가 서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부드러움이 엿보였다. 소영은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하였다. "큰형님께서 찾아오신 것을 모르고 마중나가지 못해서 죄송스럽 습니다." 심목풍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안으로 들어섰다. "삼제, 이 그림에서 무슨 비밀이라도 알아 냈나?" 갑작스런 심목풍의 물음에 소영은 가슴이 섬뜩하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하였다. '큰일났구나. 저 빨간 꽃의 화심을 떨어뜨린 것을 눈치 챘나보군 나!' 이런 생각을 하며 재빨리 눈길을 돌려 꽃의 화심을 보니 그것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고, 색채도 전 것과 똑같았다. '아! 저 꽃에는 다른 화심이 또 있었나 보구나. 과연 서성(書聖) 시천도는 일대의 인재임에 틀림없다.' 소영은 짐짓 정색을 하며 크게 대답했다. "소제는 견식이 부족한 소치로 이상한 점을 발견치 못하였습니 다." 소영은 화심이 조금도 변함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쾌 재를 불렀다. 소영은 눈을 껌뻑거리며 천연스럽게 물었다. "큰형님께서는 어찌하여 소제를 그렇게 보십니까? 소재의 얼굴에 무어라도 묻었습니까?" 심목풍은 어깨를 움츠려 보이더니 갑자기 큰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삼제의 심중에 죄진 일이 없다면 내가 바라 보는 것 이 무엇이 두렵겠나?" 소영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심목풍은 빈틈이 없고 교활한 놈이로구나. 틀림없이 무엇을 눈 치채고 있나 보다. 혹시 화심이라도 보이면...' 그러나 화심은 천만다행으로 심목풍이 방안으로 들어설 때 이미 창문 사이로 날아가 버렸다. 심목풍은 주위를 훑어 보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는 냉랭한 음 성으로 은근히 소영을 위협하였다. "삼제, 이 방안에 조그만한 바늘을 뿌려 놓았다 하더라도 내 눈 을 속이지 못하네." "큰형님의 식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심목풍은 옥선자 그림이 놓여 있는 식탁 옆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삼제, 자네는 앞으로 오 년 만 있으면 천하무림의 인물들을 모 두누르며 제일의 고인이 될 것일세. 그렇게 되면 나에게도 적수가 되겠지!" 소영은 그의 가시가 돋친 말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짐짓 미소를 띄었다. "큰형님께서는 소제를 너무 과분하게 칭찬하십니다. 소제는 비록 훌륭한 스승에게서 절학을 익혔으나 어리석고 무능한 관계로 무공 이 부족합니다. 큰형님을 따르려면 아마 제 평생에도 못할 것입니 다." "정말 그리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소영은 그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심목풍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띄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나의 말은 삼제의 기지를 말하는 것이네. 삼제는 틀림없이 고인 이 될 게야. 그러나 삼제의 그 영리한 기지를 무공에 이용한다면 보다 훌륭한 절학을 터득할 수 있겠지. 벌써부터 삼제를 믿고 재질 을 보아 왔던 내 추측이 맞을 것 같군." 그는 소영을 억지로 추켜 주는 것 같았다. 소영은 태어나서부터 지혜가 뛰어났고 총명하였다. 또 장산패에 게서 강호의 지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악랄한 인물들은 거의 다 알고 있었지만 역시 직접 강호에 나서는 데는 애숭이었다. 그래서 엉큼한 심목풍의 내심을 정확하게 간파하지 못했다. 심목풍은 말을 이었다. "내가 이곳에 들어 올때 삼제의 표정을 보니 무엇에 쫓기는 사람 처럼 당황한 빛을 보이더군. 삼제의 심중에는 분명 커다란 비밀이 들어 있을 것이네. 이 옥선자 그림이 탁상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삼제는 이 그림에 대하여 무슨 비밀을 알아냈을 것 같군 내 생각이 틀리나?" 소영은 암암리에 그에 대한 경계심이 발동하여 적지 않은 주의를 하였다. '심목풍은 귀신같은 간계로 나에게 덤벼드는군. 난 견식이 부족 하니 말이 많으면 도리어 약점을 잡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침묵을 지켜 그에게 더 이상 눈치를 주지 말아야지.' 그는 이런 결심이 서자 그대로 실천에 옮겨 아무 대답도 하지 않 고 멋적은 미소만 띠었다. 심목풍은 한동안 소영의 대답을 기다려도 입을 열 기색을 보이지 않자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며 체념한 듯 힘없이 입을 열었다. "삼제는 잠시 사이에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나에게 조금도 눈치 를 보이지 않으니 실로 놀랄 만하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이 틀림 없다고 장담 하네. 삼제의 의견은 어떤지?" 소영은 더이상 말대꾸를 하지 않으면 심목풍의 화를 내리라 생각 하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큰형님의 훈계가 있으시다면 달게 듣겠습니다." 심목풍은 별안간 큰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허허... 과연 겸손하군." 그의 웃음소리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저 웃음에는 살기가 들어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심목풍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방 안은 온통 웃음소리로 차 소영의 귓전을 어지럽혔다. 소영은 암암리에 내공을 모아 귀를 울리는 웃음소리를 막았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부드럽게 지어 보였다. 이때 문 밖에서 가벼운 인기척이 들렸다. 심목풍은 웃음을 돌연 멈추고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그의 고함은 방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져 소영도 깜짝 놀라 어깨 를 움츠릴 정도였다. 그러자 문 밖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놀라는 소리가 가 늘게 들렸다. "어머!" 소영은 재빨리 문을 활짝 열었다. 그곳에는 은란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두려움에 전신을 떨고 서 있었다. 그 앞에는 두 개의 찻잔이 깨어져 흐트러져 있었다. 소영은 그녀가 가엾게 보였다. 그래서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하려 는데 심목풍이 먼저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삼장주는 이제 고향으로 부모님을 만나러 이곳을 떠나게 되었 다. 너희들은 그를 따르겠느냐?" 은란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대 장주님의 분부대로 따르겠사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결정은 심장주에게 달려 있다. 그가 너희들 을 데려가려는지 알 수가 없구나." 소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입을 열었 다. "소제는 마침 그것을 부탁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금란과 은란은 매우 영리하고 소제를 많이 도와 줘 이제는 정이 들었습니다. 이번 에 소제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들을 딸려 보내주신다면 소제 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사옵니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란과 은란은 확실히 우리 백화산장의 으뜸 시녀이다. 저들은 무공도 약하지 않고 응변할 수 있는 기지가 있어 삼제와 동행하는 데 부족한 점은 별로 없을 줄 믿지. 두 시녀가 삼제를 따른다면 나 도 안심할 수 있지." 소영은 문득 당삼고가 생각나 그녀도 데리고 이곳을 나가고 싶어 졌다. "큰형님, 감사합니다. 소제는 또 한 가지 청을 드릴 것이 있습니 다." 심목풍은 궁금한 눈빛으로 소영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삼제, 무엇인가? 어서 말해 보게." 소영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결심을 한 듯 입을 열 었다. "당낭자는 우리 장의 규칙을 어기어 옥에 갇혀 있다는데 그녀를 풀어 줄 수 없겠습니까?" 심목풍은 의외의 말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삼제는 장에 대하여 적지 않은 일을 알고 있군." "소제는 삼장주의 신분으로서 우필 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을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녀도 함께 데리고 고향으로 가겠단 말인가?" 소영은 내심 당삼고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내가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영영 옥에서 벗어나지를 못 할 것 이다. 잘못하다가는 아무도 모르게 목숨까지도 쓴게 되겠지.' 그는 당삼고를 이 기회에 구하고 싶었다. "소제는 그런 마음입니다만 당낭자가 응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삼제는 무공도 뛰어나고 인품도 비범하여 뭇여자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따르려 할 것일세. 그녀도 분명 삼제의 제의를 거절하지는 않겠지." "그렇시다면 큰형님은 그녀를 소제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내 언제 삼제의 부탁을 안 듣던가? 삼제는 조금도 어렵게 생각 지 말고 고향의 부모님들이나 찾아보도록 하게. 그리고 강호군호들 과 결투를 약속한 날까지는 꼭 돌아와야 하네. 알겠나?" 소영은 내심 그를 비웃었다. '나는 고향으로 부모님을 찾아가 만나본다는 명목으로 이곳을 나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더욱 의의가 깊은 것은 이곳에서 악 을 돕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어찌 이곳을 다시 찾을까?' 생각은 짐짓 섭섭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장중에 마침 일이 많은 시기에 떠나는 것만도 큰형님께 죄스러 운데... 될 수 있는 한 하루 속히 돌아오겠습니다." "나는 삼제를 위하여 성찬을 준비하여 놓았네. 이제 정오가 거의 되어 갈 터이니 성찬이 끝난 후 떠나도록 하게." 소영은 그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은란에게 물 었다. "너는 대 장주를 그렇게 무서워하느냐?" 은란은 어두운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셋째 나리, 오늘 성찬 자리에서 음식을 조심하십시오." 그녀는 엉뚱한 말을 꺼내고, 몸을 굽혀 바닥에 부서져 있는 찻잔 을 주웠다. 소영의 마음은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심목풍은 비록 의심이 많고 간계가 비상하지만 나에게는 신의를 지켜 왔는데 어째서 나를 해친다고 할까? 하여튼 은란이도 나에게 무슨 이유가 있어 경고를 한 것일 테니 주의는 해야지.' 그는 간단한 행장을 꾸린 다음 옥선자 그림을 둘둘 말아 품속에 넣고 대청으로 향했다. 대청에는 벌써 잔치를 하듯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심목풍, 주조룡, 금화부인 그리고 우문한도가 자리를 잡 고 있었다. 소영이 더욱 크게 놀라게 한 것은 이제까지 옥에 갇혀 있던 당삼고가 나타난 것이었다. 소영이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훑어 보려는데 금화부인이 옆 좌석 을 손으로 두드리며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었다. "소제, 빨리 오시오. 여기가 소제의 자리요." 소영은 감사의 미소를 띄며 금화부인에게 다가서서 품 속의 옥선 자 그림을 꺼내었다. "부인, 이 그림을 받으십시오." 금화부인은 한참동안 소영을 바라 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 그림은 본래 소제에게 주려고 하였소. 그러나 이 그림이 너 무나 아름다와 소제의 마음을 빼앗을 것 같아 도로 받겠소." 건너쪽에 앉아 있는 심목풍은 계속 소영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 다. 심목풍은 그에게서 아무런 기색도 찾지를 못하자 내심 실망의 기색이 서렸다. '정말로 내 추측이 틀렸단 말인가?' 소영은 짐짓 그의 눈빛을 피하며 금화부인에게 다시 말을 건넸 다. "저의 형님께서는 삼기진결도 부인에게 보관하라고 일렀습니 다." 그는 품속에서 삼기진결을 꺼내어 앞으로 내밀었다. 금화부인은 의외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천천히 삼기진결을 받았다. "좋소. 내 구경이나 좀 하고 대장주에게 맡기겠소." 이때 심목풍이 술잔을 높이 들고 소영에게 말했다. "삼제, 몸조심하고 속히 다녀오게." 소영은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쳐들고 그에게 맞인사를 하며 막 들이키려는 순간 은란의 경고가 생각났다. '음식을 조심 하십시오.' 그는 입술에까지 대었던 술잔을 도로 식탁에 내려 놓았다. 주조 룡이 그런 눈치를 채었는지 자기의 술잔을 높이 쳐들고 한숨에 술 잔을 비워버렸다. "삼제가 무사히 길을 가기를 바라는 뜻에서 삼제와 술잔을 나누 고 싶소." 그러자 금화부인과 우문한도가 덩달아 술잔을 기울였다. 이제 남 은 것은 소영이 앞에 있는 것 뿐이었다. 소영은 여러 사람에게 민망한 추태를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술에 설령 창자를 태우는 독이 들어있다 하여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소영은 이런 생각으로 다시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 갔다. 어디 선가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그 술을 먹으면 안 되오." 소영은 삼키려던 술잔을 입안에만 넣고 자리에 앉았다. '지금의 분위기로는 내가 냉정을 되찾는 것 뿐이로구나.' 이런 생각으로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에게 전음입밀로 써 경고를 보낸 상대를 찾았다. 대청 안에는 몇 사람 이외에 두 명의 시녀가 심부름을 하기 위하 여 들어 와 있었다. '만약에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말해 주었다면 필경 금화부인 이나 당삼고일 것이다. 그러나 저 두 사람의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 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그 음성이 처음 듣는 것이니 등 뒤의 두 시 녀 중에서....' 여기까지 생각이 되자, 고개를 돌려 두 시녀를 보려 하는데 심목 풍 갑자기 끼어들었다. "삼제는 한시 바삐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뿐일 테니 우린 상관말 고 음식이나 듭시다." 소영은 젓가락을 집어 들고 떡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으나 입에 들어 있는 술 때문에 먹지를 못하고 쩔쩔매었다. 이때, 다시 그 낮은 음성이 들렸다. "당신이 만약 내 말을 듣지 않고 그 술을 먹어 버렸다면 이후에 는 심목풍의 종이나 마찬가지가 되오. 앞으로 독수약왕을 만나 그 가 당신을 구해주면 모를까 오직 당신이 심목풍에게 목숨을 건져 달라고 사정을 하는 수밖에 없소. 다행히 당신이 그 술을 삼키지 않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뱉으시오." 소영은 그의 말 중에 독수약왕이라는 이름을 듣자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 전날 폐허된 절에서 내 피를 내어 독수약왕의 딸을 구 출하 였으니. 그럼 바로 그녀가....' 그는 자신을 돕는 사람이 있음을 느끼고 용기가 생겼다. 재빨리 옷소매를 뒤져 동전을 꺼내 아무도 모르게 식탁 밑으로 가지고 가 오른손으로 식지로써 창문을 향하여 동전을 퉁겼다. 소영은 유선자에게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회선수법(回旋手法) 을 배운 바 있었다. 그가 날린 동전은 식탁 밑으로 뻗치다가 방향 을 꺾어 창 쪽에서 날아 들어 오는 것처럼 되었다. 그것은 주조룡의 귓전을 스치고 그가 들고 있던 안주 접시에 명 중되었다. 그러자 그 접시가 산산조각이 나며 그곳에 담겨 있던 고기와 다 른 양념들이 주조룡의 옷에 쏟아졌다. 그의 꼴은 엉망이 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소영은 상을 짚으며 몸을 솟구쳐 번개처럼 빠르게 창 밖으로 나가서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시 솟구쳐 지붕 위로 올라섰다. 그는 지붕에서 입속에 넣고 있던 술을 재빨리 뱉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밑에서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금화부인, 주조룡 그리고 우 문한도가 지붕 위로 올라 왔다. 금화부인은 소영의 곁으로 다가오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소제, 실로 빠른 신법이오. 그래 적을 찾았소?" 소영은 고개를 흔들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못찾았소." 주조룡이 얼굴을 붉히며 크게 외쳤다. "어떤 놈이 감히 백화산장에 발을 들여 놓았느냐?" "호호.... 이장주는 항상 백화산장의 경계가 엄하여 담은 동(銅) 이고 벽은 철(鐵)이라 하더니, 오늘은 대낮에 적이 침입하였소? 더우기 대청 가까이까지 접근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주조룡은 금화부인의 조롱을 못 들은 체 주위를 살펴 보고는 별 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자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실로 이상한 일인데...." 금화부인이 창 밖의 지세를 살폈다. 대청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조그만 꽃밭이 보였으나 암기가 날아 들어 온 방향과는 전혀 틀렸다. "이장주, 적은 팔 힘이 센 인물인가 보오. 저 꽃밭에서 대청 안 으로 날렸으니...." 그녀의 말에 주조룡은 다시 한 번 얼굴을 붉히며 왼손을 휘둘러 기왓장에다 화풀이를 하듯 일장을 때렸다. "이곳을 지키는 호원(護阮)은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꽃밭 주위에서 십여 명의 장한이 제각기 특색있는 무기를 들고 모습을 나타내며 쏜살같이 달려 왔다. 주조룡은 그들을 보자 눈을 빛내며 재빠르게 땅으로 뛰어 내렸 다. 뒤를 이어 금화부인과 우문한도 그리고 소영도 내려서자 벌써 십여 명의 장한들도 주조룡 앞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우문한도는 내심 조심스러운 주의가 생겼다. '이 장한들은 행동이 이처럼 빠른 것으로 보아 분명히 모두 뛰어 난 무공을 지녔을 것이다.' 금화부인도 내심 같은 생각을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백화산장이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경비가 매우 엄하구나. 이렇게 하여 장안의 모든 사람들을 감시하 는구나.' 십여 명의 장한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주조룡에게 입을 열었 다. "이장주님,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 "너희들은 적이 이곳에 침입한 것도 모르고 있었느냐?" 장한들은 의외의 말에 모두 대답을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 보았다. 잠시 후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맡은 바 임무 수행에 조금도 태만하지 않았습니다. 적 이 이곳에 침입하였다는 말씀은 믿기 어렵습니다." "적이 침투하지 않았다면 암기가 혼자서 저 창으로 날아 들어 왔 단 말이냐?" 십여 명의 장한들은 암기가 날아들었다는 말에 새파랗게 안색이 질리며 몸을 가느다랗게 떨었다. 다시 주조룡이 입을 열려는데 대청 안에서 심목풍의 음성이 들려 왔다. "이제, 그들은 너무 꾸짖지 말게. 이 일은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돌려 보내게." 주조룡은 분한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단칼에 목을 베고 싶었지만 심목풍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소영은 주조룡의 뒤를 바싹 따라 대청으로 들어 가면서 마음을 죄었다. '저 심목풍은 실로 영특하여 이미 내가 벌인 일인 줄을 알기라도 하였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들어서니 심목풍은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여러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대장주께서는 태연하신 것을 보니 침입자를 알고 계신 것 같소 이다." "아니오. 삼제가 한시바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데 어찌 이 정도의 일로써 시간을 지체하겠소? 그래서 오늘은 모든 일을 덮 어두고 우선 삼제를 즐겁게 해 주려는 것이오." "자, 흥취를 깨지 말고 어서 음식이나 듭시다." 소영은 음식에도 독이 들어 있을 것 같아 먼저 손을 대지 않고 눈치만 살폈다. 그러자 심목풍이 먼저 음식을 들어 맛있는 듯 먹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소영은 안심하고 몇 가지 음식을 집어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목풍은 벌떡 몸을 일으켜 소영에게 다가와서는 다정하게 손을 잡으며 대청 밖으로 나갔다. 꽃밭을 지나 장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문인 원문으로 갔다. 그곳에는 벌써 아름다운 마차가 네 필의 준마에게 매달려 있었 고, 마부석에는 청의 동자가 긴 채찍을 들고 앉아 있었다. "이것은 최고급의 마차로써 네 필의 말이 끌며 빠르게 달릴 수 있네. 그리고 저 안에 삼제의 부모님께 드릴 선물이 들어 있으니 나와 이형의 성의로 알고 받아 두게." 소영은 마차를 유심히 살피던 중 마부석에 앉아 있는 청의 동자 가 금란임을 알았다. '아, 심목풍은 약속을 지키는구나.' "큰형님, 이렇게까지 소제를 생각해 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 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심목풍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당삼고를 쳐다 보고는 의미 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삼제, 당낭자와 함께 마차에 오르게." 소영은 그제서야 생각난 듯 당삼고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심각한 생각을 하는 듯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당삼고는 두려운 눈빛으로 심목풍을 주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 겨 소영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모든 준비가 다 되고 이제 곧 떠날 수 있게 되자 금화부인이 앞 으로 나서면서 손을 내밀었다. "소제, 누나는 더 이상 전송을 못 나가니 몸조심하시오." 소영도 손을 내밀어 가볍게 악수를 하였다. "부인의 돌봐 주심에 감사하오이다." 이때 소영은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에서 종이 쪽지 같은 감촉을 느꼈다.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받아 쥐고 옷소매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는 심목풍 주조룡 그리고 우문한도에게 정중한 인사를 하였다. 금란은 즉시 말고삐를 늦추며 채찍을 휘둘렀다. 마차는 질풍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이랴! 이랴!" 얼마를 달렸는지 이제 백화산장은 보이지 않고 뽀얀 먼지만이 뒷 길에 날리고 있었다. 소영은 휘장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 갔다. 그곳에는 은란이 남장 을 하고 구석에 앉아 있었고, 그 건너 쪽에 두 개의 큰 상자가 놓 여 있었다. 그 상자에 기대서 잠을 자는지 당삼고가 눈을 감고 있었다. 네 필의 준마에 세 명의 낭자를 태우고 길을 떠나는 소영의 마음 은 잠시 즐거웠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와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정 반대였다. 소영은 의아심이 생겨 입을 열었다. "은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것인가?" 은란은 이 때까지도 소영이 곁에 앉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 으므로 그녀에게 소영의 물음이 큰 놀라움을 주었다. 은란이 꿈속에서 깨어난 듯 천천히 눈길을 돌려 소영을 바라 보 았다. 그녀의 눈빛은 매우 어두워 보였다. "세째 나리...." "왜 그러느냐? 무슨 말인데? 우리는 이제 백화산장을 떠났으니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해봐라." "아닙니다. 소녀 별다른 이야기가 없사와요." 소영은 내심 답답했으나 더 묻지 않았다. 그는 한쪽 구석에 기대 어 눈을 감았다. 소영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해가 서산에서 기 울어 차츰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마차는 멈춰져 있었고, 안에 있던 당삼고와 은란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으며 휘장을 통해 금란의 모습만 눈에 들어 왔다. "여기가 어디냐?" "이제야 깨어나셨습니까? 은란과 당낭자는 휴식하러 들어갔습니 다. 그리고 아까서부터 마차 밖에서 포장주(包莊主)가 나리께서 깨 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포장주가 누구냐? 나는 그를 알지 못하는데!" "허허허.... 저는 대장주의 금화령 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특 별히 마중나온 것이오. 어서 청으로 듭시오. 삼장주님을 위하여 벌 써부터 음식을 준비하여 놓았습니다." 소영은 마차 밖으로 나섰다. 그곳에는 오십여 세쯤 되어 보이는 청색 비단 장삼을 걸친 노인이 서 있었다. 소영이 밖으로 나서자마자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굽히고 정중한 예를 올리는 것이었다. 소영은 깜짝 놀라 망설이다가 가볍게 허리 를 굽혀 답례를 했다. "감사하오." 노인은 웃음 띤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장주님께서는 저에게 삼장주님을 정중히 모시라고 일렀습니 다. 삼장주님께서는 저의 불찰을 용서해 주신다면 더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소영은 그의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내심 감탄을 하였다. '백화산장의 세력은 정말 경시할 수 없구나. 곳곳마다 이런 분타 (分舵)가 있으니...' 청삼 노인은 앞장을 서서 건너 쪽 커다란 집으로 소영을 안내하 였다. 그 집은 매우 크고 웅장하여 마치 대궐같은 집으로 홍색 대 문과 녹색 기와는 그 집의 위풍을 여실히 나타내 주었다. "삼장주님,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문 옆에는 이십여 세 정도의 청년이 희미한 등불을 받쳐 들고 부 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등의 주위를 덮고 있는 비단 에는 각각 포(包) 자가 써 있었다. 소영은 날카롭게 주위를 살펴 보며 일곱 층의 계단을 올라 대청 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그들이 대문에서 오장 정도 걸음을 옳 겼을 때 홍색 대문이 소리를 내며 닫혀졌다. 조그만 마당 두 개를 지나자 바로 앞에 대청이 보였다. 대청에는 밝은 등불을 여러 개 켜 놓아 멀리서 보아도 호화롭게 보였다. 노인은 재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가운데 제일 높은 의자를 가리키 며 말했다. "삼장주님, 어서 앉으십시오." 소영은 자기가 아무리 겸손하게 거절한다 하여도 그가 들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았다. 노인은 소영이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보고는 대뜸 앞으로 나서 면서 장삼을 뒤로 젖히고 한쪽 발을 꿇었다. "포자위(包子威) 삼장주께 문안드립니다." 소영은 노인의 행동을 보고 내심 큰 배짱을 가졌다. '이왕 이런 분위기이니 위세를 떨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이런 생각으로 짐짓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일어나시오!" "삼장주님, 여로에 피로가 많으셨을 줄로 압니다. 차린 것은 변 변치 못하오나 마음껏 잡수시고 편히 쉬십시오." "포형, 이리로 오셔서 같이 듭시다." 노인은 황송한 표정으로 허리를 몇 번 굽히며 대답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소영은 주위를 훑어 보며 당삼고와 은란 그리고 금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무척 의아스럽게 생각하였다. 노인은 소영의 건너 쪽 자리에 앉으며 소영의 생각을 눈치채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세 분의 낭자들은 벌써 제 하인들이 대청으로 모셨습니다. 안심 하시고 음식이나 드십시오." 포자위는 공손한 태도였으나 소영의 마음은 무엇을 잃은 것 같이 허전하였다. 소영의 저녁 식사가 끝나자 노인은 내실로 안내하였다. 안내된 방은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었다. 소영은 이곳의 화려함이 백화산장의 난화정사보다 더 한층 높다고 생각하였다. 소영이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자 포자위가 공손하게 앞으로 다가 서며 물었다. "삼장주께서는 언제 떠나시렵니까?" "내일 새벽에 떠나겠소." "그러시다면 떠나실 때 마차를 타시겠습니까? 아니면 빠른 배로 갈아 타시렵니까? 어서 분부를 내리십시오. 그래야 내일 새벽까지 준비를 하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배를 타면 편하고 빠르지. 그러나 배를 타게 되면 이들은 필시 뱃사공이라는 자를 딸려 보내 나의 일거일 동을 감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앞으로 할 일에 많은 지장 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마차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런 생각에 들자 마차를 타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마차를 타겠소. 포형의 수고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소." "아,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잠자리가 불편하더라도 편히 주무십 시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포자위가 허리를 굽히며 물러나자 소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내실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두어 번 훑어 보았지만 아무 이상한 점을 발견치 못하자 그대로 침상 위로 올라가 책상다리를 하고 운 기조식을 하였다. 그러나 머리 속에는 수없이 많은 잡념이 떠올라 정신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은란과 금란이었다. 그녀들 의 거동은 분명히 전과 같지 않고 변한 데가 있었다. '두 시녀들은 무엇인가 비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면 전날까지도 나에게 상냥하고 공손히 대해 주던 그들이 오늘 갑 자기 변할 리가 없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갑자기 내실 밖에서 쇠와 쇠가 부딪 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깜짝 놀라 재빠르게 움직여 내실 안에 켜져 있는 등불을 끄고 창가로 달려 갔다. 어둠이 차츰 눈에 익자 밖에서 싸우고 있 는 사람들을 희미하게 알아 볼 수 있었다. 포자위는 금도를 휘두르고 있었으며 그의 상대는 야행 경장을 한 대한으로 문창필(文昌筆)을 들었다. 그들을 맹렬하게 치고 받으며 싸우고 있었다. 그를 보고 있는 소 영의 마음은 또다시 불안해졌다. '저 상대는 누구일까? 그리고 포자위를 돕는 사람이 왜 없을까? 이 넓은 장원이 정말로 백화산장의 분타라면 절대로 포자위 하나만 이 아닐 텐데.' 소영의 의혹이 풀리기도 전에 밖의 상황은 묘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제까지 수세에 몰리던 포자위의 금도가 갑자기 그 기세 를 바꾸어 무서운 검광을 뿌리며 상대를 역습하는 것이었다. 포자 위는 처음 손을 쓸때 자신의 무공을 숨기고 우선 상대가 마음을 놓 고 문창필을 휘두르도록 유도했다. 상대가 마음을 놓자 자연 필법을 노린 것이었다. 상대는 갑자기 변한 금도의 초식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당황한 빛을 나타냈다. 이윽고 궁지로 몰리던 대한이 포자위의 번쩍이는 검광 아래 날카 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가슴께를 움켜 쥐고 몇 차례 뒹굴더니 곧 잠잠해졌다. 그는 소영을 향하여 두 손을 모아 공손한 예를 올리더니 나지막 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무능한 탓으로 하마터면 삼장주님이 계신 곳까지 괴한을 들여 보낼 뻔했습니다. 다행히 먼저 발견하여 혼을 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삼장 주님의 단잠을 깨워서 죄송합니다." 소영은 내심 깜짝 놀랐다. '포자위는 보통 인물이 아니로구나.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구나.' 사실 소영의 방은 불을 꺼 놓았기 때문에 안에서 밖을 볼 수는 있어도 밖에서 안을 엿보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괜찮소." "삼장주님의 넓은 은덕에 감사 드리겠습니다." 포자위는 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쓰러져 있는 대한에게로 다 가가서는 그를 가볍게 둘러메고 어디로인가 총총히 사라졌다. 소영은 그를 불러 오늘밤에 침입했던 대한의 정체를 묻고 싶었지 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였다. 다음날 새벽 잠결에 무슨 인기척을 느끼고 번쩍 눈을 떴다. 사방 을 두리번거려도 어제 저녁 그대로였다. 눈 뜬 그대로 잠시 자리에 누워 있으려니 문 밖에서 포자위의 말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벌써 때가 이렇게 되었나?' 그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문을 열어 제쳤다. 그 때까지 문 밖에 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리, 이제 일어났습니까? 어서 세수를 하시고 안으로 드십시 오." 어제 저녁 말로는 새벽에 길을 떠난다고 하고서 이렇게 늦게 일 어난 자신이 쑥스러웠다. 시녀가 안내하는 대로 세면을 하고 다시 내실로 돌아오니 포자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매우 안정되고 밝아 어제의 괴한에 대한 일은 까맣 게 잊은 듯했다. "삼장주님께서는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포형, 나와 같이 온 낭자들은 일어났소?" "예, 낭자들은 벌써부터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쯤 은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삼장주님의 분부만 기다릴 것입니다." "좋소. 그럼 그녀들에게 마차에 타라고 일러 주시오. 곧 길을 떠 나야겠소." 포자위는 소영의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마치 사정을 하듯 입을 열었다. "삼장주님, 아침 식사를 마련하였사옵니다. 드시고 가십시오. 만 약 삼장주께서 아침을 드시지 않고 제 집을 떠나신 것을 대장주께 서 아시면 저는...." 소영은 시간이 급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성의를 너무 무시하여 도 화가 될 것 같아 그의 말대로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하였다. 밖으로 나오니 금란과 은란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청의 서동차림 으로 마차 옆으로 소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삼고는 이미 마차 안으로 들어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금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직접 말고삐 를 잡았다. 네 필의 준마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긴 울음소 리를 지르고는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마차가 떠나자 포자위가 손을 흔들면서 크게 외쳤다. "삼장주님의 안전을 빌겠습니다." 얼마를 달리니 웅대한 포자위의 집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만큼 은란과 당삼고는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서 멍청히 허공만 바라 보고 있었다. 소영은 이제 더 이상 의혹을 참을 수 없었다. 소영은 말고삐를 잡아 당겨 마차를 세웠다. '이곳이 좋구나. 이곳에서 두 시녀와 당낭자에게 숨은 비밀을 알 아 내야겠다.' 소영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서며 냉랭하게 말했다. "금란, 은란 너희들은 마차에서 내려라." 금란은 뜻하지 않게 소영의 냉랭한 음성을 듣고 내심 느끼는 것 이 있어 말없이 내려섰다. 소영은 앞으로 걸음을 옮겨 두 필의 말을 마차에서 떼었다. 그리 고 두 사람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내어 주며 말했다. "이곳에서 백화산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돌아가거라. 말을 타면 쉽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소녀들에게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으면 꾸짖고 매질을 하여 주십시오. 어찌하여 소녀들을 다시 그 무서운 호랑이굴로..."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영의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백화산장을 못잊어 하는 것 같다. 지금이 제일 좋은 기회이니 어서 너희들이 바라는 산장으로 가거라." 금란의 두 눈에는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셋째 나리, 은란이 때문이겠지요?" "그렇다. 너희들은 모두 나에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 너희들 에게는 오직 두 갈래 길이 남아 있다. 그 첫째는 이 길로 즉시 백 화산장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둘째는...." 소영의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자 금란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다음이 궁금한 듯 다그쳐 물었다. "그럼 두 번째 길은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과 고민을 숨김없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숨김이나 거짓이 없다면 너희들을 꾸짖지 않고 다시 받아들이겠다." 금란은 한동안 입술을 깨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리께서 반드시 물어 보시겠다면 할 수 없이 모두 말씀드리겠 습니다." "좋다. 그러나 한 마디도 거짓을 말하거나 숨긴다면 너희들의 목 숨을 빼앗을 테니 그리 알아라." 금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기왕 말을 꺼내는 이상 어찌 생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나리께서 소녀들을 용서하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은란을 쳐다 보았다. 은란은 내려서도 마 차를 멍청히 쳐다 보고만 있었다. "셋째 나리께서 오늘 이렇게 묻지 않으셨더라도 언제인가 제 스 스로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나리께서는 은란이를 너무 탓하지 마십 시오. 저 애는 이미 심목풍에 의하여 강제로 축골독단(縮骨毒丹)이 라는 맹독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소영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다그쳐 물었다. "독약을 먹었단 말이냐? " 금란은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었다. "그 독약은 서서히 체내로 퍼져 들어가는 만성(慢性) 독약입니 다. 약을 먹은 후 칠 일 안에는 발작이 없지만, 사람은 멍청하게 되어 하루종일 잠이나 자고 모든 사리를 분별할 줄 모른답니다." 소영은 눈길을 돌려 은란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는 흐려져 있었고 입을 열 줄 몰랐다. "내가 견식이 부족한 탓으로 너희들을 잘못 꾸짖었구나." 소영은 금란에게 또다시 물었다. "그림 당낭자도 그 축골독단을 먹었단 말이냐?" "소녀가 보기로는 아마 틀림없는 것 같사옵니다. 그리고 심목풍 이 무엇 때문에 이런 독약을 썼는지 그 내막을 모르겠습니다. 나리 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백화산장의 모든 일은 그 하나하나에 비밀 이 붙어 있어 대장주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모르고 있습니다. 다행 히 은란이가 독약을 먹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이것만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대장주가 그녀에게 강제로 먹였단 말이냐?" 금란은 그 때를 회상하는 듯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떨었다. "은란이는 장내에서 대장주 이외에 어느 사람에게도 명령을 받지 않습니다."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대장주의 청각은 매우 예민하여 오 장 내에서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하여 그에게 들키지 않고 엿볼 수 있었단 말이냐?" "그것은 소녀가 고의로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나는 은란과 함께 있어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목풍은 축골독단을 한 알 꺼내어 자세한 약효를 은란에게 알려 준 다음 먹으라고 하였 습니다. 은란은... 은란이는 억지 웃음을 띠며 그 약을..." 금란의 슬픔은 이제 극에 달했다. 소영은 이 어여쁜 낭자들이 악독한 심목풍에게 그토록 모질게 당 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가여웠다. "금란아,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은란이의 몸이 위태롭지는 않으 니....그리고 심목풍은 어째서 너에게는 독약을 먹이지 않았느냐?" "소녀는 나리의 시중을 해야 됩니다. 소녀도 은란이와 같이 독약 을 먹었다면 어떻게 나리를 도와 길을 가겠습니까?" '두 사람은 독약으로 바보을 만들어 놓고 내 눈을 속이기 위해 금란이만 손을 대지 않았구나.' 소영은 하늘을 바라 보았다. 멀리로 기러기 한 쌍이 날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은 이 행로가 결코 그리 유유하고 한가하지 않을 거 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8. 누명을 쓰다 소영은 이제 자신과 직접 관계되는 일을 알고 싶었다. "대장주가 너에게 분부한 것은 무엇이냐?" "나리를 모시고 백화산장으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소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나리께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신다면 암암리에 손을 써서 나 리....." "하하하.... 대장주도 이번만은 너무 간단하게 생각을 했군. 네 가 가지고 있는 무공으로 나를 해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금란은 소영의 견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만 알고 있지 둘은 모르는구나.' "번쩍이는 창칼은 쉽게 피할 수 있으나 암중으로 급습해 오는 화 살은 막아 내지 못한다고 말씀드렸던 거억이 있습니다. 그는 소녀 에게 나리를 손쉽게 해칠 수 있는 두 가지 물건을 주었습니다." 소영은 되려 무안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암중으로 독수를 뻗치면 쉽게 나를 해칠 수 있겠지. 그래 대장주가 무엇을 주었느냐?" 금란은 품속에서 조그만 옥상자를 꺼내어 손바닥에 올려 놓았다. "이 상자에서 두 가지 독이 들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무 색무미의 독가루이며, 다른 하나는 불에 태우는 독향이라고 하였습 니다. 독가루는 나리의 음식에 뿌리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소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방법은 흔히 있는 일이라 별로 신통치 않구나." 소영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옥상자 곁으로 다가갔다. 순간, 금란은 손에 들고 있던 옥상자를 멀리 던지려 했다. 소영 은 재빠르게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잠깐만, 어떻게 생긴 약인지 구경이나 한 번 해 보자." 금란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듯 두려운 눈빛으로 옥상자를 소영 에게 건네주었다. 소영은 은근히 운기를 돌아 혈도를 봉한 다음 옥상자를 조심스럽 게 땅에다 내려 놓고 재빠르게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옥상자엔 금 란이가 말하던 독가루와 독향은 없었고 커다란 구슬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차 뒤로 몸을 숨겼던 금란이 모습을 보이면서 물었다. "셋째 나리, 독가루가 날지 않게 존심하십시오." 소영은 뚜껑을 닫고 품 속에다 집어 넣었다. "이 옥상자는 잠시 내가 보관하겠다." 소영은 은란의 처지가 불쌍하게 느껴져 될 수 있으면 그녀를 힘 껏 돕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은란의 독을 풀 수 있겠느냐?" 금란은 반가운 빛을 띠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소녀가 알기로는 대장주는 비록 무공은 높지만 독을 전문으로 쓰는 인물은 아닙니다. 다만 대장주에게는 독수약왕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백독을 마음대로 쓸 뿐만 아니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합니다. 대장주가 은란과 당낭자에게 먹인 축골독단도 바로 그에게 서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 해독을 하려면 부득이 그를 만나야 합니 다." "너는 그 독수약왕이란 인물을 만나 본 적이 있느냐?" "본 일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백화산장을 찾는 일이 극히 드물 어 소녀가 만난 일이 없으나, 그러나 다른 시녀들의 말에 의하면 정말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하답니다." 소영은 그녀의 수다스런 이야기를 들으며 지난 일을 새삼 되새겨 보았다. 황폐한 절로 상팔의 전서를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독수약왕을 만 나 그에게 전신의 혈도를 짚혔다가 다시 그의 딸의 도움으로 혈도 를 풀었던 일이 생각났다. 소영은 금란이 독수약왕의 핑계를 대어 말을 얼버무려 버리는 것 으로 생각하고 독수약왕의 모습을 물어 보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금란은 독수약왕을 직접 만나 보지 못했다니 더 이상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소영은 마부석으로 올라 갔다. "마차에 타라. 대장주는 필시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을 보냈을 것 이다. 그러니 한 곳에서 너무 오래 지체하면 의심을 받게 된다." 금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은란을 부축하여 마차 안으로 태우고는 마부석으로 올라 탔다. 금란은 말고삐를 잠고 다른 한 손으로 채찍을 들어 힘차게 네 필 의 말 등을 내려 쳤다. "이랴!" 네 필의 준마가 거침없이 내달렸다. 금란이 입을 열어 조금 전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틀림없이 대장주의 첩자가 나리의 뒤를 따를 것입니 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별 흉계를 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제 저녁에 묵은 포자위의 대접으로 보아도 대장주는 나리를 못내 아쉬 워하고 있습니다. 나리께서 백화산장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가 는 길목마다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풀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힐끗 소영을 쳐다 보고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나리께서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만날 때까지는 암수 를 뻗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그러나 만약에 나리께서 백 화산장으로 돌아가시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나리에게 화를 입히려고 혈안이 될 것입니다." "내가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은란과 당낭자의 독을 제거할 수 있는 해약을 구하는 일이다. 만약에 수일 내로 그들의 해독을 구하 지 못하면 그들은 발작을 하게 되니, 내 갈 길에 커다란 지장이 있 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그렇다고 그들을 외면할 수도 없고. 또한 발작하는 그들을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금란은 그제서야 무슨 생각이 났는지 환하게 웃었다. "셋째 나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야 생각이 나는데 대장주가 칠 일 안으로 은란과 당낭자의 해약을 인편에 보내 주겠다고 하였 습니다." 소영은 반가움에 눈을 빛내며 금란의 꽃같은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금란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외면하였다. "너는 백화산장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록 호의호식하였지만 하루가 마치 일 년 같았습니다." 소영은 결심을 한 듯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좋다. 내가 너희들을 백화산장의 세력 밖으로 데리고 나가 너희 들에게 자유를 주겠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강호에서 발을 씻고 평 범한 인간으로 돌아가거라." 금란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면서 쓴웃음을 흘렸다. "나리의 생각은 너무나 간단하십니다. 셋째 나리,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이제 갈 길을 결정하였사옵니다. 우리 두 시녀 는 나리를 존경하고 흠모하지만 나리의 곁에서 시녀 노릇을 하기는 너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 말은 절대로 소녀가 사양하는 말이 거나 거짓이 아님을 믿어 주십시오." 마차는 어느덧 오솔길을 벗어나 조그만 산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셋째 나리는 소녀를 나쁜 계집이라고 욕하셨겠지요? 백화산장을 찾은 손님들 중에 나리가 대장주에게 제일 두려움을 주신 분입니 다. 셋째 나리...." 금란의 두 뺨에 눈물이 흘렀다. "나리..... 소녀와 은란이는 대장주에게 순결을 빼앗긴 몸입니 다. 소녀의 마음은 그의 살을 잘라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습니다." 소영은 묵묵히 귀를 귀울이고 그녀의 긴 이야기를 듣기만 하였 다. "소녀는 무례하게도 나리를 흠모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나리의 높은 인품에는 소녀가 적합지 않다고 느껴 이제는 오직 나리를 도 와 원한을 푸는 일이 제 소원입니다. 소녀는 모든 힘을 모두 나리 를 위해서 바치겠습니다. 셋째 나리께서는 소녀의 정성을 받아 주 십시오." 소영은 백화산장의 세력권 밖으로 나가 그녀들을 자유의 몸으로 놓아 주려고 하였지만 이제는 생각이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 내가 기왕 사람을 구하기 위해 힘을 쓴다면 어찌 흐지 부지할 것인가! 어떻게 해서든 은란과 당낭자의 독을 풀어 주고 내 스스로 안전한 곳을 찾아 이들을 정착시켜야 되겠다. 금란과 은란 이 나를 생각하는 갸륵한 마음을 잊지 않고 보답하겠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금란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마음은 잘 알겠다. 심목풍의 악행이 많다 하여도 나는 그와 의형제를 맺었다. 내가 내막을 모르고 맺은 것이긴 하나 남자 로서 한 번 맺은 의형제니, 결코 그와 적이 되어 싸울 수는 없다. 만약에 내가 그와 의형제의 결의를 끊는다면 그 때에는 그는 나의 첫 번째 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와 정면으로 부딪 칠 수는 없다." 소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사부님은 나에게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와 싸움으로써 무림의 곧은 전통을 살리라고 하셨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을 도울 것이다." 금란은 말고삐를 잡았다. "셋째 나리, 나리의 무공을 이용하여 악행을 저지르려고 나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나리의 말씀대로 그와 형제의 의를 맺었다면 어째서 그는 나리를 해하려고 소녀에게 명하였습니까?" 소영은 채찍을 힘껏 휘둘러 가슴 속에 치미는 분노를 표현했다, "네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의리를 배신할 수는 없다. 그와 나의 결맹이 끊기기 전에는 모두 참아 내려는 것이 내 결심이다." 그들의 마차가 산모퉁이를 돌려는 순간이었다. 맞은편에서 세 필 의 준마가 질풍처럼 달려 왔다. 길이 워낙 좁았으므로 금란은 마차 를 세워 그들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첫 번째 말에 탄 사람은 청의 소녀로서 소영의 일행을 거들떠 보 지도 않고 지나쳤다. 곧이어 두 번째 말이 다가 왔다. 그 말 등에 는 흰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노인이 호랑이 같은 무서운 형상 을 짓고 마차 옆을 지나쳤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난날을 더듬던 소영의 머리 속에 문득 떠오 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 저 노인은 귀주 주막에서 만난 적이 있는 필수신룡 단목정 이로구나. 그리고 청의 소녀는 주조룡에게 던진 암기를 받아 낸 나 를 무서운 눈빛으로 쏘아 보던 그 소녀....' 이런 생각 중에 세 번째 말이 지나쳤다. 그 말 등에 탄 사람은 바짝 여위었으며 작은 키에 회색 장삼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다 지나가자 금란은 다시 말을 몰았다. 소영은 백화산장을 떠날 때 금화부인이 남몰래 전해 준 쪽지가 생각났다. <중도에서 필시 저지가 있을 것이오. 두 계집을 조심하시오.> '나의 앞길에는 수많은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강호 에 나서려면 반드시 응변하는 기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흉계를 미리 간파하고 상대를 물리쳐 의를 취할 수 있다.' 소영은 금화부인의 주의에 별 신경을 쓰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소영은 금란을 믿었다. 왜냐하면 금란은 심목풍을 배반하고 선을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소영의 뒤를 따르겠다고 비장한 결심을 했기 때문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금화부인의 쪽지가 자꾸만 뇌리에 떠올랐다. '금화부인이 쪽지에 쓴 글은 분명 중도에서 저지가 있다고 하였 는데...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소영은 두 갈래 생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이때 갑자기 금란의 외침이 들렸다. "셋째 나리, 앞에 웬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소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휘장을 젖히고 마차 밖으로 나갔 다. 과연 마차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네 명의 장한이 옆으로 줄 지어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들 중 두 명은 중년 장한이었고, 다른 두 명은 청색 장삼을 입 은 노인과 가사를 걸친 중년 정도의 화상이었다. 소영은 수 개월 동안 강호의 경험이 있었던 터라 상대를 대강 짐 작할 수 있었다. '저 노인과 화상은 훌륭한 무공을 지녔겠군. 상대하기 힘들겠는 데.' 청의 노인이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리며 소영에게 물었다. "귀하께서는 백화산장에서 오시는 길이신지요?" 소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오른쪽 장한이 비교적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귀하의 대명이 소영이라 하오?" 그는 또다시 고개만을 끄덕였다. 청의 노인은 갑자기 긴 한숨을 내쉬며 탄식을 하였다. "소대협은 강호에 발을 디딘 지 얼마 되지 않지만 벌써 강호에 명성을 떨친 고인이오. 그러나 소대협이 백화산장에 투신할 줄은 전혀 생각치 못했던 일이오. 아깝소, 아까워." 소영은 상대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를 가짜 소영으로 알고 있나?' "소인은 여러분들을 전혀 모르고 있소이다. 더구나 여러분과 나 는 원한 관계도 없는데 어찌하여 길을 막소?" 청의 노인은 눈을 빛내며 마차를 가리켰다. "한 가지만 묻겠소. 저 마차 안에는 무엇을 실었소?" "저 안에는 나와 동행하는 몇몇 친구가 있을 뿐이오." 왼쪽의 장한이 검을 뽑아 들고 소영에게로 몇 발 다가섰다. "만약에 다른 물건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소영은 맞은편 숲속을 날카롭게 살펴 보았다. '숲속에는 많은 장한들이 숨어 있구나.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저들에게 마차 안을 보게 하여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좋소이다. 여러분의 의향대로 하십시오." "금란아! 그 휘장을 걷어라." 네 명의 상대는 소영이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서로 얼굴을 쳐다 보고는 마차 가까이로 다가섰다. 청의 노인은 당삼고를 보자 의외라는 듯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물었다. "마차 안에 여자도 있소?" 소영은 가슴이 섬뜩하였다. '그렇구나. 아직까지 당낭자는 여자옷을 입고 있었으니... 그러 나 이미 벌어진 일이니 대답을 안할 수가 없었다.' "그렇소!" "우리는 삼장주와 동행하는 여인을 성가시게 할 생각은 없소. 수 고스럽지만 낭자를 내려오게 해 주시오." "좋소." 청의 노인은 마차 안을 들여다 보고는 구석에 쌓인 두 개의 상자 를 가리켰다. "저 상자를 볼 수 있겠소?" 소영은 울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찾으려고 이러는 것일까? 저것은 심목풍 과 주조룡이 나에게 준 부모님의 선물인데...' 조금도 꺼릴 게 없는 그는 선뜻 응하였다. "저 두 상자를 내려 저분에게 보여드려라." 상자는 빨간 색이 칠하여진 아주 호화스런 것이었다. 그 빨간색 상자는 각각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으며 두터운 비단으로 싸여 있었 다. 소영은 참다 못해 냉랭하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대낮에 앞길을 막는 것까지는 좋으나 마차 안까지 뒤지는 무례함을 소인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만약 당신들이 이 상자를 본 후 아무런 것도 발견치 못할 때는...." 청의 노인도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러면 소대협께 무릎을 꿇고 사죄하겠소." 소영은 네 명의 상대를 번갈아 쳐다 보며 금란에게 말했다. "저 상자를 열어 보아라." "저에게는 열쇠가 없습니다." 소영은 그제서야 자신에게도 열쇠가 없음을 깨달았다. 심목풍은 그저 마차 안에 선물 상자가 두 개 있다고만 말했기 때 문이었다. "그럼 자물쇠를 부숴버려라." 그러나 금란은 소영을 한 번 힐끗 보고는 마부석으로 갔다. 소영 은 그녀가 말을 듣지 않고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 서 그녀를 꾸짖으려고 막 입을 열려는데 금란은 마부석 밑에서 장 검을 꺼내드는 것이었다. 금란은 상자 앞으로 다가서서 검광을 날렸다. "쨍그렁!" 쇳소리와 함께 열쇠가 걸려 있던 고리가 떨어져 나갔다. 역시 그 다음의 상자도 똑같이 떨어져 나갔다. "저, 상자의 자물쇠가 풀렸으니 어서 상자를 열어 구경하시오." 노인은 미안한 표정을 보이며 천천히 왼쪽 상자 앞으로 다가서서 손을 뻗쳐 뚜껑을 열어 젖혔다. 상자의 뚜껑을 열리자마다 흰 가루 가 사방으로 날려 짙은 약냄새가 주위 사람들의 코로 파고 들었다. 청의 노인은 마치 앞가슴을 일격당한 것처럼 중심을 잃고 뒤로 몇 발 짝 물러서며 비틀거렸다. 두 명의 장한이 깜짝 놀라 달려 나와서 청의 노인을 부축하여 열 려진 상자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때 두 명의 장한은 상자 안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몸에 승복을 걸치고 조그만 목탁을 든 채 지금까지는 한 마디도 없었던 화상이 심각한 표정으로 천천히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안을 들여다 보고 그대로 두 손을 합장하고 나지막하게 염 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소영은 네 사람이 놀라며 또한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저들이 상자 안을 들여다 보고 저토록 슬퍼할까?' 소영은 걸음을 옮겨 열려진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소영은 상자 안을 무심코 들여다 보고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뒤로 서너 발자 국 물러났다. 그 상자 안에는 흰 가루를 깔아 놓았고, 그 위에는 사람의 머리 가 반듯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머리는 벌써 오래 전에 잘 려졌던 것으로 아직은 얼굴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수염은 턱을 덮고 있었고 두 눈은 부릅떴고 머리칼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소영은 그 상자 옆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상자를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오래 된 듯 색바랜 두 통의 편지와 금빛나는 단검과 동 (銅)거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는데 오래된 듯 색이 누렇게 변해 있었 다. 청의 노인은 잠시 후 안정을 되찾고 냉랭한 음성으로 소영에게 외쳤다. "이렇게 증거물이 나타났는데도 삼장주는 변명할 말이 있소?"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상자 안의 사람을 가 리키며 다그쳐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그러자 이제까지 땅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있던 두 장한이 약속이 나 한 듯 벌떡 일어나며 소영을 향해 장검을 휘둘렀다. 소영은 뒤로 비켜 서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두 분은 잠깐만 진정하시오. 소생에게 몇 마디 말할 기회를 주 시오." 그러나 두 명의 장한은 이미 흥분이 극도에 달하여 소영의 외침 은 듣지 못한 채 계속 몇 수를 공격했다. 소영은 빈 손으로 그들의 공격을 피할 뿐 반격은 하지 않았다. 두 장한은 벌써 이십여 초를 휘둘렀지만 소영의 털끝 하나 건드 리지 못했다. 청의 노인은 소영의 무공을 알아 보고 그들에게 명령했다. "멈춰라!" 두 장한은 즉시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노부가 직접 삼장주께 가르침을 받고 싶소이다." 청의 노인은 말을 맺는 동시에 미처 소영의 대꾸도 듣지 않고 번 쩍 검광을 뿌리며 옥녀투사(玉女投死) 초식으로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었다. 소영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려 그의 일격을 피하며 다급하게 외쳤으나 청의 노인의 옥녀투사는 계속 허공을 가르며 소영의 심장 을 위협했다. 금란은 뒤에서 그 광경을 보고 매우 위급함을 느꼈다. "셋째 나리, 조심하십시오. 그들의 검초가 표독스럽습니다. 지금 은 말로써 그들을 안정시킬 때가 아닙니다." 두 장한은 엉뚱한 참견자가 나타나자 하나는 금란에게 또 하나는 은란에게 덮쳐 갔다. 금란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장검을 움켜 쥔 채 재빨리 은란의 앞을 막아 섰다. "당신들은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공격하다니 그게 도리요?" 그 중 한 명이 장한이 날카롭게 호통을 쳤다. "백화산장놈들 모두가 죄없는 인명를 해쳐서 온 손이 피로 물들 었을 것이다. 백화산장놈들은 죄없는 인명을 해쳤다. 오늘 너희들 은 죽는다 해도 그 죄를 씻지 못할 것이다." 돌연 왼쪽의 장한이 날카롭게 호통을 치며 횡소천군의 초식으로 금란의 허리를 끊을 듯 다가왔다. 금란은 그들의 공격을 도저히 피해 낼 수 없다고 느끼고 재빨리 금사전원(金絲廛圓)의 초식을 전개했다. 동시에 장검을 종횡으로 휘둘러 은란과 당삼고를 보호하였다. 이때, 입속으로 염불만 외우고 있던 화상이 상자 앞으로 성큼 다 가서서 금빛나는 단검을 집어 들어 재빠르게 품 속으로 집어 넣는 것이었다. 소영은 순간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이오? 고인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오? 아니면 내 물건을 훔치려는 것이오?" 이같은 호통소리와 함께 소영은 검을 잡고 있는 청의 노인의 오 른팔을 향하여 장력을 퍼부었다. 그는 몸을 날려 피했으나 소영의 연속적인 장력에 뒤로 물러났다. 소영은 우장으로써 상대의 오른팔을 공격하고 좌장을 들어 더 날 카로운 장력을 펼쳤다. 소영의 연환섬전(連環閃電) 장법은 강호에서 으뜸이었다. 연환섬 전의 장력은 그 형태가 묘하여 상대로 하여금 어디를 공격의 목표 로 삼는지 모르게 할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소영이 연속 십육 장을 날리자 청의 노인은 조금도 반격을 가하 지 못하고 뒤로 육, 칠 척 가량을 물러섰다. 소영의 장력이 다음으로 옮겨지려는데 별안간 청의 노인이 몸을 솟구쳐 단검을 감춘 화상에게로 덮쳐 가며 호통을 쳤다. "내 놓으시오!" "무엇을 내 놓으란 말이오?" 소영이 대신 답했다. "금검이오. 당신은 내가 못 본 줄 아시오?" "이것은 당신네 백화산장의 물건도 아니며 설사 보면 어떻게 하 겠소?" "그런 악랄한 수법으로 보아 당신은 정파의 고승이 아닌 것 같 소." "아무아미타불, 시주께서는 빈도를 어떻게 본단 말씀이오?" "내가 보기에는 도적과 같소." 화상은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 다. "이 금도는 빈도의 옛 친구의 것이니 나는 그의 자식에게 주겠 소." 화상은 잠시 말을 끊고 두 개의 상자를 번갈아 쳐다 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빈도는 수십 년 간 강호에 살면서도 아직 싸움이라는 것을 모르 고 지내 왔소. 그러나 죽은 사람은 빈도와 오랜 교분이 있었던 친 구로서 절대로 모른 체 할 수 없는 일이구려. 빈도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당신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어 디 빈도에게 들려 줄 수 있겠소? 금도를 처음 본 순간 당신을 죽이 고 싶었으나 확실한 범인을 알아야겠기에 감정을 누르고 참았소." "그럼 그 금검이 비참했던 과거와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어찌 이 금검뿐이겠소. 저 두 통의 편지도 그리고 동거울도 모 두 옛 무림의 비참했던 사건과 크게 관련이 있소이다." 소영은 이제 조금씩 사건의 실마리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의 겉모습으로는 인품을 모른다고 하더니 이 화상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대사님의 법호를 여쭙고 싶습니다." "허허허.... 빈도는 선천적으로 몸이 여위어 마치 백설 중에 우 뚝 솟은 마른나무와도 같아서 자칭 고목(枯木)이라 하오." 소영은 그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 고목대사이군요. 소생 미처 몰라 뵈옵고 실례를 범하였사옵 니다. 대사께서는 이번 일의 내정을 잘 알고 계시니 저 두 장한의 손을 멈추게 해 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소시주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 이 인자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소." "그럼 대사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목대사는 고개를 돌려 청의 노인에게 입을 열었다. "시주, 죄송합니다만 잠간 저들에게 손을 멈추라고 명해 주십시 요." 청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 두 장한에게 소리쳐 싸움을 멈 추게 하였다. "노형의 존성 대명은 어떻게 됩니까? 또 상자 속의 인물은 누구 입니까?" 청의 노인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자신을 소개하였다. "노부는 동공성(董公誠)이라 하오. 의형(意形) 문파의...." 그는 천천히 눈길을 돌려 상자를 쳐다 보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상자 속의 머리는 본문의 제 구대 장문인이오. 그리고 저 장한 들은 문하의 제자들이오. 그들 사제간의 정은 마치 부자와도 같아 서 저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소." "동형은 그와 어떤 사이였소?" "나도 그의 사제요." 동공성은 이제 소영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귀장께서 저 머리를 오랫동안 보관한 것 같은데?" 소영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것은 나도 전혀 모르는 일이오." 동공성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물었 다. "소형은 강호에 발을 디딘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벌써 명성은 널리 퍼져 있소. 그런데 어째서 그 악의 소굴인 백화산장엘 들어 갔소?" "그것은... 그것은... 까닭이 있어서였소. 내 개인의 사정이었으 니 남들에게 이야기할 것이 못 되오." 동공성은 소영을 한참 동안 쏘아 보며 말이 없다가 심각한 표정 으로 입을 열었다. "노부가 소형을 속이는 것이 아니오. 오늘 이곳에 온 인물들은 의형 문파뿐이 아니오....." "소생도 알고 있소. 저 속에는 다른 고인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 "소형은 어떻게 오늘 일을 처리하겠소?" "소생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소생은 동형의 고명 한 가르침에 따르겠소." "그것은 곤란하오. 노부가 알기로는 저 숲에 숨어 있는 인물들 중에는 소림 문하의 고승과 삼대 문파 중의 고수들이 포함되어 있 을 것 같소." "그들이 모두 소생에게 원한을 가진 인물들이란 말이오?" "백화산장이 저지른 악은 너무나 많아 소영이 그 일에 전연 무관 하다 하더라도 백화산장의 삼장주라는 것만으로도 오늘 살아서 이 곳을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오." 소영은 눈썹을 치뜨고 크게 소리쳤다. "대 문파의 인물들은 강호에서 인품이 뛰어나기로 숭앙을 받고 있소이다. 그런데 사람을 세워 놓고 무작정 원망하고, 괴롭히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소생도 참는 것에 한도가 있소이다." 고목대사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들은 흑백을 가리지 못한 것에 의심을 품고 있고 오래 전부터 내려 오는 원한이 있소. 소시주께서는 저들과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시오. 소시주께서는 최대한의 도량으로 참아 주시오. 오늘의 국 세를 피로 물들이는 것은 원치 않소." 고목대사는 여기까지 말을 하고 돌연 눈을 감고 잠시 염불을 외 웠다. "나무아미타불, 소시주의 무공은 빈도가 예측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오. 오늘 소시주께서 이 역경을 이겨 내지 못한다면 강 호의 무림은 언제까지나 피로 물들여질 것이오. 빈도는 지난 수십 년 간 산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강호의 근래 일은 잘 모르고 있소 이다. 더구나 백화산장의 장주로 있는 심목풍은 만나 보지도 못하 였소. 그가 무림에 많은 원한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공이 절 예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소시주를 만나 보니 더욱 그의 무공이 높다고 느끼게 되었소." "소생은 죽을 수는 있으나 모욕당할 수는 없소이다. 세상 인물들 이 소생을 용서할 수 없다면 굳이 변명은 하지 않겠소." "저들은 오늘 복수를 하려고 모였소. 소시주는 강호 무림의 평화 를 위해 조그만 모욕을 참고 결백을 보여 주는 것이 좋을 것이오." 소영은 한 번 결심하면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생사는 별로 중하지 않소." 고목대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실망어린 표정으로 말을 받 았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 소? 작은 일을 참지 못하고 피를 흘린다면 소시주는 군자라고 볼 수 없소. 참음에 현명함이 들어 있으니 빈도의 말대로 하시오." "참으면 어떻고 안 참으면 또 어쩌겠소?" "참는다면 흉을 길로 변화시키고 포악을 온순으로 대하게 되는 것이오. 소시주의 생명과 모욕은 하나이지만 여기에서 생기는 일은 온 강호의 중대사요." 소영은 내심 짚이는 바가 있어 그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하였 다. 소영이 예를 올리자마자 숲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소영에게 달려 오고 있었다. 그들은 사십여 명쯤으로 벌써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 다. 소영은 암암리에 진기를 모으고 걸으면서 금란에게 소리쳤다. "그들 두 사람을 마차에 태우고 잘 보호하여라." 금란도 사태의 긴박함을 느끼고 재빨리 은란과 당삼고를 부축하 여 마차에 태웠다. 나타난 군호들은 소영을 겹겹이 둘러싸고 포위망을 좁혔다. 잠시 이같은 상태가 계속되는데 서쪽 구석에서 흰 옷을 입은 소년이 앞 으로 뛰어 나오면서 비통한 음성으로 외쳤다. "아버님의 유서다!" 소년은 상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한 통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소영은 그 편지를 보았다. <이 편지는 나의 처 문아가 직접 뜯어 보시오.> 그 글씨는 매우 정교하게 또박또박 씌어 있어 죽은 사람의 인품 을 짐작케 하였다. 소년은 슬픔과 원한이 복받치는지 온 몸을 떨었다. 소영은 주위를 훑어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백화산장과 원한을 맺고 있다니! 어쩌다 가 내가 이런....' 소영을 둘러 싼 군호들은 한 마디 말도 없었고 또 그들끼리도 말 을 주고 받지 않았는데도 소영과 그들 사이에는 절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소영은 최대한의 노력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무어라 입을 열어 이 절박한 분위기를 깨뜨려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고목대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소시주, 마음을 가라앉히시오. 지금의 이것은 훗날 소시주의 운 명을 가름질하는 순간이오. 훗날을 생각하여 이 고비를 넘기시오." 소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까지 무릎을 꿇고 떨기만 하던 소년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 어머님은 아버님을 걱정하시다가 한 달 전에 돌아가셨 습니다. 이 자식이 어머님을 대신하여 유서를 뜯어 보겠사오니 허 물치 마십시오." 주위의 군호들이 이 소년을 잘 알고 있는 듯하였으나 누구 한 사 람 소년에게 위로의 말을 보내지 않았다. 소년은 낭랑하게 유서를 읽어 내려 갔다. <이 글은 현처에게 보내는 것이오. 나는 백화산장에 잡혀가 열 일곱 가지의 각각 다른 독형을 받았소. 당신에게 이 글을 쓰는 순 간이 아마 이 세상의 마지막이 될 것이오. 난 당신에게 원수를 갚 아 달라고는 안하오. 다만 부부의 정으로서 내 아들을 훌륭하게 키 워 그 애로 하여금 아비의 원한을 풀어 주게 해 주시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허전한 마음 금할 길 없구려.> 소년이 다 읽자 소영은 그 유서 밑에 서명된 이름을 살펴 보았 다. 그곳에는 남파 태극문(太極門)의 제 십이대 장문인 석준산(石 俊山)이라고 씌어 있었다. 소년이 흘린 눈물로 편지는 온통 젖었다. "석장문,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영존의 협명은 강호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 무림의 어느 누가 공경을 하지 않겠소. 그러 니 어서 진정하시고 귀중한 몸을 보호하여 영존의 복수를 해야 하 오이다." 그때 두 명의 노인이 앞으로 나와 소년의 양 옆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 중 하나가 부드럽게 소년의 등을 두드리며 입을 열 었다. "석장문인은 본문을 다시 일으켜야 될 커다란 짐이 있소이다. 그 리고 원수도 갚아야 되니 몸을 조심하시오." 소년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석준산의 유서를 왼쪽 노인에게 건네주면서 울음섞인 어조로 말했다. "두 분 사숙은 저 대신 이 유서를 보관해 주십시오. 불행히 제가 목숨을 잃게 되면 두 분께서 남은 제자들을 모아 다시 태극문을 세 워야 됩니다. 저 때문에 강호에 우리 남파 태극문이 없어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소년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눈길을 돌려 소영을 쏘아 보았다. "당신이 바로 백화산장의 삼장주요?" 소영은 정중하게 답례를 하였다. "그렇소. 내가 소영이오." "아버님께서 백화산장에서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은 이 유서가 증 명을 하고 있으니 구차한 변명은 않겠지요? 저는 이제서야 지금까 지의 의혹이 풀렸소. 살인을 한 자는 목숨으로써 갚아야 되고 돈을 꾼 자는 돈으로써 갚아야 이치에 맞는 것이오. 그러므로 먼저 삼장 주에게 피맺힌 원한을 갚겠소." "석형의 말씀도 옳소. 그러나 소생에게도 깊은 사연이 있으니 먼 저 소생의 말을 들어 주시오." 소영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주위 군호들 사이에서 소복차림의 중 년 부인이 급히 뛰어 왔다. 그녀는 오른손에 영패를 들고 왼손은 얼굴을 감싼 채 처량하게 울음을 터뜨렸는데, 소영은 그 여자를 유심히 살펴 보았으나 안면 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중년 부인은 대뜸 입을 열었다. "어느 분이 백화산장의 장주요?" 청의 노인이 들고 있는 칼로 소영을 가리키며 입을 열려는데 소 영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소인이오." 그러자 소복 여인은 원한에 찬 눈빛으로 한참 동안 소영을 쏘아 보더니 돌연 등에 꽂혀 있는 장검을 뽑아 들고 날카로운 일격을 뻗 쳤다. 그녀의 검초는 매우 날카롭고 살기를 띠어 소영의 가슴을 뜨 끔하게 만들었다. 소복 여인은 자신의 검초를 가볍게 피하기만 하고 반격을 보내지 않는 소영의 행동을 보자 내심 깜짝 놀랐는지 잠시 손을 멈추고 멍 하니 소영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조금 전보다 더욱 슬픈 통곡을 하며 다시 장검 을 휘둘렀다. 소영은 그녀의 울음 소리에 반격을 하려는 마음이 그 대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녀의 검초는 갈수록 묘기를 보여 잠시의 틈도 없이 소영의 급 소를 노리고 덤벼들어 더 이상은 피하기가 힘들었다. 소영은 어느 순간 자신이 정말 헤어날 수 없는 위험한 경지에 달 했다고 생각되자 우렁찬 외침과 함께 한 줄기 날카로운 장풍을 뻗 어 여인을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게 하였다. 순간 그는 왼쪽 어깨의 감각이 약간 이상함을 느껴 돌아 보니 왼 쪽 어깨에서 붉은 피가 솟아 나와 옷을 물들이고 있었다. 고목대사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무아미타불, 소시주의 인내심은 실로 평범하지 않소이다. 빈 도는 소시주를 존경하오." 소영은 창백한 안색으로 여인에게 물었다. "당신의 남편이 백화산장에서 목숨을 잃었는지는 모르나 나는 절 대로 당신 남편을 죽이지 않았소. 내가 백화산장으로 들어 간 것은 수 개월 전이오. 그럼에도 부인께서 나를 원수라고 우기신다면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으며 부인께서 다시 공격을 한다면 나도 부득이 반격을 하겠소." 소복 여인은 냉소를 띠면서 말을 받았다. "만약 당신같이 높은 무공을 지닌 사람이 없었다면 남편은 목숨 을 잃지 않았을 거요." "부인은 나를 원수라고 믿는 것이오?" "그렇소. 당신과 같은 고수라야만 비로소 내 남편을 살해할 수 있으니 어찌 의심하지 않겠소." "하하.... 부인께서는 너무나 나를 과찬하시는군요." 그녀는 다시 날카로운 일격을 보냈다. 소영은 왼쪽어깨의 상처가 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전처럼 그녀의 공격을 피하고만 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재빠르게 오른손을 뻗어 여인의 오른 팔목을 짚어 갔다. 그녀는 검세를 늦추고 팔을 밑으로 내려 소영의 반격을 피하고는 곧이어 회풍약류(廻風弱柳)로써 검초를 전개시켰다. 소복 여인의 독기 어린 검초는 주위의 군호들에게도 두려움을 주 었다. 그러나 소영이 반격을 시작하자 그녀의 검초가 날카로운 것 보다도 소영의 장세가 더 거세고 빨라 이제는 전과 같은 위세를 보 이지 못하였다. 그녀가 몇 발 뒤로 물러나려는데 돌연 우렁찬 소리와 함께 소영 의 오른손이 큰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것 같더니 소복 여인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앗!" 그녀의 검을 쥔 팔목에 소영의 장세가 정통으로 맞은 것이었다. 장검이 땅에 떨어지자 소복 여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 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아이고.... 남편의 원수를 눈 앞에 두고..." 그녀는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군호들을 헤치고 어 디로 인가 달려 갔다. 소영은 그녀가 멀리 사라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저 부인은 누구일까? 다음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으면 오늘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여 그녀의 나에 대한 원한을 풀어 주어야겠 다.' 소영의 상처는 점점 커져 상처를 누르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붉 은 피가 새어 나왔다. 고목대사는 소영의 창백한 안색과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에서 그의 인내도 한계에 다달았다고 생각했다. '소시주의 인품은 높고 무공도 경지에 달한 것 같다. 그는 훗날 반드시 무림에서 일대 최고협이 될 인물이다. 오늘 그를 너무나 지 나치게 억눌러 궁지에 몰아 넣는다면 그는 선을 버리고 악을 택할 것이니, 무림의 평화를 위하여 내가 나서서 이 쓸데 없는 결투를 말려야겠다.' 그때 석준산의 아들이 품 속에서 일 척도 못 되는 단검을 꺼내었 다. "소생 석봉선은 삼장주의 절학을 한 수 받고 싶소." 소영은 소복 여인에게 왼쪽 어깨를 부상당했던 터라 석봉선의 말 을 듣자 가슴속에서 불같은 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조그만 소년 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니 분노를 억누르고 침착하게 입을 열 었다. "영존께서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그것을 알고 있었소?" "백화산장이오." "그럼 어째서 백화산장을 찾아가지 않았소?" "그동안 백화산장에서 아버님이 살해되셨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 어 지금까지 주저해 왔소." 석봉선은 옆에 놓인 두 개의 상자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아버님의 유서를 본 이상 다른 변명은 있을 수 없소. 당신 이 만약 백화산장에서 아버님을 살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백화산 장의 삼장주로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히 죽음을 기다려야 되오." 소영은 더 이상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분은 소생의 변명을 조금도 믿어 주시지 않으시니 할 수 없 이 무공으로써 서로의 생사를 가려야겠군요." 그러자 옆에서 누구인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소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호통쳤다. "여러분이 나를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단정하였으니 나도 참을 수 없소. 여러분들 중 몇 사람을 죽여야겠소." 석봉선이 다시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삼장주, 검을 드시오." 그는 비록 어리고 또 부친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일파의 장문인으로서의 위풍을 지니고 있었다. "소생은 이 두 손으로 상대하겠소." "삼장주가 검을 쓰지 않겠다면 할 수 없이 무례한 행동을 하겠 소." 석봉선은 말을 끝내면서 단검을 휘둘러 백학척령(白鶴剔鈴) 초식 으로써 소영의 옆구리를 베려 덮쳐 갔다. 소영도 그와 맞서기 위하 여 천전신지(天電迅至)의 장력으로 석봉선의 오른팔을 쳐 내었다. 이것은 남일공이 수십여 년의 수련으로 만들어 낸 연환섬전 장법 과 비슷하여 빠른 속도로 상대의 허점을 공격하는 묘기였다. 더구 나 천하의 각 문파에서 제일 유익한 장법만을 골라낸 것으로 적을 공격하고 또한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연화섬전 장법으조 초식을 바꿔서 연속 팔장을 뻗쳤다. 석봉선은 제대로 손을 쓰지도 못하고 수세에 몰리면서 궁지에 이 르렀다. 그러나 소영 역시 많은 출혈 때문에 제대로의 힘을 발휘하 지 못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며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 거렸다. 석봉선은 재빠르게 소영의 허점을 알아차렸다. 그는 수세로 몰리 던 것을 돌연 공세로 바꾸어 검을 휘둘렀다. 검초는 전보다 약했지 만 쉴새 없이 번득였다. 이것이 바로 남파태극문에서 무림을 독주하는 회풍십팔검(廻風十 八劍)이라는 절기였다. 언뜻 보기로는 약한 검초로 보였으나 그것 을 매회 반복하며 처음에서 끝으로, 끝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하여 오십사 초가 되었고 다시 반복 되기 일백 육 초로 끝나는 것이었 다. 이처럼 여섯 검을 휘날리는 것을 가리켜 일검이라고 불렀다. 소영은 회풍십팔검을 간신히 피해 낸 다음 몸의 피로가 극도에 달했다고 생각이 미치자 내심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소영은 비록 장산패에게서 각파의 검법을 전수받지는 못하였지만 그들 특유의 정묘한 변화는 익혔으므로 상대의 검초가 움직이는 것 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회풍십팔검은 소영으로서도 처음 보는 검법이었다. 그 검법은 약간의 빈틈도 찾을 수 없었고 그대로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이때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석봉선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소영은 검세가 자신의 심장을 향해 뻗어오는 것을 느꼈으나 제대로 막아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영의 앞가슴을 향했던 석봉선의 검 세가 별안간 밑으로 처지며 밑에서부터 검을 돌려 옆구리를 베려고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소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29. 심목풍의 계략(計略) 석봉선이 소영에게 뻗친 이 일검은 바로 회풍십팔검의 한 절초로 써 회류선탕(廻流旋蕩)이라고 하는 초식이었다. 소영은 왼쪽 어깨의 혈도를 봉쇄시켜 유혈을 방지시키긴 했지만 팔을 쓰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했으므로 석봉선의 이 일검이 비스듬 히 왼팔을 찔러 오자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끝이 팔꿈치 밑을 스치면서 옷이 찢어지고 선 혈이 솟았다. 석봉선의 검세가 소영에게 적중하자 군호들은 내심 기뻤다. 그러 나 그 순간 소영이 오른손을 들어 수라지력으로 석봉선의 오른팔 을 공격하자 석봉선은 손에 들었던 장검을 놓치고 휘청거리다 쓰러 지고 말았다. 소영은 연속 두 번이나 검상을 입었으며 또한 운기하여 수라지력 을 발휘했기 때문에 비록 석봉선에게 중상을 입혔지만 자신의 혈도 를 봉쇄할 만한 진기는 다시 모을 수가 없었다. 자연히 그의 혈도는 다시 풀려서 상처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그의 옷소매를 완전히 피로 물들였다. 주위에서 관전하고 있던 군호들은 대부분이 수라지력을 모르고 있던 터라 소영이 검상을 입은 몸으로 석봉선을 쓰러뜨리자 놀라움 을 감추지 못했다. 군호들 가운데 오십쯤 되어 보이는 노인 둘이 재빨리 뛰어 나오 더니 하나는 석봉선을 부축해 일으켰으며 또 한 사람은 등에 멘 장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남파태극문하등곤(南派太極門下鄧坤)이 백화산장 삼장주의 절기 를 지도받겠소." 그는 미처 소영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공격을 취했다. 이 때 돌연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당신들은 모두 무림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부상 입은 사람을 상대하다니 그게 무슨 영웅이라 할 수 있겠소? 만일에 당신이 결투를 원한다면 내가 당신을 상대해 주리다." 푸른옷에 검을 쥔 서동 하나가 소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섰다. 나타난 서동은 바로 변장한 금란이었다. 등곤은 검을 도로 거둬들이고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남자요, 아니면 여자요?" 금란은 그들이 번갈아 소영을 상대하는 것을 보자 마음이 다급한 나머지 미처 여자의 음성을 숨기지 못한 것이다. 금란은 약간 흠칫했으나 곧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참견 마시오. 우선 내 보검을 굴복시킨 다음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등곤은 냉랭하게 말했다.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목숨을 바쳐 그 죄를 보 상해도 그것을 다 갚지 못할 악종들이니라." 등곤이 번쩍 손을 휘두르며 일검을 공격했다. 차가운 검빛이 번 쩍이며 공중을 날았다. 쌍방의 검 끝이 노리는 곳은 모두 치명적인 급소였다. 소영은 등곤의 검초가 절묘한 것을 보고 금란이 그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차 안의 은란과 당삼고는 축골독환(縮 骨毒丸)을 복용하였으니, 그녀들을 돌보지 않고 도망치지 않는 이 상 살아남는 길은 오직 이들을 격퇴시키는 것이다. 소영은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싸매 고 고개를 돌려 고목대사를 바라보며 차디차게 말했다. "대사, 이 자들은 우리를 이곳에서 살해하려는 속셈이 분명하오. 소생은 두 번을 양보하여 두 차례의 검상을 입었으니 이제 나 소 아무개가 검을 비정하게 휘둘렀다고 탓하지 마시오." 고목대사는 나지막하게 염불을 외더니 입을 열었다. "사무친 원한과 분노는 참기 힘드오이다. 시주께서는 소승의 옛 친구가 올 때까지 조금만 더 참아 주시오. 그가 나타나면 오늘의 격투는 곧 끝장이 날 것이오." 주위의 군호들은 눈길을 두 사람에게 보내면서 서로 수군거렸다, 이때 별안간 등곤의 날카로운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검을 놓으시오!" 그는 날카로운 장법으로 금란의 오른손을 향해 내려 쳤다. 그녀 의 응변태세는 번개같이 빨랐으나 등곤의 신속한 검을 피해 내지는 못했다. 차가운 빛이 번쩍 스쳐가자 금란의 부드럽고 백옥같이 흰 팔은 마침내 등곤의 검날에 세 치 가량 베이고 말았다. 그러나 금란은 악착같이 반격을 가했다. 그녀의 팔에서 흐르는 선혈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사방에 뿌려졌 으며 주위에서 관전하는 군호들에게도 튀었다. 소영은 한 차례 운공조식을 끝낸 후 체력이 다소 회복되자 손을 휘둘러 재빨리 수라지력을 펼쳤다. 곧이어, 등곤의 비명이 들리더니 그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뒤로 나가 떨어졌다. 소영은 등곤을 쓰러뜨린 후 황급히 금란에게로 다 가가서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자를 갖고 빨리 길을 떠나자!" 소영은 재빨리 금란의 손에서 보검을 잡아채어 휘둘렀다. 그러자 검광이 번쩍이며 차가운 검막을 이루어 달려드는 군호들의 공격을 막았다. 그녀는 재빨리 말고삐를 잡고 마차를 몰아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소영의 검세는 연속 변화를 일으키며 덮쳐 오는 두 명의 장한을 쓰러 뜨린 후 호통을 쳤다. "나의 길을 막는 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군호들은 소영의 무공이 이토록 높은 것을 보자 두려운 마음이 생겨 아무도 감히 앞장서서 막으려는 자가 없었다. 소영의 용맹은 군호들의 사기를 꺾었으며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단숨에 사, 오십 리 길을 달려갈 수 있었다. 그는 그제서야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그만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진기를 모아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느라고 결사적인 반격을 하 였으므로 상처가 다시 도져서 피를 많이 흘렸던 것이다. 금란은 깜짝 놀라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셋째 나리.... 셋째 나리....." 소영이 힘없이 눈을 뜨며 간신히 말했다. "걱정 마라! 나는 죽지 않는다. 나를 부축해서 마차에 오르게 한 다음 다시 길을 재촉하여라!" 말을 마치자 소영은 다시 기절해 버렸다. 금란은 이를 악물고 자 기의 아픔을 참으며 소영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마차로 다가갔다. 그때 등 뒤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의 상처는 심하냐?" 그녀는 전신이 오싹해지며 두 손에 힘이 쭉 빠져 품 안에 부축한 소영을 힘없이 놓쳐 버렸다. 이때 흰 손이 쓱 뻗쳐 오더니 쓰러지 는 소영을 재빨리 받아 들고 천천히 땅에다 눕혔다. 그러자 금란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조용히 땅에 꿇어 앉았다. "대장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미처 몰라 뵈어 소녀는 멀리 마중을 못하였으니 저의 죄를 대장주님께서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거라! 내가 오리라는 것을 네 어찌 알 수 있었겠느냐." 금란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심목풍의 거대한 체격이 바로 코 앞에 있었다. 이때 멀리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 오며 몇 필의 건마가 질풍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심목풍은 소영을 번쩍 들어 마차에 올려 놓았다. "빨리 마차를 출발시켜라. 그러나 너무 빨리 달리지 말고 저 말 들이 쫓아오게끔 하여라. " 금란은 묵묵히 마차에 뛰어올라 채찍을 휘둘러 쏜살같이 마차를 몰았다. 뒤쫓는 말발굽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바싹 따라붙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비명소리가 흙먼지 속에서 일어났다. 금란은 뒤돌아 보지 않고서도 심목풍이 뒤쫓는 사람에게 손을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백화산장에 대해서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있으 며, 또 셋째 나리에 대한 오해도 이미 깊다. 대장주가 마차 속에 몸을 숨기고 암기를 날려 공격해 오는 무림 인물들을 상하게 했으 니, 이 앙갚음은 이제 모두 셋째 나리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훗날 셋째 나리는 변명할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도 곧이 듣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셋째 나리께서 무림의 각대 문파의 연합공격을 받 게 되면, 천하에 발붙일 곳이 없어져 할 수 없이 백화산장으로 돌 아가서 다시 대장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되리라.' 그녀는 대장주의 명령을 어기려는 생각으로 채찍을 휘둘러 마차 의 속력을 재촉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포장 속에서 심목풍의 굵다란 외침이 들렸다. "마차를 좀 천천히 몰아라!" 그녀는 심목풍의 호통을 듣자 더는 어길 수가 없어서 말고삐를 잡아당겨 마차의 속력을 줄였다. 그러자 또다시 말발굽소리가 가까 이 들리면서 처참한 비명이 뒤따라 일어났다. 이러한 비명 소리는 자그만치 아홉 번이나 계속 되었다. 그때 돌연 마차 속에서 심목풍의 음성이 들렸다. "마차를 멈추어라." 마차가 멎자 심목풍의 거대한 몸집이 구부정하게 나오더니, 손을 들어 금란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금란아! 셋째 나리는 너에게 대우가 좋더냐?" 이 지극히 보기 힘든 친절하고 부드러운 미소는 금란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녀가 심목풍에게 순결을 잃던 밤에도 그는 이렇게 온화하게 웃 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가 말하는 좋은 대우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셋째 나리께선 모든 사람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계시는 분이신 데 어찌 저같은 비천한 종년을 눈여겨 보시겠습니까?" 심목풍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가 아무런 호감도 없이 너와 은란을 데려가겠다고 자청했겠느 냐? 네가 열심히 셋째 나리의 시중을 잘 든다면 훗날 반드시 너희 들의 사이를 맺어 줄 것이다." "저같은 종의 몸으로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세월이 흐르면 정이 생기기 마련이니 자연히 그는 너를 아껴 줄 것이다." 그는 웃음을 거두면서 숙연하게 말했다. "그가 깨어난 후에 방금 있었던 사건을 이야기해 주면 안 된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왔었다는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네가 내 말을 잘 이행한다면 훗날 너를 그의 첩으로 만들어 주겠다." 그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 그는 이미 많은 사람들과 원수를 맺었다. 앞으로는 오직 백화산장으로 돌아 오는 길만이 그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이해득 실은 뻔한 것이니 너는 잘 생각해서 행동하여라. 그럼 나는 이만 떠난다." 금란은 황급히 그를 불렀다. "대장주님, 은란 동생과 당삼고가 복용한 축골독환이 시한이 되 었습니다. 대장주님께서는 자비심을 베풀어 그녀들을 구할 수 있는 해독약을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약 소영이 깨어나 어떻게 그녀들이 해독을 했는가 물을 때 뭐 라고 대답하겠느냐?" "그것은 제가...." 심목풍은 잘라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미 내가 준비해 온 바가 있다. 그러니 너는 아무 염려 말고 어서 길을 떠나라!" 금란이 어찌 더 이상 그의 분부를 거역할 수 있으랴. 그녀는 몸 을 날려 마차 위에 오르더니 채쩍을 휘둘렀다. 마차는 다시 쏜살같 이 달리기 시작했다. 단숨에 칠, 팔 리 길을 비호같이 달려 온 다음 그녀는 비로소 말 고삐를 잡아당겨 마차를 멈추었다. 소영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으며 어느새 상처에는 약 이 발라져 있었고 유혈도 멎었다. 금란은 서서히 손을 뻗쳐 추궁과혈(推宮過穴)의 수법으로 소영의 몸을 더듬어 몇 군데 막힌 혈도를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녀가 잠시 몸을 주물러 주니 소영의 혈도는 곧 풀렸다. 소영은 가볍게 숨을 뱉으며 서서히 눈을 뜨고 금란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상처에 바른 약을 보고 입을 열었다. "네가 나에게 약을 발라 주었느냐?" 금란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일어나 앉으며 당삼 고와 은란을 바라 보며 말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더 이상 추격해 오지 않았더냐?" "저는 셋째 나리를 마차에 모신 후 즉시 전속력으로 마차를 몰고 달려 왔기 때문에 그들이 추격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금란은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고 감히 소영을 쳐다 보지 못했다. "아아! 그들의 분노를 풀기도 어렵지만 흑백도 가려내기 전에 나 를 그렇게 억누르고 공격하니 참으로 견디기 힘드는구나." 금란이 그를 위로했다. "강호는 원래가 시비 투성이며 이곳에 몸을 둔 이상 은혜와 원한 에 얽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소영은 불만이 가득하여 말했다. "말은 비록 그렇다마는 그래도 그들은 먼저 흑백을 가려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들은 오래 전부터 깊은 원한을 품어 왔으니 이미 사리를 따질 수 없었겠지요." 소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그들을 탓할 수도 없지. 대장주는 그 많은 사람들 과 원수를 맺은 증거물을 내 마차에 올려 놓았으니. 이것은 고의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이 아니겠느냐?" 또다시 소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 소영은 백화산장에 대해 죄를 진 일이 없는데 그들은 어째서 이처럼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일까?" 금란은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셋째 나리는 비록 무공이 고강하나 천하의 무림 인물들과 원한 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오해를 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두 분의 형제가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곳에는 없지. 그들 형제의 명성과 지위면 이 일을 해결해 줄 수 있을 텐데 ....." 금란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 두 형제분은 어떤 인물입니까?" "중주이고..." 금란은 소영의 말에 깜짝 놀랐다. "중주이고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 같습니다." "그 두 사람의 무공은 고강하며 강호의 경력도 매우 풍부하다. 강호에서 일어나는 모든 흉계는 이들 두 사람의 눈을 벗어날 수가 없지. 하지만 지금 그들이 이곳에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금란은 무엇인가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셋째 나리에게 그렇게 유력한 협력자가 있다면 먼저 우리는 그 분들의 행방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 있겠느냐? 천하는 이렇게 넓으며 사람은 헤 아릴 수 없이 많은데...." "셋째 나리와 중주이고 사이에 무슨 암기라도 없습니까?" 소영은 금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있지! 있고 말고. 네가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잊어버릴 뻔 했 구나." 금란은 눈을 빛내며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럼 됐습니다. 셋째 나리께서는 길을 가시면서 중도에 암기를 남겨 두어 행방을 표시해 놓으면 중주이고가 그 암기를 보는 즉시 우리의 뒤를 따라올 것이니 자연 만나게 될 것입니다." 소영의 얼굴에는 희색이 떠올랐는데 어쩐 일인지 이내 한숨섞인 어조로 말했다. "만약에 그들 두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암기 를 도중에 남겨 둔다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 아니냐." "일은 이왕 여기까지 도달하였으니 조급한 생각을 버리시고 너무 괴로워 마십시오. 중주이고가 강호를 곳곳이 살펴 보는 안목이 있 다면 암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중주이고가 암기를 보고 쫓아오는 것은 운수에 맡기고 밑 져야 본전이니 해 봐야겠다. 너는 마차를 몰면서 갈림길이 나오면 멈추고 내게 알려야 한다. 그리곤 암기를 남겨 두도록 하자." 마차는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힘차게 달렸다. 금란은 정신을 차 려 주위의 갈림길을 살피며 마차를 몰다가 십자로에 이르렀다. 그녀는 말고삐를 당기면서 소영에게 보고했다. "셋째 나리, 십자로입니다." 그는 마차의 포장을 헤치고 가볍게 몸을 날려 땅에 내려섰다. 그 것을 본 금란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 상처가 모두 완쾌되셨습니까?" 소영 역시 자신의 상처가 이렇게 빨리 완쾌될 줄은 생각하지 못 한 듯 의쓱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나는 완쾌됐다. 네 상처는 좀 어떠냐?" 금란은 기쁜 듯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셋째 나리께서 염려해 주신 덕택에 저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네가 훗날 남과 겨루게 될때 쉽게 상처를 입지 않도록 내가 몇 초의 검식을 전수해 줄 것이다." 금란은 방긋이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는 갈림길에 암기를 남겨 놓았다. 소영이 일을 다 마칠 때까지 다행히 추격해 오는 사 람들이 없었다. 금란은 소영이 다시 마차에 오르자마자 채찍을 휘둘러 질풍처럼 달렸다. 마차가 갑자기 달리는 바람에 은란이 몸의 균형을 잃고 옆 으로 넘어졌는데 그와 동시에 은란이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르 는 것이었다. 소영은 재빨리 오른손을 뻗쳐 은란의 혈도 세 곳을 연속 찍었다. 가슴이 얼어 붙는 듯하던 은란의 비명소리가 차츰 멈춰졌으며 뒹 굴던 몸도 진정이 되었다. 소영은 가볍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과연 축골독환은 무서운 것이구나." 금란은 고개를 돌려 당삼고를 힐끗 바라 보았다. 그녀는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매우 평온한 안색이었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금란은 이상하다는 듯 소영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모두 축골독환을 복용했는데 어찌 은란만이 발작을 일으키고 당삼고는 아무 일 없을까요?"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지! 독약의 성질로 따진다면 두 사람은 아직 발작할 시간이 되지 않았지. 그러나 조금전 마차가 갑자기 출발할 때 은란이 충격 을 받아 그녀의 독성이 일찍 발작한 것이다." 은란은 소영에게 몇 곳의 혈도를 찍힌 다음 뒹구는 것은 멎었으 나 근육이 오그라지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아픔에 못 이겨 구슬같은 진땀을 흘렸다. 금란은 손수건을 꺼내 은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그 자 신도 아픔을 같이 하는 듯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그녀는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셋째 나리, 이 몸은 죽어 마땅하오니 셋째 나리께서는 중벌을 내려 주십시오." 소영은 금란의 갑작스런 말에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사실은 아까 대장주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소영은 이 말에 그만 흠칫하며 외쳤다. "뭐라고? 그렇다면 나는 왜 그것을 몰랐지?" "그때 셋째 나리께서는 출혈이 심한데다 격심한 피로로 인해 정 신을 잃었던 것입니다." 소영은 고개를 숙여 자기의 상처를 살펴 보더니 물었다. "그럼 이 상처에 바른 약은 대장주가 발라 준 것이냐?" 금란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그리고... 그 분은 많은 사람들이 셋째 나리에게 원한를 품 게 하였습니다." 소영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대장주님은 셋째 나리인 척 마차 안에 몸을 숨기고 뒤쫓아 오는 사람들을 공격하였습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다친 것 같더냐?" "그들의 비명소리가 너무나 처절하게 들렸으므로 소녀의 생각엔 그들이 다시 살아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소영의 눈에 냉랭한 빛이 나타나더니 노기찬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어디로 갔느냐?"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셋째 나리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경고 한 다음 즉시 가버렸습니다." 소영은 한숨을 쉬며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나는 어째서 그것을 조금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셋째 나리의 혈도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네가 나의 혈도를 풀어 주었단 말이냐?" 금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마차는 이제 강호에서 피맺힌 원한의 목표가 되었으니 우리 가 계속 이 마차를 타고 길을 재촉한다면 아마 앞으로 많은 괴로움 이 따를 것입니다." 금란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셋째 나리의 무공은 비록 뛰어나지만 아직 몸에 입은 중상도 완 쾌되지 않았거늘 어찌 많은 무림 고수들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우선 적세를 피하여 상처가 완쾌된 다음 다시...." 소영은 금란의 말을 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우리가 마차를 버리고 도망친다면 혹시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변명할 기회는 영원히 없어질 것이다." "지금의 오해는 아마 셋째 나리 혼자서는 결코 설명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저의 뜻은 다만 일시로 적의 칼날을 피하여 훗날 다시 방법을 생각해 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영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 "대장부가 어찌 잔꾀를 부리겠느냐? 더구나 은란과 당낭자가 복 용한 축골독환의 독성이 발작할 시간이 눈 앞에 닥쳤다. 만약에 우 리가 마차를 버리고 변장하여 떠난다면 백화산장에서 약을 갖고 오 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찾을 수 있겠느냐?" 금란은 소영의 태도에 감격해서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셋째 나리의 영웅심에 크게 감격합니다. 저는 셋째 나리의 곁에 서 시중을 들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소영은 씁스레 웃으며 말했다. "나를 추켜 올리지 마라. 당당한 칠척의 체구로서 너희들의 안전 을 보호해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너의 도움을 받았으니 실로 부 끄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엄구나." 이때 갑자기 질풍같이 달려 오는 말발굽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 고 한 줄기 차가운 빛이 포장을 뚫고 날아 들어 왔다.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날아 들어 온 암기를 손으로 받아 내며 금란에게 말했다. "너는 이 두 사람이 그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잘 보살펴라." "저는 있는 힘을 다해 받들겠습니다." 소영은 마차에서 뛰어 내리며 고개를 들어 뒤를 보았는데 두 필 의 건마가 벌써 칠, 팔 척 밖에 우뚝 서 있었다. 하늘색 장삼을 입고 흰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그는 바로 단 목정이었다. 그의 곁에는 푸른 옷을 입은 아름다운 소녀가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등에는 비스듬히 장검을 메고..... 소영은 두 사람을 훑어 보고는 공손히 가슴에 손을 모으고 인사 했다. "알고 보니 단목대협이시군요." 단목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렇게 만나게 되었구려. 우 리가 힘들여 손을 쓰지 않아도 당신을 찾아 계산을 할 사람이 이제 곧 올 것이오." 그리고는 말머리를 돌리더니 쏜살같이 달려 갔다. 소영은 물끄러미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나를 추격해 왔을까? 그리고 왜 나를 보더 니 다시 되돌아 갔을까?' 이때 옆에서 금란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셋째 나리, 빨리 길을 재촉해야 됩니다." 소영은 비로소 정신이 든 듯 중얼거렸다. "그렇다. 필경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금란은 소영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셋째 나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소영은 금란을 지그시 바라 보며 말했다. "나는 그 단목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필경 우리의 상세가 어 떤가 살펴 보러 온 거다. 금란! 내 생각으론 우리의 앞길은 험악한 고비가 많을 것 같다." 금란은 마음의 걱정과는 달리 상냥하게 말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셋째 나리와 같 은 정인군자(正人君子)는 필경 하늘의 도움을 받으실 것입니다." 소영은 다시 마차에 올라갔는데 은란은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 어 있었다. 그녀는 몹시 고통스런 표정이었으며 당삼고는 여전히 얼빠진 듯 앉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금란은 채찍을 휘날리며 말을 몰아 마차는 다시 화살처럼 앞으로 달려 갔다. 약 이, 삼 리 가량 달려 왔을 때 갑자기 네 필의 말이 처량하게 울부짖더니 쓰러지면서 죽어 버렸다. 마차에서 뛰어 내린 소영은 네 필의 말을 자세히 살펴 본 후 탄 식하며 말했다. "네 필의 말은 모두 독이 묻은 암기에 맞아서 죽었다. 단지 암기 는 몹시 가늘고 작아서 내가 발견하지 못했구나." 금란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아까 그 단목정이 뻗친 암수입니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의 짓일 것이다." 금란은 의외로 밝은 표정을 짓더니 웃음을 띠며 말했다. "오히려 잘 됐습니다. 이제 셋째 나리는 할 수 없이 마차를 버리 고 변장을 하신 다음 길을 떠나야 합니다." 소영은 침통한 말투로 말했다. "일은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에 게는 무슨 음모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쓰러진 네 필의 말 옆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어디선 가 갑자기 날카로운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소영과 금란은 흠칫 놀라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소영이 재 빨리 고개를 돌려 사방을 훑어 보았으나 남쪽으로 이십 장쯤 떨어 진 곳에 장원이 하나 있을 뿐 아무리 살펴 보아도 인가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날카로운 호통소리는 바로 그 장원에서 들려 온 모양이었다. 금란도 주위를 한 차례 훑어 본 다음 소영에게 말했다. "셋째 나리,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길을 재촉해야 됩니다." 소영은 묵묵히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 은란과 당삼고를 편히 쉬게 한 다음 방법을 강구해 보자." 금란은 멀찌감치 있는 장원을 바라 보며 물었다. "저 장원으로 가자는 말씀입니까?" "너도 아까 그 호통소리를 들었지? 그 호통소리는 바로 우리들의 주의를 끄느라고 지른 것이다." "맞아요! 그들은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걸려들게 하려는 것이군 요." 소영은 씁스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처지는 비록 험악하나 아직 절망적이지는 않다. 다만 곤 란한 일은 독물에 중독된 두 낭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 뿐이지." 금란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셋째 나리, 혼자서 길을 떠나십시오." "그럼 너희들은 어떻게 하느냐?" 금란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백화산장에 구원을 청하겠습니다." "큰 장주가 아직 곁에 있다면 몰라도 이곳은 백화산장과는 이미 수백 리 떨어진 곳이다." "저의 품속에는 백화산장의 충천화포(沖天火泡)가 있습니다. 이 것을 터뜨리기만 하면 즉시 큰 장주의 귀에 들릴 수 있을 것입니 다." 금란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더니 다시 이어갔다. "큰장주께서 세 개의 충천화포를 저에게 주실 때 재삼 분부를 하 였습니다. 아주 위급할 때에만 사용하라구요....이 화포는 백화영 유(百花令諭)보다도 빠릅니다. 이 화포를 발사시키면 비록 천 리 밖이라도 몇 시간 안에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금란은 이어 말을 계속했다. "백화산장에서는 영통한 신합(편지 전하는 비둘기)을 많이 기르 고 있습니다. 우리를 추격하는 사람들이 충천화포를 보면 즉시 서 신을 써서 비둘기 발에 묶어 큰 장주에게 보고를 하게 되는 것이지 요." "그럼 됐다." 소영이 무심코 눈길을 돌리니 이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서 여태껏 눈에 띄지 않았던 초가집이 보였다. 소영은 즉시 그곳을 가리키며 금란에게 말했다. "우선 저 농가로 가서 이들 둘을 편히 쉬게 한 다음 의논하자." 금란은 은란을 업고 당삼고를 부축하면서 앞에서 걸었으며 소영 은 두 개의 나무 상자를 들고 뒤에서 따라갔다. 가까이 가 보니 그 외딴 초가집은 거대한 용나무 밑에 세워져 있 는 농가였다. 두 쪽의 나무로 만든 사립문은 반쯤 열려 있었으며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소영은 크게 기침을 하며 소리쳤다. "아무도 없소?" 그러자 안에서 노파의 음성이 들려 왔다. "누구요?" 소영은 큰소리로 말했다.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렸습니다. 두 낭자가 불행히 병에 걸려 보 행이 어려워서 잠시 쉬었으면 하는데 승낙해 주시겠습니까? " 사립문이 서서히 열리더니 백발의 노파가 죽장을 짚고 천천히 걸 어 나왔다. "황무지의 이 오두막은 누추하여 귀빈을 맞이할 수 없소. 그러나 손님이 괜찮으시다면 안으로 들어 오시오." 그는 연방 노파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그 노파는 금란이 업고 있는 은란을 힐끗 보더니 백발을 저으며 말했다. "집을 나서면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이오. 손님들은 미안해 하지 말고 무슨 부탁이든지 이 늙은이에게 말씀하시오." 소영은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저희는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 즉시 떠나겠습니다. 할머니에 게 어떻게 감히 수고를 끼치겠습니까?" 노파는 소영과 은란을 유심히 훑어 보더니 죽장을 짚고 천천히 내실로 들어 갔다. 소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보아도 이 노파는 이런 벽촌 출신이 아닌 것 같구나...' 이때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전(錢) 아주머니 계십니까?" 내실에서 노파의 음성이 들려 왔다. "무슨 일로 나를 찾소?" 소영이 슬며시 내다 보니 경장을 한 장한이 농가의 사립문 밖에 서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소생은 주인의 명령을 받고 노선배님께 전할 말이 있어 왔습니 다." 내실에서 전 아주머니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나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고 집 안에는 귀빈도 계시니 오늘은 만나지 않겠소. 일이 있으면 훗날 만나서 합시다." 그러자 그 장한은 다급하게 말했다. "일이 긴박하오니 부디....." 그러자 내실에서 전 아주머니의 노한 음성이 들렸다. "오늘 만나지 않겠다는데 당신 귀에는 들리지 않소?" 장한은 다급하게 말했다. "제가 온 일은 노선배님 댁에 온 손님들과 관계가 있으니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 아주머니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소영은 자리에 서 벌떡 일어서며 나직하게 금란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우리를 찾는 일이라면 내가 나가서 물어봐야겠다." 소영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그 장한이 놀라 외마디 비 명을 지르며 황급히 도망쳤다. 내실 안에서 다시 전 아주머니의 음 성이 들려 왔다. "나쁜 놈 같으니, 좋게 말할 때 듣지 않고... 그 놈은 오히려 권 하는 술을 받지 않고 벌주를 마셨구나." 금란이 나직이 속삭였다. "셋째 나리, 전 할머니는 아마 이곳에서 은거하는 고수일 것입니 다." 이때 또다시 전 아주머니의 음성이 들려 왔다. "손님들은 아무 염려 마시고 편히 쉬시오. 이 오두막은 비록 초 라하오나 안전만은 보장할 수 있소이다." 전 아주머니는 다시 말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곳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는 없소이다." 소영은 천성이 남에게 굽히기 싫어하는 성품이라 즉시 대답했다. "할머니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절대로 할머니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으며 우리 일행은 지금 즉시 떠나겠습니다." 전 할머니는 곧 말을 보냈다. "화가 몹시 났구려." 소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두 개의 상자를 집어 들며 말했 다. "금란! 어서 가자, 그들은 필경 우리의 앞 길을 모두 막았을 것 이다. 할 수 없이 그들과 충돌을 감행해야겠구나." 금란은 은란을 업고 당삼고를 부축하며 소영의 뒤를 따랐다. 그 러자 별안간 내실과 객실 사이의 휘장이 열리며 그 전 아주머니가 문을 가로막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잠간만! 나는 아직까지 아무런 보상 없이 이 오두막에 손님을 초대해 본 적이 없소. 물건을 놓고 가시오." 소영은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이렇게 황량한 곳에 희노무상(喜怒無常)한 무림 고수가 살고 있 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충돌을 면할 길이 없을 것같군." "할머니께서는 저에게 어떤 물건을 남겨두라는 말씀입니까?" "오오! 보아하니 당신은 이 늙은이와 충돌을 하겠단 말이구려" 소영은 곧 대꾸했다. "형세가 저를 그렇게 하게끔 강요를 하니 저 또한 어쩔 수 없군 요." 전 아주머니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너같은 어린 나이에 그런 호기가 있다니 실로 가상하구나." 전 아주머니는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했다. "나의 삼 장을 받아라! 막아 내든지 피하든지 마음대로 해라. 다 만 네가 아무 상처도 없이 나의 삼 장을 피해 낸다면 너희들을 놓 아 주겠다." 소영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만 할머니께서 손을 뻗치신다면 소생은 기꺼이 받아드릴 용의 가 있소." 전 아주머니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용맹스러운 영웅들을 좋아한다. 너는 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오른손에 잡았던 죽장을 버렸다. 동시에 번개같이 일장을 뻗쳐 왔다. 소영은 그녀의 일장을 피하지 않고 오른손을 날려 마주쳐 갔다. 서로 맞부딪친 일장은 쌍방의 장력이 비등하여 승부를 가려 내지 못했다. 전 아주머니는 약간 놀란 듯 오른장을 거둬들이는 듯하다가 다시 잽싸게 뻗쳐 갔다. 소영도 암암리에 이를 악물고 다시 일장을 맞받 아 뻗쳤다. 순간 전 아주머니의 어깨는 요동치며 휘청거렸다. 소영도 역시 몸의 중심을 잃고 뒤로 두 발 물러섰다. 전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이미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오른장을 번쩍 쳐들고 망설이며 감히 뻗쳐 내지 못했다. 그녀는 이 마지막 일장 역시 소영을 격퇴시킬 자신이 없어 함부로 출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장세를 서서히 걷어 들이며 냉랭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의 제자냐?" 소영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소생의 은사는 문파를 세우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성명을 밝힐 수 없습니다." 전 아주머니는 눈에 날카로운 빛을 번쩍이며 번개같이 오른장을 들어서 전력을 다해 뻗쳐 왔다. 쌍방의 장력이 충돌하는 순간 요란 한 폭음이 울리자 소영은 그 맹렬한 장력으로 인해 눈 앞에 불꽃이 번쩍 튀며 단번에 너덧 발자국 물러났다. 전 아주머니 역시 몸의 중심을 잃고 뒤로 세 발짝 물러났다. 소 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삼장은 이미 끝났는데 할머니께서는 또 무슨 조건을 내세우시겠 습니까?" 전 아주머니는 길을 터 주며 말했다. "자! 어서들 가거라." 소영은 나무상자 두 개를 들고 큰 걸음걸이로 사립문을 나섰다. 그러자 사, 오 장 밖에 경장차림을 하고 등에 단도를 꽃은 두 명 의 장한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소영을 쏘아 보고 있었다. 금란은 급히 소영의 등 뒤로 바싹 다가서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셋째 나리! 저들은 아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소영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람이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뭇사람들의 존경과 두려움을 받고 있는 이유를 너는 알고 있느냐?" "저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손이 악독하여 살인을 많이 하였기에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약에 저 사람들이 나의 앞길을 막고 있다면 나 소영도 할 수 없이 저들을 죽이는 수밖에 없다." 금란은 소영이 요즘에 수없이 많은 분노를 참고 견디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 분노가 자제력을 끊고 치솟아 올라 나중의 결과는 생각치도 않고 일을 저지르려는 것을 보자 금 란의 가슴은 떨렸다. 이때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귀하가 바로 백화산장의 삼장주요?" 소영은 들었던 나무상자를 내려 놓으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어쩌겠소?" 소영은 등에 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이때 금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셋째 나리, 일시적인 울분을 참지 못하시면 평생 씻지 못할 원 한을 사게 되오니 진정하십시오." 금란의 간곡한 충고가 귀에 들리자 소영은 평온을 되찾으며 살기 가 사라졌다. 그는 들고 있던 장검을 내리며 조용히 물었다. "두 분께서는 무슨 볼 일이 있으신지요?" 그중 한 사람이 나서며 대꾸했다. "당신은 길을 오며 연속 아홉 명의 무림고수를 살해했으니 실로 악독하기 짝이 없구려." 소영이 그들의 모습을 훑어 보았다. 옷차림이나 태도로 보아 강 호의 유명한 인물같지는 않고 졸개인 듯 싶었다. 그러나 무례한 태 도로 자기를 대하는 것에 울화가 치밀은 소영은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 보며 소리쳤다. "두 분은 죽음이 두렵지 않소?" 나머지 한 사람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당신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우리 형제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호기가 있소. 천하영웅들은 당 신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소. 우리 형제가 악독한 당신의 검에 대항하다 죽는다면 반드시 무림의 숭앙을 받을 것이오. 이런 영광 을 얻는데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소?" 소영은 약간 놀라며 한숨섞인 말투로 물었다. "그럼 두 분은 죽음을 찾아온 것이란 말이오?" "그것도 아니오. 우리는 주인의 명령을 받고 당신에게 이를 말이 있어서 온 것이오. 우리 주인께서 주연을 차려 놓고 당신에게 참석 할 용의가 있느냐고 물으라 하셨소." 소영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나머지 한 사람이 덧붙였다. "백화산장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흉계로써 사람을 죽이더군요.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비겁한 수법은 쓰지 않 을 것이오. 만약 당신이 우리 주인의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 는 피로써 갚을 것이오." 소영은 장검을 걷어들이며 결연히 말했다. "두 분은 앞장 서시오. 소생은 귀주인을 만나 보고 싶소." 두 장한은 아마 소영이 응하지 않으리라고 짐작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말했다. "그럼 우리 형제가 앞장 서겠소이다." 소영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소생이 개인문제를 해결할 동안 잠시 기다려 주시 오." 그리고 금란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가거라. 그들을 데리고 다시 백화산장으로 말이다." 금란은 조용히 말했다. "셋째 나리, 저희들 걱정은 마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 가 급적이면 충돌을 피하십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걱정되는 것은 저 두 사람의 독성이 발작할 시간이 닥친 것이다. 네가 만약 백화산장으로 돌아 가지 않는 다면 두 사람의 목숨은 위태롭다." 금란은 침착하게 말했다. "당낭자의 마음이 어떤지 그것은 제가 모르오나 은란 동생의 마 음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독성이 발작하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백화산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할 것이 틀림없 습니다." 소영은 하늘을 우러러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셋째 나리께서 저희들을 짐으로 느끼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어디 까지나 셋째 나리의 곁을 따르고자 원하고 있습니다." 소영은 이 하늘 아래 금란, 은란이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을 깨 닫자 결연히 말했다. "좋다! 그럼 같이 가기로 하자." 그리고 몸을 돌려 두 장한의 뒤를 따랐다. 앞장선 두 장한은 약 칠, 팔 리쯤 지나오자 다음 무성한 숲으로 들어 갔다. 이때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던 장한이 큰 소리로 외쳤다. "백화산장의 삼장주께서 연회에 참석하러 오셨습니다!" 어느새 소영의 앞은 넓은 잔디 위에 약 사십 가량 되어 보이며 수염이 턱을 둘러 싸고 번쩍이는 범눈을 가진 늠름한 사나이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소영은 그 사람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소생은 초청을 받고 왔습니다. 주인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지 요?" 그 털보 대한은 소영의 모습을 보자 처음부터 줄곧 번쩍이는 눈 빛으로 아래위를 훑어 보고 있었다. 소영이 포권을 하고 묻자 비로소 눈길을 거두어 들이며 그도 역 시 포권을 하고 대답했다. "바로 소생이 주인이오. 당신의 말투로 보아 바로 백화산장의 삼 장주이시군요." "그렇소. 귀하께서는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털보 대한은 별안간 앙천대소하더니 급히 손을 뻗쳐 소영의 오른 팔을 향해 일장을 날리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순진하고도 늠름한 청년이 그처럼 악독한 짓을 하다니, 참으로 사람의 겉모양만 보고는 모르겠구려." 소영은 재빨리 오른손을 쳐들어 털보를 향해 뻗쳤다. 두 사람의 손이 맞부딪치는 순간 상상외로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했다. 한참 후 그 털보 대한은 소영의 오른손을 놓으며 칭찬을 했다. "삼장주, 과연 훌륭한 솜씨오." 소영이 겸손하게 물었다. "과찬의 말씀이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소생은 보천성(步天星)이라 하오."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는 순간 이상하게도 친밀한 감정이 솟아 적의가 크게 감소됐다. 소영은 조용히 물었다. "보형께서 사람을 보내 저를 이곳으로 오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 까?" 보천성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분의 무림친구들이 삼장주를 만나 보고 싶어 하오. 소생도 물론 그 중의 한 사람이오." 보천성이 손뼉을 치자 동쪽 숲에서 흰색 승복을 입은 약 오십 세 쯤 되어 보이는 승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소영은 이 승려를 보자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보천성은 그 중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 대사께서는 바로 소림문하의 지광대사(智光大師)이시오." 소영이 공손히 예를 올리자 지광은 합장을 하고 불호로써 답례했 다. 보천성은 다시 손뼉을 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쪽 숲에서 건 강한 신체에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대한 하나가 등에 한 쌍의 일월청강륜(日月靑鋼輪)을 매달은 채 서서히 걸어 나왔다. 소영은 그를 보는 순간 말을 걸려고 하다가 문득 생각이 달라져 서 입을 다물었다. 보천성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초곤산 초대협이오. 사람들은 성수철담(聖水鐵膽)이라 고 칭한다오." 소영은 다시 포권하여 절했다. "초대협, 소생은 소영이라 하오." 초곤산은 소영을 지그시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소문은 많이 들었소.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 각하오." 소영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마치 나를 모르는 척 하는구나. 왜 그럴까?' 소영이 처음 악소채를 따라 견식을 넓히면서 만났던 인물들은 어 린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영을 기억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세 번 손뼉을 치자 서쪽 숲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 다. 한 사람은 호리병을 든 승려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다 떨어진 누더기 옷에 더러운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보천성은 두 사람을 가리키며 소영에게 소개했다. "이 두 분은 강호에서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풍진기객(風塵奇 客)인 주승(酒僧)과 반개(鈑介)시오." 소영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공손히 말했다. "두 분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보천성이 다시 손뼉을 네 번 두드리자 북쪽 숲에서 흰 수염의 노 인 하나가 지팡이를 끌고 왼발을 절룩거리며 걸어 나왔다. 바로 소영이 백화산 장에서 본 일이 있는 상대해(常大海)였다. 상대해는 과연 옛날의 원한을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듯 보천 성이 소개도 하기 전에 그의 말을 막고 입을 열었다. "한달 전, 삼장주가 그 심목풍의 보호 아래 우리를 쫓아 낸 위풍 과 그 살기를 우리는 아직 잊지 못했소." 소영은 잔잔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귀 사도께서는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보아하니 입으로는 설명 이 어렵겠구려." 상대해는 크게 비웃었다. "내가 직접 목격을 한 것이니 어쩌겠소? 설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단 말이오?" 소영은 해명할 말이 가슴에 가득했으나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 어야 할지 몰라 다만 한숨만 짓고 묵묵히 서 있었다. 보천성은 그들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니 내가 소개할 필요가 없군요." 그리고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오늘 삼장주를 이곳으로 초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삼 장주에게 몇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어서 모셔온 것이니 솔직히 대답 해 주시오." 소영은 마음을 다지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무엇이든 마음껏 질문하시오. 제가 알고 있는 데까지는 성의껏 대답할 것이며 또한 결코 거짓이 없을 것이오." 지광대사는 합장을 하고 불호를 한 번 외운 다음 소영에게 물었 다. "삼장주께서 아까 연속으로 아홉 명의 고수들을 격사시킬 때 소 승의 사제 하나가 삼장주의 손에 목숨을 잃었소. 그런데 삼장주께 서는 무엇 때문에 독수를 뻗어 그의 목숨을 빼앗았는지요?" 주승은 몽롱히 취기어린 눈으로 소영을 훑어 보더니 중얼거렸다. "아깝구나, 아까워! 아깝게도 훌륭한 구슬이 흙탕 속에 빠졌구 나." 그러자 반개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원한은 깊소! 저런 사람은 이미 감정이 마비된 사람이 오. 그와 말을 나누는 것보다는 오히려 힘을 아껴 소에게 비파를 퉁겨 주는 것이 훨씬 낫겠소." 소영은 불쾌한 생각이 들었으나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제했다. 마른 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대답하려고 했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 르지 않았다. 이때 돌연 초곤산이 입을 열었다. "삼상노어옹(三湘老漁翁)은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이오. 당신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거늘 어째서 당신은 절독한 암기를 사용하여 그분 의 목숨을 빼앗았소? 내가 그의 원한을 갚아 주지 않는다면 삼십 년간의 우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소영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그러나 머리만 점점 복잡해질 뿐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다. 주승은 고개를 들어 반개를 흘끔 쳐다 보며 말했다. "야 이 거지야! 네가 말해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유를 말하는 데 우리는 이유도 없이 싸움에 끼어들 수야 없지 않냐?" 반개는 허리에 찬 큰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더니 밥을 한 주먹 움켜 쥐고 입 속으로 털어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신행추풍객(神行追風客)은 우리 주승, 반개와는 풍진삼우(風塵 三友)라 하오. 그런데 당신은 우리의 친구 목숨을 빼앗았소. 우리 가 그의 복수를 해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 풍진삼우가 당신들의 백화산장을 두려워한다고 비웃을 것이오." 보천성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 심목풍은 흉명이 높을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람과 원한을 맺었소. 그가 여태껏 죽인 사람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 소이다. 십 년 전에 천하 영웅들이 합세하여 그를 공격했을 때 무 림 인물들은 그때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었으나 뜻밖에도 십 년 후 그는 다시 강호에 나타났으며 또 당신과 같은 좋은 협력자를 얻은 것이오." 소영은 마침내 속에서 피가 끓는 울분이 치솟아 자신을 억제할 수 없게 되자 소리쳤다. "닥치시오! 당신들은 무슨 근거로 그 사람들을 모두 내가 죽였다 고 말할 수 있소?" 보천성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사람들은 삼장주가 탄 마차 뒤를 바싹 쫓아갔었는데 당신이 아니면 또 누가 했단 말이오?" 소영은 흥분한 듯 외쳤다. "목격한 사람이 있소?" 보천성이 곧 대답했다. "내가 보았소." 소영은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다시 소리쳤다. "당신이 분명히 목격했단 말이오?" 그러자 보천성은 갑자기 노기 띤 음성으로 숲을 향해 외쳤다. "둘째 어른의 시체를 가지고 오너라." 그러자 숲에서 대답하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장한이 한 구의 시 체를 들고 급히 달려 왔다. 보천성이 그들에게 분부했다. "이곳에 내려 놓아라." 두 명의 장한은 시체를 내려 놓고 물러났다. 그 시체는 눈을 번 쩍 뜬 채로 입가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보천성은 비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의 동생은 착하고 매우 어진 사람이오. 나의 악독한 성격과는 정반대요. 그와 같은 선량한 사람에게 이처럼 비참한 결과가 올 줄 은 미처 몰랐었소. 그러니 그가 어찌 눈을 감고 죽을 수 있겠소이 까?" 보천성은 비통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날카롭게 말했다. "삼, 사 장 떨어진 거리에서 그가 마차에 다가섰을 때 쓰러지는 것을 직접 보았소. 그래도 잡아 뗄 작정이오?" 소영도 마침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그 마차 안에 오직 나 혼자만 타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단 말이오?" "그 마차 안에는 오직 지금 여기 있는 네 사람밖에 없소. 그런데 당신 말고 또 누구란 말이오?" 소영은 마침내 울분이 치밀어 치를 떨며 외쳤다. "그들은 비록 마차를 추격하다가 피살됐지만 범인은 결코 내가 아니오." 보천성은 노기 찬 음성으로 그를 힐난했다. "내가 직접 보았는데도 당신은 교활한 변명을 하다니...다만 분 한 것은 당시 나는 동생의 죽음으로 비통한 나머지 끝까지 마차를 추격하여 당신을 잡지 못한 것이 분할 뿐이오." 소영은 노기찬 음성으로 대꾸했다. "당신들이 흑백도 가려내기 전에 나를 의심하는 것은 너무 경솔 한 짓이오." 이때 금란이 돌연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셋째 나리, 순금은 불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리께서는 너 무 급하게 서두르지 마시고 차근차근 저분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하십시오." 주승은 손짓으로 금란을 가리켰다. "당신은 누구요?" 금란은 당당한 자세로 대답했다. "나는 금란이라 하오. 모두 의리있는 인물이라고 자부하는 당신 들은 어찌 이렇게 경솔하시오?" 초곤산은 그의 음성이 마치 여자같이 가냘프다고 느껴졌으나 남 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너는 여자냐, 아니면 남자냐?" 금란은 당돌하게 대답했다. "여자요. 그러나 나는 당신들 같은 건장한 남자들이 분명치 않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우리 여인들보다 현명하지 못하다 고 느꼈소." "흥! 당신들의 이 엄숙한 얼굴들을 보니 실로 가소롭구려." 초곤산은 쳐들었던 장세를 거두어 들이며 말했다. "호남은 여인과는 다투지 않는다. 내가 이런 신분에 너같은 연약 한 여인과 다투겠느냐." 보천성은 등에 꽂았던 은피리를 뽑아 들면서 냉랭히 말했다. "당신이 어떤 수단으로 암기를 썼든 연속 아홉 명이나 되는 고수 를 쓰러뜨렸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당신이 고명하다는 것을 증명 할 수 있소. 나 보천성은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소." 소영도 재빨리 장검을 뽑아 들며 냉정히 말했다. "기왕에 입으로 자세히 해명할 수 없는 바에야 우선 무공으로 상 하를 겨뤄 보고 그 다음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금란! 너는 빨리 비 켜라." 보천성은 은피리를 번쩍 쳐들었다. "내 초를 받으시오!" 그는 번개같이 은피리를 휘두르며 소영을 향해 찍어 갔다. 소영 의 장검은 즉시 기봉등교(起鳳騰較)의 초식으로 수세와 공세를 곁 들여 뻗쳤다. 그는 그 일검으로 보천성의 은피리를 막아 내며 손을 휘둘러 앞으로 찔러 갔다. 보천성은 몸을 치솟아 그것을 피하며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은 피리를 휘저으며 반격해 갔다. 은빛이 번쩍이며 피리의 그림자가 하늘을 덮은 채 밑으로 떨어졌 다. 그는 비통한 감정에 지배되어 전력을 기울여 맹렬한 기세로 공 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소영도 장검을 휘두르며 보천성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악투가 벌 어졌다. 보천성의 적법(笛法)은 일초 일초 연속적으로 공격을 하여 적으로 하여금 반격할 기회를 허용치 않았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적법이며 보통 사람들은 삼십 초를 받아 내기가 어려운 초식이었 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는 소영을 만났기에 그 날카로운 적법도 위 세가 격감하여 맥을 추지 못했다. 소영은 장산패에게 검술을 배우면서 천하 각파의 절초를 모두 익 혀 두었기 때문에 응변에는 뛰어났었다. 그의 검초는 매우 풍부하며 변화무쌍했다. 보천성의 적세(笛勢) 를 가볍게 피해 내고 있는 사이에 그것을 관전하고 있던 주위의 군 호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와 같은 어린 나이에 이토록 훌륭한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도 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그들은 삼십여 합을 겨루었다. 소영은 별안간 춘풍화우(春風化雨)의 초식으로 적세를 막아 내며 말했다. "소생은 이미 적법을 지도받았소. 그러나 별로 신통한 것도 아니 구려. 자! 이제부터 내가 반격할 차례요. 조심하시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영은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보천성 은 점점 기세가 꺾여 기선을 잃었다. 그는 소영과 몇 초를 겨룬 후 마침내 소영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수십 년 간 길러 온 내력으로써 상대방의 장검을 날려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들어맞지 않았다. 그가 힘껏 내력을 뻗쳤는 데도 소영의 장검은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의 내력은 도로 은피리에 딸려 즉시 밑으로 내려 갔다. 이것은 바로 검술 속 에 점(粘)과 활(滑) 두 가지의 운용이었던 것이다. 우선은 음유(陰柔)의 힘으로 보천성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들이 고 검세는 은피리를 따라 내려 가며 보천성의 은피리를 움켜 쥔 오 른손을 노렸다. 이때 보천성이 들었던 은피리를 떨어뜨렸다. 만약에 이때 보천성이 은피리를 빨리 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팔은 끊어졌으리라. 소영이 급히 뒤로 두어 발 물러나며 뻗었던 힘을 거두고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 30. 주승(酒僧)과 반개(飯介) 보천성은 창백한 안색으로 말했다. "삼장주의 검술은 참으로 훌륭하구려. 소생은 적수가 못 되오." 금란은 소영이 홧김에 사람을 해칠까 두려워했는데 그가 즉시 손 을 거두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심하였다. 상대해는 손에 든 쇠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말했다. "오늘은 정식으로 무공을 시합한 것도 아닌데 패한들 무슨 억울 함이 있겠소. 보형, 잠시 물러가 쉬시오." 그는 말도 끝내지 않고 횡소천군(橫掃天軍)의 초식으로 소영의 허리를 향해 내리쳤다. 소영은 지팡이가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자 감히 장검 으로 막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몸을 날려 재빨리 피했다. 상대해는 연속 몸을 날려 다가서며 지팡이로 공격해 왔다. 마치 퍼붓는 빗줄기와도 같이 맹렬한 것이었다. 그는 소영이 자기의 쇠 지팡이와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있음을 알아 더욱 지팡이의 위세 를 발휘하였다. 그가 휘두르는 지팡이의 기세는 맹렬한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이미 오십여 합을 겨루었다. 소영은 덮쳐 오 는 장세(杖勢)에 뒤로 육, 칠 척 가량 물러섰다. 상대해는 비록 우세한 격투를 벌이고 있지만 속으로는 소영의 속 셈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영이 지금은 나의 장세에 겁을 먹고 감히 장검으로 맞서지 못 하고 있지만 만약에 실날만한 빈틈이라도 알아 낸다면 반드시 그에 게 기선을 빼앗길 것이다. 그러니 그를 속전속결로 쓰러뜨려야 한 다.' 소영은 비록 연속 후퇴하며 피하고 있었지만 그의 수비태세만은 만전을 기한 것이었다. 검초의 풍부함은 예측을 불허했으며 상대해 로 하여금 빈틈을 노리지 못하게 하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상대해는 서둘러 승리를 거두려 했다. 그러나 오십여 초가 지나 도 여전히 소영의 검초에는 일점의 빈틈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상대해는 초조해진 나머지 장세에 빈틈이 생겼다. 소영은 재빨리 장검을 휘둘러 천하도괘(天河倒掛)의 초식을 발휘 했다. 그의 장검은 두 줄기 번쩍이는 검광을 날리며 비스듬허 상대 해의 장세를 뚫고 들어 갔다. 소영의 맹렬한 장력은 상대해의 장세를 파괴시켰고 장검은 회풍 서류(廻風恕柳)의 초식으로 좌우로 찍어 갔다. 검세가 뻗쳐 오자 상대해는 지팡이를 미처 거두어 들이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몸을 뒤 로 피했다. 소영은 일장일검으로 우세를 차지하자 그림자처럼 상대해를 따라 몸을 날렸다. 상대해는 재빨리 뒤로 삼, 사 장 가량 물러났다. 그 러나 악착같이 따라 붙어 가슴을 노리는 소영의 검세를 피할 수가 없었다. 사태가 긴박하게 되자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긴 한숨과 함께 손을 멈추었다. 주위에서 관전하던 군호들은 차마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모두들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속으로 소영이 연속 아홉 명 이나 무림의 고수들을 살해한 것으로 보아 그의 일장이 필경 상대 해의 목숨을 빼앗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대해의 제자 두 사람이 호통을 치며 좌우에서 소영에게 달려들 었다. 그들은 연마한 공력을 모조리 발휘하여 소영을 엄습했다. 소 영은 팔을 휘두르며 장검을 좌우로 날렸다. 그 순간 연거푸 쨍그렁! 하는 소리가 터졌다. 소영이 그들의 장 세를 거뜬히 막아 낸 것이다. 그는 여전히 우뚝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냉엄한 눈에 서 날카로운 빛이 번개처럼 빛났다. 군호들은 상대해를 바라 보았다. 그의 앞가슴은 다만 옷자락이 세 치 가량 찢어져 있을 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검을 든 두 명의 제자는 스승의 무사함을 보자 잠시 얼빠진 듯 한동안 서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사부님!" 상대해는 천천히 눈을 뜨고 제자를 바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끝났다! 우리 사제가 또 무슨 낯으로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겠느냐?" 그는 손을 들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자신의 천령요혈(天零要 穴)을 향해 일장을 뻗쳤다. 두 제자는 사부가 이런 수를 쓸 줄은 꿈에도 예기치 못했었다. 그들이 스승이 자결하려는 것을 바라 보 고만 있을 때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번개같이 손을 뻗쳐 상대해의 팔에 일격을 가했다. 상대해는 자결하려고 뻗쳤던 손이 갑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흠칫 놀랐다. 마침내 그의 손은 힘없이 아래로 처졌다. 두 제자는 눈길을 돌려 소영을 바라 보았다. 그것은 원한에 맺힌 눈초리인지 아니면 감격에 겨운 눈길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숨을 쉬며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지광대사가 크게 불호를 외고 천천히 다가서며 위로했다. "승패는 흔히 있는 일이오. 무림에서는 아직까지 승리만 하고 패 배를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란 하나도 없었소. 상대협은 너무 괴로 워 마시오." 상대해는 힘없이 대답했다. "나는 강적의 구원을 받아 목숨을 건졌으니 이 모욕을 어떻게 보 답해야 좋단 말이오?" 소영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언제든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상대협의 검에 응해 드 리겠습니다." "내가 설사 오늘의 설욕을 씻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나 역시 한번 은 당신의 목숨을 살려 주겠소." 상대해는 지팡이를 한 번 탁 짚더니 일장 밖으로 날아가 뒤도 돌 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검을 든 두 제자도 사부가 떠나는 것 을 보자 즉시 따라가 버렸다. 소영은 세 사람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지 었다. '저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깊이 오해하고 있으니 어떻게 설명을 해야 옳단 말인가?' 이때 지광대사가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소승은 평생 이렇게 훌륭한 검술은 처음 보았 소. 과연 아홉 명의 무림 고수들을 순식간에 살해할 만한 무공이구 려. 소승은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지도를 받고 싶소 이다." 소영은 겸손하게 말했다. "대사는 현문은협(玄門隱俠)이시며 절세의 고수이니 소생은 적수 가 못 됩니다." 지광대사는 침착하게 말했다. "겸손의 말씀이요. 삼장주, 어서 상대해 주시오." 소영은 오늘의 분위기로 보아 이미 말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장검을 휘두르며 천풍진몌(天風振袂)의 초 식을 전개했다. 순식간에 세 줄기의 차가운 검광이 일어나며 지광대사의 세 군데 요혈을 향해 각각 공격을 퍼부었다. "과연 훌륭한 검법이오!" 그는 옷소매를 털어 한 줄기의 잠력을 발출하여 소영의 검세를 막아내고는 재빨리 손을 소영의 가슴을 향해 뻗쳤다. 소영은 장검을 비스듬히 도로 끌어들이며 지광의 장세를 막고 입 을 열었다. "대사! 잠깐만 멈추시오." "삼장주,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소영은 장검을 도로 칼집에 꽂고 포권을 하더니 말했다. "대사께서 무기를 사용하시지 않으니 소생도 빈손으로 상대해 드 리겠소이다." 지광도 선뜻 응했다. "당신이 편리한 대로 하시오." 소영은 그에게 일례를 하며 재빨리 일장을 날렸다. 지광도 공력 을 모아 일격을 방출하여 맞부딪쳐 왔다. 쌍방의 장력이 맞부딪치는 순간 폭음이 터졌다. 소영은 가슴이 섬뜩하여 외쳤다. "대사의 장력은 정말 놀랍소." 그는 연환섬전장법(連還閃電掌法)을 전개하여 공격을 퍼부었다. 지광도 소영의 일장을 받자 역시 속으로 놀랐다. '어린 나이에 내공이 이토록 정묘하니 만약에 세월이 흘러 더욱 무공이 원숙해지면 그를 당해 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소영은 지광에게 어느새 십육 합까지 공격을 가했다. 그의 공격 은 눈코뜰 사이 없이 전격적이었으며 실로 그 솜씨는 경탄할만 하 였다. 지광대사는 이 번개같은 공격에 뒤로 연속 네 발짝이나 물러났 다. 소림사의 십팔나한(十八羅漢)은 이미 천하에 명성이 자자해서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소영의 연환섬전장세 에 몰려 계속 후퇴만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장중의 군호들은 한결같 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승이 나지막한 소리로 반개에게 말했다. "야, 거지야! 보아하니 저 아이는 확실히 그 무공이 보통이 아니 구나. 아마 저 중도 저 애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때 지광대사가 별안간 힘차게 이장을 뻗쳤다. 다시 공방전이 벌어졌다. 사 장이 서로 교차되자 일 장 거리 안에는 잠력이 가득 찼다. 소영의 장세는 보고 있는 사람들이 눈앞이 아물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빨랐다. 그러나 지광의 추호도 빈틈없는 수세에 소 영은 그의 수비를 뚫지 못했다. 얼마 가지 않아 쌍방은 벌써 백여 초나 겨루었다. 그러나 여전히 막상 막하의 실력으로써 승부가 속히 날 것 같지 않았다. 반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손에 든 솥을 두드리며 말 했다. "주승아! 저들 두 사람은 싸울수록 정신이 나는 것 같구나. 저 상태로 계속 싸운다면 오백 초 안에는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다." 주승이 대꾸했다. "나는 네가 보는 것과는 다르다. 소영이 백 초 안에 이미 두 번 이나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적을 상대한 경험이 부족하여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놓친 것이다. 지광대 사의 수비는 엄밀하나 너무 수비에 치중해 공격은 뜸하다. 그러니 소영을 굴복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자 이때 갑자기 지광대사가 크게 불호를 외치더니 별안간 수 세에서 공세로 전법을 바꾸며 좌장 우권을 한꺼번에 앞으로 뻗쳐 냈다. 반개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주승아, 너도 보았지? 지광은 이제부터 숨겨 놓은 실력을 발휘 할 것이다." 주승도 맞장구를 쳤다. "그의 권장이 계속 공격을 하면 오히려 완전히 틀린 두 가지의 역도(力道)를 발출시킬 수 있지." "그렇고말고. 그의 우장은 비록 여전히 십팔나한 장법을 사용하 지만, 좌장은 소림의 칠십이 종 절기 중의 하나인 선천성공권(先天 性功拳)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초의 공세에는 강유가 함께 곁들어 있으니, 아마 저 아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들 것이다." 주승은 소영의 장법을 칭찬했다. "저놈의 장법은 좀 괴이한 점이 있다. 저것은 강호에서 이미 없 어진 연환섬전장법 같구나. 옛날에 남일공 대협께서 저런 장법으로 명성을 떨쳤지." 반개는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너는 그 남대협의 연환섬전장법을 본 적이 있느냐?" 주승은 미소를 띠고 그에게 말했다. "나는 비록 인연이 없어 그 남대협의 연환섬전장법을 본 적이 없 지만 남대협은 본 적이 있다." 반개는 여전히 코웃음쳤다. "너는 그 연환섬전장법을 본 적도 없으면서 어찌 입을 함부로 놀 려 남을 놀라게 하느냐?" 주승은 그를 힐끗 보더니 다시 웃으며 말했다. "나는 천하의 장법을 모두 구경했으나 저놈이 발휘하는 저렇게 빠른 장법은 본 적이 없다. 남일공은 절묘한 장세로 강호를 휩쓸며 뭇 사람들에게 제일 빠른 장법이라는 칭찬을 받았었다." 두 사람이 말을 나누는 사이에 격투의 상황은 크게 변하였다. 지광대사는 소림의 선천성공권을 발출한 후 과연 열세에서 벗어 났다. 그는 장과 권으로 강, 유 두 가지의 완전히 틀린 역도를 사 용했다. 그의 장세는 갑자기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여 종잡을 수 없 었다. 소영의 번개같은 연환섬전장법은 막대한 영향을 받아 속도가 차 츰 늦어졌다. 속도를 장점으로 하는 장법이 차츰 그 기세를 제한받 자 위력이 크게 감소되었다. 이같은 공방전을 벌이는 사이에 지광대사와 소영은 완전히 전세 가 바뀌었다. 금란은 몹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관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 로 애를 태우고 있었다. '만약에 셋째 장주가 저 중의 손에 굴복된다면 군호들은 필경 셋 째 장주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셋째 장주의 억 울한 누명은 영원히 씻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때 별안간 소영의 장법이 변했다. 그의 왼손은 여전히 연합섬전장법을 사용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십이난화불혈수(十二亂火 不血手)를 전개했다. 삼초도 못 되어 사태는 역전되어 소영이 다시 우세를 차지했다. 그 장지(掌指)는 거미줄이 얽히듯 시종일관 지광대사의 주혈(主 穴)을 노리며 떨어지지 않았다. 반개는 지광대사가 유리한 전세로 만회하는 것을 보자 속으로 기 뻐하며 주승을 비꼬아 주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소영이 장법 을 별안간 바꾸며 열세에서 벗어나 지광으로 하여금 장과 권법을 마음대로 사용치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그는 중얼거렸다. "저놈은 과연 온몸이 절기로 뭉쳐진 놈이로구나." 주승이 슬그머니 그를 비꼬았다. "나는 비록 하루종일 술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주정뱅이지만 사물의 판단에는 더 명철하지." 반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승을 흘겨 보며 말했다. "미친 소리 하지 마라, 이 주정뱅이야! 지광은 소림의 칠십이 종 절기 중에서 일곱 가지를 벌써 숙달시켰어. 그중에서 선천성공권과 나한십팔장의 두 가지만 사용했을 뿐이야." 그의 말이 떨어지자 격전의 승부는 이미 명확히 판가름이 났다. 소영과 지광대사는 서로 갈라졌다. 지광은 곧 합장을 하더니 조 용히 말했다. "삼장주는 무공이 매우 고강하여 소승의 적수가 아니외다." 소영은 공손히 대답했다. "대사께서 양보하셨지요." 반개가 안색을 바꾸어 험상궂은 얼굴로 뛰어 나가며 말했다. "이녀석, 정말 제법이구나, 이 늙은 거지도 가르쳐 다오." 반개는 말을 하면서 무쇠솥을 가슴 앞에 들고 흔들어댔다. 소영 은 공수하고 웃는 낯으로 인사를 했다. "오래 전부터 주승, 반개 두 분의 협명을 듣고 있었소이다." 반개는 냉랭하게 쏘아 붙였다. "인사말은 그만두게! 오직 무공만이 고저를 가릴수 있을 뿐!" 보고 있던 금란은 암암리에 걱정을 하고 있었다. "삼장주님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해도 이렇게 많은 고수들이 번갈 아 싸움을 거는 데는 이겨 낼 재간이 없을 거야. 이대로 계속 싸운 다면 마침내는 그분이 패할 것이 틀림없어..." 소영은 검을 뽑아 들고 반개에게 말을 건넸다. "자! 어서 출수하십시오." 반개는 소영이 연달아 보천성, 상대해, 소림의 지광대사를 물리 친 것을 목격한 터라 적을 업신여기지 못했다. 그는 무쇠솥을 머리에 뒤집어 썼다. 그는 무쇠솥으로 무기를 삼 아 초수의 변화를 창안해 낸 인물이었다. 소영은 그가 솥을 쓴 것을 보자 장검으로 비스듬히 찔어 갔다. 그러나 반개는 검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장검은 쇠솥과 부딪 치자 제 힘에 미끄러졌다. 그 때문에 소영은 팔뚝을 베일 뻔했다. 소영은 깜짝 놀라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솥은 원래 이렇게 묘하게 쓰는 것이구나..." 그는 재빨리 물러서며 팔을 낮추고 미끄러진 장검을 피했다, 그 리고 검으로 자기의 앞을 봉해 버렸다. 반개는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하하하..... 늙은 거지의 쇠솥 맛이 어떤가?" 소영도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매우 고명하시군요." 담소하는 중에 반개는 종횡무진으로 계속 공격해 왔다. 그의 무 공은 일가를 이룬만큼 초수가 괴상하고 특이한 것이었다. 소영은 장검에 힘을 모아 수비했다. 반개의 공세가 괴상하고 사 납기는 했지만 소영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소영은 점차로 두려움이 사라지자 장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반 격을 시작했다. 반개는 일세의 영명을 얻기 위해, 소영은 억울함을 풀기 위해 그 들은 사력을 다하여 싸웠다. 소영이 보기에 반개의 무기가 너무나 이상했다. 십팔반(十八般) 무기와 외문(外門) 무기 칠종과도 달랐으며, 그 이상한 초술은 고 심(高沈)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소영은 열세를 만회하여 반격을 전개했으나 일시에 상대를 제어 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흰색과 검은 그림자가 교차되어 빙글빙글 돌며 난무하고 있어 양측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별안간 검 은 그림자와 흰빛이 동시에 뚝 멈추고 떨어졌다. 소영이 검을 안고 서서 몸을 공손히 굽히며 입을 열었다. "많이 양보하셨소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주승과 반개가 자기의 일을 도와 주었던 것을 생각하고 두 사람을 매우 공경하고 있었다. 반개는 한참 후에야 천천히 말을 하며 돌아섰다. "이것은 이 늙은 거지가 한평생에 두 번째 당하는 패배요. 우리 가 후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하오." 주승이 높은 소리로 외쳤다. "이 더러운 거지야! 가지 말고 이 주정뱅이가 네 분풀이를 하는 것을 보아라." 그러나 반개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자네도 그를 이기지 못하네. 여기서 더이상 추태를 보이지 말게 나." 주승은 기가 차서 멀거니 반개를 응시했다. 한편 소영은 기운이 더욱 왕성하여 두 눈에서는 정기가 넘쳐 흘 렀다. 이처럼 여러 사람과 오래도록 싸웠는데도 피곤한 기색이라고 는 추호도 없었다. 주승은 그러한 소영을 보자 속으로 크게 놀라며 암암리에 생각했 다. '저 아이는 참 심후한 내공을 지녔구나. 그리고 사람됨이 영걸하 고 준수하여 흉악하고 그릇된 기운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데, 어째 서 백화산장에 가담하여 악당 심목풍과 한패가 되었을까?' 이때 반개가 다시 재촉했다. 주승이 높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저 아이와 겨루어 보지 않고는 정말 속이 편치 않겠네. 소 영, 조심하게. 나도 자네에게 교훈을 받고 싶으니까." "물론 모시겠소이다." 주승은 성큼성큼 걸어 나와 소영과 육, 칠 척 되는 곳에 우뚝 멈 추어 섰다. 소영은 검을 가슴 앞에 가로들고 말했다. "객은 주인을 누르지 않는다고 했으니 먼저 손을 쓰십시오." "조심해라!" "염려 마십시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승이 입을 벌리자 한 줄기의 물화살이 강하게 뻗쳐 나왔다. 그 물화살은 강력한 술냄새를 풍겼다. 소영은 손에 내경을 모아 그 물화살을 맞받아 때렸다. 물화살은 소영의 장력에 부딪치자 곧 흩어지더니 빗줄기처럼 수 척 사방을 덮어 씌웠다. 소영은 암암리에 진력을 모아 호신강기를 운기했다. 그 술줄기는 소영의 반 자쯤 앞에서 돌담에 부딪친 물줄기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주승은 깜짝 놀라서 그만 소리를 지르고는 두말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 본시 그의 술을 뿜는 초술은 한평생의 절학이었다. 진기를 모아 한 입에 마셨던 술을 분수같이 뿜어 내는데 설혹 제지를 받는다고 해도 그 술화살이 갈라지며 이루어진 물줄기가 사방 몇 척을 덮기 때문에 더욱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술화살이 그 호신강기를 격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는 단 일초에 패배를 인정했던 것이다. 이제 그 잔디 위에는 소영과 금란, 은란 및 당삼고 외에 보천성 과 초곤산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보천성은 이미 소영에게 고배를 마신 뒤라 다시 싸울 수가 없었 다.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초곤산뿐이었으나 초곤산은 소영에게 달려들어 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하는 것이 싸워서 지는 것보다 더 명성을 손상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물러갈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등에 메었던 쌍륜을 내려 휘두르면서 말했다. "노부는 쌍륜으로 삼장주의 검술을 교훈받겠소." 소영은 포권을 하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노선배님은 저를 몰라 보십니까?" 초곤산은 이미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승산이 조금도 없을 뿐 아니라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쌍륜 을 움켜 쥐고 곧 전신경을 모아 공격을 취하려는데 뜻밖에도 소영 이 자기와의 구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초곤산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쌍륜을 거두고 물었다. "노부는 당신의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요. 그러나 이렇게 만나기 는 오늘이 처음인데...." 소영은 탄식하며 대꾸했다. "저도 소영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는 소 영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도대체 소영이 몇이나 되오? 노부는 들을수록 어리 둥절 하게 되는구려." "그동안 소영을 몇 명이나 보셨습니까?" 초곤산은 한참 후에야 돌연 소리를 쳤다. "약 오 년 전이었소. 노부는 매우 허약하고 병에 시달리는 어린 아이를 보았는데, 그 아이의 이름도 소영이라고 했던 것 같소이다. 무당산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모르오." 소영이 다시 차분히 물었다. "그 소영의 얼굴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초곤산이 고개를 저었다. "똑똑히 기억하지 못하나, 그저 희미하게 그 아이가 너무나 허약 했다는 것과 매우 영리하고 신체와는 달리 마음이 굉장히 대담했다 는 것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소." 초곤산은 갑자기 길게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노부하고 왜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병 투성이인 데다가 강호의 원한에 말려들어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오. 그 아이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나 있으니 어떻게 만 날 수 있겠소이까?"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바로 그 옛날에 허약하기 짝이 없던 소영이올시다." 초곤산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소영을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돌 연 노기찬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마오!" 소영은 그가 완고하고 자상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고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오 년 전 제가 노선배님과 함께 어떤 상봉우리에서 곤란한 일을 당했었지요. 그 산 위에는 악누님도 있었소이다." "악소채 말이오?" "그렇소이다. 그후 중주이고도 만났었지요." 초곤산은 펄쩍 뛰며 말했다. "맞았소! 어찌 그렇게 잘 알고 있소?" 소영은 속으로 웃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고집장이구나. 내가 이렇게 똑똑하게 설명을 했는데도 아직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군. 그러나 그의 좋은 점은 바 로 이것이다.' 소영은 다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제가 바로 그 소영이니까 자연 자세히 알고 있지요." 초곤산은 소영을 자세히 뜯어 보더니 또 고개를 힘있게 흔들었 다. "노부는 결코 속지 않소." 소영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힘차게 말했다. "제가 한 가지 그날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면 노선배님은 틀림없 이 믿으실 것입니다." 초곤산은 소영을 뚫어지게 쏘아 보며 대꾸했다. "노부의 눈은 이 때까지 조금도 틀림이 없었소." 소영은 회상하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제가 노선배님의 무릎에 앉아 노선배님의 수염을 잡아 당 기면서 좋은 수염을 기르셨다고 감탄한 일을 기억하십니까?" "맞았어. 그런 일이 정말 있었소." 초고산은 반신반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그 때의 아이인가?" "무엇 때문에 노선배님을 속이겠습니까?" 그러자 초곤산은 갑자기 오른손에 들었던 쌍륜을 내동댕이치고 소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 년 동안 못 본 사이에 이렇게 늠름하게 컸구나!" 그의 말씨는 좀 어색했지만 구구절절 진심이 깃들어 있었으며 표 정은 아직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소영은 사문을 떠난 후 줄곧 험악하고 기만에 찬 환경 속에서 지 내 왔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노인의 호쾌하고도 진지한 온정을 받 게 되자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초곤산은 소영의 손을 힘차게 흔들며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장하다! 그렇게 허약하던 자네가 이처럼 씩씩하게 변하 여 사람이 영 바뀌었으니 노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악소채도 자네를 만나면 알아 보지 못할 것일세." 소영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제가 그동안 겪은 일들은 한 마디로 말하기 힘듭니다." 초곤산은 소영의 손을 잡고 땅에 내던졌던 청강륜을 다시 집어 들며 말했다. "심목풍이 자네의 연약한 신체를 바꾸어 놓고 이처럼 놀라운 무 공을 전수해 주었나?"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초곤산은 엄숙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람은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은원 관계를 분명히 하고 지내 야 되네. 심목풍은 그동안 악행을 산같이 저질렀네. 그러나 만일 자네가 그에게 은덕을 입었다면, 자네가 그를 돕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지." "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이 무공은 심목풍과는 추호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어째서 백화산장에 가입했는가?" "제가 처음으로 강호에 들어섰을 때 세상의 험악함을 모르고 사 람을 식별하는데 어두운 탓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한 번 실 수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어 천하의 무림인들이 모두 소영을 욕하 게 되었습니다." "젊은이가 경험이 없는 것을 탓할 수도 없지. 그러나 실수를 깨 달았으면 곧 돌이켜야 하지 않겠나?" 초고산은 정색을 하고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듯이 말했다. "자네는 왜 무림 고수 아홉 명에게 독수를 써서 죽였나? 다른 사 람은 내가 모르니까 그만두지만 그 삼상노어옹(三湘老漁翁)은 노부 하고 수십 년 간 사귄 사람이라네. 그의 위인은 매우 겸손하고 자 애롭고 누구와도 원수를 맺은 일이 없는데. 자네가 흑백을 가리지 않고 맹독 암기로 죽였단 말일세." 소영은 눈에 정기를 번쩍이더니 조용히 물었다. "초대협께서도 그들을 이 소영이 해친 것으로 아십니까?" 초곤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그린 듯이 설명했고, 보대협은 직접 보고 들었다는데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나?" 소영은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 "그들은 심목풍의 손에 살해됐소이다." 초곤산은 깜짝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 "심목풍도 왔던가?"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분명하게 말했다. "왔었지요. 그러나 그는 줄곧 어두운 곳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 지요. 무림 고수 아홉 명을 살해한 일도 계획적으로 내게 그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소영은 금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 사건의 경과와 상황을 내게 일러주지 않았다면 저 역 시 내막을 모를 뻔했습니다." 초곤산은 오른손으로 턱에 늘어진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금란을 주목하고 물었다. "당신이 정말로 보았단 말이오?" 금란은 확고하게 대답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소이다." 초곤산은 비로소 납득이 간 듯 그녀에게 말했다. "그랬었구려. 그럼 그 사건의 경과를 말해 보시오." 금란은 엄숙한 표정으로 그 때의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다. 초곤 산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연방 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 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노부는 믿겠소. 이것은 바로 이화접목(移化接木)의 계책이오. 이상할 것은 없소." 한 옆에서 조용하게 듣기만 하던 보천성이 불쑥 말참견을 하였 다. "패장은 본시 아무 것도 말을 할 여지가 없지만 내게 몇 가지 풀 리지 않는 의문이 있는데 물어도 좋을지요?" 소영이 선뜻 대답했다. "어서 말씀해 보시오." 보천성이 소영에게 말했다. "부상당한 아홉 명의 고수 중 여덟 명은 이미 죽었소. 그러나 풍 진삼우 중의 신행추풍객만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소. 그는 맨 앞에서 그 마차 가까이 따라갔던 사람이니 그가 말을 할 수만 있다 면, 이 일은 밝 혀 내기 쉬울 것이오." 소영이 급히 말했다. "지금 어디 있소? 제가 함께 가서 그를 만나고 싶소이다. 저를 그와 만나게 해 주시오." 보천성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은 반드시 주승과 반개가 동의를 해야만 되오. 내 마음대로 하기는 어렵소." 소영은 그가 아직도 의심을 많이 품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초곤산을 향해 말했다. "노선배님은 제 말을 믿으시니 대신 좀 해명을 해 주십시오." "노부는 자네 말을 믿으므로 물론 자네를 위하여 해명할 마음이 있네. 그러나 심목풍은 악명이 너무 높으며 자네는 그 백화산장과 관계를 맺었으니, 단시간에 해명하기 어려울 것 같네. 이후로는 모 든 일에 인내심을 가지고 행동하게나." 소영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노선배님께서 저를 위해 해명하시는 것은 이것으로 족합니다. 그들이 믿고 안믿는 것은 강제로 할 수 없으니까요." "자네가 백화산장을 떠나면 자연 무림 동지들의 의심이 풀리겠 지." "아직은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먼저 심목풍을 만난 후에 라야 결정짓게 되지요." 이때 금란이 대화중에 끼어 들었다. "심목풍은 마음이 그지없이 음침하며 수단이 악랄합니다. 삼장주 께서 함정에서 빠져 나오려면 반드시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야 합니 다. 두 분께서는 이 불쌍한 낭자들을 보셨지요?" 초곤산과 보천성은 동시에 그녀들을 바라 보며 물었다. "이 두 낭자는 누구이며 어떤 암계를 받았소?" 금란은 은란과 당삼고가 처한 상황을 차근차근히 설명했다. 그리 고 그들에게 은란과 당삼고를 소개하였다. "은란은 저와 둘도 없는 친구이며 이분은 당삼고라고 합니다. 서 남도 사람에게 당삼고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수백 년 동안 사천의 당가는 줄곧 위세가 혁혁했고 한 문호를 이루고 있소. 이 당삼고 낭자는 사천 당가에서 어떤 지위요?" 금란은 조용히 대답했다. "당낭자는 우리와는 신분이 크게 다릅니다. 그녀는 지금 당가의 주인이신 당마나님의 친손녀입니다." 초곤산은 의분을 느낀 듯 말했다. "좋아! 심목풍은 정말 대담하군. 저 당낭자의 가문은 수백 년 동 안 줄곧 암기의 권위자로 존경을 받아 왔지. 심목풍이 그 당가를 멸시했구나." 소영이 공손히 포권하여 머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두 분께서 내막을 다 아셨으니, 천하의 영웅들 앞에 이 소영을 위해 몇 마디 변명해 주신다면 깊이 감사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은 후에 또 만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초곤산이 다급히 그를 제지했다. "잠깐!" "초대협께서는 아직 분부가 있으십니까?" "이 두 낭자가 취한 축골독환은 약효가 언제쯤 발생하나?" "대략 복용 후 칠 일 전후입니다. 그러나 너무 충격이나 상해를 입으면 약효가 일찍 발생한답니다." "그 낭자들의 약효가 발생하면 어떻게 하겠나? " "심목풍이 독성이 발생하기 전에 해독약을 보낸다고 했습니다." "심목풍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제때에 보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 "그 때는 또 형편되어 가는 대로 하지요." 금란이 돌연 나서며 말했다. "큰장주는 항상 마음이 사납고 손이 매섭습니다. 그러나 삼장주 님에게는 백화산장의 미래와 관계 때문에 잘해 주지요. 그것은 삼 장주께서 강박을 뿌리치지 못하여 속박되게끔 하려는 속셈이지요, 그가 고수 아홉 명을 죽인 것도 삼장주님에게 강적을 만들려는 심 산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하의 모든 무림 동지들이 소영이라는 인 물을 용서할 수 없는 극악의 인물로 보게 될 테니 삼장주님께서 발 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다시 백화산장으로 돌아와서 심목풍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돕겠지 하는 생각으로 있는 것입니다." 초곤산은 머리를 크게 끄덕이며 감탄하였다. "맞았소! 심목풍의 속셈은 바로 그것이오." 금란은 간곡히 부탁했다. "천하의 무림 인물들은 모두 삼장주님을 극악무도한 악인으로 오 해하고 있습니다. 만일 노선배님께서 이분을 위해 변명해 주시지 않는다면 장차 천하의 무림 인물들은 모두 삼장주님을 증오하고 적 대시할 것입니다. 삼장주님은 만일 그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한바탕 살생을 하고 말 것이며 은원이 겹치고 겹쳐 결국 삼장주님 은 백화산장에 귀속되어 일을 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금란이 쉬지 않고 단숨에 이렇게 열변을 토하자, 초곤산은 머리 를 끄덕이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이때 보천성이 소영의 앞으로 나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소형이 이렇게 결백하신 줄은 미처 모르고 저는 여태껏 엄청난 오해를 했소이다." 소영은 포권하여 답례를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탓으로 흑백을 가리지 못했습니다. 어찌 여러분을 탓하겠습니까? 앞으로 저는 심목풍을 만나면 다시는 무림에서 악랄한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권하겠습니 다." 보천성은 가만히 탄식하며 말했다. "저는 제 의동생의 장례를 치른 후에 반드시 초대협을 따라 소영 의 결백을 무림 동지들에게 알리겠소이다." 소영은 공손히 인사했다.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보천성도 얼굴에 친밀한 웃음을 띠고 절을 했다. 초곤산은 청강일월쌍륜을 거두어 넣으며 말했다. "자네의 이번 일이 벌써 강호에 두루 알려져 무수한 무림 고수들 이 이곳으로 집결하여 합력해서 참극을 막으려 하고 있다네." 소영이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무슨 참극이오니까?" 초곤산이 설명했다. "소문에 자네는 앞에서 백화산장의 고수들을 영솔하고, 심목풍은 후방에서 지휘하며 다시 강호에 나온다고 하더군. 그래서 먼저 사 대현(四大賢)을 멸망시키고 난 다음, 남해로 모여 오흉의 피를 아 미산에 씻고 청성의 이대 문파를....." 소영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초곤산의 말을 가로막고 물었다. "그 말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저는 고향으로 양친을 찾아가는 것 뿐인데요." "이러한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나도 모르지만 그 소문 때문에 무 림은 발칵 뒤집혔다네. 모두 격분하여 자네를 응징하려고 모여들기 시작했지. 주승과 반개 및 상대해와 노부 등은 한 발 먼저 도착한 것에 불과하네. 지금부터 자네가 남행을 하려면 그 여정은 형극(荊 棘)의 길일 것일세." 금란이 거듭 말했다. "노선배님께서는 삼장주님의 사정을 다 아시니 많이 해명해 주시 기 바랍니다." "염려 마시오. 그러나 이곳으로 모여드는 무림 인물은 수가 많고 노부는 혼자니 모조리 돌보기는 어려울 게요. 유감스럽게도 주승과 반개가 일찍 떠나버렸구려. 그들 두 사람이 이러한 실정을 다 알고 앞장서서 일을 했더라면 이번의 분쟁을 해소하기 쉬웠을 텐데..." 그는 소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서서 급히 가버렸다. 소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 보면서 천천히 앉아 나직이 중얼거렸 다. "천하의 무림 동지들이 나를 죽일 놈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내 가 목을 늘이고 죽음을 기다릴 필요야 없지 않나?" 금란이 조용히 소영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삼장주님께서 조금만 참으시면 시비도 결국 가려질 날이 올 것 입니다. 그 때에는 천하의 무림동지들이 삼장주님 앞에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소영은 씁쓰레한 웃음을 띠고 벌떡 일어나며 힘차게 말했다. "앞길이 아무리 험악해도 이곳에서 앉아 기다릴 수는 없다. 길을 떠나자." 금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의 처지가 험악하고 사면초가이지만 저는 조금도 두려워하 지 않습니다. 백화산장에서의 생활과 비교하면 이곳이 더 안전하다 고 생각합니다." 소영은 그녀가 다시 은란을 들쳐 업고 당삼고의 손을 잡고 가려 는 것을 보자 흐뭇한 감을 느꼈다. '금란은 십여 세에 불과하지만 험악할 경우를 당해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 어찌 당당한 사나이로 일개 계집애만도 못 하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자 갑자기 용기가 용솟음쳐 올라 당당하게 앞장 서 걸어 나갔다. 숲속에서 나오자, 오두막의 전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것 이 눈에 띄었다. 노파는 한 그루의 큰 나무 밑에 서 있었다. 그 표 정은 매우 엄숙했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소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노파는 냉랭한 목소리로 쏘아 붙였다. "얘, 꼬마야 축하한다." "나에게는 근심이 태산 같은데 축하한다니 무슨 말이오?" 노파는 여전히 쌀쌀맞게 말했다. "네가 숲속에서 살아 나왔으니 크게 기뻐할 일이 아닌가?" "참 그렇군요. 염려해 주어 고맙소." 노파는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그러나 너는 너무 기뻐하지 마라. 네가 방금 겪은 것은 서막에 불과하지. 앞으로 만나는 상대들은 틀림없이 과거의 것보다 백 배 나 더 고강할 것이다." "일러주셔서 고맙소." 노파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무림 사대현의 문하제자들도 이미 도착했다. 그 밖에 또 아미청성 문하의 고수들과 지모가 대단하고 독을 잘 쓰는 남산신의(南山神醫)가 있단다." "대단한 인물들이군요. 내가 다행히 현재의 곤경을 벗어날 수 있 다면 후일 꼭 방문하여 깨우쳐 주신 정리를 감사드리겠소." 노파는 냉소하였다. "그 남산신의는 독수약왕과 함께 무림에서 유명하지. 네 무공이 높다 마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노파는 말을 계속했다.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은 길어야 내일 오정까지 살겠고, 짧으면 오늘 자정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소영은 여러 가지 의혹이 일었으나 히죽이 웃고 말했다. "가르쳐 주셔서 정말 고맙소. 조심하겠소이다." 노파는 화가 나서 지팡이로 땅을 딱 치더니 소리쳤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왜 네게 가르쳐 주는지 아는가?" 소영은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모르겠소." 그러자 노파는 자신있게 말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나 혼자서도 너희들 네 사람의 생명을 건 질 수 있단 말이다." 소영은 노파의 속셈이 무엇인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우리들 네 사람을 천하영웅들과 대치시키려는 것은 아 니겠지요?" 노파는 냉랭한 소리로 제안했다. "네가 나의 일을 한 가지만 해 준다면 나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 도 너희들을 구해 주겠다."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그러나 내 일행은 이미 대적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소. 저들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암기로써 나를 해치 려고 한다면 재난을 당하는 것은 이 낭자들일 것이오." 노파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나는 한평생 남에게 연민의 정을 가져 보지 못했다. 약육강식 (弱肉强食)은 매우 당연한 일이야." 소영이 노파를 향하여 말을 하려는데 그녀가 재빨리 말을 가로채 며 빈정거렸다. "알겠다. 네 생각에는 이 두 낭자를 봐서 의롭게 도와 달라는 거 지, 하지만 나는 일평생 남에게 거저 주는 것은 없었다. 흥정을 하 자." 소영이 결연히 말했다. "좋소. 조건을 말하시오!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하겠소." 노파는 천천히 말했다. "너를 사흘만 빌리자는 것이다." 소영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뭐요? 나를 사흘 동안 빌려 쓴다고요? 살아 있는 사람을 빌려 쓰다니, 이건 처음 듣는 일인걸..." 노파는 웃으며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라, 내가 이런 나이인데 놀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너같은 어린애와 상대하려는 게 아니다." 소영은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는 것을 느끼며 냉랭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허튼소리 마시오." 노파는 여전히 깔깔 웃으며 설명했다. "내가 빌려 쓴다고 한 것은 다름 아니라 네가 한 사람을 사칭하 고 나와 함께 연회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다. 연회가 끝나면 다시 네 본인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소영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나더러 누구를 사칭하라는 것이오?" 노파는 한숨을 길게 쉬며 힘없이 말했다. "나의 손자를 사칭하는 것이다." 소영은 딱 잘라 말했다. "대장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의 성과 이름을 바꾸지 않는 법이오. 그것은 안 되겠소." 전노파는 다시 냉랭하게 말했다. "시대의 사명을 아는 자가 준걸(俊傑)이라고 하지 않느냐. 네가 나의 청을 승낙하지 않는다면 너희들 네 사람은 결코 오늘의 악전 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삼 생각해서 처신하기 바란다." 전노파는 다시 타이르는 말투로 천천히 말했다. "안전한 길이 있는데 왜 위험을 무릅쓰나? 더구나 나는 너를 사 흘만 빌리는 것이며 결코 불의를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영은 매우 이상해서 속으로 궁리를 했다. '정말 이것은 들어 보지도 못한 괴상한 일이로구나.' 노파가 그의 생각을 깨뜨렸다. "저 두 낭자의 독성은 곧 발작할 것이다. 너 혼자서는 제 아무리 무공이 높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안전까지 돌봐 주기는 어려울 것이 다. 합하면 우리 두 사람이 유리하고, 갈라지면 둘이 다 패하고 상 하는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소영이 약간 누그러지며 물었다. "쌍방이 유리하다면 고려할 수도 있소. 그러니 무엇인지 먼저 설 명해 주시오. 그래야 내가 생각해 보고 결정짓지 않겠소?" 전노파는 반색을 하며 대꾸했다. "그렇게 나온다면 의논할 여지가 생기는데...." 소영은 엄숙하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천하의 무림동지들이 모두 이 소영을 오해하고 있지만 나는 결 코 양심에 부끄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소. 할머니는 먼저 이것을 생각하시오. 만일 나더러 당신의 이용물이 되라고 요청하는 것이라 면 아예 이야기는 꺼내지 마시오." "이곳은 이야기하기 불편하니 나의 초가집으로 잠시 들어가서 앉 자" "좋소. 그렇게 합시다." 노파는 빙그레 웃으며 앞장서 걸어 갔다. 소영은 성큼성큼 따라 가면서도 마음이 착찹했다. 불과 몇시간 전에 이곳에서 저 노파와 겨루며 싸웠는데, 지금 다 시 그 집에 돌아와 노파와 협상을 할 판이니.... 노파는 손수 소영과 금란에게 차를 따라 주며 웃는 낯으로 공대 를 했다. "나의 이 송자향예차(松子香藝茶)는 손님에게 대접하는 일이 없 소. 이 차에는 폐를 튼튼케 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효능이 있소. 두 분이 먼저 한 잔 드시고 의논해도 늦지 않소이다." 소영은 이 때까지 호걸들과 싸웠기 때문에 벌써부터 목이 말랐던 차에 차를 대접받자 곧 잔을 들었다. 그가 그 찻잔을 입에 대려 할때 돌연 금란이가 가볍게 기침을 했 다. 그러자 소영은 그것이 차를 마시지 말라는 경고임을 깨닫고 곧 찻잔을 도로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전노파는 금란을 힐끗 쳐다 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앞에 놓인 찻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리고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삼장주는 내가 왜 이런 광야를 선택해서 살고 있는지 아시오?"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노파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이곳은 속진을 씻는 불가의 청기(淸氣)도 없고 눈을 즐겁게 하 는 풍경도 없소. 누구든 노후에 은거하는 곳으로 이런 곳을 선택하 지는 않을 것이오." "할머니가 이곳을 택하신 데에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겠지요." "이 수천 년 묵은 용수(榕樹)때문에 나는 이 오막살이에 수십 한 서(寒署)를 살게 되었소." 그녀는 화제가 빗나간 것을 깨달은 듯 소영이 묻기 전에 얼른 이 야기를 바꾸었다. "나는 이곳에서 십팔 세의 손자와 함께 살고 있었소. 그런데 이 년 전에 그 손자가 갑자기 실종되어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구 려. 내가 그 애를 찾으러 갈 마음은 있지만 남과 선약이 있기에 그 를 찾으러 갈 틈을 낼 수가 없소." 이렇게 말하더니 별안간 눈물이 글썽해졌다. 소영은 노파가 손자를 사랑하는 정이 극진한 것을 보자니 동정심 이 생겼다. 소영은 노파를 위로하려고 했으나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그만 어두운 표정으로 탄식만 내뿜었다. 노파는 눈물을 닦고 억지로 기분을 돌리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조금 전에 나는 옛친구의 편지를 받았는데, 내일 오정 때 손자 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해 달라고 하는 사연이었소. 실종된 지 벌써 이 년이 넘은 손자를 내가 어디 가서 찾아오겠소?" "그렇다면 사실대로 그쪽에 말하지 않는 거요." 노파는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그 옛친구는 성미가 매우 괴팍해서 나와는 수십 년 간 사귄 친 구지만 화를 내는 날에는 살인도 불사하는 사람이오. 내 손자가 실 종되었다고 말한다면 틀림없이 그는 믿지 않을 것이오. 나는 이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중 삼장주가 온 것이라오. 당신은 실종된 내 손자와 나이도 비슷하오. 삼 일간만 그 옛친구의 집에 동행하여 나 를 도와 준다면 그 후에는 여전히 소영으로 되돌아 가도 좋소. 그 리고 또 나 역시 당신에게 거저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오. 내 능력을 다해서 천하 무림고수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 주겠 소." 소영은 한참 주저하더니 말했다. "나는 그 옛친구가 왜 당신의 손자를 꼭 보려는지?" 노파는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가 그만 두고 헛기침만 연달아 하더 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우리들은 옛날에 원수지간이었소. 서로 원한이 매우 깊었 는데 풀어 버리게 된 것은 내 손자 때문이었소. 만일 내가 연회석 상에 그 손자를 데리고 가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그의 오해를 사서 연회장에서 서로 반목하게 되어 손을 쓰게 될는지 모른단 말이오." 소영은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할머니의 금년 연세는 어떻게 됐소?" "나는 육십하고 여섯이오." "할머니의 나이가 예순 여섯이라면 그 옛친구도 반백은 넘었겠지 요?" "그는 나보다 몇 살 더 먹어서 이미 칠십이 넘었다오." 소영이 재빨리 말했다. "바로 내 의문은 그것이오. 당신들은 벌써 회갑이 훨씬 지난 분 들이고, 서로 십 년 간이나 만나지 못했잖소. 그때 당신의 손자는 불과 팔, 구 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옛친구는 어찌 대사를 전연 알지 못하는 어린애를 중하게 본단 말이오?" "그 사정을 말하자면 길지요. 삼장주가 믿기 어렵다면 우선 이 청첩을 보시오." 청첩장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우리가 헤어진 지도 어느새 십 년의 세월이 흘렀구려. 내일 정 오 전에 연교(軟轎)를 보내겠으니 그것을 타고 한 번 오셔서 연회 에 참석하시기 바라오. 아울러 영손을 데리고 함께 오시기를 간망 하오.> 소영은 청첩장에서 눈을 떼었다. 노파는 가만히 탄식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청첩장은 표면으로는 나를 청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최후의 구절이 중요하오.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삼장주가 가장 적합하 다고 생각되었소. 그래서 이렇게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삼장주를 청 해다가 솔직하게 의논하는 것이오. 그러니 삼장주는 나를 특별히 생각하여 도와 주시오." 소영은 청첩장을 천천히 노파에게 돌려 주며 말했다. "이 일은 참 기괴한 일이니, 좀 자세히 생각해 보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전노파는 천천히 일어서며 대답했다. "좋소. 당신들이 의논한 동안 나는 잠시 물러가 있겠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머니 마음대로 하시오." 전노파는 청첩장을 다시 받아 들고 천천히 내실로 돌아 갔다. 31. 오두막의 방어진(防禦陣) 소영이 전 노파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 금란을 돌아 보며 물었다. "너도 다 들었겠지?" 소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일은 좀 수상하여 진가를 분간하기 매우 어렵구나. 그러나 전 노파의 말씨가 이토록 간절하니 허위로 조작하는 것 같지는 않 구나." 금란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이 일의 이면에는 틀림없이 어떤 내막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러니 제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승낙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소영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명을 바꾸는 일은 도저히 승낙할 수 없다." 이때 내실 사이에 드리운 부드러운 발을 젖히며 전 노파가 나왔 다. "나는 한평생 남에게 구원을 청해 본 일이 없었소. 그러나 이런 나이가 되어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그녀의 목소리는 지극히 처량했고 떨렸으며 더욱 늙어 보였다.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소영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가만히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를 도와 주신다면 곧 영단 두 알을 당신에게 드려 저 두 낭자 의 독을 해독해 주겠소이다." 소영이 노파의 손을 보니, 과연 그녀의 손바닥에는 작고 묘하게 생긴 옥병이 있었다. 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웃는 낯으로 사양했다. "할머니의 호의는 고맙소이다. 그러나 이 두 낭자의 중독은 백화 산장의 축골독환이라 그들이 조제한 해독약 말고는 어떤 해독약도 효과가 없소이다." 노파는 약간 냉소를 띠고 말했다. "이 영단은 내가 삼십여 년 간 소중히 간직했던 것이오. 그 어떤 독이든 종류를 막론하고 이 영단을 먹기만 하면 곧 몸의 독성이 해 제되는 것이오. 삼장주가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한 번 시험해 보시는 게 어떻겠소?" 소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처럼 진귀한 영단이 만일 용도가 틀린다면 너무나 아깝지 않 소?" 전 노파는 웃으며 대답했다. "삼장주는 안심하시오. 내가 백발백중 고칠 자신이 없다면 면전 에서 권하지도 못할 것이오." 소영의 마음은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영단을 받아 은란과 당삼고 의 중독을 풀어주면, 결과적으로 노파의 은혜를 받는 것이므로 그 때는 반드시 성명을 바꾸고 저 노파의 손자로서 행동해야 되는 것 이다. 단 삼 일 간의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한평생 잊기 어려운 치욕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은란과 당삼고의 독성이 발작할 때 힘줄이 당 기고 뼈가 오그라지는 고통을 생각하면 그만 또 마음이 동요되는 것이었다. 전 노파가 자신있게 말했다. "삼장주는 이 영단을 마음 놓고 써 보시오. 만일 이것으로 두 낭 자의 중독이 풀리지 않는다면 나는 나머지 여생을 종이 되어 그녀 들의 시중을 들겠소이다." 소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의 이 해독 영단이 저 낭자들의 독을 풀면, 나는 할머니 를 따라 그 옛친구의 연회에 나가야 하지 않소?" 전 노파가 단호히 말했다. "물론이오. 하나 그의 이름이 무림을 진동시키고 모두들 두려워 하지만 당신에게는 가해하지 않을 것이오. 그 점은 절대 안심하시 오." 소영이 노파를 똑바로 쳐다 보며 말했다. "내가 일단 가겠다고 약속하면 도산검림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를 세워 뒤돌아 보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사전에 말해 두고자 하는 것이 있소. 그것은 내가 할머니를 따라 연회에 가는 것은 좋으나, 나의 성과 이름까지 바꿀 수는 없소." 전 노파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삼장주가 나를 따라 연회에 간다면 그들은 자연 당신을 전씨 가 문의 손자로 볼 것이오." 소영은 끝까지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든 내 입으로는 승인할 수 없소!" "좋소! 그때 가서 당신이 나의 말대로 한다면 꼬리를 잡히지 않 게 될 것이오." 소영은 그 말에는 쾌히 승낙했다. "좋소!" 소영은 옥병을 집어 들고 병마개를 열어 콩알만한 두 알의 흰 영 단을 꺼낸 뒤 은란과 당삼고의 입에 그 영단을 넣었다. 금란이 재 빨리 쌍장으로 은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은란이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온 방안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 했다. 그녀는 혈도가 풀리자 감각이 회복되어 근골이 수축되는 고 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뒹굴었던 것이다. 소영이 노파를 돌아보며 경고했다. "할머니, 운기하여 경계하시오. 나는 언제나 몰래 습격하는 것을 싫어하오. 만일 저 낭자가 그 약으로 죽는다면 나는 지체 않고 전 력으로 당신을 때려 죽여 그녀들의 원수를 갚겠소." 노파는 소영의 말을 못 들은 듯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상한데? 이상하다! 이 해독 영단은 언제나 영험하기 짝이 없 었는데 왜 이 낭자는 고통스러워하는 것일까?" 금란은 은란이 심하게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자, 그만 정신이 아 찔하여 구슬같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한편 당삼고는 으윽! 하고 소리를 지르고 정좌하더니 푹 쓰러졌 다. 눈처럼 희고 고운 얼굴에 검은 기운이 서리더니 이내 검은 액 체를 토해 냈다. 이때 노파는 땅이 꺼지게 탄식을 하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참말로 무서운 독약이군." 그리고 재빨리 당삼고의 곁으로 달려가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 다. 은란은 어느새 뒹굴고 소리치던 것을 멈췄다. 안색도 점점 당 삼고와 흡사하게 검게 물들더니 그녀 역시 시뻘건 물을 토해 냈다. 이러한 변화가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 알 수 없는 소영은 그 저 물끄러미 그들만 바라 보았다. 비위 상하는 이상한 악취가 온 방안에 가득찼다. 그때 노파는 휴우 하고 한숨을 짓더니 외쳤다. "됐다. 됐어!" 소영이 놀라 노파를 돌아 보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낭자들이 위로 토하고 아래로 설사를 하니 영단의 효험이 벌 써 나타난 것이오. 내가 이분들의 옷을 갈아입힐 동안 삼장주는 나 가 계시오." 소영은 노파의 무공이 고강한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손을 쓴다 면 금란은 도저히 노파의 적수가 못 된다. 자기가 밖으로 나가면 이 노파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자 방 안에서 노파의 음성이 들려 왔다. "삼장주, 들어오시오." 방으로 들어서 보니 상황은 크게 바뀌어 있었다. 당삼고와 은란 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눈을 감고 운기조식 중이었다. 그녀들 의 안색은 많이 회복되어 창백하긴 했지만 검은 기운이 사라졌으며 고통의 빛은 조금도 없었다. 전 노파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두 낭자의 위험한 고비는 이미 지났소. 삼장주는 나의 요청을 승낙했으니 어떻게 하시겠소?" 소영이 결연한 말투로 대답했다. "대장부의 승낙은 중천금이오. 약속이 변할 리 있겠소?" 당삼고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 정기가 없 었다. 그러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고 억지로 일어나려고 했다. 노파 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 황급히 말렸다. "안 되오. 낭자의 몸 안에는 아직도 독이 남아 있소. 어서 내 말 대로 조용히 앉아 조식하고 절대 경거망동은 삼가시오." 소영이 조용히 말했다. "두 낭자는 천우로 극독이 제거되었으니 실로 마음이 놓이오." 은란이 눈을 반쯤 뜨고 간신히 말했다. "이 일은 삼장주님의 탓이 아니에요." 노파가 다시 말렸다. "낭자들은 말을 많이 하지 마시오. 앞으로 네 시진 이내에 여독 이 깨끗하게 제거될 것이오." 소영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 할머니의 말씀이 옳소. 두 낭자의 몸 안에 있는 극독을 제거 한 것은 이 할머니가 주신 영단의 덕택이오." 노파가 소영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삼장주가 이 방을 나가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암만 해도 이분들이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니 말이오." 소영은 돌아서서 초가집을 나와 늙은 용나무에 기대서서 사방의 풍경을 바라 보았다. 불현듯 고향집의 양친이 생각났다. 그러자 그 만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버지는 너그러우시고 어머니는 사랑이 매우 깊으셨다. 말없이 집을 떠난 지 몇 해 동안 전혀 소 식을 전하지 않았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아들 생각에 눈물을 홀리 실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뭉클하여 그만 어두운 심정으로 눈 물을 금치 못했다. 그때 별안간 날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 보니 흰 비둘기가 곧장 초가집 안으로 날아 들어 갔다. 소영은 흠칫 놀라며 생각했다. '노파는 무림 인물과의 왕래가 드문데 어디서 온 전서구(傳書鳩) 일까?'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집 안에서 전 노파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흰 편지를 들었으며 얼굴은 침울한 빛을 띠고 있었 다. 노파는 느린 걸음으로 소영에게 다가와서 손에 든 편지를 내밀었 다.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노선배님은 어찌하여 무림 동지들과 원수를 맺습니까? 이 편지 를 보시는 즉시 소영의 일행을 쫓아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해가 떨 어지기 전에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영은 그것을 읽고 길게 탄식했다. "음..... 천하의 무림 동지들이 나를 이렇게 깊이 오해하고 있으 니 실로 해명하기 어려운 것 같구나." 시선을 들어 노파를 바라 보며 물었다. "할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만일 내가 도와 줄 마음이 없었다면 오랫동안 귀중하게 간직했 던 영단을 저 두 낭자에게 먹이지 않았을 것이오." "할머니는 한낱 할머니의 손자로 사칭하도록 나를 빌리는 것에 불과한데 이 대가는 너무 큽니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나도 이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없 소. 천하의 무림과 원수를 맺게 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소영은 진심으로 말했다. "내 생각으론 할머니께서는 이번 일에 가담하지 마시고 나 혼자 대항했으면 싶습니다. 다행히 내가 죽지 않으면 내일 오정에 할머 니와 함께 옛 친구의 연회에 가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불행히도 당신이 죽는다면?" 소영은 어이가 없어 노파를 빤히 쳐다 보며 대꾸했다. "그 때엔 자연히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때문에 나는 그것을 원치 않소. 나는 반드시 내 능력을 다하여 꼭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겠소." 소영은 잘라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그는 용나무에 기댄 채 하늘을 바라 보았다. 노파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지금은 책략이 두 가지 있소. 첫째는 적의 공격을 피하여 그들 에게 허탕을 치게 하는 것이오." 소영이 급히 가로막았다. "그 방법은 마땅치 않소. 내 추측으로는 우리들의 행동은 이미 그들의 감시 중에 있다고 보는 바이오." 노파는 소영의 말을 들은듯 만듯 이어 말했다. "둘째 방법은 그들과 돌아가며 싸우는 것이오. 그러나 반드시 미 리 조치를 해 놓고, 들어 오면 공격하고 물러가면 지키는 것이요." 소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 당삼고와 은란, 두 낭자의 체내의 독이 해질 무렵까지 제거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어떨까요?" 노파는 곧 대답했다. "체내의 독이 전부 제거된다고 해도 체력이 회복되지 못했으니, 열 두 시진 안에는 적을 막을 수 없을 것이오." "그 비둘기가 가져온 편지로 로면 오늘 밤 이곳으로 숨격해 올 인원은 적지 않을 것 같소. 우리들은 단지 세 사람의 힘인데다 독 상이 완치되지 않은 두 사람을 보호하는데 힘써야 하니 지극히 어 려운 일이오이다." 소영이 이렇게 말하자 노파가 곧 말을 받았다. "우리들이 수단을 써서 내일 오전 때까지만 지탱한다면 틀림없이 원군이 도착할 것이오." "그 옛친구 말입니까?" "그렇소! 그는 나를 보아서는 손을 안 쓰겠지만 당신을 위해서는 꼭 손을 쓸 것이오." 소영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나는 그와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요?" 노파는 웃으며 간단히 대꾸했다. "그는 당신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손자를 구하는 것이 오." 이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해는 아직 저렇게 있는데 어째서 미리 출동하는 것 같소?" "내가 찢어 보낸 편지를 보고 화가 나서 미리 출동하는 것 같소." "그렇다면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 되겠소이다. 할머니께서는 저 세 낭자의 안전을 보호하시오. 나는 적을 맞겠소이다." 전 노파는 그의 말을 급히 가로챘다. "그들은 인원이 많은데 당신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막아낼 수 있 겠소? 뱀은 머리를 때려야 하고 도적은 두목을 잡아야 한다는 말과 같이 우리들은 반드시 그들의 중심 인물을 우선 제거해야 하오." 그녀는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소영에게 물었다. "중독되지 않은 저 낭자는 무공이 어떻소?" "이류에 속하는 솜씨입니다." 전노파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사천당가의 암기는 무림에서 백 년 간 명예를 누렸소. 저 당삼 고가 상하지 않았다면 아주 좋은 협조자가 되었을 텐데... 지금 우 리는 세 사람이 적을 막고 또 일제히 출전해서 삼각진을 구축하여 야 하오. 저 용나무를 한계로 그들이 초가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이오." 소영이 대뜸 말했다. "안 됩니다. 세 사람이 일제히 출수하면 물론 정세의 변화를 바 꿀 수는 있겠지만, 저 체력이 회복되지 못한 두 낭자를 돌볼 사람 이 없게 됩니다." 노파는 그 말에 수긍했다. "나도 그것이 제일 골칫거리요. 만일 우리 세 사람의 힘이 하룻 밤과 반나절을 지탱할 수 있어 적을 초가로 들어 가지 못하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녀들을 내가 무공을 연습하는 지하의 밀실로 들 어가서 휴양하라고 하겠소. 그러나 적의 힘이 월등히 강해 우리가 중과부적으로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을 때, 밀실 속의 두 낭자까지 돌아볼 수 없게 될까 걱정이오." "그 지하의 밀실은 견고합니까?"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견고하오. 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들어 갈 수 없 소. 단 한 가지 유감스러운 점은 딴 곳으로 나가는 비밀문이 없는 것이오." 소영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내 생각에는 두 낭자들을 밀실로 들여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 소이다. 그래야 우리가 전심일치해서 오는 적을 막을 수 있지 않겠 소이까?" 전 노파가 초가를 돌아 보더니 단호히 말했다. "그렇게 되면 저 초가는 사수해야겠소이다!" 소영도 동의했다. "내 소견에도 그것이 상책이라 여겨집니다." 노파는 마침내 결심하고 머리를 끄떡였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내가 가서 두 낭자를 밀실에 옮기고 오겠 소.' 초가로 들어 갔던 노파가 얼마후 금란을 데리고 나타났다. 금란이 소영의 옆으로 가까이 와서 낮은 소리로 보고했다. "전 할머니의 밀실은 매우 견고하며 안전합니다. 그들이 불을 놓 아 초가가 다 타 버린다고 해도 당삼고와 은란은 절대로 안전합니 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금란은 조용히 말했다. "삼장주님, 용서할 사람은 용서하시고 너무 사납게 손질하지 마 십시오.' 소영은 금란을 눈여겨 보며 대답했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 여하에 달렸다." "삼장주님은 이미 참으로 많이 참으셨습니다. 그 초곤산과 보천 성 양인이 삼장주님을 위하여 작극적으로 변명하겠다고 약속했으 니, 우리 사건의 진상이 근일 중에 곧 밝혀질 것입니다. 만일 삼장 주님께서 일시의 분을 참지 못하시고 사람을 살해하신다면 거의 다 성공한 일을 실패로 몰아 넣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금란의 이같은 정성어린 충고를 듣자 소영은 가만히 탄식했다. "네 말이 맞다!" 이때 갑자기 쌩!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을 가르고 향전(響箭)이 날아 왔다. 전 노파는 지팡이로 쳐서 그 향전을 떨어뜨리더니 냉소 를 하며 소영에게 말했다. "그들은 이제 곧 출동하오. 내가 당신을 도와서 그들과 대적할 결심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타진하려는 것이오." 소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할머니는 지금이라도 상관하지 않으시는 게 좋소이다." 그러자 노파는 버럭 노성을 질렀다. "내가 당신을 도울 생각이 없다면 아무리 당신이 도와 달라고 사 정을 해도 도와 주지 않소. 그러나 내가 당신을 도우려고 마음 먹 었을 때는 아무리 당신이 거절을 해도 역시 나는 도울 것이오." 노파는 엄숙한 표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침범하는 적은 인원이 많고 우리는 세 명뿐이오. 그러니 그들과 대적할 때에는 절대 개인적으로 싸워서는 안 되오. 내 생각에는 각 기 한 방위를 지키면서 서로 응원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보오." 노파는 시선을 돌려 금란을 바라 보며 물었다. "낭자는 암기를 쓸 줄 아오?" 금란은 곧 대답했다. "쓸 줄은 압니다만 익숙치는 못합니다." "좋소! 낭자는 방안을 지키시오. 나와 삼장주는 방 밖에서 적을 막겠소. 우리는 저 방을 방어의 요지로 삼고 그들을 막아 내기로 합시다." 소영도 노파의 작전에 동의했다. "좋소이다. 할머니의 전략에 따르겠소이다." 금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전 할머니,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해도 좋을는지요?" 전 노파가 곧 응했다. "할 말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하오." "우리는 침범하는 무림 인물들과 원수진 일은 없으니 독수를 써 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꼭 필요하다면 목숨은 상하지 않게 하 는 것이 좋겠어요." 전 노파가 냉랭히 말했다. "저들의 행동은 분명히 이 할멈을 멸시하는 것이오. 오늘 저들에 게 쓴 맛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이후에 내 무슨 낯으로 강호에 얼 굴을 내 놓소?" 금란이 다시 몇 마디 더 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번개처럼 날아 왔다. 노파가 재빨리 지팡이로 때렸으나 그 화살은 맞지 않고 방향만 약간 치우쳐 쌩! 하는 소리와 함께 늙은 용나무에 가서 꽂혔다. 소영이 깜짝 놀라서 부르짖었다. "강한 활에 긴 화살! 힘이 이렇게 맹렬하니 이것을 쏜 사람의 내 력은 틀림없이 매우 놀랍겠소이다." 전 노파는 화살을 뽑아 자세히 살피더니 안색이 변하며 쌀쌀하게 소리쳤다. "좋다! 그도 올 줄은 몰랐군!" 소영이 황급히 물었다. "누구입니까!" 신전진건곤 당원기(神箭眞乾坤唐元奇)! 그 사람은 천생신력(天生 神力)이오. 천 근의 경궁을 당길 수 있는 장사이며 무기도 놀랍게 무겁소." 소영은 궁금하여 다그쳐 물었다. "그는 어떠한 무기를 씁니까?" "일 장 이 척의 부드러운 줄이 달린 은추(銀鎚)를 쓴다오."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어 말했다. "그를 만나거든 조심하시오. 그가 쏘는 화살은 칼로 때려서도 안 되고 그의 무기도 강하게 받아서는 안 되오." 소영이 노파에게 제안했다. "우리는 먼저 이 용나무 위에 숨어서 그들의 공세를 살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진기를 모아 똑바로 선 채 일장 남짓하게 날아 오르더니, 왼손을 내밀어 부드러운 가지를 잡고 날쌔게 무성한 잎 사이로 들 어가 숨는 것이었다. 전 노파는 그 동작을 주시하고 있다가 나지막하게 칭찬을 했다. "참으로 훌륭한 경공이오." 노파도 지팡이로 땅을 쾅 치더니, 몸을 비스듬히 솟구쳐 소영의 곁으로 날아 올라 빽빽한 잎 사이로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이 나무 위에 숨자마자 사람의 그림자가 곧 초가 앞에 나 타났다. 소영은 잎 사이로 내려다 보았다. 나타난 적은 두 사람이 었는데, 약 삼십여 세 가량 되어 보였으며 경장을 했다. 소영은 전음술을 이용하여 노파에게 물었다. "할머니, 이들은 어느 정도의 인물입니까?" 노파가 나지 막하게 응했다. "동정을 살피러 온 졸개들이오." 그런데 또다시 네 사람이 빠르게 달려 왔다. 맨 앞에 선 사람은 하늘색 장삼을 입었고 긴 팔에 가는 허리, 빛나는 눈과 짙은 눈썹 을 하고 있었으며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었다. 그의 뒤에 세 사람은 각기 양은곤(凉銀棍)을 들고 있었는데, 중 한 사람은 양은곤 외에도 어깨에 비스듬히 장검을 메고 있었다. 전노파가 속삭였다. "저 사람을 알겠소?" 소영은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르겠소이다. 할머니는 물론 아시겠지요?" "저 사람은 근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무림의 젊은 괴걸(怪傑)이 오. 무림에 나온 지 오 년도 못 되는데 벌써 하남(河南) 호북(湖 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사성(四省)의 무림 인물들을 굴복 시켜 규합하고 사성의 총타주로 추대를 받은 인물이오." 그녀는 소영을 힐끗 바라보더니 이어 말했다. "저 사람은 스스로 사성의 총타주가 된 후 여러 차례 나를 찾아 와서 나에게 다시 강호에 나와 자기를 도와 달라고 요청했었소. 그 리고 하는 말이 강호에는 문란한 기상이 싹트고 있어, 오 년 이내 에 반드시 전에 없었던 대살육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소. 저 사람은 말도 잘하고 도리를 알고 있소. 그의 언변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어 나도 거의 그에게 설득당할 뻔했소. 그러나 나는 매번 거절했 소. 그가 다시 네 번째로 또 찾아왔을 때 나는 그에게 다시 붙잡히 면 거절할 방도가 없겠기에 피했었지요." 소영은 그녀가 이렇게 긴 설명을 하면서도 그 사람의 이름을 말 하지 않기에 참다 못해 물었다. "할머니, 그의 성명은 무엇입니까?" "그는 마문비(馬文飛)라고 하오." 이때 밑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 왔다. "노 선배님은 강호에서 빛나는 명예를 지니신 분이외다. 그러한 분이 백화산장의 인물을 접근케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입니다." 소영이 자세히 살피니 그 우렁찬 외침은 바로 마문비의 목소리 다. 소영은 말하고 있는 마문비를 찬찬히 뜯어 보다가 노파에게 속 삭였다. "저 사람의 기품은 속되지 않소이다. 훗날 무림에서 반드시 한 자리 할 사람같이 보이는군요." 노파가 곧 대답했다. "훗날이라고 할 것도 없소. 현재의 형세로 보더라도 그의 사성 총타주라는 지위는 결코 일파의 장문인의 신분보다 낮은 것이 아니 오." 소영은 마문비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저 사람을 내가 상대해 보겠소이다." 노파가 주의를 주었다. "저 사람하고 대등하게 싸우려면 방대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의 언변에도 동요되지 않아야 하오." 소영은 노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기를 모아 용나무 꼭대 기에서 사뿐히 땅 위로 내려섰다. 마문비는 소영의 가벼운 신법을 힐끗 보더니,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그만 두고 오른손의 부채를 가 슴 앞에 들고 왼손을 슬쩍 옆으로 내밀었다. 그의 뒤에 섰던 세 사나이들 중에서 등에 장검을 메고 있던 자가 재빨리 보검을 끌어 내려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소영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 다. 오히려 그의 뒤에 늘어선 사나이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양쪽 에서 튀어 나와 양은곤을 휘두르며 삼면합공의 기세를 이루었다. 소영은 걸음을 뚝 멈추고 어깨 위의 장검을 쓱 뽑았다. 지그시 쏘아 보고 있던 마문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나는 소영이라고 하오." 그러자 마문비는 냉소하며 말했다. "백화산장의 삼장주였구려. 몰라 뵈어 실례했소이다." 소영은 가슴을 쫙 펴고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외다. 귀하의 존명이 마문비시오?" "그렇소. 소생이 바로 마문비요." 소영이 슬쩍 물었다. "우리들은 평소에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닌데, 어째서 귀하는 부하 들을 영솔하시고 이 소영을 귀찮게 하십니까?" 마문비는 서슴지 않고 반문했다. "천하 무림인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귀하는 그들을 도살하셨소이 까? 더구나 죽은 아홉 명 중에는 나의 유력한 부하도 있소이다. 죽 은 자의 복수는 고사하고라도 귀하가 나의 땅을 어지럽히는 일 한 가지만 갖고도 이 마문비는 좌시할 수 없소." 소영은 냉랭히 대꾸했다. "흥, 그 말씀이라면 백화산장도 총타주 귀하의 땅 위에 있거늘 그건 상관없소이까? 만일 마문비 당신이 정말 하남, 호북, 호남, 강서 사성의 총타주로 자처한다면 벌써 그 백화산장을 공격했어야 옳았소이다!" 마문비는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소영은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당신은 심목풍의 위명이 두려워서 백화산장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외다. 만일 지금 당신과 대적하는 상대가 이 소영이 아니고 심 목풍이라면....." 마문비가 노해서 버럭 소리쳤다. "심목풍이라면 어떻단 말이오?" 소영은 냉소를 띠고 말했다. "당신은 감히 나타나서 그에게 맞설 생각도 못했을 것이오. 그것 이 어찌 당신 마가 혼자뿐이겠소." 그의 이 몇 마디 말은 듣기에 매우 쓰라리고 각박한 것이었지만 사실 실정이 그러하였다. 마문비는 눈썹을 꿈틀하는 것이 화가 치밀은 모양이었다. "심목풍이 자취를 감추어 깊이 숨어 있다가 다시 강호에 나타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소. 오늘 나는 먼저 삼장주 당신을 처치 한 다음 곧 심목풍과 싸우겠소!" 그러자 소영은 코웃음 치며 빈정거렸다. "당신은 나조차 이기지 못할 것이오!" 마문비는 핫핫! 웃으며 소리쳤다. "당신은 연달아 무림 고수 아홉 명을 살해해 무공이 고강함은 이 미 증명되었소. 나는 그러한 당신께 교훈을 받고자 하오." 양은곤을 들고 있는 사나이 셋이 냉랭하게 말했다. "총타주님께서 출수하실 것 없이 우리 셋이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들은 양은곤을 휘두르며 삼 방위로 소영을 공격했다. 소영은 장검으로 천녀산화의 초식을 전개하여 검광을 사방에 날 리며 검꽃을 송이송이 펼치고, 세 사람이 이룬 공세 속에서 빠져나 왔다. 세 사람은 검꽃이 연달아 펼쳐 나오는 것을 보자 슬그머니 두려 운 생각이 들었다. 소영은 세 사람이 공격에서 수비로 전법을 바꾸 는 찰나 번개같이 그 포위를 뚫고 마문비에게 달려 들었다. "저 세 사람은 내 적수가 아니오. 나는 죄없는 사람은 상하고 싶 지 않소이다. 당신의 절학을 교훈받겠소." 마문비는 소영이 쉽사리 세 사람의 포위를 뚫고 나오는 것을 보 고 속으로 크게 놀랐다. 이때 날카로운 기합소리가 들리며 양은곤을 든 세 사람이 또 달 려 들었다. 이들은 소영이 포위를 벗어나자 체면이 크게 손상됨을 느끼고 결 사적으로 공격해 왔다. 그들은 이미 사전에 의논해 둔 전법을 쓰기 때문에 그 기세가 매우 맹렬했다. 그들은 일격에 소영을 물리칠 생각이었다. 소영은 순간 장검을 휘둘러 앞으로 뻗치며 활자결(滑子訣)의 초식을 전개하며 검에 음 유한 힘을 잔뜩 모아 오른쪽에서 공격하는 양은곤을 때렸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검끝으로 그 사나이의 오른팔을 찍었다. 일거 에 피하고 반격해 동, 북 두 곳에서 공격하는 양은곤을 동시에 막 아냈다. 정면을 방위하는 사나이는 소영이 장검으로 자기의 양은곤과 부 딪치려는 것을 보고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은 고통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 다.' 그는 양은곤을 밖으로 맹렬하게 때려 소영의 장검을 날리려 했 다. 그러나 그의 장검을 날려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장검에 은곤이 말려드는 게 아닌가. 그는 크게 놀라 움찔했다. 그 순간 소영이 비호같이 달려 들어 번개같이 빠르게 검끝으로 그의 오른팔을 찍었다. 그 사나이는 더 생각할 겨를이 없어 본능적으로 은곤을 잡아 챘 다. 이때 소영이 장검을 든 오른팔을 밀기만 하면 그 사나이는 죽 지 않으면 반드시 부상할 것이다. 그러나 소영은 그를 해치려 하지 않고 왼발을 번쩍 들어 걷어 찼 다. 그 사나이는 소영에게 채여 사, 오 척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소영의 반격 일 초는 삼 인의 포위를 깨뜨렸을 뿐 아니라, 무기 를 빼앗았으며 또한 걷어 차서 나가 떨어지게 했던 것이다. 이것을 본 동, 북 양쪽의 두 사나이는 깜짝 놀라 흠칫했다. 마문비 역시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동, 북의 두 장한은 한꺼번에 달려 들어 양은곤을 빙빙 돌리며 정면으로 공격해 왔다. 소영은 검을 다시 칼집에 꽂고 진기를 잔뜩 운기하여 양은곤을 향해 힘차게 팔을 한 번 휘둘렀다. 쇳소리가 요란하게 나며 동쪽에 섰던 사나이의 양은곤이 날아 갔다. 북쪽의 사나이는 은곤을 떨어 뜨리지는 않았으나 두 팔이 울려서 몹시 저렸기 때문에 한동안은 무기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소영은 마문비를 돌아 보며 말했다. "총타주의 교수를 받고 싶소이다." 소영은 상대에게 뺏은 양은곤을 휘둘러 역소오악(力掃五嶽)의 초 식으로 그의 허리를 향해 갈겼다. 마문비는 소영의 놀라운 내력을 보았으므로 감히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양 어깨를 흔들더니 단번 에 팔 척 가량 물러났다. 소영은 은곤을 휘두르며 힘껏 공격했다. 그는 전에 써 본 일이 없는 양은곤을 손에 잡았지만 사출하는 초식은 곤법의 정종학(正宗 學)이었다. 그의 스승 장산패, 남일공, 유선자 세 사람은 각기 정묘한 절기 를 지녔을 뿐 아니라, 천하 각 문파의 무공에도 통달해 있었다. 더 우기 장산패는 잡학을 좋아해서 점성술(占星術)과 의학에까지 광범 위하게 미쳤다. 소영은 본래 지혜가 뛰어났고 그들에게 전수받은 덕분으로 짤막 한 오 년의 세월이었으나, 타인들이 수십 년 간 익힌 무공을 다 획 득했다. 이 양은곤은 십팔반 무기 내에 속했으므로 자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문비는 평소에 자기가 배운 무공이 많다고 자 부하고 있었다. 그 역시 십팔반 무기를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소영의 곤법을 보니 참으로 정종곤법 중의 신수학(神髓學)이라 속 으로 그를 따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영은 단숨에 연달아 십팔 초를 공격했다. 그러나 마문비는 조 용히 그의 십팔 초를 피해 냈다. 소영은 슬그머니 감복했다. 마문비는 소영이 십팔 초 연환곤법의 전개를 마치자 장검으로 날쌔게 공격해 들어 갔다. 그는 반격하는 동시에 왼손에 든 부채로 비스듬히 바람을 부쳐 냈다. 그의 보검은 양은곤을 잡은 소영의 오른팔을 향해 뻗치고 부 채는 소영의 반격을 막는데 쓰여 일 초로써 공격과 수비를 겸했다. 소영은 그의 반격하는 일 초에 한 발 물러섰다. 마문비는 만일 자기가 소영에게 공격을 늦출다면, 반드시 양은곤 은 더욱 강력한 초술을 발휘할 것이라고 느졌다. 그래서 그는 비호 같이 달려들어 소영에게 바싹 접근해서 왼손엔 부채, 오른손엔 보 검으로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소영은 각종 무기에 통달했으나, 정통한 것은 역시 검술과 장법 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적을 대하는 경험이 부족했다. 선기와 승 산을 장악했을 때에는 단숨에 깨끗하고 통쾌하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피동적인 입장에 몰리면 경험에서 얻는 응변의 능력이 모 자랐던 것이다. 마문비는 암암리에 소영이 발후하는 초식을 살폈다. 그는 소영이 평생 처음 만나는 강적이라고 느꼈을 뿐 아니라, 상대의 무공과 내 력이 모두 자기보다 위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소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의 장기로 상대의 단점을 공격하는데 있다고 생 각했다. 그는 소영이 곤법을 한 차례 전개한 다음 곤을 거두는 기 회를 포착하여 번개같이 달려 들어 반격을 가했다. 소영이 들고 있는 양은곤은 떨어져서 싸울 때는 좋은 무기이지 만, 마문비가 바싹 달려 든 후에는 위세를 발휘할 수 없을 뿐더러 거추장스런 것에 불과했다. 마문비는 장검으로 검꽃을 떨쳐 내며 시종 습격하여 소영이 초수 를 바꿀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소영의 중요한 혈도를 찍었다. 그래서 소영은 상대의 습격 을 피하기만 할 뿐 반격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동안에 마문비는 삼십육 검을 찔러 내고 부채로도 이십 사 초를 급공했다. 그동안 소영은 거듭 후퇴하였다. 이때 늙은 용나무 꼭대기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이 양은곤을 버리지 않고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질질 끈다면 백 초를 더 싸워도 일 초의 반격조차 할 수 없을 것이오." 그는 노파의 깨우침을 들은 후에야 번뜻 크게 깨달았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 진작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일찍이 은 곤을 버렸더라면 내 두 손도 매여 있지도 않았을 것을....완전히 검세에 눌려 두 손으로 곤을 잡고 피하고만 있었으니 이것은 마치 두 손을 묶고 싸운 것이나 다름없었군.' 이런 생각을 할 동안 심신이 적지 않게 분산되었다. 그때 재빨리 쳐 내리는 마문비의 부채가 왼쪽 어깨를 스쳤다. 그 순간 옷이 찢어지고 선혈이 옷을 물들였다. 마문비는 부채로 일격을 가하면서 소영이 피를 흘린 후에는 다시 싸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채가 소영의 어깨에 닿는 순간 어떤 강대한 저지력을 받았다. 그 저지력은 형태가 없었다. 단지 소문으로만 듣던 호신강 기와 수미신공(須彌神功)인 것 같았다. '이 두 가지는 무림에는 극히 드문 것이다. 상대는 이렇게 어린 나이에 언제 이런 기공을 연마했을까?' 소영은 왼쪽 어깨를 부상당하자 강력한 투지가 왈칵 용솟음쳤다. 이것은 바로 옛날 양산박(梁山泊)의 호한(好漢) 무송(武松)이 장문 신(蔣門神)을 패배시킨 오보원앙(五步鴛鴦) 연환각(連環脚)의 초식 중 일 절이었다. 마문비는 장검을 연달아 번쩍이며 운룡삼현(雲龍三現)의 연환검 초를 전개했다. 차가운 섬광이 번쩍이며 검세도 삼엄하게 전신의 문호를 막아 버렸다. 소영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이 반격의 기세는 넉넉히 열세 를 만회하여 공격할 기회를 쟁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진기를 운용하여 재 빨리 땅으로 내려서서 마문비에게 반격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보다 앞서 양은곤을 출수하여 반룡요주(盤龍繞柱)의 초식으로 비스듬히 마문비를 후려 갈겼다. 마문비는 소영의 오보원앙연환각의 절기를 막기는 했으나 주도권 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은곤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 오는 것을 보자 그것을 강하게 맞받는 것이 현명치 못하다고 느끼고 진기를 한 모 금 들이 마시더니 재빨리 오 척쯤 물러났다. 소영은 고삐 풀린 소처럼 자유자재로 활동하며 양은곤으로 삼십 율로(路)의 전문봉술(專門棒術) 초식을 멋있게 전개했다. 마문비는 소영의 무공피 굉장히 정기(情奇)하고 다양한 것을 보 고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의 무예는 천하의 여러 장기를 하고 불교와 도교의 상승 신공을 얻었으니 후에 반드시 천하 무적이 될 것이다. 그때 가서 그를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 돌 것이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꼭 그를 제거해야 될 텐데...' 소영이 이때 마문비의 틈을 타 쏜살같이 달려 들었다. 그러자 쨍! 하는 소리가 나며 장검이 곤세에 휩쓸려 방비하던 문호가 활짝 열렸다. 마문비의 수족은 대뜸 마비되어 하마터면 손에 든 장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때 소영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 들더니 양은곤을 번쩍 휘 둘러 직도황룡(直搗黃龍)의 초식으로 번개같이 그의 앞가슴을 향해 콱 찍었다 32. 무림 사대영웅과 대결 마문비는 은근히 이를 갈며 몸을 옆으로 돌려 소영의 곤세(棍勢) 를 피했다. 양은곤(凉銀棍)은 마문비의 요혈을 찍으려고 했던 것인 데 반 치의 차로 앞가슴을 스치고 말았다. 마문비는 자기가 이미 패배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모험적으로 주도권을 쟁취지 않으면 맹렬하게 전개해 오는 소영의 곤법을 막아 낼 수 없으리라 판단했다. 한편 소영은 자기가 휘두른 양은곤이 마문비의 가슴을 스치고 지 나 가자 자기의 일격이 실패한 것을 알고 팔을 굽혀 회수하려고 했 다. 이 틈에 마문비가 빠르게 반격해 들며 왼손에 든 부채로 비스 듬히 소영의 오른팔을 베려고 했다. 소영은 방금 실패의 고배를 마셨기 때문에 양은곤을 더 잡고 있 으면, 또 자기에게 불리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곧 두손을 폈다. 양은곤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마문비는 소영이 차마 무기를 버리리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그런 데 뜻밖에 이와같은 행동을 보자 놀라는 표정이었다. 소영은 손발이 홀가분하여 훨씬 민첩하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는 오른팔을 굽혀 부채의 공격을 피하고 왼손으로 재빨리 일장을 쳐 냈다. 마문비는 오른팔이 아직도 저려서 검을 휘두르기에 불편 을 느껴 왼손의 부채 만으로 소영을 공격했다. 소영은 일장을 쳐 낸 다음 연환섬전장법을 발휘하여 초마다 더 빠르게 연환 칠 장을 쳐 내 마문비의 부채를 눌러 버렸다. 이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마문비의 부하 세 사람은 여태껏 마문 비가 강적과 싸워서 통쾌하게 이기는 광경만 보아 왔기 때문에 오 늘의 싸움은 그져 놀라을 따름이었다. 소영이 연환으로 재빨리 장법을 전개하자 마문비는 부채와 장검 을 들고만 있었지 도무지 맥을 추지 못했다. 그는 암암리에 부채 자루의 용수철을 누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무림의 유명한 인물이고, 패권을 잡을 만한 재질을 겸 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암수를 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차마 손을 쓰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소영이 갑자기 장세를 거두고 훌쩍 오 척 정도 뒤로 물러났 다. 소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총타주는 무공이 매우 높소. 이렇게 백 초를 더 싸워도 승부를 가릴 기회를 얻기가 어려울 것이오. 조금 후에 다시 싸우기로 합시 다." 소영은 말을 마치자 돌아서서 초가를 향해 달려 갔다. 마문비는 속으로 외쳤다. '정말 부끄럽다!' 소영이 비록 마문비를 추켜서 말했지만, 마문비 자신의 생각으로 는 싸울수록 더 빨라지는 소영의 연환장법 앞에는 결코 십 초를 더 지탱해 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이때 초가 앞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노파는 지팡이 한 개로 혼자서 칠, 팔 명의 포위공격을 막아 냈다. 그렇지만 아직 도 네 사람이 더 남아 있어 그들은 전노파를 돌아 지나쳐서 초가 안으로 들어 갔다. 그 광경을 본 소영은 매우 다급해져서 진기를 끌어 모아 힘껏 달 려가 수라지력을 발출하여 한 사나이를 찍어 쓰러뜨렸다. 전노파는 그것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래서 연속 삼 초를 쳐내 적 한 사람을 부상시켰다. 전노파를 포위 공격하던 무림의 고 수 칠, 팔 명은 소영이 아주 쉽게 자기네의 동료 한 사람을 쓰러뜨 리는 것을 보자 투지를 잃고 말았다. 전노파는 여장부답게 지팡이로써 맹렬한 초술을 발출하여 포위공 격 해 오는 군호들을 연달아 반격하여 물리쳤다. 소영은 번개처럼 다시 초가의 문앞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서라! 억지로 들어 가려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때 이미 네 명의 사나이는 초가의 문앞에 접근해 있었지만, 금 란이 연속적으로 쳐 내는 암기에 막혀서 주춤하고 있었다. 이들 중 두 사람은 칼을 들고 있었으며, 한 사람은 연편(軟鞭-부드러운 채 찍)을 들고, 또 한 사람은 호차(虎叉)를 들고 있었다. 소영은 네 사람을 노려 보았다. "나는 결코 사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 그렇지만 경우에 따 라서는 사람을 해칠 수도 있으니, 굳이 여러분이 초가 안으로 들어 가기를 고집한다면, 내가 사람을 상하게 한다고 나를 탓하지 마시 오." 그러자 연편을 쓰는 사나이가 노한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누군데 그처럼 거만하오?" "나는 소영이오. 여러분께서 무슨 일이 있으면 모두 이 소영에게 말하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마음대로 저 초가로 들어간다면 그것 은 죽음을 찾아가는 거나 마찬가지니 그렇게 아시오." 네 사람 중에서 우두머리인 듯한 연편을 소지한 사나이가 날카로 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믿을 수는 없소." "믿지 못하겠거든 한 번 해 보시지." 그러자 연편을 쓰는 사나이는 오른손을 휘저으며 낮은 소리로 칼 을 쓰는 두 사나이에게 말했다. "곤(昆), 중(仲) 당신들은 일제히 이 악한에게 덤벼 드시오." 칼을 든 두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란히 서서 소영의 길을 막았다. 그리고 연편을 든 사나이가 호차를 든 자를 돌아 보며 외 쳤다. "우리는 초가로 들어 갑시다." 소영은 양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노한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이 내 경고를 듣지 않으면 고생을 사서 하는 결과가 되 오." 그러나 이들은 금란의 암기와 상대하느라 소영이 마문비와 싸우 는 모습을 못보았으므로 소영의 경고를 무시했다. 호차를 든 사나이가 초가를 향해 달려 들어 갔다. 그러자 소영이 노호를 지르면서 검을 휘두르며 그의 앞을 가로질렀다. 칼을 든 사나이는 소영의 이처럼 맹렬한 기세에 질려서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그때 호차를 든 사나이는 초가에 바싹 접근했다가 갑자기 사, 오 척 밖으로 밀려 나왔다. 시선을 모아 바라 보니 소영이 어느새 장 검을 들고 초가의 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소영은 호차를 든 사나이를 일격에 쓰러뜨렸다. 그 사나이는 두 눈을 치뜨고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 자 리에 있던 사람들은 소영의 이처럼 빠른 일격을 목격하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때 무거운 음성이 들려 왔다. "너희들이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빨리 물러나거라." 연편을 든 사나이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얼른 대답했다. "저희는 총타주의 체면을 손상시켰으니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 말소리의 주인공은 마문비였다. 마문비는 급히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 나가서 호차를 든 사나이를 발길로 걷어 차며 말했다. "너희들의 무공이 낮은 것이 아니라 그의 무공이 높다." 호차를 든 사나이는 두어 번 뒹군 다음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총타주님, 왜 출수를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마문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네 사람이 합력해서도 그를 이기지 못했는데, 하물며 혼자의 힘으로 덤비다니... 쓸데없이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어." 호차를 가진 사나이는 그래도 마땅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 "조금 전에는 제가 미쳐 방비도 하기 전이었을 뿐입니다. 그걸 가지고 어떻게 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문비는 안색이 약간 변하여 외쳤다. "어서 물러가지 못할까?" 그 호차를 든 사나이는 소영에게 굽히고 싶지 않았지만 마문비의 말이 두려워 급히 물러섰다. 마문비는 고개를 돌려 뒤에서 싸우고 있는 장면을 바라봤다. 전 노파는 이미 전국을 제어한 듯 공격일변도로 나가고 있었다. 마문 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오늘의 싸움은 이 마문비가 부하 몇으로 이길 것 같지 않구나!' 마문비는 유성 화포(流星火砲)를 꺼내 오른손으로 공중을 향해서 던졌다. 불꽃이 사방에 흩어졌다. 소영이 냉랭하게 내뱉듯이 말했다. "마문비, 원군을 부르는 거요?" 마문비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소. 오늘 이곳에 온 사람은 애당초 나 혼자만이 아니오. 다 만 내가 전 노선배님을 존중하기 때문에 호걸들에게 억지로 뒤에서 기다리도록 권했던 것이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전 노선배님이 나 의 체면을 세워 주신다면 이 이상 더 좋은 일이 없으련만..." 소영이 말을 받았다. "아깝게도 그분이 총타주의 체면을 세워 주지 못했구려!" 마문비가 어떤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히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이상 노선배님을 설복할 능력이 없으니, 오늘 이곳에 온 호걸들에게 이야기하여 공중의 의견에 따를 뿐이 오. 그러니 싸움이냐, 화친이냐 하는 것은 결코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오." 소영은 여전히 코웃음을 쳤다. "이 한 사람 때문에 중원의 호걸들과 마 총타주를 수고롭게 해서 매우 미안하오." 마문비는 그 말을 듣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말했다. "오늘의 싸움은 무림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싸움이오. 물론 개인 의 체면이나 승부에 관한 것도 아니고, 오직 대국적인 견지에서 해 결할 문제라고 볼 수 있소." 소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형은 공명정대한 마음과 영웅다운 기품을 지니고 있군요. 조 금 전에 있었던 우리들의 대결에서 당신은 결코 지지 않았으니 그 처럼 겸손하실 필요는 없소." 마문비가 말을 받았다. "삼장주가 나에게 사정을 보아 주신 거지요. 그렇지 않다면 나는 틀림없이 패했을 것이오." 마문비는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소형의 위명을 들어온 지 이미 오래요. 빠른 말을 타고 이 틀 동안 밤낮을 쉬지않고 소형의 뒤를 따라간 적이 있소. 그러나 만날 인연이 없었던지 끝내 소형을 뵙지 못하고 말았소. 그리고 처 음으로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싸움판에서 만나게 될 줄은 차마 몰 랐소." 소영은 이 말에 마문비는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고 느끼며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다. "마형은 어느 소영을 쫓아갔었소? 설마 나는 아니겠지요?" 마문비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 세상에 소영이 몇 사람이나 되오?" 소영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둘이오." 마문비가 말을 이었다. "일찌기 들어보지 못한 소리요. 세상에는 동명이인이 더러 있을 수도 있지만, 둘 다 그처럼 절기를 지녔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 오." 소영은 탄식하듯 말했다. "그렇소. 세상에서 이처럼 공교로운 일도 없을 것이오. 그러나 실제의 일이고 보니 둘 중에서 하나는 소영의 이름을 사칭하는 가 짜 소영일 것이오." 마문비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례한 말씀을 묻는 것을 용서하시오. 삼장주의 소영이란 이름 은 진짜요? 가짜요?" 소영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진짜면 어떻고, 가짜면 또 어떻소?" 마문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오. 진짜와 가짜의 소영이 모두 절기를 지닌 고 수라면 그들이 각각 행한 뒷자취는 영원히 남을 것이니, 그때 가서 감히 누구의 행적이 옳았다고 가려 낼 수 있으리오?" 소영은 고개를 들어 힐끗 바라 보고는 말했다. "마형의 원군이 왔소." 마문비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들은 결코 이 마 모를 돕지는 않을 것이오." 소영이 비꼬듯 말했다. "마형을 돕지 않는다니? 설마 이 소영을 도우러 온 것은 아니겠 지" "그들은 다만 백화산장의 삼장주를 만나러 왔을 뿐이지, 이 마 모를 돕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오." 마문비는 가볍게 한 번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은 사전에 나와 약속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오. 모두 가 제멋대로 온 사람들이오...." 소영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강호에 나온 지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소. 그런데 무슨 큰 죄악을 저질렀기에 이 많은 무림 고수들이 나를 찾아 몰려왔단 말 이오." 마문비가 역시 천천히 타이르듯 말했다. "소형은 기품이 비범할 뿐만 아니라 확실히 악을 행할 상은 아니 오. 그러나 현재 백화산장에 가담했기 때문에 무림의 공적(公敵)이 된거요." 그 사이에 말 몇 필이 질풍같이 달려 왔다. 전노파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급히 삼 초를 공격하여 포위하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몸을 날려 급히 초가로 갔다. 전노파는 소영의 곁으로 다가가서 멈추어 서며 이렇게 말했다. "적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 우리들은 함께 적을 막읍시다." 소영은 달려오는 군호들을 바라 보았다. 그 모습은 각양각색으로 수 십 인에 달했다. 전노파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맨 앞장 서서 달려 오는, 얼굴이 붉은 사람이 바로 신전진건 곤(神箭鎭乾坤) 당원기(唐元奇)요. 그리고 저 사람은 본래 팔 힘이 놀라울 정도로 세니까 장력으로 부딪치면 안 되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원기가 다가와서 높은 소리로 외쳤 다. "누가 백화산장의 소영인가?" "내가 그 사람이오. 무슨 분부라도 있소?" "잘 만났군. 내 은추를 받아라!"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거대한 은추를 곧장 날려 소영의 앞가슴을 향해 찍었다. 그때 소영과 그의 거리는 구 척 정도 되었다. 그의 은삭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기 때문에 은추를 자유자재로 조종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소영을 향해 똑바로 공격해 왔다. 소영은 암암리에 운기해서 장검으로 획 그것을 찍어 냈다. 이때 전노파가 다급한 어조로 소영에게 말했다. "그의 은추와 부딪쳐서는 안 되오!" 그리고 전노파는 지팡이를 내밀어 은추를 찍었다. 그러나 날아 온 은추의 힘이 너무 강해 오히려 전노파의 팔이 진동을 받아 팔이 저리고 아팠다. 그러나 은추는 다시 소영의 검세에 찍혀 떨어졌다. 당원기는 순간 흠칫 놀랐다. "이녀석! 제법이군. 내가 다시 한번 시험해 보지." 당원기는 다시 손을 휘둘러 은추로 찍어 왔다. 당원기는 그 힘이 천하에 소문나 강호의 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당원기와 겨루는 사람은 누구 든 그의 무기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원기는 다른 사람과 겨루는데 있어서 여태껏 자기의 은추를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사람은 만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소영이 장검으로써 그의 은추를 처음으로 맞부딪친 사람이 된 것 이다. 소영은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좋소. 다시 당신의 은추를 받겠소." 소영은 진기를 운기하고, 경력을 강처럼 운행하여 힘을 검날에 집중하여 은추를 향해 찍었다. 그러나 검과 추가 부딪쳤지만 아무 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소영은 끄떡 않고 서 있는데 신기하게도 은추만 떨어졌다. 당원 기는 이 광경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전노파는 소영이 당원기의 은추를 받아 내지 못할까 걱정스러워 서 지팡이를 내밀어 언제든지 구원할 자세를 취하고 바라 보고 있 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영이 연달아 이 추를 받아 내고도 끄떡 없이 서 있는 것을 보자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은추는 휙휙! 소리를 내면서 태산이 무너져 내린 듯 소영에게 덮 쳐 왔다. 당원기가 노성을 질렀다. "좋다. 내 은추를 감히 또 받았겠다!" 당원기는 다시 은추를 내리쳤다. 그러나 소영의 경공은 천하 제 일의 유선자에게서 전수받은 것이었다. 소영은 몸을 번쩍이는 순간 이미 당원기의 앞으로 번개처럼 접근 하여, 좌장으로 당원기의 앞가슴을 때리고 오른손에 든 장검으로는 당원기의 은추를 달아 맨 연삭을 눌렀다. 이와 같은 수법은 매우 위험한 것 같지만, 당원기의 은추의 공격을 막는데는 이보다 더 좋 은 방법이 없었다. 당원기는 보기와는 다르게 신기할 정도로 민첩해서 그는 곧 팔을 굽혀 그 큰 은추를 회수했다. 그렇지만 소영은 그에게 틈을 주지 않고, 장검을 재빨리 휘둘러 연달아 삼 검을 공격해 내고, 좌장을 검세에 곁들여 사 장을 쳐 냈다. 이 한 차례의 검과 장풍의 맹공으로 당원기는 눌려서 잇달아 후 퇴를 하여 반격할 힘을 잃고 거의 소영의 검세에 부상을 입을 정도 가 되었다. "삼장주, 빨리 돌아와요!" 소영이 전노파의 고함소리를 듣고 곁눈질 해 보니 전노파는 지팡 이를 가로쥐고 초가의 문 앞을 막아서 있었다. 이때 초가의 양쪽에서 엿보고 있던 무림의 고수들이 각각 칼을 뽑아 들었다. 형세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소영은 오른팔을 굽혀 검을 회수하고 몸을 날려 초가의 문 앞으 로 물러났다. 이때 누구든 손을 써서 그를 제지할 수도 있었지만, 모두 미동도 하지 않고 소영을 바라 보고만 있었다. 소영이 가까이 오자 전노파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마문비의 왼쪽에 있는 도인은 청성파(靑城派)의 삼대 명검 중 으뜸인 인월도장(印月道長)이오. 이 사람의 검술은 매우 정예하 니 경시해서는 안 되오."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르쳐 주셔서 고맙소이다." 전노파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문비의 오른쪽에 있는 홍의를 걸친 사람은 강호에서 유명한 완화고수(玩火高手)인 삼양신탄 육괴장(三陽神彈陸魁章)이 오. 그는 독화정가(毒火井伽)와 함께 강호에서 정사(正邪)이화로 불리우고 있소. 이 사람의 온몸은 그대로 불덩어리니까 그와 손을 쓸 때는 특별히 조심해야 하오." 소영은 시선을 돌려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훑어 보았다. 마문비, 인월도장, 삼양신탄, 당원기 외에도 주위에 둘러 선 이십여 명의 사람들은 언뜻 보아도 평범한 무리들은 아닌 것 같았다.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심목풍은 강호에 나오자마자 당장 강호를 뒤흔들어 놓았구나!' 이때 마문비가 높은 소리로 외쳤다. "삼장주의 무공은 내가 방금 교훈 받았소만 확실히 고명하외다." 소영이 말을 받았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문비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인월도장은 당대의 청성 장문인의 수제자로 검술이 정예하시 어 이름을 강호에 떨치고 있는 분인데, 소제가 삼장주의 무공 자랑 을 했더니 부러움을 금치 못하여 소형의 검술을 교훈받으시겠답니 다." 소영이 아무말도 하지 않자 마문비는 소영이 난처해 하는 줄 알 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인월도장이 소형과 승부를 가리기 전에 우리는 한 치도 더 앞으 로 나가지 않겠소." 마문비는 다시 주위의 호걸들을 돌아 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모두 일 장씩 뒤로 물러서시오. 그리고 인월도장과 백화산장 삼장주의 검술 겨루기를 구경만 하고 계십시오." 마문비는 강호에서 명망이 높은 사람이어서 모두 그의 말에 복종 하여 일 장 정도 물러섰다. 소영이 전노파를 돌아 보며 말했다. "할머니도 관전만 해 주십시오." 소영은 가벼운 걸음으로 오 척 정도 걸어 나와서 포권을 하며 허 리를 굽혔다. 인월도장은 오른손을 번쩍이더니 싹! 하는 소리를 내며 등에 꽂 았던 장검을 뽑아 들고 소영의 앞 오 척쯤 되는 거리에 서서 문호 를 열고 싸울 자세를 취했다. 소영은 순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주위의 영웅들은 마문비, 육괴장, 당원기와 인월도장을 수령 으로 여기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이들 네 사람만 물리친다면 나머 지 사람들은 모두 겁이 나서 도망가 버릴 것이다.'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칼을 한 번 퉁기고 입을 열었 다. "도장은 명문 대파의 사람이시니 기선을 잡으려고 먼저 출수하시 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먼저 출수하겠소이다." "자아, 소대협! 출수하시오." 소영이 장검을 번쩍 들자 검끝이 세 번 부르르 떨리고 세 송이의 검꽃이 일었다. 이 검법은 봉황삼점두(鳳凰三点頭)라는 것이었다. 인월도장은 장검을 한 번 휘둘러 흰 광망을 일으켜 소영의 검세 를 봉해 버렸다. 소영은 다시 검을 번뜩여 두 송이의 검꽃을 일으키며 상대방을 찔렀다. 그러나 인월도장은 다시 획분음양(劃分陰陽) 일 초로써 땅! 하는 소리를 내며 소영의 장검을 물리쳤다. 그는 마문비가 하도 소영의 검초 내력을 칭찬하였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강하게 그의 검을 받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소영은 검을 돌려 회고약류(廻顧弱柳) 초식을 발하여 인월 도장이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또 일검을 휘둘렀다. 인월도장도 소영의 이 검세를 다시 막아 냈으나 검세의 진동을 받아 팔이 약간 저렸다. 하여 인월도장도 검세가 쓸어 오는 것을 보자 이번에는 강하게 맞부딪치지 않고 검을 한 번 휘둘러 소영의 오른팔을 향해 찔렀다. 소영은 할 수 없이 팔을 낮추고 공세를 피했다. 인월도장은 이 틈을 이용하여 기선을 잡아 장검으로 연속 공격을 시도하여 단숨에 오검을 찔러 냈다. 소영은 그 이상 반격할 수가 없어 잇따라 오 보를 물러났다. 소영은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인월도장은 소영이 물러서는데도 연달아 팔 검을 공격한 후에야 기세가 약간 누그러졌다. 소영이 인월도장의 검세가 느려져 다시 반격을 전개하자 쌍방의 검이 한데 어울려 맹렬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어느덧 해는 서산마루에 걸려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순식간 에 그들은 벌써 백 초 이상을 싸운 것이다. 마문비는 시력이 매우 뛰어나고, 또 인월도장의 곁에 제일 가까 이 서 있었으므로 인월도장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반대로 소영은 싸움이 더할수록 용감해져서 검세가 점점 사나와 졌다. 순간 소영은 갑자기 검세를 더하여 겹겹으로 싸인 검기를 밀어 냈다. 은색 광망이 파도처럼 밀려 갔다. 쨍그랑! 하고 금속이 부딪 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어느새 검기는 사라지고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소영은 그대로 검을 들고 서 있는데 인월도장의 장검은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인월도장은 천천히 소매를 들어 이마의 땀방울을 씻었다. 이윽고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삼장주의 검술은 과연 높은 경지에 이르렀소. 나는 적수가 될 수 없소." 소영이 포권을 하며 말을 받았다. "도장께서 양보하셨겠지요." 인월도장은 천천히 땅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어서 검집에 꽂았다. "삼장주는 빈도를 이기긴 했지만 천하의 영웅들을 다 이긴다고 할 수 없을 것이오." 인월도장은 말을 마치고는 빠르게 달려 갔다. 소영은 총총히 사 라지는 인월도장의 뒷모습을 지켜 보고 있다가, 그가 완전히 사라 지자 그만 긴 한숨을 쉬었다. 그때 갑자기 홍의를 걸친 사나이가 등에 꽃은 화룡봉(火龍棒)을 뽑아 들고 냉랭하게 외쳤다. "나는 육괴장이오. 삼장주의 절학을 교훈받을까 하오." "그야 물론 모셔야지요." 이때 전노파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그의 무기와 화기를 조심해요." 육괴장이 이 말을 듣자 코웃음을 쳤다. "중원에 이름이 떠들썩했던 전노파가 백화산장에 가담할 줄은 정 말 몰랐소." 전노파가 노한 소리로 말을 받았다. "노신이 백화산장에 가담했다고 누가 그랬소?" 육괴장이 반박했다. "여러 사람이 똑똑히 지켜 보는 가운데서 당신은 백화산장의 편 을 들었소. 그래도 내 말이 거짓말이오?" 전노파는 다시 말을 받았다. "노신은 소영과의 약속 때문에 그를 도와주는 것 뿐인데, 그게 백화산장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마문비가 이때 말참견을 했다. "그렇다면 노선배님은 소영이 백화산장의 삼장주란 사실을 알고 계시오?" "물론 알고 있소." 마문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소영을 도와 주는 것이 천하영웅들과 적대되는 것임을 왜 모르시오? 만일 노선배님께서 백화산장의 사람이라면 모 르되,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당신이 그의 편에 가담한단 말이 오? 아무튼 오늘의 싸움이 끝난 후에는 그 승부가 어떻게 되든 노 선배님은 누명을 벗기 어렵겠소이다." 전노파가 말을 받았다. "노신의 일은 총타주 당신이 관여할 바 아니오." 이때 육괴장이 언성을 높였다. "나는 이미 전노파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요. 소영을 처치하고 나서 교훈을 받겠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크게 노했다. "당신은 그 보잘것 없는 화룡봉을 믿고 그렇게 큰 소리요?" "삼장주,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시험해 보시지." 육괴장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룡봉을 휘둘러 곧장 내리 쳤 다. 소영은 이미 전노파의 경고를 받고, 화룡봉의 위력이 괴이하다 는 것을 알고 피해 버렸다. 그리고는 장검을 휘둘러 육괴장의 오른 팔을 향해 찔렀다. 육괴장이 팔을 낮추어 소영의 검세를 피하고 화룡봉으로 소영의 허리를 쓸어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무수한 검꽃이 떨어져 내리며 두 팔을 향해 검세가 밀려 왔다. 육괴장은 재빨리 몸을 돌려 이 보 후퇴했다. 그러자 소영은 기합소리를 내며 검과 장풍을 함께 쳐 내 속공을 전개했다. 육괴장은 소영의 이와 같은 세력에 눌려 감히 화룡봉의 위력을 전개하지 못했다. 이처럼 한 번 때리고, 한 번 찍는 공세는 매우 어려운 것이지만 소영은 공격을 자유자재로 해 내고 있었다. 이때 당원기가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내려 화살을 쏘아 냈다. 화살은 무서운 위력을 지녔고 당원기는 소영이 이동하는 거리까 지 계산에 넣어서 화살을 쏘았으므로 소영은 틀림없이 맞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형세가 다급해지자, 소영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장검 을 휘둘러 음우폐일(陰雨弊日) 초식으로 검기를 일으켜 문호를 봉 해 버렸으나 소영의 검세는 화살의 방향을 약간 위로 치우치게 하 는데 그쳤을 뿐 막아 내지는 못했다. 장전은 칼을 스치고 싹! 하는 소리와 함께 소영의 어깨쭉지 옷을 찢어 놓았다. 소영은 깜짝 놀랐다. 육괴장은 이 틈을 이용하여 기선을 잡고 소영을 물리쳤다. 이때 전노파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크게 외쳤다. "좋소. 당신들은 소위 강호에서 이름난 인물들인데, 이렇게 떼를 지어 공격하시오?" 당원기는 화살을 또 꺼내서 시위에 재다가, 전노파의 이와 같이 꾸짖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뜨끔하여 다시 화살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소영은 당원기의 화살로 마음이 흩어져서 암암리에 그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가 장전을 거두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놓았 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장검을 다시 휘둘러 삼 초를 맹렬히 공 격하여 다시 육괴장을 열세로 몰아 넣었다. 육괴장은 독화정기와 함께 강호의 정사이화라고 불리우고 있는 만큼 호탕한 위인인지라 화기를 사용하기 전에 미리 경고를 했다. "삼장주의 무공은 과연 높소. 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화기를 전 개 할 터이니 조심하시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한 차례 한숨을 내쉰 후 건청기공을 잔뜩 운 행하여 몸 주위를 강기(薑氣)로 둘러쌌다. 소영은 그러면서도 검세는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육괴장은 뒤로 훌쩍 뛰어 팔 척 가량 물러서서 소영의 검 세의 위력권 밖으로 탈출했다. 육괴장이 곧 화룡봉을 휘두르자 번 쩍하며 화설(火舌)이 빠르게 뿜어 나왔다. 그 화세는 길게 뻗어 오 다가 소영의 앞삼척 전방에서 화염 덩어리를 만들었다. 소영은 깜짝 놀랐다. 소영은 진기를 끌어 모아 날아 올랐다. 그 러자 화염은 소영의 두 발을 스치고 지나 갔다. 육괴장은 일격이 있은 후에는 소영이 반드시 위로 솟아 오르리라는 것을 예상했다는 듯, 화룡봉을 들어 공격했다. 소영은 공중에서 다리를 굽히고 몸을 한 바퀴 빙 돌아 옆으로 사, 오 척 날아 갔다. 실로 아슬아슬하게 그 무서운 화염을 피해 냈다. 육괴장은 소영의 날쌔게 피하는 신법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육괴장의 화룡봉 속엔 세 개의 기관이 장치되어 있어 적과 대 결하는데 있어서 세 번 밖에 불꽃을 뿜어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 러므로 나머지 한 개마저 써 버린다면 이 화룡봉은 평범한 무기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시간을 소비해 가며 다시 화약을 장전해 야만 한다. 한편 소영도 맹렬한 불꽃을 두 번 피하기는 했지만, 그 불꽃의 기세가 너무도 지독한 것이었으므로 은근히 가슴이 뛰었다. 두 사람은 이와같이 피차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도 공격하지 못하고 경계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육괴장, 노신이 들은 풍문에 의하면 이 화룡봉은 싸울 때마다 독화를 세 번밖에 분출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이오?" 전노파가 은근히 소영에게 알려주기 위해 물은 것이다. 육괴장은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소. 이 화룡봉은 이제 한 번밖에 더 불을 뿜어 낼 수가 없 소. 하지만 무수한 무림의 고수들이 바로 세 번째로 뿜어 내는 독 화에 상한 자가 많으니 삼장주도 조심하시오." 이때 전노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림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공명정대한 행동을 취해야 하오. 암 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벌써 떳떳하지 못한 수단이오. 이 화기로 싸 운다면 당신이 혹시 이길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당신이 이긴다 고 하더라도 영웅은 될 수 없는 것이오." 육괴장은 그 말을 격분한 나머지 말을 가리지 않고 전노파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전노파는 그 말을 듣자 발끈 화가 치밀어 올라서 악을 쓰며 말했 다. "남들은 그 화기를 겁낼지 몰라도 이 늙은이는 조금도 무서워하 지 않는다. 삼장주, 잠깐 물러서시오. 노신이 이놈과 한바탕 해야 겠소." 소영이 천천히 대답했다. "우리는 아직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거늘 어떻게 그만 둘 수가 있 소." 소영은 말을 마치자마자 와락 달려 들어 검을 중궁(中宮)으로 뻗 어 곧장 육괴장의 심장을 향해 찌르자 육괴장도 다시 화룡봉을 휘 둘러 불꽃을 쏘아 냈다. 화룡봉 속에 장치되어 있던 최후의 마지막 화염은 앞의 두 번보다 훨씬 강렬했다. 사실 소영이 이처럼 그에게 몸을 날려 와락 덤벼든 것은 그로 하 여금 마지막 화룡봉을 쏘아 내도록 유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영은 불꽃이 뿜어 나오는 것을 보자, 등을 땅에 붙이고, 다시 옆 으로 한 번 뒹굴어서 독화를 피하고 벌떡 일어났다. 육괴장은 싸움을 많이 해 본 사람이라 소영이 피하면서 협초를 전개하여 독화를 피하는 것을 보자, 곧 경각심을 높였다. 그래서 조금 전에 소영이 와락 덤벼 들었을 때는 불꽃을 방출하 여 막고, 잇따라서 금침정해(金針定海) 초식으로 찍어 갔다. 소영은 벌떡 일어서자마자 화룡봉이 벌써 앞가슴에 닦아 있었으 므로 어쩔 수가 없어서 장검을 휘둘러 폐문추월(閉門推月) 초식으 로 문호를 봉해 버렸다. 검과봉이 부딪치는 순간 펑!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육괴장은 화룡봉의 초술을 바꾸어 갑자기 연속 삼봉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소영은 검을 휘둘러 몸을 지키며 오직 수세로써 삼 봉을 모두 퉁겨 버렸다. 육괴장은 오른손으로 화룡봉을 휘둘러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왼손 으로는 품 속을 더듬어 삼양열화탄(三陽熱火彈) 두 알을 끄집어 냈 다. 소영은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재차 화기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피할 것인가?' 그러나 소영은 이런 생각과는 관계 없이 좌장을 쳐 냈다. 그래서 육괴장이 막 삼양열화탄을 꺼냈을 때는 소영의 장력이 이미 도착하 여 바로 육괴장의 왼손을 때렸다. 육괴장은 손에 암기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소영의 장력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펴자 열화탄은 사, 오 척 앞으로 날아가서 떨어져 땅 에서 훨훨 타올랐다. 소영은 그 광경을 보자 속으로 탄식하고는 단호한 결심을 했다. 소영은 끊임없이 검을 휘둘러 넘실거리는 검영(劍影)의 파도 속으 로 육괴장을 몰아 넣었다. 장내에 둘러 서 있는 사람들은 당원기가 소영에게 패하는 것을 봤고, 청성파의 삼대 명검의 으뜸인 인월도장이 패하는 것도 보았 으며, 육괴장은 아직이 패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보니 조 만간 패할 위기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마문비뿐이었다. 전노파는 소영이 연승하는 것을 보자 그 용기와 무공에 감동되어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질투심도 생겼다. 육괴장은 가까스로 십여 합을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 이때 소영이 큰소리로 외쳤다. "손을 놓으시오!" 육괴장은 뜻밖에도 고분고분해졌다. 소영의 말대로 화룡봉을 팽 개쳐 버렸다. 소영이 그의 암기가 너무도 지독한데 화가 나서 검끝 을 곧장 육괴장의 가슴에 들이댔으나 육괴장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나의 기술이 부족해서 졌으니 죽어도 유감은 없소. 삼장주는 빨 리 손을 쓰시오." 소영은 그의 용기가 가상하게 여겨져 육괴장의 가슴에 들이댔던 장검을 거두어 버렸다. 육괴장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삼장주의 무공은 과연 높은 경지에 이르렀소." "과찬이시오." 소영은 시선을 돌려 장내를 훑어 보며 입을 열었다. "나와 단독으로 겨루어 볼 분이 또 계시오?" 장내의 호걸들은 이미 소영의 용기와 그의 무공을 다 본터라 감 히 단독으로 겨루겠다고 나오는 자가 없었다. 이윽고 마문비가 가볍게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삼장주의 무공은 우리들이 보아서 잘 알았소이다. 심목풍이 좌 우의 손처럼 의지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가 무어라 대답 을 하려는데 또 마문비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오늘 싸움은 무림의 일반적인 명성을 겨루는 무술 경기는 아니외다. 삼장주가 비록 연승했다고는 하지만, 이것 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이 삼장주의 무공을 떠본 데 불과하오. 우리 들은 삼장주를 제거하려는 마음이 더 굳어졌소이다." 전노파가 말을 가로채고 나섰다. "사설만 늘어 놓을 것 없소. 당신들이 한꺼번에 덤비고 싶다면 마음대로 출수를 해 보시오." 소영은 전노파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문비의 말뜻을 깨닫고 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나는 지금 틀림없이 백화산장의 삼장주요. 그러나 나는 절대로 악한 일은 하지 않았소. 그렇지만 여러분이 나를 핍박하고 공격한다면 나는 변명할 말이 없소. 다만 한 마디 일러 두고 싶은 것은 무기에는 눈이 없으니 여러분께서 떼를 지어 공격하신다면 유 혈의 참극이 벌어질 것이 두렵구려." "우리들은 이미 강호에 몸을 들여 놓은 사람들인데 어찌 생사를 그다지 두려워하겠소? 삼장주께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줄 아오." 소영은 안색이 돌변했다. "여러분께서 꼭 싸우시겠다면 할 수 없소이다." 소영은 정신을 가다듬어 검을 쳐들고는 타는 듯한 시선으로 마문 비를 노려 보았다. 마문비는 견문이 넓은 사람이었다. 검을 쳐드는 소영의 태도를 보자 그게 바로 상승검도 중의 어검수법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 다. 마문비는 겁이 덜컥 났다. 그가 이번에 출수하면 틀림없이 누구 든 그의 검 앞에 피를 뿌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곧 부채 의 용수철을 눌렀다. "여러분은 물러나시오. 내 혼자서 삼장주와 싸우겠소." 주위의 호걸들은 마문비의 처사를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마문비의 무공이 워낙 높으므로 잠자코 그의 말대로 물러섰다. 소영은 전신의 공력을 장검에 모으고 조용히 서 있었다. 마문비 는 부채를 들어 소영의 앞가슴을 겨누고 용수철을 누르고 있었지 만 곧 출수하지는 않았다. 소영은 검을 옆으로 들고 서서 공수(攻 守)를 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마문비는 묵묵히 한참 동안 소 영을 노려 보았지만 여전히 손을 쓸 기회를 얻지 못했다. 소영은 몸을 두어 번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휴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장검을 떨구고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마형! 돌아가시오. 기회는 얼마든지 있소." 마문비는 부채를 도로 넣어 버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이 일검을 받아 낼 수 없소." "마형은 지나치게 겸손하시군요." "제가 아무리 보아도 소형은 진짜 백화산장의 사람 같지 않소." 소영은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틀림없이 백화산장의 삼장주인 걸요." "그 이면에는 반드시 숨은 사정이 있을 것이오. 나는 소형과 터 놓고 얘기하고 싶소." 마문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소제는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무수한 소년 영웅들과 친분 을 맺어 왔소. 그러나 소형 같은 뛰어난 재주와 지혜와 무공은 처 음 보았소. 지금 강호는 가는 곳마다 살기가 등등하고 악마가 성행 하여 도의가 꺼져가고 있소. 소형은 이제 소년 영웅이시니 기둥이 되어서 도의를 지키고 마를 제거하여 무림을 위해 평탄한 길을 열 어서 백세에 불멸할 공을 세우셔야 하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뭣 때 문에 마의 소굴에 몸을 맡기시고 인간에게 죄를 지으시려 하오?" "소제의 고충을 다 말씀드리기는 힘드오. 내일밤 이 때에 여기서 기다리겠소. 마형께서 틈이 계시다면 만나 주시기 바라오." 마문비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소. 내일 삼경까지 소제는 있는 힘을 다해서 천하 영웅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겠소." 마문비는 돌아서서 군호들을 거느리고 재빨리 달려 갔다. 소영은 마문비의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라 보고는 야릇한 정을 느꼈다. 전노파는 지팡이로 땅을 한 번 치고 나서는 말했다. "오늘밤 이곳에서 피가 내를 이루고 시체가 산적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좋은 장면으로 끝나게 됐군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마문비의 영웅다운 기품과 비범한 기지에서 기인된 것이 오." 전노파가 말을 이었다. "그가 만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만한 나이에 어찌 하남, 호 북, 강서 등 사 성의 무림 인물들을 영도할 수 있겠소." 소영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오늘 밤에는 다시 침범하는 자가 없었으면 좋으련만..." 이때 뒤에서 금란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삼장주님은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소영은 금란을 돌아보며 물었다. "은란과 당낭자의 독상은 어떤가?" "약을 먹은 후 크게 호전되어 지금 밀실에서 조식을 하고 있습니 다 제가 들어가서 돌보겠습니다." 금란은 돌아서서 방 안으로 들어 갔다. 이때 전노파가 갑자기 깔깔 한바탕 요란스럽게 웃어젖혔다. "노신은 오늘 정말 통쾌한 구경을 잘 했구먼. 많이 피곤하지?" 소영은 씁쓰레하게 웃었다. "저는 아직 괜찮소이다. 오히려 할머니께서 저희들을 위해 친히 싸워 주시고 그들과 원수가 되었으니 저는 미안한 마음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전노파가 말을 받았다. "우리의 일은 교환 조건으로 이루어진 거야. 오늘은 내가 삼장주 를 도와 주었지만, 내일은 삼장주가 나를 도와 주어야 할 테니 미 안해 할 것도 없지." 소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 할머니께서는 누구의 연회에 가시는지 미리 저에게 알려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전노파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이면 자연히 알게 될 텐데... 갑자기 알고 싶어졌나?" 이때 은란과 금란, 당삼고가 나란히 나타났다. 소영이 말했다. "저 할머니께서 해독약을 주셔서 두 분이 살아났소. 두 분께선 저 분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오." 전노파가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약을 준 건 교환조건에 불과해. 그러니 두 사람은 이 노신 에게 감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 당삼고는 그 말을 듣자 어리둥절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듯 나직이 소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으로써 저분의 해독약과 교환하셨지요?" 33.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공주 소영은 담담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나는 그저 저분과 연희에 가기로 약속한 것 뿐이오." 소영은 말을 잠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낭자는 지금 독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체력이 완전히 회복된 것 은 아니오. 지금 우리의 처지는 여전히 위험하오. 강적이 주위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소. 언제 습격해 올지 모르는 것이오....." 소영은 당삼고와 은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 그러니 두 낭자가 체력을 빨리 회복하면 그만큼 우리들의 위험은 줄어드는 셈이오." 이때 전 노파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이들을 바라 보며 얼음장 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은 이 이상 이 사람을 괴롭히지 말아요. 이 사람은 지금 연달아 악전고투를 치렀으므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오." 세 아가씨들이 그 말을 듣고 일제히 나가버리자 소영과 전 노파 는 조식을 취했다. 오경이 지나자 날이 훤히 밝았다. 소영은 선정(禪定)에서 깨어났 다. 피로가 깨끗이 가셨다. 전 노파가 말했다. "해가 이미 높이 떴군. 어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 입으시오." 소영이 말했다. "할머니, 아직 때가 이르니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전 노파는 하룻밤 사이에 주름살이 더 깊어지고 양미간에는 천 만 가지 근심의 빛이 어렸다. 그리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듯 이 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반나절이 지나고 정오가 가까와졌다. 푸른 빛깔의 작은 교자(較子) 두 채가 급히 달려 왔다. 전 노파가 낮은 목소리로 소영에게 일러 주었다. "삼장주, 잘 기억해 두오. 지금부터 삼장주는 잠시 동안 전옥(錢 玉)이라고 이름을 바꾸는 게요. 이미 노신과 약속을 했으니 끝까지 노신이 시키는 대로 하여야 하며, 결코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되오." 전 노파는 소영의 오른손을 끌고 나갔다. 그들은 각각 그 교자 위 에 올라 탔다. 소영은 그 가마를 메고 온 네 사나이를 바라 보았 다. 네 사람은 모두 꽁꽁 얼어있는 듯했으나 이들의 눈동자는 불타 고 있어 상승내공을 지닌 사람 같았다. 두 사람이 가마에 올라 타자 네 사람은 발을 내린 다음 가마를 메고 빠르게 달렸다. 가마는 마치 말이 달리는 것같이 빨랐다. 약 한 시간 가량 달려 간 후 가마가 멈추었다. 가마발을 들치자 전 노파가 먼저 내려 그 앞에 서 있었다. "옥아, 어서 내려 오너라." 소영은 전 노파를 건너다 보며 천천히 가마에서 내렸다. '남들은 이 소영의 이름을 사칭하여 그 진짜와 가짜를 가리기 어 려울 정도로 강호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오늘은 이 소영이 타인의 성명을 사칭하려고 하다니....' 작은 가마 두 채는 넓은 대청 앞에 멎었다. 가마를 메고 온 사람 들은 단정히 손을 내리고 양쪽에 서 있었다. 소영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나직이 전 노파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요?" "넓은 저택이라고 알아두면 돼. 이런 집은 도처에 있지." 소영은 빙긋이 웃었다. "알았소이다, 가르쳐 주심에 감사하외다." 전 노파가 전음술을 써서 말했다. "지금 우린 조손(組孫)의 신분인데 그렇게 불러서야 쓰나? "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씨를 바꾸었다. "알았어요." 소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안개 자욱한 대청 안에서 맑고 차가운 말소리가 들려 왔다. "수부인(嫂夫人). 그동안 별고 없으셨소? 아직도 북해의 옛친구 를 기억하고 계셨소?" 전 노파가 대답했다. "세월은 정말 빠르오. 빙궁을 떠나서는 난 늘 생각했었소." 대청에서 한바탕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애는 영손이오?" 전 노파가 다시 대답했다. "빙궁의 옛일을 불민한 어린 손자가 기억하지 못함을 사과드리 오." 대청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내 딸은 그날 밤을 잊지 못하고 있소. 하루종일 이 노부 에게 그때 만났던 영손을 한 번만 보게 해 달라고 조르고 있소. 북 해의 빙궁에는 진기한 물건도 많건만 그 애의 울적한 마음을 풀어 주기에는 모두 부족하오. 그래서 내 아내는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몇 번이나 노부더러 중원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하지만, 빙궁의 일이 많아서 여태껏 딸을 데리고 남쪽으로 올 틈이 없었소. 여기에 온 뜻은 어디까지나 그 애의 영손을 생각하고 같이 지내고 싶어하 는 소원을 풀어 주려 함이오." 가슴에 용을 아로 새긴 비단 도포를 입은 사람이 대청으로 다가 왔다. 눈같이 희고 긴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노인이었다. 소영은 오 년 전의 옛일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무위도 장의 단실에서 만났던 북천존자였다. 전 노파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북천존자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는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대청으로 들어와 앉으시오." 전 노파는 이때 소영을 바라 보며 꾸짖듯 말했다. "옥아, 너는 어찌 이처럼 예의를 모르느냐? 선배님을 보고도 경 배할 줄 모르다니." 소영은 곧 엎드려 큰절을 했다. "후배 전옥이 노선배님을 뵈옵습니다." 북천존자는 하하 웃고 소영을 부축해 일으켰다. "전세형(錢世兄)은 어서 일어나오." 북천존자는 소영을 일으켜 곧장 대청 안으로 데리고 갔다. 대청 은 서늘할 만큼 공기가 차가왔다. 소영은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살펴 보았다. 대청의 양쪽에 열여섯 개의 큰 항아리가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그 항아리 속에서 찬 기운이 올라 오는 것 같았다. 북천존자는 긴 나무상 옆에서 소영의 손을 놓고 웃으며 말했다. "전세형은 거기 앉으시오." 북천존자는 다시 전 노파를 바라 보며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 다. "영손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고 준수할 뿐만 아니라 비범한 재질 을 가지고 있는 것 같소. 수부인께서는 이런 훌륭한 손자를 두었으 니 참으로 기쁘시겠소." 전 노파가 말을 받았다. "앞으로 존자께서 많이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북천존자는 잠시 소영을 바라 보다가 전 노파에게 말했다. "노부가 중원에서는 먹어보기 힘든 몇 가지 음식을 가지고 왔소. 함께 들고 마시도록 합시다." 북천존자는 말을 마치자 벌떡 일어서서 손뼉을 쳤다. 잠시 후 자욱한 안개 속에서 흰 옷을 입은 소녀 넷이 각기 목반 을 들고 줄을 지어 나왔다. 소반 위에는 각각 옥잔이 한 개씩 놓여 있었다. 북천존자는 옥병을 들어 나무 마개를 뽑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세형의 주량은 얼마나 되오?" "후배는 술을 잘 못합니다." "좋소. 그러면 조금만 드시오." 북천존자는 옥병을 들어 소영의 술잔에다 술을 세 방울만 떨어뜨 렸다. 그 옥병에는 많아야 술이 여섯 량 정도 들어 있을 것 같았다. 북천존자는 다시 전 노파의 옥잔에다 술을 반 잔쯤 붓고 나서 자 기의 잔에도 역시 반 정도만 채웠다. 북천존자는 천천히 술을 들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부의 이 설향천일취(雪香千日醉)를 한 번 맛보시오." 원래 소영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려고 했지만 북천존자가 살 짝 혀만 적시는 것을 보자 그는 생각을 고쳐 먹었다. 소영은 살짝 한 방울을 마셔 보았다. 술 한 방울이 입에 들어가 자마자 온몸에 짜릿한 향기가 퍼졌다. 북천존자는 술잔을 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전세형은 술을 못 이기거든 마시지 말고 이 요리나 맛보오." 북천존자는 소반 위에 놓인 세 개의 그릇을 가리켰다. 첫째 그릇 에는 얼린 돼지 기름 같은 희고 향기로운 것이 담겨 있고, 둘째 그 릇에는 담홍색의 공같은 것이 세 개 들어 있었다. 빛깔이 약간 이 상한 것 외에는 꼭 고기로 만든 단자 같았다. 셋째 그릇에는 진한 국이 반 그릇 정도 들어 있었다. 국 빛깔은 청록색인데 도무지 무 엇으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북천존자는 젓가락으로 그릇을 가리키며 말을 했다. "첫째 그릇에 담긴 것은 천 년 묵은 곰의 발바닥이고, 둘째 그릇 에는 물로 찐 설연자라오. 어서 드시오." 소영이 설연자를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발자국 소리와 함께 자 욱한 안개 속에서 백의 낭자가 천천히 걸어 오고 있었다. 북천존자가 그녀를 보고 말했다. "설향, 여기 왜 왔니?" "쇤네는 명을 받들어 전공자를 모시러 왔습니다." 북천존자는 딸을 무척 사랑하는 듯했다. 가볍게 몇 번 헛기침을 하고는 소영을 향해 말했다. "내 딸의 요리 솜씨는 빙궁의 명 요리사보다도 낫소. 그 애가 전 세형을 위해 좋은 안주를 준비한 것 같은데 어떻소?" 소영은 설연자를 도로 내려 놓고는 전 노파를 돌아 보았다. 전 노파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옛날 공주와 만났을 땐 네 나이가 너무 어렸었지. 공주는 아직 도 너를 잊지 못하고 있으니 빨리 가서 공주를 만나 보도록 해라." 소영은 마지못해 일어서서 설향을 따라 갔다. 안개 자욱한 대청을 지나 자 후청이 나타났다. 후청에는 엷은 분 홍색 치마 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향나무 의자에 단정히 앉아 있었 다. 그녀는 매우 수줍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향이 소영을 데리고 들어섰는데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설향이 소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 분이 바로 우리 공주님이십니다. 여기서 기다리신 지가 퍽 오래되었지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재빨리 돌아서서 나가 버리고 소영과 홍의 소녀 둘만이 남게 되었다. 소영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고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지 난날 전옥과 공주가 만났던 일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말 을 먼저 해야 좋을지 몰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홍의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 공자께서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예, 덕택에. 그런데 공주께서도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홍의 소녀는 다소곳이 얼굴만 떨굴 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에도 빙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는 옛날의 일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소영은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 버렸으므로 빙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 우리들은 세상 모르는 어린애였었지만, 저는 소꿉장난을 하던 일과 또한 우리가 주고 받은 말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어 요. 나이가 들수록 더 뚜렷이 기억나는군요." 빙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영을 바라 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기억보다 더 준수하군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양볼을 붉게 물들이며 더욱 수줍어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게 생겼다. 소영은 잠깐 동안 넋을 잃고 그녀 를 바라 보았다. 빙아는 매우 기쁜 표정이었다. "나는 여러 번 아버지에게 당신을 북해의 빙궁으로 데려다 달라 고 졸랐지요. 아버지는 늘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나는 여러 번 울기도 했으며 몸부림도 쳤어요. 그래서 드디어 아버지는 당신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해서 나를 데리고 중원으로 오신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참 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더니 다 시 입을 열었다. "우린 그때 빙궁의 뒤에서 놀았어요. 당신은 나를 신부로 분장시 키려 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지요. 나중에 당신은 화가 나서 울음을 터뜨려서 나는 할 수 없이 승낙을 했지요." 그녀는 잠간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 일들은 이미 십여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내 눈에는 어제 일처럼 떠올라요." 소영은 그때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저 그녀의 맑은 음성에 도취되어 멍청히 서 있었다. "웬일인지 난 부쩍 그 때의 일들이 생각나서 견딜 수 없어요. 아 아! 그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 당신도 나처럼 그 때의 일들을 생 각하고 계시나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말문이 콱 막혀 버렸다. 무슨 말이든 적당 한 대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할수록 머리가 더 어지러워져서 정말 쥐 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버리고 싶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 러자 빙아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말을 안하세요?" 소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공주!" 빙아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나를 공주라고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소영이 반문했다. "그럼 당신을 어떻게 부를까요?" 빙아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들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요. 내가 당신을 옥동생이라 고 부르면 당신은 나를 무어라고 불러야 하지요?"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소녀가 나를 옥동생이라고 불렀다니까 분명히 나이가 전옥보 다는 위이겠구나. 그렇다면 나는 이 소녀를 누나라고 불러야 할 텐 데....?' "왜 그래요? 혹시 내 이름을 잊기라도 했나요?" 소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당신의 이름을 깜빡 잊고 말았소." 빙아는 그 말을 듣자 안색이 돌변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동안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없군요?"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전 노파의 실종된 손자가 아직도 이 소녀를 생각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내가 알 수 없으니, 내가 어떻게 대신 전옥 노릇을 한단 말 인가? 아무튼 이 소녀가 물을 때마다 퍽 난처해지는구나...' 빙아는 토라져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원망에 가득 찬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좋아하는 계집애라도 생긴 모양이군요?" 소영은 엉겁결에 얼른 대답했다. "아니오." 빙아는 이 말을 듣자 무슨 구원이라도 받은 듯 갑자기 표정이 환 하게 밝아지며 방그레 웃음마저 띠었다. "그러면 당신은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무림에서 최고의 지위와 문파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시죠?" 소영은 대답을 망설였다. 빙아는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그렇게 망설일 것 없어요. 우리 어머니는 나를 귀여워해 주시 고, 아버지는 어머니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요. 나는 빙궁 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지니신 무공을 모조리 당신에 게 주고, 장차 당신이 빙궁 문호의 장문인이 되도록 부탁을 하겠어 요." 소영은 다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게는 안 될 거요." "누가 안 된다고 그래요? 내가 꼭 되도록 해 드리겠어요." 빙아는 잠시 동안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우리 그런 얘기 그만 둬요. 그보다도 저.... 제가 어렸을 때보 다 미워졌어요? 예뻐졌어요?" 빙아는 더 이상 수줍어하지 않았으며 맑은 목소리로 즐거이 말했 으며 소영에게는 무척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공주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소." 빙아가 다시 새침해졌다. "왜 내 이름을 부르지 않죠?" '내가 네 이름을 알아야지.' 빙아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탄식조로 말했다. "옥동생, 내 이름을 정말 잊었어요?" 소영은 더 이상 이야기 하다가는 정체가 드러날 것 같아 작별인 사를 하고 싶었다. 그때 비녀들이 백옥 차반(茶般)에 향차 두 잔을 받쳐 들고 들어 왔다. "전 공자님, 차 드십시오." 소영은 찻잔을 받아 상에 올려 놓고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백의소비는 입을 가리고 풋풋하고 웃어젖혔다. "전공자님, 언제 그런 예절을 배우셨어요?" 빙아가 갑자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북해의 빙궁에 있을 때는 나를 빙아라든가 빙누나라고 불렀는 데, 지금은 마주 앉아서 말끝마다 공주라고 부르는구나." 소영이 곧 말참견을 했다. "그때 당신과 나는 세상사를 모르는 어린아이였지만, 지금은 이 미 어른이 되었으니 당연하지 않소?" 백의 소비는 두 사람만 남겨 놓고는 슬그머나 물러가 버렸다. 빙아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비굴한 것 같아서 갑자기 상 위의 찻잔을 들어 힘껏 내동댕이쳤다. 소영이 빙아의 표정을 바라 보니 양미간에는 노기가 잔뜩 서려 있고 살기가 등등했다. 당장 무슨 일이라도 일으킬 듯한 기세였다. 소영은 은근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전 노파는 나를 위해서 천하 영웅들과 원수를 맺었다. 그 댓가 로 나더러는 자기의 손자 구실을 해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뜻밖에 도 이와 같은 애정문제가 있다니.... 하지만 나는 유종의 미를 거 두어야 한다. 만약 일을 그르쳐 버린다면 전 노파를 저버리는 결과 가 되는 것이다.' 소영은 생각이 이에 미치자 자기의 처사가 매우 옹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빙아를 정답게 바라 보며 미안한 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빙아, 화났소?" 빙아는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누가 당신보고 나를 빙아라고 부르라고 했어요? 당신이 나와 무 슨 상관이 있어요? 당신이 나에게 빙아라고 부를 자격이 있어요? 내게 조금도 아첨할 필요 없어요. 당신의 마음에는 벌써 나라는 존 재는 없어요. 그따위 꾸며대는 말을 듣기도 싫어!" 소영은 그녀의 말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자기는 거짓 정을 주고 있는 것이다. "공주, 잠깐 분노를 진정하시고 내 말을 들어 보시오." 빙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듣기 싫어요. 나가 줘요!" 소영은 그녀의 눈에 살기가 서려 있는 것을 보자 당장이라도 손 을 쓸 기세라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다. "공주가 이처럼 나를 싫어하시니 나는 이로써 작별하오." 소영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때 빙아가 또 고함을 질렀다. "서욧!" 소영이 돌아서자 빙아가 약간 부드러운 소리로 입을 열었다. "금방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했지요?" 소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전옥이 아니오. 용서하시오. 그래서 지나간 일들을 전혀 몰라 공주의 마음을 아프게 한 거요." 빙아는 깜짝 놀랐다. "당신이 전옥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이에요?" "나는 소영이오." 빙아는 다시 한번 놀랐다. "소영, 소영이라고?" "그렇소. 나는 전 노파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의 실종된 손자로 가장하는 일을 승낙하고 연회에 온 것이오."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전 노파는 사전에 전옥과 공주의 옛일에 관해서 말하지 않았소. 이런 복잡한 사연이 있는 줄 알았다면 절대로 승낙하지 않았을 것 이오." 빙아가 갑자기 말을 가로챘다. "왜요?" 소영이 천천히 대답했다. "사람에게 애정과 절개는 한없이 중요한데 내가 전옥의 이름을 사칭해서 낭자로 하여금 옛친구로 오인토록 만들었으니 그 죄가 막 대하오. 내가 더 이상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나는 사람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죄를 알았다면 또한 당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알 고 있겠군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섬뜩했다. "여자의 명예와 절개는 생사보다도 더 중요해요. 그런데 당신은 전옥의 이름을 사칭해서 내 절개를 크게 우롱했어요. 또한 후에 당 신이 사람들에게 북해 빙궁의 공주가 이러이러하더라고 소문을 낸 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이 세상에 살겠어요?" "만약 이 소모가 그처럼 비겁한 사람이라면 당신에게 진실을 틸 어 놓지도 않았을 거요." 그러나 빙아는 듣지 않았다. "당신이 어떤 궤변을 늘어 놓더라도 나는 믿지 않아요. 당신이 당장 내 앞에서 칼을 물고 자결해서 죽기 전에는!" 그녀의 탐스러운 모습은 차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소영은 아찔했다. 빙아의 결연한 태도를 본 소영 역시 강경한 어 조로 입을 열었다. "대장부가 죽음에 대하여 어찌 두려움이 있겠소? 더구나 내가 자 초한 것이니.... 허나,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오." "흥, 인간에게 최대의 분함과 최고의 고통은 죽음이에요. 어떤 고난도 죽음만은 못해요. 그런데 당신은 죽음이 무섭지 않다면서도 비겁하게 피하는군요." "나는 후세까지 이름을 남길 욕심은 없지만 비겁한 이름을 남기 고 싶지도 않소. 낭자가 나를 믿어 준다면 기한을 연장해 주시오. 오늘 일에 대해서 갚아드리리다." "당신의 말은 그럴 듯하지만 어떻게 믿을 수 있지요?" 소영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갔다. 그러나 붉은 옷자락이 펄럭이더니 빙아가 소리없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낭자의 신법은 참으로 훌륭하오. 놀랍소." 소영이 급히 이 보 물러서며 말하자 빙아는 코웃음을 쳤다. "북해빙궁의 칠환보(七幻步)가 절묘하다는 것은 천하의 무림이 다 아는 사실이오." 소영은 은근히 화가 치밀어 슬며시 비꼬았다. "칠환보란 이름은 들었어도 천하제일이라는 말은..." "뭐요? 그렇다면 한번 해 보겠어요?" 빙아는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그 표정이 재미 있어 소영은 유들유들하게 답변했다. "물론! 한 수 받아 보겠소." 입으로는 가볍게 말했으나 그는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았다. 진기 를 단전(丹田)에 모으며 은근히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빙아는 빙그르르 몸을 돌리더니 소매자락을 펄럭였다. 그러자 두 개의 홍색 인영(人影)이 소영의 좌우를 동시에 공격해 들어 왔다. 소영은 양쪽에서 공격하는 두 인영 중 어떤 것이 진짜 빙아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두 손을 활짝 벌리며 두 인영을 동시에 후려 갈겼다. 인 영은 소영의 공격을 받고 창졸간에 사라지고 오, 륙 척 떨어 진 곳에 빙아가 가만히 서 있었다. "호호호, 칠환보법이 어때요?" "흥, 환상으로 눈을 어지럽히는 장난이 뭐 그리 대단하겠소? 그 것은 무공이라 할 수도 없소." "큰소리는 삼가하시오. 내가 인영을 만들어서 양쪽으로 공격했는 데 당신은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어요?" "나도 두 손으로 하나씩 맡았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칠환보의 묘한 점은 방향이 없는 거예요. 만일 인영 세 개를 만들어 공격하면 어떡하겠어요?" "두 손과 다리 하나로." "네 개의 인영일 때는?" "두 손과 두 발을 동시에 사용해서 막을 수 있소" "호호, 멋지군요. 그러면 다섯 개의 인영을 만들어 공격한다면?" "절대로 경솔하게 말할 수는 없소. 낭자는 넷 이상의 인영으로 화신(化身)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소영의 말에 빙아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다. "난 할 수 없지만, 저의 아버지는 하실 수 있어요." "무공의 정도가 아닌 것은 요술에 불과하오." "요술이라니요? 이건 일종의 기묘한 보법이에요. 진퇴동작에 일 정한 법칙이 있어요. 당신은 모르면 잠자코 있으세요. 만일 저의 아버지가 들으시면 당신을 반드시 토막내서 죽일 거예요." "낭자, 웃기지 마시오. 설혹 낭자의 가친께서 칠환보가 아니라 백환보를 사용하더라도 나를 반 토막으로 만들진 못할 것이오." "저의 아버지가 당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선 내 가 혼을 내 주겠어요." 빙아는 발끈 화를 내더니 재빠르게 일격을 소영에게로 날렸다. 소영은 두 손을 깍지긴 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소영의 주먹바람 은 빙아의 장풍과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빙아는 코 방귀를 뀌며 두 번째의 공격을 퍼부었다. 훨씬 강해진 장풍이 파도 처럼 소영에게로 몰아 닥쳤다. "요것 봐라." 소영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장풍을 피하며 손가락을 펴 빙아의 혈 도를 찍어 갔다. 빙아는 날렵하게 몸을 비틀어 피하면서 왼손으로 소영을 때렸다. 두 사람의 공격과 방어하는 동작은 매우 민첩하고 변화가 많았 다. 소영이 이십 초를 공격했으나 빙아는 가볍게 피해내며 날카로 운 반격을 퍼부어 소영을 당황케 했다. 두 사람이 서로 감탄하며 아직도 공방전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 다. 갑자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빙아! 너희들은 무공을 시험하는 것이냐? 진짜 싸우는 거냐?" 빙아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손을 멈췄다. 나타난 사람은 북천존 자와 전 노파였다. 뒤로 물러선 백리빙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옥동생의 무학을 시험해 보고 있는 중이었어요." 북천존자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소영과 백리빙을 쏘아 보고 있었 다. 전 노파도 두 사람이 단순히 무공을 겨루어 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북천존자의 성격은 매우 날카롭다. 한 번 노하면 사정을 두지 않는 잔인성을 지니고 있는데....' 전 노파는 내심 불안했으나 어쩔 수 없어 지켜 보기만 했다. 백 리빙이 애교가 담뿍 담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옥동생은 본시 실력이 있으면서도 나타내질 않거든요. 동생에게 강제수단을 써서 몇 수 시험해 보지 않았다면, 아직도 동생에게 이 런 무공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거예요." 백리빙은 북천존자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더니 소영의 손목 을 잡고 방으로 달려 갔다. "영손(令孫)의 무공은 누가 가르쳤소?" "가문에 전래해 오던 무공 이외에 몇 분의 지도를 받았어요. 애 가 총명해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지요." "노부의 관찰로는, 영손의 무공은 고수의 무공을 전수 받았을 뿐 만 아니라 벌써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소. 노부가 그의 초식을 자 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잘못 본 것은 아닐 거요." "존자께서 그 애를 칭찬하시니 전가의 기쁨이오." 북천존자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노부는 생각에는 그의 무공은 전가에서 가르친 게 아닌 것 같 소." 전 노파는 내심으로 깜짝 놀랐으나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대 답했다. "제가 강호를 물러 나와 전원에 파묻힌 것은 전적으로 손자를 위 해서요. 저희 남편의 친구되는 몇 분이 그 애의 재질을 사랑해서 무공을 지도하긴 했지만.... 그분들은 일정한 기한도 없이 사흘이 고, 한 달이고 마음 내키는 대로 가르쳐 주곤 했소." 북천존자는 머리를 고덕였다. "어쩐지 영손의 수는 전가의 무공과 전혀 다르다 했소." "그분들은 그 애에게 무공만 가르쳤을 뿐 제자로 받아 들이지는 않았어요." "그것은.... 그들이 자기의 능력을 알기 때문이요. 아무라도 그 의 스승이 되기는 어렵소." 전 노파는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 애를 과장하는 거예요. 그분들이 제 자로 삼기를 꺼리는 이유는 항렬 때문일 거예요." "무림에는 나이가 필요치 않소. 고수가 위요. 그들은 자기들의 실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제자로 두지 않았을 것이오. 내 딸과 수 부인의 영손이 싸우는 것을 보니, 영손의 무공은 참으로 놀랍소." 전 노파는 가볍게 웃었다. "존자는 그 애의 무공을 몇 초나 보셨다고 그런 단정을 내리시 오?" "그가 정묘하고 폭넓은 무공을 지니지 못했다면 내 딸에게 벌써 굴복당하고 말았을 거요." 전 노파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이 없자 북천존자는 다시 말을 꺼냈다. "내 딸은 벌써 노부의 것을 대부분 전수했소. 방금 영손은 내 딸 이 전력을 다해 공격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소." "내 손자보다 존자의 영애(令愛)가 훨씬 강해요." "아니오. 내 딸의 천변만화(千變萬化)의 공세를 그는 조용하게 풀어 버렸소. 이것은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오." "그 애가 틀림 없는 수부인의 손자요?" 전 노파는 마음이 뜨끔했으나 태연하게 대답했다. "세상에 남의 이름을 사칭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애는 분 명히 전옥(錢玉)이에요." "지금 생각해 보니, 노부가 기억하고 있는 전옥과 지금의 그와는 좀 틀린 것 같소." "아이들은 크면 변해요. 제 기억에 있는 빙아와 지금의 빙아도 많이 다른걸요." "아니오. 노부는 점술과 관상을 좀 배웠는데 모습과 골격, 기품 이 모두 틀리오." "내 손자가 존자를 뵈었을 때는 열 살도 못 됐을 때이며 아직 응 석받이였는데 기품이란 말은...." "천생적인 골격은 변치 않지요!" 전 노파는 더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전 노파가 우 물쭈물 하는데 북천존자가 강압적으로 말했다. "수부인께서 전옥을 오라고 하셔서 내가 그를 자세히 볼 수 있게 해 주시오." 전 노파가 거절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소영과 백리빙이 나란 히 걸어 나왔다. 전 노파가 입을 열려는데 북천존자가 앞질렀다. "전세형! 이리 오시오! 노부가 분명하게 물어 볼 말이 있소." 전 노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말로는 소영에게 무엇이라고 주의를 줄 수도 없고, 눈짓을 하자니 북천존자가 날카롭게 지켜 보 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부르세요." 소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소영은 북천존자를 향해 걸어 갔다. 그 뒤를 바짝 따르며 북천존 자를 살피던 백리빙이 소영의 허리를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속삭 였다. "조심해요. 아버지는 나쁜 마음을 지니신 것 같아요." 소영은 속으로 흠칫 놀랐으나 어깨를 딱 편 채 북천존자의 앞으 로 성큼성큼 걸어 갔다. "노선배님, 무슨 분부이신지요?" "이리 가까이 오시오. 노부가 물어 볼 말이 있소." 소영은 백리빙의 경고가 생각나자 의심이 생겼다. 북천존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부인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북천존자의 가시가 돋힌 말에 전 노파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 는 미묘한 웃음을 흘리더니 소영을 쏘아 보았다. "바른 대로 대답해! 너는 전옥이 아니지?" 소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백리빙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날카롭 게 반문했다. "누가 옥동생이 아니라고 했어요?" 북천존자는 찔끔하는 눈치였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눈썹을 치키 며 성난 어조로 따지고 드는 백리빙의 기세에 놀란 그는 껄껄 웃고 말았다. "허허, 틀림 없구나. 노부의 눈이 흐려서 착각을 했다." 그는 전 노파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부인께서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자녀들의 일에 우리가 신경을 쓸 것이 아닌 것 같으니 그만 들어 갑시다." 전 노파는 팽팽히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며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 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백리빙이 소매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말했 다. "참 위험했어요." "뭐가 위험했단 말이오?" 소영이 어리둥절하며 묻자 백리빙은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당신들 두 노소의 생명을 내가 구했는데 그걸 몰랐단 말예요?" "부친 말씀이오?" "그래요. 만일 당신이 우리 아버지의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했다 면... 당신은 지금쯤 시체로 변해 누워 있었을 거예요." 소영은 불복하는 마음에서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나는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가 당신을 보자마자 살기를 품을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의 음풍섭혼장은 절세의 무공이에요." 소영은 생각했다. '이름만 들어도 과연 몸이 으시시하군.' 소영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백리빙은 화가 치밀었다. 그 녀는 속으로 은근히 벼르면서 말을 이었다. "그 섭혼장은 위력이 대단해서 일장으로 상대방의 혼을 뺐을 수 가 있어요. 장풍에 맞으면 죽거나 병신이 되지요. 아버지는 섭혼장 에다 자신의 흠한기공을 첨가해서 음풍섭혼장으로 고쳤어요." 백리빙은 잠시 말을 끊더니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이었다. "아버지는 당신과 얘기할 때 암암리에 음풍섭혼장을 운기(運起) 했어요.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에 일격으로 당신을 죽이려 했던 것 이에요." 소영은 그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 말을 못 믿어요?" "못 믿는다기보다.... 좀 이상하오...." "이상하다니요?" "낭자는 조금 전에 내가 전옥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때에 죽일 듯 펄펄 뛰지 않았소? 그런데 북천존자 앞에서는 태도가 돌변해서 나를 감싸 주었으니....." 백리빙은 갑자기 까르르 웃어댔다. "호호호,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잖아요?" 그녀는 돌연 정색을 하더니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에게 일러 준 소영이란 이름은 거짓이 아니겠지요?" "그렇소. 나의 본명이오." "내 이름을 아세요?"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낭자의 성은?" 백리빙은 허리를 굽혀 절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녀는 두 자 성으로 백리라 해요. 소녀의 이름은 외자로 빙이 라고 해요." "백리빙이라.... 차가운 이름이군." "저는 중원에는 드물게 드나들지만 항상 중원의 경서를 읽고 있 어요. 소녀의 비칭은 제대로 쓴 것인지 모르겠어요?" "알맞게 썼소." 백리빙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나 어조에는 정 이 담뿍 깃들어 있었다. "만일 소녀가 훗날 중원에 나가게 된다면 중원의 처녀로 가장해 도 통할 수 있을까요?" "낭자의 말씨는 발음이 정확하고 억양이 원만한 데다가 태도가 중원 처녀와 그리 다르지 않소." 소영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 보며 약간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제 나는 작별하겠소." 이 말을 들은 백리빙은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리며 꺼져 들어 가 는 음성으로 말했다. "상공은 전옥을 사칭하고 왔지만.... 소녀는 마음을 변경할 수는 없어요." "그건 괜찮소. 나는 낭자에게서 몇 차례의 권을 받아 마음 깊이 감격하고 있소. 낭자를 도와서 전옥의 행방을 찾아 내어 빙궁으로 달려 오도록 힘써 주겠소." 백리빙은 원망이 가득 서린 눈으로 소영을 바라 보았다. 소영의 시선이 하늘에 머무른 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백리빙은 안타까 운 듯한 숨을 내쉬더니 머리에 꽂혀 있던 옥비녀를 뽑아 들었다. "소 오빠, 이 비녀를 받으세요." "오빠라니..... 낭자의 뜻은?" "후일 소 오빠가 소녀의 전동생을 만나면 그에게 이 옥비녀를 주 세요. 이 비녀를 가지고 북해 빙궁으로 와서 소녀를 만나라고 해 주세요." 소영은 옥비녀를 받았다. "낭자는 안심하시오. 만일 내가 전옥을 찾을 수 없다면 이 옥비 녀를 고스란히 낭자에게 반환하겠소." "그 옥비녀는 천산(天山)에서 천 년 묵은 옥을 캐내어 다듬은 것 이에요. 백 가지의 독을 알아 낼 수 있으니 몸에 지니고 있으면 도 움이 될 때가 있을 거예요." "알겠소. 나는 이만 가겠소." "잠깐만, 어디로 가려고 하세요?" "전 할머니를 데리러 가오." "가지 마세요. 우리 아버지는 소 오빠에게 의심을 품고 있어요. 가시면 사고가 생길 거예요."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역시 그분을 남겨 둘 수가 없소." "정 그렇다면... 소녀가 그분을 모셔 오겠어요." 백리빙은 주위를 둘러 보더니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아래위 흰 옷 을 입은 시녀가 가벼운 걸음으로 달려 왔다. "향설(香雪)이 도련님을 모시고 이곳을 떠나 삼 리 밖에 있는 산 신묘(山神廟)에서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라." 향설은 몸을 돌려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대문을 나서자 담 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뛰어 나와 길을 막았다. 향설이 그들에게 낮은 소리로 몇 마디 설명하자 그들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길을 터 주었다. 삼 리 길을 가는 동안 대여섯 번이나 길을 막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 때마다 향설이 나서서 그들을 설 득시켰다. 산신묘에 도착하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소영에게 말했 다. "다행히 공주님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어요." "낭자, 수고하셨소." 그녀는 맑은 눈으로 소영을 조심스럽게 바라 보며 말을 이었다. "삼, 사 리 이내는 우리 빙궁의 호위대가 삼십육 반으로 나누어 계속 순찰하고 있어요. 그러나 삼 리까지 순찰구역이고 삼 리 밖은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수수방관하지요." "과연 엄중한 경계망이군요. 그런데도 낭자는 나를 편안하게 오 게 해 주었군." 향설은 생긋 웃었다. 그녀의 뽀얀 살결에 미소가 잔잔하게 퍼졌 다. "그들은 제가 공주의 심복 하녀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감히 저 를 섭섭하게는 못하지요." "당신네 공주님의 마음은 어떻소?" "좀 차가와 보일 뿐이에요. 우리 빙궁에서 가장 무서운 분은 바 로 공주의 어머니에요." 이때 사신묘 앞으로 백리빙과 전 노파가 나타났다. 전 노파를 데 리고 나타난 백리빙을 본 소영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그녀에게 말 했다. "낭자, 수고하셨소." "두 분은 어서 떠나세요. 도중에서 무사하시기를 빌겠어요. 소녀 가 멀리까지 전송하지 못함을 용서하세요." 전 노파가 이 말을 받았다. "공주는 존자를 속이면서까지 수고를 하셨으니 나는 이 은혜 어 떻게 갚을지 모르겠구려." "노 선배님은 안심하세요. 아버지 앞에서 소녀가 약간 도와드렸 다고 해서 마음에 두실 것은 없어요." "나는 곧 차비를 차려서 길을 뜨겠어요. 땅 끝까지라도 찾아다니 며 내 손자를 만나 그 애와 함께 빙궁으로 돌아가겠어요. 둘이서 함께 북천존자를 뵈옵고 사죄하겠어요." 백리빙은 소영의 얼굴을 훔쳐 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없어요. 노 선배님이 옥동생을 만나시 거든 소녀대신 한 마디 문안이나 전해 주시면 되어요." 그녀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붉어진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스치 고 있었다. 그러나 전 노파는 백리빙의 이러한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공주가 그 애를 위해 천리 길을 고생했으니 그 애가 빙궁에 가 서 사정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에요. 내가 그를 찾아 내면 어김없이 빙궁으로 찾아가겠어요. 공주는 이제 돌아가세요." 전 노파는 몸을 돌렸다. 소영도 두 소녀에게 인사를 하고 전 노 파의 뒤를 따랐다. 백리빙은 사라져가는 소영의 뒷모습에 시선을 박은 채 손을 가슴 에 얹고 지그시 눌렀다. 오한과 같은 전율이 그녀의 전신에 찌르르 흘러 내렸다. "아씨, 이제 들어 가요." 향설의 재촉에 응, 응, 대답만 하던 백리빙은 소영의 모습이 완 전히 사라진 후에도 굳은 듯 서 있었다. 전 노파는 소영을 데리고 급히 달려 초막에 도착했다. 금란은 소영이 돌아 오는 것을 보더니 반색을 하며 급히 달려 왔 다. 은란이도 당삼고와 함께 방에서 뛰어 나왔다. 그녀는 먼저 전 노파에게 몸을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소영에게 절을 하였다. 소영은 당삼고와 은란에게 물었다. "상처는 다 나았소?" "완쾌되었어요. 금란 낭자에게 들으니 정말 당신의 수고가 컸더 군요." 당삼고가 먼저 대답하고, 은란이 그 뒤를 따라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소비는 분에 넘치는 행복으로 셋째 나리에게 큰 은혜를 받았습 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지...." "같은 처지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이 때에 은혜를 입었느니, 갚겠다느니 하는 소리는 당치도 않다." 소영이 웃으며 말하자 다시 당삼고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우리와 원한을 맺은 일도 없는데 이토록 우리를 괴롭 힌다면 오늘 밤엔 그놈들에게 사천당가(四川唐家)의 암기와 독약맛 이 어떤지 보여 주겠어요." "그건 안 되오. 독약과 암기는 사용할 수 없소. 우리가 백화산장 에 가담한 것이 잘못이오. 우리 몇 사람의 힘으로는 천하의 영웅들 과 대적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설혹 그런 능력이 있다 하더 라고 함부로 선인을 죽일 수는 없소. 우리의 생명에 관계되지 않는 한 낭자는 함부로 암기를 쓰지 않는 것이 좋겠소." 소영은 잠시 말을 끊고 세 여인을 둘러 보더니 다시 이었다. "낭자께서 화골독단(化骨毒丹)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대장주(大 莊主)도 미처 모를 거요. 하지만 그런 암기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 는 것이고.... 오늘밤에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밤새워 길을 가야 하니, 세 분께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오." 금란이 입을 열었다. "셋째 나리도 어서 휴식을 취하세요." 네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초막으로 들어 갔다. 각자 책상다 리를 하고 앉아 눈을 감고 정신통일을 하며 운기를 조식하는 가운 데 시간은 차츰 흘러 갔다. 어둠이 내리고 구름을 헤치며 달이 떠오르자 소영은 천천히 일어 섰다. 그는 금란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적이 초막으로 침입하지 않는 한 우리 모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좋겠다." 그는 방문을 열고 뜰로 내려섰다. 남색 옷에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는 마문비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소제가 한 걸음 늦었소. 마형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소형이 늦은 것이 아니라 소제가 일찍 왔을 뿐이오." "그건 그렇고.... 소제는 처음 산에서 나와서 아는 사람도 없었 고, 무림 인물들과 원한을 맺을 생각은 더욱 없었소. 그런데, 영웅 들이 곳곳마다 소제를 노리며 괴롭히려드니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 겠소." 소영이 정색을 하고 묻자 마문비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 다. "소형이 침착하고 군자라는 건 아무도 의심치 않소. 다만 영웅들 이 몰려드는 건 당신이 백화산장에서 왔기 때문이오." "백화산장에서 와서 그렇다니요?" "옛날 심목풍이 강호를 돌아다니며 무수한 인명을 죽였소. 아마 심목풍 만큼 원수가 많은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리하여 무림동도 들의 합공을 받아 중상을 입고 사라졌기에 모두들 그가 죽은 것으 로 알았는데...." 마문비는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가 뜻밖에도 백화산장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니...."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영은 무거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마문비에게 물었다. "그때 마형은 강호에 발을 디디고 있었소?" "소제가 강호에 발을 디뎠을 때에는 심목풍이 이미 숨어 버린 뒤 였소. 하지만 나는 나의 사부에게 들어서 자세히 알고 있소." "마형은 재질이 풍부하고 무공이 뛰어났으니.... 사부께서 분명 히 명망이 높으신 기인이시겠지요." 마문비는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 사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소."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사부는 심목풍의 장풍에 맞아 심한 내상을 입으셨소. 그분은 소 제에게 무공을 전수하시며 병마와 오 년 동안 싸우셨소. 사부님이 고통을 못 이겨 신음을 토할 때마다 소제는 이를 갈며 복수의 칼날 을 가슴 깊이 갈고 있었소." "그랬었군요. 마형이 심목풍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은 것 도 무리가 아니오. 소제는 그동안 심목풍의 악행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많아 지금 마형이 들려 준 이야기도 사실임을 알고 있소. 그 러나 이미 때가 늦었소. 만일 내가 백화산장과 대적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오. 다만 맹세하겠소. 결코 백화산장 의 나쁜 일에는 터럭만큼도 협조하지 않겠소." "친구의 말을 의심해선 안 된다고 했소. 하나, 소형은 오늘 밤의 맹세를 단단히 기억하셔서 우리의 믿음이 어그러지지 않도록 하시 오." "염려 마시오. 심목풍을 만나면 그가 개과천선하도록 권유하겠 소." "심목풍은 이미 악의 구렁텅이에 깊이 빠졌으니 소형의 힘으로 건져낼 수가 없을 것이오. 다만 소형 자신의 처신만 잘하면 되오." 마문비는 고개를 번쩍 쳐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더니 말을 이었 다. "소제의 충고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오. 소형은 신중히 생갹 하시기 바라오. 이만 작별하겠소." 마문비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굽힌 후 돌아섰다. 소영이 그를 급히 불러 세웠다. "마형! 잠깐만...." "왜 그러시오?" "오늘 소제는 많은 것을 깨달았소. 내가 백화산장과 무림동지 사 이에 얽힌 원한과 시비를 풀어 보겠소." "소형이 소제의 권고를 들어 주니 감격하오." 소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소형은 마형을 괴롭힐 일이 한가지 있소." "무엇이오? 소제의 힘으로 될 일이라면 사양치 않겠소." "백화산장이 맺은 원수는 너무도 많소. 소제는 백화산장의 세째 장주라는 신분으로 강호에 출현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길을 막 으며 괴롭히고 있소. 나는 여러 가지 말로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했 으나 그들은 나를 죽이지 못해 야단들이오. 소제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마형이 그들에게 설명해서 피비린내 나 는 싸움이 없도록 해 주시오." 마문비가 대답했다. "힘이 닿는 데까지는, 다만 몇 사람이라도 권해 보겠소." "고맙소. 소제는 마형의 후의를 받아 무고한 살인을 면하게 되었 소." 마문비는 목례를 하더니 몸을 돌려 달려 갔다. 몇 번 발을 움직 인 듯하였는데 그의 모습은 이미 소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영이 초막에 돌아와 보니 당삼고와 금란, 은란은 이미 행장을 꾸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금란은 중요한 물건만 보따리에 싸고 나머지는 나무상자에 그대로 놔 두었다. "우린 즉시 출발합시다." 소영이 말하자 금란과 은란은 각각 보따리를 하나씩 어깨에 둘러 메었다. 그들 네 사람이 방에서 나오자, 안방에서 전 노파의 음성 이 새어 나왔다. "네 분은 도중에 몸조심하시오. 늙은 몸은 전송 못하오." "할머니께서 도와 주신 은혜 소영은 길이 기억하겠소." 소영의 말을 전 노파가 처량한 음성으로 받았다. "그대들이 떠나는 것을 보니 나도 이 오막살이를 버리고 따라 가 고 싶어지니... 후일 이 늙은 몸의 손자 전옥을 만나거든 잘 돌봐 주시오." "힘이 미치는 데까지 도와 주겠소.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네 사람은 안방을 향해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몸을 돌렸 다. 네 사람이 경공법을 발휘해서 얼마쯤 달렸을 때였다. 돌연 숲속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휙! 하고 바람을 가르며 화살이 날아 왔다. "누구냐?" 소영은 급히 장검에 진기를 모아 부운엄월(浮雲俺月)의 초식으로 화살을 후려 갈겼다. 당삼고는 몸을 굽혔다 펴며 손에 독침을 움켜 쥐고 앞장을 섰고, 그 뒤를 장검을 뽑아든 금란, 은란이 어깨를 나 란히 하고 따랐다. 소영이 장검으로 화살을 때렸으나 자르지는 못하고 방향이 빗나 갔다. '이 화살에는 놀랍도록 강한 힘이 들어 있구나. 이놈을 해치우지 않으면 계속 귀찮게 굴 테니 해치워야겠다.' 소영은 팔보등공(八步登空)의 신법을 전개해 급히 몸을 날려 숲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 때였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은추(銀鎚)는 소영의 옆구리를 노리고 번개처럼 날아 들었다. 34. 납치된 부모님 소영은 재빨리 손을 뻗어 은추에 달린 줄을 잡았다. 강한 힘이 은추를 끌어 당기자, 소영의 몸도 곧장 딸려 갔다. 은추를 휘두른 사람은 신전진건곤(神箭鎭乾坤) 당원기(唐元奇) 였다. 당원기는 소영의 몸이 은추의 줄에 딸려 오자, 솥뚜껑같은 손을 소영을 향해 휘둘렀다. 소영은 급히 오른손을 휘둘렀다. 서로 마주치자 그는 어깨에 통 증을 느꼈다. 소영은 은추의 줄을 놓으며 왼손으로 수라지력(修羅 指力)을 발출해 당원기의 무릎을 찔렀다. 오른쪽 무릎 관절을 지력으로 찔린 당원기는 소영이 어린 나이로 무공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격공타혈의 지력을 전개할 줄은 미처 몰 랐다. 당원기는 신음을 뱉으며 푹 거꾸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소영은 재빨리 손을 놀려 몇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일행을 향해 급히 몸을 돌렸다. 그는 쇠붙 이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흠칫했다. "당삼고와 금란, 은란이 저지를 당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오늘 밤은 포위망을 뚫으려고 손발이 닳도록 싸워야겠구나." 그가 급히 숲을 빠져 나와 앞을 바라 보니 세 명의 사나이가 당 삼고, 금란, 은란에게 손을 쓰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은 매우 치열 했다. 소영은 그제서야 숲 속에다 장검을 두고 온 것을 알고 후회 했다. "삼성곡을 떠나 올때 유선자가 준 교피(較皮) 장갑이 있지. 이 장갑은 칼과 창을 막을 수 있다고 하니, 장갑을 끼고 맨손으로 싸 울 수밖에 없겠다." 소영은 급히 장갑을 꺼내 손에 끼었다. 교피 장갑은 사람의 피부 색을 닮았기 때문에 얼른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때 당삼고가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검을 버려라!" 그녀는 장검을 재빨리 휘둘러 중앙에 있는 사내의 오른팔을 베어 갔다. 그 검법은 매우 빨랐다. 상대방이 할 수 없이 칼을 버리려는 데 곁에서 칼이 들어와 당삼고의 검을 막았다. 당삼고는 독침을 뿌리려 했다. "당낭자! 안 되오!" 소영이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 들었다. 그는 우선 금란을 향해 내리치는 칼을 막으며 신룡탐조(神龍探爪)의 수법으로 상대 방의 오른팔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칼을 빼앗았다. 소영이 맨손으로 칼을 막았는데도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을 본 사내는 깜짝 놀랐다. 소영은 칼을 뺏아 들자, 번개처럼 몸을 날려 두 사내의 칼을 후 려 쳤다. 금속성이 두 번 울리자, 두 사내는 모두 칼을 거두며 물 러서고 말았다. "빨리 가시오!" 소영의 말에 당삼고와 금란, 은란은 재빨리 몸을 날려 앞으로 달 려 갔다. 세 여자가 삼 장 밖으로 몸을 날리자 소영은 칼춤을 추듯 세 사나이에게 절묘한 검법을 전개했다. 세 사내는 소영의 칼을 피하느라고 진땀을 흘렸다. 순간 한 사내 가 비명을 지르며 오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소영이 몸을 돌려 다른 사내의 칼을 후려치니, 그는 기겁을 하고 물러서며 칼을 떨어 뜨렸다. 소영은 차갑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의 생명을 없애려면 십합 이내에 죽일 수 있다. 허 나, 나는 너희와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죽이진 않겠다." 소영은 들고 있던 칼을 던져 버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세 사내는 질린 표정을 지은 채, 소영의 앞을 막을 엄두도 못 내 고 있었다. 소영은 걸음을 재촉하여 당삼고 일행을 따라 갔다. 당삼고는 중천에 높이 걸린 달을 바라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소 영에게 말했다. "이미 삼경이 지났군요. 우리가 무림 인물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 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심목풍의 함정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만일 심목풍이 끝끝내 나의 앞길을 막고 형제로서의 정의를 돌 아보지 않는다면, 나도 그에게 순순히 체포되진 않겠소." 당삼고가 주위를 훑어 보며 다시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은 심목풍이 얼마나 악랄하고 간교한 인물이라는 것을 모 르세요. 나는 할머니가 그의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정 말 무섭고 잔인한 사람이에요." 이 때였다. 일 장쯤 떨어진 풀밭에서 긴 탄식소리와 함께 몇 개 의 회색 그림자가 뛰쳐 올랐다. 그 사람들의 신법이 너무도 빨라, 소영은 감히 쫓아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뒤늦게서야 쫓아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그 들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화상(和尙)들인 모양이에요." 당삼고의 말을 받아 금란이 입을 열었다. "소녀가 우문한도에게 들었는데 소림사에는 무공이 놀라 운 화상 여덟 사람이 있다더군요. 그들은 강호의 시비를 가리기 좋아해서, 팔대금강(八大金剛)이라고 부른대요." 소영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림사의 고승들 말고는 그렇게 빠른 신법을 쓰는 화상은 없을 거야." "그들은 어두운 곳에 숨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 데 셋째 나리께서 심목풍에 대한 감정을 솔직이 털어 놓는 것을 듣 고는 나리의 본심을 알았을 거예요. 그래서 생각을 달리 먹고 급히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금란의 추리에 당삼고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소림사의 중이 아니고 심목풍이 파견한 부하들인지 몰라 요." "소녀가 알기로는....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승복을 입지 않아요. 낭자께서도 보셨지만, 방금 그 사람들은 승복을 입고 있었어요. 절 대로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아니에요." 소영은 머리를 끄덕여 동의하며 입을 열었다. "아뭏튼 우리는 더욱 빨리 달리는 것이 좋겠소." 네 사람은 최대한의 경공을 발휘해서 달렸다. 날이 밝았을 때, 장벽호에 도착했다. 호숫가에 우뚝 선 하얀 담 이 보이자 소영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소영은 하얀 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메인 음성으로 말했다. "저것이 우리 집이오! 아아.... 내가 집을 떠날 때에는, 불과 열 두세 살에 불과한 아이였는데... 이제 이만큼 컸고 신체도 튼튼해 졌으니, 부모님도 나를 알아 보지 못하실 테지." 소영은 갑자기 화살처럼 내닫더니 순식간에 대문 앞에 다다랐다. 그는 옷깃을 여미고 먼지를 털며 문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담 너머로 울창한 수목은 보이는데, 굳게 닫힌 대문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소복이 있나?" 소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 도 들리지 않았다. "소복이 있나? 나야! 소영이야!" 소영이 목청을 돋구어 불렀으나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을 거듭해서 불러도 집 안은 무덤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웬일일까?" 소영의 감격에 넘치던 얼굴이 차츰 변해 불안과 초조의 기색이 떠올랐다. "무엇인가 잘못된 모양이구나." 은란이 소영의 창백한 얼굴을 훔쳐 보며 곁으로 다가섰다. "셋째 나리, 댁의 위치를 심장주에게 말씀드렸어요?" 은란의 말에 소영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더니 갑자기 발을 들어 대문을 걷어 찼다. 대문이 활짝 열렸다. 깨끗하게 손질된 정원이 보였으며 뜰은 깨 끗했고 꽃나무들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소영은 긴장을 풀고 안으로 들어 갔다. 집은 옛날의 모습을 그대 로 지니고 있었으나,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소영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사랑방을 향해 크게 외쳤다. "누구 없소? 나 소영이오." 그러나 그의 외침에 대답하는 것은 바람소리뿐이었다. 우당탕거 리며 방문마다 열어 보던 소영은 소대인의 서재로 들어섰다. 몇 권의 책이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책상이나 방 바닥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소영은 눈앞이 아찔함을 느끼며 급히 서재를 나오려다가 우뚝 멈 춰 섰다. 벼루에 눌려 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소영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편지였다. <삼제가 떠난 뒤에 갑자기 급본를 받았소. 옛날의 원수 몇몇이 나에게서 받은 굴욕을 갚으려고 날뛰고 있소. 삼제의 부모에게도 화가 미칠 것 같아 급사를 보내어 양친을 백화산장으로 모셨소. 삼 제는 이 편지를 보는 즉시 백화산장으로 와서 양친을 뵙도록 하시 오. 대장주 심목풍> 편지를 읽은 소영은 이를 뿌드득 갈며 부르르 떨었다. "소대협, 무슨 편지에요?" 어느새 들어 왔는지 당삼고가 소영의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금란, 은란도 서재에 들어 와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심목풍이 먼저 와서 부모님을 백화산장으 로 데려 갔소." 금란이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대장주가 여길 왔었어요?" "이 편지를 읽어 보시오." 소영은 그녀들에게 편지를 내 주었다. 금란이 편지를 받아 들자, 당삼고와 은란이 머리를 내밀어 함께 읽었다. 편지를 읽은 그녀들 은 한동안 말을 못하고 침통한 표정만 지었다. 이윽고 금란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셋째 나리,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상심만 하면 뭘해요? 선후책 을 강구해야지요." "만일 우리 부모님에게 눈꼽만한 상처라도 입힌다면. 내가 백화 산장을 피로써 씻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마음을 조급하게 갖지 마세요. 대장주는 결코 어른들을 상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셋째 나리를 끌어 들여 충 성하게 하자는 뜻일 거예요." "수단이 너무 야비하다. 형제의 정을 생각한다면 이럴 수가 있느 냐?" "화를 내셔도 소용 없어요.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지...." "백화산장으로 돌아가는 길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방에 먼지 하나 없는 것을 보니, 두 분께서는 이곳에서 떠나신 지 얼마 안되는 모양이에요. 우리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따라 간 다면, 중도에서 막을 수도 있겠어요." "맞았소! 그들은 우리집을 모르고 있었소. 필경 우리들의 뒤를 밟다가 한 걸음 앞서서 달려 온 것에 불과하오. 지금 쫓아 가면 금 방 잡을 수 있을 것이오." 소영이 급히 뛰쳐 나가려고 하자 금란이 앞을 막았다. "나리, 망동해선 안 됩니다. 제 말씀을 들어 보세요." "무엇이 망동이냐? 불과 수십 리밖에 가지 못했을 텐데." "나리께서는 대장주를 너무 가볍게 보시는군요." "가볍게 보다니?" "우리가 비록 쫓아가 잡을 수 있다 하더라도, 구출할 수는 없어 요. 쌍방의 체면만 손상될 뿐이지요." 금란의 말에 소영은 입을 다물었다. 당삼고가 금란에게 말했다.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우리가 일제히 손을 써서 호송인들을 처치하고 어른들을 구하면 되잖아요?" "만일 대장주가 직접 호송한다면 어떡하겠어요?" "심목풍이 아니라 그보다 백 배 더한 사람이 호송한다 하더라도, 우린 소대협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거예요." "그들이 어른들을 방패막이로 우리를 위협한다면?" "그건...그 때에는...." 당삼고가 대답을 못하자 금란이 말을 이었다. "그 때에는 손을 묶고 발을 들 수밖에 없을 거예요. 대장주는 셋 째 나리의 무공을 아끼지만, 셋째 장주가 그를 버릴까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는 셋째 장주의 이용가치가 떨어진다면 금방 죽이려고 할 거예요." 은란이 말참견을 했다. "금란 언니의 말이 옳아요. 대장주의 속셈은 셋째 나리를 위협해 백화산장으로 끌어 들이려는데 있으니 어른들을 해치지는 않을 거 예요." 당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소영이 금란과 은란을 바라 보며 물었다. "너희들은 어디 의지할 곳이 있느냐?" 금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희들은 어려서부터 백화산장에서 자라났어요. 설혹 어느 집에 서 저희들을 받아 들인다 해도 죽음을 낳는 결과밖에 안 돼요." "세상이 넓은데 어디 가서 몸을 숨길 곳이 없겠느냐? 너희들은 인적이 드문 곳을 택해서 살도록 해라." "셋째 나리는요?" "그 나리란 소리 좀 이제 치워라. 나는 너희들의 나리가 아니다. 내가 갈 곳은 백화산장이다. 가서 부모님을 뵙겠다." 은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셋째 장주께서 소녀들을 데리고 백화산장을 떠나셨는데, 혼자서 돌아가시면 반드시 대장주의 의심을 받을 거예요." "너희들이 나를 따라 산장으로 간다 해도 심목풍은 나를 의심할 거다. 나 혼자서 대항하는 것이 후환도 없고 깨끗하다." "만일 심목풍이 부모님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충성을 맹세하라면 어떡하시겠어요?" 소영은 고개를 숙이며 침통한 어조로 대답했다. "강호의 모든 사람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해도, 나는 부모 님을 저버릴 수 없다." 금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들이 도망한 것을 알면 대장주는 땅끝까지라도 쫓아와서 죽 일 거예요. 그러나 소녀들이 셋째 장주님을 따라 백화산장으로 돌 아가면 잔명을 보존할 수 있을 거예요. 셋째 장주님 혼자 가시는 것보다 소녀들과 함께 가는 게 조금은 경계심이 늦춰질 거예요." "소녀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니 셋째 장주님은 염려하시지 않 아도 돼요. 함께 가는 것이 좋겠어요." 소영은 당삼고를 돌아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당낭자의 가문은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 심목풍이 찾지는 못할 것이오. 낭자는 백화산장으로 가실 것 없소." "소대협이 함께 가자고 하신다면...." "아니오. 역시 낭자는 사천(四川)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그렇다면... 좋아요. 집으로 가서 할머니를 만나면 소대협을 도 와 주라고 간청하겠어요." 소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낭자의 조모님도 나를 돕기는 어렵소. 내 일은 내가 처리하겠 소. 잠시 객실에서 기다리시오. 나는 어머님의 방을 가 보고 오겠 소." 소영은 천천히 서재를 나섰다. 안방에 가서 문을 열어 본 소영은 가슴이 섬뜩했다. 푸른 옷을 입은 낭자가 침상에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던 것이다. 소영은 그 낭자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소부인의 시중을 들던 하 녀가 분명했다. 소영은 하녀의 앞으로 가서 손을 그녀의 코 끝에 대어 보았다. 콧김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낀 소영은 급히 그녀의 혈도을 풀어 주었다. 혈도가 풀리자, 하녀는 숨을 길게 들이쉬며 눈을 뜨더니 소영을 발견하고 새파랗게 질렸다. "누, 누구요?" "나는 소영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 가셨느냐?" "아니에요. 제가 아는 도련님은 당신처럼 건강하지 않았어요. 당 신은 누구예요?" 소영이 조급한 마음에서 큰소리로 묻자, 하녀는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부인이 마님을 납치하고, 두 괴한이 영감님을 강제로 떠 메고 갔어요." 이 말을 들은 소영이 발을 구르며 성난 소리로 부르짖었다. 하녀는 소영의 고함에 놀라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소영은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라. 너는 집을 잘 지키고 있어라." 소영은 하녀가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안방을 나왔다. "갑시다!" 소영은 격한 음성으로 한 마디 하더니 몸을 돌이켰다. 소영은 걸 음을 멈춘 채, 강물을 바라 보며 여러 가지 상념을 떠올리다가 갑 자기 격분해서 소리쳤다. "알았다! 참으로 악랄한 계획이었구나!" 일행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소영을 바라 보았다. 소영은 어금 니를 깨물고 묵묵히 서 있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들의 계획에 넘어 갔소. 그들은 많은 물적(物的) 증거를 준비 해 백화산장의 셋째 장주가 사람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갔다는 소문 을 퍼뜨린 것이오. 그래서 많은 무림인물들로 하여금 길을 막도록 했소. 나는 입이 있어도 변명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오. 무림인물 과 내가 싸워 서로 원수를 맺게 하여서 심목풍이 전에 맺은 원한까 지도 나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수작이었소. 사방에 원수가 가득 차 서 설 자리가 없게 되면 자기에게 의지하게끔 만들려는 얕은 수작 이었소. 그러나 내가 무수한 굴욕을 참아 가며 한 사람도 살상하지 않자, 그는 내 부모를 납치한 것이요." 소영의 말이 끝나자 금란이 입을 열었다. "대장주는 언제나 실수가 없어요. 셋째 장주께서 도중에 많은 사 람들을 죽였다고 해도 그는 어른들을 백화산장으로 납치했을 거예 요." 소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별안간 걸음의 속도를 빨리했다. 세 소녀도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 이튿날에는 호북성의 경내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일행은 당삼고에게 작별을 고했다. 당삼고는 몹시 서운 한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우리도 어서 가지." 소영은 당삼고의 뒷모습에 잠깐 눈길을 주었다가 금란, 은란을 재촉했다. 소영의 걸음은 여전히 빨랐다. 백화산장을 내려 올 때와는 달리, 돌아가는 길에는 아무도 앞을 막는 사람이 없었다. 일사천리로 달 리던 소영이 백화산장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문득 걸음을 멈 추었다. 그의 시선은 한 마리의 비둘기를 쫓고 있었다. "우리가 돌아 왔다고 비둘기가 알리러 가는군." 비둘기는 백화산장 쪽으로 사라졌다. 세 사람이 백화산장에 도착 했을 때에는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다. 언제나 조용하던 백화산장 주변에는 무슨 잔치가 벌어졌는지 오색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 져 있었다. "이놈의 산장을 아예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까?" 소영은 백화산장을 보자 욱하고 분노가 치밀었지만 격분을 참기 위해 일부러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장문(莊門)을 향해 걸어 갔다. 세 사람이 장문에 다다랐을 때, 주조룡이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 다. 주조룡은 소영을 발견하고 말에서 훌쩍 뛰어 내리더니 빠른 걸 음으로 마주쳐 오며 손을 흔들었다. "삼제, 마침 잘 돌아 왔소. 지금 우리 백화산장에는 많은 영웅호 걸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소." 웃음을 띠며 말하는 주조룡의 입술을 바라 보며 소영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말하자면 소제가 오는 날이 장날이었군요." 주조룡이 다시 말했다. "나는 삼제가 이처럼 빨리 돌아 올 줄은 몰랐소." 말을 하며 주조룡은 금란과 은란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이 완연했으며 옷과 머리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이들은 굉장히 급하게 달려 온 것이 분명하구나.' 주조룡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소영이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소제의 부모님이 도착하셨는지요?" 주조룡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 두 노인께서도 오셨소?" 소영은 상대방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듯 꾸미는 모습을 보고 화 가 치밀었다. "이장주님은 기밀(機密)에 참여하시면서 이런 일도 모르시오?" 주조룡이 어깨를 약간 움찔하더니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삼제는 천천히 말해 보시오. 나는 전혀 모르오." 소영은 눈꼬리를 찌푸리며 주조룡을 바라 보다가 품 속에서 심목 풍의 필적인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이장주께서 정말 모르신다면.....이것을 읽어 보시오." 주조룡은 편지를 받아 읽더니 가벼운 미소를 띄며 말했다. "큰형님은 항상 생각이 깊으신 분이니 이 일도 심사숙고 끝에 결 정했을 것이오. 두 분 노인장에게 어떤 화가 미칠까봐 염려되어 미 리 예방책을 쓰신 것인지도 모르오." "이제는 소제가 묻는 뜻을 아셨소?" "대강은 알겠소. 삼제, 우리 함께 큰 형님을 뵙고 여쭙시다." "이장주님께 분명히 묻겠소. 우리 부모님은 이곳에 도착하셨소?" 주조룡은 소영이 말할 적마다 이장주님이라는 존칭을 붙이자, 히 죽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거짓이 없이 대답하는데.... 정말 그 일은 모르오." "설마 이 편지가 가짜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그것은 확실히 큰형님의 필적이오. 결코 가짜가 아니오." 주조룡은 잠간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좌우지간 큰형님에게로 갑시다. 가면 진상이 밝혀질 것이오." "좋소, 갑시다." 소영이 안으로 들어 서려는데 주조룡이 금란과 은란을 바라 보며 차가운 어조로 명령했다. "너희들은 난화정사로 돌아가거라." 두 소녀는 소영의 뒤에 붙어선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두 소 녀가 움직이지 않자 주조룡은 언성을 높였다. "들었나? 난화정사로 돌아 가란 말이야!" "이장주께서 간섭하실 일이 못 되오!" 주조룡은 소영을 향해 돌아 서며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삼제, 뭐라고 했소?" "금란과 은란은 대장주께서 소제에게 주셨소. 이장주님이 그녀들 에게 간섭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주조룡은 눈두덩에 주름을 잡으며 소영을 노려 보더니 맥빠진 웃 음을 흘리며 소영에게 물었다. "허허, 삼제는 우리 백화산장의 규칙을 아시오?" "모르오." "삼제는 백화산장에 가맹한 지 얼마 안 되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 오. 내가 백화산장의 규칙을 일러 주겠소. 첫째, 윗사람의 명령을 어기지 마라....." 주조룡은 소영이 큰소리로 웃는 바람에 말을 중도에서 끊었다. 소영은 주조룡에게 반문했다. "백화산장에서 이 소영은 어떤 사람이오?" 주조룡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왜 묻소? 당신이 백화산장의 셋째 장주라는 것은 강호에 널리 알려져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잖소?" "그렇소. 나는 분명 백화산장의 삼장주요. 그렇다면 이 백화산장 에서 나보다 높은 사람은 누구요? 심목풍 대장주와 당신 이장주뿐 이잖소?" "그렇소. 그게 어쨌단 말이오?" 소영은 어깨를 추석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이장주님은 소영을 어떻게 보시오?" "우리는 삼제를 훌륭한 아우이며 친구로 생각하고 있소." 소영은 계속 질문의 화살을 퍼부었다. "그렇다면 나의 부모가 대장주 이장주와 어떤 관계가 있소?" "어떤 관계라니.....?" "나의 부로님이 당신들의 부모가 아니란 말이오?" 주조룡은 흠칫하는 기색을 얼른 감추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오. 삼제의 부모님은 큰형님이나 나의 부모도 되오." "그 말 한번 잘하셨소.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어째서 나의 부모님을 납치해 인질로 삼았소?" 이 말을 할 때의 소영은 금방 주조룡을 잡아 먹을 듯한 표정이었 다. 주조룡은 노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백화산장의 계열로 보면 자기가 높지만, 무공면에시는 자기가 약 하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었다. 주조룡은 소영의 분노를 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어색한 웃 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삼제, 너무 따지고 들어 어리둥절해지는구려. 나는 이 일에 대 해 잘 모르오. 큰형님은 일을 벌이실 때 심사숙고해서 하시니까 이 일도 필경 어떤 이유가 있었을 거요. 큰형님에게 물어 봅시다." 소영이 코웃음을 쳤다. "흥, 정말 모른다니 할 말이 없군요, 그렇다면. 이장주라는 분은 지위는 높지만 알맹이가 없군요." 이 비웃음에는 주조룡도 참을 수 없었다. 주조룡은 숨을 씩씩거 리며 소영을 노려 보며 간신히 분노를 누르고 타이르듯 말했다. "삼제,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을 모르시오? 아무리 흥분했다 하더라도 예의는 차릴 줄 알아야 할 것 아니오?" "예의요? 하하하.... 도대체 그 예의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길래 소영이만 지켜야 되고 다른 사람은 지키지 앉아도 됩니까?" "다른 사람은 지키지 않다니? 삼제는 말을 삼가시오." "이장주님, 백화산장의 사람들이 아직도 소영을 헝제나 친구로 대한다면 이렇게 섭섭하게 할 수가 있소? 부모를 잡아다 인질로 삼 으며 나에게 예의를 지키라니.... 이장주께선 장유유서만 알고 붕 우유신(朋友有信)은 전혀 모르시오?" 주조룡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상대방을 겁내는 마음도 있고, 심목풍이 소영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에 분노를 지그시 눌렀다. "삼제,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 갑시다. 큰형님을 만나면 자연 모든 것이 해결될 테니까." 주조룡은 더 이상 입씨름을 하기 싫다는 듯 안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좋소. 갑시다." 소영은 주조룡의 뒤를 따랐다. 마주보며 눈짓을 교환한 금란과 은란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소영 의 뒤를 따라 들어 갔다. 35. 백화산장의 고수들 소영, 주조룡, 금란, 은란 네 사람은 몇 개의 뜰을 지나 망화루 앞에 도착했다. 누각의 문은 굳게 닫혔고, <손님을 만나지 않겠다>는 패가 높이 걸려 있었다. 주조룡이 소영을 돌아 보며 말했다. "마침 큰형님이 좌식(坐息)시간이라 손님을 만나지 않으시겠다 니, 다시 오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는 형과 동생이라 부르는 사이인데 어떻게 손님이라 하겠 소?" 소영은 좌장을 휘둘러 문을 때리고 높은 소리로 외쳤다. "빨리 문 열어!" 이 일장은 암암리에 내력을 운기했기 때문에 쌍대문이 삐걱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굳게 닫혔던 쌍대문이 열리자, 경장을 하고 칼을 찬 사나이가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소영과 주조룡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 보았다. "누가 문에 일장을 가했소?" 소영이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삼장주 소영이다." 경장한 사나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문 위에 걸린 목패를 삼장주께선 보지 못했소?" 소영이 아니꼽다는 듯 말을 내뱉았다. "보았다면 어쩔 테냐?" "지금 이런 시각에 대장주님은 손님을 만나지 않소. 삼장주께서 는 목패를 보시고도 출수를 했으니 고의로 범한 것 같군요." "너, 눈에 보이는 게 없느냐?" "대장주님의 명령은 산과 같소. 삼장주님이라도 순종하셔야 하 오." 소영은 갑자기 그 사나이의 뺨을 후려쳤다. "개새끼! 환장했군. 누구 앞에서 감히 말대꾸냐?" 소영의 출수는 매우 빨랐고, 사나이는 조금도 방어하지 않았다. 사나이의 어금니 두 개가 부러져 입에는 선혈이 가득 고여서 뚝뚝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내렸다. 사나이는 정신을 가다듬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대장주의 명령을 하속배가 어길 수 없소. 설령 제가 이장주와 삼장주를 이 문으로 들여 보낸다 해도 십이 층의 경호인은 두 분을 들여 보내지 않을 거요." 소영이 냉랭하게 말을 내뱉았다. "어떤 놈이든지 나를 막을 수 없다. 어서 길을 비켜라!" 소영이 문 안으로 성큼 들어 서면서 사나이에게 부딪쳤다. 사나 이는 풀썩 뛰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며 어깨에 꽂았던 칼을 뽑았 다. 소영이 냉랭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죽고 싶으냐?" "대장주의 명령이 매우 삼엄하오. 이장주와 삼장주께서 굳이 강 제로 들어 가시겠다면 이 하인배는 죄를 짓는 수밖에 없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눈에 살기를 띠면서 주조룡을 향해 물었다. "이놈이 윗사람을 알아 보지 못하니 죽이는 것이 어떻겠소?" 주조룡이 대답했다. "우리 산장의 규칙대로 한다면 그는 죽고도 죄가 남소. 하지만 그는 대장주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죽어 마땅한 놈이라면 인정을 베풀 것 없소." 소영은 왼손으로는 십이난화불혈(十二蘭花拂穴)수법을, 오른손으 로는 연환섬전장법(連環閃電掌法)을 사출했다. 그 위력이 너무도 강해, 사나이는 겨우 사, 오 초를 가까스로 받 아 넘기다가 칼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뿐만 아니라 반신이 빳빳 하게 굳어 버렸다. 소영은 사나이를 발로 차서 거꾸러뜨리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 했다. "이번이 처음이므로 이쯤에서 그친다. 이 다음에도 만일 뉘우침 이 없다면, 그 때는 너의 모가지가 달아날 줄 알아라." 소영은 말을 마치자 성큼성큼 걸어서 이 층으로 올라 갔다. 주조 룡은 소영이 지금 매우 흥분되어 눈에 살기를 띠고 있는 것을 보 자, 당장 그를 제지한다면 그에게 원수를 살지도 몰라 조심했다. 주조룡은 원래 위인이 엉큼한지라 자신이 없는 것은 결코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곧장 아무 말도 않고 소영의 뒤를 따라 올라 갔 다. 금란이 은란의 귀에다 대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도 셋째 나리를 따라서 올라 갈까?" 은란이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올라 가요." 금란과 은란은 나란히 이 층으로 달려 올라 갔다. 이 층에는 흑 색 경장을 한 사나이들이 서 있었다. 왼쪽의 사나이는 안령도(雁翎 刀)를 들고, 오른쪽의 사나이는 한 쌍의 판관필(判官筆)을 들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길을 막았다. 소영이 눈을 부릅뜨고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들은 나를 몰라 보느냐?" 안령도를 든 사나이가 서슬이 시퍼래서 대꾸했다. "망화루에서는 대장주 한 분만의 명령을 받기로 되어 있소. 그외 의 명령은 일절 들을 수가 없소." 소영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대들었다. "백화산장에서는 모두들 나를 삼장주라고 부른다. 설마 공연히들 그러는 것이 아니겠지?" 그러자 판관필을 든 사나이가 거만하게 나섰다. "이 망화루는 대장주님이 거처하는 곳이오. 그래서 경비가 삼엄 하오. 대장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오를 수 없 소." "내가 꼭 올라 가겠다면?" 왼쪽의 사나이가 능글맞게 대답했다. "우리들은 두 장주님을 알고 있지만, 칼은 눈이 없기 때문에 삼 장주를 알아 보지 못하오." 소영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오른손을 휘둘러 그에게로 찔러 갔 다. 그 사나이는 미처 안령도를 써 보지도 못한 채, 배에 수라지력 을 맞고 입을 딱 벌리며 피를 쏟고 나동그라졌다. 소영은 시선을 돌려 판관필을 들고 있는 사나이를 보고 외쳤다. "목숨이 아깝거든 빨리 비켜라!" 그 사나이는 소영의 일격에 동료가 쓰러져서 생사가 분명치 않음 을 보자 엉겁결에 쌍필을 휘둘러 소영의 혈도 두 곳을 공격해 왔 다. 소영은 몸을 비틀어 교묘하게 쌍필을 피하고는, 곧장 달려들어 우장으로 비스듬히 때려 잠력을 밀어내 쌍필을 눌러 버렸다. 그리 고는 그 사나이의 왼팔을 잡고 약간 비틀자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나이의 왼팔이 부러졌다. "왼팔만 꺾어 징계를 하지." 소영이 내뱉듯이 말하고는 왼쪽 다리로 사나이의 혈도를 차 버리 고 성큼성큼 삼 층으로 달려 올라 갔다. 그 사나이는 왼팔이 부러져 아픔이 뼈 속까지 스며 들었으므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곤 전신의 공력을 운행하여 그 고통을 이기 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 다시 소영에게 혈도를 채이고 그 자리에 픽 쓰러져 버렸다. 주조룡은 소영이 경호인을 연달아서 상해하며 미친 듯아 달려 올 라 가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망화루의 경호인들은 한층씩 올라 갈수록 그 무공이 높아지 는데, 소영이 이런 식으로 돌파해서 올라 간다면, 반드시 층을 더 할수록 더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모두 백화산장의 정예 고수들이므로, 심목풍이 결코 이들이 모조리 상하 도록 좌시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 형제간에 반목 하는 참극이 연출될지도 모른다.' 주조룡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일행은 어느 새 삼 층으로 올 라 왔다. 삼 층에는 오십쯤 되어 보이는 늙은이가 있었다. 그는 왼 손에는 철방패를, 오른손에는 단도를 들었으며 얼굴 빛깔은 무쇠 빛깔처럼 검고 단단해 보였다. 이 늙은이는 문을 가로막고 서서 소영과 주조룡이 올라 오는 것 을 보고도 잠자코 있었다. 소영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나를 알 테지?" 늙은이는 소영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대꾸만 했다. "당신은 우리 백화산장의 삼장주요." 소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신분을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예의를 표시하지 않는가?" "망화루에서는 심대장주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절을 해 본 일이 없소." 소영은 순간 비위가 상했다. "넌 허세가 대단하군." 소영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별안간 외쳤다. "빨리 비켜!" 늙은이는 여전히 코웃음을 쳤다. "삼장주께서는 제가 좋은 말로 권유할 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이오."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내가 꼭 올라 가겠다면?" 늙은이는 오른손의 단도로써 철방패를 한 번 두드렸다. "당신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거지요." 소영이 내뱉듯 말했다. "그렇다면 조심하게." 소영은 홱 일장을 쳐 냈다. 늙은이는 왼손의 철방패를 비스듬히 내밀어 소영의 장풍을 막으 며 오른손의 단도를 단봉료운(丹鳳了雲)초식으로 옆으로 말아 올렸 다. 소영의 장풍은 철방패에 부딪치자 곧 옆으로 미끄러져 버렸다. 소영은 몸을 굽혀 단도를 피하면서 늙은이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 찼다. 늙은이는 왼팔을 낮추어 철방패로써 아랫도리를 막으며, 오 른손에 든 단도를 번개처럼 휘둘러 소영의 오른쪽 다리를 베려고 했다. 이때 소영은 그의 문호가 매우 엄하게 봉해져 있는 것을 보고 내 찼던 다리를 재빨리 도로 거두었다. 늙은이는 그 틈에 달려 들어 철방패로 몸을 보호하며 단도로 공 격해 왔다. 소영은 할 수 없이 다섯 보 후퇴했다. 소영은 곧 장세 를 바꾸어 연달아 사 장을 내리쳤다. 늙은이는 일시적으로 눌려서 수세를 취했지만 전신 상하를 철방 패와 단도로 지키는 까닭에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십여 합을 싸웠 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은란이 이때 등에 꽂았던 장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셋째 나리, 검 받으세요." 이 두 비녀는 주조룡이 옆에 있는데도 조금도 꺼리는 빛이 없었 다. 주조룡이 소리를 질러 비녀들을 제지하려는 순간 소영이 대갈 일성했다. "놓아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일장으로 늙은이의 오른팔을 때렸다. 순 간, 늙은이는 손에 들었던 단도를 떨어뜨렸다. 소영은 일초를 성공 시키자, 그를 토망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오른 발로 늙은이의 왼팔을 차서 철방패마저 떨어뜨렸다. 그러고 나서 재빨리 왼손의 다섯 손가락을 뻗쳐 늙은이의 왼손 어깨를 눌렀다. 소영은 냉랭한 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하였으니 어떤 죄에 해당하는 가?" 늙은이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못 들은 척 했다. 소영은 정색을 하면서 냉랭한 소리로 다시 외쳤다. "넌 살고 싶겠지?" 이때 주조룡이 끼어 들었다. "삼제, 살인해서는 안 되오." 소영은 애당초 늙은이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므로, 그 말 이 떨어지자 장세를 거두며 물러섰다. "이장주의 명령이니 너를 살려 주겠다." 이때 느닷없이 음흉하고 냉랭한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삼제는 격노한 가운데서도 둘째 형의 명령을 들으니 그 정의가 놀랍구려." 소영이 고개를 들어 바라 보니 심목풍이 사층의 층계 입구에 서 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주조룡이 허리를 굽혀 포권례를 올렸다. "큰형님께 인사드립니다." 심목풍이 손을 가로저었다. "이제는 지나치게 예의를 갖출 것 없소." 금란과 은란은 죽음을 각오한 바이지만 막상 심목풍이 나타나자, 그만 놀라서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너희들은 삼장주를 모시고 먼길을 갔다 왔으니 공을 세운 사람 들이다. 어서 일어나거라." 금란과 은란은 심목풍이 뜻밖에 부드럽게 대하자 어리둥절했다. 심목풍은 소영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형이 왕년에 많은 원수를 맺어 놓아 부득불 망화루의 문단속 을 좀 삼엄하게 했더니 하속배들이 삼제까지 막아 버렸구려." 주조룡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망화루엔 누구든지 맘대로 들어 갈 수 없는 것은 백화산장에 서는 다 아는 사실인데, 어째서 큰형은 오늘따라 이처럼 겸손해졌 을까?' 심목풍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삼제가 먼 길에서 돌아 왔으니 형이 좀 위로를 해야겠소. 빨리 올라 오시오. 그리고 이 형이 두 분과 의논할 일도 있고...." 소영은 몇 번이나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냐고 물어 보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심목풍이 앞장 서서 걸어 갔다. 각 층의 경호인들은 올라 갈수록 그 형상이 냉혹하고 괴상했다. 십 층 이상의 경호인들은 모두 흰 수염을 날리는 늙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냉랭한 표정으로 심목풍마저 못 본 척 했다. 소영이 그들을 자세히 살펴 보니, 그들은 모두 눈에 정기가 넘치 는 고수들이었다. 십삼 층에는 이미 풍성한 주석이 마련되어 있었 다. 그리고 푸른 비단옷을 입은 아름다운 비녀 네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목풍이 상좌에 앉고, 소영과 주조릉이 좌우에 앉았다. 금란과 은란도 끼어 앉았다. 심목풍이 잔을 들어 소영에게 권했다. 소영은 술잔을 들어 마시 려고 하다가 자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술잔을 도로 놓으며 입을 열었다. "소제가 몇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소." 심목풍이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이든 다 해 보시오." 소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제가 양친을 뵈오러 고향으로 찾아 가는 도중에 많은 무림의 인물들이 길을 막고 나섰소. 그들이 소제의 소지품을 조사해 봐야 겠다기에 소제는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었으므로, 내 손으로 떳떳하 게 상자를 열어 그들에게 보여 주었소. 그런데 뜻밖에도 그 상자 안에는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었소." 심목풍은 그 말을 듣자 웃기만 했다. "그들은 사람의 머리를 보자 어떤 반응을 나타냈소?" 소영은 심목풍이 그의 음모를 폭로하면 뉘우치는 빛을 보일 줄 알았다. 그러나 심목풍은 놀랍게도 이토록 태연한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닌가? 소영이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금란이 용기를 내어 말했 다. "그 사람들은 사람의 머리를 보자, 화를 내면서 삼장주님이 살인 범이라고 떼를 썼습니다." 심목풍은 고개를 연방 끄덕이며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이 갑자기 친한 사람의 머리를 보고 강호의 소문이 사실이 라는 확증을 얻었을 테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소영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큰형님이 그 상자에 머리를 넣어 소제더러 가지고 가라고 하신 뜻은 무엇이오?" 심목풍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이 형이 삼제에게 이름을 낼 기회를 마련하려는 것이었 소." 소영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소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남의 칼을 빌려서 나를 죽이려는 계획 인 것 같소. 내가 무림영웅들의 공격을 받아 죽어 버린다면 어떻게 이름을 낼 기회가 생기겠소?" "그 점에 대해서 삼제는 안심해도 좋소. 이 형은 삼제가 위험을 당하기만 하면, 곧 누가 달려 가서 구하도록 배치해 놓았었소. 그 뿐만 아니라 나는 삼제의 무공을 믿고 있었소." "그러면 일부러 그러셨단 말인가요?" "맞았소. 그것은 모두 이 형이 계획적으로 한 것이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어 분통이 터지려 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렇다면 소제의 부모님을 잡아 온 것 또한 대장주님의 안배였 군요?"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백화산장은 많은 원수를 가지고 있소. 그들은 나를 뿌리채 뽑아 버려 후환을 없애려고 발버둥치고 있소. 만일 이 형이 두 노 인들을 백화산장으로 모셔 오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아마 다른 무림인에게 잡혀 갔을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 야 단이 아니겠소?" 소영은 심목풍의 표정이 너무도 태연하고, 자기가 이렇게 격분해 서 질문할 것도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은 태도를 보자, 속으 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놈은 이미 준비를 다 해 놓은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성을 내어 덤벼 들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다. 반드시 이놈이 상상치 못한 일을 해야만 되겠다.' 소영은 생각이 이에 미치자, 억지로 화를 누르고 일어서서 포권 하고 읍을 했다. "큰형님의 용의주도한 점을 소재는 감격해 마지 않습니다." 심목풍은 소영이 이렇게 나오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해서 어 리둥절하며 잠시 놀라는 빛을 띠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색을 하면 저 너털웃음을 한바탕 웃어젖혔다. "이 형이 일찍이 삼제는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보아 왔는데, 과연 잘못 보지는 않았군." 심목풍은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대장부는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삼제는 이 미 인생의 묘미를 터득한 것 같군요." 소영은 억지로 웃는 얼굴을 보였다. "소제는 부모님을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심목풍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와 나는 형제지간이니 춘부장과 영당(令堂) 또한 나의 부모 와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두 노인장에게 조금도 불편을 드리지 않 으니 그점에 대해서 삼제는 안심하시오." 소영은 역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제는 벌써 수 년 간 부모님의 얼굴을 뵙지 못했소. 자식된 마 음으로 사모의 정이 절실하여 한시 바삐 양친을 뵙고자 하오." 심목풍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두 분 노인장께서는 휴식 중이시오. 소제는 너무 급하게 서두를 것 없소. 노인장 두 분께서 피로를 회복하신 후에 뵈어도 늦지 않 을 것이오." 소영은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은란이 급히 가벼운 지풍으로 소영의 다리를 때리자. 소영은 탁자를 손으로 가볍게 두 드리며 말했다. "큰형님이 그처럼 배려해 주시니 절을 한 번 해야겠소이다." 소영이 옷깃을 여미며 정말 절을 하려고 하자, 심목풍은 오른손 을 휘둘러 암경을 몰아치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제, 너무 어려워할 것 없소. 내 삼제에게 할 말이 있소." 소영은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큰형님,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이 형이 이번에 다시 강호에 나와서 속으로는 은근히 삼제가 나 의 강적이 되지 않을까 염려해 왔었는데 오늘 삼제가 그처럼 임기 응변을 잘 하는 것을 보니, 나의 선견지명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증명할 수가 있었소." "큰형님은 너무 과찬을 하십니다." "옛부터 두 영웅은 나란히 설 수가 없다고 했소. 이 보잘것 없는 백화산장에서 어떻게 이 형과 삼제가 버티어 나갈 수 있겠소?" "큰형님은 너무 의심이 많소이다. 소제는 조금도 영웅이 될 생각 이 없소이다." "만약 삼제가 명리를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형제는 길이 달라 끝내는 서로 반목하여 원수가 되고 싸우게 될 것이오." 소영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형님은 내 부모님을 잡아다가 인질로 삼고, 나더러 백 화산장을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하려 했군요?" 심목풍이 담담하게 웃었다. "미연방지를 한 것이 뭐가 잘못이오?" 소영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으나 심목풍은 여전히 태연한 표 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삼제, 앞에 있는 잔을 비우는 것이 어떻겠소?" 심목풍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웃었다. 소영은 술잔을 들면서 천천히 물었다. "큰형님이 소제를 그처림 높이 평가했다면 왜 몰래 나에게 독수 를 쓰지 않고, 연만하신 내 부모님을 잡아다 고통을 주려하오?" 심목풍은 여전히 담담하게 웃었다. "이 형이 춘부장과 영당을 모셔 온 것은 결코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오." 소영은 더 이상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상을 탁 치며 일어섰다. "큰형님이 그처럼 무정하시면서 소제가 의리 없다고 나무라지 마 시오." 소영은 서슴지 않고 옷자락을 뚝 찢었다. "우리 형제는 이제 옷을 찢어 의를 끊고, 땅을 그어 절교하는 바 요." 심목풍은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우리 혈제에게 조만간 이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소" 심목풍은 갑자기 웃음소리를 그치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 다. "우리 형제는 이로써 의리가 끊어졌으니, 지금부터 지모로서 강 호에서 패권을 다툴 것이오." 소영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소제는 강호를 쟁패할 마음은 없소." 소영은 순간 자신이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고, 심목풍은 정 식으로 도전할 의사가 있음을 눈치챘다. 심목풍은 여전히 냉랭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설령 강호를 쟁패할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무림 의 패권을 잡는 데 있어서 당신은 거추장스런 존재요." 심목풍은 잠간 동안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내일 정오에 망화루로 와서 춘부장과 자당을 만나시오. 나는 당 신과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소." 소영은 공수를 하면서 말했다. "내일 정오에 약속대로 오겠소." "멀리 전송하지 못하오." "그러실 필요 없소." 소영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왔다. 금란과 은란도 일어 서서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주조릉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앉아라!" 두 비녀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주조룡을 힐끗 한 번 돌아 보 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년들이 정말..." 주조룡은 벌떡 일어나서 두 비녀에게 덤벼들려 했다. 이때 심목풍이 오른손을 휘들러 장력을 쳐내서 주조룡을 막았다. "가도록 내버려 두시오." 금란과 은란은 돌아서서 심목풍에게 큰절을 했다. "대장주님, 감사합니다." 심목풍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감사할 것 없다. 너희들은 소영을 따라 갔으니 이제 내 백화산 장의 사람이 아니다." 금란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쇤네들은 어디까지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금란은 은란을 이끌고 소영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 갔다. 소영은 곧 백화산장을 나와 버렸다. 금란과 은란도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묵묵히 길을 걸어 어느새 오, 육 리를 걸었다. 금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째 나리, 거기 가시려고 맘먹었을 때 이러리라고 짐작하셨어 요?" 소영은 휴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의 사람들이 심목풍을 맹수처럼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 그 사람은 과연 음험하고 매우 독랄하구나." 은란도 가볍게 탄식을 했다. "대장주는 애당초 셋째 나리가 고향으로 돌아 가시는 길에 살인 을 하도록 만들어서, 셋째 나리로 하여금 아무 데도 발붙일 곳이 없도록 만들려는 계획이었어요. 그래서 셋째 나리가 백화산장에만 몸을 바치도록 말예요. 그러나 뜻밖에도 셋째 나리는 인용(仁龍)을 겸비하셔서, 연달아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함부로 살인을 범하지 않 았어요. 그러므로 셋째 나리의 인협(人俠)의 기상을 대장주는 매우 미워하고 괴로워한 나머지, 셋째 나리의 부모님을 납치하여 인질로 삼으려한 것이에요." 두 비녀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셋째 나리,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갑니까?" 소영이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우리는 우선 숨을 만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도록 하자." 금란은 말했다. "쇤내가 아는 바로는 이 백화산장의 사방 백 리 이내는 가는 곳 마다 백화산장의 밀정이 잠복해 있어요." 소영은 그말을 듣자 눈을 번쩍였다. "놈들이 내눈에 띄기만 하면 당장 요절을 내버릴 테다." 은란이 말참견을 했다. "저희 생각으로는, 셋째 나리께서는 부모님을 만나 보시기 전에 는, 역시 백화산장의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메어 오고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금란이 품 속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서 소영에게 주며 상냥한 목 소리로 위로했다. "셋째 나리의 부모님깨서는 모두 착하신 분들이니까 하늘이 도우 실 거예요. 나리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셋째 나리께서는 오 히려 용기를 내고 정신을 차려서 선후책을 강구해서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부모님을 구출하셔야 되는 거예요." 소영은 비단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백화산장에는 고수가 구름떼같이 몰려 있고, 또한 복병이 겹겹 으로 둘러싸고 있으니, 내 비록 그들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부모 님을 구출하기란 무척 힘드는 일이다." 은란이 말을 받았다. "그 말씀이 옳아요. 저희들은 비록 생각은 간절하지만 무공이 얕 아서 나리를 도울 수가 없으며, 나리께서 혼자 구출하시기는 어려 워요. 그러니 협력자를 구하는 것이 좋겠어요." 소영은 이를 갈며 탄식했다. "내가 어리석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림인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었으니 어디 가서 협력자를 구하겠느냐?" 금란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 일은 역시 일시에 해결될 수는 없으니 우리는 쉴 곳을 찾아 서 천천히 쉬면서 의논하기로 해요." 소영은 문득 그 황폐한 절간이 생각났다. "가자, 쉴 만한 곳으로 안내하겠다." 세 사람은 곧장 상승경공을 전개하여 북쪽 교외를 향해 달려 갔 다. 소영은 익히 아는 길이라 경공을 써서 두 비녀를 끼고 불과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경과되자, 그 절간에 도착했다. 소영은 두 비녀를 데리고 곧장 대전의 뒷뜰로 들어 가서 동편에 있는 월랑(月廊)방으로 들어 갔다. 달포 전에 그는 중주이고와 약속을 했었다. 만일 강호에 큰 변고 가 생겨 연락이 어럽게 될 때는, 자기가 와서 남쪽 벽가에 있는 관 속에 중주이고가 넣어 둔 보고서를 보기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소영은 약속대로 왔지만, 독수약왕과 일생 병으로 고생하면서 근근히 숨만 붙어 있는 그의 딸을 만났을 뿐이었다. 지금 소영은 이곳에 오게 되자 불현듯 그 때의 일이 생각나서, 두 비녀를 데리고 그 방으로 들어 간 것이다. 은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셋째 나리님, 쇤네가 전에 여기 와서 셋째 나리를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한 일이 있어요." 소영이 천천히 대답했다. "알고 있다, 너는 금화부인을 만났고, 그녀는 대장주에게 그 사 실을 고해 바쳐 너를 애꾸눈이며 쇠다리를 한 늙은이에게 시집보내 게 하겠다고 협박했지." 은란이 의아한 듯 반문했다. "셋째 나리께서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 소영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때 나는 방에서 독수약왕에게 잡혀 피를 뽑히고 있었어." 은란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금화부인은 셋째 나리를 참 좋게 생각하고 있던데요?" 금란이 이 말을 듣자 미간을 찌푸렸다. "만일 금화부인이 백화산장에 있다면 셋째 나리가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반드시 나타나서 만났을 텐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 니 아마 백화산장에서 떠났나 봐." 은란이 입을 열었다. "금화부인이 아직 백화산장에 있다면, 셋째 나리를 도와 줄 수 있을 텐데....." 그들이 서로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문 앞에 이르렀다. 칠이 벗 겨진 방문은 꽉 닫혀 있었다. 소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독수약왕을 만났던 일이 생각나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곳은 인적이 드물 뿐만 아니라 방안에는 관이 있고, 또 이 낡은 절에는 지키는 중도 없는데 이 문은 왜 잠겼을까?' 금란은 소영이 망설이고 서 있는 것을 보자, 참다 못해 낮은 소 리로 외쳤다. "셋째 나리, 왜 들어 가지 않으세요?" "너희들은 여기서 잘 경비해라." 소영은 오른손에 약간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풀썩 일며 문이 활짝 열렸다. 소영은 안을 둘러 보았다. 관이 여기저기 몇 개 흩어져 있었으며 그 광경은 전날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다. 소영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 갔다. 곧 남쪽 벽가에 있는 관으로 가서 손에 힘을 주어 관 뚜껑을 밀어 젖혔다. 갑자기 관 속에서 맑은 새소리가 들려 왔다. 안을 들여다 보니 그 속에는 정밀하게 만들어진 새장이 하나 들어 있었고 새장 안에 는 비취 빛깔의 앵무새 한 마리가 쉴새없이 날뛰고 있었다. 금란은 새장을 꺼내어 손에 들고는 사랑스러운 듯 한참 동안 살 펴 보고 있다가 다시 관 속으로 넣었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새는 너무도 아름답다!" 소영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중주이고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독수약 왕과 병에 걸린 그의 딸을 만났다. 그런데 두 번째인 지금 은 앵무새를 만났구나. 이 새는 새장만 보더라도 그 주인이 얼마나 이 새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주인이 이 새를 관 속에 넣어 둔 이유는 이곳은 황폐한 절이라서 인적이 드물고 비 밀 장소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안심하고 넣어 두었겠지....' 소영은 생각이 이에 미치자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은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셋째 나리께선 뭣이 그리 우스운지요?" 소영이 대답했다. "이 새를 여기다 둔 사람은 필경 이곳이야말로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않는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하여 두었겠지만, 바로 우리들에게 발견되고 말았잖느냐? 그게 우습단 말이다." 금란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쇤네가 새를 감정하는 재주는 없지만, 이놈은 전신이 우아한 비 취 빛깔인 것만 보아도 훌륭한 새인 것 같아요. 정말 나는 이 새를 가지고 싶어요." 은란이 말참견을 했다. "이 앵무새를 관 속에 넣어 둔 지 쾌 오래된 듯 하군요." 소영은 그 말에 의아심을 느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보세요. 저 새장 속에는 모이가 다 없어지고 물도 말랐어요. 적 어도 이틀 이상의 시간이 경과했을 거예요." 소영이 그 말을 듣고 새장 안을 들여다 보니 은란의 말대로 모이 와 물이 전혀 없었다. 소영은 그만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군. 이 앵무새의 주인은 정말 멍청한 사람이군." 금란이 입을 열었다. "쇤네의 소견으로는 이 새장의 주인은 아마도 해를 입은 것 같아 요." 소영은 어리둥절해서 잠자코만 있었다. 은란이 말을 받았다. "금란 언니의 말이 옳아요. 이 백화산장으로부터 수십 리 이내의 지역에는 가끔 살인이 있어요." 금란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뭣 때문에 이 사랑스러운 새를 이곳에다 버려 두고 갔을까요?" "자아! 우선 관이 있는 이 방에서 하룻밤 휴식을 취한 후 내일 떠나기로 하자, 그 때까지 만일 앵무새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새장을 열고 앵무새를 놓아 주자." 소영은 말을 마치자 천천히 금란과 은란의 얼굴을 훑어 봤다. "어떠냐? 무섭지 않으냐?" 금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섭지 않아요." "좋아. 우린 오늘 밤 여기에 앉아서 새자꾸나." 소영은 말을 하면서도 중주이고가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슴에 품었다. 황폐한 절간에 밤이 점점 깊어지자, 무서움이 더해 갔다. 이따금 새장 속의 앵무새가 처량하게 울어 밤의 적막을 깨뜨렸다. 은란이 느닷없이 말했다. "저놈은 틀림없이 배가 고플 거예요. 빨리 놓아 줍시다." 소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만약 앵무새의 주인이 밤중에 돌아 와서 자기의 아끼는 새가 어 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어라 대답하겠느냐?" 은란이 말을 받았다. "아니에요. 정말 그 사람이 이 새를 사랑한다면 새의 먹이가 이 미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은란은 조용히 관 뚜껑을 열고 새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상 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셋째 나리, 이놈을 놓아 줄까요?" "마음대로 해라." 은란은 새장의 문을 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빨리 날아 가거라!" 비취빛 새는 새장 밖으로 나와서는 곧 날아가지 않고, 은란의 머 리 위를 한 바퀴 빙 돈 다음, 날개를 치며 창문을 향해 날아 갔다. 금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새는 좀 신비한 데가 있다." 은란은 새장을 천천히 관 속에 도로 넣어 두고, 관뚜껑을 원래대 로 덮어 놓았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새의 주인이 지금 돌아오더라도, 우리들이 모두 모른다고 해 버리면 그만일 거예요." 소영은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했다. 소영이 운기하며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눈을 떠 보니, 두 비녀는 여전히 관 위에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왜 여태껏 운기조식을 하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느냐? 내일은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할 텐데." 금란이 대답했다. "쇤네는 앞으로 셋째 나리에게 다가 올 일에 관해서 생각해 봤어 요.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통한 계책이 없군요." 소영이 타일렀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은란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셋째 나리님은 대장주를 굴복시킬 자신이 있으세요?" 소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위인 이 음흉하고 무공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그를 무서워 하지는 않는다." 이때 은란이 말참견을 했다. "셋째 나리, 쇤네가 몇 마디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드리더라도 노여워하지 마세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라." 은란이 말했다. "셋째 나리가 아무리 무공이 높고 용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 의 몸으로는 도저히 백화산장의 무수한 고수들을 상대할 수 없을 테니 내일은 참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참지 못하여 당장에 손을 쓰 시더라도 싸움을 고집하지 마시고 또 금란과 저의 안전 따위도 돌 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포위를 뚫고 나가시기만을 바랄 따 름입니다." 소영은 눈을 깜짝거리며 은란의 말을 받았다. "자식이 되어 가지고 부모의 슬하에서 효도를 다하지 못하는 것 도 이미 인생의 큰 죄를 지은 셈인데, 더욱이 나로 말미암아 부모 님이 고생을 하고 계시거늘 내 어찌 만 번 죽은들 내 목숨을 아까 와 하겠느냐!" 은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셋째 나리, 심목풍이 나리의 부모님을 잡아 온 목적은 셋째 나 리를 굴복시키기 위함이니, 셋째 나리께서 계속 무사하기만 하면 심목풍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겁니다." 그녀는 은근히 소영에게 내일의 약속에 가지 말라고 내비쳤다. 소영도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 일은 너희들이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내게 한 가 지 생각이 있다. 너희들은 내일 정오의 약속에 나와 함께 갈 것 없 이 이 기회에 도망쳐 버리는 게 좋겠다." 은란은 그 말에 쓸쓸히 웃었다. "저희들이야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다만 셋째 나리께서. ....." 소영은 손을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일에 관해서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너희들도 쉬어야 하니 까." 은란은 그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감고 운기조식하기 시 작했다. 36. 분노의 상봉(相逢) 하룻밤은 어느 새 지나가고 날이 훤하게 밝았다. 소영은 크게 한 번 숨을 들이 마시면서 고개를 들었다. 금란과 은란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서 조식을 하며 공력을 운행하고 있었다. 소영은 은근히 그녀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측은하기 도 했다. 바깥에서 권막이라도 연습할겸 소영은 살며시 일어섰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소영은 깜짝 놀랐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소영은 이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충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순간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한 사나이가 눈만 퀭하게 뜨고 문 앞을 막아 섰다. 그 사람은 얼굴과 온몸이 피투성이였기 때문에 도무지 누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고, 오직 부릅뜬 두 눈만 제 모습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실룩거렸으나, 픽 쓰러 져 버렸다. 금란과 은란은 그 소리에 깨어났다. 재빨리 그에게로 달려가 그 피투성이가 된 사나이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소영이 급히 외쳤다. "건드리지 말아라." 두 비녀는 깜짝 놀라서 손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소영은 천천 히 그에게로 다가 갔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서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이 사람은 중상을 입었군. 전신에 여섯 군데나 칼을 맞았어. 내 부의 상처가 어느 정도 심한지는 아직 알 수 없군." 금란이 다급히 물었다. "이 사람은 전신에 칼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니, 우선 몸 에 묻은 피를 씻어 줘야만 치료를 할 수 있겠어요." 소영이 대답했다. "그렇군. 우선 물을 좀 떠 와라." 소영은 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의 가슴을 짚어 보았다. 아직 도 심장이 약하게 뛰고 있었다. 소영은 암암리에 내력을 운기했다. 뜨거운 흐름이 부상자의 현기 대혈(大穴)을 뚫고 흘러 들어 갔다. 소영은 내공이 매우 심후하므 로 부상자의 체내로 유입시킨 진기가 당장 그의 심장을 격렬하게 움직여 잠시 후에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은 이미 빛을 잃었다. 그는 힘없는 눈길로 소영을 멀건 히 바라 보면서 꺼져 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소영이 대답했다. "나는 소영이오. 형씨가 만약 내상만 입지 않았다면, 표면의 상 처는 그다지 심하지 않소." 부상자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아 버렸다. "나를 건드리지 마시오. 관 속에 앵무새가 있소."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그놈을 날려 보내고, 나를 그 관속에 넣어 주시오. 열 두 시진 을 지탱하면 곧...." 그는 너무 지쳐서 말끝을 채 맺기도 전에 기절하였다. 이때 금란과 은란이 물 한 통을 들고 돌아 왔다. 은란은 품속에 서 명주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적셔 부상자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주었다. 피를 닦아 내자 상처가 똑똑히 보였다. 매우 깊은 칼자국이 왼쪽 눈썹 끝에서부터 머리카락 밑까지 깊이 나 있었다. 아직도 선혈이 멎지 않고 흘러 내렸다. 은란이 소영을 보며 말했다. "셋째 나리, 이분의 상처가 너무 중해요. 구하기가 어려울 것. ......" 이때 부상자가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같은 말을 번복했다. "날 건드리지 마시오...." 그는 다시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상처에서는 또 선혈이 흘러 나 왔다. 은란은 손을 멈추고 소영을 건너다 보았다. "셋째 나리, 우리에게 약이 없으니 어떻게 하죠? 살리기 힘들 것 같아요." "그는 우리들에게 그 관 속의 앵무새를 날려 보내고 자기를 대신 그 관에 넣어 달라고 했다. 열 두 시진만 지나면 다시 살아 난다고 말했다." 소영이 다시 한번 부상자의 얼굴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의 분부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앵무새는 모이와 물이 다 떨어져서 굻어 죽을 지경이었으므로, 우리들이 이 미 날려 보냈건만...." 부상자는 눈을 번쩍 뜨더니 다급하게 물었다. "놓아준 지 얼마나 됐소?" 소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약 두 시진쯤 되었을 거요." 부상자는 그제야 눈을 스르르 감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영은 그를 관 속에 눕힌 후 말했다. "형씨는 열 두 시진 내에 누가 달려 와서 구해 줄 거라고 믿는군 요?" "내 앵무새가 도중에 사고만 생기지 않는다면...." 소영은 관을 어루만지며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내일까지 다행히 이 세상에 살아 있다면, 당신을 살펴 보겠지만, 불행하게도 죽어 버린다면 다시 올 수 없을 것이오." 부상자는 그 말을 듣자 꼭 감았던 눈을 다시 번쩍 떴다. "왜요?" "나는 승패를 판가름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소. 이번에 가면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될지 의문스럽소...." 부상자는 흐려져 가는 두 눈으로 소영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말했 다. "당신은 꼭 돌아와야 하오. 이 노부가 만약 살아난다면 땅끝까지 라도 당신을 찾으러 가겠소. 만일 노부가 여기서 목숨을 잃는다면 그 얼마나...."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소영이 재빨리 대답했다. "내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꼭 오겠소. 뚜껑을 덮어 드릴까요?" 부상자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관 뚜껑을 덮고 조금 틈을 내 놓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와 방문을 닫아 버렸다. 이때 금란이 가까이 오면서 낮은 소리로 물었다. "셋째 나리, 그 사람은 나리께 무슨 말을 했지요?" 소영은 간단히 대꾸했다. "응, 아마도 사후의 일을 처리해 달라는 거겠지." 소영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정오가 되기까지는 몇 시진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 기 회에 권각 연습을 하자. 우선 너희들에게 적을 대하는 수법 몇 가 지를 가르쳐 주겠다." 소영은 두 비녀를 데리고 절간을 나와 자신은 두 비녀에게 두어 초씩 무공을 가르쳐 주고 자신도 권각연습을 했다. 이윽고 그들은 다시 백화산장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작 은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으며, 백화산장에는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기로 하였다. 주조룡은 벌써 산장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소영을 보자 성큼성큼 마주 걸어 왔다. "이 형은 삼제가 오늘 오시의 약속을 잊어 버렸는가 했소.." "우리는 이미 형제의 의리가 끊어졌으니 이장주께선 그렇게 부를 것 없소." "사해가 다 형제요. 천하를 이웃에 비긴다면 우리들의 의리가 비 록 끊어졌다 하더라도, 굳이 형제로 불러서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소?" "그렇다면 주형이 길을 안내해 주시오." 주조룡은 두 비녀를 힐끗 바라 보았다. "이들도 나와 함께 들어 갈 것이오." 주조룡은 그 말을 듣자, 냉랭한 표정이 되며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흥, 이 두 계집애의 지위를 소제가 크게 높여 놓았군." 금란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우리 자매는 이미 백화산장과는 인연을 끊었으니, 이장주는 말 을 좀 삼가시오." 주조룡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금란에게 일장을 날리려 하였다. 소영은 오른손을 재빨리 뻗쳐 주조룡의 오른팔을 꽉 잡았다. "주형, 벌써부터 손을 쓰려고 하오?" 주조룡은 팔의 뼈가 은근히 아파왔다. 뿐만 아니라 전신의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악한은 눈 앞의 손해를 보지 않는 법이다. 주조룡은 곧 헛기침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저 이 계집애를 교훈하려는 것 뿐이오. 소형과 손을 쓸 생각은 추호도 없소." 소영은 눈에 살기를 띠었다. "만일 내 부모님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있다면 나는 백화산장을 피로 물들이고 말겠소. 그때 이장주가 맨 먼저 목을 바치고 피를 흘려야 할 거요." 소영은 천천히 주조룡의 오른팔을 놓아 주었다. 주조룡은 하하하! 하고 한바탕 크게 웃어젖혔다. "그러고 보니 소형은 나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는 것 같구려." "그렇소." 주조룡은 소영의 이처럼 격노한 모습을 보자 겁이 나서, 앞장 서 서 걸어 갔다. 은란이 걸음을 빨리하여 소영의 곁에 다가서며 나직이 말했다. "세째 나리, 좀 진정하세요. 마음이 어지러워져서는 안 됩니다."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부모님은 연로하신데 어떻게 모진 고통을 견며 내실까?" 소영은 두 눈자위가 붉어졌다. 소영이 망화루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성대한 연회가 벌어져 있었 다. 심목풍은 상좌에 앉아서 깡마른 흑의의 노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을 보자 소영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그 낡은 절간에서 만났던 독수약왕이었다. 심목풍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약간 굽혔다. "세 분은 앉으시지요." 그 말투는 금란과 은란에게도 손님 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소영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가서 거만하게 버티고 앉았다. 금 란과 은란도 소영의 바로 곁에 앉았다. 심목풍은 담담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두 낭자! 좋은 구슬은 버림을 받지 않는다고 소영의 우대를 받 으니 축하하오." 은란이 몸을 굽히며 말을 받았다. "대장주의 말씀은 너무도 과분하십니다. 저희들은 그저 셋째 나 리의 인품을 존경하고 그분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할 뿐입니다." 심목풍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들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단 말이로군." 은란은 가슴이 뛰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쇤네는 그런 뜻에서 말한 게 아닙니다." 심목풍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몇 마디 농담을 한 것 뿐이오." 그는 갑자기 정색을 했다. "우리 백화산장의 계율은 매우 엄격하오. 배반자에 대해서는 결 코 가볍게 용서하지 않소. 오늘 난 반역자 몇을 징계하려 하오." 심목풍은 손벽을 두 번 쳤다. 그러자 긴 장대가 망화루 꼭대기에 서 천천히 뻗쳐 나왔다. 그 장대 끝에는 짧은 바지만을 입은 채 한 사람이 묶여져 있었 다. 심목풍은 그를 바라 보고는 히죽이 웃었다. "저 사람은 은근히 딴 마음이 생겨 나를 배반했소. 화살에 맞아 죽는 고통을 맛보이겠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긴 화살 한 개가 휙! 하고 허공 을 가르며 망화루의 한 창구에서 날아 와 그 사람의 허벅다리에 박 혔다. 순간 그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핏방울이 뚝뚝 공중에서 떨 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핏방울은 연회석에서 사, 오 척 정도 떨어 진 땅바닥 위에 떨어져 땅을 붉게 물들었다. "이 사람은 비록 딴 생각을 품었지만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죄를 가볍게 줍시다." 그러자 망화루의 여러 창구에서 수많은 화살이 일제히 날아 와서 발가벗은 그 사람의 몸뚱이에 사정없이 박혔다. 심목풍은 소영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그는 매우 통쾌하게 죽었소." 심목풍은 고래를 쳐들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또다시 누각의 동서 양쪽에서 두 개의 장대가 다시 뻗쳐 나왔다. 소영은 그것을 보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혼비백산할 지경 이었다. 그 남녀는 소영의 부모였던 것이다. 심목풍이 소영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똑똑히 보셨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소름이 끼쳤다. 등줄기에서는 연방 식은 땀 이 흘러 내렸다. "보았소. 빨리 내려 놓으시오." 심목풍은 역시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이미 형제간의 의리를 끊었는데, 그 말은 너무도 일방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요구가 뭐요? 빨리 말해 보시오." "저 안락의자에 맨 끈은 보기에는 저렇게 가늘어 보이지만 매우 튼튼하오. 혹시 저 노끈이 끊어질까 봐 염려하시는 거요?" 소영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부모님은 연세가 매우 높으셔서, 저렇게 높이 매달기만 해 도 여간 놀라지 않으실 것이오." 심목풍은 천천히 말을 받았다. "지금이라도 나와 형제의 꼭를 끊지 않는다면, 나는 이 노인장들 에게 귀빈대접을 하겠소." "옛일은 이미 지나갔으니 돌이키지 못할 것이오. 우리는 앞으로 의 일을 의논합시다." 심목풍이 그 말을 듣자 빙긋이 웃었다. "좋소. 어떻게 해서 춘부장과 자당을 구원할 생각이요?"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대장주께서도 이 이상 더 나를 부드 럽게 대하지 못할 것이오. 당신이 먼저 이 소영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지 말해 보시오." 심목풍은 또 한번 담담하게 웃었다. "좋소. 그렇다면 분명히 얘기하리다, 당신이 어떤 수단을 써서라 도 현재 소림파 장문인의 머리를 가져 노시오. 그렇게 하면 소형의 춘부장은 당장 자유롭게 될 수 있소." 소영은 깜짝 놀랐다. "소림파 장문인의 머리를?......" "그렇소. 소형의 무공이면 그 소림파 장문인의 머리를 가져 오기 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요." 이때 은란이 느닷없이 말참견을 했다. "대장주님은 소 나리께서 소림파 장문인의 머리를 가져오더라도, 소 할아버지만 자유롭게 하고 그 부인은 석방하지 않는단 말예요?" 심목풍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 눈치가 대단히 빠르시군." 소영은 더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만약 승낙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춘부장과 자당을 영원히 백화산장에 모시겠소." 소영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장주께서는 무공이 높다는 말을 들었소. 오늘 교훈을 받기에 는 안성 마춤이오." 심목풍이 하하 하고 웃어 젖혔다. "나는 당신이 결코 그와 같은 용기를 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는 데....." 심목풍은 정색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설혹 나와 겨루고 싶은 맘이 있어도 그것은 훗날의 일일 것이오. 나는 지금 춘부장과 자당의 생사문제를 쥐고 있소. 내가 손을 한 번 흔들기만 하면 저분들은 당장...." 소영은 다시 높이 공중에 매달린 부모를 쳐다 보았다. 호탕한 기 세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소영은 어두운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 보시오. 또 무슨 조건이 있소?" 심목풍이 대답했다. "소림과 장문인의 머리로 춘부장의 목숨을 바꾸는 것은, 목숨 하 나에 목숨 하나를 교환하는 것에 불과하니 가혹할 것도 없는 셈이 오. 자당을 구하고 싶거든 무위도장의 머리도 갖고 오시오!" "나더러 그 무위도장을 죽여서, 무당 문하들의 뼈에 사무치는 미 움을 한 몸에 받으란 말이오?" 소영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심목풍이 점점 차가운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이제 우린 한 마디로 결정합시다. 당신이 무위도장의 머리를 가 지고 오면 나는 자당을 석방할 것이며, 소림장문인의 머리를 가져 오면 춘부장을 석방할 것이오. 이 이상 더 좋은 방법은 없소." 소영은 치를 떨며 말했다. "이것 말고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심목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할 계책은 없소. 그리고 기한은 석 달이며 물론 삼 개월 이 내에는 춘부장과 자당을 잘 대접하겠소." 소영은 더 이상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천 천히 일어서서 터지려는 가슴을 억누르고 억지로 공수를 했다. "삼 개월의 기한이 차면 내가 꼭 백화산장으로 다시 오겠소." 심목풍이 마지 막으로 다짐을 했다. "춘부장과 자당은 연만하시고 몸이 쇠약해서 형벌을 받는 고통을 참지 못할 것이오. 잘 알아서 하시오. 소형이 다시 백화산장에 오 는 날에는 소림장문인과 무위도장의 머리를 꼭 가지고 오기 바라 오." 소영은 한바탕 전신을 부르르 떨며 돌아서서 비틀거리며 걸어 갔 다. 금란과 은란도 일제히 돌아서서 심목풍에게 작별을 고했다. 심목풍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두 낭자는 소영을 많이 위로하고 돌봐 주시오. 혹시 화가 나서 몸에 병이라도 나면 자신이 괴로운 것은 물론이지만, 두 분 노인장 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가 될 거요." 금란과 은란이 소영을 따라 백화산장을 나왔다. 소영은 미친 사람처럼 마구 발길 닿는 대로 걸어 갔다. 강변에 이르러서야 그는 비로서 걸음을 멈추었다. 소영은 강가에 서서 넘실거리는 강물을 바라 보며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이때 금란이 은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셋째 나리의 신경은 벌써 혼미해진 것같애. 우리는 무슨 방법을 써서 라도 셋째 나리의 심신을 깨우쳐 드려야겠어." 그때 소영이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돌아 보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은란이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나리께서는 큰 지혜와 대 결단력으로써 난관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삼 개월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니 그동안에 부모 님을 구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소영은 다시 가볍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이미 심목풍과 주조룡에게 옷을 찢어 의리를 끊었다. 지금 부터는 나를 셋째 나리라고 부르지 마라." 금란이 대답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입에 익었어요. 셋째 나리라고 부르지 않는 다면 정말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소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소영이라고 불러 주시오. 우리는 피차 똑같은 사람이오. 높고 낮은 분별이 어디 있겠소?" 소영은 천천히 강가에 앉았다. 그러자 은린이 소영의 앞에 무릎 을 꿇고 앉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상공의 큰 은혜를 입고 조석으로 보답할 길을 생각하고 있 었으나 그럴 만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자의 부모님 께서는 나쁜 사람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계십니다. 제가 다시 백화 산장으로 돌아가서 심목풍에게 말씀드려 공자의 부모님을 돌보게 해달라고 청을 드려 볼까 합니다." "뭐요? 낭자가 백화산장으로 돌아가겠다고?" 소영이 침착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심목풍이 들어 주지도 않을 거요." "심목풍에게 저의 무공을 폐지해 달라고 하고, 셋째 나리의 명령 을 받들어 왔다고 하면 받아 줄지도 몰라요."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오!" 이때 갑자기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와 소영은 말끝을 흐려 버렸 다. 소영은 웃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불과 일 장 밖의 거리에 독수약왕이 서 있었다. 소영은 그 사람을 보자 갑자기 분노가 끓어 올라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당신은 무엇하러 여기에 왔소? 내 손에 한 번 죽어 보겠소." 독수약왕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과 흥정하러 왔소." "무슨 거래요?" "당신은 지금 갇혀 있는 부모님을 구출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지 요?" "내 부모님을 구할 수만 있다면 이 소영은 죽어도 한이 없소." 독수약왕은 씽긋이 웃었다. "지금 세상에서는 이 노부만이 당신의 부모님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오?" "그렇다면 좋소. 얼른 말해 보시오. 어떠한 조건이라도 받아 들 이지만 잔꾀를 부리다간....." "하하하. 이 노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내 피를 뽑아서 당신 딸의 목숨을 구하란 말이오?" "바로 맞았소. 그러나 이번에는 노부가 주는 보약을 먹어서 몸을 도우고, 그 피로 노부의 딸을 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춘부장과 자 당도 구할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거삼득이 아니겠소?" 이때 은란이 불쑥 말참견을 했다. "따님이 피를 얻어야만 살 수 있다면, 쇤네가 피를 다 뽑아 드리 겠어요." 금란도 덩달아서 말했다. "쇤네도 내 몸의 피를 드리고 싶어요." 독수약왕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이 노부는 당신네들이 아니라도 얼마든 지 피를 구할 수가 있소." "그렇다면 꼭 소공자의 피라야만 된다는 말씀인가요?" "노부는 십여 년 동안 많은 사람을 살펴 왔지만, 내 딸에게 사용 할 만한 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꼭 두 사람뿐이었소. 한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죽었다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소?" "당신에게는 말해도 무방하겠지요. 바로 악운고(岳雲姑)였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악운고는 매우 고명한 분이었소. 나는 그 사람을 가장 존경했 소." 독수약왕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노부는 오래 머물 수가 없소. 당신은 가부간 빨리 결정을 하시 오." 소영은 굳게 결심이라도 한 듯 힘차게 대답했다. "승낙하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부모님의 얼굴을 먼저 봐야만 하 겠소." 독수약왕도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오. 오늘밤 삼경 무렵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절간에 서 만납시다." "좋소. 그럼 약속을 합시다." 독수약왕이 몸을 한 번 번뜩이며 눈깜빡할 사이에 모습을 감추었 다. 은란이 소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는 정말 그에게 피를 뽑아 줄 작정이세요?" "양친께서는 나로 인하여 모진 고초를 겪고 있는데 내가 무엇인 들 아깝겠소?" "제가 보기에는 그 독수약왕은 절대로 좋은 사람이 못 되는 것 같아요." "알고 있소. 그러나 그는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서 하는 짓인 데 설마 속이기야 하겠소?" "그 독수약왕이 공자의 피를 뽑아 자기 딸의 목숨을 구한 후에, 다시 할아버지와 그 부인을 백화산장으로 도로 잡아가 버린다면, 공자께서는 속으시는 것이 아니에요?" 소영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그 때는 내가 죽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무공을 다 잃게 될 것이 오. 심목풍이 나의 부모님을 잡아 간 이유도 결국은 나를 해치기 위한 것이므로 내가 만일 무공을 다 잃어버린다면, 그도 다시는 나 의 양친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이오." 은란이 그 말을 듣자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께 숨이 붙어 있는 한, 심목풍은 공자를 그냥 두지 않을 거 예요. 공자께서 만일 정말 무공을 잃어 버리게 된다면, 그때 받으 실 박해와 굴욕은 지금보다 몇 배 더할 거예요." 소영도 은란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은란이 주저하는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독수약왕과 비밀 장소에서 만난 후, 때가 되면 일제히 손을 써서 공자의 부모님을 구출해 내면 어떨까요?" 소영은 속임수를 쓴다는 것이 마음에 거슬렸으나 곧 대답하였다. "좋소. 독수약왕에게 속임수를 쓰도록 합시다. 그런데 독수약왕 도 반드시 무슨 대비책을 세울 것이오." 금란이 가볍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답니다. 그 때는 또 무슨 수가 있을 거 예요."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해질 무렵에 그 낡은 절간에서 만나자 했 고, 또 독수약왕도 거기서 삼경에 만나자고 약속했으니, 아마도 그 황폐한 절간이야말로 나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모양이오." 은란은 이때 사방을 둘러 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백화산장의 주위에는 어디든지 복병이 있어요. 우리들 이 먼저 딴 길로 한 바퀴 빙 돌아서 그 비밀 보초들의 눈을 교란시 킨 다음에 그 낡은 절간으로 살짝 들어가도록 합시다." "그게 좋겠소. 당신의 의견대로 합시다." 그들은 곧 방향을 바꿔 남쪽으로 달렸다. 얼마를 가다가 그들은 넓은 보리밭 사이로 한 채의 초가집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소영이 성큼성큼 초가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가 좋겠군, 우리는 여기서 해질 때까지 정신을 가다듬어 휴 식을 취하다가 그 절간으로 갑시다." 이때 갑자기 은란이 등에 꽂았던 장검을 쓱 뽑아 들었다. 그녀는 쌓여 있는 보리짚을 내려다 보며 높은 소리로 외쳤다. "빨리 나와! 안 나오면 불을 놓을 테다." "언니, 이리 와요. 우리 여기다 불을 지릅시다." "횃불을 이리 줘. 우리 양쪽에서 태우도록 하자." 그러자 갑자기 보리짚이 갈라지더니 봉두난발(逢頭亂髮)을 하고 웃도리를 벗은 작은 거지가 한 사람 뛰어 나왔다. "좋아! 두 낭자께서 기어이 이 작은 거지를 보리짚 속에서 나오 도록 만들었군." 은란이 작은 거지를 자세히 훑어 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거지요. 이 세상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거지에 불과한데 뭘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시오?" "당신은 몸이 아주 건장한 것을 보니 무림 인물이 분명하오." "그렇다면 또 어쩔 테요?" 금란이 불쑥 말참견을 했다. "풍문에 의하면 강호에는 개방이 있다는데, 그들은 모두 거지차 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무공은 매우 높다고 했소. 당신은 혹시 개방의 사람이 아니오?" 작은 거지가 도리어 반문했다. "당신들은 백화산장의 사람들이오?" "그래요.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은란의 대답에 작은 거지는 어리둥절하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이오? 똑똑히 말해 보시오." "우리들은 지금 백화산장을 떠났어요." 금란이 말참견을 했다. "당신이 물어 본 것에 우리들은 대답을 했소. 이제 우리들이 묻 는 말에 분명히 대답을 해 주시오." "그렇소, 당신네들이 설사 백화산장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소. 내가 바로 당신네들이 들었다는 개방 사 람이오." 소영은 일찍이 개방에 관한 이마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방은 백여 년에 걸쳐 무림의 제일 큰 방으로 이어 왔다. 그리 고 문인(門人)이 가장 많아 양자강 남북에 넓게 퍼져 있으므로 많 은 고수들을 배출하였고, 그 전성기에는 무림의 권위라고 자랑하던 소림파도 따르지 못했다. 그런데 이 개방에 지금부터 삼십여 년 전에 중대한 변고가 발생 했다. 방의 장로들이 장주의 지위를 다투어 상잔하는 비극을 연출했고, 한편 외부의 침입을 받아 개방의 장로 십팔 명이 다 죽어 방의 절 기 수종도 실전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그 명망은 크게 떨어졌지만, 그래도 이 방을 옹호하는 사람이 역시 무림에서 제일 큰 방이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은란은 개방의 사람을 만난 것이 어쩐지 반가왔다. "개 방의 사람들은 모두가 충의협사란 말을 오래 전부터 들었는 데, 오늘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갑군요." 작은 거지는 비록 의복이 남루하고 땟국이 질질 흐르고 있었지 만, 그 준수하게 생긴 모습은 감출 수 없었다. "낭자는 과찬을 하시는군요." 원래 그녀는 만일 개방 사람들이 도와 준다면, 소영의 부모를 구 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 었다. 이 일은 너무도 중대한 일이므로, 만일 말을 꺼냈다가 개방 사람들이 승낙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비밀만 누설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작은 거지는 시선을 천천히 소영에게로 옮겼다. 소영은 포권을 하고 인사를 했다. "나도 일찌기 개방의 명성을 들었소. 그런데 형씨의 성함은 어떻 게 되오?" "소제는 팽운(彭雲)이오, 귀하의 성함은?" "난 소영이오." 팽운은 갑자기 눈이 휘둥그래졌다. "백화산장의 삼장주님, 이 작은 거지는 오래 전부터 대명을 듣고 있었소." "아아, 나는 지금 백화산장의 사람이 아니오." "이 작은 거지는 하남, 호북, 호남, 강서의 총타주 입에서 소형 의 대명을 들었소." "마문비(馬文飛)가 여기 있소?" "그는 우리 방의 장로 몇 분과 함께 떠나갔소." "나는 어떤 일로 마총타주를 만나고 싶은데, 팽형께서는 그분의 거처를 아시면 좀 말씀해 주시오." "현재 그분들이 어디 계시는지 나도 알 수 없소. 그러나 찾아 봐 드릴 수는 있소. 하지만 마총타주께서 당신을 만나겠다고 승낙하실 는지 의문이군요." "팽형은 마총타주에게 한 말씀만 전해 주시면 되오. 만나고 안 만나는 것은 그가 결정할 문제요." 팽운이 선선히 대답했다. "좋소.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작은 거지는 회답을 가지고 오겠소." 소영은 문득 그 부상자와 낡은 절간에서의 약속이 생각나 급히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밤 볼 일이 있으니, 내일 정오에 여기서 만나는 것이 어떻소?" 팽운은 잠깐 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듯 망설였다, 이윽고 그는 입 을 열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팽운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이곳을 잠시 세 분에게 양보하오." 그는 나는 듯이 초가집을 빠져 나갔다. 소영은 작은 거지가 사라지자 은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이 방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소?" 은란은 방긋 한 번 웃고 나서 문 앞을 가리켰다. "그 거지가 너무 먹기를 좋아한 탓이에요." 소영은 그녀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작은 닭 뼈들이 버려져 있었다. 소영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낭자는 매우 세심하군요." "공자께서는 과찬하시는군요." 금란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개방 사람이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걸 보면 반드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군요." 은란이 다시 말을 받았다. "대장주가 다시 강호에 나왔다는 소문은 이미 강호에 널리 퍼졌 어요. 그는 옛날에 맺은 원수가 많은 데다, 지금 또 혼자서 무슨 일을 도모하고 있으니 천하무림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무리가 아 니오. 지금 상황을 살펴 본다면, 머지 않아 가공할 만한 살인극이 한바탕 벌어질 거예요." 금란이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이 기회에 천하의 영웅들과 손을 잡아야 해." 은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공자의 부모님을 구출하기 전에는 백화산장의 사 람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면 안 돼요. 심목풍을 격노케 하면, 노인장 두 분의 신상에 해가 미칠 거예요." 소영은 가볍게 탄식했다. "오늘 밤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오. 이 시간을 이용하여 운기 조식을 합시다." 은란이 대답했다. "공자께서는 안심하고 좌식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경계를 하겠어 요." 소영은 내공이 크게 진보하는 기간이었으므로, 매일 운기조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좌식에 들어 가기만 하면 극히 빠르게 무아의 경지로 들어 갔다. 은란은 금란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주위가 활짝 트여서 지키기에 매우 편리해요. 언니도 조식을 하 세요. 나 혼자 충분하겠어요." 금란이 대답했다. "그래 그게 좋겠군. 한 시진 후에는 내가 네 대신 경계를 설 테 니까." 금란도 방의 한 구석으로 가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운기조식을 했다. 이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는 은란만이 깨어 있었다, 별안간 삐걱 삐걱하는 마차바퀴 굴러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 와졌다. 은란은 깜짝 놀랐다. 이 황량한 들판에 갑자기 마차가 달려 온다 는 것은 물론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은란은 돌아서서 금란을 깨우려고 했다. 이때 마차의 휘장을 들치고 백색 경장을 한 여인이 뛰어 내렸다. 그녀의 가슴에는 아름다운 금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 아름다운 부인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삼장주님이 여기 계신가?" 금화부인이었다. 은란은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일부러 목청 을 돋우어 소리 질렀다. "부인,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러나 소영은 이미 금화부인이 바람을 일으키면서 방 안으로 들 어섰을 때, 깨어나서 암암리에 경계를 하고 있었다. 금란도 은란이 지른 고함소리에 깨어나서 벌떡 일어났다. 금화부인은 섬섬옥수를 들어 이마에 흘러 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 기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멀리 가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소영이 물었다. "뭣 때문이오?" "만일 동생이 멀리 가버렸다면 내가 어떻게 이처럼 빨리 동생을 찾을 수 있겠어요?" 소영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는 나를 찾아서 무슨 분부를 하시려는 거요?" "이 두 계집애들은 믿을 수 있어요?" "그분들은 나와 함께 백화산장을 배반했소." 그러자 금화부인이 깔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소제는 모르는 소리요. 그 위인을 알고 얼굴을 알아도 마음은 알 수 없다고 했소. 그 애들이 동생을 감시하라고 심목풍이 보낸 첩자가 아니라는 것을 동생은 어떻게 보중하겠소?" 소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나는 결코 잘못 보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오." "좋아요.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동생이 취할 행동에 대해서 의논 하는 게 어때요?" 소영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금화부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동생은 심목풍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가 무섭지 않소." 금화부인이 다시 깔깔 웃었다. "큰소리 치지 말아요. 소림사는 중원 무림에서도 권문(權門)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바 삼엄한 곳이오. 그런데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소림의 장문방장을 죽일 수가 있단 말이오?" 소영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금화부인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 "소제가 정말 소림의 장문방장을 죽인다고 해서 심목풍이 진실로 춘부장과 자당을 석방하리라고 믿고 있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어리둥절했다. "심목풍은 워낙 간사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그때 가서 또 어떻게 맘이 변할는지는 모르죠." 금화부인은 갑자기 하늘을 쳐다 보며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동생은 심목풍에게 그만큼 당하고도 아직도 그를 모르고 있으니 딱해요. 가령 동생 혼자서 소림의 중들을 다 죽인다고 해도 그는 동생의 부모를 놓아 주지 않을 거예요."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금화부인이 말을 이었다. "무림의 팔대 문파와 무수한 고수들이 그에게 대항하고 있기 때 문이오. 동생의 명성이 커질수록 또한 그 무공이 강해질수록 그는 더욱 단단히 동생을 붙잡고 놓지 않을 거예요. 당신들은 길이 다르 기 때문에 함께 일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상황에선 같은 운명체가 될 수 있지요. 그런데 지금 동생을 제어할 수 있는 무형의 고삐를 쉽사리 놓을 리가 있겠어요?" 그는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의 말이 옳소." 금화부인은 그 말을 듣자 방긋 웃었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 이래 동생이 나를 칭찬하기는 이번이 처음 이에요." 소영의 두 눈에 이슬이 번쩍였다. "이 소영은 부모님의 슬하에서 부모님을 즐겁게는 못하고, 오히 려 부모님에게 누를 끼쳐 고생을 시키고 있으니 만 번 죽어도 속죄 할 수 없겠소." 금화부인이 소영을 위로했다. "동생은 괴로와할 것 없어요. 지금은 심목풍이 절대로 춘부장과 자당에게 냉대를 하지 않아요. 우리들에게는 아직도 그분들을 구출 해 낼 시간이 넉넉히 있어요." 소영은 의아한 듯 말했다. "당신은 뭣 때문에 나를 이처럼 도와 주시려 하오?" 금화부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본래 성격이 괴팍해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나를 좋 아할 때까지 도와 주고 싶어요." 이때 금란과 은란은 일제히 허리를 굽혀 금화부인에게 절을 했 다. "부인께서 소공자를 도와서 그의 부모님을 구출하시겠다고 하니, 공자께서는 죽는 날까지 그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금화부인은 깔깔 웃었다. "나는 동생이 감사하는 것은 원치 않소. 그리고 그대들은 동생이 혹시 경솔한 짓이라도 하지 않도록 잘 돌봐 주기 바라오. 그럼 난 이만 가겠소." 소영은 그녀가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는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 물이 몇 방을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은란은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 보면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한 말이 모두 참말이라면 그녀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 군요." "그렇지만 그녀는 우리와 뒤에 만날 약속을 하지 않았으니 다음 에는 그녀를 찾을 수 없을 거야." "그렇지 않아요. 우리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백화산장의 눈을 속 이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그녀가 백화산장에 있기만 하면 언제든 지 우리들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지요." 금란이 다시 은란을 돌아 보며 나직이 말했다. "백화산장에는 머지 않아 곧 무슨 사고가 발생할 것 같아." "그럴 거예요. 아마 지금 이 백화산장의 주위에는 적지 않은 무 림의 고수들이 운집해 있을 거예요."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들도 휴식을 취하여 정력을 길러 두시오. 우리들은 언제 악 전고투를 치러야 할지 모르오." 소영은 말을 마치자 먼저 눈을 감고 앉았으나 여러가지 생각과 근심에 싸여서 정신이 혼란했다. 소영은 드디어 눈을 뜨고 금란과 은란을 건너다 보았다. 그녀들 은 이미 선(禪)의 경지에 들어간 것 같았다. 시선을 돌렸다. 순간 뒷창문에 드리운 거적대기가 약간 움직이는 듯했다. 소영은 첫눈에 그 거적대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것과는 다 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유리한 위치를 선택해서 앉은 다 음 눈을 약간 뜨고 암암리에 노려 보았다. 소영은 천 년 묵은 교피 장갑을 살짝 꺼내서 꼈다. 늘어져 있던 거적대기 사이로 돌연 단정하게 생긴 흰 얼굴이 나타났다. 소영은 그 얼굴을 보자 단번에 낯익은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그녀는 귀주(歸州)의 주루(酒樓)에서 만났던 푸른 옷을 입은 낭 자였다. 소영은 그녀를 보자 곧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줄곧 팔수신룡 단목정(八手神龍端木正)과 같이 다녔는 데, 지금 그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니 단목정도 가까이 있겠구 나.' 소영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소영은 그녀의 살기 어린 눈길을 보 자, 그때 주루에서 그녀가 주조룡을 찌르려던 일이 퍼뜩 생각났다. 소영이 막는 바람에 거의 성공했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소영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 다. 한 줄기 빛이 곧장 소영의 가슴을 향해 밀려 왔다. 소영은 오른손을 재빨리 들어 날아 오는 암기를 받았다. 그것은 작고 묘한 한 개의 은사(銀梭)였다. 은사의 끝에 반짝이는 남색의 물질은 극독임에 틀림없었다. 소영은 은사를 뒤에다 숨겨 두고 여전히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 살기 등등한 눈망울이 다시 창문에 나타났다. 그 원한 에 찬 듯한 눈망울은 소영을 한참 동안 노려 본 후에, 다시 금란과 은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소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내게 원한을 품고 몰래 맹독 암기로써 나를 상하게 하려는 심정은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조금도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까 지 암기를 쓰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소영이 이와 같이 생각하며 잔뜩 벼르고 있는데, 그 눈망울이 천 천히 움직여서 멀어지며 다시 거적대기가 내려졌다. 금란과 은란을 암살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소영은 속으로 다시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냥 가는 걸 보면 내가 맹독 은사를 맞고 죽었다고 생 각한 것일까? 또한 그녀가 은원은 분명히 하여 금란과 은란을 암살 하지 않는 걸 보면 호탕한 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하다. 내가 조금도 상처를 받지 않고 여전히 원래의 자세대로 앉아 있었는데도 그녀는 왜 가부를 알아 보지 않 는 것일까?' 조금 후에 금란과 은란도 선정(禪定)에서 깨어났다. 은란과 금란 은 그 동안의 조식으로 정신이 퍽 맑아졌다. 소영은 그녀들에게 조금 전의 일을 알려 주지 않고 은사를 슬그 머니 감춰 버렸다. 은란은 가는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웃음을 지었다. "시장하지 않으세요?" "아니오." 은란은 문을 열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해가 곧 지겠어요. 반 시진 후면 날이 어두워질 겁니다. 우린 빨리 가야 할 거예요." 소영이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갑시다. 빨리 가서 그 관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이 아직 살아 있 는지 살펴 봅시다." 세 사람은 이십 리쯤 되는 길을 반 시진 정도 달려 도착했다. 소 영의 일행은 곧장 뒤뜰로 들어 가서 관이 놓여 있는 방으로 들어 갔다. 소영은 부랴부랴 관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관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은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가 우리를 속였어요." 금란도 덩달아서 말했다. "그는 상처가 매우 중하므로 혼자서는 절대로 멀리 가지 못해요. 어쩌면 이 절간 안에 숨어 있을 거예요." 그러나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우리를 속일 필요도 없고 우리를 피할 까닭도 없소. 그는 자기의 친구에 의해 구출되었거나 아니면 어떤 침해를 당해 죽었을 거요." 소영의 말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새의 날개 소리가 들 려 오며 어두컴컴하게 저물어 가는 하늘을 가르고, 비취빛 앵무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 왔다. 그 앵무새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 보기라도 하려는 것처 럼 밖 안을 한 바퀴 빙 돌더니 소영의 어깨 위에 내려 앉았다. 앵무새는 입을 벌려 편지 한 장을 떨어뜨렸다. 소영은 편지를 펴 서 읽어 보았다. <이 쪽지를 보는 즉시로 앵무새를 따라 와서 노부를 만나시오.> 금란이 궁금한 듯 물었다. "편지에는 뭐라고 적혀 있어요?" "우리들에게 앵무새를 따라 와서 자기와 만나자고 했소." "공자님은 가시겠어요?" 소영은 잠깐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악의가 조금도 없는 것 같으니 가보는 것도 무방하겠지요." 소영은 곧 손을 들어 어깨 위의 새를 날렸다. 앵무새는 푸드득 날개를 치며 날아 올라 방 안을 한 바퀴 빙 돈 다음 다시 밖으로 천천히 날아 갔다. 은란은 비취빛 고운 앵무새를 바라 보며 말했다. "매우 천천히 날고 있군요. 공자의 말을 알아 들은 모양이에요." 소영이 말을 받았다. "좀 빨리 갑시다." 소영은 앵무새를 바라 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기하게도 세 사람의 발걸음이 빨라지자, 앵무새의 나는 속도도 빨라졌다. 앵무 새를 따라 약십 리 가까이 걸어 가자 어떤 농가가 나타났다. 앵무새는 곧장 농가의 방 안으로 날아 들어 갔다. 귀두도(鬼頭 刀)를 든 두 장한이 문을 막고 서 있었다. 그들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세 분은 누굴 찾아왔소?" 소영이 손에 들었던 쪽지를 내 보이며 대답했다. "우리들은 앵무새의 인돌로 예까지 왔소." 이때 갑자기 맑고 가냘픈 소리가 안 쪽에서 들려 왔다. "틀림없어요. 세 분은 들어 오시오." 37. 금궁의 열쇠 소영이 앞장서서 방으로 들어 갔다. 두 장한은 세 사람이 방으 로 들어 가자 곧 문을 닫았다. 이미 밤이 되어 방 안은 캄캄했다. 맑고 가냘픈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세 분은 나를 따라 오세요." 소영이 암암리에 안력을 운행하여 바라 보니 한 여인이 서 있었 다. 그녀는 앞장서 걸었다. 소영과 일행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방 을 지나 후문으로 나서자 거칠고 좁은 길이 나타났다. 소영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해 보았다. '강호상의 사람들은 정말 허장성세를 좋아하는구나. 그 농가와 이 길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 같은데 뭣 때문에 우리들을 그 농 가로 끌어 들였을까?' 이때 길을 안내하는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곧 도착해요.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흥! 또 무슨 수작을 하려고? 미리 이럴 줄 알았다면 우리들은 예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상관 없습니다." 은란은 매우 세심한 데가 있어 안내하는 여자가 자기네들과 얼굴 을 대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매우 경각심이 높아서, 은란이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옆 으로 돌아서자 은란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 로 말했다. "세 분은 그 자리에 가만히 계세요. 함부로 나다니시면 안 됩니 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 성큼성큼 걸어 가더니 몸을 공중으로 한 번 솟구쳐 뛰어 일 장 밖으로 사라졌다. 소영은 은근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은란은 그녀의 뒷모습이 어 둠 속으로 사라지자 소영을 돌아 보며 입을 열었다. "공자에서는 혹시 무슨 의심이 나지 않으세요?" 은란이 말을 이었다. "강호상에는 퍽 많은 문파가 있는데 그들은 일부러 신비하게 꾸 미고 있어요. 그는 중상을 입었으니까 옥시 강적이라도 침입할까 싶어서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도 몰라요. 여자가 계속 우리 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것을 공자께서는 아셨어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 그렇군요.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생각되는 바가 있 어요. 그녀는 우리들과 대면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회피했 어요." 금란이 말참견을 했다. "혹시 그녀의 얼굴에 흠집이라도 있어서 우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지요." 은란이 말을 받았다. "언니의 말대로 다른 이유가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그리 간단한 사연인 것 같지는 않소." "제 생각에는 그녀는 어쩌면 우리와 알고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혹시 우리가 그녀를 알아 볼까 싶어서 대면하기를 꺼려하지나 않는 가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소영은 품 속에 손을 넣어 아까 초가에서 주워 넣은 은사를 만져 보았다. "세 분께서는 이쪽으로 오세요." 소영은 고개를 들어 소리나는 쪽을 바라 보았다. 그 여자는 이 장 밖에 서 있었다. 소영은 뛰어난 안력을 지녔지만 어두운 밤이라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알아 볼 수는 없었다. 은란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앞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그녀 는 이미 알아 차렸는지 은란이 일 장 앞까지 다가 왔을 때 돌아서 버렸다. 세 사람은 그 여자의 뒤를 따라 반 리(半里)정도 걸어 가서 큰 저택 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곧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들어 오세요." 세 사람은 이 기회에 그녀를 바라 보기 위해서 입으로는 서로 사 양을 하면서도 모두들 재빨리 대문 안으로 들어 섰다. 두 개의 큰 뜰을 지나자 다시 조그마한 정원이 나타났다. 희미한 별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바라 보니, 그녀는 감색 웃을 입고 있었다. 그 남의녀(藍依女)는 큰 기와집 앞에 가서 걸음을 멈 췄다. "들어 오세요." 소영의 일행은 어떻게 하든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보려고 했다. 그러나 끝내 한 번도 볼 기회가 없었다. 금란이 몸을 옆으로 돌리며 소영의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제가 길을 안내하겠어요." 금란은 그 남의녀의 뒤에 바싹 다가 섰다. 소영은 금란이 혹시 방에 복병이나 있지 않은가 하여 자신이 먼저 들어 가서 시험해 보 려는 것인 줄 알았다. 만일 누가 습격하면, 금란이 제일 먼저 부딪 치고, 자기는 충분히 뒤에서 대비할 시간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불빛이 번쩍하더니 촛불이 켜졌다. 방 안에는 머리를 흰 천으로 동여 맨 황의인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침상 앞에는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등에 보검을 꽂고 손에는 촛불을 든 채 서 있었다. 그 황의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서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나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많은 절차를 거치게 해서 세 분에게 불편을 드렸소이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형씨의 상처는 좀 나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염려해 주신 덕분으로 상처는 아주 좋아졌소이다." "우리들은 형씨께서 구출받으신 줄 알았다면, 굳이 약속을 지키 기 위해서 예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외다." 황의인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씨께서 이처럼 신의를 지키시니 나도 형씨가 헛걸음이 되지 않도록 귀중한 물건을 한 가지 드리겠소." 소영은 씁쓰레하게 웃었다. "우리는 그저 형씨를 도우려 한 것 뿐이었소. 진귀한 물건을 주 시겠다니 그 성의는 감사하오나, 우리들은 그것을 받지 않겠소." 소영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우리는 바쁜 일이 있어 이곳에 이만 작별 인사를 할까 하오." 이때 황의인이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형씨! 잠깐만 걸음을 멈추어 주십시오."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 보았다. "귀하께서 무슨 분부가 계시온지?" 황의인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께서 이대로 가신다면 정말 섭섭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 니다." 소영이 대답했다. "이것은 극히 사소한 일에 불과하오니 귀하께서는 너무 신경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형씨의 성함이라도 알아 둡시다." "나는 소영이외다." 황의인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신은 백화산장의 사람이 아니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전에 백화산장의 삼장주였소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리어 백화산장의 대적이외다." 황의인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소영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일을 한 마디로 다 말하기는 어렵소이다. 하지만 지금 한 말 이 진실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외다." 황의인은 잠깐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백화산장의 사람이든 아니든 그건 고사하고 당신의 말에 는 신의가 담겨 있소." 황의인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동자를 바라 보며 말했다. "내 베개 밑에 있는 보따리를 꺼내서 이분에게 드려라." 동자는 황의인의 베개 밑에서 황색 보따리를 꺼내 소영에게 내밀 었다. 그러나 소영은 그 보따리를 한참 동안 바라 보고만 있을 뿐 얼른 받지 않았다. "형씨는 먼저 이 보따리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없소?" "어서 받게! 노부는 피곤해서 쉬어야겠네." 그는 소영과 얘기할 때, 여태껏 존칭을 불렀는데 이때 갑자기 말 투를 바꾸어 하대를 했다. 소영은 천천히 황색 보따리를 받아서 손으로 무게를 저울질 해 보고 그 자리에서 보따리를 풀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황의인이 침착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볼 것 없이 어서 가게!" 소영은 손을 멈추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하겠소이다. 형씨의 성명과 신분을 말씀해 주실 수 없소이까?" 황의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네, 훗날 자연히 알게 될 테니.... 모두들 어서 돌아 가게." 소영은 거친 소리로 말했다. "형씨, 몸조심하시오." 소영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 방을 나왔다. 금란과 은란도 뒤 따랐다.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야말로 신비한 존재야!" 이때 갑자기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세 분은 이리 오세요." 소영은 그 목소리를 듣자, 조금 전 세 사람을 인도하던 그 남의 녀의 목소리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소영은 금란을 돌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의 상황은 좀 이상한 데가 있소. 그 황의인은 지위가 매우 높은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또한 자유를 잃고 있는 것도 같았소." 은란도 동의를 표했다. "그런 것 같더군요." 세 사람은 소리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약 사, 오 장 정도 가니 과연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별빛 아래 서 있었다. 은란이 낮은 소리로 금란에게 속삭였다. "조금 전에 길을 안내하던 그 낭자같지 않아요." 소영이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낭자가 우리를 불렀소?" "나를 부인이라고 부르세요." 소영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남의부인이 도리어 소영에게 반문했다. "당신들은 그분을 만나셨나요?" "그 황의인 말씀입니까?" "그래요. 그분은 내 남편이에요. 내 남편이 당신에게 어떤 물건 을 주었지요?" "그분은 나에게 황색 비단 보따리를 주셨습니다." "그 보따리를 거기 두고 가세요." 소영은 황색 비단 보따리를 땅에 놓았다. 소영은 돌아 서려고 하 다가 문득 다른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황의인은 이 물건을 내줄 때 거듭 물건을 간수하길 부탁했 다. 이 여자가 틀림없는 그의 부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정한단 말 이냐? 만일 이 물건을 타인에게 편취당한다면, 나는 남의 부탁을 저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그 남의부인은 소영이 후회하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그래서 소 영이 머뭇거리자 곧 허리를 굽히고 손을 재빨리 뻗쳐 그 보따리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소영도 남의부인이 손을 뻗침과 동시에 오른 손을 재빨리 뻗쳤다. 소영의 거리가 그 여인보다 가까왔으므로 그 남의부인의 손이 보따리에 닿을 무렵, 그는 이미 그 보따리를 낚아 채고는 오 척 정도 물러났다. 그녀는 시종 돌아서지 않은 채 소영의 보따리를 뺏으려 했다. 소영은 보따리를 도로 뺏은 다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그분의 부인이라는 것만 확실하다면, 당장이라도 이 보따리를 본 주인에게 돌려 드리겠소." 그러자 남의부인이 말을 받았다. "당신네들은 이 물건을 가지고 갈 수가 없소. 무엇 때문에 당신 들은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세요?"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뇌까렸다. '이 보따리 속에는 도대체 무슨 물건이 들어 있을까? 중요한 것 이 들어 있는 것 같구나.' 소영은 곧 대답했다. "부인, 오해하지 마시오. 부탁받은 물건을 남에게 내줄 수 없다 는 것뿐이오." 남의부인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야만 내가 그분의 부인이라는 것을 믿겠어요?" 소영이 반문했다. "당신이 진정 그분의 부인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 물건을 당신에 게 부탁하지 않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에게 주었겠소?" 남의부인이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당신은 그 보따리에 싼 물건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세요?" "모르오." 남의부인이 말을 이었다. "그 물건을 지금 내게 돌려 주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거요." 소영은 은란과 금란을 돌아 보고 낮은 목소리로 한탄 비슷하게 말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우리는 이곳에 오지 말걸 그랬소." 은란이 말을 받았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더 번민하실 필요가 없어요. 이대로 가지고 가요." 소영은 보따리를 간직하고 돌아서서 걸었다. 등 뒤에서 그 남의 부인의 냉소가 들려 왔다. "필부는 죄가 없지만 구슬을 가진 것이 죄로구나!" 소영은 걸음을 재촉하여 앞으로 달려 갔다. 걸으면서 소영은 이 와 같은 생각을 해 보았다. '정말 이 보따리 속에는 진귀한 물건이 들어 있을까? 그렇다면 그는 왜 자기 처자에게 주지 않고, 낮선 나에게 주었단 말인가?' 소영은 호기심이 일어나 당장 품속에서 보따리를 꺼내서 풀어 보 고 싶기도 했으나 참고 단숨에 이 삼 리를 달려 갔다. 은란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 남의여인은 우리들에게 협박을 한 것 같아요."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한바탕 냉소가 들려 왔다. "목숨을 유지하려거든 물건을 내놓고 가거라." 이 목소리는 매우 거칠고 둔중하였다. "암기를 조심 하시오." 소영은 내공이 깊은지라 시력도 뛰어나 곧 숨어 있는 사람을 발 견했다. 소영은 곧 대갈일성했다. "작은 나무가 어찌 숨을 곳이 될 수 있겠소? 그따위 공명정대하 지 못한 행동이 영웅의 행동이라 할 수 있겠소?" 상대 방은 냉소를 터뜨렸다. "훌륭한 안력이오." 작은 나무 뒤에 있던 사람이 나타나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 왔다. "우리는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이인데 왜 길을 막는 거요?" 그는 밤안개 속에 흰 검광을 번쩍이며 등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들의 처지는 매우 위험하오. 이미 겹겹이 포위를 당하고 있 소. 내가 좋은 말로 권할 때 그 물건을 놓아 두고 가시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그건 알 필요도 없소." "그렇다면 우리도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겠소." 수염이 긴 사나이가 갑자기 소리를 높여 웃어젖혔다. "세 분은 이미 첩첩이 둘러 싼 포위망에 빠져 있소. 아무리 몸부 림쳐 봐야 소용이 없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나는 여태껏 남의 협박에 넘어 간 적이 없소. 당신의 말대로 나 는 보자기에 싼 물건을 가지고 있소.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 물건 을 훔친 것이 아니오." 흑의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당신에게 공갈을 하는 줄로 아시오? 그렇다면 세 분은 사 방을 한 번 살펴 보시오." 소영은 주위를 한 번 곁눈질해 살펴 보았다. 과연 사방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은란과 금란은 일제히 등에 꽂았던 장검을 뽑아 들고 대적할 준 비를 했다. 소영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절대로 남의 물건을 강점할 생각은 없소. 그러나 사정을 분명히 밝히기 전에는, 이 물건을 여러분에게 내줄 수 없소. 무림 의 사람들은 의리와 사리분별을 잊고 걸핏하면 무공으로 겨루어 결 투를 하려고 하니 이 어찌 사람이라 하겠소?" 수염이 긴 사나이는 그 말을 듣자 한바탕 앙천대소를 했다. "하하하.. 우리들이 당신과 무슨 결투를 할 거라고 생각하오?" "당신들이 사면 팔방을 에워싸고, 손에 무기를 들고 다가 오는 것은 결투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이오? 설마 재판을 하러 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수염이 긴 사나이는 냉랭한 목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여기있는 사람들은 본문의 일류 고수들이오. 일단 손을 쓰기 시 작하면 당신들은 십 초를 배겨나기가 힘들 것이오." 소영은 노기를 띠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요. 여러분이 원한다면 나도 할 수 없소. 그러 나 이 소영이 출수하여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원망 은 마시오." 수염이 긴 사나이는 잠깐 어리둥절했다. "당신이 바로 한 때 굉장히 이름을 날렸던 소영이오?" "그렇소." 수염이 긴 사나이는 갑자기 길게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그가 부탁한 사람은 틀림없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좀더 일찌기 알았어야 했는데...." 그는 소영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대명을 오래 전부터 들어 왔지만, 이 일은 본문에 있어서 너무도 중대한 일이오. 만일 소대협께서 끝까지 돌려 주지 않는다 면, 하는 수 없이 싸워야 할 테니 다수를 믿고 싸우는 우리들을 탓 하지는 마시오." 소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수염이 긴 사나이가 정중한 목소 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고명하신 소대협께서는 결코 타인의 물건을 함부로 가지려 하시 지는 않을 것이오. 우리는 돌려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소." 소영은 높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형씨가 그 황의인을 데리고 오시오. 그분이 한 마디만 분부하시면 나는 당장 이 물건을 돌려 드리겠소." 수염이 긴 사나이가 대답했다. "그는 상처가 매우 중해서 거동이 불편하오."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분을 만나러 함께 갑시다. 그의 말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될 게 아니오?" 수염이 긴 사나이는 그 말을 듣자 안색이 돌변했다. "그렇다면 소대협은 끝까지 버틸 작정이오?" 소영은 그의 태도가 돌변하는 것을 보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이 어디가 잘못됐소?"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그가 물건을 우리들에게 주고 싶었다면,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주었겠소?" 소영이 의아한 생각으로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자 그 사나이는 답답한 듯 입을 열었다. "소대협와 의향은 어떻소?" "무얼 말이오?" "본문의 물건을 돌려 주는 일 말이오." 소영은 사방을 곁눈질로 살펴 보았다. 주위에서 노리고 있는 고 수들은 모두 흥분해서 분노에 찬 얼굴들이었다. 그 황의인이 준 물 건은 이 사람들과는 커다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수염이 긴 사나이는 이제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단호한 어조 로 말했다. "소대협, 대체 돌려 주시겠다는 거요. 안 돌려 주시겠다는 거요? 빨리 결정하시오. 우리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소." 은란이 장검을 힘있게 고쳐 잡으며 소영에게 나직이 말했다. "공자! 황의인이 보따리를 공자에게 줄때 절실한 기대를 건 표정 이었어요. 공자께서 만일 이 보따리를 저 사람들에게 준다면 결국 그 노인의 부탁을 저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겠어요?" 소영도 힘있게 대답했다. "그렇소." 소영은 다시 수염이 긴 사나이를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귀하가 나로 하여금 이 물건을 내어 놓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원 주인을 데리고 오는 수밖에 없소. 아니면 우리가 그리로 가 든지......" 수염이 긴 사나이가 안타까운 듯 입을 열었다. "그 방법 외에 달리 타협할 여지는 없소?" "내 말은 언제나 그 한 마디뿐이오." 그러자 수염이 긴 사나이가 냉랭한 목소리로 비웃듯 말했다. "내 의견으로는 또 한 가지의 방법이 있는 것 같소."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당신들이 손을 써서 강탈하는 것말인가?" "그렇소. 손을 써서 강탈하는 것이오." 소영이 여유 있는 태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하가 강탈할 수 있다고 생각되시거든 한 번 강탈해 보시오." 수염이 긴 사나이가 딱 잘라 말했다. "소협이 끝내 고집하고 본문의 잃어버린 물건을 돌려 주지 않으 시니 우리들도 달리 도리가 없소." 그는 칼을 휘두르며 앞장서서 덤벼들었다. 이때 주의에 엿보던 사람들도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은란은 공격해 오는 적을 막으며 말했다. "공자, 포위를 뚫고 나가요." 소영이 물건을 돌려 줄까 망설이다 은란의 말을 듣고는 문득 깨 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 이 보자기의 물건을 돌려 주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우선 포위를 뚫고 나가야만 한다. 이들과 오래 싸워서는 안 된다.' 소영은 이와 같은 결심을 하게 되자 쌍장으로 연환공격을 했다. 그리고 노호를 외쳤다. "나를 막는 자는 죽는다!" 이때 맹렬한 장풍이 휘몰아쳐 나갈 길을 열었다. 은란은 복지추 풍으로, 소영은 우장으로 천마행공 일초를 쳐 내며 포위망을 뚫고 뛰어 나갔다. 금란은 장검으로 전면을 보호하며 허리를 틀어 칠, 팔척 밖으로 곧장 뛰어 나갔다. 소영도 쌍장을 연환으로 쳐내서 포 위하는 적을 물리치고, 몸을 굽혀 수염이 긴 사나이의 옆으로 스치 고 빠져 나갔다.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던 사나이들은 제각기 흩어져서 칼을 번쩍 거리며 금란과 은란을 추적하고 있었다. 소영은 곧 팔보등공(八步登空)의 상승 경공을 전개하여 날아서 금란과 은란을 뒤따라 가며, 암암리에 수라지력을 끌어 모아 한 손 가락으로 퉁겨 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비참한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쫓아 오던 한 사나이가 풀썩 쓰러졌다. 그러자 창졸간에 뒤따라 오 던 한 사나이가 칼을 휘둘러 동료를 베어 버렸다. 그가 쓰러진 사 람이 자기편이라는 것을 알고 칼을 거두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리하여 총망중에 동료의 목을 벤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들은 이와 같은 불상사로 말미암아 잠시 주춤했다. 이 틈을 이 용하여 소영은 마음놓고 달려 금란과 은란을 따랐다. 소영은 곧 진 기를 모아 금란과 은란의 양팔을 잡았다. 금란과 은란은 비록 경공 은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그 기초 훈련이 잘 되어 있었으므로, 소영 이 진기를 모아 끌어 주자 더욱 빨리 달릴 수가 있었다. 이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추격하는 적을 떨쳐 버렸다. 이윽고 소 영은 금란과 은란을 놓아 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에서는 어째서 가는 곳마다 시비 투성일까?" 이 말을 듣자 은란이 호호호! 하고 웃었다. "공자께서 사람이 너무 좋으시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시끄러운 일이 생기는 거예요." 소영은 그 말뜻을 알아 차릴 수가 없어서 되물었다. "어째서 착한 사람이 더 고뇌를 당해야 하는 거요?" 은란은 또 생글생글 웃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공자께서 만일 천성이 간사하고 교활 한 위인이었으면, 그 중상당한 노인과 오늘 밤의 약속을 맺지 않았 을 거예요." 소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 말도 그럴 듯하군요." 은란은 소영이 수긍하는 빛을 보이자, 더욱 의기양양하여 방긋 웃었다. 소영이 말을 받았다. "오늘밤 우리들에게 시비를 건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처자가 아 니면 그의 부하였소. 그는 이처럼 겹겹이 보호되어 있기 때문에 안 전에 대한 염려는 없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보자기에 싼 물건을 나에게 내 주었을까? 그러고 보니 이 물건은 나에게 부탁한다기 보 다도 일부러 쟁탈전을 모사한 것 같은 인상이 드는군요." 은란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말이 맞아요. 그가 물건을 처자나 부하에게 주고 싶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가 있어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빙그레 웃었다. "낭자는 정말 지모가 풍부하군요. 어디 그 두 가지 이유을 말해 보시오." 은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는 너무 과찬을 하시는군요. 제 말이 꼭 맞다고는 볼 수 없어요." 은란은 말을 잠간 끊었다가 방긋 한 번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 다. "그 사람이 이 물건을 공자께 드린 것은 나쁘게 말하면, 그는 화 를 공자께 전가시켜 자기의 목숨을 유지한 거예요. 그는 자기의 처 자와 부하들에게 보물을 남에게 주어 버렸으니까 자기를 죽여도 이 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은근히 암시한 것이에요." "좋소. 그럼 그 둘째 이유는 또 무엇이오?" 은란이 눈을 깜빡거리며 소영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둘째 이유란, 그 황의인이 남몰래 자기의 처자와 부하가 그 물건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처 자나 부하가 악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분노를 느껴 그 물건을 공자 께 내준 걸 거예요." 금란이 이때 말참견을 했다. "그 보자기 속에 든 물건이 과연 무엇인지 한 번 풀어 보면 어떨 까요?" "그건 안 되오. 이 물건은 우리들의 소유가 아닌데, 어떻게 함부 로 풀어 보겠소?" 은란이 이때 다시 방긋이 웃으며 말참견을 했다. "공자께서는 정말 벽창호군요. 그 사람은 이 물건을 당신에게 아 주 드린 거예요. 공자께서는 언제든지 이 보따리를 풀어 볼 수 있 어요." 소영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도 그렇군요. 그 사람의 말투에는 이 물건을 나에게 준다는 뜻이 확실했소." 소영은 품 속에서 보따리를 꺼내다 말고 말했다. "별빛이 어둡고, 안개가 짙어서 똑똑히 볼 수가 없겠구려! 우선 쉴 곳을 찾은 다음에 풀어 봅시다. 그래도 늦지는 않겠지." 그동안 세 사람은 함께 고락을 같이 하면서 주종의 관계같은 것 은 잊어 버렸다. 은란이 앞장 서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소영과 금란은 은란의 뒤 를 바싹 따랐다. 잠시 후, 마을 앞에 당도하여 형세를 한 번 살피고 나서, 마을을 돌아 서쪽으로 향했다. 일 리쯤 가니 신묘(神廟)가 보였다. 소영은 은란을 바라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묘(廟)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소?" "제 기억에 마을 서쪽에 묘가 많다는 것이 생각나서 와 보니 과 연 묘가 있군요." 소영과 은란은 서서히 묘 안으로 들어 섰다. 사방 한 칸쯤 되는 묘 안은 극히 좁았다. 불과 너덧 명이 들어서 기에도 비좁은 곳이었다. "이제 보따리를 풀어 봅시다." 은란은 화섭(火攝)을 꺼내어 불을 켰다. 소영은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보따리 안에는 잘 만들어진 작은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 는데 그 상자에는 금방 날아 갈 듯한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으며, 그 밑에는 유오독존(唯吾獨尊)이라고 씌어 있었다. 소영은 나무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한 폭의 비단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동(銅)으로 만든 열쇠가 있었으며, 금궁부약이 란 글월이 씌어 있었다. 소영은 열쇠에 새겨진 네 글자를 보고 놀랐다기 보다 머리속이 윙윙 울리는 듯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것을 찾으려고 고심하였던가? 난 생각지 도 않게 이것을 얻게 되었구나.' 이때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소영의 생각을 중단시켰다. 은란은 재 빨리 불을 꺼 버렸다. 소영도 급히 나무 상자를 닫고 품 속에 넣었다. 말굽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 오더니 드디어 묘 앞에서 멎었다. 동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분명히 이곳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았어요." 노인이 말했다. "난 보지 못했다. 어쨌든 들어가서 확인해 보자꾸나." 묘 안이 비좁아 꼼짝없이 발각되리라고 생각하며 소영은 은근히 걱정했다. 은란과 금란이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 당기며 문 안으로 숨었다. 흑의대한(黑衣大漢)이 씩씩한 갈음으로 급히 들어 섰다. 소영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날쌔게 몸 을 날렸다. 오관이 예민한 흑의대한은 이때 갑자기 옷자락 소리가 들리자, 내심 흠칫 놀라며 재빨리 등에 메고 있던 칼을 뽑아 들며 소리쳤 다. "누구냐!" 소영이 너무 다급한 바람에 몸을 공중으로 날릴 때, 옷자락 소리 가 나는 것을 조심치 못한 게 불찰이었다. 금란과 은란은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안 간힘을 썼다. 너무나 방이 협소하여 대한(大漢)이 눈을 옆으로 조 금만 돌려도 금란과 은란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한은 조금 전의 이상한 소리에 신경이 쏠려 신상(神像) 의 공대(供臺)쪽만 뚫어지게 쏘아 보고 있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칠흙같은 어둠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안을 자세히 식별할 수 없었다. 다시 노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정말 사람이 있단 말인가?" 흑의대한이 말을 받았다. "방금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그까짓 손바닥만한 방에 무엇이 있을라구. 자, 훤히 보이지 않 나." 대한은 큰 걸음으로 문 안으로 들어 섰다. 이때 은란은 만반의 공격자세를 갖추고 있다가 그 대한이 들어 서자, 잽싸게 달려 들어 힘껏 혈도를 짚었다. 금란은 급히 한 발짝 나아가 오른손으로는 대 한의 멱살을 잡고, 왼손으로는 그의 몸뚱이를 떠 받쳤다. 묘 밖의 두 사람은 경각심을 높여 주위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다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묘 안의 상황은 어떤가?" 은란은 외부로부터 오랫동안 인기척이 없자, 살그머니 고개를 내 밀어 바깥 동정을 살펴 보았다. 이때 한 줄기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더니 한 자루 사자표가 쾌속 으로 날아 왔다. 은란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얼른 움츠렸다. 그러 자 사자표는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그녀의 얼굴을 스쳐 신상(神 像)에 부딪쳐 버렸다. 은란은 대뜸 장검을 뽑아 들었다. 막 밖으로 뛰어 나가려고 발돋 움을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번개같이 뛰쳐 나가는 것 이었다. 실로 놀랄 만한 속도였다. 은란은 그 사람이 틀림없는 소영이라 생각하고 급히 소리쳤다. "공자, 그들을 놓치지 마세요." 벌써 그들은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수중에 장검을 꼬나 들고 협공해 왔으나, 어찌 된 일로 소영의 장력에는 기세를 잃고, 마치 광풍에 쓰러지는 잡초처럼 털끝만큼의 위력도 보이지 않았다. 은란이 시선을 돌리자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재빨리 도망치려 했 다. 그녀는 이 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몰라, 한 사람도 도망치지 못하게 추격하였다. 은란은 날쌔게 그 사람 앞을 막아 섰다. "공자, 퍽 빠른 신법이군요. 마치 능파보(凌波步)와 같군요?" 은란은 그 자를 자세히 보았다. 불과 십 사, 오 세 정도의 동자(童子)였다. 그녀는 그 동자를 끌고 묘 쪽으로 갔다. 그리고 굴 입구에 이르 자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세 사람은 무엇하는 사람들인지 모르니 우리 잘 심문해 보기 로 합시다." 은란은 서서히 묘 안으로 들어섰다. 금란은 이미 나머지 두 사람 을 신대 앞에 꿇어 앉혀 놓고 있었다. 은란은 손에 든 보검을 세 사람 앞으로 내밀어 위협을 가하며 말 했다. "내가 묻는 말에 바른대로 대답해라. 만약 거짓말을 하면 그 때 는 죽여 버리겠다. 너희는 이곳에 왜 왔느냐? 우선 네가 먼저 말해 봐!" 대한은 길게 한숨지었다. "우리는 이 부근을 지나는 도중에 우연히 빛을 발견하고 왔을 뿐 이오." "너희들은 어느 파의 인물들이냐?" "우리는 강호(江湖)를 유람할 뿐 아무 파도 아니올시다." "좌우간 두목은 있을 게 아니냐?" "말하기 전에 우선 아가씨에게 한 마디 묻고 싶소." ".....?" "아가씨는 어느 지방의 태생이시오?" 은란은 잠시 머뭇거렸다. "저 분은 우리 공자(公子)이고, 우리는 자매이며 공자를 동반하 여 산수를 유람하고 있다. 무림 인물과는 왕래가 극히 드물다." "당신 공자의 존함은?" 은란은 소영에게 눈짓하며 빙긋이 웃었다. "우리 공자의 성은 소이며...." 그녀는 비록 영리하고 지혜가 있었지만, 강호(江湖)의 경력이 부 족하여 거짓으로 응수할 때는 그리 유창하지 못했다. "소 무엇이오?" 은란은 몹시 난처한 듯 잠시 생각에 잠겨 머뭇거리더니 소영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때 소영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름은 소영이오." 이 한 마디에 대한은 금새 안색이 밝아졌다. 그리고 소영 앞으로 한 걸음 다가 섰다. "아! 소대협이시군요. 오래 전부터 존함을 듣고 있었습니다." 소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따위 수작 부리지 말고 너희들의 신분을 밝혀라." 대한은 은란의 말은 무시하고 소영을 바라보았다. "소대협을 찾으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발이 다 닳 도록 찾아 헤맸지요. 마침내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됐군요." 소영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나를 찾아?" "당신은 정말 소대협입니까?" "그렇소!" 소영은 남옥당(藍玉黨)이 자기 이름을 도용하고 있다는 것을 생 각하자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나를 찾는 게 아니라, 또 한 사람의 소영을 찾고 있는 게 아니오?" 대한은 품 속에서 편지를 꺼내어 소영에게 주었다. "소대협, 우선 이 편지를 보고 이야기 합시다." 소영은 편지를 받아 들고 이상히 여겼으나 호기심이 앞섰으므로 보기로 했다. "은란, 불을 좀 켜 보시오." 은란은 대한을 냉정히 바라보았다. '만약 교활한 계책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불을 켜게 하여 일행을 부르려는 수작일지 모른다.' 그녀는 대한을 의심하면서도, 소영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품속 에서 화섭을 꺼내 불을 켰다. 소영은 고개를 숙여 편지의 겉봉을 보았다. <소영 친히 보시오> 은란이 갑자기 불을 꺼 버렸다. "공자, 어떤 사람의 편지지요?" "모르겠소." "조금도 모르겠어요?" "공자, 강호에는 별일이 많으니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우선 제 가 먼저 출처를 묻고 펼쳐 보기로 해요." 소영도 역시 장산패로부터 강호에는 간사한 음모가 많다는 것을 들었는지라 대꾸를 못했다. 은란은 소영에게 묻지도 않고, 대한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누구의 청탁이냐?" 대한은 은란을 바라 보며 더듬더듬 대꾸했다. "한 아가씨의 청탁이오." "아가씨라고?" 대한은 말을 하면서 은란의 심사를 거스릴까봐 어물어물했다. 소영이 물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난 오직 성이 악(岳)이라는 것만 알고 있소." 소영은 마치 철퇴로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마 침내 그는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비틀했다. 38. 강남 사공자의 추행 은란은 소영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을 보고 소영의 손 을 잡았다. "공자, 왜 그러셔요?" "팬찮소. 걱정하지 마오." "악 아가씨는 지금 어디 있소?" "그 아가씨는 우리에게 그 편지를 전하라고만 하고, 모든 사연은 편지에 있다고 했소." "당신들은 그 아가씨와 어떤 관계인데, 이렇게 편지를 전하려고 동분서주하오?" "그 아가씨는 우리 생명의 은인이오. 그러므로 천하를 헤매서라 도 소대협에게 이 편지를 전하기로 굳게 약속했소." 은란은 소영의 표정이 몹시 긴장된 것을 보고, 필시 그 아가씨와 소영이 어떤 깊은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용히 한쪽 으로 비켜 서서 말을 하지 않았다. 소영의 격앙된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아가씨의 이름을 모른다고?" "그 아가씨가 우리의 목숨을 구했지만, 그 아가씨의 이름은 잘 모르고 있소." 소영은 갑자기 의심이 생겼다. "그 아가씨는 어떻게 생겼던가?" 대한은 머뭇거렸다. "아가씨는 젊고 미모의 아가씨이며 평범한 차림으로 다른 사람보 다 특별한 점을 찾지 못했소." "당신들은 어디서 그 아가씨를 만났소?" "대파산에서 만났소." 소영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대파산은 크기가 천 리인데, 너희들이 대파산 어디서 구호를 받 았는지 너무 막연하여 의심만 늘 뿐이군!' 소영은 이렇게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토하지는 않았다. 대한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때 우리는 남의 금지(禁地)에 잘못 들어가 생포됐고, 높은 산 봉우리에 갇혀 굶어 죽게 될 뻔 했소. 산봉우리는 구름 위로 솟았 고 바람은 칼날같이 차, 보통 사람은 몇 시간 후만에 얼어 죽을 것 이오. 무공이 제 아무리 높은 자라 해도 오래 견디지는 못하오. 우 리도 지탱치 못할 처지에 갑자기 악 아가씨가 나타나...." "악 아가씨의 병기(兵器)는 무엇이던가?" "무기는 갖지 않았고 무엇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가죽 끈 을 자르고 우리들의 생명을 구했소. 내려가는 길을 가르쳐 주며 편 지를 전해 달라며 의연히 사라졌소." 은란이 냉랭하게 말했다. "흥, 악 아가씨가 대파산에서 아무 일 없이 있을 수 있다면, 어 찌 자신이 내려 와서 찾지 않지?" "그것은 나도 모르겠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소대협은 왜 편지를 빨리 뜯어 보지 않소? 그녀는 이 편지를 미리 써 놓고 전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소. 편지에 그 내용이 자세히 써 있을 거요." 은란이 불을 켜 신상 앞에 있는 등잔에 심지를 돋구고 불을 붙였 다. "좋아, 불을 켜서 너희들의 음모에 빠져도 좋다." "아가씨, 안심하시오. 내 말은 진정이오." 소영은 편지를 뜯어 보았다. <편지를 보고 급히 대파산 계운봉 아래로 오시오.> 간단한 몇 자뿐이었다. 은란은 편지를 들고 머뭇거리며 말이 없는 소영을 보고 참지 못 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공자, 뭐라고 했어요?" 소영은 은란에게 편지를 내주었다. "자, 봐요." 은란은 편지를 보았다. "이렇게 간단해요?" "나도 의심스럽소. 악 누이가 나에게 준 편지라면 이렇게 간단하 지는 않을 텐데....." "악 아가씨의 필적을 기억하세요?" "기억이 나지 않소." 은란은 급히 등잔불을 끄고 대한 앞을 가로막았다. "시간이 없으니 잠시 쉬었다가 내일 다시 심문합시다." 소영은 악소채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한지라 이 간단한 편지라도 정말 악소채가 보낸 것이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소영은 악소채를 생각했다. 그의 서신이 그토록 간단한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악 누이는 이 편지를 쓸때,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 갈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백여 통의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백여 명에게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를 찾을 기 회가 많아지며, 편지가 남의 손에 들어 가도 안전해야 한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편지를 받고 찾아 가도, 내가 아니 면 나타나지 않으면 되니까.' 소영은 생각할수록 이유가 타당한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약속 된 장소로 가고픈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소영은 악소채를 생각하 느라고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어디서인지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 왔다. 멀리서 들리는 말소리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 왔다. 발걸음 소리도 똑똑히 들렸다. "우리 이 묘에 들어가 좀 쉬어가는 게 어떻겠소?" "들어 갈 필요 없소. 저 앞쪽 농가가 있는 곳이 폐방(弊幇)의 휴 식처이니 먼저 폐방으로 가 봅시다." 소영은 생각하였다. '어느 방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 방주(幇主)까지 몸소 이 곳에 오지 않았는가?'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소영은 낮은 소리로 은란에게 말했다. "이곳은 사통팔달(四通八達)한 요충 지대이니 오래 있을 곳이 못 되오. 날이 밝기 전에 저 세 사람을 데리고나 갑시다." "좋아요. 제가 앞장 서겠어요. 금란 언니는 저 세 사람을 감시하 세요." "허나, 이들 혈도(穴道)를 풀어야지." 소영은 세 사람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금란은 날카롭게 세 사람 을 쏘아 보았다. "엉뚱한 짓은 삼가하시오. 아니면 죽일 것이니....." 은란은 앞장 서서 묘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소영이 따랐고, 금 란은 맨 뒤에서 세 사람의 행동을 감시했다. 날이 차차 밝아 왔다. 은란은 사방의 지리를 잘 아는 듯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걸었다. 잠시 후 모사(茅舍) 앞에 당도했다. 이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밝아 인근의 풍경이 뚜렷이 보였다. 모사는 퍽 정연하게 지어 있었다. 은란은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계시오?" 나무로 만든 닫힌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가 나타났다. "누구요?" "나예요. 어서 문 좀 열어요." 사나이는 문을 열고 은란을 보자, 반가운 듯 겸손하게 허리를 굽 혀 절을 넙죽하였다. "은란 아가씨였군요. 제가 미처 영접치 못하였습니다." "괜찮아요. 어서 방으로 안내하세요." 사나이는 소영을 보고 두 손을 모으며 허리를 굽혔다. "어서 들어 오시지요." 소영은 마음속으로 은란을 무시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급히 들어 갔다. 사나이는 문을 닫고 일행을 영접한 뒤, 땅에 엎드려 은란에 게 큰절을 하였다. 은란은 엎드려 절하는 사나이를 일으켰다. "절은 필요 없고 배가 고프니 음식이나 빨리 준비하세요." "곧 올리겠으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사나이가 밖으로 나갔다. 금란은 은란을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넌 어떻게 그 사람을 알고 있니?" 은란은 미소를 지었다. "난 그를 구해 준 적이 있어요. 뜻밖에 신세를 지게 되는군요!" 세 사람 중 노인이 기침을 하였다. "우리를 이곳에 데리고 와서 어떻게 하자는 거요?" 소영은 도무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은란을 바라 보았다. "어떻게 이 세 사람을 처리하지?" "공자, 편지 내용이 진짜라고 생각하시나요?" "아직 밝히지 못했소. 이 편지에는 지난 일도 적혀 있지 않고, 서명 날인도 없으니 어떻게 알아 보겠소?" 이때 세 사람 중 노인이 급히 말했다. "이 늙은 것은 맹세하겠소. 편지는 확실히 악 아가씨가 친히 나 더러 소영에게 전하라 했고, 우리가 강호에 들어 가 알아 보니 소 대협은 무림의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허나, 소대협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번개같아 우리가 찾지 못했으나, 어제 묘에서 뜻하지 않게 소대협을 상봉하게 되었어요." "이 사람의 말을 듣고 보니 거짓말 같지 않으니 보냅시다." "귀주 부근에는 많은 고수가 운집해 있으니, 만약 우리가 착각하 여 실수를 한다면, 그 때는 후회해도 늦어요." "아가씨 말은 우리를 죽여 버리면 후환을 면한다는 말인가요?" 은란은 다시 노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그러지는 않겠소." 노인은 분한 듯 얼굴의 근육이 씰룩씰룩 했다. 소영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당신들 말이 진실이라면, 후에 다시 만나면 후히 보답할 것이 고, 만약 거짓이라면 후일에 다시 만날 생각을 하지 마시오. 그럼 가 보시오." 흑의대한이 소영을 살펴 보았다. "우리의 말은 모두 진실이지만 믿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지요." 대한은 말을 끝내자 밖으로 나갔다. 노인과 동자도 대한의 뒤를 따랐다. 소영은 세 사람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난 두 가지의 소원이 있소." 금란이 말했다. "부모님을 구하고 악 아가씨를 만나는 거지요?" "그렇소." "저는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무엇이오?" "물론 악 아가씨의 일이지요." "악 아가씨가 어쨌단 말이오?" "악 아가씨께서는 험한 깊은 산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건 정말 이상하군!" "그리고 대한의 말은, 이들 세 사람은 금지(禁地)에 잘못 들어가 생포되어 산봉우리에 수감되어서 얼어 죽을 지경에 악 아가씨가 구 출하여 주며 그들에게 이 편지를 소대협에게 전하라고 했다는데, 사정에 비해 내용이 너무 간단하군요." 금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이었다. "그곳이 금지라면 함부로 들어 갈 수 없는데, 악 아가씨는 종종 그곳에 나타나 발각되지 않는다는 점이 의심스럽군요. 공자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편지는 몇 자에 불과하지 않아요? 간단한 서신이고, 또 미리 써 놓고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하는 점도 의심돼요. 그것 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이 음모라고 생각되요." "음모라고?" "그래요. 저 세 사람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악 아가씨의 편지를 가지고 다니며 소영을 찾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많은 사람이 나를 찾을수록 기회가 빨리 온다고 생각했 을 게요." "악 아가씨는 어째서 몸소 하산해 당신을 찾지 않는 거죠?" "글쎄...." "저는 그 악 아가씨가 딴 뜻이 있어 그랬다고 단언해요." "그럼 왜 내 이름을 밝혀 나를 찾으려 할까?" 소영의 말을 듣고 있던 은란이 방긋이 웃었다. "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으나, 감히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왜?" "공자께서 노여워 하실까 봐...." "괜찮아, 말해 봐요." 이 말에 은란이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영이란 이름 두 자는 근년에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고, 전 무 림을 놀라게 했으며...." "그대는 내 이름을 가장한 남옥당을 말하는 건가?" "진짜 이름이 불문하고 남옥당인지 백옥당인지 모르지만, 강호 인물들은 소영이라는 이름을 다 알고 있어요. 그가 무공이 높다는 것과 행협하기로 널리 알려졌으며 재모 또한 뛰어나다는 것이지요. 나도 백화산장에 있었을 때 그런 말을 들었어요!" 금란이 은란의 말을 가로챘다. "공자가 처음 백화산장에 왔을 때, 가짜 소영이라고 오해한 적이 있었지요." 은란은 소영의 곁으로 다가 섰다. "심목풍이 강호에 나가기 전에 소영이라는 이름은 이미 강호를 휘둘렀고, 만약에 악 아가씨가 딴 기도가 있다면 모르되, 정말 소 영이라는 사람을 찾는다 해도 공자는 아닐 거예요." 소영은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왜 성을 악이라고 했을까? 세상에 이렇게 공교로울 수 있단 말인가?" 금란이 옆에서 참견했다. "어떻게 공자도 그 악 아가씨를 알고 계셔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심이 풀리지 않소." 이때 발걸음 소리가 나며 사나이가 먹을 것을 들고 들어와 겸손 히 은란 앞에 내려 놓았다. "별로 차린 것이 없어서 아가씨 입에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이 모사(芽舍)를 잠시 우리에게 빌려 주지 않겠소?"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죽으라면 못 죽겠습니까? 기꺼이 빌려 드 리지요." "고맙소, 그럼 폐를 끼치니 어서 준비하고 나가 보시오." "왜 그러시는지요?" "난 이미 백화산장을 탈퇴했고, 그들은 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 곳까지 추격하며 달려 올 것이오. 당신은 나를 힘으로 도와 줄 수 없으니 어서 피하기나 하시오." 사나이는 그녀가 백화산장을 무척 두려워 하고 있음을 느꼈다. "소인은 이곳에 남아 아가씨를 도와 전력을 다해 싸우겠소!" "당신이 이곳에 있으면 오히려 방해가 되니 속히 떠나시오." "정 그러시다면 말씀대로 떠나겠습니다." 사나이는 여장을 꾸려 어깨에 들춰 메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은 란에게 큰 절을 한 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소영은 밖을 가리켰다. "저 밖에 있는 양들을 보시오. 저런 것을 버려 두고 어찌 사나이 를 보냈소?" "공자께서 세 사람을 놔 주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행적이 누설될 거예요. 백화산장에서도 오고, 그 세 사람도 다시 오면 그들은 그 를 죽일 거예요." "일리가 있는 말이오. 그러니 우리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하 오." "금란 언니는 공자를 모시고 이곳에 남아 있어요. 나는 거지노인 을 찾아 만나자고 약속해야겠어요." "같이 가지." "대낮에 상공의 행동은 눈에 띄기 쉬워요. 노대인과 부인이 위기 를 면하기 전에는 우리들이 여기 있다는 것을 가급적 비밀로 하는 게 좋아요." "이곳에서 십 리 밖은 백화산장의 초소가 많은데 혼자 행동하면 위험하오." "괜찮아요. 변장을 하면 그들이 전혀 몰라 볼 거예요." 은란은 말을 마치고 급히 나갔다. 잠시 후 얼굴에 흙이 묻은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들어 와 소영을 보고 히죽 웃었다. "공자, 보세요. 그 거지 같지요?" 소영은 깜짝 놀라며 한바탕 웃었다. "변장은 그럴 듯한데 어디서 그 옷을?" "그 사람이 남겨 놓고 간 옷이지요. 내가 좀 이용해야겠어요. 언 니, 공자를 잘 모시세요. 난 갑니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고 몸조심해!" "만약 평상시라면 내가 제아무리 변장을 해도 백화산장의 눈을 속일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형세가 바뀌어 천하 영웅들이 운집하 여 수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으니, 백화산장에서도 그 많은 사람 들을 다 알아 보지는 못할 거예요." 소영은 그녀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감탄했 다.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모든일에 세심하니 후일에 반드시 성공 하겠군.' 은란은 두 손을 모아 인사하고 순식간에 죽책을 뛰어 넘어 멀리 사라졌다. 금란은 은란의 사라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금란은 살짝 밖을 내다 보았다. 네 사람이 들어 왔다. 이들 네 사람은 소영의 뇌리에 인상이 깊 었다. 전에 무당산에서 본 바 있는 강남의 사공자(四公子)였다. 네 사람은 저마다 잘난 체하는 풍류가의 차림이었다. 소영은 네 사람을 살펴 보고 그들과 부딪치면 이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금란에 게 다가 서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속히 피합시다." 소영과 금란은 급히 내실로 숨었다. 강남 사공자는 거만스러운 걸음걸이로 객실까지 들어 왔다. 맨 앞에 있는 자가 외쳤다. "사람이 있소? 우리 형제는 배가 고프니 어서 먹을 것과 마실 것 을 좀 주시오." 대답이 없으니 노한 음성을 질렀다. "이 집이 이렇게 깨끗한 걸 보니 사람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우리를 피해 숨으며 약을 올린다면, 이 집을 불지르고 말겠 다." 방 안에 숨어 있는 금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소영 에게 말했다. "저자들이 불을 지르기 전에 제가 먼저 응수하겠어요." 소영은 잠시 머뭇거렸다. 소영은 전에 그들을 보았을 때 인상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조심하시오." 금란이 천천히 나갔다. 강남 사공자가 막 수색을 하려 할 때, 금 란이 서서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 멈칫하였다. 맨끝에 있는 자가 크게 웃었다. "썩 예쁜 아가씨가 살고 있군." "미인에게 실례가 많군. 나는 일진풍 장평이오." "나는 오독화 왕검이오." "유월설 이파올시다." 맨끝 사람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였다. "저는 한강월 조광이오. 방금 실례했소. 용서바랍니다." 금란은 이들이 예의가 있는 자들인지, 지금 조롱을 하고 있는지 몰라 머뭇머뭇 말했다. "모두들 앉으시지요." 오독화가 갑자기 웃었다. "이 황량한 산중에 아가씨 혼자서 살면 무섭지 않아? 하하..." "저는 오빠와 같이 이곳에 살고 있어요." 왕검이 한 수 거들었다. "알고 보니 오빠가 있군." 유월설 이파가 금란을 쳐다 보았다. "오빠도 여기 있소?" "오빠는 장을 보러 갔어요." "그렇다면 집에는 아가씨 혼자 뿐이로군." 금란은 비로소 네 사람이 자기에게 조롱하며 장난하고 있다는 것 을 알았다. 순간 그녀는 노하여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빠는 오후면 돌아와요." "아가씨는 오빠가 몇이나 있는지?" "한 분이오." 장평은 웃으며 금란을 보았다. "만약 우리가 오빠를 죽이면, 그대는 우리의 여동생이 되고 동시 에 오빠가 넷이 되지 않겠나? 하하...." 금란은 타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진정하고 못 들은 척 하였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밖에서 차를 끓여 오겠어요." 금란이 문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때 오독화 왕검이 갑자기 손을 내밀어 금란을 막았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 싶은데 있는지?" 금란은 약간 머뭇거렸다. "내가 찾아 보지요." 왕검은 손으로 금란의 발그레한 볼을 슬그머니 만졌다. 금란은 어려서부터 험악한 환경에서 자라서 인내심이 강했다. 왕 검은 금란이 아무말 없자 장평을 돌아 보며 말했다. "이렇게 예쁘고 살결이 고운 아가씨가 이런 모사에서 자랐다는 것은 믿기 어렵지?" "맞았어. 목인촌부(牧人村夫)가 어떻게 이처럼 곱고 예쁜 처자를 기를 수 있으리." 한강월 조광이 갑자기 금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금란은 돌아 보지 않고 허리를 비틀며 공중으로 뛰어 방 밖으로 날아갔다. "퍽 빠른 수법인데? 이것이 바로 묻지 않았는데도 자기 스스로 신분을 밝히는 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날려 추격하며, 한 손을 내저어 금룡탐조 (金龍探爪)식으로 금란의 한쪽 팔을 잡았다. 금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난강절두(爛江截斗)식으로 반격하 였다. 뜻밖에 싸움이 벌어졌다. 조광은 그녀를 잡으려고 십여 초나 공격하였으나 모두 허사였다. 유월성 이파도 방 밖으로 뛰쳐 나왔다. 금란이 조광과 일 대 일로 상대하던 중에, 갑자기 이파가 가담하자 전세는 바뀌었다. 혼자 두 사람과 싸우기에는 부담이 컸다. 소영이 내실에서 밖을 엿보았다. 금란을 도와 주지 않으면 그들의 손에 잡히고 말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막 몸을 날리려 할때, 모사 밖에서 갑자기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사나이 대장부 둘이 한 계집을 농락하다니! 그 꼴을 남이 보면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지 않은가?" 그는 비호같이 금란 옆으로 다가 서며 손으로 조광을 막았다. 이 파와 조광은 손을 멈추고 냉랭히 바라 보았다. "난 누구라고, 중주이고 중 두구로군. 중주이고는 언제나 신짝처 럼 어울려 다닌다고 했지? 그렇다면 상팔도 이 부근에 있겠군?" 그는 싸늘한 눈초리로 상대를 노려 보며 단호히 말했다. "너희들 강남 사공자 듣거라! 너희들쯤 해치우는 데는 나 혼자도 충분하다." 일진풍 장평이 재빨리 나섰다. "우리와 중주이고는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데, 두형은 어째서 우리를 간섭하오?" "간단하지, 너희들이 한 여자를 조롱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런 다." 일진풍 장평이 싱겁게 웃었다. "중구이고는 재물을 좋아하고, 우리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나? 각 기 좋아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데, 네가 뭔데 협심을 발휘한답시고. ...." "군자가 재물을 좋아한다고 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게 아니다. 우 리는 항상 재질에 따라 재물을 모았고, 양심껏 살았으며, 남의 것 은 조금도 탈취하지 않았다. 어찌 너희 강남 사공자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너희 중주이고는 인의(仁義)의 영웅이란 말이군!" "우리는 최소한 도둑은 아니다." 오독화는 상팔이 오지 않았음을 알아 채고 장평에게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이 기회에 우리가 그간 익혀 온 합박검진 (合博劍陳)을 사용해 봅시다." 장평이 말하기 전에 두구가 방어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강남 사공자가 새로 연마한 묘한 기술을 배우게 되었으니 영광스럽군! 자, 어서들 덤벼라?" 장평은 강남 사공자의 큰형이며, 네 사람 중 비교적 지중(持重) 한 편이다. 그는 중주이고는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을 알기 때 문에, 비록 지금은 두구 혼자지만 안심할 수 없어 공격을 꺼려했 다. 강남 사공자는 오 년 전에 무당산에서 패한 후로 오만 불손한 태도가 약간 고쳐졌다. 그러나 당대 일류 고수들과 무공을 비교할 수 없게 되자. 네 사람은 강호에서 할 일 없이 방황하며 여자들이 나 건드리고, 약자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사공자는 무당산에서 패한 이후, 이를 악물고 어려운 무공을 연 마했다. 실지로 그들의 야망은 대단했으며 근 사오 년 만에 강호에 나온 것이며 그 이유는 무시무시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하나는 무림에 신출귀몰한 소년 협객이 나타났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년간 은신하였던 혈령자 심목풍이 다시 강호에 나왔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소영이 백화산장에 들어가 심목풍과 한 패가 됐다는 것이다. 이 소식은 사공자의 마음에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이 들은 귀주로 오게 된 것이다. 귀주에 당도해 보니 과연 가는 곳마 다 눈에 띄는 게 무림 인물들이었다. 사공자는 오다가 고수들이 운집해 있음을 보았으므로, 행동을 감 히 태만히 할 수 없었다. 중주이고는 무림에서 명성을 날린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이익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해 냈다. 장평은 그들에게 패한 적이 있는지라, 그 당시의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만만찮은 적수라는 것을 알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갑자기 두구가 큰소리로 웃었다. "사공자는 왜 싸우려하지 않지? 꼭 내가 일일이 청해야 되겠나?" 왕검이 성을 버럭 냈다. "말버릇 하나 좋군!" 왕검이 한 손으로 긴 칼을 뽑아 찔렀다. 두구는 재빨리 몸을 돌 려 왕검의 공격을 피했다. 그의 양손에는 두 가지 무기가 돌려 있 었다. 한 손엔 은권(은으로 된 가운데가 빈 원형의 무기)를 들고, 또 한 손엔 철필(鐵筆)을 들고 있었다. 이때 이파가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여러분, 기왕 합박검진을 맛보겠다니 우리는 그의 원대로 해줍 시다." 장평은 이왕 벌어진 싸움이라면 이참에 두구를 없애는 것도 좋겠 다고 생각하였다. 사공자는 일제히 사방에서 장검을 휘두르며 두구를 공격하였다. 두구는 은권과 철필을 동시에 휘두르며 사공자의 공격을 막았다. 강남 사공자의 검은 갈수록 빨라졌다. 순식간에 이십여 검을 치고 받았다. 두구는 자신의 실력만 믿고 사공자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대적하고 보니 의외로 강하지 않은가! 강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 러나 안간힘을 다해 은권과 철필로 동시에 사공자의 검을 막아 내 기에 진땀을 흘렸다. 한편 강남 사공자는 연거푸 공격을 하였으나, 허사라는 것을 알 고 은근히 두구의 검법을 존경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중주이고의 이름은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만약 단독으로 상대한다면 눈깜짝할 사이에 당하겠군!" 장평은 두구가 상상외로 공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다가 만약에 상팔이 나타나 합세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자기네들이 더욱 승산이 희박하여질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즉시 검법을 변경하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두구를 없애야겠다고 생 각한 때문이었다. 순간, 사공자의 검이 갑자기 빨라졌다. 네 개의 검이 어찌나 빠른지 그것은 아예 여러 겹의 검막으로 보 였다. 차차 전세는 바뀌어 두구가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소영은 몸을 숨긴 채, 두구가 위기에 처하여 응수할 수 없는 것 을 보고 생각했다. '사공자가 합세했으니, 이때 나도 암암리에 그를 도와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 기회에 두립타혈(豆粒打穴)법이 얼마나 위력이 있 는지 시험해 보자.' 사방을 두루 살피며 항아리에 가득 차 있는 녹두를 움켜 쥐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한 알을 상대방에게 겨냥하여 쏘았다. 이때 장평은 검을 들어 두구의 가슴을 찌르려는 찰나였다. 그의 높이 쳐든 손은 갑자기 노회혈에 자극을 받자 점점 느려졌다. 이 수법은 소영이 처음으로 시험해 본 것이어서 정확치 못해 혈 도를 명중시키지 못했으나, 장평의 검세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하 였다. 장평의 검세가 느려지자, 두구는 이 때라고 생각하고 은권을 계 속 휘두르며 철필로 장평의 검을 막았다. 풍기운용(風起雲湧)식으로 공격하여 세 사람의 검을 한꺼번에 막 았다. 장평이 공작개병(孔雀開屛)식으로 반격하고 이파와 조광이 양쪽 에서 협공하였다. "자, 우리 형제의 합박검법의 맛이 어떠냐?" "예리한 검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 그렇지 않다면 어찌 내가 자 유자재로 너희들과 상대할 수 있겠느냐?" "그럼 한번 더 해 볼까?" 장평이 혈도를 맞지 않았다면, 어찌 두구가 자유자재로 대적할 수 있겠는가? 울며 겨자 먹기로 장평은 다시 대적하려 하였다. 두구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들의 합박검진은 나를 죽일 수 없다. 그러나 나도 이들을 이 기기엔 너무 벅차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깔보고 건방지게 구는데 어떻게 한다?' 이때 갑자기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좋아, 귀형제 네 사람과 우리 두 형제이니, 이 장사도 할 만하 니 한 번 해 보세." 두구는 웃음소리만 듣고도 상팔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평은 둥근 얼굴에 배가 뚱뚱한 상팔의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이빨 사이로 한 마디 내뱉었다. "늦었군...." 상팔은 미소를 지었다. "형제는 다른 곳에서 장사를 좀 하느라고 한 발 늦었소. 여러분 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장평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몸을 숨겨 상인(傷人)을 하니 어찌 대장부가 할 짓인가?" 상팔은 약간 머뭇거리다 한바탕 웃어제쳤다. "병(兵)은 적을 이기기 위해 속임수를 써도 죄가 되지 않는 법, 설사 내가 일찍왔다고 해도 너희들에게 왔노라고 정체를 밝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주이고는 쌍동이 같은 것들이라, 난 이미 모처에 네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이번은 정말 네가 추측한 것이 틀렸다." 두구는 냉랭히 쏘아 보았다. "이번 기회에 너희를 없애 많은 여자들을 보호해야겠다." "재물을 목숨같이 보는 두 양반도 따지고 보면 우리보다 나을 것 없지." 이때 금란은 소영이 숨어 있는 내실 창쪽으로 다가 섰다. 그리고 나직이 아무도 듣지 못하게 말했다. "공자, 저 사람들은 중주이고예요? 공자는 그들을 찾으려고 하 지 않았어요? 왜 부르지 않습니까?" "급히 서둘 필요 없소. 저들의 인품을 살피려 하오." 이때 상팔이 외쳤다. "우리 형제는 비록 재물을 좋아하지만 절대로 남을 해치고 강탈 한 적은 없다." 상팔은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 년 동안 네 분은 필시 특수한 학문을 익혔겠지?" 상팔이 또 한바탕 웃더니 품 안에서 금산반(주판)을 꺼내 들었 다. 그것을 흔들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번쩍하였다. 장평이 먼저 장검을 곧추 세우자, 나머지 삼공자도 동시에 대적 할 태세를 갖췄다. 두구는 날쌔게 우측으로 몸을 돌려 다가섰다. "이 네 놈들은 합박검진을 연마했으니, 우리는 양쪽으로 공격하 여 들어갑시다." 상팔은 비웃듯 웃으며 좌측으로 돌아 금살반을 휘둘렀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흥정할 생각은 없는지? 만약 우리가 싸운 다면 다 손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장평이 손에 든 검을 휘두르자, 사공자의 위치는 갑자기 사각형 으로 대진할 기세로 바꾸었다. "흥정은 무슨 흥정이냐? 어서 덤벼라!" "그럼 손해를 보겠군. 만약 너희들이 나의 조건을 수락한다면 ....."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개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두구는 상 팔이 평소 지계(智計)가 특출하다는 것을 알고 피식피식 웃으며 철 필을 들었다. 그러나 즉시 공격하지는 않았다. 장평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조건이냐?" "지금 이 귀주 부근엔 고수들이 운집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 지?" 왕검이 대꾸를 했다. "우리가 장님이 아닌 이상 다 보았다." 이때 개짖는 소리가 점점 크고 사납게 들려 왔다. 분명히 모사 (초가집)를 향해 사람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상팔은 창가에 서 있는 금란을 보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너는 신풍방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겠지?" "그렇다." "그럼 신풍방주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고 있겠군?" "우리는 신풍방이라는 것만 들었을 뿐, 방주를 만나 본 적은 없 다." "그럼 내가 가르쳐주지. 신풍방주는 아주 젊고 아름다운 절세의 한 소녀이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 "물론 관계가 있다. 너희들은 색(色)을 좋아하고 우리는 재물을 좋아 하며, 그 신풍방주가 재색을 모두 구비한 인물이니, 만약 우 리와 합세하여 해치운다면, 쌍방이 다 이익이 있지 않겠는가?" 장평이 비로소 긴장을 거두고 타협조로 말했다. "그럼 우리와 같이 그 신풍방을 처치하자는 건가?" 39. 신풍방의 인질 상팔은 강남의 네 공자를 한 번 바라 보고 수판을 놓기 시작 했다. "일일은 일, 이사는 팔, 삼팔은 이십사....." 강남의 네 공자는 상팔이 수판을 놓는 것을 보고, 장사를 하는 태도가 그럴 듯하여 속으로 우습기도 했다. 그러나 냉면철필(冷面鐵筆) 두구는 그가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매번 곤경에 처할 때마다 수판을 퉁기며 행동을 늦췄기 때 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팔은 수판알을 퉁기며 정세의 길흉 을 점쳐 보는 수도 있었다. 두구는 상팔과 수십 년을 같이 다녔지 만, 이렇게 수판을 퉁기는 것을 본 것은 불과 서너 번밖에 되지 않 았다. 상팔은 잠시 수판을 놓더니 이상한 표정으로 창문가에 서 있는 금란(金蘭)을 바라 보다가 돌연 수판을 들고 낮게 소리쳤다. 그러자 멍멍거리며 사납게 짖던 두 마리의 검은 개가 대나무 울 타리를 훌쩍 넘어 상팔에게로 뛰어 왔다. 송아지만큼이나 크고 사납게 생긴 두 마리의 개는 상팔의 뒤에서 번쩍이는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일진풍(一陳風) 장평(張萍)은 상팔이 무슨 방법으로 합작(合作) 할 것 인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팔은 그것을 잊었는지 우 뚝 서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상팔이 무슨 연극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네 공자의 속은 모두 답답했다. 순간, 닫혀 있던 사립문이 열렸다. 차림새가 괴상 한 사람들이 한 패 몰려 들어 왔다. 맨 먼저 들어 온 마르고 키가 큰 체구에 흑의를 입은 대한이 눈 을 흘기며 냉랭히 말했다. "과연 너희들이로구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잘 만 났다." 상팔은 두 대한의 신분을 알고 있는 듯이 하하 웃었다. "좌형(左兄), 방형(方兄)이 왔으니 방주도 역시 왔겠군." 그 신풍방주의 두 앞잡이인 철판좌비(鐵判左飛)와 원혼방횡(寃魂 方橫)이었다. 그 두 사람 뒤에는 가슴에 황금색 작은 뱀이 수놓아진 흑색 도 포를 걸친 바싹 마르고 얼굴이 검은 괴인이 서 있었다. 그 괴인은 비록 키는 작았지만, 두 눈은 몹시 예리하게 빛났다. 그 괴인 뒤에는 또 네 사람의 흑의 대한이 서 있었다. 모두 등에 귀두도(鬼頭刀)를 메고 있었다. 철판좌비가 냉소했다. "우리 방주가 어떠한 신분인데 그리 쉽게 볼 수 있겠느냐?" 가슴에 황금색 뱀을 수놓은 흑도포를 입은 도인도 냉정히 말했 다. "나는 신풍방주를 보조하는 금사령주(金蛇今主)요. 할 말이 있으 면 내게 하시오. 내가 사정을 참작하여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또 방주에게 전할 수도 있소." 상팔은 웃었다. "그대의 말을 들으니 신풍방에서 지위가 높은가 보군." 철판좌비가 끼어 들었다. "방주 밑에는 보조 영주가 세 사람 있는데 각기 책임이 있지." 상팔도 빙그레 웃었다. "그렇군. 그럼 실례했소." 금사령주는 싸늘하게 웃었다. "오 년 전에 그대는 본방과 충돌한 적이 있지요? 그때 나는 일이 있어 출타중이어서 귀하를 모시지 못했는데, 그 일을 잊지 않았겠 지요?" 상팔은 껄껄 웃었다. "우리 장사하는 사람은 오직 이해 관계를 추구할 뿐, 은혜와 원 수는 기억하지 않소. 오 년 전의 일은커녕 석 달 전의 일도 계산이 남아 있지 않는 한 기억하지 못하오." 금사령주는 냉소를 지었다. "하나, 본방주는 그때 중주이고가 방해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고, 몹시 이를 갈고 있소. 오늘 내가 그대들을 만났는데 어찌 쉽게 놓 아 주겠소?" 두구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놓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소?" 금사령주는 날카롭게 응수했다. "수고스럽지 만 나와 동행해야겠소." 상팔이 웃었다. "그럼 먼저 흥정을 해 봅시다. 우리는 손해 볼 일은 하지 않으니 까." 금사령주가 자기 뒤에 있는 흑의를 입은 네 사람에게 눈짓을 하 자 네 사람은 즉각 등에 메었던 귀두도를 뽑아 들고 그들을 포위했 다. 두구는 재빨리 상팔과 아홉 척 거리를 두고 철필로 가슴을 보호 했다. "무기에는 눈이 없다. 손을 움직이면 죽지 않으면 다칠 테니, 그 래도 두렵지 않다면 달려 들어라." 아홉 척의 거리는 꼭 알맞은 것이었다. 네 흑의 사람들은 둘을 포위할 수 없으나, 둘은 그들에게 전후 협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네 흑의인들은 갑자기 두 조로 나뉘어져, 두 명씩 각각 두 사람을 포위하고 협공을 했다. 번쩍이는 검광이 주위를 감싸고 종횡무진하였다. 장평이 검을 쥐 고 있다가 검진(劍陳)을 거두고 관전을 하려고 하자, 금사령주는 의심을 품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들이 합세를 못하게 하라!" 원래 금사령주는 견식이 풍부한지라, 한눈에 네 공자의 합세검세 를 눈치채었다. 또한 합박지술(合博之術)의 위력이 크다는 것을 알 고 있었으므로, 장평이 퇴진하려고 검을 들때, 금사령주는 검진을 변화시킨 줄 알고 선수를 쳐서 합세를 못하게 경고한 것이다. 개도이귀(開道二鬼), 철판좌비와 원혼방횡은 과거에 중주이고의 맛을 본 적이 있어 그들의 무공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금사령주가 자신들에게 명령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 다. 그런데 강남 사공자는 별것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 로, 금사령주의 명이 떨어지자 잘 됐구나 하고 덤벼 들었다. 장평은 세 형제를 데리고 수수방관하고 있다가 중주이고가 기진 맥진하게 되면 어부지리를 얻을까 했는데, 뜻밖에도 먼저 사공자를 제압하여 합세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듣자 화가 치밀었다. 장평은 즉시 장검을 휘둘러 좌비를 막았다. 왕검(王劍), 이파(李 波), 조광(趙光)은 그 두 사람을 포위하여 동시에 대들었다. 순간적으로 한망(寒芒)과 검기가 하늘에 가득하게 되어, 네 사람 을 검광에 휩쓸리게 했다. 강남 사공자의 검세가 마치 폭풍우처럼 횝쓸어 오자, 개도이귀는 미처 무기를 빼들 시간이 없었다. 금사령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들이 사공자의 검세에 휘말릴 줄은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었다. 네 명의 귀두도를 든 대한들도 중주이고와 얽혀 검광과 필영(筆影)이 뒤범벅이 되어 격전이 한창 이었다. 금사령주는 이 일전이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주 이고는 비록 이 대 사이지만 우세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더우기 개도이귀의 무기를 빼들 여분도 없어 생사가 급박해 금사령주는 부 득이 두 사람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즉시 허리에서 금사편(金蛇鞭)을 빼어 들고, 큰소리를 치며 사공자의 검세에 맞서 돌진했다. 장평은 장검으로 금사편을 향해 휘두르면서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강남 사공자는 합박검진(合博劍陳)을 수 년 간 연마했다. 또한 방금 두구와 악투를 했기 때문에, 사공자의 손이 풀려 검세는 더욱 예민했다. 장평이 후퇴하자 왕검, 이파, 조광도 두 보씩 후퇴하면서 검진을 확장하여 금사령주까지 검세권에 몰아 넣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 검세가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좌비와 방횡은 즉시 무기를 빼 들었다. 좌비는 두 개의 짧고 작은 낭아봉(狼牙棒), 방횡은 두 개의 상문 장(喪門杖)을 들었다. 금사령주는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어떻게 되든지 나는 너희들 합박검진의 맛을 좀 보겠다." 그는 금사편으로 네 사람을 연속적으로 한 초씩 공격했다. 그의 금사편은 극히 정묘하게 만들어져 마치 살아 있는 독사같아 몹시 공포를 느끼게 했다. 강남 사공자는 뱀의 입에 암기가 있는 줄로 믿어, 감히 검으로 그것을 막지 못하고 동시에 뒤로 물러나 검진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금사령주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네 사람의 합박검진이 고작 이거냐?" 장평은 냉소하고 장검을 휘둘렀다. 그 검진은 장평이 주도하는 것으로, 나머자 세 사람은 그를 도와 주는 역활이었다. 장평의 검 세가 약간 빨라지자 그들도 따라 빨라지며 검진도 축소되었다. 금사령주는 깜짝 놀라며 금사편을 더욱 세차게 휘둘러서 네 사람 의 검세를 방어했다. 좌비, 방횡은 각기 낭아봉과 상문장으로 동시에 공격하였다. 네 공자는 표면적으론 우세한 것 같았지만 내심 두려웠다. 금사 령주는 금사편의 초술이 예측할 수 없을만큼 극히 순간적이고, 약 간의 틈만 있어도 진초하여 합박검진의 변화를 저지했기 때문이었 다. 악전이라 쌍방은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얼었다. 격전 중 갑자기 비명소리가 났다. 두구를 포위했던 두 흑의 대한 중 하나가 두구의 철필에 오른쪽 어깨에 상처를 입어 선혈이 낭자 했고, 무기는 땅에 떨어져 있먼다. 나머지 한 사람이 두구와 맞섰 으나, 두구의 은권(銀圈)과 철필에 전전 긍긍했다. 금사령주는 상대방의 무공이 뜻밖에 높아 부하가 상처를 입자, 몹시 초조해졌다. 그렇다고 구원할 수도 없었다. 그때 상팔이 웃음소리와 함께 호령을 하였다. "넘어져라!" 포위를 하고 있던 두 흑의 대한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무기를 떨어뜨리며 나가 떨어졌다. 상팔이 두 사람과 조금 겨누어 본 뒤, 승산을 파악하고 절초를 연속 가하여 두 사람의 혈도를 점 했기 때문이었다. 두구가 외쳤다. "너도 넘어져라." 은권으로 귀두도를 봉채하고 몸을 날려 대한의 왼쪽 가슴을 차 버렸다. 대한은 칠, 팔 척 밖으로 나가 떨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상팔은 들고 있는 금산반을 흔들어 보광(寶光)을 번쩍거리며 웃 었다. "사위(四位) 내가 도와 줄까?" 장평은 코웃음쳤다. "필요없소." 검세가 빨라지고 공격은 더욱 예리해졌다. 중주이고는 네 사람을 물리쳤는데, 자기들은 세 사람을 이겨 내지 못하자 수치심이 치솟 아 검을 휘두르며 모험적으로 진초하여 금사령주를 향해 찔렀다. 금사령주는 자기 부하가 넷이나 부상당하는 것을 보는 바람에 검 세를 약간 소홀히 했다. 순간 장평의 모험적인 일 초에 엉겁결에 몸을 한쪽으로 피했다. 장평은 호기를 놓칠세라 즉시 오른팔에 힘을 주어 찔렀다. 검끝은 여지없이 금사령주의 오른쪽 배를 찔렀다. 찢어진 옷 사이로 선혈이 흘러 나왔다. 금사령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배를 움켜 잡고, 금사편을 다시 휘둘러 장평에게 맞섰다. 장평은 자신있게 하하 웃었다. "옛말에 적을 잡아도 두목을 잡으라고 했소. 금사령주가 상처를 입었으니, 두 분은 저 네 대한과 악전할 필요가 없을 걸 그랬소." 바로 중주이고에게 한 말이었다. 중주이고는 비록 네 사람을 물 리쳤으나 모두 무명 소졸일 뿐이고, 자기는 무공이 가장 높은 금사 령주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자랑이었다. 상팔이 급히 말했다. "어서 금사편을 막으시오. 신경 쓸 겨를이 없소." 장평의 검이 금사편과 맞부딪쳤는가 했는데, 어느새 금사편은 갑 자기 옆으로 빠져 장평에게 뻗어 나갔다. 장평은 깜짝 놀라 급히 왼쪽으로 피했으나, 금사편은 이미 장평 을 갈겼다. 왕검, 이파가 양쪽에서 금사령주에게 대들었다. 좌비와 방횡, 두 사람 이 공격에 맞섰다. 장평이 상처 입은 것을 보고 삼공자가 다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강남 사공자의 합박검진은 자연히 흐트러졌다. 금사령주는 앞으로 몸을 살짝 굽혀, 옆으로 공격한 조광의 검세 를 피하면서 조광을 후려쳤다. 조광은 장검으로 금사편을 막았다. 그러나 때가 늦어 왼쪽 허벅다리를 맞고 말았다. 조광은 급히 외쳤다. "두 형님, 조심하시오. 저자의 무기는 보통 것과 다르오." 금사령주는 냉소하며 두 사람의 협공을 피해 갑자기 세 발짝 뒤 로 물러났다. 금사령주와 장평의 거리가 가까와졌다. 일격을 가한 다면 틀림없이 금사령주는 몸을 돌려 반격을 할 것이니, 그 기회에 두 사람으로 하여금 협공을 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장평은 검을 들었다. 그러나 검을 쓰려는 순간, 오른손의 힘이 빠지고 장검은 땅에 떨 어졌다. 금사령주는 코웃음을 치며 장평의 왼팔을 잡으려고 했다. 장평은 자신의 팔을 잡으려는 금사령주의 손길을 피할 힘이 없었 다. 순간, 보광을 번쩍이며 금사령주의 왼손을 치는 것이 있었다. 금 사령주는 급히 손을 거두었다. 상팔이 그에게 다가서며 금산반을 휘둘렀다. "내가 그대의 초를 받겠소." 금사령주는 오른팔을 굽혀 금사편을 거두었다. 왕검은 장평에게 급히 달려가 물었다. "중상인가요?" 장평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중상은 아니지만, 독성이 극렬해 오른팔이 마비되어 쓸 수가 없 어." 이파가 조광에게 말했다. "사제(四弟), 어서 운기하여 혈도를 짚어 독기가 내장으로 못 들 어가게 해야지." 상팔은 금사편의 독이 극렬해 장평의 오른팔이 힘없이 처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금사편에는 극독이 있지만, 내가 제거해 버릴 가능성이 있 다. 차라리 선수를 쓰는 게 상책이다.' 그가 금산반을 흔들자 보광이 유동하여 눈이 부셨다. 붉은 빛이 주위에 가득하고, 그는 질풍같이 금사령주를 공격해 갔다. 상팔의 금산반의 알은 모두 무기로 쓸 수 있었다. 금사령주는 비 록 무공이 높았지만, 이 짧은 거리에서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눈 에서 불꽃이 튀었다. 몸의 주요 혈도에 수판알이 명중되어 그는 쓰 러졌다. 개도이귀는 놀라는 한편 기가 죽어 손에 들고 있던 무기는 위력 을 잃었다. 두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은권으로 낭아봉을 막 으면서 철필로 좌비의 어깨에 일 초를 점했다. 좌비는 어깨를 움츠 려 철필에 대비했으나, 이번에는 두구의 발에 정강이를 채였다. 그 는 비명을 지르며 육, 칠 척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상팔은 번개같이 방횡의 등에 일격을 가했다. 방횡도 여지없이 나가 떨어졌다. 상팔은 수판알을 주워 집어 넣었다. 수판알은 몹시도 반짝거렸기 때문에 모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장평과 조광은 몸에 독성이 번 져 상처에서 자주빛의 피가 흘러 내렸다. 왕검은 장검을 들고 금사령주에게 달려가 검을 목에 대고 족쳤 다. "해독제가 어디 있느냐?" 금사령주는 비록 상팔의 수판알에 주요 혈도를 맞았으나, 정신을 잃지는 않았으므로 오기를 부렸다. "금사편은 여러 가지 무서운 독으로 제조했는지라, 이에 명중되 면 전신의 근육도 수축하여 죽는다. 나는 생포된 몸이니 너희들 마 음대로 해라." 왕검이 코웃음쳤다. "잘 생각했어. 하지만, 나는 단검에 그대를 죽이지 않겠다. 살을 조금씩 잘라내, 고통을 느끼며 천천히 죽어 가도록 하겠다." 이때 이파가 즉시 달려와 금사편을 잡았다. "우리도 이 채찍으로 이자를 상하게 하면 되지." 금사령주는 깜짝 놀랐다. "잠깐!" 이파는 채찍을 들고 금사령주를 바라 보며 냉소했다. 상팔이 너털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자는 내가 잡았으니 죽이고 살리고 할 때는 적어도 나에게 손 짓이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파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허락을 안하겠단 말씀이오?" 상팔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 장사하는 사람은 이해를 잘 따지는데, 어찌 무조건 허락할 수 있겠소? 생각해 봅시다." 왕검이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시오. 무슨 보답을 할까요?" 상팔은 갑자기 몸을 날려 금사령주를 붙잡고 오 척 밖으로 비켜 섰다. 두구가 왕검과 이파를 막아 섰다. "두 분은 움직이지 마시지. 서로 상서롭지 못할 테니까." 상팔은 금사령주에게 물었다. "해독제는 어디 있소?" 금사령주는 대답했다. "해독제는 우리 방주가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얻으려면 방주님 께 가야 할 것이오." 상팔은 껄껄 웃었다. "나는 그대 말을 믿지 않소." "나는 혈도를 짚혀 반항할 수도 없으니 내 몸을 수색하시오." 두구가 냉정 한 말투로 끼어 들었다.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이 금사편을 써야 되겠군." 상팔은 금사령주를 노려 보며 웃었다. "내 수법이 악랄하다고 탓하지 마시오." 그는 금사편을 들어 금사령주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금사령주가 다급하게 외쳤다. "만약 몇 시간 뒤에 해독제를 얻는다 해도, 저 두 친구는 구출할 수 없게 될 것이오." 두구가 냉정하게 말했다. "최소한 그대와 같이 죽는 수밖에...." 금사령주는 말하려다 말고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장평과 조 광은 공력을 운기하여 독성에 대항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안색을 보아 독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왕검이 돌연 몸을 날려 금사령주를 장검으로 찌르려 했다. 상팔 은 재빨리 발로 검을 차며 동시에 금산반을 휘둘렀다. 금산반으로 장검을 막고, 왕검을 걷어 차 오 척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이 자는 오직 속히 죽기를 바라고 있는데, 칼로 찌르면 그의 소 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왕검이 소리쳤다. "해독제도 가지고 있지 않다니, 갈기갈기 찢어 죽여 분풀이나 해 야지요." 상팔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기에 극독이 있는데, 해독제가 몸에 없다는 말은 그대만이 믿 겠지." 상팔이 말을 이었다. "내가 금사편으로 이자의 주맥을 상케 했으니, 독성은 즉시 혈관 을 따라 번져나가 그대의 두형보다 발작이 빠를 걸세." 순간 금사령주는 눈을 번쩍 뜨고 상팔을 바라보았다. "해독제가 어디 있다는 것을 말한다면, 우리를 어떻게 조치하겠 소?" 상팔은 다시 수판을 놓았다. "우리는 둘이 상했고 그쪽은 한 명 사망에 여섯 명이 부상했으 나, 죽은 것은 셈에 넣을 수 없고, 우리도 두 사람을 놔주겠소." 금사령주는 다급히 말했다. "누구 누구요?" 상팔이 대답했다. "그대를 제외하고 다섯 사람 중에서 마음대로 선택하시오." "왜 나를 제외하는 거요?" 상팔은 픽 웃었다. "귀하는 신분이 높아. 따라서 가격도 높으니 남겨 두었다가 신풍 방주와 흥정을 해야겠소." 이때 왕검이 화를 내며 말했다. "우선 해독제를 내 놓고 흥정하는 것이 어떻소?" 금사령주가 비웃으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하지?" 왕검은 약이 올라 장검을 휘두르며 큰소리로 고함쳤다. "네놈을 죽이겠다." 두구가 철필을 들며 끼어 들었다. "큰일을 위해 왕형은 흥분하지 말게나." 왕검은 이를 갈며 말했다. "언제고 이 장검으로 네 놈을 찢어 놓겠다." 금사령주는 비웃었다.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상팔이 냉정하게 끼어 들었다. "강남의 사공자는 모두 강호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인물이라 그 대의 꾀임에 넘어 가지 않을 것이오. 그대가 그들을 격노케 한다 해도, 결코 단번에 그대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왕검은 정말 죽이고 싶었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금사령주는 할 수 없이 태도를 바꾸었다. "내가 해독제가 있는 곳을 말해 줄 테니 조건을 하나 들어 주시 오" 상팔은 빙그레 웃었다. "무슨 조건인지 먼저 말해 보시오." 금사령주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해독제는 다섯 사람을 구출하기에 족하니 저 두 사람 외에 나도 복용해야 되겠소." 상팔이 말했다. "죽음보다 독성의 고통이 무서운 모양이군. 이 독이 얼마나 무서 운지를 알 수 있어." 그는 혼자말을 지껄이고 즉시 금사령주에게 말했다. "그야 물론이오. 우리도 그대를 남겨 두었다가 신풍방주와 흥정 을 해야 하므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대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만 있지는 않을 것이오." 금사령주는 가볍게 탄식했다. "그 해독제는 머리카락 속에 숨겨져 있소." 왕검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장검을 휘두르며 질풍같이 금사령주의 머리에 손을 뻗쳤다. 상팔은 금산반을 내밀어 왕검의 검세를 봉하 고 냉랭히 말했다. "왕형, 또 이렇게 광분한다면, 나는 해독제를 가지고 이곳을 떠 나버리겠소." 왕검은 그가 만약 정말로 해독제를 가지고 떠나 버린다면 속수무 책이라 생각하고, 할 수 없이 기침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상팔은 금사령주의 머리카락을 헤쳐 보았다. 과연 조그만 흑색목 합(木盒)이 있었다. 그 목합을 열어 보니 안에는 담홍색의 환약 다 섯 알이 들어 있었다. 왕검은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우리 두 형제는 독성이 이미 발작하여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으 니, 우선 두 알만 주시오." 상팔이 왕검에게 핀잔을 주었다. "급해도 좀 참아요." 이번엔 시선을 돌려 금사령주에게 물었다. "이 환약이 틀림없소?" 금사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상팔이 말했다. "좋소. 먼저 한 알을 먹어 보시오." 금사령주는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입을 벌리고 기다렸다. 상팔은 한 알의 담홍색 환약을 금사령주의 입에 넣으려다 말고 두구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데리고 오시오." 금사령주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두구는 등에 귀두도를 메고 있던 대한 중에서 비교적 경상을 입 은 자를 데리고 왔다. 상팔은 금사령주를 뚫어져라 쳐다 보고 하하 웃었다. "다섯 개의 환약이 있으니, 하나쯤 낭비해도 괜찮을 거요." 그는 한 알을 흑의 대한의 입에 집어 넣었다. 약을 먹은 대한은 두 손을 바르르 떨다가 죽어 버렸다. 왕검은 이를 악물었다. "독약이구나." 상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독약이야. 만약 왕형의 말대로 했다면, 지금쯤 당신네 형제 중 두 형제는 죽어 가고 있을 걸세." 왕검은 고개를 수그렸다. "상형의 견식이 해박한 데는 그저 놀랄 뿐이오." 상팔은 금사령주를 응시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권고하지만 죽고 싶은 일념을 버리시오. 모래 한 알을 움 직여도 나는 알고 있소." 금사령주는 체념하듯이 말했다. "내 왼쪽 피화(皮靴)를 찢어 보시오." 두구가 재빨리 철필로 그의 왼쪽 피화를 찢었다. 조그만 옥병이 나왔다. 상팔은 옥병을 집어 들었다. 안에는 역시 환약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왕검이 재빨리 물었다. "이 환약은 틀림없겠지?" 상팔이 대신 대답했다. "틀림없지." 그는 두 알을 꺼내 왕검에게 주었다. 소영은 창 밖에 숨어 보다가 강호의 교활한 지략에 혀를 내둘렀 다. '강호에 이렇게 음모가 백출하니 자칫 잘못하면 큰일나겠군.' 왕검은 두 알의 환약을 손바닥에 놓고 바라 보았다. "상형, 이 약도 독약이라면 우리는 두고두고 원망할 것이오." 두구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의심이 나면 먹지 말게." 왕검은 하하 웃었다. "당신네 중주이고를 의심한 것이 아니라....." 그는 시선을 금사령주에게 돌렸다. "저자의 간계가 두렵소." 상팔이 참견했다. "나는 반평생을 강호에서 유랑하며 지냈기 때문에 내 눈은 속이 지 못하지. 내 말을 믿겠다면 복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 지." 장평이 말했다. "중주이고의 명예는 탁월하다. 둘째 동생, 어서 약을 가져 오게. 내가 먼저 먹겠네." 왕검은 약간 주저하다가 천천히 장평에게 다가가 약을 건네 주었 다. 장평은 약을 받아 들자, 보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조광이 입을 열었다. "큰형님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내가 어찌 두려워하겠소. 둘째 형 님, 어서 약을 주시오. 나도 복용하겠소." "좋아, 우리 강호 사공자는 생사를 같이 하니까 만약 형님과 넷 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셋째도 나도 살아 남을 필요가 없다." 왕검은 이렇게 말하면서 약을 주었다. 소영은 이 모습을 지켜 보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강호의 사공자는 비록 좋은 일은 하지 않지만, 의리를 퍽 중요 시하고 있구나.' 상팔은 장평과 조광이 약을 먹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한 알을 꺼 내서 금사령주에게 주었다. 그리고 차례로 그의 혈도를 짚으며 말 했다. "수고스럽지만 며칠 푹 쉬시오. 우리는 당신을 이용하여 신풍방 주와 흥정을 하고 싶소." 금사령주는 길게 탄식했다. "방주는 내가 죽고 사는 것을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소." 상팔이 대꾸했다. "나는 귀방과 몇 번 접촉해 보았으나, 한 번도 방주와 정면으로 상대해 본 적이 없소. 만약 그가 보좌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다 처 리한다면, 물론 그대의 생사를 중요시하지 않겠지요." 상팔은 시선을 두구에게 돌리며 말했다. "이 귀한 금사령주와 개도이귀를 숨겨 놓게." 구는 금사령주를 들쳐 업고 개도이귀를 양팔에 끼고 급히 사라졌 다. 왕검은 장평과 조광이 모두 운기를 하여 상처가 호전된 것을 보고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는 땅에 쓰러져 있는 대한을 내려 다 보았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상팔이 대답했다. "만약 상처가 중하면 혈도를 점하여 죽여 고통을 덜 겪게 하고, 상처가 가벼우면 그들이 무공을 쓰지 못하게 한 뒤에 놔 주지." 왕검이 앞으로 나섰다. "그럼 내가 하지요. 상형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소." 그는 흑의대한을 부리나케 일으켜 세웠다. 장평과 조광은 운기를 계속 작용시킨 터라 상처가 호전되어 동시에 일어났다. 장평은 손을 맞잡고 허리를 약간 굽혔다. "구해 주어 감사하오..." 상팔은 껄껄 웃었다. "장형, 감사할 필요 없소. 나는 항상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 으니까." 장평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 형제는 상형에게 대가를 치르겠소." 그는 곧 시선을 금란에게 돌리고 말을 이었다. "저 계집이 도망칠 기회가 있는 데도 도망치지 않는 것을 보니, 반드시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일 거야. 셋째, 저 계집을 데리고 오게." 이파는 고개를 끄덕이고 금란에게 다가갔다. 그는 금란의 경공을 알고 있는지라, 함부로 상대하지 않고 장검을 뽑아 들었다. "나와 싸울 테냐, 아니면 나를 따라 오겠느냐?" 금란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이야? 나에게? 흥!" 금란이 코웃음쳤다. 이파는 장검으로 그녀의 가슴을 겨누며 냉랭 히 말했다. "건방진 계집! 너와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금란은 장검을 피하면서 이파의 오른손에 일장을 가하며 반격했 다. 이파는 버럭 소리질렀다. "건방지게 무기도 없이 반격하다니 죽고 싶으냐?" 그는 검을 마구 휘둘러 금란을 검광에 쉽싸이게 했으나 살수를 쓰지 않았으므로 금란이 이파에게 대항할 만하였다. 이파는 장검, 금란은 맨손이라 균형이 잡히지 않았으므로, 서너 초 다투자 금란 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소영은 기회를 엿보다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녹두(綠豆)를 힘껏 탄출했다. 이파의 검세는 종횡무진, 공세가 퍽 맹렬해지다가 오른 쪽 어깨의 천천혈(天泉穴)이 마비되어 손놀림이 느려졌다. 금란은 반드시 소영이 도와 줄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위험에 처해도 당황하지 않고 기회만 노리고 있던 터였다. 순간 이파의 검세가 느려지자, 그녀는 그 틈을 타 즉시 공격했 다. 오른손으로는 수휘오현(手揮五弦)식으로 이파의 왼손에 일 초를 가하고, 왼손으로는 모고신종(募鼓晨鐘)식으로 이파의 오른팔에 일 초를 가하자 이파의 장검은 즉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금란은 재빨리 이파를 걷어 찼다. 이파는 연속으로 얻어 맞아 몸 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데다, 오른쪽 정강이 밑을 채이자 비틀 거리며 육칠 보 밖으로 후퇴했다. 금란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진격하자, 왕검이 재빨리 다가서며 일검을 사출하여 금란을 저지했다. 상팔은 가볍게 탄식했다. "저 여자의 무공은 괴상하군. 그녀의 장지공세(掌指攻勢)로 봐 절대로 이형의 적수가 될 수 없는데, 이형을 힘 안들이고 제압하다 니 자세히 좀 봐야겠다." 그는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장평도 따라 다가섰다. 그때 여전히 빈손인 금란은 왕검의 검공에 몰렸다. 형세로 보건 대, 금란이 십 초를 견뎌 내지 못할 것이었다. 소영은 여전히 숨어서 손에 녹두를 쥐고 탄출할 준비를 하고 있 었다. 하지만, 상팔과 장평이 창쪽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탄출 하면 그들이 그 암기를 발견 못할 리 만무했다. 금란은 위험한 곤경에 빠졌다. 더 이상 악전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소영은 조급해졌다. 순간, 어디서 처량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상팔과 장평이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그 두 사람이 소리난 곳 으로 시선을 돌리자, 소영은 잽싸게 녹두를 탄출했다. 왕검은 승산이 짙자 상대방을 무시하여 장검을 마음대로 휘둘러 공격만 할 뿐, 수비를 소홀히했다. 하나, 뜻밖에도 검문혈(劍門穴) 이 갑자기 마비되었다. 소영의 이번 탄출은 힘을 크게 들인 것이고, 더우기 주혈에 명중 되었으므로 왕검은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금란은 왕검의 얼굴을 한 대 갈겼다. 그의 얼굴은 붉어졌다. 그 는 입으로 선혈을 토했다. 상팔은 기침을 하고 꾸벅 절을 했다. "어떤 고인인지 모르나 몸을 숨겨 보이지는 않으니, 여기서 인사 를 올립니다." 금란은 천천히 창쪽으로 물러나며 쌀쌀하게 말했다. "이 모사에는 오직 나 하나뿐이에요." 상팔이 대꾸했다. "나 상팔은 강호에서 반평생을 보냈소. 내 눈 앞에서는 절대로 몰래 모래 한 알도 움직여 놓을 수 없소. 아가씨를 무시해서가 아 니라 만약 누가 숨어서 아가씨를 돕지 않았다면, 두 번 연승하기는 커녕, 벌써 패했을 거요." 금란은 겁없이 말하며 일장을 날렸다. "믿지 않는다면 손을 써 시험해 보시지?" 상팔은 왼손으로 금란의 일격을 막으며 창쪽으로 다가갔다. "쾌남은 여자를 치지 않소. 내가 어찌 여자와 맞서겠소." 금란은 상팔이 소영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아 차릴까 봐, 쌍장을 휘둘러 순식간에 십사,오 초를 공격했다. 번번이 상팔이 막아냈지 만 그녀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두구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모양인데 맛을 보여 주어야겠 군." 상팔은 오른손을 휘둘러 또다시 금란의 공격을 막았다. "금사령주와 개도이귀는 안전하게 숨겼소?" 두구가 대답했다. "안전하오." "잘됐군." 상팔이 반격을 가하자 금란은 당황하여 계속 후퇴했다. 상팔이 하하 웃었다. "계집이 퍽도 완강하군." 그는 오른손에 몰래 내공을 집중시켜 재빨리 포풍착영(捕風捉影) 식의 일 초로 금란의 오른팔 혈맥을 후려 쳤다. 금란은 소영이 암암리에 도와줄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소영은 잠잠했다. 오른팔이 즉시 마비되었다. 반격할 힘이 없었다. 상팔은 미소를 말했다. "어느 고수인지 나오지 않고서 내가 여자를 괴롭힌다고 하지 말 라." 순간, 그림자 하나가 창문으로 훌쩍 날아 왔다. "그녀를 놔 주시오." 상팔은 그를 바라보고 깜짝 놀라며 금란을 놓았다. "형님이시군요?" 두구도 겸손하게 인사를 했다. 장평은 그 사람의 나이가 불과 이 십 세 안으로 보이는데, 중주이고가 그토록 겸손하게 대하자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다. 상팔이 말했다. "나는 형님이 이곳에 계신 줄 몰랐소. 무례했으니 양해해 주십시 오." 소영은 천천히 말했다. "두 분은 겸손해 할 필요가 없소." 장평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두형, 저분은 어떤 인물이오?" 두구가 대답했다. "우리 형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오." 장평은 또 물었다. "그럼 반드시 무림에서 유명한 분이겠지요?" 두구가 말하기 전에 소영이 먼저 대답했다. "나는 소영이오." 장평도 손을 맞잡고 절했다. "존함은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소 오늘 여기서 뵙게 되는군요." 소영은 장평이 자기를 딴 소영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알고, 그에 게 자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즉시 미소지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강남 사공자의 이름을 듣고 있었소." 장평이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상팔이 강남 사공자를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오랫만에 만났으니, 많은 중요한 일들을 얘기해야 하오. 네 분은 볼 일이 있으면 가 보시오." 장평이 말했다. "오늘 구해 준 은혜는 후일에 반드시 보답하겠소. 이만 물러갑니 다." 두구는 강남 사공자가 사립문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 었다. 두구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의외의 일을 만나 그날 약속을 어겼소. 그 뒤에 형님을 찾아 두 번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백화산장까지 들어 갔으나 번번이 매복된 고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뜻밖에 여기서 만나게 됐군요." 소영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두 형제를 만났으니 좋은 말좀 해 주시오." 상팔이 물었다. "형님은 무슨 일로 고민하고 있소?" 소영이 말했다. "우선 방으로 들어갑시다." 중주이고는 고개를 끄덕여 방으로 들어 갔다. 금란이 향각(香閣) 을 들고 들어 왔다. "두 분은 차를 드세요." 상팔이 말했다. "방금 아가씨는 상처를 입지 않았소?" 금란은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요. 두 분이 시장하실 테니 가서 국수를 말아 오겠어요." 그녀는 퍽 매력적으로 생겼다. 중주이고는 그녀와 소영과의 관계 를 알 수 없었다. "그런 대접을 우리가 어찌 받겠습니까?" 금란은 방긋 웃고 주방으로 나갔다. 두구는 마른 기침을 했다. "여쭐 말이 있는데 해도 괜찮겠습니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든 해 보시오." 두구는 주저주저하면서 말했다. "큰형님과 저 아가씨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원래 나의 시녀였지만, 지금은 내 친구요." 그리고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자세히 털어 놓았다. 상팔은 그의 말을 듣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일 급한 것은 부모님을 구출하는 거요." 소영이 말을 받았다. "그 심목풍(沈木風)은 사람이 몹시 음흉하오. 부모가 갇혀 있는 곳은 경비가 극히 엄하여 어떻게 손을 쓸 방책이 없소." 상팔은 기침을 했다. "지금 형님은 행방을 은밀히 해야 하오. 심목풍이 형님의 행방을 알면 안 됩니다." 소영이 말했다. "석 달 간의 기한이 곧 지나갈 거요. 또한 심목풍은 음흉하고 악 랄하여 한다고 하면 꼭 하고 마는 사람이니 부모님의 생명은...." 상팔이 말했다. "내가 보건대, 기한이 되었다 하더라도 심목풍은 두 노인을 해치 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영의 표정은 어두웠다. "부모님은 무공을 배우지 않았는데, 그 무서운 형극을 어떻게 감 당하시겠소?" 상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상책은 기한이 되기 전에 두 노인을 백화산장에서 구출하는 것 뿐입니다." 소영은 한숨을 쉬었다. "정면으로 심목풍에게 도전할 수는 없소. 오직 암암리에 사람을 잠입시키는 수밖에 없지만, 백화산장의 경비는 극히 엄중하여 심지 어 날아 가는 새도 걸린다 하는데 몰래 손을 쓴다는 것도 가망이 없소." 상팔이 위로했다.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기한이 아직 남아 있으니, 천천히 대 책을 마련합시다." 순간, 개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상팔이 벌떡 일어섰다. "사람이 오고 있소. 형님은 얼굴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좋으니, 어서 숨으십시오." 소영은 즉시 일어나 내실로 숨었다. 상팔은 두구에게 속삭였다. "누구든 우리는 탓하지 마세." 두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개에게 신호를 해서 사람을 들어 오게 하지요." 두구가 휘파람을 불자 개짖는 소리가 멎었다. 그때 금란이 국수 를 해 가지고 들어 왔다. 상팔은 빙그레 웃었다. "아가씨, 수고했소." 두구가 낮은 소리로 다급히 말했다. "무림인이 오고 있으니, 아가씨도 피신하시오." 금란이 말했다. "우리 은란이가 개방인(介幇人)들과 이곳으로 오기로 되어 있으 니 두 분은 그녀를 오인하지 마세요." 상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하시오." 금란도 재빨리 내실로 숨었다. 두구가 밖을 내다 보니, 자그만 몸집에 남루한 옷차림을 한 거지가 안으로 급히 뛰어 오고 있었다. 상팔은 강호를 유랑했는지라, 그 사람이 개방의 고수 일진풍 팽 운(一陳風彭雲)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팽운은 뛰어 들어 오더니 문설주에 기댄 채, 두 눈을 크게 떠 중 주이고를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두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지야, 무슨 일이 있느냐?" 상팔이 무겁게 말했다. "그를 건드리지 말게. 그는 내상을 입었어." 상팔은 재빨리 다가서더니 오른손으로 팽운의 혈도 두 곳을 점했 다. 그의 기혈(氣血)에 이상이 생긴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눈을 감고 조식한 뒤에 말해도 늦지 않네." 일진풍 팽운은 스르르 눈을 감고 소형, 하고 부르더니 피를 토하 고 비틀비틀 쓰러졌다. 상팔은 재빨리 팽운을 부축했다. "소형이 어떻단 말인가?" 팽운은 더듬더듬 말했다. "소형이 이곳에 있소?" 소영은 자기 이름을 대자 급히 옥외로 나왔다. "나 여기 있소. 무슨 일인지 가히 알겠소." 팽운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가서 은란 아가씨를 구하시오." 그는 간신히 그 말을 하고 졸도했다. 40. 괴신상의 신풍방주 금란도 밖으로 나왔다. "우리 은란이가 어떻게 됐어요? 어서 말해 봐요." 상팔은 가볍게 탄식했다. "아가씨, 재촉하지 마시오. 그는 힘이 없소. 그는 중상을 입은 데다 그 말을 하는 바람에 심장을 보호할 원기를 잃었소." 소영은 물끄러미 팽운을 바라 보았다. "두 분이 잘 간호해 주시오. 나는 은란을 구하겠소." 금란도 따라 나섰다. "나도 가겠어요." 상팔이 손짓했다. "형님, 이리 좀 오십시오. 내 말을 듣고 가시오." 소영이 다급히 외쳤다. "이 팽운의 무공은 은란보다 월등히 높소. 그런데 이렇게 중상을 입었으니 은란은 더욱 위험할 것이오. 급하여 시간을 지체할 수 없 으니, 내가 다녀온 뒤에 말하시오." 그는 이미 사립문을 나가고 있었다. 상팔이 급히 외쳤다. "천하는 넓고 끝이 없는데 어디 가서 찾겠소?"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그렇지, 이 거지가 방향을 말하지 않았으니 어디 가서 은란을 찾는다?" 상팔이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급히 서둔다고 해결된 문제가 아니니, 조 급히 굴지 말고 긴 안목으로 의논합시다." 금란이 다급히 외쳤다. "나가서 찾는 것이 앉아서 기다리는 것보다 나아요." 두구가 머리를 흔들었다. "만약 은란이 만난 자가 무공이 극히 높다면 이미 피살되지 않았 으면 생포되었을 거요. 급히 서둔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만약 그 자의 무공이 대단치 않다면 그녀는 돌아 올 것이니 급히 서둘지 마 시오." 그 말은 듣기 거북했지만 일리가 있었다. "우선 이 거지를 살려 내 일의 경과를 들은 뒤에 대책을 세워야 하오. 급히 서둘면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기 쉬우니, 형님은 내 말 을 깊이 생각 해 보시오." 소영은 천천히 도로 돌아 와 힘없이 말했다. "그렇소. 그럴 수밖에 없소." 금란과 소영은 수 개월 동안 환난을 같이 했으므로 피차 자신도 모르게 깊이 정이 들어 있었다." 상팔은 금란을 바라 보았다. "아가씨는 좀 비켜 주었으면 좋겠소. 이 사람의 옷을 벗겨 상처 를 살피고 약을 써서 속히 살려 내야 하오." 금란은 곧 내실로 갔다. 두구가 팽운의 상의를 벗기자 가슴팍에 자색의 장흔(掌痕)이 있었다. 상팔은 무릎을 꿇고 자세히 살펴 보 았다. "금사장(金沙掌)이 아니면, 죽엽수(竹葉手)의 장력에 상처를 입 은 것 같소....앗! 치명적인 곳이 상해 희망이 없을 것 같소." 두구가 탄식했다. "이 사람은 협명(俠名)이 높고, 십세 정도에 강호에 발을 들여 놓아 개방의 후배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는데, 어린 나이에 뜻밖에 이런 흉화를 당했군." 소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금사장에 상했다면 내가 치료를 할 수 있으나, 죽엽수의 손에 상했다던 치료가 어렵겠소." 그는 강호에서의 경력은 비록 얼마 되지 않지만 아는 것은 퍽 많 았다. 또한 천하의 각 문파 중의 절기, 독공을 많이 알고 있었다. 장산패(蔣山貝)가 말한 각종 절기와 독공의 치료법을 많이 기억 하고 있었다. "이 작은 거지는 무공이 강한데, 특히 경공에 조예가 깊어 마치 일진광풍 같아 일진풍이라는 아호가 있소. 강남 사공자의 수령인 장평과는 호가 같지만, 하고 다니는 짓은 하늘과 땅 차이라 강호에 서는 이들을 보고 정사양진풍(正邪兩陳風)이라고 하오. 형님이 치 료할 수 있다니, 수고스럽지만 묘수로 이 사람을 구해 주십시오." 소영이 말했다. "죽엽수는 전문적으로 내장을 상하게 하여 겉으로는 상흔이 있을 뿐이나, 심장에 타격을 입어 나도 힘을 쓸 수 없소. 하지만 금사장 에 상했다면 구할 자신이 있소." 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팽운의 상흔을 누르며 살폈다. 두구 가 끼어 들었다. "그럼 형님은 이 거지를 살릴 수 있겠군요." 소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두구는 평소 말투가 퍽 냉정하고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자 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거지에게 관심을 갖고 있군.' 상팔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죽엽수에 의해 상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사장이군." 두 손으로 팽운의 몸을 계속 만지며, 한 손으로는 상처를 눌렀 다. 시간이 쾌 흐른 뒤에야 비로소 소영은 누르던 손을 떼었다. 팽운의 상처는 오직 희미한 자색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말짱했다. 그러나 팽운은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듯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상팔이 물었다. "왜 아직 깨어나지 않지요?" 소영이 대답했다. "나는 양강(陽剛)의 기(氣)로 우선 그의 죽은 피를 제거했을 뿐, 아직 그의 혈맥을 풀지는 않았소." 상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님이 더 이상 수고하시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는 팽운의 몸을 일으켜 오른손으로 그의 등 뒤 명문혈을 눌렀 다. 소영이 말했다. "나는 그의 죽은 피를 녹였을 뿐이오. 그의 내장의 상처는 아직 중하니 너무 급속히 피를 유동시키지 마시오." 상팔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잘 알았습니다." 그는 서서히 진기를 장심으로부터 팽운의 명문혈로 진입시켰다. 약 한 시진이 지나자, 팽운은 비로소 눈을 떴다. 소영이 팽운에게 나직이 말했다. "만약 팽대협의 내장의 상처가 중하지 않다면, 진기를 운기하여 가급적 상대협이 진입시킨 진기와 서로 어울리게 하시오." 팽운이 깨어나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 어서 가서 은란을 구하시오." 소영이 물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소?" "서남방 오십 리 밖에 도관(道觀)이 하나 있는데 바로 거기에 있 소." 금란이 내실에서 물었다. "은란이는 무사해요?" 팽운은 힘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생포됐고, 나는 상처를 입은 것이오. 빨리 가서 구출하 는 것이 좋소." 상팔이 물었다. "일행은 당신 두 사람뿐이었소?" 팽운이 대답했다. "그렇소. 두 사람뿐이었소. 나는 이미 마문비(馬文飛)와 약속을 했는데, 그는 시간 내에 오지 않았소." 상팔이 말했다. "됐소. 지금부터 눈을 감은 채 말하지 말고 조식을 하며 휴식을 취하시오. 그대의 진기가 경맥에 들어가면 회복은 어렵지 않소." 소영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내가 가봐야겠소." 금란도 급히 휘장을 젖히고 나왔다. "저도 가겠어요." 상팔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여자가 어디를 간다고 하지?' 소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서 악전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또한 이곳 인원이 부족하니 저 분들과 이 모사를 지키고 있으시오." 금란은 싫었지만 소영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 다. 상팔도 일어섰다. "나는 언제 갈까요?" 소영이 눈을 크게 떴다. "즉시 갑시다." 상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금란에게 나직이 일러 주었다. "무슨 일이고 두 형의 분부를 따라야 하오."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날려 상팔을 따라 갔다. 두 사람은 팽운의 말대로 그 지점을 향해 질주했다. 과연 한 도관이 눈에 띄었다. 조그만 뜰과 대전이 있고 양쪽에 상방(廂房)이 있을 뿐이었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상팔이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굳게 닫힌 대문이 활짝 열리고, 십여 세 가량의 동자가 나왔다. 상팔은 예리한 눈으로 도동을 아래위로 훑어 보고 웃었다. "너는 오늘 처음 도장(道裝)을 입었구나?" 동자가 물었다. "어떻게 아시는지......?" 그는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상팔은 빙그레 웃었다. "안에 들어 가서 소영...." 소영이 급히 말을 이었다. "중주이고가 찾아 왔다고 여쭈어라." 동자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상팔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좋아. 안에 들어가서 여쭙기 싫다면 우리가 들어 가겠다." 동자가 급히 말했다. "잠깐 기다리세요." 그는 문을 닫아 버렸다. 상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우리 지붕으로 올라 가 동자의 거동을 살핍시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지붕위로 뛰어 올라 갔다. 도동은 대전으로 뛰어 가고 있었다. 소영은 지붕에서 내려 와 동자의 뒤를 미행했다. 상팔도 소영 뒤 를 바싹 따랐다. 동자가 종종 걸음으로 대전 안으로 들어 갔다. 상팔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형님, 잠깐 멈추시오." 소영은 왼발을 문에 들여 놓고 고개를 돌렸다. "왜요?" 상팔이 대답했다. "그들의 암산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조심하는 것이....." 순간, 대전 안에서 냉랭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웬 사람이냐?" 상팔이 얼른 대답했다. "금산반 상팔올시다." "전 들어 오시오." 상팔은 제기(提氣)하여 경계를 하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형님, 조심하시오." 그는 앞장 서서 들어 갔다. 전 내에는 흉악스럽게 생긴 커다란 신상(神像)이 신위(神位)에 서 있을 뿐 동자는 간 곳이 없었다. 상팔이 고개를 들어 신상을 바라 보며 막 말을 하려고 하자, 갑 자기 신상의 입에서 냉정한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본좌를 보고 하배가 없는가?" 커다랗고 흉악한 신상은 한 눈에 주소(鑄塑)로 만들어졌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그 입에서 말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상팔은 크게 기침을 했다. "귀하는 바로 신풍방주였구료." 신상의 입에서 다시 냉랭한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바로 본좌요." 상팔이 대꾸했다. "오 년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뜻밖에도 오늘 이와 같이 황 량한 도관에서..... 하하. 인생은 죽지 않으면 다시 만나는 법." 신상이 냉엄히 소리쳤다. "본좌는 말이 많은 자가 싫소." 상팔은 소영을 바라보며 전음술로 몰래 말했다. "형님, 조심하시오. 이 대전 안에는 매복이 있습니다." 소영은 사방을 살폈다. "은란을 잡아 왔는지 물어 보시오." 상팔은 흉악한 신상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방주는 손님이 오는 것을 싫어해서 이런 괴기한 모양으로 위장 하고, 무림 동도와 상견한다는 말을 이미 듣고 있었소." 흉악한 신상이 소리쳤다. "그대는 말이 많다고 느끼지 않으오?" 상팔은 소리난 곳을 자세히 주시하면서 생각했다. '이 신상은 어떤 주물로 만들어졌는지 몰라도, 반드시 옥중으로 통하는 암문(暗門)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신상 안에 앉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왜 이런 기괴한 형으로 가장할까?' 그는 곧 대꾸했다. "할 일 없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신풍방주가 물었다. "무슨 일이오?" "방금 이곳을 지나던 우리 일행중 한 방주를 뵙고 상의를 하고 싶소. 남자는 방주한테 부상당했고, 한 여자는 생포된 것을...." 신풍방주가 말을 가로챘다. "본좌는 출도한 이래 타인과 싸운 적이 없소." 상팔이 반문했다. "방주가 아니라면 방주의 하수인이... 우리는 장사할 때 항상 공 평한 교역을 바라오. 방주가 생포된 우리 친구를 풀어 주면, 절대 로 손해 보지 않게 해 주겠소. 귀방의 금사령주를 교환 조건으로 하겠으니, 귀방의 뜻은 어떻소?" 잠시 후, 신풍방주가 냉정히 물었다. "금사령주라고?" "그렇소. 방주의 삼대 영주 중의 하나인 그를 내가 모셔 두었 소." 신풍방주는 또 물었다. "지금 어디 있소?" 상팔은 하하 웃었다. "나는 그를 은밀한 곳에 숨겨 두었지요." 신풍방주가 단호히 말했다. "좋소, 그럼 그를 데리고 오시오." 신풍방주가 교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상팔은 금사령주와 은 란을 교환할 경우, 먼저 은란의 소재를 확인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방주가 잡아 둔 사람을 본 다음에, 그가 확실히 내 친구인 가를 확인하고 나서 태도를 결정하겠소." 신풍방주가 짤막하게 물었다. "만약 아니라면 어쩔 작정이오?" "어떤 물건인지도 모르고 값을 흥정할 수는 없지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당신들은 두 사람이 왔으니 만약 지금 잡 혀 있는 자가 당신 친구가 아니라면, 지금 당신과 함께 온 사람을 이곳에 남게 하면 어떻겠소?" "그럴 수는 없소. 내가 먼저 확인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소." "좋소. 그렇다면 보여 주겠소." 상팔은 재빨리 신풍방주의 신상 뒤로 다가 갔다. 그때 신상 안에 서 노기에 찬 음성이 들려 왔다. "멈추시오. 내 허락이 있기 전에는 움직이지 마시오." 상팔은 방주의 말만 믿겠노라면서 물러났다. 방주의 음성은 여전 허 냉랭하게 들려 왔다. "내 앞에서 공연히 어물어물 딴 수작을 부리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테니 명심하오." 상팔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나는 평생을 통하여 갖은 공갈 협박을 다 받아 보았소. 그 정도 협박쯤으로는 외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 너무 가볍게 보지 마 시오." 잠깐 침묵이 흐른 다음 방주가 입을 열었다. "대전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세 번째 방이오." "좋소. 내가 먼저 가 보고 온 다음에 다시 흥정합시다." 상팔은 즉시 몸을 돌려 나가니 소영도 뒤를 따랐다. 전문을 벗어 나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과연 여러 개의 방문이 보였다. 그 중에 세 번째 문을 밀치니 소리없이 열렸다. 은란은 기다란 머리를 어깨 위에 늘어뜨린 채, 여전히 남장 그대 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소영이 큰소리로 외치며 은란에게 다가갔다. "은란, 우리는 은란을 구하려고 왔어!" 그녀는 눈을 번쩍 뜨며 황급히 말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말고 어서 물러나세요." 소영은 어리둥절했다. "왜?" "어쨌든 내 몸에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소영은 답답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은란에게 다가가며 손을 잡으 려 했다. "신풍방주가 여기 있다고 해도 조금도 두려울 것 없어." 은란은 다급한 나머지 날카롭게 소리쳤다. "내 몸에 손대서는 안 된단 말예욧!" 은란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들은 나의 몸에 이미 무슨 수작을 해 놨어요. 만약에 공자께 서 나를 붙든다면...." 소영은 다시 힘주어 말했다. "내가 상형과 함께 이곳에 온 이유는 오직 은란을 구하기 위해서 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요." 그러나 은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돼요.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물러나세요." 소영은 뒤로 몇 보 물러나서 말했다. "그럼 내가 붙잡지 않을 테니 혼자 이리 오도록 하시오." 은란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안 됩니다. 그들이 이미 나의 양팔과 다리의 혈도를 짚 어 버려서 나는 일어설 수도 없고, 손을 움직일 수도 없으며 가슴 을 펴지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끌어 내면 되지 않소?" 은란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 내렸다. "공자, 제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 천한 계집은 죽어도 상관없 지만, 공자께서 이런 모험을 겪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때 상팔이 참견하였다. "형님, 보아하니 지금 이 아가씨는 말할 수 없는 고충이 있는 것 같소. 더구나 형님께서 너무나 다급하게 구는 바람에 미처 전후를 말할 정신을 못 차린 것 같군요." "무슨 고충인지 내가 알 수가 있어야지. 은란, 어서 자세히 얘기 해 보구려." 은란은 다소 안정을 되찾은 듯 띄엄띄엄 말했다. "난 그들에게 붙잡힌 뒤로 조금 전까지 줄곧 눈이 가려져 있었어 요. 이곳에 와서야 눈을 뜰 수가 있었지요. 그러나 이곳에 다다르 기도 전에 그들은 나의 혈도를 찔러 버렸답니다. 그들이 나의 신체 에 무슨 약 따위를 바른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지만 자세히는 알 수가 없어요. 그들이 나에게 한 짓이 무슨 작용을 할지 몰라요." 상팔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한 노릇이로군. 반평생 동안 강호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 런 경우는 처음 당해 보는군. 어쨌든 형님은 바깥으로 좀 나가 보 십시오. 내가 좀 살펴 보겠습니다." "괜찮소. 무슨 변이 생기더라도 나는 응수할 수 있소." 소영은 상팔의 경력이 자기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하는 터라, 그에게 맡기고 옆에서 지켜 보고 있었다. 상팔은 우선 사방을 한 번 휘둘러 보고는 은란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아가씨는 그들이 아가씨의 몸에다 무엇을 숨긴 것 같다고 느꼈 소?" "어디 쯤에?" "아마 가슴께 같았어요." 상팔은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처녀의 가슴을 함부로 만져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난처하자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가슴께가 이상하다고 느껴지오?" "지금은 별 생각이 없으나, 그들은 결코 좋은 마음으로 그러지는 않았을 거예요." 상팔은 더욱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은란 앞으 로 바싹 다가섰다. 은란은 심신을 안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됐어요. 우선 저의 오른쪽 혈도를 풀어 주세요. 한쪽 손이라도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런 모험을 하지 않아도 돼요." 상팔은 이윽고 제비처럼 가볍게 몸을 날려 은란의 곁을 스쳐 가 면서 재빨리 일장을 가했다. 그의 일장은 정확하게 목표에 명중했 으나, 은란은 여전히 정좌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상팔이 물었다. "어떻소?" "여전합니다. 아마 그들은 견정혈(肩井穴)을 짚지 않았던 모양입 니다. 저의 손은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상팔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가가서 좀 자세히 살펴 봐야겠군." 이때 갑자기 밖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두 분은 잘 보았소?" 소영이 즉시 고개를 돌렸다. 문 밖에는 검은 옷을 입은 거한이 서 있었다. 가슴에는 금룡이 새겨져 있었다. 견문이 넓은 상팔은 그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금룡을 보고 즉각 그의 신분을 식별하고는 공손히 말했다. "귀하는 신풍방주의 휘하에 있는 금룡령주이시군요." "그렇소." 상팔은 단도직 입적으로 말했다. "귀방의 금사령주는 내가 생포하고 있으니, 이 아가씨와 교환하 지 않겠소?" "그것은 방주가 결정할 문제지, 내가 알 바 아니오. 당신네들의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됐으면, 어서 대전으로 나갑시다. 방주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여기서는 아무리 지체해 봐야 소용없는 노릇이 오." 소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금룡령주를 따라 대전으로 갔다. 흉악 한 신상은 이미 대전 구석으로 옮겨져 있었다. 상팔은 신상 앞에 가서 포권하고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우리는 이미 확인했소. 바로 우리가 찾으려던 사람이 틀림없소 이다." 신풍방주는 짧게 대답했다. "그럼 잘 됐구려." 상팔은 진지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 드리겠는데, 귀방의 금사령주와 저 아가씨를 교환하 려는데 방주의 뜻은 어떠신지?" 방주의 음성에는 칼날같은 냉소가 섞여 있었다. "난 비록 강호에 잘 나가지 않는 사람이지만, 당신의 그 유명한 이기주의는 들어서 알고 있소. 철저하게 이해타산이 밝아 결코 손 해 보는 짓은 하지 않는다지만 나 역시 그렇게 어리숙하지는 않 소." 그 냉랭한 목소리는 여전히 신상속에서 흘러 나왔다. 그 음성은 어떻게 들으면 아주 부드러운 듯도 했으나, 또 어찌 들으면 굉장히 장엄한 것 같기도 하여 도무지 남녀 구분도 할 수 없이 신비스럽기 만 했다. 소영은 모든 것을 상팔에게 맡긴 듯이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상팔은 픽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옛부터 장삿속이라는 것은 부자지간의 의리도 팽개치는 법이거 늘, 방주께서 손해라고 판단했다면 나는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겠 소. 하나, 내가 알고 있기로는 신풍방이 강호에 출몰한 이후, 무림 에서는 귀방이 무척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고들 믿고 있더이 다. 만약 내가 금사령주를 심문하여 모든 비밀을 캐 내어 강호에 퍼뜨린다면, 아마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될 것 같은데요." "하하하...그럴 법한 추측이군. 그렇지만 속단하지는 마오. 우리 방의 인물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 극히 한정 되어 있소. 그런 식으로 금사령주를 위협해 봐야 마치 미치광 이가 꿈얘기 하는 격에 불과하오." 상팔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신상의 두 눈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상팔은 방주가 고의로 공포심을 조성하기 위 해 흉악한 신상 안에서 농간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면 서도,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소영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소형, 경계해야 됩니다. 독기의 암습을 잘 막아 내야 하오." 그 흉칙스런 신상의 두 눈은 점점 붉어지더니, 눈동자를 디룩디 룩 굴리는 꼴이 마치 무엇을 찾는 듯하였다. 상팔 역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옆을 살펴 보았다. 방금 같이 왔던 금룡령주는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상팔은 암암리에 공력을 발휘하여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 그 신 상을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신상 가까이로 향했다.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목숨이란 하늘에 달렸다는 체념 비슷한 각오를 가지고서 오른손으로 가슴을 방어한 채, 왼손으로 신상의 옆구리를 만져 보았다. 손에 무척 싸늘한 냉기가 돌았다. 그 신상은 철로 만든 것이었 다. 순간, 신상의 우람한 왼쪽 팔이 번쩍 들리며 일격을 가해왔다. 상팔은 재빨리 옆으로 피해 일격을 모면했다. 그리고 비웃음을 섞어 비난하였다. "흥! 보나마나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보니 방주의 실력도 별것 아니로군." 방주가 대노하여 버럭 외쳤다. "감히 법체를 모독하다니!" 순간, 신상의 커다란 입이 짝 벌어지더니 백광이 번쩍이면서 무 슨 물체가 상팔을 향해 날아왔다. 상팔은 그 정도 상황은 예기하고 있던 터라, 잽싸게 금주판으로 밀어 일격을 막아 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강철로 된 화살이 상팔의 금주판에 퉁겨 져 기둥에 꽂혔다. 소영도 일장을 날려 상팔을 도우려 했다. 우람 하고 흉칙한 신상이었지만 움직이지를 못하는 까닭에 소영의 일 장 이 명중하자,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소영은 자신을 가지고 접근하려 했다. 상팔은 장엄한 어조로 소리쳤다. "방주, 이 흉물스런 신상으로 무지몽매한 우인들을 협박하여 일 시적인 효과를 거둘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이 정도에 외눈 하나 까딱하지 않소. 어서 아가씨를 풀어 주오. 만약 순응하지 않는다 면, 오늘 방주의 진 면목을 들추어 내고 말겠소." 곧이어서 소영에게 전음술로 말하였다. "너무 조급하게 서둘지 마시오. 이 신상에는 많은 암기가 있어 자칫하다가는 그들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소영은 그의 충고를 받아 들여 동작에 신중을 기하였다. 상팔은 방주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자 다시 소리쳤다. "우리는 귀방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으나, 그것은 오해 때문이었 으며 피차간 원한이 없소. 따라서 서로 적대시할 필요는 없는 거 요. 귀방은 내 말을 재차 음미해 보시오." 방주는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소영은 신상의 아래위를 면밀히 훑어 보고 나서 나직이 말했다. "상형, 저것을 넘어뜨려 버립시다. 그러면 속에 제아무리 신묘한 무기가 설치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능을 잃게 될 것입니다." "형님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나로서는 도무지 불가사의한 점 이 한 가지 있는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도 통 생각이 나질 않습 니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합니까?" "이 도관(道觀)에는 신풍방의 제자들이 많이 있을 텐데 시종 눈 에 띄지 않습니다." 소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소곤소곤 하고 있을 때, 갑 자기 방주가 큰소리로 말했다. "좋소! 그 계집과 금사령주의 교환을 승낙하겠소!" 상팔이 즉각 응답했다. "좋소. 그럼 한 마디로 결정합시다. 난 해질 무렵, 금사령주를 귀방으로 보내 주겠소." 쌍방은 팽팽한 긴장으로 맞서 있었으나, 신풍방주의 교환 승낙으 로 인하여 긴장은 다시 누그러졌다. "원래는 당신 두 사람의 생명을 뺏으려 하였으나, 심사숙고 끝에 마음을 고쳐 먹었소. 두 분은 어서 가 보시오." 소영이 아니꼽다는 듯이 덤비려 들자, 상팔이 재빨리 눈짓으로 만류했다. 두 사람은 대전을 떠나 관문을 벗어났다. "형님, 방금 내가 형님을 말린 이유를 알겠습니까?" "은란을 풀어 주겠다고 승낙했으니, 더 이상 다툴 필요가 없다는 이유겠지요." "그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강호에게 회자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풍방주는, 자기 부하를 처벌할 때, 그 죄진 자를 신상 앞에 세워 놓기만 하면 저절로 징벌 이 됐답니다. 얼핏 듣기에는 모호한 얘기 같지만, 곰곰히 따져 보 면 그럴 듯합니다." "뭐가 그럴 듯하단 말입니까?" "그 신상의 내부에 설치된 각종 암기는 우리의 무공으로 두려울 것이 없소. 하나, 그 안에 무색무미한 약물이 있어서 소리없이 분 출될 경우, 우리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중독되고 말 것이오. 이제 무슨 얘긴지 이해가 됩니까?" 소영은 그럴 듯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달려 오는 소리가 들려 왔다. 금룡령주가 세 사람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은란도 끼어 있었 다. 소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풍방주의 마음이 또 변했을까요?" "글쎄요. 모를 일입니다." 이때 금룡령주가 다가와서 공손히 말했다. "우리 방주님께서 귀하가 강호에서 신용 좋기로 이름이 나 있다 면서, 기왕에 교환 조건을 승낙했으니 이 아가씨를 데리고 간 다음 금사령주를 보내 달라는 말씀이었소." 소영이 약간 비꼬는 어투로 응수했다. "귀 방주께서는 상상외로 아량이 넓으시군." "그렇고 말고요. 우리 방주께서는 항상 매사에 너그럽소." 금룡령주는 은란에게 지시했다. "이쪽으로 와!" 이때 상팔이 저지시켰다. "잠깐!" "왜 그러시오?" 상팔은 은란을 주시하며 엄중히 물었다. "지금 아가씨의 정신은 맑소?" 상팔이 묻자, 은란은 전에 없이 엄숙한 표정을 하며 약간 못마땅 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팔이 다시 물었다. "그들은 아가씨의 양팔의 혈도를 풀어 주었소?" 은란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짧게 대답했다. "풀어 주었어요." "다행이군. 그럼 그들이 아가씨의 가슴에 무엇을 넣었는지 알 수 있소? 또 지금도 그것이 그대로 있소?" "전혀 알 수가 없어요. 모든 일은 저의 혈도를 짚어 버린 후에 이루어졌으니까요." 상팔은 그녀의 언행을 낱낱이 살펴 보았으나, 별로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다. 그제서야 금룡령주에게 호의를 표시했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귀 방주에게 성의에 감사한다고 전해 주 시오." 금룡령주도 공손히 예를 차렸다. "부디 잘 가시오. 멀리 모셔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소영과 상팔은 은란을 데리고 급히 초가집으로 갔다. 상팔은 시종 은란의 거동을 암암리에 살폈다. 그녀의 무공은 조금도 손실이 없었다. 반면에 의혹은 더욱 짙어 졌다. "아가씨, 신풍방주가 갑자기 아가씨에게 호의를 베풀어 스스로 놔준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소?" "저도 잘 몰라요." 이렇게 잘라 말했으나, 아무래도 그녀는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눈치같았다. 상팔은 다시 소영에게 물었다. "혹시 형님께서 암암리에 수단을 써서 방주에게 경고를 하여 협 박한 것이 아니오?" "아니오. 난 그 신상에 결코 손도 대지 않았소."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 일이군요. 신풍방주가 하는 일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상팔은 방주가 자진해서 은란을 놔 준 데에는 반드시 어떤 원인 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더 이상 추측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급히 서둘러 초가집에 도착했다. 기다리다 지쳐 있던 금 란은 은란이 돌아 오는 것을 보자, 달려 와 은란의 손을 잡았다. "고생이 많았지?" "괜찮아, 언니!" 그들은 마루방으로 들어 갔다. 한 구석에는 팽운이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소영이 다가가서 조용히 물었다. "팽형, 상처가 심합니까?" 팽운은 서서히 고개를 돌리더니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대단치 않습니다. 애당초에는 중상이었으나, 소대협의 도움으로 이젠 완치된 것이나 다름 없소이다. 조금만 더 쉬면 완쾌될 것 같 습니다." 은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팽 오빠는 나 때문에 이런 중상을 입으셨어요." 팽운은 아주 의젓하게 대꾸했다. "그것은 우리 개방의 전통이며, 누구를 막론하고 그런 경우에 방 관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그러니 조금도 감사할 필요 없소." 금란이 끼어 들었다. "하긴 그래요. 오래 전부터 개방은 충의를 신조로 삼아 전통을 이어 왔어요." 팽운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아가씨, 너무 과장하지는 마시오. 그것은 우리가 무림에서나 할 수 있는 소리요." 소영이 나직한 소리로 두구에게 물었다. "팽운의 상세는 어떻소?" "약을 써서 효과를 보았으며, 전신의 혈도를 풀었으니 즉시 회복 될 것 같습니다." 팽운은 다시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소영은 금란에게 말했다. "우린 온종일 분주하게 설쳤더니 매우 시장하오. 먹을 것이 있으 면 좀 마련해 주구려." 금란이 일어나 나가려는데 은란이 따라 나서며 말했다. "금란 언니, 같이 가요. 나도 같이 거들 테니까." "안 돼. 너는 아직 상처도 완쾌되지 않았고, 피로할 텐데 쉬고 있어." 은란은 굳이 괜찮다면서 금란을 따라 갔다. 소영은 어두운 표정으로 상팔과 두구에게 말했다. "난 그 황량한 묘에 가기만 하면, 으례 괴상한 일을 당하게 되는 구려." 소영은 즉시 그 괴상한 일들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중주이고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리둥절했다. 잠시 후 상팔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날 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어울려 모처 럼 술을 한 잔씩 나누어 얼큰한 김에 그 황묘에 갔었지요. 도중에 양평에서 한도와 성영을 만났으나, 술에 취한 까닭에 무슨 사고가 날까 봐 일부러 피하려 했는데 이미 늦었소. 하는 수 없이 길가에 서 서로 수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무렵, 딸아이와 시녀를 데리고 오 던 사천의 당노부인을 만났지요. 이렇게 해서 시간이 지연되었으 며, 우리가 다시 황묘에 가서 쪽지를 남겨 두고 심야에 백화산장에 잠입해서 소형의 소식을 알려고 했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마터면 거기서 죽을 뻔하였으며, 형님의 종적도 모를 뻔했지요." 소영이 말했다. "그렇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체되었는데, 어찌 두 분을 탓할 수 있겠소?" 상팔이 말했다. "형님께서는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부모님 때문인가 요?"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모험을 해서라도 백화산장에 잠입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소. 또 기왕에 잠입하려면 빠를수록 좋고, 그들 이 전혀 예측도 못할 때 들어 가야 합니다." "물론 두 분의 노인을 구해 내려면 빠를수록 좋고 백화산장에 잠 입하는 것도 용이한 일이긴 하지만, 요컨데 어떻게 해야 그들이 우 리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느냐가 문제지요." 두구가 참견하였다. "우리 세 사람이 합세하면 두 노인을 구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들을 백화산장 밖에까지 무사히 나오게 할 방법이 없지 않소?" 소영이 길게 탄식하였다. 이때, 차(茶)를 들고 들어 오던 금란과 은란은 다시 백화산장으 로 들어 가겠노라는 그들의 얘기를 듣자, 즉시 굳어진 표정이었다. 그녀들은 찻 잔을 내려 놓고 다시 주방으로 가버렸다. 어려서부 터 줄곧 무서운 심목풍의 손에서 자란 그녀들은, 심목풍의 얘기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모양이었다. 팽운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백화산장의 방대한 세력에 대처하려면, 세 사람의 힘으로는 너 무 미약하오.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세 분께서 마 문비와 상의하여 연합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팔은 즉시 그의 의견에 수긍했다. "난 일찍부터 마문비의 무공이나 지략이 초인적이라는 것을 들어 서 알고 있습니다. 그는 무림에 나선 지 오래지 않아서 바로 중원 무림의 영수가 되었지요." 팽운은 탄식과 함께 말했다. "안타깝게 내 상처가 아직 완쾌되지 않았구려. 그렇지만 않다면 여러분과 같이 뛰어 볼 텐데..." 이때 상팔이 갑자기 다급히 말했다. "두구, 어서 가서 금사령주를 풀어 주게. 신풍방주와의 약속을 지켜야지. 신용을 잃어서는 안 돼." 상팔은 다시 소영에게 말했다. "지금 백화산장의 수십 리 밖에도 많은 고수들이 운집해 있소. 심목풍이 다시 강호에 출몰한다는 사실은 많은 무림 인사들을 흥분 케 했소. 내가 보건대, 지금 판국은 몹시 복잡하게 됐소. 대부분의 무림 인사들은 정의를 위해 왔겠지만, 그 중에는 사리사욕을 위한 이해관계가 얼키고 설킨 경우도 적지 않을 거요. 정말 예측을 불허 하는 판국입니다." 상팔은 시선을 팽운에게 돌리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오래 전부터 개방은 소문이 빠르다고 알고 있는데, 팽형께서 한 번 수완을 발휘하여 우리를 도와 주지 않겠소?" "글쎄요. 평상시라면 폐방의 제자들은 확실히 하룻동안에 천리 밖의 소문도 쉽사리 탐문할 수가 있지요. 하나, 지금은 때가 때인 만큼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어서 폐방의 제자들이 행동하는 데 크게 제약을 받았소. 하나,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한 번 해 보겠소이 다." 팽운은 즉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소영이 재빨리 물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상팔이 대신 대답했다. "개방에서만 통용되는, 비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암호로 소식을 전하러 가는 겁니다." 소영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아서 타인과 충돌하게 되면 곤란하 니, 우리가 암암리에 그를 보호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상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개방의 통신법(通信法)은 무림에서 수십 년에 걸쳐서 명예를 날려 왔지만, 아직까지 그 비법이 누설된 적이 없소. 만약 우리가 그를 보호한답시고 미행한다면, 그 통신술의 비 법을 엿본다는 오해를 받게 되기 십상이오." 소영도 상팔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했다. 잠시 후, 밖에 나갔던 팽운이 다시 돌아 와서 말했다. "이곳은 지형이 복잡하고 특이한 점이 많아서 통신이 가능할는지 단언할 수가 없구려." 소영이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도록 하시지요. 팽형은 아직 상처가 완쾌되지도 않았으니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깊은 배려에 새삼 감사를 드립니다." 팽운은 눈을 감더니 다시 운기조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두구가 헐레벌떡 뛰어 왔다. 상팔은 예감이 좋지 않아 황급히 물었다. "금사령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두구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금사령주는 석방했으나, 개도이귀(開道二鬼)는 어떻게 된 노릇 인지 행방이 묘연합니다. 다행히 그들을 따로 숨겨 뒀기 망정이지. ...." 말끝을 흐리자 상팔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말했다. "괜찮아. 금사령주만 석방했으면 신풍방주와의 약속을 이행하였 으니 체면은 세운 셈이니까, 다른 건 상관할 것 없네." 이때 금란과 은란이 밥상을 들고 왔다. 금란은 밥상을 내려 놓으 며 수줍은 듯이 인사를 했다. "아시다시피 황야의 초가라서 모든 게 변변치 않습니다. 우선 시 장기나 면하도록 하십시오." 그래도, 밥상에서는 고기 냄새가 풍겨 왔다. 상팔은 코를 씰룩거 렸다. 벌써 입에서는 사르르 군침이 돌았다. "아가씨들, 너무 겸손하지 마십시오. 이만하면 진수성찬입니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은란이 팽운 곁으로 다가가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로지 자기 를 위해 희생했던 의리의 사나이에게, "상세는 좀 나으신지요?" 이 은밀한 속삭임같은 아가씨의 말에 팽운의 귀밑은 붉게 물들었 다. 팽운은 일찌기 사부를 따라 강호의 물을 많이 마셨다. 따라서 온갖 험악한 일도 많이 겪었으며, 견문도 넓고 경험도 많아 중주이 고에 못지 않은 인물인 것이다. 그토록 막강한 사나이도 한낱 아가 씨의 은밀한 말 한 마디에 낮이 붉어지는 것은 역시 목석이 아닌 때문이리라. "아가씨,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나의 상처는 거의 완쾌되었소이 다." 은란은 살짝 미소를 띄었다. "다행이군요. 시장하실 텐데 식사를 하고 나서 다시 조식을 취하 시지요." 팽운은 즉시 밥상에 다가 앉더니 좌중의 사람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어찌 그토록 인심이 박할 수 있습니까? 이 비렁뱅이한테는 밥 한 술 떠보라는 얘기도 없습니다그려! 하하하....." 좌중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팽운은 어느 장소를 가나 이렇게 우 스개 소리를 잘하여 곧잘 웃겼다. 그러나 그처럼 대범하고 스스럼 없는 팽운이지만, 은란을 대할 때면 어딘지 모르게 위축되고 부끄 럼을 탔다. 상팔도 만만치 않은 입심을 가진 인물인지라, 팽운에게 질세라 바로 입을 열었다. "우리 장사치들이란 그저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볼까 하는 궁리뿐이지, 결코 형식적인 인사치레나 할 여유가 없소." 이때 두구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수저를 놓으며 팽운에게 물 었다. "여보게, 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좀 가르쳐 주겠나?" 팽운은 씹던 고기를 삼키고 입언저리를 쓱 문지르더니 입을 열었 다. "이 천학비재한 놈에게 물으실 게 있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팽운의 말에 두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 사람 너무 큰소리치지 말게, 아마 자네도 잘 모를걸 세."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좌우지간 말씀이나 해보시오. 어쩌면 의심이 풀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주승, 반개에 관하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팽운은 싱겁게 픽 웃었다. "과거에 약간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오. 무엇을 알고 싶소?" "우선 반개와 귀방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무엇이오? 혹시 그들도 개방 사람이 아니오?" 팽운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닭다리를 들고, 맛있게 뜯어 먹으 면서 대답했다. "천하의 비렁뱅이들은 모두 한 식구이지요. 그들은 비록 우리 개 방의 제자는 아니지만 개방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꼭 그들에 관하 여 알고 싶다면 우선 한 턱 내셔야 됩니다." "허허.... 철저하게 실리를 찾으려 덤비는군. 자고로 군자는 남 의 사사(私事)를 묻지 않는 법. 난 그들이 개방 사람인지 아닌지만 알았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팽운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껄껄 웃어댔다. "동가숙 서가식하는 비렁뱅이들도 그 지독한 장삿속에는 당하지 못하겠구려. 어찌 됐든 두 형께서는 돈이 많으시니 한 턱 사셔도 될 법한데, 끝내 거절하실 셈인가요?"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 식사가 끝났다. 금란과 은란이 설겆이를 할 찰나, 중년의 두 거지가 성큼 들어 왔다. 상팔은 경탄을 금치 못하여 나직이 뇌까렸다. "과연 개방은 강호에서 으뜸가는 방이오. 이런 여건에서도 벌써 연락이 이루어졌으니...." 팽운은 그들을 맞이하며 뭐라고 잠시 소곤거렸다. 이내 그들은 다시 총총걸음으로 되돌아 갔다. 팽운의 얼굴에는 갑자기 수심이 가득했다. 상팔은 일부러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개방의 신방주는 몹시 호탕하던데, 어찌하여 그대처럼 소심 한 제자를 길러 냈을까?"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오. 요 며칠간 우리 개방의 제자들은 적잖 이 살해당하여 소대협과 마문비가 언제나 연결이 될지 적이 의심스 럽소이다." 소영이 물었다. "바로 백화산장 사람들에 의하여 살해당했단 말입니까?" "지금 귀주 부근에는 무림의 고수들이 여러 가지 신분으로 운집 해 있으나 모두들 변장을 하여 진면목을 숨기고 있으니, 누구에게 죽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상팔이 재빨리 물었다. "신방주도 오게 되오?" "오기는 올 테지만, 언제 올는지는 예측할 수 없소." 상팔은 이십 년 전에 개방에 내란이 일어나서 서로 죽이는 바람 에 방중의 고수들과 장로들이 그 통에 수천 명이나 죽었다는 사실 을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의 개방은 비록 사람 수는 많지만 신방주와 몇 몇 장로를 제외하고는 고수가 얼마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호 기와 정의를 위해서는 천만번을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전통만은 아 직도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내는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불원간 다가 올 수난에 대비하여 어떠한 강적이 나타나더라도 선전분투할 힘을 배 양하기 위하여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41. 구곡담(九曲潭)의 철통같은 안배(安排) 어느새 태양은 서산으로 기울었다. 조용하던 오두막에 갑자기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미처 밖을 내다 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키 큰 사나이가 뛰어 들었다. 팽운은 즉시 그가 개방의 제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맞이하 려는 순간, 그 거한은 넘어지듯 안으로 뛰어 들더니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이었다. 소영은 재빨리 그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상팔은 품속에 지니고 있던 알약 한 개를 꺼내어 그에게 먹이고, 두구는 그의 등에 있는 명문혈을 짚었다. 이윽고 그 거한은 약간 정신을 찾은 것 같았다. "여기서 서북쪽으로 이백 리 지점에 있는 구곡담(九曲潭)에..." 그는 채 말을 맺기도 전에 다시 피를 토하며 눈을 감고 쓰러지고 말 았다. 상팔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장의 상처가 심한 데다가 급히 뛰어 왔기 때문에 최후의 원기 를 상실하여 도저히 살릴 가망이 없는 것 같소." 두구는 다시 진기를 발휘하여 강한 내력으로 거한의 몸을 주물렀 다. 내부의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그는 다시 눈을 뜨더니 꺼져가는 소리로 말했다. "서쪽으로 오십 리 밖에 개방의 암호를... 그 암호를 따라..." 그는 기어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과연 개방의 호기와 인의는 존경할 만합니다." 상팔과 두구 역시 감동하여 애석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모 두 거한의 시체 앞에 서서 정중히 포권했다. 금란과 은란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팽운은 슬픔을 참으며, 누 구보다도 침착하게 시체를 안고 밖으로 나가더니 잔디밭 위에 내려 놓았다. 그는 시체를 향해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하고 나서 곧 구덩 이를 파기 시작했다. 소영과 상팔은 도와주고 싶었지만, 개방의 규칙을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나서지를 못했다. 팽운은 시체를 매장하고 나서 일곱 개의 나뭇가지를 꺾어 무덤 위에 꽂았다. 그리고 다시 무덤 앞에 무릎을 꿇더니 흐느끼기 시작 했다. "몸은 비록 지하에 묻혔으나 연혼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고, 그 고귀한 충의의 신념은 길이길이 이름이 남을 테니 안심하고 잠 드소서. 우리 개방의 목표는 오로지 이와 같은 거룩한 죽음이니... .." 산마루에 걸린 저녁노을이 적막한 벌판에 외롭게 솟아 있는 무덤 에 붉은 광채를 쏟고 있었다. 소영을 비롯한 일행은 모두 무덤 앞 에 가서 큰절을 하였다. 팽운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일어서더니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 어찌 이런 큰절을 하십니까?" 소영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우리 무림에서는 충의를 중히 여깁니다. 저토록 거룩한 주검 앞 에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큰절을 한 것이 이상스러울 게 뭐 있습니 까?" 팽운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개방에서는 이와 같은 죽음이 비일비재하지요." 소영은 더욱 엄숙해졌다. "귀방이 무림에서 명성을 떨친 이유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구려. 실로 슬픔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팽운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하고 있더니 이내 화제를 바꾸었 다. "서둘러서 구곡담으로 가봅시다." 소영은 아직도 그의 상처가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상세는 어떠시오?" "완쾌되었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가 행동하기는 아주 좋소. 자, 내가 앞장을 서리다." 팽운은 누구의 동의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앞장을 섰다. 모두가 그의 뒤를 따랐다. 오래지 않아서 그들은 어느 삼거리에 도착했다. "아까 숨진 그 동지가 암호를 해 둔 곳은 바로 여기일 거요. 잠 깐만 기다리시오." 팽운은 허리를 굽혀 자세히 살피더니 가운데 길을 택하여 계속 전진하였다. 소영은 그들의 암호가 어떤 방법으로 전파되는가 살펴 보려고 주의를 기울였으나, 아무런 근거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밤은 완전히 어두워서 사방은 칠흑같았으나, 팽운은 마치 자기집 변소라도 찾아 가듯이 익숙한 걸음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뒤를 따 르는 사람들은 시종 말없이 팽운의 뒤를 따르고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은 드디어 희미한 불빛을 발견하였다. 한 촌락에 다다른 것이었다. 팽운은 걸음을 멈추더니 나직이 말했다. "저기가 바로 하가포(何家浦)라는 마을이오. 여러분은 여기서 잠 시만 기다리시오. 내가 가서 구곡담이 어디 있는지 찾아 보고 오리 다." 소영은 직감적으로 살벌한 분위기가 감도는 마을이라고 판단하 고, 아직 상처가 완치되지도 않은 그를 혼자 보내는 것은 위험하다 고 생각했다. "팽형, 나와 동행함이 어떻겠소?" 두구도 나섰다. "이런 일에 큰형님이 수고할 필요 없으니 내가 동행하겠소." "그럼 좋소.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어서들 다녀오시오." 팽운과 두구는 어둠 속으로 질주해 가버렸다. 상팔이 제의했다. "구곡담에는 한다 하는 무리들이 운집하는 곳이오. 우리는 공연 히 노변에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디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 아 보도록 합시다." 그 때였다. 멀리서 일진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은 반사적으로 금란과 은란을 끌고 노변에 있는 큰 나무 뒤 로 몸을 숨겼다. 상팔 역시 날쌘 동작으로 몸을 날려 나무 위에 숨 었다. 두 필의 말은 점점 가까이 달려오더니 그 나무 앞에서 멈췄 다. 소영은 어둠 속에서도 그들을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검문쌍영 (劍門雙英)인 추풍검(追風劍) 배백리(裵百里)와 무영검(無影劍) 담 통(談通)이었다. 소영은 무척 놀랐다. '음.... 저자들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을까? 저들은 비록 백화 산장의 제자는 아니지만 그들과 상통하는 처지인데, 심야에 이곳에 나타난 걸 보니 혹시 백화산장에서는 이미 여기에 군호들이 모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이때 담통이 배백리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가 검문(劍門)에 있을 때는 종일토록 자유자재였는데, 오늘 은 시종 심목풍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니 그 때와 비교하면 천양지차로구려." 배백리는 한 손을 입에 갖다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쉿, 조용히 해!" 배백리는 자기들이 왔던 곳을 다시 돌아보며 한숨과 함께 지껄였 다. "나도 괴롭네." "배형, 배형 역시 그렇다면 우리 오늘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다 시 검문으로 돌아가 버립시다." "뭐, 돌아가자고? 너무 단순한 생각일세. 심목풍이 얼마나 악랄 한 사람인데! 우리가 간다고 그냥 놔둘 성 싶어?" "이 넓은 천하에 우리 두 사람 숨을 곳이 없겠소?" "말이야 간단해서 좋네만, 생각해 보게나. 심목풍에게는 수많은 앞잡이들이 각지에 퍼져 있어 우린 끝까지 추격을 당하여 붙잡히고 말걸세." 담통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 끝까지 기어 올라 숨어 산다 해도, 백화산장의 그 노예같 은 생활보다야 못할라구요. 심목풍에게 혹사당하는 것도 이가 갈리 기는 하지만, 주조룡 그 놈이 더 얄밉고 지긋지긋하오. 우리와 친 구로 사귀자는 명분을 내세워 우리를 그 백화산장에 빠지게 한 소 행을 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리오. 어떻게 해서든지 그놈을 잡 아 죽여야지." 배백리도 똑같은 울분을 씹었다. "그렇네. 주조룡 그놈의 소행은 정말 괘씸하고, 심목풍보다 훨씬 더 한스럽고 이가 갈리네." 잠시 후 배백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여기서 더 이상 지체하고 있을 수가 없네, 심목풍은 의 심이 많은 자이니, 어쩌면 이미 사람을 시켜 우리를 미행하고 있을 지도 몰라. 우리가 이렇게 오래 지체하고 있으면 그들의 의심을 사 기 십상이야. 자, 어서 가자고." 그들은 이내 멀리 사라졌다. 소영은 그들이 사라지자 은란에게 나직이 말하였다. "보아하니 심목풍의 끝장도 멀지 않았구려. 백화산장 사람들까지 반란을 일으킬 징조가 보이는 것을 보니....." 금란이 나섰다. "백화산장 사람들이 심목풍을 몹시 혐오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감히 반란을 일으킬 만한 인물은 드물어요." "방금 그 검문쌍영이 좋은 본보기요." 소영이 이렇게 말하니 이번에는 은란이 말하였다. "그러나 검문쌍영은 백화산장으로서는 손님의 입장이에요. 심목 풍이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 한, 그렇게 대담한 거사를 기도할 백 화산장 사람은 없을 거예요." 소영이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물었다. "아가씨들도 백화산장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소?" 은란이 대답했다. "그것도 만약 공자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대체 심목풍의 어디가 무서워서 그렇게들 벌벌 떠는지 알 수가 없군." "공자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만약 반역을 하다가 발각되면 혹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심목풍의 독약은 한 번 먹기만 했다 하면, 일정한 기간 안에 해독약을 복용치 못할 경우 그대로 황천행 이랍니다." "정말 악랄한 수법이로군." "그뿐이 아닙니다. 제가 듣기로는 심목풍에게 또 한 가지 비약이 있다는데, 그것을 먹기만 하면 정신이 점점 몽롱해져서 자신을 잊 고 심목풍 이외의 사람은 알아 보지도 못하게 된답니다." "그런 일이 있었소?" "또한 심목풍은 일종의 기묘한 무공으로써, 전문적으로 사람의 내장을 상하게 하여 종신토록 자기의 명령에 복종하게 만들어 버린 답니다." "그것은 일종의 전맥진혈(剪脈震穴)이라는 수법으로 별로 기묘할 것도 없는 수법이오." 은란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렇다면 공자께서도 그런 무공을 할 줄 안단 말씀입니까?" "난 그렇다는 판단을 내렸을 뿐, 실제로 그런 상해를 당한 사람 을 보기 전에는 확언할 수 없소." 상팔이 전음술로 알려 왔다. "누가 오고 있소." 과연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질주해 오더니 나무 밑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바로 팽운과 두구였다. 상팔은 바로 나무 위에서 뛰어 내리며 다급히 팽운에게 물었다. "구곡담을 찾아냈소?" "예, 다행히 찾았소." 소영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백화산장에서는 이미 검문쌍영을 이곳에 파견시켰소. 두 분께서 는 혹시 만나지 못했소?" 팽운이 반문했다. "말을 탄 두 사람 말씀입니까?" "그렇소." 팽운이 다급히 말했다. "그자들은 순찰 임무를 띠고 파견된 것이며, 이제 딴 곳으로 갔 으니 우리도 어서 갑시다. 난 이미 우리 방의 두 제자들에게 도중 에서 기다리라고 하명해 놓았소." 상팔은 다시 물었다. "이번 집회는 누가 주최한 것입니까?" "나도 자세히 알 수가 없소. 짐작컨데 마문비가 아니면 우리 사 부가 될 것 같소." 상팔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영에게 말했다. "만약 신방주가 이번 집회의 주지가 된다면 필히 좋은 결정을 보 게 될 것입니다." "사부는 오랫동안 본방의 내부를 정리하는데 진력하여 강호에 나 설 겨를이 없었지요. 불과 수일 전에야 사부의 뜻을 알았던 것이 오. 그러나 방의 고수들을 손수 거느리고 오시려면 늦지 않게 도착 한다고 장담할 수 없소. 지금 일각이라도 지체할 때가 아니니 빨리 가 보도록 합시다. 역시 내가 앞장 서리다." 팽운은 다시 앞장을 서서 발길을 재촉하였고, 일행도 총총걸음으 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굽이굽이 도는 길을 몇 십 리나 질주 했다. 마침내 우거진 숲에 이르러 팽운이 걸음을 멈추고 일행에게 말했 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시오. 그들이 왔는지 보고 오겠소이다." 그는 말을 끝내고 황급히 숲 속으로 들어 갔다. 잠시 후 다시 숲 속에서 나온 팽운은 다급하게 말하였다. "본방의 두 제자가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숲 속으로 들어 가서 배를 타시오." 은란이 이상한 듯 반문했다. "배를 타요?" "아, 내가 미처 설명을 못했구려. 이 숲 속에는 계류가 있는데, 그 계류가 바로 구곡담으로 가는 물줄기랍니다." 그들은 팽운이 인도하는 대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울창한 수목 을 헤치고 얼마만큼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과연 별로 넓지 않은 계 류가 있었고, 목선 한 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목선에는 두 명의 개 방 사람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팽운이 맨 먼저 배에 뛰어 오르고 이어서 소영, 상팔 등이 날쌔 게 승선하였다. 개방의 두 제자들은 시종 말없이 일행이 모두 승선하자, 곧 배를 띄웠다. 굽이치며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그들을 태운 목선은 기분 좋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계곡은 좁은 편이어서 무척 뱃길이 험하 였으나, 노를 젓는 두 개방인의 기술이 무척 숙련된 까닭인지 요리 조리 장애물을 피해 가며 매우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소영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혼자 생각했다. '이토록 꾸불꾸불하기 때문에 구곡담이라 명명했던 모양이군.' 얼마 후, 그들은 망망대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목선은 이미 계곡을 벗어나서 망망대해에 이르렀다. 오른쪽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무성한 갈대숲이 보였다. 개방의 두 제자들은 재빨리 뱃머리를 돌리더니, 그 갈대숲 안으 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무성한 갈대숲에는 겨우 목선 한 척이 드나 들 수 있을만큼 좁은 비밀 수로가 뚫려 있었던 것이다. 만약 배를 조종하는 기술이 탁월하지 못하다면 길을 안다고 해도 감히 통행하지 못할 것 같았다. 소영은 재삼 감탄했다. 이곳은 비밀 수로로 손색이 없었으며 또 이런 비밀 통로를 만들 기 위해 무척 많은 힘이 들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수로를 따라 한참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양쪽 갈대숲에서 두 개의 기다란 창이 불쑥 나오며 길을 막는 것이었다. "배를 멈춰라!" 개방인은 즉시 배를 멈추었다. 오른쪽 갈대 숲 속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은 채 군호(軍號) 소리 만 들렸다. "동방갑지목(東方甲之木)." 배의 오른쪽에 있던 개방인이 즉각 응답하였다. "서방경신금(西方庚辛金)." 이어서 왼쪽에서 군호 소리가 들렸다. "천상일월성(天上日月星)." 역시 좌측의 개방 제자가 답했다. "지하수화토(地下水火土)." 두 개의 창은 곧 거두어졌다. "배에 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개방 제자 둘은 팽운만 바 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팽운이 입을 열었다. "개방의 팽운과 중주이고요." "두 여자의 신분은?" "나 팽운의 친구요."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다시 갈대숲 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좋소. 우리는 평형을 믿소." 다시 배는 전진했다. 두구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경계가 대단히 삼엄하군요." "백화산장의 무리들이 침입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므로, 이렇게 철저히 경계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침입을 막을 수가 없소." 소영이 말하였다. "오늘밤 팽형이 아니었더라면, 난 구곡담을 알아도 찾아 오지 못 했을 거요." 팽운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픽 웃었다. '비록 찾아 온다 하더라도, 사전의 초청이 없이는 어림도 없지, 우리 개방의 제자들이 드나드는 사람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으니 까.' 이윽고 배가 멎었다. 두 명의 개방인들은 간단하게 말하였다. "우리는 목적지에 닿았소. 여러분은 하선하시오." 소영은 의아했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끝없이 갈대만 우거져 있 었다. 육지가 없는데 어디로 내리란 것인지.... 팽운이 개방 제자들에게 뭐라고 귓속말로 소곤거리고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 나를 따르시오!" 그는 말과 동시에 잽싸게 몸을 날려 갈대숲으로 건너 뛰었다. 소 영은 팽운이 뛴 거리가 무려 팔 척 정도나 되어, 금란과 은란의 경 공으로는 거기까지 미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은란과 금란을 먼저 건너 뛰도록 했다. 은란이 먼저 몸을 날려 뛰었다.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팽 운 못지 않게 잘 뛰었다. 그녀는 몸의 반동을 가누지 못해 하마터 면 팽운과 부딪칠 뻔하였으나, 팽운은 재빨리 뒷걸음질을 쳐서 그 녀와 충돌을 피했다. 금란도 무난히 건너 뛰었다. 이어서 소영, 상팔, 두구도 계속 몸을 날려 무사히 건너 뛰었으 나 그들은 자기들이 몸을 싣고 있는 목판을 보고 아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사방 두 척 정도의 크기의 그 목판들이 물 위에 뜬 채로 길을 연결하고 있었다. 소영은 또 한번 감탄했다. 집회 장소를 이토록 은밀한 곳에 마련한 것을 보니, 하루 이틀에 이루어 놓은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일행이 모두 배에서 내리자, 두 명의 개방 제자들은 다시 배를 몰고 가버렸다. 팽운이 소리를 죽여 말하였다. "여러분, 조심하여 내 뒤를 따르시오. 그리고 도중에서 만약 이 상한 것을 발견하더라도 절대 함부로 손을 쓰지 마십시오." 팽운이 앞장 서서 꾸불꾸불한 통로를 빠져 나갔다. 약 십오 장쯤 걸어가니 통로는 갑자기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불빛 이 보였다. "누구얏!" 갈대숲 양쪽에서 단도를 든 두 거한이 나타나더니 앞길을 막으며 소리쳤다. 팽운은 포권하고 공손히 말했다. "개방의 거지 팽운올시다." 그들은 뒤에 있는 사람들을 낱낱이 훑어 보았다.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요?" "그 이름도 찬란한 중주이고입니다." "저 두 아가씨는?" "내 친구요." 거한은 잠시 생각에 잠기고 나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팽형이야 이미 강호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니 초청패가 없이도 되지만, 저분들은 모두 초청패를 가졌는지요?" 두구가 약간 못마땅한 표정으로 군시렁거렸다. "중주이고는 어디를 가나 자유자재로 통과되는데....." 팽운이 말했다. "이분들은 모두 내가 도와달라고 청한 고수들이니, 만약 무슨 말 썽이 있다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두 거한은 난처한 듯 서로 쳐다본기만 하더니, 그중 한 거한이 말했다. "사태가 긴박한 때라 우리 마음대로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소. 여기서 잠간만 기다리고 계시오. 우리가 높은 분들께 연락을 취해 보리다." 그는 말을 끝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 거한은 손에 부채를 쥐고 있는 한 청년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소영은 한눈에 그가 마문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문비는 걸음을 재촉하여 오다가 소영을 발견하더니 깜짝 놀랐 다. "소형도 오셨구려!" 소영은 미소를 지었다. "마형에게는 너무도 뜻밖인 모양이오. 중주이고를 소개하겠습니 다." 소영의 말이 끝나자, 마문비는 포권하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오래 전부터 두 분의 명성은 들어서 알고 있던 터이나, 오늘 이 렇게 직접 뵙고 보니 새삼스럽게 감개가 무량합니다그려." 상팔은 허허 웃더니 약간 비꼬아서 인사에 답했다. "우리는 본시 장사꾼이라서 강호인들과 내왕이 적지요. 지금도 마타주의 수하들에게 저지를 당했소." "부하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무례하게 대한 점은 저의 체면으로 보아서 용서해 주시오." 상팔은 비로소 환하게 웃으며 답례했다. "염려 마시오. 우리도 옹졸한 위인들은 아니니.... 정말 마타주 께서는 사성의 무림을 통솔하는 군호의 영수이시니, 과연 누구도 따르지 못할 기품을 지닌 분이십니다." "너무 과찬하지 마십시오. 부끄럽습니다. 조촐한 자리가 마련됐 으니 어서들 들어오십시오." 소영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들이 특별히 내방한 목적은 마형의 위품을 보고 배우려고 온 것이지,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아니오." 소영의 농담에 마문비는 껄껄 웃으며 다시 그들을 재촉하여 앞장 을 섰다. 갈대숲 속의 통로를 따라 약 오 장쯤 들어가니, 물 위에는 목재 로 만든 커다란 부대(浮臺)가 떠 있었으며 불빛도 언뜻 보였다. 입구에는 두 개의 홍색 촛불이 양쪽에 켜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가 기만 하면 사람들을 한눈에 분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대의 주변에는 검은 휘장을 둘러쳐서 불빛을 가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횡!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 왔다. 상팔은 직감적으로 무슨 암기가 습격해 온다고 판단을 내리고 즉 각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소영은 만반의 태새를 갖추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한 쌍 의 은사(銀梭)를 받았고, 입으로는 짧은 화살을 물었으며, 오른손 으로는 한 송이 금련화를 잡고 있지 않은가! 실로 눈깜짝할 사이의 절반도 못 되는 그 짧은 찰나에, 두 손과 입을 동시에 사용하여 세 개의 암기를 받아낸 것이었다. 그 빠른 수법과 정확성에 뭇 군호들은 혀를 내둘렀다. 마문비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빨리 자진해서 일어서!" 소영은 즉시 암기들을 버린 다음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마형, 아무렇지도 않으니 그만 두시오. 그자가 누군지는 모르지 만 나와 장난을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렇게 꾸짖으려 하지 마시 오." 마문비는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와 푸른 옷을 단정히 입은 소녀를 응시했다. 소녀가 아주 냉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셋째 장주의 진의를 파악하기 전에는 형제로 공경할 수 없소." 소영은 잔뜩 찌푸리고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어 버 리고 말았다. 상팔은 그 소녀의 언행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다. 42. 결렬된 회담 팽운은 사방을 두루 살피더니 개방사람이 보이지 않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리 개방 사람들이 모진 고초를 겪어 가며 파수를 보고 모든 관문도 열어 놓고 있는데, 개방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참으로 이 상한 일이구나!' 마문비는 소영에게 다시 한번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 "이왕 이곳에 오셨으니 마음껏 술이나 마셔 봅시다. 삼장주께서 는 미남이신데다 풍채 또한 근엄하시고 재능도 뛰어나시군요. 이렇 게 뵙게 된 것을 다시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오." 소영은 마문비가 말 속에 비꼬는 기색을 담는 것을 보고 대꾸하 려는데, 두구가 먼저 옆에서 냉랭히 말하였다. "마문비, 손님을 접대하는 방법이 도리에 너무 어긋나지 않소?" "난 중주이고를 오래 전부터 존경해 왔는데 그렇게 높으신 분들 께서 뜻밖에 백화산장에 접근하려고 하는군요." 두구는 울화가 울컥 치밀었다. "마문비, 말조심 하시오." 그곳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갑자기 일어서서 칼을 빼어 들고 마 문비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덤벼들 기세가 보이자, 장중(場內) 분위기는 순간 살벌해졌다. 상팔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장중을 훑어 보며 말하였다. "여러분, 이렇게 흥분하여 싸움을 벌이겠소? 우리는 장사꾼인고 로 항상 하는 게 장삿속뿐이오. 우리는 손해 볼 기미가 보이면 절 대로 싸움을 하지 않소. 백화산장을 도우러 왔다면, 이렇게 무장도 하지 않은 채 호랑이 소굴로 들어왔을 것 같소?" 어렵게 마련한 회담이 뜻밖에 살벌한 자리가 되자 팽운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마형, 이 거지같은 놈의 말좀 들어 보시오." 순간 격한 어조가 옆에서 들려왔다. "개방 제자들은 충실하며 인의(仁義)가 있고, 일진풍 팽운은 더 욱 우리 무림 동지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뜻밖에 이 순 간 죽음을 두려워하고 오직 자기 목숨만을 위해 무림정의(武林正 義)를 배신했으니 그 몰염치한 제자를 배출한 신방주가 애석하기 그지없소이다." 팽운은 얼굴을 돌려 자기를 욕하는 자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불 과 이십 남짓한 소년이 손에 장검을 들고 서 있었다. 팽운은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으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 나 그 옆에 있는 늙은 사람은 바로 유명한 상대해(商大海)였다. 이때, 돌연 옆에서 냉랭하면서도 청아한 음성이 들렸다. "여러 무림 선배님과 후배가 과거 귀주성의 한 술집에서 주조룡 을 죽이려 할때 바로 이자가 저지하여 내 억울함을 풀지 못했는데, 그가 오늘 우리들이 있는 곳에 들어 왔으니 절대로 그냥 보내선 안 됩니다. 그는 또한 소대협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며 강호 곳곳을 다 니면서 뭇 사람을 속이니, 여러분께서는 그의 꾀에 넘어가지 마십 시오."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포영에게 집중되었다. 모든 눈동자에 원한과 살기가 가득차 있었다. 상팔은 성난 군중들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망설여졌다. '앉아 있는 사람은 모두 강호에 유명한 사람들이니, 악전을 전개 한다면 승패는 어떻게 되었든간에 처참한 꼴이 빛어지겠구나!' 소영은 할 말이 많았다. 하나,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좋을지 몰라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몇 사람이 손에 무기를 들고 서서히 접근해 왔다. 이 사람 들이 공격을 해 오면 다른 사람들 역시 합세할 것이 분명하니 눈앞 이 캄캄했다. 금란과 은란은 여전히 양쪽에 서 있었다. 이들 역시 무공이 한정돼 있어 약간의 힘이 될 수는 있으나, 이 많은 사람들 에겐 도무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은란, 금란, 어서 내 뒤로 와요." 둘은 자신들의 무공이 여럿의 공격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 고, 소영의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중주이고는 많은 싸움에 경험이 풍부한지라, 재빨리 정세를 살피 고는 소영의 양쪽에 각각 서서 소영을 보호하면서 이 쪽의 세력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과시하듯 어깨를 펴고 꿋꿋이 있었다. 이때, 부대(浮臺)위에 있던 무리들은 전부 일어나 겹겹으로 포위 하고 서서히 전진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팽운은 우선 자신 이 위급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앞 뒤로 적이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이고 서 있었다. 마문비는 무리들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고, 공격하라는 말도 없이 잠잠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부대 위는 쥐죽은 듯이 조용하고 질식할 정도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이때, 푸른 옷을 입은 한 소녀가 손을 휘두르며 소영의 가슴을 향해 공격해 왔다. 소영은 날쌔게 몸을 살짝 돌려 가슴의 급소를 피하여 어깨로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공격이 상상외로 세어 소영의 몸이 약간 흔들렸다. 두구는 어이없다는 듯이 냉소를 지었다. "계집이 통이 크군." 두구는 말을 끝내자마자 손을 휘둘러 공격을 하였다. 소영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두구의 공격을 저지하고 씁쓸하게 웃 었다. "아가씨가 한 번 공격했으니 분이 좀 풀릴 거야." 소녀는 냉정한 표정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왜 반격하지 않지요?" "전에 아가씨가 복수를 할때, 내가 무심코 제지한 것이 아가씨는 아직까지 분이 안 풀린 모양이군! 하나, 내가 저지하지 않았더라도 아가씨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주조룡을 처치할 수 없었을 것이오." 두구가 공격을 할 때 무리들도 공격을 하려 했으나 갑자기 소영 이 저지하자, 모두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주조룡이 우리 부모를 죽였으니 그 원수를 갚는 것은 당연해요. 그런데, 당신이 나를 저지했으니 그 분풀이를 대신 당신에게 해도 괜찮겠지요?" "아가씨, 그날 그 장소의 사정을 잘 생각해 봐요. 내가 저지하지 않았어도 절대로 주조룡을 죽이지 못했을 거요." 소녀는 잠시 묵묵히 서서 심사숙고하였다. "당시 사정을 기억할 수 없으나, 오직 당신이 나를 저지했다는 것만 생각나요." 순간, 처량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얘야, 그 분의 말이 옳다, 그 분이 저지하지 않았다 해도 너는 절대로 주조룡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말한 자는 호랑이 눈에 얼굴이 둥글고 암기(暗器)의 명수인 팔수 신룡(八手神龍) 단목정(端木正)이었다. 갑자기 비명 소리가 장중을 뒤흔들면서 한 대한이 벌렁 넘어졌다. 소영은 잠자코 그 대한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 그가 입 에서 피를 토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정말 눈깜짝할 사이였다. 일인즉 이러했다. 이 공명심 높은 대한은 소영을 공격하여 명예 를 높이고 싶어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이때 내가 공격하여 성공한다면 내 명예가 높이 오르고 무림 동지들의 선망이 되겠구나.' 그는 그러한 생각으로 남몰래 철사장력(鐵沙掌力)을 운기하여 소 리없이 소영에게 다가서서 내리쳤다. 그러나 소영의 신경이 예민함 이 보통 사람과 달라 그의 행동을 이미 알아챘다. 소영은 만약 이 험한 분위기 속에서 잘못 처리한다면 싸움은 크 게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하여 내력을 최대한 운기하여 그 철사장력 을 보이지 않게 튕겨냈다. 소영의 내공이 이미 입신의 경지에 닿아 있어 단지 소리 없이 튕 겨냈을 뿐인데도 대한은 몸 전체가 진동할 정도였기에 피를 토한 것이다. 소영은 시치미를 떼고 모르는 척했다. 청의 소녀가 쓰러진 대한을 보니 그는 철사장력으로 유명한 취미 수왕의(吹眉手王意)였다. 소녀는 무척 의아했다. '방금 내 공격은 나를 생각해서 양보한 것이었구나! 이 왕의의 장력은 나보다 훨씬 강한데도 저렇게 허무하게 떨어졌는데....' 그녀는 고개를 들어 소영을 바라보았으나 소영과 시선이 닿자 맞 서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필수신룡 단목정 뒤로 피하였다. 마문비는 재빨리 왕의에게 다가섰다. 그는 왕의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왕형, 상처가 중하오?" 왕의의 눈, 코, 입에서 시커멓게 죽은 피가 솟았다. 이 죽은 피 는 내장 깊숙이에서 나온 것이며 심맥이 끊어진 징조였다.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도저히 살릴 가망이 없었다. 왕의는 가까스로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그는 호신강기(護身强氣)가 있....." 왕의는 말할 때 전신을 떨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 같았다. 말이 끝나자 그는 즉시 숨을 거두었다. 마문비는 숨을 거둔 왕의를 서서히 내려 놓으며 군중들에게 말했 다. "여러분, 우선 앉으시오." 왕의가 죽자 조금 전까지도 살기 등등하게 공격태세를 취하던 그 들은 마문비가 하라는 대로 자기들의 좌석으로 돌아갔다. 마문비는 소영을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소형은 무슨 일로 여기에 왔소?" "난 이미 백화산장을 이탈했고....." 이 말을 듣고 마문비가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심목풍이 말을 보내 무림 영웅들을 초청하여 소형이 백화 산장에 가맹한 데 대하여 축하하려는 걸로 아는데.... 소형이 백화 산장을 이탈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소." "그런 일이 있었소?" "저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내가 사실 그대로 말을 한다고 해도 군중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 이고, 백화산장에 남아 있는 부모님은 살아날 수가 없겠구나.' 소영은 이런 생각에 주저하며 결정을 못 내렸다. 상팔이 마문비에게 다가서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리에 할 말이 있소. 여기서 말할 순 없고.... 잠깐 저쪽으 로 갑시다." 마문비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부대 한 구석으로 갔다. 상팔은 재빨리 다가서며 마문비와 머리를 맞대고 무어라고 소곤 거렸다. 마문비는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서서히 걸어와 소영 앞에 다가 섰다. "소형, 앉으시지요." 소영은 상팔과 마문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한때 격분하였던 군중들은 소영의 실력에 은근히 질렸는지, 아니면 그 담력과 우아한 풍채에 놀랐는지 제각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마문비는 군중들을 돌아 보고 나서 소영에게 말했다. "소형의 참뜻을 몰라 경솔했음을 용서하시오." "연락없이 왔기 때문에 마형과 군중들이 몰라서 그랬는데 어찌 마형 탓이겠소?" "오늘밤의 군호(軍豪)대회에서 비록 나를 주사(主事)로 추천을 했으나, 많은 사람을 다스릴 아무 재능도 뛰어남도 없으니, 소형이 주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군중들이 따를지 의심스럽소만." 소영은 얼굴을 찌푸리며 숙연히 말했다. "마형, 할 말이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시오. 힘이 닿는 한 전력을 다하겠소이다." "지금 백화산장은 소형의 가입을 경축하느라고 야단들인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내가 전력을 다해 소형의 입장을 설명 해도 지금 군중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소. 그러니 우선 소형께 선 이곳을 잠깐 피하시고, 내가 군중들에게 양해를 얻은 후 부하를 보내 정중히 소형을 다시 집회에 모시겠습니다." 소영이 오게 된 원래의 목적은 구원을 청하려 한 것인데, 지금 상황으로 보아서는 더 이상 머물다가는 손해만 볼 것 같고 자기 부 모를 구출할 수가 없게 될 것 같았다. "기왕 군중들이 내 입장을 몰라 준다면 하는 수 없이 가야겠군."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돌려 나갔다. 상팔, 두구, 은란, 금란 등도 모두 소영의 뒤를 따라 나갔다. 팽운이 갑자기 뛰어와 소영이 가는 앞을 막았다. "소대협은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군중들이 나를 이해 못하니 이 집회에 참여할 수 없어 떠나오." "이 거지가 무능하여 군중들의 신임을 얻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 다. 저도 이 대회에 참석치 않으렵니다." 이때 마문비가 급히 팽운을 만류하며 나섰다. "팽형은 오해하지 마시오. 팽형은 무림에서 협객으로 알려졌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팽형을 존경하고 있소. 더구나 당신의 스 승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고, 지금 오직 팽형만이 있는데 팽형마 저 가신다면 개방에선 한 사람도 참석한 사람이 없게 되오." 팽운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군중들이 백화산에 대해 너무 공포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소. 난 이름없는 졸장부에 지나지 않지만 군중 들이 소형을 알아보지 못하는 점은 정말 안타깝고 한심할 뿐이오." 소영이 씁쓸하게 말했다. "얼음이 석자(三尺) 깊이 얼기까지는 하루 아침 추워서 이루어지 는 것이 아니오. 팽형, 진정하오. 난 이만 가봐야겠소." 말을 끝내고 소영은 나갔다. 팽운은 마문비의 허락도 없이 소영의 뒤를 따라 나서며 말했다. "여러분을 전송하겠소." 목판으로 깔려 있는 길 끝으로 다다랐으나 배는 보이지 않았다. 두구는 욕설을 퍼부었다. "나쁜 놈들 같으니. 우리들에게 집회에 참석치 못하게 하였으면 타고 갈 배는 구해 줘야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를 일이군." 소영이 말했다. "생각컨데 무슨 대책이 있을 거요. 너무 성급하게 생각치 마시 오." 두구가 상팔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님, 그놈과 무슨 말을 했소? 우리가 이렇게 무서워서 도망하 는 것처럼 되었으니 중주이고의 명예가 손상되었소." 상팔은 어이없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절대로 손해 볼 장사를 하지 않으니 안심하게." 팽운이 말했다. "뱃사공은 모두 우리 개방 사람들이니 내가 개방에 가서 그들에 게 배를 가져 오게 하라고 말하겠소." "팽형, 그러지 마시오. 생각컨데 마문비에게 꼭 어떤 배려가 있 을 것이니 우리는 조급하게 서둘지 말고 좀더 기다려 봅시다." 이때 멀리서 노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보니 조그마한 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작은 배는 재빨리 기다리고 있는 이들 앞에까지 왔다. 사공은 과연 개방의 제자였다. 팽운이 방의 암호로 자기의 신분을 밝히자, 두 사공은 즉시 방에 서 행하는 대로 허리를 굽히고 두 손 모아 예를 갖추었다. "너희들은 이분들을 모셔다 드리고 즉시 돌아오너라." 두 개방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 중의 한 사람이 말 했다. "우리는 마타주의 명을 받고 이곳에 배를 댔습니다. 이번엔 은패 타주의 명을 받았으니 어느 분의 분부를 들어야 할지 모르겠습니 다." 팽운은 약간 머뭇거렸다. "이번엔 예외이니 내 명을 받고 즉시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와서 마타주의 분부를 받아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팽운은 여러 사람을 둘러 보았다. "여러분, 배에 오르시오. 내 꼭 소형의 입장을 해명하여 마문비 가 손수 소형을 겸손히 모시게 하겠소." "모두 내가 부족한 탓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남을 탓하지는 마시 오." 소영은 말을 끝내고 배에 올랐다. 뒤따라 중주이고와 금란, 은란도 배에 올랐다. 두 개방 제자들은 물줄기를 따라 익숙하게 노를 저어 빠른 속도 로 갈대숲을 벗어났다. 개방 제자 한 사람이 소영을 돌아 보았다. "여러분, 어느 곳에 상륙(上陸)하시겠소?" "아무데나 빨리 상륙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두 개방 제자들은 재빨리 노를 저어 동쪽으로 몰아 잠시 후 나무 들이 무성한 강가에 배를 댔다. 소영과 여러 사람이 서서히 상륙하 자, 개방 제자들은 즉시 뱃머리를 돌려 돌아갔다. 상팔은 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어디로 갈 계획이오?" "남을 구하느니 차라리 자신을 구해야겠소. 기왕에 그 군중들의 집회에 참석치 못했으니, 내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 부모님을 위험 에서 구출해야겠소." 은란이 다가서며 말했다. "안 돼요. 백화산장 사람들은 모두 공자를 알고 있고, 백화산장 에 접근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공자를 발견할 거예요." "변장하고 가지." "백화산장의 경계는 극히 엄하여 보통 변장술로는 속일 수 없어 요." "변장만이라면 아주 쉽지요.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게 변장할 수 있는 약이 있으나, 어떻게 백화산장에 들어갈 것이냐가 문제지 요." 상팔의 눈빛은 순간 예리해졌다. 그는 은란을 바라보았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은란 아가씨에게 좋은 묘안이 있을 거 야."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데.... 될지 모르겠어요." 소영이 급히 물었다. "무슨 방법인지 어서 말해 봐요." "제가 알기로는 백화산장 동북방 쪽으로 조그마한 문이 있는데, 출입하는 사람은 오직 주방사람들과 잡역부들이며 백화산장으로 잠 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지요." 상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우, 우리는 주방 사람으로 변장하여 그 문으로 들어가 자!" 소영이 다그쳤다. "나는?" "형님을 위해 한 방법을 생각해 냈소. 형님과 은란은 변장하고 백화산장에 초청받은 고수들로 가장하면 들어갈 수 있을 거요." "어떻게 백화산장에 고수를 초청한 집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소?" 심목풍이 말을 보내 고수들을 초청, 영웅 대회를 거행하여 겉으 로는 형님이 백화산장에 가입한 일을 축하하는 것처럼 해 놓았소. 그러면 형님과 무림 정파 인물들을 갈라놓게 되고 실력을 과시하며 많은 고수들을 그가 이용하려는 것이오. 마문비도 초청 대상에 들 어 있소." "그럼 나더러 마문비를 따라다니는 사람으로 가장하여 백화산장 에 들어가란 말이오?" "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니 용서하시오." 소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나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데 있어 감격해도 시원치 않은데, 무 슨 용서가 있고 말고 하오." "나와 마문비는 이미 약속을 했으며 내일 일찍 나가기로 했소. 그리고 백화산장으로 들어갑니다." 소영은 하늘을 쳐다보며 시간을 어림잡았다. "내일 아침이라면 아직도 시간이 있으니 충분히 준비할 수 있겠 소." 소영이 선선히 제안을 받아들이자 상팔이 말했다. "난 두 마리의 맹견이 있고, 이미 그놈들은 모든 훈련을 다 받았 지만 오랫동안 돌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가서 좀 돌보고 오겠 소. 형님과 아가씨는 이 숲에서 자리를 잡고 좀 쉬십시오." "좋소,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겠소." "길면 몇 시진 걸릴 것이고, 짧으면 두 시진 내로 돌아오겠소." 말을 끝내자 상팔은 두구와 함께 가버렸다. 소영은 멀어져 가는 중주이고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소영은 강호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무림의 옳고 그름의 시비와 싸움에 휘말려 동지들의 오해를 샀고, 이미 몸을 빼낼 수 없는 지 경이 되었다. 또한 부모는 인질로 백화산장에 잡혀 있어 지력(智 力)을 다투는 양 세력 사이에서 난처하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 도 못하는 중간 인물이 되고 말았다. 부모의 정을 생각하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립고 태산같으며, 그것을 생각할 땐 소영의 정신적인 부담이 너무나 컸다. 부모가 죄없이 인질로 잡혀 있으니 한시라도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가 없었으며 사무치도록 마음이 아팠다. 은란과 금란은 시름없이 앉아 눈물을 흘리는 소영을 보고 그 대 담하고 씩씩한 사나이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마음을 헤아리며 자기들도 역시 눈물을 감추지 못하였다. 금란은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소영에게 주었다. "공자, 지금 공자께서는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신데 몸을 중히 여기셔야지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은란은 슬픔을 억제하여 부드럽게 위로했다. "지금 공자는 슬픈 마음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줄 압니다. 마음을 약하게 가지시면 일을 성사치 못하오니 그만 진정하시고 용기를 내 십시오." 소영은 두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고 긴 한숨을 내뿜었다. "아들된 도리로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면 천생에 죄를 씻지 못 하는 것인데 아들 대신 죄없이 고생하시니 후일 무슨 낯으로 뵙겠 소." "기왕 일은 이렇게 되었지만 후일에 잘 처리하면 될 거예요. 두 어른께서는 좋은 분들이니 비록 지금 고난을 겪고 계시지만 꼭 살 아 나오실 것이니 안심하셔요. 공자께서 무거운 짐을 양 어깨에 지 고 있는 이때, 이렇게 너무 고민을 하시면 오히려 몸에 해로우니 진정하시고 내일 일이나 상의해요." "낭자들의 권고는 참으로 고맙소이다."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눈을 감고 휴식에 들어갔다. 취미수 왕의가 철사장으로 공격한 후 소영에게 호신강기한다 했 지만, 그는 공력이 부족하여 약간의 손실을 입었다. 소영은 두 여인의 권고로 휴식을 취하며 조용히 생각했다. '천하 무림 사람들은 심목풍을 적잖이 미워하고 무서워하지만, 부모를 구하는 일은 역시 내 스스로 해야 할 텐데, 약간의 상처라 고 도외시해서 후일에 다시 악화된다면 완전히 자멸행위다. 부모를 구한다는 것도 우선 성한 몸이어야 한다.' 그의 지혜는 남달리 총명하여 이런 생각을 하자, 땅에 주저 앉아 운기조식을 했다. 금란과 은란이 소영을 염려하는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 큼 컸다. 이런 때 외부에서 타인이 침공한다면 하는 생각에 두 여 인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를 철저히 했다. 한참 후, 별안간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은란은 즉시 장검을 뽑아 들면서 낮은 소리로 금란에게 말했다. "언니는 공자를 돌봐 주시오. 난 저기 오고 있는 자가 적인지 확 인해 보겠어요. 만약 적이라면 딴 곳으로 유인하여 보내고 올 테 니, 언니는 공자를 잘 보살피고 나의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세요." 단 몇 마디의 말이지만 정이 담뿍 담긴 어조에 금란은 눈물이 핑 돌았다. "적을 유인하는 것은 내가 하겠어. 넌 지모(智謨)로 평소에 공자 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어. 그러니 네가 그분 곁에서 보살피고 또한 힘이 될 수도 있으니 네가 여기 있어. 내가 적을 유인하겠어." "그러나 언니는 힘이 나보다 못해요. 이 중요한 일은 언니가 할 수 없어요." 은란은 대답도 듣지 않고 질풍같이 몸을 돌려 날아가듯 나갔다. 금란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소영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의 머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났다. 다시 금란은 은란이 간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벌써 간 곳이 묘연하였다. 금란은 사방을 살피기 위해 큰 나무에 몸을 숨기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만약 이쪽으로 사람이 온다면 사정 볼 것 없이 습격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금란은 귀를 세우고 들어 보았다. 아 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은란이 벌써 딴 곳으로 유인했는지, 아니 면 그자가 방향을 바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 사방은 쥐죽은 듯이 조용한데, 한참 후에도 아 무 소식이 없었다. 너무나 조용하니 오히려 금란은 공포감을 느끼 며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그자가 은란을 죽였을까? 아니면 지금쯤 조용히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일까?' 금란은 사방을 두루 살폈다. 밤이 깊어 마치 나무 뒤마다 사람이 숨어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고요속에 적막은 흘러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에 사로 잡혔다. 또한 바람 소리와 가끔 들리는 밤새 소리는 사람이 대화하는 듯 한 소리로 들리고, 모든 나무는 사람으로 보였다. 이때 갑자기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웃음소리에 금란은 놀라 졸도할 뻔하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뒤를 돌 아보았다. 나무 옆에 검은 그림자가 사람인 듯 보였다. 밤이 깊어, 갑자기 숲 속에서 나타난 검은 그림자는 마치 유령같 기도 하였다. 금란은 정신을 차리고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누구냐?" 검은 그림자는 금란에게서 몸을 돌려 갑자기 소영쪽으로 다가갔 다. 금란은 다급해졌다. 장검을 빼어 들고 쫓아 갔다. "멈춰라!" 금란은 검은 그림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 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금란을 바라보았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이 소영인가?" 금란은 그를 자세히 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손에 맥이 쑥 빠졌다. "독수약왕이오?" "그렇다. 저기 앉아 조식하고 있는 사람이 소영이냐고 묻지 않느 냐?" 금란은 떨리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이 독수약왕의 무공은 막강하여 내가 상대할 수 없다. 그러나 그와 싸워 시간을 지연시킨다면, 그만큼 소대협에게 유리할 것이 다. 나는 공자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 이런 기회에 나는 죽음으로 그 은혜에 보답해도 아쉽지 않다.' 금란은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대담해졌다. 금란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약왕은 백화산장에나 있지, 이곳에는 무엇 때문에....?" 독수약왕은 화를 버럭 냈다. "저 사람이 소영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듣지 못했어?" "듣지 못했다면 어떡하겠어?" 독수약왕은 혼자 중얼거렸다. "하늘도 무심치 않군! 고생한 사람의 심정을 알아주니... 결국 그를 여기서 찾게 되었구나." "소공자는 심목풍의 명을 받고 나와 은란을 데리고 백화산장을 떠나 딴 일로......" "내 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심목풍과의 우정도 생각할 수 없다." 약왕은 갑자기 금란을 밀치고 소영이 있는 쪽으로 갔다. 금란은 잽싸게 장검으로 그의 길을 가로 막았다. 독수약왕은 무공이 어찌나 강한지 금란이 몸을 날려 막으려는 순 간 이미 소영에게 다가서며 손으로 그의 혈도를 세 곳이나 짚었다. 소영은 정신을 집중시켜 운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옥신 각신하는 것도 전혀 몰랐다. 그러므로 독수약왕이 혈도를 눌러도 저항하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금란은 몹시 다급해져 장검을 계속 휘두르며 몇 번이나 공격하였 다. 독수약왕은 별 힘 안 들이고 한 손으로 금란이 휘두르는 검을 막았다. "심목풍의 체면을 봐서 너를 죽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비위를 거 슬리면 심목풍과의 우정도 생각치 않고 너를 죽일 것이니 원망하지 마라." "어서 그 사람을 놓아라." 금란은 계속 장검을 휘둘렀다. 독수약왕은 한 손으로 금란의 장검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소 영의 경맥을 짚어 진기(眞氣)를 없애고 있었다. 오래 가면 상처가 생길까봐 두려워서였다. 금란은 순식간에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독수약왕은 어린애를 데리고 놀 듯 힘 안 들이고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금란은 너무나 분하고 다급해 눈물이 핑 돌았다. 이때 옷자락 소리가 들리며 그림자가 번뜩였다. 은란이었다. 금란은 어찌나 반가운지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무능하여 이자를 소공자에게 접근하게 했으니...." "경과는 조금 있다 말하기로 하고, 지금은 공자를 구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예요." 은란은 장검을 휘두르며 착실하게 공격하였다. 금란도 정신을 가다듬고 검을 휘두르며 공격하였다. 독수약왕의 무공은 막강하지만, 그는 한편으로는 소영의 웅결된 진기를 유통시키며, 한편으로는 두 여인의 공격을 막아내며 더구나 두 여인이 필사적으로 공격하자 도저히 응수치 않을 수 없었다. 독수약왕은 크게 노하였다. "무지한 계집들아, 나는 심목풍의 체면을 생각해서 너희들을 봐 주고 있는데, 정말 너희들이 원한다면 상대하여 죽여 줄 테다." 독수약왕은 소영을 잡았던 손을 놓고 금란을 공격하였다. 금란은 장검을 들고 휘둘러 독수약왕을 내려쳤다. 그러나 그 순간 독수약왕의 응수에 금란의 몸이 칠팔 보 뒤로 밀 려 가서 거꾸러졌다. 은란이 놀라 금란을 보았다. 그녀는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이때 독수약왕은 검을 금란에게 겨누고 있었다. 은란은 이 때라고 생각하며 장홍경천(長紅經天)식으로 몸과 검을 동시에 날렸다. "계집이 죽고 싶은 모양이군." 독수약왕은 왼손을 폈다 오무렸다 하며 공격하였다. 은란은 독수약왕의 막강한 일격에 뒤로 물러나다가 큰 나무에 부 딪쳐 넘어졌다. 독수약왕은 넘어져 있는 두 여자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너희들을 죽이진 않겠다. 심목풍에게 알려도 난 무섭지 않다." 독수약왕은 소영을 안고 걸어갔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어 독수약왕이 몇 개의 나무를 돌아 사라지니 찾 을 길이 없었다. 금란이 먼저 힘을 내어 일어섰다. 긴 한숨을 내쉬고 은란에게 다 가서서 그녀를 일으켰다. "은란 어때?" 은란은 독수약왕의 일격에 나무에 부딪쳐 졸도하였던 것이다. 금란이 은란의 손을 잡고 흔들자 은란이 깨어나면서 서서히 일어 섰다. "난 괜찮아요. 공자는?" "공자는 독수약왕이 데리고 갔어." 은란은 깜짝 놀랐다. "데려갔다고?" 이때 옷자락 소리가 나며 두 그림자가 날 듯이 점점 다가왔다. 금란과 은란은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기 때문에 온 자들이 적이 라면 생포될 수밖에 없었다. 오고 있던 사람이 발걸음 속도를 줄이며 말했다. "금란 아가씨요?" 고개를 돌려 자세히 보니 중주이고였다. 금란은 반갑고 또 조금 전에 당했던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 졌다. "두 분은 왜 이리 늦으셨어요?" 상팔이 어리둥절하였다. "왜 그러시오? 형님은 어디 갔소?" "그는...." "독수약왕이 잡아 갔어요." "독수약왕! 그 괴물도 귀주에 왔었단 말이오?" "독수약왕과 심목풍은 퍽 오래 사귀었고, 심목풍이 지금까지 쓴 약은 전부 독수약왕이 조제한 것이에요." 상팔은 두구를 보고, "아우,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우선 두 아가씨들을 구 하고 보세." 두구는 재빨리 품속에서 약을 꺼내 금란과 은란에게 내주었다. "우선 두 아가씨는 약을 잡수시오." "우리는 아직 괜찮으니 빨리 독수약왕을 추격하세요." "밤은 야심하고 나무는 꽉 차 있어 쉽사리 찾기 어려울 게요. 이 미 그는 심목풍과 잘 사귄 사이니 필시 심목풍의 명을 받고..." "아니에요. 그는 자기 딸의 생명을 구한다고 했어요." 상팔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자기 딸을 구한다면 소영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저는 공자의 말씀을 들어 알지만, 독수약왕의 딸은 오래 전부터 괴이한 병으로 앓고 있는데 치료법은 오직 공자의 피와 바꿔 버리 는....." 은란은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몹시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상팔은 놀라며 왼손으로 은란의 등을 눌렀다. "아가씨, 급히 서두를 필요는 없소. 독수약왕은 필시 형님을 처 치하려는 것이 아닐 거요. 아가씨가 더 위급하니 아가씨부터 치료 하고 독수약왕을 추격하도록 합시다." 상팔은 힘을 주어 은란의 명문혈(命門穴)을 눌러 진기를 안으로 주입시켰다. 독수약왕의 일격은 금란과 은란을 즉시 죽이게 할 수 도 있었으나, 두 여인이 백화산장 사람이고 또 심목풍과 퍽 깊은 사이라 심목풍의 체면을 생각해서 두 여인에게 가벼운 상처만 입혔 던 것이다. 은란은 상팔의 치료에 고마움을 느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가까 스로 참았다. "안 돼요. 우리는 공자를 찾아야 해요. 만약 늦으면 독수약왕이 공자의 피를 전부 빼 버릴 거예요." 두구가 참견을 하였다. "그렇소. 우리는 속히 가봅시다." 상팔은 두구를 보며 다시 말했다. "어서 가서 맹견 한 마리를 데리고 오게. 두 시진내면 그의 뒤를 미행할 수 있소." "내가 죽일 놈이지." 두구가 말을 하자마자 비호같이 몸을 날려 달려갔다. "두 아가씨는 잠시 쉬시오. 만일 독수약왕이 멀리 가지 않았다 면, 우리는 내일 예정된 계획을 착수할 것이니...." 두 여인은 약간 마음이 안정되었다. 추격할 것을 생각하니 잠시 나마 쉬어야지, 피로를 풀지 않으면 추격치 못하게 될까봐 눈을 감 고 조용히 앉아 조식하였다. 잠시 후, 두구가 검고 큰 개를 데리고 왔다. 상팔은 개에게 무슨 말인지 중얼거리며 개를 몰고 사방을 한 바 퀴 돌아 보고, 갑자기 잡았던 개를 놓았다. 은란은 개가 바로 독수약왕이 간 방향으로 뛰어 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뻐했다. "맞았어요! 의외로 저 큰 개를 이렇게 긴요하게 쓰게 되었군요." 상팔이 휘파람을 불자, 검은 개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상팔을 바라 보며 다시 상팔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상팔이 다시 중얼거리니 개는 다시 몸을 돌려 질풍같이 달려갔 다. 은란이 이상히 여겼다. "그게 무엇하는 거요?" "두 아가씨는 상처도 아직 완치되지 않았고 하니 너무 빨리 갈 수 없소. 독수약왕도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오. 우리가 빨 리 가면 조용한 밤중이라 옷자락소리가 십 리 밖까지 들릴 것이니, 타초경사(打草驚蛇) 식이 아니오?" "그렇군요." 두구가 말했다. "저 큰 개가 숲을 두 바퀴를 돌고 왔는데 무슨 뜻인지 알겠소?" 상팔이, "그것은 숲 속에 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살피는 거겠지." 은란과 금란은 조식하고 나니 비교적 아까보다 나았지만 몸속의 고통은 여전했다. 이를 악물고 길을 걸었다. 앞장 서서 가는 큰 개는 숲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어찌나 조심하는지 발자국 소리 하나도 나지 않았다. 검 은 개는 단숨에 약 사, 오 리를 가다가 갑자기 멈춰 큰 묘를 응시 하고 즉시 덮칠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곳이다." 두구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큰 묘 안에?" "만약 개가 잘못 찾지 않았다면 바로 이곳일걸세. 자네는 개를 좀 보게. 짖지 않도록. 난 이 근처를 수색하겠네." 상팔은 살금살금 걸어 갔다. 이 묘는 오래 묵은 무덤이었고, 무 덤 위에는 사람 키의 반쯤 자란 무성한 풀이 있었다. 상팔은 무덤을 한 바퀴 돌았다. 과연 청초(靑草) 밑부분엔 새로 깔려 있는 흙이 있었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았다, 그곳에는 두 자 정도의 구멍이 청초로 가려져 있었다. 독수약왕은 이곳이 은밀하고, 또 남이 발견치 못할 것이라 생각 했는지 구멍도 막지 않았다. 상팔은 엎드려 동굴 속으로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 말소리가 희 미하게 들려 왔다. 43. 독수약왕의 끈질긴 흡혈기도(吸血企圖) 독수약왕은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진 고수이므로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팔은 조용히 뒤로 물러서며 은란과 금란에 게 개를 데리고 멀리 피신하라고 하였다. "아우, 독수약왕의 무공은 막강하고 형님도 그의 수중에 있으니 우리는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되네. 이 좁은 묘 안에서 싸움을 할 수는 없으니 조심하게." "형님 명령에만 따르겠소." 상팔은 두구를 데리고 무덤 앞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순간 무덤 안에서 소영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은 독수약왕이라는 칭호가 있고 의도(醫道)와 약물에 초인 간적인 재능이 있는데, 왜 그러한 재능으로 당신 딸을 구하지 않고 이런 방법으로 딸을 구하려 하오?" "나는 몇 년 동안 대강남북이며 명산 등 좋은 곳을 빼놓지 않고 찾아 헤맸으나 아쉽게도 딸을 구할 만한 명약을 찾지 못했소. 또 딸의 체질에 맞는 사람을 보지도 못했지. 허나, 오직 그대만이 내 딸의 체질에 적격이니 원컨데 피를 내 딸에게 준다면, 그 고마운 은혜는 두고두고 갚겠소."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이미 당신에게 생포된 몸이고, 오직 당신의 손아귀에 있는 데 왜 이렇듯 나에게 부탁하고 있소?" "내 딸이 너무나 선량하여 내가 강제로 수혈을 했다는 것을 알면 큰일이오. 그렇게 되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나도 할 수 없이 강제로 할 수밖에 더 있겠소?" "나에게 요구하는 뜻은 내가 자진해서 수혈하여 구하겠다는 말을 하라는 거요?" "바로 그것이오. 좌우간 그대는 어차피 죽을 몸이니 좋은 일을 하여 내 딸을 살려 주오." 상팔은 이 말을 듣자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생사를 흥정하다니......' 소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긴 한숨을 쉬었다. "남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금은 아직 죽고 싶지 않소." 갑자기 불빛이 번쩍하며 등불이 켜졌다. 상팔이 또다시 안을 들여다 보니, 관 위에 담요를 깔고 소녀가 누워 있었다. 관 옆에 있는 홀은 이미 파 내려져 있었고, 사방 벽 에는 붉은색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독수약왕의 은신처라는 것을 대번 짐작할 수 있었고, 그가 은신 처를 많은 공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이 역력히 나타났다. 소영과 독수약왕은 관 옆에 앉아 있었다. 동굴 입구와는 상당한 거리이기 때문에 직접 보이지는 않고, 그림자로 두 사람의 거동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대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소.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내 가 약물을 쓰면 고통을 덜고 편안히 죽을 수 있지." "난 생전에 해야 할 일이 있소. 만약 할 일을 못하면 죽어도 눈 을 감을 수 없소." "무슨 일인지 말해 보게. 딸을 구출한다면 내가 그대가 원하는 일을 도와 줄 수 있소." "말해야 소용이 없으니 말하지 않겠소. 어서 나를 죽이시오." 상팔은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독수약왕이 앉아 있는 곳은 무덤의 맨 끝부분의 구석이니 몰래 손을 쓸 수도 없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구나!' 상팔은 지모가 많고 일의 실행에 있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성격 이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형세를 살핀 뒤, 독수약왕의 반격에 대처할 것을 미리 생각하고,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나왔던 배가 들 어가더니,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왼손으로 금산반을 휘두르며 조심성 있게 안으로 들어가 오른손 으로 재빨리 관 위에 누워 있는 소녀를 잡았다. 독수약왕은 천만 뜻밖에 이 황량한 묘지에 사람이 찾아들자, 깜 짝 놀라며 상팔에게 공격하려 하였다. 하나, 상팔은 관 위에 있는 소녀를 수중에 넣고 있으니, 독수약 왕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며 공격하려던 자세를 바꾸었다. "그녀를 놓으시오. 그 애는 허약하고 곧 숨이 넘어 가니 죽어가 는 애를 놀라게 하지 마시오." 상팔은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독수약왕이 죽어 가는 자기 딸을 천금의 보배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 다. "나도 분수를 알고 있는 사람이니 그대가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한, 나도 그대의 딸을 해치지는 않겠소." 독수약왕은 풀이 죽어 한숨을 쉬었다. "나와 당신 중주이고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당신들이 내 딸을 구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상팔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신이 사람을 잘못 택했소." 독수약왕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떤 사람을 잘못 택했다는 거요?" "소영! 소영이 우리 중주이고와 어떤 관계인 줄이나 알고 있소?" "소영은 백화산장의 삼장주인데, 중주이고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그렇지. 그는 백화산장의 삼장주도 되지만, 또한 우리 중주이고 의 웃어른이 되신다." "그것은 언어도단이다. 중주이고는 사십대이고, 이 소영은 불과 소년에 지나지 않는데... 또한 강호에 출현한 지 불과 일 년이야." "우리 형제가 소영과 이미 오 년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믿지 못 한다면 할 수 없지." 독수약왕은 맥이 쭉 빠지는 모양이었다. "무슨 조건을 원하는가? 좌우간 중주이고는 항상 이익을 바라니. ......" "이번만은 약왕이 알아 맞히지 못했군. 우리의 이번 흥정은 우리 의 웃어른이신 소영을 놔주라는 거야" 독수약왕은 깜짝 놀라며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무엇이? 소영을 놔주라고?" "그렇소. 소영을 놔주오." "소영을 놔주면 누가 우리 딸을 구한단 말이오?" "당신은 의술에 정통하여 무림에서는 제일인자이니 필히 좋은 약 이 있을 것이오." "난 십여 년을 애써 기다렸고 비로소 이 사람을 발견했는데, 나 더러 그를 놓아 주라면 내 딸을 죽이라는 것밖에 안 되지." "자기 딸의 목숨만 생명이고, 소영의 목숨은 생명이 아니란 말인 가?" 독수약왕의 바싹 마른 작은 체구가 부들부들 떨리며, 눈에는 살 기가 서려 있었다. "당신들의 오늘 나의 일을 방해한다면 후일 당신들의 잘못을 가 르쳐 주게 될 거요." 상팔은 머뭇거리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후일의 일은 후일이고, 나와 지금 말하는 것은 지금 눈앞에 보 이는 일이니 만약 당신이 소영을 놔주지 않는다면 당신 딸은...." "당신은 내 딸 목숨으로 나를 위협하는 건가?" "이것은 위협이 아니고 사실이며, 내가 감히 당신 딸을 해치지 않고 있지 않소?" 독수약왕의 살기등등한 눈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는 자애스 러운 눈으로 관 위에 누워 있는 자기 딸을 바라보았다. "내가 소영을 놔주지!" 독수약왕은 손을 휘둘러 소영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소영은 서서히 일어서서 어깨를 들썩였다. "난 죽을 운이 아닌가 봐요. 약왕은 두 번이나 헛일을 하셨군요. 그러나 나는 그 지극한 부성애에 탄복하였고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 소." "비록 지금은 이렇게 되었지만, 언젠가 다시 그대를 잡아 그대의 피로 내 딸을 살릴 것이다." 소영은 관 위에 누운 핼쓱하게 여윈 소녀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을 죽여서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을 어찌 의술이라고...." "내 딸을 구할 수만 있다면, 천만 명을 죽여서라도 꼭 구하고야 말겠다." "허나, 당신 딸의 마음은 약하고 너무 착하여 당신 생각과는 다 를 것이오." "내 딸이 오해하고 미워해도 나는 딸을 구할 것이다." "이런 부모는 가련도 하군! 당신은 선천적으로 악독하고 냉혹하 지만, 자기 자식에 대해서는 자비롭고 정이 두터움에 적지않이 놀 랐소. 그렇다면, 이 세상에 내 피 아니고는 좋은 약이 없어 당신 딸을 살릴 수 없다는 거요?" 독수약왕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세상엔 좋은 약이 있겠지,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지." 소영은 만약의 일에 대비하여 경계를 하고 상팔에게 한 발 다가 섰다. "먼저 나가시오." 상팔은 소영의 무공이 자기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알고, 안심하 고 소녀의 팔을 놓고 몸을 날려 동굴 밖으로 나갔다. 독수약왕은 상팔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번개같이 소영의 오른손 맥을 향해 찔렀다. 그러나 소영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 에 공격을 허용치 않고 재빨리 손을 휘둘러 독수약왕의 공격을 막 으며 오히려 반격하였다. 독수약왕은 폈던 손을 오무리며 주먹으로 공격을 막았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서로의 힘은 막상막하였다. 독수약왕은 소영이 동시에 서로 공격한 찰나, 독수약왕의 왼손은 소리없이 소영을 잡으려고 뻗어왔다. 그러나, 소영이 오른손으로 독수약왕의 맥혈을 치자, 독수약왕의 공격은 점차 느려지고 팔은 힘없이 처졌다. 이때 독수약왕은 가까스로 소영의 공격을 막았다. "내 딸을 해치지 말아라." "만약 당신 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이대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오. 그대는 이미 두 번이나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세 번 째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소영은 날쌔게 몸을 날려 동굴 밖으로 나왔다. 상팔과 두구는 무 기를 들고 파수를 보고 있다가 무사히 나온 소영을 보고 동시에 물 었다. "독수약왕을 처치했소?" "독수약왕은 악독하고 잔인하지만 그의 딸은 좋은 사람이오." 두구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독수약왕과 싸웠소?" "번개같이 몇 번 주고 받았지만 무승부였고, 그는 자기 딸이 상 할까봐 더 공격하지 않았소." "잘 됐소." 두구는 항상 저기압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또한 말투도 몹 시 냉랭하여 그의 웃음짓는 얼굴을 보기란 드물었다. 그러나 오늘 두구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상대방에게 한층 더 친밀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 독수약왕은 전신이 독이며 무림의 고수들 중에 독을 제일 잘 쓰니 우리는 여기서 오래 머무를 수 없소. 그러니 속히 떠나도록 합시다." 두구가 맨 먼저 앞장을 서 두 낭자가 있는 곳으로 가 같이 걸어 갔다. 소영은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오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독수약왕이 오늘밤 일을 심목풍에게 이야기하면, 필시 고수들을 보내 내 부모가 갇혀 있는 곳을 더욱 엄중히 파수를 볼 것이니, 만 약 우리가 백화산장에 들어간다고 해도 헛수고일 것이오." 은란이 웃으며 말했다. "그 점은 안심하셔요. 독수약왕이 공자를 추격한 것은 전부 자기 개인 사정이며, 심목풍과 우정이 두텁다고는 하지만, 심목풍의 성 격으로 봐서 독수약왕의 사심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에요. 그 러므로 저의 소견으로는, 독수약왕은 절대로 심목풍에게 이 말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전부 심목풍을 무서워하는 모양인데, 그렇소?" "그래요. 심목풍은 보통 악독하고 음흥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 서 그의 부하뿐 아니라 그의 절친한 친구도 사실 그에게 공포감을 느끼지요." 상팔이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좋소. 우리는 예정된 계획대로 진행합시다. 그리고 마 문비는 이미 나에게 약속했으니....." 소영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무엇을 약속했소?" "그는 형님의 기묘한 무공에 놀랐으며, 형님이 이미 백화산장을 이탈하였다면 그는 전력에 다해 우리를 돕겠다고 나와 약속했소." "그가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만 하군! 심목풍은 너무 나 악명이 높고 수단방법이 악랄하여, 백화산장과 친분관계가 있어 왕래하는 자나 무림동지도 모두 그에게 공포감을 느꼈군." "바로 그렇소. 난 이미 마문비와 만날 장소를 정해 놓았으니 모 든 준비를 해놓고 우리들을 대할 것이오." 은란이 말했다. "제가 말 많은 것을 용서하세요. 상팔 아저씨! 아저씨는 그와 무 엇을 상의하셨어요?" "그건 그도 말하지 않았지, 지금 그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숨기 고 있고 아직까지 우리에게 그런 것까지 밝히지 않았지." "제가 알기로는 심목풍이 요 몇 년 동안 백화산장에 은신하면서, 자신의 몇 가지 좋은 기술을 애써 연마하여 암암리에 사람을 훈련 시키는 비밀 지하실이 망화루 뒤에 아주 견고하게 건축되어 있는 데, 그 지하실은 심목풍 이외는 수하를 막론하고 들어갈 수 없으며 저는....." 은란은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더니 눈물을 주루루 흘렸다. 상팔은 은란의 슬픈 사정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하였다. "심목풍은 극히 악랄하여 그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수천이니, 아가씨는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은란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저는 전에 일시적으로 그에게 총애를 받아 그의 곁을 잠시도 떠 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그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 어요." "아가씨는 그 지하실에 들어가 본 적이 있소?" "없어요. 그때 그는 나를 극히 총애했지만, 절대로 나에게 들어 갈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허나, 들리는 말에는 그 비밀 지하실 은 심목풍이 심혈을 기울여서 자신의 부하를 훈련시키는 곳이라 합 니다. 그는 원래 간사하여 수하를 막론하고 믿지 않고, 오직 자기 가 친히 훈련시킨 부하들에게만 좋은 기술을 가르쳐 주지요." 상팔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지하실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오?" "심목풍은 자기 부하들을 훈련하는 방법이 특이하여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요. 그러므로 그가 무슨 방법을 쓰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요. 허나, 저는 심목풍이 무심코 한 호언장담을......" 소영은 호기심이 생겨 급히 물었다. "무슨 호언이오?" "그는 오룡(五龍)이 성할 때 자기가 천하를 재패하는 날이 될 거 라고 했어요." 상팔은 보는 눈이 넓어 강호의 일을 모르는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은란이가 한 말은 금시 초문이었다. "오룡이란 무엇이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다섯 사람 아니면 다섯 개의 기물이 겠지요." "들어보니 다섯 사람이라는 말이 기물이라는 것보다 맞는 말이라 생각되오." "사람인지 물건인지는 몰라도 그 오룡은 퍽 무서운 것임에 틀림 없어요." "물론이지! 그리고......" "그 이후로는 잘 모르지요. 보아하니 그 심목풍이 감히 먼저 도 전한 것을 보면, 필시 오령이 성할 날이 왔나 보지요?" "심목풍이 만약 무슨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면, 강호에 다시 나 타나 즉시 전 무림을 뒤흔들지는 않았을 것이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전부 말씀드렸어요. 상팔 아저씨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아저씨께서 알아서 결정하세요." "그건 나도 쉽게 결정할 수 없고.... 마문비와 상의를 해 보고, 그때 결정할 문제요." 은란은 갑자기 또 한 가지 생각이 났다. "아저씨와 마문비가 약속을 할때, 공자를 마문비와 수행인으로 가장시켜 백화산장에 들어간다고 하셨죠? 허나 제가 알기로는 백화 산장에 들어가면, 주인과 수행인은 떨어져서 수행인은 딴곳으로 가 또 다른 사람을 초대해야 하며 서로 어디 있는 줄 모르게 되지요." "그것은 나도 생각했었지, 그러나 우리 목적은 백화산장에 들어 가는 것이고....." 상팔은 말을 잠시 멎더니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좌우간 초청을 받은 사람은 은패(銀牌)를 하나씩 나누어 받고, 들어갈 때 은패를 소지하고 들어가야 하는데, 하나의 은패에 두 사 람이며 어떠한 수행인을 막론하고 은패 하나에 수행인을 더 중가할 수 없지." 지금까지 듣고 있던 두구가 말참견을 했다. "한 개의 은패에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면, 우리는 두 개의 은패가 있어야 정정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겠군요." "그렇지. 하나, 어디서 그 은패를 구하지? 지금은 황금 천량을 줘도 못 구하고 말고." "형님과 마문비는 몇 시에 만나자고 약속하셨소?" "내일 정오에 만나서 입장하기로 했네." "너무 촉박하군! 시간이 충분하다면 우리는 그것과 똑같이 만들 어 사용할 수 있을 것인데...." "똑같이 모방한다고?" "안 될 것이 없지요. 우리는 한 십여 개쯤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 에게도 나누어 주어서 백화산장에 들어가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해줍 시다." 은란이 말했다. "그 은패는 필시 무슨 암기(暗記)가 있을 것이고 위조한 것은 대 번에 발각되기 쉬을 거예요." "괜찮소. 우리는 사람이 제일 많이 들어갈 때를 노리고 있다가 그때 갑자기 우리도 한몫 껴서 들어가면, 파수병들은 바빠서 어쩔 줄 모를 거요." "방법이 좋으니 한 번 시험해 보지. 그때 우리 네 사람이 정정당 당하게 들어가게 되면, 하인과 잡부로 가장하지 않아도 되겠네." 은란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파수병들은 백화산장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에요. 우리는 쉽게 그들을 속일 수 없어요. 차라리 우리는 그 옆문으로 들어갑시 다." 두구는 안타까운 듯이 은란을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나의 위조술을 모르는군. 조각하는 것은 정밀하게 할 수 있으니 비록 암기를 찾지 못해도 외모와 안의 그림이나 무게도 똑같이 만들어, 보기에 조금도 차이가 없을 것이오. 아가씨가 믿지 못하다면 그때 가서 보면 알겠지." 은란은 눈을 반짝이며 두구를 쳐다보면서 생각하였다. '조각까지 할 줄 아는구나!' 두구가 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가씨, 그렇게 뚫어지도록 바라보지 마시고, 그런 일을 즉시 실천해 보일 테니 아가씨께서 잘 분별해 보시오." 두구는 시선을 상팔에게 돌렸다. "형님, 어떻게 마문비를 찾아 그의 은패를 잠간 빌리시오. 만약 내일 정오에서야 은패를 빌린다면 난 할 수 없어요. 그 때는 할 수 없이 아가씨 말대로 옆문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소." 상팔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왔다갔다 하였다. "좋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내가 마문비를 찾아 보겠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팔은 몸을 돌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두구는 시선을 은란에게 옮기며 말했다. "내가 서두르지 않았으면, 형님도 애써 마문비를 찾을 생각은 하 지 않았을 거요." "오래 전부터 당신 중주이고는 정의(情誼)가 두터운데 어째서 형 제지간에 그런 말을 쓰는지요?" 두구는 멋적은 듯 미소를 지었다. "큰일에 피해가 없는 한 피차간에 약간의 심기(心氣)의 자극은 오히려 원활한 효과를 거둘 수 있고, 형님도 정말 내 말에 노했다 면 저렇게 뛰어갈 줄 아시오?" "그렇군요." "이 세상의 형들은 아우보다 예리하고 솔선수범하는 법이오." "상팔 아저씨께서 그 은패를 꼭 갖고 올 수 있다고 봐요?" "내가 보건데 마문비는 절대로 우리 형님을 해치지 않을 것이고, 기왕 형님이 갔으니 십중팔구 가져 올 가망성이 있소." "상대협은 우리 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으니 우리는 여기서 휴식이나 취합시다." 소영이 이렇게 말하자 두구는 속으로 생각했다. '두 아가씨는 상처도 완치되지 않은데다가 뛰어다니느라고 퍽 피 로 하겠구나!' "그럽시다. 우리는 이러한 기회에 충분한 휴식을 취합시다." 은란과 금란은 상처가 아직도 완치되지 않았고 더구나 동분서주 하여 이미 재발되어 있었으나, 이들은 참을성과 고집이 강해 두구 가 앉자 비로소 앉아 눈을 감고 조식하였다. 두구는 두 아가씨가 조용히 조식하는 것을 보고, 소영 옆으로 다 가섰다. "두 아가씨는 모두 독수약왕에 의해 상처를 입고, 오직 큰형님을 찾는다는 일념으로 상처를 무릅쓰고 동분서주하여....." "나도 알고 있소. 그녀들은 너무 피로에 지쳤고 나도 조용히 쉬 어야겠소." 두구는 원래 말주변이 없는 사람인데다가 더구나 소영이 무슨 생 각에 잠겨 있어 말을 원치 않으니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소영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황야의 밤은 점점 깊어 만물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고, 가끔 어디 서인지 몇몇의 짐승소리가 들려와 추운 밤에 더욱 공포감을 주었 다. 이때 갑자기 은란 옆에 앉아 있던 검은 개가 동쪽으로 뛰어갔다. 두 여인은 조식하는 중 제일 중요한 관문을 진행중이니, 비록 소 리는 들었지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소영과 두구는 개가 뛰는 것에 놀랐다. 소영과 몸을 날려 개가 뛰어간 쪽으로 질주하면서 급하게 말했다. "두형, 두 아가씨를 보살피시오." 그의 동작은 어찌나 빠른지 거의 개와 육, 칠 보의 거리에 불과 하였다. 두구는 일어서서 개를 쫓아가려 했다. 개의 선천적인 예민한 이 목(耳目)은 제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사람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일 없이 개가 놀랄 리가 만무하였다. 그러나 소영이 이미 개의 뒤를 따라갔으니, 두구 자신은 할 수 없이 두 아가씨 옆으로 돌아왔다. 두구의 큰 몸집이 은란의 시야를 가렸다. 은란은 시선을 사방으로 돌려 보았다. 방금 분명히 무슨 일이 있 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죠?" 두구는 은란을 바라보았다. "괜찮소. 아무 염려 말고 아가씨들은 운기조식 하시오. 내가 옆 에서 두 아가씨들을 보호하겠소." 은란은 사방을 두루 살폈지만 소영이 보이지 않자 이상하다는 듯 이 참지 못하여 두구에게 물었다. "공자는?" "그는 개를 쫓아 갔소." "공자는 비록 무공이 강하지만 강호의 경험이 부족하며 다른 사 람의 속임수에 잘 넘어가니, 빨리 뒤쫓아 가 보세요." 44. 의도(義盜) 신투향비(神投享批) 두구는 은란이 소영에게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 으며, 두구 갈신도 따라가려 했으므로 은란에게 말했다. "내가 가면 누가 아가씨들을 보호하겠소?" "괜찮아요. 저는 조식이 끝났으니 내가 금란 언니를 보살펴도 돼 요. 어서 가 보세요." "좋소. 그렇다면 유사시엔 휘파람을 부시오. 그러면 즉시 달려와 서 아가씨들을 보호하겠소." "네, 알겠어요. 어서 가 보세요." 이때 검은 그림자가 두구에게 날쌔게 덮쳐왔다. 두구는 재빨리 피하며 바라보았다. 그 뒤엔 검은 개와 두 그림자 가 급히 오고 있었다. 왼쪽에는 소영이며 오른쪽은 일진풍 팽운이 었다. 두구는 안심이라는 듯이 숨을 돌려 쉬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난 또 누구라고, 알고 보니 거지였군." 팽운이 반가운 듯이 말했다. "당신의 이 영리한 개가 아니었던들 나는 기회를 또 한번 놓칠 뻔했소 여러분이 부대를 떠난 후, 난 생각할수록 언짢고 섭섭하여 여러분을 찾으려고 정처없이 떠났었지요. 뱃사공인 제자의 말대로 곧장 달려와 밤새도록 찾았으나 찾을 길이 막연하였는데, 때마침 당신의 그 영리한 개로 인하여 이렇게 다행히 만난 것이오." 마문비가 흑백을 가리지도 않고 우리를 부대에서 물러가라한 것 은 비단 그대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약간의 수치스러운 일이었소. 후에 기회가 있으면 꼭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소." 팽운은 두구가 격분하여 말하는 것을 듣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 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말을 못했다. 은란은 분위기가 너무 딱딱하고 어색한 것을 보고 팽운에게 시선 을 돌렸다. "팽도련님, 너무 언짢게 생각치 마세요. 우리 두구 아저씨는 장 난을 아주 잘하세요." 팽운은 본래 호방한 성격에 매우 거만한 사람이라 두구의 격한 어조를 언짢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더구 나 은란까지 이렇게 말하는데 화를 낼 수도 없어 억지로 마음을 진 정시켰다. "나에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 마문비가 당신들을 부대에서 떠 나 가라고 했을 때 나도 당신들 못지 않게 섭섭하고 괴로왔소. 그 러나 나는 나의 스승의 꾸중을 무릅쓰고, 내 마음대로 나의 제자들 을 모이게 하고 특별히 이곳으로 온 것이오." "그러고 보니 그대도 사귈 만한 친구였군!" 이때 상팔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소영은 상팔을 보며 궁금함을 참지 못하였다. "마문비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은패를 구했으니 다행이오." 두구는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럼 은패를 하나 훔쳐 나왔단 말이오?" "그렇지. 은패를 하나 훔쳐 오긴 했지만 훔칠 생각은 없었네." "그럼 훔치기 잘하는 신투향비라도 만났소?" 이때 건너편에서 검은 그림자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서 있었다. "두형은 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군. 우리는 이십 년이나 만나지 못했는데....." 시선을 돌려 보니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사나이가 서서히 다가왔 다. 그는 약 오십 세쯤 되어 보이는 사람으로, 코 밑에 팔자 수염 을 하고 두 눈빛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그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했소. 그래 어디서 지냈소?" "이십 년 전에 무엇을 훔치다가 발각되어 한 대 얻어맞고 난 후, 기분이 좋지 않아 조용한 곳에 가서 기술을 다시 연마하여 이제 다 시 강호에 들어오게 된 것이오." 금란과 은란은 그의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 렸다. 신투향비는 시선을 두 여인에게 돌리며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웃기는 왜 웃소? 내가 도둑질한다고 해서 고상하고 점잖지 못하 다는 말이오?" 은란은 미안해 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너무 노여워 마세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으니 용서하세요." "그럼 용서하지." 향비는 그 말을 하면서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은란은 깔짝 놀라 그것을 자세히 보았다. 그것은 금비녀였다. 그녀는 더욱 놀라며 제 머리를 만져 보니 머리에 꽂은 금비녀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은란은 급히 일어나며 그것을 받았다. "주시는 것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만약 내가 기술을 남에게 가르쳐 줄 일이 있다면 아가씨에게 가 르쳐 주고 싶소." 은란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배울 게 없어 도둑질을 배운담!' 이때 상팔이 나섰다. "아가씨와 그만 농담하시오. 내가 두 친구를 소개하겠소." 상팔은 소영을 가리켰다. "이분은 우리의 큰형님이신 소영이시오." 향비는 상팔과 소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어린애를 가지고 큰형님이라고 하다니..... 중주이고는 늙 을수록 망령이군!' 향비는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저는 중주이고와 형제같이 지내는 사람입니다. 이들과 함께 당 신을 큰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오. 향형,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상팔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형님, 그가 지금 한 말을 믿지 마시오. 속으로는 아니꼽다고 생 각할 것이니, 형님의 특이한 기술을 한 번 보여 주시오." 소영은 싱겁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두구가 옆에시 한 마디 거들었다. "향비는 속과 겉이 다릅니다. 언젠가는 한번쯤 큰형님의 맛을 보 게 될 겁니다." 이윽고 향비는 아니꼽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제쳤다. "좋아, 난 원래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지. 방금 나는 중주이고의 체면을 생각해서 형님이라고 불렀던 것이오. 그러니 다음부터 속에 서 진정으로 우러나와 부르게 하려면, 소형의 진실한 묘기를 봐야 겠소이다." 소영은 강호의 호걸들은 마음 속으로 존경하지 않으면 절대로 고 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못 들은 척하였다. 상팔은 향비를 바라보며 웃었다. "향비, 우리 형님은 아량이 넓기 때문에 자네의 두서없는 말은 염두에도 두지 않을 것이네." 상팔은 다시 팽운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분은 개방의 신방주의 계승자인 일진풍 팽운이오." 팽운은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거지입니다." "난 신방주와 몇 번 만난 적도 있지. 이십 년 전에 말이야." "그때 나는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지도 않았소." "만약 그대가 그때 들어갔다면 지금 다른 사람이 소개할 필요도 없지." 팽운은 그가 아니꼽고 비위에 거슬리는지, 속으로 그의 거만한 기세를 꺾으려고 생각하고, 웃으며 향비에게 다가섰다. "하긴 그때 내가 스승의 문하생이 되었더라면, 오늘 이렇게 향형 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거요." 상팔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 마디 했다. "이번엔 정말 좋은 적수를 만났군. 향비, 자네가 한 수 졌네. 거 지에게 기세를 부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세." "거지는 상대 못하겠어. 그의 몸에는 가치있는 물건이 아무것도 없군 그래. 훔칠 만한 물건이 없어." 이때 두구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형님, 시간이 없소. 은패를 위조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 하오." 상팔은 서서히 품속에서 은패를 내어 주었다. "향비가 어디서 이것을 훔쳤는지 모르겠지?" 두구는 은패를 받아들고 자세히 앞뒤를 보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알고 보니 은패의 그림이 어찌나 세밀하게 되었는지 위조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향비는 두구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두구, 자네의 위조술을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지만, 이것을 위조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나?" "이 은패가 어찌나 세밀하게 되었는지 몹시 힘들겠지만, 하루 낮 과 밤이면 이렇게 똑같이 만들 수 있겠소." "하룻밤이란 휴식시간을 포함하고 지금부터 용구를 마련하려면 이틀이 지나야겠군?" "그 정도는 걸리겠지!" "백화산장의 모임은 아직 해산하지 않았을 것이니 역시 내가 기 술을 발휘해야겠군." 향비가 말을 마치자, 상팔은 잠잠히 서서 머리 속으로 계산해 보 았다. '소영과 두 아가씨 그리고 거지와 향비 또 나, 두 사람이 은패 하나를 사용한다 해도 아직 세 개가 부족하구나.' 상팔은 향비를 바라보았다. "향비, 아직도 세 개가 더 부족하네." 소영이 말했다. "두 개면 족하오." "형님은 꼭 들어가야 하오." "마문비가 나를 데리고 들어간다는 약속을 어찌 어기겠소?" "그것은 부득이한 경우이고, 지금 은패가 있으니 마문비를 따라 가는 것은 형님의 입장으로 봐서 좀 천하게 보이지 않겠소이까?" "괜찮소. 그와 같이 가면 편리한 점이 많을 거요." 상팔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우리가 몰래 들어가는 목적은 오직 두 노인을 구하기 위해서이니 사람이 많이 필요하고 만약 마문비가 부하를 거느리고 오면 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상팔은 고개를 끄덕이며 향비를 바라보았다. 향비가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두 개고 세 개고간에 문제가 아니오. 난 조수가 한 사람 필요하 오. 만일 훔치다가 들키거나 하면 소식을 전할 사람이 있어야 하 오." 상팔은 얼굴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놈이 또 무슨 재주를 부리려고 하나?' "내가 동행하지." 향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웃었다. "당신은 배가 나와서 안 되오. 무슨 큰 인물이나 되는 것 같아 보여서 같이 가게 되면 나의 이 초라한 꼴과 어울리지 않소." 두구는 향비가 상팔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여 급히 그의 앞으로 나섰다. "내가 가겠소." "안 돼! 그대는 항상 무뚝뚝한 얼굴이라 사람이 보면 어색한 기 분을 느끼게 하오." 상팔이 말했다. "거지는 어떠한가?" "더욱 안 되지, 거지와 같이 가면 사람들 주의를 끌거든." "그럼 어느 분을 택하겠소?" 향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여자를 데리고 간다면 필시 여러 사람의 주목을 끌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손을 쓰기도 편리하지." 상팔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향비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은란 아가씨를 데리고 가려 하나? 아가씨에게 물어 봐야 하지만 젊은 아가씨가 자네같은 늙은 사람을 따라 갈까? 설복시킬 수 없을걸." 은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같이 가기를 원하지만...." 향비가 반색을 지었다. "하지만 뭐요?" "저는 백화산장 출신이며 귀주성내의 모든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으니...." 향비는 행여 은란이 다른 핑계를 댈까봐 얼른 서둘렀다. "괜찮아. 내가 변장을 시켜 줄 테니. 시간이 없소. 그러니 빨리 갑시다." 은란은 소영에게 인사를 하였다. "공자, 저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겠어요." 소영은 웃으며 은란을 바라보았다. "고생이 많겠군." 향비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더니 말했다. "오시(午時) 전에 우리 이곳에서 만납시다." 향비와 은란은 날 듯이 달려갔다. 상팔은 소영에게 다가서며 속삭였다. "저 향비는 훔치는 수법에 능하여 강호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또 한 의협심도 강하오. 그래서 이십 년 전 무림에서도 의도(義盜)라 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소. 그가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보니 일은 잘된 거요." "훔치는 일은 나쁘지만 겉으로 점잖음을 가장하고 속으로는 간사 한 사람보다야 월등히 낫지요!" 소영은 상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상형과 마문비는 만날 장소를 약속했소?" "형님은 정말 마문비와 수행인으로가장할 것을 결정했습니까?" "결정했소. 마문비에게 약속을 지키지 위해서이고, 또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오. 만약 부모님을 구출하지 못한다면 그후로 백 화산장의 파수는 더욱 엄중해지고 심목풍도 더욱 내 부모님을 못살 게 굴 것이오." 소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드디어 비장한 각오를 드러냈다. "만약 부모님을 구출 못하면 나는 백화산장에서 죽겠소." "형님, 안심하시오. 우리는 이미 형제가 되었으니 형님의 부모님 은 바로 나와 두구의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요. 만약 두 노인을 구출 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백화산장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겠소." 소영은 상팔을 감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두 분의 정의는 참으로 고맙소.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지..."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 우리는 이미 형제지간이 아니오!" "나는 그동안 말할 수 없이 고민을 하였소. 이제 실토를 하지 않 으면 안 되겠소." "형님, 분부만 하시오. 물불을 가리지 않겠소." "상형과 두형이 나를 형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나는 송구스런 마 음에 몹시괴로왔소. 이제부터는 나이 대로 나를 셋째로 불러주시 오." 상팔은 손을 저었다. "안 될 말이오. 무림에는 나이가 많든 적든간에 모든 면에서 월 등한 사람이 존경을 받아야 하오. 그리고 형님은 우리보다 무공도 높으니 우리가 호형함이 마땅하오. 하물며 나와 두구는 형님을 만 난 후로 과거에 잘못한 일을 뉘우쳤소. 앞으로는 형님을 섬기며 좋 은 일을 많이하여 과거의 죄를 씻겠소이다." 상팔은 둥근 얼굴에 큰 귀를 가졌고 배가 쑥 나와 무슨 큰 인물 이나 되는 듯 보였다. 또한 아주 착하게도 보였다. 이 때는 엄숙한 표정으로 정의감에 불타 장사꾼답지 않게 의협심이 넘쳐 보였다. "상형의 성의가 그렇게 대단하시니 나도 더 거절은 않겠소. 그러 나 후에 무림 일이 잘되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중주이고를 중주이 의(中州二義)로 바꿔야겠소." 상팔은 유쾌히 웃었다. "오늘부터 하는 일이 잘되어 마음만 편안하면 되오. 그런 명호 (名號) 따위는 마음에도 없소." 상팔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나와 마문비는 오전에 만나기로 했소. 형님은 약속을 지키겠다 니 더 이상 권하지 않겠소." "그러나 우선 마문비를 만나야 하오." "마문비와 중원인물들은 지금도 형님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있으 니 그들과 만나면 군중들이 냉정하게 대할 것이오." "그건 내가 참을 자신이 있소." "좋소. 기왕 그렇다면 우리는 어서 갑시다. 사람이 많으면 불편 하니 내가 형님을 모시겠소." 소영은 마문비와 중원군중들이 자신에게 퍽 깊은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가는 것도 모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문비와 군중들은 철저하게 감시할 것이다. 그리고 중원 군중들의 도움없이 자신과 상팔 몇몇 사람의 힘으로만은 도저히 백 화산장에게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좋소. 상형이 수고하시오." 상팔은 두구에게 귓속말로 소근거리며 소영과 함께 걸어갔다. 두 사람은 육, 칠십 리를 와서 멎었다. 상팔이 정중히 소영에게 말했다. "형님, 마문비가 비록 형님의 무공을 존경하나 의심이 많으니 조 심하시오." "나 역시 이번 일이 모욕당하지 않고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모든 것을 이해하면 되오." 소영은 살며시 눈을 감고 조식하였다.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 왔다. 얼마 후엔 금빛 찬란한 햇빛이 온누리에 퍼지며 맑은 물을 비치 고 두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이때 한 조각의 배가 멀리 멎자, 한 사람이 검은 휘장을 들치고 늠름한 모습으로 배에서 내렸다. 사나이가 내리자 배는 다시 서서히 뱃머리를 돌렸다. 상팔은 배에서 내린 사람 앞으로 다가섰다. "총타주는 과연 약속을 잘 지키는군요!" 마문비는 시선을 돌려 상팔에게 답례하였다. "두 분 오래 기다리셨지요?" "어제 상의한 일에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었소?" "기왕 상형에게 승낙을 했으니 곤란을 무릅쓰고라도 해야지요." 마문비는 다시 소영을 보며 말했다. "다만, 셋째 장주에게 미안하여 마음이 불안하오." 소영은 셋째 장주라는 말을 듣자 몹시 귀에 거슬리고 불쾌하였으 나 감정을 가라앉혔다. "마형이 협조하시니 감개무량하오." 상팔이 마문비에게 말했다. "마형, 형님을 잘 부탁하오. 난 이만 가 보겠소." "멀리 관송하지 않겠소. 잘 가시오." "천만에." 상팔은 몸을 돌려 떠나 버렸다. 소영은 상팔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마문비를 바라보았 다. "마형, 언제쯤 변장합니까?" 마문비는 서서히 하나의 보따리를 꺼냈다. "이 보자기 안에 의복과 변장하는 약물이 있소. 소형은 우선 옷 을 먼저 갈아입고 약을 사용하시오." 소영은 보자기를 받아들자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착잡하였다. 그는 숲 속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약에 물칠을 하여 얼굴에 발랐다. 여자처럼 곱고 수려한 소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딴 사람의 얼굴로 변하고 말았다. 마문비는 소영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소형은 오늘 오후 백화산장으로 들어가 연회에 참석해야 하니 성명도 갈아야 하오." "그림 마형이 하나 지어 주시오." 마문비는 한참 머뭇거리며 생각했다. "원컨데, 소형이 순풍에 돛단 배와 같이 모든 일에 성공하여 부 모님을 순조로이 구출하십사 하는 뜻으로 마성(馬成)이라 부르는 것이 어떻소?" "참으로 좋은 이름이오." "우리 귀주성에 가서 밥을 먹고 난 후에 백화산장으로 가는 것이 어떠하오?" "난 분부대로 하겠소." "그렇다면 지금 갑시다." "기왕 마형의 수행인으로 가장하였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분부하 시오." 마문비는 쑥스러운 듯이 웃음지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마문비과 소영은 말없이 걸었다. 귀주성내에 들어가니 곳곳에는 무기를 들고 말을 탄 무림 인물들이 득실거렸다. 마문비는 소영을 데리고 높고 크게 지어진 누(樓)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살피면서 서서히 누각 위로 올라갔 다. 맨 위에는 무림인물들이 초만원을 이루었고 거리 쪽으로 둥근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탁자 곁에는 누런색의 장삼을 걸친 중년 사나이가 앉아 있었고 그 곁에 두 개의 빈 좌석이 남아 있었다. 마문비는 그 탁자 안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앉았다. 소영은 변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익숙하게 수행인답게 마문비 뒤로 가서 섰다. 누런 장삼을 걸친 중년 사나이가 마문비에게 무어라고 말을 건네 려는 듯했으나 한 번 바라보고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문비도 그의 얼굴이 퍽 익었다. 그래서 자세히 바라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의 성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문비는 사환을 불러 음식과 술을 주문했다. 그리고 소영을 향 하여 말했다. "너도 이리 앉아라." "예." 소영은 단정히, 그리고 침착한 자세로 앉았다. 객실은 초만원이고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출입 자들은 대부분 강호의 인물들이었다. 소영은 사방을 살피며 생각하였다. '심목풍이 얼마나 많은 무림 동지들을 초청했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귀중성내에 들어 왔을까?' 두 사람은 재빨리 음식과 술을 배불리 먹고 나와 성내를 한 번 둘러보고 백화산장을 향해 걸었다. 이들은 한적한 곳에 이르자 마문비는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성내를 돌아보아도 소림과 무당 인물은 보이지 않소. 심 목풍은 정중한 사람은 초청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찌하여 나를 초 청했을까? 옛날 사람들의 말에는 연회와 집회는 그리 좋은 것이 없 다고 했소. 보아하니 심목풍은 대회에서 비밀리에 손을 쓸 것이 분 명하오. 백화산장에 들어가면 우리는 같이 있을 수 없으니 소형은 더욱 조심해야 하오." "말씀 고맙소. 들어간 후에 가급적이면 총타주와 같이 있겠소." "상팔, 두구도 대회에 참석하오?" "그들은 은패를 소지하고 있으니 쉽게 들어올 수 있을 거요." "잘 됐소. 중주이고의 무공은 막강하니 들어온 후에 우리의 하는 일에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오." "난 절대로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니 마형은 안심하오." 마문비는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갔다. 이 길은 소영도 익숙하여 눈을 감아도 백화산장을 찾아갈 수 있 었다. 얼마쯤 걸으니 백화산장이 나타났다. 마문비는 백화산장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많으나 직접 보는 것 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뚫어지게 백화산장을 바라보았다. 꽃과 나무가 웅장하게 둘 러싸고 있고, 높은 건물이 구름을 찌를 듯이 솟아 있으며, 맨 윗층 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마형, 이 백화산장은 보기에는 경비가 소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경비가 매우 엄하오. 저기 사방에 꽃과 나무가 있는 곳에는 모두 고수들이 숨어서 경비하고 있소." 마문비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가르쳐 주어 고맙소." 이때 나무 뒤에서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예를 갖추며 말했다. "두 분은 청첩을 받고 대회에 참석하러 오시는 분이신가요?" "그렇소." 두 사람은 갑자기 양쪽으로 물러서며 길을 터주고 허리를 굽혔 다. "들어 가시지요." 마문비는 원래 백화산장의 곳곳을 구경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니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할 수 없이 곧장 들어 갔다. 대나무 숲을 지나자 높고 큰 나무와 아름다운 꽃에 싸여 있 는 웅장한 누각이 나타났다. 왼쪽에는 십이 명의 동자들이 서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십이 명 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서 있었다. 몇 개의 나무로 된 탁자가 문 앞에 놓여 있고, 가운데서는 두 사람이 나란히 다닐 수 있는 통로 가 있었다. 그곳에는 팔자 수염을 한 두 노인이 양쪽 탁자 뒤에 각각 앉아 있고, 두 사람의 뒤에는 각각 정복을 한 두 대한이 서 있었다. 마문비의 예리한 시선은 노인들의 뒤에 있는 대한에게로 갔다. 마문비는 그들의 무림의 고수들이라는 것을 즉시 알고 진기를 암암 리에 운기하여 경계를 하며 천천히 들어갔다. 소영은 뒤를 바싹 따랐다. 마문비가 탁자 옆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두 노인이 동시에 일어 서서 허리를 굽혔다.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마문비는 싱겁게 웃으며, "예(豫), 악(鄂), 상(湘), 공(貢)의 총타주 마문비올시다." 왼쪽에 있는 노파가 말했다. "알고 보니 마도련님이시군요. 서명을 해주시겠소?" 노인은 두 손으로 마문비에게 모필을 내어 주었다. 마문비는 모필을 받아 용이 날고 봉이 춤추는 듯한 유려한 필치 로 탁자 위에 자기 이름을 썼다. 오른쪽에 있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양해하시오. 은패를 보여 주시겠소?" 노인은 은패를 들고 자세히 살피고 다시 예를 갖추어 돌려 주었 다. "마도련님, 이것을 잘 보관하시오." 마문비는 얼굴을 찌푸리며 화를 내려다 참고 은패를 품 속에 넣 었다. 왼쪽에 서 있는 노인은 시종 소영을 살피고 있다가 마문비가 은패를 품 속에 넣자 비로소 마문비에게 물었다. "이분은 총타주와 어떤 관계인 사람인지요?" "나의 수행인인데. 초청장에는 분명히 하나의 은패에 두 사람이 들어 올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잘못 봤을까?" 오른쪽 노인이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총타주, 노여워 마시오. 우리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행할 뿐이 오. 신분은 자세히 알아야 하며 수행인들의 숙소도 마련해야 하니 까요." 노인은 이윽고 소영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보게, 이름은?" "마성이 라고 하오." 이때 왼쪽에 있던 노인이 높은 음성으로 안에다 대고 외쳤다. "예, 악, 상, 공의 총타주 마문비께서 수행인을 데리고 당도했 소." 이때 붉은 옷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아가씨와 동자가 급히 다가오 며 예를 갖추었다. "마도련님을 영접합니다." 마문비는 마음속으로 퍽 떠들썩하게 야단들이구나 하고 생각했 다. 마문비는 손을 흔들어 만류하였다. "됐어." 붉은 옷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아가씨는 마문비를 보고 빙긋이 웃 었다. "제가 마도련님을 인도하겠어요." 그녀는 몸을 사뿐히 돌리더니 앞장 서서 걸었다. 마문비는 아가 씨의 뒤를 따랐다. 소영도 마문비 뒤를 따랐다. 그 뒤에는 동자가 따라왔다. 마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는 망을 보며 따라오는 것을 보니 방비 가 엄하구나!' 아름다운 아가씨는 두 사람을 인도하며 등이 걸려 있는 큰 문으 로 들어 갔다.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는 복도를 지나 넓은 대청문 앞에서 멎었다. 그리고 높이 외쳤다. "예, 악, 상, 공의 총타주 마문비 도련님이 왔습니다." 이때 대청 안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소영은 그 사람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화려하게 차린 그 사람은 청문 밖으로 나와서 마문비 앞에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난 주조룡입니다. 오래 전부터 마형의 높은 존함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셔서 백화산장을 한층 더 빛나게 해 주시니 참으로 큰 영광입니다." 45. 미인계(美人計) 마문비는 공손하게 답례했다. "둘째 장주가 친히 영접하시다니 감사하오." 주조룡은 하하 웃었다. "천만에요." 그는 마문비의 왼팔을 잡고 인도하여 나란히 대청으로 갔다. 소영은 머리를 약간 숙이고 마문비의 뒤를 따랐다. 넓은 대청에 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나, 주조룡은 마문비를 소개하지도 않고 대청을 지나면서 웃었다. "마형은 먼 길에서 오셨으니 우선 취죽헌에서 휴식을 취하시오. 오늘밤에 연회를 준비하여 다시 초빙하겠소." 소영은 시종 머리를 숙인 채 마문비의 뒤를 따라 취죽헌(翠竹軒) 으로 갔다. 이 취죽헌은 백화산장의 사대 영빈관 중에서 가장 천한 곳으로 난화정사(欄花精舍), 매화각(梅花閣), 모란정(牡丹亭)에 비 하면 시설이 아주 보잘것 없었다. 소영은 백화산장에서 오랫동안 셋째 장주 노릇을 했지만 취죽헌 에는 가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백화산장은 총타주인 마문비를 천 대하는 태도였다. 주조룡은 마문비를 데리고 숲을 돌아 죽림 속으로 들어갔다. 죽 림 속에는 붉은 벽돌로 건축된 정사(精舍)가 즐비하게 있었다. 주조룡은 한 정사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웃었다. "이곳이 마형의 거처입니다. 요즈음은 백화산장에 손님들이 많이 운집하여 숙소가 부족합니다. 미안하지만 이곳에서 수일만 지내시 오." 마문비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천만에요. 나는 백화산장의 이름만 듣고 있었는데 오늘 와보니 과연 기상이 뛰어나고 백화가 만발하여 마치 선경에 들어온 것 같 소." 주조룡은 빙그레 웃었다. "마형은 과장을 잘 하십니다그려." 그는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더니 한 미모 의 비녀가 나타났다. 주조룡은 마문비를 가리켰다. "이 분은 우리 백화산장의 귀빈이니 잘 모셔라." 비녀는 재빨리 허리를 굽혔다. "마도련님, 들어오세요." 마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취죽헌 등 많은 정사에는 귀빈을 전문적으로 모시는 비녀들 이 있단 말인가?' 그는 천천히 정사 안으로 들어갔다. 주조룡은 문 밖에서 말했다. "술과 음식이 필요하면 언제든 비녀에게 분부하시오. 나는 손님 을 접대해야 하므로 이만 물러가겠소. 용서하시오." 마문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짓했다. "가보시오." "밤에 있을 연회는 내가 몸소 와서 모시고 가겠소." 그는 몸을 돌려 가버렸다. 비녀는 청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얼굴의 화장은 수수했다. 보기 에 퍽 우아해 보였다. 가는 허리에 앵두같은 입술. 그녀는 애교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봉죽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필요하실 때는 저를 불 러 분부하십시오." 마문비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아가씨는 이 백화산장에 오래 있었나?" 봉죽은 고개를 까딱했다. "예. 어려서부터 이 백화산장에서 자랐어요. 어째서 봉죽이라고 명명되었는지 몰라요. 마도련님, 숙사를 돌아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고 바꾸겠습니다." 그녀는 앞장을 서서 걸었다. 걷는 태도가 매우 아름다웠다. 문을 하나 여니 우아한 와실이었다. 붉은 휘장이 쳐져 있고 동쪽 에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이름모를 붉은 꽃이 꽂혀 있었 다. 향기로운 냄새는 코를 찔렀고 붉은 꽃, 붉은 벽, 붉은 휘장, 실내는 전부 붉게 꾸며져 있었다. 봉죽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만족하세요?" "좋기는 한데 너무 붉어 마치 처녀의 규방 같군." 봉죽이 방긋 웃었다. "소녀가 마도련님을 모시지 않았더라면 이 취죽헌에서 산 보람이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눈동자를 굴렸다. 마문비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심목풍이 이렇게 하는 걸 보니 분명히 나를 여색에 빠뜨리려는 계략일 것이다. 많은 군호들 중에 이 여색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자가 몇이나 될까?' 그는 서서히 방 밖으로 나갔다. "이분은 마도련님의 하인인가요?" 소영이 급히 대답했다. "소인은 마성(馬成)이라고 하오." "뒤에 방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당신의 거처이니 나를 따라오세 요." 소영은 봉죽을 따라 정사 맨 뒤에 있는 한 문앞에 당도했다. 봉죽은 나무문을 열며 웃었다. "드셔서 휴식을 취하세요. 마도련님의 모든 것은 내가 모시겠어 요."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가버렸다. 방은 작고 누추했다. 나무탁자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품도 없었 다. 소영은 과거에 백화산장에 있을 때를 생각하고 실소를 금치 못 했다. 한편, 마문비는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흥, 이 방은 전부가 도색적으로 꾸며졌군. 매혹적인 미녀와 정 신을 몽롱하게 하는 향기가 풍기니.... 분명히 꿍꿍이 속이 있는 안배이니 조심해야겠다.' 순간 발소리가 나더니 이내 봉죽이 나타났다. 그녀는 교태를 띠 고 다가왔다. 마문비는 본체만체하고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봉죽이 마문비 곁에 와서 애교를 떨었다. "마도련님, 먼 길을 오시느라고 몹시 피곤하셨지요? 소비가 따뜻 한 물을 준비했으니 어서 목욕을 하시고 누워서 푹 쉬세요." 마문비는 눈을 돌려 봉죽을 바라보았다. "아가씨에게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소. 그러니 아가씨나 어서 가 서 쉬시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봉죽은 여전히 교태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마도련님을 모시는 몸이니 어떠한 분부도 복종하겠어요. 그러지 말고 분부하세요." 마문비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심목풍은 정말 비굴하군. 미인계까지 등장시키다니. 이 계집은 엄명을 받고 반드시 나를 유혹할 것이다. 용모를 보니 음탕한 여자 같지는 않은데 스스로 천한 짓을 유도하다니 한번 놀려 줄까? 어떤 반응을 보이나 해보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아가씨의 태도와 반짝이는 눈동자는 정말 비녀 같지가 않군." 봉죽은 미소지었다. "그렇게 나를 보시니 감개 무량합니다만 저를 택하여 주신다면 더욱 고맙겠어요." "어떻게?" "마도련님이 우리 대장주에게 한 마디만 하시면 돼요." "어떻게 말하지?" 봉죽은 얼굴을 붉히며 나직이 말했다. "마도련님이 우리 대장주에게 제가 퍽 사랑스런 비녀라고 한 마 디만 하시면 돼요." "그건 쉬운 일인데, 그럼 대장주는 아가씨에게 무슨 상을 주나?" "우리 대장주는 아량이 넓어 소녀를 마도련님에게 줄 거예요." "정말 넓은 아량이군. 하나, 아쉽군....." 봉죽은 눈을 크게 떴다. "무엇이 아쉬워요?" "아가씨의 미모에 아쉽게도 가까이 할 수 없네." 봉죽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비녀의 신분이라 마도련님을 모실 자격이 없지요." 마문비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아가씨의 미모는 꽃에 못지 않지만 내가 연마하고 있는 곳이 동자공(童子功)이라 여색에 접근할 수가 없어. 오직 꽃을 감 상하듯이 할 뿐인데 그건 아가씨를 모독하는 것이 된단 말이야." 봉죽은 요염하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소비는 도련님을 좌우에서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이 계집이 육체적인 야심을 품고 있구나. 강경하게 대하지 않으 면 단념하지 않겠는데.' 마문비는 이렇게 생각하고 즉시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의 교태와 미모에 동요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인데, 나 는 이상하게도 동요되지가 않는군." 봉죽은 가볍게 탄식했다. "마도련님이 그렇게 말한다면 저를 백화산장 밖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어요. 하나, 소비는 명령을 받고 있는 몸이니 마도련님이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곁에서 모든 시중을 들겠어요." 그녀는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마문비는 생각에 잠겼다. '심목풍은 과연 무서운 존재야. 비녀를 이렇게 훈련시키기도 쉽 지 않을 텐데. 이런 여색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겠 지.' 명랑하던 봉죽은 갑자기 심각해져 차와 담배를 올릴 때도 항상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마문비는 그런 거동이 퍽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한편 소영은 자기 부모님을 구출하려면 악전고투를 면치 못할 것 임을 감안하여 누추한 실내에 앉아 조식했다. 봉죽이 차와 약간의 먹을 것을 가져와도 마문비는 먹지 않았다. 심목풍이 하도 악랄하 여 차나 음식에 맛도 냄새도 없는 독약을 넣게 했을지 모르기 때문 이었다. 봉죽은 그가 차와 음식을 조금도 먹지 않자 그대로 말없이 가지 고 나갔다. 해가 서산 너머로 사라지자 과연 약속대로 주조룡이 왔다. 그는 마문비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미 주연을 준비했으니 마형도 와서 들구려." 마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대접이 융숭하니 오히려 불안하오." 소영은 조식을 했는지라 정신적인 포만감을 느끼고 고개를 숙인 채 마문비의 뒤에 서 있었다. 비록 변장을 하긴 했지만, 주조룡의 시선을 똑바로 대하지 못했다. 주조룡은 정묘하고 세심했지만 소영이 하인으로 분장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마문비를 잡고 대청으로 향했다. 소영은 마문비를 따라 대청으로 가서 상팔 등이 백화산장에 들어 왔는지 알아 보려고 했다. 주조룡은 마문비의 하인을 대청까지 동행시키지 않으려고 했으 나, 마문비는 모른 척했다. 몇 개의 화수진(定理陳)을 통과하여 불빛이 휘황한 넓은 대청에 도착했다. 연회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붉은 색의 팔선탁자(八仙 卓子)에 대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소영은 휘황찬란한 대청에 단 하나의 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 고, 퍽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백화산장에서 영웅호걸들을 초청했는데, 어째서 사람 수가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그는 성큼성큼 대청으로 들어가 벽 앞에 섰다. 주조룡은 마문비를 팔선탁자 옆으로 데리고 갔다. "여러 귀빈 여러분에게 명망이 높은 인물을 한 분 소개하겠소." 탁자에 둘러 앉아 있던 네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마문비를 쳐다 보았다. 주조룡은 마문비를 가리키며 소개하였다. "이분은 이름도 드높은 예, 악, 상, 공, 네 성의 총타주 마문비 십니다." 네 사람 중 셋이 일어났다. "오래 전부터 마형의 존함을 듣고 있었는데, 뵙게 되어 영광입니 다." 그러나 북쪽에 앉아 있는 창백한 얼굴에 백의를 입은 중년 문사 하나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조룡의 소개 말을 듣지 못한 모양 이었다. 마문비는 백의 문사를 한 번 훑어 보더니 역시 못 본 체했다. 주조룡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 사람을 마문비에게 소개했 다. "이 세 분은 태산의 영웅인 왕씨 형제이오." 남쪽에 서 있던 비교적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가 먼저 입을 열였 다. "왕통(王通)이라 하오." "왕기(王驥)라 하오." "왕방(王放)이라 하오." 마문비는 웃는 낯으로 인사를 받았다.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주조룡은 마침내 백의 문사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분은 동해신복 사마건이다." '이자는 거만하기 짝이 없으니, 나도 부드럽게 굴 필요는 없다.' 마문비는 그렇게 생각하고 천천히 앉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알고 보니 사마건이군요." 사마건은 냉소했다. "마타주의 얼굴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니, 멀지 않아 피를 흘려 야 하는 재난이 생길 것 같소." 마문비는 담담하게 웃었다. "나는 관상을 믿지 않소." 사마건이 대꾸했다.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사흘 이내에 마타주는 재난을 겪을 거 요. 그렇지 않다면 나는 오늘부터 동해신복(東海神卜)이란 칭호를 버리겠소." 마문비는 그가 이렇게 자신있게 나오자 은근히 놀랐다. "운명을 점쳐 주니 고맙소." 사마건은 고개를 쳐들고 하하 웃고는 앞에 있는 술잔을 들었다. 주조룡은 사마건이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술잔을 들었다. "여러분 드시오." 마문비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해 술을 입에 놓기는 했으나 우 물우물 하다가는 몰래 손수건에다 뱉아 버렸다. 사마건과 왕씨 형제가 마구 먹고 마시고 하자, 그제서야 마문비 도 천천히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오직 주조룡만이 술을 권할 뿐, 좌중의 사람은 말없이 먹기만 하여 술과 음식은 점점 줄어 들었다. 동해신복은 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점을 치겠다며 품 속에서 금전 세 개를 꺼내 두 손을 모아 그 속에 넣고 흔들었다. 그러다가 탁상 위에 탁 놓고 자세히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 백화산장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잠입했군." 마문비가 깜짝 놀랐다. '이 미치광이가 정말 점을 칠 줄 아는가?' 주조룡은 빙그레 웃었다. "사마형의 점괘엔 몇 사람이 나타났소?" 사마건이 대답했다. "점괘를 보니 적어도 열 명 이상이오." 주조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많지는 않군요. 우리 대장은 적어도 스무 명 이상으로 보고 있 소." 사마건이 냉랭히 말했다. "그렇다면 심대장주도 점술이 있는 거로군?" 주조룡이 웃었다. "우리 대장주는 비록 점술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사정을 예측 하는 것은 귀신같이 틀린 적이 없소." 사마건은 탁자 위의 금전을 거두었다. "내 점괘를 분석하면 귀장주에게 크게 불리하고......" 주조룡은 하하 웃었다. "사마형, 안심하시오. 여러 가지 변고에 대해 장주는 이미 대책 을 세워 놓았소." 사마건은 자기 점괘에 자신이 있는 듯이 말했다. "그 변고는 어쩌면 귀대장주도 생각치 못한 것일 거요." 주조룡은 시선을 마문비에게 돌렸다. "비록 그 변고가 우리 대장주도 생각지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 리 대장주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오." 사마건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주형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귀장주가 어떻게 응수하는 지 구경이나 해야겠소." 태산의 왕씨 세 영웅은 동시에 생각에 잠겼다. '자기 점괘를 강제로 믿으라고 하는 사마건도 몹시 기괴한 인물 이군.' 마문비는 천천히 일어섰다. "배가 부른데 할 말씀이 더 있소?" 주조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없으니 일이 있으면 마형 마음대로 하시오." "그럼 먼저 가보겠소." 마문비는 몸을 돌려 나갔다. 소영도 고개를 숙이고 마문비의 뒤를 따라 취죽헌으로 갔다. 사마건도 마문비의 뒷모습을 보고 주조룡에게 물었다. "둘째 장주, 저 사람을 잘 알고 있소?" 주조룡이 말했다. "나와 저 사람은 비록 오늘 처음 만났지만, 나는 저 사람의 모든 것을 내 손바닥의 일처럼 알고 있소." "저 사람은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니 둘째 장주는 조심하 시오." 사마건은 주조룡이 대답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나갔다. 마문비와 소영은 단숨에 취죽헌의 정사에 도달했다. 봉죽이 미소지으며 향기로운 차를 가지고 왔다. "마도련님, 쉬시겠어요?" "나는 조용히 앉아 있고 싶으니 아가씨는 가서 쉬지." 봉죽이 고개를 저었다. "소비는 여기서 마도련님을 시중해야 해요." 마문비는 손을 내저었다. "필요없어. 만약 아가씨가 백화산장을 떠나고 싶다면 내가 심대 장주를 만난 뒤에 전에 했던 얘기를 해주지." 봉죽은 급히 말했다. "소비의 시중이 싫다 하더라도 대장주에게 절대로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마문비는 웃었다. "알고 있어. 그러나 대장주에게 아가씨를 달라고 하여 백화산장 을 떠나면, 아가씨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게 아닌가?" 봉죽은 힘없이 대꾸했다. "망망한 천하에는 친척도 없는데 나는 어디로 가란 말이에요? 그 런 수고는 하지 마세요." 봉죽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문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계집이 백화산장을 떠나고 싶은 것인지 아닌지 도대체 알 수 가 없군. 백화산장의 비녀 마음도 예측할 수 없다니.' 순간, 방금 나간 봉죽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 "사마건이란 분이 찾아 오셨어요." 마문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마건이 찾아 오다니 무슨 일일까? 그자의 태도는 애매하여 속 을 알 수 없으니 조심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짐짓 태연하게 일렀다. "어서 안으로 청하라." 사마건은 곧 들어왔다. "마형을 괴롭혀서 미안하오." 마문비는 정중히 인사를 하려 했으나 그 냉정한 말소리에 주춤했 다. '이런 오만한 자에게는 예를 갖출 필요가 없다.' "사마형이 무슨 일로?" 사마건은 권하기도 전에 털썩 앉았다. "우리 솔직이 말합시다. 마형이 백화산장에 온 목적은 따로 있지 요? 주조룡은 속일 수는 있어도 나를 속이지는 못하오." 마문비는 냉소를 머금었다. "사마형은 그래서 나를 찾아 왔소?" 사마건은 자기 말만 했다. "주조룡은 내 경고를 듣지 않았으니 제아무리 백화산장의 방비가 철통같다 하지만 나는 불쾌하오." 사마건은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직성 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마문비는 얼른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너무 우둔하여 귀하의 말뜻을 잘 모르겠소." 사마건이 대꾸했다. "내 말뜻은 간단하오. 내가 주조룡 앞에서 내 점이 용하다는 것 을 증명하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오." 마문비가 물었다. "그럼 사마형은 어떻게 증명하겠소?" 주조룡은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 맛을 봐야 비로소 내 경고가 무 섭다는 것을 알 거요." 마문비는 웃었다. "자세히 듣고 싶소." 사마건은 한 구석에 서 있는 봉죽을 보자 입을 열려다 말았다. 눈치빠른 봉죽은 곧 조용히 물러갔다. 마문비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 말해도 좋소." "마형이 온 목적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주조룡도 잘 알고 있 소." 마문비는 어설프게 웃었다. "나는 백화산장측에서 나를 중하게 여겨 청첩을 보낸 줄 알고 있 소. 만약 내가 오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를 통이 작다고 비웃었을 것이 아니오?" 사마건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에 마형은 체면만을 위해서 온 것은 아니오." 마문비는 속으로 놀랐다. '이 자는 중원무림에 잘 나오지도 않는다. 또한 나는 그의 내력 도 모를 뿐 아니라 그와 백화산장의 관계도 모르고 있다. 말을 함 부로 해선 안 되겠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사마형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 목적은 변하지 않소." "만약 마형이 그 목적을 진실로 털어 놓는다면, 나는 마형을 위 해 힘을 쓰겠소." 마문비는 웃었다. "사마형은 점술을 자랑하면서 내 목적을 점쳐 보면 되지 않소?" 사마건은 불쾌한 모양이다. "마형도 나를 믿지 못하는 눈치요." "피차 깊은 사이도 아닌데 너무 많이 묻는다고 생각되지 않소?" 사마건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마형은 나에게 백화산장을 도우라고 협박하는구려?" "좋을 대로 해석하시오." 사마건은 차를 벌컥 들이키고 말했다. "마형에겐 사흘 이내에 재난이 닥쳐 올 거요. 마형이 나갈 길을 가르쳐 줄까요?" 마문비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대장부는 생사에 두려움이 없는 법, 사마형의 수고를 빌리고 싶 지 않소." "마형이 내 점괘를 믿지 못하겠다면 할 수 없소." 그는 찻잔을 놓고 나가 버렸다. 동해신복 사마건은 먼 동쪽의 성에서 중원무림에 이름을 날리기 위해 왔다가 때마침 중원무림이 백화산장의 일로 어수선해지자 백 화산장을 찾아 왔다. 그리고 자기가 배운 것으로 일거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은근히 화가 난 그는 마문비를 도와 백화산장을 발칵 뒤집어 놓으려 했으 나 마문비 역시 거절을 하는 것이었다. 문 밖을 지키고 있던 봉죽은 사마건이 대노하여 나간 뒤에 조용 히 들어와 찻잔 등을 정리했다. 그녀가 사마건이 만졌던 찻잔에 손 을 대자 찻잔은 그대로 깨져 버렸다. 마문비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봉죽은 방긋이 웃었다. "사마선생의 무공은 약하지 않군요. 그가 초조히 기다리지 않고, 명리에 급급하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백화산장이 그를 알아 줄 텐 데." 마문비는 마음이 동요되었다. '이 계집이 알고 있는 것은 이외로 많은 것 같다. 게다가 사마건 을 놀리거나 찬미하지 않고 공정하게 평을 했다. 이 계집은 무공도 꽤 높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장중의 비밀을 캐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오래 전부터 백화산장에는 현재(賢才)와 기재(奇才)들이 무수히 많다고 들어 왔는데 사마선생한테는 왜 그렇게 냉담하지?" 봉죽은 빙그레 웃었다. "이런 말은 소비가 감히 할 수 없으나 마도련님은 정인군자이시 니 절대로 소비를 탓하지 않으시리라고 믿고 말씀드리겠어요." 그녀는 밖의 동정을 살피다가 계속했다. "사마건은 시기를 잘못 만났어요. 대장주는 영웅대회를 거행하느 라고 시간이 없어 그를 접견하지 못해 그의 기재가 매몰당한 거예 요." "둘째가 보지 않았는가?" "둘째 장주의 안목은 대장주만 못해요. 그는 사마건이 기재라는 것은 알지만, 절기가 얼마나 많은지는 알지 못해요. 또한 사람을 골라 쓸 권력도 없어요." 마문비는 의아하여 또 물었다. "백화산장의 둘째 장주이면서 어찌 권력이 없을까?" "우리 백화산장의 권력이 모두 대장주에게 있어요. 둘째 장주는 단지 대장주의 명령을 하달할 뿐이에요." 마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봉죽은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이 말은 소비가 아무렇게나 한 것이니, 만약 누설되어 대장주나 둘째 장주의 귀에 들어가면 소비는 큰일나요. 둘째 장주는 비록 권 력은 없지만, 소비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쉽게 할 수 있어요." "아가씨, 안심해도 괜찮아. 나 마문비는 절대로 소인이 아니야. 한데, 아가씨는 심대장주가 언제 향연을 베푸는지 알고 있나?" "본래는 내일이 예정이었지만, 오늘밤에 망화루의 꽃밭에서 대장 주가 손수 주재하는 성대한 향연이 있을 거예요." "가르쳐 주어 고맙소." 봉죽은 미소지었다. "마도련님이 허락하신 말씀이나 잊지 마세요." 만족스런 표정으로 찻잔을 정리해 가지고 나갔다. 소영이 왔다. "총타주, 이 기회에 앉아서 푹 쉬시오. 혹시 밤에 무슨 일이 벌 어져 응수해야 될지 모르니까요." 마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여기서 쉬겠소." 소영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와실로 가지 않을까? 내가 지켜 줄 것인데 무엇이 마음에 걸 리는 것일까?' 봉죽이 들어와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시고 와실로 가서 휴식하세요. 소비가 이미 두 송이 붉은 꽃을 딴 곳으로 옳겨 놓았어요.' '저 계집은 과연 총명하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마문비는 곧 와실로 들어가 맡아 보니 아무 냄 새도 나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 운기하며 조식을 했다. 소영이 봉죽에게 말했다. "우리 총타주가 휴식할 땐, 딴 사람이 정신을 어지럽게 하면 안 되니 이곳은 내가 보살피겠소. 아가씨가 수고할 필요는 없소." 비록 변장을 했지만 그의 단정한 얼굴 생김새와 청초한 눈초리가 달라질 리는 만무했다. 봉죽은 소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참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 리며 말했다. "당신의 얼굴은 어떤 사람과 꼭 닮았어요." 소영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어떤 사람이오? 봉죽은 손을 머리에 얹고 잠시 생각해 보고는 입을 열었다. "생각이 잘 나지는 않지만 당신의 눈초리는 많이 본 것 같아요." '이 계집의 눈썰미가 뛰어나구나. 내가 변장을 했는데도 낯이 익 은 모양이지만, 나는 한 번도 이 계집을 본 기억이 없다. 나를 자 주 보지도 않았을 텐데.' 봉죽이 애교어린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마도련님을 오래 전부터 따라다녔나요?" "오래 전부터요." 봉죽은 왼발을 막 문 밖에 내딛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손을 들었 다. "생각났어요. 이리 와요. 말해 줄 테니." 소영은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명목상으로는 비녀이 지만 몰래 감시하고 있으니 너무 냉정하게 대하면 곤란한 일이 생 길 것이다. 그녀가 주조룡에게 몇 마디 나쁜 말을 하면 심목풍은 방비를 더욱 엄중하게 할 것이고, 그러면 부모를 구출하는데 지장 이 될 것 같아서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말해 보시오." "당신은 우리 셋째 장주를 닮았어요." 소영은 짐짓 깜짝 놀라는 척했다. "내가 귀장의 셋째 장주를 닮았다고요? 농담마시오." 봉죽은 웃었다. "확실히 당신의 눈매는 그 사람을 닮았어요. 윤기있는 눈매 하며 ..... 당신의 얼굴은 추한데 우리 셋째 장주는 정반대였어요. 그게 다를 뿐이군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내 눈매로 짐작하는 걸 보니 각별히 눈초리를 주의해야 되겠구 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자,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동녘에 달이 솟 아 올랐다. 봉죽이 등을 들고 들어왔다. "마도련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직 안 일어나셨소. 할 말이 있소?" 봉죽이 대답했다. "대장주가 주재할 향연 시간이 다 되었어요. 어서 일어나시게 해 요. 향연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돼요." 봉죽은 등을 놓고 촛불에 불을 붙였다.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너무 다급히 서둘지 마시오. 절대로 시간은 어기지 않겠소." 그는 말을 끊었다가 봉죽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는데 아가씨가 가르쳐 줄지 모르겠소." 봉죽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오늘밤에 당신의 셋째 장주를 만날 수 있는지요?" "물론 볼 수 있어요. 우리 장주가 영웅대회를 거행하는 목적은 셋째 장주와 강호 군호들과 대면시키기 위해서예요." 소영은 생각에 잠겼다. '어떤 자가 나 소영으로 가장할는지 모르겠군. 혹시 남옥당(濫玉 黨)을 심목풍이 손에 넣었단 말인가?' 봉죽이 말했다. "내가 당신이 우리 셋째 장주와 닮았다고 해서 묻는 건가요?" "그것도 이유 중의 하나요. 나는 귀장의 셋째 장주가 나를 닮았 다니 좀 뵙고 싶소, 얼굴이 얼마나 잘났는지도 알고 싶고....." 봉죽은 웃었다. "난 단지 당신의 눈이 닮았다고 했을 뿐이에요. 다른 부분은 거 리가 멀어요." 46. 동해신복(東海神卜) 사마건의 오기(傲氣) 소영과 봉죽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문비가 일어나 그들에 게 다가왔다. 봉죽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공손히 말했다. "마도련님, 옷을 갈아 입으셔야지요." "필요없소. 그것보다도 대장주를 위한 만찬은 언제 시작인가?" 봉죽은 둥실 떠 있는 달을 바라보더니 생긋 웃으며 애교를 떨었 다. "달이 저 나뭇가지까지 왔으니 이제 시간이 다 됐나 봅니다." "그래? 연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어떤 인물들이지?" "이 영웅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뭇 영웅들이 모두 오셨어요." 마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곧 가봐야겠군." 봉죽이 등불을 들고 재빨리 나섰다. "제가 앞장 서서 길을 밝혀 드리겠나이다." 봉죽이 밖으로 나가자 마문비는 소영에게 전음술로 말하였다. "소형, 연회석상에서 중주이고와 연락을 취하여 손을 쓸 대책을 상의할 것을 잊지 마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더니 재빨리 봉죽의 뒤를 따라갔다. "아가씨는 처음부터 이 취죽헌에 있었소?" "네. 우리 자매 중 죽(竹) 자 이름을 가진 이들은 모두 이 취죽 헌에서 일한답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난화정사(欄花精舍)에서 접객하는 아가씨들의 이름은 모두 난(欄)자 돌림이겠구려?" "무척 총명하시군요. 하나를 얘기하면 셋을 알아차리시니." 소영은 그녀가 감히 조롱하는 투로 비꼬는 것이 내심 약간 불쾌 하기는 하였으나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벌써 높은 누각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다. 여러 여비(女 婢)들이 누각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잔디 위에는 십여 개의 술통들이 놓여 있었다. 초청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마문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것 같군." 봉죽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쪽에 사람들이 오고 있지 않습니까?" 마문비가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북쪽에서 남색 옷을 입은 여비 하나가 사등(紗燈)을 들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사 십 전후의 건장한 사내가 뒤따르고 있었다. 가슴에 새까만 털이 길 게 난 거한은 무슨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문사차림이었다. 이 눈에 띄게 특이한 차림의 거한을 보고, 소영은 그가 바로 우 문한도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의 뒤에는 백년서생 성영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여비의 안내를 받아 망화루 쪽으로 앉았다. 순간 사방에서 십여 개의 불빛이 비쳤다. 안내를 맡은 여비들의 사등에서 발하는 불빛이었다. 여비들은 자기들이 인도한 손님들을 각각 지정된 좌석으로 안내했다. 아주 질서정연하게 착석토록 되어 있었다. 마문비는 봉죽을 따라 지정된 좌석을 찾아 앉았다. 소영은 낮은 음성으로 봉죽에게 물었다. "아가씨, 내 좌석은 없습니까?" 봉죽은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배짱만 있으시다면 그 옆에 앉으세요. 한 탁상에 여덟 분이 앉 게 되어 있는데, 좌우간 사람이 모자라니까 앉아도 될 거예요." 이때 냉랭한 사나이의 음성이 좌중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또다시 마형과 한 좌석에 앉게 되는군!" 마문비의 시선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부딪쳤다. 마문비는 껄껄 웃으면서 응수했다. "사마형과는 참으로 연분이 깊구려." 사마건은 마문비의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수십 명의 여비들이 좌중을 누비고 다니면서 초대된 손님들을 지정된 좌석에 착석시킨 다음 질서정연하게 물러나는 것을 보고, 마문비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백화산장의 일사불란한 조직력은 과연 경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비들의 그 정도의 훈련만 보더라도, 강호의 한다 하는 가문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백화산장의 여비들은 참으로 아름다우며 매혹적이구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분가루 냄새에 홀려 함정에 빠졌는지 모른다 오." 사마건은 마치 좌중의 사람 전부에게 들으라는 듯 고의로 언성을 높였다. 과연 수십 명의 시선이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사마건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뱀의 이빨이나 황봉(黃峰)의 침에서 내뿜는 독보다 몇 갑절 더 무서운 독은 여자의 마음일진데, 장미는 아름답고 향기가 좋지만 가시가 돋아 있어 한다 하는 영웅호걸들을 주색에 몰입시켜 여인의 치마 밑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드니 정말 통탄할 일이로군!" 그는 단전진기(丹田眞氣)를 이용했기 때문에 비록 고성을 지르지 는 않았지만, 소리는 멀리 퍼져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마문비는 약간 당황하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마형, 이제 그만 됐소. 모든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사마 형을 주시하고 있소." 사마건은 코웃음을 치며 여전히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을 관찰해 보니 대부분이 벌써 미인계에 빠져 있소.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소." 마문비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사마건도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처럼 겁없이 떠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마건은 다시 허공을 바라보며 탄식을 계속했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바보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것일까? 죽 음이 임박한 줄도 모르고, 눈앞의 색욕과 식욕에만 급급하여 마지 막 주연을 즐기고들 있으니......" 이 말에 좌중은 물이 끊는 듯 소란스러워졌다. 사마건은 갑자기 술상에 일장을 날렸다. 술잔이며 집기들이 박살 이 나며 흩어졌다. 그리고는 상 위에 엎드리더니 갑자기 대성통곡 을 했다. 마문비는 사마건의 그 미친 듯한 행동을 감히 저지시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기까지 휩쓸릴 것 같은 염려 때 문에 그냥 방관하고 있었다. 사마건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처량하기까지 했다. 무공 도 높고 재화도 많은 사람이 어찌 이렇게 웃다가 울면서 미친짓을 하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마문비는 결국 나직이 사마건을 달 래기 시작했다. "사마형, 진정하시오. 이제 각지의 군호들이 집합하여 성연이 베 풀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하시면 어디 체통이 서겠습니까?" 사마건은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으면서 탄식했다.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이 멀지 않아 흥사를 면치 못할 텐데 어찌 눈물이 나오지 않겠소?" 마문비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말았고, 사마건은 다 시 중얼거렸다. "무지한 세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제 발로 달려 와서 스스 로 죽음을 맞이하려 하니,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 오?" 좌중의 몇몇 성질이 급한 사람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 다. "미치광이! 미친 것!" 사마건은 그 소리에 반박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갑자기 은은한 종소리가 연거푸 세 번 울렸다. 구름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는 누각의 정상에 무지개가 솟아 오르더니 멀리 있는 꽃나무 숲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마문비가 유심히 살펴 보니 그것 은 수 필의 비단을 펼친 것이었다. 순간, 사방의 꽃수풀에서 갸날픈 악기소리가 들려왔다. 심목풍이 많은 군호들을 압도하려는 저의가 역력하였다. 한편, 소영은 중주이고와 향비 등을 찾아볼 양으로 두리번거렸으 나, 끝내 그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 만약에 그들의 계책이 탄로나서 입장을 거절당했다면, 마문비와 도 저히 손을 쓸 수 없는 형편이었다. 향비가 그토록 자신만만하다고 하던 은패를 취득하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하고 가슴이 조마조마하 였다. 그때 음악소리에 섞여 우람한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천의 당가 장문인 당노부인께서 당도하였소." 사천의 당가는 특출한 독기를 암기로 삼아 이미 무림에서 정평이 나 있으며, 그 명성은 강호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 당가에는 아주 괴이하고 야릇한 전통이 있으니, 그것은 첫째, 당가의 절기(絶技)를 아들에게 전하지 않고 딸에게 전수하는 것이 다. 또 당가인이라면 삼척동자라도 반드시 몇 종의 독물암기를 사 용할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의 기괴한 전통은 장문인의 좌우에서 항상 수행하고 다니는 두 여비에 관한 것이다. 그 여비들은 꼭 당가와 무슨 관련 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천부적으로 총명하고 절색의 미 모만 갖추면 되었던 것이다. 장문인은 자기를 좌우에서 수행하는 두 여비를 선택할 권리를 가 진다. 출신지나 성씨도 가리지 않고, 오로지 다음 일대의 장문을 계승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두 명의 여비를 선택하여 오 년 간 그 녀들과 함께 두문불출하고 유폐된 생활을 한다. 그 오 년이란 세월은 참으로 지루하고 쓸쓸한 세월이지만, 장문 인을 수행할 두 여비의 권위는 상당히 높아지며 여자로서의 교양과 덕을 쌓아 무척 고상한 성품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 두 여비는 장문인의 허락없이는 혼인할 수가 없으며 항상 장 문인을 수행해야 하는데, 그 기간은 장문인이 그 지위를 다음 대에 계승할 때까지이다. 그녀들은 간혹 장문인을 따라 만수원(萬壽圓)에 은거하기도 한 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는 사이에, 그들은 친혈육 못지 않게 깊은 정이 들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청춘을 바쳐 오로지 장문인을 위해 헌신하던 그녀들 이 혼인을 하게 되어도 다음 대에게 무척 존경을 받는다. 그녀들은 절대 혼인을 못하는 것이 아니고 장문인의 허락만 얻으면 혼인할 수가 있는데, 혼인하기 전에 연마했던 당가의 무공은 혼인을 하게 되면 다시 돌려 주게 되어 있다. 그 무공을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돌려 주느냐 하는 것도 장문인 이 결정하는데, 전부를 돌려 받는 경우도 있으나 가끔 특혜를 주어 일부분만 돌려 받기도 한다. 이러한 전통을 가진 당가를 강호에서 신비스럽게 여기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당가에서는 장문인이 되려면 오 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무공을 연 마해야 되며, 장문인이 된 후로도 강호에 잘 나타나지를 않기 때문 에 강호에서 장문인을 직접 본 사람은 극히 드물며 당가의 정체는 더욱 신비스럽기만 하였다. 마문비는 고개를 들어 북쪽 꽃숲을 바라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구에 청색 바지를 입고, 손에는 봉두장(鳳頭杖)을 든 당노부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좌우에는 두 명의 아리따운 여비가 장검을 차고 바짝 따 르고 있었다. 그 여비들은 백화산장의 여비들이 당노부인을 인도하 여 착석하게 한 다음에도 여전히 좌우에서 장검을 차고 바짝 따르 고 있었다. 다시 우람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관외 장백산 흑, 백, 두 노인께서 당도하셨소!" 소영은 그 흑, 백, 두 노인이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살펴 보려고 시선을 돌리다가 마문비의 시선과 마주쳤다. 마문비는 아연실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문비는 직감적으로 그 두 노인이 아주 명망높은 무림 인물이라 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때 한 여비가 그들 두 사람을 인도해 왔다. 한 사람은 전신을 백의로 감싸고 머리에도 역시 하얀 두건을 썼 는데, 훤칠한 키에 흰 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의복이 검은색 일색이었으며, 역시 새까만 두건 을 깊숙이 뒤집어 써서 눈과 코만 보였다. 그들도 모두 여비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때, 꽃숲 속에서 들려 오던 음악의 가락이 갑자기 빨라지더니, 누각 꼭대기로부터 한 사람의 그림자가 번개처럼 질주해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자의 경공보다도 그 대담함에 놀라 좌중의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의 체구는 거대했으나 약간 등이 굽어 꼽추같았으며 짙은 눈썹에 입은 함박만 하고, 검은 수염은 가 슴까지 내려왔다. 그는 바로 백화산장의 대장주인 혈영자(血影子) 심목풍이었던 것 이다. 심목풍은 바닥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재빨리 몸을 날려 아래로 뛰어 내렸다.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채 우람한 거구를 가누는 것이 었다. 소영은 심목풍의 예리한 시선을 피하려고 재빨리 고개를 돌려 버 렸다. 심목풍은 좌중의 군호들을 향해 포권하더니 의젓하게 인사를 했 다. "저의 보잘것 없는 연회에 이렇게 참석해 주신 여러분의 호의에 깊이 감사하는 바이며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좌중의 군호들을 향해 포권하고 그에게 답례하였다. 심목풍은 서서히 중앙으로 가더니 동쪽을 등지고 앉아서 사방을 한 번 휘둘러 보며 말했다. "아직도 먼 길에서 오실 분들이 몇 분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여 러분들은 오래 기다리셨고 시장하실 테니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시작합시다." 이렇게 말하더니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이때 사방의 꽃숲 속에서 무수히 많은 여비들이 술상을 들고 나 타났다. 그녀들의 동작은 나비처럼 유연하면서도 민첩하였다. 순식간에 질서정연하게 술상을 정돈하여 나열했다. 심목풍이 술잔을 높이 쳐들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시게 된 동기를 말씀드리자면 첫째, 제가 강호 에 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로는 저 의 후배 수재를 여러분께 소개시키기 위해서 올시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는 듯하였지만, 어찌나 우렁찼는지 듣는 이로 하여금 심신을 진동케 하였다. 마문비는 또 한번 감탄했다. 그의 무공이 그토록 심오하니 과연 높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당노부인이 봉두장을 쳐들면서 입을 열었다. "난 이미 요 모양으로 늙어빠진 할망구가 되었으니 이제 그만 은 퇴하려고 하던 차, 뜻밖에도 심대장주의 초청을 받고 사천을 떠나 천리길을 이렇게 달려왔소." 심목풍은 홍조를 띤 채 싱글벙글했다. "보잘것 없는 소인의 뜻을 이해해 주시니 실로 감개 무량하옵니 다." 당노부인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난 벌써 칠십이 넘은 나이지만 솔직한 것을 좋아하오. 까놓고 얘기하겠는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다음 내일 아침에는 사천으 로 돌아가야 하니 심대장주의 영웅대회에는 참석 못하게 되겠소." "그렇게 급히 오셨다가 바로 가신다면 너무 섭섭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심대장주가 염려해 주지 않아도 되오. 난 이미 결정을 했고 한 번 결정한 것을 번복하고 싶지 않소." "기왕에 그러시다면 저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노부인께 서 분망중에 틈을 내어 이렇게 참석해 주신 것만도 무한한 영광으 로 여기는 바입니다." 당노부인은 기다란 흰 눈썹을 치켜 세우더니 냉담하게 말을 받았 다. "나는 당문에서 장문인이 된 지 벌써 삼십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타인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처음으 로 심장주의 초청을 받았던 거요. 나로 하여금 사천을 떠나 이곳에 친히 참석하게 한 심장주는 실로 고명하기 짝이 없소." 심목풍은 소리를 내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무 과찬을 하시는구려."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던 소영은 비로소 심목풍이 극소수의 인물만을 초대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심목풍은 다음날의 영웅대회에 방해가 될 만한 인물만을 모조리 불러들였던 것이다. 미리 해치워 버릴 목적으로...... 당노부인이 날카롭게 외쳤다. "심장주, 내가 여기 온 목적을 알고 있을 테지요?" 그러나 심목풍은 눈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술잔을 기울이며 유 들유들하게 대답하였다. "노부인께서는 그 많은 나이에도 여전히 성미가 급하십니다. 아 서요, 몸에 해롭습니다." 당노부인은 노성으로 잘라 말했다. "난 지금 한가하게 장주와 입씨름을 하고 있을 수는 없소. 우리 사이의 일을 지금 해결할 셈이오, 아니면 조금 더 기다릴까요?" "지금은 아직 초저녁이라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소. 우선 요기 나 하십시오. 나는 기왕에 다시 강호에 나서기로 결심했으니 도망 치지는 않을 것이오." 당노부인은 격분하였으나 노골적으로 반발을 하지는 못한 채 지 팡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러나 난 삼경(三更) 이상 지체할 수는 없소." 심목풍은 여전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소. 삼경이 되기 전에 필시 무슨 해결책이 나오리라 믿습니 다." 당노부인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던 비녀가 갑자기 땅에 떨어지며 머리가 산발이 되어 밤바람에 나부꼈다. 소영은 당노부인이 격노하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심중에 매우 불만 스러운 점이 많으리라고 판단했다. 또한 노기에 의해 비녀가 떨어뜨린 그녀의 내공에 크게 놀랐다. 심목풍은 다시 술잔을 비우더니 좌중은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여러분 중에서 무슨 불만이 있는 분이 있으시면 서슴지 말고 얘 기하시오." 마문비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찰나, 사마건이 먼저 나섰다. "불초는 사마건이라 부르는 자 올시다. 저는 장주께 두 가지 질 문이 있사옵니다." 심목풍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마건을 노려 보았다. 사마건의 거동은 너무도 뜻밖이었던 것이다. "사마형, 무슨 고견이 있으시오?" 사마건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백화산장에 온 무림 인물들은 백여 명이나 되는데, 이 연회에는 불과 삼십 명뿐이니 그 까닭이 매우 궁금하여 알고 싶소이다." 심목풍은 담담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좋소. 나머지 한 가지 질문도 마저 하시오. 내 한꺼번에 답변해 드리리다." 의젓하게 응수하는 심목풍 못지 않게 사마건도 침착하게 말을 이 었다. "제가 처음 중원에 올 때 귀장주의 사람들과는 만나 본 적이 없 으므로 원수가 될 까닭이라고는 없는데, 어찌하여 이 사마건의 이 름 석 자가 살해의 대상자 명단에 섞여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사마건은 냉정하게 따지려 들었다. "사마형,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난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도무 지 이해할 수가 없소." "심장주께서 우리를 그 명단에 집어 넣지 않았다면 왜....." 심목풍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의 말을 가로챘다. "허허헛..... 내가 술에 독이라도 탔단 말이오?" 사마건의 어조는 한결 단호했다. "그런 졸렬한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것이오. 또 그 따위 수법에 속 아 넘어 갈 무림 인사들이 아니오." 순간, 심목풍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사마건, 똑똑히 들어 둬! 그 따위 수작으로 이간질을 부렸다가 는 정말 이 심목풍을 무정하다고 원망하게 될 거야." 좌중의 군호들은 모두 심목풍이 흉악무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 으며, 노련한 강호인들이라 심목풍의 안색이 변하는 것만 보고도, 무엇인가를 예측하고서 사마건에게 더 이상 도전하지 말라는 듯 시 선을 보냈다. 사마건은 군호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되는 저의를 알았으나, 분노를 참지 못하여 고함을 쳤다. "심장주가 시도한 수법은 여기 모인 군호들을 감쪽같이 속였소. 또한 그 계략은 주도면밀하였으나, 이 사마건의 눈만은 속이지 못 했소." 심목풍은 기어이 분노을 터뜨렸다. "미치광이 같은놈! 어디다대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냐? 여봐라, 어서 저놈을 잡아라!" 순간, 꽃숲에서 두 사람이 뛰어 나오더니 사마건을 향해 돌진하 였다. 마문비는 순간적으로 사마건에게 호감을 갖고, 그의 곁으로 다가 가서 나직이 말하였다. "사마형, 내가 도와드리리다." 사마건은 필요없다고 잘라 말했다. 심목풍의 두 졸개들은 벌써 사마건의 양쪽에 버티고 서 있었다. 왼쪽에 서 있는 한 명은 푸른 옷을 입고 등에는 장검을 찼으며, 오 른쪽에 있는 자는 붉은 옷을 입고 무표정하게 버티고 있었다. 소영은 그들 두 명을 찬찬히 살피고 나서 마문비에게 나직이 귀 뜸을 해 주었다. "마형, 저 청의를 입은 자는 심목풍의 대제자인 단굉장(單宏章) 이며, 홍의인은 심목풍의 팔대혈영(八大血影) 화신 중의 일 인이 오." 청의인이 사마건을 노려 보며 입을 열었다. "스스로 생포되겠느냐, 아니면 우리가 손을 쓸까?" 사마건은 그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하 웃고 나서 크게 외쳤 다. "술과 안주에는 독이 없었지만, 좌석의 근처에다 가장 무서운 금 잠고독(金潛蠱毒)을 설치했군." 이 일갈에 좌중의 군호들은 질겁을 하였다. 금잠고독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독의 무서움은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심목풍은 노기가 등등하였으나, 바로 진정을 하며 일부러 하하 웃었다. "사마형, 아무래도 그대는 미친 병에 걸린 사람 같구려." 사마건은 더욱 냉정하였다. "웃기지 마오! 장주의 실력으로는 천하의 영웅들을 다 속일 수는 있어도 이 사마건만은 속이지 못할 거요." 단굉장은 사마건의 좌석 앞에 정면으로 버티고 서서 심목풍의 명 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흉악무도한 심목풍도 즉석에서 사마건을 처치할 엄두는 내지 못 하였다. 정세를 살펴 보니, 좌중의 군호들은 모두 안색이 굳어 있었으며 여차하면 모두들 합세하여 덤벼들 기세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사마건을 처치한다면, 결과는 너무도 손해가 많을 것 같았다. 군호들은 모두가 강호에서 한다 하는 고수들이다. 우선 승부는 고사하고라도 일전이 벌어졌다 하면 백화산장이 피로 물들 것만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심목풍은 어떻게 해서든지 충돌을 피하고 군호들을 안심시킨 다 음에 사마건을 처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마형, 만약 나에게 불만이 있다든지 우리 백화산장에 원한이 있다면, 솔직이 지적하여 도전할 것이지 그런 엉뚱한 소리로 중상 모략을 하려 하니 너무 야비한 수단이 아닙니까?" "내 말은 사실이오. 장주의 교활한 언변은 내가......" 이때 심목풍은 그가 말을 더 계속하지 못하도록 다시 웃음을 터 뜨렸다. "여러분 모두 무공이 막강하여 내공이 깊은 무림의 고수들입니 다. 과연 사마형의 말대로 중독이 되었는지의 여부는 여러분 자신 들이 운기해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사마건은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건 장주가 이미 준비했던 독을 거두어 버렸기 때문에 하는 말 이오." 심목풍은 기어이 불끈하였다. "왜 그렇게 미친 소리만 지껄이고 있는 거요? 여러분이 정말 중 독됐는지는 시험해 보면 알 것이오. 이 미치광이가 터무니 없이 나 를 모함하니 나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그는 즉시 손을 들어 단굉장에게 신호를 보냈다. 장주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단굉장은 즉각 번개 처럼 오른손을 뻗어 사마건의 어깨에 일장을 가했다. 사마건은 재빨리 팔을 구부리며 피하더니 반격을 개시했다. 마문비는 앉은 채로 그들의 격투를 관전했다.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아주 세밀히 관찰할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의 무공은 문자 그대로 막상막하였다. 특히 사마건이 장을 피하는 날쌤과 반격의 기세에는 감탄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과연 훌륭한 무공이었다. 단굉장의 무공 역시 예리하고 막강하였다. 심목풍이 친히 전수해 준 그의 무공이 뛰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단굉장은 오른쪽 장을 휘둘러 사마건의 일장을 막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쌍방이 모두 일 보씩 후퇴했다. 단굉장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한낱 미치광이로만 보았던 사 람이 그토록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일 줄이야! 그가 얼떨떨해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사마건은 연속으로 팔 초나 속공을 가했다. 졸지에 당한 속공에 단굉장은 두 척 가량을 후퇴하 였다. 단굉장이 계속 수세에 몰리자, 심목풍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발작하려는 순간, 요행히 단굉장이 반격을 시작했다. 사마건은 일 보 후퇴하면서 오른손을 높이 휘둘렀다.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사마건의 옆에 서 있던 홍의거한이, 단굉장의 오른손이 사마건을 향하는 찰나에 재빨리 손을 들어 사마건의 등을 향해 내 리치는 것이었다. 마문비가 황급히 소리쳤다. "사마형, 기습을 조심하시오!" 단굉장의 공격을 막느라고 전력을 하고 있던 사마건은 마문비의 외침을 듣고서 재빨리 왼손을 뻗어 반비(反臂)로 응수했다. 홍의거한의 장력은 단굉장보다 더 월등했다. 사마건은 악전고투하였다. 앞에서는 단굉장이 협괘무비한 협공을 하고, 뒤에서는 막강한 홍의거한의 공력이 작열하고 있으니 그야말 로 진퇴양난이었다. 무려 삼십 초 이상을 겨루고 나니 사마건은 힘에 겨웠던지 비지 땀을 흘렸다. 좌중의 군호들은 모두 사마건에게 동정을 금치 못하였다. 마문비는 더 이상 방관할 수가 없어서 분연히 일어섰다. 그대로 보고만 있다가는 불원간 사마건이 패하고 말 것 같았다. 그는 왼손으로 술상을 짚고 오른손을 휘두르면서 번개처럼 뛰어 나가 단굉장의 장세를 막았다. "사마형, 안심하고 홍의인과 대적하시오. 이자는 내가 맡겠소." 사마건은 때가 때인만큼 마문비의 호의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충심으로 마문비에게 감사를 느끼면서 전력을 쏟아 홍의거한을 공 격하였다. 그러나 홍의거한은 바위처럼 굳건했다. 홍의거한의 공세는 갈수 록 흉맹해졌다. 원래 무공 중에 공격 초에는 적을 후퇴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 지만, 적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수비의 일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홍의거한의 장세는 적을 공격하는 데만 급급해 있을 뿐, 자신의 방어에는 아주 소홀하였다. 때로는 자기의 급소를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 놓은 채, 공격에만 총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만큼 공격의 장세는 막강하였다. 사마건은 홍의거한의 그 막강한 무공에 대처하기 위해서 작전을 바꾸지 않고, 교묘한 방식으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회초(回招)케 하 여 자멸토록 하려는 계획이었다. 한편, 마문비와 단굉장의 열전은 계속 불을 뿜었으나, 좀처럼 승 부가 나지 않았다. 무려 이십여 초나 겨루었으나 도무지 판가름이 날 것 같지가 않았다. 심목풍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이 싸움은 도대체 언제 끝날지 를 모르게 됐으니 심장주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여러 눈이 보는 가운데 암습을 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 고 자기가 직접 뛰어들 수도 없으니 애간장이 탈밖에. 순간 날카로운 두 갈래의 비명이 들려 와서 모든 사람들을 긴장 시켰다. 고개를 들어 보니 마문비와 단굉장이 일장 일초를 주고받 다가 서로의 강초가 부딪치는 순간, 그 반동으로 피차가 후퇴하였 던 것이다. 단굉장은 냉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오래 전부터 마타주의 명성을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과연 그 명성은 헛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더니 등에 꽂고 있던 장검을 쑥 뽑아 들었다. 마문비는 점잖게 일렀다. "천만의 말씀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오른손을 품안에 넣어 섭선을 꺼내 폈 다. "난 마총타주의 그 희한한 무기의 맛이 어떤지 보고 싶소." "그럼 좋소!" 단굉장은 장검을 좌우로 휘둘러 검화를 내뿜었으나, 공격은 하지 않은 채 마문비를 주시할 따름이었다. 마문비는 그의 검세를 보고 내심 질려 버렸다. 그가 휘두른 검세 는 진기를 회복하기 위함인데도 그 위력이 너무도 대단하였다. 만 약 그런 위세로 공격해 온다면 능히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갈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원래가 검을 잡은 자는 경솔하게 적을 공격하지 않는 법, 따라서 한 번 검을 휘두르면 필승을 신념으로 적을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단굉장의 검술은 이미 검도지경에 다다랐기 때문에 그의 일발 지세는 참으로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니, 마문 비로서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그러나 마문비는 당황하지는 않았다. 섭선을 휘둘러 진기를 일으 키면서 어떻게 적의 공세에 대처할까 궁리하고 있었다. 그때 사마건과 홍의거한의 열띤 공방전은 조금씩 승패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마건의 수법은 몹시 기괴하고도 신속했다. 처음에는 미치광이 같았던 그의 사람됨과 마찬가지로 그의 무공 역시 말할 수 없이 심 오하여 도저히 그 심도를 측정할 수가 없었다. 홍의거한의 검세도 흉맹스러워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사마 건의 괴이한 장법에 휘말려 들어 공세가 꺾이고 있었다. 승세는 사마건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심목풍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내심 안달을 하였다. 사마건의 무 공이 그토록 절묘할 줄은 미처 상상을 못했으며, 마문비가 합세한 것은 더욱 뜻밖이었다. 절대적으로 승리하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 었던 심목풍의 예측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형세였다. 다시 전세를 역전시켜 승리를 이끄는 길이란, 명령을 내려 다른 고수들이 더 합세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체면상 그것 도 못할 짓이었다. 그때 당노부인이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심목풍, 우리가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 가는군." 심목풍은 술을 한 잔 마시고 나서 억지로 웃어 보였다. "부인, 안심하시오. 난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일각이라도 빨리 끝내 버리고, 어서 사천으로 돌아가야겠소." "부인은 나에게 승리할 자신이 있습니까?" 당노부인은 냉소를 잔뜩 머금고 대답했다. "최소한 당가의 암기수법이 어떤 맛이라는 것은 보여 줘야지." 심목풍은 껄껄 웃었다.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소. 당가의 암기는 무림에 널리 소문이 나 있으니 자신만만하겠지요. 허나 나는 암기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는단 말이오." "벌써부터 그런 소릴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오." "허허 내 말이 전혀 곧이 들리지 않는 모양인데. 정 그러시다면 잠시 후에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순간, 사마건의 웃음소리와 홍의거한의 노호가 한꺼번에 장내를 진동시켰다. 홍의거한이 왕방울같은 눈을 부릅뜬 채 쌍권을 휘두르며 노호를 지르는데, 그것은 마치 피에 굶주린 맹수가 사람에게 덤비는 모습 과 흡사하였다. 사마건은 태연자약하게 쌍장을 휘둘러 응전하고 있었으나, 이미 이성을 상실하고 사납게 덤비는 홍의거한과 더 이상 격전을 계속할 흥미를 잃었다. 마문비와 단굉자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은 여전히 불을 뿜었다. 관전하는 사람들은 열전을 벌이고 있는 사람 못지 않게 긴장과 초조에 싸였다. 특히 두 사람, 소영과 심목풍은 그야말로 혓바닥이 바짝바짝 타 는 듯했다. 심목풍 역시 자기의 졸개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체면 도 체면이려니와 우선 화가 치밀어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사방의 꽃숲 속에서 울려 퍼지던 음악 소리는 이미 그쳤고, 장내 에는 두 쌍의 호걸들이 내뿜는 권풍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갑자기 사마건이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어서 자리를 피하십시오! 백화산장의 주인이 곧 금잠고 독을 뿌릴 것입니다." 좌중의 군호들은 모두가 노련한 강호들이었다. 묘강의 고독을 보 지는 못했지만, 그 독의 무서움은 익히 알고 있었다. 심목풍은 이 주연에 의심스럽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모조리 불러 들였다. 술을 마시는 동안 자세히 동태를 살펴, 좀 쓸 만한 자는 자기 부하로 만들고 오만불손한 자들은 모두 제거해 버림으로써, 다음날의 영웅대회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들을 처치하는 방법은 금화부인이 힘을 이용 하는 것이었다. 묘강의 고독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제일로 손꼽히고 있는 금화부인과 상의해 방법을 결정했었다. 그야말로 뒤도 새도 모르게 군호들을 중독시켜 버릴 흉계였던 것이다. 그 중요한 시각이 닥쳐 와서 막 금화부인이 손을 쓰려던 찰나에 사마건이 소리를 쳐서 들통을 내 버렸으니, 심목풍은 분노가 어느 정도인가는 짐작하고도 남을 수 있었다. 사마건이라는 자를 갈기갈기 찢어 놔도 속이 풀리지 않으련만 결 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무공까지 천하일품이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심목풍은 이토록 가슴이 터질 듯 부아가 치밀고 애간장이 탔지 만, 천성이 음흉스럽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 고 태연자약한 척, 대책을 고심하고 있었다. 천만 가지 방법을 다 떠올려 보았으나 이렇다 할 묘책은 없었다. 심목풍이 이렇게 벙어리 냉가슴 앓듯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사 마건과 홍의거한의 격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으며 약간의 변화 가 생겼다. 사마건의 장세는 갈수록 예리하고 신속했으며, 반면에 홍의거한 은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홍의거한은 전력을 쏟아 공 격을 취했으므로 그 공세는 의외로 막강하였다. 홍의거한은 원래 진작 패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 적인 위기에 가서는 꼭 초인적인 공력을 발휘하여 위기를 모면한 다음 반격을 개시함으로써 무승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관전하고 있는 자들 중에서 오직 소영만이 홍의거한의 위력을 우 려하고 있었다. 심목풍의 팔대혈영 화신 중의 한 사람인 그 홍의거한은 특수한 훈련을 거쳐 무공이 막강할 뿐 아니라 죽음을 불사하는 용맹을 지 녔으므로, 비록 현재로서는 사마건이 우세해 보이고 있으나, 결과 는 역시 예측 불허했다. 사마건은 군호들을 향해 다시 소리쳤다. "지금 내가 악전하고 있는 것은 백화산장과 무슨 철천지 원수를 맺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여러분들이 고독에 중독되는 참상을 방관 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내 말이 절 대로 거짓이 아니니 어서들 자리를 뜨시오." 능글능글한 심목풍도 더 이상 참지는 못하였다. 군호들이 모두 자리를 뜬다면, 금화부인에게 금잠고독을 사용하 게 하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심목풍은 이제 군호들이 격노할 것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 미친 것들! 이 따위들을 징벌하지 못한다면 우리 백화산장의 체면이 서지 않아!" 순간, 꽃숲 속에서 이상야릇한 음악소리가 들리더니 백의소녀 두 명이 걸어 나왔다. 47. 어둠 속의 기인(奇人) 두 소녀는 사마건에게 접근하더니 등에서 장검을 뽑아들고 말없 이 휘둘렀다. 처음 그녀들의 검초는 보잘것 없었지만 몇 초식을 공 출한 후 위력은 갑자기 격중하는 것이었다. 검망이 눈부시게 번쩍하며 공세는 날카롭기 그지 없었다. 사마건은 홍의거한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금방 맞아들인 새로 운 적을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해 엉거주춤 후퇴 만 계속했다. 한편 사마건의 경고에 선동되었던 군호들은 이 급변한 형세의 격 투를 바라보는 데에 신경을 쏟는 바람에 자리를 떠야 할 것조차 잊 고 있었다. 소영은 두 소녀의 검초가 악랄하고 특이한 것을 보고 무척 놀랐 다. '심목풍의 혈영화신보다 훨씬 뛰어난 초식이다. 저렇게 무공이 좋은 소녀들을 확보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심목풍의 술수는 무시 할 수 없으며 백화산장에는 상당히 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숨어 있 을 것이다.' 사마건은 드디어 패색을 드러냈다. 두 소녀로부터 연속적인 협공 을 받은 사마건은 도무지 그 공세를 봉쇄할 길이 없었다. 심목풍은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하나의 향(香) 이 탈 시간만 기다리면 금화부인은 고독을 사용할 것이니, 그 동안 만 무사히 시간을 끌어 나가면 만사는 해결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장중의 모든 군호들은 고독에 중독되어 마음대로 요리를 할 수 있으리라는 흐뭇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가 이렇게 머리 속에는 수판을 퉁기고 있을 때 갑자기 두 명의 거한이 단검을 쥔 채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당황하지 마시오. 우리가 도와 드리겠소." 그들은 두 소녀에게 각각 도전했다. 그들 두 거한의 무공은 비범하여 단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하늘을 찢는 듯하였다. 두 소녀 중 한 명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거한을 맡았고 다른 한 소녀는 여전히 사마건을 공격했다. 소영은 형세를 보고 있으려니 내심 안달이 났다. 갈수록 형세는 불리하여 그대로 방관하고만 있다가는 사마건은 십여 초 이내에 쓰 러지고 말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자기가 나서서 도와 주고 싶 었지만 그럴 경우 심목풍에게 자기의 신분을 폭로하는 결과가 되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안타깝기만 하였다. 순간 소영은 당노부인을 생각해 냈다. 그녀에게 손을 쓰도록 하 여 사마건의 위기를 모면케 할 생각으로 그녀를 돌아다 보았다. 당노부인 역시 다른 군호들과 마찬가지로 격투에 정신이 팔려 있 었다. 특히 두 소녀의 절묘한 검초에 주의력을 집중하고 있었으며 심목 풍과의 일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사마건은 갈수록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백의소녀의 검초는 점점 더 악랄해지고 홍의거한의 협공까지 받 고 있으니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소영은 그 백의소녀의 검초 씀씀이에 특이한 점을 발견하였다. 그녀의 검초는 지극히 교묘하여 상대방이 막아내기 어려운 곳만 골라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마분비와 단굉장의 격투 역시 그칠 줄을 몰랐다. 쌍방은 서로 대 치하는 시간이 공격하는 시간보다 길었지만 일단 일격을 날렸다 하 면 그 위력은 바위라도 깨뜨릴만큼 대단했다. 단굉장은 계속 두 검초를 공격했으나 마문비의 수비를 뚫지 못하 였다. 마문비는 상대방의 검초를 봉쇄하기는 했으나 속으로는 무척 놀 랐다. 만약 단굉장이 검초를 공격할 때 조금만 더 공격을 가세했더 라면 자기는 필시 당하고 말았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영은 순간 나뭇잎을 하나 주웠다. 그는 안주 접시에서 생선가 시를 골라 일일이 나뭇잎에 찔러서 글을 만들었다. <대국이 극히 위험하니 어서 손을 쓰시오.> 그는 당노부인과의 거리를 가늠하고 나서 내공을 발휘하여 나뭇 잎을 날렸다. 그것은 무림에서도 유명한 유선자의 선회수법이었다. 나뭇잎은 약 일장 정도 일직선으로 날아가다가 갑자기 선회하여 당노부인에게 향했다. 당노부인이 받아 볼 수 있을는지는 적이 의문이었다. 나뭇잎은 당노부인의 좌석 위에서 서서히 맴돌더니 그만 땅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조금만 더 힘을 썼더라면 당노부인에게 도달할 수가 있었을 텐 데......' 소영의 안타까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때 당노부인의 뒤에 있던 여비가 나뭇잎을 주웠다. 소영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것을 당노부인에게 전해 주었으 면 하고 마음을 조였다. 그러나 그녀는 낙엽을 보지도 않고 버리고 말았다. 장중의 군호들은 모두들 격전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기 때문에 소 영의 거동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소영은 한 번 시험해 보려고 했으나 그 짓이 얼마나 큰 모험인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한 번은 무난히 심목풍의 눈을 속 일 수 있었으나 다음에는 발각될 위험성이 짙었다. 심목풍에게 발 각되어 일전을 벌이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처지 를 생각하면 도저히 함부로 자기의 신분을 노출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그 여비는 땅에 버린 낙엽에 글자가 새겨진 것을 보았는지 그것을 다시 집어들고 유심히 들여다 보더니 주머니에 쑤셔넣어 버 리는 것이었다. 소영은 그녀가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거기에 당노부인의 이 름을 밝히지 않았던 자기의 실수를 깨닫고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 다. 순간 다른 여비가 당노부인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소곤거리자 당 노부인은 분연히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뒤로 물러나시오. 잘못하다가는 암기에 당할 우려가 있 소." 그러자 근처의 몇몇 군호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당노부인은 다시 봉두장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심목풍, 어서 나와서 겨뤄보자!" 심목풍은 크게 노하였지만 짐짓 태연한 척 응수했다. "꼭 지금 하자면 할 수 없지. 하지만 분명히 해둬야 한다. 여기 모인 군호들이 증인이 되니 일단 패하고 나면 잔소리하지 않기다." "즉시 판결이 날 것이다. 입씨름은 필요없다!" 당노부인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의 일전은 보통 격투와 달리하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방을 살상케 하는 자가 이기는 것으로....." "좋다! 사천 당가에는 고작 몇몇 암기를 제외하면 별것 없다. 얼 마든지 좋다." 당부인이 선공을 시작했다. 그녀는 봉두장을 휘둘러 태산압정(泰山壓頂)식으로 일초를 사출 하였다. 그러자 심목풍은 재빨리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잠력을 이 용하여 봉두장의 공세를 봉쇄시켰다. 관전하는 사람들은 심목풍의 무공에 감탄하였다. 당노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부인은 다시 심목풍의 허리에 일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심목풍 은 오른손으로 지팡이의 위세를 막으면서 왼손으로는 그녀의 얼굴 을 향해 후려쳤다. 당노부인은 재빨리 지팡이를 거두면서 일단 후퇴하였다. 심목풍은 큼직한 옷소매를 연방 걷어올리면서 공세를 취했다. 세상이 떠들썩 할만큼 명성이 드높은 당가의 일인자에게 단 이, 삼초 만에 우선권을 획득하는 심목풍의 무공은 가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하였다. 심목풍은 기세당당하게 쌍수를 휘둘러 공격을 계속했다. 그 초식 은 보기에는 별것 아닌 듯하였으나 용케도 상대방이 잘 피할 수 없 는 곳만 골라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십여 초를 교환하고 보니 당노부인은 칠, 팔 척이나 후퇴 하고 말았다. 심목풍은 득의만면하였다. "흥, 사천 당가의 무공이 고작 이 정도였던가? 실망했는데...." 노기 띤 눈빛으로 당노부인은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양쪽 옷소 매를 툭툭 털었다. 순간 은빛 찬란한 물체가 심목풍을 향하여 흩어 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노부인이 발산한 은침이었다. 과연 당노부인의 암기는 일품이었다. 다시 전세는 역전되어 이번에는 심목풍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당노부인은 봉두장을 종횡무진으로 휘둘러댔다. 갑자기 한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사마건을 도우려고 백의소녀에게 도전했던 두 거 한이 그녀들의 검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그 거한들을 죽인 그녀는 다시 사마건을 향했다. 사마건은 일 대 이로 대적하느라고 진땀을 빼고 있던 터에 한 명 이 또 합세하자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소영은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수라지력(修羅指力)을 운기하여 백의소녀를 향해 발출하였다. 기세가 당당하던 소녀는 소영의 지력이 미치자 즉각 검을 떨어뜨 리고 비명과 함께 고꾸라지고 말았다. 기진맥진한 채 악전고투하고 있던 사마건은 뜻밖에도 한 명이 넘 어지는 것을 보고 용기백배하여 백의소녀가 버린 검을 집어들고 홍 의거한을 검기에 몰아 넣었다. 소영은 다른 한 명의 백의소녀에게도 수라지력을 발출하였다. 그 녀는 자기의 동료가 넘어진 까닭이 무엇인지 미처 알기도 전에 소 영의 암력에 의하여 검을 놓친 채 넘어지고 말았다. 이 뜻밖의 변고에 군호들은 깜짝 놀라 사방을 살폈다. 괴상한 검 초로 기세당당하게 날뛰던 두 소녀가 하나씩 넘어진 것은 분명 누 군가가 뒤에서 손을 쓴 때문이 분명한데 얼마나 무공이 훌륭하기에 그렇게 절묘한 수법을 사용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심목풍은 연속 이 초를 공격하여 당노부인을 후퇴시키더니 잽싸 게 몸을 날려 백의소녀 곁으로 가서 허리를 굽혀 살폈다. 그리고 나서 잠깐 멈추라고 눈짓을 했다. 단굉장이 제일 먼저 검을 거두고 물러나니 마문비도 섭선을 접었 다. 홍의거한과 사마건도 따라서 동작을 멈추었다. 심목풍은 단굉장을 시켜 쓰러져 있는 두 소녀을 데려가라고 이른 다음 군호들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어느 친구이신지는 몰라도 무척 지력이 강합니다. 내가 오늘 또 훌륭한 솜씨를 구경하게 됐군...." 소영은 일부러 흐리멍텅한 눈빛을 한 채 시치미를 뚝 떼고 태연 자약하게 앉아 있었다. 심목풍은 말을 이었다. "어느 친구이신지 접대가 소홀했던 점을 용서하시오. 금강지력의 절학으로 우리 백화산장의 두 여비를 상하게 한 것으로 보아, 절묘 한 무공을 지닌 기인임이 분명할진데 왜 떳떳이 나서지 못하는 거 요?" 그가 누차 캐물었으나 대답하는 사람은 끝내 없었다. 아무리 지 모가 발달한 심목풍도 누군지 가려 낼 재간이 없었다. 당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심목풍, 우리의 시합은 아직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할 작정이냐?" "좀 있다가 해도 늦지는 않소."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 정체불명의 기인을 생각하느 라고 여념이 얼었다. 당노부인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시종 심목풍에게 고전을 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가 열세에 빠졌을 때는 당가의 암기인 독침을 발출하여 위기를 모면하긴 했지만 다섯 개의 독침 중 이제 한 개밖에 남지 않았다. 더구나 그것으로 적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오직 자기 방어 의 수단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심목풍은 처음 만난 강적이었 다. 그러나 사천의 위신을 위해서는 싸움을 포기할 수도 없어 전전긍 긍하던 터에 다음으로 미루자니 잘됐다 싶어 운기조식하였다. 장중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침묵이 깔렸다. 심목풍은 장중의 군호들을 일일이 살펴 보았다. "어느 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절기도 가지고도 숨기만 한다 는 것은 영웅호걸로서의 체면을 잃지 않소?" 소영은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자극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으려 고 단단히 마음을 다졌다. 이때 사마건이 일부러 큰소리로 말하였다. "죽은 사람은 아무리 종을 쳐도 깨어나지 않은 법이오. 마형, 어 서 갑시다." 마문비는 사마건의 뜻을 간파하고 역시 군호들이 알아들을 수 있 도록 큰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사마형은 금잠고독을 뿌렸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그야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이미 독을 방출했을 거요." 군호들을 위험에서 구하려는 최후의 경고였으나 누구 하나 믿으 려 들지 않자, 그들은 발길을 돌리면서 더 어조를 높였다. "사마형은 그 독이 얼마나 멀리 미치는지 알 수 있소? 우리가 어 디까지 피해야 중독을 면할 수 있는 겁니까?" "고독을 사용하는 사람의 무공에 따라서 오십 리까지도 뻗칠 수 있소. 그러나 그것은 단 한 명을 상대로 할 경우이고 오늘은 수십 명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약간만 피하면 될 것이오." 소영도 마문비를 쫓아 꽃숲으로 향했다. 군호들도 드디어 사마건의 경고에 동요되어 자리를 떠 웅성웅성 하며 꽃숲 속으로 피해 버렸다. 심목풍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암암리에 지력을 써서 두 여비 를 넘어뜨린 자를 찾지 못해 울화통이 터지는 판국에 그 미치광이 같던 사마건의 농간에 군호들을 모조리 중독시킬 계획까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그 분통이 오죽하랴. 심목풍은 뿌드득 이를 갈았다. 사마건은 뜻밖에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 그를 제거해 버리지 않 으면 큰 화를 입을 것만 같았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마건! 멈춰라!" 이미 꽃나무 근처에 다다른 사마건이 몸을 돌리더니 반문했다. "심장주, 왜 그러십니까?" "넌 도대체 백화산장과 무슨 원한이 있기에 백방으로 훼방을 놓 으려는 거냐?" 사마건은 하하 웃으며 범연히 응수했다. "내가 정녕 장주의 음모를 백일하에 들춰내기는 했다는 말씀이구 려?" 심목풍은 금방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 주고 싶었으나, 억제하며 파르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함부로 입을 놀려 내가 손님으로 모신 사람들을 현혹케 했을 뿐 아니라 시비를 걸어 왔으니 아무리 내 아량이 하늘처럼 넓다 하여 도 용서할 수가 없다!" 마문비가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심목풍은 무공이 막강하니 손을 쓸 때 각별히 주의하시오." 사마건은 암암리에 공력을 집중시켜 경계하며 몸을 도사렸다. 소영은 전음술을 사용했다. "지금 심목풍은 살기가 등등하니 사마형은 도저히 막아내기 힘들 거요. 마형이 옆에서 심목풍의 시선을 가리시오. 나도 암암리에 돕 겠소." 마문비는 사마건과 칠, 팔 보 거리를 두고 다가섰다. 눈에는 살 기가 등등하여 금방 집어 삼킬 듯한 기세였다. 순간 심목풍의 장이 번개처럼 발출하였다. 그 장세는 막강하였지 만 만반의 태세를 취하고 있던 사마건은 가볍게 막아냈다. 그러나 쌍방의 장이 허공에서 충돌하자 사마건은 몸을 비틀거리 면서 무척 동요되었다. 심목풍은 최대한의 내력으로 단 일장에 사 마건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사마건이 약간 당황하여 움찔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등에 있는 명 문혈에 일장이 와 닿은 것을 느꼈다. 순간 심목풍의 막강한 일장에 금방 쓰러지고 말 것 같던 사마건 은 뜨거운 진기가 혈맥을 통해 오자 곧 기력이 증대하고 내력이 솟 구쳤다. 심목풍은 아연실색하였다. 전력을 쏟은 자기의 일장에 쓰러지고 말 줄만 알았는데 뜻밖에도 오히려 자기가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칠, 팔 보 물러서서 보아도 사마건은 버젓이 버티고 서 있는 것 이었다. 음흉스럽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심목풍인지라 속은 지글지글 타오르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자네의 무공은 과연 놀랍군. 가히 존경할 만하네." 말하며 뼈라도 꿰뚫을 듯한 예리한 시선으로 시종 사마건을 노려 보았다. 누군가가 암암리에 도와 주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으나 그자를 찾지는 못하였다. 소영은 자기의 진기와 내공을 사마건에게 전해 주고 빨리 물러섰 다. 심목풍은 드디어 소영에게 주의를 집중시켰다. "저 젊은이가 누군가?" 마문비가 대답하였다. "내가 데리고 다니는 심복이오." "그의 이름은?" 소영은 포권을 하며 대답하였다. "소인은 마성이라 하옵니다." 심목풍이 막 앞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사방이 어두워졌다. 등불들 이 모두 꺼져 버린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 하면서 날 듯이 뛰어갔다. 소영의 시선은 예리하기 때문에 그 중에 우문한도가 끼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어두워졌고 독을 피하려는 군호들이 허겁지겁 꽃숲 속으 로 피하느라고 장내는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심목풍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보니 그는 마 치 비단을 잡고 나무를 타는 원숭이처럼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소영은 암기를 사용하여 심목풍을 해치울 생각을 하였다. 비록 공명정대하게 정면에서 도전하지 못하고 뒤에서 암수를 쓴다는 것 이 떳떳하지 못한 노릇이기는 했으나, 그런 수법으로라도 부모를 구하는데 있어서 큰 힘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결심을 하고 손을 쓰려고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심목 풍은 벌써 팔장 높이까지 올라가 버렸던 것이다. 그때 사마건이 소영의 어깨를 잡으며 다급히 말했다. "어서 숲 속으로 들어오시오!" 소영은 금잠고독의 무서움을 익히 아는 터라 주저하지 않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소영은 심목풍이 필시 꽃숲 속에 고수들을 배치시켜 군호들이 숲 속으로 피신할 때 뒤통수를 치려는 계획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숲 속은 의외로 조용하였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뿐. 군호들은 모두 꽃나무 밑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은 금잠고 독의 무서움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 독을 직접 본 사람은 극히 드물 었다. 그들은 말로만 듣던 그 신기한 독에 적잖이 호기심이 있었 다. 소영은 마문비, 사마건과 함께 있으면서 군호들의 동태를 살폈 다. 마문비가 전음술로 물었다. "사마형, 심목풍이 오늘밤 금잠고독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내 점괘로 오늘밤 위험이 충만하다는 것은 알았으나 점괘가 이 상하고 험중에 변이 있으니......" 두 사람은 전음술로 얘기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소영도 들을 수 있게끔 했다. 소영은 점칠 줄을 몰랐지만 견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누가 얘 기를 하면 즉시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점괘가 흉험하다는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끼어 들었다. "나도 복산(卜算)의 기론(奇論)을 들어 본 적이 있소. 아무리 용 한 점괘라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자세하게 추측해 낼 수 없는데 사 마형의 점괘에 심목풍이 고독을 놓는다는 사실이 나왔다니 감탄하 지 않을 수 없소." 사마건은 빙그레 웃었다. "그대는 하인같지는 않으니 진짜 이름을 말해 줄 수 없소?" "사마형은 의용(義勇)과 협심이 많은 사람이오. 더 이상 숨길 수 없지만 이름만은 사정이 있으니 이해하시오." "형제의 무공은 나 못지 않게 막강하오. 점술은 어느 것을 막론 하고 점괘로 길흉을 나타낼 뿐 길흉의 변화는 점을 치는 사람의 지 혜, 경험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오." 그는 시선을 돌려 뜰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자 즉시 전음술로 말을 이었다. "험중에 변이 있다는 점괘를 보고는 필시 심목풍은 이 연회에서 전혀 상상도 못할 계략을 꾸미고 있을 것이라 믿고, 또한 내 안전 과 점괘가 영험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심목풍에 대해 뒷조사를 했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음모를 알기 위해 한 번도 써 보지 않았던 방법을 썼소." 순간 눈앞의 정세가 변해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암흑에 싸인 좌중에 반딧불처럼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사마건이 나직이 말했다. "조심하오. 이것은 고독을 놓는 가장 처음의 방법이오." 그제서야 마문비는 사마건이 절세의 기기(奇技)를 지닌 사람임을 인식 하고 나직이 물었다. "어째서 방출한 고광(盡光)이 보이지 않지요?" 혹시 고독을 방출한 사람이 군호가 모두 도망쳐 심혈을 기울인 것이 헛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고독을 거두어 딴 곳에 배치할지 도 모르겠소." 순간 잠시 사라졌던 불빛이 다시 반짝였다. 그 수도 점점 '늘어 났다. 사마건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는 소영의 손을 잡고 겨우 입을 열었다. "방출한 사람은 대단히 치밀하오. 오늘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은 불과 몇 명밖에 남지 않았소." 소영은 사마건이 바르르 떨며, 그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는 것 으로 보아 극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소영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게 무섭소?" 사마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중을 떠난 무림동도들이 모두 사방의 화수진(花樹陣)으로 피 신했는데 사마형이 맹독의 예리함을 알고 있다면 화수진으로 피신 한 무림동도 들에게 왜 도망가라고 하지 않소?" "지금요?" 사마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방고법(放蠱法)은 묘강(苗彊)의 열세 가지 방고법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방법이오. 우리가 움직이면 그 독충은 반드시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여기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낫소." 마문비는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사마건은 무서워하는 것이 없었는데 이 독충만은 퍽 무서워하는 구나. 믿어지지 않는데.' 이 순간 수십 개의 미광이 나타나 배회하다가 잠시 후 사라졌다. 사마건이 길게 탄식했다. "지금 이들에게 도망하라고 외쳐도 되겠소." 세 사람은 시종 전음술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부근에 있는 사람들 은 듣지 못했다. 마문비가 군호들에게 외치려고 할 때 갑자기 불빛이 번쩍했다. 높이 솟아 있는 망화루(望花樓) 뒤에서 손에 금등(金燈)을 들고 머 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홍의 부인이 서서히 걸어 나왔다. 금등의 높이는 약 한 자쯤 되었다. 그리고 두 치쯤 되는 파란 불 꽃이 밤바람에 조금씩 흔들렸다. 그녀의 엄숙한 표정으로 보아 얼마나 조심성 있게 걷는가를 알 수 있었다. 소영이 속삭였다. "맞았소. 독충을 풀어 놓은 사람은 바로 저 부인이오." 사마건이 나직이 물었다. "저 부인은 어떤 인물이오?" 소영이 대답했다. "묘강의 금화부인(金花夫人)이오." 마문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소. 묘강의 제이의 고수 인데 뜻밖에도 심목풍의 부하가 되었군요." 사마건은 눈을 크게 뜨고 긴장한 채 금화부인을 주시하고 있었 다. 금화부인은 금등을 들고 화수진으로 오고 있었다. 사마건은 전신을 떨며 마문비와 소영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소." 마문비가 대꾸했다. "우리는 도망칠 수 있소?" 사마건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소." 마문비가 강경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란 말이오?" 사마건은 탄식했다. "내 점괘는 우리가 흉험(兇險)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왔는데 이제 보니 내 점술이 영험하지 못한 것 같소." 순간 금화부인은 이, 삼 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금등을 바라보았다. 파란 불꽃이 그녀의 살기어린 얼굴을 비췄다. 그녀는 등을 서서히 오른손에 옮기고 왼 손의 식지를 입에 넣었다. 사마건은 부들부들 떨었다. "큰일이오. 그녀는 혈광(血光)으로 어고법(馭蠱法)을 쓰려고 하 오. 오늘밤 우리는 이 화를 피하지 못할 것 같소." 금화부인은 잠시 그러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식지를 입에서 빼고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올 때는 마치 유령같이 왔지만 갈 때는 질풍같았다. 단지 불빛이 몇 번 번쩍이자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사마건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이상하군." 마문비가 물었다. "무엇이 이상하오?" "그녀가 왜 혈광 어고법을 쓰지는 않고 돌연 마음을 바꾸었을까 요?" 마문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시 그녀는 그것으로 우리를 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물러간 것이 아닐까요?" 사마건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필시 무슨 연고가 있을 거요." 소영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바로 물러갔으나 고독(蠱毒)을 남겨 두고 갔는지도 모르 오." 사마건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 거요. 내가 알기로는 금화부인의 누에는 이미 그녀 자신과 영통하여 그녀가 물러날 땐 누에도 남겨 두지 않았을 것이오." 소영은 그의 박학에 속으로 놀라워했다. "그렇다면 심목풍의 음모가 허사가 되었군요. 사마건은 품 안에 서 금전괘합(金錢卦盒)을 꺼냈다. "다시 한 번 점을 쳐 보겠소." 소영은 마문비의 점괘가 영험하다고 인정해 온 터라 막지 않았 다. 사마건이 금전 세 개를 괘합 안에 넣고 흔들다가 막 꺼내려 할때 갑자기 눈앞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꺼졌던 횃불과 등에 불이 다시 붙었던 것이다. 망화루 쪽에서 둔중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은 모두 금잠고독에 중독되어 나 심목풍과 다시는 대적할 수 없게 되었소. 이미 시간도 오래되었고 하니 여러분은 각자 안식 처로 돌아가 하룻밤을 휴식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기 바라오. 나와 다시 대치할 것인가를 말이오." 사마건은 괘합과 금전을 거두고 운기를 하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소영이 물었다. "무엇이 이상하오?" 사마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심목풍은 어째서 우리가 중독되었다 고 하는 걸까요?" 마문비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독충에 중독되더라도 즉각 반응이 없다고 하오." 이때 사등(紗燈)을 든 미비(美婢)들 십여 명이 장중으로 걸어왔 다. "소비들은 여러분들을 각자의 거처로 딘시겠습니다. 오늘밤 연회 는 끝이에요. 여러분은 우리 백화산장의 손님입니다." 화수진에 숨어 있던 군호들의 대부분이 걸어나갔다. 소영이 말했다. "우리도 나갈 거요?" 사마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화수진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으니 나가야지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걸어 나갔다. 봉죽(鳳竹)이 사등을 들고 급히 달려왔다. "마도련님." "봉아가씨의 눈매가 퍽 날카롭군." 봉죽이 호들갑을 떨었다. "제가 마도련님을 방으로 모시겠어요." 마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화산장의 미비들은 사등을 높이 들 고 각자 자기 주인을 질서정연하게 찾아갔다. 마문비와 소영은 봉죽의 뒤를 따라 취죽헌(翠竹軒)으로 갔다. 봉죽은 방으로 들어가 사등을 놓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마도련님, 무얼 좀 드시지 않겠어요?" 마문비는 빙그레 웃었다. "음식에 혹시 그 고독이 들어 있지는 않겠지?" 봉죽이 말했다. "안심하세요. 소비가 먼저 식사하고 난 다음 드시도록 하세요." "좋아. 그럼 먹을 것을 좀 가져오게." 백화산장의 비녀들은 모두 엄격히 선택되어서인지 매우 아름답고 상냥했다. 엄격한 규제가 있지만 그녀들은 백화산장의 승패에 관심 이 없는 듯 항상 미소를 지었다. 마문비는 봉죽이 나간 뒤에 소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형은 무슨 실마리를 잡았소?" "무슨 일 말이오?" "백화산장의 미비들은 모두 심목풍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듯하 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도 그렇게 느꼈소. 하나 그녀들은 엄격한 통치를 받 고 있으므로 심목풍이 계속 집권하는 한 마음 속으로 두려움을 버 리지 못할 것이오." 그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순간 살금살금 걸어오는 소리가 나더니 사마건의 모습이 나타났 다. 마문비가 일어서 그를 맞이했다. "사마형이시군요." 사마건은 허리를 굽혀 대례한 뒤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두 분을 모시는 계집은?" "음식을 준비하러 갔소." 사마건은 흠칫 놀랐다. "먹어서는 안 되오. 그 비녀들은 심목풍의 부하들인데 어찌 믿고 음식을 먹을 수가 있겠소." 사마형도 오늘 연회에서는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았소? 사마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 때는 지금과 사정이 다르오. 그 때는 심목풍이 나를 몰랐고, 또 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이상 우리를 독살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 금은 우리를 몹시 혐오하여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고 하오." 마문비가 대꾸했다. "사마형의 말도 일리는 있으나 우리는 백화산장에서 며칠을 묵어 야 하는데 그 때까지 어떻게 먹지 않는단 말이오?" 사마건이 물었다. "마형은 말린 식량을 가져 오지 않았소?" "가져 오기는 했지만 그것을 밤낮 몸에 지닐 수도 없고, 또 그들 이 우리 식량에도 독을 넣을 수 있지 않겠소?" 사마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말이오." 마문비는 품 속에서 길이 네 치쯤 되는, 은변(銀邊)이 새겨진 두 개의 상아 젓가락을 꺼내며 말했다. "이 한 쌍의 상아 젓가락은 천남(天南)의 친구가 준 것이오. 몸 에 지니고 다니다가 음식에 독이 있을 거라고 의심이 갈때 한 번 시험해 보면 즉시 알 수 있소. 사마형이 한 짝을 지니시오." 사마건은 선뜻 그것을 받아 품 속에 넣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그의 시선은 시종 소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소. 당신은 어떻게 하 여 금화부인이 독을 거두고 물러가게 했소?"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금화부인과 알고 있는 사이요. 그녀가 금잠 고독을 군호에게 뿌리려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전음술로 독 충을 거두고 물러가라고 했지요." 사마건이 물었다. "정말 그 말에 금화부인이 독을 거두고 물러간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 체면을 많이 생각해 준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금화부인과의 사이는 보통이 아니군요." 사마건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내가 이해할 수 없었군. 그렇다면 오늘밤은 근심하지 않 아도 되겠소." 소영이 물었다. "왜요?" 사마건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난 그녀가 방독을 실패하여 오늘밤에 다시 시도할 줄 알았는데 서로 알고 있는 처지이니 상황이 크게 달라지겠소." 소영은 나직이 말했다. "그건 믿기 어렵소. 나도 보장을 못하오." 마문비가 끼어 들었다. "사마형은 어떻게 독충을 풀거라는 사실을 알았소? 사마건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역용술을 좀 알지요. 그래서 둘째 장주 주조룡으로 가장하 여 방독하려는 비밀을 탐지했소. 그것은 실행하기가 퍽 어려웠으나 의외로 쉽게 알아냈지요." 마문비는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뇌까렸다. "그랬군요. 내일 오시에 백화산장의 영웅대회가 있고, 심목풍은 방고지계(放蠱之計)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오늘밤에 반 드시 딴 음모가 있을 것이오." 사마건이 대꾸했다. "동감이오. 내가 가장 우려한 것도 역시 금화부인이 암암리에 방 고하는 것이오. 만약 그것만 제거한다면 심목풍에게 딴 독이 있다 해도 쉽게 응수할 수 있소." "오늘밤의 연회석상의 군호들은 이미 경각을 다투고 있지만 아쉽 게도 서로 연락을 못해 실력이 분산되어 있소. 만약 심목풍이 고수 를 파견한다면 그 국면에 응수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마문비는 사마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마형은 마침 잘 왔소. 오지 않았으면 내가 찾아 갔을 것이오. 사마형은 지모가 뛰어나니 필시 좋은 방법이 있을 거요." 사마건은 눈을 감고 한동안 숙고했다. 48. 한 잔의 피와 두 여인의 생명 세 사람이 이렇듯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발소리가 나더 니 봉죽이 목반을 들고 조용히 들어 왔다. 목반에는 맛있어 보이는 네 가지 채소류와 두 개의 큰 빈대떡, 그리고 더운 술이 든 주전자 가 놓여 있었다. 봉죽은 목반을 내려 놓았다. "마도련님, 모두 시식해 보겠어요." 마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수고해 보게." 봉죽은 미소지으며 네 가지 채소류를 먹어 보고, 술을 한 잔 따 라 마셨다. "마도련님, 안심하세요." 마문비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젠 아가씨도 나가서 휴식을 하지." 봉죽은 사마건을 힐끔 쳐다보고 문 밖으로 나갔다. 마문비는 술잔을 들고 나직이 말했다. "사마형, 이 술에 독이 있는지 좀 보시오." 사마건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소." 마문비는 술잔을 놓고 상아 젓가락을 꺼내 술에 넣었다. 순간 젓 가락색은 변했다. 술이 묻은 부분은 짙은 자색이 되었다. 마문비는 냉소했다. "속과 겉이 다른 악독한 계집이군." 사마건은 재빨리 주전자를 살폈다. "혹시 주전자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오." 주전자를 이리저리 살펴 보았으나 이상이 없었다. 마문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오. 분명히 이 술엔 독이 있는데 그 계집은 큰 잔으로 따 라 마셨소. 혹시 미리 해독제를 복용한 것이 아닐까요." 사마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있소." 마문비가 제의했다. "우리 그 계집을 찾아 물어 봅시다." 사마건은 눈을 꼭 감고 심사숙고했다. "만약 그 계집을 협박하여 우리를 돕게 한다면 오늘밤 약간의 보 복은 되는 셈이오." 마문비가 물었다. "어떻게 보복하지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심목풍을 좀 괴롭혀야겠소." 마문비는 그가 기학(奇學)을 지닌 줄 알고 있는지라 더 이상 묻 지 않았다. 그때 소영이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 계집을 찾아오겠소." 사마건은 급이 일어섰다. "소형에게 수고를 끼치다니....."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봉죽을 데리고 들어왔다. 마문비는 술을 눈짓해 보이며 나직히 물었다. "아가씨는 괜찮은가?" 봉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비는 괜찮아요." 마문비는 잠자코 생각해 보았다. '이 계집은 능청을 잘 떠는군.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 는다면 인정하지 않을 거야.' 그는 즉시 말을 꺼냈다. "이 술엔 독이 들어 있다. 한데 아가씨는 독주를 마셨는데도 중 독된 것 같지 않군." "소비가 주방에서 손수 주채를 장만한 것인데 무슨 독이 있다는 거예요?" 마문비가 말했다. "혹시 그 주채의 재료에 미리 독을 넣었는지도 모르지. 봉죽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마도련님은 증명해 본 뒤에 말씀하시는 거겠지만 소비는 중독된 것 같지 않아요." 사마건이 끼어 들었다. "만약 아가씨가 미리 해독제를 복용했다면 독주를 마셔도 상관 없을 거요." 봉죽은 싱겁게 웃었다. "그렇다면 소비의 입이 백 개라도 변명을 못하겠군요." 사마건이 벌떡 일어섰다. "좋소 내가 아가씨 앞에서 한 번 시험해 보겠소." 그는 오른손을 뻗어 봉죽의 오른팔을 잡았다. 봉죽은 몸을 피하려다가 말고 돌연 부동자세를 취했다. 사마건은 그녀의 완맥요혈을 살폈다. 그는 힘을 써 다섯 손가락을 잡았다. "백화산장엔 항상 권모술수가 있소. 아가씨와 인의도리(仁義道 理)를 논한다는 것은 혀만 아픈 일이지." 그는 왼손으로 그녀의 천돌혈(天突穴)을 점했다. 봉죽은 반신이 마비되어 사마건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사마건은 봉죽의 천돌혈을 점한 뒤에 또다시 뒤통수의 풍부혈 (風府穴)을 점하고 비로소 그녀의 완맥을 놓았다. "아가씨는 내가 무슨 혈을 점했는지 알고 있소?" 봉죽은 하얗게 질린 채 냉랭하게 대꾸했다. "천돌, 풍부, 모두 치명적인 요해대혈(要害大穴)이지요." 사마건이 말했다. "안심하오. 아가씨의 생명을 빼앗지는 않을 테니...." 소영은 사마건의 수법에 비록 영웅의 도가 없었지만 심목풍의 악 랄함을 생각하고, 또 당장 위험에 처해 있는지라 사마건이 독을 독 으로 대하는 수법을 탓할 수 없었다. 봉죽이 말했다. "내 요혈을 점하여 나를 심문하려는 거군요?" 사마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는 총명하오. 천돌, 풍부, 두 혈이 어떤 맥에 속하는 것 인지 알고 있겠지요?" 봉죽은 냉랭하게 응수했다. "몰라요." 사마건은 빙그레 웃으며, "나에게 묻지..... 천돌은 임맥(任脈)에 속하고 풍부는 독맥(督 脈)에 속하오. 두 혈이 발작을 하면 아가씨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 오." 봉죽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분명히 놀라 두려워하고 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마건은 히죽 웃었다. "아가씨가 내 청을 들어 준다면 두 혈을 즉시 풀어 주겠소." 봉죽이 물었다. "무슨 청이에요?" "간단하오. 몇 개의 작은 물건을 망화루 밑에 갖다 놓으면 되는 거요." 봉죽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요. 망화루 주변 오 장 이내는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라 대 장주의 특명이 없으면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어요." "그래도 아가씨에게는 방법이 있을 거요." 봉죽은 악을 썼다.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모험은 할 수 없어요." 사마건은 마문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화산장의 규율은 확실히 매우 엄격하오." 그는 다시 봉죽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만약 아가씨가 나와 협력을 한다면 나는 아가씨를 백화산장에서 구출하겠소." 봉죽이 말했다. "여러 장주가 우리 비녀들에게 퍽 선하게 대하니...." 그녀는 갑자기 언성을 낮추었다. "당신들도 살아서 백화산장을 빠져 나가지 못할 텐데 어떻게 나 를 구출하지요?" 사마건은 껄껄 웃었다. "아가씨는 어려서부터 백화산장에서 자라 심목풍 밑에서는 도마 위의 고기와 같소. 알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넓기가 한이 없소." 봉죽은 눈을 깜빡거렸다. 사마건은 계속 말했다. "오늘 심목풍의 연회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되었는지 또한 참석 한 군호들이 몇 명이나 독충에 중독되었는지 아가씨는 잘 알 거요. 그러니 내 말을 잘 생각해 보오." 봉죽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효력이 빠른 독약이 있으면 주세요." 마문비가 이상한 듯 물었다. "효력이 바른 독약으로 무엇하려고?" 봉죽은 탄식했다. "내가 당신들의 청을 받아들여 망화루에 침입한다면 십중팔구는 발각될 거예요. 그러면 나는 그 독약을 먹고 죽는 것이 차라리 체 포되어 본장의 엄격한 벌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사마건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었다. "좋소." 그는 품 속에서 옥병을 꺼내 그 속에 든 청색의 단환을 쏟아 들 었다. "이 단환은 먹는 즉시 죽으니 중요치 않을 때는 절대로 먹지 마 오." 봉죽은 단환을 받았다. "무엇을 갖다 놓으라는 거예요?" 사마건이 대답했다. "몇 가지 작은 물건인데 아무데나 숨길 수 있어 발각되지 않을 거요." 그는 품 속에서 철통과 흑색 합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철통의 나무마개를 빼고 망화루 부근에 아무렇게나 던지면 되 오." 봉죽이 물었다. "이 흑색 합도 뚜껑을 열어야 하나요?" 사마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뚜껑을 열어야 하오." 봉죽은 고개를 쳐들었다. "좋아요. 해 보겠어요." 사마건이 주의를 시켰다. "아가씨는 천돌과 풍부, 두 혈을 잊지 마오. 한 시진 정도 지나 면 발작하니 그 철통과 합을 던지고 빨리 와야 되오. 내가 아가씨 의 혈을 풀어 줄 테니." 봉죽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나는 죽음이 두려운 것도 아니고 협박에 굴복하는 것도 아니에 요." 사마건이 말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소." 봉죽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한 시진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망화루 밑에서 죽은 줄로 아세요." "아가씨는 일찍 죽을 상이 아니니 안심하고 어서 가오." 봉죽은 몸을 돌려 몇 보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 철통과 흑합 안에 무엇이 있는지 말해 줄 수 없어요?" "이곳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사소한 것이지만 중원에서는 극히 희 한한 것이오." 그는 잠시 중단했다가 계속했다. "지금이 적기이니 어서 가오. 우리들은 앉아서 성공만을 기다리 지 않고 아가씨를 돕겠소." 봉죽이 물었다. "나를 어떻게 도와요?" "만약 아가씨가 발각되어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화수진으로 도 망치시오. 그럼 안전할 거요." 봉죽은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봉죽이 사라지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마형, 그녀가 시킨 대로 할 것이라고 믿소?" 사마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믿어도 될 것 같소." 마문비가 물었다. "어떻게 아시오?" "내가 관찰한 결과 그녀는 일쩍 죽을 팔자가 아니오. 오늘밤에 그녀는 무사할 거요." 소영이 말했다. "어쨌든 우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으니 신용을 잃으면 안 되오." 사마건이 맞장구쳤다. "물론이오. 우리 세 사람은 두 패로 갈라져 한 사람이 이곳을 지 킵시다." 마문비가 은근히 물었다. "우선 말이 많은 것을 용서하시고, 도대체 그 철통과 흑합 안에 는 무엇이 들어 있소?" 사마건은 사실대로 틸어 놓았다. "그것은 내가 동해의 산호도(珊瑚島)에서 무공을 연마할 때 얻은 두 가지 괴물이오. 심목풍이 악랄하게 사용했으니 나도 이 괴물로 심목풍을 괴롭혀 불안하게 하겠소." 마문비가 말했다. "사마형은 아직까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밝히지 않았소." "합 안에는 날 수 있는 지네가 들어 있고, 철통 안에는 괴상한 독을 지니고 있는 독사가 들어 있소. 미리 말하면 그 여비가 절대 로 갖다 놓으려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오." 소영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한 마리 독사와 몇 마리의 지네로 망화루를 괴롭힐 수 있겠소?" 사마건이 대답했다. "이 두 동물은 서로 상용하지 않고 만나기만 하면 악투를 하오. 독사는 별로 크지 않아 수 촌에 불과하지만 민첩하기 짝이 없고 기 독을 지니고 있소. 만약 그것에 물리면 내가 갖고 있는 해독제 이 외로는 해독할 수 없소. 몇 마리 날개 달린 지네도 멀리 날지는 못 하지만 퍽 영민하고 날아다닐 때 웅웅 소리를 내오. 설사 망화루에 있는 사람들을 해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신경을 혼란케 할 수 있소. 심목풍과 금화부인 사이를 벌어지게 할 수 있단 말이오. 심 목풍은 금화부인이 망화루에 방고한 줄로 알 거요." 마문비가 맞장구쳤다. "그럴 거요." "허나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 효력이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요." 마문비가 말했다. "심목풍은 총명한 인물이니 혹 화수진에 매복을 두었을지도 모르 오." "매복뿐이겠소! 온 백화산장은 오행기진(五杏奇陣)이오. 뜰과 하 수도관을 서로 연결하여 대진을 형성하고 있소. 그런 대진도 결코 나를 곤경에 빠뜨리지는 못할 거요." 소영이 끼어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첩첩이 싸인 화수진 곳곳마다 수호인이 파견되어 있다고 하오. 지금 군호들이 와 있으니 방비는 더욱 엄중할 거요." 사마건은 웃었다. "수호인을 잡아 그들의 옷으로 바꿔 입으면 행동하기가 편할 거 요." 소영이 말했다. "모험이지만 우리는 그 비녀에게 신용을 잃어서는 안 되오." 그는 마문비와 사마건을 번갈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마형과 사마형이 가시오. 나는 이 집을 지키겠소." 마문비는 내심 소영을 존경하고 있던 터라 웃으며 대꾸했다. "소형이 가는 것이 좋겠소." 사마건은 소영의 절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대답을 듣지 도 않고 마문비에게 말했다. "그럼 마형이 집을 지키시오." 마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은 조심하시오. 충돌을 가급적이면 피하시오." "고맙소." 그 말을 남기고 그는 곧 밖으로 나갔다. 소영도 그를 뒤따라 취죽헌을 떠났다. "내 뒤를 따라 오시오." 사마건은 잽싸게 화수진으로 들어 갔다. 소영은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망화루 옆에 도달했다. 두 사람은 화수를 가로질렀으나 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높이 솟아 있는 망화루에 군데군데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마건은 사방을 살피고 나직이 말했다. "내 추측이 맞다면 그 비녀는 이 길로 돌아 올 것이오." 순간 그림자 하나가 망화루에서 두 사람이 숨어 있는 숲 속을 향 해 오고 있었다. 소영이 재빨리 말했다. "의젓이 나오고 있는데..... 그 비녀인지도 모르겠소." "그녀는 실수하지 않았을 거요." 그림자는 느릿느릿 걸어 왔다. 조금도 당황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망화루는 갑자기 이층까지 불이 꺼졌다. 맨 윗층의 불만이 남아 있 었다. 소영은 불이 아직도 켜져 있는 윗층이 바로 심목풍의 숙소란 것을 알고 있었다. 심야에도 잠을 자지 않는 것을 보니 필시 오늘 밤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연구하는 모양이었다. 소영은 높이 솟아 있는 누를 바라보다가 갇혀 있는 부모 생각이 나 맥이 풀렸다. 사마건은 공력을 운기하여 잔뜩 경계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그림 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연회석상에서 백화산장의 노비들과 격투를 해 본 결과 무공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는 두 사람이 숨어 있는 부근까지 왔다. 사마건이 자세히 보니 과연 봉죽이었다. 살며시 소영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전음술로 말했다. "과연 그 비녀요. 버젓하게 걸어 나오는군." 소영은 정신을 차렸다. 의심이 들어 속으로 생각했다. '이 망화루 밑은 방비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엄중한데 비녀의 신분으로 저지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을까?' 봉죽은 천천히 화수진을 가로질러 취죽헌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마건이 나직이 말했다. "저 비녀의 표정이 이상하오. 우리 미행을 합시다." 그때 맨 윗층의 불이 갑자기 꺼졌다. 백화산장은 암흑에 휩싸였다. 두 사람은 봉죽을 뒤따라 취죽헌으로 갔다. 봉죽은 살며시 문을 열고 천천히 들어 갔다. 사마건은 재빨리 따라 들어 갔다. 마문비는 대청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봉죽이 들어 오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 말을 건네려고 했다. 사마건은 급히 다가가 속삭였다. "마형, 조심하오. 저 계집이 좀 수상하오." 마문비도 이미 경계를 하고 운기를 한 터였다. 봉죽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눈빛은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소비는....." 그녀는 오직 소비란 말만 하고 머리를 의자 뒤로 떨어뜨리고 죽 어 버렸다. "봉아가씨!" 마문비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사마건은 재빨리 마문비의 손을 쳤다. "그러지 마오." 마문비는 깜짝 놀라 급히 이 보 물러서며 의자에 기대고 있는 시 체를 바라보았다. 시체는 점점 굳어졌다. 분명히 죽은 것이었다. 사마건은 고개를 흔들며 자책하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죽였소!" "내가 미리 저지했어야 하는 건데....." "상대방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 우리도 사정을 볼 필요 없 소." 바로 이때 문 밖에 가슴 부분에 금사로 수놓은 흑의를 입고 있는 아름다운 부인이 나타났다. 사마건이 오른손을 휘둘러 공격하려 했다. 그러자 소영이 급히 막았다. 부인이 엄숙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며 예리한 시선으로 세 사 람을 쏘아 보았다. "당신들은 좋은 일을 하는군요." 사마건과 마문비는 이 부인이 바로 금화부인이란 것을 알아채고 더욱 경계를 했다. 사마건은 시선을 돌려 봉죽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대가 금화부인이오?" 금화부인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래요. 당신이 누구지요?" 사마건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동해신복(東海神卜) 사마건이오." "당신은?" 마문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문비라 하오." 금화부인은 호들갑을 떨었다. "아! 예, 악, 상, 공, 네 성의 총타주이시군요." 마문비는 대꾸했다. "허명뿐이라 부끄럽소." 금화부인은 시선을 서서히 돌려 소영을 주시했다. "당신은?" 소영은 싱겁게 웃었다. "마성(馬成)이오." 금화부인은 엄숙한 표정에 냉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흥, 코먹은 소리를 하지 그랬어요. 얼굴은 잘 위장되어 타인을 속일 수 있지만 목소리는 여전하군." 그녀는 긴 치마를 끌고서 안으로 들어 왔다. 소영이 금화부인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줄을 어떻게 알았소?" 금화부인은 시선을 봉죽에게 돌리며 대답했다. "저 계집이 인도한 것이지요!"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소?" "다른 사람으로서는 백화산장에서 엄격히 훈련된 비녀를 망화루 에 들어가게 하는 모험을 할 리 없어요." 사마건은 내심 소영의 신분이 낮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그의 이름을 알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말했다. "저 계집에게 시킨 것은 나요. 이 형과는 아무 관계도 없소." 금화부인은 품 속에서 붉은 빛의 작은 뱀을 천천히 꺼냈다. "바로 이 작은 뱀. 또 이 몇 마리의 지네는 어서 거두는 것이 좋 겠소." 그녀는 독사와 합을 동시에 던졌다. 사마건은 재빨리 합을 받았지만 독사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마문비는 독사가 사람을 물까봐 즉시 부채를 휘둘러 공격했다. 금화부인이 냉정히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그 독사는 이미 죽었어요." 마문비의 동작은 극히 빨라 금화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독사 를 두 동강내었다. 선혈이 솟구쳤다. 사마건은 독물을 대하는 힘이 금화부인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 합 을 받아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영은 금화부인에게 말을 건넸다. "부인이 이곳을 찾아 왔으니 딴 사람도 찾아 오겠지요?" 금화부인이 웃었다. "나는 방금 밖에다 독거미를 놓아 두었소. 딴 사람이 따라왔다가 는 죽고 말 거요." 소영은 봉죽의 시체를 힐끗 쳐다보았다. "부인이 그녀의 독사와 지네를 빼앗은 것을 보니 그녀도 부인이 죽였지요?" 금화부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것을 빼앗았을 뿐 죽이지는 않았소." 마문비가 다급히 물었다. "그럼 누가 죽였소?" 금화부인은 사마건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 제일의 흉수요." 사마건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마문비가 중간에 끼어들어 물었다. "부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금화부인은 말했다. "간단하오. 저 계집의 무공은 약하지 않으나 재치가 없소. 그녀 가 반격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가만히 있었을 텐데 그녀는 다급 한 탓에 일 초를 반격하여 반역심을 드러내고 말았소. 그때 독사가 반쯤 기어나와 그녀의 손을 물었소." 사마건과 마문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금화부인은 미소지었다. "저 계집은 독사에 물린 후 이상하게도 침묵을 지켰소. 이미 죽 을 각오가 되었는지 내가 독사와 지네를 빼앗자 즉시 몸을 돌려 망 화루를 떠났소. 그때 수호인이 출수하려 했으나 내가 저지했소." 금화부인은 마문비와 사마건과 말할 때는 어조도 딱딱했고 표정 도 냉정했으나 소영과는 웃어 가며 몹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마문비는 사마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마형, 봉아가씨는 뱀의 독에 죽었소. 해독제가 있소?" 사마건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단지 사독(蛇毒)에 중독되어 죽은 것이 아 니오." 금화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녀가 망화루를 나올 때 밖에 매복되어 있던 고수의 일장을 얻어맞고 중상을 입었소. 중상과 사독이 동시에 발작하여 죽은 것이니 아무리 영단묘약이 있더라고 살려 낼 수는 없소." 소영이 말했다. "처음 수호인의 공격은 저지하고 왜 그 고수를 저지하여 그녀를 구하지 않았소?" 금화부인이 대답했다. "그 고수가 밖이 캄캄한 곳에서 갑자기 공격하였기 때문에 나도 얼른 저지할 수가 없었소." 소영이 물었다. "그녀는 상처를 안고 이곳으로 곧장 왔소?" 금화부인이 말했다. "저 계집은 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리로 온 거요." 그녀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계속했다. "당신들은 화수진에서 저지한 사람이 없어 발각되지 않은 줄로 알지만 당신들의 일거일동은 모두 감시되고 있었고 망화루 위로 보 고(報告)되었소." 사마건이 물었다. "부인이 이곳에 온 것도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없겠군요?" 금화부인이 말했다. "오늘밤, 심목풍은 연회에서 무슨 곤란을 당했는지 망화루에 돌 아 와서 침묵만 지키고 있소. 그는 진상을 모르고 있을 거고, 원래 음흉하고 잔인한지라 그것을 알기 전에는 절대로 발작하지 않을 거 요. 내가 백화산장에 온 뒤로 물론 이목은 피할 수 없지만 그들이 나를 미행하여 내 거동을 살필 수는 없소." 마문비가 물었다. "그가 진상을 모르고 있는 판국에 부인이 이곳에 왔으니 더욱 감 시하겠군요?" 금화부인이 말했다. "그럼 당신들은 경거망동을....."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누구냐!" 순간 비명이 나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금화부인은 냉소했다. "누군지 잘 걸렸군."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이 계속 말했다. "심목풍은 오늘밤 틀림없이 당신들을 노릴 거요. 나는 여기서 오 래 있을 수 없고, 또 당신들을 돕지도 않겠소." 아름다운 얼굴에 처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몸을 홱 돌렸다. "잘 해 보시오." 소영은 이어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금화부인은 번개같이 사라졌다. 소영은 봉죽의 시체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보아하니 그녀의 사주는 믿기 어렵소." 사마건이 입을 열었다. "나에게 하는 말이구려." 소영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사마형은 그녀가 일찍 죽을 사주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녀는 독 사에 물려 죽었소." 사마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사주는 말대로 일찍 죽을 사주가 아니오." 소영은 봉죽의 시신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이 아가씨가 우리를 위해 죽었으니 사마형이 가지고 있는 해독 제를 그녀에게 먹여 사독을 해독한 뒤에 중상을 치료할 방법을 강 구해야 하오. 이렇게 이 아가씨를 방치해 두자니 정말 마음이 괴롭 소." 사마건은 봉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소!" 그는 품에서 옥병을 꺼내더니 세 알의 홍단환을 한 알은 자기가 먹고 두 알은 마문비와 소영에게 나누어 주었다. 소영과 마문비는 해독제를 먹었다. 사마건은 한동안 운기하며 혈도를 폐주(閉住)한 뒤로 비로소 봉 죽의 시체를 만졌다. 그녀의 얼굴이 새파란 것으로 보아 중독이 심한 것 같았다. 사마건은 옥병에서 다시 두 알을 꺼내 왼손으로 봉죽의 입을 벌 리고 넣었다. 봉죽은 이미 몸이 차가와졌고, 숨도 끊어진 터라 입에 약을 넣 어도 삼킬 수 없었다. 소영은 그녀의 가슴에 손을 대 보았다. 이미 심장은 멎어 있었 다. 그는 탄식했다. "숨이 끊어졌고 맥박도 멎었으니 금화부인의 말대로 영단묘약이 라 할지라도 구할 수가 없을 것 같소." 그런데 돌연 냉정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어째서 구할 수 없소?" 세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흑의를 입은 한 괴인이 서 있 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싸늘했다. 마문비는 놀라 생각했다. '저자의 경공은 실로 절묘하다. 조금도 소리가 나지 않았으니... .....' 소영은 하마터면 독수약왕이라고 부를 뻔했다. 마문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대는?" 그 사람은 냉랭하게 말했다. "천하무림 사람들은 다 금화부인의 독물에 겁을 먹고 있지만 나 는 그렇지 않소." 사마건은 재빨리 옥병을 거두었다. "당신은 누구요?" 상대는 대답했다. "나는 독수약왕이오. 저 계집을 살릴 수 있는데 어찌 살리지 못 한다는 거요?" 말은 사마건에게 하는 것이었지만 눈은 소영을 노려 보고 있었 다. 소영은 은연중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나의 가장을 간파했단 말인가?' 그는 즉시 눈빛을 흐리고 말없이 서 있었다. 사마건이 말했다. "당신은 자신만만하구려." 독수약왕이 말했다. "내게 한 번 맡겨 보겠소?" '오래 전부터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 오고 있었지. 의술에 정통 하지만 성미가 괴팍하여 자기 기분에 따라 사람을 살리고 죽인다는 데.... 또한 무공이 뛰어나 무림을 주름잡는 모양이고.... 이자가 봉죽을 살릴 수 있다니 한번 자극해 보자. 살리면 좋고, 그렇지 못 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마문비는 이런 생각이 들어 일부러 냉랭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의술이 정명하다 하더라도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을 거요." 독수약왕은 히죽 웃었다. "만약 내가 살린다면 어떻게 하겠소?" 마문비는 속으로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살리는데 있어 무슨 조건이 필요 있을까? 그래서 독수 (毒手)라는 호가 붙었군.' 그는 다급히 말했다. "사람을 살리면 복을 받을 거요. 죽은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어쨌든 살려야 할 게 아니겠소?" 독수약왕이 말했다. "세상에는 죽어 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니 내가 손을 여덟 개 가 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많은 사람을 다 구할 수는 없소." "좋소. 조건을 말하시오. 어떻게 하면 살리겠소?" 독수약왕은 소영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누구요?" 소영이 말이 없자 마문비가 대답했다. "나를 수행하는 사람이오." 독수약왕이 말했다. "내가 이 계집을 살려내면 당신은 내 요구를 들어 주시오." 소영은 독수약왕이 자기를 간파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마문비가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오?" 독수약왕은 즉시 대답했다. "저 하인의 피를....." 마문비는 깜짝 놀랐다. "당신은 하인의 선혈을 무엇에 쓰려고 하오?" 독수약왕은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요." '사람을 구하는데 피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나 이 독수약왕의 의술이 정통하다는 말은 절대로 헛소문이 아니니까.....' 마문비는 이렇듯 생각했다. 독수약왕은 봉죽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시간을 지체하면 나도 살리기 어렵소. 내 요구에 응할는지 어서 결정하시오." 그가 냉정하고 오만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지금 퍽 부드럽게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분명히 그도 마음이 초조한 모양이었다. "이 하인은 비록 무공을 배웠으나 선천적으로 약하니 내 피로 대 신하시오." 독수약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오. 내가 천하에서 찾아 본 결과, 오직 두 사람의 선혈만 을 쓸 수 있을 뿐이오." 마문비가 물었다. "누구 누구요?" 독수약왕은 진지하게 말했다. "한 사람은 백화산장의 셋째 장주 소영이고, 또 한 사람은 바로 저 하인이오. 청기(淸奇)하여 소영 못지 않지만 아쉽게도 내 마음 대로 할 수가 없소." 마문비는 깜짝 놀랐다. '의학으로 사람을 알아 보는 것도 점괘에 못지 않게 정확하군.' 소영은 일부러 쉰 음성으로 물었다. "내 피가 얼마나 필요하오?" 독수약왕은 탄식했다. "만약 당신이 피를 준다면 비단 목숨을 건지는 것 뿐만 아니라 그녀로 하여금 건강을 되찾게 할 수 있소." 마문비가 물었다. "도대체 병인(病人)이 어떤 사람인데 그렇게 관심이 많소?" 독수약왕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여러분을 속일 필요가 없으니 솔직히 말하리다. 바로 내 딸이 오." 마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독수약왕은 비록 악독하지만 딸에 대한 정만은 심후하 군.' 마문비는 혼자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비록 나의 수행인이지만 그런 생사의 문제는 내가 결 정할 수 없소." 소영이 말했다. "소인과 약왕과는 아무 우정도 없지만, 소인은 자비로운 마음으 로 피를 주겠소. 얼마나 필요하오?" 독수약왕은 탁상의 잔을 가리켰다. "한 잔의 선혈과 내가 가지고 있는 영단으로 내 딸의 목숨을 한 달간 더 연장할 수 있소." 소영은 승낙했다. "좋소. 소인이 한 잔의 피를 주겠소. 우선 저 아가씨의 생명을 살려 내시오." 독수약왕의 얼굴은 기쁨이 넘쳤다. "어렵지 않소." 그는 봉죽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몇 번 움직였다. 이러저리 봉죽 의 몸을 더듬으면서 독수약왕은 봉죽의 가슴과 어깨에 은침을 여섯 개나 꽂는 것이 아닌가. 그 여섯 개의 은침은 봉죽의 육대 혈도를 서로 연결시킨 것으로 자극을 주니 멎었던 피가 갑자기 유통되어 심장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사마건이 넣어 준 해독제 를 삼키는 것이었다. 마문비는 봉죽이 꿈틀거리자 크게 놀랐다. '독수약왕의 명성은 과연 헛된 것이 아니구나.' 독수약왕은 예리한 눈초리로 봉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발이 움직이자 그는 즉시 이곳저곳에 일지와 일장을 눌 렀다. 그 움직임이 어떻게 빠른지 마문비 등은 어디를 누르는 것인 지 알 수 없었다. 순간 봉죽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독수약왕은 즉시 손을 멈추고 이 보 뒤로 물러나더니 두 알의 단 환을 꺼내 마문비에게 주었다. "이것을 그녀에게 먹이고 한 오, 육 시진 잠을 재우면 되오." 마문비는 단환을 받았다. 잠시 후 봉죽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독수약왕을 보더니 즉시 땅에 엎드려 절했다.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수약왕은 냉랭히 말했다.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소. 당신을 구한 사람에게 하시오." 그는 소영을 가리켰다. 봉죽은 잠시 어리둥절하였으나 곧 소영의 손을 잡았다. "살려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녀는 소영을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몰랐다. 소영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가씨, 감사할 필요 없소. 상처가 아직 완치되지 않았으니 어 서 방으로 들어가 조식하며 조용히 휴식하시오." 봉죽은 시선을 마문비와 사마건에게 돌리고 어찌할 줄을 몰라했 다. 독수약왕이 냉랭하게 말했다. "저분의 말이 맞소. 어서 들어가 조용히 조식하시오." 마문비가 봉죽의 오른팔을 잡았다. "내가 아가씨를 방에 데려다 줄 테니 갑시다." 봉죽은 어리둥절하였지만 마문비가 이끄는 대로 와실(臥室)로 발 걸음을 옮겼다. 마문비는 그런 그녀를 자신의 방에서 쉬게 한 다음 문을 닫았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찻잔을 들고 있었고, 독수약왕은 그의 왼손을 잡고 있었다. "잠깐!" 마문비가 소리쳤다. 독수약왕은 냉랭한 시선으로 마문비를 쳐다보았다. "왜, 후회하오?" 마문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로 후회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당신 대신 내가 피를 뽑겠 소." 독수약왕은 눈을 치떴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고 있소?" "가르쳐 주시오." 독수약왕은 억지로 자제하면서 끝이 예리한 동관(銅管)을 건네 주었다. "그의 왼쪽 팔의 주맥에 이것을 꽂고 내공으로 피를 뽑아야 하 오." 마문비는 동관을 받아들었다. "당신은 뒤로 물러나시오." 마문비는 피를 뽑을 때 혹 그가 딴 짓을 할지도 몰라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독수약왕은 순순히 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어서 손을 쓰시오." 마문비는 동관을 자세히 살펴 보고 무슨 독이 있을 것 같지 않자 소영의 왼팔 주맥에 찔렀다. 오른손으로 내공을 운용하여 소영의 등을 누르며 진기를 소영의 체내로 박입(迫入)하자 선혈이 솟아 나왔다. 잠시 후 잔이 가득찼다. 마문비는 동관을 빼 한 잔의 피와 함께 독수약왕에게 내밀었다. "자, 받으시오." 독수약황은 동관과 한 잔의 피를 받고 시선을 소영에게로 돌렸 다. "후일에 만약 내가 그대를 구한다면 그대의 전신의 피를 차용하 겠소." 소영이 대꾸했다. "후일의 일은 후에 논합시다." "그 때는 차용 여부를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할 거요." 독수약왕은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나갔다. 49. 일곱 가지 암계(暗計) 마문비는 독수약왕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 한숨을 불어 냈 다. "소형, 그래 몸이 어떻소?" 소영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까짓 한 잔의 붉은 피가 무어 대수로울 게 있소."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사마건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사마선생의 그 점치고 관상보는 술법이 참으로 고명하 군요. 소제는 믿지 않을 수가 없소." 사마건은 겸손하게 받았다. "아, 그러나 그간의 우여곡절은 나로서도 이루 헤아리기가 어렵 소." 마문비가 돌연 큰일이나 생각난 듯 눈살을 찌푸리면서 입을 열었 다. "금화부인과 독수약왕은 선후하여 이곳에 당도했소. 그러니 심목 풍의 이목을 속이기는 어려울 것이오. 오늘밤 우리의 처지는 위험 하오. 일찍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사마건이 맞장구를 쳤다. "오늘밤은 이곳에 머무르며 내력을 돋우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리고는 소영에게 눈을 돌려 물었다. "소형은 피를 흘린 후 좀 언짢은 느낌이라도 있으신지?" "아무렇지도 않소." "그럼 좋소. 우리는 등을 끄고 정좌하여 운기조식하면서 적을 기 다립시다." 마문비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심목풍이 비록 음험 독랄하다고는 하지만 지금 백화산장 중에는 적지 않은 호걸들이 운짐해 있으니 그도 행동하기가 그리 쉽지 않 을 것이오. 내 뜻은 사마형과는 조금 다르오." "고명한 가르침을 듣고자 하오." "내 뜻은 등불을 끄고 앉아서 적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 집 주위에 등불을 높이 밝히자는 것이오. 첫째로는 이곳에 불을 밝 혀 다가오는 적을 환히 살피자는 것이고, 둘째로는 심목풍이 쳐들 어 왔을 경우 그의 흉중을 만천하에 드러내 놓는 것이라 할 수 있 소." 사마건은 조용히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가 이곳을 쳐들어 온다면 그것은 여러 호걸들과 우 리를 도와 줄 사람들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란 뜻이군 요." 그는 미미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우리들이 있는 이 방 주위를 비추려면 최소한 여섯 개의 등불이 있어야 하겠소. 그리고 이것을 또 밤새껏 꺼지지 않게 하려면 적지 않은 준비가 있어야겠지요. 이것을 어떻게 구해야 할는지...." 마문비는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시오. 내 이미 그 꽃나무 숲에 횃불이 꽂혀 있는 것을 보 았소. 또한 저축한 기름도 충분하여 밤새껏 피우더라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오. 그럼 내가 가서 그것을 여섯 개만 가지고 오겠소." 그는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소영이 함께 갈 것을 청했으나 마문비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쏜살 같이 나갔다.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잠시 후 드디어 마문비가 여섯 개의 등불을 가지고 달려 왔다. 사마건이 마중하러 나갔다. "마형께서는 공격을 받았소?" 그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것을 보고 묻는 말이었다. "공격은 받지 않았소만 복병을 만났지요. 사정이 급하여 두 사람 에게 손을 쓰고 말았소." "우리는 잇따라 이 백화산장에 손해를 주었구려. 어서 횃불을 밝 혀 심목풍이 어떤 귀계를 쓰는가 봅시다." 사마건은 횃불을 안고 집 모퉁이로 돌아 갔다. 그는 이미 사방의 형세를 어림하여 두었으므로 적당한 곳에 횃불을 꽂고 품에서 화섭 자를 꺼내어 불을 붙여 나갔다. 여섯 개의 횃불은 금시에 활활 타오르며 주위 삼십여 자 안팎을 대낮같이 환히 밝혔다. 마문비는 사방의 형세를 살핀 다음 방안의 촛불을 끄면서 말했 다. "두 분께서는 먼저 정좌하여 운기조식하시오. 내가 망을 보겠소." 사마건이 말을 받았다. "이제 삼경이니 날이 밝으려면 서너 시간은 있어야겠군. 심목풍 이 쳐들어 온다면 시간은 그리 많지 않구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세 사람은 일정한 간격으로 교대하였다. 조금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밝아 해가 장대끝에 세 발이나 올랐다. 사마건은 밖으로 나가 활활 타고 있는 횃불을 모조리 껐다. 소영과 마문비는 봉죽의 상세가 걱정되어 방 안으로 들어 갔다. 봉죽은 눈을 감고 쌔근쌔근 단잠에 빠져 있었다. 얼굴빛은 발그레 하여 조금도 상처를 입은 사람 같지 않았다. 마문비가 감탄해 마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녀의 상세는 이미 호전된 것 같소. 독수약왕은 과연 기사회생의 묘술이 있군요!" 소영 역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 사람이 만일 사(邪)를 버리고 정(正)으로 돌아온다면 무수한 창생에게 복이 될 것이오. 아깝게도 그 위인이 오만하고 음독하여 천하의 의술을 악용하고 있으니 실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사마건이 실내로 들어 왔다. 그는 아가씨 의 상세를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인은 회복이 빠르군요. 두 분께서 걱정을 하시지 않아도 되겠소. 얼마 후에는 점심이 있을 것이오. 우리는 간밤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으니 오시까지 쉽시다. 정오의 연회석상에는 군 웅이 모두 모일 것인 즉,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치 않을 수 없소." 세 사람은 방을 나와 대청에 앉아 모두 운기조식에 들어 갔다. 소영은 내공이 정심한지라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기운이 백해에 골고루 퍼져 행공을 끝마쳤다. 눈을 떠 보니 두 사람은 바야흐로 행공의 중요한 고비에 이른 듯 했다. 그가 일어날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발걸음 소리가 조용히 울리며 누군가 대청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대로 앉아 눈을 감았다. 바로 봉죽 아가씨였다. 그녀는 세 사람을 맑은 눈으로 한참 살핀 다음 머리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무슨 풀기 어려운 문제라도 있단 말인가?' 소영은 눈을 감은 채로 그녀의 동정을 음미하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심목풍의 권위 아래 봉사해 오지 않았느냐? 일 시에 주인을 배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녀는 과연 이 시각에 사 를 버리고 정으로 돌아 올 수 있을까? 그녀의 거동은 아직도 미심 쩍다.' 소영은 조심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봉죽은 머리를 숙이고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가만히 한숨을 불어냈다. 그리고 사뿐사뿐 사마건을 향해 걸어가는 게 아닌가. 소영은 그녀가 사마건을 해치려는 줄 알고 탄식을 금치 못하였 다. '그렇다면 금란, 은란과 같은 아가씨는천에 있을까 말까 한 선인 (善人)들이로구나.' 인습이라는 것은 고치기가 어렵다. 소영은 암암리에 수라지력을 운기하였다. 만일 봉죽이 조금이라 도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그 때는 자신이 더 빨리 손을 쓰리라 마 음먹었다. 봉죽은 사마건의 신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여전한 걸음걸이로 바깥 문을 밀었다. 소영은 마음이 한결 놓였으나 궁금증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봉죽은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수라지력을 거두고 가볍게 몸을 날려 문 뒤로 내려 섰다. 조용히 밖을 살폈다. 봉죽은 심중에 두려움이 있어 거동이 십분 조 심스럽고 이따금 주위를 살폈다. 봉죽은 꽃나무 숲 속으로 들어 가더니 이내 사라졌다. '이 아가씨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소영은 이렇듯 생각하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득 봉죽이 사라진 수풀 속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또 그들의 복장도 가지각색이었다. 장삼, 마고자, 간편한 경장차림 등- 또한 그들이 지닌 병기도 각 양각색이었다. 소영은 처음에는 크게 마음이 움직였으나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정오의 연석이 마련되는 것이 아닌가? 삼산오악의 영웅들 이 한곳에 모이니 행색도 가지가지로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수많은 영웅들은 모두 연회석으로 돌아 가 고 숲은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홀연 봉죽의 모습이 숲 속에서 나타났다. 손에는 큰 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이번엔 그녀의 동작이 매우 신속하여 마치 네 굽을 놓고 달려오는 말과 같았다. 순식간에 문어귀에 이르렀다. 소영은 즉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봉죽은 문 어귀에 이르자 누가 따라 오지나 않나 하고 뒤를 살피 며 한 손을 뒤로 돌려 문을 열었다. 들어서는 동작도 날렵했다. 그녀는 서너 걸음 저쪽에 서 있는 소영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깨신 지 오래되십니까?" "오래지 않소. 아가씨가 이 방을 떠날 때 나도 또한 깨어 있었 소." "소비의 목숨은 이미 죽은 것이온데 여러분은 또 많은 구원을 하 시어 살려 놓았습니다." 소영은 머리를 들어 쟁반 위로 시선을 던지니, 거기에는 먹음직 한 반찬과 만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소영의 시선을 따라 힐끗 쟁반 위를 보고 나서 낮은 소리 로 일렀다. "소비가 아는 바에 의하면 심목풍은 이미 일곱 가지 암계를 준비 하여 연회석상의 군웅들을 살해하려 하고 있다 합니다. 하오나 소 비의 신분이 낮고 불민하여 그 중 한 가지 독을 쓰는 것밖에 알지 못했나이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 한 차례 살펴 본 다음 말을 이었다. "심목풍의 친구 한 사람이 그를 위하여 맛도 색도 없는 만성독약 을 만들었다 합니다. 이 약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중독된 현상은 나타나지 않으며 다만 칠 일이 지나야 비로소 발효한다는 것입니 다." "그렇다면 그 독약은 술과 안주 속에 넣겠군?" 소영이 놀라지도 않고 묻자 아가씨는 약간 난처한 기색을 지었 다. "어떤 방법으로 어디에 넣는지는 소비도 잘 모르옵니다. 그러나 술과 안주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소비는 그래서 부엌에 가 서 먼저 음식을 훔쳐 왔습니다. 독의 유무를 검사하시고 양껏 잡수 신 후 연석에 나가서는 일체 드시지 마십시오." 이때 마문비, 사마건도 역시 운공을 마치고 전후하여 눈을 떴다. 사마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는 이 훔쳐 온 음식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 알고 있소?" "소비는 알지 못하옵니다. 단지 추측컨데 이 시각에는 아직 독을 타지 않았을 것 같사옵니다." 봉죽은 금년 십팔 세 되는 소녀였다. 그러나 예의 범절은 하나도 어긋나는 데가 없었다. 마문비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나는 몹시 시장하오. 이 음식에 독이 들지 않았다면 우선 배부르게 먹어야겠소." "소비는 한 번 생사를 넘고 나니 무서운 마음이 크게 덜어진 것 같사옵니다. 심대장주에 대해서도 전처럼 그렇게 두렵지는 않사와 요." 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금란, 은란도 또한....." 여기까지 말하고는 돌연 놀라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봉죽이 이미 알아듣고 놀라 물었다. "뭐라구요? 금란, 은란 언니를 아신단 말입니까?" 소영은 속으로 아차! 했으나 말은 이미 입 밖으로 튀어 나온 후 라 감춘다면 더욱 의심을 살 것 같아 시인했다. "그렇소. 두 분 아가씨는 나와 늘 같이 있었소." 봉죽은 바짝 호기심이 이는 듯 다그쳐 물었다. "두 분 아가씨는 백화산장을 떠난 후에도 줄곧 비녀의 신분인가 요?" 소영은 일시에 대답하기가 곤란해졌다. '같이 있다면 의심할 나위 없이 비녀의 신분이다. 그렇지 않고서 야 어찌 두 아가씨와 함께 지낼 수가 있을까.' 마문비가 소영의 어려운 입장을 얼버무려 주었다. "두 분 아가씨께서는 비록 종으로 자청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오 히려 그녀들을 누이처럼 생각하고 있소." "그렇다면 두 분 언니도 오늘 영웅대회에 참석한단 말씀입니까?" 소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은 오지 않았소." "아, 아깝다! 정말로...." "무엇이 아깝다는 말이오?" 봉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분 언니는 백화산장의 계집종들 가운데서 무공이 가장 훌륭 하고, 또 가장 성망이 두텁답니다. 우리들 거의 백 명에 가까운 비 녀들은 하나같이 그 두 분 언니를 존경하고 따른답니다. 만일 두 분 언니가 이곳에 오신다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소영은 그녀의 말을 듣고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금란, 은란이 그렇게 명망높은 인물일 줄이야....' 이것은 세 사람의 똑같은 생각이었다. 봉죽은 아직도 아쉬워하였다. "두 분 언니가 만일 손을 뻗쳐 부르기만 한다면 백화산장의 여비 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언니들을 따라 달아날 것이에요." 마문비와 소영 등은 일심합력하여 적의 형세를 살폈으나 종내 상 대방의 책략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의외에도 봉죽의 입에서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그러나 당장에는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비 록 상호간의 경계심이 다소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여전히 경 계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죽은 맑은 눈으로 마문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금란, 은란 두 언니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마문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솔직이 대답했다. "두 분 아가씨가 숨어 있는 곳은 지금 사정으로는 알려 주기 곤 란하오. 봉아가씨는 양해 하시기를......" 봉죽은 좀 미심쩍은 얼굴이었으나 더 말하지 않았다. "시장하니 음식이나 들어야겠군." 사마건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뒤져가며 자세히 살핀 뒤 비로소 먹 기 시작했다. 소영과 마문비 역시 달게 먹었다. 반나절이 금방 지나 어느새 오정이 되었다. 이 시간은 바로 심목 풍이 천하영웅들을 초빙한 정식 연회시간이였다. "땡! 땡! 땡!" 망화루 위에서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종소리가 끝날 무렵 푸른 장삼을 입은 한 대한이 문 밖에 이르렀다. "마어른 계십니까?" 사나이는 제법 정중하게 예를 하고 아뢰었다. 마문비가 천천히 문간으로 걸어 나갔다. "형장께서는 무슨 가르치심이라도 계신지?" 소인은 명을 받자옵고 예, 악, 상, 공, 네 성의 총타주 마씨 어 른을 삼가 청하노니......" "내가 바로 그 사람이외다." 사나이가 계속해서 아뢰었다. "백화청의 연석에는 이미 마어른의 자리가 마련되었소이다. 소인 은 명을 받자옵고 마어른을 자리까지 안내하고자 하오." 마문비는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알겠소!" 청삼인은 허리를 한 번 굽혀 보이더니 곧 자리를 떴다. 마문비는 몸을 돌리고 봉죽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우리와 함께 연석으로 가겠소? 아니면 이곳에 남아서 우리들을 기다리겠소?" 봉죽은 돌연 땅바닥에 넙죽 큰 절을 하면서 대답했다. "소비는 마어른의 거두심을 얻어 마음속으로 감격해 마지않습니 다." 마문비는 정중히 답례를 하였다. "아가씨 할 말이 있으면 일어나서 하시오. 이런 큰 절을 받기가 거북하구려." 봉죽은 천천히 일어섰다. "소비, 살아서 마어른의 종이 될 수 없다 하오면 죽어서라도 신 변을 따르며 모시겠나이다." "아가씨는 어찌 그런 말을....." 봉죽은 처량하게 웃고, "소비는 마어른을 따라 연석에 모시든 이곳에 남아 있든 살기는 어렵사옵니다. 소비는 죽기 전이나마 어르신네의 간구함을 받는다 면 죽어서도 눈을 감겠나이다." "오늘 영웅대회는 결과를 점치기 어렵거늘, 아가씨의 그런 두려 워하는 마음은 아직 시기가 이른 것 같소." 사마건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진정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쫓으려 할진데 마땅히 우 리들과 같이 연석에 가야 하오. 설사 죽더라도 떳떳하게 죽어야 됩 니다." 소영도 한 마디 거들었다. "금란, 은란 두 아가씨들도 처음 백화산장을 이탈할 때 아가씨와 똑같이 두려움에 떨었소. 그러나 지금 그녀들은 당당하게 살고 있 소." 봉죽은 그 말을 듣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분의 이와 같은 돌보심, 소비는 감격할 따름입니다." 사마건은 앙연히 입을 열어 그녀를 다독였다. "아가씨, 두려워할 것 없소. 마음을 크게 먹고 우리들과 같이 연 석에 나가기 바라오." 사마건의 말에 봉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다가, "아무리 죽음이 두렵다고 하나 소비는 이미 생사를 골고루 맛본 터입니다. 이제 죽더라도 여한은 없습니다." "하하하, 내가 보건데 아가씨는 일찍 죽을 상이 아니외다. 나는 아가씨가 조금 놀랄 일은 있더라도 결코 크게 위험하지 않음을 보 증하겠소." 사마건의 말은 크게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봉죽은 미미하게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이때 문 밖에서 아까의 사나이가 또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대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총타주께서는 어서 참석하십시오!" "우리 갑시다." 마문비는 곧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마건은 봉죽을 재촉하였다. 봉죽이 마문비의 뒤를 따라 나섰다. 사마건은 봉죽의 뒤를 바싹 따라가고, 소영은 맨 뒤에 따르며 보 호하였다. 총총한 꽃나무 숲을 지나니 앞에 광장이 나오고 그곳에 임시 연 석이 설비되어 있었다. 연석의 입구에 크게 <영웅대연회>라고 써붙 어 있었다. 소영은 연석을 한 번 훑어 보았다. 높이는 십여 장, 넓이는 백여 명이 들어 앉고도 그만한 공간이 남을 만하였다. 빙 둘러 천막을 치고 위에는 푸른 돛자리로 차일을 쳤다. 마흔 여덟 개의 기등이 빙 둘러 천막을 지탱하고 있었다. 입구로부터 들여다 보니 안에는 이미 주석이 마련된 듯, 많은 사 람이 앉아 있었다. 푸른 옷에 섶에는 붉은 꽃을 수놓은 마고자를 입은 아가씨가 나 와 마문비 일행을 맞이했다. "대명을 알려 주십시오." "마문비외다." 마문비가 점잖게 대답하자 여인은 곧 아는 체를 했다. "예, 악, 상, 공 성의 총타주 마....." 봉죽은 입술을 깨물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나야!" "언니가 이곳에 무엇하러?" "나는 마어른을 따라왔어!" 청의 소녀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 듯 그대로 몸을 비켜 길을 열어 주었다. 일행은 느릿느릿 연회장으로 들어 갔다. 소영은 여러 사람을 돌아 보았으나 중주이고와 은란 등은 보이지 않았다. 청의 소녀는 뒤따라 들어섰으나 곧 앞질러 왼쪽에서 둘째 번에 놓인 빈 자리로 갔다. "여기가 마어른의 자리옵니다." "고맙소, 아가씨!" 마문비는 인사를 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봉죽은 우물쭈물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도로 몸을 일으켰 다. 마문비는 낮은 소리로 일렀다. "아가씨,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어서 빈 자리에 앉으시오." 그제서야 봉죽은 눈을 딱 감고 앉았다. 그 마음이 간단없이 울리 고 있음을 누군들 모르랴. 그녀가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비는 세 분에게 간구할 일이 있나이다." 마문비가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오?" "만일 이 몸이 심대장주에 발각된다고 하더라도 제발 잡혀 가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만일 제가 잡혀 간다면 자결할 기회를 놓칠지 도 모르옵니다." 봉죽의 얼굴에는 결의의 빛이 역력했다. "염려 마시오. 자결을 하게도 잡혀 가게도 하지 않겠소." 장중이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여럿이 머리를 돌려 보니 바로 심 목풍이 들어 오고 있었다. 심목풍은 선비 두건에 흰 장삼을 입고 앞장 서서 들어 오며 잇따 라 좌우의 손님들에게 예를 했다. 낙타등처럼 높은 어깨, 굽은 등이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게 걸 음은 느릿하면서도 위엄이 있었고 지극히 묵직하게 보였다. 용이 기어가고 범이 발을 떼어 놓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주조룡은 심목풍의 뒤를 바싹 따르며 손을 맞잡고 입으로는 연방 인사치레에 바빴다. "여러분, 와 주시어 고맙소이다. 고맙소이다......" 주조룡 뒤에는 금화부인, 그 뒤에 독수약왕이 따랐다. 마지막으로 준수하게 생긴 소년 하나가 천천히 따라 들어 왔다. 겉에는 전포를 두르고 안에는 간편한 경장차림을 했고 등에는 한 자루 장검을 비스듬히 메고 있었다. 소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바로 나의 이름을 사칭한 소영일 게다!' 그러는 사이 심목풍은 벌써 주인 자리로 가서 좌정했다. 마지막으로 독수약왕이 앉았다. 심목풍은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술잔을 정중히 들어 올렸다. "여러 영웅들이 모두 오시어 오늘 누추한 이 자리가 크게 빛을 발하고 있소이다. 여러분께서 이 심아무개를 생각하시는 정리가 이 와 같으시니 본인은 십분 감격해 마지 않소. 자, 잔을 드십시오." 말하고 그는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장중에 많은 여러 호걸들 은 모두 잔을 들기는 했으나 술을 처리하는 모양이 각양각색이었 다. 어떤 사람은 반쯤 마시고 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잔을 입술 에 조금 대었을 뿐이었다. 개중에는 아직도 잔을 들고 있는 자도 있었다. 심목풍이 어떤 위인인가? 그가 백화산장으로 들어가 은둔하기 전 에 그의 흉악한 이름으로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것은 모르 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정과 사, 흑백 양도를 막론하고 혈영자 심목풍이라면 모두 머리 를 내흔들고 피했던 것이다. 심목풍의 예리한 눈은 자중의 군웅들을 한 바퀴 쓸었다. 술잔을 다 비운 사람은 서너 사람에 불과하였다. "여러분, 안심하시고 잔을 드십시오." 심목풍은 이렇게 말하고는 미미하게 웃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러분, 술이 세 순배 돌지 아니하고, 안주가 다섯 가지가 바뀌 기 전에 나 심목풍이 음식에 독을 쓸 리가 없소이다." 이것은 말 속에 가시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 곧 술이 거나해져야 암계를 써도 효력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 다. 어디선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왔다. "심형의 말씀인즉, 우리들 여러 사람은 단지 술과 안주를 맛만 보라는 뜻인가요?" 소영은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물론 많은 사람의 시선과 함 께 자색 도포에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늙은이가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지극히 위엄이 있어 보였다. 노인은 아직도 술잔을 손에 든 채였다. 심목풍은 노인을 본 후 담담한 여조로 말하였다. "그것은 나 심아무개와 누가 친구이며 누가 적인가를 보려 하는 것이외다." 흰 수염의 늙은이가 말했다. "내 이십 년 동안이나 강호에 발을 끊었다가 이번 당신의 초청으 로 백화산장에 온 것이니 이 정도면 충분히 당신의 체면을 세워 주 었다고 생각하는데....." "옳은 말씀, 옳은 말씀. 안형(顔兄)께서는 무슨 가르침이 계시온 지 본인 귀를 씻고 경청하겠소이다." 심목풍은 위인이 본래 오만무례하여 일찍이 이렇게 공손한 말씨 를 써 본 일이 없었다. 소영은 새삼스레 이 안모라는 늙은이의 모습을 더듬어 보았다. '이 인물은 반드시 보통 무림의 사람은 아닐 것이다.....' 흰 수염의 노인이 계속해서 말을 받았다. "이 술과 안주에 독을 넣었다면 구태여 적이니 친구니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안형의 말씀은 본인으로 하여금 천하 군웅들을 향하여 심중의 계략과 책모를 털어 놓으라는 말씀입니까?" 노인은 의연히 대답했다. "심형이 하는 일은 종래 우환을 미리 막는 것으로 능사를 삼지 않았소? 내 말인즉 바로 술과 안주 속에 독이 들었는가, 아닌가를 밝히라는 것이외다. 그래도 오늘의 대국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하하하....." 심목풍은 유쾌히 웃어젖혔다. "안형은 저를 대단히 깊이 아시는구려?" 심목풍은 잠시 말을 흐리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나 심아무개의 벗이 여기 있다면 구태여 술과 안주 속에 독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따지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은 설사 독약에 중독이 되었다 할지라도 나 심아무개를 믿 었으니 응당 제가 치료를 해 드려야지요." 심목풍의 구변은 능수능란했다. 그는 말속에 또 말을 만들어 상 대방으로 하여금 대답할 말을 잊게 하는 능수인 것이다. 그래도 노인은 물러서지 않고 응수했다. "만일 적이라면 여떻게 되는 거요?" 심목풍은 능청스럽게 받아 넘겼다. "지금 강호상에는 독을 쓰는 사람이 한 둘에 그치지 않소이다. 만일 나의 적이라 자칭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미리 방비가 있을 거외다." 노인은 그래도 지지 않고 정곡을 찔러 말했다. "그럼 지금 이 술 속에 독이 있소?" 심목풍은 마침내 술을 들었다. "안형, 안심하십시오. 지금 이 시간에는 아직 독을 쓰지 않았소 이다. 안형, 담을 크게 먹고 잔을 비우십시오." "허허....." 노인은 더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았다. 소영은 장중의 여러 사람들이 이 노인에 대해 십분 존경하는 빛 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러나 끝내 노인의 신분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좌우간 저 노인은 심목풍과 서로 어깨를 겨루고 지낼 처지임에 는 틀림없다!' 소영은 이와 같이 생각을 굴리는 중에 갑자기 부드러운 손이 자 기의 왼손을 잡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봉죽의 손이었다. 그녀는 의자 밑으로 소영의 손을 잡았다. 소영은 그녀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웬일인가?' 문득 짚히는 바가 있어 고개를 드니 바로 심목풍의 형형한 눈길 이 봉죽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위엄이 가득찬 눈은 봉죽을 금방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봉죽은 비록 소영의 손을 꽉 잡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떨리는 것 은 어쩌지 못하였다. 그녀가 얼마나 심목풍을 두려워하고 있는가는 더 말할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이때 심목풍의 쉰 듯한 목소리가 전해 왔다. "봉죽이냐?" 소영은 즉시 낮은 소리로 일렀다. "그 사람의 말에 관계치 말고 모르는 체 하시오."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안 되었다. 소영의 손을 잡았던 그녀의 손 이 스르르 맥없이 풀리었다. 소영의 마음이 섬뜩한 가운데 어느새 봉죽이 자리에서 일어나 심목풍의 앞으로 나갔다. 여러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심목풍에 큰절을 하고 엎드렸다. "소비는 바로 봉죽이옵니다." 머리를 숙이고 감히 들지 못했다. "네 이년 여기는 무엇하러 왔는고?" "소비는.... 소비는....." 그녀는 이렇게 말을 더듬으며 그 다음 말을 이어 내려 가지 못하 였다. 심목풍은 한참동안 그녀를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네가 이곳에 머문다는 것은 천하호걸 들 앞에서 우리 백화산장을 망신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백 화산장은 법도도 없는 곳이라고......" "예." 봉죽은 낮게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마문비의 눈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충격이 컸다. 봉죽은 천천히 입구를 향하여 걸음을 옮겨 놓았다. 마문비의 얼굴은 검게 물들여지고 있었다. '저 계집애가 저렇게 담이 약하여 쓸모가 없으니 내 어떻게 나가 저를 보호해 준단 말이냐?' 마문비는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돌연 봉죽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여럿이 의아스럽 게 지켜 보는 가운데 돌연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심목풍에게 큰절 을 올리는 게 아닌가. "소비, 아뢰올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러나 하찮은 계집종 하나가 어찌 심목풍의 안중에 있을 것인 가. 심목풍은 손짓을 하며 귀찮은 물건 내치듯 하였다. "가라! 무슨 이야기이든 내일 하라!" 그러나 봉죽은 물러가지 않았다. 두 눈을 내리깔고 대담하게 입 을 열었다. "소비는 이미 마어른의 수청을 들었나이다. 어른께서는 소비를 거두어 몸 가까이 두기로 하셨사옵니다. 장주의 윤허를 바라옵니 다." 모든 사람은 이 소리를 듣고 일제히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심목풍이 곧 물었다. "마형, 저 계집애의 말이 사실이오?" 마문비는 순간 얼굴의 모든 땀구멍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미미하 게 붉은 기운이 목덜미로부터 얼굴로 퍼졌다. "음." 낮게 신음을 토해 냈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는 말하자면 영웅으로 자부하고 있는 사람이다. 여기서 심목풍 의 일개 종과 동침했노라고 시인을 한다면 자기 체면이 도대체 뭐 가 되느냐 말이다. 그렇다고 부인을 하자니 봉죽의 처지가 너무 불 쌍해진다. "허허허허......" 심목풍의 웃음 소리가 송곳 끝보다도 더 날카롭게 마문비의 귀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마총타주가 어떤 인물이라고....." 백화산장의 계집종에게 반한단 말이냐? 어리석은 마음으로 망상 할 것 없다. 어서 물러가라!" 봉죽은 하는 수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발길을 돌렸다. 돌연 마문비가 소리쳤다. "아가씨! 잠깐!" 봉죽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마문비에 게 쏠렸다. 마치 그가 이 어려운 처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기다리고나 있는 듯이....... 이때 마문비의 얼굴은 이미 자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담량이 있는 사람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심목풍을 향해 포권일례하며 입을 열었다. "대장주, 봉아가씨를 저에게 주신다면 저는 실로 감격해 마지 않 겠소이다." 심목풍은 눈을 가늘게 떠 음험한 시선을 마문비에게 던졌다. "마형, 정말 저 계집애를 취해 처로 삼으실 생각이신가요?" 봉죽은 급히 끼어들었다. "소비는 마어른의 처가 되기에는 부족한 줄 아옵니다. 다만 저 는......" 심목풍은 봉죽에게는 관계치 않고 마문비를 향하여 조용히 일렀 다. "마형께서 진정 저 계집애를 귀애하신다면 나 심아무개에게 한 마디만 하면 되오." 그러더니 심목풍은 갑자기 호탕하게 웃어젖히고는 이내 웃음을 뚝 그쳤다. "그 애가 진정 마총타주의 내자가 된다면 나 심목풍이 어찌 계집 종이라 하여 함부로 말할 수 있겠소?" 심목풍의 이와 같이 은연중에 조롱하는 말은 마문비의 가슴에 날 카로운 비수를 들이대는 것과 같았다. 마문비는 입을 꽉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무어라 반박 할 적당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중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제각기 마문비와 봉죽과의 일로 저 마다 떠들고 있는 것이리라. 개중에는 은연중에 마문비를 멸시하는 듯한 눈치도 보였다. 마문비의 얼굴은 자색으로 변했다. 그는 여러 호걸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므로 괴로웠다. '이 일이 장차 강호에 알려지면 영원히 사람들에게 이야기거리로 전파될 것이다. 그러나 부인하기에는 봉죽 아가씨가 너무도 불쌍하 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무슨 변을 당할는지 모른다.' 궁지에 몰린 마문비에게 심목풍은 계속 핍박하는 말을 하여 조롱 해 마지 않았다. "마형은 바로 당금 무림에서 대명이 쟁쟁한 명사요. 따라서 그 한 마디 말은 천금처럼 무겁소이다. 그러니 백화산장의 일개 비녀 를 속일 리가 없소. 나 심아무개는 마형의 인격을 믿소이다. 이 계 집애가 아마 되는대로 지껄였을 것이오. 지금 여기서 본보기를 보 여 주겠소." 말이 끝나자 심목풍은 가볍게 소매를 휘둘렀다. 순간 그 안에서 칼날같이 예리한 바람이 쏟아져 나옴을 누가 알 았으랴. "손을 멈추시오!"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외친 소리였다. 봉죽이 죽는 꼴을 앉아서 볼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소리에 따라서 마문비의 손에서도 일장이 쏟아져 나갔다. 심목풍은 그 심후한 내력을 선뜻 거두어들였다. "허허..... 마형, 무슨 가르침이라도 계신지?" 마문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저 봉죽아가씨 입을 대신하여 구명을 바라는 것이오." "마형은 좀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느끼지 않소이까? 이 계집애는 나 백화산장의 일개 시녀요. 내가 그녀를 어떻게 처리하든 마형은 구태여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외다." 마문비는 또 할 말이 없어졌다. "하하하하......" 심목풍은 크게 웃어젖혔다. 마문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심목풍의 빈정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마형이 이 아이를 취하여 처로 삼으신다 하면 그 때는 별개의 문제올시다. 그렇다면 나는 친히 앞장 서서 성례를 치루어 야 할 것이오." 천하 영웅 앞에서 마문비가 만일 승인을 한다면 마땅히 봉죽을 취해 그녀를 처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만일 승인하지 않는다면 결국 봉죽의 목숨을 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마문비는 참으로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다. 봉죽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가 처음 마문 비에게 데려가 달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단지 시녀의 신분으로 원했 던 것이다. 그런데 심목풍은 지금 과장된 말로 마문비를 망신주며 곤란케 하니 그녀는 다만 한 마리 새처럼 와들와들 떨었다. "소비는 잔화패류(殘花敗柳)이온데 어찌 마어른과 자리를 나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마어른께서는 저를 상관하지 마세요...." 봉죽은 아직 꽃봉오리 같은 나이 열일곱, 아직 애띤 소녀에 불과 했다. 만장의 시선이 모두 자기 한 몸에 쏠리고 있음을 느끼고 이제 막 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돌연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손가락을 들어 심목풍을 가리키며 야무지게 쏘아 붙였다. "심목풍, 이 백화산장의 엄한 형벌은 결국 죽을 사(死) 자 한 자 에 귀결되는 것을....." 심목풍은 깜짝 놀랐다. "너, 이 계집애가 미쳤느냐!" 소리치면서 돌연 왼손을 저어 날카로운 지풍을 날려 보냈다. 사마건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선뜻 내력을 쏟아 일장을 뻗 어 심목풍의 지풍을 막았다. "어째서 그녀로 하여금 더 말하지 못하게 하시오?" 심목풍도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백화산장의 사사로운 일에 외인이 간섭할 필요가 어디 있 소?" 사마건 역시 조금도 꿀리는 기색이 없이 앉은 채로 조용히 말했 다. "천하 영웅이 모두 이 자리에 모였으니 설혹 본인이 간섭하지 않 는다면 다른 사람이 간섭할 것이외다." 돌연한 봉죽의 배반으로 도리어 궁지에 빠진 사람은 심목풍이었 다. 실로 그는 이 하찮은 비녀가 이렇게 대담하게 변할 줄을 몰랐 던 것이다. 이 순간에는 그의 가슴 속에 가득 담긴 백 가지 계략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만일 이 시간 봉죽이 계속 입을 열기만 한다면 자신의 추한 행동이 가차없이 백 일하에 폭로될 것이 아닌가. 드디어 안정을 잃은 심목풍은 이것 저것 생각할 경황이 없었다. 돌연 손을 휘두르니 두 줄기 남색 빛줄기가 봉죽을 향해 쏘아갔 다. 아주 죽여 입을 막을 심산이었다. 사마건은 마음이 급했다. 그대로 둔다면 불쌍한 봉죽은 어김없이 독수에 살해될 것이 분명했다. 되는 대로 앞에 있는 술호로를 집어 던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순간 사마건보다 더욱 빠른 사람이 있었다. 사마건의 술병이 날아 가기에 앞서서 두 줄기 냉랭한 빛이 날아오는 남빛 줄기를 향해 날 아 갔던 것이다. 팍팍! 하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암기가 봉죽의 안전에 떨어졌 다.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눈을 둥그렇게 떴다. 땅바닥에 두 개의 은연자가 떨어져 있었다. 그 은으로 된 연자에 두 개의 가느다란 남색의 독침이 꽂혀 있었다. 장중의 호걸들은 또 한번 놀랐다. 심목풍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 하길래 은에 독침이 꽂힌단 말이냐. 은연자가 떨어지는 것과 사마건이 던진 큰 주석 호로가 봉죽의 앞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이때 사마건은 벌써 봉죽의 신변에 이르렀으나 독침이 이미 은연 자에 맞아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자 이내 몸을 날려 제자리로 돌아 왔다. 한편 심목풍의 눈은 번개처럼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도무지 이와 같이 절묘한 수법으로 자기의 암기를 막은 자가 누 구란 말이냐? 마문비 역시 은연자을 던진 사람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고 있 었다. 심목풍의 암기를 쉽사리 은연자를 던져 막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무공은 심목풍에 뒤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마문비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무심코 눈을 들어 보니 바로 찬바람이 얼굴에 이르며 한 덩이 흰빛이 코 앞으로 닥치고 있 지 않은가. 마문비는 깜짝 놀라 얼른 섭선을 휘둘러 그 물체를 쳤다. 바로 하나의 큰 호로였다. 이 호로는 원래 사마건이 봉죽을 보호 하기 위하여 경황 중에 던진 것으로 봉죽을 스쳐 맞은편에 날아 갔 던 것이 돌연 어떤 사람의 내력에 의하여 되돌아 날아 왔던 것이 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분비의 섭선에 맞은 술호로는 돌연 공중 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의외에도 심목풍의 면상을 향해 날 아가는 것이 아닌가. 심목풍은 순간 눈을 부릅뜨며 이를 갈았다. "어느 분이 던진 은연자인지는 모르나 나로 하여금 탄복케 하였 소. 그러나 아까운 것은 머리를 감추고 꼬리만 내놓으니 영웅의 기 도가 말이 아니올시다." 말하면서 가볍게 소매를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면상을 때릴 듯 하던 호로는 다시 바람소리와 함께 방향을 되돌리는 게 아닌가. 술호로는 몇 개의 좌석을 스쳐 지나갔다. 돌연 한 사람의 호탕한 웃음이 들리더니, "술병은 있으나 술잔이 없으니 어찌 살풍경이라 하지 않으리!" 그 사람은 말하면서 날아 오는 술병을 향해 왼손으로 쳐서 방향 을 오른쪽으로 돌려 놓고, 잇따라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앞에 있던 사기잔 두 개가 허공을 뜨며 돌연 날아가는 술호로의 뒤 를 따라붙지 않는가. 술잔은 곧 부딪칠 듯 부딪치지 않고 그대로 한 자 거리를 유지하 며 날았다. 마문비는 주목하여 사나이를 보았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놀람과 기쁨이 엇갈렸다. 바싹 마른 체구에 누덕누덕 기운 회색 마고자를 입은 이 노인은 바로 십 년 전에 실종되었던 개방의 유일한 장로 손불사였던 것이 다. 손불사가 등장한 이상 마문비 등의 세력은 크게 증가했다고 할 수 있었다. 마문비는 실로 감개무량했다. '아! 이 분을 이십 년 동안이나 보지 못했구나. 여전히 신태가 의연하구나! 아직도 세상에 살아계실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50. 심목풍의 엽색행위(獵色行爲) 이때 심목풍은 거듭 헛기침을 뱉아내더니, "손형께서 또한 이곳에 오셨으니 적지 않은 영광이올시다....." 하고 엉거주춤 손을 맞잡고 예를 올렸다. 소영은 심목풍의 위인을 잘 알고 있었다. 심목풍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안중에 두는 일이 없었으며 몸을 굽히는 일은 더욱 없었다. 손불사의 큰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하하하..... 그러나 이 늙은 거지는 일생 동안 내 목숨을 걱정 해 본 적이 없소. 그대가 만일 이 늙은 거지가 죽는 것을 원한다면 나는 오히려 그 삼백 년을 더 살아 이 목숨이 얼마나 질긴가를 보 여 주리다." "손형께서 그처럼 장수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외다....." 심목풍이 이렇게 말했을 때 돌연 좌중의 한쪽에서 크게 소리치는 늙은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보면 비렁뱅이다. 어서 도와 주지 않고 무얼하느냐? 나를 술주정뱅이라고 욕만 하지 마라. 너는 나를 도와 줄 거냐? 아니면 그만 둘 것이냐?" 떠들썩한 목소리로 궤변을 늘어 놓으니 자연 장내의 시선이 모두 그리 쏠렸다. 소영이 바라 보니 그 사람은 영락없는 거지차림이었다. 그 맞은편에는 역시 때묻은 도포를 입은 거지 중이 앉아 있었으 니 바로 주승과 반개였다. 반개가 한 소리는 바로 이 주승에게 시비하는 것이었다. 주승은 배알이 뒤틀리는 듯 게슴츠레하게 취기어린 눈을 들었다. "거지가 쓸데 없는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구나. 나 술화상은 네 말에 따르지 못해!" 이때 손불사에 의해 날아간 술호로는 몇 자리를 건너 반개에게로 날아갔다. 반개는 날아오는 술호로를 보고 크게 환성을 질렀다. 주승은 얼른 날아 오는 술호로를 향해 때묻은 소매를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가 나고 술호로가 다시 방향을 돌리자, 잇따라 반개 가 날아 오는 술잔을 쳐서 두 개의 잔이 술호로를 따라가게 하였 다. "하하하하....." 반개의 입에서 거침없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두 사람은 도대체가 장중의 사람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수 작을 주고받는 게 아닌가. 장중의 사람들은 모두 강호상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일등급 고수들 이었다. 그까짓 술호로쯤 내력을 쳐서 날려 보내는 기예가 뭐 대수랴. 그러나 술잔을 곁들여 날려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손불사는 이미 그런 기예를 떨쳐 내어 여컨을 놀라게 하였던 것 이다. 그리고 보니 이제 봉죽으로 인한 소란이 아니라 난데없이 술호로 와 술잔이 장내를 날아 떠들썩하게 되었다. 술병과 술잔은 사, 오십 장쯤 날아 가다가 이제는 다시 손을 쓴 사람이 없게 되니 천천히 밑으로 포물선을 그렸다. 이때 홀연 금화부인이 손을 밑에서 휘젓자 힘이 다하여 떨어지던 술호로는 비스듬히 솟구쳐 올라갔다. 다시 그녀가 왼손 소맷자락을 휘두르니 먼저 두 개의 잔이 그녀 의 수중으로 들어 가고, 이어서 술호로 역시 누가 손으로 집어 반 듯이 올려 놓는 것처럼 부인의 탁자 위에 얌전히 놓여졌다. 이 여자는 어려서 중원에 얼굴을 나타낸 일이 있을 뿐으로, 중원 무림에서는 지금 그녀를 아는 이가 드물었다. 단지 묘령의 어여쁜 부인이 이와 같이 놀라운 재주를 보이니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하....." 심목풍은 봉죽의 일은 잠시 잊은 듯 크게 웃은 다음 입을 열었 다. "여러분 중에는 저 부인 영웅을 모르는 이가 많을 겁니다. 본인 이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소. 이분은 바로 묘강의 제 이 고수 금화부인이오. 여러분께서는 이 이름을 들은 지 퍽 오래되었을 게 요!" 금화부인은 생긋 웃고 입을 열었다. "변방의 무학이 외람되어 중원의 전당에 올랐나이다. 여러분께서 는 많은 가르침이 계시기를....." 그녀는 오른손으로 술병을 만지작거리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 한 방울의 미주를 버리기 아깝습니다. 천첩이 꽃을 받들어 부처 앞에 바치는 마음으로 저 손선배에게 한 잔 올리겠습니다." 금화부인은 잔에다 술을 가득히 따라 그것을 식지, 중지 두 손가 락으로 퉁겨 손불사에게 날려 보냈다. 손불사는 크게 웃고 날아 오는 술잔을 받았다. 술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늙은 거지가 염복이 있어서 결국은 미인의 우대를 받았구려. 부 인께서 이미 이 늙은 거지의 추함을 밉다 하여 버리지 않았으니 공 손치 못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요!" 금화부인은 가볍게 웃고는 또 나머지 한 잔에 술을 따라 손에 들 었다. "이 잔은 마총타주에게 올려야겠군요!" 백옥같은 손을 앞으로 내미니 술잔은 또 마문비에게로 날아갔다. 두 사람은 거의 마주 보고 앉았으므로 거리가 대단히 가까왔다. 그 래서인지 술잔은 아주 느릿한 속도로 날아 갔다. "부인의 정리, 감사하오." 마문비는 내력을 손끝에 모아 가볍게 술잔을 받았다. 그러나 술잔에 담긴 위력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마문비가 손에 받았으나 손 앞에서 두 번쯤 미끄러져 돌았다. 마문비는 마음속으로 크게 놀랐다. '대단히 심후한 내공이로다.' 금화부인은 또 자기 앞에 놓은 술잔을 들더니 곱게 웃으며, "자, 두 분 어서 드시어요!" 술잔을 들어 붉은 입술에 대더니 단숨에 마셔 버렸다. 장중의 호걸들은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소문은 진 작부터 듣고 있었다. 더욱이 묘강 사람들이라면 독물에는 옛부터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금화부인은 심목풍의 말대로 묘강의 제 이 고수, 독벌레를 부리 는 솜씨란 누구에 못지 않은 고수이다. 그래서 그녀의 술잔을 받은 사람이라면 쉽게 마실 수가 없었다. 손불사, 마문비가 꼭 그런 입장이 아닌가. 금화부인은 제 잔을 쭉 들이키고는 두 사람이 아직도 잔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간드러지게 한바탕 웃었다. 손불사가 돌연 부르짖으며, 술잔을 땅바닥에다 팽개쳐 버렸다. "그럼 이 잔 속에 독물이 들었단 말인가! 이건 너무한데!" 손불사는 나이가 많은만큼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았다. 그러 나 말로 하면 이쪽이 꿀릴 것은 뻔한 일, 그래서 오랜 시간 술잔 을 들고 있다가 돌연 구실을 붙여 술잔을 내동댕이친 것이다. 펑! 하는 소리가 나며 술잔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술이 사방으 로 튀었다. 장중의 시선은 일제히 술잔이 깨진 곳으로 쏠렸다. 과 연 독벌레가 들었는가 보려는 것이다. 순간 그 조각난 술잔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실같이 가늘고 길이가 한 치쯤 되는 기이한 벌레였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더욱 놀란 것은 손불사 장본인이었다. '과연 지독한 부인이로다. 내 만일 객기로 잔을 마셨다면 저놈이 벌써 뱃속으로 들어가 난동을 부리지 않았겠나?' 손불사는 모골이 송연했다. 모든 사람들도 역시 이제까지는 긴가민가 하였으나, 비로소 금화 부인이 얼마나 무서운 여자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마문비 역시 술잔을 들고 전전긍긍하였으나 손불사의 잔에서 벌 레가 나오자 그것을 구실삼아 자기 잔도 내동댕이쳤다. 여러 사람 의 눈은 다시 마문비의 잔으로 쏠렸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벌레가 기어 나오지 않았다. 금화부인은 돌연 자리를 떠 가벼운 걸음으로 손불사에게 걸어갔 다. 이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속은 독사처럼 매운 부인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은 모두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손불사의 면전으로 느릿느릿 걸어 오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암암리 에 운공을 하며 손쓸 준비를 하였다. 그녀의 동작은 느릿느릿한 듯했으나 실제로는 속도가 대단히 빨 랐다. 순식간에 손불사의 면전에 이르더니 그 희고 고운 손을 뻗어 깨 어진 사기 조각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흰 벌레를 냉큼 집어서는 돌 연 그 앵도같은 입술을 벌려 집어 넣는 게 아닌가. "아까와라.... 아깝도다....." 그 소리를 손불사는 잘못 듣고 그녀에게 냉랭한 어투를 던졌다. "그렇소. 애석하게도 이 늙은 거지가 당신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 았구려. 안 그렇소?" "그게 아니라, 이 귀한 물건을 하마터면 당신에게 줄 뻔한 것이 라오." 이 말은 그 어조로 보아 분명 진정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넓은 회장 안에서 독수약왕과 그녀를 빼놓고는 그녀의 이 말을 믿 으려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 그 독벌레의 맛이 어떻소?" 손불사가 묻는 말에 금화부인은 요염하게 웃었다. "이 맛이오? 아주 신선한 과일을 먹는 것 같지요." 그러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굼실굼실 하는 벌레를 먹는 것을 보고 모두 두려운 마음을 금치 못했는데 거기다가 그 맛이 또 한 신선하기 이를 데 없다는 말을 듣자 모두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문비는 자기 잔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기 이하게 여겼으나 은연중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옛날부터 소영과는 잘 사귀어 온 터가 아니냐. 혹시 소 형의 체면을 생각해 준 것이나 아닌지?' 지금까지의 두어 가지 소란은 그런대로 심심파적이라 하겠으나 미리 마음 속에 계획을 품고 있던 심목풍으로서는 눈살이 찌푸려지 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손불사와 자색 도포를 입은 늙은이가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나타났던 것이다. 두 사람의 무공을 계산에 넣는다면 마땅히 계획을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세의 효웅이다. 이만한 일에 심금을 어지럽히지는 않았다. 한바탕 수선이 끝나자 그는 아직도 망연히 제자리에 서 있는 봉 죽아가씨를 손가락질하며 타일렀다. "너 계집애의 일로 하여 마당에 모이신 귀빈께서 공연한 시간을 허비하였구나. 어서 물러가라. 기다렸다가 다시 말하자!" 봉죽아가씨는 그 사이 많은 사람이 심목풍의 적이 되어 시비를 일으키려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 방금 대담하게 말을 한 일도 있 고, 또 기왕에 죽음을 각오한지라 갑자기 담이 커졌다. "소비는 이미 대장주의 신위를 범한 이상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 입니다. 하찮은 목숨이지만 소비는 죽기 전에 대장주의 평소의 행 사를 만천하에 밝혀 놓아야만 죽어서도 눈을 감겠습니다!" 심목풍은 노화가 한바탕 끓어올라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손을 쓸 수 없는 것이, 만일 손을 썼다가는 아까처럼 많은 호걸들이 나 와서 손을 쓸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오늘의 대국은 이 하찮은 계집종으로 인하여 크게 어지러워질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그의 계산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꾹 참고 거만스런 낯 으로 듣고만 있었다. 봉죽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면서, "저 장중의 여비들 중 인물이 반반하다 싶으면 전부 그에게 몸을 망쳤으니....." "하하하하..... 수치도 모르는 계집애 같으니, 네 그 미치광이 같은 소리를 장중의 유수 영웅들께서 믿을 것 같으냐." "저는 바로 피해를 입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심목풍은 속이 뜨끔했으나 도리어 능청스럽게 받아 넘겼다. "본 장주가 평소 너그러운 탓으로 너희들을 엄하게 다루지 않았 더니 오늘 이같은 일이 벌어지는구나. 내 너를 탓해 무엇하랴. 평 소의 내 게으름이 잘못이로다." 심목풍은 이렇게 줏어 넘겼으나, 이미 망신은 극에 이른 것이다. 봉죽은 또 냉랭하게 앙탈을 부렸다. "당신은 왜 또 보복이 머리 위에 떨어진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심목풍은 여전히 담담하게 웃으며, 이 계집애가 어떤 사람의 사 주를 받았는지 또는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 미친 모양이니 구태여 상관할 바 아니라고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옆에 선 준수한 소년을 보면서, "본인이 오늘 여러분을 초청한 것은 바로 이 아우로 하여금 천하 영웅들에게 인견하려는데 주요한 목적이 있으니...." 그러자 장중에서는 다시 가벼운 수군거림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 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준수한 소년을 바라보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무어라 수군거렸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이 아우를 보신 분도 있을 것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낯설 것이 사실이오. 그러나 본인이 그 이름을 댄 다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오." 장중은 다시 조용해졌다. 심목풍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가 강호에 출도한 시일은 짧으나 그 위명은 오히려 일세를 진 동하여......" 돌연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럼 소영이오?" 심목풍은 느긋이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오. 바로 이 아우가 소영이외다. 이 시각에 그를...." "그 사람은 소영이 아니오." 갑자기 봉죽의 말이 심목풍의 입을 틀어 막았다. 심목풍의 눈에 순간 싸늘한 살기가 스쳐갔다. 그러나 이내 담담한 미소를 날리며 봉죽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 소영은 이미 저의 백화산장 셋째 장주가 되었소이다. 이후부 터 강호상의 여러분께서는 많은 돌보심이 계시기를....." 봉죽이 바라 보니 많은 사람들이 심목풍의 말에 수긍하는 눈치였 다.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다시 삑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그는 진짜 소영이 아닙니다. 심목풍의 거짓말을 들어서 는 안 됩니다." 심목풍은 힐끗 봉죽을 흘겨 보았으나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웃 음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가슴을 에이듯 싸늘했다. "이 계집애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보니 아마 단단 히 독에 중독된 모양이다. 셋째는 당장에 저 애를 죽여 우리 백화 산장의 규율을 바로 잡아라!" "예." 준수한 소년은 대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번쩍이는 눈길을 봉죽에게 던진 채 천천히 손을 들어 등덜미의 검자루를 잡았다. 소영이란 이름은 일시 크게 무림을 진동한 바 있으나 실제로 그 의 무공을 본 사람은 적었다. 이 시간 그 유명한 소영이 칼질을 하려 하고 있으니, 모든 사람 의 시선은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준수한 소년은 검자루를 잡은 채 천천히 손을 들어 등덜미의 검 자루를 잡았다. 그 예리한 눈빛이며, 기동이 모두 상승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아 모든 호걸들로 하여금 군침을 삼키게 했다. 봉죽은 이 때에도 오히려 용기가 크게 일어나 앙칼진 소리로 외 쳤다. "나 봉죽이 오늘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죽는 한이 있 더라도 저 심목풍의 비열 악독함을 천하 영웅에게 알린다면 죽어도 한은 없습니다." 이때 소영으로 분장한 그 준수한 소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가 다시 미미한 장홍으로 물들어 갔다. 눈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 는가 하면 장검은 검집에서 이미 반 자 가량 나와 있었다. 마문비는 벌써 섭선을 고쳐 잡고 기문을 배가시키면서 예리한 눈 으로 가짜 소영의 거동을 주시했다. 또 사마건은 사마건 대로 두 개의 금환을 꺼내서 두 손에 갈라 쥐었다. 여차하는 순간 그의 몸은 소년을 덮쳐 갈 것이다. 죽은 듯 고요의 순간, 문득 만상은 운행을 중지한 것 같았다. 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소영도 역시 가만히 품 속에서 천 년 교피로 만든 장갑을 꺼내 손에 끼었다. 심목풍은 소영을 전혀 안중에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눈은 형형하게 마문비와 사마건의 얼굴 사이에서 돌았다. 얼굴에 담은 미미한 웃음. 그가 기뻐하고 있는 것인지, 걱정하고 있는 것 인지 식별할 수가 없었다. 문득 그 가짜 소영의 손이 움직였다. 검은 이미 칼집에서 나와 있었다. 이어서 훅! 하는 바람소리. 순간 검기가 허공에 용솟음치며 싸늘한 빛이 번개처럼 쏘아 나갔 다. 바로 봉죽의 가슴을 목표로. 동시에 마문비의 몸도 허공을 날았다. 섭선이 펼쳐졌다가 다시 접히는 가운데 번뜩 부채 그림자가 허공에 가득해 버렸다. 팍, 팍! 부딪치는 소리. 이어서 부채 그림자가 싹 자취를 감추자 그 광망 사이로 예리한 검기가 곧장 뚫고 지나갔다. 이어서 공중에 금빛이 번쩍, 돌연 금색 장막이 펼쳐지는가 싶자, 그 부채 그림자를 뚫고 나오는 흰 빛줄기를 막았다. 몇차례 날카로 운 음향이 울리자 돌연 횐 빛줄기와 누런 빛줄기, 그리고 누런 장 막은 금시에 거두어져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 부 채 그림자와 누런 장막과 흰 빛줄기가 번쩍 빛나다가 사라진 것 같 았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생사의 고비를 넘겼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제정신으로 돌아 왔을 때에는 그 준수한 소년은 심 목풍의 신변에 서서, 그 창백한 얼굴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문비는 제자리로 돌아 갔으나 오른쪽 소매는 어느새 붉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섭선을 안고 서 있는 폼이 고통을 참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마건은 봉죽의 신변에 아직도 그대로 서 있었다. 두 개의 금륜 이 가슴 앞에 열 십(十)자로 교차되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는 풀 무질을 하는 것 같았고, 이마에서 구슬같은 땀이 돋고 있었다. 장중의 형세는 벌써 명백하게 드러났다. 마문비와 사마건은 순간 적으로 전력을 다 쏟았던 것이다. 만일 상대방의 검세가 조금이라도 더 세력을 떨쳤더라면 봉죽아 가씨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을 것이다. 세 사람은 모두 조용히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제히 운기 조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문비는 오른팔의 상처를 싸맬 경황도 없었다. 마치 큰 활시위 의 율동에 부딪친 듯했다. 상세는 그리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러나 그 순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위기였다. 언뜻 준수한 소년의 얼굴이 홍조와 같이 변하는가 싶더니 그 빛 은 이내 얼굴 전체에 퍼졌다. 이것은 그가 조식을 완료한 증좌가 아닌가. 이제 사마건의 이마에 돋던 구슬땀도 거의 잦아들고 있었다. 숨 소리도 차츰 평정을 회복해 갔다. 소영은 한 옆에 앉은 채 묵묵히 정세를 관찰했다. '사마건과 마문비는 다시 일격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속으로 다 같이 비밀리에 손을 쓸 궁리를 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수백 쌍의 눈이 지켜 보는 가운데 은밀히 손을 쓸 수가 있을까. 준미한 소년의 무공은 이미 만장의 군중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소영을 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진짜 소영으로 믿게 된 듯 싶다. 소영이 강호에 나와 활동한 시기는 짧다. 단지 그 번개같은 쾌검 이 여러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칭송되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준수한 소년의 거동은 일등 쾌검수만이 보일 수 있는 상 승의 무학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그들이 고요히 안정한 가운데 자세히 지켜 보았더 라면 크게 의아심을 가졌으리라. 문득 소년의 준미한 눈에서 번개불이 번쩍였다. 생사를 건 일검 을 준비하는 것일까? 마문비도 이제는 완전히 숨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피곤함이 사라 지고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는 암암리에 제 이격을 감당할 궁리 에 바빴다. '만일 다시 부딪친다면 누가 승리할지 종잡을 수가 없구나. 더욱 그의 내공과 어검비행은 나로서는 막기가 어려우니....' 지금 소년에게 승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상대방이 어검비 행을 시작한 바로 직후에 그와 어울려 부딪칠 수 있는 기력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어검비행조차 막을 도리가 난감하니 어찌하 랴. 마문비는 어검지술을 시전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이 방면에서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 어검비행은 검술상의 가장 지극한 상승공부이다. 사람이 검을 따라 몸이 나는 묘술. 그러나 상대방 소년의 조예는 상승의 경지가 아니라 바로 기초적 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검은 비록 기초라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태산을 부 술 만한 내공이 검끝에 응결되어 칫쳐 오는 것이었다. 마문비가 궁리를 거듭하는 사이에 준수한 소년은 벌써 검초를 발 휘하기 시작했다. 장검을 한 번 흔들자 차가운 빛이 번쩍하며 벌써 봉죽아가씨의 앞가슴에 이르지 않는가. 그러나 이 편에서도 손을 묶고 있지는 않았다. 소년이 검을 번뜩이자 사마건과 소영은 동시에 손을 썼다. 사마건은 곧장 쌍륜을 옆으로 긋고, 소영은 또한 떨어진 거리에 서 전신의 팔 할 공력을 쏟아 수라지력으로 적의 칼 몸을 때렸다. 준미한 소년의 일검은 먼저 소영의 수라지력에 의하여 크게 위세 가 감소되었고, 잇따라 쌍륜이 그어 오자 기어이 돌파하지 못하였 다. 둥당, 둥당하던 소리가 찡! 하고 귀를 울렸다. 사마건은 적이 두 차례의 어검공격으로 내력을 적잖게 소비했다 고 믿었다. 그러니 자기의 쌍륜이 상대방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생 각했다. 준미한 소년은 이미 얼굴빛이 변해 있었다. 크게 골탕을 먹은 것 이다. 처음 소영의 수라지력이 칼 몸을 때렸을 때 그 막중한 위력 으로 소년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하지 않았던가? 이보다 앞서 마문비는 이미 장중에 나와 있었다. "형장의 검초는 매우 고명하구려. 소인 형장의 어검지술을 배워 볼까 하오." 말소리는 공손하였으나 손은 말보다 앞서 나갔다. 섭선이 한 차례 펴 졌다가 접히자 곧장 소년의 연마혈을 찔러 갔 다. 이때 소년은 얼굴이 백지장같이 변해 일검을 비켜 옆구리로 잴 러 들어 오는 섭선을 막았다. "팍!"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그러나 소년은 다시 짓쳐 들지는 않고 섭선의 일격을 막는데 그 쳤다. "하하하....." 마문비는 호쾌하게 웃었다. "형장은 왜 손을 쓰지 않소? 저와 같은 사람은 상대가 아니란 말 씀인가요?" 돌연 그의 몸이 날렵하게 돌아 가자 손에 든 부채는 허공에 난무 하며 칼과 검, 판관필을 겸한 다양한 형세로 변해 가며 적을 휘몰 았다. 준미소년은 두 차례의 어검격출에 기력을 많이 소모한 것이 틀림 없었다. 마문비의 섭선을 막는 것만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갈팡질 팡 싸우기를 십 초, 소년은 벌써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심목풍은 국세의 위급함을 즉시 간파했다. 만일 앞으로 더 싸운 다면 소영으로 분장한 소년은 이십 초를 넘기지 못하리라. 급한 마음에 심목풍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손을 멈추시오!" 그러나 마문비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소년은 기회를 보아 물러날 생각이었으나 상대방의 섭선에 몰리 어 몸을 뺄 도리가 없었다. 벌써 숨이 크게 가빠오고 손발이 어지 러웠다. 심목풍은 자기의 말이 아무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자 노기가 충천 했다. '이 마문비란 놈이 이렇게 악독하니 반드시 매운 맛을 보여 주리 라!' 그는 슬쩍 손짓을 해 보이며 천천히 앉았다. 문득 왼쪽 자리로부 터 누군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수를 믿고 승리를 거두려 함은 영웅이 도모할 바가 아니다!" 소리와 동시에 한 가닥 연삭이 돌연 마문비를 향해 날아왔다. 마문비는 하는 수 없이 섭선으로 막으니 그 사이에 소년은 몸을 빼내었다. 날아 온 붉은 오랏줄은 무엇으로 되었는 알 수 없으나 마문비의 섭선에 부딪치자 마치 나무같이 딱딱하게 변했다. 그러나 한바탕 부딪친 뒤에 연삭은 다시 오던 자리로 되돌아 갔 다. 싸울 뜻은 없고 단지 소년의 위급함을 구하는데 지나지 않았 다. 소년은 빠르게 다섯 자를 물러났다. 그러나 자기 자리로 돌아갈 여력이 없었던 것일까? 곧 멈추어 운 기조식을 했다. 다시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마문비는 명백히 알고 있었다. 이 소년의 무공은 절대로 그의 아 래가 아니었다. 다만 두 차례의 어검지술이 실패했던 까닭에 기력 을 많이 소모하였고, 또 그가 운기를 조식할 틈을 주지 않고 마문 비가 짓쳐 들어 갔으므로 그는 일시에 곤경에 빠졌던 것이다. '만일 이 친구가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싸운다면 시간을 오래 끌 게 될 것이다.' 마문비의 꼴도 실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 적이 어검비행을 시전할 때 그것을 막다가 팔을 찔렸 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싸맬 틈도 없었다. 다시 일장의 악투를 치른 상처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소매는 피로 흥건히 물들었다. 소영은 넓은 좌중을 한 차례 살폈다. 적군과 아군의 구별은 대개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내막을 알지 못하니 서로가 조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 시각에 정면으로 나와서 백화산장 과 적대시하는 사람은 오직 자기와 사마건, 마문비 세 사람밖에 없 었다. 그는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사마건에게 일렀다. "사마형, 마총타주에게 일러 자리에 돌아와 좀 참으라 하십시오, 아직 시기가 이르지 않았으니 자제함이 적당한 듯합니다." 사마건은 이미 소영을 가볍게 대할 수가 없었다. 즉시 소리를 높여 불렀다. "마형, 자리로 돌아 오는 것이 어떻소?" 마문비는 사마건의 말을 듣고 반드시 생각하는 바가 있으리라 짐 작했다. 게다가 팔에서는 많은 피가 쏟아져 흐르지 않는가. 그는 힐끗 봉죽에게 시선을 주었다. "봉아가씨, 자리로 돌아 가시오." 사마건과 봉죽은 총총히 자리로 돌아왔다. 마문비 또한 자리로 돌아 왔다. 그러나 그는 연삭을 던진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냈다. "사마형! 저 사람을 아십니까?" 맞은편 자리에 검은 옷과 흰 옷을 입은 늙은이가 나란히 앉아 있 었다. 사마건은 머리를 가로흔들었다. "알지 못합니다." "보아하니 그들은 중원 무림의 사람이 아닌 것 같소이다." 마문비 역시 연삭을 던진 사람이 그 흑노(黑老)임을 알고 있었으 나 자기의 신분으로 함부로 입을 열기도 뭣하여 꾹 눌러 참았다. 이때 준미소년의 얼굴에 몽몽하게 자색빛이 감돌더니 금방 온 얼 굴에 퍼졌다. 사마건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이 자는 대단히 정심한 내공의 소유자가 아니냐?' 소년은 돌연 손에 쥔 장검을 치켜 들며 소리쳤다. "나 소아무개는 마총타주의 무공을 배우고자 하오." 마문비는 상대방이 지명을 하자 피할 도리가 없음을 알았다. 그는 옷자락을 꺾어 우선 상처를 싸매었다. "마문비 받들어 모시겠소!" 그는 한 손으로 상처를 매면서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사마건이 돌연 앞으로 나섰다. "마총타주의 신분이 그렇지 아니하니 소인이 한 번 받들어 모심 이 어떠하오?" 준미한 소년은 검을 두어 번 흔들어 네 송이 검화를 날렸다. 그 는 이제 흥분이 극도에 이른 것 같았다. "당신이 대신하여 죽고 싶다니 어서 병기를 뽑으시오." 사마건은 상대방의 어검술이 지극히 능란함을 알고 있었다. '내 한 사람의 힘으로는 참으로 대적하기가 어렵겠다!" 그러나 이왕 싸움을 가로막고 나섰으니 물러갈 수는 없는 일이었 다. 그는 이내 금륜을 꺼내 두 손에 나누어 들었다. 소영은 그 준미소년의 얼굴이 온통 자색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이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알 수 없구나! 보아하니 좌도 방문에 속한 것 같다. 그러나 연거푸 두 번이나 어검술을 발휘하여 기력은 탈진하였음이 분명한데 이렇게 회복이 빠르니 괴이하다.' 사마건의 무공으로는 상대방의 어검술을 막기가 곤란하다고 소영 은 판단했다. 그러면 무슨 수로 그를 돕는단 말인가. 소영이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준미소년은 선뜻 한 검을 찔러 왔다. 어검술은 아니었다. 사마건은 처음부터 상대방이 어검술을 행할까 두려워하였으나 결 국 평범한 술수로 공격해 오니 심붕으로 크게 기뻐하며 왼손의 금 륜으로 상대방의 일검을 막고 오른손으로 공격하여 들어 갔다. 그러자 소년의 장검은 돌연 옆으로 누우며 땅! 하는 울림이 일어 났다. 사마건의 왼손은 크게 흔들려 오른손의 씀씀이까지 방해하였 다. 검광과 금륜이 교차하면서 계속해서 삼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무도 상대를 상하지는 못하였다. 소영은 마음속으로 두 사람의 악투를 보며 사방의 정세를 관망하 였다. 특히 심목풍의 거동에 유의하였다. 사마건은 상대가 어검술을 쓰지 않는 한 그다지 꿀릴 것이 없음 을 알았다. 곧 신위를 크게 떨치니 초식은 십분 능려무비하여 십여 초를 지 나자 이미 대국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목풍이 돌연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그 입술이 파르르 움직였 다. 옆에 주조룡이 서 있다가 자리를 뜨는 것이 보였다. '저들은 전음술로 무엇인가 명을 내린 것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지시를 내렸을까?' 소영은 지금 변장을 하고 마문비의 종복으로 행세하고 있는 터였 다. 그렇지 않다면 크게 소리쳐서 여러 군웅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처지라 암암리에 전음지술을 써서 마문비를 불렀다. "마형, 저 주조룡의 거동을 조심하십시오." 마문비는 사마건과 준미소년의 열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 다가 문득 소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보니 마침 주조룡이 자리를 뜨고 있지 않은가. 바로 마문비가 정신을 다른 곳에 집중하 고 있는 사이에 장주의 악투는 극렬의 도를 넘어 바야흐로 전환점 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 이미 사마건과 준미소년은 벌써 이십여 합을 교환하고 있었 다. 사마건은 크게 부르짖으며 손에 든 금륜을 휘둘러 쌍무지개를 그 으면서 왼손의 금륜으로는 일식운봉 오학을 시전, 상대방이 왼쪽 허리를 찔러 오는 검세를 봉쇄하였다. 동시에 오른손을 휘둘러 상대방의 가슴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초식은 대단히 모험적인 것이다. 상대방의 검이 아직도 자기의 옆구리에 이르지 않았는데 미리 이 쪽에서 왼편을 막고 오른손을 휘둘러 공격해 들어 갔다. 웬만한 고 수라면 모두 이런 모험을 삼가는 것이 전례였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검이 돌연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 이었다. 만일 이 시각, 상대방의 검이 돌연 밖향을 돌려 오른쪽으 로 공격해 들어 온다면 사마건은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상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기선을 빼앗길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이 잘 되느라고 그랬는지 상대방의 일검은 바로 사마건 의 예측대로 왼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사마건은 크게 기뻐하며 왼손으로 상대방의 일검을 막고 오른손 의 금륜으로 상대방의 앞가슴을 쳤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준미소년은 일검을 헛치고, 요란한 쇳소리가 일어남과 동시에 바 로 적의 금륜이 가슴을 쳐오므로 황급히 두 걸음 뒤로 피하였다. 이 두 걸음은 상대방의 공격권 내에서 완전히 벗어난 거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었다. 사마건이 돌연 팔을 늦추는가 신더니 돌연 앞으로 뻗치며 그의 오른손에 잡았던 금륜이 느닷없이 손을 벗어나 허공을 가르며 날아 오는 게 아닌가. 이 금륜을 날리는 묘술은 사마건이 자랑하는 특이한 초식이었다. 소년은 하도 급작스럽게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자 막을 방법이 없었다. 둔탁하게 쇳덩이가 피부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으악!" 한 소리 비명이 터졌다. 벌써 소년의 입에서는 울컥하고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이어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회장의 모든 사람이 흠 칫 놀랐다. 문득 심목풍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사마건을 향해 걸어 왔다. 소영은 크게 놀랐다. 심목풍의 무공은 그가 이미 잘 아는 처지이 다. 한 번 손을 썼다 하면 어렵지 않게 적을 상할 수가 있는 것이 다. 사마건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그러나 심목풍은 그토록 철면피는 아니었는지, 돌연 쓰러진 자의 신변에 와서 서서히 조사하며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아무 표정도 없었다. 단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을 뿐이 었다. 분부에 따라 두 사람 푸른옷의 경장차림을 한 소년이 들것을 메고 나왔다. 구태여 심목풍의 명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곧 부 상자를 들것에 싣고 장중 밖으로 나가 버렸다. 회장의 수백 쌍 시선은 일제히 심목풍의 몸에 쏠렸다. 그는 아우를 다친 사람에게 반드시 독수를 쓰리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예측은 빗나갔다. 심목풍은 그 준미한 소년을 들것에다 실려 보낸 후 아무 말도 없 이 자기 자리로 돌아 갔다. 돌연 낭랑한 소리가 장중을 크게 울렸다. 모두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긴장하였으므로 그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하하하.... 대명이 쟁쟁한 소영이 결국은 이와같이 쓸모없는 인 물일 줄이야..... 그리고 보니 강호상의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 것." 사나이는 말을 끝내고 또 하하 웃었다. 마문비는 그 사람을 주목하여 바라 보았다. 일신에 검은 장삼을 입고 꼬장꼬장한 몸집에 키는 대단히 컸다. 얼굴은 갈색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가? 중원 무림의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심목풍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의 얼굴에 못박았다. "형장은 누구요?" 그 사람은 팔 자 눈썹을 거꾸로 치켜 올리며 다만 한 마디, 심목 풍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더 추궁하지도 않고 눈길을 돌려 온 장중 을 한 차례 둘러 본 뒤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의 이 아우가 비록 다른 사람의 손에 중상을 입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그의 기예가 부족한 것이지 조금도 이상할 것 없소이 다."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좌중을 다시 한바탕 쓸어 본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백화산장에 초빙된 분은 누구나 심목풍의 친구되시는 분이올시 다.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이 가운데 불청객이 섞여 들어 와 오늘 의 연석을 소란하게 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러한 일에 대해 서 나는 아무리 마음을 너그럽게 가진다고 할지라도 참을 수가 없 습니다." 그의 눈빛은 다시 장중을 쉽쓸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심목풍은 담담하게 웃고 계속 입을 열었다. "생각컨데 나 심아무개는 여러분의 다같이 참석해 주신 데 대해 깊은 영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불청객으로 섞여 들어 온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추궁할 생각은 없소이다. 단 지 본분을 지키고 자중해 주신다면 본인은 술이나마 전하여 정성껏 대접하려 하는 것이외다. 그러나 반대로 강함을 믿고 사단을 벌이 려 한다면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으리오. 그래서 소인은 양쪽이 다 좋은 방법을 한 가지 생각해 냈습니다만 여러분께서 동의하실는지 의문이로군요." 소영은 벌써 심목풍이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임을 간파했 다. 그러나 썩 나서서 여러 호걸들을 경각시킬 처지가 못 되니 어 찌하랴. 돌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대장주께서 어떤 고견이 계시온지, 저희들은 귀를 씻고 받들어 모시겠소." 심목풍은 소리지른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다만 낮은 음 성으로 하던 말을 이었다. "그 방법은 실로 간단합니다. 단지 한 번 시험으로 족하지요. 즉 손님들께서는 나 심목풍과 벗이 되느냐, 아니면 적이 되느냐...." 그는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만일 나 심아무개와 벗이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나의 뒤 누추한 자리로 옮기십시오. 그러나 만일 나 심아무개와 적도, 벗도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분이라면 왼쪽 자리로 옮겨 주시기 바라 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돌연 좌중은 크게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수군거리는 사람,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 각양각색이었다. 먼저 흑백 이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심목풍의 뒤로 걸어 갔 다. 이 두 늙은이는 거의 안내역이 되다시피 되었다. 두 늙은이들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일어나 심목풍 의 배후에 친 장막 뒤로 들어 가 보이지 않았다. 비로소 조용해진 뒤 장중을 보니 그 많은 사람들은 거의 반 이상 이나 줄어 있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른편 마문비 등이 앉은 자리 쪽에 서도 적지않은 사람이 일어나 왼편 자리로 갔다. 이 사람들로 말하 자면 적도 친구도 아닌 중립이었다. 이 방법은 사실 가장 알맞은 시기에 심목풍같은 간웅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이었다. 무림의 사람들은 신의를 생명같이 여기는 것 이다. 심목풍은 바로 이 허점을 찌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먼저 오른쪽의 반대자를 치고, 연후에 다시 중립을 친 다!' 이것은 비단 소영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누구나 지모있는 자라면 이 방법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오른편 좌석에는 단지 몇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 문비 등과 손불사 외에 서너 사람이었다. 소영으로 하여금 더욱 믿기 어려운 것은 어젯밤 만찬회 석상에서 너 죽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고 입씨름을 벌이던 사천 당가의 장문 인 당노부인이 오른편 적이 되는 자리에서 중립인 왼편 좌석으로 옮겨 간 것이다. '아! 사람의 심상이 무상하다더니 어찌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도 변화가 많단 말이냐?' 소영은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마문비도 오른쪽 좌석에 남은 사람들을 보고 적지않이 놀라고 있 었다. 정말 격세지감이라 할까? 우리들이 한 장막에 들어 왔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의심스러웠다. 이제 적과 아방의 세력은 완전히 갈라진 것이었다. 봉죽이 나직이 이르는 소리가 들렸다. "심목풍은 계획을 변경하였습니다. 그것은 아까 가짜 소영이 크 게 다친 때문인가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계획을 바꾸어 암암리에 손 을 써서 일을 속히 처리하려는 것이옵니다." 마문비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 제일 먼저 공격을 받을 사람은 바로 우리 몇 사람 남지 않은 적일 것이다!" 소영 역시 난처한 입장에 빠져 버렸다. 이와 같이 적과 아방을 뚜렷이 삼분하여 놓았으니 만일 심목풍이 공격해 올때 자기는 어떤 태도로 나와야 한단 말인가? 복종자의 신분을 지키며 손을 묶고 보 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얼굴은 근심의 빛으로 어둡게 그늘져 있었다. 51. 금성철벽을 뚫는 윤전대진(輪轉大陳) 마문비 등은 전전긍긍, 심목풍의 간계에 어떻게 대처할까를 궁리 하였으나, 워낙 중과부적이라 적당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돌연 쇠북을 치는 듯한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장주, 이 늙은 비렁뱅이는 줄곧 좌편에 앉아 있었소이다. 그 렇다고 또 삼대장주와 벗으로 사귈 생각은 없으니 어찌하면 되겠소 이까?" 소영은 그가 반개라는 것을 알았다. '이 사람 역시 무림의 협도 인물이 아닌가!' 심목풍은 엷은 웃음을 띠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나와 적이 되고자 한다면 응당 우편 좌석으로 가야 할 것이오." "흥, 공연히 쓸데없는 입놀림을 하였구나. 술주정뱅이 화상, 어 서 태도를 결정하라!" 그는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오른쪽으로 걸어 갔다. 뒤따라 주승도 취한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좋아! 비렁뱅이하고 늘 붙어다녔으니 설혹 지옥으로 간다고 하 더라도 떨어질 수야 없지. 주정뱅이 돌중은 네 말을 받들어 모시겠 다." 주승도 역시 오른쪽 자리로 갔다. 아주 가슴을 떡 버티고 걷는 모양새가 그럴싸하게 보였다. 두 사람이 합세하니 마문비 등은 그래도 적지않은 위로가 되었 다. 그러자 왼편 자리에서 돌연 칠, 팔 명이 무더기로 일어서더니 한 마디 말도 없이 우편 자리로 옮겼다. 마문비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 보았다. 한 사람도 낯익은 얼굴은 없었다. 심목풍은 돌연 눈썹을 곤두세웠으나 입으로는 웃음을 잃지 않았 다. "하하하하..... 심아무개와 적이 되고자 하는 분은 거리낌 없이 어서 오른쪽으로 가십시오." 돌연 한 사람이 크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심목풍과 벗이 된다고 해서 죽을 목숨 이 살아날 수 있다던가!" 소리와 함께 오십 안팎의 대한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태산이호 송씨 형제로구나!' 마문비는 이미 그들을 알고 있는 터였다. 두 사람은 곧장 오른쪽 자리로 걸어 와서는 거기 빈 자리에 앉았 다. 그러나 아직도 왼쪽 자리에는 적지않은 사람이 그대로 앉아 있 었다. "하하하..... 본인의 생각으로는 왼편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에는 아직도 나 심목풍과 적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듯한데, 왜 아직도 망설이고 계신지요?" 심목풍의 말이 떨어지자 과연 노여워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심대장주가 이미 우리와 사귈 뜻이 없는 것을 모르고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으니 진정 가슴아픈 일이 아니외까?" 이에 대답하는 소리, "형님의 말씀이 옳소이다. 머리를 자르면 피가 나니 오직 한 글 자 죽을 사(死)자라, 차라리 살아서 욕을 당하느니 죽어 영웅의 기 개를 떨침이 옳을 줄 아오." 네 사람의 대한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꾸역꾸역 우편 좌석 으로 걸어 왔다. 소영은 영웅들이 호기를 자랑하는 것이 가상하기는 하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궁금히 여기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일단 심목풍과 적이 된다면 자연 살아나기가 어렵 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들이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호기를 쓸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고 싶었다. 지금 심목풍과 적이 된다고 해서 반 드시 죽는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문득 심목풍의 얼굴이 엄숙하게 변했다. "또 없소이까?" 그는 같은 말을 몇 차례 되풀이 했다. 그러나 이제 좌편에서는 다시 행동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영은 처음부터 그 자색 도포를 입고 흰 수염을 가진 안이라는 늙은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늙은이는 여전히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적도 아니고 벗도 아니라면 신분상 어느 쪽에 속할까?' 아무리 보아도 흑도의 인물같지는 않았다. 무엇인가 마음 속으로 도모하는 바가 있으리라.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심목풍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문비 등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여러분은 나 심목풍과 적이 되려 하신다니 그 이유를 알고자 하 오." 마문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가 악을 쌓기 십 년, 수없는 살인의 기록이 있소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사문이 당신과 원수를 맺지 않았으면 벗이나 부모가 당신에게 위해를 받았소이다. 사람마다의 한(恨)은 대단히 깊은 줄 아오." 심목풍은 한바탕 헛기침을 토해 냈다. "그래 마형의 말씀이 그러하니, 형은 본인과 무슨 원한관계가 있 소?" "사문의 원수요."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형께서 사문의 원수갚음을 하고자 한다면 나 심아무개는 반드 시 기회를 마련할 것이오. 혹시 마형이 사문의 원수갚음을 할 능력 이 없을 경우에는 하나의 생명을 주어 배상할 수도 있을 것이오." 이것은 야유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문비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당신, 심대장주에게 구태여 폐를 끼치지 않겠소." "흥!" 심목풍은 코웃음을 치고 시선을 돌려 좌편 좌석을 쓸어 보았다. "여러분은 비록 나 심아무개와 사귀고자 하지는 않으나, 또한 적 이 되기도 원치 않는다니, 본인은 여전히 감격하는 바이며....." 그는 말끝을 흐리다가 잠시 사이를 두어 이렇게 못을 박았다. "이제 피차 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었소이다. 그 러나 피차간의 세력은 물과 불이니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이오." 이때 돌연 주승의 큰 목소리가 울렸다. "심대장주, 그런 태도를 강론할 것까지는 없지 않소. 화상은 이 미 지쳐서 기다리기에 진력이 났소. 대장주는 어서 이들을 서방 극 락 세계로 보내 주시든지....." 그는 하루 중 술이 깨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 주정뱅이다. 그 래서 그는 취하여 항상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거침없이 지껄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가 취해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큰 오해이다. 사실 그는 취중에도 지극히 빈틈없는 언행을 취하는 사람이다. 그는 기회를 잡아 심목풍의 주의력을 분산시킬 궁리를 아까부터 하고 있었다. "허허허..... 화상은 그렇게도 급하시오?" "어허허....." 화상의 너털웃음에 이어 이번에는 반개가 입을 열었다. "심대장주는 입과 마음이 다른 말만 되풀이 할 필요는 없소. 당 당하게 옳으면 옳다 그르면 그르다, 딱 잘라 말하시오. 그렇지 않 으면 생사를 걸고 한바탕 해 보든지....." 심목풍은 여전히 능글맞게 웃으며, "두 분께서는 너무 조급한 것 같소이다." 반개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심대장주의 귀계(鬼計)는 끝이 없으니, 언제까지 우리들을 기다 리고 있으라는 거요?" "좋소. 여러분은 먼 데서 온 손님이니까 얼른 돌아 가시기를 원 할 것은 당연한 일이외다. 그래 무엇으로 겨루겠소? 여러분이 제안 하시기 바라오. 문무 어느 쪽이든, 주먹, 손바닥, 그밖에 무슨 병 기를 쓰든가, 모두 여러분이 말씀을 하시면 나 심목풍은 그대로 따 를 생각이외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던 손불사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 늙은 거지, 손불사가 한 가지 의견이 있소이다." "오! 고견을 들려 주시기를....." 손불사는 헛기침을 토해 내고 입을 열었다. "강한 용은 지두사(指頭蛇)를 누르지 않는 것이 도리요. 당신 심 대장주가 이번 우리들을 초청하여 무림대회에 참여케 한 저의인즉. ......" 심목풍은 말을 가로막았다. "제 기억으로는 당신같은 늙은 거지는 초청하지 않은 것으로 알 고 있는데......" 손불사는 씽긋 웃고, "당신이 이 늙은 거지를 초청했든 안했든 늙은 거지는 당신네 백 화산장의 초청장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온 것이오." "허허허..... 손형의 신통(神通)이 그와 같이 광대하니 본인은 오직 경복할 따름이외다." "어허허...... 심대장주의 그 과찬의 말씀, 충심에서 나온 것이 라면 늙은 거지가 어찌 경청하지 않으리......" 그는 말하면서 자기 편 좌석을 한바탕 돌아 보았다. 심목풍과 적 이 되기를 선포하여 오른쪽에 모인 사람은 불과 몇. "피차간의 사람 수는 차이가 대단하오. 세력이 균형을 잡지 못하 니 힘으로 겨룬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것이오. 우리는 먼저 세 진 (陳)을 정하여 승부를 결행할 것을 제의하는 바, 주인이 되어 손님 의 청을 받드는 것은 영웅 인물의 도리인가 하오. 현명한 처사가 있기를 바라오." 그러나 무슨 심사인지는 모르나 심목풍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 다. "본래 내기를 하는 일이라면 소인은 원하는 바가 아니올시다. 손 형의 청은 실로 받들기 어렵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심대장주의 뜻은 훨씬 많은 사람에 의해 일시에 소수를 누르자는 것이오......." "하하! 본장의 사람들이 설사 그런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나 심 목풍은 또한 허락할 수 없소이다." 손불사 얼굴에서 차츰 웃음이 사라졌다. "심대장주는 입으로는 영웅 인물을 자부하고는 있으나 실제로는 마음 속에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지 실로 헤아리기 어렵구 려. 우리가 제출한 대로 할 수 없다면 구태여 더 물을 것이 무엇인 가? 어서 심장주, 좋을 대로 하시오!" 심목풍은 이와 같이 심중을 찌르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태연했 다. "제 뜻을 말하자면 힘에 공평을 기하자는 것이외다. 대회에 참석 한 사람은 수백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만일 삼진을 정하여 승부를 나눈다면 너무 주마간산격이 되지 않겠소이까? 그렇게 되면 수많은 숨은 인재를 놓치기도 쉬운 일이며, 결국 모임의 의의가 유실되는 것이오. 제 뜻은, 그러니까 여러분의 사람 수 대로 우리와 몇 대진 을 겨루는 것이며 생사를 묻지 말자는 것이외다." "음......" 손불사는 심목풍의 생각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목 풍은 우선 적이 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자는 것이다. 설혹 다 죽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 예봉만 꺾으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것은 실로 대답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손불사로 말할 것 같으면 개방의 오직 한 분 남은 장로일 뿐만 아니라, 온 무림과 강호 호걸들 사이에서도 일제히 지존으로 선망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모인 인물들은 모두 삼산오악의 영웅들이다. 과연 손불사의 말 대로 따를 것인지는 미지수인 것이다. 이때 심목풍은 오른쪽 자리의 사람 수를 헤아려 보고는 입을 열 었다. "손형 쪽에는 모두 십오 인이 있으니 열다섯 진으로 나누어 결행 하는 것이 어떻겠소?" 손불사는 자기 편의 호걸들을 힐끗 돌아 보았다. "그건 늙은 거지가 또한 결정하기가 어렵소이다." 이것은 그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대표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태산이호가 얼른 입을 열었다. "우리는 손노선배께서 대국을 주관해 주실 것을 공천합니다." "그렇소. 모두가 같은 의견이올시다." 호걸들은 모두 그를 밀었다. 손불사는 허허 웃었다. "늙은 거지가 감히 명을 따르겠소이다....." 그리고는 시선을 거두어 심목풍을 향했다. "귀방은 손님이 많으니 심장주의 제안은 공평지론이 아니외다." "그럼 손형의 뜻은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우리는 사람 수가 적소. 만일 사상자가 생긴다면 또한 그만큼 수가 줄어드는 것은 자명한 일....." 이번에는 심목풍이 재촉했다. "그래 손형의 뜻은 어떠하신지 어서 말씀하시오. 심아무개는 너 무 많이 기다린 것 같소이다." "좋소. 그럼 당신의 이 백화산장의 방비는 어떠한지?" "감히 금성철벽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수비가 삼엄한 것은 틀림 이 없소이다." "음, 그렇다면 삼진으로써 싸울 수 없다면 우리는 무더기로 싸우 는 것이 어떻소? 그것이 복잡하지 않을 거요." 심목풍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혼전을 하자는 말씀인가요?" "결국 말하자면 우리가 당신의 백화산장을 뚫고 나가는 것이오." 심목풍의 얼굴에 가벼운 비웃음이 스쳤다. "여러분이 올 때에는 용이했으나 갈 때는 그렇지 않을 것이오." "늙은 거지는 평생 사악함을 믿지 않았소이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손불사는 곧장 몸을 돌려 입구로 걸 어 나갔다. 소영은 손불사가 제시한 방법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백화 산장을 떠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설사 다른 방법으로 승 부를 겨룬다고 해도 심목풍의 위인으로 보아 고스란히 놓아 보내지 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휙!" 심목풍의 입에서 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바야흐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여러분, 가고 싶으면 가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나 심목풍을 너 무 가벼이 여겼음을 깨닫게 될 것이오." 벌써 회장의 입구에는 수많은 흑의 무사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번뜩이는 병기들....... 손불사는 고개를 돌려 주승, 반개에게 말했다. "두 분께서는 늙은 거지를 따라 길을 틉시다." 주승은 사람됨이 익살이 심했다. 비록 생사의 고비에 놓여도 한 마디 진지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손불사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 어나면서 손불사에게로 걸어 갔다. "노선배께서는 뒤에서 접응하십시오. 이 화상과 심철와가 앞장을 서서 진두를 맡겠소이다." 반개는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은 채 앞으로 나왔다. 그는 늘 등 에다 솥을 하나 짊어지고 다니면서 필요한 때 구걸한 쌀로 밥을 지 어먹곤 했다. 그래서 항상 거지의 신세를 면할 겨를이 없었으나 개 방의 인물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만 그가 너무 밥을 많이 먹는 까닭에 그런 꼴로 지낸 다고 하나 그것은 그의 사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에게는 크게 가슴아픈 상처가 있는 것이다. 평소에 괴팍하여 타인과 말도 잘하 지 않았으므로 그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반개 심철와는 주승의 말에 따라 훌쩍 몸을 날려 손불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영은 혼자 묵묵히 형세를 관찰하였다. '이제 일장의 격렬한 악전이 벌어지려 하는 참이다. 심목풍은 이 미 본래의 계획을 변경한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소영과 마문비 사이에 주어졌던 계획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은밀히 전음입밀의 술법으로 마문비에게 말했다. "마형, 정세가 변하였소. 우리가 미리 계획했던 일은 시효가 지 난 것 같소이다." "그렇소. 형세를 보아하니 저녁 때까지 기다리기는 어렵소이다. 다만, 중주이고와 팽운, 향비 등이 시종 얼굴을 내밀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리오." "그들은 아마 백화산장에 혼입하지 않은 것 같소이다." "중주이고는 그렇다 치고 그 신투향비로 말할 것 같으면 지모가 뛰어난 인물이 아니오? 그가 백화산장에 섞여 들어 오지 못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외다." "그러나 지금의 형세는 이미 기다리기가 어렵게 되었소이다. 이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손을 쓸 틈이 없을 것 같소." "소형의 말씀은 그러하지만 제 뜻은 너무 급히 하는 것은 부당한 것 같소이다. 먼저 향비 등과 연락을 하고 볼 일이오." 소영은 마음이 헝클어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머리를 들어 보니 주승과 반개는 벌써 입구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밖에는 병기가 번뜩거리고 있었다. 손불사가 돌연 소리쳤다. "멈추시오!" 주승은 이미 입구로 한 발짝 걸어 나갔다가 곧 뒤로 물러섰다. 반개 역시 등에 짊어지고 있던 솥을 꺼내어 준비를 하고 있다가 손 불사의 한 마디를 듣고는 곧 뒤로 물러났다. 이때 그 오른편에 남아 있던 몇 사람 호걸들은 정세의 급박함에 질렸는지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 상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주승도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아! 이 사람들은 모두 심목풍의 위세에 눌려 벌써 항거할 용기 를 잃은 것 같구나!' 문득 손불사의 더러운 얼굴에 자색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두 줄기 빛나는 눈초리가 장중 호걸들의 얼굴을 쓸었다. "여러분이 만일 이 늙은 거지를 따라간다면 그래도 어느만큼은 살아날 가망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늙은 거지가 일단 이곳을 떠난 후에는 당신들이 다시 백화산장을 떠나려 해도 어려울 것이외다." 과연 이 몇 마디 말은 효력이 발생하였다. 이제까지 우물쭈물하 던 사람 가운데 서너 명이 또 자리를 떠서 뚜벅뚜벅 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소영은 아직도 주춤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모든 것이 계획과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시간 여러 호걸들은 모두 의기소침하여 용기를 잃고 있으니 아무래도 난국을 타개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결행 해야 한다.' "마형, 우리 손노선배의 뒤를 따라 당당하게 행동합시다." 마문비 역시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 노선배의 선망이 높은만큼 심목풍의 위세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구려. 우리들 편은 몇몇 사람에 불과하나 이미 여섯 사람이 진 두에 나섰구려. 우리가 응원을 하지 않는다면 자칫 일을 그르치기 쉽겠소이다." 마문비는 선뜻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사마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혼자 중얼거렸다. "병(病)통은 이미 엊저녁에 들통이 났단 말씀이야....." 그는 벌써 두 개의 금륜을 꺼내 들고 있었다. 봉죽 아가씨가 낮은 소리로 일렀다. "소비는 스스로 무공이 보잘것 없음을 아오나 그렇다고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나이다." "좋소. 이것을 주지." 마문비는 오른손을 장화 속에 넣더니 두 자루의 단검을 꺼내어 봉죽에게 건넸다. 봉죽은 비수를 받아들고 생긋 미소지었다. "마어른의 후의에 대해서 소비는 후생에서 닭이나 개가 되어서라 도 갚겠나이다." "봉아가씨는 말이 너무 지나치오." 마문비도 웃어 보였다. 사마건이 쌍륜을 흔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도검이 두려워 피하는 것은 실로 일시의 실책이오. 살아 있는 동안 종노릇을 하는 것이 어찌 죽기보다 나을 것인가! 가소롭게도 무림동도 가운데 이와 같이 삶을 탐하는 무리들이 적지 않으니..." 이 말은 사마건의 혼잣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커서 장중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직까지 왼편 자리에서 전전긍긍하 던 사람들은 이 소리에 불끈 노여움이 치미는지 푸르락붉으락 얼굴 색이 변했다. 마문비는 이때 먼저 자리를 떠나 늠름한 기개로 입구를 향해 걸 어가고 있었다. 소영 역시 마문비의 뒤를 따랐다. 종복으로 가장을 했으니 응당 주인의 뒤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사마건은 금륜을 흔들며 역시 그 뒤를 따르고 봉죽 아가씨도 따 랐다. "하하하하......." 돌연 손불사의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모두 열 사람, 이 인원으로 오늘 백화산장의 수백 명 고 수를 물리치는 것이오. 이 일전의 결과가 어떻게 판가름이 날지는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기개는 훗날 무림에 영원히 남을 것이오." "허허허....." 심목풍이 웃음소리로 대꾸했다. "손형이 일단 능력을 발휘한다면 나 심아무개는 당신을 백화산장 에 붙잡아 둘 수가 없으리다." 어디까지나 비꼬는 말이었다. 해 볼 테면 해 봐라, 구경이나 해 보자는 식이었다. 이때 돌연 한 사람의 크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부, 살아서 빛이 나고 죽어서는 혁혁한 이름이 있으리라. 천하에 죽음보다 어려운 일이 있겠소이까? 저도 또한 기꺼이 가담 할 것이오." 한 사람이 이렇게 외치면서 걸어 나오자 위세는 크게 진작되었 다. 이제까지 우물쭈물 뜻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무리들 칠, 팔이 일제히 병기를 뽑아들고 달려 나왔다. 손불사가 인원을 세어 보니 모두 십팔 명. 영웅의 기개는 전 무 림을 진동시킬 것이다! 모두가 일기당천(一氣當千)의 기백으로 흥 분되어 있었다. 마문비는 침중한 목소리로 일렀다. "손노선배께서 덕망이 무거우시니 오늘의 일을 앞장 서서 주관해 주시기 바라오." "늙은 거지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양하지 않겠소이다." 그는 거침없이 대답하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우리 십팔 인 중에는 무공이 낮은 사람도 있고 강한 사람도 있 소. 그러나 늙은 거지가 보기에는 모두 멋지게 쌓인 보옥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다행히 이 보옥은 한 번 닦아내기만 한다면 크게 빛을 발하리라 믿소. 여러분으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재주를 묻어 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외다." 마문비는 조용히 아뢰었다. "우리는 모두 노선배의 가르침을 귀담아 들을 것이외다. 절대로 다른 의견은 없소이다." 손불사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상대방의 인원이 현저하게 많은 고로 우리는 그들과 일일이 싸 울 수는 없소. 늙은 거지는 한 가지 적을 막을 진식을 생각하였소. 우리는 모두 십팔 인이니 두 사람씩 한 조직이 되어 사면 팔방을 지키며, 동서남북 네 방위를 맡는 사람은 여덟 명으로 외진(外陳) 이 되며 나머지 열 사람은 내진(內陳)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상자가 생길 경우 즉시 공백을 메우며 행진해야 할 줄 아오." 사마건이 듣고 감탄했다. "훌륭한 방법이오. 그것은 바로 윤전대진(輪轉大陳)이 아니옵니 까? 오늘 형세에 아주 적합하다 할 수 있습니다." 손불사는 사마건을 한번 돌아 보며 말했다. "그러면 사마형이 좌익의 주축이 되어 주시오." "소인, 있는 힘을 다하겠소이다." 손불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마문비에게 어조를 낮추어 말했 다. "마총타주의 상세는 어떠시오?" "괜찮습니다." "그럼 되었소. 마형께서는 그럼 우익을 맡으시오." "삼가 대명을 받들겠소이다." 손불사의 시선은 다시 주승과 반개를 찾았다. "두 분께서는 선두의 주봉이 되어 적의 예기를 꺾어 주시기 바라 오." 주승, 반개는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삼가 명을 받들겠소이다." 손불사는 한바탕 헛기침을 토해 낸 뒤 봉죽 아가씨를 돌아 보았 다. "그럼, 늙은 거지와 봉아가씨는 중앙에서 여러분을 접응할 것이 외다." 이때 사마건의 눈이 소영의 신변으로 왔다가 돌아갔다. 그는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이 유명한 개방의 장로가 결국은 사람 볼 줄을 모르는구나. 대 단한 인물을 눈앞에 두고도 지나치다니.....' 소영은 스스로 마문비의 시종으로 가장하고 있는 터라 공연히 자 기를 내세워 여러 사람의 생각을 어지럽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 다. 그래서 줄곧 눈을 아래로 내려 깔고, 또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손불사의 마지막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두 사람, 허위대가 큰 대한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일렀다. "두 분께서는 후위를 맡아 수고를 해 주시기 바라오." 두 사람은 일제히 대답을 하고 각기 병기를 뽑아 들어 지정된 장 소로 갔다. 손불사는 다시 나머지 사람 중에서 무공이 높다고 인정 되는 네 사람을 선정하여 좌우 양익을 접응하도록 배치하였다. "이제 배치는 전부 완려되었소이다. 늙은 거지는 일일이 분파직 위를 다스릴 수 없으니 여러분께서는 각자 분발해 주시기 바라오. 또 외진은 죽음을 가늠하는 방위이니 만일 공백이 생기는 경우에는 즉시 보강하도록 해야 하오." 심목풍은 손불사가 배치를 끝낼 때까지 시종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이 늙은 거지가 무공만 높을 줄 알았더니 지략 또한 볼 만하구 나. 이렇게 윤전진을 짜고 나간다면 각인은 최고도로 실력을 발휘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축은 쉽사리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지탱하는가 내 두고 보리라.' 십팔 인의 일기당천의 용사들은 이제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었 다. 소영은 조용히 자기편의 진세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가장 약 한 부위가 후진이라고 판단하였다. 손불사가 비록 중앙에서 활약을 한다고 하지만 선봉과 좌우 양익을 응원하는 데에도 힘이 부칠 것 이 명백했다. 그는 슬그머니 후진으로 걸음을 옮겨 보각하기에 알맞은 위치에 섰다. 이것은 신분은 폭로시키지 않을 유일한 방편도 되었다. 왜냐하면 일단 접전이 벌어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선봉으 로 주력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영이 보완의 위치에 서자 옆에 섰던 중년 대한이 돌연 임의로 이탈하여 좌익으로 걸어 갔다. 아마도 소영이 신통치 않게 보였던 것이리라. 소영은 머리를 숙이고 여전히 못 본 척했다. 사마건 역시 이 후위가 가장 위험한 줄 알고 있었다. 소영이 서 슴없이 걸어가 자리를 잡은 것을 보자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젊은 친구가 자신의 무공을 너무 믿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그는 즉시 옆에 있는 사나이에게 나직이 일렀다. "형장께서는 후진의 보완처에 이동하심이 어떻겠소?" 그 사람은 사람됨이 중후하여 속으로는 어땠는지 몰라도 겉으로 는 아무런 내색을 내지 않고 걸어가 소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손불사의 큰 목소리가 장중을 울렸다. "오늘의 일전은 명예에도 관계될 뿐만 아니라 또한 생사에도 관 계되는 것이오. 여러분은 각기 전력을 다하여 응전하기 바라오!" 어느새 손불사는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손불사가 날린 일장이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더니 입구를 막고 있 는 한 사람의 혹의 무사의 가슴에 정통으로 맞았다. "으윽!" 한 마디 비명이 울리고 흑의무사는 금방 피를 토해내며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그는 먼저 위세로써 상대방의 예기를 꺾은 것이다. 그 가 쏟아낸 일장은 팔 할의 공력이 깃든 것이었으므로 사나이는 미 처 손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선두의 주승은 한 손에 술병을 쥐고 한 손을 들어 비스듬히 일장을 쪼개 냈다. 반개 역시 등에 짊어졌던 쇠솥을 꺼내어 크게 한바탕 휘둘러 둥 둥당당! 하는 소리와 함께 주승을 공격하는 수많은 병기를 막아 버 렸다. 주승의 쌍장은 위명무비한 세력으로 전면의 적을 치며 벌써 한가 닥 혈로를 열어 밖으로 치달았다. 밖에 섰던 수많은 흑의무사들은 전면의 주승, 반개를 막는 일방 겹겹이 둘러섰던 무사들의 후위는 좌우 양쪽으로 밀리면서 윤전진 의 양익을 협공하기 시작했다. 사만건은 쌍륜을 휘둘러 좌익의 문호를 굳게 봉쇄하여 바늘 끝도 들어 올 틈이 없게 하였다. 마문비 또한 울타리의 주축으로 오직 막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여 문호를 굳게 지켰다. 후진을 맡은 두 사람 대한은 비록 무공이 좀 차이는 있었지만 수 비에만 전력을 쏟았으므로 지탱할 수 있었다. 손불사의 형형한 안광은 이내 전세를 파악하였다. 전, 우, 좌 이 렇게 세 방면은 그다지 걱정할 바 아니나, 오직 후미가 쩔쩔매는 판국이라 한바탕 장풍을 휘둘러 몇 놈을 물리침으로써 응접하였다. 진중의 호걸들은 모두 앞의 적을 막는 데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 었고, 다만 소영이 초연한 입장에서 사방을 휘둘러 보며 대세의 변 화를 살펴 볼 여유가 있었다. 문득 그는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사방을 에워싸고 있 는 무사들은 전력을 다하는 것 같지 않았다. 싸우면서 물러나면서 하는 전법은 분명 상대방을 함정으로 이끌려는 조짐이 아닌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손노선배,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적은 유인작전을 쓰고 있습 니다. 우리는 그들의 계략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손불사는 깜짝 놀라 머리를 들고 사방의 정세를 헤아려 보았다. 과연 적은 암암리에 일행을 끌어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 로 끌려 간다면 꽃나무 숲에 대진이 들어가게 되리라. 그곳에서 매복한 적이 암습을 가해 온다면 그 때에는 막을 방법 이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나 귀뜀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늙은 거 지는 무의식중에 함정으로 빠질 뻔하였구나!' 머리를 들어 힐끗 바라보니 한 젊은이가 분전을 하고 있는데, 정 신을 적을 막는 데에만 집중하여 도무지 금방 입을 놀린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러나 손불사는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젊은이의 안광을 보고 틀 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 부끄럽다. 이와 같이 절기를 지닌 사람을 알아 보지 못했으 니 나도 흙에 들어 갈 날이 멀지 않았구나!' 어디선가 휘익! 하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적은 조호에 따라 갑자기 형세를 일변시켰다. 그들은 유인작전을 버리고 이제 적극적 인 공세로 나왔다. 도검이 소낙비처럼 번뜩이며 사면 팔방의 공세를 가중시켰다. 소영은 그들의 수가 이쪽의 두 배 아래는 아니라고 보았다. 또한 매 인물의 무공은 발군의 것이었다. 거의 어느 한 지방에 내놓더라도 각자는 모두 영수 인물이 될 만했다. '어느 사이에 심목풍은 이런 훈련을 마쳤을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손불사는 연거푸 장풍을 날리면서 소리쳤다. "정서쪽으로 진두를 돌리시오!" 주승, 반개 역시 벌써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지 손불사의 명 령에 즉시 방향을 바꾸었다. "이놈들!" 장풍이 획획!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고, 쇠솥은 허공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검솥이 허공을 휘두르니 마치 검은 바람이 싸고 휩쓸며 돌아가는 것 같았다. 창칼은 연달아 쇳소리를 내며 튀겨 갔다. 그러나 적은 쉽사리 물러가지 않았다. 적은 모두가 악귀같이 달 라 붙는 것이 불퇴진의 용사들이었다. 모두가 이미 충분한 훈련을 거친 것이 틀림없었다. 좌우 양익의 압력이 돌연 강해졌다. 공세는 미친 바람처럼 들이 닥쳤다. 사마건과 마문비는 신들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병기를 휘둘렀다. 가장 약한 우진에서 먼저 부상자가 생겼다. 태산이호였다. 어디를 다쳤는지 분명히 알 수 없었다. 온 몸이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으나, 그래도 자리를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날이 넓은 그들의 귀두도는 연방 허공에 칼그물을 폈다. 악전고 투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내진에서 접응하던 두 장한이 선뜻 뒤로 몸을 빼내며 태산이호의 열세를 도왔다. 일사불란의 자세였다. 윤전진이 신통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은 수로 다수를 상대하 는 데는 그 이상 가는 진식이 없었다. 소영은 사면의 압력이 급격히 증가했음을 알았다. 그들 흑의무사 가운데에는 무공이 기이하게 높은 자가 적지 않았다. 손불사가 연이어 장풍을 후려 돌리지 않았다면 윤전대진은 이미 파탄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손불사 역시 백화산장에 이같이 많은 고수가 숨어 있으리라고 예 측하지 못하였다. 보아하니 오늘 이 백화산장에서 살아 돌아 간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사방의 압력은 갈수록 증대했다. 윤전진은 이미 앞 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전세도 갈수록 위축되는 것 같았다. "으윽!" 비명에 따라 마문비 옆에서 분전하던 인물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 다. 내진에서 접응하던 사내 하나가 얼른 나아가 빈 자리를 메꾸었 다. 심목풍 이하 수많은 시선이 멀리서 이 일장의 군타악전(群打惡 戰)을 관전하고 있었다. 심목풍이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드디어 소영은 싸움을 돕기로 결심하였다. 후위에 위치하고 있었 으므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은밀히 수라지력을 휘둘러 태산이호를 핍박하는 흑의무사 팔 인을 죽였다. 원래는 가장 위급한 것이 후진이었는데 소영의 일거수에 돌연 평 온해졌다. 이제는 좌우 양익이 급격히 죄어 들었다. 두어 마디 비명이 들리 자 양익에서 각각 두 사람의 호걸이 검에 찔려 그 자리에 거꾸러졌 다. 봉죽과 다른 대한이 즉시 그 자리를 메꾸었다. 이 참혹한 접전은 거의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겹겹이 포위한 무사들 가운데서도 적지않은 사상자가 났다. 그리고 윤전대진도 거의 와해될 위기에 처하였다. 태산이호는 소영의 조력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많은 피를 흘려 기 력이 거의 소모되었다.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내진으로 들어와 있었다. 소영은 적의 무사로부터 한 자루 장검을 빼앗아 들기는 하였으나 앞장 서서 예기를 나타낼 수는 없어 단지 방비에만 전력하였다. 밥 한 끼를 먹을 시간이 지나자 소영과 나란히 서서 칼집을 하던 호걸 한 사람이 비스듬히 찔러 들어 오는 칼에 맞아 아이쿠 비명소 리와 함께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소영은 정세가 매우 급박함을 알았다. 계속해서 시간을 끌다가는 한 사람도 살아 남을 자가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윤전진은 허물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봉죽은 부상을 당했고 마문비, 사마건 그리고 반개 심철와까지도 각각 일점씩 맞았다. 세 사람은 공력이 두터워 즉시 운공하여 피를 멎게 하고, 또 재 차 병기를 휘두르고 있었으나 역시 초식상에는 많은 허점이 드러났 다. 아직 몸을 다치지 않은 사람은 주승과 손불사, 그리고 소영 세 사람뿐이었다. 태산이호와 봉죽은 다시 싸울 기력이 없었다. 나머지 팔 명은 이미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어림잡아 적의 사상자는 사, 오십명, 그 중 반수가 손불사의 장 력에 당하였다. 그러나 상대방의 세력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아아아아......" 손불사의 입에서 길게 탄식의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 죽는 것은 무림의 만대에 길이 그 이름을 남기는 것이니, 이 늙은 거지는 앞장 서서 혈로를 열겠소이 다. 마형과 사마형은 진력하여 중상자를 보호하시오." 바야흐로 손불사가 지쳐 나가려 할 순간 봉죽 아가씨의 목소리가 전해 왔다. "노선배님, 전면 밀림 속에 기관매복이 깔려 있습니다. 조심하세 요." 그녀는 헐떡거리며 계속해서 덧붙였다. "지금 정세를 보면 우리는 먼저 한 군데 튼튼히 방비를 굳힐 보 루가 있어야겠습니다. 그곳에 가서 우선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방 법을....." 손불사는 흠칫 놀랐다. 봉죽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일 억지로 혈로를 뚫고 나가려 한다면 급기야는 살아 남을 사 람이 하나도 없을 게다.' 그는 즉각 물었다. "아가씨는 그래 가까이 은신할 곳을 아는가?" 봉죽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사방을 둘러 보았다. "동쪽으로 오십 장 정도 나가면 거기 꽃수풀 속에 한 자리 청석 으로 쌓은 석보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석보를 점거할 수 있다면 급한 위험은 잠시 피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기력을 다하여 헐떡거리고 있었으므로 상처에서는 붉은 피가 샘처럼 흘러 내렸다. 말하느라고 운기하니 지혈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이때 소영은 빠르게 다가와 봉죽의 두 군데 혈도를 쳐서 봉쇄했 다. 흐르는 피를 멎게 한 다음 잇따라 짓쳐드는 두 사람의 흑의무 사를 단 일장으로 쳐 죽였다. 그 기세의 위맹함은 여럿을 놀라게 하였다. 산같은 두 사람의 몸이 한데 나동그라지는 모습을 대부분의 사람 은 모두 보았다. 소영은 정세가 급박했던지라, 연환섬전장 가운데 절초를 발휘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러한 소영의 쾌초는 심목풍의 눈에 띄지 않았 다. 만일 심목풍이 그가 연환섬전장을 쓰는 것을 보았더라면 당장 의혹을 품고 그의 신분을 간파해 냈을 것이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형세는 조금도 풀릴 줄 몰랐다. 아니 오히려 피를 본 맹수처럼 더욱 사납게 덥벼드는 것 같았다. 마문비, 사마건, 주승, 반개 등은 자기 몸을 보호하는 데도 진땀 을 흘릴 형편, 태산이호와 봉죽을 보호하는 일은 완전히 손불사와 소영의 소관이 되었다. 손불사의 일거수 일투족은 단번에 큰 효력을 나타냈다. 소영 역시 손에 천년 교피를 끼고 도검의 예리한 칼날에 구애 없 이 발장하는 수라지력으로 단번에 무리를 제압했다. 두 사람의 합공은 단번에 아홉 사람을 거꾸러뜨렸다. 손불사가 기회를 빌어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동쪽으로 나간다. 늙은 거지가 앞장을 서겠다." 이 소리에 나머지 사람들은 한꺼번에 기력을 회복한 듯 단번에 좌우 양익이 철벽처럼 튼튼해졌다. 태산이호의 상세가 무거웠다. 그들은 동료들이 악투하는 것을 보 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여러분, 우리 형제는 돌볼 필요가 없습니다. 어서 나가십시오" "하하핫.... 나 주정뱅이 돌중은 수백 번의 싸움을 해 보았으나 이같은 악전고투는 처음이외다. 정말 통쾌한 싸움이오." 주승은 이렇게 소리치고는 술호로를 거꾸로 쳐들고 꿀꺽꿀꺽 몇 모금의 술을 마셨다. 돌연 주승의 입에서 푸푸! 하는 소리가 연달아 일어나자 목구멍 으로 넘어갔던 술은 돌연 화살같이 쏟아져 나오면서 주위에 몰려 있는 흑의 무사들의 낯짝을 휩쓸었다. 이것이야말로 주승 반개의 일생의 절기로 술화살을 만들어 내공을 가미, 적을 상하는 절기였 다. "으핫!" 비명이 들리고 순식간에 서너 명의 흑의 무사가 얼굴을 싸쥐고 물러났다. 뒤에서 물밀 듯 밀려오던 무사들은 동료가 얼굴을 싸쥐 고 밀리는 바람에 일시 주춤하게 되었다. "하하하핫!" 주승은 미친 듯이 웃는 가운데 한 팔을 쓱 내밀어 태산이호 중의 노대를 덥석 껴안았다. 반개 역시 쇠솥을 빙빙 돌려 다섯 자루의 장검을 퉁겨 내고 왼손 을 뻗어 태산이호 중의 노이를 안았다. 이어서 손불사, 마문비, 사마건 등이 앞장을 서며 은연중에 삼각 진식(三角陳式)을 꾸몄다. 소영은 봉죽을 돌아 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아가씨는 걸을 수 있소?" 봉죽은 이미 소영의 무공을 보았다. 겉으로 종복의 신분을 가장 하고 있는 소년은 실제로 그의 주인에 비하여 무공이 비할 바가 아 니었다. "소녀 때문에 지연하지 마세요. 관계치 마시고 어서 적을...." "어찌 되었든 관계치 않을 수 있으리오." 소영은 선뜻 왼손을 내밀어 봉죽의 가는 허리를 안았다. 그 다음 에 전개되는 오른손의 절예는 실로 천하일품이었다. 찔러 들어 오 는 도검에 관계치 않고 쓱 손을 내밀어 칼날을 잡으니 칼을 쥔 대 한은 흡사 팽이처럼 퉁겨 나갔다. "흥!" 소영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고 장검을 고쳐 잡자 허공을 긋 는 은빛 무지개가 갑자기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으악!" 처참한 비명 아래 두 사람 흑의 무사가 무우 잘리듯 허리가 동강 이 나서 그곳으로부터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용솟음쳤다. 이어서 뇌성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검광이 하늘을 가리고 손바 람 소리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삽시간에 허공으로 튕기는 자는 무려 이십, 더구나 한 칼질에 베 어져 나가는 일세를 보자 다른 사람들은 그만 몸이 오싹 죄어 드는 듯, 일시에 앞 길을 크게 열어 주었다. 손불사의 장력 또한 뇌성폭우처럼 진두를 휘몰아쳤다. 좌우 양익에서 사마건, 마문비가 굳게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불사의 장력은 마문비에게까지 영향이 미쳤다. 봉죽은 정신을 바싹 차리고 가는 길을 명석하게 가려냈다. 한 잔의 차가 식을 시간에 일행은 꽃숲 속에 이르렀다. 전면에 석보가 보였다. 손불사는 쾌속한 장세와 위맹하기 짝이 없는 중후한 내력을 끼고 불과 수십 장의 거리를 돌파하는 동안 거의 백여 차례 장풍을 휘둘 렀다. 하지만 손불사 역시 뼈와 살로 엉킨 육신이다. 그의 내력이 비록 심후하다고는 하나 백여 차례나 장력을 쏘아 내니 기력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문득 앞을 보니 적들은 숲 속에 집결하여 최후 최강의 진식을 펼 치고 있었다. "나를 막는 자는 죽는다!" 그의 장이 다시 위맹한 힘을 발휘하여 두 명의 적이 비명을 지르 며 피를 토해 냈다. 손불사는 마귀가 들린 늙은이로 변해 있었다. 수염과 머리가 온 통 빳빳이 일어나서 귀신처럼 변모한 데다가 눈은 또 핏빛으로 붉 게 충혈되어 산 사람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돌진하며 선뜻 일장을 먹여 뒤로 자빠지는 무사 한 놈을 가볍게 잡아채 두 손으로 그 다리를 쥐고 긴 휘파람 소리와 함께 빙글빙글 휘둘렀다. 사나이의 몸이 바람소리을 일으키며 돌자 앞에 막아섰던 놈들은 감히 위험한 칼질을 하지 못했다. 잘못 하다가는 자기편을 토막내 는 수치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분히 물러나며 진세를 가다듬는 듯했다. 석보는 멀지 않은 곳에 보였다. 네모난 돌로 축조한 것이라 일단 점거하기만 한 다면 방어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손불사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손에 잡은 사나이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 사방에 튀었다. 피를 뒤집어 쓰는 것은 누구나 달가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자기 편 사람의 피를 맞는다는 것은 경황중이라 할 지라도 모두 저어했다. 손불사는 석보의 큰 나무문이 저만큼 버티고 선 것을 보았다. 사 나이의 몸뚱이를 한 바퀴 휘둘러 달려드는 흑의 무사들에게 집어 던진 후, 그 빈틈을 이용하여 바람처럼 날아 석보위 문을 두 발로 걷어찼다. 꽝!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문이 양쪽으로 확 열렸다. 손불사는 그 열려진 문 앞에 조용히 서서 지나온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의무사들의 진열이 보이고, 주승, 반개 등이 그 무사들 에 의해 진로가 막혀 있었다. 거리는 이십여 자도 되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도검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좌우 십여 명의 무사들이 또 달려 들었다. 석보를 탈취하려 는 것이 분명했다. 손불사는 주춤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사람들을 도 와 혈도를 뚫어 주자면 좌우에서 달려드는 무사들에게 가까스로 확 보한 석보를 빼앗길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우선 좌우로 달려드는 무사들을 양손으로 물리친 후 눈을 돌려 보니 얼굴이 온통 누런 젊은이가 봉죽 아가씨를 옆구리에 끼 고 오른손의 검으로 번개치듯 혈로를 뚫고 있었다. 그 앞에 막는 자는 반드시 죽거나 중상을 당하여 나동그라지는 것이었다. "오! 발군의 용장이로다!" 늙은이는 오직 감탄을 쏟아 낼 뿐이었다. 소영은 손불사 영감이 진력하여 석보의 문을 걷어차는 것을 보고 는 갑자기 호기가 크게 솟구쳐 자신의 처지를 일시 잊어 버렸다. '이러다가 크게 낭패를 면치 못하리라......' 그는 마음을 굳히자 이내 장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장검 의 예리한 날에서는 씽씽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바람이 부는 듯했다. 금시에 앞이 트이면서 저만큼 손불사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52. 적진 속의 피난처 소영의 한바탕 살수에 적의 사상자는 급격히 늘어갔다. 이미 이, 삼십 개의 시체가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주승, 반개, 마문비, 사마건 등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소영의 뒤 를 따라 혈로를 뚫고 석보에 접근했다. 손불사는 대갈일성 소리와 동시에 일초 배산장(排山掌)을 휘둘러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세로 주위의 적을 휩쓸었다. 소영의 검은 계속해서 팔방풍우를 전개, 검광이 번쩍 돌아 가는 가운데 세 사람 무사가 잇따라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아무리 죽 음을 두려워하지 않는자라 할지라도 이와같이 세 사람이 한꺼번에 거꾸러지는 것을 보고는 일시 주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사이에 반개, 주숭, 사마건, 마문비 등은 바람같이 석보 안으 로 날아 들어 갔다. "하하하핫......" 손불사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네도 어서 들어가 휴식하게, 뒷일은 나 늙은 거지가 맡겠네." "좋습니다. 노선배께서 수고하십시오." 소영은 몸을 돌려 석보 안으로 들어 갔다. 이미 마문비는 섭선을 떨어뜨리고 벽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 있 었다. 거칠은 숨결로 가슴에 파도를 일으켰다. 얼굴은 창백하고 몸 에서 흐르는 피는 여전히 옷깃을 적시고 있었다. 사마건은 쌍륜을 땅바닥에 포개어 놓고, 눈을 감은 채 단정히 앉 아 있었다. 왼팔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반개 또한 두 군데 상처를 입고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주승은 술기운으로 항상 시뻘겋게 윤이 나던 얼굴이 이 시각에는 푸르고 누런 색깔로 변해 있어 보기에 흉했다. 태산 이호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소영은 그들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봉죽 을 내려 놓았다. 봉죽 역시 지쳐 눈을 감고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벽에 의지하였 다. '만일 이 악전이 반 시간만 더 계속되었거나 석보를 발견하지 못 했더라면 우리는 전멸했을 것이다.' 소영은 길게 숨을 토해 내니 비로소 정신이 상쾌해졌다. 이때 어디선가 일진의 바라소리가 울려 왔다. "뎅, 뎅, 뎅!" 소리에 따라서 석보 밖의 흑의 무사들은 동시에 공격을 정지했 다. 그러나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석보를 둘러 싸며 원진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소영은 천천히 문전으로 나가 낮은 소리로 불렀다. "노선배님, 좀 쉬십시오." 손불사는 몸을 돌려 천천히 들어 왔다. 그의 시선은 소영의 눈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소영의 맑은 눈빛에서 은은히 쏟아지 는 신광을 보았다.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구나.' 그는 돌연 긴 한숨을 내쉬며 감탄을 발했다. "이 늙은 거지는 주의하지 않았구려. 이 사람의 무공은 실로 무 림 중에서 처음 보는 기골이오!" 소영은 자기를 칭찬하는 소리에 눈을 들어 늙은이의 얼굴을 바라 보니 이마에 약간 땀이 나 있을 뿐 신색은 여전히 정정했다. "과찬의 말씀이올시다. 노선배님의 공력의 심후하심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할 뿐이올시다." "허나.... 허나 이 늙은 거지도 이제 더 지탱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오. 다만 몇 모금 숨을 헐떡거릴 수 있는 공부가 있어 겨우 늙은 몸의 피로를 반쯤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오." 손불사의 혼원동자공은 그 기초가 단단하고, 정력이 심후한 데다 가 장세가 강인하여 스스로 피로한 몸을 회복할 수가 있었다. "주승, 반개 및 총타주의 부상은 가볍지 않은 것 같소이다. 한 시간 이내에 복원이 가능하지 못하다면....." "관계 없소. 이 석보는 꽤 튼튼하게 보이는군. 그대는 보의 정상 에 올라 가서 따로 문이 있는가 조사해 보시오. 비록 다른 곳이 있 다고 할지라도 문호가 협소하니 한 곳씩 맡아서 지킨다면 적은 진 공할 수가 없을 거요. 심목풍이 천군만마를 몰고온다 할지라도..." 소영은 석보의 정상으로 올라 갔다. 석보는 푸른색 네모진 돌을 이층으로 쌓았고 넓이는 오십여 평, 높이는 이십여 장쯤 되어 보였다. '심목풍은 이 석보를 무슨 일로 축조했을까?' 석보 안은 매우 깨끗했다. 소영은 천천히 이층으로 올라 갔다. 사면에는 각기 하나의 조그마한 환기창이 있었는데 그것은 철판 으로 여닫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소영은 심중 퍽 괴이하게 생각했다. 이층으로 오르는 층계 위에 또 하나의 견고한 철문이 보였다. 소영은 철문을 밀고 옥상으로 올라 갔다. 아래를 보니 어느새 흑 의 무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쓰러진 시체나 끊어진 팔다리도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다만 보이는 것은 땅에 얼룩진 핏자국. 주위는 귀기어린 고요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층과 아래층으로 통하는 철문 을 굳게 잠가 놓았다. 손불사는 석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소영이 낮게 기침을 하고 불렀다. "노선배님!" 손불사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오? 소영의 시선이 태산 이호에게로 돌아갔다. "저 두 분의 상처가 무거워 속히 약을 쓰지 않으면 구하기 어려 울 것 같습니다." 손불사는 품을 한참이나 더듬다가 옥합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 옥합에는 열두 알의 단약이 들어 있소. 그들에게 한 알씩 복 용시키면 오늘밤 삼경 안에는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오." 소영은 옥합을 받아 태산 이호에게 각기 한 알씩 복용시켰다. 어느덧 해는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석보에 들어온 지도 두어 시간이 지났다. 기괴하게도 이 시간까 지 적은 석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심목풍은 석보 안에 있는 적을 아주 잊어버린 것인가? 소영은 여러 사람의 얼굴을 돌아 보고 그들이 거의 기력이 회복 되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주승이 먼저 좌식에서 깨어났다. 사방을 둘러 보며 소영에게 물 었다. "흑의 무사들은 석보를 공격하지 않았소?" 소영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직......" 뒤이어 반개 심철와, 그리고 사마건이 깨어났다. 마문비도 깨어나 옷을 찢어 몇 군데 상처를 싸맸다. 소영이 물었다. "총타주의 상세는 어떠하신지요?" "내력은 이제 겨우 회복이 되었소. 외상은 살갗이 좀 상했으나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오." 말인즉 다시 싸울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사마건은 땅바닥에 포개어 놓은 금륜을 집어 갈무리하였다. "참으로 참혹하고 치열한 악전이었소." 주승이 옆에 뒹구는 술호로를 집어 들어 몇 번 흔들어 보고 탄식 했다. "아, 주화상의 술이 다하였구나!" 그런가 하면 반개는 또 앞에 놓인 쇠솥을 땅땅 두드렸다. "애석하도다. 밥지을 쌀이 한 톨도 없으니....." 사실 모두들 허기가 져서 말이 아니었다. 연석에서 음식에 독이 있을까봐 제대로 얻어 먹지도 못했고, 또 거기다가 일생 처음 당하 는 악투를 벌였으니 실로 배고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후에 태산 이호도 깨어났으나 원체 상처가 깊었으므로 정신 은 말짱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손불사는 입구에 기대어 밖을 살피고 있었다. 소영은 천천히 문간에 이르렀다. "노선배님께서는 잠시 교대하시지요. 이곳은 제가 보겠습니다." 이때 봉죽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할 말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손불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 갔다. 봉죽은 신색이 많이 호전된 것 같았으나 몸의 상처는 무거웠다. "소비가 몇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심목풍은 불로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사옵고, 독물을 넣어 죽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를 굶어 죽을 때까지 가두어 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녀는 숨이 차서 말하기 어려운 듯 잠시 말을 끊었다. 여러 사람은 가뜩이나 궁지에 빠진 데다가 이런 말을 들으니 모 두 안색이 흐려졌다. "우리는 오늘밤 포위를 뚫고 나가야 합니다. 소비는 그들의 무공 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 사람만이라도 탈출한다면 성공입 니다." 소영은 문간에 서서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열려 진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자리로 돌아 왔다. 이때 봉죽은 더욱 힘에 겨워 말소리가 가늘어졌다. "소비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씀 올리겠어요. 이곳을 돌파한 후 여러분은 동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곳은 산을 의지하고 있어 서 일단 산중에 들어 갈 수만 있다면 안심이....." 봉죽은 또 한참 동안 숨을 몰아 쉬었다. 손불사가 입을 열었다. "내 한 가지만 묻겠소. 아가씨는 어떤 좋은 방책이라도 있단 말 이오?" 봉죽은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예.... 소비가 하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참말입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심목풍은 매일 밤 삼경만 되면 반드시 한 시 간 가량 좌식하므로 포위를 돌파하는 시간은 바로 이 때가 가장 적 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소비는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까 제가 여러분을 따라가는 것은 시간만 지체시킬 뿐이니....." 그녀는 차츰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몇몇 사람은 거의 헛소 리같이 듣고 있었다. 말소리도 점점 가늘어지고, 모습도 역시 기름 이 다한 등잔불과 같았다. 소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아까 태산 이호에게 단약을 먹일 때 그녀에게도 한 알을 복용시켰다. 다른 사람은 모두 기력을 회복하였건만 이 아가씨는 왜 점점 의기를 잃는단 말인가. 봉죽은 계속해서 띄엄띄엄 말했다. "..... 심목풍이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오나, 장중에 팔대 혈영화신을 길러 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공이 대단 합니다. 그들 여덟 화신은 모두 붉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 그들을 만나면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합니다.... 아, 소비는 신분 이 낮은 몸이라 아는 것이 이것밖에 없사옵니다. 여러분께서는 부 디 옥체를 보중하십시오..... 소비는 한 발 먼저 가나이다." 하더니 돌연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자기의 천령혈을 치려고 했 다. 손불사는 만고풍상을 겪은 늙은이다. 봉죽의 하는 말을 듣는 가 운데 이미 그녀가 자결할 생각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봉죽의 손이 자신의 이마를 치려는 그 전광석화 같은 찰나에 손 불사 노인의 손가락에서 한 줄기 예리한 경풍이 날아가 그녀의 손 을 쳤다. "아!" 가벼운 외침이 들리고 그녀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면서 내려졌다. 손불사가 엄숙하게 말했다. "봉낭자, 왜 죽으려고 하는가?" 봉죽의 눈에는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소비는 무공이 변변치 못합니다. 살더라도 여러분의 바쁜 길에 짐만 될 것이오니....." 손불사는 길게 탄식을 불어 냈다. "늙은이는 고의로 아가씨가 속인다고는 믿지 않소. 그러나 아가 씨가 죽으려 하는 심정은 대단히 복잡한 것 같구려. 아가씨는 심목 풍에게 다시 잡혀 백화산장의 엄한 규율에 다스려지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소! 그렇지 않나?" "아가씨의 심중으로는 아직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할지 라도 그러한 의식은 벌써 아가씨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을 것이니. ......." 봉죽은 가늘게 한숨을 토해 냈다. "노선배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소비는 정말 그런 생각이 듭 니다." 이 때였다. 돌연 사람의 그림자가 번뜩하더니 문소리가 삐걱하고 났다. 동시에 한 명의 흑의 무사가 석보 안으로 뛰어 들어 왔다. 손불사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돌연 오른손을 빠르게 휘둘러 사나 이가 열고 들어 온 문을 닫아버렸다. "죽일 필요는 없소. 생포...." 말과 동시에 마문비는 벌써 문간으로 날아 이르렀다. 다른 사람 은 모두 상세를 회복했으나 손을 쓰지는 않았다. 오직 마문비가 비 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 섭선을 들고 몸을 날린 것이다. 흑의 무사는 이내 일장을 들어 마문비의 섭선을 막고 한쪽으로 몸을 비키었다. 바야흐로 손불사의 일장이 나아가려는 순간, "마형!" 마문비, 손불사 두 사람은 동시에 찔끔했다. "당신은 누구요?" 마문비의 묻는 말에 사나이는 신색을 가다듬고 말했다. "본인 향비올시다." "야, 향형이었구려!" "저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석보로 뛰어 들었소이다. 한 가지 긴 한 일이 있어서....." 마문비는 실내의 일행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뜻이 같은 지기이니 향형께서 무슨 고견이 계 신지 거리낌 없이 말씀하십시오." 향비는 일행을 돌아 본 다음 낮은 소리로 말했다. "본인과 중주이고는 금란 은란, 두 아가씨의 비호 아래 이미 일 전의 시각을 약속하였소이다. 그리하여 특별히 마총타주께 통지하 는 바이오." 소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갔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었길래 그림자도 볼 수 없었습니까?" "그대가 볼 수 있었다면 심목풍 역시 발견해 냈을 것이외다." 봉죽은 금란, 은란이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라구요? 금란, 은란 두 분 언니도 왔습니까?" 향비는 힐끗 봉죽을 살폈다. "왔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늙은 도적 등과 함께 흑의 무사들 가운데 섞여 있지." 소영이 물었다. "그 늙은 거지와 중주이고는.....?" 돌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손불사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 어딜!" 잇따라 아이구!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 다. 손불사는 석보에 접근하는 두 흑의 무사를 발견하고 일장을 먹 였던 것이다. "혹시 자기 편 사람을 상한 것이나 아닌지?" 향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걱정할 것 없소이다. 늙은 도둑놈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는 결코 경망하지 않을 것이니....." "그럼 당신은 또 나가야 하나요?" "아니, 가지 않아도 되오. 제가 나간다면 일부러 부상자 흉내를 내야 하니까....." 마문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향형께서 이곳에 머무르신다면 더할나위 없는 일이지요. 우리는 적지않이 실력이 증가된 셈이올시다." 신투는 익살맞게 웃었다. "헤헤..... 늙은 도둑이 두어 해 더 살려고 할진데 마땅히 이곳 에 머물러 있어야지요....." 말하며 그는 품속을 뒤져 한 장의 지도를 꺼내 땅바닥에 펼쳤다. "이것은 산장 주위의 그림이외다. 나가는 길과 적의 잠복 지점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습니다." 지도란 바람에 이제까지 벽에 기대어 있던 사람들까지도 일제히 물려 들었다. 그림은 망화루라는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길과 매복이 펼쳐져 있었다. 여러 사람이 이미 보았던 장소도 많이 표시 되어 있었다. 향비는 망화루 뒤의 꽃숲으로 둘러싸인 곳을 손가락을 눌렀다. "은란이 탐지한 소식에 의하면 두 분 노인은 바로 이곳에 감금되 어 있답니다." 소영은 갑자기 가슴이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꾹 참고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향비는 말을 이었다. "이 집 주위는 삼엄한 경비가 깔렸소. 또한 이 사본에 그려진 부 위는 백화산장 중의 요충으로 경비가 삼엄하지 않은 곳이 없소이 다." 이때 마문비, 향비, 소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영의 부모가 이 석보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향비가 이런 말을 하자 모두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주승 반개가 돌연 한 마디 했다. "당신들은 무슨 말을 하는 거요?" 향비는 머리를 들어 힐끗 주승을 건너다 보았다. "뭐라구요? 당신은 아직도 모른단 말이오?" "내게 누구 한 사람 말해 준 사람이 없으니 어찌 알겠소?" 마문비는 이 일의 중대함을 새삼스레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지 금 호걸들은 어떻게 하면 백화산장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을까 근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다시 경계가 삼엄하기 짝 이 없는 산장의 요충으로 돌입하여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니 실로 아연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소영은 도무지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제 부모가 심목풍에게 포로가 되어 망화루 뒤의 이 흑옥에 갇혀 있으니....." 그는 시선을 마문비와 향비에게 쏟았다. "..... 저는 마총타주와 향비 어른의 도움을 받아 이 백화산장에 섞여 들어 온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부모님을 구하자는 것이지 요. 그러나 여러분께서는 이 일과 관계가 없으시니 우리들이 사람 을 구하러 가는 틈을 타서 이곳을 탈출하시면 될 것입니다." 반개가 돌연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소영은 잠시 궁리를 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소영이올시다." 이 말이 새어 나오자 주승, 반개 등은 깜짝 놀라 일제히 소영을 바라 보았다. 급기야 주승은 고개를 들고 길게 탄식을 토해 내면서 중얼거렸 다. "당신이 그 소영이라.....? 아! 이 세상에는 다시 또 몇 명의 소 영이 있단 말인가? 나 화상은 이미 두 사람의 소영을 보았다. 그러 나 아직도 만나 보지 못한 소영이 또 얼마나 있을고....." "소인의 이름은 틀리지 않소이다." 소영은 상대방이 알아 주든 말든 그리 관심두지 않았다. 짧게 한 마디 하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문비가 입을 열어 부연하였다. "이 사정을 말하면 길어집니다. 이분은 진정한 소영일 뿐만 아니 라 일찍이 백화산장의 셋째 장주로서......"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한 모든 이야기를 거짓없이 털어 놓았다. 반개는 이야기를 다 듣고 새삼스럽게 소영의 얼굴을 건너다 보았 다. "과연 야명주는 흙 속에 들어 있다 하여 감추어지기는 어렵구려. 당신은 이 비렁뱅이와 일찍이 만났던 일을 기억하시오?"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영은 나직이 말했다. "그럼 악소저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것은 저도 모르고 있습니다." 반개는 격세지감이 없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마문비를 향했다. "총타주,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이 비렁뱅이도 한몫 끼겠소이 다." "하하하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나 주화상은 꽁무니를 뺄 래야 뺄 수도 없구먼!" 사마건이 공수의 예를 하고 소영에게 말했다. "소형, 나는 신복(神卜)을 자부해 온 터이올시다. 그러나 이번에 는 소형이 일신에 절기를 지닌 고인임을 알아 보지 못했으니 점쟁 이의 면목이 없구려. 그 벌로 나도 한몫의 힘을 하겠소이다." 소영은 포권의 예로 맞으며, "여러분의 정성, 진실로 감격해 마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던 태산 이호의 목소리가 돌연 여 럿의 귓전을 때렸다. "우리 형제 아직 완쾌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미력한 목숨을 바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소영이 예를 하려 하자 봉죽이 돌연 무거운 몸을 일으켜 큰절을 하는 아닌가. "셋째 어른께서는 소비를 괴이하다 여기지 마십시오. 소비 눈은 있어도 눈동자가 없사와 셋째 어른의 왕림하심을 알아 뵙지 못했나 이다." 소영은 정중하게 절을 하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천만의 말씀. 봉아가씨, 일후에는 우리 서로 남매처럼 지냅시 다." "소비 어찌 그런 방자함을....." 손불사가 숨을 토해 내며 입을 열었다. "마총타주, 이 늙은 거지는 마땅히 일을 도와야 될 줄 아오." 소영은 이미 늙은이의 무공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실로 얻기 어 려운 원조자가 아닌가. 그는 정중히 손을 맞잡고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노선배님." 손불사는 그저 담담히 웃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였다. 마문비는 실내에 있는 호걸들이 전부가 즐겨 도우리라고는 생각 지 못했던지라 내심 크게 기뻐하였다. "여러분께서 의로운 일에 즐거이 가담하셨으니 소인은 소형을 대 신하여 크게 감격하는 바올시다." 그는 손을 맞잡고 한 사람씩 돌아 가며 예를 하였다. "우리는 백화산장에 들어 오기 전에 이미 사람을 구하는 의논을 한 바 있습니다. 오늘밤 사경을 기하여 결행하기로 결정을 보았습 니다." 그는 품 속에서 긴 비단 헝겊을 꺼내서 왼팔에 감았다. "여러분께서도 흰 헝겊이 있으시면 모두 팔에 감으시어 식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리고는 향비를 향해 물었다. "향형께서는 또 하실 말씀이 계신지?" "여러분께서는 대단히 시장하실 것입니다. 이 도둑놈이 여러분에 게 약간의 음식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가뜩이나 시장한 창자가 더욱 쪼르륵 소리가 나는 듯했다. 손불사와 소영도 예외일 수 없어 참을 수 없는 시장기를 느꼈다. "허허허허......." 향비는 흔쾌히 웃고 품 속에서 허름한 자루를 꺼내 아가리를 벌 렸다. "자, 드시오!" 그는 종이 꾸러미에 싼 물건을 차례차례 나누어 주고 또 꾸러미 속에서 흰 헝겊을 꺼내어 나누어 주었다. 마문비는 종이 꾸러미를 풀었다.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고기 가루군요." "늙은 도둑이 산장 밖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 얼마 되지 않소이 다. 단지 여러분께서 잠시 배고픔을 잊으신다면 만족하겠습니다." 여러 호걸들은 소고기 가루를 나누어 먹고 어느 정도 허기를 면 했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간간이 소슬한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를 휩쓸었다. 하늘에는 자욱이 구름이 끼어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죽은 듯이 조용하여 발소리 하나라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 다. 신투 향비는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벌써 초경이 지났다. 신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호걸들은 비록 적은 음식이나마 나누어 먹고 허기를 면했는지라 생기를 되찾았다. 태산 이호 역시 상처가 깊었으나 단약을 먹고 다소 음식을 먹은 뒤라 정신이 점점 맑아졌다. 상처를 면밀히 싸맨 다음 그들은 칼을 짚고 일어섰다. 손불사는 여러 사람이 모두 일어서는 것을 보고는 앞장을 섰다. "늙은 거지가 길을 트겠소!" 향비는 얼른 손불사의 신변에 따랐다. "늙은 도둑이 손형의 부원수 노릇을 하겠소." 손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문 밖으로 나갔다. 돌연 신투 향비는 품 속에서 두 덩이의 검은 물건을 꺼내 앞으로 던졌다. 그 물건은 건너편 화수림에 가서 떨어져 펑! 펑!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을 일으켰다. 이어서 번뜩거리는 남색 인광과 화염이 작렬하여 주위의 나무들 까지도 불태울 정도였다. 밝은 빛은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여러 사람은 빛을 통하여 나무 숲을 환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쥐새끼 한 마리 어른거리지 않았다. 소영은 기이한 생각을 하며 사방을 살폈다. '이 검수들이 모두 땅속으로 꺼졌단 말인가!' 바로 이때 두어 번 활 시위 소리가 공간을 뚫고 들려 왔다. 이어서 두 가닥 화살이 어둠을 뚫고 곧장 하나는 손불사에게로, 하나는 마문비를 향하여 쏘아 왔다. 손불사는 오른손을 내밀어 날아 오는 화살을 잡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화살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하마터면 손 에서 놓칠 뻔하였다. "여러분, 조심하시오!" 이 소리와 동시에 잇따라 날아 오는 화살이 마문비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마문비는 곧 소매 속에서 섭선을 꺼내어 화살을 쳤다. 팍! 하는 소리를 내고 화살은 공중으로 튀었다. 숲에 붙은 불은 차츰 화세를 돋구어 갔다. 그러나 하나 불을 끄러 오지 않았다. 향비가 불빛으로 길을 알아 보고, "제가 앞서서 인도하겠소!" 하며 선뜻 왼쪽으로 꺽어 돌아 갔다. 두 개의 화살이 날아 온 후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향비가 길을 안내하며, 사, 오십 장을 나아가도 여전히 조용했 다. 지나 온 곳은 불이 이미 꺼져 있었다. 결국 그곳에는 한 사람 의 적도 없었던 것이다. 밤은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듯 음산하고 어두웠다. 호걸들은 모두 안력이 특수하여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능력을 지녔지만 이 때만은 정말 다섯 손가락을 내밀고도 볼 수 없 을 정도였다. 향비가 낮은 소리로 일렀다. "각자는 각기 왼손으로 앞 사람의 옷깃을 잡고 오른손은 자유로 이 불시의 적을 막는 것이 좋겠소." "늙은 거지 앞장 서겠소. 한 점의 조짐이라도 있으면 즉시 알릴 터이니 여러분은 미리 준비하시오!" 모든 사람들은 손불사, 향비를 순서로 옷깃을 잡고 뒤따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연 구역질나는 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손불사는 낮은 소리로 일렀다. "큰 독사가 다가 오는 모양이오. 모두들 조심하시오!" 향비가 화섭자 하나를 꺼내 불을 밝혔다. "헉!" 불빛에 바라보니 선두에 넉 자 길이의 큰 뱀이 보였고 그 뒤로 보이는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뱀의 테가 아닌가! 마문비가 썩 나서면서 소리쳤다. "이 많은 독사를 모조리 쳐 죽일 수도 없는 일. 불로 태워 퇴치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소!" 이럴 즈음 향비의 화섭자는 이미 다 타서 꺼져 버렸다. 갑자기 전율하는 뱀의 소요가 귓전을 어지럽혔다. 낮이라면 그다지 겁내는 사람이 없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밤이다. 섣불리 거동을 할 수 없 는 밤이라 큰 난점이었다. 향비는 또 화섭자 하나를 붙였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독사떼는 벌써 코 앞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비린내가 풍겼다. 토할 것만 같 았다. 먼 곳에서 돌연 우렁찬 소리가 들려 왔다. "그대들은 이미 독사떼에게 포위되었다. 명령일하에 독사떼는 그 대들을 물어 뜯으리라. 그대들은 무공이 아무리 놀랍다고 해도 지 금은 어두운 밤이니 명심하라!" 말소리는 잠깐 그치더니 사이를 두었다가 또 들렸다. "상천은 좋은 임을 덕으로 다스리노라. 노부 또한 사람 죽이기를 원치 않는다. 노부가 잠시 여유를 줄 터이니 그대들은 독사에게 물 려 죽을 것인가. 아니면 병기를 놓고 항복할 것인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 노부는 북을 쳐서 시간을 잴 터이니, 북소리가 열 번 울려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노부는 독사를 놓아 그대들을 죽 이리라." 말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북소리가 둥! 하고 한 번 울렸다. 53. 독사진(毒蛇陣) 손불사 노인은 사방에 득실거리는 독사의 무리를 보았다. 고개를 쳐든 놈, 혀를 날름거리는 놈 등 꾸물꾸물 움직이며 여러 호걸들을 포위하고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그 수많은 뱀의 무리는 제자리에서 득실거리고 있을 뿐, 더 앞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누군가 조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손불사는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늙은이다. 한 번 보고 독사의 무 리가 뱀을 잘 다루는 명수에게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꽃나무 숲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독사가 있단 말인가? 실로 뚫고 나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겠다."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도무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문비가 낮은 소리로 옆에 선 신투 향비에게 속삭였다. "향형, 불을 지르는 것이 어떻겠소?" 향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을 지르는 일 외 에는 달리 방책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향비의 손에 있는 화섭자는 다 타버려, 불꽃이 번쩍 하더니 아주 꺼져 버렸다. 갑자기 주위가 깜깜해졌다. "우리가 불놓을 것을 생각한 이상 백화산장의 사람들도 분명 그 런 것을 생각했을 것이오. 그러니 거기에 대한 방비를 미리 해 놓 았을지도 모르오." 마문비가 다시 말했다. "지금 정세로는 불을 놓는 길만이 뱀을 퇴치할 수 있는 방책인 듯합니다. 만일 심목풍이 이미 준비를 해 놓았다면, 우리는 먼저 손을 쓰고 그 반응에 따라서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것 같소이 다." 사마건이 돌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여러분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제가 점괘를 풀어 보니 우리 들 가운데 한 사람도 독사에게 피해를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 아래서 여러 사람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어, 한 사람도 그의 점괘에 웃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하찮은 말이 여러 사람의 마음을 크게 위로한 점만 은 틀림이 없었다. 손불사 노인이 입을 열었다. "주위 사방에는 꽃나무가 많지 않고, 또 풀도 무성하지 않소. 그 러니 불을 지핀다고 해도 뱀의 무리를 퇴치하기는 용이하지 않을 거요."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 습니까?" 이것은 마문비의 말이었다. 신투 향비가 가볍게 탄식했다. "아, 만약 중주쌍고가 이곳에 있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뱀 따위 로 곤란을 받지 않았을 것인데....." 상팔이 전문적으로 골동품이나 기이한 보물을 많이 지니고 있다 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기이한 물건들로 혹시 독사를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기도 했다. 두 번째 북소리가 울렸다. 소영의 얼굴에도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그는 성큼성큼 뱀의 무 리에게로 다가갔다. '이렇게 많은 뱀 가운데에는 필시 우두머리가 있을 것이다. 그 놈을 먼저 죽여야 한다!' 그는 단단히 벼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수만 마리의 뱀이 꿈틀 거리는 가운데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가지가지 뱀의 머리가 우굴거렸다. 다가 섰다가는 필경 물릴 것이 분명했다. 소영은 가슴이 막히고 머리가 쭈뼛해졌다. 뱀의 무리는 일종의 제약을 받고 있는 듯 비록 머리를 쳐들고 혀 를 날름거리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은 스스로의 무공을 잘 안다. 그러나 땅에 가득 널린 뱀떼 앞에서는 오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고 나직이 속삭이는 사람이 있었다. "저는 동해에 있으면서 독물을 몰아 내는 법을 익혔고 또 곧잘 뱀을 다루기도 하였습니다만, 오늘 이같이 많은 떼를 보기는 처음 이외다. 내 능력이 모자람이 부끄럽소이다." 사마건이었다. 그는 동해 신복아라고 불릴만큼 뛰어난 재주꾼이 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뱀을 몰아내는 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 었다. 소영은 낮은 소리로 받았다. "사마형의 말씀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무능하다 하여 포기할 수는 없지 않소." 잠시 생각을 하던 사마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만 마리의 독사가 우글거리고 있으니 죽여서는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이고..... 이 뱀의 무리를 퇴치하자면...." 사마건은 잠시 침음(沈吟)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뱀의 무리가 행동하는 것을 보니, 분명 무슨 포진을 하고 명 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소이다. 그러니 필시 이 독물들을 조종하 는 자가 있을 것이오. 적을 치려면 우선 장수부터 치라고 했습니 다. 우리가 먼저 찾을 사람은 이것들을 조종하고 있는 사람인데... ....." 소영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런 방법이 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마형, 또 다른 방법이란 무엇인지요?" 사마건은 즉시 대답했다. "우리가 각자 하나씩 횃불을 만들어 독사들을 몰아내며 병기로 달려드는 놈을 죽여 버리는 것이지요." 역시 그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과연 이렇듯 많은 수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북소리가 둥! 하고 울렸다. 소영은 그것이 일곱 번째 울린 소리로 알고 있다. "이제 일곱 번을 울렸으니 앞으로 세 번만 더 울리면 이것들은 모두 발동을 할 것이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손가락을 내밀어도 보이지 않 을 정도였다. 게다가 주위에 나무가 많지 않아 이들이 한 번 움직 이기만 하면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소영의 눈에 독사의 습격으로 도처에서 쓰러지는 호걸들의 모습 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새삼스레 여러 호걸들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그들은 모두 한 장소에 둘러 서 있었으나 별로 이렇다 할 묘책을 생각해 내지 못하여 꿀먹은 벙어리처럼 멍청하게 서 있을 뿐이었 다. 여덟 번째 북소리가 울렸다. 소영은 가슴이 답답해 왔다. '호걸들이 이처럼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모두 나 때문이다, 내 어찌 이것을 모르랴!' 그는 스스로 위험 속에 앞장 서 뛰어들 결심이었다. "지금 전세가 긴박하니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소이다." 그는 손을 뻗쳐 주위에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꺽어 냈다. "뱀떼가 발작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책이 못 될 것입니 다. 그러니 제가 먼저 나가서 손을 쓰겠소." 그는 말하고 나뭇가지를 휘저으며 앞으로 나갔다. 소영의 손에 든 나뭇가지가 부채처럼 좌우를 휩쓸었다. 뱀떼가 난무하고 나뭇가지가 울리는 바람소리가 거세게 일어났 다. 여기저기 나동그라지는 놈, 머리가 잘리는 놈, 순식간에 뱀들 이 죽어 자빠졌다. 사마건이 금환을 거두고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나뭇가지로 무기를 삼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그는 즉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뒤에 섰던 호걸들 역시 반나절이나 궁리를 해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지 하는 수 없이 모두 소영이 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나뭇가지를 꺽어 들었다. 나뭇가지는 모두 크지는 않았으 나 잎이 무성하게 나 있어서 좌우로 한 번 휩쓸어 대자 적지 않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일류 고수들의 내력이 가지 끝에서 발 출되어 그 위력은 대단했다. 순식간에 주위에 너저분하게 뱀의 머리가 나둥그러지며 꿈틀거렸 다. 편각(片刻)간에 벌써 수천 마리가 나둥그러졌다. "둥.... 둥...." 북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갑자기 잡목 사이가 시끄러워졌다. 뱀들이 시끄럽게 난무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걸들이 쉽 쓰는 위력은 대단했다. 나뭇잎 끝으로 조금만 막아도 독사들은 동 강이 나곤했다. 그러니 일시에는 십여 장 안으로 달려든 놈이 없었다. 돌연 날카 롭고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마건이 듣고 큰 소리로 여러 사람을 일깨웠다. "이 소리는 큰 뱀을 조종할 때 지르는 소리요. 여러분 조심하시 오." 그의 말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돌연 두 줄기 시퍼런 불길이 여러 호걸들을 향하여 곧장 달려 왔다. 그 시퍼런 불길은 가까와질 수록 더욱 커졌다. 순식간에 이십척 밖에 이르렀다. 소영은 예리한 눈으로 다가 온 괴물을 노려 보았다. 그것은 바로 거대한 이무기의 안광이었다. 가슴이 섬뜩하여 얼른 사마건에게 물었다. "사마건, 이 거대한 뱀을 우리는 어떻게 대적해야 하오?" 사마건은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 "과연 거대한 뱀이로구나!" 그는 나직이 일렀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극독이 묻은 암기로 저놈의 눈을 쏘는 거요!" "가르침을 따르겠소!"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면서 손에 든 나뭇가지를 끊임없이 휘둘러 댔다. 바로 이때 북쪽에 몰려 있던 독사의 무리들이 분분히 양쪽으 로 물러나며 한 가닥길을 터 놓은 게 아닌가! 여러 사람의 시선이 집중한 가운데 한 사람의 검은 옷을 입은 무 사가 뱀떼가 열어 놓은 길 사이로 급히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기 이한 것은 사나이가 나아감에 따라 좌우에 우글거리던 독사들이 슬 금슬금 양쪽으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소영은 그 모양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이 사람의 무공이 얼마나 높길래 좌우에 물려 있는 독사들을 저 절로 물러나게 한단 말인가?' 그는 원래 두 손에 든 나뭇가지를 한 손에 모아 쥐고 바야흐로 큰 이무기의 시퍼런 두 눈에다 쏘아 붙이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돌연 사나이가 등장함으로 인하여 생각을 돌렸다. 무엇보다 할 일은 다가 오는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 다. 소영은 손을 번쩍 들어 달려 오는 사람을 향해 암기를 던질 자 세를 취했다. 바로 이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전해 왔다. "형님, 소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소영은 그 소리를 듣자 즉시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 들였다. 바로 금산반 상팔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는 즉시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말했다. "소영이 여기 있소." 흑의 무사는 소영의 음성을 따라 즉시 그의 신변으로 달려 왔다. 여러 호걸들을 싸고 있던 독사의 무리들은 상팔이 달려 오는 길을 따라 저절로 좌우로 물러나면서 길을 터 놓았다. 소영은 손에 든 나뭇가지를 한 차례 휘둘러 넓은 공간을 만들었 다. 상팔은 즉시 그의 신변에 이르렀다. 아무 사정도 모르는 사마 건은 흑의 무사가 오는 것을 보자 크게 놀라 상팔의 등덜미를 향하 여 일장을 먹였다. 소영은 즉시 사마건의 장풍을 막으며 나직이 알려 주었다. "우리 편이오." 금산반 상팔은 씽긋 웃어 보였다. 보니 그의 수중에는 한 덩이 오리알만한 물건이 들려 있었는데, 한 줄기 짙은 웅황(雄黃)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때 주위를 둘러 싸고 있던 독사들은 사방으로 분분히 흩어지면 서 머리를 발딱 쳐들고 입으로는 퍼런 김을 토해 냈다. 감히 더 접 근을 하지 못했다. 시퍼런 불길을 쏘아내고 있던 큰뱀도 역시 제 자리에 멈춘 채 더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상형의 손에 든 물건이 무엇이길래 이 독사들이 꼼짝을 못한단 말이오?" "이건 전문적으로 독을 물리치는 데 쓰는 유황이외다. 이것만 손 에 들고 있으면 백 가지 독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많은 독사들이 덤벼든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직도 나뭇가지로 뱀을 쫓고 있는 여러 호걸들을 향하여 크게 소리쳤다. "여러분, 손을 멈추십시오." 여러 호걸들은 비록 무공이 절륜하다고는 하나 한참이나 독사떼 와 씨름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지친 듯이 보였다. 소영의 외침을 듣자 그들은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여러 사람이 영문을 몰라 바라보는 중에 상팔이 한바탕 주위에다 대고 웅황을 휘둘렀다. 주위에 들끓던 독사들은 일제히 물러났다. 모두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상팔은 스스로 앞장을 서며 낮은 소리로 일렀다. "여러분께서는 제 뒤를 따르십시오." 그는 큰 걸음으로 발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그 앞에 있던 독사들은 슬금슬금 좌우로 물러나서 한 줄기 길이 트였다. 이때 일행은 비로소 대망을 발견하고는 모두 크게 놀랐다. 그러 나 대망도 역시 잔뜩 엎드려 있을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날카롭게 귀를 찢는 휘파람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죄게 했다. 소리에 따라 독사떼들은 다시 미친 듯이 날뛰었으나 조금도 앞으 로 나오는 놈은 없었다. 상팔이 앞장을 서서 달리니 편각 사이에 잡목 숲을 뚫고 나갔다. 비로소 독사진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머리를 들어 보니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이 보였다. 바 로 백화산장의 요충지 망화루 후면이었다. 이때 망화루에는 한 점의 등불도 없이 귀귀한 살기가 감돌 뿐이 었다. 상팔은 망화루 뒷편 검은 그림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곳이 바로 두 분 노인께서 갇혀 있는 곳입니다. 두구, 금란, 은란, 모두 그 근방에서 지키고 있지요. 심목풍은 만 가지 일 가운 데 한 가지 일을 생각 못했던 것이외다. 우리들이 섞여 들어 간 흑 의 무사들 가운데 은란 아가씨가 지세에 밝고 또한 인연이 많은지 라 백화산장의 사람들 가운데에도 암암리에 그녀를 도와 주는 사람 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일은 잘 진행될 것이외다." 상팔은 단숨에 쭉 설명했다. 소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부모님께서는 확실히 저 어두운 집에 있습니까?" "은란 아가씨가 탐색한 바에 의하면 두 분께서는 확실히 그 안에 있습니다." "그 방에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것은 잘 알 수 없소이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우리는 가까 이 접근할 수도, 그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었으니까요." 상팔은 이렇게 말하고 시선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소영은 다시 낮은 소리로 일렀다. "좋소. 그럼 우리가 가서 조사해 봅시다." 상팔이 말했다. "은란의 말에 의하면 그 문은 기이하고 견고해서 아무리 고절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술 방법이 없다고 하더이다." "그럼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단 말입니까?" "가장 좋은 방법이란 열쇠를 찾아 내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도나 보검으로 그 철문을 가로지른 빗장을 때려 부수는 방법밖에 는 없습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지대가 평탄하여 만일 적이 쳐들어 온다면 막기가 어려 을 것이외다. 우리는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 없으니 먼저 저리로 가서 조사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선을 들어 바라보니 그 흑옥의 문 앞에는 두 사람의 흑의 무사 가 파수를 보고 있었다. 상팔의 인도를 받으며 소영은 몸을 낮추고 집 가까이로 갔다. 소영은 수라지력으로 일격에 두 사람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상팔이 낮은 소리로 불렀다. "두제!" 그러자 왼편에 서 있던 흑의 무사가 낮게 대답을 하고는 급히 달 려 왔다. "형님, 저는 이미 큰형님이 오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바로 냉면철필 두구였다. 상팔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 곳에 몇 사람의 무사가 있는가?" "몇 놈이 의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저와 늙은 거지가 함께 손 을 써서 죽여 버렸습니다." "은란 아가씨는 돌아왔소?" "그럼 그것을 모릅니까?" 두구는 도리어 반문했다. 상팔이 대답하기 전에 소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두제!" 그제서야 두구는 소영에게 읍을 하고 인사를 차렸다. "큰형님이 변장을 하신 후로는, 저는 몇 차례나 알아 볼 수가 없 었습니다." 소영은 미미한 웃음으로 대답을 하고 물었다. "우리가 저 흑옥의 문을 부수고 들어 갈 방법은 없겠소?" 두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소제와 늙은 거지가 이미 몇 차례 시험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 나 도무지 그 안으로 들어 갈 방법이 없습니다." "음." 소영은 낮게 신음을 토해 냈다. "내가 나가 보겠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눈을 들어 보니 흑옥은 온통 검은 그림자를 드리울 뿐 도무지 무 슨 물건으로 지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영은 손을 내밀어 검은 철문을 밀어 보았다. 그러나 문이 어찌 나 단단한지 손으로 한 번 미는 정도로는 추호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철문이 감히 나를 막을 수 있을까?' 그는 다리를 들어 그 철문을 다시 한번 밀어 보았다. 그러나 철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자물쇠를 찾기 전에는 안 되겠군!" 소영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키가 작고 조그마한 흑의 무사 한 사람이 급히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그 흑의 무사는 마문비에 게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마어른, 소녀 은란입니다. 셋째 어른은 어디 계신가요?" 마문비는 소영을 가리켰다. "이분이야!" 은란은 천천히 소영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비로소 알았다는 듯 이 몸을 굽혀 예를 했다. "소녀, 소공자에게 청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란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돌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왜 냐하면 그들 호걸들은 모두 소영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지하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영은 입을 열었다. "향형과 중주형제께서 낭자가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고 했소." "공자님의 신위에 어찌 소녀의 공이 따르겠습니까!" 그녀는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소녀가 열쇠 하나를 얻었는데 이것으로 철문을 열 수 있을지 모 르겠습니다." 그녀는 품 속에서 검게 윤이 나는 열쇠 하나를 꺼내어 소영의 손 에 넘겨 주었다. 소영은 자물쇠를 들고 자세히 바라본 다음, 다시 철문을 샅샅이 살폈다. 과연 철문에 열쇠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향비가 앞으로 나섰다. "이건 이 늙은 도둑에 맡겨 주시오." 소영은 열쇠를 신투에게 내밀었다. 신투향비는 열쇠를 받아 들고 혹옥의 열쇠 구멍을 다시 한 번 조 사해 본 다음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은란 아가씨, 틀렸는데?" 은란은 그 소리를 듣고 다시 품속을 뒤지더니 새로 두 개의 열쇠 를 꺼내 향비의 손에 넘겼다. "여기도 두 개가 있어요. 만일 이 두 개도 맞지 않는다면 소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 갑니다." 향비는 두 개의 열쇠를 자세히 살펴 본 다음 그 중 하나를 열쇠 에 밀어 넣었다. 향비가 그것을 구멍에 넣고 좌우로 몇 번 돌리자 이제까지 육중하게 잠겼던 철문이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열리 지 않는가! 소영은 금시 희색이 만면해졌다. "향형의 신기한 재주는 정말 탄복할 만합니다." 그는 말하기가 바쁘게 먼저 흑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은란이 급히 소리쳤다. "공자께선 조심하세요." 말소리와 동시에 안으로 들어 갔던 소영의 몸이 다시 밖으로 뒤 어 나왔다. 상팔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안에도 또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는 철문이 있소이다. 우리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아닐는지....." 은란이 먼저 안으로 들어 가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과연 안에는 역시 견고하기 짝이 없는 철문이 있었다. 향비가 바쁘게 따라 들어 갔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화섭자를 꺼 내 불을 밝혔다. 그는 본래 신투라고 불리는 만큼 남의 문을 여는 재주로 말하면 천하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었다. 그는 열쇠 구멍을 한 번 조사해 본 다음 느긋이 웃어 보였다. "이런 것쯤 이 늙은 도둑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오." 그는 품 속에서 한 개의 만능열쇠를 꺼내서는 열쇠 구멍에 끼어 넣고 한 번 돌린 다음 한 손을 들어 철문에 일장을 먹였다. "창!" 한 소리, 쇠가 울리는 소리가 나면서 철문은 크게 열렸다. 향비는 열쇠 구멍을 보고 그것이 보통 볼 수 있는 평범한 것이라 는 심증을 얻었던 것이다. 소영이 잇따라 안으로 들어 갔다. "열렸습니까?" "다행히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군요." 소영이 반쯤 열리는 문을 걷어 차니 다시 철문은 크게 열렸다. 은란이 옆에 서 있다가 얼른 품 속에서 불씨를 꺼내어 횃불 하나 를 만들었다. 은란이 붙인 횃불은 송진을 묻혀 만들었으므로 한 번 불을 당기자 캄캄하던 집안에 불빛이 밀려 들어 갔다. 방 한 구석에 누더기 옷에 산발을 한 노인이 한 사람 앉아 있었 고, 그 옆에는 역시 머리가 흐트러진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소영은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부모임을 알았다. 즉시 나아가 꿇 어 엎드렸다. "불효 자식 소영이 양친을 배견하나이다." 노인은 누더기 옷에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으나 의연한 기상과 불 굴의 기개가 역력했다. 노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네가 영이냐?" "바로 그러하옵니다. 불초 영아는 부모님의 길러 주신 은혜에 보 답은 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부모님을 고생시켜 드렸으니 그 죄 하 늘에 사무치나이다. 아버님께서 마음껏 소자를 꾸짖어 주십시오." 노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많이 변했구나. 이 아비도 알아 볼 수가 없으니....." 소영은 어렸을 때 병이 잦고 신체가 지극히 연약했다. 그런 터에 지금은 또 변장까지 하고 있어서 알아 보기가 어려웠다. 봉두난발의 노부인이 소리쳤다. "저 사람은 영아가 아니에요. 우리는 저 사람을 믿으면 안 됩니 다." 소영은 머리를 땅에 대고 침착한 소리로 말했다. "어머님, 제 목소리를 듣고도 알아 보시지 못하겠습니까?" 노부인은 눈을 굴려 가면서 한참이나 소영을 쳐다보고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비록 어딘가 비슷하기는 하다만 우리 아이는 얼굴색이 옥같이 흰데, 당신은 어찌 얼굴색이 그렇게 누추하니......" "저는 얼굴색을 변장하기 위한 약을 발랐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가 없는데....." 은란이 등불을 쳐들어 소영의 얼굴을 밝게 비추어 주었다. 그러 나 노부인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우리 영의 얼굴은 그렇게 흉하지 않아." 이때 밖에서 돌연 고함지르는 소리와 여러 가지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필시 한바탕 접전이 붙은 모양이었다. 소영의 눈에서는 급기야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머니! 제가 바로 소영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님이 안아 기 르신 바로 그....." 부인은 돌연 꽥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이 다시 나를 며칠 동안 굶긴다고 해도 나는 정신이 혼미 해지지 않을 게다!" 소영은 다시 난발한 노인을 향해 부복했다. "아버님! 이 자식의 목소리를 가려 낼 수 있으시겠습니까?" 노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요즘 무수한 공포와 고난을 겪은 터다. 그 자극으로 말 미암아 정신이 맑지 못하다. 나와 네 어미는 새장에 갇힌 새와 같 은 처지여서 자연 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영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내 어려서 집을 떠날 때는 허약한 몸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고 이렇게 건강해졌으며, 다시 스승으로부터 절세 무공을 받았고, 또 그 위에 얼굴에는 변장한 약물까지 칠했으니 두 분께서 알아 보시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당장 중요한 일은, 두 어른을 이 위험한 곳으로부터 구해 내는 일이다. 연후에 얼굴에 칠한 약물 을 지워 버리면 구태여 설명을 하지 않더라고 자식을 알아 보실 것 이다.' 이때 밖으로부터 손불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 금쪽같이 귀한 시간에 무얼 꾸물거리고 있는가? 어서 밀고 나갑시다." 소영은 양친에게 몸을 굽히고 말했다. "아버님, 제 등에 업히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향비가 돌연 두어 걸음 걸어 나오며 손에 든 비수를 휘둘러 두 노인을 묶고 있는 포승을 잘라 버렸다. "소형, 이 늙은 도적의 생각으로는 두 분 노인의 혈도를 치는 게 좋을 것 같소. 백화산장에서 빠져 나가려면 일장의 악투를 면할 길 이 없는데, 두 분 노인께선 아무런 무공도 없으니 혈도를 치는 것 이 더 안전하지 않겠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향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은란과 향비가 두 노인의 혈도를 쳤다. 은란은 허리에 매고 있던 비단띠를 풀어서 노부인을 걸머 메었다. 소영은 가볍게 탄식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정세가 이처럼 급박하여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양친께선 불효자 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소영이 부친을 등에 업는데 돌연 두구가 소리쳤다. "큰형님, 잠깐만!" "무슨 일이오?" "큰형님께선 무공이 절륜해서 포위를 뚫고 나가는데 앞장을 서야 합니다. 제가 아버님을 대신 업는다면 형님께서는 손을 쓰시기가 편하실 것입니다." "그럼 두형이 수고를 좀 해 주시오." 두구는 곧 몸을 낮추고 소대인을 등에 업었다. "두형, 그리고 은란 아가씨, 내 뒤를 따르시오." 소영은 이내 밖으로 나왔다. 보니 벌써 손불사는 쌍장을 휘둘러 한 무리의 흑의무사와 어울려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상팔은 품 속에서 쇠주판을 들고는 두구의 앞장을 섰다. 마문비, 사마건이 쌍쌍이 왼편으로 달려 나오며 좌익이 되었고, 우익을 맡은 사람은 반개와 주승이었다. 향비는 두구의 뒤를 바싹 따라 가면서 호위하고, 금란은 은란을 위해 길을 열고 봉죽은 은란의 뒤를 바싹 따랐다. 이때 흑옥을 둘러 싸고 있는 주위 사방의 밀림 곳곳에 등불이 비 치고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일시에 흑옥을 둘러 싸며 모여 드는 것이 분명했다. 소영은 상팔과 향비, 두 사람을 돌아 보며 말했다. "태산 이호의 상처가 아직 완쾌되지 않았으니 두 분께서 그를 대 신하여 후진을 막아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요." 상팔은 대답하고 즉시 갔다. 향비는 위인이 좀 오만한 데가 있어 남에게 지배받기를 가장 싫 어하는 성미였다. 그러나 이때 억지로 발길을 돌렸다. 소영은 자기편의 사람 수를 한 차례 헤아려 보았다. 그런데 일진 풍 팽운이 없지 않은가? "두제, 팽운은 어디로 갔소?" 두구가 대답했다. "그는 위인이 영민하여 흑의 무사 사이의 밀어를 잘 알고 있으니 내왕하는데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무사해야 할 텐데......" 말하고는 돌연 앞쪽으로 급히 걸어 갔다. 이때 길을 막고 있던 십여 명의 흑의 무사들은 손불사의 장풍을 감당하지 못하여 분분히 퇴각하고 있었다. 수목 사이에 불빛이 명멸하고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 지만 가까이 이십여 장 안팎에는 적의 그림자가 없었다. 하늘에 높이 솟아 있는 망화루에도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거대한 누각이 우뚝 솟아 있으니 흡사 도깨비처럼 보였다. 소영은 총총히 손불사의 신변에 이르렀다. "노선배께서는 계속해서 적을 막으면서도 변변히 휴식조차 하지 못하셨습니다. 조금 쉬십시오. 길을 여는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손불사는 이미 소영의 무공이 고절하고, 손을 쓰는 것이 능란하 여 자기보다도 우월하다고 생각한 바 있다. "소형의 힘은 족히 이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네." 손불사는 말하고 사방을 쓸어 보고 나서 이어 말했다. "백화산장이 아직 최대의 힘을 쓰고 있지 않네, 여기에는 필시 무슨 음모가 있을 것이네."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저 꽃나무 수풀에 무슨 포진을 한 것 같군요." 손불사는 잠시 사방의 형세를 살펴 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신속하게 행동한다면 그들이 배치를 끝내기 전에 포위를 뚫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노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전 호걸들을 불러 모아 적의 중심 부를 돌파하도록 하십시오." "이 늙은이는 전력을 다하겠네." "그럼 믿겠습니다." 소영은 말하고 큰 걸음으로 수풀 속을 향해 달려 갔다. 손불사는 가라앉은 소리로 걱정했다. "강적은 수가 많아 중과부적이라. 우리들은 속전속결을 ㅎ야 하 오. 그러니 여러 영웅들은 전력을 다하여 이곳을 뚫고 나갑시다." 그러나 손불사가 구태여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좌우에 서 있던 마문비, 사마건, 주승, 반개 덩은 소영이 나아가자 이미 빠른 걸음으로 소영의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금란이 돌연 걸음을 빨리하여 소영의 신변으로 날아 갔다. "공자, 서쪽을 향해 부딪치십시오." "알겠소!" 소영은 금란의 말에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략 삼, 사십 장쯤 가자 돌연 한 무더기의 화살이 빗발쳤다. 호걸들은 일제히 병기를 휘둘러 화살을 떨어뜨렸다. 숲 속에서 주조룡의 목소리가 전해 왔다. "그대들은 이미 겹겹이 포위되어 있다. 손에 든 병기를 버리지 않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나 다름이 없느니라." 소영은 소리나는 위치를 계산해 보았다. 나무들이 상대방을 가리 고 있어 적의 위치를 분명히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소영은 앞장 서서 수풀 속으로 뛰어 들었다. 주조룡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나의 충고를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 백화산장 사람들의 솜 씨가 맵다고 원망말라." 소영은 목소리가 전해 온 방향을 가늠해 보았으나 이미 먼저 들 려 온 그 장소는 아니었다. 그 사이에 벌써 위치를 바꾼 것이다. 이 자는 교활하기가 심목풍에 못지 않았다. 자기의 위치가 드러난 후의 공격을 생각하여 위치를 수시로 바꾸 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소영은 노여움이 치밀어 올랐으나 그렇다고 마음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역시 이쪽의 위치가 밝혀질 뿐만 아니라 당장 자신의 목소 리로 인하여 신분이 폭로될 것이다. 이때 어디선가 느닷없이 목탁치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 와싸ㄷ. 소영은 걸음을 ㄹ멈추고 주위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여러분, 잠깐!" 호걸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손불사가 돌연, "우리들은 그들의 의병지계를 알 수가 없으니....." 이렇게 소리치고 갑자기 수십 장 떨어진 수풀 속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손불사의 무공은 심히 두텁고 맵다. 그래서 그의 장력에 많은 수 풀의 나뭇잎고 꽃잎들이 동시에 작렬했다. 소영은 번개같이 몸을 날려 꽃잎이 흩어지는 곳으로 달려 갔다. 이미 두 사람의 흑의 무사가 엎드려 있었다. 숨이 끊어진 것이 분 명했다. 이때 사방에서 울려오던 목탁소리가 돌연 그쳤다. 갑자기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이 침묵은 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소름을 끼치게 했다. 그것은 바 로 폭풍전야의 정적과 같은 것이었다. 돌연 손불사의 외치는 소리, "겉옷을 벗어 암기를 막을 준비를 하시오!" 말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활시위 소리가 나면서 화살 한 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 왔다. 이 화살을 신호로 하여 사면 팔방에서 일제히 수많은 화살이 소 낙비처럼 쏟아졌다. 어두운 밤이고, 날아온 화살은 비와 같아서 호걸들이 비록 무공 이 절륜하다고 하나 방어하기는 심히 어려웠다. 화살소리, 시위소 리가 울리는 가운데 두어 마디 신음소리가 일어났다. 태산 이호가 먼저 화살에 맞았다. 소영은 태산 이호가 화살에 맞는 것을 보자 마음이 크게 흔들렸 다. '이 깜깜한 밤에 이렇게 화살이 빗발같이 쏟아지니 어찌 막아 낼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장시간 화살이 쏟아진다면 필경 한 사람도 남지 못할 것 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든지 먼저 저 궁노수들은 없애야겠다.' 이때 반개는 철화를 빙빙 돌려 날아 오는 화살들을 전부 쳐서 떨 어뜨리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마문비와 사마건이 날아 오는 화살을 부채를 돌리며 막아냈다. 두구와 은란은 소대인과 소부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몸을 굽히고 철필과 장검을 휘둘러 마문비와 사마건에 의해 옆으로 튀는 화살을 막고 있었다. 소영은 적과 아방의 형세를 살펴 보고 손불사에게 나직이 물었 다. "노선배께서는 궁노수들이 모여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 까?" 손불사는 장풍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 내면서 말했다. "보건데, 이 늙은 거지가 죽음을 무릅쓰고 길을 열어야 할 것 같 소." "선배께서는 호걸들에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말씀하십시 오. 제가 노선배를 도와 사면의 궁노수를 쓸어 버릴까 합니다." "하하하..... 좋소. 그대가 이런 호기가 있다면 이 늙은이도 그 대를 따르리다." "그럼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소리와 동시에 왼손에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들고 날아 오는 화 살을 막는 일방 오른손으로는 날아 오는 화살 한 개를 획 잡아 채 어 그것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나갔다. 손불사 역시 팔보간선의 신법으로 오른쪽 숲 속으로 걸어 가며 고함을 질렀다.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오. 이 늙은이가 먼저 길을 열겠소." 소영과 손불사는 평생의 공력을 모두 발휘하면서 번개같이 꽃숲 으로 뛰어 들어갔다. 54. 절기를 펼치는 영웅들 그때 돌연 숲속에서 한 가닥 불빛이 번쩍! 하고 튀었다. 순간 십여 장 앞의 꽃나무 숲 속에 수십 명의 궁노수가 숨어 있 는 것이 불빛 아래 드러났다. 손불사와 소영의 번개같은 시선이 그 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손불사는 두 손으로 일제히 장력을 발했다. 전력을 다한 장력이 무섭게 밀려 나갔다. 장력은 화살보다 더 빠르게 나아갔다. "퍽! 퍽!" 두꺼운 종이가 뚫리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두 번 들리더니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궁노수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순간 소영은 왼손을 질풍과 같이 휘둘러대며 앞으로 나아갔다. 몸이 뛰쳐 나오면서 발하는 장력은 대단했다. 마치 쇳덩이가 날아가듯 순식간에 네 명이 나가 떨어졌다. 돌연한 불빛 덕분에 소영과 손불사는 대단히 바빠졌다. 밝은 불 빛 아래에서 그들은 굉장한 실력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적은 반 이 상 죽었거나 크게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무공이 신출귀몰하고도 용맹함을 보고는 완전히 전의를 잃고 말았 다. 겁에 질린 그들은 쥐새끼처럼 구멍에라도 파고 들 듯 숲 속으 로 숨어 버리곤 말았다. 나머지 궁노수들이 모두 뿔뿔이 도망쳐 감과 동시에 교교히 밝혀 주던 불빛은 마지막으로 한 번 번쩍 빛을 발하고는 꺼져 버렸다. 여러 명의 궁노수들이 여러 호걸들로 하여금 손을 못 쓰도록 크 게 공격하기는 했으나 소영과 손불사가 격퇴시키고 난 후 화살의 공세가 뜸해졌다. 반개 심철와는 그 큰 철화를 들고 춤추듯 휘둘렀다. 그리고 여전 히 날아 오는 화살을 막아 내며 달려 오고 있었다. 그는 소영과 손 불사를 따라 바삐 달려 오는 것이었다. 손불사와 소영이 궁노수를 격파하고 난 후 곧 여러 호걸들은 한 곳에 모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앞을 향하여 곧장 나아갔다. 은란은 비오듯 날아오는 화살의 틈바구니 속에서 소부인이 혹시 나 상처를 입을까봐 가장 마음을 졸였었다. 소부인을 위해 힘껏 보호했으나 마음이 놓이질 않았던 것이다. 이제 궁노수가 물러났으므로 손부인의 안전함은 명백해졌다. 그래 도 은란은 마음을 놓지 못해서 금란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언니! 소부인께서 혹시 상해를 입진 않았어요?" 금란이 살펴 보더니 대꾸했다. "없는데......" 은란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금란이 대답을 뒤로 하며 빠른 걸음으로 소영에게 다가갔다. 이때 돌연 한 가닥의 날카롭고도 긴 휘파람 소리와 함께 화살 한 대가 날아왔다. 틀림없이 백화산장의 궁노가 매복해 있는 지역을 지나쳤음이 틀림 없다고 금란과 은란은 생각하였다. 손불사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약간 구부리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 다. "여러분! 우선 몸을 숨기십시오. 이 늙은 거지가 앞서 살펴 보고 난 후에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놈의 심목풍이란 작자는 험악 한 놈이라 또 무엇을 숨겨 뒀는지 알 수 없단 말이야... 제기랄!"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불빛이 번쩍 빛났다. 바로 석장 밖에서 한 줄기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게 아닌가. 그 치솟아 오르 는 불기둥은 높이 솟아 오르면서 그칠 줄 모르고 이리저리 요동을 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기둥은 수십 개로 늘어나서 온통 주위를 밝혔다. 여러 호걸들은 일제히 몸을 꾸부리고 주저 앉았다. 소영은 눈길을 앞쪽으로 모으고 솟아 오르는 불기둥을 바라 보았 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어떤 사람과 일정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 같았다. 소영은 돌연 얼굴을 들고 하늘의 별자리를 살펴 보았다. 이미 시 간의 삼경이었다. 문득 마음속에 짚히는 바가 있었다. '만약 심목풍이 시간을 미처 깨닫기 전에 백화산장을 탈출하지 않고 있다가는 천 배 만 배 더욱 곤란해지겠는 걸.'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선배님께서는 여러 사람을 인솔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앞에 서 살펴 보기로 하겠으니....." 소영은 몸을 날려 날 듯 뛰쳐 나갔다. 빽빽한 꽃나무 숲을 지나 자 돌연 그의 곁을 바싹 따르며 순식간에 한 개의 불기둥이 다가왔 다. 소영은 얼른 손을 뻗쳐 그 불기등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난데없이 한 가닥 칼빛이 번뜩이며 좌측의 숲에서 단도 가 그의 손목을 향해 허공을 가르며 날아 왔다. 소영은 마침 손에 천 년 묵은 교피 장갑을 끼고 있었으므로 단도로부터 상처를 피할 수 있었다.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잽싸게 놀려 든 단 도를 잡아챘다. 그때 빽빽한 수풀을 헤치고 흑의 무사가 단도를 휘두르며 돌연 나타났다. 소영은 얼른 왼손으로 그의 가슴을 향해 후려 갈겼다. 소영이 갑 작스런 공격에 놀란 나머지 날린 공격이었으므로 의외로 빠르고도 굉장한 위력을 발했다. 그 흑의 무사는 가슴에 장력을 맞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 졌다. 소영의 장력으로 말미암아 그 흑의 무사가 불기둥을 잡은 채 쓰러지는 순간에 매서운 휘파람 소리가 또 요란하게 들려왔다. 순간 바로 옆의 숲에서 한 개의 검은 그림자가 질풍같이 지나쳤 다. 소영은 머리를 채 돌리지도 않고 왼손으로 절쾌한 일장을 전력 으로 출수했다. 휙! 하며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그 검은 그림자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돌풍에 날려가듯 밀려났다. 그것은 사람이 내는 소 리가 아닌 것 같았다. 마음 속으로 기괴한 생각이 들어 눈을 굴려 바라보았다. 다만 검은 그림자가 두어 장 밖에서 질주하다 꽃나무 사이로 떨어져 나갔으므로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이러한 경황 중에 좌측에서 또 한 무리의 검은 그림자가 닥쳐왔 다. 소영은 이번에는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다소 운기를 모 아 석 자쯤 뒤로 물러 나면서 오른손을 뻗쳐 그 검은 그림자를 잡 았다. 왼손에 미미한 아픔을 느꼈다. 그 검은 그림자에게 물리고 만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 보니 그것은 전신에 검은 털이 난 원숭이었다. 왼쪽 팔을 비틀어 달아나지 못하게 했다. 금란이 바삐 달려 와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공자 빨리 물러 나십시오." 소영은 마음이 과히 내키지 않았으나 필히 말가운데 어떤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채고 곧 물러났다. 금란이 물었다. "공자께서 방금 잡은 것은 원숭이가 아닙니까?" "맞소. 백화산장의 기량이란 쉽게 밑천이 드러나고 마는군!" "그렇지만 그들에게 습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사정이 너무 급해 그만 방비를 못했소. 그래서 그만 순식간에 조금 물렸던 거요." 금란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디에 물렸던간에 그 독기가 혈맥을 상하게 할 우려가 있어요. 그러니 왼손을 빨리 잘라 내도록 해요!" 소영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물었다. "뭣 때문에?" 금란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원숭이의 입 속에는 아주 지독한 독이 있습니다. 만약 왼손 을 자르지 않는다면 독성이 퍼져 풍증을 일으킬 것입니다." 금란은 급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공자! 일이 급합니다. 주저할 틈이 없습니다. 지금 소녀는 자세 히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 얼른 왼손을 잘라 내어야 할 텐데..." 소영은 암암리에 독기운이 있는지 속으로 헤아려 봤다. 그러나 티끌만큼도 독성이 느껴지지 않아 머리를 갸웃거렸다. "난 괜찮은데!" 금란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공자께서는 정말로 중독된 느낌이 없습니까?" 소영은 정말 괜찮다는 표시로 팔을 움직여 보이기도 했다. 금란이 고개를 내저으며 눈물을 씻고 소영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 다. "정말 모를 일이군요. 그 원숭이의 독성은 비할 데 없이 지독한 것이에요. 그것에 물리면 말할 것도 없고 그 털을 건드리기만 해도 중독될 위험이 있을 뿐더러 발작도 매우 빠르답니다. 그런데도 공 자께서는......" 소영은 순간 뱀가죽 장갑을 낀 덕택으로 극독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정말 다행이구나.'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빨리 그들에게 알려야겠소! 그 원숭이 몸에 있는 독을 조심하라 고 말이오." 금란은 곧 몸을 돌려 손불사에게 달려가 소영의 말을 전했다. 이 렇게 하는 동안에 장중의 형세는 급변해 있었다. 꽃나무 숲의 빽빽한 틈으로 수십 명의 흑의 무사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들은 왼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무언가가 세밀하게 새겨지고 섬세하게 다듬어진 철통을 들고 있었다. 금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 십팔금강이로군!" 손불사가 물었다. "저 검을 든 사람들은 모두 십팔 인이며, 그들은 모두 심목풍이 천 명 가운데서 한 사람씩 선출한 고수들이지요. 조를 짜서 다니는 데, 다섯 개의 단검을 차고 다닐 뿐만 아니라 극독도 지니고 다닙 니다. 오른손에 든 철통 안에는 열두 개의 극독을 바른 침을 넣고 다니지요. 검은 엄호용으로 사용하지만 상대방이 가까이 접근하여 싸울 때는 독침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마치 쇠털처럼 가늘게 다듬 어져 있어 도저히 방비할 수 없어요." 그녀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길고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잠시 후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심목풍은 십팔금강에 대한 아낌이 대단하여 좀처럼 그들로 하여 금 나서서 싸우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밤엔 그들에게 출동하도록 했군요." 손불사는 어이가 없어 듣고만 있었다. "그 말이 정말이란 말이오?" 이윽고 금란이 가까스로 이렇게 말했다. "소비의 말엔 한 마디도 과장됨이 없습니다." 마분비가 말했다. "소림사의 팔대금강이라면 그 이름이 강호에 자자하지요. 그것을 본따서 사람의 수만 배가시켰을 뿐이니 별로 두려워할 것은 없을 거요." 손불사는 비록 아무 대꾸도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을 낮게 평가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무공은 깊고도 넓어 검과 방패의 씀씀이나 용법이 매우 펼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용법은 격식이 아닌 게 없고 일반적인 검과 방패의 초술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이러한 무기와 방패는 극히 소수만이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검순(儉盾)을 능히 사용할 수 있다면 결 코 그들을 얕잡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독침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머리를 돌려 살펴 보니 여러 호걸들의 안색은 한결같이 숙연해 보였다.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강적을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음 이 역력히 드러났다. 손불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심목풍은 무공이 고강한 흑의 무사들로 우리를 전멸시키려 했 다. 그러나 저희들만 다치고 죽었을 뿐 우리들의 진용을 무너뜨릴 수 없었지. 우리가 강한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격앙된 전의, 즉 필사적인 결심이 오래도록 싸울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 중에 하 나였다.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때로군!' 그는 군호들을 훑어 보고 나서 또다시 생각을 이었다. '이 늙은 거지가 의기소침하게 보인다면 필시 영향을 끼치겠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는 돌연 뭔가 결심한 듯 호쾌히 웃었 다. "하하하, 마총타주의 말이 맞소. 수백의 흑의 무사들은 모두 무 능할 뿐 우리들을 막아 낼 수는 없소. 하물며 이런 구질구질한 십 팔 명으로 감히..... 여러분들은 잠시 동안 이곳을 지키시오. 내가 먼저 나가 그들의 일진을 대략 살펴 보고 오겠소!" 그는 겉으로는 호쾌하게 보이나 내심으로는 노련하게 일을 처리 해 나가며 매사에 신중하기 그지 없었다. 신투 향비가 돌연 나서며 말했다. "손불사 선배의 명성은 일찍부터 들어 온 바입니다. 무공의 고강 함은 소문뿐 아니고 현재도 눈있는 사람은 모두 목격한 사실입니 다. 지금 이 시간에 있어서도 인물을 볼 때 무슨 군자의 기품을 구 태여 설명할 필요 없이 이 늙은 거지가 보는 바에 의하면 노선배가 가장 무기와 방패를 잘 쓸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손불사가 웃으며 말했다. "으흐흐, 향형 말씀이 옳아요!" 그의 눈빛이 번뜩이며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너덧 걸음 앞에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서 있었다. 그는 큰 걸음으로 한 발 다가갔다. 조용히 그 큰나무 곁에 다가선 그는 두 팔로 나무를 꽉 껴안았다. "얏!" 대갈일성과 함께 순간 싱싱하게 뿌리내린 그 큰나무가 뽑혀 버렸 다. 금란이 날 듯 달려 와서 손불사의 곁에 바싹 붙어 칼을 들고 나무의 가지와 잎들을 잘라냈다. 손불사는 열대여섯 자쯤 되는 긴 나무를 몸채 쳐들고 검순을 들 고 있는 무사들에게로 나아갔다. 소영은 빽빽한 꽃나무 숲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아무말 도 없이 온 정신을 집중하여 검순을 들고 있는 무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그들과 싸울까 하는 전략을 궁리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손불사가 한바탕 웃어젖히며 말했다. "소제, 내 뒤로 물러나시오. 이 늙은 거지가 먼저 그들 일진에 시험을 가해 보겠소. 이 늙은이가 해내지 못한다면 다시 오시오!" 그는 소영의 무공이 고강함을 알고 있었다. 실상 그와 같은 고수 는 무림에서는 정말 드물었다. 그의 마음 가운데 이미 경복한 지 오래였다. 소영이 말했다. "좋습니다. 노선배님은 무공이 고강하시니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 다. 곧 성공할 수 있어요!" 말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손불사는 이미 검과 방패를 든 무사 들의 몇 장 앞까지 다가 가고 있었다. 그는 암암리에 기운을 돋우 어 나무둥치를 꽉 받쳐 들고 정신을 모아 우뚝 서 있었다. 검순을 잡아 쥔 무사들은 이미 부채꼴 모양으로 포진하고 있었 다. 그들은 선공하지 않고 손불사가 먼저 공격할 것을 기다리는 눈 치였다. 이때 무사들의 뒷쪽에서 수십 개의 불기둥이 높이 솟구쳐 타올랐 다. 불빛이 강렬해서 수십 장의 주의를 백설이 내렸을 때처럼 희고 밝게 비쳐 주고 있었다. 소영은 전음술을 써서 손불사에게 말했다. "그들의 진세가 아직 완전히 잡히지 않은 것 같으니 얼른 선기를 잡아 출수하십시오!" 손불사는 그 말을 듣고 출수했다. "우왓!" 대갈일성과 함께 손에 든 꽃나무를 휘둘러 직도황룡 일초로 검순 무사를 향해 공격해 나갔다. 검순무사들은 그의 공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쉽사 리 접근해 오지 않았다. 그들은 돌연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방패로 몸을 감추고 두 걸음 씩 비켜 섰다. 손불사의 공격은 그만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세를 모아 다시 침공할 태세를 취했다. 그때 섬광을 번쩍이며 두 명의 검순무사가 전율할 속도로 침공해 들어 왔다. 손불사는 일순 놀람을 겪었다. '단초신법은 무림 일류 고수들에게도 지지 않는군!"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온 힘을 손안에 든 꽃나무에 모으고 마치 철퇴를 휘두르는 것처럼 쓸어 나갔다. 공격해 온 두 명의 무사들은 손불사의 손 안에 든 육중한 꽃나무 가 초를 변하면서 이와 같이 빠르게 움직이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오른쪽에서 달려든 무사는 재빨리 피하려고 했으나 스스로 미치 지 못해 검순이 축출되어 나가면서 한바탕 충돌했다. 일순 둔탁하 게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검순을 손에 쥔 무사가 저만큼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 검순의 칼날이 이상하게 예리했다. 손불사가 비록 흑의 무사를 일격에 날려 버렸으나 수중의 꽃나무 도 그의 예리한 칼에 맞아 두 동강이 나서 멀리 날아 갔다. 소영은 생각해 보았다. '검순을 가진 무사들이 이 백화산장의 정애군들임에 틀림이 없 군. 재빨리 수족을 놀려 손불사가 만약 싸움에 지면 내 혼자 힘으 로 여러 명을 이기기 힘들겠구나. 그를 도와서 같이 강적들을 물리 칠 수밖에 없겠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재빨리 수족을 놀려 손불사에게 맞고 나가 떨 어진 흑의 무사에게 달려 나갔다. 그의 동작은 기괴하리만큼 빨랐 다. 몸을 공중으로 띄우고 한 걸음에 몇 겹의 흑의 무사 틈바구니 를 뚫고 나아갔다. 그는 손을 뻗쳐서 검순 하나를 찍어 보았다. 순강의 검은 이미 손불사의 나무의 강맹하고 절륜한 힘에 맞아 굽어 있었다. 소영이 몸을 날려 검순을 치는 그 때에 한 명의 검순무사가 또 달려와 공격해 왔다. 소영은 곧 검순을 하나하나 잡아채면서 한편 그 흑의 무사의 공 격을 막았다. 소영은 재빨리 몸을 뒤로 대여섯 척 물리면서 오른손에 검순을 뒤로 쥐고 왼손으로는 일장을 쏘면서 적세를 당해 나갔다. 흑의 무사들은 여덟 척이나 비스듬히 미끄러지듯 물러 나갔다. 소영은 그 중의 하나에게 집중으로 공격을 했다. 이 순간에 이미 네 명의 검순무사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손불사를 공격하고 있었다. 검순을 사용하는 여러 혹의 무사는 무공이 대개 고강했다. 더욱이 그 중 두드러지게 뛰어난 흑의 무사가 있었다. 그는 다른 흑의 무사보다 월등하게 무공이 고강했다. 비록 손불사는 수중에 꽃나무를 들고 있긴 하나 역시 혼자 그들을 당해 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일진의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소영은 검 순으로 검순을 막으면서 손불사 뒤를 공격하는 흑의 무사 하나를 방어했다. 손불사는 두 손으로 나무둥치의 중간을 꽉 움켜 잡고 번개와 같 이 빠르고도 무서운 속도로 휘둘러댔다. 양쪽 옆에서 공격해 들어 오는 무사들이 일시에 낙엽이 바람에 떨어지듯 나가 떨어졌다. 정면에서 부딪쳐 오는 검순의 흑의 무사들에게도 공격해 나아가 서 일거에 세 방향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뒤쪽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소영이 뒤에서 그를 도와 싸우지 않았던들 필경 뒤편의 공격에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몇 초의 출수가 있은 후에, 그들이 제아무리 강력한 적들이라 한 들 얼마든지 그처럼 기괴한 무기를 막아 낼 수 있었고, 공격을 가 할 수 있음을 느꼈다. 별로 급히 서두르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들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때 소영의 말소리가 들렸다. "노선배님! 우리들은 뒤쪽에 서서 강적들을 다시 막읍시다." 손불사는 잔설을 날리는 바람같은 일초로 나무둥치를 갖고 왼편 에 몰린 적들을 위협하면서 나직이 말했다. "그들의 오른손에는 독침을 바른 암기가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시 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쪽에 있던 무사들이 돌연 뛰어 들었다. 순식간에 한 가닥 은빛 같은 안광이 스치면서 질쾌하게 나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얼른 수중의 검순을 치켜 들었다. 재빨리 어떤 그림자 뒤 에 몸을 숨기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독침이 검순에 와서 박혔다. 손불사의 수중에 있는 나무 등걸과 검순이 몇 번씩이나 부딪는 바람에 검순상에 있는 날카로운 칼날들은 모두 부서지고 거의 반이 나 휘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검순을 가지고는 싸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위 십팔금강이라 불리는 흑의 무사들도 새로운 무기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한편으로 검순으로 방어도 하고 공격도 하면서, 또 한편 으로는 독침을 쓰는 것을 최상의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손불사의 생각도 달라졌다. 독침을 막으려면 아무래도 검순이 필 요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문득 몸을 꼿꼿이 세워 새로운 태세로 정비했다. 돌연 수중의 나무등걸을 번쩍 치켜 들더니 옆에 있는 검순을 향 해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으로 마치 전광과도 같이 재빠르 게 그 사나이의 손목을 내려쳤다. 그 사나이는 손불사가 바로 백혈을 내리침을 얼른 알아챘다. 그 러나 손불사의 나무등걸에 박혀 있는 검순으로는 막아 낼 수가 없 었다. 그 사나이는 그것을 짐작하고 번개같이 몸을 날려 옆으로 피해 버렸다. 손불사는 그의 자세가 준비되지 못했음을 알고 돌연 손가락을 뻗 쳐 쏘았다. 한 가닥 암암중의 힘이 그 사나이의 손목을 통과하자 갑자기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이내 힘을 쓸 수 없게 되자 다섯 손가락이 힘없이 처지면서 검순 을 떨어뜨렸다. 이 탄지신통공부는 손불사가 평생을 바쳐 연마한 절기 중의 하나 였다. 소영은 사면을 살펴 보면서 팔방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손불사가 전력을 다하여 검순을 탈취하는 것을 보자 소영은 한층 더 정신을 모으고 검순을 휘둘러댔다. 이 틈에 손불사의 우익은 위험함이 없었던 것이다. 금철이 부딪 는 소리만이 시끄럽게 끊이지 않고 들려 오고 있었다. 손불사는 일격에 적을 적중시켜 질쾌하고 절륜한 수법으로 검순 을 탈취할 수 있었다. 무기를 손에 들자 새로운 기운이 솟구쳤다. 오른쪽으로 막으면서 왼쪽으로 공격해 들어 가며 휘두르는 검순의 기세는 가히 사납기 비할 바가 없었다. 검순을 든 무사들은 다른 손에 독침이 있긴 하나, 캄캄한 밤중에 서로 뒤엉켜 싸우는 판국이라 그것을 잘못 사용했다가는 자기편이 맞을까 두려워 감히 사용치 못하고 있었다. 이 때에 소영과 손불사는 서로 등을 맞대고 서서 버틸 수가 있었 다. 그들은 앞뒤로 버티고 서서 사면 팔방의 공격을 방패로 방어하 며 한편으로 전음의 술책으로 적을 퇴치할 방법을 상의하였다. 손불사가 말했다. "소형, 이 사람들의 무공은 확실히 흑의 무사들보다 월등하오. 힘을 합해 반격하지 않았으면 그들을 몇이나 해치울 수 있었을 것 같소?" 소영이 말했다. "제가 염려되는 것은 그들이 독침을 수중에 지니고 있는 점입니 다. 만약 그들이 여럿이 합력하여 일제히 쏘아 온다면 사면 팔방에 서 날아 들게 되겠으니 비록 방패로 방어한다지만 동시에 사면에서 날아드는 독침을 방어하기엔 매우 곤란할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손불사는 연방 방패를 휘둘러댔다. 금철이 서로 부딪치는 큰소리 가 울려 퍼져 나갔다. 그때 갑자기 북소리가 들려 왔다. 검순을 든 무사들은 급속히 들 려 오는 북소리에 따라 쾌속한 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두 방향 으로 나뉘어져서 마치 파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차례차례 전력으로 삼 초씩 공격을 하고 난 후 스스로 물러 나갔다. 소영은 이것이 차륜전법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 쪽의 숫자가 매 우 많은 것을 기화로 공격을 가중하여 병행시키면서 두 사람으로 하여금 지쳐서 죽을 때까지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몇 차례의 공격을 막아냈다. 소영과 손불사는 그 순간 이곳 백화산장의 십팔금강의 검순무사 들은 과연 보통의 무림 인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 다. 그들 각자의 내력은 모두가 특이한 데가 있었던 것이다. 손불사는 이미 일곱 차례의 공격을 받았다. 검순무사들이 퍼부은 공격은 무려 삼천칠백이십일 초였다. 그칠 줄 모르는 이 공격에 슬 며시 두려움을 느꼈다. 은밀히 전음의 술책으로 말했다. "소형, 이 검순무사들은 무서운 독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 을 사용치 않고 우리들을 돌려 가며 공격하니 이는 필시 무슨 음모 가 있을 것 같은데......" 소영도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이토록 무서운 싸움에 과연 끝까 지 지탱해 나갈 수 있을까도 의문이었고 한편으로는 부모의 안위가 걱정되기도 하여 즉시 대답했다. "그럴 것 같군요. 노선배님께 적을 물리칠 방법이 있습니까?" 손불사가 말했다. "이 늙은이의 생각으로는 이와같이 이들과 싸운다는 것은 헛수고 라는 것이오. 좀 모험이기는 하나 공격을 하여 저놈들을 하나씩 처 치해 나가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오." 소영이 말했다. "저도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동시에 공격하는 것 이 좋을 듯합니다." 손불사가 말했다. "이 늙은 거지의 심중에는 십분 착잡한 감정이 드는구려. 이것은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인즉, 나는 독수로써 사람을 상하게 하고 싶 진 않소!" 소영이 기이하게 여겨져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손불사가 말했다. "늙은 거지가 느낀 바로 생각컨대 검순을 가진 무사들의 개개인 은 모두가 깊고도 고강한 공력을 지녔고, 만약 상정으로도 논해 볼 것 같으면, 이 사람들은 모두가 삼십 년 이상씩 공력을 쌓아 올린 사람들로 심목풍이 수십 년 동안 키워 온 고수들이란 것이오." 소영은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 사람들의 무공은 결코 중주이고보다 못하지 않다. 그런데 어 찌 심목풍의 수하로서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엉뚱한 뜻으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도 역시 그들의 공력이 두텁고도 깊은 것으로 생각 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무림 인물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일 것입 니다." 두 사람은 전음의 술책으로 속삭이면서 한편으로는 검순무사들의 공격을 열심히 방어하는 한편 또 일변으로는 실력을 다 나타내지 않고 곰곰히 그들에게 공격을 퍼부울 궁리를 하고 있었다. 손불사가 말했다. "소제! 그들의 무공을 헤아려 대항할 수 있겠소?" 소영이 대답했다. "저는 경험이 부족하여 이들, 무공의 고하를 헤아릴 수 없군요!" 손불사가 말했다. "이 늙은 거지는 검순무사들의 전개하는 초술을 보다가 소림의 문하생들과 흡사한 점이 있음을 알았소. 나는 마음 가운데 심려되 는 점이 있소. 만약 이런 식으로 해를 입히다가 그들이 소림의 문 하일 경우 어찌 소림과 원을 맺게 되지 않겠소?" 소영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 무사들의 공력은 공격하면 할 수록 더욱 더 그 초수가 기이해지고 강명해짐을 느꼈다. 그는 내심 놀라며 말했다. "그들이 소림의 문하생들일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갑니다. 그러 나 지금은 백화산장에 속해 있는 하수인에 불과하며 우리들이 어느 정도 그들에게 공격함이 없이 관대히 대한다면 그들 또한 우리들에 게 심한 상해를 입히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에서도 우리들 은 그들의 포위 공격을 쉽사리 뚫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손불사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았다. "정세가 아주 급한 지금에 있어 이 늙은 거지도 별다른 묘책이 없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영은 고함을 지르며 공세로 나갔다. 이 수라지력은 옛날 유선자의 이름으로 떨치던 강호의 독보적인 절기이며 그 강맹함은 무림을 주름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소영이 수라지력을 펴자 한꺼번에 네 명의 무사가 연거푸 손상을 입었다. 손불사는 소영의 신기를 보자 못내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면서 또 한 그도 내심 그의 무공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여 용기백배하여 전 력으로 검순을 바싹 움켜잡고 열심히 휘둘렀다. 그는 내공이 심후하고 강맹하여 전력으로 수중의 검순을 휘두름 에 따라 흑의 무사들은 후퇴를 거듭했다. 이때 성미 급한 상팔이 그들이 오래도록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상 지탱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비호같이 몸을 날려 거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불사가 대단한 위력으로 공세를 펴고 있는 것을 보고 꽃나무 숲 속으로 몸을 옮겨 정세를 엿보고 있었다. 손불사와 소영이 자신있게 싸우는 모습을 보고 한결 마음이 놓였 다. 금산반 상팔이 옆에 서 있는 향비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보건데, 소영 형님은 마땅히 무림 중의 유일한 대형님 으로서 앞으로도 심목풍과 일전을 겨를 수 있는 유일한 분이오. 우 리가 그와 한몸이 될 수 없다면 또 누구와 더불어 어울릴 수 있겠 습니까?" 이 말에 향배는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영이 전력으로 싸 우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소영은 오른손에 쥔 검순으로 손을 뻗치며 왼편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아 내는 한편, 왼손으로 달 려드는 검순무사를 때려 쓰러뜨리고 있었다. 이렇게 용맹한 공수양 면의 수법에 향비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처럼 나이도 어린 소대협이 쌓은 공력이 어느 정도인지?" 금산반 상팔은 소영이 적수 공권으로 적을 맞이하여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사뭇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신투 향비가 그에게 무어라고 몇 마디 물어 보고 있는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소영은 급작스럽게 빨라지는 손불사의 공세에 자극을 받았던지 그에 못지 않게 바싹 따르며 몸을 날려 공격했다. 향비는 묻던 말도 잊고 그 신법에 도취되었다. 상팔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리들의 저 대형님은 하늘이 낳으신 대천재요! 무공이 백가에 통하고, 어느 방면에든지 또 정통하지 않은 게 없어요!" 향비가 눈을 치뜨며 말했다. "그는 맨손으로 검을 막고 있으니 상해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오? 이 늙은 도적이 이제까지 저 사람의 하는 짓을 반 이상 보아 왔으니 먼저 나아가 살펴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상팔이 말했다. "가서 똑바로 살펴 보시구료!" 상팔도 소영이 손에 낀 장갑이 천 년 묵은 뱀가죽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예리한 칼날에 왜 상해를 입지 않는지 그 이유 를 알지 못했으므로 더 무어라 말할 수도 없었다. 소영은 신위를 변형시키고 정기를 모아 운기했다. 검순무사들이 날뛰는 가운데 그는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또다시 칠, 팔 인의 무사를 격퇴시켰다. 손불사는 그의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내 력을 운기하여 검순무사들에게 대항했다. 이 때에 검순무사들은 벌써 반 이상이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리 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기력이 다하였음이 역력했다. 그들은 독 침을 사용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소영과 손불사의 무공 앞에 서는 맥을 못 출 것 같아 쓸 엄두를 못 냈다. 이 때에 돌연 구리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타오르던 불 기둥이 서서히 꺼지고 말았다. 십팔금강들도 소영과 손불사와의 악전을 겪고 난 후에 피해를 크 게 입었다. 그들이 이길 승산은 이미 사라졌다. 본래 백화산장에서는 십팔금강의 진용으로 군호들을 꽃밭과 숲 속에 가두어 처치하려 했다. 그러나 손불사와 소영은 능히 이 십팔금강을 물리칠 무공의 소유 자라 감히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신투향비가 이때 속력을 다하여 달려와 소영의 곁에 바싹 다가서 며 말했다. "손노선배님께서 좀 이상합니다. 좀 살피시는 것이......"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손불사의 뒤를 따랐다. 얼마 되지 않아 일행은 백화산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장 밖으로 나온 군호들은 모두 긴 한숨을 몰아쉬며 긴장했던 마 음을 풀었다. 이때 소부인을 업은 은란이 갑자기 속력을 가해 소영의 옆에 이 르러 다급하게 말했다. "공자! 어서 방향을 바꾸세요. 이곳은 위험해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돌연 긴 휘파람 소리가 나며 군호들의 앞에 다섯 개의 붉은 등이 홀연히 나타났다. 각 홍등에는 <피하시 오!>라고 적힌 하얀 글자가 보였다. 은란이 급히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과연...... 오룡대진(五龍大陣)을 펼쳤구나." 군호들은 금란한테 들은 십팔금강의 얘기가 하나도 틀림이 없음 을 알았다. 다행히 손불사와 소영의 무공이 높아서 그들의 수중에 서 간신히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그런데 또 은란이 긴장된 모습으로 절망적인 탄식을 하자 모두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향비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오룡대진이란 어떤 것이오?" "심목풍은 동산(東山)을 다시 일으킨 무림을 재패하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백화산장에 은거한 후로 힘을 기울여 천하 의 영웅들을 무찌르기 위해 기른 삼대 주력이 팔대혈영화신 및 십 팔금강과 오룡대진입니다." 손불사가 천천히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이 오룡대진은 저 십팔금강에 비해서 어떻소?" "소비가 아는 바로는 이 오룡대진은 심목풍이 스스로 성취하여 장담하는 것으로 내막은 알 수가 없으나 십팔금강보다 훨씬 무서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아요." 호탕하기 그지없이 세상을 누빈 손불사도 가벼운 탄식을 하며 말 했다. "만일 오룡대진이 정말 십팔금강보다 강하다면......" 이때 가벼이 진동하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손불사의 말을 잘랐 다. 소영은 몰래 손불사를 살펴 보았다. 과연 그는 심한 중상을 입 고도 억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체 하는 것이었다. 오룡대진이 십팔금강보다 강하다면 과연 이곳을 살아서 벗어날 수 있을런지 소영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55. 백화산장을 탈출하다 오룡대진의 괴인들은 손에 붉은 등을 들었는데, 그 생김새부터가 우선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신이 온통 붉은색이고 머리까지 붉었다. 귀신처럼 흘러내린 붉 은 머리 아래 목언저리에는 붉은 비늘이 반짝였다. 게다가 괴상하 게 긴 두 손에다가 손가락에는 세 치 안팎의 손두껍을 끼었다. 게다가 낮짝은 또 뭔가? 이건 얼굴에 가면이라도 쓴 것인지 붉 은 딱지가 꼭 끼어 있어서 밖으로 나온 것이라고는 번쩍거리는 두 눈뿐이었다. 소영은 슬그머니 은란의 손에서 장검을 취해 낮은 목소리로 일렀 다. "여러분은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제가 가서 한 번 시 험해 보겠습니다." 그의 무공의 조예는 일찍부터 뭇 사람을 경복케 하고 복종케 하 는 바가 있었다. 그러한 소영이 이 다섯 명의 괴인들을 어쩌지 못 한다면 그 때는 결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금란이 나서며 소곤거렸다. "공자님, 저도 따라가겠어요." 소영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낭자가 무얼 하겠다고?" 그러나 금란은 자못 자신있다는 어조로 말했다. "소비는 백화산장의 암호를 외우고 있거든요. 아마 공자께 도움 이 될 것입니다." 소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쓸데 없소. 내가 가서 우선 한 차례 진식을 시험해 볼 테니..." 문득 손불사가 가슴을 내밀고 한 발짝 나섰다. "이 늙은 거지가 따라 가겠소." 소영은 급히 만류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노선배님....." 이미 내상을 입었으니 어떻게 적을 또 대적하겠느냐고 말하려다 가 다시 고쳐 생각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일세의 영명을 생각하면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노선배님께서는 대국을 주저하시는 처지이시니 옥체를 보중하시 기 바랍니다. 제가 일차 시험을 해 볼 것이니 선배께서는 그동안 적을 부술 계획을 찾아 보십시오." 손불사는 가볍게 탄식했다. "그럼 조심하오!" 소영은 곧장 큰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의 시선은 한 개의 붉은 등을 줄곧 쏘아 보고 있었다. 운공을 하여 기운을 북돋은 다음 천 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이미 검과 방패를 쓰는 무사들과 싸워 본 뒤라, 이제는 백 화산장의 인물들을 깔볼 수만도 없게 되었다. 천천히 걸어가 홍의괴인과 대여섯 장 되는 거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검을 가볍게 비끼니 두어 줄기 싸늘한 칼빛이 허 공에 번뜩였다. 그는 차디찬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듯 괴상한 옷차림으로야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상대방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단지 두 눈만이 끊임없이 반짝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흥! 내 말로 그를 노하게 하여 먼저 손을 쓰게 하리라.' 그 다음에 손을 써서 대응한다면 상대방의 무공을 어림하기는 어 렵지 않을 것이다. 보아하니 가진 무기라고는 없고 오직 보이는 것 을 열 개의 손가락에 낀 두껍뿐이었다. 그것이 주로 쓰이는 병기라 면 그 씀씀이가 또한 괴상하기 짝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적을 알고 다룬다는 것은 싸움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비결이다. "입은 옷은 고기 비늘인가, 아니면 가죽인가?" 그는 거듭 비슷한 말로 상대 방의 마음을 떠보았다. 그러나 사내 는 여전히 멀거니 바라볼 뿐 일언반구의 응대가 없었다. 이렇게 대치하기를 거의 더운 차가 다 식을 시간이 지났다. 결국 못 참게 된 것은 홍의 괴인이 아니라 오히려 소영이었다. 그는 사방을 한 차례 쭈욱 훑어 보았다. 주위에는 매복인이나 상 대방을 도울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섰다. "자, 검을 받아라." 말이 끝나자 차가운 빛이 번쩍거리며 사람은 검을 따라 번개처럼 앞으로 나갔다. 핫! 하는 기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순간 예리한 장검의 끝이 곧장 홍인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검 끝은 한 치도 사나이의 살가죽을 뚫지 못하였다. 그것은 마치 하나 의 단단한 쇳덩이 같았다. 그렇다고 백 번 달구어 만든 장검이 사 람의 피부를 뚫지 못해서야 어디에 쓸모가 있단 말이냐. 흡사 고기 비늘처럼 번들거리는 옷이 검을 퉁기는 것이란 말이냐. 그럴 순간에 사나이는 너덧 걸음 뒤로 밀려 나갔다. 검끝이 살갗 을 뚫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소영의 찌르는 공력이 너무나 엄청나 게 강했던 까닭이었다. 소영은 사나이가 퉁겨 밀리는 것을 보자 이내 검을 거두었다. 상 대는 밀려 나가면서도 여전히 손을 쓰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명성을 듣기보다는 얼굴을 직접 대하는 것이 낫다더니 그 말이 조금도 거짓이 아니구나!' 그는 금란, 은란이 왜 홍의오룡의 무공이 전율하도록 두렵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보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상대방이 자기의 일격을 받고도 어 찌하여 대적하여 싸우려 들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 소영이 이와 같이 이모저모 바쁘게 생각을 굴리는 판국인데 돌연 맞은편의 홍의괴인이 몸을 몇 번 흔들더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주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나머지 네 홍의인 역시 멍청한 표정이었다. 이 뜻하지 않는 이변 에 소영은 물론이지만 주위에 둘러 섰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호걸들은 모두 영문을 몰라 멀거니 주저 앉은 자를 바라보고 있 을 뿐이었다. 신투 향비가 번개처럼 소영의 신변으로 날아왔다. "어떻게 된 일이오?" 소영 역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소. 나는 단지 그를 찔렀는데 그는 찔리지 않고 저 렇게 물러가서 주저앉아 버렸군요." 향비도 역시 까닭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참 괴기한 일이로군. 그 가운데에서는 필시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글쎄요. 나도 역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우리가 뚫 고 나갈 기회는 바로 지금이 아니겠소?" "그렇군! 그대는 어서 앞길을 여시오. 이 늙은 도둑은 가서 일행 을 부르겠소." 신투는 몸을 돌려 여러 호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뚫고 나갑시다." 소리에 따라 여럿은 총총히 달렸다. 먼저 소영이 나가고 그 뒤로 고기를 꿰듯 여러 호걸들이 따라 나갔다. 금란, 은란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오룡 대진이 이렇듯 무기 력하고 보잘것이 없단 말이냐. 소영의 한 칼에 찔린 홍의괴인은 여전히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여러 사람이 지나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홍의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호걸의 무리들은 단숨에 그곳을 빠져 나왔다. 아무도 그들 의 앞을 막은 사람은 없었다. 사마건은 자기들이 무사히 빠져 나온 것이 못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괴상한 걸! 다섯 사람의 홍의인은 차림새도 괴이하지만 그 위치 하고 있는 것도 은밀한 가운데 기문진을 짜고 있었단 말이오. 그런 데 어찌하여 그 일격을 감당해 내지 못했을까?" 이런 생각은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느끼는 것이었다. 좌우간 꼭 죽는 줄만 알았던 곳에서 무사히 빠져 나왔으니 죽었 던 목숨이 다시 살아난 것만 같아 모두들 일시에 긴장이 풀렸다. 마문비가 고개를 돌려 금란에게 말했다. "심목풍은 괴기 망측한 인물이므로 일부러 의병지계를 썼을 거 야." 금란은 고개를 끄덕였. "그래요. 그 오룡대진의 상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몇 사람이 입은 옷차림이 분명 심목풍이 고심에서 만든 용갑(龍甲)이....." 신투라 하여 귀신같은 도적이란 별명의 향비가 말을 가로챘다. "그 용갑은 정말 잘 만들어진 듯이 보이는데, 우리는 그 갑옷과 띠를 가지고 가야겠다." 이 말에 호걸들은 모두 속으로 웃었다. 평생 배운 게 도적질이라 이 늙은이는 정말 그 성질을 고치기는 어려운가 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금란이 웃으며 한 마디 했다. "그 용갑은 모두 오룡의 몸에 맞추어 입힌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몸에 맞지 않는답니다." "아가씨는 그 용갑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가?" 이건 마문비가 묻는 소리였다. "심목풍이 어디서 그런 고기 비늘을 가지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비늘에다가 특제 은줄을 써서 짜 놓은 것이라서 아주 질기답니 다. 보통의 칼이나 검으로는 어림도 없지요."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이때 소영 역시 그녀의 말에 귀를 기 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신바람이 나서 계속 이야기했다. "심목풍은 다섯 벌의 용갑을 제조하기 위해서 고수를 파견하여 일류 재단사를 잡아 왔어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갑옷을 지으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삼 년이나 걸려서 겨우 다섯 벌의 용갑을 만들었 답니다. 그러니 오룡대진은 심목풍에게 상당히 기대가 컸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향비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참, 괴기한 것은 그들이 어째서 일격을 감행하지 않았나 하 는 것이 아닌가?" 금란은 버들잎 같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소비의 능력으로 모르겠어요." 은란 역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검을 맞은 사람이 멍청이 앉아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럼 나 머지 네 사람들은 왜 모두 그 자리에서 선 채 움직이지 않았을까 요?" 마문비가 소영을 돌아다 보았다. "소형, 당신이 필경 어떤 검의 초식을 쓴 게 아니오?" 소영이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사마건이 돌연 실성한 듯 소리쳤 다. "당신 성이 소가요?" 소영은 이렇듯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피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도와가며 싸웠는데 구태여 이름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소영이외다." 마문비가 웃는 얼굴로 다그쳐 물었다. "진정 값이 나가는 이름 소영이오!" 지금까지 말이 없던 손불사도 고개를 돌리고 멍하니 소영을 응시 했다. "그대가 소영인가?" "그렇습니다." "노부는 산을 내려 온 뒤로 줄곧 그대의 대명을 들어 왔소. 이제 보니 과연 그 이름이 거짓 전해진 것이 아니구려." 소영은 남옥당의 일을 생각했다. 그가 자기의 이름 소영을 도용 해 썼다. 지금 와서 그 사람은 가짜요, 자기는 진짜라고 말하기도 거북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명백하게 밝힐까? 그러나 일시에 다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금산반 상팔이 돌연 입을 재촉했다. "빨리 가야지......" "왜요?" 사마건이 물었다. "심목풍이 깨어나서 우리가 백화산장을 빠져 나갔다는 소리를 듣 는다면 마음이 좋을 리 없소." 모두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 때였다. 멀리 날카롭게 들려 오는 사나이의 외침소리, 이어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것 같았다. 일행은 모두 강호의 늙은 구렁이들이다. 한 번 듣고서 추격해 오 는 말이 열 필 이상임을 알았다. 더 물을 것도 없는 일이다. 백화 산장에서 추격해 오는 것이 분명했다. 마문비가 머리를 들어 사방의 지세를 살펴본 다음 일행을 재촉했 다. "우리 동쪽으로 갑시다.' 말하고는 곧 앞장을 서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소영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 '이들이 이와 같이 분주하게 가는 것은 필경 무슨 뜻이 있을 게 다.' 그래서 여러 말 하지 않고 상팔을 붙들었다. "우리는 뒤에 처지기로 합시다.' 상팔은 즉시 찬성하였다. "좋소. 이들 백화산장의 무리들은 수단이 악랄하고 매우니 우리 는 구태여 강호의 규칙을 내세워 신사적으로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 다." 이것은 정정당당하지 않은 수법이라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뜻이었 다. 소영은 물론 그의 뜻을 잘 알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은은히 별빛이 비치는 아 래 몇 마리 날쌘 말이 호기있게 접근해 왔다. 상팔이 자기의 품 속을 더듬어 조그만 목합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있는 물질을 땅바닥에 흘려 놓았다. 소영이 물었다. "상형, 그 합에 든 물건이 무엇이오?" 상팔은 씽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버러지같이 자질구레한 기술이니 형님께서는 보시고 웃지 마시 오." "속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소. 이미 저들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덤비거늘 우리가 구태여 정당하게 맞싸울 필요는 없지요." "이 옥합 속에는....." 그러나 여기까지 말하고 상팔은 더 잇지 못하였다. 이미 적은 가 까운 거리에 와 있었다. 무리 가운데 먼저 두 필의 건장한 말이 별똥처럼 튀어 나오더니 두 사람 앞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즉시 뒤로 날아 피하였다. 이때 두 필의 말이 바야흐로 상팔이 땅바닥에 흘려 놓은 물질의 위에까지 접근해 있었다. 소영은 정신을 집중하여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이변이 생길 것 인가? 두 필 건마의 말발굽이 땅에 흘려 놓은 액체를 밟았다. 소리도 없었다. 다만 푸른 불빛이 땅바닥에서 지글지글 타기 시작했다. "히히힝!" 요란한 말울음 소리에 이어 앞에 있는 놈의 다리에서 푸른 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뒤쫓아 달리던 사나이는 이 광경을 보고 급히 말고삐를 잡아 채며 말을 세우면서 곧장 뒤로 돌았다. 무슨 암수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재빨리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불빛이 잇따라 번쩍이더니 이어서 그 말의 배가 지글지글 타기 시작했다. 앞에선 말이 뒷발질을 하는 바람에 인화물질이 튀었던 것이다. 잇따라 들리는 말울음 소리. 동시에 두 명의 기수는 말안장에서 급히 몸을 날려, 바닥에 내려섰다. 그러나 땅바닥에 내려서자 말은 돌보지도 않고 곧장 소영, 상팔 두 사람 들을 향해 질주해 왔다. 두 필의 건마는 몸에 푸른 불이 활활 타오르자 미친 듯이 네 굽 을 놓으려 울부짖었다. 밤중이라 불은 금시 말을 불에 태워 죽일 것 같이 보였다. 이렇게 되자 뒤를 따르던 말들은 급히 머리를 돌렸다. 길을 인도 하던 두 사람이 액운을 당한 것을 즉시 깨달았던 것이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상팔은 못내 아쉬워 연방 탄식을 쏟아 냈다. "아깝도다, 아까워! 백화산장의 적도들은 과연 교활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그들이 한꺼번에 모조리 타 죽었거늘....." 이러는 사이에 말을 버린 두 놈을 벌써 가까이에 이르렀다. 때를 놓치지 않고 소영의 오른손이 번쩍 허공을 그었다. 두 개의 돌멩이가 획!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 갔다. 밤중이라 피하는 것도 어려웠다. 더구나 두 사나이는 서로 공을 다투어 덮쳐 오는 판국이 라 이 불의의 일격을 피하지 못했다. 팍, 팍! 하는 소리가 터지자 그들의 입에서 비명이 잇따라 들려 왔다. 소영은 돌멩이가 날아가 맞는 소리를 듣고 바로 적의 혈도를 맞 추지 못했음을 알았다. 밤중이라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깝다 면 몰라도 상당한 거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영의 팔 힘은 보통 사람과는 크게 달랐다. 두 명의 장 정이 비록 급소는 맞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아픔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모두 주춤하고 자빠졌다가 엉금엉금 기어 일어났다. 푸른 불을 튀며 미친 듯이 날뛰던 말들이 벌써 까마득히 보였다. 뒤에서 쫓아오던 마필들은 일단 고삐들을 돌렸으나 다시 말머리 를 돌리더니 길을 피하며 무서운 기세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소영은 시선을 돌려 잠시 사방의 형세를 살펴 보았다. 입에서 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보아하니 모두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더 싸우기가 어렵겠소이 다. 이 사람들이 말을 달려 들어 오는 기세를 보건대 그들이 지닌 무공도 약하지 않은 것 같소. 만일 우리들이 지세가 좁은 곳을 택 하여 이들을 일단 저지할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소만, 어디..." 그 사이 벌써 적은 눈앞에 닥치고 있었다. 형세가 심히 위급했다. "그들과 접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오. 우리 두 사람이 술수 를 써서 그들을 저지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오." 상팔은 어느새 금필을 꺼내 들고 입으로는 연방, "옳아요. 옳아." 하고 소리를 질러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힘이 실 린 맑은 소리가 아니었다. 흡사 가래가 끓는 듯 답답한 소리였다. 그가 얼마나 피로해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소영은 그것이 못내 가슴이 쓰린 일이었다. '아아, 다시 이 무사들에게 포위당하여 접전을 벌인다면 호걸들 가운데에는 성하게 살아 남는 사람이 드물 것이니 이 일을....' 그가 그렇게 안타까와하고 있는데 돌연 뒤에서 마문비의 목소리 가 들려 왔다. "두 분께서는 싸우면 아니되오." 그러나 그렇다고 줄행랑을 놓을 수는 없었다. 물론 저쪽에서도 이 두 사람이 얼마나 피로해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소영은 급히 앞으로 나아가 길 한가운데를 막아 섰다. 상팔에게 낮은 소리로 일렀다. "상형은 먼저 물러가시오!" 상팔은 그의 무공을 잘 알고 있는 터라 굳이 고집을 부리지 않고 몸을 날려 삼십 장 밖으로 물러났다. 소영은 눈앞을 덮쳐 오는 마필을 보고 지체하지 않고 일장을 들 어 쳤다. 말에 타고 있던 사나이는 강력하기 비길 데 없는 한 줄기 장력이 콧잔등으로 밀려 오자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웠는지 두 손 을 마주 들어 소영의 일장을 맞이했다. "퍽!" 소리와 함께 사나이의 동작은 빠르게 움직였다. 두 손으로 막고 재빨리 한 손으로 적을 치는 솜씨는 가히 볼 만했다. 말은 크게 놀라 울부짖으며 앞발을 쳐들었다. 이때 사나이는 일 장을 막고 재빨리 한 손으로 상대방을 때렸으나 소영이 내쏟은 장 력이 너무 강하여 말안장에서 몸이 붕 떠 있었다. 소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손으로 적의 일장을 막고 또 다시 공력을 모아 더 거센 일장을 쏟아 내어 상대방의 면상을 향해 후려쳤다. 이 일장을 상대방은 막아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몸이 뜨는 바람에 면상을 다치지 않았으나 거센 힘이 가슴을 치자 으윽 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면서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내는 강골이었다. 게다가 심성이 또한 악착 같았다. 이 내 몸을 일으키더니 다음 순간 귀신같은 상을 해 가지고 덤벼 들었 다. 두려운 빛도 없었고 거세게 얻어 맞고도 싸움을 피하려는 기색 도 없었다. 사나이의 손에는 벌써 번뜩이는 검이 들려 있었다. 이때 그 뒤를 따르던 두 명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쌍쌍이 장검을 빼들고 측면에서 공격했다. 소영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선뜻 두 걸음을 내디디어 두 사람이 좌우에서 내려치는 검을 헛바람을 일으키게 하고는 그 바람으로 거의 십성의 내력을 발휘하여 앞으로 덮치는 사나이를 때 렸다. 장풍이 나가는 소리가 윙 울렸다. "펑!" 마치 벼락치는 소리와 같았다. 사나이는 말에서 굴러 떨어진 까닭에 몸이 시원치 않았다. 그래 서 소영이 거의 진력을 다 쓴 일력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더구 나 한 손에 검을 들고 내려치려는 판국이니 더욱 손을 쓰는 것이 느렸다. "으윽!" 비명이 일어났다. 사나이는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밀려나더 니 드디어 그 자리에 푹 거꾸러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다시 일어나 지 못하였다. 한 명은 이렇게 해서 해치운 셈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한꺼번에 대여섯 명이 동시에 달려 들었 다. 획획! 칼바람이 일고 섬광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소영은 그 와중에서 바람같이 좌충우돌, 장풍은 거의 적을 때리 고 한 손으로 상대방이 내려치는 것을 잡으며 그 기세로 몸을 허공 에 떠올리며 무릎과 발끝으로 두 명의 면상을 걷어 찼다. 질풍과 같은 동작이요, 쇳덩이와 같은 공세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여러 차례에 걸친 악전을 치르느라 기력은 쇠할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한차례 적을 때려 눕힌 후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 적의 검을 빼앗아 오른손에 바로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등 뒤를 소홀히 한 틈 을 타서 문득 싸늘한 검풍이 밀어 닥쳐옴을 느꼈다. 몸이 피로하면 정신이 흐트러지는 법이다. 그는 호신강기로써 적의 어떤 병기가 찔러 들어 오더라도 몸을 보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잠깐 소홀히 하여 등덜미를 내놓은 것이 아니라, 바로 몸을 운행하고 있는 호신강기를 흐트러 놓은 것이다. 적의 검은 곧장 소영의 등덜미를 파고 들다가 퉁겨 날아갔다. 상 처는 가볍지 않았다. 만일 이 찰나간의 불운한 기회에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호신강기를 전부 거두어 들인다면 아마도 적의 칼날 은 그의 가슴까지 꿰뚫었을 것이다. 비스듬이 몸을 기울인 그는 순간 적의 손에서 빼앗아 든 장검을 획 옆으로 그으며 계속해서 자기 몸으로 떨어지는 칼날을 동시에 쳐냈다. 쨍그렁!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몇 가닥 칼날이 허공으로 퉁겼다. "합!" 기합소리에 이어 으윽! 하는 참담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영 의 번뜩이는 칼날에 두 명의 허리가 잘려 나갔다. 두 명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으나 다음 순간, 머리, 허리가 옆으 로 기울이더니 마치 무우를 썰어 놓은 듯 윗부분이 먼저 땅바닥에 굴렀다. 몸의 아랫부분이 쓰러지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소영은 등덜미에 받은 일검의 상처가 가볍지 않음을 알았다. 그 러나 이 위급한 때에 상처를 돌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급히 운공 을 하여 피를 멈추게 하는 한편 잇따라 귀신 곡할 정도의 실력을 발휘했다. 검이 나는 곳은 모두 상상하지 못했으며 그 손을 쓰는 동작은 또한 매우 괴이하였다. 바로 내리치는가 하면 검은 어느새 옆으로 돌아가며 적의 목을 쳤다. 모두 이런 식이었다. 몸이 검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도 기이하였다. 여러 차례 비명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다섯 놈이 나뒹굴었다. 모 로 자빠지는 사람, 배를 안고 앞으로 꺼꾸러지는 사람 등 각양각색 이었다. 잇따라 몇 놈을 베어 버리자 형세는 크게 달라졌다. 아무리 생명을 돌보지 않는 자들이라도 순식간에 일어난 참상을 모를 수 없었다. 소영은 포위가 풀리는 틈을 타서 이내 몸을 날려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우선 걱정이 되는 것은 부모님의 안위였다. 자신이 흔들리 면 두 분의 안위가 흔들린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기운이 솟구치는 듯했다. 곧장 앞으로 달렸다. 그의 몸은 피투성이었다. 문득 들럭오는 칼부딪치는 소리. 눈을 들어 보니 그곳에도 이미 백화산장의 무리들이 와 있었다. 그에 대적하여 다섯 사람의 무림고수들이 저마다 손에 든 병기로 적을 맞아 싸우고 있었다. 소영은 그들을 한차례 훑어 보았다. 맨 오른편에서 격돌하고 있는 사람은 팔수신룡 단목정이었다. 그 옆 사람은 아름답게 생긴 청의의 소녀, 그리고 그 옆에는 절름발이 의 의협이라 하여 통칭 파협이라 일컫는 상대해가 두 사람의 제자 를 데리고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이 다섯 사람은 한 줄로 늘어 서서 싸우고 있었는데 백화산장의 무리들은 한 걸음도 그들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다섯 사람 뒤에는 또 화룡봉을 들고 일신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검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리고 서 있었으니 바로 삼양신 탄 육괴장이었다. 마문비는 그들의 뒤에 멀찌감치 비켜 서 있다가 소영이 달려 오 는 것을 보고는 반가히 소리쳤다. "어서 이쪽으로 오시오!" 소영은 멈추지 않고 싸움의 와중으로 부딪혀 들어 갔다. 단목정이 그가 달려오는 것을 보자 돌연 옆으로 몸을 날려 길을 내 주었다. 이 순간을 이용하여 소영은 바람같이 싸움판을 뚫고 지나갔다. 마문비는 곧장 소영에게로 다가섰다. "어서 앉아 좀 쉬시오......" 마문비는 문득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소영의 옷이 온통 피투성 이로 적을 벨 때 피가 튀었다면 너무 심한 편이 아닌가. 게다가 얼굴은 핏기가 없었다. "상처를 입었소?"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이미 백화산장에서 소영의 무공을 보아 알고 있었다. 소영은 그 처절한 혈투의 와중 속에서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하잘것 없는 추격자들에게 다 쳤으리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소형!" 이때 소영은 갑자기 긴장이 풀어짐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죽 빠지며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급기야 흔들리는 몸을 장검으로 땅 을 짚어 바로 세웠다. "내가 급히 달려 오느라고 피를 멎게 하는 일을 잊었구나!' 그는 천천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일 행이 둘러 앉아 분주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위급한 때라 모두들 기운을 차려야 했다. 소영이 상처를 입었다는 소문이 금방 퍼졌다. 맨 먼저 달려 온 것은 금란이었다. "상처가 대단하십니까?" 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치는 않소." 금란은 조바심을 했다. "공자의 한 몸은 우리들의 안위와 크게 관계가 있습니다. 어찌 몸을 보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서 제게 보여 주십시오." 소영은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그럼 수고 좀 해 주시오." 금란이 그의 상처를 보니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다행히 심장을 다치지 않아서....." 그녀는 급히 약을 바르고 옷을 찢어 엄밀히 싸매었다. 이때 휴식을 취하던 뭇 호걸들은 소영이 상처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라서 달려오는 자도 있었다. 소영은 때가 때인만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시간이 금쪽과 같이 귀중한 때올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백화산장의 고수들과 일전을 불사해야 합니다. 본인의 상처 는 비교적 가벼운 것이니 여러분께서는 너무 크게 걱정하여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그는 더 말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손불사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 다. 어떻게 된 일일까? 멍하니 입을 다물고 일동을 둘러 보고 물었다. "여러분께서는 손불사 노선배님을 보시지 못했습니까?" 여러 호걸들은 이 말을 듣고는 서로 얼굴만 쳐다 볼 뿐이었다. 그들이 안절부절 하고 있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자기 한 몸을 돌보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손불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마건이 입을 열었다. "그 늙은 거지는 무공이 고강하니 결코 어려운 일을 당하지는 않 았을 거요. 여러분께서는 그 일에 대해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소영은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아, 그는 몸에 중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돌연 한 소리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한 사람, 서른 안팎의 젊은이가 온 몸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뛰 어 나왔다. 상팔이 즉시 손을 써서 사나이의 온몸의 혈도를 봉채함으로써 피 가 계속해서 흐르지 않게 하였다. 여러 사람이 보니 그는 파협 상 대해의 제자였다. 소영이 보니 그의 오른쪽 어깻죽지가 이미 무우 잘리듯 끊어지고 없었다. 상팔이 그의 혈도를 쳤지만 피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흘렀다. 사나이는 왼손으로 장검을 짚고 몸을 지탱하며 말했다. "백화산장의 무리들은 계속해서 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가사와 단목 노선배께서 분전하고 계십니다만 몰려 오는 적의 수가 많아서 오래 지탱하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서....." 그러나 말을 채 맺지 못하였다. 사나이의 몸은 썩은 나무토막처 럼 털썩 땅바닥에 쓰러졌다. 마문비가 급히 몸을 날려 사나이를 부축하였다. 호걸들은 모두가 무림의 일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음식을 먹었 고 또 얼마간의 휴식도 취하였다. 마문비가 여러 호걸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상처를 치료할 영약을 가지신 분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아 신투 향비가 큰 걸음으로 나섰다. "늙은 도적이 가지고 있소." 신투 향비는 거침없이 품 속을 뒤져 금창약을 꺼내 사나이의 상 처에 손수 발랐다. 그리고 소매를 찢어서 상처를 싸매 주기까지 했 다. 보통 때라면 이러한 친절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곳에 있는 호걸들은 일류 고수요, 또한 일파의 인물들이다. 그 누가 감 히 하잘것 없는 파협의 제자에게 손수 약을 발라 주고 싸매 주기까 지 하겠는가. 신투의 하는 거동은 모든 영웅들을 감동시켰다. 사람이 위급한 경우에 닥치면 신분이고 체통이고 다 떨어 버리게 되는 법이다. 진정 인간의 아름다운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봉죽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어른, 이 중상을 입은 분을 소비에게 맡겨 주십시오." 마문비는 자못 마음이 흔쾌했다. "하하.... 천하 영웅들이 오늘 이같이 한마음으로 협력한다면 심 목풍의 세력이 설사 배로 강해진다고 한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마문비의 이 말은 장중의 호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사마건이 돌연 앞으로 나서며 손에 든 금환을 휘둘렀다. "어느 분이 저와 함께 지금 적을 대적하고 있는 분들을 돕겠습니 까?" "이 늙은 도적이 따르지" 바로 신투 향비였다. 사마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두 사람이 소매를 펄럭이며 앞으로 나가는 기세는 크게 높아졌 다. 마문비는 한 차례 사방의 형세를 살핀 다음 입을 열었다. "여기서 오리 쯤 떨어진 곳에 본인이 적을 막기 위해 매복을 배 치하였습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가야만 그들과 만날 수 있을 것입 니다." 상팔이 입을 열었다. "백화산장의 세력이 이와 같이 급격히 늘어 간다면 팔수산룡 단 목정과 파협 상대해 등은 사마건과 향비의 도움이 있다고 해도 아 마 오래 지탱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마문비는 소영을 돌아다 보았다. "본인이 이미 준비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영의 상세가 어떤 지, 걸어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금란이 얼른 말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만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라면 제가 업고서라도 가 겠......." 소영은 금란이 업고 가겠다는 말에 벌떡 자리에서 뛰어 일어났 다. "걱정마시오. 이까짓 조금 다친 것을 가지고 무엇을 꺼리겠습니 까?" 마문비가 만류했다. "소형께서는 천하 무림을 생각하여 몸을 보중해야 하오. 무리하 는 것은 삼가시오." "걱정 마십시오." 소영은 이렇게 말하고 큰 걸음으로 앞으로 나갔다. 상팔, 금란 두 사람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소영의 뒤를 바싹 좌우 에서 보살피듯 따랐다. 뒤에서는 여전히 칼부딪치는 소리와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쌍 방의 혈전은 극에 이른 듯했다. 소영은 마음 같아서는 즉시 되돌아 가서 싸움을 돕고 싶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몸을 보중해야 한다. 하는 수 없이 그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오 리의 길을 순식간에 도착했다. 먼발치로 큰바위를 양쪽에 낀 좁은 길 가운데 얼굴에 고슴도치 수염을 한 거대한 장한이 딱 버티 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그가 남악 보천성임을 대번에 알아 보았다. 마문비가 바람같이 날아 그 사람 앞에서 두 손을 맞잡고 예를 올 리며 말했다. "보형,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보천성이 찌렁찌렁 울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처분대로 다 배치해 놓았습니다. 마형과 여러분께서는 산 마루로 돌아가 쉬십시오. 이미 여러분을 위해서 충분과 음식과 건 강한 마필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소영은 그들의 계획이 주도 면밀함에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 다. '그러나 누구의 계책인지 모르겠구나!' 생각하는 사이에 무리들은 길 옆을 돌아서 큰 바위를 양쪽에 끼 고 좁은 길로 들어 섰다. 좁은 길을 지나니 눈앞의 경치가 일변했 다. 넓은 풀밭, 그리고 말울음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려 왔다. 이미 안장을 갖춘 말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문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소형과 여러 영웅들께선 여기서 잠시 쉬십시오. 제가 돌아가서 앞에서 적과 대적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퇴각을 하도록 이르겠습니 다." 소영이 나서며 말했다. "제 몸도 회복된 것 같습니다. 청컨대, 마형과 함께 가기를 바랍 니다." "우리는 이미 서로 연락하는 신호를 해 두었소. 따라서 급히 되 돌아 갈 필요도 없소. 그러니 감히 소형께서 수고를 끼칠 거야 없 지요." 마문비가 만류했다. 그러나 소영은 못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여러분께선 이 소영을 위하여 그토록 분전을 하고 계신데 내 어 찌 감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으리오." "소형이 꼭 보아야만 한다면 상관이 없지요. 가장 나은 길은 손 을 쓰지 않는 것이오." 상팔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인이 함께 가서 형님을 지키겠습니다." 소영은 과히 달갑지가 않았다. 그러나 상팔의 성의가 고맙게 느 껴져 더 말하지 아니했다. 세 사람은 풀밭을 나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이미 싸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영은 그곳에서 쭉 늘어서 있는 영웅들을 보았다. 태반이 아는 얼굴들이었다. 제일 왼쪽에는 상복을 입고 체모가 출중한 소년이 서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두 자가 채 못 되는 장검을 들려 있었다. 바로 남파 태극 문하의 회풍십팔검으로 전 무림을 떨어 울린 지 난날의 장문인 석준산의 아들 석봉선이 아닌가. 그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나이가 쉰이 될까 말까한데 검을 잡고 숙연한 모습을 하고 서 있었다. 바로 남파 태극 문하의 등곤태이다. 그 다음으로는 한 사람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으니 그는 또 누군가? 소영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곧 의혈문의 동공성을 생각해 냈다. 그 다음으로는 보천성이 서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키가 팔 척이 넘어 보이는 거인이 우뚝 서 있었다. 붉은 얼굴에 허리에는 연삭 양은주를 차고 손에는 큰 활을 들고 있었는데 벌써 활에는 살이 매겨져 있었다. 바로 신전진건곤이라 불리는 당원기였다. 이 다섯 사람을 제외하고도 양쪽 바위와 풀더미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번뜩 움직이곤 했다. 모두 매복해 있는 자들이 분명했다. 매복해 있는 사람들은 한 둘에 그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소영 등은 지나쳐 오면서도 그들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문비의 말소리가 전해 왔다. "당형, 활을 쏘아 그들을 후퇴시켜도 되겠지요?" 당원기는 끄덕이고 즉시 공중에다 대고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곧장 하늘로 치솟아오르더니 얼마쯤 올라가자 펑! 하는 소리와 함 께 화살 끝에서 흰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마문비가 영웅들을 독려했다. "백화산장의 인물들은 한꺼번에 덤비는 것을 다반사로 알고 있 소.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인정을 두지 마시고 사정없이 손을 써서 적을 상대해도 무방합니다." 고슴도치처럼 온 얼굴이 장비수염으로 뒤덮인 보천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이제 마형께서는 산 뒤로 돌아가 쉬십시오. 이곳의 일 은 우리가 처리할 테니....." "그러지요. 본인은 절벽 사이로 숨어 지키겠소이다. 우선은 손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십시오." 보천성은 이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손을 휘둘렀다. 신호를 본 사 람들은 모두 대열에서 흩어지며 분분히 바위 뒤로 돌아가 몸을 은 신하였다. 보천성은 앞장 서서 성큼성큼 바위 뒤로 돌아 높은 곳으로 향했 다. 소영과 마문비가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들이 닿은 곳은 한 거대한 암석의 틈바구니였다. 그곳은 전후 좌우가 모두 풀더미에 싸여 있어 위에 안아서 아래를 내려다 보기 에는 더없이 좋았다. 시계도 확 트이고 넓어서 아래에 보이는 길과 그 사이사이에 매복한 자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만일 적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말에서 내려 몸을 은신해 가 며 싸우는 모습이 샅샅이 보일 것이 분명했다. 머리를 들어 바라 보니 벌써 멀리로 네 필의 인마가 달려 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문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벌써 우리들의 제 일 저지선은 크게 흐트러진 것이 분 명하오." 달려 오는 자들은 모두가 검은 옷을 입은 백화산장의 무사들이었 다. 보천성이 한마디 했다. "먼저 저들을 족쳐서 상판대기를 좀 볼까?" 그리고는 저 아래 나무 밑에 서 있는 당원기를 향해 소리쳤다. "당형, 저놈들은 전부 백호산장의 무사들이오. 당형은 인정사정 볼 필요가 없소이다." 당원기는 활에 긴 화살를 매었다. 소영은 그가 느긋이 힘을 주어 화살을 겨냥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피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곧장 날아 갔다. "악!" 멀리서도 비명 소리는 처참하게 들렸다. 이 강궁의 힘은 얼마나 센지,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사나이는 화살리 가슴을 꿰뚫고 등허 리까지 길쭉하게 나와 있었다. 56. 심목풍과 신풍방주의 대면 치닫는 말 위에서 흑의무사는 처절하게 굴러 떨어졌다. 그는 두 손으로 가슴에 박힌 화살의 끝을 잡고 한참이나 애를 쓰다가 죽고 말았다. 소영은 이와 같은 기세에 입이 딱 벌어졌다. 삼국시대의 여포가 되살아나고 황충이 환생했다 하여도 이만한 솜씨를 보이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화살이 미치지 못할 거 리였다. 잇따라 두서너 차례 화살 소리가 들렸다. 돌진해 오던 사나이들이 급히 놀라 말머리를 돌리고 분산했다. 표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단 흩어졌다가 다시 질풍처럼 휘몰아쳐 왔다. 과연 두려움을 모르는 용사들이었다. 활시위 소리가 다시 터졌다. 또 한 명이 가슴을 끌어 안고 말에 서 떨어졌다. 보천성은 한바탕 호쾌히 웃고 마문비에게 말했다. "마형은 여기서 관전하고 계십시오. 소제가 나아가 손을 써서 적 을 막겠소이다." 보천성은 몸을 날려 단번에 여남은 자씩 날아 몇 번 솟구쳤다 떨 어지는 동안 벌써 골짜기 입구로 나아갔다. 때를 같이하여 좌우 양쪽 풀더미 속에 은신해 있던 영웅 호걸들 이 일제히 와아! 하고 달려나왔다. 남파 태극문의 장문인이 된 석봉선은 벌써 두 자도 채 못 되는 단검을 휘두르며 앞에 오는 적을 맞이했다. 한 차례 칼빛이 번뜩이 더니 검고 예리한 바람을 일으키면서 마상의 대한을 베어 갔다. 번 개 같은 동작이었다. 칼을 맞이한 사내는 전신에 푸른 옷을 입은 거한이었다. 슬쩍 몸을 옆으로 뉘어 피하고는 틈을 타서 등허리에서 안령도를 뽑아 들었다. 석봉선의 일 초식은 비록 허공을 쳤으나 재차 휘두르는 검초는 먼저보다 더욱 빨랐다. 그러나 푸른 옷의 거한도 만만치는 않았다. 번뜩 몸을 피하여 종 이 한 장 사이로 검을 빗나가게 하고는 다음 순간에는 다시 손에 든 안령도를 바람같이 휘둘러 덤벼들었다. 석봉선은 잇따라 몇 번을 공격했지만 여전히 적을 베지 못하였 다. 승패를 가르지 못할 때, 또는 자기가 뜻한 대로 승부를 결정짓 지 못할 때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조급해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조급해지면 손이 흐트러지기 마련, 석봉선이 꼭이같은 형국 이었다. 등곤이 낮은 소리로 걱정을 했다. "우리 남파 태극문의 무술은 정으로써 동을 제압하는 것을 위주 로 하고 있는데 장문인께서는 마음이 조급하게 들떠 있음이 분명하 니 이는 우리 파의 문하인이 극력 피하고자 애쓰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말이 떨어지자 순간 석봉선은 그 말을 들은 것처럼 금시에 화기를 누르고 검세가 침중해졌다. 푸른 옷의 대한은 여러번 말에서 내려 대적하려고 노렸으나 번번 이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석봉선의 검이 몸둘레를 바싹 죄니 어디 그럴 만한 여유가 있는가. 상대방의 검을 막기에도 어려운 처지인 것이다. 고수와 고수들의 사이에 승부가 결정되는 것은 이 종이 한 장의 차이로 기선을 제압하면 다음 검의 속도는 더욱 빠른 것이다. 이것 은 온갖 무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때는 벌써 여기저기서 싸움판이 벌어져 있었다. 의혈문하의 동공성 역시 한 장한을 맞아 열띤 칼질을 퍼붓고 있 었다. 동공성으로 말하면 한 마디로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었다. 세상 물정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지만 많은 경험을 통해 적을 맞아 어 떤 자세로 싸워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칼빛이 번뜩이니 부드러운 가운데 숨쉴 수 없는 긴박함이 깃들어 있어 무서운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바로 의형문이 자 랑하는 무술의 특색이 아닌가. 불꽃 튀는 접전이 계속되자 차츰 우열이 드러나 보였다. 석봉선의 검이 먼저 여유를 얻어 적이 타고 있는 말을 찔렀다. "히히힝!" 말은 상처를 입고 아픔에 비명을 질렀다. 별안간 앞발을 번쩍 드 니 푸른 옷의 사나이는 그 틈을 빌어 휙 몸을 날려 땅으로 내려섰 다. 석봉선은 여유있게 적이 내려서기를 기다렸다가 돌연 앞으로 짓쳐 들어 가며 일검, 적은 급히 칼을 휘둘러 막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쇳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석봉선의 왼손이 번쩍 움직이자 날카로운 한 줄기 장력이 곧장 사나이의 가슴으로 날아갔 다. 거한은 이런 술수를 미처 예측하지 못하였음인지 가슴에 맞고 말았다. 사나이는 휘청거렸다. 이 순간에 석봉선의 몸이 번개같이 날아갔는가 싶더니 그의 두 자도 못 되는 검이 어느 틈에 적의 가슴을 관통했다가 발로 차면서 뽑아 내었다. 번개같은 동작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이때 동공성 역시 의혈문의 절초를 휘둘러 주위에 가득히 싸늘한 칼빛을 그렸다. 칼이 지나감에 따라 휙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간 장을 서늘하게 했다. 다음 순간, 적이 선뜻 뒷걸음을 치는 그 찰나간의 기회를 잡고 동공성의 장검은 재빨리 옆으로 그었다. "으악!" 비명이 일어났다. 여러 사람이 그제서야 보니 사나이의 몸이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칼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 다.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이들은 어찌 이토록 인정을 두지 않는가? 사실 그들은 심목풍과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백 화산장의 인물들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들은 정녕 적을 가차없이 베어 버렸다. 이때 멀리 급한 걸음으로 달려오는 몇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대 개 칠, 팔 명은 될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수십 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급하게 따라 붙었다. 이 모양을 보자 당원기는 지체없이 활에 살을 매겼다. 연달아 세 대의 화살을 쏘았다. 또한 겨냥도 정확했다. 동료에게 바싹 접근하 던 세 명이 전후에서 땅바닥에 나둥그러졌다. 이 사이에 도망자들은 거의 골짜기 입구까지 이르렀다. 상대해와 단목정은 온몸이 피투성이었다. 삼양신탄 육괴장은 오른손에 화룡봉을 들고 있었는데 왼손 소매 는 흥건히 피에 젖어 있었다. 보아하니 상처가 가볍지 않은 것 같 았다. 팔수신룡 단목정은 자꾸만 몸을 돌리며 암기를 던졌다. 이 시각, 차디차면서도 단정하던 푸른 옷의 여자는 전과는 딴판 이었다. 긴 머리는 흐트러져 귀신같이 날리고 일신은 피항아리를 뒤집어 쓴 듯 꼭 야차와 같은 모습이었다. 또 스무 살 안팎의 장검 을 든 소년도 다리에 부상을 입어 나는 듯 오고 있었으나, 절룩거 리니 속도가 매우 늦었다. 단지 상처가 가벼운 사람은 사마건과 향비인 듯, 그들 두 사람은 나중에 전열에 뛰어들어 그다지 지친 모습은 아니었다. 계속 추격해 오는 적을 막으며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또 적을 맞 이했다. 그들이 겪은 악전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돌연 보천성이 달려나가더니 상대해와 단목정을 맞이했다. 그리 고는 추격자를을 향하여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이놈들!" 바싹 따라붙던 네 명의 무사가 주춤거리면서 멈추었다. 이쪽의 형세가 만만치 않음을 본 것이다. 이때 당원기는 이미 활을 거두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연삭 양은 추가 들려 있었다. 폭이 열 자 정도 되는 좁은 협곡에 이미 석봉선, 동공성, 등곤 등 다섯 사람이 물샐 틈 없는 그물을 치고 있었다. 누구든 지나갈 용기가 있는 자는 오라는 듯 그들이 적을 기다리 는 늠름한 위풍은 가히 일기당천의 위맹함이 엿보였다. 그 맞은편에 멈춰선 자들은 벌써 오십 명 가량 되었다. 그들이 곧추세운 병기는 대나무 숲과 같았다. 모두 푸른 빛이 번 뜩거렸다. 또한 그들의 거동이나 말 위에 앉음새가 모두 장골들이라 일기 당천의 용사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미 소영은 그 흑의 무사들과 일전을 치루어 보았으므로 그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흑의무사들을 강호에 내보낸다면 모두 가 고수급 인물에 들 것은 틀림이 없었다. 상대해 등 호걸들은 석봉선 등이 치고 있는 방어선을 지나갔다. 그러나 모두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 았다. 상대해, 단목정 등이 그래도 몸을 지탱한 것은 수십 년 동안 닦 은 내공의 덕이라고나 할까? 사실상 그들도 다른 사람 못지 않게 상처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상팔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다. '팔수신룡 단목정과 파협 상대해는 다같이 강호에서 이름을 드날 린 일류급 고수가 아니냐. 그들이 이와 같이 중상을 입을 줄이야.' 그 동안에 날이 환히 밝아왔다. 산 뒤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주승과 반개는 모두 정신과 체력 이 현저하게 회복되었다. 두 사람은 단목정이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는 암연히 서로 얼굴 을 마주보았다. 먼저 반개 심철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소영의 상처가 가볍지 않아. 그가 다시 싸운다면 상처가 도질지 도 몰라. 금후의 무림 대업을 생각한다면 소영을 싸움에 참가시켜 상처를 입혀서는 절대로 안 되겠군." 주승 역시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네. 우리가 가서 그더러 싸울 수 없노라고 전해야지...." 주승은 말끝을 흐리다가 쓰게 웃고 다시 말했다. "개방 장로 손불사가 역시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모양인데... 백화산장의 인물들에게 발각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 이 두 사람, 풍진 속에서 살아온 두 늙은 호걸들은 일생 동안 작 고 큰 싸움을 적지 않게 보고, 또 겪었다. 그러나 이번에 겪은 치열한 악투는 그들에게 일찍이 겪지 못했던 공포를 주었음이 분명했다. 심철와가 몸을 일으켰다. 주승도 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은 소매를 나란히 하고 몸을 날렸 다. 이때 산골짜기의 형세는 또 달라져 있었다. 흑의 무사들은 어느새 둥그렇게 진을 쳤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 듬고도 아직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가? 소영이 머리를 돌려 마문비에게 말했다. "마형, 적은 많고 우리편은 적소. 접전을 하면 희생이 클 것입니 다. 어서 적을 물리칠 계책을 짜는 것이 좋겠소이다." 마문비는 낮은 소리로 탄식했다. "개방과 소림의 여러 제자들이 혹 백화산장과 대적한다면 몰라 도, 그밖의 문파로는 백화산장의 적수가 되치 않소." 그의 말하는 바는 이미 승산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소영은 백화산장에서 밤새껏 싸운 일을 생각하고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만일 그때 손불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많은 호 걸이 백화산장 안에서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이번 싸움은 실로 괴이하게 어렵고도 이상한 것이었다. "마형께서 설법에 능하시니 각대문파가 합심을 하여 일어선다면. ......." 소영의 말에 마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대문파는 연원이 오래되었고, 소제가 강호상에 행도한 지는 불과 수 년, 어디 구대문파의 사람들에게 소제가 눈에나 차겠소? 그러나 그들은 결코 나를 버려 두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오." 말하는 사이 멀리 산굽이를 돌아 큰 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 났다. 거뜬하게 경장차림을 하고 검을 찬 사람은 바로 무당 문하의 전엽청이었다. 그 옆에 부지런히 오는 사람은 짧은 수염이 온 얼굴을 덮었고 네 모진 얼굴에 고리눈을 하고 있으니 그 신태가 매우 위맹스러워 보 였다. 바로 종남이협 중의 둘째 등일뢰가 아닌가. 마문비가 물었다. "소형, 저 짧은 수염이 온 얼굴을 덮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 시오?" "그 사람은 대명이 쟁쟁한 종남이협 가운데 한 사람 등일뢰요." "그럼 같이 오고 있는 젊은이는 또 누구인지....?" "그 사람은 무당파 무위도장의 제일 아래 사제인 전엽청이올시 다." 마문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전대협인 것을, 형제는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을 들어왔소이 다. 소제는 내려가서 그들을 영접하겠소이다." 마문비는 한달음에 두 사람의 신변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두 손 을 맞잡고 예를 했다. "등이협, 별래 무양하신지요. 이 마문비를 알아 보시겠습니까?" 등일뢰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마주 인사를 차렸다. "마형께서 백화산장에 깊이 들어간 일은 지금 전 강호상에 소문 이 자자하게 퍼졌소이다. 이렇듯 호쾌하고 담이 큰 행동은 본인으 로 하여금 실로 감복하게 하는 바올시다." "말하자면 부끄럽습니다." "하하하....." 등일뢰는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딴 사람들은 백화산장 중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알지 못하나 소 제는 이미 명백하게 알고 있지요. 마형이 이렇듯 안전하게 백화산 장을 빠져 나오셨다는 일은 담력이 대단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 무공이나 지혜가 모두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외다." 마문비는 오히려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등일뢰는 고개를 돌려 눈으로 전엽청을 가리켰다. "이 분은 무당 장문인 무위도장의 사제 전엽청....." 마문비는 얼른 몸을 돌리고 포권일례를 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전형의 대명을 들어왔습니다. 오늘 다행히 이 렇게 만나 뵙는군요." 전엽청도 허리를 굽혔다. "마형의 대명과 예, 악, 상, 공 네 성의 무림동도를 영도하심과 그 재능이 과인하심은 이미 오래 전부터 소제가 마음으로 흠모하던 바올시다." 이때 그들의 배후에서 한바탕 부르짖음이 들려와 마문비의 말을 끊어 버렸다. 일동은 모두 시선을 돌려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산 입구에 구름같이 몰려 있던 흑의 무사들이 숙연히 물러나 양 쪽으로 갈라서자 그 사이로 세 필의 건장한 말이 앞으로 나왔다.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던 마문비가 실성한 듯 소리쳤다. "심목풍!" 등일뢰는 성급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내 한 주먹 힘이 되고자 왔으니 응당 상대방의 예방을 꺾어야겠 군." 말을 마치고 두려움도 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전엽청이 등일뢰의 뒤를 바싹 따라갔다. 마문비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당과 소림에서 도우러 왔거늘 내 어찌 이 일은 버려 두고 처 리하지 않으랴.' 전엽청과 등일뢰는 이미 보천성 등에게 가담해 있었다. 여러 호걸들은 저마다 손에 병기를 꼬나잡고 기다렸다. 심목풍은 한 필, 전신이 백설같이 흰 준마 위에 단정히 앉아 있 었다. 몸이 커서 작은 낙타만큼 보였다. 심목풍은 차디찬 눈으로 호걸들을 쭈욱 훑어 보았다. 그리고는 말을 몰아 일행 앞으로 나와서 조용히 멈췄다. "늙은 거지 손불사는 어디로 갔는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들 호걸들은 모두 백화산장의 악전에 참 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심목풍의 물음에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뿐이 지,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흥!" 코웃음을 친 사람은 마문비였다. "손노선배 말이오? 그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갔소. 심장주가 무슨 말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본인에게 하더라도 마찬가지요." 그는 이렇게 대꾸를 하고 시선을 들어 심목풍의 어깨 너머로 보 냈다. 심목풍 뒤에 두 명의 늙은이가 바싹 따라붙어 있었다. "흥! 관동 장백산의 흑백 이노로군!" "흥!" 심목풍이 같잖다는 듯 비웃었다. "너는 내 적수가 아니다. 나는 늙은 거지를 찾아 빚을 청산하려 는 것이니까....." 보천성이 돌연 무기를 휘두르며 한 마디 했다. "심목풍, 네가 그를 찾는 일은 논하기 전에 우선 이곳을 통과하 리라고는 생각지 말라." 심목풍은 경멸하는 듯 일소에 붙였다. "그래 여러 사람의 힘을 빌어 이 심아무개의 길을 막으려고 하는 가?" 등일뢰가 노한 소리로 외쳤다. "심목풍, 너무 잘난체 마라. 네 무례가 비록 고강하다고는 하나 여기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목풍은 힐끗 등일뢰를 쳐다보았다. "등이협 훌륭한 분부시군." 심목풍은 더 이상 등일뢰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마문비에게 로 눈길을 돌렸다. "이 심아무개가 듣기로는 백화산장에서의 대전은 모두 그대 마문 비의 획책으로 비롯된 것이라 하는데 그것의 사실 여부를 모르겠 다." 심목풍은 담담히 웃었다. "비록 전해진 말이 그와 같다고 할지라도 나 심아무개가 아직 믿 지 못할 점이 있어....." 그는 잠깐 말을 끊고 낭랑하게 웃었다. "이 심목풍은 그대 마문비를 보자는 게 아니다. 그대 마문비는 그와 같은 능력이 없다. 손불사도 안 된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을 진데 손불사 그 늙은 거지도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마문비는 속이 뜨끔했다. 심목풍의 흔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대들 가운데 확실히 무공이 고강한 자가 한 사람 끼어 있다는 말이다. 그대들은 물론 미치지 못하겠지만 저 손불사도 삼 분이나 뒤진다. 나 심아무개는 친히 그를 한 번 만나고자 이렇게 뛰어왔 다." 보천성 등은 정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에게는 벌써 오래 전 부터 은퇴한 개방의 장로 손불사가 백화산장의 악전에 참가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손불사보다도 무공이 더 출중한 사람이 있다니 이건 또 어찌된 일이란 말이냐? 마문비는 눈을 똑바로 뜬 채 한 마디 했다. "심대장주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이 말은 곧 심목풍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방증하는 것이나 다름 이 없었다. 여러 호걸들은 그래서 또 한바탕 놀랐다. 정말 그런 인물이 있단 말인가? 심목풍은 냉랭하게 대담했다. "나는 비록 그 이름을 모르나 생각하기를 그는 변장술이 능하여 교묘히 우리 백화산장으로 섞여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심대장주가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는 믿지 않소." "흥! 알고 모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목하 긴요한 일은 그가 앞으로 나와서 나 심아무개와 만나는 것이다." 마문비는 지지 않았다. "심장주는 알고도 말하지 않으니 그가 나설 필요도 없지 않소." 심목풍의 차디찬 눈이 한바탕 한 줄로 늘어선 영웅들의 눈을 쓸 었다. 그 얼굴에는 여전히 간악한 웃음이 흘렀다. "그래 여러분들은 정말 나 심목풍과 겨루겠단 말씀인가?" 전엽청이 돌연 끼어 들었다. "심장주께서 싸움을 말리는 말을 기어이 듣지 않으신다면 우리들 은 하는 수 없이 죄를 지을 뿐이오." 심목풍의 눈이 예리한 빛을 뿜으며 전엽청을 응시했다. "전형, 무위도장께서는 오시지 않았는가?" 이러는 동안 홀연 어디선가 한 마디 나무아미타불! 하고 불도를 외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모든 사람이 눈을 돌려 보니 과연 한 사람 검을 빗겨 찬 도장이 흰 가사를 두른 화상과 함께 큰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그 도사의 모습은 실로 신선이 바람을 타고 노니는 듯, 속세에서 표표히 날아 다니는 듯했다. 그는 바로 전엽청의 둘째 사형 운양자였다. 그의 뒤에는 두 사람의 대머리 화상이 따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늙은 티가 몸에 배인 사람이며 한 사람은 나이 사십 안팎의 장년이 었다. 중년 화상은 어깨에 쇠로 만든 선장을 둘러메고 마치 용이 나는 듯 범이 뛰는 듯한 걸음걸이었다. 늙은 화상은 눈을 거의 감고 합장을 한 채 운양자의 등뒤를 바싹 따르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보기에 매우 힘에 겨워 보였다. 그러나 운양자의 뒤에서 처지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한 줄로 막고 서 있는 뭇 영웅들의 대열에 끼었다. 늙은 화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심목풍을 향했다. 그리고는 낮은 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심대장주, 이십 년 전 옛친구를 알아보겠는가?" 심목풍은 늙은 화상의 얼굴을 한 차례 건너다 보더니 얼굴빛이 변했다. "너는 아직도 죽지 않았는가?" "흥! 비록 이십 년 전에 네 손에서 목숨을 건졌다만, 또 네 손에 죽게 된다면 이건 이십 년 후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야겠구나." 심목풍은 뒤에 바싹 붙어 서 있는 흑백이노를 돌아보며 무어라고 몇 마디 수군거렸다. 이때 마문비는 묵묵히 정세를 저울질 해보고 있었다. 이미 전엽 청과 운양자가 나뉘어 왔다. 그것으로도 이미 실력이 크게 증가된 셈이었다. 게다가 이 화상들까지 가세하였으니 설혹 심목풍과 일 전을 치룬다고 할지라도 그다지 꿀릴 것은 없을 것 같았다. '무당, 소림 양파가 이미 이 시비의 와중으로 말려 들어왔으니 나머지 다른 문파의 동정을 얻기는 쉬운 일이 아닌가?' 이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면 설혹 백화산장의 젖먹이까지 다 나온다고 해도 크게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바로 이 때였다. 날카로운 소리가 일동의 귓전을 울렸다. 이어서 들리는 징 울리는 소리...... 심히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흔드는 소리였다. 소영은 뒤를 바라보았다. 아까 운양자 등이 오던 길로 사람들이 나타났다. 웃통을 벗은 네 명의 거한이 크고 무시무시한 신상을 받쳐 들고 오고 있었다. 신상은 팔이 넷이나 달리고 네 가지 다른 병기를 각각 들었다. 흉상은 꼭 지옥의 수문장과 같이 무시무시했다. 그 신상을 앞에서 인도하는 네 명의 장한들 중에 한 사람은 거대 한 징을 받들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두드리며 오고 있었다. 징이 울리는 소리는 길게 여운을 끌며 들어오기 때문에 기이한 충동으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었다. 소영은 무시무시하게 생긴 신상 뒤를 바라보았다. 그쪽에도 한 무리의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다. 키가 같지 않고 또한 옷차림도 가 지가지였다. '신풍방주는 줄곧 야간에만 행동해 온 터인데, 오늘 이렇게 백주 에 직접 출동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소영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옆에 있는 상팔에게 낮은 소리로 일렀다. "내려가서 마 총타주에게 한 마디 이르시오. 여러 호걸들로 하여 금 길을 터주어 신풍방과 심목풍의 충돌을 도모해 보라고." 상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휙 바람소리가 나면서 상팔은 어느새 마문비의 신변으로 다가가 서 말을 전했다. 마문비는 이미 소영을 존경하는 터였으므로 쉬이 동조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상형의 명예나 지위는 이 마모보다 높소이다. 어찌 진면목을 나 타내어 한 마디 말로써 여러 호걸들에게 이르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을, 마형의 성망은 이미 강호를 흔들고 있소이다. 뿐 만 아니라 일에는 반드시 통솔하는 사람이 있어 일사불란하게 움직 여야 하오. 여러 호걸들에게 존경이 두터운 마형과 이 아우가 어찌 비교가 되리까." 벌써 징소리는 크게 귓전을 때리며, 호걸들의 배후에 이르렀다. 도무지 이 신풍방의 인물들은 거칠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여러 호걸들이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도 또 쌍방이 서로 대치 하여 일촉즉발의 혈전이 벌어지려는 형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문비는 급했다. "길을 엽시다." 먼저 운양자가 화상과 함께 길 옆으로 나섰다. 전엽청, 등일뢰 등도 분분히 길을 비켜 섰다. 신풍방의 무리들은 사례하는 말 한 마디도 없었다. 거만하게 가 슴을 쑥 내밀고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백마에 걸터 앉은 심목풍이었다. 이때 심목풍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밀려 오는 신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풍방은 강호에서 나온 이래 악명만 쌓여 갔다. 그러나 이제까 지 그 방주라는 사람의 생김새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목풍도 비록 눈앞에 이 괴상한 무리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있고 또한 수하들을 밀파하고 있지만 그 역시 이 신풍방의 내력을 자세히 알 길이 없었다. 네 사람의 벌거벗은 거한들은 징을 두드리며 여전히 심목풍의 말 앞으로 부딪혀 왔다. 그러나 심목풍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그들 사이의 거리는 다섯 걸음에서 네 걸음으로, 네 걸음에서 다 시 세 걸음, 두 걸음 드디어 한 발 앞까지 다가왔다. 바야흐로 사 람과 말이 부딪칠 순간 돌연 징을 든 네 거한이 걸음을 우뚝 멈추 었다. 징 울리는 소리도 그쳤다. 또한 피리소리도 흡사 걸음에 맞추어 제자리에서 높았다 낮았다 끊어졌다 몇 차례 반복한 후에야 그쳤다. 한 줄기 기이하게 날카로운 소리가 신상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징을 두드리며 길을 열던 벌거벗은 거한들이 모두 뒤로 물러났 다. 여러 호걸들은 피리소리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좌우간 앞에서 길을 여는 네 거한들을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 다. 시끄럽던 소리가 모두 그치니 잠시 바람소리만이 바위 사이를 지나칠 뿐이었다. 심목풍은 여전히 조용한 모습으로 신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일뢰, 전엽청 역시 신상을 바라보며 방주가 어떤 사람이기에 그와 같은 신통력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호걸들과 함께 열 자 정도 뒤로 물러났다. 이런 행동은 동시에 강호의 습관대로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 는 무언의 표시도 되었다. 신상의 입에서 홀연 부드럽게 사람을 흘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대가 바로 심목풍인가?" 말 속에는 감정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 이기에는 충분한 위력이 있었다. 심목풍은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냉소했 다. "바로 보잘것 없는 이 사람이외다. 방주를 몰라 뵈었소. 무슨 가 르침이 계신지?" 심목풍은 지모가 뛰어난 위인이었다. 상대방이 부드러운 목소리 로 묻는 바에야 구태여 싸움을 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신상 속에서 부드러운 소리가 들렸다. "보좌는 오랫동안 심대장주의 이름을 들어왔소. 오늘 다행히 만 나 뵙는군요." '분명코 일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아닌가? 단지 무섭게 생긴 큰 신상 속에 숨어서 이 험상한 신상의 몸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 지 모르겠다. 만일 나무로 되었다면 내 일장으로 이걸 부수어 그 신비롭다는 방주의 진면목을 온 무림에 들춰 내겠다.' 마치 그의 이러한 심중을 꿰뚫어 보기나 한 듯, 신상 속에서 다 시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 들려 나왔다. "심목풍, 그대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심목풍이 대답하려 하자 그 부드러운 음성이 다시 그의 말을 가 로챘다. "이 시각, 두 개의 길이 있소. 그대는 그 중 하나를 택할 수 있 소." "자세한 것을 듣고 싶소." "우리는 동심합력으로 길을 막고 있는 호걸들을 일망타진하여, 쓸모있는 자들은 내가 거두어 들이고, 그 나머지는 무공을 없애 버 리는 것이오." 이 말은 심목풍의 의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신풍방주와는 평소에 알지도 못하고 또 백화산장과 신풍방이 따 로 거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헌데 무슨 연고로 처음 보는 처지에 서로 합력하여 항거하는 적을 치자는 말인가....?' 의심이 짙어지니 일시지간에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심목풍의 지혜를 가지고도 이 신풍방주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신풍방주가 이어 말했다. "둘째 길은, 우리들이 먼저 일장의 결전을 치르는 것이니...." 이렇게 되니 심목풍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로군. 귀방과 우리 백화산장은 왕래도 없고, 또한 원수나 은원을 산 일도 없거늘, 이와 같이 친구가 아니면 적이 되 자고 하니 너무 극단적인 말이 아니오?" 다시 신상 속에서 소리가 울렸다. "영웅이 양립할 수 없음을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본좌가 근래 관찰한 바에 의하면 우리들은 위인이나 행사가 서로 비슷하고 모계 도 상통한 것 같소. 이로써 적이 아니면 친구가 되는 것이오." 심목풍은 상대방이 얕은 꾀를 쓰거나 속임수를 쓰는 것이 아님을 즉시 깨달았다. 단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차없이 행동하는 까닭에 강호상에서는 신비하다느니, 음험하다는 소문이 떠도는 것 이다. "귀방과 폐장이 동맹을 맺자는 말씀, 크게 환영이오. 그러나 피 차 잘 알지 못하고 이렇듯 갑작스럽게 결정함은 돌연하다는 인상을 면치 못할 것이오. 심목풍은 본래 모험을 좋아하는 성미가 아니니 방주께서 기왕 본인과 동맹을 맺자는 마음이 있을진대 서로 얼굴을 대하여 면담하는 것이 옳은가 하오." 심목풍의 생각은 이 기회에 이 신비한 신풍방의 장막을 벗겨 보 자는 의도였다. 신풍방주는 즉시 대답했다. "좋소. 그렇다면 귀하께서는 길을 여시오. 오늘밤 삼경, 우리들 은 귀주성에서 십오 리 떨어진 여조묘에서 만납시다." "이로써 결정이 되었소." 심목풍은 말하고 먼저 길을 비키며 손을 저었다. 신호에 따라 구 름같이 모여 섰던 흑의 무사들은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텄다. 다시 징이 울리는 가운데 신상은 천천히 움직여 나아갔다. 이 광 경을 지켜 보는 호걸들의 모습도 가지가지로, 다행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싸움을 붙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는 듯한 사 람도 있고 또 무의미하게 선 사람도 있었다. 심목풍과 신풍방주는 전음술로 대화를 나누었으므로 일행 중 아 무도 이들의 대화를 들은 이가 없었다. 마문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계책은 헛되이 되었군." 마문비는 머리를 들어 심목풍의 뒤를 바라보았다. 심목풍의 뒤에 선 무사들은 대개 사, 오십 명쯤 되어 보였다. 지 금의 형세로는 충분히 대적할 수 있겠으나 오직 곤란한 일은 심목 풍과 대결할 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마문비는 고개를 돌려 운양자를 향해 말했다.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강적을 대적함에 있어 두 분의 고인이 있어 능히 심목풍과 대결할 수 있다면 그밖의 사람은 그다지 두려 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운양자의 대답은 담담했다. 그는 낮게 신음을 토해 냈다. "심목풍의 무공은 확실히 뛰어나오. 한 사람이 그를 대적한다면 당할 사람이 없을 게요." "도장의 뜻은 우리가 차륜전법을 써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소." "그럼 도장께서는 이미 마음으로 준비하고 계신 건가요?" "빈도는 이렇게 생각을 하였소. 이 두 분 대사와 합력하여 심목 풍을 대적할 것이외다." "좋습니다. 심목풍만 당할 수 있다면 그 나머지는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때 심목풍의 배후에 있는 흑의 무사들은 이미 전열을 가다듬고 모두 병기를 꺼내 들었다. 심목풍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살벌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어서 무사들이 서서히 자리를 움직였다. 나누어 공격하려는 움 직임이었다. 각각 위치를 잡고 살기 띤 눈으로 상대방을 노렸다. 전엽청이 갑자기 긴한 일이 생각나서 마문비의 신변으로 걸어갔다. "마형, 본인이 마형에게 한 가지 물을 말이 있소이다." "나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전엽청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까 심목풍과 마형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쪽에도 무공이 절륜 한 고인 한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모르겠소이다." 마문비는 듣고 낮은 신음소리를 토해 냈다. "확실한 사실이오. 그러나 지금 그는 모습을 나타낼 수 없는 입 장이외다.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나면 내가 의당히 두 분에게 대면 시키겠소." 전엽청은 칼끝같은 눈썹을 움직였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운양자가 허리를 굽히고 마침내 마문비를 재촉했다. "그밖에 다른 가르침은?" 한편 소영은 산허리 큰 바위 뒤에 몸을 은신한 채 눈 아래 서로 대치하고 있는 쌍방의 형세와 지리를 가늠해 보았다. 보아하니 호걸들은 일전을 치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골 짜기 사이에는 숱한 매복이 있다. 길은 좁았다. '심목풍이 비록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할지라도 사면 팔방에서 협 공을 가한다면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겠다. 단지 한 사람 심목풍을 당할 사람이 없으니....?' 여기까지 생각하니 갑자기 호기가 끓어 올라 금방이라도 달려 내 려가 심목풍과 대결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상팔은 그의 이러한 심중을 재빨리 간파해 냈다. 그는 줄곧 소영 의 거동을 지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금후 강호상의 풍파는 실로 위급합니다. 정의의 배가 모두 형님 의 삿대질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가볍게 위험에 뛰어드는 것은 천 만부당하오." 소영은 절로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어느 세 월 어느 곳에서 또 심목풍과 단독으로 겨룰 것인가! 상팔은 다시 말을 이었다. "심목풍은 이미 여러 차례 무림을 진동시켰습니다. 지금 그는 호 랑이 등에 탄 형국으로, 하고자 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차후로 도 기회는 많을 것이니 형님은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시오." 소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상형, 나는 지금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오. 지금의 형세로 볼 때 심목풍을 상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여러 호걸들은 일시의 호 기로써 단독으로 심목풍과 대결해서는 안 되오. 꾀를 써서 차륜전 을 벌이든가 해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결국 낭패를 면치 못할 것 이오." "소제가 가서 형님의 뜻을 전하겠소." 상팔은 말하고 즉시 아래로 내려갔다. 한편 심목풍은 신풍방주를 보낸 뒤 조용히 상대방의 호걸들을 관 찰하였다. 그리고는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 금 종남이협 중 등일뢰가 나타났으니 마땅히 갈천의도 올 것이다. 또 운양자, 전엽청이 왔으니 무위도장도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 다. 이 사람들이 전부 도착한다면 상대방의 형세는 크게 증대될 것 이 분명했다. 게다가 다시 손불사 늙은 거지와 아직 얼굴을 나타내 지 않는 그 고수가 심목풍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승패는 병가상사이다. 만일 여기서 일패도지한다면 그것은 나의 명성에 크게 타격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한 번 잃은 것을 어디서 찾는가?' 심목풍은 일세의 괴걸답게 적과 대치한 이후 마음을 진정하고 줄 곧 대국을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복하고 있는 사람들은 원래가 보천성이 지휘하고 있었다. 당시 로서는 약세를 스스로 알고 두려운 바가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여 러 고수가 가세하여 정세가 크게 변하였으므로 전의가 크게 진전되 었다. 새로 온 고인들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늙은 화상을 제외 하고는 전부가 이름이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보천성이 큰 걸음으로 운양자에게 가까이 왔다.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도장, 도장의 명예가 강호에 가득하여 뭇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오늘의 대전은 일반의 명리를 위한 것이 아니오니 도장께서 허락하시어 대국을 주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운양자는 미미하게 웃었다. "빈도가 어찌 감당하겠소." "도장에게 중의가 쏠렸으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운양자는 거듭 사양했다. 등일뢰가 참지 못해 한 마디 했다. "당신, 소 코 같은 늙은이는 끌어선 가지 않고 때릴수록 뒷걸음 질만 치는군.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추대하는데 무슨 사설이 그리 많소." 등일뢰는 무당파와 대단히 교분이 두터웠다. 무위도장이나 운양 자 모두 또한 등일뢰를 돈독히 대해 왔다. 때문에 운양자는 이런 소리를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와 같다면 빈도는 공경히 명을 받들겠소이다." 운양자는 이렇게 말하며 일행에게 공손히 포권례를 하였다. 57. 아비와 딸의 차이 심목풍은 여러 호걸들이 운양자를 수령으로 추대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냉소를 금치 못했다. 운양자는 심목풍을 돌아 보고 일갈했다. "심장주, 우리가 오늘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심목풍은 차디찬 소리로 대답했다. "무당산과 백화산장은 지척간이니 오늘 대면치 않더라도 다음날 얼마든지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외다." "대장주의 말이 옳소이다. 하지만 우리 무당파는 당신에게는 눈 의 가시같은 존재요. 제거하고 싶다면 구태여 후일을 택할 게 무언 가?" "흥!" 심목풍은 크게 코웃음을 쳤다. 운양자가 다시 변죽을 울렸다. "심대장주는 스스로 높다고 생각한 빈도를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양인데......" "좋아, 좋아."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운양자는 개의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흑백이노와 흑의 무사를 보았다. "오늘 이와 같이 만났으니 일장의 악투는 못 면하게 되었군." "당신 운양자의 말씀이신가?" "빈도는 스스로 당신의 적이 못 됨을 알고 있으나 기왕 응전하길 원한다면 당신 심대장주를 모시고 몇 초 상대하리다." 심목풍은 운양자가 꿋꿋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적지않이 신경이 쓰였다. '보아하니 이들은 이미 단단히 준비가 되어 있는 모양이로군.' 게다가 아직도 그 늙은 거지 손불사와 이름도 모르는 고수는 꼬 리도 내밀지 않았다. '만일 그들까지 합세하게 된다면......' 심목풍은 속으로 여전히 생각을 굴리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태연 자약했다. "그러니까 그대는 이 심아무개와 한바탕 싸우겠단 말인가?" "다 들었을 테니까 편한 대로 하시오. 만일 심장주가 도리를 따 라 간다면 빈도 등은 당신의 행사에 따를 것이외다." "하하하하......." 심목풍은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마치 종을 치는 것같이 우렁차서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파고 들었다. 모두들 속으 로 놀라 마지 않았다. 갑자기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휙 뿌려지는 일 초, 그러 나 그것은 운양자를 친 것이 아니었다. 땅바닥에서 계란만한 크기 의 돌멩이 하나가 솟구쳐 심목풍의 손 안에 떨어진 것이다. 심목풍의 시선은 곧바로 운양자의 얼굴에 떨어졌다. 이렇듯 사람 을 두렵게 하는 엄숙한 살기는 운양자처럼 오랫동안 수양을 쌓은 사람까지도 미미하게 한기를 느끼게 하였다. 심목풍은 코웃음을 치고는 돌연, "받아라!" 하는 소리와 함께 쥐고 있던 돌을 운양자에게 던졌다. 운양자는 날아 오는 돌멩이를 잡았다. 그리고 이내 눈살을 찌푸 리고 말았다. 돌멩이에 심목풍이 내력의 힘으로 뜨겁게 열을 전도 시켰던 것이다. 운양자가 받았을 때에는 마치 불덩이같이 뜨거웠던 것이다. 운양자의 손에서 돌멩이가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러나 이 내 재처럼 부숴지며 바람에 날렸다. "하하하하......." 심목풍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래 이 심아무개의 뜻을 알겠는가?" 그리고는 손을 휘둘러 수하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오늘의 싸움은 필요없다!" 그는 단지 말머리를 돌리는 것으로 싸움을 피해 버린 것이다. 그 뒤를 흑백이노가 따르고 서서히 흑의 무사들이 따라 움직였다. 우 두머리의 말이 속력을 내자 뒤를 따르던 무사들의 말도 속력 을 냈다. 구름같은 대군이었다. 올 때는 분분히 나뉘어 왔으므로 수를 몰랐으나 이들이 일제히 움직이자 마치 도도한 대하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느덧 무리들은 아득히 멀리 저편으로 사라지면서 먼지가 피어 올라 하늘을 가렸다. 의외로 싸움은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피하게 된 셈이었다. 대오를 짓고 달려가는 무리들 가운데 한 무사가 의외로 처지는 듯 싶더니 돌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얼른 보기에 실수로 떨어진 것 같았다. 사나이는 돌덩이처럼 굴러 길 옆으로 떨어졌다. 운양자들은 모두 이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백화산장의 인물들은 모두 성격이 냉혹한 위인들이라 동료가 말에서 떨어졌는 데도 본체 만체 하는구나 싶었다. 흙먼지가 멀어지고 수십 필의 마군은 까마득히 사라져 갔다. 운양자는 마군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면서 아아! 하고 길게 탄식 을 토해 냈다. "심목풍이라는 위인이 하는 일은 영원히 사람들로 하여금 측량할 수 없게 하니....." 그러자 전엽청이 그 쪽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이상한걸! 저 사람은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운양자가 물었다. "무얼 말이오?" "저 낙마한 흑의인 말입니다.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지요?" 말에서 떨어졌던 사나이는 동료들이 멀리 사라진 후 슬금슬금 길 가 풀덤불 속에서 나왔다. 멀쩡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실수로 말에 서 떨어진 사람 같지 않았다. 마문비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심목풍은 귀신같은 위인이니 이 사람이 또 무슨 사명을 띠고 오 는지 모르겠군. 여러분은 여기 그냥 계시오. 제가 가서 보겠소이 다." 잔엽청이 나섰다. "소제가 마형을 봉행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소매를 나란히 하고 달려가 순식간에 사나이의 면전 가까이에 이르렀다. 그래도 흑의인은 여전히 마주보며 걸어오고 있 었다. 두 사이는 이십여 장, 마문비가 걸음을 멈추고 싸늘하게 소 리쳤다. "서라!" 흑의인은 그 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공수의 예 를 하고 입을 열었다. "한 분 마문비 총수를 찾습니다." 마문비는 어리둥절해졌다. "본인이오. 친구는 무슨 가르침이 계신지?" 그러자 흑의인은 품 속으로 손을 넣더니 하나의 흰 봉투를 꺼냈 다. "저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 밀서를 마문비 총수에게 전하라고. ....." 그는 겁도 없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걸어와서는 두 손으로 공 손히 바치지 않는가. 마문비는 아직도 미심쩍어 냉랭하게 소리쳤다. "편지는 땅바닥에 놓고 친구는 열 자 밖으로 물러나시오." 흑의인은 고분고분 편지를 땅바닥에 놓고 열 자 밖으로 물러났 다. 마문비는 성큼 걸어가서 편지를 내려다 보았다. 땅바닥에 단정히 놓인 편지 겉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존경하는 마문비 총수, 이 편지는 소영이 친히 개봉하도록 전해 주십시오.> 글씨체는 여자의 필적 같았다. 마문비는 자세히 살펴 보아 편지에 독물이 없음을 확인한 후, 그 것을 집어 들었다. "이 편지는 누가 쓴 것이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사나이가 대답했다. "제가 이 편지를 전하여 주고 대가를 받고 안 받고는 자유이지 요. 자세한 것은 모두 그 편지 속에 적혀 있을 것입니다. 받을 사 람이 보면 즉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본인은 이로써 작 별하오." 말을 마치고 사나이는 몸을 돌렸다. 그가 가는 방향은 정남쪽이 었다. 그곳은 심목풍 등이 사라진 곳이 아니 었다. 전엽청이 가까이 왔다. "그 서신은 누가 보낸 것입니까?" 마문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나 역시 잘 모르겠소이다. 나에게 보내진 것이 아닙니다." 마문비는 편지를 품 속에 간수했다. 전엽청은 그가 말하기 꺼려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더 묻지 않았 다. 두 사람이 일행에게로 돌아오자 운양자가 슬그머니 물었다. "흑의 무사는 무슨 일로?" "글쎄요, 온 사람은 단지 한 통의 서신을 주고 갔습니다." 그가 특히 서신이라고 말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구이 물어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문비는 사소한 일로 서로 오해가 생기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 각했으나, 막상 설명을 하려고 하니 소영의 신분, 내력을 말하지 않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영의 동의도 없이 함부로 입을 열 수는 없지 않은가? 괴롭지 만 참아야 한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오랜 후, 운양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마형이 백화산장 깊숙이 들어간 쾌사는 이미 강호 무림에 전해 져서 모든 사람에게 경모의 정을 불러 일으키고 있소이다." 마문비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소제는 경모를 받을 처지가 못 됩니다......" 그리고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번 백화산장에서 무사히 살아 나온 것은 개방의 손불 사 장로 외에 또 한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누구요?" "소제는 허튼 소리 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분이 이곳에 있으니 그의 의견을 듣기 전에는 감히 함부로 그의 이름을 말하기 가......" 그리고는 품 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이 서신도 또한 그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제는 마음대로 말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마문비의 말에 전엽청은 그 형형한 시선을 들어 장내를 한차례 쓸어 보았다. "이것도 비밀이란 말인가?" "제가 아는 바로는 그 분이 본래의 면목을 숨기고 있는 것은 스 스로 신비 속에 자기를 치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피치 못할 고충이 있기 때문인가 하오." "사정이 그러하다면 마형께서 일부러 그를 우리에게 소개하실 필 요는 없소이다." 그의 목소리는 컸다. 이 소리를 듣고도 그가 나타나지 않으랴 하 는 기대를 하는 듯했다. 그러나 소영이 숨어 있는 곳은 거리가 멀었다.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물론 들리지 않았으며, 또한 전엽청은 그가 그처럼 먼 곳이 아닌 주위의 어느 바위 뒤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소리쳤으 므로 역시 소영의 귀에까지는 전해지지 못했다. 주승과 반개, 사마건이 왔다. 전엽청은 사마건에게 시선을 부으며 이 사람이냐고 묻는 듯한 표 정이었다. 그러나 경솔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지 묻지는 않았다. 마문비는 혹시 실수라도 있을까 하여 급히 나섰다. "소제가 두 분을 소개하겠소이다. 이분으로 말하면 동해신복 사 마건......" 그리고는 다시 전엽청을 가리켰다. "이분은 무당 문하의 전엽청 전대협이시오." 전엽청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했다. "사마형!" 사마건은 그 별호와 같이 점을 잘 칠 뿐만 아니라 일신에 놀라운 절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서쪽 땅에서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줄곧 몇 가지 절예로 중 원무림을 울릴 생각을 품어 왔다. 오만한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생각지도 않고 이내 이름을 드날릴 생각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하는 바가 어긋나고 또한 소원 이 이루어 지기도 전에, 백화산장의 악전에서 그만 코가 납작해졌 다. 소영의 신에 가까운 능력과 용맹, 그리고 손불사의 팔방을 울 리는 위풍 등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오만하던 마음은 이미 가신 지 오래였다. 이제 전엽청의 사람됨을 보니 무림에 뛰어난 인재로 도리어 자기 를 사마형이라 호칭하니 몸둘 바를 몰라했다. "제가 어찌 감히......" 전엽청이 물었다. "사마형께서는 중원에 처음 오셨습니까?" "저는 본래 중원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동해의 외딴섬에 가서 그곳에서 자라다가 이번에 다시 중원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비록 고향에 돌아왔으나 사람과 풍물이 모두 신기할 뿐입니다. 어릴 때 의 기억은 찾아 볼 수도 없고....." 사마건의 말은 다분히 감상조였다. 그는 그동안 많은 것을 배웠 던 것이다. "그렇지요. 중원 무림은 지금 은혜와 원수가 얽히고 설켜 동해의 조용하고 깨끗한 풍치와는 크게 다를 것입니다." "소제가 오기 전에는 중원이 잘 다스려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전해지는 말을 어디 믿을 수가 있습니까? 사마형은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사마건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중원 무림은 재인, 협사가 구름같고 지모와 무용이 뛰어나니 본 래 전해지는 말보다 월등한가 합니다." "사마형께서는 지나친 말씀을......" 홀연히 반개 심철와의 높은 목소리가 전해 왔다. "강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도 자리를 찾아 한바탕 잘 먹어 봅 시다." 주승 반개가 맞장구를 쳤다. "맞았어! 이 화상의 주벽이 벌써 발작했소이다." 이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이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 하고 조심하거나 공손한 데가 없었다. 전엽청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마문비에 게 물었다. "그럼 이 두 분이 대명이 쟁쟁한 주승복 반개입니까?" "그렇소이다. 세 분은 서로 인사하시지요." 주승 반개가 다짜고짜 내뱉았다. "필요없어!" "대사....." 전엽청이 도리어 어리둥절했다. 주승은 손까지 내저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게. 나는 그런 호칭을 받을 수 없다네. 술과 고기 안주를 준다면 귀가 좀 트일까, 말하자면 나는 주화상이오." 전엽청은 칼끝같은 눈썹을 가벼이 찡긋하며 미소를 띠었다. "대사께서 유희풍진하시고 속세에 구애를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 은 오래 전부터 들었습니다. 오늘 뵈오니 과연 거짓이 아니군요." 주승은 여전히 능청을 떨었다. "주화상은 어디까지나 주화상이지 대사란 말은 이 화상에게는 가 당치도 않는 말이야." 전엽청은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개가 돌연 하하 크게 웃고는 한 마디 했다. "주화상, 너는 감히 전대협에게 죄를 지을 건가? 너는 골칫덩어 리라 말썽을 일으키니 같이 다니고 싶지 않다. 난 먼저 간다." 말을 마치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주승은 큰 소리로 허둥지둥 외쳤다. "늙은 거지, 기다려라." 쫓아 가다가 머리를 돌려 전엽청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정말 나와 사귀고자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술을 가지 고 오는 거야. 이 주화상은 술만 보면 만사 그만이니까." 전엽청은 웃으며 포권일례를 하였다. "가르침을 받들어 깊이 기억하오리다." 주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개의 뒤를 따라갔다. 이 유희풍진하는 두 협객은 어느새 종적이 묘연했다. 전엽청은 마문비에게 고개를 돌려 알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형, 두 분은 정말 가버린 것입니까?" 못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희풍진하는 이 두 분은 언제나 행적을 알 수가 없지요. 나로 서도 정말 떠난 것인지 어쩐지 모르겠소이다. 아! 백화산장의 그 처절한 악투! 저는 이 주승과 반개 두 분이 가장 공이 크다고 생각 합니다." 운양자가 입을 열었다. "심목풍이 이미 무리를 이끌고 물러갔으니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소. 소림사의 방장과 폐문파의 장문인께서는 심목풍이 다 시 강호에 출두함에 대비하여 이미 많은 협객과 위인들에게 연명으 로 서신을 띄었소이다. 여러분께서는 무당산의 성회에 오시어 이 무림의 흉적을 제거하기 위한 방책을 함께 의논하시기 바라오. 저 심목풍은 이목이 영민하고 귀계가 측량할 길이 없이 깊으니 이 일 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빈도는 바쁜 일로 이로써 작별 을 고할까 하오." 말을 마치고 허리를 굽혀 여러 영웅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 소맷 자락을 날리며 갔다. 전엽청, 등일뢰 등도 인사를 하고 곧 도장의 뒤를 따라갔다. 이 때서야 비로소 양쪽 바위틈이나 풀덤불에 숨어 있던 이십 여 명의 장정들이 느릿느릿 모습을 나타내었다. 팔매질하는 무기와 튼 튼한 활과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모두가 마문비가 안배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뜻밖에도 강한 적은 가 버렸다. 소영 역시 상팔 등과 함께 숨어 있던 곳에서 내려왔다. 상팔이 소영의 뒤를 바싹 따르며 말했다. "형님은 이 시각 이미 여러 호걸들의 존경과 숭앙을 받고 있습니 다. 이 기회를 빌어 한 번 호령하면 많은 사람들이 형님을 따르기 를 원할 것입니다. 형님께서는 구대문파와 백화산장과는 별도로 하 나의 무림문파를 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지 반 년, 그간에 보아 온 것은 무 림이 파벌을 지어 명리 두 글자에 급급한 것이오. 더욱이 명예라는 명 자가 사람을 해치기 쉬운 것이니, 사람들이 저마다 이를 다툰다 면 무림의 분열은 영원히 그칠 날이 없으리다." 소영의 이와 같은 말에 상팔은 얼굴을 붉혔다. "소제는 그저 이익에 급급했을 뿐입니다. 얻고자 하는 것은 단순 히 재물이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술책을 쓰거나 강탈하는 것은 아 닙니다. 그러나 사람을 움직여 진품, 이복을 취하는 것은 결코 군 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니......" 그는 말을 흐리고 돌연 한숨을 지었다. "형님과 알고 난 후 저는 역시 두제와 이 일을 이야기하곤 했지 요. 이제부터는 재물을 탐내는 마음을 깨끗이 씻어 버리겠소이다. 그리하여 힘껏 형님을 도와 한번 대의를 성취해 보겠소이다." 소영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수십 년이나 되는 오래된 버릇이 하루 아침에 없어 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벌써 여러 영웅들의 면전으로 나왔다. 마문비는 편지를 꺼내 소영에게 건넸다. "여기 밀봉한 편지가 있습니다. 소형께서는 가지고 가서 보십시 오." 소영은 편지를 받았다. 보니 겉봉에 씌어 있는 글씨는 여자의 필 체처럼 보였다. "이 편지는 누가 보낸 것인가요?" "소제도 아직 모르고 있소이다." 소영은 편지를 뜯어 읽어 내려 갔다. 여인의 섬세한 글씨로 다음 과 같이 씌어 있었다. <어젯밤 홀연히 심기가 맑아져 아버님께서 소대협에 대해서 말씀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협께서 비록 변장에 능하여 백화산장으 로 들어 오시기는 하였사오나 결코 아버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 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당신의 신분을 누설하려고 하지 않으며, 이 는 당신의 몸에 돌고 있는 피로써 소녀의 목숨을 구하고자 함이니. .....> 여기까지 읽고 소영은 소름이 끼쳤다. '보아하니 저 독랄한 위인은 끝내 나의 피를 빌려 제 딸의 목숨 을 구하고자 하지 않는가! 아, 정녕 일생을 따라다닐 위인이다.' 편지는 계속되었다. <....... 아버님께서는 소녀를 위해 고심전력하셨습니다. 하오나 소녀는 다른 사람의 피로써 소녀의 목숨이 구해지는 것을 원치 않 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딸자식을 사랑하는 나머지 당신의 피 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는 계속 읽어 내려 갔다. <박명한 소녀는 병마에 시달려 종일 약물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촌각이나마 정신이 들 때가 드뭅니다. 오늘 저녁에는 전과 달라서 이상하게도 정신이 맑아 병상에서 뒤척이다가 잠들긴 어렵고 하여 이 글을 씁니다. 이 몸과 당신은 생면부지의 사이지만 소녀의 몸에는 이미 당신의 피가 돌고 있습니다. 하오나 약한 이 몸은 기름이 다한 불과 같아 서 생명의 불은 곧 꺼질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무고하게 피해를 당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나이다. 그래서 당신을 돕고자 생각하여 제 허물 없는 마음을 토로한 것입니다. 소녀가 생각컨데 심목풍이라는 자가 고심하여 길러낸 괴상한 병 사와 장수들 가운데에서도 오룡대진은 가장 흉험한 인물들인 것입 니다. 소위 오룡이란, 다섯 사람의 독자적 무술을 지닌 기인들로 심목 풍 일개인에게 항복한 뒤로는 백화산장에 와서 이후 몇 해 동안이 나 고심하여 오룡대진을 만들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간 아버님께서 그들에게 기울인 공부는 다대하며 따라서 이 몸은 그 내막을 명료 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 오룡을 제거하여 당신을 돕기 위해 전날 밤은 한 잠도 이루지 못했나이다...... 결국, 저는 계교로써 오룡의 능력을 잃게 한 것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부끄럽게 생각하는 바이오나 이 사람들을 영원히 제거하는 것은 아버님의 고심참담한 노력을 하루 아침에 파괴하는 것이라 서너 번 생각한 끝에 비로소 쌍방이 모두 안전할 계책을 생 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룡은 단지 열흘 동안만 그 능 력을 잃게 하였습니다. 열흘이 지난 후면 그들은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이것이 소녀가 당신의 큰 은혜에 보답하는 오직 한 가지 길이오니......> 글은 여기서 갑자기 끊어졌다. 서명도 또한 없었다. 편지는 말하 려고 하는 뜻을 전분 표현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전체의 의도는 명 백했다. 소영은 비로소 그 흉험하기 이를 데 없는 오룡대진이 그처럼 맥 을 못 썼던 이유를 알았다. 그는 여러 가지 상념을 일으키면서 편지를 품 속에 넣었다. 마문비 등은 역시 편지 속의 사연이 궁금했으나 당사자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물어 보는 것도 실례가 되므로 더 말하지 않았다. 이때 소맷바람 소리가 나더니 금란이 급한 걸음으로 소영의 신변 에 이르렀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부인의 몸이 워낙 쇠약하시어 더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어 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소영은 얼굴빛이 변했다. "지금 상태는 어떻소?" "좀 안정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라니 그래도 안심이오." "저와 은란이가 노부인의 몸을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더 놀라 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일찍 조용한 곳을 찾아서 며칠 정양하 시면 회복되실 것 같습니다." "음......" 소영은 낮게 신음을 토해 내고는 마문비를 돌아보았다. "어머님의 몸이 허약하셔서 다시 길을 가는 고통을 감당하시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소제는 가까운 인가를 찾아 며칠 쉴까 합니 다. 마형과 여러분께서는 다같이 바쁘신 몸이니 소제를 개의치 마 시고 편리를 도모하십시오." 마문비가 근심되는 듯 말했다. "이곳은 저 백화산장과 너무나 거리가 가깝소이다. 아마도 심목 풍은 수하인을 내보내어 우리들의 행로를 계속 탐지하게 할 것입니 다. 일은 급하나 다시 몇 리를 더 가서 쉬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 다." 소영은 대답을 못했다. 마문비의 말은 옳았다. 금란이 거들어 말했다. "마씨어른, 소비가 말이 많은 것을 용서하세요. 노부인의 몸을 보건데 다시 길을 간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마문비 역시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편이 그러하다면 소제는 여러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오나 청컨데 몇 사람 무공이 출중한 고수를 머무르게 하여 만일의 경우 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군요." 소영은 그것도 달가운 일이 못 되리라 생각했다.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종적을 감추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마형 의 두터운 은정은 알겠습니다만....." 마문비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하였다. "그럼 소형께서는 사람들을 데리고 한 걸음 앞에 가십시오. 소제 는 이 곳에 남아서 잠시 심목풍 등의 수색을 방해하겠습니다." 소영은 이런 제의까지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형을 수고스럽게 하는군요. 오늘의 정리는 후일 보답하겠습니 다." 그는 산 뒤로 돌아갔다. 일행은 중주이고, 금란, 은란 등이었다. 갑자기 신투 향비가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은 좀 천천히 가시오. 소제는 나이가 많아서 탈이오. 몸 에 익힌 기술을 그대로 가지고 관 속으로 들어가기도 안 됐고..." 소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향형, 무슨 가르침이 계신지?" 향비는 금란, 은란을 훑어 보고 말했다. "늙은 도둑이 이 두 낭자를 보건데 모두 뛰어나게 총명하오. 이 들에게 두 손으로 도둑질하는 방법을 배워 줄까 하는데, 이 큰 낭 자들이 그런 장난을 즐겨 배우려고 할지 모르겠군." 소영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향형의 마음이 그러시니 그녀들도 배우고자 할 것입니다." 눈을 돌려 금란, 은란을 보았다. 강호에 출도한 이래 신투 향비 는 줄곧 약자를 도와 강자의 물건을 도둑질하였다. 또 그의 도둑질 하는 수법은 천하무쌍이라 할 만했다. 소영은 이러한 점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연 노인을 가볍게 여기 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가 두 낭자는 기뻐 날뛰었다. "노선배님께서 이렇게 마음을 쓰시니 우리는 감격하나이다." "하하하....." 향비는 흔쾌히 웃었다. "좋아! 그럼 이 늙은 도둑도 동행할까?" 그러는데 어느새 동해신복 사마건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그는 아 주 공경하게 손을 맞잡고는 부탁조로 말했다. "소제 역시 동행하고 싶은데 여러분께서 용납하실는지 모르겠습 니다." 소영은 동의했다. "사마형께서 동행을 해 주신다면 우리는 크게 환영하오이다." 이때 금란이 돌연 마문비의 신변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한 마디 당부하기를, "백화산장의 출신 여비들은 모두 사치한 마음을 모릅니다. 이 점 을 유의하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마총타주께서 아무쪼록 봉 죽 동생을 잘 대해 주세요." 마문비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가씨, 안심하시오. 본인이 진력하여 돌볼 것이니....." 이때 사마건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소영의 신변으로 가까 이 다가서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형장이 정말 소영이오?" 무슨 말인가 했더니 겨우 이 소리였다. 소영은 웃음이 나왔다.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바로 저올시다." "그렇다면......." 그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다가 계속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소형께서 마형의 신색이 어떤가 좀 살펴 주시겠소?" 소영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마문비의 모습을 잠깐 살폈다. 그러 나 별로 이상한 데가 없는 것 같았다. "소제는 달리 느끼는 바가 없는데요." 사마건은 그렇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얼굴이 어두우니 열흘 안에 반드씨 큰 변이 일어날 것입니 다. 아 백화산장에서 소제는 이미 그가 피바다를 헤엄치게 될 것이 라고 예언을 했으니......" "그러나 그는 부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피바다를 헤엄친 것은 사 마형의 예언이 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사마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이 시각 그의 얼굴에 서린 어두운 기운은 백화산장에 있을 때보 다도 더욱 중요합니다. 게다가 그 어두운 기운은 곧장 화개혈에까 지 미치고 있습니다. 근일 중 반드시 큰 변이 있을 것입니다. 빠르 면 사흘이요, 늦어도 열흘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또 점을 치는구나 하고 소영은 생각했다. 그는 비록 그의 점을 크게 믿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을 또한 거짓이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사정이 이러하니 믿는 것이 옳겠군.' 그는 곧 입을 열었다. "사마형께서 파악하신 바가 있으니 그에게 한 마디 일러 주어야 겠군요." 사마건은 길게 한숨을 불어 냈다. "마문비의 영웅다운 성격으로는 소제의 말을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영은 잠시 생각한 다음, 큰걸음으로 마문비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마형, 소제가 몇 마디 부당한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듣고 나신 후 마형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십시오." 마문비는 뜻밖인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형께서 무슨 가르침이 계시온지 어서 꺼리지 마시고 말씀하십 시오. 소제의 능력이 미칠 수 있는 일이라면 결코 사양하지 않겠습 니다." 소영은 잘라 말했다. "마형의 얼굴색이 어둡고 신색이 다르니 열흘 안에는 반드시 조 심하십시오." 마문비는 웃었다. "저 동해신복 사마건이 당신에게 말한 것인가요?" 소영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심해서 상대방의 얼굴을 살폈다. 과 연 마문비의 미간에는 은은히 어두운 기색이 떠돌지 않는가. 그래서 곧 대답했다. "아니외다. 소제가 본 바올시다." "음....." 마문비는 잠시 생각을 굴렸다. "좋습니다. 제가 조심을 해서 심려를 끼치지 않으리다." "어머님의 신병이 회복된 후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안치시킨 다 음 소제는 방법을 내어 마형을 찾겠소." 마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 무당 양파의 장문인이 연명을 하여 천하 각지에 서신을 띄웠다니 이번 소집되는 군웅대회에 소형께서 참가해 주시기를..." "이 시각에는 약속하기 어려우나 되도록 시간을 내겠습니다. 그 럼 소제는 먼저 물러가오."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두구가 소대인을 업고, 은란이 소부인을 업었다. 상팔과 향비는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소영과 사마건은 뒤에서 따 랐다. 일행은 곧 산골짜기로 사라져 갔다. 대략 삼십 리를 가니 한 곳 무인지경인 산골짜키에 이르렀다. 사 람의 발걸음이 한 번도 미치지 않은 곳인 듯했다. 향비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소영에게 공수일례하며 말했다. "심목풍은 백화산장을 개문한 지 십 년, 아마도 주위 백 리 이내 는 모두 저들의 감시선에 들게 될 것이오." "향형의 뜻은 그럼 우리는 이곳에서 자리를 잡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는다면 심목풍의 감시선 을 속일 수 있을 것이외다." 소영은 난색을 지었다. "어머님께서 몸이 위중하시니 반드시 약을 드셔야 될 터인데 이 골짜기가 비록 은밀하다고는 하나 약을 구하는 일은 불편할 것입니 다." "소형은 걱정하실 필요 없소. 약을 구하는 일은 늙은 도둑에게 맡기시오." 상팔이 웃으며 한 마디 했다. "향형은 빈손으로 묘한 재주를 부리는데 있어서는 천하독보라 할 수가 있소. 게다가 변장술이 또한 능하니 백화산장의 눈을 속이기 는 어렵지 않을 것이외다." 이때 두구와 은란은 이미 부드러운 풀밭을 택하여 소씨 부부를 내려 놓고 막힌 혈도를 쳐서 풀었다. 또 소영은 개울로 가서 얼굴에 칠한 약물을 모두 닦아 냈다. 부 친을 뵙는 자리라 본래의 얼굴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소대인이 먼저 긴 한숨을 불어 내며 깨어났다. 소영은 땅바닥에 엎드렸다. "불효자식 소영이 아버님을 뵈옵니다." 소대인은 두 눈을 뜨고 한참 동안 아들의 모습을 건너다 보았다. "네 진정 영아냐?" "예, 바로 아버님의 자식이올시다." 소대인은 대견하다는 듯, "많이 변했구나. 지난날에는 네 몸이 약해서 병이 잦았지. 지금 은 이렇게 건강하니....." 노인은 잠깐 숨을 돌리고 나서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그래, 자세히 보니 얼굴의 윤곽은 알아볼 수 있겠다." 소영의 눈에서 눈물이 홀러 내렸다. "자식이 불효해서 부모님을 누차 괴롭혀 드렸으니 시종 마음이 편안치 않습니다." 소대인은 시선을 돌려 옆에 늘어선 호걸들의 모습을 쓸어 보았 다. 그 얼굴에 차츰 옛날의 그 자상하고 화기애애한 모습이 되살아 났다. "험한 세상을 살아 오느라 무수한 풍파를 겪었는데 이만한 놀람 이 무어 대수냐?" 옆에 섰던 은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공자, 저 좀 보십시오. 노부인의 신태가 좀....." 소영은 금시 얼굴빛이 변했다. 급히 달려가 소부인을 부축해 안 았다. "어머님! 어머님!" 눈에서는 눈물이 샘처럼 흘러 내렸다. 상팔이 슬쩍 사마건의 옷소매를 끌어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목소 리를 낮추어 말했다. "당신, 사람 몸의 병도 고칠 수 있는지 모르겠군." 사마건은 눈을 껌벅거렸다. "소제는 감히 스스로를 찧고 까불고 할 수는 없소이다만, 확실히 의술 방면에는 정심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먼저 가서 소형님을 안정시키시오. 연후에 우리 다시 병 을 치료할 일에 대해서 상의합시다." 사마건은 머리를 끄덕끄덕 하며 응했다. "알았소." 그는 소영의 신변으로 갔다. "소형이 이렇게 실성하는 것은 옳지 않소이다. 소제가 노부인의 관상을 보건데 복연이 아주 두터워 결코 흉험한 일은 없을 것입니 다. 소형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소영은 머리를 돌려 사마건을 보았다. "사마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는 모친을 내려 놓고 눈물을 닦았다. "어머님께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친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소대인이 조용한 걸음걸이로 왔다. 그리고는 노부인의 안색을 잠 깐 살핀 다음 역시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영아, 놀랄 필요가 없느니라." 여러 호걸들은 낮은 소리로 병구완을 할 의논을 하다가 소대인의 말소리를 듣고 일시 조용해졌다. "아버님께서 어떤 가르치심이라도......" "네가 떠난 후 어미는 줄곧 네 생각을 하다가 근심이 병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제 네가 돌아왔으니 마음 속으로부터의 병 이 나아 곧 회복될 것이다." "소자가 불효한 까닭에 만 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소영은 땅바닥에 엎드렸다. 은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영의 신변으로 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귀주성에 명의가 한 분 있습니다. 소비가 변장을 하여 성중에 들어가 그를 청해 오면......" 이때 산허리 우거진 풀덤불 속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 여러 사람이 놀라는 가운데 웃음소리의 주인이 말을 이었다. "필요없다! 천하 명의라 할지라도 노부에게 미치는 사람은 없다. 하잘것 없는 병세는 노부의 침 한 대로 당장 깨어날 것이며 젊음을 도로 찾을 수 있지." 여러 호걸들은 일제히 소리나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대략 삼십 여 자 떨어진 곳에 바싹 마르고 왜소한 흑의인이 서 있었다. 독수 약왕이었다. 그가 언제 그곳에 나타났는지, 모두가 근심에 싸이고 마음을 놓 고 있었던 때라 눈이 멀고 귀가 막혀 버린 것일까. 아무도 독수약 왕이 온 줄을 몰랐던 것이다. "흥!" 상팔이 코웃음을 치고 썩 나섰다. "네 이미 왔으니 돌아갈 생각은 말라." 말하면서 그는 두구에게 눈짓을 하였다. 두 사람의 몸이 번개처 럼 솟구쳐 나갔다. 어느새 독수약왕의 뒤로 돌아가 퇴로를 막아 버렸다. "하하하...... 노부가 왔다가 가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다면 이처 럼 그대들을 따라왔겠는가." 말하면서 독수약왕은 몸을 날려 풀밭으로 내려 왔다. 소영은 부친의 앞을 막아섰다. "오늘 네 망령되이 악념을 품는다면 반드시 죽여 장사도 지내주 지 않겠다." 독수약왕은 뚫어질 듯 소영의 얼굴을 쏘아 보았다. 그리고 한다 는 소리가, "너는 바로 마성으로 가장을 했지. 백화산장에서 노부는 이미 네 신분을 파악했다." "당시, 만일 심목풍에게 이 사실을 누설했더라면 우리는 이와 같 이 쉽게 살아나오지는 못했을 테지!" "물론이지. 그때 만일 심목풍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반드시 전 력을 기울여 네 목숨을 취했을 게다." "흥! 아깝게 되었군. 시기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인즉 심목풍이 이 제 이 소아무개를 죽이기는 어렵겠지." 독수약왕은 음침하게 웃었다. "노부가 네 신분을 폭로시키지 않았던 것은 자비스런 심정을 지 녀서가 아니다. 잠시 네 목숨을 붙여 두었다가 네 피를 빌어 딸의 목숨을 구하고자 생각했던 것이지." 소영은 웃으며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우리들 사이에 그런 교분이 있을 수 없지. 본인이 권하건데, 일 찍이 그런 악념을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오." "노부는 오직 딸자식 하나 뿐이니 목적을 이루기 전엔 그럴 수가 없네." 독수약왕은 끝내 버틸 모양이었다. 향비가 가까이 왔다. "소형, 우리들의 행적이 이미 발각되었으니 오직 한 가지 길은 죽여서 입을 막는 수밖에 없소이다. 그와 입씨름을 해봐야 소용 없 습니다." 소영은 손을 저었다. "향형, 천천히 손을 씁시다." 그리고는 다시 독수약왕을 향하여 말했다. "그래 당신은 어떤 대가를 가지고 나 소영의 피로써 딸의 목숨을 건지고자 하는 거요?" "노부의 의술로 말하자면 천하에 따를 사람이 없다. 무공을 따지 더라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방법을 취하더라도 그대의 피 를 얻을 수 있지." 소영은 담담히 웃고, "내 만일 한 가지 기회도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겠군?" "노부는 어느날엔가 반드시 네 피를 취할 게다. 그리하여 어김없 이 딸의 목숨을 건질 거다." '따님의 사람됨은 시비가 분명하고 선량하거늘, 아비된 사람이 이토록 잔인하고 제 욕심만 앞세워, 실로 딸의 청백한 몸에 오점을 쩍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그는 결심한 듯 시선을 들었다. "당신의 무공이 고강하다고 자신하고 있어 나 소영을 항복시킬 수 있다니, 본인은 우리 두 사람이 단독으로 싸울 기회를 주겠소. 각자는 무공으로 승부를 결정한다. 만일 당신이 이긴다면 나는 두 손을 묶어 몸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소영의 손에 패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소?" 독수약왕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노부는 일을 함에 있어서 성사시킬 일만 구하지. 일을 성사시키 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하여 남의 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이런 연유로 해서 나는 남과 다툴 때에 가볍게 승낙하지 않는 게 다. 만일 오늘 그대를 이기지 못한다면 돌아가서 내일 이길 일을 생각하고......." 이건 정말 무림의 인물치고 낯짝 두꺼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딸의 목숨이 중하다 할지라도 이런 소리를 지껄이면서 부끄 러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진정 무림의 패류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 이다. "당신 독수약왕은 명성이 차지하고 있는 무림의 지위를 가지고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다니 나 소영은 그저 감탄할 뿐이오." 독수약왕은 그런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풀밭에 누워 있는 노부 인을 슬쩍 건너다 보고는 화제를 돌렸다. "자당의 병세가 가볍지 않으니 일찍 치료를 하지 않았다간 구하 기 어렵지 않을까?" 소영은 독수약왕의 하는 수작이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모친을 살리는 대가로 이 소영의 피를 받 아 딸의 목숨을 구하자는 것이로군."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노부가 어찌 약을 쓰지 않으리!" 사마건이 끼어 들었다. "소대부인의 병세는 그렇게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소." 그는 품 속에서 금환을 꺼내어 소부인 앞에 놓았다. 이것은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58. 나의 피로 어머님을 구할 수 있다면 사마건이 금환을 놓자 독수약왕은 갑자기 눈을 희번덕거리며 여 러 호걸들의 얼굴을 쓸어 보았다. "그럼 당신은 나와 한번 해 보자는 말인가?" 이 사람은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소영이 도전을 할 때는 뒤로 빼더니 이제 사마건이 금환을 꺼내니 도리어 제편에서 싸움을 걸어 오는 것이 아닌가. 소영은 독수약왕의 이런 교활성이 미웠다. '아주 이 기회에 무림의 큰 화근 덩어리를 제거하는 것이....' 그러나 애처로운 것은 이 독수약왕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당신이 어떤 제안을 해 오더라도 나는 달갑게 받을 작정이오" 그러자 그는 또 슬그머니 발을 빼려 하였다. "노부는 평소 어떤 제한을 두는 것을 가장 싫어하지. 만일 그대 가 노부와 한바탕 겨룰 생각이라면 구태여 강화의 규칙이니 관례니 하는 것에 속박받을 필요가 없지. 암기를 써도 좋고 독물을 써도 좋고 있는 기술 없는 기술 다 뽑아내 보게." "좋소 먼저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그래도 강호의 영웅 축 에 드는군." "흐흐흐..... 무슨 과찬의 말을." 향비가 돌연 소리쳤다. "약왕이 한 가지 잊은 게 있소" "그건 또 뭔가?" 중구난방이라 웬만한 사람이라면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그러나 독수약왕은 누가 말하든 다 받아 넘겼다. "어서 말해 보시게." "여럿이 공격하는 것이지. 즉 다수로 소수를 제거하는 것...." "하하하.... 노부는 이미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했으니 당신들 역시 제한을 받을 필요 없지." 사마건은 금환을 집어 들었다. "좋아, 내가 먼저 한 수 가르쳐 주지." 이때 갑자기 은란이 허둥지둥, "부인!" 하고 소리치며 소부인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소영이 돌아보니 어머니의 병세가 자못 위급했다. 손발을 떨며 전신은 땀으로 젖어 있지 않은가? 두 눈을 꼭 감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소영은 어쩔 줄을 몰랐다. 금세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꺼질 것만 같은 공포로 몸을 떨었다. 독수약왕이 그것 보라는 듯이, "하하....." 하고 크게 웃어젖혔다. "수족을 떠는 것은 중풍의 징조이니 만일 시간을 놓쳐 버린다면 당대의 명의를 만나 치료를 한다 해도 결국 반신불수를 면하기 어 려울 걸.' 소영은 간장을 도려내는 것 같이 아팠다. 모친이 금방 숨이라도 넘어 가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마음이 몹시 급했다. "노선배님께선 치료할 수 있습니까?" 독수약왕은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구태여 약을 쓸 것도 없이 손으로 회복시키지." 어머니를 살리자니 하는 수가 없었다. 소영은 손을 맞잡고 읍을 하고. "노선배께서 수고스럽겠지만 묘수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제까지도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위급한 마당이라 강 호의 안위나 스스로의 체면같은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독수약왕은 득의의 미소를 짓고, "병을 고치기는 간단한 일이나 그 대가가 너무 커서 그대가 들을 지 모르겠군." 이제는 도리어 배짱을 내미는 판국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밉살스럽게 보며, 저 놈을 그저 당장.... 하고 속으 로 벼르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급한 때라 망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팔이 물론 상대방의 뜻을 알고는 있었으나 일부러 헛소리삼아 입을 열었다. "대가를 말한다면 구슬이든 옥이든 골동품이든간에 당신이 원하 는 대로 따르겠소." "하하하.... 옥이니 구슬이니 하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네. 금 은 보주나 골동품 같은 것은 이 독수약왕의 눈에는 초개나 흙에 다 를 바 없지." "그럼.... 무엇을 원하는가!" 상팔은 악이 치솟았다. 독수약왕은 소영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의 피로 내 딸을 구하는 것이지." 여러 호걸들은 모두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지만 사태가 사태이니 만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노부가 요구하는 대가가 비록 높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 그러니 노부가 치료하고 안하고는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독수약왕은 너희들 멋대로 하라는 태도였다. 처음부터 줄곧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소대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 다. "영아, 네 모친은 이미 나이 오십이 넘었다. 나무로 말한다면 이 미 천수를 다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는 바야흐로 일을 할 나이이다. 더구나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으니 어찌 목숨을 가벼이 하겠느냐? 어미를 구할 필요는 없느니라." 소영이 돌연 부친의 옷소매를 잡으며 꿇어 앉았다. "아버님, 엄명을 어겨야 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님의 길러 주신 은혜, 소자가 만 번 죽어 어찌 보답하겠습니까? 어찌 어머님 의 목숨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주위에 둘러선 호걸들은 저마다 굳은 얼굴로 선 채 아무 말도 하 지 못했다. 일의 중대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소대인은 묵묵히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거라. 네 효심을 보니 나는 어찌할 수가 없구나. 네 마음 대로 해라." 소영은 절을 하고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연후에 독수약왕을 향 해 결심을 내렸다. '내가 당신 따님의 목숨을 구하겠으니......" 독수약왕은 미미하게 웃으며, "그 말을 노부가 믿어도 좋을까....." "나 소영은 일단 입 밖으로 낸 말을 후회하지 않소. 당신은 미심 한 점이라도 있소?" 독수약왕은 몸을 돌려 노부인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갔다. 그 앞에 향비와 사마건이 나란히 막아서 있었다. "썩 비키지 못할까?" 독수약왕이 호통을 쳤다. 향비와 사마건은 소부인을 보호하며 손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달라졌다.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 지 못하고 물러섰다. 독수약왕은 소부인의 신변으로 가서 부인의 병세를 살폈다. 그리 고는 능글맞게 웃으며 하는 말, "여러분은 당대 제일의 신의가 어떤 솜씨를 내는지 보시오." 소부인의 옆에 서 있던 은란이 흥! 코웃음을 치고 한 마디 했다. "당신의 의술이 신통한 것은 알지만 그에 못지 않게 독을 쓰는 솜씨도 대단하지. 나는 심목풍이, 약왕은 물건을 빌려 독을 쓰는데 도 능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맞았다. 노부는 확실히 그 방면에도 능하다. 그러나 상처를 입 어 터럭만큼도 항거할 수 없는 노부인에게 그런 방법을 쓸 수는 없 지." "흥! 당신은 고의로 노부인의 병세가 엄중한 것처럼 말하여 소공 자를 위협하는군요. 그래서 자기 딸의 목숨을 구하려구....." 독수약왕은 품 속에서 침 한 개를 꺼내 들었다. "노부는 이 침 한 대로 우선 노부인을 깨어나게 하고 곧 맑은 정 신으로 돌아오게 할 수가 있지." 소영이 가라앉은 소리로 일렀다. "독수약왕, 당신이 만약 암암리에 손을 써서 어머님에게 독을 쓴 다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소?" "그대는 노부를 상할 수 없는 줄로 안다." "만일 그런 경우에는 나 소영이 하는 수 없이 영애를 죽일 것이 오. 그리하여 당신이 십여 년 간이나 딸을 고치고자 애썼던 보람이 헛되이 되고, 또 늙어 죽기까지 딸을 잃은 슬픔을 맛보게 할 것이 오." 독수약왕은 가볍게 한숨을 내불었다. "다른 사람들이 독수약왕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너 소영 역시 나 를 두렵게 만들 수는 없을 게다." 소영은 약왕의 얼굴에 시선을 박은 채 손을 뒤로 돌려 금란에게 일렀다. "보검을 좀 빌려 주시오. 쓸 데가 있으니." 금란은 응답하고 보검을 뽑아 공손히 내밀었다. 소영의 눈에 싸늘한 빛이 돌았다. "독수약왕, 당신은 이 소영의 검술을 알고 있겠지?" 독수약왕은 손에 든 금침을 들어 보이며, "노부의 침술로 그대의 검술을 당할 수 있지." 여러 사람이 긴장되어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돌연 소영이 삼십 자 밖에 있는 크지 않은 소나무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아라!" 소리와 동시에 진기를 오른쪽 어깨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장검이 천천히 수평으로 들리었다. 갑자기 팔을 뻗으니 장검은 손에서 쑥 빠져 나갔다. 휙! 하는 칼바람 소리- 장검은 푸른 빛을 뿜으며 곧장 사, 오십 자 높이로 날았다. 그곳 에서 검은 두어 바퀴 은광을 그리며 선회하다가 돌연 소나무를 향 하여 화살같이 날아갔다. 검광이 나무 주위를 돌아가며 반짝반짝 빛나고 솔잎이 분분히 날아 떨어졌다. 편각이 지난 후 갑자기 은광이 꺼지고 검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 왔다. 그제서야 보니 삼십 자 밖에 있는 소나무는 솔잎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다만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여러 호걸들은 모두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잠시 동안 죽은 듯이 고요했다. 드디어 감탄하는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독수약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노부의 기억 가운데에서 오십 년 전 이와 같이 기이한 초식을 쓰는 사람은 전 무림을 통하여 네 사람밖에 없었다. 그 중 세 사람 은 궁중에 잡혀 있고 한 사람은 행방불명....." 그는 이렇게 말하다가 돌연 언성을 높였다. "너와 장산패와는 어떤 사이냐?" 소영은 그가 장산패라는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랐다. 약왕은 지금 어검비행술을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닌가? 그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스승과 제자......" 간신히 한 마디 내뱉았다. 독수약왕은 한숨을 몰아쉬며, "그대가 이런 나이로 이같은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무학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다. 그 배후에는 반드시 기이한 연분이 있었 을 것이다. 장산패 등의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 외에....." 소영은 거듭 놀라운 심정이었다. '과연 무서운 위인이로다. 내 잘못하여 천년석균을 먹은 일까지 도 이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입으로는 전연 다른 소리를 할 수밖에- "이 일검으로 당신 딸의 목숨을 취할 수 있겠소?" "으음, 여부 있나. 그러나 노부를 상할 수는 없을 게다." 말을 마치자 약왕은 손에 들었던 금침을 노부인의 앞가슴에 푹 꽂았다. 이 사람의 침술은 과연 놀라웠다. 침이 빠지자 벌써 소부 인의 입에서 긴 숨이 흘러 나왔다. 소영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당신의 침술은 과연 독보적인 것으로 약왕의 이름에 조금도 부 끄럽지 않소." 독수약왕은 득의의 웃음을 흘리고, "노부의 손이 가는 곳에는 치료되지 않는 병이 없지." 계속해서 약왕의 금침은 소부인의 믐 위로 바쁘게 이동하며 찌르 고 이동하며 찌르고 빼고 하기를 백열두 번, 마침내 노부인의 온몸 의 혈도를 전부 열어 놓았다. 드디어 약왕은 몸을 일으키며 금침을 품 속에 간수했다. 손이 품 속으로 들어갔다 나올 때에는 그의 손에 조그만 약병이 한 개 들려 있었다. "자, 받게나." 약병은 소영의 손으로 날아왔다. "무슨 약이오? 어디에 쓰는 것이오?" 독수약왕은 담담히 웃으며, "노부가 만일 그대를 해칠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 그대는 이미 독 기운이 퍼졌을 것이다." 그리고는 호걸들을 돌아보고 하하 웃으며, "그러나 안심해도 되지. 노부는 아직 그대의 피를 얻어 딸애를 구해야 하니까." 소영은 약왕이 물건을 빌려 독을 전하는 능력이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독수약왕은 또 웃고, "병 속에 있는 다섯 알의 환약은 기운을 보충하고 정신을 맑게 할 뿐만 아니라 수명을 연장시키는 효험이 있지. 매일 한 알씩 복 용하여 닷새가 지나면 자당은 이십 년 전의 젊음으로 돌아갈 것일 세. 그대가 아깝다." 소영은 포권일례하며, '내려 주신 영단 잘 쓰겠소." "노부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하여 닷새 후에 딸애를 데리 고 오겠다." 독수약왕은 소영의 얼굴을 응시한 채 한동안 얼굴을 돌리지 않았 다. 그 눈빛에 나타난 갈망과 초조, 그리고 딸을 생각하는 부정을 소영은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대장부의 일언은 중천금이오. 약왕은 마음을 놓으시오. 오 일이 지나 모친께서 과연 약왕의 말대로 쾌차하신다면 응당 손을 묶고 피를 내어 영애를 구하겠소." "좋아, 노부는 그대의 말을 믿겠다." 독수약왕은 이렇게 말하고 번쩍 몸을 날렸다. 그는 멀리 사라졌다.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자 상팔이 손 을 맞잡고 소영의 앞으로 나섰다. "형님, 정말 피를 내어 약왕의 딸을 구할 생각입니까?" 소영은 이제 담담한 모습이었다. "내 이미 그에게 대답을 했소 이제 속일 수는 없습니다." 두구가 앞으로 나왔다. "지금 형님의 육신은 천하의 안위에 관계가 깊습니다. 어찌 자기 몸을 가벼이 할 수 있겠습니까?" 신투 향비도 한 마디 했다. "늙은 도둑도 한 번 말한 것은 행하오. 그리고 후회를 하는 일도 없소이다. 그러나 소형의 처지는 다르오. 설사 그런 약속을 어긴다 해도 천하 영웅들은 여전히 존경의 마음을 버리지 않을 것인즉..." 소영은 손을 내저었다. "여러분의 충정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더 거 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팔은 천천히 소대인의 신변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손을 맞잡 고 허리를 굽혀 예를 드렸다. "소영 한 사람의 생사는 수십 년에 걸친 무림의 운명과 관계가 깊습니다. 이런 형편에서는 오직 소대인 한 분만이 그를 말릴 수 있을 것입니다. 대인께서 몇 말씀 수고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대인은 엄숙한 표정이었다. "이 일은 진정 입을 열기가 곤란하구료. 그는 스스로의 혈액으로 약과 바꾸어 모친을 구하였으니, 이는 큰 효도요, 또한 남에게 응 낙을 하였으니 그것은 신의 문제요, 아이에게 이를 저버리라고 아 비로서 입을 열기가 무척 어렵구료." 소대인은 비록 대의를 말했으나 한편으로 애지중지하는 독자를 잃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다. 그는 말을 끝내고 걸음을 옮겨 바위 앞에 가서 섰다. 냉면철필 두구는 비록 표면으로는 얼음처럼 찬 사람이지만 내면 으로는 역시 정열이 끓고 있었다. 소영이 피를 낸다는 소리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마치 솥안에 든 개미처럼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그는 소대인이 아들을 말리지 않는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생각다 못해 그는 슬그머니 은란의 신변으로 갔다. "은낭자, 이 일은 보아하니 부인께서 깨신 다음에 소형님을 말리 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소." 은란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영이 가로막았다. "은란, 모친께서 깨신 후라도 이 사실을 모친에게 이야기해서는 아니되오." 은란은 허리를 굽히고, "예, 명심해 두겠습니다." 이렇게 되니 두구의 마지막 기원도 허사가 된 셈이었다. "그럴 수는 없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전히 고집을 부려 보았지만 소영은 도리어 엄숙한 얼굴로 이르 는 것이었다. "피를 내주겠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그 외의 말이라면 얼마든지 받들어 듣겠소이다." 두구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불어낼 뿐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상팔이 큰 소리로 일렀다. "두제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소. 형님의 마음은 이미 결정이 된 듯하니 더 말해도 소용이 없을 게요." 신투 향비는 먼 하늘을 바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독수약왕은 소형의 피를 뽑을 목적으로 당분간 우리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이니 아무리 심목풍의 눈이 밝다고 하더라도 우리 가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오. 우리는 그저 이, 삼 일 잘 조심을 한다면 별일은 없겠지." 그는 잠시 말을 그쳤다가 헛기침을 했다. ".... 그러나 이곳은 음식물이 부족해 탈이야. 우리들 강호의 잡 것들이야 짐승을 잡아 구워 먹으면 요기가 될 것이나 소노선배와 부인께서는 그것이 습관이 되지 않았으므로......" 여기까지 말하고 일동을 돌아보았다. "이 늙은 도둑이 먹을 것을 좀 훔쳐 올까 하는데 같이 동행할 분 이 계실지 모르겠구료." 금산반 상팔이 얼른 나섰다. "이 상팔은 남을 속이는 재주는 있으나 도둑질하는 기술은 못 배 워 탈이올시다. 향형과 동행하여 어떤 수법으로 도둑질하는가 좀 보아야겠소." 두 사람은 소영이 막을까 두려워 일부러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주 거니 받거니 하며 떠나갔다. 소영이 말릴 틈도 없었다. 산모퉁이 하나를 돌아섰다. 상팔이 입을 열었다. "신투, 당신이 꾸민 일을 나는 찬성할 수 없소." "무슨 일이?" "독수약왕이 닷새 후 딸을 데리고 온다는 말을 들었지요?" "들었지." "소형님이 신의를 내세워 굳이 지키려 하니 우리는 일찌감치 이 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소이다. 독수약왕은 찾아와 허탕을 칠 것이 오. 그리하여 시일이 오래 지나면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일이고.. ....." "늙은 도둑은 당신 말에 찬성할 수 없소." "그럼 따로 무슨 묘책이 있단 말이요?" 향비는 제법 헛기침까지 토해 내고는 간간한 소리로 일렀다. "묘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당신의 생각보다는 한층 강경한 방법이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시지 않겠소?" "그 소영이란 사람은 나이는 비록 어리나 아는 것이 많지. 단지 그것을 활용할 줄 모른단 말이야. 그래서 굳이 신의를 지키려는 것 이오. 그러나 대인은 사소한 예절에 구애를 받지 않는 법, 더욱이 자기 피를 뽑아 주다니..... 내 생각은 당분간 그가 몸을 피해 있 다가 후일 독수약왕을 만나 정식으로 싸움을 거는 것이오. 그래서 그때 약왕을 완전히 굴복시켜 자기를 따르게 한다면 지금 몸을 피 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될까? 이 도둑의 방법은 솥 밑에 불을 지펴 영원히 후환을 없애자는 것이외다." 상팔은 답답했다. "빙빙 둘러서 이야기하지 말고 어서 요점을 말해 보시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우리가 마문비를 찾아가 그동안의 일을 말 하고 그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이오. 닷새 후에는 약왕이 딸을 데리 고 올 것이오. 우리는 미리 그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아주 그 딸애 를 죽여 버리는 것이오. 약왕이 본래 위인이 악랄하니 우리는 조금 도 마음에 부끄러울 것이 없소." 이 일을 소영이 알면 어떻게 될까? 상팔은 그것이 걱정스러웠다. "형님을 위해서 그런 책략이라도 쓸 수는 있으나 그건 양책이라 고 할 수는 없소. 만일 그 사실이 형님의 귀에 들어간다면 형님은 즉시 소매를 찢어 형제의 의를 끊을 것이며 땅을 긋고 영원히 절교 를 할 것입니다." 향비는 손을 내저으며 열심이었다. "소형을 알게 해서는 안 되오 또 당신들 중주이고도 손을 쓸 필 요가 없고, 이 일은 단지 늙은 도적과 사마건과 손을 잡고 마문비 의 수하 고수 몇 사람이면 충분할 게요." "만일 찾지 못한다면 그 때는 중주이고가 가담을 해야지." 상팔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 좋은 방법을 찾아 내지 못한다면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한 마을에 이르렀다. 산촌이 라 빈궁한 모습이 역력했다. "상형은 여기 계시오. 내 갔다 오리다." 신투 향비는 바람같이 달려가더니 잠시 후에 많은 물건을 들고 왔다. 닭 서너 마리와 밀가루 두 부대, 솥 하나 등이었다. 상팔이 나가며 물었다. "이것이 모두 훔친 거요?" 신투는 하하 웃고, "늙은 도둑이 비록 불초하지만 이런 빈촌을 털 수야 있나! 도둑 질할 수가 없어 열 냥의 은자를 주고 왔지." 열 냥이라면 거액이다. "그건 너무 비싸지 않소? 이런 것들을 열 냥씩이나 주고...." "흐흐.... 내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스스로 우습게 알지만 따지고 보면 내 몸에 지닌 은자도 전부 훔친 것이니 너무 지불했다고 해서 무어 손해될 거야 있소. 이제 돌아갑시다." 향비는 느긋이 웃고, "아직 닷새나 있으니 시간은 충분하오. 또 당신이 혼자 돌아가면 반드시 소형의 의심을 사게 될 게요. 내일 이 도둑이 혼자 마문비 를 찾아 가겠소." 두 사람은 갈 때처럼 소매를 나란히 하여 골짜기로 돌아왔다. 닭, 오리, 밀가루, 솥 등을 가지고- 벌써 황혼이었다. 금란, 은란은 일찍부터 소부인을 위해 마른 풀 을 뜯어 동굴을 깨끗이 치우고 부인을 모셨다. 독수약왕의 침술은 과연 뛰어난 바가 있었다. 게다가 단약을 복 용한 후 정신이 맑아져서 자기가 주야로 생각해 온 아들을 보자 신 지가 더욱 맑아져 병이 한꺼번에 달아난 것 같았다. 금란, 은란은 일찍부터 노부인을 좌우에서 모시고 우스갯 소리를 하여 부인의 입에서 웃음이 그치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비록 황량한 산굴 속에서 밤을 맞이했으나 소부인은 온통 구슬로 지어진 누각에서 호의호식 근심걱정이 없는 생활을 하는 것 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대인은 부인의 측근에 자리를 잡고 앉았으나 심사는 몹시 어지 러웠다. '부자가 만난 지 며칠이 못 되어 다시 영원히 헤어져야 하니 차 라리 만나지 않음만 같지 못하구나.....' 그는 비록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지만 부자의 정이라면 역시 슬픔 을 금치 못했다. 소영 역시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자기가 먼저 죽어야 될 일을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닷새 후에는 백발이 다 된 늙은 부모님이 자식의 시체를 묻어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자 닷새라는 짧은 기간은 금쪽보다 귀중하였다. '그 전에 못다 한 효도를 전부 바치리라.' 금란이 정성껏 향비가 가지고 온 물건으로 요리를 마련하였다. 소부인은 끊임없이 금란의 요리솜씨를 칭찬했다. 밤이 깊었다. 동굴 안에는 한 자루의 초가 희미하게 타고 있었 다. 소부인은 정신이 아주 좋아져서 촛불 아래에서 두 아가씨들과 희희낙락했다. 그러자니 슬그머니 악소채 아가씨의 일이 생각났다. "영아, 네 악누님은 어떻게 되었느냐?" 소영이 대답했다. "오 년 전 난리통에 헤어진 후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 오나 소자가 이미 수소문하고 있으니, 며칠 후에 어머님의 몸이 완 쾌되시면 찾으러 갈 것이며....." 그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제 살아서는 그 풍의절세하고 만인에 빼어나고 정리가 두터운 악누이를 다시 만날 수는 없으리라. 소부인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아...... 악소채가..... 실로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 내 곁에 있을 때에는 몰랐지만 그녀가 떠난 후로는 그리운 마 음이 날로 더해 가니....." 노부인은 좌우에 앉은 금란, 은란을 돌아보며, "이 두 아가씨도 모두 남에게 기쁨을 주니.... 후에....." 소영은 모친이 흥겨운 나머지 말을 함부로 할까봐 걱정이 되었 다. "어머님의 병세는 아직도 완쾌되지 않았으니 너무 말을 많이 하 셔서는 안 됩니다. 좀 휴식을 취하십시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 다." 그는 일어나서 천천히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소부인은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자못 대견해 했다. "저 애가 어렸을 적에는 몸이 약해 사람을 이겨 내지 못해서 이 렇게 몇 해씩이나 밖으로 돌아다닐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이렇게 건강해지다니.... 아, 우리 소씨 문중의 사람들은 모두 몸이 약해 서 탈이야. 그렇지만 않았던들 영아도 일찍 혼례를 시켜 주었을 것 을......" 금란, 은란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지만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어 잠잠히 있었다. 소부인은 두 아가씨들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너희 둘은 이처럼 빼어나고 총명하니 만일 원한다면 소영으로 하여금 두 사람 가운데 하나를 골라....." 은란이 얼른 말을 가로막았다. "마님, 저희들은 그런 복이 없습니다. 오직 마님의 은덕에 감격 할 뿐입니다. 향후 저희들이 마님을 모실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과분합니다." "그래, 너무 마음을 쓰지 마라. 좌우간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 자." 소영이 밖으로 나와 하늘을 살피니 이미 이경이 지났다. 길게 한 숨을 쉬면서 그는 발길 가는 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마음 속에는 만 가지 회포가 솟아올랐다. '무예를 겨루어 패하여 죽는다면 무엇이 아까우랴. 그러나 아무 연고도 없는 여자에게 전신의 피를 바쳐야 하다니.....' 마음 속에 생각이 많다 보니 당연히 어디까지 온 줄도 몰랐다. 소슬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마쯤 갔을까? 돌연 바람을 따라 아주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 왔다. "이런 짓은 할 수 없고, 향형의 주장대로 하는 것이 좋겠소." 차갑게 느껴지는 이 음성은 냉면철필 두구의 것이 틀림이 없었 다. 소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이 앞으로 불어와 이편의 발소리 를 막아 주었다. 향비의 음성이 들렸다. "상형, 결국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시원히 이야기해 보시 게." 보통 때는 명랑쾌활하던 상팔은 이날따라 매우 근심스럽게 말했 다. "나 상아무개의 심정도 그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이 일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구료. 소형님은 위인이 워낙 정직한 사람이라 우리는 종당 그 앞에 꿇어 앉아 백배사죄해야 할 것이외다." "그래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면 그 때는 어찌하겠소?" 이것은 두구의 말, 향비의 목소리가 따랐다. "금란, 은란 두 계집애는 소형에 대한 존경이 지극하여 소형은 모친의 말씀도 없는 가운데 두 계집애로 하여금 모친을 모시게 하 였으니 생각컨대 그 두 계집애는 안 되겠소." 상팔이 맞장구를 쳤다. "맞았소 그리고 보니 신투의 방법대로 하자는 것이군요." 향비는 기침을 토해 내고는, "자, 이렇게 결정을 보았으니 나는 이제 마문비를 찾아가겠소." 두구가 쌀쌀한 말투로, "만일 내일 당신이 보이지 않는 것을 소형이 묻는다면 어떻게 대 답할까요?" "그는 묻지 않을 거요. 만일 상형이나 두 노이가 없으면 그는 철 저히 캐어 물을 것이지만 이 늙은 도둑에 대해서는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을 게요." 두구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만일 그래도 묻는다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대답하면 될 거요." 상팔이 난처하다는 듯,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함께 있었는데......" "좌우간 두 분은 돌아가시지요. 그의 의심을 사서는 안 되니까." 소영은 여기까지 듣고 풀숲에 몸을 숨겼다. 세 사람은 천천히 걸어와 손을 들어 작별을 하고 헤어졌다. 중주이고는 골짜기 안으로, 향비는 골짜기 밖으로- '이 세 사람은 무슨 모의를 했을까? 이 밤중에......' 그는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좌우간 닷새 후에 있을 자기의 생사 문제와 관계가 있는 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재물을 사랑하기를 자기 목숨처럼 아는 중주이고와 도둑질하는 기술을 무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신투 향비가 이처럼 나를 생각하니, 아, 향후 그 누가 이렇듯 귀중한 교분을 향수하랴.' 그는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대장부 한 번 약속한 바 있거니 어찌 신의를 저버릴 수 가 있단 말이냐. 그들의 계획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는 마음을 굳혔다. 다음날 날이 밝자 호걸들은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과연 향비 한 사람만이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모르는 체하고 묻지 않았다. 두 사람 중주이고 역시 시치미를 뚝 떼고- 사마건이 기이하게 여기고 물었다. "향형이 보이지 않는구료." 상팔은 슬쩍 그를 건너다 보고 헛기침을 했다. "그 늙은이는 천성이 도둑질하는 게 낙이라 며칠만 도둑질을 하 지 않으면 손이 근지러워 견디지 못하는가 보오. 또 어느 부잣집을 털러 갔을 테지요." 그가 어찌나 그럴듯하게 둘러 붙이는지 꼭 정말 같았다. 소영은 속으로 감탄했다. '내 간밤에 그들의 모습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도 꼭 속아 넘어 갔을 게다.' 59. 군자의 길을 걷고자 시간은 물같이 흘러 나흘이 지났다. 다음날은 소영이 독수약왕과 약속한 대로 자기 몸을 버려 피를 흘려야 하는 날이었다. 소영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마음은 실꾸리같이 뒤엉켜 가지 가지 상념으로 날을 밝혔다. 그는 동이 트자 중주이고를 찾았다. "두 분 형제께서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시겠지요?" 상팔이 대답했다. "당연히 알고 있소이다. 오늘은 형님께서 피를 내어 저 독수약왕 의 독녀를 구하는 날이 아닙니까?" 소영은 밤새 고민으로 지새웠으나 아침이 되니 기이하게 정신이 맑아지며 마음은 고요한 물과 같았다. "아주 잘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두구가 한 마디 했다. "독수약왕은 약속을 받았으니 올 것입니다." 상팔이 보태었다. "만일 그가 오늘 오지 않는다면 그 편에서 약속을 어긴 것이니 형님께서는 후일 그를 만나더라도 구태여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두구가 어두운 낯으로 일렀다. "그 사람의 위인됨에 비추어 반드시 일찍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 나 한낮이 되도록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 니다." 그들은 이미 신투 향비와 약속을 한 바가 있었다. 만일 나흘째 되는 날 밤 삼경까지 신투 향비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가 충분한 고수들의 도움을 얻은 것이니 중주이고가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난 밤에 향비는 오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충분히 원조자를 얻 은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이 계속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소영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였다. 소영은 담담히 선 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열어, "우리는 길에 나가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이 소리를 듣자 두구가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라구요? 우리가 나가 그를 영접한다는 말이오?" "그렇소. 우리는 그들 부녀를 영접해야 하오. 아마 그들은 이곳 으로 오는 도중에 길을 막는 사람들을 만날는지도 모르니까요." 두구는 이 말을 듣고 쇠와 같이 누르스름한 얼굴이 금세 자줏빛 으로 물들었다.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상팔 역시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말을 못하다가 그래도 한마 디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 내뱉았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그들 부녀가 중도에서 원수들을 만 난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며 우리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외 다." 소영은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말했다. "만일 우리와 정말 관계가 없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아 마도 그렇지 못한 관계가 있을 것이외다." 상팔, 두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소 리쳤다. "무슨 관계란 말이오?" 소영은 직선적으로 그들에게 일렀다. "만일 신투 향비가 다른 고수들과 약속을 하여 도중에서 그들 부 녀를 가로막는다면 어찌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 할 수 있겠소?" 상팔은 속으로 아차 싶었으나 짐짓 깊이 감추고는 극구 반대했 다. "신투 향비는 형님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이니 그런 일은 없을 것 입니다." 두구 역시 극구 부인하여, "그렇습니다. 형님께서는 너무 마음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소영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향비는 두 분 형제와 한통속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가 두 분 형제의 청을 받아들인 것이나 아닙니까?" 중주이고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까지 밀리고 말았다. 부인을 할래 야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바로 대답하기도 어려워 그저 낯을 붉히 고 끽소리도 하지 못하였다. 소영은 웃음을 띤 얼굴로 슬그머니 변죽을 올렸다. "두 분 형제는 나에 대한 마음이 두터워 평소에 소영의 말을 어 기는 때가 없더니 오늘은 이 소영이 죽는 날을 당하여 두 분께서는 도리어 망설이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중주이고는 마침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제까지 일심전력으로 형님의 분부를 따랐거늘 이제 와서 만일 우리가 두 마음을 먹는다면 곧 하늘이 벌을 내리고 땅이 우리의 육 신을 멸하게 될 것입니다." 소영은 옷섶을 여미며 꿇어 앉았다. "두 분 형제께서는 무림에서 십분 존경을 받는 신분으로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이 소영을 형으로 인정해 주시었습니다. 당시 두 분 께서 너무도 진지하게 원했으므로 나 소영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연륜을 따진다면 나 소영이 어찌 두 분을 따르리 까." 소영도 눈에 눈물이 괴었다. 중주이고는 땅에 배복하여, "형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말씀으로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 을 이렇게까지 하여 우리 형제로 하여금 송구케 하시니...." 소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분 형제분의 두터운 정리에 소영은 오직 감격할 따름이올시 다." 두구가 결연히 말했다. "형님께서는 어떤 분부라도 꺼리지 마십시오. 저희 소제는 능력 이 미치든 못 미치든 분골쇄신하여 죽기까지 따르겠소이다." "나는 이미 독수약왕에게 대답을 했으니 이제 돌이킬 방법이 없 습니다. 게다가 부모님의 은혜는 바다와 같아 이 몸의 목숨으로 어 머님을 보호했으니 어찌 후회가 있으리까. 아무쪼록 이 소영이 죽 은 후라도 두 분 형제께선 이 몸의 부모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 그 러면 구천에 가서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허허허허......." 돌연 상팔이 먼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웃었다. 그 소리는 마치 용의 울음소리처럼 구천에까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소영이 급히 물었다. "상형, 왜 웃으시오?" 상팔은 그제서야 웃음을 그치고 처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형님께서 진정 우리들을 버리시고 죽는다면 저와 두구는 반드시 저 독수약왕과 생사를 겨루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물질 을 빌려 독을 전하는 능력이 있으니 소제들이 생각컨대, 승률은 거 의 전무한 터이니 만일 형님이 죽는다면 저와 두구도 곧 황천길에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두구도 한 마디 곁들였다. "노부인께서도 이 일을 아신 후에는 통탄해 하신 끝에 세상에 살 아 계시려 하시지 않을 것인즉, 형님의 피를 내어 자당을 구하심은 결국 쓸데없는 일이 되지 알을까 합니다." 그의 말은 구구절절이 정감으로 충만되어 있으나 어조는 여전히 보통 때처럼 차디찼다. "두 분 형제가 이같이 마음을 쓰시니 실로 나는 동의하기가 어렵 군요......" 상팔이 결심을 굳힌 듯, "좋습니다. 우리는 형님의 말씀에 응답하겠습니다. 피를 뺀 후 소제 등은 먼저 두 분 노인을 안전하게 모신 다음 다시 독수약왕을 찾아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소영은 더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소영이 그렇다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전부 끊어지는 것은 아니외 다. 혹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 니......" "사람이 몸의 피를 전부 뽑고도 살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 소이다." 두구의 말에 소영은 가볍게 웃고, "약왕은 의술이 신통하고 영약을 잘 다루니 내가 피를 뺀 뒤에라 도 만일 그가 약을 써서 치료를 한다면 혹시 회복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외다." 두구는 그런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자비심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 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독수약왕이라는 의호가 어울리겠습니까?" "내가 그 딸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약왕의 평생 소원을 들어 주 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가 내가 죽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모른 체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두 분 형제께서는 이 일에 대해 서 더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그가 형님을 구하고, 구하지 않고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린 문제 이며 옆에서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피를 빼지 않는 것이....." 소영은 한숨을 쉬고 두구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두구는 그의 눈빛이 두려워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서 있었다. 드디어 날은 밝았다. 소영은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가야만 하오." "어디를 간단 말씀입니까?" 두구는 아직도 미련을 씻지 못했다. "독수약왕을 맞이하러 가는 것이오." 소영의 어조는 두구 못지 않게 냉랭했다. 두구가 한 걸음 다가서며, "정말 그를 맞이하러 가실 셈인가요?" "소영이 한 번 입 밖에 낸 말을지키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까?" 중주이고는 어이가 없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으나 결국 소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 골짜기를 빠져 나왔다. 사방의 산세는 험했다. 그리고 굽이굽이 길은 거칠었다. 소영은 사방의 지세를 바라보며 혼자 생각을 굴렸다. '지세가 이렇듯 험난하니 어디에서 적을 막을지 알 수 없구나!" 만일 그들이 소영의 이름을 대고 독수약왕 등을 인적이 드문 곳 으로 유인해 들어간다면 더욱 일은 어렵게 될 것이다. 중주이고는 소영의 거동을 보며 마음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제발 신투 늙은이가 그들 부녀를 잘 다스려 은밀한 곳으로 데리 고 가 주시기를!" "두 분 형제, 어서 가십시다." 중주이고는 마지 못해 따라갔다. 세 사람은 모두가 무림의 고수급 인물이다. 다리를 놀려 걸어가 는 데도 말보다 더 빨랐다. 서너 시간을 달리니 이미 마문비가 수하인들을 매복시켜 심목풍 을 대적하던 그 골짜기 입구까지 다다랐다. 소영은 이곳이야말로 길을 지나는 요충지대라고 판단했다. 소영 역시 독수약왕이 도착하는 시간과 길을 몰랐다. 그것은 신 투 향비 편에서도 매일반인 것이다. 만일 약왕을 막으려고 한다면 바로 이곳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주위의 산빛은 여전하고 협도의 입구는 텅 비어 있어 다만 산바 람만 불어 지나갈 뿐이었다. 그때 소영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출구 속으로 땅바닥에 흐 른 핏자국이었다. 소영은 다가가 몸을 굽혀 그 핏자국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땅 바닥의 선혈은 시간이 오래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 되 었을 것이다. 당장 얼굴색이 변했다. 그는 뒤따라 온 중주이고에게 물었다. "두 분께서 막을 곳으로 약속된 지대가 바로 이곳인가요?" 상팔이 허리를 굽혔다. "주로 그것은 향비가 안출해 낸 것이며 그는 어제쯤 도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서 독수약왕을 맞이할 것인지는 아무 도 알 수 없습니다." 소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곧 정남쪽을 향하여 달 려 갔다. 소영은 땅에 흘린 핏자국이 부상을 입은 자의 몸에서 흐른 것이 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 핏자 국이 정남쪽으로 달려간 것이다. 유심히 살펴보지 않고는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상팔, 두구 역시 꼭두각시 모양 그저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처음엔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는 신투 향비의 행사가 알고 싶어 그리 지루한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은 나란히 달리면서 속으로 일이 잘되어 간다는 확신을 얻었다. 어찌 흔쾌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아주 끝장을 냈는지 어떤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두구는 상팔을 따르며, "만일 이 핏자국이 독수약왕의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것은 그 늙은 도둑의 실수라 해야 하겠지요." 이왕 일을 저지를 바에야 깨끗이 해치우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형님이 그것을 발견하여 우리 공모자들을 탓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신투를 나무랄 일은 아니네." "나는 그 늙을 도둑의 위인이 매우 세심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 데, 그가 이렇게 핏자국을 지우지 않고 마각을 노출시킨 것은 무슨 까닭인지?" "신투가 세심한 사람임은 틀림이 없네. 그러나 그에게 그만한 틈 없이 일이 급박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를 나무랄 수는 없을 거네." 소영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론 알고 있었 다. 한 마디로 독수약왕이 이미 죽었다면 속시원하겠다는 뜻이었 다. 얼마 안 가서 높은 구릉으로 올라섰다. 여기저기 풀숲이 보이고, 풀잎사귀에 간혹 피흔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부상자는 곧장 길을 따라 달려간 모양이었다. 산세를 헤아려 보니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영이 앞장을 섰다. 세 사람은 단숨에 십여 리를 달렸다. 아득 한 산줄기는 끝없이 이어지고 종횡으로 보이는 넓은 골짜기, 그들 은 이미 상당히 높은 지대로 올라선 것이다. 그러나 핏자국은 이로부터 전혀 아무데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부상자는 하늘로 올라갔는지 땅 속으로 꺼졌는지 알아낼 길이 없 었다. 두구, 상팔은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전음지술로 이야기했다. "그 늙은 도둑이 이처럼 영민하게 일을 깨끗이 수습할 줄은 몰랐 는 걸. 만일 그가 정말 독수약왕을 해치웠다면 우리는 그에게 톡톡 히 한턱 내야겠소." 두구의 말에 상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으나 아직 단정을 내 리기는 어렵네. 독수약왕은 교활하기가 여우같고 게다가 무술이 높 으니 그렇게 간단히 처치하기는 어려울 것이네." "그는 오직 딸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백화산장의 고수들 을 동반했을 리도 없고, 또 게다가 숨이 넘어갈 듯한 딸자식을 데 리고 있으니 용이하게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신투가 어느 정도의 고수들을 데리고 갔는지 모르겠군." 그의 무예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여럿이 차륜전을 벌인다면 약왕 하나를 해치우지 못하겠소?" "정말 그와 같다면 독수약왕은 필시 독수를 사양하지 않았을 것 이네." 두 사람은 줄곧 전음지술로 이야기하였으므로 물론 소영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소영이 소리쳤다. "두 분 형제께서는 어서 따라 오시오." 두구는 그 냉막한 어조에 희열을 나타내며, "시간이 이미 얼마 남지 않았소이다. 향비와 독수약왕이 싸움을 벌였다면 지금쯤 그 늙은이의 목숨을 취했을 것입니다. 또 일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죽음을 앞둔 약왕의 딸이 무사했을 리 는 없습니다." "그의 딸이 죽었다면 구태여 독수약왕이 형님의 피를 뺄 필요는 없을 것이외다." 상팔 역시 열심히 재촉했다. "형님, 천봉이 연면하고 개의 골짜기가 종횡한데, 털끝만큼도 찾 아낼 실마리가 없습니다. 소제가 보건대 다시 찾을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소영은 머리를 돌려 한동안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한 점의 단서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좋습니다. 돌아갑시다." 중주이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세 사람은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갔다. 중주이고는 기 쁨이 넘쳐 연방 신투 향비를 칭찬했다. 소영은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으나 속으로는 그들의 성심에 감동 했다. 그들은 무림의 고수로서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이해득실만 따지 는 것으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들이 아무 소득도 없 는 일에 이와 같아 기뻐하기는 난생 처음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빨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본래 머물렀던 골짜기로 돌아 왔다. 해는 이미 장대 끝에 높이 솟아 있었다. 소부인은 금란, 은란이 좌우에서 모시는 가운데 천천히 거닐며 주위의 산세를 감상하고 있었다. 신기는 맑고 눈에는 기쁜 빛이 가 득했다. 소영은 가벼운 걸음으로 모친의 면전에 이르렀다. "어머님, 몸이 많이 좋아지셨습니까?" 노부인은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는 듯 자애스런 눈빛으로 아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원래 어떤 큰 병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너를 지나치게 절실히 생각했을 뿐이다. 아, 내 지금 너를 보고 있거늘 무슨 병이 또 있 겠느냐?" 소영은 어버이의 사랑을 느껴 가슴이 뭉클했다. "소자가 불효하여 어머님을 괴롭혀 드렸습니다." 만일 노부인이 아들의 피를 대신하여 자기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체 어떤 감정이 들까? 소영은 생각할수록 괴로웠다. 소부인은 이러한 아들의 심정은 모르고 좌우에 선 두 아가씨들을 돌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두 아가씨들은 다같이 훌륭하구나!" "어머님 말씀대로 저들은 아주 좋은 아가씨들입니다." 소부인이 돌연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영아, 넌 어디 갔었느냐? 내 일찍 일어나 너를 찾았다." 소영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괴로웠다. "친구를 만나러 갔었습니다. 몇 가지 일을 상의하느라고....." "아, 너는 원래 강호의 사람이 아닌데 어찌 이런 생활을 벗어나 지 못하느냐? 어미는 종일토록 조바심만 하게 되는구나." "모친의 말씀은......" 이때 침중한 목소리가 들려와 모자의 대화를 끊었다. "그렇지 않소 영아는 이미 무림의 수뇌인물이니 함부로 당신만을 가까이 할 수는 없는 일이오. 더욱이 그를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하다니......" 소대인이 천천히 걸어왔다. 소영은 얼른 예를 올렸다. 소부인은 대인의 얼굴을 한 번 건너다 보고 나서, "요새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건대 강호에는 모두 은혜와 원한 과 원수와 살인이 뒤얽혀 있다는데 영아가 그 가운데 몸을 담고 있 다면 이 어미가 어찌 마음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소대인은 아들의 얼굴을 한 번 유심히 살핀 다음 옆에 선 사람들 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영아는 원래 몸이 약해 불치의 병에 걸려 있었소. 강호의 의협 들이 그에게 약을 주고 무예를 익히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는 스무 살을 넘기지 못했을 거요. 그가 이렇듯 강호 고인들의 구함을 입었으니 마땅히 강호의 분부를 따라야 하오. 만일 불행히 죽는다 면 그건 그 애가 스무 살 때 죽은 것으로 치면 되오." 소부인은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건 부친으로서 자식을 일찍 죽으라고 비는 말씀 같군요." 말을 마치고 노부인은 은란의 어깨에 팔을 걸고 걸어갔다. 소대인은 노부인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고개를 돌리고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얘야, 저기 독수약왕이 기다리고 있다." 이 말은 마른 하늘의 날벼락같이 여러 사람의 귀를 울렸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놀란 것은 중주이고와 상팔과 두구였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영은 좀 놀랐으나 음성은 지극히 차분했다. "독수약왕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한 여아를 데리고 왔다. 이미 나와 오 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소대인의 얼굴은 비록 조용하나 엄숙하고 장중한 걸음걸이로써 그가 얼마나 심려하고 있는지를 역력히 알 수 있었다. 소영은 여전히 담담한 몸가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 히 부친의 뒤를 따라갔다. 중주이고는 긴장으로 몸을 떨었다. 십년 공부가 아미타불이 되는 판이었다. 그러나 멍청히 서 있을 수만도 없어서 상팔이 낮은 소리 로 이끌었다. "우리도 가세." 두 사람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대략 백여 장쯤 걸어갔을까. 잡초가 무성히 우거진 곳에 이르러 소대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소대인이 아직 입을 열기도 전에 잡초 속에서 독수약왕의 음성이 들려 왔다. "소영, 그대는 닷새 전에 약속한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가?" "대장부가 어찌 일 언을 가볍게 할 수 있겠소. 가슴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소." 풀대가 흔들리며 곧 독수약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중주이고는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 보고 있었다. 약왕은 몸을 나타내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투 향비가 여덟 명의 고수들을 데리고 나 약왕을 길목에서 지 키고 있었다. 그대는 이 일을 알고 있는가?" "대개 짐작은 하고 있었소이다. 아침에 알게 되어 약왕을 영접하 러 나갔으나, 이렇게 돌아왔소." 독수약왕은 흥! 코웃음을 치고 냉랭하게 내뱉았다. "그 늙어 죽지도 못한 도둑놈이 나를 막을 수 있다면 노부가 어 찌 수십 년 간이나 강호에서 탈없이 지낼 수가 있었겠는가!" 상팔이 그 말을 듣고 한 마디 빈정거렸다. "약왕은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 왔으면서도 아직도 장수하는 것 이 싫증이 나지 않소?" 독수약왕은 예리한 눈으로 상팔을 한 번 건너다 보았으나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 "그 늙은 도둑놈이 쥐꼬리만한 계략을 써서 노부를 유인해 갔지. 운수 나쁘게도 그곳에서 바로 백화산장의 인물들을 만났단 말씀이 야. 그들은 이곳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라 생사를 건 일장의 악투가 벌어졌다. 노부는 도둑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그대의 얼굴을 보아 서 독을 쓰지 않았으니 이것은 이미 내가 인정을 보여 준 것이라고 알아야 하네." 냉면철필 두구가 참지 못하고 썩 나섰다. "우리 소형님은 협사로서 일단 입 밖에 낸 말은 산과 같이 엄숙 하니, 스스로 피를 내어 당신의 딸을 구한다는 말은 다시 변치 않 을 것이오." "노부가 그를 믿지 않았다면 어찌 향비 등을 그대로 살려 두었겠 는가?" 두구는 눈에 불을 켜고 소리쳤다. "형님께서는 비록 응답은 하였지만 이로써 다 된 것은 아니오. 아직 응답하지 않은 사람이 있소." "그게 누군가?" 두구는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소인 두구요." "흥! 그대가 무슨 연고로? 그럴 자신이라도 있는가?" 두구는 엄숙히 선언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만일 약왕이 형님의 몸에서 피를 빼겠다면 먼저 우리 중주이고의 목숨을 거둬들이는 수고를 해야 하 오." 소영이 손을 들어 급히 말렸다. "두 분 형제!" 그러나 두구는 막무가내였다. "형님께서 신의를 중히 여기는 만큼 우리는 의를 다하여 맺어진 사이올시다. 만일 형님이 만류하신다면 우리 형제는 먼저 형님의 면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소영은 당황했다. "두 분 형제는 내 말을 들으시오." 상팔이 나섰다. "소제 등은 귀를 씻고 모시겠습니다. 형님은 꺼리지 마시고 이야 기하십시오." 소영은 독수약왕을 돌아보며, "소영이 피를 내어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죽어야 되는가 요?" 독수약왕은 눈을 껌벅였다. "만일 여러분들이 다 함께 노부와 협력한다면 노부는 수법을 다 하여 그대의 목숨을 보전하겠소." 상팔은 한숨을 내쉬고 두구에게 일렀다. "두제, 일이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도 형님을 더 곤란하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네. 독수약왕이 형님의 목숨을 보장한다면 우 리는 힘을 모아 협력하는 일에 응답을 합시다." 독수약왕이 한 마디 보태었다. "노부는 그 위인이 강호의 규칙이나 법규에 얽매이기 싫어하나 오직 신의로써 승낙한 말만은 이제까지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소이 다." 두구는 그래도 다그쳤다. "그럼 피를 뺀 후에도 형님의 절세 신공은 유지될 수 있겠소?" "노부는 그 일만은 단언하기 어렵소이다. 그 뒤 경과를 보아야 될 것이오." 분위기는 어느덧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두구는 한숨을 내쉬고, "형님의 일신 무예가 전폐된다면 어찌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으리오?" 소영이 마음을 가다듬고 한 마디 했다.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소. 소영은 본래 무림인이 아니니 일신 무예를 버린다면 그 날로 강호에서 물러나겠소." 소대인이 결론을 지었다. "이 한 마디로 이미 결정된 일이니 더 논할 필요가 없겠소이다." 상팔이 몸을 굽신하며,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하고는 다시 독수약왕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약왕, 우리가 어떻게 협력을 해야 할 것인지?" "소영의 목숨을 건지고자 한다면 피를 내는 일에 앞서 우리는 우 선 조용히 외떨어진 장소를 찾아야 하오. 두 분은 좌우에서 우리를 보호하면 될 거요. 나는 칠 일 동안 한편으로 그의 피를 내는 한편 약물을 써서 그의 원기를 보충해야 하니까." 그제서야 상팔은 찬성했다. "좋습니다. 약왕의 말대로 따르겠소이다." 소영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시간을 가늠해 본 다음, "약왕께서 언제 손을 쓰실 건지?" "노부의 뜻은 빠를수록 좋소. 지금의 강호는 풍운만장,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가 없으니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우리 두 사람에게 다 무익한 일이니......" "오늘 좀 늦게 손을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인이 모친을 배 별해야 하겠으니 용서해 주시오." "필요없다. 네 모친은 지금 황황난안하니 네가 배별하러 간다면 오히려 모친에게 슬픔만 더해 줄 뿐이다." 하고 소대인이 막았다. 소영은 땅에 배복하였다. "그럼 아버님께서 어머님에게 제 대신 말씀 전해 주십시오." "아비가 한 말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된다." 소영은 크게 절하고 몸을 일으켰다. "약왕은 시술할 장소를 선택해 놓았소?" 독수약왕은 기다렸다는 듯, "노부는 이미 찾아 놓았소." "여기서 먼 곳이오?" "십 리도 채 못 되오." "약왕은 좀 지체하시어, 저희들이 몇 마디 이야기한 다음 출발할 수 있을는지?" "노부가 좀 기다릴 수는 있으나 너무 시간을 끄는 것은 곤란하 오." 상팔은 코웃음으로 대답하고 바람같이 달려갔다. 그는 차 한 잔이 식을 시간이 지나자 곧 돌아왔다. 약왕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해 보였지만 그에 대해서는 더 말 하지 않고 소영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소형. 아직도 미진한 일이 있소?" "아니오 이제 떠나도 되오." "노부가 길을 안내하리다." 소영, 상팔, 두구의 순서로 그의 뒤를 따랐다.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으니 어언 황혼- 독수약왕이 손을 들어 벼랑 중턱에 돌출한 바위를 가리켰다. "저 큰 바위 뒤에 서너 사람이 들어갈 동굴이 있소. 딸애는 그 안에서 기다릴 것이외다." "흥! 약왕은 이곳 지리를 잘 알아서 마침내 그런 동굴도 발견했 구료!" 상팔의 빈정거리는 말에도 독수약왕은 그다지 화를 내지 않았다. "그건 과찬이오, 단지 사람을 찾는 기술에 있어서는 천하에서 노 부를 따를 자가 없을 뿐이지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를 뿐이외다." 그의 말투를 들으면 어디까지나 남에게 굽히지 않으려는 뜻이 분 명히 보였다. 그것이 더욱 상팔에게는 밉살스러웠다. 두구가 한 마디 했다. "우리 형님은 한 번 말한 약속은 아주 중하게 여기는 성미지요. 그 덕분에 약왕은 소원을 이루게 된 것이오.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 다면 이런 생사에 관한 문제를 어찌 이렇게 소홀히 하겠소?" 소영은 그들 중주이고가 왜 쓸데없는 소리를 자꾸 지껄이는가 처 음에는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차츰 그들의 의중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즉 상팔, 두구는 어찌해서든지 약왕을 부채질하여 먼저 화를 내 게 하려는 것이다. 화를 내고 먼저 손을 쓴다면 그 때는 당연히 정 당방위가 될 것이니 약속을 어겼다는 말은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 이다. 그러나 소영은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 "두제, 이제 그런 말은 더 필요 없소." 독수약왕이 그런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오히려 소영보다 더 먼저 깨닫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저 한 주먹에 골탕을 먹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식을 생각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다 같은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점점 피를 빼는 당사자에게 호감이 생겼다. '정말 군자다운 위인이로다!' 속으로 연방 감탄해 마지 않았다. 얼마 후 그들은 어렵지 않게 산중턱에 있는 동굴에 도달했다. 60. 소녀의 심원(心願) 소영은 동굴 속에 첫발을 들여 놓으면서 유심히 안을 살폈다. 굴 안 쪽 깊숙한 곳에는 마른 풀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한 소녀가 두 눈을 꼭 감고 누워 있었다. 붉은 비단옷을 덮은 아가씨는 깊이 잠든 듯이 보였다. 소영은 측은한 마음에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독수약왕이 가볍게 탄식을 불어냈다. "저 애는 자색이 천하 절륜하고 지혜 또한 노부보다 낫거늘, 오 직 병이 뿌리 깊어 비쩍 말라 사람의 모습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 니....." 두구는 여전히 싸움을 걸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제가 보기에 영애는 이미 기절하여 숨을 거둔 것 같소." 그 말에는 독수약왕도 어지간히 노하였다. "노부의 의술은 천하에 필적할 만한 자가 없다. 비록 이 아이의 병을 돌이키지 못하고 뿌리를 뽑지 못하였으나 나는 이미 술수를 써서 그 애의 목숨을 십 년 이상이나 연장시켜 놓았거늘...." 상팔 역시 노인의 말을 가로채어, "약왕이 이미 영애를 십 년 이상 연명하게 하였다면 어찌 다시 시간을 내어 그녀를 치료할 영약을 찾지 않소?" 두 사람은 어르고 달래며 최후의 일각까지 독수약왕을 괴롭혔다. 그저 무슨 수단을 쓰든지 약왕이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는 심 보였다. 그래도 독수약왕은 여전히 화를 누르고 있을 뿐, "딸애의 병은 천고의 고질이라 노부조차도 아이를 치유시킬 방법 을 모르고 있소." 이렇게 이르고는 시선을 돌려 소영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 사람의 몸 속에 돌고 있는 피를 쓰지 않고는 딸애의 파괴된 혈청을 복원시킬 수는 없소." 상팔은 여전히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나는 세상에 당신 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영약이 없다고 믿 지 않는데....." "영약을 구하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지." 상팔은 제 배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우리 중주이고는 부유하기가 가히 나라에 비길 만하고 모아 둔 것이 풍부하기가 전무후무할 것이외다....." "그러나 그대들 중주이고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몽땅 털어 판다 고 해도 내 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영약은 구하기 어려울 걸." "약왕은 착오로......" "노부의 말이 어디가 틀렸다는 말인가?" "우리 중주이고가 모아 둔 물건은 비단 주보나 옥에 그칠 뿐 아 니라, 진기한 것을 널리 구하여 구하기 어려운 각종 영약도 가지고 있단 말씀이야. 그러니 우리가 당신의 딸같이 허약한 사람의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영약을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노부가 듣기로는 이 수십 년 간 아이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그런 약물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는데....." "천산에서 이루어진 설연자는 어떻소?" 독수약왕은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안 되오." "천 년 된 보삼은?" "천 년 보삼은 비록 매우 귀중한 것이지만 딸애를 치료할 수 있 는 주된 약물은 아니오." 모두가 듣지 않는 약이라고 하니 상팔은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 다. "그럼 말해 보시오. 혹시 우리가 당신을 위해 찾아 올 수도 있을 지 모르니.....' "그대가 먼저 물으면 노부가 대답하겠소."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성형선지(成形仙芝)나 천 년 이상 된 하수오(何首烏) 등은 모두 가 주약의 일종이어서 한 가지만 찾아도 다른 약은 짝하기가 어렵 지. 그러나 천고의 기약은 내가 알기로는 그대 중주이고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상팔은 이에 이르러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성형선지란 기약으로서 일종의 버섯을 말하는데 이것이 오래되어 완전히 사람의 형태를 이룬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르면 대 부분 젖같은 즙이 나온다고 하나 그 중에서도 최상의 것은 젖같은 즙 대신에 피가 나온다는 것이다. 하수오는 보통 새박뿌리라고 하는데 이것이 천 년 이상이나 된 것이라면 사람이 복용할 경우 영원히 젊음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 이다. 두구가 깊이 신음을 토해 내고는 입을 열었다. "십 년 전에 관외 지방의 속주에서 천 년 된 하수오 하나를 바쳤 다는데 황제가 늙어 다 복용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경사로 가서 그 것을 훔쳐 올 수도 있을 거요. 그것으로 따님의 생명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으리다. 다만 경사가 여기서 너무 먼 거리에 있으니 그것 을 가지고 올 때까지 따님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독수약왕은 이 소리를 듣더니 차갑게 반박했다. "십 년 된 이야기는 하지 마시오. 노부는 즉각 손을 써야 할 테 니 두 분은 내려가서 내 대신 바람이나 막아 주시오." 상팔이 무겁게 한숨을 토해 냈다. "소인 아직 할 말이 있으니 약왕은 다 듣고 손을 써도 늦지 않을 게요." "무슨 말인지 빨리 해 보시오. 지금 시간은 사실 노부에게는 금 쪽같은 것이오." 상팔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무엇이 급하오? 당신이 실제로 딸을 구하는 일이 성취되면 그때 우리는 전력을 다해 약왕을 처치해 버릴 텐데....." "흥! 노부는 이미 소영의 목숨만은 보장한다고 했소. 그런데도 자꾸 이렇게 치근치근 달라 붙는다면 우리는 구태여 합작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상팔은 두구를 돌아보고 하는 수 없이 엄포나 놓을 수밖에. "좋아! 사람이 서까래 아래에서 어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있 겠는가? 그러나 한 마디 명확히 해 둘 일은 만일 피를 낸 후에 소 형님이 세상에 살아 남지 못한다면 그 때는 끝장을 내는 것이오. 일찍이든 늦게든 반드시 따님의 목숨을 취할 것이니 약왕은 늘그막 에 딸을 잃은 슬픔으로 애통할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독수약왕은 드디어 뿔이 돋았다. "두 분이 자꾸 실없는 소리를 그치지 않는다면 노부는 소영의 목 숨을 살려 낸다는 약속을 취소하겠소!" 이 말은 과연 두려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중주이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동생, 가세!" 상팔의 말에 따라 두구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 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독수약왕은 두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 다음 비로소 소영에게 돌아섰다. "노부가 그대의 혈도를 짚어도 되겠지요?" 소영은 눈을 감았다. "약왕, 어서 뜻대로 하시오." 약왕은 곧 손을 들어 소영의 세 군데 혈도를 눌렀다. "그대가 스스로 생명을 보전하려면 마땅히 노부와 합작을 해야 하오." "약왕, 어떤 분부가 계신지 꺼리지 말고 말씀하십시오." "노부가 그대의 무술이 고강함을 알고 있소. 혈도를 누르니 피의 순환이 어찌나 거센지 막아낼 도리가 없군. 그러니 그대는 스스로 운공을 하여 피를 모이게 하시오. 노부를 도와야만 노부는 적시에 손을 쓸 수 있겠소이다." 소영은 눈을 뜨고 담담히 미소지었다. "만일 소영이 삶을 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무리라면 어찌 이 렇게 손을 묶였겠소. 사람을 떠보는 것은 옳지 않소이다." 독수약왕은 실은 소영의 도움을 청한 것이지만 그 안에는 상대방 의 의중을 떠보는 뜻도 함께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영의 나무라는 소리에 약왕은 얼굴이 붉어지는 듯하더니,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하였소이다." 그는 말을 마치고 굳어진 소영의 믐을 안아다가 구석으로 가서 마른 풀 위에 그의 딸과 나란히 눕혔다. 소영은 누워서 속으로 혼자 한숨을 내쉬었다. '나 소영은 은사와 의부 그리고 유선자에게 수 년 동안 길러지는 은혜를 입어, 세 분 노선배의 뜻을 받들어 강호를 편안하게 하려 하였거늘 오늘 이렇게 보잘것 없는 경우에 떨어질 줄이야 누가 알 았으랴......' 그는 다시 몇 군데 요혈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독수약왕이 다시 혈도를 짚었던 것이다. "이제 노부는 피를 빼겠소." 소영은 이때 아혈도 막혀 버렸으므로 비록 정신은 말짱하다고는 하나 말도 할 수 없었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다시 왼쪽 옷소매가 걷어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극렬한 아픔- 돌연 동맥으로 어떤 물체가 찔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독수약왕은 자애에 넘치는 음성으로 혼자말처럼 딸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완아(婉兒) 아프더라도 좀 참아라. 이제부터는 너도 다른 아이 들과 같이 이 아비의 눈앞에서 즐거운 운음을 웃게 될 게다. 나는 나의 절세의 의술과 무공을 전부 너에게 전해 줄 것이며, 오 년 내 에 너를 반드시 천하에 짝할 수 없는 소녀 영웅으로 만들 것이다." 소영은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 오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무공을 전혀 모르는 일개 여아를 천하 영웅으로 만들겠다니 너무 허풍이 지나치지 않을까!' 다시 독수약왕의 목소리가 전해 왔다. "완아야, 이 아비는 무림 중 인물들에게서는 정의와 사악의 중간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러나 아비의 행사가 희노애락이 무변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 그런 것은 말하지 말자꾸나....." 약왕은 잠시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 내 일생 동안 적지 않은 사람을 죽였고, 또 너를 위해서 도 몇 사람을 죽였구나. 그렇다 치고 나는 절세의 의술로써 너로 하여금 일조 일석에 한 갑자의 공력을 얻게 할 것이니....." 소영은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독수약왕이 제 딸을 일류 고수로 기를 수 있다 해도 전혀 무공 을 모르는 사람을 일류 고수로 만들려면 적어도 삼, 오 년은 걸릴 것이다. 그런데 약왕은 무슨 수로 일조 일석에 한 갑자의 공력을-. 돌연 긴 한숨소리가 들려와 소영의 생각을 중도에서 멈추게 하였 다. 이어서 가느다랗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또 사람을 해치려고 합니까?" 곧 독수약왕의 소리, "이 아비가 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란다." "저는 이미 희망이 없음을 아시면서 왜 또 딴사람의 피를 취하려 고 하십니까?" "얘야, 이 사람의 피는 보통 사람의 피와 다르다. 이번에 피를 갈아 낸다면 너는 곧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게다." "..... 왜요?" "이 현묘한 이치는 당금 세상에서 이 아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게다." 약왕은 잠시 한숨을 몰아 쉬었다가 길게 숨을 내쉬며 계속했다. "완아야, 그의 몸의 피는 네 체질과 아주 합당할 뿐만 아니라 가 장 중요한 것은 그가 보통 사람이 먹을 방도가 없는 물건을 먹어서 네 몸의 파괴된 피를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아비는 그가 무엇 을 먹었는지 한 마디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선지초 아니면 천 년 하수오같은 것일 게다." 소영은 이 소리를 듣고는 또 혼자 탄식하는 것이었다. '.... 내가 천 년 석균을 잘못 먹어 공력이 크게 증가하였는데, 이로 인해 오히려 생명을 버릴지도 모르는 액운을 당했으니 세상의 일이란 유익한 일은 유해한 일과 직결이 되는 모양이구나.' 이때 가느다란 목소리가 갑자기 다급해졌다. "아버님, 그럼 이 분이 바로 소영이란 말입니까?" 독수약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독수약왕의 딸이라 과연 총명하구나. 옆에 있는 사람을 단번에 알아맞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가씨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았 다. "어서 그를 놓아 주어요." 소영은 비록 고개를 돌릴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었으나 한 사람이 힘을 들여 일어나는 것을 알았다. 이어서 팔이 늘어지며 동맥을 찌르고 있던 물체도 뽑혀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독수 약왕의 탄식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완아야, 이 아비는 너를 업고 장장 남북을 편력하면서 백산흑수 를 건너 드디어 너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냈거늘, 네 어찌 이 아비의 고충을 조금도 알지 못하느냐?" 독수약왕은 성질이 악독하여 손을 쓰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상례 이지만 유독 자기 딸에 대해서는 그 자애로움이 비할 바가 없었다. 여자의 음성이 계속해서 들려 왔다. "아버님이 이 딸을 가련해 하시고 사랑해 주심을 제가 어찌 모르 겠습니까? 저를 업고 대강 남북을 편력하심을 이 몸이 어찌 모르겠 습니까? 아버님의 깊은 은혜가 바다와 같음을 이 몸이 어찌 다 보 답하겠습니까?" "너는 다만 목숨을 보존하며 아비의 슬하에서 기뻐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곧 아비에게 보답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제가 하루를 더 사는 것은 그만큼 아버님에게 하루를 더 고통스 럽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소영의 피를 받기만 하면 완아, 너는 곧 보통 사람과 같 이 회복할 수가 있다. 다시는 병마 때문에 정신이 어지러워지지는 않을 게다." "아버님은 강제로 다른 사람을 어렵게 만들 수는 있으나 제가 수 혈하도록 강박하실 수는 없습니다." 독수약왕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잠시 말을 못했다. 그리고는 하는 말, "그게 네 뜻이냐?" "아버님은 먼저 그를 위해 그의 몸을 보해 줄 약을 준비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여아는 수혈을 하지 않겠습니다." 소영은 기이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 이 부녀는 성품의 차이가 너무나 크구나. 아비는 이리같 이 독한 반면 딸은 마치 선녀와 같이 마음이 선량하여 타인을 손상 시키기를 원치 않으니......' 독수약왕의 장담하는 소리. "아비는 몸에 영험한 환약을 가지고 있다. 그의 기력을 보충하기 에 충분하지. 그러니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느니라." "아버님, 아직 어머님의 일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독수약왕은 처연한 소리로 대답했다. '네 어미의 목소리, 얼굴, 웃는 모습이 내 마음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으니, 종생토록 잊을 수는 없을 게다." "어머니는 반평생을 아버님만을 존경하고 사랑으로 모시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어머니께서 임종하시면서 하신 말씀 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독수약왕은 눈물이라도 흘리는지, 코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렇지, 아비는 종생토록 잊지 못할 게다." "아버님, 어머니는 무어라고 말씀을 하셨지요?" "그녀는.... 그녀는...." 냉혹하고 얼음과 같이 차디찬 독수약왕도 이 때만은 마음 속의 격동을 어쩔 수 없는 듯, 말을 더듬으며 한참 동안이나 뒷말을 잇 지 못했다. "아버님은 잊고 계시지만 여아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임종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당신이 이 몸을 종 생토록 속인 것을 원망한다고 하시었습니다." 독수약왕은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소영은 자기 손등에 따뜻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보니 독수약왕에게도 눈물은 있었구나.' 약왕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옳다. 네 어미는 확실히 그렇게 말했다." "아버님은 또 이 몸을 속여 평생의 고질병을 고친다고 해도 여아 는 종생토록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독수약왕은 다시 슬프게 푸념을 늘어 놓았다. "네가 이 아비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으니 나는 네 어미를 사 별하고 또 딸과도 이별해야 한단 말이냐?" 비쩍 말라 파리하게 보이는 소녀도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버님은 의술이 절세한데도 여아를 치료할 다른 방도는 생각하 지 않고 꼭 남의 피를 빌려야만 딸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니..." 소녀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을 뻗어 소영의 몸 위에 놓인 수혈 관을 내려 놓았다. "아버님, 만일 이 몸이 죽으면 아버지의 슬픔은 비할 데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러니 남의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죽음을 애통해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독수약왕은 의술과 지모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위인이지만 유 독 자기 딸에 대해서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 완아! 먼저 누워서 할 말이 있으면 천천히 하려무나." 소녀는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눈은 죽은 사람처럼 움푹 꺼져 들 어 갔으나 그 빼어나게 아름다운 윤곽만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으로 올리며 부드 러운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님, 이 사람의 혈도를 풀어 주시어요. 소녀가 그와 몇 마디 말을 해야겠어요." 독수약왕은 딸이 이렇게 다그치자 하는 수 없이 소영의 혈도 두 곳을 열어 주었다. 소영은 눈을 뜨고, 또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독수약왕은 애원하는 목소리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소형, 이 아이는 평생 고질병으로 인하여 좁은 병석에서 지내다 보니 인간 세상의 험악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양순하기만 하오. 그러니 그대도 이 아이에게 조심을 하여 행여 상처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오." 소영은 그저 담담하게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긴 머리의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소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소영입니까?" "그렇소. 본인이올시다." "제가 당신에게 편지 한 장을 보냈는데 받아 보았습니까?" "받았소이다. 아가씨의 도움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 오. 제가 몇 군데 요혈이 막혀 몸을 일으켜 사례치 못함을 용서해 주시오." "저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병이 잦아 부모님 외에는 딴 사람 과 만난 적이 드물어요. 당신은 제가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랍니다." 소영은 눈을 멀뚱거리면서 혼자 생각을 굴리는 것이었다. '..... 우리가 얼굴을 대한 것은 단지 세 차례에 불과하며 그것 도 경황중에 잠깐 본 것인데, 이 아가씨가 아직도 기억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로다. 더구나 그 아비는 미친 듯 딸자식을 위해 내 피 를 뽑으려고 하지 않는가?' 마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기는 이 소녀에게 어떻게 대접을 해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녀는 구슬픈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당신은 아마 기이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저도 역시 잘 모르겠어요. 일 년 내내 병상에 누워 정신 이 맑은 날이 아주 드물었는데 한 사람을 알아 볼 수 있으니 이 얼 마나 귀중한 일입니까?" 아가씨는 숨이 가쁜지 여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 었다. "제가 깨어날 때마다 아버님은 항상 당신의 이름을 말씀하시며 이 몸이 당신의 피를 수혈해야만 병이 나아 다른 여자 아이들처럼 희희낙락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을 자연히 마음 속에 새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소?" "그러나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두 사람이 어 디선가 만났다고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렇소. 우리는 만났었지만 모두 깊은 밤이었소. 아가씨께서 어 떻게 기억하고 계신지 모르겠소이다." 그녀는 숨을 몰아 쉬고 나서 기억을 더듬는 듯 느릿느릿 입을 열 었다. "그렇습니다. 그때 우리는 경황중에 바쁘게 한 번 만났을 뿐입니 다. 저에게는 다만 희미한 모습뿐이었지요. 그러나 그 후 달밤에 혼자 생각하노라니 당신의 그 희미하던 모습이 분명히 떠올랐습니 다. 그것은 반은 인간 세상에서 얻은 것이며 반은 이몸의 사색중에 서 얻은 것입니다." 소영은 뜻밖이라 생각했다. '..... 십 년을 혼미한 가운데 정신이 든 날이라곤 드물었는데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다하다니.....' 독수약왕은 걱정스러운 듯 달래었다. "완아야, 네 이미 너무 말을 많이 했다. 쉬었다가 다시 이야기하 여라." 이것은 어버이의 자애로움이 남김 없이 나타난 말이라고 하겠다. 이때 소녀는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흰 이가 가지런히 밖 으로 내보였다. 실로 오래간만에 웃는 웃음이었다. "아버님, 여아의 기억 중에 아마도 지금 이 시각이 정신이 든 중 에서도 가장 맑은 것 같습니다. 제가 말을 많이 했나요?" "그렇다. 얘야, 네가 종래 한 마디도 하지 않더니 오늘 이렇게 많은 말을 하였구나." "그렇지만 저는 조금도 피로하지 않아요." 독수약왕의 얼굴도 비로소 이 때는 사람의 탈을 쓴 어버이와 같 았다. 속으로는 말리고 싶었을 게다. 그러나 딸이 오래간만에 이렇 게 기뻐하는 모양을 보고 그랬는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소녀는 계속해서 물었다. "아버지가 저에게 만약 당신의 피를 수혈하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정말입니까?" 이때 독수약왕은 소영의 낯빛을 응시하였다. 그 눈빛 속에는, 제 발 그렇다고 대답해 주기를 애걸하는 심정이 역력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친의 의술은 정통하기로 소문이 났으니 아마 틀리지 않을 것 이외다." "당신도 역시 우리 아버님의 말씀을 믿어요?" 독수약왕은 그 다음에 나올 소영의 대답이 무서웠을 것이다. 얼른 말을 가로챘다. "무슨 소리냐? 아비는 너를 속이지 않아요." 소녀는 뼈만 남은 앙상한 손으로 소영의 머리를 짚었다. "당신은 몸의 피를 빼어 이 몸을 구한 후 스스로 어떻게 되는 줄 아셔요?" 소영은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생사를 미리 점칠 수는 없소이다." 약왕이 이내 말했다. "죽지는 않는다." 소녀는 소영의 이마 위에 올려 놓았던 손을 거두어 들였다. "당신이 나의 하잘것 없는 목숨을 건진 후에 영원히 땅 속에 묻 힌다니......" 이 말도 소영에게는 역시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랫동안 생명을 목마르게 구하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가 있 을까?' 긴 세월을 병석에 누워 있던 사람은 누구나 강렬한 생명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소녀는 지금 생사 문제를 보 통의 일로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몸의 피를 전부 뽑히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어찌하여 아버님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나요?" 소영은 느끼는 대로 말하였다. "영존께선 의술이 절세하시며, 나에게는 일찍부터 말하기를 천천 히 조심해서 수혈하면 죽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다고 하였소." 소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우리와는 서로 남남지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자신의 피로써 이 몸의 목숨을 구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소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부친께서 이와 같이 사람을 핍박하니 누군들 당신을 구하지 않 겠소?' 이런 말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녀가 너무 병약하므로 차마 말을 할 수는 없었 다. 독수약왕은 얼른 말을 가로채어, "소공자로 말하면 대인대의한 협사로 너의 기지와 풍모가 뛰어남 을 아까워한 나머지 드디어 피를 내어 너를 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거짓말 잘 하시는군!' 소영은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인들 그것을 모르랴. "아버님, 저를 사랑해 주시는 마음은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 지만 아버님께서 저를 위해 하시는 일이 도리어 소녀를 기쁘게 하 지 않으니 웬일입니까?" 독수약왕은 가슴이 섬뜩했다. "아가, 내가 어떻게 잘못했단 말이냐?" "저는 알아요 사람들은 모두 아버님에게 협박당하여 할 수 없이 피를 뽑힌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어찌 그가 자원하여 내 주었 다고 하십니까?" "그건.... 그건....." 독수약왕은 거짓말을 해 놓고 수습을 하지 못했다. 급하게 되면 엉뚱한 궁리가 생긴다고 얼떨결에 소영을 돌아 보며 물었다. "그대가 무슨 거짓말을 했소?" 이 소리를 듣자 소영은 돌연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내가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있단 말이냐? 생각 같아서는 당장 손을 쓰고 싶었지만 소영은 참았다. 만일 이 자리에서 그가 발작을 한다면 일은 모두 끝장이 나는 것 이다. 독수약왕은 그대로 화가 나 여아를 상처입게 할 것 같고, 또 소 영은 소영대로 기대를 건 희생의 희망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 다. 이런 생각은 소영의 마음 속에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 "아가씨, 부친의 말씀이 옳소이다. 나는 기꺼이 피를 내어 당신 을 구하고자 원했소." 약왕은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표정이었다. "얘야, 어찌 소대협의 호의를 물리치고 또 타인을 거듭 핍박하겠 느냐?" 소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몸은 받아 들일수가 없습니다." 약왕은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아가씨의 얼굴에는 엄숙한 빛이 돌았다. 여위어 뼈만 남은 얼굴 이라 더욱 싸늘했다. "아버님이 그의 몸에서 피를 뽑은 일은 이미 이 몸이 오룡의 능 력을 감소시킨 것으로 보답을 했으니 지금 우리는 그에게 아무 빚 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그에게서 수혈한다면 그 다음은 어 떻게 보답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독수약왕은 처연하게 한숨을 불어냈다. "얘야, 너는 다시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더 시간을 끈다면 내 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너는 그렇 게 이 아비의 심정을 모르고 간장을 끊어 내는 일을 해야 하겠느 냐?" 소녀는 앙상한 두 손으로 그 아비 약왕의 손을 잡았다. "아버님, 이 여아로 하여금 깨끗하게 죽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 습니까?" "완아, 네가 죽어 만사가 다 괜찮다고 생각하느냐? 이 다 늙은 애비는 어찌 외롭게 살아 가란 말이냐?" 소녀의 깊이 패여진 눈자위에서 눈물이 샘물처림 흘러 내렸다. "아버님..... 그렇지만.... 저 사람의 피로써 저의 목숨을 구한 다면 또 새로이 빚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심에 부담을 가지고 사는 것이 어찌 죽음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독수약왕은 이렇게 달래도 안 되고 저렇게 말해도 경우에 꿀리게 되자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얼굴에 결심의 빛이 돌연 비치더니 딸의 손에 잡힌 손을 뽑아냈다. "완아, 네 이렇게 아비의 말을 듣지 않으니 나는 할 수 없이 네 혈도를 쳐야겠다. 그래도 좋으냐?" 그러나 딸도 아비 못지 않게 강경했다. "아버님이 정히 그러시다면, 제가 먼저 목숨을 끊어 보여 드려도 좋으신지요." 독수약왕이 대답을 하려 하는데 갑자기 굴 밖에서 상팔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약왕, 지금 소형님의 형세가 어떠하신지, 내가 들어가 볼 수 있 겠소?" 소영이 대신 대답했다. "나는 아주 좋으니 들어올 필요가 없소이다." 상팔은 소영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좀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형님, 진정 몸조심하십시오. 저희들은 동굴 밖에서 지키며 기다 리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의심할 것 없이, 소영이 부르기만 하면 즉시 굴 안 으로 뛰어들겠다는 것이었다. 두구가 역시 예의 그 차디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약왕, 매 한 시간 간격으로 우리 형제는 형님의 생사를 확인하 기 위해 형님의 목소리를 듣거나 직접 들어가 눈으로 보아야겠소." 독수약왕이 대노했다. "만일 두 분이 내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들이닥친다면 그 때는 소형의 생명이 끊어지더라도 노부를 탓하지 마시오." 둘도 꿇리지 않고 소리쳤다. "우리는 이미 동굴 밖에 많은 나무와 풀더미를 준비해 놓았소 만 일 형님의 몸에 의외의 일이 발생할 때에는 즉시 불을 지를 것이 오. 약왕도, 따님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말아야 하오." 독수약왕은 코웃음을 치고, "만일 두 분이 불을 지른다고 해도 노부를 곤란하게는 할 수 없 을 걸!" 상팔이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따님은 불기의 열과 연기의 고통을 참아낼 수가 없을 거 요." "흥!" 약왕은 코웃음을 쳤으나 더 말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딸을 향해 물었다. "얘야, 너도 다 들었느냐?" 그녀는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들었습니다." "아비는 이처럼 너를 위해 고심을 하거늘 너는 조금도 아비의 고 충을 생각해 주지 않으니......" 약왕도 탄식하고 딸도 한숨을 불어냈다. "이 몸을 구하기 위해서 또 다른 사람을 해친다면 그것은 또 얼 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아비가 소영의 피를 수혈한 다음에는 아무런 걱정도 없느니라." "아버님 그만 두세요. 저를 어머니 무덤 곁으로 데리고 가서 움 막을 하나 지어 주세요 그러면 소녀는 산천의 영기와 지하에 계신 어머님의 도움으로 몸이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수약왕은 무술, 의술, 지모가 뛰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유독 애지중지하는 딸에게만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비도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네가 마음 편히 받아들일는지 모 르겠구나." "어떤 방법인데요?" 약왕은 소영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방법은 소형이 동의할지 안할지 모르겠구료." "먼저 말씀을 해 보시오. 제가 들은 다음에 도리를 강구합시다." "그렇지, 노부가 먼저 딸애의 대답을 들은 다음에 비로소 소형의 뜻을 알아보는 것이 순서겠군." 그는 말하면서 다시 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떤 일입니까?" 딸이 묻는 말에 약왕은 잠시 끊었다가 대답했다. "만일 종신토록 너를 소영의 배필로서 짝지운다면 어찌하겠느냐? 연후에 그의 피를 빼어 네가 살아난다면, 그 때는 너도 마음이 괴 롭지 않겠지?" 아가씨는 뜻밖의 말에 한동안 멍청히 있었다. 그리고 나서 쓴웃 음을 지었다. "저는 나무처럼 말라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아요 아버님 은 그것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독수약황은 미소를 짓고, "아가야, 너는 지금 병마에 시달려 꼴이 말이 아니다만 만일 병 이 낫는다면 너는 하루아침에 꽃보다도, 선녀보다도 예뻐질 게다. 너는 그것을 모르느냐? 아비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천하의 미녀 양귀비, 서씨가 너를 따르겠느냐?"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토해 냈다. "아.... 제 기억으로는 그러한 모습은 얼마간 있었던 것 같습니 다. 하오나 아버님은 이 딸을 비록 하늘로 올릴 수 있다고 해도 이 몸의 모습을 예전처럼 돌이킬 수는 없을 거예요." "완아, 아비의 말은 구구절절이 사실이다. 어찌 그런 불신의 말 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소녀는 비쩍 마른 손과 얼굴을 내밀며, "아버지는 이몸을 남에게 짝지어 준단 말입니까?" 독수약왕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우리들의 뜻이 그렇게 정해진다면 아비는 소영과 담판하겠다." "그러니까 아버님은 이 몸을 그의 처로 짝지어 주고 다시 그 피 를 뽑아 이 몸의 목숨을 구하고....." "그렇지." "그러나 제가 살고 그이가 죽는다면 나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영원히 과부 신세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두 부녀의 일문일답은 사실 방약무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 다. 모든 행사는 그들의 장중에서 움직이는 것인가? 소영은 그녀가 어찌 이처럼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 았다. '아가씨는 십수 년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며 타인과 별로 접촉 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예의인들 배울 까닭이 없다.' 소영의 판단에도 일리는 있었으나 그것은 천성적으로 사람이 타 고난 꾸밈없는 심정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때로 예절이라는 것은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있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그로 써 고통을 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독수약왕은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네 만일 진정 소영의 처로 시집을 간다면, 이 아비가 장인의 신 분으로 어찌 사위의 목숨을 가벼이 볼 수 있겠느냐? 따라서 나는 내가 지닌 바 전 능력을 다하여 그의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 소녀는 이때 눈을 스르르 감고 몸을 벽에 기대었다. 아마도 너무 오래 말을 하여 피곤해진 것이리라. 독수약왕은 소영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소형, 노부와 여아가 한 말을 다 들었는가?" 소영은 차갑게 내뱉았다. "약왕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다고 생각하는데?" "왜?" "소인은 비록 당신 부녀의 앞날에 대해서는 관계할 것이 없다 하 겠으나 보아하니 이 일도 나와 관계가 깊으므로 묵과할 수가 없소 이다." 독수약왕은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미모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절세의 여아를 그대에게 시 집 보내려는 것이거늘..... 그것이 잘못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소영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단지 영애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긴요한 일이니 그밖의 일은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아니오. 우리는 먼저 이 일을 명확히 해야 되오." "말하지 맙시다." "명백하게 말하려 하지 않는군." "으- 음." 소영은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생각을 굴렸다. '이 독수약왕은 비록 악독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나 그의 딸은 반 대로 너무 선량하다. 내가 여러 말을 하여 그녀를 해치는 것은 옳 지 않다.' 그는 생각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소인은 이미 혼인할 상대를 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니 약왕의 존 의를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독수약왕은 위협하듯, "지금은 그대의 생사와 관계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오. 이 일은 간단한 것이 아니오. 그녀와 관계를 끊어야 해. 만일 그렇지 않을 진대 노부는 하는 수 없이 손을 써서 그녀를 죽이겠소." '흥! 아주 악독하고도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소영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미 대꾸할 말을 염두에 두었던 터라 말이 술술 흘러 나왔다. "약왕의 뜻이 그렇다 해도 상대방의 무예가 탁월하고, 게다가 경 비가 삼엄하다면 약왕은 접근하기도 어려울 것이외다." 약왕은 여전히 큰소리를 쳤다. "하찮은 일을..... 그대는 노부에게 그녀의 이름만 알려 주면 된 다. 그녀가 설혹 천자의 무남독녀라고 해도 노부가 방법을 써서 어 렵지 않게 처치하겠다." 고영은 눈을 감고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 괴물이 계속해서 다그치니 누구의 이름을 댄단 말이냐?' 그러나 일시지간에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모르겠다. "그 아가씨의 이름은 무엇인가?" "......" 독수약왕은 후우 숨을 빨아들였다.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 것은 노부를 속이고 있기 때문이지?" '만일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면 당장 이 수척한 아가씨는 마음이 상하게 될 것이다.' 기왕 말한 바에야 그대로 밀고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인이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여아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가?" "약왕은 반드시 알아야 되겠소?" "물론 알아야지." 소영은 쓴웃음을 짓고, '내 말해 보아야 약왕도 방법이 없을 것 같으니 그만 두겠소이 다." "하하하......" 독수약왕은 흔쾌히 웃고, "노부는 평생 강호를 편력하면서 이제까지 눈에 거슬리는 자를 그대로 내버려 둔 적이 없었소. 어찌 눈의 가시를 그대로 둘까..." 소영은 이제 누구의 이름이든 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음이 급 한 가운데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북천존자의 딸- '그녀를 빌려서라도 곤궁함을 면치 않을 수가 없구나.' 그는 물었다. "약왕은 북천존자를 아는지 모르겠소." 그 말을 듣자 과연 독수약왕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들었지.... 그러나 그 사람은 중원에 자주 오지 않는데....." "그렇소. 그는 북해의 빙궁(氷宮)에 깊이 들어앉아 중원 무림과 는 은혜도 원수도 없소이다. 그러나 근자에 그는 곧잘 중원으로 왔 소이다. 짧은 오 년 사이에 북천존자는 적어도 두 번 중원에 들어 왔지요. 약왕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소." 독수약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네." 소영은 계속해서, "두 번째 중원에 들어온 후 그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음도 약왕 은 알고 있을 테지요?" "그렇지, 그는 지금 강남 일대를 유람 편력하고 있지." "약왕은 그가 이번에 여아를 동반한 일도 알고 있소이까?" "그의 수행원이 하도 많아서 그 가운데 그의 딸이 끼였는지는 모 르겠네." "좋소. 내 지금 약왕에게 알리겠소. 그 북천존자의 딸은 아비와 함께 있소." "뭐라고? 그러나 북천존자의 딸과 그대 사이에 연분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소영은 약왕의 태도에서 그가 북천존자에 대하여는 어지간히 두 려움과 존경을 함께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나와 그녀가 서로 아느냐고 묻는 것입니까?"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가?" "서로 만난 이후 서로 정이 있어....." "그 다음 말은 약왕의 딸을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다. 독수약왕은 물었다. "그대가 정혼을 했다는 것이 바로 북천존자의 딸인가?" "그렇소이다." 독수약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노부는 믿지 못하겠는데......" 소영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당신이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리고 짐짓, "약왕이 믿지 않는다면 다른 도리가 없소." 독수약왕은 진짜인가 하는 얼굴로 소영을 바라보았다. '이 빼어나게 영준한 젊은이가 만일 북천존자의 딸의 눈에 띄었 다면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 반드시 계집애 쪽에서...." 좌우간 약왕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노부가 북천존자의 딸애를 없앨 수 없는 줄로 아는가?" 소영은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다가 비로소 눈을 떠 약왕을 바라 보았다. "약왕은 그럼 그 북천존자보다도 우월하다고 생각하시오?" "흥! 노부는 비록 무술에 있어서 그에게 한 수 뒤질지 모르나, 독을 쓰는데는 천하 제일이라 자부하고 있지." 소영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천천히 말했다. "본인이 이미 피를 내어 구하기로 했으니 생사를 점치는 것은 어 려운 일이오. 설사 목숨을 보존한다고 해도 단시일 내에는 거동하 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내 어찌 약왕의 능력을 저당하리오. 더 말 해 보았자 소용 없는 일이 아니겠소?" 소영은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아 버렸다. 한편, 그는 사세 부득이하여 거짓말을 하긴 했으나 은근히 걱정 이 되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이 소문은 빨리 전파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는 북천존 자의 명성을 훼손시키는 결과가 되니 그 죄, 가볍다고 할 수가 없 구나.' 약왕의 딸이 서서히 기운을 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사람들은 모두 뜻을 둔 인물들이 있으니, 아버지도 그 런 생각을 그만 두십시오." 독수약왕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대수로울 것 없다." "왜요?" "저 사람과 북천존자의 딸이 서로 만나서 정을 통하고 있다 할지 라도 그 북천존자는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너와 저 사람은 이렇게 아비도 나서서 주관하는 일이니 우리가 먼저 중매인 을 통하여 정혼을 해 버린다면......" 딸은 이내 말을 가로막았다. "아버님은 어찌 남의 일을 그렇게 가볍게 보십니까?" "나는 그저 네 대답만 들으면 된다. 그러면 아비는 도리가 있으 니...." 소녀는 심중에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그것을 참기 위해 한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하하하......" 독수약왕은 딸이 응답하지 않는 것을 그대로 긍정적인 것으로 받 아들였다. "너 반대는 하지 않는구나. 침묵으로 아비의 뜻에 맡기는 것이겠 지?" 그는 말끝을 흐리다가 갑자기 크게 목청을 돋구어서 동굴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상형, 두형, 두 분은 어서 동굴 안으로 드시오. 노부는 두 분과 잠깐 상의할 일이 있소이다." 61. 억지 장인 중주이고는 동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의 생사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마음만 졸이고 있는데 독수약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대답하며 비호같이 달려 들어 갔다. 상팔은 소영을 한 번 힐끗 바라보고 나서, "약왕, 우리를 부른 것은 무슨 할 말이 있어서요?" 독수약왕이 대답했다. "노부가 두 분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소." 상팔은 의외란 듯, "말씀하십시오. 저희들이 귀를 씻고 잘 들어 모시겠으니...." 독수약왕은 소영을 한 번 돌아보며 말했다. "두 분은 정말로 독수약왕이 소영의 목숨을 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요?" 두구는 얼굴에 열기를 띠고 소리쳤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오. 우리가 이미 재삼 말했지만, 만 약 약왕이 우리 형님의 목숨을 건지지 못한다면, 당신 딸도 그 대 가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약왕은 코웃음을 쳤다. "두 분이 소영을 구하고자 생각한다면 노부가 하는 일에 수고를 좀 해 주셔야 되겠소." 두구는 다급히 물었다. 독수약왕은 싱긋 웃음을 지었다. "소녀에게 짝을 만들어 주어야 되겠는데.... 그러니 두 분께서 수고롭지만 중매를 서 주셔야겠소." 상팔은 장발을 늘어뜨리고 벽에 기대 앉아 있는 삐쩍 마른 소녀 를 힐끗 바라보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구를 따님의 짝으로 만들고자 하는지 모르겠는데....." 약왕은 기다리기나 한 듯, "소영이오." 상팔은 대경실색하였다. "우리 형님을?" "그렇소." 두구는 이 말을 듣고 얼굴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따님은 어딘가 좀....." "그는 처음에 독수약왕의 딸이 어딘가 좀 배필로서는 적당치 않 다고 말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소영의 목숨이 아직 약왕의 손아귀 에 들어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그래서 황급히 입을 다물 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독수약왕이 말했다. "만약 내 딸이 소영과의 혼담을 허락만 한다면, 소영은 노부의 둘도 없는 사위가 되는 것이오." 상팔은 속으로 이 늙은이가 돼먹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 다. 그러나 입으로는 짐짓, "그렇소이까?" 약왕은 점점 기세를 올렸다. "내 딸을 출가하기도 전에 장부를 사별하여 망문을 지키는 과부 로 만들 리는 없지 않소? 그러니 노부가 반드시 모든 기술을 다해 서 소영의 목숨을 건져 내겠소." 두구가 빈정거렸다. "다시는 피를 뽑아내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기술일 것입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약왕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두 분이 중매 역할만 해 줄 수 있다면 당신들의 형님이 피를 뽑 힌다 해도 결코 몸에 상처를 입게 되지는 않을 것이외다." 상팔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우리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가 없소. 먼저 형님의 의중을 알아 본 다음에야 할 수 있겠소." 두구도 함께 다그쳤다. "약왕은 먼저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좋겠소. 그래야 우리 형제 들이 마음 턱 놓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지 않겠소?" 독수약왕은 그의 사랑하는 딸을 돌아다 보았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이미 깊은 잠이 들은 듯, 벽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약왕은 애처로운 듯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그녀를 안고 동굴 밖 으로 나갔다. 상팔은 소영이 누워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고 나직하 게 말했다. "형님, 방금 독수약왕의 말을 모두 들으셨습니까?" 소영은 머리를 끄덕였다. "모두 들었소." "이 늙은이가 자기 딸의 덕행이나 형모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담 을 끄집어 내는군요." 두구가 이 말을 받았다. "고래로 대지대해의 인물들은 모두가 소절에 구애되지 않았습니 다. 그런데 형님께서 어찌 소절에 얽매여 응답을 하시지 않았습니 까?" "한 여자의 명예에 관한 일인데 어떻게 함부로 대답을 하란 말이 오?" 상팔은 머리를 휘휘 내젓고는 말을 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 형님께서는 일체 입을 다무십시오. 소제가 잘 처리할 것이니, 후일 독수약왕이 힐책을 한다 해도 모든 책임을 소 제에게 미루십시오." 두구가 반대의견을 말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독수약왕 늙은이는 꾀가 발칙해서 반드 시 형님을 핍박하여 스스로 입을 열게 할 것이오. 그러니 세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소영은 크게 감동한 듯, "아! 두 분 형제께서 이와 같이 나에게 관심을 표해 주시니 소영 은 말할 수 없이 감격하고 있소. 그러나 대장부가 하는 일에는 반 드시 명확한 구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므로 가벼이 응낙할 수는 없구료." 상팔은 탄식하며 말했다. "소제가 큰맘먹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형님께서 너무 고집을 부리시는군요." 이때 독수약왕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로 이야기를 해 본 결과가 어떻게 됐소?" 상팔은 애걸하듯 소영에게 말했다. 독수약왕이 듣기라도 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어, "형님께선 소제가 말씀드린 대로 독수약왕에게 응대하십시오." 소영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켜서는 안 되므로 가벼이 허락을 할 수가 없소." 독수약왕은 기다리다 지쳐서, "이젠 노부가 들어가 보겠소." 말이 떨어지자 곧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 하면서 약왕이 동굴 속 으로 뛰어 들어 왔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딸을 조심스럽게 내려 놓은 다음 세 사람을 돌아 보았다. "세 분이 이야기해 보니 어떻습니까?" 상팔은 말을 얼버무렸다. "형님께선....." 독수약왕은 대번에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럼 소영은 허락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군. 독수약왕의 딸이 어 떤 점에서 배필이 못 된다는 말이오?" 상팔은 전전긍긍하며, "우리 형님의 성격은 독수약왕이 벌써 아다시피 경솔하게 허락을 하지 않으며, 한 번 허락한 것은 생사를 불문하고 후회하지 않습니 다." 약왕은 좀 누그러져서, "알고 있소. 소영은 군자의 풍모와 장부의 기개를 가지고 있소." 두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만약 형님이 술수를 부릴 줄도 알고 약아빠진 인물이라면, 오늘 약왕도 형님의 피를 뽑을 수는 없었을 것이오." "노부는 내 여아의 혼사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야 되겠소. 소 영은 허락을 했소?" 상팔이 대답했다. "내가 약왕의 말을 형님에게 전했소." "그래, 소영은 한 마디로 거절했단 말이오?"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다면 다시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소?" "그럼 무어라고 말했는가?" "두 눈을 꼭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마치 알아 듣지 못하 는 것 같았습니다." "애주가는 벌주를 마시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노부가 소 영의 입을 열게 할 방도도 없다고 믿소?" 상팔은 태연하게, 그러나 약간 비꼬듯이 응수했다. "남자편에서 혼사를 재촉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여자편에서 재촉 한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했소." 두구도 편을 들어서 응수했다. "만약 약왕이 그처럼 혼사문제를 가지고 떠든다면 이것과 피를 뽑아서 당신 딸을 구하겠다는 약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우 리는 훌륭하신 소영형님께서 말린다 해도 손을 써서 간섭하겠소." 독수약왕은 이 말을 듣고 분이 복받치듯 날카롭게 중주이고를 노 려 보았다. "그럼 두 분은 노부의 솜씨가 어떤가 시험을 해 보겠다는 말인 가?" 두구는 품 속에서 은권을 꺼내 오른손에 움켜 잡았다. "피차 손을 쓸 땐 온갖 수단을 다 쓰는 것이오. 만약 우리가 실 수해서 당신 딸에게 부상을 입힌다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오." 독수약왕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은 지금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인물인데, 만약 십 여 년 간 병상에서 신음해 온 여자에게 해를 입힌다면 어찌 영웅인 물이라고 할 수 있겠소?" 두구는 코웃음을 치면서 외쳤다. "흥! 만약 약왕이 독을 사용한다면 나는 따님에게 해를 입힐 수 밖에 없소." 독수약왕은 기가 막히다는 듯, "두 분께서는 이렇게 노부를 협박해야 되겠소?" 상팔은 빙글거리며, "약왕은, 말씀이 좀 심하시군. 우리는 약왕과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오." 약왕은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힐끗 보고 나서, "그럼 두 분은 말씀을 하시오." 상팔은 기다렸다는 듯, "나는 세상 만사에 통달해서 당대의 일급 고수라고 자부하고 있 소. 그러나 중매쟁이 노릇은 아직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 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그러니 약왕께서 깊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약왕은 태도가 냉정해지며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상팔은 껄껄 웃고 나서, "남녀의 혼사는 부모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중 매 서는 일은 서로가 좋아해야...." 독수약왕이 말을 가로챘다. "바로 그것이오. 노부가 명령을 했고 두 분께서 중매를 서면 모 든 절차를 갖춘 것이 아닌가!" 두구가 어림없다는 듯, "그러나 소대인의 명을 받은 것은 아니지 않소?" 상팔도 빙그레 웃으며, "딴 사람들은 사위를 고를 때 남자의 재질이나 딸의 행복을 염두 에 둡니다. 그러나 약왕은 오직 사위의 몸에서 피를 뽑아 딸의 목 숨을 구하기 위해서 딸을 출가시키겠다는 것이니, 그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구료." 독수약왕은 기분이 상한 듯 상팔을 노려보았다. "내 딸을 소영의 처로 삼겠다는 것과 소영의 몸에서 피를 뽑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별개의 문제인데, 어찌하여 두 가지를 혼 동해서 말하는가?" 상팔은 곧 말을 받았다. "약왕의 의술이 절세무비한데 어째서 병을 치료하는데 사람의 피 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오? 만약 약왕이 정말로 사위를 고를 마 음이 있다면 약물을 구해서 먼저 따님의 병을 치료하시오. 그런 다 음에 혼사문제를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독수약왕은 두 눈을 번쩍거리며 냉소를 터뜨리고 나서, "두 분이 이처럼 핵심을 회피하고 빙빙 돌려서 약왕을 속여 먹으 려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세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니구료. 이제 혼사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기로 합시다. 노부가 먼저 소영의 몸에서 피를 뽑아서 딸의 목숨을 구하고 그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합시다." 목소리를 낮춰서 연이어 말했다. "두 분은 중매를 서든 말든 좋을 대로 하시오." 두구는 대번에 안색이 붉으락 푸르락해졌다. "우리 형제들이 딴 사람의 말을 그대로 좇아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러한 인물인 줄 아시오?" 독수약왕도 역시 화를 내었다. "그럼 두 분은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두구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독수약왕이 독을 쓰는 재주는 뛰어나다고 들었지만, 사 람을 놀랠 만한 무술이 있다고는 아직 듣지 못했소. 그러니 오늘 한두 가지 무예를 보여 주셨으면 하오." 중주이고는 애초부터 독수약왕을 노하게 하여 한바탕 접전을 치 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분위기가 무르익어 약왕 의 마음을 쿡쿡 찔러 주는 것이었다. 독수약왕은 안색을 싹 바꾸고, "두 분이 노부의 솜씨를 시험해 보려 한다면 노부의 손이 맵다고 탓하진 마오." 상팔은 담담히 웃으며, "좋소! 약왕이 이렇게 간이 크게 명백히 도전을 해 왔으므로 우 리 형제도 사양하지 않겠소. 그러나 먼저 분명히 말해 두지만, 만 일 약왕이 손을 쓴다면 우리 형제도 따님에게 해를 입히겠소. 그러 니 후에 우릴 탓하지는 마시오." 품에서 금주판을 꺼내 들고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독수약왕도 무기를 꺼내시지. 우리가 한 번 후리면 생사를 결정 하게 될 터인데......" 약왕은 두 눈에 불똥을 튀기며 노려보고 나서, "이 굴은 지세가 협소하니 밖으로 나가서 사생결단을 합시다." 상팔은 금주판을 흔들며 쩔꺽쩔꺽 소리를 냈다. "남을 해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고, 방비하는 마음이 없어도 안 되는 것이오. 우리 옆에 따님이 없으면 약왕은 독을 쓸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독수약왕은 벌컥 화를 내며, "그렇다면 노부가 독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두구가 빙글거리며, "얼굴을 알고 사람을 안다고 해도 마음 속까진 알 수 없는 것, 더욱이 약왕 앞에 독수라는 두 글자를 덧붙이고 있으니 독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해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내 생각엔 여기에 서 접전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상팔이 말했다. "우리는 두 사람이지만 함께 협공을 하지는 않을 것인즉, 내가 먼저 손을 쓰겠소." 독수약왕은 분노가 극에 달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목소리 까지 떨면서 소리쳤다. "금일 너희가 여아를 해친다면 너희 중주이고는 목숨이 없어질 줄 알아라! 무림의 규율에 따라 혈전을 치르다가 아무런 무술도 익 히지 않은 연약한 여아를 해친다면 당연히 목숨을 바쳐야 한다." 두구도 어투를 바꿔서, "사슴이 좋다 해도 누구의 손에 죽든지 최고급의 요리는 될 수 없소. 마찬가지로 당신 딸은 우리에게 별 이익을 주는 인물은 아니 니, 약왕도 이리와 같이 교활한 말은 그만 그치시지. 우리 중주이 고는 이미 무수히 풍랑을 겪어 온 터이라 누가 뭐라든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상팔은 몸을 으쓱 하고는, "약왕은 신분을 생각해서 먼저 공격을 하고 싶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내가 먼저 손을 쓰겠소." 상팔은 손에 잡은 금주판을 뒤흔들면서 보광을 번쩍이며 똑바로 공격해 나갔다. 독수약왕은 몸을 살짝 피하며 일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응수는 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분함을 참지 못하고 있었지만 딸이 옆에 누워 있어 손을 잘못 쓰면 딸을 해치게 될 것을 생각하고는 불길 같은 노여움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상팔은 껄껄 웃으며, "왜 가만히 서 있지? 약왕은 세 번 공격을 견뎌낼 수 있을까?" 금주판을 휘둘러 백학척령의 술법을 써서 공격해 나갔다. 독수약왕은 역시 살짝 피할 뿐 이번에도 손을 쓰지 않았다. 상팔이 다시 몸을 으쓱 하며 공격하려는 찰나, 소영이 돌연 두 눈을 크게 뜨고 고함을 쳤다. "손을 멈추시오!" 상팔은 금주판을 거두고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형님,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 소영이 단호히 일렀다. "여기 일은 형제들이 관계할 바가 아니니 물러들 가시오." 두구가 변명을 늘어 놓았다. "독수약왕은 스스로 우리에게 도전해 왔습니다. 그러니 형님의 피를 뽑는 것과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소영은 목소리를 더 높였다. "말할 필요 없소. 동굴 밖으로 나가시오." 중주이고는 서로 멀뚱히 바라보고는 마지못해 발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독수약왕은 두 사람이 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곧 뒤 쫓아 나가 동굴입구에서 한참 서 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소영은 혈도가 막혀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독수약왕이 공격 을 하지 않는 것을 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자는 독을 쓰는 재 주가 천하에서 제일이므로 중주이고 몰래 독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약왕, 우리 두 분 형제에게 몰래 독을 썼습니까?" 독수약왕은 빙긋이 웃고, "소형, 당신은 산과 같이 말을 무겁게 하는 군자, 대장부의 명칭 을 당연히 받을 수 있지만 저 중주이고는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구 료." 소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래서 당신은 몰래 그들에게 독을 썼다는 말이오?" "그럴 리가 있소? 그러나 동굴 입구에 극독을 펴 놓았소. 만약 그들이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와서 소란을 피우면 그들은 중독이 될 것이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노부를 탓할 것이 못 되오." 소영은 탄식하면서 말했다. "약왕은 따님의 생명을 구하려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님의 혈도를 열고 빨리 파괴된 피를 갈아 넣으시오. 그리고 나서 따님을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충분히 휴식을 시 켜 속히 회복하도록 힘쓰시오." 독수약왕은 감탄하는 어조로, "노부가 만일 너무 빨리 피를 뽑으면 그대의 생명을 건지기가 어 렵게 되오." 소영은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천천히 피를 뽑는다 해도 내가 분명히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아 니오. 내가 이미 허락을 했으니 생사에 관해서는 유의할 필요가 없 는 것이오." 독수약왕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감격에 찬 눈길로 소영을 바라보며, "노부가 수십 년 동안 강호를 돌아다니며 웅재대략의 영웅들을 무수히 보았지만 그대와 같이 의협심이 강한 인물은 보지 못했소." 소영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약왕은 나를 칭찬할 필요가 없소이다. 나는 당신이 우리 어머니 를 구해줬기 때문에 이것을 보상하려 할 뿐이고 따로 동정심 같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오." 독수약왕은 가죽통을 꺼내서 거기에 죽 꽂혀 있는 속이 빈 철침 을 뽑아 들고 말했다. "노부는 지난 몇 년 동안 심산, 대택을 돌아다니며 진기한 영초 를 구해서 여아의 병을 치료해 볼까 했소. 그러나 수 년 동안의 노 력도 헛되어 그 약을 구하지 못했던 것이오. 그래서 그 다음으로 생각해 낸 것이 가죽통과 철침을 준비하여 그 약을 먹었을 것 같은 건장한 사람을 찾아서 여아의 파괴된 피를 바꿔 보자 하는 것이었 소. 이렇게 몇 년 동안 찾아다니다가 결국 발견한 것이 소형 당신 이었소. 아!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구료." 소영은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약왕, 피를 뽑으시오." 독수약왕은 머뭇거리며, "그러나 그대의 혈도를 막아야겠는데....." "약왕이 나의 내수력(內受力)을 믿지 못하겠다면 혈도를 막아도 좋소!" "피를 빨리 뽑으려면 노부는 한편으론 그대의 행혈을 멈추게 하 고 한편으론 여아의 혈도를 누르고 있어야 하오. 철침이 동맥을 뚫 고 들어가면 비록 고통은 크지 않다 해도 행혈이 빨라지게 되면 장 차 죽게 된다는 심리상으로 공포감을 갖지 않을 수 없소. 그러니 혈도를 막는 것이 좋을 것 같구료." 소영은 체념한 듯, "나는 지금 죽음을 기다리는 양순한 양과 같으니 약왕 마음대로 하시오 상의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독수약왕은 오른손으로 소영의 두 군데 혈도를 막아 버렸다. "혈도를 막아 버렸으니 고통은 느끼지 않겠지만 피를 뽑는 속도 가 빨라져 그 영향을 받을 것인데 몇 분 간만 잘 참아 주시오." 소영은 혈도가 막혔으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왼쪽 팔이 뜨끔 했다. 속이 빈 철침이 동맥을 찌른 것 같았다. 연이어 앞가슴에 장풍이 밀어 닥쳐 내장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의 피 흐르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은은한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소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 첫 번째 절차가 완료된 것이로구나!' 이 순간 갑자기 왼팔이 느슨해졌다. 혈관에 꽂혀 있던 철침이 빠 지고 가슴을 압박하던 장풍이 걷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영은 속으로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약왕이 탄식하는 소리가 났다. "얘야! 너 왜 이러느냐?" 유약하고 무력한 여자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저를 소영에게 시집 보내지 않으시겠어요?" "물론! 소영은 이미 너를 처로 삼겠다고 승낙했다. 그러니 네가 소영의 피를 받는 것은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거지." "저는 아버님 말씀을 믿을 수 없군요. 그와 같은 영웅호걸이 어 찌 나처럼 추악한 계집을 아내로 삼겠다고 승낙했겠어요." 약왕은 이 말을 듣고 자기 딸이 측은하게 생각됐다. 그래서 딸을 달래는 어조로, "완아! 너는 이 아비가 당대의 무예계에서 제일가는 의술을 지녔 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너는 나의 유일한 딸이니 내가 전심전력을 다하여 너를 건강하게 만들겠다. 그렇게 되면 원래 너의 용모가 절 세이므로 너를 만나는 남자는 모두가 너를 부인으로 삼고 싶어 할 것이다." "소영이 저에게 직접 말해 주지 않고서는 아버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군요." 독수약왕은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고, "좋다! 그러나 먼저 아비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야 한다." "무슨 약속입니까?" "만일 소영이 너를 처로 삼겠다고 너에게 직접 말한다면 아비의 말을 좇아 소영의 피를 받아야 한다. 아! 완아, 너는 언제나 딴 사 람을 위해서는 마음을 쓰면서 아비가 딸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렇게 도 몰라 주느냐?" "먼저 저 사람의 혈도를 열어 저에게 직접 이야기하도록 해 주세 요." 독수약왕은 어쩔 수 없이 소영의 혈도를 열어 주었다. 그러나 몰 래 전음술을 써서 말했다. "소형, 사람을 죽이면 자기도 역시 죽게 되고, 사람을 구해 주면 자기도 역시 구함을 받는다는 말이 있지 않소? 소형께서 이미 여아 를 구해 주시기를 약속했으니 지금 좀 도와 주시오." 소영은 천천히 눈을 뜨고 약왕을 바라보았다. 약왕은 얼굴 가득히 애걸하는 빛을 띠고 있었다. 소영은 속으로 탄식을 하고는 다시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소영을 주시하고 있던 여자가 속삭이듯 물었다. "우리 아버님께서 당신이 나를 처로 삼겠다고 승낙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거짓말이 아닌가요?" 소영은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나서 약왕을 힐끗 돌아 보았다. 약왕은 얼굴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 었다. 소영은 이것을 보고 어찌나 측은한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아버님께선 당신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아가씨는 갑자기 활기를 띠며, "당신이 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승낙했다면 저의 이름을 아시 겠지요?" 소영은 속으로 참 맹랑한 아가씨라고 생각하면서, "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아버님이 저를 속였군요? 저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제가 당신 의 피를 받게 하려구요. 그런데 당신은 또 왜 저를 속이나요? 완이 라는 이름은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아명이구요. 저의 진짜 이름은 남궁옥이랍니다." "아! 남궁옥! 영존께서 이미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남궁옥은 별로 신통치 않은 표정을 짓고 약왕에게, "아버님, 저 사람 몸의 혈도를 풀어 주세요. 그래서 일어나 앉아 저와 이야기할 수 있게 말입니다." 독수약왕은 눈을 두릿두릿 굴리며 황급하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그가 너에게 직접 말해 주었으니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이제 그의 피를 받는 것이 긴요할 뿐이다." 남궁옥은 두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겨 있다가 약왕을 향해서, "아버님, 지나간 일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약왕은 이 갑작스러운 물음에 약간 성질을 누그러뜨리고 반문했 다. "무슨 일?" "제가 몇 살 때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저를 칭찬하시며, '완아! 너는 총명절륜하니 아비가 너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겠다'라고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약왕의 딸보다 더 총명한 사람은 없구말구....." "아버님께선 여아를 속이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고는 왜 저를 그렇게 곳곳에서 속이십니까?" 독수약왕은 일격을 맞은 듯 멍청하니 아무 말도 못했다. 남궁옥은 계속해서, "아버님께서는 마음과 뜻을 오로지 소녀를 구하는데 바치고 계십 니다만, 만약 이 소녀가 죽는다면 그 때서야 저를 속이는 마음을 버리실 수 있겠습니까?" "아비가 너를 속이려 한 것도 모두 너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아버님께서 정말로 저를 가엾게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면 먼저 소 영 도령의 혈도를 열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를 병마에서 구해 낼 방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완아는 지혜가 비범하니 아비도 네 말을 믿어 보겠다." 약왕은 오른손을 연달아 휘둘러서 소영의 혈도를 열어 주었다. 소영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남궁옥을 바라보니 손에 가죽통을 들고 벽에 기대 앉아 있었는데 삐쩍 마른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 다. 독수약왕은 딸을 다그쳤다. "아비가 소영의 혈도를 열어 주었으니, 완아, 빨리 너를 구할 방 도를 말해 봐라." 남궁옥은 둥글고 큰 눈을 굴려 소영의 두 허벅지를 바라보더니, "아직 두 허벅지의 혈도는 열어 주시지 않았잖아요?" 약왕은 대견한 듯 껄껄 웃으며, "완아, 근래에 네가 지금처럼 정신이 말짱한 때는 없었는데..." 하며 손을 휘둘러 혈도를 열어 주었다. 남궁옥은 약왕을 똑바로 쳐다보며, "아버님의 의술은 천하제일이라는데 정말인가요?" "그렇구말구." "제가 보기엔 좀 명백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어요." "무엇인데?" "소영 도령의 피가 어째서 소녀의 목숨을 구할 수 있습니까?" "응! 그건 아주 간단해. 왜냐하면 그는 일종의 기약을 먹어서 보 통 사람의 피와는 다르다는 거야." "그렇습니까? 그의 피도 천성적으로 기혈인 것은 아니군요. 그렇 다면 무엇을 먹었는지, 그것은 어느 곳에서 구했는지, 왜 묻지 않 습니까?" 독수약왕은 자기 머리를 한 대 딱! 하고 때리고는, "그래, 그래, 아비가 너무 서둘러서 정신이 없구나!" 소영을 내려다 보면서, "저 애의 말을 소형도 전부 들었소?" "들었습니다." 약왕은 인자로운 얼굴로, "만약 소형이 무엇을 먹었는지를 말해 준다면 소형의 피를 뽑아 서 소녀의 목숨을 구할 필요는 없소." 소영은 눈을 감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그것은 언덕에서 자라는 기초인데 회백색이고, 생김새는 마치 우산과 같은 모양을....." 독수약왕이 말을 가로챘다. "그것은 천 년 묵은 돌버섯이오. 바로 딸애의 병에 필요한 것이 오 어디서 자라는지 모르겠소?" "호강의 위쪽, 삼협의 사이인데 그곳이 어딘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전에는 기억하고 있었소?" "희미하게.... 그러나 찾아갈 수는 있을 것이오." "그럼 소형, 수고스럽지만 노부 일행을 데리고 가는 것이 어떻 소?"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먼저 설명해 드릴 말이 있습니다." "노부는 귀를 씻고 잘 들어 모시겠소이다." "그 돌버섯은 위로는 하늘이 보이지 않고 아래로는 땅이 보이지 않는 절벽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데, 제가 무의식중에 반쯤 먹어 버 렸지만 아직도 많이 남아 있소. 제가 다만 희미하게....." 독수약왕은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건 긴요치 않소. 그대가 전부 먹어 버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도 충분하오." 소영은 계속 설명해 나갔다. "그 지방은 천봉이 중첩해 있어서 돌버섯이 자라는 곳이 어느 곳 인지는 저도 지적해 낼 수는 없군요." 독수약왕이 말했다. "어떤 한 가지 특징도 기억나지 않소?" "그 절벽 위에는 밑으로 쏟아지는 한 가닥의 폭포가 있었던 기억 이 납니다." 독수약왕은 생기가 돌며, "오! 그 특징만으로 충분하오." 소영은 가볍게 탄식하며, "제가 이런 것을 기억하고는 있습니다만, 천봉이 중첩한 중에서 그 절벽을 찾아 내는 것은 단시일 내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따님의 몸은....." 여기에서 말을 갑자기 멈췄다. 남궁옥의 면전에서 그녀의 병세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독수약왕은 다시 냉정한 표정으로, "노부가 절세의 의술로 딸애를 일 개월 동안 지탱하게 할 수 있 소. 그러나 만약 한 달 내에도 여전히 그 천년석균이 자라는 절벽 을 발견 못한다면, 그 때는 하는 수 없이 그대의 피를 빌려 딸애의 생명을 구해야 하겠소." 남궁옥이 갑자기 말을 가로챘다. "한 달 아니라, 두 달이라도 지탱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독수약왕은 이처럼 자신있게 말하는 딸이 무척 대견했다. 그러나, "얘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아비는 절세의 의 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아비가 네 맥박을 조사 해 보니 이미 기름이 다 달아서 꺼지려는 등불과 같이 약하기 짝이 없더라. 아비의 환약과 은침이 없다면 열흘도 지탱하기 어렵다. 한 달이라는 기간은 아비가 심력을 다해서....." 약왕은 길게 한숨을 쉬고 딸이 입을 열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 서, "소대협은 진실로 군자이다. 그래서 한 번 허락하면 결코 번복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네가 두 달 기한으로 허락한다면 노부 는 어쩔 수 없이 너를 한 달 더 살려내야 하는 것이다." 남궁옥은 미소를 띠고, "아버님은 목숨을 지탱시키는 또 다른 힘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 시는군요." 독수약왕은 기이하다는 듯, "무엇을 간과해?" 남궁옥은 힘없이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살아야 되겠다는 의지......" "네가 왜 그렇게 갑자기 강렬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남궁옥은 두 눈을 껌벅이며 소영을 바라 보았다. "아버님이 저 소영 도령의 피를 뽑지 못하게 하려구요....." "하하하, 아비가 똑똑히 알겠다." 남궁옥은 삐쩍 마른 두 볼에 살짝 홍조를 띠고 약왕의 품 속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독수약왕은 소영을 보며, "소대협, 내 딸의 말을 전부 들었소?" "전부 들었습니다." "좋소! 저 애가 두 달의 기한으로 하고 싶어 하니, 나는 비록 그 애 아버지지만 마음대로 그 애 말을 고칠 수 없구료. 그러니 두 달 안에는 그대의 피를 뽑지 않겠소. 하지만 두 달이 지나도 여전히 천년석균을 찾아내지 못할 때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소형의 피 를 뽑아내지 않을 수 없겠구료." "만약 따님이 두 달을 지탱하지 못한다면......" "흥! 그럴 리가.... 만약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그 애의 명이 한 달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칠 수밖에....." 돌연 눈빛을 번쩍이며 황급히 물었다. "소형, 그대는 알 수 있겠소? 왜 그 애가 두 달 간을 약속기일로 고집하는지를....." "따님은 마음이 아주 선량해서 딴 사람을 해치는 것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독수약왕은 벌컥 화를 냈다. "흥! 그것밖에 모를 테지. 두 달 간을 살 수 없을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야." 소영은 어리둥절했다. "저는 미처 생각 못했소이다." 62. 삼협에서 다시 만난 송보노인 독수약왕은 한 마디 한 마디, 똑 떨어지게 말했다. "딸애는 지금 그대에게 모든 정을 쏟고 있어. 그래서 차라리 자 신이 흔쾌하게 죽을지언정 그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피하고자 하 는 거야." 소영은 더욱 머뭇거렸다. "이건, 이건....." 독수약왕은 화를 벌컥 내며, "이거니 저거니, 할 필요가 없다구. 내 딸애는 비록 목숨을 바쳐 서라도 당신을 구하고 싶어 하지만 나 독수약왕은 그렇게 넓고 큰 아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단 말씀이야." 소영은 약왕의 심중을 모르겠다는 듯, "그럼 약왕은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이오?" 독수약왕은 자기 딸을 바라보고 나서 소영에게 눈길을 보내며 천 천히 입을 열었다. "만일 한 달 안으로 돌버섯이 자라고 있는 절벽을 찾아내지 못한 다면 딸아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오? 그 애가 기한을 두 달 로 정했으므로 당신의 피를 뽑자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딸애 가 죽어버리면 그 때는 천년석균도 하등 필요가 없는 것이지. 그래 서 노부는 당신과 딸애를 함께 묻어서, 심산 대택에서 장구한 세월 잠을 자야만 하는 딸애의 고독을 풀어 줘야 되겠단 말씀이야." 소영은 이 말을 듣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럼 약왕은 나를 매장시키겠단 말이오?" 약왕은 태연하게, "바로 그런 뜻이지. 심경이 어떻소?" 소영은 담담하게, "좋은 생각이오. 그러나 소생은 아직 승낙을 하지 않았소. 내가 당신을 데리고 천년석균을 찾아가려면 먼저 혈도를 모두 풀어 주어 야 하지 않겠소? 나는 내 피를 빼서 따님을 구한다고 허락을 했을 뿐이지 목숨을 바치겠다고는 승낙을 하지 않았소. 그러니 약왕이 나를 죽이려고 생각한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엔 없소." "무슨 방법인데?" "각자 무공으로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오." 약왕은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의 무예가 출중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노부가 두려 워할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지. 그러나 노부는 실패할지도 모를 그 런 모험은 하지 않는 성격일세." 소영은 약왕의 음흉한 속셈을 알아채지 못하고, "약왕, 무공으로 서로의 생사를 결단하는 방법 이외에도 이 소영 을 죽일 만한 책략이 있소?" 독수약왕은 여전히 능글능글했다. "나이가 어리니 역시 생각이 좁군. 노부가 미연에 화를 방지하지 못할까 봐서?" "어떻게 미리 방지한단 말이오?" "미리 말해 주는 것은 좋지 않은데.... 말해 주지! 노부가 물체 를 빌려서 독을 전하는 기술은 천하가 다 아는 일, 한 달 기한 내 에 천년석균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노부가 몰래 독을 쓰겠단 말씀이 야. 딸애가 죽을 때 함께 순사시키지. 그 때는 이미 온몸에 독이 퍼져서 노부에게 대항할 수 없지." "약왕, 미리 말해 줘서 고맙소. 내가 안 이상 철저히 방비하겠 소." 계속해서, "이미 뱉아 버린 말. 후회하시진 않겠지?" "걱정도 팔자로군. 노부는 얼마든지 틈을 엿볼 수 있어. 그건 그 렇고 우리는 먼저 결정해야 할 긴요한 일이 있는데....." "무슨 일?" "그대는 노부와 딸애를 함께 데리고 가겠다고 아직 승낙을 안했 잖나?" "따님은 선량하기 이를 데 없으니 동행하겠다면 나도 대찬성이 오." "그럼, 이것으로써 허락한 것으로 믿겠네." "약왕은 나를 믿지 못하겠소?" 독수약왕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천만에, 만약 소영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누구의 말을 믿겠나?"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소영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소영은 몸을 벌떡 일으켜 두 팔을 쭉 펴서 기지개를 켰다. "우리 세 사람만 동행하는 것이오?" 독수약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중주이고는 견식이 매우 넓지. 그들을 함께 데리고 갈 수 있다 면 좋을 텐데....." 소영은 의외라는 듯, "우리 형제들까지 동행한다면 독수약왕 부녀는 우리들에게 세력 이 눌릴 텐데....." 독수약왕은 껄껄 웃고, "무공으로만 말한다면 소형 혼자서도 나를 필적할 만하오. 거기 에다 중주이고가 합세하면 당연히 이쪽이 꿀리게 되지." 소영은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중주이고가 우리와 함께 동행할지 어떨지는 나도 잘 모 르겠소. 먼저 그들과 상의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독수약왕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노부가 보기엔 그들 중주이고는 소형, 당신에게 보내는 존경이 두터워서 그들이 천년석균을 찾아서 동행할 것인지 아닌지는 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오. 그들 중주이고는 칼날같은 산이나 기름솥 이라도 그대와 동행한다면 결코 사양하지 않을 인물들이거든." 소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나 타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는 법, 내가 먼저 그들의 뜻 을 알아 보겠소. 만일 동행하지 않겠다면 나도 강요하진 않겠소." 독수약왕은 갑작스레, "노부가 동굴 입구에 펴 놓았던 극독을 제거해야 되겠군." 그는 훌쩍 동굴 입구로 나가서 펴 놓았던 극독을 제거하고서, 크 게 소리쳤다. "중주이고! 너희 용머리 형님이 부르신다." 이때 중주이고는 동굴 속의 사정이 어떻게 변했나 알지 못해 초 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약왕이 부르므로 몸을 날려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소영이 정신도 말짱하게 동굴 속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의외라는 듯 두 손을 맞잡고, "형님, 아무 탈도 없었습니까?" 소영은 빙그레 웃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상팔은 독수약왕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고 나서, "약왕은 마음을 돌렸소?" 독수약왕은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표정으로, "노부는 소형과 약속했소. 일종의 영약을 찾아서 딸애의 병을 치 료하기로..... 그런데 당신들 함께 가지 않겠소?" 상팔은 소영에게 눈을 돌리며, "형님, 독수약왕의 말이 사실인가요?" 독수약왕은 기분을 잡친 듯, "노부가 언제 거짓말을 했나?" 두구는 냉랭하게, "약왕, 당신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아직 자세히 듣지 못했잖아!" 독수약왕은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으나 중주이고를 노하게 해서는 불리할 것이라 생각하고 꾹 참았다. 소영은 이들의 말을 가로챘다. "독수약왕은 거짓말을 하지 않소. 나는 이미 독수약왕과 약속했 소. 두 달 기한으로 영약을 찾아 떠날 것을..... 만약 그 안에 찾 아내지 못한다면......" 두구는 냉랭하게, "약왕, 만일 두 달 안에 영약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래도 우리 형님의 피를 뽑아서 당신 딸의 목숨을 구하려고 할 것인가?" 독수약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노부가 보기에 그 때에는 소형의 피도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 되오." 상팔은 이해 못하겠다는 듯, "왜 그렇게 생각하오?" "딸애는 두 달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니까......" 두구가 냉소를 터뜨리며, "사실 따님은 십여 년 간 병석에 누워 있어 건강한 사람까지도 괴롭게 했는데, 죽어 버린다면 약왕도 부담을 덜게 되겠소이다그 려." 독수약왕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두구, 넌 내 딸애를 저주하는 거냐?" 상팔은 두구가 다시 악담으로 상대할까 봐서 두구를 앞질러 급히 말했다. "약왕, 화내지 마시오. 지금 무림에서 두제가 독설가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소. 조금만 참으면 되는 것이니 따님을 위해서 영약을 찾아내려면 약왕이 좀 참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독수약왕은 분을 억누르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두구는 여전히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냉랭한 음성으로, "우리 형님께서 응낙을 하셨으니 우리도 자연 따라가겠습니다." 소영은 황급하게, "두 분 형제께선 무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상팔은 하하 웃고, "형님을 따라가는 일이라면 하늘 꼭대기, 바다 끝이라도 같이 가 겠습니다." 끓는 물 속이나 불을 밟는 일도 오히려 즐거운 일이 될 것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소영은 깊이 탄식을 하고 나서, "두 분 형제께선 함께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반드시 동행하겠다면 구태여 막지는 않겠지만......" 독수약왕은 중주이고를 향하여, "노부가 듣기에 중주이고는 두 마리의 특종 맹견을 기른다고 하 던데, 같이 데리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상팔은, "한 마리를 데리고 가겠소." 독수약왕은 세 사람을 쭉 훑어보고, "그럼 언제 길을 떠날까?" 상팔은 소영을 바라보며, "형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모님께 배별한 후에 떠나는 것이 좋겠소. 이번에 떠나는 것도 역시 생사를 점칠 수 없는 길이니, 다시 두 분을 괴롭게 해 드릴 수는 없소." 독수약왕은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인사드릴 필요는 없는 것이니 지금 즉시 떠나는 것이 어떻 겠소?" 두구가 눈을 흘기며, "지금 이러한 형편에선 약왕도 우리 형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소." 소영은 상팔과 두구를 보며, "두 분 형제께서 기르는 맹견은 지금 어디에 있소?" 상팔은, "형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가서 맹견을 끌고 온 다음 에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소영은 독수약왕을 돌아 보며, "약왕, 천년석균이 자라고 있는 곳은 천인절벽이고, 꼭대기서부 터 한 줄기 폭포가 쏟아져 내려와서 절벽에 나 있는 석균을 가리고 있다오. 뿐만 아니라 사면이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여 있고, 아래는 천장이나 되는 골짜기요, 절벽 사이엔 이끼가 깔려 있으니 쉽사리 찾아낼 수 없을 것이오." 독수약왕은 냉담하게, "그처럼 험악한 곳이라면 소형은 어떻게 올라 갔고, 또 어떻게 내려올 수 있었소?" "말을 해도 믿기 어려울 것이오. 한 마리의 보기 드문 대붕(大 鵬)이 역시 그 석균을 따먹고 있었소. 그래서 나는 대붕의 등에 타 고 절벽을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오." "노부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군. 그러나 믿지 않을 수도 없겠 군." "지금 우리가 석균을 딸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는 것 같 소. 즉 절벽 위의 동굴에서 끈을 꼬아 내려뜨리는 방법이오. 그러 나......" "무엇이 그러나요. 이 방법 이외는 별무양책이오." 소영은 아니꼬운 듯, "약왕은 만약 내가 그 천년석균을 따는 것을 도와 주기 바란다면 그런 객기를 버리는 것이 좋을 텐데....." 독수약왕은 피식 웃고, "소형, 그대의 피를 쓰는 것이 딸애의 병엔 제일 좋소. 그러나 노부가 인물이 아까워서 대신 석균을 찾자고 했는데 고마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구료." 소영은 약왕의 말이 일리가 있으므로 머뭇머뭇 말을 못하다가 이 윽고, "약왕의 말은 틀리지 않소. 그러나 내가 그 때에는 전연 무예를 익히지도 않았었고, 더욱이 갑판에서 자다가 동굴로 끌려갔기 때문 에 거기로 가는 길도 수로도 기억 못하고 있다는 거요." 독수약왕이 말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천장이 되는 절벽은 삼협 사이에 있는 것 이오. 우리는 한 척의 빠른 배를 빌려서 강을 따라 올라가며, 갑판 에 서서 양변의 절벽을 조사하는 것이오. 그러다가 비슷한 곳을 찾 으면 절벽을 기어 올라가 동굴을 찾는 것이오." 소영은 끄덕끄덕, "그 방법밖엔 없을 것 같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던 두구가 돌연, "귀주의 사방 수십 리에는 백화산장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데 이렇게 우리가 떼지어 간다면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을 수 없을 거요." 독수약왕은 태연하게 말했다. "만일 백화산장 사람들이 우리를 방해한다면 노부가 스스로 상대 할 것이니 중주이고는 손을 쓸 필요가 없소." 두구가 비웃음을 띠고, "약왕, 호랑이 굴 앞에 버티고 앉아서 호랑이가 나와도 모르는 체하라니, 무슨 되지도 않는 말이오?" "노부가 반생이 지나는 동안 아직 딴 사람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소. 그러니 맘 턱 놓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 먹으시구료." 두구는 노기가 등등해서, "약왕, 너무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지 마시오." 두 사람이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상팔이 돌아왔다. 독수약왕은 상팔에게, "맹견을 데리고 왔소?" 상팔은 약왕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영에게, "맹견을 데리고 왔습니다. 형님께서 분부하시길 기다리고 있습니 다." 소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 갑시다." 소영은 굴을 빠져 나가서는 돌연 걸음을 멈추며, "부모님께서 이 골짜기에 계신데..... 사마형과 금란, 은란, 세 사람이 두 분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는 없을 것이오." 상팔은 미소를 짓고, "형님, 마음 푹 놓으시오. 향비가 이미 호걸들을 데리고 와서 두 분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모셔 갔습니다." "어느 곳으로?" 상팔은 독수약왕을 힐끗 바라보고 하하 웃으며, "남을 해치는 마음이 있어선 안 되고 또 방비하는 마음이 없어서 도 안 되는 것이오. 형님은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그 지방은 십분 안전하다니까요." 독수약왕은 비위가 상한 듯, 딸을 안아 일으켜서 성큼성큼 먼저 걸어 갔다. 상팔은 휘파람을 획 불었다. 풀덤불 속에서 검은 털의 커다란 개 가 불쑥 튀어나와서 상팔의 뒤를 쫓아왔다. 독수약왕은 앞서서 가다가 산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며, "노부가 백화산장의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띄면 반드시 심목풍에게 연락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 면 귀찮아질 것이오. 그러니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길 을 떠납시다." 두구가, "흥! 그러면 약왕은 심목풍을 매우 두려워하는군요?" "노부와 그는 형제를 맺은 사이인데 무엇이 두렵겠소?" 두구가 다시 말을 끄집어 내서 약왕을 노하게 만들려고 하는데 소영이 제지했다. 상팔은 가지고 있던 마른 음식을 분배했다. 독수약왕은 품에서 한 개의 옥병을 꺼냈다. 두 개의 환약을 쏟아 서 조심스럽게 자기 딸에게 먹였다. 소영 등은 약왕이 자기 딸에 대한 자애심이 극진한 것을 보고 가 만히 생각했다. '절세의 독기를 가지고 있는 저자가 만일 병든 딸이 없었다면, 갈고닦은 기술로 결코 심목풍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을 인물인데..' 이들은 초경이 될 때까지 앉아서 쉬었다. 다시 날이 어두워지자 길을 떠났다. 맹견의 예리한 취각은 백화 산장의 밀정들을 피해서 가도록 했다. 강변에 도착하니 이미 시각은 사경- 음산한 안개가 드리워지고, 밤은 칠흑같이 깜깜하였다. 강물은 가득 차서 출렁거렸으나 어선의 불빛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두구가 냉랭하게, "캄캄한 밤에 바람도 세고 어선의 불빛은 보이지 않으니 날이 밝 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군." 독수약왕은 일침을 놓듯, "우리가 일각을 지체하면 소영은 일각만큼의 살 기회를 잃는 것 이오." 상팔은 이들의 입씨름을 가로막고 슬쩍 화제를 돌렸다. "약왕은 물길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잘 모르오." "우리 문외한들이 배에 올라서 뱃사람들을 당해 낼 수 있을는지 의문이군." "만일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노부가 그들 몸에 독을 뿌리겠소." 상팔은 몸을 일으키며, "내가 가서 객선을 찾아 보겠소." 한 시간쯤 지나서 상팔이 급히 돌아왔다. "내가 삼협으로 가는 배 한 척을 찾아냈소. 빨리 가서 탑시다." 약왕은 딸을 안고서 상팔의 뒤를 따라 약 칠, 팔 리를 내려가니 과연 두 개의 돛을 단 범선 한 척이 강가에 정박하고 있었다. 배는 어둠 속에 묻힌 채 등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상팔은 먼저 갑판 위로 뛰어 올라가서 곧장 선실로 들어갔다. 소영, 두구, 약왕도 뒤따라 들어갔다. 두구가 부싯돌을 켜 보니 거기엔 칠, 팔 명이 가로 세로 누워 있 었다.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상팔은 웃으며, "이들은 모두 배의 귀신들이오. 내가 왔을 때 그들은 모두 선실 에 둘러 앉아서 도박을 하고 있었소. 내가 배를 띄우자고 했더니 한 마디로 거절하더군요. 그래 정세가 급박해서 이들의 혈도를 막 아 놓고 나서 형님을 부르러 간 것입니다." 소영은 탄식을 하고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약왕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상형의 재주에 우리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구료." 상팔은 코웃음을 치고, "흥! 그런 칭찬을 듣고 싶진 않소. 우리 형님을 위한 것이 아니 라면 어찌 내가 이런 묘책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소?"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뱃사람들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두구는 책상 위의 촛불에 불을 붙이고 오른손을 품 속에 넣어 한 줌의 황금과 두 알의 주옥을 책상 위에 꺼내 놓았다. 그리고는 냉 랭하게, "여러분은 배에서 생활하면서 이러한 보물은 구경하기도 어려웠 을 거요. 이것들을 드릴 테니 배를 저어 상류로 올라갑시다." 뱃사람들은 이 보물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가만히 생각해 봤 다. '이 주옥 한 개만 가지고도 배 세 척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희색이 만면했다. 사십 전후의 한 거한이 책상 위의 보물들을 바라보며, "강으로 나가시렵니까?" 상팔은 웃으며, "당신이 선주요?" "소인의 이름은 주순입니다. 여러분이 할 말씀이 있으시면 모두 해 보십시오." 상팔은 웃으며, "먼저 황금과 주옥을 넣으시고, 즉시 배를 띄웁시다." "달도 없고 바람은 거세며, 물살이 세고 파도가 높으니 배를 띄 운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배를 사시겠 다면 팔겠습니다." 이어 그는 고함을 치며 뱃사람들에게, "어이! 돛을 올리고 배를 띄워라." 선실 속의 수부들이 대답을 하고선 급히 밖으로 뛰어나왔다. 서 로 부르고 대답하며 작업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커다란 배가 강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소영은 독수약왕을 돌아 보며, "약왕, 따님을 침대에 눕혀 편안히 한잠 자게 하시오." 독수약왕은 소영을 한동안 바라보고 나서 그의 말대로 침대에 자 기 딸을 눕혔다. 이 돛이 두 개 달린 범선은 주로 삼협을 왕래하는 배로 수부들이 모두 경험이 풍부했고 물길의 형세를 잘 알고 있어서 밤에 풍랑이 거센 중에도 배를 평온하게 잘 몰았다. 소영은 갑판으로 걸어나갔다. 머리를 들어 동쪽 하늘을 바라 보 았다. 물고기 빛깔 같은 백색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미 해가 뜰 시각이었던 것이다. 주순은 급히 와서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계십시오. 풍세가 아직 꺼지지 않고, 풍랑이 여 전히 거세니 몸의 균형을 잡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소영은 미소를 짓고, "선주께선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지금 강 위에 해뜨 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영은 갑판에 서서 강바람을 쐬었다. 사방을 둘러 보며 지나간 일을 회상해 보았다. 그렇게 하여 경로를 찾아볼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동굴이 삼협 사이에 있다고 말한 것은 다만 추측이었을 뿐이다. 분명히 그 곳이라곤 확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범선은 강을 거슬러 올라 가서 곧장 삼협의 물길로 들어갔다. 소영은 파도의 물결이 꺼지기도 전에 다시 한 가닥의 풍랑이 일 어나는 것을 보고 서 있었다. 자기 마음도 파도와 같이 일정치 않 음을 생각했다. 이번 길의 성패를 터럭만큼도 파악할 수 없었으므 로 구슬픈 감정을 도저히 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오에 뱃사람들이 오찬을 가져 왔는데 술, 고기 등 아주 풍부한 식사였다. 독수약왕은 허약한 몸의 자기 딸을 생각하고, 장시간 동안 배를 타고 가는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 주순에게 물어봤다. "우리는 언제쯤 삼협으로 들어갈 수 있소?" "만약 천신(天神)이 순풍을 불어 주시면 해지기 전에 협도에 들 어갈 수 있을 거요. 그러나 풍랑이 맞지 않으면 내일 저녁 때라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수약왕은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노부는 두 팔에 천 근 이상의 신력을 가지고 있는데, 좀 빨리 달릴 수 있게 당신들을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구먼." "노인장께서 수고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실은 노부가 당신들의 일을 도와 주고 싶어서가 아니고 내 딸의 몸이 아주 약해서 너무 오랫동안 배를 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요." "그렇습니까?" "곤란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노인장의 역량이 비록 크다고 해도 자연의 위력에 대항할 수 없 는 법이오." "그러니 선실에서 한참 쉬십시오." 말을 마치고 급하게 뛰어나갔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뒤에 주순은 만면에 희색을 띠고 급히 들어 왔다. 기쁜 웃음을 지으며 독수약왕에게, "노인장, 마음을 놓아도 좋겠습니다. 풍세가 이미 바뀌었으니 우 리는 금일 밤에 삼협 입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수약왕은 무표정하게, "밤에는 계속 갈 수 없소?" "못 갑니다. 삼협의 물길은 도처에 급한 여울이 있고, 또 군데군 데 초석이 있습니다. 소인은 비록 그런 것을 환히 알고 있지만, 밤 에 배를 모는 모험은 감히 못하겠군요." 독수약왕은 화를 벌컥 내며, "만약 딸애가 장시간 배를 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면 너 희들 누구도 살 생각은 말아라." 주순은 어리벙벙해져서 초연히 밖으로 물러나갔다. 풍랑은 변해서 배는 순풍을 받아 태양이 지기 전에 입구에 도달 했다. 주순은 물 여울이 잔잔한 곳을 찾아 배를 정박시켰다. 독수약왕은 속으로는 불만이었지만, 모험을 하지 않으려는 뱃사 람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독수약왕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배가 차츰차츰 더 들어 갈수록 물길은 더욱 험악해졌으며 암초가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강 양측에 있는 산벽은 점점 가팔라졌다. 약왕과 소영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갑판에 서서 양쪽의 절벽을 살피고 있었다. 소영의 눈은 예리했지만 한 번 훑어 보고 동굴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낼 수는 없었다.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파악해 보려 해도 그 굴을 지나쳤는지 아직 오지 못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하루가 지나서 저녁 노을이 물들었다. 주순은 또 밤에 배를 모는 모험을 하기 싫어서 물살이 비교적 잔 잔한 곳을 찾아 배를 정박시켰다. 약왕은 마음이 몹시 급했으나 어찌할 수는 없었다. 소영은 말은 안했지만 마음은 약왕보다도 더 초조해서 뱃머리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졌다. 소영은 오 년 전 사람들에게 그 신비한 동굴로 끌려갈 때 산세를 보아 두었었지만 지금은 온 정신을 집중하여 찾아내려 해도 아무런 실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노젓는 소리가 났다. 소영은 깜짝 놀라서 휘둘러 보았다. 북처럼 생긴 조그만 배가 소 영이 타고 있는 배 가까이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배를 젓는 사람은 도롱이를 쓰고 있었다. 소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자는 오 년 전에 나를 데리고 갔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과 얼굴이 비슷한데.....' 또 북처럼 생긴 배는 그가 오 년 전에 타고 갔던 것과 비슷하다 는 생각이 언뜻 일어났다. 이 작은 배는 기이하게도 대단히 빨라서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벌써 가까이 왔다. 소영은 이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급히 그 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약왕은 배 안에서 딸을 돌보며 한편으론 소영의 태도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소영이 몸을 날려 배에서 떠나는 것을 보고는 몹시 당황 하여 후닥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소영이 작은 배를 향해서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뒤를 쫓 았다. 독수약왕의 이 돌연한 행동은 중주이고를 놀라게 했다. 그래 서 이들도 역시 갑판으로 뛰어나갔다. 이 때는 벌써 소영과 약왕은 삼, 사 장 떨어져 있는 작은 배로 날아가고 있었다. 소영이 그 배로 내려 설 즈음에 도롱이를 걸친 노인은 오른손을 뒤집어 일장의 공격을 퍼부었다. 매서운 장풍이 똑바로 공격해 나 왔다. 소영은 만약 이 장풍을 맞으면 강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없겠다 고 생각하고 진기를 일으켜 몸을 공중으로 삼 척을 띄워 장풍을 피 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가누고 배를 디디고 섰다. 그 노인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은 없었고 오히려 칭찬을 했다. "훌륭한 솜씨인걸." 이때 독수약왕이 배에 내려서며 냉랭하게 말했다. "소형, 무얼 하는 거요?" 소영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 노인을 향해서, "손을 멈추시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노인은 손을 멈추고, "무슨 말이냐?" "물살이 세어서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우선 배를 안전한 곳에 대 고 이야기합시다." 약왕은 오른손에 독을 움켜 쥐고 소영의 뒤에 서서 소영이 도망 갈 길을 찾는가 하고 호시탐탐 노려 보며 극독을 뿌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도롱이를 쓴 노인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소영의 얼굴을 주시 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는군.' "낯이 설지 않은데?" 소영은, "저는 악의가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배를 안정시키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인데요." "네가 악의가 있다고 해도 나는 두렵지 않아." 노인은 두 손으로 노를 저어 배를 잔잔한 곳에 대 놓고 물었다. "당신은 누구이며, 무슨 할 말이 있소?" 소영은 사방을 돌아 보며,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배에는 또 한 분이 있어야 할 텐 데요?" 노인은 깜짝 놀라며, "당신이 정말 누구인지 자세히 말해 보시오." "우리는 오 년 전에 한 번 만났습니다. 노인장과 함께 동반한 분 께서 강 속에 빠진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그 노인은 위아래로 소영을 훑어 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나는 조금도 기억이 없는데." 전에는 소영이 바싹 말랐고 바람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허약했 었는데 지금은 건강한 호걸이 되었으니 생각해 낼 리가 만무했다. 소영은 약왕과 노인을 바라보며, "그대와 그 분이 함께 저를 강 속에서 구해 내서 저를 높은 절벽 의 동굴 속으로 데리고 가 와병중인 노인을 뵙게 했는데 이래도 생 각이 안 나십니까?" 그 노인은 눈썹을 꿈틀꿈틀하더니, "맞소. 오 년 전의 그 애가 당신이라면 그럼 당신이 소영이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소영이오." 노인은 한숨을 훅 쉬고, "그럼 지금 강호에서 이름을 드날리는 소영이 바로 당신이오?" 소영은 짐짓, "지금 세상엔 같은 성명을 가진 자가 수없이 많은데 그 소영이란 자는 다른 사람일 것입니다." 노인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당신이 소영인지 아닌지 알고 싶지 않소. 그러나 딴 사람들을 인솔하고 왔으니 무슨 일이 있소?" 소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천년석균을 따러 왔다는 것을 이 자에게 누설할 필요는 없지.' "저는 옛땅을 다시 돌아보고도 싶고 병석에 누워 있던 노인에게 치사도 할겸 왔습니다." 노인은 냉랭히,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당신 혼자서도 충분할 것인데, 이렇게 사 람들을 동원한 것은....." 말을 마치고 갑판에 서 있는 중주이고를 바라 보았다. 소영은 당황해서, "제가 비록 친구들을 동행하고 왔지만 절대로 악의는 없습니다." 그 노인은 옆에 서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는 약왕 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노부는 독수약왕이오." 하며 돌연 손을 뻗쳐 대나무를 노인에게 내던졌다. 노인은 대나무를 받아 들고, "약왕, 당신이 독을 쓰는 재주는 천하에 제일이라는데 오늘 좀 시험해 보고 싶군." "당신은 벌써 노부의 독을 맞았소." 그 노인은 놀라는 빛을 감추지 못하며, "약왕은 나를 놀라게 할 생각이오?" 약왕은 피식 웃고, "노부의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운기를 조식해 시험해 보라구." 노인은 가만히 시험해 보았다. 과연 중독의 낌새를 눈치채고 안 색이 변해서, "과연 독수약왕답군요." 하더니 몸을 돌려 물 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소영은 급히, "멈추시오." 노인은 노해서 부르짖었다. "노부가 오 년 전에 물에 빠진 너를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렇게 독을 맞지는 않았을 거야." 독수약왕은 냉랭하게, "노부는 독을 뿌리는 재주가 천하 제일일 뿐 아니라 독이 발작하 지 않게 하는 재주도 있소. 당신이 맞은 독은 독성이 격렬할 뿐 아 니라 내가 지금까지 쓴 독 중에서 가장 독한 것이오. 독이 퍼지면 전신이 흐물흐물해져서 삼일 후면 죽어 버린다오." 그는 목소리를 낮춰서, "독을 맞은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물이야. 냉수가 닿으면 독성이 즉시 발작하오." 노인은 계속 불안에 떨면서, "물 속에 들어가면 독성이 발작한다니 믿지 못하겠는걸." 노인은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감히 물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 고 있었다. 약왕이 물체를 빌려 독을 전하는 능력이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 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약왕은 자신만만하게, "노부는 본래 거짓말을 하지 않소. 믿고 안 믿고는 마음대로 하 시오." 소영은 약왕을 바라보며 못마땅한 듯 말했다. 약왕은 웃으며, "만약 독을 쓰지 않았더라면 저 노인은 물 속으로 들어가 도망쳤 을 거요." "내가 약왕을 데리고 이곳에 온 것은 약을 찾자는 것이오. 그런 데 이렇게......" 약왕은 이 말을 듣고 무안해 하며, "노부는 미연에 화를 막아 내겠소." 말을 마치고 품 속에서 해독약 한 알을 꺼내서 도롱이를 쓴 노인 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해약을 먹으면 즉시 독이 풀릴 것이오." 노인은 손을 뻗쳐 약을 받아 단숨에 삼켜 버렸다. "눈을 감고 기운을 조절하시오." 노인은 독수약왕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눈을 감고는 기운을 조절 했다. 약왕은 전음술로 나지막하게 소영에게 말했다. "눈을 감고 있는 노인의 혈도를 막아 버릴까?" 소영은 차갑게 약왕을 쏘아봤다. 노인은 잠시 기운을 조절하고 나서 눈을 뜨고 소영과 약왕을 바 라 보며 입을 열려고 했다. 소영이 얼른, "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소?" "노부가 해독술을 썼고 또 해독약을 먹였으니 순식간에 풀렸을 거요." 도롱이를 쓴 노인이, "이미 풀린 듯하오." 소영이 말했다. "오 년 전 제가 구조를 받았을 때 존함을 묻지 않아서 모르고 있 는데 오늘 서로 통성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도롱이를 걸친 노인이 대답했다. "나는 송보라는 사람이오." 63. 독사의 소굴을 지나 소영은 그 도롱이를 걸친 노인과 손을 맞잡고 인사를 드린 후 입 을 열었다. "바로 송형이었군요." 송보도 마주 인사를 했다. "그렇습니다." 소영이 말을 이었다. "송형께서는 수고스럽겠지만 허락해 주실는지....." 송보가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나 본데......" 소영이 다시 말했다. "오 년 전 소제가 은혜를 입었을 때에 어떤 동굴로 운반되어 간 일이 있었지요. 그곳은 아주 험한 산길을 지난 곳이라고는 기억하 지만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가 않습니다. 물론 귀찮고 수고 스럽겠지만 그 곳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시면......" 이때 독수약왕이 말을 가로챘다. "저희들과 함께 가 주신다면 좋겠는데....." 소영이 말했다. "송형께서 직접 저희들과 함께 가 주신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혹시 곤란한 일이라도 있을지 모르니 억지로 저 희들 부탁만 내세울 수도 없군요." 송보는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공자께서는 성미가 유난한 분이시라 제가 한 번 여쭈어 보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자 분들이야 아무 악의도 없으니 그곳으로 찾아가는 것을 막고 싶지는 않지만 혹시 그 분이 나중에 화라도 내 시면......" 이때 독수약왕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감히 우리들에게 무례하게 한다면 우리들도 생각이 있습니 다." 소영은 얼른 독수약왕에게 눈짓을 하고 송보를 향해 공손한 말투 로 물었다. "송형께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송보가 대답했다. "만약 소형께서 아무 악의를 품지 않으셨다면 제게 한 가지 방법 이 있기는 합니다." 소영이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들어 보겠습니다." 송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하였다. "여러분께서 배 위에 올라가셔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제가 먼저 저희 공자께 알린 후 여러분들이 가신다 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 다." 독수약왕이 말하였다. "만약 당신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린 어디에 가서 당신을 찾지요?" 송보가 대답했다. "제가 한 번 대답한 이상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은 없을 것 입니다." 소영이 다시 물었다. "만약 송형의 공자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요?" 송보는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해 보지 않았습니다. 만약 저의 공자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제가 연락은 해 드리겠습니 다." 소영은 문득 그때 언제나 침상에 누워 있던 장작개비같이 바싹 마른 노인 생각이 났다. 그래서 다시 한 마디 물어 보았다. "병상에 누워 계시던 노인 한 분이 생각나는데 아직도 그 동굴 속에 계신지요?" 송보는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분은 바로 저의 주인이셨지요. 하지만 벌써 돌아가셨습니다." 소영은 홀로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오 년 전 내가 그 동굴 속으로 운반되었을 때 그 노인은 내게 잘 대해 주셨었는데..... 내가 가까스로 그 천 년 묵은 돌버섯을 찾아내서 그에게 조금 보내 주었을 때 그의 병세는 매우 좋아졌었 지..... 아, 그가 돌아가셨다니! 정말 뜻밖이군......"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송보가 나직이 말했다. "노주인께서 병으로 돌아가신 후 공자께서 그의 뒤를 이어 받았 습니다." 소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공자는 제가 오 년 전 우연히 만나 본 소년 같은데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송보가 말했다. "우리 집 노주인께선 아드님이 단지 한 분밖에 안 계셨습니다. 소형이 우연히 만났던 그 분은 틀림없이 우리 공자님이실 것입니 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가 만일 당신을 가게 한다 해도 당신 공자께서 당신을 붙잡 아 두고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면......" "글쎄요요.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지요. 이런 상태에서는 기회 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요." 소영이 그 말을 듣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더라도 우리는 불가불 방비할 대책을 생각 해야지요. 글쎄요, 여기 양쪽 모두 안전한 방법이 있기는 한데..." 소영은 계속해서, "우리가 당신 뒤를 살짝 따라가서 석동을 발견하면 어두운 곳에 숨어 있을 테니까, 그때 당신은 공자께서 우리를 접견하시겠다면 우리들을 큰 소리로 부르시오. 우리는 스스로 강호상의 규칙을 좇 아 귀부를 배견할 것이며, 만일 공자께서 우리를 접견하지 않으신 다면 구태여 송형께 수고를 끼칠 필요도 없이 한 시각 후에 스스로 그 석동으로 밀고 들어 가면 그만 아닙니까?" 송보가 그 말을 받았다. "글쎄요. 그건 좀 곤란한 이야기인데요." 이때 독수약왕이 가로채서 말했다. "그게 좋습니다. 우리들에겐 이길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적으니까 노부의 생각으로는 당신이 먼저 가서 반응이 없을 때 우리가 곧 밀 고 들어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송보는 속으로 혼자 탄식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한테서 무예를 배웠는지 알 수도 없고, 본래가 무슨 일에든지 철저하고 필사적이라 어떻게 처리하기도 곤 란한데 일신에 지닌 무공마저 뛰어나니..... 제기랄.' 이때 소영이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이런 귀중한 시간에 당신들은 그렇게 이야 기만 하고 있겠습니까?" 송보가 갑자기 이를 뿌드득 갈면서 소리쳤다. "좋소 그곳에 가서 내가 공자의 허락을 얻지 못한다면 당신들이 곧 석문으로 달려와 문을 두드리고 직접 공자를 찾아서....." 소영이 즉시 대꾸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송형께서는 지금 곧 수고를 좀 해 주십시 오." 독수약왕은 즉시 그의 딸을 품에 안고 일어서서 머리를 들어 깎 아 세운 듯한 절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이 조그만 배를 강안에 대시오." 송보는 긴 나무로 만든 노를 써서 배를 강안(江岸)에 대어 놓았 다. 소영은 중주이고, 독수약왕과 함께 강안으로 올라 곧장 그 깎 아 세운 듯한 절벽을 향하여 올라가기 시작했다. 절벽은 깎아지른 듯 험해서 군호들은 팔과 다리를 다 사용해야만 비로소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독수약왕은 가슴에 딸을 안고 있어 서 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소영은 그것을 보자 가늘고 긴 줄을 내려서 그의 한 팔의 힘을 도와 주었다. 이때 상팔은 송보의 몸 뒤로 바싹 따르며 그의 행동을 감시했다. 한 백 장쯤 올라갔을 때 비로소 한 줄기 좁은 길에 이르렀다. 송보는 머리를 돌려 줄곧 소영을 살펴 보며 말했다. "서쪽으로 백 장쯤 가면 이제 우리 공자께서 기거하시는 석동에 이릅니다. 여러분들께서 여기에 잠시 머물러 주셨으면 합니다만... ..." 소영이 재빨리 응수했다. "우리들은 석동 입구까지 가겠습니다. 뭐 거기나 여기나 마찬가 지 아닙니까?" 송보는 가벼이 탄식하며 한 마디 내뱉았다. "석동 가까이 십 장 안에는 매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찌 고생스런 위험을 감당하시려 하십니까?" 독수약왕이 그 말을 받았다. "만일 정말로 매복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기꺼이 그대를 따 라가겠소." 송보는 자기가 실언했음을 깨닫고 묵묵히 앞장을 서 걸어갔다. 구불구불한 작은 길을 걸을 때에는 딸을 안은 독수약왕을 도울 필요가 없었으므로 소영은 한 걸음 앞서서 곧 송보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송형께선 저 십 장안에 설치되어 있는 매복기관을 몇 군데서 조 종하는지 아시겠군요." 송보가 응수했다. "조종기관 같은 건 없습니다. 저 석동 속에 우리 공자와 계집종 둘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손을 나누어 기관 을 지키도록 하겠습니까?" 소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기관이 없으면 그럼 뭐가 있습니까?" "각종 독물이 있습니다." 소영은 이상히 생각하며 물었다. "온갖 종류의 독물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독사 독지네 등 별별 독충이 다 있습니다." 소영은 마음 속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독사, 독지네라! 뭐 까짓것들 두려울 것은 없지만 만일 이와 같 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습격해 온다면 이걸 어찌 막아 낸다?' 이때 상팔이 뒤에서 금산반을 꺼내 들고 말했다. "약왕! 뭘 그 따위 독사나 독지네 같은 걸 무서워하십니까?" 이때 독수약왕이 갑자기 크게 몇 발자국 옮겨 송보 뒤에 바짝 다 가 서며 말했다. "노부는 독사 따위는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송보가 머리를 돌려 힐끗 독수약왕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말했 다. "여러분께서는 곧 아실 것입니다. 이제 이곳에서 조금만 앞으로 나가더라도 독물을 퇴치할 방법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독수약왕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자! 먼저 가실까요?" 그러자 송보는 발걸음을 떼어 일 장쯤 앞으로 나가서는 갑자기 품 속에서 동령(銅鈴) 한 개를 꺼내서 흔들어 울리게 했다. 캄캄한 어둠 속을 뚫고 동령소리는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그때 상팔이 소영의 귀에다 소곤거렸다. "그가 동령을 사용해서 신속히 경보를 전하는군요. 우리 뛰어 올 라 그를 잡아 버립시다." 그러나 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우리들은 이미 적과 화합할 수 없으니 그까짓 경보쯤 울려 봤자 뭐, 급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독수약왕이 암암리에 독계를 풀며 나아가니 과연 독물들이 서로 범하는 걸 볼 수가 없었다. 송보가 약 십여 장쯤 나아간 후에 갑자기 멈추며 아래에다 대고 소리쳤다. "도착했다." 이 말을 들은 소영이 급히 몇 발자국 나아가 머리를 들어 바라 보니 단지 높고 큰 바위 옆에 조그만 문이 꼭 닫혀진 채로 덩그렇 게 놓여 있었다. 독수약왕이 소영을 향해 물었다. "소형이 옛날에 왔던 곳이 틀림없소?" 소영은 사방을 한 차례 휘둘러 보고 기억을 더듬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온 지가 아주 오래되었고 이렇게 어두우니 도무지 어딘 지 생각이 안 나는군요." 독수약왕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럼 먼저 돌문을 살핀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소영은 살짝 운기를 하여 공력을 모아 오른손을 뻗어 석문 위에 올려 놓고 낮은 목소리로 송보에게 말했다. "송형께서 문을 여시겠습니까, 아니면 밑에서 밀어 열까요?" "이 석문은 대단히 견고해서 그대가 천 근의 신력이 있다고는 하 지만 이 문을 열 수는 없을 것이오." 이 말을 듣고 소영은 내공을 운행하여 시험해 보니 과연 아주 견 고했다. 소영은 혼자 중얼거렸다. "여기서 이같이 밀어도 꼼짝 않으니 이 문을 부숴 버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겠군!" 이때 상팔이 산길 옆에서 큰 바위를 들고 왔다. "형님 빨리 엽시다." 하면서 그가 큰 바윗돌을 높이 들어 올려 돌문을 향해 똑바로 던 지려 했을 때 갑자기 송보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시오!" 이때 두구 또한 커다란 돌을 주워 높이 들어 올리니 송보의 날카 롭게 외치는 목소리가 또 들려 왔다. "이 돌문이 비록 이렇게 단단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힘으로 내치 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송보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대들이 만약 우리 공자께 적의가 없다면 청컨대 일을 하는데 있어 제일 좋은 방법을 강구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러자 소영이 즉시 말했다. "일은 이미 시위에 매겨진 화살과 같습니다. 비록 당신네 공자께 서 양해치 않을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이때 송보가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 손을 뻗어 돌문 옆 큰 바위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자 한바탕 윙욍거리는 소리가 들 려 오더니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점점 멀어져 갔다. 소영은 나직이 뇌까렸다. '아! 본래 돌을 굴려 소리를 전하는 방법을 써서 문을 여는 신호 로 사용하는구나.' 대략 밥 한 그릇 먹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그 돌 구르는 소리 는 사라져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돌문은 열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독수약왕이 맨 먼저 참지 못하고, 성이 잔뜩 오른 소리로 송보에 게 말했다. "너 이 고얀 놈, 노부를 희롱해! 내 너에게 뼈를 깎고 힘살을 당 기는 기독의 재미를 보여 주마." 송보가 냉랭히 대꾸했다. "석부는 아주 깊숙이 있어서 돌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면 곧 와서 문을 열어 줍니다." 말하는 사이에 갑자기 소리가 나며 돌문이 활짝 열렸다. 밤은 깊을 만큼 깊었고 굴 속은 더욱 어두운데 이 몇 사람들은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어서 한 장 이내는 능히 볼 수 있었다. 송보가 냉랭히 말했다. "돌문이 이미 열렸으니 모두들 들어가십시오." 소영이 갑자기 앞서 걸으며 말했다. "여기 길이 있소." 두구가 급히 두 걸음 앞으로 나와 소영의 앞쪽으로 서며 말한다. "소제가 길을 트지요." 하고 철필을 꺼내 들고 단단히 경계를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석동은 왼쪽으로 구부러졌다 오른쪽으로 꺾였다 하며 산 가운 데를 돌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들어갈수록 지세는 점점 평탄해졌 다. 한참을 들어가자 그들은 이 석동이 천연적인 동굴에 약간 손질 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상팔이 급히 송보의 뒤로 바싹 따르며 말했다. "송형! 만일 이 석동 속에서 무슨 변고가 일어난다면 우리 형제 는 먼저 손을 써 당신을 대할 것이오."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갑자기 불빛이 뿌옇게 비쳐 나왔다. 이 몇 사람들은 시력이 대단히 민감해서 이렇게 희미한 빛이라도 대낮과 같이 환히 볼 수 있었다. 두구는 빨리 걸음을 옮겨 한 모퉁이를 지나 고개를 들어 바라 보 았다. 그 모퉁이의 벽 아래 등 하나가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등불 은 밝게 빛나고 그 벽 위엔 '멈추시오'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상팔이 침울한 목소리로 송보를 향해 말했다. "송형, 이 등의 심지가 아직 다 타지 않은 걸 보니 방금 불을 붙 인 것이 틀림 없군요." 송보가 대꾸했다. "그렇소."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기 조금 전에 누군가가 여기에 불을 붙이 고 물러갔소?" "바로 그렇소." 이때 두구가 가로채며 말했다. "이 벽에 쓰인 글자는 경고하는 뜻이오?" 송보가 대꾸했다. "죽음에 빠지지 않도록 그대들에게 경고하는 뜻이오. 만일 멈추 지 않고 이 이상 더 앞으로 나간다면 곳곳에 위험이 있어 그대들을 징벌할 것이오." 상팔이 고개를 들어 힐끗 살핀 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높이가 불과 오 장밖에 안 되는데 이런 돌길에 매복기관을 숨겨 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듣고만 있던 두구가 말했다. "형님! 잠시 이곳에 머물러 계십시오. 소제가 먼저 살펴보지요." 소영이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주저 말고 전진합시다. 물러갈 수는 없소. 그들이 이 돌길에 무슨 매복을 해 놓았을지라도 그대로 밀고 나갑 시다." 말이 떨어지자, 걸려 있던 등불이 갑자기 두 번 흔들리더니 꺼져 버렸다. 두구가 차갑게 내뱉았다. "이런 쥐새끼같은 놈, 제까짓 게 무슨 영웅이라고!" 그러자 상팔이 돌연 몸을 날리며 한바탕 웃고 나서 말했다. "좋아! 불을 꺼 우리 중주이고를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건가!" 순간 보광이 한 번 번쩍이더니 어두운 돌길 위에 갑자기 파란 빛 이 비쳤다. 자세히 보니 상팔의 수중에 용의 눈알만큼 커다란 구슬 이 쥐어져 있었는데 청백색의 광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독수약왕이 기뻐 말했다. "야명주다!" 상팔이 대꾸했다. "그렇소. 중주이고는 천하 갑부이므로 이까짓 야명주 한 알쯤은 별로 대단한 것이 못 되오." 이때 듣고만 있던 송보가 냉랭히 그 말을 가로챘다. "단지 돌길이 대낮처럼 밝다고 좋아하지 마시오! 아마 그대들이 겹겹이 둘러싸인 매복을 통과하기란 쉽지 않을 거요!" 이때 두구가 갑자기 왼손을 뻗어 송보의 오른쪽 어깨를 움켜잡고 말했다. "흥! 똑똑히 기억해 둬. 우리들이 죽기 전에 얼마든지 그대를 죽 일 수 있다는 사실을!" 송보는 크게 웃고 대꾸했다. "나 송보는 죽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소. 더군다나 나는 돌길로 는 안 갈 테니까....." 이때 독수약왕이 오른손을 휘저어 송보의 어깨를 치고는 두구를 향해 말했다. "두형! 그를 놓아 주시오. 내가 이미 그의 양 어깨를 못 쓰게 해 놓았소." 구슬빛 속에 비치는 송보의 모습은 처참하리만큼 일그러졌고 얼 굴엔 땀이 비오듯 하여 방울져 아래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그는 이를 갈며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상팔은 암암리에 찬탄했다. '이 사람의 참는 힘은 정말 대단하구나. 정말 놀랄 일인데.' 이때 소영이 돌연 앞으로 나와서 송보 가까이 다가서며 두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쳐 혈도를 풀어 주며 말했다. "송형! 자....." 이 말에 송보는 어리둥절하였다. 머리를 돌려 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이러시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아무 원한도 없소. 그러므로 여기서 송형이 당하시는 고통을 차마 볼 수가 없군요." 송보가 차갑게 대꾸했다. "대장부로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거늘 이까짓 고통쯤이야 어찌 두려워하겠소." "어쨌든 우리는 그대와 아무런 원한도 없소. 또 우리가 여기에 온 것도 그대의 공자와 적대감이 있어서 온 게 아니고 단지 뒷산의 비폭(飛瀑)과 뛰어난 골짜기의 기이한 경물을 좀 구경하려는 생각 에서요." 송보가 말했다. "이렇게 이곳에 온 데 대해서 몇 가지 믿지 못할 것이 있소." 소영은 대답했다. "송형이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별 도리가 없군요. 그러나 송형은 지금 여기를 떠날 수 있소. 떠나시오!" 송보가 이상히 여기며 물었다. "정말로 가도 좋다는 이야기요?" "여기에서 무슨 헛소리를 하겠소?" 송보는 가만히 운기해 보고 과연 아무 이상이 없음을 알았다. 소영은 가벼이 한 차례 탄식하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 공자를 뵙거든 나를 대신해 그에게 한 번 청해 주시오." 송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그대들과 더불어 공자를 설복시키는 것밖에 도리가 없 소." 소영은 말했다.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기는 해도 그러면 곤란을 면하기는 어려 을 것이오." "그러나 제가 먼저 설명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 공자께서 응답을 하실는지 안하실는지 알 수가 없지 않소?" "만약 공자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 때에는 서로 극단을 달리게 될 것이오." 송보가 두 손을 마주잡고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그러면 여러분들, 조심하십시오." 말을 마치고 그는 큰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갔다. 소영은 맨 앞에서 송보의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보고는 비로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길을 찾읍시다. 약왕께선 가운데에 서서 가 주십시오." 독수약왕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소형! 노부는 생각하면 할수록 모르는 일이 하나 있소이다." 소영은 그가 뭘 물으려는지 알았지만 꾹 참고 짐짓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왜 그 송가 녀석을 놓아 주었소? 만일 그 사람이 아직 있다면 길을 가다가 무슨 위험이 있을 때 우리들 스스로 나설 필요가 없지 않소?" "모든 것은 이 소영이 시험해 보겠습니다. 약왕께서는 마음을 쓰 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고 소영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독수약왕은 그의 말대로 소영의 바로 뒤에서 걸었고 중주이고는 맨 마지막에 걸었다. 대략 사, 오 장을 걸어 사, 오 개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날 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멈추시오!" 소영은 그 말대로 발걸음을 멈추고 일반 규칙대로 산을 향해서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한 후 말했다. "불초는 소영이라 합니다. 귀동의 주인을 뵙고자 왔습니다." 그 여자는 소영이 객기로 그런 말을 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머뭇 거리다가 말했다. "그대들이 일이 있어서 뵙기를 청하신다면 동굴 밖에서 기다리실 일이지 이렇게 경솔히 침입해 왔으니 뵙기는 틀렸습니다." 독수약왕이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우리들이 침입해 들어 왔음을 알았으면 그만이지 웬 잔소리가 그렇게 많은가?" 그러자 분노에 찬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독수약왕이 대꾸했다. "노부는 독수약왕이다."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려 왔다. "듣지도 못하던 이름이로구나." 독수약왕은 마음 속으로 몹시 노했으나 화를 내 봐야 별 도리가 없음을 알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형! 일개 계집아이가 우리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겠소?" 소영은 대답했다. "여기서 먼저 예를 보인 다음......" 하고는 큰 소리로 갑작스레 물었다. "아가씨!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씀하십시오. 만일 귀동의 주인 이 보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곧장 밀고 들어갈 수밖에 도리가 없 소이다." 그 여자가 즉시 대꾸했다. "만일 당신들이 몰래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온다면 나는 즉시 매 복을 발동시키겠어요." 소영은 조용히 들으며 그 소리를 따라 그녀의 위치를 알아 내고 돌연 큰 소리로, "아가씨 조심하십시오." 하고는 몸을 날려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돌연 번쩍이는 섬광 속 에 검풍이 얼굴을 습격해 왔다. 독수약왕과 중주이고는 모두 오랫동안 대적해 온 경험이 있는지 라 퍼뜩 사태를 깨닫고 단단히 경계를 하면서 앞으로 돌진해 나아 갔다. 소영은 오른손을 흔들어 잠력을 밀어내 습격해 들어오는 검세를 저지시키며 왼손으로는 지풍을 퉁겨 즉시 반격해 들어갔다. 그때 교성이 한 번 들리더니 그 여자는 갑자기 검을 거두고 물러 나서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소영은 위험을 무릅쓰고 곧바로 나아가 그 여자를 쫓았다. 독수약왕과 중주이고도 동시에 지극히 빠른 신법으로 소영의 뒤 를 쫓아 바짝 따랐다. 그러자 큰 울림소리와 함께 굴 꼭대기에서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질풍같이 굴러 떨어졌다. 소영이 손을 뻗어 절륜한 공격을 가하자 급한 나머지 그 여자가 기관을 발동시켰던 것이다. 독수약왕과 중주이고는 비록 빠른 신법을 가졌으나, 그 구르는 바위의 위세에 다치고 말 사태에 이르렀다. 이때 금산반 상팔이 굴러 오던 커다란 돌멩이를 힐끗 보다가 돌 길 옆 굽어진 틈을 발견하여 모두 그쪽으로 피했다. 그들이 막 그곳에 이르렀을 때 구르던 돌은 불과 반 척의 간격으 로 두구를 눌러 버릴 뻔했다. 독수약왕은 급히 말했다. "상형, 청컨대 야명주로 길을 좀 밝혀 주시오. 이 새를 따라 급 히 추적합시다. 그들이 이미 기관을 발동했으니 우리도 이 이상 객 기를 부릴 필요가 없으니까요." 상팔이 몸을 옆으로 돌려 소영 앞에 이르러 말했다. "약왕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소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형, 너무 그리 걱정하지 마시오." 상팔이 말했다. "형님께 너무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서....." 여운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돌연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이상한 냄새가 얼굴로 끼쳐 왔다. 구슬의 빛으로 살펴보니 조그만 뱀이 마치 쏘아 놓은 화살처럼 재빠르게 덮쳐 왔다. 상팔은 걸음을 멈추고 손 안의 금산반을 휘두르며 나갔다. 그때 번쩍 하는 백광이 일며 어느 틈인지 소영의 장검이 이르러 싹 하는 소리와 함께 덮쳐오는 뱀을 잘라 버렸다. 이때 땅 속에서 사악사악 하는 소리와 함께 기괴한 독사와 독물 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석동은 불과 수 척밖에 되지 않으 므로 이렇게 밀려 오는 뱀을 피할 길은 도저히 없었다. 본시 상팔은 보고 배운 것이 많고 지혜가 많았지만 이렇게 좁다 란 길에서 이 뱀떼를 만나자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맸다. 소영이 벽공장력을 쏟아 땅을 휩쓰는 일격을 가하자 앞에 오던 독사들이 강맹한 장력을 받고 당장에 죽어 버렸다. 그러나 독사는 더욱 많이 몰려 왔고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이때 독수약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물러나십시오." 하고는 손을 들어 약가루를 한 봉 꺼내 들었다. 상팔과 소영은 그가 기독을 시전하여 독사를 제압시키려는 줄 알 고 걸음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독수약왕이 계속해서 오른손을 흔들고 이어 시간이 좀 지나자 봉 우리로 된 삼 척의 둥치 같은 독지대가 이루어졌다. 뱀 무리가 그 앞으로 다가 오더니 과연 멈춰선 채 내려 오지를 못하고 또한 감히 기어 오르지도 못한 채 몰려 들기만 했다. 소영은 가만히 이 뱀무리를 처치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기이한 피리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 피리 소리가 급해질 때마다 독사무리들은 뛰어 올랐지만 자리에 서 우글거릴 뿐 넘지를 못했다. 대개 이러한 종류의 극독은 뱀무리 와는 상극이라 이 독사떼는 감히 넘어 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상팔은 그 독사들이 자꾸만 끊이지 않고 모여 들고, 더구나 괴기 한 모양의 독사들이 풍기는 냄새가 지독한 탓으로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약왕! 독사들이 자꾸만 몰려 드는데 이렇게 밑에서 대치하고만 있는 건 좋은 벙법이 아니오. 약왕께서는 뱀을 막는 방법을 아시니 쫓는 방법도 아시겠군요?" "지금 단지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만.... 쓸 수 있을는지 모 르겠습니다." 상팔이 얼른 말했다. "쓰고 못 쓰고는 상관없습니다. 먼저 말씀이나 좀 해 주십시오." 독수약왕이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독사들이 비칠거 리며 한쪽으로 피해 갔다. 상팔은 매우 이상하다고 느끼고 손을 높이 들어 구슬로 비춰 보 았다. 온몸에 누런 빛을 띠고 길이는 일 장이나 되며 머리엔 붉은 관이 달린 어린애 팔뚝만한 뱀이 급히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런 뱀은 대개 뱀 중의 왕으로 머리를 들고 한 번 나타나면 뱀무리들 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한쪽으로 물러나기 마련이었다. 그 붉은 관을 쓴 뱀 왕은 마침내 독분이 뿌려진 곳에 이르자 갑 자기 멈추어 서서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살피며 마치 그곳을 뛰어 넘어 올 듯 하였다. 상팔이 급히 말했다. "저 머리에 붉은 관이 달린 뱀은 마치 뱀 가운데 왕인 것 같습니 다. 이놈을 때려 잡으면 저 뱀무리들이 놀라 물러갈 것 같은데요." 소영은 우글거리는 독사떼를 바라 보며 나직이 탄식했다. '한 달 전 백화산장에서 고생을 할 때도 뱀무리에 혼이 났는데, 오늘 밤 이놈들은 아주 보기가 힘든 기괴한 놈들 뿐이구나. 저 붉 은 관을 쓴 놈은 더욱 흉악해 보이니 저걸 때려 잡으면 혹시 독사 떼가 놀라서 도망갈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런데 만약 일격에 거 꾸러뜨리지 못해 이 놈이 화가 나서 저 독사들을 뛰어 넘도록 시킨 다면 뒤로 빠질 구멍도 없고 이거 난처하게 되었는데.....' 마음 속에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살짝 운기를 하고 막 수라지력 을 펼쳐 내려 하는데 갑자기 독수약왕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 다. "야! 거 참 귀한 뱀인데." 상팔이 물었다. "약왕께선 저 이상한 뱀을 칭찬하시는 것이오?" "그렇소. 만일 이 뱀의 생혈을 마시면, 최소한 십 년 공력이 증 가합니다." 하더니 갑자기 한바탕 웃고 말을 계속했다. "만일 저 뒷산 폭포수 아래 정말 천 년 묵은 돌버섯이 있어 딸아 이의 병이 치료되고 다시 이 뱀의 피를 빌리면 설사 딸아이가 허약 한 몸일지라도 환골탈태하여 당금 천하의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대 로 할 수 있는 신력에 견줄 만할 텐데......" 이때 붉은 관을 쓴 뱀이 크게 울부짖자, 갑자기 조용하던 뱀무리 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홀연히 삼각형의 대가리를 가진 괴사(怪蛇) 가 독약을 뿌린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일어나질 못하고 그 속에서 꼼짝도 안했다. 이어 연달아 독사 무리가 그 속으로 뛰어 들었지만 독수약왕이 무슨 약을 썼는지 뱀 몸에 독분이 닿기만 하면 즉시 뱀들은 뻗어 버렸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 홍관사왕 앞에서 독사의 무리가 죽음을 두 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 아 죽은 독사들로 꽉 메워져 마침내 넘을 수 있는 뱀다리가 완성되 었다. 독수약왕은 오른손을 휘저어 또 다시 약분을 뿌리며 전음술을 써 서 말했다. "노부의 독분은 이제 모두 써 버렸소이다. 이후에는 다시 독사를 대할 도리가 없소이다. 그러나 지금 유일한 계책은 모두 저 홍관사 왕의 몸뚱이 하나에 달려 있소." 이때 홍관사왕은 독사들의 주검으로 만들어진 다리 위를 곧장 넘 어 오고 있었고, 그 뒤로 수많은 독사떼들이 따랐다. 상팔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약왕! 저 사왕을 대할 좋은 방법이 있소?" 독수약왕이 대답했다. "만일 이 뱀 한 마리뿐이라면 강경책이 있지만 지금 독사무리가 따라 오는 데다 그것들은 모두 기독을 가진 것들이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소이다." 듣고 있던 소영은 오른손을 뻗어 지풍을 쏜살같이 쏘아 보냈다. 그가 퉁긴 지풍은 매우 빨라 곧장 사왕의 머리에 있는 홍관을 습격 해 들어 갔다. 홍관사왕은 깜짝 놀라는 것 같더니 재빨리 피해 버렸다. 지풍이 도달한 곳은 그 홍관사왕 뒤에 있던 두 마리의 괴상한 독사가 있던 곳이라 그 두 마리만이 죽어 버렸다. 소영은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 이 뱀이 이룰 수도 없는 무공을 안단 말인가?" 독수약왕이 말했다. "뱀은 무공을 할 수가 없소이다. 그러나 이놈은 이미 신령스런 경지에 이른 것 같소." 다행히 독수약왕이 또 하나의 독구(毒區)를 만들어서 홍관사왕과 그 놈을 따르는 독사들을 또 다시 저지시킬 수 있었다. 소영은 중얼거렸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는 한 마디 내뱉고 장검을 뽑아 손에 들고 말했다. "먼저 이 사왕을 베어 버린 다음에 다른 독사들을 대할 방법을 생각합시다." 독수약왕이 즉시 대답했다. "우리들은 아직 이 독사들을 다룰 방법이 없소이다. 그러니 저 홍관사왕이 성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급한 일이오." 소영이 말했다. "내가 단칼에 베어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노부가 아는 바로는 이 뱀은 가죽과 비늘이 매우 견고해서 이미 칼이나 창같은 건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아니 그럴수가!" 독수약왕이 말했다. "소형이 믿기 곤란하거든 그럼 중주이고에게 물어 보시오." 소영은 눈을 돌려 상팔의 얼굴을 바라 보며 물었다. "정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상팔이 대답했다. "세간에는 확실히 일종의 기이한 뱀가죽이 있어 도검을 두려워하 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홍관사왕도 그러한지는 소제도 잘 모르겠 습니다." 독수약왕이 대답했다. "물론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상팔이 말했다. "정말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겠군요. 만일 독사떼가 또 한 독구마저 넘어 온다면 그 때에는 도리가 없지 않소." 독수약왕이 말했다. "노부에게는 이 독사들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때 두구가 차갑게 한 마디 했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이고 이 일이 무슨 일인데 당신은 아직도 사사로운 마음을 품고 있는 거요?" "노부는 그래도 먼저 명백히 밝힌 다음에 하겠소." 상팔이 물었다. "무슨 말이오?" "만일 노부가 저 홍관사왕을 잡으면 그것은 내 것이 되는 거요." 소영이 말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아직도 따지십니까? 만일 당신이 능히 뱀들을 물리친다면 이 눈앞의 모든 것은 당신이 다 가지시오." "노부는 이 때문에 일을 처리하기 전에 부득불 명백히 해 두는 것이오." 두구가 냉소하며 말했다.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온 것은 당신의 따님을 위한 약 을 구하려는 것이고 또한 이 석동을 나가지 않는 것도 이렇게 위험 을 당한 것도 모두 당신의 따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독수약왕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지금 그대들이 이 석동을 나가려 해도 힘만으로는 마음대로 안 됩니다." 하더니 갑자기 한 손을 휘두르자 한 줄기 경기가 암암리에 뻗쳐 곧바로 살며시 다가선 홍관사왕을 향해 덮쳐 갔다. 그 홍관사왕은 독수약왕의 벽공장력 속에서 단지 몸을 두 번 뒤 집었다. 그러더니 성난 모습으로 노려 보면서 슬금슬금 다가서며 혀를 날름거렸다. 독수약왕이 오른손을 한 번 휘두르자 환약 한 알이 날아가 홍관 사왕의 입 속으로 들어 갔다. 그러자 그놈은 갑자기 몸부림을 치며 뒤에 있는 독사무리를 꼬리로 치며 몸을 세워 그들을 물어 죽여 수 많은 크고 작은 독사를 삼켜 버렸다. 독사들은 이 홍관사왕에게 감 히 항거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며 뒤로 꽁무니를 뺐다. 소영은 그들이 서로 죽이는 모양을 보며 속으로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이때 독사를 조종하는 피리 소리가 다시 들려 오기 시작했다. 홍관사왕의 발작으로 뱀무리가 피리의 지시를 받지 못하기 때문 이었다. 독사무리는 오는 것이 빨랐던만큼 갈 때도 매우 신속히 사 라져 단지 그 홍관사왕만 빼 놓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때 홍관사왕은 방금 전의 넘치던 기운은 이미 사라진 듯 조용 히 땅 위에 엎드려 있었다. 독수약왕은 약효가 이미 나타났음을 살피고 품 속에서 꺼낸 자루 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홍관사왕을 집었다. 홍관사왕은 마치 겨울잠을 자듯 움직이지 않았고 독수약왕이 자 루 속으로 집어 넣을 때까지도 가만히 있었다. 상팔은 독수약왕이 아주 기쁜 마음으로 홍관사왕을 거두어 들이 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이 홍관사왕을 보니 아주 크게 쓸모가 있으리라.....'라고 생각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약왕! 축하합니다!" 독수약왕이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좋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씀...." 그는 마음 속의 일을 말하지 않으려는 듯했으나 마침내 입을 열 었다. "노부가 어떤 기서에서 이 홍관사왕에 대해 본 적이 있었는데, 오늘 우연히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정말 생각 못했습니다." 두구가 말했다. "약왕의 말투를 들으니 이 홍관사왕은 정말 진기한 물건같군요." "천고의 기이한 보물이지요. 내 딸아이에게 큰 도움을 줄 것입니 다." 소영이 말했다. "그럼 영애의 병을 고칠 수 있겠군요?" 독수약왕은 눈을 한참 고정시켜 생각하더니 머리를 흔들며 말했 다. "고치지 못합니다. 천 년 묵은 돌버섯을 구하지 못하면....." 그는 더 이상 홍관사왕에 대해 말하기를 바라지 않는 듯 자루를 묶어 품에 간직하고 앞장서서 뿌렸던 극독을 제거하며 나아갔다. 소영이 몸을 돌려 앞서 가려 하자 상팔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낮 게 말했다. "약왕이 앞서 가도록 하십시오. 형님이 먼저 가시는 거나 마찬가 지입니다." 또 다시 몇 번인가 모퉁이를 돌자 이윽고 길이 넓어졌다. 소영은 지금까지 온 길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미 수십 장을 깊숙이 들어 왔으니 마땅히 그 병든 노인의 석실이 있는 곳까지 왔 어야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독수약왕의 고함이 들려 왔다. "이 쥐새끼같은 놈! 감히 네가...." 하더니 오른손을 휘둘러 일장을 밀어 냈다. 두 차례 암경이 부딪 치는 소리와 격한 바람 소리가 일어나며 고요한 밤 좁은 길을 휩쓸 었다. 이때 한 마디 냉랭한 소리가 들려 왔다. "너희들이 아무 까닭도 없이 나의 석부를 범함은 무슨 마음에서 냐?" 독수약왕이 막 대답하려 할때 소영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우리들은 한 아가씨의 생명을 구하려고 이곳에 와 약물 한 가지 를 얻고자 하던 차에 마침 송형을 만났습니다. 송형께서 말씀을 드 리셨을 줄로 생각하는데요." 그러자 그 차가운 목소리가 또 들려 왔다. "넌 누구냐?" "불초는 소영이라 합니다. 이미 송형에게서 들으셨겠지만 오 년 전 이곳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넌 명이 긴 녀석이구나! 오 년 전 그 절벽에서 떨어져 죽지 않 았느냐?" 소영은 심중으로 섬뜩했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대는 오 년 전 이 소영과 한 번 만난 인연이 있는 소주인이신 지요?" 냉랭한 목소리가 받았다. "네가 그걸 기억해 내다니....." 말이 점점 작아지더니 갑자기 날카롭게 소리쳤다. "풀을 벨 때 뿌리를 자르지 않았더니 봄바람에 다시 살아났구나. 너는 옛날에 이미 죽은 목숨인데.... 오늘 석부로 사람들을 끌고 올 줄은 미처 몰랐구나." "야! 쓸데없이 지껄이지 마라." "넌 누구냐?" 두구가 대답했다. "두구......." 상팔이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헛된 이름만 알려진 중주이고다." 이때 독수약왕도 한 마디 했다. "노부는 독수약왕이다. 나는 죽은 목숨도 살리지만 독으로 생명 을 뺏을 수도 있지." "아! 무림 중에 쟁쟁하게 날리시는 분들이구먼." 상팔이 말했다. "좋아! 좋아! 우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차가운 목소리가 갑자기 크게 울렸다. "그 따위 미치광이들은 두렵지 않다." 64. 석균의 절벽 두구가 성이 나서 소리쳤다. "녀석 입만 살았구나! 야! 이 꼬마야, 먼저 나하고 삼백 합을 겨 루어 보자." 그 차가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좋다. 내가 너희들 몇이 두려워 못 나타나는 줄 아는구나." 말이 떨어지자 얼핏 십 장 밖 구부러진 모퉁이에서 한 사람의 그 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상팔이 손을 들어 야명주를 비춰 보니 수염 하나 없는 흰 얼굴에 청삼을 두른 사람이었다. 이때 독수약왕이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마악 극독을 뿌리려 했 다. 소영이 그를 붙잡고 말했다. "잠시 기다려 봅시다." 그 청삼인은 육칠 척 앞에 멈춰 서서 냉랭히 말했다. "그대들은 이곳의 지형에 생소하니 패할지라도 마음이 편치 않을 테지요." 하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양장을 서로 부딪쳤다. 그러자 불빛이 번쩍였다. 이때 두 명의 비단 등을 받쳐 든 청의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 다. 그들은 가벼운 차림새였고 등에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있었 다. 돌길 안이 갑자기 밝아지자 모든 경물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두 명의 소녀는 청삼인의 곁으로 다가가 그 옆에 비단 등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천천히 걸어 갔다. 독수약왕이 고개를 돌려 소영을 힐끗 한 번 바라 보며 말했다. "그대는 참을성이 많아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나, 노부는 참을성 이 없어 그럴 수가 없소." 하면서 갑자기 발을 들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청 삼인이 오른손을 휘두르며, "물러가라!" 하고 소리치자 한 줄기 은광이 쏜살같이 뻗어 나왔다. 독수약왕은 재빨리 비켜서며 약간 겁먹은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좋은 공력이다." 이때 소영이 오른손을 뒤집는 듯하더니 번개같이 장검을 뽑아 휘 둘렀다. 한바탕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 개의 조그마한 은침이 검광을 번쩍이며 모두 땅에 떨어졌다. 은침이 땅에 떨어지 자 어느 틈엔지 소영의 칼도 제자리에 꽂혀졌다. 독수약왕은 머리를 돌려 소영을 바라 보고 마음 속으로 칭찬을 금치 못했다. 소영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영존의 옛마음은 미루어 두고라도 그 분은 나 소영의 목숨을 구 해 주셨는데....." 청삼인이 대꾸했다. "선부께선 인자함 때문에 그대를 붙잡아 놓지 않아 오늘의 화근 을 만드셨소." "우리는 아무런 악의도 없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형께서 파격 적으로 허락해 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오래야 반나절이고 잘되면 반시간 이면 되니, 일이 끝나면 더 이상 머물지 않고 곧 돌아가겠 습니다." 청삼인은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귀하의 뛰어난 검법으로 내가 허락하도록 해 보시오." 소영은 조용히 말했다. "나에겐 그런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청삼인이 말했다. "흥! 나의 호승지심을 일으키게 하려고." 이때 옆에 있던 두구가 성이 나서 소리쳤다. "우리 큰형님께서 인의로 대하시는 게 너 따위가 두려워 그러시 는 줄 아느냐?" 상팔도 한 마디 했다. "축하술을 안 마시고 벌주를 마시려 하는구나! 어리석은 놈!" 청삼인이 머리를 젖히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소영의 검법을 보니 혹 나와 겨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희 둘 은 주둥이로만 나불거리는 것 같구나." 두구가 이 소리를 듣고 소영을 넘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좋다! 이 두구가 먼저 너의 가르침을 받아 보지!" 말이 떨어지자 어느 틈엔지 왼손엔 은백 손수건을 오른손엔 철필 을 꺼내 들었다. 그가 마악 몸을 날리려 할때 소영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두형, 돌아오시오!" 두구의 표정엔 격분이 서렸으나 소영의 말을 어기지 못하고 무기 를 모은 후에 천천히 돌아 왔다. 소영은 천천히 세 걸음을 내딛고 말했다. "손을 쓰지 않고 우리가 반나절을 머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 을까요?" "다른 좋은 방법은 없소." 소영이 얼른 말했다. "그럼 꼭 손을 써야만 합니까?" 청삼인은 낮게 신음을 하더니 이윽고 말을 이었다. "방법이 꼭 하나 있소이다. 허나 그대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말하 지 않는 것만 못하오." 소영은 즉시 대꾸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면, 결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청삼인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소영을 노려보며 한참 만에 입을 열 었다. "그대는 악소채를 아는지....." 소영은 갑자기 한 대 얻어 맞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그렇습니다. 한데 그 악 아가씨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청삼인의 얼굴에 한 가닥 비웃음이 스쳐 갔다. "그대는 그녀를 몹시 보고 싶어 하는군." 소영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형께서 밝은 길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만....." 독수약왕이 갑자기 끼여 들었다. "소형! 우리는 약을 구하는 일이 급하오. 노부 앞에서 한 약속을 잊지 말라!" 소영이 천천히 얼굴을 돌리자 별같은 눈에서 신광이 쏟아지며 곧 바로 독수약왕의 얼굴에 박혔다. 한참이 지난 다음 비로소 천천히 말했다. "약왕의 말씀이 맞소이다." 하고 다시 눈을 돌려 청삼인을 바라 보며 말을 이었다. "악 아가씨의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우리가 약물 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면......" 청삼인이 어깨를 세우며 물었다. "무슨 약물이지요?" 소영이 말했다. "이 석부 뒤쪽에 폭포가 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하려는 약물은 바로 폭포수 아래 절벽 사이에 있습니 다. 다만 그대가 우리를 이 석부에 한시간 동안만 머물 수 있게 해 주시면 됩니다만....." 청삼인이 물었다. "그 돌벽 사이에 무슨 약물이 있단 말이오?" 독수약왕이 가로채서 말했다. "그대는 너무 지나치게 묻고 있다고 생각치 않는가?" 청삼인은 나직이 신음하며 말했다. "좋소! 이곳의 예를 깨뜨리고 허락하겠소. 그러나 한시간을 넘겨 선 안 되오." 소영이 말했다. "충분합니다." 청삼인이 또 손을 들어 세 번을 두드리자, 두 명의 청의소녀가 급히 달려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공자, 무슨 분부십니까?" "등을 들고 저 분들을 폭포 아래까지 모셔다 드려라." 두 청의소녀는 대답을 마치자 각각 비단등을 하나씩 들고 앞서 가며 말했다. "소비들이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청삼인은 돌연 앞서 가더니 모퉁이를 돌자 사라져 버렸다. 상팔이 낮은 목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큰형님! 좀 이상한데요. 저 꼬마가 형님이 악 아가씨를 안다니 까 갑자기 마음이 변해 약을 캘 수 있도록 해 주니 말입니다. 하지 만 다른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이때 독수약왕이 말했다. "조심할 필요 없소. 노부가 이미 그에게 독을 뿌렸으니 한시간 내에 반드시 극독이 발작할 거요." 소영이 눈을 돌려 독수약왕을 바라 보며 물었다. "정말이오?" 독수약왕이 대답했다. "노부는 거짓말이라고는 한 일이 없소." 그때 듣고만 있던 두 시비가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독수약왕은 성난 소리로 외쳤다. "이 못된 것들아! 뭐가 좋아 그렇게 웃는 거냐?" 그러자 왼쪽의 시비가 갑자기 얼굴을 돌려 독수약왕을 노려 보며 말했다. "이 바보같은 영감쟁이야! 말조심해! 우리가 비록 신분은 노비지 만 우리 공자님 이외의 다른 사람 말은 듣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 해!" 독수약왕의 양눈에 살기가 번쩍였으나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그르친다는 생각이 들고, 또 딸아이의 생각에 묵묵히 노기를 누르고 걸었다. 두구는 독수약왕의 모습을 바라 보며 생각을 굴렸다. '이 독수약왕이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렇게 참아 내다니...." 소영은 독수약왕이 몰래 독을 가한 사실에 몹시 불만을 느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두 시비를 향해 말했다. "두 분 중 한 분만 우리를 안내하시고 다른 한 분은 곧 공자에게 달려가 그에게 운기를 해 중독되었는지 여부를 살피라 하시오." "그럴 필요 없이 그에게 이렇게 알려라. 우리들을 선의로 맞아 약물을 구해 이 석부를 나갈 때 공손히 전송한다면, 노부가 그때 해독약을 주겠다고." 오른쪽에 있던 시비가 참을 수 없었던지 갑자기 소리쳤다. "우리 공자께선 종일 독물로 식사를 하시는데 어찌 그까짓 독에 상하시겠소? 정말 웃기지 마시오." 소영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당신 공자께서 종일 독물만 잡수신다구요?" 왼쪽 시비가 말했다. "그래요! 공자뿐만 아니라 우리도 매일 서너 마리의 독사를 먹는 걸요!" 소영은 전신에 차가운 기운이 끼침을 느쪘다. 그는 속으로 나직 이 중얼거렸다. "이들은 이렇게 청수한데 매일 독사를 먹을 줄이야......" 상팔이 가벼이 기침을 하며 말했다. "뱀탕과 오독연은 모두 맛있는 요리지......" "그런 요리가 아녜요. 그렇다면 못 먹을 사람이 없지요." 상팔이 물었다. "그러면 아가씨는 어떻게 먹지요?" "손으로 잡아 그냥도 먹고 구워도 먹고 삶아서 먹기도 하죠." 그러자 오른쪽 시비가 한 마디 했다. "당신은 우리 무산의 오독연이 천하 제일인 줄 모르시는군요?" 소영이 말했다. "두 분 아가씨는 모두 날로 독사를 먹나요?" 두 시비가 똑같이 대답했다. "그게 뭐 그리 이상하지요? 당신이 믿지 못하시겠다면 당장 먹어 보일 수도 있어요." 소영은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볼 필요 없습니다. 두 분 아가씨를 믿지요." 상팔이 물었다. "두 분 아가씨는 댁의 공자를 모신 지가 오래되었습니까?" 두 시비는 똑같이 낮게 신음하더니 왼쪽의 시비가 말했다. "삼 년밖에 안 됐어요." 소영이 물었다. "삼 년 전에도 아가씨들은 뱀을 날로 먹었나요?" 그러자 왼쪽의 시비가 대답했다. "아니요. 뱀을 날로 먹기는 이곳에 와서부터예요. 공자께서 가르 쳐 주셔서 비로소 먹을 줄 안 걸요." 소영은 가벼이 탄식하며 말했다. "일반 가정의 계집아이들은 조그만 큰 벌레를 보아도 놀라고 땀 을 뒤집어 쓰는데 두 분 아가씨들은 독사도 날로 먹고, 호기가 이 렇듯 높으시니 정말 탄복하겠습니다." 오른쪽에 있던 시비가 얼른 말을 받았다.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독사를 보기만 해도 다른 사람들 처럼 두려워했는데, 한 번 먹은 후부터는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말하는 사이에 또 한 모퉁이를 돌았다. 그때 오른쪽 벽에서 은은히 밝은 빛이 흘러 들어 왔다. 소영은 마음이 뜨끔함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이 그 병든 노인이 치료하던 곳인데. 가련하게 그 노인은 돌아가셨다니.....' 지난 일이 역력히 뇌리를 스치자 소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빛이 새어 나오는 석벽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두 시비가 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한 걸음 늦었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살짝 공력을 모아 경력을 쏟아 내며 강하게 밀었다. 그러자 괴상한 소리와 함께 돌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마 누군가가 떠날 때 매우 급한 탓으로 석문을 미처 잘 닫지 않아 불 빛이 새어 나온 것 같았다. 오른쪽 시비는 소영이 돌문을 밀어 여는 걸 보고 깜짝 놀라 급히 소리를 지르며 칼을 뽑아 들고 달려 갔다. "빨리 물러나시오." 그녀는 급히 석문 안으로 달려 들어 가며 칼을 뻗어 곧장 소영을 찔렀다. 소영은 손을 들어 한 번 휘저어 장력을 쏟아 내 검세를 막으며 천천히 말했다. "오 년 전 내가 이 석동에서 아가씨의 노주인을 뵈었을 때, 그 당시 아가씨는 아직 이 무산석부에 들어 오지도 않았었소." 그 소녀는 자기의 검세가 소영이 휘저은 일장에 의해 저지되자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의 무공은 약하지 않구나. 말할 때는 전혀 몰랐는데.' 하고 중얼거리다가 그가 한 말을 깨닫고는 물었다. "뭐라구요? 당신이 우리 주인을 아신다구요?" 소영이 말했다. "아! 애석하게도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니......." 그는 눈을 돌려 높은 대 위의 하이얀 촛불, 그리고 벽에 늘어진 흰 휘장 아래 한 구의 목관이 벽을 의지한 채로 놓여 있는 것을 보 았다. 이때 두 계집종이 모두 들어와 검을 빼어 들고 소영의 일거 일동 을 주시하고 있었다. 금산반 상팔도 얼른 그녀들을 따라 들어 왔고 밖의 돌 길에도 자 연스럽게 적을 맞는 세력이 펼쳐진 것 같았다. 소영은 눈을 돌려 그 나무관을 바라 보며 말했다. "이 목관 속에 당신네 노주인의 유해가 있습니까?" 두 시녀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요, 당신이 감히 이 목관 아래서 망동을 한다면 살아선 이 무산의 석부를 결코 빠져 나갈 수 없을 걸요?" 소영은 옛날 친절했던 노인의 정이 생각나 손을 모아 목관 앞에 읍하며 말했다. "후배 다시 이 석부에 왔습니다. 노인장께서 돌아가신 줄은 생각 치 못했습니다." 두 시비는 그가 목관 앞에서 예를 베풀자 아무 악의가 없음을 알 고 더 이상 저지하지 않았다. 소영은 길게 읍한 뒤 돌아 나올 생각이었는데, 이때 한 가지 생 각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처음 노인을 만났을 때 한 석문으로 들어 왔었다. 만일 이 관을 놓은 곳이 옛날 에 노인께서 병을 치료하던 방이라면 저 석벽 뒤에는 반드시 두 개 의 방이 있고 침상이 하나 놓여 있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는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석벽을 향하 여 돌문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일장을 발출해 냈다. 과연 석벽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자 소영은 즉시 속이 비어 있음을 알았다. 이때 왼쪽에 있던 시비가 돌연히 몸을 굽혀 장검을 세우고 덮쳐 왔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일초의 휘진청담(揮塵淸談)을 떨쳐 장검의 기 세를 누르며 천천히 물었다. "이 석벽 사이에 하나의 복실이 있는데 아가씨는 아시는지요?" 그 청의소녀는 검세가 소영의 장세에 가벼이 저지당하자 급히 칼 을 거두어 들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매우 급박해 화난 목소 리로 대답했다. "몰라요." 소영은 가벼이 웃으며 말했다. "옛날 그대의 노주인께서 이 소모에게 극진히 대해 주셨으니, 오 늘 내가 다시 이곳에 왔는데 어찌 그의 영관에 배례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때 독수약왕이 가로채고 나섰다. "지금 이 시각은 금같이 귀중한데, 여기서 쓸데없이 이렇게 시간 을 낭비할 수는 없소." 소영은 독수약왕과 따지지 않고 다시 오른손을 휘둘러 그 돌벽 사이에다 일장을 가했다. 그 시비가 옥같은 팔을 휘두르자 장검이 다시 날아 들었다. 소영은 번개같이 장검을 피하고 소리쳤다. "아가씨! 나로 하여금 검을 뺏도록 만들지 마시오!" "당신이 내 검을 뺏을 능력이나 있어요?" "좋소이다. 그럼 한번 시험해 볼까요?" 소영은 오른손을 재빨리 뻗음과 동시에 다섯 손가락을 쪽 뻗어 그 소녀의 오른쪽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가씨는 이 복실의 석문을 여는 방법을 아실 텐데요?" 그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왼손으로 석벽을 향해 재빠르게 내력을 쏟아 탐색을 계속했다. 다른 또 한 명의 청의시비는 소영의 왼손 장력이 계속해서 벽 사 이를 움직이는 것을 보자 마음이 대단히 급했으나, 왼쪽의 시비가 소영의 장세에 억제당하고 있어 순식간에 빠져 나갈 방법이 없을 뿐더러 자기의 갈 길마저 막혀 있자 급히 손을 휘둘러 높은 대 위 에서 타고 있는 하얀 촛불을 끄려 했다. 그녀는 먼저 방 안의 촛불을 꺼 버린 후 일을 처리하려 한 것이 다. 그것을 알자 금산반 상팔은 얼른 준비하고 있다가, 오른손을 뻗어 그 청의소녀의 허리를 찌르며 재빨리 촛대를 막았다. 그 소녀 가 쏘아낸 경력은 이미 쏟아져 나가 다시 거두지도 못하고 벽에 부 딪혀 버리고 그 빈 관 앞의 촛불에는 이르지도 못했다. 두 시비의 무공은 그리 높지 않아서 소영과 상팔의 한 수에 곧 제압당했다. "두 분 아가씨들은 얌전히 계시는 게 좋을 것이오. 그같이 성을 내다가는 이런 고통을 맛볼 테니까." 말하는 사이 손에 경력을 넣자 두 시비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 러지며 땀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소영의 오른손이 재빨리 석면 사이를 이동하며 드디어 흔적을 발 견했다. 앗!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이윽고 돌문이 크게 열렸다. 소영이 옛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 노인의 나무 침상이 놓였던 곳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 살피는데 갑자기 냉랭한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그 소리가 나는 곳은 바로 노인의 나무 침상이 놓였던 자리였다. 소영은 손을 돌려 지풍을 쏟아 시비의 혈도를 막은 후 몸을 도사 리며 두 손으로 가슴을 보호하고 들어 가면서 물었다. "그대는 뉘시오?" 그의 동작은 매우 빨라 말하는 사이 이미 석실 안으로 들어와 있 었다. 석실은 대단히 캄캄했다. 소영은 비록 높은 시력을 가졌으나 촛불이 있던 밝은 곳에서 온 까닭에 복실로 들어서자 갑자기 앞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차갑고 침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이곳은 오래 머무를 곳이 못 되오. 어서 나가시오." 이때 소영은 한 가닥 아주 독하기 이를 데 없는 냄새가 방 안에 서 풍김을 알고 즉시 뒤로 물러서 돌문을 빠져 나왔다. 그러자 한 바탕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 돌문은 스스로 닫혀져 버렸 다. 소영은 손을 들어 두 시비의 막혔던 혈도를 풀어 주며 말했다. "이 복실은 본래 너희 무산석부의 노주인께서 쉬시던 곳인데 이 일을 너희들이 모르고 있었다니....." 그러자 혈도가 풀린 시비가 훅! 한숨을 불어 내더니 물었다. "당신은 우리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아셨지요?" 소영은 눈을 돌려 상팔을 바라 보며 말했다. "그를 놓아 주시오." 상팔은 아직도 한 시비의 맥문을 잡고 았다가 놓아 주라는 말을 듣고 그 시비에게 말했다. "우리 형님께선 마음이 너그러우셔서 본래 가벼이 사람을 상하게 하시지 않는다. 그 분이 만일 너희들을 수습하려 한다면 손 한 번 만 놀리면 된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으 니.... 만일 또 그를 화나게 만든다면 그 때엔 도리가 없다는 걸 명심해라." 그녀들은 서로 바라보더니 몸을 굽혀 칼을 칼집에 집어 넣고 눈 을 돌려 상팔과 소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어서 한 시비가 물었다. "두 분 중 어느 분이 나이가 많나요?" 상팔이 눈빛을 번쩍이며 두 시비를 쓸어 보고 말했다. "무림에서는 무공의 강약으로 서열이 정해지는데 그게 뭐가 이상 하단 말이냐?" 목소리가 다시 작아지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대들이 고통받길 원하지 않는다면 제발 얘기를 시키지 말라. 이렇게 좌우에서 물어보면 내가 귀찮지 않느냐?" 두 시비 중 나이가 많은 듯한 시비가 차갑게 대꾸했다. "우리들은 단지 공자의 명을 받들어 길만을 안내할 뿐입니다. 만 일 이렇게 엉뚱한 일만 물으시려 한다면 저희들은 죽는 수밖에 다 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때 독수약왕이 차갑게 말했다. "기한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오. 만일 약을 취하는 일이 잘 못 늦어진다면, 노부는 두 시비를 놓아 주지 않겠소." 소영은 비록 가슴 속에 묻고 싶은 의문이 많았으나, 스스로 억누 르고 문을 나오며 말했다. "좋소 두 분은 어서 길을 안내하시오." 두 시비는 석실을 나와 돌문 밖에 놓여 있던 비단등을 들고 앞서 가기 시작했다. 소영은 재빨리 그 시비 뒤를 따르며 계속 눈을 굴려 양쪽 석벽 위를 살펴 보았다. 양쪽 벽 위엔 많은 문이 있었는데 모두 들어가 지 못하도록 봉해 놓았다. 오 년 전 소영이 처음 이 석실을 보았을 때도 회의를 품었었으나 지금 이 시각엔 더욱더 의심이 솟아났다. 그러나 형세가 갇힌 격이라 스스로 일어나는 의문을 눌러 버리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또 다시 두 모퉁이를 돌아서자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오 기 시작했다. 왼쪽의 시비가 재빨리 걸어가 석벽의 한 곳을 가볍게 누르자 벽이 열리며 석문이 나타났다. 시비가 멈춰서서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석문 밖이 바로 폭포수입니다." 독수약왕이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머리를 들어 바라 보았 다. 과연 한 줄기 거대한 폭포수가 아득한 봉우리에서 무서운 속도 로 떨어져 내려 곧장 아래 골짜기로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머리를 숙여 아래를 살피니 천길의 협곡엔 한 조각 아득한 어두 움이 덮여 있어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소영은 독수약왕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 돌버섯은 저 폭포수 아래 돌벽의 사이에 있습니다. 옛날 이 곳에서 떨어져 꼭 죽는 줄 알았으나, 도중에 빠져 나온 돌부리에 걸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돌부리까지의 거리가 이 입구에서 얼마나 됩니까?" 소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저어.... 기억이 똑똑히 나지 않는데요." "대략 얼마나 되지요?" "최소한 백 장은 될 것입니다. 그보다 길지는 몰라도 짧지는 않 을 겁니다." 독수약왕이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그곳으로 내려갑시다." 두구가 냉랭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연히 당신 혼자 내려갈 일이 아니오. 우리 큰형님께선 당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노부와 소영이 서로 약속한 말은 영약을 얻어야만 끝나는 것이 오." 소영이 물었다. "약왕의 뜻은.....?" "만일 그대 혼자 내려가도록 해, 영약을 얻은 후에 그대가 올라 오지 않는다면 노부는 헛되이 마음만 허비할 것이고....." 상팔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면 약왕께서 내려가면 되겠군요." 독수약왕이 냉소하며 즉시 대꾸했다. "만일 줄을 끊어버리면 노부는 이 천길 절벽으로 떨어져 몸이 부 서지고 뼈가 가루가 돼 버릴 게 아니오?" 두구가 말했다. "우리 형제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 왔소. 만일 실수로라면 몰라도 어찌 고의로 줄을 끊겠습니까? 사람을 그렇게 못 믿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측정할 수 없는 것이오." 상팔이 말했다. "한 시진이란 손가락 한 번 퉁기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오. 약왕 께서 이와 같이 생각만 하신다면 시간이 모자랄까 두렵소." 두구가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청삼인이 수하들을 이끌고 공격해 올 텐데, 그때 우리는 적을 맞아야 할 테니 약왕을 돌볼 수가 없습니다. 다 만 힘을 다해 싸우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약왕이 그 말을 받았다. "정세가 그렇게 된다면 소영과 노부는 천길 절벽 아래에서 죽는 수밖에 없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한심한 생각이 들었으나 묵묵히 말했다. "약왕!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십시오. 무슨 고견이 있거든 망설이지 마시고 어서 말씀하십시오." 독수약왕이 대답했다. "그대와 나 두 사람이 단독으로 내려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좋소. 제일 좋은 방법은 우리 둘이서 동시에 내려가는 것이오." 두구가 말했다. "우리가 준비한 줄은 두 사람이 동시에 내려갈 수 있을 만큼 질 기지 못합니다." "그거야 간단하지." 두구가 말했다. "고견을 바랍니다." "먼저 소영이 내려가서 그 돌부리를 찾은 후에 끈을 올려 내가 내려 가면 되지 않소?" 상팔이 고개를 들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올라올 땐 반대로 하면 되겠군요. 먼저 약왕께서 올라오고 그 다음에 큰형께서는 약왕이 오르시기를 밑에서 기다리다가 약왕이 오르신 다음에 다시 줄을 내려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 까?" "그렇소.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두구가 말했다. "우리들 생각을 당신에게 말씀드린다면, 먼저 내려 가고 나중에 올라 오는 것이나 나중에 내려 가고 먼저 올라 오는 것이나 모두 따질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겠는데요." 이때 듣고만 있던 소영이 가벼이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이 어느 때이고, 이곳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약왕께서 그 렇게 기회만 따지시면 생각하다 시간을 다 보내겠습니다." 그의 말소리는 가벼이 떨려 나왔다. 그는 다시 두구에게 말했다. "두 형제, 끈을 주시오. 내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두구의 안색이 순간 숙연해졌다. 차갑게 약왕의 두 눈을 응시하 며 천천히 품 속에서 바늘만한 굵기의 가느다란 비단 줄을 꺼냈다. 이 줄은 특수하게 다듬어진 것이라 매우 질겨 보통 사람을 매다 는 데는 좀 곤란하지만 소영이나 독수약왕 같은 무림인물이 의지할 때에는 아주 여유가 있는 것이다. 소영은 그 줄의 한쪽 끝을 잡아 허리에 매고 큰 걸음으로 굴 밖 을 향해 나아갔다. 금산반 상팔이 소리쳤다. "형님, 조심하십시오." 소영은 머리를 돌려 한 번 탄식하고 대답했다. "내가 그를 대신해 약을 구하기로 했으니 그와 다시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상팔이 말했다. "이 두 아가씨가 굴 입구를 지키고 있으니 좀 불안한 걸...." 하더니 그녀들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두 분께선 몸에 가지신 무기를 풀었으면 합니다." 두 시비는 자기들의 힘으로 감히 항거할 수 없음을 알고 그의 말 대로 무기를 풀어 내려 놓았다. 상팔은 그들이 풀어 놓은 장검을 집으며 말했다. "내가 그대들의 혈도를 막는다고 오해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이 끝나자마자 오른손으로 한 줄기 장풍을 쏘아 왼쪽 시 비의 혈도를 막아 버렸다. 오른쪽 시비가 이를 보고 마악 항거하려 했으나 어느 틈엔지 독 수약왕의 지풍이 날아와 그녀의 혈도를 막아 버렸다. 소영의 별같은 눈에서 번쩍 신광이 쏟아지며 두구와 독수약왕을 쓸어 보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약왕께서 내려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들이 저 두 시비의 혈도를 막았지만, 만일 이곳 주인이 화를 내게 된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이곳에선 악투가 벌어질 것이오. 약왕께선 이곳에 머물러 계 시다가 두 분 형제가 적을 맞았을 때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 에서 천 년 묵은 돌버섯을 취했을 때 제가 줄을 흔들 테니 다시 나 를 끌어 올리시기 바랍니다." 독수약왕은 홀연히 가벼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소형! 몸을 보중하시오." 하고는 중주이고를 돌아 보고 말을 이었다. "두 분께선 그대들의 큰형님을 잘 보살피십시오. 노부는 저 돌길 의 모퉁이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만일 이곳의 주인이 습격해 들 어 오면 제가 막아 내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방법이 있겠지요." 독수약왕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으나 몸을 돌려 가 버렸 다. 두구가 소영을 보며 근심스레 입을 열었다. "큰형님께서 위험스럽게 가실 것이 아니라 소제가 대신 가겠습니 다." 소영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상관 없습니다." 말을 마치자 소영은 곧 굴 입구를 향해 걸어가서 벽 아래에 서서 벽호공을 펼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구는 두 손으로 줄을 꼭 잡고 조심스럽게 수중의 줄을 풀어 내 렸다. 소영이 마악 두 장 가량 내려 왔을 때였다. 갑자기 독수약왕의 큰소리가 들리며 동굴 속의 분위기가 긴장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시간이 다 되었소. 그대는 약속을 잊으셨소?" 소영은 일이 급함을 느끼고 운기 행공하여 쌍장을 벽에 붙이고 큰 소리로 말했다. "두 형제! 줄을 빨리 늘이시오." 이때 상팔은 가슴에서 금산반을 꺼내어 들고 두구에게 말했다. "두제, 방심하지 말게, 형님을 잘 살피고 줄을 꼭 잡게. 나는 가 서 독수약왕을 도와 적을 막겠네."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달려갔다. 두구는 잔뜩 긴장하여 상팔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았다. 성난 폭포는 사납게 쏟아져 내리고, 물방울은 마치 안개처럼 뿌우연한 데다가 밤마저 깊어 도저히 멀리는 볼 수가 없 었다. 그는 단지 수중의 줄이 빨리 풀어지고 있는 걸로 소영이 이 미 위험을 무릅쓰고 떨어져 내려가고 있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줄을 풀어 내렸다. 그러나 내리면 내릴수록 점점 빨라져 이미 백 장 가까이 풀었는데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이제 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두구는 속으로 크게 놀라 중얼거렸다. '줄이 모자라니 이걸 어쩐다......' 그는 줄을 당겨 멈추게 하려 했으나 만일 그 가는 줄이 소영이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는 힘 때문에 끊어져 버리면 더욱 큰일이므로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수중의 줄이 멈추어졌다. 소영이 내려 가다가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뒤에서는 욕지거리 와 독수약왕의 성난 부르짖음이 들려 오고 이어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 왔다. 두구는 강호상의 경험이 풍부하여 그 칼 부딪치는 소리와 목소리 를 듣고 거리가 다름을 느끼자, 즉시 누군가자 독수약왕의 방어선 을 뚫고 넘어서서 상팔과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 머리를 돌려 바라 보니 단지 상팔의 금산반에서 비치는 보광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고전을 치르면서도 자기가 놀랄까 염려하여 말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두구는 매우 긴장했다. 생사를 가름하는 격투의 소용돌이로 말려 들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마에선 구슬같은 땀방울이 끊이지 않고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이때 뒤에서 누군가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는 상팔이 다쳤을까 돌아 보지도 못한 채 수중의 줄에만 희망을 걸 고 기다렸으나 소영의 소식은 마치 바다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오래 도록 알 수 없었다. 65. 영약을 얻다 두구는 오랫동안 소영의 동정이 없자 아! 하고 가볍게 탄식하고 는 품 속으로 손을 넣어 철필을 꺼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손을 써야 했던 것이다. 상팔은 힘이 부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거들어야 했던 것이다. 이때 손을 묶은 줄이 밑으로부터 한바탕 흔들려 옴을 느꼈다. "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손에 힘을 모아 힘껏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소영은 이미 두구가 강적과 대적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 다. 위에서 힘을 주어 잡아 당기자 자기도 서둘렀다. 이때 두구의 등 뒤에서는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 려 왔다. 상팔이 어쩔 수 없이 싸움에 말려 들었으나 역부족하여 뒤로 밀 리는 꼴이 선했다. 두구는 만 가지 생각이 얽혔으나 그렇다고 뒤를 돌아다 볼 수는 없었다. 갑자기 줄이 늦추어졌다. "두형!" 소영의 목소리였다. 두구는 크게 기뻐하여, "형님, 올라오셨습니까?" 눈앞에 소영의 모습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원래 두구는 냉정한 듯하나 실은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형님! 괜찮습니까?" 두구는 소영을 힐끗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뒤집어 철필을 잡았다. 동시에 왼손을 품 속에 집어 넣더니 은백색의 호수권(護手圈)을 끄집어 내었다. 그는 몸을 홱 돌렸다. 철필은 어느덧 적의 앞가슴을 노렸다. 실 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이때 한 자루의 철척(鐵尺)이 비스듬히 펼쳐졌다. 적이 철필을 막아낸 것이었다. 쏴! 하는 소리와 팡팡! 하는 소리가 한데 어울렸다. 두구의 호수권이 비스듬히 돌며 연거푸 날아오는 습격을 막아냈 다. 두구는 그제서야 상대방의 힘을 헤아릴 수 있었다. 지상에 놓아 둔 등불이 여전히 빛나고 있어 모든 것이 똑똑히 보 였다. 그의 눈앞에 남색옷을 입은 네 소년이 각기 단도, 보검, 철 척, 연자창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네 종류의 무기는 각기의 특성으로 무공을 나누어 공격해 왔다. 상팔의 무공이 비록 훌륭하기는 했으나 네 사람의 공세를 막아 내기는 힘들었다. 두구의 귓전에 상팔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두제, 한바탕 막아 주게. 나는 잠시 빠져 나가 상처를 싸매야겠 네." 두구는 오른손엔 철필, 왼손엔 호수권으로 힘껏 위기를 모면해 나갔다. 상팔은 걸음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형님, 천 년 묵은 돌버섯을 취하셨습니까?" "취했소이다. 그런데 상처가 대단하오?" 소영의 나지막하면서도 걱정스런 말투였다. 상팔은 옷을 찢어 내어 왼팔의 상처를 싸맸다. "팔은 약간 다쳤을 뿐이지만 왼쪽 넓적다리의 상처가 심한 모양 입니다." 소영이 훑어보니 과연 상팔의 왼쪽 넓적다리에서 선혈이 끊임없 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다리 상처는 어떻소?" "형님, 걱정 마십시오. 아직 근육까지 상하지는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순간에 두구의 아이쿠! 하는 비명소리 가 들려 왔다. "두제도 부상을 당했군. 그 연자창을 조심하게. 몹시 흉악하고 변화무쌍하여 예측할 수가 없네." 상팔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소리쳤다. 소영이 눈을 들어 보니 두구의 왼쪽 다리에서도 선혈이 솟구치고 있었다. 소영은 길게 한숨을 몰아쉬고 나서, "두형, 뒤로 물러나시오. 내가 두형 대신 적을 막아 내겠소." 그와 동시에 장검이 어느덧 칼집에서 나왔다. 두구는 그의 무공을 믿는지라 재빨리 뒤로 물러 나와 옷을 찢어 내어 상처를 싸매었다. 소영이 오른손을 흔들자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이 싸늘한 빛 을 발하며 번개같이 빠르게 나아가 네 개의 무기를 막아 냈다. 남색옷의 네 소년이 쓰는 무기의 묘기는 기기묘묘하였다. 단도로 치면 철척이 곧 뒤따라 이르고 또 연자창으로 뱀이 굴을 빠져 나오 듯, 수은이 땅에 쏟아지듯 공격하여 들어 왔다. 소영은 상대방의 공세가 대단히 사납고 날카로움에 놀라 심중으 로 중얼거렸다. '중주이고가 모두 저 연자창으로 부상을 당한 것도 이상할 게 없 군. 저 사람의 무공은 과연 괴이하고 악독하구나.' 그리고는 수중의 검을 꽉 잡았다. 왼손으로 번개같이 장법을 전 개하여 검세를 보조하고서야 네 사람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때 갑자기 독수약왕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두형, 소형이 올라왔소?" 두구는 차가운 소리로 대답했다. "올라왔소." "돌버섯(石菌)을 취득했소?" "다행히 명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소." 독수약왕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노부는 평생 처음 강적을 만났소이다." 상팔이 놀라며 물었다. "아니 약왕도 부상을 입으셨소?" "두 곳에 좀....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는 잠시 말을 흐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록 부상은 당했지만 여전히 싸울 능력은 있소." 소영의 반격이 비록 셀지라도 네 사람의 공세를 막기란 힘든 일 이었다. 중주이고는 상처를 살핀 다음 운기를 모아 공격해 들어 가며 나 직이 말했다. "형님, 이놈들의 무공이 실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 조금도 사정 을 두지 마십시오." 소영도 심중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오늘 저 몇 놈을 해치우지 않는다면 이 무산석부(巫山 石府)를 빠져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각을 굴리며 기묘한 재주를 연출하니 검에 한 조각 한광이 번 뜩이면서 마침내 철척을 잡은 소년이 나동그라지는 것이었다. 소영 의 장검이 그의 앞가슴을 노렸으므로 마침내 내장이 파열되어 선혈 을 흘리면서 기절해 버리더니 곧 숨을 거두어 버리고 말았다. 중주이고는 소영을 돕고자 하였으나 그의 검기에 눌리어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소영은 남의 소년 하나를 친 후에 지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너희들 주인과 나와는 원래 약속이 있었다. 한 시진(時辰) 내에 는 공격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튼 너희들이 손을 멈추지 않는다면 소영의 솜씨를 계 속 보여 줄 테니 놀라지 마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번개같은 검세가 작렬하였다. 그 일검은 소년의 가슴에 적중하였다. 날랜 칼날이 앞가슴을 그대로 뚫고 나 갔다. 소년은 즉사하고 말았다. 상팔은 차디찬 눈빛으로 방관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한 일인데..... 어떻게 저들은 죽어 가면서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을까?' 그는 낮은 소리로 두구에게 물었다. "두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나?" "무엇이 잘못 됐소?" "저 사람이 우리들과 악전고투할 때에 몇 마디 기괴한 소리를 낸 이후에는 아무 소리도 없지 않았나? 동생은 들었나?" "못 들었는데요." "소형님의 검세에 상하고도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았단 말이네." "정말 그렇군요. 그거 이상한데요." 그들이 말을 주고받는 동안 또 한 사람이 소영의 칼 아래 나가 떨어졌다. 네 사람의 남의 소년 중 벌써 세 사람이 상한 것이다. 소영은 연거푸 세 사람을 해치고 나니 기분이 울적하고 내키지 않아 더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상대방은 이제 연자창을 쓰는 사람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소영은 그가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물러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싸울 태세로 나왔다. 상팔은 낮은 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형님, 이 무산석동 중에는 기괴한 일이 많습니다. 이미 독이 있 는 물건으로 음식을 삼고 무공이 또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니 결코 좋은 사람일 리는 없습니다. 이 시각에도 우리는 험악한 지경 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됩니다." "사형 말이 맞소." 소영은 말을 마치고 다시 정신을 집중시켰다. 왼손의 힘을 빼고 오른손을 휘두르자 운파월광(雲破月光)하는 소리와 함께 남의 소년 의 가슴 언저리 옷자락이 찢어지면서 선혈이 흘러 내렸다. 소영은 그의 상처가 가볍지 않음을 보고 차마 다시 공격하지 못 하고 오른팔을 오므려 겁세를 거두었다. 그 찰나 남의 소년은 몸을 두어 번 흔들흔들하더니 연자창을 들 고 소영을 향해 달렸다. 소영은 그가 중상을 입은 후에도 사납게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 도 못했는지라 하마터면 창에 찔릴 뻔하였다. 소영은 화가 치밀었다. 장검을 휘둘러 곧장 중궁(中官)을 밟고 올라가 연자창을 비스듬히 떨어져 내려가게 하였다. 장검이 차디찬 빛을 발함과 동시에 선혈이 낭자했다. 남의 소년의 오른팔을 그대 로 잘라 버린 것이다. 두구는 외쳤다. "이놈은 그래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니 그대로 놓아 줄 수 없습니 다. 후심(後心)을 찔러 완전히 죽여 버리십시오." 소영은 머리를 내둘렀다. "놀랐소! 이 네 사람이 이렇게도 지독하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 다니......" 상팔도 무어라고 하려다가 가벼운 기침과 함께 입을 다물어 버리 고 말았다. 두구는 몸을 번뜩 솟구치더니 그 쓰러져 있는 남의 소년을 확 밟 고 나서, "갑시다! 독수약왕이 어찌 되었나 가 봅시다." 소영은 검을 손에 잡고 뒤를 따르고 상팔은 그 옆에서 걸었다. 얼마를 걷다가 한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훅, 훅! 하는 권풍(拳 風)이 들려 왔다. 자세히 앞을 보니 바로 독수약왕이 백발이 나부 끼는 두 노인과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적수공권이었다. 두 노인 중 하나는 금실로 된 부채를, 또 한 노인은 검을 잡았는 데 공세가 맹렬하기 짝이 없었다. 독수약왕은 그 불진과 장검의 긴박한 공세 아래서 공수입백도, 맨주먹으로 검을 맞상대하는 수법을 전개하여 그들을 상대하고 있 어서 승부를 판가름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궁지에 빠져 공력이 줄어들었으므로 양손을 교차하여 한 수를 일변 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독을 뿌릴 힘도 없었다. 소영은 이를 주시하여 보다가 문득 장검을 비껴 세우며 소리쳤 다. "두형은 물러나시오." 두구는 독수약왕에 대하여 본래 감정이 좋지 않았다. 독수약왕을 도울까 망설이는 중에 소영의 말을 듣고 한 옆으로 비켜 섰다. 소영은 장검을 뽑아 가슴 앞에 대고 상승무학의 한 수인 승룡인 봉(乘龍引鳳)으로 불진의 묘기를 가볍게 막아 냈다. "제가 약왕을 도와 한 팔의 힘이 되겠습니다." 독수약왕은 이 말을 듣고 눈으로 암시를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쌍수를 오그라뜨리더니 허리를 굽혀 타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괴 상한 수법으로 검을 잡고 있는 노인을 향해 재빠르게 덮쳤다. 마치 독수리가 매를 공격하는 듯 날랜 동작이었다. 독수약왕은 두 노인과 맞서 십여 합을 지탱하기 어려울 때에 소 영이 갑자기 나타나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남한테 도움 받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지라 속으로는 소영의 뜻하지 않은 출 현에 기뻐하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소영은 백발 노인의 묘수인 금사불진을 대적하자 즉시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 강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공격하여 오는 백발 노인의 수는 보통 무사가 생각하기에는 아무 힘도 없는 평범한 수법 같았지만 부드러운 금사가 내뿜는 기운은 산을 가르고 바위를 깨뜨릴 만한 힘이었다. '이 노인의 수중의 불진이 이처럼 큰 힘을 내뿜으니, 이 검술을 가진 노인의 무공도 대단하겠지! 독수약왕이 두 사람의 협공 아래 서도 이렇게 오랜시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이 아 니야.' 생각을 굴리면서도 수중의 검세는 돌연 빨라져 불진을 사용하는 백발 노인의 기선을 제압하였다. 독수약왕은 소영이 나서서 협력한 후에야 비로소 압력이 제거되 었다. 그 칼을 잡은 노인은 이러한 타법으로는 승패를 가리기 어려움을 느꼈는지 검세를 일변, 공세는 돌연 사나워졌다. 한참 격투가 치열할 즈음, 갑자기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다. 두 노인은 힘껏 무기를 휘두르더니 뒤로 물러났다. '이 두 놈들이 또 무슨 계교를 쓰려는 걸까?' 독수약왕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두 노인은 흰 수염을 나부끼면서 수중의 병기를 움켜 잡아 맹공 격하면서 뒤로 훌쩍 솟구쳤다. 그들은 번개같이 달아났다. 잠깐 사 이에 늙은이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독수약왕은 그들이 물러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저 놈들이 힘이 모자라서 달아나지는 않을 텐데......" 두구는 그 중얼거림을 알아 듣고 쌀쌀하게 말을 받았다. "우리 형님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스스로 깨닫고 물러간 것이 분 명하지 뭐." 상팔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문득 두 남의 소년이 가까운 곳 에 옆으로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백발의 두 노인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독수약왕과 대적했다가 상 처를 입은 것이라 생각되어 물었다. "이 두 소년은 죽었소?" "중상을 입었을 뿐이지 죽지는 않았소. 두 소년은 아까 그 노인 들보다 먼저 노부에게 협공해 왔소." "이들 모두가 약왕의 손에 상했소?" "그렇소." "이들의 상처는 어느 정도요? 다시 행동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할걸!" 두구가 말을 가로챘다. "그 두 노인이 급급히 물러가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것으 로 보아 필시 무슨 음모가 있는 것 같으니 우리는 지체 말고 이곳 을 떠나야 하오." 두구는 몸을 돌려 앞장을 섰다. 그들이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어디선지 얼음장같이 싸늘한 말 소리가 들려 왔다. "내 부하가 명령을 듣지 않고 약속을 어겨 제멋대로 굴었소. 이 미 내가 그들을 가두었으니 여러분은 마음놓고 지나가시오. 막지 않을 테니......" 말소리는 잠시 그쳤다가 다시 이어졌다. "두 시진의 약속은 이미 끝났으나 내 부하가 부당하게 약속을 어 겼으므로 여러분에게 한 시진을 연장시켜 주겠소. 그러나 만약 한 시진이 지나도 이 석부 중에 있을 때에는 내가 출수하여 공격해 나 갈 테니 그리 아시오." 그러자 소영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부하들은 애석하게도 모두 나에게 죽었소." "나는 그들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내 명 령을 어겼으니 죽었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소영이 다시 대꾸하려 하자, 얼음장같은 그 소리는 계속되었다. "다만 한 시진이 있을 뿐이다. 여러분이 내 말을 믿거든 속히 얌 전하게 이곳을 빠져 나가고, 만일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꾸물 꾸물 시간을 늦추어도 좋다." 소영 일행은 이 길을 빠져 나가기 전에 반드시 몇 번의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만 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의 추측은 어긋났다. 그들이 무산석동을 나오는데 걸리적거리는 것은 아무것 도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숨을 물아 쉬면서 석동의 출입구를 빠 져 나왔다. 지금까지 활짝 열렸던 석문은 그들 네 사람을 내보내자마자 펑! 하고 닫혀 버렸다. 상팔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이상해!" 두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아해 하며 물었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그가 석도 중의 거대한 돌을 옮기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곳을 빠 져 나오기 힘들었을 텐데..... 석부 주인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순 순히 놓아 주었는지 알 수 없단 말이오." 소영이 듣고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군자일 거요." 상팔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어라구요? 형님은 정말 그 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시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어째서 우리들을 놓아 주었겠소? 우리를 해 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거지....." 두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소제는 그렇게 생각치 않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 석 부 주인은 석부 중의 일류급 인물을 죄다 내세워 우리들의 실력을 시험해 본 후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우리 들을 그 속에 머물게 한다면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선 제압하기 어 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찌감치 내보낸 것입니다." 소영이 그 말을 받으려 했으나 독수약왕이 앞질러 물었다. "소영, 취득한 천 년 묵은 돌버섯을 노부에게 보여 주시오." 소영은 품 속을 더듬어 자루 속에 든 돌버섯을 한 움큼 꺼내 주 었다. 독수약왕은 그 버섯을 별빛에 비추어 보더니 기쁨을 감추지 못하 며, "과연 이것이오." 하더니 품 속에 넣고는 또 물었다. "또 있소?" 상팔은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만큼을 가지고도 모자라서 그렇소?" "딸의 병세가 위중한지라 이것 가지고는 효험이 없을 것 같소." 소영은 아무 소리도 않고 또 한 움큼의 돌버섯을 내어 주었다. 독수약왕은 다시 별빛에 비추어 보고 흐뭇해 하며 더 이상 손을 내밀지 않았다. 네 사람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얼마 후에 쾌속선으로 올라갔다. 배 안에서는 촛불이 일 렁이고 있었고 선주는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선주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인사를 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상팔은 선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독수약왕에게 말을 걸었다. "약왕은 이번 길에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그리 고 저의 형님과 약왕께서 맺은 언약도 이제 여기에서 그쳐야겠군 요." "좋소 세 분께서 노부와 같이 배에 타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즉시 고별 인사를 드리고 이 배로 떠나겠습니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약왕께서 약을 취득하셨으니 이제부터 중요한 일은 영애의 병을 치료하는 일입니다." 독수약왕은 다행이라는 듯, "소형의 말씀이 맞소이다. 노부의 생각도 그렇소 그리고 이 선실 에서 약물을 조제하고 딸애를 치료했으면 하는데 세 분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두구는 쌀쌀하게, "약왕은 어찌 이렇게 갑자기 공손해지셨소?" 소영은 두구의 말을 무시해 버리듯 재빨리 독수약왕에게, "만일 이 배 안에서도 괜찮으시면 약왕 마음대로 착수하셔도 좋 습니다." "세 분이 다 허락해 주셨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상팔도 두구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적의에 찬 말투였다. "피차간 언약은 해소되었으니 약왕은 다시는 무슨 수단을 쓰지 않는 것이 좋으실 텐데......" "노부는 다만 세 분과 상의하고자 하는 것 뿐이오." "좋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아직도 우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 이 있습니까?" 소영이 진지하게 물었다. "노부의 딸애는 아주 여러 해 동안 병마에 시달렸기 때문에 반드 시 이 선실을 빌려 써야만 되겠습니다. 그러니 세 분께서는 잠시 동안은 휴식을 취하실 수 없게 되겠지요." "그렇겠군요." 독수약왕은 머리를 깊이 숙이며, "염치없는 청입니다." 그러나 두구는 여전히 냉정한 태도였다. "도대체 몇 시간이나 써야 합니까?" "지금부터 내일 해 떨어질 때까지만......" "그 때는 우리가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올라가야 할 텐데....." 세 분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면 노부는 곧 딸애를 데리고 배 를 떠나 다른 조용한 곳을 찾아가야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소영은 이렇게 말하고 앞장 서서 선실을 나갔다. 중주이고도 그 뒤를 따랐다. 독수약왕은 재빨리 배 안의 문을 닫았다. 사방에 장막을 드리워 바람이 조금도 들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소영과 중주이고는 선실 뒤로 나와 갑판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날은 점점 밝아와 동방의 하늘가는 희끄무레해졌다. 사공이 달려와서 물었다. "여러 어르신네들. 배를 어디로 몰깝쇼?" 상팔이 대꾸하였다. "즉각 닻을 올려라. 그리고 처음에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네? 다시 돌아가요?" 사공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두구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사공은 이상하다는 듯이 세 사람을 힐끗 바라 보더니 더 이상 묻 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뱃머리를 돌려 다시 삼협을 나왔다. 상팔은 갑판 위에 앉아서도 여전히 배 안의 동정을 살폈다. 그만 큼 그는 세심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공은 혼자 생각을 굴렸다. '저 사람들은 참 괴상하다. 선실에 편안히 앉아 있을 일이지 왜 갑판 위에 나와 바람과 햇빛을 쐬며 욕을 본담!' 사공은 사뭇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구의 얼음장같이 싸늘한 모습을 보고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오정이 되었을까. 비로소 문이 열리더니 독수약왕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머리는 온통 땀투성이였고 얼굴은 일그러져 마치 금 방 일장의 고투를 겪은 사람 같았다. 걸음걸이 또한 휘청거렸다. 그는 세 사람 앞으로 오더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두구는 그를 힐끗 바라보고, '저 사람을 지금 죽이려면 누워서 떡 먹기일 텐데......' 하는 생각을 하였다. 소영은 가볍게 기침을 하였다. "약왕, 영애는 어떻소?" 독수약왕은 머리를 끄덕끄덕하면서 맥이 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노부는 이미 그 애의 전신의 맥을 통하게 하고 약물을 먹였소. 지금 아주 편안히 잠을 자고 있소." 그리고는 눈을 감고 운기조식했다. 배는 물결을 따라 살같이 빨리 내달렸다. 양쪽으로 높이 솟은 층 암절벽을 뒤로 하며 앞으로 앞으로 미끄러지듯 내닫는 것이었다.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배는 이미 삼협을 완전히 빠져 나왔다. 철썩철썩 파도가 부딪는 곳에서는 배의 그림자가 산산조각 부서졌다. 독수약왕은 내공이 깊은 사람이라 약 한 시진의 조식을 취하고 나자 정신이 맑아지고 화색이 돌았다. 그는 눈을 껌벅거리면서 세 사람을 훑어보더니, "소형, 염치없는 청이 또 하나 있습니다." "염치없는 청이라면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소. 우리가 들어 줄 수 없으면 약왕에게 미안하니까요." 두구가 딱 잘라 말했다. 독수약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노부는 호의로 세 분과 상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 분께서 만일 허락하지 않는다면... 설마 노부를 핍박하는 것은 아니겠지 요?" 소영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딸애의 병세는 소형이 취득한 영약을 얻어 차도가 있습니다. 머 지 않아 곧 건강이 회복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 애는 수십 년 간 병마에 시달려 원기가 완전히 소모되었습니다. 귀주(歸州) 지방 은 비바람이 험하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므로 노부는 선실에서 한 이레 동안 머물러 저 애가 체력을 회복한 후에 다시 나설까 합니 다." 상팔은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건 약왕의 일이니 우리와 상의할 필요가 없소." "세 분의 조력을 빌려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그래서 꼭 상 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을 빌려야 될 일이라면 한 번 말해 보십시오. 들어 드 릴 만한 건지 아닌지......" "그렇지만 세 분께서 기꺼이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면 노부가 말 하는 것은 헛수고가 되지 않습니까?" 두구가 나서서 싸늘하게 물었다. "아니, 약왕은 우리들에게 허락할 것을 강요하는 거요?" 독수약왕은 허탈하게 웃었다. "만일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면 저 애로 하여금 죽음의 길을 재촉 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대협이 위험을 무릅쓰고 취득한 돌버섯을 헛되이 사용한 결과가 됩니다." 상팔은 사방을 돌아 보고 웃으면서, "왜 그렇게 핵심을 말하지 않고 종잡을 수 없이 빙빙 돌리기만 하오? 단도직입적으로 명백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부가 저 애를 치료하는 중에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만일 어 떤 적이 배에 올라타 공격해 온다면 어쩌겠습니까? 그러니 세 분께 서는 우리 부녀를 보호해 주십시오." 독수약왕은 말을 마치고 세 사람의 얼굴을 힐끗 바라 보았다. 두구는 싸늘하게 웃고 말했다. "약왕은 처음부터 모조리 부탁할 일만 생각하고 있으니 우리 형 제는......" 독수약왕은 손을 흔들어 두구의 말을 가로막았다. "뱀은 대가리가 없으면 기지를 못하고 새는 날개가 없으면 날지 를 못하는 법입니다. 세 분 중에 한 분이 일을 주관하셨으면 좋겠 습니다." 상팔이 나섰다. "그야 우두머리는 소형님이죠." 독수약왕은 두구와 상팔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이미 자신의 신분을 알고 계시는군요. 따라서 더 이상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옳음을 알 것입니다. 또한 그래야만 장법(章法)을 어지럽히는 일을 면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조용히 있던 소영이 나섰다. "약왕은 우리를 핍박하는 거요, 아니면 도움을 청하는 거요?" "글쎄요. 노부는 평생 남에게 도움을 청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약왕이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결국 핍박하는 것이니....." "허락하시는 겁니까?" 소영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 "난 아직 대답하지 않았소." 독수약왕은 의미있는 웃음을 띄우고 나서, "소형이 지금 손을 써서 이 노부의 혈도를 점한다면..... 그건 정말 쉬운 일일 텐데......" 두구가 참지 못하고 말을 받았다. "우리들은 이미 당신을 죽여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수고 하기 싫어서 그만 둔 것이다." "그랬소? 노부는 실로 세 분을 대신하여 애석하게 생각하오." "대장부로서 어찌 상대방의 위급한 때를 노리겠는가? 지금도 늦 지는 않지만." "늦었습니다. 만일 세 분께서 그때 노부를 쳤었더라면 이제 와서 상의하고 말 것도 없었을 텐데.... 세 분께서는 애석하게도 좋은 기회를 그냥 지나치신 것입니다." 상팔은 비웃는 말투로, "약왕의 말투는 우리를 이곳에 잡아 두려는 것 같군." 하고 독수약왕을 노려 보았다. "세 분께서는 이미 실책을 범하셨습니다. 결코 내 곁에 앉아 있 어서는 안 되는데....." 독수약왕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소영은 크게 눈을 떴다. "당신은 벌써 우리 몸에 독을 썼단 말이오?" "노부는 이미 세 분에게 알렸습니다. 내가 가진 물건으로 독을 퍼뜨릴 수 있다고." "나는 믿어지지 않는데......" "믿어지지 않는다면 한번 운기해 보시구려." 상팔은 운기해 보고 중독되었음을 알았다. "좋다. 네가 벌써 우리 몸에 독을 썼으니 이젠 우리의 수단이 악 랄하다고 욕하지 마라." 두구가 재빨리 몸을 일으키더니 오른손으로 철필을 뽑아내 재빠 르게 선실로 향했다. "멈춰라!" 독수약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상팔은 몸을 비스듬히 하여 그를 막으면서, "약왕, 자신이 있다면 일격에 우리를 쓰러뜨리고 네 딸을 구해 봐라." 소영 또한 냉소하면서 중얼거렸다. "약왕의 사람됨이 이처럼 비열한 줄은 정말 미처 몰랐소. 도무지 군자의 기개란 없군." 말을 마치고 돌연 오른손을 휘둘러 독수약왕의 왼쪽 허리를 찔렀 다. 독수약왕은 소영의 욕설에 얼굴을 붉히다가 갑작스런 공격에 얼떨떨했으나 재빨리 뒤로 두어 발짝 물러나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숨을 몰아 쉬면서 품 속에서 옥병 하나를 끄집어 냈다. "이 병 속에는 해독하는 약물이 있으니 세 분이 복용하시면 즉시 독이 풀릴 것이오." 66. 선상의 혈투 상팔은 옥병을 받아 들었다. "이 약은 가짜가 아니오?" 불신이 도를 지나니 약왕도 어지칸히 불쾌한 모양이었다. "믿어지지 않으면, 사공에게 대신 시험을 해 보면 되지 않겠는 가?" 상팔은 독수약왕의 심성이 인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시 사공 한 사람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말 에 그가 더욱 미웠다. 상팔은 병마개를 뽑았다. 남을 제물로 삼을 수는 없는 일, "필요없소, 내 먼저 한 알 맛보지." 그는 알약 한 알을 꺼내어 입 속에다 털어 넣고는 우적우적 씹어 삼켜 버렸다. 눈을 멀뚱거리며 기다리고 있노라니 뱃속에 들어간 알약은 서서히 녹아 흐르며 아랫배로 퍼졌다. 게다가 이상한 열기 로 온몸이 후끈거렸다. 그리고 그 열기는 곧 상팔의 온몸에 나른하 게 퍼졌다. 소영은 옆에서 암암리에 수라지력을 운용하며 준비를 하고 있었 다. 만일 상팔이 어떤 참극을 당하는 날에는 즉시 손을 쓸 셈이었 다. "약왕이 만일 이번에도 교활한 수단을 쓴다면, 다른 사람을 시킬 것 없이 내가 손수 당신들 부녀를 해치우고 말겠소." 약왕은 여전히 큰소리를 쳤다. "나는 그대들 세 사람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는 입으로는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이 세 사 람을 당적하기가 그리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상팔은 단전에서 퍼지는 열기를 온몸에 보내고 있다가 문득 두 눈을 번쩍 떴다. "음, 과연 해약이로군!" 이제는 안심하고 먹어도 좋다. 소영과 두구는 상팔의 손에서 약병을 받아 돌려가며 한 알씩 먹 었다. 세 사람은 모두 약왕이 쓴 독을, 또 그의 해약으로 완전히 풀었다. 독수약왕이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노부는 일생 동안 일찍이 이런 일을 한 적은 없다. 독을 쓴 후 에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해약을 쓴 일은." 두구는 여전히 빈정거렸다. "형세가 급하니까 약왕이 하는 수 없이 굴복한 것이지." 독수약왕은 몸을 돌려 배 안으로 들어 가더니 사랑하는 딸을 품 에 안고 다시 갑판으로 나왔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는 결코 세 분의 기세에 눌린 것은 아니오. 해약을 드린 것 은 실로 소대협의 군자다운 풍도에 감격한 까닭이지. 대의로 몸을 버려 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실로 많지 않소." 소영은 멀거니 서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남궁옥의 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홀연히 측은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두 분 형제, 사람을 도우려면 끝까지 도와야 하오. 이미 그를 도와 영약을 얻은 바에야 어찌 그를 위하여 칠 일 동안 호위가 되 지 않을 수 있으리까. 두 분의 뜻이 어떠하신지 모르겠소이다." 상팔은 좀 겸연쩍은 생각이 드는지 손을 들어 뒷머리를 득득 긁 었다. "소제 등은 모두 형님의 분부에 따를 뿐입니다. 형님께서 기왕 그들 부녀를 위하여 칠 일 간 호위가 되기로 한 이상 아우들은 그 대로 따르겠습니다." 독수약왕은 고개를 가로젓고, "딸애는 이처럼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생기가 돌 아 소생할 기미가 역력하오. 그러니 감히 세 분께 수고를 끼칠 필 요가 없소이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영애의 생사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약왕은 굳이 감정으로 말 씀하시오?" 약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구가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우리 천금같은 형님께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두 분 부녀를 위해 호위가 되겠다고 말씀하시었음에도 약왕이 굳이 요구하지 않 는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독수약왕은 밉살스럽다는 듯 두구를 노려 보았다. "노부는 그대들에게 핍박당하고 싶지도 않고, 또한 아무 대가도 없이 온정을 바라지도 않소." "그럼 약왕의 뜻은?" 소영이 물으니 약왕은 어조가 약간 달라졌다. "세 분께서 만일 우리 부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호위를 하여 준 다고 하면 노부는 마땅히 보답할 물건이 있소. 세 분께서 그것을 받기를 원한다면 노부는 딸애를 구원하면서 수 일 동안 이 배에 머 물 것이며, 만일 그대들이 받기를 거절한다면 노부는 따로 고깃배 한 척을 얻어 곧 육지로 올라가겠소." 소영은 심중으로 생각했다. '이 작자는 참으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군. 사람에게 굽히 기 싫어하는 성미는 고사하고라도 약간의 인정도 받기를 원치 않으 니......" 그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칠 일 간의 호위가 완전히 끝난 후 우리는 약왕이 주는 물건을 받으면 되오." 약왕은 얼굴에 아무 표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입으로는 선뜻 승낙했다. "좋아! 우리들은 이 한 마디로 서약을 끝낸 것이외다." 약왕은 딸을 안은 채 다시 배 안으로 들어 갔다. 소영은 낮은 소리로 중주이고에게 일렀다. "우리들이 이미 호위가 되기를 약속한 이상, 근신해야 하오. 조 금도 부주의한 행동을 해서는 아니되오." 두구는 시선을 돌려 사방을 보고 나서, "배가 강의 한복판을 가고 있는데 이곳에 와서 소란을 부리는 사 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독수약왕도 그리 걱정은 하지 않을 것입니 다." "말이야 옳은 말이지만 그렇다고 태만할 수는 없소. 우리는 우리 대로 만일의 일에 대비해야 하니까." 상팔도 걱정없다는 듯 장담했다. "뒤따라 습격할 사람이 있다면 오직 무산석부의 사람들뿐이지요 그밖에는 달리 이 배를 주의할 사람은 없소." 그리고는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그러나 석부에서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외다. 그가 뒤따라 엄습 할 생각이 있었다면 우리를 놓아 보낼 까닭이 없지요." 배 안에서 독수약왕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노부의 견해로는 그 무산부에는 대변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소 그 석부의 주인은 우리를 돌아 볼 여가가 없을 게요." 두구는 예의 그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그곳에는 이미 약왕의 위명이 크게 떨치고 있을 겁니다." "흥!" 독수약왕은 말끝마다 비꼬아대는 것이 적지 않게 불쾌했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아예 귀가 막힌 사람처럼 들은 척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만큼 딸을 깊이 아끼고 있는 것이었다. 선상의 나날은 흐르는 물결과 함께 흘러 갔다. 엿새가 지났다. 배는 이미 언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독 수약왕은 여전히 배를 그대로 물에 띄우기를 고집했다. 그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날 한낮이 되어 소영은 갑판에서 뒷짐을 지고 사방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배 안에서 독수약왕이 걸어 나왔다. 느릿느릿 여유있는 모습이 었다. "내일 해가 떨어진 후에 딸애는 이 배를 떠나야 하오. 꼭 이레가 차는 시간이구료." "영애의 병세가 낫지 않았다면 이삼 일 더 머물러 계셔도 무방합 니다." 며칠을 같이 기거하는 동안 독수약왕은 소영 등과 화합하여 어느 정도 친근한 사이가 되었으므로 전처럼 그렇게 적의에 찬 어조를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후일 다시 적대 입장에 처하여 마주 겨루는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서로 죽이기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약왕은 천천히 입을 열어, "관계 없소이다. 아이는 이 시각 이미 기맥이 통했고 병세는 점 점 좋아지고 있소. 노부는 그 애를 데리고 한 군데 조용하고 깨끗 한 곳을 골라 머물 것이외다. 나는 늘 힘을 기울여 그 애의 성취함 을 도울 것이오. 그 애는 무공의 극한을 깨칠 것이오. 짧은 삼 년 동안 그 애로 하여금 무림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류 고수 로 성취시킬 것이오." "약왕의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소영은 그날을 기다 리겠습니다." 이때 멀찍이서 두 척의 쾌속선이 빠르게 강 위를 미끄러져 왔다. 독수약왕은 이미 수상쩍게 보고 있었는지, "두 척의 작은 쾌속선이 좀 수상해 보이는구료. 소대협께서는 각 별히 조심하시오." 소영은 눈을 들어 다가 오는 쾌속선을 응시했다. 배에는 각기 두 사람씩 타고 있었다. 한 사람은 키를 잡고 배의 행로를 조정하고, 다른 한 사람은 뱃머리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배는 고깃배처럼 선실도 선창도 없었다. 단지 앞머리가 불쑥 쳐 들리어 속력이 좋아 보였다. 두 척은 소영 등이 타고 있는 배를 한 바퀴 돌더니 돌연 뱃머리 를 돌리고 떠나 버렸다. 소영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엿새 동안 다행히 사고가 없었는데.... 최후의 하루에 일이 벌 어질 줄이야. 이미 귀주에 가까우니 백화산장의 무리들인지도 모르 겠다!' 생각을 굴리면서 힐끗 바라보니 가던 배는 다시 뱃머리를 돌려 가까이 이르고 있었다. 상팔, 두구 역시 쾌속선들을 발견하고는 황망히 소영의 신변으로 왔다. "이 두 척의 배가 심상치 않군요?" 독수약왕이 의연히, "우리들을 찾으러 왔다면 노부는 오히려 그들과 한바탕 싸우는 것이....." 소영은 영문을 몰랐다. 약왕이 무엇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는지. "왜 굳이 싸워야 한단 말입니까?" "두어 시진 후에는 딸애를 도와 최후로 혈맥을 통하게 해야 하므 로 여러분을 도울 새가 없기 때문이오." 소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약왕은 여전히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오만한 사람이군!'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이때 쾌속선들은 벌써 큰 배에 접근하고 있었다. 돌연 앞에서 오던 배의 이물에 있던 검은 옷의 사나이가 몸을 날 리더니 큰 배의 갑판으로 날아 왔다. '엔간히 간덩이가 큰 친구로군. 이렇게 청천백일하에 한바탕 해 보자는 것인가.....' 소영의 눈은 사나이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나이는 예리한 눈으로 여럿의 얼굴을 보더니 소영을 향하여 입 을 열었다. "여러분, 배를 이곳에 멈추십시오. 서두를 것 없소." 두구가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요? 말하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예모가 없단 말이 오?" "흥! 내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묻는군!" 두구는 가슴을 벌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대답을 할 필요는 없소. 우리는 줄곧 묻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 니까!" 사나이는 또 차갑게 미소를 짓고, "오늘은 예외가 될 거요." "반드시 그렇지도 않을걸!" "당신은 누군가? 말투가 어지간히 거칠군!" 이렇게 되니 쌍방은 자연 시비가 붙어 버렸다. 두구는 벌컥 화를 내고 소리쳤다. "또 다시 지껄이면 내 즉시 너를 물에 처넣겠다." 그러나 사나이는 여전히 코웃음을 쳤다. "한번 해 보시구료!" 두구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가 손을 쓰기 전에 소 영의 말이 떨어졌다. "싸워서는 안 되오!" 두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한 방에 상대방을 묵사발 만들 겠다는 듯이. 그러나 소영의 말이 떨어지자 하는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 오고 말았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귀하께서 이곳에 오신 것은 무슨 가르침이 있어선지 명백히 말 씀해 주시기 바라오!" 사나이는 소영의 아래위를 한 차례 훑어 보았다. 준수하고 관후 한 태도와 영걸한 풍도가 일일이 사나이의 시야에 들어갔다. 사나이는 감히 항거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인가? 돌연 손을 마주잡고 인사를 차렸다. "대명을 알려 주시기 바라오." 소영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바른대로 대답했다. "본인은 소영이라 하오." 순간 대한은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오래 전부터 뵙고자 했더니 오늘에야 다행히 배견하게 되는구 료." 소영이 즉시 물었다. "그대의 이름을 듣고 싶은데?" "하찮은 이름, 세상에 전할 바도 못 됩니다. 소인이 말씀을 드려 도 소대협께서는 아시지 못할 것입니다." 상팔은 생각했다. '이놈은 교활하기 짝이 없군. 슬쩍 형님의 이름을 묻고 제 이름 을 감춘다.' 그래서 얼른 기침을 하고, "어두운 밤에는 등을 켜는 법이오. 종을 치면 소리가 나기 마련 인데, 그대는 왜 그처럼 흐리멍텅한가?" 사나이는 다시 상팔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리고는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귀하께서는 또 누구신지?" "중주이고의 첫째, 상팔이오 귀하도 당연히 이름을 대어야지." 사나이는 눈을 크게 뜨고, "오오, 순풍에 돛단 듯이 재물을 모아 이제는 나라보다도 부유하 다고......" 두구가 손가락질을 하며 냉정하게 소리쳤다. "우리는 자네 성명을 묻는 거야. 자네 귀가 고장났는가? 고장났 거든 말을 대신 들을 사람을 데리고 다니게!" 사나이는 다시 두구에게로 시선을 못박았다. "그대의 말투를 보니 상스럽기 짝이 없군, 아마 중주이고 중의 작은 장사꾼이렷다." "그렇다!" "둘째 장사꾼에게는 한 자루 철필과 한 척의 호수은전이 있어 오 래 전부터 강호에 이름을 떨치고, 또 빛놀이 하는데도 능하여 당할 장사가 없다더군!" 독수약왕이 한 마디 비꼬았다. "귀하는 이것저것 아는 것도 많군. 그럼 노부의 이름을 한번 알 아맞춰 보시지!" '으- 음' 사나이는 독수약왕을 주시하며 잠깐 생각을 굴리다가, "당신은 비록 깡마르고 체격이 작다고는 하나 오히려 대명이 쟁 쟁한 인물 같은데....." 독수약왕은 참지 못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노부는 당신의 칭찬을 듣자는 게 아니야. 노부의 성명을 알아내 지 못한다면......" 그러나 독수약왕이 말하는 사이 사나이는 돌연 목소리를 낮추어 소영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여러분께서 이몸을 도와 목숨을 구해 주신다면 그 은혜는 후히 갚겠소이다." 사나이는 고개를 똑바로 쳐든 채였다. 목소리는 작았다. 마치 동 료가 눈치채는 것을 꺼리기라도 하는 듯이. 그러나 소영과 중주이고 등은 모두 들었다. 다만 약왕만이 듣지 못하였다. 소영은 사나이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오랫동안 강호를 떠돌아 다니며 돈놀이와 장삿꾼으로 치부한 중주이고까지도 이 때만은 그 들의 수완을 발휘하지 못하고 멍청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사나이는 소영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중주 이고를 향하였다. "두 분께서 만일 저를 도와 주신다면 저는 많은 값을 지불할 것 이외다." 갑자기 상팔의 장사꾼 근성이 움직였다. "무엇으로 값을?" 사나이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림의 성인이라 일컫는 시천도가 친필로 서명한 그림이오!" 그거라면 그야말로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장사에 눈이 어두워진 상팔은 체면이고 형님이고 따질 것 없이 즉석에서, "좋다!"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넙죽 대답을 해 놓고 보니 그만 크게 실 수한 것임을 깨달았다. 상팔의 멋쩍은 얼굴이 소영의 얼굴로 돌아 왔다. "애애햄- 소제는..... 이미 다시는 장사를 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소이다. 그러나 흥정거리가 있으면 여전히 참지를 못하고 예전 근성이 일어나니......" 소영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흥! 벌써 대답을 해 놓고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며 담담히 대답했다. "사정이 이미 이와 같이 되었으니 무슨 연고인지 그 사람에게 물 어 보시지요." 다른 한 척의 뱃머리에 섰던 사나이가 돌연 큰 배로 날아 올라 왔다. "우리는 가야 한다." 소리와 동시에 사나이는 먼저 온 대한의 몸을 휙 끌었다. 상팔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갈일성했다. "손을 놓아라!" 소리를 따라 먼저 배에 올랐던 사나이는 급히 잡힌 것을 뿌리치 고는 상팔 등의 신변으로 돌아 왔다. 상팔은 다리를 당겨 사나이를 통과시키고는 돌연 손을 벌려 따라 붙는 사나이를 막았다. "청천백일하에 네 감히 손을 써서 사람을 다칠 셈인가....." 사나이는 거침없이 손을 내밀어, "누가 너보고 참견하라더냐?" 소리와 동시에 일장을 날려 보냈다. 상팔은 손을 내밀어 마주 일장을 내치며, "당신 정말 한번 해 볼 텐가?" 펑! 하는 소리가 울리고 사나이는 다리를 휘청거렸다. "흥!" 상팔이 코웃음을 치는 가운데 사나이는 이미 강적을 만났다는 것 을 알아차렸는지, 돌연 몸을 날려 타고 왔던 배로 떨어져 내려 갔 다. 상팔은 달아나는 사나이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그 그림으로 돈벌이가 될까?" 이때 뒤에 몸을 피했던 사나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손으로 돌 연 얼굴 껍질을 벗겼다. 그 안에서 전혀 다른 얼굴이 나왔다. 원래 그는 안피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나이의 얼굴은 가면을 쓰고 있던 때보다도 나이가 들어 있었 다. 대략 오십쯤 되었을 게다. 짙은 눈썹에 눈은 형형하게 크고 넓 적한 얼굴이었다. 코가 곧고 입이 컸다. 인상은 괜찮았다. 그러나 얼굴에는 기이하게 검은빛이 떠돌고 있었다. 독수약왕이 사나이를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한 마디 했다. "당신은 또 돈을 내버려야겠군!" 사나이는 영문을 몰라서, "무슨 말씀이신지?" 약왕은 웃지도 않고 일렀다. "당신의 낯빛을 보니 심하게 중독된 것 같소. 의약의 비용으로 또 돈을 써야겠으니....." 이 말을 듣고 사나이는 흠칫 놀랐다. "내가 중독된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소?" "노부가 그만할 걸 몰라서야 강호를 돌아 다닐 필요가 없지 않은 가?" 사나이는 독수약왕의 얼굴을 새삼스레 뜯어 보았다. "노형은 뉘십니까? 우리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한눈에 제가 중독된 것을 알아 보시니....." 소영이 대신 대답했다. "독수약왕이라 하는 분이시오. 당대 무림의 제일가는 명의요." 사나이는 대번에 손을 맞잡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약왕이시군요. 예를 잃었습니다." 독수약왕은 담담하게 웃고, "노부의 이런 꼴이 유명한 의원같이 보이오?" 하고 곧 몸을 돌려 딸이 있는 배 안으로 들어 갔다. 상팔이 싱글싱글 웃으며 나섰다. "맘에 드는 돈벌이야. 우리는 이미 받기로 했으니 당신의 이름이 나 대시오. 그래야만 분명히 상담을 할 수 있지 않겠소이까?" "아.... 저는 시청이란 사람올시다." 이 사이 여러 사람은 물 위의 사정은 돌아 보지 않고 있었다. 왜 냐하면 배에 접근했던 쾌속선은 사나이가 배에 오르자 곧 노를 저 어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소영의 입에서 크게 호통치는 소리가 일어나 더니 찬빛을 번쩍이며 어느새 발검 일초하고 검을 검집에 꽂았다. 땅!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갑판에 화살 하나가 두 동강이 나서 떨어졌다. 이어서 들리는 우렁찬 소리- "발검의 솜씨가 대단하군!" 그것은 강물 위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강상 에 쏠렸다. 네 척의 쾌속선이 쏜살같이 달려 왔다. 그 뱃머리마다 각각 네 사람씩 가뜬한 전투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활 을 메고 두 사람은 검을 메었다. "두 분 형제는 그 사람을 데리고 어서 배 안으로 들어가시오." 돌연 물에서 활 시위 소리가 일어나면서 한 발이나 되는 긴 화살 이 연거푸 날아 왔다. 소영은 다시 장검을 빼어 한바탕 휘둘렀다. 네 대의 화살이 동시 에 갑판에 떨어졌다. 상팔은 어느새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고는 금주판을 한바탕 휘둘 렀다. 수판알 구르는 소리가 요란히 울리는 가운데 몇 개의 화살이 또 떨어졌다. 두구도 또한 품 속에서 철필과 호수은전을 꺼내 들었다. 그는 그 저 적이 배에 붙기만 하면 모조리 요절을 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쾌속선 네 척은 큰 배에서 삼십 자쯤 되는 곳에 이르더니 멈추었다.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멈추어라!" 오른쪽 뱃머리에 선 사나이가 호통을 지르자 어지럽게 날아 오던 화살이 뚝 그쳤다. 소영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들은 이미 세 방면에서 활을 쏠 진세를 펼치었소. 우리는 대 항하기가 불편하니 배 안으로 들어가 대적할 방법을 의논합시다." 두구가 입을 열어, "저놈들은 내력을 알 수 없군요. 잠깐 사이에 저렇게 빠르게 행 동을 하니 보통 지나가는 무림의 인물이 아니라 강상을 누비는 조 직있는 도적 무리인 것 같소." 오른편 뱃머리에서 사나이가 다시 소리쳤다. "어느 분이 배에서 일을 주관하고 있소?" 소영이 앞으로 나섰다. "당신은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소?" 상대방에서 소리쳤다. "그대는 이미 오늘의 사정을 똑똑히 보았을 텐데?" "분명히 보았소이다. 여러분은 삼면에서 일제히 활을 쏘아 공격 할 모양이나 그런 것으로는 우리를 상하게 할 수 없을 것이외다." "흥! 만일 화살에 불을 붙여 화공을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항 하겠소?" 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불화살은 말할 것도 없이 배에 불을 낼 것이 틀림없었다. 이때 그 시청이란 사나이는 상팔과 두구의 인도로 배 안으로 들 어 갔다. 상팔은 사나이를 들여 보내고 나서 입구에 선 채, 소영을 도울 준비를 했다. 물 위에서 사나이가 소리쳤다. "좋다. 여전히 버틴다면 먼저 한번 맛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 옆에 선 궁노수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그들에게 맛을 보여줘라!" 명령에 따라 한 궁노수가 뒤에 걸머진 화살 하나를 꺼냈다. 특제 로 된 것인지 먼 발치에서 봐도 검은 것이 번쩍번쩍 윤이 났다. 그러자 옆에 짧은 창을 든 사나이가 주머니에서 화섭자를 꺼내더 니 불을 붙여 다시 활시위에 메겼다. 검은 화살 끝은 지글지글 타 기 시작했다. 궁노수는 재빨리 활에 불이 붙은 화살을 메겨 반월처럼 잡아 당 겼다가 쏘아 보냈다. 피융! 화살이 어떻게 제작된 것인지는 몰라도 길게 날아 가는 사이에도 꺼지지 않았다. 소영이 다시 검을 휘둘러 화살을 물 속으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금방 꺼지지 않고 한참이나 지글지글 타다가 꺼졌다. '지독한 화살이로군!' 다시 고개를 드니 배에 섰던 사나이는 이제 알겠냐는 듯이 득의 의 웃음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대의 검을 뽑는 솜씨와 손놀림이 그와 같이 정확한 것을 보니 필경 무림 중에서도 명망이 있는 인물 같군! 그러나 내가 명을 내 려 여기 여남은 사람이 일시에 불화살을 쏘아댄다면 그대가 비록 쾌검 기초가 있을지라도 그 많은 화전을 일시에 떨어뜨릴 수는 없 을 것이다. 큰 배는 즉시 잿더미가 된다." 사나이의 말을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팔이 낮은 소리로 일렀다. "우리가 비록 역경에 처했다 할지라도 기가 죽을 필요는 없소이 다. 독수약왕이 손을 쓰기를 허락한다면, 네 사람이 동시에 쾌선으 로 날아가 한바탕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하는 놈이 두목인 것 같 으니 형님은 그 자를 맡으시고 소제 등은 독왕과 더불어 나머지 세 척을 맡겠소!" 소영 역시 낮은 소리로, "그들의 특제 화살이 연소하는 힘이 매우 강력하니 만일 한 개라 도 갑판에 떨어진다면 이 배는 금방 불더미로 화할 것이오." "정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사공의 도움이라도 청할 수밖에 없습니 다. 다른 일은 못한다지만 불을 끄는 일도 못하겠습니까?" 소영은 반대했다. "그들은 무공이 없는 사람들이니 무고히 살상당하게 할 수는 없 소." "그러나 이 배를 구해야......" "상형은 의견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어서 독수약왕에게 가서 상 의해 보시오. 그에게 혹시 고견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료." 상팔은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이상하게도 독수약왕은 형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형님 이 말한다면 그는 물리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형님이....." 소영은 잠깐 생각을 굴리고 나서, "그렇게 합시다!" 그는 몸을 돌려 배 안으로 들어 갔다. 상팔은 금주판을 품 속으로 감추고 큰 걸음으로 나아가 그 오른 쪽에 있는 우두머리 배와 마주섰다. 그리고는 점잖은 예를 하고 입 을 열었다. "당신은 뉘신지요?" 사나이는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쌀쌀하게 소리쳤다. "당신들 두 사람 중에 대체 어느 분이 일을 주관하는가?" "그는 우리 형님이시니 자연 그가 일을 주관하시지." "흥! 귀하가 기왕 우두머리가 아니라면 어서 그대의 형에게 말하 게 하시오." 상팔은 느물느물 웃고 시간을 끌 뱃심이었다. "말은 그렇소만, 그는 전부터 형님으로 일컫기를 좋아하지 않소 이다. 그러니 소인과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돈을 청하신 다면 얼마든지 드릴 게고, 또 돈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서로 상 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흥!" 사나이는 콧방귀를 뀌고 나서 단호히 한 마디 했다. "첫째, 그대들은 먼저 자신들이 거둬 들인 그 반역자를 돌려 보 내야 한다!" 상팔은 여전히 싱글싱글했다. "그 일이라면 쉬운 일이외다. 우리들이 이처럼 곤경에 처해 있는 데 그 사람 하나를 돌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많 은 돈을 내놓는다고 해도 이 곤경을 해결할 수는 없을 테니까." "흥! 그대는 과연 선견지명이 있군!" 상팔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마치 엿이나 먹어라 하는 듯. 그러나 겉으로는 점잖게 절을 하고는, "당신의 이름을 들어야 우리들이 이야기하기가 좋을 것 같소이 다." 그는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사나이는 즉시 대답했다. "본인은 물뱀이라 일컫는 탕평이오." "아! 탕형이시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상팔은 또 생각이라도 하는 척 고개를 갸우뚱하고 시간을 끌었다. 사나이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왜 말이 없는가?" "......" 이번에는 더 엄하게 소리쳤다. "그럼 좋다. 두 번째 조건을 말하겠다. 그대들은 조건없이 우리 들의 군주를 뵈어야 한다." 이 말에 상팔은 머리를 번쩍 치켜 들었다. "당신들의 군주라니요?" "그렇지! 우리 군주께서는 강호에 출도하신 지 그리 오래되지 않 아 무림 중에는 모르는 자가 많다." "그렇다면 제가 들어 알아 모시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겠 군요." "그밖에..... 여러분이 폐군주를 뵈러 갈 때에는 일제히 병기를 버리고 몸에는 형구를 둘러야 한다." "무슨 형구를 써야 하오?" "그건 자연 알게 된다. 어서 대답이나 하시지." 상팔은 대답하는 대신 품 속에서 금주판을 꺼냈다. 그것을 왼손 으로 단정히 잡고 오른손으로는 수판을 퉁기면서 중얼거리는 것이 었다. "셋에 둘을 더하라... 그러면 다섯이 되고... 이하고 오하고 곱 하라... 그러면 십이로다... 안 되겠는데? 밑진다. 밑져....." 이것은 적과 아방을 비교하고 또 어떻게 대적할까를 셈하는 것이 었다. 그러나 상대방에서 이 꿍꿍이속을 알 까닭이 없었다. 기다리 다 지친 탕평은 갑자기 노한 소리로 외쳤다. "조건은 단지 이 두 가지다. 대답할 것인지 아니할 것인지 어서 결정하라. 시간을 끌다간 큰코를 다칠 줄 알아라." 사나이는 마침내 상팔이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 었다. 그러나 상팔은 여전히 능글능글했다. "당신들의 군주를 뵈러 가는 것도 어렵지 않소이다. 그러나 몸에 형구를 두르고 가야 한다니, 이건 너무 볼썽사납지 않을까요?" "흥! 안 될 소리.... 우리 군주를 뵈러 가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 하고 형구를 써아 한다." "그럼 당신도 쓰는 거요?" 탕평은 마침내 화를 냈다. "흥!" 어떻게나 세게 콧방귀를 뀌었는지 콧물이 떨어졌다. 그래도 대답 은 해야 되었던지, "허튼 수작 말라. 본궁 중의 사람은 자연 쓸 필요가 없다." 상팔은 등 뒤를 힐끗 돌아다 보았다. '무슨 의논이 이렇게 긴가....?' 그는 계속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만은 반드시 저희 형님이 결정지어야 할 일인가 하오...." 그때 뒤에서 소영의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응낙할 수 없다." 소영은 큰 걸음으로 갑판을 걸어 나와 상팔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의 당당한 모습은 어떤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상팔은 또 싱긋 웃어 보이고는, "형님께서 응할 수 없다 합니다." 탕평은 노해서 소리쳤다. "응할 수 없다면 스스로 죽음을 받는 것이다." "감히 수고를 끼칠 수야 있습니까? 우리들은 죽지 않으려면 지푸 라기라도 마련해야 하겠소." "나는 너희들과 입씨름을 할 시간이 없다. 응할 것인가 안할 것 인가 한 마디로 말하라. 다시 시간을 끌다가는 불화살을 맞을 줄 알라." 소영이 낮은 소리로 상팔에게 일렀다. "독수약왕은 이미 응낙하였소. 우리 배를 저 네 척의 쾌속선에 가까이 닿게 하시오. 손을 쓰지 않으면 모르거니와 일단 손을 쓰면 단번에 해치워야 하오." "지금 저들과의 거리는 삼십 자쯤 됩니다. 다섯 자 정도만 더 접 근할 수 있다면 아우도 어렵지 않겠소이다." 물뱀이라 하는 탕평의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들은 빨리 상의하여 결정하라. 나는 참을 수 없으니 시간을 정할 수밖에 없다." 상팔이 소리 높여 응답했다. "탕형, 잠깐 기다리시오." 그러나 탕평은 막무가내였다. "열까지 셀 동안 결정하지 않는다면 화전을 쏘겠다." 사나이는 돌연 오른손을 번쩍 쳐 들더니 머리 위로 휘둘렀다. 사 나이의 소리에 응하여 네 척에 타고 있는 도합 여덟 명의 궁노수는 일제히 등에서 특제 화살을 꺼내 시위에 메겼다. 소영은 잠시 눈을 들어 사방의 형세를 살폈다. 공격을 하려면 활 을 쏘기 전에 해야 한다. 이때 벌써 여덟 개의 강궁은 만월처럼 휘어 있었다. 짧은 창을 든 사나이들은 일제히 품 속에서 화섭자를 꺼내 들었다. 상팔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정세를 보아하니 위험을 무릅써야겠군!" 화살 끝에 드디어 불이 당겨졌다. 네 척의 쾌속선은 마침 서서히 노를 움직여 앞으로 나왔다. 상팔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쩐지 형편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군!' 이윽고 날카로운 소리, "하나!" 호령은 숨을 한 번 몰아 쉬는 시간마다 하나씩 더해졌다. 적의 쾌속선은 다시 얼마쯤 접근하다가 멈추었다. '흥! 아주 적당한 거리로구나.' 벌써 일곱을 세는 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암암리에 진기를 크게 돋구었다. "내 먼저 부딪치겠소." "형님께서 먼저?" 이때 탕평은, "아홉!" 하고는 딱 멈추었다. 아직 열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이었다. 돌 연 소영이 크게 부르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닥쳐라!" 탕평은 흠칫 놀랐다. "무슨 일이냐?" 탕평이 소리치는 것과 소영의 몸이 갑판을 떠난 것은 동시였다. 소영의 몸은 허공으로 이십 자쯤 솟구쳤다가 꺾어지면서 순식간에 탕평의 머리 위를 내리 덮쳤다. 드디어 여덟 명의 궁노수들이 일제 히 화전을 쏘았다. 큰 불덩어리 여덟 개가 허공을 가르며 큰 배의 여기저기로 날아 왔다. 소영이 내리 덮치는 것을 본 탕평은 즉시 손에 든 짧은 창으로 곧장 위를 찔렀다. 검광이 몇 차례 번쩍였다. 잇따라 비명이 일어났고, 단창은 허공으로 튀었다. 탕평은 이미 옆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 옆에 짧은 창을 들고 선 한 사람이 소영의 일검에 단창이 날아 가자 이내 쇠방망이를 꺼내 어 허리를 막았다. 소영은 장검으로 옆에 있는 탕평을 들이치는 한편 몸을 날려 옆 으로 피하며 그 여세로 일장을 들어 정면에 있는 경장대한의 앞가 슴에 일장을 먹였다. 한 줄기 거센 손바람이 윙 소리를 내며 밀려 갔다. 쾌속선은 길이 불과 여남은 자, 너비 석 자 가량이었다. 배 위가 너무 좁아서 피할래야 피할 곳조차 없었다. 소영의 장풍을 받은 사나이는 칼날같은 바람이 불어 닥치는 것을 보고도 피할 여지가 없었다. 겨우 옆으로 몸을 틀었다. 가까스로 요혈을 피하기는 했으나 상대방의 일장은 거침없이 어깻죽지를 때 렸다. "펑!" "아이쿠!" 사나이는 몸을 비틀다가 그만 물 속으로 첨벙 빠지고 말았다. 이 순간 소영의 왼손은 번개같이 사나이가 쥐고 있던 창을 뺏아 들었다. 한 바퀴 은빛이 배를 휩싸고 돌았다. "으악!" 비명이 일어나는 가운데 탕평의 몸도 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어서 두어 차례 비명이 일어나자 활을 쥔 궁노수의 허리가 꺾 이며 일시에 두 놈이 물로 떨어졌다. 궁노수들은 흰 그림자가 날아 오는 것을 보자 화전을 쏘는 원래 임무를 잊어 버렸다. 뱃머리에 선 탕평이 물 속으로 떨어지고 그 옆에 쇠방망이를 든 사내가 허리를 채이고 쓰러지자 앞뒤 일을 가릴 사이도 없이 활로 막았다. 그것이 허리를 잘린 실책이었다. 배 위에 있는 적을 모조리 물 속에 처 넣고 소영은 눈을 들어 다 른 세 척의 배를 바라 보았다. 원래 그 배에서도 소영이 허공을 날아 내리는 것을 보자 즉시 경 각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상팔이 몸을 날려 덮칠 때에는 이미 두 개의 단창이 곧장 뻗으며 그를 맞았다. 상팔은 형세가 용이하지 않음을 보자 곧 손에 든 금주판을 좌우 로 휘둘러 두 줄기 창날을 헤치고 그 사이로 몸을 적의 배 위에 내 렸다. 이어서 금주판은 오른쪽의 적을 치고 왼손으로는 왼쪽의 적을 향 해 일장을 쏟아 냈다. 실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창을 잡은 장정은 팔을 호되게 얻어 맞고 옆으로 비키려다가 물 에 떨어졌다. 풍을 받은 사나이는 주춤 두어 발자국 밀렸다. 이 기세를 잡아 상팔은 짓쳐 들면서 발로 사나이의 배를 걷어 찼다. 사나이는 좁은 배에서 미처 창을 휘둘 겨를이 없었는데 돌연 일장을 얻어 맞고 염 통이 터지는 듯한 아픔으로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차 배 를 걷어 채이자 순식간에 뒤로 벌렁 나자빠지면서 뒤로 곤두박질쳐 물 속에 처박혔다. 이때 강궁을 든 두 놈은 기회를 노리며 활을 버리고 대신 허리의 검을 뽑아 들었다. 상팔은 금주판을 좌충우돌, 한참 열띤 싸움을 벌이고 있는 판이 었다. 소영은 상팔이 이미 기선을 잡고 있음을 보았다. 검을 뽑아 든 두 궁노수들은 이미 갈팡질팡 반격조차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승부는 이미 끝장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험악한 경우에 처한 것은 냉면철필 두구였다. 원래 소영과 상팔이 몸을 날린 직후 배에 있던 독수약왕과 두구 는 기다리고 있다가 동시에 밖으로 내달으며 나머지 두 척의 배 위 에 떨어졌던 것이다. 독수약왕은 배 위로 뛰어 내리면서 창을 든 뱃머리의 두 대한을 향하여 동시에 쌍장을 내 쏟았다. 전력을 다 기울인 일장이 날아가 니 그 위세는 위맹무비였다. 뱃머리의 두 장한은 창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뒤로 밀리었다. 독수약왕은 그 틈에 배위에 발을 붙였다. 그는 아주 한꺼번에 적 을 해치울 생각으로, 오른손으로는 앞에 강궁을 든 사나이에게 전 력을 다 쏟은 일장을 치는 한편 왼손으로는 지풍을 써서 사나이의 팔을 찔렀다. 이 수법은 그가 평생 자랑스럽게 여기는 절기의 하나인 중랑첩파 로써 오른손과 왼손이 중첩하여 적을 습격하는 묘기였다. 사나이는 활로 막았으나 바로 왼팔이 찌르는 듯 저려 오는 것이 었다. 독수약왕의 공력이 그 얼마나 심후한가? 자연 사나이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금시 아픔으로 몸을 비실거 렸다. 그의 몸이 가까스로 평정을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또 한 가닥의 강력한 힘이 몰려와 앞가슴을 때렸다. 이 일격의 힘은 더욱 흉하고 매웠다. 사나이는 입을 딱 벌리고 금세 새빨간 피를 토해 냈다. 사나이의 몸은 걷잡을 사이도 없이 물 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67. 시천도의 한 독수약왕은 좌우에서 비틀거리는 두 사나이는 돌아 보지도 않고 그 기세로 곧장 나머지 한 사람의 궁노수를 쳤다. 역시 그가 자랑 하는 초식 중랑첩파였다. 사나이는 칼을 뺄 여유를 얻지 못했다. 처음 물에 떨어진 궁노수 와 비슷하게 죽어 갔다. 다만 그는 입에서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장풍을 면상에 맞아 그 상처가 가볍지 않은 듯 풍덩! 물 에 빠졌다.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그 순간 좌우에서 비틀거리는 두 단창의 무사가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 왔다. 그 중 한 명이 긴 창을 들어 태산을 찍어 내리는 듯한 힘으로 독수약왕의 머리를 향해 내리 갈겼다. 창이라 가까운 거리 에서 찌르기가 몹시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흥!" 독수약왕은 코웃음을 치며 왼손을 휘둘러 옆에 있는 무사를 밀어 뜨리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에 내력을 모아 머리 위로 떨어지는 창 을 손으로 받았다. "이놈 견뎌 봐라." 약왕은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앞으로 잡아 당겼다. 사나이는 무서운 공격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끌려 갔다. 이 순 간 독수약왕은 창을 잡은 손을 밖으로 내밀었다. 사나이는 끌려 오다가 돌연 창의 손잡이로 배를 세게 찔리고는 헉! 하고 헛바람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곳은 바로 물 속이었다. 창을 놓친 채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이 순간, 나머지 한 명이 기회를 보아 약왕의 옆구리에 창을 들 이댔으나 그보다도 먼저 약왕의 단창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 갈겼 다. 대한은 머리가 띵- 울리고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비틀거리 며 뒤로 물러났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첨벙! 물소리가 나고 물이 튀었다. 마지막 한 명도 역시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으하하하하하......" 약왕은 크게 웃어젖히고는 두 발로 각각 양쪽 뱃전을 밟고 흔들 흔들 움직여 금시 배를 엎어 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독수약왕의 몸이 훌쩍 솟구치더니 어느새 본래 타고 있던 큰 배 위로 올라 가는 것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소영은 자기 가 발을 붙이고 있는 큰 배에 칼로 큰 구멍을 내어 엎어 버리고 말 았다. 그리고 그의 몸은 공중을 날아 두 구의 배에 떨어졌다. 이때 두구는 철필을 가지고 한 대한을 거꾸러뜨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세 사람과 어울려 싸우고 있었다. 소영이 배 위에 이르기도 전에 철필을 휘둘러 또 한 놈의 궁노수 를 물에 처 넣었다. "하하하핫!" 그는 크게 웃어젖히고는 나머지 두 명을 노려 보았다. 한 명의 궁노수와 또 한 명의 대한은 이미 대적할 상대가 아님을 알고 뱃머 리로 쌍쌍이 물러나며 다시 짓쳐들 태세였다. 그러나 그것은 소영 이 배에 오르는 서슬에 그만 허사로 그치고 말았다. 은광이 번뜩하자 두 명은 동시에 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두구는 다시 호쾌하게 웃고 두 개의 창을 들어 팔에 크게 힘을 주어 배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동시에 소영과 함께 재빨리 큰 배 안으로 돌아 왔다. 상팔과 함께 싸우던 대한은 자기편이 물에 빠지는 것을 거듭 보 자, 기력을 잃었다. 그는 슬며시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 헤엄쳐 달 아났다. 상팔은 금주판을 거두어 넣고는 노를 저어 큰 배 가까이에 접근 하여 쾌속선을 큰 배에 매달고 씩 웃어 보였다. "이 쾌속선을 또 쓸 데가 있을까요?" 소영은 배의 부서진 부분을 살펴 보았다. 뱃바닥이 일부분 부서 지고 또 하나의 돛대가 타 버렸다. 심한 결투 끝에 이만큼의 손상 이란 실로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큰 배 안에 있던 배를 부리는 사람들은 소영 등이 대한 등과 싸 우는 솜씨를 본 후에 한숨을 몰아 쉬었다. 소영 등 호걸들의 솜씨 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두려움마저 느꼈다. 네 사람의 뱃사람과 활 쏘는 두 사람이 헤엄쳐 도망갔으니 반드 시 그들이 이 경과를 군주에게 알릴 것이다. 일단 지금은 우리가 승리하여 일이 잘 끝났지만 앞으로 더 맹렬한 공격이 퍼부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때 탄식하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분들이 저를 구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 를 구해 주신 것이 화근이 되어 군주와 해결지을 수 없는 원수가 되었으니 저의 마음은 몹시 아플 뿐입니다." 독수약왕의 말소리가 잔잔히 들려 왔다. "큰 배에 돛을 올려라." 주순이 황급히 선실로 들어 오며 말했다. "어느 곳으로 갈까요?" 소영이 대답했다. "강가로 접근시키시오. 우리는 물 위에서는 실력을 발휘치 못하 니 말이오. 만일 강적이 추격해 온다면 우리들은 언덕으로 올라가 싸워야겠소." 주순은 대답을 하고 선실에서 나와 사동을 불러 배를 출발시켰 다. 독수약왕은 소영을 힐끗 바라보면서 말을 꺼낼 듯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상팔은 계속 시청을 응시하면서, "당신이 많은 값을 낸다고 자신있게 말씀하셨는데, 나는 이 그림 이 값나간다는 말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습니다." "화성 시천도(時天道)는 오직 한 폭의 그림을 세상에 남겨 놓았 습니다. 한 폭은 옥선자의 화상이었고, 또 하나는 약간 파손된 중 성봉월도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내 줄 그림은 어느 것인지요." 시청은 머리를 흔들면서, "옥선자의 화상과 중성봉월도는 강호에 흘러 다녔는데 어느 곳으 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값으로 내 놓으려 하는 것은 옥선 자의 화상도 아니고 또한 중성봉월도도 아닙니다." 두구는 쌀쌀하게, "시천도는 다만 한 폭의 그림만 남겨 놓았는데 네 이미 두 그림 이 없다면 참말로 우리 중주이고를 조롱한 것이구나." 상팔은 손을 흔들어 두구를 막으면서, "그대는 시청이라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시청은 가벼운 탄식을 하고는, "감히 여러분들을 속이지는 못하겠습니다. 시천도는 바로 저의 조부이십니다." 두구는 냉정한 눈초리로, "여보시오, 그런 헛된 소리는 마시오. 무림 중에 그 시천도가 평 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 줄 아시오? 우리 중주이고 와 같은 의협적인 사나이도 아내가 없지만..... 자녀가 어찌 생길 수가 있단 말이오?" 상팔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친구, 중주이고의 눈은 조금도 속일 수 없단 말이야. 네가 옥석 을 구분할 마음이 있다면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 보시지." 시청은 열띤 음성으로, "여러분들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만 알고, 그...그렇게 된 까닭 을 모르십니다. 시천도께서 비록 끝까지 장가들지 않았다 하나..." 여기까지 말하더니만 갑자기 입을 꽉 다무는 것이었다. "아내도 없는 그에게 어찌 당신이 생겼단 말이오?" 시청은 길게 탄식하면서, "이것은 강호에 숨겨진 하나의 큰 비밀이었습니다. 이 비밀은 백 년 간이나 감추어졌던 것이니 저를 제외하고는 온 세상 사람 아무 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상팔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결국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렇게 우물쭈물 넘겨 버릴 작정 인가?" "에.... 시가(時家)의 자손이 되어 선조의 하신 일들에 대하여 는.... 비록 제위께서 저의 생명의 은인이시라 할지라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두구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우리로서는 무턱대고 믿을 수만도 없소." 상팔이 두구의 말에 맞장구치듯, "백 년 전의 일을 말하는데 뭐가 어떻게 되겠소?" 시청은 겸연쩍어 하며, "그렇다면 말씀드리지요."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틀림없이 시천도께서는 결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위께 서도 시천도의 주위에서 있었던 일을 더러는 들으셨을 것입니다. 옥선자와의 끊을 수 없던 사랑 후, 이름도 없는 어느 여인과 정을 맺어 그 여자는 남들에게 내세우지 못하는 아내가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시청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 다. 그는 울먹이면서 계속 얘기해 나갔다. "그 여자는 별다른 재주나 인물도 갖추지 못한 촌사람이었습니 다. 그러나 그 분은 일대를 누빈 화가였으며, 독특한 재주를 지녔 었습니다." 짤막한 몇 마디의 말에 거기 모인 군호 모두가 엄숙한 분위기 속 에 말려 들었다. 평소에 혼자서 잘난 척하던 독수약왕까지도 그 말을 듣고는 엄숙 한 표정을 지었다. 소영과 두구, 상팔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상팔은 일어나더니 차를 한 잔 따라서 시청에게 건네며, "시형! 지금 들려 주신 값진 이야기는, 옥선자의 화상보다 우리 에겐 더 중요하군요 자! 차나 한 잔 드시면서 천천히 말씀하십시 오. 이 흥정에서는 우리가 밑진다 하여도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시청은 눈물을 닦으며 눈을 크게 뜨고 소영을 힐끗 쳐다 보고는, "저와 같은 무능한 놈을 또 누가 믿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뛰어 난 재주와 무예와 모든 면에서 이름 떨친 시천도의 자손이라는 것 을......" 독수약왕은 가벼운 기침을 하면서, "장상(將相)은 원래가 씨가 없는 것이오. 자식이 아비보다 못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자! 보십시오. 저의 이런 꾀죄죄한 모 양으로도 절세가인의 여식을 둔 것을 보십시오. 시형깨서도 그런 일로 마음 상하지 마십시오." "아마 그 시천도께서도 생전에 여자관계가 매우 많았던 걸 보면 여염집의 자손과 다름없소. 결국 모계의 평범하고 저능한 기질을 타고났을 뿐이지......" 상팔은 그의 말을 듣고 급급히 말을 이어, "그 촌여자는 시형 선배의 향연(香煙)을 보존한 후예요?" "그 여인은 하찮은 산촌에서 이름없는 나무꾼의 딸로 태어났습니 다. 시천도는 떠돌아 다니다 발걸음이 그곳에 머물게 되었지요. 한 폭의 효일냉천도(曉日冷泉圖)를 그리기 위해 바로 그 농가에 머물 게 되었습니다. 반 년을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어느날 그 촌여자는 시천도의 재주에 반하여 정을 주게 되었습니다. 반 년 후, 시천도 는 그림을 완성시켜 놓고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리고 소식도 끊어 졌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시청은 숨을 몰아 쉬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그 촌여자는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용서받 지 못하여 실컷 두들겨 맞고는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여자는 어 린 핏덩이를 위하여 남몰래 갖은 고생을 다하며 살아 갔습니다. 고 향에서 쫓겨 나와 남의 집살이를 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식을 잘 길러 보려는 마음에서..... 그러나 그 여자 는 잘 얻어 먹지도 못하고 혹사만 당하다 결국은 꼬치꼬치 말라 죽 었습니다. 죽을 즈음에 그의 어린 자식을 불러 놓고 이제까지의 비 밀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아울러 그 여자가 고이 간직했던 한 폭의 효일냉천도를 자식에게 주면서 그 그림을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 보 라고......" 암담하게 긴 탄식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 불쌍해라. 그 시천도께서는 천하에 몹쓸 박정한 사람이 군." 부드럽고 맑은 음성이었다. 독수약왕이 깜짝 놀라 머리를 돌려, "얘야 언제 깨었느냐?" 하고 묻자 가느다란 음성으로 대답이 들려 왔다. "저는 깨어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천도에 대한 이야기 를 모두 똑똑히 들었습니다." 상팔이 탄식하며 한 마디 했다. "한 폭의 효일냉천도는 이미 그들 모자가 일생의 부귀영화를 누 린 것보다 낫다. 다만 애석한 것은 그들은 그때 시천도께서 그린 그림의 가치를 조금도 몰랐다는 것뿐."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상인은 이익만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은 가볍게 여기는군요. 당 신들 중주이고는 주옥명화가 만금을 주고도 못 산다는 것만 알 뿐 가련한 촌여자의 온갖 고난은 모르는구료! 그 효일냉천도는 어떠한 비싼 값을 주더라고 팔지 마십시오. 그 그림의 애절한 사연이 얼마 나 값진 것이오. 시천도께서 한 번 가고 소식이 없었으니 그가 친 히 그린 그 명화는 그 여자의 유일한 위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생각나면 그림을 보고 상사의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잊었을 것입니다." 상팔은 멍청히 듣고 있다가 한 마디 했다. "낭자의 말이 옳군." "그 촌여자가 병들어 죽은 후에 그 여자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모친의 유언대로 그림을 가지고 아버지를 찾으러 나섰습니다. 이럭 저럭 십 년이 지나는 동안 소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십 년의 풍상을 겪고 난 후 몸마저 몹시 야위어졌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어느 저자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전에는 어머니의 유언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 찾기 를 뒤로 미루고 조그만 가게를 차렸습니다. 요행히 영업이 날로 번 창하여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태기가 있어 아들 을 낳았던 것입니다." 말소리가 가늘어지더니 잠시 그쳤다가 다시 계속되었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상팔은 술병을 들어 시청의 잔에 부어 주며 웃으면서 말했다. "급히 말할 필요 없습니다.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시청은 침통하게 다시 이었다. "제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부친께서는 지병이 다시 재발하여 저 를 베갯 머리에 불러 놓고는 이제까지 있었던 여러 일에 대하여 상 세한 말씀을 하시고는 이 효일냉천도를 제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그만......" 그는 말을 뚝 그쳤다가 한참 후 다시 이었다. "부친께서 겪으셨던 일을 거울삼아 저는 곧 마음을 달리했습니 다. 먼저 한 분의 스승을 모셔다 무술을 배웠으며, 이 년 후에는 강호로 들어 갔습니다. 제가 집을 나설 때엔 약관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환갑에 이르렀습니다." 상팔은, "시형의 고생과 효심은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시청은 머리를 흔들면서 굳은 표정으로,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어찌 훌륭하다 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볍게 탄식하고는, "저는 수십 년의 세월을 소비하며 조부를 찾으려고 했으나 조부 는 영영 못 찾았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많은 일화를 들었지요." 상팔은 마음 속의 생각을 추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근 백 년 전의 일이니 화성(畵聖) 시천도는 시형의 아버지가 병 석에 있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시형께 서 천하의 구석구석을 찾아 다닌다 한들 그를 찾을 방도가 있었겠 습니까?" 좌중은 조용하고 다만 시청이 계속하여 말하는 소리만 들렸다. "저는 마음 속으로 선조께서 이미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셨 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혹시 하고, 요행의 생각을 가졌 던 것입니다. 선조의 기절할 만한 무공과 기정산수(奇情山水)라는 성정(性情)은 보통 사람보다 그 수명이 훨씬 길 것이라는 희망으 로..... 그리고 결국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의 시체를 매장한 곳이 라도 찾아 보려 했습니다." 상팔은 뒤를 이어, "내가 알기로는 시형선배가 묻힌 곳은 무이산으로 알고 있는데.. 시청은 얼른 말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무이산 선자 봉우리입니다. 저는 그것을 알아낸 후 에 즉시 무이산 선자 봉우리로 달음질쳤습니다. 그러나 제가 본 것 은 다만 허허벌판과 산봉우리뿐이었습니다. 그 전설에 있는 천도화 보까지도 일체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선자봉상 에서 삼일밤을 노숙하면서 애써 찾았습니다. 조그마한 바위까지도 자세히 조사하여 보았으나 여전히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상팔이 말을 이었다. "화성 시천도에 대하여는 내려 오는 말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 나 그것은 전설에 그칠 뿐입니다. 그는 일생 동안 사람과의 왕래가 아주 적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알아낼 사람이 몇이 나 되겠습니까?" "삼 일 후에 저는 선자봉을 떠나 다시 강호를 찾아 마침내는 한 가닥의 비밀을 찾아 내고 말았습니다." "시노선배의 전설에 대하여 저는 오히려 들은 것이 대단히 많습 니다. 시형이 말씀하시기만 한다면 제가 자료를 제공해 드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말씀드리지요." 띄엄띄엄 말하고는 다시 이어, "제가 찾아 낸 비밀이라는 것은 저의 선조께서 돌아가시며 남기 신 것들에 대하여 알아 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폭의 옥선자의 화상과 반 폭의 중성봉월도를 남겨 놓으신 외에 또 직접 손으로 쓴 천도무록(天道武錄)이라는 책이 한 권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이 누구의 손에 들어 갔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러나 동정수구 방수령이 가져 갔다더군요 선조께서는 살아 계실 때 사람들 앞에 나타나시지 도 않으셨고 돌아가신 후에는 뼈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까 뼈를 묻은 분묘조차도 없는 셈이지요. 저는 한 폭의 효일냉천도 를 제 몸에 지니고 있을 뿐,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다른 유품들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에 그것들을 찾기를 희망했지 요. 그러다가 동정수구에 적을 두고 조그만 두목 자리에 앉아 버렸 지요." 소영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물었다. "당신 할아버지가 남겨 놓은 천도무록을 찾아 냈나요?" 이 물음에 시청은 조용히 머리를 흔들면서, "거기에 대해서 저는 아무런 단서조차 찾아 내지 못했습니다. 다 만 한 가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을 뿐이지요." 상팔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일인데요?" "동정수채 방채주의 무공은 해가 갈수록 강해만 갔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아들은 말할 수 없이 큰 실력을 가졌습니다. 물론 그 의 아버지보다 더 훨씬.... 그 소채주는 집을 떠나 무술을 배운 것 이지요. 비록 제자가 선생보다 다소 낫다 하더라도 그 차이가 현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속에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으 리라 생각됩니다." "동정수구 방수령은 죽은 지 이미 십 년이 넘었는데....." "그렇습니다. 방총타주는 십삼 년 전에 죽었습니다. 강호에서 말 하기는 그가 갑작스러운 병에 걸려 죽었다고들 하지요. 그러나 그 것은 방가(方家)가 고의로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 방노채주는 밤 중에 살해당한 것입니다. 머리까지도 실종되어 찾지를 못했지요." "그럼 그를 죽인 자는 누구란 말인가?" "안타깝게도 그를 아직 찾아 내지 못하고 있지요. 다시 그를 찾 아 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상팔은 탄식을 토하며, "사람이 죽자 기세가 떨어졌지요. 그 방노채주가 죽은 후부터 동 정호의 기업까지도 동시에 강호상에서 없어졌지요." 시청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노채주가 죽은 후에 원래는 방소채주가 총타주의 지위를 계승했 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정수채의 해산을 선포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실인즉 그와는 아주 반대였습니다. 그 방소채주의 뛰어난 무공은 아버지보다 훨씬 위였습니다. 분명히 동정수채를 해산한다 고는 말했지만 암암리에 실력을 확충했던 것입니다. 다만 그가 하 는 짓이 교묘하기 짝이 없어 강호에서는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는 사람이 적을 뿐이지요." "그러면 방소채주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방소채주는 사해군주(四海君主)라 자칭하는 사람입니다." "아! 과연 뜻밖이군." "신분이 탄로나면 혹 사람들에게 해를 입을지 모릅니다. 저는 군 주의 부름을 받고 일종의 만성 독약을 복용했습니다. 만일 여러분 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는 벌써 강 속에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아! 그랬었군요 당신이 잘 조식하기만 하면 우리들이 힘껏 시형 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 군주는 강제로 저에게 독물을 먹 였으며 또한 제 정신에도 간계를 꾸며 놓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저 를 죽이려 하지 않는 것은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 니다." 이 말에 독수약왕은 단호하게, "관계 없소. 나는 당신을 위하여 몸 속에 있는 독을 없앨 자신이 있소." 시청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저는 그 뜻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하며 일어나더니 독수약왕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독수약왕은 만류하며, "사양할 것 없소. 대체 그가 당신에게 무슨 독약을 먹였는가를 알려만 주오. 만일 모른다면 시간을 좀 허비해야 할 것이오." 소영은 독수약왕을 힐끗 바라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아주 변한 것이 아닌가?' 시청은 다시 탄식하는 소리로, "저는 강제로 독약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중한 상처를 입었 습니다." 독수약왕은 담담하게 미소지으며, "당신이 이 시각에 당장 죽지만 않는다면 나는 당신의 생명을 구 할 자신이 있소." 이때 선실 밖에서 주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들,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상팔은 몸을 재빨리 일으키더니 먼저 선실 밖으로 뛰어 나가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여덟 척의 쾌선이 이곳으로 급히 오고 있습니다." 상팔이 머리를 들고 쳐다 보니 과연 여덟 척의 쾌속선이 바람처 럼 몰려 오는 것이었다. "법석거리지들 말아라. 사공들에게 조용히 하도록 일러라. 쳐들 어 오는 배는 우리들이 상대하겠다." 말하는 사이에 소영, 두구, 독수약왕은 벌써 한 줄로 서서 걸어 나왔다. 여덟 척의 쾌속선은 기세를 떨치며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이 타고 있는 큰 배에 다가 왔다. 그러더니 둥그렇게 큰 배를 둘러 싸는 것 이 아닌가. 소영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이 여덟 척의 쾌속선이 여덟 군데에서 화약을 뿜는다면 상대하 기가 좀 힘들게 생겼는걸.' 주시해 바라 보니 여덟 척 쾌속선의 갑판 위에는 각각 남빛 투구 를 쓴 네 사람의 무사가 서 있었다. 그들은 손에 긴 창을 쥐고 있 었다. 여덟 척의 쾌속선은 소영 등이 탄 큰 배를 둘러 싼 후에는 더 이 상의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무엇을 기다리는 듯- 다만 배 안에서 시청의 목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쾌속선 위에 있는 무사들이 바로 사해군주 손 아래 있는 사람들 입니다. 남색옷을 입은 패거리들이 그 중 가까운 사람들이지요." "보아하니 사해군주가 몸소 나타난 듯합니다." 상팔은 여유있게 말했다. "그것 참 다행한 일이로군. 도적도 잡고 괴수도 잡아야지. 사해 군주가 몸소 나타났다면 우리가 강적을 무찌를 기회가 생긴 것이로 군." 여덟 척의 쾌속선 위에는 서른두 명의 남색옷을 입은 무사가 줄 지어 서서 눈동자를 굴리며 일제히 소영 등이 타고 있는 배 위를 주시했다. 그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쥐죽은 듯 조용히 서 있었다. 한눈에 이 들이 훌륭한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독수약왕은 소영을 힐끗 바라 보면서, "우리의 배는 지금 강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물 위에서 그들과 싸운다면 사실상 불리합니다. 노부의 뜻은 사해군주가 아직 도착하 지 않은 틈을 타서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배를 버리고 언덕 위로 올라 격전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소영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냉면철필 두구가 말을 가로채었 다. "그 강안은 모두 백화산장(百花山莊)의 땅이오. 우리가 언덕으로 올라가면 그곳에 있는 무사의 공격을 받을 것이오." 상팔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써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한 일인데..... 이 강 근처는 백화산장의 세력이 미치는 곳인데.... 그 사해군주가 이곳에 와서 깃발을 날리 는 것을 심목풍이 모를 리가 없는 일인데.... 또한 그를 그대로 내 버려 둘 리도 없고." 독수약왕은 이 말에, "그 심목풍의 사람됨은 사해군주가 강에서 이처럼 날뛰는 것을 보고 그냥 둘 성질이 못 되지." "사실이 그렇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우렁찬 각적소리가 강변의 정적을 깨뜨렸다. 소영 등은 이 각적소리로 보아 여덟 척의 쾌속선이 곧 공격해 올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여덟 척의 쾌속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배 안에서만 시청이 떠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해군주가 나타났다." 소영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머리를 들어 바라 보니 과연 남쪽 강 위에 한 척의 오색 거선이 천천히 달려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오색 거선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속력이 더딘 듯하나 실은 대 단히 빨라서 벌써 사, 오 장에 이르렀다. 그러더니 두 척의 쾌속선 이 재빨리 양쪽으로 갈라섰다. 상팔은 거선을 힐끗 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엄청나게 큰 배로구나.' 상팔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배 안에서 또 시청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선 위에는 모두 다섯 개의 돛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색 거 선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지금 몇 개의 돛대 위에 기를 걸었습니 까?" 상팔이 다만 하나의 흰색 돛대 위에 흰색의 깃발 한 장만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다만 한 장의 흰색 깃발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그 위에서 두 번의 각적소리가 난 후 잇따라 종소리와 북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두구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욕을 했다. "빌어먹을 녀석, 진짜 군주가 온 것처럼 가장하는군." 소영이 웃으며 두구의 말에 덧붙였다. "그 녀석은 오히려 사해군주보다 대담하게 까부는군." 그럴 즈음 배 문이 서서히 열리고 그 안에서 네 사람의 황의를 걸친 동자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네 사람의 황의동자 뒤에는 한 사람이 바싹 다가 오고 있었다. 몸에는 인괘도포(人卦道袍)를 걸쳤 고 손에는 불진(拂塵)을 들고 있었다. 소영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저 사람의 옷을 보니 분명 사해군주는 아닌 것 같군.' 이렇게 생각을 더듬고 있을 즈음, 그 도인은 벌써 배 위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네 사람의 황의동자는 양쪽으로 갈라섰다. 소영은 자세히 그 도인의 모습을 훑어 보았다. 소영의 눈에 들어 온 도인의 모습은 말대가리 같은 긴 얼굴에 다섯 갈래의 긴 수염을 늘어뜨렸고 인괘로 채색한 수를 놓은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 입 은 모양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는 손에 있는 불진을 한 번 흔들어대더니 소영 등을 주시하면 서, "여러분 중 어느 분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오. 대답해 보시오." 상팔은 힐끗 소영을 쳐다 보았다. 소영은 약왕을 쳐다 보았다. 독수약왕은 낮은 소리로, "저 도인의 얼굴 꼴을 보니 대단히 간교하게 생겼군. 소대협의 사람됨은 군자와 같아 말로써는 그의 적수가 안 될 테니 상형이 한 번 나아가 보시오." 소영은 약왕의 말을 듣고 웃으며, "좋소! 상형이 수고 좀 해 주시오." 상팔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천천히 걸어 나가 손을 모으고는, "도장께서는 무슨 가르치심을?" 그 도장인의 두 눈 속에서 예리한 빛이 번뜩였다. 상팔을 쳐다 보고는, "귀하는 무어라 칭호하오?" "저의 성은 상(商)입니다." "이름은?" "일·이·삼·사·오·륙·칠·팔, 하는 팔입니다." "아! 중주이고 중의 노대셨군요. 빈도 실례했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저희들이야 하찮은 장사치인데 예절을 지켜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소리가 가늘어지더니 뚝 그쳤다가는 다시 이어, "도장께서 저의 이름을 다 아셨으니 저도 또한 도장의 법호를 듣 고 싶습니다." "빈도야 강호에 있지 않았고 대산에 깊이 묻혀 있어 말씀드려도 상대협께선 모르실 겁니다. 그러니 숫제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도장께서는 이미 삼계(三界) 밖으로 뛰쳐 나오셔서 오행중(五行 中)에 계시지 않았으니 방외지인(方外主人)은 무엇 때문에 강호 안 으로 들어 오셨나를 잘 모르겠습니다." "군주께서 맞이하러 오시어 그 함정을 물리치기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산에서 내려와 그의 한 팔이 되었지요." 상팔은 여기까지 말을 듣고 손을 모으고는, "원래 그랬었군요." 그 도인은 왼손을 가슴에 갖다 대고 예를 올리고는, "빈도는 강호에 들어와 중주이고의 명성과 장사 솜씨가 뛰어나다 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상형이 이곳에 계시니 또한 두형도 함께 계 시겠군요?" 두구는 이 물음에 냉랭한 목소리로, "바로 저올시다. 도장은 무슨 가르치심을?" 그 도인은 두구를 쏘아 보며, "빈도 대명을 앙모한 지 오래입니다." 이 말에 두구는 같잖다는 듯이, "송구스럽습니다." 도인은 살짝 웃어 보이더니 눈을 소영이 있는 곳으로 돌리며, "시주께선 누구십니까?" 독수약왕은 화난 목소리로, "이 사람은 정말 간사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군, 우리의 내막은 샅샅이 물으면서 자기의 이름은 밝히질 않으니.... 더 이상 우리도 묻는 말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 소영도 속으로, '그 말은 맞는 말이로다.'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을 때, "하찮은 무명 소졸입니다." 도장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다시 독수약왕을 쳐다 보며, "귀하의 형모를 빈도는 들은 듯도 한데 반드시 유명한 인물이시 지요?" 독수약왕은 이 말에 냉소하여, "지나친 칭찬을 하시는구료." 짤막하게 잘라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도인은 이 말은 들은 체 도 않고 다시 물어 왔다. "시주의 칭호는 무어라 하시나요?" "도인의 칭호는 무어라 하십니까?" 도장의 눈에서는 빛이 번쩍이더니 차갑게 독수약왕의 얼굴을 주 시했다. "빈도는 소요자(逍遙子)입니다. 시주의 존성 대명은?" "노부는 병을 고치는 사람입니다." "의원이시군요?" "기운이 별로 좋지 않아 줄곧 약을 쓰고 있습니다." 상팔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도장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이제 저와 이야기합시다. 우리는 장사를 해도 사람들과는 아주 사이좋게 지냅니다." 소요자는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사람이었다. 독수약왕의 그와 같 은 심한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담히 웃으면서, "빈도는 군주의 명을 받들어 상형과 한 가지 의논할 일이 있습니 다." 상팔이 귀를 기울이며, "매매에 관한 일입니까? 상업에 대한 일이라면 흥미거리입니다. 남느냐 아니면 손해냐 하는 것들 말입니다.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실은 저의 군주께서 이번에 강호에 출도하시어 한 가지 일을 하 시려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산을 떠나기를 네 번이나 권하셨 던 것입니다." 상팔은 통쾌하게 웃으면서, "옛날 제갈공명 같은 분도 삼고초려에 불과했는데 도장께선 네 번이나 청을 받으셨다 하니 정말 놀랄 일이군요." 도인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빈도는 제갈공명처럼 자거(自居)하지 않았으니 옛사람의 행실과 비교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도장의 재능과 학식은 참으로 훌륭하시니 절대로 손해 보는 장 사는 안하시겠지요. 자! 어서 말씀이나 하십시오." 소요자는 실로 보통 사람보다는 큰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상팔의 비웃음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원래 영웅은 오만한 풍골이 있어야 하는지라 빈도는 종래부터 오기있는 영웅 인물들을 공경해 왔습니다." 이 말에 상팔은 움찔하며 속으로, '이토록 담이 큰 사람과 상대하기란 힘든 일이군.' 다시 소요자가 냉랭하게 말했다. "삼 일 전 저의 군주께서는 이곳을 지나가셨지요. 그때 백학산장 의 심대장주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 있지요." 이 사실은 소영 등이 알고 싶었던 일이라 모두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소요자는 잠깐 말을 멈추고 소영과 상팔을 쳐다 보더니, "빈도는 좋은 얘기로 말을 시작했지요. 우리는 피차간 무림의 동 도요, 강호의 벗들인데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기분을 상하십니까 하고요. 그러나 심목풍은 사람을 깔보아 빈도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소. 또한 빈도의 말은 무엇이고 묵살해 버려 마침내 저희 군주를 노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싸움을 하게 됐 습니다." 상팔은 이 말에 수긍이 가는 듯 속으로, '그들 배가 쾌속선을 보고 성급히 달아난 것도 이상할 것이 없구 나. 삼 일 전에 이곳에서는 싸움이 벌어졌었겠군.' 여기까지 생각을 한 상팔은, "도장의 지략이 훌륭하시어 큰 승리를 거두셨겠군요." "심대장주는 물에서의 싸움이 익숙하지 못한지라 우리의 싸움은 반 나절 만에 끝났습니다. 또한 그들의 배는 크게 상하였고 백화산 장의 백에 가까운 부하들이 강물에 빠져 물결 따라 흘러 갔습니다. 심대장주는 몇몇 부하의 보호를 받으며 조그만 조각배를 타고 도망 쳐 간신히 목숨만을 건졌습니다." 독수약왕은 심목풍과의 친분이 두터운지라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끼여 들며 물었다. "그는 부상을 당했습니까?" 소요자는 담담히 웃으며, "심대장주의 무공에 빈도는 크게 탄복했습니다. 비록 크게 부상 을 입었을망정 그는 우리의 쾌속선을 계속 격침시켰고 또한 우리열 두 명의 고수들을 다치게 한 후 강을 건너 언덕에 오르셨습니다." "누가 그를 다치게 했습니까?" 소요자는 이 물음에 잠깐 주춤하더니 다시 여유있는 말투로, "맹렬한 싸움이 벌어져 서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운지라 누가 심대장주를 상하게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심대장주 는 빈도를 깔보지 않은지라 저와 삼십 합을 교수(交手)하여....." "당신의 무공으로 심목풍을 이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데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삼십 합을 교환하는 동안 빈도도 또한 그에게 한 번도 지지 않았지요." 상팔은 이 말에 크게 놀랐다. '아니 그의 말이 참말이라면 이 사람의 무공은 정말 놀랄 만한 솜씨가 아닌.... 이즈음 무림고수 중에서 삼십 합을 접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소요자는 독수약왕을 주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귀하께서 이처럼 심대장주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보니 두 분 사 이의 정분이 매우 두터운 모양이구료." "당신이 정말 심목풍과 접전하여 삼십 초를 견디었다면 마땅히 무림 중의 고수라 칭하기에 충분합니다." 소요자는 담담히 웃었다. "만일 심목풍이 참패하지 않았다면 저의 군주와 빈도는 벌써 이 곳에서 쫓겨나고 말았을 것이외다." 소영은 소요자의 말이 사실일 것이라고 인정했다. 독수약왕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네들은 크게 승리를 거둔 것이로군." 소요자는 느긋이 웃어 보였다. "며칠 전의 싸움은 심목풍에게 운이 나빴던 싸움이라 할 수 있지 요. 만일 우리가 그에게 패하였더라면 이곳 귀주땅 강물 위에 머무 를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잠깐 그쳤다가 다시 말했다. "심목풍이 다시 강호에 나와 거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신들 중주이고도 이미 알고 있겠지요?" 이 사람의 말이 어찌나 교묘한지 강호 일에 모르는 것이 없는 상 팔로서도 도무지 그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그는 급히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우리 형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 까닭에 폐군주께서는 스스로의 청빈한 생활을 버리고 강호 에 행도하기로 결심한 것이외다." 상팔은 웃으며 유감이라는 듯이 말했다. "당신네 군주께서 기왕 심목풍 때문에 강호에 출도하셨다면 이 첫 번 싸움에서는 백화산장의 우두머리들과 화합을 했어야 했을 것 이오." 소요자 역시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맞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폐군주께서는 곧 귀주 강변에 장소를 정하고 머물고 계신 것입니다." 68. 오색 거선을 타고 나타난 소요자 "이 고집불통 노도(老道)가 이랬다 저랬다 말하니 속심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상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들어 보니 바로 정남방에 또 여 덟 척의 북 모양의 쾌선이 물결을 헤치며 오고 있었다. 상팔은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이 고집불통이 일부러 시간을 끌어 그들로 하여금 완전 히 배치를 하게 하였군.' 상팔은 생각을 굴리며 혼자 소리를 내어 웃었다. 소요자는 과연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상팔의 웃음소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모습도 조용히 오색 찬란한 거선 위에 서 있 었다. '이 능청꾸러기가 정말 시침을 떼고 있군. 하여튼 말이나 건네보 자.' 상팔은 싸늘하게 코웃음치며, "도장께서는 아주 악독한 음모를 꾸미고 있군." 하고 넌지시 말을 걸었다. 소요자는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상형은 말씨가 아주 정중하시군요 빈도가 어찌 대답을 하지 않 겠습니까? 앞으로 많은 가르침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도장의 역원이 이미 당도하여 모두 배치되었는데도 시치미를 떼 시렵니까?" 소요자는 여덟 척의 쾌선이 다가 오는 것을 힐끗 바라 보고 담담 히 미소를 지으면서, "저의 군주는 손님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더욱이 당신들 중주이 고에 대해서는 존경하고 사모하시는 터입니다. 빈도의 낯을 보아 주신다면 오색 거선에 올라와 주십시오." 상팔은 머리를 돌려 소영을 힐끗 돌아 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은 이미 겹곁이 포위되어 곤란한 지경에 처하지 않았습니 까? 우리들이 배를 탄 채로 그들과 대결하느니보다 차라리 오색 거 선 위에 올라가 승부를 가림이 좋겠습니다." 듣고만 있던 독수약왕이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저 애의 큰병이 이제야 나았는데 지금 저 배로 올라간다는 건 좋지 않은데....." "정말 싸우기로 한다면.... 이번에는 불리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는 강 속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되기가 십상입니다. 이 배에 더 이상 머물러 있기 보다는 차라리 채색선에 올라가 기회를 엿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두구의 이 말은 마치 독수약왕을 힐책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옳 은 소리였다. 독수약왕은 가볍게 기침을 하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도인에게 일장 내로 접근할 수 있다면 독을 쓸 수 있을 텐데....." 이때 갑자기 소요자의 고성이 들려 왔다. "삼 일 전 심목풍이 친히 십여 척이 넘는 쾌선과 거선을 거느리 고 왔지만 일거에 모두 침몰당하였다. 심목풍만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지만.... 못 믿겠나? 만일 믿어지지 않는다면....좋다! 빈도가 삼 일 전의 일을 재현하여 보이겠다." 천신만고 끝에 남궁옥의 생명을 구했는데 다시 싸움을 하게 된다 면 배는 반드시 적에게 파선될 것이고, 남궁옥 또한 물에 빠져 죽 고 말 것이다. 소영은 그녀의 정의감과 선량한 마음씨를 생각하며 얼굴을 돌려 상팔을 보았다. "상형, 그들이 먼저 남궁옥 부녀와 그 시(時)라는 사람을 놓아 주기만 하면 무슨 조건이든지 들어 준다고 하시오." 상팔이 눈썹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형님....." 소영은 손을 내저어 말을 가로 막았다. "필요 없소. 내 말대로 하시오." 그의 태도는 전에 없이 강경했다. 상팔은 독수약왕을 힐끗 돌아 보면서 마땅찮은 듯이 떠벌렸다. "우리 형님께서 약왕에게 지극한 인정을 베풀고 계시오." "노부는 평생 잊지 않고 은혜를 보답하겠소." 독수약왕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잠자코 있던 두구가 쏘아붙였다. "당신같이 나쁜 일을 부지기수로 한 늙은이가 이렇듯 우리 형님 의 자비하신 인덕을 받았으니 참으로 복도 많구료." 독수약왕의 성격으로 볼때 중주이고에게 연달아 희롱당했으니 노 여움을 터뜨리고도 남을 텐데 그는 이상할 만큼 꾹 참고 있었다. 그의 심중은 착찹하였다. 이 시각 사해군주의 뱃무리들과 충돌한 다면 아무리 무공이 높은 사람일지라도 물고기밥을 면치 못하리라 는 것과 호협지기로 목숨을 걸고 구해 주려는 소영의 인덕을 생각 하자 심중의 울화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중주이고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상팔은 얼굴을 들어 소요자를 바라 보고 외쳤다. "도장께선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신지 똑똑히 말해 주십시오. 그리 하여 우리 형제들이 상의하고 일을 처리하도록 하여 주셨으면 합니 다." 소요자는 고개를 약간 돌리며 빙긋이 웃었다. "저의 군주께서는 당신들 중주이고에 대해서 지극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당신들은 저의 군주께서 몽매에도 찾아 헤매던 영웅들이 신 것입니다."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상팔은 재미있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도장께선 그럼 우리들을 사해군주의 수하에 두고 싶다는 말씀이 시요?" "바로 맞았소." 소요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상팔은 잘라 말했다. "중주이고는 오만하여 도장의 말씀을 듣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래도 소요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영웅 인재는 모두 그런 법입니다. 빈도도 일찍이 그런 것을 알 고 있었소이다." 상팔은 심중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도 일찍이 생각했었다고? 그렇다면 그는 벌써 우리들을 제복 (制服)시킬 방법을 잘 생각해 두었겠군.' 그는 머리를 들어 오색이 찬란한 거선을 바라 보았다. "우리 형제는 비록 교만한 성격은 있지만 우리들보다 강한 사람 에 대해서는 항상 존경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니 도장께서 우리를 탄복시킬 방법이 있다면 보여 주십시오. 그때 우리 형제는 기꺼이 고인(商人)을 뵈오러 그 오색 거선에 올라가겠습니다." "좋습니다. 빈도는 쌍수로 환영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군주께서도 두 분을 뜰에 나가 맞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한 가지 조건이 남았습니다." 소요자는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응시하며 물었다. "무슨 조건입니까? 빈도가 응낙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야겠지 요." 상팔은 자기 일행을 둘러 보며, "그거야 매우 간단한 일이지요. 우리 형제는 사해군주를 뵈러 갈 것이오. 다만 도장께서는 그 전에 이 배에 있는 사람들을 놓아 주 시기 바라오." 그 말을 들은 소요자는 잠시 동안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두 손을 깍지끼고 기지개를 켜며 응낙해 왔다. "좋소, 두 분의 뜻대로 하겠소." 지금까지 잠자코 앉아 있던 소영이 가슴을 내밀며 한 마디 했다. "저도 배에 올라 당신의 군주를 뵙고자 합니다." "형님, 쓸데없는 고생을......" 두구는 작은 소리로 말하며 소영을 쳐다 보았다. 소영은 묵묵부답이었다. 소요자가 다시 소리쳤다. "그대는 누구요? 우리 군주의 오색 거선은 다만 영웅적인 인물만 환영한단 말이오. 일개 이름도 없는 사람이 이 배에 오르려는 생각 은 꿈에서라도 망령된 짓이오." 소영은 앞으로 나서며, "강호상에 어찌 헛이름뿐인 사람이 있겠소." 하고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귀하는 도대체 뉘시오?" "소영이오." 잘라 말하는 소영의 말에 소요자는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되물 었다. "뭐? 당신이 소영이라고....?" "그렇소." 소영은 눈도 들지 않은 채 대꾸할 뿐이었다. 소요자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빈도가 산을 떠난 후에 소영이라는 사람이 백마쾌검(白馬快劍) 으로 무림을 진동시킨다는 말을 들었는데.... 바로 당신이란 말입 니까?" "도장께선 나를 못 믿겠다는 말씀입니까?" 소요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소영은 나이가 어리면서도 영특하고 외모가 훤칠하게 잘났다고 무림에서 말들 하더니만 정말 그렇군. 그런데 당신은 생각했던 것 보다도 더 어린데....." 소영의 표정은 잠시 근엄해졌다. "도장께선 제 실력을 보고 싶으십니까?" "소영, 이 자리에서 본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독수약왕이 팔을 내저으며 완강한 태도로 나왔다. 그러나 소영은 한번 힐끗 바라보고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약왕께선 선실로 들어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겨 앉아 있던 독수약왕은 몸을 돌려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중주이고는 멀거니 서 있었다. 소요자는 갑자기 쾌활한 소리로 말했다. "성함을 들어온 지는 오래되었지만 애석하게도 만날 기회가 없었 습니다. 소대협께서 친히 한 수 해 주시어 빈도의 안계(眼界)를 넓 혀 주신다면 다시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중주이고는 소영의 행동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미 일이 벌어진 것을 알고 잠자코 방관만 하였다. 소영은 팔을 젖혀 칼자루를 꽉 쥐면서 물었다. "도장께서 보고 싶으신 것은 무엇입니까?" 소요자는 미소를 지으며 소영을 넌지시 건너다 보았다. "소형은 쾌검으로 강호에 그 이름이 자자하니 빈도는 그 검법을 보고 싶습니다." 소영은 이미 운기하고 나서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좋소 당신의 안계를 넓혀 드리리다. 절묘한 무림의 회선검초(廻 旋劍招)를 보시오." "빈도는 다만 검초(劍招)의 이름만 들었지 보지는 못했습니다." "자, 똑똑히 보시오." 그는 곧 오른팔을 휘둘렀다. 칼집에서 빠져 나간 장검은 씽! 하 는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았다. 횡으로 날아간 장검은 때에 따라 서 언제든지 낙하할 기세로 요동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훌륭한 회선검이로다." 소요자는 소영의 검법에 넋을 잃었다. 여음을 길게 빼며 허공을 가르던 장검은 돌연 뱅그르르 돌더니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동시에 흰빛이 번쩍이더니 이어서 참혹한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모든 사람들의 눈은 한 곳으로 쏠렸다. 방금까지 쾌선 갑판 위에 서 있던 남의의 대한 하나가 나둥그러지며 강물 속으로 빠졌다. 남의의 대한을 찔러 죽인 장검은 본래의 궤도대로 돌아서 소영 옆으로 날아 왔다. 오른손을 펼친 소영은 날랜 동작으로 칼자루를 잡았다. 그 세속 을 놀라게 하는 일초의 회선검은 소요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 렸다. 그뿐만 아니라 상팔과 두구까지도 경이감을 금치 못하는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채 서 있었다. 소영은 장검을 칼집에 꽂은 후 담담히 웃으며 물었다. "저의 검초가 어떻습니까? 오색 거선 위에 올라 갈 만한 자격이 있다고 보셨습니까?" "강호상에서 소대협의 이름만 듣고도 놀라는 사람들이 하나도 이 상할 것이 없군요." 소요자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담고 소영을 쳐다 보았다. "그건 과찬이십니다." 소요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가라앉은 음성으로, "소대협은 이 일초의 회선검법에 의하여 이미 저의 군주를 뵈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무엇입니까?" 소영답지 않게 성급한 태도로 따졌다. "빈도는 저의 군주께서 일찍이 세우신 아주 나쁜 규칙을...." "그게 무슨 규칙인데요?" 소영의 마음은 의문 속에 싸여 급급할 뿐이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처음으로 저의 군주를 뵈옵는 사람은 누구 를 막론하고 일종의 형구(刑具)를 머리에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귀군주께서는 그토록 애재(愛才)를 목마르게 기다리신다면서 애 법(愛法)은 너무 지나치시군요." 소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소요자는 그의 태도를 훑어보고 나서 가볍게 기침을 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일로 저의 군주를 책하실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규칙은 이미 세워진 것이니 빈도가 세 분께 사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두구가 드센 태도로 나섰다. "우리가 반드시 그 오색 거선 위에 올라가야만 군주를 만날 수 있습니까?" 소요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우리가 굳이 가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갑자기 소요자는 파안대소하였다. "빈도는 일찍이 중주이고가 약속을 잘 지키기로 무림 중에서 이 름을 드날린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설마 한 번 허락해 놓고 나서 거절할 리가 있을라구요." 두구는 여전히 드세게 나왔다. "우리가 배에 오를 것을 허락한 것은 틀림없지만 형구를 쓰겠다 고는 하지 않았소." 소요자는 두구의 기세에 눌렸는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서 있더니 조용한 어조로, "세 분께서 형구를 쓴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의 형식에 불과한 것이니까....." 하고 말을 끊었다가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태도는 매우 신중하였다. "세 분이 형구를 쓰고 배에 오르는 것은 저의 군주께 경의를 표 하는 것이고, 또 저의 군주께서 세 분을 상면코자 하는 것은 제위 의 재능을 사랑하심이니 자연 양편이 피장파장 아니겠습니까."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소영은 남궁옥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였으 므로 더 이상 시간을 끌어도 도움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 다. 고개를 번쩍 들고 그는 즉각 입을 열었다. "무슨 형구를 써야만 하는 건지 도장께서 설명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소요자는 쾌활하게 웃었다. "한 가닥의 가느다란 쇠사슬에 불과합니다." "좋습니다." 소영은 즉시 응낙했다. "소대협의 성격과 쾌활한 말씀, 진실로 빈도는 경탄해 마지 않소 이다." 소요자의 칭찬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은 채 소영은, "그러나 저에게도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고 말끝에 힘을 주었다. "말씀하십시오." 소요자는 갑자기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들은 이 쾌선이 먼저 이곳을 떠나가는 것을 보아야만 형구 를 쓰고 오색 거선 위에 오르겠습니다." 눈썹을 잔뜩 찡그린 소요자가 물었다. "그 배 안에 어떤 사람이 있길래 그처럼 중요시합니까?" "어떻든 간에 대답만 하시오. 또 무슨 딴 수를 생각해 내려는 건 아니겠지요?" 두구는 소요자를 쏘아 보았다. 소요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빈도는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오." 소영이 담담한 태도로 대꾸해 주었다. "이제서야 막 큰 병이 나은 여자가 있습니다." 소요자는 빙그레 웃었다. "원래 영웅이란 매우 다정다감한 것입니다. 빈도가 어찌 허락하 지 않겠습니까." 소영은 재빨리 재차 다짐하였다. "우리는 반드시 쾌선이 이곳을 떠난 후에야 형구를 쓰고 배에 올 라갈 것입니다." 돌연 소요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것은.... 그것은...." "저는 한 번 말한 젓은 반드시 실천합니다. 쾌선만 떠나 보낸다 면 스스로 형구를 쓸 것입니다." "좋소." 소요자는 힘주어 말하고 중주이고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두 분의 뜻은 어떠시오?"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우리 형님이 응낙하신 일이라면 화약을 지고 불에라도 뛰어들겠 소. 우리들도 역시 허락합니다." "그러면 빈도가 한 척의 작은 배를 마련하겠습니다. 세 분께서는 그리로 옮기시어 쾌선이 떠나도록 하여 주십시오." 소요자가 말을 마치고 손을 들어 흔들자, 즉시 한 척의 배가 소 영 일행에게로 쏜살같이 다가 왔다. 물결을 가르며 내달아 쾌선 앞 에 와서는 멈추었다. 그 배에는 노를 젓는 건장한 대한 한 사람 이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영은 고개를 들어 소요자를 힐끗 바라 보고 물었다. "바로 저 배입니까?" "그렇습니다. 세 분께서는 어서 그 배에 오르십시오." 소영은 상팔과 두구를 돌아 보고 나서 먼저 몸을 날려 작은 배 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 중주이고도 그의 뒤를 바착 따랐다. 세 사람은 몸을 바로 잡아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바로 이때 쾌선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 왔다. "소대협.... 소대협은...." 그것은 온 기력을 다하여 부르짖는 소리라기보다 차라리 신음소 리였다. 소영은 가만히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남궁 소녀로군!' 그는 두구를 돌아 보았다. '배를 빨리 떠나도록 하라고 이르게." 두구는 쾌선을 건너다 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너희들, 아직도 배를 떠나 보내지 않고 있으니 여기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냐?" 그의 냉정하고 준엄한 표정은 당장이라도 손을 써서 죽일 듯한 기세였다. 아무리 기분 좋은 말을 해도 쌀쌀하기만 한 그의 음성이 요, 표정이다. 하물며 지금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 있으니 그러한 태도를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은 당연했다. 선주인 주순은 재빨리 몸을 굽혀 읍하면서, "즉각 배를 떠나게 하겠습니다." 하고 공손히 말했다. 잠시 후, 물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쾌선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 갔다. 정동방에 배치되었던 두 척의 쾌선은 재빨리 양쪽으로 비켜 나 길을 열어 주었다. 쾌선은 빠른 속도로 내달아 순식간에 작은 점으로 보였다. 소요자는 가볍게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그 쾌선은 이미 언덕 가까이 갔습니다. 이제는 빈도가 바로 거 선으로 뒤따라 간다 해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세 분께서는 이제 마음을 놓으십시오." 소영은 소요자를 쳐다 보며 대꾸하였다. "도장은 정말 신용이 있는 사람이구료." "군자가 믿음이 없어서 되겠습니까? 빈도가 세 분을 믿는 것도 또한 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차 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지도 않을 거요." 두구의 태도는 여전하였다. "중주이고는 무림상에서 신용있기로 이름이 났는데 빈도에게 농 담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영은 팔을 내저어 두구의 말을 가로막았다. "도장, 형구를 씌우시오." 소요자가 손을 들어 신호하자, 푸른 옷의 동자와 녹색 옷의 소녀 가 즉시 뱃머리로 걸어 왔다. 그 오색 거선은 수면에서 높이가 육 척 이상이었다. 그러나 소영 형제가 머물고 있는 작은 배는 갑판과 수면 사이가 불과 일 척 남짓이었다. 그러므로 소영 형제는 오색 거선 위의 풍경을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소요오자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 오고 있었다. "너희들은 내려가서 세 분의 귀객에게 형구를 드려라." 푸른 옷의 동자와 녹색 옷의 소녀는 일제히 대답하면서 소영 형 제가 있는 배 위로 날아 떨어졌다. 그들의 나이는 불과 열너덧 살이었으나 공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이 오색 거선에서 작은 배에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두 개의 가 랑잎이 바람에 나는 것과 같아 배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두 동자의 무공이 이처럼 훌륭하니 사해군주의 무공은 정말 만 만치 않겠는걸.' 상팔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잠시 후, 청의동자는 천천히 손을 놀려 쇠사슬 형구를 꺼내면서, "어떤 분이 먼저 쓰시겠습니까?" 하고 소영 일행을 둘러 보았다. 소영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그 쇠사슬 형구를 자세히 살펴 보았 다. 그것은 삼 척 길이에 불과했으나 동그란 고리로 이어지고 반 자마다 격하여 하나의 호도만한 금고가 있었다. '이 형구는 참말로 이상하다. 반드시 특수한 작용을 할 수 있을 게다.' 소영이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데 두구가 가슴을 내밀면서 소리 쳤다. "이 두 어른께서 먼저 시험해 보마. 그러나 이 어른의 성미는 대 단히 괴팍하니 너희들 조심해야 한다." 청의동자는 비록 어릴지라도 수양은 아주 잘 되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웃으면서 수중의 쇠사슬 형구를 들어 두구의 목을 얽으려 하였다. 그러나 두구의 키가 대단히 큰지라 청의동자가 두 손을 아무리 높이 쳐 들어도 두구의 목에 닿지 않았다. 게다가 또 두구는 고의 로 머리를 쳐 들고 가슴을 펴며 발돋움하는지라 더욱 손을 쓸 방법 이 없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녹의소녀가 두어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재빨리 내밀었다. 청의동자는 진기(眞氣)를 모으고 녹의 소녀의 팔 위에 올라섰다. 그는 손을 펼쳐 형구를 두구의 목에 건 후, 아주 숙련된 솜씨로 재 빨리 잠갔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두구는 그 금고리가 잠궈지는 것를 보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몇 개의 고리를 잠그기 전에는 쇠사슬 형구의 묘한 용도를 알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번 잠그고 나니 두 팔이 죄어들고 목이 점점 아파왔 다. 두구는 쓰디쓰게 웃으면서 움직이지 않고 엄숙히 서 있었다. 그러면서 심중으로는, '이 하찮은 한 가닥 쇠사슬이 이 두구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두구에게서 물러난 청의동자는 품 속에서 또 한 가닥의 쇠사슬을 꺼내더니, "다음은 어느 분 차례입니까?" "나다." 상팔은 웃으면서 목을 길게 내밀어 보였다. 청의동자는 다가서서 같은 방법으로 상팔을 완전히 얽어 매었다. 소영은 줄곧 냉정한 눈으로 보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소영 앞으로 다가간 청의동자가 마지막 한 가닥의 쇠사 슬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정중히 말했다. "이번에는 귀하 차례입니다." "마음대로 해라." 소영은 눈도 깜짝이지 않고 바른 자세로 서서 자기의 목이 다 얽 어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소요자는 세 사람이 모두 금빛 쇠사슬을 쓴 것을 보더니 소리없 이 웃었다. "빈도, 염치없는 요청이 또 있습니다." 두구가 소리쳤다. "염치없는 요청이라면 말 않는 게 좋소. 이미 형구를 썼으니 결 코 다시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소요자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저의 군주께서 세우신 법규입니다. 천하 무림의 동도(同 道)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법을 따르니 세 분께서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소영은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한 요청이라면 허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도장께서 먼저 말씀해 보십시오." 소영의 얼굴을 지그시 넘겨다 본 소요자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의 군주를 뵈러 갈 때에는 무기를 놓고 가야만 합니다." 듣고 있던 소영은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두구 는 참지를 못하고 거친 소리로 부르짖었다. "도장 마음대로 되지 않을걸!" 말을 마친 두구는 즉시 운기하였다. 순간 몇 가닥의 쇠사슬이 끊어졌다. 그러나 원래부터 느슨하던 쇠사슬은 도리어 꽉꽉 죄어 들었다. 두구는 깜짝 놀랐다. '하찮은 쇠사슬이 이처럼 견고하다니....' 소요자는 한동안 그의 행동을 바라 보고 나서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세 분의 무공이 깊고 강할 뿐 아니라 아주 오만한지라 빈도는 부득불 특제 쇠사슬을 써야 했습니다. 천복을 맺은 위에다 다시 백 번 연마한 철로 배합했습니다. 또 제위를 얽은 곳은 관절 혈맥이 있는 곳이오. 비록 천 근의 귀신같은 힘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끊어 버리기는 어려 울 것이오." 상팔은 다 듣고 나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도장께서는 깊은 계략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간악하기 짝 이 없군." 소요자는 당당히 웃으며, "저의 군주에겐 다만 이 세 가닥의 쇠사슬이 있을 뿐입니다. 만 일 당신들 일행이 한 사람만 더 많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수 없었 을 겁니다." 하더니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 입을 열어 청의동자와 녹의소녀 에게 명령하였다. "그분들의 무기를 취하여라." 그들은 각기 손을 뻗어 소영의 장검과 두구의 철필을 뺏으려 하 였다. 두구는 재빨리 몸을 숙여 날아 오르는 동시에 청의동자를 걷어 차 버렸다. 그 동자의 무예도 만만치 않았다. 날쌔게 몸을 피하면 서 손을 써 두구의 오른쪽 넓적다리의 현경혈을 향하여 찔렀다. 그러나 두구는 이미 그 동자가 자기의 혈도를 점하려는 것을 알 아차렸다. 황급히 오른쪽 다리를 거두어 들인 그는 속으로 혀를 내 둘렀다. '저 조그만 녀석이 이렇게 악착같이 나올 줄은 몰랐는걸.' 이때 소영의 명령이 떨어졌다. "두 아우는 그들로 하여금 무기를 취하게 하게." 두구는 그 말에 즉시 복종했다. 자세를 바로 하고 다시는 반항하 려 하지 않았다. 청의동자는 두구의 어깨 위에 꽂힌 철필을 빼 내었다. 녹의소녀도 민첩하게 몸을 놀려 소영의 장검을 빼어 들고 나서 상팔에게로 다가갔다. 상팔은 그 소녀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내며, "무기가 있긴 있지만 꺼내기가 매우 불편하오. 소녀가 내 사슬을 잠시 풀어 주면 내가 꺼낼 테니, 그런 다음에 다시 얽으면 어떻겠 소?" 하고 넌지시 제의하였다. 녹의소녀는 강호상의 경험이 적은 모양이었다. 상팔의 몇 마디에 순진한 표정으로 벙어리가 되어 서 있기만 하였다. 이때 청의동자가 다가왔다. "무기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수고를 대신하겠습니다." 상팔은 배를 내밀고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럼 자네가 수고 좀 하게." 오색 거선 위의 소요자는 처음부터 입을 다문 채 냉정한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청의동자는 상팔의 동그란 옷소매 밑에 손을 넣어 금주판을 끄집 어 내었다. 그는 머리를 들어 소요자를 바라 보며 말했다. "무기를 모두 거두었습니다." "좋다. 너희들은 즉시 배로 올라 와라." 동자와 소녀는 무기를 지닌 채 몸을 날리더니 큰 배 위로 뛰어 올라 갔다. "무기를 모두 내 놓았으니 도장께서는 또 무슨 분부를 내리겠습 니까?" 두구는 한 마디 했다. "나는 일찍이 고집불통은 믿을 수 없다고 알았었는데 과연 그렇 군." 소요자는 담담히 미소지으면서 개의치 않았다. "세 분께서는 쇠사슬을 썼기 때문에 행동이 불편하실 겁니다. 빈 도가 사다리를 놓아 배에 오르기 편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소요자는 상대방의 의사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소리쳤다. "사다리를 놓아라!" 잠시 후에, 싹!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줄기 오색 찬란한 사다 리가 거선 위에서 곧장 작은 배 위에 떨어졌다. 소영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앞장을 서서 사다리를 밟고 걸었 다. 중주이고 역시 입을 다문 채 소영의 뒤를 따라 오색 거선 위로 올라 갔다. 그들이 머리를 들어 보니 거선 위에는 갑판이 꽤 널찍하여 길이 삼 장에 넓이가 일 장 두 세 치쯤이나 되었다. 갑판의 끄트머리에는 하나의 용봉을 새긴 배 문이 있었다. 소요자의 뒤에는 검은 복장을 한 열두 명의 대한이 등에 안령도 를 메고 서 있었다. 소요자가 손을 들어 흔들자 그 열두 명의 대한 은 신속하게 흩어져 길을 열어 주었다. 상팔은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상세히 살펴 보았다. 오색 거선 의 구조는 보통 범선과는 아주 다르게 설계하여 만들어진 것 같았 다. 소요자는 웃으며, "세 분은 갑판 위로 올라와 잠시 기다리십시오. 빈도가 곧 저의 군주께 말씀드려 세 분을 영접하시게 하겠습니다." 하고 제법 친절한 태도로 나왔다. 소영은 중얼거렸다. "저들은 진심이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지." 소요자는 정색을 하고, "세 분께서는 도대체 뭘 못 믿겠단 말씀이십니까?" 하더니 뚜벅뚜벅 선실로 건너가 버렸다. 지금까지 굳게 닫혔던 뱃문이 활짝 열리더니 소요자가 들어가자마자 닫혀졌다. 상팔은 작은 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이 금쇠사슬은 쉽사리 끊어지지 않습니다. 소제가 슬쩍 시험해 보았으나 끊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 시각 우리들은 이미 겹겹이 포위되어 있소. 정세가 급박하지 만 않다면 아우들은 참고 견디기 바라오." 소영은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형님의 말씀대로 따를 뿐입니다." 상팔은 공손히 대답했다. "우리들은 이 쇠사슬을 끊을 수 없을지라도 아직은 두 발로도 적 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곤란한 것은 우리가 아직도 배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물에 익숙치 못하잖습니까? 설사 저들의 포위망을 뚫고 공격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저 망망한 강을 건너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두구는 장황하게 자기 소견을 피력하였다. 소영은 역시 침착한 어조로 대꾸하였다. "두형의 말씀이 옳소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참아야 한다는 말이오." 이때 굳게 닫혔던 용봉 문이 활짝 열렸다. 이어서 두 명의 청의동자가 걸어 나왔다. 전신에 녹의를 걸친 네 명의 소녀가 뒤를 따랐다. 그 두 동자와 네 소녀의 등에는 청색의 장검이 꽂혀 있었다. 두구는 낮은 소리로 상팔에게 속삭였다. "둘째형, 사해군주는 반드시 호색가(好色家)일 겁니다." 상팔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어젖혔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 "보시오. 그의 문하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지 않소?" 두구는 자신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때 돌연 풍악이 울리며 노랫소리가 들려오더니 금빛나는 누런 포를 입은 도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69. 사해군주의 철옹성을 뚫고 소영이 자세히 살펴 본즉, 그는 아직 젊어 보였다. 나이는 삼십 이나 되었을까? 수염도 없는 얼굴은 창백하리만큼 맑았다. 천천히 내딛는 걸음걸이는 현을 뜯듯 둔중하면서도 일정했다. 소요자는 그 사람 뒤를 바싹 따랐다. 창문을 나서자 소요자는 급 작히 걸음을 빨리하여 그의 앞을 막아 섰다. "저의 군주께서 선실을 나오셨습니다. 세 분 다 절하여 알현하시 어야 하겠습니다." 두구는 냉담했다. "절은 무슨 절! 그는 황제도 아니잖은가! 진정 황제가 아니라면 우리 형제가 그에게 절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의 음성은 결코 크진 않았으나 황포인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눈을 부릅뜨고 쳐다 보고 있는 것이 적잖이 심사가 뒤틀린 모양 이었다. 소요자는 이제 그만두지 못할까 하고, 호통을 치려다 말았다. 소 영이 더욱 거슬리는 말을 내뱉을까 봐 그게 두려웠던 것이다. 입가 에 몇 마디 떠올렸다간 그대로 삼켜 버렸다. 그때 청의동자와 녹의소녀 두 사람이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에서 사, 오 척 앞까지 접근해 와 걸음을 멈추더니 양쪽으로 비켜 서서 길을 터 주었다. 황포인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청의동자 앞을 지나 여러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방금 국사께서 세 분의 대명을 말씀하신 걸 들었습니다. 제가 세 분을 사모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소영은 마음 속으로 비웃듯 뇌까렸다. '모반을 꾀하려 함에 틀림없구나! 네가 자칭 사해의 군주라고? 저 고집장이 늙은이를 국사라고 불러가며..... 기껏 열 척밖에 안 되는 쾌선과 이 큰 오색의 범선만 가진 주제에, 흥!' 그러나 오히려 엉뚱하게 말했다. "말씀이 과분하십니다그려." "세 분께서 선창에 드셔서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저에게 알현할 뜻을 나타내게 해 주십시오." 황포인은 끝까지 알현이란 말을 강조했다. 두구는 그 말이 몹시도 거슬렸다. "우리 형제는 별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인데 어찌 감히 황제가 거 처하시는 곳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소요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지껄였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저의 군주는 바다와 같이 넓은 아량을 가 지셨고 재인을 사랑함이 목마른 자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무림 가운데 너무도 유명하신 분들이므로 바로 저의 군주께서 목마르게 기다리시던 분들이옵니다. 비록 방탕함이 있다 하나 그게 무슨 상 관이십니까!" 황포인이 받아 말했다. "국사 말씀이 틀림없지요. 세 분께선 선실로 들어가 말씀하시지 요." '이미 이 야단스런 배 위에 올랐으니 우선 선실 안에 들어가서 형편을 볼 수밖에.....' 소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결단을 내린 듯 선실로 걸어 갔다. 상팔, 두구는 소영이 선실 안으로 걸어 들어 가는 것을 보고 아 무 말 없이 따라 들어 갔다. 선실 안은 넓기도 하지만 매우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두터운 융단이 깔리고 벽에는 온통 짙은 녹색의 면사 휘장이 둘러져 있었다. 용과 봉황을 수놓은 금빛 교의가 후면 벽에 바짝 기대어 놓여져 있고 박달나무로 짠 책상이 그 앞에 무겁게 놓 여져 있었다. 그 옆엔 양쪽으로 네 개의 비단을 입힌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금빛 교의가 있는 후면 벽에는 여섯 자 가량의 거대한 그림이 걸 려 있었는데 무림형세도라는 다섯 글자가 그 그림이 무엇인가를 말 해 주었다. 생각과는 달리 이 방 안의 치장과 특히, 그 큰 그림은 사람의 관 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소영은 <무림형세도>란 것을 자세히 뜯어 보았다. 거기에는 천하 의 각대문파의 소재지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고, 또한 그들의 무공 과 제자의 숫자까지도 분류하여 첫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자상히 꾸며져 있었다. 제일 위쪽에 백화산장과 소림사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이 두 곳 중 한 곳은 수백 년 동안 무림 기운데서 태산북두처럼 받들고 있는 무학의 기원지와 동시에 성지인 곳이요, 또 한 곳은 신비하기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강호의 도장이 아닌가! 이 두 곳에 대해서만은 아는 것이 별로 없는지 사람 수와 그들의 특이한 무공에 대해서 열거해 놓지 않았다. '정말 세심한 사람이군. 이 한 폭의 <무림형세도>를 꾸미는 데도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을 소비했겠는데.....' 소영은 내심 놀랐다. 황포인은 비단 좌석 사이로 해서 박달나무 책상을 돌아 금빛의 교의에 가서 단정히 앉았다. "세 분은 좀 앉으십시오." '이게 네가 말한 알현이란 건가? 스스로 먼저 의젓이 자리를 차 지하고 앉아서는 청한 손님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으라고! 흥! 도대 체 손님을 접대하는데 태도가 이게 뭐야!' 상팔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세 분께선 편히 앉으십시오." 소요자가 야단스럽게 웃으며 권했다. '왔으니까 일단 앉아 볼 일이야.' 이런 때는 언제나 소영이 앞장 서서 결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소영은 박달나무 책상 옆에 놓인 금빛 비단 좌석에 가 아무렇게 나 주저앉았다. 중주이고도 그를 따랐다. "으흐흐흐..... 차를 올려라!" 소요자는 흡족해 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창벽의 한 모퉁이에 둘 러친 비단 휘장이 사르르 열리면서 은밀한 문이 나타났다. 문이 조 용히 열리면서 다섯 명의 아름다운 비녀들이 눈부신 옷을 걸치고 손에는 옥으로 만든 쟁반을 받쳐 들고 사뿐히 걸어 나왔다. 쟁반 위에는 향내 그윽한 차가 놓여 있었다. 아름다운 비녀들은 소영과 중주이고 앞에다 다소곳이 차를 받들어 올렸다. 소영과 두 사람은 두 팔이 비록 쇠사슬에 묶여 있었지만 손은 마 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소영은 매우 난처했다. 달갑지 않은 대접이었다. 그는 두 손을 내저었다. "감사합니다만, 아가씨!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서 소요자를 힐끗 쳐다 보는 그의 눈매가 매우 날카로웠 다. "흥!" "흥!" 중주이고도 냉랭할 뿐 말이 없었다. 황포인과 소요자는 옥쟁반 위에 놓인 차를 가져갔다. "세 분께선 차를 드시지 않으려 하니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소요자는 왼쪽 손으로 가리키며 당당하게 명령했다. 다섯 명의 비녀들이 일제히 은밀한 문 안으로 사라지자 곧 그 문은 닫혔다. 소요자는 천천히 찻잔을 박달나무 책상 위에 갖다 놓으며 말했 다. "군주께선 이제 세 분의 귀한 손님과 말씀을 나누도록 하시오." 황포인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말을 꺼냈다. "제가 세 분의 이름을 많이 들었던 바 오늘에야 만날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하오." "사양하실 필요없소. 하실 말씀이 계시거든 분명히 말씀하시오." 소영은 조금도 태도가 누그러지지 않은 채 대답했다. "흐흐....., 지금 무림 가운데는 살육이 끊이지 않고 형세가 대 단히 어렵습니다. 하늘도 호생의 덕이 있거늘 사람이 어찌 측은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저는 뜻한 바 있어 무림에 뛰어 들어 살육을 막고 백세토록 태평한 기업을 마련코자 합니다." 잠시 입가에 엷은 웃음을 떠올리다간 무언가 생각난 듯하더니 계 속 말을 이었다. "세 분께서 이 점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소영은 상팔을 쳐다 보며 그에게 대답토록 했다. 상팔은 문득 기침을 크게 한 번 했다. "하하하하..... 핫핫......" 방약무인하게 큰 소리로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황포인은 매우 못마땅해서 양미간에 주름을 깊게 짓고 상팔을 노 려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상팔이 웃음을 거두고 말을 하기 시작하자 입을 다물었다. "군주께서 무림에 나타나신다니 천하에 다행스런 일이군요. 하핫 하......" "당신의 대명을 알고 싶소." "금산반 상팔이라 합니다." 황포인은 두구에게 눈길을 돌렸다. 두구는 단정하나 차갑게 그 눈길에 대답했다. '냉면철필 두구라 하오." "두 분이야말로 강호에서 존칭하는 중주이고가 아니시오! 당신은 바로 소영형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소영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겠다는 듯 그는 또 한 모금 차를 홀 짝 마시고는 계속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무림의 이와 같이 어지러운 형세를 바로 잡고자 합니다. 세 분께서는 부디 저의 한 팔이 되어 주십시오. 저는 지금 그대들 과 같은 영웅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때에 상팔이 대답했다. "군주의 웅재대략에는 소요도장의 도움이 있는데 무공을 알지 못 하는 강호의 밥버러지 같은 우리가 어찌 군주를 도울 수 있겠습니 까?" "아아! 지나치게 겸손하십니다그려! 국사에게서 이미 세 분의 무 공에 대해서는 소개받았습니다. 저 또한 오래 전부터 대명을 들은 터입니다. 세 분이 기꺼이 도와 주시겠다면 반드시 중임을 맡기겠 거니와 이 다음 무림의 군주자리를 차지했을 땐 세 분의 공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황포인의 말에 상팔은 좀 신중히 듣는 체하며 말했다. "이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저희들이 단번에 결정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말은 그러하나 내심 비웃고 있었다. '네놈이 이미 군주라 자칭하는 걸 보니 속으로는 다 되어 있다는 거지, 흥!' 황포인은 소요오자를 바라 보며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그에게 물 었다. "국사의 생각은 어떻소?" 소요자는 웃음을 띄우며 대답했다. "빈도의 생각으로는 뭐 큰 문제거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원하는 지, 그렇지 않은지만 결정하면 될 것으로 봅니다." 소요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상팔은 홀로 결정할 수 없음을 깨닫고 소영에게 말했다. "형님께서 결정하십시오." 소영은 잠시 깊은 숨을 몰아쉬곤 말했다. "만약 우리들이 군주에게 봉사할 수 없다면?" 황포인은 놀랐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더구나 몸이 형구로 얽어 매인 채 이같이 강경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치 못 했다. 그는 안색이 확 변하면서 말했다. "세 분께서 허락치 않는다면 저의 체면을 짓밟는 셈이지요." 소요자가 나섰다. "뛰어난 호걸은 시대의 임무를 아는 자입니다. 빈도가 보건대 세 분께선 허락하시는 게 좋을 거요." 소영은 소요자의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도장은 우리를 위협하는 거요?" 소요자는 그늘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위협이 아니오. 빈도의 마음 속에서 나온 말이오. 바로 금과옥 조 같은 소리지오." 소영은 지금하는 한 마디 말이 적이 되는가 친구가 되는가 하는 생사가 걸린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감히 혼자서 결정할 수 없 었다. 옆의 중주이고를 바라 보고 말했다. "두 분 형제의 뜻은?" 상팔이 대답했다. "우리는 큰형님을 따를 뿐이지, 생사에 관계치 않겠습니다." 소영은 황포인을 올려다 보았다. "군주께서 만약 저를 협박한다면 소모는 결코 허락할 수 없습니 다." 황포인은 잘라 말했다. "지금 나의 한 마디로 세 분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것을 잘 알 텐 데요." 소요자가 황급히 말을 막으며 거들었다. "군주께선 노함을 거두십시오. 빈도가 다시 한 번 권해 보겠습니 다." "좋아요 다시 한 번 권해 보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땐 정말 후환 을 남길 필요가 없겠지요." 그 말은 사뭇 위협적이었다. 소요자가 가볍게 기침을 하며 한 걸음 다가왔다. "빈도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에헴! 여러분들! 다시 한번 생각 해 보시길 바랍니다." "상형이 말해 보오!" 소영은 그렇게 시키고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기운을 움직여 공력 을 모아 뽑았다. 중주이고는 소영이 말하는 뜻을 알았다. 이 형구는 보기에는 가 느다랗고 조그만 것이었으나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일단 한 번 시험해 볼 준비를 했다. 소요자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후 이어 말했다. "세 분은 아직도 창창할 때입니다. 지금 나이에 쥐도 새도 모르 게 죽는다면 너무도 애석한 일이 아닐까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는 서늘한 바람이 일 정도로 싸늘하고 음산 한 눈빛으로 세 사람을 번갈아 훑어보고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세 분은 빈도의 의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는 어떻게 우리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두구가 되받아 말했다. "세 분의 몸에 매인 형구는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해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오!" "반드시 그렇지도 않을걸." "두형이 빈도의 말을 믿지 않으니 사람을 불러와 세 분께 보여줌 이 어떻겠소?" "어떤 사람을?" 두구가 말했다. "그 사람의 명망이나 지위는 아마 아직까지도 세 분의 위일걸."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소요자는 두 손을 흔들며 고함쳤다. "늙은 거지를 데려오라!" 소영은 생각했다. 늙은 거지란 개방의 인물이 아닌가. 개방에는 원래 충의지사가 많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늘 이 사 해군주에게 마음을 주진 않으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일진의 가벼운 음향이 들 려 왔다. 그러더니 벽 사이로 은밀한 문이 또다시 활짝 열렸다. 푸 른 옷을 입은 두 동자가 손에 긴 장검을 들고 해어진 옷을 걸친 깡 마른 늙은이를 끼고 문에서 나왔다. 그 노인에게는 쇠사슬이 매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견골과 비 파골이 있는 곳에는 우근이 뚫고 지나갔다. 두 사람의 청의동자는 오른손에는 장검을 들고 왼손으로는 각기 우근을 한 가닥씩 잡고 있었다. 소영은 그 깡마른 노인을 보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상팔이 옆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뛰쳐 나갈 뻔했다. 노인은 세 사람을 찬찬히 뜯어 봤다. 눈빛에는 놀라움이 가득했 지만 금방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이 굳어졌다. 그 깡마른 늙은 거지는 개방 가운데 겨우 살아 남은 장로였다. 소영이 백화산장을 탈출할 때 그가 도와 주었던 것이다. 바로 손불 사였다. "여러분들은 이 늙은이를 알만 하지요?" 소요오자의 말소리에 모두 정신이 들었다. 상팔이 다급히 말했다. "모르오." 소요자는 천천히 소영에게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그대는 반드시 알 것이오." 소영의 머릿속에 상팔의 말이 와 박혔다. '상팔이 나에게 모르는 척하라고 막았으니 무슨 속셈이 있을 것 이다. 그는 강호에서의 경험이 많으니 그를 따르자.' "그의 형모를 보아하니 사람들에게서 많이 들은 듯하오." "하하하핫.... 그랬었군. 그를 보자 깜짝 놀라더니만 별게 아니 었군." 소요자는 크게 웃어제쳤다. "개방이란 이름은 세 분께서 이미 들으셨을 줄 생각하오. 이 분 이 바로 개방 중에 오직 한 분 살아 계신 장로 손불사요." 두구는 생각했다. 이 손불사의 무공은 말할 수 없이 강한 것인즉 어떻게 사해군주에게 붙잡혔을까. 소요자는 싸늘한 시선으로 두구를 노려보며 말했다. "두구! 손불사의 대명을 들은 적이 있지?" "듣다마다!" "손불사의 내공은 중주이고에 비해 어떠하오?" "그거야 우리들에 비해 말할 수 없이 고강하지요." 소요자는 기분이 좋았다. "핫핫하..... 좋소. 두형이 그 형구의 위력을 끝내 믿지 않으니 빈도는 곧 당신에게 한 번 시험해 보이리라." 잠시 말을 중단하더니 계속했다. "내가 네놈의 형구를 풀어서 손불사에게 치운 후 그를 죽임으로 써 형구의 위력을 나타내 보이겠다." '내 몸에 씌워진 형구를 풀 기회를 얻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걸. 젠장! 이게 큰형님에게 돌아가지 않고....." "그러나 빈도가 형구를 풀기 전에 우근으로 너의 양쪽 비파골을 먼저 꿰뚫어 놓아야만 하겠구나!" 두구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큰형님에게 이런 변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요자는 몸을 일으켜 두구 가까이 걸어 왔다. 두구는 소영을 돌아 봤다. 두구의 눈빛이 반짝이면서 소영에게 뭔가를 묻고 있었다. 묶인 채로 우근이 비파골을 뚫게 놓아 둘 수 는 없는 일 아닌가. 그는 손을 뻗쳐 항거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소형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계속 소영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소영이 별안간 일어서며 외쳤다. "손을 멈추시오!" 소요자는 소영을 바라 봤다. 기분 나쁘리만큼 음흉한 웃음을 흘 리면서. "흐흐..... 그대는 또 무슨 가르침을 주시려오?" "당신은 우리 세 사람 중 우두머리가 누군지 아실 테지....." "중주이고가 목숨도 돌보지 않고 소형을 따르고 있으니 그것은 분명한 게 아니오!" 소영은 곧 대들 듯이 말했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 어찌 나하고는 얘기를 나누지 않는 거요?" 그의 음성은 다소 떨리고 있었다. "히히히.... 나대로 요량이 있으니 소형이 대신 근심할 필요는 없을 게요." "도장께선 강제로 두구형제를 수습할 작정이오?" 소요자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의 비파골을 먼저 뚫지 않는다면 혈도를 찔러야 하기 때문이 오." 소영은 두 다리를 벌려 그를 막으며 완강히 저지했다. "소모가 죽기 전에는 결코 사람을 해치려는 도장의 못된 손버릇 을 용납할 수 없소!" 소요자는 소영에게만은 특별히 참는 듯 말했다. "소대협께선 쾌검으로 무림에 이름을 드날렸소. 하지만 지금 당 신의 수중에는 검이 없으니 빈도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게요." "소모에게 비록 검이 없으나 도장께서 형제를 상하게 함은 이 눈 으로 도저히 볼 수 없소!" 두구가 벌떡 일어났다. "큰형님, 비켜나십시오. 이 늙은 고집쟁이가 이미 소제를 지적해 서 상대하고자 했으니 소제가 시험해 보겠습니다." 그때 손불사의 말소리가 들렸다. "세 분은 형구를 차고 있으니 아마도 모두 적수가 되지 못할 거 요." 손불사의 무공은 소영과 중주이고도 모두 직접 본 바였다. 그의 말이 결코 거짓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소요자는 손불사를 노려 보면서 기분나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하하..... 손형은 드디어 생각이 통했군요." 손불사의 눈초리가 일순 빛을 번뜩이는 듯하더니 그대로 꺼지고 말았다. 길게 탄식하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만일 이 늙은 거지와 소대협과 중주이고가 너희들을 돕는다면 사해군주의 이름은 곧 사해에 드날리고, 천하에 그를 모를 자가 없 겠지." "맞았소이다. 빈도가 백번 참으며 원하는 바는 네 분이 저의 군 주의 한팔이 되어 달라는 것이지." 손불사가 말했다. "도장이 그들을 설복시킬 수 없는 것이 섭섭할 뿐이오." "만일 끝까지 허락해 주지 앉는다면 어쩔 수 없이 네 사람을 죽 여 후환을 없애는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러나 만약 이 늙은 거지를 얻을 수만 있다면....." "빈도는 지금껏 사람을 씀에 의심한 바가 없습니다. 손형은 고견 이 있으신지요. 청컨대 솔직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늙은 거지는 도장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사해군주의 휘하에 들도록 권하기를 원하오." 소요자는 뭔가 심각히 생각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핫하....." 손불사는 매우 불쾌하여 소요자를 쏘아 보았다. "왜 웃는 거요?" "손형은 빈도에게 잡힌 후 계속 오만하고 냉담했소. 빈도가 백번 권했으나 끝내 대답치 않았소. 그런데 돌연 이처럼 태도가 급변하 여 오히려 빈도를 위하여 그들을 설득시키겠다니 어찌 의심치 않겠 소이까?" "고장이 늙은 거지를 신임치 않겠다면 말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 오." 소요자는 눈길을 모으고 골똘히 생각에 묻혔다. 잠시 후, "빈도는 결코 손형을 의심하고 싶은 것이 아니오. 일단 먼저 저 의 군주에게 청해 봄이 좋을 듯하오." 소요자는 황포인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한 마디 주고받았다. 손불사의 얼굴에 냉소가 흘러갔다. 그는 슬그머니 얼굴을 돌리고 전음입밀로 얘기했다. "소대협! 그대는 한참 피어날 나이가 아니오. 금후 이십 년의 강 호의 형세는 소대협에게 기대하는 바 크오. 몸을 보중하기 바라오. 일시에 객기를 부려 만용을 부리지 말기를....." 이때 소요자가 돌아서서 말했다. "우리 군주께서는 손형의 명성을 감안하시어 십분 신임한다 하 오." 손불사는 그제야 머리를 치켜 들고 소요자를 조용히 바라 보며 물었다. "도장은 또 어찌하여 돌연 늙은 거지를 믿으오?" "그건 저 군주의 뜻이오. 빈도가 생각컨대 손형이 전력을 다한다 면 효과가 있으리라 믿소." 손불사는 엄하게 말했다. "늙은 거지와 소영의 사장(師丈)과는 우의가 심히 두터웠소. 도 장께선 이미 불가능하다 했으나 이 늙은이는 정말로 해낼 자신이 있단 말이오." "만약 손형이 빈도가 의아해 하는 점을 풀어 얘기해 주신다면 빈 도는 진심으로 감복하겠소." 소요자는 빈정거리고 있었다. "당신은 늙은 거지가 간계를 쓴다고 의심하고 있군?" "여러분들 모두 형구가 매어져 있어, 합력출수할 우려를 빈도는 느끼지 않고 있소. 간계를 쓴다 하지만 만약 빈도의 면전에서 그러 하다면 빈도는 병신이란 누명을 면키 어렵겠지요." 손불사는 쩌렁쩌렁한 소리로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이 늙은 거지가 뭣 때문에 돌연 마음을 바꾸었는지 알고 싶소?" "손형이 말씀해 주신다면,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늙은 거지와 소영의 사장과는 우정이 심히 깊은 터요. 어린 나 이로 죽어 가는 것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오." 소요자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만약 소영의 사장과 친구라면 틀림없이 소영을 보았겠군 요?" "당연하지요. 그를 처음 봤을 때는 그의 나이 너무 어렸었소. 그 는 아마도 늙은 거지를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오." "이 소영의 사장은 누구요?" 손불사는 다소 뻐기는 듯 말했다. "그건 이 늙은 거지가 말할 수 없음을 용서하시오." 소요자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는 듯이 한참 동안 손불사에 게 의문의 눈초리를 보냈다. 손불사는 먼 곳을 바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의 옛벗은 원수가 많소. 강호에선 그가 이미 죽었다고 믿고 있지.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무수한 번뇌가 그에게 닥칠 거요." "천하가 이토록 넓은데 당신이 그의 거주지를 밝히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마침내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 해도 그를 찾아낼 길이 없겠구료." "도장은 꼭 물어야만 하겠소?" "만약 손형께서 구태여 대답하시기를 원치 않는다면 억지로 물어 볼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말하더라도 도장은 두려워하지 말기를....." "지금 무림 세계에서 이 빈도가 무서워 떨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 손형도 그 중의 한 사람이오." "장산패! 도장께서도 이미 한 번쯤은 들어 본 이름일 거요!" 소요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섰을 뿐 말을 잃고 서 있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장산패라! 하긴 장산패 말고는 이런 제자를 길러 낼 수 있는 사 람이 없지!" 소영은 소요자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사부의 이름을 듣고 그 두려워하는 심정을 역력히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이 고집쟁이 노도가 정말 나의 사부를 알고 있단 말인가?' 손불사가 냉랭한 소리로 말했다. "도장은 믿을 수가 있겠소?" "믿지요. 그럼 손형께서 내 대신 그들에게 권고해 주십시오." 손불사는 당장 서두르려고 하지 않고 다시금 요구 조건을 내걸었 다. "나는 사사로운 정으로 감동시켜 설득코자 하니, 그와 말하는 중 에 아무도 엿듣게 해서는 아니될 것이오." "빈도가 사람을 보내어 엿듣는다 해도 여러분의 이목을 속일 수 없을 것이오." 손불사는 또 말했다. "내 비록 그의 사부의 벗이라 하나 그가 기억해 내긴 몹시 어려 울 것이오. 그가 믿도록 하기 위해서는 좀 긴 시간이 필요하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시오?" "하루면 족할 것이오." "손형의 생각대로 하시오. 그리고 또 다른 조건이 있습니까?" 손불사는 의젓이 품위를 갖추면서 말했다. "대접함은 예가 있어야 하는 법, 곧 당신들의 오색 거선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녀를 두 사람 선발하시오. 그리하여 술시중을 들 게 해 주시오." "하하하.... 그야 아주 쉬운 일이지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부탁해야겠소. 나에게 그윽하고 정한 한 방을 정해 주오. 그리하여 우리들이 술을 먹고 마음을 털어 놓 고 얘기할 수 있도록 말이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소요자는 갑자기 바빠졌다. 아까 손불사를 호송해 온 장검을 쥔 동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네 사람은 곧 영빈창으로 동자의 안내를 받으며 갔다. 그 동안에 도 소요자는 동자에게 이것저것 이르고 있었다. "네 분의 귀빈께서는 앞으로 우리 군주와 함께 수고하실 분들이 니 너희들은 조심하여 성심껏 모시도록 하여라." 과연 동자들은 네 사람에게 다시는 무례히 굴지 않았으며 필요 이상으로 몸을 굽실거렸다. 손불사 등은 두 동자의 뒤를 바싹 따라가 우아하게 자리잡은 방 으로 안내되었다. 두 사람의 청의동자는 손을 모아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이곳으로 앉으십시오. 저희들은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손불사는 조용히 웃으며 농조로 말했다. "두 분은 우리가 달아날까 봐 무섭지 않소?" 청의동자는 감히 대답할 생각을 못하고 우근을 집어다 바깥으로 내 놓았다. "어찌하여 너희 두 사람은 이 늙은이를 이처럼 대접하는가? 만일 내가 죽어 버린다면 사해군주가 반드시 너희들을 혼낼 테지! 하하. ......" 청의동자 두 사람은 방을 나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저희들은 할 일을 할 뿐이니 노인장께선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 시오." "너희들은 우리를 방 밖에서 지키는 거냐?" 청의동자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저희들은 우근을 끌어 내어 철기둥에다 붙들어 매 놓으려고 하 오. 노인께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감히 엿듣지 못하옵니 다." 청의동자들은 모두 사라져 갔다. 손불사는 창벽에 바싹 귀를 대고 귀를 기울였다. 청의동자들의 발자국소리가 멀리 들렸다. 그는 안심한 듯 고개를 돌려 엄숙한 표정으로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 늙은 거지가 몇 마디 권하겠네." "귀를 씻고 공손히 듣겠습니다." 소영은 몸을 더욱 조아리고 손불사를 빤히 들여다 보았다. 방 안 에는 무거운 공기가 깔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또박또박 손불사가 입을 열었다. "늙은 거지의 나이는 칠십이 다 되었네. 평생토록 보고 들은 것 도 많거니와 수많은 영웅 인재들도 만나 봤네. 그러나 자네처럼 성 취한 인물은 여태 보지 못했지. 절대 기재요, 거기에다 광세기우를 가하여 소대협과 같은 무림의 기재를 배양하였으니.... 더욱이 얻 기 어려운 것은 소대협의 그 의협심과 또 쇠와 같은 굳은 담을 가 진 영웅의 호기야. 금후 삼 년 동안 무림의 대국에 도가 살아나고 마가 사라지는 것은 오직 소대협의 두 어깨에 매인 일이오. 늙은 거지는 천하무림의 동도를 위해 간청하고 명하네. 소대협이 죽어서 는 안 될 일이오." 소영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깐 얼떨떨했다. "노선배께선 후배를 너무 칭찬하십니다." "하하하.... 늙은 거지는 일생 동안 한 번도 마음과 동떨어진 말 을 해 본 적이 없네." 상팔이 불쑥 나섰다. "손선배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형님의 일신은 앞으로 수십 년 무림의 운명을 혁신할 중책을 지니고 계시니 참으로 몸을 보중 하셔야 합니다." 소영의 탄식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형구는 비록 끊기가 용이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이곳은 배 안이라서 사면에는 강물이 넘실거리니 우리는 물에 익숙치 못한지라 이것을 끊고 탈출한다 할지라도 살아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바로 그런 문제라면 이 늙은이도 계책이 있소. 내가 소대협 스 승의 벗이라고 핑계댄 것도 나를 도와 무림을 위해서 진중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오." "노선배께서 좋은 방도가 있으시면 분부하십시오. 후배는 절대 순종하겠습니다." "좋은 계책이 있어도 지금은 계획을 전개하지 않는 것이지. 나는 소대협이 청산에 머물면서 나무가 타지 않을까를 두려워 말라고 권 하고 싶네." 이때 상팔이 나서며 말했다. "좋은 책략이 있다면 바로 거짓으로라도 항복하여 일단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서서히 탈출을 기도하는 것 입니다." 손불사는 신중하게 말했다. "사해군주가 조급함을 드러낸 듯하나 실은 마음 속을 드러내지 않아 그의 속을 헤아리기가 심히 어렵다네. 한편 소요자의 여우 같 은 꾀도 또한 깊어 간사하기 짝이 없네. 우리가 거짓으로 투항하는 것쯤은 이미 그도 예기하는 일로 그 대책까지도 벌써 다 생각해 두 었을 게야." 두구는 냉담히 말했다. "노선배의 말씀 대로라면 우리는 죽음을 당하는 수밖에 없겠군 요." "늙은이에겐 다른 계책이 있소. 하지만 소대협이 따를는지?" 소영은 바싹 다가들며 말했다. "노선배님의 계획이라니, 어서 들려 주십시오." "늙은 거지의 방법이란..... 흐흐...." 손불사는 잠시 말을 흐리면서 여러 사람의 표정을 살펴 보고는 말을 이었다. "즉, 죽어 가는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것이오. 그에게 대답할 필 요도 없고 거절할 필요도 없이 그냥 질질 끌려가는 것이지... 흠 흠......" "언제까지?" 상팔이 물었다. "그것은 노선배도 말할 수 없소. 사해군주는 현재로 보아 확실히 강호의 무림에 쟁웅할 야심을 가지고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들을 그 의 기수 아래 포섭고자 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그는 무던히도 우리 를 기다리는 것이오. 아마 어느 때까지는 죽이지 않으리다." 상팔이가 입을 떼려 할 때였다. 갑자기 어지러운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분명 누가 엿듣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누구냐!" 상팔이 소리쳤다. 그때 애교띤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소비들은 명을 받들고 주효를 가지고 왔습니다." "창문은 닫히지 않았으니 그대로 들어 오너라." 두 사람의 아름답고 요염한 여비가 녹의를 입고 사뿐사뿐 걸어 들어 왔다. 앞장 선 여비는 나무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갑자기 요리 냄새가 확 퍼지면서 식욕을 자극했다. 뒤이어 주전자 다섯 개를 쟁반에 받쳐 들고 또 하나의 비녀가 다 소곳이 걸어 들어 왔다. 비록 절세의 미녀는 아니라 하더라도 화사 한 미소와 그윽한 향기를 발산하며 생생하게 그들 앞에 도사리고 앉았다. 네 가지의 요리가 탁자 위에 놓여졌다. 첫 번째 비녀는 젓가락으 로 그 요리를 뒤섞은 후에 먼저 자기가 집어서 먹어 보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여러 어르신네님? 안심하고 잡수십시오. 이 요리 속에는 절대로 독이 없습니다." 손불사가 말했다. "소요자는 참으로 생각하는 게 면밀하군." 둘째 비녀는 술잔과 주전자를 놓고 난후 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잔 가득히 술을 부어 마셨다. "술 속에는 독이 없습니다." 두 사람의 미녀는 그들이 사용했던 잔과 젓가락, 사발 같은 것을 거두어 가지고 조용히 물러가려 했다. 손불사가 돌연 소리쳤다. "두 아가씨,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두 비녀는 일단 걸음을 멈추고 나서 똑같이 대답했다. "노인장! 또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 "허허허.... 소요자는 이 오색 거선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 를 나에게 보내어 술시중을 들게 했거늘, 두 분은 어찌 물러가려 하오." 왼쪽에 섰던 비녀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리고 선뜻 대답했다. "노인께서는 소비들이 잔을 올리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판 위에 구슬 구르듯 매끄럽고도 낭랑했다. 손불사는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늙은 거지는 단지 마시면서 두 아가씨를 바 라 보고 싶을 뿐이지." 두 비녀는 말없이 서로 잠깐 바라 보다가는 조용히 손불사에게 다가가 양쪽에 섰다. 왼쪽에 서 있던 비녀가 섬섬옥수로 네 사람에게 한 잔씩 술을 채 우고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술이란 아주 흥을 돋구지요. 네 분께서 먼저 한 잔씩 드심이 어 떠합니까?" 손불사는 손을 뻗쳐 앞에 놓인 술잔을 들며 말했다. "하하하.... 내가 가장 나이가 많으니 먼저 한 잔 먹어도 괜찮겠 지! 그리고 다른 사람은 좀 천천히 마시는 것이 또한 경노존현하다 할 수 있잖은가! 하하하....." 그는 정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까와는 달리 시종 웃음을 머금고 호탕하게 떠들어댔다. 그리고 점점 얼굴을 뒤로 젖히며 술잔을 서 서히 비우고 있었다. 그는 연거푸 예닐곱 잔을 그런 식으로 들이켰 다. 각 쟁반 위의 안주도 골고루 부지런히 맛보았다. 그동안 소영과 중주이고는 그가 하는 모습을 바라 볼 뿐 주효에 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손불사가 심상치 않은 행동을 취하자 긴장하여 그의 일거 일동에서 조그마한 기미라도 알아 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하핫..... 됐어. 두 아가씨는 이제 물러가도 좋겠소. 이 늙은 이는 몇 잔만 마시면 며느리인지 색시인지를 구별치 못한단 말씀이 야. 두 아가씨는 피하는 게 좋겠지! 우핫핫하......" 두 비녀는 그 말을 듣고 사뿐히 일어나 납신 절을 하고 선실에서 물러 나갔다. 동시에 문을 닫아 버렸다. 손불사는 그들이 멀어져 감을 기다렸다가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 었다. "세 분은 이제 안심하고 드셔도 되오. 이 술과 안주 속에는 확실 히 독이 없으니까." 그는 이상하리만큼 장황하게 떠들어 대며 두 비녀들 앞에서 술과 안주에 독기가 있나 없나를 시험해 본 것이다. 상팔이 민망해서 거들었다. "그런 일이라면 저희들이 해 봤어야 옳았을 것을.... 노선배님께 서 시험하시도록 방관해 버렸습니다그려." "아하! 나는 너무 늙어 버렸소. 두 분은 장년들이오 소형을 힘껏 도와 우리 무림동도를 위해 힘써 주시기를 바라겠소." 상팔이 말했다. "노선배님, 절대 안심하십시오. 우리들이 탈출할 수만 있다면 오 직 강호의 대의만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까짓것 장사에 손해보고 이문 남기고 하는 것은 따지질 않겠습니다." 손불사는 잠시 미소를 머금었다. "늙은 거지는 그들에게 비파골과 견골을 우근으로 뚫려 도망갈 능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소영이 말했다. "그들이 노선배님의 무공을 없애 버렸나요?" "그들은 나를 써먹으려고 핍박하고 있소. 그러니 무공을 없애 버 릴 리는 없지!" "노선배의 다리 사이와 어깨 위의 우근을 끊어 버릴 수만 있다면 곧 자유롭게 무공을 회복하실 텐데....." "무예를 익힌 사람은 이 네 곳에 우근이 지나가면 무공이 비록 없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리오." "노선배님, 그들이 과연 오늘중으로 사람을 보낼까요?" "오늘 안으로는 사람이 오지 않을 테지. 그러나 항상 우리들은 감시를 받고 있어요." "이 창문 외에 벽 속에도 무슨 설비가 갖춰져 있을까요?" "그야 물을 필요도 없지. 그렇지만 우리로서는 알아 내기가 어렵 지!" 소영은 발끈하여 들고 있던 술잔을 내동댕이쳐 깨뜨려 버렸다. "우선 노선배의 어깨와 다리 사이의 우근을 끊어 버립시다. 적을 막을 계책은 그 후에 생각하기로 하고." 손불사는 머리를 저었다. "성패를 막론하고 우리들은 도망나갈 방법이 없소. 하물며 무슨 모험을 하려고 하나?" "후배는 이미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 오색 거선 안에서 대항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해군주도 차마 이 배를 강물 속 에 가라앉히지는 않을 테지요.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잖습니 까?" "방법은 훌륭하오. 허나 많은 모험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습니다. 노선배의 신공이 회복되리라 믿습 니다. 또 후배들의 몸에 형구가 매어져 있다 하나 적어도 며칠 동 안은 그들과 맞붙어 싸울 수 있습니다." 손불사의 다음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깨뜨려진 술잔의 날카로운 조각으로 우근 뒤를 베기 시작했다. 그의 내공은 깊고도 두터운 것 이었 다. 천 근을 누르는 완력하며, 아주 날카로운 술잔 조각의 날 은 우근을 결사적으로 베어 내고 있었다. 반나절이나 되어서야 우 근은 드디어 완전히 끊어졌다. 상팔은 줄곧 창문을 지키며 날카롭게 쳐다 보고 있었다. 두구는 사방의 창벽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시종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70. 네 영웅 탈출하다 그들은 계획했던 일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의외로 일 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손불사의 몸에서 우근은 끊어졌지만 그는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 었다. 오히려 점점 어두운 그늘이 그의 얼굴에 깔려 가고 있었다. 감개가 무량한 듯 깊이 한숨을 들이켰다가 내뿜었다. 소영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노선배님, 운기하여 보십시오. 무공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지 요?" "늙은 거지는 이미 운기해 보았네." "노선배님의 무공은?" "그들은 나를 써먹을 생각이었던 게지. 그래서 혈맥은 다치지 않 았네. 늙은 거지는 소대협을 구하려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소대 협이 먼저 나를 구하다니.... 허허...." 상팔이 웃으며 말했다. "헤헤.... 그 소요자란 놈은 백번 치밀했으나 한번 소홀했군요. 큰 형님의 손목 힘이 얼마나 센지를 생각해 내지 못했으니 말입니 다. 바로 꽃을 날려 사람을 상하게 하고 잎을 따다가 적을 만든 지 경에 이르렀군....." 소영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술잔이 없었더라면 할 수 없었을 것이오." 이즈음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손불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늙은 거지의 몸에서 우근이 떨어져 나갔으니, 이제 그놈들이 가 만 두지 않겠지." 그 발자국소리는 이미 창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창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저는 명령을 받들고 왔습니다. 일러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손불사는 우근을 발로 밟고 있었다. 바깥 사람은 조금도 방 안의 동정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손불사가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인가. 들어와 말해라!" 창문이 열리면서 두 명의 청의동자가 들어 왔다. 사방을 훑어보 던 그들은 손불사의 우근이 벗겨져 있음을 보고 깜짝 놀랬다. 순간 그들은 칼을 빼들려고 했다. 문 뒤에 숨어 있던 상팔, 두구 가 나는 듯 그들에게 달려 들었다. 두 명의 청의동자가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혈도가 상팔, 두구에게 막혀 버렸다. 과연 중주이고는 고수답게 몸 씀씀이가 전광석화와 같이 빨랐다. 손불사는 몸을 구부리고 두 자루의 칼을 집어 들고는 창문을 닫 았다. "쌍검을 빼앗았으니 전력이 강화된 셈이군. 이제 가장 중요한 일 이 남았네. 어떻게든 그 형구의 열쇠를 찾아야겠는데, 그래서 얼른 세 분의 몸에 얽힌 형구를 따 버려야 할 게 아니오!"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낮았다. 상팔이 말했다. "왜 이 청의동자에게 물어 보시지 그럽니까?" "좋아요!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는 청의동자에게 손불사는 엎드려 다가갔 다. 그의 몸을 더듬더듬하더니 혈도를 짚어 살려 내었다. 청의동자 는 부시시 일어나다가 손불사를 힐끗 쳐다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두 무릎의 혈도는 아직도 맞은 채여서 그대로 힘없이 주저 앉고 말았다. 그는 공포에 질려 두리번거렸다. 손불사는 장검을 다시 한 번 꽉 힘주어 잡고는 청의동자의 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사정이 사정인만큼 네가 소리를 지른다면 당장에 죽여 버리겠 다." "지금 이 배는 강 한가운데 있어요. 이 주위에는 스물네 척의 배 가 호위하고 있으니 당신네들이 도망친다는 것은 도저히 안 될 소 리요." "그 일에 대해서는 네가 신경쓸 필요 없어. 넌 이 늙은 거지의 묻는 말에만 잘 대답하면 되는 거야!" 청의동자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입술이 굳게 닫혔다. 손불사가 물었다. "이 형구를 따는 열쇠는 누가 보관하고 있느냐?" "소요도장께서 보관하십니다." "믿을 수 없어!" 손불사의 목소리는 매우 위협적으로 들렸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숨소리까지 모두가 사실입니다. 하지만 못 믿으시겠다면 별 도리가 없지요." 두구가 오랜만에 말했다. "노선배님, 그들과 입다툼할 필요 없습니다. 이 두 놈을 죽여 버 리고 원상태로 돌아가 얘기합시다!" 손불사의 칼날이 청의동자 목 부근에서 두어 번 날카롭게 위협적 으로 번뜩거렸다. 찌를 듯이 칼을 고쳐 잡으며 그가 말했다. "이 늙은 거지의 마음이 사나워지면 너의 그 반반한 얼굴에 칼자 국이 남을 것이다." 이 말에 청의동자는 더욱 겁에 질린 듯했다. 자기의 준수한 얼굴 에 상처가 생긴다는 것을 매우 두렵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죽이지 않소?" "죽인다고 네게 좋을 게 뭐냐?" 이때 또 누가 매우 바삐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손불사는 상팔과 두구를 힐끗 쳐다보고는 한 손가락으로 그 청의 동자의 혈도를 재빨리 집어 눌렀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동시에 아리따운 여자의 음성이 귓 전을 때렸다. "여러 어르신네들, 술과 안주를 더 하시겠습니까?" 두구는 창문을 살짝 열고 말했다. "낭자, 들어오시지!" 호수에 미풍이 일 듯 어느새 그 소녀는 선실 안으로 사뿐히 들어 왔다. 날렵한 발걸음이었다. 상팔이 한 손가락을 뻗쳐 그녀의 등쪽 혈도를 향해 찔렀다. 이때 한 줄기 찬 빛이 눈 앞을 스쳐갔다. 뒤따르던 또 하나의 비녀가 얼 른 보검을 내리쳤던 것이다. 원래 이들 비녀와 동자들은 모두 특수한 훈련을 받아 몸이 날래 기 이를 데 없는 터였다. 상팔이 얼른 손가락을 거두었다. "대단히 민첩한 계집이로군, 이 계집애를 달아나게 할 수는 없 어." 두구가 이렇듯 말을 내뱉으며 얼른 선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뒤 따르던 비녀가 어느새 달아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손불사는 과연 빨랐다. 누구보다도 먼저 창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하하하... 우리들의 행색이 발각된 바엔 숨을 필요가 없겠군." 상팔이 껄껄거리면서 그 녹의비녀에게서 보검을 뺏어 들었다. 손 불사는 다시금 선실 안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이 오색 거선 속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비밀 장치가 되어 있으니 밖에 나가는 것보다는 당분간 이 선실 안에서 지켜보는 것 이 좋을 것 같소." 소영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좋아! 적을 사로잡으면 왕도 사로잡는 것이라 했겠다. 이제 소 요자를 사로잡는다면 사해군주를 협박하여 반드시 형구의 열쇠를 찾을 수 있겠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무리의 발자국소리가 돌진해 왔다. 네 명의 청의동자, 네 명의 녹의비녀를 거느리고 소요자가 노기 충천 해서 광풍이 몰아치듯 달려 오고 있었다. 손불사가 중얼거렸다. "과연 소요자가 몸소 나타나셨군. 그놈의 무공이 고강한지라 이 늙은이는 아마도 그를 사로잡을 수 없을 거요!" "우리는 각기 전심전력을 할 뿐이지. 지금 당장 성공이냐 실패냐 를 가릴 것은 없습니다." 소영이 힘주어 소리쳤다. 이때 소요자의 성이 나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분들은 모두 무림에서도 고명한 신분을 가지신 분들이 어찌 말에 신용이 없소?" 손불사가 응답했다. "거짓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병법에도 씌어 있소. 늙은 거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살면서 적대지중에 신의를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겠 구료!" "당치도 않는 소리를....." 소요자는 채 말도 못 맺고 말았다.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하하하핫.... 하하하...." 돌연 소요자가 크게 웃었다. 두구가 따지듯 말했다. "네가 우리 형제에게 형구를 씌운 것은 거짓말이 아니더란 말이 냐?" 소요자는 걸음을 뚝 그치고 힘주어 말했다. "빈도는 본래 인성이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먼저 두려움을 주 어 복종케 한다. 그러나 우리 군주는 인성이 선하다고 여기시어 덕 으로 먼저 정복케 하시지....." 손불사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냅다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지 소리. 늙은 거지도 벌써 진력이 나도록 들었다." 두구가 소리쳤다. "이제 형세는 분명해졌소. 우리와 화의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싸울 것인가 한마디로 결정하는 수밖에 없소." 소요자는 싸늘하게 말했다. "흥! 기껏 늙은 거지의 몸에서 우근을 끊어 냈다고 큰소리를 치 는가! 그 형구를 풀 도리가 없거늘 어찌 감히 싸움을 걸어 온단 말 인가!" "그까짓 형구쯤은 문제가 아니지, 싸우는데 별 지장이 없을 걸 세." "빈도는 벌써 이럴 줄 알고 대책을 세워 두었단 말이야. 너희들 이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여 명령을 듣는다면 또 한번 살 기회는 있지!" 소요자가 천천히 걸어 나와 창문에까지 다가오며 말했다. 손불사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 고집쟁이야. 네가 감히 늙은 거지와 한바탕 싸워 볼 생각이란 말이지! 하하하....." 소요자는 손불사를 노려 봤다. 그의 눈이 불꽃처럼 번뜩였다. "빈도가 설마 너를 두려워할까?" "좋다. 생사가 결단날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겠군." 그는 소요자가 주의를 흐트릴까 봐 칼을 곤두세우고 바람을 가르 며 뛰쳐 나갔다. 소요자는 수중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한가닥 가벼운 바람을 일깨 우더니 칼끝을 재빨리 피해 나가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빈도의 무공을 알고 싶다면 한순간도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손불사는 팔을 내리고 장검을 거두어 들었다. 다른 한 손으로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일장을 격출했다. 그의 내력은 웅혼했으며, 장세는 강맹하기 비길 데 없었다. 소요자의 손에서 떨어져 나온 먼지 같은 것이 두 가닥의 날카로 운 기세로 음산하면서도 줄기찬 힘을 여러 갈래로 용출하고 있었 다. 손불사와 소요자의 장력은 서로가 강맹절륜한 것이어서 중간에 서 서로 부딪쳐 무형으로 와해되어 버렸다. 손불사는 내심 적이 놀랐다. '이 고집쟁이 노도를 경시해서는 안 되겠구나!' 그러면서 돌연 수중의 장검이 세 송이의 검화를 그리면서 소요자 의 앞가슴 세 곳의 큰 혈도를 노리며 급습했다. 소요자는 냉소하며 불진을 거두고는 검신을 향해 막아 섰다. 손불사는 생각했다. '이놈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해 보자.' 손불사의 검세는 조금도 늦춤이 없이 그의 불진을 향해서 돌진하 고 있었다. 쏴샤! 쏴샤! 바람이 칼날에 부딪히는 듯한 소리만 들릴 뿐 숨소 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서로의 긴장된 눈초리는 쇠라도 뚫을 듯 기 운이 뿜어 나왔다. 손불사의 백련정강한 검세와 소요자의 봉비하는 진사는 부딪칠 때마다 일진의 날카롭고도 소름끼치는 금속성 소리를 발했다. 이윽고 그 유화한 소요자의 진사는 손불사의 장검을 타고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손불사는 검신을 고정시키고는 암암리 내공을 써서 소요자의 진 사의 힘을 칼끝에 가늠했다. 검신에 압박해 오는 소요자의 불진은 점점 칼을 타고 은밀한 힘으로 손불사의 손을 타오르고 있었다. "얍!" 손불사가 돌연한 기합을 발출하자 그의 검신은 바들바들 떨리면 서 소요자의 앞가슴을 냅다 찔렀다. 소요자는 얼른 한 걸음 물러섰다. '이 늙은 거지의 공력이 과연 보통이 아니구나!' 손불사는 두 발자국쯤 뒤로 물러서더니 다시 검신을 비켜 세우고 섰다. 소요자의 내력이 검신을 따라 진격하여 옴을 느끼고, 오히려 피 하지 않고 수십 년 동안 수련한 정순한 내공으로 일격을 가할 작정 이었던 것이었다. 만일 그때 소요자가 피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모두 패하여 부상을 입을 뻔하였다. 그러나 어찌 소요자가 생명을 무릅쓰고 싸우겠는가! 그는 몸을 보살펴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손불사는 그때 이미 소요자의 내력 이 어깨에까지 침격하여 한 대 얻어 맞았다. 손불사는 응변에 쾌속 했다. 얼른 두 발자국 물러서서는 기회를 타서 어깨에 맞은 상처를 드러냈다. 강하게 얻어 맞기는 했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소요자는 기선을 잡았지만 조금도 소홀히 하는 빛이 없이 뒤로 물러났다. "형님, 그를 가게 버려 둘 수 없습니다." 상팔이 성급하게 뛰어 들려 했다. 소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도장, 걸음을 멈추시오." 소요자는 이미 멀찌감치 물러가고 있다가 소영의 고함소리를 듣 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말을....." "제가 또한 도장께 몇 초의 절학을 배우고 싶습니다." 소요자는 소영의 몸에 얽힌 형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당신은 쾌검으로 알려진 가장 훌륭한 검객이라는 것을 빈도도 들어 알고 있는 지 이미 오래요. 그러나 당신 몸엔 형구가 씌워져 있고 수중엔 칼이 없으니 어떻게 빈도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빈손으로 몇 초 배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구가 나서며 말했다. "이 고집쟁이 노도야. 당신의 인물됨이 영웅이라면 즉시 형님의 몸에 매인 형구를 풀어야 하지...." 소요자는 머리를 내저으며 말했다. "빈도는 수양을 쌓은 사람이오. ....허허, 어찌 필부의 언사 때 문에 격노하겠는가?" 상팔이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이 만약 우리들로 하여금 사해군주의 휘하에 들어가길 원한 면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오." "오! 그것 참, 빈도가 가르침을 들어야겠는걸. 무슨 좋은 수가 있소?" "우선 우리 형님의 형구를 풀고 그에게 장검 한 자루를 주시오. 그 후에 도장과 승패를 겨루시오. 만일 도장이 우리 형님을 이긴다 면 달갑게 하라는 대로 하겠소." 그리고는 상팔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빈도가 불행하게도 당신의 형님에게 패한다면....." "그러면 사람을 볼 면목이 있겠는가? 죽는 수밖에 없지!" 잠시 있다가 상팔은 계속하여 말했다. "죽여 버릴 것까지는 없지. 도장 자신이 정한 대로 하면 될 것이 니까." "만일 내 나이 삼십 전이라면 생각할 것 없이 즉시 대답해 버렸 을 것이오." "지금은?" 두구가 재빨리 물었다. "지금? 글쎄, 빈도는 결코 경솔히 대답할 수가 없소." "뭣 때문에?" 상팔이 물었다. "이 일이 지나친 모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감히 못하겠다고? 감히 할 수 없다면 죽은 귀신을 조상하는데 단장할 필요 없지, 죽어 버려라!" 두구가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이때 소영이 힘주어 말했다. "만일 제가 몸에 형구를 쓰고 적수공권으로 도장과 양초를 겨룬 다면 도장은 해 보시겠소?" 이때 손불사는 이미 원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 뜨고 카랑카랑한 소리로 말했다. "소요자는 지극히 경계심이 강한 사람인데 소대협이 그처럼 모험 을 한다 해도 그가 응낙할 리 없지!" 소요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일생 동안 저지르지 않은 일을 해야겠다. 응낙하겠다." 소영이 대답했다. "그 길은 비좁으니 도장께선 선실로 들어오셔서 가르쳐 주십시 오." 소요자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창문 어귀까지 걸어 왔다. "빈도는 바로 이곳에서 소대협의 놀라운 무공을 보겠소." 소영은 가슴을 내밀고 두 발짝 큰 걸음을 떼어 놓고 말했다. "도장! 출수하십시오." 소요자는 소영을 힐끗 훔쳐봤다. 소영이 서 있는 자리는 바로 그 의 불진이 미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이 사람은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데 이처럼 담략이 크고 호용한 기백이 있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 소요자는 내심으로 경의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어린 자네가 적수공권으로 어찌 빈도의 신기를 뺏을 수 있는가! 먼저 출수하라!" 상팔이 또 끼여 들었다. '네가 심중으로 너무하다 생각하거든 먼저 우리 형님의 형구를 벗김이 좋지 않겠는가?" "허허.... 빈도는 재삼 설명했다. 여러분들이 무슨 소리를 한다 고 하더라도 빈도를 격노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고." 소영은 은밀하게 진기를 제기하면서 말했다. "도장께서 먼저 출수해도 좋습니다." "좋소. 소대협은 그토록 준걸이니 빈도는 명령대로 받들겠소." 하고 불진을 휘둘렀다. 그것은 소영의 머리를 향해 강한 힘으로 돌진해 왔다. 그가 발출하는 초식이 한 자 넓이의 원을 그리면서 전율해 옴을 느끼며 생각했다. '불진을 보니 검세보다 더욱 피하기가 어렵겠구나.' 소영은 한편 두어 자 걸음으로 몸을 옮겨 이를 피했다. 소요자는 불진을 거두며 말했다. "이 선실은 불과 몇 평의 넓이라, 나의 실력을 발휘하기에는 충 분치 못하군." 소영이 받아 넘겼다. "그렇다면, 도장께서는 내가 출수할 테니 받으시오." 동시에 오른손을 들어 화살같이 날카로운 바람으로 일격을 가했 다. 소영은 이미 운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은 무섭도록 빨랐 다. 일진의 경미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소요자를 향해 질주했다. 아직도 어린 나이에 이처럼 놀라운 성취가 있었던가! 질주하는 바람은 암암리에 이미 소요자의 몸에 접근했다. 너무도 순식간의 일이라 소요자는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이 얼떨결에 비켜 섰다. 지풍은 소요자의 몸을 스쳐가며 그의 넓은 옷소매에 구멍을 내 놓고는 창 밖으로 빠져 나갔다. "앗!" 비명과 함께 엉뚱하게 청의동자가 나동그라졌다. 소영의 지력은 소요자를 피하며 그를 따라 온 청의동자에게 맞아 격살했던 것이다. 소요자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얼굴빛이 확 변하며 한마디 했다. "금강지력이군. 과연 비범하오. 그 기예는 바로 소림칠십이종 절 기 가운데 제칠종 절예인데 소대협은 어디서 배웠는지......" "제가 사용한 것은 금강지력이 아니옵니다." "아니라고? 소림의 금강지력을 제외하고 이렇게 강력한 위세가 있을 수 있을까?" 두구가 냉소했다. "그거 참! 너의 그 고루하고 얕은 견문이 이상할 뿐이다!" 소요자는 노했다. 비록 수양이 깊다 하나 이러한 모욕을 참을 수 가 없었다. "나의 군주께서는 그 재주를 아깝게 여겨 아직 대력을 쓰지 않고 살려 두었음을 알지 못하는군! 그리고도 빈도를 이토록 노하게 만 드니 단단히 골탕을 먹어야겠군!" 손불사가 말했다. "소요자! 너도 이미 알겠지? 우리들을 죽일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지났다는 것을!" "손형이 우근을 풀었다고 해서 감히 이처럼 호언장담하는 것이 오?" "늙은 거지는 너 소요오자를 상대할 자신이 있다. 소대협과 중주 이고는 비록 형구를 차고 있다 하나 또한 자신을 보전할 능력이 있 단 말이야." "빈도가 만일 여러분을 사지에 두고자 한다면, 여러분과 무공으 로 싸울 필요가 있겠는가?" 두구가 냉소하며 말했다. "도장께서 만일 이 오색 거선을 가라앉히고 싶다면 우리 형제도 달갑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몇 사람이나 건져낼 수 있겠는가?" 손불사가 말했다. "하하.... 이 늙은 거지는 소요도장을 찾겠다." 상팔은 말했다. "우리 중주이고는 동남동녀 몇 사람을 찾겠다. " 소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수고스럽지만 도장께서는 그 사해군주에게 전해 주십시오. 소모 라는 분이 군주의 무공을 한번 보고 싶다고." 소요자는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눈빛엔 완연히 살기를 띠고 있었다. 분명히 수양이 부족한 이 사람은 몇 사람의 말에 몸을 가 누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억지로 화를 누르고는, "여러분이 이미 빈도의 살인방법을 시험해 보게 한 이상 어쩔 도 리가 없겠구료! 흥, 빈도는 곧 귀하들의 명령을 따르겠소." 손불사는 돌연 장검을 휘둘러 대며 소리쳤다. "늙은 거지는 오늘 도장과 물거품이 되겠다. 도장이 만일 이곳을 편안히 떠나고 싶다면 먼저 늙은 거지에게 항복하라!" 이때 한 동자가 급히 달려와서 소요자에게 낮은 소리로 몇 마디 이르고는 황황히 멀어져 갔다. 소요자는 태연했다. 그러나 경험이 풍부한 손불사는 이미 불길한 징조임을 알았다. '저놈이 분명 심경이 어지럽겠구나! 이 틈에 창문을 타서 저놈을 이곳으로 끌어 들이자. 그리하여 소영과 중주이고와 더불어 그를 항복시키는 거다. 그런데 형구의 열쇠를 저놈이 몸에 지니고 있을 까? 그렇기만 하다면 형구를 풀어 꺼릴 것 없이 일방 싸우며 한편 으로 달아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 굴리면서 한편 몰래 진기를 모으며 기회를 노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휙! 갑자기 그가 창 밖으로 뛰쳐 나갔다. 손에 든 장검은 살벌한 검기를 발했다. 불의의 습격에 놀란 소요자는 얼른 불진을 휘두르며 손불사에게 대항했다. 그것은 부드러운 반면 강합을 지니고 손불사의 칼과 접 전하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려던 손불사의 의도는 소요자의 불진 에 막혀 버렸다. 빙글빙글 자리를 바꿔가며 두 사람은 일진일퇴의 대접전을 벌이 고 있었다. 간혹 가다 번갯불빛처럼 한 줄기 은광이 터져 나왔다. 그러던 중 한 줄기 빛살이 일어나더니 산을 밀치고 바다를 기울일 형세로 곧장 소요자를 압박해 나갔다. 소요자는 일소의 휘파람소리를 내면서 전력을 다해서 진사를 봉 장하여 대항하고 있었다. 진사는 한 조각 검은 구름처럼 은빛나는 검광을 막고서는 소요자 로 하여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도록 했다. 편각 같은 시간에 두 사람은 벌써 이십여 번이나 승부를 다투었다. 그러나 불승불패의 대치한 상태로 서로는 백중한 형편이었다. 소요자는 손불사를 한 발자국도 밀쳐낼 수가 없었다. 소영은 두 사람의 대전을 긴장하여 세밀히 살펴보고 있었다. 과 연 소요자의 불진하는 초술은 여간이 아니었다. 손불사와 같은 고 수도 하마터면 소요자의 수중에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에도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더 합세하여 싸웠다. "우앗!" 돌연 소요자에게서 벽력과 같은 기성이 터지면서 그의 불진의 초 수는 급변하였다. 손불사는 소요자의 최후의 발악 같은 급변한 기 공에 두어 걸음 밀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소요자는 한편으로 품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 내었다. 펑! 고막을 찢는 소리가 울리면서 어느새 그 물건은 땅바닥에 던 져졌던 것이다. 순식간에 창문은 연기로 가득 찼다. 시야가 가려졌 고 소요자와 손불사의 모습도 없어졌다. 아연한 순간에 손불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쉬지 말아요. 마시면 죽는 거요." 이런 와중에 소요자는 살짝 몸을 숨겨 창문을 빠져 나갔다. 71. 사해군주 심목풍과 격돌하다 손불사는 소요자가 선실에 독연기를 뿜는 것을 보자 마음이 급했 다. 자기도 모르게 쌍장을 내밀어 쳤다. "펑!" 소리와 함께 선실의 창문이 떨어져 나갔다. 손불사는 쌍장을 휘둘렀다. 산더미를 허물 듯 휘몰아친 장풍의 위세는 계속해서 실내의 독연기를 소용돌이치게 했다. 창을 통해 쏟아져 나가는 연기가 마치 화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과 같았다. 그제서야 상팔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이 고집쟁이 노도사가 결국 무림 중 하오문에서 쓰는 미혼약물 을 다 쓰다니.... 악독하기 짝이 없구나!" 드디어 선실의 독연기는 손불사의 장력에 의하여 모조리 씻겨 나 갔다. 손불사는 상팔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굴리 더니, "늙은 거지도 약간 냄새를 마시긴 했는데, 이건 미혼약의 향기가 아닌 것 같소...." "미혼약물이 아니라면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더욱 악독한 독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좌우간 보통의 미혼약이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소." 두구가 입을 열었다. "무슨 물건이든 간에 결코 좋은 것일 리는 만무합니다. 그리고 그 고집쟁이 노도가 총총히 가버린 것은 노선배님과 형님의 무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반드시 무슨 중대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일 것입 니다. 우리는 이 기회에 탈출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손불사는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벌써 준비가 있을 거요." 두구는 다짜고짜 앞장을 서서는, "제가 길을 열겠으니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말을 마치고 큰 걸음으로 선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손불사가 머뭇거리니 상팔이 다시 한 마디 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더 많은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두제 의 말대로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이 이로울 듯합니다." 손불사도 그제야 마음이 움직여, "두 분의 말처럼 그렇게 용이하지는 않을 터이나 시험삼아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료." 하고는 소영을 돌아 보며 걸어 나갔다. 두구가 앞장 서서 막 문을 밀고 나가자 좁은 통로에서 앙칼진 여 자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 왔다. "멈추어라!" 소리를 따라 한 사람의 녹색 옷을 입은 아가씨가 천천히 모퉁이 를 돌아 걸어 왔다. 여러 사람은 그녀의 손에 든 물건을 보았다. 그것은 막대기와도 같고 대롱같기도 하였다. "이 철대롱 속에는 독을 탄 액체가 가득 들어 있소. 만일 여러분 이 억지로 여기를 탈출한다면 소비는 부득이 이것을 쓰지 않을 수 가 없소."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모퉁이를 돌아서는 또 두 사람의 녹의소녀- 그녀들의 손에도 역시 앞에 온 녹의소녀와 마찬가지로 철대롱이 들려 있었다. 이때 두구와 앞을 막은 녹의소녀와의 거리는 열 자 정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번 시험해 볼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바람소리 가 훅! 일어나는 가운데 손불사 노인의 몸이 회오리바람처럼 돌아 와 앞을 가로막았다. "급하지 않소!" 노인은 낮은 소리로 이르고 나서 세 녹의소녀를 향하였다. "이 늙은 거지는 아가씨들의 말이 믿기지 않는데....." 먼저 나타났던 소녀가, "소요도장께서는 여러분들을 믿지 못하시어 소비 등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키게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분들이 경거망동을 한다면 당장에 이 철대롱을 시험해 보이라 하셨습니다." "좋아, 이 늙은 거지가 눈을 씻고 기다리겠다." 그녀는 머리를 돌려, "그 사형수를 데리고 오라!" 소리에 따라 푸른 옷을 입은 동자 두 명이 무사차림의 장정 하나 를 떠메고 와서 내려 놓았다. "이 사람은 멋대로 군주의 명령을 어겼으므로 사형에 처하오. 즉 시 이 사람으로써 여러분에게 시험해 보이겠소." 두 동자는 장정을 녹의소녀의 면전에서 서너 자 되는 곳에 밀어 놓은 다음 혈도를 쳐서 사나이를 깨어나게 하였다. 사나이는 긴 하품을 하며 깨어났다. 두 동자는 즉시 물러섰다. 녹의소녀는 어리둥절해 있는 사나이를 향하여 신속무비한 동작으 로 손에 들고 있던 철대롱을 내밀었다. 수십 줄기나 되는 은색의 물줄기가 화살처럼 사나이의 얼굴과 앞가슴을 때렸다.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사나이는 몸을 비틀며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다가 두어 발자국 헛 걸음을 치더니 거꾸러지고 말았다. '지독한 극약이로군.' 모든 사람이 저마다 놀라며 쓰러진 사나이를 보니 이미 숨은 끊 어져 있었다. "여러분은 모두 직접 보셨지요? 소비가 말씀드린 것은 결코 거짓 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출중한 무공을 지녔다고 하여 이 대롱 속에 서 나가는 액체를 막을 수 있다면 소비는 두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두 녹의소녀와 동자를 데리고 돌아 갔다. 소영은 머리를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세 개의 대롱에서 독약이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면 그건 소낙비 와 같을 터인즉, 어찌 한 방울도 맞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으랴. 무공이 고강하다고 할지라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외다." 손불사 역시 같은 심정을 토로했다. "이 길로는 갈 수가 없소. 우리는 다시 선실 안에 들어가 달리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두구는 씨근벌떡거렸다. "흥! 소코 같은 도사놈이 이렇게 악독할 줄이야. 일후에 이 두구 의 손에 걸리기만 해 봐라! 뼈다귀를 부수어 놓고 말 테니....." 상팔은 아직도 미련이 남은 듯, "우리가 일제히 암기를 던진다면 일격에 세 계집애를 칠 수 있으 니 뚫고 나가지 못할 것도 아닌데....." 손불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은 이미 준비가 있소. 모두 모퉁이에 숨어 있을 터인즉, 비 록 제일의 암기 명수가 있다고 할지라도 용이한 일은 아니외다." 상팔은 굳이 고집을 부려, "만일 그들이 지키는 길이 이곳 뿐이라면 저는 진정 한 가지 방 법이 있습니다." 소영이 물었다. "무슨 양책인지요?" "소제가 모험을 하여 정체를 나타내면 그들 역시 앞을 막을 것입 니다. 그 순간에 형님께서 즉시 손을 쓰시면 일거에 칠 수 있을 것 입니다." 소영은 머리를 내저었다. "상형의 생각은 스스로 몸을 버려 세 계집애와 같이 죽자는 것인 가?" "하하하..... 그 계획이 잘된다면 당연히 따르는 것이 이로울 겁 니다." 손불사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늙은 거지의 판단이 틀리지 않는다면 소요자는 한 길을 터 놓고 엄밀히 지키고 있을 것이 분명하오. 길은 하나뿐이오." 두구가 다시 답답하다는 듯 손을 들어 배의 벽에 일장을 때렸다. "이 벽은 모두 나무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어찌하여 뚫고 나가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 말에는 손불사도 맞장구를 쳤다. "좋아! 그 방법밖에 없겠군.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곳에 갇혀 있 는 것도 좋은 방법은 못 되오." 손을 들어 시험삼아 일장을 치니 펑! 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면 서 선체 전부가 찌르릉 울렸다. 상팔 역시 희희낙락했다. "옳습니다. 그 고집쟁이 노도사가 급히 간 것을 보면 필경 강적 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손불사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일장을 친 것은 시험 삼아 한 것으로 결코 선체를 전부 떨어 울릴만큼 강력한 것이 아님 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불사는 돌연 손을 들어 장검을 뽑아 들고는 또 한 손으로는 탁 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진정 강적이 왔다면 한번 뚫고 나갈 필요가 있소이다." 소영이 물었다. "노선배께서는 그 탁자의 넓은 면으로 독약을 막을 생각이십니 까?" "그렇소." "좋습니다. 그것을 뉘어 막는다면 성공률이 대단히 클 것입니다. 저와 노선배는 동시에 손을 쓰는 것이....." 손불사는 머리를 흔들고, "그럴 필요는 없소. 그대의 몸에는 금사슬의 형구가 매어 있으니 행동이 불편함은 당연한 일이오. 게다가 이 늙은이에게 다섯 남녀 아이는 상대가 되지 않소.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단지 독액일 뿐이 지. 그것만 막을 수 있다면 이 늙은 거지의 수완을 가지고도 남을 것이외다." "어찌 노선배 한 분만이 위험을 무릅쓸 수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여러분이 오지 않았던들 이 늙은 거지는 이미 생명 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그리고는 잠시 숨을 몰아쉰 다음, "여러분은 여기에 있다가 이 늙은이가 부르는 소리를 기다리시 오." 오른손에는 장검, 왼손에는 탁자를 들고 손불사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두구가 나섰다. "제가 노선배를 따라 한 팔의 힘이 될까 하오." 손불사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대는 이 늙은 거지가 그 이남삼녀를 당해 내지 못할까 봐 그 러는가?"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필요 없네." 이때 다시 쾅! 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선체가 심하게 진동했다. 소영이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강적은 이미 배에 접근한 것이 분명하오. 무슨 물건인 지는 모르나 뱃전을 심하게 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안팎에서 싸우는 셈이니 형세는 유리하오." 손불사는 이렇게 말하고 탁자로 앞을 막고 서서는 크게 소리질렀 다. "얘들아, 너희들 그런 하잘것 없는 대롱으로 이 거지의 앞을 막 을 수 있겠느냐? 조심해라. 이 늙은이가 뚫고 나가겠다." 소영은 뒤에서 두 개의 젓가락을 주워 들었다. "형세가 이와 같으니 소영은 부득불 악독한 수법을 쓸 수밖에 없 을 것 같습니다." 상팔이 옳은 말이라는 듯, "피차 적어서 적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 형님은 구태여 자비 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소영을 비롯하여 상팔, 두구 세 사람은 모두 몸이 형구로 묶여 있었으므로 동작이 자유스럽지 못했다. 따라서 적을 맞았을 때에는 각별히 선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영은 손에 두 개의 젓가락을 잡고는 큰 나무 문짝에 기대어 손 불사의 거동을 주시했다. 손불사 노인은 왼손으로 탁자를 들어 몸을 보호하면서 앞으로 나 가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오른손의 장검을 휘둘렀다. 소영은 온 공력을 두 손에 모았다. 저쪽에서 적의 동정만 나타나 면 곧장 유선자에게서 배운 절륜한 암기의 수법이 펼쳐질 판국이었 다. 문득 두 개의 장검이 모퉁이에서 불쑥 나오면서 손불사의 검을 막았다. 세 개의 검이 모퉁이에서 서로 엇갈렸지만 두 동자도 세 녹의소녀도 나타나지 않았고 또 독약도 쏘아 오지 않았다. '내 이 탁자로 막으며 재빠르게 계집애들을 상대해야겠다.' 손불사 노인은 속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었지만 사정은 노인의 기 대와는 아주 달랐다. 한참 검을 휘둘러도 상대방은 모습도 나타내 지 않았고 독을 뿌려 오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상한데?' 노인은 기이하게 여기며 갑자기 검을 잡은 손에 내력을 운용하여 힘껏 쳤다. 그제서야 쨍그렁! 소리와 함께 한 자루 장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이어서 다시 장검을 떨치기 이삼 초, 또 장검은 적의 손 에서 벗어난 듯했다. 손불사는 그제서야 힐끗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두 청의 동자가 엎드려 검을 주으려는 판이었다. 녹의소녀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세 분 어서 오시오. 우리는 꾀임수에 빠졌소." 손불사 노인은 일행을 부르며 왼손에 들었던 탁자를 내던졌다. 이어서 손불사 노인의 왼손이 들리면서 동자에게 일장을 먹였다. 동자들은 검을 집으려다 말고 급급히 두 손을 들어 손불사의 장 풍을 막았으나 어찌 상대가 될 것인가? 일제히 물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하하.... 소요자는 다만 세 개의 철대롱만 있었던 모양이오. 그래서 급하게 되니 계집애들을 불러 간 것이지." 두 동자들은 장검을 집기도 전에 한바탕 얻어 맞고는 몸을 비틀 거리다가 다시 소영 등이 다가오니 그만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 아났다. "서라!" 소영이 소리쳤으나 겁이 난 동자들은 듣지 않았다. 그대로 달아 났다. "너희들이 큰 소리도 듣지 못하니 이 소영이 무정하다 나무라지 마라!" 손을 드니 두 개의 젓가락이 화살처럼 나아갔다. "아앗!" 두 마디 비명과 함께 동자들은 나둥그러졌다. 손불사는 탁자를 다시 집어 들어 앞을 보호하면서 걸어 나갔다. 동자들은 허벅다리에 각각 젓가락을 한 개씩 맞았다. 근육 속으 로 한 치쯤 꽂힌 듯했다. 쓰러진 채 네 활개를 버둥거릴 뿐이었다. 소영은 동자들의 다리에서 젓가락을 뽑았다. '내 이렇게 어린 동자들을 상하게 하다니......' 두구가 동자들을 노려 보며 한 마디 했다. "너희들, 겨우 열서너 살씩 먹고 죽으니 애석하다!" 청의동자는 그 눈 속에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구가 가뜩이나 냉면이란 별명을 듣는 싸늘한 얼굴에 더욱 무서 운 흉상을 해 보였다. "너희들, 죽고 싶지 않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이렇게 으름장을 놓아도 동자들은 입술을 우물거릴 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두구는 냉랭하게 소리쳤다. "그 세 계집애는 어디로 갔느냐?" 동자들은 슬그머니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으나 여전히 함구무언이 었다. 소영은 훅 한숨을 내쉬었다. "묻지 마시오. 우리 그대로 나갑시다." "늙은이가 앞장을 서겠소." 손불사는 다시 탁자로 몸을 가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좁은 통 로는 열두어 자 가량, 한 모퉁이를 지나면 바로 층계가 있어 갑판 으로 통했다. 한바탕 쇠가 어지럽게 부딪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갑판에서 일장 의 악전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층계가 보이고 출구가 환히 올려다 보였 다. 손불사는 자기가 들고 있는 탁자를 내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저 곳을 빠져 오르지 못하겠군!' 세 녹의소녀는 너무 급했던지 갑판으로 오르는 출구의 뚜껑도 닫 지 않았다. 손노인이 층계를 올라갔다. 그리고 탁자로 몸을 보호하며 밖을 살피다가 돌연 멍해졌다. "무슨 일입니까?" "심목풍이......" 이 소리를 듣고 소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노선배께 말씀드릴 것을 잊었군요. 전날 심목풍은 사해군주에게 크게 골탕을 먹었습니다. 일거에 여러 척의 배가 부서지고 많은 고수가 살상을 당했지요. 심목풍이 그런 괴로움을 당했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손불사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독으로써 독을 제거해야겠군. 우리는 차라리 그들이 승패 를 가른 다음에 올라가는 것이 어떻겠소!" 상팔이 말을 받았다. "우리 형제가 금사슬 형구에 매어 있지만 않다면 그렇게 하는 것 이 좋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묶여 있으니 차라리 갑판으로 올라가 기회를 보아 행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겠군. 그럼 이 늙은 거지가 앞장을 서겠소." 그는 말하고 곧장 층계를 뛰어 올라 갔다. 소영은 그의 뒤를 바싹 따라 붙어 갑판의 형세를 살폈다. 갑판에 는 이미 유혈이 낭자했고 수십 구의 시체가 처처에 뒹굴고 있었다. 손불사는 어느새 갑판으로 올라가 큰 돛대 위에 숨어 뒤에다 대 고 손짓을 하였다. 어서 오르라는 뜻이었다. 세 사람은 소영을 선두로 하여 가볍게 갑판 위로 올라와 손불사 의 배후에 은신했다. 큰 돛이 말려 있어 방패가 되었다. 배를 지키는 무사들은 거의 살상된 듯 갑판에서 어울려 싸우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주위에 산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손불사가 중얼거렸다. "사해군주는 톡톡히 골탕을 먹었군." "배 위의 사람 수를 보니 거의 다 죽은 것이 틀림없소." 소영은 주목하여 갑판의 형세를 살펴 보았다. 장대하게 키가 큰 위인은 바로 심목풍으로 뱃머리에 우뚝 서 있었는데 그가 들고 있 는 장검에서는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방금 또 한 사 람을 벤 것이 분명했다. 소요자는 불진을 들고 좌충우돌하면서 두 사람의 늙은이와 악전 고투하고 있었다. 두 늙은이는 의복이 특히 시선을 끌었다. 한 사람은 전신 상하 백색의 장삼, 한 사람은 온통 검은색, 말할 것도 없이 장백산에서 온 흑백이노였다. 전에 소영은 흑백이노를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두 늙은이 는 손을 쓰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는 두 늙은이의 무공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중원 무림의 무공과는 전혀 틀리는 형식이며 술수였 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완전히 일가를 이루고 있어서 위력이 대단 했다. 그들 두 사람은 소요오자와 어울려 싸웠지만 손에는 아무 것 도 들린 것이 없었다. 소요자가 흑백이노와 어지러운 혼전을 벌이고 있는데 그 황색도 포의 사해군주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해군주의 기풍은 과연 대단하군. 온 배 안이 벌집을 쑤셔 놓 은 것같이 되었어도 나타나지 않으니......" 손불사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로다. 심목풍은 자기의 수하 고수를 데리고 오지 않 았다는 말인가? 갑판에 쓰러진 자들은 전부가 사해군주의 수하들이 니......" 소영이 말했다. "보아하니 심목풍은 이미 다치고 죽은 자기편 사람들은 전부 다 른 곳으로 옮긴 것이 분명합니다." 이때 소요자는 불진을 거세게 휘둘러 맹공하여 흑백이노를 뒤로 두 발자국이나 밀어 냈다. 다음 순간 소요자의 몸이 훌쩍 허공으로 날더니 십여 자나 뒤로 물러나며 선실속으로 떨어져 들어 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용 과 봉황을 조각한 덮개가 꿈틀 움직이더니 단번에 문이 되어 입구 를 봉해 버리고 말았다. "노선배님, 갑판 위는 이와 같이 유혈이 낭자한데 선실 안은 오 히려 평정무사한 것 같소이다." 손불사 역시 괴이하다는 표정으로, "이 늙은이도 또한 괴이하게 여기고 있소. 크고 작은 전투를 여 러 번 겪었으나 오늘과 같이 기괴한 싸움은 처음 보는구료. 지금 갑판에는 심목풍과 흑백이노를 제외하고는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하 나도 보이지 않으니....." 소영 역시 그것이 궁금했다. '그렇다면 심목풍은 다만 흑백이노만을 데리고 왔단 말인가?' "단지 세 사람으로 이 배의 무수한 고수들을 모두 죽였다면 흑백 이노의 무공 또한 놀라운 바가 아닐 수 없다." 소영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심목풍이 걸걸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사해군주! 너의 사십팔 명의 호위무사들은 이미 완전히 죽었다. 보아하니 배 안에는 더 싸울 만한 무사가 없는 모양인데 그쯤하고 이제 모습을 나타내는 게 어떤가?" 선실 안에서 사해군주의 대답하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전해 왔다. "네 비록 나의 수하 사십팔 명을 완전히 죽였다고는 하나 네가 데리고 온 십팔 명의 고수들은 몇이나 남았더냐? 목하 너희 세 사 람을 제외한다면 달리 도와줄 인재가 없을 게다." 그제야 소영은 심목풍이 십팔 명의 무사를 데리고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그의 수하 고수들도 전부 살상당한 것인가?' 이즈음 배 안에서는 또 소요자의 음성이 전해 왔다. "심목풍, 빈도가 한 마디 알려 줄까?" "흥! 네 감히 나를 선중으로 끌어 들이려는 수작이냐?" 다시 그 용과 봉황이 새겨진 선창의 문이 흔들리며 열렸다. 소요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 오색 거선에는 사십 명의 호위무사 외에도 또 삼십육 명의 동자와 이십사 명의 여비가 있다. 그들은 우리 군주의 한 마디 분 부만 떨어지면 즉시 나가 그대들을 공격할 수 있다." "흥, 아무리 많은 인원이 올지라도 다만 억울하게 죽는 원귀가 될 뿐이다. 일찌감치 귀군주더러 몸소 나오라고 이르는 게 좋을 게 다." 말소리가 떨어지자 과연 황포를 입은 사해군주가 걸어 나왔다. "심대장주, 진정 본인에게 도전하는 것이오?" 사해군주는 나이 겨우 삼십여 세, 일신에는 용과 봉이 수놓아진 황색도포를 입고 있었다. 두 손은 맨주먹으로 아무런 무기도 사용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심목풍이 한 마디 싸늘하게 변죽을 울렸다. "귀하의 금관용포가 아주 그럴 듯하군. 그러나 그 몸에 지닌 무 공은 어느 정도인지?" "심대장주께서 한 번 시험해 보시지?" "두 차례의 악전 끝에 무고한 그대의 수하는 많이 살상당했다. 그러니 이제 나와 군주가 직접 일전을 겨루어 승패를 나눔이 좋겠 지." 사해군주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본좌는 이미 심대장주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요. 그러나 심대장 주와 일전을 겨루어 이길 수 없다면 아예 강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을 게요." 심목풍은 갑판 한가운데로 나왔다. "군주께서 이미 그런 뜻이 계시다니 이 심아무개는 환영하는 바 이오." 그는 걸어 나오면서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그의 앞길에 누 워 있는 시체들을 하나하나 강물로 집어 넣고 있었다. 손을 움직이 는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발로 차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체들 은 사람이 던지기라도 하는 듯이 물로 떨어졌다. 소영은 이 모양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이 사람의 무공은 과연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구나." "하하하하......" 사해군주의 큰 웃음소리가 소영의 귓전을 때렸다. "심대장주의 위명은 이미 강호에 파다하게 퍼져 있거늘, 구태여 그런 잔재주를 부릴 것은 없지 않은가?" 손불사는 전음술로 소영과 중주이고에게 말했다. "새로 나타난 사람과 전부터 있던 사람이 곧 이 배 위에서 결전 을 앞두고 있소이다. 바로 효웅과 간웅의 대결이지. 우리는 두 사 람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거에 두 간웅을 섬멸할 수 있을 것 이오. 그렇게 된다면 어찌 무림의 큰 공덕이 되지 않으랴. 세 분은 몸을 잘 숨겨 발각되지 않도록 하시오." 이때 심목풍은 이쪽을 등지고 있었다. 거대한 몸집이 사해군주의 면전을 우뚝 막아선 것이다. 그의 걸걸한 목소리가 전해 왔다. "강한 손님이 군주를 억압할 수는 없는 일. 군주, 먼저 손을 쓰 시오." 그 말에 따라 과연 사해군주도 한 발짝 나섰다. 갑자기 소요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군주, 잠깐 참으십시오." "본좌는 그에게 약세를 보일 필요가 없소. 소장께서는 무슨 말씀 이 있으신지?" 소요자는 미미하게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군주께서는 진작부터 무림의 맹주로서 강호를 영도하실 뜻이 계 셨거늘 어찌 일시의 기분으로 친히 적을 대적하십니까?" 심목풍이 쌀쌀하게 빈정거렸다. "그대들이 이 심아무개만 패퇴시킬 수 있다면 무림을 주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금방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사해군주는 의연히 가로막았다. "본좌는 조만간 심목풍과 반드시 일전을 겨루어야 하오. 그러니 더 무엇을 꺼리겠소." 소요자는 가당치 않다는 듯, "군주의 말씀이 비록 틀림은 없으나 이 시각은 오히려 그 시기가 아닙니다." "어째서요?" "지금의 실정으로 보건데, 우리는 이미 대국을 주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은 수가 적고 우리는 다수이니 군주께서는 자연 친히 적을 막을 필요가 없소이다." 사해군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도장의 뜻은?" "빈도의 뜻은 심목풍을 핍박하여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어 우 리가 이용하자는 것이외다." 사해군주는 옳은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께서 만일 계책이 계시다면 본좌는 잠시 화를 누르겠소." "군주께서는 선실로 돌아 가십시오. 빈도가 이들을 대할 것입니 다." 사해군주가 아직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선실 안에서 갑자기 한 사 람의 청의동자가 나오더니 소요자의 귀에다 뭐라고 소곤거렸다. 소영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꼈다. '저 아이는 우리의 일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사해군주는 갑판 위의 격전으로 잠시 소영 등의 일을 잊었다. 문득 소요자는 안색이 진정되더니 담담히 웃으며 손을 휘둘러 청 의 동자를 물러가게 했다. 심목풍은 기다리기에 지쳤는지 한 마디 비꼬았다. "군주는 싸우기가 두려운 모양인가?" 소요자가 이미 세 분을 항복시킬 계책을 마련하였으니 본좌는 자 연 귀하와 수고스러운 손놀림을 할 필요가 없지." 심목풍은 시선을 돌려 흑백이노에게 무언의 뜻을 전했다. 두 늙 은이는 빛이 번쩍하듯 신속한 동작으로 선실로 들이 닥쳤다. 이 꼴을 보자 사해군주는 즉시 쌍장을 들어 두 갈래로 공격했다. 바로 흑백이노의 가슴을 친 것이다. 소요자가 불진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군주, 어서 선실로 드십시오." 사해군주는 몸을 기울여 선실 안으로 들어 갔다. 흑백이노는 각각 오른손을 들어 사해군주의 일격을 막았으나 펑! 하는 소리가 일어나자 오히려 한 걸음씩 뒤로 비틀거렸다. 이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요자는 급하게 휘둘러 흑백이노를 다 시 한 발자국씩 밀어 냈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이 다시 공격하기도 전에 몸을 번뜩여 선실 로 들어가 버렸다. 심목풍이 낮은 소리로 한 마디 했다. "선실 안으로!" 말과 동시에 장검으로 앞을 보호하면서 선실 입구로 걸어 갔다. 흑백이노는 왼손으로 가슴을 보호하고 오른손으로 맞는 자세를 취하며 선실로 돌진했다. 순간, 선실 안에서 검은 점으로 보이는 물체가 소낙비처럼 쏘아 나왔다. 하도 갑작스런 일이라 흑백이노도 또한 무슨 암기인지 알 아 보기도 전에 손바닥을 뒤집어 막으며 물러났다. 그러나 손바닥 은 이미 암기에 맞았는지 벌에 쏘인 것처럼 따끔거렸다. 두 늙은이 바로 뒤에 섰던 심목풍은 몸을 뒤로 훌쩍 날리더니 여 남은 자를 한꺼번에 날아 물러났다. 소영은 즉시 마음 속에 짚히는 바가 있었다. '독물이로구나......' 선실 안에서 소요자의 큰 웃음소리와 함께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 려 왔다. "두 분 상세는 어떻소?" 흑백이노는 동시에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손바닥 한 가운데 하나의 검은 점을 발견하고 즉시 실성하여 소리쳤다. "독침이다!" 얼른 운공하여 왼팔의 혈도를 막았다. "하하하..... 그렇소. 바로 백보단혼 황봉침이라는 것이니 백 걸 음을 가기도 전에 죽을 것이오. 보통 사람은 한 방울만 맞아도 상 처가 즉시 썩어 문드러지오. 당신들의 내공이 아무리 정순하다고 할지라도 그 백 종의 독사로부터 뽑아 혼합시킨 독을 항거할 방법 이 없을 것이오. 게다가 항차 독침까지 맞았으니......." 흑백이노는 관외의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바지만 이 소리를 듣고 무심할 수가 없었다. 즉시 얼굴색이 변했다. 소요자는 또 하하 웃으며 빈정댔다. "그 독침은 가늘기가 쇠털같아 핏줄을 타고 이내 심장으로 들어 갈 것이외다. 여러분은 아무리 금강불괴의 몸이라 할지라도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게요." 흑백이노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불진을 비껴 든 소요자의 모습이 천천히 나타났다. "두 분은 다만 한 가지 살 길이 있을 뿐이오." 흑백이노는 눈썹을 곤두세우며 욕설을 퍼부으려고 했으나 억지로 참는 눈치였다. "저의 군주께서 지니신 독문의 해약을 제외하고는 천하에 두 분 의 상처를 치료할 약이라곤 없소." 흑백이노는 다시 자기들의 팔을 들여다 보았다. 독침이 꽂힌 자 리의 짙은 흑색은 이미 팔꿈치까지 침윤해 들어와 있었다. 이렇게 생사를 판가름할 위기에서 두 늙은이는 힐끗 머리를 돌려 심목풍을 바라 보았다. 심목풍은 거듭 헛기침을 토해 내고는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의 몸에 지금 해독하는 영약이 있습니다. 두 분 상처를 제게 보여 주십시오." 흑백이노는 일제히 심목풍의 신변으로 걸어 갔다. "두 분의 상처는 어디입니까?" "상처는 왼손 손바닥 가운데요." "다른 곳은 상하지 않았습니까?" 흑백이노는 머리를 저었다. "우리가 쏟아낸 장력으로 독수와 독침은 모두 땅바닥에 떨어졌습 니다. 왼팔을 제외하고는 다른 상처는 없습니다." "두 분은 소매를 걷어 올리십시오." 흑백이노는 곧 소매를 걷어 올렸다. 검은 줄기가 팔꿈치까지 올 라와 있었다. 심목풍은 눈살을 찌푸렸다. "두 분은 어찌하여 운공을 하여 혈도를 봉쇄하지 않았소이까? 이 렇게 극독이 팔을 거슬러 올랐으니....." 답답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비록 혈도를 막기는 하였습니다만 독을 막을 수는 없더군요." 심목풍이 돌연 고개를 들었다. "좋아, 나도 그들에게 독을 선사하겠소." 소리와 동시에 한 가닥 빠르고 급한 암경이 소요자의 가슴을 향 해 날아 갔다. 소요자는 불진을 흔들며 가볍게 막아냈다. "심대장주께서 비록 경천동지의 재주가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은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마시오." 소요자는 말과 동시에 불진에 내력을 집중하여 상대방의 벽공장 력을 맞이하였다. 심목풍의 이 일장은 필생의 내력을 전부 모은 것 이었다. 소요자가 비록 물진에 공력을 담아 상대방의 일장을 막았으나 펑! 하는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소요자는 비틀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가슴이 섬뜩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 심목풍의 위세는 과연 가볍게 볼 수 없군!' 그가 이렇게 놀랄 즈음 돌연 처절한 비명이 들려 왔다. 소요자가 크게 놀라 바라 보니 언제 나와 있었던지 두 명의 청의 동자가 선실 입구에 서 있다가 가슴에 각기 한 자루씩 버들잎 같은 작은 단도를 맞았다. 동자들은 사지를 버둥거렸으나 숨이 넘어갈 것이 뻔했다. 72. 강호의 지략가가 모두 모이니 심목풍은 소요자에게 전력으로 일장을 먹이는 순간 잇따라 두 자 루의 비도를 던졌다. 그 비도 끝에는 역시 극독이 발라져 있었다. 그가 두 동자를 죽인 것은 소요자를 격퇴시킬 확률이 적음을 계산 한 소치라 하겠다. 소요자가 동자들의 모습에 눈을 팔고 있는 순간, 다시 이번에는 어른들의 비명이 일어났다. 소요자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보니 이미 흑백이노의 왼팔이 모 두 잘라진 게 아닌가? 심목풍이 두 아이를 죽인 것은 단순히 흑백이노의 심신을 혼란시 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 서슬에 재빨리 장검으로 두 늙은이의 팔을 내려쳤던 것이다. 소영은 몸을 은신한 채 이 모양을 보자 간담이 떨렸다. '심목풍이 저렇게 악독한 위인일 줄이야!' 심목풍은 단칼에 흑백이노의 팔을 잘라 버림으로써 두 늙은이의 배신을 예방한 것이다. 심목풍의 목쉰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두 분의 왼팔의 상세는 비록 영약이라도 치료하기 어려우니 이 심목풍은 두 분을 대신하여 쓸데 없는 것을 잘라 버려 우리의 돈독 한 우의를 유지하게 한 것이외다." 흑백이노의 잘라진 팔꿈치에서 시뻘건 선혈이 그치지 않고 흘러 갑판을 어지럽혔다. 고통스러움에 두 늙은이는 얼굴색이 변했지만 그래도 입으로는 여전히 뇌까리는 것이었다. "심대장주의 말씀이 옳소이다." 심목풍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분은 어서 운공하여 피를 멈추게 하십시오. 우리는 다시 일 장의 악전을 치러야 합니다." 만일 두 늙은이가 가슴이나 허리에 암기의 극독을 맞았다면 어떻 게 되었을까? 심목풍은 가차없이 두 노인의 목을 잘라 버렸을 것이 다. 흑백이노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급히 옷자락을 찢어 상처 난 팔을 싸매기 시작했다. 갑판에 떨어진 두 개의 팔뚝은 이미 흑 자색으로 변해 있었다. 또한 팔에서 흘러내린 피도 흑자색이었다. 심목풍은 이때 소요자를 건너다 보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도장의 두 시동을 죽임으로써 두 친구의 팔을 대신하였으나 그 것으로 다행이라 여겨서는 안 되오." 소요자는 그 말상 같은 얼굴에 담담히 미소를 띠었다. "빈도는 심대장주의 악랄한 수단에 경탄한다. 또한 두 벗의 그와 같은 호기에도 감탄했다." "흥! 대단한 칭찬이시군. 도장온 다시 어떤 귀계와 음모라도 시 전하라. 나 심모가 진정 한번 시험해 보겠다." 소요자의 입에서 돌연 큰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하핫.... 심대장주, 머리를 돌려 보시지!" "무엇을 보란 말인가?" "이 배가 어디까지 왔는지 그걸 보라는 말씀이야." 심목풍은 머리를 들어 강 위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라곤 오직 출렁이는 강물뿐, 어디까지 왔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심목풍은 다만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이 오색 거선은 가면 갈수록 백화산장과 멀어지오. 심대장주께 서 흥취가 있으시다면 우리는 한번 남해로 멀리 나갔다가 다시 중 원으로 돌아 와도 늦지 않을 것이오." "흥, 도장의 뜻은 이 심목풍이 수영을 할 줄 모른다고 비웃는 것 이겠지?" "하하.... 그대가 비록 헤엄을 칠 줄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 군주 와 물 속에서 겨루기는 어려울 것이오." 이때 손불사 노인 역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는 소영 등을 돌아 보며 낮은 소리로 이르는 것이었다. "이 오색 거선은 갈수록 멀어지오. 우리에게는 또한 불리한 일이 아닐 수 없소이다. 이 늙은이는 실로 물오리에 뒤지지 않으나 여러 분의 헤엄치는 솜씨는 어떠한지?" 소영이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또한 수영을 그다지 할 줄 모릅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하 사정을 보면 쌍방은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소. 우리 몇 사람은 실로 백 량 무게의 조예가 있으니 형세가 급해지면 우리도 부득불 수단을 쓰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무슨 수단을 씁니까?" 손불사는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대들은 다만 이 늙은 거지가 하는 대로만 하면 되오." 말을 마치자 그는 돌연 몸을 나타내어 뚜벅뚜벅 큰 걸음으로 갑 판으로 나갔다. "심대장주, 오랜만이외다." 심목풍의 음침한 얼굴에 일순 헤아리기 어려운 빛이 스치고 지나 갔다. 그러나 심기가 깊은 위인이라 평온을 회복하는데는 빨랐다. "손형 또한 여기 계셨구료." 소요자는 손불사를 바라 보며 물었다. "다른 세 분은?" "그들은 이미 기다리기에 지쳤소." "누구를 기다리기에 지쳤소?" "그것까지 이 늙은이가 밝혀야 하는가?" "음-" 소요자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빈도가 생각을 미처 못했소이다." "좋소. 도장은 이 늙은 거지더러 굳이 말하라는 모양인데 내 밝 혀 말하리다. 그들은 도장이 씌운 형구의 열쇠를 기다리고 있는 중 이오." 심목풍은 뭐라 말할 듯한 표정이었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형구냐고 물어 보려는 듯했다. 소요자는 그 말상 같은 얼굴에 엷은 웃음을 떠올렸다. "알았소. 네 분은 위험한 기회를 포착한 것이로군." "하하.... 도장, 도대체 무슨 위난이 있다고 이 늙은 거지를 살 피지 않으려 하시오." 심목풍이 돌연 입을 열었다. "손형, 저 고집쟁이는 아주 미치광이올시다. 손형까지도 안중에 두려고 하지 않는구료." 손불사는 부지중에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다. '이 심가놈아, 대간대악와 역정을 보면 네놈이야말로 저 사해군 주보다 몇 배나 죽일 놈이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천연덕스럽게 감추고 그저 큰 소리로 웃었 을 뿐이었다. 소요자는 눈을 돌려 선창 안을 바라 보며 마치 혼자말로 중얼거 리듯 내뱉었다. "손형이 도와 주신다면 이 일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텐데...." 손불사는 헛기침을 한 번 토해 내고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목하의 정세로 논할진대, 이 늙은 거지는 기이한 화폐라 할 수 있지. 그러니 도장은이 거지와 돈의 가치를 따져 몇 냥 몇 냥 헤아 려 봐야 짐작이 잘 안 갈 거요." "당신 손대협이 하고자 하면 되지 않겠소. 그러면 우리는 우세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손불사가 이어 말했다. "도장은 나를 협박하여 이용하려 하는군.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심목풍이 그 말을 받았다. "손형이 나의 한팔이 되어 주신다면 이기는 건 문제가 아닐 거 요." "이 늙은 거지 혼자서 결정키 곤란하오. 그들과 먼저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하겠소." "뭐라고? 그럼 개방 중의 사람이 또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요?" "개방 중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마침 소영과 중주이고가 나란히 걸어 들어 왔다. 소영의 일 행이 나타나자 가장 놀란 것은 심목풍이었다. 소영이 이곳에 나타 났다는 것은 손불사를 만난 것보다 더욱 의외였다. 심목풍이 놀라 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평소 그의 사람됨이 음흉스럽기 비길 데 없기 때문이었다. 중주이고는 각기 하나의 목판을 받쳐 들고 있었다. 그들은 소영의 눈치를 한번 살펴 보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는 깊은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이 목판으로 독침과 독수를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손불사가 말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군.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 소요자는 그 말을 듣고는 돌연 품 속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그는 여전히 능글맞게 그 열쇠꾸러미를 높이 들어 흔들며 말했다. "이것은 금사슬의 열쇠지. 천하엔 교묘한 재주를 가진 솜씨꾼이 많다. 하나 이처럼 복잡미묘하게 만들 수는 없을 거야. 만약 여러 분이 나를 못살게 군다면 이 열쇠를 강물 속으로 빠뜨리고 말 테 다." 손불사는 그의 말에 놀랐다. '소영은 깨어진 술잔으로 나의 몸에서 우근을 끊어 낼 수 있었 지. 그의 팔힘은 여간한 게 아냐. 하지만 금사슬의 형구를 끊어 버 릴 방법이 없다면, 그리고 저놈이 열쇠를 정말 강물 속으로 던져 버린다면 정말 곤란하게 되겠는데.' 손불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난처해졌다는 결론밖에 얻지 못 했다. 심목풍이 목쉰 소리를 내며 입을 떼었다. "나 심아무개는 고의로 사람을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소요자가 가진 열쇠로는 결코 소영의 몸에 걸친 형구를 딸 수 없어." 심목풍은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다시 계속했다. "소영! 만일 심아무개와 합력한다면 밥 한 그릇 먹을 동안이면 저 오색 거선 위에 남아 있는 잔적을 소탕할 수 있을 것이오. 그리 고 사해군주를 사로잡아 그들을 위협한다면 열쇠를 차지하는 것은 여반장이지." 소요자는 만만치 않게 대들었다. "만일 손불사와 중주이고가 그 꾀임에 쉽사리 넘어간다면 강호동 도의 비웃음을 사는 수밖에 없을 거요." 손불사는 소영과 중주이고를 번갈아 쳐다 보며 물어 왔다. "세 분의 의견은?" 상팔이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우리 형제는 이미 손노선배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생사를 막론 하고 손노선배의 말씀을 따를 따름입니다." "당신들이 그토록 이 늙은 거지를 믿는다면 잘 생각해 봐야겠는 걸." 소요자가 말했다. "손대협! 생각할 필요가 없소. 당신이 나서기만 한다면 심목풍쯤 은 사로잡을 수 있지. 그렇게 하면 빈도는 세 분의 형구를 풀어 주 겠소." 손불사는 걱정스런 빛을 띠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늙은 거지 혼자서는 심목풍의 적수가 될 수 없지." 소요자가 다그쳐 말했다. "그렇다면 중주이고의 형구를 풀어 당신을 돕도록 하겠소." 상팔이 걸쭉하게 소리쳤다. "우리 중주이고의 형구를 푼다 하나 헛수고일 뿐이오." "어째서?" "세 사람이라 할지라도 심목풍의 적수가 될 수 없으니까." 소요자는 내심 찔끔 놀랐다. 그러나 곧 거침없이 웃어제쳤다. "하하핫핫, 알 만하오. 여러분의 뜻은 소영 신상의 형구를 풀어 달란 말씀이신가요? 하하핫....." 두구가 서릿발이 선 듯 노해 외쳤다. "그렇다. 지금 세상에서 우리 소영형님을 제외하고는 누가 심목 풍의 적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심목풍이 돌연 폭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두구가 말하는 것은 바로 소요도장과 사해군주를 깔보는 것이로군!" 이 몇 사람들이야말로 온갖 풍상과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들이 었다. 비록 표면적으로 직접 양립되어 적으로 대항치 않는다 하더 라도,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겨 있는 계기는 변화가 무쌍할 뿐만 아니라 그 출중함이 끝이 없었다. 소요자는 문득 결연한 표정을 짓더니, 게걸음으로 두어 걸음 소 영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형구를 풀며 말했다. "빈도는 손대협과 소대협이 두터운 신의를 가졌다고 믿고 있소. 한 번 대답을 한 것이니 변할 리는 없겠지요. 이번만은 빈도 스스 로가 작정하여 형구를 푼 것이오." 소영은 두 팔을 쫙 펼쳐 사방으로 휘둘러 봤다. 속이 후련했다.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토했다. 심목풍은 사태가 어쩔 수 없어 소영과의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어 가자 뭔가 위축되어 몇 걸음 물러섰다. 상팔은 기쁨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소요자는 소영을 힐끗 쳐다 봤다. 그의 눈빛은 후회하고 있음에 틀림 없었다. 그에게서 형구를 푸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다. 그 렇지만 다시 그를 사로잡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 이라는 것이 지금에야 생각났다. 새장을 열어 봉황을 날려 보내고 자물쇠를 풀어 용을 달아나게 한 것과 같은 지경이었다. 만약 이들이 심목풍과 손을 잡고 공격해 온다면 이를 어쩐단 말인가! 스스로 화를 부른 것인지라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그대는 왜 웃는 거요?" 더구나 상팔의 웃음소리가 심상치 않아 그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팔이 문득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틀림없지요. 우리 형님은 말한 것은 언제나 지키고 약속을 깨뜨 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장에게 승낙한 일도 없고 대답한 말 도 없습니다." 소요자의 불안한 심중은 드디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났다. 이어 노한 음성으로, "이 엉터리....." 소영은 확실히 한 마디도 승낙하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그대로 침 묵을 지켰다. 상팔이 비웃듯 말했다. "도장! 자세히 생각해 보시오 내 말이 틀리는지......" "빈도는 누가 뭐라 해도 소영과 중주이고는 성실히 명예를 지킨 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어기는 일은 없을 줄로 생각한다." 상팔이 말했다. "손노선배님께서는 아직도 도장을 도울 것인가 아닌가, 생각중이 시니 너무 상심 말기를! 우리 중주이고는 원래 이해를 따지려 드는 장사치가 아니오? 결코 상관치는 않겠으나 친구의 우정을 먼저..." 소요자는 상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뇌까렸다. "아무리 이해만을 생각하는 장사치라 할지라도 신용만은....." "도장!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 중주이고가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를......" 소요자는 기가 찼다. 그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자 맥이 풀렸다. "너희 중주이고는 아직 형구가 풀리지 않았음을 알아 둬라!" 화를 억누를 길 없어 되는 대로 지껄여 댈 뿐이었다. 상팔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도장 염려 마십시오. 중주이고는 결코 당신에게 형구를 풀어 달 라고 조르지 않을 것이니. 하하핫...." 손불사가 말했다. "도장이 도량이 넓다면 이 때야말로 중주이고의 몸에서 형구를 풀어야 마땅할 것이오." 소요자는 다소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까짓 것, 뭐가 어떻겠소? 하하핫......" 그리고는 뚜벅뚜벅 중주이고에게 다가가서 형구를 풀어 주었다. 두구는 오랜만에 자유로이 두 다리를 폈다 오므렸다 해 보았다. "도장! 이처럼 해 주시니 고맙소." 상팔은 너무 쉽게 형구가 풀어진 게 재미없다는 듯 말했다. "도장! 우리를 오랫동안 묶어 두셨으니 아무리 보상을 한다 해도 비싸지는 않겠지요." 소요자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지으면서 억지로 화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실성한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창문 쪽으 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두구는 싸늘하게 말했다. "도장! 아직도 한 가지 일을 잊으셨군요!" 소요자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 보았다. "무슨 일이오?" "우리의 무기를 도장께서는 응당 돌려 주셔야지요." 소요자는 초연해지면서 말했다. "사람까지 풀어 줬는데 그까짓 무기를 뭣 때문에 지니고 있겠소! 잠깐만 기다리신다면 즉각 돌려 드리겠소." 뚜벅뚜벅 문으로 걸어 들어 가더니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손불사는 낮은 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저 고집쟁이가 돌연 이처럼 너그러워졌으니 이 늙은 거지가 난 처해졌는데....." 소영이 대답했다. "오늘과 같은 일은 미묘한 균형이 작용해서 그렇게 된 것이오. 우리들은 일시의 호기로써 출수해선 안 될 겁니다." "그렇다. 심목풍과 소요자는 모두 생각이 깊고 그 꾀를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교활한 놈들이지. 그러나 소요자의 속셈은 뻔하지. 승냥이를 몰아 내고 호랑이와 싸우는 것이 바로 가만히 앉아서 어 부지리를 노리는 것이니 우리는 꾀임에 빠져선 안 될 것이오." 그즈음 심목풍은 책상다리를 하고 뱃전에 기대 앉아 있었다. 흑백이노는 그의 양쪽에 버티고 서 있었다. 햇살이 뜨겁게 그들 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는데 암암리에 그들 위로 흰기운이 솟아 올 랐다. 손불사가 이 기운을 알아차리고 가벼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심목풍은 우리와 일전도 불사할 모양이야. 가만히 앉아서 운동 을 하고 있으니..... 전력으로 출수할 준비를 하는 모양이군. 우리 가 먼저 예봉을 막을 수는 없지." 이때 소요자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러분의 무기를 가져 왔소." 상팔은 시선을 돌렸다. 두 명의 청의비녀가 손에 중주이고의 무 기를 받쳐 들고 서 있었다. "두 분 무기이옵니다." 두구는 팔을 뻗쳐 철필과 은전을 집어 들었다. 상팔은 금산반을 집어 들고 그 여비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두 분은 물러가도 좋소." 그는 이미 소요자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두 비녀 에 대해서도 철저한 경계를 했다. 두 비녀가 그 말을 듣고 가벼이 절을 하며 물러갔다. 이때 소요자와 오색선 주위에 있던 그의 부하들은 모두 선실 안 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창문을 단단히 닫아 버렸다. 갑판 위에는 소영과 손불사 일행과 심목풍, 흑백이노만이 남았다. 소영은 줄곧 심목풍의 거동에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흰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농도는 짙어졌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났을까. 그 흰기운이 돌연 보이지 않았다. "조심하시오. 심목풍이 거동할지 모르오." 상팔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서 낮게 말했다. "큰형님! 우리들은 어떻게 할까요?" "저 심목풍의 동정을 엿보고 얘기합시다. 그가 거동하는 것을 보 아 틈을 타 제거해 버리는 거요." 갑자기 심목풍이 상팔을 노려 보았다. 그리고 흑백이노에게 뭔가 를 소곤거리고는 곧장 걸어 나왔다. 소영이 얼른 장검을 뽑아 들었다. 순간, 낙엽 위를 지나는 뱀소 리와 같은 한 가닥의 바람소리가 들려 왔다. "두 분 형제에서는 이곳에서 지키고 계시오." 소영이 중주이고에게 말했다. 이 순간 소영의 마음 속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착잡했다. 이곳에서 심목풍과 결전을 벌여 승패를 가 린다면 결국 소요자에게 어부지리를 줄 뿐이잖은가! 착잡하게 생각하는 중에 그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 이 윽고 서너 자로 좁혀 들었다. 두 사람은 그쯤에서 동시에 멈추어 섰다. 심목풍은 마른 침을 삼키면서 말을 꺼냈다. "셋째 아우!" 소영은 멈칫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퍽 오랜만이군!" 소영은 어리둥절했다. "심대장주, 무슨 말씀이신지? 기탄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심목풍은 빙그레 웃으며, "셋째 아우라는 부름이 낯이 선가?" "도가 같지 않으니 함께 하기는 어렵지요. 우리는 형제의 의를 응당 끊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셋째 아우는 나와 적이 될 작정인가?" "심대장주의 무공이 고강하다 함은 소아무개도 이미 다 알고 있 는 터이옵니다. 몇 초 가르쳐 주신다면 소영은 기꺼이 배우겠습니 다." 심목풍의 안색이 무섭게 변하며 엄숙하게 말했다. "얘기해야 할 게 몇 마디 있네. 생선의 가시가 목에 걸려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지경이니." "소영은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아우의 양친께서는 또 형에 의해서 백화산장으로 모셔졌지." 소영은 깜짝 놀랐다. 쇠뭉치로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 맞은 것 같 았다. 그는 저절로 온몸이 떨렸다. "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저번엔 우리의 행동이 거칠어 백부에게 예의 없는 짓들을 했지. 이번엔 아우가 이미 그들을 잘 가르쳐 놓아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지. 형은 네 명의 미비와 두 명의 동자를 보내어 두 노인을 모시 게 했네. 금란, 은란도 여전히 백모 곁에서 시중들고 있네." 소영은 거친 소리로 외쳤다. "거짓말 마시오." 심목풍은 시종 조금도 노여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형의 말은 가슴 속에서 우러나온 말이야. 아우가 믿으려 않는다 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심목풍은 몸을 돌려 흑백이노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사람에게 물어 보게. 당장에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니."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소영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신투 향비는 그토록 총명하더니 일순간 돌았단 말이야. 하하하 핫.... 글쎄, 그가 그 두 노인을 더욱 멀리 데려가지 않고, 가석하 게도 백 리 안에서 붙잡히고 말았거든. 더욱 멀리 보냈더라면 아우 도 찾을 수 없었겠지만.... 과장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백 리 안은 손바닥이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처럼 다 알 수 있단 말이야." 소영은 이 말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백화산장의 탐정과 밀정들 은 쌍방 백 리 내에 배치되고 있어 향비와 같이 얼빠진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발각되는 것도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심목풍은 소영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의 표정으로 보 아 어느덧 그의 말을 믿고 있음이 틀림 없는 것 같았다. 심목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엄숙한 목 소리로 말했다. "주이제는 작은 일에는 총명했으나 대사에는 흐리멍텅하단 말이 야. 형은 그에게 두 노인을 모셔 오는 것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했 단 말일세. 형은 당시에 너무도 바빴으므로 물어 볼 틈도 없었지. 한 번 틀리고 두 번 틀려 결국은 난처한 일을 만들었단 말이야! 지 금도 생각하면 형은 여전히 불안하단 말이야!" 소영은 그의 말에 마음이 동요했다. 어느덧 그는 그의 말을 점점 믿고 있었다. 당장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심목풍은 가벼이 탄식하는 투로 말했다. "셋째 아우가 만약 형과 손을 잡고 합작한다면 형은 얼마나 기쁠 지....." 소영이 선뜻 말했다. "비록 저의 부모님이 당신의 보호하에 있다 할지라도 다시는 나 소영을 위협할 생각은 마시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무상한 것이라 단언하기가 아주 어렵지. 형은 이 오색 선상에서 아우를 만날 줄은 정말 뜻밖이었어....."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잠깐 말을 끊었다가 잠시 후 다시 힘주어 말했다. "내가 할 말은 이제 다 했네. 아우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도 좋아." "나는 할 말이 없소." "그럼 좋다. 네가 간악한 소요자의 꾀임에 빠져 꼭 형과 몇 초를 겨루어 보고자 하니, 좋다. 먼저 출수하라." 소영은 심목풍을 뚫어져라 노려 보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의 발걸음이 한 발짝 한 발짝 무겁게 물러나고 있었다. 상팔이 급급히 걸어 와서 물었다. "형님, 심목풍과는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소영은 체념한 듯 한 마디 내뱉았다. "다 됐소. 우리의 이번 노력은 헛수고인가 보오!" "무슨 일인가? 이 늙은 거지에게도 들려 주게!" 손불사는 눈을 치뜨고 궁금해서 다그쳐 물었다. "저는 아홉 마리 황소와 두 마리의 호랑이를 합한 힘을 소비했습 니다. 더군다나 노선배님의 힘을 빌려 백화산장에서 부모님을 구출 했으나, 지금 또 저 심목풍에 의해 백화산장에 잡힌 몸이 되었습니 다." 손불사와 중주이고의 놀라움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만 멍하니 바라볼 뿐 할 말을 잊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상팔이 침통한 소리로 말했다. "큰형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거 참! 굉장히 난처하게 되었는데!" 손불사가 말했다. "그 심목풍이 자네의 원을 무엇이든 들어 주고 난 다음 이곳을 떠나 함께 자네의 대인을 뵈러 가려는 건가?" "아닙니다." "이 일은 늙은 거지가 보기엔 그 심목풍이 간교를 부리고 있음이 틀림없어! 그러나 결코 소홀히 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소대협이 잘 생각해서 결정을 하도록 하게!" 상팔이 성급히 나서며 말했다. "자! 제가 그와 한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소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 심가는 무공이 고강하니 상형은 각별히 조심해야 하오." "큰형님, 염려 마십시오. 그는 지금 저에게 하수할 리가 없습지 요." 그는 곧장 심목풍 앞으로 걸어 나갔다. 손을 치켜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심대장주, 저는 금산반 상팔이올시다." "내 벌써 당신을 보았소." 상팔이 크게 웃고는 말했다. "하하핫..... 심대장주, 저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라구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지." "저는 심대장주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지 않습니다." 심목풍은 불끈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여러 번 헛기침을 하며 진 정하려 애를 썼다. 상팔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소대협의 부모님께서는 정말 백화산장에 계십니까?" "내 이미 소영에게 말했다." "그러나 믿지 않고 있소. 저에게 다시 말씀드리라는군요." "말해 봐!" "저의 소형님께선 증거라도 될 만한 물건을 보시기를 희망합니 다." 심목풍은 화가 치밀어 버럭 외쳤다. "믿지 못하겠으면 그만이지, 왜 자꾸 귀찮게 구는가?" 상팔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했다. "우리가 만약 당신을 죽여 버린다면 소형님의 부모님을 구출하는 것은 조금도 어려울 게 없지요." 심목풍은 약간 멈칫했다. "나는 소아우를 만날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무슨 증거물을 지니 고 다니겠소?" "마음이 착해야 재물이 생기는 법, 우리같은 장사꾼들은 이 말을 둘도 없는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심목풍을 빤히 쳐다 보고는 계속 말을 해 나갔다. "소영형님이 심대장주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오늘중으로 부자가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오." "생사를 알 수 없는 이 판국에 그 말은 너무 이르지 않은가?" "생사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들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심 대장주께서는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심목풍이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만약 오늘 이 오색선에 타고 있는 사람이 모두 죽는다면 나야말 로 반드시 그 최후의 인물이 될 것이다." "하하핫.... 형세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의외의 일이란 있는 법입 니다. 심대장주께서는 제가 먼저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심목풍의 눈초리엔 싸늘하게 그늘진 기운이 떠올랐다. 상팔의 얼굴을 주시하는 그의 눈매가 파르르 떨리면서 아무 소리 도 못했다. 상팔도 그를 주시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눈초리에선 사람으로 하 여금 소름이 끼치고 무섭게 하는 일종의 강인한 힘이 서려 있었다. 상팔은 얼른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심대장주, 결정하십시오. 그래야만 빨리 가서 다시 명을 기다릴 테니까요." 심목풍은 착 가라앉은 소리를 냈다. "가서 일러라. 내 이미 그에게 대답했다고...." "빈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심목풍은 노하여 소리쳤다. "너도 심목풍의 맹세를 믿지 못한단 말이냐?" "맹세를 하셨다 하나 우리는 또한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심목풍은 이 배를 떠난 뒤 반드시 너희들 중주이고를 죽이고 말 겠다." "그것은 차후의 문제요. 지금 당신은 낮은 나무 밑에 있으니 머 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목풍이 말했다. "네 의견은 장차 어떻게 된단 말이냐?" "그건 대단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말이 막 끝나자마자 돌연 날랜 비둘기 두 마리가 쏜살같이 날아 왔다. 그것들은 공중에서 두어 바퀴 선회하다가 심목풍의 어깨에 내려와 앉았다. 심목풍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바탕 웃어젖혔다. 그리고는 품 속 에서 작고 가느다란 어떤 물건을 꺼내 비둘기의 날갯죽지 속에 끼 워 주었다. 두 마리의 날랜 비둘기는 두 날개를 활짝 펴고는 하늘 높이 날아 갔다. 그 때였다. 어느새인지 꽉 닫혀 있던 창문이 활짝 열리는 듯하더 니 두 개의 한성이 번쩍 하며 하늘로 쏘아졌다. 심목풍의 노한 음 성이 순간 그 한성을 뒤따르는 듯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 쥐새끼같은 놈들이......"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이 한 번 원을 그렸다. 두 줄기의 광선이 공중을 가르고 날아갔다. 쩡! 하고 청명한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가 들렸다. 잠시 후 일검의 한성은 심목풍의 비도를 맞고 떨어졌다. 다른 한 개의 한성은 공중을 날아 오른쪽 비둘기의 엷은 가슴에 꽂혀 동시 에 수직선으로 강물에 떨어졌다. 이들 건장한 비둘기는 특수한 훈 련을 받은 것임에 틀림 없었다. 한 마리가 죽은 것을 보더니 다른 한 마리는 즉각 두 날개를 거두고 재빨리 날아 내려 와서 강면을 스칠 듯 지나갔다. 그리고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더니 순식간에 사 라지고 말았다. 열려진 창문에서는 뜻밖에 소요자가 나타났다. 긴 장검을 들고 맨 앞에 걸어 나왔다. 그 뒤로 열두 명의 청의동자가 따랐다. 그들 중 두 사람은 비침과 독침과 독소가 든 철통을 들고, 나머지는 장 검을 들었다. 상팔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소요자 뒤의 두 청의동자가 들고 있는 철통 속에는 독침, 독소 가 들어 있어 무섭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 습니다. 심대장주께서는 우물쭈물하다가 화를 당하고 후회해도 소 용없습니다." 호기는 하옥을 삼키고 악명은 강호를 진동시킨다는 심목풍도 워 낙 사태가 급박해짐을 깨닫고는 할 수 없이 천천히 몸에서 하나의 금패를 꺼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몰아 쉬면서 말했다. "이것이 바로 백화산장 가운데 최고의 영패이다. 누구를 막론하 고 이 영패를 지니고 있다면 나 심목풍이 친히 임하는 것과 같이 대할 것이다. 너희가 만일 이 금패를 가지고 백화산장에 갈 것 같 으면 감히 막을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공손히 영접하며 명 령을 기다릴 것이다." 상팔은 그의 무공이 고강함을 알고 감히 다가갈 생각을 못했다. "던져 주시오." 심목풍은 금패를 던져 주면서 말했다. "너는 참으로 담이 약하구나!" "제가 약한 것이 아니라 심대장주의 악명이 너무도 소문이 난 탓 이지." "또 한 가지 알려 둘 게 있다. 이 금패는 다만 한 가지 일, 한 가지 요구만을 들어 줄 수 있다. 소영의 금패를 돌려 주는 날 바로 중주이고는 사망하는 날이다. 나 심목풍은 여태껏 악하게 협박에 그친 일은 없었다. 말은 법을 따라 나왔고, 칼은 말을 따름에 미칠 뿐이니라." 상팔은 심목풍에게 그 이상 참견하지 않고 소영에게로 돌아 왔 다. 이때 소요자는 장검을 칼집에서 빼어 들었고 열 명의 청의동자 들도 검을 빼어 들고 일좌의 검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었다. 상팔은 금패를 들고 돌아 와서는 나지막하게 경과를 설명했다. 소영은 말했다. "지금 우리 몇 사람은 실로 중대한 입장에 놓이고 말았군!" "심목풍을 돕는다면 사해군주는 또한 이길 길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 소요자를 돕는다면 심목풍이 대단히 위험함을 느낄 것 이다. 우리가 누구의 편을 들더라도 원수를 지게 됨은 어쩔 수 없 는 일이다. 심목풍을 죽이더라도 사해군주는 우리를 놓아 줄 리가 없지. 평생을 잔꾀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오늘같은 상황하에선 별 도리가 없겠구나!" 두구가 말했다. "이놈들이 싸움에 지쳐 어쩔 수 없는 틈을 타서 강호를 위해 제 거합시다." "소요자는 일시 오산하여 형구를 풀어 준 것을 후회막심하게 생 각하고 있다. 너희 중주이고의 형구를 풀어 준 것은 더욱 형세가 핍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련한 모략과 깊은 계산하며 심 목풍의 음침함과 험악한 성질로 보아 결코 우리들에게 어부지리를 안겨 줄 리는 없지." 이때 소요자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손불사! 너는 바로 개방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살아 남은 가장 훌륭한 장로요, 명성이 강호에 막중하다 할 것이다. 빈도는 네게 한 말을 천금과 같이 귀하게 믿는 바이니 결코 저버리지 말기를 바 란다." 손불사가 느릿느릿 걸어 나갔다. "그렇다. 이 늙은 거지는 무슨 말이든 내가 스스로 한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실천한다." "빈도가 소영, 중주이고에게서 금사슬을 풀어 준다면 힘을 합하 여 저 심목풍을 생포한다고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니 설마 잊지는 않았겠지?" "하하하.... 그것 말이냐? 하하..... 도장의 동작이 나의 말소리 보다 더 빠르더군. 막 대답하려 할 때 벌써 형구는 풀어져 버렸더 군. 그래서 이 늙은 거지는 애석하게도 미처 대답을 못했지. 이놈, 잘 생각해 봐라 그렇지 않은가?" 73. 백화산장에서 날아온 검객들 소요자는 손불사가 돕겠다는 말을 하지 않자, 자신도 모르게 낮 빛이 변했다. "당신 방금 뭐라고 했소?" "늙은 거지 한 사람의 힘으로는 심목풍의 적수가 아니다,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나?" "그건 그렇고 그 다음은?" "그 다음에 도장은 소영의 형구를 풀었다. 그리고 무슨 연고인지 는 모르나 중주이고의 형구도 풀었지." "빈도가 무슨 이유로 소영의 형구를 풀었는지 알고 있소?" "그렇다면 도장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도와 심목풍과 대적할 것이 라고 생각했소?" "바로 그런 뜻이외다. 심목풍으로 말하면 그 악행이 강호에 자자 하니 마땅히 해물이오. 두 분은 빈도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도, 마 땅히 손을 써서 무림의 패류를 없애야 할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대 공대덕하는 일이지." "말은 틀림이 없소만, 아깝게도 귀군주 역시 그렇게 옳은 위인은 아니오. 하나의 해물을 제거하고 하나의 해물을 남겨 두는 것은 해 를 제거하지 않음만 못하지." "그렇다면 승낙했던 말을 이행치 않으려는 것이로군." "이 늙은이는 결코 승낙한 적이 없소이다. 당신이 아무리 나를 충동질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지." 소요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빈도는 그대의 입을 철저히 막은 연후에 그들 몸에 감은 형구를 풀어야 했을 것을....." "지략가의 천 가지 배려도 한 가지 실수는 있는 법, 도장은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소." "그대가 대답을 하지 않는 이상 빈도는....." 손불사는 싸늘한 음성으로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았다. "할 수 없는 일이오. 늙은이는 고집이 세어서 한 번 마음을 굳히 면 변하는 일이 없소." 소요자는 체념한 듯, "이 일은 이미 지나갔으니 더 쟁론해도 소용이 없소이다. 단지 빈도는 이 시각 손형에게 분명히 물어 볼 말이 있소이다." "들어 봅시다." "만일 빈도가 천하를 위하여 악을 제거하고자 심목풍과 죽음을 무릅쓰고 생사결판을 낸다면 손형은 어찌할 것인지, 어느 편에 가 담하겠소?" 소요자는 내심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감히 손을 쓰지는 못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소영의 무 공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가 한번 또 손을 쓸 때에는 세상에 보기 드문 명검사인 두 사람이 동시에 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뿐인가. 상팔, 두구 역시 오래 전부터 무림에 위맹을 떨친 고수가 아닌가. 심목풍은 한쪽으로 물러선 채 줄곧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운공을 하며 정세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밀리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갑판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직 물결이 뱃전을 때리는 소리뿐. 대략 차 한 잔이 식을 시간이 지나 소요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손형은 어찌할 것이오? 멍백히 말해 주기 바라오." 손불사는 눈을 돌려 심목풍을 바라 보고 그 시선을 거두어 다시 소요자를 향했다. 그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흘렀다. "늙은 거지가 보는 바로는 오늘 이 시각, 이 장소에서는 더 싸울 필요가 없는 것 같소." "무슨 까닭인가?" "나 늙은 거지가 그대를 경멸하는 것은 아니오. 한 사람이 한 사 람을 당적한다면 그대 소요자는 심목풍의 적수가 아니야. 그러나 지금 그대는 우세한 형편에 있지. 그대들이 숫적으로 우세하기 때 문이지. 또 선상에 몸을 담고 있는만큼, 심목풍은 불리하고.... 그 는 헤엄을 치는 실력이 낮으니까. 그러니 쌍방은 서로 참아야 한다 고 생각하오." 소요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기회는 두 번 있는 게 아니오. 오늘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는 도리어 심목풍에게 그대가 죽을 날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렇지만도 않소. 이유는 또 한 가지 있지. 그대 소코 같은 도 사는 반드시 알아야 하오." "무슨 말인가?" "나 늙은 거지와 소영은 모두 물에 익숙치 않다. 따라서 반드시 싸울 것이라면 구태여 해상에서는 싸우지 않는다. 이 말을 알아 듣 겠나?"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모두 대강의 한가운데에 몸을 담고 있소. 이 오색 거선에 있는 여비들은 모두 수영에 익숙하지. 어쩔 수 없 이 형세가 바뀔 때에는 이 오색 거선를 침몰시키고 물 속에서라도 그대들을 잡아가겠다." 한편, 소영의 마음 속에는 적지 않은 근심이 있었다. 첫째 백화 산장의 부모가 걱정이었다. 또 사태의 변화에 따라 심목풍과 사해 군주가 손을 잡는다면?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효웅과 간웅의 사이니까.' 그는 한 마디 했다. "도장은 이 큰 배를 침몰시킬 여유가 없을 것이오." 손불사가 잇따라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잠시 심목풍과 한 패가 되지 않 을 수 없는 걸!" 그는 이렇게 말하고 눈을 돌려, "심대장주의 뜻은 어떠하오?" 심목풍은 담담히 웃고, "손형이 어떤 말을 하든 이 심목풍은 그대로 따를 생각이외다." "하하하.... 당신 심목풍이 오늘 이 거지에게 그렇게 순순히 나 을 줄은 몰랐소!" 심목풍은 손불사의 비꼬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그처럼 심기가 깊은 위인이었다. 소영은 선실로 들어가는 입구로 몸을 날려 막아 섰다. "도장께서는 즉시 이 배를 육지로 댈 것을 명령함이 좋을 것이 오." 그는 말하면서 슬그머니 천 년 묵은 교피로 된 장갑을 끼었다. "음-" 소요자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적과 아방을 비교해 보면 도무지 승산이 없었다. 이것은 삼척동자도 어렵지 않 게 가려 낼 수 있을 것이다. 소요자는 드디어 배를 언덕에 댈 것을 명하고야 말았다. 배가 언 덕에 가까워지자 심목풍과 흑백이노는 먼저 배에서 날아 언덕에 내 려 섰다. 소영, 손불사, 중주이고도 잇따라 언덕에 내렸다. 육지에 닿자 모두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격세지감이 있었던 것일 게다. 심목풍은 오색 거선을 바라 보며 크게 소리쳤다. "소요도장, 나 심목풍은 이미 오색 거선에 올라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도장이 만일 담량이 있다면 백화산장으로 와도 좋다!" "흥!" 소요자는 콧방귀를 뀌고는 상대하지 않았다. 배는 다시 돛을 올리고 강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이곳은 외진 강 언덕, 무수한 잡초가 바람에 쓰러질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 았다. 손불사가 입을 열었다. "심대장주, 일세의 효웅이 오늘 이 늙은이 때문에 낭패하여 돌아 가는 꼴을 보시겠소?" "흥! 이 심목풍 또한 그 오색 거선 위에 있었기 망정이지, 그렇 지 않았더라면 네 분은 결코 살아서 육지로 오르지 못했을 거요." 손불사는 웃고, "지금 우리 쌍방의 형세는 여전히 삼, 사의 비율이오. 또한 심대 장주의 수하 두 늙은이는 모두 한 팔씩이 잘라져 부상을 입고.... 목하의 형세는 예측하기가 매우 곤란하군." 심목풍은 사방 주위를 한 차례 쓸어 보고는 담담히 웃었다. "이곳은 여전히 나 심목풍의 세력권 내지. 우리가 손을 쓴다면 한 시진 이내에 백화산장의 친구들이 달려올 것이오." 소영이 돌연 심목풍의 면전으로 걸어 갔다. "심대장주, 지금 어디로 갈 생각이오?" "마땅히 백화산장으로 돌아가겠네." "저도 역시 백화산장으로 돌아가서 부모님을 배견할 생각이오." "음-" 그는 잠시 쉬었다가, "상팔은 나의 칙령금패를 가졌네. 그대들은 어느 때라도 거침없 이 백화산장으로 올 수 있을 것이네. 그럼 나는 먼저 가겠네!" 소영은 재빨리 심목풍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장주, 만일 승낙한 말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이곳을 쉽게 떠나 지는 못할 것이오." "하하하핫....." 심목풍은 한바탕 큰 소리로 웃어제치고 나서, "아우, 자네는 정말 우형을 협박하여 싸울 것인가?" 소영은 여전히 냉정했다. "서로 길이 다르니 일을 함께 꾀하기는 어려운 일, 우리는 서로 형제의 의가 끊어졌으니 다시는 형이니, 아우이니 하는 말을 쓸 필 요가 없소." 심목풍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 아우가 이 형과 싸워 서로 이기고 지는 것은 고사하고라 도 부모님을 구할 방법이 있는가!" 소영은 강경하게 오른손을 번쩍 들어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나는 심대장주가 일찍이 말한 한 마디를 기억하고 있소. 이 소 영과 심목풍은 반드시 한차례 일장의 생사결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기왕 면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구태여 날짜를 미룰 필요가 없소. 어서 손을 쓰시오." 심목풍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이 사라졌다. "아우가 나를 이처럼 핍박하다니.... 그럼 어서 병기를 잡아라." 두 사람의 거동을 바라 보던 손불사 노인이 얼른 들고 있던 장검 을 던져 주었다. 소영은 한 손으로 가볍게 검을 받아 쥐었다. "나는 지난 날 당신에게 한 번 은혜를 입은 바 있소. 오늘은 당 신에게 삼 초를 양보하겠소." 심목풍은 비웃었다. "아우가 그렇게 쉽게 나를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아마 그렇지는 못할 거요. 심대장주의 무공의 뛰어남을 나는 귀 로 듣고 눈으로 보았소. 오늘 싸움의 승패를 미리 자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그렇다면 어찌 싸움을 걸어 오는 것인가?" 소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돌연 상팔이 앞으로 썩 나섰다. "심대장주는 지금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소. 설사 형님이 이기더 라도 별로 신통한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칙령금 패를 가지고 있으니 언제라도 백화산장을 배방할 수 있을 것이외 다. 오늘의 싸움은 무익하오." 소영은 전부터 상팔의 지모가 뛰어남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왜 싸움을 말리는 것일까?' 그러나 스스로 물러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이미 긴장으로 팽 팽하게 맞서고 있지 않은가. 돌연 심목풍이 하하 웃고 몸을 돌려 흑백이노에게 말했다. "두 분, 어서 갑시다." 소영은 더 막지 않았다. 심목풍은 흑백이노를 데리고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그림자도 보 이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소영은 비로소 긴 한숨을 불어 내었다. "소요자의 말은 틀림이 없소. 오늘 심목풍을 놓쳤으니 다시는 이 런 기회를 얻기가 어려우리다." 상팔은 크게 웃고 입을 열었다. "형님, 독수약왕이 왔습니다. 그는 급히 형님을 보고자 합니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어디에 있소?" "바로 왼쪽 풀숲에 있소이다." 소영은 머리를 돌렸다. 독수약왕은 상팔의 검정개를 데리고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본래 말라서 뼈만 남은 데다가 검은 옷을 입고 나오니 흡사 산송장 이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 손불사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는, "약왕, 당신은 아직도 죽지 않았구료." 독수약왕은 차디찬 시선으로 손불사를 힐끗 건너다 보고는 역시 차디찬 한 마디로 응수했다. "당신 늙은 거지, 기어이 노부의 면전에서 죽고 싶은가?" "흥!" 손불사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도 더 말하지 않았고 독수약 왕도 관계하지 않았다. 약왕은 소영을 바라 보며, "영존과 영당께서는 심목풍의 수하인에게 잡혀 다시 백화산장의 포로가 되었소." 순간 소영의 눈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두 분께서 어디 갇히셨다구요?" 독수약왕은 짧게 한숨을 불어 냈다. "여기서 사, 오 리쯤 떨어진 한 농가에 있소." 소영은 괴이쩍게 여겼다. "백화산장이 아닙니까?" "두 분은 모두 이 늙은이에게 구출되었소." "부모님은 무사하십니까?" "영존과 영당, 그리고 은란, 금란 두 낭자들도 모두 무사하오." 소영은 두 손을 마주하고, 깊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차렸다. "감사합니다." 독수약왕은 얼굴의 근육을 씰룩거렸으나 더 말하지 않았다. 상팔이 물었다. "약왕에게 묻겠소. 신투 향비는 어찌 되었는지요?" "중상을 입었소.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소." 상팔은 한숨을 토해 내고 더 묻지 않았다. "노부가 들은 바에 의하면 마문비는 영당, 영존을 보호하다가 백 화산장의 수하인들에게 상했다 하더이다." 소영은 가슴이 아팠다. '내 반드시 그들을 위해 복수를 하리다.....' 약왕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지금의 형세로는 아직 위험은 제거되지 않았소. 노부는 두 어른 을 구하기 위하여 급히 독수를 써서 연거푸 백화산장의 열두 고수 를 상하게 하였으니....." 소영은 거듭 사례를 올렸다. "소영은 깊이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지금 영존 등이 계시는 농가는 그리 안전한 곳 이 못 되오 우리는 급히 가야 하오." 독수약왕은 이렇게 말하고 먼저 발길을 돌렸다. 모두 급한 걸음걸이였다. 질풍처럼 달려 갔다. 도중에서 손불사는 한 마디, 약왕을 놀려댔다. "약왕이 일생에 한 가지 좋은 일을 했구료." "무슨 말씀!" "허허, 이건 과찬이 아니오." 약왕은 대꾸하지 않고 더욱 소맷바람을 거세게 일으키면서 앞장 서 달려갔다. 약 사, 오리를 달렸다. 잡초가 무성한 들판 가운데 다 허물어져 가는 농가가 있었다. 양쪽 부서진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이 띳집인가요?" 소영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렇소." 소영은 마음이 급하여 독수약왕의 대답도 채 듣기 전에 대문을 밀었다. 문이 활짝 열리자 두 소녀가 막아 서 있었다. 은란, 금란 이었다. 모두 장검을 들었다. 금란, 은란은 소영을 보자 얼른 절을 하고는 양쪽으로 물러섰다. 소영이 머리를 들어 보니 부모님은 마당 가운데 풀덤불 위에 앉 아 있었고 그 옆에는 한 소녀가 누워 있었다. 소영은 그 소녀가 독 수약왕의 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땅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불효자식이 부모님을 뵈옵니다." 눈물이 금세 눈시울을 적셨다. "일어나거라." 소대인의 말이었다. 소영은 일어섰다. "못난 자식이 거듭 부모님을 괴롭혀만 드리니....." "지나간 일은 이 귀여운 낭자에게 모두 들었다. 네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 노인은 잠시 말을 그쳤다가 돌연 천연한 빛을 지었다. "..... 다만 향장사 그 분이 중상을 입고 생사를 점치기 어렵다. 아! 그 일전은 진정 처참하고도 극한 것이었으니....." "소자는 마땅히 그 분을 위하여 복수를 할 것입니다." 소부인이 입을 열었다. "마장사 역시 몸에 몇 군데 상처를 입은 몸으로 계속해서 싸우다 가 쓰러지셨단다." "소자가 이 분들의 은정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나하나 깊이 마 음 속에 새겨 두겠습니다." 상팔이 물었다. "그 동해신복 사마건은 어찌 되었습니까?" 소대인은 입을 열어 한숨 짓고, "아마 부상을 당했을 것이외다. 백화산장의 수십 명 무사가 일시 에 달려와 매우 혼잡하였소. 노부는 단지 그 향장사와 마장사가 부 상을 입은 것을 보았을 뿐 곧 백화산장에 끌려간 몸이 되었소이다. 그 이후의 일은 잘 알 수 없고......" 소부인은 손을 들어 독수약왕을 가리키면서, "저 어른께서 바로 네 아버지를 구해 주신 큰 은인이시다." 그러자 독수약왕은 겸허하게 인사치레를 하였다. "이 늙은이의 딸 또한 소대협의 깊은 은덕을 입었소이다. 이 일 은 단지 약간의 보답에 불과할 뿐이외다." 약왕의 말소리가 막 그치는 순간, 돌연 머리 위에서 새의 날개 부딪는 소리가 거세게 들렸다. 여러 사람의 놀란 눈은 일제히 허공 으로 향하였다. 독수약왕의 얼굴색도 변했다. "백화산장의 통신 비둘기요!" "바로 맞았소." 손불사가 말을 받았다. 독수약왕은 굳어진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의 형세를 보아하니 이미 일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소 이다.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이미 멀리서 이 띳집을 둘러 싸고 있을 것이오." "심목풍은 오색 거선 위에서 몸을 굽혀 순종하였소. 그러니 반드 시 장원으로 돌아가 전력을 모아 달려올 것이 분명합니다." 소영의 말에 약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소, 그러니 우리는 미리 준비를 해 두어야 하오." "약왕께서는 무슨 양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우리는 양쪽으로 나뉘어 한쪽은 소대인 부부를 보호하고, 한쪽 은 강적을 맞이해야 하오." 독수약왕 역시 아직 별 묘책이 없는 모양이었다. "약왕께서는 그 어떤 계획이라도 세우고 계신지요?" "노부는 아직 별 방책을 강구하지 못했소." 약왕은 이렇게 말하고 시선을 돌려 손불사를 바라 보았다. "늙은 거지, 당신은 이미 계책이 있을 법한데?" 손불사는 하하 웃고, "이 늙은 거지는 줄곧 심기를 쓰지 않고 있네. 소대협이 결정하 여 안배하는 것이....." 말을 끝내지 않고 돌연 그의 오른손이 번쩍 들리며 소영의 어깨 위로 일장을 쳤다. 여러 사람이 놀라는 가운데 강렬하기 짝이 없는 손바람은 곧장 소영의 어깨를 스치고 담장 위를 날아갔다. 동시에 소영의 몸은 번쩍 허공으로 솟구쳐 담장 밖으로 날아갔다. 손불사는 보일 락 말 락 웃으며, "따를 필요 없네. 한 사람 좀도둑이 띳집에 접근했을 뿐이네. 이 미 늙은이의 일장에 극락으로 갔을 거네." 손불사는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연방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 사나이의 모습이 담장 위에 어른거리자 거침 없이 일장을 먹였던 것이다. 독수약왕이 낮게 소리쳤다. "벌써 왔군!" 뒤이어 소영이 천천히 다가왔다. "선봉은 이미 당도하였습니다. 대군이 뒤따를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서, "두 분 형제와 약왕께서는 부모님과 소녀를 보호하는데 수고해 주십시오." 손불사가 의연한 목소리로, "이 늙은 거지는 그대를 도와 적을 막겠네." "바로 그런 뜻이올시다." 독수약왕이 의견을 말하였다. "당신들 두 사람으로는 실력이 미치지 못할 것이니 중주이고도 두 분을 돕는 것이 좋겠소. 노부는 금란, 은란의 도움만 있으면 충 분히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게요." 소영은 읍을 하고, "약왕의 무공은 높고 강하십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손불사에게 말했다. "약왕께서는 반드시 계책이 있을 터이니 저는 공경히 명을 받들 겠습니다." 이때 밖에서 요란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상팔이 중얼거렸다. "강적은 이미 당도하였습니다. 이미 탈출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 니다." 소영은 검을 뽑았다. "저와 손노선배는 먼저 나아가 제일진을 맞을 것이오. 두 분 형 제께서는 잠시 이곳에 남으시어 약왕을 도와 부모님을 보살피시다 가....." 독수약왕은 고개를 내저었다. "만일 강적이 밀려 왔다면 먼저 그들을 충살한 연후에라야 탈출 할 수 있을 것이오." 독수약왕은 이에 덧붙여서 소대인 부부가 무공을 전혀 모르므로 암기의 공격을 막아낼 도리가 없어 만일 위험을 무릅쓰고 충살해 나간다면 분명코 부상을 당할 것이리라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 남아 여러분들이 우선 강적을 쳐부수어 길을 튼 후에 나가는 것이 옳을까 하오." 손불사는 의견을 달리하여, "백화산장에는 고수가 구름처럼 많소이다. 그들이 전부 온다면 죽이고 또 죽여도 다 죽일 수 없을 게요. 형세가 이렇고 보면 우리 는 밤을 새워도 이곳을 탈출하지는 못할 것이오." 상팔 역시 의견을 들고 나섰다. "손노선배의 의견도 옳으나 우리는 한 가지 일을 아직도 생각하 지 못하고 있소이다. 적이 만일 일제히 불화살을 쏜다면 이 띳집은 순식간에 타버리고 말 것이외다. 우리가 이곳에서 지키기만 하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니외다." 독수약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여러분의 말씀도 타당하오. 그러나 노부의 뜻은 아직 이곳을 지 키는 것이 안전할까 하오. 오늘의 싸움은 서로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외다.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 가 노인 등을 안전하게 모시는 것이오. 날이 어두워지면 노부는 독 으로써 능히 적을 물리치고 이곳을 탈출할 수가 있소이다." 소영은 이 소리를 듣자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기왕 독을 쓸 바에야 밤과 낮을 가릴 것이 무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밖에서 가라앉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 이 띳집은 겹겹이 포위되었소. 삼십 명의 궁노수와 이십 명의 창잡이가 집을 둘러 싸고 있소. 그대들은 말할 것도 없고 허 공을 나는 새라도 빠져 나가지가 어렵소." 금란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단굉장의 목소리입니다." 소영이 물었다. "심목풍의 큰 제자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 사람입니다." 소영은 여러 사람을 돌아 보고, "적이 화공을 할 모양이오. 여러분은 조심하시오." 말하고 뚜벅뚜벅 걸어 대문 밖으로 나갔다. 독수약왕은 사방을 한바탕 쓸어 본 뒤에 소대인을 향해 말했다. "소씨 어른 왼쪽 벽 밑으로 옮기십시오. 그곳은 담장이 두꺼워 웬만한 강궁이라도 안심할 수 있소이다." "예에." 소대인은 대답하고 부인을 부축하여 한쪽 벽 모퉁이로 갔다. 손불사가 한 마디 했다. "약왕은 백화산장의 사람들과 대면하여 싸우기가 거북할 테니 모 옥을 지키시오. 이 늙은이는 나가 소대협을 돕겠소." 중주이고도 이내 따라 나섰다. "마당에는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하오. 우리들도 대문 밖으로 나가 겠습니다." 그러자 금란, 은란도 각기 장검을 잡고 따라 나섰다. "저희들도 미약하나마 한 팔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상팔이 만류했다. "소용 없소. 두 낭자는 이곳에서 지키시오. 우리는 사람 수가 부 족하니 경솔히 할 수가 없소. 만일 강적이 이곳에 난입한다면 두 분은 약왕을 도와 적을 막아야 하오." 금란, 은란은 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상팔, 두구는 손불사의 뒤를 바싹 따라 이미 밖으로 나왔다. 이때 소영은 손에 장검을 잡고는 여남은 자 되는 거리에 있는 높 은 돌 위에 서서 바야흐로 사방을 둘러 보고 있었다. 때는 벌써 노을이 짙게 물들 무렵이었다. 가을 바람이 소슬하게 사방에 무성하게 자란 풀숲으로 불어 갔다. 그러나 백화산장의 고 수들은 모두 풀덤불 사이에 몸을 은신하고 있는지 한 사람도 보이 지 않았다. 소영이 큰 소리로 호통을 질렀다. "단굉장, 네 머리는 감추고 꼬리만 휘젓고 있으니 어찌 영웅이라 고 할 수 있겠는가?" 말소리가 떨어지자 돌연 풀덤불 속에서 세 사람의 경장을 한 사 나이들이 불쑥 일어섰다. 가운데 선 사람은 대략 이십 세쯤, 등허 리에 한 자루 훌륭한 장검을 메고 있었다. 바로 심목풍의 대제자인 단굉장이었다. 단굉장의 좌우에 선 사람들은 모두 회색의 간편한 경장차림, 보 아하니 모두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오른쪽에 선 사람은 큰 키에 검은 수염, 왼편에 선 사람은 흰 얼굴에 수염은 없었다. 바로 검문 쌍영 중 추풍검 배백리와 무영 담통이었다. 단굉장은 손을 들어 예를 한 뒤, "단굉장이 셋째 장주님을 알현하오." 소영은 냉랭하게 소리쳤다. "필요 없소. 나는 이미 심목풍파와 의를 끊었으니 이미 백화산장 의 사람이 아니오. 귀하는 나에게 예를 차릴 필요가 없소." "저는 사부의 명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후배의 예를 버릴 수 없소이다." 단굉장이 이렇게 말하자 소영은 또 다시 소리쳤다. "그대가 만일 나를 백화산장 중의 셋째 장주로 안다면 즉각 사방 의 포위를 푸시오." 단굉장은 순간 당황한 빛을 나타냈다. "그것은....." "철수시키려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나 소영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 분명하군." "그런 것이 아니오라, 후배는 명을 받고 왔소이다. 빈손으로 돌 아 간다면 책임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대의 책임이란 무엇이오?" "셋째 장주님의 양친을 모시고 백화산장으로 돌아가는 것이옵니 다." 소영의 눈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오?" "백화산장의 명령은 대산과 같은 엄중함이 있습니다. 소인은 명 을 따라 힘껏 할 뿐이지 승패는 계산 밖이올시다." "흥!" 소영은 크게 코웃음을 치고는, "나와 백화산장은 이미 정이 다하여 의를 끊은 지 오래요. 그대 들이 계속 망동하면 나 소영은 부득불 피를 보지 않을 수가 없소. 원망하지 마시오!" 단굉장은 바로 심목풍의 수제자이다. 위인이 음험하고 지모에 뛰 어나 바로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하겠다. 그는 담담히 웃고는 즉시 입을 열었다. "셋째 장주님께서 백화산장과 단절하였노라 재삼 말씀하신 이상 이 단굉장 또한 돈독한 뜻으로 말씀드리기도 불편하오니....." 그는 잠깐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이었다. "소대협의 무공은 이 단모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습니다. 확실 히 대단히 빼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저는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면 왜 철수하려 하지 않으오? 기어이 유 혈의 참극을 벌이겠다면 그 때는 후회해도 늦을 것이오." 그러나 단굉장은 여전히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제가 몇 마디 말씀을 올리겠으니 꼭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영 역시 소란을 피우기를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을 거듭 괴롭혀 드릴 것이 안타까웠다. "무슨 일이오? 말해 보시오!" 단굉장은 천천히 여유있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는 소대협께서 한 가지 일을 잊고 계심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띳집의 사면 팔방에는 사, 오십 명의 장사가 매 복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화살과 강궁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살 에는 모두 극독이 묻혀 있어 조금 스치기만 해도 반드시 생명을 잃 을 것입니다. 소대협의 무공이 뛰어나 이편에서는 도저히 적중할 수가 없을 것이오. 나 영당이나 영존은 무림 중의 인물이 아니옵니 다. 싸움이 벌어지면 유혈참극을 면할 수 없을 것인즉 두 분 노인 께서 잘못하시어 상하실 경우 저는 막을래야 막을 수 없을 것입니 다." 소영도 역시 한 마디 했다. "나 소영 역시 그대에게 일러 주겠소. 이 띳집 안에는 나 소영을 제외하고도 무림 중 사람이 그 이름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질 고 인이 몇 분 계시오. 그대가 손을 쓰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 일과 다름이 없소. 소영은 이제 할 말을 다 했으니 믿기지 않는다면 손을 써서 시험해도 무방하오." 단굉장과 검문쌍영은 서로 얼굴을 마주본 다음 공수의 예를 하 고, "저희 세 사람과 또 사방에 매복한 무사들을 제외하고도 백화산 장의 후위 무사들이 곧 당도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돌연 손불사가 썩 나서면서 큰 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소제, 그놈들과 입씨름을 할 필요는 없네. 이 늙은이가 세 사람 을 수습하겠네." 노인의 몸은 이미 단굉장 등에게로 부딪혀 가고 있었다. 날카로 운 장풍이 벌써 단굉장 등의 심장에 이르렀다. 검문쌍영은 동시에 대갈일성- "멈춰라!" 쌍검이 일제히 푸른빛이 번쩍 하는 가운데 교차하며 손불사의 공 격을 막았다. 그러자 손불사는 즉시 단전에 기운을 모으고 선뜻 제 자리에 멈춤과 동시에 왼손을 들어 일장을 쪼개 냈다. 손불사는 본래 무림 중에 철장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만큼 그의 일장은 쇠방망이를 두드리듯 상대방을 때렸다. 윙! 하고 밀려 오는 기세는 실로 사람의 혼백을 빼앗듯, 단굉장과 검문쌍영은 다같이 상대방의 손속의 무서움을 알고 감히 예봉을 막지 못했다. 선뜻 좌우로 비켜 서니 훅! 하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도망하려느냐?" 손불사의 몸은 그 순간 허공으로 껑충 솟았다가 단굉장의 면전에 떨어졌다. 단굉장은 번뜩 몸을 옆으로 빼어 석 자 정도 물러났다. 동시에 오른손을 선뜻 움직여 발검일초, 그의 장검은 어느새 손불사 노인 의 옆구리를 취하였다. 단굉장의 무공은 심목풍에게서 전해 받은 것이다. 검의 씀씀이가 기이하게 빠르며, 위력은 신랄무비하였다. 손불사의 무공이 비록 위맹하다고 하나 적이 요혈을 노리고 오는 데는 정면으로 맞부딪치지 못하였다. 그렇게 하면 같이 죽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일순 몸을 비껴 상대방의 검끝을 피하고 오른손을 휘둘러 곧장 단굉장의 면상을 찔러 들어 갔다. 단굉장의 장검은 빠르게 변하여 쏴! 하는 소리가 연거푸 세 차례 일어나며 손불사 노인의 공세를 맞이했다. 그가 공격하는 검은 모두가 손불사의 중요한 요혈을 노린 것이었 다. 노인은 적의 검세를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불사는 적이 자기의 장력을 정면으로 맞이하지 않고 몸을 움직 여 피하면서 공격해 들어 오는 것을 보고는 이미 단굉장의 무공이 약하지 않음을 알았다. '이 사람의 무공은 약하지 않구나. 오늘 이 녀석을 제압하지 못 한다면 이 늙은 거지의 일생의 영명에 흑칠을 하는 결과가 될 게 다.' 마음이 일변하자 장세를 일변, 순간 온 하늘은 온통 손바닥 그림 자에 가리운 것 같았다. 훅훅! 하는 바람소리가 사면 팔방에서 일 어나며 단굉장의 몸을 완전히 손바닥 그림자 속에 가려 넣었다. 그러나 단굉장은 십분 마음을 가라앉히고 비록 자신이 손불사의 손그림자 아래에 가려지긴 하였으나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좌로 번 뜩 우로 번뜩, 시종 상대방의 장풍을 접하지 아니했다. 이렇게 거 의 십여 초를 보냈으나 손불사의 철장은 단굉장의 몸에 한 점의 상 처도 내지 못하였다. 검문쌍영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좌우 양쪽에서 공격할 기회 를 노렸으나 좀처림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보다도 그들은 단굉장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몰라 감히 나아가 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한 정황은 소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벌써부터 손을 쓰 려고 하였으나 손불사와 단굉장이 일 대 일로 겨루고 있는지라 오 히려 자기가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손불사의 공세는 갈수록 맹렬해졌다. 사면 팔방에서 훅훅! 하는 바람소리가 일어나면서 이리 뛰고 저기 피하는 단굉장의 옷자락을 사납게 날렸다. 소영은 조금 기괴하게 생각되었다. 단굉장은 이와 같이 시종 피하기만 하면서도 검문쌍영의 도움을 청하거나, 또 사방에 매복한 장정들을 호령하여 싸움을 벌일 뜻을 보이지 않았다. 쌍방이 서로 접전하기를 다시 몇 합이 지났다. 돌연 손불사는 크게 신위를 떨치더니 돌연 이노옴! 하는 고함소 리와 함께 일장을 쏟아 냈다. 이 일장의 손바람은 마치 큰 파도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밑으로 덮쳐 내려 오는 것 같았다. 단굉장은 급히 몸을 피하였으나 장풍의 파도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마침내 왼쪽 어깨에 맞았다. "하하하......" 손불사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단굉장은 두어 발자국 몸을 비틀거리다가 옆에 있는 풀덤불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네 능히 노부의 십여 초를 받아 넘겼으니 패했을지라도 오히려 영광된 일이니라." 손불사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시선을 돌려 좌우 양쪽에 서 있는 검문쌍영을 노려 보았다. "그대들은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덤벼라!" 이 두 사람은 장검을 서로 어울려 교환하는데 독특한 장기가 있 었다. 만일 한 사람이 나와서 싸운다면 단 오합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이 합력하면 능력은 몇 배로 증가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검을 잡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섰다. 손불사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조심해라! 두 사람이 모여 이 늙은 거지의 일장을 합력하여 막 아 내라." 아직 손불사의 일장은 나가기 전이었다. "호호호호....." 어디서 들리는 여인의 웃음소리인가. 돌연 지분 냄새가 확 풍겨 오면서 여인 하나가 바람처럼 날아 이르지 않는가. 온 몸에 녹색의 옷을 입고 허리는 가뿐히 동여 맸는데 가슴에는 금빛 찬란한 꽃무 늬의 수를 놓아 미려한 모습이 더욱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손불사의 면전에 이르자 선뜻 고운 손을 내밀어 검문쌍영 의 검세를 막고는 교태어린 음성으로, "당신이 바로 개방 중의 단 하나 남은 손불사요?" 손불사는 여인의 미려한 자태를 응시하였다. "바로 그러하오." 여인의 입에서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터졌다. "호호..... 당신은 이 몸을 아실 텐데?" "노부의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대는 바로 묘강의 금화부인이 지." "호호.... 그래요. 눈은 아직 어두워지시지 않았구료. 한 번에 맞추시니....." 손불사는 안색이 차가워졌다. "늙은 거지는 당신의 대명을 들은 지 오래요. 오늘 가르침을 받 을 기회를 얻었으니 이 아니 즐거운 일인가." "서두르지 마시오. 나는 먼저 나의 형제와 싸우겠소. 연후에 손 을 써도 늦지 않소." 금화부인은 노인을 제지하고는 눈을 돌려 소영을 향하였다. "소제, 누나를 보고도 어찌 한 마디 인사말도 없나?" 소영은 소리없이 웃고, "부인은 심목풍의 영을 받고 오신 것이오?" "그렇다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흥! 그를 도와 사람을 잡으러 왔지." "부인은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것을 물어 무엇할까? 바로 백화산장의 도망병이 아닌가?" 소영의 칼끝같은 눈썹이 순간 치켜 올라갔다. "허튼소리! 그 두 분은 나 소영의 양친이오." 금화부인은 깔깔 웃었다. "알지 못하는 자는 죄를 줄 수 없으니 그대의 양친이라 해서 화 를 내는 건가?" "부인은 묘강 방면에서 일대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는 몸, 구태 여 심목풍을 돕다가 명을 재촉할 필요는 절대로 없소이다. 나 소영 이 전하는 말을 듣고 일찍이 묘강으로 돌아감만 못하오." 금화부인의 얼굴에 처량한 미소가 흘렀다. "소제, 그건 좋은 말이긴 하지만 이미 너무 때가 늦었네." "어째서 늦다고 하오?" 그러나 금화부인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슬쩍 화제를 돌렸 다. "나는 소제의 양친을 모셔가야겠네." "내 보건대 뵐 필요가 없을 듯한데......" "내가 뵙고자 한다면." "음-" 소영은 잠시 신음을 토해 내고 나서, "단지 한 가지 방법이 있소. 그것은 나 소영의 이 장검을 이기는 길이오." "흥! 그 방법 외에 양책이 없을라구?" "다만 그 한 길뿐이오. 적이 되든 친구가 되든 그것은 완전히 당 신 마음에 달린 문제요." "이 몸은 이미 그대와 적이 되길 원치 않았소. 그러나 또 심목풍 의 명을 듣지 않을 수도 없었소. 그러니 참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이때 말방울 소리가 딸랑딸랑 울리면서 주조룡의 준마가 서서히 다가왔다. 소영은 이를 보고는 적지 않이 기분이 상했다. '금화부인과 주조룡이 일제히 이곳으로 온 것을 보면 백화산장의 고수들이 거의 반은 온 것 같구나!' 주조룡은 말을 세우더니 손을 들어 보이며 인사치레를 했다. "셋째, 오랜만이오." 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이미 심목풍의 면전에서 의교단절한 몸이외다. 그런 칭호 는 적당치 않소이다." 주조룡은 빙긋 웃으며, "하하하..... 나는 방금 형님을 만나고 오는 길이오. 그런데 그 가 왜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소영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내 말은 이로써 모두 끝났소. 듣고 안 듣고는 당신 편할 대로 하시오." 주조룡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들어 사방을 쓰윽 훑어 본 다음 띳집을 손가락질하며 말 했다. "만일 화공을 전개한다면 편각 사이에 저 띳집은 잿더미가 될 것 이오." 돌연 손불사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비린내 나는 놈이 함부로 떠드는구나. 이 늙은 거지가 먼저 네 녀석을 교육시켜야겠다." 손불사는 거침없이 날아 주조룡의 말 앞에 이르렀다. "멈추시오!" 이것은 금화부인의 호통소리였다. 이어서 부인의 손에서 하나의 물체가 손불사 노인의 등을 향해 거세게 날아갔다. 소영이 외쳤다. "조심하십시오. 그녀가 독을 쓰고 있소." 손불사는 이미 금화부인의 독물수법을 익히 들어온 터였다. 돌연 소영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자 주조룡의 앞에 이르러서 재빨 리 진기를 거두어 들임과 동시에 그의 몸은 이내 허공으로 대여섯 자 솟구쳤다가 공중에서 한 차례 물구나무를 선 다음 십여 자 밖으 로 날아 떨어졌다. 이때 금화부인이 던진 물체는 목표를 놓치자 공중에서 저절로 스 르르 감기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길이 한 자쯤 되는 독사였다. 손불사 노인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메스꺼웠다. '흥! 이런 못 된 암기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 순간 금화부인은 허리를 움츠렸다가 세게 펼쳤다. 그러자 그 녀의 몸은 허공으로 날아 둘둘 말린 독사가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 에 잡아 소매 속으로 넣어 버렸다. 손불사의 손이 돌연 번뜩이더니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가 훅! 일어났다. 벽광장력은 거센 힘으로 금화부인에게로 곧장 날아갔다. 이에 금화부인은 아직 독사를 거두기 전이라 재빨리 왼손을 펼쳐 적의 일장을 막았다. "펑!" 주위가 쩌렁쩌렁 울렸다. 금화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흔들흔 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귀하의 내공은 약하지 않군. 감히 나와 싸우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지." "그렇다네. 늙은 거지는 받들어 모실 생각이야." 소영은 금화부인이 지니고 있는 독사가 한두 마리에 그치지 않음 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잇따라 독사를 던진다면 땅바닥은 금 세 독사로 우글거릴 것이다. 이것을 잘 모르는 손불사는 어떻게 대 처할 것인가? 소영은 그것이 근심이 되었다. 돌연 소영의 몸이 허 공을 날더니 바로 손불사의 앞을 막으며 떨어졌다. "노선배께서는 이미 한 번 싸우셨으니 이번엔 제게 맡겨 주십시 오." 금화부인은 소영이 날아옴을 보자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소제, 정말 이 누이와 싸울 생각이오?" 소영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부인은 내가 권하는 말을 듣지 않으니 조만간 일장의 악전을 면 하기는 어렵게 되었소. 여러 번 말을 해야 소용없는 일이니 어서 병기를 꺼내시오." 부인은 난처한 모양이었다. "이 누이는 사세부득하여..... 그렇다만 설마 소제가 이것을 양 해하지 못할까!" "당신은 폭군을 받드는 신하나 다름이 없소이다. 무슨 사정이 있 어 그렇단 말이오?" 소영이 이와 같이 들이대니, 부인은 마침내 약이 올랐다. "아, 있을 수 없는 일이로구나. 네 이처럼 누이를 핍박하다니... 나도 할 수 없이 상대할 수밖에 없다." "부인이 무슨 능력이 있든 마음대로 써 보시오. 피차 손을 쓰는 데 있어 죽지 않으면 상할 것은 뻔한 일, 누구라도 사정을 둘 수는 없소이다." 금화부인은 버들같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이 누이는 몇 마디 먼저 설명할 것이 있네." "어서 말씀하시오." "이 누이는 온몸이 독으로 가득 싸여 있다는 것을 동생은 알고 있겠지?" "알고 있소." "누이가 그대를 이길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을 경 우 사세부득하여 독을 쓰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감사합니다. 먼저 행동하시어 이 소영이 경계하게 해 주시오." 금화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품 속에서 두 송이 금화를 꺼내어 나누어 쥐었다. "자, 동생, 먼저 손을 쓰게!" "저는 많은 양보를 받은 셈이구료. 공경하는 것이 분부를 따른 것만 못함을 알고 있소. 준비하시오." 소영은 내력을 모아 일검을 찔러 나아갔다. 그는 이미 오늘의 형 세를 점치고 있었다. 백화산장은 비록 전력을 기울여 온 것은 아니 나 많은 무리가 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부속부대가 계속해 서 당도할 것이 틀림 없었다. 긴요한 일은 한 시각이라도 일찍 결 판을 내는 것이었다. 금화부인은 좌우 양손에 각각 금화 한 송이씩을 들고 있다가 소 영의 검이 찔러 들어 오자 오른손을 휘둘러 금화로 예리한 칼끝을 막았다. 이 금화의 길이는 고작 다섯 치이다. 그것을 병기로 사용 함엔 필시 묘한 쓰임새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영은 이것을 계산에 넣으면서 돌연 검세를 일변시켰다. 금화부인의 가슴을 향해 가던 장검은 돌연 중도에서 번쩍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방향을 바꾸어 부인의 오른쪽 어깨를 베어 내려 갔다. 금화부인은 오른팔을 움츠려 검세를 피한 다음, 왼손의 금화를 치켜 들어 소영의 앞가슴을 취하였다. 소영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금화가 가슴 앞으로 밀려드는 그 순 간에 재빨리 왼팔을 내밀어 덮쳤다. 금화부인은 빠르게 왼팔을 움츠려 들었다. "이 금화에는 극독이 묻어 있다고 내 말했거늘, 그대는 죽고 싶 어 명을 재촉한단 말인가?" 소영은 담담히 웃고, "정말인가 직접 보고자 한 것이오." "흥! 그대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고 내력이 아무리 심후하다고 할지라도 내 금화에 묻은 극독을 맞기만 하면 촌각도 지탱할 수 없 을 게다." 돌연 주조룡의 큰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하하하.... 두 분 싸움에 너무 사양이 많구료. 서로 손을 써 서 다투는 것이 아니라 흡사 옛친구가 오랜만에 만나 심회를 풀고 있는 것 같구료!" 소영은 잇따라 검초를 발휘하며 소리쳤다. "주조룡, 우리는 이미 정리가 끊어진 지 오래다. 나의 노여움을 자극할진대 먼저 그대 주조룡의 목숨을 취할 것이다." "하하하.... 셋째, 말씨가 너무 거칠구나! 이 형은 그렇게 가볍 게 죽지 않는다. 지금 강호상에서 형을 노리고 있는 자가 어찌 한 둘에 그치겠는가? 그러니 오히려 형은 오늘 이 때까지 의연히 살아 오고 있지 않은가?" 옆에서 지켜보던 손불사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소영은 마음이 선량하고 구정이 연연하니 아마도 그대에게 손을 쓴다고 해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늙은 거지는 다르 다. 말하면 반드시 실천하므로 오늘은 결코 그대를 놓아 보내지 않 겠다." 노인의 말소리 끝머리는 허공 중에서 들려 왔다. 어느새 몸을 날 려 수십여 자나 솟구쳤던 까닭이었다. 손불사는 그곳에서 돌연 몸을 뒤집더니 머리를 아래로 다리를 위 로 하여 곧장 주조룡의 머리 위로 덮쳐 내려왔다. 주조룡은 말채찍으로 허공을 후려침과 동시에 마상에서 왼쪽으로 몸을 날려 떨어졌다. "네 또 달아나는가....." 손불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가닥 검광이 번뜩하면서 쌍 쌍이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날아와 손불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검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으윽!" 두어 마디 처절한 비명이 들리는 가운데 두 사람의 장한은 허공 을 쥐어 뜯으며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그들은 손불사의 다섯 손가 락에 가슴을 맞은 것이었다. "이놈들을!" 소리와 동시에 손불사의 몸이 땅에 이르렀다. 다시 두 손이 번뜩하자 두 구의 시체는 채 땅에 닿기도 전에 허 공을 날아 곧장 주조룡 면전으로 날아가지 않는가. 주조룡은 겨우 위기를 피했으나 속으로는 적지 않게 놀랐다. '이 늙은 거지의 무공은 과연 대단하구나! 두 무사가 나를 막지 않았던들 나는 이미 그의 손에 상했을 것이니.....' 그는 손을 들어 날아오는 시체를 향해 일장을 쳤다. 시체는 거듭 욕을 보고는 땅에 떨어져 묵사발이 되었다. 손불사는 한바탕 손을 휘둘러 두 장사를 처치한 다음 의연히 한 곳에 버티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다음의 출격을 준비하는 듯. 74. 고개 숙인 독수약왕 이 때였다. 여남은 자 밖에 보이는 풀덤불 속에서 음침한 목소리 가 우렁우렁 들려 왔다. "으흐흐.... 칠살찬운수는 늙은 거지의 전문적 수법이외다. 이장 주께서는 저당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말소리가 떨어지자,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와 손불사의 앞을 막아 섰다. 전신에 푸른 옷을 입고 작달막한 키에 통통하게 살진 늙은이였다. 손불사는 흰 눈썹을 찡긋 치켜 올렸다. "신삼괴(申三怪), 네 아직도 세상에 살아 있었군. 정말 뜻밖인 데?" 신삼괴는 으흐흐 하고 음침하게 웃고, "너도 또한 살아 갈수록 목숨이 길어지는구나!" 손불사의 반응은 냉정했다. "너는 죽어 마땅할 놈이 죽지 않았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다만 결국은 또 백화산장 문하에 투신하여 심목풍에게 아첨을 떨고 있다니 진정 이 늙은 거지로 하여금 이빨이 시게 하는구나!" 신삼괴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십 년 전 우리는 황산에서 일전에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 러나 오늘의 싸움은 반드시 생사를 거는 싸움이 되겠구나!" "흥! 설마 이 늙은 거지가 네깟놈을 두려워하겠느냐?" 이때 소영이 크게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께서 끝내 지고 싶지 않다면 나 소영의 손이 무정하다고 생 각지 마시오." 여럿은 눈을 돌려 바라 보았다. 이때 소영의 장검은 신룡이 구름 을 뚫고 나오듯 송이송이 검화를 날리며 이미 금화부인의 온몸을 칼그물 속에 몰아 넣고 있었다. 금화부인의 두 개의 금화는 소영의 검에 눌리어 도무지 독을 쓰 지 못하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목숨도 위태위태하게 보였다. 격렬한 드잡이 판국에 돌연 소영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비키시오!" 흥! 하는 소리가 일어나면서 금화부인의 오른손 금화가 땅에 떨 어졌다. 소영의 일검은 금화부인의 오른팔을 넉넉히 자를 수 있었 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어진 사람이라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검의 날카로운 날이 바로 여인의 팔뚝을 치는 순간 손을 뒤집어 칼몸으로 부인의 팔을 쳤던 것이다. 금화부인은 크게 놀라 펄쩍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빈 오른손의 놀림은 빨랐다. 어느새 품 속에 넣었는지 한 마리 독 사가 손을 벗어나 곧장 소영의 코 앞으로 날아오지 않는가? "흥!" 소영은 코웃음을 보내는 동시에 돌연 왼손을 들어 날아 오는 독 사를 잡았다. 금화부인의 안색이 금세 변했다. "죽이려고 하는가?" "알 수 없지!" 소영은 담담하게 대꾸하고는 독사를 손에 잡는 순간 다시 그것을 휙 뿌리쳐 신삼괴에게로 던졌다. 신삼괴는 잠자기 검은 빛줄기가 날아 오자 처음에는 놀랐다. 또 한 무슨 암기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무공이 고 강함을 믿고 있었고 또한 소영이 잡는 것을 보고는 약세를 보이기 가 싫었다. 그래서 날아오는 물체가 코 앞에 이르자 덥석 손을 내 밀어 잡았던 것이다. 처음에 느낀 늙은 손의 감촉은 우선 미끈미끈하여 이상했다. 늙 은이는 기분이 좋지 않아 즉시 땅바닥에다 팽개쳤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손이 근질근질 하면서도 따가웠다. 독 사에게 물린 것이다. 이 조그마한 독사의 기독은 어떠한가?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사 람 이라 할지라도 두 시진을 살아 남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신삼괴가 제아무리 장담을 한다고 해고 한 번 물린 독사의 독은 즉 시 핏줄을 타고 심장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공력으로는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었다. 오른팔은 벌써 끊어질 듯 저려 왔다. 깜짝 놀란 금화부인은 즉시 몸을 날려 신삼괴에게 다가갔다. 즉 시 손을 놀려 신삼괴에 의해 팽개쳐진 독사를 거두어 들이면서, 다 른 손은 어느새 품 속에서 붉은 알약 한 알을 꺼내어 신삼괴에게 넘겨 주었다. 이 모든 동작은 실로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어서 복용하세요!" 신삼괴는 반생을 강호를 떠돌아 다닌 늙은 구렁이로 아는 것도 많고 본 것도 많았다. 이 시간이 자기에게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긴박한 순간임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 거드름을 피워 물리칠 것인 가? 즉시 환약을 입 속에 집어 넣어 꿀꺽 삼켜 버렸다. 주조룡이 급히 묻는 소리. "신형, 상세는 어떠시오?" 신삼괴는 대답할 여력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목구멍으로 넘어간 단약을 녹이느라고 그러는지 오만상을 찌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화부인이 계속해서 일렀다. "이 시각엔 다시 싸울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 삼 일은 쉬어야 합니다." 주조룡은 형세가 글렀다고 여긴 모양인지 돌연 채찍을 들어 말의 엉덩이를 후려 갈겼다. "이랴!" 건강한 말은 즉시 말머리를 돌리며 질풍처럼 네 굽을 놓고 달리 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새 손불사가 따라붙고 있었다. "주조룡! 게 섰거라!" 소리와 함께 노인의 무시무시한 일장이 갔다. "히히힝!" 말울음소리가 크게 일어나는 가운데 주조룡의 몸은 돌연 안장을 떠나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거꾸로 풀덤불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말이 네 굽을 꺾고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사람은 피했으나 말은 호 되게 얻어 맞았던 것이다. 옆으로 벌렁 자빠지자 네 굽을 허우적거리다가 그대로 조용해지 고 말았다. 벌써 날은 땅거미가 짙게 내려 깔렸다. 손불사가 머리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금화부인도, 신삼괴도 없었 다. 쌍쌍이 숨어 버린 것이다. 손불사는 닭 쫓던 개 모양이 되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지거리 를 퍼부었다. "개 방귀 같은 놈들, 주조룡 듣거라! 나 늙은 거렁뱅이가 조만간 너를 산채로 잡아다 쳐 죽이고 말겠다." 그 말에 응답이나 하듯, 돌연 사방에서 피융! 하는 화살소리가 일어났다. 일제히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화살은 곧장 손불사에게로 날아 왔다. "흥!" 그는 크게 코웃음을 치고 나서 갑자기 쓰러져 죽은 말의 시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따라 이리저리 흔 들었다. 날아 오는 화살은 대부분 말의 시체에 꽂히거나 땅에 떨어 졌다. 소영은 소리쳤다. "차츰 야색이 짙어 가니 포위를 뚫기가 어렵지 않겠습니다. 노선 배께서는 빨리 돌아 오십시오. 새로운 대책을 강구합시다." 손불사는 이 소리를 듣자, 말의 시체를 털썩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휙 몸을 날려 소영의 신변으로 다가 왔다. "적의 몇몇 수뇌 인물이 부상당했네. 왜 이 때를 이용하여 포위 를 뚫고 달아나지 않는가?" 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모님께서는 모두 무공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밤이라 띳집 사방에 수많은 매복이 있을 텐데 어찌 그들이 쏘아대는 강궁 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날이 밝으면 우리는 물론 적이 쏘아대는 화살이나 암기를 볼 수 는 있으나, 적도 또한 우리를 똑똑히 볼 수 있으니 그간의 이해득 실을 소대협은 다시 생각해 보시오." "후배의 생각으로는 먼저 사방의 매복을 소탕한 후에 다시 부모 님을 모시고 포위를 돌파하는 것이....." "좋아! 소대협의 생각대로 하지요." 소영은 장검을 치켜 들고. "저는 왼쪽에서 띳집을 돌고 노선배께서는 오른쪽으로 돌아 한 차례 매복을 소탕한 후에 집 뒤에서 합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 록 전부 소탕하지는 못한다 해도 반이라도 해치운다면 포위를 뚫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소대협의 의견에 따르겠소." 소영은 발길을 돌렸다. 손불사 역시 옆으로 돌았으나 몇 걸음 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 고 물었다. "소대협, 늙은이는 한 가지 미심쩍은 일이 있소. 대협의 가르침 을 받아야겠소." 소영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금화부인이 암기를 사용한 독사는 그 주독이 비할 데 없이 강렬 하거늘 아우는 어찌 아무 두려움 없이 그 뱀을 받았는가?" 소영은 소리 없이 웃으며, "후배의 손에는 천년교피장갑을 끼고 있어서 극독이 두렵지 않습 니다. 그러니 독사가 물지 못한 것이지요." "아, 그랬던가?" 노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길게 한숨을 불어 냈다. 먼 옛날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신삼괴는 옛날 노부와 황산에서 하루낮, 하룻밤을 줄곧 악투를 벌였지. 신삼괴의 무공이 높아 이 늙은 거지가 꺾어낼 수가 없었 소. 그 후 그는 소림의 무아대사에게 상하여, 이로부터 종적을 감 추고 다시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지. 그런데 뜻밖에도 백화산장에 잠적해 있을 줄이야....." 그는 잠깐 쉬었다가 사방을 한차례 살핀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신삼괴는 옛날부터 그 이름을 강호에 떨치었소. 그 위명으로 말 하면 절대 심목풍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오. 헌데 어찌하여 심목 풍의 밥을 얻어 먹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손불사의 말을 듣고 소영은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각대문 파에는 모두 심목풍의 첩자가 잠입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심 목풍은 앉아서도 무림의 정세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 환히 알고 있 었다. 또한 각대 문파에 잠입한 첩자가 그곳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 문파 내의 움직임을 소상히 알 수가 있는 것이 다. 심목풍이 싸울 때마다 승리하고 전무림을 굽어 보는 오만심을 갖게 된 것도 앞에 말한 연원이 있는 까닭이 아닌가? 손불사는 소영이 잠시 말이 없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소대협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소?" "이 일을 말하자면 길어집니다. 일후에 노선배께 상세히 말씀드 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소영은 이렇게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손불사는 더 듣고 싶었으 나 소영이 말하기를 피하고, 또 때가 때인만큼 이내 몸을 돌림과 동시에 떨어진 곳에 있는 풀덤불 속을 향하여 호된 일장을 날려 보 냈다. 마치 속에 있는 화기를 풀어 보듯이. 그러자, "아이쿠!" 하는 비명이 일어나면서 덤불속에 숨어 있던 사나이가 데굴데굴 굴러 풀덤불 밖으로 나왔다. 한편 소영은 손에 든 장검으로 한바탕 풀섶을 베었다. 돌연 풀덤 불 속에서 번쩍 단검 한 자루가 나왔다. "챙!" 하고 쇠와 쇠가 맞부딪는 소리. 적의 단검은 비록 소영의 창검을 막았으나 엄청난 소영의 잠력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단검은 멀리 이십여 자 밖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손불사는 큰 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주조룡과 금화부인은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너희들이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다니 스스로 죽음을 불러 들이는 결과이니라!" 소리를 지르며 노인은 계속해서 훅훅 하고 손바람을 쏟아 냈다. 무겁고 거센 장력은 태풍처럼 풀덤불을 휩쓸었다. 두 사람이 손을 쓰자 그 위세는 자못 대단했다. 편각지간에 벌써 칠, 팔 명의 장한이 나둥그러졌다. 그러나 반대로 풀덤불에 아직도 은신하고 있는 고수들은 비명소 리에 갑자기 격동되었다. 계속해서 터지는 활 시위 소리.... 화살 이 빗발같이 날아 왔다. 화살과 동시에 수많은 암기도 함께 쏟아져 왔다. 소영은 전에 한차례 독수약왕에게 시전한 대로 비무검의 수법으 로 내력을 충족시키다가 돌연 화살이 날아 오는 곳을 향하여 쏘아 냈다. 검광은 허공은 뚫고 나가 한 바퀴 풀숲을 휩쓸었다. 비명이 일어나고 피와 사람의 팔다리가 한꺼번에 튀었다. 손불사 역시 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번개치듯 적을 휩쓸었다. 이 무림 양대 고수의 전력을 집중한 위력은 과연 사람의 심금을 떨 어 울리는 결과를 나타냈다. 벼락이 사방에서 떨어지고 우뢰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 결국 매복해 있는 자들은 반수 이상이나 떨어져 나갔다. 나머지 무사들은 스스로 대적하지 못한다기보다 무서운 결과에 정신을 차 리지 못했다. 분분히 일어나 사방으로 달아났다. 대략 한 공기 밥을 먹을 시간이 지났다. 이제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매복은 말끔히 사라졌다. 두 사람은 벌써 집 뒤꼍에서 만났다. "노선배, 무양하십니까?" "하하.... 덕택에 괜찮소. 자, 이제 혼란한 이 틈을 타서 우리는 곧 탈출해야 하오." "노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독수약황이 두 사람을 맞았다. "백화산장의 인물들은 물러갔소?" 독수약황은 한바탕 헛기침을 토해 내고는 심목풍은 그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겠군. 이제 우리는 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오." "좋습니다. 노선배께서는 어서 따님을 안으십시오. 즉각 출발합 시다." 소영은 이렇게 말하고 큰 걸음으로 부친의 신변으로 걸어 갔다. "아버님, 제 등에 업히십시오. 길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노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금산반 상팔이 몸을 날려 이르렀다. "형님께서는 적을 막는 것이 긴요한 일입니다. 아버님은 제가 업 어 모시겠습니다." 소대인은 민망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상팔은 즉시 몸을 돌려 굽혔다., "지금은 형세가 매우 위급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 오." 금란은 전처럼 소부인을 업었다. "자! 그럼!" 소영은 검을 잡고 앞장을 섰다. 손불사가 그 뒤를 따르고 이어 소대인을 업은 상팔과 소부인을 업은 금란, 그리고 독수약왕이 딸 을 안고 따랐다. 일행이 대문 밖으로 나와 머리를 들어 보니 어둠 속 정북방에서부터 몇 개의 횃불이 바람처럼 밀려 오는 것이 보였 다. 손불사는 소영을 돌아 보며, "저 화공은 필시 백화산장의 무리들일 것이오. 불을 밝히고 당당 히 오고 있는 품이 백화산장의 정예고수들인 것 같군." 소영은 소리를 낮추어, "지금 형세를 보면, 그들과의 싸움을 피하는 것이 상책인 것 같 소." 그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정남방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들은 아직 적의 포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바람같이 걸음을 재촉하니 순식간에 사, 오 리를 달렸다.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일어나더니 한 필의 쾌마가 숲 속의 오솔길을 따라 달려 가는 것이 보였다. 독수약왕이 낮은 소리로 일렀다. "이건 반드시 백화산장의 파발꾼일 것이다." 소영은 이미 땅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었다. "누구냐? 멈추지 못할까!" 그 사람은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말을 달려 달아났다. 소영이 곧 몸을 돌려 두어 번 솟구쳤다가 떨어지자 벌써 말을 따 라 붙었다. "서라!" 소리와 동시에 그의 손에 들렸던 돌멩이가 날아갔다. "으윽!" 비명이 일어나고, 사나이는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소영이 가까이 이르렀을 때 돌연 사나이의 품에서 빛줄기 하나가 허공으로 뻗어 올라가더니 돌연 아득한 공중에서 일성 포향과 함께 작렬했다. "흥!" 두구는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급히 달려갔다. "그 놈이 아직도 죽지 않았군!" 그는 사나이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 보았다. 땅바닥에 엎드 려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두구는 손을 내밀어 사나이의 몸을 뒤집었다. "억!" 사나이의 코와 입은 선혈로 물들었고 벌써 숨이 끊어져 있었다. 원래 소영은 가까운 거리에서 돌을 날렸고, 또 때가 때인지라 자 기의 공력이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음을 잊고 힘껏 격중시켰기 때문이었다. 또 사나이가 맞은 곳도 중요한 혈도 중의 하나인 후심 이었다. 그래서 사나이는 한순간에 숨이 끊어졌던 것이다. 소영은 이 사나이의 충성심에 재삼 탄복을 금치 못했다. 두구가 중얼거렸다. "죽으면서도 신호불을 발출했으니 대단한 놈이로군!" 말과 동시에 사나이의 시체를 힘껏 걷어 차니 시체는 피를 날리 며 여남은 자 밖으로 날아갔다. 독수약왕은 이때 먼 하늘에 작렬하며 떨어지는 불꽃을 보고 있었 다. "우리의 방향이 이미 적에게 탐지되었으니 여기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소영은 먼저 자리로 돌아 왔다. "동쪽으로 나아감이 좋을 듯하오." 일행은 즉시 동쪽을 향해 달렸다. 얼마를 가니 여러 가지 나무가 뒤섞인 잡목림이 나왔다. 소부인은 금란의 등에 업혔으나 오랫동안 흔들림에 시달려 제정 신이 아니었다. "영아, 좀 쉬었다 가자꾸나!" 소영은 어머니 분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머님 말씀이 옳습니다. 이미 험경을 지났으니 좀 쉬어 가도 되겠....." 바로 이때- 잡목숲에서 돌연 불빛이 번쩍했다. 여러 사람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보고 있는 동안 불꽃은 두 개의 횃불로 화하였다. "이 횃불은!" 소영이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숲 속에서 착 가라앉 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셋째 아우, 줄곧 쉬지 않는군. 천타금강이나 동요나한이라 해도 더 지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백화산장에서는 이미 침상을 치우고 기다리고 있다. 아우는 무슨 연고로 장중으로 와 쉬려 하지 않는 가?" 그것은 바로 심목풍의 목소리였다. "흥!" 손불사가 코웃음을 치고 한 마디 했다. "심목풍, 그대는 아직도 이 늙은이를 볼 낯짝이 있느냐?" 서로 대치한 가운데 여기 저기서 부싯돌을 치는 소리가 일어나면 서 잇따라서 몇 자루의 횃불이 더 밝혀졌다. 소영은 시선을 쓸어 횃불을 헤아려 보았다. 횃불 뒤에 고요히 움 직이는 검은 그림자들- 소영은 그 뒤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횃불마다 수가 비슷함을 알아 보았다. 하나, 둘.... 모두 열 명 정도의 흑의대한이 횃불을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밖에 횃불 든 자의 옆에는 각각 강궁을 겨누고 있는 두 사람의 강철같은 궁로수- "이미 모두 배치를 끝냈군!" 이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소영의 마음은 기이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화광은 서서히 움직였다. 그 뒤에 각각 병기를 뽑아 든 무사들도 움직였다. 대오가 정연했다. 이리하여 순식간에 적은 사면 팔방을 에워싸고 말았다. 소영은 암암리에 횃불의 수효를 세어 보았다. 모두 스물네 개였 다.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 나왔다. '심목풍과 아직 몸을 나타내지 않은 고수들을 계산에 넣지 않고 라도 사방을 에워싼 무사는 열 명씩 쳐도 이백사십 명.... 거기다 가 횃불을 들고 있는 자와 좌우의 궁노수들을 합하면 모두 이백사 십사 명- 백화산장에서 소영은 이미 이 무사들을 신물이 날 정도로 지도해 왔다. 그들의 무공이 비록 무림 중 제일급의 서열에 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강호에 나가면 웬만한 현을 지배할 수 있는 일기당천의 무서운 용사들이 아닌가. 게다가 이들은 하나하나가 오랜 훈련으로 일단 접전이 벌어질 경 우 에는 죽을둥 살둥 미치광이처럼 숨이 넘어갈 때까지 늘어 붙는 종자들이었다. 중주이고와 금란 등은 소대인 부부를 풀밭에 모셨다. 독수약왕 역시 딸을 노인들 신변에 눕혔다. 중주이고, 금란, 옥란, 그리고 독수약왕 다섯 사람은 거동이 불편한 세 사람들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섰다. 스물네 자루의 횃불이 타고 있으니 주위는 대낮같이 밝 았다. 독수약왕은 몸을 숨기고자 했으나 도리가 없었으므로 아예 허리를 펴고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다. 사방을 에워싼 흑의 무사들은 여남은 자쯤 되는 거리에서 이쪽을 네 모꼴로 둘러싸고 있었다. 병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없었고 숨조 차 쉬고 있지 않은 듯 사방은 일시 무덤처럼 고요했다. 다시 심목풍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소형제, 하잘것 없는 백여 무사가 그대를 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 형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마흔여덟의 궁노수가 있다. 이 사람들은 그대의 양친을 향해 강궁을 당길 것이며 암기를 사출해 낼 것이다. 그 끝에 독을 발라서....." 소영은 얼굴이 흑빛이 되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손불사 가 약왕을 돌아 보고 한 마디 했다. "약왕, 싱목풍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이미 당신을 보았을 것 이오. 구태여 모르는 척할 필요가 없지 않소?" 독수약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싸늘했다. "강호의 친구들은 모두 심목풍 심대장주를 가리켜 정이 차고 의 리에 경박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부와 그는 정리가 깊고 교분이 돈 독했다. 오늘의 국세는 아마도 내가 나가 수습하여야 할 것이니.." 그는 잠간 말을 끊었다가 갑자기 목청을 돋구었다. "심형, 이 형제가 보입니까?" 어둠 속에서 심목풍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미 보았네." 얼음같이 차고 잔잔한 소리였다. 독수약왕은 심목풍이 더 말할 여유도 주지 않고, "심형은 아우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외다. 내 딸 완아는 바 로 이 동생의 생명이오. 여기선 소영이 수차 딸애의 목숨을 구한 연고로 아우는 부득불 그에게 보답해야 하오." "흥! 조카딸의 병세는 이제 불치병으로 낙인이 찍혔는데 그 누가 그 애를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소삼제 역시 마음이 있다 해도 능력 은 없을 것이오." "사정은 심형이 추측한 바와 다르오. 소형은 죽음을 무릅쓰고 여 아를 위해 영약을 찾아 내었소. 이미 딸애의 고질병은 완전히 치료 되어 앞으로 열흘이나 보름 정도만 휴식한다면 보통 사람과 같아질 것이외다." "그렇다면 이 형은 그대에게 축하술을 드려야겠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독수약왕은 잠시 생각을 굴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서로의 의가 금란으로 하여 맺어졌고, 이후 친분이 보통 이 아니었소이다. 또한 이 아우는 당신을 위해 많은 심력을 기울여 왔소이다. 백화산장이 오늘의 성황을 이룬 것도, 또 근 천여 명의 죽음을 돌보지 않는 무사들을 거느리게 된 것도.... 비록 이 아우 가 으뜸의 공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 둘 수를 따지자면......" 심목풍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옳은 말이오 그대는 나를 위하여 백화산장의 기업을 닦은 셈이 오. 그러니 설마 그대가 타인을 위하여 그 닦여진 기반을 흔들려고 는 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을 이 아우가 어찌 감히....." 독수약왕은 얼른 심목풍의 말을 가로막고는 휴우 숨을 내쉬었다. "하오나 아우는 심형에게 한 가지 청구할 일이 있소이다." "말하라!" 독수약왕은 또 잠깐 침묵하였다가 입을 열었다. "소형은 딸애의 목숨을 살려 주었소이다. 그러므로 아우는 소형 의 부모를 구출하기에 이른 것이오. 지금 만일 심형이 이 포위를 열어 이들을 가게 한다면 아우는 이로써 빚을 완전히 청산하게 되 는 것이오. 그 이후는 다시 우리는 좋은 형제지간이 될 수 있으리 라. 그리고 난 후 아우는 전심전력으로 딸애의 몸을 보살펴 불과 삼 년 내지 오 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그녀를 무림에 둘도 없는 고수로 만들 것이오. 그리하여 우리 부녀는 전력으로 심형을 도와 무림을 제패하려는 대업을 완성시킬 것이외다." "하하.... 삼 년 내지 오 년이란 세윌이 비록 짧지는 않다고 하 나 나 심목풍은 그대를 기다릴 수 있소. 그러나 당장 무림 중의 각 대문파에서는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오. 나 심아무개가 보는 바로 는 삼 년 이내에 무림의 대국은 결정을 보아 혹시 그대가 나의 시 체 앞에 와서 추위에 떨고 있어야 할지 모르오." "그렇다면 심형은 소제의 체면을 생각해 주지 못하겠단 말이오?" 돌연 손불사가 큰 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당년에 그대 독수약왕은 백 화산장을 위하여 고기를 기르는 물이며, 말을 살찌게 하는 여물이 되었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네. 지금 백화산장에는 날갯죽지를 단 무사가 구름같이 많소. 그러니 독수약왕은 전처럼 중요한 존재 는 아니오. 결국 이처럼 의미없는 입씨름을 할 것이 아니라 이 늙 은 거지는 약왕 당신더러 때를 모르는 늙은이라 할 수밖에 없군." "흥!" 독수약왕은 코웃음을 치고, "우리 형제의 일에 그대 거지가 쓸데없이 참견할 건 없다." 심목풍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나의 조카딸을 구해 주었다. 그대는 또한 열두 명의 무 사를 독으로 죽이면서 소영의 양친을 구하였다. 이로써 피차의 빚 은 청산되었다고 생각지 않는가?" 약왕은 헛기침을 토해 내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구하려면 살게끔 구해야 하는 것이오. 제가 소형의 양친 을 구해 준 이상, 다시 심형에게 사로잡혀 백화산장으로 달아나는 것을 원치 않소이다. 그러나 오늘밤 심형께서 주위에 둘러선 무사 들로 하여금 포위를 풀게 해 준다면 이후는 다시 소형의 일로 입씨 름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외다." 독수약왕의 어조는 제법 강경했다. 심목풍은 낮게 신음소리를 토해 내고는 기분나쁜 음성으로 다시 힐난하였다. "아우는 무슨 연고로 이렇게 선심을 쓰는 것인가?" 75. 남궁낭자의 예지는 밤하늘을 밝히고 독수약왕은 냉정한 태도를 바꾸어 심목풍을 향해 간절하게 말했 다. "호랑이가 제아무리 독하다 해도 제 새끼는 잡아 먹지 않으며, 사나운 짐승도 정이 있는 법이오. 소제는 비록 독수를 지니고 있지 만 역시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한이 없소. 자식이 불효를 할지언정 어버이로서의 자애는 버릴 수 없구료. 소대협이 딸의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내 목숨을 구해 준 것보다 더 크다 하겠소. 그러니 심형 께서는 이 소제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그를 놓아 주기 바라오." 소영은 독수약왕의 말을 반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순간 부모님 이 고난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워 부모님만 무사할 수 있다면 설사 모욕을 당하고 굴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참으리라 마음 먹었다. 심목풍이 대꾸했다. "우리들의 친분으로 봐서 이 형은 응당 그대의 부탁을 받아 들여 야 하겠지만 말야. 헌데......" 독수약광은 급히 다그쳐 물었다. "헌데 뭐요?" 심목풍은 대답했다. "허나 호랑이란 놓아 주면 후환이 무궁한 법일세. 사내 대장부가 어찌 그까짓 일쯤으로 인정에 끌리나 그대는 딸을 사랑하는 나머지 대국을 소홀히 하는구료." 독수약왕의 낯빛이 일변하면서 냉랭한 어조로, "내 평생에 타인에게 이렇듯 애걸하는 말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 이오. 심형께서 이처럼 인정 없게 대하시는 것은 소제로 하여금 의 리와 정을 스스로 끊도록 강요하는 거나 다름 없소." 정동방의 흑의 무사들이 양면으로 갈라서자 심목풍은 여덟 명의 홍의의 사나이들을 이끌고 느린 걸음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그 여 덟 명의 홍의의 사나이들은 각기 거대한 검을 등에 꽂고 있었고 낯 빛은 굳은 나무토막처럼 차갑고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마치 관 속에서 방금 꺼낸 여덟 구의 송장같았다. 독수약왕은 냉연히 웃으며, "팔대혈영화신(八大血影化身)이로군." 심목풍도 역시 입가에 냉소를 띠며, "그렇다! 소제도 이만하면 이 형이 여기 오기 전에 이미 만반의 대책을 세웠다는 사실을 짐작하겠지?" 여기서 말을 끊고 잠시 묵묵히 바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가 지금이라도 생각을 돌린다면 아직은 늦지 않았다." 독수약왕의 여윈 얼굴이 한동안 경련을 일으키더니 갑작스럽게 왼손으로 서서히 도포자락을 들어 올리고 오른손으로는 재빨리 금 란의 보검을 빼어 들어 일검으로 찢어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는 도포를 자름으로써 이 시각부터 의리를 끊읍시다!" 이어 단검을 휘둘러 모래와 풀을 날리며 자기 앞 땅에 줄을 긋고 는, "땅을 그어 절교를 하고 이로부터 누구도 의리를 품지 않기로 합 시다." 심목풍은 웃음을 거두고 싸늘한 낯빛으로 한 번 더 권유했다. "소제는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나?" 그러나 독수약왕은 냉랭히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심대장주께서 노부에게 소제라 부르지 마시오." 심목풍은 고개를 젖히고 앙천대소했다. "약왕께서 나 심모와 절교하기를 고집한다면 심모도 더 이상 권 하지 않겠소. 우리들의 수십 년의 친분으로 보아 심모도 먼저 한 말씀 올려야겠소." 독수약왕은 응했다. "어서 말씀하시오." "만약 싸우게 되면 무기는 눈이 없으니, 그대의 딸이 부상을 입 더라도 나 심모가 악독하다 원망은 마시오." 독수약왕은 본래부터 얼굴이 보기 흉한데다가 이 말을 듣자 차갑 기가 단단한 얼음장같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한 마디 힘주 어 내뱉듯 말했다. "그 누구든 내 딸에게 손을 쓰는 날이면 노부가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심목풍은 일소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대가 독을 사용하는 것을 겁내지만, 심목풍은 겁내지 않는다는 것을 약왕은 잘 알고 있을 거요." "독이 무려 천만 종류가 있는데 심목풍도 만독이 겁나지 않을 리 는 없겠지."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사귀어 오지 않았나. 약왕이 사용할 수 있 는 독을 나 심목풍은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알고 있지." 독수약왕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나서는, "나 독수약왕이 몇 수 숨겨 둔 게 있다." "피차 이미 적이 되었으니 나 심목풍도 더 숨길 필요가 없겠군. 막판을 대비해서 나는 이미 그대에게 독수를 내려 그대로 하여금 전혀 모르는 사이에 부상을 입도록 했지! 일 년 내에 그대는 심모 와 만나지 않으면 그 상처가 발작할 것이다." 독수약왕 역시 지지 않고 응대했다. "노부 역시 벌써 그대에게 몰래 독을 내렸는데 반 년쯤 후에야 그 독성은 발동할 것이다." 두 사람의 이같은 몇 마디 말은 강호의 험악한 풍파를 그대로 드 러 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소영은 수십 년 간 친분이 두터운 친구들이 피차 모두 몰래 독수 를 내렸다니 실로 소름이 끼치는 일이구나 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 다. 심목풍은 이 말을 듣고 한동안 크게 웃어젖히더니, "그대의 말처럼 정말 나 심목풍의 몸에 기독을 내렸다 해도 발작 하려면 반 년이란 세월이 있으니, 너 독수약왕은 금일의 액운을 벗 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독수약왕도 냉랭하게 응수했다. "목하 승부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으니 심모는 너무 큰소리 치지 말라!" 소영이 묵묵히 상황을 살펴 보니 이미 활시위의 화살인 양 또는 호랑이 등에 탄 것처럼 일장 생사를 건 싸움을 도저히 피할 수 없 음을 깨닫자 즉시 보검을 휘두르혀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심목풍! 그대는 강호에서 수십 년 간 명성을 누렸으니 사내대장 부라면 영웅의 풍모를 지녀야 하는 법, 오늘밤의 결과가 어떻든 간 에 나 소영은 수중의 장검으로 그대와 결전을 벌일 생각인데 심장 주는 거절치 않겠지?" 심목풍의 싸늘한 눈빛이 서서히 소영의 얼굴로 옮겨졌다. "오늘밤의 상황으로 보아 나는 이미 필승의 기회를 잡고 있는데 그대가 생명을 걸고 싸운다니 너무 바보스런 짓이 아닌가!" 소영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손불사와 독수약왕에게 얼굴을 돌려, "나 소영은 몇 마디 폐부에서 우러 나온 뜻이 있는데, 두 노선배 님께서는 나 소영의 뜻대로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손불사가 가가일소하고, "우리가 오늘 밤 설령 포위를 뚫고 나가지 못한다 치더라도 백화 산장의 도당들은 태반이 죽음을 당할 것이니 본전에다 이자까지 합 친 결과가 아니겠나. 소대협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서 털어 놓게 나. 물 속으로 가라면 물 속으로 갈 것이고, 불 속으로 가라면 불 속으로 사양치 않고 들어 가겠네." "불초, 먼저 감사드립니다." 하며 소영은 손을 맞잡고 예를 올린 다음 눈길을 독수약왕 쪽으 로 돌려 의향을 기다렸다. 독수약왕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노부는 이미 심목풍과 절교를 선언했고 심중에 아무 거리낌도 없으니 무슨 말이든 마음 놓고 하시오." 소영은 숙연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꺼냈다. "불초가 심목풍과 상대하는데 있어 두 분께서는 도와 주실 것 없 이 중주이고와 금란, 은란과 같이 전력을 다해 포위를 뚫고 나가 주십시오." "두 분 노선배의 무공이라면 백화산장의 무사들이 도저히 가로막 지 못할 것이니, 포위망을 뚫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하겠습니다." 소영은 어떤 최악의 경우라도 불사하겠다는 결의였다. 손불사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그래 혼자서 심목풍과 그의 팔대혈영화신과 맞서겠단 말이오?" 독수약왕이 거들었다. "게다가 몸에 이백 개의 금제를 받아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흑의용사들....." 소영은 적절한 각도로 자세를 잡아 심목풍과 그의 팔대혈영화신 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그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불초도 포위망을 뚫을 자신이 있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불초의 뜻을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손불사가 말했다. "약왕, 대열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게! 이 늙은 거지는 남아서 소 대협을 돕겠네!" 독수약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 늙은 거지의 장력이 웅휘하니 그들을 보호하며 포위망을 뚫는데 가장 적합하네! 내가 남아서 소대협을 돕겠네! 독수를 떨칠 수 있으니 말일세." 심목풍은 담담히 웃으며, "그대들은 천천히 상의해 보게. 내가 그대들의 상의가 끝날 때까 지 기다려 주마." 소영은 다급해져서 높은 음성으로, "두 분 노선배님에서 나 소영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겠다면 이후 부터 우리 영원히 교제를 끊읍시다!" 심목풍은 음산한 웃음을 띠며, "삼제는 화내지 말게. 이 늙은 거지와 독수약왕은 영존, 영당을 보호하면서 포위를 뚫을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그대의 의견을 따르지 못하는 걸세!" 소영은 버럭 화를 내며, "당신께서 걱정 안해 주셔도 되오!" 하고 쏘아 대고는 눈길을 돌려 보니,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던 흑 의무사 등이 이미 무기를 뽑아 들고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심목풍은 입으로는 비록 천천히 상의하도록 여유를 주마고 말했 지만, 기실 이 시간을 이용해 사람들을 배치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심목풍의 뒤에 서 있던 여덟 명의 홍의의 사나이 중 네 명이 걸 음을 떼어 놓더니 정북(正北)과 정서, 정남 등 세 곳으로 갈라 섰 다. 소영은 심목풍이 사람을 배치하는 것이 더욱 더 엄밀해지는 것을 보자 탄식하며 시간이 지연되면 될수록 나에게는 불리하니 억지로 라도 일전을 벌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요행히 심목풍을 죽이게 된다면 무림을 위해서 해독을 제거 하는 결과가 되니 설사 이곳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유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같은 생각이 들자, 암암리 진기를 모아 서서히 수중의 장검을 들어 공격을 가하려 하였다. 그때 돌연 방울을 굴리는 듯한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 왔다. "또 다시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되요." 얼굴을 돌려 보니 독수약왕의 허약한 딸이 아닌가. 그녀는 간신 히 몸을 지탱해 금란의 오른팔목을 움켜 잡고 일어나며, "나를 부축해서 건너 가요." 하는 것이 아닌가. 금란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어디로 가신단 말씀이에요?" 독수약왕은 딸이 애써 몸을 지탱해 서 있는 것을 보자 마음이 조 급해져서, "어서 앉아! 어서 앉아라." 하고 말했다. 본시 소대인 부부와 남궁옥이 중주이고, 금란, 은란 등 사면의 보호 속에 있었는데 이제 남궁옥이 몸을 일으키니 몇 사람이 보호 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만 것이다. 남궁옥은 가냘픈 오른손을 들어 헝클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언제나 이 딸이 영리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독수약왕은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얘야, 너는 비록 영리하기는 하지만 무공을 모르지 않느냐? 지 금 겹겹이 위험 속에 처해 있으니 자칫 잘못하다간 목숨을 잃게 된 다. 네 몸이 허약하기 이를 데 없으니 어찌 일격을 당해 낼 수 있 단 말이냐." 남궁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심아저씨께 사방의 흑의 무사들을 철수하도록 요청해 보겠 어요." 독수약왕은 소스라쳐 놀랐다. "이 애비는 그와 수십 년 간의 친분이 있고, 그를 도와 백화산장 을 건립케 해 주었는데도 그는 지금 이 애비에게 그것에 대한 보답 을 주지 않아서 도포자락을 잘라 절교까지 했는데 어찌 네 말을 들 어 주겠느냐?" 남궁옥은 금란의 어깨에 기대어 겨우 몸을 가누며, "아버지께서는 걱정 마세요. 이 딸이 그로 하여금 흑의 무사들을 물리치게 할 계책이 있어요." 그는 천천히 심목풍을 향해 걸음을 옳겨 갔다. 소영은 놀라 다급히 말했다. "생사는 어린애 장난이 아니오. 그러니 낭자는 어서 물러 가시 오." 남궁옥은 주옥같은 두 눈에 별빛같은 맑은 빛을 담고 빙그레 웃 으며 소영을 바라봤다. "왜 제가 죽을까 봐 겁나세요?" 생사의 위급한 갈림길에서 숱한 눈동자가 주시하는 가운데, 바람 만 불어도 금방 쓰러질 것 같은 가냘픈 여자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소영은 한편으론 화가 치밀어 오르고 한편으론 어색해져서 긴 한숨 을 한 번 내쉬고 어쩔 바를 몰라 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독수약왕은 딸이 고집을 굽히지 않는 것을 보자 다급해서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조급히 말했다. "완아야! 소대협의 말처럼 생사의 대사를 장난으로 삼아서야 되 겠느냐? 어서 물러서라." 그러나 그녀는 태연했다. 완아는 사방에 높이 쳐든 횃불과 겹겹 으로 에워싼 흑의 무사들을 바라 보면서 부드런게 입을 열었다. "심아저씨의 수하가 너무 많아 여러분은 이 겹겹의 포위망을 벗 어나기 어려워요." 심목풍은 돌연 무거운 음성으로 허허 웃고 나서, "그들이 겹겹의 포위망을 뚫고 나간다 하더라도 낭자와 소영의 부모는 데리고 나갈 수 없을 것이오." 남궁옥은 금란을 보며 가볍게, "..... 가요." 하고 재촉했다. 금란은 심목풍을 보자 겁을 집어 먹어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서 발걸음을 옳겨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공을 전혀 모르는 일개 연약한 여자도 죽음을 겁내지 않는 데 자기는 어 째 이처럼 겁을 낸단 말인가 하고 스스로를 꾸짖고는 이를 악물고, 대담하게 심목풍을 향해 걸어 갔다. 소영은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장검을 손에 쥔 채 냉랭히 입을 열 었다. "심목풍! 그녀는 무공이라고는 전연 모르는 연약한 여자다. 그대 가 만약 그녀에게 부상을 입힌다면 다시는 천하 영웅들을 대할 낯 이 없을 것이다!" 독수약왕은 양손을 불끈 쥐고 식은땀을 연방 이마에서 훔쳐냈다. "심목풍! 네가 만약 내 딸에게 조금이라도 부상을 입힌다면 나는 백화산장의 모든 사람들을 독살하고, 닭 한 마리, 풀 한 포기도 남 기지 않을 것이다." 남궁옥은 고개를 돌려, "아버님, 그리고 소공자, 안심하세요. 심아저씨께서는 절대로 저 를 괴롭히지 않아....." 심목풍은 하하 냉소하며, "낭자는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지 말아라. 그대의 부친은 이미 땅 을 그어 나와 절교를 불사했는데 이 심아저씨도 대자대비한 사람이 아니니 너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남궁옥와 금란은 이미 심목풍의 앞까지 다 가 갔다. 남궁옥은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심아저씨, 후배는 독을 사용할 줄 모르니 겁내지 마세요." 심목풍은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네가 독을 사용할 줄 안다 해도 나는 겁나지 않는다." "그럼 좋아요. 심아저씨께서 귀를 바싹 대 주세요. 제가 아저씨 와 몇 마디 말할 것이 있어요." 심목풍은 어리둥절해서, "무슨 말이길래 그러는가? 그냥 얘기하여라." 완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말은 매우 기밀한 말이라 남이 들어서는 안 돼요." 심목풍은 난처한 듯, "그대 부친도 들어서는 안 되나?"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부친께서 만약 알게 되면 틀림없이 단단히 나를 혼내 줄 거예 요." 심목풍은 약간 주저하더니 마침내 그 거대한 체구를 굽혀 귀를 바싹 갖다 댔다. 그녀는 심목풍의 귀에다 입을 대고 몇 마디 소곤거렸다. 그러자 심목풍의 낯빛이 금세 변하며 몸을 일으키기가 바쁘게, "그게 정말이냐?" 하고 다그쳐 물었다. 그녀는 힘없이, "저는 많은 말을 해서 이제 상당히 지쳐 있어요. 심아저씨가 만 약 믿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심목풍은 살기가 등등했다. "이 계집애야! 나는 먼저 너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버려야 시원하겠다." 그녀는 힘없이 웃어 보이며,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그르치는 법이에요. 아무런 무 공을 모르는 저를 죽인들 당신에게 무슨 큰 이익이 될까요?" 심목풍은 얼굴의 살기가 차츰 사라지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 네 말대로 사방의 흑의 무사들을 물리친다면?" "그러면 저도 자연히 약속을 이행하는 거지요." "내가 만약 너의 의견을 따르겠다면?" "그들을 먼저 가게 해요. 저는 여기 인질로 남겠어요." 군호들은 그녀가 심목풍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 러나 심목풍이 사방의 흑의 무사들을 철수시키겠다는 뜻을 비치자 저마다 모두 놀라 마지 않았다. 심목풍이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좋다!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는 손을 들어, "길을 터 주어라!" 하고 명령했다. 심목풍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방의 흑의 무사들은 후퇴하여 동, 서, 남, 북으로 각각 길을 터 주었다. 심목풍은, "사방으로 길이 뚫렸으니 그대들은 스스로 한 갈래 길을 택해 가 거라!" 남궁옥은 고개를 돌려 소영을 쳐다 보고는, "소공자! 제 말 한 마디 들어 주시겠어요?" 소영은 어두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완낭자, 어서 말씀하시오." "어서 당신의 부모와 여러분을 모시고 정남쪽으로 가세요." "낭자는?" "저는 여기 인질로 남아야 돼요." "안 되오! 나 소영은 당당한 사내 대장부인데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소? 오늘밤 여기서 싸우다 죽어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낭자의 말에 따를 수 없소!" 그녀는 탄식했다. "소대협은 영웅의 기개로써 이곳에서 싸우다가 죽으면 그만이겠 지만 소대협의 부모님은? 그들도 여기서 소대협과 함께 죽으란 말 씀인가요?" 소영은 이 말에 대답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독수약왕이 돌연 주먹을 맞잡고, "심형! 소제가 여기 남아 인질이 될 터인즉 내 딸을 가게 해 줄 수 있겠소?" 심목풍은 침중한 어조로, "그대가 남았댔자 쓸모가 없으니 그만 두겠네." 남궁옥이 다시 말했다. "아버님, 지금 이 딸은 바로 심아저씨 곁에 있어요. 그가 손을 들어 내리치기만 하면 즉시 저를 죽일 수 있어요. 그 때에는 아버 님도 구해 주실 수 없습니다." 독수약왕은 울먹거리며 말했다. "얘야! 누가 너더러 스스로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더 냐?" 그녀는 갑자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그러나 심아저씨께선 절대로 피해를 입히지 않으실 것으로 믿어 요. 그렇죠?" 심목풍은 거만스레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네가 나를 속이지만 않는다면 너의 신변을 보호해 주지." 완아는 옷소매를 들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냈다. "어르신네들은 들으십시오. 어서 가지 않고 언제까지 기다리실 참이에요?" 소영은 독수약왕과 중주이고를 향해 침통하게 말했다. "여러분! 소인의 양친을 모시고 먼저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 소영은 여기 남아서 낭자를 지키겠습니다." 강적이 사방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생사가 경각에 달린 이 자리에, 바람조차도 정면으로 맞을 수 없는 일개 약하고 가냘픈 남 궁옥이 침착하게 여유를 보이며 밤바람에 흩어진 머리칼을 쓰다듬 으면서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좋아요. 심아저씨는 비록 악독하지만 무척 총명한 사람인만큼 이해득실을 잘 계산하고 있으니 일시적인 분풀이를 하기 위하여 저 를 죽여서 그의 강호의 패업을 그르치지는 않을 거예요." 하며 상냥스런 얼굴을 심목풍에게 돌리며, "심아저씨, 후배의 말이 맞지요?" 심목풍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맞다고 해 두지." 완아는 빙그레 웃으며 눈길을 다시 소영에게로 돌렸다. "어서 가라고 하세요." 하며 일행들이 떠나기를 재촉했다. 손불사는 일소에 부치며, "소대협! 우리는 전번에 백화산장에서 수백 명의 무사들을 상대 했는데 그 일전이야말로 정말 통쾌했었네. 이 늙은 거지는 그날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네. 오늘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니 이 늙은 거지가 빠져서야 되겠나? 나도 남아 소대협과 함에 생사고락 을 나누고 싶네그려." 완아는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안 돼! 모두 가야 해요. 한 사람이라도 더 가게 되면 그만큼 보람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소대협 혼자 남아서 저와 함 께 있으면 충분해요." 그녀는 금란을 밀어 젖히며 말을 이었다. "그대도 가요." 군호들은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어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제일 먼저 중주이고가 소대인을 부축하여 남쪽을 향해 걸어 갔 다. 은란은 소부인을 부축해 일으켜 중주이고의 뒤를 바싹 따랐다. 손불사도 소영을 한 번 바라 보고는, "소대협, 부디 무사하기를 빌겠네. 이 늙은이가 한 걸음 먼저 가 겠네." 독수약왕은 여전히 장내에 버티고 서 있었고, 금란 역시 멍청히 완아 곁에 서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완아는 매우 조급해져서 전신의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여기 남는다 해도 이 딸을 구할 수는 없는 데 여기 남아서 무엇하시나요? 기어이 떠나지 않으시겠다면 이 딸 은 아버님 앞에서 당장 죽겠어요!" 독수약왕의 뺨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얘야, 몸조심하여라." 완아는 금란의 얼굴에 눈길을 돌리고, "어서 저의 아버님 뒤를 따라 나가세요." 그제서야 금란은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절을 한 다음, "저는 명령을 따라 가겠사오니, 부디 몸조심하세요." 말을 마치고 독수약왕의 뒤를 따라 정남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완아는 병중의 몸에 긴장이 풀리자 두 다리가 꺾이며 힘없이 앞으 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소영은 급히 한 걸음 나가서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완아는 긴 한숨을 내뿜으며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대협에게 제 이름을 알려 드린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소영은 내심 이 때가 어느 때인데 쓸데없는 소리를 한담, 하고 생각했으나 대답을 안할 수도 없었다. "그렇소." "그대는 아직 기억하세요?" "물론 기억하고 있소." "저에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소영은 대답했다. "아가씨의 이름은 남궁옥이라 하오. 맞았소?" "예! 한 자도 틀리지 않았어요." 심목풍은 한 옆에서 조각된 인형처럼 군호들이 다 떠날 때까지 줄곧 지켜 보며 아무 말도 없더니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이 말했다. "너희들의 말은 좀 있다가 해도 늦지 않다. 노부의 인내심이 아 무리 강하다지만 한도가 있는 법이다." 소영은 눈을 돌려 군호들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졌음을 보자 앞가 슴을 내밀며, "심목풍! 나 소영과 생사를 건 일전을 벌이지 않겠소?" 심목풍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극히 노해 있음이 분명하였 다. 그는 치미는 불길을 지그시 억누르며, "내가 만약 너를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영존과 영당을 그대로 보 내지 않았을 것이다." 남궁옥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심아저씨가 저를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리라 믿어요." 심목풍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나쁜 계집애 같으니, 오늘 밤은 너를 그냥 보낸다만 일후 절대 로 용서치 않겠다." 남궁옥은 거침없이 대꾸했다. "훗날의 일은 훗날에 해요." "이제 그들은 떠났으니 네가 노부와 약속한 일을 실천해야지!" "뭐가 그렇게 급해요? 그들은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 아니에 요."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냐?" "밥 한 솥 지을만큼만 기다려 주세요." 심목풍은 단호히 거절했다. "너무 길다." "좋아요. 그럼 차 한 잔 끓일 시간만 기다려 주세요." 심목풍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냉소를 터뜨리고 다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소영은 신기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든 약한 여자가 저렇듯 심목풍으로 하여금 자기 말에 따르게 하니 도대체 그녀는 무슨 방법을 쓴 것일 까?' 당장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밝히기를 꺼릴 것 같아 입 밖에 내지 는 못했다. 남궁옥은 추호도 두려워하는 빛 없이 소영을 바라 보고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심대장주께서는 기필코 나와 영존과 영당을 생금하여 백화산장 으로 잡아가려고 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해서 심중 틀림없이 노 여워하고 있을 거예요." 소영은 당황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함부로 할까? 그의 노여움을 사서 무슨 일을 저질러야만 속이 시원하단 말인가? 만약 심가가 손만 뻗 친다 해도 자기로서도 도저히 구해 낼 도리가 없을 텐데.....' 하며 불안해 했으나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낭자의 말이 옳소." 남궁옥은 빙그레 웃으며. "허지만 심대장주는 대지대룡(大智大龍)한 분이어서 절대로 우리 두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의 강호 대업을 그르치지 않을 거예요." 소영은 무슨 생각으로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 그저 애매 하게 대꾸했다. "그렇소." 남궁옥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저는 언제나 심대장주를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이제 그는 저의 아버지와 절교를 했으니 다시는 그를 아저씨라고 부를 수가 없군 요." 심목풍은 과연 일대의 인물다워 남궁옥이 쌀쌀한 말투로 비웃든, 말 든 그냥 내버려 두고 시종 묵묵히 서 있었다. 대략 차 한 잔을 끓일 만한 시간이 지나자 심목풍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낭자!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남궁옥은 살짝 웃으며, "됐어요." "네가 노부와 약속한 일을 이제는 실천에 옮겨야 하지 않겠나?" 남궁옥은 주위를 한번 훑어보고 난 다음, "이렇게 해요. 대장주깨서는 먼저 이 뒤의 무사들을 철수시키세 요. 제가 대장주께 넘겨 준 후 즉시 도망갈 수 있게 말이에요." 심목풍은 눈을 굴릴 뿐 묵묵부답이었다. 남궁옥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나쁜 궁리는 마세요. 저도 그 도안을 몇 조각으로 찢어서 각기 다른 곳에 숨겨 두었어요. 설사 저를 죽이고 일부분을 얻더라도 다 모아 완전히 한 장을 만들 수는 없을 거예요." 심목풍은 냉소하며, "낭자는 낭자가 제시한 조건이 너무 많다고 생각치 않는가?" 남궁옥도 지지 않았다. "대장주께서는 이미 우리들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는다고 약속했 으니 어서 주위의 무사들을 철수시키세요." "네가 나를 속이지 않는다고 보증할 수 없지 않느냐?" "저는 절대로 당신을 속이지 않아요. 그러나 대장주가 그렇게 의 심을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녀는 주위를 돌아본 다음,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어도 소대협은 틀림없이 포위를 뚫고 나 갈 거예요. 지금 당신은 이미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데 한 번 더 양보를 하는 것이 어때요?" 심목풍은 어이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간교한 계집! 네가 만약 나를 속이면 하늘 끝까지라도 쫓아가 너를 산 채로 잡아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잔인한 고 통을 맛보게 할 테다!" 남궁옥은 방그레 웃으며, "만약 당신을 속이지 않았다면?" "노부가 치른 대가는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손을 들어 휘두르며, "모두들 물러가라!" 주위에 있던 흑의 무사들은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방으로 흩어 져 버렸다. 심목풍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낭자, 사면을 에워싸던 무사들은 이미 철수했다. 노부는 이렇듯 양보를 했다." 남궁옥은 심목풍 뒤에 서 있는 홍의의 사나이를 바라 보며 천천 히 말했다. "대장주께서는 기왕에 사면의 흑의 무사를 철수시켰으니 물론 홍 의의 사나이들도 남겨 둘 필요가 없겠지요." 심목풍은 눈살을 찌푸리며, "낭자, 노부의 노여움에 부채질하지 말라! 나는 당초의 약속을 저버릴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묵묵히 서 있던 소영이 이때 돌연 말을 받았다. "그대가 나 소영을 억제하는 기회는 이제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 다. 대장주께서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어디 한번 시험을 해 보시 지." 남궁옥이 말을 받아, "백 리 길을 이미 구십 리까지는 걸어 왔어요. 이 마지막 한 걸 음을 양보 않는다면 애써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결과가 되 지 않겠어요?" 심목풍은 돌연 앙천대소하더니, "일세영웅인 나 심목풍이 일개 연약한 계집애의 계략에 빠져 궁 지에 몰리고 이렇듯 실심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군." 남궁옥은 방긋이 웃으며, "대장주의 말씀은 너무 지나치시군요." 심목풍은 뒤에 늘어서 있는 홍의 용사들을 돌아 보고,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홍의 용사들은 아무 말 없이 각기 물러갔다. 심목풍은 홍의의 사나이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얘기를 시작 했다. "낭자, 또 무슨 조건이 있는가?" "이젠 없어요." 그녀는 품 속에서 하나의 노란빛 보자기를 꺼냈다. "사실은 이 도안이 완전무결하게 제 품 속에 있었어요. 당신이 저를 산 채로 잡든 죽이든 간에 손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었어요." 심목풍이 손을 내밀어 그 보자기를 막 받으려는 찰나 소영이 크 게 소리쳤다. "잠깐만!" 하고 심목풍을 차갑게 쏘아 보며, "심장주!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소영은 재빨리 장검을 밀어 일련의 검꽃을 피워 남궁옥을 에워싸 고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게 서두를 것까지는 없다." 하더니 그는 등을 돌려 대고 앉아서, "낭자, 제 등에 업히시오." 남궁옥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소영의 등에 업혔다. 이때 심목풍은 암암리에 공력을 모아 소영을 공격할까 했다. 그 러나 한편 생각하면 소영의 예측할 수 없는 무공에는 그로서도 선 뜻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손을 뻗쳐 일격만 가하면 남궁옥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소영이 도안을 빼앗아 달아난다면 결국 손해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위인이 원래 음험하여 심중의 궁리를 표면 에 나타내지는 않았다. 소영은 남궁옥을 업고 몸을 일으킨 후 왼손으로는 남궁옥의 수중 에서 보자기를 받아 쥐고는, "심목풍! 자아 받아라!" 하며 왼손을 휘두르자 보자기는 일진의 광풍을 동반하고 곧장 옆 으로 날아 갔다. 심목풍은 두 어깨를 흔들며 땅을 박차면서 전광석화처럼 재빠르 게 보자기를 잡아 챘다. 소영은 보자기를 내던짐과 동시에 공중을 나는 것처럼 정남을 향 해 남궁옥을 등에 업고 달렸다. 심목풍이 보자기를 잡아 챘을 순간에는 소영의 모습은 이미 그곳 에 없었다. 심목풍은 소영과 남궁옥이 사라진 쪽을 넋을 잃고 한동 안 바라 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한편, 소영은 남궁옥을 등에 업고 몸을 날려 단숨에 십여 리를 달려 온 후에 고개를 돌려 봤다. 심목풍이 뒤를 쫓지 않는 것을 확 인하고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낭자, 좀 쉬어야 되겠소." 남궁옥은 두 눈을 살며시 뜨고 가쁜 숨을 한두 번 몰아 쉬고는, "소대협이 너무 빨리 달리니 차가운 바람이 계속 얼굴을 때려서 하마터면 얼굴이 굳을 뻔했어요." 소영은 허약한 그녀가 이렇게 급히 달려 온 충격을 감당하기 어 려웠으리라 생각했다. "사태가 위급하기에 도망치기에만 바빠서 낭자가 겨우 병마의 손 에서 풀려 나왔다는 사실을 잊었었군요." 남궁옥은 힘없이 웃으며, "전 같으면 나는 벌써 기절했을 거예요." 소영은 어리둥절하여, '내가 즉시 걸음을 멈추었기 때문에 기절을 면했나요?" "아니에요. 당신이 저를 업고 있는데 제가 기절을 해 버리면 잠 시 동안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잖아요?" 소영은 어리둥절해 입을 다물었다. 남궁옥은 쓸쓸히 웃으며, "아직 기억하세요? 저의 아버님께서 저를 당신의 아내로 주려고 했는데 당신이 단호히 거절하고......"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완낭자, 우리 지난 일은 들추지 맙시다. 우리는 먼저 영존을 만 나야 하오." 남궁옥은 눈을 감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으스름 달빛 아래 그녀의 눈에서는 수정같은 눈물이 두 줄기 흘 러 내렸다. 소영은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해 주려 했으나 지금 한 마디라도 말을 더하면 그만큼 번거로움이 따를 것 같아 못 본 체하 고 그녀를 다시 등에 업고 발길을 재촉했다. 다시 십 리 정도를 걸어갔을 즈음, 두 줄기 사람의 그림자가 번 개처럼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려 오고 있었다. 소영은 피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왼손으로 남궁옥을 잡고 오른손으로 장검 을 뽑아 들었다. 두 그림자는 소영 앞까지 당도하자 우뚝 멈춰 섰다. 희미한 달빛 아래 자세히 보니 그들은 손불사와 독수약왕 두 사람이었다. 독수약왕은 딸이 소영의 등에 업혀 있는 것을 보자 마음이 다소 놓이는 듯한 눈치였다. "소대협! 딸애가 부상을 입었소?" "아니오. 별일 없습니다." 독수약왕은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완아야, 별고 없었느냐?" 남궁옥은 살며시 눈을 뜨고 아버지를 바라 보며, "네, 아주 좋아요." 독수약왕은 이 말을 듣자 보물이나 얻은 듯이 기뻐하며 소영의 등에서 딸을 받아 안았다. "얘야, 너는 무슨 방법으로 심목풍을 물리쳤느냐?" 남궁옥은 가냘픈 목소리로, "아버님, 저는 말할 기력조차 없어요." "그래, 말하지 말아라. 이 독수약왕의 딸은 병마에서 해방되자마 자 또 놀라운 일을 치르었구나." 그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형언 할 수 없는 격동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소영이 말을 받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완낭자의 지혜와 용기는 칠척의 대장부도 따를 수 없었습니다. 불초도 십분 경탄해 마지 않습니다." 독수약왕은 득의양양한 듯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 말을 당신 소대협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믿을 수 있겠구료." 손불사도 옆에서 한 마디 했다. "이 늙은이는 낭자가 무슨 방법으로 강적을 물리쳤는지 도무지 알 수 없구료." 독수약왕은 웃으며, "그야 물론 절묘한 임기응변의 기략이었겠지." 사실은 그 역시 자기 딸이 어떻게 그 음흉한 심목풍으로 하여금 사방의 호위 심복들을 물리치게 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손불사도 심중으로 생각하기를, '그의 딸은 여태껏 혼미상태 속에서 십 년을 하루같이 지내다가 별안간 깨어나더니 일개 연약 무력한 여자로서 신기한 계략으로 강 적을 물리쳤으니 물론 기뻐하기는 해야겠지만 저렇게 미친 듯 좋아 하는 것은 좀 지나친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심중으로는 이렇게 흉을 보면서도 입으로는 소영 을 향해 태연히 말했다. "소대협, 남궁낭자가 어떻게 강적을 물리쳤는지 알고 있나?"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세한 내용은 저 역시 모르겠습니다만 남궁낭자는 심목풍에게 하나의 노란빛 보자기를 주었습니다." "글쎄요, 무슨 일종의 도안인 것 같았습니다." "그 도안은 중요한 것이어서 우리 몇 사람의 생명보다도 어쩌면 중요할지도 모르지." 독수약왕이 갑자기 나서서 말을 받았다. "이상한 일이오. 그 애는 줄곧 병마에 시달려 왔는데 그 도안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일이오." 손불사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독수약왕은 다른 사람이 그 딸을 영리하다고 칭찬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며, 그가 만년에 이르러 사 (邪)를 버리고 정(正)을 택하게 되었은즉 이 늙은이가 몇 마디 말 로 그의 딸을 칭찬하여 그를 즐겁게 해 주리라 생각했다. 또한 그로 인해 정의감을 북돋워 주게 되면 더욱 좋은 일이라 생 각했다. 이같이 생각하고 그는 미소를 띠고, "댁의 따님의 지혜는 절세의 묘책이오. 우리들은 감히 생각도 못 할 바가 아니겠소?" 독수약왕은 과연 기뻐서 방성대소했다. "손형께선 별 말씀을 다하시는구료. 그가 만일 강호에 나가거든 손형께서 많이 보살펴 주시기 바라오." 독수약왕은 감격어린 표정으로 깍듯이 부탁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하자 독수약왕은 이어, "소대협의 부모님께서 아들을 기다리고 계시니 손형은 소대협을 모시고 양친을 만나러 가 주시기 바라오." 소영이 물었다. "노선배님은?" "노부는 당분간 여러분과 작별해야 할 것 같소이다." 손불사는 의아하여, "그대는 어디로 가려고?" "딸의 이런 제지를 그르치게 되면 평생 유감된 일일 것이오. 그 러니 저도 한 곳 조용하고 깨끗한 심산을 찾아가 이 몸의 모든 정 력을 쏟아 기약(奇藥)을 채집하여 선약을 만들어 약물의 힘을 빌려 서라도 그 애의 선천적인 결함을 보충해야겠소." 그는 이어, "앞으로 삼 년 동안은 이 애를 착실히 지도하여 무림의 꽃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오." "영약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어디 가서 구하려 하오?" "그것은 걱정 없습니다. 저는 딸애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약을 찾아 천하의 모든 명산에 발자국을 심다시피 하였습니다. 비록 딸 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을 찾지는 못했지만 다른 적지 않은 기초와 영약을 채집해서 한 곳에 저장해 두었소이다." 말을 마치고 긴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보며, "저는 항상 그 애의 난치병이 치료만 되면, 내가 채집한 약으로 환약을 만들어 먹이고 그 애에게 모든 무예를 전수하며 무림 중에 크게 성공을 시켜 보려는 게 꿈이었는데 이제 그 꿈이 실현될 것 같습니다." 손불사는 머리를 끄덕이며, "약왕이 이렇듯 훌륭한 포부를 지니고 있다니 이 늙은이는 만류 할 수가 없구료." "앞으로 많은 세월이 있으니 우리는 청산이 그대로 있고, 장강이 계속 흐르고 있는 후일에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것이오. 형제들 이 제 작별을 해야겠구료." 말을 마치고 그는 한두 번 뛰어 올랐다 내리더니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손불사는 그의 멀어져 가는 그림자를 보며 장탄식을 했다. "이 사람이 일을 꾸미면 언제나 악랄했는데 자기 딸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자애롭구나....." 소영도 한 마디 했다. "자식이 불효하다는 말은 들었어도 부모가 자애스럽지 않다는 말 은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옛사람들의 말은 하나도 틀린 데가 없습니다." "남궁낭자가 갔으니 우리들도 갈 때가 되었구료." 그러면서 그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소영은 손불사를 바라 보고 무언가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고 그를 따라갔다. 희미한 길을 두 사람 은 나는 듯 재빠르게 달려갔다. 잠깐 사이 에 그들은 사, 오십 리를 걸어 나갔다. 손불사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한동안 땅을 내려다 보다가 밭을 향해 걸어 갔다. 소영 역시 물어 보지도 않고 손불사를 따라 걸었다. 십 리쯤 가 니 갑자기 전면 숲 속에서 무거운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요?" 손불사가 대답했다. "늙은 거지요." 그러자 사람의 그림자가 번뜩이더니 금산반 상팔이 숲 속에서 몸 을 날려 달려 왔다. 소영은 부모의 안위가 걱정되어 급히 물었다. "나의 부모님은 어디 계시오?" 상팔이 대답했다. "여기 계시면 안전치 못할 것 같아 소제가 두구와 금란, 은란을 시켜 두 분 어르신네를 모시고 먼저 이곳을 떠나시게 하고 혼자 이 곳에 남아 기다리고 있던 중입니다." 소영은 이 말을 듣고 양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속으로, '두구와 은란, 금란의 힘은 모두 약한데, 만약 백화산장의 복병 을 만나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상팔은 소영이 심중에 염려하는 것을 알아차린 듯 입을 열었다. "그들은 두 마리의 사냥개가 앞에서 인도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백화산장의 이목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불사가 다그쳐 물었다. "떠난 지 얼마나 되오?" "밥 한 솥 지을만큼의 시간도 채 못 되오." "그럼 어서 뒤따라 갑시다!" 상팔은 금산반을 거두고 불룩한 배를 내밀며, "소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하며 동남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밤이 깊어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소영은 혹 방향을 잘못 잡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무거운 어조로, "상형, 너무 빨리 달려가서는 안 되오. 방향을 잃을 우려가 있으 니까......" "형님, 그 점이라면 안심하십시오. 소제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 다." 소영은 별 수 없이 뒤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약 십 리 정도를 갔을 때 돌연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달려 왔다. 소영은 암암리에 진기를 모았다. 손을 들어 막 내리치려고 할 때 갑자기 상팔이 두 팔을 벌리자 그 검은 그림자는 곧장 상팔의 품 속으로 뛰어 들었다. 자세히 보니 상팔의 품 속으로 뛰어든 것은 바로 두 마리의 개 중에 한 마리였다. 손불사는 경험이 많아 비록 그 개의 거동으로 무슨 뜻인지를 분 명히 알 수는 없어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 냈다. "사고가 난 게로군!" 짧은 말이었지만 그 몇 마디가 소영에게는 철퇴로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새파랗게 질려서 다그쳐 물었다. "상형! 무슨 사고가 터졌소?" 상팔이 대답했다. "무슨 괴변이 생겼나 봅니다. 제가 빨리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팔을 휘두르니 개가 앞을 향해 달렸다. 그들도 개를 따라 전력으로 달렸다. 그들의 경공은 고수였고 개도 비호같이 달 려갔으므로 순식간에 육, 칠십 리 길을 달렸다. 한 곳에 이르니 어둠 속에 홍등이 하나 높다랗게 달려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인지 물 흐르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 왔다. 자세히 살펴 보니 두구가 높다란 잔교(棧橋) 위에서 한 손에는 철필을 들 고 또 한 손에는 몸을 보호하는 은전을 휘두르며 한 명의 흑의 괴 한과 일장의 처절한 악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잔교의 넓이는 불과 석 자 정도였으며 이미 낡아 빠진 잔교는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 리며 윙윙 울리고 있었다. 흑의의 사나이 뒤 육, 칠 척 되는 곳에 바싹 마른 한 사나이가 홍등을 높이 들고 있었다. 등불 밑에는 두 명의 흑의의 시체가 나둥그러져 있었다. 두구의 손에 쓰러진 것이었다. 그리고 다리 끝 저쪽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 른거렸다. 은은히 보이는 그것은 알고 보니 하나의 높다란 신상(神 像)이었다. 소영은 이것을 보고, "신풍방 중의 한 사람이다!" 하며 급히 다리 위로 달려 갔다. 손불사가 급히 소리쳤다. "소대협! 그 다리는 이미 지탱하기 어려울 것 같네. 아마 또 다 른 사람이 올라 선다면 끊어질 것이네. 소대협은 절대로 위험한 짓 을 하지 말게나. 우리가 도착한 이상 그들의 인원수를 겁낼 것 없 으니 먼저 두 구를 다리에서 내려 오게 하게!" 소영은 잠시 상황을 살피다가, "두형이 있는 위치는 땅과 불과 한 길 정도이니 설사 추락한다 해도 즉시 안전하게 뛰어 내릴 수 있습니다." 상팔은 허리춤을 더듬어 금산반을 꺼내 들고 말을 받았다. "소제가 두제와 교대하겠으니, 형님께서는 우선 두 분 어르신네 를 만나 보십시오." 그는 다리를 향해 달려 가며 소리 높이 외쳤다. 76. 신풍방주 길을 비켜 주다 "이봐! 두제. 그만 내려와서 좀 쉬게나. 내가 대신 맞서리다!" 그의 고함소리는 귀를 울렸지만 두구는 전혀 못 들은 양 철필을 휘두르며 악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팔의 강호 경험은 풍부했다. 두구의 대답이 없자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암암리에 진기 를 끌어 올려 곧장 다리 위로 달려 갔다. 소영은 눈을 들어 사방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부모와 금란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심 조급해짐을 참을 수 없었다. '만약 두 낭자가 두 분 어르신네를 보호하고 부근에 숨어 있다면 지금 나와서 만나야 될 텐데 어째서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사방을 살피고 있을 때 한 줄기 사람의 그림자 가 질풍처럼 달려 왔다. 소영은 안력이 비범하므로 단번에 금란임 을 알아 보고 다급히 물었다. "금란인가? 두 분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란은 소영 앞으로 달려 와서 아뢰었 다. "소대인과 노부인은 모두 안전하십니다. 그런데 은란이가 중상을 입어 소인이 두 분을 모시고 수풀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두아저씨 께서 이미 네 명의 강적을 쓰러뜨렸습니다. 아마 부상을 입은 것 같사오니 공자께서 속히 가셔서 도와 주십시오." 소영은 손불사를 돌아 보며 부탁했다. "노선배님! 가셔서 은란의 상처를 돌보아 주시오. 후배는 상형을 도와 강적을 물리치겠습니다." "다리 밑의 급류는 매우 험악하니 이 다리를 될 수 있는 한 망가 뜨리지 말고 보호토록 하오." 하며 소영은 다리로 걸어 갔다. 손불사는 금란을 향해, "자아! 낭자 어서 가세!" 금란은 이에 정중히 답하고 몸을 돌려 안내했다. 소영이 다리 가까이까지 이르렀을 때 상팔은 이미 다리 위로 뛰 어 올라 두구와 교대하고 있었다. 두구는 비틀거리며 다리를 내려와 소영 앞으로 오더니, "형님!" 한 마디 부르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앞에 푹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소영은 재빨리 팔을 뻗어 두구를 부축하며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는 앞가슴과 왼쪽 다리에 각각 상처를 입고 선혈이 낭자 하게 물들어 있었다. 소영은 이것을 보고 무거운 어조로, "두형제, 정신 차리시오. 이 소영이 도와 줄 터이니 제발 정신을 잃지 마시오." 그는 왼손으로 두구의 몸을 부축하고 오른손은 두구의 복부를 누 르며 진기를 모아 뻗으니 한 줄기 열기가 두구의 명문혈로 곧장 전 해 들어 갔다. 두구는 길게 한숨을 몰아 쉬고 천천히 두 눈을 뜨고 입을 열었 다. "형님, 소제의 무공이 약해서 하마터면 두 분 어르신네의 안전을 기할 수 없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심력이 모두 다해 버 렸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또 다시 눈을 감았다. 소영은 탄식을 하며, "나 소영은 끝없는 감격을 받았소이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형제의 상처는 가볍지 않으니 말을 하지 마시오. 어서 운기를 해서 내가 두형제의 체내에 넣어 준 진기와 호응해서 먼저 기혈을 안정되게 하시오. 연후에 다시 약을 발라 주겠소." 언제나 낯빛이 냉랭한 두구가 갑자기 엷은 웃음을 띠더니, "고맙습니다."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소영은 그의 의리를 무척 존중하는 호탕한 천성을 생각하여 내심 걱정스러우면서도 감격했다. 그는 일면 진기를 뿜어 그를 도와 상 처를 아물게 하고, 일면 그의 앞가슴과 왼쪽 다리의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혈관까지는 상하지 않았다. 두구는 소영이 계속 불어 넣어 주는 진기를 받아 점차 회복되고 피로도 어느 정도 풀렸다. 눈을 떠 보니 소영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몹시 힘이 든 것 같았다. 그는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제는 형님의 진기를 받아 이제는 혼자도 숨쉴 수 있게 되었습 니다. 형님께서는 그만 휴식을 하십시오." 이때 갑자기 잔교 쪽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 에 두구의 말이 끊어졌다. 고개를 돌려 바라 보니 상팔과 결투를 하던 흑의 사나이가 상팔에 의해 다리 밑으로 떨어져 내리며 비명 을 지른 것이었다. 그는 급류에 떨어지자 물살에 묻혀 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소영은 품 속에서 상한 데 바르는 가루약을 꺼내 두구의 상처에 뿌려 준 후 옷자락을 찢어 두구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두형제, 조용히 쉬시오. 나는 가서 상형을 돕겠소." 그는 몸을 일으켜 다리를 향해 달려 갔다. 이때 저편에서 두 명의 사나이가 달려 오고 있었다. 상팔은 손에 금산반을 들고 막 마주 가려는데 소영이 이미 팔보 등공(八步登空)의 경공을 써서 허공을 가르고 상팔의 머리 위로 날 아 갔다. 발이 다리 위에 내려 서자 그는 벌써 상팔 앞에 서 있었 다. 소영은 고개를 들어 상팔에게, "상형은 돌아가서 두형제를 간호하시오. 제가 일장을 겨뤄 보겠 소이다." 상팔은 소영이 자기보다 무공이 뛰어남을 잘 알고 있었다. "형님 조심하십시오." 말을 마치자 그는 몸을 돌렸다. 소영은 진기를 모아 당당하게 앞을 향해 걸어 갔다. 홍등을 든 사나이는 동료가 상팔의 금산반에 의해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자 이미 적수가 아님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영은 재빨리 뛰어가서 일순간에 홍등을 든 사나이의 눈 앞에 다다랐다. 그 사나이는 이제 도망칠 수도 없음을 알자 홍등을 왼손 에 넘기고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고 소영을 향해 곧장 찔러 왔다. 소영은 차가운 웃음을 띠고 장검을 들고 맞섰다. 그의 가슴엔 비 분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검기는 더욱 날카로웠다. "쨍그렁!" 강철이 맞부딪는 소리가 나더니 그 사나이의 수중에서 칼이 날아 갔다. 소영은 칼을 날림과 동시에 양 발로 연거푸 세차게 걷어 찼다. 그 사나이는 왼발은 피했지만 연거푸 걷어 찬 오른발은 피하지 못 하고 아랫배를 정통으로 얻어 맞고는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갔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등불과 함께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이때 동료를 도와 주려고 달려 온 사나이들이 이미 소영 가까이 까지 다가 왔다. 홍등이 다리 밑으로 떨어져 버리자 다리 위는 갑 자기 캄캄해졌다. 소영은 대갈일성하고 먼저 일격을 가했다. 선두의 사나이는 한 자루의 등이 두터운 칼을 들고 있었는데 소 영이 일검을 찌르자 칼을 휘둘러 검을 막았다. 그는 팔 힘이 무척 강한 사나이였다. 게다가 그가 쓰는 무기는 굉장히 무거운 검이었 다. 그래서 그는 소영의 장검이 비록 손을 벗어나서 날아가지는 않 더라도 진동을 받아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칼과 검이 맞부딪치자 소영의 장검 에는 한 줄기 무형의 힘줄이 있는 것 같았다. 산도 능히 가를 수 있을 만한 그 큰 칼의 힘을 가볍게 누르고 소영의 장검은 칼과 부 딪치며 섬광을 튀겼다. 동시에 소영의 검이 미끄러지듯 상대의 칼날을 비집고 들어 가다 가 번쩍 하고 날았다. 순간 싸늘한 빛이 무지개를 그리자 사나이의 처절한 외마디 비명이 어둠을 갈랐다. 비명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칼을 잡았던 손목이 잘려 잔교 밑으 로 떨어졌다. 소영은 또 다시 왼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쿵 소리가 났다. 장풍이 그 사나이의 앞가슴을 정통으로 때렸다. 사나이는 몸이 허공으로 붕, 날렸다가 다리 밑으로 떨어져 버렸 다. 소영은 오른발로 사나이가 다리 위에 떨어뜨린 칼을 걷어 올려 왼손으로 잡았다. 그것을 잡자마자 힘껏 전면으로 던졌다. 싹! 소리와 함께 큰 칼은 뒤따라 오던 사나이의 가슴에 명중했 다. 그 사나이는 동료가 상대방과 싸움이 붙자마자 불과 두 초식도 못 넘기고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자 멍해져 있었다. 소영은 순식간에 두 사나이를 해치웠다. 눈깜짝할 사이에 검과 장풍으로 두 장한을 해치웠으니 얼마나 놀라운 솜씨인가? 세 번째로 뒤에 따라 오던 사나이는 앞의 두 사나이가 급류에 휘 말려 들어 가는 것을 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둠 속에 벌어질 격 전을 앞두고 그는 응전태세만 취하고 있었다. 그가 멍청히 서 있는 사이, 소영이 다시 뻗은 개산도(開山刀)가 그의 가슴에 육박했다. 쌍방의 거리가 가깝고 칼의 힘 또한 맹렬하 였으므로 그 사나이는 당황하여 급히 옆으로 몸을 들렸다. 이 다리 는 불과 두서너 자 넓이밖에 안 되었으므로 순간 그는 난간에 머리 를 부딪혔다. 두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튀었다. 그 순간 소영의 칼이 질풍을 몰고 싹! 소리를 내며 스쳤다. 왼팔 이 공중으로 날았다. 소영은 즉시 다시 한 발을 들어 그 사나이를 다리 밖으로 걷어 차 냈다. 그는 순식간에 세 명의 사나이를 무찔 렀다. 그 다음 다시 진기를 모 아 맞은 편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갔다. 그가 이렇게 달려 가는 이유는 뒤따라 오는 상대방이 잔교를 끊어 버릴까 염려가 되어 사전에 막기 위함이었다. 심목풍이 더 많은 추 격병을 보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홍등이 급류에 떠내려 가고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 건너편에 있는 사나이들은 어둠에 가려서 다리 위의 격투를 채 분간하지 못했다. 소영은 순식간에 다리를 건너 갔다. 이때 다리를 지키고 있던 귀 두도(鬼頭刀)를 든 두 사나이가 동정을 살피며 오고 있었다. 그들 은 앞장 섰던 동료들이 모두 순식간에 황천객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두 사나이가 소영의 모습을 목격했을 때- 그는 이미 오른손의 장검으로 해시신루(海市蜃樓) 초식을 전개했 다. 일진의 무서운 검 그림자가 공간을 가르며 육박해 들어 갔다. 그는 남쪽에 있는 사나이를 향해 검으로 공격을 하고 왼손으로는 수라지력(修羅指力)으로 북쪽의 사나이를 공격하고 있었다. 북쪽의 사나이는 소영의 모습을 채 보기도 전에 수라지력에 의해 현기요혈(玄機要穴)이 명중되어 끽 소리도 못하고 다리 아래로 굴 러 떨어지고 말았다. 남쪽의 사나이는 겹겹이 다가 오는 검 그림자가 머리 위를 뒤덮 자 정신이 혼미해져서 황황히 대항을 했다. 그러나 헛손질만 했을 뿐 소영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사나이는 뒤늦게야 위험을 깨닫고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그 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한 줄기 검광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 갔다. 그 순간 사나이는 풍덩 소리를 내며 물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소 영은 단숨에 두 사나이를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 자기도 몸을 날 려 다리 아래로 내려 섰다. 그때 돌연 두 개의 홍등이 나타났다. 소영은 길게 숨을 내쉬고 바라 보았다. 네댓 장쯤 되는 전면에 하나의 커다란 신상이 보였다. 그 신상 앞에는 전신을 흑의로 감싸 고 장검을 든 여덟 명의 사나이들이 한 줄로 서서 신상을 가로 막 고 있었다. 그리고 바지를 입고 온몸이 검은 털로 덮여 있는 사람 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닌 이상한 네 명의 거대한 사나이들이 그 신 상의 양쪽에 딱 버티고 서 있었다. 신상 뒤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 뒤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듯했다. 소영은 가까이 다가가 딱 버티고 서서 당당하게 말을 걸었다. "신풍방주! 당신이 강호에서 이름을 떨치고 싶다면 바른 낯으로 대할 것이지 어찌 이런 귀신차림으로 신비스러운 체하여 사람을 현 혹시키려 하느냐?" 이때 거대한 신상 속에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말소리가 들렸 다. "그대는 대체 누구기에 이처럼 건방진 소리를 하는가?" 소영은 생각을 굴렸다. '이 사람은 여자가 분명하지 않은가? 일개 여자가 어찌 이런 공 포 분위기를 자아 내며 거짓으로 꾸민 신상 속에 들어 있단 말인 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불초는 소영이오. 일개 여자가 이런 귀신차림을 하다니 이는 있 을 수 없는 일이오. 또, 이런 괴상한 신상은 일부 어리석은 자들에 게나 겁 주는 것이거늘 어찌 이런 음산한 분위기를 빌려 무림에서 패권을 잡을 꿈을 꾼단 말이오? 가소로운 일이오." 그 무섭게 생긴 신상은 소영의 말에 몹시 격노한 듯 눈을 부릅떴 다. 주먹만한 두 눈동자 속에서 갑자기 요기(妖氣)가 쏟아져 나오 면서 차가운 말소리가 들려 왔다. "너희들은 물러서라. 내가 직접 소영과 맞서겠다." 손에 장검을 든 여덟 명의 흑의의 사나이들은 일제히 신상 뒤로 물러 났다. 짧은 바지를 입고 몸에 털이 난 네 명의 괴인들도 신상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 소영은 연거푸 강적을 만나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특별히 네 명의 괴인들을 주의했다. 그들의 거동이 느리고 두 팔에 근육이 불끈 솟아 올라 있는 것을 보아 그 네 명은 힘이 놀라울 것이리라 생각하고 내심 경계했다. 여자의 부드러운 말소리가 다시 흘러 나왔다. "소영, 공격을 하시오." 소영은 어리둥절했다. "그대는 신상 속에 숨어 있는데 어찌 싸운단 말이오." 신상은 갑자기 깔깔 웃었다. "호호호... 이 신상은 바로 신풍방이니 마음 놓고 공격하시오." 소영은 신상을 한 번 살펴 보았다. 신상의 높이는 거의 일 장 반 (一丈半)쯤 되어 보였고 전신 상하의 빛깔이 달랐다. 소영은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몰랐다. "불초는 공격을 받겠으니 방주께서 먼저 선수를 쓰시오." 하고 말하고는 속으로, '네가 신상 속에 숨어서 어떻게 손을 쓰는지 두고 보자.' 하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절기를 모 아 추호도 허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했다. 신풍방주가 싸늘하게 외쳤다. "그럼, 조심하시오." 갑자기 커다란 입이 열리더니 한 줄기 흰 빛이 곧장 뻗어 나왔 다. 이때 소영은 이미 신상 앞 일 장쯤의 거리에 육박해 있었다. 뻗어 나온 흰 빛은 매우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는 즉시 검을 휘둘러 이를 막았다. 쨍그랑! 하고 쇠붙이가 맞부딪는 소리가 울렸다. 그 흰 빛이 소 영의 검과 맞부딪친 것이었다. 등불빛에 살펴 보니 그것은 한 자 정도의 단검이었다. 그 단검은 반원을 그리며 빙글 돌더니, 갑자기 다시 신상의 입 속으로 날아 들어가 버렸다. 소영은 냉소하며, "낭자는 그 단검에 단단한 노끈을 매어 마음대로 뻗치고 거두는 데 별로 놀랄 만한 기술도 못 되는구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쿡쿡 웃는 소리가 나더니 그 신상의 오른 쪽 팔이 번쩍 들렸다. 소영은 장검을 앞가슴에 똑바로 들고 천천히 움직이는 팔을 주시 했다. 신풍방주의 말이 흘러 나왔다. "소영, 당신은 다시 가까이 올 용기가 있어요?" 소영, "왜 없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서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때 등 뒤에서 손 불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소형! 적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지 마오!" 한 줄기 사람의 그림자가 옷자락을 날리며 바람을 몰고 달려 왔 다. 사람이 채 당도하기도 전에 장력이 먼저 떨어지며, 한 가닥 벽 공장풍(壁空掌風)이 곧장 뻗어 나왔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장풍은 신상의 앞가슴을 정면으로 때렸다. 거대한 신상은 한두 번 건들거렸을 뿐 여전히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손불사는 오른손으로는 벽공장력을 쏟아 내고 왼손으로는 소영의 왼 손목을 잡고 억지로 끌었다. 나지막한 소리로, "지금이 어느 땐데 그녀와 이런 무모한 싸움을 하고 있소?" 소영은 그제서야 부모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이 렇게 대답했다. "비록 노선배님의 말씀이 옳으나 길 복판에 막아 섰으니 그녀를 먼저 제압하지 않고는 통과할 수가 없잖습니까?" 손불사는 한 번 돌아 본 다음, "옆으로 비켜 가면 되지 않겠소." "이 신상 뒤에는 신풍방의 고수들이 숱하게 숨어 있는데 그렇게 쉽사리 보내 줄 것 같습니까?" 그는 음성을 낮추고 이어 말했다. "두구, 은란의 상처가 가볍지 않아 필시 싸울 기력이 없고, 저의 양친은 무공을 모르는 분들이니, 만약 그들을 격퇴시키지 못하면 이곳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손불사가 대꾸했다. "이 늙은이가 다시 강호에 들어온 후, 개방제자가 일러 주는 말 을 들었는데, 신풍방의 표지인 신상은 열두 명의 당대 고수명장(高 手名匠)들이 십 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것이며, 그 속의 설비가 정교하며 수족은 돌면서 출격할 수 있다 하오." 그는 이어, "더욱이 삼십육 종의 각기 다른 흉기를 한꺼번에 발사해 낼 수 있다 하며, 그 중에도 독연기, 독수(毒水)는 더욱 비길 데 없이 악 독하여 신상 앞 한 장(丈) 정도만 다가 서면 무공이 제아무리 강하 고 솜씨가 아무리 빠른 사람도 독연기와 독수를 막아 낼 도리가 없 다 하오." 소영은 검날같은 눈썹을 치켜 뜨고, "그럼 신풍방을 상징하는 이 신상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무릇 전설이란 과장되어 있거나 뭔가 잘못된 데가 있어 사실과 부합되기가 어렵소. 그러나 그가 그처럼 무서운 무기라고 했으니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과 과히 거리가 먼 것은 아닐 것이오. 소형은 지금 천하 무림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고 있고 또한 양친의 안전을 보호해야 하니, 상황이 극히 불리하고 꼭 싸우지 않고는 다 른 방편이 없다면 몰라도 피할 수 있다면 스스로 위험에 뛰어 들 필요는 없소." 그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하물며 상대방은 소형이 무공으로써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 것 도 아니고 단신 독연기 독수와 싸워야 하니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소." "노선배님의 의견으로서도....?" "이 늙은이가 보는 바로는 길을 돌아가 충돌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우리가 그 신상 앞 일 장의 거리까지 다가가지만 않으면 암기를 뻗쳐 온다 해도 우리를 어쩔 수 없을 것이오." "그러면 노선배님의 말씀대로 후배는 여기서 적을 막을 터인즉, 노선배님은 그들에게 빨리 다리를 건너게 하십시오." "그럴 필요는 없소. 이 늙은이가 벌써 상팔과 신호로 연락했으니 까......" 말을 마치자 그는 얼굴을 들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소영은 품 속에 서 한 줌의 동전을 꺼내더니 낮은 소리로, "그 신상의 구조는 비록 정교하지만, 둔하여 그 자체는 이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데려온 몇 명의 부하들을 상대하여 그 방대한 신상을 움직일 수 없게 하면 됩니다." 손불사가 의견을 말했다. "사태가 촉박하니 소형은 사람을 부상케 하지 말고, 먼저 기를 죽여야만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게요." "노선배님의 말씀은......"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소리를 높여 외쳤다. "신풍방께 알리오! 우리들은 이곳을 지나는 길이며 여러분과 싸 을 의사가 없소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민저 가로막은 길을 터 주 기 바라오." 신풍방주가 쌀쌀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들은 한참 동안 얘기를 주고 받더니 도주할 계략을 꾸민 게 로구료?" 그 흉하게 생긴 신상의 커다란 머리가 서서히 움직였다. 그 순간 두 줄기 불빛이 곧장 두 사람을 향해 날아 왔다. 소영은 낮은 음성으로, "노선배님의 말씀대로 과연 이 신상의 구조는 정교하군요." 신풍방주는 비웃는 어조로, "소영, 이 방주는 이미 그대의 이름을 들었는데 어찌하여 나와 일전을 벌이지 못하는가?" 소영이 응답했다. "나는 낭자를 겁내지는 않소. 다만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 이 곳에 오래 지체할 수 없소. 일후에 다시 방주를 만나게 된다면 소 모는 기필코 방주 몸 앞 일 장의 거리에서 가르침을 받겠소." 신풍방주가 이때, "그대의 말이 진정이시오?" 하자, 소영은, "물론 진정이오!" 하고 대꾸했다. 신풍방주는 돌연 높이 소리쳤다. "길을 터 주어라!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비단 소영의 예상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견식과 경험 이 풍부한 손불사조차 어리둥절하였다. 다리가 드러나 보이는 짧은 바지를 입은 네 명의 괴인이 그 거대한 신상을 들고 십 장 정도 물 러나 길을 터 주었다. 소영은 낮은 목소리로 손불사에게 속삭였다. "노선배님, 어찌 된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손불사는, "신상 속에서 울려 나오는 음성을 들으니 신풍방주는 틀림없이 여자 같은데......" "예, 그런가 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 늙은이는 평생 꼭 한 사람을 겁내고 있는데.. ..." "어떤 사람?" "여자, 무릇 여자가 하는 일은 이 늙은이는 언제나 알아 맞출 수 가 없단 말이야." 말을 하는 사이에 상팔은 소씨 부부와 두구 등을 데리고 다리를 건넜다. 두 마리의 개도 상팔의 뒤를 바싹 따르고 있었다. 상팔이 낮은 음성으로, "형님, 이 다리를 끊을까요? 소제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두 송이 불꽃이 곧장 고공에 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백화산장의 추격병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러분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가시오. 그밖의 일은 나와 손노선 배님이 알아서 하겠소." "신풍방이 길을 터 준 속셈은 예측할 수 없은즉 그들이 언제 계 략을 바꿀는지 모르오." 상팔은 더 이상 말을 않고 소대인을 업고 두구를 부축하여 선두 를 달렸다. 금란은 은란을 부축하고 소부인을 업고 상팔의 뒤를 바 싹 따랐 다. 소영은 양친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얼굴이 어두워졌 다. 그는 가슴이 아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신풍방주는 약속을 지키는 듯 과연 제지하지 않았다. 소영은 상팔 등 일행이 멀리 가는 것을 보자 낮은 음성으로 손불 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우리도 갑시다." "신풍방주에게 작별인사나 하오." 소영은 심중 이렇게 생각했다. '오늘 밤 형편으로 신풍방주가 만약 우리들을 가로막았더라면 양 친과 부상을 당한 두구, 은란 등은 이곳에서 빠져 나갈 수 없었으 리라.' 이렇게 생각하니 자기가 신풍방주의 수하를 연거푸 몇 명 죽인 것이 몹시 미안했다. 그는 즉시 두 주먹을 맞잡고 인사를 했다. "오늘 방주께서 길을 비켜 주신 은혜를 소영은 마음 속 깊이 새 겨 두겠습니다. 훗날 반드시 보답하여 드리겠습니다." 77. 강호에 떠오른 큰 별 신풍방의 커다란 신상 속에서 상냥하고 애교있는 음성이 들렸다. "고맙다는 인사는 할 필요가 없어요. 어서 가 보세요." "가세!" 하고 손불사는 소영과 함께 달려 갔다. 두 사람은 공력이 고강하 므로 나란히 달려 순식간에 상팔 등 일행을 따를 수 있었다. 손불사는 한숨을 푹 쉬고 입을 열었다. "소대협, 신풍방주의 말투를 들으니 우리에게 아무런 적의도 없 는 것 같던데 소대협은 어떻게 생각하나?" "후배 역시 그녀가 어째서 갑자기 적의를 버리고 친구로서 대했 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여자의 마음은 가장 맞추기 힘드니, 우리는 그런 것에 신경을 낭비하지 맙시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일이 있소. 그것 을 소형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모르겠소." "무슨 일입니까?" 손불사는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목하, 소형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며 그 반면에 원수를 맺는 횟수도 늘어나고 있지.... 심목풍은 소형을 눈에 가시 로 여기고 있으며 백화산장의 세력이 점점 방대해져서 당금의 각 대문파를 능가하는 느낌마저 드는구먼. 지금 소형은 자연적으로 일 반 협의도의 가슴 속에 영수로서 군림해 있으니 대세에 묶여 손을 뗄래야 뗄 수 없지. 지금의 강호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분란과 복 잡으로 인해 앞으로 사, 오 년 안에는 평정이 될 것 같지 않은 실 정이며......" 그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소영을 지그시 바라 보더니 다시 계 속했다. "나는 소형에게 중임을 맡으라고 권했으니만큼 전력을 다해서 소 형을 도와 죽음도 불사할 것이오. 그러나 소형의 양친 어른은 하나 의 크나큰 부담이 아닐 수 없소그려. 누군가가 두 분 어른을 손아 귀에 넣기만 하면 소형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배반케 하여 남에게 이용을 당할 우려가 있소."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손불사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소형의 양친 어른을 하나의 안전하고 은 밀한 곳에 모시고 보호하는 것이오. 그래야만 소형도 안심하고 전 력을 기울여 강적과 맞설 수 있소." "노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이 안전한 곳입니 까?" "우리 개방의 본거지도 안전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양친께 서 온종일 거지들과 생활을 함께 하셔야 되니 괴로운 노릇일 것이 오." "귀방의 본거지는 비록 방비가 삼엄하지만 벌써 백화산장의 첩자 가 침입하고 있습니다. 저의 부모님이 만약 귀방의 본거지에서 살 게 되면 그 소식이 순식간에 심목풍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하고 손불사는 놀랐다. 소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철대로 없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비단 귀방의 본거지 외 에도 심목풍의 첩자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신풍방도 마 찬가지입니다." "내 개방은 충성으로써 대대로 이어 왔는데 만약 이러한 불상사 가 있다면 체면이 크게 손상되는 일이로구료." 여기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소영에게 물었다. "소형은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심목풍이 그들을 소집할 때 모두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저는 알 아 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미 우리 개방내의 일에 간섭하지 않은 지 오래되지만 이 일만은 간섭하지 않을 수 없군. 분명히 색출해 내야겠다!" 소영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 다. 그는 이 일이 큰일이라 함부로 말을 했다가는 즉시 개방 중에 서로 죽이는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심중에 확고한 자신 이 없이는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손불사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과거에 심목풍이 몸에 중상을 입고 도주했을 때, 그를 뒤쫓던 군호들이 끝까지 추격해서 그 당시에 죽여 버렸다면 오늘날 무림에 이토록 어지러운 상황은 없었을 것인데, 아아! 풀을 뽑을 때 뿌리 까지 뽑아야 하는 것을, 그렇지 않아 오늘의 화근을 남겼으니... 그때 심목풍을 죽이려던 군호들의 생각이 모자랐었지....." "심목풍은 비단 무공이 정심하여 추측을 불허할 뿐 아니라 마음 의 음흉함과 수단의 악랄함은 역시 뒤따를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상히 여기는 것은 그가 어떻게 그 많은 고수들을 끌어 모아 그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우도록 만들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의 사람됨은 남이 원치 않고 남이 행하지 않는 짓을 하며 게 다가 음침한 심술과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니 자연적으로 두려 워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하더니 잠시 말을 끊고 물었다. "이미 개방도 그런 상태라면 안전하지 못하니 소형은 두 분 어른 을 어디로 모셔 갈 생각인지요?" "저 역시 어디가 안전한 곳인지 도무지 분간을 못하겠습니다." "소형, 두 분 어른의 일을 적절히 처리해야지만 비로소 소형은 마음을 놓고 강호에서 활약할 수 있소. 내가 보는 바로써는 지금 소형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라 앞으로 이삼 년 후에는 틀림없이 무 림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그 심목풍과 소요자 등과 강호에서 대항케 될 것이오. 지금은 수백 년 동안 일찍이 없었던 혼란한 시기이며 또한 가장 비참하고 살벌한 시대라오. 이것은 내가 소형을 추켜 세 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무림 형세로 보아 소형 말고는 이 마지막 난국을 수습할 인물이 없기에 그러는 것이오." 소영은 손불사의 말을 듣고 탄식하며 겸손한 태도로, "노선배님은 너무 후배를 과장해서 칭찬하십니다." 하자 손불사는 핫 하고 웃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는 일평생 남을 과장해서 평가해 본 적이 없소. 나는 다만 혼란에 빠져 있는 비참한 무림의 동지들을 위해 도움을 청하 는 것 뿐이오." 그리고 갑자기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그러나 두 분 어른은 지금 현재 큰 부담이 되고 계시지.... 심 목풍은 틀림없이 소형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을 것이고, 모든 심혈 을 기울여 소형 양친 어른의 행방을 찾아 미끼로 삼으려는 심산일 것이오. 소형,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동안 소형을 도와 주겠 소. 그러니 소형은 무림을 짊어질 담력을 길러야 하오." 소영은 그의 말 속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느끼고 잠시 묵묵히 침울한 표정을 하였다. 이때 상팔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소생이 은밀한 곳을 하나 알고 있는데 심목풍의 이목이 닿기 어 려운 곳입니다." "어느 곳인데?" 하고 손불사가 물었다. "그곳은 멀리 남해에 있는데 사면이 바다에 둘러 싸인 외딴 섬입 니다. 어부들이 한 백 가구쯤 살고 있으며 경치도 매우 아름답습니 다. 만약 금란, 은란을 시켜 두 분 어르신네를 모시게 하여 그 섬 안에 은신케 하면 심목풍의 눈이 닿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손불사는 일언지하에 반대했다. "안 되지, 그 고도에는 통틀어 백 가구에 불과하니 두 분께서 그 섬에 거처하시게 되면 틀림없이 온 섬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오. 그리고 어선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어디서 정박할지 모르니 그들 의 말끝에서 이 소식이 언젠가는 틀림없이 중원에까지 전해질 것이 오." 상팔은 한동안 잠잠히 있더니, "노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야 하 겠군요." "아니오. 그곳은 소형이 십분 마음을 놓고 뒷일을 걱정하지 않아 도 되는 곳이라야 하오."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천하가 이처럼 광범한데 나 소영은 부모에게 폐를 끼쳐 그 분들 이 안심하고 편히 사실 수 있는 땅조차 없게 만들 줄은 미처 몰랐 구나......" 하고 탄식했다. 상팔은 그를 위로하였다. "형님 걱정 마십시오. 우리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서로 머리를 짜 내면 형님께서 안심하실 수 있는 곳을 언젠가는 찾아 낼 수 있 을 것이오." 그들이 이렇게 말을 주고받을 때,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가까이 다가 오고 있었다. 손불사는 낮은 음성으로, "어서 길 옆의 숲 속으로 몸을 숨기시오!" 하고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들이 모두 숲 속으로 숨기가 무섭게 두 필의 건마가 앞뒤로 나 란히 달려 왔다. 뒤따르는 말 위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하룻밤을 꼬박 새고 달려 왔는데도 소식을 조금도 들을 수가 없었으니 내 생각에는 틀림없이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소." 선두에서 달리는 사람이 대답했다. "당형! 마음을 푹 놓으시오. 나의 점은 절대로 틀림없소. 이 방 향에 있을 것이오." 이때 상팔이 나지막한 소리로 소영에게, "형님, 저것은 동해신복 사마건의 목소리가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소영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음성이 흡사하군요. 그러나 그들이 가까이 오거든 똑똑히 확인하고 부르도록 하지요." 눈을 똑바로 뜨고 살피니 선두에서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은 과연 사마건이었다. 뒤따르는 사람은 등에 큰 활을 메고 있었으며 허리 춤에는 화살이 가득 꽂힌 전대를 메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신전 진건곤 당원기였다. 소영은 껑충 뛰어나가 길 복판에 버티고 서서 웃으며 말했다. "사마형! 오랜만이오. 누구를 쫓고 있는 중이오?" 불쑥 뛰어 나온 사람이 소영인 것을 보자 사마건은 반색을 하며 곧 말고삐를 끌어 당겼다. 최고의 속도로 달리던 말이 길게 부르짖 더니 급정거를 하였다. "소형이구료. 마침 형을 찾고 있던 중이었소." 하며 말 위에서 뛰어 내려 달려 오더니 소영의 손을 덥석 잡았 다. 그리고, "형을 얼마나 애타게 찾았다고....." 하더니 소영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당원기를 향해서 소리쳤 다. "당형, 나의 점괘가 어떻소?" 하자 당원기도 웃으며, "과연 영험하구료." 하더니 역시 말에서 뛰어 내려 소영의 앞으로 다가서서 두 손을 모으고 깊숙이 절했다. "마총타주가 중상을 입은 후 그는 소형을 추대하면서 이렇게 말 했소이다. 만약에 무림동도들이 이번에 비참한 살상을 무난히 넘기 려면 소형을 모시고 대국을 수습하여야 된다고 말이외다." 소영이 다급히 물었다. "마총타주의 상처는 좀 어떻소?" "비록 중상을 입긴 했으나 다행히 무당파의 장문인 무위도장의 도움을 얻어 생명의 위험은 없습니다." 소영은 안도의 빛을 나타내며 말했다. "길인(吉人)은 천상(天相)이라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아무쪼록 하루속히 건강을 회복하길 빌어 마지 않겠소." 사마건은 천천히 물었다. "중주이고와 함께 있지 않나요?" 상팔은 두구를 부축하며 모습을 나타냈다. "중주이고는 여기 있소이다." 사마건은 그들을 보자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매우 잘됐소. 여러분들이 무사하니 나도 그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됐소." 두구가 냉랭히 물었다. "무슨 말을 한단 말이오?" 사마건은 그를 보며 말했다. "많은 영웅들이 두 분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어서 제가 두 분은 무사하다고 있는 힘을 다해서 역설했지요. 그러니 만일 두 분께서 사고라도 생겼으면 천하의 영웅들은 나 사마건의 점괘가 영험하지 못하다고 비웃을 게 아니겠소." 두구는 다시 쌀쌀하게 말했다. "나는 비록 죽지 않았으나 상처는 가볍지 않소이다." 상팔은 이때 갑자기 신투 향비의 생각이 나서 황급히 물었다. "그 늙은 도적은 어떻게 됐소?" "향형의 부상은 비교적 가벼워서 현재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 소이다." 손불사는 숲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현재 어디에 계시오?" 손불사도 백화산장 안에서 크게 용맹을 떨치어 군호들은 이미 그 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며 모두 그를 상당히 존경하고 있는 터였다. 사마건은 손불사를 보자 황급히 손을 모으고 공손히 절을 하였 다. "노선배님, 역시 이곳에 계셨군요." "왜? 이 늙은이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가?" 하고 껄껄 웃었다. 사마건도 약간 미소를 띠고 말했다. "소생은 서쪽 중원에 와서 원래 중원의 무림 인물들과 실력을 겨 룰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백화산장의 일전에서 저의 영웅심은 깨끗 이 사라져 버리고 심중에서 소형에 대해 더욱 앙모하는 마음이 솟 아 올랐지요. 그러기 때문에 중원에 남아서 미약한 힘이나마 그 분 을 도와 드리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손불사는 유쾌한 듯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현명한 사람이외다. 이 늙은이는 당신과 사귀어 보고 싶어 졌소." 사마건은 가벼운 기침을 하며 말했다. "무위도장과 마문비 등은 현재 아주 은밀한 곳에서 상처를 치료 하고 계시면서 한편으로는 심목풍과 대적할 계획을 강구하고 계십 니다." 손불사가 그에게 물었다. "이곳과의 거리는 어떻소?" "약 이백 리 정도 됩니다." "좋소. 당신은 근육도 풀 겸 한동안 걷기로 하고 부상한 두형을 말에 태우는 게 어떻소?" "노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고 자기의 말을 끌어다가 두구에게 타라고 권했다. 이것을 본 소영은 속으로 크게 의아심을 느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그처럼 차갑고 교만한 태도를 보였던 이 사 람이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온화하게 태도가 변했을까?' 하고 생각할 때 상팔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 말에 올라 타게. 이처럼 사마형이 성의로 대우하니 우리 도 사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두구는 큰 걸음으로 걸어 가서 차디차게 입을 열었다. "그럼, 수고스럽지만 길을 좀 걷구료." 사마건은 상냥하게 말했다. "두형은 부상당한 몸이니 제가 응당 양보를 해야 되지 않겠소." 그러면서 두구를 부축하여 말 위에 올려 주었다. 상팔은 시선을 당원기에게 옮기고 말했다. "당형, 아직도 부상당한 낭자가 한 분 있는데...." 하자 당원기는 다급히 물었다. "어느 분이오? 어서 이 말에 태우도록 하시오." 상팔은 고개를 돌려 숲 속을 향해 소리쳤다. "금란낭자! 은란의 상처가 어떻소? 말을 타고 갈 수 있겠소?" 그러자 금란의 소리가 들려 왔다. "손노선배님의 치료와 진기의 도움으로써 상처는 원만히 아물어 아마 말을 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요? 그럼 어서 그녀를 데리고 나오시오." 금란은 대답을 하고 은란을 안고 걸어 나와 당원기의 건마에 태 웠다. 소영은 내심 몹시 미안한 생각이 들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고 했을 때 손불사가 크게 소리쳤다. "심목풍이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끝까지 우리를 추격할 것이오. 이곳에서 더 이상 지체 말고 빨리 길을 재촉하도록 합시다." 사마건은 곧 동의했다. "좋습니다. 그럼 내가 길을 안내하겠소이다." 하고 앞장서서 달려 갔다. 도중에서 소영이 몸소 겪은 경과를 털 어 놓자, 듣고 있던 사마건과 당원기는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당원기는 소영의 이야기를 들은 후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심목풍 하나도 상대하기 힘드는데 지금 다시 사해군주가 불어났 으니 강호의 분란은 더욱 심각해져서 수백 년래의 가장 흉악한 때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손불사가 입을 열었다. "소문에 듣기로는 무당파의 장문인 무위도장이 지혜와 두뇌가 매 우 훌륭하다던데 어떤 묘계를 써서 사해군주와 심목풍이 맞붙어서 그들이 처절한 싸움을 벌이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상당한 기력을 아낄 수 있 을 텐데...." 소영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소생이 보는 바로는 그들 두 사람은 마음이 음침하고 계략이 깊 은 자들이라 그들끼리 충돌을 일으키기는 어려울 것 같소이다." 사마건이 소영에게 물었다. "사해군주의 무공은 어떻습니까?" "그는 여지껏 손을 써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고심(高深)을 추측할 수가 없구료." 손불사가 말을 받았다. "나는 소요자에 관해서 알고 있는데 그 자는 비단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심술이 또한 사납기 그지 없소. 그러나 사해군주는 이러 한 소요자를 이용해서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게 할만큼 재주가 있는 자이니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닐 것이오." 당원기와 사마건은 모두 소요자의 내력, 출신을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말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날이 훤히 밝아 올 무렵, 그들 일행은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그 리고 그곳에서 소부인을 위하여 일행은 부득불 반나절을 쉬어야만 했다. 그들은 그 마을에서 한 대의 마차를 구한 뒤에 다시 길을 재촉했 다. 하룻밤을 꼬박 걷기를 계속했고 또 다시 다음 날의 태양이 서 산에 저물어 갈때 그들은 어느 호숫가에 당도하였다. 사마건이 소영에게 말했다. "소형, 무위도장 등은 바로 이 호수의 맞은편에 있습니다." 소영은 사마건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 보았다. 과연 맞은편에 보 이는 푸른 산기슭에 보일 듯 말 듯 아득히 오두막집이 눈에 띄었 다. 손불사는 호면의 길이가 약 이 리 정도되며 넓이 역시 그쯤되 는 것을 눈짐작으로 재어 본 후 입을 열었다. "호수를 건너려면 배가 있어야 되는데 어디서 배를 구할 수 있겠 소?" 당원기가 나서며 대답했다.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소생이 즉시 배를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는 어깨에 메었던 활을 손에 들고 화살을 당겨 핑! 하고 쏘았 다. 그는 궁술에 조예가 깊어서 신전(神箭)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고 있었다. 그가 쏜 화살은 허공을 가르고 곧장 구름을 뚫었다. 그러자 잠시 후에 과연 호면에서 한 척의 배가 파도를 가르고 달려 왔다. 배의 속도는 상당히 빨라서 보고 있는 동안에 벌써 그들이 기다리는 호숫가에 와서 닿았다. 그 작은 배에는 검을 지닌 중년의 도사가 노를 젓고 있었으며 뱃 머리에는 남색 옷에 검을 지닌 전엽청이 서 있었다. 전엽청은 그 배가 탕기도 전에 몸을 날려 호숫가로 올라 왔다. 그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당원기와 사마건을 향해 소리쳤다. "두 분께서 수고가 많으시군요." 하더니 눈길을 손불사에게 돌리고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노선배님께서 왕림해 주시니 정말로 영광이옵니다." 그러자 손불사는 웃으며 말했다. "영사형은 언제나 무림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마침 내 시비 속에 말려드셨군요. 정말 뜻밖이외다." 전엽청이 말했다. "소생의 사형은 비록 별명이 무위(無爲)라 하지만 실은 협골열장 을 지니셨습니다. 이번에 강호에 분란이 야기되자 저희들 무당파가 곧 그 소용돌이 속에 말려 들었는데 그것은 소생의 사형께서 워낙 마음이 인자하셔서 일대 무뢰한의 횡포가 발생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손불사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뭐라고? 아니 그렇다면 소림, 아미, 청성 등의 여러 대문파에서 는 모두 좌시하며 상관을 하지 않고 있단 말이오?" "소생의 사형께서는 벌써 사람을 보내서 소림파의 강문방장을 만 나 현재의 강호의 대국을 알렸으나 심부름을 간 사람이 아직 돌아 오지 않고 있어서 소림파의 태도가 어떠한지 회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일행을 한 번 둘러 보고 다시 계속했다. "소생의 사형께서는 여러분들을 몹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호수 를 건너도록 하여 저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십시다." 손불사는 서슴없이 첫 번째로 배에 올라 탔다. 사마건이 전엽청에게 말했다. "전형, 먼저 손노선배님과 소대협을 모시고 가시오. 저희들은 다 음 차례에 가겠소이다." 그러고 보니 그 배는 너무 작아서 손불사와 소영 및 그의 양친과 금란, 은란이 배에 오르자 이미 꽉 찼던 것이다. 전엽청은 낮은 소리로 노를 젓는 노인에게 분부했다. "그대는 여기서 내려 저 분들과 잠시 함께 있게. 내가 노를 젓고 갈 테니....." 그의 나이는 비록 어리나 무당파 문하에 있어서는 신분이 매우 높았으므로 그 중년의 도인은 공손히 읍하고 배에서 내렸다. 전엽청이 노를 저으며 배를 밀치자 작은 배는 나는 듯 파도를 헤 치고 달려 나가 순식간에 맞은편 언덕에 도착했다. 흰 수염이 앞가슴에 드리워진 무위도장이 운양자를 데리고 벌써 마중나와 있었다. 소영은 눈길을 돌려 사방을 훑어 보았다. 이곳 반달 모양의 분지 는 뒤는 산에 의지하고 앞은 호수에 면하고 있어서 맑은 호수에 비 친 푸른 산그림자는 저녁 노을 속에서 산호빛으로 물들어 그 아름 다운 경치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위도장은 합장하고 웃는 낯으로 손불사에게 인사를 했다. "노선배님은 세상을 등진 지 수십 년이나 되는데 기어코 이 강호 의 살생의 시비 속으로 말려 드셨소이다그려." 손불사는 성격이 매우 호탕하여 핫하 웃으며 대꾸했다. "이 늙은 몸은 나무토막처럼 변해서 앞으로 산다 해도 몇 년 남 지 않았으니, 여생을 무림 정의를 위해서 미약한 힘이나마 바쳐 그 것이 다소 힘이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이다." 소영은 무위도장이 자기를 애호해 주려고 힘쓰는 것이 고마워 급 히 두 걸음 나아가서 정중히 예를 올리고 입을 열었다. "후배 소영은 도장의 만수무강을 비옵니다." 무위도장은 몸을 굽혀 답례를 하고 인자하게 웃었다. "소대협은 우리 무림동지들이 목하 가장 존경하는 위인인데 빈도 가 영광스럽게도 이렇게 수려한 풍채를 뵈올 수 있으니 참으로 기 쁘기 그지없습니다." 소영은 가볍게 탄식했다. "소생은 아직 어리고 무식해서 도장의 이와 같은 칭찬을 들을 만 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어찌 이처럼 과분한 칭찬을 들을 수가 있 겠습니까?" 무위도장은 운양자를 한 번 뒤돌아 보고 분부했다. "둘째, 내 대신으로 군호들을 정중히 영접하게." 운양자는 공손히 대답했다. "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무위도장은 낮은 목소리로 손불사를 향해서 권했다. "두 분은 빈도와 함께 정실로 가셔서 차를 듭시다. 빈도는 한 가 지 어려운 일에 봉착하고 있는데 아무리 심사숙고를 해 봐도 결단 을 내리기 어려워 두 분의 가르침을 받을까 합니다." 이때 벌써 두 명의 중년 도사가 마중을 나와 소영의 양친과 금 란, 은란을 한 채의 초가집으로 안내해 갔다. 소영과 손불사는 무위도장을 따라 한 채의 초가집으로 걸어 들어 갔다. 그 집 안의 장치는 아주 간단하였다. 침상 하나에 탁자가 놓 여 있었으며 몇 개의 대나무 의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자, 미목이 수려한 도동이 곧 세 사람 앞에 차를 날라 왔다. 손불사의 나이는 육십이 훨씬 넘었으나 성격은 여전히 급하여 자 리에 앉자마자 무위도장에게 다그쳐 물었다. "도장, 무슨 일이오? 어서 말씀해 주시오. 이 늙은 몸은 언제나 성질이 급하고 인내성이 부족하외다." 무위도장이 도동을 향해 손짓하자 그 도동은 소리없이 초가를 나 가더니 조용히 문을 닫았다. 손불사는 무위도장의 행동에서 이 일이 매우 중요한 기밀에 속하 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무위도장은 가볍게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너무나 돌발적인 것이오. 빈도조차 어리둥절하고 있소 이다. 만약 소대협께서 오늘 오시지 않으셨다면 오늘 밤에 뜻밖의 살생이 벌어질 뻔했던 것입니다." 소영은 어리둥절했다. "후배가 관련된 일입니까?" "그러하이다. 그 자는 소대협을 지명하여 찾았으니까요." 소영은 더욱 이상해서 미간을 모으고 물었다. "그 자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러자 무위도장은 엄숙한 어조로 대답했다. "북천존자이외다." 손불사는 이 말에 안색이 변하여 입을 열었다. "아니 그 노마두가 현재 중원 땅에 와 있소?" "바로 이 부근 십 리 안에 있소이다. 그는 멀리 북해의 빙궁(水 宮)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중원 땅에는 발길을 끊다시피 하고 있었 는데 그 자는 요즘 중원무림의 사태에 관해서 어느새 손바닥 들여 다 보듯 자세히 알고 있더군요." 손불사는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그 노마두도 역시 심목풍과 결탁해서 중원의 무림을 뒤흔들 작 정이 아니오?" 무위도장은 고개를 저었다. "북천존자는 몹시 자부심이 많은 사람인데 그가 어찌 심목풍과 결탁하겠소이까? 하물며 그는 중원에서 패권을 잡겠다는 마음을 가 져 본 적이 없소이다." "그럼 단독으로 소영을 대항코자 온 것이겠구료?" "그렇소이다." 무위도장은 이렇게 대답하더니 소영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 보며 서서히 말을 계속했다. "소대협께서는 탓하지 마시기 바라오. 빈도는 그것이 오해라고 믿지만 그래도 먼저 내정을 설명해야겠군요." "노선배님, 어서 말씀하십시오. 후배는 귀를 씻고 경청하겠나이 다." "소대협께서는 북천존자의 따님을 잘 아시나이까?" 소영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두어 번 만난 적이 있을 뿐이외다." "그림 비록 오해이긴 하겠지만 아니땐 굴뚝에 연기가 난 것이 아 니었구료?" "대체 무슨 말이오? 어서 설명부터 해 주십시오." "어젯밤 늦게 북천존자는 갑자기 혼자 호수를 건너 와서 곧장 빈 도의 초가로 침입했소이다. 빈도는 그 자의 이름을 들어서 그의 무 공이 대단한 줄 알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고 맞이했지만 그는 다짜 고짜 소대협의 행방을 아느냐고 물어 왔소이다." "도장은 그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소?" "빈도는 그 자의 얼굴에 노기가 서려 있는 것을 보고는 모른다고 딱 잡아 떼었는데, 그 자는 빈도의 말을 믿지 않고 떠나 가면서 오 늘 밤 열두 시 이전에 소대협을 찾아 내라고 엄포를 놓더군요. 만 약 그때 소대협의 행방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원망 말라 고 협박하며 무당파의 인물을 모두 박살내 버린다고 위협했소이다." 소영은 이 말을 듣고 이상히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무위도장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가 말하기를 소대협께서 그의 딸을 유괴해 갔다고 하더군요." 소영은 깜짝 놀랐다. 그는 눈썹을 치켜 뜨며 무위도장을 바라 보 는데 그 준수한 눈동자 속에는 강렬한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위도장도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온화하게 말했다. "빈도 역시 그것은 오해라고 믿지만 북천존자는 설명을 하려 하 지 않고 노여움을 지닌 채 떠났소이다." 손불사가 화를 벌컥 냈다. "그 노마두는 시비를 걸려고 그러는 것이 분명하외다. 이 며칠 사이에 나는 소형제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북천존자의 딸은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소이다." 무위도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빈도 역시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이 속에는 틀림없이 무 슨 흉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더군요." 하더니 시선을 소영에게 돌려, "당대의 무림 안에 때를 같이 해서 두 명의 소영이 나타날 모양 이외다." 하였다. 그러자 손불사가 껑충 뛰어 오르며 외쳤다. "그렇군! 틀림없이 소영을 가장한 놈의 짓일 것이오." 소영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현재 진상이 가려지기도 전에 남옥당의 짓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늘 밤에 북천존자를 만나 본 후에 다시 이야기를 하 도록 합시다." 무위도장도 동의를 표시했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소이다. 때가 되면 손노선배님 과 빈도가 소대협과 함께 그를 만나 봅시다. 만약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 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힘이 될 수 있으니까요." 소영도 가벼운 표정으로 돌아 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후배의 행적은 뚜렷하여 분명하니 억울함을 깨끗이 씻을 수 있 을 것이오." 그러나 무위도장의 의견은 달랐다. "말은 비록 그렇지만 북천존자의 사람됨이 언제나 건방지고 잘난 척하니 그는 아마 소대협의 해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외다." 무위도장은 백화산장의 일전에서 소영의 활약상을 들어 용맹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같은 어린 나이에 아무리 신기한 재주 를 타고났더라도 북천존자와 대항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기의 생각을 몇 마디 권고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나무문 이 삐거덕 열리더니 문을 지키던 조금 전의 그 도동이 얼굴을 내밀 고 입을 열었다. "사숙님이 군호를 안내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고 보고하자 무위도장은 곧 몸을 일으켜 정실의 입구까지 마중 을 나가 합장하며 영접했다. "여러분! 어서 들어오십시오." 상팔이 맨 먼저 들어 오고 그 뒤로 두구, 당원기, 사마건, 전엽 청, 운양자가 들어 왔다. 도동은 군호들의 자리를 마련하고 차를 나른 후 다시 소리없이 정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마건이 제일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생은 소대협을 찾아서 모셔 오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다행히 도 점괘가 맞아서 도장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실천했습니다." 무위도장도 웃었다. "사마형, 정말 수고했소이다." 하며 눈길을 두구에게 돌리더니 말했다. "두형의 상처는 어떠합니까? 빈도가 두형을 모시고 조용한 방으 로 가서 휴식을 취하시도록......"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구는 차디차게 웃으며 가로막았다. "필요 없소이다. 불초는 이대로 견딜 수 있습니다." 그의 표정과 음성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얼음장 같아서 제아무리 남을 감동시킬 말이라 하여도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온다면 듣는 사 람으로 하여금 몹시 불쾌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위도장은 온화하게 웃었다. "빈도가 이곳을 선택하게 된 것은 강적이 쉽사리 기습을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는데 심목풍의 이목으로서는 이미 이곳 우리의 은 신처도 탐지했을 것이외다. 만약 그가 우리를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면 이틀 안으로 고수들을 데리고 달려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 는군요." 여기서 말을 잠시 끊고 좌석을 주욱 훑어 보았다. "여러분! 먼 곳에서 오시느라고 몹시 시장하실 테니 먼저 음식을 드신 다음 빈도가 다시 여러분을 숙소로 모시겠으니 푹 휴식을 취 하십시오. 만일 심목풍이 고수를 끌고 이곳에 당도한다면 그들과 겨루어야 하니까요." 그의 말이 끝나자 두 명의 중년 도사가 나타나더니 일제히 합장 을 하고 공손히 말했다. "여러분, 어서 식당으로 나오십시오. 음식이 마련되었습니다." 군호들은 그 두 명의 도사를 따라 다른 한 채의 초가집으로 들어 갔다. 그 안에는 이미 주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안쪽의 손님 상에는 고기, 생선, 닭, 오리 등 여러 가지 육류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문쪽의 상에는 몇 가지 채소 요리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무위도장과 운양자 및 현문에 몸을 투신한 제자들은 모 두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총총히 끝낸 후 군호들은 각기 도사의 안내로 방으로 들 어 갔다. 이곳은 원래 수십 가구의 인가가 있었다. 그들은 낚시와 사냥을 생업으로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무위도장이 이곳을 선 택해서 군호들을 대대적으로 모아 백화산장과 상대하기로 한 후 무림의 살상이 무고한 백성에게까지 파급되는 것이 두려워 그는 특별히 후한 돈을 주어 이곳에서 살던 수십 가구의 가난한 사람들을 다른 고장으로 보내었다. 소영의 거실은 부모의 바로 옆방이었다. 이 두 분 노인은 자기의 아들이 무림 동지들의 옹호를 받고 생사를 밥먹듯이 하는 것을 보 자 몹시 불안하였다. 그들은 강호의 분란 속에 아들이 말려 들어 어쩔 수 없이 강호의 평정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하는 수 없이 듣지 않고 묻지 않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의 모친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한시도 소영을 위해 걱정을 안하는 때가 없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여러 차례 강호를 물러나서 조용한 곳을 택해 평화스러운 생활을 하자고 권하려 했으나 번번이 남편에게 제지당 해 왔던 것이다. 이날 밤 이경쯤 돼서 소영은 몰래 일어났다. 그는 한동안 휴식을 취한 후라 심신이 매우 호조되었음을 느꼈다. 그는 무위도장을 찾아서 함께 북천존자를 만나러 가려고 마음을 먹고 방을 나섰다. 그러자 그의 눈에 아직도 불이 환히 켜져 있는 옆방의 문이 눈에 띄었다. 그는 가슴이 뜨끔했다. '나는 부모님들에게 무한한 폐를 끼쳐 늙으신 나이에 안정된 생 활을 못하시고 여기저기 떠돌며 방랑케 하니 참으로 불효막심하구 나. 저렇게 불이 아직도 환한 것을 보니 밤이 깊었는데도 자리에 드실 생각은 없이 필시 내 걱정을 하고 계실 것이리라.....' 하고 생각한 그는 그곳으로 발길을 돌려 문을 두드리고 들어 가 려 했다. 그러나 마침 그때 방 안에서 모친의 인자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아아! 아들을 낳으면 농부를 만들어서 백발이 될 때까지 편안하 게 살도록 하는 게 좋겠군요. 우리 영아는 너무나 똑똑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화를 초래해서 이렇게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는군요.. ......" 부드러운 모친의 음성은 마디마디 천륜의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소영은 그만 코허리가 시큰해져서 순식간에 눈물이 뺨을 타고 내 렸다. 곧 부친의 음성이 뒤따랐다. "그만 두시오. 만약 우리 영아가 정말 농부나 어부가 됐다면 당 신은 또 못난 놈이라고 탓했을 것이오. 우리는 비록 적지 않은 풍 상을 겪었지만 그만큼 견식을 넓히지 않았소? 산이며 호수며 아름 다운 달과 별- 이런 자연의 수려한 풍경은 모두가 상상도 못했던 훌륭한 경험이었소." 모친의 소리는 노성을 띠었다. "당신은 아들을 위해서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는군요. 영아는 온 종일 싸움 속에서 위험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우? 무기에는 사정이 없으니 그러다가 몸이라도 다치면 어떻게 합니까?" 부친은 핫핫 웃었다. "그 점은 안심해도 좋소. 내가 보기에도 우리 영아의 솜씨는 비 범합디다. 천군만마가 덮치고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도 영아를 다치 게는 못할 것이오. 영아는 그토록 어린 나이에 강호의 영웅들로부 터 추대를 받고 있으니 얼마나 부모로서 영광스러운 일이오? 아들 을 두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모친은 더욱 목소리에 모가 났다. "얼씨구, 참 좋구료. 당신은 강호를 쏘다니는 데에 아주 신이 나 서 찬성하시는군요. 부친이 이러니 자식이 야성을 지닐 만도 하군 요....." 그러나 부친은 여전히 웃었다. "영아가 만일 일신에 절세 무공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현재까지 살아 있을지도 의문이 아니겠소? 내가 전에 당신에게 일러 준 말이 기억나지 않소? 영아는 태어날 때부터 괴상한 병을 타고 났기에 유 명한 의사들도 모두 속수무책이었으며 오래 살아야 이십 년이고 아 니면 열댓 살 무렵에 죽는다 하지 않았소? 나는 애초에 영아가 열 살 되던 해에 천하를 구경시켜 주려고 했었소. 영아에게 견식을 넓 혀 주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서 말이 오." 모친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말이야 그렇지요. 그러나 현재와 과거는 달라 영아의 괴질은 이 미 완치됐어요. 그런데 어찌 옛말을 자꾸 꺼내어 말을 하십니까?" "과거에 있던 영아는 이미 괴질로 죽었고 현재의 영아는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이오." "제가 낳아 제가 길렀는데 어찌 우리의 아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 소대인은 줄곧 말씨가 부드러웠다. "지금의 영아는 이미 우리 개인의 자식이 아니라 무림 일대의 구 성(救星)이며 만인의 생사가 그의 양 어깨에 달려 있소. 당신이 만 약 영아를 독점하려고 그 애를 졸라 조용히 살자고 한다면 영아는 날 때부터 효성이 지극한 아이라 틀림없이 당신의 소원을 따를 것 이나 천하는 이로써 파국을 초래하는 것이 되오. 얼마나 많은 부모 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을 것이며 또한 얼마나 많은 부인 네들이 가장을 잃게 되는가, 당신은 생각한 적이 있소?" 모친은 잠시 묵묵히 있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영아는 아직 약관의 나이인데 천하의 창생들에게 있어 정말 그 렇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그는 몸에 무림의 절기를 계승하고 있는데 비록 약관의 나이지 만 이미 당세에는 필적할 상대가 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단 말이오. 무림의 살상은 비록 무림 안의 인물들의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여파가 미치는 곳에 사는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까지도 그 화를 면 치 못할 것이오. 당신은 영아 한 사람의 생사만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대국적으로 볼때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오." 소영은 창 밖에 꼼짝 못하고 서서 방 안의 이러한 대화를 듣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부친의 말에 용기백배하여 몸을 돌려 곧장 무위도장의 정실로 향해서 몸을 날렸다. 무위도장과 손불사는 벌써 밖에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소영이 오는 것을 보자 즉시 가까이 다가갔다. 소영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한발 늦었군요. 두 분은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손불사는 밤하늘을 쳐다 보며 대답했다. "때마침 잘 왔네그려." 무위도장도 말했다. "북천존자의 일에 빈도는 군호들을 깨우고 싶지 않소이다. 그래 서 특별히 손형과 소대협에게 청컨대 우리의 배를 타고 호수를 건 너가 맞은편에서 그와 회합을 나눕시다. 만일 회담이 결렬되어 싸 움이 벌어진다 해도 군호들을 격동시키지 않을 것이니까요." 소영도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들이 호숫가로 걸어 나가자 전 엽청이 경장을 하고 벌써 배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위도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알고 이곳에 왔는가?" "사형께서는 저의 행동을 용서하십시오." 손불사는 웃으며, "이 늙은이가 영사제를 자세히 보니 훗날 반드시 당신들의 무당 문하를 빛낼 인물이오. 그러니 함께 가서 견식을 넓히는 것도 과히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외다." 무위도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전엽청에게 말했다. "손노선배님의 말씀이 없으셨더라면 배에서 자네를 쫓아 버렸을 것일세." 전엽청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손불사에게 깊이 절을 했다. "노선배님의 말씀에 감사를 올립니다." 손불사는 대답도 없이 배에 뛰어 올랐다. 그는 일행이 배에 오르 자 전엽청에게 말했다. "어서 떠나도록 합시다." 전엽청은 쌍노를 잡으며 무위도장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노를 저을 제자는 소제가 되돌려 보냈습니다." 하고 그는 힘차게 노를 저어 나갔다. 작은 배는 기슭을 떠나 쏜살처럼 미끄러져 나갔다. 밤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호수도 몹시 어두웠다. 무위도장은 열심히 전시력을 모아 사방을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 었다. "우리는 모두 각별히 주의하여 앞을 살펴야 되겠습니다. 만약 북 천존자가 미리 한 걸음 빨리 와서 곧장 저희들의 본거지로 침입하 게 된다면 결과도 매우 비참해지니까요." 그러나 그때 이미 한 척의 작은 배가 물거품을 튀기며 나는 듯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78. 호반을 강타하는 호걸들 쏜살같이 달려 오는 작은 배를 발견하자 손불사가 먼저 입을 열 었다. "저 배에 혹시 북천존자가 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자 전엽청은 무위도장이 분부를 내리기도 전에 뱃머리를 돌 려 질풍같이 빠른 속도로 그 배를 향해 다가갔다. 그 두 개의 작은 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서로 접근했다. 전엽청은 그 배에 서서히 다가 가더니 갑자기 그 배와 가지런히 몰아 세우며 진로를 막았다. 무위도장은 뱃머리에 서서 합장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 배에 계신 분이 북천존자이십니까?" 하고 묻자 곧 차가운 음성이 대꾸를 했다. "그렇소! 내가 북천존자이외다." 하며 서서히 푸른 옷에 작은 모자를 쓴 수염이 기다란 노인이 일 어났다. 자세히 보니 그는 배 안에다 침대를 놓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배 안에는 북천존자 외에 뱃사공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본 소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언제나 많은 사람을 이끌고 다녔는데 오늘 밤은 무슨 까닭에 혼자서 왔을까?' 무위도장은 웃으며, "지금 아직 삼경이 되지 않았는데 존자께서는 왜 일찍 오시는구 료." 북천존자는 이 말에 아무 대꾸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왔 다. "도장께서는 소영을 찾아 냈소?" "다행히 명령에 거역하지 않았소이다만....." 소영은 무위도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나서며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불초 소영은 여기 있사온데 존자께서는 무슨 일로 부르셨나이 까?" 그러자 그는 소영을 똑바로 쳐다 보며 말했다. "노부가 보기에도 그대인 것 같았는데 과연 틀리지 않았군." 하더니 다시 손불사를 향해 말했다. "그대는 개방주의 유일한 손불사시구료." 손불사는 핫핫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북천존자는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오래 전부터 그대의 명성은 듣고 있었소. 오늘 이렇게 만 나게 되니 영광이......." "원 별말씀을......" 북천존자는 다시 소영의 얼굴에 눈길을 박았다. "내 딸은 지금 어디에 있나?" 소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댁의 따님의 거처를 소생이 어떻게 알겠소이까?" 북천존자는 벌컥 화를 냈다. "그대가 모른다면 누가 안단 말인가?" "소생이 어찌 꼭 따님의 거처를 알아야 한단 말이오?"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참극을 빛게 될 테니까....." 소영은 굴하지 않고 눈썹을 치켜 세우며 대꾸했다. "존자께서 만약에 도리를 지키지 않으시겠다면 아예 이야기도 하 지 맙시다." 북천존자는 더욱 노했다. "내가 만일 도리를지키지 않는다면.... 이렇게 혼자서 올 것 같 은가? 그러나 그대가 나를 화나게 한다면....." 소영은 차갑게 대꾸했다. "존자께서는 엉뚱한 말을 하셨는데 그것을 듣고 내가 화를 낼 것 이라는 사실을 미리 짐작 못하셨소?" 북천존자는 발작을 일으키려는 듯 양 어깨를 들먹였으며 수염이 저절로 흔들렸다. 그러나 끝내 화를 참고 천천히 물었다. "내 딸을 그대가 납치해 가지 않았나?" 소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생이 존자의 따님을 유괴할 필요가 어디 있소이까?" 하고 반문하더니 다시 물었다. "누가 그럽디까? 본 사람이 있소?" "본 사람은 없으나....." 소영은 냉소를 터뜨렸다. "본 사람이 없다면 누가 당신에게 그런 소리를 했군요? 그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지도 않지......" "본 사람도 없고 알려 준 사람도 없다면 존자는 어찌 소생을 지 목하시오?" "내 추측이 그러하니 절대 틀림없을 것이다." 소영은 화가 극도로 난 나머지 오히려 웃고 말았다. "이 일은 댁 따님의 명예에 관계되느니만큼 존자께서는 한번 잘 알아 보십시오. 소생을 욕되게 하는 것은 고사하고 댁의 따님의 신 상에 상처를 주게 되니 그 분에게 있어서는 큰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소이다." 북천존자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유괴하지 않았다고 잡아 떼는데 그럼 내 딸은 어디 갔단 말인가?" "그것을 소생이 어찌 알겠소?" 그는 시선을 한 곳에 박고 한동안 깊이 생각에 잠기더니 재차 물 었다. "정말로 모르는 일인가?" "물론 정말이오.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소?" 북천존자는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내 딸을 그대가 유괴했든 안했든 그 애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대를 의심할 것이다." 소영은 마침내 화가 났다. "존자가 자꾸 근거도 없이 말로 트집을 잡으니 도대체 무슨 속셈 으로 그러시오?" 북천존자는 앙천대소했다. "현재의 무림에서 몇 사람이나 나와 도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 격이 있을까?" 소영이 물었다. "존자는 소생을 어떻게 처치할 생각이오?" 소영은 이 자의 무공이 고강하고, 한편 중원무림이 몹시 분란상 태에 있기 때문에 강적을 많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심중으 로는 매우 화가 났지만 억지로 참는 것이었다. 북천존자는 태연히 말했다. "나는 그대를 데리고 가야겠다." 소영은 잠시 그의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에게 응수했다. "소생은 댁의 따님의 거처를 모르니 데리고 가도 아무 소용 없을 것이오." "나에게는 좋은 생각이 있다." "만약 댁의 따님을 찾아 내는데 도움이 된다면 소생은 기꺼이 도 와 드리겠소이다. 존자께서 먼저 말씀을 해 주시오. 그러면 소생도 한번 생각해 보겠소." "내 딸이 집을 나가게 된 것은 순전히 그대를 찾으려고 했기 때 문일세. 앞으로 내가 그대를 데려간 후 곧 천하에 그것을 퍼뜨리고 일 개월 이내에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하면 내 딸은 자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일 개월 안에 틀림없이 쫓아 올 것일세." 그의 말에 손불사는 냉소를 흘렸다. "좋은 방법이오. 그러나 단 한 가지 좋지 못한 점이 있소." 북천존자는 못마땅한 눈치로 물었다. "어떤 점이오?" "만약 당신의 딸이 소문을 뒤늦게 접했거나 아니면 소문을 듣고 도 돌아 오려고 하지 알으면 존자는 어떻게 소영을 처리하겠소?" "만약 내 딸이 소영을 살려 주라는 말이 없다면 내가 한 말을 취 소할 수 없는 노릇이지....."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내가 이번에 중원에 나오게 된 동기는 원래 금궁의 열쇠의 행방 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뜻밖에 내 딸이 실종되어 나를 애타게 하였 으니 금궁의 열쇠를 찾는 일은 부득불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됐소 이다." 손불사가 다시 물었다. "존자의 뜻은 일 개월 내에 만약 따님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장 에 소영을 처형하겠단 말씀이구료?" "그렇소! 나는 내 생각이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소이다." 소영은 가슴에 울화가 부글부글 끓어 올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 었다. 그는 즉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일을 존자께서는 잊으셨소!" 북천존자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데?" "존자께서는 이 소영이 남에게 순순히 손을 내밀고 또한 남에게 절대로 목숨을 내맡기지 않는 고집이 있다는 사실을 잊으셨단 말이 외다." 북천존자는 냉연히 일소했다. "그럼 그대는 나하고 맞서 보겠단 말인가?" "맞서 보지 못할 게 뭐 있소!" 북천존자는 노성을 질렀다. "바로 이 배 위에서 겨루어 보는 게 어떤가?" 소영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은 오래 전부터 북해의 빙궁에서 살고 있으니 틀림없이 바다에서의 싸움에 자신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와 배에서 싸우 면 안 된다.' 이런 계산을 한 그는 격분을 누르며 차분한 말투로 대꾸했다. '배 위는 장소가 협소하니 존자께서 싸우고 싶다면 넓은 곳에서 겨루는 것이 좋겠소이다." "그것도 좋지." 하며 북천존자가 손을 들어 신호하자 배는 재빠르게 방향을 돌려 다시 달려 나갔다. 손불사는 무위도장을 힐끗 쳐다 보고 말했다. "오늘 밤의 사태는 우리가 양보를 해도 역시 좋게 끝날 것 같지 않소이다그려." 무위도장은 고의로 배의 속도를 늦추도록 지시하며 북천존자의 배가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 저 북천존자의 무공은 고강하여 만만치가 않은데 소대 협은 정말 그와 겨룰 생각이시오?"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싸우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손불사가 제안을 했다. "우리 모두 합세하여 그와 싸우기로 하고, 내가 먼저 그와 맞붙 어 싸울 테니 내가 만약 그를 이기지 못하면 소대협이 이진을 맡고 그런 후 승부를 가려 내지 말고 즉시 도장께서 삼진을 맡으시오... ..." 소영이 즉시 반대했다. "그 방법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디가 좋지 않단 말인가?" "소생이 직접 목격한 바로는 북천존자의 수하 고수가 대단히 많 습니다. 만약 우리가 번갈아 가며 그를 상대한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자기 수하 고수들을 부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은 더욱 번거롭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 혼자서 그와 결전을 벌 이면 승패를 막론하고 다른 복잡한 일은 초래되지 않을 것입니다." 손불사가 나서며 반대했다. "무위도장과 내가 이 일에 참여한 이상 북천존자가 소대협을 데 리고 가는 것을 가만히 방관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번 싸움 에서 소대협이 승리를 거둔다면 물론 좋겠지만 만일의 경우 불행히 패배한다면 무위도장과 나는 좌시할 수 없으니 이 일전은 반드시 유혈 참극을 빚어 낼 것이네."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작은 배는 어느새 호숫가 에 와 닿았다. 북천존자는 벌써 언덕에 올라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만 면에 짜증스러운 표정을 나타내고 쏘아붙였다. "이 호면은 통틀어도 불과 백 장 넓이뿐이라 아무리 늦게 배를 몰아도 이것보다 더 일찍 올 수 있었을 것인데 참으로 늦구료." 소영은 배에서 뛰어 내리며 그의 말을 받았다. "존자께서 먼저 손을 쓰시오." 이때 밤하늘을 가렸던 구름이 깨끗이 걷혀져 밝은 달과 뭇 별들 이 나타났다. 북천존자는 소영을 한번 훑어 보더니 담담하게 웃었다. "그대는 어린 나이에 담력은 보통이 아니구먼....." 소영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 "수고스럽게 과찬할 필요는 없소이다."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나며 손불사와 무위도장, 전엽청이 연 달아 언덕에 내려 섰다. 북천존자는 차가운 눈길을 그들에게 보내더니 다시 담담한 어조 로 소영에게 말했다. "무기를 뽑아 들어라!" 소영은 등에 지닌 장검을 싹 뽑아 들었다. "존자께서도 어서 무기를 뽑으시오." "나는 맨손으로 대항하겠다." 소영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뽑아 들었던 장검을 도로 검집에 꽂더니 그것을 등에서 풀러 손불사에게 건네 주며 입을 열 었다. "존자께서 무기를 사용치 않으니 소생 역시 맨손으로 싸우겠소이 다." 그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북천존자는 미간을 깊이 모으며 말했 다. "그대가 맨손으로 싸우면 나의 적수가 안 된다." 소영은 진기를 모아 정신을 통일시키며 입을 열었다. "소생이 만일 존자의 손에 부상당한다면 자신의 무예가 쓸모없음 을 탓할 뿐 죽어도 한이 없겠소. 그러나 소생도 미리 한 가지 해명 해 둘 말이 있소이다. 저는 존자의 따님을 유괴하지 않았다는 사실 을 말입니다." "그 사실은 나도 이제 믿겠다. 그러나 자네를 미끼로 내걸지 않 으면 내 딸을 찾기 매우 힘들 것 같아서 나는 꼭 그대를 데려가야 되겠네." 소영은 담담히 웃었다. "존자의 고강한 무공은 천하에 모르는 자가 없는데 이렇게 모처 럼 존자와 소생이 맞설 수 있으니 다시 없는 영광이외다. 승부에 관계없이 전력으로 항거하겠소이다." 북천존자는 입가에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안 됐네마는 그대에게 승리의 기회는 없을 것일세." 하더니 재빨리 손을 날려 일방을 때렸다. 그가 때려 낸 장의 기 세는 별로 힘을 쓴 것 같지 않았지만 한 줄기 강력한 장풍이 똑바 로 뻗쳐 왔다. 소영은 이 일전의 승패의 결과가 나중에 매우 크게 나타날 것이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추호도 행동을 소홀히 하지 않고 몸을 재빨리 날려서 그것을 피했다. 북천존자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조심해라!" 하더니 오른손을 갑자기 금나수법으로 바꾸어 재빠르게 잡아 챘 다. 소영은 다섯 손가락을 반쯤 오그려서 오히려 북천존자의 오른손 목을 향해 쓱 쓸었다. 북천존자는 갑자기 껑충 뛰어 뒤로 물러나며 속으로 놀랐다. "십이난화불혈수(十二蘭花拂穴手)로구나. 그대는 유선자(柳仙子) 를 잘 아는가?" 소영은 그가 단번에 자기가 사용한 무공의 이름을 밝혀 내는 것 을 보자 역시 놀라며 속으로 과연 북천존자의 무학이 심오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대답했다. "그렇소. 유선자는 다름아닌 소생의 사부요." 그 말에 북천존자는 냉소하였다. "그래서 그대가 이처럼 건방지구나." 하더니 두 손에 힘을 더 증가시켜 산을 뒤엎을 듯한 맹렬한 기세 로 공격을 가해 왔다. 소영은 남일공(南逸公)의 연환섬전장법(連環閃電掌法)을 펼쳐 내 어 북천존자의 강력하게 뻗쳐 오는 공세를 맞받았다. 손불사와 무위도장은 어둠 속에서 공력을 잔뜩 모으고 있었다. 그들은 소영이 조금이라도 패배의 기미를 보이면 재빨리 출수하여 그를 구해 낼 심산이었다. 두 사람의 짐작으로는 북천존자의 명성으로 보아 소영이 삼십 초 식을 넘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실제는 두 사람의 예상을 크게 뒤엎고 소영은 북천존자와 오십 초식을 겨루면서도 여 전히 막상 막하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남일공의 연환섬전장은 웅휘신속한 장점이 있어서 적을 공격하기 에 가장 알맞았고 유선자의 십이난화불혈수는 가벼움과 기이함을 장점으로 갖고 있었으므로 적의 공격을 막기에는 매우 적합했다. 소영이 이렇게 적당한 두 종류의 무공을 전개하니 그의 수법은 완전무결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신속한 공격이었고 당대의 가장 절 묘한 수비였다. 북천존자의 공세도 날카롭고 맹렬했지만 그는 소영의 번개같이 빠른 호신 장영(掌影)만 뚫을 수 있었을 뿐 소영의 그 절묘한 불혈 수법에 의해 중도에서 불가불 기세를 거두어야 될 형편에 이르렀 다. 두 사람은 근 백 초나 겨루었는데 일장도 정면으로는 맛서지 않았다. 그러기에 싸움은 더욱 흉험하여 놀랍도록 기묘하고 날카로 웠다. 쌍방은 다시 몇 초식을 더 겨룬 다음 북천존자가 갑자기 장을 거 두고 뒤로 물러났다. 소영은 처음 북천존자와 싸움을 시작할 때 다소 심중으로 두려운 생각을 가졌으나 수십 초식을 겨루고 보니 담력이 차츰 생겨났다. 그리고 공격과 수비에도 더욱 익숙해져서 자신만만하게 대항했다. 그런데 갑자기 북천존자가 장풍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 닌가. 손불사는 무위도장과 서로 얼굴을 쳐다 보고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사람은 비록 한 마디의 말도 교환하지 않았으나 심중으로는 똑같이 소영의 무공에 감탄했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 던 것이다. 이 절세의 소년 영걸에 대하여 이미 무위도장은 마음이 기꺼워 감탄의 눈으로 잠잠히 소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북천존자의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그대가 사용한 장법은 나의 추측이 맞는다면 아마 남일공의 연 환섬전장법일 것이다." "그렇소이다. 존자는 과연 지식이 넓군요." "그대가 남일공과 유선자라는 중원 무림의 양대 고수의 절예를 겸비하였으니 지극히 짧은 시간 안에 강호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 었던 것이 당연하구먼." "존자께서 또 과찬하시는군요." "허나 내게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는데 좀 물어 봐야겠군." "예, 무엇이든지 물으십시오." "수십 년 전에 나는 남일공과 장법 시합을 해 보았고 또한 유선 자와도 무공을 겨루어 보았는데 그 무렵 나는 그들보다 약간 무공 이 높았었지." 소영은 그가 자기의 의부의 위명을 더럽히는 말을 꺼내자 황급히 가로막았다. "소생이 보는 바로는 존자의 말씀이 확실치 않은 것 같소이다." 그러자 북천존자는 노여워했다. "내가 어떠한 신분인데 함부로 거짓말을 조작해서 말할 것 같은 가?" 소영도 기를 쓰고 의부를 위하여 반발하려고 하자 손불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대협, 북천존자의 말을 먼저 듣도록 하시오." 소영은 그의 말에 억지로 분을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존자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소생은 귓전으로 흘려 듣 겠소이다." 북천존자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남일공의 연환섬전장법은 꼭 이십 년 이상 의 연마를 쌓아야만 비로소 웅휘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 을 알고 있는 바이네. 그런데 그대는 나이가 매우 어려 태어날 때 부터 무공연습을 했다 치더라도 이러한 공력을 지니기 어려운데 어 째서 이처럼 놀라운 실력을 갖고 있는지 이 점이 도저히 이해가 가 지 않는구먼." "소생은 장력이 사부의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함을 스스로 알 고 있는데 존장께서 과장하시는군요." "그대의 장력으로 말하자면 내가 과거의 남일공과 싸울 때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지. 그러나 그 무렵의 남일공은 장년이었으므로 그의 장력도 이미 삼십여 년의 수련을 쌓았을 때였지." 손불사가 말을 받았다. "천부의 소질이 다르니 개인마다 그 성취도 자연 차이가 있는 법 이오." 북천존자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에게 물은 것이 아니오!" 손불사는 핫핫 웃었다. "이 늙은 몸이 남의 일에 한몫 잘 끼여든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알고 있소이다." 이때 소영이 급히 말을 받았다. "존자께서 이처럼 불초에게 물으시는 것은 대관절 무슨 속셈에서 요?" "나는 거듭 생각해 보아도 풀 수가 없어서 물어 본 것 뿐이니 속 셈이라는 말은 부당한 말일세." "소생 역시 시원한 대답을 드릴 수 없군요. 존자께서 꼭 대답을 들으시겠다면 소생의 사부님의 전수가 훌륭했기 때문일 것이외다." "그대의 장력 속에 남일공과 다른 점이 또 있는데 내가 밝혀 내 지 않는다면 그대도 아마 모를 것일세....." 소영은 속으로 그런 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즉시 입을 열었다. "소생은 자각하지 못하오나 만약 그런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소생이 사부님만큼 정묘하지 못하다는 것이겠지요." "남일공의 장력은 강한데 비해 그대의 장력 속에는 강한 속에서 도 부드러움이 있더군." '내가 수련한 내공은 사부님과 다르기 때문에 발휘하는 장력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소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겉으로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지만 심중으로는 북천존자의 넓은 견식에 매우 감탄해 마지 않 았다. 북천존자가 입을 열었다. "만일 그대가 단지 남일공의 섬전장법만으로써 나의 공세에 항거 하였다면 삼십 초식 안에 나는 그대의 혈도를 명중시킬 수 있었지.. ...." 소영은 당장 말을 받았다. "그럼 존자께서는 아까 사정을 봐 주셨단 말인가요?" "그것도 아니지. 다만 그대는 유선자의 십이난화불혈수를 사용함 으로써 나의 정묘한 금나수법의 위력을 발휘 못하게 했기 때문일 세." "아, 그랬었군요." "나는 또 한 가지, 그대에게 알려 줄 게 있지. 그 십이난화불혈 수는 당대의 무학 중에서 가장 절묘한 수비의 무공이라 나를 제외 하고는 그것을 깨뜨릴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네....." "존장의 말씀을 들으니 틀림없이 이 초식을 파괴시키는 방법을 알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그렇지. 내가 만약 그 십이난화불혈수를 깨뜨리지 못한다면 세 인들이 나를 북천존자라고 칭해 준 것이 헛되지 않은가?" 소영은 속으로 이 사람의 견식이 매우 심오한 것으로 보아 틀림 없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북천존자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제의하겠는데 그대는 그것을 마음대로 결정하여 선택하게." 소영은 이 사람은 비록 건방지기는 하나 왜 마음이 넓다고 생각 했다. 그는 즉시 대꾸했다. "존자께서 무슨 가르치심이라도?" "나는 여태껏 한평생 남과의 싸움에서 이번처럼 백 초 이상을 넘 긴 적은 딱 두 번뿐이네. 이번이 세 번째이지. 그대 같은 후배가 이러한 놀라운 공력을 지니고 있다니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 네그려." 소영의 웅심은 꿈틀하였다. 그러나 표면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빛 을 띠고 담담히 웃기만 했다. "소생은 듣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더 이상 칭찬을 말아 주십시 오." 북천존자의 낯빛이 일변했다. "좋아, 기왕에 그렇다면 나도 번거로운 말은 빼고 간단히 하겠 네." 하고 소영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천하의 무공 중에 동시에 연환섬전장법과 십이난화불혈수를 상 대할 수 있는 장법과 권법은 극히 드물지. 그러기에 나는 비록 파 괴할 능력은 있으나 완벽하게 내 마음대로는 발휘할 수 없는 것이 네. 그러니 그대의 목숨을 뺏거나 중상을 입히게 될지도 모르지. 왜냐하면 점혈과 금나수법으로는 절대로 십이난화불혈수를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네." "상관 없소이다. 소생에게 중상을 입히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 생의 무예가 훌륭치 못한 탓이니 원망은 않겠소." "그렇게 되면 나의 본의와는 다르게 되는 것일세. 뜻은 어디까지 나 그대를 다치지 않게 사로잡아서 그대를 미끼로 내 딸을 돌아오 게끔 유인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니, 만약 자네를 일장에 죽 여 버리면 나의 본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결과가 되지 않나?" "하늘은 음양이 있고 달 역시 컸다 작았다 하지 않소이까? 세상 일에는 반드시 십전십미(十全十美)의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외다. 존자의 생각은 비록 그렇지만 힘이 달리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내게는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대가 응할는지 모르겠구먼." "무엇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그대가 만약 스스로 나의 적수가 아님을 알고 순순히 묶인다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도 있고, 한편 내 뜻에도 부합되니 좋지 않은 가?" 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깝게도 소생은 죽음을 두려워할 소인이 아니오. 존자의 호의 를 미안하지만 받아 들이지 못하겠소이다." 북천존자는 벌컥 화를 냈다. "고집이 센 녀석이군! 자아 내 장을 받아라!" 하며 손을 휘둘러 맹렬히 뻗쳐 왔다. 이 일장은 종전의 기세와 크게 달라 장풍이 닿기도 전에 이미 한 줄기 뼈를 에는 듯한 찬기 운을 동반한 암경이 곧장 밀려 왔다. 소영은 흠칫 놀라며, '이것이 대체 무슨 무공이기에 이렇게 한랭할까?' 하고 생각하며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일장을 맞부딪쳤다. 쌍방의 장세가 마주치자 전신이 갑자기 오싹해짐을 느꼈다. 북천존자는 냉랭하게 다시 외쳤다. "이 초식은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절예라고 장담하는 현빙장(玄 氷掌)이라네. 일류 강호 고수들도 열 장을 받아 넘기기 어려운 것 일세." 그는 연방 양손을 휘둘러 다시 이장을 뻗쳐 왔다. 소영은 이를 악물며 양손을 함께 날려 다시 그 이장을 받아 냈 다. 이 이 장 속에 섞여 있는 음랭한 기세는 조금 전의 일장보다 더 심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도 슬그머니 놀랐다. 소영은 등골이 오싹하도록 한랭한 장풍과 계속 맞선다면 급기야 는 그 추위에 손발이 얼어붙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두려운 느낌마 저 들었다. 북천존자는 크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과연 대단하군, 연거푸 나의 삼장을 받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으니....." 오른손을 다시 강력히 뻗치자 말할 수 없이 차가운 냉기가 엄습 해 왔다. 그는 일장 또 일장 쉴 새 없이 공격을 가해 와 소영으로 하여금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묘안을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소영은 할 수 없이 다시 손을 들어 연거푸 그 공세를 받아 냈는 데 전신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떨었 다. 북천존자는 양손을 연속 휘둘러 각기 삼장을 다시 때렸다. 소영은 좌우로 막으면서 계속 여섯 초식을 받았다. 북천존자는 손을 멈추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의 현빙장의 힘이 어떤가?" 이때 소영은 내력에 한 줄기 기이한 추위의 엄습을 받고 수족의 움직임에 부자유를 느꼈다. 그는 내심 크게 놀라며 또한 격분하였다. "이렇게 사문에 속하는 무공으로써 설사 이긴다고 하여도 정식의 무공시합으로는 이길 수 없소!" "나는 수십 년의 고련을 거쳐 놀라운 기술을 터득하였고 이것을 나보다 먼저 연마해서 성공한 사람이 없으니 마땅히 무림 백대에까 지 전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사문에 속하는 것으로 단정하는가?" 소영은 자신의 몸을 엄습한 한기가 갈수록 심해지고 전신의 근육 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빳빳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어 다 시 그와 맞붙기는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여기서 패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억지로 진기를 모 으고 수라지력(修羅指力)을 운기하며 일면으로는 왼손을 품 속에 넣어 은환(銀環)을 꺼내 들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존자는 유선자의 십이난화불혈수가 절묘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 분에게 또 무슨 절기가 있는지 알고 계시오?" "그녀의 십이난화불혈수 외에 또 무슨 놀라운 무공이 있는지 나 는 알 수 없구먼." 소영은 입가에 냉소를 띠며 말했다. "소생이 존자에게 시범적으로 보여 드릴 테니 보시겠소?" "좋아. 한번 견식하고 싶군 그래." "그럼 먼저 유선자의 암기 수법을 견식하시오." 하고 날쌔게 왼손을 날리자 한 줌의 은환은 유성같이 날아가 북 천존자의 상, 중, 하 각체의 대혈을 각각 노렸다. "만천화우(滿天花雨)의 암기수법이 뭐가 그리 신기한가?" 하고 자신만만하게 껄껄 웃더니 재빨리 양손을 뻗치자 강력한 힘 이 세차게 밀려 나와 은환이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 힘에 의해 각도가 빗나가 제멋대로 날아 갔다. 그런데 북천존자가 암기를 격 퇴시키는 바로 그 순간 소영이 크게 소리치며 몸을 솟구쳐 올리더 니 전력을 다해 수라지력을 뻗쳐 냈다. 북천 존자는 마침 암기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기에 소영이 절학을 펼쳐 내는 것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그에게 한 가닥의 강력하고 비 할 데 없는 지풍이 곧장 엄습해 왔다. 북천존자가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위험을 느꼈을 때는 한발 늦어 날카로운 지풍은 이미 앞가슴의 현기대혈(玄機大穴)에 육박해 있었 다. 그는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려 그것을 피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갈비 사이가 몹시 아파 왔다. 지풍은 마침내 대포혈(大包穴)에 명중했던 것이다. 이 수라지력은 만만한 무공이 아니었으므로 북천존자는 비록 심 후한 내공이 있었지만 역시 견디지 못하였다. 그는 기혈이 위로 끓어 오름을 느끼며 눈앞이 아찔하여 하마터면 땅에 쓰러질 뻔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비범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재빨리 진기를 끌어 모아 울렁이는 기혈을 진압하고 몸을 돌려 재 빨리 달아나 버렸다. 소영도 강제로 운기하여 수라지력의 초식을 전개해서 다행히 성 공은 했지만 그 역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양다리에 힘이 쭉 빠지 며 앞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손불사와 무위도장은 황급히 달려 와서 소영의 쓰러지려는 몸을 부축하고 다급히 물었다. "상처가 대단하오?" 두 사람의 눈에 비친 소영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백지장같이 창 백하였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중얼거렸다. "이것이 바로 유선자의 수라지공이지요....." 한 마디 하더니 그 역시 무위도장의 품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79. 흔들리는 생명 손불사는 소영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져서 기절한 것을 보 자 불같이 노해서 욕설을 퍼부었다. "늙은 괴물아! 어떤 악독한 무공을 썼기에 소대협을 이처럼...."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북천존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노선배님에서는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그 북천존자 역시 중상 을 입고 도주했소이다. 이 일전에서 북천존자도 코가 납작하게 됐 으니까......" 무위도장의 말에 손불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이가 먼저 그놈의 진기를 소모시켰어야 했는데....." "지금은 이미 지난 일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소? 당장 급 한 것은 소대협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이지요." 손불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소영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소 영의 숨결이 매우 약하여 큰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상처가 대단한데......" 손불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무위도장이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이 부상당했다는 것을 외부에 누설시켜서는 안 될 것이 오. 빈도의 생각으로는 이 근처에 조용한 장소를 구해 소대협이 상 처를 치료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는데.... 노선배의 의향은 어떠신 지요?" "좋소. 그렇게 합시다. 만일 심목풍의 귀에 소대협이 부상당했단 말이 들어 가면 그놈은 당장 덤벼들 테니.... 그런데 마땅한 장소 가 있을는지?" 옆에 있던 전엽청이 끼여 들었다. "여기서 이 리 정도 가면 부유한 농가가 한 채 있습니다. 그 집 에서 소대협이 휴식을 취하도록 하면 어떨는지요?" "만일 식구가 많으면 이 일이 누설되기 쉬울 텐테." "그 농가는 매우 부유하지만 가족이 많지는 않습니다. 몇 명의 머슴과 주인 내외, 그리고 딸이 하나 있을 뿐입니다." 무위도장의 물음에 전엽청이 대답했다. "사제가 어떻게 알지?" "소제는 총타주와 함에 그곳에서 이틀 동안 머무르고 있었기 때 문에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우 잘되었군. 노선배님, 소대협의 상처가 매우 중하 니 더 지체할 수 없소이다. 어서 길을 재촉합시다." "그럽시다." 그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즉시 길을 떠났다. 전엽청이 선두에, 무위도장이 뒤에서 보호하며 손불사는 소영을 안고 가운데에 섰다. 세 사람이 경공술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달리니, 이 리의 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하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집은 굉장히 크고 웅장했다. 농가라기보다는 어 느 고관대작의 저택 같았다. 집 앞에서 발을 멈춘 전엽청이 주먹으로 가볍게 대문을 두드렸 다. 잠시 지난 후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더니 솟을대문이 활짝 열렸다. 나타난 사람은 삼, 사십 대의 사나이였는데, 그는 손에 든 초롱 불을 흔들며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한밤중에 웬 사람들이 남의 단잠을 깨우나......" 투덜거리던 사내는 전엽청이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더니 급히 입을 다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전엽청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깨물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전엽청이라는 사람인데 주인 어른에게 좀 뵙고 싶다고 전 해 주셨으면 고맙겠소." 사내는 전엽청의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며 초롱불을 쳐들었다. 전엽청의 얼굴을 살펴 본 그는 공손하게 말했다. "아, 난 또 누구시라구. 바로 전엽청 어르신네였군요." "조형께선 소제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소?" "어르신네께서 너무 겸손하시군요. 저를 조형이라 공대하시니 제 가 그런 칭호를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곧 전 갈하고 오겠습니다." 사내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더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 갔다. 들어 간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노인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노인이 나타나자 전엽청은 얼른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하며 정중 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다시 노장(老丈)께 폐를 끼칠까 해서 찾아 왔습니다.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노장께서는....." "무슨 말씀을.... 잘 오셨소. 우리 집은 방이 너무 많아 걱정이 니 서슴지 마시고 어서 들어 오시오." 노인은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한 옆으로 비켜 섰다. 전엽청이 앞장서 들어 가고 그 뒤를 손불사와 무위도장이 따랐 다. 초롱불을 든 사내는 이들을 안내하며 앞장을 섰다. 넓은 뜰을 지나 한 채의 별관 앞에서 사내는 걸음을 멈추며 전엽 청에게 말했다. "이 방을 쓰십시오. 또 무엇이든 분부하실 일이 있습니까?" "깊은 밤중에 깨운 것만도 죄송한데 무슨 시킬 일이 있겠소? 조 형은 가셔서 쉬십시오." 전엽청의 말에 사내는 오히려 황송한 표정을 지었다. 뒤따라 온 노인은 손불사의 팔에 안긴 소영을 보더니 눈살을 조 금 찌푸렸다. 그는 전엽청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대협, 방은 누추하지만 편히 쉬시오. 그리고 무엇이든 불편한 점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사람을 부르시오. 그럼 난 가겠소." "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노인은 사내와 함께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전엽청은 방문을 열며 감개무량한 듯 입을 열었다. "이 방은 총타주가 상처를 치료하던 방인데, 뜻밖에 우리가 다시 빌려 들게 되었으니....." 손불사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주인은 매우 선량하여 세사의 시비에 끼일 것 같지 않 은데, 어째서 우리같은 강호 인물을 받아들일까?" "그들 부부는 과거에 총타주의 은혜를 입었던 모양입니다." 전엽청의 말에 손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모두 방으로 들어 섰다. 방은 크고 깨끗했으며 방바닥에 는 푹신한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심목풍의 세력권은 귀주(歸州)를 중심으로 수백 리까지 뻗쳐 있 어 우리는 선량한 사람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되겠소. 빈도는 하룻 밤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해 소대협을 치료하겠소. 만일 소대협의 상 처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 될 것 같소이다. 소대 협이 편안히 요양할 수 있으며, 죄없는 사람들에게 화를 끼치지 않 을 장소를 택해야지요." "도장의 말씀이 옳소이다." 손불사는 아랫목으로 가서 소영을 방바닥에 내려 놓았다. 무위도장이 소영의 곁에 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삼제(三弟), 촛불을 이쪽으로 가져 오시오." 전엽청은 이미 손에 촛불을 받쳐 들고 있었다. 그는 소영의 곁으 로 촛불을 가져 왔다. 그 촛불을 받아 들고 소영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 보던 무위도장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소영의 얼굴빛은 시 퍼렇게 변해 있었다. 처음 내상을 입었을 때는 창백하기만 했었는 데 지금은 아예 송장빛이나 다름없었다. "오래 전부터 도장은 의술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는데... 도장에 게는 소대협을 구할 방법이 있겠지요?" 손불사의 말에 무위도장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더니 손을 내밀어 소영의 가슴에 얹었다. 그의 고개가 좌우 로 흔들렸다. "빈도는 자신이 없소." "그렇다면 매우 위험한 모양이구료." "그렇소. 매우 위험하오. 매우 특수한 무공에 의해 상상도 못할 중상을 입었소. 상처를 어디에 입었는지도 모르겠으니 구할 수 있 다고 단정짓기도 매우 어렵고... 하지만, 빈도는 최선을 다해 보겠 소." "도장께서 어떻게 치료할 생각이오?" "지금 소대협의 숨결은 매우 미약하여 곧 호흡이 정지될 것 같 소. 빈도가 일신의 내력으로 소대협의 기혈(氣血)이 순조롭게 유통 되도록 해 보겠소. 그런 후 상태를 봐서 약물을 쓸 생각이오." "이 늙은이는 의술에 대해서는 백지이니 모든 처리를 도장에게 맡기겠소. 아무쪼록 살릴 수 있도록 해 주시오." 무위도장은 무거운 책임감을 의식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빈도가 시험해 보겠소." 무위도장은 소영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는 오른손을 소영의 등에 있는 명문혈(命門穴)에 대고 한 줄기 뜨거운 진기를 들여 보 냈다. 그의 두 눈은 소영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이마에는 땀 방울이 맺혔다. 한동안 방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초조와 긴장을 담은 손불 사와 전엽청의 시선이 두 사람을 지켜 보고 있었다. 소영의 얼굴에 아무런 변화도 없자 손불사가 그의 왼손을 쥐어 보았다. 소영의 손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도장, 명문혈로 진기를 넣어 주는 일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모 양이오. 방법을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 무위도장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더니 소영의 등에서 오른 손을 떼었다. 그는 품 속을 뒤져 두 개의 환약을 꺼내 소영의 입에 넣어 주었다. 소영의 송장같은 얼굴은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을 뿐 만 아니라 입에 넣어 준 약을 삼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손불사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구할 수가 없겠구료." 무위도장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두 손으로 소영의 입을 억지 로 벌리고 약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으로 밀어 넣어 목구멍 으로 넘어가게 한 다음 입을 다물려 주었다. 두 개의 환약을 삼키 고도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초조하게 지켜 보고 있던 손불사가 벌떡 일어서며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틀렸어! 가망이 없어!" 그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더니 무위도장에게 말했다. "도장, 어서 전력을 다하시오. 나는 독수약왕(毒手藥王)을 찾아 오겠소." 무위도장이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의술로 논한다면 그 독수약왕은 고금을 통해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소. 노선배께서 그를 데려 올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 이 어디 있겠소?" "하지만.... 노선배님은 독수약왕의 거처를 알고 계십니까?" 전엽청이 묻자 손불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모르는데......" "노선배님이 그의 거처를 모르시면서 어떻게 데려 오겠다는 것입 니까? 이 넓은 천하에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언제 알아 낼 수 있습니까?" "나도 그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바다에서 바늘을 건지듯 한번 운에 맡기는 것이오. 이따금 우연과 기적도 만날 수 있으니까 , ......" 무위도장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힘없이 말했다. "만일 손을 쓰지 않고 이대로 두면 소대협은 이틀을 넘길 수 없 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손불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도장, 당신은 그를 며칠 동안만 더 살아 있게 할 수 없소?" "빈도가 만일 그럴 능력이 있다면 노선배께서 독수약왕을 찾을 필요도 없겠소이다." 손불사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푹 내쉬더니 처량한 목소리로 탄식을 터뜨렸다. "만일 내가 나서지 않고 소대협을 사해신궁에 머물러 있게 했더 라면 이런 위험은 없었을 텐데....." 손불사는 후회와 고통이 범벅된 착잡한 표정으로 서 있더니 무위 도장에게 물었다. "도장은 어떻게 할 작정이오?" 이 말은 몹시 격한 어조였고 손불사의 눈에서는 파란 불꽃이 튀 는 듯했다. 소영을 살려 내지 못하면 당장 때려 죽이기라도 할 듯 한 표정이었다. 이 표정을 본 무위도장은 가슴 속에서 욱하고 치미 는 것이 있었지만 억지로 누르며 대답했다. "빈도가 다시 침술로써 시험해 보겠소. 만일 침술로도 소대협의 생명 속에 있는 잠재력을 깨울 수 없다면 빈도는 속수무책이오." "그렇다면..... 소대협을 죽일 수밖에 없단 말이오?" "빈도의 능력으론 불가능하오." "그래 당신은 어쩔 셈이오?" 칼날을 품은 듯한 질문에 무위도장은 잠시 침통한 표정을 보이더 니 반문했다. "노선배의 뜻은......" "이 늙은이의 생각 말이오? 소대협은 도장과 이 늙은이의 수중에 서 죽으니 우린 한 줄에 꿰인 생선 드림 격으로.... 당신도 나도 변명을 할 수는 없소." 무위도장은 씁쓸한 미소를 띤 채 침묵을 지켰다. 곁에 있던 전엽청이 대신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의 말씀을 들으니.... 만일 처의 사형에서 소대협의 목 숨을 구하지 못하면 목숨을 변상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렇소. 물론 나, 늙은 거지도....." "노선배님과 저의 사형이 소대협의 뒤를 따르겠다는 뜻입니까?" "후배의 말 속에 걸리는 점이 있군. 따르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 로써 사죄하자는 뜻이지." "그건 공평치 못합니다." 전엽청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손불사의 눈빛에 싸늘한 냉소가 머물렀다. "그렇군. 확실히 공평치 못했어. 후배를 계산에 넣지 않았으니 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소대협은 북천존자의 손에 의해 부상을 당 했잖습니까? 사형이 그의 치료를 맡았다고 해서 꼭 상처를 완쾌시 켜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불가항력이라는 것이 있는데 치료를 못했다고 해서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은 너무 잔인합니다." 손불사는 공허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만일 소대협이 죽는다면 누가 심목풍과 강호에 맞서겠소? 심목풍에게 죽으나 지금 우리 스스로가 죽으나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생명을 아껴 비겁한 인간이 될 것은 무엇 이지?" 전엽청이 다시 항변을 하려는데 무위도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우는 노선배와 입씨름을 치우시오." 그는 손불사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빈도는 관상술을 좀 알고 있는데..... 소대협은 일찍 죽을 상이 아니오." "그 관상을 믿고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것은 아니지요?" 손불사의 질문에 무위도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손불사는 성질이 매우 급했다. 그가 불같은 성질만 누를 수 있었 다면 그의 명성과 무공으로 보아 벌써 개방의 방주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손불사의 이런 성질을 잘 아는 무위도장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선배께서는 안심하시오. 만약에 소대협이 불행하게 된다면 나 는 죽음으로써 무림에 사죄하겠소." 무위도장이 한풀 꺾인 어조로 수그리고 나오자 손불사는 자기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 부드럽게 말했다. "이 늙은이가 성질이 괴팍해서 한두 마디 했을 뿐이니 도장께선 마음에 두지 마시오. 하지만, 소대협이 불행히도 죽는다면.... 내 가 알기로는 적어도 몇 사람은 그의 뒤를 따라 갈 것이 확실하오." 전엽청이 끼여 들었다. "누굽니까?" "첫째..... 그의 부모님." "나이 많으신 분들이 외아들을 잃으면 상심이 클 테니 가능성이 있는 얘기입니다. 그 부모 말고 누가 또 있습니까?" "중주이고가 죽을 것이오." "다음은?" "소대협이 백화산장에서 데리고 나온 금란, 은란 두 낭자." "정말 그럴까요?" 손불사가 화를 벌컥 냈다. "이 늙은이는 세상에 다시 살기를 원치 않고 있는데 어찌 거짓말 을 하겠나? 자넨 어째 그렇게 의심이 많은가? 노부의 말조차 믿으 려고 들지를 않다니......" 전엽청은 얼굴이 빨개지며 무엇이라고 반발을 하려고 했다. 이때 무위도장이 크게 외쳤다. "아우! 불을 잘 비추시오!" 무위도장은 손에 침을 꺼내 들고 있었다. 전엽청은 더 말을 못하고 불을 소영의 가까이로 가져 갔다. 무위도장은 소영의 혈도를 찾아 침을 찌르기 시작했다. 손불사와 전엽청은 숨을 죽인 채 무위도장의 손끝을 주시했다. 마지막으로 걸어 보는 기대에 찬 시선들- 무거운 침묵이 방을 메웠다. 무위도장은 입을 꽉 다물고 한 바늘씩 조심스럽게 찔러 갔다. 그 의 표정은 천 근 바위가 누르는 듯 육중해 보였고 이마에는 땀방울 이 맺혀 있었다. 무위도장이 침으로 소영의 몇 군데 혈도를 찌르고 막 손을 떼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소영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무 거운 한숨이 푸우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추워 죽겠다." 하는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잠꼬대처럼 무의식중에 흘러 나온 말이었다. 그러자 무위도장이 급히 침을 떼며 말했다. "아! 이제 알겠소. 소대협은 북천존자에게서 한기(寒氣)의 공력 을 얻어 맞은 것이오. 지독한 한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인데.... 한기를 쫓는 약을 써서 시험해 보겠소." 손불사는 소영이 큰 내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기뻐했 다. "지금 무위도장이 사용한 침술은 매우 효과가 컸소. 도장께서 몇 군데 더 꽂아 보시지요." "소용 없소. 몸에 차 있는 한기를 몰아내기 전에는 깨어난다 하 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소." "한기를 쫓는 약이 있소?" 무위도장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의 체내에 있는 한기는 보통의 한기와는 다르오. 약도 특 별히 조제해야 될 것이오. 내가 처방을 내어서 두어 첩 지어 오게 하겠소이다." "그렇다면 어서 처방을 내리시오. 이 늙은이가 약을 지어 오리 다." 손불사는 곧 밖으로 나갈 듯한 태도를 취하며 무위도장을 재촉했 다. "날이 곧 밝아 올 테니 잠시 기다렸다 가는 것이 어떻겠소?" 손불사는 버럭 화를 냈다. "인명은 하늘에 달렸다고 하지만, 생과 사의 차이는 머리카락보 다도 가는 것인데 어찌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소? 어서 처방을 지 으시오." "노선배의 말씀은 옳지만, 빈도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약처방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로 알고 있는데.... 무엇을 조심 한다는 것이오? 처방을 내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소대협의 내공은 웬만한 한기쯤은 감히 침입할 수 없도록 높소. 허나 지금 그의 몸에는 한기가 침입해 있소. 이 한기를 몰아낼 처 방은 아무렇게나 내릴 수 없는 것이오. 빈도는 자세히 연구를 하고 나서 처방을 내려야 하겠소이다." 손불사는 마음이 매우 조급했지만, 무위도장의 말을 들으니 그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한기만 쫓아내면 된다기에 당장 치료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 것도 아니구나.... 도대체 북천존자의 무공은 얼마나 높기에 이 소 대협의 내공을 뚫고 지독한 한기를 몰아 넣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는 한기내공을 수련했다더니 빈 말이 아닌 모양이지.' 손불사는 암담한 생각이 들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가 실망 하는 것을 본 무위도장이 입을 열었다. "노선배께서는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 북천존자의 한기내공으로 소대협은 내상을 받았지만 생명이 당장 위급한 것은 아니외다." 손불사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도장,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서 소대협의 생사는 그 개인에 그치 는 것이 아니오. 그의 생사는 전무림의 안위에 직결되는 것이오." "노선배의 말씀은 옳소. 소대협의 생사는 전체 무림의 흥망에 관 계되며, 특히 우리 무당파는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어 우선적으로 타격을 받게 될 것이오. 빈도가 소대협의 생사에 쏟는 관심은, 노 선배가 그에게 쏟는 관심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오." 손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 이 늙은이는 의학에는 전혀 문외한이니 도장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소이다. 아무쪼록....." "염려 마시오. 소대협을 위해서, 빈도의 무당파를 위해서 전력을 다해 구명책을 연구해 보겠소." 말을 마친 무위도장은 입을 꽉 다물고 시선을 허공의 한 점에 못 박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엄숙한 표정으로 무아의 경 지에 몰입된 모습이었다. 소영의 얼굴은 여전히 시퍼렇고 입술은 까맣게 타 있었다. 이것 을 보는 손불사의 마음은 예리한 칼로 삭신을 도려내는 듯 아팠다. 그는 손을 내밀어 소영의 손을 움켜 잡았다. 여전히 얼음장 그대로 였다. '가망이 없겠구나. 이대로 심장까지 꽁꽁 얼어버리면 그만이다.' 손불사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가슴이 메어지는 듯 아프고 목 이 메었다. 이 때였다. 갑자기, 펑! 하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이 소리를 들 은 손불사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머리가 번쩍 쳐들어졌다. "이게 무슨 폭음이오?" 놀라 묻는 말에 전엽청이 대답했다. "경보입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몸을 일으켜 방을 뛰쳐 나갔다. 무위도장은 전혀 그 소리를 못 들은 듯 여전히 깊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방으로 다시 들어 온 전엽청이 무위도장의 팔을 흔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형! 경보가 울렸는데.... 아마 강적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바위처럼 굳어 있던 무위도장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경보가.....?" "그렇소. 강적이 이미 초수를 건너 오고 있을 것이오." 무위도장은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손불사를 향해 입을 열 며 몸을 일으켰다. "노선배께서는 여기에 계시며 소대협을 보호해 주시기 바라오. 빈도와 전사제가 동정을 살피고 오겠소이다." "아니오. 이 늙은이도 도장과 함께 갑시다. 전사제가 이곳에 남 아 소대협을 보호토록 합시다. 만일 북천존자가 나타났다면 이 늙 은이가 그 놈의 목줄기를 따 놓고 말겠소이다." "북천존자는 무거운 부상을 입고 달아났기 때문에 이곳에 다시 나타나지 못할 것이오. 빈도가 생각하기로는 심목풍이 부하들을 이 끌고 이곳까지 추격해 왔을 것 같소." 무위도장은 다급함을 누를 수 없어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전엽청이 그 뒤를 따르려는 것을 손불사가 저지했다. "후배! 자네는 여기에 남아서 소대협을 보호하게! 늙은이가 무위 도장과 함께 갔다 올 테니...." "그건....." 전엽청의 말을 가로막고 무위도장의 음성이 뛰어 들었다. "손선배는 무공이 아우보다 고강하여 어떤 강적과 만나도 싸울 수 있소. 아우는 남아 있는 것이 좋겠소." 무위도장의 말소리는 차츰 가늘어지더니 나중의 몇 마디는 잘 들 리지도 않았다. 전엽청이 결정을 못 내리고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에 손불사의 몸은 이미 방에서 뛰쳐 나가고 있었다. 그는 훌쩍 솟 아 오르더니 지붕 너머의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휴! 어쩔 수 없군." 전엽청은 방문을 닫고 의자를 가져다 소영의 곁에 앉았다. 송장이나 다름없는 소영과 단둘이서 방에 앉아 있자니 마음이 초 조했다. '누가 나타났을까? 심목풍일까? 소영은 어찌되는 것일까?' 전엽청이 초조해 하고 있는데 소영의 입에서, "아이, 추워.... 아아, 추우워....." 하는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엽청이 급히 이불을 꺼내서 소영 의 몸을 덮어 주었다. 이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바람이 휙 몰려들었다. 촛불이 꺼질 듯 흔들리고 불 그림자가 어지러이 어른거렸다. 전엽청은 급히 몸을 돌리며 장검을 뽑아 들었다. 문 앞에 나타난 사람은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머리는 궁괄을 했고, 가슴엔 금빛 꽃을 수놓았으며 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방으로 들어 섰다. 나타난 부인을 본 전엽청은 장검으로 앞 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금화부인이군요?" "그래요." 금화부인은 소영을 힐끗 바라 보며 전엽청에게 물었다. "그의 상처는 어때요?" 전엽청은 눈을 치뜨며 장검을 휘둘렀다. 한 줄기의 검광이 무지 개를 그려 냈다. "소대협은 비록 적과 싸울 힘이 없지만 나 전엽청이 여기에 있으 니 당신이 그를 해칠 수 없을 것이오." 금화부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전엽청을 바라 보더니 소영에게로 다시 눈길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에는 숙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소영을 잠시 바라 보던 금화부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그에 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를 본 전엽청은 장검을 휘둘러 한아름의 검광을 일으키며 강한 어조로 소리쳤다. "멈추시오!" "멈추시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들여 놓았다간 내 칼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금화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전엽청을 노려 보더니 여전히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나를 화나게 하지 말아!" "화나게 하면 어쩔 테냐!" 전엽청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금화부 인은 입가에 보일 듯 말듯 한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백선아(白線兒)의 위력을 보여 주지." "백선아라니.....?" "천하에서 가장 괴상하고 가장 독한 독사의 일종이지, 날개가 돋 친 듯 화살처럼 빠르게 행동하며, 몸뚱이는 강철같이 단단해서 어 떤 무기로도 상대하기 힘들지." "그런 뱀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 "믿어지지 않다니.... 그 독사의 맛이 어떻다는 것을 전파한 사 람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아직 그 독사의 맛을 두 번 볼 수 있 는 기회를 가진 사람이 없었으니까....." "나는 환자를 해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다만 그의 상처가 어느 정도나 되나 살펴 보고 싶을 뿐이다." "흥, 내가 어떻게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있지?" 전엽청이 싸늘하게 말하며 다시 장검을 휘두르자 금화부인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품 속에서 하나의 옥합을 꺼내며 차 갑게 말했다. "그대는 내 동생과의 감정이 어떤가?" "누가 당신의 동생이지?" 금화부인은 턱으로 소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누워 있는 소영!" 전엽청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좋은 편도 나쁜 편도 아니다." 금화부인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옥합을 도로 넣었다. "내가 만일 그대에게 이 독사를 풀어 죽게 만든다면 후일 소영이 나를 원망할 것이다. 그래서 화를 누를 수밖에 없겠다." "흥,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전혀 없을 텐데....." 금화부인은 말 없이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한 어조로 말했 다. "나는 시간이 없는 사람이니 그대는 분명히 대답하라. 우리가 서 로 싸우지 않고서 내가 내 동생의 상처를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이 없겠나?" "당신이 정말 소대협을 해칠 생각이 없다면.... 그의 상처를 보 는 것은 허락할 수 있지. 그러나....." "빨리 말해. 난 바쁘니까." "내가 아직도 당신을 믿을 수 없으니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겠 어. 내가 당신의 몇 군데 혈도를 찔러 당신이 공력을 사용할 수 없 게 해 놓고 만일 당신이 소대협을 해치려고 하면 내가 즉시 제지할 수 있도록 해 주면 허락하지." 금화부인은 미묘한 운음을 살짝 지어 보이더니 차갑게 말했다. "좋다. 어서 손을 써라." 그녀는 두 눈을 감으며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전엽청은 재빨리 왼손을 뻗쳐 그녀의 몇 군데 혈도를 찔렀다. 금화부인은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되었나?" "이제 그를 살펴 봐도 좋소. 하지만 몸을 건드려서는 안 되오. 만일 손가락 하나만 건드려도 가만 두지 않을 테니 그냥 보기만 하 시오." 전엽청이 공대를 하며 옆으로 한 걸음 비켜 섰다. 금화부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전엽청을 쏘아 보더니 소영의 앞으 로 걸어 갔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소영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 보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상처가 대단히 깊구료." "대단하오."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북천존자요." 금화부인이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허공을 응시하더니 무거운 음성을 입술 사이로 밀어 냈다. "그의 현빙장력은 위력이 대단하며, 그가 지은 약이 아니고서는 한기를 몰아 낼 약이 없는 것인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오. 나의 사형은 의술에 정통하니 한기를 몰아 낼 방법이 있소." "무위도장의 의술은 한계가 있지." 금화부인이 냉소를 띠며 말하더니 소영에게서 몇 걸음 물러 섰 다. 그녀는 두 팔을 전엽청에게 내밀며 말했다. "어서 내 혈도를 풀어 주게. 나는 북천존자를 찾아가서 해독약을 받아 와야겠어." 전엽청은 금화부인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을 내밀 어 금화부인의 혈도를 풀어 주며 물었다. "북천존자의 무공은 대적할 만한 사람이 지극히 드문데, 당신이 그에게로 약을 구하러 가다니, 그것은 스스로 그의 함정 속으로 뛰 어드는 결과일 텐데 당신은 자신이 있소?" 혈도가 풀리자 금화부인은 팔을 몇 번 굽혀 보더니 차갑게 말했 다. "그건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전엽청은 대꾸할 말을 잃어 입을 다물었다. 금화부인은 문을 향해 걸어 나가며 말했다. "내 동생을 잘 보살펴 주게. 내가 북천존자에게 다녀올 테니... 만일 내일 삼경이 되어도 내가 돌아 오지 않으면 더 기다릴 필요가 없네." "멈추시오!" 전엽청이 소리치자 금화부인은 걸음을 멈추며 그를 돌아 보았다. "또 무슨 볼 일이 있나?"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소." "무언가? 난 바쁜데....." "조금 전에 호숫가에서 경보가 울렸는데 당신과 관련되어 있소?" 금화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심목풍이 고수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추격해 왔지. 그들의 추격 을 알리는 경보였을 걸세." 금화부인이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려는데 다시 전엽청이 말을 걸 었다. "또 한 가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소." "지금 나에게는 일 초가 천금보다 중하다. 할 말이 있거든 빨리 해라!" 금화부인이 어투를 바꾸고 짜증섞인 투로 말하자 전엽청이 다급 히 물었다. "당신은 소대협이 상처를 입고 이곳에서 요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쫓아 왔소?" "그대들이 결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가까운 곳에 숨어서 지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심목풍도 역시 소대협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군요? 그래서 쫓아 오고 있는....." "만일 심목풍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벌써 이곳으로 쫓아 왔을 것 이다. 그는 다만 사방으로 찾아 다니고 있을 뿐이야." 전엽청이 다시 물어 볼 기회도 주지 않고 금화부인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어깨가 약간 움직이는 것 같더니 지붕 너머 로 사라져 버렸다. '약을 구하겠다고 북천존자에게로 가는 정성과 용기는 좋지만, 글쎄..... 구할 수 있을까?' 전엽청은 금화부인이 사라진 어둠 속을 멍하니 바라 보다가 방문 을 닫았다. 소영의 곁으로 가서 앉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금화부인의 말은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심목풍은 정 말 여기까지 추격해 온 것일까? 많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면 사형과 손불사가 당해 낼 수 있을까? 지금쯤 치열한 결전이 벌 어졌겠지. 소형만 아니었다면 달려 가 보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 전엽청은 마치 바늘 방석에 앉은 듯 마음이 불안했다. 방안에 깔 린 숨막힐 듯한 답답한 공기와 송장같은 소영의 안색이 그를 몹시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대로 달려가 볼까? 아니 그러다 만일 누구에게 소영이 납치당 하거나 목숨이 끊기는 날이면....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 있자니 답 답하기만 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전엽청이 사뭇 불안해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굴까?' 전엽청은 촛불을 끄고 장검을 뽑아 들었다. 방문 옆의 벽에 찰싹 등을 붙이고 선 채 그는 적의 침입을 기다렸다. '어떤 놈이든 나타나기만 해 봐라. 단칼에 모가지를 하늘로 날려 보낼 테다. 필경 심목풍의 패거리겠지.' 잔뜩 긴장한 채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전엽청의 눈은 날카롭 게 빛났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진 채 오른 손엔 장 을 꽉 움켜 쥐고 있었다. 이 때였다.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 왔다. "소대협의 상처는 어떤가?" 그것은 손불사의 음성이었다. 전엽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장검을 칼집에 꽂았다. "여전합니다." 문이 열리며 손불사가 천천히 들어 섰다. 전엽청은 부싯돌을 그어 촛불을 켰다. "노선배님은 심목풍을 만났습니까?" "만났네." "저의 사형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째서 혼자 오셨지요?" 손불사는 소영의 곁으로 다가 서며 대답했다. "도장은 호수를 건너 군호(群豪)들과 회합 장소에 갔네." "심목풍과 싸웠습니까?" "만일 그와 싸웠다면 이 늙은이가 멀쩡한 몸으로 돌아올 수는 없 었겠지." 전엽청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심목풍은 우리들을 해치려고 나타난 것이 아닙니까? 원수끼리 만났는데 어떻게 싸움이 없었지요?" "흐흐, 늙은이 역시 어떻게 된 것인지 이상하기만 하군. 마치 여 우에게 홀린 것 같기도 하고, 아마 이 늙은이의 목숨이 아직 죽을 때를 만나지 않은 모양이지?"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전엽청이 답답하다는 듯 묻자 손불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설 명했다. "이 늙은이와 무위도장이 함께 달려 갔을 때 심목풍은 호숫가로 올라 오고 있더군. 서로 몇 마디 주고 받는 사이에 이미 우리는 심 목풍의 무리들에게 포위를 당했지." "그래서요?" "일촉즉발 곧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려는 긴장된 순간이었 는데 어디서인가 기이한 악기소리가 들렸네. 그것은 퉁소소리 같기 도 하고 비파소리 같기도 하고....." "그건 누가.....?" "모르지. 아무튼 그 소리가 들리자 심목풍은 낯빛이 변하더니 급 히 철수하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하더군. 심목풍은 허둥지둥 달아나 버렸는데.... 일이 그처럼 괴상하고 간단하게 끝날 줄은 이 늙은이 도 미처 몰랐네. 어떻게 된 것인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야." 전엽청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렇다면 그 악기소리가 저희들을 도와 주었군요." "글쎄 아마 무위도장도 영문을 모를 걸세." 손불사는 소영의 얼굴을 내려다 보더니 전엽청에게 물었다. "여기에선 아무 일도 없었나?" "금화부인이 왔었습니다." "금화부인이?" 손불사는 머리를 돌려 전엽청을 바라 보며 물었다. "그녀가 어떻게 소대협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북천존자와 격투하는 장면을 숨어서 보았답니다." "그렇다면 소대협과 북천존자가 싸우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가 여 기까지 추격해 왔단 말인가?"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 요부는 전신의 구석구석에 독을 숨기고 있는데.... 그녀가 소대협의 몸을 건드린 적이 있었나?" "제가 곁에서 지키고 있어서 건드리지는 못했습니다." 손불사가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금화부인은 건방지고 고집이 세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데다 가 무공도 자네보다도 높은데 어떻게 자네의 말을 듣고 손을 대지 못했단 말인가?" "제가 먼저 그녀의 양팔에 있는 혈도를 찍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만 소대협에게 접근시키겠다니까 순순히 응하더군요. 그래서 그녀 는 소대협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손을 대었다면 저는 힘들이지 않고 그녀를 처치할 수 있었으니까요." 손불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물었다. "다음은?" "그녀가 소대협의 상처를 살피고 난 후 제가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어 보냈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떠나면서 남긴 말은 없었나? 다시 오겠다던가 하는...." "있었습니다." 전엽청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소대협을 위해서 해독약을 구해 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 습니다. 내일 밤 삼경 이전에 꼭 돌아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서 약을 구해 온다고 하던가?" "북천존자에게서요." 손불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금화부인의 무공은 상당하지만 북천존자의 적수로는 어림없지." "그녀의 진지한 표정이나 어조로 보아 거짓말 같지는 않았습니 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어째서 소대협에게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건 나에게 물어 보았자 소용없는 질문이네." 전엽청은 손불사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개 를 숙인 채 한동안 말이 없더니 몸을 돌이키며 말했다. "노선배님은 여기서 잠깐 기다리십시오. 제가 사형을 마중가겠습 니다." "가게!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손불사는 말을 끊고 잠시 소영에게로 눈을 주더니 다시 이었다. 80. 기사회생 "이 늙은이가 생각컨대 소대협은 내일 삼경까지 숨이 붙어 있을 것 같지 않네. 무위도장을 만나거든 속히 이리로 오라고 하게. 소 대협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속히 어떤 방법을 강구해야 될 테 니까....." "네,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전엽청은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곧 몸을 돌려 뛰어 나갔다. 전엽청이 나가자 손불사는 소영의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 엎드린 채 의식을 잃고 있는 소영의 얼굴은 방문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 것이 사람의 얼굴일까 의심할 정도로 창백했다. '나 때문이다. 내가 끌어 내지 않았다면 이런 변을 당하지는 않 았을 텐데.....' 손불사의 심정은 지극히 괴로웠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 과 바꿔 소영을 살려 내고 싶을 정도였다. 긴 겨울밤을 손불사는 소영의 곁에 앉아 뜬눈으로 밝혔다. 불안 과 초조 속에서 밤을 새우며, '혹시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나?' 하고 몇 번이나 소영의 손목을 잡아 보곤 했다. 가늘게 뛰는 맥 박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다가 또 불길한 생각에 맥을 짚어 보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날이 밝자 하인이 조반을 가지고 왔다. 산해진미가 상 위에 가득 했지만 손불사는 몇 수저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입이 깔깔해서 식 욕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소영의 손발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더 욱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산 송장이나 다름없구나.' 손불사는 안절부절 못하고 들락날락했다. 기다리는 무위도장은 오지 않고 소영의 신색은 더욱 송장으로 변해 가니 그의 조바심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바짝 타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점심 때가 가까울 무렵에야 무위도장이 총총걸음으로 나타났다. 손불사의 눈에 제일 먼저 띈 것은 무위도장이 손에 들고 있는 약봉 지였다. "이리 주시오." 손불사는 빼앗듯이 약봉지를 받아 들고 부엌으로 나갔다. 약탕관 을 빌려 손수 부채질을 하여 약을 달이면서도 그는 땅에 궁둥이를 붙이질 못했다. 약을 달여 들고 들어 선 손불사는 무위도장과 협력 해서 소영에게 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숟갈로 입을 벌려서 약물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소영의 코를 쥐어 입으로 숨을 쉬게 하면서 한동안이나 실랑이를 벌인 끝에야 겨우 약을 모두 먹일 수 있었다. '두 첩의 약을 한꺼번에 달여 먹였으니 다소 정신이 들겠지.' 두 사람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소영을 주시했다. 기대를 갖 고 가슴을 태우던 이들은 차츰 실망하기 시작했다. 약을 먹인 지 한 시진이 지났으나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두 첩의 약은 바다에 버린 한 바가지의 뜨물만한 구실도 못한 결과가 된 것이다. "도장, 약을 잘못 지은 것이 아니오?" 손불사가 절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무위도장은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무겁 게 대답했다. "빈도가 처방한 후 직접 약재를 검사했는데 모든 약재는 그 질이 나 분량에 있어서 조금도 틀리지 않았소." "그렇다면 소대협에게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무위도장은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이라기보 다 우는 표정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했다. "아마 빈도의 의술이 빈약하여 처방에 잘못이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이제 기대할 곳은 금화부인밖에 없겠구료." "만일 금화부인이 북천존자에게서 약을 구해 올 수만 있다면 소 대협의 생명은 아무런 위험도 없지요." 무위도장은 금화부인이 이곳에 다녀 갔다는 말을 전엽청에게 들 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만일 약을 구해 오지 못한다면?" 손불사의 날카로운 물음에 무위도장은 더듬거렸다. "그건..... 그렇게 된다면....." "그건 어떻다는 거요? 금화부인만 믿고 우리는 소대협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으라는 말이오?" "참으로 부끄러운 얘기지만 금화부인이 해독약을 구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소. 빈도의 의술로는 이제 방법이 없소." "음....." 손불사는 쓴침을 삼키며 신음을 흘렸다. 그의 표정은 몹시 우울 했으며 아랫 입술을 꽉 깨문 채 허공을 노려 보는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손불사가 착 가라앉은 음 성을 잇자국이 난 입술 사이로 밀어 냈다. "북천존자가 어떤 인물인데.... 금화부인의 무공으로는 해독약을 구해 올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지. 생사는 운명에 달렸으니 이 늙 은이는 그 누구도 나무랄 수 없고.... 도장,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는데......" "말씀하시오." "금화부인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 소대협의 생명을 살려 낼 다른 방법은 정말로 없겠소?" 무위도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는 아무리 머리를 짜 봐도 뾰죽한 수가 없군요." "허허, 딱한지고..... 도장, 무림에서 누구의 의술이 제일 높소? 북천존자의 손을 빌리지 않고 해독약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없겠 소?" "빈도가 알기로는 우선 독수약왕밖에 꼽을 수 없겠소. 독수약왕 이라면 해독약을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들 사이에는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무위도장이 침묵을 깨뜨리고 입을 열었다. "빈도의 생각으로는 금화부인이 나타날 삼경까지만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소. 만일 금화부인이 그 때까지 약을 구해 오지 못하면 달리 방법을 연구합시다." "도장의 말뜻은 알겠소. 허나 금화부인은 북천존자의 적수가 못 될 뿐만 아니라, 설혹 그녀가 약을 구할 수 있다 치더라도 약속시 간까지 나타나긴 힘들 것이오." "그렇지 않소. 금화부인이 만약 약을 얻을 수만 있다면 전력을 다해 달려 올 것이오." 자신있게 말하는 무위도장을 바라 보며 손불사가 의아한 듯 물었 다. "어떻게 확신하오?" "금화부인은 소대협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소. 그녀가 소대협을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어젯밤의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녀가 직접 손을 쓰기가 곤란했다면 심목풍에게 알려 자객을 보낼 수도 있었잖겠소?" 손불사는 잠깐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도장의 뜻은.... 오늘 밤 삼경까지 기다린 후 다시 결정을 짓자 는 것이오?" "지금 형편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소." "할 수 없구료. 그럼 삼경까지 기다려 봅시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소영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했다. 죽은 것 이나 다름없는 산 송장을 놓고 확신도 없는 기다림으로 시간을 보 내려니 그 지루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손불사의 모습은 뜨거운 솥에 떨어진 개미와도 같았다.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했다. 수십 번이나 들락거리 고 그러다간 소영의 손을 쥐어 보고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손불사가 초조함을 감추 지 못해 들락거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무위도장은 한 곳에 앉아 눈을 감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야 손불사에 못지 않겠지만 그는 자기의 감정을 누를 수 있는 자제력 을 지니고 있었다. 어둠이 깃을 벌리고 그 한 가닥이 방에까지 밀려 들자 무위도장 이 초에 불을 밝혔다. 소영의 몸은 더욱 차가워졌고 숨결 또한 얼 른 분간하지도 못할 정도로 가늘어졌다. "도장! 소대협이 이 밤을 넘길 것 같소?" 손불사가 소영의 곁에 엉거주춤 앉으며 물었다. 무위도장은 소영 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아주 약하게 뛰고 있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렵겠구나. 어쩌면 삼경 안에 덜컥 숨이 멎을는지도 모르겠다.' 무위도장은 다시 소영의 맥박을 짚어 보고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 어 보았다. '잘하면 삼경은 넘길 것 같은데.... 문제는 금화부인이 해독약을 구해 올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가망이 없겠구 나.' "소대협의 내공이 매우 깊으므로 비록 중상은 당했지만 이, 삼 일은 무난히 견딜 것이오." 손불사는 소영에게 눈을 둔 채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도장, 그게 정말이오? 이 늙은이를 안심시키려는 거짓말은 아니 오?" "사실이오. 혹시 맥을 잘못 짚었다면 몰라도 나는 조금도 거짓말 을 하지는 않소." 무위도장은 정색을 하고 말했지만 -맥을 잘못 짚었다면 몰라도- 라고 한 말은 뒷길을 터 놓은 말이었다. '만일 금화부인이 나타나지 않고, 소영이 내일을 못 넘기고 죽는 다면, 맥을 잘못 짚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뒷길을 터 놓았던 것이다. 이런 무위도장의 심중을 알지 못하는 손불사는 이, 삼 일 간은 염려없다는 말을 곧 이 듣고 다소 안심하는 눈치였다. 질식할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침울한 표정의 두 사람은 금화부인 이 나타나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일 초, 또 일 초- 그야말로 피를 말리고 심장을 불태우는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 속에서 이경이 가까워질 때까지 계속 기다렸다. 여태껏 바위처럼 앉아만 있던 무위도장은 초조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 섰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서성거리더니 문 앞으로 다가 섰 다. 무위도장은 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았다. 밤하늘엔 별빛만 이 싸늘하고, 어둠에 잠긴 집 주위에는 스산한 바람소리만이 스칠 뿐 이었다. '금화부인은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그녀의 모습은 아무데도 보 이지 않고 숨막힐 듯한 어둠뿐이구나.' 무위도장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모든 것은 끝장이구나. 그녀가 천우신조로 해약을 구했다 하더라도, 반 시진만 늦으면 아무 소용 없게 된다. 소영의 목숨은 이제 한 줌도 못 남았다. 절망이다. 절망뿐이다.' 무위도장은 더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뛰쳐 나가려는데 어디서인가 가늘게 들려 오는 외침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여자의 음성인 듯했다. '......?' 무위도장은 잔뜩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여자의 음성은 소영 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듯했다. '이상하다. 적어도 이 리는 떨어진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인데 이 깊은 밤중에 누구일까?' 무위도장은 호기심을 누를 수 없어, "소대협을 부탁하오. 빈도가 잠시 나갔다 오겠소." 하고 손불사에게 말하고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소영을 부르는 여인의 음성은 바람결을 타고 끊겼다 이어 졌다 했기 때문에 무위도장은 그 소리를 가늠해 달리기가 그리 쉽 지 않았다. 이, 삼 리 길을 단숨에 달려 간 무위도장은 여인의 모습을 발견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여인은 검은 장삼을 입었으며 등에는 장검 을 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 서서 그녀는 일정한 방향도 없이 마구 소영의 이름을 외쳐대고 있었다. 무위도장이 천천히 다가 서자 그녀는 흠칫 놀라며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누구요?" 무위도장은 내심 크게 놀랐다. 그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다가서 는데도 여인이 금방 알아 차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문파의 여인인지 모르나 무공이 굉장한 모양이구나.' 무위도장은 커다란 나무를 돌아 여인의 앞으로 다가 서며 대답했 다. "나는 무위도장이라 하오." 가까이 보니 여인은 나이가 스물도 채 못 된 소녀였다. 그녀는 형형한 눈길로 무위도장을 노려 보며 차갑게 물었다. "여기는 무엇하러 왔지요? 소녀가 당신을 부른 것도 아닌데...." 어투는 쌀쌀하기 그지없었지만 천진난만한 성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무위도장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낭자가 부른 사람은 소영이 아니오?" "그래요. 소녀가 부른 사람은 소영인데.... 혹시 그가 있는 곳을 아세요?" "낭자는 누구요? 어째서 소영을 부르고 있소?" 소녀는 버럭 화를 냈다. "당신은 알아요 몰라요?" 무위도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일 소영의 거처를 모른다면 내가 여기까지 달려 왔겠소?" 무위도장의 말에 소녀는 한 발짝 다가 섰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 키며 급히 물었다. "어디에 있어요? 어서 저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세요." "낭자의 신분과 성명을 모르는데 어찌 데려 갈 수 있겠소? 신분 을 밝히지 않으면 거절하겠소." "그럼 좋아요. 저는 육연대라고 해요. 이제 되었지요? 어서 데려 다 주세요." "육연대라..... 들어 본 적이 없소이다." 소녀의 말하는 태도가 하도 천진스러워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무 위 도장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소녀는 화 가 치미는지 눈썹을 찌푸리며 쏘아 붙였다. "저를 모른다면 저의 아버지는 알 테죠?" "가친의 존함이 어떻게 되오?" "북천존자예요!" 무위도장은 가슴이 섭뜩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육연대를 바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낭자는 현빙궁의 공주이구료. 빈도 실례했소이다." 무위도장은 북천존자에게는 원한이 있지만 그의 딸까지 미워할 수는 없었다. 천진난만한 소녀의 태도에 어딘가 모르게 끌려 들어 가는 마음을 느낄 뿐이었다. 육연대는 마음이 매우 조급한 듯 약간은 아양을 섞어 가며 졸랐 다. "소녀는 묻는 대로 모두 알려 드렸으니 어서 소영에게 저를 데려 다 주세요. 저의 아버지가 사용한 현빙장력은 매우 독하기 때문에 시간이 늦으면 구할 수 없어요. 어서 저를 데려가 주세요. 네?" 무위도장은 상대가 북천존자의 딸이라 심중으로 꺼림칙했다. 그 러나 돌려 생각했다. '지금 소영은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다. 이 소녀가 그를 치료하 겠다는 말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한 번 믿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 다. 보아하니 섣부른 수작은 하지 않을 것 같으니....' 무위도장은 몸을 돌리며 육연대에게 말했다. "빈도를 따라 오시오." 무위도장이 몸을 훌쩍 날리니 육연대도 뒤에 바짝 붙어 섰다. 그 녀는 달리면서 계속 무위도장에게, "빨리 가요. 네? 늦겠어요. 좀더 빨리 가요." 하고 재촉했다. 무위도장이 칠분의 경공을 발휘해서 화살처럼 달리니 육연대도 뒤지지 않고 따라 왔다. '나이 어린 소녀가 굉장하구나. 언제 경공을 이토록 배웠을까?' 무위도장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 서자 손불사는 소영의 몸을 일으켜 끌어 안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소영의 명문혈에 대고 자신의 진기를 소영의 폐부로 넣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 서는 것을 보고 손불사는 볼멘 소리로 무위도장 에게 핀잔을 주었다. "도장은 이 늙은이를 그럴 듯하게 속였구료. 소대협의 목숨이 경 각인데, 이, 삼 일은 문제 없다고?" 무위도장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며 육연대가 손불사에게 말했다. "어서 그를 놓으세요!" 말과 함께 손가락을 뻗쳐 손불사의 오른 손목을 찔러 갔다. 갑자 기 육연대의 기습을 받은 손불사는 급히 오른손을 거둬 들이며 몸 을 일으킴과 동시에 강력한 일장으로 반격했다. 일장을 날리며 그 는 무위도장에게 물었다. "도장, 이 낭자는 누구요?" "북천존자의 따님이오. 소대협의 목숨을 구하러 왔소이다. 손형 께서는 비켜 주시기 바라오." 육연대는 오른손으로 손불사의 장력을 막으며 왼손을 재빨리 놀 려 품에서 두 알의 빨간 약을 꺼냈다. 그녀는 그 약을 소영의 입에 넣어 주려고 왼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불사의 장력은 매우 강해서 그녀가 맞받아 내기에는 힘 이 달렸다.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두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 육연대는 얼굴이 붉게 달아 올라 손불사를 노려 보더니 왼발을 번쩍 들어 손불사의 아랫배를 향해 걷어 찼다. 손불사는 급히 몸을 날려 구석으로 피해 갔다. 육연대는 날카로운 눈으로 손불사를 노려 보며 차갑게 외쳤다. "만일 소영이 목숨을 잃게 된다면 저는 기필코 당신네 두 사람을 그냥 두지 않겠어요. 목숨을 바치도록 하고 말 테니까......" 그녀는 한 마디 엄포를 놓더니 급히 오른손으로 소영을 부축하며 환약을 그의 입 속에 집어 넣었다. 무위도장은 소영의 얼굴에 시선을 박은 채 한편으로는 육연대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손불사도 소영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긴장된 시간이 잠시 흘렀다. 소영이 갑자기 양팔을 들어 한 차례의 기지개를 켰다. 이것을 본 무위도장은 기쁨을 금치 못해 소리쳤다. "과연 육낭자의 약은 신묘한 효과가 있군!" 이 말을 들은 손불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낮은 소리로 무위도장의 귀에 대고 물었다. "저 낭자가 누구라고?" "빈도가 벌써 손형에게 알려 드리지 않았소? 북천존자의 딸이라 고......" "그녀의 성이 무어라고 했소?" 무위도장은 손불사의 집요한 질문에 의아해서 반문했다. "손형께서는 어째서 그렇게 따지고 물으시오?" "글쎄 어쨌든 대답이나 하시오." "북천존자의 성이 무엇이겠소?" "이 늙은이가 알기로는 북천존자의 성은 백리(百里)라 하던데 그 의 딸이 육가가 될 리는 없잖소?" 무위도장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오?" "물론 정말이지. 이 늙은이는 거짓말이라고는 모르니까....." 손불사는 무위도장의 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육가이든 왕가이든 또한 북천존자의 딸이든 아니든 개의 할 필요는 없소. 우리가 당장 걱정할 것은 소영의 생사이니 저 소 녀가 그의 상처만 치료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구태여 따질 필요가 없잖소." 무위도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소영이 다시 기지개를 켜며, "아이, 추워 죽겠다." 중얼거리더니 눈을 떴다. 천장을 멀거니 바라 보던 그는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후닥닥 일어나 앉았다. 손불사는 크게 기뻐하며 소영에게 말을 걸었다. "소대협, 좀 어떤가?" 소영은 얼굴을 돌리며 손불사를 바라 보았다. 그의 얼굴의 푸르 죽죽한 빛은 사라졌으나 아직도 백지장처럼 파리했다. 그는 손불사를 멀거니 바라 보다가 눈을 깜빡여 다시 보더니 비 로소 입을 열었다. "손선배님.... 후배는 꿈을 꾸다가 깨어난 듯 어리둥절할 뿐이지 만.... 과히 아픈 곳이 없습니다." 그는 눈을 돌려 무위도장을 바라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도장께 재삼 감사 드립니다." 무위도장과 손불사의 기쁨은 매우 컸다. 그들은 찌푸렸던 얼굴을 활짝 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정신은 말짱하구나. 다행이다.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다. 조금만 늦게 저 소녀가 나타났더라도.." 무위도장은 기쁨에 넘친 미소를 띠며 소영에게 말했다. "소형! 다행이오. 정말 우리는 걱정이 컸소. 저 분 낭자께서 구 해 주지 않았더라면....." 소영은 눈을 돌려 육연대를 바라 보았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머 리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낭자는 이 몸과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어떻게 여기에 오셔서 저를 구해 줄 수 있었소?" 무위도장은 육연대를 북천존자의 딸이라고 지금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의 본명을 밝히기 싫어서 저 소녀는 가명을 썼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는 소영이 육연대를 전혀 몰라 보는 것 을 대하고는 의문이 생겼다. 그는 소영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진기를 모으며 소영의 곁 으로 다가 섰다. "소형,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시오. 이 낭자는 북천존자의 따님이 오." 소영은 육연대를 찬찬히 훑어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분의 딸이 아니오." "낭자의 이름이 육연대라고 하던데.... 그래도 틀리오?" 소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름도 엉뚱하오. 북천존자의 딸은 백리빙(百里氷)이오. 두자 성의 백리가인데 어떻게 갑자기 육가로 변할 수 있단 말이오?" 이 말을 들은 무위도장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육연대의 오른손을 잡으며 위엄있는 어조로 물었다. "낭자는 북천존자의 딸로 가장하고 나타났는데 그 속셈이 뭐요?" 육연대는 잡힌 손을 뿌리치려고 하지도 않으며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이 손을 놓고 말씀하세요." "낭자는 뒤로 다섯 걸음 물러 서시오. 그러면 빈도가 손을 놓아 주겠소." "왜요? 도장께서는 소녀가 소공자를 해칠까 봐 그러시나요?" "그렇소. 낭자는 너무 소대협과 가까이 있소. 낭자가 별안간에 손을 쓰면 빈도가 막아 내기 힘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육연대는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일 소녀가 저 분에게 상처를 입힐 생각이 있었다면 무엇하려 고 약을 써서 구해 주었을까요?" "낭자의 말은 옳소. 하지만, 낭자의 신분이 밝혀지기 전에는 누 가 뭐래도 안심할 수가 없으니 뒤로 다섯 걸음 물러 서는 것이 좋 겠소." 육연대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다섯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소영에게서 물러 서며 무위도장에게 말했다. "이제 소녀를 놓아 주실 수 있겠지요?" 무위도장은 육연대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 러 서며 합장을 하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낭자께서 남의 이름을 도용해서 오신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지 만, 낭자가 소대협의 생명을 구해 주신 데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 금할 길 없소이다. 빈도가 방금 무례하게 군 것을 괘념치 마시오." 육연대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때 그녀는 문을 등지고 서게 되었는데, 아랫목에 있는 소영을 돌아 보며 서운하다는 듯 물었다. "소공자는 정말 소녀를 모르세요?" 소영은 다시 육연대의 얼굴을 훑어 보았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 어 보아도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모르겠소." "소공자는 향설언니는 아시지요?" "향설은 알고 있소. 그녀는 백리낭자의 시녀이오. 나는 그녀를 몇 번 본 적이 있소." "향설언니는 백리공주를 따라 몰래 떠났어요. 공주는 소공자의 행방을 사방으로 찾고 있어요. 소녀도 향설언니와 동행하려고 했었 으나 공주의 명령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남아 있게 되었어요. 소녀 는 북천존자의 시중을 들며 한편으로는 소공자의 행방을 탐색하라 는 명령을 받았던 거예요. 공주의 생각으로는....." "북천존자께서 공주가 집을 떠난 것을 알게 되면 반드시 소공자 에게 어떤 분풀이를 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거예요. 때문에 공 주께서는 집을 떠나시던 날 소녀에게 영단(靈丹) 두 알을 주셨어 요. 만일 소공자에게 북천존자의 화가 미치면 사용하라고 주신 거 예요." 소영은 가볍게 탄식했다. "백리낭자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군." "공주께서는 소공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어요. 만 일 소공자가 화를 당하면 그 해독약을 갖다 드리라고 지시하신 거 예요." "낭자는 내가 부상당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소?" "저의 빙궁(氷宮)에 오늘 낮에 금화부인이 잡혀 왔어요. 그녀는 해독약을 훔치러 왔다더군요. 그 말을 들은 소녀는 언뜻 소공자가 생각나서 급히 금화부인에게 물어 봤어요." "부인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더군요. 시간이 흘러 초경이 되니까 비로소 입을 열었어요. 그녀는 소녀에게.... '소영을 구해 야 된다. 네가 그를 구할 수 있겠느냐?' 하지 않겠어요. 소녀는 깜 짝 놀라며 한편 백리공주의 예지에 감탄했어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요." "소녀는 공자께서 어디에 계시냐고 금화부인께 물어 보았어요." 무위도장이 불쑥 끼여 들었다. "금화부인이 낭자에게 알려 주었겠군요." "네, 알려 주었어요." "그녀가 알려 주었다면 왜 여기로 곧장 오지 않았소?" 무위도장의 질문에 육연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 다. "금화부인이 장소를 알려 주고 있는 그 순간에 마침 누군가 들어 오고 있었어요. 그래서 소녀는 할 수 없이 몸을 숨겼어요. 그녀는 심문을 받으러 끌려 갔어요. 그래서....." "시간은 없고, 할 수 없이 대강만 알고 있는 위치를 찾아 나선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마음은 조급해 지고 할 수 없이 소공자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게 되었어요." 육연대는 말을 끊고 무위도장을 바라 보더니 다시 이었다. "이 분 도장께서 제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찾아 오셨는데.... 소 녀의 이름을 물으실 때에 당황한 나머지 낭자의 신분으로 가장했던 거예요." 소영, 무위도장, 손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이 육연대에게 물었다. "육연대는 낭자의 본명이오?" "네, 진짜 성과 이름이에요. 저는 소공자를 만나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으로 백리공주의 신분으로 가장했지만 감히 이름까지 도용할 수는 없었어요." 이 때였다. 갑자기 손불사가 소매를 흔들어 촛불을 껐다. 그는 낮은 소리로 주의를 주며 문 옆으로 다가 섰다. "누가 오고 있소. 조용하시오."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긴장하며 귀를 모았다. 과연 옷깃이 스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붕에서 뜰로 내려 서는 기척이 들렸다. '누굴까?' 손불사는 진기를 손에 모아 쥐며 문을 노려 보았다. 그가 입을 벌려 물으려고 하는데 밖에서 먼저 튀어 들어 오는 음성이 있었다. "소영의 상처는 어때요? 변화가 있었나요?" 그것은 여자의 음성이었다. 무위도장이 상대방의 신분을 알아 보 고 큰 소리로 물었다. "금화부인이오?" "그렇소."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금화부인이 들어 섰다. 그녀는 아랫배를 움켜 쥐고 있었다. 무위도장이 부싯돌을 부딪쳐 촛불을 밝혔다. 방 안이 환해지자 여러 사람의 눈이 금화부인에게 쏠린 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금화부인의 긴 머리는 풀어 헤쳐져 산발이 되었고 고통으로 일그 러진 얼굴에는 땀투성이였다. 이를 악물고 한 걸음씩 떼어 놓는 발 은 천 근의 납덩이를 끄는 듯 무겁고 힘겹게 보였다. '비참한 모습이다. 분명 혹독한 고문을 받은 것이 틀림없구나.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은 모양인데......' 금화부인의 모습을 본 소영은 가슴이 뭉클하여 걱정스러운 표정 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무거운 표정으로 금화부인을 바라 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 서서 소영의 앞으로 몇 걸음 다가 서던 금화 부인은 육연대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 왔군요." "네, 왔어요." 육연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찰나에 금화부인이 가벼운 신음을 내더니 풀썩 넘어졌다. "앗!"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부르짖는 가운데 육연대가 급히 달려 금 화부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녀는 금화부인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 어 끌어 안으며 다급히 물었다. "상처가 대단해요?" 금화부인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육연대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해독약을 가져 왔어요?" "네. 이미 소공자에게 복용시켰어요." "육낭자! 참 고마워요. 만일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소 영의 목숨은 이미 사라졌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이젠 안심이 야." 금화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육연대의 팔을 뿌리치고 혼 자서 섰다. 그녀는 곧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소영은 벽을 기대고 앉았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금화부인 에게 말했다. "부인, 어디에 부상을 당했소?" 금화부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상관 없소. 죽지는 않을 테니까....." 말을 하던 금화부인은 갑자기 허리를 굽히며 핏덩이를 쏟아 냈 다. 이것을 본 소영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 부인은 나를 살리려고 약을 구하러 갔다가 저 지경을 당하고 말았구나. 정말 고마운 일이다.' 소영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육연대가 금화부인의 팔을 잡으 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저의 어른에게 부상을 당하셨군요?" "아니오. 그게 아니고....." 금화부인이 머리를 저으며 말하려는 것을 무위도장이 눈짓으로 저지하며 육연대에게 주의를 주었다. "육낭자! 금화부인은 내상을 입은 모양이니 말을 하면 해롭소. 낭자는 부인에게 될 수 있는 한 말을 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소." 육연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위도장은 품 속에서 약병을 꺼내더니 두 알의 약을 손바닥에 쏟았다. "육낭자, 이 약을 금화부인에게 드리시오." 육연대는 무위도장이 내 주는 약을 받아 들었다. 그녀가 금화부 인의 등에 한 손을 내밀며 약을 먹이려고 하자 금화부인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약을 빼앗았다. "부축은 필요 없어요.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요." 금화부인은 육연대의 손을 뿌리치더니 두 알의 약을 삼켜 버렸 다. "부인, 소영은 육낭자가 가져온 해독약을 먹고 많이 좋아졌소. 부인의 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이곳으로 와서 누워 휴식을 취 하시는 것이 좋겠소." 소영의 권고에 금화부인은 머리를 흔들어 사양했다. 그녀는 자신 이 큰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고집이 세어 그대로 버 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농담조로 소영에게 말을 걸었다. "소제, 사람들마다 나보고 금화부인이라고 부르는데 소제도 역시 나를 금화부인이라고 불러서야 되겠소. 좀 서운한데......" 소영은 금화부인의 의중을 몰라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내가 무엇이라고 불러야 흐뭇하겠소?" 금화부인은 정감이 담뿍 담긴 눈길을 소영에게 보내며 대답했다. "나를 누나라고 부르오. 나는 이제까지 소영을 동생이라 불렀으 니 그게 당연하지 않겠소?" 소영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마음에는 금화부인을 누나라고 부르 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내가 누나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악소채 하나뿐이다. 더 이 상 누나를 삼아 무엇하겠는가? 그렇지만 금화부인은 어떤 생각에서 인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특히 오늘은 내 생명을 구하려 다가 커다란 부상까지 입었으니.... 만일 내가 그녀의 요구를 거절 한다면 그녀는 몹시 상심해서 증세가 악화될는지도 모른다. 우선 누님이라고 불러 주자.' 이렇게 생각하고 웃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소. 누님이라고 부르지요.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조건이라니?" 소영은 피식 웃었다. "누님이 이 동생의 청을 꺾지 말고 이곳으로 내려와 침상에 누우 시라는 것입니다. 상처가 크든 작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으니까 요." "좋아요 동생 말대로 하지." 금화부인은 아랫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몸은 금방 쓰 러질 듯 비틀거렸다. 금화부인이 방금까지 소영이 누워 있던 자리에 가서 벽을 기대고 앉자 소영이 입을 열었다. "누님, 무위도장은 의술이 매우 훌륭하니 상처를 한번 진찰받아 보는 것이 어떻겠소?" 소영은 금화부인이 매우 고집이 세고 괴팍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덮어 놓고 무위도장더러 금화부인의 맥을 짚어 보라고 했다가는 성질이 괴팍한 금화부인이 어떤 태도로 나와 무위도장을 난처하게 만들지 모른다. 우선 설득을 시킨 후에 진찰받도록 하게 하자.' 이런 생각에서 진찰받기를 권유한 것이다. 그러나 금화부인은 한 마디로 거절했다. "필요 없소. 내 자신의 상처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소. 하룻밤만 쉬면 나는 깨끗이 나을 것인데 무슨 진맥이고 뭐고가 필 요하겠소?" 무위도장이 입을 열어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러 자 손불사가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무위도장의 의술은 비록 독수약왕보다는 못하지만 세간에서 드 물게 보는 신의(神醫)라 할 수 있소. 너무 고집만 내세우지 말고 진맥을 받아 보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손불사는 원래 금화부인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진 감정으로 대할 수 있었다. '금화부인은 소영을 위해 생명을 걸고 모험을 했다. 더욱이 소영 과 누님, 동생으로 부르게 되었으니 내가 너무 감정만 앞세울 수는 없다. 지금 금화부인의 상세가 매우 나쁜 것 같으니 어떻게 하든 진맥을 받고 상처를 치료하도록 권유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생각에서 정중하게 말한 것이다. 손불사의 말에 금화부인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영이 다 시 한마디 거들었다. "손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누님은 성격이 대쪽 같아 이따금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도 너무 고집만 앞세우는 것은 누님에게 손해일 뿐이오. 여러분이 간청하는 것은 모두 누님을 위 한 마음에서이니 무위도장에게 진맥을 받아 보십시오." 금화부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표정이었 다. 이것을 지켜 보던 육연대가 답답함을 참지 못해 입을 열려는 데, 금화부인이 소영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동생! 동생은 내가 죽을까 봐 겁나오?" 81. 또 다시 부모님을 찾아 소영은 금화부인을 향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누님은 소영의 목숨을 구해 주려다가 몸에 중상을 입었잖소? 소 제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소?" 금화부인은 소영을 빤히 쳐다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좋소.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내가 진맥을 받지. 무위도 장께서 좀 수고해 주셔야겠군요." 무위도장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금화부인의 백옥같이 흰 손목을 덥석 잡더니 눈을 감은 채 맥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방에는 침묵이 짙게 깔렸다. 이윽고 무위도장이 금화부인의 손목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부인의 상처는 대단한 것은 아니군요. 그런데 조용히 앉아서 휴 식을 취하지 않고 무리하게 돌아 다니셨기 때문에 상처가 악화되었 소." 금화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았어요. 도장께선 의술이 보통은 넘는군요." 소영이 끼여 들었다. "완쾌될 가망이 있소?" 무위도장이 대답했다. "지금 부인의 기혈은 이미 내부에 깊숙이 침투했기 때문에 많은 시일을 휴양해야 되겠소." "긴 시간이 필요하다면 나는 여기서 오래 머무를 수 없어요." 금화부인의 말에 무위도장이 머리를 저었다. "안 되오 늦으면 칠 일, 빠르면 오 일은 요양이 필요하오." "그럴 수 없어요. 나는 내일 오전에 이곳을 떠나야 되오." "부인, 빈도가 일부러 부인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니오. 만약 에 부인께서 적당한 휴식을 취하지 않고 이대로 몸을 움직인다면 상처는 손을 대 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될 것이오. 그 때에는 보살 이 인간세상에 다시 태어나 부인의 병을 고치려고 하더라도 가망이 없소. 부인은 왜 병을 악화시키려고 고집하시오?" 금화부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고집이 아니에요. 내가 만일 여기서 오, 륙 일 동안 있는다면 천하의 어떤 명의가 와도 내 병을 고칠 수 없어요. 나는 하루라도 더 오래 살고 싶은 욕심에서 이곳을 바삐 떠나려는 것이에요." 금화부인의 말에 소영은 의아하여 물었다. "그건 무슨 소리요. 살기 위해 휴식을 취하지 않겠다니?" "꼭 알고 싶소?" "알고 싶소이다." 금화부인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숨겨 무엇하겠소? 사실 나는 심목풍에 의해 중독을 입은 지 오래되었소. 열흘마다 한 알의 해독약을 그에게 받 아 먹지 않으면 나는 생명을 잃게 된다오. 삼 일 후면 내가 해독약 을 받아 먹을 날이니 그 날까지 심목풍에게 가야 되오. 그 날이 지 나면 나는 독성을 이길 수 없어 죽고 마는 것이오." "그런 일이 있었오?" 소영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묻자 금화부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동생을 속일 것 같소? 나만이 아니라 백화산장의 중요한 인물들은 모두 그 약에 중독되었소. 무공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독성이 무서운 약을 먹었다오." 금화부인은 힘이 드는지 말을 잠시 끊고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이었다. "듣기로는 그 독약은 독수약왕이 오랫동안 연구해서 만들었다 하 오. 그 약은 심목풍만이 해독할 수 있을 뿐 천하에 해독할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는 무서운 약이오." "음.... 심목풍은 정말 악독하고 잔인한 놈이군." 소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허공을 노려 보더니 금화부인에게 물었 다. "독수약왕이 만든 약이니 그가 해독할 수 있잖겠소?" 금화부인이 대답하기 전에 손불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독수약왕이 어디로인지 숨어 찾을 수 없으니....." "그가 이곳에 있다 하더라도 당장 해독약을 만들지는 못할 거예 요." 금화부인이 한 마디 힘들여 하더니 사르르 눈을 감았다. 몹시 피 곤하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돋 아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 쉬던 그녀가 차츰 숨결이 안정되더니 머리를 옆으로 떨어뜨렸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무위도장이 소영에게 눈짓을 하며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금화부인의 잠을 깨우지 말자는 뜻이었다. 소영은 무위도장의 뒤를 따라 나섰다. 방을 나서자 무위도장이 소영을 돌아 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소대협은 금화부인을 구할 생각이오?" "물론, 구해야 합니다." "꼭 구할 생각이라면 모험을 해야 될 것이오." "모험을 하다니요? 어떤 모험을 한다는 말이오?" 무위도장은 주위를 한 번 살펴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상처는 대단치 않소. 다만 치료를 하지 않고 무리를 했 기 때문에 나쁜 피가 엉켜 있을 뿐이오. 빈도가 건방진 소리를 하 는 것이 아니오. 삼, 사 일이면 그녀의 내부에 뭉친 핏덩이를 없앨 수 있소. 오 일 후면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지요. 그러나 가장 골 칫덩어리는 그녀의 상처가 아니라 심목풍이 그녀에게 먹인 독성이 문제요." "도장께선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소?" 소영의 물음에 무위도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심목풍이 금화부인에게 어떤 독을 사용했는지조차 빈도는 모르 고 있소. 안다 하더라도 삼, 사 일 동안에 해독약을 제조할 수는 없소." 하고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금화부인이 백화산장으로 들어 간다 하더라도, 수백 리의 길이 그녀의 생명을 뺏을 것이오." 소영은 가볍게 탄식했다. "도장의 말씀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군요. 금화부인의 목숨은 구 할 수가 없다는 것이오?" "방법은 하나뿐이오. 하지만, 이 방법에 소대협이 응할는지 모르 겠소." "어떤 방법이오?" 무위도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빈도가 침과 혈지법을 써서 그녀의 무공을 폐지하고....." "무공을 폐지시킨다 하더라토 그녀의 내부에 침투한 독성을 막을 수는 없잖소? 그러니 그녀의 목숨은 어차피 끊기는 것이 아니오?" 무위도장은 말을 중간에서 끊고 소영이 성급하게 끼여 들자 천천 히 머리를 저었다.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 보시오. 이것은 가장 손쉬운 해독 방법 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우선 그녀의 무공을 없앤 후 그녀를 한증막에 넣어 식초를 사용 해서 독을 증발시키는 방법이오." "꼭 됩니까?" 무위도장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빈도가 자신이 없다면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그녀의 몸에서 독을 제거한 후 다시 무공을 지닐 수 있나요?" "없소이다. 일생 동안 무공을 몸에 지닐 수는 없소." 소영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소?" "빈도에게는 이 방법 이외에는 방법이 없소." 소영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침울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무엇인 가 생각하던 그는 머리를 들며 입을 열었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군요. 소제는 감히 결정을 내릴 수가 없겠 소." "물론 소대협이 단독으로 결정할 일은 못 되오. 무엇보다도 본인 의 의사가 중요하니까. 소대협이 꼭 그녀를 살려야겠다는 의향이 있다면 간곡히 권해 보시오. 생사는 그녀의 선택에 달린 것이니까 요." "그럴 수밖에 없겠군요." 소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방에 들어 서니 금화부인은 누운 채로 눈을 뜨고 있었 다. 소영과 무위도장이 나란히 들어 서는 것을 본 금화부인은 가벼 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 "도장과 동생은 무슨 얘기를 했소?" "누님의 상처에 관한 얘기를 했소." 소영이 다가 서며 대답하자 금화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쓸쓸하게 웃었다. "쓸데없는 짓이오. 내일 오전에 나는 이곳을 떠나야 되오. 무위 도장이 내일 오전까지 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면 좀 늦어도 되지 만......." 소영은 말을 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본 금화부인 이 얼굴에 웃음을 거두며 물었다. "동생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두는 거요?" "누님은 내 생명을 구하려다가 이 지경을 당했는데....." 소영이 다시 말끝을 얼버무리자 금화부인이 갑갑한 듯 재촉했다. "무슨 얘긴지 속시원히 틸어 놓는 것이 좋을 텐데......" 소영은 무위도장을 힐끗 바라 보고 말했다. "무위도장에게 한 가지 훌륭한 방법이 있다는데....." "그것은 가장 둔한 방법인데 어찌 훌륭한 방법이라고 하시오?" 무위도장이 소영의 말허리를 끊고 겸손해 했다.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면 금화부인에게 말했다. "무위도장은 너무 겸손하신데.... 사실 나도 누님에게 말하기는 거북하오. 이 방법은 누님의 생명을 건질 수는 있지만 무공을 모두 잃어야 되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달리 없소. 누님의 의 향을 듣고 싶소." 금화부인은 피식 웃었다. "내 무공을 없애는 것은 생명을 없애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인 데." "그래서 나도 적극적으로 권할 수는 없소. 선택은 누님에게 달렸 으니까." 금화부인은 도리질을 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소. 더욱이 무공도 잃고 싶지 않소. 때문에 내일 오전에 이곳을 떠나 백화산장으로 돌아가겠소. 오늘 밤에 운 기를 조식하면 얼마간은 체력이 회복될 테니까." 무위도장이 한 걸음 나서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때가 이미 늦었소. 지금 금화부인은 걸어 다닐 수 없을 뿐만 아 니라 운기조식은 상처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오. 조용히 앉아서 움 직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소." 금화부인은 돌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리고 있었다. "그, 그게! 사실이오?" "부인, 지금 시간이 흐를수록 피곤해지지 않소?" "네, 그래요." "그렇다면 내 말이 틀림없소이다. 부인은 백화산장으로 갈 수 없 소." 금화부인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두려움과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진기를 끌어 모으며 높은 소리로 말했 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곧 가야겠어요." "부인! 안 됩니다." 소영이 그녀의 앞을 막아 서자 금화부인이 생긋 웃었다. "또 부인이라고 부르는군." 소영은 입을 다물었다. 무위도장이 대신 말했다. "부인, 지금 그런 것에 신경쓸 계제가 아니오. 부인은 백 리도 채 걷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오. 부인이 무리해서 걷는다면 오직 죽 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오." 금화부인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나도 짐작해요. 허나 위험을 무 릅쓰고 모험할 수밖에 없어요." "부인, 기회는 한 번뿐이오. 고집을 부리지 마시오." 소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묵묵히 서 있더니 불쑥 입을 열었 다. "도장! 만일 부드러운 침상을 마련해서 누님을 눕히고 백화산장 으로 들고 가면 어떨까요? 상처에 지장이 있겠소?" "그렇게 하면 상처에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것이오." 무위도장의 대답에 소영은 얼굴을 펴며 말했다. "그럼 누님, 잠시 기다려요. 소제가 모시고 가겠소." "소대협이 백화산장으로 가려고?" 손불사가 눈을 휘둥그래 뜨며 물었다. "저는 단지 십 리 길을 함께 갔다가 되돌아 오겠소." 무위도장이 말했다. "소대협은 잊고 있는 일이 있군요." "잊다니.... 무엇을?" "소대협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으므로, 역시 걸을 수 없소이 다." 갑자기 금화부인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호호, 동생에게 이런 성의가 있다는 것만도 나는 감격했소. 동 생이 나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너무 위험이 크오. 심목풍에게 발각 되는 날이면 동생은 물론이고 나까지토 피해를 당할 것이오." "그러나 누님은 몸이....." "괜찮소. 나는 백 리까지만 갈 수 있으면 살아나오. 길옆 아무 데나 쓰러진다 하더라도 곧 심목풍의 일파에게 발견될 테니까. 심 목풍은 아직까지 나를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백방 으로 나를 구하려고 노력할 것은 틀림없소." 금화부인은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더니, 소영을 돌아 보며 정 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 몸 건강하게 잘 있소. 훗날 만나길 빌겠소." 말을 마치자 그녀는 훌쩍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몸이 몇 번 움직이더니 지붕 너머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소영은 급히 금화부인의 뒤를 따라 가려고 했으나, 손불사가 앞 을 가로막는 바람에 멈춰 섰다. "소대협, 금화부인의 말이 맞네. 그녀와 만일 동행한다면 스스로 를 해칠 뿐만 아니라 그녀까지도 해치는 결과밖에 안 되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 섰다. 여태껏 한구석에 가만히 서 있던 육연대가 문으로 다가 서며 입을 열었다. "소녀도 이제 가야겠어요. 만일 존자에게 발각당하면 목숨을 부 지하지 못해요." "이대로 돌아가도 생명이 위험할 텐데 낭자께선 어찌 돌아가려고 하지요?" 손불사의 물음에 육연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빙궁의 규율은 몹시 엄해요. 혼자 도망 나오면 어디까지든 쫓아 와서 죽여요. 어차피 죽음을 당할 바에야 궁으로 돌아가겠어요." 육연대는 소영에게 시선을 부으며 말을 이었다. "소공자, 훗날 저의 공주를 만나거든 잘 대해 주세요." 말을 마치며 그녀는 몸을 날려 밖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 라 보던 손불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들의 심정을 이 늙은이는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무위도장이 고개를 끄덕여 손불사의 말에 동감을 표하더니 소영 을 돌아 보며 물었다. "소대협의 몸은 어떠시오?" "한기는 완전히 사라졌소. 상처도 많이 나아진 듯하오. 정확히 말해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소." "다행이오. 빈도는 이제 한 가지 부담을 덜게 되었소." 문 밖을 내다 보고 있던 손불사가 몸을 돌리며 무위도장을 향해 물었다. "도장께선 여기서 심목풍과 일전을 벌일 참이오?" 무위도장은 느닷없는 질문에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힘없이 고개 를 늘어뜨리며 침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 무당파의 실력으론 백화산장의 세력과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빈도는 잘 알고 있소. 몇 명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역시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려는 우스꽝스런 몸부림에 불과하오. 그런 데......" "우리는 더 물러설 수 없는 막바지에 몰리게 되었소. 지금 형편 으로는 죽기를 한하고 싸우든가 아니면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 든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소." 손불사가 다시 물었다. "도장은 이미 무림의 구대문파와 연락을 취했잖소? 그들에게 구 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구대문파와 합세하면 심목풍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결코 패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애석한 일은....." 무위도장은 갑자기 말을 중단하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손불사는 무위도장의 얼굴을 바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시오? 그럼 구대문파는 고수를 파견해서 도와 주려 들지 않는단 말이오?" 무위도장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보다 못한 손불사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비로소 그는 말을 꺼냈다. "비록 고수를 파견하겠다는 의사는 보내 왔지만 그들은 전력을 다해 도와 주지는 않으려고 하오. 구대문파는 제각기 사리사욕에만 급급해서 자기들의 이해타산만 따지고 있소. 심목풍에겐 오히려 어 부지리(漁夫之利)를 주는 결과지요." "그 말이 맞구료.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으니 심목풍이 하나하 나씩 정복하기에 좋은 기회와 구실만 줄 뿐이겠소이다. 그래 도장 께선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사실 고민이오. 백 년 전부터 무림의 구대문파 사이에는 비록 큰 원한관계는 없지만 사소한 일로 곧잘 충돌하고 있소. 더욱이 각 문파에 이렇다 할 인재가 없어 문파 사이는 그저 덤덤한 관계요. 그 중에서도 소림파는 수십 년 동안 일체 다른 문파와 왕래를 끊다 시피 했소." "도장과 소림 장문인과의 교분이 두팁다던데.... 이것은 헛소문 이었구료." 무위도장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소림파의 장문인과 빈도는 제법 교분이 두텁소. 허나 이번 무당 파가 당하게 된 일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에 소림의 장문인조차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소." 무위도장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개인적인 교분은 어디까지나 개인 관계에서 끝날 일이 아니겠 소? 까딱 잘못하다간 일파의 기둥 뿌리가 뽑힐 지경이니 소림파의 장문인도 자기의 직책을 남용할 수 없는 것이지요." 손불사는 무위도장의 침울한 표정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그것도 일리가 있소. 하지만 구대문파가 옛정을 끊어 버리고 서 로 경원하며 아웅다웅하다니.... 이것은 스스로 멸망의 구덩이를 파는 결과요." 옆에 서서 묵묵히 듣고 있던 소영이 끼여 들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 강적을 상대하느냐에 있지 않소? 소제가 한 가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있는데 도장께서 가르쳐 주시 기 바랍니다." "무엇이오?" "그 금화부인이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요?" "글쎄.... 그건 이 늙은이도 의문스러운 일이었는데." 손불사도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위도장은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도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그 악기소리요. 그 소리가 울 리자 심목풍이 몹시 놀라며 허둥지둥 달아나고 말았는데...." "도장께선 음률에 조예가 깊으신 줄로 알고 있는데 그 소리는 악 기에서 울린 것입니까?" 소영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무위도장은 석연찮게 대답했다. "글쎄요. 퉁소소리도 같고 비파소리 같기도 하고.... 두 가지의 악기가 한꺼번에 울린 것도 같고.... 아무튼 빈도가 듣기로는 퉁소 와 비파가 한꺼번에 울린 것 같았소이다." 손불사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 늙은이는 수백 년 동안 무림을 뒤흔든 인물들을 생각해 보았 지만, 악성(樂聲)으로 적을 무찌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 다는 것은 듣지 못했는데......" 소영도 같은 말을 했다. "이건 확실히 괴상하군요. 저도 무예를 닦을 때 사부님에게서 무 림 각파의 과거사를 자세히 들었는데 악성으로 적을 무찌를 수 있 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군요." 무위도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손불사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소영과 무위도장을 번갈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이런 일을 얘기할 곳이 못 되니 우리는 이제 돌아갑시 다." "그럽시다." 소영은 황금덩어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촛불을 껐 다. "이제 갑시다." 소영은 앞장서서 문을 나섰다. 그 뒤를 바짝 붙어 따라 오며 손 불사가 소영의 오른 손목을 잡았다. "소대협은 체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이 늙은이가 한 팔의 힘을 빌려 주어야겠소." 그는 갑자기 진기를 끌어 모으더니 소영의 손목을 잡은 채 몸을 날렸다. 자연 소영의 몸이 딸려 올라 갔다. 소영은 심목풍이 부하를 이끌고 추격하다가, 악성을 듣고 혼비백 산해서 도망쳤다는 것이 커다란 의문으로 마음에 남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부모에 대한 안부였다. '부모님께 어떤 일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소영은 급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세 사람이 호숫가에 이르니 운양자가 네 명의 중년 도사들을 이 끌고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사고가 없었나?" 무위도장이 낮은 소리로 묻자 운양자가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 다. "모든 것이 잘 되었으며 침범해 온 적도 없었습니다." 소영이 앞으로 나서며 운양자에게 물었다. "운도장께서는 소제의 부모님을 보셨소?" "두 분 어르신네를 심목풍이 노리고 있다는 것을 빈도는 잘 알고 있소. 그래서 중주이고와 사마건 등에게 산 속의 은밀한 곳을 택해 숨게 하시라고 호송을 부탁했소." 소영은 속으로, '잘하려던 짓이 오히려 잘못된 결과가 되지나 말았으면....' 하고 생각하며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어 다시 물었다. "그들은 돌아왔소?" "아직 산에서 돌아오지 않았소." 소영은 마음이 불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고 몸을 날렸다. 그가 배 위로 뛰어 내리자 무위도장과 손불사도 배로 올라탔다. 운양자와 네 사 람의 도사는 다른 배에 탔다. 두 척의 배는 파도를 헤치며 바람처럼 미끄러졌다. 배의 속도는 매우 빨랐으나 소영에게는 더없이 느리게만 생각되었다. '부모님께 아무런 일도 없었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벌써 두 차례 나 부모님은 곤경을 치르셨으니.... 내가 강호에 발을 디딘 후 잠 시라도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지 못했으니 이런 불효가 또 어디 있으랴.' 소영은 초조함을 누를 수 없어 직접 노를 잡고 힘껏 저었다. 삐이걱, 삐이걱. 소영이 공력을 이용해 노를 젓자 배는 쏜살같이 미끄럼쳤다. 배 가 언덕에 닿자 소영은 일행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곧장 몸을 날 렸다. 집을 향해 한달음에 뛰어 온 그는 활짝 열려진 대문을 향해 크게 외쳤다. "누가 있소?" 어두컴컴한 집 안의 내실 쪽에서 금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소공자세요?" 뒤이어 불빛이 번쩍이더니 촛불이 밝혀졌다. 소영이 성큼성큼 안 으로 들어 서니 금란이 경장을 하고 마주쳐 나오고 있었다. "부모님들은 이미 중주이고가 보호해서 산으로 가셨어요." "그 분들이 지금 어디 계신지 낭자는 아오?" "그건 모르겠어요." 소영은 고개를 돌렸다. 손불사와 운양자가 나란히 문 밖에 서 있 었다. 소영은 운양자에게 물었다. "운도장은 아시오?" "하하, 소형은 안심하시오. 영존과 영당께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계시다는 것을 빈도가 보증하겠소." 소영은 손을 모아 쥐고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소제도 운도장께서 치밀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소. 허나, 부모님 을 직접 뵈옵기 전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군요." "하하, 소대협의 효심에는 감동할 뿐이오. 빈도가 이미 사람을 시켜 신호를 보내도록 했으니 곧 신호가 올 것이오." 소영은 잠시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조바심을 했다. "부모님이 계신 곳을 운도장께서 아신다면 소제를 그곳으로 좀 데려다 주면 고맙겠소." "소대협의 효심에 빈도는 마땅히 응해야겠지만, 짐작컨대 중주이 고는 이미 신호를 받고 하산하고 있을 것이오. 우리가 산으로 찾아 갔다가 길이 엇갈리면 오히려 시간 낭비밖에 안 될 테니 기다리는 것만 못할 것이오." 소영은 조바심을 누르며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리기로 합시다. 그런데 얼마나 기다려야 될까요?" "늦어야 한 시진이면 될 것이오." 소영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 갔다. 대청에 앉은 그는 넋을 잃 은 듯 허공을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이나 부모를 납치당했으니 소영이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이도 어리니 효심이 지극할 것은 당연하지.' 운양자는 마당에 선 채로 소영의 표정을 지켜 보았다. 금란은 한쪽에 비켜 서서 이따금 대문 쪽으로 눈길을 주고 있었 다. 대청에 켜 놓은 초가 다 탔으나 소영의 부모도 중주이고도 나 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소영이 운양자를 바라 보며 짜증스 럽게 물었다. "운양도장, 우린 얼마나 기다렸소?" "아직 한 시진이 못 되오." 소영은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초조와 불안이 감돌았다. 금란이 촛불을 새로 갖고 와서 촛대에 꽂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불안한 표정이 돌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좀 이상하다. 혹시 중도에서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운양자는 속으로 은근히 걱정되어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께선 앉아 계시오. 빈도가 신호를 보낸 제자에게 물어 보 고 오겠소." 하고 소영의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운양자가 막 대문 앞에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휙! 바람 을 가르며 한 사람이 쏜살같이 달려 들었다. 하마터면 두 사람은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 "앗!" 운양자는 급히 몸을 피하며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왼쪽 손목을 덥석 잡았다. 이때 소영도 대청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운양자에게 손목 을 잡힌 사람은 무당문하의 제자였다. 운양자는 그의 손목을 놓아 주며 핀잔하듯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토록 서두르느냐?" 그 제자는 숨을 헐떡이며 잠시 정신을 못 차리더니 갑자기 운양 자 앞에 넙죽 엎드렸다. "제자는 마음이 조급해서 달려 왔기 때문에 그만 정신이 희미해 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사숙께서 용서해 주십시오." 대청에 서 있던 소영이 갑갑증을 누를 수 없어 몸을 날려 달려 나왔다. 그는 무당파의 제자를 향하여 성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어서 말하시오!" 제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제자는 명령을 받아 산 속의 중요한 곳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내 부모님이 또 납치를 당했단 말이오?" 소영이 말을 가로채며 묻자 무당파의 제자는 얼굴에 부끄러운 표 정을 띠었다. "제자는 잠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갑자기 혈도를 찔렸습니다." 말을 듣고 있던 운양자의 낯빛은 흑빛으로 변했다. 그는 가벼운 신음을 내며 제자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 후는? 어떻게 깨어났느냐?" "제자는 장문의 사부님에 의해 구원되었습니다." "도장은 현재 어디에 있느냐?" "사부님은 제자를 구한 후 경과를 물어 보셨습니다. 제자의 말을 들은 사부님은 '너는 사숙에게 급히 통지해서 소대협과 함께 산으 로 올라 오시도록 일러라' 하시고는 제자와 헤어졌습니다. 제자는 명령을 받고 급히 이곳으로 달려 온 것입니다." '아, 부모님에게 또 불상사가 일어났구나.' 소영은 처음에는 몹시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러나 막 상 일이 터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침착해졌다. '구해야 한다. 백 번을 끌려 간다 해도 모두 생명을 걸고 구해야 된다. 절망하고 낙담해서 한숨만을 터뜨릴 수는 없다.' 소영은 단단히 다짐하며 무당파의 제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곳까지 달려 오느라고 고단할 테니 휴식을 취하시오." 제자는 운양자와 소영에게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 섰다. 운양자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뜻밖에도 변고가 일어났으니.... 빈도는 부끄럽기 짝이 없소." "일은 이왕 벌어진 것이니 운도장은 너무 상심치 마시오. 우선 상황을 자세히 아는 것이 급하니 어서 산으로 올라갑시다." 소영의 말에 운양자는 몸을 돌려 대문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빈도가 길을 안내하겠소." 소영도 즉시 운양자의 뒤를 바짝 따랐다. 두 사람의 몸은 두 줄 기 바람처럼 허공을 뚫고 내달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십 리 길 을 달렸다.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자 울창한 밀림이 한 옆으로 나타났다. 이 때 이미 날은 환히 밝아 있었다. 앞에서 달리던 운양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소영도 급 히 멈춰 섰다. 운양자는 밀림 속의 어두운 곳을 뚫어질 듯 노려 보고 있었다. "운도장, 길을 잃었소?" 운양자는 고개를 저으며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소영이 뒤따르려고 했을 때 운양자가 한 도인을 안고 나오고 있 었다. 여기도 무당파의 제자 하나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운양자는 도인을 내려 놓더니 그 사람의 등을 손바닥으로 후려 갈겼다. 도인은 숨을 길게 내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운양자를 보더니 급히 몸을 일으켜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자를......" "절은 필요 없다. 빨리 경과나 말해 보아라." 운양자가 소리치자 도인은 무겁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제자는 이곳에서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혈도를 찔리고 쓰러졌는데.... 사숙께서 구해 주셨어요." "너의 혈도를 찌른 사람이 누구냐? 어떻게 생겼더냐?" "제자는 옷깃이 스치는 소리만 들었을 뿐 미처 고개를 돌려 바라 볼 틈도 없었습니다. 누가 나타났구나 생각하는 순간 그만 혈도를 찍혔습니다." 운양자는 소영을 돌아 보며 말했다. "소대협, 그 사람이 혈도를 찌르는 수법은 매우 놀랍소만, 두 제 자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것을 보니 사람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소.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절대로 심목풍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하지만 이상한 것은 심목풍을 제외 한 누가 무엇 때문에 소제의 부모님을 납치하려고 했을까요?"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모두가 악랄한 수법을 씁니다. 우리 무당 파의 제자들을 이처럼 봐 줄 리는 없소이다. 이건 틀림없이 제삼자 의 짓이오." 운양자는 도인을 바라 보고 손짓을 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먼저 내려 가거라." 도인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 보고 있던 소영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심목풍이 아니고서는 정말 이상한 일이군." 소영이 중얼거리고 있는데 멀리서 이쪽으로 달려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채 그들을 주시했다. 나타난 사람은 무위도 장과 상팔, 두구, 사마건 등이었다. 이들 이 나타나자 소영은 다소 마음이 놓였다. 무위도장을 선두로 네 사람은 차례차례 소영의 앞에 다다랐다. 상팔과 두구는 소영의 앞에 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소제들은 죽어 마땅합니다. 형님의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 니다." 소영은 이미 모든 것을 손에 쥔 듯이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이 납치당한 것이 틀림없구나.' 그는 커다란 실망을 느꼈으나 양손을 내밀어 두 사람을 일으켰 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두 분 형제, 어서 일어나시오. 이미 이 소영은 모든 것을 짐작 했으니 자세한 경과나 들려 주시오." 상팔이 몸을 일으키더니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소제는 두 분 어르신네를 한 곳의 석굴 안에 모셨었소. 소제가 동굴 안에 있었고 두제가 동굴 밖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한밤중 이 되자 돌연 두제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소. 소제가 급히 뛰어 나가니 전신을 검은 옷으로 휘감은 괴한이 서 있었소. 두제는 그 괴한에게 혈도를 찔린 채 발앞에 쓰러져 있었소." "상형은 그 사람과 싸움을 했소?" "부끄럽소. 나는 몹시 당황했기 때문에 앞쪽의 적만 보았지 뒤에 서 기습할 줄은 미처 몰랐소. 더욱이 그들의 무공이 어찌나 민첩한 지 소제가 대항하려고 했을 때는 어느 틈엔가 혈도를 찔리고 말았 소." 소영은 상팔의 옆에 서 있는 두구를 주목하며 입을 열었다. "두형은 그 사람을 똑똑히 보았소?" "말하려니 부끄럽기 짝이 없군요. 소제는 어느 틈엔가 날아온 암 기에 의해 혈도를 찔리고 정신을 잃었소." 무위도장이 거들었다. "그것은 두립타혈(豆粒打穴 : 콩알로 혈도를 때리는 것)의 절기 로 높은 내공이 아니고서는 펼쳐 낼 수 없소. 더군다나 두형 같은 고수를 상대했으니 적의 무공은 가히 짐작을 못하겠소." 소영은 사마건에게 물었다. "사마형은 적을 유심히 살펴 보았소?" 사마건은 어색한 웃음을 잠간 얼굴에 스치며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일이오. 소제는 상형의 뒤를 지키고 있었오. 상형이 석굴을 나갈 때 소제는 이미 일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고 각별히 경계했소." 그는 잠간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소제의 생각으로는, 상형과 두형의 무공이 높으니 강적을 만난 다 하더라도 수십 합은 싸울 줄 알았소. 그런데 사람의 몸이 갑자 기 번쩍 움직이기에 아차! 적이 또하나 있어 상형을 암습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소. 그래서 급히 상형을 불렀소. 그런데 이것이 소제의 실수였소. 소제가 있는 위치를 적에게 노출시킨 결과였지요." "그래서 어찌 되었소?" "그들은 한 줌의 암기를 날렸소. 소제는 즉시 몸을 날려 피해 냈 으나 두 군데에 그만 암기를 맞고 말았소." "그렇다면, 사마형 역시 그 콩알의 암기에 부상을 입었군요?" 소영이 다그쳐 묻자 사마건은 숨돌릴 사이도 없이 대답하기에 쩔 쩔맸다. "동굴 속이 너무 어두워서 상대방이 소제의 혈도를 정확히 겨냥 치 못했던 모양이오. 소제는 암기에 맞았으나 다행히 혈도가 막히 진 않아 싸울 능력이 있었소." "그럼 사마형은 그들과 싸웠소?" "싸움이 붙었었소. 허나 두 초식도 지나기 전에 소제는 혈도가 찔려 쓰러지고 말았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사마형은 저 암기에 맞아 부상당한 뒤에 적과 싸웠으니 자연 힘 이 달렸을 것은 분명하오." "소대협의 말은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소. 상대방의 무 공이 소제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소제가 당한 것이오. 그의 무 공은 놀랍소. 불과 이 초의 격투 끝에 혈도를 찔려 보기는 소제로 선 처음이오. 그런 무공은 이 세상에도 몇 명 없을 것이라고 생각 되오." "저의 부모님은 어찌 되었소?" "소제가 혈도를 찔린 후 동굴 안에는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 소. 그러니 소대협의 존당께서는....." 무위도장이 끼여 들었다. "빈도가 동굴로 달려 갔을 때 이미 동굴 속에는 두 분 어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소. 심지어 은란조차도 실종되었소." "도장께서는 그 사람이 사용한 암기를 살펴 보았소?" 소영의 물음에 무위도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 속에서 콩알만 한 두 개의 암기를 꺼냈다. "소대협은 이런 암기를 본 적이 있소?" 소영은 암기를 받아 손바닥에 올려 놓고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 것은 황색이었는데 쇠는 아니고 무슨 나무의 열매 같았다. "본 적이 없소이다." "그것은 보리자(菩裏子)란 것인데 일종의 내력만을 이용해서 사 용하는 것이오. 한꺼번에 여러 군데의 혈도를 찌를 수 있지요." "도장께선 이런 암기를 누가 사용하는지 아시오?" "빈도의 기억으로는 이런 암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한 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허지만 그 사람은 이미 금궁 속에 갇혀 있소." "금궁이 열리지 않았으니 그 사람이 강호에 나타났을 리는 만무 하고......" "그렇기 때문에 빈도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소." "그 사람에게 제자가 있소?" "빈도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한 명의 제자도 두지 않았소." 무위도장은 잠깐 끊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괴한은 두 분의 어르신네 를 납치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 같소. 각처에서 수비하고 있 던 빈도의 제자들에게 혈도만 찔렀을 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 았으니.... 분명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사마건이 뒤이어 입을 열었다. "또 하나 의심스런 것은 그들이 어떻게 우리가 몸을 숨긴 동굴을 발견했느냐는 점이오." 무위도장은 운양자를 돌아 보며 물었다. "그 석굴을 아는 사람은 운사제와 나 이외에 무당 문하에서 누가 또 있나?" "삼제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삼제 말고는?" "삼제 말고는 사형의 시중을 드는 두 동자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함부로 입을 열어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텐데.." 듣고 있던 소영이 끼여 들었다. "도장, 소제가 한 가지 알려 드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소." 무위도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소영에게 몸을 돌렸다. "소대협이 알려 줄 것이 있다니.... 어서 말해 보시오." "심목풍은 각 문파에 첩자를 두고 있소이다. 물론 무당파에도.." "뭐요? 그것이 사실이오?" 무위도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이 며,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82. 밀림 속의 괴노인 "물론이오. 직접 첩자를 파견하는 것을 목격했으니 거짓이 아니 오." 소영의 대답에 무위도장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눈초리를 빛내며 입을 열었다. "빈도가 즉시 무당의 문하생들을 소집하였소. 소대협께선 첩자를 지적해 낼 수 있겠소?" 소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심목풍이 각 파의 첩자들을 소집할 때에는 깊은 밤중이었소. 더 욱이 나는 백화산장의 삼장주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말단 좌석 에 끼여 있었소. 그리고.... 소집된 사람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 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목격했으나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었소." "그렇다면 소대협께선 이름을 아시오?" "그것 역시 모르오." 소영이 머리를 흔들며 대답하자 운양자는 입을 열었다. "만일 소대협의 말이 틀림없다면 그 첩자는 우리 무당파에 잠입 한 지 하루 이틀이 아닐 것이오. 사형께선 조급히 생각치 마시오. 우리들이 이 일을 안 이상 훗날 유심히 살펴 보면 자연 알아 낼 수 있을 것이오." 이때 바람에 옷깃을 펄럭이며 손불사가 나타났다. 그는 빠르게 몸을 날려 다가 오며 숨찬 소리로 말했다. "소대협! 두 분의 어른을 납치해 간 범인은 절대로 백화산장의 심목풍이 아니오." 그는 옷자락을 펄럭이더니 소영의 앞에 멈춰 섰다. 먼 길을 달려 왔는지 얼굴에는 땅과 먼지투성이였다. "노선배께선 단서를 잡으셨소?" 무위도장이 묻자 손불사는 옷소매로 이마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여러분은 우선 늙은이가 가져 온 종이 쪽지를 본 후에 설명을 들으시오." 그는 품 속에서 한 장의 종이 쪽지를 꺼내 들었다. 무위도장이 그것을 받아 펼치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쪽 지로 쏠렸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심목풍은 인간이 악랄하고 주도면밀하여 반드시 두 분의 어르신 네를 잡아 소형을 위협할 것이오. 그는 소형의 효심을 이용하려는 속셈이오. 두 분 어르신네의 안전을 위해서 당분간 은밀한 장소로 모셔 가서 대신 봉양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시오.> 그것은 매우 급하게 흘려 쓴 초서로 서명도 없었다. 무위도장은 쪽지를 소영에게 넘겨 주며 손불사에게 물었다. "노선배님은 어디서 이 쪽지를 얻으셨소?" "여러분이 그 석굴을 수색하고 있을 때 이 늙은이는 부근의 높은 산봉우리로 올라 갔었소. 사방을 살펴 보니 한 사람이 남쪽으로 달 려 가는 것이 보이더군요.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뒤를 추격했소." "노선배님은 뒤쫓아 가서 그 사람을 붙잡았소?" "그 사람은 경공이 어찌나 뛰어난지 늙은이의 걸음으로는 도저히 잡기 힘들었소. 허나 그는 내가 뒤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 소. 그래서 오 장의 간격까지 바짝 따라 갈 수 있었소." "노선배님의 공력으로 오 장까지 좁혔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붙잡혔겠군요?" 운양자의 말에 손불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내가 뒤쫓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더니 갑자기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소. 물론 나도 젖먹던 힘까지 내어 쫓았소. 그러나 그의 경공술이 탁월했기 때문에 예닐곱 개의 산봉우리를 넘고서야 일 장의 거리로 좁혀 들었소." 무위도장이 다시 물었다. "그는 이 쪽지를 내어 놓았고, 노선배께선 그를 그냥 놔 주고 돌 아 오셨소?" 손불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이 늙은이는 그를 쫓아 가면서 으름장을 놓았소. 이놈, 네가 도망가면 어디까지 갈 것이냐? 하늘 끝, 바다 모퉁이까지 가 겠느냐? 설혹 네가 하늘로 날거나 땅 속으로 스며들어도 나는 기필 코 쫓아 가서 잡고야 말겠다고 말이오." 손불사는 잠시 말을 끊고 마른 침을 목구멍으로 넘기더니 다시 이었다. "그 사람은 무림에 나타난 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인지 내 으름장 을 듣자 즉시 걸음을 멈추었소." "노선배님은 그와 싸웠겠군요." 소영이 급히 묻자 손불사는 머리를 끄덕였다. "싸웠소. 서로 십여 초식을 교환하며 싸웠소." "그 사람은 노선배님에게 죽임을 당했겠군요?" 운양자가 성급하게 묻자 손불사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는 자기 주위에 둘러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 보면서 신경질적으로 외 쳤다. "당신들이 이처럼 숨쉴 사이도 없이 사방에서 물어 오니 이 늙은 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소! 도대체 누구의 질문에 먼저 대답해야 옳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잖소." 손불사는 멋쩍은 듯 피식 웃더니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그를 자극시켜 싸우려고 욕설을 퍼부었더니 그는 예상보다 쉽게 달려 들어 걸음을 멈추더군요. 나는 급히 덤벼 들었소. 그는 검술이 놀라웁디다. 할 수 없이 몇 수의 위험한 초식을 써서 그의 장검을 빼앗았소. 무기를 뺏은 뒤 그를 생포하려고 했는데 그만.." "놓치셨군?" "이 늙은이는 다시 강호에 나타나서 실로 적지 않은 무림의 젊은 수재들을 만났소." "노선배님은 그의 얼굴을 보셨소?" 소영이 묻자 손불사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못 보았소." "어째서요?" "그는 복면을 했었소." "그랬군요. 그 뒤엔 어떻게 되었소?" 소영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묻자 손불사는 다시 이야기를 이었 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보시오." 손불사가 들려 준 이야기는 대강 다음과 같았다. 무기를 뺏은 손불사는 의기양양했다. 그래서 상대방을 사로잡으 려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네놈의 손에서 이미 무기가 떨어졌으니 순순히 항복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나 복면괴한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손불사는 상대방이 굴 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절기의 초식으로 공격했다. 손불사는 오른 손으로 괴한의 안면을 갈기며 왼손을 휘둘러 그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괴한의 동작은 매우 날쌔었다. 손불사의 오른손을 왼 손으로 가볍게 막으며 옆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흥! 제법 몸이 빠르군." 손불사는 잠시도 여유를 주지 않고 연거푸 서너 초식을 공격했으 나 번번이 허공을 치고 말았다. 십여 초를 공격했으나 도무지 승산 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반격을 당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손 불사는 초조했다. '놀라운 무공이다. 나이도 젊어 보이는 놈이.... 이렇게 되면 할 수 없다. 창피한 일이지만 암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겠다.' 손불사는 암기를 꺼내려고 손을 움직였다. 이 때였다. 휘익, 바 람소리가 나며 또 하나의 사람이 뒤에서 나타났다. '뒤에도 적이 있었구나!' 손불사는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나타난 사람은 손불 사에게 종이 쪽지를 하나 던지더니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달아났다. '웬 종이 쪽지를......' 손불사는 종이 쪽지를 손에 움켜 쥐면서 급히 달아나는 괴한의 뒤를 쫓았다. 방금 나타난 사람은 몸이 호리호리하고 동작이 매우 민첩했다. '여자로구나!' 손불사는 전력을 다해 추격하며 소리쳤다. "서라! 도망가면 끝까지라도 쫓아 가서 죽여 버리겠다." 도망가던 여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홱 돌아 섰다. 역시 얼굴에는 복면을 하고 있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러나 복면 여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장검을 손불사에게 휘둘 렀다. 그 예리한 검술에 놀란 손불사는 급히 뒤로 한 걸음 물러 섰 다. '이 여자의 무공은 저 사내보다도 더 높구나.' 손불사는 기가 질렸으나 그대로 놔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복 면 여인에게 덤벼들었다. 여인은 가만히 선 채로 검을 휘두르는데 그 빛이 사방 일 장을 온통 메꾸었다. 손불사는 검광을 뚫고 들어 가려고 했으나 전혀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사내가 곁들 여 협공하니 더욱 뒤로 몰리게 되었다. '분하다. 이런 애송이들을 당하지 못하고 몰리다니..... 손불사 의 무공도 이제는 한물 갔구나.' 손불사가 주춤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몸을 돌리더니 바람처럼 달 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 보며 손불사는 쫓아 갈 엄 두도 못 내고 있었다. '이제 강호에서 늙은이들은 맥을 못 추게 되었구나. 젊은 사람들 이 놀라운 무공을 지니고 속속 나타나니......' "...... 그래서 이 늙은이는 두 사람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지켜 보고 있다가 여러분들이 생각나서 급히 달려 온 것이오." 손불사는 이야기를 마치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듣고 있던 무위도장이 탄식처럼 말했다. "빈도가 보건대 이번에 나타난 사람들은 몇 명 안 되오. 그러나 개개인이 모두 탁월한 무공을 지닌 무림의 일류 고수들임에 틀림없 소." "그건 이 늙은이도 동감이오. 그런데, 여러분들은 괴한을 뒤쫓을 어떤 의견이 있소? 이대로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손불사가 좌중을 둘러 보며 물었으나 모두들 고개를 저을 뿐이었 다.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상팔이 고개를 쳐들며 입을 열었다. "제가 데리고 다니는 개 두 마리가 산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 것을 끌고 왔으면 어떻게 적의 뒤를 추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상팔의 말에 반응을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미 간을 모은 채 심각하고 침울한 표정들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고 별안간 소영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흑흑 울며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차라리 심목풍에게 잡혀 간 것만도 못하군요. 백화산장은 찾아 볼 만한 곳이만, 이 사람들은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안 보이니 이 넓은 천지에 내 부모님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소?" 모두들 한숨만 내쉴 뿐 소영을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소영은 끓어 오르는 격정을 못 이겨 흐느끼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이게 무슨 추태냐?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운 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잖나. 괜히 다른 사람들까지 우울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소영은 급히 울음을 삼키며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울음을 그치는 것을 본 사마건이 입을 열었다. "소대협, 너무 상심치 마시오 그리고 그 쪽지의 필적을 자세히 살펴 보시오. 혹시 누구의 필적인가 알아낼 수도 있을 테니....." 소영은 머리를 저었다. "조금도 알아낼 수가 없소." 무위도장이 입을 열었다. "무림에서는 편지 끝에 서명을 남기는 것이 상례로 되어 내려 왔 는데.... 이 사람은 서명은커녕 기호조차도 남겨 놓지 않았구료." "필적을 보니 황급히 갈겨 쓴 모양인데.... 아마 너무 급했던 나 머지 서명을 남기는 것을 잊었나 보지요?" 운양자의 말에 두구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쓸데없소. 이렇게 횡설수설 떠들 바에야 차라 리 두 마리의 개를 데리고 와서 발자국을 따라 추적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늙은이는 그들이 달려 간 방향은 알고 있소. 그러니 당신네 중주이고의 개가 쓸 만하다면 적의 뒤를 쫓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 닐 것이오." 손불사의 말에 상팔이 대답하고 나섰다. "좋소. 한번 시험해 봅시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십 시오. 저희 형제가 두 마리 개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말을 끝내기가 바쁘게 몸을 돌려 산을 뛰어 내려 갔다. 그 뒤를 두구가 쏜살같이 따랐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운양자가 소영의 곁으로 다가 서며 입을 열 었다. "소대협, 길인천상(吉人天相)이라고, 두 분 어른들은 온화하고 후덕하신 상이니 절대로 흉한 일은 당하지 않을 것이오. 빈도는 전 력을 다해 어른들을 구해서 죄과를 대신하겠소." "이 일을 어찌 도장이 책임진다는 것이오?" "빈도가 두 분을 산으로 모셔 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 지 않았을 테니 빈도의 죄가 크오." "아니오. 그들은 사전에 계획을 꾸미고 있었으니 부모님이 어디 계시든 일을 당하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오." 소영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무위도장은 가슴이 찌르르 하는 것 을 느끼며 비감한 어조로 말했다. "빈도도 면목이 없소." "아니오. 도장은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소제가 억울하게 생각하 는 것은 저의 양친은 무림과 전혀 관계를 맺은 일이 없는데 어쩌다 무림의 은원에 말려 들어 이런 일을 당하시는가 하는 데 있소. 모 두가 소제의 불효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소대협은 무림에 발을 디딘 기간은 비록 짧지만 재질이 높고 인 연이 좋아 순식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소. 자고로 영웅에게는 번민이 따르는 법이니 너무 상심친 마시오. 나는 이미 강호에서 반 을 지냈으니 목숨을 걸고 소대협을 돕겠소. 불의를 몰아 내고 무림 의 평화를 이룩하려는 소대협의 뜻을 받들다 죽는다 하더라도 결코 후회는 없을 것이오." 손불사는 말을 잠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또한 이 늙은이는 보잘것 없는 명성이나마 지니고 있어 몇 명의 도움을 청할 수도 있소. 제자와 동지와 힘을 합쳐 소대협의 한 팔 이 되겠소." 소영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후배가 무슨 덕으로 노선배님의 이토록 큰 아낌을 받을 수 있겠 소." "하하하. 말은 소대협을 위한 것이지만 사실은 무림의 동지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오. 바른 대로 말하자면 소대협을 돕는 것이 아니 라 불길 속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지." "노선배님의 말씀이 매우 무겁게 들립니다."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소. 그건 그렇고 당장 급한 것은 두 분 어른들을 찾아 안전한 장소에 모셔야 될 텐데.... 그래야 소대협이 안심하고 일을 도모할 수 있잖겠소?" "노선배의 말씀이 옳소." 무위도장의 말이었다. 손불사는 시선을 무위도장에게 잠깐 주었다가 소영에게 옮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그들과 싸우며 보니 그들은 백화산장의 무리들이 아니오." "그것이 의문점입니다. 백화산장이 아니고 누가 후배의 부모님을 납치할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영의 말에 손불사가 별안간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며 말했다. "그렇지! 어쩌면 사해군주의 소행일지도 모르겠다." "아! 그럴 가능성이 크군요. 심목풍이 사해군주에게 시켜서 했을 지도 모르겠소." 소영이 정신을 차린 듯 말하자 손불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사해군주의 짓이라면 찾아 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겠는 데....." "빈도가 보기에 이번에 나타난 사람들은 소대협의 양친에게 아무 런 원한이나 악의가 없었던 것 같소." 무위도장의 말에 소영이 물었다. "만일 악의가 없다면 왜 양친을 납치했겠소?" "그것은 빈도도 잘 모르겠소. 허나 그들은 손톱끝만한 악의도 없 을 것이라는 것만은 확신하오." "어떻게 확신하시오?" "빈도의 문하생들이 모두 혈도를 가볍게 찔렸을 뿐 아무런 부상 도 없었소. 만일 그들이 조금의 악의라도 품고 있었다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오." 손불사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리는 먼저 중주이고의 두 마리 개를 시험해 봅시다. 우선 적의 뒤만 쫓을 수 있다면 상대가 누구라는 의문점은 자연히 풀릴 것 아니겠소?" 모두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무위도장 이 무엇인가 말하려는데 중주이고가 달려 오는 모습이 보였다. 상팔과 두구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두 마리 의 개가 따랐다. 전신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며 매우 영리하고 사납 게 생긴 개였다. 손불사는 사납게 생긴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개들은 왜 사납게 생겼군. 그러나 추격할 능력을 익혔는지 모르겠구료." 상팔이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우리 형제는 이 개들을 이용해서 많은 사건을 해결했소. 염려스 러운 것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기 때문에 적 의 냄새를 찾아 낼 수 있을지 걱정이오. 재수에 맡기는 수밖에 없 겠지요." "일은 늦으면 더욱 해결하기 어려울 테니 두 분께서 시험해 보시 오." 소영의 재촉을 받은 상팔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손불사에게 말했다. "손노선배님께서 길을 안내하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만일 노부가 그들이 도망간 옷을 안다면 당신들의 두 마리 개를 쓸 필요도 없소." "손노선배님께서는 오해하지 마십시오. 노선배님은 괴한들과 싸 우던 곳까지만 저희들을 데려가 주시면 됩니다. 먼저 두 마리의 개 에게 적의 체취를 맡게 해야 추격할 수 있지 않겠소?" "그렇군.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소." 손불사, 소영, 중주이고, 무위도장, 운양자, 사마건- 이렇게 일 곱 명은 두 마리의 개와 함께 바람처럼 달렸다.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자 눈앞에 확 트인 벌판이 나타났다. 손불사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며 말했다. "바로 이곳이오." 상팔이 손불사 곁으로 다가 서며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서 자세히 확인해 보십시오. 만일 조금이라도 틀린다 면 헛수고만 할 뿐입니다. 빗나간 각도가 머리카락 차이라도 나중 엔 수만 리로 벌어지게 되니까요." 손불사는 사방을 유심히 살피더니 사, 오 척 앞의 잔디밭을 가리 켰다. 다른 곳은 잡초뿐인데 유독 그곳만이 잔디밭을 이루고 있었 다. "이 늙은이의 기억은 생생하여 조금도 틀리지 않소. 저 잔디 위 에서 그들과 싸우다가 그만 놓치고 말았소." "알겠습니다. 그럼....." 상팔은 두 마리 개를 앞으로 불러 들이더니 쭈그리고 앉았다. 그 는 손짓과 눈짓으로 개들에게 무엇인가 의사 표시를 하였다. 이윽고 두 마리의 개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턱으로 잔디밭을 가리 켰다. 두 마리의 개는 쏜살같이 잔디밭으로 달려가 코를 땅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한동안 냄새를 맡던 개들이 돌아 서더니 손불사에 게 달려 왔다. 두구가 급히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은 겁내지 마시오. 두 마리 개는 선배님의 체취를 맡으 려는 것이오." "나는 개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소." 두 마리의 개는 손불사의 발등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더니 갑자 기, 컹! 컹! 요란스럽게 짖어댔다. 상팔이 가벼운 휘파람을 불자 개들은 상팔에게로 달려가 꼬리를 흔들었다. 상팔이 다시 손짓과 눈짓으로 개와 의사 표시를 하더니 벌떡 일 어나며 양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컹! 컹! 두 마리의 개는 우렁차 게 짖더니 앞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 뒤를 따르며 상팔이 소리쳤다. "여러분! 발자취가 발견되었으니 추격합시다!" 사람들은 우르르 상팔의 뒤를 따랐다. 무위도장도 운양자에게 귓속말로 무엇인가 지시하고 몸을 날렸 다. 운양자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더니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달 려 갔다. 소영은 마음이 매우 초조했다. 그래서 걸음을 빨리하여 상팔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는 개의 뒤를 쫓아 뛰면서 상팔에게 물었다. "상형, 저 개가 추격할 수 있겠소?" "만일 손노선배가 이끈 위치가 틀리지 않는다면 두 마리의 개가 추격하는 방향은 조금도 틀리지 않을 것이오." 두 마리 개는 이따금 코를 땅에 대고 냄새를 맡다가 달리고, 달 리다가는 또 냄새를 맡으며 쉬지 않았다. 상팔과 소영의 뒤를 따르며 손불사가 무위도장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저 개들은 쓸모가 있을 것 같군요." "개도 다루는 사람에 따라서 지혜가 발달한다더군요. 빈도가 들 은 적이 있는데, 무림에는 새를 부릴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 더군요. 그 분은 새를 마음대로 부려 목숨까지 바칠 수 있도록 만 들었으며 적을 추격하거나 사람을 찾는 기술도 가르쳤다더군요. 그 가 새를 부리는 기술은 예전에도 후세에도 따를 사람이 없답니다." "그렇소. 그는 호칭을 조왕(鳥王)이라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금궁 에 갇혀 있어, 새를 부리는 기술이 세상에서 영원히 끊어지게 되었 소." 무위도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노선배께선 그 조왕을 보신 적이 있소?" "그렇소. 이 늙은이는 우연히 조왕과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소." 손불사는 장탄식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기인이오. 조왕이 새를 길들이는 기술은 정말 신이라 할 수 있소. 조왕과 내가 술을 마실 때, 그가 커다란 보라매 세 마리 를 부릅디다. 그러더니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 이곳에서 천 리 떨 어진 곳의 복숭아 밭에 가서 복숭아를 가져 오너라! -명령하니 세 마리의 보라매가 그 말을 듣고 푸드덕 날아 갑디다." "그래서요?" "한참을 기다리니 과연 세 마리의 보라매는 한 소쿠리나 되는 복 숭아를 운반해 왔소. 이 늙은이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소. 조왕은 정말....." 손불사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두 마리의 개가 별안간 컹, 컹, 우렁차게 짖었기 때문이었다. 두 마리의 개는 울창한 밀림을 향해 요란스럽게 짖어대었다. 소영이 장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여러분! 여기서 잠깐 기다리시오. 제가 들어가 밀림 속을 살펴 보고 곧 나오겠소이다." 상팔이 급히 소영의 앞을 막아 섰다. "형님! 잠깐 기다리시오." "왜 그러오?" 상팔은 소영에게 대답하기 전에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미친 듯 짖어대던 두 마리의 개가 조용해졌다. "그들이 밀림 속에 매복해서 우리들을 유인하려는 속임수를 쓰는 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되오." 소영이 말했다. "설령 이 밀림 속이 도산창림(刀山槍林 : 아주 험하고 위험함)이 라 하더라도 나는 들어가서 살펴 봐야겠소." "그야 물론이지요. 허지만 우리들은 사전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신중하게 살피는 것이 좋겠소." "어떻게 준비한단 말이오?" 상팔은 두구를 돌아 보며 말했다. "두제, 자네는 한 마리의 개를 데리고 이곳에서 지키고 있게. 나 는 소대협과 함께 밀림으로 들어 가서 살펴보고 올 테니....." "그럽시다. 만일 적을 만나거나 의심스러운 점이 있거든 즉시 경 보를 보내시오. 그러면 우리가 곧 달려 가겠소." 두구는 개 한 마리를 불러 들였다. 상팔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는 소영에게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제가 이 개를 데리고 앞장서서 길을 터 놓을 테니 형님은 저 의 뒤를 바짝 따라 오시오." 소영은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남의 뒤를 따르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러나 불만을 말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상팔은 한 마리의 개를 끌고 밀림으로 들어 섰다. 소영도 즉시 뒤를 따르며 품 속에서 두 개의 동전을 꺼내 손에 쥐었다. '만일 상팔에게 암습을 가하려는 자가 나타나면 이 동전을 사용 해서 물리쳐야겠다.' 그는 상팔의 뒤를 보살피기 위해서 동전을 꺼내 들은 것이다. 밀림 속은 생전 사람이 밟아 보지 않은 원시림(原始林) 그대로였 다. 하늘을 뚫을 듯 치솟은 나무는 비집고 들어 가기 힘들 정도로 빽빽했다. 거기다가 가시덤불과 억새풀이 우거져 있어 발을 디딜 틈도 없었다. 무성한 나뭇가지는 하늘을 가렸고 땅에는 풀잎이 쌓 여 발이 푹푹 빠졌다. 컴컴한 밀림 속은 습기와 바람소리 때문에 매우 음산했다. '이런 밀림 속에서는 불의의 암습에 대비하기가 무척 힘들겠다.' 소영은 한 손에 두 개의 동전을 움켜 쥐고 한 손에는 장검을 쥔 채 신경을 청각과 시각에 집중시켰다. 상팔은 두 손으로 가슴을 보호하며 무성한 나뭇가지 속을 이리저 리 뚫고 나갔다. 소영은 그 뒤에 바짝 붙어 서며 장검을 쉴새없이 휘둘러야 했다. 늘어진 나뭇가지를 베어 길을 트기 위해서였다. 밀림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수백 년씩 묵은 아름드리였다. 그래 서 가지들도 몹시 굵었으며 그 가지들은 나무 밑동에서부터 위까지 총총히 박혀 있었다. 소영은 장검으로 나뭇가지를 베며 나가자니 자연 걸음이 더디었 다. 상팔과 거리가 떨어지자 그는 급히 나무를 돌아 따라 붙었다. 한 시진 정도 앞으로 전진했다. 그동안 얼마나 들어 왔는지 방향 이 어찌 되었는지 분별하기가 지극히 곤란했다. 상팔의 앞에서 뛰어 가던 개가 갑자기 컹, 컹, 요란스럽게 짖더 니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 두 사람은 바짝 신경을 세우며 급히 개의 뒤를 따라 갔다. 그들 의 눈 앞이 갑자기 확 트이며 푸른 물이 보였다. 그것은 작은 연못이었다. 둘레 삼 장 밖에 안 되는 연못가에는 빙 둘러 좁은 풀밭이 있었다. 개는 연못의 물을 들여다 보며 컹컹 짖어대고 있었다. 연못 물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시퍼렇고 상공에 는 역시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양산처럼 하늘을 가리 운 나뭇가지와 나뭇잎 때문에 연못 주변도 밀림 속이나 다름없이 어둡고 햇빛 한 줄기 비추지 않았다. 상팔이 손을 흔들어 개를 짖지 못하게 했다. 개는 연못의 물을 들여다 보며 금방이라도 뛰어들 듯 으르렁거렸다. 소영은 연못 속을 자세히 살펴 보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상형,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상팔은 연못과 그 주변을 유심히 살피더니 머리를 저었다. "나 역시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소. 설마 이 물 속에 그 사람 들이 숨어 살 리는 없고....." "이 연못은 둘레가 불과 몇 척 안 되며 주위에는 울창한 나무숲 이오. 사람이 이런 밀림에 산다는 것도 우습지만 더군다나 물 속에 서 살 리는 없잖소?" "소제 역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뿐이오. 개가 우리들을 이곳까 지 데려 왔으니 분명 어떤 이유는 있을 텐데....." 소영은 허리를 굽혀 물 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시퍼런 물은 어찌나 깊은지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물에 비치는 그림자라도.....' 소영은 이런 생각도 가졌으나 물에 비친 그림자는 무성한 나뭇가 지뿐이었다. 연못이나 그 주변에 특별히 관심을 끌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작은 연못 속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을 것같지도 않군.' 소영이 허리를 펴는데 돌연 풍덩,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상형, 내가 보기에 그 사람들은 연못 속에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소. 우리는 그 자들의 유인에 끌려 이곳까지 헛걸음을 친 것 같 소." "글쎄요. 그 자들이 우리가 개를 이용해서 추격할 것을 미리 알 았다면.... 일부러 이 연못을 통과해서 개가 냄새를 잃도록 만들었 다면 모를까, 그렇잖으면 반드시 이 연못에....." 소영이 상팔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석굴을 찾을 수도 있었으니 우리를 골탕먹이는 이런 방 법쯤은 죽먹듯 쉽사리 해 낼 거요." "형님의 말이 옳소." 상팔은 말을 끊고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만일 그 자들이 이토록 주도면밀한 작전을 짤 수 있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오. 반드시 그 자들은 굉장한 강적이오." "물론 강적임에는 틀림없소. 상형은 물론 손불사까지도 당해 내 지 못할만큼의 무공을 지녔으니.... 그건 그렇고 우린 이제 어쩌지 요" 이 때였다. 언뜻 들으면 새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괴상한 웃음소 리가 들려 왔다. -낄낄, 낄낄낄낄..... 순간 두 사람은 진기를 끌어 모으며 신경을 집중했다. 웃음소리는 밀림을 흔들며 계속 울려 퍼지는데 그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놈이 이토록 기분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을까?" 소영은 동전을 꽉 움켜 쥔 채 사방을 날카롭게 휘둘러 보았다. 참다 못한 상팔이 막 입을 열어 욕을 퍼부으려는데 갑자기 웃음 소리가 뚝 그쳤다. 쥐죽은 듯 고요한 침묵을 누르며 무거운 긴장이 깔렸다. 숨막힐 듯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팽팽한 긴장을 느끼며 적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갑자기 옷자락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높은 나무 꼭대기 에서 기다란 덩굴이 내리어졌다. 그 덩굴 중간에는 전신을 새까만 옷으로 감싼 사람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그 흑의괴인은 덩굴을 잡은 채 연못 위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 오고 있었다. 이것을 본 상팔은, '소영이 조급한 마음과 분노를 누르지 못해 갑자기 손을 쓸는지 도 모르겠다. 경솔해서 이익은 없지.' 생각하고 낮은 음성으로 소영에게 말했다. "형님, 너무 급히 손을 쓰지 마시오. 우선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 한 후 손을 써도 늦진 않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흑의괴인을 노려 보았다. 흑의괴인은 연못 위로 곧장 내려 오다가 발이 수면에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덩굴을 흔들며 두 손을 놓았다. 그러자 그의 몸은 가 볍게 날아 풀밭에 내려 섰다. "놀라운 경공이군!" 상팔은 내심 감탄했다. 흑의괴인이 나무 꼭대기에서 연못가로 내 려 선 시간은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그는 소영과 상팔에게 등을 보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흑의괴인은 땅에 내려 선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도 상 팔도 그를 노려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숨막힐 듯한 긴장이 그들 사이를 갈라 놓고 있었다. 이런 자세로 한동안 대치하고 있던 상팔이 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친구, 자넨 상당히 침착하고 담이 크군. 우리들이 암수를 쓰는 것을 겁내지도 않나?" "어디 암수를 한번 써 보시지. 구경 좀 하게....." 상팔은 소영을 힐끗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친구, 말투가 건방지기 짝이 없군. 우리가 만일 암수를 썼다면 친구는 벌써 저 연못 위에 떠 있는 시체가 되었을 텐데....." "흥,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지. 그대들이 암수를 쓰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만일 섣불리 암수를 써서 잔재주를 과시하 려고 했더라면, 연못 위에 떠 있는 시체는 내가 아니라 자네들일 것일세." 흑의괴인의 어조는 어디까지나 차갑고 조금도 굽히는 기색이 없 었다. 그의 뒷모습을 노려 보고 있던 소영이 입을 열었다. "사내 대장부라면 떳떳하게 행동을 해야 되지 않을까?" "흥, 떳떳하지 못한 것도 나에겐 없을 텐데....." "당신은 마치 지옥의 사자처럼 전신을 까만 옷으로 가리고, 그 웃음은 또 무엇인가. 마귀의 귀신이라도 들씌웠나? 그건 어쨌든 기 왕 담대하게 이곳에 나타난 이상 얼굴을 돌릴 용기도 있어야 할 텐 데....." 흑의괴인은 짤막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노부가 떳떳치 못한 것이 아니다. 얼굴을 돌리지 않는 것은 노 부가 아직 살기(殺氣)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살기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을 돌리지 않다니.... 이해되지 않는데.' 소영은 흑의괴인에게 물었다. "친구, 당신의 말은 이해되지 않는군. 그것이 어떤 뜻을 얘기하 는 것인지 똑똑히 알려 줄 수 없겠나?" "꼭 알고 싶은가?" "물론, 꼭 알고 싶네." 흑의괴인은 잠깐 말이 없더니 한마디씩 끊어 뱉듯 말했다. "노부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다. 누구이 든 노부를 본 사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죽여 버리겠다고.' '이 사람은 괴상한 소리도 다 하는군. 사방엔 울창한 나무숲이고 여기 자그마한 연못이 하나 있을 뿐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되는 데.... 이런 곳은 맹수나 득시글거릴 곳이지 은거생활을 할 만한 곳은 아니다. 그건 그렇고, 이 사람은 왜 사람을 만나면 죽이겠다 는 잔인한 결심을 했을까?' 소영은 다시 말을 걸었다. "참 괴팍스러운 사람이군. 그런데 당신은 지금 이곳에 나타났고, 우리들은 당신을 보았으니 죽음을 당할 모양인데 왜 가만히 있지?" "나는 아직 그대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나를 보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등을 본 것은 본 것이 아닌가? 멋대 로 씨부렁거리고 멋대로 해석하며 스스로 기만하고 있군.' 상팔은 흑의괴인의 기습을 암암리에 방비하며 도전적으로 말했 다. "우리들은 친구의 얼굴을 꼭 좀 보고 싶은데.... 그러나 자네에 게 죽임을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 어떤 방법이 없겠나?" "방법은 있지. 하지만 그대들에게 능력이 없을 것 같군." 흑의괴인이 깔보듯 말하자 소영이 입을 열었다. "능력이 있고 없고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고, 그 방법이나 들려 주게." 흑의괴인이 내뱉듯 말했다. "한 가지 방법, 그것은 너희들이 노부를 누를 수 있어야 된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친구의 무공을 눌러 보겠다. 약속을 했으 니 이제 얼굴을 돌려라!" "흥!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흑의괴인은 코웃음을 치며 싸늘하게 내뱉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 다. 흑의괴인의 얼굴을 본 순간 상팔과 소영은 흠칫 놀랐다. '이건.... 사람의 얼굴이 아니구나. 못생겨도 정도가 있지....' 흑의괴인은 얼굴이 검붉은 데다 양쪽 뺨에 주먹만한 혹이 달려 있었다. 혹은 잘 익은 홍시처럼 빨갛고 턱 밑으로 축 늘어져 대롱 거렸다. 왼쪽 뺨의 혹에서는 핏물이 줄줄 흘러 내리고 오른쪽 혹에 서는 하얀 고름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가슴까지 늘어뜨린 긴 수 염은 고름과 피로 범벅이 되어 지저분했다. '구역질이 나는구나.' 상팔은 비위가 상했으나 억지로 참으며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노인께선 이곳에 사신 지 얼마나 되셨소?" 흑의괴인은 가느다란 눈에 살기를 띤 채 두 사람을 노려 보더니 턱으로 소영을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저 어린 녀석의 나이보다 더 많이 살았다." "우리들은 노인에게 한 가지 일을 알아 보고 싶소." 상팔의 말에 흑의괴인이 차갑게 대꾸했다. "나에게 알아 볼 것은 하나도 없다." 소영이 나섰다. "이 일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오. 만일 노인께서 가르쳐 주신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소." 흑의괴인은 소영을 집어 삼킬 듯 노려 보았다. 그 눈초리는 얼음 장처럼 차갑고 살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이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소영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흑의괴인은 소름이 끼치도록 차 가운 음성을 토해 냈다. "건방지고 어리석은 놈들.... 너희들은 노부가 결심한 맹세가 있 다는 것을 잊었나? 이제 곧 죽을 놈들이 무엇을 알고 싶다는 것이 냐? 조용히 염불이나 외우던지 마지막 발악이나 해 볼 일이지...." "노인! 말이 너무 지나친데,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군." 상팔이 소리치자 흑의괴인은 낄낄 웃었다. "흐흐흐, 참새는 죽어도 짹 한다더니.... 소용 없다. 너희들은 과거나 미래를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금방 내 손에 죽을 놈들이 니까...." 83. 향기를 풍기는 짐승 소영은 그 흑의괴인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 했다. '이런 두 개의 독한 혹이 달렸으므로 스스로 자기의 추한 모습이 부끄러워서 사람을 만나기를 꺼리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 원시림 속에 숨어서 사는구나. 이런 사람의 성질은 괴상하기 마련인 것이 다. 그렇다면 내가 양보해야지.'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은 저희들과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으니 결코 침해할 마음은 없으시겠지요?" 그 괴노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부는 이미 이곳에서 열여덟 사람을 죽였는데 이제 그대들 두 사람까지 합하면 꼭 스무 명이 되는구먼. 전에 죽은 사람들도 나와 결코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었지." 소영은 이 말을 듣자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 다.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이 이토록 잔인하니 여기에 계속 남겨 두어서 사람을 해 치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상팔은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노형의 금지(禁地)에 들어 왔으니 당신에게 피살되는 것 은 마땅하다고 칩시다. 그러나 우리가 죽기 전에 노형에게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소. 아낌없이 가르쳐 주시기 바라오. 그러면 우리 는 이곳에서 노형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그 은혜는 구천에서라도 잊지 않겠소." 그 노인은 냉랭하게 웃었다. "좋소 말해 보시오." 상팔이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어떤 사람이 노형의 이 금지를 지나갔는데 노형은 알 고 계시오?" 노인은 역시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누구든 이곳을 지나갔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죽음을 당했을 거요."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죽었다고 하더라도 시체는 이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할 게 아니오?" 노인은 그제서야 고개를 가로저었다. "삼 년 이래에 두 분은 처음으로 이곳에 도착한 사람이오." 상팔은 어리둥절했다. 도무지 노인의 말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상팔은 애원하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몇 명의 도적을 추격하다가 이곳에 이른 것이오. 사실은 이 개가 길을 인도한 것이오. 만약 사람이 이곳으 로 지나가지 않았다면 이 개 역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지는 않 았을 것이오. 노형은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우리는 모두 같은 무 림의 친구이니 노형께서는 좀 가르쳐 주시기 바라오." 노인은 그 말에 화를 벌컥 냈다. "노부와 교분을 맺으려 하지 마오. 노부는 일평생 어떤 친구도 사귄 적이 없소." 소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날카롭게 외쳤다. "우리들은 개가 길을 안내하여 이곳까지 추격해 왔으니만큼 절대 로 틀림이 없을 것이오. 그런데 그대는 한마디 말로 부인하는 것을 보니 아마 그 사람들과 한 패인 것 같소." 노인은 화가 잔뜩 났다. 그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럽쇼! 이 녀석, 간덩이 한번 크구나. 노부에게 그처럼 무례하 게 대하다니......" 노인은 말을 함과 동시에 장풍을 뻗쳐 냈다. 소영은 곧 좌장을 뻗쳐 맞서 갔다. 쌍장이 맞부딪치자 펑! 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두 사람은 각각 일 보씩 뒤로 밀려났다. 소영은 속으로, '이 늙은이의 장력이 이처럼 원숙해 있으니 절대로 얕봐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스스로 경각심을 높였다. 노인은 적이 놀란 듯한 시선으로 소영을 한참 동안 바라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녀석! 대단한데....." "무엇이 대단하오?" 흑의노인이 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는 여기서 수십 년 동안 살아 오면서 이 연못가에 접근해 오는 사람들을 십팔 명이나 죽였지만 한 번도 노부가 연속 이 장을 쳐내 본 적이 없었다." 소영은 비꼬듯 말했다. "그래서 놀랐단 말이오?" 상팔이 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노형의 손바닥이 흡사 피로 물든 것처럼 새빨간 것을 보니 노형 은 틀림없이 홍사장(紅沙掌)을 익혀 왔구료?" 흑의노인이 대답했다. "그렇소. 이 수십 년 내에 내 홍사장으로부터 목숨을 건진 사람 은 한 사람도 없었소." 흑의노인은 우장을 들어 다시 쳐내려 했다. "잠깐만!" 흑의노인은 쳐다 보며, "할 말이 뭐요?" 상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형은 그동안 열여덟 명의 사람을 죽이면서 그것도 모두 일장 으로 해치웠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나 오늘의 일장은 이미 과거의 예를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소대협에게 약간의 상처조차도 입히지 못했으니 앞으로 누가 누구의 손에 죽을지 모르는 일이 아니오? 만 약 다시 싸워서 우리들이 노형의 손에 피살된다면 스물의 숫자를 무난히 채울 수 있지만 반대로 노형께서 우리들의 손에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그야말로 밑지는 장사가 아니겠소?" 흑의노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노부는 절대로 그대들의 손에 부상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다시 소영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쳐냈다. 소영은 속으로, '이 늙은이를 굴복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사실을 토해 내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영은 오른손을 재빨리 뻗쳐 손가 락으로 그 노인의 완맥을 노려 찍어 가며, 왼손으로는 다급히 일장 을 쳐냈다. 흑의노인은 비록 생김새는 보잘것 없이 추하게 생겼지만 무공은 만만치 않았다. 그 쌍장의 공세는 날카롭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소영은 다시 연환섬전장법을 펼쳐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이 십여 합을 겨룬 후에는 소영이 차츰 우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소영이 이처럼 우위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 배워 두었 던 남일공의 연환섬전장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연환섬전장법이란 장법 중의 정화(精華)로 그 초식마다 남일 공의 심사숙고한 심혈의 결정이 서려 있었다. 말하자면 남일공은 필생의 정력을 모두 이 장법의 연구에 기울였던 것이다. 거기에다 소영은 수정을 가하여 지금 소영이 발출하고 있는 장법 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장법은 전연 격파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장법만으로도 소영은 한때를 주름잡을 수 있는 것이다. 흑의노인은 이 젊은이의 장법이 이처럼 신기할 줄은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다. 흑의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속으로 약세를 느끼면서 몇 초를 지탱해 보았지만 소영의 질풍같이 밀려 오는 장 풍에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영은 속으로 부모님이 걱정되어 오래 싸움을 끌고 싶지 않았 다. 그래서 암암리에 수라지력을 운기하여 격투를 벌이면서 갑자기 손가락 한 개를 뻗쳐 지풍을 몰아쳤다. 흑의노인은 이때 눈코뜰 새 없이 장풍을 막기에만 바빴으므로 소 영이 암암리에 쳐낸 지풍을 방비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소영이 쳐낸 지풍에 장문(章門) 요혈이 찍히고 말았다. 소영의 지력은 너 무도 강했으므로 노인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곧 다리에 힘이 쭉 빠져 노인은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상팔이 야유하듯 말했다. "당신은 열여덟 명을 죽인 보답을 오늘에야 비로소 톡톡히 받고 말았구료." 상팔은 오른손을 내밀어 흑의노인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면서 말 을 이었다. "그대가 만약 두 사람을 더 죽여 스물의 숫자를 채우고 싶다면 이제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소." 흑의노인은 혈도를 찍혔지만 말은 할 수 있었다. "무슨 방법이오?" 상팔은 곧 대꾸했다.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만 하면 되오. 만약 한 마디라도 거짓말이 섞였다가 나에게 들키는 날이면 그 때는 진짜 혼이 나고 말 거요." 노인의 위인은 비록 냉랭하고 오만하지만 죽음은 두려운지 연거 푸 네, 네, 하고 대꾸했다. "어서 말씀해 보시오. 노부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모두 알려 드 리겠소." 상팔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사이에 이곳을 지나간 사람이 었었지요?" 흑의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이곳을 지나치려면 노부 몰래는 갈 수 없 소이다." 상팔은 우격다짐으로 다시 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지난 삼 년 동안에 이곳을 지나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 소이다." 흑의노인은 소영과 상팔을 훑어 보면서 입을 열었다. "두 분이야말로 이곳에 온 유일한 사람이오." 상팔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아하니 톡톡히 쓴 맛을 보지 않고는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 을 모양이군." 상팔은 곧 오른손의 식지를 내밀어 그 노인의 왼쪽 뺨에 붙은 큰 혹을 찔렀다. 노인은 매우 아픈 듯 비명을 지르며 이마에는 식은 땀이 배어 나왔다. 아마도 혹은 노인의 몸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인 듯 아픔을 금치 못했다. 상팔이 다그쳐 물었다. "말하겠소, 안하겠소?" 노인은 줄곧 아픔을 참느라고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입으로는 한결같은 대답을 했다. "분명히 지나간 사람이라곤 없었소." 소영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는 영견(靈犬)의 안내를 받아 이곳까지 왔소. 만일 지나간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왔겠소?" 흑의노인은 개를 한참 동안 바라 본 후 입을 열었다. "그 연유는 이러하오. 이곳에서 서식하는 이상한 짐승이 있는데 그 짐승이 발산하는 기이한 향내를 맡고 개가 유인돼 온 거요." 상팔이 되물었다. "무슨 짐승이길래 향내를 발산할 수 있단 말이오?" 흑의노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름은 노부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놈이 지나간 후면 반드시 이상한 향기가 로에 스며들지요. 그래서 그놈이 나타날 때 마다 반드시 많은 호랑이나 표범 종류의 맹수들이 뒤따라 왔어요. 하지만 그놈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지요." 상팔은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그 이상한 짐승은 지금 어디 있소?" 흑의노인은 어물어물하며 밝히려 들지 않았다. 상팔이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기어코 맛을 봐야겠군!" 상팔은 오른손을 날려 다시 그 사람의 혹을 향해 찔러 갔다. 상 팔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두구의 험상 궂은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리 화를 내고 있을 때라도, 도무지 그 표정에는 노기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자 흑의노인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노부가 바른 말을 하리다." 상팔은 속으로 우스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 이 사람을 보았을 때는 그 기세가 자못 등등하여 천하라도 호령할 만한 위인인 것 같 았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다가 온다고 생각하니 그는 질겁 을 하며 얼간이가 되고 만 것이다. 소영은 그 흑의의 두 혹이 한쪽에서는 피가 흐르며, 다른 쪽에서 는 고름이 질질 흐르는 것을 보자, 그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소 영은 상팔을 바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놓아 줘서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오." 상팔은 소영의 말이 떨어지자 곧 그의 멱살을 놔 주었다. "당신이 만일 다시 또 바른 말을 하지 않고 허튼수작을 한다면 이번에는 당신의 혹 두 개를 몽땅 잘라 버리겠소." 흑의노인은 한바탕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상한 짐승은 여기서 십 리 가량 떨어진 흑혈(黑穴) 속에 서식하고 있소." 상팔이 다그쳐 물었다. "흑혈이란 무엇을 말함이오?" 흑의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혈의 내력은 노부 역시 모르고 있소. 그러나 그 앞에 세워둔 비석에 흑혈이란 두 글자가 씌어져 있어 노부도 그대로 부를 따름 이오." 상팔이 말을 받았다. "좋소. 그야 어쨌든 말을 계속하시오." "그 비석 아래에는 동굴이 하나 있지요." 흑의노인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 밀림 속에는 원래 햇빛이 잘 통하지 않는다오. 그 흑혈은 매 우 깊은 동굴이어서 몇 자 정도만 걸어 들어 가도 무척 어두워 지 척을 분간할 수가 없게 되오." 상팔이 말을 가로채었다. "당신은 거기에 가 본 적이 있소?" 흑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노부가 그 흑혈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 양쪽 뺨에 붙어 있 는 이 보기 흉한 혹도 생겨나지 않았을 거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어리둥절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이오?" 흑의노인은 말을 계속했다. "이 얘기는 이미 십여 년 전의 일이오. 노부가 그 이상한 짐승을 쫓아 흑혈에 들어 갔었소. 그러나 동굴 속에서 일장 정도 걸어 갔 을 때 나는 어떤 사람에 의해 혈도가 찔려 버렸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 흑혈 속에 사람이 들어 있었단 말이오?" 흑의노인의 대답은 이어졌다. "그 사람이 흑혈에 살고 있는지의 여부는 노부도 단정지을 수 없 지만, 그러나 노부가 그에 의해 혈도가 찔린 후 두 사람이 주고받 는 대화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소. 남자와 여자의 음성이 들려 왔기 때문에 두 사람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소." 상팔이 말을 가로챘다. "그렇다면 노형의 얼굴에 붙은 이 두 개의 혹은 날 때부터 있었 던 게 아니란 말이오?" "그렇소. 노부의 양 뺨에 붙은 이 두 개의 혹은 그들의 소행이 오. 그들이 무슨 독물을 내 얼굴에 바르자 곧 이 두 개의 독혹이 생겨난 것이오." 흑의노인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런데 그 중 남자는 나를 죽일 참이었지요. 하지만 여자가 내 목숨을 살려 주어 이곳에서 그들을 위해 이 연못을 지키도록 하자 고 고집을 피웠던 것이오." 고영이 호기심이 동하는 듯 다시 물었다. "그 남녀의 생김새는 어떠했소?" 흑의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노부는 줄곧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소." 상팔이 다시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도망가지 않았소?" 흑의노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내 양 뺨에 이처럼 보기 싫은 혹이 생겨나 하루종일 고름과 피 가 질질 흘러 내리는데 어찌 또 세상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겠소. 하물며 이, 삼 개월마다 한 차례씩 약물을 복용하지 않으면 양 뺨 의 혹은 갑자기 부어 올라 그 아픔이 뼈를 에이는 듯하오. 그러므 로 내가 가령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겁내지 않고 이곳에서 도망 친다고 해도 이 혹이 발작하면 복용할 약물이 없으므로 죽음을 면 할 수 없을 것이오."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알고 보니 그랬었군요." 상팔이 말참견을 했다. "그러면 삼 개월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한 번 복용할 해약을 가져다 주는군요." 흑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지만 사람이 가져 오는 게 아니오." 소영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사람이 가져다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 가져 온단 말이오?" 흑의노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한 마리의 흰 원숭이가 가져 오지요." 소영은 상팔을 한 번 바라 본 다음 손을 내밀어 그 노인의 혈도 를 되살려 주었다. "알고 보니 당신도 남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 불쌍한 신세이군 요. 하지만 당신이 이곳에서 계속 열여덟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너 무 잔혹한 일이 아니오?" 흑의노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노부 역시 어쩔 수 없었소. 그 흑혈의 주인이 어떤 사람이든 이 연못의 십 장 이내에 접근해 오는 사람은 다 죽여야 하며 절대로 한 사람이라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고 나에게 분부를 했소. 만약 노부가 그의 분부를 거역하는 날에는 약물을 보내 주지 않는다고.. ..." 상팔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은 흑혈로 가는 길을 알고 있지요?" "알고는 있지만 이제는 다시 갈 수 없게 되었소." 상팔이 말을 이었다. "우리들과 함께 갑시다. 우리들이 당신의 신변을 보호해 줄 테니 까...." 흑의노인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두 사람을 한참 동안 지켜 보 았다. "두 분의 무공이 비록 높기는 하지만 그 흑혈의 주인과는 상대하 기 힘들 것이오." 상팔은 한바탕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가고 싶든, 안 가고 싶든 어차피 가야 하오. 그대가 만 약 가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는 억지로 끌고 가는 수밖에 없소." 흑의노인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결국 그대들이 그 남녀를 만난다면 생명을 잃게 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나도 덩달아서 죽어야 하는 결과가 되지 않소." 상팔이 윽박질렀다. "그대는 살아 봤자 앞으로 남의 노예로밖에 살 수 없으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속시원하지 않겠소?" 흑의노인은 그 말을 듣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마치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십여 년 동안 노부가 어찌 이 일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상팔이 다그쳐 물었다. "이제야 생각이 트였소?" 흑의노인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의 한마디 말이 나를 깨우쳐 주었소." 소영이 다짐을 했다. "그럼, 우리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말이군요." "좋소. 그대들을 데리고 가든 안 가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 소영은 조금 전 흑의노인이 그처럼 죽음을 겁내던 꼴을 생각하자 실소가 흘러 나왔다. 상팔은 흑의노인에게 공수를 하면서 예를 표했다. "노형의 존함은? 우리들은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았군요." "소제는 왕방(王方)이오." 상팔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구두표자(九頭豹子) 왕방이시군요." 왕방은 끄덕였다. "그렇소. 귀하는?" "금산반 상팔이오." 왕방이 다그쳐 물었다. "중주이고....." 상팔이 말을 받았다. "바로 맞았소. 중주이고 중의 첫째요. 왕형은 무림인들과의 왕래 가 그동안 없었으며 줄곧 혼자서 지내 왔는데 용케도 저의 형제들 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왕방은 한바탕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일생 동안 친구 사귀기를 싫어하고 게다가 이런 밀림 속에 서 십여 년 간이나 파묻혀 있었으므로 성격이 너무도 괴팍하게 변 해 버렸소. 그래서 조금 전에 많은 무례를 범했는데 두 분께서는 너무 허물하지 말아 주십시오." 상팔은 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허물없이 대하지 않았소. 그런데 왕형은 어 째서 여태껏 친구 하나도 사귀지 않았습니까?" 왕방은 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원래 강호를 종횡무진하며 떠돌아 다녔으므로 친구를 사귈 여가가 없었고 밀림 속에 갇힌 후부터는 더욱 혼자서 살아 왔으니 까....." 상팔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왕형은 지금 두 명의 친구를 사귀려 하는구료." 왕방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소제는 너무도 추한 모습이어서......" 상팔이 말을 가로챘다. "왕형께서 만약 싫어하지 않으신다면 소제는 왕형과 한번 사귀고 싶소." 그 말을 듣자 왕방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정말이오?" 상팔이 거들었다. "정말이지 않구요." 왕방이 무슨 대꾸를 하려는데 갑자기 어디서 이상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소영은 놀란 표정으로,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다. 상팔의 앞에 웅크리고 앉았던 개가 별안간 왕! 하 고 짖으며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달려 갔다. 왕방이 다급히 말했다. "상형! 어서 개를 못 가게 막으시오. 그 짐승이 곧 여기에 나타 날 거요." 상팔이 양손으로 입을 벌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날쌔게 달려 가던 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상팔의 곁으로 되돌아 왔다. 소영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의 개 짖는 소리에 놀라 혹시 그 짐승이 놀라서 도망가 지나 않았을까요?" "그 짐승은 삼 일 만에 한 번씩 이 연못에 와서 목욕을 하지요. 오늘 그 짐승이 목욕을 하는 날이니, 우리들은 곧 숨어야 하오." 상팔은 그 말을 듣자 개를 부등켜 안고 커다란 나무 뒤에 가서 숨었다. 소영과 왕방도 역시 뒤따라서 몸을 숨겼다. 이들이 막 몸을 숨기자마자 곧 한 줄기의 이상한 향내가 바람을 타고 풍겨 왔다. 왕방이 소영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그 짐승이 곧 나타날 거요." 소영은 시선을 모아 주위를 살피다 밀림 속에서 흰 털이 보기 좋 게 자란 사슴 비슷하기도 하고 또한 양 같기도 한 이상한 짐승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짐승은 연못가에 다다르자 한참 동안 연못의 물을 멀거니 바 라 보고 있다가 갑자기 풍덩 연못 속으로 뛰어 들어 갔다. 소영이 낮은 목소리로 왕방에게 물었다. "이 짐승이 무슨 쓸모가 있소?" "무슨 쓸모가 있는지는 소제 역시 잘 모르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 흑혈의 주인은 이 짐승을 상당히 귀여워하고 있는 것 같소."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소! 우리가 만약 저 짐승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 흑혈의 주 인은 틀림없이 우리들을 추적해 올 거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일부 러 그 흑혈에 들어 가서 그들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을 거요." 왕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 역시 그렇게 생각되기도 하오만, 속단할 수는 없구료. 그 흑혈의 주인이 이 짐승을 끔찍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십 년 동안 의 관찰로써 아는 바이지만 그러나 십 년 동안에 흑혈의 주인은 한 번도 흑혈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우리가 가령 짐승을 사로잡더라도 그를 유인해 낼 수 있을는지...." 이때 갑자기 밀림이 떠나 갈 듯한 날카로운 포효소리가 들려 왔 다. 소영은 그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무슨 소리요?" "한 마리의 사자요. 이 짐승이 목욕할 때마다 진기한 여러 가지 짐승들이 몰려 오곤 하지요. 소제는 비록 그 동안에 혼자서 고독을 되씹으며 살아 왔지만 한편으로는 기괴한 짐승들을 많이 볼 수 있 었소." 왕방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한바탕 괴상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 려 왔다. 소영은 큰 나무 뒤에 숨어서 고개를 쳐들어 공중을 바라 보았다. 화려한 빛깔의 날개를 지닌 한 마리의 거대한 새가 유유히 연못 가에 있는 작은 나무 위에 내려 앉았다. 왕방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 새는 수콩작이오. 원래 암수 두 마리가 있었는데 암놈은 어 디로 날아가 버렸소. 아니 혹시 어디서 어린 새끼를 기르고 있는지 도 모르오. 이미 보름 전부터 나타나지 않았소." 소영은 속으로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짐승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가 어찌 이다지도 강렬하단 말인가? 이처럼 많은 새와 짐승들을 모을 수 있을 만큼.....' 소영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귀가 따가울 정도로 여러 종류의 새소리가 공중을 가득 채우며 연거푸 수십 마리의 기 이한 새들이 밀림 속에서 날아 나와 연못가에 내려 앉았다. 이 불 가사의한 정경을 바라 보고 있던 소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었다. '이 짐승은 이처럼 많은 짐승을 끌어 모을 수 있는 힘을 가졌으 니 정말 신기하기도 하구나! 내가 만약 저 짐승을 잡아서 훗날 악 누나를 만났을 때 노리갯감으로 준다면 악누나는 매우 기뻐할 텐 데.....' 다시 한바탕 성난 포효가 울려 퍼지면서 털이 곱슬곱슬한 사자 한 마리가 연못가로 다가 와서 잔디밭 위에 엎드렸다. 소영은 암암리에 운기를 하여 잔뜩 경계했다. 왼손으로 품 속을 더듬어 한 개의 동전을 꺼내서 손에 쥐었다. 사자가 행동을 취하기 만 하면 곧 출수하여 상대할 생각이었다. 이때 왕방이 낮은 소리로 일러 주었다. "소대협은 안심하시오. 이 짐승의 또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어떠 한 맹수든 간에 이 짐승을 보는 순간부터는 매우 유순하게 되어 도 무지 그 짐승을 해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오." 소영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정말 그렇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그 흰 털을 가진 이상한 짐승은 갑자기 연 못에서 껑충 뛰어 나와서 곧장 서쪽을 향해 달려 갔다. 왕방이 급히 입을 열었다. "야단났소. 이 짐승은 맹수와 흉조(凶鳥)는 무서워하지 않지만 사람을 제일 두려워하고 있소. 더욱이 이놈의 귀는 민감하기 짝이 없어 우리들이 한 말을 다 들은 것 같소." 소영이 재빨리 뛰어 나왔다. "어서 뒤쫓아 갑시다." 소영은 진기를 끌어 모아 연못을 단숨에 뛰어 넘었다. 이때 상팔 또 한 나무 뒤에서 뛰어 나왔다. 상팔이 데리고 있던 개가 컹컹 짖으면서 곧장 사자를 향해 덤벼 들었다. 그러자 그 털 이 곱슬곱슬한 사자는 한바탕 으르렁거리면서 개를 향해 마주 덤벼 들었다. 이때 소영은 이미 맞은편 언덕에 당도하였다. 성난 사자가 눈을 부라리는 것을 보고 개가 사자에게 이기지 못하리라 염려하여 오른 손을 날려 수중의 동전을 재빨리 쳐냈다. 그 수법은 매우 정확할 뿐만 아니라 그 위력 또한 대단한 것이었 다. 그리하여 동전은 비호같이 날아 사자의 왼쪽 눈을 명중시켰다. 순간 사자는 아픔을 참지 못하여 비명을 지르듯 으르렁거리더니 방 향을 바꾸어 도망쳐 버렸다. 이 소리에 놀라 수십 마리의 진기한 새들이 모두 푸드덕 날개소 리를 내며 일제히 날아 밀림 속으로 들어 갔다. 소영은 앞장 서서 그 이상한 짐승을 뒤쫓았다. 상팔과 왕방도 소 영의 뒤를 따라 달려 갔다. 그러나 밀림이 워낙 무성하여 소영은 경공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 했다. 그래서 그만 그 짐승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한 줄기의 향내만은 아직도 코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다 행히 개가 후각이 예민하므로 이번에는 개가 앞장 서서 길을 인도 했다. 이윽고 그들의 눈앞에 전개된 풍경은 돌변했다. 갑자기 시계가 환히 트이며 이 울창한 원시림 속에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상팔은 이 공지의 넓이는 직경이 십 장 정도는 되리라고 측정했다. 이 공지에는 부드럽고 무성한 풀이 가득 자라나 있었다. 사방에 빽빽이 들어차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고목의 밀림과는 전연 딴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소영은 왕방을 돌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도대체 어느 곳이오?" 왕방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 역시 이곳에는 와 본 적이 없었소." 하고 대답했다. 소영이 다시 물었다. "이곳이 혹시 흑혈이 아니오?" 왕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혈은 한 그루의 커다란 노송 아래 있소. 거기에도 공지가 있 긴 하지만 노송의 가지와 잎사귀에 짙게 가려져 햇빛을 볼 수가 없 소." 상팔이 입을 열었다. "개를 놓아서 그 짐승을 찾도록 해 봅시다. 이곳은 그 짐승이 서 식하는 곳인지도 모르오." 상팔은 개가 마구 날뛸까 봐 개를 붙잡고 있었다. 소영이 대답했다. "급히 서두르지 마오." 소영은 몸을 굽혀서 푸른 풀을 한 움큼 뜯어 손바닥에 올려 놓 고, 그 풀을 한참 동안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소영은 입을 열었다. "왕형께서는 그동안 이 밀림에서 이십여 년 동안 살아 오시면서 이처럼 부드러운 풀을 본 적이 있소?" 왕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지 못했소." 상팔도 몸을 굽혀 역시 풀을 한 움큼 뜯어 쥐었다. "이 풀은 매끄러우면서도 솜같이 부드럽군요." 소영이 말을 받았다. "문제는 바로 여기 있소. 이처럼 고목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울창 한 원시림 속에 이런 풀이 자랄 리 있겠소? 분명히 이 풀은 다른 곳에서 옮겨다 심은 것이오." 상팔이 말참견을 했다. "그렇소. 이곳은 확실히 이상한 곳이오." 소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 풀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다름 없는 밀림이 들어차 있으니 문 제의 핵심은 바로 이 풀밭에 있는 것이오."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렇소. 바로 이 풀밭에서 우리는 어떤 비밀을 캐 낼 수가 있을 것이오." 소영은 들고 있던 장검을 휘둘러 한 곳의 풀을 베고 그 아래를 살펴 보려고 했다. 바로 이 때였다. 어디선지 무겁고 칭착한 목소 리가 들려 왔다. "이 풀 밑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물체가 양육되고 있소. 당신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감히 그것들과 대항할 수 가 있을는지?" 이 소리는 너무도 뜻밖이었으므로 소영과 상팔 모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들이 천천히 소리나는 곳을 바라 보자 바퀴 달린 의자 하나가 서서히 밀림에서 굴러 나오고 있었다. 그 의자는 매우 이상했다. 의자의 네 귀퉁이에는 대나무 기등이 서 있었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푸른 비단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 고 그 의자에는 남색 장삼을 입고 머리에는 유건을 쓴 안색이 창백 한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소영은 이를 보자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낮은 소리로 상팔에 게 속삭였다. "저 사람은 매우 이상하군요. 어째서 의자의 사면을 휘장으로 가 리고 있을까요?" "아무튼 이 밀림 속에는 괴상한 일이 무척 많으니 우리들은 십분 유의해야 할 겁니다." 그 사람은 굴러 다니는 의자를 밀어 풀숲가를 돌아 상팔 등이 있 는 곳에서 일장의 거리에 다다랐다. 상팔이 소영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이 사람이 풀숲을 지나서 오지 않고 풀숲가를 빙 돌아서 오는 것을 보니 이 풀 속에는 틀림없이 어떤 비밀이 있는 것 같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들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무릎 위에는 한 장의 붉은 담요가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개 의 그물이 놓여 있었다. 그의 이와 같은 차림은 볼수록 이상하기만 했다. 상팔은 몇 번 잔기침을 한 다음 공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친구의 거주지입니까?" 그 사람은 처음에는 고개를 가로저어 부인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하며 훅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요." 상팔은 소영을 힐끗 쳐다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의 말뜻은 좀 모호하군요. 똑똑히 말해 줄 수 없겠소?" 그 사람은 말을 이었다. "이곳은 내 거주지가 아니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오 년 이상 이나 살아 왔소. 그러니 내 거주지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소?" 상팔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요. 정말 일리 있는 말이오." 소영은 그 위인이 매우 부드러우며 처음 볼 때의 괴상한 인상과 는 딴판이므로 곧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친구의 존함을 물어 봐도 좋소?" 그 사람은 대꾸했다. "나의 성은 장이며 이름은 자안(自安)이오." 소영은 말을 받았다. "오오! 장형이었군요. 저는 소영이오." 장자안이 말을 이었다. "아아! 여러분은 내가 오 년 만에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오. 나는 그 동안에 줄곧 맹수들과 진기한 새들만 보고 살았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장형의 말투를 들어 보니 장형은 자원해서 이곳에 사는 것이 아 닌 것 같은데요?" 장자안은 갑자기 무릎을 덮은 담요를 걷었다. "내 양 다리는 이처럼 이 의자에 묶여져 있어서 한 발자국도 걷 지 못하오. 여기는 밀림 속이라 이 굴러 다니는 의자 역시 이 공지 에서만 왔다갔다 할 수 있을 뿐이오." 소영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려 자세히 바라 보았다. 그의 다리는 쇠가죽으로 만든 질긴 끈으로 꽁꽁 묶여져 있었는데, 오래된 탓인 지 그 끈은 자흑(紫黑)색으로 변해 버렸다. 소영은 그 광경을 바라 보자, 이 끈은 비록 견고하지만 몸에 무 공을 지닌 사람이라면, 사 오 년의 내력으로 충분히 끊을 수 있으 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영은 곧 입을 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장형은 왜 다리의 끈을 끊도록 노력해 보지 않았소?" 장자안은 소영을 한 번 훑어 보더니 하하 하고 웃어제쳤다. "소형과 이 분들은 모두 무림의 고인인 것 같구료....." 상팔이 대답했다. "내 변변치 않은 무공은 약간....." 장자안이 말을 이었다. "내 다리를 묶어 놓은 이 끈은 여러분의 눈으로 볼 때는 별로 대 단한 것이 못 되지만 닭 한 마리도 제대로 잡을 힘이 없는 이 연약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리에 묶인 끈을 푼다는 것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오." 소영은 가볍게 탄식했다. "장형은 무림의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이런 변을 당했소? 이와 같은 방법은 절대로 보통 사람의 복수 수단이 아닌 것 같은데...." 장자안이 입을 열었다. "이건 바로 나의 호기심이 지나쳤던 탓이오. 나는 어려서부터 기 기괴괴한 책을 좋아하여 각처로 기서(奇書)를 수집하러 돌아 다녔 소. 그리고 나의 집안에는 약간의 재산이 있었으므로 밤낮으로 독 서에만 열중하였지요." 그는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윽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전인 것 같소. 저는 한 권의 기서를 수집했는데 그 책은 원래 일대의 화성 시천도의 소유 였는데 어떻게 그것이 흘러 나와서 나의 수중에 들어 오게 되었소. 그리고 그 책에는 시천도의 친필로 쓴 필적이 남아 있었소. 나는 그 책을 침식을 잊다시피 하며 열심히 읽었소. 그리고 수 년 동안 이나 연구를 거듭하였소."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게 무슨 책이며, 거기에 무엇이 씌어 있길래 장형으로 하여금 그처럼 침식을 잊어 가며 열중케 하였소?" 장자안이 대답했다. "그것은 한 권의 고서(古書)였지요. 누구의 저서인지는 표지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것은 의서였어 요. 거기에는 단방(單方), 연독(鍊毒), 해독(解毒) 및 각종의 독물 을 양육하는 방법이 수록돼 있었소."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럼 약서(藥書)로군요." "약서라고만도 할 수 없소. 기술된 범위가 상당히 넓기 때문이 오. 특히 연독, 해독의 방법은 일찍이 들어 보지 못했던 괴상한 것 이었소. 그리고 그 책을 지은 사람은 비단 지식이 풍부할 뿐만 아 니라 많은 여행을 하여 산간벽지의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다 기록해 두고 또한 수십 종의 기독(奇毒)한 물건의 생산지와 그 잡는 방법 까지 기록해 두었소." 상팔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그것을 시험해 본 적이 있소?" "나는 그것을 읽던 도중 호기심이 생겨 노자를 준비한 다음 하인 하나를 데리고 멀리 운검에 가서 책에 씌어 있는 대로 실험해 본 결과 과연 열세 종류의 독사를 잡을 수 있었소." 소영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되물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소?" 장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오. 그뿐더러 나는 책에 기재된 방법대로 이십삼 종의 뱀 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야만적인 성격을 온순하게 길들여 내 맘대로 조종할 수도 있게 만들었소." 상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일찍이 듣지 못했던 일이로군." 장자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뱀을 길들이는 방법이 들어맞자, 다시 호기심이 생겨 일 년 후에 책에 기록된 대로 천중(川中)으로 들어가 봤는데 과연 거 기서 다시 몇 마리의 독물을 잡았소. 이렇게 되자 내가 독물을 잘 양육한다는 소문이 진리(鎭里) 사이에 널리 퍼졌소. 그러나 그로 인해 나는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소." 상팔이 말을 받았다. "숱한 사람들이 그 독물을 보러 왔기 때문이오?" "그 가장 큰 번뇌는 내가 무의식중에 이독공독(以毒攻毒)의 방법 으로 이웃 사람들의 독창(毒瘡)을 고쳐 준 데에서 비롯된 것이오. 그로 인해 나의 이름이 뜻밖에도 떠들썩하여 하나에서 열, 열에서 백의 입으로 퍼져 나가 치료를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일 새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백 리 밖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수두룩했소." 소영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사람을 구해 준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인데, 장형은 어째서 그 것을 즐거이 받아들이지 않았소?" "기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모두 책에 기록된 단방뿐이며 의술 에 대해선 그 기초도 모르고 있으니 어떻게 사람의 병을 고쳐 줄 수 있겠소.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단방은 영험하기 그지없어 약을 쓰기만 하면 병이 완쾌되었소." 그는 잠깐 동안 말을 끊고는 훅 하고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 윽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래서 내가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그들은 더 몰려들기 때 문에 한 가지 금례(禁例)를 내려 버렸소. 무릇 중병에 걸려 곧 죽 게 된 사람이라야만 내가 구해 주겠다고....." 그는 다시 잠시 동안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이렇게 금례를 내리고 나니 좀 조용해지긴 했지만, 나의 이름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지고 말았소." 그는 다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오 년 전의 어느날 밤, 깊은 밤중이었소. 나는 영문도 모 르고 누군가에 의해 이곳으로 잡혀 왔었소. 그리고 그에게서 몇 가 지의 독물을 양육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소. 그리고 나는 이 의자에 묶인 것이오. 일의 경과는 복잡한 것 같지만 막상 말을 하려고 하 니 이처럼 간단하군요." 상팔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양육한 독물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바로 이 풀 밑에 있소." 소영이 다시 물었다. "무슨 독물들이오?" "원래는 그 종류가 수십 종에 달했는데, 몇 년 동안 선택과 도태 를 거치는 동안에 현재 두 가지 독물만이 남게 되었소." 상팔이 다시 물었다. "그 독물들은 이름이 있소?" "물론이오."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두 가지의 독물은 그 이름이 뭐요?" "그 중 한 가지는 혈승(血蠅)이고 또 한 가지는 금지네라 하오." 상팔이 말참견을 했다. "금지네는 나도 들은 적이 있는데 혈승이란 말은 일찍이 들어 보 지 못했소." 장자안이 설명을 했다. "그 두 가지 독물을 비교해 본다면 혈승의 독은 금지네보다도 더 하오." 그는 말을 끊고 한참 동안 상팔 등을 주시한 다음 다시 말을 이 었다. "...... 그것은 남강(南疆)에서 생산되는 독한 파리요. 강호에 비록 독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만, 감히 혈승을 잡으러 가는 사 람은 거의 없소." 소영이 물었다. "그 이름을 혈승이라 했으니 보통 파리와 비슷한가요?" 장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양에 있어서는 보통 파리와 비슷하나 보통 파리보다는 월 등하게 크오. 그리고 그 입이 교룡과 같이 뾰죽하고 단단하며 피를 빨아 먹기를 좋아하므로 혈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오." 상팔은 빙그레 웃었다. "만약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독물이란 말을 붙일 자격도 없지 않 소?" "그렇소. 겨우 그것뿐이라면 그들 역시 천신만고를 겪어 가면서 이 독물을 키우지는 않을 것이오." 소영이 장자안에게 물었다. "그 땅 밑의 피파리와 금지네의 숫자는 대체 얼마나 되오?" "금지네는 약 천 마리 이상쯤 되고 피파리는 아예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요. 어림수로 말해도 만 마리 이상일 거요." 소영이 다시 물었다. "대체 누가 이 두 가지 독물을 당신에게 키우라고 부탁했었소?" 장자안이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말씀드리기 창피한 노릇이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 주인 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달도 없는 캄캄한 밤중뿐이오. 그뿐더러 그들은 나와 얘기 할 때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가 없 소. 하지만 그들이 남녀 두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오." 왕방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흑혈의 주인이 아니오?" "그렇소. 나도 어렴풋이 흑혈이란 말을 들은 것 같소." 왕방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럼 틀림없이 흑혈의 주인이오." 소영이 말을 이었다. "장형, 제가 몇 마디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더라도 크게 허물하 지 말아 주시오." "소형,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지만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장형, 그들이 이 독물을 키우는 목적은 반드시 인간을 해치기 위해서일 것이오. 그래서 저는 그들의 악랄한 행위를 미연에 방지 하기 위해 이 독물들을 없애 버리고 싶은데 무슨 묘책이 없겠소?" 소영은 말을 마치자 장자안의 대답을 기다릴 여유도 없이 품 속 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내가 먼저 장형을 묶어 놓은 끈을 끊겠소." "그럴 필요 없소. 내 양 다리는 이미 수 년 동안 묶여 있었으므 로 흐르던 피가 말라 버리고 맥박이 통하지 않아 줄을 끊는다고 하 더라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상팔이 말참견을 했다. "그런 생각 마오. 장형이 만약 걸어 갈 수 없다면 내가 업고라도 가겠소." "형씨의 그 성의에 저는 감격할 뿐이오." 장자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날카롭고 차가운 음성이 들 려 왔다. "장자안! 너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순간, 장자안의 얼굴빛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84. 흑혈의 주인 소영이 소리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 바라 보자, 전신에 흑의를 입고 얼굴 역시 검은 수건으로 가린 사람이 밀림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을 보자 약간 놀라는 기색이었다. 소영이 낮은 목소리로 상팔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를 놓쳐서는 안 되오. 사로잡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상팔은 소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 며 공수를 하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형제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노형께서는 그간 연고 없으셨는지요?" 그 흑의인은 의아한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대는 뉘시오? 나는 그대와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어째서 형제 라 말하는 거요?" 상팔이 얼른 대답했다. "사해는 모두 형제란 말을 쓰니 제가 노형을 형이라 부른 것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흑의인은 냉랭하게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니 그렇게 친절한 호칭은 필요 없소." 이때 상팔과 흑의인과의 거리는 불과 일 장 정도였다. 갑자기 상팔은 대갈일성했다. "너는 잡수시오 할 때는 먹지 않고 퍼먹으라고 해야만 먹는 성미 로군. 형이라고 부르는 게 불쾌하다면 할 수 없이 개새끼라고 불러 주지." 흑의인은 약간 어리둥절했다. 상팔은 그가 채 반박할 엄두도 내기 전에 갑자기 뛰어 올라서 창 응박토(蒼鷹搏兎) 일초로써 덤벼들었다. 그러나 흑의인의 솜씨도 뒤지지 않아 상팔이 덤벼들자 오른손을 갑자기 번뜩여 한 자루의 단도를 뽑아 들고 재빠르게 맞부딪쳐 왔다. 상팔은 빈정거렸다. "녀석 봐라! 그래도 잔재주는 있구나." 상팔은 왼손으로 일장을 뻗쳐 칼의 공세를 막고 오른손으로는 금 라수법을 써서 흑의인의 칼을 잡아 채려 했다. 그러자 흑의인은 칼 을 휘둘러 한 줄기의 한광을 공중에 그려 내면서 몸을 보호했다. 상팔은 단전의 진기를 내려 재빨리 땅바닥에 내려 섰다. 그리고 는 곧 손을 휘둘러 맨손으로 칼을 뺏는 금라수법을 펼쳐서 흑의인 과 한바탕 맹렬한 싸움을 전개했다. 그러나 흑의인의 칼쓰는 법은 무척 괴이하여 그 변화무쌍함을 종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팔은 두 번이나 험한 초식을 전개하여 공격했지만 칼을 뺏지는 못했다. 상팔은 은근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사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 다.' 상팔은 매우 조급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법을 돌변하여 왼손 으로 교타금령(巧打金鈴) 초식으로 맹렬히 쳐 내고 오른손으로는 금사전완 초식을 사용하여 흑의인의 왼쪽 손목을 향해 찍어 갔다. 상팔은 전력을 기울여 공격을 가했으므로 그 왼손의 장력은 심히 강했다. 흑의인은 칼을 이쪽으로 돌려 막으려 했으나 상팔의 장력에 의해 칼의 기세가 주춤해 버렸다. 상팔은 이 틈을 노려 오른손을 내밀어 단번에 흑의인의 왼쪽 손목을 잡아 챘다. 상팔은 그제야 하하 웃으 며 호통쳤다. "이 녀석! 너는 이 상노대(商老大)가 십여 초씩이나 손을 쓸만큼 그 솜씨가 제법이구나. 어서 수중의 칼을 버리지 못할까?" 상팔은 말을 하면서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자 흑의인은 견딜 수 없는 듯 칼을 버렸다. 상팔은 왼손으로 칼을 집어 들고 오른손으로는 흑의인의 손목을 잡은 채로 소영의 앞으로 끌고 갔다. 장자안은 상팔이 맨손으로 칼 든 사람을 사로잡는 것을 보자 매 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 만약 나도 일찍이 무공을 배웠다면 그들에게 잡혀 이와 같은 곤욕을 치르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상팔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무공을 배우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는군! 당신이 만약 몇 년 동안 무공을 배웠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잡히기는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당신의 고통은 더 처참해졌을 것이다.' 소영은 흑의인을 훑어 보며 입을 열었다. "이놈! 얼굴의 망사를 벗어라." 상팔은 빙그레 웃었다. "친구, 자네가 한 조각의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감싼 의도가 무엇 인가. 감히 사람을 대하지 못할 무슨 사연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상팔은 말을 함과 동시에 왼손을 들어 흑의인의 얼굴에 가린 검 은 수건을 벗겨 버렸다. 호기심에 차서 그를 바라 보고 있던 사람 들은 순간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흑의인의 얼굴 한가운데는 커다 란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코는 온데간데 없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흑혈 주인의 수단은 너무도 잔인하여 백화산장보다도 더한 것 같군!"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흑의인을 가엾다는 듯 바라 보았 다. "그대의 코는 깎이었나?" 흑의인의 표정은 반발심으로 굳어져 있었으나 소영의 말을 듣자 갑자기 훅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잘려 버렸소." 소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소영이란 사람인데 결코 형씨를 해하지는 않을 거요. 흑혈 의 주인에 관한 사실을 저에게 알려만 주신다면 저는 책임지고 당 신을 안전하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겠소." 흑의인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늦었소."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무슨 까닭이오?" 이때 흑의인은 갑자기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며 시커먼 피를 한 모금 토해 내고는 숨을 거두어 버렸다. 소영은 상팔을 바라 보며 탄식조로 입을 열었다. "흑혈 주인의 수단이 이처럼 악독하니 그대로 보아 넘길 수가 없 소. 반드시 그놈의 소굴을 없애 일거에 그의 기업을 뭉개 버려야 하오. 백화산장, 사해군주 외에도 강호에 악독한 놈이 다시는 등장 하지 않도록 말이오....." 상팔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강호엔 살기가 감돌고 있어 그야말로 수천 년 내에 일찍이 없었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한데 형님께서는 그 먹구름 속을 뚫 고 비치는 한 줄기의 태양과 같은 존재요. 어서 빨리 악의 무리를 소탕하고 강호를 평안케 했으면 좋으련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바탕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장자안은 급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어서 이 휘장 속으로 들어 오시오. 피파리가 곧 출현할 것이오." 상팔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개에게 낮은 음성으로 무어라고 지시 를 하자 개는 갑자기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이때 왕방은 이미 휘장을 들어 올리며 그 속으로 들어 갔다. 그 러나 소영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버티고 서서 풀숲의 한가운데를 응시하고 있었다. 상팔은 소영을 밀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서 휘장 속으로 들어 가시오. 이 일은 모험할 일이 아니오." 소영은 여전히 버티고 서서 대답했다. "그 피파리와 금지네가 정말 사람을 잡아 먹을 수 있을만큼 무섭 다고는 믿을 수 없소." 그러자 장자안이 소리를 질렀다. "두 분도 어서 들어 오시오. 조금만 더 늦으면 큰일나오." 상팔은 소영을 밀다시피 하여 휘장 속으로 들어 갔다. "우린 먼저 상황을 살펴 본 다음 행동을 개시합시다. 만일 그 피 파리가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면 우리가 다시 나가서 활동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소영이 상팔에게 끌리다시피 휘장 속으로 들어 가서 막 몸을 일 으키려는 찰나 그 넓은 풀숲 한가운데서 갑자기 직경이 석 자 정도 의 큰 구멍이 열리며 길이가 한 치 가량 돼 보이는 검은 벌레가 분 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장자안은 급히 소리 질렀다. "누군가가 고의로 피파리를 방출했소. 여러분은 크게 조심하여야 하오. 사방의 휘장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 피파리의 배에는 독이 가득 들어 있으므로 누구든지 한 번 물렸다 하면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무수한 피파리가 날아 나왔다. 직경이 십 여 장에 달하는 풀숲 위에는 파리소리뿐이었다. 소영은 시선을 모아 그것들을 바라 보았다. 피파리는 검푸른 빛 깔이었다. 그리고 날개의 힘이 매우 강하여 날아다니는 속도가 기 가막히게 빨랐다. 그것들은 풀숲 위를 종횡무진으로 번개처럼 날아 다녔다. 장자안은 가볍게 탄식을 했다. "휴우! 저렇게 무서운 독물들을......." 소영도 그 말에 더욱 경각심을 높이며 시선을 돌려 바라 보았다. 휘장 밖에 있는 일구의 시체 위에 피파리가 산더미처럼 달라 붙 었다. 그 시체는 피파리가 달라 붙자 눈깜짝할 사이에 수축되어 잠 시 후에는 껍데기와 뼈다귀만 남았다. 상팔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장형, 이 피파리는 과연 지독하군요. 저 피파리를 제압할 수 있 는 무슨 방법은 없소?" 장자안이 천천히 대답했다. "지금 저것들을 제압하지는 못하오. 다만 저것들이 지하의 소굴 속으로 들어 간 다음 불을 질러 태워 죽이는 수밖에 없소." 이때 왕방이 깜짝 놀라 소리질렀다. "피파리가 몰려 왔소!" 그는 손을 들어 쳐 내려고 했다. 알고 보니 이미 수십 마리의 피 파리가 사람의 냄새를 맡고 휘장 밖에 몰려 와 있었다. 장자안이 급히 소리질렀다. "손을 쓰지 마시오. 가령 일장에 몇 마리의 피파리를 죽여 없앤 다 하더라도 휘장을 격파하여 그들이 날아 들어 오게 되면 우리 네 사람은 살 생각은 말아야 하오." 왕방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만약 그것들이 점점 많이 몰려 와서 휘장을 뚫고 들어 오면 어 떻게 하오?" 장자안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염려할 것 없소. 이 휘장은 매우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견고하 기 이를 데 없소."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그 피파리들은 이미 휘장에 달라 붙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그것들은 공간이 없을 정도로 휘장 에 달라 붙어 햇빛조차 가릴 지경이었다. 소영은 재빨리 천 년 묵은 교피 장갑을 꺼내서 손에 끼고 입을 열었다. "상형은 아래쪽을 살펴 피파리가 들어 오지 못하게 막고, 왕형은 위를 살펴 막으시오." 장자안은 깜짝 놀라 말했다. "손에 피파리가 닿게 해서는 안 되오. 반드시 독의 침입을 받을 것이오." 상팔은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왕방에게 건네 주었다. "왕형! 이 휘장 속에서는 장검을 사용할 수 없으니 이 단도로써 휘장 속으로 들어 오는 피파리를 상대하시오." 왕방은 손을 내밀어 비수를 받아 들었다. 상팔은 원래 경험이 풍부하므로 휘장 안으로 들어 오기 전에 미 리 나뭇가지를 하나를 꺾어 가지고 들어 왔다. 그 나무 막대기는 길이가 한 자 가량 됐으며 굵기는 오리알만 했다. 상팔은 그것을 꼭 쥐고 있었다. 이때 휘장의 사면에는 피파리가 꽉 달라 붙어서 비린내가 확 풍 겨 들어 왔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피파리가 휘장에 겹겹이 달라 붙어 있었으므로 햇빛을 확 가려 휘장 속은 마치 암실처럼 어두웠 다. 상팔은 시선을 모아 사면의 휘장을 살펴 보며 한편으로는 나직 이 장자안에게 말했다. "장형, 당신은 피파리를 양육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므로 틀림없 이 피파리들을 물러 가게 하는 방법도 알 수 있을 것이오. 우리는 이 휘장 속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오." 장자안이 막 무슨 대답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한 줄기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 왔다. "너희들은 이미 피파리떼에게 갇혔다. 내가 언제든 암기를 쳐 내 휘장을 찢어 버리기만 하면 피파리가 즉시 휘장 속으로 스며들어 가서 너희들의 피를 완전히 빨아 먹어 치울 것이다. 이 피파리는 지금 겹겹으로 포위를 하고 있으므로 너희들이 어떠한 재주를 가졌 다 하더라도 항거할 수는 없다." 소영은 낮은 음성으로 장자안에게 물었다. "장형, 저 사람은 누구요?" 장자안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 주인의 음성과 흡사해요." 왕방이 말참견을 했다. "그렇소. 바로 그 흑혈 주인의 음성이오." 소영은 그제서야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상형, 그놈이 있는 곳과 이곳과의 거리는?" "이 장 안팎인 것 같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내 판단과 비슷하군." 소영은 시선을 장자안에게로 옮겼다. "저놈은 어찌하여 피파리를 겁내지 않소?" "제 생각으로는 피파리가 감히 침입하지 못하게 해약을 바른 것 같소. 그렇지 않다면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휘장 안에 숨어 있었 을 것이오."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뭐라구요? 그렇다면 피파리를 제압할 수 있는 약물이 있단 말이 오?" 장자안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소. 몇 가지 약물을 배합한 다음 일종의 기이한 향내가 풍 기는 약을 배합한 것 같은데 피파리는 그 향내를 맡으면 곧 멀리 피해 버리지요."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놈이 휘장 속에 숨어 있다면 내가 그놈을 상대할 수 있 게 될는지 모르지만 만약 약물을 발랐다면 쉽게 상대할 수 없소." 상팔은 가슴이 섬뜩했다. "장형은 그 약물을 조제할 수 없소?" 장자안은 고개를 저으며, "그 기서에는 기록돼 있는데 단지 두 가지 주약(主藥)을 구하기 가 쉽지 않소. 조제할 수는 있지만 재료가 없어서 조제하지 못하는 것이오." 이때 그 냉랭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방금 내가 한 말을 그대들은 다 들었겠지? 지금 그대들이 갈 길 은 두 길뿐이다. 마음대로 선택해라. 그 하나는 내가 휘장을 찔러 피파리가 그대들의 피를 빨아 먹게 하는 것이오, 다음은 내 명령에 복종하여 나의 흑혈 속으로 들어 와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코웃음을 쳤다. 그도 말로써 반박하려는데 상팔이 이를 말렸다. "이런 악독한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강호의 도의를 지킬 필 요는 없소. 군자는 속이는 것을 죄로 알지 않는다고 했소. 소제가 그와 상대하겠소."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갑자기 높은 음성으로 외쳤다. "그대는 뉘시오?" 그 냉랭한 음성이 대답해 왔다. "나는 흑혈의 주인이다." 상팔은 비웃듯 말했다. "흑혈의 주인이라고? 나는 멀리 강남 강북 어디 안 가 본 곳이 없는데 흑혈의 주인이란 말은 처음 듣소." "내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강 호에 출현한다면 반드시 무림을 진동시켜 천하가 감탄하게 만들 것 이다." 소영이 끼여 들었다. "이 피파리떼들을 믿고서?" "피파리와 금지네는 내가 양육한 두 가지 독물에 불과하지만, 그 대들이 이 피파리떼의 공격을 피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 다." 상팔이 말했다. "우리들이 그대의 흑혈에 들어 가면 어떻게 되는가?" 흑혈의 주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주 간단하게 처리된다. 그대들이 흑혈에 들어 와 내 부하가 되겠다면, 한 알의 약물을 복용하여 오관 중에서 눈이나 코나 그대 들이 맘대로 선택해서 한 가지만 내게 제공하면 흑혈의 문하제자가 된다." 상팔은 그 말을 듣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건 또 무슨 규정일까?' 그러나 상팔은 여전히 높은 음성으로 외쳤다. "그대는 우리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흑혈의 주인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대는 틀림없이 중주이고 첫째 인 금산반 상팔일 것이다." 상팔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또 한 분은?" 흑혈의 주인은 이내 대답했다. "그 이름은 강호에서 쟁쟁한 소영! 그렇소?" 상팔은 소영을 바라 보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보아하니 그는 고의로 우리를 여기까지 유인한 것 같소. 하지만 소제는 아직 흑혈의 주인이란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필시 여기에 는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소." 소영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가 단번에 우리들의 이름을 알아냈는데 정말 의아스러운 일이 군요." 흑혈의 주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왕방, 네가 감히 나를 배반하다니 너의 죄는 백 번 죽여도 시원 치 않겠다." 왕방은 상팔을 바라 보았다. "만약 우리가 그놈의 손에 잡히게 된다면 어떤 참혹한 형벌을 당 할지도 모르니 차라리 피파리에게 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그 의 수중에 들어 가고 싶지 않소." 그는 놀라고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소영은 손을 천천히 내밀며 낮은 소리로 왕방에게 말했다. "왕형, 그 비수를 나에게 주시오." 왕방은 이미 혼비백산해 있었으므로 소영이 시키는 대로 비수를 소영에게 건네 주었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비수를 고쳐 잡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소영은 평생 기습을 해 보지 않았는데 오늘은 상황이 다르니 할 수 없이 수단 방법을 가릴 여지가 없소." 상팔이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그놈의 간사한 계략에 걸려 들어서 여기에 갇히게 되었으니 어떤 수단으로 반격을 하더라도 떳떳하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소영이 이윽고 힘있게 말했다. "좋소! 상형은 다시 그놈에게 말을 거시오. 나는 그놈이 서 있는 위치를 알아 내야겠소." 왜냐하면 휘장 밖에는 피파리들이 수없이 겹겹으로 몰려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리를 들어 그의 위치를 짐작하려는 것이었다. 상팔이 높은 소리로 말했다. "노형은 스스로 흑혈의 주인이라 칭했고 또한 하필이면 이런 햇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떳떳이 고개를 들고 남의 앞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소." 흑혈의 주인은 그 말을 듣자 냉랭한 목소리로 웃어젖혔다. "내가 연마한 무공은 여느 것과는 달라 그대들도 추측할 수 없는 것이오." 소영은 미리 암암리에 공력을 끌어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어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흑혈의 주인이 있는 곳을 확인하게 되자 갑자기 오른손을 날렸다. 그러자 비수가 휘장을 뚫고 나갔다. 휘장이 찢어지자 곧 몇 마리의 피파라가 날아 들어 왔다. 그러나 소영은 미리 준비해 있다가 오른손을 휘둘러 두 마리의 피파리를 당장에 때려 죽였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쏜살같이 뻗어 찢어진 휘 장을 감싸 쥐었다. 소영의 동작은 과연 번개처럼 빨랐다. 장자안이 피파리를 건드리 지 말라고 소리쳐서 경고하려고 했었으나 그의 말이 채 나올 겨를 도 없이 소영은 두 마리의 피파리를 때려 죽이고 오른손으로는 찢 어진 휘장을 봉해 버린 것이었다. 수십 마리가 길다란 주둥이로 소영의 손을 마구 물어 뜯었다. 장자안은 대경실색하여 소리를 질렀다. "소형, 피파리에게 손등을 물려서는 절대로 안 되오."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상관 없소. 손에 장갑을 끼고 있으니까....." 장자안이 말을 이었다. "피파리의 입은 뾰죽하게 튀어 나와서 손에 장갑을 끼고 있다 하 더라도 방지하기 어려울 것이오." "이 장갑은 보통 것과는 달라 예리한 칼날로도 상하게 할 수 없 는 것이오." 장자안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마리의 피파리가 소영의 손등을 물어 뜯는데도 그가 아무렇 지도 않은 것을 보자 어안이 벙벙해져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 었다. 상팔은 소영의 회선수법이 천고의 일절(一絶)이라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 한 칼이 저 흑혈의 주인에게 상처를 입혔으면 좋으련만. 그 렇게 된다면 힘을 모아 구름처럼 몰려드는 이 피파리들을 상대할 수도 있을 텐데......' 상팔은 그러기를 바라면서 정신을 곤두세워 자세히 들어 봤지만 오랫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편 휘장 안의 사람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조용히 있었으므로 사방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리 덮었다. 차 한 잔 끓일 시간이 족히 지나갔는데도 여전히 흑혈의 주인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상팔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상한데, 흑혈의 주인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슬며시 물러 났단 말인가?' 소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 휘장 속에 언제까지 갇혀 있을 수는 없소. 어떤 방법 을 생각해 내서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하오."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 흑혈의 주인은 형님의 회선수법에 명중되어 부상을 당해서 슬며시 물러 갔는지도 모르오." 상팔은 다시 장자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형, 휘장 밖의 피파리들을 물리칠 좋은 방법은 없소?" 장자안은 일개 서생이었지만 생사에 관해서는 담담하며 차분한 기색을 보여 주었다. "현재 유일한 방법은 밤이 깊어 날씨가 차가워졌을 때 그것들이 스스로 물러나게 되는 길뿐이오." 상팔은 그 말에 약간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그렇다면 이 피파리들이 추위를 탄단 말이오?" 장자안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피파리들에게는 두 가지 특성이 있소. 그 한 가지는 이것들 은 식성이 놀라워 열두 시간 내에 무엇이든 먹지를 못하면 곧 날개 에 힘이 빠져 사람을 해칠 능력이 없어지며, 또 한 가지는 한랭을 매우 두려워하여 추위에도 견딜 수 없으며 또한 반대로 햇빛도 오 래 받을 수 없다는 것이오." 소영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장자안은 여전히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스스로 물러가는 길밖에 다른 양책을 나로서는 생각해 낼 수 없구료."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마냥 참고 기다릴 수 있도록 흑혈의 주인이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휘장 안에 갇혀 마음대로 그의 손에 맡겨질 바에야 차라리 힘껏 뚫고 나가서 그와 자웅을 겨루는 게 나을 것이 오." 장자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망갈 기회를 포착할 수가 없소. 이 휘장을 한 걸음만 벗어나 면 곧 피파리가 사면 팔방에서 공격을 가해 올 것이오. 그때 만약 한 번만 물린다면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사이에 독이 발작하여 전 신이 마비되어 무공을 잃고 피파리에게 피를 빨려 죽는 길밖에 도 리가 없소." 장자안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 여러분이 갑옷 속에 몸을 숨긴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한 가망이 없소." 소영이 이 말에 무슨 대꾸를 하려는데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나며 한 줄기의 차가운 빛이 휘장을 뚫고 들어 왔다. 그러나 소영 의 수법은 번개같이 빨랐다. 게다가 천 년 묵은 교피 장갑을 끼고 있었으므로 칼을 겁내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어 덥석 쥐었다. 받아 쥔 칼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그것은 한 자루의 버들잎처럼 납작하게 생긴 유엽비도(柳葉飛刀)였다. 상팔은 급히 수중의 막대기를 휘둘러 윙윙거리며 찢어진 구멍을 통해 들어 오는 두 마리의 피파리를 쳐서 떨어뜨렸다. 그러나 피파리들은 인기척을 듣자 찢어진 휘장 구멍으로 다투어 서 들어 오기 시작했다. 소영은 급히 들고 있던 비도를 던져 버리고, 오른손을 들어 올려 비도에 의해 찢어진 휘장을 감싸 쥐었다. 소영은 두 손으로 휘장의 두 구멍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흑혈의 주인이 다시 암기를 뻗쳐 내서 또 다시 휘장의 한 곳을 찢어 버린다면, 그 때는 피파리 가 제멋대로 날아 들어 와서 네 사람은 몰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대는 칼 한 자루를 던진 다음, 오랫동안 암 기를 쳐 내지 않았다. 시시각각으로 죽음이 임박해 오는 이때 경험 이 많다는 상팔도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장자안을 바 라 보며 묻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난들 그것을 어떻게 알겠소." 기실 상팔도 그에게 물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막힐 듯한 분위기를 배겨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휘장 속에 갇혀 있는 게 뉘시오?" 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소영과 상팔은 깜짝 놀랐다. 상팔이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형님, 저것은 금화부인의 목소리가 아니오?" "그렇군요.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여길 왔을까? 혹시 이 흑혈의 주인 역시 심목풍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85. 독거미의 숲을 벗어나 소영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금화부인이 흑혈 주 인을 알게 되었나에 대하여 의혹을 품고 있을 때 굵은 음성이 들려 왔다. "저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은 바로 중주이고 중의 상팔과 소영..." 그 소리를 들은 금화부인은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소영이라? 그 자는 우리와 영 마음이 통하지 않는 자인데 오늘 만일 당신에게 생포되었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크게 기뻐해야 할 일 일 뿐더러 또한 강호를 진동시킬 만한 대사로군요." 흑혈 주인이 말을 이었다. "저 소영은 개성이 강해서 우리 흑혈문하에 들어오기를 거절하니 어쩔 수 없이 저들을 둘러 싸고 있는 휘장을 열어서 혈승의 배나 채워 주도록 해야겠습니다." 금화부인은 마치 소영에게 들으라는 듯 고의로 목청을 높여서 말 했다. "그렇게 하면 너무도 아까운 것 같군요." 그러자 흑혈 주인은, "아까울 게 뭐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금화부인은 그에게 반문했다. "당신은 소영이 오늘날 강호에서 날리고 있는 명성을 알고 계십 니까?" 그녀의 묻는 말에 흑혈 주인은 머리를 저었다. "근 몇 해 동안 저는 흑혈에서 떠나 본 일이 드물어 단지 딴 사 람에게 소영이라는 자의 이름을 전해 들었을 뿐 그 자세한 내정은 모르고 있지요. 그러나 중주이고만은 옛날에 한 번 만나 본 일이 있었지요. 확실히 크게 이름이 나 있는 인물이더군요." 상팔은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 자가 나와 한 번 만났다고?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 이때 금화부인의 말이 들려 왔다. "소영은 강호에서 이름을 날린 기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 명성 이 전 무림에 쟁쟁하게 퍼져 있는데 만일 당신이 혈승으로 하여금 그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를 빨아 먹게 하였다면 딴 사람이 그 사 실을 믿으려 하지 않을 걸요." 그 말에 흑혈 주인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금화부인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소영의 명성이 너무도 크게 알려졌기 때문에 만일 당신이 정말 로 그를 죽였다 해도 딴 사람이 못 믿는 것 뿐만 아니라, 나 금화 부인 역시 그를 친히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그가 혈승에게 갇혔다 는 사실을 못 믿겠군요." 흑혈 주인은 핫하 하고 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는 것을 보니 소영을 죽일 수가 없다 그 말 씀이군요?" 다시 금화부인은 수긍했다. "그렇소. 당신이 그를 생포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당장에 사해 (四海)에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며 강호를 호령하게 되지요." 흑혈 주인은 득의에 찬 음성으로 긍정했다. "그렇게 되겠군요." 금화부인은 잘라서 말했다. "제가 한 말은 전부가 사실이지만 만일 당신이 믿어 주시지 않는 다면 그거야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 소영이라는 자는 워낙에 성질이 누구에게 지기를 싫어하는 자라 나의 흑혈문하에 들어 오지를 않으니 남겨 둬 봐야 화근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요." 하는 흑혈 주인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그 말에 금화부인은, "그를 생포하려면 역시 꾀를 써야지요. 시간을 끌면 소영은..." 하더니 갑자기 음성을 낮추어 무어라고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그 래서 더 이상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 흑혈 주 인의 말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부인의 말씀이 옳소. 과연 부인의 고견은 실로 대단하시군요. 소생으로 하여금 탄복을 금치 못하게 하십니다." 이 말을 듣자 상팔은 소영의 귀에다 입을 바짝 대고 이렇게 속삭 였다. "금화부인이 틀림없이 형님을 구해 낼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영도 조용히 대꾸했다. "저 여인의 속셈은 도저히 예측하기가 힘드는군요. 도대체 그녀 가 무슨 연극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구료." 상팔은 더욱 자신있게 말했다. "아마 제 말이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딴 사람에게는 악 독하지만 형님에게만은 특별히 대해 주거든요." 다시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그러자 멀찍이서 갑자기 일진의 괴 이한 소리가 전해지자 휘장에 달라 붙어 있던 혈승들이 돌연 하나 도 남아 있지 않고 전부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 보니 햇빛이 나무 위에 비스듬히 내리 쬐 고 있는 것이 아마 정오경쯤 된 듯 싶었다. 소영이 초조한 듯이 막그 휘장을 들치고 나가려 할때 장자안의 말소리가 들렸다. "소형, 잠시 기다렸다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왜요?" 하고 소영이 반문하자 장자안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 흑혈 주인은 혈승을 숨겨 두는 흑룡(黑龍) 검은색 새장 비슷 것이 있지요. 만일 그가 나무 뒤에 숨어서 당신이 휘장을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혈승을 풀어 놓는다면 그 때는 이미 다시 이곳 으로 피해 오려 해도 그럴 여유가 없을 것이오." 소영이 그 말에 그만 주저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차피 흉측한 위험을 한 번 치러야 될 판인데 이 휘장 속에서 멍청하게 갇혀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소?" 하고 휘장을 들치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로 그때 부드럽고 가 느다란 음성이 귓가에 들려 왔다. "빨리 휘장 속으로 다시 물러 가시오." 소영은 대번에 그것이 금화부인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금화 부인이 전음지술로써 자기에게 위험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깨달은 소영이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어 몸을 돌려 다시 휘장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것을 본 상팔이 다급히 물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휘장 밖에는 역시 매복이 있었나요?" 소영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금화부인이 전음지술로써 나에게 휘장 속으로 다시 들어 가라고 하는구료." 그 말을 듣고 상팔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면 됐어요!" 소영은 상팔의 말에 눈이 휘등그래지며 반문했다. "아니 무엇이 됐다는 말이오?" 소영이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보자 상팔은 태연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다면 절대로 형님에게 휘장 속으 로 되돌아 가라고 일러 줄 리가 없다는 이야기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어찌 알 수 있단 말이오?" 하고 소영이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상팔은 차근차근 말하였다. "그 금화부인은 몹시 영리한 사람이며 전신이 극독일 뿐 아니라 매서운 하수를 할 수 있는만큼, 만일 아직 계책에 만전을 기하지 못했다 치더라도 그녀가 형님을 구해 낼 생각만 갖고 있다면 필연 코 무슨 방법을 생각해 낼 것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돌연 금화부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동생, 부상을 당하지 않았겠지요?" 하고 물었다. 소영은 곧 입을 열고, "아무 이상 없습니다." 하며 대답했다. 이때 그녀의 옥같이 하얀 손이 뻗쳐 오더니 휘장 을 들추었다. "이제 나와도 괜찮아요." 소영이 앞장서서 휘장 밖으로 나오자 상팔도 소영의 뒤를 바짝 따라 나왔다. 햇빛 아래서 보는 금화부인의 안색은 창백하여 핏기라고는 한점 도 없어 보였으며 머리는 어지럽게 흐트러져서 마치 잠에서 갓 깨 꺼난 듯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몸을 지탱하지 못 하는 듯 비틀거렸다. "누님의 상처는 좀 나아졌습니까?" 그의 물음에 금화부인은 가냘픈 미소를 입가에 띠며 대답했다. "괜찮아, 설마 죽기야 할라구?" 소영은 이이 무위도장 등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그녀가 살려 주 었다는 이야기를 듣던 터라 몇 마디 감사의 말을 하려고 했다. 그 러나 갑자기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서 가볍게 탄식하며 물었다. "그 흑혈 주인은 어찌 됐습니까?" "내가 몰래 독사를 풀어 그를 물게 했으니 그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반나절 이상을 지탱해 내지 못할 것이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왕방이 옆에서 불쑥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흑혈 중에는 일남일녀가 있어 만일 남주인이 부상을 당했을 때에는 여주인이 가만히 있지 알을 것이외다." 금화부인도 그것을 시인했다. "그래서 우리는 되도록 빨리 이곳을 도주해야 되지요. 내가 알기 로는 그 흑혈 중에는 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있는 것 같던데...." 소영은 궁금한 것을 다시 물었다. "누님께서 어찌 그 흑혈 주인을 알고 계십니까?" 금화부인은 잘라 말했다. "말을 하자면 길어지며 또한 한두 마디로써 될 이야기가 아닐 뿐 더러 이곳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도 못 되니 빨리 피신처를 먼저 물색해 놓은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지." 그때 옆에 섰던 장자안이 나섰다. "만일 그 흑혈 여주인이 혈승을 갖고 당신들의 뒤를 쫓아와서 그 것을 풀어 놓게 된다면 아마 이 천하에 당신들이 몸을 숨길 곳이라 고는 한 군데도 없을 것이오." 그 말에 금화부인은 차디찬 웃음을 띠고 대꾸했다. "혈승이 비록 악독하기는 하지만 나 금화부인이 보기에는 그토록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고 봐요. 당신은 천하 만독이 서로 제압하고 중화할 수 있다는 원칙을 모르십니까?" 장자안은 대답했다. "소생이 알고 있는 바로는 묘강(苗彊)에 있는 인면(人面) 거미만 이 그 혈승을 제압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그러자 금화부인은 슬쩍 그를 바라 보더니 웃음을 띠고 말했다. "맞았소. 보아하니 당신의 견식은 좀 넓은 것도 같구료. 내 몸에 는 바로 그 묘강의 인면 거미를 갖고 있지요." 장자안의 얼굴엔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시다면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하셔야요. 지금 이곳에서 만 일 흑혈의 여주인이 그 혈승을 풀어 낸다면 당신네들이 아무리 인 면 거미를 갖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막아 내겠소이까?" 그 말에 금화부인도 끄덕였다. "이 사람의 말이 맞아요. 우리는 되도록 빨리 몸을 숨길 만한 곳 을 찾아야 합니다." 그녀의 말에 소영이 곧 호응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누님을 안고 길을 재촉하도록 하겠습니 다." 상팔은 소영을 힐끔 쳐다 보며 물었다. "장형도 모시고 가야겠지요?" 그러자 장자안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소생은 이미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어 행 동이 불편하니 당신네들이나 빨리 도주하시오." 상팔이 불쑥 앞으로 한 발 다가서더니 일장을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장자안이 앉아 있던 나무 의자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자아! 소생이 장형을 업고 길을 떠나기로 하겠소이다." 미처 장자안이 무어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그 반쪽 난 의자와 그 위에 앉은 장자안을 들쳐 업더니 큰 걸음으로 앞을 향해 전진하였 다. 왕방이 가슴을 쓱 내밀고 나섰다. "제가 앞장서서 길을 열겠습니다." 이 사람은 그 흑혈 주인을 매우 존경하고 또한 두려워하는 것 같 더니만 지금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이 보였다. 상팔은 장자안을 등에 업고 왕방의 뒤를 따랐으며 소영은 금화부 인을 부축하고 맨 끝에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금화부인은 두 다리에 워낙 힘이 없어 길을 걷기에는 너무도 무리인 듯했다. 소영은 하는 수 없이 금화부인을 두 팔로 꽉 껴안고 달렸다. 금화부인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소영에게 물었다. "동생, 이렇게 나를 안으면 딴 사람들이 시샘할 것이 염려되지 않아?" 소영은 빙긋이 웃으며 속으로, '지금 이렇게 위급할 때에도 농담을 할 여유가 있다니.' 하고 생각하며 금화부인에게 말했다. "누님께서 길을 걸을 수 없으시기에 소제가 수고를 좀 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금화부인은 앞에다 대고 소리쳤다. "당신들이 이곳에 들어 온 길을 기억하고 있다면 빨리 그 길로 나갑시다. 우리는 동굴 속으로 우선 피신을 해야 되니까요." 상팔은 길눈이 밝았다. 길을 기억하는 재주는 강호에서 그를 따 를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그는 연방 앞장 선 왕방에게 이 리 가라 저리 꺾어라 하고 뒤에서 소리쳐 알려 주었다. 그들 일행은 약 반 시간 정도 길을 재촉하여 숲가에 도착했다. 푸른 하늘에는 흰구름이 한가롭게 떠 있고, 높은 산마루에도 한 조 각 걸려 있었다. 그 한 조각은 마침 절벽 위의 한 곳을 뒤덮고 있 었다. 상팔은 가느다란 탄식을 하더니, "우리는 방향을 잘못 잡았습니다." 했다. 소영은 돌연 손불사와 무위도장 등이 머리에 떠올라 속으 로 흠칫 하였다. "안 되요. 우리는 빨리 길을 되돌아 가야 됩니다." 장자안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직 험지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왜 또 그 호랑 이 아가리에 뛰어 들려고 하십니까?" 소영은 상팔을 똑바로 바라 보며 말했다. "L우리는 그 험지를 벗어났다 할 수 있겠지만 무위도장과 손불사 등 여러 사람은 그 혈승의 독함을 모르고 있는데 혹시 숲 속으로 우리를 찾으러 들어 가게 되면 필시 흑혈 주인에게 당할 것이 아니 겠소." 금화부인이 물었다. "아! 그들도 전부 왔나요?" "예, 그 분들은 전부 숲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며 저와 상형이 사 나운 개를 따라 숲 속으로 쫓아 들어 왔지요." "동생이 쫓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 사람이에요?" "저의 부모......" 하다가 뚝 그치더니, "누님께서 그 흑혈 주인과 잘 알고 계신 모양인데 혹시 그가 어 떤 사람을 생포한 것을 못 보았나요?" 금화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흑혈 내외의 실정을 모르고 있지." "그렇다면 그가 어째서 누님을 구해 주었습니까?" '내가 길 옆에 까무러쳐 있을 때 백화산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출되었지. 아마 심목풍은 나를 아직 크게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 는지 고수들을 파견하여 해독약을 갖고 나의 행방을 쫓았었지. 어 쨌든 내가 죽을 때가 아니었던지 그들에게 발견된 것이야." 소영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누님께서는 왜 그 흑혈 안으로 뛰어 들었지요?" "이 누나가 기절하여 혼수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이 이곳으로 업어 왔어. 그래서 나는 이 흑혈이 백화산장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았던 것이야." 상팔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맞았어요! 맞아....." 소영은 의아한 얼굴로, "무슨 일인데요?" 하고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옛적에 천하 고수들이 심목풍을 밀림 속까지 쫓 았으나 밀림 속에서 갑자기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그 러니 아마 틀림없이 그 흑혈 속에 숨었던 모양이지요?" 그 말에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러면 그 흑혈은 심목풍의 본 소굴인 모양이군." 금화부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그 안에 들어가 보니 매우 넓고 큰데 칠흑같이 어둡더군요. 내 생각 같아서는 그 안에 많은 문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그러자 소영은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흠! 내 양친께서 틀림 없이 그 흑혈 속에 갇혀 계신 모양이로 군." 상팔이 소영의 말을 받았다. "만일 두 어르신네께서 정말로 그 흑혈 안에 갇혔다면 그것은 아 마 막 날이 밝을 무렵일 겁니다." 하며 눈길을 금화부인의 얼굴에 박으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부인께서는 언제 깨어나셨나요?" "나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요. 나는 깨어난 뒤 바로 그 흑혈 속을 더듬으며 빠져 나왔지요. 흑혈 속에는 통로가 하도 많아 복잡하긴 하나 내가 있던 곳이 마침 그 동굴의 입구에 가까운 곳이었기에 더듬거리며 출구를 찾게 되었던 것이오." 하더니 소영을 보고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 누나가 누구라고, 비록 그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딱 짐작이 갔었지. 더구나 그는 나를 모르고 있었거든." 상팔이 다시 물었다. "부인의 말씀을 들어 보니 소대협의 양친께서 납치되었다는 사실 을 몰랐던 모양이지요?" "예, 몰랐어요. 내가 그 흑혈에서 나오자마자 당신네들이 그 혈 승에게 갇혀 있는 것을 보게 된 거지요." 소영이 금화부인에게 물었다. "그 흑혈은 땅 속 깊이 있는 하나의 동굴이겠지요?"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 가자면 얼마나 많은 문호가 있는지 그 수 를 알 수가 없으며 그 안이 얼마나 깊고 긴지 만일 그곳의 내정을 모르는 사람이 흑혈에 발을 들여 놓게 되면 그들에게 생포되지 않 으면 암수에 걸려 죽게 마련이지." 소영은 그 말에 이마를 찌푸렸다. "그 흑혈 속에는 많은 함정을 만들어 놓은 모양이군요?" "함정이 매복되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동굴 속의 어둠이란 심야보다도 더 캄캄하더군. 그 흑혈 안에서는 아무리 좋 은 시력이라도 석 자 밖의 물체를 분간해 낼 수가 없을 정도였어. 그러니 무슨 함정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저 사람의 암 습만이라도 막아 낼 궁리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소영이 또 물었다. "그 흑혈 안에는 사람이 많습니까?" "나는 그 흑혈 안에서는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어. 그러나 내 감각으로는 많은 사람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더군." "저에게는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고 소영이 말했다. 금화부인은 눈으로 그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소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흑혈 내에 있는 사람은 그 안에서 어떻게 물건을 분별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금화부인은 잠시 주저하더니 대답했다. "그런 무공은 이 누나가 연마해 보지 않아 장담을 할 수가 없으 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 흑혈 속에서 계속 여러 해를 살아 왔다면 흑암중에도 물건을 분별할 수 있는 특수한 안력을 연구해 낼 수도 있는 문제겠지." 상팔이 다시 화중에 끼여 들었다. "그들의 안력은 야밤에도 물체를 볼 수 있도록 연마해 내지는 못 할망정 최저한도 그 흑혈 중의 형세에 익숙하여질 수는 있는 문제 니까. 만일 그들이 적당한 곳에 몸을 숨겨 암습을 해 온다면 역시 막아 내기가 힘들 것이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장자안이 돌연 그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는 빨리 혈승을 방비해 낼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 흑혈 속의 사람이 쫓아 오기라도 한다면 사방에 이렇게 아무런 방비도 없는 이곳에서 틀림없이 당하 고 말 것이외다." 금화부인은 고개를 쑤욱 빼고 절벽 밑을 한번 살피더니 소영에게 물었다. "동생은 이 절벽을 내려갈 수 있겠나?" 소영도 밑을 한번 살펴 보았다. "아마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금화부인은 절벽 밑의 모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일 이 절벽 밑에 우리가 숨을 만한 동굴이 없다면 우리는 저 모퉁이를 이용해서 그 혈승을 막아 내야 해요." 상팔은 재빨리 등에 업고 있던 장자안을 내려 놓고 장삼을 벗더 니 쭉쭉 찢어서 마디마디 붙잡아 동여 매었다. 그렇게 해서 제법 튼튼한 밧줄을 만들고는 금화부인을 향해 말했다. "부인께서 먼저 절벽 밑으로 내려 가시오." 하더니 소영을 한번 쳐다 보고, "형님께서도 모험을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금화부인은 입가에 웃음을 짓더니 장삼을 찢어서 이은 헝겊 밧줄 을 잡고 천천히 절벽 밑으로 내려 갔다. 소영도 장자안을 안고 역시 그녀의 뒤를 이어 절벽 밑으로 내려 갔다. 제일 나중에 남은 상팔은 그 밧줄의 한쪽 끝을 나무에 매어 놓고 자기도 그것을 잡고 밑으로 내려 섰다. 그 절벽 밑은 이백 평쯤 되는 아담한 분지였다. 그리고 삼면이 일곱 길쯤 되는 절벽으로 둘러 싸였으며 단지 일면만이 밖으로 통 할 수가 있는 곳이었다. 금화부인은 주위를 눈여겨 살펴 보았으나 동굴은 눈에 띄지 않았 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모퉁이를 찾아서 좌정했다. 상팔은 금화부인을 쳐다 보며 물었다. "부인! 이곳은 그 혈승을 막아 낼 수 있을 만한 곳입니까?" "아마 그런 것 같군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무위도장을 한번 불러 보도록 하죠." 하더니 목청을 높여 길게 휘파람을 부는 것이었다. 그 휘파람소 리는 마치 용의 울부짖음과도 같이 구름을 뚫고 울려 퍼졌다. 그러 자 조금 후에 컹컹 개짖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상팔은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그 분들이 찾아 왔습니다." 하고 다시 얼굴을 치켜 들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 휘파람소리가 멎기가 무섭게 한 마리의 호랑이같이 사나운 개가 쏜살같이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그 사나운 개의 뒤에는 두구와 사마건이 따르고 있었다. 상팔은 소리 높여 불렀다. "두제, 큰형님은 이곳에 계시네!" 두구와 사마건은 곧 대답을 하고 달려 왔다. 소영은 그들에게 다급히 물었다. "손노선배님과 무위도장께서는 어디로 가셨소?" "그 분들은 개를 앞세우고 숲 속으로 형님을 찾으러 들어 갔지 요." 그 말에 소영은 아연실색했다. 그는 황급히 외쳤다. "아차! 큰일났군! 그 분들이 만일 흑혈 안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 면 혈승에게 큰 화를 당하게 될 텐데....." 하자 두구가 물었다. "어떻게 생긴 혈승인데요?" 상팔이 대뜸 나섰다. "지금 이렇게 경황 없는 중에 자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시간이 없네. 자네들은 여기서 형님을 모시고 있게. 나는 이 사나 운 개의 힘을 빌려 그 분들을 찾아 올 테니까....." 장자안이 한쪽 구석에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으로는 가실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만일 그 분들이 혈 승의 떼를 만났다면 당신이 갔다고 무슨 도움이 될 것도 아닐 테니 가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팔은, "무림의 일에 대해서 장형은 아직 모르고 있소." 하더니 몸을 재빨리 일으키며 그 사나운 개의 엉덩이를 한 번 탁 치며 사람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또 한번 수고 좀 해 주어야겠다!" 이때 왕방이 크게 소리쳤다. "상형! 잠깐만!" 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저것 봐! 혈승이 다가 오고 있소. 자세히 귀를 기울이고 들어 봐요. 틀림 없이 부웅부웅 하는 소리가 들려 오니까." 상팔은 눈살을 모으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더니, "과연 그렇군. 틀림 없이 혈승이 날아 오는 소리다!" 하고 재빨리 두 손으로 개를 덥석 안더니 제자리로 뛰어 왔다. 금화부인은 긴장된 얼굴로 황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당신들은 저 구석진 곳으로 가서 한데 모여 계시오." 하고 당부했다. 소영 등은 이미 그 혈승의 무서움을 알았던지라 그 말에 재빨리 물러 나서 구석진 곳으로 갔다. 그러나 두구와 사마건은 혈승이 도 대체 어떤 독충인지를 몰라 과히 두려운 기색도 없이 천천히 그들 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구석에 모여 자세히 바라 보니 금화부인은 침착한 솜씨로 품 속에서 한 개의 옥함을 꺼내더니 그 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 고 위로 한 번 쳐 드니 전신이 벽록색(碧綠色)인 네 마리의 복숭아 씨만한 거미가 일제히 옥함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들이 피신한 모 퉁이에는 작은 나무들이 많이 서 있었다. 옥함에서 나온 네 마리의 큼직한 거미는 그 작은 나무 사이를 왔 다갔다 하며 빙빙 돌았다. 순식간에 몇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는 절 벽 모퉁이는 거미줄로 엉켜 버렸다. 금화부인은 거미줄이 엉킨 것을 보자 그제서야 엷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동생, 이 거미줄이 튼튼하고 밀집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혈승의 수가 워낙 많아 혹 한두 마리가 그 거미줄을 뚫고 들어 올지도 모 르니 각별히 주의를 해 주기 바라오." 왕방은 손을 내밀어 억센 잡초를 한 줌 뽑아 들고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상팔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한 움큼 꺾 어 들었다. 두구와 사마건은 서로 얼굴을 바라 보더니 가만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금화부인은 서서히 풀숲 위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거미줄 속에 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일러 주었다. "당신들은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절대로 그 거미줄에 손가락이 닿지 않도록 주의해야 돼요." 그 말에 상팔이 되물었다. "왜요? 이 거미줄에도 극독이 있습니까?" 금화부인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 핏기라고는 한 점도 없는 창백한 안색이었으나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을 한 채 마치 생사 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상팔의 물음에 그녀는 가볍게 웃더니 대답했다. "그 거미줄의 독은 과히 독하지는 않으나 저 독거미에게 굉장히 예민한 반응을 주지요. 그 거미줄에 어떠한 물체든지 닿기만 하면 저 독거미는 사람을 물어 버리게 되지요." "만일 그 독거미에게 물리게 된다면 구출할 방법이 없습니까?" 금화부인은 상팔의 물음에 잠시 주저하더니 애매한 대답을 했다. "저 독거미의 뱃속에 든 독은 굉장하지요. 만일 실수하여 그것에 물렸다 하면 구할 방법이 전혀 없지요." "부인의 말씀은 구할 기회가 도저히 없다는 이야기신가요?" 금화부인은 끝까지 물어 오는 상팔에게 힐끗 눈길을 보내더니 대 답했다. "내가 최고로 짧은 시간 내에 물린 사람에게 저 독거미의 독이 퍼지지 않게 하는 약물을 먹이기 전에는 어렵지요. 그러나 그 짧은 기회란 너무도 순간적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만일 독거미에게 물렸 다 하면 구사일생 정도라고 생각하면 틀림 없어요." 그 말에 상팔은 음성을 높여 모두에게 주의를 주었다. "여러분, 모두 들으셨겠지요? 우리 서로 저 거미줄에 닿지 않도 록 각별히 조심합시다." 소영과 상팔은 전신에 단단히 공력을 모으고 한동안 기다렸으나 혈승은 날아 들지 않았고 거미줄만 더욱 단단하게 얽혀 가고 있었 다. 두구가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어째서 그 혈승인가 하는 독충이 나타나질 않는가?" 왕방이 정신을 모아 귀를 기울여 봤으나 그 부웅부웅 하던 혈승 의 날개소리는 벌써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치 그 혈승이 이곳까지 날아 왔다가 다시 돌아간 듯하였다. 소영은 언뜻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안색이 변하며 소리쳤 다. "그 혈승떼가 손노선배님과 무위도장을 만난 것 같은데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빨리 가서 알려 드려야 하지 않을까?" 장자안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미 늦었소이다. 만일 두 분께서 그 혈승을 만났다면 지금쯤 벌써 피와 살이 전부 빨려서 시체조차 분별치 못하게 되었을 것입 니다." 두구는 여전히 냉연한 태도로 말했다. "우리가 그 두 분을 찾아 가는 것은 덮어 두고라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독거미가 쳐 놓은 거미줄 속에서 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노 릇이 아니겠습니까? 이 거미줄이 점점 더 견고하게 쳐지는 것을 보 니 어쩌면 우리 역시 이 거미줄 속에 갇혀서 죽게 될지도 모르겠군 요.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그 혈승의 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거미줄 밖으로 나가서 그 분들을 찾아 보는 것이 좋겠소이다." 장자안이 다시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분께서 근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잠 시 후 날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길을 재촉할 수 있게 되니까요." 소영의 가슴 속은 몹시 암연하였다. 그는 긴 한숨을 후욱 내쉬며 말했다. "우리 당당한 칠 척 장신들이 어이없게도 한 무리 혈승에게 발길 을 묶이고 또한 독거미줄의 힘을 빌려 목숨을 보전해야 된다니 정 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잠잠히 앉아 있던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동생, 너무 그렇게 영웅심만을 생각할 것 없소. 세상 일이란 전 부 무공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고쳐야 돼. 요. 이 누나만 해도 그렇지, 일생 동안을 각종 독물만 다루어 오면 서 용독지능(用毒之能)에 있어서 최고라고 장담하지는 못해도 공전 에 없었으리라 자부해 왔던 터인데 그러나 심목풍이 내 몸에 쓴 독 은 이 누나로서도 해독할 수가 없을 뿐더러 나의 모든 지략을 총동 원시켜서 연구를 해 봐도 그가 나에게 쓴 독의 조제법을 알아 내지 못했지." 상팔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물었다. "부인의 말씀은 이미 수중에 심목풍이 사용하는 독이 있다는 말 씀인가요?" "그렇습니다. 나는 꾀를 써서 심목풍이 사용하는 독물을 얻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 조제법을 알아 내지 못해 그 해약도 만들지 못하 고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계속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 심목풍 외에 단지 독수약왕 한 사람만이 그 약의 조제방법을 안다고 하더군요." 소영이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독수약왕은 이미 그의 딸을 데리고 은거해 버렸지요. 행 방을 알 수 없으니 그 분을 찾을 길이 막연하지요." 금화부인은 장자안을 똑바로 바라 보며 물었다. "당신은 혈승이 절대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장담을 할 수 있 겠어요?" "네, 소생이 혈승과 금시오공(金翅蜈蚣 : 지네의 일종)을 사육해 온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어 물론 장담할 수가 있지요." "좋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의 말을 믿겠소. 만일 혈승이 갑 자기 나타나면 당신의 몸으로 혈승의 배를 채우시겠어요?" "좋소이다. 그렇게 되면 소생 죽어도 원이 없겠소." 상팔이 금화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이 거미줄이 점점 더 밀접하게 엉키는데 언제 이것을 뚫 고 나가실 작정이십니까?" 그녀는 미소로 대답했다. "그거야 여러분께서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독수약왕이 독을 배합하는 능력은 나 금화부인보다 좀 위일지 모르나 독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나를 따르지 못할 것이오." '무림 중의 사람들이 갖는 이 명예에 대한 애착과 승리에 대한 집념은 정말로 그 도수가 넘칠 정도구나.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녀 는 아직 자기의 독물 사용 능력을 자랑하고 있단 말인가?' 금화부인은 웃음소리와 함께 약간 비웃듯이 말했다. "사람이란 태어난 곳과 묻힐 땅이 있어야 된다는 말은 당신네들 장부들이 자주 쓰는 말이지요. 여러분은 전부가 칠 척의 대장부이 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찌 이 금화부인보다도 더 하십니 까?" 소영이 가로막고 나섰다. "우리는 죽음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죽음이 가 치가 있나 없나를 따지는 것이지요. 만약 팔팔한 사지가 달린 장정 들이 그 혈승에게 피와 살을 빨리게 된다면 그것은 죽어도 눈을 감 지 못하게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금화부인은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지금 우리의 살 길은 광활하니 여러분께서는 마음 푹 놓고 담소 하시고 노래를 불러도 무방합니다." 하며 거리낌 없이 크게 웃었다. 상팔도 따라 웃으며 크게 외쳤다.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 사내 대장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슴 을 펴야 옳은 일이겠지요." 상팔의 말에 모두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우울한 생각을 날려 보 냈다. 그러나 소영은 두 눈을 감은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고 두 구도 괴이할 표정에 희색이라고는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날이 벌써 저물기 시작하였다. 상팔은 사방에 어둠이 깔리자 장자안에게 물었다. "장형, 하늘에 별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제 출발해도 되겠 지요?" "가도 되겠습니다." 상팔은 다시 금화부인을 향해 말했다. "부인이 이 거미줄 좀 치워 주시오." 금화부인은 미소를 띠고 장자안을 바로 보았다. "틀림없겠지요?" 장자안은 또렷이 대답했다. "틀림 없습니다." 금화부인은 서서히 품 속에서 옥함 하나를 꺼내더니, "여러분 중에 누구 횃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마건이 나섰다.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만 부인께서는 불로 이 거미줄을 태워 버 릴 작정이십니까?" "불로 태워 버릴 수는 없지요. 저 독거미는 워낙 동작이 빨라서 만일 도망이라도 가게 되면 필연코 해를 입는 사람이 생길 테니 반 드시 저 네 마리의 독거미를 먼저 제거한 다음에 이 거미줄을 태우 도록 해야지요." 사마건은 재차 물었다. "부인께서는 어떻게 저 네 마리의 독거미를 제거하실 작정이십니 까?" "가만히 계세요. 여러분께 좋은 구경을 하도록 해 드리지요." 하며 갑자기 그 옥함을 열어 팔을 한 번 쑥 내밀었다. 한 줄기 흰 선이 거미줄 위에 있는 독거미에게 덮쳐 갔다. 일행은 일제히 그 흰 선을 주시했다. 그것은 뜻밖에도 한 마리의 흰색 작은 뱀이 아닌가? 네 마리의 독거미는 그 백사를 보자 갑자기 그 백사를 향해 다가 가더니 자발적으로 백사의 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마건이 횃불을 높이 치켜 들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전부 그 광 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던지라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백 사의 몸은 몹시 작았기 때문에 연달아 복숭아씨만한 독거미 네 마 리를 먹고 나서 배가 불룩 튀어 나왔다. 이때 금화부인은 수중에 들고 있던 옥함을 다시 치켜 들고 그 뱀 을 한 번 건드렸다. 그러자 그 조그만 뱀은 순식간에 옥함 속으로 들어 가고 말았다. 금화부인은 서서히 뚜껑을 덮더니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저 거미줄을 태우도록 합시다." 사마건이 들고 있던 횃불을 거미줄에다 댔다. 순식간에 거미줄은 후두둑 하는 소리를 내고 깨끗이 타 버렸다. 상팔은 장자안을 업으며 말했다. "장형은 거동하기가 불편하니 아무래도 제가 업고 길을 재촉하도 록 해야겠습니다." 소영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금화부인을 돌아 보며 물었다. "누님께서는 거동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금화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 되겠소. 적어도 사흘쯤 휴양을 더 해야 될 것 같군." 소영은 그녀가 자기의 목숨을 여러 차례나 구해 준 은혜를 생각 하고, "소제가 부축해 드려야 마땅하지요." 하면서 몸을 굽히더니 금화부인을 선뜻 등에 업었다. 이때 두구가 나서며, "제가 앞장서겠소." 하고 앞장서서 걸어 갔다. 분지를 나서자 소영은 갑자기 발을 멈추더니 제의했다. "두형, 이 분들을 먼저 가게 하고 두형과 나는 손노선배님과 무 위도장을 찾으러 가도록 합시다." 두구의 말투는 항상 건방지다. 누구에게나 듣기 거북할 정도로 말하였으나 소영에게만은 항상 공경하고 정중한 태도였다. "소제는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소영은 사마건을 한 번 쳐다 보더니 부탁했다. "사마형께서는 매우 수고스럽겠지만 제 대신....." 금화부인이 그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이 분에게 나를 업히려고?" "그렇습니다." "안 되오! 나는 이곳에 남아서 동생을 구해 주어야 해요!" "누님께서는 몸도 자유롭지 못하신데 어찌 저를 도와 주시겠단 말씀입니까?" "내가 비록 행동에 불편을 느끼기는 하지만 나는 전신에 독물이 있어서 만일 그 혈승떼를 만나더라도 내 몸에 있는 독거미로 도와 줄 수가 있으니 아무래도 동생과 함께 있어야 좋을 거야." 두구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형님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부인을 업고서 어떻게 적 을 맞이하겠습니까? 만일 부인께서 정 고집을 부리시겠다면 소생이 할 수 없이 실례를 해야겠습니다." "어떠한 실례를 나에게 하겠다는 말씀이신지?" "소생이 강제로 부인을 업게 되는데 어찌 실례가 아니겠소이까?" 그러자 금화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괜찮습니다." 두구는 앞으로 두어 발 다가 서더니 금화부인을 업었다. 그리고 사마건을 쳐다 보며 부탁했다. "사마형께서는 우선 이 분들을 데리고 십 리 밖에 있는 그 동백 나무 밑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세요." 사마건은 곧 상팔 등과 함께 몸을 돌려 걸어 갔다. 소영은 밤하늘을 쳐다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그 두 사람을 찾지요?" "소제의 생각으로는 우리는 일정한 곳에 지키고 있으면서 저 사 나운 개를 풀어 그 분들을 찾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요." 하고 두구가 자기의 의견을 말하자 소영은 잠시 주저하더니 곧 동의했다.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두구는 금화부인을 업고 한 손으로는 그 사나운 개를 끌고 토롱 위로 올라 갔다. 그리고 갑자기 개의 엉덩이를 발로 탁 쳤다. 그와 동시에 나지막한 휘파람소리를 날카롭게 불었다. 그 큰 개는 컹컹 사납게 짖더니 몸을 날려 비호같이 앞으로 달려 갔다. 그 개의 속 력은 굉장했다. 곧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다시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그 소리가 점 점 가까이 달려 왔다. 두구는 고개를 번쩍 들고 앞을 바라 보았다. "소식이 오는군요." 소영은 궁금한 듯 물었다. "무슨 소식일까?" "두 마리 사나운 개는 이미 만난 모양입니다. 그 개가 아무 이상 이 없으니 손노선배님과 무위도장께서도 아무 위험이 없었던 모양 입니다." 그 말에 약간 안심을 하였으나 그래도 걱정이 되어, "정말일까?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나." 하고 반신반의하자 두구는 다시 힘있게 말했다. "소제가 어찌 형님에게 거짓을 말하겠소이까?"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과연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그림자 가 쏜살같이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앞에서 달려 오는 것은 두 마 리의 사나운 개들이었으며 그 뒤에는 손불사와 무위도장이 바짝 따 르고 있었다. 소영은 반가워 마주 달려 가서 그들을 맞이하며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두 분께서는 그 혈승떼를 만나지 않으셨군요." 그러자 손불사가 대뜸 대답했다. "바로 그 왕벌같이 생긴 파리떼들 말인가? 무섭지 무서워! 만일 무위도장의 재빠른 기지가 아니었다면 이 늙은 목숨은 벌써 그 파 리떼의 먹이가 되었을 게야." 소영은 그의 말을 들어 보니 분명히 그 혈승떼를 만난 듯한데 그 렇다면 맹렬히 달려드는 혈승떼를 이 두 분께서 무난히 넘기신 재 주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위도장도 입을 열어 손불사를 칭찬했다. "그게 아니지, 노선배님의 두 번에 걸친 강맹한 장력이 아니었던 들 우리는 아마 그 혈승을 피해 낼 기회가 없었을 것이외다." 하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 혈승을 푼 사람이 가련합니다. 우리 대신 혈승의 밥이 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손불사가 받아서 말했다. "불쌍할 게 뭐 있소. 그들은 우리 생명을 노리던 자들인데 죽어 마땅할 일이지....." 듣고 있던 소영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요." 하고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두구는 벌써 금화부인을 업고 상팔 등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손불사는 소영에게 웃으며 물었다. "자네도 그 혈승을 만났었나?" "네, 후배도 한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난 셈이지요." 하며 그동안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손불사는 묵묵히 듣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금화부인은 정말 나쁜 길을 버리고 정도로 돌아 올 마 음이 제법 있는 모양이구먼?" 무위도장은 엷은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렇다고 보지를 않습니다." "어디 그 고견을 들어 봅시다." "금화부인이 수차 우리에게 도움을 준 이유는 전부 이 소대협 한 사람을 위해서였지요." 하더니 소영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계속했다. "저는 벌써 수 년 전부터 금화부인의 이름을 들어 왔지요. 그 여 인은 몹시 냉혹할 뿐 아니라 악독하여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은 추 호도 염두에 두지 않으며 반생 동안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전부가 자기 멋대로 했었지요. 심목풍이 그녀의 성격을 십분 알고 있지 않 았더라면 절대로 중원에 들여 보내지 않았을 것이오." "옳은 말이오." 하고 손불사가 끄덕였다. 소영이 곧 이야기했다. "그러나 심목풍은 그의 몸에 독을 썼답니다." 그러자 무위도장이 대꾸했다. "그것 또한 소대협과 관계가 있지요." 소영은 무위도장을 향해 말했다. "심목풍은 의심이 워낙 많은 사람이라 절대 그 어느 사람도 믿지 를 않지요. 독수약왕의 몸에까지 역시 똑같은 수를 써 왔어요. 어 쨌든 백화산장 전체에서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심 목풍에게 암암리에 독수를 받았지요." 무위도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다 하지만 만일 심목풍이 금화부인이 소대협에게 마음 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못 챘다면 그토록 악착스럽게 독을 쓰 지 않았을 것이며 더욱이 그녀에게 직접 말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 오." 소영은 아직도 몇 마디 더 항변하려고 했으나 손불사가 나서며 막았다. 그는 껄껄 웃더니 농담 비슷하게 말하였다. "이 늙은 나도 눈치채고 있었지. 그 금화부인이 확실히 소제에게 한 가닥 특이한 감정을 갖고 있더군. 그 여인은 이름을 날린 지가 오래되니 따져 보면 아마 반백살은 될 듯 싶은데......" 그러나 그는 그녀의 나이를 말한 것이 너무 귀에 거슬릴 것 같아 서 돌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소영은 더 이상 이들이 금화부인의 이야기를 꺼낼까 겁이 나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두 분께서 위험을 당한 경파나 말씀해 주십시오." 손불사는 정색을 하고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소제의 행방을 쫓고자 그 숲 속으로 깊숙이 들어 갔지. 그리고 반나절이나 헤매어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 그 숲 속에서 맴 돌았었지. 그때 아마 개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숲 밖으로 달려 나갔지. 나와 도장은 이 개를 부르는 방법을 몰라서 어쩔 수 없이 그 개의 뒤를 따랐었지." 하더니 잠깐 말을 끊었다가 한숨을 쉬고 다시 차근차근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숲 밖으로 나오자 그 큰 개가 땅에 착 엎드려서 꼼짝도 하 지 않고 눈을 크게 부릅뜨고 앞을 노려 보며 이상한 태세를 갖추고 있더군. 나는 항상 허둥거렸으나 그 때만은 정신이 바짝 들더구먼.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앞을 바라 보았더니....." 말을 하다가 힐끗 무위도장을 한 번 쳐다 보며, "그때 마침 이 무위도장도 내 옆에 다가 왔었지." 하자 무위도장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노선배께서 그런 침착한 표정을 지으시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외다." 손불사가 갑자기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86.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소리 "사실인즉 그 사람들은 전부 흑색 옷차림을 하고 복면을 하여 컴 컴한 밤중이라서 있늘 것이 마치 나무와도 같았거든....." "참 그렇겠군요." "만일 무위도형이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암기의 타법으로 그 중 의 한 사람을 맞춰서 쓰러뜨리지 않았던들 이 늙은이는 아마 그것 을 나무로만 생각했을 거야." 무위도장이 그 말을 받아, "만일 제가 그 나뭇가지로 쳐 내지 않았던들 그들이 혈승떼(血蠅 : 피를 빨아 먹는 파리)를 풀어 내지 않았을는지도 모르지요." "무위도형께서는 원래가 마음이 자비로워 비록 나뭇가지를 꺾어 암기로 사용하긴 했으나 매우 약하게 쳤지. 그 사람은 가벼운 경상 을 입고 몸을 돌리더니 혈승을 풀어 내더군. 나는 형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손을 휘둘러 장풍을 쳐 내어 혈승의 공습을 저지 시키려 했지. 그때 무위도장께서 나를 잡아 당기어 숲 속으로 들어 왔지. 그러나 그 혈승의 큰 무리는 우리의 뒤를 맹렬히 쫓아 들어 왔는데 부웅부웅 날아 오는 소리가 귀청을 다 멍멍하게 하더군." 눈길이 사나운 개를 한 번 스치더니 말을 이었다. "그 순간 이 늙은 나는 사람의 지혜가 저 개만도 못하구나 싶었 지. 저 개는 마치 혈승의 지독함을 직감이나 한 것처럼 한 그루의 동백나무 뒤로 숨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와 무위도형도 곧 저 개의 뒤를 따라 동백나무 숲 속으로 몸을 숨기고는 장풍을 날려 혈 승의 침공을 막았던 것이지." 그 말에 소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캄캄한 밤에 시야가 분명치 않을 뿐 아니라 혈승의 날아 오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정확한데, 이 두 분께서 혈승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니 참으로 운이 좋았구나!' 손불사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래 나는 날아 들고 있는 것이 마치 왕벌같이 생긴 것임을 발 견했을 뿐 아니라 그 속도가 굉장하며 보통 왕벌보다 훨씬 빠르다 는 것을 알았네. 혈승의 수효는 점점 늘어서 천 마리쯤 되나 보더 군. 물론 나의 장풍 때문에 그 동백나무 안에까지 침입하지는 못했 으나 언제까지나 그런 방법으로 밀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 다행히 무위도형이 이 때를 잘 맞추어 두 개의 비수를 날려 혈승을 풀어 놓은 두 사람을 상하게 했지. 그 순간 어찌 된 일인지 혈승은 일제히 방향을 돌리더니 쓰러진 그들에게 달려 들어 순식간에 뼈만 앙상하게 남기고 모조리 뜯어 먹더군. 그래서 무위도형과 그 기회 에 도망을 쳤던 것이라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말로는 이렇지만 그 때의 실정은 생사가 경각에 달린 긴박한 상 태였으므로 지금 생각해 보아도 등골이 오싹해지는군. 나는 평생을 통해 무수한 풍파를 겪어 왔으며 독물을 사용하는 고수도 많이 보 아 왔지만 천 여 마리의 혈승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했던 것이었네."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미 그 동백나무 밑에까지 당도했 다. 상팔이 황급히 앞으로 나와 반기며, "두 분께서는 몹시 놀라셨지요?" 하고 말했다. 손불사는 눈을 굴리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훑어 보더니 웃는 낯으로 말했다. "다행한 일이오. 우리는 한 사람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을 뿐 아 니라 오히려 두 사람이 더 불었구료." 먼저 도착한 금화부인이 그의 말을 받아 쏘아 붙였다. "이 늙은이야! 왜 나는 치지 않지? 뻔히 세 사람이 늘었는데 어 째서 두 사람이라고만 하는가?" 손불사는 그제서야 그녀를 발견한 듯이 담담히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이건 또 누구요? 야아, 정말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 난다더니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금화부인은 차갑게 웃었다. "손노인! 혈승떼에게 죽지 않았으니 그 늙은 목숨을 잘 보존해야 겠구료. 심옥풍이 이미 삼 개월 내에 당신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맹 세를 했을 뿐 아니라 전무림에 그 말을 퍼뜨렸다오." 손불사는 태연히 받았다. "이 늙은이는 이렇게 많은 나이를 먹도록 아직 그 어느 누구의 협박에도 넘어가 본 적이 없었지. 허나 어쨌든 그런 말을 전해 주 니 고맙구료." 금화부인도 냉랭하게 말했다. "심목풍이 자신이 없으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니 각별히 조심해야겠소이다." 듣고 있던 무위도장이 이때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손선배님! 저것이 무슨 소리인가 좀 들어 보시오."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귀를 기울여 들어 보니 한가 닥의 악기소리가 고요하게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음악소리는 아주 기이했다. 퉁소소리 같기도 하고 비파소리 같기도 하였으며 또한 가만히 들어 보면 마치 두 가지의 악기를 합주하는 소리 같기 도 하였다. 손불사가 나직이 말했다. "저 소리는 마치 심목풍을 격퇴시킨 그 음악소리 같군." 무위도장도 끄덕였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소영은 재빨리 몸을 솟구치더니,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소생이 가 보고 오겠습니다." 하더니 이미 두 장 밖으로 달리고 있었다. 손불사도 그의 뒤를 따라 갈 생각을 했다. "무위도형께서는 이곳에 잠시 계십시오. 나도 그를 따라 가 보고 오겠소." 이에 무위도장이 황급히 외쳤다. "노선배님! 조심하십시오. 되도록 충돌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손불사의 몸은 두 장 밖으로 솟구 치고 있었다. 금화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무위도장은 숨을 크게 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오. 만일 제가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고 남에게 들은 이야기라면 나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세 상에 그렇게 기이한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금화부인은 답답한 듯 재촉했다. "도장님! 그렇게 돌려 이야기하지 마시고 어서 요점을 말씀해 주 십시오." 무위도장은 그녀를 힐끗 쳐다 보더니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날 저녁 심목풍이 백화산장 내의 고수들을 인솔하고 빈도와 손노선배님을 포위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형세로 본다면 만일 서로 출수하게 되면 빈도와 노선배는 심목풍의 패거리들에게 포위 되어 피를 보게 될 위기였지요. 그러나 바로 쌍방이 검을 빼들고 싸우려던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한 가닥의 기이한 음악소리가 들 려 왔지요. 그래서 혈전을 면하게 되었지요. 다시 말해서 빈도와 손노선배의 목숨이 구출된 셈이지요." 그러자 금화부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무위도장의 말을 가로챘다. 두구는 그녀를 못마땅한 듯 힐끔 쳐다 보더니 차갑게 쏘아 붙였 다. "무엇이 그리 우습소?" 금화부인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마치 대낮에 꿈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군요.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인데요." "빈도가 직접 경험한 일이며 절대로 거짓이 아니오. 부인이 못 믿겠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오. 그러나 이것은 빈도 혼자 겪은 일 이 아니고 손노선배님도 같이 겪었으니까요." 상팔은 비호같이 몸을 날리는 소영의 신법을 주시하더니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세상 일이란 신기하군요. 오 년 전만 해도 소대협은 약하디약한 일개 서생이었건만 오 년 후인 오늘에 와서는 강호에 명성을 떨치 는 영웅이 되었으니......" 한편 소영은 경공의 축지법을 전개하여 그 음악소리를 따라 단숨 에 오 리쯤 달려 갔다. 계속 달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등불이 새 어 나오고 있는 한 채의 초가집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 초가집에서 는 이미 그 기이한 음악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소영은 발을 멈추고 그 초가집 앞에 서서 안의 동정을 살폈다. 손불사가 뒤를 쫓아 와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소제, 무엇이라도 발견했나?" "소생의 판단으로는 그 음악소리가 바로 이 초가집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번 들어가 보도록 하지." "좋습니다. 먼저 문을 두드려 보고 들어가 보도록 합시다." 광야에 고립된 이 한 채의 초가집은 사방이 잡초로 덮여서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두 사람은 그 초가집 문 앞으로 다가 서서 문을 두드리려고 했 다. 그러나 문은 꽉 닫힌 채였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기울였 다. 그러나 집 안에서는 끝내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사람이 사 는 것 같지도 않았다. 손불사는 나이가 이미 환갑이 다 되었지만 그 다급한 성질만은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다짜고짜 손을 들어 일장으로 나무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여보시오! 아무도 없소?" 그러자 집 안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떠한 사람이기에 이토록 무례하오?" 손불사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언뜻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참았다. 만일 이 초가집 안에 정말로 그 음악을 연주한 사 람이 있다면 그에게 성질을 낼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마른 기침 을 한 번 하고 점잖게 말했다. "소생은 손불사라 하오." 집 안에서는 다시 그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댁은 남자요? 아니면 여자요?" 손불사는 흠칫 놀라며 이내 생각했다. '요즘 무림 중에 새로 출도한 사람들이 혹 나를 모를 수도 있겠 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선배인 손불사라는 것쯤은 이름만으로 도 알고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 늙고 굵직한 목소리가 당당히 대장부의 음성인데 어찌하여 여자냐고 묻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남녀의 음성도 분별 못하시오?" 초가집 안에서 여전히 차디찬 음성이 새어 나왔다. "당신은 내 음성이 남자 같소? 아니면 여자 같소?" 손불사는 얼떨떨해졌다. 그는 그의 질문이 이상하여 다시 속으로 궁리해 보았다. '이 자의 음성은 남자의 목소리가 분명한데, 그러나 그가 만일 당당한 남자라면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손불사는 워낙 평생을 두고 보아 온 것과 경험이 많았으나 순간 적으로 그의 질문이 납득이 되지 않아 소영을 보고 물었다. "소제, 그 사람이 남자 같소? 아니면 여자 같소?" 소영은 서슴없이 말했다. "남자의 음성 같습니다."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은데......" 하더니 음성을 높여 대답했다. "당신은 분명히 남자일 것이오!" 그러나 그 얼음장 같은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천만에!" 손불사는 어이가 없어서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소리쳤다. "지금 그 음성만 해도 틀림없는 남자의 음성이 아니오?" 하고 오른손에 운공하고 있던 내력의 경기를 발휘하여 대문의 복 판을 내리쳤다. 문고리가 부서지며 삐걱 하고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들이 막 들어 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한 줄기의 강경한 암경이 밖으로 뻗쳐 오는 것이 아닌가. 그 경력은 기세가 몹시 맹렬할 뿐 아니라 대단히 거세었다. 손불사는 집 안의 동태를 눈여겨 보기도 전에 아무 경황 없이 본 능적으로 일장을 맞받아 쳤다. 두 줄기의 장력이 맞부딪치자 일진 의 광풍이 일었다. 손불사는 전신의 진동을 느끼며 그만 물러 서고 말았다. 이때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활짝 열렸던 대문이 갑자기 닫혔다. 소영은 자신이 상대의 장력을 받아 치지는 않았으나 손불사가 밀 려 나오는 것을 보자 속으로 놀랐다. 어떠한 인물이기에 이토록 강 한 공력을 발휘한단 말인가 하고 감탄을 하며 손불사에게 물었다. "노선배님, 상대를 똑똑히 보셨습니까?" "못 봤어......" 하더니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소제, 우리는 고명한 인물을 만났으니 섣불리 출수를 해서는 안 되겠어." "그럼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럴 필요는 없지." 하더니 음성을 높여서 말했다. "이 늙은 몸이 그대께 한 가지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니 하교 있 으시기 바랍니다." 초가집 안에서는 다시 차디찬 음성이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조금 전에 저는 일종의 악기소리를 들었는데 혹 그대께서 연주 하셨는지요." "그 음악을 연주하던 사람은 이미 이 곳을 떠났소이다." 손불사는 황급히 물었다. "그 분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끝없이 넓은 이 천지에 어디로 갔는지 어찌 알겠소?" 소영은 살며시 그 집 대문을 만져 보며, '저 손노선배님의 장력으로 이 대문을 가루로 만들기는 식은 죽 먹듯 쉬운 일일 텐데. 저 집 안의 사람이 일종의 장력을 뻗쳐 적당 한 균형을 이루게 하여 이 나무문이 장력의 힘으로 부서지는 것을 막았으니 그 사람도 손노선배와 같은 공력을 지녔겠구나.' 하고 생각이 미치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불사도 평생에 드물게 만난 강적임을 알아차렸는지 더 이상 출 수치 않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귀하의 장력이 웅휘한 것을 보니 절대로 보통 사람은 아니신데 좀 배알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 늙은이가 정녕 귀하와 상대할 자격 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가 이렇게 은근히 싸움을 거는 것은 상대가 문을 열고 맞아 주 지는 않더라도 무슨 다른 대꾸라도 있겠지 하는 의도에서 그랬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손불사는 치미는 울화를 억지로 누르면서 노성으로, "귀하는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소." 하며 또 다시 일장을 내리쳤다. 그러자 와지끈 하고 대문은 산산 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이런 상황은 손불사의 생각과는 크게 어긋 났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소영은 재빨리 안으로 달려 들어 갔다. 그리고 집 안을 살펴 보 았다. 어찌 된 일인지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그는 급히 방으로 뛰어 들었으나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없었으며 그곳에 있던 사람 도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손불사는 등불에 비친 방구석에서 한 장의 편지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주워 들었다. 그들이 등불에 비쳐 본 그 종이 에는, <소대협 보시오! 심목풍은 이목이 영민하니 대협에서 양친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 시 은밀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소영은 얼떨떨해졌다. 그는 편지에서 눈을 돌리고 손불사에게 말 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숨었던 사람은 우리를 돕고 있는 사람이군요?" 손불사는 신중히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심목풍은 워낙 귀신같은 계략을 꾸미는 놈이라 확실한 내용을 알기 전에는 행동을 할 수가 없는 일이지." 소영도 수긍했다. "노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들은 다시 편지로 눈을 돌리고 계속 읽어 내려 갔다. <양친께서는 이미 여독에 시달리어 피로에 지쳐서 더 이상 길을 재촉치 못하게 되셨으니 필히 적당한 곳을 찾아 며칠 휴식을 취하 셔야 되는 형편이지요. 그러나 심목풍의 마수는 이미 그 무공을 알 지 못하는 양친에게 뻗쳤으니 그는 기어코 끝장을 보려고 달려 들 것이오. 심목풍은 손이 넓어 부하들이 많으며 곳곳에 수하인을 배치해 놓 았지요. 당신은 밝은 곳에 있고 적은 어두운 곳에 숨어 있으니 서 로 겨루게 된다면 당신이 큰 손해를 볼 것은 당연한 일이오. 그러 니 그때 가서 다시 부모의 안전을 보호하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할 것이오. 이 쪽지를 읽어 본 다음에는 곧 불에 태워 없애 버리도록 하시 오. 내가 당신을 만날 여유가 생기면 당연히 사람을 보낼 것을 이 글로써 아뢰는 바이니 부디 마음을 푹 놓으시오.> 짤막한 편지 끝에는 그 누구의 글이라는 서명도 적혀 있지 않았 다. 손불사는 그것을 다 읽고 난 뒤에 소영에게 말했다. "이 쪽지는 잘 소지해야 되겠군." 그러나 소영은 잠시 주저하더니, "남길 필요 없습니다!" 하고 그것을 등불에다 살라 버렸다. 손불사는 소영을 보며 물었다. "이 글의 내용을 보니 자네와 몹시 친숙한 사이 같군 그래."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도대체 누구 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현재 눈앞에 닥친 형세로 보아 우리는 더 이상 양친을 찾아 낼 수 없을 것 같군." "흐음! 그가 서명도 안하고 신분도 밝히지 않았으니 어찌 소생이 마음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소제, 내가 몇 마디 권고해야겠는데 자네는 어디까지나 침착해 야겠네. 지금 처해 있는 이런 상황하에서 자네가 아무리 초조해 봤 던들 소용이 없는 일일세. 그 사람이 만일 우리에게 트집을 잡으려 면 필연 이 쪽지에다 그것을 비쳤을 것인데 내가 종합해서 생각해 본 바로는 이 글 속에는 위협의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없으며 내 그동안 쌓아 온 경험으로 보아 글 쓴 사람은 절대로 소제에게 악의 가 없는 듯하네." 이때 손불사의 손에 들었던 등잔불은 이미 기름이 다 닳아 깜박 거리더니 꺼져 버리고 말았다. 소영은 어둠 속에서 긴 한숨을 내뱉더니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 었다. "이제야 겨우 한 가지 일에 대해 실마리를 잡게 됐군요." "무슨 일인데?" "심목풍을 격퇴시킨 음악소리와 소생의 부모를 데려 간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손불사는 무릎을 탁 치더니 감탄하듯 외쳤다. "허어! 영웅은 소년층에서 나온다더니 틀림없구나! 이 늙은이는 정말 이제는 흙에 들어갈 때가 되었구나. 그것을 미처 생각해 내지 못했다니....." 소영은 입가에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힘없이 말했다. "생각이 벌써 났었던들 무슨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물론 관계가 있지. 그날 저녁 자네는 중상을 입어 몸 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을 때 나와 무위도장은 심목풍이 인솔한 많 은 고수들에게 호숫가에서 포위를 당하고 있었지. 그때 마침 바람 을 타고 흘러 온 기이한 음악소리만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벌어졌을 텐데..... 그렇게 되면 나와 무위도장은 그날의 고비를 넘기지 못 했을 뿐 아니라 운양자 등 무당락의 문하생 전부와 마문비 등이 아 마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뻔했지. 그런데 소제의 양친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 심목풍을 격퇴시킨 바로 그 사람이라면 절대 안심해도 될 것일세." 소영은 손불사의 말에 마음이 다소 놓였다. 그는 차분한 음성으 로 물었다. "노선배님,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무위도장 등 여러 사람이 몹시 궁금하여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우 리는 우선 그 동백나무 숲으로 가서 다시 대책을 강구해 보도록 하 지." "지금으로써는 그렇게 하는 도리밖에 없겠군요." 두 사람은 초가집을 나와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갔다. 손불사는 길을 재촉하면서 입을 열었다. "소제, 잠시 후 무위도장 등이 기다리는 곳에 가서는 될 수 있으 면 그 쪽지에 관한 이야기는 안하는 게 좋겠어." 소영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건 왜요?" "목하 강호의 실정은 참으로 시끄러운지라 자네가 예를 들어 풍 연(風煙) 중의 밝은 고수라 친다면 그 백화산장의 일전은 자네의 이름을 날리게 했을 뿐 아니라 특히 무림 안에서는 이미 자네만이 심목풍을 상대해 낼 수 있는 상징으로 꼽고 있는 형편이지. 아마 자네는 아직까지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중 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겠지. 심목풍이 백방으로 손을 써서 자네 의 양친을 생포하려는 속셈도 자네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흉 계라네. 그는 속으로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지. 즉, 앞으로 강호에 서 그와 대항할 수 있고 그가 강호를 휩쓸고 패권을 잡아 군림하려 는 계획을 저지할 능력이 있는 자는 자네뿐이라는 것을 말일세. 이 늙은 나는 자네보다는 좀 낫다고 봐야지. 양친의 항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자네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것일세." 소영도 납득이 간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노선배님의 말씀이 옳군요. 만일 그 분들이 물어 온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되겠습니까?" "사실대로 말해 줘야지. 그러나 반만 말일세." 두 사람의 경공은 모두 절정에 달하고 있는지라 이야기를 몇 마 디 나누는 동안에 어느새 이미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동백나무 숲 에 당도했다. 무위도장과 중주이고 등은 속으로 몹시 초조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때라 두 사람이 돌아 오자 반색을 하고 달려 나왔다. 금화부인은 아직 체력이 회복되지 않아서 몸을 동백나무에 기댄 채 소리쳤다. "퉁소 부는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까?" 하고 묻자 소영이 대답했다. "단지 그 소리만을 들었을 뿐 그 장본인은 보지를 못했지요." 무위도장도 나서며 물었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손불사는 소영의 입에서 말이 불쑥 튀어 나올까 두려워서 핫핫 하고 웃으면서 자기가 그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이 늙은이와 소제가 초가집 한 채를 발견하고 그 앞에 쫓아 갔 을 때만 해도 그 퉁소소리는 초가집 안에서 들렸었는데....." 금화부인이 말참견을 했다. "왜 들어 가서 만나 보도록 하지 그랬어요?" 손불사는 금화부인 쪽으로 눈길을 돌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내가 그 집 대문 앞에 서서 몇 마디 말을 하는 동안 초가집 안 에 있던 사람은 그 틈에 그만 집 뒤로 도망을 쳐 버렸더군요. 아무 런 인기척이 없어서 나하고 소제가 그 초가집 속으로 뛰어 들었을 때에는 이미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가 않았지요." 무위도장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우리와 만나기를 꺼려하는가 보군요." 손불사가 끄덕이며 결론을 내렸다. "아마 그런 모양이오." 상팔은 소영을 쳐다 보며 말했다. "형님, 사나운 이 개들이 비록 취각이 예민하긴 하지만 이처럼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쫓아 가도 소용이 없겠군요." "지금부터 쫓아 가 봐야 이미 소용이 없으며 일이 기왕에 이쯤 됐으니 지금 당장 조급해 봐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오. 그러니 지 금 그의 뒤를 쫓는 것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위도장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소대협은 지금부터 어디로 가실 작정이신가요?" "귀파의 제자와 마문비 등 모두가 그 호숫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우선 그곳으로 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영의 제안을 듣자 무위도장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소영이 어째 갑자기 부모의 행방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방침 을 바꾸었을까?' 무위도장은 워낙 침착한 인물인지라 이러한 의혹이 속으로 일기 는 하였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두구가 입을 열었다. "소제들이 무능하여 양친을 남에게 납치당하게 하였습니다만 하 늘 끝까지라도 쫓아 가서 두 분을 모셔 와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두형의 진심에는 나로서 십분 감격하는 바이오. 그러나 지금의 전세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 많은 부상당한 친구들 을 모른 체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87. 남해오흉의 가슴에 그어댄 구검지술 소영은 양친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안전하게 구출되어 갔음을 알 고는 적이 마음을 놓았다. 그는 원지로 곧 돌아가 무림 동료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옳다고 주장했다. 손불사도 그의 뜻에 찬성하여, "옳은 일이오. 이 늙은이도 그렇게 생각했었소. 만약 우리가 그 곳을 완전히 떠나게 된다면 심목풍이 또 다시 고수를 시켜 습격해 올 것이오. 비록 운양자 등 무공이 뛰어난 사람들이 보호하고 있다 고는 하지만 그 많은 고수를 당해 내기는 어려운 일이오." 이때 금화부인이 돌연 일어나더니, "여러분께서 원지로 돌아 가시니 나는 더 이상 동행할 수 없겠군 요." 하며 눈길을 소영에게 옮기더니, "소제, 부디 몸조리 잘하기 바라네. 그럼 이 누이는 그만 가 봐 야겠군요......" 하더니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소영은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몸을 일으켜 금화부인의 앞을 가 로막았다. "누님의 상처가 아직 완쾌되지 않았는데 어찌 혼자서 행동하실 수 있겠소?" 금화부인은 서글픈 듯 억지로 웃음 지으며, "그럼 소제는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가?" "소제 생각으로는 누님이 우리와 같이 가시면 내가 다소나마 보 호를 해 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금화부인은, "동생의 뜻은 나에게 사를 버리고 귀정(歸正)하여, 백화산장을 떠나라는 말인가?" 소영은 곧 대답했다. "소제가 감히 그런 주장을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선 상처가 호전된 후 다시 가고 싶은 데로 가셔도 늦지 않소." 금화부인은 돌연 안색이 변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만약 내가 동생과 같이 그 호반으로 가게 되면 심목풍이 당장 이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누님은 심목풍이 그렇게 두렵소?" "그가 내게 손을 뻗치는 날에는 나는 곧 중독된 독이 발작하여 죽게 되니 내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겠나. 동생은 생각해 보게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금화부인은 곧 응했다. "물어 보게나. 혹 내가 일러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 "소제도 백화산장에서 오랫동안 살아 왔는데 심목풍이 어째서 나 에게는 독을 쓰지 않았을까요?" 금화부인은, "그야 자네가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 혹 그가 쓸 틈이 없었 든지 아니면 강호에 처음 발을 디딘 자네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 다고 생각했든지 둘 중의 하나겠지." 소영은 잠시 주저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면서, "누님은 꼭 혼자 가겠소?" "내가 내 목을 지키려면 꼭 가야만 하지." 소영이 암연(暗然)히 말했다. "누님이 입은 상처는 대단히 커서 도중에서 아무도 보살펴 줄 사 람이 없으면 매우 위험할 텐데....." 금화부인은 웃으며, "걱정할 것 없네. 이 몸에 지닌 독물만으로도 내 한 몸을 보호하 기는 충분하니까." 하고 손을 들어 작별을 고하고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 녀의 상처는 아직 회복되지 않아 체력이 매우 약해져서 비틀거리며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소영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빠른 걸음으로 그녀 앞을 막아 섰다. 그리고 손을 맞잡고 읍을 한 후, "누님께서는 수차례나 저의 생명을 구해 주셨는데 소제는 한 번 도 제대로 보답을 못해 드렸소. 지금 누님의 상처가 이토록 심한 데, 이 소영이 몰랐으면 모르되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이상 어찌 혼 자 가시게 할 수 있겠소?" 금화부인은 호수와 같이 맑은 두 눈으로 소영을 한참 동안 바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너무 친절하게 대해 줄 필요는 없네. 이 누나는 많은 사 람을 상대해 왔네. 그러므로 그런 겉치레의 사탕발림 같은 소리는 귓전에도 들리지 않네." 하더니 소영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총총히 발길을 옮겼다. 소영은 꿈에토 금화부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미처 몰 랐다. 그는 한동안 멍청히 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소영은 금화부인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몸 을 돌려 무위도장 앞에 와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저토록 고집이 셀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무위도장이 대답했다. "금화부인은 워낙 꾀가 많은 사람이라 자기의 안위에 대한 계산 은 다 하고 있을 테니 우리가 그리 걱정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하 오." "장부가 입은 은혜를 갚지 못하니 도무지 마음이 불편합니다." 손불사도 참견했다. "창창한 내일이 있는데 무어 그리 조급히 굴 것 없네. 우리 빨리 가 보도록 하지." 하더니 앞장서서 길을 나섰다. 무위도장이 소영에게 나지막하게, "소대협, 금화부인이 가기 전 비록 거절은 했지만 그것이 진정은 아니었소." "도장께서 그걸 어찌 아십니까?" 무위도장은 웃으며, "그녀가 마음 속에 하고 싶은 말을 했다면 울 필요가 없었겠지 요." 소영은 의아해서, "저는 그녀와 아주 가까이 있었지만 그녀가 우는 것은 보지 못했 는데요." "소대협은 유심히 보지 않았기 때문이오. 빈도는 그녀가 몸을 돌 리고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는 것을 분명히 보았소." 소영은 잠시 주저하더니, "도장께서 똑똑히 보셨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호반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무위도장은 절벽 밑에 들어서자마자 무엇을 느꼈는지 암연히 소 영을 바라 보며, "우리가 또 한발 늦은 모양이군!" 소영이 급히 물었다. "무슨 사고라도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 같소. 만일 그들이 전부 돌아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무슨 큰일이 난 것 같소." 소영도 내심 그 말이 적중한 것 같았다. 만약 이 절벽 밑에 아직 무당의 제자들이 남아 있다면 그들이 비록 같은 파의 장문인을 마 중나오지는 않을지라도, 절벽 밑에 망을 보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때 손불사, 중주이고, 사마건, 그리고 왕방과 장자안 등까지도 모두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무위도장은 황급히 한 채의 초가 앞으로 달려 갔다. 소영은 무위도장의 뒤를 바짝 따라 가며 암암리에 운공하여 만일 의 돌발사태에 대비했다. 그는 연거푸 몇 번의 흉험을 치름으로써 안목이 높아졌다. '무위도장을 따라 이곳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당 문하의 주 요 인물들이라 일파의 정예들이 전부 이곳에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무슨 참변이 발발했다가는 무당파가 받은 타격은 실 로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들은 이미 초가 앞에 당도했다. 무위도장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소영을 한 번 바라 보 고는 서서히 왼손을 내밀어 나무문에 손을 얹었다. 침착하게 열기 는 해도 그의 손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 문은 아마 천근의 무게 는 더 되는 것 같았다. 무위도장이 혼신의 힘을 다 해야만 그 나무 문이 열릴 것 같았다. 소영은 속으로 탄식을 하고는 돌연 무위도장 옆으로 한 발 다가 가서 그를 보호하였다. 그는 무위도장의 표정이 매우 침울한 것으 로 미루어 이 초가 안에 무당 제자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거나, 아 니면 강적이 잠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무위도장 옆에 바싹 붙어 섰다가 적시 에 보호해 줄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그 나무 대문이 활짝 열리고 실내의 광경이 시야에 들어 왔다. 모든 것은 여러 사람의 상상 밖이었다. 그곳에는 죽어 쓰러 진 시체도 없었고 적의 잠복도 없었다. 다만 운양자가 그 안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고, 그의 양 옆에는 도포를 입고 등에 검을 멘 무당 제자 여섯 사람이 앉아 있 었다. 일곱 사람 전부가 심한 내상(內傷)을 입은 듯 책상다리를 하 고 앉아 운공조식(運功調息)을 하고 있었다. "사제, 무사한가?" 하며 안으로 들어 섰다. 운양자는 눈을 뜨고 무위도장을 쳐다 보더니 이내 눈을 무거운 듯 내려 감고 아무 말이 없었다. 무위도장은, "사제! 내상의 정도가 심한가?" 하고 물었다. 이때 소영도 무위도장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 왔다. 운양자는 다시 눈을 뜨고 무위도장을 바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 어디를 다쳤는지 빨리 말해 보게!" 하며 황급히 운양자 곁으로 다가 갔다. 운양자는 여전히 정좌하여 꿈쩍도 않았다. 무위도장이 바싹 다가 서자 돌연 몸을 뒤로 솟구치더니 손가락을 날카롭게 뻗어 무위도장의 갈비뼈에 있는 대포혈(大包穴)을 찍었 다. 무위도장은 운양자가 이처림 자기에게 덮쳐 올 줄은 꿈에도 몰 랐다. 그는 순간 움찔하였다. 운양자의 손톱이 도포자락에 와 닿았 다. 너무도 의외의 일이라 황급히 진기를 모으며 옆으로 몸을 피했 다. 운양자는 민첩한 동작으로 손을 뻗쳐 왔고 또 한 번 초식을 바 꾸는데도 번개같아, 무위도장이 그 대포요혈을 피해 내자 곧 오른 팔을 쭉 뻗어 경문혈을 찍어 왔다. 무위도장은 비록 뛰어난 무공을 지니기는 했지만, 극히 상심하며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던 터라 더 이상 그 번개같이 빠르고 변화 무창한 돌연한 습격을 막아 내지 못하고 그만 상대의 손가락에 혈 도를 찔려 반신이 마비되어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러나 그는 역시 일대의 장문인이었다. 무공의 성취가 매우 오 묘하여 곧 일장을 휘둘러 운양자의 오른팔 맥문을 향해 내쳤다. 그런데 운양자가 무위도장에게 덮쳐 들자 운양자 양쪽에 앉아 있 던 여섯 명의 도인도 돌연 몸을 일으키더니 소영에게 덮쳐 오는 것 이었다. 여섯 명은 이미 공력의 위치를 미리 지적해 놓았는지 십이의 장 심이 일제히 소영의 열두 군데의 부위를 향해 불을 뿜었다. 돌연한 사태에 소영 역시 무방비상태였다. 그는 온통 몸을 휘감다시피 한 장영(掌影)이 사면 팔방에서 공격해 들어 오자 즉시 쌍장을 동시에 들고 각 요해를 막은 후 몸을 옆으로 번쩍 날렸다.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왼쪽 어깨와 등, 두 군데에 각각 일장을 받았다. 그중 도인의 장력이 날카로웠음에도 소영은 운기하여 호신 할 여유는 없었으나 현문정동내공(玄門正東內攻)과 건청강기가 몸 에 배어 본능적인 반응으로 막아 내어 심한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여섯 명의 도인은 소영이 장을 맞고서도 쓰러지지 않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한 소영을 격동시킨 두 도인의 손목이 오히려 마비 되어 옴을 느끼고 각자 한 발짝씩 물러 섰다. 이때 왼쪽에 서 있던 도인이 소리쳤다. "검을 뽑아 육합검진(大合劍陣)으로 그를 포위하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 안에는 검빛이 번쩍이더니 한 덩어리 검의 그림자가 소영을 향해 덮쳐 갔다. 소영은 비록 상처가 심하지는 않았으나 조금의 방비도 없었기 때 문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하여 한동안 운기하는 바람에 반격할 수가 없었다. 그 여섯 도인이 검을 뽑아 사방을 포위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소 영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대갈일성하며 연속 사장을 내뻗쳐서 사 방으로 들어 오는 검세를 일단 꺾어 놓았다. 그리고는 장검을 뽑아 운기미공의 초식으로 사방에 검기를 그려 몸을 호위했다. 일전의 쇠붙이가 맞부딪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소영을 향해 내 리치던 장검이 모두 격퇴당했다. 여섯 도인은 그가 이미 무시 못할 강적 임을 직감하고 그들의 장 검이 격퇴당한 후 더 이상 돌격하지 않고 곧 육 합검진을 운용하며 교묘하고 절륜한 배합으로 소영을 그들의 검진 안으로 충층이 포위 해 버렸다. 소영은 크게 분노했던 터라 장검이 검집을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속공으로 우선 몇 명을 쓰러뜨려 울분을 풀리라 마음먹었다. 그런 데 상대방의 육합검진이 그야말로 절묘하기 그지없는 배합을 하여 소영의 번개같은 검세를 봉쇄해 버릴 줄이야...... 소영은 십여 번을 연달아 공격해 보았으나 모두가 상대방의 장검 에 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그는 오묘한 검진에 말려 들었음을 깨닫고 더 이상 헛된 공세를 취하지 않고 검세를 일변하여 수세로 바꾸었다. 그가 과거에 삼성곡에서 무예를 배울 때, 은사 장산패에게 검진 의 묘완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다. 이 기이하고 오묘한 검진은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둘의 위력을 지니는 게 아니라, 어느 한쪽이건 진을 편 사람 전부의 역량이 검 마다 연결되어 일체(一體)를 이루어 합하면 전부가 연관되고 흩어 지면 각자가 묘를 살린다는 것이다. 여섯 사람으로 조직된 육합검진은 비록 소영을 겹겹이 에워싸기 는 했지만 소영은 장산패에게서 배운 오묘한 검법의 이론을 아는지 라 수세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마치 광막으로 몸을 감싼 듯 삼엄하기 이를 데 없는 육합 검세가 제아무리 위세가 있어도 소영의 옷자락 끝 한 번도 스치지 는 못하는 것이었다. 이때 무위도장의 몸이 비틀거리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 고 말았다. 소영은 크게 당황하여 속으로, '손불사 등이 아직도 당도치 않은 것을 보니 필시 강적의 저지를 받은 모양이다. 그들의 도움을 받기는 틀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검세를 일변하여 왼손과 오른손에 든 검을 전력으로 운용했다. 그는 장산패, 남일공 두 기인 고수의 절세의 기예를 동시에 펼쳤 으니 그 위세는 마치 해일이 일어 격랑이 해안을 쪼개고 제방을 허 물어뜨리는 것 같아서 정연하던 육합검진은 그 검세의 격랑에 말려 들기 시작했다. 육합검진의 위세는 소영의 검세에 몰리기는 했으나, 그러나 소영 은 한동안 이 검진 속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이때 운양자는 무위도장을 꽁꽁 묶어 버렸다. 소영은 두 눈으로 무위 도장이 상대방에게 묶이는 것을 보고서도 어찌할 수 없자 피가 거꾸로 치솟아 올랐다. 그는 오른손에 들었던 장검으로 삼 초의 절학을 연이어 휘둘러 내자, 검꽃이 온통 주위를 뒤덮는 순간 재빨리 왼손에 교룡 가죽으로 된 장갑을 끼었다. 그는 가만히 정세를 살펴 보았다. 만약 꾀를 쓰지 않고 그저 무 공으로만 육합검진의 포위를 뚫으려면 장시간의 격투가 계속될 것 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의외의 방법을 생각해 내어 일거에 강 적을 물리칠 생각을 한 것이다. 이때 소영은 비록 아직 그 육합검진의 변화를 완전히 파악을 하 지는 못했으나 이미 그들의 검초를 어느 정도 타진한지라 고의로 검세를 약간 죽여 빈틈을 보였다. 여섯 도인은 소영의 광풍 폭우같은 반격에 몰려 진법이 흩어질 뻔 하기까지에 이르자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또한 만약 소영의 공격으로 진법이 흩어지면 십여 합 대결을 하다가 다시 육합검진을 재정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이 맹렬한 반격을 하다가 갑자기 빈틈을 보이자 더 이상 판단도 아니하고 재빨리 두 자루의 장검이 빈틈으로 공격해 들어 왔다. 만약 소영이 팔을 돌려 그 두 자루 장검의 공격을 막아 낸다손치더라도 그 사이에 나머지 네 사람의 공격을 막아 낼 시간 적 여유가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일격으로 알았 다. 그러나 소영은 오른쪽 검으로 두 자루의 검세를 받아치지 않고 장갑을 낀 왼손을 내밀 줄이야..... 그 검을 든 사람은 흥! 하고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하고는 일부 러 검세를 늦추어 소영으로 하여금 장검을 잡게 하고는 속으로, '네가 제아무리 금종조나 철포삼 같은 무공을 배웠다 해도 내 검 신을 잡지는 못할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이때 소영이 자기 수중으로 들어 온 장검을 잡자 그는 암암리에 운기하여 칼을 한 번 돌려 내경을 발하여서 검신을 푹 찔러 넣어 중간에서부터 밖으로 내 긁으려 했다. 이것은 일종의 공, 경이다. 사람은 역시 피와 살로 형성된 것이라 어떠한 무공을 연마했다 해도 검을 피하고 칼을 피하는 것은 대부분이 이 한 줄기 경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도인이 소영으로 하여금 자기의 검신 을 잡게 한 후 다시 비트는 것은 곧 경기를 깨치고 마는 것이었다. 그는 단번에 소영의 손가락을 잘라 내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영이 손에 이미 검과 칼을 막을 수 있는 교룡 가 죽의 장갑을 끼었을 줄은 알지 못했다. 그 도인은 검을 확 밀어 긁 었으나, 상대방의 손가락은 잘려지지 않았다. 소영이 그 틈에 맹렬히 앞으로 잡아 당기니 그 도인은 검을 잡은 채 앞으로 쓰러지려 했다. 한 사람의 방위가 움직이자 육합검진은 전체적으로 저지되었다. 소영은 한쪽 발을 날려 그 도인의 왼쪽 정강이를 냅다 걷어 찼 다. 육합검진의 한 사람이 빠지니 검진의 오묘한 변화는 곧 기능을 잃었다. 소영은 그 틈에 반격을 가해 장검에서 연속 검빛이 번쩍이 자 두 사람이 비명을 지르고 다시 한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이때 운양자는 이미 무위도장을 묶어 놓고 소영이 육합진세를 격 퇴해 내는 기세가 얕볼 것이 아니로구나 싶어 곧 검을 뽑아 들고 들이 닥치며 대갈일성했다. "너희들은 물러서라!" 여섯 명 중 셋이 부상을 당하고 나머지는 소영의 예리한 검초에 쩔쩔매며 그 검하에 곧 피를 보게 되려는 찰나에 이 소리를 듣고는 일제히 물러 섰다. 소영은 이미 그 고함소리로 이 자가 운양자가 아닌 것을 눈치챘 다. 그는 검을 가슴 앞에 가로 잡더니 냉랭히 말했다. "너는 누구냐? 네 어찌 무당파의 부하인 양 변장을 하고 잔꾀를 부리느냐? 어찌 장부의 행동이라 할 수 있겠느냐?" 운양자는 싸늘한 웃음을 띠고는 손을 들어 얼굴을 훑었다. 눈썹 과 수염이 떨어지며 깡마르고 길쭉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서서 히, "네가 바로 소영이라는 자렷다?" "그렇다! 너는 누구냐?" 그 사람은 또 한번 냉소를 띠고, "너는 남해오성(南海五聖)이란 대명을 들어 보았겠지?" 소영은 잠시 주저하더니, "소생은 남해오성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없으나 남해오흉이 라는 이름은 들었소." "오성도 좋고 오흉도 좋다. 어쨌든 바로 우리 다섯 형제들의 대 명이지!" 소영은 땅에 벌렁 자빠진 세 명의 도인을 가리키며, "바로 당신과 이 몇 사람인가?" 그 자는 고개를 젖히고, "남해오흉이 만일 이처럼 약하다면, 오흉이라는 이름이 아깝겠 다." "그러면 이 여섯 명의 무당 제자를 가장한 도인들은 또 누구냐?" "백화장의 검수들이지!" 소영은 냉랭한 웃음을 띠고, "그 이름도 거창하던 남해오흉 역시 백화산장의 일개 앞잡이들일 줄이야....." 그 자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여전히 담담하게, "그거야 당신 상관할 바 아니지." '이 자를 보아하니 퍽이나 교활하고 침착한 것 같은데 남해오흉 중 몇 째인가?' "당신은 오흉의 우두머리요?" 그 사람은 냉랭히 대답했다. "소생은 우리 형제 중에서 제일 막내인 냉수수사(冷手秀士) 전중 원(田中元)이다." 소영은 일부러 그에게 말을 걸어 그동안에 밖의 정세를 좀 살펴 보려 했다. 그러나 손불사와 중주이고 등은 마치 바다 밑에 깔려 버리기라도 한 듯 캄캄했다. 냉수수사 전중원도 무엇을 기다리는 듯 두 눈은 소영을 노려 보 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영은 돌연 수중의 장검을 휘두르더니, "너희 남해오흉이 전부 이곳에 왔겠지?" 그는 손불사와 중주이고가 아직껏 소식이 없음을 보자 강적을 만 나 악전고투를 하고 있지 않으면 무슨 암산에 걸렸나 보다 싶어 속 으로 매우 초조했다. 전중원은, "그거야 대답해 줄 수가 없지!" 소영은 돌연 음성을 높여, "당신들이 무당의 부하로 가장한 것은 모두 백화산장 심목풍의 명을 받고 온 것이냐?" "그것도 물어 볼 필요가 없지!" 소영은 노기 띤 음성으로 고함쳤다. "너희 남해오흉은 심목풍을 위해 일을 해 주는 모양인데 거저 해 주는 것은 아니겠지?" 전중원은 담담히, "그야 물론이지. 남해오흉은 절대로 밑지는 장사는 해 본 일이 없으니 아무 대가 없이 그의 일을 해 줄 리는 만무하지." 소영은 또 말을 이어, "그렇다면, 심목풍이 너희 형제에게 무슨 대가를 주었기에 너희 들이 이토록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하고 덤벼든단 말이 냐?" "소가야! 너는 그런 것을 물으면 내가 대답을 줄 것 같으냐?" "심목풍이 당신네들 남해오흉을 모셨으니 소생도 물론 모실 수 있는 법 아니겠소?" 전중원은 수중에 든 장검을 한 번 휘두르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말버릇이 아주 없구먼! 아무래도 우선 나한테 맛을 좀 봐야겠는 걸." 하며 장검이 번쩍 하더니 소영을 향해 찔러 왔다. 소영은 전중원의 검초를 막아 낸 후 내심, '심목풍이 남해오흉을 이곳으로 파견한 것을 보니 뒤에 많은 고 수들이 들이닥칠 것이 뻔하구나. 그렇다면 우선 이 자를 생포하여 캐어 물어 보아야겠구나.' 이런 생각이 소영으로 하여금 정묘한 검초를 발휘치 못하게 했 다. 왜냐하면 그는 혹 일검에 전중원을 죽일까 겁이 나서였다. 전중원의 검초는 확실히 예리하여 점점 그 위세를 더해 갔다. 소 영은 작심한 바가 있어 절기를 십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방 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만 급급했다. 쌍방은 사오십 합을 겨루었으나 여전히 승부가 나질 않았다. 소영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속으로,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언제 상대방을 제압할지 모르겠으니 이 제는 어쩔 수 없이 독수를 써야겠구나.' 생각하고, 장검의 초식을 돌변하여 반격을 전개하여 일초 일식마 다 상대방의 급소만을 노려 갔다. 소영이 이처럼 아무 제약 없이 공격을 퍼부으니 형세는 크게 달라졌다. 전중원은 소영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다. 그는 소영과 겨룰 때, 각별히 조심하여 초식이 무척 심중했다. 이십여 합을 겨루고는 속 으로 크게 의아했다. 소영이 검초 중 매번 검의 위력이 십분 발휘 되지 않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처음에 겨룰 때 전중원은 몹시 의혹스러웠다. 소영의 검초가 어 찌 이렇듯 기이한가 싶었으나 이십여 합을 맞선 후 그는 점점 예리 하게 검초를 펴 나갔다. 소영은 생포하려는 속셈 때문에 마음놓고 절기를 다할 수는 없었 으나 그의 검술은 본시 기묘해서 전중원의 공세가 한 푼쯤 더해 가 면 소영의 수세 또한 한 푼 정도를 높여 시종 팽팽한 국면이 전개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영이 생포할 생각을 버리고 마음놓고 반 격을 개시하자 전중원은 그제서야 강적임을 깨달았다. 그는 검을 거두고 후퇴하려 했으나 이미 뜻대로 되지를 않아 그 만 소영이 그려내는 겹겹의 검영에 사방이 막히고 말았다. 쌍방은 다시 십여 합을 겨루었다. 전중원은 이미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소영의 기초(奇招)가 번개같이 번쩍이더니 전중원의 오른손 에 들린 검을 때려 떨어뜨리고 말았다. "당신, 패한 것을 자인하겠나?" 전중원은 두 눈에 흉광을 번쩍이더니, "소대협은 과연 듣던 바 대로군요. 소생, 졌소이다." 이때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 하더니 도인 한 사람이 장검을 들고 덮쳐 왔다. 소영은 재빨리 그것을 발견하고 그를 향해 검을 한 번 휘둘렀다. 그 도인은 자기 수중의 검을 전중원에게 넘겨 주려던 참이었다. 소 영의 번개같은 일검은 이것을 적시에 내리친 것이다. 싹, 하는 소리와 함께 선혈이 튀기더니 그 도인의 반쪽 팔과 그 손에 든 장검이 동시에 바닥에 뒹굴었다. 전중원은 돌연 일장을 쳐내 소영의 가슴께로 향했다. 소영은 재빨리 왼손을 내뻗어 일장을 마주 받았다. 쌍방의 장력이 맞붙자 전중원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 서고 말았 다. 전중원은 그 틈에 초가 밖으로 도주할 수도 있었는데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소영은 부모의 행방도 걱정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전중원을 사 로잡아 그 입에서 저 편 소식을 알아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전중 원도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그를 사로잡으려면 필시 죄를 쓸 수밖 에 없다고 생각했다. 쌍방은 묵묵히 마주선 채 차 한 잔 끓일 만한 시간이 경과되었 다. 이때 전중원은 가슴을 제치고 가가대소하더니, "소대협은 내 일장을 받는 것이 아닌데 그랬소." 소영은 내심 움찔했다. "그건 왜? 당신의 장력은 그리 대단한 것 같지도 않던데!" 전중원은 냉연히, "나는 손가락 사이에 독침을 몰래 숨겼는데 당신이 내 일장을 받 았으니 이미 당신은 나의 극독에 중독이 되었을 것이오. 그 독성은 발작이 매우 빠른데 당신이 그렇게 멍청히 서서 공격을 안해 오는 것을 보니 이미 발효를 하는 모양이지?" 소영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자는 과연 악독하구나!'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자기 왼손에는 이미 교룡 가죽의 장 갑을 끼고 있어 예리한 검날도 까딱 없는데 그까짓 독침이 무슨 작 용을 할까 보냐 싶었다. 그는 비웃는 어조로 "소생은 백독이 불침이지!" 전중원은 냉랭히 말했다. "남해오흉의 독침은 우리 오형제가 제조한 해독약 외에는 천하를 다 뒤져도 해독할 약이 없을 걸!" 소영은 얼마 동안 강호를 다니면서 많은 견식을 얻은 터다. "당신이 믿지 못하겠다면 두고 볼 수밖에....." 전중원은 이미 약물이 발효할 사간이 된지라 헛기침을 한 번 하 고는, "내가 열을 세는 동안 당신 몸에 든 독이 발작을 않을 때는 나 전토는 금후 소영을 만나도 싸움을 않으리라."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너무 감사하여 나 소모는 감당을 못하겠구료." 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어, "소생이 독의 발작이 없을 경우 다만 나의 세 가지 질문에 대답 해 주면 만족하겠소." "핫핫핫. 네가 정말로 발작을 않는다면 세 가지 아니라 삼십 가 지라도 대답해 주겠다." 소영은 엄숙한 어조로, "너희 남해오흉은 모두가 무림에 이름을 날린 자들이니 절대로 거짓은 아니겠지?" "남해오흉은 위인이 비록 좀 거만하기는 하나, 한 번 입 밖에 내 어 놓은 말은 끝까지 지키는 것이 우리들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럼 셈을 시작해 보시지?" 그는 손불사와 상팔, 두구 등이 아직까지 오지 않는 것을 보니 필경 적의 저지를 받아 쌍방이 죽음을 건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거 나 아니면 적의 암계에 걸린 것이리라 생각하고, 우선 눈앞에 있는 이 자를 굴복시켜야만 되겠기에 꾹 참고 기다리리라 생각했다. 이때 전중원은 하나, 둘, 셋, 넷 하고 큰 소리로 셈을 시작했다. 계속 아홉까지 세었으나 소영은 여전히 끄떡 없이 웃음을 띤 채 서 있지 않은가? 전중원의 깡마른 얼굴이 돌연 일변하더니 멍청하게 서서 소영을 바라 보며 망연히 묻는 것이었다. "당신 정말 중독이 안 되었소?"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내 이미 얘기한 바대로 백독의 침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 소? 당신이 정 믿지 못하겠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하고 잠시 말을 끊더니 음성을 돋구어, "당신 아직 열 자가 남았는데 빨리 마저 세구료!" 전중원은 연신 눈을 껌뻑이더니 담담히 웃었다. "만일 소생이 마지막 한 자를 세지 않으면 우리의 약속은 영원히 그 승부를 가릴 수 없는 법이겠지요?" 소영은 그 말에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해오흉의 이름은 껍질뿐이구먼. 이처럼 치사한 소인배들일 줄 이야......" "병법은 꾀로 승리를 얻는 법, 당신 소대협의 강호 편력이 부족 했기 때문이거늘 어찌 이 전모를 나무라실까?" 소영은 울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너는 그 따위 시시한 몇 마디를 지껄이고 무사히 이곳을 빠져 나갈 줄 아느냐?" "그야 소대협이 무공으로 나를 제압할 수 있다면 모를 일이지." "흥,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격분하여 이미 살기가 동했다. 서서히 수중의 장검을 치켜 들고는, "네가 나 소영의 삼 초만 받아 낸다면 너희들을 그냥 보내 주겠 다." 전중원은 소영이 치켜 든 검을 보자, 상대가 이미 검도에 깊은 조예가 있음을 알았다. 이 일초가 나온다면 반드시 경천동지(驚天 動地)하리라 짐작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운기하여 방비를 하고, 또 한편 눈을 굴리며 퇴로 를 찾았다. 그리고 암암리에 전음지술로 무당 제자를 가장한 두 명 의 도사에게 합력하여 소영을 대적하자 일렀다. 소영은 대갈일성하고 장검을 휘둘렀다. 은빛을 번쩍이며 사람과 검이 동시에 전중원을 향해 덮쳐 갔다. 전중원은 검을 들어 소영의 검세를 막으며, 재빨리 뒤로 물러 섰 다. 이것은 바로 장산패가 소영에게 전수해 준 구검지술(驅劍之術) 인데 검도 중의 최고의 절학이었다. 소영이 스승 곁을 떠난 후 계속 강호에 분주하여 그가 배운 구검 지술은 겨우 그 방식을 깨달은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의 형세가 급 박하여 할 수 없이 시전해 낸 것이었다. 그런데 일진의 강철이 맞부딪는 소리와 함께 검광이 온통 세 사 람을 에워싸더니 두 가닥의 비명이 들려 왔다. 무당 제자를 가장한 백화산장의 고수들이 무참히 죽은 것이다. 하나는 허리가 두 동강이가 나 죽고, 하나는 목이 잘리어 선혈을 공중에 뿜으며 머리가 육칠 척 밖으로 날아 가 버렸다. 88. 또 다시 들려오는 소리 교활한 전중원은 수중에 든 장검을 버리고 꽁꽁 묶은 무위도장을 나꿔채 가지고는 몸을 솟구쳐 초가집 밖으로 달아났다. 소영은 자기가 쳐낸 일검의 위력이 이토록 거창할 줄은 몰랐다. 그는 자신도 황홀해서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바로 그 찰나적인 순간 전중원은 이미 무위도장을 데리고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소영은 진기를 한 번 들이마시고 문 밖으로 쫓아 나왔다. 전중원은 이미 사, 오 장 떨어진 곳의 산 위를 달리고 있었다. 손불사와 상팔, 두구들은 보이지를 않았다. 소영은 이 상태에서 손불사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숨을 한 번 마시고는 전중원을 쫓아 갔다. 소영의 경공은 천하에 이름을 날리 던 유선자의 친전을 받은 터라 전력으로 시전하니, 마치 전광석화 와 같아 백 장을 못 가서 전중원을 불과 두어 장 정도까지 따라 잡 았다. 그는 고함을 쳤다. "당장 발을 멈추지 않으면 나 소영은 암기를 써서 너를 쓰러뜨리 겠다." 이 말이 떨어지자 전중원이 돌연 팔을 뒤로 제치더니 한 줄기 은 성(銀星)이 번개같이 날아드는 것이었다. 소영이 장검을 휘둘러 이를 받으니 강철 부딪는 소리가 나며 날 아 온 암기는 전부 장검에 맞아 땅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순간 전중원은 그 틈을 타서 육, 칠 척의 거리를 넓혔다. 소영은 전중원이 곧 산 중턱에 올라 서게 된 것을 보자 속으로, '만일 저 자가 숲 속으로 들어 가게 되면 그를 찾기란 하늘의 별 을 따기보다 힘들 것이다.' 고 생각했다.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단전에 진기를 모으고 팔 보간선의 경공중의 절기를 써서 획! 하고 바람을 가르면서 단숨에 그와의 거리를 반 장 정도 줄였다. 전중원의 경공술도 뛰어났다. 그러나 당대 제일의 경공 명가인 유선자가 직접 세심히 가르친 제자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가 본 래 무공에 있어 소영만 못한 데다 등에 무위도장까지 짊어졌으니 더욱 소영의 걸음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다시 몇 장을 나가는 동안 소영은 이미 그와의 거리를 칠, 팔 척 정도로 좁혔다. 소영이 막 일격을 휘둘러 내려 칠 찰나 돌연, "핫핫핫핫핫."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형제, 안심하십시오. 이 자는 더 이상 도망하지 못할 터이니. ......" 그 소리와 함께 산허리에서 돌연 전신을 회색으로 덮은 늙은 거 지가 돌아 나오는 것이 아닌가. 소영은 단번에 눈앞에 나타난 자가 자기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 고 있던 손불사임을 알았다. 그는 내심 의아했다. '어떻게 해서 저 분이 다시 산 속으로 돌아 왔을까?' 이때 손불사는 일장을 날려 한 줄기 강한 힘을 뻗쳐 전중원의 앞 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냉랭한 어조로, "사람을 내려 놓아라!" 전중원은 손불사를 노려 보며, "글쎄 마음대로 될까?" 하면서 오른손을 날려 손불사의 장세를 맞받아 쳤다. 쌍장이 맞 부딪치자 전중원은 일 보 물러 섰다. 바로 그 두 사람이 접장하는 사이에 소영이 이미 다가 서며 손을 날려 수라지력(修羅指力)을 내 뻗어 전중원의 왼쪽 넓적다리 비양혈(飛陽穴)을 향해 찍어 갔다. 이 수라지력은 유선자가 평생을 걸려 연구해 낸 절기 중의 하나였 다. 그가 삼성곡에서 수십 년 간 은거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수라지 력에 쏟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미 그 중의 삼매를 터득 했다. 소영은 그녀에게 지도를 받고 연습한 기간은 비록 길지 않았 지만 대성의 경지에 다다랐던 것이다. 한 줄기 무형 무성의 지력이 전중원의 비양혈에 적중했다. 전중 원은 갑자기 왼쪽 넓적다리가 마비되어 하마터면 땅에 주저앉을 뻔 했다. 소영은 다시 재빨리 왼손을 뻗어 무위도장을 잡으며 오른손에 든 장검을 가로그리고 전중원의 오른쪽 가슴을 쳐갔다. 전중원도 내공 이 깊은지라 비록 소영의 수라지력이 왼쪽 다리 혈도에 적중하기는 했으나 급소가 아니어서 지탱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타격은 심해 순간에 두 번의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땅 위에 털 썩 고꾸라지고 말았다. 소영은 장검을 날려 무위도장이 묶인 끈을 끊었다. 그리고 손불 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노선배님, 그 자는 남해오흉의 하나로 무공이 굉장하니 잘 감시 해야 합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저는 우선 무위도장께 서 찍힌 혈도를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는 무위도장을 정좌시키고는 추궁과혈(推宮過穴)의 수법으로 그의 혈도를 풀어 주기 시작했다. 약 차 한 잔 끓일 만한 시간이 경과하자, 무위도장은 돌연 두 눈 을 번쩍 뜨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대협, 감사합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무위도장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손불사를 한 번 바라 보고 는, "노선배님의 일행 중 부상을 당한 사람은 없겠지요?" 하고 물었다. 손불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이 늙은이 외에는 전부 부상을 당했소." 소영이 양미간을 치키며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손불사는 다시 입 을 열었다. "아직도 한 가지 이 늙은이가 얘기해 드리지 않았는데 바로 구도 표 왕방이 절벽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어요." 소영이 의하해서 물었다. "노선배님께선 저희들 뒤를 바짝 따라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 늙은이는 자네들이 그 초가에 들어가 한참 동안이나 소식이 없기에 상팔과 두구를 불러 막 초가로 들어 가려던 참인데 돌연 소 낙비가 쏟아지듯 무수한 암기(暗器)가 허공을 가르며 덮쳐 오지 않 겠나. 그래서 우리는 크게 당황하여 나까지 그 암기에 적중될 뻔했 지......" "그러면 그들은 전부 그 암기에 당했단 말씀입니까?" "사마건과 왕방은 그 암기에 맞았지만 상팔과 두구는 과연 강호 의 고참 인물이어서 판단력이 오히려 나보다도 위이더군! 두 사람 은 요행히 첫 번째로 날아든 암기를 피했는데, 그들은 장자안을 보 호해야 했기 때문에 두 번째로 날아든 암기에 부상을 당하고 말았 지! 허참! 그 두 사람의 실력은 장자안만 보호하지 않았던들 절대 로 그 암기에 다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소영이 물었다. "무슨 암기길래 그토록 무섭던가요?" "마치 소나기가 내리듯 덮치는데 그게 모두 자오침(子午針)과 매 화침(梅花針)같은 가늘고 작은 암기들이었네." 소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악독한 암기는 한두 사람이 쏘아대도 피하기 힘든 일이인 데 더욱이 매복하여 소나기같이 퍼부었다니 피해 내기가 여간 힘들 지 않았겠군요." "나는 정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곧 산중으로 후퇴하자고 했지. 그들의 암기가 쏟아져 오는 곳과 이 산과는 불과 육, 칠 장 거리밖 에 되지 않았지만 산지로 몰려 와서 사마건은 이미 더 이상 지탱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네. 할 수 없이 내가 그를 안고 후퇴했지." "다행히 그들이 추격해 오지는 않았군요?" 손불사는 손을 저으며, "무슨 소리야....." 하더니 이어, "나는 사마건의 상처를 보고는 그가 독약이 묻은 암기에 맞은 것 을 알았지. 나는 앞에 동굴 같은 것이나 발견되기를 바랐지. 우선 그들을 협곡이나 동굴 같은 곳에 누이고, 추적해 오는 적을 물리치 려고 말야! 그런데 동굴이나 협곡을 찾아 내기도 전에 그들이 들이 닥치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나?" "어떻게 생긴 자들이 쫓아 왔는데요?" "열댓 명의 흑의를 입은 경장의 대한들이었네, 각자 손에 암기가 들은 매화침 통과 각각 모양이 다른 무기를 들고 있더군. 내가 앞 장을 섰었는데 그들의 추격을 막기 위해 부득이 안고 있던 사마건 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 주었지, 두구도 그땐 이미 부상을 당해 있었더란 말야....." 그는 이어, "그러나 이때 그들의 독상이 발작을 시작하여 행동이 몹시 느렸 지. 재촉도 할 수 없고 해서 겨우 십 장 정도 전진했을 때 이미 적 이 따라 붙어 나는 혼자 십여 명을 상대하게 되었네. 이때 한 명이 빈틈으로 빠져 나가는 바람에 왕방은 그만 그 자 손에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네......" 소영은 암연히 말했다. "부득이한 일이었는데 어찌 노선배님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손불사는 숙연히, "말이 그렇지 이 늙은이는 영 마음에 걸리네." 소영은 상팔과 두구가 걱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그 후 어찌 되었습니까?" 손불사는 무위도장을 한 번 바라 보고는, "말이 났으니 말이지 정말 이 늙은이는 무위도장의 깊은 계략에 탄복해 마지 않네." 무위도장은 암연히, "이 빈도가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칭찬받을 만한 깊은 생 각을 했다면 이토록 무당일문의 정예가 비참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째서? 그 조금 전에 이 늙은이를 만나 뒤를 쫓던 흑의의 사나 이들을 물리친 자가 당신네 무당파 문하들이 아니었소?" 무위도장은 고개를 흔들며, "빈도, 그런 공을 차지할 복이 못 되는가 봅니다." 손불사는 의아해 했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구먼....." 소영은 어리둥절하여, "도대체 무엇이 어찌 되었습니까?" 손불사가 대답했다. "나는 왕방이 그 자 손에 절벽 밑으로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이 미 구할 수 없는 일이라 속에서 울분이 치밀어 연속 장력을 쳐내 비록 상대방 두 명에게 부상을 입히기는 했으나, 여전히 맹렬한 그 들의 공세를 어떻게 막아 낼 도리가 없었네. 만일 내가 뒷걱정만 없었더라면 반 시간 내에 그들을 모두 죽여 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 운 일이 아니었지." 하고 그는 이어, "정신이 양쪽으로 분산되어 민첩하게 적을 대할 수가 없어 오히 려 그들에게 한쪽으로 밀리고 말았네. 이때 그 중에서 무공이 좀 높은 자 하나가 그 틈을 타서 내가 막고 있던 길을 넘어서 상팔과 두구가 있는 곳으로 쫓아 가지 않겠나......" 소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노선배님! 그러면 그 두 형제는 이미 당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손불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일 그들 손에 죽었다면 내 어찌 두 분을 대할 면목이 있었겠 나?" 소영은 답답해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형세가 위급함을 직감했으나 몸을 두 쪽으로 나눌 수도 없 고 초조해 있는데 이미 몇 사람은 독이 크게 발작해서 대항할 힘이 아주 없어지지 않겠나? 이렇게 위급한 찰나에 뜻밖에도 일성의 퉁 소소리가 들려 오더니 손에 보검을 든 네 명의 흑의를 입은 사람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오듯 달려 오며, 손에 든 보검에서 네 줄기 은 빛이 번쩍이더니 예리한 검초로 일순간에 우리를 추격하던 흑의 사 나이들의 태반을 살상했네. 그러니 나머지 몇 명은 겁을 집어 먹고 달아나더군." 무위도장이 물었다. "그 네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물어 보셨습니까?" "내가 막 물어 보고 인사를 하려는 찰나 그 네 명은 몸을 돌려 마치 나는 듯 사라지고 말았지." 소영이 물었다. "그러면 그들의 생김새라도 보셨겠군요?" 손불사는 잠시 주저하더니, "네 사람 모두가 검은 천으로 복면을 해서......" 하고 말을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이어, "자네가 묻지만 않았다면 네 잊을 뻔했군. 그 네 명 중의 두 명 은 체격이 몹시 작아 남자 같지가 않더군." 소영은 망연하여, "거참, 알 수 없는 일이군요." 무위도장도 의아해서 물음을 던졌다. "마치 그들은 심목풍의 사람들이 기습할 것을 미리 알고 일부러 그곳에 숨었다가 도와 준 듯한데 만일 그들이 정녕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어째서 우리에게 미리 경고를 해 주지 않았을까 요?" "나도 그 점이 이상하단 말야." 소영은, "그들이 도와 줄 생각이 있고 더욱 많은 백화산장의 고수들을 살 상한 것으로 보아 적은 아닌 듯 싶군요." "글쎄, 진심으로 도와 주고 싶었다면 어째서 이름을 밝히지 않았 을까?" 무위도장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들이 미리부터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고, 진심으로 우리 를 도와 주고 싶었다면 어찌하여 본파에 좀 일찍 한마디 통보를 해 주지 않고 우리 무당 문하의 정예와 상처를 수양하는 몇 분의 고수 들이 모두 화를 당하게 했을까요?" "소생이 사방을 유심히 살펴 보았으나 격투를 벌인 흔적이 없는 데 혹 그 운양도장(雲陽道長)께서 이미 귀파의 제자들을 데리고 이 곳을 피해 떠난 것이 아닐까요?" 손불사는 전중원을 한 번 바라 보더니, "우리 이 자를 고문해 보도록 하지." "그래야겠군요." 하고 소영이 대답하더니, 전중원 앞으로 다가가서 전중원의 혈도 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두 팔과 두 다리를 찍으며 냉랭히 물 었다. "네놈이 운양자를 가장했으니 그 운양도장의 행방을 알고 있겠 지?" 전중원은 소영을 한 번 바라 보고는 담담히 웃으며, "그렇소!" 하고 대답했다. "그림 운양도장은 지금 어디 있지?" "소생이 말을 아니하면 어쩌겠소?" 하고 비웃는 어조였다. 이에 손불사는 두 눈을 부릅뜨고는, "나는 너희들 남해오흉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다! 허나 나는 네 가 정녕 쇠와 구리로 두들겨 만든 진라한(眞羅漢)이라고는 볼 수 없다. 소대협은 손을 안 쓸지 모르지만, 이 늙은이는 너에게 따끔 한 맛을 보여 주겠다! 내 우선 네 오음절혈(五陰絶穴)을 찍어 네 피가 모두 내부(內腑)로 몰리는 맛을 보여 주겠다!" "남해오흉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시시한 인물인 즐 알았소?" "좋다. 우리 한번 시작해 보도록 하지." 손불사는 이렇게 말하더니 천천히 전중원 앞으로 다가가서 오른 손을 치켜 들고, "이 늙은이는 네게 차 한 잔 끓일 만한 여유를 줄 터이니 잘 생 각해 보아라!" 전중원은 잠시 주저하더니, "내가 운양자의 행방을 얘기해 주면 여러분은 나를 어떻게 대해 주겠소?" 했다. 손불사는 무위도장을 한 번 바라 보고 나서, "그건 도장이 알아서 하셔야지....." 무위도장의 빛나는 눈빛이 한참 동안 전중원을 쏘아 보더니, "우리 무당파는 너희들 남해오흉과 아무런 원한관계가 없건만 어 찌 너희들이 본파와 적이 되려 하는지 알 수 없구나." 했다. 전중원은 이렇듯 곧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에서도 그 표정 은 여전히 침착하기만 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우리 남해오흉이 출도(出道)한 후 중원에 아홉 번 들어 왔었는 데 오늘 비로소 처음으로 당신들에게 당한 셈이오. 여러분께서 우 리 남해 오형제와 원수를 맺고자 하거든 지체없이 내게 독수를 내 려도 좋소. 허나 여러분께서는 나를 고문할 생각은 아예 마시오. 나는 순식간에 나 자신을 죽일 수 있으니까요." 하고 이어서, "그리고 금후 여러분께서는 갖은 수단을 다 써서 우리 네 분 의 형제를 죽이려 들겠지만, 우리 네 분의 의형 중 하나만이라도 살아 남는다면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고 복수할 것이오." "그건 너희들 남해오흉의 개인 사정이고, 지금 우리가 묻고 있는 것은 운양도장과 무당문하 여러 사람의 행방이 어찌 되었느냐는 것 이다!" 하고 소영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내 몸의 혈도를 풀어 주면 가르쳐 주겠소." 손불사가 그 말을 받아, "남해오흉은 원래 간계가 많고 수단이 악독하다는 것을 이 늙은 이는 오래 전부터 들어 왔다." 그러자 전중원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그의 말을 받아, "그렇소! 남해오흉이 비록 나쁜 일을 많이 해 왔고 또 사술(詐 術)도 많이 써 왔지만 일단 응낙한 말에 대해서는 어기는 법이 없 소." 소영은 냉랭히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은 조금 전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을 잊은 모양이로군!" 전중원은 태연히 대꾸했다. "그것은 다만 꾀를 썼을 뿐,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오. 단지 당 신이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없어 그런 것이지! 우리가 그 내기를 하기 전 당신이 한 마디만 더 내게 일정한 시간을 정해 나로 하여 금 마지막 숫자를 세게 했다면, 내기에서 내가 분명히 졌겠지만." 소영은 그 말을 들으니 그럴 듯도 했다. 그의 입에서 '십'이란 숫자가 나오지 않았으니 물론 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전중원의 전신 혈도를 풀어 주고는 담담히, "좋다! 그러면 이제 말해 보아라." 전중원은 두 눈을 내리 감고 암암리에 조식해서 진기가 전신에 돌고 있음을 인식하자 그제서야 서서히 눈을 떠 소영 등을 훑어 보 고는, "소생이 이곳에 왔을 때 이곳은 이미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없는 빈 집이었소." 하고 말했다. 무위도장이 황급히, "그게 정말입니까?" 하고 다그쳐 물었다. "소생의 입에서 나간 말이니 거짓이 아니오." 소영은 검날같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당신은 이번에 어떤 공로를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데리고 온 사 람들이 많은 부상을 당했는데 무슨 면목으로 심목풍을 대하겠소?" "그런 걱정까지 해 줄 필요는 없소." 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어, "심대장주는 이미 나에게 당신의 검술이 놀랄 만하다고 말해 주 었소 오늘 한 번 겨루어 보니 과연 그 말이 옳소. 오늘의 일을 소 생은 길이 잊지 않겠소. 하나 훗날 남해 오형제는 다시 한 번 소대 협의 무공의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오." "소모도 언제든지 가르침을 받겠소." 손불사가 냉소를 띠고, "왜, 그 몇 마디만 해 놓고 가려나?" 하고 그를 쏘아 보았다. "핫핫핫핫핫. 소생은 세 분을 이겨내지는 못했지만 내 발로 가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오."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그의 몸은 이미 공중으로 솟구쳐 있었다. 그와 동시에 왼손으로 손불사, 오른쪽 발로 무위도장, 그리고 오른 팔을 휙! 하고 휘두르며 한 줄기 은빛을 소영에게 던졌다. 이처럼 너무나 가까운 거리라서 소영은 돌발사태에 대비했었으나 갑작스런 기습이라 약간 당황했다. 그는 재빨리 오른손으로 일장을 쳐 내고 몸은 철판교(鐵板橋)의 초식으로 뒤로 제쳤다. 손불사도 대갈일성하며 일장을 밀어 내고 반격해 갔다. 무위도장은 그의 이런 수단에 화가 치밀어 그의 발이 들어 오자 피하기는커녕 손가락을 날카롭게 뻗어 전중원의 종아리에 있는 현 종혈을 찍어 갔다. 이러한 무림 고수들의 격투는 그 누구도 추호의 선수(先手)도 양 보하지 않았다. 전중원은 단번에 손, 발, 암기로 쳐서 세 사람을 각기 동시에 공 격했으나 손불사와 무위도장의 반격을 불러들인 셈이었다. 전중원이 쳐 낸 자세는 단지 허세였다. 손과 발을 쳐 낸 후, 공 중에서 몸을 뒤로 제쳐 발이 땅에 닿았을 때는 이미 이곳과 일장이 나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다. "핫핫핫. 소생, 이만 물러가겠소. 훗날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하더니 이미 칠, 팔 장 밖으로 날듯이 달아 났다. 소영이 몸을 솟구쳐 그의 뒤를 쫓으려 하자 무위도장이 손을 뻗 어 그를 가로막았다. "도망가게 내버려 두시오. 우리는 사람을 구하는 일이 더 급하 오." 소영은 그제서야 상팔과 두구 등 여러 사람들이 아직도 중독되어 있는 것이 생각났다. 그는 황급히 손불사에게 물었다. "노선배님! 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손불사는 긴 한숨을 내쉬며, "바로 저 오른쪽 얼마 안 떨어진 숲 속에 있지! 거참, 심목풍은 과연 발이 넓군. 이 늙은이가 그와 적이기는 하지만 그의 수단에는 탄복할 수밖에 없군 그래! 남해오흉까지 그의 수하에 끌어 들여 이 용할 줄은 미처 몰랐단 말야!"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덧 숲 앞까지 다다랐다. 손불사가 앞장서서 그 숲 속으로 들어 갔다. 소영과 무위도장은 손불사의 뒤를 따라 약 이, 삼 장 정도를 들 어 가니 사방이 절벽으로 된 곳에 당도했다. 거기에는 사마건과 상 팔, 두구 등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운공조식을 하고 있었다. 장자안은 실눈을 뜨고 있었으며 두 마리의 개는 상팔과 두구 옆 에 엎드려 있었다. 손불사는 의아한 듯, "이상하다! 어째 다들 독상이 나은 듯하지?" 하고 허리를 굽혀 들여다 보았다. 이때 상팔이 내리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고 세 사람을 번갈아 바 라 보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노선배가 가신 후 곧바로 한 사람의 흑의를 입은 사람이 총총히 달려 와서 지남철(磁鐵) 비슷한 것으로 우리 몸 속에 파고 들어 간 독침을 빼 주고는 한 사람 앞에 한 알씩의 해독약을 먹으라고 준 뒤,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헌데 그 사람의 수법이 무척 익숙해서 우리 여러 사람 치료를 눈 깜짝할 사이에 끝 내더군요." 손불사가 물었다. "당신들은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 보지 않았소?" "물어 보아도 시종 입을 열지 않더군요." 하고 상팔이 대답했다. "이렇게 계속 우리를 도와 주면서 그 이름을 밝히려 들지 않으니 도시 그 속셈을 모르겠단 말야." 하고 소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위도장이,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습디까?" 사마건이 눈을 뜨더니, "제가 보기에는 여자 같기도 하던데요?" 하고 대답했다. "여자요?" 하며 소영이 놀란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 사람의 몸매는 무척 가냘프고, 열 손가락은 아주 섬세했을 뿐만 아니라 몸에서는 묘한 향기까지 풍기는 것이 틀림없는 여자 같았습니다." 하고 상팔이 상세한 말을 했다. 소영은 입으로는 말을 안해도 속으로는 크게 기이하게 여겨, '어째서 그렇게 많은 계집애들이 도와 준단 말인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인데.....' 하고 생각을 했다. 이때 무위도장이, "빈도가 반평생을 살아 오는 동안 내귁영웅과 무슨 교제를 해 본 일이 없고 무당 일문도 여자 위주의 무림 문파와 왕래가 없었으니 절대로 우리 무당파를 위해서 돕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손불사도 동감이 가는 듯 말했다. "이 늙은이도 평생을 여자와는 담을 쌓아 왔으니 물론 나를 도와 준 것도 아닐 테고......" 소영도 한 마디 할 수밖에 없어, "소생도 어디서 온 여(女)영웅이 남몰래 우리를 돕고 있는지 모 르겠습니다....." 그러나 머리에 번개같이 생각나는 일이 있어, "혹 그녀가 아닐까?" 손불사가, "어떤 사람?" "소생은 그저 그렇게 짐작해 보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많지요." "말을 해 보아야 여러 사람이 들어 보고 의견을 제시해 줄 것이 아닌가." "북천존자(北天尊者)의 딸 백리(百里)낭자......" 손불사는 손바닥을 탁 치더니, "맞았어! 그녀 외에는 그토록 무공이 높은 여자가 없으니까! 마 치 신동과 같이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감추는 것이....." 무위도장은 고개를 저으며, "빈도의 생각은 두 분과는 좀 다릅니다. 남몰래 도와 주고 있는 여성은 절대로 백리낭자가 아닐 것이오." "어째서 그렇소?" 손불사는 무척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만일 그가 백리낭자라면 벌써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거요. 그녀가 소대협을 찾고 있는데 어찌 모른 체 한단 말이오. 그것으로 보아도......" 무위도장이 채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손불사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맞는 말인데, 그럼 그녀가 누구일까?" 무위도장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옆에 있는 소영을 쳐다 보았다. "그거야 빈도가 알겠소?" 그러자 손불사는 소영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소대협! 그렇게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지만 말고 무슨 이 야기라도 하여 보게나. 무슨 증거라도 있나?" 소영은 막연히, "그건 저도 잘 모르고 있으니....."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감았다. 손불사는 그의 대답이 시원치가 않자 조금 섭섭한 눈치를 보이면 서 말했다. "그거 정말 이상하구나. 내가 이렇게 늙을 동안 강호를 돌아 다 녔는데도 이번 같은 묘한 일은 처음 당해 보는데! 서로 전혀 알지 도 못하면서 우리가 위급할 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타나 도 와만 주고는 그냥 훌쩍 사라져 버린다.... 허어, 정말 모를 일이로 군." 무위도장이 두 손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지금 형편으로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뾰죽한 수가 없겠소. 앞 으로 십여 일 정도면 어떻게든지 알아 내고야 말겠으니 더 이상 생 각지 맙시다." 손불사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혹시 무슨 흉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훗날 은혜의 보 답을 요구하든가......" "글쎄.... 그것도 생각해 볼 문제인데!" "그것도 그렇지만 정말로 그녀가 어려운 조건을 붙여서 우리에게 보답을 요구한다면..... 들어 줄 수도 안 들어 줄 수도 없을 터이 니 야단났군요." 소영이 말참견을 하였다. "그거야 그때 가서 우리들이 해결하면 되지 않겠소?" 이때, 두 눈을 감고 운기조식하던 두구가 천천히 눈을 뜨면서 냉 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생이 도장께 한 마디 알려 드릴 것이 있소이다." 무위도장은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아! 그렇소? 어디 말씀하여 보시오. 빈도는 귀를 기울이고 들으 리다." "우리의 독상을 치료하여 주던 사람이 이곳을 떠나면서 소생에게 전한 것이 있소이다. 도장에게 전해 달라고 하면서....." 무위도장은 바싹 앞으로 다가 서며 다그쳐 물었다. "무슨 말이었소?" "그녀의 말은, 귀파의 제자들은 운양도장께서 이끌고 서쪽 이십 리 밖의 옛 절로 갔다고 하였소이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어서 그곳 으로 가 보라고......" 무위도장은 만면에 희색을 띠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정말인지 거짓인지는 몰라도 저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옮겼을 뿐입니다." 손불사는 힐끗 무위도장을 쳐다 보고, '도장은 무척이나 좋아하는군.' 하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녀가 우리에게 함께 가라고 하였소? 아니면 무위도장 혼자 가 시라고 하였소?" "그녀는 나에게 말하기를 분명히 우리들이라고 하였소이다. 우리 들이라면 도장 한 분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지 않겠소." 두구의 말을 듣고 난 손불사는 대뜸 주위를 둘러 보며 외쳤다. "여러분! 여러분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이대로 길을 재촉할 수 있겠소?" 상팔, 두구와 사마건 등 여러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이구동성으 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소영은 장자안을 쳐다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도 갑시다." 하면서 등을 돌려 그를 업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두구 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아닙니다. 이런 일이 큰형님이 하실 것이 아니오이다." 하면서 장자안을 등에 업었다. 소영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두형은 너무 무리하면 몸에 해로울 텐데......" "괜찮소이다. 이 정도는." 군호들은 줄을 지어 길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앞 길은 모 두 산이었지만 너무나 깊은 곳이라 인적이 보이지 않아 별로 신경 을 쓰지 않고 길을 재촉할 수 있었다. 얼마를 걸어 조그만 산등성이를 넘어서니 눈앞에는 정말로 아주 오래된 절이 나타났다. 절은 비록 옛것이라 허술하였지만 그 규모 는 대단히 커서 많은 인원이 묵을 장소로는 안성맞마춤이었다. 무위도장은 뒤에 따라 오는 일행을 멈추게 하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는 그녀의 말만 듣고 무작정 나아갈 수는 없지 않 겠소? 빈도가 먼저 가 보겠소." 손불사가 앞으로 나섰다. "이 늙은 거지도 따르겠소." 무위도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신경 을 곤두세우고 천천히 절이 있는 곳으로 다가 갔 다. 그들이 절 문 앞에 당도하자 안에서 운양자와 전엽청이 웃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무위도장은 자신의 부주의로 큰 곤경에 빠졌던 경험이 있으므로 우선 그들을 의심하였다. 그는 대뜸 우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서라!" 운양자는 사형을 만나 반가운 마음으로 앞으로 나서며 예를 올리 려고 하다가 무위도장의 외침소리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사형께서 무슨 일로....? 제가 잘못이 있으면 벌을 주십시오." 그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것을 본 무위도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사제, 이리 가까이 오게. 내 조금 전에 큰 봉변을 당하였기에 그대들도 가짜인가 해서..... 허허허....." 전엽청이 걱정이 되는 듯 다그쳐 물었다. "어떤 자에게....." "그놈은 사제를 가장하여 나에게 다가 오더니 갑자기 혈도를 찍 어 버렸네. 만일 소대협과 손선배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지금쯤은 그들에게 잡혀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것일세." 전엽청은 너무나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무위도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해오흉의 전중원이 운양자를 가장 하여 일대 소란을 피웠던 지난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 주었다. "마총타주의 상처는 좀 나았는가?" "이젠 음식도 약간 먹을 수 있고 말도 합니다. 참, 그가 소대협 을 만나 보고 싶어 하던데요!" 손불사는 잔뜩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였소?" "아직 말을 똑똑히 못하여 물어 본 것도 없소이다." "그런데 운형은 어떻게 심목풍의 습격을 미리 알고 이곳으로 피 하였소?" 운양자는 눈길을 무위도장에게 돌리며,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부님을 만나면 물어 보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하고는 전엽청에게 어이없다는 눈길을 보냈다. 무위도장은 모든 일이 자꾸만 미궁 속에서 생겨나니 내심 불안한 마음이 생겨 다그쳐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 "네, 사형과 다른 여러분들께서 나가신 후에 소제는 그 초가 대 문 틈에 하얀 종이 쪽지가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종이 에는 심목풍이 무림의 많은 고수들을 몰아 무당파를 치려고 한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곳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면서 어서 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종이에는 서명이 되어 있던가?" 운양자는 고개를 저었다. "없었습니다. 심지어 무슨 기호나 표기도 없었습니다. 그 종이는 사부님을 보호하는 동자에게 주었습니다." 손불사는 긴 탄식을 하였다.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언제나 우리 뒤에서 도와만 주니......" 이때 소영과 사마건, 그리고 중주이고 등 모두가 손불사의 뒤로 다가 왔다. 무위도장은 주위 사람들을 돌아 보면서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우리들 뒤에 숨어서 도와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심목 풍의 모든 거동을 훤하게 알고 있는 것 같소이다. 이번에 무당파의 위험을 미리 알려 준 것도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아니겠소?" 소영이 말을 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 사람은 바로 악성(樂聲)으로 심목풍을 물러나게 하였던 고인 인지도 모르지요." 무위도장은 잠시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말했다. "그의 정체는 안개 속의 신룡(神龍)이라고나 할까? 그는 많은 부 하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더욱이나 부하들의 무공은 극히 뛰어나 그의 말에 따라 나타났다가 다시 그를 따라 사라져 버리니 그들의 명령 계통이 매우 엄격한 것 같소." 손불사가 맞장구를 쳤다. "맞았소. 그 사람은 신비의 안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오. 심목 풍은 극악무도하여 여러 사람에게 원한을 사고 있을 터이니 그 사 람도 심목풍과 원한이 있는 모양이오." 무위도장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의 말을 받았다. "정말로 그 사람이 심목풍과 원한이 있다면 악성으로 그를 쫓지 는 않았을 것이오. 다만 심목풍이 그 비파와 퉁소소리를 합한 묘한 소리를 무서워하는 것 뿐일 거요." 소영이 무슨 생각이 난 듯 무위도장의 이야기를 받았다. "네, 그 말이 맞습니다. 만일에 심목풍이 그 사람을 무서워하고 또 그 사람이 원한이 있다면 벌써 심목풍을 찾아 목을 베었을 것이 오." 그러자 운양자가 앞으로 나서며 주위 사람들에게, "여기서 이렇게 서 있을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 갑시다." 하면서 문을 활짝 열었다. 옛날에 어느 중들이 살던 곳인지 그 규모는 대단히 컸으나 너무나 오래되고 또 사람이 살지 않았던 까 닭에 천장이나 벽, 그리고 바닥은 모두 헐어서 겨우 비나 피할 수 있을까 바람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전만은 워낙 튼튼하게 지 었던지 그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행히 마문비 등 상처를 입 은 몇몇 사람이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십여 명의 건장한 무당파의 제자들은 두 패로 나뉘어서, 그 하 나는 대전에서 쉬며 세 사람의 부상자를 치료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대전의 지붕이나 근처의 높은 나무에 올라 가서 주위의 동정을 살 피었다. 소영은 그들의 모습을 바라 보다가 문득 일행이 몹시 배가 고플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는 대전 앞을 지나는 도동 하나를 불러 세워 일행이 요기를 할 수 있도록 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 도동은 곧 마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갔다. 무당파의 제자들 은 그 행동의 민첩하고 일사불란 하기가 이를 데 없어 평소 무당파 의 기강을 보는 듯 했다. 89. 찾아온 삼흉 소영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 서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 전각 안의 신상은 이미 너무도 파손되어 어느 신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전각 안은 구석구석이 말끔히 청소되어 있었다. 대전 의 일각에는 세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모두 깊은 잠에 빠진 듯 소 영 등이 들어 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소영은 운양자를 돌아 보며 물었다. "도장, 소생이 저 분들의 상세를 좀 보아도 좋겠지요?" "물론 괜찮지요......" 운양자는 잠시 말을 끊더니 다시 이었다. "세 사람은 지금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상처가 모두 중상이라 정신을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여 아마 소대협을 알아 보지 못 할 것이오." "나는 그저 저 분들의 상세만 보고 절대 귀찮게 하지 않겠소." 하며 조용히 다가갔다. 그들 세 사람은 밑에다 두꺼운 요같은 것 을 깔고 몸에는 흰 이불을 덮고 있었다. 마문비는 눈을 꼭 감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싶었고, 나머 지 두 사람은 머리를 흰 천으로 싸맸기 때문에 얼굴을 알아 보기가 힘들었다. 소영이 가볍게 탄식을 하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 분들의 무공은 보존되겠지요?" "무공이 소실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세 사람 중에 둘은 아마 불구 가 될 것 같소이다." 무위도장도 길게 탄식했다. "빈도는 이미 우리 무당파의 모든 영약을 다 써서 그 분들의 상 처를 치료했으나 그들이 불구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할 수가 없 소." 소영은 안타까웠다. '만일 독수약왕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이들을 완치시킬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독수약왕의 절세 의술을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그 의 가치가 느껴졌다. 이때 장자안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 "소생은 지금 배가 몹시 고픈데 무엇 좀 요기할 것이 없을까요?" 원래 장자안을 업고 전각 안으로 들어 온 두구는 그를 문 곁에 내려 놓았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두 개의 의자 다리에 묶여 일어설 수가 없어 가만히 벽에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무위도장은 운양자를 돌아 보며 말했다. "먹을 것을 좀 장만해 오도록 하게." 그러자 운양자는 곧 대답했다. "소제가 이미 준비하라고 시켜 놓았으니 이제 곧 가지고 올 것입 니다." 그들이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두 명의 도동이 각각 여러 가지 음식을 들고 전각 안으로 들어 왔다. 군호들은 하루종일 길을 달려 왔으므로 모두 허기가 졌다. 그러나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라 보통 사람들보다 인내심이 강했다. 여러 가지 음식이 푸짐하게 들어 오 자 곧 군호들은 허리띠를 풀어 놓고 허기진 배를 욕심껏 채웠다. 식사가 끝나자 무위도장은 소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오래 머물고 있을 곳이 못 되오. 빈도의 생각으로는 이 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심신이 회복되는 대로 곧 길을 떠나도록 하 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에 칼을 멘 어느 중년 도사가 총 총히 들어 오더니 무위도장에게 공손히 절하고 보고하였다. "장문사존께 아뢰오. 고찰 밖에서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위도장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그러자 그가 미처 무슨 분부 를 내리기도 전에 운양자가 재빨리 몸을 움직이더니, "제가 가 보고 오겠습니다." 하고 전각 밖으로 달려 갔다. 손불사는 혼자말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백화산장 사람들이 멀짜감치에서 우리 뒤를 미행했다면 곧 이곳 고찰로 들이닥칠지도 모르지." 사마건도 한 마디 하고 나섰다. "소제가 점을 한번 쳐 보겠소이다. 길흉이 어떠한가 말이외다." 하더니 옆 사람의 의견은 아랑곳없이 품 속에서 점치는 데 필요 한 거북이 가죽과 금전 여섯 개를 꺼냈다. 그리고 두어 번 흔들었 다. 그것을 흔들다가 바닥에다 확 뿌리고는 한동안 바라 보고 있었 다. 군호들은 묵묵히 시선을 사마건의 표정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점괘에 나타난 길흉을 알아 보려고 유심히 그의 표정을 살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사마건의 입에서는 한 마디의 말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군호들은 의아한 눈으로 열심히 괘상(卦像)을 바라 보고 있는 사 마건을 지켜 보고 있었다. 손불사가 몹시 답답한 듯 마른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입을 열었 다. "그 점괘는 흉이오, 길이오?" 사마건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점괘는 틀림없이 흉한데 그 흉 속에 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는 도대체 길인지 흉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군요." 무위도장이 이어 말을 받았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이 점괘는 선흉후길(先凶後吉)이라는 말이구 료." 그러자 사마건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점괘입니다. 제가 자세히 생각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하자 손불사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대꾸했다. "그대가 그 점괘의 길흉을 가려 낼 때쯤 되면 강적들이 이미 이 고찰 내에 들이닥친 뒤가 될 것일세."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운양자가 황급히 뛰어 들어 왔다. "과연 강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벌써 이 고찰에 서 삼 리 정도밖에 안 되는 곳까지 와 있습니다." 이 말에 소영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물었다. "몇 명이나 되어 보입니까?" "대략 열 명 정도는 되어 보이더군요." "그렇다면 백화산장 사람들에게는 인정사정 볼 것 없어요. 무조 건 모조리 죽여 없애야 되겠군요." 손불사가 소영의 말을 받아 말했다. "열 명이라면 우리 힘으로 상대할 만 하구먼." 운양자가 재빨리 말했다. "제가 곧 전령을 내보내겠습니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본문의 제 자들에게 전부 고찰로 돌아 오라고 말입니다." 무위도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 자들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처치해 버리고 이곳을 속 히 떠나야 되겠습니다." 전엽청이 나서며, "소생은 우선 대문을 지키고 있는 제자들을 도와 주어야겠습니 다." 하더니 민첩하게 몸을 솟구쳐 전각 밖으로 나갔다. 무위도장은 손불사를 향해 말했다. "노선배님께서는 이 대국을 주관하시어 총지휘를 하여 주시오." 손불사는 핫핫 하고 큰 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도장께서 주관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이다. 나는 소제와 함께 우선 선두로 쳐들어 오는 적을 막아야겠어 요." 하더니 무위도장의 대답도 듣지 않고 소영을 끌고 전각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때 고찰 안에 있던 무당파의 제자들은 전부 전각 밖에 운집하 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위도장은 전각 안에 남은 군호들을 번갈아 바라 보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부상한 세 사람의 안전이므로 빈도는 이들을 지키기 위하여 본문 중의 제자 몇 명에게 두 사람씩 한 조 를 만들어 정문과 창문을 각각 지키도록 하고 여러분과 나는 전각 밖에서 진을 치고 적을 막으려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상팔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도장의 생각도 물론 좋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적이 어떻게 나 올지 아직 알 수 없으니 그것이 문제이군요." "우리는 그들을 이곳 고찰 안으로 유인하여 모조리 죽이는 길이 상책일 것 같은데 손선배님의 의견은 어떤지 알 수가 없군요." 상팔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역시 그렇게 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제가 곧 손선배님께 가 서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하고,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한편 손불사는 소영을 데리고 전각 문에 도착했다. 과연 십여 명 의 흑의대한이 마치 나는 듯이 이쪽을 향해 달려 오는 것이 보였 다. 전엽청은 네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각자 장검을 움켜쥐고 대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손불사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선 대문 안에 숨어서 저 자들이 도대체 무엇하러 어디 로 가는 것인가를 확인한 뒤에 손을 쓰기로 하지. 만일 저 자들이 대단치 않은 자들이면 우리가 나갈 필요도 없으니 그냥 이곳에 숨 어서 사태를 보다가 전엽청을 도와주기로 하는 게 좋겠네." 그는 원래가 생각했다 하면 실천에 옮기는 성격이라 소영의 대답 도 듣기 전에 그를 끌고 대문 뒤로 몸을 숨겼다. 숨어서 몰래 문구 멍으로 내다 보니 세 명의 대한은 순식간에 대문 안에 이르렀다. 왼쪽에 선 사람은 키가 팔 척이나 되고 시뻘건 얼굴에 붉은 옷을 입었으며 또한 붉은 신발을 신고 있어 전신이 시뻘건 차림이었다. 그는 등에 쇠로 만든 커다란 지팡이를 메고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남색 장삼에 등에 검을 메고 있었는데 그 가 바로 전중원이었다. 가운데에는 검은색 도포를 입은 사람이 서 있었는데 과의 눈썹은 매우 짙었으며 왼쪽 눈썹에 칼자국이 뚜렷이 나 있었다. 소영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전중원이 여기까지 따라 왔을 때에는 무슨 준비를 갖추고 왔을 것입니다. 저 양옆에 있는 자들도 혹 남해오흉 중의 인물이 아닐까 요?" "나도 그런 짐작이 가오." "만일 정말로 오흉 중의 인물들이라면 전엽청 혼자의 힘으로는 당해 내지 못할 테니 우리가 빨리 나가 도와 줍시다." "괜찮소, 우리는 우선 여기서 동정을 살핀 다음 결정짓기로 합시 다." 소영은 손불사의 속셈을 알 수 없어서 우선 그의 말대로 가만히 밖의 동정을 살폈다. 그 자들은 전엽청과 불과 사, 오 척 되는 곳에 와서 발을 멈추었 다. 그들 가운데 있던 흑의인이 전중원을 보며 물었다. "저 사람인가?" 전중원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엽청은 수중의 장검을 한 번 휘두르더니 냉랭히 물었다. "세 분은 누구를 찾습니까?" 그러자 흑의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엽청과 네 명의 중년 도사 를 훑어 보더니 말을 이었다. "소영." 전엽청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소. 소대협께서는 지금 이 고찰 안에 계시오. 그러나 그 분 을 만나 보고자 한다면 우선 소생의 장검부터 물리치고 들어 가 만 나시오." 그 흑색 도포를 입은 자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전엽청은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소영이 강호에 출현하고부터 그가 가는 곳마다 이름을 날리고 다녀 짧은 시일 내에 크게 명성을 얻었지. 그리고 은연중에 무림의 동도인물에게 제일 존경을 받고 있으며 오래지 않아 무림의 영도자 가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 무당파가 무림 중에 오래 보유하고 있 는 위명이 그로 인해 빛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 세 사 람이 소영에게 도전을 해 온 것으로 보아 시시한 인물들은 아닐 테 니 내가 만일 이 자들을 격퇴해 버린다면 우리 무당파의 위명을 날 리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흑의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흑의 도포를 입은 사람은 눈을 치떴다. 살기가 등등하고 격노 한 듯했으나 어쩐 일인지 꾹 참으며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물었다. "너는 무당 문하의 제자인가?" 전엽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무당문하의 전엽청이라 하오. 세 분이 소대협에게 도전 하는 것으로 보아 무명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대관절 누구시오?" 그 흑의 도포를 입은 사람은 오른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좍 펴 보이더니 거만하게 말했다. "남해오성(南海五聖)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전엽청은 흠칫했으나 곧 태연하게 대답했다. "대명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소이다." 왼쪽에 서 있던 붉은 옷차림의 사람과 전중원은 시종 한 마디의 말도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그 가운데 있는 흑의인이 그 들보다 신분이 높은 듯 싶었다. "기왕에 오성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빨리 들어 가서 통보해라." 전엽청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무엇을 통보하라는 말이오?" "소영에게 우리 남해오성이 왔다고 통보하란 말이다." "당신들은 세 사람인데 어찌 오성이라 자칭하는가?" 흑의인의 음산하고 시퍼런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변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성질이 매우 포악하고 성급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러 나 그는 어떠한 힘에 속박을 당하고 있는 듯 억지로 참으며 발작을 않는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고 손을 저으며 무서운 얼굴로 물 었다. "당신은 그것을 꼭 알아야만 되겠소?" 전엽청도 결연히 대답했다. "그렇소!" 흑의인은 갑자기 발로 땅을 힘껏 찼다. 그러자 흙먼지가 일어 두 치 가량 땅이 푹 패이고 발자국이 생겼다. 그는 냉랭한 어조로 대 답했다. "나는 섭혼장 손성(攝魂掌孫成)이라 하오. 남해오성 중의 둘째 요." 하더니 왼쪽에 있는 홍의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나의 삼제 시위(柴威)라고 하며......" 다시 전중원을 쳐다 보며, "이쪽은 우리 막내 전중원이오. 또 물어 볼 것이 있소?" 대문 뒤에 숨어 있던 손불사와 소영은 그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 었다. 손불사는 그의 말을 듣자 매우 의아해 하며 소영에게 속삭였다. "남해오흉이 옛날에는 청성과 아미의 양대문파를 쑥밭으로 만들 었네. 성질이 악하기로 이름난 그들이 오늘은 어찌 이다지도 얌전 할까?" 소영도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는 그의 얼굴에 살기가 등등한 것이 몹시 격분한 것 같은데 다만 억지로 참고 아직 발작을 하지 않는 것 같군요." "글쎄, 그것이 이상하단 말이야. 그가 격노를 참는다는 그 자체 가 말이오..... 아마 소제를 만나려고 그러나 보오." 이때 전엽청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세 분은 무슨 일로 소대협을 만나고자 하는지요?" 손성이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소영이 이곳에 있소, 없소? 내가 참는 데도 한도가 있소." 소영이 대문 밖으로 뛰쳐 나가려고 했으나 손불사는 그를 꽉 붙 들며 귀에다 속삭였다. "조급히 서두르지 말게.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 듯하네." 전엽청은 무당 문파의 이름을 날려 보려는 속셈으로 장검을 휘두 르며 말했다. "이곳부터 통과하고 만나도록 하시오." 손성은 화를 버럭 내며 소리쳤다. "당신이 이렇게 트집을 잡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하며 왼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왼쪽에 있던 홍의대한이 돌 연 앞으로 들이닥치며 전엽청의 칼을 잡아 채려고 했다. 전엽청은 상대의 내세가 이토록 번개같을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 에 수중의 장검을 하마터면 뺏길 뻔했다. 재빨리 뒤로 오 척쯤 물 러나며 수중의 장검을 휘둘렀다. 순간 한 가닥 검꽃이 공간에 그려 졌다. 시위는 기합소리도 우렁차게 휙 한 줄기 권풍(拳風)을 내뻗으며 앞으로 두 발자국 다가 서는 것과 동시에 왼손은 벌써 어깨의 쇠지 팡이를 뽑아 들었다. 그의 동작은 아주 대담했으며 공세 역시 매우 민첩하여 전엽청의 손에 있는 장검 따위는 아예 무시하고 덤벼드는 것 같았다. 전엽청은 상대의 권풍이 맹렬하게 바람을 가르며, 한 줄기 강경 한 잠력이 검세를 누르고 뻗쳐 오자 크게 놀라 부지중에 속으로 외 쳤다. '이 자의 권풍이 이토록 강경하니 무시할 수 없구나.' 전엽청은 성하도괘(星河倒掛)의 일초로써 반격을 하니 검빛이 온 통 하늘에 난무했다. 이 일초는 무당검법 중의 정묘한 초식으로 검 세가 매우 면밀하고 또 그 공세 중에 엄중한 수세마저 내포되어 방 위에 상당히 유리한 것이었다. 그러자 시위의 쇠지팡이가 면밀하고 예리한 검빛 속으로 찌르고 들어 올 줄이야. 갑자기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자 전엽청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발 물러섰으며 손이 은은히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시위의 일격은 전엽청의 검세를 흩어지게 했으며 오른손으로는 또 하나의 쇠지팡이를 뽑아 들고 공격을 가해 왔다. 그러나 이때 손성의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멈춰라!" 시위는 그 말에 곧 쇠지팡이를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손성은 전엽청을 향해 냉랭하게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당신과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라 소영에 게 급한 볼 일이 있어 온 것이오." 전엽청은 속으로 자기의 성하도괘 검중에 숨겨진 기묘한 변화를 저 시위가 대단치도 않은 지팡이 장법(章法)으로써 어떻게 파괴했 을까에 대하여 한편 놀라며 한편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위는 여전히 전엽청이 자기 형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자 크게 격노하며 소리쳤다. "혹 소영이 이곳에 있지도 않은데 이 자가 어물어물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닐까요? 더 이상 긴 이야기는 필요 없습니다. 소제가 이 자 와 저 네 명의 중놈의 목을 자르겠소. 처치한 후 들어 가 보도록 합시다." 하며 다시 지팡이를 휘두르며 공격을 하려고 했다. 이때 돌연 낭랑한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고개를 들고 그 곳을 바라 보니 경장을 한 소년 하나가 서서히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때 재빨리 전중원이 외쳤다. "형님! 저 자가 바로 소영입니다." 소영은 대문 뒤에서 시위와 전엽청이 겨루는 것을 보고 있다가 그의 지팡이가 무지무지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에 놀랐다. 전엽청이 위험하다고 느꼈으므로 마침내 대문 밖으로 나와 손성 에게 다가 갔던 것이다. 전엽청은 소영이 나오는 것을 보자 얼굴을 붉히며 검을 거두어 칼집에 넣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소영은 시위의 악랄한 출수가 간단하기 그지없건만 그 중에 단지 신기한 위력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지고의 수법이 아니라 이 사람이 천성적으로 그러한 놀라운 신력을 가지고 있음을 직감하 였다. 그는 적을 얕보지 않고 서서히 다가갔다. 그리고 진기를 암 암리에 끌어 모으며 이 자를 어떻게 상대해 줄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손성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하고 절을 한 뒤, "그대가 소영이시오?" 하고 물었다. 소영은 상대편을 한 번 살폈다. 그 세 사람 뒤에는 따라 온 아홉 명의 흑의대한이 멀찌감치서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보 였다. "소생이 바로 소영이오만, 세 분께서는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어 오셨습니까?" 손성은 뒤에 서 있는 전중원을 힐끗 쳐다 보더니 말했다. "조금 전에는 저의 동생이 큰 죄를 지었소이다. 소생이 대신 사 과드립니다." 소영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천만의 말씀을......" 그러나 그는 속으로 몹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이 자들이 이곳에 온 것은 조금 전에 전중원이 당한 화풀이를 하러 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손성을 건성으로 기침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말했다. "우리 남해의 오형제는 소대협과 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 다. 다만 일이 좀 뒤틀린 데다가 심목풍이 중간에서 기름을 치는 바람에 소대협에게 그만 죄를 짓게 됐습니다." 소영은 얼떨떨해서 간단히 대꾸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며 한동안 남해오흉의 속셈을 알 길이 없어 어떻게 말을 받아 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손성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절을 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첫째는 사죄를 하러 왔습니다만 그 외에 한 가지 복잡한 일을 부탁도 드릴 겸해서 왔습니다." 소영이 힐끗 뒤돌아 보니 손불사는 이미 자기 뒤에 바짝 와서 붙 어 서 있었다. 그러나 강호에 오래 다니며 경험이 풍부한 손불사조 차도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손성 일행의 속셈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손성은 소영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읍하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 좀 도와 주실 뜻이 있으실는지?" 소영은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먼저 말씀을 들려 주셔야 소생이 가부를 말할 수 있지 않습니 까?" 손성은 눈을 내리 뜨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 남해 오형제는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아직 한 번도 남 의 도움을 청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소대협의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은 실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 다." 소영은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귀하께서 우선 일의 전모에 대해 설명부터 해 주심이 좋겠소이 다." 손성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오형제는 중원 무림에서 많은 원한을 맺어 왔지요. 과거에 우리 형제가 청성, 아미 등 두 문파를 피바다로 만든 일에 대하여 소대협께서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소영은 그것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은 잘 알지 못했으나 들은 적 은 있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성은 다시 말했다. "제가 만일 입을 열어 모든 것을 말씀드린 다음 소대협께서 도와 주시는 것을 거절하신다면 남해 오형제는 더 이상 강호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면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비록 평범했으나 그 말 속에는 만일 이야기를 들은 후 소영이 도와 주지 못하겠다면 절대 그냥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이 담 겨 있었다. 소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하의 부탁이 정대광명(正大光明)한 일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나는 기꺼이 전력을 기울여 도와 드리겠습니다만 만약 하 늘을 대할 수 없는 비겁한 일이라면 칼이 모가지에 들어 오는 한이 있더라도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엽청은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몹시 부끄러웠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소영의 이토록 광명하고 넓은 흉금과 정대한 기개는 나같은 사 람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위인이구나.' 손성은 잠시 주저하다가 결연히 말했다. "좋소! 형제는 솔직히 말씀드리겠소. 소대협이 도와 주시든 도와 주지 않든 간에 억지는 쓰지 않겠습니다." 소영도 쾌히 대답했다. "그럼 소영도 귀를 기울여 경청하겠습니다." 손성은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남해 오형제 중 큰형님과 넷째가 갑자기 풍병에 걸려 우리 형제까지도 알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무림에서는 단지 소대협만이 그 질병의 치료를 해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데, 소대협 께서 도와주시겠다면 큰형님과 넷째가 의식을 회복하는 날 우리 남 해 오형제는 반드시 보답해 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소영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질병을 고치는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소생의 큰형님과 넷째의 병은 너무 돌발적이라 증 세가 나타난 지는 불과 열두 시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모 든 기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미 부근 수십 리 안에 있 는 열세 분의 명의를 모셔다가 진찰도 해 봤습니다만 전부가 속수 무책이더군요. 그래서 마침내 소대협을 이렇게 모시러 온 것입니 다." '병을 치료하는 일이라면 저 무위도장께서 훨씬 고수이거늘 나 소영은 의술에 대해선 백지인데 어찌 나를 찾아 왔을까?'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손성에게 물었다. "귀하께서는 어느 분에게 제가 그런 풍병에 걸린 분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들으셨습니까?" 손성은 품 속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더니 물었다. "소대협제서는 이 쪽지를 남긴 분을 잘 아시겠지요?" 소영이 그 쪽지를 받아 보았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 다. <귀제께서 걸리신 괴질은 이십사 시간 내에 치료를 해 주지 않으 면 자신이 살을 찢고 죽어 가는 악질적인 질병이지요. 처참하기 짝 이 없는 병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늘에서 덕을 내리시어 불초에 게 구제할 길을 가르쳐 주게 했는데 당대의 고인들 중 그 풍병의 병세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저 외에는 단지 소영만이 그 능력이 있소이다. 나는 마침 급한 볼일이 있어 지체할 수 없어 떠나니, 당 신께서는 되도록 속히 소영을 찾아 가서 도움을 청하도록 하시오.> 이 쪽지는 아주 간단하게 글을 써 놓았다. 서명도 없고 표시도 없었다. 소영은 두 손으로 쪽지를 들고 보고 또 보았으나 도무지 누구의 농간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때 손불사가 나서며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쪽지에 무엇이 씌어 있소?" 소영은 구원을 청하듯이 그것을 손불사에게 넘겼다. "노선배님께서 이것 좀 보십시오." 손불사도 그것을 한 번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짐작되는 것이 없었다. 이때 궁금한 듯이 손성이 물었다. "소대협께선 그 분을 아시겠지요?" 소영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거....." 손불사가 나서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오. 모르면 어떻게 소영을 지명하겠습니까?" 소영은 터무니없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는 속으로 이것은 사람의 생사에 관한 문제인데 농을 할 수가 있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부인을 하려고 하는데 재빨리 손불 사가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질병에 걸린 두 분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오?" 손성이 손불사에게 대답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농가에 있습니다." 손불사는 전중원을 흘끗 바라 보더니 다시 태연하게 말했다. "소대협의 인의지명(仁義之名)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이미 그런 변고를 알게 된 마당에 절대 전력을 다해야지요." 손성은 정중히 인사했다. "소생은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손불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당신네들은 심목풍과 한 패인데 심목풍과 앙숙인 우리 소대협이 만일 당신네 두 형제를 치료해 준다면 그것은 강적을 도 와주는 격이 되지 않소?" 손성은 급히 대답했다. "만일 소대협께서 우리 큰형님과 넷째를 치료해서 낫게만 해 주 신다면 절대로 심목풍을 도와 소대협을 적대시하지 않겠습니다." 손불사는 껄껄 웃더니 전중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의 막내 동생이 산장 내의 고수를 대동하고 독이 묻은 암기 로써 독수를 내려 소대협의 몇몇 형제를 상하게 했는데 그 일은 어 찌하시겠소?" 전중원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소생이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그 분들의 치료를 하기 위해서입니 다." 손불사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의 치료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그들은 벌써 죽었을 것이오." 90. 금침을 뽑아든 돌팔이 의생 손성은 전중원을 힐끗 바라 보더니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께서 의술이 정심하신데 보잘것 없는 독 묻은 암기쯤이야 소대협의 치료로써 곧 완쾌되겠 지요. 그러나 막내가 소대협에게 범한 죄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더니 전중원에게 고개를 돌리고 명령했다. "빨리 사과드리도록 하게." 전중원은 꼼짝 못하고 엉거주춤 앞으로 두 발짝 걸어 나오더니 소영에게 포권을 하고 공손히 절 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소생이 조금 전에 큰 실수를 범하였으니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소영도 급히 답례를 한 뒤 말했다. "서로 겨루는 마당에서는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는 법이니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전중원은 읍하며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의 넓으신 아량에 소생 탄복을 금치 못할 따름입니다." 손불사는 냉랭하게 손성을 향해 말했다. "강호의 음흉한 간계를 방비하지 않을 수 없소. 이 쪽지가 만일 소대협을 함정에 끌어 들이는 것 이라면....." 손성은 손을 저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남해 오형제가 비록 악독한 수를 비교적 많이 썼습니다만 절대로 거짓말을 해 본 적은 없었습니 다." 손불사가 비웃는 얼굴로 물었다. "당신 뒤의 저 사람들은 어떤 인물들이오?" "백화산장의 고수들입니다." 손불사가 냉소하며 말했다. "그것 보시오 백화산장의 사람이 여전히 당신네들과 함께 다니는 것으로 보아 어찌 이 편지가 심 목풍의 간계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소." 손성은 결연한 태도를 표시했다. "좋소! 그렇다면 소생이 우선 저 따라 온 백화산장 사람들을 죽이는 것으로 저의 진심을 표시하 겠습니다." 하며 별안간 솟구치더니 그 뒤에 서 있던 대한들의 대열로 덮쳐 갔다. 그가 손을 연달아 뻗치자 두 명의 대한이 무기를 미처 빼 들지도 못한 채 땅에 고꾸라졌다. 시위와 전중원도 손성의 뒤를 따라 그 흑의대한들에게 달려 들었다. 지팡이가 휘둘러지고 장검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세 사람을 따라 왔던 흑의대한 전부를 한 명도 빼 놓지 않고 쓰러뜨렸다. 소영은 그것을 보자 다시 감개가 새로워 속으로 생각했다. '저 남해오흉은 과연 듣던 대로 악독한 수법을 쓰며 무정하게 배신을 하는구나.' 손불사 역시 그들 세 사람이 이토록 급작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보자 잠시 넋을 잃었다. 손성은 큰 걸음으로 다가 와서 입을 열었다. "소대협, 이제 저희들을 믿을 수 있으시겠지요." 소영은 그를 지그시 바라 보며 물었다. "세 분께서 그 장중의 고수들을 죽였으니 훗날 어떻게 심목풍을 대할 것이오?" 손성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가 소대협과 사귀기 전에는 심목풍과 협조하여 소대협을 적대시해 왔지만 지금 이미 소대협 과 우정을 맺게 됐으니 당연히 백화산장을 위할 필요가 없겠지요." 소영은 생각했다. '당신이 그 장본인인 심목풍까지 죽인다 해도 나는 당신들의 두 형제의 풍증을 고칠 수 없소이 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질질 끌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막 입을 열어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데 또 다시 손불사가 앞서서 입을 열었다. "세 분은 이 고찰 밖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오. 내가 소대협과 상의할 일이 하나 있소이다." 손성을 곧 말했다. "적이 되든 친구가 되든 간에 모두 소대협의 마음에 달렸으니 그쪽이 편리할 대로 하시오." 손불사는 몸을 돌려 고찰 안으로 들어 가며 말했다. '소제, 나를 따라 오시오." 소영도 그의 뒤를 따라 고찰 안으로 들어 가면서 물었다. "노선배님께서 그들에게 치료를 할 수 있다고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신 것은 무슨 생각에서 그러 셨습니까?" 손불사는 태연히 말했다. "남해오흉이 전력으로 백화산장을 돕게 되면 심목풍은 마치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 되므로 필히 그들의 사이부터 갈라 놓아야 되기 때문에 그랬소." "그러나 소생은 의술이 백지인데 어찌 그들 형제의 풍증을 고쳐 줄 수가 있습니까?" 손불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방면에는 나도 소제와 같소. 그러니 우선 무위도장에게 물어 보도록 합시다." 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대전을 향해 걸어 갔다. 이때 무위도장과 중주이고, 사마건 등은 밖이 소란하지 않고 조용하기만 해서 이상하게 여기고 막 고찰 밖으로 나가 동정을 살펴보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손불사와 소영이 나타났던 것이다. 손불사가 앞장서서 대전 안으로 들어 서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괴사는 해마다 있는 일이지만 금년은 특히 많구먼. 이상하지 이상해." 무위도장이 다가 서며 궁금한 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토록 이상한 일이?" 손불사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강호에 알려진 소영의 능력은 못하는 것이 없는 줄 아는 모양이외다." 무위도장은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손불사는 간단히 설명했다. "밖에 온 사람들은 남해오흉 중의 삼형제인데 그들은 소제에게 자기네 형제 둘이 걸린 풍증을 치 료해 달라는구료." 무위도장은 뜻밖이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요?" 소영이 그 뒤를 이어 말했다. "그러나 저는 그 질병을 치료할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의 풍증을 치료해 줄 수 있겠습니까?" 무위도장은 그것을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이상하군요. 그들이 어째서 소대협을 찾아 왔을까요?" 소영이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혹 어떤 자가 고의로 남해오흉에게 나를 찾아 가서 그들이 형제의 병을 치료케 하라고 화를 뒤 집어 씌운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만일 완치시키지 못할 경우 남해오흉과 원한을 맺게 하려는 흥 계가 아닐까?" 무위도장은 그 의견에 즉시 동의하며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소영이 다시 말했다. "제가 재차 거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믿으려 들지 않더군요." "소대협의 뜻은 어떠하오?" "그들은 종이 쪽지 한 장을 갖고 왔는데 그 쪽지에는 엉뚱하게도 소생이 그 풍증을 치료할 수 있 다는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이미 응낙을 하셨소이까?" "형세가 그쯤 됐으니 응낙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지요." "그 쪽지는 누가 쓴 것인지 소대협께서도 보셨소?" "그 쪽지에는 서명이 없더군요." "그럼 소대협은 누구의 필적인지 모르시는군요?" "모르겠어요." 무위도장은 입을 다물고 한동안 무슨 생각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소대협께서 기왕에 응낙을 하셨다니 가 보셔야겠소." 소영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소생은 전혀....." 무위도장이 곧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빈도가 같이 가 보도록 하겠소이다. 그때 가서 일을 처리하도록 해 보십시오." 소영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우선 그럴 수밖에 없겠군요." 하고 대답했다. 이때 손불사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나도 함께 가도록 합시다. 만일 상대방이 손을 써 온다면 우리도 세 사람이고 상대도 셋이니 일 대 일로 격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위도장이 곧 말을 받았다. "이곳은 남아 있을 곳이 못 되니 우리 일행도 길을 뜨도록 합시다." 하더니 고개를 돌려 운양자를 바라 보며 분부했다. "무당 문하생과 다른 분들은 모두 부상자를 데리고 길을 뜰 준비를 하도록 명령을 내리도록." 운양자는 공손히 읍하며 물었다.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가서 만나기로 하면 되겠습니까?" 무위도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자네들은 우선 망양곡(望陽谷)으로 가 있게." 운양자는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무위도장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는 그 남해오흉을 따라 가 보도록 합시다." 세 사람은 고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한참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손성 등이 곧 그들 앞으로 다가 오며 소영에게 포권을 하며 공손히 물었다. "소대협께서는 응낙해 주시는 겁니까?" 소영은 무위도장을 한 번 바라 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생은 무위도장을 모시고 같이 가려고 합니다. 도장께서는 의술에도 정심하시어 소생의 부족함 을 도우실 수가 있습니다." 손성은 무위도장에게도 포권의 예를 올리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저희들은 도장 어른의 높으신 대명을 오래 전부터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함께 가 주신다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손불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은 불을 끄는 일과 같으니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것이오. 우리가 기왕에 응낙 을 했으니 빨리 가서 그들을 구할 수 있도록 서두릅시다." 하며 속히 떠나도록 손성에게 재촉했다. 손성은 그들 일행의 앞에 서서 길을 인도했다. 무위도장은 나지막하게 전엽청에게 몇 마디 하고는 곧 소영과 나란히 길을 떠났다. 손성과 시위 그리고 전중원 등 남해삼흉은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으며 소영, 손불사, 무위도장 등 일행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 여섯 사람은 모두 강호의 최고 일류급 고수들이었다. 그러므로 각기 경공을 전개하여 질주하 니 마치 쾌마와도 같이 그 속도가 빨랐다. 소영은 그들 남해삼흉이 갈수록 속력을 내는 것이 암암리에 경공술을 비교해 보려는 속셈이리라 짐작하고 자기도 곧 진기를 모아 속력을 가했다. 여섯 개의 그림자가 울퉁불퉁한 산길을 질주하 는 모습은 마치 유성과도 같이 그 속도가 빨랐다. 그들은 족히 사십 리는 달려 왔을쯤 해서 발을 멈추었다. 손성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다 왔습니다." 소영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들이 온 곳은 깊은 유곡의 끝이었다. 양쪽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고 앞에는 한 개의 봉우리가 길을 막았으며 계곡 밑에는 잡초와 작은 나무가 무성하고 아주 황량 한 곳이었다. 무위도장은 사방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자 의아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두 분 형제는 어디에 계시오?" 손성이 그의 말을 받았다. "은밀한 작은 동굴 안에 있지요. 제가 곧 안내하겠습니다." 그는 앞장서 걸어 갔다. 소영 등 일행은 뒤를 바짝 따랐다. 손성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봉우리 밑에 다다르더니 음성을 높여 소리쳤다. "호가이동(護駕二童)은 어디 있는가?" 그 소리가 울려 퍼지자 곧 가늘고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제자는 여기 있사옵니다." 동시에 그 절벽 밑의 큰 암석 뒤에서 서서히 등에 장검을 멘 열너덧 살 된 청의동자 두 명이 모 습을 나타냈다. 소영이 그 두 동자를 보니 안색이 파리하고 누렇게 떠서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서는 정광이 번쩍였고 많은 내공의 수련을 쌓은 듯이 보였다. 두 동자는 소영의 일행을 한 번 훑어 보더니 손성에게 몸을 굽혀 예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사숙님, 안녕히 다녀 오셨습니까?" 손성은 곧 물었다. "너희들 스승의 병세는 어떠하냐?" 왼쪽에 있는 동자가 입을 열었다. "별로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손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좋아. 소대협께서 우리를 따라 여기까지 오셨으니 빨리 네 스승을 부축하여 이리로 나와 소대협 에게 병세를 보여 드리도록 하여라." 두 동자는 대답을 하고 싸늘한 눈빛으로 소영 등을 바라 보더니 그 큰 암석 뒤로 천천히 돌아 갔 다. 순간 무위도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저 큰 암석 뒤에는 무슨 특별한 설치를 해 놓은 모양이구나. 그러니까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으 려고 하는 것이지....' 소영과 손불사도 그런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손성은 건성으로 헛기침을 한 번 하더 니 입을 열었다. "소생의 큰형과 넷째는 병세가 극히 악화되어서 동굴 속이 매우 지저분하고 어지러워 세 분을 안 으로 모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손불사는 속으로 그렇지 않다고 의심을 했으나 겉으로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저 두 분 환자의 병세를 보러 온 것이니 아무 데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손성은 담담히 미소만 지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등에 장검을 멘 그 청 의동자가 짚과 등덩굴로 만든 푹신한 침대를 들고 동굴에서 나왔다. 그 침대 위에는 남색옷을 입고 머리에 방건(方巾)을 쓴 선비가 누워 있었는데 그 사람의 안색 역 시 푸르고 누렇게 뜬 것이 그 동자의 안색과 흡사했다. 손성은 자기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내려 놓아라." 두 동자는 그의 말에 따라 침대를 땅에 내려 놓고 오 척 정도 뒤로 물러섰다. 소영이 그를 자세히 살피니 침대에 누운 남색옷의 선비는 눈을 꼭 감고 깊은 단잠에 빠진 듯하였 다. 그는 손성을 바라보고 물었다. "이 분은 누구시오?" 손성이 침대에 누운 선배를 가만히 내려다 보며 말했다. "이 분은 우리 남해 오형제 중의 제일 큰형인 구검신환 장자우(九劍神環張子羽)올시다." 소영은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아, 원래 남해오성의 두목이시군요.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손성은 침울한 목소리로 나지막 하게 말했다. "소생의 큰형께서는 그 재능과 지혜가 우리들보다 훨씬 뛰어날 뿐 아니라 무공 또한 우리와는 비 교도 되지 않을 만큼 월등하지요. 아홉 자루의 비수로 백 보 안의 호랑이를 때려 잡으시며, 두 개 의 신환으로써는 열 길 안의 나는 새를 떨어뜨릴 수가 있지요. 그래서 구검신환이라는 벽호를 갖 게 되었답니다. 이러한 일대의 영웅이 병마에 시달리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소영은 병치료에 대해서는 경험이 도무지 없었으므로 장자우가 눈을 감고 자는 듯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때 무위도장이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는 우선 이 장형의 병세부터 물어 보시지." 소영도 그럴 듯하게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그리고는 손성을 바라 보며 물었다. "이 분은 계속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나요?" 손성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큰형께서는 이 풍증에 걸린 뒤로는 우리 형제들까지 알아 보지 못하 시기에 소생이 어쩔 수 없 이 그의 혈도를 찍었지요." 소영은 점잖게 말했다. "이 분의 병세를 알려면 우선 혈도부터 풀어야겠습니다." 손성은 잠시 주저하더니, "지금 큰형님은 아직 혼미상태에 있어 만일 혈도를 풀어 주게 되면 사람을 상하게 할지도 모르는 데...." 하고 대답했다. 소영은 약간 흠칫했으나 끝내 잘라 말했다. "괜찮소 우리가 조심할 테니까요." 손성은 시위와 전중원을 바라 보며, "자네들도 조심하게." 하고는 장자우의 혈도를 풀었다. 그러자 장자우는 눈을 번쩍 뜨고 주위에 둘러 선 사람들을 번갈 아 훑어 보더니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양어깨와 몸 전체에 많은 혈도가 아직 찍혀 있어 상반신을 일으켜 앉기는 했으나 사지가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손성은 헛기침을 한 번 하 더니, "자, 이제 운혈을 풀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소영은 손성에게 말했다. "이 분의 어깨에 찍힌 혈도를 풀었으면 좋겠군요. 제가 맥을 자세히 짚어 보아야겠으니까요." 손성은 소영을 한참이나 바라 보더니 물었다. "두 어깨의 혈도를 풀어요?" 소영은 두 어깨에 찍힌 혈도를 풀면 진맥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러 나 이미 그런 말을 했으니 끝까지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우선 양어깨의 혈도부터 풀어야 하오." 손성은 경고를 했다. "소대협, 조심하십시오..." 하더니 두 손을 동시에 뻗쳐 장자우의 양어깨의 혈도를 풀고는 뒤로 세 발짝 물러섰다. 소영은 암암리에 운기하여 장자우의 반응을 주시했다. 장자우는 양 팔을 조금 움직이더니 허리를 쭉 펴고 앉았다. 소영은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물었다. "귀하의 병세는 좀 어떠시오?" 장자우는 냉랭한 시선으로 소영을 쏘아보더니 천천히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소생은 소영이라 하오." 그 말에 장자우는 냉소를 짓더니 말했다. "당신이 소영이오? 대명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소이다." 소영은 속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정신이 아주 맑은데 어찌 그런 병에 걸렸다는 말인가?' 그러자 갑자기 왼쪽 손목이 욱신욱신 저려 왔다. 이미 장자우에게 왼쪽 혈맥을 찍힌 것이었다. 소 영은 한편 운기하고 한편 맥문을 보호하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당신의 정신은 퍽 맑군요." 순간 장자우는 오른손을 번쩍 들더니 소영의 앞가슴에 일격을 가했다. 그의 장세는 허공을 가르 며 매우 강력하게 뻗쳐 왔다. 소영은 오른손을 날려 장자우의 장세를 막으며 소리쳤다. "소생은 귀하의 영제의 초청으로 장형의 병세를 치료해 주러 왔소." 장자우는 몇 번이나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양쪽 넓적다리에 아직 혈도가 찍혀 있는지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왼손의 공세는 몹시 날카로워 쳐 내는 초식마다 소영의 급소 요혈만 을 노리는 것이었다. 그는 왼손으로 소영의 왼쪽 손목을 향해 찍었으나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한 자 정도밖에 되지 않아 소영은 반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장을 날려 장자우의 예리한 장세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가 전력으로 대항을 하나 몹시 위태로운 장난이 아닐 수 없었다. 순식간에 소영은 장자우의 십여 초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 냈다. 손불사는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의 겨루는 상황을 보며 장자우의 공격하는 장세가 점점 기이하고 악독하여 은근히 의심이 생 겼다. '혹, 심목풍의 간계로 이 자가 병자로 가장을 하고 소영과 우리를 유인하여 단번에 일망타진하려 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각별히 주의를 해야겠구나.'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소제 조심하시오 우선 그의 혈도부터 찍어 놓고 봅시다." 소영도 장자우의 공격을 십여 초나 막아 내며 역시 심상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왼쪽 손목에 찍 힌 혈맥이 점점 더 저리고 조여 와 더이상 지탱하기 힘이 들었다. 만일 혈맥이 그에게 찍히고 또한 그의 장세를 막아 낼 능력이 없었다면 장자우의 손에 피를 보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손불사는 고함소리가 들려 오자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즉시 반격을 가해 장자우의 어깻죽지의 혈도를 찍었다. 그 일격은 몹시 날카로워 장자우는 전신이 저려옴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반격을 가할 능력이 없어 찍고 있던 소영의 왼쪽 손목을 놓고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손성이 곧 물었다. "소대협, 부상당하지 않았습니까?" 소영은 냉랭히 말했다. "이 분의 공세가 빠르긴 하지만 아직 나 소영을 상케 할 수는 없소이다." 손성은 장자우를 한 번 바라 보더니, "소대협께서 다시 혈도를 찍으셨군요?" 하고 물었다. 소영은 냉랭히 대답했다. "그렇소!" 손성은 그 대답을 듣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흠, 그렇다면 역시 진맥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겠군요." 소영도, "정세가 이러하니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겠소이다." 손을 내밀어 다시 암암리에 장자우의 양 어깨의 혈도를 찍고 오른손으로 장자우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그의 맥박이 몹시 느린 것은 어깨의 혈도를 찍혔기 때문인 듯싶었다. 그러나 소영으로서 는 그 이상의 증세를 알아 낼 도리가 없었다. 이때 무위도장이 물었다. "소대협, 그 사람의 맥이 어떻소?" 소영은 장자우의 맥의 변화를 알아 낼 수가 없었으나 무위도장이 이렇게 물어 오므로 어쩔 수 없 이 대답했다. "맥이 정상이 아닌 것을 보니 과연 병세가 보통이 아닌 듯 싶소이다." 손성이 하늘을 바라 보며 말했다. "소생의 큰형은 이 병을 얻은 지 하루 저녁이 지났으며 소대협을 찾느라고 또한 너덧 시간 소비 하여 만일 그 쪽지에 쓴 글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제 칠, 팔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소영이 조용히 입을 열며, "소생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전중원은 손성을 힐끗 쳐다 보며 말했다. "소대협께서는 아직 손을 쓸 방도를 강구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그때 손불사가 나서며 대꾸했다. "만일 이 분이 보통 시시한 병에 걸리셨다면 당신은 아마 소대협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오." 손성은 포권을 하고 읍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막내는 아직 미숙하여 아무 것도 몰라 실언을 했으니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지요." 기이한 괴질에 걸린 사람을 앞에 두고 소영은 실로 어찌할 바를 몰라 슬그머니 돌려 댔다. "이 분의 병세는 확실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소생이 무위도장과 상의를 해야 확실한 증세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손성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생은 의학에는 백지이오나 이 큰형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공이 실로 고강하여 이미 한서(寒 署)가 불침(不侵) 지경까지 달한 분이신데 갑자기 이런 괴질을 얻으신 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옵 니다. 그래서 소생의 육감으로는 딴 사람에게 가해를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기까지 합니 다." 소영은 재차 말했다. "이 분의 병세는 확실히 그런 의심이 갈 만한 것입니다." 손성은 미간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두 분에게 수고를 끼치겠습니다." 하고 시위와 전중원을 데리고 일장 밖으로 물러가더니 책상다리를 하고 조식을 하였다. 소영은 두 명의 청의동자를 보고 말했다. "그대들도 물러나 있도록. 내 도장과 함께 이 분의 병세에 대해 연구를 좀 해 봐야겠으니...." 두 청의동자는 서로 한 번 바라 보더니 뒤로 다섯 발짝 물러섰다. 소영은 무위도장을 바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저는 의술에는 백지라 이 사람의 병세를 알 길이 없으니 도장께서 한번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 까?" 무위도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더니 장자우의 왼쪽 손목을 짚어 보았다. 그러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빈도가 이 사람의 진맥을 해 보니 무슨 병에 걸려 있는 것 같지는 않소." "그렇다면 이 사람은 병인 척 고의로 가장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위도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디엔가 부상을 입은 듯하오." 두 사람의 대화는 음성을 극히 낮추었기 때문에 두 동자가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들리지 않았다. 소영은 다시 나지막하게 무위도장에게 물었다. "도장께서는 치료하실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무위도장은 천천히 대답했다. "진찰해서 얻는 것으로 처방은 해 보겠지만 효력이 날지, 나지 않을 지에 대해서는 장담을 할 수 없소." "어떤 사람이 쪽지에 내가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장난을 했는지는 모르나 이상한 것은 저 남해 오흉이 어째서 나를 그토록 믿는지 모르겠군요." "만일 그 쪽지를 남긴 자가 소대협이 남해오흉을 설복하는 데 있어 도와 줄 뜻이 있다면 암중에 서 도와 줄 것이라고 믿소." "아직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혹 화를 내게 뒤집어 씌우려는 것인지도 모르지오." "빈도가 우선 처방을 하여 소대협에게 일러 줄 터이니, 잠시 기다려 경과를 보아 여전히 아무런 동정이 없을 경우에 소대협은 빈도가 일러 준 처방대로 치료를 해 보시지요. 그러면 비록 그의 암상을 완치시킬지 장담은 할 수 없으나 해는 없을 것이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요." 손성과 시위 등은 일 장 밖에 물러 앉긴 했으나 소영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영이 무 위도장과 무슨 말을 나누는 것이 장자우의 병세에 관해 논의하고 있는 것 같아서 죽 참고 눌러 앉아 있었다. 그러나 반 시간이 지나도 소영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큰 걸음으로 다가 와서 포권을 하고 말했다. "이미 우리의 뜻을 밝혀 드렸으니 소대협께서는 크게 한 번 묘수로써 되도록이면 빨리 큰형의 병 을 치료해 주십시오." 소영은 남을 기만하는 것이 비위에 맞지 않았으나 표면으로는 엄숙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어 서 억지로 그럴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분의 맥을 짚어 보니 병세 같지는 않소이다." 손성은 흠칫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병세 같지 않다구요? 그럼 무엇입니까?" 소영은 여전히 점잖게 말했다. "내상을 입은 것 같소이다." 손성은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간의 내정을 소생은 자세히 모릅니다. 제가 이곳에 와 보니 큰형의 풍증이 이미 발생하였었지 요. 그래서 큰형이 괴질을 얻게 되었는지 혹은 내상을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 지요." 소영은 슬그머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선 그가 병을 얻게 된 경과부터 들어 봐야 되겠구나.' 소영은 눈길을 두 동자에게 돌렸다가 손성에게 물었다. "당신의 저 사질들도 경과를 모를까요?" 손성이 그 동자들을 향해 손짓을 하자 두 동자가 다가 왔다. 소영은 그들의 아래위를 훑어 보았 다. 비록 나이는 아직 어리나 표정만은 매우 냉정하였다. 소영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아이들은 무슨 무공을 배웠는지 모르나 어린 나이에 이토록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다니 실로 놀랍구나.' 하고 찬찬히 그들을 살펴 보았다. 그들이 앞에 다가 오자 손성이 분부를 내렸다. "소대협께서 물으실 말씀이 있다니 사실대로 아뢰어라." 두 동자는 대답과 동시에 일제히 소영에게 눈길을 돌리며, "소대협께서는 어떠한 질문이 있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소영은 지그시 그들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영사는 어디서 이 병을 얻으셨소." 왼쪽의 동자가 말했다. "바로 이 계곡 안에서입니다. 가사와 넷째 사숙이 볼일을 보시러 나간 지 불과 반 시간도 되지 않아서 함께 돌아 오셨습니다." 무위도장이 천천히 물었다. "그 뒤로는?" 오른쪽 동자가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가사와 넷째 사숙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으나 가사께서는 워낙 엄하셔서 우 리는 말을 함부로 건네지 못했지요. 그때 넷째 사숙께서 먼저 몸을 지탱치 못하고 땅에 쓰러지셨 습니다. 이어 가사께서도 무슨 말씀을 하시려다 말고 그냥 까무러치셨습니다. 우리는 갑자기 그런 급변을 당해 크게 당황하여 사형이 이곳을 지키고 제가 뛰어 나가 두 분의 사숙을 찾아 왔던 것 입니다." 무위도장은 이 말을 듣고 생각했다. '맞았다. 남해오흉은 원래 그 호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는데 전중원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러 나 이런 사고가 있어서 나오지를 못했구나.' 이때 손성이 동자의 말을 이어 입을 열었다. "소생은 그런 놀라운 소식을 받고 황망히 달려 와 추궁과혈(推宮過穴)의 수법을 전개하여 큰형과 넷째의 정신을 차리게 했지요.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혼미상태에 빠져 사물을 분간치 못하고 저에게까지 출수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혈도를 찍어 반 시간 동안 법석을 떨다가 마침내 저 큰 바위 위에서 쪽지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 쪽지는 소대협께서 아까 보셨지만....."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제가 우선 처방을 내려 볼 테니 이 분에게 그것을 복용시켜 봅시다." 손성은 공손히 읍하며 말했다. "소대협께서 이렇게 도와 주시니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소이다." 소영은 손성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별말씀을... 그럼 수고스럽지만 붓과 벼루를 갖다 주십시오. 제가 곧 처방을 할 테니." 손성은 동자에게 곧 명령했다. "속히 가서 문방사보(붓, 벼루, 먹, 종이)를 갖고 오너라." 왼쪽에 있던 동자가 달려가더니 잠시 후 문방사보를 받쳐 들고 올라 왔다. 소영은 속이 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무위도장이 알려 준 그대로 처방을 내릴 수밖에. 손성이 처방하는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나 그의 눈길은 시종일관 소영의 붓끝을 떠나지 않았다. 소영이 막 두 가지의 약초 이름을 적었을 때 무위도장의 말이 들렸다. "소대협, 잠간 기다리시오." 소영은 놀리던 붓을 멈추고 그를 바라 보고 물었다. "도장께서 무슨 고견이라도?" "우리 다시 연구를 좀더 해 보고 처방을 해도 늦지는 않소." 손성의 안색이 약간 변하였으나 끝내 꾹 참았다. 무위도장은 손성의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은 이 장형을 위하여 해독을 하는 처방을 내리려는 것이오?" 소영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순간 망설이다가 할 수 없이 무위도장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무위도장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약을 쓰는데 있어서 비록 조심은 해야 되겠지만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그렇지가 않소. 장형께서 는 시간의 여유가 없으니 빈도의 생각으로는 꼭 이상수단을 써야 좋을 것 같소." 소영은 만면에 갈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한쪽에 서서 초조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 손성을 보 자 어쩔 수 없이 무위도장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우리가 실수를 하여 이 사람이 다치게 된다면 큰 오해를 받게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손성이 나서며 말했다. "그 쪽지에 쓴 글에 의하면 소대협 아니고는 고칠 능력을 지닌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 틀림없이 비상수단을 가리키는 모양입니다. 소대협께서는 안심하시고 손을 써 보도록 하십시오. 치료에 만 전을 기했어도 완치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만 해 주셔도 우리 남해 오형제는 감격할 따름입니다." 소영은 이 말에 홈칫하며 속으로 슬그머니 생각을 굴려 보았다. '저들이 나를 이토록 신임하고 있는데 내 만일 이 사람의 증상을 치료치 못한다면 이들에게 큰 실망을 줄 뿐 아니라 나 자신도 기분이 좋지 않겠구나.' 그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갑자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손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전중원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사람의 휘파람소리 같은데 제가 가 보고 올까요?" 손성은 끄덕이며 당부했다. "조심해서 갔다 오게." "알겠습니다. 안심하세요." 하더니 그 휘파람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날렸다. 무위도장은 암암리에 전음지술을 전개하여 소영의 귀에다 말을 보냈다. "소대협, 빈도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장자우의 증세를 처방 하나로는 치료치 못할 뿐더러 저들에게 의심만 살 것 같소." 소영도 미간을 모으며 나직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된단 말입니까?" "빈도 생각으로는 아예 소대협이 추궁과혈의 수법으로 장자우의 몸에 한 번 시전하여 그들이 뭐 가 뭔지 어리둥절케 해 놓은 뒤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소영은 속으로 슬그머니 화가 났다. '이 쪽지를 남긴 자가 아직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는 걸 보니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것이 분명하구 나.' 그는 여태껏 살아 오면서 오늘과 같이 창피하고 멋쩍은 일은 처음 당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뻔히 의술에 백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가인 척해야 되니 참으로 고역이었다. 손불사는 계속 소영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는데 그의 눈에 초조의 빛이 가득한 것을 보고 무슨 생 각을 했는지 손성에게 돌아 서며 포권을 하고 말했다. "제가 그 휘파람소리를 들어 보니 높고 격앙하여 구름을 뚫을 듯하군요. 그것으로 보아 그 자는 절대로 보통 무림 인물 같지 않은데 영제 한 사람이 절대 상대를 해낼 것 같지 않으니 제가 손형 과 같이 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손성은 잠시 주저하더니, "좋습니다. 함께 가 보도록 합시다." 하고 두 청의동자에게, "너희들은 사부님을 잘 모셔라." 분부하고 앞장을 섰다. 손성의 집요한 감시가 없어졌으니 소영은 좀 진정이 된 듯했다. 그는 나지막하게 무위도장에게 말했다. "이런 일을 가장하는 것은 저로서 더 이상 해 내기 힘이 듭니다. 그러니 아예 탁 털어 놓고 그들 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위도장이 무엇인가 대답을 하려고 할때 갑자기 왼쪽에 서 있던 청의동자의 입이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더니 한 줄기 가느다란 음성이 소영의 귀에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장자우는 일종의 기묘한 금침으로 혈을 찍혔지요. 바로 그의 뒤통수 머리털 속에 세 자루의 작 은 금침이 박혔으니, 그 금침만 뽑아 주면 그의 정신을 되찾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몇 마디의 모기소리 같은 음성이 소영의 귓속에 전음되어 똑똑히 들리자 그는 잠시 넋을 잃었 다. 그러나 그 전음지술로 보내는 소리는 다시 들려 왔다. '내 진작 일러 주려 했으나 손성의 위인이 몹시 치밀하여 만일 섣불리 했다가는 탄로가 나 일은 크게 달라지게 되겠기에 참고 있었소이다. 그러니 지금 당신은 추나수법(推拏手法)으로 장자우의 몸에 잠시 동안 손을 쓰는 척하고 있다가 손성이 돌아 오면 그에게 몇 마디 공갈을 친 다음 장자 우의 뒤통수에 박힌 금침을 뽑아 주도록 하시오." 하더니 잠시 소리가 그쳤다가 다시 이어졌다. "남해오흉들의 무공은 매우 고강하오. 이번 일은 훗날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니 당신은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오늘 초경이 되기 전에 명령대로 돌아 가 봐야 합니다." 그 전음하는 말소리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뚝 멎었다. 소영은 속으로 매우 놀라고 또한 몹시 수치스러웠다. 고개를 들어 왼쪽에 서 있는 그 청의동자를 바라 보니 그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더니 곧 그 얼음장같은 차가운 표정으로 다시 돌아 갔 다. 다시 오른쪽에 있는 청의동자를 보니 엄숙한 표정을 그대로 짓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눈치를 채 지 못한 듯 싶었다. 소영은 속으로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어떠한 사람이 이토록 담이 커서 이런 일을 꾸민 것일까?' 이때 무위도장이 입을 열었다. "소대협, 일이 기왕 이쯤 됐는데 더 이상 끌고 나가도 이미 저들은 믿지 않을 것이오. 아예 빈도 가 두 개의 금침을 줄 테니 소대협이 그 침으로 빈도가 일러 주는 곳에 두 군데 찔러 놓고 처방 하나 남기고는 되도록 빨리 이곳을 떠납시다." 소영은 방금 청의동자가 전음지술로 자기에게 일러 준 말을 무위도장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영은 미소를 짓고 천천히 그에게 말했다. "도장께서 더이상 수고를 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소생이 이미 치료 방법을 알았으니까요." 무위도장은 어리둥절하더니 다급히 물었다. "정말이오?" 소영은 다시 웃었다. "아마 틀림없을 것입니다. 손성이 돌아 오거든 손을 쓰도록 하겠소이다." 무위도장은 소영이 절대로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성품임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가 어떻 게 갑자기 치료 방법을 알았나에 대해서는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노장답게 침착하였다. 소영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자 그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소영은 오른손을 내밀어 장자우의 왼쪽 손목의 혈맥을 짚고 왼손으로 장자우의 몇몇 요혈을 밀어 제쳤다. 한동안 지난 후에야 손불사, 손성, 전중원 등이 돌아 왔다. 소영은 요혈의 추나를 멈추고 손성을 힐끗 바라 보더니 물었다. "손형, 어떤 사람인지 만나 보셨소?" 그러나 손성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한참이나 찾아 봤으나 적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영은 내정을 알게 된 터이라 담이 금세 커졌다. 그는 길게 한숨을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생이 자세히 영형의 맥박과 혈행을 진찰해 보았으나 아무런 병 증세도 나타나지 않는군요." 손성은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큰형은 병을 가장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소영은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물론 가장은 아니지요." 손성은 답답한 듯이 소영을 바라 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 된 일입니까?" 소영은 침착하게 설명을 했다. "누군가의 암수에 걸렸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수법이 기묘하여 대뇌의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 오. 그래서 정신이 혼미상태에 빠지고 반응이 아주 느리게 되었지요. 그러나 다행히 무공은 전폐 되지 않아 다소 남아 있소이다. 만일 영형의 무공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손형도 아마 영형을 제압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손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평상시에는 저희들이 큰형 수하에 백 합의 적수도 되지 못하니 그 분을 제압한다는 것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이야기겠지요." 그는 잠시 말을 그쳤다가 다시 계속하였다. "병세가 판명이 되었으니 소대협께서는 그 치료법을 강구해 내셨는지요,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소영은 차근차근 설명을 하였다. "잡증(雜症)이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오. 지금 제가 이미 영형의 증세를 알아 냈으니 생명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어렵지 않게 됐소이다. 그러나 지금 영형이 도대체 어디 를 다쳤나, 그것을 아직 몰라 필히 자세한 관찰을 하여 부상당한 곳을 찾아 내야만 병을 치료할 수가 있는 것이오." 손성은 포권을 하고 공손히 읍을 하며 부탁했다. "소대협의 수고를 끼쳐야겠습니다." 소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생이 이미 응낙을 했으니 전력을 다할 것을 약속하오." 그는 두 손을 내밀어 장자우의 앞가슴부터 더듬기 시작했다. 무위도장은 소영이 이런 태도로 나 오는 것을 보고 크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암암리에 운기하여 전신 경계를 하였다. 한편 손불사 역시 망연한 안색을 감추지 못하고 소 영을 넋을 잃은 듯 멀거니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세밀히 관찰하고 있는 사람은 손성이 었다. 소영의 거동을 세심히 바라 보고 있던 손성은 소영의 이러한 허세를 보자 크게 의심을 품 었다. 손성의 형형한 눈빛은 마치 야밤의 번갯불과도 같이 소영의 두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입으로는 말끝마다 '소대협' '소대협'하고 존칭을 붙였으나 속으로는 크게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소영이 과연 자기 형의 병세를 치료해 줄 수 있나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소영의 두 손은 서서히 이동하더니 마침내 장자우의 뒤통수까지 뻗치어 천천히 더듬어 올라 갔 다. 지켜보고 있던 손성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물었다. "소대협, 머리를 다칠 리가 있나요?" 소영은 두 손을 멈추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 보더니 냉랭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소." 하고 오른손을 들러니 엄지손가락과 식지 사이에서 한 치 정도 되는 금침 하나를 뽑아 들었다. 손성은 순간 안색이 돌변하였다. 이때 시위와 전중원도 전부 주위에 둘러 서서 뚫어지게 소영의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영의 눈 빛은 문쪽에 있는 청의동자를 한 번 바라 보더니 서서히 뽑아 든 금침을 손성에게 넘겨 주었다. 그 금침을 받아 드는 손성의 표정에는 경의와 탄복의 빛이 교차되었다. 소영은 왼손으로 장자우 의 머리카락을 헤쳤다. 두 개의 금침이 그의 뒷골에 박혀 있는것이 아닌가? 두 금침의 사이는 약 한 치 정도되었다. 손성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굉장히 악랄한 수법이구먼." 소영은 천천히 그 두 개의 금침을 뽑아 내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됐습니다. 만일 영형께서 대뇌를 다치지 않았다면 조금의 휴식을 취한 후에는 곧 정신을 다시 되찾게 될 것입니다." 손성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미간을 모으며 다그쳐 물었다. "만일 대뇌를 다쳤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어, "그렇다면 약간 골치아픈 상황이 일어나겠지요." 하면서 서서히 일어섰다. 91. 백화산장을 쳐라 손성은 큰 걱정을 하고 있다가 소영이 쉽게 장자우의 뒤통수에서 세 개의 금침을 빼 낸 것을 보 고 기쁜 마음으로 포권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 큰형님의 병환만 낫게 하여 주신다면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소영은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짐짓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제가 영형의 병세를 관찰해 보니 그 금침의 탓일 뿐 다른 내상은 없는 것 같소."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손성은 말을 끝내고 눈길을 돌렸다. "넷째를 데리고 오라." 시위가 곧 커다란 암석 뒤로 사라지고 잠시 후 두 명의 대한이 들것을 가지고 나왔다. 소영은 내심 암석 뒤의 동정을 짐작해 보았다. '저 커다란 암석 뒤에는 많은 대한이 있나 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다시 손을 움직여 넷째의 머리에서 세 개의 금침을 뽑아 내었다. 앞에서 물 끄러미 소영의 손놀림만 보고 있던 전중원이 입을 열었다. "소대협, 소생의 두 형님께서는 이제 무슨 약을 먹어야 되오?.." "그럴 필요 없소. 잠시 동안 이대로 휴식을 준 뒤 혈도를 풀어 보아서 다음을 상의합시다." 소영은 앉았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그 동안 쌓였던 긴장감과 일종의 안도감이 한 꺼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강호 무림에서 짱짱한 실력을 과시하고 있는 남해오흉들도 지금만은 소영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 고 있었다. 전중원은 되도록 빨리 두 형의 혈도를 풀어 그 결과를 알고 싶었지만 손을 쓸 소영이 무어라 말 을 안하니 그저 갑갑하기만 하였다. 이렇게 잠시가 지난 후 전중원이 못내 기다리던 소영의 말 이 드디어 무겁게 들렸다. "좋소 이제 당신의 두 형의 혈도를 풀어 봅시다." 손성은 누구 못지 않게 조바심을 하고 있었으므로 소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네? 정말입니까?"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반문을 하였다. 소영은 청의동자에게 들은 말대로 두 사람의 머리에 박혀 있는 금침을 뽑기만 하면 다시 본정신을 되찾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 혈도가 풀린 장자우는 천천히 눈을 뜨고 소영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사방을 두 리번거리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자우라 하면 오흉 중에 우두머리로 무공도 제일 높고 견식도 풍부하여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 벌써 주위의 분위기를 직감하였다. 손성은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터이라 혹시 소영을 적으로 알고 손을 쓸까 봐 황급히 입을 열었다. "형님, 깨어나셨군요. 소대협께선 소제의 부탁을 받고 큰형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장자우의 표정은 매우 차가웠다. "내가 상처가 심하였느냐?" "큰형께선 암수에 걸려 금침으로 혈도를....." 장자우는 손성에게서 한 개의 금침을 받아 들고 자세히 살펴 보았다. "큰형님께선 뒷머리에 세 개의 금침으로 기혈을 맞으셨지요. 그리고는 곧 정신을 잃으시고...." 손성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장자우는 고개를 흔들어 중단시켰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시위에 게로 눈길을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너는 넷째의 혈도를 풀어 주어라." 시위가 공손히 대답을 하고 넷째의 혈도를 풀자, 장자우의 싸늘한 눈빛은 넷째의 얼굴을 뚫어지 게 쏘아 보았다. 주위는 돌연 상대의 숨소리도 들릴 정도로 숙연해졌다. 장자우는 넷째의 정신이 회복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소영에게 입을 열었다. "우리 오형제가 본시 소형을 적대시해 왔는데 이제 소형에게 뜻하지 않은 도움을 받았으니 오늘 부터 오형제는 소형과의 적대감을 없애겠소." 소영과 나란히 서 있던 손불사는 그의 건방진 말에,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장자우는 눈길을 돌려 손불사를 쏘아 보았다. "소형께서 소생을 구하였으니 그 은혜를 갚는 뜻으로 지금까지 갖고 있던 나쁜 감정을 전부 풀겠 다는 것이 무엇이 나쁘오? 우린 여기에서 헤어집시다." 장자우의 인사는 아주 간단하였다. 그가 퉁명스럽게 말을 끝내고 암석 뒤로 사라지자 손성은 부 끄러운 표정으로 소영을 한참 동안 쳐다 보았다. '내가 부탁해서 일부러.....' 손성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 장자우가 사라진 쪽으로 뒤따라 달렸다. 손불사는 가슴 속에서 치미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 손을 들어 암석에다 화풀이를 하려고 진기 를 모으는데 지금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지켜만 보던 무위도장이 앞으로 나서며 손불사의 손을 잡았다. "손형, 우리도 돌아 갑시다." 손불사는 마지못하여 손을 거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남해오흉의 포악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생명의 은인에게까지도.... 그럴 줄 알았다면 살려 주지는 않는 것인데." 무위도장은 남해오흉이 사라진 곳을 바라 보며 말했다. "남해오흉은 본래부터 조그만 무공을 믿고 무림을 유린해 오던 놈들이오. 그들은 중원의 무림에 많은 원한을 사고 있다오. 아미와 청성 두 문파를 휩쓸어 버렸을 때도 그 두 파의 많은 제자들을 모두 죽이지 않았소? 빈도가 알기로는 아미, 청성 두 파는 다시 무공을 닦아 남해오흉을 죽이지 못하는 한 다시는 강호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지금 그들과 무슨 관계를 맺는다면 훗날 중원 무림의 동도들에게 무어라 해명을 하겠소?" 손불사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우리를 없애려는 심목풍에게 도움을 주지 않겠다 하였으니 몇 명의 적을 물리친 것과 다 름이 없지 않겠소?" 하더니 소영에게 얼굴을 돌려 물었다. "소대협은 지금 강호 무림이 혼란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소?" 소영은 그의 엉뚱한 물음에 대뜸 대답할 말이 없어 잠시 당황하였다. "도장께서는 화근을 만들고 있는 우두머리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 오?" "그렇소 강호에서는 심목풍으로 알고 있는데 그를 죽이면 그후 다시 악인이 없을 것인가를 묻는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으로는 심목풍 하나를 없애 버린다 하여도 강호에는 표면상의 평정뿐이지 내면으로는 언 제까지나 암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위도장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역시 소대협의 총명함은 따를 사람이 없구나. 하나를 알려 주면 셋을 알고 있군.' "그렇소 심목풍의 수단은 비록 악랄하지만 일개 사악의 표식에 불과하오. 정말로 강호의 온 무림 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금궁의 열쇠라는 것이오. 무림에서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동안 무공은 한없이 정진하여 정화(精華)의 오묘한 절학이 생겼소이다. 그런데 그것이 요 근래에 와서 금궁으로 모두 파묻혀 버렸지요." 무위도장은 잠시 말을 끊고 주위 사람들을 훑어 보았다. 소영이나 손불사가 귀를 기울여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음을 느끼자 다음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금궁에 들어 간 고수 중에서 단 한 사람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 지금으로서는 금궁에 대 하여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허황한 망상을 하고 있는 거요." 소영은 그 망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다그쳐 물었다. "금궁의 속에는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무위도장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영을 보았다. "소대협도 큰 관심을 갖고 있소? 금궁의 속에 꼭 무엇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명성과 위용을 과 시하려면 금궁에 들어 가야 된다. 또한 금궁에 들어 가기만 하면 꼭 강호를 한 손으로 통치할 수 는 없어도 강호의 일대 지존이 될 것이다' 라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오." 이번에는 손불사가 물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믿음이 생겼소?" "왜냐하면, 한때라도 수백 년의 절학을 이어 받아 재능을 날리던 고인들이 금궁 내에 기기(奇技) 를 남겼을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라오."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었군." 그의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혼잣말이었으나 무위도장은 귀담아 들었다. "소대협, 너무 기대를 가지지 마시오. 강호 군호들이 그렇듯 엄청난 망상을 하고 있지만 정작 금 궁을 열어 보면 그 속에 아무것도 없고 몇 사람의 뼈만 있을지도 모르오. 금궁을 열기 전에는 어 느 누구도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확정을 못하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도 빈도의 추측으로 조금의 신빙성도 없으니 농담으로 흘려 버리시오." 무위도장의 언변은 재치가 있고 명확하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감을 사게 하였다. 그는 말을 끝내고 소영에게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빈도가 소대협에게 물어 볼 말이 있소." 소영은 눈을 빛냈다. "무슨 일이오?" "소대협은 어떻게 해서 장자우가 뒤통수에 금침을 맞았다는 것을 알았소?" 소영은 빙그레 웃음을 띠고 내심 대답할 말을 꾸며 내었다. '저들은 나에게 의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무어라 대답을 한다? 우연히 보았다고 할까? 아 니지. 그럼 솔직하게... 그래 솔직하게 말해 버리자.' "만약에 도장이나 손선배께서 오늘의 광경을 보지 않으셨다면 제가 장자우의 상처를 고쳐 주었다 고 믿지 않으셨겠지요?" 손불사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 말을 받았다. "소대협, 자네가 입을 열지 않았을 때부터 무슨 짐작이 갔었지만... 소대협이 그런 말을 하니 이 거렁뱅이 늙은이도 궁금하여 가만 있지를 못하겠군." "겉보기로는 제가 신묘한 의술을 지닌 것 같았지만 저는 의술에 대하여 조금도 알지 못하고, 솔 직하게 말씀드리면 너무나 싱거운 일이라 웃으실 것입니다. 사실은.... 사실은 그것을 알려 준 사 람이 있었소이다." 무위도장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다급히 물었다. 손불사도 덩달아 입을 열었다. "설마 남해오흉끼리 싸운 것은 아니겠지요?" 소영은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아니오. 두 명의 청의동자 중에 한 사람이 알려 주었소." 무위도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대협의 말은 믿기 어렵소. 그 금침으로 상대의 의식을 잃게 하는 것으로 보아 금침을 쓴 사람 은 틀림없이 높은 무공을 지녔을 것이오. 그런데 그 청의동자가 어찌 알고 있단 말이오?" 소영은 은근히 화가 치밀어 버럭 음성을 높여 대꾸했다. "분명히 그 청의동자가 전음입밀로 저에게 말했소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해가 잘 안 가는구료." "무엇이 또 이해가 안 간다고 하시오?" 무위도장은 정녕 소영의 말을 믿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그 두 명의 청의동자는 모두 장자우의 제자인데 어찌 그들이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소대협에게 암중으로 도움을 줬단 말이오?" 소영은 손을 흔들어 말을 막고 또 다시 빙그레 웃음을 보냈다. "그들은 아마 장자우의 제자가 아닌 것 같소. 왜냐하면 저에게 말하기를 '저희들은 오늘 저녁 초 경이 되기 전에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였으니 어디로 보아도 장자우의 제자가 아님이 명백한 것이요." 무위도장도 이제는 조금씩 수긍이 갔다. "그렇다면 그들이 누구의 명을 받고 이곳으로 우리를 도우러 온 것이 아니오?" 손불사가 그의 말을 이었다. "상대가 장자우와 넷째에게 거뜬하게 암수를 쓴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오. 금침으로 그들의 뒤 통수를 찔러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게 한다는 것은 보통 묘수가 아니므로 상대가 그를 죽이려면 힘들이지 않고 해치울 수도 있었을 것이오. 남해오흉 중 으뜸인 장자우가 꼼짝 못하고 당한 것을 보니 상대의 무공도 짐작이 되오. 그래서 두 청의동자를 시켜 소대협을 도왔을 것이오." 무위도장은 무슨 생각이 난 듯 손바닥을 탁, 치고 말을 꺼냈다. "맞소 맞아. 그 사람은 금침을 써서 장자우를 쓰러뜨리고 꾀를 써서 장자우의 제자로 분장시킨 동자를 보내 오흉의 감시를 뚫고 우리를 도와 준 것일 거요. 모든 계획이 제대로 들어 맞아 우리 도 편했고, 남해오흉도 적개심을 버린다고 하였으니 그 사람의 도움이 정말로 컸소." 소영은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은 또 다른 장자우의 제자를 데리고 있단 말입니까?" "그런 것 같소. 그 사람의 기지로 보아 장자우의 제자와 똑같은 동자를 찾아 분장을 시켰을 것이 오." 손불사는 더 깊은 의문을 풀고 싶어 다시 물었다. "소대협, 그 청의동자가 자신의 정체와 내력을 이야기하였나?" "그는 다만 금침을 빼내는 방법과 초경이 되기 전에 꼭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만 말했소." 여기까지 말을 꺼낸 소영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무위도장은 그가 무슨 생각을 했나 직감하였지만 짐짓 모르는 체 그의 말만 기다렸다. 소영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돌연 손바닥을 세차게 쳤다. "아, 이제 생각이 나오이다. 그 청의동자는 틀림없이 여자가 분장한 것일 거요." 손불사가 의외의 말이란 듯 다그쳐 물었다. "그럼 그는 남장이란 말이오?" "확실한 것은 직접 알아 보지 못했으나 그들의 음성이 가느다랗고 억지로 남자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았소." 무위도장이 맞장구를 쳤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 사람은 장자우의 두 제자를 납치하여 그 모습 대로 화장술을 써서 변장시 켰을 것이오. 장자우의 제자들은 아직 어려 신체가 작으니까 부득이 여자를 썼을 가망성이 있소." 손불사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 동자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렇게 관심을 쓸 필요는 없고 우리는 그 사람의 정체와 내력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한 문제요." 소영은 손에 잡히는 나뭇가지를 쓸데없이 꺾으면서 말했다. "제가 보기로는 그 사람이 얼마 동안 이대로 몸을 숨기고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소." 그러자 손불사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늙은 거렁뱅이가 궁금해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 고 강호를 위협한다는 것이 도시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오. 어째서 그들은 억지로 신비한 체 위대한 체하는 것인지 모르겠단 말이오." 그는 바로 옆에 솟아 있는 조그만 바위에 걸터 앉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중에는 어쩔 수 없는 딱한 사정으로, 예를 들어 그들 자신을 해치려는 강적이 두려워.... 그런 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신비'라는 두 글자 때문에 그럴 것이오." 소영도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손불사 건너쪽의 바위에 앉으면서 물었다. "손선배께서는 도장선배와 함께 강호에 오랫동안 다니셨으니 무슨 짐작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모르겟는데.... 이미 여러가지 생각을 하여 보았으나 조금도 짐작이 가지를 않네. 내 만일 조그만 단서라도 잡았다면 벌써 입이 아프게 떠들어 대었지 그냥 있지는 않았을 것이네. 소대협은 아직 까지도 이 늙은이의 성질을 모른단 말인가?" "지금까지 얻은 경험으로 보아 그 사람은 많은 여자를 제자로 데리고 있을 뿐 아니라 번번이 우 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지혜로 도움을 주곤 그대로 정체를 감추고 있소." 무위도장은 뒷짐을 지고 소영과 손불사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무슨 깊은 생각을 하였다. 소영 과 손불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미소를 띠기도 하였다. 손불사는 그런 모양을 물끄러미 쳐다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도장형, 너무 신경을 쓸 것 없소. 그 사람은 심목풍의 일거일동을 훤하게 알고 있으며, 우리의 행 동도 감시를 하는 것 같소. 그렇다고 우리에게 악의를 품은 것은 아니니...." 그는 소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소대협, 그사람이 만일 소대협을 만나자고 할때 될 수 있으면 거절하지 마시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바에야 이 자리에서 무작정 콩이냐 팥이냐를 논할 것은 없으니 어서 길이 나 떠납시다." 소영은 정체 모를 상대를 곰곰이 생각하던 중, '혹시 그가 내 부모님을 구해 간 사람이 아닐까?' 하는 희망도 가져 보았다. 이제까지 말도 없이 뒷짐만 지고 있던 무위도장이 돌연 생각난 것이 있는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무릎을 쳤다. "그렇지! 그 사람은....." 그가 입을 막 열려는데 갑자기 뒤편 숲 속에서 날카롭게 허공을 꿰뚫고 화살 하나가 날아 왔다. 그 화살은 세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 오 척 정도 떨어진 조그만 나무에 꽂혔다. 화살 끝에는 흰 종이가 묶여 있어 살의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무위도장이 재빠르게 몸을 날려 그 종이를 떼었다. 소영과 손불사도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위도장에게 다가갔다. 그 편지의 겉봉에는 정성 들여 쓴 글씨로, <이 편지는 소영이 직접 뜯어 보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 무위도장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편지를 소영에게 건네 주었다. 소영의 궁금한 마음도 누구 못지 않아 즉시 봉투를 뜯어 보았다. <소대협에게! 심목풍은 당신을 사로잡아 자신의 부하로 삼을 수 없음을 알고, 이제는 당신을 죽이려 하고 있소. 그의 간계는 놀랄만큼 악랄하여 무슨 일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소. 그는 언제나 강렬한 독 약을 쓰고 있으며 이미 백여 명의 장한을 훈련시켜 정예의 심복으로 만들었소. 그는 그들로써 당 신을 굴복시키려는 것이오. 심목풍은 이 계획을 비밀리에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 자세한 것은 모르겠소. 내가 알고 있는 데까지 알려 드렸으니 앞으로 더욱 몸조심하시오.> 그리고 편지의 끝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어 여전히 상대가 누구인지 묘연했다. 소영은 무의식중에 긴 한숨을 내쉬고 편지를 무위도장에게 전했다. 무위도장과 손불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다 읽고는 무위도장도 한숨을 쉬었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니 소대협은 각별히 조심하여야 되겠네." 손불사가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게 좋은 방법이 있소. 우리는 심목풍에 대항할 계책을 세우는 것이오. 그 심목풍이 도대체 얼 마나 악독하고 간계가 뛰어난지 직접 보고 싶구료." 무위도장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손선배께서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소?" "우리끼리 논할 것이 못 되오. 우선 귀파의 제자들을 만난 다음 계책을 세우기로 합시다." 그는 말을 끊었다가 다시 생각이 난 듯 무위도장에게 물었다. "도장께서는 영사제에게 명하여 제자들을 망양곡에 모이게 하라고 하였다는데 그것이 정말이오?" 무위도장은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늙은이는 많은 곳을 쏘다녀 보았지만 그 망양곡이라는 곳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무위도장은 빙그레 웃음을 띠며 손불사에게 미안한 표정을 보였다. "미안하오. 그 망양곡이라는 곳은 우리 무당파에서만 쓰고 있는 암호요. 그 곳은 여기서 십 리도 못 되는 장소이니....." 손불사는 대꾸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였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무위도장이 가리키는 망양곡을 향하여 내달렸다. 세 사람의 경공은 모두 높은 경지에 달하여 있 으므로 제비가 날고 나비가 춤추듯 가볍고 빠르게 서쪽으로 질주했다. 무위도장의 말대로 약 반 시간쯤 달리자 일행의 눈앞에 조그마한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은 양쪽 벽에서 솟아난 나무에 등나무 덩굴이 빽빽하게 퍼져 있어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손불사는 계곡의 입구로 걸음을 옮기면서 입을 열었다. "이게 바로 망양곡이라는 곳이오?" 이 말에 무위도장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오랜만의 웃음이었다. "허허허... 그렇소이다. 빈도가 이곳을 망양곡이라 이름지었소." 그는 말을 끝내고 곧 두 손을 가 슴께로 쳐들어 손바닥을 세 번 쳤다. 그러자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등나무 덩굴이 움직이더니 전엽청이 뛰어 내렸다. 그는 무위도장 앞으로 다가와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사형, 어서 오십시오." 무위도장은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별일 없었소? 마총타주는 좀 어떻소?"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전엽청은 앞장을 서서 세 사람을 안내하였다. 소영은 맨 뒤에 따라 가며 주위 지형을 자세히 살 폈다. 계곡 입구에서 칠십여 장을 들어가니 오른쪽 절벽의 중간 정도에 천연적으로 생겼는지 밖 으로 불쑥 튀어 나온 편평한 암석이 눈에 띄었다. 그 암석은 십여 명이 둘러 앉을 수 있었으며 아무나 올라가지 못할만큼 높았으므로 일행의 휴식장소로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전엽청은 그 바위 밑으로 세 사람을 안내하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보기와는 달리 그렇게 높 지는 않았다. 전엽청은 머리 위의 바위를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저곳이 편히 쉬시기에 좋으실 것입니다." 무위도장은 힐끗 그곳을 올려다 보더니 그대로 몸을 솟구쳐 올라갔다. 그 뒤를 이어 소영과 손불 사 그리고 전엽청도 따라 올랐다. 그곳은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지형지물도 없어 그대로 바위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손불사는 주위를 훑어 보며 탄식했다. '무당파라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일대 명파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어찌하여 백화산장과 맞부딪 치게 되어 피해 다니다니....하루속히 심목풍의 목을 베어야만 무림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겠다.' 바위에 올라 앉은 다른 사람들도 침통한 표정으로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르는데 돌연 소영의 말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심목풍이 데리고 있다는 백여 명의 장한을 상대하는 데 있어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면 말씀 해 보시오." 손불사가 무엇이 우스운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내가 생각해 낸 계책은 간단하지. 그렇지만 이것은 이용술을 할 줄 알아야만 되지." 무위도장이 반갑게 말을 받았다. "이용지술이라면 빈도도 조금 할 수 있소." 손불사는 무릎을 탁 치며, "그러면 아주 잘 되었소." 하며 말을 이었다. "심목풍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써 가며 소대협의 부모님을 납치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으 로 알고 있소. 물론 소대협을 자신의 부하로 만들기 위해서요. 그러나 그의 첫 번째 간계도 정체 모를 사람에게 방해를 받아 헛수고가 되었소. 그렇게 되니 심목풍은 최후수단으로 소대협을 죽이 려고 날뛰는 것이오. 그는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각오할 것 같소. 조금 전의 편지에 그가 백여 명의 장한을 준비시켰다고 하지만 그 백여 명 장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소." 손불사는 마치 백화산장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세밀하게 그곳 사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악랄하기 그지없는 심목풍은 금은 보화로 강호의 고수를 매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더군 다나 소대협의 무공이 높아 강호의 고수들 만으로는 당해 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백여 장한들 에게 특수한 무기를 주었을 것이오." 소영이 말을 받아 성급하게 물었다. "그 특수 무기가 무엇이오?" 손불사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위도장과 전엽청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독이오! 그는 독을 쓸 것이오." 주위 사람은 의외의 말에 깜짝 놀라 멍하니 손불사만 쳐다볼 뿐 한마디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 다. 손불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심목풍의 장한들이 어떤 독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 내야 되오. 나의 계책은 도장의 제자 들 중에서 소대협과 비슷한 사람을 몇 명 뽑아 소대협으로 분장시키는 것이오. 그리고 나와 소대 협은 다른 모습으로 분장을 하여 그들이 가짜 소대협에게 독을 쓰는 것을 알아 내자는 말이오." 무위도장은 소영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 보더니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손선배의 계책은 고명하긴 하나 소대협의 얼굴과 닮은 제자가 몇 없을 것이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오. 단지 소대협과 비슷하게만 분장하면 되니까. 우리는 낮에는 객점에 숨 어 있으면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되도록 하지 말고 소문만 내면 되오. 그러면 간악한 심목풍도 별 생각없이 찾아 올 것이오." 무위도장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손형의 이야기는 백화산장과 정면으로 대결하자는 것이로군.' 이런 생각을 하며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각 대문파 전부가 심목풍의 백화산장이 너무나 비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어 감히 맞서질 못 하는 실정이오. 그런데 소대협께선 단신 백화산장에 도전을 하니 온 강호 무림이 들떠 있소. 아마 거의 모두가 소대협을 도울 것이오. 우리 무당파는 백화산장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워 그가 제일 의 공격 목표로 삼을 것이오." 무위도장의 눈살은 차츰 크게 찌푸려졌다. "흠! 무당파는 우리 장삼봉(張三峰) 사조께서 세우신 이래 아직까지 적에게 쫓겨 유랑을 하며 지 내지는 않았는데.... 빈도는 본파의 장문으로서 비단 무당 문하의 명성을 높이지는 못하고 오히려 장을 버리고 떠도는 신세이니 이대로 죽고만 싶은 심정이오." 손불사가 위로의 말로 무위도장의 마음을 달래었다. "도장형, 아무 상심하지 마시오. 강호에서는 소림파를 태산북두로 여기며 무림의 정의 수호를 떠 맡기려 하였지만 이 늙은이가 보기에는 별로 신통치가 않소. 역시 강호에서는 무당파가 으뜸이오. 심목풍이 다른 문파를 제쳐 놓고 귀파를 제일의 목표로 꼽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당파가 중요 하다는 뜻이 아니겠소? 도장형은 강호의 기대를 어긋나게 해서는 안 되오." 무위도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과분한 칭찬은 마시오. 무당파가 심목풍의 목표가 된 것은 지리적인 여건 때문이오." 소영이 입을 열어 말참견을 하였다. "소생, 도장께 한마디 여쭈어 볼 것이 있소이다." "소대협, 무슨 고견이라도 있소?" "도장께선 무당 문하의 정예 제자들만을 데리고 나오셨는데 그렇다면 무당산 삼원관에는 아직도 많은 제자가 있을 게 아니오? 만약에 심목풍이 고수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삼원관을 습격하게 한 다면 그 남은 제자들은 제대로 손을 쓰지도 못하고 참사를 당할 것이 아니오?" "그거야 빈도가 어찌 생각을 안하였겠소. 그러나 심목풍은 너무나 간계가 뛰어나 빈도와 무당 문 하의 정예가 삼원관을 떠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오. 삼원관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쓰러 뜨린다 하여도 빈도와 정예 제자들이 남아 있으니 무당파는 존재할 것이라는 것도 생각 하였을 거요. 약한 제자들을 이유없이 해한다면 그의 평이 더욱 나빠져 더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사게 되니 약삭빠른 그가 그런 손해되는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오." 소영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느끼는 것이 있었다. '무위도장이 이렇게 무당산을 나와 정예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유랑하는 이유가 심목풍의 대거 공 격을 피하려는 것이었군.' 이때, 갑자기 손불사가 자신의 무릇을 탁 치면서 소리쳤다. "오늘날 무림의 구대 문파가 동심 협력하여 심목풍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정말 이상하오. 시일을 끌면 끌수록 심목풍의 세력은 비대해져 나중에는 자신의 발등이 다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단 말이오. 난 강호의 모든 문파가 썩었다고 생각하고 있소." 무위도장은 긴 한숨만 연거푸 내쉬었다. "손형의 말씀이 맞소. 그러나 각 대문파 역시 그만한 고충이 있지요. 빈도가 알기로는 각 대문파 의 장문인들이 그런 생각을 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심목풍의 세력이 너무나 커서 누가 먼저 감 히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오. 물론 보복이 두려워서요. 한번 잘못 나섰다가 온 문파를 망치기 싫어서 모두 숨을 죽이고 눈치만 보는 것이니 그들을 너무 믿지 맙시다." 무위도장의 이야기는 점차 깊은 일에까지 파고 들어 갔다. "지금 각 대문파는 비밀리에 몇몇 고인들을 풀어 열쇠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소이다. 그들은 금궁에 들어 가기만 하면 생각도 못한 높은 무공의 절기가 들어 있다고 믿는 것이오. 그래서 그 것을 터득하여 심목풍을 누르고 무림의 군왕으로서 두각을 나타내려는 욕심들이오." 그는 이야기를 끝내고 천천히 눈길을 돌려 소영을 쳐다 보았다. "빈도가 몇 마디 어려운 질문을 하여도 팬찮겠소?" 소영은 엷은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되물었다. "금궁의 열쇠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그렇소이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 금궁의 열쇠가 악운고의 수중에 들어 갔다는데 그것이 사 실이오?"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소생이 악운고를 만났을 때는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였었소. 그러므로 악운고가 금궁의 열쇠를 가지고 있나의 여부는 무어라 대답을 못하겠소이다." "악운고가 이미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것이 정말이오?" 소영은 옛날의 쓰라린 추억이 새삼 생각나는 듯 눈을 감고 잠시 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옛 날 생각을 하는 것이므로 덧붙여 악소채에 대한 그리움도 샘물처럼 솟아났다. "그것은 결코 헛소문이 아닙니다. 소생의 이모인 악운고는 이미 선계(仙界)의 사람이오." 무위도장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였다. "빈도, 하나만 더 묻겠소이다. 그 금궁의 열쇠가 악소채의 수중에 있는지요?" "하하하....그렇소이다. 확실히 악소채의 수중에 들어 있소." 소영은 깜짝 놀라 눈길을 돌려 소리가 들리는 곳을 주시했다. 그곳에는 중주이고와 사마건, 운양 자, 이렇게 네 명이 서 있었다. 조금 전에 말을 꺼냈던 것은 상팔이었다. 그들은 각각 몸을 솟구쳐 바위 위로 올라 섰다. 상팔은 의외로 소영의 모습이 보이자 놀라는 표 정으로 멍청히 서 있기만 하였다. 소영은 무표정하게 상팔을 쳐다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일에 대해선 나의 두 형제께서 더 잘 알고 있으니 그 분들에게 물어 보시오." 상팔은 그제서야 걸음을 옮겨 소영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싱겁게 웃음을 흘렸다. "악낭자께서 직접 소인에게 일러 주었소이다. 금궁의 열쇠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 러나 몸에 지니지는 않은 것 같았으며 그것을 어디에다 두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소." 무위도장은 무슨 결심을 하였는지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악낭자께서 하루속히 금궁에 들어가 심목풍을 제압할 수 있는 대책을 찾기 바라오." 소영의 마음 한구석은 무엇을 잃은 사람처럼 허전하였다. '이모님의 장례는 지내지 못하였고 악누나의 생사도 모르니..... 지금쯤 악누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 까? 누나도 나를 생각할까? 심목풍을 누르고 누나를 찾아 길을 떠나야겠다. 나를 위해 목숨을 걸 고 험준한 역경을 이겨 내어 주었는데.....' 상팔은 오랜만에 만나는 소영이 반가워 눈길을 돌려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소영의 침통한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자 손불사가 재빨리 입을 열어,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악운고는 이미 선계의 분이 되셨소. 악소채의 행방도 전연 모르니 금궁의 열쇠는 마치 바다에 가라앉은 모래알 같소. 그것을 가지고 자꾸만 이야기를 꺼낼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악독한 심 목풍을 쓰러뜨리고 강호에 다시 평온을 되찾나가 더 시급한 문제요." 소영은 악소채와 작별하고 난 후 지금까지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으로 인해 악소채를 잊고 있었 다. 그러나 이제 다시 악소채의 이야기가 나오자, 보고 싶은 연연한 심정이 온 가슴을 메우는 것 이었다. 소영은 수심중에도 손불사의 이야기에 심목풍이란 말이 나오자 대뜸 입을 열어 말대꾸를 하였다. "지금 강호의 각 대문파와 각 방의 호걸들이 심목풍에게 항거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제일 큰 원 인은 심목풍의 세력과 그 악명이 두려워서요. 그러니 우리가 먼저 손을 써서 심목풍에게 약간이 나마 피해를 주면 그 소문이 강호에 퍼져 각 대문파가 용기를 얻어 일어설 가망성도 있지 않소?" 손불사가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맞았네. 소대협의 기지에 노부도 감탄하였네. 과연 영웅은 나이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으로 되는 것이구먼." 무위도장의 생각도 소영의 계책이 옳다고 느꼈다. "소대협의 말은 백 번 옳소. 그러나 그에 따르는 계략을 이야기하시면 더욱 쉽게 일을 끝낼 수 있을 것이오."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소인의 견식으로는 좋은 계략이 떠오르지 않소이다. 소인은 도장께 가르침을 받고 싶소." 무위도장은 주위 인물들을 돌아가며 쭉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얼마간이나마 득세를 한 뒤, 심목풍이 복수를 하기 위하여 어느 문파를 공격한다고 헛소 문을 퍼뜨린다면 많은 동조자를 얻을 것이오. 이렇게라도 수를 써서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무림 의 동도들이 우리의 계획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도록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의 방법이오." 손불사가 손을 흔들며 정색을 하였다. "아니오 그런 악독한 자를 상대하는데 있어 무슨 수단 방법을 가리려고 하오? 우리가 만약에 수 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목풍을 눌렀다 하여도 강호의 동도들이 문어라 핀잔은 없을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돌려 계속 입구 쪽을 멍하니 바라 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얼마 동안을 그렇게 있더니 돌연 자기 혼자 이야기를 하듯 중얼거렸다. "한 가지 일만은 소생이 미리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소영에게 집중되었다. "소생이 알고 있기로는 강호의 각 대문파에 심목풍의 첩자가 잠입해 있소이다. 마방과 신풍방에 까지도 말이오. 이런 사정이 있으니 우리가 무작정 두들기다가는 심목풍의 귀에 틀림없이 들어갈 것이오. 미리 신중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곤란할 것이오." 무위도장은 의외의 말을 듣고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한동안 소영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그는 이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것은 소생이 직접 눈으로 보고 들었던 것이라 조금의 거짓도 없소. 그 첩자들은 심목풍을 만 났을 때 모두 인피가면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얼굴과 정체는 모르고 있소이다." 소영의 날카로운 눈빛은 계곡 사이를 오가고 있는 무당 문하의 제자들을 쏘아 보고 있었다. 그는 무위도장에게 시선을 돌리며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귀파에도 그의 첩자가 있으니 도장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 각별한 주의가 필요할 것이오이다." 무위도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대협의 말씀 대단히 고맙소. 앞으로는 만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겠소." 하더니 소영의 앞으로 선뜻 나와서 일행의 가운데로 자리를 잡고 말을 꺼냈다. "우리는 너무 힘을 분산해서는 안 되오. 그러니 두 패로 갈라집시다. 만약 심목풍을 만나게 된다 면, 양면 협공으로 전력을 기울이면 그도 별다른 수를 못 쓸 것이오." 손불사는 찬성하며 말했다. "도장의 말씀이 맞소. 우리는 몇 사람의 가짜 소영을 더 만들어 심목풍의 이목을 흐리게 만들어 야 하오." 무위도장과 소영이 동시에 대답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되어 여덟 군호들은 심목풍을 누를 계획을 신중하게 세웠다. 92. 삼강서우란 이름의 기생집 무위도장의 은신처인 망양곡에서는 강호 무림을 어지럽히는 심목풍을 누를 의견을 서로 주고받았 다. 무위도장은 한 패의 무당 제자들을 강호로 보내어 각 대문파에 서신을 전하게 하는 한편 제자 중 에 제일 무술이 강한 여섯 명을 뽑아 분장시켰다. 전엽청은 사전의 계획대로 소영과 손불사를 따랐고 운양자는 그대로 계곡에 남아 마문비의 상처 를 돌봐 주기로 하였다. 계곡을 떠나는 군호들은 모두가 희한한 분장술로 모습을 바꾸었다. 강호에서 당당한 위명을 떨치 고 있는 무위도장은 약한 문인으로 분장하였다. 그리고 늙은 거지라 자칭하면서 항상 해진 옷을 입고 다니는 손불사는 이번만은 단정하게 깨끗한 옷을 입고 흰 수건으로 머리를 싸맨 차부(車夫) 로 변장하였다. 사마건은 숨은 재질을 되살려 점쟁이로 분장했다. 중주이고는 본래부터 강호에 유협하면서 분장을 많이 하였던 경험이 있던 터라 변장하는데 있어 서는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부로 분장했다. 소영과 전엽청은 나이와 정반대 로 늙은 노인으로 분장을하고 당나귀를 탔다. 군호들을 뒤에서 도울 무당의 여섯 제자들은 모두 포목장사로 변장하여 관도를 따라 악주로 길을 떠났다. 길을 가면서 강호 무림의 인물들을 유심히 관찰하니 그들의 발걸음이나 표정은 한결같이 무엇에 쫓기는 듯한 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일행이 길을 재촉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이것은 비록 심목풍의 안목이 넓고 날카로웠지만 군호들이 이같은 변장으로 나타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지려는 시간에 일행은 눈앞에 악주성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상팔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당나귀를 탄 소영에게 입을 열었다. "저곳에는 남관 이외에 육대화(六大和) 객잔(客棧)이 있는데 집이 크고 방이 많아 그 집에 드나드 는 인물들이 많소이다. 심목풍의 부하들이 악주에 있다면 필시 그 객잔에 머물고 있을 터이니 안 성마춤이 아니겠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우리는 몇 명씩 따로따로 행동하여 객잔으로 들어 갑시다. 만약 우리 일행이 한꺼번에 몰려 들어 간다면 심목풍의 부하들에게 의심을 살 것이오. 이번만은 전처럼 허술하게 일을 할 것 이 아니라 철저히 사전 계획대로 하여야 되오." 일행은 암암리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우선 상팔이 앞장서기로 하였다. 그는 길을 가는 도중 뒤 를 따르는 일행을 위하여 가끔 침을 뱉아 놓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상팔이 객잔에 도달하였을 때엔 이미 해가 저물어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상팔은 사환을 불러 당나귀를 맡기고는 제일 구석진 방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객잔 내에는 기둥마다 등불이 밝게 켜져 있었고 대청에는 저녁식사 준비로 많은 사환들이 분주하 게 오갔다. 벌써 객잔 안은 손님으로 만원이 되어 저녁을 먹으러 대청으로 나온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상팔은 뒤따라 들어 오는 소영을 맞으러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당나귀의 방울소리 가 들리며 소영이 나타났다. "방은 구해 놓았소?" "아주 구석지고 조용한 방이오." 소영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객잔 안으로 가다가 대청 끝에 앉아 있는 두 명의 경장대한과 눈이 맞부딪쳤다. '저놈들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 그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곧 상팔의 뒤를 따랐다. 소영은 대청을 지나 과원(跨院)으로 들어 갔다. 그곳은 등불을 하나만 켜 놓아서 주위가 어두운데 커다란 방이 소영을 기다렸다는 듯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때까지 방 청소를 하던 사환은 소영과 전엽청을 번갈아 쳐다보며 갸우뚱갸우뚱하였다. '저 늙은이들은 모두 광목 바지저고리에 거북스럽게 흰 수염을 가슴까지 길러 촌스럽기 비길 데 없구나. 더군다나 허리띠도 넓은 것을 했으니 시골 구석에서 농사나 짓던 늙은이가 강호 구경을 하러 올라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런 큰 방을 쓸 만한 돈도 없겠지, 에이 재수없게시리....' 그 사환의 짐작은 소영과 전엽청이 내심 바라던 것이라 오히려 잘되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 사환 은 치우던 방을 그대로 놓아 두고 부지런히 밖으로 나오며 소영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독방은 방값이 좀 비싼 편입니다. 두 분께서 돈이 없으시다면 다른 작은 방을 쓰시도록 하십 시오." 하자 상팔은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이놈은 우리를 촌 사람으로 알고 있구나.' 이런 짐작을 하고 품 속에서 두 냥쯤 되는 은자 하나를 꺼내어 사환의 손에 쥐어 주며, "모자라는가? 우리들은 오래 머물 손님이니 놓치지 말게." 그리고는 소영과 전엽청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들은 비록 바깥 세상을 모르고 사시던 분이지만 한 번 돈을 쓰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네." 사환은 은자의 효력 때문인지 이제까지의 건방진 태도가 싹 사라졌다. 허리를 굽실거리며 공손히 말했다. "원 별말씀을..... 이것으로도 남습니다요. 그럼 안으로 드셔서 잠시 쉬십시오. 차를 갖다 드릴 터 이니." 소영은 그가 멀리 사라지자 나직이 상팔에게 물었다. "상형, 의심살 만한 사람을 보셨소?" "나도 보았소 검문의 쌍영인 추풍검(追風劍), 배백리(裵百里), 무영검(無影劍), 담통이 이곳에 있더 군요." 맨 뒤에 들어 선 두구가 말을 받았다. "검문쌍영이라 하면 그래도 이름깨나 날리는 놈들인데 어째서 심목풍의 부하가 되었습니까?" 그러자 상팔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 갔다. "쉬잇! 조심하게나." 두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소영이 궁금한 듯 입을 열었다. "상형, 검문쌍영이 이곳에 왜 나타났을 것 같소?" "그들의 모습이 보인 것으로 보아 심목풍은 벌써 악주에까지 손을 뻗쳤다는 뜻이 되오. 그러나 그것에도 약간 의문이 있긴 한데......." "무슨 의문이오?" "심목풍이 무공이 높고 기지가 정명한 장한들을 백여 명이나 풀어 놓아 형님을 해하려고 날뛰는 데 어찌 정면으로 모습을 나타내겠소? 그들은 독을 써서 암암리에 형님을 해하려고 할 것이 분명 하니 이곳에 검문쌍영이 모습을 나타낸 것도 많은 의문이 있다는 것이오. 만일에 그들도 심목풍 이 풀어 놓은 장한 중에 끼여 있다면 저렇게 정정당당히 본모습 그대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터인 데...." 소영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힘있게 끄덕였다. "그렇지. 그들이 나를 해치려 이곳을 찾았다면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변장을 하면 훨씬 수월하 게 일을 끝낼 수가 있을 것이 아니겠소?" 상팔은 돌연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갑자기 무릎을 치며 입을 열었다. "틀림없이 검문쌍영은 심목풍의 부하가 아닐 것이오. 지금까지 우리의 뒤에서 암암리 도움을 주 던 사람이 심목풍과 무슨 내통이 있어서 그에게 우리의 거취를 고하겠소? 분장한 사실을 알려 주 지만 않았다면 심목풍도 이것만은 모르고 있을 것이오." "그렇기도 하군." 상팔은 바싹 앞으로 다가서서 소영과 한 발 정도 가까이 되었다. "형님께서 이 악주성에 나타난 후 심목풍의 부하가 눈치를 채 백화산장의 장한들이 이곳으로 몰려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 이지만 아직 본 정체를 나타내지도 않았는데 백화산장에서 이곳으로 장한을 보냈다 하면 어딘가 좀 이상하지가 않소?"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전엽청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거야 우리가 검문쌍영을 잡아 직접 문초를 하면 곧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상팔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소생의 생각으로는 그럴 수가 없을 것....." 그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밖의 동정을 살피던 두구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일행의 눈길 에 들어 오는 것은 조금 전에 한바탕 수다를 떨던 그 사환이 찻잔을 들고 바쁜 걸음으로 오고 있 는 것이었다. 사환은 방엔 놓여 있는 여덟 모가 난 탁상 위에 찻잔을 놓으며 물었다. "무슨 음식을 올릴까요?" 소영은 우선 저녁식사를 간단하게 시키고 덧붙여 술과 안주도 주문했다. 사환이 다시 원외로 나 가자 전엽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형께서 제 제안에 선뜻 찬성을 안하시니 다른 고견이 있는 것 같소이다." "그렇소 제 생각으로는 검문쌍영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그들대로의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소." "상형의 고견에 저는 항상 탄복하여 왔던 터이라 상형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소." 상팔은 빙긋이 웃음을 띠었다. "먼저 검문쌍영이 어째서 이곳에 나타났는가를 알아야 되겠소." "그거야 그들을 잡아야만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아니겠소?" 상팔은 손을 저었다. "꼭 그들을 붙잡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상형에게는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 두 사람의 주고 받는 대화 속에는 절박한 긴장감이 흘렀다. 상팔은 두 손을 불끈 쥐어 보이면서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비밀리에 조사하는 것이오." "그것도 좋은 방법이오. 우리는 검문쌍영을 직접 건드리지 않고 얼마 동안 미행하여 뒷조사를 하 는 것이 안전할 것 같소." 소영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한마디로 결정을 내렸다. "좋소 우리는 곧 두 패로 나뉘어 그들을 감시하도록 합시다." 그러자 전엽청이 대뜸 앞으로 나서며, "소생이 먼저 그들을 감시하겠소." 하고, 원외로 걸음을 옮겼다. 상팔은 재빠르게 손을 뻗어 전엽청을 잡았다. "안 되오. 큰형님과 전형은 오늘 이 정도의 일을 가지고 수고를 하실 필요가 없소이다. 더군다나 두 분은 반백이 된 늙은이로 분장하고 있으니 거동 하나하나 아직도 많은 허점이 있소. 검문쌍영 이 두 분을 보게 되면 즉시 두 분이 분장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될 것이오. 만약 그들이 대청에 없다손 치더라도 다른 사람이라도 두 분을 보아 쉽게 속지는 않을 것이오." 소영은 근심된 표정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겠소?" 상팔은 웃음을 띠고 말했다. "이런 일은 두 분이 해낼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천하에서 미행에 제일 으뜸인 사람은 개방 문파 에 있소이다. 그 하나는 일진풍 팽운(彭雲)이며 다른 하나는 신투향비(神偸向飛)라고 하오. 이 두 사람 이외에도 개방 문하들은 거의 모두가 미행에 자신을 가지고 있소이다. 아직 손형이 도착을 안했으니 무어라 말을 못하겠지만 손형은 개방의 장로로 있으니 개방의 제자들을 시킬 수 있을 것이오. 이 악주에는 개방의 제자들이 많을 터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오." 전엽청이 탁상 위의 찻잔을 집어 들면서 말을 받았다. "상형의 말씀에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검문쌍영이 이 객잔에 오래 머물리라는 것은 확실하지 못하 잖소? 만약 손선배가 이곳에 오기 전에 그들이 이곳을 떠나면 모든 것이 허사가 아니오. 지금의 형세로는 손선배를 기다릴 수 없으니 우리끼리라도 수를 짜내야 되지 않을까요?" 상팔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하더니 무슨 결심을 하였는지 옷매무새를 고치고 또 자신의 분장도 잘 다듬었다. 잠시 후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느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소이다. 그럼 두 분께서는 이곳에 남아 계시오. 제가 먼저 그들의 동태를 살피겠소이다." 그는 말을 끝내고 밖으로 나가며 두구에게 귓속말로, "동생, 큰형님과 전형은 모두 강호에 경험이 적으니 자네가 뒤에서 보아 주어야 되네. 공연히 상 대를 쫓다가 오히려 쫓기는 결과가 안 되게....." 두구는 냉랭한 표정으로 상팔의 말을 듣고 몇 번 소영과 전엽청을 돌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걱정 말고 형님이나 조심하시오." 상팔은 입술을 꼭 깨물고 두구의 등을 몇 번 가볍게 두드리며, "잘 부탁하네." 하는 말과 함께 어깨를 조금 움직이는 것 같더니 어느 사이에 원외로 사라졌다. 그는 몸이 뚱뚱 하고 배가 불룩하게 튀어 나왔지만 민첩하게 몸을 날리는 동작은 제비같이 빨랐다. 두구는 방으로 들어 와 창문과 출입문을 모두 닫아 걸었다. "두 분께선 방 안에 가만히 계시오. 제가 밖에 나가서 주위의 동정을 살펴 볼 터이니 마음을 놓 으시고 편히 쉬시오." 이때 사환이 문을 두드리며,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자 두구는 입을 다물었다. 두구는 옆에서 기다리는 사환에게 짐짓 핑계를 대어 급히 돌려 보냈 다. 그는 다시 한 번 창문과 문을 살핀 후 탁자로 다가와 술병을 들고 소영과 전엽청에게 낮은 음성 으로 말했다. "어서 술이나 들고 불을 끄도록 합시다." 소영은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초조함으로 인해 다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술이 들어와도 그냥 그대로 딴 데 정신이 팔려 흡사 정신나간 사람 같았다. 세 사람은 탁자에 둘러 앉아 술과 안주 그리고 약간의 음식을 든 후 그릇을 그대로 놓아 둔 채 불을 껐다. 세 사람이 정좌를 하고 앉아 있는 내실은 마치 빈 방처럼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상팔이 밖으로 나간 지 벌써 한 시진이 지났는데도 별다른 소식이 없자 소영은 은근히 걱정이 되 었다. '상형이 나간 지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으니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닐 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요함을 깨뜨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가 지나자 그렇게 떠들썩하던 대청이 잠잠해졌다. 두구는 소영의 한숨소리를 듣고 직감적으 로 느낀 것이 있었다. '큰형님은 둘째 형님을 걱정하고 있구나.' 그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아주 낮게 입을 열었다. "큰형님께서는 아직 둘째 형님의 성격을 모르셔서 그러실 것이오. 둘째 형님은 겉보기로는 퍽 온 순하지만 무슨 일을 하겠다고 결심만 하면 꼭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미지요. 그러니 이왕 밖으로 나간 김에 무슨 단서를 갖고야 돌아오지 그냥은 안 올 것이오." 소영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만 두었다. 두구는 그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 입을 열었다. "큰형님께서는 너무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둘째 형이 검문쌍영과 부득불 맞서게 되었다 하더라도 굳이 싸울 일만 없다면 어떻게든지 몸을 피하여 도망쳤을 것이오." "제발 그래 주었으면 좋겠소." 소영의 말을 이어 전엽청이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앞으로 한 시진만 더 이대로 기다려 본 후 그래도 상형의 소식이 없으면 우리도 밖으로 나가 손 선배와 상형을 찾읍시다." 세 사람은 서로 굳은 결심을 나타냈다. 방 안의 공기는 차츰차츰 긴박한 분위기로 변하여 갔다. 소영과 손불사는 서로 헤어지면서 약속한 것이 있었다. '우리 특이한 일이 없을 때에는 서로 만나지 않기로 합시다. 길에서 만나더라도 우리는 전연 모 르는 사람이오.' 소영은 앞으로 한 시진 후에는 그 약속을 깨뜨리고 손불사를 찾아야 된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처 지가 무척 서글퍼졌다. '악주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사건이 생겨 서로의 힘을 빌려야 되니 앞으로 거대한 세력의 심목풍 과 싸우려면 어찌해야 좋을까?' 너무나 한심한 생각에 또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소영이 내 쉰 한숨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만큼 여러 번이었다. 두구가 무슨 위로의 말을 하려고 막 입을 열려는데 달빛을 받고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비치는 것 같았다. "누구냐?" 소영과 전엽청도 눈깜짝할 사이에 밖으로 몸을 날려 양쪽으로 갈라지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 다. 세 사람의 이같은 동작은 모두 일순간에 이루어졌다. 상대는 어둠 속에서 대답을 보냈다. "나야, 빨리 안으로 들어 가 불을 켜게." 그러자 두구는 다급히 방으로 들어 가 탁자 위에 세워 둔 촛불에 불을 당겼다. 촛불이 켜지자 어 느새 안으로 들어 왔는지 상팔의 모습이 등 뒤에 보였다. 그는 핏기없는 하얀 얼굴로 왼쪽 어깨를 움켜 잡고 있었다. 소영은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끼며 재빠르게 상팔의 몸을 부축해 주었다. "상형, 많이 다치셨소?" "괜찮소이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으니 금창(金創)약이나 조금 발라 주시오." 옆에서 보고 있던 전엽청이 품 속에서 조그만 주머니를 꺼내었다. "우리 무당 문중의 지혈생산(止血生散)이라는 약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것이오." 두구는 그에게서 약주머니를 받아 들면서, "많이 들었소. 이것은 강호에서도 유명한 약이오이다." 하고 주머니를 열어 흰가루를 상팔의 상처에다 뿌렸다. 전엽청은 만일을 위하여 지혈제와 함께 상처를 동여 맬 수 있는 헝겊도 준비하고 있었다. 두구는 치료를 끝내고 이마의 땀을 씻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하였군. 갈비뼈가....... " 그러자 상팔은 깜짝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갈비를 다친 것이 아닌가?" "아니오. 갈비뼈와의 차이는 머리카락 한 올 사이요." 상팔은 그제서야 얼굴에 화색을 보이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난 또 한쪽 팔을 아주 잃게 될까 큰 걱정을 하였었는데 불행중 다행이군." 소영은 벌써부터 걱정해 오던 일이라 잠시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상형, 어떻게 된 일이오?" 상팔은 크게 숨을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대청으로 나갔더니 검문쌍영이 식사를 끝내고 계산을 하고 있었소." "상형은 피를 많이 흘리고 또 상처도 깊으니 길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상형이 어깨를 다치게 된 일이나 간단하게 말해 보시오." 상팔은 빙긋이 미소를 보였다. "나는 밖으로 나가는 그들의 뒤를 미행하였소. 그들은 큰 행길을 지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주위 분위기가 흥청거리는 곳으로 갔소. 그곳에는 각양각색의 초롱이 기둥마다 달려서 산들바람 에 흔들리며 근처를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소. 그 행길 양쪽으로는 거대한 주택들이 늘어 서 있 었소." 전엽청이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다. "그곳이 무엇하는 곳인데 그토록 번잡하오?" "바로 악주성의 유일한 오락 장소가 있는 곳이며 기생과 술 그리고 창녀들이 있는 곳이지요." 소영이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검문쌍영이 무엇하러 그곳으로 갔을까? 혹시 그들은 호색한이 아니오?" "나도 이상히 생각했었소이다. 검문쌍영이라면 그런 곳을 찾을 때는 변장을 하고 갈 텐데 그대로 갔으니 말이오. 그래서 더욱 바싹 그들을 따랐소이다." 소영은 내심 짚이는 생각이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심목풍이 설마 그곳에도 손을 뻗치지는 않았겠지요?" 상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제가 보기로는 그곳에 심목풍의 첩자가 있을 뿐 아니라 아마도 악주를 움직이는 심목풍 의 명령기관이 설치된 것 같았소. 그들은 큰 기생집으로 들어 갔소. 문에는 삼강서우(三江書寓)라 고 씌어 있더군요. 그래서 저도 주저없이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 갔소." 소영이 그의 말을 끊고 다그쳐 물었다. "상형의 상처는 그곳에서 당하였소?" 그러자 두구도 입을 열어 말참견을 하였다. "설마 검문쌍영이 그 기생집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형에게 칼을 휘두르지는 않았겠죠?" 상팔은 어깨의 상처도 잊은 듯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기생집에 쫓아 들어가 보니 그 안에는 웬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삼강서우의 건물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구석구석마다 고풍이 물씬 풍기고 있었소. 비파소리와 간드러지게 웃어젖히는 기 생들의 웃음소리가 주위를 어지럽히더군요. 방마다 사람들로 꽉 차 있고 그늘마다 자리가 날 때 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빈틈이 없었소. 그 장사 해볼 만하더군요. 돈이 산더미같이 쌓일 것 같았 소." 소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역시 옛날의 기질이 있어 돈 버는 장사라면 신이 나나 보오?" 하고 농담을 했다. 상팔은 그 말에 마치 어린애처럼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허허....제가 정말로 옛날 생각 을 잊지 못한 것 같소이다." 두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서 어깨를 다치게 된 일이나 말해 보시오." 상팔은 웃음으로 두구를 힐끗 쳐다 보고 다시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삼강서우의 뒤뜰로 올라 갔소. 그곳에는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는데 양쪽에 두 명의 하인이 지키고 있으면서 나를 못 들어 가게 막는 것이 아니겠소. 내 옷차림이 이렇게 지저분하고 더군다나 마부 차림이니 그들 생각으론 마부의 주머니로는 기생집에 들어 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 거요. 그들의 저지를 뚫고 들어가려다가 검문쌍영에게 눈치를 채일까 봐 어두운 곳을 찾아 서 지붕으로 올라 갔소." 전엽청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상팔에게 물었다. "그 뒤뜰에도 곳곳에 등불을 켜 놓아 근처의 지붕을 밝게 비추고 있었지만 유독 건너편 정자엔 등불이 보이지 않았소. 창문마다 두꺼운 발을 드리웠으며 그 틈으로 희미하게 방 안에 켜 놓은 불빛이 보였소. 그러나 지붕 위에서 조금도 움직이지를 못하였소. 내가 올라가 있던 지붕에서 불 이 꺼져 있는 정자로 가려면 지붕으로 간다 하여도 밝은 곳을 몇 개 거쳐야 되기 때문이었소. 그 저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 보듯 멍하니 그곳만 보고 있을 뿐이었소." 소영은 그가 어깨의 부상 때문에 무리를 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면 몸에 해로울 것이라고 느꼈다. "상형, 좀 간단하게 이야기하여 보오." 상팔은 왼쪽 어깨의 상처를 쳐다 보고는 만족한 웃음을 보였다. "무당파의 영약은 정말 신기하군요. 지금 나는 조금도 상처의 아픔을 느끼지 않고 있소." 소영은 그의 위인됨을 족히 알고 있는 터라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럼 상처에 지장이 없도록 음성을 조금 낮추어 이야기하시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았으나 도저히 아무에게 들키지 않고는 불 꺼진 정자 로 갈 수가 없었소. 그렇다고 그대로 바라만 볼 수도 없어 지붕을 내려 와 옷을 다른 것으로 갈 아 입고 들어 가려고 하였소." 그제서야 실내의 사람은 상팔이 입고 있는 옷이 먼저 것과 전연 틀린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동안 상팔의 상처와 그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미처 그의 변한 모습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상팔은 마부복을 벗어 버리고 혹색 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전엽청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물었다. "그렇게 빨리 어디서 옷을 빌렸소?" 상팔도 그 일이 다시금 생각나는지 싱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밖으로 나와 어두컴컴한 골목을 찾았소. 그곳에서 잠시 기다리니 마침 나와 신체가 비 슷한 사람이 나타나기에 무작정 그의 혈도를 찍은 뒤 그 사람의 옷과 내 옷을 바꾸어 입었소." 그러자 조그만 내실에는 군호가 웃어젖히는 웃음소리로 꽉 찼다. 상팔은 신이 나는 듯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과연 사람에게는 옷이 날개라더니 기생집 후원 입구를 지키고 있던 하인들은 옷만 바꾸어 입은 나를 그대로 들여 보내는 것이 아니겠소." 소영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뒤뜰은 굉장히 넓더군요. 양쪽으로 쭉 늘어 선 정자는 모두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어느 곳에 검문쌍영이 들어 있는지를 분간할 수 없었소.정자가 열두 개나 되었는데 거의 불이 켜져 있으 니..." 두구가 호기심에 끌려 상팔의 이야기 구절마다 어깨를 움츠렸다 폈다 하였다. "형님, 그렇다면 불이 켜진 정자마다 손님으로 꽉 찼단 말이군요?" "그렇지, 나는 그 여러 정자를 쭉 훑어 보았으나 그들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지. 다만 적진 깊숙 이 들어 온 것 같은 기분만 들더군." 전엽청이 다그쳐 물었다. "그곳이 틀리던가요?" "제가 처음에 주위를 살필 때는 몰랐었는데 열두 정자를 두루 훑어 보고서야 이상한 점을 생각해 내었소. 알고 보니 그 열두 개의 문호는 바로 우연중 팔봉방위(八封方位)를 뜻하는 것이었소. 그 래서 그곳은 절대로 평범한 기생집이 아니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재빨리 그곳을 빠져 나오려고 입 구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는데.... 돌연 어둠 속에서 '죽여라!' 하는 낮은 외침과 함께 날카로운 검 광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내 가슴을 향해 비스듬히 쳐 내려 왔었소. 너무나 뜻밖에 당한 일이었고 더군다나 칼을 휘두른 상대의 솜씨가 놀랍도록 빨라 그만 어깨를 베인 것이오." 두구는 옛날부터 상팔과 행동을 같이한 터라 그의 무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이기에 형의 어깨에 단 일격으로 큰 상처를 주었을까?' 이런 생각으로 눈살을 크게 찌푸리며 물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보았소?" 상팔은 고개를 저었다. "못 봤네. 볼 수도 없었고, 또한 그의 검술이 얼마나 빠른지 강호에서도 보기 드문 솜씨였네. 다 행히 내가 어깨를 맞고 앞으로 더 나가지를 않고 지붕으로 몸을 날렸었네. 내가 막 지붕에 올라 서자 조금 전에 내가 서 있던 곳으로 사방에서 무수히 많은 암기가 쏟아지는 것이 아니겠나. 만 약에 조금만 더 그곳에서 지체하였더라면 목숨을 잃을 뻔하였지." 소영이 점잖게 입을 열어 짐짓 넓은 견식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런 설치는 상형 한 사람을 상대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라 사전에 모든 계획을 세워 놓 아 침입한 적을 꼼짝 못하게 하려던 것일 거요. 천만다행으로 상현의 기지로 화를 면하였으니 퍽 이나 반갑소." 상팔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단 말이오." "무슨 일이오?" "바로 내가 일격을 당한 그 장소가 이상하단 말이오. 처음에 지나갈 때 유심히 살폈는데 괴한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없었소. 도대체 그 괴한은 언제 어디에서 나타나 나에게 칼을 휘둘렀는지를 모르겠소."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만일 그 정자가 움직일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다면....." 상팔이 재빠르게 말을 받았다. "맞았소. 그것을 생각 못했군요. 그들의 장치는 아주 악랄하오. 한칼에 죽지 않으면 비오듯 쏟아 지는 암기에 맞아.... 역시 그렇게 되면 강호의 일류 고수들이라도 피해 내기가 힘들 것인데 내가 운이 좋았나 보오." 두구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점차로 흥미로운 상팔의 이야기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래 지붕 위로 도망간 뒤 누가 뒤쫓지 않았소?" "내가 오른 지붕은 전실과 가까운 곳이며 다행히 앞마당에 사람들이 들끓어서 그대로 사람들 틈 으로 뛰어 내렸네." 소영이 냉랭히 말했다. "필경 그 삼강서우가 수상한 곳이긴 하군." 전엽청이 손을 비비며 말을 받았다. "심목풍의 세력이 천하에 구석구석 퍼져 있어 도처에 그의 제 이, 제 삼 소굴이 있으니, 우리 우 선 그 소굴을 하나 골라서 쳐부수기로 합시다." "전형의 말이 옳소. 오늘 저녁은 편안히 푹 쉬고 내일 저녁 삼강서우로 잠입하여 한바탕 오랜만 에 힘을 써 보도록 합시다." 상팔이 앞으로 나섰다. "전형은 아무래도 무위도장과 손노선배님에게 사전 상의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전엽청이 근심된 표정으로 물었다. "소생의 사형께서도 이곳 객잔에 드셨는지 모르겠소?" "그건 염려 마시오. 내가 조금 전에 검문쌍영을 쫓으러 대청으로 나갔을 때 그곳 기둥에 씌어 있 는 암호가 보였었소. 그러니 틀림없이 이곳에 드셨는데 어느 방인지는 모르겠구료." 바깥의 어두움은 차츰 짙어 갔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간간이 들려 오는 말소리가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오고 그 사이 벌써 삼경이 지났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무사히 날이 밝았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뜻밖에도 무위도장과 손불사가 소 영을 찾았다. 소영은 자신이 그들을 찾으려 하였었는데 그들이 직접 찾아 왔으니 힘 안 들이고 일이 잘되어 갔 다. 이제 모든 사람이 다 모이게 되자 새로 온 두 사람에게 어젯밤에 상팔이 당한 일들을 자세하게 이야기하여 주었다. 무위도장은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우리는 이제부터 전세 속으로 말려들게 된 것 같소. 기왕 이렇게 나섰으니 힘을 함하 여 심목풍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줍시다. 이곳 악주에 심목풍의 소굴이 있고 또한 많은 부하가 있다 하지만 백화산장의 주력이 이곳에 있지는 않을 것이오." 손불사도 매우 흥분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분타를 기생집에다 설치해 놓은 심목풍의 기지는 정말 감탄할 만하군. 이 늙은이가 강호의 모든 곳을 유랑했지만 기생집에 분타를 설치하였다는 이야기는 오늘에야 처음 들어 보는 일이오. 좌우 간 오랜만에 기생집 구경이나 하여야겠소." "가긴 가야겠지만 사전에 세밀한 계획을 세워야겠소." "도장께서는 무슨 계책이라도 있소?" 무위도장은 다그쳐 묻는 손불사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계책은 한 가지 있으나 그것이 여기에 적용이 될지 궁금하군요. 빈도가 이야기할 테니까 만약 여러분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슴지 마시고 중단시켜 주시오." 이런 전제를 내어 놓은 무위도장은 삼강서우라는 기생집을 공략할 계책을 자세하게 이야기하였 다.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던 손불사가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도장의 계책은 정말로 기가 막힌 것이오. 적을 혼란하게 만든 뒤 허리를 찌른다! 허허 허....." 손불사의 호탕한 웃음이 막 그치려는데 돌연 문 밖에서, 탁! 하고 조그만 물체가 마룻바닥으로 떨 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위도장의 안색이 싹 변했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그의 말과 함께 또 다시 두 번째 소리가 들렸다. "빈도가 이곳에 오기 전에 곳곳으로 망을 볼 사람들을 내 보내었소. 지금 저 소리는 의심할 만한 인물이 이곳에 들어 왔다는 신호요." 소영은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럼 심목풍의 부하가 이곳에 들어 왔다는 말이오?" "그렇소." 무위도장은 문께로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이었다. "빈도는 먼저 가 보아야 되겠으니....." 손불사도 그의 뒤를 따랐다. "노부도 몇몇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해야 되겠소." 개방의 제자들은 강호 곳곳에 전부 퍼져 있었으니 이곳 악성에도 없을 리 없었다. 손불사는 개방 문하 중에서 오직 한 사람 남은 장로인만큼 제자들이 그를 대하는 예는 매우 공손 했다. 그러니 그의 말 한 마디면 십여 명의 제자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니 도움을 받 아야 될 장한은 아주 쉽게 결정되었다. 두 사람이 나가자 소영은 눈길을 돌려 상팔에게 물었다. "상형은 어깨를 다쳤으니 며칠 푹 쉬시오." 상팔은 고개를 저었다. "반나절만 쉬면 충분할 것이오." 소영은 그 한 사람만 이곳에 남겨 둔다는 것도 위험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소영, 전엽청, 그리고 중주이고 등 네 명 은 객잔을 나와 군영루를 찾았다. 군영루는 악주에서 제일 큰 술집이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무위도장과 사마건의 모습이 보였다. 무위도장은 청포에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머리에는 망건을 쓴 평범한 노부로 변장하고 있었다. 소영은 내심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그들 옆을 지나쳐 자리가 빈 탁상으로 자리를 잡았 다. 사마건은 여전히 점쟁이 차림이었다. 아직 점심 때가 일러서인지 손님은 과히 많지 않았다. 그들 은 이 층으로 올라가 아래층이 잘 보이는 장소에 제각기 자리를 잡았다. 일행의 눈빛이 마주치자 소영은 품 속에서 조그만 약병을 꺼내어 그것으로 노인으로 변장한 모습 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이제 소영의 본래 모습이 나타난 것이었다. 소영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래층으로 내려가 입구에서나 이 층에서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 다. 이어 변장한 모습 그대로의 중주이고와 전엽청이 소영의 근처 탁상에 앉아 암암리에 그를 보호하 였다. 그들은 군영루 안의 인물들과 쉴새없이 드나드는 손님들을 일일이 살폈다. 소영을 위시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으로 심목풍이 어떤 수법으로 공격을 할 것인가를 궁금히 여겼다. 잠시가 지난 후 상팔이 무엇을 보았는지 두구의 옆구리를 찌르며 입구를 가리켰다. "저 자를 조심하게." 두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곁눈질로 지금 막 입구로 들어서는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 다. 그 자는 일 층의 빈 자리를 지나 이 층으로 오르는 층계 입구까지 가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 추고 흘깃 소영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소영의 등 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탁상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사환이 찻잔을 받쳐 들고 소영의 앞으로 다가 왔다. "나으리,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무위도장은 잔뜩 긴장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깨뜨리기 위하여 탁상 위에 놓인 술잔을 대번에 들 이켰다. 소영이 무어라 주문을 하니 곧 사환이 주방으로 물러갔다. 사환이 주방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커다란 쟁반에 술과 안주를 들고 나왔다. 상팔은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터라 사환이 안주를 가지고 나오는 시간이 무척 빠르다고 생각되었다. "좀 이상한데?" 두구는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어떠한 술집이고 간에 선후가 있는 법인데 어째서 큰형님에게 먼저 술을 갖다 주는 것일까? 주 문은 우리가 먼저 했단 말일세. 저 사환을 주의하게." 그들은 사환의 일거일동을 날카롭게 살폈다. 사환은 무표정하게 소영에게 다가 와서는 아무 말도 없이 술과 안주를 놓고 이 층으로 올라 갔 다. 두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째 형은 너무나 의심이 많단 말이야. 심목풍이 이곳에까지 손을 뻗치지는 않았겠지!' 소영은 혼자서 술을 마시게 된 것을 우습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술병을 기울여 잔 가득히 술을 따 랐다. '오랜만에 술집에 들어 왔군.' 이런 생각을 하며 술잔을 들어 막 입에 대려는데 돌연 등 뒤에서 전음입밀의 목소리가 은은히 들 려 왔다. "그 술과 안주는 먹지 못하는 것이오." 그것은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으며 눈치채이지 않게 찬찬히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 근처에는 여자가 없는데 어디서 그 음성이 들렸을까? 전음입밀을 쓰는 것으로 보 아 보통 여자는 아닐 텐데. 하여튼 빨리도 난관에 부딪쳤구나. 이놈들이 독을 써서.....' 이런 생각을 하며 들었던 술잔을 도로 탁상에 놓았다. 그러자 주방으로 들어 가려던 사환이 소영 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술과 안주가 너무 뜨겁습니까?" 소영은 사환을 유심히 쳐다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렇다면 안주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십니까?" "아니!" 사환은 탁상에 놓인 술잔과 안주를 힐끗 바라 보고는 다시 권했다. "그러시다면 어찌 술을 안 드시나요?" "이 술과 안주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요." 사환은 대뜸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허리를 연방 굽신거렸다. "손님께선 농담도 잘하십니다." "이 술과 안주에 이상이 없다면 자네가 먼저 먹어 보게." 소영은 이야기를 하면서 두 손을 놀려 그의 오른쪽 다리의 요혈을 찌르고, 반 강제로 술을 먹였 다. 그의 행동은 매우 민첩하여 몇 가지 동작은 일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다른 손님들은 조금 도 눈치를 못 채었다. 설사 소영과 사환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사환과 손님의 관계 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소영이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니 입에 물고 있던 술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사환은 두 눈을 둥 그렇게 뜨고 소영의 손에서 빠져 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자네 조심하여야겠어." 소영은 그에게 점잖게 주의를 주고 요혈을 풀어 주었다. 사환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주방 쪽으로 달려 갔다. 그가 주방 입구까지 다다랐을 때 갑자기 그의 몸이 뒤틀리는 것 같더니 그대로 마룻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가 쓰러지는 모습은 마치 나 무 토막 같았다. 그는 마침 천장을 보고 쓰러졌으므로 코와 입에서 붉은 선혈이 새어 나오는 것 이 빤히 보였다. '만일에 누군가가 나에게 이것을 미리 알려 주지 않았다면 내가 저런 꼴이 되었을 게 아닌가? 부 끄러운 일인데!'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벌써 그 사환의 주위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우르르 모였다. '이 주객들 중에는 틀림없이 심목풍의 부하들이 끼여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나를 알고 나 는 아무도 모르니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인 것이 아닌가. 이곳도 오래 머물지는 못할 곳이로군.'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 속에서 몇 푼의 동전을 꺼내어 탁상에다 놓았다. 두구는 불안해서 안절부절을 못하였다. "둘째 형님, 우리도 밖으로 나갑시다. 심목풍의 손길이 여기까지 뻗쳤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는데....." 중주이고가 자리를 뜨자 계속해서 전엽청 무위도장 손불사 그리고 사마건이 몸을 일으켰다. 소영은 곧장 걸음을 옮겨 군영루 출입문으로 나가려는데 또 다시 조금 전의 그 여자 음성이 귓전 을 울렸다. "암수를 조심하시오." 소영은 재빨리 주위를 살펴 보았으나 역시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대는 나에게 모습 보이기를 싫어하는군. 하여튼 암수를 조심하라고 했으니 단단히 정신을 차 려야 되겠는걸.' 이렇게 생각을 하며 막 문을 나서려는데 별안간 차가운 섬광이 눈앞에 번쩍이는 것이었다. 그는 재빠르게 문 뒤로 몸을 숨겼다. 그 순간 십여 개의 독침이 대문 위에 나란히 꽂히는 것이었다. 소영을 겨냥한 독침 중 몇 개는 열려진 문 사이로 빠져 나가 죽어 넘어져 있는 사환을 구경하던 두 사람의 주객에게 사정없이 꽂혔다. "아앗!" 두 주객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그 자리에 쓰러져 몇 번 뒹굴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그들 바 로 옆에서 같이 구경을 하던 주객들은 두 사람이 어째서 죽었는지를 전연 몰랐다. 그 독침은 매우 가늘고 짧은 것이 마치 돼지털과 흡사하였다. 소영은 가슴 속에서 치미는 분노를 달랠 길 없어 문 앞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뚫어지게 쏘아 보 았다. '저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에게 독침을 날린 인물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로구나.' 중주이고와 그외 일행들은 쓰러진 두 명의 주객을 훑어 본 후 사태가 긴박함을 느끼고 모두 암암 리에 공력을 모아 예기치 않은 공격에 대비하였다. 상팔은 몸을 날려 문을 나서며 소영의 옆을 스치는 순간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형님, 빨리 따라 오시오." 소영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이곳에서 괜히 행인들만 살필 것이 아니지.' 이런 생각을 하고 앞서 가는 상팔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소영의 뒤를 전엽청이 따르며 뒤의 동정을 살폈다. 93. 기생집에 잠입하다 소영은 끓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어떤 놈이 암습을 가했는지 눈에 띄기만 해 봐라. 단단히 혼을 내어 분풀이를 하고 말 테니.....' 소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암암리에 사방을 쉴새없이 경계했다. 두 개의 가도(街道)를 지나 네거리의 입구에 다다랐다. 길 양편엔 각양각색의 점포와 노점(路店) 들이 손닙을 부르며 늘어서 있었다. 노점은 길 복판까지 차지해 들어 왔고 많은 사람들로 인해 걸음을 옮기기 힘들 정도였다. '이렇게 복잡해서야 암습을 당하기 꼭 알맞겠다. 골목길을 택해 걷는 것이 안전할 것 같은데.....' 소영은 대여섯 장쯤 앞에 왼쪽으로 꺾어진 골목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 가려고 생 각했다. 전음입밀의 술법으로 상팔에게 그 뜻을 알려 주려고 했을 때였다. 그의 앞으로 다가 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줄곧 소영을 바라 보며 성큼성큼 다가 오고 있었다. 다 떨어진 옷을 걸친 중년 사나이었다. '개방 제자가 대강의 남북에 깔려 있다더니 저 사람은 손불사가 나에게 보낸 개방의 제자인 모양 이구나.' 소영이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 사나이와의 거리는 사, 오 척으로 가까와졌다. 그 사나이는 소영에 게 대뜸 말을 걸었다. "당신이 소대협이오?" "그렇소. 노형께서는 누구시오? 혹시 개방의....." 소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돌연 그 사나이가 양손을 동시에 움직였다. 왼손에는 비수를 쥐고 소영을 공격하며 오른손으로는 여러 개의 독침을 뿌렸다. 불과 사, 오 척의 가까운 거리에서 돌연스러운 공격을 가하니 그것을 막아 내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더욱이 독침의 공격을 막아 낸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소영은 연달아 암습을 당했었기 때문에 이 사나이에게도 은근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 의 양손이 움직이는 것을 본 소영은 칠 장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쳐 냄과 동시에 몸을 뒤로 눕히 며 물러섰다. 형세가 매우 다급했으므로 소영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개의할 수가 없었다. 바짝 붙 어서는 상대방의 공격을 철판교(鐵板橋)의 초식을 사용해서 피해 낸 것이었다. 상대방의 무공은 보통이 넘었다. 소영이 민첩하게 뒤로 넘어지며 물러서는 것을 보자 그는 재빨 리 옆으로 몸을 날리더니 왼손에 들었던 비수를 소영에게 던졌다. 그와 동시에 몸을 솟구치더니 뒤로 돌아서 뺑소니를 치기 시작했다. 소영을 향해 던진 그 사나이의 비수는 엉뚱하게도 몇몇 사람들의 발목과 정강이에 박혔다. "으악!"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대굴대굴 뒹굴었다. 이것을 본 소영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죽일 놈, 무고한 사람을 해쳤구나.' 소영은 상대방이 도망치며 던진 비수를 몸을 살짝 뒤틀며 오른손으로 잡아 들었다. 그는 급히 몸 을 솟구치며 그 비수를 도망가는 사내를 향해 힘껏 던졌다. 소영이 비수를 날린 수법은 유선자에게 배운 암기 수법이며 이것은 강호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절학이었다. 더욱이 소영은 울분이 치솟아 있는 힘을 다해 비수를 던진 것이라 그 날아 가는 힘 과 속도는 극히 놀라웠다. 바람을 가르고 공기를 찢으며 비수는 화살보다 더 빠르게 날아 갔다. 소영이 비수를 받아 다시 던질 때에는 이미 사나이는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는데 뒤에서 바람소리 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바로 이 순간에 날아간 비수가 그의 정문혈(頂門穴)에 깊숙 이 꽂혔다. 칼자루만 남기고 칼날은 모두 꽂힌 것이었다. "으악!" 사나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더니 이를 악물며 이마에 박힌 비수를 뽑아 들었다. 그는 그 비수를 소영에게 던질 듯한 자세를 취해 보이다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큰길에서는 일시에 소란이 벌어졌다. "살인이다!" "사람이 죽었다!" 사람들은 놀라움과 공포에 질려 부르짖으며 우왕좌왕 소란을 피웠다. 흡사 난리가 난 듯한 수라 장이었다. 상품을 늘어 놓고 팔던 목판을 들고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고, 죽은 사나이의 곁으로 몰 려드는 사람도 있었다. "무엇이냐?" "난리가 났냐?" "누가 죽었냐?" 멋도 모르고 떠들며 뛰는 사람들도 있었다. 거리는 순식간에 혼잡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들었다. "빨리 갑시다. 나를 따르시오." 상팔은 군중들이 떠들며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더니 급히 소영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소영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상팔의 뒤를 따랐다. '백화산장의 무리들이 각양각색으로 변장을 해서 수시로 암습을 가해 오고 있구나.' 소영은 앞뒤에서 보호하는 상팔, 두구, 전엽청을 훑어 보며 걸음을 빨리했다. 이들이 골목으로 꺾어 들자 한 채의 커다란 집이 보였다. 그 집의 솟을대문이 어찌나 큰지 문의 추녀 밑이 웬만한 집채만 했다. 대문 추녀 밑으로 상팔이 소영을 끌고 들어서더니 인피가면 하나를 꺼냈다. "형님, 빨리 이것을 쓰시오." 소영이 인피가면을 받아 얼굴에 쓰자 두구가 품에서 푸른 장삼을 꺼내 소영에게 내 주었다. "이 옷을 위에다 걸치면 사람들이 형님을 몰라 볼 것이오." 소영이 급히 장삼을 걸치자 그제서야 전엽청이 다가 오며 숨찬 소리로 말했다. "거리는 큰 혼란에 빠졌소. 순찰대가 곧 올 것 같으니 우리는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소." 네 사람은 그 골목을 돌아 다른 행길로 나섰다. 상팔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꾸밉시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말고 서로 호응할 수 있도록 합시다." 네 사람은 복잡한 거리를 조금씩의 간격을 두고 걸었다. 이 거리에도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퍼 져 사람들의 표정이 사뭇 흉흉했다. 길을 한참 걷는 동안 다른 암습자는 만나지 않았다. 아직 식 사를 할 때는 안 되었으나 거리를 쏘다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소영은 객점 안으로 들어 섰다. 소영을 따라 들어 온 세 사람은 각각 하나씩의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객점에는 이들 말고 서너 명의 손님이 있을 뿐 한산했다. 또한 술과 안주 이외에는 먹을 만한 음 식도 별로 없었다. 네 사람은 각각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그들이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할 무렵에 네 명의 장정이 객점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 섰다. 이 객점에는 모두 일곱 개의 탁자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영의 일행 이 네 개를 차지했고 다른 손님들이 나머지를 차지했기 때문에 탁자가 없었다. 들어 선 네 명의 장정은 모두 경장을 했다. 앞장 선 장정은 괴상하게 생긴 무기와 염왕필(閻王筆) 을 메고 있었고 다른 장정들도 단도와 암기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그들 네 사람은 실내를 쓱 훑어 보더니 앞장 선 사내가 소영의 맞은편에 걸터 앉았다. 다른 세 장정들도 각각 전엽청, 두구, 상팔이 점령한 탁자로 가서 한 사람씩 마주보고 앉았다. 상팔, 두구, 전엽청은 이때 모두 다른 옷을 입고 변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본색이 쉽게 탄 로날 염려는 없었다. 소영의 맞은편에 앉은 장정은 소영을 한 번 훑어 보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손을 내밀어 술주전자 를 잡았다. 그는 소영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술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의 주량이 세고 술을 마시는 속도가 아주 빨라 주전자는 금방 바닥이 나고 말았다. 술주전자가 비자 장정은 그것을 탁자에 올려 놓았다. 소영은 그의 일거일동을 지켜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이때 객점의 출입문 가까이에 두구와 마주앉아 있던 장정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조금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모르오. 여러분들은 가만히 앉아 계시오. 괜히 움직 였다가 무고한 희생을 당하지 말고......." '이 객점에 우리 네 사람과 뒤에 앉은 뚱뚱보 세 사람뿐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들이 우리의 신분 을 알아 차리고 들어 온 것이 아닐까?' 소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경계심을 높였다. 이때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은 노인이 객점 안으로 들어 섰다. 그 노인은 실내를 천천히 훑어 보더니 서서히 상팔의 앞으로 다가섰다. "여기 합석해도 되겠지요?" 상팔은 무공도 높지만 경험도 매우 많다. 또한 그는 지모가 뛰어난 위인이었다. 노인이 앉으니 상 팔의 앞엔 두 사람의 낯선 사람이 있게 되었지만 상팔은 조금도 불쾌하거나 동요하는 빛 없이 태 연했다. 은근히 상대편을 살펴 볼 뿐이었다. 노인은 태양혈이 툭 솟아 있었다. 안광이 날카롭고 형형한 기백이 엿보이는 표정으로 보아 무서 운 무공을 지녔음이 분명했다. '이 노인은 등에 칼을 멘 이 장정들보다 훨씬 무공이 강하겠구나. 이 장정들은 노인에 비해 일개 의 졸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를 상대하려고 이곳에 나타난 것은 아닌 모양인데.....' 상팔이 이런 생각을 하며 침착한 데에 비해 전엽청은 성질이 급했다. 그는 노인이 상팔의 앞에 앉는 것을 보고 불끈 아니꼬운 생각이 치밀어 곧 손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소영이나 상팔이 너무도 침착하게 앉아 있으므로 화를 눌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갔다. 돌연 소영의 앞에 있는 장정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노인 곁으로 다 가가서 읍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장주님, 그들이 여태껏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니 오지 않을 모양입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약속을 했는데 어길 리는 없어. 우리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도록 하자." '아하, 이들이 누구와 약속을 한 모양이구나. 그런데 하필이면 이렇게 좁은 객점에서 만나기로 했 을까?'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상팔은 음성이 귀에 익은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누구인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노인을 어디서 보았을까 생각하며 자주 노인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노인 곁에 앉아 있던 뚱뚱한 장정이 상팔의 거동을 수상하다고 생각했는지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사람을 그리 힐끔거리오? 얼굴에 무엇이 묻었소?" 상팔은 흠칫하며 얼른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염왕필을 멘 장정은 여전히 상팔을 의심이 가득 찬 눈으로 노려 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상팔은 짐짓 죄송스럽다는 태도를 꾸미며 대답했다. "네, 저는 마차를 모는 마부입니다." 그러자 장정은 비호같이 손을 뻗쳐 상팔의 손목을 움켜 잡았다. 손을 빼면 신분이 탄로 날 것 같 아 상팔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노인이 손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괜한 시비를 걸지 마오!" 염왕필을 멘 장정은 노인을 몹시 존경하는 모양이었다. 즉시 상팔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상팔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들어 섰다. 푸른 장삼을 본 소영은 가슴이 섬뜩했다. '심목풍이 이미 이 근처에 나타난 것이 아닐까?' 방금 들어 선 청년은 심목풍의 제자인 단굉장(單宏章)이었던 것이다. 단굉장은 실내를 두리번거리 더니 노인의 곁으로 다가 서며 물었다. "어느 분이 주어른이시오?" 노인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내가 바로 낙양의 주문창(朱文昌)이라 하오." 단굉장은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아, 그러시오? 대명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습니다. 막상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원, 별말씀.... 형씨의 성함은 어찌 되오?" "소생은 성은 단이고 이름은 굉장입니다. 여기 청첩장이 있으니 주선배께서 보시기 바랍니다." 주문창은 단굉장이 내주는 청첩장을 펴 보더니 물었다. "노형은 심장주와 어떤 관계가 되시오?" "바로 저의 사부님이십니다." "아, 그럼 심장주에게 이렇게 전하시오. 나를 이처럼 초청해 주시니 곧 가겠다고....." "네, 이미 진(秦), 우(尤), 허(許), 세 노선배께서 초청한 장소를 향해 떠났으니 주 노선배께서도 빨리 오십시오." "단형은 안심하십시오." 단굉장은 포권을 하며 물러갔다. 단굉장이 빠른 걸음으로 객점을 나가자 주문창도 서서히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네 명의 장정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소영은 하인을 불러 술과 술잔을 새로 가져 오라고 했다. 술잔을 거두던 하인이 소영에게 말했다. "은자(銀子)가 있는데요." 소영은 술잔을 들여다 보았다. 과연 오전짜리 은전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 장정이 술값으로 남기 고 간 것이 분명했다. '그 사람은 건방지긴 하지만 남의 공술이나 얻어 먹으러 다니는 건달패는 아닌 모양이군.'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상팔이 고개를 쳐들며 중얼거렸다. "주, 진, 우, 허. 이들은 무림의 사대현(四大賢)이렷다." 소영은 몸을 일으켜 상팔과 마주앉으며 물었다. "상형, 그 주문창이란 노인을 알고 있소?" "모르오. 허나 주문창의 이름은 귀에 익도록 들었소. 무림의 사대현인 중에서 주문창이 우두머리 격이지요. 강호의 시비에 참여치 않고 있던 이 네 사람을 심목풍이 찾을 줄이야......" 상팔은 미간을 모으며 잠간 생각하는 눈치더니 말을 이었다. "풍문에 의하면 그 사대현은 무공이 매우 높다 하오. 허나 성질이 괴상해서 무림 인물과 교제를 않고 있다오. 살벌하고 음모와 피비린내가 가득한 무림에서 그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답니 다. 그들은 일체 강호의 일에 간섭치 않고 은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무림의 사 대현이라도 부른답니다." 소영이 말했다. "그들이 속세를 떠난 것을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소. 하지만, 무공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강호에서 악이 선을 누르며 기승을 부리는 것을 외면한다는 것은 대영웅이니 대현인이니 하는 칭 호를 받을 만한 일은 못 되잖소?" 상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이 옳군요." 소영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심목풍이 이곳 악주성 내에 도착한 모양인데..... 우리의 행방이 이미 드러났으니 오래 머무르지 말고 우리 이제 갑시다." 소영은 술값을 계산했다. 돈을 받으며 하인은 소영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소영이 쓴 인피가면은 푸르둥둥하고 누렇기도 했으며 귀밑엔 시커먼 털이 솟아 있어 몹시 흉칙하게 보였다. 소영이 객점을 나서자 상팔이 곁에 다가 섰다. 전엽청과 두구는 뒤떨어져 따라 왔다. 이들 네 사람은 성내의 형세를 대강 살펴 볼 수 있었다. 저녁이 되고 어둠이 깔릴 무렵에 네 사람은 외따른 곳에 있는 한 채의 부두집으로 들어 갔다. 두 명의 무당파 제자들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영과 상팔 등은 인피가면을 벗고 다른 모습으로 변장했다. 전엽청은 푸른 도포에 귀공자 차림을 하고 얼굴에도 약간 손질을 가했다. 상팔은 장삼에 호박같이 생긴 모자를 쓰고 까만 화의(和衣)를 입었다. 얼굴에 인피가면을 쓰니 그 차림새가 확 달라졌다. 두구는 인피가면에 세 갈래의 턱수염을 달고 허리엔 장검을 찼다. 귀공자의 호위병과 같은 모습 이었다. 소영은 가면에 자그마한 모자를 쓰고 푸른 옷을 입어 전엽청의 시종으로 가장했다. 네 사람이 변장을 마치자 무당 제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잘 되었습니다. 그럴 듯한 변장이군요. 저의 장문께서는 이미 손 노선배님과 오경에 이곳에서 만 나시기로 약속이 있습니다." "좋소, 당신들은 이곳을 잘 지켜 주기 바라오." 소영이 말하자 다른 무당 제자가 전엽청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사숙은 강남순찰사 정대인의 둘째 아들 정지청(程志靑)으로 행세하시는 것입니다." "알았다." 전엽청은 소영을 바라 보며 말했다. "소대협, 제가 이름을 하나 붙여 드리지요. 정령(程領) 어떨까요?" "좋군요." 소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사람은 간단한 음료를 마시고 어두운 골목을 빠져 나갔다. 이들이 큰길에 당도하니 이미 검은색의 포장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부석에 있던 무당 제자 하나가 뛰어 내리며 이들에게 말했다. "손 노선배께서 마차 안에 계십니다." 네 사람은 포장 마차의 안으로 들어 갔다. 손불사는 변장을 풀고 본래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변장하는 데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서.... 내 본래 면목이 좋아." 손불사가 웃으며 말하자 소영이 물었다. "노선배님은 개방의 인물들을 몇 명이나 찾으셨습니까?" "나는 이미 여러 명의 어린 거지들을 찾아 대기시켰소. 우리의 행동은 모두가 무위도장이 계획한 것이니 그대로 따르면 되겠소. 이 늙은이가 한 마디 일러 두고 싶은 말은....." "......." "그 삼강서우(三江書寓)에 들어 간 뒤 누구든 사정을 봐 주어선 안 된다는 것이오. 내 제자의 보 고에 의하면 심목풍이 이미 성내에 많은 고수들을 이끌고 왔다니 만일 맞붙게 되면 절대 인정사 정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오." "오늘 저녁에 심목풍과 만나게 될는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심목풍은 소대협이 간다는 것을 알면 밤이 열이라도 기다리고 있을 걸....." 손불사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삼강서우의 계집애들은 대부분이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니 각별히 조심해야 될 것이오. 절대로 가락과 관현소리에 현혹되는 일이 없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하오." "안심하십시오." 전엽청이 대답하자 손불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개방 제자들과 함께 밖에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손불사는 전엽청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 무위도장은 치밀한 계획과 앞뒤를 맞추는 재능이 뛰어난 분이더군. 확실히 보통 사람과는 견 줄 수 없는 분이야." 전엽청은 자기 사형을 칭찬하자 매우 기분이 좋았다. "황송합니다." 손불사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이런 차림으로 기원(妓阮)에 들어 갈 수 없으니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좋겠군." 손불사가 마차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곧바로 채찍 휘두르는 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움직이기 시 작했다. 덜컹거리며 마차가 달리자 소영이 전엽청에게 말했다. "될 수 있는 한 손을 쓰지 않도록 하시오. 자칫 잘못 하다가는 심목풍이 파견한 무리들이 눈치채 게 될 우려도 있으니까....." 전엽청은 고개를 끄떡였다. 잠시 후, 마차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삼강서우에 가까와진 것이다. 포장을 들치고 바라 보니 길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붐비고 있었다. 길 양편엔 꽃등이 줄줄이 높이 매달려 있었고 장안의 일류 부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호색한 얼굴로 길을 메우다시피 걷고 있었다. 사람들 때문에 마 차는 행진을 못하고 멈춰 섰다. 두구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길로 뛰어 내렸다. "쓸데없는 사람들은 길을 비켜라?" 호통치며 손으로 사람들을 홱 밀쳤다. 그러자 칠, 팔 명의 사람들이 짚단처럼 나둥그러졌다. 두구는 청모를 쓰고 긴 칼을 찼기 때문에 고관대작의 호위병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기세만은 무 림 그대로였다. 명조(明朝)에는 가끔 고관대작들이 사적으로 이런 기원을 찾는 일이 있었다. 그 호위 무판들은 대 개가 신분을 뽐내고자 지금 두구의 복장처럼 차리길 좋아했다. 이런 차림새가 눈에 띄면 행인들 은 차림새만 보고도 고관의 호위병으로 알고 조심을 하였다. 두구에게 떠밀려 넘어진 사람들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지만, 두구의 차림새와 호화스러운 마차를 보고는 감히 입을 열어 대항하지 못했다.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며 길을 터 줄 뿐이었다.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서 잠시 후에는 삼강서우 앞에 멎었다. 상팔이 먼저 내리고 그 뒤를 소영과 전엽청이 따라 내렸다. "들어 갑시다." 두구가 앞장 서더니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 갔다. 소영은 전엽청의 뒤를 바짝 따라 붙었다. 이들이 내리자 마차는 되돌아 달려가 버렸다. 이 삼강서우는 악주성 내에서 가장 이름이 높은 기 원이었다. 기생들은 하나같이 요염하고 가무에 뛰어났다. 기원이 여러 곳에 많고 특히 이 주변에 는 기원들이 하나의 거리를 이루었으나 삼강서우만큼 흥청거리는 곳은 없었다. 전엽청이 대문을 들어 서자 두 명의 하인이 정중하게 맞이했다. 두구가 하인들 앞을 가로막으며 묵직하게 말했다. "우리 공자님을 놀라시게 하지 마라."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두 하인이 동시에 대답하자 상팔이 유창한 관어(官語 : 관가에서 쓰는 말)로 입을 열었다. "우리 공자께선 너희 삼강서우의 이름을 오래 전부터 들어 오시던 차에 이번에 특별히 시간을 내 어 구경오신 것이다. 특등객으로 모시도록 해라. 우리 공자께서는 기분이 좋으시면 돈을 물쓰듯 하시니까 알아서 모셔!" 상팔은 여러 지방의 언어 풍습에 정통해 있었다. 그의 유창한 관어는 아무도 의심치 못할 정도였 다. 소영은 두 하인을 살펴 보았다. 옷차림은 평범했으나 미간에 오만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팔의 유창한 관어에 대답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이 두 명의 하인은 무림 인물이 변장한 것임이 틀림없구나. 그러기에 이토록 손님 접대가 서툴 고 쩔쩔매지. 그리고 보니 이 삼강서우에는 엄중한 경계망이 있는 모양이지?'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두구가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우리 나리가 하신 말씀을 들었나?" 두 하인은 서로 마주보더니 왼쪽에 있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소인 원래 아는 것이 없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하더니 북쪽에 있는 하나의 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에 빈 방이 하나 있으니 들어 가시지요. 소인이 곧 아가씨들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상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공자께서 어떤 신분이라고 이런 혼잡한 곳에서 흥을 돋을 수 있단 말이냐?" 두구가 집안을 둘러 보더니 인공으로 만든 자그만 산을 가리키며 하인에게 물었다. "저 언덕 뒤에는 무엇이 있느냐?" "그곳은 후원입니다. 오늘 저녁 그곳은 단골 손님들로 이미 꽉 차 있습니다." "쫓아 버리면 되지." 두구는 샙어 뱉듯 말하더니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갔다. 두 하인은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지라 어쩔 줄을 모르고 멍청히 있을 뿐이었다. 전엽청이 싸늘한 음성으로 짐짓 중얼거렸다. "이 집에선 기생 장사를 그만 둘 모양이지?" 그러자 상팔이 매우 황망한 어조로 말했다. "공자께선 지체가 높으신 분인데 어찌 이런 하인과 다투십니까? 내일 소인이 명첩을 한 장 써서 악주부에 보내 이 집을 좀 혼내도록 하겠으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그럴 듯하게 둘러대니 두 명의 하인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전엽청의 일행이 진짜 관가에 있는 사람들로 알고 고개를 푹 숙이고 물러서고 말았다. '나도 평생에 기원 출입은 처음이지만 너희 두 명도 역시 기생집의 일꾼 행세를 하는 것이 처음 인 모양이구나.' 전엽청은 이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들은 하인들이 물러서자 두구의 뒤를 따라 갔다. 두구는 이미 상팔에게 삼강서우의 내력과 형세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대담하게 후원의 대 문 앞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빨리 문 열어라!" 삐이걱 하며 문이 열리더니 중년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문 앞에 버티고 선 채 냉랭하게 물었 다. "당신, 누굴 찾소?" "계집질하러 왔다." 사나이는 두구를 훑어 보더니 역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후원의 별당은 이미 만원이 되었으니 내일 일찍 오시오." 그가 문을 닫으려고 했으므로 두구는 무릎으로 문을 버티어 닫지 못하게 하며 노한 음성으로 소 리쳤다. "건방진.... 저리 꺼져! 우리 이공자께서 특별히 이곳을 찾아 오 셨는데 네가 감히 공자님의 기분 을 상하게 할 작정이냐?" 사나이가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두구에게 대항하려고 했을 때 전엽청과 소영이 다가 왔다. 전엽 청은 그 사내와 두구가 충돌할까 봐 얼른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문을 아주 빨리 연 모양인데.... 좋았어. 사례금을 두둑이 주도록 해라." "네." 상팔이 대답하고 품 속에서 금조각 하나를 꺼내 사나이에게 주었다. "어서 우리 공자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려라." 사나이는 금조각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것은 고관대작이 아니고서는 뿌릴 수 없는 거액 이었던 것이다. 금조각을 받아든 사나이는 태도가 돌변해서 허리를 굽혔다. 이 틈을 이용하여 전엽청은 안으로 들어 섰다. 사내가 급히 막으려 했을 때는 소영, 상팔, 두구까지 모두 안으로 들어선 뒤였다. 이들 네 사람의 기세가 당당하고 차림새가 관가 사람들 같으니 사나이는 더 막지 못했다. 두구가 앞장 서서 들어가 모퉁이 하나를 도니 다른 사나이가 나타나서 앞을 막으며 물었다. "손님께선 객실을 정하셨습니까?" "아직 정하진 않았네. 제일 크고 조용하고 호화스러운 방을 주게." 그 사나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좋습니다. 소인을 따라 오십시오." 그 사나이는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 갔다. 소영은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뒤뜰의 풍경은 앞뜰과 달랐다. 앞뜰에는 모든 방에 불이 밝혀졌고 처마 밑엔 초롱불이 매달려 있었다. 그치지 않고 노래와 악기소리가 시끄럽 고 진짜 기생집의 분위기를 물씬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지붕 위엔 커다란 등불이 여러 개 켜져 대낮처럼 뜰을 밝히고 있었고 복 도엔 모두가 오색찬란한 꽃등이었다. 방문은 모두 두꺼운 천으로 가려져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 았고 사람들의 말 소리도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나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후원의 별채는 특수한 설계로 꾸며 고급의 손님만 받는 모양이구나.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나는지 밖에서는 짐작조차 못하게 꾸몄으니 기생집 같지 않다.'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전엽청의 뒤에 붙어 서서 긴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안내 하던 사나이가 방문 하나를 열었다. "자, 이리로 드십시오. 소인이 곧 기녀들을 불러 오겠습니다." 두구는 긴 복도의 끝까지 데려온 것이 수상하다고 생각하며 사나이에게 물었다. "방 안에 사람이 있나?" "손님이 있다면 제가 어찌 또 손님들을 이곳으로 모시겠습니까?" "좋아. 네가 들어가서 불 좀 켜라." 사나이는 안으로 들어 갔다. 두구는 문 앞에 서서 진기를 모아 가슴을 보호하며, 사나이를 따라 들어 가지는 않았다. 불빛이 번쩍하더니 한 가락의 초에 불이 붙었다. 불이 밝혀지자 두구는 비로소 안으로 들어 갔다. 방은 매우 넓어 사방 이 장은 되었다. 사방 벽에는 짙은 자색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탁자며 바 닥에 깐 주단이며 보료 등 모두가 최고급품을 사용해서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소인이 기녀들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사나이가 나가려고 하자 두구가 입을 열었다. "서두르지 마라. 우리 공자님은 지체가 높으신 분이니 내가 직책을 맡은 이상 소홀히 할 수 없다. 공자님에게 화가 미쳐선 큰일이니 좀 조사를 해야겠다." 두구는 벽을 가린 천을 들쳐 세밀히 검토하더니 사나이에게 말했다. "가 봐라. 술을 빨리 올리고 제일 아름다운 기녀들만 우선 들여보내라. 우리 공자께선 흥이 나시 면 이곳에서 하룻밤 묵으시게 될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너희들이 어떻게 대하느냐의 수단에 달 렸다." "나리는 네 분이신데 왜 두 기녀만 부르십니까?" "공자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두구가 불쾌한 어조로 말하자 사나이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나갔다. 그가 나가자 전엽청과 소영 은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상팔은 여전히 문 밖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이 낮은 음성으로 전엽청에게 말했다. "저쪽 복도에서부터 이곳 객실까지 두 겹의 문호가 있는 것이 어째 기원같지 않은데요." "내가 이미 벽을 조사했으나 적의 매복이나 이상한 장치를 발견하지 못했소." 두구의 대답에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백화산장의 망화루에는 층층마다 무서운 암기 장치가 매복되어 있소. 이 삼강서우도 심목풍이 경영하는 곳이라면 응당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을 거요. 우리는 방심하지 말고 각별히 주의해야 됩니다." 이때 상팔이 헛기침을 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름다운 아가씨구먼." 사람이 온다는 신호로 알고 전엽청은 급히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앉았다. 소영이 전엽청의 옆에 섰고 두구는 한쪽으로 물러가서 섰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주렴이 젖혀지더니 네 명의 미소녀가 향수냄새를 물씬 풍기며 나타 났다. 앞에 선 소녀는 소복차림을 했고 엷은 화장에 머리엔 붉은 꽃을 꽂았다. 그 뒤의 소녀는 녹색의 치마 저고리에 역시 간결한 차림새였다. 뒤에 두 소녀는 핏빛처럼 붉은 옷에 짙은 화장을 했으며, 그녀들 뒤에 시녀가 한 명 따르고 있었다. 시녀는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네 분이 우리 삼강서우에서는 가장 인기가 있는 분들입니다." 전엽청은 기녀들을 훑어 보더니 간결한 차림의 두 기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금조각 하나씩 드려라." 시녀를 따라 들어 섰던 상팔이 얼른 금조각을 두 개 꺼내 시녀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은 공자께서 앞에 있는 두 낭자에게 주는 것이다." 시녀는 금조각을 받으며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붉은 옷을 입은 두 기녀에게 나지막하게 말하고 는 먼저 나가버렸다. "갑시다." 붉은 옷의 두 기녀는 매우 기분이 나쁜 듯 입을 삐쭉거리며 홱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낭자, 앉으시오." 전엽청이 방에 남은 두 기녀에게 말하자 그녀들은 대담하게 앉았다. 소영은 그녀의 일거일동을 주시하며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전엽청은 어려서부터 무당산에서 성장했으므로 한 번도 여자와 마주앉아 본 적이 없었다. 이제 두 기녀와 마주앉은 그는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기녀들과 술 타령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두 기녀만 바라 보던 전엽청은 그대로 앉아 있기가 쑥스러워 입을 열었다. "낭자들은 삼강서우에 온 지 오래되었소? 이름이 무엇이오?" 흰옷을 입은 기녀가 대답했다. "소첩은 백매(白梅)라 하옵고 이 애는 동생인 녹하(綠荷)라 하옵니다." 녹색의 옷을 입은 기녀가 말을 이었다. "박명한 여자들이라 이런 곳에 오게 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온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이 여자들은 말하는 솜씨를 보니 다루기 쉽지 않겠다.' 전엽청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안상이 들어 왔다. 주안상을 들고 들어 온 시녀가 두구를 힐끗 바라 보더니 보조개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 나리께서도 시중이 있어야 되잖겠어요?" "이젠 늙어서 그런 생각이 없네." 상팔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두구도 한 마디 했다. "우리 공자 앞에서 버릇없이 까불지 마라. 너는 명재촉을 하고 싶으냐?" 시녀는 혀를 낼름 하더니 방을 나갔다. 백매가 술주전자를 들어 전엽청의 잔에 따르며 애교를 띠고 말했다. "나리의 존함은 어찌 되시나요?" "내 성은 정이라 하오." "정공자를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천기가 한잔 올리겠어요." 백매는 자기 술잔에 술을 따라 쭉 들이키더니 다시 술을 채워 전엽청에게 주었다. 전엽청은 그 술잔을 받아 입술로 맛을 보더니 백매에게 돌려 주었다. "낭자의 성의를 무시해 미안하오. 나는 원래 술을 조금도 못하오." "공자님, 술을 못 드신다면 요리나 많이 드시와요." 녹하가 은저(經書)로 닭고기를 한 점 집으며 말했다. "저희 자매가 정공자의 사랑을 받게 되니 몹시 영광이에요. 나리께서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신다 니 술을 더 권하지는 않겠어요. 그 대신 안주나 드시와요." 그녀는 전엽청의 입으로 고깃점을 가져 갔다.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게 된 전엽청은 매우 난 처했다. '먹자니 안 될 일이오.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겁장이로 보일 테고 이거 일이 난처하게 되었는 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엽청이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하나의 손이 나타나더니 녹하가 들고 있는 젓 가락을 잡았다. "우리 공자께서 어떤 신분이라고 낭자는 이토록 무례하게 구시오?" 그것은 소영이었다. 소영은 손가락에 진기를 모아 젓가락을 통해 녹하의 손으로 보냈다. '너희들의 거동이 아무래도 하류계 여성 같지는 않다. 너희들이 무공을 지녔는지 어디 시험 좀 해 보자.' 이런 생각에서 소영은 젓가락을 통해 내력의 공격을 한 것이었다. 녹하는 소영을 바라 보며 눈을 두어 번 껌벅이더니 갑자기 가느다란 비명을 지으며 젓가락을 놓았다. 이것을 본 소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러면 그렇지. 내가 뻗친 내력이 비록 세지는 않았지만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얼굴이 부어 오르고 눈이 충혈되어 비명을 질렀을 것인데 너는 고의적으로 젓가 락을 떨어뜨리며 놀란 척하고 있군. 그것은 너무 엉터리 연극이야.' "낭자, 왜 그러시오? 엄살이 대단하군." 녹하는 소영을 노려 보더니 전엽청에게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님, 이 서생은 무례하군요." 전엽청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담담히 웃었다. "낭자는 왜 그러시오? 어디 다치기라도 했소?" "비록 부상을 당하진 않았지만 깜짝 놀랐어요." "그가 낭자의 손가락도 건드리지 않고 살도 닿지 않았거늘 무엇을 그리 놀랐다는 것이오?" 녹하는 화난 표정을 지으며 전엽청에게 반문했다. "공자께선 정녕 보시지 못하셨단 말씀이세요?" "글쎄. 난 영문을 모르겠는데....." 녹하는 몸을 일으키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기는 비록 이런 곳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어렸을 적에는 글도 읽었사와요. 또한 기방(妓房)에 도 어엿이 행규(行規)가 있는 법이옵니다. 공자께서 천기를 아껴주시는 것은 감사하옵니다. 또한 공자께서 천기를 경박하게 보신다 해도 할 수 없사와요. 그러나 일개 종의 몸으로 천기에게 그토 록 무례하게 대하다니....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천기는 이런 모욕을 당할 수가 없사옵니다." "얘, 어서 앉아라! 이 정공자께선 풍채와 인품이 우아하고 고결하신 것으로 보아 고관대작의 직계 임이 분명하시다. 네가 어찌 잠깐의 수모를 빙자해 공자님께 무례를 범하려고 그러지?" 녹하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 다시 앉았다. 백매가 전엽청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자께선 너무 불쾌하게 생각지 마시와요. 천기의 동생은 워낙 성미가 급해서..... 그 성질 때문게 많은 단골손님들을 뺏기기도 한답니다. 호호호, 옛말에 대인은 소인을 나무라지 않는다 하였으니 공자께서 천기의 동생을 더 꾸중하시지 않으실 줄 믿사옵니다. 동생의 무례한 죄를 대신해서 천 기가 술을 올리겠사와요." 백매는 술잔을 들어 잔을 비우더니 다시 술을 따라 전엽청에게 내 주었다. '흥, 잘들 논다. 기껏해야 너희들이 술과 음식을 권하는 수작밖에 안 부리는구나. 필경 이 음식에 는 무슨 곡절이 있으렷다.' 소영이 그녀들을 더욱 의심하여 경계하는데 전엽청이 술잔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마시는 시늉을 했을 뿐 도로 잔을 내려 놓았다. 백매는 더 이상 권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소영에게 얼굴을 돌려 추파를 던지며 말했다. "소관(小官), 오늘 저의 동생 녹하는 정공자께서 부르신 것이에요. 우리의 행규로는 한 사람에게 불린 이상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 수는 없어요. 그러나, 오늘 저녁 정공자께서 녹하의 시중을 거 절하신다면, 내일 일찍 오세요. 녹하가 시중을 들도록 하겠으며 그땐 어떤 행동을 해도 녹하가 화 를 내지 않을 것이에요." 이 말을 들은 소영은 인피가면 속으로 얼굴을 붉혔다. 94. 가짜 기생과의 싸움 기생, 백매의 말에 소영은 귀밑까지 얼굴을 붉혔다. 만일 그가 인피가면을 쓰지 않았더라면 홍시 처럼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해 당황했을 것이다. 강호에 경험이 많고 매사에 치밀한 상팔은 소영의 마음이 움직여 일을 그르칠까 봐 걱정이 되었 다. 그래서 얼른 입을 열었다. "이 소관은 비록 우리 공자님의 종이긴 하나 공자님과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 온 처지이니 피차간 에 마음이 잘 통하는 사이요. 그러니 경박한 행동이랄 수 없지." 백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이상하군요. 천기가 보기에 공자께선 스물이 넘으셨겠고, 소관가는 체격은 크지만 얼굴 로 보아서는 겨우 열 대여섯에 지나지 않을 것 같군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다면, 칠, 팔 세의 나이 차이가 있을 수 있겠어요?" '흥, 이 기생은 무시하지 못할 계집이구나.' 상팔은 가슴이 뜨끔했으나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모르는 소리요. 소관가는 마음이 천진스럽고 고민을 하지 않아 어려 보이지만 이미 스물이 넘었소." 이때 문 밖에서 두 기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백매, 녹하, 손님을 받으시오!" 두 기녀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공자, 잠시 앉아 기다리세요. 천기는 손님을 모셔드리고 곧 돌아오겠어요." 전엽청은 기원 출입이 처음인지라 이런 경우에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자 상팔이 그녀들 앞을 가로막았다. "두 낭자께선 어디를 가려고 그러시오?" "손님을 영접하고 오겠어요." 백매의 대답에 상팔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공자께선 많은 기원을 드나드셨지만 기녀가 손님을 이중으로 받는 것을 못 보셨소. 두 분 의 화대가 얼마나 되는지 청구하시오. 오늘은 우리 곁에서 아무 데도 나가면 안 되오." "행규에 어긋납니다. 공자께서 금이 많다 하셔도 우리는 욕심을 낼 수 없어요. 행규가 있으니까 요." "낭자들은 우리 공자의 신분을 아시오?" "모릅니다." "강남순찰사 정대인의 둘째 아드님이시오."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순찰사의 아드님이 아니라 황태자가 오신다 해도 천기들은 행규를 어길 수가 없사옵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에 낭자들을 꼭 데리고 있어야겠소." 상팔은 한 마디로 잘라 말하더니 두구에게 명령했다. "그 하인을 불러라!" "네." 두구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더니 방금 두 기녀를 찾던 하인을 데리고 들어 왔다. 상팔은 그를 바라 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자네가 당직인가?" "그렇습니다. 나리께서 무슨 분부라도 계십니까?" "이 두 낭자의 몸값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 공자께서 저녁 내내 살 테니 그리 알게!" 하인은 기생들을 돌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낭자들은 우리 삼강서우에서 가장 일류에 속하는 기녀입니다. 상대하는 분들이 모두 이곳의 유지와 유명인사들입니다. 두 아가씨를 보내지 않고는 못 배길 손님들이 왔는데 만일 손님들이 이 낭자들을 묶어 두신다면 오늘 저녁 이곳엔 큰 난리가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쥐꼬리만한 악주부의 명사들이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공자께서 이미 두 낭자에게 마음을 두셨으니 절대로 놓아 줄 수는 없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소인이 두 낭자를 데리고 가서 그 손님들을 적당히 구슬려 놓고 한 시 간 이내에 다시 보내겠습니다." 하인의 말에 전엽청이 발끈 화를 냈다. "몹시 무례하구나. 나의 흥취를 깨뜨렸으니 뺨을 후려 갈겨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구가 하인의 뺨을 후려 갈겼다. 두구의 손놀림이 매우 빨랐으나 하 인은 가볍게 피했다. 그러나 두구의 왼손이 바로 뒤따를 줄은 몰랐다. 뺨을 얻어 맞은 하인은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했다. 그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눈을 부라리며 대들 었다. "왜 무고한 사람을 때리시오?" "이놈! 그것은 약과다. 더 이상 우리 공자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간 아예 목을 잘라 버리겠다." 두구가 호통치자 백매가 두구의 옆으로 다가 서며 차갑게 비꼬았다. "솜씨가 대단하시군요." 상팔은 두구가 하인의 뺨을 쳤으므로 곧 일전이 벌어질 것이라 짐작했다. '이놈은 두구의 손길을 피하는 동작이 매우 빨랐다. 보통 놈이 아니다. 분명 무공이 높을 거다.' 상팔은 이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것을 본 두구가 곧 몸을 날려 상팔의 곁에 서며 문을 막았다. 상팔은 하인과 백매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낭자! 빨리 자리에 가서 앉지." 백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분이 함부로 사람을 때린 것은 지나친 행동이에요." 소영이 전엽청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 두 계집이 몹시도 건방져 따끔한 맛을 보여 주기 전에는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지 않구려." 전엽청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번쩍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백매의 허리를 공격하며 소리쳤다. "썩은 계집들! 뉘 앞이라고 감히 요사스런 주둥이질이냐?" 백매는 전엽청이 덤벼들자 더 숨기지 않고 민첩하게 몸을 날려 피하며 말했다. "왜 이러세요?" "흥, 네가 본래 무공을 지녔었군. 그래서 순순히 말을 듣지 않고 콧대가 높아 까불었구나." 전엽청은 연속 삼장을 백매에게 날렸다. 이 삼장은 모두 무당 문중의 절초였다. 두 손을 놀리는 동작이 매우 빨라 웬만한 사람들은 일초도 견디기 힘든 공격이었다. 그러나 백매는 날렵하게 몸을 날리며 전엽청의 공격을 모두 피하는 것이 아닌가. "대단한 신법이군." 상팔이 말과 함께 백매의 뒷덜미를 잡으려고 손을 뻗쳤다. 그러나 백매는 이번에도 재빠르게 몸 을 숙이며 상팔의 공격을 피했다. "흥, 낭자는 제법 쓸 만한 신법을 지녔는데......" 상팔은 한 마디 비꼬며 두 손으로 연거푸 사초의 공격을 퍼부었다. 백매는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상팔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해 냈다. 이것을 본 소영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 계집들의 신법이 매우 빠르구나. 만일 백화산장의 계집들이라면 금란, 옥란의 위일 텐데, 무슨 신법인지 도무지 알지를 못하겠구나.'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백매도 무서운 고수들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더욱 경계를 하고 있 었다. 그녀는 상팔의 공격을 피해 낸 뒤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여러분은 도대체 신분이 무엇이에요? 관가에 계신 분들이라면 그토록 빠른 신법을 구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 "낭자의 신법은 기묘하지만 강호의 견문에는 밝지가 못하군." 상팔의 말에 백매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피차간에 결투를 하게 되었으니 신분을 밝히는 것도 도리일 텐데!" "낭자는 절대로 기생의 신분이 아닌 듯한데, 먼저 낭자의 신분부터 밝히는 것이 어떨까?" 백매는 대답을 않고 상팔을 노려 보더니 돌연 손톱으로 옷을 가볍게 내려 그었다. 그러자 흰 옷 이 칼로 벤 듯 곧게 베어지며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 내렸다. 백매가 흰 옷을 베어 던지니 속에는 찰싹 달라 붙은 경장차림새였다. 검정색 경장차림에 허리에 는 흰색의 띠를 매었고 거기에는 네 자루의 비수가 꽂혀 있었다. 이때 상팔은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으며 전엽청은 술상 앞에 서 있었다. 소영은 전엽청의 뒤에, 녹하는 나무 걸상에 앉아 이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경장차림을 드러낸 백매는 양쪽에 서 있는 전엽청과 상팔을 둘러 보더니 싸늘하게 엄포를 놓았 다. "여러분들은 이미 집 안에 들어선 격이니 이제는 감추려 해도 얘기하지 않고 못 견딜 거예요." 상팔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낭자의 엄포 그럴 듯하군. 낭자는 도대체 백화산장에서 어떤 지위에 있는 신분이지?" 백매는 흠칫하며 대꾸했다. "여러분께서는 이미 나의 정체를 알고 계셨군요." "그럼 낭자는 이 삼강서우의 비밀이 철저한 줄 알았소?" 백매는 사태가 긴박함을 느끼자 녹하를 바라 보며 말했다. "녹하, 이들은 정체를 가리고 이곳에 나타났지만 모두가 무림의 일류 고수들이 분명하다. 나 하나 의 힘으로는 좀 벅찰 것 같으니 너도 나서서 도와 줘야겠다." 녹하는 담담하게 웃으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긴 치마와 저고리를 벗어 던졌다. 그녀는 녹색 의 경장차림을 드러냈는데 역시 네 자루의 비수를 지니고 있었다. 상팔은 두 소녀의 비수를 눈여겨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두 계집의 무공이 한 계통이니 우리는 한 계집의 빈틈만 찾아 내면 되겠다. 힘들이지 않고 상대 하려면 역시 빈틈을 빨리 찾아 내야지.' 녹하는 가볍게 손을 허리에 대더니 두 개의 비수를 양손에 하나씩 갈라 쥐었다. 싸움이 붙고야 말 긴박한 정세에서 소영은 다른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녹하가 소리를 질렀고 또 하인이 이곳에 잡혔는데도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을 보니 밖 에서는 필시 어떤 대비책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소영이 이런 염려를 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상팔은 녹하의 말에 대꾸하고 있었다. "좋아, 낭자가 손에 쥔 비수로 어떤 절초를 만들어 내는가 한 번 시험해 보겠다." 상팔이 녹하의 앞으로 나서는 것을 소영이 급히 막았다. "내가 먼저 상대하겠소." 소영은 상팔을 물러서게 하고 녹하를 보며 말했다. "낭자께서 소생을 좋게 보지 않았을 텐데. 어디, 실컷 분풀이를 해 보시는 것이 어떻소?" "흥, 너는 죽어야 마땅해." 녹하는 씹어 뱉듯 말하더니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두 줄기의 싸늘한 검광이 소영을 향해 비호 처럼 덤벼 들었다. 불빛 아래 번쩍이며 소영의 심장을 향해 찔러드는 비수를 본 전엽청과 상팔은 흠칫 놀랐다. '이 계집의 동작은 매우 빠를 뿐만 아니라 초식이 절묘하구나.' 이런 생각에 그들은 상대방을 얕보는 마음이 싹 가시고 말았다. 소영은 단전의 진기를 모아 무릎을 구부리지 않은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가볍게 공격을 피했 다. 녹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너는 도대체 어떤 신분인지 정체를 밝혀라." "후후, 그냥 종의 몸에 불과해." "네 무공은 공자보다 위인 듯싶은데?" "칭찬해 주니 고맙군." 소영은 빈정대며 생각을 굴렸다. '이 계집들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니 빨리 굴복시키는 것이 좋겠다. 강적들이 밖에서 몰려 와 안 팎으로 협공을 당하면 불리하니까.......' 이 때였다. 푸른 옷을 입은 하인이 돌연 몸을 솟구치더니 상팔에게로 덮쳐 갔다. 파란 빛이 번쩍 이는 것으로 보아 그의 손에 비수가 들린 것이 분명했다. 상팔은 급히 왼손으로 하인의 오른손 맥혈을 찍으며, 오른손으로 장력을 내뿜었다. 그의 일초는 번개보다 빠르고 폭풍보다 거세었다. "으흑!" 하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개울가에 내던져진 개구리처럼 사지를 버둥거리 더니 피를 울컥 토하고는 쭉 뻗어 버렸다. 상팔은 어제 저녁의 분풀이를 하듯 일격으로 상대방을 죽인 것이다. 그는 하인을 공격하며 그의 손에 들었던 비수를 빼앗아 들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무림의 고수들이구나.' 하인이 상팔의 일격으로 뻗어 버리는 것을 본 백매는 흠칫했다. 그러나 표정만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태도로 보아 어느 파리 한 마리가 죽었는가 하는 듯 싶었다. 소영은 두 소녀가 하인의 주검에 눈을 돌리는 사이에 재빨리 교피장갑을 꺼내 손에 끼었다. 전엽청이 하인의 시체를 힐끗 바라 보더니 두 소녀에게 말했다. "두 낭자께서 총명하다면 우리에게 항복하는 것이 어떻소?" "글쎄올시다." 백매가 코대답을 하더니 몸을 솟구쳤다. 그녀는 양손에 하나씩의 비수를 쥐고 상팔에게 덮쳐 갔다. 백매가 몸을 날리는 순간 녹하도 소영의 앞가슴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소영은 이미 그녀가 공격 해 올 것을 짐작했기 때문에 몸을 피하지도 않고 한 손으로 비수를 잡았다. 소영이 비수를 잡으려는 것을 본 녹하는 짐짓 양양해졌다. '흥, 이 비수가 보통 쇠인줄 아나? 아무리 손바닥에 철판을 깔았다 해도 이것을 잡진 못하지.' 일부러 찌르는 속력을 늦추어 소영의 손에 잡히게 했다. 그녀는 소영이 비수를 잡으면 내력을 가해서 좌우로 비틀려고 한 것이었다. '네 놈의 손가락이 모조리 잘려 나가 피투성이 손으로 앞으로는 두부도 건드리지 못하게 될 것이 다.' 이런 생각을 한 녹하는 소영이 비수를 잡자 즉시 내력을 가해 비틀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비수는 두꺼운 철판에 박힌 듯 꼼짝도 안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은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고 있잖 은가? 녹하는 십분의 공력을 다 쏟아 비수를 틀어 보았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녹하는 기겁을 하도록 놀 라며 급히 왼손으로 소영의 오른 손목을 찍었다. '흥, 요 계집애는 매우 괘씸하게 굴었으니 어디 맛좀 보여 주자.' 소영은 내력을 발휘해서 앞으로 손을 끌어 들였다. 그러자 놀라운 힘에 의해 오른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소영에게 뻣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왼손은 이미 거두어 들일 틈이 없어 자신의 오른 팔목을 팍 때리고 말았다. 녹하의 왼손이 내려치려는 찰나에 소영이 비수를 잡아 당겼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장력으로 자 신의 팔을 때린 것이다. 그러나 녹하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위기일발의 순간에 장력 의 힘을 뺐다. 그래서 비록 오른팔을 맞기는 했으나 대단치는 않았 다. 소영은 비수를 뺏아 드는 것과 동시에 전광석화처럼 오른손을 뻗쳐 녹하의 왼쪽 어깨를 찍었다. "으흑!" 녹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비틀비틀 물러나다가 털썩 주저 앉았다. 이때 백매와 상팔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백매는 두 자루의 비수로 기묘한 절초를 만들어 상팔을 연방 공격했다. 상팔은 맨손으로 백매의 비수를 퍼하며 그녀의 손목을 찍으려고 했다. 백매는 차츰 상팔에게 제압당하고 있었지만 소영은 시간을 단축할 필요를 느꼈다. '앞으로 십 합만 겨루면 상팔이 완전히 우세하게 되고 이십 합이면 백매의 손에서 비수를 뺏을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을 끌면 불리하니 상팔을 좀 도와 줘야겠다.' 소영은 곧 진기를 끌어 모아 은근히 오른손을 움직여 수라지력을 백매의 허벅지를 향해 뻗쳤다. 한 줄기 강한 기운이 그녀에게로 곧장 뻗어 갔다. 백매는 오른쪽 허벅지에 무시무시한 지력을 맞 고 깜짝 놀랐다. 다리가 찌르르 저려 오는 바람에 비틀거렸다. 상팔은 누워서 떡 먹는 식으로 백매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아 들 수 있었다. 그는 소영이 암중으 로 자기를 도와 준 것을 알아 차렸다. 백매는 넓적다리에 심한 일격을 맞고 이미 항거할 힘을 잃 었다. 그녀는 상팔에게 양쪽 어깨의 혈도를 찍히자 이를 갈며 소리쳤다. "누가 나에게 암수를 썼지?" 소영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소생이 했소이다." "당신이? 어떤 무공인데....." 소영은 수라지력을 유선자에게서 배운 것을 심목풍이 알고 있기 때문에 알려 줄 수가 없었다. 그 래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그저 하기 쉬운 일지를 썼을 뿐이지." 백매는 소영을 노려 보더니 녹하를 돌아 보며 물었다. "많이 다쳤니?" "부상당하진 않았어요. 다만 관절을 찍혀 움직일 수 없을 뿐이에요." 녹하는 왼쪽 어깨의 관절을 찍혔던 것이다. 이때 상팔이 비수를 백매의 얼굴에 대더니 차갑게 위협했다. "낭자가 이토록 아름다운 미모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면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시오." "그거야 묻는 말을 들어 봐야 대답의 여부가 있지요." 백매의 응수에 상팔은 피식 웃더니 이내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낭자들은 백화산장에서 왔지?" "그래요." "심목풍은 지금 어디에 있소?" "심대장주의 신비스러운 행동을 소녀가 어찌 알겠어요? 혹시 이 객실에 돌연 나타날지도 모르지 요." 백매는 빈정거리는 투로 대답하더니 상팔에게 반문했다. "당신들이 이곳에 변장을 하고 나타난 것은 어떤 목적이 있을 텐데요?" 그녀는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상팔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고운 얼굴은 여자에게 있어서는 생명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기에 은근히 마음을 죄고 있었던 것이다. "흥! 그건 알 필요 없고.... 낭자의 아름다운 얼굴에 만일 내가 실수로 칼자국이라도 낸다면 너무 도 아까운 일인데...." 상팔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자 백매는 화를 파르르 냈다. "당신들은 오늘 밤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후후, 그것은 내가 낭자에게 묻고 싶은 말인데?" 이 때였다. 돌연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일장 더 받아 보시지." 하는 그것은 두구의 음성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전엽청은 장검을 번뜩이며 급히 밖으로 뛰어 나 갔다. 문 밖에선 기합소리와 무기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 왔다. 매우 치열한 싸움이 붙 은 모양이었다. "강적들이 이미 정면으로 덤벼 들고 있는 것 같은데 이 계집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상팔의 물음에 소영이 대답했다. "백화산장의 모든 인물들은 하나같이 악행을 저질렀소. 허나 이 계집들은 이미 반항할 능력을 상 실했으니 구태여 죽일 필요는 없소." 상팔은 비수로 백매의 얼굴에 가볍게 상처를 내며 말했다. "내가 손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야. 심목풍이 이곳 악주성에 왔지?" 백매는 날카로운 눈으로 상팔을 노려 보더니 스르르 내리 감으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당신은 질문할 권리가 있소?" 그녀는 이를 악물어 울분과 저주를 참고 있는 듯했다. 소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두 낭자를 너무 탓할 수는 없지. 백화산장엔 규율이 엄하고 심목풍에게 겁들을 먹고 있기 때문 에 입을 열 리가 없소. 그녀들을 죽이진 말고 혈도나 찍어 놓읍시다." "그렇게 하지." 상팔은 재빠르게 백매의 두 곳 혈도를 찍었다. 이 때였다. 벽에 늘어져 있는 천이 움직이며 차가운 바람이 소영의 등줄기를 향해 들이 닥쳤다. 소영은 이때 녹하의 혈도를 찍으려던 참이었다. '암습이구나!' 소영은 오른 팔꿈치로 녹하의 혈도를 찍으면서 왼손을 재빨리 뒤로 돌려 날아드는 암기를 잡았 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들었던 녹하의 비수를 암기가 날아 온 방향으로 던졌다. ".....윽!" 천 속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상팔이 재빨리 달려가 천을 힘껏 잡아 당겼다. 천이 쭉 찢어지 며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심장에 정통으로 비수가 꽂혀 죽어 있었다. 그 사나이의 몸 뒤에는 비 밀문이 채 닫히지 않아 약간 열려 있었다. 사나이는 그곳을 통해 나타난 모양이었다. "조심해야겠소. 이 객실엔 여러 가지 장치가 있을 것이오." 상팔의 말에 소영은 문을 향해 걸었다. 그 뒤를 상팔이 따랐다. 문을 나서니 검광이 눈부시게 번쩍이고 있었다. 전엽청이 장검으로 무지개빛 검광을 뿌리며 괴한 과 싸우고 있었다. 두구는 이미 상대에게 몰려 정원으로 내려간 듯했고 전엽청은 바로 문 앞에서 싸우고 있었다. 소영은 전엽청의 곁으로 다가서며 찔러 오는 적의 장검을 맨손으로 잡았다. 상대방은 소영이 맨 손인 것을 보고 안심하여 검을 힘껏 찔렀으나 검은 소영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괴한이 얼떨떨하는 찰나에 전엽청이 재빨리 장검으로 괴한의 가슴을 찔렀다. 괴한은 외마디 비명 을 지르며 푹 거꾸러졌다. 괴한이 처치되자 소영은 재빨리 몸을 날려 뜰로 내려 섰다. 그 곳에서는 두구가 네 명의 장정과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그 네 명의 사나이들은 장검으로 두구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검술이 모 두 뛰어났다. 두구는 철필과 은권을 갈라 쥐고 네 장정과 싸우고 있었다. 소영은 괴한에게서 뺏은 장검을 휘두르며 두 괴한의 장검을 막아냈다. 소영이 나타난 것을 본 두 구는 용기백배해서 나머지 두 장정을 상대로 기묘한 초식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그의 철필이 한 장정의 어깨를 찍었다. 철필에 어깨를 찍힌 장정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것을 본 소영은 재빨리 그의 왼쪽 정강 이를 걷어 찼다. "윽!" 장정은 다리뼈가 부러지며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 소영은 그 장정의 정강이를 차는 것과 동시에 장검을 휘둘러 다른 장정의 팔을 잘라 버렸다. 두구를 협공하던 네 명의 괴한 중 이미 두 명이 소영에게 공격을 받아 나둥그러졌다. 겁을 집어 먹은 두 명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죽으나 도망가다가 죽으나 마찬가치다. 이 멍텅구리야!" 소영은 물찬 제비처럼 몸을 날려 두 장정에게 덮쳐 갔다. 도망가던 두 장정은 등 뒤로 따라오는 바람소리를 느끼고 고개를 돌려 칼을 휘둘렀다. 소영은 한 장정의 칼을 맨손으로 후려 갈기며. 장검으로는 다른 장정의 팔을 쳐서 칼을 떨어뜨리 게 했다. 한쪽 팔을 잃은 장정은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려고 도망쳤다. 소영은 재빨리 수라지력을 그 장정의 등줄기를 향해 날렸다. "으악!" 장정은 비단폭을 찢는 듯한 비명과 함께 푹 거꾸러지더니 사지를 쭉 뻗어 버렸다. 소영은 그가 넘어져 죽는 것을 보자 아직도 칼을 들고 달아나는 장정 하나를 향해 장검을 내던졌 다. 메뚜기처럼 도망치던 장정은 급히 칼을 휘둘러 소영이 날린 장검을 후려 쳤다. 그러나 소영이 내력을 모아 던진 장검은 그 장정이 휘두른 칼을 부러뜨리며 그대로 뚫고 들어 갔다. "으악!" 장정은 가슴에 장검을 맞고 벌렁 나자빠져 그대로 버둥대다가 숨이 지고 말았다. 이때 이머 두구는 부상당한 두 장정의 목숨을 끊어버린 뒤였다. 네 명의 장정을 모두 죽였으나 다른 사람이 공격해 오진 않았다. 뒤뜰 전체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할 뿐이었다. 대낮처럼 지붕을 밝히고 있는 등불이 기분 나빴다. 두구는 무서운 침묵이 마음에 걸리는지 소영의 곁으로 다가서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이젠 어떻게 하지요?" "글쎄.... 아무래도 수상하군요 지붕엔 등불이 대낮 같은데 뜰엔 등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으니....." 전엽청이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우리의 출현이 삼강서우를 발칵 뒤집을 만한데 지금 이처럼 조용하기만 하니..... 분명 어떤 흉계 가 있을 것이오." 이 때였다. 남쪽에 있는 방 안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너희들은 이미 완전히 포위되었다. 사방에 쇠털처럼 가는 독침이 수만 개 깔려 있어 내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너희들이 파리나 잠자리로 둔갑을 한다 해로 이 독침을 피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소영은 진기를 모아 사방을 경계하며 전엽청에게 소곤거렸다. "전형, 저놈에게 말대꾸 좀 하시오. 나는 그 사이에 형세를 살피겠소." 전엽청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요?" "노부가 누구라는 것을 아는 것보다 너희들의 생명이 내게 달렸다는 것을 알면 된다. 지금 너희 들에겐 두 갈래의 길이 있다. 그 하나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침에 맞 아 죽는 것이다." 전엽청은 코웃음을 쳤으나, 상대방의 비위를 거슬려 당장 독침세례를 받고 싶지는 않아 입을 다 물었다. 그러자 다시 암실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 뒤뜰의 객실에는 여러 가지 비밀장치가 되어 있다. 단 한 자의 공간도 없다. 너희들이 잘난 무공을 믿고 까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 둬라." 전엽청이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소영에게 물었다. "어떡하죠?" "사방의 형세를 보니 저놈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소. 우리는 우선 아까 앉아 있던 객실로 들 어 가서 탈출할 방법을 뚫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때 상팔의 음성이 들렸다. "두 낭자는 점잖게 구는 것이 신상에 좋을 거야. 나는 여자라고 해서 봐 주는 성질은 아니니까." 상팔은 백매와 녹하를 양 어깨에 하나씩 걸머지고 나오고 있었다. 이것을 본 두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빨리 객실로 돌아 가시오." "그 안에는 있을 곳이 못 되네." "그건 왜요?" "독연기를 뿜어 내고 있네. 들어가야 독연기의 밥이 될 뿐이네." "알고보니 우릴 그 방에 가두어 놓고 독연기로 죽이려고 했군." 전엽청이 상팔과 두구 사이로 비집고 들며 말했다. "이 뜰의 사방엔 암기가 꽉 차 있소. 우린 적의 포위에 걸렸소." 상팔은 사방을 훑어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들이 암기를 퍼붓는다면 우리는 이 두 낭자를 방패 삼을 수밖에 없겠군." 이때 북쪽의 방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관을 보고서야 눈물을 흘릴 어리석은 놈들이군. 좋아 내가 한 가지 보여 주지." 소영은 급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사방에 전부 암기가 있으니 각자 한쪽씩 맡으시오." 그는 재빨리 몸을 날려 장정의 시체 하나를 끌어 안고 들어 왔다. "내 너희들의 눈을 뜨도록 해주겠다." 북쪽 방에서 다시 음성이 들리더니 갑자기 두 마리의 새가 날아 올랐다. 두 마리의 새가 지붕 위 까지 솟아 올랐을 때였다. 싯! 하는 소리와 함께 수천 개의 은빛이 새를 향해 날아 갔다. 그러자 두 마리의 새는 땅에 떨어져 버렸다. '음, 몹시 가느다란 암기에 독이 묻어 있는 것이 분명하구나.'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시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너희들 중 누가 소영이냐?" 소영이 흠칫 놀라며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 상팔이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무엇을 착각한 모양이군. 만일 여기에 소영이 있다면 너희들은 벌써 소영의 장풍에 날 아 갔을 것이다." 그러자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가슴을 죄어 오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을 깨뜨리며 두구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남, 북, 양쪽 객실에 적이 숨어 있으니 그 객실로 덮쳐 들어가 우선 충돌을 한 뒤 방법을 모색합 시다." 잔꾀가 많은 상팔도 이런 형세 속에서는 묘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객실로 뛰어든다는 것 도 쉬운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수한 암기가 객실에서도 뿜어 나올 텐데.....' 네 사람은 입을 다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숨막힐 듯한 침묵만이 점점 밀도를 좁혀 오고 있을 뿐 이었다. 95. 두 여인의 희생 이윽고 상팔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소영에게 말했다. "형님, 그들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니 시간적으로 우리가 매우 불리합니다. 그러 므로 소제 생각 같아서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 갈 수밖에 별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네 사람 중 오직 형님만이 살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것 같으니, 우리들 걱정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영이 말을 받았다. "그 암기는 폭풍우처럼 휘몰아치기 때문에 나는 새도 피해 날아 가기가 힘들 정도이니 자신이 있 을는지요?" 두구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형님, 상형의 말 뜻은 이러합니다. 우리 네 사람 중에서 세 사람은 어차피 죽기 십상일 것이며 또한 죽는다고 하더라도 무림의 대국(大局)에 미치는 영향은 별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님의 생사는 무림의 판도에 끼치는 영향이 그야말로 중대한 것이므로 우리들 중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형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안 되오. 그건 안 되오. 우리들은 모두 살아날 기회가 있소. 어째서 우리 네 사람 중에 살아야 할 사람이 나뿐이란 말이오." 전엽청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대협은 아직도 중주이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그들 두 사람의 뜻인즉 이런 상황에서 는 소대협, 당신의 안전만을 보호하자는 것이오." 전엽청은 이어 말했다. "때에 따라서는 우리들 세 사람은 소대협을 둘러싸고 그 암기독침에 상하는 한이 있더라도 소대 협에게는 조금도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소영이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네 사람은 공동 운명체요. 내가 어쨌든 길을 열겠으니 우선 저 북쪽 방 으로 들어 갑시다. 거기서 방법을 모색해 봅시다." 그가 말을 마치고 눈길을 돌리자 백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향해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 다. 소영은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상형! 상형이 그녀들의 아혈(啞穴)을 찍었소?" 상팔이 대답했다. "나는 이 두 계집애가 혹시 소리를 지를까 두려워 아혈을 찔렀소." 소영이 타이르듯 말했다. "이 백낭자의 혈도를 풀어 주시오." 상팔은 소영의 말이라면 언제나 무조건 복종이었으므로 더 무어라 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백매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백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소영을 바라 보고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이 소대협입니까?" "그렇소. 내가 소영이오." 백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옥란 아가씨를 아십니까?" 소영은 금란과 옥란에 대한 말이 나오자 몹시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녀들이 실종된 후로 여태껏 소식을 모르고 지낸 터였다. 그래서 가볍게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지요. 그런데 아가씨도 옥란 낭자를 알고 있소?" 백매가 대답했다. "나와 옥란은 아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백매는 갑자기 금성을 낮추며 말을 이었다. "그 북쪽 방으로 뛰어들 수는 없습니다. 암기가 빗발치듯 몰아치므로 도무지 기회가 없을 것입니 다." 소영은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무슨 양책이라도 있으신지요?"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오직 소대협께서는 우리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영이 반문했다. "무슨 방법이오?" "나와 동생 녹하를 놓아 주십시오." 그러자 상팔이 싸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얕은 수작 쓰지 마라. 나 상팔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다. 너 따위 계집애의 꾀에 넘어갈 줄 로 아느냐?" 백매가 말을 이었다. "당신네들은 어차피 기회가 없습니다. 오직 이것만이 한 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천만의 말씀. 우리가 너희들 둘을 인질로 잡고 있다면, 그들이 우리들에게 함부로 암기를 쓰지는 못할 것이다." 백매는 그 말을 듣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당신은 아직도 심목풍의 성격을 모르는 것 같군요. 우리 두 계집 뿐만 아니라 우리들보다 몇 십 배나 더 중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만일 당신네들을 죽이려고 한다면 인질 따위를 생각할 사람이 아닙니다." 드디어 소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형, 그녀들의 혈도를 풀어 주고, 팔의 맥이 통하게 해 주시오." 상팔이 어리둥절해서 반문했다. "정말 그녀들을 풀어 주는 거요?" 소영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팔은 소영의 말대로 백매의 혈도를 풀어 준 후 입을 열었다. "녹하 아가씨는 어떻게 하겠소?" "함께 풀어 주시오." 상팔은 두 여자의 혈도를 모두 풀어 준 뒤 소리 높여 말했다. "두 분은 이제 가도 좋소이다." 백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소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들에게 당신네들이 풀어 줬다는 것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두구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네들이 스스로 빠져 나온 것처럼 꾸며야 한단 말이오?" 백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서 두 분께서는 우리 자매와 몇 수 겨루어야 합니 다." 상팔이 빈정거렸다. "우리 부처님을 서천(西天)으로 보냅시다. 그러면 두 아가씨들은 그 곳에서 몇 배의 암기를 더 보 탤 것이니....." 말을 마치자 상팔은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질풍처럼 백매를 향하여 일장을 쳐 냈다. 백매는 재빨 리 장풍을 피하면서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대협, 나의 비명을 들은 뒤 곧 북쪽 방을 향해 뛰어 들어 가십시오." "알았소이다." "여자의 말이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상팔이 빈정대면서 쌍장에 힘을 주어 연거푸 사초를 공격해 냈다. 이들이 주고받은 말은 모두 나 지막한 음성이어서 주위에 매복해 있는 사람들도 확실히 알아 듣지 못했다. 녹하는 손을 돌려 전엽청을 향해 쳐 내며 말했다. "감히 나의 일장을 받아 보시겠습니까?" 전엽청은 코웃음을 한 번 친 후 손을 휘둘러 그 일장을 막아 냈다. 그는 소영이 두 여자를 석방 한 일에 대해서 속으로 매우 꺼림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녹하의 일장을 받자 모든 화풀이를 그녀에게 하려는 듯 오른손을 휘둘러 전력을 다해 장을 쳐 냈다. 쌍장이 마주치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가벼운 진동이 일어났다. 녹하는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서너 발자국 물러서며 비틀거렸다. 백매도 장을 헛치며 녹하를 따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높은 음성으로 외쳤다. "동생, 상처가 중한가?" 그녀는 한편으로는 말을 하면서 한편으로 북쪽 방을 향해 뛰어 갔다. 전엽청이 말했다. "소대협의 이처럼 인자한 태도는 과연 쉽지 않은 일이오. 그래서 나는 감복하는 바 크오." 소영은 그가 속으로 자기가 두 여자를 석방해 준 데 대해 불만을 품고 비꼬는 것임을 알아 채고 도 못 들은 척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엽청이 말을 계속 거들었다. "그러나 강호에는 흉한 일로 가득차 있으므로 소대협의 그와 같은 인자한 처사를 강호에서는 결 코 정당한 일로 인정치 않을 것이오." 소영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두 여자를 그대로 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오늘 저녁에 빠져 나가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오." 전엽청이 대답했다. "소대협은 적을 아껴 주었지만 적들은 우리들을 생각해 주지 않을 거요. 그러니 두 여자를 놓아 준 것은 호랑이를 산에다 풀어 준 거나 다름 없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외마디 비명이 울려 나왔다. 소영이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빨리 뛰어 갑시다." 전엽청, 상팔, 두구 등도 소영의 뒤에 바싹 붙어서 북쪽 방을 향해 뛰어 갔다. 그 순간 공기를 가 르는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남쪽에 있는 집 안에서 수많은 암기가 질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소영은 들고 있던 시체를 휘둘러 은침을 막아 내면서 외쳤다. "빨리 뛰어 가시오." 네 사람의 동작은 지극히 빨라 단번에 일장 정도 뛰어 갔으므로 은침의 세력권 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영이 수중의 시체로 대부분의 은침을 막는 동안에 전엽청 등은 이미 복도에 올 라섰다. 이때 북쪽의 공중에서도 암기 은침이 날아 왔다. 그 거리는 불과 일장도 되지 않았으므로 소영이 제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하더라도 자칫하면 그 암기에 상할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소영은 놀랍게도 손에 든 시체로써 은침을 막고 복도에 올라 섰다. 상팔, 두구, 전엽청 등은 모두 무기를 들고 복도의 벽에 바싹 붙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영이 이상히 여겨 물었다. "여러분은 왜 방에 들어 가지 않는 거요?" 전엽청이 대답했다. "소대협을 기다리는 거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몸을 날려 발로 문을 걷어 차고는 한 쪽으로 피했다. 그러자 연약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여러분들, 들어 오세요." 그 음성은 바로 백매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연약하기 이를 데 없어 중상이라도 입은 듯했다. 소영은 좌장으로 안면을 보호하며 실내로 들어 갔다. 상팔, 두구도 곧 뒤따라 들어 갔다. 두구는 성냥을 꺼내 불을 켰다. 그리고 방 안을 살펴 보자 방 안에는 이미 네 명의 경장을 한 대 한이 횡사해 있었고, 녹하도 온몸에 독침을 맞고 죽어 있었으며, 백매는 문 뒤에 쓰러져서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이야말로 한 폭의 그림처럼 처참한 장면이었다. 곧, 두 여자의 생명과 소영 등 네 사람의 안전과 맞바꾼 셈이 된 것이다. 소영은 몸을 굽혀 백매를 안아 일으켰다. "아가씨! 상처가 매우 중합니까?" 백매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늦었어요. 소대협님, 제 걱정은 마세요. 후일 당신이 심목풍을 죽인다면 나의 원수를 갚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소영은 탄식을 하였다. "아가씨들은 우리들을 구해 주기 위해서 이와 같은 중상을 입은 것이구려. 우리들은 꼭 전력을 기울여 아가씨의 생명을 구해 드리겠소." 백매는 여전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필요없습니다. 이 실내의 기관은 모두 이미 내가 부수었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뒷창문으로 빠 져 나가 복도를 지나 가세요. 그때 불빛에 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리고 복도가 끝나 는 곳에서 서쪽 담을 넘어 가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는 단숨에 이 말을 마친 뒤 힘에 겨워 숨을 헐떡였다. 소영은 그녀가 두 눈을 꽉 내리감고 있는 것을 보자 이미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라는 것을 알 았다. 소영은 즉시 진기를 끌어 모아 오른손으로 그녀의 등을 누르자 한 줄기의 뜨거운 기운이 그녀의 명문혈(命門穴)에 스며 들었다. 그러자 백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 소대협입니까?" "그렇소." 백매는 말을 이었다. "내게 소대협님의 진짜 얼굴을 한 번 보여 줄 수는 없어요?" 소영은 잠깐 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얼굴에 덮어 쓴 인피가면을 벗었다. 백매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소영을 두어 번 쳐다 본 뒤 말했다. "은란 동생을 잘 보살펴 주세요." 백매는 가까스로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어 버렸다. 소영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고는 백매의 시체를 방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사방을 둘 러 보며 입을 열었다. "이 상황을 보고 추측하건데 그녀들이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살수를 써서 두 사나이를 죽 였으며, 그러자 나머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녹하를 향해 독침을 쳐 냈소. 그러나 녹하는 진력을 다하여 반격해서 상대의 사내를 죽이고 자신도 숨이 끊어진 것이오. 그리고 백매는 나머지 한 사 람과 싸움을 해서 결국 그를 죽였지만 자신도 상하고만 것이오." 드디어 상팔이 입을 열었다. "두 분 낭자는 정말 의로운 죽음을 당했소. 나는 여기서 두 분의 은혜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리 오." 상팔은 말을 마치고 각각 두 구의 시체 앞에서 장읍(長揖)을 올렸다. 전엽청은 소영을 힐끗 바라 보고는 부끄러운 기색을 나타내며 말했다. "내가 두 아가씨를 오해한데 대해 이 자리에서 사죄하겠소." 그도 두 구의 시체 앞에서 장읍을 올렸다. 소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어느날엔가 우리들이 심목풍을 죽일 때에는 두 아가씨의 제사를 올려 드릴 것을 잊지 맙시다." 상팔이 대답했다. "알겠소." 소영은 이내 정색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자아, 우리는 이제 떠납시다. 그러나 이 두 아가씨가 우리를 구해 준 뜻은 영원히 잊지 맙시다." 소영은 앞장을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백매의 말대로 뒷창문을 열어 보자 과연 긴 복도가 있었다. 소영이 어느새 내력을 운공하여 창살을 부수었다. 그리고는 모두들 복도를 따라 서쪽으로 걸어 갔다. 그들이 어떤 집 모퉁이를 돌 때였다. 별안간 싸늘한 빛이 번쩍이더니 한 자루의 단도가 정면으로 내리쳐 왔다. 그러나 소영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단도를 잡아 채서 당기자 그 사람은 그대로 끌려 왔다. 이때 전엽청이 재빨리 장검을 빼들어 싹! 하는 소리를 내며 단도를 잡은 팔을 잘라 버렸다. 그러 자 그의 몸이 핑그르르 돌며 탁! 하고 벽에 부딪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벽 사이에 회전 기관이 장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상팔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소리질렀다. "그렇소. 바로 내가 이렇게 당했소. 그들은 회전기관 위에서 돌연 칼을 내밀어 이쪽에서 대항할 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오." 이들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어느새 복도 끝에 이르렀다. 소영은 진기를 모아 앞장 서서 그다지 높지 않은 담을 뛰어 넘어 갔다. 담 밖에는 꽃나무가 심어 져 있었고, 정자가 우뚝 서 있었으며 뜻밖에도 조용한 화원(花園)이 있었다. 꽃밭 속으로 상팔, 두구, 전엽청이 잇따라 몸을 날려 내려 섰다. 상팔이 눈이 휘둥그래지며 말했다. "이곳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갑시다." 그는 말을 마치고 곧 믐을 담에 바싹 붙이고 서쪽을 향해 걸어 갔다. 소영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후원을 보건데 자못 어떤 고관대작의 화원 같은데 어째서 삼강서우와 이웃하고 있는 것일 까?' 이들은 담 옆을 따라 질풍처럼 서쪽으로 달려 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또 하나의 담을 넘었다. 등불이 반짝이고 행인들의 왕래가 번잡했다. 드디어 그들은 삼강 서우 앞에 다다른 것이다. 그들의 경공은 모두 훌륭했지만 환한 등불과 워낙 사람들의 눈이 많았 으므로 인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말았다. 몇몇 행인이 놀라 외쳤다. "도적이다! 도적이다!" 길 가던 행인들은 모두 발길을 멈추고 이쪽을 주시했다. 상팔이 나직이 속삭였다. "사람들 틈으로 숨어 들어 갑시다." 그리하여 이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날쌔게,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이미 사람들 속으로 숨어 들어가 버렸다. 이들은 어느새 그 사람들을 뚫고 나와 마차가 머무른 곳에 이르러 재빨리 마차에 뛰어 올랐다. 마차는 즉시 앞으로 내달렸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오?" 백매와 녹하, 두 아가씨가 생명을 바치고 이들을 구해 주었다. 그래서 이들은 위험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어디로 갈 것인가는 이들 네 사람은 전연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삼 강서우에서 뜻밖의 변을 당했으므로 사전의 계획이 모두 틀어 져 버린 것이다. 이윽고 전엽청이 입을 열었다. "이 삼강서우에 분명히 심목풍의 첩자를 두고 있는 것 같으니 내 생각 같아서는 우선은 그냥 두 었다가 나중에 손 노선배님을 만나 회합한 뒤 이 삼강서우를 없애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소영은 대답했다. "그곳에는 비록 기관이 가득차 있지만 없애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소. 문제는 우리가 하나의 삼 강서우를 없애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오. 그 심목풍은 또 열 개의 삼강서우를 건립할 수도 있다는 것이오. 그 사람은 음흉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오. 그러니 우선 심목풍만 없애면 나 머지 사람들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 되어 버릴 것이오." 전엽청이 말을 받았다. "말은 비록 그렇지만 심목풍을 잡아 죽인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오." 그때 갑자기 상팔이 슬며시 손을 내밀어 마차를 모는 사나이의 목을 향해 찍어 갔다. 전엽청이 깜짝 놀라서 오른손을 휘둘러 질풍같이 상팔의 맥문을 향해 찍어 가며 외치듯이 말했 다. "상팔형, 왜 그러시오?" 그러자 그 마차를 몰던 사나이가 말등에 일장을 치고는 곧 마차에서 뛰어 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 졌다. 상팔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아깝다. 아까와!" 전엽청도 무슨 기미를 알아 차리고 다그쳐 물었다. "그 사람은.....?" 상팔이 대답했다. "백화산장의 사람이 마부로 가장한 것이오." 전엽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마부로 변장한 본문의 제자는 이미 변난을 당한 게 아니오?" 상팔의 대답, "비록 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 변이야 당했겠지." 전엽청이 말했다. "상형은 정말 경험이 풍부하고 아는 것이 많군요. 정말 면목이 없소." 상팔이 오른손을 휘둘러 마차의 천장을 쳤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 위에 큰 구멍이 하나 뚫 렸다. 상팔이 입을 열었다. "우선 마차에서 내리고 봅시다." 말을 마치자 그는 앞장 서서 마차에서 내려 갔다. 뒤따라 소영과 두구, 전엽청도 뛰어 내렸다. 그 러자 마차는 마치 퉁겨 놓은 화살처럼 질풍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상팔은 멀리 사라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며 가볍게 탄식을 했다. "솔직이 말하면 허점이 많소. 만일 전형께서 조금만 더 세심하게 관찰을 했더라면 그 점을 발견 했을 텐데......" 전엽청이 대답을 했다. "내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면 그의 신분을 알아 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이외에는 결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오." 상팔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마차에 오른 뒤 그는 줄곧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마차를 몰았소. 그것이 첫째 의문되는 점이며, 그 다음 그는 곧 황폐한 교외의 길을 골라서 달려 갔으므로 나는 확신을 얻어 그의 혈도 를 찍으려 했는데 뜻밖에도 전형이 그를 구해 줄 줄이야!" 전엽청은 거듭 사죄를 했다. "부끄럽소이다." 소영이 말참견을 했다. "만약에 전형이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했을지도 모르니 일시적인 실수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 하지 마시오." 두구가 시선을 돌려 사방을 바라 보니 자기네들이 황량한 벌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멀리서 강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두구는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마차를 이곳으로 몰고 온 데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다고 생각되오." 전엽청이 말을 받았다. "그렇소. 그는 불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었을 것이오." 그들이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들이 지나 오던 길쪽에서 일진의 요란한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소영이 소리나는 쪽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누가 오는군요." 전엽청은 곧 장검을 빼어 들었다. "분명히 그 자의 패거리일 것입니다. 그들을 사로잡으면 그 곡절을 알아 낼 수 있을 것도 같은 데....." 그는 상팔을 막아 적을 놓치게 한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를 사로잡으려고 덤비고 있 었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질풍같이 빨라 어느새 이들 앞에 당도했다. 소영이 그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회색 옷을 입고 목봉(本俸)을 하나씩 들고 있어 개방의 제자처럼 보였다. 소영은 이미 그 들에게 한 번 혼이 난 일이 있었다. 하마터면 그들의 독침에 명중당할 뻔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는 개방의 옷을 입고 있는 것만 보아도 단단히 경계를 하였다. 왼쪽에 서 있던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어느 분이 소대협이십니까?" 소영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상팔이 앞으로 나서며 말을 가로챘다. "왜 그러시오?" 개방의 제자는 상팔을 힐끗 쳐다 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 방중 손장로의 명을 받들어 온 것입니다. 손장로에서는 소대협님을 모셔다가 곧 사람 을 구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영은 가슴이 섬뜩했다. "도대체 누굴 구한단 말이오?" 그 거지는 대답했다. "무림의 사대 현인(賢人)들께서 심목풍의 계략에 빠져 그 정세가 매우 위급하므로 손장로와 무당 파의 무위도장께서는 이미 달려 갔습니다. 그래도 혹 실력이 부족할까 싶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곧 삼강서우로 달려 가서 소대협께 통지하여 함께 돕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상팔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이렇게 뇌까렸다. '이제 보니 정세가 또 변했구나. 어쩐지 우리를 맞으러 오는 사람이 있는가 했더니......' 그러나 이때 전엽청이 냉랭한 음성으로 내뱉듯 말했다. "두 분께서는 명을 받들어 삼강서우로 갔다면서 어떻게 우리가 이곳에 온 사실을 알았단 말이오." 그는 아까 상팔을 가로막아 적을 놓치게 한 사실이 있었으므로 지금은 매우 용의주도해졌다. 중년의 거지가 말했다. "우리는 삼강서우 밖에서 한 점장이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이곳으로 갔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소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필시 사마건(司馬乾)이었을 것이다."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지금 어느 곳에 있단 말이오?" "지금 나씨(羅氏) 종사(宗祠)에 있습니다." "좋소. 수고스럽지만 길을 인도하시오." 그러자 그 두 거지는 몸을 돌려 동남쪽으로 길을 접어 들었다. 이들 네 사람도 경공을 펼쳐 두 거지의 뒤를 바싹 따라 갔다. 약 십 리 정도 갔을 때 길을 인도하던 두 거지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왼쪽이 섰던 거지가 손을 들어 운집해 있는 검은 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것이 바로 나씨 종사입니다." 전엽청이 말을 받았다. "두 분께서는 가지 않겠습니까?" 두 거지는 일제히 대답했다. "우리는 아직도 황학루에 볼 일이 남아 있습니다. 뿐더러 손장로께선 우리는 종사 안에는 들어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소영의 대답을 기다리려고 하지도 않고 몸을 돌려 급히 달려 가 버렸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자, 우리들은 한 번 들어 가 봅시다." 상팔이 말을 받았다. "형님 우리는 지금 이 이상 더 위장(僞裝)을 할 필요가 없어졌소." 일행은 얼굴의 인피가면을 벗어 품 속에 넣고 겉에 입은 옷을 벗고 앞장을 섰다. 한 채의 매우 황량한 사당이 나타났다. 그러나 원래는 매우 웅장한 건물이었다. 소영은 천천히 칠 층의 돌계단을 올라 갔다. 그러나 사당의 대문은 꽉 닫혀 있었으며 아무리 귀 를 기울여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무림의 사대 현인이 모두 변을 당한 것은 아닐 텐데....'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손을 들어 대문을 밀었다. 그러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로 된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대문을 들어 서자 눈앞에는 한 채의 청원(廳阮)이 나타났다. 뜰 가득히 잡초가 우거져 있는 것으 로 보아 이 나씨 가문은 이미 몰락하여 종사를 돌보는 사람도 없는 듯했다. 이때 상팔이 소영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정세가 심상치 않소. 형님께서는 조심하시오." 상팔은 말을 마치고 손을 휘둘러 청원의 문에다 일장을 내리쳤다. 그의 장력은 정말 대단했다. 뿐 만 아니라 이 일장은 전력을 기울여 쳐 냈기 때문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청원의 문이 열렸다. 그 속을 들여다 보니 단지 컴컴할 뿐 이상한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상팔이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그 개방의 제자가 한 말에 의하면 손 노선배님과 무위도장이 모두 이곳으로 달려 갔다고 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아무런 동정이 없을까요? 평소에 사대 현인은 비록 속세를 떠나 무림에는 머물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무공은 심오한 경지에 이르러 있으므로 제아무리 심 목풍이 이들을 곤경으로 몰아 넣었다고 하더라도 일시에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을 텐데, 어 째서 이처럼 쥐죽은 듯 고요할까요?" 소영도 양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런 것 같소. 이 안에는 분명히 심상치 않은 곡절이 있는 듯 싶소." 소영은 말을 마치고 잠깐 망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가 먼저 들어가 볼 테니....." 두구가 앞으로 나섰다. "소제가 형님을 위해 길을 열어 드리겠소." 소영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두구가 걸음을 옮겨 놓으며 앞장 서서 걸어 갔다. 소영은 두구가 자기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차마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어 잠자코 두구의 뒤를 따랐다. 전엽청이 상팔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는 팔 척 가량 떨어져서 뒤따르며 암기의 기습에 대비합시다." 상팔은 이미 삼강서우에서 가공할 일전을 치른 다음이라 적이 잔혹하고 포악한 데다 무공과 기지 가 또한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품 속에서 금주판 을 꺼내 들고 있었다. 전엽청도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왼손에 바꿔 쥐고, 오른손을 품 안에 다시 넣어서 두 자루 의 칠휴검(七休劍)을 꺼내 들었다. 이들 두 사람이 준비를 끝냈을 때는 소영과 두구는 이미 팔 척 정도 앞장 서 걷고 있었다. 이들 네 사람은 잔뜩 경계를 하며 정청(正體)의 문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두구가 몸을 날려 힘껏 창문을 걷어 찼다. 그러나 다만 벽과 창문이 진동하는 소리만 울려 올 뿐 사방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청문은 원래 매우 단단한 것이었지만 두구의 힘에 못 이겨 활짝 열려 버렸다. 두구는 조심조심 대전 안으로 들어 가서 성냥불을 켰다. 불빛 아래 보았지만 여전히 인적이라고 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두구는 잠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몇 마디 욕설을 내뱉았다. "두 놈의 거지새끼가 감쪽같이 속였군. 만일 내가 이놈들을 만나기만 하면 혓바닥을 뽑아 버리고 말 테니....." 소영도 불빛으로 사방을 비쳐 보았지만 싸운 흔적도 없는 것을 발견하자 속으로 은근히 화가 치 밀었다. "그 두 거지놈들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소. 그들이 만약 심목풍의 부하로 우리들을 이곳으로 꾀어 왔다면 이곳에는 반드시 그들의 패거리가 매복해 있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이곳 에는 그와 같은 기미가 없으니 그들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한 까닭을 모르겠소." 이때 상팔과 전엽청도 청문 밖에 당도했다. 상팔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혼잣말처 럼 중얼거렸다. "이것이 혹시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 : 호랑이로 하여금 산을 떠나게 하다)나 아닐는지....." 이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어디에선가 가벼운 신음소리가 들려 왔다. 두구는 안색이 돌변하여 재빨리 성냥불을 다시 그어 신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던졌다. 소영이 냉랭한 음성으로 외치듯 말했다. "누구요?" 그러자 더듬더듬 꺼져 가는 듯한 대답이 들려 왔다. "나 작은 거지요." 소영은 그 음성이 매우 귀에 익어 날카로운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당신은 팽(彭)형이 아니오?" "바로 작은 거지입니다." 두구가 입을 열었다. "제상(祭床) 뒤에 있소." 소영이 두구 앞으로 뛰어 가며 말했다. "내가 그를 끄집어 내겠소." 그는 성큼성큼 제상 앞으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 제상 뒤의 사람을 끄집어 냈다. 소영은 그를 바라 보자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백화산장의 무사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소영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 사람은 중상을 입은 듯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팽운(彭雲)입니다." 소영도 그의 음성으로 미루어 팽운이 틀림없음을 알았다. 소영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어째서 백화산장의 무사복을 입고 있소?" 팽운이 다시 꺼져 가는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상처가 매우 중하여 말할 기력조차 없습니다. 빨리 뒤에 있는 사람을 구하시오."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누구를 구하라는 말이오?" "무림 사대 현인과 무.... 위도장...." 소영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다그쳐 물었다. "그들이 지금 어디 있소?" "사당 뒤 멀지 않은 곳에....." 팽운은 말도 다 끝맺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소영은 두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두형은 여기서 팽형을 지키면서 내공으로 그의 회복을 도와 주시오. 나는 빨리 뒤로 가 볼 테 니....." 그는 홱 몸을 돌려 정청을 물러 나왔다. 전엽청과 상팔은 청문 밖에서 그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래서 전엽청은 장문(掌門)의 사형(師兄) 이 변을 당했다는 말을 듣자 상팔에게 말할 겨를도 없이 즉시 몸을 날려 소영의 뒤를 따랐다. 상팔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두구에게 말했다. "동생, 그 작은 거지가 숨을 돌리거든 그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 그 두부점(豆腐店)에 가서 기다리 게." 두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바탕 바람을 일으키며 팽운을 안고 정청의 한 모퉁이에 가서 암암리 에 내공을 운기하여 팽운의 앞가슴을 주물러 주었다. 상팔도 이 몇 마디의 말을 마치자, 두구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날려 전엽청의 뒤를 따 랐다. 앞장 서서 뛰어 가던 소영은 순식간에 사당 뒤에 다다랐다. 이 사당 뒤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 다. 별빛 아래 물결만 출렁일 뿐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었다. 소영은 의아한 생각 이 들었다. '그 두 개방의 제자들은 혹시 거짓말을 했을지 몰라도 설마 그 일진풍(一陣風) 팽운마저 거짓말 을 했을 리는 없는데.....' 그렇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별빛 아래 찰랑거리는 연못의 물결 외에는 아무런 인적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전엽청이 소영의 곁으로 다가서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우리 사형은 지금 어디 있소?" 소영이 전엽청을 돌아 보며 말을 받았다. "나도 지금 찾고 있는 중이오." 상팔이 어느새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만일 심목풍이 일부러 한 사람을 지정하여 일진풍 팽운의 목소리와 똑같이 흉내낼 수 있게끔 수 련을 쌓게 했다면 또 몰라도 그렇게 음성이 같을 리는 없는데......" 소영이 물었다. "그는 정말 팽운이요?" 상팔이 대답했다. "틀림 없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팽운은 영웅적인 기질이 있으므로 절대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오. 그러니 우리가 잘 찾아 봐야 할 것이오." 전엽청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별빛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연못이여! 말 좀 해다오. 사람들의 그림자는 다 어디로 갔는가?" 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긴 웃음소리가 못 가운데서 들려 왔다. 96. 얼굴 없는 조력자 그 웃음소리는 쉰 듯하면서도 음험하기 그지 없어 듣는 이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케 했다. 소영은 그 웃음소리를 듣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외쳤다. "심목풍!" 연못 속의 사람이 대답했다. "맞았다. 바로 그렇다." 소영은 내심 흠칫했다. '이 사람은 정말 솜씨가 대단하구나. 어떻게 연못 가운데 서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소영은 짐짓 냉랭한 음성으로 빈정거리듯 말했다. "물 속에 몸을 숨기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거늘 무엇이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대는 뻐기는가?" 그러자 심목풍이 컬컬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소제, 나의 조그만 배로 와서 얘기나 좀 나눌까?" 소영이 연못 가운데를 바라 봤지만 컴컴해서 어디쯤 그가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피차간에 이미 얼굴을 대한 적이 있으니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지 말기 바란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연못 한 가운데가 밝아지며 등불을 휘황하게 단 작은 배 한 척이 떠올랐다. 이 배는 여느 배와는 달라 배 모양이 모가 져 있었으며 배 안의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상팔이 탄식하듯 말했다. "그렇다! 배를 연못 한 가운데 세워 두곤 배 전체를 회색의 두꺼운 기름 종이로 덮어 씌웠구나. 어두운 밤이라 우리가 감쪽같이 속았구나." 이때 심목풍이 또 높은 음성으로 외쳤다. "여러분들께서도 배 안으로 와서 얘기를 좀 나누는 것이 어떨까요?" 상팔이 대답했다. "심대장주, 배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겠군요?" 심목풍이 이내 대답했다. "늙은 거지 한 사람과 소코(牛鼻) 노도(老道), 그리고 네 분의 귀빈이 있소이다." 심목풍은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 네 분의 귀빈은 그 이름이 매우 높이 알려져 있지만 좀처럼 강호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평소엔 쉽고 싶어도 뵐 수 없는 분들이오."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무럼 사대 현인이오?" "그렇소. 소제는 개방 사람들을 본받아 감각이 매우 예민하군." 소영이 말을 받았다. "나는 곧 심대장주의 배에 가서 뵙기를 원하오." "매우 환영하는 바이오. 그렇다면 조그만 배를 한 척 보내서 맞으러 가겠소." 소영은 심목풍이 타고 있는 배와 이곳까지의 거리를 대략 측정해 봤다. 불과 오, 육 장의 거리였 다. 하지만 중간에서 다시 힘을 넣지 않는다면 건너 가기가 매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만 은 등평도수(燈萍渡水)의 경공을 발휘한다면 건너 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상팔과 전엽청 이 의문이었다. 소영은 생각이 이에 미치자 높은 음성으로 외쳤다. "심대장주께서 배를 보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심목풍은 말을 마치고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곧 노젓는 소리가 나며 한 척의 작은 배가 육지를 향해 다가 왔다. 소영이 전엽청과 상팔에게 나직이 일러 주었다. "두 분께서는 조심하십시오. 절대로 배 안에 있는 음식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마치자 소영은 눈길을 이쪽으로 저어 오는 배를 바라 봤다. 배를 젓고 있는 사람은 비록 경 장은 갖추었지만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았다. 경장을 한 사나이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삼장주님을 환영합니다." 소영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소영이오. 삼장주란 존칭은 감당키 어렵소." 사나이는 말을 받았다. "대장주의 분부이시니 소인들이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소영은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서 배 위에 올라 탔다. 상팔과 전엽청도 소영의 뒤를 따라 배 위에 올라 탔다. 그러자 흑의의 사나이는 곧 노를 저어 큰 배를 향해 연못 가운데로 방향을 돌렸다. 이윽고 심목풍이 큰 배의 뱃머리에 나서며 허리를 굽혀 이들을 맞이했다. "세 분들, 안녕하셨소?" 소영도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큰 배에 올라 서며 입을 열었다. "감히 대장주를 수고스럽게 해서....." 그러나 그는 속으로는 은근히 경계를 했다. 심목풍의 위인됨이 워낙 비겁하고 악독하기 때문에 단지 그의 손끝에 닿기만 하더라도 혹시 중독 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일대의 간웅(奸雄) 심목풍을 마주 대하자 세 사람은 모두 신중을 기했다. 그가 언제 돌연 기습을 가해 올지 모를 일이므로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심목풍은 서서히 몸을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소영을 뚫어지게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소제! 소제는 이 심목풍에게 너무 생소하게 대하는 느낌이 있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나는 감히 높이 올라 가지 못합니다." 심목풍이 다시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이 참는데도 한도가 있는 것이오. 만약 소제가 너무 지나치게 나를 난처하게 만든다면 나도 옛정을 돌아 보지 않을 테니...." 소영이 비꼬듯 말했다. "심대장주는 이미 나에게 갖은 악독한 수단을 다 써 왔지만, 나는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아마 천명인가 보오." 심목풍이 냉랭하게 코웃음치며 말을 받았다. "천명 좋아하시는군....." 심목풍은 약간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심모는 항상 사람이란 하늘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오." 소영이 비꼬듯 쏘아 붙였다. "대장주께선 워낙 기지와 무공이 높으시니 그런 재주가 있는지도 모르지요." 심목풍이 천천히 대답했다. '너무 과분한 말씀. 그건 그렇고 당신의 친구인 손불사, 무위도장 등이 모두 배 안에 있으니 들어 가 보는 게 어떻겠소?" 소영이 배 안으로 눈길을 돌리니 손불사와 무위도장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었으며 그 좌 우에 두 명의 청의노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가운데 상 위에는 산해진미가 가득차 있었고, 한 병의 술도 준비되어 있었다. 심목풍이 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소제, 어째서 들어 가지 않고 망설이는 거요?" 소영이 눈길을 돌려 사방을 바라 보자 배 안에는 사벽이 모두 자단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다만 북쪽 벽에 나무로 된 조그마한 문이 달려 있었다. 그것이 아마도 내창(內艙)으로 통하는 문 같았다. 외창(外艙)에는 네 명의 청의노인과 손불사, 무위도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상팔이 몸을 비스듬히 하며 소영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내가 앞장 서겠습니다." 상팔은 말을 하면서 천천히 발을 옮겨 선실 안에 들어섰다. 소영도 시선을 심목풍에게로 돌리며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심대장주, 앞장 서십시오." 심목풍이 짐짓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소제는 언제부터 이처럼 의심이 많아졌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당신 심대장주와 거래함에 있어서는 역시 조심하는 게 상책이겠지요." 심목풍은 그 이상 버티지 않고 잠자코 선실 안으로 들어섰다. 소영은 심목풍의 뒤를 바싹 따랐다. 그러나 전엽청은 선실의 문앞에 서 있을 뿐 안으로 들어서려 하지 않았다. 심목풍이 전엽청을 힐끗 뒤돌아 보며 입을 열었다. "전형은 어째서 선실 안으로 들어 오지 않으시오?" 전엽청은 소영과 상팔이 이미 선실 안으로 들어 갔으니 자기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만일 심목풍의 말에 자극을 받더라도 꾹 참고 절대로 선실 안에 들어 가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했다. "저는 이대로 선실 밖에 남아 있겠습니다." 소영은 전엽청이 선실 밖에 남아 있으려는 눈치를 알아 차렸다. "심대장주를 상대해 본 사람치고 누구든 경계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요." 드디어 심목풍이 전엽청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미소를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창문 밖과 창 안의 거리는 불과 수 척, 어떤 변고가 일어난다면 당신도 마찬가지로 도망칠 수는 없을 거요." 전엽청이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심대장주께선 너무 심려해 주시는군요." 소영은 손불사와 무위도장 등을 바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네 분의 청의노인은 당신이 모셔 온 무림 사대 현인인 것 같군요?" 심목풍이 대답했다. "그렇소. 과연 소제의 안목은 틀림없군." 소영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여섯 분의 노선배님들을 모두 당신이 혈도를 쩍어 놓았소?" 심목풍이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한 빛으로 대답했다. "소제가 만일 무공이 넓고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면, 혹시 그들의 혈도를 풀어 줄 수 있는지 한번 시험해 보구려." 소영이 천천히 손불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한동안 손불사를 자세히 들여다 봤다. 그 다음 천 천히 오른손을 내밀어 손불사의 등줄기를 누르며 암암리에 내공을 운기하여 손불사의 내부(內腑) 로 뻗쳐 갔다. 그러자 한 가닥 뜨거운 열기가 손불사의 내부로 스며들어 혈맥순환을 재촉하였으므로 손불사의 얼굴에는 곧 혈색이 떠돌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의 몸에는 몇 군데의 경맥이 막혀 있는 것 같 았다. 그러나 그 상처가 어디에 있는지는 쉽사리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소영은 곧 오른손을 거두고 심목풍을 돌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들은 점혈수법(點血手法)으로 당한 것 같군요." 심목풍이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것에 의해서 상한 것 같소?" 소영은 잠깐 생각해 보았다. 만일 이 사람들이 점혈수법에 의해서 당하지 않았다면 점혈수법과 비슷한 수법에 의해서 당한 것만은 틀림 없다. "혹시 참맥폐혈(斬脈閉血)같은 수법이 아니오?" 심목풍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무학이란 원래 깊고 넓은 것. 소제는 비록 하늘의 은총을 입어 좋은 운을 지녔지만, 역시 무학에 는 풋나기군." 소영도 냉랭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당신 심대장주가 무슨 수단을 써서 그들을 상하게 했든간에 내가 이왕 여기 온 이상, 반드시 이 들을 구해서 이곳을 떠나 갈 것이오." 심목풍은 웃으며 말했다. "큰소리 치지 마오. 어디 한 번 두고 봅시다."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아무래도 이들의 혈도를 풀지 못한다. 그러니 이들을 구하려면 다만 심목풍을 굴복시켜 그 로 하여금 이 사람들의 혈도를 풀게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심목풍은 매우 간교한 자인지라 이 배 위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치밀하게 배치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의 정세로는 도저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소영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심대장주께선 이제 나이가 들었으므로 시간이 갈수록 견디지 못하여 불리한 결과를 가져 올 것 이오. 그러나 나 소영의 체력과 무공은 날이 갈수록 더 발전하여 우리들 사이의 대결은 시간을 질질 끌면 끌수록 나에게 승산이 커질 것 같은데, 심대장주께선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심목풍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한 마디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소." 소영은 손불사 등을 또 한번 둘러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당신이 만약 이곳에서 날 꺾으면 그 후 무림에서는 당신을 꺾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오." 심목풍이 냉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소제는 나와 무예를 겨루자는 건가?" "그렇소. 당신이 죽나 내가 죽나 사생결단을 하잔 말이오." 심목풍은 역시 담담하게 웃었다. "정세와 경우가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면 몰라도, 나는 역시 당신이 백화산장으로 다시 돌아오기 를 바라는 바요."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다시 말을 이었다. "소제의 말은 과연 옳소. 이 형은 이미 늙어 무림을 재패한다 하더라도 오래 계속되지 못할 것이 며, 나를 이어 무림을 재패할 사람은 자연 소제일 것이오." 심목풍은 당대의 간웅인지라 그의 음흉한 간계는 아무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몇 마디의 말은 소영을 매우 아끼는 듯이 얘기해서 소영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영은 심 목풍을 노려 본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심대장주께선 이미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바 있는데 무엇 때문에 명리의 쇠사슬을 벗어나지 못 하고, 무림의 패권에만 도취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자 심목풍은 낮을 붉히며 외치듯 말했다. "닥쳐라! 나를 교훈할 셈인가?" 소영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나는 진심으로 충고하는 바입니다. 심대장주께선 이 이상 무림의 패권에만 도취되지 마시고, 조 금이라도 무림을 위해 좋은 일을 하라고 권하는 바입니다." 심목풍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아무래도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꼭 우리들이 생사의 담판을 지어야겠는가?" 소영이 무슨 대답을 하려는데 갑자기 심목풍이 두 손을 들어 펑!하는 소리를 내며 벽을 향해 곧 장 일격을 가했다. 그러자 굳게 닫혀져 있던 내창으로 통하는 나무문이 갑자기 크게 열리며 온몸 에 붉은 비늘을 단 한 괴인이 뚜벅뚜벅 이쪽으로 걸어 왔다. 소영은 그것을 보자 재빨리 뒤로 물러나 상팔에게 등을 대고 그 괴물을 주시하였다. 그 붉은 괴 인의 모습은 볼수록 무서웠다. 그는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목에서 발끝까지 붉은 비늘로 덮여 있고, 두 손에는 손톱을 세 치 정도나 길러 보기에도 흉칙했다. 얼굴 역시 붉은 가면을 쓰고 다만 한 쌍의 눈만이 반짝였다. '이 괴인의 몸에 달린 붉은 비늘은 도대체 무슨 물건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상팔은 비늘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오른손을 들어 한 알의 보석을 퉁겨 냈다. 이 보석은 단단하기 이를 데 없으며 사면이 능형(稜形)으로 되어 있어 매우 예리했으므로 상팔이 언제나 품고 다니며 암기로 써 왔다. 하지만 매우 진귀한 것이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경우가 아 니면 좀처럼 쓰지 않았다. 상팔이 지금 그것을 쓰게 됐으니 지금의 형세를 그만큼 다급하게 여긴 것이다. 상팔은 보석에 십 분의 공력을 담아 보냈다. 그 보석은 촛불 아래 찬란한 빛을 발하며 그 홍린(紅麟) 괴인의 앞가슴 에 닿았으나 곧 핑!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져 창문 입구의 나무벽에 깊이 박혀 버렸다. "오룡대진(五龍大陣)!" 소영의 싸늘한 외침에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오룡 중의 하나다. 만약 자네가 그를 굴복시킬 수 있다면, 그때 가서 나와 겨루자." 지난날, 소영이 마문비 등의 군호(群豪)를 거느리고, 백화산장을 발칵 뒤집어 놓았을 때 십팔 금 강검순대진(金剛劍盾大陣)과 백 명에 달하는 흑의무사의 포위 공격을 무찔렀다. 그리하여 가까스 로 포위를 뚫고 나오자 다시 홍의오룡이 가로막았다. 그때 소영은 일검에 홍의오룡을 쓰러뜨렸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남궁옥이 암암리에 쇄공(鎖功)과 독분(毒粉)을 사용하여 그 오룡의 무공을 봉쇄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밤 다시 그 오룡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밤엔 남궁옥의 도움은 없는 것이다. 오 직 소영 자신의 무공으로만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소영은 진기를 잔뜩 끌어 모았다. 그리고 그 괴인의 약점을 찾아 손을 쓰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전신에 붉은 비늘이 덮여 있었으므로 오직 두 눈을 제외하고는 아무데도 손댈 만한 곳이 없었다. 이때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사전에 꼭 한 가지 자네에게 알려 주고 싶은 말이 있네. 이 사람의 몸에 붙은 붉은 비늘에는 이 미 극독을 발라 놓았으므로 만일 거기에 상처를 입게 되면 순식간에 독이 안으로 침입하여 죽게 되네. 그리고 이 세상에는 그 독을 풀어 낼 약물이 없지." 소영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알려 주어 고맙소!" 이런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그 홍의괴인은 침착한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소영에게로 다가 왔다. 소영은 홍의괴인의 동작이 매우 느린 것을 보고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홍의괴인은 독을 바른 비늘 갑옷을 입고 있으므로 몸을 움직이는데 있어서 크게 영향을 받을 것 이다. 그러므로 만약 넓은 곳에서 그와 상대한다면 간편한 경공으로 그를 상대할 수 있겠지만 이 배는 협소하므로 운신이 불편하니 장력으로 그를 상대할 수밖에 없겠구나.' 소영은 대강 마음 속으로 이렇게 결정하자 오히려 마음이 가라 앉았다. 그래서 홍의괴인이 자기 앞까지 접근해 오는 데도 여전히 버티고 서서 손을 쓰지 않았다. 전엽청은 이 광경을 보자 깜짝 놀랐다. 소영과 그 홍의괴인은 거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접근해 있었으므로 피차간에 손만 내밀면 충분 히 상대방의 급소 대혈을 찌를 수 있을 거리였다. 전엽청은 다급한 생각이 들었다. '이 홍의괴인은 분명히 독이 묻은 갑옷을 입고 있는데 소영이 어째서 저렇게 가까이 서 있단 말 이냐? 뿐만 아니라 아무런 무기도 빼들지 않고.... 설마 육장(肉掌)으로 온몸에 극독을 바르고 있 는 홍의괴인과 싸우려는 것은 아니겠지?' 전엽청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소영이 오른손을 들어 전광석화처럼 일장을 쳐 냈다. 그러나 홍의괴인은 소영의 공격을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리하고 긴 손톱이 달린 오른 손을 번쩍 들었다. 그 괴상한 손톱이 마치 다섯 자루의 검처럼 움직여 소영의 왼쪽 어깨를 잡아 채려 했다. 그러나 소영은 왼손을 들어 그 괴인의 오른손을 막은 뒤에 다시 우장을 내밀어 그 사람의 가슴에 적중시켰다. 이 일장은 소영이 팔분 이상의 내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펑!" 소리와 함께 홍의괴인은 소영의 일장을 얻어 맞고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심목풍이 이때 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소대협! 그 붉은 비늘에 바른 극독은 위력이 대단하니 빨리 운기하여 혈도를 막게나. 만약 자네 가 생명을 보존하고 싶다면 두 팔목을 끊어 버리는 수밖에 없네." 그러나 소영은 맨처음 심목풍을 만났을 때부터 천 년 묵은 교피장장을 끼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 에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걱정하지 마시오." 소영은 다시 손가락 하나를 펴서 질풍과 같이 그 홍의인을 향해 찍어 갔다. 원래 소영은 자기의 그 일장이 제대로 적중된다면 그 홍의괴인을 당장 절명시킬 수는 없다 하더 라도 기절을 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이 홍의괴인은 세 걸음 물러나는 데 그쳤던 것이다. 소영은 의아한 생각과 더불어 홍의괴인을 빨리 쓰러뜨려야만 심목풍을 상대한 다는 초조감에 휩싸였다. 소영은 그래서 이번에는 수라지력(修羅指力)을 발휘하여 홍의괴인의 앞가슴 자관(紫官) 요혈을 노 리고 찍어 갔다. 한 줄기의 암경(暗動)이 곧장 몰아쳐 갔다. 이때 홍의괴인은 연속 두 차계의 맹격을 받았으므로 비록 갑옷의 비늘로 호신은 하였지만 역시 맹렬한 충격을 받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쓰러 지려고 했다. 그러자 깜짝 놀라는 것은 심목풍이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몇 달 보지 못한 사이에 소영의 공격은 눈부시게 진보한 것 같구나. 그런데 소영은 천부적인 재 능과 사승(師承)의 요건을 다 갖추고 있으므로 오늘 저녁에 만일 죽이지 못한다면 후일 다시 그 를 죽일 기회는 별로 없을 것이다.' 심목풍은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갑자기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비틀거 리던 홍의괴인이 그 휘파람소리를 듣자 갑자기 몸을 가누고 두 줄기의 싸늘한 눈빛으로 소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 봤다. 심목풍은 이 광경을 보자 다시 입을 열었다. "소영, 나는 이미 몇 차례 너에게 타일렀다. 그러나 너는 끝내 고집을 부리니 나는 이 이상 너를 그대로 두지 않겠다." 심목풍은 말을 마치자, 손을 들어 소영을 향해 곧장 공격했다. 심목풍은 워낙 체구가 큰 데다 또한 두 팔이 특히 길어서 소영과는 사 척 가까이 떨어져 있었지 만, 손을 내밀자 놀랍게도 소영의 팔 뒤에 거의 닿았다. 소영은 앞뒤로 강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홍의괴인은 두 눈에 살기를 띤 채 서서히 다가 왔다. 그러므로 소영은 어느 쪽을 막아야 할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마침 심목풍이 뒤에서 일격을 가해 왔다. 심목풍의 공격은 실로 심후했다. 그야말로 비석이 라도 가르고 돌이라도 부술 정도로 격렬했다. 그러나 소영은 이 순간 몸을 돌려 적을 맞을 계제가 못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건청기공(乾 淸氣功)을 모아 몸을 보호하고 급소를 피할 준비를 한 뒤, 그의 일격을 맞아 주기로 하고 우선 이 홍의괴인부터 쓰러뜨린 후 다시 심목풍과 겨루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상팔은 심목퐁이 소영에게 공격을 퍼붓는 것을 보자 비록 그의 적수가 못 될 줄은 알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오른손을 내밀어 번쩍이는 금산반(金貨盤)을 꺼냈다. 동시에 실목풍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쳐 냈다. 질풍같이 빠른 솜씨였다. 사람의 몸이란 관절이 있 는 곳이 제일 취약하므로 상팔은 소영을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이와 같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목풍은 냉랭하게 한 번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는 재빨리 손가락을 굽혔다가 한 번 퉁겼다. 그 지풍이 바로 상팔의 금산반에 적중되었다. 그러자 상팔은 수중의 금산반이 그 지풍에 의해 빠져 달아나려는 듯함을 느꼈다. 상팔은 내력을 사용하여 가까스로 금산반이 빠져 나가져는 것을 억제했다. 이때 갑자기 싸늘한 빛이 번쩍이며 두 줄기 흰 빛이 질풍처럼 그 홍의괴인을 향해 날아 가는 것 이 보였다. 바로 전엽청이 쳐 낸 두 자루의 칠휴검이었다. 심목풍은 왼손의 지력(指力)으로 상팔의 수중에 있는 금산반을 쳐 내고,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소 영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쳐 냈다. 그러나 그의 장세가 채 소영의 오른쪽 어깨에 닿기도 전에 한 줄기의 무형의 힘에 의해 저지당했다. 심목풍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호신강기!" 그는 다시 우장에 몇 분의 힘을 가해 장을 세워 바람같이 쳐 냈다. 소영의 이 호신강기는 아직 진경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보통 강호인물은 그를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심목풍은 공 력이 대단한지라 한 줄기의 강한 장력을 쳐 내 소영의 호신강기를 뚫고 그의 어깨에 적중시켰다. 그러자 소영은 어깨에 마치 칼을 맞은 듯 오른팔이 쑤시고 저려 왔다. 소영은 이를 악물고 아픔 을 참으며 옆으로 삼척 가량 물러났다. 심목풍은 소영이 아무런 비명도 지르지 않았으므로 그의 상처가 중한지 가벼운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도 소영의 호신강기에 울림을 받아 오른팔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단지 눈깜빡할 사이에 일어났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격이었다. 그리고 전엽청이 쳐 낸 칠휴검이 소리를 내며 홍의괴인의 어깨에 적중되었다. 원래 이 홍의괴인은 비록 창, 칼이 뚫기 힘든 갑옷으로 호신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소영의 웅혼한 장력에 일격을 맞아 심한 내상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전엽청이 쳐 낸 두 자루의 단검을 피하지 못해 모두 맞고 말았다. 그러나 이 예리한 보검도 그 붉은 인갑을 뚫지는 못했다. 두 자루의 검이 인갑에 부딪치는 순간 모두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때 상팔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는 낭당초암(浪撞礁岩) 일초를 발휘하여 전력을 다해 심목풍을 향해 부딪쳐 갔다. 심목풍은 오른팔이 저려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몸을 돌려 피하며 왼손으로 재빨리 일장을 쳐 냈 다. 이 장세는 상팔이 일장을 쳐 내 명중시키지 못하자 제 이초를 발하려는 순간에 그에게로 당 도했던 것이다. 순간 상팔은 싸늘한 빛을 번쩍이며 한 자루의 장검이 질풍처럼 심목풍의 왼팔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알고 보니 전엽청이 재빨리 뛰어 들어 이 일검을 쳐 낸 것이다. 그러자 심목풍은 왼손을 내리고 칼을 피한 다음 비스듬히 일장을 쳐 냈다. 이 일장의 변화는 너 무도 빨라 전엽청은 곧 몸을 피해야만 했다. 그래서 한 줄기 강한 힘이 밀려 오는 것을 보자 재 빨리 창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심목풍이 냉랭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영, 이 연못 위의 나무배가 아무래도 너의 뼈가 묻힐 곳이 되겠구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딩딩딩! 하는 세 마디의 현(鉉)소리를 내며 한 줄기의 금빛이 허공을 뚫고 날아 그 홍의괴인을 향해 갔다. 이때 홍의괴인은 이미 소영을 선실의 한 모퉁이까지 몰고 가 예리한 손톱이 달린 열 개의 손가락 을 뻗쳐 서서히 소영을 향해 잡아 채려는 참이었다. 소영은 궁지에 몰리자 하는 수 없이 오른쪽 어깨의 아픔을 견디며 왼손을 내밀어 전력을 다해 일 격을 쳐 낼 준비를 하였다. 비록 그 손톱에 긁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장으로써 홍의괴인에 게 중상을 입히려고 했던 것이다. 바로 이 찰나에 한 줄기의 금빛이 당도했던 것이다. 그러자 홍의괴인은 외마디 괴상한 비명을 지 르며 소영을 향해 잡아 채려던 손을 갑자기 되돌려 자기의 눈을 가리며 한동안 부들부들 떨더니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소영은 뜻밖에 다급했던 위험에서 벗어났으므로 어리둥절했다. 이때 비파소리가 어디선가 유유히 들려 왔다. 심목풍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왼손을 휘둘러 상팔을 두 번씩이나 곤두박질치게 한 다음 몸을 날려 홍의괴인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그 홍의괴인을 옆구리에 끼고 창문을 뛰어 나가 한 척의 작은 배에 올라 타고는 물결을 헤치며 달아나 버렸다. 이 순간의 동작은 마치 나는 듯 빨랐다. 전엽청이 비록 선실 밖의 갑판에서 지키고 있었지만 막지를 못했다. 전엽청은 심목풍이 작은 배 에 올라 탄 다음에야 그것을 알 정도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때 전엽청은 조금 전에 심목풍의 일장에 날려 선실 밖으로 뛰어 나왔지만 이미 심목풍의 강한 장력에 의해 중상까지는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상을 입어 암암리에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영은 심목풍이 그 홍의괴인을 끼고 선실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을 보자 꿈에서 깨어난 듯 혼잣 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만약에 심목풍이 그 홍의괴인을 끼고 선실 밖으로 나가는 기세를 이용하여 나에게 일장을 가했다면 나는 꼼짝없이 그의 일장을 맞고 알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소영은 그 짧은 동안에 이미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었으므로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가 마음을 가라앉혔을 때는 이미 비파소리가 그치고 조용했다. 상팔은 역시 노강호답게 위험한 고비가 지나자 곧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형님, 우리 이 사람들을 빨리 구해서 떠납시다." 소영은 네 명의 청의노인과 손불사, 무위도장 등을 둘러 보며 말했다. "우리는 우선 이분들의 혈도를 풀어 줄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하오." 상팔은 이미 두 명의 청의노인을 옆구리에 꼈다. 그러자 소영도 한 손에 한 사람씩 무위도장과 손불사를 껴안고 전엽청도 나머지 두 청의 노인을 안아 일으켰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갑판 위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한 척의 작은 배는 이미 심목풍이 타고 가버렸기 때문에 타고 건너 갈 배가 없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물에는 익숙치 못하였다.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상팔이 말을 받았다. "이 연못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육지까지의 거리도 얼마 되지 않으니 우리들은 물 속에 뛰어 들 어서라도 육지까지 가야겠습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전엽청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 까닭은....?" "이 배 위엔 아무래도 무슨 장치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빨리 갑시다." 소영이 막 물 속으로 뛰어 들려고 할때 상팔이 두 청의노인을 내려 놓고 펑, 펑 하고 이장을 쳐 내 두 개의 창문을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물 속에 던졌다. 소영은 곧 물 속으로 뛰어 들어 한 짝의 창문 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그 위에다 무위도장 손불사를 내려 놓고 자신은 다시 물 속 으로 뛰어 들었다. 상팔과 전엽청도 잇따라서 뛰어 내렸다. 이 두 짝의 창문의 부력은 여섯 사람을 무사히 육지까지 운반할 수가 있었다. 전엽청은 육지에 올라 물에 흠뻑 젖은 옷을 내려다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정말 스스로 불러 일으킨 화다. 만약 우리들이 조금만 침착했더라도 이와 같은 낭패는 당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자 이때 갑자기 펑펑! 하는 폭음이 울렸다. 연못 가운데 떠있던 배가 산산조각이 나서 불길에 싸여 버렸다. 아마도 그 배는 매우 잘 타는 물질로 만들어 놓은 듯 폭발 소리가 나자마자 곧 불 길이 일어나 활활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전엽청은 방금 자기가 했던 생각이 오히려 부끄럽게 되었다. 그래서 상팔을 바라 보며 변명 비슷 하게 말했다. "만약 상형이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 우리가 여태껏 저 배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면 지금쯤 우리 는 모두 저 불 속에 화장되고 말았을 거요." 상팔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말로 다행한 일이지만 그다지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소영이 이 말을 듣자 가볍게 탄식조로 말했다. "한 사람이 강호에서 활동하는 데는 무예만 가지고는 살아 나가기가 힘들며 역시 기지와 운이 있 어야 하는 것 같소." 상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니 우리는 이제 이 여섯 사람의 혈도를 어떻게든 풀어 주어야 할 것입니 다." 상팔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무림 사대현은 그동안 강호의 은원(恩怨)에는 휩쓸리지 않은 지 이미 수십 년이었는데 지금 심 목풍이 이 네 사람을 해치려다 미수에 그쳤으므로 우리가 만약 그들을 구해 낸다면 백화산장은 네 명의 강적이 더 생기는 셈이 됩니다." 소영은 말을 받았다. "내가 보건데 심목풍은 이 여섯 사람의 혈도를 단순히 찍는 데만 그치지는 않은 것 같소." 전엽청이 이 말을 듣자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렇다면 소대협의 뜻은?" 소영이 말을 이었다. "내 생각은 심목풍이 이 여섯 사람의 혈도를 찍은 다음 무슨 수작을 썼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 니 이들을 구할 수 있을는지도 의문입니다." 상팔이 물었다. "형님께서는 그럼 심목풍이 이 여섯 사람에게 무서운 독을 주입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소." 소영은 이번에는 말머리를 돌렸다. "조금 전에 배에서 격투를 벌였을 때는 우리가 매우 불리했소. 만약 누가 암암리에 도와 주지 않 았다면 나는 벌써 그 홍의괴인의 손에 상했을 것이오. 그의 비늘 갑옷은 단단하기 이를 데 없었 소. 실로 도검(刀劍)으로도 상대하기 어려웠소이다." 소영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 옥란, 금란의 말이 맞았소. 심목풍이 부리는 오룡은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 악독한 사람이었 소. 그런데 오늘 저녁엔 일룡을 부렸기 망정이지 만약 한꺼번에 나왔다면 심목풍이 손을 쓸 것도 없이 우리 세 사람은 그 배에서 살아서 나오기 어려웠을 거요." 상팔도 그 말에는 수긍이 간다는 듯 잠깐 동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가 암암리에 도왔을까요?" "나도 그것을 알 수 없소. 아무튼 내가 가장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는 손을 써서 암기로 그 홍 의괴인의 두 눈을 명중시킨 것이오." 상팔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전형께선 줄곧 갑판 위를 지키고 있었는데 혹시 무슨 그럴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소?" 전엽청이 힘없이 대답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와 같은 점을 발견하지 못했소." 상팔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는 혹시 그 금침이 어느 쪽에서 날아 왔는지 기억할 수 있는지요?" 소영이 대답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 금침은 창문 밖에서 쳐 나온 것 같았는데..." 전엽청이 의아한 듯 말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갑판 위에서 금침을 쳐 냈다면 반드시 내 눈에 띄었을 텐데....."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형께선 혹시 무슨 소리를 못 들었소?" "그리고 보니 소대협께서 그 홍의괴인과 격투를 벌이고 있을 때 일진의 은은한 비파소리가 들려 온 것 같았습니다." 소영이 말을 받았다. "바로 그것입니다. 지난날 손 노선배님이 호반에서 심목풍이 거느린 고수와 만나 쌍방이 손을 쓸 때도 일진의 악성(業聲)이 들려 왔었소. 심목풍은 그 악기소리를 듣자 곧 달아나 버렸소. 나중에 사형과 손 노선배님은 그 악성은 퉁소와 비파소리가 배합된 소리라고 얘기했소이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도 그 비파소리가 들리자 심목풍은 여전히 놀라서 도망쳐 버렸소. 사전에 장치해 놓았던 악독한 수단이 채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상팔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심목풍이 비파와 퉁소소리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소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오. 이번에는 비파소리뿐이었는데도 그는 놀라서 달아나 버렸으니까......" 상팔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도대체 그와 같이 높은 무공을 지닌 사람이 누구인데 단지 소리만 듣고도 당대의 간웅 심목풍이 도망을 치다니....." "나는 그 한 개의 금침도 그 탄금인(彈琴人)이 쳐 낸 것이라고 생각하오." 소영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는 줄곧 몸을 숨긴 채 우리를 도우며 금침자혈(金針刺穴)법을 사용하여 암암리에 남해오흉(南 海五兇)중의 첫계와 넷째를 상하게 하였소. 또한 그 교정(交情)을 나 소영에게 넘겨 주어 오흉으 로 하여금 내가 구해 준 은혜에 보답하여 다시는 심목풍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우리들에게 몇 명 의 강적을 덜게 한 것이오."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줄곧 우리와 만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소영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전엽청은 속으로 사형의 안위를 걱정하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 손 노선배님과 저의 사형은 다같이 경험이 풍부하고 지모가 많은 분이므로 만일 그들의 혈도를 풀어 준다면 혹시 이 의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영이 대답했다. "전형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성공할 확률은 크지 않지만 어쨌든 전력을 다해 시험해 보겠습 니다." 전엽청이 말했다. "제가 먼저 한 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되지 않을 때는 소대협께서 손을 쓰셔도 늦지 않으 리라고 생각합니다." 상팔이 이 말을 듣자 곧 말참견을 했다. "이곳은 불편하니 우리 다시 그 나씨 종사로 갑시다." 그는 말을 마치자 청의노인을 안고 앞장 서서 걸었다. 이들은 각각 두 사람씩을 끼고 사당의 대 청으로 향해 걸었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상팔이 말했다. "내가 사방의 동정을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전엽청이 말을 받았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말을 마치자 전엽청은 두 손을 내밀어 먼저 무위도장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소영은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무위도장은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전엽청은 계속해서 추궁과혈의 수법을 발휘하며 한참 동안 주물렀으나 무위도장은 조금도 깨어날 것 같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전엽청은 손을 멈췄다. 그는 얼굴에 맺힌 땀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일종의 독문점혈(獨門點穴)수법인 것 같습니다. 나로서는 자신이 없으니 소대협께서 역시 손을 써 보시기 바랍니다." 소영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나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소이다." 전엽청이 말을 받았다. "소대협께서는 너무 겸손해 하지 마십시오." 소영은 몸을 굽혀 서서히 우장을 내밀어 무위도장의 등줄기에 대고 암암리에 운기를 가했다. 그 러자 한 줄기의 뜨거운 기류가 무위도장의 명문혈(命門穴) 안으로 스며 들어 갔다. 잠시 후 소영은 다시 우장을 거두고, 왼손을 재빨리 내밀어 무위도장의 몸에 있는 네 군데의 대 혈(大穴)을 연거푸 두드렸다. 97. 몸을 숨기는 악소채 소영은 알고 있는 방법의 모든 해혈법(解穴法)은 다 사용했다. 그러나 무위도장은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소영은 단념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소. 우리는 그들을 구명할 방법이 없을 것 같소." 이때 상팔이 살며시 손을 내밀어 무위도장의 가슴에 얹었다. 그의 심장이 가늘게 뛰는 것을 느낀 그는 입을 열었다. "이들은 모두 살아 있습니다." 소영은 상팔을 바라 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무위도장만을 가지고 논한다면 그의 체내에는 몇 군데 맥이 통하지 않고 있소. 그러나 심목풍이 무슨 수법을 썼는지 모르겠소. 우리는 그의 혈도를 풀어 낼 수 없으니....." "각 문파의 혈도를 찍는 초술은 모두 틀려 참파(斬派), 진혈(震穴), 불혈(拂穴) 등의 각종 수법이 있습니다. 이들의 숨만 끊어지지 않았다면 아직 구할 수 있으니 형님께선 너무 초조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차근차근 생각하면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곁에 서 있던 전엽청이 말을 받았다. "만일 이들 여섯 사람의 혈도를 풀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들을 모두 업고 가야 되겠지요?" 상팔이 전엽청의 말에 무엇이라고 대꾸하려는 찰나에 어디서인지 퉁소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 는 매우 부드럽고 가느다란 곡조였는데 가물가물 들리는 그 소리에 소영을 비룻한 여러 사람은 섬뜩함을 느꼈다. 소영은 손을 흔들어 두 사람에게 말을 못하도록 한 다음 귀를 기울였다. 퉁소소리는 흐느끼는 듯, 하소연하는 듯했다. 커다란 원한과 슬픔을 구구절절이 터뜨리어 상심을 일으키게 하는 슬픈 가락 이었다. 소영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가물가물한 퉁소소리는 물결이 급히 흐르듯 어지러워지더니 갑자기 뚝 끊어지고 말았다. 소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매우 비통한 소리군. 듣고 있자니 처량한 마음 금할 수 없소." 상팔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영의 말을 받았다. "그 소리는 비록 가늘고 부드럽지만 그 우아함과 뚜렷한 음색(音色)으로 보아, 퉁소를 분 사람은 무림의 고수임에 틀림없소.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가락 속에 힘이 들어 있을 수는 없지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파소리가 흐른 뒤에 퉁소소리가 따르니 비파를 탄 사람과 퉁소를 분 사람은 분명 부근에 있을 것 같소." 상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파소리가 먼저 들리고 퉁소소리가 곧 이어졌으니, 퉁소소리가 비파소리를 따른 것이지요." 상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비파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시조를 읊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 가 끝난 뒤 다시 시조가락이 들리고, 비파소리와 노랫소리가 범벅이 되어 들려 오기도 했다. 비파소리는 한 많고 사연 깊은 심정을 누구에게인가 호소하는 듯한 처량한 곡조였다. 그 소리는 소영의 마음에 알 수 없는 슬픔을 끼얹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게 했다. 돌연 비파소리가 끊어졌다. 꿈에서 깨어난 듯 소영이 머리를 들었다. 상팔의 얼굴에도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상팔이 긴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나는 어머님의 제사를 지낼 때 한 번 울었던 적이 있고, 오늘 두 번째로 눈물을 흘렸소이다." 상팔의 말에 전엽청도 손등으로 눈두덩을 문지르며 말했다. "나도 비파소리가 하도 처량해서 눈물을 금할 수 없군요." "그 탄금(彈琴)소리는 너무도 절실한 슬픔을 안겨다 주는구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 겠소." 소영의 말에, 전엽청이 무위도장을 힐끗 바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만일 이 여섯 명의 부상자만 없었다면 오늘밤 우리는 그 탄금의 주인공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전엽청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다시 퉁소소리가 울려 왔다. 퉁소소리 역시 비파소리에 못지 않게 처량한 곡조였다. 퉁소소리가 다시 들려 오자 소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가서 저 퉁소를 부는 사람과 비파를 퉁기는 사람을 보고 오겠소." 상팔이 말했다. "형님께서 혼자 가시겠소?" "이곳엔 여섯 분의 부상자가 있으니 이분들을 놓아 두고 함께 갈 수는 없소. 두 분께서는 이분들 을 보살피고 계시오. 내가 가서 보고 올 테니....."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오. 만일 적을 만나게 되면 휘파람을 부시오. 그럼 우리가 곧 달려 갈 테니....." "퉁소와 비파를 다루는 사람이 우리의 적이라면 우리를 돕지는 않았을 것이오." 소영은 말을 끊고 무엇인가 신중히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건 나의 사부께서 일러 준 말씀인데.... 몸에 절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괴상한 성질 을 갖고 있다더군요. 만일 내가 저 사람들을 충동시킨다면 그들은 노해서 나를 상하게 할는지도 모를 일이오. 그 때엔 두 분께서 쫓아 온다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기엔 조금도 나를 도울 수 없을 것 같소. 그러나....." "......." "이것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인데.... 한 시간쯤 기다려도 내가 돌아 오지 않거든 두 분 께서는 이곳에 더 머물러 있지 마시오. 지체 없이 손노선배님을 모시고 약속한 곳으로 돌아 가시 오. 절대로 나를 찾지 말고....." 상팔이 나서며 입을 열려는데 소영은 눈짓을 해 저지하더니 몸을 돌려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상팔과 전엽청은 그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영의 신경은 퉁소소리에 쏠렸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얼마쯤 가자 퉁소소리는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 보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커다란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시력을 집중해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곳은 황량한 벌판이며 저 만큼에 울퉁불퉁 솟아 오른 야산(野山)이 보였다. 소영은 일부러 어 흠! 기침소리를 냈다. 그러나 퉁소를 부는 사람은 가락에 도취된 듯 돌처럼 굳은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았다. 여전히 처량한 음률만 토해 내고 있었다. '내가 낸 기침소리는 진력을 집중했기 때문에 굉장히 강한데, 저 사람은 조금도 듣지 못한 듯 꿈 쩍도 않고 있으니.....' 소영이 의아한 생각을 하며 그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외마디 물음이 튀어 나왔다. "누구냐?" 이 소리는 매우 강하고 갑작스럽게 튀어 나왔으며, 퉁소를 불던 사람의 음성이 아닌 딴 사람의 목소리였다. 소영이 흠칫하며 시선을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 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매우 귀에 익은 음성 같은데, 누구의 목소리일까?' 소영은 그 음성이 귀에 익다고 느꼈으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소영이 대 답을 하려고 멈칫거리는데 속삭이는 듯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말을 하지 마시오. 가능한한 얼굴을 가리고 당신의 신분을 나타내지 마시오." 아주 가까이에서 귓전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듯한 음성을 들은 순간 소영은 흠칫하여 하마터 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소영은 마음의 격동을 누르고 급히 복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나무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발끝으로 땅을 발으며 사뿐사뿐 바위 앞으로 다가 갔다. 이때 퉁소소 리가 끊어지더니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이 퉁소를 불던 사람의 입에서 굴러 나왔다. "옥당이오?" 바위 앞으로 걸어 가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며 대답했다. "그렇소. 바로 소제요." 퉁소를 불던 사람은 약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 동생이 사방으로 아우를 찾아 다니는 것을 알고 있나?" "그 동생은 성미가 너무 급해서 나는 그녀의 팔팔한 성질을 당해낼 수가 없소. 나는 그녀를 만나 지 못하겠소. 아무리 이종사촌간이라 하지만....." 소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한때 나를 흉내내던 남옥당이구나. 그리고 남옥당과 저 퉁소를 불던 사람은 이종사촌 간인 모양이지?' 퉁소를 불던 사람은 코웃음을 가볍게 치더니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어떤 속셈을 품고 있는지, 형이 되는 내가 모를 것 같나?" "종형! 이 일은 형과 이 아우가 결정할 수 없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옳 지요." 다급한 어조로 남옥당이 말하자, 퉁소를 불던 사람이 몸을 일으켜 그의 앞으로 다가 갔다. 그 사 람은 장삼을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긴 옥퉁소를 쥐고 있었다. 옥퉁소를 든 사람은 지극히 빠른 동작으로 남옥당의 앞으로 다가 섰다. 이때 하늘을 가리웠던 구름이 약간 흩어지며 하늘의 한 조각을 드러냈다. 남옥당과 옥퉁소를 든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서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소영이 갑갑증을 느낄 즈음에 옥퉁소를 든 사람이 차갑게 말했 다. "지금부터 나는 너와 이종사촌 형제라는 인척관계를 끊어 버리겠다. 오늘부터 네가 계속 내 뒤를 미행한다면.... 내 손이 너무 무정하다고 탓하지는 말아라." 옥퉁소를 든 사람은 말을 마치더니 몸을 휙 돌렸다. 그의 몸이 몇 번 공중으로 솟았다 내렸다 하 더니 찬 바람을 남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영은 두 사람을 지켜 보며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다가 옥퉁소를 든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묘하군. 맺어진 인척관계를 말 한 마디로 끊을 수 있을까? 무엇인지 깊은 관 계가 있긴 하겠지만....' 옥퉁소를 든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남옥당은 굳어진 자세로 서 있더니 무거운 한숨을 쉬 며 몸을 돌렸다. 그는 소영을 힐끗 바라 보더니 천천히 다가 왔다. 소영은 남옥당의 검술이 뛰어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계태세를 갖추며 그를 주시했다. '남옥당이 자기 종형에게 기분을 잡치고 나에게 분풀이를 할는지도 모르겠다. 제발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소영이 잔뜩 경계하고 있는 사이에 이미 상대방은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소영의 서너 걸음 앞에 다가 선 남옥당은 커다란 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깊은 밤중에 이곳은 무엇하러 왔소?" 소영은 대답을 않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되먹지 않은 소리를 하고 있군. 이곳은 너의 영토가 아닌데, 네가 올 수 있다면 나도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냐?' 남옥당은 소영이 대답을 않자 화난 표정을 지으며 차가운 어조로 다시 물었다. "당신이 만일 지금 대답을 않는다면 아마 다시는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할 기회가 없을 거요. 거듭 묻겠는데, 당신은 누구이며 이곳에 무엇하러 왔소?" 소영은 속으로 웃음을 깨물었다. 다시는 대답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 으름장을 놓는 것이 우스웠 던 것이다. 소영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을 않는 것을 본 남옥당은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무서운 눈으로 소영을 쏘아 보았다. 소영도 지지 않고 그를 쏘아 보았다. 두 사람은 거리가 매우 가깝게 마주 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눈동자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똑 똑히 살펴 볼 수 있었다. '강적을 만났구나!' 남옥당은 상대를 깔보던 기가 죽으며 칼자루에서 손을 내렸다. 그는 약간 부드러운 음성으로 소 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악낭자의 일파요?" 소영은 상대가 겁을 집어 먹는 것을 보고 다시 웃음이 솟구쳤으나 깨물어 삼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악소채의 일파라고 대답하는 것도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남옥당은 거만스럽던 자세를 허물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는 품 속을 뒤지더니 한 통의 편지를 꺼내 소영에게 내밀었다. "수고스럽겠지만 악낭자에게 이 편지를 전해 주고 말씀드려 주시오. 남옥당은 일생 동안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이며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고 말이오." 편지를 건네주는 남옥당의 얼굴은 몹시도 처량하고 초라하게 보였다. 그것을 본 소영은 마음이 움직였다. '무엇이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한 마디 해 주고 싶구나.' 생각했으나 입을 열면 자기의 신분이 탄로될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소영이 편지만 받고 말은 하지 않자 남옥당은 약간 서운한 듯한 표정을 보이더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노형께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억지 부탁은 드리지 않겠소. 하지 만 노형이 악낭자에게 나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해 주시길 바라겠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나는 노형의 은혜를 잊지 않겠소." '너와 너의 종형이 어떤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지 나하고는 상관도 없으며 또 내가 악소채에게 너를 추켜세울 이유도 없다. 내가 어떻게 너를 좋게 얘기한단 말이냐?' 소영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본 남옥당의 얼굴에 약간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그 표정에 곧 처량한 그림자가 덮이며 입에서는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 나는 물러가겠소. 모쪼록 노형의 수고를 기대합니다." 남옥당은 소영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의 어깨 는 축 늘어져 있었고 걸음걸이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이구나. 남옥당은 그 지니고 있는 무공이 지극히 높고 성질이 굳고 강하면 서 호탕하여 그 이름이 널리 퍼졌는데.... 지금은 저토록 초라한 기색이니 그의 패기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둠 속으로 느릿느릿 사라져 가는 남옥당의 뒷모습에 시선을 쏟으며 소영은 깊은 동정심을 느꼈 다. 남옥당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소영은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들여다 보았다. 겉에 는 <악낭자에게 옥당이 드림>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나 안에는 편지 이외에도 다른 것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참! 악누님이 뒤에 있을 텐데.' 소영은 급히 머리를 돌려 뒤를 살펴 보았다. 그러나 두꺼운 어둠의 장막만이 덮여 있을 뿐 사람 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상하다. 조금 전 분명히 악누님의 음성이 들렸는데.... 나에게 신분을 나타내지 말라고 이르더니 피리를 불던 사람도 남옥당도 모두 가 버렸는데 누님은 왜 모습을 숨기고 있을까?' 소영은 큰소리로 부르려고 했으나 아직 멀리 못 갔을 남옥당을 격동시킬까 봐 입을 다물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 소영은 가슴이 답답했다. '퉁소를 들고 있던 사람과 남옥당과의 절교는 악누님이 틀림없이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대강은 짐작할 수 있지만.....'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한동안 기다렸으나 악소채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구름과 별들 이 숨바꼭질을 하고 이따금 산들바람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나타나지 않을 셈인가! 왜 몸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아요! 나를 이곳에 두고 어디로 사라진 것일 까?' 소영은 더 참을 수 없어 어둠 속을 향해 나지막한 음성을 날렸다. "누님, 지금 어디에 있어요? 왜 몸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아요? 이 동생을 만나기가 싫은가요?" 소영의 말이 끝나자 어디서인가 웃음소리가 아주 약하고 짧게 들려 왔다. 그러나 소영에게는 그 소리가 크고 자세하게 들렸다. '누님이 숨어서 웃고 있구나.' 소영은 설레는 가슴을 안고, 방금 웃음소리가 들려 온 방향으로 시선을 부었다. 그의 앞 사 장쯤 떨어진 곳에 큰 바위가 있었다. '저 바위 뒤에 숨기고 있구나.... 내가 못 찾을 줄 알고.....' 소영은 진기를 모아서 몸을 날렸다. 해연략파(海燕掠波)의 경공술을 발휘하여 공중을 날며 반가움 에 소리쳤다. "누님! 나....." 그는 뒷말을 얼른 끊어 버렸다. 바위 뒤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것은 악소채가 아니었다. "소공자, 저는 소공자의 그런 칭호를 감당할 수 없어요." 말하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치렁치렁한 머리에 댕기를 드리운 소녀였다. 얼른 보아 열 대여섯 살 쯤 되어 보였다. 낯선 소녀가 나타나자 소영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몸을 세운 후,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며 물었 다. "낭자는?" 그 소녀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소녀는 악낭자의 계집종입니다. 우리는 한 번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소공자께서는 벌써 잊으시 고 기억 못하세요?" 소영은 소녀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한 마디로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소영이 말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소녀는 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미 얼굴을 숨겨야 될 사람들은 다 갔는데 아직도 가면을 쓰고 무엇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소영은 그녀의 말에 멋적은 미소를 흘리며 얼른 가면을 벗었다. 그것을 품 속에 간직하며 소녀에 게 말했다. "나는 낭자를 어디서 만났는지 영 기억해 낼 수가 없군요. 분명하지 못한 점을 용서하시오." 소영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 계곡 속에서 남해오흉....." 소영은 주먹으로 머리를 쳤다. "아! 그렇구나, 바로 낭자께서 청의동자로 가장해서 남해오흉의 옆으로 스며 들었지." 소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때 낭자께선 남장을 하고 있었으니, 어찌 내가 쉽게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소영은 소녀의 얼굴을 다시 바라 보았다. 소녀는 수줍은 듯 눈을 살짝 흘기며 생긋 웃었다. 소영은 급히 소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나의 누님은 어디 있소?" "누님이라니요?" "악소채 누님 말이오." 소녀는 잠깐 침묵을 지킨 채 소영의 얼굴을 바라 보다가 대답했다. "가 버렸어요." "가다니..... 어디로 갔단 말이오? 낭자는 알고 있지요?" "알기는 알지만....." 소녀는 말꼬리를 흐리며 미간에 가벼운 주름을 잡았다. 소영은 바짝 타는 듯한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안다면, 가르쳐 주시오." "글쎄요. 악아가씨께서 소공자를 만나 주실는지 의문이군요." "무슨 말이오? 누님은 반드시 나를 반길 것이오. 빨리 나를 데려다 주시오. 나는 이미 오륙 년 동 안이나 누님을 뵙지 못했소." 소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만나 주지 않을 거예요. 남옥당과 옥소랑군이 얼마나 애를 태우며 줄곧 악낭자의 뒤를 따랐는지 아세요? 하지만 아가씨는 한 번도 그들을 만나 주지 않았어요. 어떤 애원이나 협박도 유혹도 모 두 다 헛수고였어요. 그런데 소공자라고 꼭 만나 줄 이유도 없잖아요?" "그것과는 다르오. 악누님과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오. 누님은 나를 끔찍이 아끼며 함께 놀고 식 사하며 옷 입는 것까지 거들어 주었소. 누나는 나를 반기며 만나 줄 것이오." 소녀는 눈꼬리를 휘며 배시시 웃었다. "그 때와 지금은 달라요. 그것은 소공자께서 어렸을 때의 일이고 지금은 이미 어른이 다 되었잖 아요?" "다르긴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나는 믿고 있소. 누님은 나를 만나 줄 것이오. 만일 낭자가 끝까 지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가서 물어 보시오." 소영이 한사코 자기 주장을 내세우자 소녀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 니 이렇게 대답했다. "정 그러시다면 소녀가 가서 물어 보고 올 테니 소공자께서는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세요." 그녀가 몸을 돌리려 하자 소영이 황급히 제지하며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나를 데리고 가지 않고 이곳에 남겨 두려는 것이오?" "소녀가 소공자를 모시고 가면 악낭자께선 소공자를 만나 주지 않을 거예요. 소녀만 괜히 욕을 먹게 되고 소공자도 일이 난처하게 될 테니 이곳에서 잠자코 기다리세요. 소녀가 다시 이곳에 나 타날 때에는 적어도 한 가지 대답은 가지고 올 거예요. 만나 주겠다든가 아니면 만날 수 없다든 가..... 만일 악낭자가 소공자를 만날 수 없다고 하면 소녀가 오지 않고 다른 연락방법을 취할는지 도 몰라요. 그리고 만일 소공자를 만나 주겠다면 모시러 오겠어요." 소영은 소녀를 따라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소녀의 말을 듣고 보니 역시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좋소. 여기서 기다리지요." 소녀는 애교스럽게 눈을 한 번 찡긋해 보이더니 몸을 돌렸다.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 어깨가 으쓱하더니 이미 삼 장이나 멀리 날아갔다. 눈깜짝할 사이에 이미 그녀의 모습은 어둠에 잠겨 버 리고 말았다. '의외로 누님을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구나. 어떤 표정으로 나를 맞이할까? 매우 기뻐서 눈물을 흘리겠지? 그동안 어떻게 모습이 달라졌을까?' 소영은 악소채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설레이는 마음을 끌어 안고 바위 위에 올라 앉았다. 황량한 벌관의 차가운 돌 위에 어둠을 잔뜩 마주하고 앉아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외롭거나 무서 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악소채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이 가슴을 벅차게 할 뿐이었다. 밥 한 그릇을 먹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소영은 차츰 지루한 생각이 들었다. 초조한 마음에서 약간 짜증까지 일었다. '왜 여태껏 나타나지 않을까? 만일 그녀가 누님의 답변을 가지고 이곳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할까? 사면 팔방으로 찾아 다닐까? 여기서 언제까지나 기다릴까?' 소영은 초조한 마음을 누를 수 없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이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의 앞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나타났구나!' 소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앞으로 다가 오는 사람은 조금전 나타났던 그 소녀가 분명했다. 소영은 반가운 마음에 급히 몸을 날려 소녀의 앞으로 달려 갔다. 그리고는 숨돌릴 사이도 없이 물었다. "악누님이 나를 데리고 오라고 했지요?" 소녀는 걸음을 멈추고 소영의 얼굴을 딱하다는 듯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소공자의 믿음이 너무 컸어요." 그 음성에 동정하는 마음이 담긴 것을 깨달은 소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는 한 걸음 소 녀에게로 다가 서며 다급하게 물었다. "믿음이 컸다니.... 누님이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말이오?" 소녀는 말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이를 본 소영은 화난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가 무어랍디까?" 소녀는 얼굴을 들고 소영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맑은 시선이 소영의 눈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오더니 땅으로 푹 떨어졌다. 그녀는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녀는 소공자가 몹시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했어요. 아가씨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이 없더니 한 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는데... 만나지 않겠다고 전하라더군요." 소영이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질렀다. "왜 만나지 않겠다는 거요?"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조용히 말씀하세요." "미.... 미안하오. 그런데 그녀는 무엇 때문에 만나지 않겠다고 했는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소영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노여움과 서글픔이 함께 치밀었다. 그것은 다시 서글픔이 되어 가라 앉았다. 그는 힘없는 음성으로 소녀에게 말했다.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 주시오. 나는 꼭 그녀를 만나야겠소." "악 아가씨가 만나지 않겠다는데 소녀가 감히 어떻게 모시고 가겠어요?" 소영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몸을 흔들며 묵묵히 서 있다가 반신반의하는 표정 이 되었다. "정말 말을 전하긴 했소?" 소녀의 눈이 세모꼴로 변하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소영을 쏘아 보았다. 소영은 그 시선을 정면으 로 받았다. 소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믿지 못하겠어요?" "정말 믿기 어렵소." 소녀는 소영을 바라 보더니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소공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아가씨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했어요. 너무 상심치 않는 것이 좋겠어요." "이해되지 않는 일이로군." 소영은 먹구름에 덮인 하늘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리더니 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 소녀에게 주었다. "이것은 남옥당이 악소채에게 전해 달라고 준 것이오. 수고스럽지만 이것을 그녀에게 전해 주시 오." "소공자도 뭐 전할 말이 있어요?" "나는 그녀가 나를 만나기를 꺼리는 이유를 모르겠소." "그녀가 소공자를 만나지 않는 것은 소공자께서 모르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낭자는 그 이유를 아시오?" "모르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소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불똥이 이는 듯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는 단호한 음성 으로 이렇게 말했다. "좋소 가서 악누님에게 전해 주시오. 나 소영은 이후로 어떤 곤란과 역경에 처하더라도 결코 그 녀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다만 과거에 나를 구해 주었던 은혜는 여기서 감사드리겠다고...." 소영은 말을 마치더니 두 손을 모아 쥐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소녀는 급히 소영의 앞에서 몸을 비키며 물었다. "우리 아가씨에게 감사를 드린다면서 왜 소녀에게 절을 하지요?" "이 절도 그녀에게 낭자께서 전해 주길 바라오." 소녀는 너무도 어린애 같은 소영의 태도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렸다가 얼른 지워 버렸다. 그녀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녀는 소공자께서 이르신 말씀을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낭자에게 폐를 끼쳤던 것, 이 자리에서 감사드리겠소." 소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 보며 소녀는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소영은 한 번도 뒤를 돌아 보지 않았다.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하군. 그러면서도 어린애처럼 단순한 사람....." 소녀는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몸을 들렸다. 소영이 나씨의 사당으로 돌아 오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던 상팔과 전엽청이 반색을 하며 다 가섰다. 전엽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소. 소대협의 신상에 어떤 일이 생기지나 않았나 하고.... 무슨 일은 없었지요?" "미안하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사고도 없었소. 손 노선배님들은 좀 어떠시오? 정신이 드셨소?" 상팔이 대답했다. "그분들의 혈도는 이미 풀렸소. 또한 해독재를 복용시켰습니다." "정말이오?" 소영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묻자 상팔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손불사의 음성이 대청 안에서 들 려 왔다. "나는 깨었소. 소제는 어서 들어 오시오. 심중에 많은 의혹이 쌓였는데 이것을 어서 풀고 싶소." 소영은 손불사의 음성을 듣고 급히 안으로 들어 섰다. 과연 무위도장, 손불사 그리고 무림의 사대 현인들도 모두 깨어 있었다. 소영이 들어 서는 것을 보고 손불사가 다급하게 물었다. "소제!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어찌된 일이라니요? 나도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소영은 손불사에게 시선을 떼어 따라 들어 온 상팔을 향해 말했다. "누가 이 분들의 혈도를 풀었소?" "형님은 모르시오?" "아니, 나는 이곳에서 나간 뒤에 한 번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럼 이상한데......" 상팔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소영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빨리 얘기해 보시오." "형님이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한 분의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이곳에 나타났었소. 그는 형님의 명령을 받고 이분들의 상처를 치료하러 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요? 그 사람의 모습은 어땠소? 남자요? 아니면 여자요?" "그는 가면을 썼으며 남자의 복장을 했더군요." "말투는?" "완전히 남자의 목소리였소." 소영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럴 만한 인물을 떠올리려고 했으나 기억나는 사람 이 없었다. 그는 갈등을 느끼듯 다시 물었다. "그 뒤는 어떻게 되었소?" "나하고 전형은 그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생각되어 막으려고 했었소. 그런데 그가 잠자기 손을 뻗 치더니 빠르기 이를 데 없는 동작으로 우리의 혈도를 찍어....." "계속하시오." 소영의 재촉에 상팔은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혈도가 찍혀 그를 막을 수 없었소. 그는 안으로 들어 서서 이분들의 혈도를 풀어 주고 환약 하나씩을 주더니 다시 우리 두 사람의 혈도를 풀어 주었소." "그는 자기의 신분을 밝혔소?" "밝히지 않았소." "무슨 말이든 묻지는 않았습니까? 자세히 얘기해 보시오." 상팔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곁에 서 있던 전엽청이 한 발 나서며 말했다. "그는 가기 전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소. 나는 항시 강호의 일을 묻지 않으며 무림 속에서의 생 과 사에 대해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는 한 사람이 열여덟 명의 무림인물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으나 역시 참견을 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소대협에게 꼭 전하라 는 말을 마치고 그는 홀연히 사라졌소." 소영은 전엽청의 말을 듣고 탄식하듯 말했다. "그 사람의 성격은 매우 냉혹하고 괴상한 것 같군." "그 사람의 성격은 매우 냉혹했소. 듣고 있자니 소름이 끼칩니다. 그러나 그는 소대협을 몹시 존 경하고 있는 듯했소." 이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손불사가 말참견을 했다. "듣자하니, 그는 소제에게서 어떤 도움을 받았거나 아니면 도움을 바랄 만한 일이 있는 모양이군 요." 소영은 손불사의 말을 듣고 다시 머리를 쥐어 보았으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나에게서 도움을?" "아마 틀림없을 것이오. 그가 말하기를 손선배님과 우리 사형, 그리고 무림 사대현의 생사에 대해 서 자기는 무관하며, 자기가 이분들을 구해 준 것은 모두 소대협을 위해서이니 자기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고 했소. 모든 공을 소대협에게 돌리며 그는 또 이런 말을 했소." 전엽청의 말에 소영이 얼른 물었다. "어떤 말을?" "후일 소대협에게 도움을 청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소영은 도무지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도움을 받겠다는 것인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모든 사람 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린 것을 알아 챘다.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해서 이익될 것은 없겠다. 나 혼자 속으로만 멍청해지고 겉으로는 아는 척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음. 그래서, 그는 또 무엇이라고 말했소?" "그 몇 마디만 하고 곧 사라졌소." 소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악소채에게 무시를 당한 일에 울분이 치솟고 마음이 처량해져서 상팔과 전엽청을 붙들고 이 울분을 터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곳으로 들어 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그 동안에 어리둥절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기랄, 비를 피하려다가 홍수를 만난 격이로구나. 이렇게 된 이상 내 울분은 속으로 가라앉혀 나 혼자 삭이는 수밖에 없겠군.' 겉으로는 우울한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가슴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생각은 복잡했으나 그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손불사에게 말을 걸었다. "손 노선배님은 좀 어떠십니까?" "그 사람이 준 약은 효능이 매우 신비롭구려. 심목풍이 내 뱃속에 넣은 독이 말끔히 해소된 것 같소이다." 손불사의 대답에 소영은 다행이란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잘 되었어요. 도장께선 어떻습니까?" "나도 많이 나아진 것 같소이다." 무위도장의 대답에 소영은 다른 네 사람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네 분의 상처는 좀 어떻소?" 맨 앞에 앉아 있던,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손을 모아 쥐며 대답했다. "낙양의 주문창(朱文員)은 소대협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두 번째 노인이 일어서며 역시 공손하게 읍을 하더니 말했다. "제남(濟南)의 진사정(秦士廷)이 소대협에게 감사 드리오." 세 번째 노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금릉(金陵)의 우자청(尤子淸)이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 드리오." 네 번째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강주(江州)의 허시당(許時棠)은 대은을 입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깊은 마음으로 은혜에 감사드립 니다." 소영이 네 사람의 표정을 살펴 보니 그들은 조금도 수치스럽거나 비굴하거나 하는 기색이 없이 조용하고 엄숙했다. '과연 이들 네 사람이 무림의 사대현이란 것은 과장된 칭호가 아니었구나. 수양도 이런 경지에 다다르려면 많은 수업과 시련을 겪어야 하겠구나.' 소영은 속으로 감복하며 그들의 인사에 답하였다. "미거한 몸이 무슨 은공을 베풀었다고 할 수 있겠소? 천운이 현인들을 도운 것 뿐이지요. 헌데 네 분의 현인께서는 강호의 은원(恩怨)관계에 발을 딛지 않은 줄로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심목풍 과는 원한관계를 맺게 되었지요?" 주문창이 씁쓸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우리는 그 심목풍과 아무런 원한도 없소이다." "그렇다면 그건 좀 이상하군요. 심목풍은 당신네 현인들의 혈도를 찌르고 독약을 먹인 것으로 보 아 죽일 의사가 있었던 모양인데.....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람을 어찌 무참히 죽이려 들었겠습니 까? 제 소견이 좁아서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진사정이 대답했다. "탁자자탁, 청자자청(濁者自濁, 淸者自淸)이라, 마음이 흐린 사람은 근본부터 흐리고, 마음이 깨끗 한 사람은 근본부터 깨끗하다. 이런 말이 있지만, 우리는 그 심목풍과 아무런 은원관계도 없는 것 이 확실하오." 소영은 이들이 똑같은 말을 하자 속으로 고소(苦笑)를 삼켰다. '이 사람들은 너무도 완고하구나. 죽어서도 저런 말을 할까? 원한관계가 없는데 어떻게 죽임을 당할 뻔했단 말인가?' 소영은 이런 생각을 했으나 겉으로는 전혀 나타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심목풍이란 사람의 잘못이 크군요. 이유도 없이 네 분을 한 곳에 모아 놓고 혈도를 찌르고 독약을 먹이다니....." 우자청이 입을 열었다. "문심본무귀(問心本無鬼)요, 하필상길흉(何必相吉凶)이라. 자기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거늘 무엇 때 문에 길흉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소?" 소영은 다시 웃음을 삼켰다. '어렵쇼?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들은 심목풍에게 원한을 끼 친 일이 추호도 없다고 하며,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마음에 두지 않고 약속대로 왔을 뿐이라는 얘기인데. 무슨 잠꼬대인지 통 모 르겠군.' 소영은 일종의 장난기섞인 즐거움을 속으로 맛보며 다시 말을 던졌다. '내가 생각해 보니, 네 분의 현인께서 너무 도량이 넓고 선하시기 때문에 심목풍이 해치려고 든 것 같군요." 이번에는 허시당이 소영의 말을 받았다. "군자흉회, 명월청풍(君子胸懷, 明月淸風)이오. 생불부인, 사이하감(生不負人 死而何感).... 군자의 품은 뜻은 밝은 달이나 맑은 바람과 같고, 살아서 남에게 부담이 없으니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 외다." 소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후훗! 정말 사람 배꼽 빠지겠군. 이 사람들은 도무지 감정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군. 원수진 일이 없고 빚진 일이 없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그러나 소영은 다시 생각했다. '아니. 웃을 일이 아니야. 이 사람들은 확실히 현인군자이다. 심목풍이 이들을 정말 죽여 버렸다 해도 눈꼽만큼의 원한도 품지 않겠구나. 인간이 이런 도에 다다르려면 얼마나 수련을 쌓아야 하 는 것일까? 성인 공자(孔子)도 희비애락의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텐데 ......" 이때 네 현인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던 손불사가 입을 비쭉거리더니 신랄한 어조로 말을 토했 다. "흥, 네 분은 과연 성인군자시요. 이 늙은 거지와 무위도장이 목숨을 걸고 모험을 감행하여 구하 러 갔던 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헛수고였군요. 진작 이럴 줄 알았다면 심목풍이 네 분의 현인을 죽이든 살리든 그대로 놔 둘 것을.... 그랬으면 나도 혈도를 찍히고 독을 복용하는 수치와 고통을 면했을 텐데...." 주문창이 감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섞이지 않은 밝은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손불사의 말에 대꾸했 다. "수은당지보, 적원응조소(受恩當知報, 積怨應早逍)라.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해야 하고 원한이 쌓였 으면 일찌감치 없애 버려야 하는 법, 우리는 손대협과 무위도장께서 목숨을 걸고 구해 주신 은혜 를 입었으니 영원히 가슴 속에 새겨 두겠소이다." 손불사가 불쾌한 듯 말했다. "이 늙은 거지가 은혜를 보답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 같소?" 곁에 있던 무위도장도 역시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네 분은 무림에서 수십 년 동안 강호의 일에 참견치 않고 사대현인의 칭호를 얻었으니 과연 현 인답다고는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자기의 처신만을 생각하고 시비를 가리기를 꺼리는 것 같소이 다." 소영은 생각했다. '오랫동안 사대현인의 무공은 매우 강하다고 들었다. 이들이 만일 무림의 정의를 위해 발벗고 나 서서 심목풍과 대항한다면 우리에겐 적지않이 힘이 증가될 것이다. 또한 은거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무림의 고수들을 초빙해서 심목풍을 상대해 싸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진사정이 무위도장의 말에 답변했다. "옳고 그름은 원래 옛부터 있어 온 기정사실이거늘 우리가 시비에서 벗어난 것이 무엇이 그릇되 었단 말이오?" 손불사가 차가운 조소를 띄며 말했다. "여러분께서 시비의 밖으로 멀찍이 벗어났다면 심목풍은 무엇 때문에 여러분에게 억지로 독약을 먹여 죽음으로 몰아 넣으려고 했을까요?" 대답을 듣지 않고 무위도장이 손불사의 말끝을 이어 비꼬았다. "네 분께서는 무림의 정의와 화(禍)를 수수방관하며 산수의 경치에 묻혀 세월을 잊고 풍류에 도 취하면서 오히려 의기양양한데 한 번 자신에게 물어 보시지. 당신들은 과연 현인다운가? 아니면 졸장부인가....." 무위도장의 말 속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 들었다면 벌컥 화를 내며 대들었을 것이 다. 그러나 네 사람은 시종 얼굴에 아무런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주문창만이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비꼬고 조소를 퍼부어도 네 사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본 손불사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 더니 입을 열었다. "네 분이 무공의 절학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대현인이라 불린 것은 무림의 은원 속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기 때문이오. 무림 속의 공명과 무림 개인의 원한관계와 이해타산을 외면하고 은거생활 을 즐기신 것은 확실히 존경할 만하며 대현인이란 칭호를 얻을 만하오. 하지만, 이번 심목풍이 네 분을 해치려고 독수를 뻗쳤던 것은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성질이 매우 다릅니다." 진사정이 물었다. "어디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이오?" "심목풍은 무림을 손아귀에 틀어 쥐고 마음대로 흔들려는 야욕을 품고 있는 것이오. 그래서 평소 에 무림의 어느 누구와도 아무런 원한관계가 없는 네 분의 현인들까지 해치려고 한 것이외다. 그 가 현인들을 해치려는 것을 네 분께서 따지지 않겠다고 치더라도, 무림의 정의가 풍전등화가 되 어 간악한 무리에게 짓밟혀도 외면만 하실 수 있소이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중하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표정이 네 현인의 얼굴에 비쳤다. 이윽고 우자청이 손불사를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손대협의 의견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 오?" "간단하고 당연한 방법이 있소이다. 네 분께서 무림의 대의를 위해 몸을 내세우는 것이외다. 그 흉악한 심목풍과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이오." 이 말을 들은 허시당이 말했다. "손대협의 뜻은 무림의 살벌하고 치사한 돌풍 속에 우리들이 쉽쓸려 들어 가야 된다는 것이 아니 오?" 무위도장이 손불사 대신 입을 열었다. "지금 강호는 정의가 소멸당하고 악당이 판을 치고 있소 네 분은 모두 무림의 인물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소이다. 현인과 악당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며, 네 분의 현인께서는 종횡으로 날뛰며 무 림의 기강을 흐리고 있는 악당들을 그대로 누워서 보고만 계시지는 않겠지요?" 네 현인들은 다시 침묶을 지켰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 속에 젖어 있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주문창이 진사정, 우자청, 허시당을 돌아 보며 물었다. "세 분 현제(賢弟)께서는 손대협과 무위도장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물론 나는 이 두 분의 말씀이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지만....." 진사정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의 이치는 틀림 없으나, 우리들로 하여금 무기를 들고 피비린내 나는 무림에 뛰어 들게 한다 는 것은 마음 속이 불안스럽고 꺼림 직함을 금할 수가 없군요." 진사정의 말이 끝나자 우자청이 뒷말을 이었다. "소제의 생각으로도 손대협과 무위도장의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는 것은 인정하오. 심목풍이 우리 의 혈도를 찍고 독을 강제로 복용시킨 것을 따질 수는 없소. 그러나 그 심목풍이 그릇된 야욕을 품고 강호의 기강을 흐리며 악행을 감행하는 것을 보고서도 못 본 척 방인한다는 것은, 후세의 무림 질서를 생각해서라도 좀 생각해 볼 문제인 줄로 알고 있소." 허시당이 그 뒤를 이었다.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줄곧 우리의 일만 하면서 강호의 시비에 관여치 않았었소. 지금 우리가 새 삼스럽게 강호의 시비에 끼어든다는 것은 좀 어떨까 생각되는군요. 다시 말하자면 어리둥절하단 말이외다." 무위도장은 네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사람들의 마음은, 반은 우리에게 동조할 뜻을 보이고 반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결단을 못 내리고 망설이는구나. 고삐도 너무 바짝 잡아 당기면 끊어지는 법. 일단 늦추어 주는 것도 괜 찮겠다.' 이런 생각을 한 그는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네 사람에게 말했다. "네 분께서는 너무 조급히 결정지으려고 하시지 말고 천천히 상의해 보십시오. 우리들은 결코 억 지를 써서 네 분들을 곤란하게 할 생각이 없소이다." 이 말을 들은 주문창은 진사정, 허시당, 우자청에게 눈짓을 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무위도장과 손불사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우리가 일단 상의를 한 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는 것이 어떻겠 소?" "언제쯤 회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무위도장의 질문에 주문창이 반문했다. "글쎄요.... 언제쯤이 좋을까?" "삼일 후 점심 때 이곳에서 만나면 어떻겠소? 삼 일이면 충분히 상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데....." 손불사가 기한을 제시하자 주문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좋겠소. 삼 일이면 충분하오. 그럼 우리는 한 마디로 약속하겠소. 삼 일 후에 이곳에 오 겠소. 그 때에 우리가 상의한 결과를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소." 주문창은 약속하는 대답을 하더니 소영에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밖으로 향해 걸어 나갔다. 그가 나가자 진사정, 우자청, 허시당, 세 사람도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는 사라져 버렸다. 98. 사두추혼전 네 사람이 밖으로 사라지자 실내는 잠시 침묵으로 메워졌다. 이 침묵을 깨뜨리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손불사였다. 그는 네 사람이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그 네 사람의 고집은 정말 두 손을 들 정도로군. 늙은 거지는 괴이한 성질을 가진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저토록 괴벽이 도를 넘는 사람은 눈뜨고 처음이오. 정말 존경할 만한 고집장이들이오."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소영이 입을 열었다. "그 사대현인의 행동에는 나도 어리둥절할 뿐이었소. 세상의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선과 악을 가 려내기란 어려운 것이지요. 그 사대현인은 절세의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강호의 소용돌이에 쉽쓸리지 않고 은원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구분하기 어려운 시비 속에 뛰어 들기를 꺼리기 때문 이오. 그래서 그분들은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지요. 하지만 그 정도가 하도 지나쳐서 흡사 감정을 지니지 않은 것 같아 어리둥절했소이다." 소영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 분들이 개인적인 원한까지도 따지지 않으려는 도량은 실로 현인군자의 칭호를 받을 만하지 요. 일반 무림의 사람들은 원수를 반드시 갚아야 된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잖소? 이것과 사대 현인의 생각과는 실로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 "무림의 정의가 땅 속에 묻히려는 이 절박한 현실을 외면하려는 것은 너무도 안이한 사고 방식이 아닐까요? 영웅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선행과 도리를 외면하다 니...." 무위도장이 소영의 말을 받았다. "허명오인(虛名誤入)이라.... 헛이름을 듣고 사람을 잘못 보는 경우가 있는 법. 그 사대현인은 자기 들의 명예가 없다면 결코 그토록 참아 내는 마음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오. 허지만, 이것은 매 우 미묘한 문제가 개입되어 있소이다." "겉으로 보아서 그 네 사람은 명리를 탐하지 않고 원한을 마음에 새겨 두지 않으며 기량이 넓어 남이 따라 가지 못할 것 같소. 허나 속을 들여다 보면, 이 네 사람의 행위는 많은 모순을 간직하 고 있소. 그들은 나름으로의 계산이 있는 것이오. 사대현인이란 이름이 꼭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 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소. 도장의 안목은 확실히 높소이다." 무위도장의 말에 손불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지했다. 무위도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시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경쯤 되었겠죠." 전엽청이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무위도장은 문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우리도 이제 가야겠소. 그들이 너무 오래 기다릴 것 같소." 손불사는 그 말에는 반응도 보이지 않고 소영에게 말했다. "소제, 내가 물어 볼 말이 좀 있는데....." "어떤 질문인지요?" 소영이 반문하자 손불사가 물었다. "상팔 형에게 들으니 소제께서는 퉁소소리를 쫓아 나갔었다고 하던데, 그 퉁소를 불던 사람을 보 았소?" 소영은 손불사의 질문을 받자 문득 악소채가 생각났다. 만나고 싶은 일념으로 소녀를 통해 간청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한 것을 생각하니 그녀가 다시 야속스러워졌다. '무엇 때문에 거절했을까? 잠깐만 만나 주면 되었을 텐데.... 사 람의 정리를 그렇게 잘라 버릴 수 있을까?' 소영은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억지로 참으며 대답했다. "예, 만나 보았소." 짧은 대답이었지만 소영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손불사, 상팔, 전엽청의 시선이 일제히 소영에게로 쏠렸다. 나가려고 일어섰던 무위도장도 몸을 돌리며 소영을 주시했다. 손불사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물었다. "정말로 그 퉁소부는 사람을 보았단 말이오?" "그렇소이다." "어떤 인물이었소?" 모두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을 훑어 보며 소영이 대답했다. "장삼을 입은 소년이었소." 무위도장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어요? 또 젊은 사람이란 말이오?" "그렇소. 어두운 밤이라 비록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는 틀림없이 젊은 사람이었으며 장삼 을 입었고 턱에는 한 올의 수염도 보이지 않았소." 소영의 대답에 무위도장이 손불사를 바라 보며 물었다. "노선배님, 무림의 인물중에서 누구의 퉁소소리가 제일 좋은지 아시오?" "소왕장수(蕭王張秀)....." 손불사는 말을 중단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소왕장수는 이미 금궁 안에 갇혀 있는데?" "그렇소. 제가 알기로도 소왕장수의 퉁소에는 따를 사람이 없다고 생각되오. 소문에 의하면 그의 퉁소소리는 매우 오묘하고 신비스러워 나는 새도 불러 들이고 백 가지의 새 울음소리도 불어 낼 수 있어 퉁소왕이라 불린다고 하더군요." "그 퉁소왕이 금궁에 갇힌 뒤부터 강호에선 퉁소를 부는 고수가 있단 말을 다시 들을 수 없었는 데.... 그가 돌연 강호에 나타났군요." 손불사와 무위도장의 말을 듣고 있던 전엽청이 끼어 들었다. "나는 너무 늦게 태어나 소왕장수의 퉁소소리를 들어 보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그러나 아 까 들었던 그 퉁소소리는 정말 사람의 오장 육부를 모두 뒤집어 놓는 듯 기묘하고 처절하더군요. 그 퉁소소리는 줄곧 처량하고 애절한 곡조가 되어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하더군요." 무위도장이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물었다. "혹시 퉁소소리의 뒤를 이어 비파소리도 들리지 않았소?" "비파소리가 먼저 나고 퉁소소리가 뒤따랐습니다. 비파소리는 유연한 슬픔을, 퉁소소리는 처절한 슬픔을 나타내고 있더군요." "바로 그것이오. 그날 밤 호반에서 심목풍이 놀라 도망가게 한 것도 비파와 퉁소의 혼합된 소리 때문이오." "그것이 누구일까요? 퉁소를 부는 사람과 비파를 뜯는 사람이.." 손불사가 성급하게 묻자 무위도장이 대답했다. "노선배께선 머릴 짜가면서 생각하실 필요가 없소. 그 탄금하는 사람과 퉁소부는 사람은 남물래 우리들을 도와 주었으니 우리의 적은 아닐 것이오. 그들이 지금은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지 만, 언젠가는 만날 날이 있을 것 아니겠소?" "그렇소. 심목풍은 비록 물러갔지만 그가 악주를 떠났다고 볼 수는 없으니 우리는 일찍 약속한 장소로 돌아 갑시다." 손불사의 말에 무위도장은 머리를 끄덕여 찬성했다. 소영은 이때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손불사와 무위도장의 대화를 듣고 소영은 비파를 뜯던 사람과 퉁소를 불던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머리에 떠올리며 악소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파를 뜯던 사람은 악소채가 분명하며 퉁소를 분 사람은 남옥당의 이종사촌이다. 두 사람은 비 파와 퉁소로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을까? 하나는 구애를 하고 하나는 그것을 거절한 것일까? 어쨌 든 악소채가 나를 만나기를 꺼리는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정말 야속한 여자다. 나는 이 사람 들에게 내가 당한 억울함을 하소연해서 이 울분을 다소라도 풀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소영은 차마 자기가 악소채에게 당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속으로 울분을 누르며 겉으 로는 태연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소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본 상팔이 걱정되는 듯 물었다. "소형, 무슨 근심이 있소?" "아, 아니오." 소영은 어색한 웃음을 띠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몸을 일으켰다. 이들 나씨의 사당을 나와 어둠을 헤치며 걸었다. 소영과 손불사는 두어 걸음 뒤로 처져서 걸었다. "내가 겪은 이야기를 들어 보겠소?" 소영이 묻지도 않는데 손불사가 먼저 입을 열어 자기가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손불사와 무위도장은 개방의 제자가 뛰어와 보고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림의 사대현인이 심목풍에게 꾀임을 당해, 나씨 사당의 연못에 있는 목선(木船)에 있다는 것이다. "무위도장, 심목풍의 성질은 매우 흉악한데, 사대현인은 필경 큰 화를 입었을 것 같소이다." 손불사의 말에 무위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네 사람은 강호와 내왕은 없지만 이름이 왜 알려져 있으며 무공도 매우 강한데, 심목풍 이 간사한 혓바닥과 간계로써 그들을 매수한다면 강호는 발칵 뒤집히고 말 것이오. 그 영향은 상 상도 못할 정도로 클 텐데......" "우리 어서 가 봅시다." 두 사람은 급히 나씨의 사당을 향해 걸어 갔다. 그들이 사당 뒤의 연못에 이르러 보니 한 척의 목선이 떠 있었다. 두 사람은 우선 사방의 동정을 살핀 후 목선에 시선을 집중하였다. 목선에는 촛불이 켜져 있고 그 촛불 밑에는 둥그런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탁자 주위로 사 대현인이 둘러 앉아 있는데 심목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대현인은 있는데 심목풍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잖소?" 무위도장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손불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말이오. 보아하니 심목풍이 어디에 숨어 있는 모양인데 ..... 아무튼 우리는 어서 배 위로 올 라가 봅시다." "잠깐 기다리시오." 무위도장은 침착하게 사방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심목풍의 모습은 아무 데도 없었다. 무위도장은 심목풍이 매우 간교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얼른 배 위로 뛰어 오르지 않았다. "우선 사람을 구해 놓고 볼 일이오." 손불사는 더 망설일 것 없다고 생각하며 훌쩍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 들었다. 무위도장은 할 수 없이 뒤따라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배에 올라 서서 다시 살펴 보았다. 여전히 심목풍은 보이지 않았다. 사대현인은 혈도를 찍힌 채 앉은 자세로 굳어져 있었다. "우선 이분들의 혈도를 통하게 합시다." 두 사람은 사대현인의 혈도를 풀어 주기 위해 허리를 구부린 채 열심히 주물렀다. 그러나 네 사 람의 혈도는 아무리 애를 써도 풀어지지 않았다. 이 때였다. 붉은 옷을 입은 괴인이 하나 나타나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다가 오고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손불사와 무위도장은 기겁을 하도록 놀랐다. 손불사는 진기를 모아 맹렬한 일장을 홍의괴인에게 뿌렸다. 그의 손에서 발출된 장풍은 무서운 기세로 홍의괴인의 심장에 밀어 닥쳤다. 그러나 홍의괴인은 잠깐 머뭇거렸을 뿐 다시 다가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서운 놈이다. 나의 일장을 받고도 끄덕없다니....' 손불사가 아연실색을 하고 있을 때 칼을 뽑아 든 무위도장이 홍의괴인의 어깨를 향해 곧장 찔러 갔다. 검은 홍의괴인의 어깨를 찌르자 둔탁한 음향이 검끝에서 들릴 뿐 홍의괴인은 여전히 꿈쩍 도 않았다. 단단한 돌을 찌른 결과밖에 얻지 못했다. '아니...... 이럴 수가! 저놈은 도대체 사람이냐? 뭐냐?' 두 사람의 놀라움은 극도에 달했다. 머리끝이 쭈뼛하는 공포와 먹구름장 같은 의혹을 느끼며 어 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였다. "휘익!" 귓전에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급히 몸을 움직였을 때에는 이미 심목풍에게 혈도를 막힌 뒤 였다. 손불사는 여기까지 이야기하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는 소영을 바라 보며 묵묵히 몇 걸음 옮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도무지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후의 일은 소형제께서 이미 알 고 있듯이 심목풍에 의해 독약을 먹게 되었던 것이지요." 소영이 입을 열었다. "나도 그 홍의괴인을 만났었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심목풍에게 사 로잡혀 있었을 것이오." 두 사람이 말하는 사이에 이미 두부점에 가까와진 모양이었다. "드르륵 들들 드르륵 들들" 맷돌 돌아 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이 가까이 가 보니 두부점의 문은 활짝 열려져 있고 촛불 속에서 남루한 옷차림을 한 노인이 맷돌을 돌리고 있었다. "들어 갑시다." 손불사가 앞장 서서 집 안으로 들어 섰다. 맷돌을 돌리던 노인은 손불사의 얼굴을 바라 보다가 그 뒤에 따라 들어 온 무위도장을 바라 보더니 다시 맷돌을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방에서 기다리고 있다오." 손불사는 뒤에 서 있는 네 사람에게 들어 가자는 눈짓을 하고는 안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갔 다. 그 뒤를 소영을 위시한 네 사람이 따라 들어 갔다. 이들 다섯 사람이 안방에 들어서 보니 사마건(司馬乾), 두구(杜九)와 무림의 제자들이 비좁은 방 안에 둘러 앉아 있었다. 한쪽에 있는 나무침대에는 팽운(彭雲)이 누워 있었다. 소영은 침상 앞으로 다가 서며 팽운에게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팽형, 좀 어떠시오?" 팽운은 파리한 안색에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아마 죽지는 않을 모양이오." 그는 말하면서 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침상 밑으로 내려 서서 손불사에게 절을 했다. 그것을 본 손불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서 눕거라!" 팽운이 침상으로 가서 눕자 손불사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상처는 어디냐?" "왼쪽 가슴 위입니다. 다행히 두 노선배님께서 매우 세심하게 상처를 보살펴 주셨기 때문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곁에 앉아 있던 두구가 겸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별말씀을.... 우리 거북스러운 존칭은 치우고 서로 형제라 부릅시다." 두구의 말에 팽운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저의 사조(師祖) 앞에서 두 노선배님께 저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어찌 형제의 대열 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소이다. 친구로 사귀고 싶다면 우린 사귀면 되는 것이오. 어찌 상하를 구별하려는 겸손을 피우시오?" 손불사가 웃으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그 말도 괜찮군. 팽운은 나를 사조라고 칭하리 서로 친구 관계를 맺겠다면 두형도 나보다 두 계 단이 낮아지게 되는 것이오." 두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무위도장이 다가 서더니 팽운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 보았다. "괜찮소. 내일 다시 두 첩의 약을 복용하면 곧 회복되겠소." 이때 맨 나중에 들어 온 상팔은 방이 너무 좁아 앉을 자리가 없는 것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오래 거처할 곳이 못 되는군요. 우린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팔의 말을 들은 팽운이 말했다. "내가 은밀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곳이오?" "성 밖으로 오 리쯤 가면 한 채의 빈집이 있습니다. 집 주위는 대나무 밭으로 둘러싸였고 집안이 매우 넓으며 모든 가구와 집기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팽운의 말에 전엽청이 이상한 듯 물었다. "그런 집이 어찌 주인이 없소?" "글쎄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귀신이라도 나오는 흉가이거나 뭐 그런 이유가 있겠지 요." "그렇게 거처하기에 좋은 곳이 있다면 더 머무를 필요없이 일찌감치 가면 되겠군. 넌 걸을 수 있 겠느냐?" 손불사가 팽운을 돌아 보며 묻자 그는 곧 대답했다. "천천히 걷는다면 지탱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날이 새기 전에 우리는 이곳을 빠져 나가지." "팽형은 내가 업겠소. 어서 내 등에 업히시오." 두구가 등을 돌려 대며 말하자 팽운은 몇 번 사양하다가 그의 등에 업혔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 두 일어나 두부집을 나섰다. "소대협, 당신은 귀신이 있다는 것을 믿소?" 전엽청이 뒤에 처져서 걷는 소영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묻자, 소영은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난 믿을 수 없소." "이 전엽청도 귀신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었소. 그러나 귀신이 있다는 말은 몇 백 년이 지나도 없 어지지 않고 도처에서 전해 오고 있잖소? 남의 말을 들으면 귀신이 있을 법도 하고 한 번 그 흉 가에 가서 귀신을 직접 만났으면 좋겠소이다." 소영의 머리 속은 악소채 생각으로 꽉차 있었다. 그는 악소채가 어째서 자기를 만나지 않는지 그 것만이 섭섭하고 이상하게 생각되어 전엽청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소영이 심각하게 무슨 생각에 젖어 있으며 마음이 몹시 들떠 있는 것을 눈치챈 전엽청은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에는 동쪽 하늘에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대나무의 잎사귀들은 산들바람을 안고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울창한 대숲 사이로 커다란 집이 한 채 보였다. 그것을 본 손불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팽운에게 나직이 물었다. "이 집은 조금도 파괴되지 않았으며 매우 크고 깨끗해서 조금도 황량한 느낌이 들지 않는구나. 그런데 어째서 사람이 살고 있지 않지?" "글쎄요. 사람이 왜 안 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제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살펴 보는 것이 좋겠소. 만일 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면 우린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도 도리이겠지요." 무위도장의 말에 상팔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게 좋겠습니다. 제가 먼저 가서 살펴 보지요." 상팔은 말을 마치자마자 대숲을 빠져 나가 대문 앞으로 다가 갔다. 그가 보니 검은색이 칠해진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상하다. 사람이 살지 않다면 왜 대문이 닫혀 있을까? 입이 가벼운 팽운이 다른 집을 잘못 보 고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상팔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등 뒤에서 팽운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빈 집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상형은 망설이지 말고 대문을 열어 살펴 보시오." 상팔은 팽운의 말에 용기를 내어 대문을 밀어 보았다. 그러나 대문은 굳게 닫힌 채 꿈쩍도 안했 다. 상팔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틀리오. 만일 집안에 사람이 없다면 문이 안으로 잠겼을 리가 없소." 팽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방을 훑어 보더니 말했다.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으며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상형, 담을 넘어가 살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팔은 팽운이 상처 때문에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은근히 호기심이 발동되어 담을 뛰어 넘었다. 그는 안에서 빗장을 벗겨 대문을 활짝 열었다. "두형, 나를 업고 들어 갑시다." 두구는 팽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문 안으로 들어 섰다. 문지방을 넘어 서서 보니 저만큼에 중문(中門)이 닫혀 있고 그 중문과 대문 사이에는 붉은 벽돌이 깔려 있었다. 문간은 금방 청소를 한 듯 깨끗했다. '이런 집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군.' 두구는 팽운을 업은 채 중문을 열어 젖히고 안으로 들어 서려고 했다. 이때 상팔이 급히 두구를 제지했다. "두제, 멀찌감치 떨어져 있게. 사람을 등에 업고 있으니 만일 기습을 받는다면 곤란할 테니....." 두구는 머리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 섰다. 그가 물러 서자 상팔은 큰기침을 하면서 안을 향해 소리쳤다. "계십니까?" 그러자 차가운 음성이 들려 왔다. "무슨 일이오?" 사람이 없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세 사람은 흠칫 놀랐다. 상팔은 급히 두 손을 모아 쥐며 공손하게 말했다. "새벽잠을 깨시게 해서 매우 죄송합니다." "흥, 당신네들은 남의 사택에 담을 넘어 들어 온 죄를 알 텐데. 빨리 나가지 않고 무얼 하시오?" "우린 그럼.... 물러갑시다." 상팔이 몸을 돌리며 팽운에게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팽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문 안의 뜰을 살펴 보더니 역시 낮게 말했다. "상형, 그 사람도 이 집의 주인은 아니오." "그렇다면.....?" "상형께서 믿지 못하겠거든 그에게 직접 물어 보시오." 상팔은 팽운의 말을 듣자 그렇잖아도 안에서 말한 사람의 언사가 매우 비위에 거슬리고 있었던지 라 놀리는 셈치고 한 번 물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신도 이 집의 주인은 아니거늘 어찌 그토록 무례한 말을 한단 말이오?" 상팔이 언성을 높여 안에 대고 소리치자 안에서 즉시 답변이 나왔다. "세상사는 모두 선후가 있는 법. 누가 당신들 보고 늦게 오라고 하였소? 개똥참외도 먼저 맡는 사람이 임자인데 웬말이 많소?" 팽운이 상팔에게 속삭였다. "어떻소? 저놈은 단지 하루 먼저 온 것 뿐이오. 이 집의 주인은 아니니 강경하게 밀어 보시오." 상팔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안을 살펴 보았다. 집은 매우 크고 뜨락도 넓었다. 그 안마당의 저쪽에 역시 넓은 대청과 방들이 보였다. 안에서 대 답하는 소리는 대청과 붙어 있는 서쪽 방에서 들렸다. '이 집은 매우 크구나. 날도 이미 밝았고 팽운의 상처도 치료해야 되니 저 사람이 기왕 주인이 아닌 바에야 우리가 여기서 잠시 머문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누가 먼저 들어 왔든 똑같이 객에 불과하니까.' 이렇게 생각한 상팔은 안을 향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집으로 얘기할 것 같으면 우리는 삼 일 전에 이곳에 머물렀었소. 단지 어떤 일 때문에 잠깐 나갔다가 오늘 돌아 온 것 뿐인데 ..... 그러니 선후를 가리자면 우리가 당신보다 며칠 앞서서 온 셈이오. 이 집은 우리들의 소유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이 이미 머물렀으니 우리도 당신을 나가라 고 할 수는 없군요. 다행히 이 집은 매우 커서 몇 사람이 더 머물러도 무방할 것이니 함께 지냅 시다." 상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질그릇이 깨지는 듯한 음성이 튀어 나왔다. "무엇이라고? 흥, 안 된다. 내가 좋은 말로 권고할 때에 빨리 물러 가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 다." 이 소리를 듣자 상팔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내가 어떤 인물인지 아니?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무림에서 잔뼈가 굵어 온 사람이다. 만일 내 가 이대로 너에게 꿀려 물러 선다면 내 무슨 낮으로 강호에 서겠느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 리지 ........' 상팔은 높은 소리로 말했다. "만일 우리들이 물러가지 않겠다면....." "뭐야? 너희들이 정 세상 살기가 귀찮다면 아예 칠성판에 눕는 셈치고 들어 와도 좋지. 그러나 목숨을 헛되게 버리기 아깝거든 어서 내가 화를 내기 전에 물러 가시지." 위에서 듣고 있던 두구가 치미는 화를 누를 수 없어 상팔에게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둘째형, 우리 안으로 들어 가 봅시다." "좋소 그러나 나 혼자서 들어 갈 테니 두제는 팽형이나 보살피고 있게나. 상대방의 말투를 들어 보니 결코 만만한 인간은 아닌 듯하군." 상팔이 안으로 들어 서려고 하자 팽운이 역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상형, 조심하시오." "걱정 마시오." 상팔은 팽운에게 간단한 대답을 던지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 갔다. 중문의 문지방을 들어 선 그는 대청을 향해 곧장 걸어 갔다. 넓은 마당을 지나 대청과 이 장쯤 떨어진 곳까지 상팔이 다다랐을 때였다. 차가운 음성이 방에서 달려 나와 상팔의 어깨를 흠칫하게 했다. "경고를 않고 죽이는 것은 비열하지만 나는 이미 너희들에게 돌아 가는 것이 좋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너희들이 자청해서 죽음 앞으로 다가 서고 있으니 나를 원망하진 말아라." 상팔은 걸음을 멈추면서 두 개의 보석을 품 속에서 꺼내 들었다. '상대방의 언행으로 미루어 보아 결코 알아 볼 수 없는 강적일 것이다. 함부로 덤비지 말고 조심 하자.' 그는 이런 생각에서 진기를 모아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할 자세를 취하며 암기로 사용할 보석을 꺼내 들은 것이다. 중주이고(中州二賈)의 부유함은 세상에서 겨룰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보석이 몇 개의 방에 가득 할 정도로 쌓여 있어 상팔은 늘 몸에 보석을 지니고 다녔다. 보석을 암기로 사용할 목적은 아니 었지만 형세가 불리하면 암기 대신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안에서 으름장 놓는 소리가 들리자 두구가 급히 팽운을 내려 놓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상대방의 말투를 들으니 어쩌면 무서운 솜씨를 지녔는지도 모르겠소. 팽형은 여기서 잠깐 기다 리시오. 제가 둘째 형님의 뒤를 따라 들어 가 손을 보태야겠소." "두형, 형은 언제부터 셋째라고 자칭하게 되었소." "우리 중주이고가 소대협을 큰형으로 모시면서 상형은 둘째, 나는 셋째가 된 것이오." "아, 알고 보니 그렇군요." 두구는 곧 안으로 뛰어 들어 가려고 했다. 이 때였다. "으악!" 상팔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안에서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는데 상팔이 무엇에 튕겨지 는 듯 뛰어 나오고 있다. '아니?' 두구는 급히 몸을 날려 상팔의 앞으로 달려 가며 다급하게 물었다. "둘째형, 부상을 입었소?" 상팔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없이 왼손의 옷소매를 걷어 보였다. 두구가 보니 그의 손목에 화 살이 하나 꽂혀 있었다. 그것은 화살이라기보다는 바늘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매우 작은 침이었는데 대가리는 뱀대가리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작은 화살이 꽂힌 곳에는 이미 검붉은 반 점이 돋아 있었다. '당했구나!' 두구는 급히 손을 내밀어 그 화살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자 상팔이 왼팔을 뒤로 감추면서 두 걸 음 뒤로 물러 났다. "침에 극독이 묻었으니 손을 대지 말게." 두구가 어쩔 줄을 모르며 대청 쪽과 상팔을 번갈아 보고 있는데 소영, 손불사, 무위도장, 사마건 등이 한꺼번에 들이 닥쳤다. "어찌 되었소?" 다급하게 물으며 오는 그들을 보자 상팔과 두구는 중문쪽으로 일단 후퇴하며 상팔이 왼팔을 내 보였다. 앞장 서서 급한 걸음으로 들어 오던 무위도장이 상팔의 가까이에 다가 서며 그의 왼손목을 들여 다 보았다. 무위도장은 상팔의 손목에 꽂힌 화살을 들여다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낮게 소리쳤다. "사두추혼전(蛇頭追魂箭)이다." 두구가 깜짝 놀라며 역시 낮은 소리로 부르짖었다. "사두추혼전....?" 뒤이어 그는 다시 물었다. "어떻습니까? 매우 위험하오?" 무위도장은 심각하게 입을 다물고 화살만 바라 보더니 급히 손을 뻗쳐 상팔의 왼팔을 잡았다. 그 는 상팔의 팔에 있는 몇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독이 더 퍼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상팔의 혈도를 찍은 후 그는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에게 들었는데.... 이 암기에는 무서운 독이 묻어 있다고 하오. 하지만 내가 강호에 발을 디 딘 후, 이 사두추혼전이 강호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곳에 갑작스럽게 나 타났으니 암기를 사용한 사람은 어떤 내력(來曆)이 있는 사람에 틀림없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무위도장의 곁에 서 있던 소영이 물었다. "그럼, 도장께선 이 화살에 묻은 독을 해독할 수 있단 말이오?" "내가 알기로는 이 독은 이 화살을 만든 사람만이 해독할 수 있소. 천하의 어떤 명의라 할지라도 추혼전의 독은 해독할 수 없소." 이 말은 상팔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상팔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적이 실 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암기를 사용한 사람이 어디에 있소? 아직도 이 집에 있소?" 두구는 서쪽의 방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아마, 아직 서쪽 사랑방에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무위도장! 도장에서는 상형의 상처를 좀 치료해 주십시오. 나는 이 추혼전을 사용한 사람에게 해독약을 얻어 오겠소." 말을 마치자 소영은 대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위도장은 급히 그를 잡으려고 했으나 그에게서 한 줄기 엄숙한 기색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 소년은 확실히 보통 인물이 아니구나. 능히 큰 그릇이 될 수 있는 인물이다. 어찌 내가 이 소 년을 막으리오.' 소영이 혼자 안마당을 들어 서는 것을 본 손불사가 그의 뒤를 따라 가며 무위도장에게 속삭였다. "내가 가서 소대협을 좀 도와 줘야겠소." 소영은 대청을 향해 걸어 가면서 진기를 모아 불의의 습격에 대비했다. 그는 비록 무림에 발을 디딘 지는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많은 무림 고수들을 만났다. 그래서 무공도 무공이지만 여러 가지 지식과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대청 서쪽으로 다가 서면서 소영은 큰 소리로 말했다. "집 안에 어떤 고인이 계시온지 소영이 뵙고 싶소이다!" 소영의 말이 끝나자 서쪽 방에서 쌀쌀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얼음을 입에 물어 깨물었다 가 한 쪼가리씩 뱉어 내는 듯 날카롭고 차가왔다. "만날 틈이 없다." 소영은 그 음성이 너무도 냉정하고 말투가 건방진 것에 조금은 섬뜩했으나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다시 말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예의로써 만나려고 하는데, 노형께선 이렇듯 사람을 멀리서 거절하니 너무 무 례하다고 느끼지 않소이까?" "무례하다고....? 나는 평소에 무림 인물들과 말을 하는 성미가 아니니 당신은 어서 물러 서는 게 좋을 것이오." 소영은 처음 생각에는 방으로 곧장 뛰어 들어 가 독화살을 사용한 자와 한바탕 격투를 벌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상대방을 적당히 구슬러 해독약을 얻어서 상팔을 치료해 주고 물러서는 것이 좋겠다.'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돌려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상대방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의외로 상대방 이 거만스럽고 냉정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소영은 주먹을 불끈 움켜 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방에 계신 분, 당신의 그 담이 크고 냉정한 말투는 천하의 영웅들을 얕보는 것 같소이다." 방에서 다시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 튀어 나왔다. "지금부터 나는 어떤 말에도 대답을 않겠소. 당신이 만일 한 걸음이라도 더 발을 들여 놓는다면 나는 사두추혼전을 한 번 더 사용할 수밖에 없겠소. 이 독화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안다면 당신의 목숨이 사라질 것을 조심하시오." 이 말은 소영을 극도로 격분하게 했다.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두 손을 품 속으로 가져 갔 다. 천 년 묵은 뱀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꺼내 손에 낀 그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의 가르침이 얼마나 훌륭한가 지도를 받고 싶소." 그러나 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영이 다시 입을 열려는데 손불사가 곁으로 다가 섰다. 그는 소영의 귓전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 했다. "내가 알기로 사두추혼전은 지금 금궁에 갇혔으므로, 금궁이 열리지 않는 다음에는 절대로 나올 수 없을 것이네.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지만..... 놀랍게도 추혼전의 암기를 사용하니 보통 놈과는 다르네. 소대협은 각별히 조심해야 될 것일세." "노선배님의 염려에 감사합니다."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은 후배와 함께 위험을 겪지 않아도 되겠소이다." 손불사는 잠시 염려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뒤로 물러 났다. 그가 물러 서자 소영은 목청을 돋구어 방에다 대고 소리쳤다. "소영이 이미 배움을 청했는데 당신이 방에만 틀어 박혀 있으니 나는 더 기다릴 수 없이 방으로 들어 가 한 수를 배울 도리밖에 없겠소." 말을 해 놓고 반응을 기다렸으나 역시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상팔의 무공도 결코 약하지 않은데 상대가 한 번 손을 써서 독화살을 명중시킨 것을 보면, 상대 의 무공은 희대의 절학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나는 추호라도 방심을 해서 상대방의 수에 넘어 가 서는 안 되겠다.' 소영은 진기를 집중시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위의 동정을 유심히 살피면서 두 손으로는 심장 을 보호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두 걸음, 세 걸음.... 그의 전 신경을 팽팽히 조여 오는 모든 감각은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려 민감하게 사방을 경계하 고 있었다. 일곱 걸음, 여덟 걸음. 튕겨질 듯이 긴장된 순간, 돌연 싸늘한 빛이 번쩍였다. 그것은 소영을 향해 날아 들었다. 99. 거만한 옥퉁소 소영은 재빨리 손을 휘둘러 한 개의 추혼전을 받아 냈다. '만일 내가 조금만 방심했더라도 이 암습을 당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천 년 묵은 교피 장갑이 없었더라면 어찌 극독이 묻어 있는 이 추혼전을 잡을 엄두를 냈겠는가?'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방에서 다시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호! 훌륭한 솜씨로다. 무림에 나온 뒤로 나의 사두추혼전을 받아 낸 사람은 흔하지 않았는데....." 잠시 음성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나의 추혼전에는 극독이 묻어 있다. 네가 맨손으로 그것을 받아 냈으니 아마 그 중독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걸." "그렇지 않을걸." 소영이 가볍게 응수하자 방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히히히. 네가 만일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한 번 운공해서 시험해 보시지." 소영은 추혼전을 고쳐 잡으며 대꾸했다. "답례를 않는 것은 무림의 인사가 아니니 귀하께선 나에게 주었던 당신의 암기를 도로 가져 가시 오." 소영은 말하는 것과 동시에 손을 쳐들어 앞으로 뿌렸다. 추혼전은 질풍같이 방을 향해 날아 갔다. 이 탄지발사(彈指發射)의 암기수법은 소영이 유선자에게서 배운 것이다. 유선자는 암기 사용에 있 어서 강호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음, 무서운 수법이다.' 멀찍이 떨어져서 소영의 일거일동을 지켜 보던 손불사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방 안에서 낄낄 새어 나오는 운음소리는 소영이 추혼전을 던지자 갑자기 뚝 끊어졌다. 이때 소영은 이미 방을 향해 뛰어 들고 있었다. 소영은 문 앞을 향해 몸을 훌쩍 날렸다가 마루를 딛는 것과 동시에 발로 힘껏 문을 걷어 찼다. "펑!" 문이 활짝 열리는 것과 동시에 소영은 옆으로 살짝 비켜 섰다. '추혼전을 쓰는 놈은 무서운 놈이다. 내가 만일 무턱대고 들어 섰다가는 추혼전의 제물이 될 것 이다.' 소영은 문을 걷어 차자마자 상대방이 추혼전을 던질 줄 알고 옆으로 비켜 선 것이다. 그런데 예 상과는 달리 아무런 암기도 날아 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잠시 기다리며 동정을 살피던 소영은 두 손으로 가슴을 보호하며 방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자 정 면의 창문 앞에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은 소영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는데, 소영이 들어 가도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소영은 가볍게 기침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나 소영은 다행히 목숨을 잃지 않았소." 사내는 냉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강호에 들어 선 뒤로 줄곧 소영이란 이름을 들어 왔소. 오늘 만나 보니 과연 훌륭하군요." "과분한 칭찬이시오. 당신의 추혼전이야말로 소리도 없이 빠르기가 번개같았소. 나는 그런 암기술 법은 처음 보는 것이었소." 사내는 말투를 약간 누그러뜨렸다. "당신은 이 방에 뛰어 들었는데, 무슨 볼 일이 있소?" "내 형제가 당신의 추혼전에 맞아 부상을 입었소. 그 해독약을 좀 얻으려는 생각이오." "그 일 뿐이오?" "그렇소. 다만 그 한 가지 일 뿐이오." 사내는 잠시 생각하는지 말이 없었다. 소영은 그 뒷덜미를 노려 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해독약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소. 하지만 하나의 조건이 있소." "무슨 조건이오?" "내가 해독약을 드린 뒤 여러분들은 즉시 이곳을 떠나시오. 약속을 이행한다면 나는 곧 해독약을 드릴 것이며 당신이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추혼전을 맞은 사람은 극독이 발작해서 죽게 될 것 이오." 소영이 대답했다. "만일 내 형제가 제 삼자에게 부상당한 것을 당신이 살려 준다면 한 가지 조건이 아니라 열 가지 조건이라도 받아 주겠소. 그러나 나의 형제는 당신의 추혼전에 부상당한 것이오. 나는 일행이 많 으니 단독으로 처리할 수는 없고 의논을 해야겠소." 사내가 짜증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얘기한다면.... 당신은 응낙할 수 없다는 것이오?" "단독으로 결정할 수는 없소." "좋소. 당신은 가서 그들과 상의한 뒤 다시 오시오." 소영은 생각했다. '손불사와 무위도장이 이 제의를 수락할는지 모르겠구나. 그들은 명성있는 사람들이니 순순히 물 러 서려고 들지 않을 텐데.' 소영은 사내에게 말했다. "나는 동행인들을 설득시켜 보겠소. 그러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먼저 해독약을 주시오." "먼저 그들과 상의한 뒤 약을 가지러 와도 늦지 않소." 소영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당신은 사람을 상해 놓고 배짱을 부릴 생각이오? 약을 주는 일과 이곳에서 우리가 떠나는 일은 별개이니 혼동해서 얘기하지 마시오." "그럼 어떡하겠소?" "한 가지 묻고 싶소. 우리들이 이곳을 멀리 떠나는 일 이외에 약을 구할 방법은 없소?" 사내가 대답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소." "그것이 무엇이오?" "그것은.... 해독약이 내 몸에 있으니 당신이 재주껏 빼앗으면 되오." "그것을 제외하고 다른 방법은?" "없소." 잘라 대답하는 말에 소영은 화가 치밀었다. "기왕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좀 실례되는 행동을 해야겠소." "체면 차리지 말고 마음껏 재주를 발휘해 보시오." 소영은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전신의 급소를 보호하며 사내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 갔다. 사내는 줄곧 등을 보인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사내를 내리 치려고 하다가 멈추며 말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얼굴을 보이지 않소?" 그러자 사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소영은 흠칫 놀랐다. 사내는 얼굴에 번 쩍번쩍 하는 황금색의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사람같지 않고 흡사 금으로 만든 조각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당신이 쓰고 있는 가면은 매우 훌륭하군요." 소영은 말과 동시에 손을 내밀어 금가면을 쓴 사람의 왼쪽 손목을 잡아 채려고 했다. 금가면을 쓴 그 사람은 장승처럼 선 채 소영은 노려 볼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이 상대방을 잡아 채는 기세는 매우 느렸지만 그 속에는 많은 변화를 품고 있었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공격과 수비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수법이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거의 팔목을 잡 히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손목을 덥썩 쥐었다. '.....어!' 소영은 흠칫 놀랐다. 금가면의 손목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쇠처럼 단단했다. 이때 금가면이 돌연 오른손으로 소영의 오른팔을 그어 왔다. 금가면의 오른손에는 손톱이 길게 자라 있었다. 소영은 재빨리 왼손 으로 그의 오른손을 후려 갈기며 뒤로 세 걸음 물러 섰다. 금가면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미 중독되었소. 불과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면 극독이 발작할 테니 그만 물러 가 서 뒷일이나 준비하시오." 그는 소영이 교피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교피장갑은 나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구나.' 소영은 자신의 왼손을 훔쳐 본 뒤 사내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나의 이 손톱에는 극독이 묻어 있소. 당신의 왼손은 나의 손톱에 그어졌으니 곧 죽게 될 것이 오." "하하, 당신은 암기에도 극독을 묻혔고 손톱에도 묻혔으니 독에 대해서는 가히 첫손가락을 꼽을 수 있겠군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무슨 독이든 겁내지 않소." "그럴 리가..... 왼손을 들어 자세히 봅시다." "볼 것 없소이다. 나는 백독이 내 몸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으니까." 금가면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 손톱에 있는 독은 보통의 독과는 틀리는데.... 어떤 인물이든 이 독이 조금만 묻어도 곧 발작 하오." 소영은 돌연 몸을 날려 일장을 상대방의 가슴으로 날렸다. 소영은 조금 전 상대방의 왼손이 쇠처럼 딱딱했던 것이 의심나 공격을 하면서 그 의 왼손을 유심 히 살펴 보고 있었다. 금가면은 소영이 공격해 오자 왼손을 들어 반격했다. 소영은 급히 물러 서면서 금가면의 왼손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노출된 그의 왼손에는 시커먼 쇠갈고리 세 개가 붙어 있었다. '놀랍게도 이 놈은 강철로 만든 의수(義手)를 했구나.' 소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철수(鐵手)를 무기로 사용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금가면은 소영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양손을 번개처럼 움직여 연거푸 삼초의 공격을 퍼부었다. 이 공격은 매우 빠르고 거세어 소영을 계속 세 걸음이나 물러 서게 했다. 소영은 반격할 틈을 노리다가 재빨리 몸을 옆으로 돌리며 연속적으로 팔초를 공격했다. '만일 이놈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해독약을 구하기 힘들겠구나.' 소영이 이런 생각에 잠깐 정신이 분산된 틈을 노려 금가면은 다시 공격해 들어 왔다. 철수가 번 쩍이며 소영의 정수를 찍으려고 덤벼들고 오른손이 뒤따라 소영의 가슴을 향해 덮쳐 왔다. 소영은 비록 교피장갑을 끼고는 있었지만 철수를 정면으로 받아낼 용기가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세로 물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소영은 마음을 다져 먹었다. 두 손을 재빨리 놀려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 내며 반격의 틈을 노렸 다. 이 때였다. "멈춰라!" 낮은 소리가 소영의 등 뒤에서 들려 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멈추고 얼굴을 돌렸다. 나타난 사람은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남색 장삼을 입었고 손에는 옥퉁소를 쥐고 있었다. 그를 본 금가면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공자님을 뵈옵니다." "인사는 필요없네." 싸늘한 눈초리로 소영을 훑어 보았다. 그의 미간에는 살기가 어렸으나 말투만은 공손하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소영이라 하오." 그러자 청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 이제 보니 소형이었군요. 몰라 뵈었소이다. 나는 보자마자 곧 소영이 아닌가 했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듯 겸손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소영은 청년의 태도에 의아심을 품으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요? 글쎄, 남들은 모두 나를 옥소랑군이라고 부르더군요." 이 말에 소영은 흠칫했다. '옥소랑군..... 그는 남옥당의 이종사촌인데......' 소영은 옥소랑군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바라 보며 말했다. "당신은 옥소랑군이라 자칭하고 또한 손에 퉁소를 들고 있으니, 퉁소의 명수임에 분명하겠군요." "음률에 대해서 조금 이해하는 정도이외다." '너무 겸손하구나. 어젯밤 너의 퉁소가락을 들었는데 그 애절하고 오묘한 곡은 신의 경지에 도달 했던데.....'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옥소랑군이 물었다. "소형은 음률학(音律學)에 대해 조예가 깊으시오?" "나는 음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오." "너무 겸손하시군요. 그런데 소형은 어째서 나의 종인(從人)과 다투셨는지요? 나에게 얘기해 주면 소형에게 대신 사과하겠소." '옥소랑군이 나에게 이토록 공손하게 대하는 것은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쨌든 나는 약을 얻어 갈 기회를 만난 것이니 얘기를 해 보자.' 소영은 금가면을 힐끗 바라 보며 말했다. "사과한다는 말씀은 감당치 못하겠소. 나의 형제 하나가 추혼전에 부상을 입었소. 나는 그 해독약 을 얻으려는 것 뿐이오." 옥소랑군은 금가면을 노려 보며 차갑게 말했다. "너는 또 극독의 암기를 사용해서 사람을 부상시켰구나. 어서 해독약을 내 놓지 못해?" 금가면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이 집에서 강제로 투숙하려고 하기에 따끔한 맛을 좀 보여 주려던 것이었습니다." 금가면은 말대꾸를 하면서도 옥소랑군의 말을 거역하지는 않았다. 품 속에서 하나의 작은 옥병을 꺼내더니 환약 한 알을 소영에게 내밀었다. 소영은 서슴지 않고 손을 내밀어 약을 받았다. 옥소랑군은 금가면이 소영에게 암습을 가할까 봐 노려 보고 있었다. 금가면은 소영이 독을 두려 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수를 사용하지 않고 순순히 환약을 내주고 물러 섰 다. 그러자 옥소랑군이 입을 열었다. "소형의 친구가 추혼전에 상처를 입었다면 어서 그 약을 복용시키시오. 약을 먹고 한 시진이 지 나면 상처는 완전히 나을 것이오." "고맙소." "그런데, 소형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소?" 소영은 무슨 부탁이 있다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으나 선선히 대답했다. "내가 해서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 봅시다." "다름 아니라, 나는 오늘밤 이곳에서 한 친구와 긴밀한 얘기를 나누기로 했소. 이 안에 소형의 일 행이 끼면 곤란하니 편의를 좀 보아 주시기 바라오." 소영은 얼른 대답을 않고 금가면을 바라 보았다. 그는 옥소랑군이 소영에게 친밀하게 대하는 것이 몹시 못마땅한 듯한 눈길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주인은 나에게 지나칠 정도로 친밀히 대하고, 하인은 오히려 잡아 먹을 듯한 눈치를 보이니.....' 소영이 내심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옥소랑군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소형의 의견은 어떻소?" 소영은 옥소랑군에게 얼굴을 돌리며 대답했다. "지금 나로서는 결정하기 곤란하군요. 밖에 가서 두 분 노선배와 의 논을 한 후 대답해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당신은 그 늙은 거지와 무위도장을 말하는 것이오?" "그 늙은 거지가 바로 개방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선배요. 또한 무위도장은 바로 무당파의 장문인 이오." "하하, 무당파는 텅 빈 항아리요. 실속 없는 이름만 지닌 채 자칭 오대검파의 첫째라고 하지만, 사실 그 몇 수의 변변찮은 검법은 시골뜨기 앞에서나 큰소리칠 수 있을 뿐이오." 옥소랑군은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개방은 더욱 꼴불견이지. 한 떼의 늙은 거지와 젊은 거지들의 오합지졸이지요. 인원수는 제법 많으나 단 일격이면 모두 박살나 버릴 허수아비들이지요." 옥소랑군이 기고만장해서 떠드는 소리에 소영은 멍해졌다. '허풍도 이 정도 되면 입이 벌어지는구나. 심목풍도 감히 이토록 큰소리는 치지 못하는데.....' 소영은 내심 불쾌했으나 태연한 안색으로 말했다. "당신이 개방과 무당파를 얕보는 것을 보니 놀랄 만한 절기를 지닌 모양이군요. 그러나 나는 그 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소. 또한 그들을 존경하므로 반드시 먼저 상의한 뒤에 떠나는 것을 결정 짓겠소." "나는 다만 소형이 이곳을 떠나기만 바랄 뿐이오. 다른 사람들이야 남든 가든 상관 없소. 그들이 남아 보았자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니까......" "아무튼 나는 그들과 의논해서 결정하겠소. 대답할 여유를 주시오." 소영은 옥소랑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금가면이 매우 흥분한 듯 소영을 쫓아 나가며 공격을 하려는 것을 옥소랑군이 손을 들어 막았다. 뜰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상팔의 앞으로 다가 선 소영은 약을 그에게 내 주며 말했다. "빨리 이 해독약을 먹으시오." 상팔은 이미 실신상태에 빠져 들어 가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고 눈은 게 슴츠레했다. '과연 추혼전에 묻은 독약은 무섭구나. 독을 맞은 지 얼마 안 되어 벌써 이토록 사람의 몸에서 힘을 빼냈으니, 과연 혼을 빼낸다는 이름을 무시 못하겠구나. 그런데 약효가 한 시진 내에 신속하 게 나타날 수 있을까?' 상팔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대한 소영은 심히 마음이 괴롭고 불안했다. 상팔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약을 받더니 입에 넣고 삼켰다. '제발 약효가 있어서 상팔이 얼른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소영은 손에 땀을 쥐며 상팔을 주시했다. 그러자 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되는 상팔의 얼굴에 생기 가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과연 무서운 독에 신통한 약이구나. 다행이다.' 소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구에게 말했다. "상형을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운기를 조식시키시오. 그 약을 준 사람의 말에 의하면 한 시 진이 지나면 곧 회복된다고 했소." 상팔은 두구에게 부축되어 일어 서며 소영에게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두구는 그를 데리고 한 그루의 나무 밑으로 갔다. 그들은 책상다리를 하고 마주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상팔의 생명이 위기에서 일단 구제된 것을 보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손불사는 소영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을 만나 보았소?" "주인과 하인, 두 사람을 만났소." "퉁소를 든 청년이 그 방으로 들어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람이 주인이오. 방에는 왼팔에 철수를 한 하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추혼전으로 상팔을 명중시킨 장본인이오." "하인이 그런 재주가 있다니 주인되는 사람의 무공이 어느 정도라는 것은 가히 짐작할 수도 없겠 군." '물론이오. 그 사람은 당신네 무당파나 개방의 실력을 아이들 장난보다도 낮게 평가합디다.' 소영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나 눌러 참으며 입을 열었다. "주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시험해 보지 않았소. 그러나 얼굴에 가면을 쓴 그 하인과 몇 수 겨뤄 보았는데, 확실히 높은 무공을 지녔었소." "소대협은 그의 성명을 아시오?" 손불사의 물음에 소영이 대답했다. "그는 이름을 밝히진 않았소. 자칭 옥소랑군이라 하더군요." "옥소랑군? 옥소랑군이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 대여섯밖에 안 되었소.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 옥소랑군은 나씨의 사당에서 듣던 퉁소를 불던 장본인이오." "그럼 우리를 도와 준 친구이니 마땅히 만나야겠군." 무위도장의 말에 소영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손을 흔들었다. "필요없소. 그는 성질이 매우 거만해서 우리를 상대하지도 않소. 그가 암중으로 우리를 도운 것은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거요." 소영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 옥소랑군은 시종 나에게 친밀하게 대했는데 반대로 금가면의 하인은 나를 불구대천의 원수이 기나 한 듯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댔소. 아무래도 복잡하고 미묘한 원인이 개재(介在)되어 있는 모 양이오." 손불사가 중얼거렸다. "허허, 괴이한 일이군. 이 늙은이는 강호를 안방 드나들 듯했지만 친구이자 원수인 사람에 대해선 만나 보지도, 들어 보지도 못했는데......" "그 점은 이 소영도 이해 못하겠소. 아무튼 원인이 있겠지요." "무슨 원인?" '이 일은 악소채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을 파악하기도 전에 멋 대로 지껄이는 것은 옳지 않지.' 소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지금 확실히 단정해서 얘기할 수는 없으니 두고 보는 수밖에 없소." 무위도장은 소영이 무엇인가 짐작되는 것이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손불사에 게 더 캐어 묻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영은 말머리를 돌려 입을 열었다. "그 옥소랑군은 해독약을 주면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소." "조건이라니?" "우리에게 이곳을 떠나 달라는 부탁을 하더군요." 곁에 서 있던 팽운이 불쑥 끼어 들며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이곳은 그들의 소유도 아닌데....." "그는 여기서 어떤 친구와 만나기로 했는데 우리들의 소란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오." "기왕 그렇다면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소." 무위도장의 말에 이어 손불사가 소영에게 물었다. "소대협은 응낙을 했소?"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어 의논한 뒤 대답하기로 했지요." "그렇다면 옥소랑군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만 우린 이대로 물러날 수 없소." 손불사의 강경한 태도에 소영은, '이 선배는 젊은 사람보다도 더 패기가 있구나.' 생각하며 말했다. "옥소랑군은 비록 겸손하게 말했으나 매우 도도하였소. 만일 우리가 응낙을 않으면 한바탕 싸움 이 벌어지게 될 것이오." "우리가 이대로 물러 선다는 것도 너무 얕보이는 것이니 안 되오." "그럼 노선배님의 의견은?" "하하하, 이 늙은이가 무엇이 두렵겠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체면은 세워야 되잖겠소?" 이 음성은 매우 커서 방에까지 들릴 만했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옥소랑군이 걸어 나오며 소리쳤다. "어떤 사람의 말투가 그토록 무례하지?" 소영은 일이 난처하게 되었구나 싶었다. 또한 손불사가 궂이 이곳에 남겠다는 것이 의아스럽기도 했다. 옥소랑군이 날카로운 소리로 묻자 손불사가 얼른 대답했다. "늙은 거지.요." "하하하하......" 옥소랑군은 양천대소를 하며 서서히 다가 왔다. '큰일이다. 결국 싸움이 붙겠구나. 옥소랑군과 나는 겨뤄 보지는 않았지만 그 금가면의 무공으로 보아 굉장한 고수일 것이다. 손불사가 상대할 수 없을 텐테......' 소영은 여유만만한 옥소랑군의 태도를 보고 이런 생각이 들어 옥소랑군의 앞으로 나가 막아 섰 다. 그는 두 손을 앞에 모아 쥐며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옥소형, 화를 참으시오." 옥소랑군은 소영이 앞을 막아 서자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소형께서 저 늙은이를 대신해서 나설 작정이오?" 소영은 불쾌했다. '나는 예외로 나섰는데 이 자는 무례하구나.' 소영은 약간 냉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 전에 말했잖소? 나 혼자서 일을 결정할 수 없다고 ..... 우리가 아직 상의하고 있는데 당신이 기세 등등해서 나타난 것은 너무 사람을 얕보는 행동이 아니오?" "나는 소형과 다투기 싫으니 소형은 이 일에서 빠지시오. 쓸데없는 일에 참견 않는 것이 좋을 거 요." 소영은 더욱 불쾌해졌다. 화가 치미는 것을 지그시 누르며 옥소랑군의 싸늘한 얼굴에 대고 말했 다. "옥소형이 이렇게 나온다면 나는 관계치 않을 수가 없소." "그렇다면 꼭 참견해야겠다는 말이오?" "일이 묘하게 됐으니 물러설 수는 없소." 옥소랑군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는 소영을 무섭게 노려 보며 곧 손을 쓸 듯한 자세를 취했다. 소영도 지지 않고 두 손에 진기를 모으며 옥소랑군을 노려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살벌한 긴 장이 흘렀다. 그러나 먼저 긴장을 깨뜨린 것은 옥소랑군이었다. "그녀의 체면을 보아 소형을 한 번 봐 주겠소. 여러분들은 다시 의논해 보시오. 그러나 밥 한 그 릇 먹을 동안만 여유를 주겠소. 그 시간 이후에도 이곳에 머무르고 있으면 그 때에는 내가 너무 무례하다고 탓하지 마시오." 옥소랑군은 뱉어버리듯 말을 하더니 몸을 돌이켜 안으로 사라졌다. 소영은 들어 가는 그의 뒷모 습을 바라 보며 마음 속으로 의아해했다. '그녀라니..... 악소채를 두고 하는 말일까? 남옥당은 어젯밤 옥소랑군과 서로 감정이 좋지 못했었 다. 그들은 모두 악소채를 사모하는 모양인데, 사촌끼리의 연적이라.....' 이때 손불사가 탄식처럼 말했다. "과연 옥퉁소로구나!" "나는 저 옥퉁소를 본 적이 있었소. 이미 십 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퉁소를 든 사람이 바뀌었을 뿐 퉁소는 분명 그것이오." 소영이 자세한 이야기를 캐물으려고 하는데 먼저 무위도장이 탄식했다. "무서운 내공을 지녔구나!" 소영은 무위도장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 그곳엔 옥소랑군의 발자국이 뚜렷이 찍혀 있었는데 그 깊이와 간격에 조 금의 차이도 없었다. '암중에 내력을 발휘해서 발자국을 남겼구나. 발자국의 깊이와 간격이 고른 것으로 보아 내공의 힘도 실로 짐작조차 못하겠구나.' 소영은 발자국을 하나하나 눈여겨 보다가 손불사의 옆모습을 훔쳐 보았다. '손불사가 이미 옥퉁소의 내력을 알고 있으니 옥소랑군의 정체를 알기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 겠군. 그러니 옥소랑군에게 더 캐물을 필요도 없겠다.' 그는 손불사에게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노선배께선 이곳에 더 머무르기로 결심하셨소?" "필요없소. 나는 이미 옥퉁소를 보았으니 가야겠소." 손불사의 말에 소영은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이제 보니 손불사는 그 옥퉁소를 보기 위해 일부러 옥소랑군을 격분시켜 나오게 하였구나.' "노선배께선 돌아가기로 결심하셨단 말이오?" "그렇소. 이미 옥퉁소를 본 이상 여기에 남아 있다 한들 늙은 거지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소." 소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불사의 얼굴을 멍청히 쳐다 보며 생각했다. '손불사는 자기 나름대로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구나. 그러나 나는 이미 옥소랑군과 감정대립이 있었으니.... 혹시 오늘 여기서 옥소랑군과 만나기로 한 사람이 악소채가 아닐까?' 소영은 이대로 돌아가기도 멋적고 남아 있기도 곤란해서 잠시 망설였다. 소영의 표정을 살핀 무위도장이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이곳에 남고 싶소?" "글쎄요. 옥소랑군은 우리보고 곧 물러 가라고 했는데, 이대로 물러 가자니 수치이고 남아 있자니 무서운 강적과 한바탕 악전고투를 해야 될 텐데......" "빈도의 생각으론 중용지책(中庸之策)을 쓰는 것이 좋겠소." '중용지책? 가느냐, 있느냐는 극단적인 것인데 거기에 어떻게 중용지책이 있단 말인가?' 소영은 무위도장의 속셈을 몰라 다그쳐 물었다. "도장께선 방법이 있소?" "만일 이 집에서 묵는 일 때문에 싸움이 붙는다면 그것은 아이들의 떡 한 개 때문에 어른 싸움이 붙는 경우와 마찬가지요. 그렇다고 그냥 물러 선다는 것도 체면 문제이고..... 빈도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이곳을 떠나는게 좋을 것 같소. 떠나긴 떠나되......" "떠나긴 떠나되?" "소대협이 떠나기 전에 몇 수의 절기를 옥소랑군에게 보여 주시오. 그러면 우리는 물러 선다 해 도 크게 체면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니까......" 소영은 그럴 듯한 생각에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장의 말은 그럴 듯하군요. 하지만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솜씨를 보여 준단 말이오?" "그 옥소랑군은 발자국을 남긴 것으로 보아 무공이 높긴 하지만, 소대협도 그에게 뒤지지 않으리 라고 빈도는 생각하오. 그러니...." "......" "어떤 사람이고 무공을 나타내는 데에는 장단점이 있소.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무공을 지니고 있을 수는 없소. 소대협께서 무공을 발휘할 때 가능한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살리면 옥소랑군 도 혀를 내두르게 될 것이오." "좋습니다." 소영이 응낙하자 무위도장이 전엽청을 돌아 보며 말했다. "사제는 이곳에 따라 온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먼저 이곳을 떠나게." 전엽청은 약간 불만을 누르며 일행을 데리고 나갔다. 소영은 꽃나무 아래에 앉아 운기조식하는 상팔이 염려되었다. '나는 무공의 절기를 보여 주려는 데에 목적이 있지만 어쩌다 싸움이 붙어 버리면 상팔이 걱정이 로구나. 상팔은 조금만 운기조식을 하면 회복될 것 같은데.....' 손불사가 소영의 염려를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소대협이 무공을 발휘할 때에 다른 생각은 마시오. 이 늙은이와 무위도장이 상팔형의 신변을 보 호하고 있겠소." "그럼 두 분만 믿습니다." 소영은 진기를 모으고 그 동안 손불사는 다른 사람들을 내 보내며 일을 안배했다. 이때 이미 시간이 되어 옥소랑군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 여러분은 어쩔 작정이오?" 소영은 상대방의 쩌렁쩌렁한 음성을 듣고 흠칫했으나 손불사와 무위도장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 다. "두 분은 나를 도울 필요가 없소." 소영은 고개를 돌려 방안을 향해 말했다. "잠깐 밖으로 나올 수 없겠소?" "밖으로? 후후, 나는 항상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오. 만일 여러분이 끝까지 버티겠다면 오직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오. 소형께서 나를 설득시키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하 오." 소영은 옥소랑군의 말투에 울컥 비위가 상했다. "우리는 지금 돌아갈 생각이오. 그러나 당신의 태도가 너무 건방지군요. 우리는 생각을 바꾸었소." "달리 생각하다니?" "우리는 가긴 가되 밥 한 그릇 먹는 시간 동안은 이곳에 남아 있어야겠소." 그러자 옥소랑군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소영! 나는 너에 대해서 이미 참을만큼 참았다." "나도 이토록 화를 누르며 참아 보긴 처음이오." 소영이 지지 않고 대꾸하자 옥소랑군의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잠깐만 시간을 준다. 빨리 이곳을 나가라!" 소영은 그 말이 무척 건방져 화가 났다. "당신 태도가 이토록 건방지니 정말로 참기가 어렵소. 아무래도 우리는 이곳에 남아야겠소." 벌컥 화를 내는 옥소랑군의 외침이 들려 왔다. "흥, 당신들은 자결해서 죽겠소? 아니면 내가 직접 손을 쓰길 원하오?" 옥소랑군이 얼굴에 살기를 띤 채 문을 박차고 나와 섰다. 그 곁에는 금가면을 벗은 하인이 섰는 데 그 사내의 얼굴은 물감을 칠한 듯 시퍼랬다. 수염은 없었으나 옥소랑군보다는 오, 륙 세 더 먹 어 보였다. 소영은 다시 불같은 화가 치밀었다. 손불사도 화를 참지 못해 입술을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겠다.' 소영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도전적인 음성으로 빈정거렸다. "옥소랑군! 당신은 우리 보고 자결해서 죽으란 말이오?" "그렇소. 만일 내가 손을 대면 여러분들은 큰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을 테니....." "흥, 멋대로 지껄이는군. 당신은 이런 말을 아시오?" "......" "대장부는 죽일 수는 있지만 욕보일 수는 없다는 말....." "흥, 여러분들은 죽으면 죽었지 욕을 보진 않겠단 말이지?" 소영이 대꾸했다. "그렇소. 우리는 자결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 "어떻게 죽든 그것은 당신들이 선택할 권리가 있소." 소영은 상대방의 어린애 다루듯 하는 태도에 화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우리가 너에게 진다손 치더라도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다. 승패야 어찌 되었든 너하고 꼭 한 판을 싸워야 분이 풀리겠다.' 소영은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제하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자결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 자연 당신이 손을 쓰기를 기다리겠소." 옥소랑군은 낯빛이 푸르락 붉으락해지며 입을 열었다. "역시 죽고 나서야 후회할 사람들인 것 같군. 당신들 중에서 누가 먼저 내 손에 죽겠소?" "내가 먼저 당신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소." 소영이 가슴을 펴며 말하자 옥소랑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소형 먼저? 내 손에 죽고 싶단 말이오?" "내가 언제 죽고 싶다고 했소? 더욱이 당신 손에 죽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소." "그렇다면?" "나는 다만 당신의 콧대가 너무 높기에 얼마나 높은가 재어 보려고 먼저 나섰을 뿐이오." 소영은 잠깐 끊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내가 자칫 실수해서 당신에게 상처를 입힐까 봐 겁나는군요." 이 말은 옥소랑군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했다. 그는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소영을 노려 보더 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모두들 소영을 거만하고 담대하다더니 막상 만 나고 보니 과연 배짱 하나는 쓸 만하군. 네가 먼저 죽기를 원하고 그토록 날뛰니 더 이상 사양할 수도 없다." 이 말은 소영이 금방 죽기라도 할 것 같이 들렸다. '이 옥소랑군이 자기가 거만하다는 것은 모르고 오히려 나보고 배짱이 세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그건 그렇고 도대체 저놈은 얼마만한 무공을 지녔기에 이토록 큰 소리를 치고 있을까?'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누가 누구의 손에 먼저 죽을지는 조금 후에 자연히 판명나게 될 테니 너무 큰소리는 치지 마시 지." 옥소랑군은 아무런 대답도 않고 소영을 노려 보기만 했다. 소영도 진기를 잔뜩 모으며 상대방의 공격에 대비했다. 무위도장과 손불사는 옥소랑군의 거만한 태도에 화도 났지만 한편으로 은근히 겁도 났다. '저놈이 큰소리를 치는 것으로 보아 기막힌 절기를 지닌 모양인데.....' 양편에는 잠시 숨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옥소랑군이 몸을 훌쩍 날리며 옥퉁소로 소영의 가슴을 찍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죽어라!" 100. 악소채와 만나는 소영 소영은 이미 그 푸른 옷을 입은 철수인(鐵手人)과 대적해 본 경험이 있어 그 실력을 알고 있었다. 주인의 신분을 지닌 옥소랑군의 무공은 필시 철수 하인보다 위일 것임을 알아차리고 은연중 경계 를 하고 있었으므로 옥소랑군이 손을 들어 피리로 일격을 가해 올 무렵 소영도 오른 손으로 퉁소 를 향해 일장을 퍼붓고 동시에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날리며 말하였다.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을걸." 그러나 소영은 그 말을 끝맺기도 전에 한 줄기의 광풍이 가슴에 격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영은 이미 암암리에 강기를 모아 호신하고 있었으므로, 비록 그의 가슴을 때린 장풍이 부상을 입힐 만한 것은 못 되었지만 속으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한 줄기의 암공은 언제 쳐 낸 것일까? 만약 그 옥퉁소를 따라 쳐 왔다면 결코 이렇듯 빠르지 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큰소리 칠만 했겠지만..... 만약 나의 강기가 막아 내지 못했다면 이는 필시 내 혈도를 파괴하고 말았을 것이다.' 옥소랑군은 자기가 쳐 낸 공력이 소영의 가슴에 적중한 것을 똑똑히 보았는데 놀랍게도 소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버티고 선 채 오히려 반격을 가하기 위해 암공을 운행하는 게 아닌 가!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제 보니 그는 당대 현문절기(玄門絶技)의 지고지상(至高至上)인 호신기를 연마하였구나. 정말 놀라운 일이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상대방의 묘기에 감탄하면서 피차간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옥소랑군은 수중의 옥퉁소를 내리 쳐서 소영이 뿜어 낸 다섯 손가락의 공력을 막아 내고 즉시 옥 퉁소를 위로 쳐 올리며 소영의 오른쪽 팔의 급소를 찔렀다. 소영은 재빨리 오른팔을 굽혔다 펴며 왼손으로 일장을 쳐 냈다. 동시에 갖가지 묘수를 발휘해서 마치 전광석화와 같은 무섭고 빠른 공격을 펼쳤다. 옥소랑군은 걷잡을 수 없이 공격해 오는 소영의 무공을 막아 내기에도 힘에 겨워 순식간에 삼장 이나 뒤로 물러난 뒤 말했다. "당신이 지금 사용한 무공은 혹시 남일공의 비법이라 일컫는 섬전연격장(閃電連擊掌)이오?" 소영은 옥소랑군이 저만큼 물러나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역시 공격을 멈추고 싸늘하게 노 려 보며 말했다. "그렇소. 역시 당신의 견식은 넓군요." 소영은 아무렇게나 대답하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은 무공이 높고 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세상 무림의 견식도 매우 깊고 넓구나.' 다시 옥소랑군이 말했다. "그 장법은 어디서 배웠소?" 소영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 그건 알려 드릴 수가 없소." 옥소랑군이 다시 물었다. "나는 남일공이 친히 가르쳐 주었는지 아니면 당신이 비급에서 스스로 터득하여 배운 것인지 알 고 싶은 거요." "물론 그분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것이오." 소영이 대답하자 옥소랑군은 깜짝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남일공이 아직 죽지 않고 세상에 살아 있단 말이오?" 옥소랑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소리를 더듬거렸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그 노인장이 아직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만 알지 지금 어디에 계신지는 알려드릴 수 없소." 소영이 딱 잘라 말하자 옥소랑군은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가 조사해서 알아 내고 말 것이오." 옥소랑군은 말을 마치자마자 옥퉁소를 들어 일격을 가했다. 소영은 들어 오는 옥퉁소의 일격을 가볍게 옆으로 쳐 내며 비스듬히 장세를 몰아 옥퉁소를 향해 덮쳐 갔다. '이 사람은 매우 민첩하고 절기를 지녔구나. 놀랍게도 장풍으로 나의 옥퉁소를 막다니. 하지만 어 디 혼 좀 내 줘야겠군.' 옥소랑군은 옥퉁소를 질풍같이 내렸다가 재빨리 소영의 손을 향하여 맞받아 찔러 냈다. 소영은 다섯 손가락을 모아 달려드는 옥퉁소를 재빨리 나꿔챘다.그러자 옥소랑군은 적이 놀라면 서도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이것은 당신이 화를 자초한 것이니 결코 나를 탓하지 마시오." 온 몸의 운기를 모아 옥퉁소를 돌려 버렸다. 이것은 옥소랑군의 계획적인 흉계였다. 옥퉁소는 극히 작고 칼날같이 예리한 돌기가 많아 옥소랑군과 같은 심후한 내공으로 운기를 모아 옥퉁소를 돌리면 그 돌기에 누구라도 부상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영은 여전히 옥퉁소를 꽉 움켜 쥐고 있었다. 부상을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옥소랑군이 쩔쩔매고 있있다. 옥소랑군은 당황한 나머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의 내공의 힘은 과연 고강하오. 하지만 내 옥퉁소를 내 놓으시오!" 소영은 여전히 옥퉁소를 움켜 쥔 채 잠시 생각하였다. '피차 적이거늘 내 어찌 수중에 들어 온 적의 무기를 돌려 주겠는가? 더구나 이 옥퉁소는 이름있 는 고귀한 것이어서 옥퉁소가 부러질까 봐 두려워하는 게 옳겠지.' 그러나 소영은 슬그머니 옥퉁소를 놓아 주었다. 옥소랑군은 자기의 외침에 소영이 옥퉁소를 놓아 주리라곤 생각도 못하다가 뜻밖에도 소영이 옥 퉁소를 놓아 주자 날쌔게 삼 장이나 뒤로 물러 서며 싸늘하게 말했다. "소형은 참 신통하게도 내 말을 잘 듣는구려." 돌연 옥퉁소를 들어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느다랗고도 싸늘한 빛이 옥퉁소의 구멍에서 수없이 날아 나왔다. 알고 보니 아름답고 우아한 옥퉁소 속에는 가느다란 용수철이 있어서 숨겨 진 독침을 튀겨 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소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 옥퉁소와 옥소랑군을 번갈아 노려 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제 보니 당신의 그 옥퉁소는 그렇듯 악독한 암기로 상대방의 안목을 높여 주는구려." 옥소랑군은 냉소했다. "만약 네가 내 말을 잘 듣지 않았다면 벌써 이 독침에 상하고 말았을 것이다." "당신이 그 옥퉁소 속에 독침을 숨긴 방법이 제법 기묘하고 악독하여 막아 내기 힘들겠지만 결코 이 소영을 해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오." 옥소랑군은 소영이 손에 칼로도 끊지 못하는 천 년 묵은 교피 장갑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이 옥퉁소 속의 용수철은 매우 강해서 네가 비록 암기로 호신하려 하지만 이 날카로운 독침을 막아 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가 나로 하여금 옥퉁소를 놓게 한 것은 하나의 호의를 보인 것이니 그와 더 이상 따질 것이 없다.' 소영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옥소랑군이 거듭 소리쳤다. "나는 아직까지 인정으로 봐 주었는데도 너는 여전히 물러날 줄을 모르느냐?" '내가 만약 저 사람의 말대로 순순히 물러난다면 저 사람은 필시 독수를 사용하여 한바탕 살상을 저지를 것이니 내 어찌 순순히 물러 갈소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옥소랑군을 굴복시켜야겠다.' 여기까지 생각한 소영은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서서히 등에 짊어진 장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당신의 옥퉁소의 술법은 정말 놀랍도록 절묘함을 알았소. 나는 당신에게 몇 수의 절묘한 수법을 배우고 싶소. 부디 아끼지 말고 가르쳐 주기 바라오." 소영이 점잖게 말하자 옥소랑군은 냉소를 터뜨리며 일갈했다. "소영, 너는 내가 어째서 번번이 너에게 사정을 봐 주는지 아는가?" "나는 모르겠소." 소영은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다시 옥소랑군이 말했다. "한 사람 때문이다." "누구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옥소랑군의 살기 띤 얼굴이 일그러지며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평생 무림에서 지내왔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이토록 참아 본 적이 없었다. 소영, 너에겐 정 말 예외인 줄을 알아야 한다." 소영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금도 꺼려할 필요가 없소. 나 소영은 어디까지나 소영이며 어느 누구와도 관련이 없으니 자 어디 마음 놓고 손을 써 보시오." 옥소랑군은 두 눈에 번쩍 빛을 모아 날카롭게 쏘아 보며 말했다. "너는 끝내 나로 하여금 손을 쓰게 할 작정인가?" "천만에 당신이 손을 쓰도록 억지를 부릴 의사는 없소. 그러나 기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은 내게 인정사정 볼 것도 없으며 우리는 서로가 자기의 무공을 발휘해서 승부를 가리는 것 뿐이 오." 소영이 말 끝도 맺기 전에 옥소랑군은 허리를 제치고 호탕하게 한바탕 웃으면서 한 마디 던졌다. "좋다. 조심하라." 옥소랑군은 고함소리와 함께 갑자기 퉁소를 들어 휙 뿌렸다. 소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적할 것처럼 말을 하긴 했지만 옥소랑군의 실력을 파악치 못하고 있었으 므로 내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옥소랑군이 고함소리와 함께 옥퉁소를 뿌려 공격하자 소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가볍게 몸을 날려 뒤로 물러 섰다. 옥소랑군은 연속 세 번이나 공격을 퍼부었다. 세 번 공격이라 하지만 그것은 눈깜빡할 사이였다. 쳐 내리는 퉁소는 보이지 않고 사면 팔방으로 마구 흩어져 맹렬히 쳐 오는 불꽃만이 일고 있었 다. 그때 손불사가 무위도장을 바라 보고 나직이 말했다. "저 사람의 초식은 참으로 기이하군요. 나는 평생에 처음 보는 듯하오." 무위도장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이것은 승부를 예측키 어려운 싸움이오....." 그는 무엇을 망설이는지 중간에서 말을 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소영은 사면 팔방으로 흩어져 쳐 오는 불꽃을 피하려고 연속 오 장이나 물러 서며 간신히 급공을 물리쳐 냈다. 옥소랑군은 여전히 비웃듯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당신이 나의 이 퉁소의 공격을 그것도 세 번이나 연속된 공격을 피해 낸 것은 정말 힘든 일이 오. 정말 장하오." 입으로는 지껄이면서도 옥소랑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옥퉁소를 더욱 빠르게 휘둘러댔다. 마 치 돌풍처럼 몰아 닥치는 퉁소의 공격은 거듭될수록 더욱 빠르고 날카로와져서 마치 전광석화처 럼 닥쳐 와 소영을 덮쳐 누르면서 안개처럼 일어나는 불꽃의 연기 속으로 몰아 넣었다. 소영은 강호에 발을 들여 놓고 무림의 물을 마시기 시작한 이래 오늘과 같은 싸움은 처음이 아닌 가 생각했다. 분명 이것은 악전고투였으며 자신의 경험 부족을 내심 부끄러워했다. 옥소랑군의 공세가 번개불이 번쩍이듯 사면 팔방에서 불꽃을 몰아 오는 바람에 소영은 반격할 틈 도 얻지 못했지만 공격할 힘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깜빡할 사이에 그들은 십여 합의 격투를 벌였 으나 소영은 반격은커녕 손 쓸 사이도 없이 계속 밀리기만 하였다. 그것은 소영 자신도 안타까운 일이었으며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조이게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소영은 조급하게 굴지 않고 침착하게 공격을 막아 내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소영이 계 속 밀리며 막아 내기에 급급하자 손불사는 참을 수 없는지 초조한 눈길을 들어 무위도장을 바라 보며 나직이 물었다. "도장,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전세가 심상치 않소이다. 소영이 줄곧 수세에 몰리며 반격의 기회마 저 얻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찌 싸움을 계속 지탱해 나가겠소? 내가 가서 조금 도울까 하는데 어 떻게 생각하시오?" 무위도장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대답했다. "노선배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대협은 그 무공의 실력이 경이로우나 아직 싸움에 경험이 없어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를 판단하지 못한 것 뿐이오. 게다가 저 사람의 퉁소 공격법 역시 오묘하고 괴이한 것이어서 저도 처음으로 보는 공격이오. 만일 우리들이 나아가 소대협을 돕는다면 오히려 소대협의 심사를 어지럽히는 결과를 가져와 더욱 불리할지도 모르니 차라리 좀더 전세를 살핀 뒤 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무위도장 역시 손불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속으로 놀랍고 위험스 러운 싸움의 결과를 볼 것만 같은 불안을 억제치 못하고 있었다. 소영은 여전히 옥소랑군이 휘둘러대는 옥퉁소의 불꽃에 싸여 한 순간도 반격할 수가 없었다. 정 말 예기치 않았던 악전고투였다. 다시 한 잔의 뜨거운 차를 마실 동안 소영은 여전히 한바탕 험악한 격투 속에 휘몰려 악전을 거 듭하고 있으면서도 반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영은 손불사와 무위도장이 염려할만큼 두려워하거 나 급박한 위험에 몰렸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옥소랑군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빠르고 날카롭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소영의 장검을 빼앗거나 떨 어뜨리지는 못했다. 그때 소영이 외마디 고함을 지르며 장검을 휘둘러 겹겹이 싸인 옥퉁소의 불꽃 속에서 공격해 나 왔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일진의 광풍이 일며 벼락이 떨어지듯 굉음이 꽝! 꽝! 들려 왔다. 소영의 장검이 옥퉁소의 공격을 맞받아 내면서 오히려 깊숙히 찔러 들어 갔다. 그것은 소영이 계속 노리 고 있던 반격의 기회였다. 처음부터 소영은 계속 몰리고 있었지만 허점을 찾아 일순에 공격하려는 계책이었다. 그 허점이 지금 소영 앞에 크게 나타났으니 어찌 소영이 지체하겠는가! 소영은 겹겹이 싸여 오는 퉁소의 불꽃들은 뚫고 나오며 연속 세 번이나 장검으로 공격해댔다. 공 격하는 장검이 어찌나 거세고 빨랐던지 옥퉁소의 불꽃을 튕겨대며 번지는 장검의 섬광이 번갯불 이 치듯 눈부셨다. 순식간에 몇 합의 공격이 오고 가며 옥퉁소와 장검이 한데 어울려 요란한 폭음과 동시에 절묘한 술법을 발휘하면서 회오리 바람처럼 엉클어져 휩쓸었다. 그것을 근심스럽게 바라 보던 무위도장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지껄였다. "그가 옥퉁소의 그늘 속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것이 아니었군." 손불사도 따라서 지껄였다. "하지만 험악하기가 조금 전보다 더한데요." 이때 옥소랑군의 뒤에서 싸움을 지켜 보던 철수인도 어딘지 불안했던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 다. 아무리 보아도 싸움이 호전될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이미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갈수록 싸움이 격렬해지며 살기가 돌았다. 옥퉁소 와 장검이 부딪칠 때마다 요란한 폭음소리와 함께 번갯불처럼 불꽃이 튀어 보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무위도장은 손불사를 한 번 돌아 보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선배님, 무슨 방법을 강구하여 두 사람이 더 이상 싸움을 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손불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은 안 되오. 이제 아무리 말려도 저들은 손을 멈추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대적한다면 아마 둘 다 상하는 결과만 남을 것이 아닙니까?" 무위도장은 조급하게 반문하고 있었다. 손불사는 무위도장의 다급한 말에는 대꾸하지 않은 채, 소영과 옥소랑군을 자세히 바라 보고 있 었다. 소영의 이마에 땀이 배어난 것으로 보아 이미 전력을 기울여 힘이 많이 소모된 것 같았고, 옥소 랑군 역시 미간에 땀방울이 맺혀 하나 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누가 보든지 더 이상 싸움을 계 속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때 누군가 고함을 질러댔다. "멈추시오!" 소리와 함께 옥소랑군은 재빨리 몸을 날리면서 세 번이나 연거푸 공격을 해댔다. 그가 세 번씩이 나 연속적으로 퍼부은 공격은 소영의 장검이 교묘히 막아 내었다. 소영은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이래 처음으로 적수다운 적수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싸 움은 정말 위험스러웠다. 더 이상 계속한다면 생명까지도 버릴 각오를 해야만 될 것이라고 순간 적으로 느꼈으며 은연중 옥소랑군에게 경의를 표했다. 옥소랑군이 퉁소를 거두고 물러 서자 소영도 즉시 장검을 거두어 들이고 물러 났다. 그들은 모두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들의 시선이 못박힌 듯이 머문 곳에는 머리를 두 갈래로 따 늘이고 청색 긴바지에 짧은 웃옷을 입고 허리에는 노란 띠를 두른 십육 세쯤 되는 자그마한 소녀가 등에는 보검인 듯한 장검을 멘 채 대문 곁에 숙연히 서서 이쪽을 노려 보고 있 다. 소영은 섬뜩함을 느끼고 잠시 생각했다. '이 계집아이는 어제 보았던 아가씨가 아니냐? 저 아가씨는 악누님의 몸종이니 아마 누님의 심부 름을 왔을 게 틀림없다.' 숨을 헐떡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슬쩍 닦아 내던 옥소랑군이 손을 모으며 소녀에게 가볍게 말 했다. "소문(素文) 아가씨, 그 동안 별일 없었소?" 그 청의의 소녀는 크고 맑은 두 눈을 들어 날카롭게 사방을 훑어 보고는 몸을 굽혀 모여 있는 군 호들에게 정중히 예를 한 다음 간단히 말했다. "소녀가 어찌 옥소랑군의 인사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옥소랑군이 재빨리 소녀의 말을 가로챘다. "아가씨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말을 하는 옥소랑군의 목소리가 몹시 긴장되어 있었다. "한 가지 일을 알려드리려 왔습니다." "무슨 일이오? 혹시 악 낭자가....?" "그렇습니다. 아가씨께서 오늘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하신다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옥소랑군은 안색을 변해 가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 이유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알지 못합니다." 소녀는 소영에게 시선을 돌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소공자께서는 소녀를 몰라 보시는군요." 소영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한 번 본 사람을 나는......" "아닙니다. 우리는 벌써 두 번째 만나는 걸요?" 하고 소녀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소영은 조금 당황했지만 차갑게 대답했다. "그런가요? 하지만 처음에 아가씨는 남장을 하였으니까 자연 알아 보지 못했어요. 아가씨 모습을 본 것은 어제가 처음인 셈이 아닙니까?" 소녀는 의미있는 웃음을 보이고 곧 옥소랑군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는 기다리지 마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만나지 않으면 언제 또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옥소랑군은 안색을 흐리며 물었다. "아가씨께서 공자를 뵙고 싶을 때 사람을 보내 찾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옥소랑군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격노한 모습을 드러냈다. 내심 크게 분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옥소랑군은 크게 발을 구르며 손을 들어 철수인을 향해 말했다. "우린 가자꾸나." 말을 마치기 바쁘게 옥소랑군은 훌쩍 몸을 날려 지붕 위로 날아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가볍 게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철수인은 옥소랑군을 따라 제비처럼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오 르더니 그들을 흘겨 보고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이 그림자처럼 사라지자 소문 소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소영 곁으로 와 속삭이듯 말했다. "소공자, 우리 아가씨를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만약 댁의 아가씨가 그렇게 예쁘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제 저녁엔 만나게 해 달라더니 그새 마음이 변하셨나요?" 그녀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가씨, 오해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악 누님이 나를 만나겠다면 나는 당장 달려가겠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안내해서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가도 괜찮겠습니까?" 소영은 소문을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호호, 만약 괜찮지 않다거나 혹시 아가씨께서 허락치 않으셨다면 제가 무슨 이유로 소공자를 모 시겠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궁금한 점이 있어서 묻고 싶은데요." "좋습니다. 무엇인가 말씀해 보세요." "악낭자가 어째서 어제는 나를 만나지 않았으며 오늘은 또 왜 나를 데려 오랍니까? 나는 까닭을 모르겠소." 소녀는 잠시 고운 눈매를 정그리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유가 있는지 없는지 소녀는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설령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해도 소녀는 소공 자께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소영도 얼굴을 찡그려 보이고 말했다. "혹시악낭자가 무슨 일로 나를 만나려는지 소녀는 아시오?" "무엇 때문이냐구요? 그보다도 소공자께서는 지금 무엇 때문에 악 낭자를 만나지 않으려는지....." 머뭇거리던 소녀는 음성을 낮추어 말을 이었다. "악 아가씨와 당신 소공자와는 어떤 사이신지 소녀는 전연 알지 못합니다. 단지 아가씨께서도 당 신을 위해 밤낮으로 심혈을 기울여 왔다는 것 뿐입니다. 우리 두 자매가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처리한 남해의 오흉 사건은 그 일례에 불과하며 그녀는 당신이 자기가 도운 것을 눈치 못 채게 하려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말을 채 맺지도 않은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소영은 그녀가 계속 이야기하기를 기다렸으나 소녀는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소영은 답답했다. "아가씨, 얘긴 다 끝났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그럼 왜 이야기를 하다 마는 거요?" "저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겠어요. 감히 더 말할 수가 없어요." "괜찮습니다. 모두 듣고 싶어요." 그녀는 소영의 위압적인 언사에 눌린 듯 한숨을 길게 토해 내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너무 많이 지껄였으니 소공자께서는 제게 더 이상 묻지 말아 주십시오. 다른 이야 긴....." 소영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손불사를 한 번 돌아 본 후 말했다. "아가씨에게 묻겠는데, 여기 계신 다른 몇 분들도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아가씨께서 따로 분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가씨께서는 낯모르는 분과 만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자 손불사가 참견했다. "소대협, 난처하게 생각지 마시오. 우린 여기서 기다리면 될 테니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그렇게 하시지요." 소문 소녀도 재촉하듯 말했다. 소영은 손불사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읍을 해 보이고 말했다. "그럼, 여러분께서는 이곳에서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다녀오겠습니다." "어서 가보시오." 하고 손불사가 재촉했다. 소녀가 앞장을 서서 소영을 인도했다. "어서 가시지요."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문 소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웅장하고 거대한 집을 걸어 나오자 소문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좀 더 빨리 가는 게 좋겠어요." "아가씨가 먼저 마음껏 달려 보시오. 나는 충분히 따라 갈 수 있으니까요." "소녀는 이미 소공자의 무공을 보고 놀란 바 있습니다. 따라서 소녀가 소공자와 경공술을 겨루고 싶은 의사는 없습니다." 소영은 그녀가 수 차례나 암중에 자기를 도운 일을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는 것을 금치 못했다. 소영이 멋적은 모습을 보이자 소녀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갑자기 몸을 날리며 외치듯 말 했다. "그럼 소녀가 앞장 서겠습니다." 그녀도 무공이 높은지라 소영이 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에 최대의 경공을 발휘하여 이미 칠팔 장이나 앞서서 달려 가고 있었다. 소영은 진기를 한 모금 깊이 들이 마신 뒤 재빨리 몸을 날려 그 뒤를 따라 갔다. 두 사람은 쫓고 쫓기는 기분으로 최대의 경신술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십여 리를 달려 나갔다. 소영이 전력을 다하여 일 장의 거리로 뒤쫓아 갔을 때 갑자기 그녀가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소 영은 하마터면 그녀와 부딪칠 뻔하였다. 황급히 진기를 들이 마시고 멈추지 않았다면 호되게 부 딪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자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까르르 웃어대며 말하였다. "호호흣.... 역시 소공자의 무공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도록 높으시군요." 소영은 화가 난 투로 말했다. "어째서 멈추는 거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소." 소녀는 여전히 웃으며 손을 들어 한 쪽을 가리켰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짙은 녹음 사이로 은은 하게 보이는 초가집 한 채가 아담하게 드러났다. "다 왔습니다. 바로 저 초가집입니다." 소영은 격동을 눌러 참으며 지그시 그 초가집을 바라 보았다. "소공자, 악 아가씨를 만나실 때 말을 조심해서 하십시오." 소녀는 나직이 이르고는 얌전한 걸음을 옮겨 앞장을 섰다. "무엇 때문에 내가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거요?" "아가씨는 이미 시달릴 대로 시달려 있으니 소공자께서 더 이상 아가씨를 슬프게 해서는 안 됩니 다." "좋소. 그렇게 하지요."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그들은 이미 초가집 앞에 당도했다. 소녀가 나무로 얽어 만든 대문을 두 번 톡, 톡, 두드렸다. 그러자 스르르 문이 열리며 온 몸에 붉 은 옷을 입고 등에는 장검을 맨 갸름한 소녀가 문앞에 나타났다. "아가씨 계시냐?" 소문 소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녀는 소영을 한 번 훑어 보고 말했다. "계십니다. 소공자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소영은 흠칫 놀라 붉은 옷을 입은 소녀를 바라 보았다. '이 계집애는 어떻게 나를 알아 보는 것일까? 성까지 알고 있으니......' 소영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 섰다. 문을 열고 들어 서자 안은 퍽 단조로웠다. 놓인 물건이라곤 한 개의 큰 탁자와 네 개의 대나무 의자가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왼쪽으로 가까운 곳에 엷은 남색의 질이 나쁜 휘장이 초가집 안팎을 두 칸으로 나누고 있었다. 소문 소녀는 방 밖에서 머뭇거리고 들어 오지 않았다. 대신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소영의 등뒤 로 바짝 따라 들어 오며 나직이 말했다. "소공자.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소녀가 아가씨께....." 그때 남색 장막 안에서 경쾌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너는 물러가 있거라." 잠시 후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조용히 물러가자 장막이 걷히며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걸어 나 왔다. 소영은 순간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다름아닌 오 년 동안이나 헤어 져 있던 악소채였다. 그 때의 모 습 그대로였지만 어딘지 조금은 세파에 시달린 듯했다. 지친 표정에 우울한 빛이 미간에 떠오르 고 있었다. 그러나 악소채는 억지로 환한 모습에 히소를 담뿍 지으며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 멍하니 보기만 하지? 넋빠진 사람처럼.... 설마 이 누나를 몰라 보는 것은 아니겠 지?" 소영은 왈칵 눈물이 솟는 것을 억제하며 공손히 두 손을 모아 읍을 해 보이고 말했다. "누님! 이 얼마만입니까? 그 동안 저는 누님의 음성과 모습을 한시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새겨 두고 있었습니다." 악소채는 가볍게 탄식을 했다. "그러나 동생은 많이 변하였구려. 만약 내가 우연히 지나치다가 동생을 만났다면 동생을 몰라 보 았을 거야." "나는 건강하게 변하였지만....." 소영의 말을 잘라 악소채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이토록 풍채가 좋은 미소년이니, 아! 오 년의 세월이 이토록 길단 말인가? 너무나 많은 변화를 가져 왔으니....." 소영은 전에 없이 악소채가 감상에 젖어 있는 것에 놀라 속으로 매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 누님은 항상 명랑하고 외유내강의 기질을 지녔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듯 슬픔과 우수에 잠겨 있을까? 말투부터 어떤 체념에 빠진 사람처럼 연약해졌으니.....' 소영은 악소채의 크고 동그란 눈이 피로에 충혈된 채 눈물에 젖어 있음을 보고 더욱 놀라며 황급 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누님, 왜 이러십니까?" 그러나 악소채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아, 아무렇지도 않아.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동생을 갑자기 만나니 형언할 수 없이 기뻐서 그러 는 거지. 우리 지난 얘기나 할까?" 소영은 그녀가 지난 몇 년 동안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생각하자 왈칵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악소채마저 슬프게 할 수는 없었으 므로 소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치솟는 격정을 참았다. "누님, 지난 몇 년 동안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으셨군요. 그렇지요?" "나야 어려서부터 강호에 몸을 담고 무림에서 자라 왔으니 그깐 고통쯤이야 대수롭지 않지만 동 생이 어린 몸으로 어떻게 그 고난의 나날을 지내 왔는지, 동생은 귀엽게 자랐어야 하는데 다 내 가 덕이 없는 탓이야." "누님, 물론 고통을 무수히 겪기야 했지만 이제 모두 지난 일이고, 지금은 이렇듯 건장하게 자라 지 않았습니까?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정말 옛날과는 너무나 달라졌어. 자꾸만 어릴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지만 이제 동생은 무림에 이 름을 날리고 강호에서 명성도 얻었으니 지난날의 고통이 보람을 찾은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되기 까지 동생이 어린 몸으로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제가 오늘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누님이 음으로 양으로 도와 주신 덕이 아닙니까? 무엇으로 누님 께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영은 진심으로 악소채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했다. "나는 결코 동생을 돕지 못했어. 동생이 강호무림에서 겪은 고통을 손톱만큼도 덜어 주지 못했으 니 어찌 내 도움이라 하겠어. 생각하면 참으로 덧없고 미안한 마음뿐인데." 악소채는 그만 복받치는 설움을 억제치 못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사 람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악소채는 고개를 돌리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어 눈물 을 삼켰다. "누님, 모두 지난 옛일이니 너무 생각하지 마십시오." 소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침착하게 말하고 있었다. 101. 악소채의 발자취 악소채는 옆에 있는 대나무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앉아서 이야기해." 소영은 그녀의 말대로 오른쪽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악소채는 소영의 건너쪽 의자에 앉으면서 말을 꺼냈다. "동생이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해 주겠어?"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하자면 굉장히 길지요." 소영은 악소채와 헤어진 뒤의 모든 일들을 간단하게 골자만 이야기 하였다. 악소채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다가 놀라는 표정도 지으며, 때에 따라서는 슬픔의 빛을 보이기도 했다. 소영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은 우연하게 노선배를 만나 무공을 전수받았으니 정말로 크나큰 조화라고 할 수 있군." 소영은 돌연 어제 저녁의 일이 생각나 화제를 바꾸었다. "누님, 제가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는데....." "어제 동생을 만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물으려는 것이지?" "맞습니다. 나는 어째서 그랬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지금까지도 누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악소채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동생, 지난 이야기는 들추지 말아. 지금 우리는 이렇게 마주앉아 있지 않아?" "누님이 원하신다면 더 이상 들추지 않겠소. 더구나 누님이 요 며칠 사이에 암중으로 저를 도와 준 은혜 평생 잊지 않겠소." 악소채는 손을 저으면서 그의 말을 막았다. "그런 것은 따지지 말아.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가 전연 모르는 사람들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 소영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줄곧 악소채의 표정을 살폈다. 악소채는 입가에 미소를 띠기 는 하였지만 그것은 억지 미소로 보였다. '틀림 없이 무슨 걱정이 있구나.' "누님, 누님께선 심려가 많으신 것 같은데......" "아니,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인데 그것이 아무리 애써 보아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으니." "무슨 사정입니까? 저에게 말해 줄 수는 없는지요?" 악소채는 앞으로 흘러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가벼운 탄식을 했다. "이 누이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소영은 내심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무슨 일이 그렇게 큽니까?" 악소채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소영에게 보내면서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동생도 이제는 청년이 되었으니 어렸을 때와는 생각하는 것이 크게 달라졌을 테지." "제가 강호에 발을 디딘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 동안 겪은 고초와 음모는 이루 헤아릴 수 없 습니다. 더욱이 지난 몇 달 간은 몇 십 년이 흘러간 것 같아요. 저도 이제는 강호를 내다 보는 견 식이 부족하지는 않으니 누님의 심사가 무엇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제 힘이 미치는한 돕겠습니 다." 악소채는 고개를 숙이고 낮은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동생은 백리낭자라는 사람을 알고 있어?" "알고 있지요. 그녀는 바로 북천존자의 딸이며 이름은 백리빙이라고 하지요. 그녀는 저를 도와 준 일도 있습니다." "그럼, 동생은 그 은혜에 보답할 생각....?" 소영은 의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니 응당 보답을 해야지요." "또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 "말해 보시오. 제가 알고 있는 일이라면 모두 대답하겠으니...." 악소채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생명을 구원받았다면 어떻게 그 보답을 해야 할까?" 그녀는 말을 하며 소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그건 쉽게 말하기가 곤란한데요." "어째서?" "먼저 상대가 어떤 상황에서 생명을 구해 주었나를 알아야 되겠고...상대가 진심으로 구원을 했다 면 그 은혜야 태산보다 높지요." 악소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벼운 탄식을 하였다. "그 사람은 처음엔 진심으로 생명을 구해 주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대가를 바라고 있 으니....." 악소채는 눈을 빛내며 양미간을 찡그렸다. "상대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조건이라면 응당......" 소영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악소채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말을 안하지?" "누님이 묻는 그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냥 어떤 사람이야." "그럼 누님은 그를 알고는 있군요." 악소채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가락을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님은 지금까지 하신 이야기 모두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것 같군." 악소채는 장탄식을 하며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그만 두었다. 소영은 그러한 악소채를 유심히 바라 보며 무겁게 말을 이었다. "제가 한 가지 일을 추측하였는데 혹시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화를 내지 마십시오. 누님께서 말 씀하시는 사람은 혹 남옥당이 아닙니까? 옛날에 가짜 소영 행세를 하던 사람." 악소채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막 입을 열려는데 밖에서 소문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안 됩니다. 지금 아가씨께선 손님과 이야기를 하고 계시니 잠시 후에 찾아 주세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두 짝 대문이 활짝 열리며 옥소랑군이 안으 로 들어 섰다. 그는 소영의 모습을 보고 대뜸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무서운 눈빛으로 소영을 쏘아 보았다. 소영도 그에 지지 않고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 한동안 서로 눈빛으로 맞섰다. 얼마가 지나자 옥소랑군이 먼저 눈길을 돌려 악소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악낭자께서 저와의 약속을 취소하려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군요." 악소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대답했다. "그렇소." 소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내심 경계를 했다. '저놈은 원래 성질이 조급하여 이 정도의 일에도 화를 내며 손을 쓸 것이다.' 이렇게 추측을 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악소채의 앞으로 다가 섰다. 그러나 소영의 추측은 어긋났다. 옥소랑군은 손을 쓰기는 커녕 웃는 표정으로 정중히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흥취를 깨뜨려 죄송하오이다." 옥소랑군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와, 앉기를 권하기도 전에 가운데 의자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전에 사원에서 범한 실례를 소형께 사과하오." 소영은 그의 부드러운 태도가 뜻밖이라 어리둥절하였다. '이상하다. 그는 어째서 나에게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는 걸까?'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얼른 대답을 않자 옥소랑군이 말을 이었다. "소형의 일행께서는 아직도 그 사원에 계시오?" 소영은 그에게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렇소. 왜 그런 것을 묻소?" "당신의 일행은 지금쯤 무척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오. 만약에 당신이 이곳에 오래 머문다면 그 들에게 이곳까지 찾아 오는 수고를 끼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하는 말이오." 소영은 그의 말을 듣고 내심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손불사와 무위도장은 무림에서 명성이 높은 분인데, 이곳까지 나를 찾 아 와서 악 누님을 보면 크게 화를 내실 것이다. 이제까지 악 누님이 그분들에게 인사를 안했으 니......." "그럼 장형의 의견은 어떻소?" 옥소랑군은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소형께서 대사원으로 찾아가 일행에게 이곳을 찾지 말라고 이르면 되지 않겠소?" 소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악소채를 쳐다 보고는 밖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나서려는데 문 옆에 서 있던 소문이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 이곳을 떠나지 마시오. 모두가 옥소랑군의 흉계입니다." 소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고개를 돌려 악소채를 바라 보았다. 악소채는 무슨 걱정이 있는 지 고개를 깊이 숙이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악누님은 옥소랑군을 만나는 것이 곤란한가 보군. 더욱이 두려운 빛을 보이고 있으니 필시 곡절 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이대로 떠날 수는 없겠구나.' 소영은 먼저 앉았던 자리로 되돌아 갔다. 옆에서 근심된 표정으로 소영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던 소문은 얼굴 가득히 안도의 빛을 띠었다. 소영이 되돌아 서자 옥소랑군은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형, 어째서 되돌아 오는 거요? 잊으신 거라도 있소?" "나는 당신에게 이곳을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소." 옥소랑군은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 일행이 이곳까지 찾아 온다면 어쩌시겠소?" 소영은 악소채를 쳐다 보며 대답했다. "당신은 그런 것에까지 관심을 갖지 않으셔도 되오." 그러자 옥소랑군은 험상궂은 얼굴을 하며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크게 소리질렀다. "소형, 당신은 정말로 나와 대결할 생각이오?" 소영은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어째서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과 싸우려 하겠소." "그렇다면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부득이 나와 생사를 걸어야 할 것이오." 소영은 상상 밖으로 핏대 올리는 옥소랑군을 보고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악누님께서 무슨 일로 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이 사람의 계략에 걸려 들 어 언제라도 생명을 빼앗길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닐까?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 남아 악누님을 보호해야겠다.' 옥소랑군은 소영의 대답이 없자, 다시 코웃음을 쳤다. "흥! 소형, 당신이 끝까지 내 일을 방해한다면 오늘이야말로 당신의 목을 베겠소. 나중에 후회하 고 잘못을 빌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 지금 결정을 내리시오." "어떤 결정을 내리란 말이오?" "소형이 이곳을 떠나든가 아니면 각자 지니고 있는 무공으로 승부를 결정지어 생사를 나누든 가....." 소영은 다시 악소채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이제 고개를 들고 소영을 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호수 같이 맑은 두 눈에 눈물이 괴어 금방이라도 뺨에 흘러 내릴 것만 같았으며 더군다나 신색은 백지 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다시 옥소랑군의 말소리가 들렸다. "목숨이 아깝거든 어서 이곳을 떠나 다시는 악낭자를 찾지 마시오." 소영은 침묵을 지키며 신중하게 생각했다. '이 사람의 무공은 고강하여 생사를 걸고 싸운다면 둘 중에 어느 누가 죽게 될지 모른다. 나는 강호의 혼란한 정세를 바로 잡아야 될 의무가 있으니 이곳에서 헛된 싸움을 할 시간이 없다. 오 늘은 내가 한 발 양보를 하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의 무공은 매우 높아 내가 대적하지 못함을 알고 있소. 그리고 서로간에 원한도 없으며 아 무런 이해관계도 없는데 목숨을 건 싸움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옥소랑군은 건방진 태도로 두 손을 뒷짐진 채 말을 받았다. "당신이 나와 싸우기를 원치 않는다면 오늘부터 악낭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시오." 소영은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너무 나를 못살게 구는구려. 나와 악누님과의 사이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옥소랑군이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닥치시오!" 그러자 소영은 자존심이 크게 상하여 똑같이 언성을 높여 대꾸했다. "당신은 너무 건방지오! 상대를 무조건 얕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가 당신을 피하려 는 것은 당신을 무서워서가 아니오." 옥소랑군은 왼손에 들고 있던 옥퉁소를 오른손으로 바꿔 쥐며 창문께를 가리켰다. "이 초가집 뒤에는 넓은 풀밭이 있으니 그곳으로 나가 결판을 지읍시다." "좋소. 당신이 그런 것을 원한다면 나도 사양만 하지 않겠소." 옥소랑군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먼저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그의 뒤를 따르면서 눈길을 돌려 악소채를 보았다. 그녀는 두 사람이 생사를 건 결투를 하려는 것에는 관심도 없는 듯 망연히 앉아 있기만 했다. 소영은 내심 장탄식을 하였다. '아! 악누님과 옥소랑군 사이에 미묘한 관계가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 없구나.' 이때, 소문이 뛰어 들어 와 매우 근심된 표정으로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그냥 악소채의 옆으로 다가 갔다. 소영은 더 이상 지체해 있으면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재빠르게 몸을 날려 초가집 뒤쪽으로 나갔 다. 과연 그곳은 널찍한 풀밭으로 자웅을 겨루기에는 안성마춤의 장소였다.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칼자루를 움켜 잡으면서 한 발 한 발 옥소랑군에게 다가 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약 사, 오 장이 되자 옥소랑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형, 검을 뽑으시지! 오늘의 이 싸움은 다른 때와 달라. 서로 갖고 있는 독수를 마음껏 발휘해 야 할 것이오." 소영은 다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장형께서 그런 규칙을 정하셨으니 저는 따르겠소. 그러나 싸움을 하기 전에 몇 가지 물어 볼 말 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소?" "말해 보시오. 아주 간단히 끝내야 되니 긴 이야기는 마시오." "첫째 우리는 아무 원한도 없으면서 왜 싸워야 하는 것이오?" 옥소랑군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한다면 잠도 못 잘 것이고 입맛이 없어 밥도 먹지 못할 것이니 까......" "나도 당신이 암암리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은 짐작하였소. 어째서 그런 원한을 갖게 되었소?" 옥소랑군은 냉랭한 미소를 띠었다. "정말 당신은 모르고 있단 말이오?" "악 누님 때문이 아니오?" "그렇소. 바로 악낭자 때문이오. 당신과 악낭자는 너무나 정이 두텁기 때문에 당신을 죽이려고 하 는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당신은 악 누님과 나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잔소리는 필요 없소. 어서 검을 드시오." 옥소랑군은 일갈을 외치며 옥퉁소를 휘둘러 금룡탐조(金龍探爪)의 초식을 써서 소영의 앞가슴을 곧장 찔렀다. 소영은 재빠르게 장검을 뽑아 들어 공격해 들어 오는 퉁소를 막아 내면서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단지 나와 악 누님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싸움을 하다니 정말 모를 일이오." 그러나 옥소랑군은 한 마디도 대답을 않고 계속 퉁소를 휘둘렀다. 소영은 치미는 분노를 참고 있으려니 상대가 너무나 건방지다고 느껴졌다. '이 사람은 여간해서 손을 멈추지 않겠군. 혼을 좀 내 주어야겠군.' 그 사이에 두 사람은 팔초를 보내고 팔검을 받았다. 옥퉁소와 검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주위를 뒤흔들어 놓았다. 옥소랑군은 소영의 팔검을 막아 낸 뒤 내심 두려움을 느꼈다. '소영이라는 인물이 어째서 강호의 명성을 크게 얻고 있나 했더니 과연 비상한 절기를 지니고 있 구나. 오늘 그를 쓰러뜨리려면 살수를 써야만 되겠다. 그렇지 않다가는 도리어 내가 화를 당하겠 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옥퉁소를 들어 올려 입가로 가져갔다. "소형, 이 옥퉁소를 무시하지 마시오. 이것을 불면, 숨통을 막아 버리는 절세의 독이 들어 있어 구멍마다 강한 암기가 쏟아지니 각별히 조심하시오." 소영은 그의 말을 듣고 은근히 걱정을 하였다. '그는 승리에 마음이 급급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 "당신이 꼭 나와 생사 결판을 짓겠다니 할 수 없소. 나는 당신의 암기가 어느 정도의 높은 경지 에 도달했는지 시험하고 싶구려." 옥소랑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소영의 주위를 돌았다. 소영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그가 움직이는 모양을 유심히 살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을 쳐다 만 보았다. 소영은 그 틈을 이용하여 품에서 천년교피로 만든 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었다.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풀밭에는 금방이라도 바위가 부서지고 하늘이 울릴 만한 싸움이 전개될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은 모두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들의 쌍무을 말릴 엄 두를 못 낼 정도였다. 두 사람이 서로 한 발씩 앞으로 내어 놓고 다시 한 발을 딛는데 돌연 검은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전신에 검은 옷을 입은 악소채가 나타났다. 그녀는 두 사람의 중간에 사뿐히 내려 서서 양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영과 옥소랑군은 모두 십성의 공력을 모아 한 수에 승부를 내려고 벼르던 때였다. 두 사람이 만약 부딪친다면 어느 하 나가 중상을 입지 않으면 두 사람 모두 화를 면키 어려웠으므로 자연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쉽사 리 손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운데 방해자가 나타나자 옥소랑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낭자, 웬일이시오? 낭자께서는 우리 두 사람 중에서 어느 하나가 죽어야 된다고 생각지 않으시 오?" 악소채는 눈물을 글썽이며 낮은 음성으로 반문했다. "무엇 때문이지요. 당신들은 서로 아무 원한도 없잖아요?" 옥소랑군의 미간 사이로 한 줄기 형형한 기색이 스쳤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오. 세상은 우리 세 사람을 용납치 않기 때문이오." 소영은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침통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 넓은 세상에 어찌 우리 세 사람을 용납치 못한단 말이오?" 옥소랑군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당신은 정말 그 뜻을 모르겠소?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체하는 거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소. 어찌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 병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오?" 악소채가 말을 받았다. "나는 대협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그 보답은 반드시 해 드리겠소. 그러나 그 일과 소동생과는 아 무런 관계도 없으니 장대협은 너무 간섭하지 마시오." 옥소랑군은 돌연 희색을 띠며 다그쳐 물었다. "그럼 낭자는 어떻게 하시겠소?" "장대협께서 저에게 조금의 시간의 여유를 주면....." "좋소이다. 얼마나 시간을 드리면 낭자의 결정을 들을 수 있겠소이까?" 악소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한 마디로 말했다. "일 년이오." 그러나 옥소랑군은 난색을 지었다. "그건 곤란하오. 나는 너무 성질이 급해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오." "그럼 장대협은 얼마의 시간을 생각하고 계시오?" 옥소랑군은 왼손을 들어 세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최소한 삼 개윌을 넘어서는 안 되오." 악소채는 침묵을 지키고 얼마 동안 생각하였다. '삼 개월이라니 너무나 짧은 시일이로구나. 그 동안 내가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을 하여 그 의 큰소리를 면할 수 있을까?' 그녀는 삼 개월이 너무나 짧다고 느껴져 반문하였다. "삼 개월이요?" "그렇소. 낭자께서 생각하시기에 짧은 기간이지만 나에게는 삼 년과 같이 지루한 시간이 될 것이 오." 악소채는 그에게 더 이상 말해 보아야 소득을 볼 것 같지가 않았다. "좋소. 그럼 당신의 말대로 삼 개월로 합시다. 그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무엇이오? 내 힘이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응낙하겠소." "삼 개윌 내에는 당신의 그 듣기 싫은 퉁소소리도 끊어 주고 또한 당신의 모습도 내 눈에 보이지 말아 주시오." "좋습니다. 승낙하지요." 옥소랑군은 초가집을 쳐다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삼 개월 후에 만날 때는 어디서 만나지요?" 악소채는 미처 그 생각을 못했으므로 대답을 못하고 한참 동안 궁리를 하였다. 악소채는 삼 개월 동안 그의 은혜에 보답을 못하게 되어 부득이 그의 요구조건을 듣게 될 때에는 죽음으로써 항거 할 결심이었다. "삼 개월 뒤, 단혼(斷魂)의 절벽 밑에서 만납시다." "고금을 통하여 누구를 막론하고 그 단혼의 절벽을 내려다 본 사람이 없거늘 낭자께서 그곳을 택 하시니 좀 이상하오이다." 악소채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만약 장대협께서 두려우시다면 찾아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옥소랑군은 두 손을 세차게 흔들면서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아니외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낭자보다 며칠 먼저 가서 기다리겠소이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럼 서로 약속이 끝났으니 이제 이곳을 떠나 주시오." 옥소랑군은 그녀의 말에 공손히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 "낭자의 인격을 존중하오. 삼 개월 후의 약속은 꼭 지키리라 믿겠소." 그는 소영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악소채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 한 번도 소영을 쳐다 보지 않았다. 그리고 몸을 날려 악소채 곁을 떠나면서도 소영에게 한 마디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악소채는 옥소랑군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긴 한숨을 내쉬며 소영에게 말을 꺼냈다. "동생, 그날 밤 내가 무엇 때문에 동생과 만나는 것을 피했는지 이제 알겠지요?" 소영은 심중으로 조금은 짐작했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저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악소채는 옥소랑군의 일 때문에 수심이 가득차 있었으나 그의 뚱딴지같은 대답에 그만 웃음을 터 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소영도 자신의 대답과 악소채의 짧은 웃음에 그만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님께서 무슨 근심 걱정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말씀하시오. 동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라도 서슴치 않고 시행하겠으니......" 소영은 이야기 도중에 언뜻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악누님이 암암리에 여러 번 나를 도와 준 것만 보아도 누님의 무공은 나보다 강하다. 그런데 나 는 누님에게 큰소리를 쳤으니...' 이런 생각이 들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 악소채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이 일은 겉으로 보아 무척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해.... 오늘 동생을 이곳으 로 청한 것도 벌써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야. 나 혼자만 쩔쩔매고 있기 보다는 동생에게 모 든 이야기를 털어 놓고 조금이나마 도움을 얻기 위함이지." 그녀는 갑자기 음성을 나지막하게 내리고 말을 이었다. "이곳은 이야기할 곳이 못 되니 초가집으로 들어 갑시다. 그 옥소랑군은 나와 약속한 것은 꼭 지 킬 것이니 앞으로 삼 개월 전에는 절대로 동생을 괴롭히지 않을 거야. 나는 동생에게 할 말도 많 고 내 뒷일도 부탁해야 해." "뒷일이라니요?" 악소채는 되묻는 소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안으로 들어 가서 이야기해." 그녀는 앞서서 초가집으로 들어 갔다. 문간에서는 소문이 서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소영은 안으로 들어 서자 다시 똑같은 물음을 다그쳤다. "누님, 조금 전에 누님의 뒷일을 맡긴다고 하신 것은 무슨 일입니까?" 악소채는 담담한 웃음을 띠었다. "동생, 너무 서두르지 말아. 내가 동생을 부른 것은 자세한 얘기를 해 주려고 한 것이니 천천히 얘기해도 되지 않겠어?" "지금 제 마음은 대단히 조급합니다." 악소채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중주이고가 이미 모든 것을 이야기 하였을 것 같은데...." "조금은 들었습니다. 그들은 누님을 밀실에 감금하였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누님이 도망을 쳤다고 하더군요.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은 누님의 신변을 무척 걱정하였으며 아직까지도 궁금히 여기고 있습니다." 악소채는 빙긋이 웃었다. "그들이 나를 염려해? 호호호. 내가 만약에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면 그들의 목숨은 열 개가 된다 하여도 아마 살아나지 못할 것이야. 나는 그들을 원망하고 있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그들이 동생 을 형님이라 부른 후부터는 옛보다 더욱 호감을 갖고 있다오." "누님께서는 비록 넓은 아량으로 그들을 용서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누님 앞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게끔 하겠소." 악소채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필요 없어요. 그들은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니...." 그녀는 또다시 소영을 뚫어지게 쳐다 본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는 내 무공으로 자신의 목숨도 지킬 수 없었으니 어찌 동생을 잘 보살폈겠어. 그때 동생을 데리고 길을 떠나 귀한 공자에게 강호의 억센 풍파를 겪게 한 것을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어." 소영은 웃음을 띠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누님, 저는 조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누님께서 저를 데리고 길을 떠나지 않으셨다면 어찌 오늘 같은 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급히 알고 싶은 것은 누님의 일입니다." "나는 중주이고에 의하여 밀실에 갇힌 후 얼마 안 되어 어떤 사람에게 구출되었어." 소영은 내심 짚이는 바가 있었다. "아마도 그 옥소랑군이었나 보군요." 악소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사람의 무공은 절세하여 세상 사람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아.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나 에게는 대단한 관심을 쏟았으며, 이 제는 정까지 품고 있는 것 같아." "아! 이제서야 그가 왜 저를 보고 크게 흥분하였는지 알겠군요." 악소채는 곱게 눈을 흘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동생은 남녀의....." 그녀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화제를 돌렸다. "옥소랑군은 나를 구한 뒤 나를 데리고 세심모사(洗心茅舍)로 갔었다오." 소영은 세심모사라는 말을 듣자, 돌연 오 년 전 옛일이 생각났다. 악운고의 시체가 제일 먼저 머 리에 떠올랐다. 형산 모퉁이의 대나무 밭에 세워 있는 세심모사와 그곳에 살고 있던 백발노파, 그 리고 악소채 혼자서 수십 명의 강적을 막아 내던 일..... "고인은 원래부터 정이 깊었던 까닭에 그 세심모사 주인은 애당초 가모의 시체를 칠 일 동안만 보살피겠다던 것을 이제까지 돌보고 있어. 나는 그 주인과 칠 일을 약속해 놓고 그 기한을 어겼 었지. 내 생각으로는 그의 성격이 매우 날카로와 칠 일이라는 기한을 넘기면 그대로 가모의 시체 를 방치할 줄로 알았는데 내 예상과 다르게 매우 세심하게 보살펴 주어 가모의 시체는 조금도 상 하지가 않았어." 소영은 지난날 악운고의 사랑을 받던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누님, 이모님의 시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한 번 찾아 뵈옵고 싶습니다." "나와 옥소랑군은 그 곳을 찾아 가모의 시체를 유서대로 침연곡(沈燕谷)으로 옮기려고 하였지만, 그런데 그 세심모사의 주인이 그것을 못하게 했어." "그럼 지금까지도 이모의 시체는 세심모사에 있단 말이오?" "그렇지." 소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악소채에게 한 발 다가서서 물었다. "누님, 무엇 때문에 이모님의 시체를 안장하지 않는 것이오? 그 노파가 무서워서요?" 악소채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때 내 처지는 계속 추격받는 몸이었으며 고수들이 그 금궁의 열쇠 때문에 내 목숨을 노 리고 있었으므로 가모의 시체를 안장시킬 여유가 없었지. 더군다나 자칫 가모의 시체에 화라도 입힐까 두려워서......" 102. 악소채를 둘러싼 애증의 고리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그 후로는요?" "나는 그곳을 나와 또 다른 한 패에게 쫓기게 되었는데 옥소랑군이 모두 그들을 물리쳤지." "그 옥소랑군은 누님에게 무척 친절하군요." 악소채는 장탄식을 하였다. "솔직이 말해서 그는 나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어. 나는 지금까지 수차에 걸쳐 그의 도 움을 받았어.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 동생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야." 소영은 그녀의 말을 받아 무어라 입을 열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소영이 대꾸가 없자 악소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옥소랑군은 나의 무공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를 어떤 고인에게 소개시켜 주었어. 그는 고인에게 며칠을 두고 사정을 하여 나를 그의 문하생으로 넣어 주었던 것이지." 그러자 소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것 참..... 옥소랑군이 그렇게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다면 굳이 고인에게 사정을 하지 않고 자 신이 직접 누님에게 무공을 전수시켜도 되었을 텐데......" "그것은 옥소랑군의 무공 기질이 나와 틀리기 때문이었어. 그도 그런 것을 생각하였지만 모든 것 이 여의치 않아 그 노선배를 찾은 것이지." 소영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리라 생각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의자로 다가 섰다. "누님이 지금 지니고 계신 무공은 분명 옥소랑군보다 높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누님에게 무공을 가르친 노선배는 대단한 분이 아니오?" 악소채도 소영을 따라 건너쪽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동생에게 대답하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 과히 허물치 말아." "무엇 때문입니까?" "노선배는 나를 받아 들일 때 나에게 세 가지 약속을 시켰어. 그 첫째는 나에게 무공을 전수시켜 주되 나의 스승은 되지 않겠다는 것이며 앞으로 어디에서 만나더라도 절대로 아는 체를 않기로 하였지." 소영은 눈을 빛내며 그녀의 이야기에 잔뜩 흥미가 생겼다. "그 사람은 참으로 이상하군요. 두 번째는 무슨 약속이오?" 악소채는 왼손으로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두 번째는 서로의 이름과 거처, 그리고 지난 과거를 밝히지 말것이지." "그 다음 세 번째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내가 전수한 무공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시키는 것을 엄금했어." "강호의 각대 문파들은 모두 자기네의 무공이 세상에 널리 퍼져 그 명성을 날리기를 좋아하는데 누님의 노선배는 오히려 절기를 감추려하니 그것 참 이상하군요." 악소채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말을 받았다. "나도 처음에는 동생과 같은 의심을 갖었는데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오." "그건 어떤 이유에서요?" 악소채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무슨 생각을 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것은 그의 무공이 너무나 악독하여 만약에 그것을 세상에 퍼뜨리면 강호 무림은 일 대 혼란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오. 더욱이 나쁜 사람에게 그 수법이 전수되면......" 그녀는 다음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소영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악누님에게 무공을 전수시킨 노선배는 정말로 의인이로구나. 그 분은 뒤에서 강호를 위하고, 강 호를 걱정하는 무인인 중에 으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언제인가 남해오흉을 혼내 줄 때 썼던 금침정뢰가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소영으로서는 생전 듣지도 못한 악독한 암기였다. 소영의 생각은 자신을 떠나서 강호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누님을 가르친 노선배라면 능히 심목풍을 누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들어 줄는지.....'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 그 노선배님께서 조금만 도와 주신다면 강호를 어지럽히는 심목풍을 물리칠 수 있을 터인 데....." 악소채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노선배를 만날 수 없어. 나는 그곳에서 사 년 간을 머무르면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수련을 한 덕분으로 얼마간의 절기를 터득하였지. 그런데 그는 느닷없이 나를 밖으로 내 쫓으며 그곳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게 하였지." "왜 그랬나요?" 악소채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허공을 응시하였다. 그녀는 또다시 옛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소영은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후 악소채는 맥없는 음성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나는 며칠을 두고 생각하였지만 조금도 짐작을 못하고 말 았지." 그녀는 앞으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사 년 만에 강호에 나오면서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동생이었어. 그러나 동생이 강물에 빠 져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너무 허무한 생각이 들어 그곳에서 삼 일 동안이나 제사를 지냈었지. 그리고 칠 일을 탄식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던 것이야. 나는 복수를 맹세하였는데 그때 내 무공 이 약하여 동생의 복수를 못할 정도였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물에 빠졌을 거야." 소영은 장탄식을 하였다. "누님이 나를 그토록 생각하고 계시니, 나는 실로 무엇으로 그 은혜에 보답해야 될지 모르겠습니 다." 악소채는 소영에게 빙긋이 웃음을 보내고는 다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반 년 후 뜻밖에도 동생이 다시 강호에 나타나서 명성을 떨친다는 소문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지. 그래서 즉시 온 강호를 뒤져 동생을 찾았으나 그것이 가짜 소영일 줄이야 누가 알았 겠어. 그 남옥당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면......" 그녀는 그 때의 분함이 생각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소영의 머리에 떠오르는 또 하나 의 생각이 있었다. "누님, 그때 누구에게 시켜 편지를 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악소채는 시선을 창으로 돌리며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응. 나는 그동안 많은 사람을 구해 주었는데 그 사람마다 편지를 주어 동생에게 전해 달라고 부 탁했어. 나는 동생을 사칭한 남옥당을 찾아 치미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어 그를 단단히 혼내 주 었는데 그가 다시 귀찮게 굴 줄은 미처 몰랐지." 소영은 언뜻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그쳐 물었다. "혹시 그가 누님에게....." 소영은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악소채는 소영의 말에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다시 자신의 말을 이었다. "그 후 내 마음이 약간 가라앉을 무렵 다시 일진의 파란이 일어났어. 그것은 가모의 유언을 지키 지 못한 죄책감과 동생의 부모님을 대할 면목이 없어 번민에 몸부림치다가 당한 일이지. 어느날 저녁 깊은 번민에 사로잡혀 그만 깜빡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고 보니......" 소영은 그 다음이 퍽 궁금하였다. "깨어나서 어떻게 되었어요?" 악소채는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대답했다. "내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혈도를 찍힌 뒤였었지." 소영은 너무나 의외의 말이라 마치 자신이 당한 일처럼 눈을 부릅뜨고 격분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누가 누님에게 그런 못된 짓을....." "백화산장에 있는 두 명의 졸개들이 내가 깨어난 것을 보고 나를 놀리는 것이야. 그들은 감히 입 에 담지 못할 말로 나를 희롱하여 내 분노를 터뜨렸어. 그러나 혈도를 찍혔기 때문에 그들을 혼 내 줄 수도 없어......" 악소채는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소영은 내심 그녀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그쳐 물었다. "그 다음은요?" "그 후 그들은 끝내 나에 대한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어. 그 때의 상황으로는 죽지도 못하 고 살지도 못하였는데 뜻밖에도 옥소랑군이 나타나서 그들을 처치하였지." "그 사람은 누님을 다시 또 구해 주었군.요." 악소채는 침묵을 지키며 그저 고개만 끄덕여 대답했다. 그녀가 말을 꺼내지 않자 방 안은 잠시 쥐죽은 듯 조용하였다. 이윽고 침묵을 먼저 깨뜨린 사람은 소영이었다. "누님, 그 다음 이야기를 하여 주시겠습니까?" "옥소랑군은 그들에게서 나를 구한 뒤 내가 수심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 다시 그 노선배에게 나 를 데리고 가 우리들은 그곳에서 다시 탄금지술(彈琴之術)을 전수받았지." 그녀는 말을 멈추고 힐끗 소영을 쳐다 보았다. 소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악소채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악소채의 지난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었다. "그는 종일토록 나를 벗삼아 산을 찾고 물을 건너며 옥퉁소로 내 수심을 달래 주었어." "옥소랑군은 정말 군자 호인이로군요." "동생은 그를 너무 좋게만 생각지 말아. 옛날에도 세월이 흐르면 정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그는 점차로 나를 정으로 대하게 되었고, 나 역시 그를 정으로 대하였어. 다만 그때 당시는 그것 을 몰랐을 뿐이었지." 소영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악소채는 그가 말을 꺼내지 못하게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매우 달이 밝은 밤에 그는 나를 데리고 구화산 꼭대기에서 달을 감상하면서 조그만 비파 하나를 선사했어. 그는 내가 탄금지술을 알고 있다 하여 준비했던 것이지. 그는 퉁소를 불고 나는 비파를 퉁기니 거기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음은 내 마음을 허공에 뜨게 만들 정도로 황홀하 였지." "누님, 그는 심기가 매우 깊은 사람이로군요." 악소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옥소랑군의 퉁소소리는 곡조를 바꾸어 한 줄기 부드럽고 낮은 음을 내었는데 그의 간드 러진 퉁소소리는 내 마음을 무아지경으로 빠뜨려 세상만사를 잊게 만들었지." 소영은 전처럼 그 다음을 다그쳐 묻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악소채는 더욱 얼굴을 붉히며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소영은 그녀의 당황하는 표정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누님, 그 다음은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래도 좀처럼 악소채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옥소랑군의 퉁소소리가 멈추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의 품에......" 소영은 갑자기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누님이, 누님이, 그 놈에게.....' 그는 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부르르 떨었다. 악소채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동생, 왜 그래?"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조금....." 악소채는 의아스런 눈빛으로 한참 동안 소영을 쳐다 보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는 내 손을 쥐고 달에 맹세를 했어. 나를 아내로 맞아 들이겠으며 종신토록 반려자가 되겠다 고 말이야." 소영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의 말은 일방적인 것 같군요. 누님은 무어라 대답을 하였소?" "나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지. 하나는 나를 도와 동생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고....." 소영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그 다음은요?" "두 번째는 그에게 삼 년의 여유를 달라고 했어. 그 동안 동생의 원수도 갚고, 아니 동생이 죽지 않고 어디엔가 살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동생을 찾을 생각이었지. 삼 년이 지나도 동생의 생사를 분명히 모르게 된다면 자연히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지." 소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그쳐 물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나는 이렇게 살아 있지 않습니까?" 악소채는 장탄식을 하였다. "그 당시에 너무 얼떨떨한 생각으로 몇 마디 한 것이 잘못이었지. 지금에 와서는 후회도 못하고 변명도 못해." "왜 안 됩니까? 누님은 그에게 삼 년을 기다려 달라고 하셨지 않소? 아직 그 기한은 안 되었으며 더군다나 내가 살아서 앞에 나타났으니 누님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응당 앞서 약속을 깨뜨릴 수 있지 않습니까?" 악소채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에게 삼 년을 기다려 달라고 하였지, 동생을 만나면 어떻게 하겠다고는 안하였기 때문이 야." 소영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것이오. 바로 그랬기 때문에 그와의 약속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오." "내 생각은 그렇지만 옥소랑군이 들어 주지를 않는군." 악소채는 말을 끝내고 소영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두 사람의 미묘한 눈빛은 한참 동안이나 교 차되었다. "나의 가모께서 남긴 유서에는 나에 대한 장래가 적혀 있었어. 거기에는 나로 하여금......" 그녀는 수줍음으로 두 뺨이 붉게 물들어 마치 잘 익은 앵두알 같았다. "이모께서는 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나는 언제나 어머니처럼 모시고 있었으니, 분명 나에게 이모님의 장례를 치루어 달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악소채는 여기서 눈을 감아 버렸다. "그 유서에는 동생을 낭군으로 삼을 것을 부탁하였소." 소영은 깜짝 놀라 흠칫하였다. '그럴 리가.....' 악소채는 고개를 숙이면서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은 부끄러운 것이라 동생에게 이야기 안하려고 하였는데 이제 사정이 이렇게 되어 부득 이.... 동생은 내가 주책없는 이야기를 함부로 지껄였다고 허물하지 말아."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의 마음 속에는 누님을 천인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누님을 멸시 한다는 말씀은 조금도 꺼내지 마십시오." "여하튼 이 일은 조만간에 동생에게 알려 주려고 벼르던 것이니 오히려 속시원하게 잘 되었어. 오늘 동생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여 주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 야." 그녀의 마지막 말은 불길한 예감으로 느껴졌다. 소영은 의아한 생각으로 막 입을 열어 물으려는데 악소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가모의 유서에 나와 동생의 장래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씌여 있어. 동생은 세상에 태어나서부 터 절맥이어서 비록 상승무공을 터득한다 하여도 이십 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니 가모의 시체를 안치하면 오래 돌보지 말고, 또한 가모의 복수도 뒤로 미루라고 하셨지." 소영은 의아심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어째서 이모님은 복수를 뒤로 미루라고 하셨나요?" 악소채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소영을 곁눈질로 힐끗 쳐다 보았다. 그녀는 수줍음으로 인하여 말 소리까지도 가느다랗게 들렸다. "가모께서는..... 나에게 단계종으로 돌아가 동생과 부부의 인연을 맺으라고....."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말했다. "가모께서는 동생의 소씨 집안을 위하여 동생과 부부 인연을 맺은 뒤 딸과 아들을 하나씩 낳아서 대를 잇게 하라고 하셨어. 그 후에야 가모의 원수를 갚으라고 부탁했어. 가모의 지혜는 넓어서 원 수를 갚을 수 있는 자세한 방법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나는 목숨을 걸고 동생을 데리고 나온 것이야." 소영은 악운고의 억울한 죽음이 새삼 생각나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직도 많은 사유가 있을 것 같은데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시겠소?" "지금은 많은 변화가 생겼어. 우선 죽었다던 동생이 살아 있으며, 가모의 유언대로 이십 세를 넘 기지 못할 줄 알았는데 하늘의 도움인지 그 고비를 넘긴 것이지. 더군다나 동생은 절세의 무공을 지녔으니 이제는 나는 운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소영은 가슴 속이 답답함을 느끼며 그대로 눈을 감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악소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문께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동생, 그 옥소랑군의 무공은 어땠지?" 소영은 생전 처음으로 남녀의 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까닭에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듯 울렸다. 그의 마음은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다급하게 울렁거렸다. 그러던 중 전혀 뚱딴지 같은 그녀의 물 음에 잠시 어안이 벙벙하여 대답을 못하였다. 악소채는 빙그레 웃음을 띠며 다시 똑같은 물음을 보냈다. "동생, 옥소랑군의 무공이 어떠하였어?" "그의 무공의 고강함은 강호에서 찾기 힘든 것이었소." "그럼, 그와 겨루면 이길 자신이 있어?"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누기 이기고 지는 것은 예측키 어렵소." "그는 나에 대한 정이 바다와 같이 깊고 산같이 높으니 나로서도 무어라 단안을 내리지 못하겠 어. 동생의 의견은 어떤지....?" 소영은 너무나 의외의 물음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건, 그건....." "일이 이쯤 되었는데 무엇을 망설이지? 동생이 품고 있는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소영은 눈을 빛내며 오랫동안 악소개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창 밖을 내다 보고 있었기 때문에 소영에게는 뒷모습만 보였다. 그녀의 뒷모습은 하늘의 선녀가 내려 온 것 같이 아름다왔다. 소영은 가슴 속에서 불덩이같은 정 감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거야 누님께서 이떻게 결정하시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 까? 만약 누님이 그를 좋아한다 면 그에게 종신을 맡기게 되는 것이 고, 그렇지 않다면 앞서 나와 약속한 대로 그와의 관계를 깨 뜨리는 것이지요." 악소채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또 한 가지의 일을 동생에게 말하지 않았어." "무슨 일입니까?" "만약 앞서의 약속을 깨뜨린다면 옥소랑군은 목숨을 걸고 동생과 싸우려고 할 거야." 그러자 소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악소채에게로 다가가며 크게 외쳤다. "누님! 그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할지라도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악소채는 천천히 몸을 돌려 다가 오는 소영에게 담담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어. 동생과 그가 맞부딪친다면 어느 누구든 크게 상하고 말 것이란 것을......" "나는 누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소." 악소채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동생은 무림 동도들의 희망이야. 악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앞장을 서고 있으니 강호의 군 주라고 할 수 있어. 더군다나 심목풍에게 정면으로 대항하는 유일한 인물이니 여인 때문에 목숨 을 버릴 필요가 없어." "내 마음 속에는 오직 누님뿐이오. 누님을 사모하는 정은 옥소랑군보다 더 높을 것이오. 내 비록 나이가 어려 강호의 견식이 부족하다지만 누님과 헤어지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직 누님을 생각하는 한 가지 마음뿐이었소. 오늘 누님께서 모든 이야기를 하셨으니 저도 서슴지 않고 누님 을 사모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이오." 악소채는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옛날의 동생은 너무나 허약하고 분별이 없어서 정말 내 마음을 애타게 하였었지. 그런데 지금은 풍채도 좋고 온몸에 영기가 가득차 있어 흐뭇해." 소영은 자신의 칭찬에 흐뭇한 마음이 들어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옛날 소영입니다." 악소채는 오랫만에 소리내어 웃었다. "호호호.... 이제는 동생도 제법 말을 잘하네." 이때, 소문이 문을 열고 들어 와 그녀의 웃음을 막아 버렸다. 소문은 쟁반에 두 개의 찻잔을 받쳐 들고 무엇이 좋은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담고 다가 왔다. 그녀는 탁상에다 찻잔을 내려 놓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차가 늦어 죄송합니다." 악소채는 아무 대꾸도 없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소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동생, 식기 전에 차를 마시고, 내가 동생에게 보여 줄 것이 있으니 차를 들면서 잠깐만 기다려 줘." 그녀는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단목으로 된 조그만 상자를 품에 안고 들어 왔다. 그녀의 표정은 지난 어느 때보 다도 엄숙하였다. "동생, 이 상자를 잘 보관해 줘." 그녀가 내미는 상자는 매우 가벼웠다. '이 안에 무엇이 들었길래 이토록 가벼울까?' 소영이 이렇게 궁금히 생각하고 있는데 악소채가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이곳에 금궁의 열쇠가 들어 있어!" 소영은 너무나 의외의 일이라 그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금궁의 열쇠요?" 소영의 다그쳐 묻는 말에 옆에 서 있던 소문이 깜짝 놀랐다. 소영 자신이 생각하여도 그는 너무 큰소리로 물은 것이었다. 악소채는 침착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 오늘 동생에게 이것을 주는 것은 동생이 직접 금궁에 들어 가 보라는 뜻이야." 소영은 손을 흔들면서 뒤로 몇 발 물러났다. "안 됩니다. 이렇게 진귀한 것을 어찌 내가 갖고 있겠습니까? 이것은 누님이 보관하셔야 됩니다." 악소채는 갑자기 싸늘한 표정으로 소영을 쏘아 보았다. "동생은 나와 옥소랑군이 맺은 약속을 모르고 있어? 단혼의 절벽에서 만날 그 약속을 어길 수는 없지 않아. 나는 그곳에서 그와 생사를 판가름할 결심이니 삼 개월 후에 내 목숨은 어찌 될는지 모르고 더군다나 동생은 심목풍을 이겨야 될 무공이 필요하니 서슴지 말고 금궁으로 들어 가. 삼 개월이라는 세월은 생각보다도 빠른 것이니 속히 금궁으로......"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영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지?" "누님과 옥소랑군이 삼 개월 후 단혼의 절벽에서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악소채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생각을 하고서는 막연히 대답을 하였다. "그것은 내가 결정지을 일이 아니야. 그 때의 상황을 보아 나도 많은 변화를 가질 거야." "내가 보기로는 옥소랑군은 마음이 좁고, 누님을 생각하는 정이 깊어 누님이 그의 청을 들어 주 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손을 쓸 것이오." 악소채는 별다른 표정도 없이 단호히 거절하였다. "안 돼, 동생은 옥소랑군과 맞설 수 없어." 소영은 한 번 결심한 것은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성미였다. "무엇 때문이오?" "그것은 옥소랑군의 뒤에 방대한 세력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야. 그 사람들은 모두 무림의 고수 들이며 더군다나 나에게 무공을 전수한 노선배도 포함되어 있으니 동생 혼자서 어찌 그들을 당해 낼 수 있다는 것이야. 동생이 혹 그를 죽인다 하여도 그의 뒤에 있는 동도들에게 많은 시달림을 받을 거야. 지금 동생은 심목풍 한 사람도 벅찬데 그들의 원한을 산다면 동생의 포부는 무너지게 될 테고." 소영은 가볍게 포권을 하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누님을 위한 일이라면 분골쇄신이 되더라도 아깝지 않소이다." 악소채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한참 동안 생각하였다. 소영이 무슨 생각이 떠올라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악소채의 표정이 무섭게 변하였다. 그는 꺼내 려던 말을 덮어 두고 유심히 그녀의 변하는 표정을 살폈다. 악소채는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가는 다시 부드럽게 되고 또다시 심각한 표정이 되곤 하였다. 얼마 후 그녀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지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옥소랑군의 구혼을 받아 들였으니 동생은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 소영은 너무나 뜻밖의 말이라 가슴이 덜컥 내려 앉으면서 몸뚱이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 아득하였다. '누님이, 누님이 나를 버리다니..... 아,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만나지나 않았어야 될 것 을.....' 악소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물었다. "동생 나한테 할 말이 있어?" 소영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 보기만 하였다. 악소채는 딱딱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할 말을 다하였고 동생도 다른 말이 없는 것 같으니 이제 이곳에서 서로 헤어지도록 해." 소영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에 부딪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누님은 나를 내 쫓으시렵니까?" "그렇지. 동생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 남녀 유별이란 것을 알고 있을 것이야. 그러니 이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어?" 소영은 내심 큰 반발심이 생겼다. '좋다. 제 아무리 무공이 높고, 또한 나와 정이 들었던 누님이지만 이제는 옥소랑군에게 가 버 린....' 그는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털어 버리듯 머리를 흔들고 나서, 가볍게 포권을 하였다. 그리고 싸늘 한 몸짓으로 입을 열었다. "누님의 행복을 빌겠소. 그럼...." 그는 인사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자 등 뒤에서 악소채의 애뜻한 음 성이 들렸다. "동생, 너무 상심하지 말아." 소영은 그녀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초가집 대문을 붙들고 비통에 잠겨 몸부림을 쳤다. 얼마 후, 귓전에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공자님!" 소영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천천히 눈을 뜨고 뺨에 흘러 내린 눈물을 닦았다. 부드러운 음성의 임자는 소문이었다. 그녀는 소영의 뒤에 서서 숙연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너무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되었다. "아가씨 미안하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대문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너무나 악소채를 그리워하였으므로 그녀를 잃은 슬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상심은 비통의 눈물이 되었고, 많은 눈물이 그의 혈 관 구석마다 분노의 포말을 침전시켰다. '누님이 그럴 줄이야. 누님이... 누님이.....' 그는 망연 속에 그저 발걸음이 닿는 대로 길을 택했다. 얼마를 갔을까. 눈 앞에 조그만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보였다. 소영은 냇물가로 다가가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턱을 괴었다. 그는 넋빠진 사람 같았다. 흘러가는 구름을 한없이 보고 있었다. 주위는 쥐죽은 듯한 정적 속에 오직 흐르는 냇물소 리만이 소영의 귀를 적시었다. 얼마 후 그렇게 많던 구름이 서쪽으로 모두 지나가고 하늘은 씻은 듯이 파아랗게 되었다. 그 흐 르는 구름은 소영에게 일종의 계시를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소영은 파란 하늘을 쳐다 보며 차츰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는 개울가로 내 려 가 차가운 물로 세면을 하였다. 얼음과 같이 차가운 냇물은 그 동안의 희미한 정신을 맑게 씻 어 주었다. 그는 되찾은 맑은 정신 속에 한 가닥 스치는 바람결을 느꼈다. 그리고 그에게 어떤 영 감이 스쳤다. 그것은 큰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이놈! 무림을 어지럽히는 악의 무리를 제거하겠다고 큰소리치 던 놈이 기껏해야 여자 때문에 이성을 잃느냐? 어서 일어나서 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동도들을 찾아라! 그들은 너를 기다리 느라고 걱정 속에 지내고 있다.-- 소영은 내심 흠칫 놀랐다. '그렇구나. 지금 택원(宅院)에서는 손불사와 무위도장 등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들자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택원이 있는 방향을 잡아 질풍처럼 몸을 날렸다. 그 거대한 택원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대나무밭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었다. 택원 앞에는 손불사가 나와서 두 손을 뒷짐진 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는 터벅터벅 다가 오 는 소영을 보고 반색을 하며 맞이했다. "소대협, 이제야 돌아 오는구려." 소영은 망연한 웃음을 띠며 말을 받았다. "조금 늦었습니다." 손불사는 그의 웃음이 억지로 웃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항상 명랑하던 그의 신색이 우 수에 깃들었고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어, 마치 커다란 싸움을 하고 난 사람 같았다. '소대협이 그 동안 싸움을 하였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영의 신색이 너무나 엄숙하여 물을 수가 없었다. 손불사는 소영이 직접 이야기를 할 때만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도 그는 좀처럼 입을 열려 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할 수 없이 그 이유를 묻기로 결심하였다. "소대협!" 소영은 눈길을 돌려 손불사를 쳐다 보고는 또다시 억지 웃음을 띠었다. "소대협은 혹시 밖에 나가 강적을 만난 것이 아닌가? 소대협의 안색이 창백하고 피곤하게 보여서 묻는 것이네....." 소영은 대답 대신에 쓴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택원 안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손불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더 묻지를 않았다. 두 사람이 거의 택원에 다다를 무렵 손불사의 눈에 퍼뜩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소영의 옷소 매 속에서 햇빛을 받아 밝은 광채를 띠고 있는 조그마한 상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손불사의 커다 란 눈을 더욱 크게 떠졌다. '소영은 지금까지 저 상자를 지니고 있지 않았는데 지금 가지고 있으니 틀림없이 밖에 나가서 누 구에게 받은 것일 거다.' 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소영에게 물었다. "소대협, 옷소매 속에 있는 조그만 나무 상자는 무엇인가?" 소영은 그가 가리키는 나무상자를 꺼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 말이오? 정말 이상하군요. 나는 이곳에 넣지를 않았는데......." 그는 조그만 상자를 유심히 살피었다. '아! 이것은......' 소영은 이제야 그 상자에 대한 생각이 났다. 악소채는 어느 틈에 소영의 옷소매 속에다 금궁의 열쇠가 든 상자를 넣어 준 것이었다. 손불사는 워낙 강호의 견식이 풍부한 인물이기 때문에 곧 소영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소영은 분명 어느 누구에게 심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저 상자는 소영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을 거다. 그런데 누가 그에게 저렇게 중요한 물건을 주었을 까?'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벌써 그들은 내실로 들어 갔다. 무위도장, 전엽청, 사마건 등 이 소영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도 소영의 안색이 창백하고, 심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서로 얼 굴만 쳐다 볼 뿐 아무도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무위도장은 곁에 있는 손불사에게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손형, 소대협의 심기가 신통치 않나 보오." "그렇소이다. 그는 밖에 나가서 무슨 심적인 충격을 받은 것 같소." 사마건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 무림 중에 미혼대법(迷魂大法)이라는 것이 있어 상대의 정신을 빼앗는다는데 혹 시....." 손불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는 정신적 자극을 받았소이다." 이때 아무 말도 없이 멍하게 서 있던 소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갖다 주어야겠군." 그는 몸을 돌려 다시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손불사는 어깨를 흠칫해 보이며 만류하였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되는군." 말과 함께 손을 뻗어 소영의 옷고름을 붙잡았다. "소대협,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소영은 손에 들고 있는 나무상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상자를 주인에게 돌려 주려 하오." "누구에게 돌려 줄 것이오?" "악누님이오." 손불사를 위시한 모든 사람은 깜짝 놀랐다. '악소채를 만났구나. 그녀가 이제야 모습을 나타내는군.' 무위도장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소대협.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소?" 소영은 조금도 주저없이 대답했다. "금궁의 열쇠요." 소영의 말은 청천의 뇌성벽력과 같이 주위 사람들의 귀청을 후려쳤다. 모든 사람들은 한동안 정 신을 잃고 멍하니 소영이 들고 있는 조그마한 상자만을 쳐다 보았다. 무림에서 이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수 많은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강호를 뒤지 고 있는 금궁의 열쇠가 전려 뜻하지 않게 그들의 눈 앞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눈과 입이 한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그들 자신도 몰랐다. 103. 금궁으로 떠나는 소영 금궁의 열쇠! 그것은 무림의 운명을 좌우하였고, 또한 천만 무림들이 생명과 같이 중하게 여기는 보물이었다. 얼마나 많은 무림고수가 그것을 위해 뜨거운 피를 쏟았는지 모른다. 매번 금궁의 열쇠에 관한 전 설이 강호에 나돌 때마다, 곧 그 뒤를 이어 연속적인 분쟁과 살육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소영은 빛을 잃은 눈길로 서서히 군호들을 돌아 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기다리십시오. 나는 이것을 돌려 주고 오겠소이다." 그러자 손불사가 손을 내밀어 그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소대협, 악낭자가 이 나무상자를 건네 줄때 무슨 말을 하지 않았소?" 소영은 얼굴을 들고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한 듯합니다." 무위도장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손불사에게 말했다. "노선배님, 소대협의 심기가 어지러워 보이니 우리는 그를 막아야 합니다." 손불사도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다시 소영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 악낭자가 무어라고 얘기했소이까? 소대협! 우리에게 좀 들려 주는 것이 어떻소?" 소영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많은 말을 하였지요. 그러고 보니 이 금궁의 열쇠는 무림과의 관계가 매우 깊은 것 같소 이다." 손불사가 곧 받아서 말했다. "관계가 깊기만 하겠소이까? 아예 무림의 운명을 쥐고 있는 열쇠인걸요." 소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녀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심목풍을 이기려면 반드시 금궁에 한 번 들어 가야 한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손불사가 숙연히 말했다. "그렇소......" 소영은 다시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러나 이 금궁의 열쇠는 제 것이 아닙니다." 무위도장이 말했다. "그 악낭자께서 기왕 금궁의 열쇠를 소대협에게 주었으니 자연 소대협이 그 금궁에 한 번 들어 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나 이 열쇠를 악낭자에게 돌려 주면 악낭자의 뜻을 헛되게 하 는 결과가 되지 않소이까?" 소영은 나무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한숨을 지었다. "이 상자는 어쩌면 그 악누님의 생명과 관련이 있을 것이오." 손불사가 흠칫하며 다급히 물었다. "악낭자의 생명과 관련이 있다니요?" "그렇습니다. 누님이 이 금궁의 열쇠를 나에게 넘겨 주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어 눈을 감고 죽 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손불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은 매우 심상치 않구나. 그 악낭자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니 내가 함부로 끼어 들 일이 못 되는구나.' 무위도장 역시 손불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도 말을 이어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소영은 다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나는 이 나무상자를 돌려 줘야 하겠소." 무위도장이 손불사에게 귀뜸을 했다. "손형, 소대협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소이다. 그러니 손형께서 따라 갔다 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손불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영에게 다가 서며 물었다. "소형, 나와 함께 벗하여 가는 것이 어떻겠소?" "어찌 감히 수고를 끼치겠습니까?" "소대협은 내가 함께 따라 가는 것을 원치 않는 모양이구려?" 소영은 마침내 결심한 듯 대답했다. "노선배님께서 동행하고 싶다면 같이 갑시다." 손불사는 비록 소영이 자기의 동행을 원치 않는 것을 알고 있으나 소영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하 는 수 없어 염치불구하고 소영의 뒤를 따랐다. 소영은 걸음을 재촉하여 단숨에 그 오두막에 당도하였다. 그러자 소문이 간단한 짐을 메고 등에 는 장검을 꽂은 채 문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소문의 행장을 보자 즉시 어리둥절했다. 그는 이곳으로 올때 틀림없이 그 나무상자를 돌려 주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잠재의식 속에는 악소채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심정이 크게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소문의 은방울 같은 고운 음성이 들려 왔다. "소공자님, 우리 아가씨는 이미 떠나 버렸습니다." 소영은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 "떠난 지 얼마나 됐습니까? 그리고 방향은?" 손불사는 멀리 서서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았다. 소문은 가냘프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공자께서는 아가씨를 쫓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가씨가 저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공자께서 뒤쫓 지 못하게 막으라고 하셨습니다." 소영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낭자, 나에게 누님이 간 방향을 가르쳐 주시오. 나는 누님을 꼭 만나서 이것을 돌려 줘야 합니 다. 이 상자 안에는 무림의 운명을 좌우하는 금궁의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소문도 고개를 까딱하며 대답했다. "저도 압니다. 아가씨께서 이미 저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아가씨는 저에게 공자로 하여금 이 나무 상자를 잘 보관하시도록 전하라고 이르셨습니다. 그 나무상자 속에는 금궁의 열쇠 말고도 금궁 소재지의 형세도가 있는데 그것은 아가씨의 어머님이 친필로 그리신 것이랍니다." 소영은 다만 안타까운 애상(哀傷)이 머리끝까지 스며들어 가슴이 쓰리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소문은 천천히 품 속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소영에게 건네주며 조용히 말했 다. "아가씨께서는 가시기 전에 편지를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공자께서 마음이 안정되었으면 주 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영은 그 편지를 받아 급히 뜯어 보려고 했다. 그러자 소문이 손을 내밀어 저지하며 말했다. "뜯지 마십시오. 아가씨께서는 공자가 편지를 몸에 지니고 조용히 앉은 다음 천천히 읽으시라고 하셨습니다." 소영은 미간을 모으며 투정하듯 말했다. "무슨 제한이 그리 많소?" 소문은 새침하게 잘라 말했다. "아가씨께서 당부한 말은 이제 다 전해 드렸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몇 말씀 공자께 할 이야 기가 있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소영은 곧 응했다. "낭자! 주저말고 얘기하시오. 나 소영은 귀를 기울여 듣겠습니다." 소문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저는 아가씨를 모시게 된 뒤부터 생전 그분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이번에 공자를 보내고 난 뒤 우리 아가씨는 목청을 돋아 터 놓고 울었답니다......" 소문은 한동안 말을 잃더니 다시 조용히 계속했다. "아가씨의 울음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들 시종은 모두 무릎을 꿇고 애걸했습니다. 부디 아가씨께서 몸을 보중하도록 하시라고 말입니다. 그제서야 아가씨는 서서히 울음을 거두시 고 진정하시더군요." 소영은 하늘을 쳐다 보며 탄식했다. 그는 다시 힘없는 눈길을 소문에게 돌렸다. "그리고 곧 이곳을 떠나셨나요?" 소문을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가씨는 곧 공자에게 드린 그 편지를 썼습니다." 소영은 신음하듯 한숨을 쉬더니 수중의 편지를 내려다 보았다. 소문이 이야기를 다시 계속했다. "이 편지 위에는 우리 아가씨께서 쓰신 글 말고도 아가씨의 황금같이 귀한 눈물이 배어 있습니 다. 저는 이 눈으로 아가씨가 하염없이 울며 쓰는 것을 봤습니다. 많은 눈물을 편지 위에 떨어뜨 리며 붓을 놀리는 모습은 너무나 애처로왔습니다. 그러니 상공께서는 그 편지를 잘 보관하셔야 합니다." 소영도 눈물이 글썽해지며 침통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소중히 간직하겠소이다." "지금 우리 아가씨는 이미 수십 리 밖을 가고 있을 테니 공자께서는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리고 저는 결코 그분의 가는 방향을 알려드리지 않을 것이니 어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일찌감치 돌아 가십시오." 소영은 그래도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소문에게 물었다. "당신네 아가씨께서 가기 전에 혹시 무슨 전하신 말이 없었소?" "없었습니다." "낭자의 가르침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겸손하실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서 가십시오." 소영은 수중의 나무상자를 소문에게 건네주며 말하였다. "수고스럽지만 이 나무상자를 낭자가 악누님에게 전해 주기 바라오." 소문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것이 우리 아가씨의 예측대로군요. 아가씨는 떠나시기 전에 제게 여기서 공자를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저를 기다리게 하신 것은 공자가 꼭 찾아 오실 것을 예측하셨기 때문이었지요. 그런 데 과연 공자께서는 이렇게 오셨습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아가씨가 저에게 말하시기를 만약 공자께서 아가씨가 떠난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신다면 편지를 주라고 하셨는데 공자는 그 말대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소영은 악소채를 그리는 듯 먼 곳에 눈길을 보냈다. 소영은 길게 한숨을 지을 뿐 묵묵히 말이 없었다. 소문은 영롱한 눈동자로 소영을 지그시 바라 보며 말했다. "공자님, 우리 아가씨께서는 공자의 위인이 군자시라 분명히 그 금궁의 열쇠를 돌려 보낼 것이라 고 하였는데 과연 그 예측대로 맞아 들었어요." 그녀는 안색을 바꾸고 진지한 표정으로 엄숙하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아실 것입니다. 우리 아가씨께서 금궁의 열쇠를 공자님께 넘겨 줄 때에 얼마나 심각 하게 생각하셨나를 말입니다. 아가씨는 공자님을 끌어 들이고 싶지 않았으나 오히려 운명은 그분 을 공자님에게 맡긴 것입니다." 소영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낭자,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 줄 수 없습니까?" 소문은 매몰차게 대답했다. "공자님은 보기에는 매우 총명한 것 같은데 어찌 그리 둔하십니까?" 소영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왜 둔하다는 말이오?" "공자님이 만약 총명하시다면 어찌 제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소영은 소문을 지그시 바라 보더니 천천히 중얼거렸다. "악 누님의 무공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며 옥소랑군의 무공은 나와 비등하니 만약 그들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인다면 악 누님은 결코 그 옥소랑군에게 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악 누님이 자원해서 두 손을 놓고 포박을 기다린다면 몰라도......" "그렇습니다. 만약 무공만 가지고 논한다면 우리 아가치는 확실히 그 옥소랑군 위에 있어 백 합 내에 어쩌면 그의 목숨을 뻬앗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옥소랑군은 바로 우리 아가씨 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소영은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러므로 나의 악누님이 굴욕을 억지로 참으며 그의 괴롭힘을 당한다는 말이오?" 소문은 픽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은 또 틀리셨군요." "어째서요?" "그 옥소랑군은 우리 아가씨를 그지없이 존중하고 있으므로 절대 무례한 행동은 범하지 않습니 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두 공자님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서라구요?" "그렇습니다. 공자님이 강호에 나타나기 전에 우리 아가씨와 그 옥소랑군은 자주 만나 손을 맞잡 고 명승고적으로 놀러 다니셨지요. 그때 우리 아가씨는 가끔 우수에 잠기기도 하였으나 명랑한 표정일 때도 있었습니다." 소영은 곧 물었다. "내가 강호에 나타났다는 것을 듣고 난 뒤에는요?" "공자님이 강호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는 형세가 크게 변했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아 가씨의 얼굴에서는 다시 웃음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또한 재삼 옥소랑군의 약속을 거절하였으니 이것이 공자님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소영은 미간을 모으고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생각컨대 이야기가 약간 어색한 것 같군요." 소문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이 어색하단 말씀입니까?" "한 마디로는 자세히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그만 두겠습니다." 그는 약간 주저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낭자가 방금 얘기한 바에 의하면 그 악 누님께서 그녀의 운명을 나에게 맡기겠다고 했다는데 그 것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우리 아가씨뿐 아니라 저도 운명을 공자님께 맡겼는걸요." 소영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오?" 소문은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다. "옥소랑군은 우리 아가씨가 다시는 그를 아는 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눈치챘지요. 그것은 모두 공자님 때문이라고 그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속으로 공자님을 얼마나 원수같이 보고 있겠습니 까? 그런데 만약 두 분이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인다면 우리 아가씨께서는 얼마나 입장이 난처하 겠습니까? 하나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정다운 동기간이며 마음 속의 낭군이고, 한쪽은 자기의 생명을 여러 번 구해 준 은인이며 한동안 가깝게 지내던 친구니까요." 소영은 물었다. "낭자는 악누님에게 그 옥소랑군이 구혼을 청한 것을 모르시오?" 소문은 쌀쌀하게 대꾸했다. "누가 모른다고 했습니까? 우리 아가씨께서 그것을 승락하기 전에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 일이 있는데 공자님은 그것을 아시고 계십니까?" "악누님이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단지 공자님이 죽지 않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그 혼약은 무 효라는 조건이지요." "기왕 그렇다면 악누님은 그에게 굴할 필요가 없는데 어째서 그 옥소랑군을 두려워합니까?" "첫째는 여러 번 자기를 구해 준 정을 잊기 어려워 무정하게 대할 수가 없으며, 둘째로는 바로 공자님의 생사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소영은 결연히 말했다. "나는 옥소랑군을 두려워하지 않소." "공자님은 비록 그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반드시 그를 이길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어요. 두 호랑이 가 서로 싸우면 반드시 한 쪽은 다칠 것입니다. 상한 쪽이 만약 공자님이라면 우리 아가씨는 단 장의 슬픔을 평생 동안 안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상한 사람이 옥소랑군이라면 곧이어 한바탕 풍파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의 집안 사람들은 옥소랑군이 결코 공자님의 손에 상하는 것 을 수수방관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의 일가들이 공자님에게 복수를 한다면 공자님 혼자 서는 감당을 못할 뿐 아니라 온 무림에도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악전이 벌어질 것입니다." 소영은 곧 그녀의 말을 이었다. "내가 악 누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악 누님이 수업한 스승까지도 이 소동에 말려 들어 갈 것이 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우리 아가씨께서 가르침을 받은 은사와 옥소랑군은 매우 친숙한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아아! 그렇게 됐군요." "이제 좀 아시겠어요? 우리 아가씨가 무엇 때문에 운명을 공자님께 맡겼는가를 말입니다. 옥소랑 군의 일가는 모두 인적이 드물고 산자수명한 곳에 거주하며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외인과의 왕 래가 드물지요. 옥소랑군과 남옥당 그리고 장낭자가 강호에서 활약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여간해서 그 본거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소영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의 가르침에 감사드리는 바이오." "좋습니다. 공자님이 우리 아가씨의 처지를 이해하셨다니 자연히 어떻게 하셔야 옳은 것인지 아 시겠군요. 그럼 무사히 지내시길 바라오며 아가씨와 저는 공자를 위하여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소영은 꿈을 꾸는 듯 중얼거렸다. "그랬었군요. 악누님이 나에게 금궁의 열쇠를 넘겨 주고 나를 그 금궁 안에 들어 가라고 한 것 이....." 소문은 곧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공자님이 옥소랑군의 일가를 이겨 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것입니다." 소영은 포권을 하고 말했다. "이제 알겠소이다. 그럼 수고스럽지만 낭자께서 악 누님에게 소영은 전력을 다하겠다고 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소문은 황급히 몸을 피하여 공손히 답례를 하며 덧붙였다. "영존, 영당과 그 두 분 낭자는 모두 이미 우리 아가씨께서 어느은밀하고 안전한 장소로 모셔 놓 았으니 공자님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소영은 늙으신 부모님이 자기 때문에 수많은 풍상을 겪고 계신 것을 생각하자 마음이 매우 우울 해졌다. 그는 부모에게 죄송한 자책감에 사로잡혀 침통한 어조로 물었다. "낭자는 우리 부모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 알려 줄 수 없소?" 소문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똑똑히 말했다. "그것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 아가씨는 벌써 안배가 다 되어 있어 공자께서 부모님을 만 나시게 될 때에는 공자님을 그곳으로 인도하여 만나게 해 드릴 사람이 마련되어 있으니 아무 염 려 마십시오." "알았소이다. 그럼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 "아! 참, 공자님은 기억하고 계십시오. 옥소랑군의 조부는 소왕 장방(簫王張放)이라고 합니다." 소영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라구요? 그 소왕장방도 금궁 안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아! 그만 가 보십시오. 저도 길을 재촉해야 하니까." 그녀는 정중히 예를 올리고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가 버렸다. 소영은 소문의 가냘픈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 보고 있다가 그제서야 길게 한숨을 쉬 고 몸을 돌렸다. 손불사는 두 사람의 대화가 그칠 줄 모르는 것에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그는 소영이 그녀와 작 별을 하고 돌아 오자 성급히 물었다. "소대협, 그 낭자는 무슨 말을 그리 오래하였소?" 소영은 침울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는 제게 많은 이야기를 알려 주었으며 또한 제 마음 속에 많은 부담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무슨 일이오? 나에게 털어 놓고 이야기해 줄 수 없소?" "저의 악 누님에 관한 이야기지요." "젊은이들의 심정은 나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그런 일은 나와 상의해도 소용 없겠소이다." 소영은 힘없이 물었다. "노선배님에서는 혹시 소왕장방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손불사는 호탕하게 웃으며 곧 대답했다. "알고 있구 말구. 금궁 안에 갇힌 십대기인(十大奇人) 중의 하나지." "그 사람의 무공은 어떻습니까?" "금궁에 갇힌 십대기인의 무공은 각기 장점이 있지. 만약 그들이 고하를 가릴 수 있었다면 교수 신공 포일천(巧手神工 包一天)이 금궁을 만들어 그들을 가두지 않았을 것이오." 소영은 잠잠히 생각에 골똘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만약 우리가 그 심목풍을 놓아 주고 상관을 않는다면 강호에는 곧 큰 변이 일어날까 요?" 손불사도 신중히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심목풍은 원래 우리 형제들을 가담시켜 크게 이용하려고 하였으나 자기의 뜻에 어긋나자 오히려 그의 야심을 폭로시켜, 기일을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소....." 그리고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어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출사가 불리하여 연속 실패를 거듭했으며 또한 매번 소대협과 관련이 있었으므로 그는 벌써 소대협을 눈에 가시처럼 보고 있을 것이오. 그의 위인으로 보아 필시 계획을 짠 뒤에 발동할 것이며, 만약 소대협을 제거하기 전에는 전면적인 발동을 하지 않을 것이오." 소영은 힘차게 말했다. "그럼 됐습니다." 의아한 얼굴로 손불사가 물었다. "무엇이 됐단 말이오?" 소영은 천천히 설명했다. "저의 악 누님이 말하기를 제가 만약 무림에서 그 심목풍을 이기려면 반드시 금궁에 한 번 들어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선 강호의 일에서 떠나 금궁에 한 번 들어 가려 합니다." 손불사는 다시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 일은 나도 결정하기 어렵소. 지금 무림에서는 소대협을 심목풍을 제거하는 깃발로 보고 있지 요. 그러니 일단 소대협이 잠적하여 강호에서 모습을 감춘다면 무림에서 지금 싹트기 시작한 심 목풍 타도의 기운은 필시 사라지게 될 것이오. 그러나 그 금궁에 들어 가는 일도 극히 큰 일이니 어느 것이 더 중하고 더 긴요한 것인지 나역시 분간키 어렵소이다." 이런 말을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그들은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 왔다. 무위도장 등은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보자 곧 다가 오며 물었다. "소대협! 악낭자를 만났습니까?"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만나지 못했소이다." 손불사는 뒤를 이어 설명했다. "그 악낭자는 소녀 하나를 남겨 소대협에게 금궁의 열쇠를 거두어 잘 간직하도록 설복하였고 또 한 즉각 금궁에 들어 가도록 전하게 하고 이미 그곳을 떠나 행방을 감추었더군요." 무위도장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리되는군요.... 천하 무림인들은 금궁이 무이산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소. 그러나 무이산 은 천 리에 뻗어 있어 금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무도 모르오." 소영이 말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이 속에 그 금궁의 소재지를 그린 형세도가 있다 합니다." 이때 손불사가 외치듯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점은 만약 소대협이 강호에서 갑자기 없어진다면 필시 심목풍을 제거하려던 움직 임이 유야무야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오." 무위도장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심목풍이 연속 실패를 거듭하자 무림에서는 이미 그를 항거하는 한 줄기의 기운이 싹트고 있는데 만약 소대협이 돌연 실종을 한다면 필시 커다란 영향이 미칠 것이니 반드시 안전 한 대책을 강구해야 하오." 손불사가 걱정어린 얼굴로 말했다. "소대협은 기왕 큰 마음 먹고 금궁으로 들어 가니 어찌 단시일 내에 다시 강호에 나타날 수 있겠 소?" 무위도장도 신중히 의견을 말했다. "대적하는데 있어 우리도 전략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전엽청이 나서며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사형의 말씀은 기왕 남옥당이라는 자가 소대협의 이름을 사칭도 했으니 우리도 다시 또 하나 의 소영을 만들어 보자는 말씀입니까?" 손불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도 그럴 듯한 사람을 선택하여 소영으로 변장시켜 가끔 강호에 나타나게 한다면 심 목풍에 항거하는 기세를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심목풍의 의심을 없앨 수 있어 바로 일거양득이 되지요." 무위도장이 나직이 말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소영으로 가장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때 두구가 상팔을 부축하고 걸어 왔다. 소영이 다가 온 상팔을 보고 물었다. "이제 좀 어떠시요?" 상팔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대답했다. "사두 추혼전(蛇頭追魂箭)의 극독은 비록 강렬하나 그 해독약도 효험이 귀신같아 소제는 이미 많 이 좋아졌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소영은 미간을 활짝 피고 웃었다. "그것 참 다행이구려." 그리고는 눈길을 갑자기 전엽청에게 돌리고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전형이 나를 가장해서 행동하는 것이 어떻겠소?" 전엽청은 겸손한 말투로 대답했다. "단지 힘이 닿을까 걱정입니다." "손 노선배님과 무위도장께서 따라 다니시며 보호를 꿇고 심목풍과 정면 충돌만 피한다면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위도장이 입을 열었다. "나의 의견으로는 사람을 변장시킬 것까지는 없다고 봅니다." 손불사는 곧 그 말을 막아서 물었다. "어째서요? 설명을 듣고 싶군요." "듣고 있자니 약간 허황하나 사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치밀하게 계획하여 몇 달 만 어물어물 넘기면 문제는 없을 줄로 압니다." 손불사가 성급히 재촉했다.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오." 무위도장은 소영을 바라 보고 나서, "내가 이것을 주장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며 약간 머뭇거리더니 주위를 훑어 본 다음 나직이 말했다. "소대협은 매번 어떠한 골란지사나 험악한 일을 겪을 때마다 모두 자기가 처리하였으며 우리는 언제 누가 그를 도운 적이 있습니까? 모두 그의 재지와 무공을 믿은 것이지." 손불사도 머리를 끄덕였다. "흠." 무위도장은 여전히 소영을 지그시 바라 본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만약 사람을 대신 가장시켜 소대협으로 행세케 한다면 우리도 그의 안전을 보호해야 하니 그것 은 수동에서 능동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손불사는 다시 크게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오." "그러니 소대협으로서 행세할 사람을 하나 찾는다면 모든 것은 정반대로 돌아 갈 것이니 그것은 쓸데없는 노력의 낭비일 것이오. 이것이 첫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소대협을 가장할 만한 인물 을 찾아 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손불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만약 소대협이 가공의 인물이라면 우리는 또 어떻게 그를 보호한단 말인가?" 무위도장은 손불사를 돌아 보며 대답했다. "그것은 쉽소이다. 내가 한 가지 예를 들어 이야길 하지요. 만약 우리가 조그만 가마 하나를 보호 한다 치고 그 가마 안에 가짜 소영이 앉아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소영의 암살을 기도하여 가장 악독한 암기를 모두 그 조그만 가마 안에 넣었다고 하면 우리는 그 가마 안의 가짜 소영을 구할 능력이 없어 그를 해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불사는 비로소 터득이 된 듯 말했다. "도장의 고견은 이제 알겠소이다." 무위도장은 다시 소영에게 물었다. "소대협께서는 언제 출발할 작정이십니까?" 소영은 분명히 대답했다. "나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소대협께서는 동행할 사람을 데려 갈 생각이십니까?" "두 사람을 데려 갈 작정입니다." 그러자 무위도장은 대뜸 중주이고를 돌아 보며 말하였다. "혹시 저 두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위도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한 가지 방법밖에 없겠소이다." 무위도장은 두구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단지 두 형을 가장할 수 있는 사람 하나만 찾아 내면 됩니다. 다행히 두 형은 항상 모자 를 깊이 내려 쓰고 생전 남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니 단지 그 가장한 인물이 두 형의 기품만 풍 기게 하면 될 것입니다." 동해신복(東海神卜) 사마건이 갑자기 뛰어 들며 말했다. "도장! 제가 두 형을 가장하면 비슷할지요?" 무위도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오죽 좋겠소. 사실은 내가 바라고 있던 일이오." 소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장의 지모(智謀), 손 노선배님의 호용(豪用), 거기다 사마형과 전 형이 돕는다면 필시 심목풍이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무위도장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역시 소대협께서 빨리 금궁으로 들어 가셨다가 되도록 속히 강호에 나타나 주시기만 바라겠소이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팔을 바라 보고 물었다. "따라올 수 있겠소?" 상팔은 가슴을 펴고 힘있게 대답했다. "대강 회복되었으니 큰형님께서는 너무 걱정 마십시오." 소영은 포권을 하고 말했다. "그럼 저는 곧 떠나기로 하고 이만 작별하겠소이다." 손불사가 재삼 주의시켰다. "금궁 안에는 반드시 흉험이 많을 테니 소대협께서는 각별히 조심하시오." "힘껏 해 보겠습니다. 노선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일동에게 인사를 한 후 중주이고와 금궁을 항해 떠났다. 손불사는 길게 한숨지으며 말했다. "도장, 소대협의 무공은 비록 고강하나 그는 이미 여러 사람이 노리는 표적이며 또한 심목풍이 백계로써 그를 해치려 할 테니 그것은 참으로 예방하기 어렵소. 아무래도 내가 암암리에 그들을 좀 호송해 주는 것이 어떻겠소?" 무위도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상팔은 심기가 매우 깊은 사람이라 만약 나의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모두 변장을 하고 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약 위풍있게 암중 호송을 한다면 오히려 남들의 이목을 끌게 되어 그의 행적을 주의하게끔 만들 뿐입니다." 늙은이는 또 무엇인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다시 말하였다. "어쩌면 그 악낭자가 암중에 그들을 보호할지도 모릅니다." 손불사는 거듭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과연 도장의 말씀이 옳소! 도장의 고견으로는 지금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겠소?" "잠시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 행적을 감춘 무림의 사대현인을 만난 뒤 다시 갈 길을 결정합시다." "옳은 말씀이오. 만약 도장이 얘기하지 않았다면 나는 하마터면 그 사대현인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을 뻔 하였소이다." 무위도장은 다시 한숨을 쉬며 천천히 말했다. "나씨종사(羅氏宗祠)의 회합에서 입씨름을 해야 하는데 그 사대현인을 설복할 수 있기를 바랄 뿐 이외다." 104. 응양봉(鷹揚峯) 반사곡(盤蛇谷) 한편 소영은 중주이고와 함께 단숨에 십여 리 길을 달려 갔다. 그러자 상팔이 돌연 발걸음을 멈 추고 입을 열었다. "형님, 좀 쉬는 게 어떻소?" 소영이 주위를 돌아 보니 왼편에 우거진 숲이 보였다. 그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걷기가 힘드오?" 상팔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우리가 무이산으로 가는 길은 수백 리에 달하니 도중에 심목풍의 첩보망에 걸리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변장을 한다면 많은 번거로움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소영은 곧 그 말에 동의했다. "그렇소. 정말 이번 길은 제발 편안하게 아무런 일도 없었으면 좋겠소." 상팔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형님은 가짜수염을 붙이고 수금원으로 변장하고, 소제는 마부로 가장하며 두제는 짐꾼으로 꾸미 면 좋을 것이오." 두구는 몹시 후회스러운 듯 소리쳤다. "한 가지 잊은 일이 있소!" 소영은 그를 바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 두 마리의 큰 개를 데려 오지 않은 것이오." 수 년 간 두 마리의 주개는 중주이고와 함께 행동하며 이미 영성(靈性)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중 중이고와 두 마리의 개들 사이에는 어느새 깊은 정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상팔은 두구를 위로했다. "무위도장은 세심하므로 그 개들을 잘 보살펴 줄 것이니 염려 말게." 두구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두 분 형님의 뜻대로 되길 바라겠소이다." 세 사람은 숲속에서 각기 변장을 하였다. 그들은 본래의 정체를 가린 뒤 길을 재촉하여 부지런히 무이산을 향해 달려 갔다. 소영은 달리면서 악소채와 옥소랑군의 약속만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그 삼 개월 안에 금궁에서 나올 수 없어서 형산으로 달려 갈 수는 없었으나 속으로는 이 일을 잊지 못하여 전력을 다해서 길을 재촉했다. 무이산은 천 리에 가까울 정도로 뻗쳐 있어서 봉우리가 무수히 많았다. 세 사람은 마른 양식을 준비하고 산속으로 깊숙히 들어 갔다. 이날 점심 때쯤 무이산 밑에 당도하였다. 상팔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한 바위를 찾아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형님, 우리는 그 나무 상자 안의 지도를 좀 보아야겠소이다. 소제가 듣기로는 금궁은 비록 무이 산에 있다지만 아무래도 주붕 부근에 있지는 않는 것 같소이다." 그리고 보니 세 사람은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오는 도중 한 번도 그 나무 상자를 열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소영은 품 안에서 그 상자를 꺼내서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세 치 가량 되는 황금색 열쇠가 비스듬히 들어 있었고 그 열쇠 밑에 하얀 비단 헝겊이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소영은 천천히 금열쇠를 꺼내고 비단 헝겊을 집어 펼쳐 보았다. 그 비단에는 다만 한 마리의 독 수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 날카로운 주둥이와 강철같은 발톱의 형상은 매우 위맹스러웠고, 독수리 밑에는 머리를 치켜 든 한 마리의 큰 뱀이 혀를 반 자쯤 내밀고 있었다. 이 한 폭의 응사상박(鷹 蛇相博)의 그림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으나 금궁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듯했다. 소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비스듬히 바라 보았으며 상팔과 두구도 넋을 잃은 듯 기웃이 들여다 보 고 있었다. 맨 먼저 두구가 가볍게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것은 가짜 열쇠가 아닐까요?" 소영은 강력히 부인했다. "악누님이 어찌 내게 가짜 열쇠를 줄 리가 있겠소? 다만 우리의 견식이 모자라 이 그림 속의 뜻 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오." 그는 악소채를 마음 속으로 그지없이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누구든 그녀를 중상하는 것을 원 치 않았다. 상팔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형님의 말씀이 옳소이다. 이 그림은 의미가 심각하므로 우리는 차근차근 검토해 봐야 되겠소이 다." 소영은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이 금궁의 열쇠는 천하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므로 이 그림도 자연 쉽사리 풀 수 있는 것이 아 니라고 생각하오." 상팔은 두구를 힐끗 쳐다 본 다음 나직이 말하였다. "이 흰 비단이 이미 누렇게 변해 있는 것을 보아 분명히 연대가오래된 것이오. 단지 우리가 그 안의 비밀을 해독 못하는 것이 안타깝구려." 두구가 불쑥 말했다. "상형의 주보를 감별하는 능력은 천하에 누구도 따를 수 없소." 상팔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지만 이 서화를 감별하는 능력은 없는걸....." 갑자기 소영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옳지! 이 한 폭의 그림은 분명히 일종의 산세의 형태를 암시하는 것이오. 우리는 다만 이 그림과 같은 산세를 찾으면 될 것이오. 그곳에는 반드시 금궁이 있을 것이오!" 그러자 상팔도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그렇군요. 형님의 추리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 그림이 암시한 산세의 형태를 빨리 찾아야겠소이다." 소영은 다시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것은 그렇다고 치고 나는 도저히 이 그림과 금궁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요." 두구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이 그림이 금궁과 관련이 없다면 이 금열쇠와 그림은 모두 가짜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슬그머니 생각은 했지만 조금 전의 실언으로 소영이 발끈 화를 내는 것을 보았기 때 문에 더 이상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상팔이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형님, 소제가 몇 마디 당부할 게 있는데 소제를 과히 책망하지 마시오." "천만에! 어서 말해 보시오." "이 무이산은 천 리나 뻗쳐 있어 비록 이러한 산세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우리는 온 무이산을 뒤 지며 찾을 수는 없잖소." 그 말에 소영도 마음 속으로 동감하였다.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군. 바로 이 무이산 속에 이러한 곳이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무슨 수로 그것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상팔이 소영을 지그시 바라 보며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소제에게 한 가지 묘안이 있는데 최상의 대책은 아니오나 이처럼 바다에서 바늘을 건지는 식보 다는 나을 것이외다." 소영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슨 고견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우리는 나뭇꾼이나 사냥꾼을 찾아 이렇게 생긴 형세가 있는가의 여부를 물어 보는 것이 어떻겠 소?" 소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대답했다. "지금 기왕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으니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소." "형님은 이곳에서 쉬고 있으시오. 소제가 부근에 몇몇 나뭇꾼과 사냥꾼을 찾아서 물어 보겠소." "좋소. 그러나 일찍 돌아 오시오. 괜히 걱정을 하지 않게 말이외다." "많아도 한 시간이면 곧 돌아 와서 보고하겠소." 그는 몸을 일으켜 순식간에 사라졌다. 두구는 몸을 일으켜 삼 장쯤 떨어진 곳에 있는 불쑥 튀어 나온 큰 바위 위로 올라 갔다. 그는 사 방을 살펴 본 다음 다시 바위 아래로 내려가 한 곳의 길목을 지키고 섰다. 그는 험악하고 허위에 꽉찬 강호에서 오랫동안 겪어 왔기 때문에 누가 뒤에서 쫓아 올까 조심이 되어 곳곳마다 의심을 두고 각별히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영은 아직도 그 독수리 그림을 골똘히 바라 보며 속으로 줄곧 중얼거리고 있었다. '만약 이 금열쇠가 가짜였다면 악 누님이 절대로 나에게 주었을 리가 없다. 그녀는 나의 지혜로 분명히 이 그림이 비밀을 풀 수 있다고 믿고 주었으리라. 내가 만약 이 비밀을 풀지 못한다면 금 궁에 들어 서지 못할 뿐 아니라 악 누님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번뇌한 나머지 들고 있던 그림을 무심중에 땅에다 떨어뜨렸다. 그러자 뜻밖에도 독수리의 발이 돌연 그 그림의 위치에서 움직였다. 소영은 가슴이 두근두근하여 재빨리 그림을 집어 들어 손으로 그 독수리의 다리를 밀어 봤다. 그러자 갑자기 기이한 일이 나타났다. 조금 전에 움직였던 그 독수리의 다리가 놀랍게도 쭉 뻗쳐 나오는 게 아닌가! 분명히 아래로 향한 독수리의 다리가 그림에서 움직여 놀랍게도 흰 비단 위에 튀어 나온 것이다. 놀라서 넋을 잃다시피 바라 보는 소영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비단 위로 튀어 나온 독수리의 다리 아래에 자잘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응양봉(鷹揚峯) 반사곡(盤蛇谷)> 이 뜻밖의 발견은 소영으로 하여금 미칠 듯이 기쁘게 만들었다. 그는 그 그림을 가슴에 안고 껑 충껑충 뛰며 큰소리로 외쳤다. "발견했다. 나는 발견했다!" 길목에서 파수를 서고 있던 두구가 급히 달려 오며 다급히 물었다. "형님! 왜 그러시오?" 소영은 겨우 진정하였으나 목소리는 아직도 흥분에 떨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금궁의 소재를 발견하였소!" 두구는 어안이 벙벙해 다그쳐 물었다. "어디에 있소?" 소영은 그림을 펼쳐 보였다. "바로 이 그림에서 알았소." 두구는 재빨리 다가 서며 그것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 독수리의 그림은 여전하며 뱀도 그대로 머 리를 들고 있어 별로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이상한 듯이 물었다. "형님, 소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소이다." "이 그림에는 이상한 장치가 되어 있더군요." 소영은 손을 내밀어 독수리의 발을 밀어 붙였다. 그러자 두구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것을 읽었 다. "응양봉.... 반사곡....." "그렇소. 우리는 다만 그 응양봉과 반사곡의 소재지만 알아 낸다면 곧 금궁을 찾을 수 있을 것이 오." 두구가 감탄하듯 소영을 바라 보며 말했다. "이것은 하늘이 형님을 금궁에 들어 가도록 도운 것입니다." 그러자 소영은 걱정이 되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응양봉은 어디에 있을까?" 두구가 그를 위로했다. "그것은 쉽소이다. 단지 지명을 알기만 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외다." 그때 상팔이 한 노인을 업고 급히 달려 왔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소영 앞에 당도했 다. "이 노인은 무이산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살았으므로 산중의 형세와 지리에 훤해 극히 소상히 알 고 있소이다. 그래서 데리고 왔으니 이 노인에게 그 그림을 보여 주시오." 그 노인은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 오고 얼굴에는 주름이 겹겹이 잡혀 있어 대략 칠십이 넘은 듯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 무이산 중에서 오랫동안 사셨습니까?" 노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곳에서 살았으니 근 칠십 년은 될 거요." "그러면 할아버지께서는 무이산의 지형을 훤히 아시겠군요?" "백 리 안에 일초일목을 다 기억하고 있소이다." "그럼 할아버지께 묻겠는데 응양봉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그 노인은 입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응양봉.... 응양봉...." 그러나 그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두구가 싸늘하게 물었다. "그럼 반사곡은 어디오?" "반사곡...... 반사곡....." 노인은 다시 중얼거리는 것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나는 만사곡(萬蛇谷)은 알고 있지만 반사곡이라는 것은 들어 본 일이 없소이다." 소영이 급히 물었다. "만사곡이라구요?" "그렇소. 그 곳은 매우 깊은 골짜기입니다. 그 안에 뱀이 워낙 득실거려 만사곡이라 합니다. 비록 세상에서 제일 가는 뱀잡이의 명수라 해도 감히 그 만사곡 안에는 들어 가지 못합니다." 소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독수리의 발 아래는 분명히 반사곡이라고 씌어 있었으니 만사곡과는 다를 것이다.' 그때 두구가 다시 싸늘하게 물었다. "노인장, 우리가 묻는 곳은 반사곡입니다. 상다리를 하고 앉을 때의 그 반(盤)자 입니다." 그의 음성은 항상 냉랭하여 귀에 거슬렸기 때문에 그 늙은 나뭇꾼은 흘끗 그를 쳐다 보더니 머리 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르겠소이다. 나는 이곳에서 자라 이곳에서 늙었으나 반사곡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소." 소영은 또박또박 말하였다. "응양봉 반사곡은 응당 한 곳에 있을 테니 할아버지께서 응양봉을 모른다면 자연 반사곡도 모르 시겠지요." "내가 모른다면 아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소영은 할 수 없이 그 노인을 도로 상팔에게 데려다 주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자 돌연 그 노인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무슨 봉이라고 했지요?" 소영은 다시 기대를 걸고 말했다. "응양봉입니다. 나는 독수리의 응(鷹)자와....." 그의 말을 막으며 노인은 머리를 다시 흔들었다. "음은 비슷하나 역시 다릅니다. 내가 잘못 들었군요." 소영은 기대에 찼다가 다시 실망하여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할아버지께서 말하려는 것은 무슨 봉우리입니까?" 그는 천천히 말했다. "인연봉(姻隊峯)이라고 합지요. 유래가 깊은 봉우리지요. 한 쌍의 남녀가 서로 깊이 사랑하였으나 쌍방의 가장이 허락을 하지 않고 그들을 갈라 놓았답니다. 그러나 그 남녀의 사랑은 강렬하여 죽 어도 헤어질 수 없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그들은 서로 약속을 하고 집을 도망나오려다 그만 발각 되어 그 절봉 꼭대기까지 쫓기게 되었지요." 소영이 말허리를 꺾고 입을 열었다. "청춘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데 집에서는 어째서 반대를 했을까요?" 노인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양쪽 집안은 원래 원수지간이어서 툭하면 싸움을 벌였습니다. 한 번 싸움이 끝나면 쌍방은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지요. 그 한 쌍의 남녀는 쌍방 족장(族長)의 자녀들이었으니 결혼을 허락할 리가 없지요." 소영은 가볍게 탄식하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째서 그 봉우리가 인연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나요?" 나뭇꾼 노인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 남녀는 결국 그 낭떠러지로 뛰어 내렸습니다. 깎아지른 듯 깊이가 천 길에 달하는 곳으로 두 사람이 손을 꼭잡고 뛰어 내리는 것을 본 쌍방의 가족은 크게 감동하여 앞을 다투어 그 낭떠러지 밑으로 달려 가서 두 남녀의 시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나뭇꾼 노인은 이야기를 중단하고 길게 한숨을 짓더니 다시 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시체를 찾지 못했을 뿐더러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지요. 그러는 동안에 이 들의 가족은 마음에 뉘우침을 느끼고 몇 대에 걸친 원한을 깨끗이 풀어 버렸지요. 그들은 봉우리 위에다 한 채의 사당을 짓고 인연묘(姻鉛廟)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묘 안의 향불이 꺼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천하의 모든 청춘남녀들이 모여 들어 마음에 드는 반려 를 구하게 되길 기구했습니다. 그래서 그 봉우리의 이름은 인연묘의 이름을 따서 인연봉이라고 하게 되었지요." 노인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두구가 다시 싸늘하게 말했다. "노인장, 우리는 응양봉과 반사곡이 어디 있는가를 묻고 있지 노인장에게 이 무이산에 깃들은 전 설을 듣자는 것이 아니외다." 노인은 황급히 항변했다. "나는 하고 싶어 한 말이 아니오. 여러분이 물으니 말할 수밖에 없지 않소이까?" 소영은 슬며시 속으로 생각했다. '응양봉과 인연봉 그리고 반사곡과 만사곡.... 비록 음은 비슷하나 생판 다른 이름이다.' 상팔은 재빨리 소영의 심중을 알아 낸 듯 소영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을 했다. "이 무이산이 천 리나 뻗혀 있어 이 노인장께서 비록 이곳에서 오래 사셨다지만 결코 천 리에 걸 친 사세를 모조리 안다고는 할 순 없을 것입니다." 상팔은 말을 마치고 곧 그 노인을 다시 업고 급히 되돌아 갔다. 소영은 두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그림에서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틀리지는 않을 것이오." 두구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묘한 것은 기왕에 응양봉이 있는데 그 이름과 비슷한 인연봉이 있고 반사곡이 있는데 또한 만사 곡이 있는 점입니다. 만약 그 그림에 명백하게 씌어 있지 않았다면 정말 알아 내기 힘들 것입니 다." 소영은 힘없이 말했다. "아아! 그렇다면 우리가 그 응양봉을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 같구려." "큰형님, 과히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세심히 찾는다면 반드시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의 구조를 보니 그 응양봉은 분명히 매우 웅대한 산세로서 단지 한 번 본 사람이면 누구나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유심히 살피고 도중에 탐문한다면 반드시 찾아 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상팔이 총총히 되돌아 와서 소영을 보며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 물었다. 소영은 그가 속으로 의심을 품은 줄 짐작하고 곧 그림속의 비밀을 발견한 내정을 말해 주었다. "큰형께 제가 몇 마디 여쭈어 볼 말이 있습니다." "상형과 나는 형제지간이니 무슨 일이건 서슴지 말고 말해 보시오." "이 열쇠를 남겨 놓은 분은 솔직하게 그 금궁의 소재지를 설명하지 않고 이러한 한 폭의 그림으 로써 암시를 하였으니 필시 이 그림은 많은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금궁의 열쇠를 취득한 사람의 지혜를 시험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의 재 지가 모자라면 비록 그 열쇠를 취독한다 해도 역시 금궁에는 들어 가지 못할 것입니다." "옳지, 그 말도 일리가 있소." "큰형님의 재지는 원래 보통 사람이 따르기 힘드는 비상한 것이오나 지금 마음에 무슨 고민이 있 으신 바 득실지심(得失之心)으로 마음이 불타듯 초조한 상태인듯 합니다." 소영은 속으로 슬그머니 생각했다. '나는 지금 악 누님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초조하니 득실지심을 지니고 있는 게 틀림없 지.....' 상팔의 말은 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니 큰형님께서 속히 득실지심을 버리고 냉정을 되찾으신다면 능히 큰형님의 지혜로써 그림 에 담겨 있는 비밀의 뜻을 풀 수 있을 것이며 금궁의 문에 들어 가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믿습니 다." 소영은 돌연 일어나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읍하며 입을 열었다. "상형의 간곡한 충고에 감사드리는 바이오." 그러자 상팔은 급히 땅에 엎드려 넙죽 절을 하며 말했다. "이러한 생각 역시 큰형님의 감화로 알고 있습니다." 소영은 상팔을 황급히 부축해 일으켰다. "내게 무슨 능력과 덕망이 있다고 두 분 형제의 이렇듯 후한 애호를 받겠습니까?" 상팔은 몸을 일으키며 한숨과 함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년의 중주이고는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무진장 금은보화를 모으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지요. 만약 이것을 먹고 마시고 노는데 쓴다면 아마 천 년을 낭비해도 백분의 일도 다 쓰지 못할 것입 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만족지 않고 마치 이 세상의 보화를 모조리 긁어 모아야 만족이 될 듯 탐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큰 형님을 모시고부터 우리는 진실로 왕년의 잘못을 깊이 깨달았습 니다. 비록 천하의 재물이 모두 우리 중주이고의 소유라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백 년이 못 가 흙속에 묻힐 텐데. 그때 가선 한 조각의 재물인들 갖고 갈 수 없을 것을....." 소영은 상팔의 술회를 들으며 속으로 슬그머니, '이 사람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적지 않은 재물을 모은 것 같구나.'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곧 상팔에게 물었다. "상형, 당신들은 대관절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소?" "천 리에 성을 쌓아도 끄떡 없을 정도이떠 이루 계산할 수 없습니다. 큰형님께서 심목풍을 격퇴 시키신 다음 우리는 모든 재물을 형님에게 맡겨 보천창생(普天蒼生)에 유익한 일을 하고 싶습니 다." 소영이 감격하여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하길 원하였소. 그러나 감히 요청하지 못하였을 뿐이오." 상팔이 웃으며 말했다. "큰형님의 분부시라면 저희들은 무엇이든지 따르겠습니다." 다시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해서 빨리 금궁을 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영은 자기의 경력이 실로 중주이고를 따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궁으로 들어 가자면 두 형제의 경력과 지식의 힘이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소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그 그림을 지면에 펴 놓고 말했다. "두 분은 이리 다가 오시오. 우리 한 번 다시 검토해 봅시다." 세 사람은 잠시 그 흰색 비단 헝겊에 그려진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이때, 갑자기 상팔이 손을 뻗쳐 그 그림을 들더니 그것을 햇빛에 비쳐 한동안 열심히 바라 보았 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제 의견으로는 이것은 결코 간단히 풀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 독수리 발 아래 씌어져 있는 지명이 바로 그 금궁의 소재지라면 일은 간단하지 않을까요?" "상형의 의견은 어떻소?" "제가 보기에는 이 그림 안에 따라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여섯 자 글씨 속에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상형, 다시 가서 그 나문꾼 노인을 모셔 오시오." 하였다. 상팔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노인을 모셔다 무엇 하려구요?" "우리는 우선 인연봉 위로 가 봅시다." "인연봉 양쪽은 모두 절벽으로 되어 있어 한 쪽은 만사곡이고 또 한 쪽은 바로 그 청춘남녀가 몸 을 던진 낭떠러지입니다." 소영은 부지중에 외쳤다. "뭐라구요? 그 만사곡도 인연봉 아래에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제가 이미 그 노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이곳에서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백 리도 되지 않는다 하더군요." "좋소! 그럼 가서 그 노인을 모셔다 그곳으로 안내하게 하시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명백하게 물어 머리 속에 자세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인연봉이라는 것이 그림에 씌어 있는 응양봉이건 아니건 간에 한 번 가 보는 것도 무방할 것 이다.' 마침내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고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걸음을 재촉한다면 아마 날이 저물기 전에 그곳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오."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상팔은 말과 함께 재빨리 앞에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소영과 두구는 상팔의 뒤를 바싹 따랐다. 상팔은 이미 그 나뭇꾼 노인에게 극히 상세하게 길을 알아 낸 듯 마치 익숙한 길을 가듯이 쏜살 같이 치달았다. 세 사람은 경공이 모두 무림에서 일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비록 산길이 험악했으나 마치 고삐 풀린 말이 경쾌하게 달리는 듯했다. 그들은 반나절을 급히 달려 해가 서산에 질 무렵 이미 목적한 고봉(高峰)밑에 도착했다. 소영은 과거에 천 년 묵은 돌버섯을 많이 복용하였기 때문에 내력이 충족하여 별로 피로를 느끼 지 않았다. 그러나 상팔과 두구는 연속 몇 시간을 치달아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너 조금도 휴식 없이 달려 왔기 때문에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는 이마에 땀방울이 많이 맺혀 있었다. 상팔은 눈앞에 우뚝 솟은 고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저의 기억이 틀림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그 인연봉일 것입니다." 고개를 들어 봉우리를 쳐다 보니 때마침 해가 질 무렵이라 서쪽 하늘은 붉게 노을져 있었으며 석 양이 봉우리의 꼭대기를 비치고 있었다. 소영은 자세히 바라 보니 봉우리 위엔 금벽(金碧)도 찬란히 호화롭게 지은 한 채의 사당이 보였 다. 상팔이 재빨리 설명했다. "저 사당이 바로 인연묘입니다. 그 나뭇꾼 노인의 말에 의하면 저 인연묘가 완성되던 날 남자쪽 가장이 참혹하게 죽은 자기 아들을 애도하여 그 혼을 달래기 위해 자기집의 대대로 물려 오는 보 석을 저 인연묘에 장식했다 합니다. 그러므로 해와 달이 그 보석을 비칠 때마다 항상 일곱 가지 아름다운 색채가 빛을 발사한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원인을 모르고 두 남녀의 혼이 나타난 것이라고 전한다 하더군요. 그래서 저 인연묘는 크게 번성하여 매달 초하루 보름이면 수많은 젊 은이들이 불원천리하고 이곳에 참배하여 분향한다 합니다. 그리고 보통 날에는 적지 않은 향객이 저 절간 밖에서 미련을 두고 배회한다 하더군요." 소영은 불현듯 그 옥소랑군과 남옥당이 악소채를 애타게 사모하는 심정이 생각났다. 만약 저 인 연묘가 정말 영험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두 사람도 어쩌면 이 무이산의 인연묘로 달려 와 종신의 대사를 구했을지도 모른다. 상팔은 소영이 계속 침묵을 지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자 그를 깨우치듯이 다시 말했다. "그 노인 말에 의하면 저 인연묘의 향불은 갈수록 번창 일로이므로 밤을 새워 절 앞에 서성거리 는 향객들을 위하여 묘 주위에 몇 채의 아실(雅室)을 지어 그들에게 유숙할 수 있도록 했다 합니 다." 소영은 상팔에게 말했다. "우리도 어서 올라가 봅시다." 상팔도 곧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는 연일 달렸으니 만약 저 인연봉 위에서 하룻밤을 쉬고 정신을 맑게 한다면....." 하더니 말끝도 맺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발길을 옮겨 산봉우리를 향해 달려 갔다. 소영과 두구도 상팔의 뒤를 따라 위로 올라 갔다. 이 인연봉은 툭 튀어 나온 고립된 산봉우리였으므로 삼면이 모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낭떠러 지였으며 다만 한 곳만이 봉우리와 통하였다. 해는 이미 기울었으나 아직도 하늘은 훤했다. 소영은 사방을 한 차례 돌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이 봉우리에 딴 곳으로 통하는 길이 또 있다면 그 젊은 남녀는 낭떠러지에 몸을 던져 죽지 는 않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자연 이 인연묘도 세워졌을 리가 없다.' 그는 인연묘를 바라 보았다. 그 안에는 네 자루의 붉은 초가 휘황하게 대전 안을 밝히고 있었다. 이 사당은 규모가 매우 작아 한 채의 대전을 제외하고는 양쪽에 각각 한 칸의 상방(廂房)이 있었 다. 대전 안에는 육십쯤 되어 보이는 향화도인(香火道人)이 신상(神像) 한 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불공탁자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이 인연봉 꼭대기의 크기는 불과 한 마지기 정도였으며 그 둘레에는 과연 청석을 벽으로 한 초가 집이 두 채 있었다. 그곳에는 주점의 간판이 높이 걸려 있었고 불이 환하게 켜 있어 보기에는 인 연묘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소영이 사방의 경치를 바라 본 다음 상팔과 두구에게 말했다. "우리는 기왕 이 인연봉에 올라 왔으니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떻겠 소?" 그들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인연묘 앞으로 다가 갔다. 상팔은 재빨리 불룩한 큰 배를 내밀고 앞장서 들어 갔다. 대전 안의 향화도인은 상팔을 힐끗 바라 보더니 곧 얼굴에 웃음을 띠고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어르신네, 어서 오십시오. 이 인연묘의 두 신은 남녀의 인연을 짝지어 줄 뿐 아니라 여하튼 수복 을 구하는 모든 분들에게 한결같이 영험이 있습니다." 상팔은 품 속에서 아무렇게나 금전을 꺼내 탁자 위의 시주함에다 넣고 향화도인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머리를 들어 두 개의 신상을 바라 보았다. 이 인연묘의 신상은 보통 절간과 다르게 한 쌍의 남녀의 조각상만이 있었다. 그 남자는 온몸에 단장(短裝)을 하였고 두 발을 노출시켰으며 이목이 준수하였다. 한편 여자는 몸 에 녹색단삼(祿色短杉)의 저고리와 녹색의 긴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 신상은 누가 조각했는지 몰라도 시골의 순박한 면모를 지니게 하였으니 역시 얻기 힘든 솜씨 구려." 향화도인은 상팔이 아무렇게나 꺼낸 돈이 금전인 것을 보자 지극히 흡족한 표정에 겸손한 태도로 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들 곁으로 바싹 다가와 설명을 시작했다. "인연묘는 천 리 밖까지 이름이 널리 퍼져 있으며 제비를 뽑든 점을 치든 간에 모두 영험합지요. 세 분께서는 암암리에 각기 염원을 말씀하시면 인연 두 신은 세 분의 기원을 반드시 들어 줄 것 입니다." 그러나 신상 앞에 꿇어 엎드렸던 그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그들의 이야기소리를 듣자 살며시 일 어나더니 소영과 상팔을 일별하고 몸을 슬쩍 돌려 총총히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녀가 만약 태연히 나갔다면 소영이 그녀를 유심히 바라 보지 않았을 것이고 무심히 대전 밖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이 당황한 듯한 거동은 즉시 소영에게 수상한 감을 느끼게 하였고 또한 중주이고의 의심을 샀다. 두구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 여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 여자의 동작도 빨랐다. 그녀는 대뜸 발걸음을 멈추고 단번에 석자를 뛰어 넘더니 두구를 지나 절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상팔도 벌써 경계를 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두구를 피해 넘는 쾌속한 신법을 보자 즉시 오른팔을 내밀어 그 여자를 가로막았다. 이 인연묘의 대전 문은 비록 넓었으니 두구가 반을 가로막았고 상팔이 큰 배를 불룩하게 내밀고 더구나 오른팔까지 내밀었으니 그 여자는 손으로 상팔을 밀어 제치고 나가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식지와 중지를 함께 뻗더니 상팔의 맥문을 곧장 찍었다. 상팔은 오른팔을 급히 거두어 그녀의 일격을 피하고 다섯 손가락을 쑥 내밀더니 그녀의 오른팔을 반대로 낚아챘다. 그때 소영의 소리가 들려 왔다. "빨리 길을 비켜 주십시오." 소영은 이미 그 여자가 바로 귀주성(歸州城) 안에서 처음 보았던 얼굴이 엄숙한 그 소녀라는 것 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이 여자는 줄곧 단 목정을 따라 다니며 조금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분명히 단목정 도 이 인연봉 위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상팔은 소영의 말을 듣자 즉시 몸을 비켜 길을 터 주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믐을 비스듬히 돌리 더니 비호같이 달려 나갔다. 이미 완전히 날이 어두워 그녀의 모습은 곧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상팔은 유심히 사방을 살펴 보았으나 그녀의 모습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소영이 나직이 말했다. "찾을 것 없소이다." 상팔이 소영을 돌아 보며 물었다. "큰형님께서는 그 여자를 아십니까?" "항상 단목정과 함께 다니는 그 낭자가 아니오?" 상팔은 무릎을 탁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바로 그 아가씨입니다. 저도 역시 낯이 익었는데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 었지요." 두구가 불쑥 말했다. "그 낭자는 줄곧 푸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은 어찌 검은 옷을 입었을까요?" 상팔이 잠시 생각하더니, "어쩌면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일세." 소영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녀의 눈에 아직도 눈물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저 인연신상에게 소원 을 빌고 있었을 것 같소." 상팔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 낭자가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단목정도 이곳에 있을 것 같군요. 우리는 그 단목 정을 찾아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왕년에 그들은 큰형님이 백화산장에 투항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으니 지금 큰형님과 심목풍을 모르는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저 낭자는 큰형님께 대하여 조금도 존경을 표시하지 않 으니 단목정을 찾아 반드시 그녀의 불경을 따져야겠습니다." 소영은 두구에게 말했다. "그만 두오. 그들은 우리들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이인데, 우리들을 존경할 필요가 어디 있겠 소?" 두구는 그래도 따지려 했지만 상팔이 눈짓을 하며 만류하였다. 그 향화도인(香火道人)은 마치 다투고 싸우는 일에는 익숙해진 듯, 아예 이들의 행동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상팔이 낮은 소리로 소영에게 물었다. "우리는 오늘 밤 인연봉(姻緣峯)에 남아 있어야 합니까?" 소영이 대답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냉랭한 음성이 들려 왔다. "남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소영과 중주이고는 깜짝 놀랐다. 이윽고 두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누구냐?" 예의 그 맑고 차가운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나요." 대답 소리와 함께 키가 작고 가는 몸집에 얼굴이 예쁘장하게 생긴 청의소년이 천천히 들어 왔다. 상팔은 그 소년을 힐끗 보았다. 준수하게는 생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력이 부족해 보이고 남자 다운 기개가 없어 보였다. 상팔은 곧 입을 열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는 귀하와 아무런 상관이 없거늘 귀하는 어찌하여 우리들의 이야기에 끼어 드는 거요?" 그러나 청의소년은 묻는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소영을 똑바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무엇 때문에 이 인연봉으로 왔소?" 그 말투는 마치 옛친구를 다시 만나 책망이라도 하는 듯한 말씨였다. 소영은 그 청의소년이 도무지 어디서 만나 본 사람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귀하는 누구시오?" 청의소년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소대협은 정말 나를 모르겠소?" "매우 낯익은 얼굴 같기도 한데 어디서 보았는지는 생각나지 않는군요." "소대협은건망증이 심하군요. 나는 소대협을 기억하고 있는데.." 청의소년은 말과 함께 손을 들어 머리에 쓴 푸른 수건을 벗어 버렸다. 고운 머리채가 드러났다. "백리낭자가 아니오?" "이제야 겨우 찾게 되었군요." 상팔과 두구는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 슬며시 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오랜 세파에 시달린 향 화노인은 갑자기 동종(銅種)을 한 번 두드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연이 있으면 천 리 밖에 있어도 만날 수 있고, 인연이 없으면 마주보고 있어도 만나지 못한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알아 주는 법......' 소영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낭자는 어찌하여 이곳에?" 이 사람은 바로 북천존자의 딸 북해공주 백리빙이었다. "저는 소대협을 찾아서 천 리길을 뒤쫓아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소영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이곳 인연봉에 온 것은 우연한 동기에서인데 이 낭자는 어찌 이다지도 정확하게 알아 맞출 수 있었을까?' "낭자는 언제 이곳에 오셨소?" "정오 때쯤해서......" 그녀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소대협에게 물어 볼 말이 너무도 많습니다." 소영은 주위를 둘러 보며 말했다. "이곳은 이야기를 할 곳이 못 되니 우선 적당한 곳을 찾아....." 그러자 백리빙이 말을 가로챘다. "저는 이미 객사를 예약해 두었어요." "우리 일행 중엔 아직도 두 형제가 남아 있는데......" 백리빙이 다시 말을 가로챘다. "괜찮아요. 그 객사엔 아직도 빈 방이 남아 있으니 제가 안내하지요." 백리빙은 돌아 서면서 다시 수건을 덮어 썼다. 소영은 이 천진난만한 북해공주가 그 동안 매우 성숙한 느낌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짧은 몇 개 월이었지만 백리빙은 몇 년을 자란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백리빙은 이미 절을 빠져 나가 앞장 서서 걸어 가기 시작했다. 소영도 그녀의 뒤를 따라 절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절 밖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중주이고를 찾았으나 중주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두 사람이 그동안 어디로 가 버렸을까?' 소영은 크게 불러 보려고도 생각했지만 신통할 것 같지 않아 그만 두었다. 백리빙은 걸음을 재촉하여 한 채의 모옥(茅屋)으로 들어 갔다. 소영은 뒤를 따라 들어 갔다. 이와 같은 객점은 원래 그 목적이 손님들에게 비바람을 피할 수 있 을 정도의 장소를 제공하는 것 뿐이므로 물론 대우는 좋지 않았다. 소영은 다만 백리빙을 따라 곧장 들어 가서 객점 뒤편의 객실로 갔다. 실내에는 이미 한 자루의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방에는 너무도 엄숙하여 거의 웃는 얼굴이 라고는 볼 수 없을 듯한 흑의를 입은 한 여인이 먼저 들어 와 있었다. 소영은 의아한 생각이 들 었다. '이 두 사람은 어째서 함께 있는 것일까?' 백리빙은 고개를 돌려 소영을 쳐다 보고는 입을 열었다.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에요?" 소영은 그녀를 보기는 몇 번 보았지만 한 번도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으므로 공수를 하며 일례를 올렸다. "단목 노선배님은 함께 오시지 않았습니까?" 흑의의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스승님 말씀이시지요? 그 분은 어떤 사람의 기습을 받아 이 백리낭자께서 만일 구해 주시지 않 았더라면 봉변을 당할 뻔했지요." 소영은 그제야 이들 두 사람은 서로 그와 같은 사연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단목 노선배님의 상세는 어떠하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소대협께서 그처럼 염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스승님께서는 백리낭자의 영단이 영험하여 무사 합니다." 그녀는 이미 소영과 두 번이나 말을 주고받았지만 끝내 고개를 숙인 채 소영을 한 번도 바라 보 지 않았다. 이때 백리빙이 입을 열었다. "단목 노선배님의 상세는 이미 좋아졌지만, 아직도 휴양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분은 제가 험 한 강호에 혼자 나다니는 것을 보고는 특별히 염려하셔서 단목 낭자를 동반하도록 해주신 거예 요." 백리빙은 말을 마친 후 시선을 계속 소영에게 못박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으나 소영은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대답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백리빙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흥! 하고 코웃음을 쳤 다. "어째서 소대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요?" 소영은 그제야 꿈에 깨어난 듯 반문했다. "낭자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신 겁니까?" 백리빙이 대답했다. "이 방 안엔 다만 우리뿐인데 내가 단목낭자와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그야 물론 소대협에게 말한 게 아니겠어요?" "낭자께서는 나에게 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지?" 백리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대협도 나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을 게 아닙니까? 가령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께선 저를 구하기 위해 문규(門規)를 어겼으니 영존께서는 크게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지 금도 낭자를 찾기 위해 애태우고 있을 것입니다." 백리빙은 흑의녀에게 시선을 돌리며 무슨 말을 할 듯 하다가 입을 다물어 버리고 천천히 앉았다. 그러나 혹의녀는 매우 총명한 여자이므로 나직이 말했다. "두 분께서는 얘기를 나누십시오. 저는 음식이라도 준비해야겠습니다." 소영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객점의 종업원에게 분부할 일을 어찌 낭자께서 직접 수고를 하십니까?" 그러나 흑의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이제 백리빙과 소영만이 남게 되었다. 백리빙의 맑고 빛나는 두 눈동자는 줄곧 소영의 얼굴에 못 박혀 마치 그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105. 인연봉의 철없는 공주 소영은 그녀의 태도가 불안하여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는데 백리빙이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엎드려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소영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천천히 침상가로 걸어가서 나직이 말했다. "낭자! 낭자께서 나로 말미암아 나돌아 다니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백리빙은 울면서 말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병중에서 자라왔으며, 제 말 한 마디면 안 되는 것이 없다시피 했고, 무수한 사람들이 나의 시중을 들었는데, 이제 강호에 나돌아 다니는 몸이 되자 저를 보살펴 주는 사람이 란 한 사람도 없군요."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온갖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천진난만하게 자라왔으나 오직 소영을 찾겠 다는 생각만으로 그 좋은 환경을 벗어나서 천리 길을 싫다 않고 밤낮으로 험한 길을 달려왔던 것 이다. 그러나 막상 그를 만나고 보니 너무도 기대에 어긋났으므로 그녀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감당 할 길이 없었다.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낭자께서 겪은 고생을 제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다만 저는....." 백리빙은 갑자기 일어나 앉으며 눈물을 닦았다. "소대협은 무엇하러 이곳에 오셨지요?" 그녀는 아직도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았다.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고 하였다. 눈물자국 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입가엔 웃음이 번졌다. 소영이 대답을 하려 했지만 백리빙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소대협이 이 인연봉으로 온 것은 저를 찾으려는 것이었지요?" 소영은 속으로 내가 어떻게 낭자가 여기 있는 줄을 알았겠느냐 하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얼굴에 온통 갈망의 빛이 차 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바로 낭자를 찾으러 온 것이오." 백리빙은 그 말을 듣자 생긋이 웃었다. "그리고 보니 소대협도 나를 몹시 보고 싶어 했군요....." 그녀는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동안 저는 비록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홀로 강호를 돌아다니는 데도 또한 독특한 재미가 있 었어요." 소영은 백리빙이 자기를 찾으러 이곳에 온 것으로 오인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자 도저히 바른 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소영은 말머리를 돌렸다. "낭자는 이곳에 무엇하러 오셨지요?" 백리빙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이곳 인연봉 위에 인연묘가 있어 사람들의 인연을 맺게 해 준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이곳 까지 달려와 기원을 드리려고 했는데 과연 이곳에서 소대협을 만날 줄이야....." 그녀는 말이 너무 지나쳤다고 느꼈는지 두 뺨을 살짝 붉히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소영은 정말 난처했다. '나의 정다운 말 한 마디에 그녀는 기쁜 빛을 띠니 그녀가 나에게 품고 있는 정의는 한없이 깊 구나. 이걸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백리빙은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와서는 차 한 잔을 따라 소영에게 줬다. "저는 소대협을 만나기 전에는 늘 만일 소대협을 만나면 꼭 다정하게 대해 주리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뜻밖에도 소대협을 만나게 되니 그만 심술을 부리고 말았어요. 차 한 잔 따라 드리는 것 도 잊고....." 백리빙은 말을 마치자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 소영에게 건네주었다. 백리빙의 이와 같은 말은 티없이 맑고 천진하여 동심이 가득 서려 있었으며 조금도 애교를 부리 는 태도는 아니었다. 다만 솔직하고 담백한 진실이 깃들어 있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려 주었다. '이 여자는 어쩌자고 이처럼 숨김없이 솔직하게 나에게 접근해 오는 것일까? 나는 장차 이 여자 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백리빙은 그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이곳에 오느라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 리를 멀다 않고 왔을 테니 필경 목이 마를 거예요." 소영은 찻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낭자....." 백리빙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말을 받았다. "소대협이 저에게 낭자라고 부른다면 저도 소대협을 소영공자라고 불러야겠군요." 소영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소.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불러야 하오." 그러나 백리빙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나 그건 좋지 않아요." 소영은 빙긋이 웃으며 반문했다. "어째서?" 백리빙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부르면 서로의 거리가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백리빙은 말을 마치고 소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깐 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북해에 있을 때는 모두들 저를 빙아라고 불렀어요. 소대협도 저를 빙아라고 불러 주시겠 어요?"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가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할 텐데.....' 소영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빙아!" 백리빙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불러주니 정말 기뻐요. 아아!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어요. 지난날 저는 어머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어머님의 말씀은 모두 값진 것이었어요." 소영은 반문했다. "영당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어머님의 말씀에 의하면 부드러움이 오히려 강한 것을 이겨낼 수가 있다고 했어요. 그러므로 여자란 온순하고 부드러워야만 비로소 낭군의 환심을 살 수 있어 사랑을 받게 된다고 했어요."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빙궁에 있을 때는 너무도 철없이 굴었구나.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달래느라고 그런 말을 했겠지.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진짜로 믿고.....' 소영은 다시 이어 생각을 굴렸다. '이번에 내가 금궁으로 가는 일은 중대한 일일 뿐만 아니라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두 낭자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어떻게 하든지 그녀들을 다시 북천존자의 곁으로 돌아가게 해야지.....' 이때 백리빙이 갑자기 다시 입을 열었다. "아아! 소대협은 저를 빙아라고 부르지만 저는 소대협을 어떻게 불러야 하지요?" 소영은 빙긋이 웃었다. "빙아가 좋을 대로....." "소대협은 저보다 두 살이 더 많으니까 제가 오빠라고 부르겠어요." 소영은 다시 맞장구를 쳤다. "좋소. 오빠라고 부르는 게 좋겠소." 백리빙은 다짐을 했다. "좋아요. 그럼 오빠라고 부르겠어요." 백리빙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등불 아래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이것 보세요. 제가 얼마나 기뻐하나를....." 소영은 그녀가 정말 무아의 경지에 이르도록 도취된 것을 보자 정신이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백리빙은 잠시 동안 춤을 추고 나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 난 한 가지 생각이 났어요." 소영은 백리빙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 "우리 함께 인연사로 소원을 빌러 가요." 소영은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무슨 소원?" 백리빙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제가 인연사에서 소원을 빌어 이렇게 오빠를 만나게 됐으니 다시 가서 그 감사함을 빌어야지 요." 백리빙은 고운 손을 내밀어 소영의 오른손을 잡아 끌었다. "오빠, 저와 함께 가요. 그 인연사의 신은 과연 영험해요." 소영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일어섰다. "지금 당장 가자는 건가?"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빨리 감사를 드려야만 다시 다른 소원을 이루게 된대요." 소영은 막무가내로 그녀에게 끌려 나왔다. "좋아!" 백리빙은 시종 기쁨에 넘쳐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이 절문 앞에 이르자 마침 향화도인이 절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걸어오는 것을 보자 다시 돌아서서 절 안으 로 들어갔다. 백리빙은 절 안에 들어서자 먼저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소영은 그 곁에 서서 한 쌍의 신상을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백리빙은 기원을 끝낸 후 고개를 돌려 소영을 바라봤다. 그녀는 소영이 그때까지도 멍청히 서 있는 것을 보자 얼른 그의 손을 잡아 끌며 "오빠! 오빠도 빨리 무릎을 꿇고 인연신에게 감사를 드려요." 소영은 하는 수 없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백리빙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우리 이제 돌아가요." 소영은 어떻게 하면 그녀를 권고해서 돌아가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목전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다. 백리빙은 손을 내밀어 소영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오빠! 이제 돌아가야 돼요." 소영은 그제야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자고?" 백리빙은 갑자기 기쁜 빛을 거두었다. 그녀는 소영을 바라보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요?"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별로....." 백리빙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나를 속이려 하지 마세요. 나는 보면 다 알아요. 오빠의 마음속에는 지금 많은 걱정거리 가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나를 만나게 된 것을 몹시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백리빙은 이마에 흘러 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오빠! 오빠는 지금 내가 신상 앞에서 무슨 맹세를 했는지 아세요?" 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 백리빙은 새초롬하게 말을 내뱉았다. "나는 신상 앞에서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오빠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오빠를 따르겠 다고 맹세했어요." 소영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영존께서는 지금 무수한 빙궁의 고수들을 풀어서 너의 행방을 찾고 있다. 그런데 네가 만일 나 와 함께 붙어 다닌다면 영존께 큰 염려를 끼치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백리빙은 비록 어린 티는 가시지 않았지만 매우 영리했다. 잠시 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 더니 곧 입을 열었다. "내가 오빠를 따름으로 인해 오빠에게 폐라도 끼칠까 봐 두려우세요?" 소영은 다시 이런 생각에 잠겼다. '북천존자는 무공이 강할 뿐만 아니라 많은 고수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다. 그뿐더러 나에게는 이미 나쁜 감정을 품고 있으니 만약 너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는 정말 용서하 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악소채의 안위를 염려하여 금궁으로 들어갈 생각뿐이었으므로 백리빙의 부 드럽고 따뜻한 정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백리빙은 소영이 줄곧 침통한 표정으로 수심에 잠겨 있는 것을 보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알았어요." "뭘 알았다는 거야?" 백리빙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는 저와 함께 있는 것을 우리 아버지에게 들키면 혹시 오해라도 사게 될까 봐 그러는 거지 요?" 소영은 잠깐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그것도 한 가지의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원인은 빙아가 오랫동안 돌아가 지 않으면 영존과 영당께서 크게 걱정을 하신다는 것이야. 그렇게 되면 빙아는 불효를 저지르게 되고....." 백리빙이 얼른 말을 받았다. "괜찮아요. 그런 것은 염려할 것 없어요. 내가 편지를 한 통 써서 북해로 보내 난 중원을 편안히 유람하고 있으니 어머님께서는 과히 걱정하지 마시라고 하지요 뭐!"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북해의 빙궁은 멀고 멀 뿐만 아니라 또한 얼음과 눈보라로 덮여 있는데 어찌 보통 사람이 그곳 을 찾아갈 수 있겠는가?" 백리빙은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오빠는 나를 몹시 귀찮게 여기고 있군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나를 쫓아 버리려는 거지요? 네, 그렇지요?"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조로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영존과 영당께서 빙아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이 오빠는 다른 이유가 있단다. 이번에 내가 이 무이산으로 온 것은 기실 다른 계획이 있어서다. 그러므로 빙아를 데리고 동행하기가 거북하구나."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나에게 이야기해 줄 수는 없어요?" 소영은 그녀의 애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자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옆에 서 있는 향화도인을 한 번 힐끗 바라보고는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빙아, 우리 나가서 이야기하자." 소영은 앞장 서서 걸어나왔다. 백리빙도 소영의 뒤를 따라 천천히 인연사를 나왔다. 한참 걷다가 백리빙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빠, 이제 말해요. 이곳엔 아무도 없어요." 소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빙아, 금궁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니?" "네, 저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해해 주겠군. 내가 빙아를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것은 바로 내가 그 금궁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야." 백리빙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 금궁 속에 여자는 들어갈 수 없나요?" 소영은 거짓말은 할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뭐 꼭 그런 법은 없지만....." 백리빙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나를 데리고 가도 상관없잖아요?" 소영은 정색을 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원에 있는 무림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 금궁에 대한 비밀을 알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그리로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떼를 지어 몰려올 것이다. 우리들은 금궁에 당도 하기도 전에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그뿐더러 금궁 속에는 곳곳에 함정과 사람을 해치는 기계가 장치돼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단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생명을 잃게 마련이지. 그러므로 이 오빠 도 이번에 가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거늘 내가 어찌 빙아를 데리고 갈 수 있단 말이냐?" 백리빙은 소영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분명히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더욱 오빠의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어째서?" "금궁이 그다지도 험한 곳이라면 어떻게 오빠 혼자 모험을 무릅쓰고 가도록 보고만 있을 수가 있어요. 나도 곁에서....." 소영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안 돼!" 백리빙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왜 안 된단 말이에요? 나는 이미 오빠와 생사를 같이 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소영은 천천히 타이르듯 말했다. "빙아, 이번 일은 빙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빙아는 어찌 위험을 무릅쓰고 끼어 들려고 하 나?" 백리빙은 맑은 두 눈동자에 눈물을 잔뜩 머금고 원망스러운 듯 소영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백리빙은 목멘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일개 약한 여자의 몸으로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 오?" 소영은 김빠진 대답을 했다. "그야 물론 나를 찾기 위해서지." 백리빙은 따지듯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천신만고를 겪어 가면서 오빠를 찾아낸 이 마당에 오빠가 나를 따돌린다면 나는 앞으로 무슨 면목으로 다시 사람을 대할 수 있으며 무슨 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이에요?" "그건, 그건....." 백리빙은 소영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비록 빙궁에서 살아왔지만 중원의 경서(經書)를 많이 읽었어요. 그런데도 오빠는 나를 보 잘것 없는 여자라고 업신여기니....." 백리빙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앞을 향해 후닥닥 달려 나갔다. 소영은 다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소영은 백리빙이 갑자기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자 그녀가 혹시 절벽에서 몸을 날려 자살이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빙아! 헛된 짓은 하지 말아라." 소영은 감히 더 달려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백리빙은 낭떠러지 끝에 서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 오빠는 인연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어요?" 소영이 대답했다. "나무꾼에게 들어 대강은 알고 있지." 백리빙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절벽이 바로 한 쌍의 애인들이 몸을 날려 죽은 곳이에요. 지금 나도 만약 이 절벽에 몸을 날려 죽는다면 인연사에는 다시 나의 소상이 하나 더 생겨날 거예요. 다만 그 소상의 곁에는 오 빠가 빠져 있을 따름이겠죠." 소영은 매우 초조했다. '이 여자는 아직도 어려 순간적인 감정으로 자칫하면 정말 낭떠러지에 몸을 날려 버릴지도 모른 다. 그렇게 되면 평생 한을 남기는 일이 될 것이다.' 소영은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고함을 질렀다. "빙아! 빨리 돌아와요. 절대로 헛된 짓을 해서는 안 돼!"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결코 헛된 짓이 아니에요. 내가 지금 오빠에게 하고 있는 말은 모두 진실이에요. 나는 이미 신 상 앞에서 맹세를 했어요. 만약 오빠가 나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나는 절벽 밑으로 뛰어내려 내 마음을 표시하기로 했어요." 그녀의 음성은 처량하리만큼 간절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뭉클하게 했다. 소영은 그녀의 한쪽 발이 이미 공중에 떠 있으며 밤바람에 옷자락이 너풀거리는 것을 보자,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 "빨리 돌아 와! 내 빙아를 데리고 갈 테다." 백리빙은 단숨에 뛰어서 소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게 정말이지요?" 백리빙은 이처럼 천진난만한 소녀였다. 소영은 이미 한 말을 고칠 수 없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말이지. 그러나 다만....." 백리빙이 말을 가로챘다. "다만 뭐예요?" "우선 나와 세 가지 약속을 해야겠어. 아무 연고없이 일을 저지르지 말며, 모든 것은 내 명령대 로 따를 것, 만약 이 약속을 어길 때는 빙아와 동행하지 않기로....." 소영의 생각으로는 그녀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면서 자라났기 때문에 반드시 콧대가 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러한 약속이라면 절대로 수락하 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천만 뜻밖이었다. 백리빙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그야 물론 오빠의 말대로 해야지요." 소영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단목낭자는?" 백리빙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집으로 돌려 보내지요." 백리빙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오빠! 언제 떠나시겠어요?" "늦어도 내일 새벽에는....." 백리빙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오빠!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객점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게 어때요?" 소영이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야. 나는 같이 온 두 형제를 찾아야 해." 백리빙이 웃으며 말했다. "상팔과 두구 말이군요?" "그래. 그런데 빙아는 어떻게 그들을 알지?" 백리빙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오빠의 신변에 대해 늘 관심을 가져왔으므로 아는 게 당연하지요....." 백리빙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난 가서 행장을 꾸릴 테니, 오빠는 떠날 때 꼭 나를 불러줘야 해요." 소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이미 허락한 이상 빙아를 버리고 가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고 가 봐라." 백리빙은 그 이상 다짐을 하지 않고 돌아서서 곧장 객점을 향해 달려갔다. 소영은 사라져가는 백리빙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을 한 번 내리쓸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천천히 절벽으로 걸어가서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밤은 어언 깊어 절봉 위에는 산들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불었다. 소영은 고개를 숙여 절벽 밑 골 짜기를 내려다 봤다. 골짜기에는 어둠이 깔려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매우 깊은 낭떠러지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제아무리 상승 경공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번 떨어지면 분골쇄신을 면하지 못할 것이 다. 그렇거늘 하물며 한 쌍의 촌부촌녀(村夫村女)의 경우에야...그러나 그들 두 사람은 생전에는 비록 부부로 결합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죽은 후에 사람들이 신명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보람있 는 일이라고나 할까? 더욱이 그 소상을 만들어 사당까지 세우고 끊일 새없이 향화를 올리며 심지 어는 천리를 멀다 않고 달려와서 기원을 드리게 되니 이 또한 가치 있는 죽음이라 아니할 수 없 다.' 소영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절벽의 골짜기에서 한 줄기의 푸른 빛이 번쩍이며 이동해 가더니 차츰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만약 어느 사람이 이와 같은 불빛을 보았다면 아마 도깨비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 나 소영의 시력은 비범한지라 그 푸른 빛이 이동해 가는 속도로 판단해서 어떤 사람이 수중에 등 불을 들고 골짜기 밑으로 걸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이때 가벼운 발자국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소영은 암암리에 경각심을 높였다. 그는 곧 진기를 끌어 모아 재빨리 몸을 획 돌렸다. 나타난 사람은 상팔과 두구였다. 그들은 나란히 소영에게로 다가왔다. 상팔이 소영을 바라보며 먼저 미소를 지었다. "형님, 정말로 놀라운 이목입니다. 우리들은 형님이 놀랄까 봐 일부러 천천히 걸어왔는데....." 소영은 말을 가로챘다. "마침 잘 왔소. 지금 이 절벽 밑에서 아주 이상한 것을 발견했소." 상팔과 두구는 그 말을 듣고 급히 소영의 곁으로 다가와서 절벽 밑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절벽 밑의 골짜기는 어두컴컴하기만 할 뿐 아무런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두구는 양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형님, 어디에 이상한 것이 있습니까? 우리의 눈이 무뎌서 그런지 잘 보이지 않는군요." 소영이 곧 대답했다. "아니오. 조금 전에 한 줄기 푸른 빛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이미 사라져 버렸소." 상팔이 입을 열었다. "푸른 빛이라니요?" 소영이 대답을 하려는 찰나 다시 골짜기 밑에서 푸른 빛이 나타났다. 소영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저기, 저걸 봐요." 상팔과 두구는 시선을 모아 골짜기 밑을 내려다 봤다. 과연 한 줄기 푸른 빛이 이동해 가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보았소?" 상팔이 끄덕였다. "네, 보았습니다."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견문이 넓으신데, 그것이 무슨 연고인지 알 수 있겠소?" 상팔이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소제는 미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불빛이 도깨비불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소영도 맞장구를 쳤다. "나의 스승 흉라기박(胸羅奇博)께서 도깨비불에 관해 설명해 주셨는데, 조금 전의 그 푸른 빛은 절대로 도깨비불은 아닌 것 같 소." 상팔이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형님의 말뜻은 그 푸른 불빛은 인위적인 것이란 말이지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만약 어떤 사람이 골짜기 밑으로 푸른 비단을 두른 초롱을 들고 간다고 가정해 봅시다. 더우기 그것을 백 길이나 되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다고 칠 때 한 점의 푸른 빛으로밖에 더 보 이겠소?" 상팔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형님의 의견이 옳습니다." 두구가 말참견을 했다. "그렇다면 골짜기에는 사람이 살고 있을 겁니다." 소영이 말을 받았다. "문제는 거기에 있소. 만약 그 절벽 밑에 사람이 살고 있다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닌데,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무슨 곡절이 있을 겁니다." 두구가 말을 받았다. "무슨 곡절일까요?" 소영은 곧 대답했다. "이쪽 절벽이 바로 그 촌남촌녀가 손을 맞잡고 몸을 날려 정사한 곳이라 하오. 두 분께서도 아 시다시피 그 늙은 나무꾼의 말에 의하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시체를 찾아보았지만 끝 내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후일에 가서도 백골마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오."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렇지요. 설사 두 사람이 떨어져 분골쇄신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흔적만은 남아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두구가 다시 끼어들었다. "혹시 두 사람이 골짜기로 떨어질 때 골짜기를 가로질러 자란 등나무덩굴이나, 절벽에 돋아난 나무에라도 걸려 떨어지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게 아닐까요?" 소영은 말을 받았다. "두 분의 의견도 물론 그럴 듯하오. 그러나 나는 또 달리 한번 생각해 보았소" 상팔이 다그쳐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소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골짜기 밑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푸른 등불을 들었을까요?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봤어요. 푸른 빛은 항상 보는 이로 하여금 도깨비불로 오인할 수 있도 록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 같아요." 상팔이 말을 받았다. "형님의 추측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럴 법한 일이기도 합니다." 두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응양봉(鷹揚峯) 반사곡(盤蛇谷)을 찾아가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 있는데 어째서 이 런 상관도 없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이때 상팔이 마침 입을 열었다. "형님의 뜻은 골짜기 속의 정세를 탐지해 보려는 것입니까?" 두구가 말을 가로챘다. "소제의 의견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한 시간이 금보다도 더 귀한 때입니다. 급히 금궁의 소재지를 찾아야 할 이때 되도록이면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소영이 말했다. "두형의 말도 옳소. 하지만 우리들은 이 일을 알게 된 이상 캐보지 않을 수도 없지 않소?" 두구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만일 우리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라면 우리는 상관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두구는 여태껏 소영을 신주처럼 모셔왔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이때 두 구의 뇌리에는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두 분이 이처럼 골짜기 밑을 내려가 보려고 하는데 굳이 막는다면 아마 후일에 나를 원망할 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때 갑자기 골짜기 밑에서 다시금 푸른 빛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두 개가 동시에 나타나 흩어 져서 두 곳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소영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상하군!" 상팔이 말했다. "우선 사람을 데리고 와서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소영은 반문했다. "어떤 사람을 말이오?" 상팔이 천천히 대답했다. "이곳의 사정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그 향화도인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가서 데리고 오지요." 상팔은 말을 마치자 곧 몸을 날려 달려갔다. 소영은 원래 상팔을 가지 못하게 막을 생각이었으나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람처럼 재빨리 달 려갔기 때문에 미처 막을 틈이 없었다. 상팔은 어느 새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소영은 차마 그를 소리내어 부를 수도 없고 해서 그 냥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골짜기 밑의 푸른 빛은 차츰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 었다. 소영은 낮은 목소리로 두구에게 동의를 구했다. "두형, 마치 어떤 사람이 청사초롱을 들고 한 채의 집 앞에 멈춰 섰다가 문을 열고 들어간 것 같지 않소?" 두구도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요." 소영이 말을 이었다. "만약 우리가 골짜기에 내려가서 오늘밤 안으로 탐지할 수만 있다면 내일의 여정에는 별 지장이 없을 텐데....."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상팔이 향화도인을 데리고 달려왔다. 향화도인은 잠을 자다가 상팔에게 끌려왔으므로 아직도 몽롱한 기분에 싸여 있었다. 상팔은 향 화도인을 소영의 앞으로 바짝 데리고 왔다. 소영은 향화도인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씨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았소?" 향화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인연사를 지을 때부터 줄곧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겠군요?" 향화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이지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좋소. 내 형씨에게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 향화도인은 손등으로 눈을 쓱쓱 비비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오?" 소영은 절벽 밑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골짜기에 사람이 살고 있지요?" 향화도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들은 이곳에 와서 인연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두구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형님께서는 이 산골짜기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물었지 당신에게 인연사 에 대한 이야기를 묻지는 않았소." 향화도인은 두구의 말에 가슴이 섬뜩함을 느껴 곧 말을 이었다. "이 절벽의 깊이는 수백 길에 달하므로 비단 피와 살로 된 몸이 아니고 단단한 돌멩이라 할지라 도 떨어지면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입니다." 두구는 다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귀가 있소 없소? 우리 형님께서 물은 것은 이 골짜기 밑에 사람이 살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오." 향화도인은 그제야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이 골짜기 속에 습기가 가득차 있고, 또한 몹시 추울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독물들이 출몰하므 로 물론 사람은 살 수 없지요." 소영은 잠깐 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공수를 하며 그에게 예의를 표했다. "많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형씨의 단꿈을 깨워 드린 데 대해 제가 사과를 드립니다." 향화도인은 두구의 몇 마디 날카로운 말에 가슴이 떨리던 차에 소영이 돌려 보내 주겠다는 뜻을 표하니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소영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할 것도 잊고 재빨리 가버렸다. 소영은 향화도인이 멀리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상팔과 두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 분께서도 들으셨지요?" 상팔이 대답했다. "들었습니다. 형님!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글쎄, 한번 내려가 봤으면 좋겠군요. 혹시 의외의 발견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상팔이 찬성을 했다. "좋습니다. 그럼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한번 내려가 보기로 합시다." 소영이 말을 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지금 내려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상팔은 곧 되물었다. "지금 말이오?" 소영은 단호히 말했다. "그렇소. 이 골짜기엔 사실 아무런 이상한 것도 없으며, 그 번쩍이는 푸른 빛도 단지 쌓여 있는 짐승들의 뼈에서 생겨난 인광에 불과할는지 모르니까....." 소영은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만약 우리가 지금 골짜기 밑으로 내려간다면 날이 밝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올라올 수 있을 것 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시간도 늦어지지 않을 것이오." 상팔이 말을 받았다. "형님, 소제가 두려워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 골짜기는 매우 지세가 험할 뿐만 아니라 길도 잘 알 수 없으므로 이 밤에 골짜기를 내려간다는 것은 심히 위험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소영이 다시 말을 받았다. "나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소. 두 분께서 걱정하고 있는 것은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을 잘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상팔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괜찮소. 나는 이미 골짜기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소." 상팔이 다그쳐 물었다. "그 방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소영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조금 전에 내가 백리낭자를 따라 객점에 들렸는데 그 객점에는 제법 많은 밧줄이 쌓여 있었소. 내 생각으로는 그 밧줄을 가져다가 두 분께서는 위에서 잡고 내가 그 밧줄을 타고 내려간다면 산 길을 걷지 않고도 무사히 골짜기 밑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하오." 상팔은 그 말을 듣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건 더욱더 위험한 일이오." 그러나 소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 두 분께서는 말리지 마오. 내가 곧 가서 밧줄을 가지고 오 겠소." 소영은 말을 마치자 곧 돌아서서 달려갔다. 중주이고는 소영의 그와 같은 태도를 보자, 이미 말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소영의 동작은 매우 빨랐다. 잠시 후에 그는 곧 두 뭉치의 밧줄을 안고 왔다. 소영는 밧줄을 내 려 놓으며 중주이고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두 뭉치의 밧줄을 이어 놓는다면 충분히 골짜기 밑까지 이를 것 같소." 상팔이 말했다. "형님은 지금 무림에 있어서 정의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데 어찌 함부로 모험을 할 수가 있겠습 니까? 소제가 대신해서 내려가 보겠습니다."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상형은 너무나 뚱뚱해서 아마도 이 밧줄이 견뎌내지 못할 것이오." 이때 두구가 끼어 들었다. "그럼,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소영이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없소. 내가 가보겠소." 소영은 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밧줄을 풀었다. 상팔은 두구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정녕 형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저희들은 더 말리지 않겠습니다." 소영은 서둘러서 밧줄을 허리에 감으며 말했다. "그리고 만약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내가 길게 휘파람을 세 번 불어 공곡전음(空谷傳音) 법으로 전달하겠소." 소영은 상팔과 두구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몸을 날려 골짜기 밑으로 내려갔다. 상팔은 잡은 밧 줄을 천천히 늦추어 주며, 혹시 밧줄이 튼튼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다시 이어주기도 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한편 소영은 진기를 끌어 모아, 두 손에는 천년 묵은 교피장갑을 끼고 절벽을 따라 내려갔다. 그 러나 석벽은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푸른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소영은 은근히 가슴이 떨렸다. '절벽이 이다지도 미끄럽고 험하니 제아무리 일류의 경공을 가졌다 하더라도 역시 그 경공을 전 개할 수가 없겠구나.' 이때 소영의 오른발이 돌연 부드러운 물체에 닿았다. 소영은 이미 강호의 경험이 많아졌으므로 발이 닿는 감각만으로도 그것이 풀이나 나뭇잎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영은 밧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위로 삼 척 가량 뛰어 올랐다. 상팔은 더욱 강호의 경험이 깊은지라 밧줄이 갑자기 팽팽해지자 대뜸 소영이 의외의 변고를 만 났다는 것을 알고 그 이상 밧줄을 내리지 않았다. 소영은 수 척 가량 다시 위로 올라온 후 밑을 내려다 보았다. 순간 소영은 자기 눈을 의심할 정 도로 놀랐다. 석벽에서 돌출한 큰바위 위에 어떤 사람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소영은 너무도 뜻밖이라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뉘시오?" 소영은 놀란 김에 연거푸 몇 번 물었지만 상대방은 끝내 대답이 없었다. 소영은 매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죽은 사람이 아닐까?' 그러나 그 사람이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볼때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소영은 거듭 큰소리로 외쳤다. "귀하는 죽은 사람이오? 아니면 산 사람이오?" 과연 그 한 마디는 크게 효과가 있었다. 노기어린 음성이 대답해 왔다. "노부가 만일 죽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여기 앉아 있겠소?"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뇌까렸다. '네가 정녕 산 사람이라면 어째서 내가 몇 번이나 물었는 데도 대답을 하지 않았지?' 그러나 소영은 짐짓 부드러운 소리로 물었다. "귀하는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소?" 그러나 그 사람은 다시 묵묵부답이었다. 소영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이러한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의 절벽에 돌출해 있는 일개 바위 위에 저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훌륭한 경공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뿐더러 그의 담력에는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 다." 소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말했다. "저는 형씨께서 계시는 바위를 빌려 잠시 휴식코자 하는데 형씨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 바위는 나의 소유가 아니거늘 여기서 휴식을 하든 무엇을 하든 내 알 바 아니오." '이 사람은 매우 솔직한 데가 있군.' 하고는 진기를 끌어 모아 그의 기습에 대비하면서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이 돌출한 바위는 직경이 사 척의 넓이에 불과했다. 또한 느닷없이 석벽에서 튀어나온 것으로써 묘하게 평평했다. 그 사람은 바위의 중앙에 이 척 가량 차지하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러므로 좌우 양쪽에는 각 각 한 자 정도의 여유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갑자기 기습을 가해 온다면 매우 상황이 불리하였다. 그리하여 소영은 매우 조심스럽게 바위 뒤에다 발을 내디딘 후에야 비로소 수중의 밧줄을 풀었다. 소영이 시선을 모아 그 사람을 살펴보니 주위에는 광풍이 일고 있었고, 상처를 당한 듯이 보였 다. '이 사람은 어째서 이런 곳에서 상처를 당한 채로 앉아 있는 것일까?' "형씨께서는 어느 곳에서 이처럼 상처를 입으셨소?" 그러나 그는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소영은 바짝 앞으로 다가가 그의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는 상처가 꽤 심한 것을 보고 "저는 형씨께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도와드리는 것으로 저의 갑작스런 출현을 사과하리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가볍게 사나이의 앞가슴을 누르면서 내공의 강한 기류를 그 사람의 핏줄에 불어 넣었다. 순간 그 사람의 상한 혈도는 뚫어졌다. 그러자 그 사람은 떨기를 멈추었으며 이마의 땀방울도 점점 가셔졌다. 소영은 이미 그의 상한 혈도가 뚫려서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것을 알고 천천히 손을 그의 앞 가슴에서 손을 떼었다. 이윽고 그 사람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소영을 유심히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천만에요. 제가 만일 형씨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면 형씨는 벌써 상세를 회복했을 텐데...굳이 도 와줬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소영은 강호의 경력이 길지는 않지만 그가 터득한 견식은 매우 넓었다. 소영은 사람이란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자기 공을 남에게 내세우 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 한 마디라도 매우 부드럽게 할 수 있는 아량을 가지고 있 었다. 그 사나이는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더니 소영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당신은 이곳에 무엇하러 오셨소?" 소영은 약간 찔끔했다. '이 자는 선수를 치는구나!' 소영은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는 골짜기 밑에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생겨 내려가려고 하던 참이오." 그 사람은 고개를 들어 소영이 잡고 내려온 밧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친구께서는 밧줄을 타고 내려온 것 같은데 위에 또 동행이 있습니까?" 소영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귀하께선 혼자입니까?" 사나이는 곧 대답했다. "둘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사람뿐입니다." "그렇다면 일행은 지금 어디에.....?" 106. 비밀문을 찾아내다 "죽었소." 소영은 의아한 듯 물었다. "시체는 어디 있소?" "골짜기 밑에 내버려 두었소." 그 사나이는 잠시 말을 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들이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절대로 가만히 놓아 두지 않을 것이 오."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골짜기 밑엔 틀림없이 무림의 고수가 잠복해 있는 것 같군. 이 사람은 이 골짜기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인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캐물어 봐야겠군.' 소영은 다시 물었다. "형씨의 성함은?" "저는 단문승(段文昇)이오." 소영은 얼른 포권을 했다. "바로 단형이었구료!" 단문승도 예의를 표했다. "형씨께선?" "저는 소영이라 하오." 단문승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말했다. "귀하가 바로 무림에서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는 소대협이란 말이오?" 소영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과분한 말씀이오. 변변치 못하오." 단문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대협 같은 귀하신 분이 이런 황산까지 오신 것은 바로 금궁을 찾기 위해서겠지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섬뜩했다. "그렇소. 단형께서 어떻게 제가 여기 온 뜻을 알고 있소?" 단문승이 대답했다. "소대협께선 백화산장에서 혈전을 벌여 그 오룡진을 대파함으로써 심목풍에게 대항하시지 않았 소? 그로 인해 강호의 정의가 다시 세워졌다오. 무림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모두들 소대협을 지 극히 받들고 존경하고 있소. 그렇거늘 무림에서는 악의 무리가 횡행하고 있는 이때 금궁을 찾는 큰일이 아니면 소대협께서 어찌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오시겠소." 소영은 그의 말을 듣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말이야 비록 틀림없는 말이지만 어떻게 이 사람은 내가 금궁을 찾으러 왔다는 것을 대뜸 추측 할 수 있었을까?' 소영은 단문승의 기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짐짓 빙그레 웃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단형의 추측이 맞소. 그런데 뜻밖에도 단형께선 저보다 한걸음 먼저 오셨군요." 단문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저보다도 수 개월 먼저 이곳에 와 있는 사람도 있소이다." 소영은 깜짝 놀랐다. "뭐라구요?" 단문승이 방금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 했다. "우리들보다도 수 개월 먼저 이곳에 당도한 사람이 있소." 소영은 속으로 '그렇다면 그 응양봉 반사곡이란 바로 이 부근에 있으며 이 인연이란 두 글자는 양양의 변한 이 름이란 말인가?'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제가 알기로는 그 금궁의 열쇠는 아직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금궁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가 있을까요?" 단문승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소대협께선 또 어떻게 금궁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소영은 속으로 이 사람은 매우 날카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소영은 급기야 입을 열어 "저는 어떤 명인의 가르침을 받고 찾아온 거요." 단문승이 말을 이었다. "바로 그거요. 그 사람이 소대협에게 금궁의 위치를 가르쳐 주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쳐 줄 수 있는 일이 아니겠소? 저 역시 어떤 사람의 가르침을 받고 오게 된 거요." 소영은 속으로 '옳지! 나는 다만 아무렇게나 말했을 뿐인데 뜻밖에도 정말 그런사실이 있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단형,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 왔는지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단문승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저는 절대로 대답하지 않겠지만, 소대협께서 물으시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단문승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우러러보고는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 었다. "나는 나의 의형제 한 분과 삼 일 전에 이곳에서 십여 리쯤 떨어져 있는 한 산골짜기에서 부상 자를 한 사람 구한 일이 있지요. 그런데 그 부상을 당한 사람은 이미 위독했었소. 나와 의형제는 가지고 있는 영단을 모조리 사용했으나 역시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해낼 수가 없었소. 그러나 그 부상자는 한 차례 정신이 든 순간이 있었소....." 소영은 순간 말을 가로챘다. "그 사람이 당신네들에게 금궁이 여기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소?" "그렇소. 그의 상세는 너무도 중해 다만 그 말 한 마디만 내뱉고는 숨을 거두고 말았소." 소영이 다시 물었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요?" 단문승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소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정말 소대협이오?" 소영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장부 어찌 이름을 고치겠소. 저는 확실히 소영이오." 단문승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당신이 정말 소대협이라면 나도 사실을 말해 주겠소. 그 사람은 인연봉 밑이 바로 금궁이라고 하였소." 소영이 다시 물었다. "그밖에 한 말은 없소?" "그 말 한 마디를 내뱉고는 그만 숨을 거두어 버렸소."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똑똑히 들었습니까? 한 발의 차이로 천리 길이 어긋난다는 말도 있듯이 혹시 그 사람이 응양봉이라 하는 것을 두 분께서는 인연봉이라고 듣지나 않았는지? 글자는 틀리지만 음은 비슷하니까." 단문승은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절대로 그럴 리 없소. 저와 동생은 똑똑히 들었소. 사실 우리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 사 람의 시체를 묻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소. 어쨌든 인연봉으로 달려가 보기로 했지요."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그런데 이 산골짜기 속에 있는 줄은 또 어떻게 알았소?" "우리는 이곳으로 달려와서 사방을 조사해 보았지만 시종 아무런 이상한 곳도 발견하지 못했소. 그러나 밤이 되어 짙은 어둠이 내리깔린 후에야 비로소 이 골짜기 밑에 푸른 빛이 번쩍거리는 것 을 발견하였소. 만약 그 사람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형제는 또한 그것을 수상하게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러나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바가 있어 곧 길을 찾아 골짜기 밑으로 내려갔지요."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두 분께서는 골짜기로 들어선 후 암암리에 뻗쳐 온 독수로 인해 부상을 당한 거지요?" 단문승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골짜기는 아주 깊어 수십 리나 되었소. 우리들은 거의 하루를 걸은 후에야 비로소 길을 찾아 이 인연봉 밑에까지 이르게 되었소. 이때는 이미 해가 져서 골짜기 밑은 어두컴컴했소. 그래 서 사방을 분별할 수가 없었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그게 바로 오늘밤이겠군요?" 단문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바로 오늘밤이오." 소영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과 그동안 이야기를 하면서도 정작 요점은 빠뜨리고 있었군. 지금 시간은 금보다도 귀 한 것인데 이런 한가한 말로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소영은 곧 말머리를 돌렸다. "단형! 그런데 함께 온 형제분은 어떻게 하여 죽게 되었소?" 단문승은 어두운 표정을 했다. "아마 일종의 극독이 묻어 있는 암기를 맞고 죽었을 것이오. 내가 그의 비명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소." 소영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단형께선 적을 보지 못했소?" 단문승은 여전히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 골짜기 속은 이미 어두컴컴하여 모든 것이 똑똑히 보이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의제의 시체를 살피고 있는데 누가 등뒤에서 일격을 가해 왔소.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연마한 무공이 동 자혼원기공(童子混元氣功)이었으며 내가 이것을 잔뜩 운기하여 경계를 펴고 있었으므로 일격을 맞긴 했지만 그것을 감당해 낼 수가 있었지요. 그래서 나는 즉시 몸을 날려 그 일격을 피하면서 고개를 뒤로 돌려 보았소. 그러나 그 자는 이미 간 곳이 없었소." 소영이 물었다. "그들이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던가요?" 단문승이 대답했다. "아마 그랬을 거요. 아무튼 그 일격은 매우 강한 것이었소. 마침내 나는 적이 나타나지 않자 기 회를 이용하여 도망치는 것이 제일 상책이라고 생각했지요." 이때 소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그 돌출한 바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 바위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중간에 튀어나와 있으므로 어떠한 상승경공을 가진 사람이더 라도 뛰어오르기가 힘든 것인데 하물며 부상을 당한 몸으로서야.....' 단문승은 마치 소영의 이와 같은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 죽지 않으려면 하늘의 도움이 있는 법이오. 나는 살기 위하여 급히 도망을 가다가 하는 수 없이 절벽의 꼭대기로 오르려고 했소.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하여 절벽을 기어올랐소. 그러나 사 오 장의 높이에 이르렀을 때 절벽은 더욱 험준해져서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버렸소. 설사 나보다 경공이 십 배 나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상 더 절벽을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오. 그 러나 다행히 내가 몸을 멈춘 곳은 많은 잡초들이 길게 자라 있었소. 그래서 나는 우선 그 잡초 속에 몸을 감추었소. 그런데 내가 몸을 숨기자마자 곧 두 줄기의 강렬한 등불이 절벽 위를 비추 었소.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그 등불은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소." 소영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단형께선 어떻게 이 바위 위로 올라오게 되었소?" 단문승이 말을 이었다. "나는 비록 몸을 숨겼지만 끝내 들키고 말 것이라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뜻밖에도 무의식중에 내민 손에 쇠고리 한 개가 잡히질 않겠소. 알고 보니 그것은 한 가닥의 쇠사슬이었소. 이 쇠사슬 은 오랜 세월 동안에 심한 녹이 슬어 있었소. 나는 손에 힘을 주어 그 쇠사슬을 잡아 당겼지요. 그랬더니 쇠사슬이 끊어지며 석벽의 일부분이 열리질 않겠소. 그것은 한 개의 돌문에 연결되어 있었소." 소영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물었다. "그 돌문은 사람의 손으로 건립된 것이었소?" 단문승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석벽 위에 어떻게 쇠고리와 쇠사슬이 저절로 생겨날 수가 있겠소?"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그 돌문 안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던가요?" 단문승이 말을 이었다. "한 줄기의 돌계단이 줄곧 이 돌출한 바위까지 통해져 있었소. 나는 이곳에 이르자 더 올라갈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우선 여기 앉아 운공을 하여 상세를 치료하기로 한 것이오." 소영은 연방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바위 뒤에는 한 개의 열고 닫을 수 있는 돌문이 있겠군요?" 단문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대협께서도 손으로 뒷벽을 약간 밀기만 하면 곧 돌계단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오." 소영은 단문승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상세는 지금 어떻소?" 단문승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한동안 조식을 하고 나니 별로 호전되지도 않았지만 더 악화되지도 않았소." 소영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단형은 이 밧줄을 타고 봉우리 꼭대기로 올라가시오. 위에는 나의 두 형제분이 기다 리고 있으니, 가서 그들에게 사실대로 이 골짜기 안의 사정을 얘기해 주시오." 단문승이 소영에게 되물었다. "소대협께선 이 밧줄을 다시 사용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소영은 간단히 답했다. "그럴 필요없습니다." 소영이 곧 밧줄을 몇 번 흔들자 과연 밧줄은 위로 당겨져 올라갔다. 단문승은 그 밧줄을 잡고 위를 향해 올라갔다. 한편 소영은 단문승이 바위에서 떠나자 곧 손을 뻗어 바위 뒤의 석벽을 밀었다. 과연 돌문이 열 렸다. 소영은 이제 강호의 경험이 적지 않은지라 석벽이 열렸지만 얼른 들어가지 않고 돌문 위를 자세 히 살펴보았다. 소영의 시력은 비범한지라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것은 천연의 석동(石洞)에다 사람의 힘을 가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돌문은 매우 튼튼하게 만 들어졌으며 원래는 쇠고리를 달아 놓은 흔적이 있었다. 소영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한 가지 생각 이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이것은 천연의 석동이라 하지만 거대한 인력을 들여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무엇 때문에 막대한 인력과 재력을 들여 이 황폐한 골짜기에다 석동을 손질해 놓았을까? 거기엔 반드 시 그만한 곡절이 있을 것이다. 혹시 이것이 금궁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돌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이 한 줄기의 석도는 폭이 매우 넓어 통행하기에 편리하였다. 이 한 가지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이 석도를 만드는 데는 막대한 인력 과 재력이 소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참 내려가니 돌계단은 갑자기 평탄한 길로 바뀌었다. 소영은 곧 이곳이 출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영은 손을 뻗쳐 석문을 밀었다. 과연 한 개의 두꺼운 돌문이 열리더니 별빛이 은은하게 석굴 안으로 스며들었다. 소영은 이미 단문승에게 들었으므로 돌문 바깥은 잡초로 덮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영 은 곧 돌문 밖으로 나갔다. 과연 잡초가 허리까지 닿았다. 절벽도 여기서부터는 상당히 완만한 경 사를 이루었다. 소영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처럼 완만한 경사와 잡초로써 엄호된 지형을 이용하여 돌문을 만든 사람은 상당히 용의주도 한 사람이겠구나!' 소영은 몸을 잡초 속에 숨기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영은 워낙 시력이 좋았으므로 희미한 별 빛 속에서도 골짜기 밑의 풍경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소영은 한참 동안 골짜기 밑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끝내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몸 을 날려 밑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네. 그는 절대로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갈 수는 없어. 지금쯤 이 미 죽어 있을 것일세." 그러자 다른 음성이 대답했다. "그럴 거야. 우리가 이미 그 잡초더미 속에 많은 암기를 쏘았으니 만약 그가 잡초 속에 몸을 숨 겼다면 그 역시 독이 묻은 암기를 맞고 쓰러졌을 것일세." '이 두 사람은 분명히 단문승의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내가 만약 경솔하게 골짜기 밑으로 뛰어 내려 갔다면 영락없이 그들에게 발견될 뻔했구나. 그런데 이 산골짜기 속에 어째서 이렇게도 많 은 무림의 인물들이 살고 있을까?" 이윽고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두 사람은 기다리다 지쳐서 가 버리는 모양이 었다. 소영은 그대로 잠시 동안 더 기다렸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벽호공(壁虎功)을 전개하여 등을 절 벽에 바짝 붙이고 천천히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알고 보니 그 잡초더미와 골짜기 밑과의 거리는 불과 사 장 정도의 거리였다. 순식간에 소영은 골짜기 밑에 이를 수가 있었다. 107. 연못에 비친 금궁 소영은 골짜기로 내려서며 내심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였다. '이 골짜기 속에는 의외로 많은 인물들이 살고 있으니 앞으로 매우 신중하게 행동을 해야겠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소영이 내려선 골짜기에는 온통 괴석이 돌출 해 있어 행동하기에는 많은 지장을 받겠지만 몸을 숨기기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눈으로는 사방을 살피고 귀로는 팔방을 경계하였다. 그가 절벽을 내려선 자리에서 약 십여 장을 걸었을까? 뜻밖에도 사람이 있어야 할 장소에 아무 런 인기척도 없었고 고요한 침묵만이 소영을 기다릴 뿐이었다. 소영이 조금 전에 봉우리에서 보았던 파란 등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 사람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단 말인가? 심야의 계곡은 모든 사람들에게 황량함과 고독한 심정을 불러일으킨다. 소영은 골짜기를 따라 다시 걸음을 옮겨 수십 장을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참 이상도 하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는 근처의 조그만 바위에 몸을 기대고 온 신경을 귀로 모았다. '혹시 무슨 소리라도 들려오지 않을까? 이윽고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전혀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 소영은 잔뜩 긴장한 채 그 괴성의 정체를 살폈다. 그는 갑자기 싱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손바닥 을 가볍게 쳤다. '아하, 저것은 샘물이 흐르는 소리로구나.' 그는 너무나 긴장한 탓으로 샘물소리를 듣고도 적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샘물은 그다지 멀지 않 은 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곳은 그리 넓은 장소가 아닌데 바위와 바위 사이를 누비고 어디로 흐르는지 쉴새없이 가느다 란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소영은 달빛에 반사되는 샘물 줄기를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샘물은 어디서 흘러온 것이기에 이토록 면면히 흐르고 있을까? 이것은 분명 천연적인 지형 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물줄기의 원천은 이 근처일 텐데.....' 그가 여기까지 생각하였을 때 돌연 뒤쪽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 골짜기는 모든 게 다 좋으나 다만 샘물 줄기가 가느다란 것이 큰 흠이야. 언제나 물을 길으 려면 이곳까지 와야 되는 불편이 있으니 말일세." 소영은 재빨리 몸을 날려 옆에 있는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후 두 명의 건장한 사나이가 커다란 병을 하나씩 들고 소영이 서 있던 곳으로 걸어왔다. 앞서서 오고 있는 사나이는 비교적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다. 뒤따라 오는 사나이가 말을 받았다. "내가 들은 바로는 이 자심곡은 중원에서도 이름난 약수로 대단히 큰 시내를 이루었었다네. 그 런데 어느 날 명장(名匠)이 나타나 샘물 줄기를 막아 많은 물이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네. 그리고 는 길 가는 사람들의 갈증이나 풀어주게끔 이렇게 조금씩만 물줄기를 터 놓았다는군." 앞의 사나이가 믿기 어렵다는 듯이 다그쳐 물었다. "그것이 정말인가?" 뒤의 사나이는 매우 성질이 급한 모양이었다. "내 어찌 그것을 장담하겠나. 그러나 이렇게 물줄기가 가느다라면서도 흐르는 것이 세차니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는 아무 일도 아닌데 제법 큰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나이는 소영이 숨어 있는 바위 앞을 지나 샘물가로 갔다. 그들은 쭈그리고 앉아 병에다 물을 퍼 담으면서도 계속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 다. 소영은 그들의 일거일동을 자세히 살피며 이렇게 추측해 보았다. '이 골짜기에 많은 무림 인물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도대체 어느 곳에서 기거하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지금 저들에게 손을 쓴다면 여반장으로 처치할 수 있으나 좀더 두고 보아야겠 다. 저들은 이런 밤중에 이곳까지 물을 뜨러 왔으니 필시 무슨 곡절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두 사나이는 병에 물을 다 채우고 되돌아 가고 있었다. 소영은 눈을 반짝이며 두 사람이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너무 밤이 깊어 주위가 캄 캄한 까닭에 곧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비록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험한 난관을 많이 겪어왔다. 그 런 까닭에 웬만한 일에 부딪쳐서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해치웠다. 소영은 숨었던 바 위에 등을 기대고 서서 눈썹 같은 달을 쳐다보았다. '저 달이 자취를 감추고 다시 먼동이 터오면 먼저 이 골짜기부터 살펴야 되겠다. 이곳의 형세를 분명히 파악한 후에 다음의 행동을 계획하자.' 이런 생각을 하고 나자 온몸에 피로가 밀려들었다. 그는 바위 밑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붙였다. 얼마나 잤는지― 옷 속을 파고드는 스산한 바람에 펀뜻 눈을 뜨고 사방을 살폈다. 동쪽 하늘이 점차로 밝아오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새벽이었다. 소영은 크게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름 모를 많은 산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는 풀숲을 바라보며 산 속의 평온함을 새삼 깨달 았다. '이런 곳에서 평생을 조용히 살았으면.....' 풀숲에서 눈길을 돌려 건너쪽 절벽을 바라보던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앗!" 하고 외쳤다. 그의 눈앞에 너무도 묘한 광경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숲을 조금 지난 곳에 조그만 연못이 보 였는데, 그 연못 가운데에 두 마리의 뱀과 커다란 독수리가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양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환상 같기도 했지만 뱀의 모양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갈은 느낌이 들어 그대로 환상 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 같은 기묘한 광경은 소영의 마음을 흥분으로 들 끓게 하였으며 일종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소영은 뱀과 독수리를 유심히 응시하며 "응양봉(鷹揚峯)의 반사곡(盤蛇谷)은 원래 호수에서 비치는 영상이로구나."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내달려 연못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는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키면 위험 하다는 것도 잊고 오직 연못에 비친 기묘한 광경에만 정신이 쏠렸다. 마침내 그는 연못가에 다다라 조금 전까지 비치던 뱀과 독수리를 찾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 지 연못 속에는 두 개의 흐릿한 그림자만 보일 뿐이었다. '어? 이것 참 이상하다. 분명히 두 마리의 뱀과 당장이라도 날듯한 독수리를 보았는데.....' 소영은 눈길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느 새 햇빛이 떠올라 어제 저녁에 자신이 내려왔던 절벽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주위를 돌았다. '참으로 이상하군. 분명히 이곳에 두 마리의 뱀과 독수리가 보였는데.....' 이런 생각으로 몸을 돌려 먼젓번 바위로 되돌아 가려는 순간 왼쪽 어깨가 뜨끔하는 느낌이 들었 다. 그것은 조그만 바늘로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당했구나.' 경험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다. 그는 상대에게 암기를 맞았다고 느낀 순간 재빠르게 내공을 모아 독이 온몸으로 퍼지지 못하게 하였다. '상대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암기는 정말로 이상한 극독이 묻어 있는 것이로군.' 소영은 암암리에 운기조식을 하여 왼쪽 어깨의 혈도를 봉해 버렸다. '상대는 어느 곳에 있을까?' 그는 암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냉랭하게 외쳤다. "그대는 누구요? 어째서 소생에게 암기를 쓴단 말이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위 틈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렸다. "너는 누군데 혼자서 이 죽음의 골짜기로 들어왔느냐?" 소영은 들리는 음성을 좇아 상대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었다. 상대는 연못에서 동쪽으로 일 장쯤 떨어진 바위 틈에 있었다. 소영이 그곳으로 몸을 날리려는데 상대가 먼저 모습을 나타내었다. 상대는 머리와 수염이 눈같이 희고 얼굴은 해골처럼 바짝 마른 노인이었다. 바위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서는 그는 키가 작았다. 한 마디로 영준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여덟팔 자 걸음으로 소영의 앞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너는 이미 자오투골침(子午透骨針)의 독침을 맞았다. 그 침에는 강력한 독이 들어 있어 몸을 움 직일수록 뼈 속으로 파고들어 간다. 그러니 쓸데없는 행동은 삼가는 것이 좋을 거야." 소영은 눈을 똑바로 뜨고 상대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일찍이 보지 못한 노인이었다. '누구일까? 강호에서는 보지 못했는데.....' 그는 괴노인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따위 독침으로는 내 목숨을 빼앗지 못할 것이오. 당신은 보기와는 달리 매우 비겁하군요. 상 대가 적인지 친구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비겁하게 뒤에서 암수를 쓰다니....." 체구가 작고 백발인 괴노인은 음침한 소리로 웃어젖혔다. "흐흐흐...노부의 그 독침에는 일곱 가지 맹독이 담겨져 있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이라도 독 을 제거할 수가 없다. 그 침을 맞은 후 한 시간 이내에 내가 조제한 해약을 먹지 않으면 온몸의 뼈가 썩어 그대로 목숨을 잃게 된다. 자오투골침의 암기는 내가 일생 동안 수련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을 맞고 한 시간만 지나면 내 해약으로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너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지." 소영은 그 말을 듣고 내심 통탄하였다. '소영아, 소영아,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악누님의 생사가 너에게 달렸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다니...어서 위기를 벗어나거라.' 그는 멀리서 들리는 듯한 악운고의 꾸지람을 생각하였다. 오늘따라 옛날에 운명을 달리하신 악 운고가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소영은 어려운 난관에서 구원자를 만난 것 같아 내심 다그쳐 물었다. '그럼 저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모님, 현명한 방안을 가르쳐주십시오.' 이때 그의 환상을 무참히 깨뜨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흐흐흐....." 상대의 웃음은 바로 코 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소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상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괴노인은 체격이 작고 바짝 마르긴 하였지만 심기만은 매우 예민하였다. "네가 만약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손을 뻗쳐 얼마 만큼의 생기(生氣)가 있는지 시험해 보 아라." 말하는 괴노인의 눈은 신광이 번뜩였으며 양쪽 태양혈(太陽穴)이 높이 돌기하였다. 소영은 직감적으로 그의 높은 무공을 눈치채었다. '아, 노인은 내외 무공을 겸비한 고수로구나. 만약에 내가 손을 써서 일격에 그를 쓰러뜨리지 못 한다면 다시는 그를 죽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꾀로써 그를 상대해 보자.' 소영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정중히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귀하께서는 소생과 난생 처음으로 뵈옵는 분인데 무슨 연고로 암암리에 독수를 뻗었는지요?" 괴노인은 히죽이 웃음을 띠웠다. "그것보다 너는 무엇하러 이 골짜기에 들어왔느냐?" 소영은 대답을 않고 천천히 눈길을 돌려 주위를 훑어보았다. '이 노인 혼자뿐인가 보군. 그렇다면 그와 정면으로 부딪쳐도.....'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알자 차츰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 산골짜기는 원래 임자가 없을 텐데 어찌 소생이 들어온 것을 탓하시오?" 괴노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영을 쏘아보았다. "노부는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다. 네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들어왔나를 알고 싶을 따름이다." 소영은 걸음을 옮겨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소생은 오래 전부터 이곳 인연봉을 구경하고 싶었소이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 노인은 소영의 말을 가로챘다. "인연봉을 구경하려 했다면 어째서 이 골짜기까지 내려왔느냐?" "그저 호기심에서 왔을 뿐이오." "그래? 네가 귀신도 모르게 이 골짜기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 노부도 탄복하겠다. 네가 내려온 골짜기는 부하들이 곳곳에서 지키고 있는 요새 같은 곳이다. 그런데 너는 그들의 경계망을 뚫고 이곳 금지구역에까지 들어왔으니....." 소영은 그의 말을 듣고 내심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음, 이곳이 이들의 본거지로구나. 이 조그만 연못을 중심으로 무슨 집단을 형성하고 있나 보군. 더군다나 겉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이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구나.' 그는 되도록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노인장 어른, 소생은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호기심으로 이곳까지 들어온 것뿐이오." 괴노인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냉랭하게 다그쳐 물었다. "네가 골짜기로 들어온 것은 둘째 문제로 치더라도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아무에게도 저지를 당하 지 않았다는 것이 의문이로구나." "그렇소이다. 소생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한 번의 저지도 받지 않았소이다. 처음에 내려올 때는 저지가 없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급습을 당할 줄은 꿈에도 생 각지 못하였소. 그러나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괴노인은 의외라는 듯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그 말의 뜻은 무엇인가? 어째서 후회 않는단 말인가?" "만약 소생이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저지를 당하였다면 지금처럼 이 신비의 골짜기를 두루 구경 할 수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소영은 말을 하면서 걸음을 옮겨 어느 새 괴노인의 곁에 다가섰다. 괴노인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몇 발 뒤로 물러서며 날카롭게 외쳤다. "멈춰라!" 소영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웠다. "노인장 어른, 제가 두렵습니까?" 괴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가 두렵지는 않지만 너의 암기에 당하기는 싫다." "노인장께저 소생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그다지도 놀라시오?" 괴노인은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든, 우리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었다는 것으로만 보아도 충분히 자네 의 높은 무공을 짐작하겠네. 어느 누구라도 죽음의 목전에서는 상대를 반격하는 힘이 초인적이 되는 것이네. 지금 자네의 경우가 그렇지. 그래서 노부는 자네를 두려워 않지만 만약의 일에 충분 한 대비를 하는 것일세." 소영은 내심 지극히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음을 느꼈다. '흥, 이 노인은 무공만 높은 게 아니라 지혜도 뛰어나 매우 총명하다. 이럴 때 상형이라도 있으 면 상형과 지혜로써 맞싸울 수 있을 텐데...지금 나 혼자로서는 상대를 누르기가 힘들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괴노인의 커다란 음성이 들렸다. "자네 무엇을 생각하나? 조금만 있으면 독침의 영향을 받아 심한 발작을 일으킬 터인데 두렵지 않나? 혹시 노부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려는 것은 아닐 테지....." 괴노인은 말은 하면서도 은근히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독침이 아직까지 효과를 나 타내지 않자 차츰 걱정이 불안으로 바뀌었다. '저놈은 아직 나이도 어리면서 매우 뛰어난 절기를 지니고 있구나. 그런데 어째서 자오투골침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괴노인이 이렇게 불안한 생각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의 자오투골이란 암기는 이십여 년 동안 연구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그 독기의 무서움은 자신도 놀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소영은 전에 천년석균(千年石菌)을 복용하였으므로 체내로 침입하는 독을 견제하는 힘이 남달리 강했다. 게다가 독문의 상승내공인 건청강기를 터득하고 있어 그 내공으로써 진기를 모아 혈도를 봉쇄하였기 때문에 독기가 전신에 퍼지지 않았다. 괴노인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차츰 조급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괴노인 의 자오투골의 독침은 예상 외로 강하였다. 소영은 상승내공의 덕분으로 독기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으나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었 다. 차차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자오투골의 독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이제 독기가 퍼지나 보구나. 다행히 지금이라도 어느 누가 나를 돕는다면...누가 나를 돕기 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텐데...이곳에서 허무하게.....' 소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구원자만 애타게 기다렸다. 구원자가 나타난다는 것은 꿈 같은 막연한 기대뿐이고 살아날 희망은 실낱 만큼도 없는 일이었다. 괴노인은 교활하고 의심이 많았다. 그는 잠시도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고 언제나 소영과 이 장 정도 떨어져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소영은 마지막 각오를 하였다. '좋다! 이대로 나 혼자만 죽을 수는 없다. 죽을 바에는 상대와 같이 죽는 것이다. 아, 악누님도 다시 못 보고.....'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나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는 괴노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암암리에 단전에 진기를 모아 필사의 일격을 뻗칠 기회를 노렸다. '단 한 번에.....' 그의 각오는 대단한 것이었다. 마침내 상대를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막 손을 쓰려는 데 갑자기 괴노인의 표정이 돌변하는 것이었다. 소영은 가슴이 섬뜩함을 느끼며 그대로 손을 멈추었다. '저 늙은이가 벌써 눈치를 챈 모양이군. 만약 그가 눈치를 챘다면...지금 손을 쓴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잖은가.' 그런데 그 다음이 이상하였다. 괴노인은 갑자기 얼굴이 백지장같이 창백해지며 미간을 찌푸리는 게 아닌가? 그는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소영은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노인장, 무슨....." 괴노인은 손을 흔들어 소영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네 잠깐만 기다리게." 그는 소영의 곁을 지나 앞으로 몇 걸음 나서며 숲 속을 향해 벽력 같은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그러자 숲 속에서 맑고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요." 괴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암기를 썼느냐?" 숲 속의 인물은 여전히 냉랭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북해빙백(北海氷魄)이오." 소영은 그 몇 마디에 대뜸 상대를 알아내었다. 그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서 자신도 모르게 "빙아!" 소영의 부르는 소리에 맞추어 숲 속에서 번뜩하는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는 나비같이 가볍 게 몸을 날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숲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남색의 경장을 한 백리빙이었다. 백리빙은 화사한 웃음을 띠고 소영에게 말했다. "오빠, 괜찮아요?" 소영은 왼쪽 어깨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저 노인장에게 자오투골을 맞았다." 하고 괴노인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백리빙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괴노인에게 바짝 다가가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이 골짜기 속에 많은 사람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들은 모두 당신의 부하이지 만 당신은 그들을 부를 수 없소. 만약 소리를 내어 사람들을 부른다면 즉시 당신의 목을 베겠소. 그러니 당신이 사람을 부르고 싶다면 부르시오. 당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 당신의 목숨은 결정지 어질 테니까요." 괴노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기만 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소영은 우선 구원자가 나타난 것이 반가웠다. "빙아, 어떻게 이곳까지 왔느냐?" 백리빙은 귀엽게 눈을 흘겼다. "오빠는 너무 성질이 급해서 탈이에요. 무엇보다도 오빠의 몸에 든 자오투골 독기를 해독시킬 약을 구하는 것이 급해요." 그녀는 눈길을 돌려 지금까지 멍하니 서 있는 괴노인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독을 많이 사용한 경험이 있다면 그 북해빙백의 독기를 알고 있겠지요?" 괴노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노부가 너의 암기에 목숨을 잃는다 하여도 너희 두 사람은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백리빙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번개같이 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팔목의 혈맥을 짚었다. 그녀의 행동은 너무나 의외이고 또한 빨라 괴노인 뿐만이 아니라 소영까지도 깜짝 놀랐다. 괴노인은 갑작스런 공격에 미처 막을 틈이 없어 그대로 혈맥을 짚히고 말았다. 백리빙은 다급하게 입을 열어 "당신은 죽지 않을 수도 있소. 우리 저 바위 뒤로 가서 이야기합시다." 하고는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켰다. 괴노인은 혈맥을 짚혔기 때문에 조금도 반항을 못하 고 그녀가 가리키는 바위 뒤로 끌려갔다. 백리빙은 괴노인의 혈맥을 짚고 암암리에 공력을 뻗었다. 괴노인은 전신이 마비되는 것같이 정 신이 아득하여 마치 어린애가 어른을 뒤따르듯 맥없이 가는 것이었다. 소영은 두 사람의 뒤를 따르려니 펀뜻 악소채의 생각이 떠올랐다. '악누님과 옥소랑군이 단혼 절벽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이제 삼십 일밖에 안 남았다.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악누님은.....' 그는 다급한 마음으로 백리빙에게 말했다. "빙아, 노인장에게 해약을 받아낼 수 있겠느냐?" 백리빙은 괴노인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미소를 띠웠다. "이 노인장께서는 아무래도 관을 보기 전에는 곡을 하지 않을 모양이에요." 그녀는 말을 하며 옷소매 속에서 한 알의 영단을 꺼내었다. "오빠, 우선 이 약을 복용하세요." "무슨 약인데?" "빙백 암침의 해약이에요. 비록 약의 효용은 틀리지만 어느 정도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예요." 소영은 더 묻지 않고 그녀에게서 영단을 받았다. "오빠, 이제는 운기를 조식하세요. 그동안 오빠의 해약을 얻어낼 테니까요." 소영은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그대로 땅바닥에 앉아 운기를 조식하였다. 백리빙은 회심의 미소를 띠우며 소영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눈길을 괴노인에게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괴노인을 뚫기라도 하려는 듯 싸늘하였다. 그녀는 품 속에서 두 개의 빙백침을 꺼내어 괴노인의 손등에 꽂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몸에는 독침이 있으니 응당 그 해약도 있겠지. 당신이 직접 내놓지 않겠다면 할 수 없 이 내가 찾아내겠소. 어린 계집이 함부로 몸을 뒤진다고 허물치 마시오. 당신이 그렇게 만드는 것 이니까....." 괴노인은 다급하게 물었다. "만약 노부가 해약을 내놓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백리빙은 빙그레 웃음을 띠웠다. "피차 해약을 교환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오빠의 독을 재거해 주고 나는 당신의 독침을 빼 주기 로 합시다." 괴노인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돌연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 백리빙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노부가 낭자를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낭자도 노부를 믿을 수 있겠소?" "그건 어째서요?" "낭자가 노부를 놓아 준다면 노부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낭자를 죽이려 할 텐데, 그래도 노부 에게 해약을 주겠다는 건가?"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놓아 주겠다는 약속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오. 당신이 이곳을 벗어나 무슨 일을 하든 우 리가 상관할 것이 못되니 그것은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단지 나는 당신에게서 해약을 얻으면 되 오." "여자의 말을 어찌 믿겠는가?" 백리빙은 쓴웃음을 지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소. 당신이 정 여자를 믿지 못하겠다면 오빠와 약속을 하시오. 오빠는 강호의 대영웅호걸이니 당신이 믿을 만할 거요. 오빠의 일언은 중천금이라 할 수 있소." 괴노인은 눈길을 돌려 운기를 조식하고 있는 소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누구요?" 백리빙은 소영을 힐끗 보았다. "강호 무림에서 누구나 한결같이 존경하고 있는 소영이라는 분이오." 괴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소영이라...소영...요 근래에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백리빙은 발끈 화를 내며 큰소리를 질렀다. "오빠의 쟁쟁한 명성은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데 당신이 못 들었다면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러자 지금까지 운기를 조식하고 있던 소영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빙아, 그와는 여러 말 하지 말고 어서 해약이나 구해 내거라." 괴노인은 그제야 품속에서 조그만 옥병을 꺼내었다. "해약이다." 백리빙은 괴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을 내밀어 그 옥병을 받으려 하였다. 그러자 괴노 인은 재빨리 그 옥병을 입 안에 집어 넣고 말했다. "낭자가 계속 억지를 쓴다면 노부는 이 약병을 삼켜 버리겠다. 노부는 이미 세상을 살만큼 살았 으므로 저 청년과 생명을 맞바꾼다 해도 후회는 않겠다." 백리빙은 의외로 괴노인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내심 당황하였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이오? 당신은 무엇을 바라고 있소?" 괴노인은 담담히 대답했다. "낭자가 말한 대로 서로 생명을 구하는 것이오." 백리빙은 잠시 생각하고는 "좋소. 그렇다면 먼저 당신의 해약을 주겠소." 하며, 옷소매 속에서 조그만 영단을 꺼내어 괴노인의 입에다 넣어 주었다. 괴노인은 아무 의심도 없이 그 영단을 삼키려고 했다. 그 순간 느닷없이 백리빙이 일 장으로 그 의 등줄기를 가격했다. 그녀의 일 장이 떨어지는 힘은 굉장한 것이었으므로 괴노인의 충격은 치 명적이었다. 괴노인은 그 충격으로 인하여 입에 물고 있던 약병을 뱉아 버렸다. 그는 마지막 발악으로 소리 를 높여 부하들을 부르려 하였다. 백리빙은 눈썹을 치켜뜨며 "아직 혼이 덜 났군." 하고는 왼손으로는 그의 혈도를 짚으며 오른손으로는 다시 등줄기를 가격하였다. 괴노인은 마침 내 선혈을 흘리며 기절하고 말았다. 백리빙은 쓰러진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경주를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시겠다니....." 그녀는 땅에 떨어져 있는 옥병을 주워 들고 소영에게 다가갔다. 소영은 그녀가 기묘한 수법으로 해약을 빼앗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하였다. '음! 아직 나이도 어리고...어른 앞에서 재롱을 떨기는 하여도 심기만은 깊군.' 그는 자오투골의 독기를 빼는 해약을 복용하면서 입을 열었다. "빙아, 만약에 빙아가 아니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개죽음을 당할 뻔하였구나." 백리빙은 얼굴을 붉히며 방그레 웃음을 띠웠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저는 오빠 혼자서 이곳을 찾아 나섰다는 말을 듣고 조금이나마 도움 이 되어 드리려고 온 것이에요. 그런데 오빠의 두 형제들이 저를 못 가게 막지 않아요. 그래서 하 도 화가 나서 그들과 싸움을 하였지요. 그들은 내 무공을 당해내지 못하자 비로소 길을 터 주더 군요."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두 형제를 상하게 했단 말이냐?" 백리빙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나는 그들에게 팔분의 장세로 몇 장을 공격하고는 그대로 이곳을 찾아 나섰어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한 백리빙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오빠, 어디를 다치셨어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소영의 상처를 걱정하였다. 소영은 왼쪽 어깨를 가리켰다. "이쪽이다." 백리빙은 그가 가리키는 왼쪽 어깨를 한참 동안 살피더니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옷을 벗으세요. 내가 몸에 박힌 독침을 뽑아 주겠어요." 소영은 어쩔 줄을 몰라 잠시 망설였다. 남녀는 엄연히 유별인데 어찌 옷을 벗는 추태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품속에서 조그만 비수를 꺼내어 백리빙에게 건네 주었다. "빙아, 그것으로 내 어깨쪽의 옷을 찟어라." 백리빙은 그 순간 짚이는 생각이 있어 생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움직였 다. 괴노인이 날질 자오투골 암기는 보통 바늘 정도만했으며 녹색을 띠고 있었다. 소영은 고개를 돌려 어깨의 상처를 보았다. 독침이 박혀 있는 부분의 살은 벌써 시푸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빙아, 그 침엔 극독이 묻어 있으니 조심하여라." 백리빙은 침묵을 지켰다. 독침은 살 속으로 깊이 박힌 게 아니어서 뽑아내기가 수월하였다. 백리빙은 엄지손가락과 가운 데손가락으로 살그머니 독침을 잡고는 재빠르게 뽑아냈다. 독침은 벌써 색이 변해 있었다. 백리빙은 뽑아낸 독침을 버리지 않고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오빠, 상대는 이런 극독의 침을 사용할 줄 아는 것으로 보아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아요. 더군 다나 이런 것은 강호에서 못 보던 것이니 분명 그가 만들어낸 것일 거예요. 그의 악랄한 수법을 혼내 주려면 이 독침을 도로 그에게 찔러보면 어떨까요? 자기가 만든 독침에 스스로 목숨을 잃는 다는 것도....." 이때 등뒤에서 나지막하게 "응!"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일시에 눈길을 돌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기절해 있던 괴노인이 언제 깨어났는지 백리빙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는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괴노인은 혈도를 찍혔기 때문에 말도 못하고 또한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의 이마에 는 공포로 인한 땀이 촉촉히 배어났다. 소영은 두려움에 입술까지 떨고 있는 괴노인을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저 노인은 나를 죽이려 하였지만 막상 저런 모양을 보고 모른 체할 수는 없다.' 그는 손을 흔들어 그녀의 손을 멈추게 하였다. "그럴 필요없다. 어저 그 독침이나 버려라." "좋아요. 그럼 오빠의 상처가 완쾌될 때까지 참기로 하지요." 소영은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백리빙을 대견하게 생각하였다. '역시 빙아는 영리한 동생이야. 언젠가는 나도 훌룽한 오빠노릇을 해야 되겠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그녀가 준 해약의 효과를 알아볼 심산으로 다시 운기조식을 했다. 과연 자오 투골의 암독은 깨끗이 제거되었다. 왼쪽 어깨의 아픔도 없어져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은 느낌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소영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운기조식을 끝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괴노인에게로 다가가서는 "노인장, 만약 소리를 지르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면 용서를 않겠소." 하고는 그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괴노인은 심기가 지극하였다. 그는 혈도가 풀리자 암암리에 운 기조식을 해 보았다. "어? 이상하다. 내 몸은 조금도 독기에 중독된 것 같지가 않으니 ...저 조그만 계집은 분명 북해 빙백 독침이라고 말하였는데.....' 괴노인은 뜻밖의 일에 어리둥절하여 두 사람의 신색만 살피고 있었다. 소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귀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 정직하게 대답해 주시오. 이 골짜기에는 노인장 이외에 또 누가 있소?" 괴노인은 소영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 청년은 그리 악인은 아닌 것 갈군. 그러나 내가 소리를 지른다면 정말로 내 목숨을 빼앗을 지도 모르지.' 그는 낮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무엇을 말하라는 것이오?"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이 늙은이는 매우 교활하고 음흉스럽구나. 내가 정면으로 물어보더라도 그는 대답을 안할 것이 며 또한 대답을 한다 해도 거짓말을 할 것이다. 그러니 유인전술로써 그의 입을 열게 해야겠다.' 그는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노인장, 당신의 말대로 이 골짜기의 경계가 엄하다면 어째서 나와 빙동생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데 아무런 제지도 없었소? 그리고 이곳을 지키는 무림 고수들이 많다면 이렇게 당신이 곤경에 처 해 있는 데도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 거요? 혹시 그들은 모두 겁쟁이들이므로 우리들을 보자 도 망친 것이 아닐까요?" 괴노인은 눈썹을 곤두세우며 곧 말을 받았다. "두 분께서 어떻게 하여 이곳까지 들어왔는지를 지금까지 생각해 보아도 전연 이해가 가지 않는 군요. 만약에 두 분들이 이 골짜기 양쪽의 삼엄한 경계를 보시면 깜짝 놀랄 것이오. 공중을 나는 새도 우리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을 정도요." 소영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짐짓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인장은 거짓말도 잘하는구려." 괴노인은 이제 두 사람에게 말하는 투가 공손해졌다. "두 분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굳이 변명은 않겠소. 그러나 ....." 그는 무엇인가 아쉬운 생각이 든 것 같았다. 백리빙이 앞으로 나서며 "오빠, 그와 여러 말 하실 필요없어요. 그를 독침으로 한 번 찔러주면 거짓말을 더 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녀는 손을 뻗쳐 괴노인의 옷소매 속에서 독침을 찾아내어 무조건 그의 왼쪽 어깨를 찌르려 했 다. 제아무리 기지가 풍부하고 견식이 넓은 노인이라 해도 이렇게 겁없이 날뛰는 여자 앞에서는 어 쩔 수가 없었다. 괴노인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낭자, 잠깐만....."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우며 백리빙을 쳐다보았다. 백리빙은 어깨를 찌르려던 독침을 괴노인의 얼굴로 가져가 그의 얼굴을 독침으로 그으려 했다. 괴노인은 말은 할 수 있었지만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백리빙이 그어내리는 독침은 괴노인의 이마에서 뺨으로 그리고 코끝으로 옮겨갔다. "노인장, 앞으로 만약 한 마디 거짓말을 한다면 한 번 찌르고, 두 번이면 역시 두 번을 찌르겠 소." 괴노인은 입술을 가볍게 떨었다. "낭자께선 노부에게 무엇을 물으려 하오?" 백리빙은 무엇을 묻겠다고 생각한 바가 없었으므로 얼굴을 붉히며 소영에게 물었다. "오빠, 우리가 무엇을 물어야 돼요? 난 모르니 오빠가 물어보세요." 소영은 당황해 하는 그녀의 모양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빙아는 역시 철이 덜 들었구나." 이어서 그는 눈길을 돌려 괴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께서 제가 묻는 말에 거짓없이 대답하신다면 저를 죽이려던 잘못을 묻지 않겠소. 그리고 노인장의 생명도 보장하겠소." 괴노인은 한참 동안 소영을 쳐다보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는 이미 저 낭자의 북해빙백 독침을 맞았으니 죽음을 면키 어렵겠지요?" 소영은 고개를 돌려 백리빙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빙아, 북해빙백의 해약을 갖고 있느냐?" 백리빙은 빙그레 웃음을 띠우면서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나의 북해빙백에 독이 들어 있었다면 어찌 지금까지 그가 살아 있겠어요?" 괴노인은 벌써부터 그 침에는 독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짐짓 시간을 끌기 위하여 다시 물었 다. "북해빙백이라는 암기는 북해빙궁에서 제일 무서운 암기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소. 그것에 독이 없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백리빙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북해빙백은 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뉘어져 있소. 그런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것을 갖 고 시비를 따지려는 것이오. 정말 독이 들어 있는 독침을 보여 드리리까?" 그녀는 품속의 독침을 꺼내려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소영이 그녀의 손을 잡 았다. 소영은 음흉스런 노인을 당장 병신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아직 그에게서 이곳 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꾹 참았다. 소영이 말했다. "노인장, 먼저 묻겠소. 이 골짜기는 황량하고 매우 깊은데 여기에서 노인장은 무엇을 하고 있었 소?" 괴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여유를 주어도 그의 대답이 없자 돌연 백리 빙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그럼 어디....." 그녀는 말과 함께 독침을 괴노인의 손등에 찔렀다. 이번 자오투골의 독성은 예상 외로 강하여 독침에 찔린 손등은 금세 붉은 색을 띠었다. 괴노인은 안색이 창백해지며 눈은 휘둥그래졌다. 소영은 수중에 들고 있던 해약을 한 개 꺼내어 그에게 먹였다. 백리빙은 괴노인이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소리로 물었다. "오빠, 그 병 속엔 해약이 몇 알이나 남았어요?" "세 알 남았다." "그럼 저 노인장을 네 번 찌른다면 더 이상 구할 수 없겠네요." 괴노인은 한 번 손등에 맞은 독침의 경험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백리빙의 말을 전적으로 곧이들었 다. 백리빙은 그의 신색이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을 느끼고 그 기세를 이용하려고 다시 다그쳐 물었 다. "노인장, 어서 말하지 않겠소? 다시 독침 맛을 보여 드리리까?" 괴노인은 한숨을 내쉬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노부는 이곳에 보물을 찾으러 왔소." 소영은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무슨 보물이오?" 백리빙이 미리 괴노인에게 엄포를 놓았다. "노인장이 이번에도 대답이 없으면 독침으로 그의 입술을 찔러야 되겠어요." 괴노인은 백리빙을 쏘아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왕 말을 하게 됐으니 거짓말은 않겠소. 무슨 보물인지는 몰라도 무림 선배의 유물이오." 소영은 그의 대답을 듣고 내심 실소를 했다. '이 늙은이는 끝까지 교활하게 행동하는군. 지금 말하는 것은 거짓말은 아니지만 사실 그보다도 더한 비밀이 있을 게다.' 그는 이쪽에서 직접 부딪쳐 보리라 생각했다. "노인장이 찾고 있는 선배의 유물은 금궁이 아니오?" 괴노인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소영은 조금 전에 연못에 비친, 뱀과 독수리를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은 하였다. '아, 이곳이 바로 금궁이구나. 그러나 내가 그 열쇠와 그림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딴 사람이 이 곳을 알았을까.' 내심 이런 생각을 하였으나 그것을 괴노인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소영은 괴노인의 마음을 건드 리지 않으려고 말을 부드럽게 하였다. "노인장께선 이 골짜기에서 몇 년을 살았소?" "오 년 가까이 되오." 소영은 깜짝 놀랐다. '오 년이라...그럼 그는 금궁을 찾았을 게 아닌가?' "오 년이라면 금궁을 찾고도 남을 세월인데....." 괴노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다만 그 금궁이 이 골짜기에 있다는 것만 알았지 자세한 장소는 모르고 있소." "그렇다면 오 년을 찾았어도 못 찾았단 말이오?" 괴노인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금궁을 찾았다면 이런 산골짜기에 머무르고 있겠소?" 소영은 무엇인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 괴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의 말씀을 들으면 이 골짜기에는 많은 무림 인물들이 모여 있을 것 같은데?" "그렇소. 이곳에는 노부 이외에 많은 고수들이 있소." "노인장께선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내 뒤에 나타나 극독의 암기를 격중시켰으니 그 무공이 매우 높은 것 같소." 괴노인은 쓴웃음을 입가에 띠웠다. "과분한 칭찬이오." "그러나 아깝게도 노인장께서는 어떤 사람의 종노릇을 하고 있구려." 소영의 말에는 상대를 비꼬는 뜻이 들어 있었다. 괴노인은 자기도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려다 옆에 서 있는 백리빙이 두려워서 억지로 참았다. 소영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제가 보기로는 노인장은 이곳에서 무공을 닦은 것 같지가 않소이다." "노부는 사대 감공(監工) 중의 하나로....." 괴노인은 말하지 못할 비밀을 스스로 밝혔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그동안 말이 없던 백리빙이 앞으로 나서며 냉랭하게 물었다. "노인장, 당신은 이곳에서 무슨 일을 벌여 놓았소? 당신은 이곳의 감공으로 있었던 것 같은 데....." 괴노인은 백리빙의 비위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우린 이 골짜기에서 금궁을 찾고 있소." "노인장은 감독이라는 직책이지만 여기에 고용된 인부는 몇 명이나 되오?" "원래 이곳에 이백 명이 고용되었는데 지금 백여 명뿐이오." 소영은 백리빙이 위압적으로 괴노인을 몰아쳐 이곳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을 보고 내심 폭소를 터뜨렸다. '저 노인은 비록 교활하고 견식이 풍부하지만 조그만 여자에게 맥을 못추고 고분고분 대답을 하 는군.' 백리빙은 말끝마다 수중에 들고 있는 독침을 괴노인에게 들이대었다. "어찌 되어 백 명이나 줄어들었소?" "그들은 모두 죽었소." 소영은 괴노인이 거짓없이 그녀가 묻는 것을 모두 대답하는 것을 보고 은연중 괴노인의 정체가 궁금하여졌다. 그는 전음지술로써 백리빙에게 속삭였다. "빙아, 그의 이름을 물어보아라." 백리빙은 눈길을 돌려 소영을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예, 오빠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녀의 웃음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노인장의 대명은 어찌 되시오? 그리고 강호에서는 어떠한 별호를 쓰고 계시오?" 108. 호랑이굴로 찾아 들어가다 괴노인은 다년간 강호에서 명성을 떨쳐 온 터인데, 오늘 뜻하지 않게 조그만 계집에게 창피를 당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만약 훗날 이 소문이 강호에 떠돈다면 나는 무슨 낯으로 동도들을 만날까!'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왼쪽 뺨이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아! 또 독침을 찔렸나 보다.' 백리빙은 옥병을 열어 한 알의 해약을 꺼내 들었다. "노인장께서 훗날의 미명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소. 다만 이곳에는 오빠와 나뿐이니 노인장이 거룩한 죽음을 하였다고 알아줄 사람도 없소. 우리는 강호에 나가 당신의 죽 음을 헛된 소문으로써 악인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러자 괴노인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급히 말을 꺼냈다. "좋소. 말하리다. 노부의 이름은 반룡(潘龍)이라고 하오. 강호에서는 자오판(子午判)이라고 일컬 었지요." 백리빙은 옥병 속에서 해약을 한 개 꺼내어 반룡에게 먹이고 나머지 두 알은 버렸다. 반룡은 눈 이 휘둥그래지며 백리빙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백리빙은 땅에 떨어진 해약을 발로 못 쓰게 만들고는 "이건 너무 귀찮군. 당신은 최후의 일침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하면서 표정을 엄숙하게 바꾸고 다그쳐 물었다. "골짜기 속에 백 명이 남아 있다면 어째서 아무도 보이지 않소? 당신네들은 이곳에서 얼마 동안 을 일해 왔으며 무슨 보물을 찾으려는지? 만약 한 마디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살아 남을 생각을 하지 마시오. 우리는 꼭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당신이 알아서 대답하시오." 반룡은 그녀의 수중에서 번뜩이는 독침을 보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일을 한 지는 사 년이 되었소. 일단 이 골짜기 속으로 들어온 일꾼들은 죽기 전에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오. 백여 명 일꾼들은 모두 굴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 을 거요. 그들은 세상의 이목을 피하여 낮에는 잠자고 밤에만 일을 하오." 백리빙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세 명의 감공은 무공이 어떠하오?" "그들대로 특색 있는 무공을 지니고 있소." "그럼 당신들을 이렇게 시키고 있는 인물은 누구요?" 반룡은 한 마디로 대답했다. "심목풍!" 소영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하였다. '그 심목풍은 과연 무서운 놈이로군. 뜻밖에 금궁의 장소를 알아 내어 암암리에 찾고 있었구나. 사 년 전이라면.....' 이때, 백리빙이 입을 열어 그의 다음 생각을 막아 버렸다. "오빠, 또 물어볼 것이 있소?"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반룡에게 시선을 돌렸다. "노인장, 이제부터는 반형이라 부르겠소." 반룡이 빙그레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반형, 이 골짜기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세 명의 감공들은 또 어느 곳에 있 는지요?" 반룡은 힐끗 백리빙을 쳐다보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양쪽 절벽에는 이미 수많은 동굴을 뚫어 놓았으며 일꾼들은 그곳에서 쉬고 있을 것이오." "반형의 이야기로는 이곳의 경계가 삼엄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당신을 몇 시간이나 붙잡고 있는 데도 어째서 당신을 찾지 않는 거요?" 반룡은 흐뭇한 미소를 갑자기 쓴웃음으로 바꾸었다. "사 년 동안 이곳에는 조그마한 사고도 없었소. 그러므로 이곳의 경계는 조금 소홀하지요. 그러 나 골짜기의 양쪽 입구는 개미도 못 들어올 정도로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소. 두 분이 만약 골짜 기 입구로 들어왔다면 틀림없이 완강한 제지를 받았을 것이오. 더군다나 노부에게도 그 사실이 알려졌을 터인데....." 소영은 은연중 상대를 골려주고 싶은 짓궂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멀쩡히 골짜기로 들어오지 않았소. 우리가 걸어 들어왔지 새처럼 날아왔 겠소?" "두 분이 양쪽 절벽 사이로 내려왔다면 혹시 우리들이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백리빙이 수다를 떨며 반룡의 말을 가로챘다. "당신은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우리야 어디로 들어왔든 이제 그것을 논할 필요가 없 지 않소?" 그녀는 이어서 다시 소영에게 물었다. "오빠, 또 물을 것이 없어요?" 소영은 양쪽 절벽을 유심히 살피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 명의 감공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또 백여 명의 일꾼들은 어느 곳에서 데리고 왔소?" "이 골짜기의 일은 대단히 위험하여 보통 사람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하오. 그러므로 이곳의 일 꾼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기초실력의 무공은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오. 그래서 그동안 백 명이 죽 었지만 그것을 보충하기가 매우 힘드오. 일꾼들 중에는 무림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던 인물도 있 소. 그리고 세 명의 감공은 지금 삼호 동굴에 있을 것이오." "그럼 무슨 방법을 써야 들키지 않고 세 명의 감공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나요?" 반룡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것은 말할 수 없소." 그러자 백리빙이 성난 표정으로 수중의 독침을 반룡의 코 앞에 들이대고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오빠, 그가 정 말을 않겠다면 뒷날의 화근을 없애는 뜻에서 아주 죽여 버립시다." 반룡은 그녀의 말이 절대 거짓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녀와 몇 번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괴팍 한 성격임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녀는 정말로 죽일 것같이 서둘렀다. 반룡은 그녀의 독침이 움직이기 전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하오. 그러나 두 분이 그것을 믿지 않을 거요." 소영은 눈에 광채를 띠며 그에게 바싹 다가섰다. "어디 말씀이나 해 보시오." 반룡은 눈길을 돌려 주위를 훑어보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골짜기의 일꾼들은 사개 조로 나뉘어져 있어 노부까지 포함한 네 명의 감공이 각 조의 책임 자로 있소. 일개 조가 오십이 명씩이었는데 사 년이 지나는 동안 다치고 앓아 목숨을 잃은 사람 이 근 백여 명에 이르렀소. 그래서 노부의 조도 지금은 사십 명뿐이오. 그들은 이곳에서 오래 지 냈고 숫자가 적은 관계로 서로가 상대를 잘 알고 있소. 만약 낯선 사람이 한 명만 끼여도 대번에 알 수 있다는 것이오." 반룡의 이야기는 아주 세밀한 일까지 들추어냈다. "그러나 한 가지, 서로 다른 조의 일꾼들은 그동안 별로 접촉이 없었으므로 자세히는 상대를 알 지 못할 것이오. 두 분이 골짜기에서 자유로이 행동을 하려면 일꾼으로 변장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오." 그는 소영과 백리빙을 쳐다보며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두 분께서 노부를 믿고 이 자리에서 놓아 준다면 노부가 두 벌의 작업복을 가지고 오겠소. 두 분은 노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오." 소영은 잠시 궁리한 끝에 속으로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눈을 반짝였다. "우리가 노부를 어떻게 믿겠소?" "이것은 모두 두 분을 위한 노부의 방법이오. 두 분께서 노부를 믿지 못한다면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소?" 반룡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응시하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우리 네 명의 감공들은 차례로 골짜기 입구를 감시하며 이곳을 빠져 도망하려는 일꾼들을 붙잡 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곳에 침입하려는 적을 제지하는 것이오. 다행히 지금은 노부의 시간이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다음 감공이 나와 노부가 없는 것을 보고 이곳을 샅샅이 뒤질 것이오. 그렇 게 되면 두 분은 꼼짝없이 그들에게 들키게 되고 행동에 지장을 받을 것이오." 백리빙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이곳에서 풀려 나간다면 즉시 신호를 보내 우리들을 잡으려 할 것이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이겠소." 반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장부의 일언은 중천금이니 믿어 주시오. 한 번 당신들과 약속한 이상 다시 적의를 품지 않겠소." 소영과 백리빙은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다다라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으나 별로 신통한 방안이 서 지 않았다. 얼마 후, 백리빙이 얼굴 가득히 희색을 보이며, 반룡이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소영에게 말했 다. "오빠,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어요. 만약 그가 우리를 배반한다면 그에게 그 대가를 줄 수 있는 묘수가 있단 말이에요." 소영도 그녀의 뜻을 눈치채고 진지한 태도로 반문했다. "무슨 방법인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상대의 혈을 찌르는 것과 비슷한 무공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것은 혈도를 찍는 것과는 달라 한쪽 혈도를 찌르면 다른 한쪽의 혈도를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에요. 아버지의 말씀으로는 그런 무공은 북해의 독문 수법이기 때문에 강호의 어느 누구라도 알고 있지 않대요. 한쪽의 혈도를 찍어 놓고 반대쪽의 혈도를 풀어준다면 그 사람은 행동하는데 조금도 지장이 없다 고 하셨어요. 그러나 혈도를 찍힌 지 열두 시간이 지나도록 그것을 풀지 않으면 그곳의 피가 뭉 쳐 점차로 심장에까지 파고 들어간대요." 반룡은 두려움에 질려 눈을 크게 뜨고 백리빙의 앵두 같은 입술만 쳐다보았다. "그렇게 되면 칠 일 만에 그 사람은 죽고 만대요. 더군다나 칠 일 동안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더 심하다고 하셨어요." 반룡은 날카롭게 백리빙을 쏘아보며 냉랭히 말을 꺼냈다. "만약 노부가 두 분을 해칠 마음이 있다면 열두 시간 동안 참았다가 혈도를 푼 다음 손을 쓸 수 도 있지 않소? 그러나 노부는 열두 시간 안에는 꼼짝 못할 게 아니오?" 백리빙은 무서운 표정으로 반룡의 말을 반박했다. "그럴 기회가 있을 것 같소? 당신은 열두 시간이 되면 다른 한쪽의 혈도를 또 찍힌다는 것을 생 각지 못했나 보군요?" 소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속히 금궁을 보고 싶었다. '좋다. 반룡에게 속더라도 우선 그의 말대로 해 보자.' 그는 위험이 깃든 용단을 내렸다. "빙아야, 너의 방법대로 하여 반형을 놓아 주어라." 백리빙은 잠시 주저하더니 곧 북해 독문의 수법을 펴 반룡의 왼쪽 팔목의 혈도를 찍었다. 그녀 는 조금도 주저없이 손을 움직여 다시 두 곳의 혈도를 풀어주며 말했다. "이제 당신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소. 우리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반 시간 이내에 돌아오시오. 만약 그동안에 당신이 안 돌아오면 당신이 우리와 맺은 약속을 어긴 것으로 단정하 겠소." 반룡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두어 번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는 몇 시간 만에 자유로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분노보다 기쁨이 앞선 표정이었다. 반룡은 눈길을 돌려 두 사람을 잠시 쳐다보고는 쏜살같이 숲 속으로 사라졌다. 백리빙은 그가 숲 속으로 사라지자 격분한 표정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보기에는 그가 약속을 어기고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괜히 그의 말을 믿고....." 소영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빙아, 이왕 엎지른 물이니 이제 어찌하겠느냐? 이제는 적을 맞아 싸울 준비나 하자." 백리빙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 어리광을 부리듯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 "호호호...오랫동안 싸움을 못해 보았는데 다행히 오늘은 신나게싸워 보겠네요." 두 사람은 만약을 위하여 사방에서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다행히, 천연적으로 많은 바위가 돌출해 있어 몸을 숨기기에는 아주 십상이었다. 긴장된 시간이 얼마쯤 흐르자 과연 반룡은 자신의 약속을 어김 없이 지켰다. 그는 두 벌의 작업 복을 내어놓으며 다급히 말을 꺼냈다. "자, 이것을 입으시고 어서 얼굴에 검정을 칠하시오. 그리고 낭자는 머리를 올려 남장으로 하시 오." 백리빙은 바위 뒤로 올라가 머리를 틀어 올려 변장하고 반룡이 내 준 작업복을 입었다. 그녀는 몸집이 작기 때문에 남자가 입는 작업복은 너무나 컸다. 더군다나 얼굴에 검정칠을 한 모습은 마 치 작은 거지의 꼴이었다. 소영은 웃음보다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더 앞섰다. "빙아, 미안하다. 너까지 고생을 시키는구나." 백리빙은 방그레 웃음을 띠웠다. "괜찮아요. 다만 오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어오." 그녀의 몇 마디 말은 소영을 크게 감동시켜 소영이 막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반룡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낭자의 이는 너무 희니 될 수 있는 한 웃지를 마시오." 백리빙은 발끈 성을 내며 냉랭하게 소리쳤다. "나와 오빠는 당신의 동도가 아니니 말을 삼가시오." 반룡은 미간을 찡그렸다. "두 분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하는 말이니 너무 허물치는 마시오." 백리빙이 앞으로 썩 나서며 다음 말을 꺼내려는데 소영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렸다. "빙아야, 그의 말이 옳다." 반룡은 빙그레 웃으며 소영에게 포권을 했다. "역시 사내대장부 간에는 서로 통하는 것이 있구료. 어서 갑시다." 라는 말과 함께 몸을 날려 숲 속으로 달려갔다. 소영은 그의 뒤를 따르며 품속에서 천년 묵은 교피 장갑을 꺼내어 꼈다. 그는 반룡의 뒤를 바짝 따르며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사정없이 필살의 일격을 보낼 결심이었다. 반룡은 두 사람을 데리고 오십여 장이나 달려 어느 절벽 밑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절벽은 감 히 올라가거나 내려올 엄두도 못 낼 만큼 깎아지른 듯한 곳이었다. 반룡은 잠시 훑어보고는 어느 한쪽의 돌을 밀어냈다. 뜻밖에 돌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소영과 백리빙은 선뜻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것이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아심 때문이었다. 그 석실 안에는 아무렇게나 뒹굴며 잠을 자고 있는 삼십여 명의 일꾼 들이 눈에 띄었다. 소영은 잠자고 있는 그들을 일일이 훑어보고는 내심 크게 걱정을 했다. '나는 다 같은 남자이니까 이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있지만 빙아는 여자로써 어떻게...그러나 지 금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 반룡은 풍부한 식견으로 소영의 안색을 보고 대뜸 모든 것을 눈치챘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써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낭자의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시오. 이 일꾼들은 수 년 동안 이 골짜기에서 생활하며 부득이한 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혹심한 노동을 하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항상 기진하여 일만 끝나면 이렇 게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게 되오. 이들이 깨어나려면 아직도 반나절은 더 있어야 하오." 소영은 그들에게 무한한 동정심이 생겨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형, 이 사람들은 어째서 이런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오?" "그들은 자유를 선택할 능력이 없소이다. 그들이 죽기 전에는 이곳을 나가지 못하며 또한 도망 도 못 가오."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심목풍은 금궁의 열쇠를 얻지 못했을 텐데 어찌 이곳을 알았을까? 더군다나 이백여 명이나 되 는 사람을 골짜기로 집어 넣어 사 년 동안이나 혹사시켰으니 그의 악랄한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 겠구나. 심목풍은 사 년이나 금궁을 못 찾았는 데도 조금도 굽히지 않는구나.' 그가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백리빙이 낮은 음성이지만 힘을 주어 말했다. "오빠와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오빠는 나 때문에 조금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어 요." 그녀는 소영의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소영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소영은 회심의 미소로써 그녀 를 쳐다보았다. 백리빙은 수줍음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소영의 시선을 피했다. 두 사람의 이런 모양을 보고 있던 반룡이 빙그레 웃음을 띠며 소영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노부는 여기에서 헤어지겠소이다. 두 분께선 어디 자리를 잡고 앉아 계십시오." 그는 두 사람에게 구석진 자리를 가리키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전과 같이 돌문을 닫아 버 렸다. 그러자 석실 안은 한 치의 눈앞도 분별할 수 없게 캄캄해졌다. 이들은 너무나 잠에 지쳐 불을 켜 놓지도 않았다. 소영은 조금 전에 보아 두었던 구석진 자리로 백리빙을 데리고 갔다. 그곳은 요행히 마른 풀이 깔려 있어 몸을 눕히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백리빙이 먼저 귓속말로 입을 열었다. "오빠, 무슨 수를 써서든지 이 사람들을 구해 주어야겠어요."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네 명의 감공만 죽이면 될 것이 아니냐?" "오빠도 악을 보면 참지를 못한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실감하였어요. 우선 하룻동안 이곳의 자세 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해요."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앞으로의 계략을 짜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영과 백리빙은 돌벽에 기대 선 채 깜빡 잠이 들었다. 소영은 잠결에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것을 느끼고 번쩍 눈을 떴다. ― 적인가? 그는 적진 깊숙이 호랑이굴에 들어온 것 같은 불안한 마음으로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부쩍 신경 을 곤두세웠다. 그 찬바람은 반룡이 석실 문을 열었기 때문에 들어온 것이었다. 반룡은 양쪽 손에 등불을 밝혀 들고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왼쪽 사람은 파란 장삼을 입고 검은 수염을 가슴에까지 기른 중년의 인물이었다. 그는 수중에 금테를 두른 조그만 상자를 소중히 들고 있었다. 소영은 그 금상자를 보고 무척 낯익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디서 보았더라.....?' 반룡이 들고 있던 등불이 차츰 위로 올라가자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외쳤다. '앗! 저것은.....' 반룡의 뒤를 따라 들어온 두 사람은 주조룡과 우문한도였다. 소영은 옆에 있는 백리빙의 손목을 살짝 꼬집어 그녀의 잠을 깨웠다. 백리빙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무의식중에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소영은 그녀의 손을 잡아 다시 제자리로 앉히며 전음입밀로써 말을 전했다. "빙아, 그대로 있거라. 지금 백화산장의 이장주로 있는 주조룡과 그 한패인 우문한도가 이곳에 들어왔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처럼 벽에 기대어 잠든 척했다. 소영은 눈을 실낱같이 가늘게 뜨고 그들의 행동을 엿보았다. 주조룡과 우문한도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와 잠자고 있는 일꾼들을 지나는 눈길로 훑어보았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서로 가벼운 손짓을 해 가며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소영은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만일의 일에 만반의 대비를 했다. 그들이 두 사람에게 점점 가까이 오자 가느다랗게 말소리가 들렸다. 주조룡이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문형, 대장주께선 이 일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계시오. 또한 대장주는 제삼의 증거를 알아낸 후 틀림없이 이 골짜기에 금궁이 있다고 확신하였소. 그러나 아무리 이곳을 뒤져 보아도 금궁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였소." 우문한도는 가벼운 웃음을 띠웠다. "심대장주께서 수백 명의 무림 인물들을 이곳에 가두고 사 년 동안이나 산골짜기를 파헤쳐도 끝 내 금궁을 찾지 못하였단 말이오?" "그렇소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림 고수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재주깨나 있는 인물들 이오. 그런데도 아직 찾아내지를 못하였으니 금궁이 이곳에 없는 것도 같구려." 우문한도는 주위를 훑어보며 "이곳에 들어올 때 언뜻 보았지만 이 골짜기의 바위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것 같소. 그러니 이백 명이 아니라 만여 명이라도 이 골짜기를 파헤칠 수 없을 것이오." 하고는 눈길을 주조룡에게 모으고 다시 물었다. "이곳의 자세한 지도와 충분한 장비가 있소?" "모두 준비되어 있소. 대장주께서 우문형을 이곳으로 오시게 한 까닭도 바로 그것이오. 우문형의 도움을 얻자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주위를 훑어보고는 주조룡에게 물었다 "현재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몇 명이나 남았소?" 주조룡이 무어라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앞에 가던 반룡이 돌아보며 대답했다. "사 개 조를 모두 합하면 백이십 명 정도 됩니다." 우문한도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다시 반룡에게 물었다. "당신의 조에는 몇 명이나 남아 있소?" 반룡은 조금도 주저없이 대답했다. "삼십삼 명이오." 소영은 그의 말을 듣고 내심 존경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아! 반룡은 정말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로구나. 괜히 의심을 하여 혈도를 찔러 놓았으니...그가 처음에 우리에게 말할 때는 서른한 명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들을 포함시켜 대답을 하는 것으로 보 아.....' 이때, 우문한도가 다시 말을 꺼냈다. "당신은 조원 중에서 무공이 약간 높은 자를 두 명만 골라 주시오. 그들을 데리고 사방의 지형 을 좀 살펴봐야 되겠소." 소영는 그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에 잠겼다. '우문한도는 나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지만 나를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변장 을 하였으니 더욱 나를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조룡은 오랫동안 함께 지낸 까닭으로 나 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에게 정체를 드러내게 될 테니 나와 빙아는 나 가지 말아야 되겠다.' 반룡은 이런 소영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일꾼들을 살피더니 곧 그 중 두 명을 깨웠다. 우문한도는 그 두 명을 보더니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좀 점잖게 생긴 사람은 없소?" 반룡이 깨운 두 명은 모두가 우락부락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주조룡은 쏘는 듯한 눈길로 두루 훑어보더니 뜻밖에 소영과 백리빙을 가리켰다. "저 두 사람이 비교적 괜찮군. 두 사람을 깨워 보시오." 반룡은 할 수 없이 소영과 백리빙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게 긴장 되어 있었다. 소영은 백리빙의 손을 힘차게 쥐며 전음입밀로써 말했다. "빙아야, 조금도 당황하거나 눈치채일 행동은 하지 말아라. 우리들은 정체가 탄로나기 전에는 언 제까지나 이곳에서 땅을 파는 일꾼이다." 백리빙은 대답 대신 소영의 손목을 꽉 쥐었다. 반룡은 두 사람의 이름을 모르겠고, 설령 알고 있다 하여도 부를 수가 없어 그냥 되는 대로 불 렀다. "야, 일어나!" 그는 발길로 두 사람의 궁둥이를 찼다. 백리빙은 가슴속에서 불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사정이 그렇게 되었으므로 꾹 참았다. '어디 두고 보자. 네까짓 게 내 궁둥이를 차다니.....'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조룡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우문형, 이 두 사람은 제법 괜찮게 생겼구료. 다만 얼굴이 좀 더러울 뿐이지만 그것도 깨끗이 씻어내면 귀공자 같겠는 걸요." 소영과 백리빙은 간이 콩알만해졌다. 만약 이 자리에서 주조룡에게 정체가 탄로나는 날이면 지 금까지의 오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생명까지도 잃게 될 것이었다. 우문한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좋소. 그런대로 한번 써 보겠소." 백리빙은 또다시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네 이 털보야. 네까짓 게 뭔데 나에게 명령하겠다는 거냐? 너는 일개 훈장이지만 나는 공주란 말이다. 그런 것이 나를 써 보겠다고? 훗날 너를 사로잡아 내 종으로 삼겠다.' 반룡도 한 번 소영과 약속한 일이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두 사람을 부르지 않으려 했던 것이 다. 소영과 백리빙 그리고 반룡이 가슴을 죄면서 주조룡의 행동만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천만다행으 로 주조룡은 두 사람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소영과 백리빙이 아무 도 모르게 골짜기로 들어와 이렇게 일꾼 복장으로 변장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주조룡은 눈길을 돌려 우문한도에게 말했다. "우문형, 대장주께서는 너무도 조급하게 금궁을 찾으려고 삼 일 후에 직접 이곳으로 나오시겠다 고 하셨소. 그동안 우문형께서 무슨 희소식을 찾아내야 하오. 그래야 우리는 대장주를 뵈올 면목 이 생길 것이오." "지금은 이미 밤이 깊었으니 내일에나 지형을 살펴보겠소." 우문한도는 이같이 말을 하고는 눈길을 반룡에게로 돌렸다. "당신은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여 오늘밤은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시오." 반룡은 정중히 포권을 하고 대답했다. "명령대로 실행하겠소이다." 우문한도는 다시 눈길을 돌려 소영과 백리빙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얼굴의 때를 깨끗이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어라. 그리고 오늘 저녁은 편히 쉬고 내일 아침에 나에게로 오너라." 소영과 백리빙은 정중히 포권을 하며 큰소리로 말했다. "분부대로 시행하겠사옵니다." 우문한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주조룡이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반룡은 손짓으로 두 사람을 뒤따르게 하였다. 두 사람이 반룡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오니 벌써 해는 저물어 어두운 밤이 되었다. 반룡은 두 사람을 데리고 어디로인지 한참 동안 내려가더니 조금 전과 같은 석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조금 전의 석실과 모양은 비슷하였으나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반룡은 등불을 돌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두 분을 내일 쓰시겠다는 사람은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선기서여의 주인 우....." 소영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우문한도란 말이군요." 반룡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를 알고 있소?"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는 백화산장의 이장주 주조룡이 아니오?" 그러자 반룡은 안색이 크게 달라지며 물었다. "당신은.....?" "나 말이오? 그보다도 반형은 이 산골짜기에서 사 년 동안이나 묻혀 살았기 때문에 강호의 일을 잘 모를 것이오. 지금 강호에서는 커다란 변동이 있어 무림의 각 문, 각 파가 모두 힘을 합하여 백화산장을 뒤엎으려 하고 있소. 지금 심목풍이 급하게 금궁을 찾아내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오. 반형은 내 이름을 말해 주더라도 모를 것이므로 굳이 알려드리지 않겠소. 그러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동생이 언뜻 내 이름을 말한 것 같은데....." "좋소. 당신이 이름을 밝혀 주지 않겠다면 더 묻지 않겠소. 그러면 당신은 백화산장과 적이요, 친구요?" 소영은 백리빙을 힐끗 쳐다본 후 주저없이 대답했다. "적이오. 만약 내가 심목풍과 친구라면 어찌 이런 골짜기로 들어왔겠소?" 반룡은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신도 역시 금궁을 찾으려 하오?" "그렇소." "당신이 우문한도와 백화산장의 이장주를 알고 있으니 그들도 당신을 잘 알겠구료." 소영은 침묵을 지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룡은 쓴 입맛을 다시며 진지하게 물었다. "내일 우문한도의 말대로 두 분이 얼굴을 씻고 그들 앞에 나타나면 모든 것이 탄로나게 될 것이 아니겠소?" "우리는 반형의 말에 따르겠소." 반룡은 잠시 생각하고는 낮은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두 분이 이 골짜기에 잠입해 들어왔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면 두 분에게도 해가 되겠지만 노 부 또한 편안치 못할 것이오." "반형, 아마 주조룡은 나를 눈치채지 못하였을 것이오. 지금으로써는 그들에게 내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소." "유일한 방법은 두 분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것이오." 백리빙이 입을 열어 오랜만에 말참견을 했다. "당신이 그들에게 말을 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오." 반룡은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눈빛으로 백리빙을 쳐다보았다. "노부는 두 분을 위해 좋은 방안을 세워야 하며 또한 노부의 생사문제도 신중하게 고려해 봐야 되오." 소영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그에게 부탁했다. "반형이 만약 우리를 돕는다면 후일 꼭 보답하겠소." 반룡은 입을 열어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두 사람은 잔뜩 긴장된 눈빛으로 반룡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반룡은 한참 동안을 궁리하더니 비로소 무거운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변장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있소?" 소영은 백리빙을 힐끗 쳐다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없소. 변장이 정 필요하다면 검정으로라도 하면 되지 않겠소?" "두 분은 지금 인부들 틈에서 그들의 눈을 속일 수는 있어도 주조룡과 우문한도를 속이지는 못 할 것이오. 더군다나 그들은 공교롭게도 두 분을 지적하며 내일 지형을 살필 때 시중을 들라고 하지 않았소?" 백리빙이 오랜만에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반룡은 두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들은 백화산장과는 적이지만 나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 이왕 이들을 도와주고 있으니 끝까 지.....' 그는 소영에게 눈길을 보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노부가 옛날에 강호를 나다니면서 인피가면을 썼던 일이 있었소. 지금도 그것을 버리지 않고 보관중이니 사용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것이 꼭 한 개뿐이라 한 분은 못하게 될 것 같소." 소영은 만면에 희색을 띠었다. "됐소이다. 그럼 하나로 우선 나부터 변장하기로 하고 이 동생은 남장만 하기로 합시다. 그들은 나를 알고 있을 뿐이지 동생은 잘 모르니까....." 반룡은 고개를 끄덕이고 품속에서 인피가면을 꺼냈다. "이 가면을 쓰면 안색이 변하여 마치 병자와 같이 되오. 그리고 무의식중에 가면을 벗으면 안 되오. 이제 노부는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두 분을 도와주었소. 그러니 두 분께서 요령껏 그들의 눈 을 속여 서로 아무런 탈이 없게끔 하기 바라오." 그는 등불을 밑으로 내려 앞길을 비치면서 다음말을 이었다.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이곳에서 나갑시다. 두 분께서 내일 아침까지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안 내하겠소." 그러나 백리빙이 장난기어린 웃음으로 소영에게 어리광을 피웠다. "오빠, 지금 그 가면을 써 봐요. 오빠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 빨리 보고 싶어요." 소영은 주저없이 반룡에게서 받은 인피가면을 썼다. 백리빙은 그 모양을 보고 마치 어린애처럼 웃어젖혔다. "과연 병자 같군요. 아주 늙은 사람 같아요." 소영은 가면을 쓴 채 피식 웃었다. "그것 잘됐군. 우선 병자노릇이나 할까?"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반룡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 이제 나갑시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의심을 받게 되오." 소영은 그의 뒤를 따르려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다급히 그를 불렀다. "반형, 그동안 미안하였소. 지금 반형의 혈도를 풀어드리리다." 그리고는 백리빙에게 일렀다. "빙아야, 반형의 혈도를 풀어주도록 해라." 백리빙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소영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어 그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반룡은 의외의 일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노부를 놓아 주겠다는 것이오?" 소영은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반형의 성의에 저는 보답할 길이 없소. 그래서 혈도라도....." 반룡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과연 군자요." 그러나 백리빙이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로 말했다. "오빠, 어째서 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에요?" 소영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빙아야, 너는 강호에서 도의가 중하다는 것을 모르느냐? 반형이 우리에게 진실로 대해 주니 우 리도 그를 믿지 않을 수가 없지 않느냐. 반형은 의협심이 있는 분이야. 그가 이곳에서 감공으로 일하는 것도 필시 무슨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 백리빙은 그제서야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반룡은 두 사람을 데리고 얼마 전의 그 석실로 갔다. 하루 저녁은 빠르게 지났다. 날이 밝자마자 반룡이 두 사람을 찾아 백리빙이 남장으로 변장할 수 있는 물건들을 내주었다. 백리빙은 재빠르게 남장으로 변장하면서 소영에게 입을 열었다. "오빠, 우리는 정말로 우문한도의 명령을 받아야 되나요?" "그렇다." 마침 아침이라 잠에서 깨어난 인부들이 하나 둘 일어났다. 반룡은 다급하게 두 사람을 재촉하였다. "빨리 갑시다. 주이장주가 기다리고 있소." 두 사람은 인부들에게 눈치채이지 않게 태연히 석실을 나갔다. 반룡은 걸음을 옮기면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은 태연하게만 행동을 취하면 절대로 그들에게 발각되지는 않을 것이오." 이때 일행에게로 다급히 다가오는 두 명의 경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오십여 세 정도의 대한이었고 또 하나는 청색 장삼을 걸쳤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쪽 귀가 없는 노인이었다. 그는 소영과 백리빙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소영에게 시선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은 병에 걸린 것 같은데....." 반룡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등(鄧)형의 말씀이 옳소. 이 사람은 오랫동안 앓다가 며칠 전에 조금 나아졌소." 등이란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백리빙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오! 이 사람은 제법 용모가 준수하게 생겼군." "등형도 그렇게 보시오? 그러나 아깝게도 이장주께서 그를 먼저 택하셨으니...그렇지 않았다면 그를 등형의 하인으로 드리려고 하였는데....." 등가는 쓴웃음을 지었다. "군자는 남이 아끼는 것을 원치 않는 법이오. 그를 칭찬하는 것으로 보아 반형도 그를 아껴주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오?" 그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며 반룡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던 것 같소. 새로 들어온 인부요?" 반룡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나도 그들을 모르고 있는데 네가 모른다고 할 만도 하지.' "노부의 이 두 인부는 오랫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소. 저 사람은 몸이 아파서였고 또 한 사 람은 석실에 남아서 노부의 잔심부름을 하여 왔지요." "그랬었구료!"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경장을 한 대한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자, 빨리 갑시다. 주이장주께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실 것이오." 소영은 청의 대한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의 정체를 추측해 보았다. '이 대한은 분명 백화산장의 인물이로군. 주조룡을 따라 이곳까지 왔으니 예사 무공을 지닌 사 람은 아니겠지.' 이런 생각으로 백리빙에게 전음입밀로써 말했다. "빙아,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 만약에 경솔한 행동을 한다면 지금까지의 성과가 수포로 돌아가 게 된다." 백리빙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장한의 뒤를 따라 가며 골짜기의 자세한 지형을 눈여겨 보았다. 왜냐하면 골짜기의 지형 은 매우 험악하여 미리부터 눈에 익혀 두지 않으면 후에 곤란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얼마를 가자 다시 어제의 그 조그만 연못이 보였다. 낮에 보는 연못은 더없이 맑았으며 한 줄기 의 샘물은 여전히 거센 기세로 연못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연못의 서쪽 커다란 바위 위에는 언제부터인지 우문한도가 조그만 종이에 무엇을 그리고 있었 다. 소영은 가슴이 섬뜩했다. '주조룡은 이미 연못에 비친 독수리와 두 마리의 뱀을 본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연못 을 열심히 바라보지 않을 텐데 .....' 그러나 주조룡의 표정은 매우 심각하여 소영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이 금궁의 환상을 보지는 못 한 것 같았다. 반룡, 대한 그리고 한쪽 귀가 없는 노인 등은 그들 두 사람에게 대단한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들 뒤로 다가서서 감히 말도 못하고 허리만 굽히고 서 있었다. 약 반 시간 정도가 지나자 비로소 우문한도는 붓을 놓고 바위에서 내려왔다. 반룡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정중하게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우문선생께 인사 드리옵니다." 우문한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였소이다." 주조룡이 우문한도의 뒤를 따라 바위에서 내려서며 입을 열었다. "대장주께서 삼 일 내로 이곳에 오실 것이오. 그러니 전보다 더욱 경계를 강화하여 적의 침입을 막도록 하시오." 짝귀 노인이 말을 받았다. "이장주님,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곳의 경계는 삼엄하여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나는 새라 도 우리의 이목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오." 주조룡은 돌연 표정을 냉랭하게 바꾸었다. "지금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소. 요사이 강호에는 한 사람이 나타나 우리 백화산장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소. 더군다나 무림의 많은 문파가 그를 따르고 있으니 대단한 상대요." "어떤 인물인데 감히 백화산장에 도전을 하오?" "당신네들은 오랫동안 이곳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강호의 일을 잘 모르고 있는 것도 당연하오. 그 사람의 성은 소이며 이름은 영이오. 곧 소영이라 하오.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그가 지니고 있 는 무공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높아 심지어 대장주까지도 그를 경계하고 있소." 귀가 한쪽인 노인과 반룡은 깜짝 놀랐다. '나이도 어린 것이 대장주에게 도전하다니...과연 강호는 그동안많이 변했나 보군.'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심목풍의 지혜와 무공이 강호에서 으뜸이라 어느 누구도 그 를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룡이 의아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장주께선 그와 겨루어 보셨소?" "비록 정식으로 겨루지는 않았지만 수 차 짧은 대결을 하였소. 그 사람은 확실히 대장주와 자웅 을 겨룰 수 있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소....." 주조룡은 더 이상 말하면 심목풍의 위신을 손상시킬 것 같아 그 다음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화 제를 바꾸었다. "우리의 연락망에 의하면 그 소영이라는 인물도 무이산으로 들어왔다 하니 여러분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될 것이오." 반룡은 그 말을 듣고 내심으로 느끼는 것이 있어 소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혹시 저 사람이.....' 그는 짐짓 부드러운 표정으로 주조룡에게 입을 열었다. "이장주께서 선택하신 두 사람을 데리고 왔소이다." 109. 만사곡에 감춰진 비밀 주조룡은 시선을 돌려 소영과 백리빙을 힐끗 바라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저 사람도 병이 있소?" 반룡이 곧 대답했다. "병이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주조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좋소! 당신들은 가 보구료." 하고 말했다. 사 대 감공은 일제히 대답하고 돌아갔다. 반룡이 막 몸을 돌려 두어 걸음 걸어가자 돌연 주조룡이 다시 불러 세웠다. "반룡, 당신은 잠깐 남으시오." 반룡은 다시 몸을 돌려 되돌아 왔다. 주조룡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얼굴을 돌려 우문한도를 보며 말했다. "우문형, 무슨 단서라도 찾아내셨소?" 우문한도는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골짜기는 비록 매우 길지만 웅장하고 깊은 호수가 부근에 있소. 그런데 심대장주께서 그 중 심의 소재지를 찾아냈다는 것은 역시 그 재지가 비범함을 증명하는 것이오." 주조룡이 말을 받았다. "그러나 이백여 명의 건장한 인부들이 계속 수 년간을 일해 왔건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아 내지 못했습니다." 우문한도도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로써는 저 역시 확정을 지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골짜기 안을 완전히 조사해 본 후에야 비로소 단언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주조룡이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어찌 됐다는 것입니까?" 우문한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 한 가닥 분천(噴泉)은 이상한 점이 있소." 주조룡은 의아한 듯 물었다. "어디가 이상하다는 말씀이오?" 우문한도는 설명했다. "이 물줄기가 강력한 것으로 보아서는 이 분천은 틀림없이 하나의 큰 폭포였을 것이오. 이 산의 수맥은 역시 이곳에 모이는 것 같거늘 어찌 다만 한 갈래 샘줄기로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 소?" 주조룡이 급히 물었다. "우문형의 뜻은 그럼 이 분천이 인공으로 인해 제한된 것이란 말입니까?" "현재로써는 다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지 아주 단언을 내리기는 곤란합니다." 이렇게 말한 우문한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어 말했다.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있는데 이장주께 물어보겠소이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답하지요." 우문한도는 주조룡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심대장주께서는 이미 금궁의 열쇠를 얻었습니까?" 주조룡은 약간 망설이더니 곧이어 말했다. "만약 대장주께서 이미 금궁의 열쇠를 수중에 넣었다면 이렇게 수 년 간이란 세월을 소비해 가 며 산곡을 더듬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미심쩍은 듯이 말했다. "심대장주께서 금궁의 열쇠를 얻지 못했다면 어째서 그 금궁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 지요?" "상세한 내용은 저 역시 잘 모릅니다. 아마 대장주께서는 어떤 사람의 입을 통해 약간의 내용을 알아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대장주께서 아직 공력을 수련하고 있던 기간이었지만 친히 달려와서 두 차례나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대장주께서는 항상 용의주도하시므로 만약 무슨 증거를 찾아내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많은 인부들을 동원해 가면서 몇 년이나 계속하여 작업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조룡은 차근차근 말했다. "대장주께서는 두 번째 답사를 하신 후 곧 인부들을 이곳으로 보내기로 결심하셨소. 무슨 믿을 만한 징조를 찾아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백 명의 건장한 인부들이 이곳에서 수 년 동안 작업 을 계속했는 데도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기에 비로소 우문형을 모셔오게 된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골짜기의 형세는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이상한 곳이 없으나 웅기(雄氣)가 암암리에 숨겨져 있고 용맥이 은은히 잠복되어 있어 반드시 전문 지식을 갖춘 자가 아니면 쉽사리 찾아낼 수가 없 을 것입니다. 대장주께서 이곳에 인부를 보내신 것으로 보아 분명히 이 골짜기의 형세를 알아낸 것 같소." 주조룡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어쩐지 아무것도 알아차릴 수가 없군요." 우문한도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만약 제가 한두 군데 특이한 곳을 지적해 주면 이장주도 쉽사리 이상한 점을 느끼게 될 것입니 다." 소영은 한쪽에 서서 정신을 집중하여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우문한도는 스스로 선기서려의 주인이라 일컫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학식이 비범한 사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 재능을 가지고 뜻밖에도 심목풍과 어울려 스스로 마도에 투신하였구나.'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유심히 우문한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우문한도는 오른손을 들어 그 한 갈래 분천의 위쪽 암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장주, 자세히 보십시오. 저 샘의 암벽에 무슨 이상한 곳이 없습니까?" 소영 역시 슬그머니 그가 지적하는 암벽을 바라보았다. 그 위는 미끄러운 암벽이었고 색은 검붉 은 빛을 띠어 지극히 눈에 선명했다. 그러나 그밖에 별로 이상한 점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주조룡이 입을 열었다. "우문형, 저 암벽은 색채가 눈에 산뜻한 것 외에는 별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군요."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옳지, 너도 발견해 내지 못하는구나.' 주조룡의 말을 듣자 우문한도가 다시 깨우쳐 주었다. "이장주, 조금만 더 유심히 살펴보시오. 저 암벽은 이 골짜기 속의 다른 암벽과는 틀리지 않습니 까?" 소영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이렇게 느꼈다. '내 어찌 이처럼 무능하단 말인가? 이렇게 간단한 것도 발견해 내지 못하다니.....' 주조룡도 비로소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소?" 그의 말투는 우문한도의 해설에 대해 지극히 언짢은 듯한 태도였다. 소영은 그것을 보자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조룡은 나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발견해 내지 못했는 데도 이상하게 태연한 척하는구나.' 우문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은 보기엔 간단하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아직 저 암벽 위로 올라가 자세 히 관찰해 보지는 않았으나 대략은 내 추측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저 암벽의 겉부분은 막대한 변 화가 있었소이다." "무슨 변화입니까?" "이것도 역시 학식에 관한 문제지요. 이 골짜기의 바위는 대부분이 화강암에 속하며, 비록 그 질 이 견고하여 마치 쇠와 같이 단단하지만 만약 문맥(紋脈)을 찾아낸다면 채취하기 매우 순조로울 것입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 문맥을 식별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 이 방면의 전문가가 아 닌 이상 찾아내기가 몹시 힘들지요." 하더니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다시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만약 저의 추측이 틀림없다면 몇 년 전에는 저 암벽이 이렇게 매끈하지 않고 울긋불긋한 큰 바 위가 돌출해 있었을 것이며 다른 곳의 암벽과 똑같았을 것이오." 주조룡은 스스로 총명한 채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우문형의 추측은 저 암벽에 돌출해 있던 큰 바위를 인공적으로 깎아냈단 말씀이군요. 그렇지요?" 우문한도는 약간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만약 저 암벽에 돌출했던 바위가 저절로 깎여 나갔다면 약간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곧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암벽 위에 돌출한 바위를 인공으로 깎아 없애 버렸다면 오 히려 쉽사리 발견할 수 없지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손가락으로 낭떠러지 밑에 있는 큰 바위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저 절벽에 돌출한 바위가 인공으로 깎여 떨어졌다면 그 깎인 돌조각은 꼭 절벽 밑의 작은 호수 부근에 떨어졌을 것이오. 다만 제가 단언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깎은 사람이 이유가 있어 그랬는지 아니면 우연히 그랬는지 잘 모르며 또한 그 사람이 바위를 깎아내린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지요." 주조룡은 기쁜 듯이 말했다. "우문형의 말씀대로라면 그 금궁의 소재지는 바로 이 부근이겠군요." 우문한도는 대답했다. "그것은 감히 단언할 수가 없습니다. 이 골짜기 속에 만약 정말 금궁이 있다면 자신을 갖고 열 흘이나 보름 이내에 소재지를 찾아낼 수 있지만 이곳에 금궁이 없다면 설사 제가 몇 군데 이상한 곳을 지적해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조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문형의 말이 옳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주조룡은 우문한도의 박식함에 승복한 것이 분명했다. 우문한도는 돌연 고개를 돌려 백리빙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자네, 이리 와 보게." 백리빙은 그의 말대로 순순히 걸어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소영은 대뜸 진기를 끌어 올려 암암리에 경계를 하며 혹시나 백리빙이 입을 열면 정체가 탄로나 지 않을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백리빙은 줄곧 우문한도의 앞으로 다가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문한도는 손가락으로 그 한 갈래 분천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저 분천 옆에까지 기어 올라가 한 조각의 돌을 주워 오게." 백리빙은 묵묵히 몸을 돌려 암벽을 향해 걸어갔다. 소영은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빙아는 과연 똑똑하여 남자의 음성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는 것이리라.' 주조룡은 힐끗 반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사람은 어째서 나무토막같이 말도 할 줄 모르는가?" 반룡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골짜기 속에서 일을 해 오며 평상시에 별로 말을 하지 않아 이미 습성이 되었 습니다." 주조룡은 분부했다. "이 두 사람은 오늘부터 일을 시키지 말고 우문형의 시중을 들게 하게." 반룡은 다시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한 가닥의 분천은 땅에서 사 장 높이에 있었지만 그 사이에 돌들이 삐죽삐죽 나와 있어서 분 천까지 오르기에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백리빙의 경공으로 말한다면 단번에 솟구쳐 오를 수 있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일부러 천천히 기 어 올라갔다. 소영은 매우 흐뭇하게 여기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빙아의 응변하는 지혜는 실로 나보다 못하지 않구나.' 하며 시선을 돌려 우문한도를 보니 그는 유심히 백리빙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영은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알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혹시 우문한도는 빙아에게 의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사람은 과연 만만치 않은 인물 이군.' 백리빙은 그 한 줄기의 분천 옆에 이르렀다. 그녀는 곧 한 개의 돌을 집어 그것으로 돌출된 바 위를 쪼개내어 다시 천천히 내려왔다. 그녀의 거동은 침착하여 시종 태연자약했으므로 우문한도는 줄곧 유심히 주시하였지만 역시 아 무런 미심쩍은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백리빙은 한 조각의 돌을 들고 우문한도에게로 다가가서 공손히 건네 주었다. 우문한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 들고 손바닥에 올려 햇빛에 비춰 보며 자세히 관찰했다. 조그마한 한 조각의 돌이었으나 우문한도는 마치 보옥이나 명화를 감정하듯이 여러 번 되풀이해 보았다. 그러더니 얼마 후에 비로소 눈길을 돌려 주조룡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심대장주께서는 분명히 오십니까?" 주조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금명간에 도착할 것입니다." 우문한도가 말했다. "제게는 아직도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 확실히 증명만 된다면 아마 주형이나 대장주의 두터운 기대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산골짜기를 한 번 둘러 봐야겠습니다." 소영은 속으로 다시 이런 생각을 했다. '그의 말투를 들으니 마치 무언가 확신을 얻은 것 같은 걸.' 주조룡이 나서며 말했다. "제가 우문형을 모시고 둘러볼까요?" "괜찮소. 다만 누군가 한 사람이 길을 인도해 주면 됩니다.' 하더니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장주는 그들에게 명령하여 잠시 일을 멈추고 쉬도록 해 주십시오. 대장주께서 당도하신 후 다시 일을 시작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주조룡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그건....." 우문한도가 끝내 우겼다. "만일 대장주께서 나무라신다면 책임을 저에게 미시면 됩니다." "좋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소이다." 우문한도는 힐끗 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행동할 수가 있겠나?" 소영은 공손히 대답했다. "소인의 병세는 이미 회복되어 벌써부터 행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사옵니다." "좋아! 자네들 둘이 나를 따르게." 그러자 갑자기 반룡이 몸을 돌려 길을 막으며 말했다. "골짜기 속에는 장애가 많아 우문선생 혼자서 행동하시기에는 아마 불편한 점이 많으실 것입니 다." 우문한도는 힐끗 소영과 백리빙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 두 사람의 동행이 있는 걸." 반룡이 이어 대답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골짜기 속에서 일하는 인부인지라 골짜기를 수호하는 사람들은 이들을 알지 못하므로 이들은 연락의 암호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문한도는 반룡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당신이 길을 안내해 줘야겠군." "그렇습니다. 만약 이장주께서 선생과 동행을 하지 않으면 다만 사대 감공 중에서 한 사람을 선 출하여 선생의 길을 인도케 할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남구료." 반룡은 주조룡을 힐끗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주조룡의 승낙없이 감히 직접 그의 명령을 따를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조룡은 빙그레 웃었다. "우선생은 우리 백화산장의 귀빈으로서 이번에 들어오신 것도 역시 우리 백화산장을 위해서이니 이 황량한 골짜기에 자네들은 잘 모셔야 하네." 반룡은 포권을 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주조룡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우문형께서는 골짜기 속의 형세를 조사해 보십시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어서 가 보십시오." 하더니 우문한도는 시선을 반룡에게로 돌리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동쪽에서 들어왔으므로 이미 대략 그쪽의 형세를 훑어보았으니 당신은 이번에 나를 서 쪽으로 안내하여 그쪽의 형세를 좀 살펴보기로 합시다." 반룡은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하고 곧 맨 앞에 서서 걸어갔다. 우문한도는 금테를 두른 상자를 들고 반룡의 뒤를 바싹 따라갔 다. 소영은 눈짓을 하여 백리빙에게 우문한도의 뒤를 따르도록 하고 자기는 일 장 가량 떨어져서 뒤 따라 갔다. 그는 환자 같은 안색이었으므로 모르는 사람은 그의 몸이 좋지 않아 뒤떨어진 것으로 알고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소영의 마음속에 가장 염려되는 것은 혹시나 반룡이 도중에서 마음이 변해 약속을 저버리고 내 용을 주조룡과 우문한도에게 알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으므로 줄곧 반룡의 거동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러나 반룡의 거동이나 언사는 뜻밖에도 각별히 자기를 엄호해 주는 것이었다. 반룡은 앞장 서서 약 십여 장 들어가더니 산골짜기를 따라 북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산 모퉁이를 돌자마자, 골짜기 밑의 형세는 별안간 바뀌었다. 선뜻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허리까 지 올라오는 잡초에 덮인 골짜기가 수십 장 밖까지 뻗쳐 있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또 끝에 가서는 서쪽으로 꺾여 있었다. 소영은 언뜻 느끼는 바가 있어 암암리에 미소를 지었다. '은신하기에 적당한 곳이구나. 오늘밤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주이고를 불러와 이 잡초 속에 숨어 있게 한다면 훌륭한 협력자가 두 명 더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때 반룡의 음성이 앞에서 들려왔다. "우문선생, 이 골짜기의 기질은 굉장합니다. 그 층마다 모두 형세가 판이하게 다르지요. 그래서 저 산모퉁이를 돌면 골짜기의 밑은 곧 풀포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불모의 백사지올시다." 우문한도는 손에 들었던 상자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좋은 곳이군. 보아하니 내 생각이 틀림없겠군." 그는 느끼는 바가 있어 무심코 이렇게 내뱉았다. 그러나 소영은 그의 말을 듣고 말 속에 깃들어 있는 뜻을 알아차렸다. 소영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과연 적지 않은 책을 읽었군. 그 중에서도 지질학 방면에 대해서는 특히 견식이 넓 은 모양이다." 이 골짜기 속은 과연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층마다 그 지질이 모두 틀렸다. 포일천이 이 골짜기 를 선택하여 금궁을 건립하게 된 것은 확실히 목적이 있어서였던 것이다. 우문한도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상자를 열더니 붓과 종이를 꺼내 상자 뚜껑을 책상삼아 그려 내기 시작했다. 소영은 그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가까이 다가가면 그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다만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눈에 어렴풋이 보이는 바에 의하면 우문한도는 그 종이 위에다 작은 봉우리를 하나 그리더 니 그 밑에 몇 자 써 넣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우문한도는 비로소 몸을 일으켜 종이와 붓을 상자 속에 집어 넣더니 입 을 열었다. "이 길은 풀 사이로 통해 있지요?" 반룡이 대답했다. "이 잡초들은 비록 허리까지 덮을 만큼 깊지만 벌레와 독사들이 없어 아무런 위험도 없습니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당신이 앞장을 서시오" 그들이 수장이나 되는 깊은 숲 속을 헤치고 나가자 과연 경치는 다시 변하였다. 일망무제한 노 란 모래땅이 뻗쳐 있었다. 그 풍경은 마치 대사막의 경치를 연상케 했다. 다만 그 규모가 적을 뿐 이지― 소영은 속으로 '상상 외로 이 산골짜기는 변화가 심하구나.'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주위를 살펴보고 있을 때. 우문한도는 조그만 자루 하나를 꺼내더니 모 래를 두어 줌 집어 그 속에 넣으며 말했다. "이 모래길을 지나면 또 어떠한 경치가 나타나지요?" 반룡이 곧 대답했다. "이 황사(黃砂)길이 끝나면 흰 자갈밭이 나타납니다." "그 자갈밭을 지나면?" "다시 또 경치는 변해 푸른 잔디가 깔리고 산꽃이 만발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또 그 앞의 경치는?" "풀빛이 점점 퇴해 가며 곧장 막바지에 당도하게 되지요." "그 막바지에 또한 어떠한 경치가 있소?" "그곳에는 절벽이 길을 가로막아 산골짜기를 갈라 놓았습니다. 그 일면은 바로 무이산에서 유명 한 만사곡으로 통하지요." "만사곡이라니?" "그 골짜기 속에는 만 가지 뱀들이 운집하여 있는데, 그 형태가 각양 각색으로 괴상한 종류의 독을 지닌 뱀들이 우글거려 만사곡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두 덩어리의 자갈과 꽃 그리고 마른 풀 따위를 주워 오십시오." 반룡이 되물었다. "우문선생은 직접 가 보지 않으시렵니까?" 우문한도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일 다시 가 보겠소." 말을 끝내고 상자를 다시 내려 놓은 다음 정좌를 하고 앉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매우 피로한 듯한 모습이었다. 눈을 감은 그는 곧 선경(禪境)에 몰입한 듯했다. 반룡은 고개를 돌려 소영과 백리빙을 향해 말했다. "두 분은 우문선생을 잘 모셔야 하오." 하더니 몸을 돌려 우문한도의 부탁을 이행하러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소영은 천천히 우문한도의 뒤로 다가가며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만약 내가 이 사람을 죽이려 한다면 손을 들기만 하면 될 것이며, 또한 그를 굴복시켜 우 리 편으로 만드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매우 생명을 아끼는 사람이므로 절대 죽음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주조룡이 비록 이곳에 있지만 역시 저지 할 능력은 없다. 다만 힘드는 것은 그 심목풍이지. 그가 친히 이곳에 당도한 것인데 그의 지모와 견식은 모두 비범하여 필시 내정을 알아볼 것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생각을 해 몇 가지 방법을 강구해 보았으나 모두 적당치 않다고 느껴 졌다. 그러는 사이에 백리빙이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우문한도의 등을 찍었다. 소영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막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으며 또한 큰소리로 외쳐서 제지할 수 없 는 것이므로 재빨리 오른손을 뻗쳐 내력을 발출했다. 그래서 한 갈래의 장력을 몰아내어 백리빙 의 오른손을 급히 막았다. 백리빙은 장력이 밀려와 강력한 힘으로 자기의 오른장을 막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것이 소영의 제어인 것을 깨닫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소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암암리에 전음지술을 전개하여 말했다. "빙아, 그를 해쳐서는 안 돼!" 백리빙은 가볍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원래 한 가지의 계책이 있었다. 다만 지금의 처지에서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문한도는 이들 두 인부가 소영과 백리빙이 변장한 것임을 꿈에도 알 리가 없었고, 또한 자기 가 선경지경에 몰입한 사이에 하마터면 큰 변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추호도 몰랐을 것이다. 약 반 시진이 경과한 다음 반룡이 급히 돌아왔다. 그의 수중에는 산 꽃과 마른 풀 그리고 한 덩 어리의 흰 자갈이 들려 있었다. 소영은 그가 몸을 멈춘 후에도 여전히 숨을 가쁘게 헐떡이는 것을 보고 거리가 별로 가깝지 않 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반룡은 우문한도가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것을 보자 감히 말을 하여 방해를 하거나 놀라게 할 수가 없어 조용히 한쪽에 서서 그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동안이 지나갔다. 그러자 우문한도는 비로소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반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고했소!" 하더니 손을 내밀어 흰 자갈, 흰 산꽃, 마른 풀 등을 받아 상자 속에 집어 넣었다. 백리빙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무엇이든지 모두 저 나무상자 속에 넣는구나. 만약 수를 써서 그의 나무상자를 훔친 다면 그는 지팡이가 없는 손오공이 되겠군.' 그녀는 속으로 우문한도의 상자를 훔칠 생각을 하니 스스로 기뻐서 소영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 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자 가지런한 이빨이 드러났다. 소영은 대뜸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전음지술로써 말했다. "빙아. 자신의 신분을 잊지 마라!" 그러자 우문한도가 말했다. "반형, 제가 몇 가지 일을 물어보고 싶은데 가르쳐 주시겠소?" 반룡이 마치 놀란 참새처럼 황급히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말씀 낮추십시오. 우문선생의 말씀이라면 제가 알고 있는 한 무엇이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골짜기 속에서 몇 년 동안이나 일을 해 왔으며 심지어는 인부들의 절반이 지쳐 목숨을 잃었다니 그 공사야말로 매우 험난했겠군요?" 그가 묻는 것은 매우 교묘하여 속셈을 파악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눈치도 챌 수가 없 었다. 반룡은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대장주의 지시에 따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문한도가 다시 물었다. "대장주가 어떻게 지시를 하던가요?" "대장주께서는 네 곳의 산택을 선탑한 후 인부들을 나누어 이 공사를 시작하게 하였으며 골짜기 깊숙이 들어가며 일하게 하여 외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공사 진도는 어떻소?" "공사를 시작할 당시에는 그런대로 순조로웠으나 산벽은 갈수록 견고하여 쇠망치나 곡괭이로 산 벽을 때리면 불꽃만 일 뿐 떨어지는 것은 기껏해야 겨우 주먹만한 돌조각에 불과합니다." 우문한도는 이 말을 듣더니 가볍게 웃었다. "이 몇 개의 산봉우리는 모두 딱딱하기 그지없는 화강암이오. 만약 지질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견고한 암석을 뚫을 수가 없소." 반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우리는 몇 년이 걸렸어도 별로 진전을 보지 못했군요." 우문한도는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좋소. 우리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 매듭을 짓기로 합시다. 이후 제가 의문이 있을 때 반형의 가르침을 바라겠소." "별말씀을...우문선생의 질문이라면 저도 무엇이든 알고 있는 데 까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우문한도는 나무상자를 집어 들더니 몸을 돌려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 갔다. 반룡은 바싹 그의 뒤를 따랐으며 소영과 백리빙은 일부러 일 장 가량 떨어져서 뒤따랐다. 풀 속으로 들어섰을 때 소영은 전음지술을 이용하여 나직이 백리빙에게 말했다. "빙아, 중주이고는 지금 어디에 있지?" 백리빙이 나직이 대답했다. "내가 거처하고 있는 점방에 있어요." 소영이 다시 말했다. "오늘밤 안으로 너는 그 비밀 통로를 이용해서 산봉으로 올라가 그들에게 인부 차림으로 골짜기 안에 잠입하여 이 풀밭 속에 숨어 있도록 해라." 백리빙이 되물었다. "단문승은? "그 사람을 처리하는 것은 좀 곤란하구나. 우리는 그를 죽여 입을 봉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를 인연봉 꼭대기에 남겨 놓는다면 아마 심목풍의 부하들에게 잡혀갈 것이니 그가 만약 고문을 이겨내지 못해 우리의 행적을 불어 버린다면 일을 그르치고 만다." 백리빙은 자기의 의견을 표시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별로 좋은 사람 같지 않으니 아예 죽여 없애는 게 좋겠어요." "만약 우리가 그를 죽여 입을 봉해 버린다면 심목풍의 악독한 행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백리빙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참 깜빡 잊었군요. 오빠가 인자하시고 의리 있는 대영웅이라는 것을....." 소영이 입을 열어 다시 말을 하려는데 돌연 날카로운 각적소리가 들려왔다. 우문한도는 곧 발을 멈추고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요?" 반룡이 대답했다. "경계를 알리는 신호입니다." 우문한도는 의아한 듯 물었다. "경계를 알리는 신호라면 그럼 이 골짜기 속에 적이 들어왔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이 길게 뻗친 풀 속은 매우 깊어서 허리까지 덮었으므로 서로 가슴 위만 내놓고 있을 뿐이었다. 백리빙의 작은 몸은 풀 속에서 겨우 고개만 내밀 수 있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재빨리 굴려 주위 를 살폈다. 그 각적소리는 날카롭고 길게 세 번 들리더니 뚝 그쳤다. 반룡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세 번 울린 각적소리는 긴급을 알리는 것입니다. 적은 이미 산골짜기 안에 들어온 모양입니다." 우문한도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제발 소영이 아니래야 할 텐데....." 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앞으로 걸어갔다. 반룡은 고개를 돌려 소영과 백리빙을 보더니 바싹 우문한도의 뒤를 따라갔다. 백리빙은 암암리에 전음지술을 전개하여 소영에게 말했다. "오빠, 그들은 오빠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제발 오빠가 아니기를 바라고 있는데 만약 그 장본인이 바로 자기의 등뒤에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분명 놀라서 기절초풍을 하고 말 것이에요." 소영은 속으로 은근히 걱정을 했다. "만약 나타난 사람들이 중주이고이고 혹시 그들이 생포된다면 나로서는 구해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태껏 쌓아 온 공은 완전히 수포가 되고 말 것이다." 백리빙의 전음을 들은 소영은 속으로 선뜻 느끼는 바가 있어 만약 정세가 긴박하게 될 때에는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 이곳에 남아 있고 한 사람은 그들을 구할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 다. 그는 곧 입을 열었다. "빙아, 우문한도의 경각심은 매우 높다. 그러니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하여 우리의 신분을 탄로 시켜서는 안 된다." 말을 하는 사이에도 그들은 가슴까지 덮은 풀숲을 헤쳐 나갔다. 우문한도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시켜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반룡을 바라보며 물었 다. "각적소리가 이미 그쳤는데 정세는 어찌 되었을까요?" 반룡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마 강적이 굴복했나 봅니다." 우문한도가 되물었다. "이렇게 되면 이 골짜기도 이미 은밀하다고는 볼 수가 없지 않소?" 반룡은 대답했다. "수 년 동안 아무런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요 근래에 와서는 연속 일이 생기는군요." 그러자 우문한도가 곧 물었다. "그럼 이미 이 골짜기 속으로 잠입해 들어왔던 사람이 있었단 말이오?" 소영은 속으로 흠칫하고 긴장되어 암암리에 공력을 집중해서 경계했다. 만약 반룡이 피치 못해 자기의 신분을 폭로한다면 하는 수 없이 전광석화같이 방어할 틈을 주지 않고 그들을 굴복시킬 태세를 갖추었다. "전날 밤 이경쯤 두 사람이 골짜기 속으로 잠입해 왔으나 그 후 곧 우리에게 잡혀서 죽고 말았 지요." 우문한도가 다그쳐 물었다. "어떤 사람이었소?" "두 명의 이름없는 강호의 졸개들이었습니다." 우문한도는 다시 말했다. "소영이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상대하기가 별로 두렵지 않지 ....." 반룡은 무엇인가 물으려고 입을 씰룩거리더니 곧 자기의 신분을 깨닫고 가볍게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우문한도가 대뜸 물었다. "무슨 물어볼 말이라도 있소?" 반룡은 입을 열었다. "여쭈어 봐도 좋을는지요?" "괜찮소." "우문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소영은 매우 상대하기 힘든 인물인 것 같군요." 우문한도는 픽 웃었다. "상대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정말 무시무시한 인물이오. 심대장주도 비범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소영에게는 공포심을 느끼고 있소. 백화산장이 강호에서 얻은 위세는 모두 소영에 의해 파괴당해 버리고 현재 무림에서 각 효웅들이 감히 백화산장을 적대시하게 된 것도 대부분이 소영의 뒷받침 이 있기 때문이라오. 그 사람은 이미 무림에서 백화산장을 타도하려는 영도적인 인물이 되어 있 소." 반룡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우문선생은 소영을 본 일이 있습니까?" "물론 보았지요!" "우문선생께서는 소영의 생김새와 차림을 제게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후일 만약 제가 그를 만 나게 됐을 때 더 한층 조심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문한도는 천천히 말했다. "설명해 보았자 당신은 믿지 않을 것이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계속했다. "당신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직접 그런 일을 겪지 않고 남의 말만 들었다면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오." 반룡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문선생의 일언은 중천금이거늘 선생의 말씀을 제가 왜 믿지 않겠습니 까?" 우문한도는 힘있게 말했다. "여보, 우리 일찍 돌아갈 것 없이 이대로 이곳에서 이야기나 하다 갑시다." 하며 나무상자를 내려 놓고 편히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소영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소영이라는 자는 나이가 불과 이십 세도 되지 않았는데 무공이 매우 두려워할 정도지요." 반룡은 못 믿겠다는 듯 부인했다.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우문한도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강조했다. "틀림없이 그러하니 별로 이상해 할 것도 없소."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우문한도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년 전 강호에 처음으로 소영이 나타났지요. 그런데 그의 검술은 괴상할 뿐만 아니라 그 검 법은 마치 전광석화처럼 빨라 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그와 대진하는 데 있어서 무기를 미처 뽑기 도 전에 이미 그의 날랜 검법에 살해되고 말았지요. 그로 인해 그의 이름은 크게 강호에 알려졌 던 것이오." 그는 슬쩍 반룡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가 매우 열심히 듣고 있는 모습을 보자 계속했다. "그러나 일 년 전 강호엔 다시 두 번째의 소영이 나타났었소. 이 사람의 무공은 첫 번째 나타난 소영보다도 몇 배 더 강했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물론 두 사람 중의 하나는 가짜이겠지요? 아마 그 나중 사람은 앞서 나온 사람의 이름을 빌려 한번 행세를 해 보려고 했었나 보지요." 우문한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좋지만 첫 번에 나타난 소영은 검술이 비록 뛰어났지만 심대장주의 적수는 되지 못하 였소. 또한 그는 백화산장과 적대시할 마음은 없었소. 그러나 나중에 나타난 자는 그와는 달랐었 소. 비단 검술이 비범할 뿐만 아니라 무공은 무엇이든지 골고루 갖추어 권장, 경공, 암기, 지풍 등 어느 것 하나 탁월하게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소. 더욱이 이상한 것은 그는 먼저 백화산장과 교분을 맺어 한때는 백화산장의 삼장주노릇까지 했었소. 그러나 곧 백화산장을 이탈하여 적으로 변해 심대장주가 강호의 고수들을 모아 편성한 흑의위대(黑衣衛隊) 십팔 명의 쟁쟁한 사나이들도 그를 저지하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그에게 형편없이 패배했지요. 짧은 반 년 사이에 백화산장 의 위명은 크게 손상 되었소. 또한 소영의 출현으로 강호에는 백화산장에 반항하는 풍조가 생겼 던 것이오." 반룡은 놀란 듯이 물었다. "그렇게도 무섭습니까?" 우문한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만약 그가 그렇게 무섭지 않다면 심대장주가 나를 이곳까지 불러 도와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 을 것이며 하루 속히 금궁을 개척하는데 협력하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반룡은 궁금한 듯이 말했다. "선생께서는 여태껏 말씀하셨지만 소영의 생김새는 아직 말해 주시지 않는군요." 우문한도는 담담하게 웃으며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이는 이십에 미달했으며 우아하고 준수하게 생긴 얼굴에다 풍채가 의젓하며 당시 규방 소녀 들이 꿈 속에서 그리는 낭군의 화신같이 생겼지요. 그리고 만약 소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소년이 바로 절세의 무공을 몸에 지니고 명성을 강호에 떨치고 있는 인물이라고는 절대 생각지 못할 정도로 잘생겼지요." 반룡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마구 뛰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힐끗 소영을 쳐다보았다. 백리빙은 그처럼 소영을 칭찬하는 것을 들으니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히 우문한도는 눈치 채지 못했고 그녀 역시 재빨리 표정을 고쳤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다시 말했다. "반형, 당신이 만약 이런 일을 장주에게 묻는다면 그는 절대로 당신에게 말해 주지 않을 것이 오." 110. 제 삼의 잠입자 반룡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선생님께서 제게 베푸신 과분한 우의에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문한도는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보잘것 없는 몸은 이미 반형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소이다." 소영은 펀뜻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 사람은 항상 음험하며 생각이 매우 깊은데, 이렇게 그럴 듯하게 입을 놀려 반룡을 농락하는 것을 보니 무슨 속셈이 있는 것 같다.' 반룡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저는 우문선생의 과분한 우정을 받게 되니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영광이올시다." "별말씀을...우리 서로 거리낌없이 도의로써 교분을 맺읍시다." 하더니 잠시 주저한 끝에 다시 물었다. "저는 반형에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 반룡이 말을 받았다. "제가 아는 것은 무엇이나 숨김없이 말씀해 드리지요." "고맙소. 이 금궁의 일에 관해 반형은 얼마나 알고 계시오?" 반룡은 약간 망설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거기에 관해서 여태껏 심대장주께서 저에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저의 말은 다름이 아니라 반형이 이 골짜기에서 수 년간 일해 오며 무슨 발견이라도 하지 않았 는가 그것을 묻는 것이오." "그렇다면야 몇 가지 이상한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우문한도는 다급히 되물었다. "반형, 그것을 말씀해 주시오. 감사히 듣겠소이다." "약 일 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작은 동굴 속에서 한 자루의 모양이 매우 괴상하고 오래 된 단 검을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단검은 지금 어디에 있소?" "이미 심대장주께서 가지고 가셨습니다." 우문한도는 실망한 듯이 말했다. "그럼 그 단검의 모양이나 설명해 주시구료." 반룡은 눈을 지그시 감고 마치 그 단검의 모양을 기억 속에서 더듬고 있는 듯하더니 잠시 후 눈 을 뜨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 년이 넘었으므로 이미 기억이 흐립니다만 대략 말씀드린다면 그 칼집은 약 한 자 두 치의 길이로 세 손가락만한 넓이의 것이고 색깔이 짙은 자주색을 띠었지요. 그리고 무엇으로 만들었는 지 몰라도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우문한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주색의 칼집이라? 천하 명검 중에는....." 하고는 고개를 들어 힐끗 반룡을 바라보더니 스스로 화제를 돌려 말했다. "그 칼집 속의 검은 어떤 형식이었소?" 반룡은 고개를 저으며 "저는 다만 그 칼집을 보았을 뿐 속에 있는 검의 모양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 검을 발견할 당시, 심대장주가 바로 곁에 있다가 반형이 그 검을 뽑아 보기도 전에 심대장 주가 거두어 간 것이로군요." 반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우리가 그 자주색 단검을 발견한 지 십 일 후에야 비로소 심대장주께서 이곳에 당도 하셨지요." 우문한도는 웃으며 말했다. "열흘 동안이나 반형은 그 칼을 뽑아 보지 않았으니 그 인내심은 실로 나로 하여금 탄복케 하는 군요." "제가 그런 인내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단검과 칼집은 지극히 견고하게 밀착되어 있어서 제 힘으로는 도저히 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검집에는 무슨 장치가 없었습니까?" "매우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만 전체의 단검에는 아무런 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 칼집과 칼은 딱 붙어 있는 듯했습니다." 우문한도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다시 물었다. "그것은 혹시 한 개의 자주색 강패(鋼牌)가 아니던가요? 반형은 어째서 그것이 단검이라고 단정 할 수 있었습니까?" "저는 수십 년 동안의 경험으로 그것이 분명 단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문한도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어떻게 그것을 단검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습니까?" 반룡은 곧 대답했다. "그 검의 검자루와 검 자체의 넓이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으며 그 자루의 손을 보호하는 둥근 부 분과 검 자체의 빛깔 역시 크게 다릅니다. 때문에 저는 그것이 단검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소영은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 자루의 단검이 무엇이 이상하여 우문한도는 저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것일까?' 이어 우문한도가 또 물었다. "반형은 그 칼집에서 또 무슨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예를 들어 글씨라든가 꽃무늬 따 위를 말입니다." 반룡은 기억이 되살아 난 듯 말했다. "만약 그것을 선생이 묻지 않으셨다면 깜박 잊을 뻔했군요. 그 칼집에는 한 마리의 용과 비슷한 그림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아는 것이 없어 그 조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지요." 우문한도의 얼굴에는 번개같이 놀라움의 빛이 나타났다. "그 용과 비슷한 그림 속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지 않았던가요?" 그는 혹시나 반룡이 알아 듣지 못했을까 봐 거듭 말했다. "내 말은 그 새겨진 사람의 생김새가 매우 이상하지 않았던가 하는 것입니다." 반룡은 잠시 생각을 거듭해 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마치 한 사람의 얼굴 모습과 같았습니다."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아깝군, 아까워!" 반룡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엇이 아깝다는 말씀입니까?" 우문한도는 스스로 자기의 실언을 깨닫고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반형의 말을 들으면 그것은 한 자루의 보검 같은데 내가 직접 보지 못해 단언을 할 수가 없군 요....." 하며 말꼬리를 흐리더니 다시 계속했다. "심대장주는 그 단검을 보고 무어라고 합디까?" 반룡은 담담히 대답했다. "잠시 어루만지더니 곧 품속에 집어 넣으시더군요" 우문한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경계를 알리는 신호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아마 침입한 자는 이미 우리 편에게 살해 되었나 보군요." 반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우문한도는 그때 이미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겨 놓으려다가 그 말을 듣자 돌연 걸음을 멈추며 되물었다. "반형은 어떻게 그 사람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요?" "이 골짜기의 신호소리는 정해진 바가 있어서 만약 그 사람을 죽였거나, 혹은 잡았다면 다시 다 른 신호를 하여 골짜기 속에서 인부들이 계속 수색하는 것을 중지시킵니다." 우문한도는 미간을 찌푸리고 반문했다. "현재의 상황은 어떻소?" "적의 행적은 비록 발견되었으나 다시 도망가서 아직 우리 쪽에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문한도가 되물었다. "이 산골짜기는 비록 길게 펼쳐져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형세가 별로 복잡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째서 적의 행방을 쉽사리 찾아내지 못할까요?" "제아무리 무공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역시 우리의 정밀한 수비망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잠시 후면 틀림없이 무슨 소식이 전해질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소영과 백리빙을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다. "만약 적이 인부들 사이에 잠입해 들어온다면 조사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 아니겠소?" 소영은 깜짝 놀라며 암암리에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과연 무시할 수 없구나. 차후 그에 대해서는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반룡은 매우 불안해진 듯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우리도 앞으로 가 봅시다. 한편 그들을 도와 골짜기 속으로 잠입해 들어온 적의 행방을 찾는데 도울 수도 있을 테니까요." 우문한도는 원래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 강적을 수사하는데 도울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반룡이 이렇게 말하자 거절할 수가 없어 상자를 들며 동의했다. "반형의 말이 옳소!" 하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반룡은 급히 앞장을 서며 "제가 앞장을 서지요." 하였다. 소영은 재빨리 백리빙의 뒤를 따라와 전음지술을 전개해서 말했다. "빙아! 어떤 자가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우리들과 맞부딪치게 되더라도 빙아는 꾹 참아야 해." 백리빙은 눈을 돌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걸음을 빨리하여 걸어나갔다. 그들 일행이 불과 육칠 장쯤 걸었을 때 돌연 땡땡땡 세 번 금속성 소리가 들려왔다. 우문한도는 흠칫 발을 멈추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것은 무슨 신호지요?" 반룡이 곧 설명했다. "긴급 응변하라는 신호입니다. 적은 매우 솜씨가 고명하여 이미 골짜기 속의 사람을 세 명이나 부상시켰거나 죽였다는 신호입니다." 그러자 그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우문한도가 물었다. "저 금속의 소리는 왼쪽 부근에서 들려오는데, 그렇다면 부상자나 혹은 시체가 왼쪽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이십 장 이내입니다." 말을 하며 몸은 이미 앞으로 달려나갔다. 하나의 산 모퉁이를 돌자 과연 세 명의 검은 옷으로 경장을 한 사나이가 손에 무기를 들고 세 구의 시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반룡과 우문한도는 걸음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소영은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 칠팔 장 떨어진 곳에 서서 시선을 똑바로 고정시키고 그들이 어떤 무기에 살해되었는지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우문한도가 서 있는 위치가 소영의 눈길을 막았기 때문에 살펴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물었다. "적의 종적을 발견했나?" 세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들 중의 하나가 공손히 대답했다. "골짜기로 들어설 때 우리가 매복시킨 장치에 의해서 발견되어 경계의 신호를 울리는 동시에 곧 추격을 하였으나 적의 행방은 이미 묘연했습니다. 아마 이 세 형제에게 발견되어 적은 그때 독수 를 뻗쳐 세 형제를 죽였을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몸을 굽혀 세 구의 시체를 자세히 조사해 본 후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암기에 상하고, 한 사람은 내가의 예리한 수법에 죽었군." 그는 눈길을 돌려 아까 대답한 사나이에게 물었다. "너는 그 사람을 보았느냐?" 그 사나이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소인은 경계 신호를 듣고 달려왔으나 한 발 늦어 다만 두 사람의 그림자만 보았을 뿐 생김새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문한도는 다시 물었다. "이장주는 어디 계시냐?" 그 사나이가 대답했다. "삼대 감공을 이끌고 적을 추격하러 갔습니다." 우문한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룡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그 세 구의 시체를 묻어 주어라!" 반룡의 신분은 골짜기 속에서 그 세 사람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들보다 훨씬 높은 모양이었 다. 세 명의 사나이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명령을 받들어 한 사람이 하나씩 시체를 들고 곧 장 골짜기 옆을 향해 걸어갔다. 반룡은 더 이상 세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음을 옮겨 우문 한도의 뒤를 쫓아갔다. 소영과 백리빙은 두 사람과 시종 육 장 이상의 거리를 두고 걸어갔다. 우문한도가 걸어가며 물었다. "반형, 그 검은 옷의 사나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오?" "골짜기 속을 순시하는 무사들입니다. 모두 삼십육 명이며 세 사람이 하나씩 조를 지었지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들은 세 사람이 함께 죽음을 당했던 것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우문한도는 갑자기 오던 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아까 왔던 그 한 줄기의 분천 곁에 이르렀다. 소영은 걸으며 사방을 살폈으나 뜻밖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호숫가는 이 상할 정도로 고요하였으며, 적을 추격하는 긴장되고 어수선한 정경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혼자서 상상해 보았다. '그렇다면 그 골짜기 속에 들어온 사람은 이미 죽었거나 생포된 것이 아닐까?' 그러자 그의 생각을 깨뜨리듯이 우문한도의 음성이 들렸다. "반형, 골짜기에 잠입한 강적은 아직도 남아 있소?" "저는 아직 강적이 골짜기를 떠났다는 신호를 듣지 못했습니다." 우문한도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 적이 아직도 골짜기 속에 남아 있다면 물론 어딘가 숨어 있을 것이오. 우리는 서쪽에 서 왔으나 중도에서 적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우리 편의 시체만 보았으니 이 골짜기의 경비태세 는 매우 허술한 것 같군요." 반룡은 변명하듯이 "수 년간에 걸쳐 이 골짜기로 잘못 들어왔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모두들 우리가 예정한 계획대로 죽었거나 혹은 골짜기의 인부로 써서 노동력을 보충하였지요. 한 번도 실수가 없었는데 요 근래 에 와서는 어째....." 우문한도가 별안간 그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그럼 근래에 와서도 골짜기 속으로 잠입해 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말이오?" 반룡은 힐끗 소영과 백리빙을 쳐다보며 태연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두 사람도 세밀히 문초하여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랬었군요." 우문한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반형, 내가 물어볼 말이 있는데 괜찮을는지요?" "우문선생, 무엇이나 서슴지 마시고 분부하십시오." "당신네들 사대 감공은 부하 인부들에 관해서 일일이 그 신원을 파악하고 있는지요?" 반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골짜기 속의 사 조(組)의 인부들은 제각기 각 조마다 감공 한 사람을 두고 있어서 그들 각 조 의 감공은 물론 자기 조의 인부들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됐소." 그들이 이렇게 말을 하고 있을 때 주조룡이 급히 달려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장주, 적을 찾아내셨소?" 주조룡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보건대 산 중의 비밀은 이미 밖으로 새어나간 것 같소이다. 에이! 빌어먹을...어서 대장주께서 당도하셔야 할 텐데....." 소영은 암암리에 '심목풍은 지혜와 무공이 모두 비범한데 어째서 부하들은 하나 같이 모두 얼간이 같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주조룡이 말을 이었다. "우문형, 무슨 단서를 찾아내셨습니까?" "이미 약간의 단서는 찾아낸 셈이지요. 이 산골짜기의 형세와 지질은 매우 괴상해서 견고한 암 석과 황사 그리고 비옥한 땅과 수맥(水脈) 등 없는 것이 없소이다." 주조룡이 천천히 물었다. "다른 산골짜기와 무엇이 다릅니까?" 우문한도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아주 틀리는 점이 많지요. 이 수십 리나 되는 산골짜기를 걸어 보면 지질이 마치 천만 리 길을 걸어도 있을까 말까 하는 기적이 나타나고 있소이다. 짧은 수십 리 길이지만 천만 리와 비등한 지질의 변화가 있으니 말이외다." 주조룡은 문득 눈길을 돌려 작은 호수를 바라보더니 깜짝 놀란 듯이 외쳤다. "아니! 저것이 무엇이지?" 우문한도는 주조룡이 가리키는 곳을 얼른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심히 살펴보니 그 작은 호수의 잔잔한 푸른 파도 속에 빨간 그림자가 하나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하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멀리 칠팔 척 밖에 서 있었기 때문에 호수 속의 상황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주조룡의 외치는 소리를 듣자 마음이 몹시 초조해졌다. 그러나 앞으로 걸어나가 그것을 볼 수가 없었으므로 다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문한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오래 묵은 잉어 같기도 하군." 주조룡은 눈길을 돌려 반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평상시에도 저 호수 속에 저런 빨간 것이 있는 것을 보았소?" 반룡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더니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상시에 저희들은 이렇게 대낮에 호숫가에서 감상할 여가가 없었습니다. 대장주께서는 저희들 에게 명령하시기를, 피치 못할 사정 이외에는 절대로 대낮에 골짜기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습니다." 주조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형!" 그러나 우문한도는 호수 속의 빨간 그림자를 열심히 주시하고 있어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 았다. 그때 갑자기 물거품을 크게 일으키며 그 번뜩이던 빨간 물체는 곧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우문한도는 별안간 땅에 두 손을 짚고 엎드려 왼쪽 귀를 땅에 바짝 갖다 대더니 눈을 지그시 감 은 채 정신을 집중시켜 무엇인가 열심히 듣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비로소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면서 입을 열었 다. "이 작은 호수는 확실히 괴상하군." 주조룡이 다그쳐 물었다. "무엇이 괴상하다는 말입니까?" 우문한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호수 앞의 지하에는 한 갈래의 지하수맥이 있는 것 갈은데 그것은 마땅히 이 호수의 물과 관련이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듣기에는 이것이 서로 아무 상관도 없다 하니....." 바로 이때 무거운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일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 귀 하나가 없는 노 인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누구나 첫눈에 그의 모습이 심상치 않음을 곧 알 수 있었다. 그 노인은 매우 심한 내상을 입은 듯하였다. 주조룡은 선뜻 손짓으로 명령했다. "반룡, 어서 가 부축해 주시오." 반룡은 재빨리 달려가서 그 흰 수염의 노인을 번쩍 안더니 주조룡의 곁으로 달려왔다. 우문한도는 그를 보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입을 열지 마시오." 하더니 오른손을 떨쳐 그 노인의 혈도를 두 군데나 찍었다. 그리고 급히 상자를 열어 두 알의 환약을 꺼내 노인에게 복용시킨 후 조용히 말했다. "약효가 퍼져 상세를 막은 후에 이야기를 해도 늦지 않으니 잠시 쉬시오." 그 노인은 힐끗 우문한도를 쳐다보더니 곧 눈을 감아 버렸다. 소영은 다시 속으로 생각했다. '중주이고가 기어코 일을 저지른 모양이구나.' 그때 주조룡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문형, 그가 견디어 낼 수 있을까요?" 그의 말투는 노인의 생사에 관심이 없고, 다만 내정을 우선 묻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말 투였다. 우문한도는 숙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내력을 억지로 운기하여 이곳까지 견디며 걸어왔기 때문에 이미 기진맥진하였소. 만약 속 히 상세를 봉쇄하지 않으면 기력을 지탱해서 경과를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오." 주조룡은 멋쩍은 듯이 사과했다. "저는 우문형께서 의술에 지극히 조예가 깊으시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구료. 영단을 복용했으 니 그의 생명은 틀림없이 보존할 수 있겠군요." 우문한도는 천천히 말했다. "그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아직 자신할 수가 없지만 약효가 나타나면 최소한 그 의 상세를 봉쇄하여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을 것이며 두 시간쯤은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소이 다." 소영은 슬쩍 주조룡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는 지극히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 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한동안이나 지난 후 우문한도는 비로소 손을 뻗쳐 노인의 두 곳 혈도를 풀어주며 말했다. "이장주, 이제는 물으셔도 됩니다." 주조룡은 기다리는데 진력이 나 있었던 터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적을 만났소?" 하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적은 한 쌍의 남녀였습니다." 주조룡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일남일녀라면 틀림없이 소영이겠군." 이 말에 소영을 지극히 두려워하고 있는 우문한도는 대뜸 안색이 변하였다. 그는 겁먹은 어조로 물었다. "그 남자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노인은 천천히 설명했다. "이십 세 안팎이었으며 남색 경장에 보검을 차고 무공은 몹시 높았으며....." 그는 이렇게 말하다가 힘에 겨운 듯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우문한도는 그가 숨을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 여자는?" 노인은 겨우 숨을 돌리더니 띄엄띄엄 주워섬겼다. "녹색 장삼에 역시 녹색 바지를 입었으며 녹색의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얼굴이 지극히 아름다 웠습니다. 그리고 여자도 역시 한 자루의 장검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문한도는 고개를 돌려 주조룡을 바라보더니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삼켜 버렸다. 주조룡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긴장된 마음을 약간 풀며 입을 열었다. "다른 두 감공은 어떻게 됐소?" 노인은 그를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모두 그 여자의 장검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여자의 검초는 악독하기 짝이 없었으며 오히려 그 청년보다도 훨씬 더 날카로웠습니다." 주조룡이 우문한도에게 말했다. "소영은 평소에 남색 경장을 하지 않았었는데....." 우문한도는 대뜸 반박했다.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하더니 눈을 돌려 노인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당신네들은 어디서 그 남녀와 마주치게 되었소?" "이곳에서 불과 수십 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그 말을 들은 주조룡과 우문한도는 무의식중에 퍼뜩 눈길을 사방으로 돌려 경계하듯 살폈다. 주조룡은 다시 한 번 기침을 하며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어째서 그들과 싸울 때 소리를 질러 구원을 청하지 않았었소?" 노인은 억지로 기운을 차리며 대답했다. "싸움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요." 주조룡이 다그쳐 물었다.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찌 이토록 중상을 입었소?" "그 남녀의 초식은 번개같이 빨라 그 여자의 장검이 한 번 번뜩이자 왕(王), 안(顔), 두 감공이 한꺼번에 죽어 버렸지요. 저는 무기를 채 뽑기도 전에 이미 그 청년이 뻗어낸 일 장에 격중되고 말았지요." 주조룡은 의아한 듯 다그쳐 물었다. "그는 어째서 당신을 죽이지 않았소?" "저는 일 장을 맞고 땅에 쓰러졌으므로 아마 죽은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다시 주조룡은 노인에게 물었다. "그들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보지 못했소?" "아마 서쪽으로 갔을 것입니다. 저는 중상을 입어 눈이 흐려서 똑똑히 볼 수는 없었습니다만....." 주조룡은 마침내 길게 탄식했다. "말을 들어보건대 아무래도 소영 같구먼....." 하고 중얼거렸다. 우문한도는 혼자말처럼 지껄였다. "그가 어떻게 우리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주조룡은 두려운 듯 몸을 흠칫 떨더니 불안한 안색이 되었다. "아마 우리들을 뒤쫓아 왔을 겁니다." 우문한도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여자는 누구일까요? 검을 뽑아 들자 일격에 두 감공을 죽일 수 있었다니 소영과 정이 통해 함 께 달아난 금란, 은란, 두 계집년은 아닐 것이고....." 백리빙은 우문한도의 말 속에 소영이 두 계집종과 함께 정이 통해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절로 소영에게 눈길이 갔다. 소영은 그녀의 안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자 혹시나 정체가 탄로날까 염려되어 급히 전음지술 로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 "빙아! 우리는 지금 적진 속에 있으니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때 주조룡이 입을 열었다. "그 두 계집종년이 아니라면 그럼 누굴까요? 사대 감공은 모두 힘깨나 쓰는 사람들인데 그녀의 일 격에 둘이나 한꺼번에 죽었다니 일류 고수임이 틀림없다고 봅니다." 우문한도도 시인했다. "흠...그렇다면 적은 소영이 아닌 것 같군요." "우문형의 추측대로이길 바랄 뿐입니다." 하더니 주조룡은 반룡을 바라보며 "이 골짜기 속에 무공이 쓸 만한 자가 얼마나 있소?" 하고 물었다. 반룡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공으로 말하자면 역시 사대 감공이 으뜸이며 그 중에서도 이 등형이 제일 훌륭합니다." 그 등형이라고 불린 흰 수염의 노인은 기력이 없는 중에도 "반형, 과분한 말이오. 우리 네 사람 중에서는 반형의 무공이 으뜸일 뿐 아니라 또한 반형의 독 침 암기는 지극히 비범하여 절세의 묘기입니다." 하고 말했다. 주조룡은 반룡에게 분부했다 "반룡, 다시 몇 명의 고수를 소집하여 우리는 곧 서쪽을 수사해야겠소." 반룡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골짜기 속의 고수들은 사대 감공을 제외하고는 모두 흩어져 제각기 각 처를 지키는 흑의위대밖 에 없습니다. 그들은 각기 책임지고 수비하는 부분이 있어 만약 명령을 내려 이동시킨다면 또다 시 적이 침입해 들어왔을 때는 쉽사리 감시망이 뚫리게 됩니다." 주조룡은 이 말에 반문했다. "그렇다면 경솔하게 그들을 이동시킬 수 없다는 말이군." 반룡은 곧 입을 열었다. "이곳에 매복된 장치는 모두 대장주께서 친히 안배한 것입니다. 이장주께서 만약 이동시키신다 면 저는 곧 이장주의 명령을 하달하겠습니다." 그러자 주조룡은 머뭇거리더니 "그렇다면 이동시킬 필요가 없지....." 하고 반룡을 넌지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이 골짜기 속에서 오랫동안 있었으니 이곳에 매복해 놓은 장치에 관해 매우 명확하게 알고 있겠군?" 반룡은 황급히 그것을 부인했다. "저는 다만 저에게 맡겨진 일만 알고 있을 뿐 적을 막기 위해 장치해 놓은 비밀에 대해서는 전 연 모릅니다." 주조룡은 냉랭히 말했다. "하여간 나보다야 나을 것이 아니오?" 반룡은 주조룡이 불쾌한 표정을 짓자 감히 말대꾸를 하지 못하고 급히 대답했다. "그야 그렇습지요." 주조룡이 다시 물었다. "당신의 의견은 어떻게 우리가 계속 적을 추격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오?" 주조룡은 비록 나타난 적이 소영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속으로는 역시 두려움이 앞섰다. 만약에 소영이 이곳에 뒤쫓아 왔을 경우, 그는 절대로 자기를 가만히 놓아 두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우문한도 등과 한자리에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할 것이라고 생 각되었다. 만약 소영이 자기를 해치려고 찾아 오더라도 옆에서 도와줄 사람들이 몇몇 있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문한도는 역시 손님의 신분이라 주조룡이 그에게까지 명령하여 소영을 추격하자고 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반룡 역시 오랫동안 강호에서 굴러온 사람이라 재빨리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곧 주조룡의 속셈 을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그의 질문을 받자 즉시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저의 뜻으로는 전국(全局)을 혼란시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들 남녀를 추격하는 것 을 잠시 멈추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우문한도도 가볍게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침묵을 깨뜨렸다. "나 역시 동감이오. 그들 두 남녀를 추격하려면 자기들 부서에서 잠복 중인 고수들을 불가불 동 원시켜야 할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사태는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 추측되오. 이 골짜기 속에는 별로 훔쳐갈 만한 진귀한 보물이 없으니 그대로 내버려 두고 사태를 우선 주시해 봅시 다." 주조룡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문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가 소란을 피우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면 오히려 잠입해 온 그들 적으로 하여금 의혹에 싸이게 하는 결과가 되지요. 그렇게 되면 감히 섣불리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장주께서 이제 곧 고수들을 이끌고 당도하실 것이니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그 두 남녀를 생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11. 소영 앞에 나타난 가짜 소영 우문한도가 말했다. "소제는 이미 산중의 몇 군데 중요 지점의 형세를 그렸고, 일부분의 모래와 돌도 채집했지만, 자 세히 연구해 본 후가 아니면 심대장주에게 대답을 드릴 수가 없소. 그리고 이장주께서 곡 중(谷 中) 의 고수들을 모아서 곡 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수색하지 않는다면 소제는 이 시간을 이용 하여 수집해 온 물건들을 자세히 연구해 봐야겠소." 주조룡이 대답했다. "그게 좋겠군요." 주조룡은 다시 반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문선생에게 은밀한 석실을 선택해 주시오." 반룡이 대답했다. "이장주께서 거처하고 계시는 방이 가장 은밀한 곳이며, 방 안에는 대장주께서 설계하신 몇 군 데의 기관도 있습니다." 주조룡은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다시 등(鄧)노인에게로 돌렸다. "당신의 상세는 어떻소?"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대답했다. "우문선생의 영단과 훌륭한 치료법으로 말미암아 크게 호전되었습니다." 주조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가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시오." 그 노인은 대답을 하고는 곧 돌아서서 가 버렸다. 주조룡은 다시 반룡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곧 공인(工人)들 중에 비교적 무공이 높은 사람을 골라 골짜기의 중요한 곳을 지키게 하도록 하시오." 반룡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주조룡이 말했다. "우문형, 우리들은 갑시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조룡의 거실인 석실로 들어갔다. 소영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골짜기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자신과 백리빙, 반룡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반룡은 우문한도와 주조룡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나를 따라 오시오." 백리빙은 그 공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석실의 코를 찌를 듯한 악취를 생각하자 저절로 구토증이 났다. 그녀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시 그 공인들이 거처하는 석실 속으로 들어가야 하오?" 반룡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일을 중지하였으므로 비교적 무공이 높은 일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정신 력을 회복했습니다. 게다가 두 분은 낯선 사람들이므로 틀립없이 동료들의 질문을 받을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곧 정체가 탄로나기 쉽습니다." 소영이 반문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반룡은 곧 대꾸했다. "두 분은 저의 숙소에서 잠시 쉬고 계십시오. 그렇게 하면 정체가 탄로날 기회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백리빙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길을 안내하십시오." 반룡은 두 사람을 데리고 석굴 안으로 들어선 후 돌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 다. "두 분 중에 한 분은 소영이시지요?" 소영은 고개를 돌려 석굴의 문을 바라보았다. 돌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햇빛이라곤 조금도 스며 들어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바깥에 누가 서서 엿듣는다고 하더라도 석굴 안의 말을 알아 듣지는 못할 것 같았다. 소영은 천천히 대답했다. "귀하의 생각에 맡기겠소. 나를 소영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아니라고 생각해도 좋소. 다만 귀하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귀하를 해치지 않을 것이오." 이 석굴의 깊이는 불과 이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이와 같은 몇 마디의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이미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 석굴 속엔 대나무 침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석굴의 벽에는 두 자루의 장검과 두 자 루의 단검이 걸려 있었다. 반룡은 손을 내밀어 벽에 걸린 한 자루의 장검을 내려 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십시오. 저는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늦어도 한 시간 안에는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백리빙이 소영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한번 본때를 보여 주는 게 어떨까요?"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없어." 이때 반룡은 이미 돌문을 열고 석굴을 나가 버렸다. 백리빙이 다시 낮은 소리로 물었다. "주장주와 우문한도는 오빠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지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미소를 지었다. "그 두 사람은 원래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에 무공이 자기네들보다 높은 사람이라면 누구 를 막론하고 무조건 두려워하지." 백리빙도 따라 웃었다. "네, 그래요. 오빠의 말이 옳은 것 같아요." 백리빙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 골짜기의 형세와 지질은 확실히 다른 골짜기와는 다른 것 같아요. 주조룡이 금궁은 여기에 있다고 한 말이 혹시 참말이 아닐까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십중팔구는 틀림없을 거야."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오빠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소영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금궁을 찾을 수 있는 지도를 가지고 있지. 거기에 의하면 금궁이 여기인 것 같기도 해. 그 러니 좀더 확실한 고증을 하여 금궁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아내야만 할 텐데....." 백리빙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 금궁 속엔 무슨 보물이 있길래 이다지도 무림 사람들이 금궁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발버둥 을 치는 걸까요?" 소영이 대답했다. "상세한 것은 나도 모르지만 전설에 의하면 수십 년 전에 중원 무림에서는 인재들이 운집해 있 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열 사람의 무공이 특히 뛰어났다는데 이들은 서로 무공을 겨루어 무림 제일의 명예를 차지하려고 각축전을 벌였단다. 그러나 이들은 수천 합을 겨룬 후에도 승부를 가 려내지 못했단다. 그들은 각기 터득한 무공의 종류는 달랐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그 조예가 정상 에 이르고 있었으므로 강은 유를 부술 수 있고 유는 또한 강을 제어할 수 있어 피차가 극한의 체 력을 소모했지만 서로가 능가할 수 없었다고 한다." 소영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러므로 모두들 특수한 방법을 연구해야만 군호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중에는 교수신공(巧手神工) 포일천(包一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건축에 특기가 있었다고 한 다. 그래서 그는 많은 세월을 소비하여 금궁을 건립했던 것이다." 소영은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천하 십대 호걸들이 모두 금궁에서 무예를 겨루도록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입궁한 후 그들은 모두 금궁 속에 갇힌 바 되어 한 사람도 무림에 다시 나타난 사람이 없 었단다." "그렇다면 그 포일천은 어떻게 되었어요? 그는 자기가 금궁을 건립했는데 어째서 다시 나오지 못했지요?" 소영은 대답했다. "아마 그는 사문(死門)을 만들어 금궁 속에서는 절대로 문을 열 수 없게 만든 것 같다. 그래서 십대 고수들이 금궁 속에 갇히게 되자 일제히 그에게 분노를 느껴 합력하여 그를 죽여 버렸던 것 이나 아닐까?" 소영은 가볍게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은 다만 나의 추측일 뿐 진짜 원인은 금궁에 들어가 보기 전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 백리빙은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들이 금궁 속에 갇힌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그들은 지금도 살아 있을까요?" 소영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것이 바로 탐지해야 할 비밀이야. 그 십대 고수들의 내공의 성취를 논한다면 여태껏 살아 있 는 것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되지만 한편 금궁은 깊은 산 속에 있는 것이므로 사 람이 사는 데 적합한가의 여부는 추측을 불허하는 것이다." 백리빙이 말을 가로챘다. "심목풍은 수백 명의 공인들을 시켜 수년 동안이나 공작을 계속하면서도 역시 금궁을 찾아내지 못했거늘 오빠는 어떻게 하여 금궁을 찾겠다는 거예요?" 소영은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그 지도 속엔 틀림없이 그것이 암시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지혜가 부족하 여 깨달을 수 없구나."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설사 그 금궁의 문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소영이 말을 받았다. "포일천은 십대 고수들을 금궁 속으로 유인해 들이기 전에 벌써 이번에 금궁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금궁의 열쇠 한 개를 이 세상에 남겨 놓았지. 우리는 다만 금궁의 문을 찾고 그 열쇠의 사용방법만 알게 된다면 무난히 금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백리빙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금궁의 열쇠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소영이 대답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그들이 있는 석굴의 문이 활짝 열렸다. 반룡이 긴장된 표정으로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백리빙은 나직이 소영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이 이처럼 빨리 돌아오는 것을 보니 아마도 무슨 뜻밖의 변화가 생긴 것 같군요." 반룡은 급한 나머지 석굴의 문을 닫는 것마저도 잊어 버렸다. 소영은 시선을 돌려 반룡을 바라봤다. 그의 오른팔에는 선혈이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으며 이미 옷소매를 반이나 적셨다. 뿐만 아니라 오른손에 들었던 보검은 온데간데 없었다. 반룡은 석굴 안으로 들어서자 다시 벽에서 한 자루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 일련의 사태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던 것이다. 반룡이 벽에서 단검을 내려 들자마 자 한 사람의 그림자가 옷소매를 바람에 펄럭이면서 뛰쳐 들어왔다. 소영이 달려오는 사람을 자세히 바라보니, 그는 손에 장검을 든 남색 장삼을 입은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입구에 멈춰 섰다. 자세히 보니 그는 준수하고 멋있게 생겼다. 바로 소영 자기의 이름 을 도용한 남옥당(藍玉黨)이었다. 남옥당은 소영과 백리빙을 한 번 훑어본 다음 다시 반룡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는 그 검집 속에 든 단도를 뽑을 기회마저 없을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죽이려면 설사 네 수중에 단도가 쥐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너는 역시 나의 일검을 받아내기 힘들 것이다." 반룡은 단도의 자루를 쥐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소영이냐?" 남옥당은 역시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누구든 간에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살고 싶거든 사실 그대로 나의 물음에 대답이나 해 라." 반룡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자 남옥당이 다시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이 바로 금궁의 소재지이냐?" 반룡은 고개를 끄덕일 뿐 말은 하지 않았다. 남옥당은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백화산장에서 보내온 사람들이냐?" 반룡은 다시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 역시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남옥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금궁을 찾아냈느냐?" 반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찾아내지 못했소. 그런데 귀하는 도대체 누구요?" 남옥당은 앙천대소를 한바탕 터뜨렸다. "너는 나를 소영으로 알고 있는 모양인데 그럼 소영이라고 부르면 될 게 아닌가?" 백리빙은 은근히 그를 야유했다. "이 사람은 매우 뻔뻔스럽기도 해라. 오빠가 서 있는 앞에서 감히 오빠의 이름을 도용하다니....." 이 말은 원래 백리빙이 입 속에서 우물거린 말이었으나 뜻밖에도 마지막 몇 마디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남옥당은 귀가 매우 예민했다. 어느 새 백리빙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 며 신랄하게 물었다. "너는 방금 뭐라고 했지?" 백리빙은 그 말을 듣자 화가 잔뜩 치밀어 올랐다. '옳지! 네가 끝내 의기양양해서 나까지 업신여기는구나.' 백리빙은 소리를 높여 외쳤다. "뻔뻔스럽다고 했다! 뭣 때문에 소영이란 이름을 도용하느냐 말이다!" 남옥당은 그 말을 듣자 안색이 돌변했다. "너는 소영을 알고 있나?" '바로 내 곁에 있다.' 하고 대답하려다가 얼른 말을 바꿔 버렸다. "알든 모르든 네가 무슨 참견이냐?" 남옥당이 얼른 말을 받았다. "물론 나에게도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남옥당은 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장검을 휘둘러 싸늘한 광채를 번쩍이며 석굴 안으로 깊숙이 뛰 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백리빙의 앞가슴을 노려 두 군데의 혈도를 향해 찔러왔다. 그 검세는 그야 말로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백리빙은 곧 몸을 크게 번뜩여 오르면서 검세를 피했다. 남옥당은 백리빙이 자기의 검세를 살짝 피하는 것을 보자 강적을 만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곧 검 세를 거두며 이렇게 말했다. "귀하의 무공은 비범하오. 절대로 공인의 신분이 아닌 것 같소. 진짜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없겠 소?" 백리빙은 그의 일검으로 인해 몇 발자국 물러나게 된 것을 분개하여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누구인들 상관할 필요없다. 그러나 다만 나는 네가 가짜 소영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다." 남옥당은 백리빙의 음성이 맑고 가냘픈 것을 보자 여자임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양미간을 찌푸리 며 말했다. "나는 확실히 소영이 아니오. 헌데 낭자는 무슨 까닭으로 남장을 하여 공인들 틈에 끼여 있소?" 백리빙은 곧 품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 들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내가 낭자든 여자든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역시 무공으로써 승부를 가리자." 소영은 남옥당의 무공이 무시 못할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검초는 변화무쌍하여 백리 빙이 정식으로 맞서게 된다면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이며, 그렇다고 자기가 나선다면 정체가 드러나 주조룡 등을 자극시키게 될 것이므로 곧 전음지술을 사용하여 말했다. "빙아, 그와 싸우지 마라. 최선을 다하여 그와 서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해라. 현 재 이 시각에 우리들의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백리빙은 이미 반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소영의 이와 같은 말을 듣자 하는 수 없이 참기 로 했다. 그녀는 두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꼭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소?" 남옥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 생각엔 아마 당신은 악낭자의 부하 같은데....." 백리빙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악낭자가 누굴까? 아무튼 그가 악낭자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악낭자를 매우 존경하거나 두려워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잠시 한바탕 연극을 해 볼까?' 백리빙은 이런 짓궂은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과연 댁의 생각대로요." 그 말을 듣자 남옥당은 갑자기 포권일읍을 했다. "낭자께 무엄한 짓을 했으니 널리 양해하십시오." 백리빙은 속으로 '과연 악낭자는 무서운 존재로군. 그녀의 부하마저도 이처럼 존경하는 것을 보면.....' 백리빙도 역시 허리를 굽혀 답례를 했다. "너무 겸양하지는 마십시오." 남옥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낭자께서는 악낭자를 모신 지 오래 됩니까?" 백리빙은 속으로는 '나는 악낭자를 보지도 못했는데.....' 했지만 겉으로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악낭자를 모신 지는 일 년 남짓합니다." "낭자께서는 악낭자의 곁에 계시면서 혹시 악낭자께서 저의 일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까?" "댁의 이름이 뭐요?" "남옥당이라 하오." 백리빙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남옥당이라고요?" 남옥당은 큰소리로 되뇌었다. "그렇소. 제가 바로 남옥당이오." 백리빙은 짐짓 고개를 갸웃거리며 "악낭자께서 댁의 이야기를 한 것도 같은데....." 남옥당이 다그쳐 물었다. "아아, 그렇다면 악낭자께서는 저를 어떻게 평가하셨소?" 백리빙은 속으로 '그가 묻는 말에 대해서 나는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는지.....'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돌연 귓전에 소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빙아, 그에게 평이 나쁘지 않았다고 대답해." 백리빙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아아, 이제 생각나는군요. 우리 아가씨께선 댁을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남옥당이 입을 열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일성의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남옥당이 황급히 말했다. "공자께서는 이번에 악낭자의 명을 받들어 오게 된 것입니까?"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한편 속으로는 '누가 그녀의 명령 따위를 듣는단 말인가?'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때 남옥당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함께 온 동반자가 한 사람 있는데 될 수 있는 한 그에게 당신의 신분을 알리지 말아 주십 시오." 남옥당은 다시 시선을 반룡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이 사람은 백화산장의 사람이니 죽여 버릴까요?"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없습니다. 지금은 이미 우리에게 협력하여 우리의 신분을 엄호해 주고 있습니다." 남옥당은 말머리를 돌렸다. "악낭자께서는 이번에 모두 몇 명의 사람을 이곳으로 보냈소?" 백리빙은 소영을 힐끗 바라보며 "다만 우리 둘뿐이오." 하고 대답했다. 남옥당이 다시 물었다. "좋소. 제가 모든 것을 똑똑히 알았으니 앞으로 오해는 없을 것이오." 남옥당은 말을 잠깐 그쳤다가 다시 이었다. "그럼 저는 지금 곧 나가서 나의 동료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테니 두 낭자께선 몸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만일 저의 도움이 필요하실 때는 사양 마시고 분부 있으시기를 바라오." 그는 백리빙과 소영의 대답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돌아서서 쏜살같이 석굴 밖으로 사라져 버렸 다. 백리빙은 남옥당이 석굴에서 나가버리자 참지 못하겠다는 듯 호호호 하고 웃었다. "오빠, 그는 오빠도 여자인 줄로 알고 있어요." 소영은 백리빙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반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돌문을 잠글 수가 있소?" 반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잠글 수가 있습니다." 소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좋소. 우선 저 석문부터 잠그어 주십시오. 제가 몇 마디 반형에게 솔직히 드릴 말씀이 있소." 반룡은 잠깐 망설이다가 석굴 입구로 걸어가서 석문을 걸어 잠그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소영 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대는 도대체 누구요?" 소영은 미소를 지었다. "저의 이름은 잠시 동안 가르쳐 줄 수 없소.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날이 있을 거요. 그보다도 지금 제가 반형에게 몇 가지 물을 말이 있소." 반룡은 할 수 없다는 듯 "무슨 말이오?" 하고 되물었다. 소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우리는 아직 신분을 드러낼 수 없소." 소영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러니 반형은 제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이나 해 주시오." 반룡이 되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심목풍은 당신을 대하는 게 어떻소?"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소.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대장주의 말만 꺼내도 벌벌 떨 정도이니 까요." 소영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내가 만약 지금 반형더러 그를 배반하라고 한다면 반형은 그럴 용기가 있소?" 반룡은 잠시 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두 분을 도왔으므로 백화산장의 계율을 배반한 거나 마찬가지요." 소영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소?" "만약 대장주께서 이 일을 알게 된다면 검으로 몸을 토막토막 잘라 죽이는 형벌을 받을 것이오." 소영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도 엄중하오?" 반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결코 죽음을 면할 수는 없소." 소영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귀하는 이미 백화산장을 배반한 셈이 아니오?" 반룡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소. 두 분의 신분이 드러나는 대로 저는 즉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오." 소영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반형은 아예 어두운 생활을 버리고, 밝은 내일을 기약하여 백화산장에 서 깨끗이 떠나 버리는 것이 어떻겠소?" "허지만 저는 어느 곳에 밝은 내일이 있는지를 모르겠소." 소영은 의미심장하게 빙그레 웃었다. "만일 반형께서 그럴 마음만 있다면 곧 됩니다." 이때 꽝꽝! 하고 석문을 치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아무도 없소?" 하고 주조룡의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소영은 다급하게 "우리가 반형을 돕겠다고 한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마시오." 반룡은 한편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부리나케 달려가서 석문을 열었다. 그러자 주조룡과 우문한 도가 차례로 들어왔다. 우문한도는 반룡의 상처를 바라보며 "상세가 심하오?" 하고 물었다. "감사합니다. 몸을 지탱할 수는 있습니다." 주조룡은 천천히 돌아서서 석문을 잠그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적을 보았겠군?" "네, 보았습니다. 저는 그와 싸워 그의 장검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주조룡이 다시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의 모습은 어떠했소?" 주조룡은 매우 용의주도한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부상을 당했는데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듯했다. 반룡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 사람은 매우 젊고 영준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검세는 날카롭기 짝이 없어 저는 다 만 그와 두 차례의 초식을 교환했는 데도 이미 그의 검세하에 부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주조룡은 반룡의 대답에 매우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 년 전만 해도 그 사람은 소영의 이름을 도용하여 강호를 휩쓸었으며 그는 일 년도 채 못 되 는 사이에 온 무림에 그 명성을 떨친 다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실종되어 다시는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소. 그 후에 진짜 소영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오." 주조룡은 이와 같이 지껄이며 석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소영과 백리빙은 이미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반룡이 입을 열었다. "제가 무능하여 백화산장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이장주의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당신을 탓할 수만은 없소. 그 사람의 무공은 워낙 높아 설사 나와 우문선생이 함께 공격을 가 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그를 당해내지는 못했을 것이오." 반룡이 곧 말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장주님." 반룡은 대답을 마치자 곧 나무의자 두 개를 내놓았다. 주조룡과 우문한도는 조금도 사양하는 빛이 없이 의자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아마 무슨 상 의할 일이 있는 듯했다. 주조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문형, 이미 계산해 냈습니까?"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소생은 대강 계산해 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곤란한 점은 그 한 갈래의 지하 수맥입니다. 만 일 자칫 실수를 하여 수맥을 건드리게 된다면 홍수처럼 물이 솟아 올라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이루게 되어 아마도 이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물난리를 겪게 될 것입니다." 주조룡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제어할 방법이 없소?" 우문한도는 한참 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포일천이 금궁을 이곳에다 건립한 이유는 바로 그 지하수 때문일 거요. 지질학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면 아예 금궁의 소재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며 설령 지질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한 줄기의 수맥을 본 다음에는 감히 금궁을 찾아낼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주조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법한 말이오." 주조룡은 다시 시선을 반룡에게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골짜기 안에 있는 공인들 중에 무공이 높은 사람들이 있소?" 반룡이 대답했다. "처음 골짜기에 들어올 때만 해도 공인들 중엔 확실히 솜씨가 비범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 다. 그러나 여태껏 노동을 해 왔으므로 진짜 무공이 있는 사람들도 수 년간의 피로에 지쳐 기진 맥진해서 그 솜씨를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문한도가 말참견을 했다. "만약 우리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아마 그는 격분한 나머지 실외의 모든 공인들을 다 죽여 버릴 는지도 모르지요." 주조룡이 쌀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재의 공인들은 모두 쉬지 않고 연속 수 년간 일해 왔기 때문에 기진맥진하여 쓸모가 없게 되 었소. 그러니 금궁의 문을 개척하는 데는 다시 새로운 공인들을 물색해야 될 것이오." 그의 말투는 백여 명의 공인이 한꺼번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다. 소영은 속으로 '주조룡의 무공은 별로 높지 않지만 성격의 잔인함에 있어서는 심목풍만 못지 않군!' 하고 생각했다. 우문한도가 다시 말했다. "소생이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금궁의 문을 여는 데는 별로 많은 인력이 필요없을 것 같소. 제 생각으로는 그 속에는 반드시 중요한 기관이 장치되어 있어서 만약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섣 불리 서두르다가는 필시 수맥을 파괴하게끔 되어 있을 것 같소. 그래서 만약 그 수맥을 건드리기 만 하면 산골짜기 전체는 모두 홍수로 뒤덮여 영원히 금궁을 찾아낼 수가 없게 될 것이오." 주조룡은 한바탕 한숨을 내쉬었다. "우문형의 말대로라면 기필코 금궁의 열쇠를 수중에 넣어야 할 것 같소. 그래야만 금궁을 개척 할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야 물론 금궁의 열쇠를 수중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가령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교묘한 수단을 써서 깊이 연구해 보면 될 것도 같소. 소생의 뜻은 이 금궁을 여는 일은 세밀한 공사이므로 절대로 만용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주조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대장주께서 당도하실 테니 우문형이 만약 금궁의 문을 개척할 자신이 있다면 대장주께 말씀 드려 이 골짜기를 지키도록 하지요." "꼭 자신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만 금궁의 열쇠를 찾기 전에는 소제는 어떻든 방법을 연구 하여 금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겠소." 이때 꽝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문한도가 물었다. "누구요?" 반룡이 얼른 일어서면서 대답했다. "우리 편입니다." 반룡은 성큼성큼 문께로 걸어가 석문을 열었다. 그러자 흑의를 입고 단도를 꽂은 한 사나이가 걸어 들어왔다. 보아하니 골짜기 속을 지키는 사 람이었다. 그는 곧장 주조룡 앞으로 가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이장주님께 아뢰옵니다." 주조룡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강적은 어찌 되었느냐?" 흑의를 입은 사나이가 대답했다. "적은 한 쌍의 남녀로 무공이 대단히 강하여 골짜기 속을 휩쓸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저지할 사 람이 없었습니다. 그뿐더러 골짜기를 수비하는 사람들은 이미 모두 그들에 의해 십중팔구는 죽음 을 당했을 것입니다....." 주조룡이 답답하다는 투로 말을 가로챘다. "지금은 어떻게 됐냐는 말이다." 흑의의 사나이가 대답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갑자기 살육을 멈추고 골짜기 밖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갔단 말이냐?" "네, 골짜기 밖으로 물러가 버렸습니다." 주조룡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것 잘되었군. 그럼 너는 가 봐. 조심해서 골짜기를 지키도록. 그들은 다시 올지도 모르니까." 흑의의 사나이는 "네." 하고 한 마디 큰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우문한도는 그 사나이가 석실에서 사라지자 다시 시선을 주조룡에게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장주, 그 가짜 소영이란 남옥당이지요?" 주조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문한도가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의 무공은 어느 정도입니까?" "검법이 기가 막히게 빠르고 무공이 매우 높습니다."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진짜 소영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주조룡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매우 힘든 대답입니다. 아마 비등할 것입니다." 백리빙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그 사람은 나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어떻게 오빠의 적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우문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남옥당도 역시 상대하기 힘든 인물이군요?" 주조룡이 천천히 대답했다. "우문형은 남이 아니니 숨기지 않고 말하겠습니다만 오늘의 정세만 보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대 항할 능력이 없습니다. 남옥당 한 사람만 하더라도 우리가 대항할 수 없거늘 게다가 그는 한 사 람의 동료를 데리고 왔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어째서 그가 갑자기 이곳에서 물러 났을까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이처럼 중요한 곳을 심대장주께선 어째서 고수를 파견하여 수호하지 않을까요?" "수 년간 줄곧 일을 해 왔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기 때문에 심장주는 마음이 식어져서 고수를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주조룡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대장주께서 이번에 우문형을 이곳에 모셔 온 것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만약 우문형께서 어떤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대장주 는 여기에다 심혈을 기울이지 않고 이 골짜기를 버릴 생각이었 으므로 동시에 금궁을 찾으려는 마음을 완전히 포기할 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문형께서 이 곳에 오신 후 뜻밖에 큰 수확을 거두었으니 대장주께선 다시 정세를 고려하여 고수들을 보내 이 골짜기를 수호할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주조룡은 갑자기 중대한 일이라도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반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골짜기 속으로 들어오는 길이 몇 개나 있소?" "제가 알기로는 하나뿐입니다." "만약 한 줄기의 길을 봉쇄해 버린다면 아무도 이 골짜기로 다시 들어올 수는 없겠군?" "그렇습니다. 양쪽의 절벽은 그 깊이가 천 길이나 될 뿐만 아니라 깎아 세운 듯 미끄러워 아무 리 일류의 경공을 지닌 고수라도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내려오지 못할 것입니다." "좋소. 당신은 가서 곧 명령을 전해 지금 남아 있는 보초들을 모아 곧 골짜기 입구로 가시오. 그 래서 골짜기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으시오." "네." 하고 대답을 하고는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주조룡이 다시 말을 이었다. "또한 공인들 중에서 무공이 비교적 높은 사람들을 골라 골짜기 입구를 지키도록 하오." 반룡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서서 주조룡의 말이 끝날 때까지 들었다. "명령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인사를 마치자 반룡은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주조룡은 반룡이 석문 밖으로 사라지자 다시 우문한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문형, 만약 일이 순조롭게 진척된다면 언제쯤 금궁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112. 끝없는 암투 우문한도가 말했다. "그것은 매우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삼 개월쯤 걸릴 것도 같고 또한 재수가 좋으면 단시일 내에 될 것도 같습니다." 소영은 석실의 한 모퉁이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만약 백리빙과 힘을 합하여 느닷없이 출수를 한다면 일격에 두 사람을 죽이거나 아 니면 혈도를 정확하게 찔러 생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문한도로 하여금 나를 돕게 하여 금궁을 찾을 수도 있을 텐데...그러나 그때쯤이면 심목풍이 고수들을 이끌고 당도할 것이다.' 소영은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갑자기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다. '만약 이번에 손불사와 무위도장 등과 함께 이곳에 왔다면, 그들의 무공으로 충분히 골짜기로 들 어오는 중요한 길목을 지켜 심목풍과 상대할 수 있을 텐데...하지만 지금의 형편으로는 위험을 무 릅쓸 수가 없다.' 소영은 한동안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이런 좋은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더군다나 입을 열어 백리빙과 상의할 수도 없으니 더 가슴이 타기만 했다. 이때 주조룡이 탄식조로 말했다. "만약 대장주께서 좀 일찍 우문형을 이곳으로 모셔 왔던들 아마 지금쯤은 벌써 금궁의 비밀을 파헤쳤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문한도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산의 형세를 관찰하여서 얻은 결론은 이 산골짜기에는 인공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교묘하여 지질학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알아낼 수가 없습니 다." 주조룡은 말을 받았다. "아아, 대장주께선 좀더 일찍 우문형을 생각해 냈어야 했는데....."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아마 대장주께선 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거나 아니면 애당초부터 중요시하지 않았을 것입니 다. 그리고 이번에 저를 이곳으로 오게 한 것도 다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서 그랬을지도 모 르지요." 주조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강적이 수시로 이 골짜기로 들어올 가능성이 있으니 대장주께서 오시기 전에는 우문형도 역시 실제로 시험해 볼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러니 이 기회를 이용하여 편안히 휴식을 취해 두십시오."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이장주께서는 볼일을 보십시오. 나는 골짜기 속의 지질을 좀더 자세히 연구해 봐야겠소." 우문한도는 말을 마치자 금칠을 한 상자를 열어서 그 안에 든 자갈, 풀, 모래, 황토 화강암 등을 꺼내 앞에다 벌려 놓고 두드려 보기도 하고 무엇을 기재하기도 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백리빙은 끝내 참지 못하고 소영에게 말했다. "오빠, 우리는 계속 이렇게 그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까?" 소영이 대답했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망친다. 그 금궁은 정의도와 악당의 생사 문제를 좌우하는 것 이므로 우리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금궁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 골짜기에 비록 강적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는 미약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니 오늘밤 우리는 중주이고를 불러와서 함께 손을 쓰기로 하자." 백리빙이 소영의 말에 대답을 하려 할때 갑자기 우문한도가 그녀에게 눈짓을 했다. "이리 오게." 백리빙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속으로 '그는 내가 오빠와 전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것일까?' 백리빙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걸어나갔다. 그녀는 암암리에 운공을 하며 잔뜩 경계태세를 취했 다. 우문한도는 한 덩어리의 화강암을 손에 들고 백리빙에게 보이며 말했다. "작은 연못가에 가서 다시 한 조각의 화강암을 주워 오게." 그는 말을 마치자 다시 고개를 숙이고 붓으로 종이에다 무엇을 그렸다. 백리빙은 화강암을 받아 들면서 슬쩍 우문한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우문한도가 한 장의 백 지 위에다 가득 글씨를 써 놓은 것이 보였지만 무엇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백리빙은 다시 소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소영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백리빙은 하는 수 없이 속으로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흥, 지금은 네가 위풍당당하게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만 내일이면 너도 꼴불견이 될 것이 다.' 소영은 백리빙이 화강암을 들고 잠자코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보자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약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이 경과되자 백리빙과 반룡이 함께 돌아왔다. 우문한도가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구해 왔느냐?" 백리빙은 짐짓 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구해 왔습니다." 백리빙은 가지고 온 돌을 두 손으로 받들어 우문한도에게 바쳤다. 우문한도는 거들떠보지도 않 고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 옆에 놓아 두었다. 백리빙은 우문한도의 분부를 기다리지도 않고 곧 소영의 곁으로 물러가서 앉았다. 소영은 백리 빙의 마음이 격뿐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고 혹시 그녀가 참지 못하여 폭발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나직이 물었다. "빙아, 화났어?" 백리빙은 소영의 말에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그녀는 웃고 나니어느 정도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반룡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가 방금 들은 바에 의하면 십여 명의 사람들이 이 골짜기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떠한 인물인지는 아직 자세히 모르지만....." 주조룡은 두 눈을 내리감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그 말을 듣자 벌떡 일어섰다. "대장주님이 아닐까?" 반룡이 얼른 대답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주조룡이 다시 말했다. "빨리 알아 봐요. 만약 적이라면 있는 힘을 다해 골짜기의 입구를 막아야 하오. 절대로 그들을 들여 놓아서는 안 되오." "네." 반룡이 대답을 한 다음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하는 찰나에 갑자기 우문한도가 붓을 땅바닥에 팽개 치며 소리를 높여 웃어젖혔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 으며 반룡 역시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주조룡이 가벼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우문형!" 그러나 우문한도는 연방 웃어젖히며 주조룡이 부르는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조룡은 성큼, 한걸음 우문한도에게로 다가서며 일 장으로 우문한도의 어깨를 눌렀다. "우문형, 어디가 잘못 되었습니까?" 우문한도는 그제서야 웃음을 그쳤다. "감사합니다. 이장주!" "나에게 무엇을 감사한단 말이오?" 주조룡은 암암리에 경력을 우장에 집중시켜 여전히 그 우장을 우문한도의 등줄기에 있는 명문혈 에다 고정시키고 있었다. 언제든지 내력을 뻗어내기만 하면 우문한도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태 세를 취하고 있었다. 우문한도는 담담하게 웃었다. "소제는 너무 기뻐한 나머지 진기가 역행하여 혈도가 풀어졌던 것 같습니다. 만약 주이장주님의 일 장이 아니었더라면 소제는 아마 웃음소리를 멈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말하는 틈을 이용하여 갑자기 몸을 돌려 뒤로 물러나면서 주조룡이 노리고 있는 명 문요혈을 피했다. 주조룡은 순간 하하하 하고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우문형은 무슨 그다지 기쁜 일이 있길래 혈도가 풀어지는 것도 몰랐단 말이오?" 소영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두 사람은 입으로는 서로 형이야 동생이야 부르고 있지만 제각기 속셈은 따로 갖고 있구나.' 우문한도는 갑자기 안색이 싸늘하게 변하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제는 이 몇 조각의 암석에서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소." 주조룡이 말을 받았다. "금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문한도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소 크게 관계가 있는 일이오." 주조룡이 다그쳐 물었다. "소제에게 알려줄 수는 없소?" 소영은 언뜻 마음속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나는 금궁의 열쇠를 지니고 있으니 다만 그 금궁을 여는 방법만 알 수 있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금궁에 들어갈 수가 있겠지.....' 이때 우문한도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심대장주께선 빠른 시일 내에 이곳에 도착할 수가 있겠소?" 주조룡이 태연을 가장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아마도 곧 도착할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소. 대장주께서 도착하신 후 곧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조룡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소제가 먼저 들을 수는 없단 말입니까?" 우문한도는 냉랭하게 한바탕 또 웃어젖혔다. "이장주가 방금 만약 수중의 내력을 뻗쳐냈다면 소제는 아마 이미 숨이 끊어져 죽었을 것이오." 주조룡은 가볍게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우문형, 그건 오해요. 소제는....." 우문한도는 담담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장주, 여러 말 해 봐야 소용없소. 소제는 절대로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두 번 다시 말하지는 않소." 이때 쾅쾅!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려와 그들의 대화를 끊어 버렸다. 반룡이 곧 문을 열자, 흑의를 입은 사나이가 한 사람 뛰어 들어왔다. 그는 곧 주조룡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이장주께 아뢰오. 대장주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주조룡이 황급히 물었다. "지금 어디 계시냐?" 흑의의 사나이가 대답했다. "이미 골짜기 입구로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주조룡이 그 말을 듣자 다급하게 외쳤다. "나와 함께 맞이하러 가자." 주조룡은 재빨리 걸음을 옮겨 석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그는 석실 입구에서 다시 고개를 돌려 우문한도에게 말했다. "우문형은 가시지 않겠소?" 우문한도는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냉랭하게 대답했다. "소제는 잠시 휴식을 취해야겠소. 이장주는 대장주를 만나거든 소제를 대신해서 인사를 여쭈어 주기 바라오." 주조룡은 의미심장하게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우문형은 마음 놓고 휴식하십시오. 소제 다녀오리다." 그는 반룡과 함께 석실을 나갔다. 소영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문한도는 무엇을 믿고 저렇게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심목풍마저도 거들떠보지 않는 눈치 군.....'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빙아, 심목풍의 음흉함과 기지는 주조룡이나 우문한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으니 우리는 더욱 각 별히 조심하여야 한다." 백리빙은 그 말에 고개를 연방 끄덕이긴 했지만 속으로는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꼭 그와 한바탕 겨루어야지.' 석실 속에는 소영과 백리빙 그리고 우문한도가 남아 있었다. 우문한도는 곧 상자를 열어 흰 종이 위에다 무엇을 가득히 적어 놓은 몇 장의 종이조각을 꺼내 품속에 감추었다. 그제야 소영은 그들의 마음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알고 보니 각각 속셈이 따로 있군!' 우문한도는 그 몇 장의 종이조각을 숨긴 다음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무서운 눈초리로 소영과 백리 빙을 노려보았다. 소영은 속으로 잔뜩 경계를 하며 '우선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수시로 그의 태도에 임기응변을 해야지.' 소영은 짐짓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모르는 척하고 앉아 있었다. 우문한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얼굴엔 살기가 번뜩이며 곧 손 을 쓸 것만 같았다. 소영은 암암리에 경계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백리빙 역시 무공이 높고 담대한 성격이었으므로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우문한도는 자기가 두 사람의 곁으로 줄곧 가까이 갔지만 이들이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다. "자네들은 이 골짜기에 있는 것이 맘에 드는가?" 소영이 얼른 대답했다. "네, 좋습니다." 우문한도는 가볍게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단 말이지?" '어리석은 체해야만 그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있을 것이다.' 소영은 이렇게 생각하고 "소인들은 그런 생각을 한 지가 오래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우문한도는 이 말을 듣자 앙천대소했다. "음, 내 힘이 닿는 대로 하루속히 두 사람을 이 골짜기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지." 소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골짜기의 사람들이 모두 선생님을 받들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좋아. 내가 자네들을 위해서 힘써 주지." 우문한도는 말을 마치고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소영은 속으로 '이 사람은 원래 나와 빙아를 죽임으로써 입을 봉하려 했는데 어째서 다시 마음이 달라졌을까?' 하고 의아심을 가졌다. 우문한도는 그 금테를 두른 상자를 들고 석실의 한 모퉁이로 가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석실 안 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나 한참 후에 석실 밖에서 한바탕 요란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이 시선을 돌려 슬며 시 바라보자 키가 크고 허리가 구부러진 심목풍이 앞장 서서 석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주조룡과 그의 수제자 단굉장이 바싹 뒤따르고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수행원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밖에 서 있었다. 심목풍은 차가운 눈빛으로 우문한도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문형, 몸이 불편하십니까?" 우문한도는 천천히 두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던 바 다행히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큰 공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우문형은 장차 그 이름을 강호에 널리 떨치게 될 것입니 다." 우문한도는 가볍게 한 번 헛기침을 했다. "소제는 이미 나이가 환갑에 이르렀으므로 명성을 떨치려는 마음은 이미 버린 지 오래입니다." 심목풍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문형께서 정녕 명리를 원하시지 않는다면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우문형께서 요구하는 것이라 면 무엇이든지 소제의 힘 자라는 대로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변변치 못한 이 몸은 왼쪽 골짜기의 지형과 지질을 연구하여 몇 군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 다. 아마도 그곳에 십중팔구는 바로 대장주께서 찾고 계시는 금궁의 소재지가 있음을 단정할 수 있습니다." 우문한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소제는 먼저 믿을 만한 보장이 있기를 원합니다." 심목풍은 처음에는 그 말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담담하게 웃 으며 말했다. "우문형은 농담도 잘하시는구료. 수 년 동안 소제는 우문형을 존경해 왔으며 앞으로도 더욱 존 경해 마지 않을 텐데 우문형께서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장주, 천만의 말씀입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모든 일이란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제일 현명한 방법입니다. 대장주께서는 비록 성의를 다해 주시겠지만 소제로서는 또한 미리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심목풍은 정색을 하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문형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우문한도는 주조룡을 힐끗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새가 다 날아가 버리면 활이 쓸데없다는 것은 천고에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소제가 만약 다행 히도 금궁을 열 수 있다면 심대장주에겐 그 역시 큰 공훈이 아니겠습니까?" 심목풍이 말을 가로챘다. "심모는 스스로 그 감사함을 알고 있어 절대 우문형에게 섭섭하게 대하지 않을 겁니다."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금궁을 연 다음 대장주께서는 소제를 재능이 비범한 사람으로 볼 것이지만, 한편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심목풍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정녕 우문형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소제가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믿지 않을 테니 우문형께서 무슨 조건이 있다면 서슴지 마시고 이야기해 보시구료. 소제가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해 보리다." 심목풍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허지만 소제는 몇 마디 우문형에게 알려줄 말이 있습니다." 우문한도는 정색을 하며 "대장주의 분부라면 소제는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심목풍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심모가 지금은 마음이 다급한 김에 우문형의 어떠한 조건이라도 들어 주겠다고 승낙했지만, 일 단 일이 끝난 후에 마음이 달라져서 약속을 어긴다면 그때에는 우문형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문한도는 그 말을 듣자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소제가 그것까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대장주께 이런 문제는 제출하지도 않았을 것입니 다." 심목풍은 엄숙한 표정을 갑자기 누그러뜨리며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그러고 보니 우문형께서는 벌써 그런 것도 계산해 두었구료. 그렇다면 어떠한 고견인지 말씀해 보시지." 우문한도도 역시 담담하게 웃었다. "소제가 만약 다행히도 그 금궁을 열 수 있게 되면 대장주께서는 기필코 그 금궁 속에서 제가 두 가지의 물건을 선택해서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심목풍이 반문했다. "무슨 물건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저으며 "현재로선 저 역시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두 가지 물건을 제외한 나머지 물건은 모두 심대 장주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심목풍은 잠깐 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허락하겠소." 우문한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대장주께선 비록 허락해 주셨지만, 그때가 되면 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심목풍은 그 말을 듣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피차의 교분은 신의로써 이루어져야 하거늘 우문형께서 그다지도 믿지 않으신다면 유감천만일 따름이오. 소제로서는 우문형으로 하여금 믿게 할 방법이 없소." 우문한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있습니다. 그러나 대장주께서 허락해 주실는지가 의문입니다." 심목풍은 담담하게 웃으며 "어쨌든 말씀이나 해 보십시오." 우문한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제가 한 알의 기이한 물건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것을 복용만 해 주신다면....." 심목풍은 안색이 일변했다. "그럼 나더러 독약을 복용하란 말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독약이 아닙니다. 천하에 독물을 사용하는 사람 치고 독수약왕을 능가할 사람이 없습니 다. 대장주는 독수약왕과 교분이 두텁거늘 제가 어찌 경솔하고도 가소롭게 대장주에게 독약을 복 용토록 하겠습니까?" 심목풍은 담담히 웃었다. "독약이 아니면 무엇이오?" 우문한도는 즉시 대답했다. "천산(天山) 유곡 속에서 자라난 무심과(無心菓)입니다." 심목풍은 가볍게 한 번 기침을 했다. "그 무심과를 복용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우문한도는 즉시 말을 받았다. "무심과를 복용하고 나면 천천히 과거와 미래를 잊어 버리게 됩니다." 심목풍이 한바탕 냉랭하게 웃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독약보다도 더욱 악랄하구려." 우문한도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심목풍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이윽고 다시 담담하게 웃었다. "그럼 해독할 방법은 있소?"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천하 만물은 반드시 상극(相剋)이 있는 법. 물론 해독할 방법이 있지요. 소제는 또 다른 진기한 과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복용하면 스물네 시간 이내에 곧 본래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습니 다." 심목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몸이 그 무심과를 복용한 후 정신이 몽롱해지면 우문형은 멋대로 금궁의 보물들을 처리하려 는 생각이군요." 우문한도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무심과의 약성은 복용한 후 칠 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효력이 발생하 게 되는 것입니다. 그땐 저는 이미 금궁을 떠나 있을 것입니다." 소영은 이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만약 인공으로 만든 약물이라면 사람의 기억을 상실시킬 수가 있겠지만 어찌 천연의 과일이 그 러한 효능을 가질 수가 있단 말인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로다.' 이때 심목풍이 고개를 쳐들며 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세상에 정말 그런 천연의 과일이 있다니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군요." 심목풍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다그쳐 물었다. "그 무심과는 지금 어디 있소?" 우문한도는 손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바로 제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심목풍은 슬쩍 변죽을 울렸다. "우선 꺼내서 구경이나 좀 합시다." 우문한도는 곧 대꾸했다. "대장주께서 먼저 결심을 하십시오. 허락하신다면 물론 꺼내 드리지만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보 실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자 심목풍이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때엔 당신은 이 골짜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소?" 우문한도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대장주께서 반드시 허락하실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심목풍은 다그쳐 물었다. "어찌 자신을 한다는 거요?" 우문한도는 웃으며 "왜냐하면 대장주께서는 기필코 금궁에 들어가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심목풍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심모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문형이 어째서 그런 이상한 생각을 갖게 되었나 하는 점입니 다." 우문한도는 주조룡을 힐끗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것은 오직 주이장주의 침착성이 부족했던 때문이오. 주이장주의 태도로 보아 대장주께서는 나를 죽이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조룡은 깜짝 놀라서 내뱉듯이 말했다. "우문형, 함부로 사람을 모함하지 마시오. 이 몸이 언제 당신에게 그럴 만한 행동을 했단 말이 오?" 우문한도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전에 내가 금궁을 열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생각해 내서 일시 너무도 기쁜 나머지 소리를 내어 웃었더니 주이장주께서는 아마 소제가 이상한 마음이라도 품고 있다고 의심을 했는지 손을 들어 나의 심맥(心脈)을 누르지 않았소? 만일 그때 내가 침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나는 주형의 손에 죽었을 것입니다." 주조룡이 다급히 말을 가로챘다. "우문형, 그건 오해요. 소제는 다만 우문형의 웃음이 하도 이상하여 혹시 진기가 혈도에서 풀려 나오지나 않았나 해서 손을 뻗쳐 도와드린 건데, 뜻밖에도 그것이 우문형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줄은 정말 몰랐소." 우문한도는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그건 궤변이오. 나의 웃음이 멈춘 후에도 주형의 손은 여전히 나의 등줄기를 누르고 있었소!" 우문한도는 시선을 돌려 심목풍을 힐끗 바라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심대장주께서 아무런 분부도 없었다면 주이장주께서는 절대로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목풍의 싸늘한 두 줄기의 시선은 주조룡의 표정을 한 번 훑어본 다음 재빨리 다시 우문한도에 게 옮겨졌다. 소영은 이때 주조룡의 전신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문한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변변치 못한 이 몸이 혹 금궁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대장주께서는 가슴속의 분노를 터뜨릴 곳이 없어 결국 저에게 그 분풀이를 할 것이며, 또한 금궁을 찾아낸 후에도 저는 이미 이용 가치가 없 어졌으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국은 죽음뿐이니...그래 서 금궁을 찾아내기 전에 대장주와 협의하려는 것입니다." 심목풍은 담담하게 웃었다. "우문형, 이 한 가지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되오. 지금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을 생포하 여 이 세상에서는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고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정색을 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지금 내 입엔 일종의 극독한 환약이 들어 있소. 이빨로 깨물어 삼키기만 하면 즉시 독이 발작 하여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장주께선 금궁으로 들어갈 기회를 상실하게 되거나 설령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몇 년 더 늦어질 것입니다.' 심목풍은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우문형은 정말 의심이 많군요. 그렇다면 심모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어서 그 무심과를 꺼내 시구려." 소영은 이들 두 사람이 하는 수작을 지켜본 다음 이런 생각을 했다. '심목풍이 어떤 사람이라고! 쉽사리 우문한도의 요구를 받아들일까 보냐! 보아하니 이 일로 말미 암아 한바탕 생사를 건 싸움이 벌어지겠군.' 그러나 사정의 변화는 뜻밖이었다. 심목풍은 정말 서슴지 않고 무심과를 삼키려 했다. 우문한도는 급히 금테를 두른 상자를 열어 동합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고 마치 복숭아처럼 생긴 노란 물건 한 개를 꺼냈다. 우문한도는 그것을 식지와 중지 사이에 들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오." 우문한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 과일의 향긋한 맛은 혀를 자극할 것입니다. 그리고 속엔 씨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오 랫동안 몸에 지니고 다녔으므로 말라 버렸습니다." 심목풍은 빙그레 웃었다. "우문형은 먹어본 일이 있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먹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과일의 향기를 아시오?" 우문한도는 약간 난처한 빛을 보이며 대답했다. "지난 날 소제가 이 과일을 처음 얻었을 때, 그 향기가 매우 짙어 수천 장 밖에서도 그 향긋한 냄새를 맡아볼 수 있을 정도였었소. 그래서 소제는 이 과일이 향긋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목풍은 무심과를 받아 들고 만지작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우문형, 이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대신할 수는 없소?" 우문한도는 곧 대답했다. "소제가 이 방법을 꺼내기 전이라면 다른 방법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미 이야기를 꺼낸 이상 다른 방법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 다." 심목풍은 가볍게 웃었다. "좋소. 이 심모는 일생 동안 남에게 굽혀본 일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특별히 우문형의 뜻을 이루 어 주겠소." 우문한도는 말을 받았다.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그르치는 법이오. 대장주께서 장차 무림을 한 손아귀에 넣을 것 을 생각하신다면 이까짓 일쯤이야 조금도 언짢게 생각할 게 없을 겁니다." 심목풍은 그 말을 듣자,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옳은 말이오." 심목풍은 독과를 들어 입 속에 넣었다. 주조룡은 깜짝 놀라서 "대장주!" 하고 외쳤다. 심목풍이 노한 소리로 꾸짖었다. "모두가 너의 잘못으로 빚어진 결과다." 심목풍은 말을 함과 동시에 앞으로 한걸음 나서면서 손을 뻗어 주조룡의 완맥을 잡았다. 주조룡은 다시 "대장주!" 하고 외쳤다. 심목풍은 오른손을 뻗쳐 주조룡의 앞가슴을 향해 찍어갔다. 그러나 장세가 그의 앞가슴에 닿으 려는 찰나 심목풍은 갑자기 손을 뒤로 돌려 반대 방향을 찍어갔다. 순간, 한 줄기의 질풍같이 빠르고 강력한 지풍, 암경이 곧장 우문한도의 명부요혈을 향해 뻗쳐갔 다. 이때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수 척이었다. 우문한도는 비록 늙은 구렁이처럼 간사하고 교활했지만 심목풍의 주조룡을 향하던 손이 그처럼 느닷없이 자기에게로 돌아올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피할 틈이 없어 심목풍의 강한 지 풍에 명부요혈이 적중되고 말았다. 이때 심목풍의 동작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오른손의 지풍이 우문한도를 적중시키자, 재빨리 주 조룡의 손을 잡고 있던 왼손을 돌려 우문한도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나서야 심목풍은 냉 랭하게 한바탕 웃어젖혔다. "우문형께서는 스스로 이런 결과를 자초했으니 할 수 없는 일이지." 심목풍은 곧 주조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의 입 속에서 빨리 약물을 꺼내!" 그 말이 떨어지자 주조룡은 곧 손을 뻗쳐 우문한도의 입을 벌리고 그의 입 속에서 흑색 단환 한 개를 찾아냈다. 심목풍은 꺼낸 단환을 한 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은 교활하고 음흉스럽기 짝이 없으니 절대로 경솔하게 처리해서는 안 돼. 다시 그의 입 속을 들여다 보게. 또 독환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 주조룡은 대답을 한 다음 다시 우문한도의 입 속을 자세히 들여다 봤다. 과연 혓바닥 밑에서 한 알의 흑색 단환이 나왔다. 이때 우문한도는 두 곳의 요혈을 찍혔으므로 말도 할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소영은 심목풍과 우문한도의 서로 잡아 먹으려는 듯한 일 장의 싸움을 바라보고는 속으로 이렇 게 생각했다. '강호의 속임수가 험악하다더니 과연 악랄하기 그지없구나!' 그러나 심목풍은 곧 오른손을 떨쳐 우문한도의 두 군데 요혈을 풀어주고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 다. "우문형은 그래도 이 심모를 위협하겠소?" 우문한도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주가 나의 몸뚱이를 토막토막으로 잘라서 죽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금궁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줄 수 없소." 심목풍은 냉랭하게 말했다. "우문형은 그래도 고집을 부릴 작정이오?" "저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니 마음이 오히려 편하군요." 심목풍은 담담하게 웃었다. "당신과 나의 거리는 불과 수 척이오. 당신에게 절대로 자살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가소롭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단칼에 죽으나 천백 번 찔려 죽으나 죽음은 마찬가지요." 심목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문형은 너무도 자신만만하군요. 하지만 당신이 이 심모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이 심모는 언 제든지 당신을 굴복시킬 자신이 있소." 심목풍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러나 심모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소." 우문한도는 심목풍의 말이 다시 누그러지는 것을 보자, 다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느꼈다. "제가 만약 금궁을 개척해 준다면 대장주께선 어떻게 저를 대해 주겠소?" "우문형은 박학다식하고 지모가 풍부하므로 이 심모는 앞으로 다시 우문형을 존경할 것이오. 내 가 당신을 죽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설사 당신이 나에게 협력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마 나 와 적대시하지는 않으리라 믿소. 다만 당신이 소영을 도와 나에게 맞서지 않는다면 곧 당신을 강 호에서 물러나게 하여 선기서여로 돌려 보내 책이나 읽으며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겠소." 우문한도는 잠깐 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말이야 그럴 듯하지만 저로서는 역시 믿을 수 없는 말이외다." "어째서 못 믿겠다는 거요?" 우문한도는 힘없이 대답했다. "당신이 맹세를 하기 전에는....." 113. 우문한도의 시중꾼이 되어 심목풍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문형이 만일 나를 도와 금궁을 개척케 한다면...그래서 내가 금궁의 물건을 손에 넣게끔 해 주었는 데도 내가 당신을 살해한다면 나는 옳게 죽지 못할 것이오."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좋소. 심대장주를 한번 믿어 봅시다." "고맙소. 나는 우문형에게 추호도 악의가 없소. 다만 우문형이 너무 나를 의심했기 때문에 약간 의 오해가 생겼던 것뿐이오." 심목풍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우문형은 언제쯤 금궁을 개척할 생각이시오?" "길면 칠 일, 빠르면 사 일....." 심목풍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따지듯 물었다. "만일 우문형이 칠 일이 지났는데 금궁을 개척해 내지 못했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소?" 우문한도는 자신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금궁이 이곳에 있는 이상 절대로 열리지 않을 리는 없소이다." "금궁은...내가 알기로는 확실히 이곳에 있소." "그렇다면...내가 약속 기일에 금궁을 개척하지 못한다면 그 때에는 심장주의 어떤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소." 심목풍은 오른손으로 우문한도의 어깨를 툭툭 치며 껄껄 웃었다. "하하하, 좋소. 우문형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설사 우문형이 금궁을 개척해 내지 못하더라도 전력을 기울여 주기만 하면 되오." 심목풍은 돌연 진기를 끌어 모으더니 카악! 하며 무심과(無心菓)를 뱉아냈다. 그는 그것을 옷에 쓱쓱 문지르더니 우문한도에게 내주었다. "이 과실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기물(奇物)이니 잘 간직하시오." 우문한도는 무심과를 받아 상자 속에 넣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눈을 감았다. 심목풍은 주조룡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불렀다. "이장주!" 주조룡은 안색이 변하며 급히 허리를 굽혔다. "형님, 무슨 분부가 있습니까?" "자네가 일을 잘못하여 우문형이 오해를 했었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대답해 보게." "제 잘못은 저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심목풍은 무서운 눈길로 주조룡을 노려보았다. 주조룡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심목풍이 약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자네의 이번 잘못은 기억해 두겠네. 후일 다시 잘못을 저지를 때에 한꺼번에 문책하겠네." 주조룡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형님의 너그러운 은혜에 감사할 뿐인니다." 심목풍은 소영과 백리빙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저 두 사람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오?" "네, 그들은 공인(公人)들인데 우문형께서 선출하여 뒷바라지를 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옷을 갈아 입히고 이곳에 남아 명령을 기다리게 하게. 그리고 이 방은 누구 의 거처인가?" 반룡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인의 거처입니다." "우문형에게 내 주어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반룡이 공손히 대답하자 심목풍은 다시 우문한도에게 시선을 던졌다. "우문형, 나는 조금 전에야 소식을 들었는데 그 가짜 소영이 몇몇 무림의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 을 엿보고 있다고 하오. 또한 다른 몇 패의 사람들이 몰려와 기회를 노리고 있소. 우리는 우선 정 세를 조사해 일찍 방비망을 펼쳐야겠소." 우문한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대장주께선 그만 가 보시오." "그러지요. 그럼 우문형은 몸조리 잘하시오." 심목풍은 주조룡에게 눈짓을 하며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주조룡 등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실내는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은 소영과 백리빙 그리고 반룡뿐이었다. 이때 석실에 남아 있던 반룡이 침묵을 깨뜨리고 우문한도에게 말을 걸었다. "우문선생, 제가 무엇이든 도와드릴 것이 없겠습니까?" "별로 없소." 우문한도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는 소영과 백리빙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반형, 이 두 사람에게 옷을 갈아 입히고 얼굴의 때를 씻도록 하시오." "네, 곧 그들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우문한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을 데리고 갈 필요는 없소. 수고스럽지만 반형이 좀 가져다 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을 한 반룡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우문한도는 반룡이 사라지자 손짓을 하며 소영에게 말했다. "자네, 이리 좀 와 보게." 소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우문한도는 소영과 백리빙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 왔나?" "오래 되었습니다." "자네들이 노동을 하던 것과 나를 따라 일하는 것과 다른 점이 있나?" '우문한도는 자기가 홀몸이기 때문에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구 나. 신분을 알지도 못하는 공인과 친하려고 들다니 상당히 외로운 신세가 되었군.' 소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노동을 하던 것과 지금 선생님을 따라 일하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이 골짜기에서 우문한도의 친구들은 다만 자네들 뿐이네." 우문한도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만일 이 골짜기를 빠져 나가려면 그 유일한 방법은 바로 나의 명령을 따르며 나하고 힘을 합치는 것뿐일세."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소영이 허리를 구부리며 말하자 우문한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아. 자네들은 옷을 갈아 입은 후 내 곁에 앉아 나를 도와주게나. 나도 자네들을 도와 이 골짜 기에서 벗어나도록 해 줄 테니."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소영은 허리를 깊이 구부려 읍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백리빙은 시종 아무 소리도 않고 소영의 곁에 붙어 서서 움직였다. 우문한도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우문한도의 얼굴은 번뇌의 표정으로 덮여 몹시 쓸쓸해 보였다. 소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심목풍의 악랄한 수단에는 우문한도도 이미 증오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구나. 내가 지금 본색을 드러내면 우문한도는 나를 적대시하지 않고 손을 잡으려고 들 것이다. 그가 허락만 해 준다면 빙 아를 중주이고에게 보내 돕도록 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우문한도의 앞으로 다가섰다. 우문한도는 소영의 발소리를 듣더니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눈에 광채를 발하며 소영을 쏘아보더 니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 소영이 우문한도에게 다가설 때에는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손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문한도의 눈빛에 음흉한 마음이 엿보이는 것을 느끼고는 '이 사람의 눈을 보니 엉큼하고 간교하겠다. 힘을 합쳐서 이로울 것이 별로 없겠는데.' 하고 생각을 고쳐 먹고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소인은 한 가지 선생님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우문한도는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소영을 노려보며 물었다. 소영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소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골짜기에 대한 것인데...선생님께서 들어 주실는지요?" "좋아. 자네가 알고 있는 대로 말하게. 많을수록 좋지." 소영은 친밀감을 표시하는 척하며 말했다. "소인은 이 골짜기에서 신분이 낮아 아는 것이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몇 가지 알고 있긴 하지 만, 이것도 선생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소영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서 다음 말을 준비하기에 머리를 짜야 했다. 이것을 알 리 없는 우문한도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네. 내가 알고 있는 일이든 모르고 있는 일이든 관계치 말고 어서 얘기해 보게." 소영은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속으로는 망설이면서 입으로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 불쑥 튀어 나왔다. "그 금궁에 관한 일인데....." "음성을 낮추게. 그래, 금궁이 어찌 되었단 말인가?" 소영의 입에서 금궁이란 말이 나오자 우문한도는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소영은 '우문한도가 이토록 다급하게 물으니 얼렁뚱땅 꾸며대긴 해야겠는데.....' 생각하며 역시 되는 대로 입을 열었다. "소인은 어떤 인부 하나가 절벽 밑 작은 웅덩이에서 금가락지 하나를 주운 것을 본 일이 있었습 니다." "그래? 그 금가락지는 어디에 있지?" "그 사람이 감독관에게 바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문한도는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자네는 그 사람을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그것 잘되었군. 빨리 가서 그를 불러오게. 내가 좀 봐야겠네. 아마 그 금가락지는 금궁을 개척 하는 데에 의외의 도움을 줄는지도 모르겠군." 우문한도는 구미가 바싹 당기는 표정을 지으며 채근했다. '마침 잘되었구나. 이 기회를 이용해서 빙아를 중주이고에게 보내야겠다. 그들이 이 산골짜기로 잠입해 들어올 수 있는 좋은 기회군.' 이렇게 생각하며 소영이 말했다. "소인은 그를 알고는 있지만 별로 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백리형과 그는 오랫동안 사귄 사이이므로 백리형을 시켜 불러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응, 그거 좋겠군. 금가락지를 훔쳐올 수 있다면 더욱 좋고, 만일 그럴 수 없다면...아무튼 빨리 다녀오도록 하게." "네, 소인이 백리형에게 일러 곧 그 공인들 사이에 끼여들어 될 수 있는 한 금가락지를 훔쳐오 도록 하겠습니다." 소영은 말꼬리를 잠깐 흐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감독관이나 주이장주께서 묻는다면 어떻게 하지요?" "괜찮네. 내가 응대할 방법이 있으니 속히 다녀오도록 하게." 우문한도는 바짝 몸이 달아 재촉했다. 소영은 백리빙에게 다가서며 전음지술로 "빙아, 너는 곧 우리가 내려오던 길로 해서 산꼭대기로 올라가라. 중주이고에게 알려 속히 이 골 짜기로 들어오는 숲 속에 잠복하라고 일러라." 하고 음성을 높여 말했다. "백리형 가서 금가락지를 수중에 넣은 후 속히 돌아오시오. 될 수 있으면 훔쳐오는 방도를 취해 서....."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이때 반룡이 의복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었다. 백리빙이 나가는 것을 본 반룡은 눈이 휘둥그래지 며 들어서지도 않고 머뭇거렸다. 이것을 본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에게 무엇을 좀 가져 오도록 부탁했소. 옷은 돌아온 후에 갈아 입도록 하시오." 반룡은 옷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저는 대장주님의 명령을 받아 선생님 곁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시키실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저에게 분부하십시오." 우문한도는 코웃음을 치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은 나의 시중을 들러 왔소? 아니면 나를 감시하러 왔소?" "제가 감히....." 반룡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우문한도는 다시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은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것뿐이니 설사 나를 감시하더라도 굳이 탓하지는 않겠소. 당 신은 돌아가 대장주에게 전하시오. 내가 금궁을 개척할 수 있는 방법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두 사람의 시중꾼 이외에 반감공 같은 분의 수고까지는 필요가 없다 하더라고." 반룡은 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소영은 '반룡이 이미 백화산장을 배반했다는 것을 알면 우문한도가 이토록 쫓아내려고 들지는 않을 텐 데.....' 하고 생각했다. 반룡은 난처한 기색으로 우문한도를 바라보더니 몸을 굽혀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저 사람은 돌아가서 심목풍에게 이 사실을 모두 얘기할 테지. 그렇게 되면 지금의 내 처지로는 결코 이롭지 않을 텐데.....' 우문한도는 반룡을 다시 불러들이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눌러 참았다. 한 번 나간 반룡은 밤 이 되도록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등을 가져 오고 술과 음식을 가 져 온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우문한도는 "자네도 이리 와서 같이 먹세." 하고 맞은편의 자리를 권했다. 소영은 매우 황공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하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소영은 백리빙이 염려되어 입맛이 없었다. 흡사 모래알을 씹는 듯한 기분으로 밥을 억지로 먹고 수저를 놓았다. 우문한도는 소영이 수저를 놓는 것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표정을 살피니 소영은 일말의 동정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자네의 무공은 어느 정도인가?" 갑자기 우문한도가 물었다. 소영은 무슨 눈치를 챈 것이 아닌가 하고 속으로 흠칫했으나 태연히 대답했다. "소인의 무공 말씀입니까? 말씀드리기 창피할 정도입니다. 보통 사람보다 약간 나을 정도입지 요." "그래? 그렇다면 내가 이후에 자네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겠네." "감사합니다." 우문한도는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며 근심스럽게 물었다. "자네의 형제가 떠난 지 꽤 오래 되었지?" "떠난 지 칠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곧 돌아올 시간인데요." "그 금가락지는 매우 중요하지. 그가 꼭 얻어 와야 할 텐데 ....." 소영은 속으로 피식 웃었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내지 않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진실로 빙아가 금가락지를 얻어올 수 있다 하더라도 너에게 줄 수는 없지.'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우문한도와는 다른 이유 때문에 마음이 초조했다. '심목풍의 지혜와 무공으로 보아 백리빙이 그에게 잡히는 날이면.....' 소영은 초조한 마음을 더 누를 수 없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문한도가 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무얼 하려고 일어서나?" "소인은 백리형을 마중 나갈까 합니다." "좋아. 빨리 돌아오게." 소영은 대답을 하고 석실 밖으로 나왔다. 동굴 속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소 영은 시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동굴문을 향해 걸었다. 두 개의 돌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소영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박혀 있고 서천에는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이미 삼경이 지난 모양이구나. 중주이고가 발각되지 않았다면 이미 이 동굴 근처에 몸을 숨기 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 활동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니 여기서 잠시 기다려 보자.'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두 개의 회색 그림자가 유성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소영 은 급히 동굴 속으로 몸을 숨기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두 사람은 이미 소영과 다섯 자 거리까지 다가오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 두 사람은 소영의 앞에 나타나더니 부리부리한 눈초리로 소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왼쪽 사람은 깡마른 체구에 검은 수염을 길렀으며 등에는 장검을 메고 있었다. 오른쪽 사람도 등에는 장검을 메고 있었으나 흰 얼굴에 수염은 없었다. 이들은 모두 회색의 경장을 하고 있었다. 나타난 두 사람은 검문쌍영이라 일컬어지는 배백리와 담통이었다. 소영을 노려보던 배백리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네, 소인의 성은 악(岳)가이며....." 소영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담통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 골짜기의 공인인가?" 소영은 아직 옷을 갈아 입지 않아 인부 차림 그대로였다. "그렇습니다. 소인은 원래 반감독의 부하이온데 지금은 우문선생을 모시고 있습니다." 배백리가 물었다. "우문선생은 안녕하신가?" "네, 지금 운공하며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배백리가 담통을 돌아보며 말했다. "담형, 우리 우문선생에게 가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거 좋겠소. 역시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좋을 테니....." 배백리가 다시 소영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자네가 앞장을 서게. 우리는 우문선생을 뵈어야겠으니." 소영은 백리빙을 기다리다가 뜻밖의 방해자를 만나 내심 몹시 불쾌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심목풍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더니 이젠 다시 충복이 된 모양이지? 지금 내 신분을 밝혀 이들 강적과 싸워 보았자 이로울 것도 없고.....' 소영은 할 수 없이 몸을 돌려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배백리와 담통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시종 소영과 서너 발자국의 거리를 유지하 며 뒤따르고 있었다. 깜깜한 동굴을 지나 석실 앞에 당도하자 소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석실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우문선생! 누가 선생을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우문한도의 음성이 튀어나왔다. "누구냐?" 배백리가 소영을 제치고 안으로 성큼 들어서며 말했다. "검문쌍영이 우문선생을 뵈오려고 왔습니다." 우문한도는 날카로운 눈으로 배백리와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담통을 바라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배형, 담형, 어서 오시오." 그는 두 사람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두 분께서 이 우문한도에게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소?" 배백리가 공손하게 읍하며 대답했다. "우문선생에게 방해를 끼쳐 죄송합니다." "하하, 방해될 거야 없지만 나는 심장주의 명을 받고 금궁을 개척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니 만 일 두 분이 특별한 볼일이 없다면 그만 돌아가기를 바라오." 배백리와 담통은 냉정한 우문한도의 태도가 의외인 모양이었다. 서로 마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 을 짓더니 담통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우린 별일도 없으며 방해도 하지 않겠소이다. 하지만, 우문선생에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 이다." "무슨 일이오?" 담통이 턱으로 소영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자는 정말 선생의 시중을 들고 있는 사람이오?" "그렇소. 바로 주이장주가 추천해 준 사람이오. 왜,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소?" "아니...그의 행동이 수상쩍기에 선생에게 달려와 물은 것뿐입니다." 우문한도가 싸늘하게 반문했다. "수상쩍다니.....?" "아, 아닙니다. 동굴 어귀에 서 있기에....." "이제 더 물을 것이 없소?" 우문한도의 너무도 차가운 태도에 검문쌍영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배백리가 담통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갑시다. 우문선생을 잠시나마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우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더니 몸을 돌렸다. 담통은 무엇인가 더 이야기하려는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다가 나가 버렸 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이윽고 우문한도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소영에게 물었다. "그들은 다 갔나?" "네, 갔습니다." "자넨 어디서 그들에게 붙잡혔나?" "소인은 동굴 입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순찰하다가 소인을 보더니 우문선생의 안부 를 물으며 소인보고 데려다 달라고 하더군요." 우문한도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더욱 음성을 낮추었다. "자넨 그 백리형제를 보았나?" "보지 못했습니다." 소영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하자 우문한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중도에서 무슨 변을 당한 것이 아닐까?" 바로 이때였다. 인기척이 가볍게 들리더니 백리빙이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우문한도는 흠칫하며 "매우 빠른 신법이군." 하고 감탄했다. 그러나 소영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큰일이다. 빙아가 무공을 나타냈으니 이번에야말로 우문한도의 의심을 사서 정체가 탄로나겠 다.' 소영의 이런 염려를 백리빙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일부러 숨을 할딱거리며 숨가쁜 소리로 말했 다. "그 금가락지를 가진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뭐라고? 어디 갔지?" 우문한도는 실망과 의혹이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백리빙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여러 곳으로 찾아 다녔지만....." 우문한도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반짝이며 백리빙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비꼬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자네의 경공은 제법이더군." "밖에 경비가 엄하고 쉴새없이 순찰을 돌고 있으므로 소인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 다. 마침 두 사람이 들어서길래 그들의 뒤를 따라 석실 밖에 숨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선생님 과의 대화에 열중해서 저를 발견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자네는 방금 어디서 실내로 뛰쳐 들어왔나?" "바로 돌문 밖에 있었습니다." 우문한도는 돌문 밖을 힐끗 바라보더니 "거리가 팔 척은 되는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백리빙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소인은 전신의 기력을 다해 뛰어 보았습니다." 우문한도는 백리빙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네는 훌륭한 경공의 기초가 있네. 노력만 한다면 분명 대성할 걸세." 하고 말했다. 백리빙은 황송하다는 듯 두 손을 마주 잡고 허리를 굽혔다. "앞으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소인이 사부님에게 무예를 터득할 당시에 사부님은 소 인에게 무공을 수련하기에 적합한 체질이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신체가 작으니 상승경공을 수련하기에는 적당한 체질이지." 우문한도는 더 캐묻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들은 옷을 갈아 입게." 백리빙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섰다. 소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석실의 귀퉁이로 갔다. 우문한도는 등불을 끄고 다시 눈을 감았다. 우문한도의 숨소리가 점점 작아지자 소영은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백리빙에게 물었다. "동생은 중주이고를 만났나?" "만났어요. 그들은 이미 골짜기로 숨어들어 오빠의 분부대로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요. 처 음에 그들은 공인을 가장해서 군중 속에 끼여들려고 했었어요." "그래서?" "내가 오빠의 명령이니 수풀 속에 몸을 숨기라고 하니까 마지못해 따르더군요. 지금 수풀 속에 숨어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럼 되었군. 동생은 그들과 만날 때 쓰는 신호를 정했나?" "정했어요." 백리빙은 잠깐 말을 끊고 우문한도의 눈치를 살피더니 근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경솔해서 몸을 너무 빨리 놀렸으니 아마 우문한도가 의심을 품고 있을 거예요.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그 책임을 어떡하지요?" "괜찮다. 그가 비록 속으로는 의혹을 느끼고 있지만 그의 속셈은 다른 데에 있는 듯하다. 필경 우리를 이용할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심목풍에게 이야기하진 않을 테니 우선은 걱정 할 필요없다." 백리빙은 몸을 소영에게 기대며 정이 담뿍 깃든 어조로 말했다. "오빠가 꾸짖지 않는다면 나는 안심이에요." 소영은 백리빙이 몸을 기대오자 몹시 당황했다. 급히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어느 새 백리빙 은 잠이 든 모양이었다. '꽤 고단했던 모양이구나. 이토록 곤하게 자는데 내가 어찌 밀어낼 수가 있겠는가?' 소영은 자기의 품에 기댄 채 잠이 든 백리빙을 그대로 놓아 두었다. 물씬물씬 풍겨 오는 여자 특유의 체취와 탄력성 있는 보드라운 몸의 감촉에 정신을 쏟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도 눈을 감았 다. 시간은 잠시도 쉬지 않고 흘렀다. 석실 속에서 세 사람은 삼 일 밤낮을 보냈다. 이 삼 일 동안 심목풍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술과 몇 끼니의 밥을 부하를 시켜 날라다 주었을 뿐이었다. 삼 일 동안의 밤을 소영과 백리빙은 석실 귀퉁이에서 어깨를 붙이고 앉은 채 잠을 잤다. 먹고 자고, 먹고 자는 시간을 삼 일간 계속하자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 일째 되는 날의 점심 무렵이었다. 소영은 지루함을 참지 못해 하품을 하며 우문한도를 바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참으로 끈질긴 사람이군. 만일 오늘도 행동을 않고 있다면 그의 혈도를 찍어 버리고 빙아와 함 께 이곳을 떠나는 수밖에 없겠다.' 소영이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였다. 돌연 석실 밖에서 쿵쿵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굴까?' 소영이 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여러 사람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들어선 사람은 심목풍, 주조룡, 단굉장, 금화부인과 머리가 하얀 노파 한 명이었다. 노파는 푸른 옷을 입었고 손에는 봉두장(鳳頭 杖)을 짚은 당노파였다. '금화부인이 이곳에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사천 당가의 당노파가 느닷없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더욱이 무공이 강호를 흔드는 당노파가 심목풍의 뒤를 따라왔으니 이상하다.' 소영은 의아심과 놀라움을 느끼며 그들을 주시했다. 심목풍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곧장 우문한도의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우문형!" 심목풍이 낮은 소리로 부르자 우문한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심장주께서 무슨 가르침이 있소?" 심목풍은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오늘이 벌써 사 일째인데 우문형께서는 어떤 단서라도 생각해 내셨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라 말했다. "생각해 냈소." 이 말은 심목풍뿐만 아니라 소영도 놀라게 했다. '생각해 내다니...무엇을 어떻게 생각해 냈단 말인가?' 소영은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물을 수는 없어 심목풍만 바라보았다. 심목풍은 목이 타는지 마른침을 삼키며 조급하게 물었다. "내가 물었던 것은 우문형께서 금궁을 개척할 방법을 생각해 냈느냐는 것인데, 우문형의 대답이 사실이오?" "그렇소. 금궁이 확실히 이곳에 있다면 나는 그 문이 있는 위치를 찾아낼 수 있소. 하지만 그 문 을 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요." 심목풍은 희색이 만면해지며 말했다. "우문형은 과연 지혜가 특출한 기인이오. 이곳에 모인 누구라도 우문형의 지혜로움을 따를 수 없겠소." 심목풍은 소영과 백리빙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두 사람은 흐리멍텅해서 우문형의 시중을 잘 보살필 수 없을 것 같소. 내가 이미 우문형을 위해 예쁜 두 계집애를 데려왔으니 우문형은 그녀들의 시중을 받으시오." 그는 석문 쪽을 바라보며 약간 큰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어서 들어와서 우문선생께 인사드려라." 그러자 녹색옷을 입은 두 시녀가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은 심목풍에게 몸을 숙이며 "대장주님께 인사드립니다." 하고 맑은 음성으로 말했다. 심목풍이 그녀들을 보고 "우문선생께 인사드려라." 하자 그녀들은 몸을 우문한도에게로 돌리더니 날아갈 듯한 자세로 큰절을 했다. 섬세하고 부드 러운 동작 속에 늘씬하게 균형잡힌 몸매가 드러나 있었다. 모두 십팔구 세쯤 되어 보였다. 우문한도는 차가운 눈초리로 두 소녀를 바라보더니 역시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두 낭자는 일어나시오." 두 소녀가 나란히 일어서자 우문한도는 심목풍을 향해 말했다. "나는 염복이 없으니 두 낭자들은 장주께서 쓰시도록 하시오. 나는 저기 있는 두 공인의 시중만 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심목풍은 우문한도가 거절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우문한도를 바라보며 민망한 표정 을 짓더니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아마 계집애들이 예쁘지 않아 우문형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두 소녀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두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물러 섰다. 우문한도가 심목풍에게 물었다. "지금 어느 때쯤 되었소?" "오시(午時)가 가까웠소." "벌써 그렇게 되었나?" 우문한도는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더니 강한 억양으로 말했다. "빠를수록 좋으니 한 시진 뒤에는 금궁의 문을 찾는 데에 손을 쓰기 시작해야겠소." 이 말은 심목풍을 몹시 기쁘게 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반가운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소. 내일 착공을 해도 별로 지장이 없다면 오늘 하루 더 쉬시지요." "하루라도 속히 착공해서 금궁을 빨리 찾아내야 나도 안심할 수 있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미 착수하기로 결심했으니 더 머뭇거릴 필요가 없소." 우문한도는 말을 잠깐 끊고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대장주께선 건장한 사나이 이십 명만 골라 주시오." "좋소. 우문형께서는 나에게 어떤 일이라도 지시하시오. 그것이 금궁을 개척하는 데에 필요한 것 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거절하지 않겠소." 우문한도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는 다른 부탁은 없소이다. 그리고...내가 아직 더 생각해야 될 것이 있으니 대장주께서 는 특별한 볼일이 없다면 돌아가 쉬도록 하시지요." "그렇다면...나는 우문형을 방해하지 않겠소." 심목풍은 얼굴을 돌리더니 소영과 백리빙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우문형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으니 실로 행운아들이다. 아무쪼록 우문형의 시중을 잘 들어라. 나중에 너희들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 테니....." "네, 대장주님의 말씀 명심해서 받들겠습니다." 소영과 백리빙은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그는 다시 우문한도에게 "그럼 다시 오겠소." 하고는 뒤따라 온 사람들을 휘둘러보며 석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따라 나갔다. 이들이 밖으로 나가자 우문한도는 몸을 일으켜 문 밖을 둘러보더니 소영을 불렀다. "자네, 이리 와 보게." '이 늙은 원숭이가 어떤 잔꾀를 부리려고 그러는 모양이구나. 아무러면 어떠랴. 나는 굿이나 보 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지.' 소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선생님께선 어떤 분부가 있으신지요?" 우문한도는 돌문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 석문을 잠글 수 있을까?" "글쎄요. 소인의 힘으로는...혹시 쇠사슬로 고리를 만들어 걸어 잠근다면 몰라도....." 소영의 대답에 우문한도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이 석실 속으로 들어오는 길은 이 돌문 하나밖에 없겠지?" "그렇습니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이 돌문뿐입니다." "그것 참 잘되었군. 문 밖에 쇠사슬이 있으니 자네가 좀 잠궈 주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영은 백리빙을 한 번 돌아본 후 밖으로 나갔다. 쇠사슬을 찾아 그는 문을 잠가 버렸다. 소영이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우문한도가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자네들 이리 와 보게." 백리빙과 소영이 그의 앞으로 가서 서자 그는 두 사람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 사람이 무엇인가 냄새를 맡은 모양이구나.' "현재 이 방에는 우리 세 사람뿐일세. 나는 절대로 자네들을 상하게 하지 않을 테니 자네들은 확실한 신분을 밝혀 주기 바라네." 114. 금궁의 문을 찾아라 '드디어 물어 오는구나. 이 사람의 심중을 알 수 없으니 나의 정체를 밝힐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치미를 딱 뗄 수도 없고 입장 난처한데.....' 소영과 백리빙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하자 우문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미 유심히 관찰한 추측이 틀림없다면 자네들은 이곳으로 잠입한 지 꽤 오래 되었으며 뚜렷한 목적이 있기 때문일 것일세. 자네들은 반룡과 한 패가 아니며 어떤 수단을 써서 그를 매 수하여 이곳에 들어온 것이 분명하네. 그래서 내가 자네들의 신변을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이야." 소영은 우문한도의 말을 듣고 문득 대답할 말이 생각나서 얼른 입을 열었다. "선생님의 관찰력은 실로 예리합니다. 사실 저희들은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잠입한 것입니 다." "누구의 명령을 받았나?" 우문한도의 다급한 질문에 '이 사람에게는 그가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또한 마음대로 건드릴 수도 없는 사람의 이름을 대는 것이 좋겠다.' 하고 생각한 소영은 얼른 대답했다. "남옥당이라고...선생님께서 알고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바로 소영의 탈을 썼던 사람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바로 그 남옥당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우문한도는 소영의 말을 그대로 믿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가 자네들을 이곳으로 보낸 속셈은 무엇인가?" 소영은 그동안 강호의 경험이 많이 늘었다. '내가 너무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면 이 사람이 나를 오히려 의심하게 될 테지. 슬슬 늦추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에게 손톱만큼의 악의도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소영의 말에 우문한도는 안색이 변하며 차갑게 말했다. "만일 내가 한 마디만 하면 너희 두 사람은 찍소리도 못하고 이곳에 뼈를 묻게 된다는 것쯤은 알 텐데....." 위협적인 우문한도의 말에 소영은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할 수 없지. 반룡에게 하던 방법으로 우선 항복시킬 수밖에.....' 소영은 곁눈질로 백리빙을 훔쳐보았다. 그녀 역시 눈에 어떤 결의가 엿보이며 소영이 신호만 보 내면 곧 우문한도에게 덤벼들 의사를 보이고 있었다. 우문한도는 백리빙의 경공을 보기는 했으나 자신의 무공을 믿고 있었으므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호의 무공 졸자들이 나에게 덤벼들어 보았자 단 한 번의 주먹질에 뼈가 으스러지고 말 테 지.....' 이런 생각으로 두 사람을 별로 경계하지 않으며 우문한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자네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네." "무슨 방법입니까?" "지금부터 전심전력을 다해 내 명령에 따라 일하는 것일세." 소영이 대답할 말을 찾고 있는데 우문한도는 금칠을 한 상자를 열더니 푸른색 환약을 꺼내 들었 다. "만일 자네들이 노부의 말을 따르겠다면 곧 이 약을 먹게. 그러면 노부는 자연 자네들의 안전을 보호해 줄 것이네." '이 사람은 심목풍처럼 악랄한 수법을 써서 약으로 남을 부리려고 하는구나. 단단히 혼을 내 주 어야겠다.' 소영은 이런 생각을 했으나 억지로 참으며 물었다. "선생님께선 심장주에게 약을 쓰려다 실패한 울분을 아직까지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습니까?" "아니지. 다만 강호의 사람들은 시시각각으로 마음이 변해 믿을 수가 없네. 나는 금궁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하니 자네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네. 그러니 자네들이 살고 싶으면 어 서 이 약을 복용하게." 소영은 손을 내밀어 두 개의 환약을 집어 들었다. "살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약을 먹어야겠군요. 그런데, 이 약을 먹 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정신이 혼미해지고 과거를 망각하게 되네." "그럼 해독약이 있습니까?" "물론 있지." "그렇다면....." 소영은 약을 입으로 가져가는 체하다가 돌연 왼손을 재빨리 놀려 우문한도의 오른손목을 잡았 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을 들어 한 개의 환약을 우문한도의 입 속에다 털어 넣었다. "...아니?" 기겁을 하도록 놀란 우문한도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소영이 손목을 잡아채며 약을 넣어 준 동작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처 방비할 틈이 없었다. 소영이 손을 쓰자 백리빙도 재빨리 손가락으로 우문한도의 목줄기를 건드렸다. 우문한도는 얼떨 결에 약을 꿀꺽 삼켜 버리고 말았다. 소영은 우문한도의 오른손목을 움켜쥔 채 오른손으로는 그의 목을 풀어주며 말했다. "우문선생! 스스로 해독약을 꺼내 드시오." 우문한도는 눈을 부릅뜨더니 두 손에 힘을 주어 소영과 백리빙을 향해 후려갈기며 외쳤다. "노부가 방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다." 우문한도가 손을 휘두르자 소영은 몸을 약간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을 민첩하게 놀려 우 문한도의 손목을 다시 잡아채었다. "이번엔 우문선생께서도 방비가 있었겠지요?" 소영이 빈정거리는 것과 동시에 백리빙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한 줄기의 지력을 우문한도의 왼쪽 손목에 명중시켰다. "으윽!" 우문한도는 비명을 지르며 급히 두 손을 거두려 했다. 그러나 오른손은 소영의 손에 잡힌 채 뽑혀지지 않았다. 소영이 우문한도의 손목을 잡아챈 것이나 백리빙이 지력으로 공격한 것은 지극히 빠른 동작이었 다. 더욱이 소영의 손에 잡힌 우문한도의 손목은 천근 철판에 박힌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놈들의 무공은 오히려 나보다 위이구나. 무림의 일급 고수를 깔보고 방심하다니.....' 우문한도는 진기를 모아 통증을 참으며 말투를 공손하게 했다. "두 분의 무공이 이토록 고강한 것을 모르고 노부가 그만 실례를 했소." 소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분한 칭찬은 필요없소. 우문선생은 우선 해독약을 복용하시오. 독이 발작하면 구하기 어려울 테니....." "괜찮소. 노부가 스스로 제조한 이 약은 매우 늦게 발작하기 때문에 앞으로 두 시간이 경과해야 만 비로소 발작할 것이오." "그렇다면, 이야기 좀 합시다. 당신은 경주(敬酒)를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시게 되었는데...우리가 합심할 의논 좀 합시다." 우문한도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좋소. 두 분께서 어디 한번 말해 보시오." 소영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문선생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일을 약속해 주셔야겠소." "두 가지 일이 무엇인지 우선 말씀해 보시오." "첫째...우리의 신분을 보호하여 절대로 탄로시키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해 주셔야겠소." 우문한도는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두번째는?" "두번째는...줄곧 우리들과 같이 다니며 금궁까지도 같이 갈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우문한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두 분은 공인의 신분으로 행세하고 있는데 어떻게 금궁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소?" "그러니까 우문선생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닙니까?" "설사 내가 두 분을 금궁까지 모시고 간다고 약속한다 하더라도 심목풍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소영은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금궁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심목풍도 선생의 말을 거역할 수 없을 것이오. 선생이 끝내 고집을 부려 우리들을 데려가겠다고 하면 심목풍도 어쩔 수 없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피식 웃었다. "당신들은 심목풍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군요. 만일 내가 고집을 세운다면 당신들은 귀신도 모 르게 죽고 말 거요. 심목풍이 두 분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더라도 내가 굳이 고집을 내세우면 우문한도가 두 사람을 이용해서 딴 목적을 달성하려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당신들을 죽일 겁니 다." 우문한도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소영은 더 조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단념할 수도 없어 답답한 마음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금궁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소영이 궁리하고 있는데 우문한도가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심목풍은 위인이 간악하고 무공이 높아 섣불리 건드릴 수 없소. 노부가 알기로 심목풍은 무림 인물 중에서 단 한 사람만을 두려워하고 있는 모양이오." "누군데...어떤 실력이 있기에 심목풍이 두려워한단 말이오?" "소영이오. 소영을 제외하고는 심목풍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이 말을 들은 백리빙은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소영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 보고 칭찬을 늘어놓다니...아무튼 오빠의 무공이 심목풍도 두려워할 정도로 높다니 기쁜 일이다.' 소영도 또한 웃음이 치미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어째서 그렇소? 내가 알기로는 소영은 이제 강호에 얼굴을 내민 햇병아리에 불과한데." "그렇지 않소. 일찍이 심목풍은 소영과 몇 차례 겨룬 적이 있었소. 그런데 우연이랄까 운이 좋았 다고 할까 심목풍은 항상 우위에 섰었소. 허나 사실은 심목풍의 무공이 소영만은 못했소. 소영이 야말로 무공과 지혜를 겸비한 천재적인 인물이오." 우문한도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 소영은 속으로 멋쩍은 생각이 들었으나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우문한도의 말은 이어졌다. "교만방자한 심목풍은 겉으로는 큰소리를 땅땅 치고 있지만 소영에게 만은 큰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소." "그렇군요. 하지만 아깝게도 지금 이 골짜기에 소영이 없으니 지금 그의 이야기를 해 봐야 소용 없잖소?" 하더니 소영은 돌연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우문선생! 내가 제시한 두 가지의 조건을 선생께선 아직 약속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할 작정이 오?" "나는 이미 사실 그대로 말했소. 첫 번째의 조건은 약속을 지킬 수 있지만, 두 번째 일은 내 뜻 대로 되는 일이 아니잖소? 노부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오?" 소영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사람은 교활하기 짝이 없어 본심을 알 수 없으니 반룡을 대하던 수법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 다.' 소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선생의 뜻대로 하겠소. 다만 선생은 약속한 것을 보증할 만한 증거를 보여 줘야겠소. 그래야만 우리가 안심할 수 있잖겠소?" "그건 두 분의 지나친 욕심이 아니겠소? 현재의 이런 상황 속에서 노부가 무엇으로 보증하란 말 이오?" "그건 간단하오. 우문선생이 성의만 있다면 보증할 수가 있소." "어디 어떤 방법인지 들어봅시다." "사람은 몇 번 죽소?" 엉뚱한 질문에 우문한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한 번 죽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선생의 생사로 보증을 세웁시다. 우문선생이 만일 마음이 변해 우리를 배 신한다면...그때에는 선생은 살 수가 없소. 또한 금궁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지요. 이것이야말로 확실하고 타당한 방법이 아니겠소?" 우문한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역정난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오?" 소영은 씹어뱉듯이 대꾸했다. "나는 강호의 무명 졸자요." 우문한도는 소영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당신은 인피가면을 쓰고 있구료." 하고 말했다.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인피가면을 벗고 노부에게 본래의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소. 그러나 우문선생께서 약속한 조건만 충실히 이행해 준다면 언젠가는 나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이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석실을 울렸다. 세 사람은 모두 숨을 죽인 채 석문 쪽을 주시했 다. 소영은 긴장을 느끼며 우문한도를 주의해 보았다. 우문한도는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누가 왔군. 아마 심목풍이 틀림없을 거야." '이 교활한 늙은이가 심목풍에게 어떤 수작을 부릴는지 모른다. 할 수 없이 비상수단을 써야겠 다.' 소영은 오른손에 내력을 끌어 모으며 왼손으로는 재빨리 우문한도의 가슴을 찍었다. 우문한도는 강호에 경험이 많고 비범한 인물이었다. 소영이 손을 쓰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그는 재빨리 옆 으로 피하며 왼손을 휘둘렀다. 그는 왼손으로 소영을 쳐내어 잡혀 있는 오른손을 빼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영의 지력 내공은 매우 강했다. 소영의 손가락에 힘이 가해지자 우문한도는 오른손목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 한 통증을 느껴 이를 악물었다. '지독한 놈이다. 마치 무쇠로 만든 인간처럼 힘이 굉장하구나.' 우문한도는 고통을 참으며 재빨리 오른발을 움직여 소영의 아랫배를 향해 걷어찼다. 그러나 이 번에도 소영의 손이 조금 빨랐다. 소영은 왼손을 내리며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려 우문한도의 발을 향해 찍어갔다. 깜짝 놀란 우문한도가 급히 발을 거두며 주춤하는 사이에 백리빙의 손이 어느 틈에 우문한도의 어깨에 닿아 혈도를 찍었다. '으음.....' 우문한도는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저항할 힘을 잃고 멍청히 서 버렸다. 그 사이에 소영과 백리빙 의 손이 동시에 움직여 두 곳의 혈도를 찍어 버렸다. '이놈들의 무공이 높다는 것은 조금 전에 알았지만, 이토록 손발이 빠를 줄은 몰랐는데!' 우문한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시 소영의 손이 움직이더니 그의 아혈(啞穴)을 찍어 말 을 못하게 만들었다. "선생, 잠시만 참으시오." 소영은 우문한도를 끌어다 벽을 마주하고 책상다리를 한 자세로 앉히더니 재빨리 석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우문한도의 혈도를 찍고 석실 밖으로 나가기까지의 시간은 불과 차 한 모금 마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석실 밖으로 나갔던 소영은 금방 되돌아 왔다. 그는 우문한도의 아혈을 풀어주며 말했다. "심목풍이 이미 이십 명의 건장한 사나이들을 준비해 놓았답니다. 선생이 언제 이 일을 착수할 것이냐고 묻더군요." 우문한도는 안면근육을 일그러뜨리며 반문했다. "누가 왔소?" "심목풍의 수제자 단굉장이었소." 우문한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었군. 심목풍이 직접 왔었다면 분명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이 석실 안까지 들어왔을 텐데....." 그는 말꼬리를 잠깐 감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당신은 백화산장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군요." "지금 그런 것을 논할 때가 아니오. 시간이 없소. 선생의 뜻은 어떻소? 속히 결정을 지으시오." 소영의 강경한 어조에 반발하듯 우문한도가 차갑게 말했다. "만일 내가 당신들의 위협에 굴복할 수 없다면?" "흥, 그렇게는 안 될 거요. 만일 선생이 굳이 고집을 부린다면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선생을 죽 일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내가 허락하면 당신들은 날 어떻게 하겠소?" "허락한다면 물론 서로 협력해서 일이 잘되도록 도모해야지요. 그러나 선생의 한 군데 혈도를 찍어, 열두 시간 안에 풀어주지 않으면 자연히 죽게 만들겠소. 이것은 만일을 위해 신중을 기하려 는 것이지요." 우문한도는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소.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으니 당신의 뜻대로 합시다." "그럼 실례하겠소." 소영은 재빨리 손을 움직여 우문한도의 혈도를 한 곳 찍었다. 그런 후 세 곳의 혈도를 풀어주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생사를 건 내기를 하고 있소. 우문선생의 생명과 우리 두 사람의 생명을 교환한다 면...우린 무명 졸자이고 선생은 강호의 일급 고수이니 자연 선생 쪽이 억울할 것이오." 우문한도는 급히 금테를 두른 상자를 열어 환약 하나를 꺼내 삼켰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노부는 당신에게 기혈(奇穴)을 찍혔는데...무공은 여전하겠지요?" "비록 영향은 없지만 약간의 지장은 있소." "열두 시간이 지나면 노부는 어떻게 되오?" "내가 그 혈도를 일단 풀어주고 다시 한 군데의 기혈을 찍어 열두 시간을 살 수 있도록 하겠소." 우문한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렇게 되면 나의 생명은 당신의 손에 영원히 매이게 되잖소?" "아니, 그것은 염려 마시오. 선생께서 힘 닿는 데까지 약속을 지켜 주신다면 헤어질 때는 선생의 혈도를 풀어 자유를 회복시켜 주겠소." 우문한도는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 뒤를 암암리에 진기를 모으며 소영이 따랐다. 백리빙이 소영의 뒤를 바짝 따르며 전음지술로 말했다. "오빠, 그게 정말이에요? 열두 시간 뒤에 우문한도는 정말 죽게 돼요?" "사부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사실 여부는 나 역시 장담할 수가 없어." 소영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될 수 있으면 우문한도의 곁을 바짝 쫓아라. 가까이에 있을수록 더욱 유리하다는 것을 명심해 서....." "염려 말아요."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우문한도의 뒤를 바짝 따랐다. 우문한도는 돌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심목풍과 주조룡, 당노부인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문한도가 나타나자 심목풍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이십 명의 장정들을 이미 준비해 놓았으니 우문형은 마음껏 재질을 발휘해 보시오." 우문한도는 얼굴을 돌려 바로 등뒤에 붙어 서 있는 소영을 힐끗 바라보더니 심목풍에게 대답했 다. "나는 정세가 매우 급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며, 압박을 받고 있는 몸이니 할 수 없이 전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소이다." 이 대답은 심목풍과 소영, 두 사람에게 깊은 뜻을 내포시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심목풍은 우 문한도가 소영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우문형은 너무 좁게 생각지 마시오. 만일 나를 금궁 속으로 인도만 해 준다면 나는 그에 대한 보답을 후하게 하겠소이다." 우문한도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석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뒤를 백리빙이 바짝 따랐다. 잠시 후 일행은 작은 연못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이미 반룡이 이십 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이 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정들은 손에 망치, 괭이, 톱, 정 등의 연장을 들고 있었다. 우문한도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사방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심목풍을 위시한 사람들은 모두 긴장한 채 그를 주시했다. '과연 금궁의 문을 발견할 것인가?' 긴장과 흥분, 기대와 회의의 감정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가 이들을 감싸고 있었다. 이윽고 우문한도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연못과 붙은 한쪽의 절벽 앞으로 다가서더니 금 상자의 뚜껑을 열고 한 조각의 흰 돌을 꺼냈다. 우문한도는 돌로 절벽에다 사방 오 척 정도의 사각형을 그리더니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이곳을 삼 척 정도의 깊이로 파 주시오." 스무 명의 장정들은 반룡의 지시를 받자 즉시 연장을 들고 절벽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곡괭이와 정과 삽으로 부지런히 석벽을 쪼아내기 시작했다. 찡! 찡!― 연장이 석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심목풍은 뒷짐을 지고 선 채 장정들의 일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그 절벽 으로 쏠리고 있었다. 절벽을 뚫는 소리가 시끄러운 틈을 이용해서 소영은 백리빙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빙아, 저기 심목풍의 곁에 서 있는 노부인이 있지? 그녀가 바로 독약을 묻힌 암기를 사용하기 로 무림에서 이름난 사찬 당가의 장문인이야. 만일 우리의 신분이 탄로되어 싸우게 된다면 특히 그녀의 독약 암기를 조심해야 돼." 백리빙은 무척 지혜롭고 영리하지만 아직도 동심(童心)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끔찍한 귀여움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어리광쟁이이기도 했다. 지금 커다란 위험 속에 처해 있으면서도 백리빙은 겁보다는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소영 이 곁에서 자기를 염려해 주자 '고마운 사람.....' 이라는 생각에 기뻐하며 생긋 웃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이가 하얗게 드러나며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이것을 본 소영은 속으로 몹시 당황했다. 급히 진기를 끌어 모아 신변을 보호하며 얼굴 을 돌렸다. '만일 빙아의 웃는 모습을 누가 보았다면.....' 그러나 다행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절벽으로 쏠려 있었다. 소영은 마음을 놓으며 가만히 한숨 을 내쉬었다. 절벽을 반 자 정도 파들어 갔을 때였다. 돌연 우문한도가 크게 외쳤다. "멈춰라!" 이십 명의 장정들은 곧 일손을 멈추었다. 심목풍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헛기침을 하며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우문형, 뭐 발견된 것이라도 있으시오?" 우문한도는 흥분된 눈빛으로 여전히 절벽을 주시하며 말했다. "심장주,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못 느꼈소?" "소리가 다르다니요? 나는 우문형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데요." 우문한도는 입을 다문 채 절벽 앞으로 다가서더니 한 장정의 손에서 망치를 뺏어 들었다. 그는 그 망치로 석벽을 힘껏 후려갈겼다. 그러자, 텅!― 석벽이 크게 울렸다. 그것은 석벽 속이 비어 있다는 증거였다. "이래도 모르시겠소?" 우문한도는 성난 사람처럼 큰소리로 외쳤다. 소영은 '나보고 들으라고 일부러 큰소리를 지르는 것 같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하! 과연 비어 있는 소리 같군요. 정말 놀랐소." 심목풍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말하자 우문한도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너무 경솔하게 기뻐하지는 마시오. 이것은 금궁일 수도 있지만, 또한 지하수가 흐르는 맥을 뚫 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우문한도는 눈을 돌려 거세게 뿜어나오는 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한 줄기의 수맥은 매우 강대해서 우리가 만일 석벽을 뚫어 버린다면 모두가 홍수의 화를 면 할 수 없을 것이외다." 심목풍은 담담히 웃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소?" "물론이지요. 지금 뚫고 있는 곳이 수맥이라면....." "그렇다면 그건 매우 조심해야 될 일이군요. 그래 우문형은 어떻게 할 작정이시오?" 우문한도는 심목풍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쇠망치로 석벽을 두들겼다. 텅! 텅!― 우문한도는 석벽을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다시 두들기고 하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망치를 놓고 물러서며 말했다. "좋소. 좌우간에 벽을 뚫어 놓고 봅시다. 여러분들은 다시 일을 시작하시오." "우문형은 견문이 넓고 학식과 지혜가 풍부해 무림에서 일컫기를 대유재인(大儒才人)이라 하더 니...정말 오늘 비로소 우문형의 재질을 보고 탄복했소이다." 심목풍이 추켜세우자 우문한도는 피식 웃었다. 그는 장정들이 다시 석벽을 깨뜨리는 것을 지켜 보며 말했다. "심장주, 과분한 칭찬은 마시오. 나의 판단이 정확한 것은 아니니까." "과한 칭찬은 아니오. 만일 우문형께서 금궁을 개척하지 못한다면 다른 아무도 금궁을 개척할 사람은 없으리라고 봅니다." '우문한도의 표정을 보니 금궁을 꼭 개척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만일 그의 힘으로 금궁이 열 린다면 내가 지니고 있는 이 금궁의 열쇠는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것일까?' 우문한도를 지켜보며 소영은 이런 생각을 했다.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소영도 심목풍 못 지 않게 흥분하고 있었다. 석벽은 점점 단단해져 좀처럼 뚫기 어려웠다. 정을 대고 쇠망치로 두들겼으나 불똥이 튀며 돌가 루만 부서져 내릴 뿐이었다. '저렇게 하다가 언제 뚫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우문한도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빨리 멈춰!" 장정들은 곧 손을 멈추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우문한도에게 쏠렸다. "우문형, 무엇이 잘못되었소?" 심목풍이 낮은 소리로 묻자, 우문한도는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교수신공 포일천은 과연 비상한 인물이군." 심목풍은 의아한 시선으로 우문한도와 절벽을 번갈아 보며 다그쳐 물었다. "우문형, 도대체 무슨 일이오?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데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우문한도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만일 내가 이 골짜기에다 금궁을 설립했다면 그 출입문을 이곳에 설치했을 것이오." "그런데...지금 문은?" "포일천은 이곳에다 문을 두지 않았소. 문은 다른 곳에 있소." 심목풍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 다. "우문형, 이곳에 문이 없고, 그 문을 찾기가 어렵다면...그러나 금궁이 이 속에 있는 것만 확실하 다면 우린 벽을 뚫고 들어갑시다." 우문한도가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안 되오. 우리가 모두 죽기를 원한다면 몰라도." "그렇게도 위험하오?" "그렇소. 우리가 억지로 벽을 뚫으려고 애써 보았자 결국은 화를 자초하는 길밖에 안 되오." 심목풍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물었다. "벽을 뚫으면 수맥이 파괴되어 홍수를 겪는단 말이오?" "그것은 아니오만....." 우문한도가 말끝을 흐리자 심목풍은 속이 타는지 마른침을 삼키며 다그쳐 물었다. "수맥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 무슨 화가 있단 말이오?" "쇠망치가 암벽을 두들길 때 느껴지는 파동으로 짐작하건대 분명 기묘한 장치가 되어 있소이다. 만일 때를 맞춰 공인들의 손을 멈추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 오." "그들이 죽는 것뿐이오?" "내가 보는 견해로서는 그렇소. 심장주께선 믿지 못하시겠소?" 심목풍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우문형의 학식을 내가 어찌 못 믿겠소? 다만, 공인들의 죽음으로써 우문형의 판단이 틀림 없다는 것을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소이다." 심목풍의 이 말에 우문한도는 속으로 치를 떨었다. 공인들의 죽음이야 어찌 되었든 자기가 확신 만 갖게 해 달라는 말투에 우문한도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문한도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심장주께서 만일 나의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마음대로 시험해 보시오. 하지만 장주께서 그들 에게 명령해 주시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더니 주조룡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공인들에게 일을 계속하도록 시키게." 주조룡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정들을 향해 명령했다. "너희들은 계속 석벽을 뚫어라!" 십여 명의 장정들은 일제히 대답을 하더니 석벽 앞으로 달라붙었다. 소영은 심목풍에게 정체가 탄로날 것이 두려워 약간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그는 우문한도와 심목풍의 대화를 확실히 듣지 는 못했다. 심목풍은 안광을 집중해서 석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장정들이 석벽에 달라 붙어 몇 번의 망치질 을 했을 때였다. ".....앗!" 심목풍은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우문한도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석벽을 뚫 던 십여 명의 장정들이 갑자기 풀썩 쓰러져 버린 것이다. 그들은 비명도 신음도 없이 그 자리에 서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 느닷없는 변화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심목풍과 우문한도였다. 심목풍은 우문한도의 예언이 적중한 것에 놀랐고 우문한도는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어찌하여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갑자기 쓰러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놀랐던 것이다. 별안간에 십여 명의 장정들이 쓰러진 것을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갑자기 비 명도 없이 쓰러졌고 다른 이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목풍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곧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오히려 껄껄 웃었다. "허허, 우문형은 과연 기인이오. 헌데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우문한도는 심목풍의 여유만만한 태도에 적지 않이 놀랐다. '과연 심목풍은 무섭도록 대담한 놈이구나. 그렇지만 나 역시 공인들이 갑자기 쓰러진 원인을 알 수가 없지. 그렇다고 내가 모른다고 대답했다간 이놈이 나를 얕볼 테니.....' 우문한도는 대답할 말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미 말씀 드렸는데 심장주께서 권고를 무시했으니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외다." "허허, 내가 우문형을 탓할 수는 없고 권고를 듣지 않은 것은 확실히 나의 실책이오만 도대체 저들이 왜 쓰러졌는지 궁금하오." 우문한도는 장정들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그 금궁의 사방에는 분명 극독이 깔려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그것은 일종의 독연기이겠군요." 우문한도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시체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매우 조심을 하며 느릿느릿 걸었다. 우문한도는 시체 앞으로 다가가며 심목풍이 말리기를 은근히 기다렸으나 심목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우문한도는 시체 앞으로 가서 섰다. 우문한도는 진기로 몸을 보호하며 시체 하나를 젖혔다. 시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그는 "음....." 하고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쇠털처럼 가느다란 독침이 시체의 면상에 대여섯 개나 박혀 있었던 것이다. 독침을 맞은 곳은 붉게 부어 올라 있었다. '무서운 극독이구나.' 우문한도는 심목풍에게 얼굴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심장주! 이리 와 보시오!" 심목풍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천천히 우문한도의 앞으로 걸어갔다. "우문형, 무엇을 발견했소?" 우문한도는 말없이 턱으로 시체를 가리켰다. 심목풍은 시체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알고 보니 어떤 힘에 의해 튕겨 나온 독침이구료." "그렇소. 심장주는 독침이 이 암석의 어디서 날아 왔는지 아시오?" 심목풍은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발로 시체를 툭툭 건드려 보더니 "금궁이 확실히 이곳에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군." 하며 석벽으로 눈을 옮겼다. "그렇소. 금궁은 물론 이 석벽 속에 있소. 하지만 석벽 주위에 온통 위험한 장치가 깔려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도 하오." 우문한도는 말을 마치고 기분 나쁠 정도로 히히히 음침스럽게 웃었다. 심목풍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우문한도를 바라보더니 "우문형, 이 독침이 어떻게 해서 튕겨져 나왔소? 이것은 분명 석벽에서 튕겨 나온 것 같은데....." "심장주께선 똑똑히 보셨소?" "똑똑히 보다니요? 나는 물론 똑똑히 보지는 못했지만 독침은 석벽에서 튕겨져 나온 것이 분명 하잖소?" "그렇소. 나는 이미 이 장치를 알고 있었소." 우문한도의 말에 심목풍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알고 있었다니 우문형은 정말 절세의 기인이시구료." 우문한도는 껄껄 웃었다. 사실 그는 장정들의 시체를 살펴보기 전까지는 그들이 어째서 쓰러졌 는지 알지 못했다. 독연기가 새어 나와 그런 것인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체의 얼굴에 박힌 독침 을 발견하고는 어떻게 장치해서 튀어 나왔을 것이라 추측한 것뿐이다. "이 방법은 매우 정묘하게 만들어져 사람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금궁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현 혹시키기도 하지요." 우문한도의 말은 심목풍에게 이해되지 않았다. "우문형, 그게 무슨 소리요?" "즉 이 독침의 장치로 인해 심장주 같은 분은 이곳이 곧 금궁이 아닌가 착각하게 된단 말이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지혜가 많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심목풍이었지만, 지금은 우문한도에게 완전히 뒤지고 있었다. 우 문한도는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한바탕 껄껄 웃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독침이 튀어 나오게끔 만든 장치부터 설명하겠소." "어서 얘기하시오. 나는 우문형에게 가르침을 받아야겠소." "알고 보면 간단하지요. 우선 석벽에 구멍을 뚫고 그곳에 용수철 장치를 해서 독침을 넣은 후....." "아하! 알겠소. 그러니까 독침을 용수철에 장치한 후 그것이 튀어 나오지 못하도록 백옥(白玉)으 로 구멍을 막았겠군요. 알고 보니 쉽군." "그렇소. 그 백옥은 매우 연해서 슬쩍 두들겨도 곧 파괴되어 독침이 튀어 나오게끔 되어 있었지 요."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벽을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교수신공 포일천이 석벽에다 독침을 장치한 속셈은 분명 금궁의 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겠지 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심장주의 그런 생각은 아무라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생각이오. 그것은 포일천이 적을 유인하려 는 계획에 그대로 넘어간 것이오." "어째서?" "만일 포일천이 금궁의 문을 이곳에 설치했다면 절대로 이곳에 암기 장치를 하지 않았을 것이 오. 왜냐하면 출입문에 암기 장치를 하면 자신도 드나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 알겠소. 우문형의 말씀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금궁의 문은 이곳에 없다는 말이 되잖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금궁의 문은 분명히 이곳에 없소." 115. 예기치 못한 동맹 심목풍은 눈썹을 치켜 뜨고 냉담히 웃음을 흘렸다. "이곳을 우문형은 살폈단 말이오?" "그렇소이다." "그러나 우문형은 아무리 계산을 하였어도 문이 있는 곳을 찾아내지 못하지 않았소?" 우문한도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포일천의 건축 기술은 박식하오. 그래서 나는 그를 따를 수 없어 계산을 못해 내는 것이오." 심목풍은 살벌한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발작할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우문한도에게 화를 내봐야 별로 신통치 않음을 생각하고 다시 부드러운 말을 꺼냈다. "좋소이다. 그럼 우문형은 수고스럽겠지만 좀더 자세히 관찰해 주시오. 나는 믿고 있겠소. 우문 형의 해박한 견식으로 틀림없이 금궁의 문을 찾을 것이라고 말이오." "나는 그보다 먼저 대장주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무슨 말씀이시오?" 우문한도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금궁의 문을 찾았다 하여도 열쇠가 없는데 어떻게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겠소?" 심목풍은 돌연 험상궂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요? 우문형께서 그것도 생각지 않고 있단 말이오?" "그 독침암기를 보기 전에는 확실한 대답을 못하였소. 그러나 지금은 그 생각을 안할 수도 없으 니....." 심목풍은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우문형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소." 만약 교수신공 포일천이 금궁의 문에도 어떤 기계장치를 하여 놓았다면 어떻게 열쇠없이 문을 열겠소?" "우리들은 사람이 많소. 문이 기계장치로 되었다면 사람의 힘을 빌려 굴을 뚫으면 될 것이 아니 오?" 우문한도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게요. 금궁은 필시 정묘하게 만들어져 억지로 그것을 열려 하면 그 기계가 고장나 석문 까지도 완전히 닫혀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오." 심목풍은 수심에 싸인 신색으로 힘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금궁의 열쇠를 가졌다면 벌써 금궁을 열었을 것이오. 금궁의 열쇠가 없으니까 우문형께 도움을 청한 것이 아니겠소." 우문한도는 주위를 훑어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곳 벽 사이에 들어 있는 암기를 보고 포일천의 건축기술에 감탄하였소. 이곳을 만든 솜 씨는 매우 정묘할 뿐 아니라 함부로 침입하려는 사람에게도 무서운 제지를 가하게 만든 것이오. 이것으로 보아 억지로 문을 부순다면 금궁은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오." 심목풍은 한 자리에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문한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잘못 손을 쓰다가는 벽에서 나오는 독침에 맞을지도 알 수 없고 또한 애써 벌여 놓은 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이 같은 생각에 앞으로의 일에 침착하기로 결심했다. "우문형은 아직 금궁의 문을 못 찾았으니 그것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우문한도는 말을 받지도 않고 다시 그 자리에 앉아 무엇인지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심목풍은 궁금한 생각에 그의 어깨 너머로 계산하는 것을 훔쳐보았다. 그러나 우문한도는 종이 가득히 숫자만 써 놓으므로 무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주조룡이 심목풍에게 다가와 낮게 입을 열었다. "형님께선 잠시 쉬십시오. 형님이 이곳에 계시면 인부들도 제대로 일을 못할 것입니다." 심목풍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저 사람은 색을 좋아하니 여자만 보면 심정이 부드러워질 것이네. 그러니 어서 가서 금화부인 을 데리고 오게. 그녀로 하여금 저 사람을 암암리에 감시하게 하지." 주조룡도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얼굴 가득히 화색을 띠었다. "형님의 계책에는 탄복하였습니다. 금화부인은 전신에 맹독을 갖고 있어 무공이 우문한도보다 우세할 것이고, 더군다나 그녀는 말재간도 좋아 우문한도를 벗하며 암암리 감시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금화부인에게 이렇게 전하게. 우문한도와 이야기 중에 암암리에 손을 써서 독에 중독되게 하라 고 말이네. 그녀는 여러가지 맹독을 지닌 벌레를 가지고 있을 테니 우문한도를 중독시키긴 쉬울 것일세. 그런 후 그에게 해약을 미끼로 그의 심경에 영향을 준다면....." "그렇게 하면 우문한도의 연구에 도리어 악영향을 미칠 것이 아닙니까?" 심목풍은 음흉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우문한도는 머리를 쓰는 것이 너무나 비상하여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지만 죽음만은 극히 두려 워한다네. 그가 독충에 물려 중독된 다음 해약을 미끼로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틀림없이 죽음을 택하지는 않을 것일세." 그는 말을 잠시 끊고 힐끗 우문한도를 쳐다보았다. 우문한도는 일행에게 등을 돌린 채 열심히 글을 쓰고 있어 이런 흉계를 모르고 있었다. 심목풍의 흉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엄밀하게 하여야 되네. 만약 그가 미리 눈치를 채는 날이면 금궁을 찾는다는 우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꾸민 흉계라고 생각지 않게 비 밀리에 진행시키게." 주조룡은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소제는 즉시 금화부인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어디로인가 사라졌다. 한편― 소영은 다른 쪽에 걸터앉아 내심 곰곰이 생각하였다. '악누님과 옥소랑군의 약속 날짜는 시시각각 눈앞에 닥쳐 오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금궁으로 들 어가지를 못했으니...그러나 이렇게 앉아만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금궁의 문을 찾을 수도 없으 니 진퇴양난이구나. 금궁의 문만 찾는다면 열쇠는 있으니.....' 그는 마음이 정해지자 그대로 앉아 있지를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켜 우문한도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백리빙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황급히 물었다. "오빠, 어디로 가려고요?" "우리는 하루 빨리 금궁으로 들어가야 좋다. 그러니 우선 나 혼자 가서 우문한도에게 이야기를 해 보겠다. 너는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곳에 남아 있거라." 항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던 백리빙이건만 이번에는 한 마리의 양과 같이 얌전하게 물러섰다. 소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우문한도의 옆으로 다가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 우문한도는 고개를 들고 소영을 잠시 쳐다보고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금궁의 문을 벌써 찾으신 것이 아닙니까?" 우문한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는 그렇게도 급하냐?" "우리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위험합니다. 일찌감치 금궁을 찾아내어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문한도는 양미간을 찡그렸다. "우리가 금궁에 들어가면 살아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소영은 그의 말을 듣고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어 '오라. 이제 보니 그는 고의로 시간을 늦추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는 짐짓 다그쳐 물었다. "왜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우문한도는 차갑게 표정을 바꾸었다. "우리가 금궁에 들어간 후부터는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게 될 것이 아닌가? 나는 심목풍의 인 간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므로 이후의 일을 넉넉히 짐작하고 있다. 그는 틀림없이 우리를 죽이거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영이 말을 받았다. "심목풍은 우리를 죽이지 않겠다고 악속하지 않았습니까?" 우문한도는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심목풍이 동굴 밀실에 감금한다면 나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일생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되지 않겠나. 그는 나를 죽이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무슨 딴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문선생님께선 일부러 시간을 늦추고 있는 것이 아니오?" 우문한도는 실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문을 찾아낸다 하여도 금궁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없으니 어떻게 하겠나." 소영은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내가 당신을 돕겠소." 우문한도는 소영의 말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 세상에서 금궁을 열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면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다만 그 사람 만....."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금궁의 열쇠를 갖고 있다면 몰라도....." 우문한도는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끝을 맺지 못하고 입 속으로 우물거렸다. 소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선생께서 금궁의 문만 찾아내신다면 제가 그 문을 열겠소이다." 우문한도는 돌연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노부는 큰소리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너는 세상에 금궁의 열쇠가 몇 개나 되는 것 으로 알고 있나?" 소영은 그 물음에는 대답을 못하고 당황하였다. 사실 그는 세상에 금궁의 열쇠가 몇 개나 되는 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문한도는 소영이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자 가볍게 냉소를 지었다. "내가 알아낸 증거로는 이곳을 만든 포일천은 두 개의 열쇠를 갖고 다니다가 한 개는 어느 누구 에게인지 주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보관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가 금궁에 들어가 있으니 자연 세상에는 한 개의 열쇠뿐이지 않겠느냐?" "그 하나가 있소." 우문한도는 그 말을 듣고 눈빛을 빛내며 언뜻 사방을 훑어보았다. 두 사람이 있는 수 장 밖에 여덟 명의 대한이 있을 뿐 심목풍이나 주조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우문한도의 옆으로 앉으며 말했다. "선생께선 동정을 살피실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나가 버렸소." 우문한도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였다. "너는 여지껏 그들의 동태만 살피고 있었나 보구나." "우문선생,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앞일을 의논합시다." 우문한도의 눈빛은 소영을 꿰뚫기라도 할 것처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너는 필시 남옥당의 부하는 아닐 것이니 만약 내 짐작이 맞는다면 남옥당 자신이겠다. 그렇지 않느냐?" "내가 누구라는 것은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니 우선 급한 대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 봅시 다." 우문한도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네가 금궁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 소영은 다급한 마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우리는 서로 같은 운명이오. 이런 다급한 때에 어찌 선생가 장난의 말을 주고받겠소." 우문한도는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가 무슨 말을 하려고 막 입을 여는데 돌연 금화부인이 나타났 다. 그녀는 번개와 같이 빠르게 우문한도에게 달려오자마자 다그쳐 물었다. "우문선생, 금궁의 문을 찾아내었소?" 소영은 그가 대답을 하기 전에 그 자리를 피하려 하였다. "선생께서 무슨 다른 분부가 없으시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금화부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음성을 굵게 바꾸었다. 우문한도는 손을 흔들며 "다른 것은 없으니 가 보아라." 하고 소영을 내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비상한 견식을 갖고 있는 금화부인은 태뜸 소영을 의심하 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영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이상하다?' 그녀는 다급히 외쳤다. "서라!" 소영은 가슴이 뜨끔함을 느꼈으나 겉으로는 태연자약했다. "부인께서 무슨 분부가 있으신지요?" 금화부인은 눈썹을 치켜 뜨고 죄인을 심문하듯 물었다. "너는 나를 알고 있느냐?" "지금 처음으로 뵈옵습니다." 금화부인은 눈길을 돌려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선생은 이 사람을 종으로 데리고 계시오?" "노부는 부인과 같은 위세도 없으니 어디를 갈 때마다 따라다니는 하인이나 시녀가 없소이다. 언제나 혼자 왔다가 혼자 떠나는 것이지요. 이 사람은 주이장주가 나에게 준 하인이오." 우문한도는 말을 끝내고 갑자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아마 그도 부인과 같이 노부를 암암리에 감시하기 위한 자이겠지요." 그는 임기응변으로써 금화부인의 의혹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금화부인은 그제서야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내뱉듯이 말했다. "좋아! 너는 가거라." 소영은 몸을 돌려 제자리로 가면서 내심 궁리를 하여 보았다. '역시 우문한도는 놀랄 만한 기지가 있구나. 그러나 금화부인이 나에게 잘 대해 주던 것으로 보 아서는 굳이 신분을 숨기지 않고 도움을 청해 본다면...나와 백리빙 둘이서는 힘이 모자라니 그녀 가 도와만 준다면 일이 훨씬 쉬울 것이다.' 이럴 때 백리빙이 어느 새 다가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여인은 누구예요?" "금화부인이라고 불리우는 무공이 높은 사람이지. 그녀는 몸에다 독충을 가지고 다니면서 상대 를 암암리에 위협하는 괴여인이야. 원래는 묘강에서 패왕으로 있었는데 중원 무림으로 들어와 무 림 고수들과 겨루어 보려는 심산이었지. 그런데 우연하게 심목풍이 그녀를 끌고 백화산장으로 들 어갔지."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고 다음 말을 이었다. "심목풍은 추측할 수 없는 지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야심이 너무나 흉악하고 음독하여 꼭 무림 을 제패하려는 것이야. 만약 그가 마음을 돌려 일대 정의의 문파를 세운다면 강호가 우러러보는 개산종주(開山宗主)가 될 텐데....." 백리빙은 갑자기 냉랭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흥! 내가 보기로는 그 금화부인이 너무나 눈에 거슬려요." 소영은 의외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하였으나 차츰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빙아는 심목풍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다만 금화부인만 생각하고 있구나. 역시 여자는.....' 그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빙아야, 무엇이 거슬리느냐?" "그녀의 교태가 넘치는 모습을 보더라도 보통 여자는 아닐 것 같아요. 이 일만 끝나면 그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어야지." 소영은 깜짝 놀랐다. '금화부인의 무공은 절대 얕지 않다. 빙아가 암중으로 손을 써 그녀를 해한다 해도 상처는 입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습할 수 없는 결과만 초래케 된다.' 이런 생각으로 다급히 말했다. "빙아야, 지금은 절대로 네 마음대로 일을 벌일 수 없다. 우리의 목표는 금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느냐? 될 수 있으면 책임을 중요시하고 모욕을 참아야 된다. 빙아야, 작은 일 때문에 큰 뜻 을 버리지 말아라." 백리빙은 살짝 곁눈질을 하여 소영을 쳐다보며 교태를 띠었다.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 잠시 그녀를 용서하겠어요." 소영은 그녀에게 회심의 미소를 보내고 천천히 눈길을 돌려 우문한도를 보았다. 우문한도는 옆에 있는 금화부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금화부인은 혼자 있기가 쑥스러웠던지 소영에게로 다가와 대뜸 물었다. "너는 백화산장에 오래 있었느냐?" 소영은 내심 불쾌한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인은 이곳에서 일을 했사옵니다." 금화부인은 청아한 눈빛으로 한참 소영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옆에서 이 모양을 보던 백리빙은 얼굴을 붉히며 날카롭게 금화부인은 쏘아보더니 긴 한숨을 내 쉬고 연못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금화부인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왜 인피가면을 쓰고 있느냐?" 소영은 너무나 놀라 그만 "어?" 하는 소리를 발하고 말았다. '이제는 마지막이로구나.' 그러나 그것을 시인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소인은 천성으로 이렇게 항시 병든 안색이오. 이런 것까지 부인께서 물으실 필요가 없소이다." 금화부인은 돌연 음성을 아주 낮게 하고 다정히 물었다. "조금 전에 너와 우문한도는 무슨 이야기를 하였느냐?" "그와 금궁의 문을 찾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소이다." 금화부인은 눈빛을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그는 무어라 말하더냐?" "그는 전력을 다하여 애쓰기는 하나 자신이 없다고 하였소." 금화부인은 힐끗 우문한도를 쳐다본 후 화제를 돌렸다. "그럼 너희들은 이장주가 특별히 선택한 것이라 하였지? 이장주는 너희에게 우문한도를 암암리 에 감시하라고 하였느냐?" 소영은 이 물음에는 뭐라 대답을 못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금화부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너는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려 하니 아주 훌륭한 하인이다." 하고 갑자기 오른손을 뻗어 소영의 얼굴을 훑으려 하였다. 소영은 깜짝 놀라며 재빠르게 몸을 옆으로 빼내 그녀의 일격을 피하면서 다급히 물었다. "부인! 이게 무슨 짓이오?" 금화부인은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천천히 소영에게 다가왔다. "나의 갑작스런 한 수를 피한 것으로 보아 무림에서도 일류 고수에 속할 무공을 지니고 있구나."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손을 뻗쳐 소영의 얼굴로 덮쳐왔다. 소영은 커다랗게 숨을 들이쉰 다음 뒤로 두 발이나 물러나며 큰소리로 말했다. "부인은 어째 이러시오? 소인은 백화산장에 속해 있으며 주이장주께서 추천한 것인 데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그는 중주이고와 자주 동행하면서 임기응변의 방법을 많이 익혔다. 과연 이 말은 큰 효과가 있어 금화부인은 다시 손을 쓰지 않고 냉랭히 묻기만 하였다 "그럼 네가 인피가면을 썼다는 것을 시인하겠느냐?" "부인께서 이왕에 알아내셨다면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지 않겠소?" "너는 우문한도를 너무 얕보고 있는 것 같은데...내가 그 인피가면을 알아냈으니 우문한도는 벌 써 짐작은 하였을 것이다." 이때 우문한도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아! 금화부인! 이것은 심목풍이 당신에게 시킨 것이오?" 소영은 언뜻 불길한 예감이 들어 우문한도를 쳐다보니 그는 오른손을 잔뜩 움켜쥐고 괴로운 표 정을 짓고 있었다. 금화부인은 간드러지게 웃음을 터뜨리며 "호호호...너무 긴장하지 마시오. 내가 갖고 있는 해약을 복용하면 금방 나을 수 있소. 그 지네의 독이 맹독이라 하여도 우문선생의 깊은 내공으로 인하여 그리 쉽게 독성을 발하지는 않을 것이 오. 약 반 시간 정도 지나서야....." 우문한도는 원한에 찬 눈빛으로 금화부인을 쏘아보고는 천천히 움켜쥐고 있던 오른손을 폈다. 그러자 조그맣고 빨간 지네가 대여섯 토막으로 절단되어 떨어졌다. 그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 이라 지네에게 한 번 물린 후에야 모든 것을 알고 소리지른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백리빙은 안색이 무섭게 변하여 "악독한 여인....." 하고 그녀에게 손을 쓰려고 하였다. 소영은 옆으로 몸을 움직여 그녀를 막았다. "빙아야, 너는 가만히 앉아서 일이 진행되는 것만 구경하거라. 지금은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니지 않느냐?" 백리빙은 가쁜 숨을 내쉬며 분을 참지 못하였다. 소영이 다시 그녀를 달래려고 입을 열려는데 우문한도의 말소리가 들렸다. "부인의 명성을 믿고 속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 그의 음성이 차츰 높아졌다. "심목풍이 부인에게 말하여 독충을 풀어 놓은 것이 아니오?" 금화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심목풍을 들출 필요는 없소. 나의 독충에 물렸다면 나만이 구할 수 있어요." 그리고는 뜻밖에 품속에서 해약을 꺼내어 선뜻 우문한도에게 건네 주었다. 우문한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해약을 받아 먹었다. "부인은 내가 그 독충에 물려 중독되지 않게 하는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오?" 금화부인은 피식 웃고 쌀쌀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렇게나 생각하시오. 그러나 당신은 나와 적이 된다 하여도 내 적수가 될 수는 없을 것이 오." 우문한도는 가벼운 냉소를 띠고 다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금화부인을 등지고 책상다리로 앉아 운기를 조식하였다. 이것을 보고 있던 금화부인은 다시 간드러지게 웃어댔다. "호호호...어서 운기를 조식해 보도록 하세요. 그 지네의 독이 매우 강하여 혹시 완전히 제거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우문한도는 마치 노승이 입정(入定)한 것처럼 조소를 개의치 않고 조금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의 표정은 심각하여 무슨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두 사람이 반 시진 정도나 서로 대치를 하였으나 우문한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을 열려는 기색을 안 보였다. 그러자 금화부인은 제풀에 맥이 풀려 슬며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우문한도는 금화부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려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다급한 표 정으로 소영에게 손짓을 하여 불렀다. 소영은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갔다. "우문선생, 무슨 분부가 있습니까?" "나는 당신의 정체가 어떻다는 것을 상관치 않고 당신을 믿기로 결정하였소." 소영은 얼굴에 화색을 띠고 곧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리는 서로 생사의 운명이 같으니 힘을 합하여 난관을 뚫어 봅시다. 만약 우리가 손을 잡는다 면 이곳에서 살아 나갈 희망은 더욱 크오." 우문한도는 주위를 유심히 훑어보고는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금궁의 문을 찾아내었소.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금궁의 열쇠를 가지고 있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사정에 무엇을 속이겠소? 어서 계획이나 말하여 보시오." "좋소이다. 우리는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금궁으로 들어갑시다." 소영은 확실한 것을 알기 위하여 다시 물었다. "선생은 금궁의 문을 찾을 자신이 있소?" "그렇소. 십중팔구요." 우문한도는 눈빛을 빛내며 다음을 이었다. "우리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금궁에 장치된 기계장치를 이용하는 것이오. 금궁의 기 계라면 넉넉히 심목풍을 대항할 수 있을 것이오." "금화부인의 지네에 물린 상처는 어떻소이까?" 우문한도는 쓴웃음을 보였다. "괜찮소. 금궁이 열리기 전에는 절대로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오. 조금 전의 독충도 나를 위협하 는 행동이오. 심목풍도 내가 늑장을 부리는 것을 짐작한 것 같소." 하고는 전에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갔다. 우문한도는 고개를 돌려 소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운기조식하였다. 소영과 백리빙도 밤이 되기만을 조급히 기다렸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시간은 쉬지 않고 흘 러 어느덧 석양이 깃들었다. 이때 심목풍이 황급히 들어와 우문한도에게 바짝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우문형, 방금 운기조식에서 깨어나서 소식을 들으니 금화부인의 독충에 물렸다구요? 그래 어찌 되었소?" 우문한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흘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금화부인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뜻하지 않게 그녀의 몸에서 빠져 나온 지네에게 물렸었소. 다 행히 금화부인에게 해약이 있어 그것을 먹고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건강하오. 염려해 주셔서 대 단히 고맙소이다." 심목풍은 잠시 주위를 훑어보았다. "우문형, 이제 날도 저물었으니 석실로 돌아가 쉬도록 하시오. 금궁의 문은 오늘도 못 찾았지만 내일은 꼭 찾게 하여 주시오." 우문한도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지를 않았다. "돌아가지 않겠소. 나의 몸에는 아직도 지네의 독이 조금 남아 있으니 잠시 더 운기를 조식하여 야 되오. 그리고 이렇게 밖에서 찬바람을 쏘이며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 혹시 생각지도 못했던 결 과가 나타날지도 모르오." "우문형께서 이토록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니 저의 마음이 불안해집니다그려." 우문한도는 가벼운 기침을 서너 번 하고 말을 꺼냈다. "나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 대장주를 도울 의무가 있는 사람이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무엇이오?" "이곳을 지키는 부하들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면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일러 주시오. 모든 생각 은 조용한 가운데서 하여야 되오." 심목풍은 대뜸 응낙했다. "좋소! 우문형이 바라는 대로 하겠소. 몸을 보중하시고 너무 과로를 하지 마시오." 그리고 소영과 백리빙을 보고 생각난 듯이 말했다. "우문형, 저들은 어쩌시겠소?" 우문한도는 잠시 생각을 하는 척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도 돌려 보내 편히 쉬게 하고 싶지만 내 일이 바쁘니 오늘만큼은 나와 함께 이곳에 남기기로 하겠소." 심목풍은 더 묻지를 않고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우문형, 그럼 내일 아침에 또 뵙시다. 수고하시오." "원 별말씀을...대장주나 편히 쉬시기 바라오." 우문한도는 살짝 실눈을 뜨고 심목풍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운기조식을 하였다. 날은 점점 저물어 온통 어둠으로 뒤덮였다. 소영은 지금이 제일 중요한 순간임을 느끼고 내심 최대의 인내심을 발했다. 백리빙은 소영의 옆에 바짝 다가앉아 아무리 굴 속에서 밤을 지샌다 하 여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주위는 쥐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초경이 지나고 이경이 다가오자 비로소 우문한도가 몸을 움직 였다. 그는 강호의 견식이 누구보다도 풍부하고 지혜가 비상하여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였 다. 우선 몸을 일으키고는 점잖게 뒷짐을 지고 주위를 몇 번 왔다갔다 하였다. 우문한도는 눈길을 돌려 사방을 살펴보고 일행을 감시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소영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손을 쓸 때가 왔소." 소영은 벌써부터 그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짐짓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습니까?" "이경 정도가 되었소." 소영은 옆에 있는 백리빙을 흔들어 깨우고 몸을 일으켰다. "우문선생께선 금궁의 문이 있는 곳을 계산하였소?" 우문한도는 그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도리어 소영에게 물었다. "금궁의 열쇠는 지금 어디에 있소?" "지금 내 몸에 있소." 우문한도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나에게 주시겠소?" 소영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고 곰곰이 생각했다. '이제 와서 그를 믿지 못한다면 서로의 약속이 안 되지. 그러나 만약을 생각해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생은 이렇게 하여 보겠소이다. 먼저 선생의 한 곳 기혈을 바꾸어 짚어 만약의 일에 대처하겠 소. 선생께서 우리를 배반하고 딴 일을 저지른다면 선생의 생명은 부지할 수 없게 될 것이오." 우문한도는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소영은 그의 왼쪽 팔목에 있는 기혈을 짚었다. 우문한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소영이 기혈을 짚기 좋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기혈을 짚고 물러나는 소영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마시오. 지금부터는 나와 당신은 같은 친구라는 것을 말이오."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말을 받았다. "좋소이다. 우리가 금궁으로 들어간 후에 당신의 혈도를 풀어주겠으니 과히 허물치 마시오." "심목풍은 자신의 마음이 너그럽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 주려고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을 세우지 않았소.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이오. 우리가 보기에는 감시가 없지만 상대는 언제 어디서 느닷없이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오." 소영은 주위를 새삼 훑어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대하자는 것이 아니오? 서로의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니 암중 으로 다투는 일이 없어야 되겠소." "우리는 시간이 얼마 없소. 당신이 금궁의 열쇠를 갖지 않았거나 또는 가짜를 갖고 있다면 도리 어 심목풍에게 금궁의 위치만 가르쳐 주는 결과가 되오." 우문한도는 눈길을 돌려 백리빙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 아가씨는.....?" 소영은 내심 그의 예리한 관찰력에 감탄하였다. '과연 우문한도의 명성은 날릴 만하구나. 벌써 빙아가 남장을 한 여자라는 것을 눈치채었으니!' 그는 백리빙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단호히 대답했다. "물론 같이 가겠어요." 백리빙은 빙그레 흐뭇한 미소를 소영에게 보냈다. 우문한도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입을 열었다. "만약 이 일이 발각되어 심목풍에게 알려진다면 두 분의 생명은 보장되지 못할 것이오." 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무사할 것 같소?" "물론 나도 온전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렇다고 하여 두 분과 같이 그에게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 란 것을 알아 두시오. 심목풍은 두 분을 죽일 수 있어도 나는 못 죽이오. 내가 없으면 금궁을 못 찾기 때문이지. 당신은 그렇게 생각지 않소?" 소영은 피식 쓴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선생께선 언젠가는 죽을 몸이 아니오? 심목풍이 당신의 수고를 생각하여 이곳에서 놓아 주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니 우리가 조금 먼저 죽을 뿐 당신이라도 조금도 나은 것이 없소." 세 사람은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벌써 연못가의 절벽에 도착했다. 우문한도는 절벽을 가리키며 연못의 분수로 시선을 옮겼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금궁의 문은 바로 저 분수의 아래에 있을 것이오." 소영은 물 속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독수리와 뱀을 생각하고 또한 햇빛이 비치는 각도를 계산한 다면 그의 추측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선생께서 생각하신 대로 모든 것이 틀림없기를 바라겠소이다." "틀림없을 것이오." 소영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소생이 먼저 올라가 살펴보겠소. 두 분은 여기에서 잠시 동안만 기다려 주시오." 하고는 연못의 분수 아래로 가려 했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다급히 손을 뻗어 소영의 옷소매를 잡았다. "잠깐만! 우리가 여기에 서 있으면 심목풍에게 발각되더라도 변명할 여지가 있지만 당신이 절벽 으로 올라간다면 대뜸 의심을 사게 될 것이오." 소영은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선생께서도 마찬가지로 무어라 답변을 못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그곳으로 올라간다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오. 당신은 금궁의 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소? 그렇게 되면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루어 놓은 공든 탑이 일시에 무너지는 꼴 이 되고 말 것이오."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럼 선생의 의견은 어떻소?" "금궁의 열쇠를 나에게 주시오. 내가 먼저 올라가겠소." 이제까지 한 마디도 없던 백리빙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이 올라갑시다." 우문한도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좋습니다." 하고 절벽으로 달려갔다. 백리빙은 소영에게 물었다. "오빠! 나는요?" "같이 올라가자!" 백리빙은 기쁜 듯 손바닥을 마주치고 소영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벽호공(壁虎功)을 전개하여 벽을 기어올랐다. 절벽은 마치 칼날로 베인 것 같이 위로 곧게 뻗쳐 있을 뿐 아니라 연못 분수의 물방울이 번져 많은 이끼가 끼어 있어 매우 미끄러웠다. 벽호공은 참으로 묘한 것으로 절벽에 조금만 돌출한 것이나 틈만 있으면 힘 안 들이고 그것에 몸을 의지할 수 있든 신법이었다. 그러나 이 절벽만은 어느 누구라도 오를 수 없을 만큼 오르기 가 어려웠다. 약 삼 장 정도 올라갔는데 벌써 우문한도의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그의 뒤를 바짝 따르며 고개를 돌려 백리빙을 보았다. 백리빙은 비록 여자이지만 벽호공 을 충분히 익혀 우문한도보다 힘 안 들이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흘리고는 암암리에 상승내공을 운용하여 보다 빠르게 절벽을 올라 우문한도를 앞질렀다. 그는 우문한도의 옆을 지나며 입을 열었다. "선생,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으시오. 내가 도와드리리다." 소영은 절벽에 불쑥 튀어나온 암석을 찾으려고 계속 손을 더듬었다. 얼마를 그렇게 올라갔을까! 소영은 계속 위로 올라가며 의지할 곳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위로 뻗은 채 더듬던 왼손이 허 공을 더듬는다는 것을 느꼈다. '어? 이상하다. 돌이 잡히지 않고.....' 그는 한 곳에서 갑자기 안으로 들어간 벽을 더듬고 힘껏 거머잡았다. 그것을 의지하여 뒤따르는 우문한도를 도와주려는 심산에서였다. 소영이 그곳을 부여잡자 뜻하지 않게 몸이 절벽 안으로 빨 려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소영은 그곳의 형세를 살펴볼 생각도 없이 곧이어 엎드렸다. 그곳은 아주 평평한 지형이라 엎드 리고 있는데 조금도 불편을 주지 않았다. 그는 밑으로 손을 뻗었다. "선생, 내 손을 잡으시오." 우문한도는 극도의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절벽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발휘하 여 오른손을 뻗어 소영의 손을 맞잡았다. 소영은 그를 힘껏 부축하여 겨우 위로 끌어올렸다. 이때 백리빙도 뒤따라 올라섰다. 우문한도는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소영과 백리빙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두 사람의 무공은 나보다 월등히 높은 것 같다. 이곳까지 올라왔는 데도 조금의 피로감도 보이지 않고 숨도 정상적으로 쉬니.....'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눈길을 돌려 절벽 밑을 내려다보았다. 절벽 밑은 밤이라 그런지 아무것 도 분별할 수 없었고 다만 높이가 육장 정도일 것 같았다. 세 사람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세히 그곳을 살폈다. 일행이 서 있는 곳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 중간에 마치 동굴을 파다 그만둔 것같이 의지할 곳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먼저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과연 그렇구나." 그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소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느끼고 다그쳐 물었다. "무슨 일이오?" "소생은 벌써 생각해 냈소. 만약 금궁이 이곳에 있다면 문이 있을 곳에 마땅히 의지할 장소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오." "선생의 생각으로는 금궁의 문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는 손으로 더듬어 주위를 자세히 살피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은 높은 무공을 지닌 사람이라면 삼사 명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이오. 이런 것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이오." 소영은 그 말을 믿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절벽에다 조그맣게 의지할 곳을 만들 사람이 어디에 있겠소? 그게 나의 경우가 된다 하여 도 이런 쓸데없는 일은 안할 것이오." "한 군데 몸을 의지할 수 있어야 금궁을 열지 않겠소?" "이곳이 금궁의 문을 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발판이란 말이오?" 우문한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소. 이곳은 틀림없이 금궁을 열 수 있는 발판이오." 하고는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제는 꺼내시오" "무엇 말이오?" 우문한도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금궁의 열쇠!" 소영은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들고 입을 열었다. "선생께선 금궁의 문이 있는 곳을 소생에게 알려줄 수 없소?" "어두운 밤인데 어떻게 볼 수 있다는 것이오? 내가 금궁의 열쇠를 본다면 혹시 금궁의 문이 어 떻게 생긴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금궁의 문을 쉽게 찾을 수도 있고 시간도 허비하지 않을 것이오." 소영은 그의 말을 들으며 암암리에 궁리를 하였다. '만약 그가 금궁의 문을 열고 나와 빙동생을 데리고 들어간다면 이 열쇠를 그에게 건네 주어도 좋겠지만...그러나 마음이 변하여 혼자 금궁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섣불리 열쇠를 그에게 넘겨 준다는 것은 크나큰 모험이 될 뿐이다.' 이런 결심이 서자 그에게 열쇠를 내놓지 않고 손을 들어보였다. "열쇠는 이것이오. 선생은 굳이 열쇠를 가질 필요없이 쳐다보아서 금궁의 문을 추측하시오." 우문한도는 눈길을 금궁의 열쇠에 집중하여 한참 동안 살펴보고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당신은 나를 믿지 못한단 말이오?" 소영은 고개를 힘있게 저었다. "아니오. 그런 것은 아니지만...선생이 금궁의 문을 찾아내는 것을 본 후에 드리겠소. 그리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절벽 밑에서 카랑카랑한 외침소리가 들렸다. 116. 마침내 열리고야 만 금궁 세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절벽 밑에서 들려온 음성은 세 사람의 귓전에 세차게 울렸다. "우문형, 금궁의 문을 찾아내었소?" 세 사람은 똑같이 그 목소리가 심목풍의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우문한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영을 쏘아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먼저 심목풍의 물음에 대답하시오. 우리가 금궁으로 들어가면 가면을 벗고 선생에게 본 모습을 밝혀 드리겠소." 우문한도는 더 묻지 않고 큰소리로 심목풍에게 소리쳤다. "아직 찾지 못하였소." 밑에서 다시 심목풍의 말소리가 들렸다. "우문형, 조심하시오. 실수하여 밑으로 떨어지면 크게 다칠 것이오." "이곳은 십분 안전하오. 심대장주는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밑에서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곳을 밝게 비쳐 드리리까? 어두워서 뭐가 보이겠소." "필요없소이다. 지금 금궁의 문을 찾고 있는 도중이니 너무 소란을 피우지 마시오." 우문한도는 말을 꺼내자마자 절벽을 더듬거려 문을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골짜기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며 절벽 밑에서 몇 개의 횃불이 켜졌다. 그 횃불은 아주 특수하게 만든 것 같았다. 한 번 불이 붙자 불기둥이 이 척이나 높이 타올랐다. 그래서 자연 조명 의 힘도 강하여 주위는 온통 대낮처럼 밝아졌다. 세 사람은 시선을 모아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십여 명이 한 군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제일 앞에 선 사람은 바로 심목풍이었고 그 둘레에 사주당문의 당노부인과 금화부인 그리고 주조 룡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바로 뒤에 검문쌍영의 모습이 보였고 그 뒤에 반룡이 서 있었다. 몇 개의 횃불을 들고 서 있는 것은 푸른 경장을 한 대한들이었다. 심목풍은 횃불의 빛을 이용하여 세 사람이 있는 절벽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세 분이 의지하고 있는 곳은 더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 같소. 그러니 내가 지금이라도 암기를 써서 공격을 한다면 우문형께서 몸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내심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심목풍의 말도 그렇구나. 그가 암기나 독화살로써 우리를 공격하면 더 피하지 못하고 당하게 되겠구나. 그러나 버티어 볼 수 있을 때까지는 그를 달래 보자.' 그는 내심으로 잔뜩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지만 짐짓 태연한 체하고 그의 말을 받았다. "아직도 나는 금궁의 문을 못 찾았으니 대장주께선 너무 조급한 마음을 갖지 마시오." 이 몇 마디 말은 심목풍을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커다란 의혹을 일으키게도 하 였다. 심목풍은 고개를 숙이고 다음 행동을 심사숙고하였다. 소영은 불안한 마음으로 백리빙의 손을 꼭 잡고 심목풍의 행동을 주의깊게 주시하였다. 소영이 밑의 광경을 주시하고 있는데 돌연 우문한도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열쇠를 주시오." 그의 다급한 음성으로 보아 금궁의 문을 찾은 것 같았다. 소영은 더 이상 금궁의 열쇠를 아끼지 않고 대뜸 그에게 넘겨 주었다. 이때 갑자기 외마디 비명소리가 절벽 밑에서 들렸다. 소영은 깜짝 놀라 비명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신을 암중으로 도와준 반룡의 최후의 비명이었다. 그는 무엇에 날렸는지 허 공으로 떠서 절벽에 부딪쳐 둔탁한 음을 내며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심목풍은 우문한도와 같이 있는 두 사람을 의심하고 반룡에게 물으니 자연 모든 것이 탄로났다. 그러자 반룡이 두 사람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는 이유로 심목풍의 분노는 더 커져서 사정없는 일 장을 날린 것이었다. 심목풍은 일 장을 가해 반룡을 죽인 후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곧장 이 장 높이의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의 거대한 체구는 마치 가벼운 공이 날듯 그대로 허공에 뜬 채 절벽으로 날아왔다. 심목풍이 몸을 날리자 금화부인과 당노부인도 곧 그의 뒤를 따라 절벽에 붙었다. 벌써 심목풍은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소영 일행이 있는 곳은 육 장 높이가 되었으므로 아무리 높은 경공을 지닌 사람이라도 한 번에 뛰어 오를 수는 없었다. 이제 대세는 큰 변화가 일어 일전의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소영은 세 사람이 절벽을 기어 오르는 것을 보고 형세의 다급함을 직감하였다. 그는 눈길을 돌 려 우문한도에게 입을 열어 "선생께선 금궁의 문이나 찾아내시오. 소생은 저들을 상대하겠소." 하고는 백리빙에게 말을 건네었다. "빙아, 당노부인의 독침과 금화부인의 독충을 조심하여라." 이럴 즈음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은 이미 절벽의 반을 올라왔다. 소영과 그들의 거리는 불과 이삼 장뿐인지라 서로 얼굴을 자세히 분별할 수가 있었다. 백리빙은 품속에서 두 개의 한빙은침을 꺼내어 오른손에 쥐고 암암리에 진기를 모았다.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이미 독침을 발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백리빙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까닭에 이런 험난한 난관을 한 번도 경험하 지 못했었다. 그녀는 앞으로 상대할 적이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일류 고수라는 것을 생각 하고 전신의 진기를 모았다. '오늘 백리빙의 독침과 너희 못지 않은 무공의 맛을 보여 주겠다.' 그녀의 각오는 목숨을 건 것이었다. 우문한도는 왼손에 금제 열쇠를 움켜쥐고 절벽을 샅샅이 살폈다. 그는 다가오는 적으로 인해 당 황한 내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들이 이 위험에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은 오직 금궁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절벽을 기어오르는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은 양쪽으로 나뉘어 소영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녀들 은 소영과 백리빙의 신분을 모르고 있었지만 절벽을 오른 것으로 지레 짐작하여 높은 무공을 지 닌 인물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소영에게 가까이 접근을 못하고 얼마간 사이를 두고 대치하 는 결과가 되었다. 당노부인은 소영과 이 장이 조금 못되는 자리까지 다가와서는 품속에서 은빛이 번쩍이는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비수가 꽂힐 수 있는 틈을 발견하고 그곳에다 힘껏 비수를 꽂았다. 그리고는 비수에 매달려 우문한도에게 소리쳤다. "우문선생! 하인으로 가장한 두 사람의 정체는 무엇이오?" 우문한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불초는 이제 잠시만 있으면 금궁의 문을 찾을 것 같소. 그러니 노부인께서는 쓸데없는 소리로 불초의 심신을 소란시키지 마시오." 그러자 당노부인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소영은 지금까지 벌어진 형세를 모두 파악하였다, '지금으로써는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가 유리하다. 그동안 우문한도가 금궁의 문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시간을 늦추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옆에 있는 백리빙에게 낮은 음성으로 일렀다. "빙아야, 될 수 있는 대로 손을 쓰지 말아라." 백리빙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이를 내보이며 빙긋이 웃었다. 소영은 그녀의 웃음을 보니 얼마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이 동생은 귀엽게 자라나 이런 험악한 분위기를 처음 당해 볼 텐데 뜻밖에도 아주 침착하구나. 동생이 저렇게 침착한데 나는.....' 그는 자신의 좁은 마음을 새삼 반성하며 금화부인 쪽을 보았다. 금화부인은 왼손을 석벽에 붙여 놓고 오른손으로는 품속에서 조그만 옥상자를 꺼내었다. 소영은 그 옥상자를 본 순간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었다. '오! 저것은 금화부인이 항상 갖고 다니는 독충이 든 상자로구나. 저 속에는 그녀가 지니고 있는 독충 중에서도 제일 악독을 지닌 백선아(白線兒)라는 실뱀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녀가 손을 쓰기 전에.....' 그의 추측이 맞았다. 금화부인은 절벽에 붙어서 상대를 공격하기가 매우 곤란하였으므로, 더군다 나 상대가 포악하게 손을 쓴다면 더없이 불리한 상태가 되었음을 알고 독뱀으로써 상대하려고 하 였다. 심목풍은 바로 정면으로 올라왔다. 절벽을 오르고 있는 세 사람은 소영과 백리빙의 본 정체를 알지 못하여 내심 두려운 감이 없지 도 않았다. 이때 연못 서쪽에서 다시 서너 개의 횃불이 켜지고 십여 명의 장한이 달려왔다. 그들은 제각기 굵은 밧줄과 갈고리 그리고 나무 토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음, 사다리를 만들어 올라오려는 수작이로구나.' 소영은 이런 추측을 하며 가운데로 다가가 올라오는 심목풍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저 심목풍은 벽호공을 전개시켜 몸을 절벽에 붙이고 있어 별로 손을 못 쓸 것이나 금화부인이 나 당노부인은 한쪽 손을 움직일 수 있으니 그녀들이 큰 골치로구나. 이곳은 그래도 발붙일 곳은 되지만 그녀들의 독침과 독충을 피하기에는 많은 곤란을 받겠다. 그렇다면...그렇다. 최후의 방법 으로 금화부인에게 내 정체를 밝혀 그녀가 손을 쓰지 않게 해야겠다. 전부터 그녀는 나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으니 그녀가 나라는 것을 알면 암수를 뻗치진 않겠지." 그는 생각을 끝내자마자 전음입밀로써 금화부인에게 말했다. "누님은 그동안 무고하셨습니까? 소제 소영은 누님의 염려 덕분으로 여기까지 도착하였습니다." 그러자 금화부인의 얼굴에 한 가닥 놀라는 빛이 스쳤다. 그녀는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띠며 맑 은 눈빛으로 소영을 쳐다보았다. 소영은 그녀의 미소속에 다정한 정감이 담겨져 있는 것을 느끼고 내심 기쁜 마음이 용솟음쳤다. '됐다. 그녀는 아직까지 나를 잊지 않고 있구나. 이제 그녀가 나를 알았으니 독충을 쓰지 않겠지. 그럼 당노부인만 경계하면.....' 그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우문한도에게 말을 건네었다. "우문선생! 저들이 사다리를 다 만들기 전에는 우리에게 형세가 유리하오. 소생은 그들의 공격을 자신있게 막을 수 있으니 마음놓고 금궁의 문을 찾으시오." 우문한도가 고개를 돌려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데 밑에서 심목풍의 말소리가 들렸다. "우문형, 금궁의 문을 찾아내었소?" 우문한도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심목풍을 내려다보았다. 심목풍은 생각 밖으로 일행에게 가까 이 다가와 우문한도와 이 장도 채 못되는 거리에 있었다. 우문한도는 내심 두려운 마음으로 '조금 전에 반룡을 날리던 그런 장력으로 나에게 공격을 한다면 족히 화를 당하고도 남음이 있 겠구나.' 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못 찾았소." 심목풍은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다시 몸을 움직여 좀더 가까이 올라왔다. 소영은 그것을 보고 문득 심목풍의 속셈을 눈치챘다. "저놈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틈을 이용하여 조금씩 올라오는군." 이 같은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암중으로 칠분의 장력을 운용하여 소리없이 심목풍에게 뻗었다. 한 가닥의 가느다란 암경(暗勁)이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세상에서 교활하기로 악명이 높은 심목풍이 이것을 알아내지 못할 리 없었다. 비록 절벽에 붙어 있는 처지이기는 하였으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평시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소영의 손바닥이 약간 움직인 것을 보고 벌써 경계심이 생겨 암경이 닿기도 전에 황급히 몸을 비켰다. 그가 응변을 빨리 하였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소영의 장력에 맞아 절벽 밑 으로 떨어질 뻔하였다. 소영의 장력은 그의 옷자락을 펄럭이며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심목풍은 일장을 간신히 피한 뒤 이어 다그쳐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소영은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며 "흥!" 하는 냉소를 터뜨렸다. 심목풍은 양미간을 찡그리더니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에게 황급히 소리쳤다. "두 분께선 저 자에게 마음껏 독수를 발휘하시오." 그러자 당노부인은 즉시 출수하였다. 오른손을 치켜 올리자 세 개의 싸늘한 빛이 번쩍이면서 소 영에게 덮쳐왔다. 소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른손을 휘둘러 벽공(壁功) 장력을 발하여 당노부인에게 반격하 였다. 그리고는 동시에 옆으로 어깨를 숙이며 당노부인이 날린 세 개의독침을 잡으려 왼손을 뻗쳤다. 소영의 이 두 동작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상대를 반격하고 또한 상대의 공격을 막는 빠른 경공은 모든 사람이 감탄할 정도였다. 강호 무림 중에서 많은 고수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교묘한 수법으로써 상대의 암기를 잡아내는 일은 많았으나 그것은 전연 틀린 일이었다. 그들은 암기라 하여도 화살이나 비수 그리고 창처럼 비교적 큰 것을 알아내었지 바늘만한 독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찬 당가의 극독 묻은 암기는 보통 사람이 감히 잡을 생각도 못하는 것이었다. 소영이 왼손을 뻗자 곧이어 "퍽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세 개의 독침이 손바닥에 맞고 땅으로 떨어졌다. 당노부인은 절벽에 꽂아 놓은 비수를 잡고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있 었다. 그녀는 소영이 뻗는 벽공 장력을 그리 어렵지 않게 피하였다. 당노부인은 예상 외로 소영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독침을 받아내는 것을 보고 내심 깜짝 놀랐다. 그러나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어 가벼운 냉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의 세 독침은 삼릉추명사(三稜追命砂)라고 하오. 그 독침의 앞은 매우 예리하고 뾰족 하며 꼬리에는 독이 묻어 있는 가시가 있소. 그 독성은 너무나 강렬하여 사람의 살을 조금만 스 쳐도 그것은 즉시 자줏빛으로 변하여 썩어 들어가게 되는 것이오." 그녀는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를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소영이 독침을 받아내었으니 그에게 하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반 시진만 지나면 전신이 마비되어 힘을 잃고 두 시진이 지나면 심장으로 파고 들어가 목숨을 빼앗기지. 그것에 중독되면 우리 당가의 독문해약 이외에는 이 세상에서 어느 해약으로도 해독이 안 된다는 것을 아시오?" 소영은 천년 묵은 도마뱀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끼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독침이 아무리 강해도 별 효용을 보이지 못하였다. 소영은 뒷걸음으로 우문한도에게 다가갔다. "우문선생, 어서 문을 찾으시오. 뒤는 염려 말고!" 심목풍이 대신 그의 말을 받아 냉랭하게 물었다. "당신의 정체를 밝히시오." 소영은 그런 방법으로 암기를 받아냄으로써 심목풍에게 더 큰 의심을 사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 만 워낙 다급한 형세라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소영은 지금 쓸데없이 심목풍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자신의 정체를 더 빨리 알려주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침묵을 지키며 눈을 감고 운기를 조식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꾀에 제일 먼저 속은 사람은 당노부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독침이 소영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지레 짐작하였다. 그녀는 신이 나서 심목풍에게 수다를 떨었다. "그는 이미 이 늙은이의 독침에 맞아 중독되었소이다. 잠시 후면 곧 발작을 하게 되니 우리들은 구태여 위험한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심목풍은 암암리에 심려가 많았으나 당노부인의 자신있는 이야기와 또한 소영의 그런 표정을 보 고 적이 마음이 풀려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금화부인은 아무 말도 없이 소영의 모습만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 같은 불안한 형세를 참지 못하고 백리빙이 소영에게 물었다. "오빠, 많이 다쳤어요?" 소영은 그녀에게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아 전음입밀로써 자세한 진상을 알려주었다. "아니다. 나는 교피장갑을 끼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날카롭고 독한 것이라도 다 막아낼 수 있단 다. 일부러 이렇게 하여 시간을 끌어보려는 심사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라." 백리빙은 그의 심각한 표정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조급했던 마음이 한결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당노부인을 살기어린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흥! 언젠가는 너도 내 한빙은침에 혼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녀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돌연 일행이 의지하고 있는 절벽 전부가 움직이는 것 같은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뒤로 돌아서 우문한도를 보았다. 우문한도는 기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나는 찾았다. 금궁의 문을 열었다." 그의 말소리가 벼락치는 것 같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심목풍은 깜짝 놀라 밑으로 떨어질 뻔 하였다. 그러자 당노부인이 몸을 솟구쳐 세 사람에게 덮쳐왔다. 백리빙은 제일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재빠르게 손을 뻗쳐 칠분의 장력을 보냈다. 당노부인은 비록 늙어 머리가 백발이 다 되었지만 무공은 실로 고강하였다. 더군다나 풍부한 경 력과 적을 대할 때의 응변의 기지는 많은 사람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백리빙의 일 장을 받자 즉시 진기를 풀어 밑으로 내려섰다. 당노부인은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녔어도 몸이 허공 에 뜬 상태로는 상대와 대적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백리빙이 쳐낸 일 장은 세찬 기세로 "휙!"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와 함께 심목풍 과 금화부인이 다시 세 사람에게 덮칠 기세를 보였다. 소영은 우문한도가 금궁으로 혼자 들어갈 것을 염려하여 줄곧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 에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덮쳐오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백리빙은 일 장으로 당노부인을 격퇴한 후 또다시 심목풍과 금화부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녀 가 막 손을 쓰려는데 갑자기 자신의 가슴께로 세찬 장력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당노부인은 백리빙의 장력을 피하여 밑으로 몸을 내렸으나 아주 절벽 밑으로 내려간 것은 아니 었다. 그녀는 곧 허공에서 몸을 돌려 다시 절벽에 꽂혀 있는 비수를 잡았다. 그리고는 백리빙이 심목풍과 금화부인에게 정신을 쏟고 있는 사이를 이용하여 장력을 뻗친 것이었다. 이곳의 싸움은 지극히 위험하여 어느 한쪽이 먼저 기회를 잡아 선수를 쓰면 상대는 죽지 않으면 중상을 입게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과히 넓지도 않은 장소에서 적을 대하는 백리빙에겐 더욱 큰 문제였다. 당노부인이 뻗은 장력은 서로의 생사를 가름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대단히 악독하였다. 백리빙은 그때 마침 심목풍에게 장풍을 쏟을 기세였었다. 그래서 급히 손을 거두고 가슴께로 향 해 뻗어오는 장력에 정면으로 맞섰다. 당노부인은 원래 노련하고 무서운 사람으로 백리빙을 조금도 얕보지 않았다. '상대는 심후한 내공을 갖고 있으며 초식의 변화가 무쌍하구나. 더군다나 형세가 불리하니 장력 으로 자웅을 겨룬다면 필시 내가 불리하지. 그러니 아주 정면으로.....' 당노부인은 이런 계략으로 뻗었던 장력을 황급히 거두고 훌쩍 몸을 솟구쳐 백리빙의 기문요혈을 짚어갔다. 이 기문요혈은 사람의 몸에서 매우 중요한 급소로 만일 한 번만 찍히면 죽게 되거나 중상을 입는 곳이었다. 그녀는 다른 한 손은 소영을 향해 뻗었다. 정세가 급하게 된 백리빙은 옆으로 몸을 피하지 않으 면 안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당노부인은 평평한 바위 위에 발을 붙였다. 그때서야 소영이 깜 짝 놀라며 엉겁결에 당노부인을 향하여 일진의 장풍을 뻗었다. 당노부인은 미처 몸을 바로 잡기도 전에 소영의 공격을 받았다. 그녀는 소영의 일 장에 본능적 으로 손을 휘둘러 맞섰다. 소영은 위치가 유리하여 안에서 밖으로 쳐낸 결과가 되었으므로 당노 부인의 장력보다 훨씬 우세하였다. 두 사람의 장풍이 부딪치자 "펑!" 하는 소리와 함게 세찬 바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당노부인은 맞부딪친 장풍의 여력으로 더욱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그녀는 잠시 허우적거리더니 기어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소영은 문득 그녀의 백발 머리를 보고 당삼고가 생각났다. 그래서 즉시 밑으로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당노부인은 너무나 의외의 일이라 어안이 벙벙하였다. '이 사람이 나를 구해 주다니.....' 소영은 당노부인을 끌어올린 뒤 곧이어 심목풍을 경계하였다. 백리빙은 소영이 당노부인을 물리친 것을 보고 용기백배하여 금화부인에게 일 장을 쳤다. 이때 심목풍은 천성의 간계로써 금화부인을 먼저 올라가게 한 뒤, 곧 뒤따라 올랐다. 백리빙이 금화부인에게 공격을 보내는 틈을 이용하여 심목풍은 재빠르게 몸을 솟구쳐 소영에게 덮쳐갔다. 이 몇 교전은 모두 일시에 일어난 일이라 서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을 쓴 것 이다. 심목풍은 진기를 모아 왼손은 번개처럼 앞으로 뻗어 평평한 바위 끝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일진 의 장풍을 세차게 몰아쳤다. 소영은 벌써부터 그의 공격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별로 당황하지 않고 그의 장풍에 맞섰다. 두 사람의 장풍은 조금 전보다 더 큰소리를 치며 부딪쳤다. "펑!" 심목풍은 상대의 장풍이 조금 우세한 것을 느끼며 그 여파로 하마터면 손을 놓쳐 밑으로 떨어질 뻔하였다. 그는 그제서야 상대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내심으로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이며 금강지력을 운용하였다. 금강지력은 바위도 산산조각 낼 것 같은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잡고 있는 바위 끝에 다섯손가락이 꽂힐 듯 심후하게 움 직였다. 이즈음 백리빙의 장력을 받은 금화부인은 그만 몸을 지탱치 못하고 절벽으로 떨어졌다. 소영은 밑으로 떨어지는 금화부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내심 무한한 회의를 느꼈다. '아! 금화부인이 화를 당하였구나. 그녀는 나를 생각하여 손을 쓰지 않았는데.....' 그는 다른 생각을 할 여지도 없이 당노부인의 오른손목의 혈도를 짚었다. 그리고 이어 왼발을 내딛어 심목풍의 손을 밟으려고 했다. 소영의 심후한 내공으로 내디딘 발은 굉장한 힘이 있었다. 아마 심목풍의 손가락이 밟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으스러질 것이었다. 심목풍은 대뜸 소영의 뜻을 눈치채고 내심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저놈은 조금도 얕볼 수 없는 강적이로구나. 이대로 버티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는지 모르겠다. 이럴 바에는 직접 정면으로 부딪쳐 보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겠다.' 하고는 돌연 최후의 진력으로 상승내공을 전개시켜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소영이 발이 닿았 을 때는 이미 심목풍의 몸은 허공에 떠 있었다. 이럴 즈음 절벽에서 들리던 우렁찬 소리는 이제 그쳤는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 대신 일 행이 의지하고 있던 곳에 커다란 동굴이 열렸다. 우문한도는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소영은 그것을 보고 다급한 마음으로 백리빙에게 소리쳤다. "빙아야, 빨리 석문 안으로 들어가라. 뒤는 내가 맡을 테니." 그는 여전히 당노부인의 혈도를 짚고서 심목풍을 상대하였다. 백리빙은 몸을 날려 석문으로 들어서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빠, 조금 있으면 문이 닫히겠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소영은 석문으로 달렸다. 소영에게 혈도를 찍힌 당노부인은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그를 따랐다. 석문 안은 매우 캄캄하였다. 상대의 모습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어 우문한도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영이 잠시 주위를 살피려는데 옆에서 백리빙의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어디에 있어요?" 그녀의 말소리가 들리는 곳은 소영에게서 불과 일 장 정도의 사이뿐이었다. "빙아야! 여기 있다. 빨리 와라." 백리빙은 그제서야 소영을 찾아왔다. 소영은 그녀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백리빙은 잡힌 손목을 통하여 따뜻한 정감이 흐르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였다. 소영은 한손은 당노부인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백리빙을 이끌었다. 그는 당노부인을 내려다보 며 "당노부....." 하고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돌연 석문 입구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뜩이는 것이었다. 소영은 무의식중에 입을 다물고 나타난 상대를 주시하였다.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상대는 체구가 거대하고 빠른 신법으로 보아 심목풍이 틀림없었다. 소영은 상대가 심목풍이라고 느끼자 곧 그에게 장력을 뿌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백리빙이 손을 써서 "얍!"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두 개의 한빙은침을 심목풍에게 날렸다. 심목풍은 비록 두 사람의 신분을 모르고는 있었으나 그들의 무공이 매우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석문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잔뜩 주위를 경계하였다. 그는 내공이 뛰어나 백리빙이 기합소리와 함께 날린 한빙은침의 방향을 재빨리 알아내었다. 오 른쪽 다리를 약간 옆으로 움직여 상체를 돌리고는 손을 휘둘러 두 개의 은침을 중도에서 떨어뜨 렸다. 소영은 그가 손을 휘두르는 순간 무엇인가 은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저놈이 무엇을 들고 있구나.'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한 자 정도의 단검을 수중에 움켜쥐고 있었다. 소영은 말할 수 없는 적개 심이 불쑥 치솟았다. '어디 맛 좀 보아라.' 그는 팔분의 공력으로 두 손을 한꺼번에 휘둘렀다. 두 줄기의 거센 장풍이 심목풍의 가슴께로 뻗어갔다. 심목풍은 과히 어렵지 않게 소영의 공격을 받아내고는 벼락치듯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소영은 가볍게 냉소를 보냈다. "흐흥...소생은 당신과 친구가 아니니 이름을 댈 필요가 없지 않겠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찬바람이 석문 안을 휘몰아 치더니 사람의 그림자가 날쌔게 날 아 들어왔다. 심목풍의 뒤를 이어 쫓아 들어온 사람은 금화부인이었다. 금화부인은 백리빙의 장력에 의하여 절벽 밑으로 떨어졌으나 상승내공의 신법으로 가볍게 내려섰었다. 그녀는 땅에 내려서자 주저없 이 다시 석벽을 타고 올라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석문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소영은 금화부인이 다치지 않고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을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금화부인은 지금 비록 적의 편에 들어 있지만 나를 은연중 돕고 있다. 빙동생이 그런 것을 미 처 모르고...그러나 석문이 저렇게 열려 있기만 한다면 계속해서 심목풍의 부하가 들어올 텐데....." 소영이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심목풍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그의 웃음은 마치 미친 사람이 터뜨리는 것 같았으며 하도 커서 동굴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 웃음의 꼬리는 맹수가 상처를 입고 부르짖는 것 같았다. 소영은 가슴이 섬뜩함을 느끼고 백리빙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빙아야, 저 심목풍은 무공이 고강하니 그의 장력과 정면으로 맞부딪치지 말아라." 백리빙은 빙궁의 공주로서 항상 자기 마음대로 모든 일을 해 왔다. 그래서 그녀가 겁없이 심목 풍과 맞설 것으로 짐작하고 미리 주의를 준 것이었다. 백리빙은 소영에게 꽉 잡힌 손목으로 뜨거운 체온이 통할 때 야릇한 감을 느꼈다. 내심으로 수 줍고 기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저는 오빠의 말을 따르겠어요." 이때, 석문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굳게 닫혔다. 이제는 더욱 캄캄해졌다. 석문이 닫히기 전에는 입구가 희미하게 밝아 그런 대로 갑갑함은 면했 는데, 석문이 닫히고 보니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 상대의 모습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긴장된 침묵을 먼저 깨뜨린 사람은 우문한도였다. "왕년에 무림의 십대 고수들이 이곳에 갇혀 단 한 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소. 그런 것을 보면 금궁의 문이 얼마나 견고한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하고 말이 끝나자 돌연 한 개의 횃불이 환하게 켜졌다. 횃불은 우문한도가 들고 있었다. 그는 소 영에게서 불과 이 장 정도의 거리에 우뚝 서 있었다. 횃불에 비친 동굴의 모습은 한 마디로 말하여 지옥이었다. 겨우 사람의 키가 닿을 정도의 높이 에 양팔을 벌리고 가운데 서면 양쪽 벽이 닿았다. 이 동굴은 우문한도가 서 있는 곳에서 동서로 갈라져 있었다. 심목풍은 소영과 일 장 정도 옆에 있었고 금화부인은 심목풍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소영은 백리빙과 당노부인의 손을 잡고 암암리에 생각했다. '우문한도는 어째서 불을 켰을까? 심목풍이 손을 쓰면 필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 고 있을 텐데. 더군다나 나와 백리빙도 심목풍과 적이란 것도 알고 있으면서 저렇게 횃불을 밝힌 것으로 보아 무슨 이유가 있을 테지. 우선은 상관하지 말고 기다려 보아야겠다.' 심목풍은 소영에게 혈도를 찍혀 땅에 쓰러져 있는 당노부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냉랭하게 말했 다. "우문선생, 당신이 먼저 우리의 약속을 어겼으니 당신과 나는 이제 남이 되었소. 그러므로 언제 든지 손을 써서 당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우문한도는 그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동굴 안은 캄캄하여 얼마든지 피신할 수 있었는데 어찌 일부러 횃불을 밝혔겠소? 내가 당신에게 죽고 싶어서였겠소?" 심목풍은 냉소를 지었다. "흐흐흐...당신은 내가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오?" "나 우문한도가 당신과 맺었던 약속대로 하였다 하더라도 당신은 금궁을 찾운 후에는 나를 죽였 을 것이오. 옛말에 나는 새도 죽이고 좋은 활도 감추고 또한 교활한 토끼도 죽이며 자기의 앞잡 이 노릇을 하던 개도 끝에 가서는 끓여 먹는다는 것처럼 당신의 엉큼한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 이 있소." 심목풍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당신의 목숨은 나에게 달려 있으니 더 큰소리 마시오. 당신은 나에게 대항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도 있소?" 우문한도는 냉랭하게 웃었다. "흐흐...당신은 나를 죽이는 것보다 자신의 목숨을 생각지 않았소?" "글쎄...당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당신의 명성은 강호를 위협하고 일대의 교활한 영웅이지만 왕년의 열 명이나 되는 고수와 비교 할 수는 없을 것이오. 그들 열 명이 이곳을 나가려고 힘을 합하였어도 기어이 문을 열지 못하였 소. 그런 것을 당신 혼자의 힘으로 금궁의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소?" 심목풍은 어두운 신색으로 다그쳐 물었다. "당신은.....? "나 말이오? 당신이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곳을 마음대로 나갔다 들어올 수도 있소. 당신이 지금 나에게 손을 써서 나를 죽인다면 당신도 끝내는 이 금궁에서 일보도 나가지 못하고 죽을 것이오." 소영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흥! 열쇠를 갖고 금궁의 문을 열고는 마치 자신의 기지로써 연 것같이 뽐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였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내가 우문한도의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말한다면 나에게도 커다란 악영향이 미치게 된다. 우문 한도는 나보다 더 심목풍을 경계하고 있으니 그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자. 더군다나 두 사람이 은연중 암투를 할 터이니 그 기회를 이용하여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영의 계략이 이렇게 결정될 무렵 심목풍의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그렇다면 금궁을 나간 후에 당신을 죽여도 괜찮겠소?" 우문한도는 표정을 험상궂게 바꾸며 버럭 소리질렀다. "그것은 나중 일이오. 그때가 되면 당신을 상대할 수 있는 묘안이 생길지도 모르니 너무 큰소리 는 마시오. 지금 이 시각에는 목전의 일만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오." "좋소. 나는 당신의 말을 듣겠소." 우문한도는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눈길을 돌려 소영과 백리빙을 가리켰다. "심대장주는 이 두 분이 누구인 줄 알고 있소?" 심목풍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우리 백화산장의 사람이 아니오. 그러나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겠소." "그럼 이 두 분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계신지요?" "매우 고강하오." 우문한도는 담담히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이 두 분과 자웅을 겨루어 본 것 같구료." "그렇소. 그러나 간단하게 한 수 나누었을 뿐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인지 곰곰이 하더니 불쑥 뚱딴지 같은 제안을 했다. "우리 이 자리에서 세 패로 나눕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도 좋고 또한 앞으로의 일에 도 단점이 없을 것이오." 심목풍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우문선생의 의견은 우리 여섯 사람을 세 패로 나누자는 것이오이까?" 우문한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맞소이다. 당신과 금화부인 그리고 당노부인이 한 패이고, 이들 젊은 두 사람이 다른 한 패가 되며, 소제가 한 패가 되는 것이오." 심목풍은 벌써 무엇을 느꼈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우문선생의 뜻을 알겠소. 그렇다면 당신은 혼자이니까 금궁의 보물을 셋으로 나누어 그 한쪽을 갖겠다는 것이 아니오? 그럼 우리 다섯이 나머지를 분배하게 되니, 허허허...당신은 너무나 욕심이 많구료. 그렇게 보물이 탐나시오?" "심대장주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탐내어 사오 년 동안이나 암암리에 노력한 것이 아니겠소. 여러 분들이 아무리 보물을 차지하였다 하여도 금궁에서 나가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헛수고 아니오?" 우문한도는 주위를 훑어보고는 이어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 소제의 의견이 못마땅하시다면 다른 의견을 말해 보시오." 소영은 악소채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음을 새삼 느끼고, 이런 것으로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소영이 먼저 고개를 끄덕여 그의 제의에 응낙하자 백리빙도 따랐다. 심목풍은 소영이 응낙하는 것을 보고 비꼬는 말투로 "당신이 응낙을 하지만 당신 몫의 보물은 내가 빼앗을 것이오." 소영은 피식 웃기만 할 뿐 그의 말을 받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 심목풍은 풀이 죽어 더 말을 꺼 내지 못하였다. 심목풍은 그제야 생각난 듯 갑자기 손을 뻗어 당노부인을 일으키고는 소영에게 찍혔던 혈도를 풀어주었다. 당노부인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비비며 짧게 기지개를 켰다. 그녀는 눈길이 소영의 모습에 닿자 무어라 말을 하려다 심목풍의 날카로운 시선에 그만 입을 다 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심목풍의 뒤로 갔다. 우문한도는 횃불을 높이 쳐들고 소영의 옆으로 다가와 낮은 음성으로 급히 말했다. "고맙소. 조금 전의 내 거짓말에 반박을 할 줄 알고 무척 걱정하였었소. 나도 당신을 도울 기회 가 있기를 바라겠소." 하고는 심목풍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심대장주, 이곳에서는 당신의 무공이 제일 높고 또한 당신 패가 인원이 많소. 그렇다고 소제를 너무 박대한다면 부득불 삼 대 일의 대결이 될 것이오. 때에 따라서는 나도 이 두 분과 행동을 같이 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리고 싶소." 심목풍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소영과 백리빙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우문한도가 들고 있는 횃불은 이제 거의 꺼져 가 잠시 후엔 그나마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심목풍의 눈빛이 갑자기 번쩍이는 것이었다. 우문한도가 들고 있던 횃불이 꺼지자마자 "퍽! 퍽!" 하고 장력이 부딪치는 굉음과 함께 차가운 바람이 우문한도의 옷자락을 날렸다. 우문한도는 깜짝 놀라며 재빠르게 그 자리에 누웠다. 그는 머리 위로 세찬 장력이 지나가는 것 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하마터면 당할 뻔하였구나.' 그는 언제 준비하였는지 옷소매 속에서 다른 홰를 꺼내어 불을 켰다. 횃불이 다시 밝혀지자 우 문한도는 제일 먼저 심목풍을 쳐다보았다. 심목풍은 어찌 된 일인지 조금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 은 태도였다. '그렇다면 누가 나에게.....' 그러나 심목풍은 우문한도의 기지에 당할 수 없음을 알고 그에게 선수를 써서 생포를 하려고 했 었다. 심목풍의 음흉한 계략은 소영과 백리빙의 목숨도 시시각각 노리고 있었다. '먼저 우문한도의 혈도를 찍어 그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한 다음 저 정체불명의 두 놈도 죽여야 되겠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횃불이 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횃불이 꺼지자 대뜸 우문한 도에게 번개같이 손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심목풍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소영이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직감적 으로 이것을 눈치채었다. 그래서 심목풍이 손을 쓰는 것과 동시에 자신도 손을 휘둘렀던 것이다. 17. 신비에 싸인 보화 심목풍은 이미 거리와 위치를 계산하여 단번에 손을 뻗쳐 덮치려고 몸을 도사렸다. 그러나 소영 은 기선을 제압하여 심목풍의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비껴 앞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불빛이 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동굴 속의 어둠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들은 순전히 기억력과 민감한 귀를 이용하여 몸이 움직일 때 일어나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가늠하여 서로 장풍을 날렸다. 심목풍은 내심 깜짝 놀랐다. '누구의 무공이 이토록 높은가?' 그는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뒤로 물러서 원위치로 돌아갔다. 소영도 그 와 때를 같이 하여 재빨리 그의 원위치로 되돌아 갔다. 우문한도가 횃불을 또다시 켜 놓았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제자리에 서 있었다. 우문한도는 심목풍과 소영을 번갈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만약 여러분께서 죽고 싶지 않으면 나의 비위를 더 이상 건드리지 마시오." 하며 헛기침을 하더니 이어 말했다. "내가 길을 인도할 테니 여러분은 나를 따르시오." 그는 말을 마치자 곧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소영과 백리빙 그리고 심목풍, 금화부인들은 그의 말 을 따라 우문한도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들이 동굴의 갈라진 곳까지 걸어갔을 때 우문한도는 갑 자기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뒤따르는 소영 등도 그의 뒤를 따라 왼쪽 돌길로 접어들었다. 약수십 장을 걸어갔을 때 그들의 눈빛은 갑자기 환경이 바뀌었다. 몇 자 되지 않던 좁은 통로가 돌연 넓어지면서 사오 장 가량되 는 평지가 나타났다. 우문한도는 다시 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자 주위는 더욱 밝아져서 그들 몇 사람은 사방의 사물과 형세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소영은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 사람은 과연 머리가 비상하구나. 필요할 것을 미리 짐작하고 어둠을 밝힐 홰를 갖고 다니는 것을 보니.....' 사면을 둘러보니 주위의 석벽에는 여러 군데에 석실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가만히 세어 보니 여섯 칸이나 되었다. 그 석실에는 모두 철문이 달려 있었다. 세 개의 철문은 꽉 닫혀 있었고 나머지 세 개의 철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심목풍은 나서며 말했다. "우문선생, 저 세 칸의 석실은 아마 포일천이 그 열 명의 뛰어난 고수들의 거처로 만들었을 것 이오." 우문한도는 천천히 대답했다. "석실 속에 들어가 살피기 전에는 지금 나로서는 그 속의 사물을 알아내는 방법이 없소이다." 하더니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곧 계속했다. "한 가지 내가 사전에 여러분께 얘기할 것이 있소. 포일천의 손으로 만들어진 이 금궁은 그가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오. 이것은 나의 헛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이 금궁의 곳곳에 교묘 한 장치와 함정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소이다. 까딱 잘못 실수하는 날에는 즉시 그 비밀 장 치에 걸려들 것이외다. 그러니 여러분께서 행동하실 때에는 저에게 앞장을 서게 하는 것이 좋겠 소이다." 심목풍이 매정스럽게 말했다. "만약 그 석실 안에 무슨 진귀한 보물이 있으면 우문선생이 먼저 차지하고 필요없는 찌꺼기는 우리에게 선심 쓸 생각이오?" 우문한도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싸늘하게 잘라 말했다. "무공으로 논한다면 나는 당신들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오." 심목풍은 여전히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나 우문선생은 장치나 건축에 정통하여 또한 금궁을 드나드는 문을 견제하여 우리들을 강 제로 따르게 만들었으며 명령대로 움직이게 하지 않았소." 우문한도도 지지 않고 맞섰다. "나는 절대 그런 마음이 없소. 또한 당신처럼 세 패가 각자 꼭 공평하게 얻으려고 하는 마음도 없소." 심목풍이 곧 그의 말을 받아서 되물었다. "만약 이 금궁 속에 확실히 보물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 보물이 반드시 가치가 똑같은 것 이라고는 할 수 없소. 어느 것은 가치가 있고 또 어느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공평하 게 나눌 수 있겠소?" 소영은 속으로 심목풍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물건의 가치가 같지 않다면 어떻게 공평하게 나눌 것인가?' 우문한도는 소영의 마음을 이미 알아차렸다. 심목풍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 천천히 소영을 바라 보며 말했다.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심대장주와 같은 것이오. 금궁 속에 있는 물건은 각기 틀리는 데 어떻게 사람이 똑같이 나눌 수 있겠소?" 소영은 머리를 끄덕였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심목풍이 다시 나섰다. "우문선생께서 만약 고견이 없으시다면 내가 한 가지 방법을 제의하겠소이다." "좋소. 그럼 어디 심대장주의 제의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얻은 물건을 우선 한곳에 모아 놓읍시다. 우문선생께서 우리들을 세 패로 나누어 놓았 으니 각 패에서 한 사람씩 내보내 같은 거리와 같은 호령하에 각자 손을 뻗쳐 누가 먼저 뺏든 간 에 그 물건을 뺏은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이 어떻겠소? 여러분의 의향은....." 우문한도는 그 말을 듣더니 앙천대소를 했다. "당신 심대장주의 무공은 나보다 강하오. 또한 자기의 진짜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이분도 나보 다 무공이 높소. 심대장주와 당노부인 및 금화부인을 합치면 세 사람이고 이분 형제도 두 사람인 데 나는 단 혼자 뿐이오. 이처럼 실력이 같지 않고 힘이 모자라 중과부적인데 서로 같은 거리에 서 같은 호령하에 싸워 뺏는다는 것은 공평하다고 할 수 없소." 심목풍은 씹어뱉듯 말했다. "나의 방법대로 하지 않겠다면 그럼 우문선생의 고견을 들어보아야겠군요." 우문한도는 잘라 말했다. "저의 뜻은 서로 싸우지 말고 우리 각자 자기의 재주에 따라 얻은 것을 갖기로 합시다." 소영은 내심 우문한도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그 들의 말만 듣고 있었다. 심목풍은 코웃음을 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우문선생께서는 더 명백하게 얘기를 하시어 소제의 견문을 넓혀 주십시오." 우문한도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심대장주께서 제의한 의견과 대동소이하지요. 심대장주는 다만 먼저 금궁 속의 물건을 전부 찾 아내자는 것이고, 저의 의견은 다만 찾아낸 물건을 삼등분으로 나누어 놓고 동전으로 알아맞추는 것으로써 두 분께서 차례로 알아맞추신 다음 제가 맨 끝에 알아맞추기로 하지요. 그리고 그 동전 의 수를 알아맞춘 사람은 수집한 물건 중의 삼분의 일을 먼저 골라 갖는 것입니다." 심목풍이 냉랭히 물었다. "그럼 나머지 두 개는 또 누가 먼저 갖는 것이오?" "나머지 두 사람은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측이 먼저 갖는 것이오." 소영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만약 이 제안 속에 다른 음모가 없다면 공평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심목풍은 머리를 저으며 즉시 반대하였다. "그 방법은 좋지 않소. 무림에서는 지모와 무공으로 겨루는 것이 상용의 도리인데 제비를 뽑아 물건을 분배하는 법이 어디 있소?" 우문한도는 답답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한 가지 더 설명해야 되겠군요. 지금 우리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운명이오. 설사 누가 암산을 하여 이 안의 보물을 얻었다 해도 이 금궁을 벗어나갈 수는 없는 일이오. 이곳에서 굶어 죽는 길밖에 없소이다. 그러니 금궁의 보물을 얻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심목풍은 여전히 냉소했다. "만약 당신의 방법이 공평하지 않을 경우에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당신을 죽일 것이오." 우문한도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한 차례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들은 세 패로 나뉘어져 있소. 나는 무공이 제일 약할 뿐 아니라 외톨이란 말이오. 당신들은 어느 때든 간에 충분히 나를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소. 그러나 나 외에 여러 분들은 금궁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없소이다. 이것만이 나의 막중한 생명의 보장이오. 여러분들께 서 금궁 안에서 죽고 싶은 생각이 있으시다면 또 문제는 달라지지만....." 금화부인이 발끈 화를 내며 외쳤다. "우문한도! 우리는 당신을 단번에 죽이지는 않겠소! 죽음보다 더 무서운 살아 있는 고통을 느끼 게 하겠소. 나는 당신이 철로 만든 사람이라고는 믿지 않으니까요!" 소영은 마음속으로 다급했지만 혹시 심목풍이 자기의 목소리를 듣고 정체를 알아차릴까 봐 묵묵 히 듣고만 있었다. 심목풍은 소영과 백리빙을 보자니 슬그머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두 사람은 누군지 몰라도 참을성이 대단하구나. 여태껏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 니 굉장하군.' 그는 이런 생각을 머리 속으로 하면서 "좋소! 심목풍은 승낙했소이다." 하고 슬쩍 소영을 주시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너도 무슨 말을 할 테지?' 그러나 그 기대와는 달리 소영은 묵묵히 머리만 끄덕이고 동의를 표시할 뿐 역시 말을 하지 않 았다. 우문한도는 곧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여러분이 승낙하셨으니 그럼 각자의 운수대로 얻는 것으로 결정하겠소이다." 그는 곧 걸음을 옮겨 반쯤 열려 있는 철문으로 향했다. 심목풍은 우문한도의 한 옆에 바짝 붙어 걸어갔다. 소영도 뒤질세라 황급히 따라붙어 그들과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 심목풍은 암암리에 내력을 운용하여 한쪽 무릎으로 소영의 왼쪽다리 풍시(風市)를 향해 재빨리 찍어갔다. 그는 소영이 일체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매우 의심이 갔다. 그래서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하게끔 슬쩍 손을 써 본 것뿐이었다. 소영은 재빨리 왼손을 낮추고 지풍을 일으켜 심목풍의 왼쪽 다리의 혈해(血海)혈을 찍어갔다. 심목풍은 만약 소영이 이 반격을 피하지 않으면 자기의 출수로써 소영의 풍시혈을 찌를 수 있다 해도 자기 역시 소영이 내뻗은 지풍에 혈해혈을 찍혀 자기의 두 다리는 병신이 될 것이라 생각했 다. 이렇게 계산한 그는 재빨리 다리를 빼내어 일격을 피해 버렸다. 소영은 모험을 하여 승리를 거두고 심목풍으로 하여금 뒤떨어지게 하여 기선을 제압하였다. 그 는 우문한도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나 심목풍의 동작도 매우 빨랐다. 그는 소영의 지풍을 피한 후 즉시 앞으로 달려와 소영과 는 불과 어깨의 차이로 나란히 서게 됐다. 우문한도는 반쯤 열린 철문 앞에 당도하자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선출하여 이 철문을 열고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떻소?" 심목풍이 물었다. "우문선생께서는 왜 손수 열지 않고 그러시오?" 우문한도는 핫하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이 금궁의 보물을 삼분의 일만 차지하게 되어 있는 사람이오. 만일 이 문에 독이 묻어 있 어 내가 죽게 된다면 여러분에게 너무 편리를 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우문선생은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오?" "당신들 두 패 중에서 누구든 한 사람이 이 철문을 열도록 하시오." "당신은 어느 패를 지적하는 것이오?" "심대장주 쪽에 사람이 더 많으니 자연 심대장주 편에서 누가 열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심목풍은 당노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노부인께서 수고스럽지만 저 철문을 열어 주실 수 없을까요?" 당노부인은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그 철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자세히 한번 살펴보고 나서 품속에서 가죽장갑을 꺼내더니 오른손에 끼고 철문을 열었 다. 심목풍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독이 묻어 있습니까?" 당노부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소심하면 실수를 하지 않는 법이오. 독이 있으나 없으나 이 늙은이는 장갑을 끼면 아무 일도 없소이다." 우문한도는 왼손으로 횃불을 들고 안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돌침대에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 다. 몸에는 화려한 비단 도포를 걸치고 있었고 등에는 단검이 꽂혀 있었다. 심목풍은 갑자기 몸을 날려 번개처럼 석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 사람 을 흔들어보았다. 순간 도포는 가루가 되어 분분히 흩어져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곧 한 구의 백골이 드러났다. 그 앙상한 백골의 등뼈에는 단검이 깊이 꽂혀 있었으며 그 부분에는 횃불에 반사되어 싸늘한 섬 광이 쉬지 않고 번쩍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문한도가 가볍게 한숨지며 말했다. "이 사람은 필시 그 열 명의 고수 중의 하나일 것이오. 누군가에게 칼을 맞고 이 석실 안으로 도망을 와서 상세가 심하여 겨우 이 돌침대에 엎드려 죽은 것인가 보오. 이 단검은 수십 년이 지 났어도 녹이 슬지 않은 것을 보니 분명히 보통의 단검이 아닌 모양이오." 심목풍은 백골의 등에서 단검을 빼냈다. 그러자 백골이 와르르 흩어지고 말았다. 우문한도는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심대장주, 이 단검도 우리가 찾는 금궁의 보물 중에 하나로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심목풍은 싸늘하게 물었다. "당신이 보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심대장주가 보관을 해도 무방합니다." 하더니 잠시 생각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 사람이 누구라는 것은 몰라도 금궁에 들어온 열 명의 고수 중의 하나라는 것만은 틀 림없소이다. 이 금궁에 들어온 열 명의 고수는 이미 모두 이 금궁 속에서 죽었다는 것이 이 사람 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심목풍은 손을 번쩍 들더니 그 단검을 휘둘러 철문을 향해 힘껏 찔렀다. 그러자 싸늘한 빛이 번 쩍이더니 나무토막에 칼이 꽂히듯 칼자루만 남기고 검신은 완전히 철문에 박혔다. "좋은 검이구나. 정말 좋은 걸! 금덩이를 자르고 옥을 쪼갤 수 있는 검이니 참으로 드문 보검이 다." 심목풍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우문선생, 그 금궁의 문이 강철로 만들어져서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이 철문과 한가지일 것 이오. 나는 이 보검이 손에 있는 한 또다시 우문선생이 금궁의 문으로 우리를 협박하는 것을 감 수할 수 없소이다." 소영이 그의 손에 있는 단검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시 생각을 거듭했다. '저 단검은 무슨 보검일까? 금궁 속에서 사십여 년 동안이나 매몰되어 있었는데.....' 우문한도는 싸늘한 눈초리로 심목풍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만약 그 한 자루의 단검으로 금궁의 문을 열 수 있다면 어째서 그 열 명의 뛰어난 고수들이 옥 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이때 당노부인이 갑자기 그의 말을 받았다. "이 늙은 몸이 알고 있기로는 그 왕년의 십대 고수들은 금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두 자루의 보검 을 갖고 있었소. 이 한 자루의 단검말고도 또 다른 예리한 보검이 이 금궁 안에 있을 것이오." 소영은 여전히 마음속으로만 혼자 중얼거렸다. '검술이 절묘한 사람에게 만약 저렇게 예리한 보검이 있어 장검과 보조를 맞추어 준다면 그것은 아마 호랑이에게 날개가 돋치는 격이 될 것이다.' 심목풍은 유유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 단검의 칼집이 보이지 않자 소리높여 웃어대며 "우문선생, 만약 당신이 나를 너무 협박하지만 않는다면 나 역시 아직 모험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하더니 안색이 갑자기 싸늘하게 돌변하였다. 그는 우문한도를 노려보며 천천히 말했다. "만약 여전히 우문선생께서 나를 협박한다면 어쩌면 나 심목풍은 이 한 자루의 예리한 보검으로 금궁의 문을 열어볼 생각이 일어날지도 모르오." 말뜻을 새겨 보니 이 단검은 이미 자기의 것으로 된 것처럼 조금 전의 약속은 마이동풍격으로 들은 듯한 투였다. 우문한도는 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방금 우리들이 한 약속을 당신은 준수하겠소. 하지 않겠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심목풍은 못마땅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분은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오?" 소영은 심목풍을 한 번 쏘아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입은 꽉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우문한도는 쌀쌀하게 쏘아붙였다. "만약 심대장주께서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겠다면 그것은 나를 이분 형제에게 합세하여 한 패가 되도록 압박을 가하는 것이나 한가지요. 그러면 삼 대 삼의 입장이 될 것이오." 그는 눈을 돌려 소영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계속했다. "이분 형제께서 당신을 상대할 수 있다면 우리가 서로 삼 대 삼으로 대항할 경우 누가 누구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미리 장담할 수 없을 것이오." 소영은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순간에 심목풍이 너무 날뛰어 만약 내가 방관만 한다면 그는 필시 안하무인격으로 설 칠 것이 틀림없다.'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귓전에 심목풍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분은 아마 나의 적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이분 형제의 진짜 무공을 보기 전에는 나는 믿지 못할 것이오." 소영은 갑자기 앞으로 두어 걸음 나오며 그 철문을 향해 일 장을 쳐냈다. "펑!" 하는 소리가 들리며 그 철문에는 즉시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패였다. 소영은 천 년 묵은 교피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상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일 장은 그가 전력을 다한 것이었다. 그래서 쉽사리 그 철문에 손가락 자국이 깊이 새겨졌다. 그의 오른쪽 팔은 그 진동에 의해 오랫동안 마비되었고 얼굴이 상기되며 숨이 가빴다. 다만 그는 인피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암암리에 운기조식을 한 후 천천히 원위치로 물러섰다. 그는 시종일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심목 풍과 우문한도는 그가 벙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심목풍은 그의 참을성에 감복하면서도 더욱더 파악할 수 없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심목풍은 큰걸음으로 걸어나오며 그 철문에 움푹 파인 손가락 자리를 자세히 주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분의 장력은 매우 놀랍군요." 우문한도는 바짝 출문 앞으로 다가가서 한참 바라보았다. "맞군요. 심대장주도 이렇게 할 수 있는지요?" 소영이 끝까지 이렇게 침묵을 지키는 것은 심목풍이 자기의 음성을 알아 듣고 신분을 알아차릴 까 봐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그 침묵은 자연적으로 우문한도로 하여금 자기의 편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심목풍은 앙천대소를 한 후 말했다. "이 지력의 깊이는 얼마 되지 않아 불과 천 근의 힘밖에 되지 않소.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고 자부하오." 우문한도는 비꼬듯 물었다. "그렇다면 왜 심대장주께서는 시범을 보이지 않으십니까?" 심목풍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그런 일을 까닭없이 하고 싶지 않소." 우문한도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힘있는 소리로 말했다. "대장주, 당신이 얻은 단검을 잠깐 이리로 넘겨 주시오. 세 가지의 보물을 모은 후에 우리들은 약속대로 나눕시다." 심목풍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손에 든 보검을 건네 주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우문선생이 보관을 해도 마찬가지요." 우문한도는 보검을 받더니 말했다. "심대장주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금궁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약속을 지켜 주셨으면 하오." 이때 금화부인이 나서며 그 산산히 흩어진 백골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백골이 생전에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입었던 도포가 매우 훌륭한 비단인 것을 보면 살아 있 을 때에는 자부심이 비범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오." 우문한도는 냉랭히 대꾸했다. "아깝게도 우리에게는 저 백골의 내력을 토론할 시간의 여유가 없소이다." 하며 오른손에 검을 잡고 왼손으로는 횃불을 잡고 걸음을 옮겨 다른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일 행도 그의 뒤를 따라 그 반쯤 열린 철문으로 다가갔다. 우문한도는 그 철문 앞에 다다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공평하게 행동해야 되는 것이오. 그러니 이번에는 당신이 문을 여시오. 다음에는 내가 열기로 하겠소." 소영은 내심 생각하기를 '이 철문에 설사 극독이 묻었다 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고 성큼성큼 걸어가서 손을 내밀고 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일행은 첫 번째 석실 속에 시체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틀림없이 시체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러니 그 석실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문한도는 횃불을 깊숙이 석실 속으로 들이밀어 한참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중 얼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심목풍은 궁금한 듯 물었다. "우문선생은 무엇을 알았다고 중얼거리는 거요?" 우문한도는 석실 속을 비추던 횃불을 다시 돌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방금 본 그 백골 이외에는 아마 앞으로 저렇게 따로 죽어 있는 시체는 보지 못할 것이 오." "그것은 또 왜 그렇소?" "만약 나의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금궁에 들어온 십대 고수들은 죽기 직전에 필시 한 자리에 모여서 금궁을 벗어나는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오." 우문한도가 이렇게 말하자 심목풍이 곧 되물었다. "그럼 그 훌륭한 도포를 걸친 사람은 왜 단독으로 한 곳에 죽었을 것 같소?" 우문한도는 심각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내 짐작으로는 아마 그 사람은 포일천일 것이오. 그는 십대 고수들의 증오의 대상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한 곳에서 죽은 모양이외다." 소영은 속으로 감탄하였다. '이 사람은 과연 머리가 비상하구나. 만약 올바른 길을 걸어간다면 일대의 인걸이 될 수 있을 텐데.....' 심목풍은 머리를 끄덕이며 "우문선생의 말에는 일리가 있소." 하더니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 심목풍은 또 하나의 강적을 발견했구나." 우문한도는 냉랭히 대꾸했다. "심대장주는 과찬하시는군요." 심목풍은 가벼운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이어 계속했다. "내가 너무 무관심했었소. 우문선생의 머리가 비상하여 고금의 학문을 터득한 것을 잊었으니 말 이오." 그는 말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우리는 저쪽 반쯤 열려 있는 철문 속의 석실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까?"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대장주는 안심하시오. 내가 한 말은 산과 같이 확고히 지키니까요." 하며 큰 걸음으로 세 번째의 반쯤 열린 석실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그 철문 앞에 다다 르자 발을 들어 철문을 밀어제쳤다. 일동은 기대에 찬 얼굴로 그 석실 속을 훑어보았으나 이곳도 역시 눈에 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목풍은 석실에서 눈을 돌리며 우문한도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방법을 강구하여 저 꽉 닫혀 있는 세 개의 철문을 열어야 하겠소." 우문한도는 손에 든 단도를 흔들어 보이며 "이 예리한 보검이 있으니 저 세 개의 철문을 여는 것은 어렵지 않소이다." 하더니 재빨리 닫혀 있는 철문 앞으로 다가가서 보검으로 열쇠를 잘랐다. 이 보검은 극히 예리 하여 일검으로 그 철문의 철제 자물쇠가 즉시 땅으로 떨어졌다. 심목풍이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우문선생, 조심하시오. 만일 석실 안에 무슨 비밀 장치가 되어 있어 당신을 상하게 한다면 우리 는 모두 이 금궁 속에서 죽게 되니까요." 우문한도는 냉소를 짓고 "만약 내가 진짜로 포일천의 비밀 장치에 불행히 상한다면 여러분들이 이곳을 벗어나는 희망은 극히 적어질 것이오." 하며 발로 철문을 걷어찼다. 일행은 긴장하여 그 석실 속을 살펴보았다. 그 석실 속에는 돌침대가 하나 놓여져 있었으며 그 위에는 하나의 지팡이와 향나무로 만든 함이 하나 놓여 있었다. 심목풍은 몸을 날려 번개같이 석실 안으로 뛰어들더니 오른손으로 그 향나무 함을 덮치려 했다. 소영은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미리 준비했던 두 개의 돌을 손에 쥐고 심목풍의 손을 향 해 힘껏 내던졌다. 그것은 돌에 지나지 않았으나 강력한 내력으로 던진 것이라 바람을 가르며 화 살처럼 날아갔다. 심목풍은 즉시 알아차리고 함을 덮치려던 오른손을 급히 거두었다. 그 찰나 바람을 가르고 날아 온 돌은 그 돌침대에 적중하며 딱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며 땅에 흩어졌다. 소영은 돌을 쳐내는 것과 동시에 쏜살같이 석실 속으로 뛰어들어 심목풍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 목풍은 얼굴에 살기가 등등하여 소영을 노려보더니 냉소하며 일 장을 쳐냈다. 소영은 재빨리 몸 을 옆으로 피하면서 일 장을 맞받았다. 두 사람의 장력이 맞부딪치는 순간 요란한 소리가 귀청을 크게 울렸다. 심목풍은 오른손을 들어 비스듬히 일 장을 뻗어 소영의 손목을 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소영은 날쌔게 오른손을 거두고 비호같이 몸을 날려 왼손으로 다시 일 장을 뻗어 선수를 쳤다. 우문한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멈추시오!" 하며 보검을 쥔 채 석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석실로 뛰어들었을 때 소영과 심목풍은 벌써 사 초를 겨루고 난 다음이었다. 쌍방의 실력은 막상막하로 극히 위맹했다. 그들의 초식은 변화무 쌍하였으며 악독하고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우문한도가 뛰어들며 단검을 휘둘러 제지하니 그제야 소영과 심목풍은 뒤로 물러섰다. 심목풍은 소영의 빠르고 맹렬한 권장의 초수를 보고 몹시 놀랐다. 그는 소영을 뚫어지게 응시하 며 외쳤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그러나 소영은 냉소를 할 뿐 말이 없었다. 심목풍은 다시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매우 깊은 수양을 쌓아 인내력이 대단한 모양이구료. 그러나 나는 당신이 말을 하게끔 만들고야 말겠소." 우문한도는 그 향나무 함과 지팡이를 집어 들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이 금궁에서 벗어나려면 서로 의지하여 순조롭게 앞으로 나가도록 합심해야 하오." 하더니 앞장서서 석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든 단검과 향나무 함, 지팡이 등을 차례 로 내려 놓으며 "지금 우리는 이미 세 가지의 보물을 얻었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심목풍이 눈을 부라리며 반문했다. "뭐라구요? 이 지팡이도 하나의 보물로 치는 것입니까?" 우문한도는 코웃음치며 대꾸했다. "이것은 각자의 운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오. 누가 되든 이 지팡이를 갖게 되는 사람은 자기의 운수를 탓하는 도리밖에 없소이다." 심목풍은 싸늘한 어조로 비꼬았다. "우문형의 표정을 보니 이긴다는 자신이 만만한 것 같구료." 우문한도는 곧이어 말하기를 "심대장주가 혹시 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오?" 심목풍은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슬그머니 위협을 했다. "당신이 만약 동전으로 알아맞추기를 할때 암암리에 음흉한 꾀를 써서 잔재주를 부린다면 용서 치 않겠소. 아마 그때 가서는 이 말하지 않는 분께서도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것을 더 이상 방해하 지 않으리라고 믿소!" 그는 눈을 돌려 소영을 다시 주시하며 소영의 동의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소영은 우문한도에게 천천히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세 사람의 이해 충돌은 서로 적이 됐다, 편이 됐다, 하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심목풍과 생 명을 걸고 싸웠는데 지금은 다시 이해관계가 얽히니 같은 편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우문한도는 껄껄 웃으며 품 속에서 세 개의 동전을 꺼내더니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들을 쭈욱 훑 어보며 말했다. "두 분께서 나를 믿지 못하시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어느 분이 먼저 동전을 집으시겠소?" 심목풍은 소영을 힐끗 쳐다보더니 천천히 손을 내밀어 세 개의 동전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내 제의를 하나 하고 싶은데 두 분의 의향은 어떻소?" 우문한도는 심목풍의 말에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침묵을 지키고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소영으로 하여금 입을 열게끔 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소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침묵을 지키고 버티고 있다가 한참 후 우문한도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의견이오?" 심목풍은 곧 말했다. "나의 의문은 왜 금궁의 물건을 모조리 찾아낸 다음에 분배하지 않고 지금 이것만 가지고 하느 냐 하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빙긋이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왕년의 그 열 명의 고수들이 이 금궁에 들어올 때 각기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것은 생과 사를 건 도박의 결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오. 나는 다만 이 금궁 속에 적어도 두 자루의 보검이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오. 또다른 물건의 유무에 관해서는 모르오. 그러나 아마 이것을 아는 무 림인사는 몇 명 없을 것이오." 손으로 그 향나무 함을 가리키며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 우리들 앞에는 한 자루의 예리한 보검이 놓여 있소. 이것은 물론 진귀한 보물이오. 그러나 이것은 저 향나무 함보다는 신비하지 못하오. 만약 당신 심대장주가 이 세 가지 물건 중에서 하 나를 고른다면 아마 쉽사리 결정하지 못할 것이오. 그것은 사람의 손에 의해 이 금궁 속에 들어 온 모든 물건은 전부 진귀라는 두 글자가 붙어 있기 때문이오. 저 하나의 지팡이는 세 가지 중에 서 제일 시시한 물건이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막상 이 금궁 속에 있으니 일은 저절로 달라진단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혹시 저 지팡이가 가장 진귀한 물건인지 누가 압니까?" 소영은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 사람의 말 속에는 한 가닥 심후(深厚)하고 오묘한 도리가 내포되어 있다. 그는 듣는 이의 마 음을 흔들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가를 가려낼 수 없게 하는 솜씨가 대단하구나.' 말을 마친 우문한도는 일행의 얼굴을 차례로 둘러보더니 다시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나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군요." 심목풍이 그의 말을 받았다. "우문선생의 말 속에는 진리가 숨겨져 있지만 명백하게 알아듣기 어렵소이다. 그러니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신다면 더욱 좋겠지요." 우문한도는 한동안 그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탄식하듯이 물었다. "우리가 금궁으로 들어온 목적은 이런 명검을 얻으려고 온 것입니까?" 심목풍은 냉소하며 비웃듯이 말했다. "이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열 명의 고수들을 위하여 제사라도 지내주러 왔다는 말씀이 오?" 우문한도는 약간 입가에 웃음을 띠며 천천히 말했다. "정 그렇다면 내가 제일 알아듣기 쉬운 예를 하나 들겠소이다. 만약 이 향나무 함 속에 천축(天 竺) 나라에서 가장 진귀한 경문(經文)이 들어 있다면 불문고승의 눈에는 그것이 보옥(寶玉)으로 보일 것이며 그 가치 또한 성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대장주께서는 이 나무함을 좋 아하지 않으시겠지요." 심목풍도 지지 않고 맞섰다. "우문선생은 책을 많이 보았어도 역시 한 권의 경문을 좋아할 리 없겠지요." 우문한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다시 그에게 말했다. "이 지팡이도 혹시 한 분의 소림 고승이 사용한 것이라면 그는 자신이 이 금궁을 살아서 나갈 희망을 포기했을 것이오. 그리고는 절세의 공력을 운기하여 이 지팡이에다 소림의 절학을 기록해 놓았을지도 모르오. 그렇다면 이것은 함 속의 경문과 보검에 비해 볼때 어느 것이 더 가치가 높 다고 생각하시오?" 우문한도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심목풍은 퉁명스럽게 "사실이 그렇다면야 나는 그 나 함보다 그 지팡이를 고를지도 모르지요." 하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우문한도는 싸늘하게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함 속에 있는 것이 꼭 경문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으며 또한 지팡이에 절세의 무공이 꼭 적혀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오. 이 세 가지 물건을 고를 때 머리가 복잡할 것이오." 당노부인이 갑자기 화중에 끼어 들며 탄식하듯 말했다. "우문선생은 과연 글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 다르군요. 이 늙은이는 선생의 고견에 탄복해 마 지 않소." 우문한도는 멋쩍은 듯이 "당노부인의 과찬을 본인은 부끄럽게 생각할 뿐이오." 하더니 다시 심목풍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심목풍을 바라보며 "사물의 진리를 안다면 승리한 자는 진실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없으며 또한 패배한 자 역 시 정말로 졌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오. 이 종이 한 장 차이의 승과 패는 순전히 자신의 운수에 달려 있는 것이오." 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심목풍은 다시 의문이 가는 것을 물었다. "우문선생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 당장에 이 세 가지 물건을 나누어 갖자는 것 같군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분배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렇지 않다가는 눈이 돌 지경으로 얻는 물건이 늘어났을 때 나누어 갖기가 더욱 어려울 것 아니겠소?" 심목풍도 그 말에 끄덕였다. "과연 그 말도 옳구료." 그는 두 손을 뒷짐 지듯이 뒤로 돌리고 잠시 동전을 만지작거리더니 선뜻 오른쪽 주먹을 내밀었 다. 그리고 소영과 우문한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자아! 두 분께서는 알아맞추어 보시오!" 우문한도는 소영에게 "당신이 먼저 말하시오." 하고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침묵을 지킬 수 없는 소영은 하는 수 없이 손을 내밀며 목소리를 꾸며 대답했다. "두 개요!" 그는 딱 잘라 이렇게 한 마디 했을 뿐 즉시 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심목풍은 흠칫 소영을 바라보며 "나는 당신이 말을 할 줄 알았소. 과연 당신의 대답이 맞았소." 하며 손을 내밀어 주먹을 펴 보였다. 과연 손바닥에는 두 개의 동전이 놓여 있었다. 우문한도가 곧 말했다. "당신께서 알아맞추셨으니 마땅히 먼저 골라 가지십시오." 심목풍은 이어 그의 말을 받았다. "저분이 한 가지를 고른 다음 우리는 가위 바위 보로 정해서 이긴 사람이 먼저 갖기로 합시다." "그럴 필요는 없소. 나는 심대장주가 먼저 고른 후 갖기로 양보하겠소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문선생이 손해 보지 않소?"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손해로 인해서 나에게 복이 굴러 들어올지 누가 알겠소?" 그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소영은 땅에 놓여진 물건 중에서 천천히 몸을 굽혀 단검을 집어 들려 고 했다. 소영은 분명히 그 예리한 보검을 가지려는 것이다. 이때 갑자기 백리빙이 소리쳤다. "그 함을 집으세요." 소영은 단검에 손을 대려다가 그녀의 말을 듣자 그냥 몸을 일으켰다. 의아한 듯이 백리빙을 바라보자 그녀는 나지막하게 간청했다. "내 말을 한 번만 들어 줘요 네? 그 나무함을 집으세요." 소영은 그녀의 말에 갈망이 가득찬 것을 보자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손을 내밀어 나무함 을 집었다. 심목풍은 곧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우문선생, 정말 가위 바위 보를 하지 않겠소?" 우문한도는 엄숙하게 말했다. "대장부의 일언은 중천금이오. 한 입으로 두 말은 하지 않습니다." 심목풍은 물건 앞으로 다가가더니 "우문선생께서 이렇게 사양을 하시니 나는 당신을 위해 좋은 것을 남겨 놓아야겠군요." 하며 손을 내밀어 그 지팡이를 집었다. 그 지팡이는 불문에서 쓰는 보통의 무기로써 굵고 거대 한 것이었다. 심목풍이 그것을 집자 소영은 자기의 예상이 크게 어긋난 것을 느꼈다. 우문한도는 미소를 짓고 몸을 굽혀 마지막 남은 단검을 집어 들고 말했다. "만약 그 나무함 속에 들어 있는 것이 경문이 아니고 또한 지팡이에 절대로 무공이 씌어 있지 않다면 나의 이 한 자루의 단검이 제일 진귀한 물건인 셈이군요." 심목풍은 헛기침을 하여 "우문선생의 말이 맞습니다. 이것은 각자의 운수에 달린 것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 일행을 바라보았다. 우문한도가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의 관찰로는 우리가 계속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면 필시 그 포일천이 설계한 비밀 장치에 접 할 것이오." 심목풍이 나서며 냉랭히 말했다. "우문선생께서 설마 우리를 놀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자 퉁명스럽게 우문한도가 말했다. "이 시각 이런 상황에서 심대장주는 나를 믿는 것이 좋을 것이오." 심목풍은 핫하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휴식을 취해야 된다는 말이오?" "맞습니다. 나는 시간을 조금 더 내어 사방의 상황을 한번 조사해 보겠소. 혹시 시간과 힘을 절 약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심목풍은 내심 의혹이 스쳤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천천히 물러서며 금화부인과 당노부 인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 시간을 이용해서 조식을 합시다." 한편 소영은 나무함을 집어 들고 백리빙의 곁으로 돌아가서 가만히 물었다. "빙아야, 그 단검은 매우 예리하여 쇠붙이도 자를 수 있는데 왜 그것을 선택치 않고 이 나무상 자를 택하라고 그랬어?" 백리빙은 잔잔히 미소지었다. "그 단검이 진귀하다는 것은 저도 알아요. 그러나 이 나무함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은 혹시 그 단 검보다 몇 배 더 귀중한 것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 나무함이 정묘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그 속에 들어 있는 물건도 절대로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소영이 자세히 나무함을 들여다 보니 과연 지극히 정묘하게 만들어진 함이었다. 그는 즉시 제안 했다. "우리 이것을 열어 볼까?" 백리빙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나무함의 뚜껑을 열려고 했다. 그러자 소영이 돌연 그것을 뺏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열 테니 빙아는 저리로 비켜라." 그것은 그 함 속에 혹시 독이 있을까 봐 염려되어서 그랬던 것이다. 자기는 천년 묵은 교피 장 갑을 끼고 있기 때문에 극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리빙의 안전을 도모하여 신중을 기하고 그 함을 열려고 했다. 그 나무함에는 구리로 교묘하게 만든 작은 자물쇠가 붙어 있었다. 소영이 그것을 힘껏 비틀자 그 구리 자물쇠는 즉시 부러졌다. 소영은 약간 긴장되어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함 속에는 양피로 싼 한 권의 책이 단 정히 놓여 있었다. 그 책의 표지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으므로 무슨 책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때 심목풍과 우문한도는 암암리에 소영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나무함 속에 무 엇이 들어 있나 하는 몹시 궁금해 하는 표정들이었다. 소영은 천천히 그 양피 가죽으로 표지를 싼 책을 펼쳐보았다. 안에는 꼬불꼬불한 글씨가 잔뜩 씌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글씨인지 도무지 해석할 수 없었다. 소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백리빙에게 물었다. "이 책에 기록돼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겠니?" 백리빙은 머리를 흔들었다. "전연 모르겠는데요." 소영은 책을 도로 덮으며 말했다. "아마 십중팔구는 무슨 경문인 것 같구나." 이 동굴 속은 깜깜하여 우문한도의 옆에 있는 한 자루의 횃불만이 그들의 의지였다. 그러나 이 들 일행은 모두 내공이 심후한 사람들이라 안력이 전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조그만 불빛으로도 모든 것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심목풍은 갑자기 냉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우문형께서 예상한 것이 과연 맞습니다. 나무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이 경문인 모양이외다." 우문한도는 미소를 띠며 "아마 무공이 기재된 책인가 보오." 하고 대꾸했다. 소영은 나지막하게 백리빙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빙아야, 저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말아라. 그들에게 파악할 수 없는 느낌을 주어야 된다." 백리빙은 가볍게 탄식하며 가만가만 속삭였다. "이것은 다 나의 잘못이에요. 아아! 오빠는 그 단검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는데....." 백리빙은 후회하고 있었다. 소영은 미소를 입가에 띠고 그녀를 바라보며 싹싹하게 말했다. "괜찮다. 그런 생각은 그만 둬라." 심목풍과 우문한도는 정신을 모아 엿들었어도 그들의 대화소리가 너무나 적었기 때문에 무슨 말 을 하는지 들을 수가 없었다. 이때까지 별로 말이 없던 금화부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대장주, 아직도 저 두 개의 철문을 열지 않았는데 그것을 열어봐야 하지 않겠소? 그 두 칸의 석실 속에 혹시 그 열 명의 고수들의 유물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소?"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인의 말이 옳소." 하더니 우문한도를 향해 말했다. "우문선생, 아직도 열어 보지 않은 석실이 두 개 남았는데 열어 보지 않으시겠소?" 우문한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내가 이 쇠를 자를 수 있는 단검을 소유하게 됐으니 여러분들을 위해 봉사해야 할 것 같군요." 하자 심목풍도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내가 우문선생을 도와야 할 일은 무엇이오?" 우문한도는 담담히 웃었다. "나는 이미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 생각해 냈는데 그것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소. 이 나머지 칸의 석실을 살피고 나서 그 방법을 한번 시험해 보아야겠소." 그는 큰 걸음걸이로 두 번째의 철문 앞으로 다가가서 단검을 들어 쇠 자물통을 자르니 그것이 부러지며 철문이 열렸다. 그들은 일제히 석실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 석실 속에도 돌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고 다른 석실 과 똑갈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 돌침대 위에는 커다란 옥병이 놓여 있었으며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심목풍은 소영을 돌아보며 성큼성큼 석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 옥병을 집더니 병 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 옥병 속에는 전신이 백설같이 희고 눈알이 빨간 마치 붕어 같 은 물고기가 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심목풍도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옥으로 깎아 만든 붕어 같은 고기와 옥병 을 꺼내더니 갖고 나와서 우문한도에게 말했다. "우문선생! 이 옥병 속에는 옥으로 만든 물고기가 들어 있는데 이것을 한 가지로 칠 것이오? 아 니면 두 개로 나누어서 두 가지 물건으로 칠 것이오?" 118. 비밀장치를 밝혀내다 우문한도는 손을 내밀어 옥병 속에서 그 옥으로 만든 고기를 꺼내 한참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은 그는 천천히 입 을 열었다. "이 옥병은 원래 옥으로 만든 물고기를 두는 데 쓰는 것이므로 당연히 한 가지 물건으로 쳐야 하오." 심목풍이 곧 그의 말을 받았다. "이것은 극히 진귀한 것이 아닐까요?" 우문한도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 옥병과 옥고기의 내력은 나도 모릅니다. 심대장주는 본 것이 많고 아는 것도 풍부하니 혹시 이 옥고기의 내력과 출처를 알고 계신지요?" 심목풍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 옥고기의 내력은 모르지만 확실히 보통 물건이 아닐 것이오. 십대 고수들이 장난감을 갖고 금궁으로 들어왔을 리는 만무하니까요." "심대장주의 말은 정말 일리가 있소. 이 옥고기는 보통 물건이 아니오." 잠시 말을 끊고 일행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더니 다시 이었다. "그러나 불과 한 개의 옥으로 깎아서 만든 장식품에 지나지 않소." 소영은 옆에서 그 우문한도의 일거일동을 빠짐없이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가 처음에 옥고기를 보고 놀란 것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우문한도가 곧 태연을 가장하고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 자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소영은 그가 옥고기의 내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모른다고 잡아떼는 데에는 반드시 무슨 계략이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는 만약 자기가 이번에도 다행히 이긴다면 꼭 이 옥고기를 차지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심목풍이 제의했다. "이 옥병과 옥고기는 이번에도 우문선생께서 보관하시오." 하며 옥병을 억지로 우문한도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우문한도는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또 하나 석실이 남아 있소." 하고 걸음을 빨리하여 나머지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금화부인은 그의 뒷모습을 보더니 눈을 돌려 심목풍에게 말했다. "대장주, 기왕에 이 옥병을 들고 싶은 생각이 없으시다면 내가 들고 있겠소." 심목풍은 잠시 주저하더니 "좋소!" 하고 손을 내밀어 그것을 금화부인에게 건네 주었다. 금화부인이 옥병을 받아 들 무렵 우문한도 는 벌써 단검을 휘둘러 쇠 자물통을 자르고 철문을 열었다. 일행이 일제히 석실 안을 들여다 보니 그 석실에도 역시 돌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작은 향로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향로는 색이 까맣고 높이가 약 한 자 가량 되어 보였 으며 넓이는 불과 다섯 치도 되지 않았다. 이번에 심목풍은 어쩐 일인지 전과 같이 석실 안으로 몸을 날려 이 향로를 먼저 차지하려고 하 지 않았다. 우문한도는 그 향로를 자세히 살폈다. 그 향로에는 금으로 된 뚜껑이 덮여 있었는데 그 속에 무 엇이 들어 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소영을 향해 말했다. "이 오래된 향로는 당신이 들고 가 주십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석실로 들어가 그 향로를 들고 나왔다. 그 향로는 굉장히 무거웠다. 안 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안을 살펴볼 수는 없었다. 심목풍은 오른손을 들어 그 향로의 금뚜껑을 열어 보려고 접근했으나 소영은 재빨리 그것을 피 해 버렸다. 그 뚜껑을 열어 보지 않았지만 보고 싶은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래 된 향로 속 에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는지 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우문한도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나서 "만약 이 향로 속에 들어 있는 것을 하나의 독립된 물건으로 칠 수 있다면 그 옥병과 함께 일찌 감치 공평하게 나눕시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라고 말했다. 소영은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우문한도가 왼손을 내밀어 향로의 금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향로 속에는 하얀 분말이 가득차 있었으며 한 가닥 그윽한 향내가 풍겼다. 박학다재(博學多才)를 자부하는 우문한도는 그것을 바라보았으나 그 향로 속에 하얀 분가루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그 뚜껑을 닫으면서 결론을 내렸다. "이 오래된 향로는 단지 하나의 물건으로 인정하여 분배해야겠소." 심목풍과 소영, 우문한도, 이 세 사람은 무공의 고하로 볼때 우문한도가 제일 약했다. 그러나 그 는 실력이 비등한 소영과 심목풍의 두 고수 가운데서 자기의 비상한 두뇌로써 한 번 보아 만사를 빈틈없이 처리해 나가는 재질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군호들 중에서 항상 수뇌인물답게 행동하여 실수를 하지 않았다. 심목풍은 싸늘한 눈초리로 소영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그 매서운 눈빛 속에는 분노가 가득차 이글거리는 광채가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그는 소영이 자기에게는 향로의 뚜껑에 손도 대지 못 하게 하면서도 우문한도에게는 열어 보는 권한을 준 것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그는 즉시 출수 하여 소영을 박살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기이하게 높은 무공과 본 얼굴을 가린 인피가면 때문에 심목풍으로 하여금 그의 정체를 헤아릴 수 없게 하여 감히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우문한도는 심목풍을 힐끗 바라보고 "유감스럽게도 물건이 두 가지밖에 없으니 어떻게 하오? 한 가지만 더 있으면 공평하게 나눌 수 있을 텐데....." 하고 말을 걸었다. 심목풍은 억지로 마음속에 솟구치는 분노를 누르며 담담히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여섯 칸의 석실을 모두 살펴보았소. 우문선생께서 그렇게 말을 둘러대지 마시오. 우리들은 마땅히 금궁 깊숙이 들어가서 살펴보는 것이 좋겠소." 우문한도는 신중하게 대꾸했다. "안으로 더 들어간다면 강호를 수십 년 동안이나 미혹시킨 금궁의 비밀이 풀어질 것이오. 따라 서 우리의 처지도 이 순간보다 더욱더 위험해질 것이 틀림없소." 심목풍은 코웃음쳤다. "우문선생께서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 중히 여기신다면 이 금궁으로 들어오지 말았어야 좋았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그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소영을 향해 말했다. "당신의 뜻은 어떠시오? 여기서 중지할까요? 아니면 계속 안으로 들어갈까요?" 소영은 서슴지 않고 "계속 안으로 들어갑시다." 하며 변성을 해서 간단히 대답했다. 소영의 대답을 들은 우문한도는 소영에게 말했다. "당신이 깊숙이 들어갈 생각이시라면 약속을 지키셔야지요." 그 말에 소영도 처음에 무슨 약속인가 하고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생각이 나서 손에 들고 있 던 향로를 내려 놓고 손을 들어 우문한도의 몸을 향해 이 장을 쳐냈다. 심목풍은 껄껄 웃으며 비꼬았다. "이제 보니 우문선생은 그분에게 혈도를 찍혔구료. 어쩐지 나에게만 유독 불친절하다고 생각했 더니....." 우문한도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이분은 그래도 말을 하면 꼭 지키는 분이오. 만약 내가 심장주에게 혈도를 찍혔다면 아마 그리 쉽사리 나의 혈도을 풀어주지는 않았을 것이오." 심목풍은 냉랭히 웃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문한도는 혈도가 풀리자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길을 막고 있는 암벽 앞으로 다가서더니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여기까지 와서는 앞으로 나가는 길이 커다란 암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과연 여기 있구만! 내가 예상한 것이 틀림없다." 그는 단검을 들어 벽에다 확 꽂았다. 그리고 한 번 옆으로 비틀더니 재빨리 몸을 날려 뒤로 멀 찍이 피하고 땅에 착 엎드렸다. 소영과 심목풍은 모두 우문한도에게 매우 깊은 경계심을 갖고 있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리는 것 을 보자 그를 따라 엎드렸다. 갑자기 우렁우렁 동굴 속이 울리더니 암벽의 일부분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암기가 허 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왔다. 수없이 많은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휙휙 날아 왔으나 그들은 이미 땅에 찰싹 붙어 경계하였기 때문에 그 화살들은 모조리 머리 위를 지나갔다. 한참 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자 그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암벽 위에는 원래 한 곳에 암문(暗門)이 있었고, 그밖에는 암문을 여는 비밀장치가 있었으나 너무나 그 장치가 엄밀하여 찾기가 곤란하지요. 그러나 나는 이 보검의 힘을 빌려 그 암문을 조 종하는 쇠사슬을 끊었으므로 이렇게 열렸으니 이 암문은 오늘부터 효능이 없어졌소이다." 심목풍과 소영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몹시 우문한도에게 감탄과 존경의 빛을 금 하지 못했다. 그들은 각기 암암리에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의 학식과 지혜는 과연 보통 사람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비상하구나.' 우문한도는 그들이 묵묵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자 담담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석실은 이미 열렸으니 어느 분이 먼저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시겠소이까?" 심목풍이 곧 제의했다. "우리들은 비밀로 매복해 놓은 장치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니까 자연 우문선생이 길을 인도하 셔야지요." "그렇다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소?" 하고 당노부인이 돌연 입을 열고 나섰다. "이 늙은 몸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하더니 지팡이를 짚고 큰 걸음으로 앞장서 걸어갔다. 심목풍과 금화부인, 백리빙, 우문한도 등은 그 뒤에 나란히 한 줄로 서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석문 안에 들어서니 한 가닥 매우 협소한 길이 뻗쳐 있었으며 그 넓이는 불과 두 자 가량밖에 되지 않아 겨우 두 사람이 나란히 설 수 있는 넓이였다. 우문한도는 걸음을 옮기며 설명을 하였다. "만약 포일천이 이 통같이 협소한 외줄기 길 속에 어떤 악독한 장치를 비밀로 설치해 놓았다면 우리들은 필시 도망을 못하고 꼼짝 없이 큰 변을 당할 것이오." 그의 말소리는 매우 높았으므로 굴 속으로 울렸다. 나란히 서서 캄캄한 길을 걸어가는 군호들은 각기 공포에 질려 오싹해 오는 감을 느꼈다. 길이 너무 어두워서 당노부인은 운기하여 안력을 집중시켰으나 석 자 이내의 사물도 분간할 수 없었다. 이 좁은 길을 이십 장쯤 걸어서 들어갔다. 이윽고 길은 끝나고 눈앞이 확 트였다. 갑자기 얼굴에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공기가 매우 맑고 신선하여 그들은 답답함에서 벗어나 정신이 번 쩍 들었다.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원래 이곳은 외부와 상통되어 있었군요. 이것을 진작 알았었다면 금궁의 문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외다." 우문한도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이 통풍 설비는 매우 꼬볼꼬불하게 만들어진 것이오. 그런데도 이렇게 바람이 잘 통하게 했소 이다. 만약 이 포일천이 그 통풍하는 구멍을 통해 한 가닥이라도 햇빛을 비추게 했다면 교수신공 이라는 칭호는 받지 못했을 것이외다." 심목풍이 눈을 돌려 사방을 훑어보니 과연 햇빛은 조금도 스며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위의 형상과 경물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우문한도는 헛기침을 여러 번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소제가 갖고 있던 두 개의 횃불 중 하나는 이미 다 타 버렸소. 지금 남은 이 하나의 횃불마저 다 타 버린다면 우리는 아마 암흑을 더듬어야 할 것이오." 그는 말을 마치고 품 안에서 다시 하나의 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러자 갑자기 주위의 경물 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눈에는 곧 동쪽 정면에 쌍문이 활짝 열린 대청이 보였다. 그것은 역시 삼면이 석벽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이 장 둘레의 방이었다. 심목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면이 이렇게 석벽으로 되었으니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저 대청 안일 수밖에 없구료." 우문한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쪽 대청으로 가는 길밖에 없으니 여러분은 조심하여 따라 오시오." 하며 왼손으로 횃불을 밝히고 오른손에는 단검을 쥐고 대청을 향해 똑바로 걸어나갔다. 심목풍 도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그 청문은 원래 활짝 열려 있었으나 그들이 대청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저절로 닫혀졌다. 심목풍 은 흠칫 놀라며 즉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청문 밖에 무슨 비밀 장치가 되어 있나 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돌려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심대장주께서는 진작 그것을 깨달으셨어야 되었을 것을....." 그는 심목풍을 지그시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만약 이 포일천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다 무서운 매복 장치를 해 놓았다면 이 장 가량 되는 방 원형의 이 방에서 우리는 살아날 기회가 있을까요?" 소영과 심목풍은 그 말을 듣자 얼떨결에 천장을 쳐다보았다. 소영은 암암리에 생각하였다. '저 청문은 이미 닫혔고 단 하나의 도망갈 수 있는 길은 방금 들어온 통로뿐인데...그러나 그 통 로는 좁을 뿐 아니라 불빛도 없이 깜깜하여 행동하기에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우리가 있 는 이곳은 막다른 곳이다.' 심목풍이 싸늘하게 우문한도의 말을 받았다. "그것은 포일천이 석벽 위에 장치한 암기에 달렸지요." "그렇다면 그것을 일종의 독침이라고 예상해 보시오. 심대장주께서 살아날 자신이 있으신지?" 심목풍은 얼음장같이 냉랭하게 말했다. "만약 내가 피하지 못한다 칩시다. 그러나 그때에는 여러분도 한 사람 빠짐없이 살아날 수 없으 리라 믿습니다." 우문한도는 담담히 웃었다. "저희들이 죽는 것은 억울할 것이 없지만 그러나 당신 심대장주께서 어떻게 죽을 수가 있단 말 이오?" 심목풍은 그의 말 속에 조소가 깃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억지로 참으면서 더 이상 말하 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암암리에 운기하여 우문한도의 거동을 감시하였다. 소영은 묵묵히 심목풍의 거동만 살폈다. 그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우문한도를 보호해야 되겠 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우문한도가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이런 험악한 상황 하에서는 국면을 무난히 유지할 사람은 우문한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풍부한 경험과 초인적인 기지로 심목 풍의 음모를 전부 사전에 봉쇄해 버리는 것이었다. 우문한도는 천천히 대청 앞으로 다가가서 횃불을 높이 쳐들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분은 저와 함께 대청으로 들어갑시다. 혹시 무슨 변고가 생기더라도 같이 저항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심목풍은 뒤에 있는 소영을 바라보며 "당신의 의견은 어떻소?" 하고 물었다.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손에 든 향로를 백리빙에게 건네 주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 나 여전히 입을 다문 채 행동으로만 표시하는 것이었다. 심목풍은 미간을 찌푸리며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에게 나직이 말했다. "두 분께서는 잠시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그는 성큼성큼 대청 앞으로 걸어나갔다. 우문한도는 수중의 단검으로 대청문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소영에게 말했다. "포일천은 아무리 천만 번 계산을 했어도 한 가지만은 빠뜨렸구료." 심목풍이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무엇을 빠뜨렸습니까?" 우문한도는 수중의 단검을 들어보이며 싱긋이 웃었다. "이 한 자루의 쇠를 흙처럼 자를 수 있는 단검에 찔려 죽을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죽기 전에 이 한 자루의 단검만 감추었다면 일은 한층 곤란하였을 것이오. 우리에게 이 한 자루의 단검이 없었다면 이처럼 쉽게 그의 비밀 장치와 단단한 암벽을 파괴할 수는 없었을 것이 오." 심목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장 묘한 것은 공교롭게도 이 한 자루의 보검이 당신 우문선생에게 돌아갔다는 것이오. 만약 이 검을 내가 얻었다면 우선생은 아마 이처럼 손쉽게 들어가실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더니 무슨 중요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제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소?" "심대장주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그러나 제 능력이 부족하여 과연 당신의 의문을 풀어드릴 수 있을는지 걱정이군요." "금궁 속에 갇혔던 십대 고수는 이런 예리한 칼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어찌 벽을 파괴하여 빠져 나가지 않고 이 금궁에 갇혀서 죽었을까요?" 심목풍의 이러한 질문에 소영도 마음속으로 끄덕였다. '맞아! 과연 그것은 이해가 안 되는 의문인 걸.....' 우문한도는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했다. "잘 물어보셨습니다. 이 단검으로 백장이나 되는 산벽을 도저히 뚫을 수 없었다 칩시다. 그러나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 문을 파괴하여 나갈 수 있는 일인데 왜 이곳에서 죽었을까요?" 심목풍은 곧 맞장구를 쳤다. "십대 고수는 각기 뛰어난 기지의 소유자로 아무리 비밀장치에는 익숙치 못했다 해도 우문선생 의 말씀같이 검으로 문을 파괴하여 탈출했어야 하는데....." 우문한도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심대장주는 오히려 나에게 대답을 못하게 만들었소. 지금 현재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으나 필 시 이 점에는 원인이 있을 것이오. 아마 포일천은 그들의 탈출에 대비하여 단단히 예방을 했을지 도 모르지요." 심목풍은 냉소하며 비꼬았다. "저는 우문선생이 모르는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모르는 것도 있었군요." 우문한도는 싸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가 대청으로 들어간 후에 혹시 저는 그 원인을 알아낼지도 모르지요." 그는 수중의 횃불을 높이 쳐들어 꽉 닫혀진 대청문을 이리저리 한동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그 는 갑자기 들었던 횃불을 내려 놓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심목풍과 소영은 모두 그의 속셈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자 할 수 없이 따라서 뒤로 물러났 다. 우문한도는 제자리로 돌아오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영문을 모르고 뒤따르던 심목풍과 소영도 동 시에 원위치로 돌아왔다. 이때 별안간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닫혀졌던 청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심목풍과 소영은 그제서야 우문한도가 횃불을 놓고 뒤로 물러선 이유를 알았다. 그 횃불은 대청문 바로 앞에 놓여 져 있어서 그 불빛을 이용하여 대청 안의 일부 경물을 볼 수 있었다. 이 굴 속의 대청은 크고 캄캄하였다. 불빛이 비춰진 곳에 마침 탁자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이 보 였다. 돌 탁자 위에는 각기 종류가 다른 무기들이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이것을 본 군호의 마음 은 호기심에 싸여 추호도 공포와 긴장을 느끼지 못했다. 소영은 그 돌탁자의 무기 중에서 한 자루의 백옥소와 장검이 나란히 놓여져 있는 것을 재빨리 보았다. 그는 암중에 생각하였다. '저 옥소는 혹시 소왕 장방의 유물이 아닐까?' 이때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야 알겠소. 우리가 서 있는 곳과 그 석문 사이의 땅에 청문을 조종하는 장치가 놓여 져 있소. 그 장치는 너무 예민하여 사람이 밟았다 하면 열려 있던 대청문은 즉시 자동으로 닫혀 지게 되었던 것이오." 우문한도도 감탄하며 말했다. "그 장치는 수십 년을 지났는 데도 지금 이렇게 영민(靈敏)하게 잘 들으니 건축의 신기함이 얼 마나 높은 것인가 알 수 있소. 과연 포일천은 재능이 출중한 인물이구료." 심목풍이 곧 받아 "여기서 저 청문과의 거리는 불과 일 장밖에 되지 않으니 우리가 몸을 날려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오. 더 이상 머리를 써서 이 청문을 조종하는 장치를 조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문한도는 싸늘하게 반문했다. "만약 우리들이 저 대청으로 들어간 뒤 그 두 짝의 문이 또다시 꽉 닫혀지면서 열 수 없다면 그 때 가서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심목풍은 어리벙벙해져 주저하더니 싸늘하게 비꼬았다. "그것을 내가 만약 알고 있었다면 우문선생은 아마도 벌써 내 장력에 죽었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심대장주는 나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속히 없애 버리심이 좋을 것이오." 심목풍은 자기의 실언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받았다. "우리가 이 금궁을 나가기 전에는 또다시 살의를 품지 않겠소이다." 우문한도는 여럿을 돌아보며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서 있으시오." 하더니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네다섯 발자국을 걸었을 때 또다시 청문이 자동적으로 닫혀졌다. 우문한도는 몸을 굽히고 단검을 휘둘렀다. 아마 예리한 보검으로 그 자리의 돌땅을 파헤쳐 청문 을 조종하는 장치를 찾아내려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두 번 단검을 휘둘렀을 뿐 갑자기 손을 멈추더니 원위치로 돌아왔다. 심목풍은 날카롭게 비꼬았다. "돌땅이 너무 견고해서 우문선생은 보검이 상할까 봐 그러시오?" 우문한도는 안색이 숙연해지며 심목풍의 신랄한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딴 생각에 사 로잡힌 듯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무서운 수단이구나." 심목풍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다급히 물었다. "우문선생,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소?" 우문한도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 포일천의 능력은 너무나 비범하여 나는 티끌만큼도 그를 따를 수 없구료." 금화부인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혹시 또 무슨 잔꾀를 부리려는 것이 아니오?" 심목풍은 곧 그녀의 말을 이었다. "만약 우문선생이 저 금화부인이나 당노부인과 말다툼을 일으켜 싸우게 된다면 나는 책임지지 않겠소." 우문한도는 냉랭한 눈초리로 일동을 훑어보고 나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당신들의 처지가 위험하다는 것만 알릴 수 있을 뿐이 오. 일에 대해서는 아무 힘도 못될 것이오." 하더니 기침을 한 번 하고 "이 돌땅의 밑에는 바로 급류가 흘러내리고 있소이다. 까딱 잘못 하면 홍수가 밀려들어 우리들 은 전부 이 금궁 안에서 익사하고 말 것이란 말이외다." 심목풍의 안색이 단번에 변하였다. "아니! 그것이 정말이오?" 우문한도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믿을 수 없다면 귀를 대고 한번 들어보시오." 심목풍이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과연 우문한도의 그 검으로 찍은 구멍을 통해 급류가 휩쓸려 흘 러 내려가는 소리가 미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그만 전신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우문한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의 말만 계속했다. "만약 포일천의 사람됨이 나의 추측보다 더 악독하다면 아마 중요한 곳에다 그 급류로 통하는 암문을 조종하는 장치를 해 놓았을 것이오. 그러므로 누군가 그 기관을 건드리기만 한다면 그 암 문이 자동으로 열릴지도 모르오." 금화부인이 그에게 다시 소리쳤다. "당신은 점점 더 무서운 소리만 하는구료. 이 금궁 속에는 발자국을 뗄 때마다 함정이 있어 어 디서나 죽음이 뒤따르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렇다면 속히 이곳을 빠져나가면 될 것이 아니오?" "만약 지금 누구든지 이곳을 빠져나가겠다면 저는 절대 말리지 않겠소!" 심목풍이 다그쳐 물었다. "우문선생은? 그럼 당신은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겠다는 말이오?" "나의 생각은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어떻게 호랑이 새끼를 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니 이왕 금궁으로 들어온 이상 운수에 맡기고 한번 맞부딪쳐 보아야겠소. 나는 벌써부터 생사는 초 월하였소." 이런 상태에서는 항상 거들먹거리던 심목풍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 를 끄덕이며 "좋소! 우리도 우문선생과 같이 만사를 운수에 맡겨 봅시다." 하고 말했다. 우문한도는 핫하 웃으며 "대장주께서 왜 갑자기 겸손해지셨소?" 하고 조소하자 심목풍이 버럭 화를 내었다. "대장부는 굽힐 때도 있고 큰소리 칠 때도 있는 법! 이런 것으로 남에게 약점을 잡혔다고는 생 각지 않소." 우문한도는 그의 말을 묵살하고 화제를 돌렸다. "지금 우리들의 급선무는 대청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오. 나는 처음에 저 대청을 조종하는 장치를 파괴하려고 했으나 지금은 그 계획을 포기해야겠소." 심목풍은 나서며 제의했다. "내가 실험해 보겠소." 하더니 진기를 모아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내공이 심후하여 진기를 모아 초상비(草上飛)의 초 식을 발휘하였다. 그 순간 마치 제비같이 날아서 대청 앞에 내려섰다. 그의 신법은 비할 데없이 가벼웠다. 과연 그 청문은 닫혀지지 않았다. 심목풍은 대청 앞으로 다가가서 머리를 디밀고 그 안을 한번 살폈다. 그러나 혼자서는 들어갈 용기가 없었는지 그 자리에 선 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들도 어서 건너오시오." 이 말에 군호들도 천천히 걸어갔다. 이들은 모두 무림의 일류 고수들이라 진기를 모아 걸어갈 때 발이 땅에 닿는 힘이 극히 가벼웠다. 청문 앞에 다가온 우문한도는 땅에 놓인 횃불을 집어 들며 말했다. "제가 앞장서겠소." 그는 선두에 서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에 비쳐진 대청 안은 깊이가 약 사장쯤 되고 넓이는 불과 이 장 반 정도인 좁고 기다란 곳이었다. 그 안에는 입구에 놓인 기다란 돌탁자 위에 여러 가지 무기가 놓여 진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심목풍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말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오? 그렇다면 또다른 대청 복실이 있는 것일까요?" 우문한도는 대답하지 않고 횃불을 높이 밝히며 대청의 벽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하나의 다른 문이 나왔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펴보았다. 소영은 마음속으로 악소채와 옥소랑군과의 단혼곡에서의 약속을 상기하였다. 만약 그 옥소랑군 이 소왕 장방의 후손이라면 이번에 이 금궁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그 장방과 가장 밀접 한 사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소영은 심중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부지중에 손을 내밀어 그 한 자 루의 백옥소를 집어 들었다. 심목풍은 재빨리 소영의 손을 덮쳤다. 그리고 싸늘하게 외쳤다. "당신은 이 안의 물건에 마음대로 손을 대서는 안 되오." 소영은 날쌔게 후퇴하여 심목풍의 일 장을 피했다. 심목풍의 출수가 어찌나 빨랐는지 소영은 그의 장세를 피하기에 바빠서 그만 바로 뒤에 석벽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소영은 그 석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나 소영이 재빨리 몸을 가누어 반격 을 시도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의외의 변화는 소영과 심목풍으 로 하여금 격투하는 것을 잊게 하였고 정신을 가다듬어 만일의 변고에 대비하게 했다. 소영이 부딪친 그 대청의 오른쪽 석벽은 별안간에 석문이 열리더니 바퀴 달린 의자 한 개가 천 천히 굴러 나왔다. 그 의자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몸에 회색 장삼을 걸치고 있었으며 손을 축 늘어뜨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노승이었다. 횃불에 비친 그의 목에는 향나무로 만든 일련의 염주를 걸고 있었다. 심목풍은 얼떨결에 큰 기침을 한 번 하더니 "누구냐!" 하고 외치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이것을 본 우문한도가 황급히 말했다. "심장주는 함부로 손을 쓰지 마시오." 심목풍은 손을 거두며 "그것은 또 왜 그러시오?" 하고 물었다. 우문한도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이 금궁은 수십 년 간이나 닫혀 있었는데 어찌 살아 있는 사람이 있겠소?" "그러나 그는 죽은 사람 같지 않소이다. 이 금궁 속에서 수십 년 갇혔었다면 아무리 무공이 심 후한 사람이라도 마땅히 살이 썩고 백골만 앙상할 것이 아니겠소." 우문한도는 여전히 침착했다. "이것은 하나의 수수께끼라 그 내막을 알아내기 전에 나는 심대장주께 답변할 수가 없구료." 심목풍은 계속 따지려고 했으나 그의 눈에도 그 승려의 모습이 이상하게 비쳤고 전신의 살은 전 부 굳어서 산사람 같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때 그 바퀴 의자는 구르는 것을 멈추었다. 그 노인은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우문한도는 단검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천천히 노승 앞으로 다가가 횃불을 가까이 비쳐 얼 굴을 살펴보았다. 그 노승의 눈썹은 새하얗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여러 개 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 의 얼굴빛은 살아 있는 사람과 같이 생전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문한도는 노승에게서 눈을 떼고 심목풍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장주, 당신은 이 금궁에 갇힌 사람들 중에서 승려가 모두 몇 사람이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아마도 두 분이었던 것 갈습니다." 우문한도가 말했다. "한 분은 소림사의 절세 기승(奇僧) 무상대사(無相大師)이고 또 한 분은 누구였지요?" "제가 알기로는 법명을 천인(天忍)이라 하는 승려지만 그는 소림 출신이 아니오." 우문한도가 끄덕였다. "그 말이 맞을 겁니다. 제가 기억하기에도 천인이라는 고승이었소. 그러나 이분은 아마 소림파의 무상대사일 것이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여러분은 어떻게 석벽의 장치를 조종하여 이 대사를 출현시켰소?" 심목풍이 소영을 건너다 보고 대답했다. "그것은 저분에게 물어보시오." 우문한도는 눈을 소영에게 돌리고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저 석문을 열었소?" 소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심한 듯 대답했다. "나는 이 대장주의 일격을 피하려고 몸을 날리다가 우연히 이 벽에 부딪쳤을 뿐이오." 그는 여전히 목소리를 꾸며서 말했다. 심목풍과 우문한도는 그것이 본 음성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것으로 신분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심목풍이 다시 말했다. "지금 이렇게 된 마당에서까지 당신이 신분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하오." 우문한도가 천천히 다가오며 심목풍의 말을 받았다. "이분은 분명히 우리들과 잘 아는 사이일 것이오. 그러므로 얼굴에 인피가면을 쓰고 또한 음성 마저 꾸미니 몹시 이상한 느낌이 드는군요." 소영은 그들 두 사람이 번갈아 공격하자 가면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자기 얼 굴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자 얼굴까지 올린 손을 다시 내리며 냉소를 띠고 천천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우문한도는 소영을 바라보며 담담히 물었다. "당신이 방금 부딪친 벽이 어디요?" 소영은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곳이오." 우문한도는 그 석벽 앞으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른 곳과 다름없이 평평한 석벽이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포일천은 과연 천재구료. 이 석벽은 다른 곳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만일 당신이 우연히 이 벽에 부딪치지 않았다면 도저히 그것을 못 찾아냈을 것이오." 그리고 그는 손으로 석벽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달아 몇 장을 내리쳐도 석벽은 아무런 반 응이 없었다. 그는 소영에게 다시 확인했다. "이곳이 틀림없지요?" "틀림없소이다." 우문한도는 다시 벽을 쳤다. 내력을 다 모아 연달아 때리자 과연 세 번째 장력이 벽을 때렸을 때 동쪽 정면 석벽에 변화가 생겼다. 다시 이상한 소리가 귀에 들리더니 석벽에는 다시 하나의 석문이 열리며 또 바퀴 달린 의자가 천천히 굴러 나왔다. 그 의자 위에는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고 몸에 장삼을 걸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이 바퀴 달린 의자는 대청 중간까지 굴러 오더니 갑자기 멈추었다. 의자 위의 노인은 두 손을 단정히 무릎 위에 얹어 놓고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 다. 우문한도는 물끄러미 그 노인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중얼거렸다. "나는 알았다! 이제야 알았어!" 심목풍은 싸늘하게 물었다. "우문선생은 무엇을 알았다는 것이오?" 우문한도가 천천히 대답했다. "심대장주께선 견문이 풍부하니 그들이 앉아 있는 위치와 거리로 봐서 왕년에 있었던 일을 얼마 쯤 추리할 수 있으신지요?" 119. 금궁 속의 수수께끼 심목풍은 자세히 그 흰 수염의 노인과 무상대사를 바라보았으나 별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 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알아낼 수가 없소. 우문선생께서 분명히 말해 주시오." 우문한도는 웃으며 대답했다. "심대장주의 지혜라면 반드시 그 사정을 알아낼 수 있을 텐데 다만 당신이 생각해 보지 않기 때 문이오....." 심목풍은 거듭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역시 알아낼 수가 없소. 우문선생에게 부탁하겠소." 그러나 심목풍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칭찬을 하면서 속으로는 비웃고 있겠지? 고약한 놈 같으니라고...내 만일 살아서 이 금궁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단단히 혼내 줄 테다.' 우문한도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소제가 이제 그들 두 사람의 위치를 말씀드리겠소. 조금만 계산해 본다면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오...그 사람의 주위에도 좌석이 있소." 심목풍이 따지듯 말했다. "금궁 속에는 모두 십대 고수가 있소. 포일천을 제외하면 아직도 아홉 사람이 있소. 이것을 모르 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만약 우문형께서 그 점을 가리켜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 닐 것이오." 우문한도는 곧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심형께서는 그 점에 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심목풍은 어리둥절했다. "그건....." 우문한도가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공으로 말한다면 소제가 심장주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사리판단에 있어서는 소제가 심대장주를 능가한다고 자부하고 있소. 그러니 심대장주께서는 그 사정을 알지 못한다면 잠자코 계시오." 심목풍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이 화끈 달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우문한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몇 사람 가운데는 반드시 한 개의 원탁이 놓여 있었을 것이오. 소제가 그들이 거기서 식사 를 했다거나 원탁의 주위에 둘러 앉아 담론을 했다고 단정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들이 원탁의 주위에 빙 둘러 앉아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소영은 두 사람이 앉아 있었던 그 바퀴 달린 의자의 위치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우문한도의 말이 맞다고 생각되었다. '그가 내용을 말하기 전에는 퍽 기이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더니 막상 듣고 보니 평범하 구나. 이 사람은 우리들 중에서 가장 재주가 있고 기지가 앞서는 사람이다.' 이때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포일천이 무슨 방법으로 이들 두 사람을 죽기 전에 이렇게 단정하게 바퀴 달린 의자에 앉혀 놓 았는지, 또한 무엇 때문에 이렇듯 평안하게 죽었는지, 그 점에 대해서는 소제도 짐작할 수가 없 소." 심목풍은 이때 입술을 실룩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물어 버렸다. 이번에 말을 잘못해서 혹 시 다시 우문한도의 조소를 받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우문한도는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심대장주, 횃불을 잠시 들어 주실까요?" 심목풍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 심모는 일생 동안 남의 부림을 당해본 적이 없소." 우문한도가 미소를 지었다. "심대장주께서 만약 캄캄한 곳에서도 체면을 찾는다면 나는 이 횃불을 버리겠소." 금화부인이 앞으로 성큼 한걸음 나섰다. "내가 횃불을 들까요?"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누구든지 좋소." 그는 횃불을 금화부인에게 넘겨 주고는 다시 석벽 앞으로 다가가서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는 연달아 수십 장을 때렸지만 끝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심목풍이 냉소를 터뜨렸다. "우문형, 당신은 이 석벽을 모조리 다 두드려 볼 작정이오?" 우문한도는 그제야 손을 멈추고 천천히 그 두 개의 바퀴 달린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거기서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그것을 조사하였다. 심목풍은 바로 이때가 우문한도의 코를 꺾어 놓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흐흐흐 하고 웃어젖 혔다. "우문형이 서 있는 곳은 바로 그 원탁의 위인지도 모르오. 만약 기관을 잘못 건드려 그 탁자가 갑자가 위로 뛰어 오른다면 우문형은 그 바람에 천장의 석벽에 부딪칠 것이오." 그러나 우문한도는 온 정신을 기울여 무엇을 조사해 보고 있는지 심목풍이 아무리 조소를 퍼부 어도 묵묵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우문한도는 허리를 굽히면서 손을 내밀어 그 무상대사의 바퀴 의자를 한 번 가볍게 밀었 다. 그러자 의자는 소리를 내면서 석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다음 석문은 자동적으로 닫혀 버 렸다. 우문한도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그 의자가 사라진 석벽을 한참 동안 살피고 난 후 되돌아 왔 다. "횃불을 이리 주십시오." 금화부인은 횃불을 건네 주면서 물었다. "우문선생, 무슨 발견이라도 했소?" 우문한도는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횃불을 높이 쳐들고는 석벽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 다. 그의 태도는 매우 신중을 기하는 것 같았다. 한 걸음마다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께서는 한 바퀴 돈 다음 무슨 발견이라도 했소?" 우문한도가 천천히 대답했다. "저는 이 대청 안에 모두 몇 개의 석문이 있는가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심목풍이 다그쳐 물었다. "그래 알아보셨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문이 닫힌 곳은 아무리 결합이 교묘하다 하더라도 전연 흔적이 없을 수는 없죠." 이때 심목풍이 말을 가로챘다. "나는 일일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소. 만약 포일천이 자기 자신을 계산해 넣지 않았다면 이 대 청 안에는 아홉 개의 암실이 있는 것을 추측해 낼 수가 있소." 우문한도는 그 말에 반박을 했다. "심대장주의 추측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돌아본 것으로는 다만 여섯 개의 암실문이 있었다는 흔적밖에는 없습니다." 심목풍이 반문했다. "모두 아홉 사람인데 어째서 여섯 개의 암실밖에 없단 말이오?" 우문한도는 심목풍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지혜로 생각해 내야 할 문제요." 심목풍은 우문한도가 가지고 있는 횃불이 이미 반 이상이나 타들어 간 것을 보자 다급한 생각이 들었다. "우문선생, 그 수중에 있는 횃불은 앞으로 한 시진 정도면 다 타버릴 것 같소." 우문한도는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때가 되면 우리들은 암흑 속에서 더듬어 나갈 수밖에 없죠." 심목풍은 냉소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빛이 없어서야 되겠소? 우문선생께서 만약 마음을 진정하여 정말 우리들과 함 께 연구할 생각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이 횃불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심대장주께선 이미 무엇을 생각해 낸 것 같군요?" 심목풍은 이내 응했다. "그렇소. 이 석실 속에 만약 밖에서 광선이 들어올 수 없다면 반드시 무슨 조명장치가 있었을 것이오. 왕년의 그 십대 고수들이 내공이 심후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런 암흑 속에서 마주 앉아 있 지는 않았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반문했다. "그렇다면 심대장주는 이 대청 안에 조명등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씀이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만약 우문선생의 말대로 이 대청 속에 원탁이 있었다고 한다면 반드시 조명등이 있어 야 할 것이 아니오?"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딴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원탁을 조종하는 기관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것을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심목풍이 말을 이었다. "그 원탁이 만약 천장에 있지 않으면 반드시 지하에 숨겨져 있을 것이오. 사방의 석벽에는 숨겨 져 있지 않을 것이오."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심대장주의 고견에는 일리가 있소. 하지만 이 반들반들한 바닥에서 조금도 의심할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아 소제는 손을 쓸 엄두가 나지 않소." 심목풍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우문선생은 앞으로는 우리들 앞에서 재주를 과시하지 마시오." 심목풍은 성큼성큼 대청 한가운데로 가서는 암암리에 내력을 운공하여 느린 걸음으로 왔다갔다 했다. 심목풍은 소영이 벽을 때려 바퀴 달린 의자가 드러나게 한 것을 보고 만약 이 대청 속에 원탁이 있다면 그 조종기관은 반드시 이 중앙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때문이다. 심목풍은 갑자기 발을 디딘 곳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와르르 하는 소리를 내면 서 한 개의 커다란 돌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심목풍은 이미 방비하고 있던 터라 양손을 들어 암암리에 내력을 운용하여 그 거대한 돌을 받았 다. 거석은 그 모양이 과연 원탁처럼 생겼다. 네 개의 다리는 직경이 한 자 다섯 치 가량 돼 보이 며 적어도 삼천 근 이상이 될 것 같았다. 심목풍은 이 거석을 받쳐 들고는 우문한도와 소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꼼짝도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심목풍은 슬며시 화가 났다. "두 분께서는 이 거석에 내가 치어 죽기라도 할 것이라 생각하시는 거요?" 심목풍은 대갈일성을 지르면서 묵묵히 내력을 운기하여 갑자기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순간 수천 근이나 되는 거석이 그의 힘에 의해 수 척의 높이로 떠올라 갔다. 그 틈에 심목풍은 돌 밑을 빠져나와 재빨리 몸을 날려 자기의 원위치로 돌아왔다. 하늘을 뒤흔들어 놓는 듯한 진동과 함께 석탁이 바닥에 떨어졌다. 대청 안에 있던 군호들은 제각기 운기를 하며 깨어진 돌조각에 상하지 않으려고 방비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자기의 위치를 떠나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와당탕 하는 소리가 나더니 사방의 벽에서 또 다섯 개의 석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무상대사를 포함한 다섯 개의 의자가 동시에 석탁을 향해 굴러 왔다. 알고 보니 석탁이 떨어져 부딪친 곳이 바로 이 대청을 조종하는 총기관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원래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푸른 장삼을 입은 흰수염의 노인과 합쳐 과연 모두 여섯 사 람뿐이었다. 소영이 시선을 돌려 그들을 자세히 바라보니 그 여섯 사람 중에는 무상대사와 푸른 장삼을 입은 흰 수염의 노인 외에 또 한 사람의 화상(和尙)이 있었다. 그 화상은 붉은 가사를 입고 짙은 눈썹에 눈이 컸다. 머리에는 아홉 개의 계파가 찍혀 있었다. 소영은 이 사람이 심목풍이 조금 전에 말한 그 천인대사(天忍大師)일 것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은 머리에 금관을 쓰고 금색으로 꽃을 수놓은 노란 도포를 입었으며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남색 장삼을 입고 융단으로 만든 모자를 썼으며 바짝 마른 몸집에 눈이 작았다. 눈썹도 매우 짧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인자함을 풍기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 한 사람은 토산(土産) 포목으로 만든 바지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죽립(竹笠)을 쓰고 의 자 위에다 길이가 두 자 가량 되는 담뱃대를 걸쳐 놓았다. 언뜻 보아 시골 부자 같은 인상을 주 는 사람이었다. 소영은 이미 강호에서는 손꼽는 고수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여태껏 선배 인물들을 별로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장산패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들은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그 모습이 크게 달라져 있어 한동안 한 사람도 알 아내지 못했다. 이 놀라운 변화로 인해 심목풍의 분노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모두들 이 대청 안의 변화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눈이 어지러워져 오색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서 멍청하게 서 있을 따름이었다. 한참 후에야 우문한도가 가벼운 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정말 교묘한 장관이오! 신공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소." 심목풍은 이 신기하고도 교묘한 솜씨에 정신이 팔려 완전히 조금 전의 분노를 잊어 버렸다. 그 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대청 속에 원탁이 있음을 알아낸 우문선생도 포일천만은 못하다 하더라도 놀라운 지혜를 가 진 사람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이 대청 속에 원탁이 설치돼 있으리라고 예측하게 된 것은 단지 이들 두 사람이 나타난 후에 그들이 앉아 있는 거리를 계산해서 단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오. 그것을 가지고 신기하다 고는 할 수 없습니다. 건축학에 약간의 조예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단박 알아낼 수 있 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보다도 저는 이 원탁이 내려앉은 곳이 바로 이 대청 안의 여섯 개의 암실을 조종하는 총기관 이 있는 곳이라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소. 조금 전만 하더라도 저는 포일천의 솜씨에 그다지 감탄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시각부터는 완전히 달라졌소. 그에 대한 존경심을 금할 길이 없소."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아까운 것은 이 석실 속에 조명등이 없다는 것이오. 우문선생의 수중에 있는 횃불은 거의 다 타들어 가고 있소. 만약 그 불이 꺼져 버린다면 그때는 석실 속은 캄캄해질 것이오. 만약 우리들 이 무엇을 찾아내겠다고 더듬어 나가다가 또 다른 기관에 부딪친다면 그때는 우리들은 살아나기 힘들 것이오."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심대장주의 생각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등잔이 있을 것이오. 하지만 그 등잔 속에 기 름이 남아 있는지가 의문이오." 우문한도의 수중에 있는 횃불은 약 한 치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수중의 횃불을 보면 서 재빨리 석탁을 향해서 걸어갔다. "소제가 실험해 보겠소. 혹시 소제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니....." 그는 말을 마친 다음 석탁을 자세히 바라본 후 손을 들어 석탁의 가운데에 얹어 놓았다. 그리고 는 손바닥에 힘을 주고 좌우로 여러 번 문질렀다. 그러자 과연 석탁의 가운데가 움직였다. 우문한도는 왼쪽을 향해 그것을 한참 동안 돌렸다. 이윽 고 밥그릇만한 구멍이 열렸다. 우문한도는 구멍에다 손을 집어 넣었다. 곧 그는 은으로 만든 호리병 모양의 등잔을 꺼냈다. 등잔의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은등 속에는 아직도 많은 기름이 남아 있었다. 우문한도는 외치듯 말했다. "심대장주께서는 마음을 놓으시오. 이 등잔 속에 남아 있는 기름은 이틀 동안은 충분히 쓸 수 있겠소." 심목풍은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났다. "이 석실 속에 불빛만 있다면 어떠한 장치가 있더라고 우리는 겁날 것이 없소." 우문한도는 등잔에다 불을 붙이고 횃불을 켜서 주머니 속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바깥 밀실에서 본 그 화려한 비단 도포를 입은 시체와 이 석실에 있는 여섯 사람을 합치면 일곱 사람이 나타난 셈인데 만약 전설의 이야기가 틀리지 않는다면 이 금궁 속으로 들어 온 십대 고수 중에 아직도 세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셈입니다."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혹시 이 대청 속에 아직 세 개의 밀실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요?"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가령 소제의 계산이 틀린다고 하더라도 이 밀실을 조종하는 총기관은 절대로 틀리지 않을 것입 니다." 우문한도는 여섯 구의 시체를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가령 이 석탁의 둘레에 열 사람이 둘러 앉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의자의 거리와 위치를 보면 분명히 여섯 사람이 앉은 흔적밖에는 없소. 당시 포일천이 이 바퀴 달린 의자와 원탁을 설계할 때 다만 여섯 개의 의자만 놓도록 설계를 했고 만일 강호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 정말이라면 그 세 사람의 거처는 반드시 딴 곳에 있을 것이오....." 심목풍이 말을 가로챘다. "지금 우리들은 우선 목격한 일부터 처리해 나가야 합니다. 잠시 그 세 사람의 행방은 덮어 두 기로 합시다." 이때 당노부인이 참견을 했다. "노신은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소. 우문선생께 물어볼까 하는데....."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무엇이든 제가 알고 있는 일이라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당노부인이 말을 이었다. "이들은 금궁에서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는 데도 어째서 여태까지 시체가 썩지 않았을까요?" 이때 심목풍이 대답을 가로채고 나섰다. "아마도 이 금궁 속의 기온은 시체가 썩지 않을 정도인 것 같습니다." 당노부인이 반문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들이 이 대청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 석실 속에서 본 화려한 비단 도포를 입은 시체는 썩어 뼈만 앙상하게 남았을까요?" 심목풍은 묵묵부답이었다. 우문한도가 천천히 대답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무슨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소제가 아는 바로는 시체를 썩지 않게 할 수 있 는 약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금궁 속에 갇혀 죽은 사람들은 모두 소제보다 몇십 배나 뛰어난 공력을 가진 사람들이므로 증거를 얻기 전에는 미리 예언을 할 수 없소." 소영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왜 이런 필요없는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나는 다만 그들이 빨리 소왕장(簫王張) 의 신분을 조사하여 그의 유물 중에서 무공이 적힌 책자를 찾아내기를 바라고 있는데...그리하여 빨리 금궁을 벗어나서 악누님을 도와 옥소랑군과 그의 일가를 상대해야할 텐데.....' 심목풍이 긴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우문선생, 저의 생각으로는 지금 우리들은 서로 생각하는 바를 솔직이 털어 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서로 암투를 해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소제의 뜻도 마찬가지요." 심목풍은 시선을 소영에게로 돌렸다. "당신은?" "저는 두 분이 상의하는 것이 공평하기만 하다면 무조건 따르겠소." 소영은 이렇게 대답했다. 심목풍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좋소. 변변치 못한 이 몸이 먼저 얘기를 꺼내겠소." 심목풍은 석탁의 주위에 앉은 여섯 구의 시체를 둘러본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이 금궁에 들어온 것은 결코 십대 기인의 유물을 얻으려 함이 아니오. 다만 그들이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 낸 무공을 얻으려고 희망했을 뿐이오."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을 가졌소. 이 형씨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두 사람은 말을 마치자 시선을 모아 소영을 주시했다. 마치 그의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처럼. 소영은 가능한 한 말을 피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때 그 은등의 심지에서 강렬한 불빛이 비쳐 대청 안의 구석구석까지 환하게 밝혔다. 심목풍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금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금궁에 갇혀 있는 십대 고수들이 반드시 금궁 속에서 긴 세월 을 보내면서 무공이 실전되지 않도록 잘 보존해 두었으리라고 생각했소. 그러나 막상 금궁 속으 로 들어와서 보니 그 정세는 내가 생각하던 바와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소." 우문한도가 반문했다. "그렇다면 심대장주의 말씀은 이들이 너무 빨리 죽었다는 것이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공을 남겨 두었으리라는 희망은 거의 없습니다."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대장주께선 가장 중요한 처리방법을 빠뜨렸습니다." 심목풍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우리들이 이 금궁 속에서 무공이 기재된 책자 한 권을 찾아낸다면 그것을 누구에게 주어 야 할지? 덮어 놓고 아무에게나 준다면 반드시 한바탕 풍파가 일어날 것이오. 예를 들어 말한다 면 그 책자가 두 분 중 누구의 손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소제는 제일 먼저 그것을 뺏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필시 유혈의 참극을 빚어내고 강한 사람은 살고 약한 사람은 죽게 될 것이오. 그러 므로 우문선생이 결정한 그 도박식의 약속은 실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문한도가 반박하듯 말했다. "심대장주께선 여태껏 얘기를 하면서도 그 해결책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심목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소제의 생각으로는 그 무공이 기재되어 있는 책자가 누구의 손으로 들어가든 자기 사유의 물건 으로 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다 함께 각자 자기의 기억력과 재질에 의해 무공을 배우자는 거요. 누가 많이 배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오직 자기의 재질에 달려 있을 뿐이 오." 우문한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은등 속에 남아 있는 기름은 앞으로 잘해야 삼십 시진 정도 더 갈 수 있을 것이오. 그렇다 면 금궁을 나간 다음 그 책자는 또 누구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까?" 심목풍의 대답. "우리가 금궁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 책자를 불에 태워 버리는 것이오. 아무도 금궁 밖으로 그 책자를 가지고 나가지 못하도록....." 우문한도가 말했다. "만약 심대장주께서 말한 것을 자신이 지킬 수만 있다면 소제는 대찬성입니다만....." 심목풍은 소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의 의사는 어떻소?"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심목풍의 사람됨은 항상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데, 지금 갑자기 이런 방법을 내놓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슨 속셈이 있을 것이다." 소영은 우문한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우문선생께서는 심대장주의 말을 믿으십니까?"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었다. "저 역시 매우 믿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소영은 긴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심목풍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성을 내려하다가 억지로 참고 허허 하고 웃어젖혔다. "아마도 우리들의 협상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 같소." 우문한도가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만약 심대장주께서 먼저 말한 대로 이행을 해서 우리들의 신임을 얻어 놓는다면 그때는 사정이 달라질 것 같소." 심목풍은 담담하게 웃었다. "두 분께서 결코 이 심모와 타협할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한 가지 한 가지씩 해결해 나갈 수 밖에 없소." 심목풍은 잠깐 말을 끊고 여섯 구의 시체를 훑어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우선 제일 중요한 일 한 가지가 남아 있소. 아마 두 분께서도 이에 협력하는 것만은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오?" "이 여섯 구의 시체의 신분을 밝히는 일이오. 전설에 의하면 이 금궁 속에는 모두 열 명의 고수 들이 있다고 했소. 하지만 열 명의 고수들이 반드시 이 금궁 속에 들어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이오. 혹시 두 사람의 재질이 뛰어난 인물이 있어서 그들은 위험 속에 뛰어들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때 십대 고수 이외에도 다른 고수가 호기심 에 끌려 금궁 속을 들어왔을지도 모를 일이오. 그러니 전설을 그대로 믿을 수도 없는 것이오....." 심목풍은 갑자기 한바탕 앙천대소를 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강호에서는 나 심목풍이 이미 죽었다고 전해진 일이 있소.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나는 여전히 이렇게 살아 있지 않소?" 소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게 무슨 그리 장한 일이라고 떠벌리고 있는 것일까?'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대장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 십대 고수들이 남긴 무공의 책자를 찾아내기 전에 우리들은 먼 저 그들의 신분을 밝혀내는 한편 또한 그들이 사망한 시간과 원인을 캐내야 하오. 그래서 만일 이들 고수들이 금궁으로 들어오자마자 죽었다면 그들의 무공이 적힌 책자를 찾겠다는 희망은 버 려야 하오." 심목풍은 시선을 돌려 무상대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살아 있을 때와 죽은 후의 모습이 비록 다르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분은 틀림없이 소림파의 무상대사인 것 같소." 우문한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는 비록 무상대사의 고명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만나본 적은 없소. 심대장주의 단정이 그 러시다면 그야 틀리지는 않을 것이오." 심목풍은 다시 시선을 머리에 계파가 찍혀 있고 붉은 가사를 입은 화상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이 금궁 속에 들어온 사람들 중 승려의 신분을 가진 사람은 두 사람뿐인 것 같 소. 한 분은 무상대사이고 또 한 분은 그 법명을 천인이라 하는데 혹시 이분이 그 천인대사가 아 닐까요?" 우문한도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분 화상의 신분은 틀리지 않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시선을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는 금색 꽃을 수놓은 푸른 도포를 입은 늙은이에게 로 옮겼다. "이분은 금관에다 푸른 도포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몸차림이 좀 특이한 것을 보니 혹시 그 전설에 나오는 도왕마탑(刀王馬塔)이 아닐까요?"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틀림없을 것이오. 소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탑은 십이초파천도법(十二招破天刀法)으로 무림 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자칭 도왕이라고 했소. 그는 금관을 쓰기를 좋아했으며 당시 그 이외에는 별로 푸른 도포를 입은 사람이 없었다고 하니 틀림없이 그 사람일 것이오." 우문한도가 푸른 장삼을 입고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심대장주께서는 이 사람을 아시오?" 심목풍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의 옷차림은 평범할 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별 특징이 없으므로 얼른 그 신분을 알아내 기는 힘들 것 같소."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혹시 화산파의 일대 기재 담운청(談雲靑)이 이런 차림을 하지 않았을까요?" 심목풍이 대답했다. "맞았소. 담운청은 확실히 푸른 장삼을 즐겨 입고 수수한 차림을 했소. 그러나 장방도 푸른 옷을 즐겨 입었소. 이 사람의 신분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소." 당노부인이 갑자기 말참견을 했다. "노신은 그가 누구라는 것은 몰라도 그가 장방이 아니라는 것만은 단정을 내릴 수 있소." 심목풍이 물었다. "당노부인께서는 그가 손에 퉁소를 들고 있지 않은 점에서 그러시는 거죠?" 당노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오. 이 늙은이가 어렸을 적에 장방을 본 일이 있소. 그를 존경한 나머지 유심히 그를 살펴보았었소. 그래서 그의 모습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소." 이때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당노부인께서는 장방의 특징을 말해 보시오. 그래야만 우리들의 의심이 풀릴 게 아니오." "장방의 인중에는 쌀알만한 한 개의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점이 없습니다." 심목풍은 대답했다. "그는 죽인 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났으므로 근육이 수축되어 아마 얼굴의 모양도 달라졌을 것입 니다." 당노부인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오. 나는 그의 모습을 똑똑히 알고 있으니....." 우문한도가 말참견을 했다. "우리들은 우선 그를 화산파의 담운청이라고 단정을 내립시다." 소영은 이들이 근 백 년 동안에 걸친 무림의 인물들을 논하고 있는 것을 그저 열심히 듣고만 있 었다. "형씨의 고견은 어떻소?" 소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들을 일찌기 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다. 그런데 내가 어떻 게 안단 말이냐?' 그러나 소영은 표면적으로 전연 의견이 없다는 것을 나타낼 수는 없었다. "저의 생각으로도 이 사람은 장방은 아닌 것 같소." 심목풍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우문한도는 남색 장삼을 입고 융단 모자를 썼으며 작은 눈에다 바짝 마른 몸집을 가진 사람에게 로 시선을 돌렸다. "심대장주께서는 이분을 알고 계십니까?" "하남일수, 상제인(尙濟人)이오." "소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우문한도는 다시 바지저고리를 입고 죽립을 썼으며 의자 위에 담뱃대를 걸쳐 놓은 흡사 시골 부 자 같은 차림을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이 바로 죽립옹(竹笠翁) 백선당(白善堂)이 아닐까요?" 심목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죽립과 담뱃대는 특수하므로 십중팔구 틀림없을 것이오."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만약 금궁에 들어온 사람이 열 사람의 고수뿐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이미 여섯 명을 발견했 소. 거기에다 포일천을 합하면 모두 일곱 사람, 아직도 우리는 세 구의 시체를 찾아내지 못한 셈 이오." 이때 여태껏 잠자코 듣고만 있던 금화부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만약 나머지 세 사람의 시체가 썩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찾아내지 못할 게 아니오?"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세 사람의 시체가 이미 썩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약간의 흔적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갑자기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생각해 낸 듯 수중의 단검을 높이 쳐들고 흔들었다. "이 단검은 짧으면서도 예리하여 쇠를 진흙 자르듯 할 수 있으니 필시 내력을 지닌 명검일 것이 오. 심대장주께서는 견문이 많으니 이 단검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맞춰 보시오." 심목풍은 한참 동안 단검을 살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 이들 여섯 사람 중에서는 오직 담운청만이 칼을 썼다고 생각되오. 하지만 이 단 검이 누구의 것인지는 나도 단정을 내릴 수가 없소." 우문한도는 탄식조로 말했다. "아까운 일이로다! 아까운 일....." 심목풍이 다그쳐 물었다. "무엇이 아깝다는 겁니까?" "만약 이 단검이 누구의 소유인지를 알 수만 있다면 한 가지 중대한 일을 증명해 낼 수가 있는 데....." 심목풍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문형께서는 그렇게 아리송하게 말하지 마시고 분명하게 얘기를 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시간 이 없소."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이 검의 주인이 바로 포일천을 죽인 사람이오." 소영은 우문한도의 말을 듣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일은 그리 진지한 고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은 일을 제일 먼저 생각 해 낸 점으로 보아서는 역시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재질을 가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20. 천인대사의 붉은 가사 심목풍은 다시 여섯 구의 시체를 훑어본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여섯 사람이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은 모두가 비슷하므로 그 일 검으로 포일천의 등을 찌른 사람은 이 여섯 사람 중에는 아무도 없다고 봅니다."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그것으로 한 가지 일이 증명되었습니다." 심목풍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우문한도의 대답.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금궁 속에는 또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소. 다만 우리들 은 그들의 거처를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오." 심목풍은 잠깐 깊이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금궁 속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체에 불과하오. 목전에 제 일 중요한 일은 우리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들이 남긴 무공 책자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심대장주의 의욕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오."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우리들이 금궁에 들어온 의도는 모두가 똑같을 것이오. 그러니 십대 고수가 남긴 무공을 찾는 다는 것이 어찌 나 한 사람만의 뜻이라 할 수 있겠소?" 우문한도가 말했다. "심대장주께서는 저의 뜻을 오해하고 있소. 내 말뜻은 그들이 남긴 무공을 찾기 전에 우리는 먼 저 그들에게 무공을 남길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과연 있었을까 여부를 알아낸 후에 그 무공 책자를 찾아 보자는 거요." 심목풍은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 "우문형의 말에는 일리가 있소. 그렇다면 먼저 우문형이 고견을 말씀해 보시오." 우문한도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여섯 분의 고수들은 핏줄과 근육이 모두 말라 버렸소. 사망한 지 이미 수십 년이 경과되어 그들을 목격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살아 있지 않을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풀기 어려운 비밀이 되 고 말았소. 그러니 우리들은 다만 지혜로써 추단(推斷)할 수밖에 도리가 없소....." 우문한도가 시선을 돌려 심목풍과 소영 등을 번갈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소제가 이 여섯 사람의 표정을 관찰해 볼때 이들은 임종시에 그 심정이 안정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심목풍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만약 그들이 포일천이 자기네들을 모해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이토록 의 자에 앉아서 평안히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반드시 힘껏 반격을 했을 것이므로 이 대청 안도 한바탕 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당노부인이 또 갑자기 말참견을 했다. "이 늙은이의 소견은 좀 다르오."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중지(衆智)를 합하면 나라라도 세울 수 있다고 했소. 이 의문을 풀어내는 데는 절대로 한두 사 람의 지혜만으로는 될 수 없소. 그러하오니 당부인께서는 서슴지 마시고 고견을 말씀해 주십시 오." 당노부인이 말을 받았다. "이 늙은이의 식견이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혹시 벽돌을 던졌는데 옥이 굴렀다는 말과 같이 여러분의 지혜의 문을 열어 놓을지도 모르오....." 당노부인은 시선을 돌려 이 여섯 구의 시체를 자세히 훑어보면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오. 포일천은 이 여섯 사람이 대청에 들어서자마자 독수를 썼 다고 합시다. 그래서 이들의 몸에 본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극독이 스쳐 들어갔다 치고, 이들이 그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소. 그러나 이들이 때가 늦었음에도 불 구하고 심후한 내공을 운기하여 그 극독을 제거하려고 이처럼 한곳에 모여 앉아서 진기조식을 했 는지도 모를 일이오. 그러나 만사는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끝내 극독을 제거하지 못 하고 독이 몸에 퍼져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오." 심목풍은 말을 받았다. "만약 제가 그런 경우에 처했다면 절대로 이런 수양을 하지 않고 반드시 출수를 하여 반격을 가 했을 것이오. 하지만 이 여섯 사람은 수양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으므로 이렇게 참고 견딜 수 있 었는지도 모를 일이오." 당노부인이 말을 이었다. "우리 당가에는 수십 종의 독약과 암기가 있는데 이것들은 오두 그 독을 사용하는 법이 다르오. 그래서 그 중 제일 독성이 강한 것은 제아무리 무림의 고수라고 하더라도 일단 중독되기만 하면 반격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지요." 이때 금화부인이 또 말참견을 했다. "그렇죠. 독을 쓴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입니다. 묘강에 있는 금누에와 독벌레는 가히 독중의 독이라 할 수 있소. 저는 독을 쓰는 데는 능하지 못하지만 독벌레를 구사하는 데는 자신이 있습 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 독벌레의 독에 중독되기만 하면 당장에 반항할 기력을 잃고 말지요." 금화부인의 이와 같은 말을 듣자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몸서리를 쳤다. 그들은 모두 속으로 비 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이 여인이 우리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암암리에 우리에게 독벌레를 구사한다면 우 리는 영락없이 그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군호들은 모두 금화부인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자 심목풍이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일찌기 지금의 강호에서 독을 쓰는 데는 그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독수약왕에게 들은 적이 있소. 독충에 중독되었다고 하더라도 살리는 방법이 전연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오." 금화부인은 갑자기 깔깔 웃었다. "여러분들은 마음을 놓으십시오. 저는 절대로 여러분에게 독충을 구사하지는 않소." 우문한도가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부인께서 독충을 구사한다면 제일 먼저 심대장주께서 당신을 용서치 않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어젖혔다. 이윽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당부인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소." 당노부인이 말을 받았다. "이 늙은이는 그저 가르침을 받을 뿐이오." 우문한도가 말했다. "만약 이 여섯 사람이 극독을 입은 것을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꼭 의자 위에 앉아서 운공하여 독을 뽑아낼 필요는 없지 않소?" 당노부인이 말을 받았다. "가령 그들이 독이 발작하여 죽은 후에 포일천이 그들을 의자 위에 앉혀 놓았다고 할 수도 있잖 아요?" 우문한도는 여전히 반론을 펼쳤다. "아마도 그때 포일천은 칼에 맞아서 자기 자신도 돌볼 틈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그럴 마음의 여 유가 있었겠소?" 백리빙이 갑자기 말참견을 했다. "혹시 이 의자 위에는 어떤 기관이 설치돼 있어 그들이 앉기만 하면 일어날 수 없게 되어 있는 지도 모르죠." 군호들은 그 말을 듣자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모두들 의자를 돌아보았다. 심목풍이 말했다. "우문형께서는 기관학에 대해서 정통하시니 자세히 한번 관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의자에 어 떤 기관이 장치되어 있는지....." 우문한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가령 이 의자 위에 어떤 기관이 장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 제 일류 의 고수들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들 여섯 분의 무공으로 말하면 바위라도 쪼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뿐더러 이 바퀴 달린 의자에는 제가 보기에는 기관이 장치되어 있는 것 같지 도 않습니다." 심목풍의 말. "우리들이 여태껏 갑론을박한 것은 다 헛되고 말았소. 조그마한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으니 말이 오."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들이 주고받은 말은 모두가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 여섯 사람의 사인을 규명하지는 못 할 것 같구나.'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혹시 이럴지도 모르지요. 이 금궁 속에 있던 사람 중 한 사람은 같이 죽지 않고 남아서 시체를 이 의자 위에 얹어 놓았는지도 ....." 심목풍. "그 사람이 누굴까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 금궁 속으로 들어온 십대 고수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되 기도 하지만...아직 세 사람을 찾아내지 못했으니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소." 심목풍은 정색을 하면서 다시 물었다. "우문형, 십대 고수들 중에 혹시 금궁을 빠져나간 사람이 있을까요?"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글쎄요. 절대로 없다고 장담하지는 못하지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심목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이 여섯 사람이 바퀴 달린 의자 위에 앉아서 사망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반대로 그 것은 이들 여섯 구의 시체를 죽은 후에 이 의자 위에 얹어 놓았다는 결론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그 사람은 포일천이 아니고....." 우문한도가 말을 잘랐다. "이 금궁 속에 들어온 고수가 열 사람이 틀림없다면 당연히 그 사람은 우리들이 아직 발견해 내 지 못한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이오." 심목풍의 말. "만약 열 사람이 동시에 사망했다고 가정한다면 이와 같은 추리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우리들 여섯 사람이 이 금궁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이 이곳에 들어왔다는 증명도 되는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그 말을 듣자 어리둥절했다. "그것은, 그것....." 우문한도는 정말 아리송해서 뒷말을 잇지 못했다. 기실 장내의 군호들은 모두 이 말을 듣자 속으로 크게 놀랐으며 모두 가슴이 답답해 왔던 것이 다. 만약 이 금궁에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왔다면 그 십대 고수가 남겼을지도 모를 무공의 책자는 그들이 가지고 갔을 것이며 그들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걸고 금궁에 들어온 목적은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모두들 한참 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우문한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들 여섯 사람의 사인을 규명하지 못함으로써 문제는 난관에 봉착했소. 하지만 우리들이 다른 세 구의 시체를 찾아내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먼저 이곳에 들어왔다는 단정을 내릴 수 없는 것이오." 심목풍은 갑자기 걸음을 옮겨 천인대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천인대사의 시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순간 천인대사의 붉은 가사가 후루루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천인대사가 입고 있던 붉은 가사는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에 삭아서 심목풍의 손이 닿자마자 즉 시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모두들 시선을 모아 그 바퀴 달린 의자를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 의자는 윤택이 나도록 매끄럽 기만 할 뿐 기관을 장치해 둔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천인대사는 옷이 찢어지자 알몸뚱이가 드러났는데 그 몸뚱이는 마치 바짝 마른 북어를 연상시켰다. 수십 년 동안에 피와 살이 말라 버린 것이다. 심목풍은 천인대사의 시체를 다시 의자에 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한 가지 확정은 내릴 수가 있소. 이들은 죽기 전에 결코 손을 써서 싸우지는 않았다는 것 이오!" 121. 암투와 암투의 대결 우문한도는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하 제일 중요한 일은 우리들이 어떤 수단 방법을 써서라도 나머지 세 구의 시체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오."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금궁은 여기서 끝난 것 같소이다. 우리들 여섯 사람 중에는 다만 우문형 한 사람만이 건축학에 통달한 것 같으니 이 석실 속에 혹시 다른 암문이 있는지 잘 좀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 다." "저의 뜻은 먼저 우리들이 이 의자가 있던 석실로 들어가 보자는 것입니다." 심목풍이 맞장구를 쳤다. "현재의 입장으로써는 그렇게 할 수밖에 딴 도리가 없소." 우문한도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심목풍과 소영을 바라봤다. "여기 지금 여섯 개의 바퀴 달린 의자가 있소. 그런데 우리들도 모두가 여섯 사람이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여섯 구의 시체를 치워 버리고 각자 이 바퀴 달린 의자에 올라 앉아 각자의 석실로 들어간다면 짧은 시간 안에 석실 속의 상황을 모두 파악할 수가 있을 것 같소." 금화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참견을 했다. "그 방법은 타당치 않소." 우문한도가 반문했다. "어째서 타당치 않단 말이오?" 금화부인이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지금 그 여섯 개의 석실을 조종하는 기관을 알고 있다면 우리들이 석실 안으로 들 어간 다음 당신이 그 기관을 조종하여 석실의 문을 닫아 버린다면 우리들은 영낙없이 이 여섯 사 람의 뒤를 따라 바퀴 달린 의자 위에 앉아서 죽어야 하는 것이오." 심목풍이 금화부인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옳은 말이오. 우문형께서는 설사 그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일단 경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앙천대소를 했다. "두 분께서 그다지도 내가 모해할까 봐 겁이 난다면 석실을 조사해 보겠다는 욕망은 버리는 게 좋겠소." 심목풍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혹시 그 석실 속엔 무슨 단서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오. 조사해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애 석한 일이오." 우문한도가 잠깐 무엇을 생각하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여러분이 만약 저를 믿는다면 나 혼자서 석실 속으로 들어가 보겠소. 그래서 무슨 단서를 발견한다면 그때 다시 여러분에게 알려 같이 대책을 논의 하도록....." 심목풍은 그 말을 듣자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좋소. 저는 동의하겠소." 심목풍은 소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형씨의 의견은 어떻소?" 소영은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여서 긍정하는 빛을 보였다. 우문한도는 담운청의 시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담형, 소제는 당신을 가장 존경했었소. 화산 일파의 검술은 원래는 아무런 오묘한 점도 없었는 데 담형께서 심혈을 기울여 부패해 가는 그 검술을 절세의 신기로 바꿔 놓았소. 그래서 당신은 십대 고수의 순열에 끼이게 되었소. 오늘 소제는 담형의 의자 위에 앉겠소." 우문한도는 말을 마치자 포권일읍을 하고 담운청의 시체를 내려놓은 다음 자기가 그 의자 위에 올라 앉았다. 우문한도는 의자 위에 올라 앉은 다음 오른발로 의자를 한 번 찼다. 그랬더니 이 바퀴 달린 의 자는 갑자기 뒤를 향해 질주했다. 심목풍과 소영은 그를 주의해 보지 않았으므로 우문한도가 의 자의 어디를 탔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 석실은 의자가 나온 다음 문이 자동적으로 닫혀 있었다. 그러나 의자가 다시 석벽에 다다르 자 자동적으로 석문이 열렸다. 그리고 우문한도의 의자가 석문을 지나 석실 안으로 들어가자 두 개의 석문은 재빨리 닫혔다. 심목풍은 우문한도가 석실 안으로 사라지자 소영에게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우문한도는 위인이 음흉하므로 우리는 그를 십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형씨는 담운청의 의자를 조종하는 기관을 기억하고 있소?" '이 심목풍은 나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하려고 무척 애를 쓰는구나! 하지만 네 맘대로는 되지 않을 걸.....'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목풍은 냉소를 쳤다. "귀하의 수양이 깊은 데는 정말 감탄해 마지 않소. 하지만 우문한도가 무슨 흉계를 꾸며 우리들 을 여기에 가둬 버린다면 귀하도 죽음을 면할 수 없소." 그러나 소영은 마음속으로 매우 주의를 하고 있었으므로 심목풍이 조소를 하건 말건 끝내 한 마 디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청 안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너무도 조용하여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릴 지경이 었다. 자그마치 밥 한 그릇 먹을 시간이 지났는 데도 우문한도는 나오지 않았다. 심목풍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고함을 질렀다. "우문형, 그 석실 속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이제 다 알아냈을 게 아니오?" 심목풍은 연거푸 몇 번 외쳐 보았지만 우문한도는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고 또한 나오지도 않았 다. 심목풍은 참을 수 없어 안절부절을 못했으며, 소영도 역시 의아심이 생겼다. 심목풍은 소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과연 저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군요. 우문한도는 이미 이 대청속의 비밀을 알아냈는 데도 모르 는 척하고 기회를 타서 석실 속으로 들어간 것이오. 흥! 과연 교활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오. 귀하 는 그 석실을 조종하는 기관을 열어도 좋소." 소영은 백리빙을 끌고 대청의 석벽으로 다가갔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손을 휘둘렀다. 연거푸 석벽을 내리치다가 겨우 그 기관을 명중시켰다. 한바탕 이상스런 소리와 함께 동남쪽의 석문이 다시 열렸다. 그 의자가 천천히 굴러 나왔다. 하지만 우문한도는 보이지 않았다. 심목풍은 손을 내밀어 당노부인의 수중에 있는 선장(禪杖)을 뺏어 들었다. 그는 분노에 찬 음성 으로 외쳤다. "우문형, 이래도 나오지 않겠소?" 심목풍이 오른손을 휘두르자 그 선장은 무서운 속도로 석문의 중앙을 향해 날아갔다. 그가 만약 조금 전의 그 한 마디를 하지 않고 지체없이 선장을 던졌다면 그의 공력이나 수법으 로 보아서 반드시 그 선장을 석실 안으로 투입시킬 수 있었을 텐데 잠깐 사이에 시간이 늦어 버 렸다. 선장이 그 석문에 부딪치며 펑 하고 폭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석문은 매우 단단하여 철선장이 부딪쳤는 데도 몇 개의 돌 조각만 떨어졌을 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심목풍은 그래도 일대의 간웅인지라 곧 이성을 회복하여 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우문한도에게 속았소. 목하의 대적으로서는 석실에 들어가서 그를 찾아 보는 수 밖에 없소." 이때 소영도 매우 긴장되어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 것도 생각하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들의 무공이면 아마도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거요. 당신이 아니면 내가 나가는 거요." 소영은 이때 백리빙을 힐끗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펀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심목풍은 더욱 음흉한 위인이므로 내가 만일 석실로 들어가 버린다면 빙아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소영은 곧 입을 열었다. "역시 당신이 가는 것이 좋겠소." 심목풍은 틀림없이 소영이 들어가기를 사양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말한 것인데 뜻밖에도 소영이 거절해 버리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들어가지 않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마음을 크게 먹고 당노부인과 금화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천천히 의자 위에 걸터 앉았다. 그의 말씀은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소영을 상대하라는 것이다. 금화부인은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대장주께선 안심하십시오. 다만 우문한도를 꼭 찾아내기만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심목풍은 음흉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므로 이미 의자 위에 올라 앉았지만 생각이 달라졌 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는 석실 속으로 들어가서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 금궁의 출구는 단 하나뿐이다. 그런데 우문한도는 먹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만약 그 가 석실 속에서 위험한 일에 부딪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열 시진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 다. 그 동안에 나는 대청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식을 하여 체력을 회복해야겠다. 사실 금궁으로 들어온 사람 가운데 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 마지막까지 체력 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심목풍은 의자에 앉은 것을 매우 후회하고는 눈을 감고 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소영은 심목풍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어째서 앉아 있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소?" 심목풍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문한도가 아까 이 바퀴의 기관을 밟아서 움직이게 할때 나는 마침 딴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 문에 그가 어디를 어떻게 밟는지 유심히 보지 못했소." 소영은 천천히 의자 옆으로 걸어가서 그 의자를 몇 번 밟아 보았다. 그러나 의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목풍은 천천히 다시 일어서면서 말했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우문한도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소." 그러나 심목풍은 일어서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자를 조종하는 기관을 건드렸다. 그러자 의자는 갑자기 석실을 향해 질주해 갔다. 심목풍은 몸을 채 바로잡기도 전에 의자가 움 직였으므로 하는 수 없이 털썩 도로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꼼짝 못하고 석실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심목풍이 탄 의자가 석실 속으로 들어 가 버리자 석문은 또 자동적으로 곧 닫혀 버렸다. 금화부인은 닫혀진 석문을 바라보면서 소영에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말 같기도 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 석실 속에는 석문을 여는 기관이 장치되어 있기나 한지?" 심목풍이 옆에 없게 되자 소영은 더 꺼릴 것이 없었다. 그는 곧 금화부인의 말을 받았다. "그 석실 속에는 마땅히 석문을 조종하는 기관이 있을 것이오. 다만 그들이 찾아내지 못했을 따 름이지....." 금화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문한도는 일부러 석실 속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갇힌 것일까요?" 소영이 대답했다. "그것은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오. 하지만 그가 일부러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면 심목풍이 이제 석실로 들어갔으니 단단히 혼이 날 것이오." 금화부인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 이들 두 사람이 모두 밀실에 갇혀서 다시 나오지 못한다면 우리들도 아마 살아서 이 금궁 을 빠져 나가기란 어렵지 않겠어요?" 소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아무리 무공이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금궁 속에서 살 수는 없소. 아예 한 모금의 물도 마 시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금화부인은 침착한 목소리로 소영에게 다시 물었다. "결국 먹을 음식이 없어 못 산다는 거죠? 만약 음식물이 있다면 이 안에서 오래 살 수 있을까 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는 공기가 유통되고 있으므로 먹을 것만 있다면 적어도 사오 년은 무난히 살아 나갈 수 있을 것도 같소." 백리빙은 속으로 금화부인의 거동이 아니꼬왔다. '이 여인은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일까? 자꾸 오빠에게만 말을 걸려고 하니.....' 백리빙은 곧 걸음을 옮겨 금화부인과 소영의 가운데를 막아섰다. 금화부인은 백리빙이 남장을 한 여인인 줄 몰랐으므로 그가 무엇 때문에 막아섰는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금화부인은 곧 당노부인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만일 심대장주가 석실 속에 갇혀 버린다면 당노부인은 앞으로 어떻게 하겠소?" 당노부인이 대답했다. "그를 조금 더 기다려 본 후에 결정하겠소." 금화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노부인께서는 무작정 기다릴 셈이오? 하지만 우리들은 먹을 것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으므 로 금궁을 나갈 때쯤에는 아마도 기진맥진해 버릴지도 몰라요.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는 안 되오." 당노부인은 금화부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심대장주가 석실 속에 갇혀 버린다면 백화산장의 거의 천 명에 가까운 고수 중에 누굴 추 대하여 장주의 자리를 계승해야 할지?" 당노부인의 이와 같은 말에 소영과 금화부인은 다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백화산장을 떠나 온 후 백화산장의 내정을 전연 모른다. 그러나 어째서 금화부인처럼 오 만한 여자가 여태껏 백화산장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리고 당노부인으로 말하면 일파의 장문인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처럼 심목풍에게 복종하는 까닭은?' 소영은 그녀들의 대화에 일부러 귀를 기울였다. 금화부인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부인의 의견으로 누가 심목풍의 뒤를 이어 장주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노부인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주조룡은 큰 인재가 되지 못하므로 절대로 심목풍의 뒤를 이어 장주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오." 당노부인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또한 단굉장은 심목풍의 사랑하는 제자이긴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역시 대임을 맡아 나가기 는 어려울 거요....." 금화부인이 깔깔 웃어댔다. "이도 안 되고 저도 안 된다면 다만 당노부인 당신 혼자만이 대임을 맡을 수 있다는 결론이군 요?" 당노부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보기에는 심대장주가 당신 금화부인을 대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비밀 얘기도 함께 나누며 또한 어디를 가나 동행을 했으니 아마도 장차 장주의 자리를 계승할 사람은 바로 당신일 것 같소." 금화부인은 그 말을 듣자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당노부인은 나를 퍽 의심하는 모양이구려?" 당노부인이 말을 받았다. "백화산장 안에서는 신임할 만한 사람을 한 사람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금화부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사천(四川) 당가(唐家)는 무림 중에서 일파로 손꼽히고 있어 강호의 여러 대문파와 어깨를 나란 히 하고 있는 데도 어찌 백화산장에 남아 있기를 원하시는지?"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내가 알고 싶어 했던 말들이다.' 이윽고 당노부인이 대답했다. "우리 당가 일문의 노소 수십 명의 생사는 모두 심대장주의 장중에 있소. 이 늙은이는 당가 일 문이 나로 말미암아 전멸되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그의 명령대로 움직 이고 있는 것이오." 당노부인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부인께서는 자원해서 심대장주를 위해 일하고 있지요?" 금화부인이 천천히 대답했다. "심목풍은 비록 나의 몸에다 독을 써서 나의 생사를 조종하고 있지만 그것이 나로 하여금 중원 에 머물게 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오." 당노부인이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여기에 머물러 있는 거요?" 금화부인은 이때 큰소리로 한바탕 깔깔 웃었다. "내가 중원에 왜 머물러 있느냐고요? 그것은 다만 나의 동생을 위해 작은 도움이나마 주려는 것 이오." 당노부인이 다시 물었다. "당신의 동생이 중원에 있소?" 금화부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에게는 친형제가 없소. 그러나 의동생이 한 사람 있지요." 당노부인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당신의 의동생은 누구요?" 금화부인도 역시 빙그레 웃었다. "매우 유명한 사람이지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당노부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앞에서 허세를 부릴 필요는 없소. 빨리 말하시오." 금화부인은 정색을 했다. "당신이 심목풍에게 고자질을 하더라도 무섭지 않소. 나의 동생은 바로 소영이오." 당노부인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 소영이라구요? 한때 백화산장에서 셋째 장주가 되었던 소영이란 말이오?" 금화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맞았소." 당노부인이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도 그를 한 번 본 적이 있소. 그는 지금 심목풍과 당당하게 겨룰 수 있는 단 한 사람 의 적수라 할 수 있소." 금화부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요...나의 동생은 협골일 뿐만 아니라 절세의 무공을 지니고 있어 심목풍은 그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죠. 다만 한 가지 나쁜 점은 그는 너무 잘 생겼기 때문에 젊은 여자들이 그를 보기만 하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거죠. 듣기로는 당삼고도 그와 교제가 있다는데 정말인지 요?" 백리빙은 속으로 이렇게 뇌까렸다. '허튼 수작하지 말라. 나의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당노부인이 대답했다. "알고 있는 사이일 뿐이오. 무슨 교제가 있다고는 할 수 없소." 금화부인은 갑자기 웃음을 거두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소영이 갑자기 금궁에 나타나서 심목풍과 싸운다면 당노부인께서는 어떻게 하겠소?" 당노부인은 흥미 없다는 듯 대답했다. "소영이 갑자기 이 속에 나타날 리가 만무하니 이 늙은이는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 하오." 금화부인이 말을 받았다. "소영은 못하는 일이 없소. 그는 이미 우리들 가까이 서 있는지도 모르오." 당노부인은 금화부인이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 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그럴 리는 만무하오." 금화부인은 큰소리로 깔깔 웃어젖혔다. 당노부인은 그녀의 웃음소리에 비위가 상한 듯했다. "당신은 뭣 때문에 웃는 겁니까? 내 말이 어디 잘못된 데라도 있다는 거요?" 금화부인은 순간 소영의 신분을 아직 그녀에게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금화부인은 짐짓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어찌 감히 당노부인을 비웃겠습니까?" 한편 백리빙은 금화부인의 웃음소리가 매우 방탕한 것을 보고 속으로 마땅치 않은 감정을 가졌 다. '이 여인의 웃음소리가 이처럼 방탕한 것을 보면 필시 그녀는 음탕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오 빠를 그녀의 곁에 있게 해서는 안 되겠다.' 백리빙은 이러한 생각을 하며 소영의 손을 끌고 석실의 한 구석으로 갔다. 백리빙의 이와 같은 거동은 금화부인의 눈에 이상하게 비쳤을 뿐만 아니라 소영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소영은 나직이 말했다. "빙아야, 이게 무슨 짓이냐?" 백리빙은 금화부인을 힐끗 한 번 쳐다봤다. "나는 금화부인의 웃음소리가 싫어요." 소영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음, 그랬구나. 금화부인은 확실히 방탕한 데가 있다. 그녀가 예절을 지킬 줄 모르는 것은 묘강에 서 자라났기 때문에 우리 중원의 예절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영은 금화부인이 혹시 이와 같은 눈치를 채고 멋쩍어 할까 봐 무엇을 발견하려는 것처럼 손을 내밀어 벽을 때렸다. 세상 만사는 이따금 예기치도 않았던 반전을 겪는 법이다. 우문한도는 샅샅이 사면의 벽을 뒤지 고도 그 벽에 장치돼 있는 기관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소영이 무심코 때린 일 장에 그 기관이 명 중됐던 것이다. 벽 사이가 움직이는 듯하더니 넓이가 반 자 정도 되는 석문이 열렸다. 그 석문 안에는 한 개의 옥환(玉環)이 걸려 있었다. 이때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이 일제히 그리로 몰려 왔다.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늘어져 있는 옥환은 어디에 소용되는 것일까?' 소영은 손을 내밀어 그것을 당겨 보았다. 갑자기 와르르 하는 소리가 나며 대청 전체가 움직이 는 듯했다. 소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은근히 경계를 했다. 만약 어떤 위험이 발생한다면 내력을 운기하여 위 험에 대비함으로써 세 사람의 부녀자로 하여금 먼저 피신케 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한바탕 우르릉 하는 소리가 지나가자 눈앞의 광경이 달라졌다. 반들반들한 석벽에 갑자기 두 사 람 정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는 통로가 트인 것이다. 소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통로를 바라보고 있 었다. 소영은 통로가 약 일 장 가량 깊이 들어가서 왼쪽으로 구부러진 것을 보고는 즉시 말했다. "제가 들어가서 살펴볼 테니 세 분께서는 대청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들어오셔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백리빙이 곧 입을 열었다. "싫어요. 난 당신과 함께 가겠어요." 금화부인은 백리빙의 목소리를 듣자 어딘지 모르게 여자다운 냄새가 풍긴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남장을 한 여인일 것이다.' 금화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말을 내뱉았다. "너는 금란이 아니냐?" 백리빙은 금란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자기를 보는 그녀의 눈이 불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왜 쳐다보지요?" 소영은 두 사람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서 얼른 백리빙의 손을 잡아 끌고 통로로 들어갔 다. 금화부인의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네가 만일 금란, 은란 중에 한 계집애라면 나에게 이처럼 무례하게 대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 면 너는 분명 악소채일 것이다." 이때 마침 소영과 백리빙은 왼쪽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거기에 있는 양쪽 벽에는 다섯 자 정도의 간격마다 한 개의 보주(寶珠)가 박혀 있었다. 그러므로 불을 밝히지 않아도 대청의 광선이 비쳐 들어와 보주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앞을 바라볼 수가 있 었다. 백리빙이 이때 나직이 속삭였다. "오빠, 악소채란 이름은 퍽 귀에 익은데요.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이름 같아요." 소영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녀는 무림에서 유명한 사람이니 자연히 너도 들을 기회가 있었겠지." 백리빙은 미소를 띠었다. "흥, 금화부인은 나를 악소채로 오인했어요." 백리빙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소영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오빠, 오빠는 악소채를 잘 알지요?" '이 계집애는 마음이 좁다. 지금 그녀에게 납득이 가도록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잠시 그녀를 속 일 수밖에.....' 소영은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중원 무림에서 누가 악소채를 모르겠느냐? 이 오빠도 한 번 만나본 적이 있다." 백리빙은 그제야 직성이 풀렸다. "아아, 그랬었군요. 그럼 그 악소채도 변변치 못한 사람일 거예요." 소영이 반문했다. "어째서?" "악소채는 여자죠?" "그렇지." "그 금화부인은 나의 신분은 모르지만 악소채가 오빠와 동행하리라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나를 악낭자로 오인한 거예요. 흥! 내가 그렇게 멋대로 놀아나는 여잔 줄 알았나 봐요." 소영은 백리빙의 말 속에 악소채를 모욕하는 뜻이 깃들어 있어서 마음이 언짢았지만, 해명을 하 려면 복잡해질 것 같아 응, 하고 말끝을 얼버무려 버렸다. 이때 두 사람은 이미 통로의 끝에 이르렀으므로 소영은 손을 내밀어 눈앞에 가로막힌 석벽을 밀 었다. 곧 한 개의 석문이 열렸다. 소영은 횃불을 켜 들고 사면을 살펴봤다. 한 칸의 서재인 듯한 방이 나타났다. 방안의 한 구석에 유리 등잔이 놓여 있었는데 등잔에는 기름이 좀 남아 있었다. 불을 붙이니 석실 속이 갑자기 밝아졌다. 불빛에 바라보니 방안에는 석탑이 하나 놓여 있고, 석 탑 뒤에 있는 나무의자 위에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매우 인자한 표정을 지닌 노인 한 분이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띤 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때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이 석실로 들어 오고 있었다. 소영은 그 단정히 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이 장방일지도 모른다.' 지금 소영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빨리 장방을 찾아내어 옥소의 무공 초수를 어느 정도 알아내서 석 달 뒤에 있을 단혼곡의 약속에서 악소채를 돕는 일이었다. 이때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당노부인, 이 사람이 소왕 장방일까요?" 당노부인이 대답했다. "장방의 인중에는 검은 사마귀가 하나 있소. 이 사람의 인중에 사마귀가 있다면 그가 바로 장방 일 것이오."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군! 조금 전 당노부인이 대청에서 장방의 이야기를 했는 데도 벌 써 잊어 버리다니.....'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시선을 모아 그 노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검은 사마 귀라곤 없었다. 소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사람도 장방이 아니야." 이때 금화부인은 백리빙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확실히 그가 남장여인임을 알 수 있었지만 그녀 의 진짜 신분은 밝혀낼 도리가 없었다. 금화부인은 시선을 돌려 바라보다가 석탑 아래 한 개의 서랍이 닫혀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것을 보자 머리에 펀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걸음을 옮겨 소영과 백리빙을 지나쳐 노인이 앉아 있는 의자 옆으로 갔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의자를 잡고 그 노인의 시체를 옮겼다. 한편 백리빙은 금화부인을 처음부터 싫어하고 있던 터라 금화부인이 다투어 앞으로 나가는 것을 보자 무슨 속셈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백리빙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냉랭하게 외쳤다. "움직이지 말라!" 백리빙은 소리를 지르면서 일 장을 쳐냈다. 금화부인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너무도 교만하니 그녀의 일 장을 받아 볼까?' 금화부인도 오른손을 내밀어 일 장을 쳐냈다. 두 장력이 맞부딪치는 순간 두 사람은 오른쪽 팔 이 진동됨을 느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의 무공은 상당하구나!' 백리빙은 금화부인이 일 장을 맞고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있는 것을 보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래서 들고 있던 나무상자를 놓고 몸을 앞으로 날렸다. 그녀의 동작이 너무도 빨라 소영은 즉시 그것을 막지 못했다. 금화부인은 속으로 강적을 만났다 고 생각하여 십분 경계를 하면서 적을 대했다. 백리빙은 줄곧 맹공을 가하여 초마다 금화부인의 오혈을 명중시켰다. 그러나 연 십이 초를 공격 했는 데도 금화부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소영은 원래 싸움을 말리려고 생각했으나, 백리빙이 금화부인을 싫어하는 정도가 보통이 아니었 으므로 아예 그녀들이 실컷 분풀이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쌍방이 위기에 처할 때 자신이 나 서서 싸움을 말리리라 생각했다. 소영은 그래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백리빙의 숨가쁜 급공이 끝나자 이번에는 금화부인이 갑자기 반격을 개시했다. 그녀는 장풍과 지풍을 동시에 펼쳐냈다. 초식이 기이할 뿐만 아니라 몹시 맹렬했다. 소영은 금화부인이 공세를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면 몇 초가 더 지난 후에는 백리빙이 금화부인 의 손에 상할 가능성이 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영은 갑자기 옆으로 몸을 날려 오른손을 휘둘 러 일 장을 쳐냈다. 한 줄기의 장풍이 금화부인의 공세를 막아 버렸다. "손을 멈추시오!" 금화부인은 그 소리를 듣자 재빨리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당신은 소동생이지?"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소영은 손을 들어 머리에 쓰고 있던 인피가면을 벗 었다. "네, 제가 바로 소영이오." 당노부인온 그제야 무엇을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소대협, 이 늙은이는 진작 당신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소영은 약간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후배가 알기로는 당노선배와 심목풍은 적대의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세상 일이란 정말 변화무 쌍하군요. 그 동안에 노선배께서 심목풍과 손을 잡다니....." 122. 화신노인(化身老人)의 진면목(眞面目) 당노부인은 소영의 말을 듣더니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뜻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소." 금화부인이 말을 받았다. "당노부인의 문중에 있는 수십 명의 식구들은 모두 심목풍의 수중에 생사가 달려 있소. 그러므 로 만일 당노부인께서 심목풍의 협박에 응하지 않는다면 사천 당씨 가문은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 져야 되는 거요." 소영이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심목풍의 수단이 매우 악랄하니 당노선배님을 탓할 수 없지요." "비록 우리 당가의 식구들이 심목풍의 수중에 생사가 매어 있지만 노신은 오래도록 심목풍의 손 아귀에 쥐어 지낼 수는 없소....." 당노부인은 무엇인가 말을 더 이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백리빙을 바라보고 있던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동생, 이 낭자는 어떤 인물이오?" 소영은 백리빙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노부인과 금화부인은 모두가 적이 아니니 빙아는 얼굴의 검정을 씻어 본모습을 이 분들에게 보여 주지." 소영의 말에 백리빙은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이 금궁 안에는 재(災)가 없으므로 만일 얼굴의 검정을 지워 버리면 다시 변장할 수가 없어요." 금화부인이 말했다. "동생, 이 낭자는 우리들 앞에서 본래의 얼굴을 나타내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 구태여 강요할 필 요는 없소. 단지 낭자의 신분이나 설명해 주구려." 그러자 백리빙이 외쳤다. "안 돼요. 가르쳐 주지 말아요." 그러자 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백리빙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총애를 받으며 자라 이토록 버릇이 없구나. 만일 지금 빙아의 성 격을 바로잡지 않으면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소영은 부드러운 어조로 타이르듯 말했다. "빙아, 금화부인은 이 오빠의 생명을 여러 번 구해 준 은인이다. 만일 금화부인의 도움이 없었다 면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금화부인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 동생의 말은 너무 겸손하군요. 이 귀가 간지러워 들을 수가 있어야지....." 백리빙은 소영이 타이르듯 하는 말에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소영은 백리빙의 태도가 공손해지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과 누님에게 제 동생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낭자는 바로 북천존자의 따님 백리빙입니 다." "오! 알고 보니 이 낭자가 바로 북해빙궁의 공주로군." 금화부인의 말이었다. 그녀는 비꼬는 듯한 미소를 백리빙에게 던지고 있었다. 백리빙은 금화부인이 소영의 생명을 몇 번이나 구해 주었다는 말에 약간의 호감을 느끼고 있었 으나 비꼬는 듯한 말을 듣자 다시 성질이 치솟았다. "그래요. 제가 북해빙궁의 공주예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백리빙의 티없이 맑은 눈동자에 적의의 빛이 감돌았다. 금화부인은 싸늘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소영에게 얼굴을 돌렸다. "동생, 이 누이가 탄복하지 않을 수 없군요." 금화부인의 다음 말이 분명 듣기 거북한 말일 것이라고 생각한 소영은 얼른 그녀의 말 허리를 끊으며 화제를 다른 각도로 이끌었다. "심목풍의 앞에서 나는 두 분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소. 만일 그것이 두 분에게 불쾌했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사죄하겠소." 소영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두 손을 모아 쥐며 허리를 굽혔다. 금화부인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동생이 공인으로 변장해서 경계가 삼엄한 골짜기로 침투했고, 이곳 금궁 속으로 들어왔으니 그 지혜와 호기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군요. 무림의 영웅들이 이구동성으로 심목풍을 대적할 사람은 오직 소영뿐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군." 당노부인이 말을 받았다. "심목풍은 하늘도 겁내지 않고 어떤 무림 고수라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오직 소대협에게 만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오." 소영은 두 여인의 칭찬에 거북해져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때 금화부인이 갑자기 소영을 팔꿈치로 건드리며 말했다. "동생, 저기 석상(石床) 밑에 서랍이 열려 있는데, 어떤 물건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 어서 열어 봐요." 소영은 금화부인이 가리키는 서랍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누님이 발견한 것이니 서랍 속의 물건은 마땅히 누님의 것이오. 누님이 보시오." "그건 다르오. 심목풍은 나를 눈의 가시처럼 여기고 있지만 여전히 생사권을 쥐고 있소. 그 속에 금궁의 십대 고인이 함께 남긴 비록이 있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무용지물이오."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하여튼 그 심목풍이란 놈은...내가 살아 있는 한 기필코 그를 굴복시켜 무림의 여러 사람을 묶 은 쇠사슬을 풀게끔 하겠소." 백리빙은 금화부인의 언행이 매우 교만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녀가 소영에게 만은 지극히 공손하 게 대하는 것을 보고 조금씩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소영이 서랍을 열기를 주저하자 당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소대협, 손을 쓰려면 어서 해요. 심목풍과 우문한도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소영은 마지 못해 석상 앞으로 갔다. 열려진 채로 있는 서랍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본 소영은 가 벼운 실망을 느꼈다. 그곳에는 종이쪽지 한 장밖에 없었다. 소영은 그 종이쪽지에 씌어진 글을 읽어 보았다. "금궁의 물건은 이미 내가 가져가오. 먼 길을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을 텐데 미안하기 짝이 없 구려." 소영은 도깨비에게 홀린 듯 멍한 기분이었다. 그의 뒤로 다가선 금화부인이 쪽지를 들여다 보더 니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없군." 소영은 종이쪽지를 집어 들고 안팎을 유심히 살펴본 후 그것을 서랍 속에 도로 넣으며 물었다. "무슨 말이오?" "우문한도와 심목풍의 말을 빌리자면 이 금궁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열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모 두 여섯 사람의 시체밖엔 발견하지 못했잖소?" 당노부인이 다가와 종이쪽지를 읽어 보더니 금화부인에게 말했다. "노신의 생각으로는 금화부인의 말대로 이 종이쪽지는 십대 기인 중의 한 사람이 일부러 남긴 것 같소." 소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소. 이 종이에 씌어진 글씨는 절대로 몇 십 년 전에 쓴 것이 아니오. 글씨가 이토록 생생하고 종이도 변색되지 않았잖소?" 금화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니 동생의 말이 맞소. 그렇다면 우리보다 먼저 누군가가 이 밀실에 들어왔던 모양이 군." "확실하오. 누가 왔었소." 소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종이쪽지를 다시 살펴보며 말했다. "내가 보는 바로는 이 쪽지가 서랍 속에 넣어진 것은 삼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소." 백리빙이 끼어 들었다. "오빠의 말은 누군가가 금궁을 떠난 지 불과 삼 개월밖에 안 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렇지." 소영은 세 사람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림 인물이라면 십대 귀인이 금궁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소. 금궁을 찾기 위해 정열과 청춘을 바친 사람도 적지 않았소. 수십 년 동안 혈안이 되어 금궁을 찾으려고 애쓴 사람 들도 있소. 금궁을 찾는 사람들을 모두 합치면 수백 명이 될 것이오." 소영은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금궁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소. 하지만 그 중에는 무공과 지모가 출중한 사람이 있어서 아무도 모르게 금궁을 찾아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오." 소영의 말을 듣고 있던 당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설혹 어떤 사람이 무공이 고강하고 지모가 뛰어났다 하더라도 건축학을 모른다면 금궁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잖겠소?" "누구이든 한 가지 일은 알게 됩니다. 금궁을 찾아 이십 년씩 연구하고 노력한 사람이라면 건축 학에도 자연 조예가 깊어질 수 있지요." 소영의 견해가 타당했기 때문에 당노부인이나 금화부인이 반론을 펴지 못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심목풍과 우문한도에게 이런 실망을 맛보여 줘야 할 텐데...심목풍이 금궁을 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애를 썼는지...그 끈기와 인력(人力), 재력(財力), 수단을 총동원해서 심혈을 기울였는데 끝내 는 남에게 선수를 뺏기다니....." 당노부인이 말했다. "만일 소대협의 추상적인 논리가 사실과 일치한다면, 이 금궁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우문한도보 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오. 금궁에 들어와 중요한 물건을 내가면서도 조금도 흔적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이때였다. 갑자기 윙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들은 소영은 재빨리 인피가면을 썼다. "심목풍과 우문한도가 찾아온 모양이군." 금화부인이 낮은 음성으로 말하자 소영은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 모아 경계심을 높이며 입을 열 었다. "만일 심목풍이 이곳에 나타나거든 두 분께서는 여전히 나를 모르는 척해 주시오. 나는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본모습을 심목풍에게 드러낼 수 없으니 협조해 주시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은 서로 마주 바라보며 입은 열지 않았다. 그녀들이 무엇인가 꺼리고 있는 것을 눈치챈 소영도 더 말하지 않았다. 윙윙거리는 음향은 잠시 이어지더니 갑자기 뚝 그쳤다. 그러자 석실의 바닥 한쪽이 서서히 열리 며 하나의 구멍이 생겼다. 이것을 제일 먼저 본 백리빙이 주의를 주었다. "오빠, 조심하세요. 이 석실에는 이상한 장치가 있는 모양이에요." 백리빙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구멍 속에서 한 사람의 머리가 불쑥 솟아 올랐다. 나타난 사람은 우문한도였다. '이제 보니 여러 갈래의 길이 한 군데로 이어져 있었구나. 그 돌문의 길도 역시 이곳으로 통했 구나.'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문한도의 뒤를 바짝 따라 심목풍이 나타났다. 이들 두 사람은 소영의 일행이 먼저 이곳에 나타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어 리둥절한 표정으로 네 사람을 둘러 보았다. 소영은 우문한도와 심목풍을 바라보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문한도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곳에 오셨소?" 금화부인이 대답했다. "한 걸음씩 걸어 왔지요." 우문한도는 금화부인이 가리키는 통로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 통로는 대청으로 통하고 있소?" 소영은 약간 고개를 끄덕일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우문한도는 소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당노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느 분이 이 실내로 들어오는 문을 발견했소?" "내가 발견했소. 벽을 더듬으며 오다가 우연히 발견했소." 소영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쪽지를 우문한도에게 내주며 말했다. "먼저 이것을 보고 얘기하시오." 우문한도는 종이를 받아 들고 읽어 보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 종이는 어디서 얻었소?" "서랍 속에서 발견했소." 종이쪽지를 넘겨 보던 심목풍이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우문형, 만일 이 종이에 적힌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들이 심혈을 기울이며 금궁에 들어온 것은 모두 허사가 되었구려." 심목풍은 말을 끊고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을 훑어보더니 물었다. "두 분께서는 이 사람의 뒤를 바짝 따라 들어오셨소?" "그래요. 우린 바짝 붙어 서서 들어왔어요." 노부인의 대답에 우문한도가 다시 물었다. "두 분은 그가 서랍 속에서 종이쪽지를 꺼내는 것을 직접 보셨소?" "내가 먼저 서랍을 발견했어요. 채 닫혀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열어 보려고 했는데 이분이 한 걸음 먼저 서랍을 열었어요." 금화부인의 대답이었다. 우문한도는 종이쪽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글씨로 봐서는 별로 오래 되지 않았소. 만일 이 종이가 위조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금궁 에 들어오기 약 삼 개월 전에 이미 누구인가 금궁에 들어와 물건을 가져갔다는 결론이 되오." 심목풍이 소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몇 사람 중에 심기가 매우 깊은 사람이 있어, 수 개월 전에 이리 이 쪽지를 써서 지녔다 가 이곳에 들어온 후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지요." 소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이 종이쪽지를 주운 장본인인데 여러분이 믿든 못믿든 상관치 않겠소.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측량하려고 들지 마시오." 심목풍은 불쾌한 표정으로 소영을 노려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나는 믿겠소. 이 종이쪽지는 위조된 것이 아니며 또한 누군가 일부러 수작을 꾸민 것이 아니라 는 것을....." 우문한도가 종이쪽지를 소영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나 역시 이 종이에 씌여진 글씨가 사실일 것이라고 열에서 여덟아홉은 믿고 있소." 심목풍이 의아스러워하며 물었다. "우문형은 아직도 믿지 못하는 점이 있군요." "그렇소. 솔직히 말해서 우린 아직 한 가지 의문과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소. 우리가 그 의문을 풀 수 없다면 바로 금궁에서 물러나지요. 그리고 일말의 희망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소." "우문형의 말은 이해되지 않는군요. 무슨 의문이며 어떤 희망이 있소? 이런 상황에서 말을 빙 돌리지 말고 느낀대로 얘기해 주시오." 심목풍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보채듯 했다. "내가 말한 의문이란 것은 이 석실 안의 시체가 아직 덜 발견되었소. 강호의 전설에 따르면 아 직도 두 구의 시체가 있어야 할 텐데...만일 우리가 나머지 두 구의 시체만 발견한다면, 열 사람의 기인이 금궁에 모였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지요." "과연 그것은 의문이라고 할 수 있구려. 그러나 희망이 있다는 것은 또 무엇이오?" 우문한도가 멋쩍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금궁의 물건을 먼저 들어온 사람이 가져갔다고 하더라도 그가 모조리 가져가지는 못했을 것이 라는 기대지요." 심목풍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이곳에 아직 물건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이오?" "그렇소. 그것이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일말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소."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우리 두 사람이 곤경에 빠졌을 때 우문형의 기지로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소. 그러니 나 는 모든 일을 우문형에게 맡길 뿐이오. 우문형이 선두에 서서 두 구의 시체를 찾아 보시오." 심목풍과 우문한도가 이곳으로 들어온 경로는 이러하였다. 심목풍이 금궁을 돌아 다니고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등을 보이며 앞을 걷고 있었다. 통로가 하 나뿐이기에 심목풍은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이 통로는 갈수록 좁아지며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고 있었다. 몸집이 비대한 심목풍은 어 쩌다가 벽을 건드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앞뒤가 꽉 막히고 말았다. 심목풍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것은 그의 몇 걸음 앞을 걷던 우문한도였다. 우문한도는 심목풍의 앞뒤를 막은 철사를 칼로 끊고 그를 구했다. "고맙소. 우문형의 이 은혜를 잊지 않겠소." 심목풍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는 우문한도를 적으로 생각했으나 이 일로 해서 적대감정이 많이 감소되었다. "은혜고 뭐고 앞으로 더욱 조심하시오." 우문한도는 앞장 서서 좁은 통로를 걸었다. 심목풍은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두 사람은 여러 번의 위험을 겪으며 통로를 헤매었다. 위기에 처했을 적마다 우문한도가 용케 뚫고 나가곤 했다. 두 사람이 한동안 헤매어 결국 당도한 곳이 이 석실이었다. 비밀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이미 소 영 등이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우문한도는 눈을 지그시 감고 무엇인가 한참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만일 내 판단이 옳다면, 우리는 다른 두 구의 시체를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오." "그건 왜 그렇소?" 심목풍의 물음에 우문한도는 석실 안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금궁은 여기서 끝난 것이오." "그건 무슨 소리요? 필경 어떤 소견이 있으시겠지요?" "내가 자세히 사방을 살펴보니 다시 뻗어 나가기가 힘들 것 같소." "어째서?" "이 금궁의 사방에는 무서운 암류(暗流)가 깔려 있소. 포일천이 제아무리 하늘을 나는 수단이 있 다 하더라도 역시 그 암류의 충격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오." "우문형의 말은 일리가 있소.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믿겠소?" 당노부인이 말했다. "이 속에서 우리가 두 구의 시체만 찾아낼 수 있다면 우문선생의 말은 자연히 증명되지요." 우문한도가 말했다. "만일 십대 기인이 금궁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머지 두 구의 시체는 이 석실 속에 있을 것이오." 심목풍이 물었다. "우문형의 말은 이 석실에 딸린 다른 방이 있다는 말이오?"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포일천이 이 금궁을 얼마나 절묘하게 건축했으며, 밀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만 그것은 모두 사방 십 장 안에 위치해 있을 겁니다." 우문한도는 벽으로 다가서서 한동안 귀를 기울이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석실은 절대로 깊게 파고 들지 못하오. 여기서 일 장 정도만 파고 들어가면 땅 속은 소용돌 이오." "그게 사실일까요?" 심목풍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묻자 우문한도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심장주께서 믿지 못하겠거든 석벽에 귀를 대고 들어보시오." "그는 들어도 알지 못할 것 같소." 심목풍은 이렇게 말하면서 석벽으로 다가가 귀를 바짝 붙였다. 과연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 은 땅 속에서 거센 소용돌이가 있는 듯 웅웅거리는 소리였다. "심장주, 들으셨소?" "들었소." 심목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우문한도가 그것 보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내 말을 믿겠소?" 심목풍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영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금궁에 들어온 사람이 모두 여덟 명이었는지도 모르오. 지금 우선 할 일은 먼저 이 사 람들의 신분을 밝혀내는 것이오. 그래야 나머지 사람들의 신분도 밝힐 수가 있을 것이오." 이 말투는 흔히 노인들이 강호에서 쓰는 말투였다. 우문한도와 심목풍은 소영의 신분에 더욱 의 심을 품게 되었다. 심목풍이 소영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먼저 이 석실 안으로 들어왔는데...여기에 있는 시체들을 잘 살펴보았소?" "그야 물론 살펴보았지요." 소영은 눈길을 시체에게로 던지며 '금궁에 들어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는 대부분이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인데...내가 이 사람들 의 신분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소왕(簫王) 장방은 아닌 것 같소."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그렇소. 장방은 아니오." 심목풍은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우문형의 어조를 들어보니 우문형은 이 사람의 신분을 알고 계신 모양인데...누구요?"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화신노인(化身老人) 수천의(帥天儀)인 것 같소." "화신노인?" "그렇소. 그가 얼굴 모습을 수시로 바꾸는 기술은 놀랍도록 뛰어났다고 하오. 강호에서는 그의 본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함께 금궁에 들어온 십대 기인들도....." 이 말을 듣고 소영은 생각했다. '흐흥, 만일 금궁의 십대 기인이 화신노인의 진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면 우문한도는 어떻게 화신노인인 줄을 알 수 있지?' 우문한도는 말을 이었다. "듣기로는 화신노인 수천의는 어떤 사람과 있든지 항상 세 종류의 얼굴과 신분으로 대했소. 어 느 것이 그의 진짜 얼굴인지 알 수가 없지요. 심지어는 그와 수십 년씩 사귄 친구들도 진짜 얼굴 을 가려낼 수 없었다 하더군요." 심목풍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만일 이 사람이 수천의라면 지금은 그의 진짜 얼굴이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나도 확실히 모르겠소." 금화부인이 물었다. "얼굴을 분별할 수 없다면서 어떻게 수천의라는 것은 알지요?"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오. 소왕 장방과 다른 세 사람이 아닌 이상 수천의라고 보는 것이 좋겠 지요." 소영은 다시 생각했다. '강호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진짜 얼굴을 모른다면 화신노인의 재주야말로 세상에 짝이 없겠구 나. 이 사람은 무공이 매우 높고 신비스러운 일생을 보냈지만 결국 금궁에 갇혀 죽게 되었으니... 인간이란 아무리 뛰어난 재주와 지혜가 있어도 자기의 앞일은 예측할 수가 없다는 말이 사실이구 나.' 심목풍이 우문한도에게 말했다. "우문형의 고견과 안목에는 정말 탄복을 금치 못하겠소. 그리고 보니 이 사람은 그 수천의가 분 명한 것 같군요." 우문한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사람의 얼굴에는 이토록 자비로운 웃음을 띠고 있으니...수천의 이외에는 죽음 직전에 이토 록 평화스러운 웃음을 머금을 수 없었을 것이오." 당노부인이 말했다. "노신은 오래 전부터 화신노인의 이름을 듣고 앙모해 왔소. 그런데 그의 진짜 얼굴이 어떤 것인 지?" "그와 수십 년 동안 사귄 친구들도 진짜 얼굴을 몰랐는데 오늘 우리가 어떻게 가려낼 수 있겠 소?" "허지만 그는 이미 죽었어요. 죽은 사람이 다시 변신할 수는 없을 테니 우리는 그의 진짜 얼굴 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금화부인이 말참견을 하자 우문한도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금화부인의 말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면, 화신노인의 얼굴을 벗겨 보자는 뜻 같군요?" "같은 말이라도 우문선생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니 거북하군요." 금화부인이 비꼬자 우문한도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건 어쨌든 나는 화신노인의 얼굴에 손을 댈 수 없소. 이 노선배는 죽으면서도 자기의 얼굴을 몰라 보게 했는데...우리가 죽은 시체를 건드려 진짜 얼굴을 가려낸들 무엇하겠소? 그대로 놔 둡 시다." 우문한도는 제법 엄숙한 태도였다. 이 말에 소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얼씨구, 우문한도가 언제부터 이처럼 인정이 두터웠었지?' 금화부인이 차갑게 말했다. "이 몸은 우문선생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어요. 이 화신노인의 진짜 모습을 알아낸 사람이 없었 다니, 죽은 후에도 그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도 저승에서 가슴이 아플거예요. 우리가 지 금 그의 진짜 얼굴을 벗기고 진짜 모습을 드러낼 수만 있다면 이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잖아 요?" 금화부인은 얼굴을 심목풍에게 옮기며 물었다. "대장주님의 생각은 어때요?" "두 분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어 나도 얼른 답변하기 곤란하구려." 심목풍이 대답을 얼버무리자 우문한도가 소영에게 물었다. "당신의 의견은 어떻소?" "그의 진짜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괜찮은 일인 것 같소." 금화부인이 소영의 말끝을 이었다. "저분의 의견도 이런데 우문선생은 그래도 반대하겠소?" "그렇다면 나는 더 고집을 세울 수가 없군요." 우문한도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금화부인이 화신노인의 시체 앞으로 다가서더니 오른손을 쳐들었다. "우선 이 노인이 얼굴에 인피가면을 썼는지 안 썼는지부터 알아 내겠어요." 금화부인의 오른손이 노인의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우문한도가 소리를 질렀다. "잠깐!" 금화부인은 손을 멈추고 우문한도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문선생, 나를 겁나게 하여 생각을 변경시킬 셈인가요? 무슨 대단한 말씀이 있나요?" 우문한도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화신노인은 심기가 매우 발달된 분이오. 자기의 진짜 모습을 밝히지 않으려고 한 데에는 어 떤 이유가 있을 것이오. 또한 죽으면서도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 어떤 심기를 사용했을 것 이오." "우문선생의 말씀은 내가 손을 써서 이 시체를 건드리면 어떤 화를 당할 것이라는 얘기지요." 금화부인은 우문한도의 말이 꺼림칙하게 들린 모양이다.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망설였다. "우문형, 이 화신노인이 독을 잘 사용하오?" 심목풍의 질문에 우문한도가 머리를 저었다. "그가 독을 사용했다고 들은 적은 없소. 설혹 독을 쓴다 하더라도 얼굴에 바를 리야 없겠지 만....." 금화부인이 머리에서 금비녀를 뽑아 들며 말했다. "그가 독을 사용했든 안했든 나는 방심할 수 없어요." 금화부인은 금비녀로 화신노인의 얼굴을 가볍게 찔렀다. 금비녀는 시체의 얼굴에 닿았으나 들어 가지 않았다. 시체의 얼굴은 바위처럼 딱딱했던 것이다. "무슨 살이 이렇게 단단할까?" 금화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우문한도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 어떤 약물을 바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은 지 몇 해가 지났으니 근육이 굳었을 테 지요." "그렇지 않아요. 금비녀에 닿은 감촉이 근육이 아닌 것 같아요." "어디 봅시다." 심목풍이 금화부인의 손에서 금비녀를 받아 들었다. 그는 금비녀로 시체의 얼굴을 두어 번 두드 려 보더니 중얼거렸다. "과연 근육이 아니군." 심목풍은 금비녀를 금화부인에게 돌려 주었다. 시체에 대한 의문은 컸지만 그것을 파괴하다가 어떤 화를 당하거나 남에게 욕을 먹을 것이 두려우 손을 쓰지 않은 것이다. 금화부인은 금비녀를 받아 들더니 내력을 사용하여 시체의 얼굴에 쿡 찔렀다. 그러자 파삭 소리 가 나며 금비녀가 반 치 가량 들어갔다. "여러분, 이것 좀 보세요." 금화부인이 금비녀를 놓으며 외쳤다. 소영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시체의 얼굴로 쏠렸다. 비녀 로 찌른 자리를 중심으로 가느다란 금이 사방으로 그어져 있었다. '음, 화신노인의 얼굴에는 어떤 약이 두껍게 발라져 있었구나. 그렇다면 지금의 이 얼굴은 그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군.' 소영이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심목풍이 놀란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짜 얼굴이 아니오." "좋아요. 내가 가짜 얼굴을 벗기겠어요." 금화부인은 오른손에 내공을 모아 시체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매우 두꺼운 껍질이 조각조 각 떨어졌다. 금화부인은 금비녀로 나머지 껍질들을 벗겨냈다. 드디어 시체의 진짜 얼굴이 나타났다. 비녀 끝에 약간씩 상하긴 했지만 얼굴 윤곽만은 뚜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나타난 얼굴은 약물로 만든 얼굴과는 딴판이었다. 몹시 야위었고 코는 무엇에 잘린 것처럼 형체 만 조금 있을 뿐인 흉칙한 모습이었다. 시체의 진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던 금화부인이 탄식했다. "사람이라면 미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나 갖게 마련이지. 이 사람도 보기 싫은 코 때문에 일부 러 가짜 얼굴을 만들어 사람을 대했군. 그 마음은 알 수 있겠어." 우문한도는 금화부인의 말을 듣더니 갑자기 두 손을 모아 쥐며 시체에다 대고 공손하게 절을 하 더니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의 덕행은 존경할 만합니다." "나는 화신노인이 존경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단 말을 듣지 못했는데...우문형께서는 어떤 덕행이 존경할 만하다는 것이오?" 심목풍의 물음에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화신노인의 화장술이면 준수한 청년으로도 변장할 수 있었소. 그러나 그분은 시종 호호백발의 노인으로 변장하고 강호를 다녀 하나의 추문도 남기지 않았소. 그런데도 존경할 만한 분이 아니 란 말이오?" 이 말을 듣고 소영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화신노인이 만일 청년으로 변장했다면 그의 독특한 변장술로는 누구든 감쪽같이 속겠 지. 청년으로 변장해서 여러 가지 염문을 퍼뜨리고 다닐 수도 있었을 텐데...우문한도의 말은 역시 일리가 있구나.' 소영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가 만일 준수한 청년으로 변장했다면 무림에 커다란 염문을 일으키고 다닐 수도 있었다는 말 씀이에요?" "부인께서는 묘강에서 오셨으니 우리 중원의 일을 모르오." 우문한도는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금화부인에게 한 가지 얘기해 드린다면 우리 중원의 인물은 묘강의 인물과 판이하게 다르 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오." "좋아요. 얘기해 보세요" 우문한도는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일백 년 전에 우리 중원에 한 분의 검수(劍手)가 출현했소. 그 사람의 무공은 그다지 고강하지 못했소. 그런데도 그는 무림을 발칵 뒤집어 놓고 말았소. 그 분쟁의 기원은 모두 여인의 몸에서 발생했던 것이오." 시선을 심목풍에게 돌리며 말했다. "심형은 그 일에 대해서 알고 계시오?" "그렇소. 나 역시 들은 적이 있었소." "그 당시에 그는 소녀들이 선망하는 대상이었소." 금화부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백 년 전의 과거 일을 들출 필요가 어디 있어요? 그 일을 들춰 지금 무림에 어떤 보탬이 되나요?" "흥, 부인께서는 묘강에서 오셨으므로 지식이 얕을 것이라고 생각했더니 역시 짐작이 틀리지 않 구려." 금화부인이 코웃음을 치며 우문한도에게 말했다. "나는 비록 묘강의 변두리에서 자랐지만 중원의 지식이 실린 책은 많이 읽었소. 너무 깔보지 마 시오." 우문한도는 천장을 올려다 보며 껄껄거리고 웃었다. "하하하, 부인, 만일 책을 읽은 것으로 논한다면 나 우문한도보다 많이 읽은 사람은 드물 것이외 다." 우문한도는 금화부인이 대꾸하려는 것을 손을 흔들어 막으며 말을 이었다. "부인은 나의 말을 들어보시오. 그 일은 이미 과거지사가 되었지만, 그의 일대기(一代記)를 책으 로 저술한 사람이 있었소. 내가 알기로는 그 책은 민가에 널리 퍼져 있소. 규방의 처녀들이 그 책 을 간수하며 예물로 주고받기도 한다더군요." 우문한도는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 책에는 일일이 주석과 그림이 있소. 비록 검수는 죽었지만 그의 혼은 모든 규방처녀들의 마 음속에 살아있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시선을 화신노인의 시체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만일 화신노인이 청년으로 가장했다면 그의 분장과 무공으로써 천하를 진동시켰을 것이오. 검 수보다도 더 유명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는 일이오." 우문한도는 자신이 한 말의 효과를 기다리려는 듯이 잠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그의 말 에 그럴 듯한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심목풍 등은 마땅찮은 얼굴을 했다. "우문형이 읽은 책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우리는 지금 시간이 많지 않으니 직접 관계되지 않는 이야기는 더 꺼내지 않는 것이 좋겠소." 이어서 당노부인이 말했다.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나머지 두 구의 시체를 찾는 일이오. 무림의 전설로 미루어 추측컨데 그 두 구의 시체는 소왕 장방과 무당파의 명숙(名宿)일 것이오." 심목풍이 다시 말을 받았다. "그 두 구의 시체만 찾아내면 금궁에 들어온 우리의 목적은 일단 달성했다고 보아도 무방하오. 따라서 금궁을 물러서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다음 순서가 되겠지요." 우문한도가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심대장주께서 금궁에 들어온 목적은 십대 기인이 남긴 (秘錄手冊)을 찾기 위해서인데...만일 몇 구의 시체만 보고 금궁을 물러난다면 실망이 너무 크잖소?" 심목풍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하하, 우문형이 그렇게 말한다면 나로서는 뭐라고 답변을 해야 되지요? 하지만 나에게도 생각 이 있소." 심목풍의 말에 우문한도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을 했다. "심장주께선 어떤 생각이 있다는 것인지 들려 주시겠소?" "나는 일찍 금궁을 떠나고 싶소. 그 이유는....." 심목풍은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시선을 보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꺼리는지 눈동 자만 굴리면서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심장주, 왜 말씀을 중단하시오? 궁금하니 어서 들어 봅시다." 우문한도가 재촉하자 심목풍은 여러 사람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123. 한 권의 비록 "만일 종이쪽지에 적힌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들보다 먼저 들어와 십대 기인의 유물을 가져간 사 람이 있을 게 아니겠소? 그 사람은 이곳을 떠난 지 몇 개월 안 됐으니 짧은 시간에 무공의 절기 를 모두 터득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심목풍의 말에 우문한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심대장주의 말뜻을 알겠소. 심장주께선 일찍 금궁을 빠져나가 비급을 가져간 사람을 찾겠다는 것이지요?" "그렇소." "과연 심장주다운 생각이군요. 이 우문한도는 심장주에 비해 머리를 쓰는 것이 아주 둔하오." 심목풍은 껄껄 웃었다. "내가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그 놈을 찾을 자신이 있소. 늦으면 일 년, 빠르면 반 년 안에 내가 기어이 그 놈을 찾아내고야 말겠소. 이 방면에 있어서는 아마 나를 따를 자가 없을 것이오." "심장주의 수족 같은 심복들이 천하에 깔려 있으니 가능한 일이외다. 그러나 이 우문한도가 한 가지 꺼리는 것이 있소." "무엇이오?" "소영에 관한 일이오." 우문한도의 말이 떨어지자,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소영에게로 쏠렸다. 그러 나 그것은 잠깐 사이의 일이었고, 그녀들은 재빨리 우문한도와 심목풍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영이란 말이 나오자 심목풍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영이 또 무엇을 어쨌단 말이오? "심장주는 소영을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고 있잖소?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를 일찍 죽이는 것이 좋을 텐데 왜 그대로 놔 두시오?" 심목풍은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며 씹어 뱉듯 말했다. "언젠가는 소영이란 놈이 내 손에 죽을 것이오." 이 말을 듣고 백리빙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터무니없는 소리! 주제에 큰소리만 치다니.....' 우문한도는 소영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강호에서는 지금 소영의 무공이 하루에 천리의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떠들며 심지어는 심장주 와 당당히 맞설 수 있다고도 하더군요." 심목풍은 코웃음을 쳤다. "강호의 소문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오." "소영의 무공이 심장주와 맞먹든 뒤지든, 무림에서는 그를 구성(救星)으로 받들고 있소." 심목풍은 기분이 몹시 상하는지 콧방귀를 뀌며 우문한도의 말을 귓전으로 흘렸다. 우문한도는 자기가 실언했음을 깨닫고 얼른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강호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한결같이 소영을 치켜 세워 심장주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오." "....."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심장주가 지금 서둘러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오. 심장주는 금 궁의 유물을 가져간 놈을 뒤쫓을 것이 아니라 우선 소영을 죽여야 되오." 이 말은 소영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던져 주었다. '저 놈은 과연 심목풍과 어깨를 겨룰 만한 흉악한 놈이구나. 그런데 놈은 이미 내 정체를 알아 챈 것이 아닐까?' 소영은 우문한도를 당장 때려 눕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역시 태연을 가장하고 가만히 서 있 었다.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금궁을 떠난 후의 일이오. 우선 급한 것은 나머지 두 구의 시체를 찾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요란한 웃음소리가 천장을 무너뜨릴 듯 울려 퍼졌다. 석실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미친 듯 웃어대는 우문한도의 태도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심목풍 역시 안색이 변하며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우문형, 왜 웃으시오?" 우문한도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아무 소리도 않고 돌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당노부인이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멈추시오! 만일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면 나는 백보단혼사(白步斷魂砂)의 맛을 보여 주겠소." 말과 동시에 그녀는 재빨리 녹피장갑(鹿皮掌匣)을 꺼내 손에 끼면서 한 줌의 독모래를 움켜쥐었 다. 한 줌의 독모래를 뿌리게 되면 우문한도는 물론 석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화를 당하게 될 위 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암암리에 운기를 하며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심목풍이 손을 저어 당노부인을 말리며 우문한도에게 말했다. "우문형, 나는 우문형을 죽일 생각은 없소. 더우기 우문형은 나의 생명을 구해 주기도 했으니...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노여움을 살 만한 행동을 해서 화를 자초한다면 이 심목풍도 어쩔 수 없 소." 우문한도는 껄껄 웃으며 심목풍을 돌아다 보았다. "심장주, 당신은 소영을 만날 생각이 없소?" 이 말은 모든 사람을 찔끔하게 만들었다. 심목풍은 주위를 한 번 훑어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소영이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이오?" "흐흐, 만약 내 판단이 맞는다면....." 우문한도는 일행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심장주와 같이 온 당노부인과 금화부인은 모두 심장주를 배신한 것이 틀림없소." 순간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의 안색이 돌변했다. 특히 소영의 놀라움은 컸다. '우문한도는 과연 무서운 놈이구나. 이미 나를 알아봤구나.' 소영은 진기를 모아 경계심을 높이며 심목풍을 주시했다. 심목풍은 우문한도의 말을 듣고 놀라는 표정이더니 소영을 쏘아보며 물었다. "당신이 소영이오?" 일이 이렇게 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소영은 재빨리 인피가면을 벗어 버리고 대 답했다. "그렇소. 내가 소영이오." 소영의 얼굴이 나타나자 심목풍은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소영을 노려 보더니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진작 알아냈어야 했는데....." "지금도 늦지 않았소." 소영은 차갑게 말하며 가슴을 폈다. 이때 백리빙도 얼굴의 검정을 지워 버리고 황홀하리만큼 예 쁜 본래의 얼굴을 드러냈다. 우문한도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심장주! 만일 당신이 소영을 죽일 생각이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좋은 기회요." 심목풍은 침착을 되찾으며 차갑게 물었다. "우문형은 언제 소영의 정체를 발견했소?" "방금....." 우문한도는 당노부인과 금화부인을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 두 부인은 벌써부터 소영의 신분을 알았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녀들이 왜 심장주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오." "우문형은 과연 고명하오." 심목풍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더니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당장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는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금화부인은 일이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몸에 지니고 있던 나무상자를 몰래 더듬어 독사를 꺼내 쥐었다. 그리고는 날카롭게 우문한도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 당신은 어떻게 우리들이 소영의 신분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소?" 이 질문은 매우 예리했으나 오히려 심목풍에게 어떤 확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확증을 잡기 전에 함부로 손을 쓰지 말자.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 수습하지 못할 사태가 벌어 져 곤란을 당할지도 모르니....' 우문한도는 능청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금화부인에게 대답했다. "우선 내가 소영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부터 말하겠소. 그는 공인으로 변장했으나 지나치게 무예 가 고강했소. 얼굴엔 인피가면을 썼고 목소리도 일부러 다르게 내고 있었지만...그런데 아까 내가 소영의 이름을 들먹일 적에 두 분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소. 그래서 나는 소영임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두 분이 그의 정체를 알면서도 일부러 숨겼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오." 당노부인은 이미 우문한도에 대한 분노를 누를 수 없어 막 손을 쓰려고 했다. 이때 갑자기 금화 부인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금화부인은 한바탕 웃어대더니 정색을 하며 우문한도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우문한도! 당신은 지나치게 총명하군요. 소영의 신분을 제일 먼저 안 것은 바로 당신이면서 일 부러 우리에게 숨겼어요. 더우기 소영과 힘을 합해 우리에게 대항했어요." 당노부인은 우문한도에게 손을 쓰려다가 금화부인의 임기응변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요. 우문한도는 정말 음흉한 인물이오." 우문한도는 금화부인이 오히려 자기를 몰아 세우는 임기응변에 놀라며 속으로 몹시 당황했다. '잘못하다 내가 당하겠다.' 우문한도는 다급함을 느끼자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터무니없는 말은 마시오." "흥, 그렇게 당황해서 발뺌을 하려 들지는 마시지요.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할 테니 들어봐요." "심장주께선 금화부인의 터무니없는 말을 믿지 마시오." 우문한도가 금화부인의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금궁 안에서는 누구도 도망갈 수 없소. 그러니 금화부인의 경과 설명을 들어도 괜찮을 거요. 만 일 우리들 중에 죽일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약간 늦추면 되니까....." 그는 금화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얘기해 보시오." 금화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문한도를 쏘아보며 말했다. "우문한도! 당신이 좁은 석실 안에서 소영의 신분을 탄로시킨 것은 음흉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 에요." "음흉한 계획이라니....." "흥,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 봐요. 당신은 소영의 정체를 탄로시키기 전에 횡설수설 여러 말을 늘어 놓았어요. 그것은 심장주와 소영이 싸우기를 바란 것이에요. 우리 여섯 명을 세 패로 구분할 때 실력이 가장 달리는 것은 바로 당신이에요." 금화부인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일사천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가 서로 싸우길 바란 거예요. 싸워서 기진맥진하거나 중상을 입게 된다면 그때는 당신이 우리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을 테니, 즉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속셈에서 소영의 정체를 밝혀낸 것이 아니고 뭐예요?" 금화부인의 말은 이치에 딱딱 들어 맞아 우문한도가 얼른 반박할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그 는 화를 못참아 눈을 부라리며 기껏 "묘강에서 온 여인이 이토록 웅변술이 뛰어날 줄은 미처 몰랐 군." 하고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금화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흥, 우문선생이야말로 언제나 웅변술로 한 몫 보는 분이잖아요? 하지만 진짜 시비를 가르는 데 에는 말문이 막힐 거예요." 우문한도는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곧 대들 듯한 기세를 보이더니 심목풍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심장주께선 금화부인의 말을 믿지 마시오. 그녀의 말을 믿었다가는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오." 금화부인이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우문선생도 죽음을 꽤 두려워하는군요. 구차한 목숨을 유지하고 싶어 대장부의 기개마저 저 버리고 전전긍긍하는 꼴이 우습군요." 심목풍은 우문한도의 얼굴을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금화부인에게로 시선을 못박았다. 심목풍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얼른 알아볼 수 없는 표정의 변화가 자주 일 어났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소영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진기를 모아 심목풍을 경계하였다. '만일 이곳에서 싸움이 붙는다면 심목풍에게 대적할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석실 은 좁기 때문에 내가 불리하다. 이런 곳에서는 내공으로 겨루는 수밖에 없을 텐데...내공으로 말하 면 심목풍이 나보다는 강할 것이다.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심목풍은 우문한도와 금화부인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금화부인의 말도 일리가 있소. 그러나 우문형 역시 무조건 말한 것이 아니고 증거를 제시했으 니...나는 누구의 말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는구려." 우문한도가 말했다. "심장주, 일은 매우 간단하오. 나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소." 심목풍의 눈이 번쩍 빛났다. "어떤 방법인지 말해 보시오." "심장주께서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에게 명령을 내리고 지켜보기만 하면 알 수 있지요." "명령을 내리다니요?" "두 부인으로 하여금 소영을 공격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오. 두 부인이 생사를 돌보지 않고 전력 을 기울인다면 내 말이 거짓이라고 할 수 있잖소? 그렇게 되면 내 목숨을 순순히 내놓겠소." 우문한도의 말이 떨어지자 금화부인이 소리쳤다. "우문한도! 얕은 수작은 버리시지요. 당신이야말로 생사를 걸고 소영을 공격해 보시오. 왜 못하 지요? 뒤가 구려서 그러지요?" "뭐요? 부인은 정말....." "흥, 정말 어쨌단 말예요?" "그만들 두시오!" 심목풍이 소리쳤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심목풍을 향해 말했다. "심장주께선 우문한도의 말을 믿으시겠소, 아니면 금화부인의 간교한 말을 믿으시겠소?" 심목풍은 두 사람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우리는 금궁에 들어올 적에 약속한 말이 있소. 그 언약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니 어찌 어길 수 있겠소? 모든 일은 우리가 금궁을 빠져나간 다음에 해결지어도 늦지 않을 테니, 여기서 시비를 가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우문한도는 심목풍의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소영을 향해 물었다. "심장주의 신의있는 말씀에 소대협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소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 만일 내가 여기에 끼어 들어 균형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은 아마 당신이었을 것이오." 이 말은 소영이 있기 때문에 심목풍이 우문한도에게 손을 쓰지 못한 것이라는 뜻이었으며, 그 밑바탕에는 우문한도의 기혈을 찍었던 일을 암시하고 있기도 했다. 우문한도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하니 서 있다가 약간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소대협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기 바라오." "소영은 언제든지 위협을 받고 떨지는 않소. 우문형이 당장 나에게 손을 쓰고 싶다면 나는 사양 하지 않고 받아 들이겠소." 소영의 도전적인 언사에 우문한도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소영의 곁에 있는 백리빙은 불안했다. '오빠가 무엇을 믿고 큰소리를 치는 것일까? 이곳에서 지금 싸워 보았자 이로울 것이 없을 텐 데.....' 심목풍도 소영의 태도에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우문한도는 약간 억양을 높여 다시 말했다. "나는 소대협의 의사를 묻고 있소." "흐흥, 우문한도! 당신의 지금 행동을 따지자면 나는 즉시 당신을 죽여 버려야 마땅하오." 우문한도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소대협, 지금 나는 이 석실 안에서 우리가 취할 행동을 의논하자는 것이오. 개인끼리의 감정이 나 은원은 버리는 것이 좋겠소." "뭐요? 감정? 하하하...우문선생, 당신은 과연 음흉스럽기 짝이 없구려. 좋소. 나는 심장주와 당신 이 어떻게 결정하든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소." 우문한도는 심목풍을 돌아다 보았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입을 굳게 다문 채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망신이다. 소영이란 놈에게 나는 망신을 당했고, 저 능구렁이 심목풍은 또 어떤 수작을 꾸밀는 지.....' 우문한도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며 소영에게 말했다. "내 뜻은...우리는 금궁에 들어올 때 약속한 것을 지켜 당분간은 개인끼리의 감정은 덮어 두자는 것이오. 안전하게 금궁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합심해서 일에 몰두하자는 의견이오." "두 분이 결정한 대로 소영은 따르겠소." 소영은 대답하며 생각했다. '지금 이곳에서 싸움이 붙는다면 나에게 유익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일단 밖에 나가서는 한바탕 해볼 만하니 이들이 제의한 의견에 따르는 것이 나에게 큰 이익이다.' 우문한도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분간 무거운 짐은 내려 놓은 셈이다. 그러나 금궁을 나서면서 제일 먼저 죽을 것은 내가 되 겠구나.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의 형편으로서는 가는 데까지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 지.' 두 사람이 상반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우문형!" 우문한도는 심목풍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심장주, 왜 그러시오?" "소대협이 금궁 안에서 싸우지 않을 것에 동의한 이상 우문형은 가장 안전하게 되었소. 마음 놓 고 나머지 두 구의 시체를 찾아봅시다." 우문한도는 소영과 두 패가 싸움이 붙기를 바랬다. 그래야만 자기는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소영은 나를 잡아 먹을 듯이 증오하고 있다. 이제 이간질이 실패로 돌아갔는데 심목풍의 비위마저 건드렸다가는 나에게 더욱 불리할 테니 당분간 심목풍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 겠다.' 우문한도는 이렇게 생각하고 심목풍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심력을 다해서 노력해 보겠소이다." 우문한도는 잠시 석실의 사방을 둘러보더니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돌아다녔다. 다섯 사람은 숨 을 죽인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문한도는 벽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귀를 대고 무엇인가 들어보기도 하더니 돌탁자 앞으로 다 가섰다. 그는 손을 뻗쳐 돌탁자를 이리저리 더듬어 보았다. 손으로 두드리기도 하고 만져 보기도 하는 사이에 어느덧 반나절의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우문한도가 두 손으로 돌탁자를 힘껏 치더니 서랍 밑으로 손을 넣고 더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여러분! 만일 내가 어떤 장치를 잘못 건드리면 곧 석실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오." 심목풍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 석실이 내려앉기라도 한단 말이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아무튼 나는 어떤 장치를 건드렸는데, 이 석실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 만은 확실하오." 그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돌탁자 부근에서 들려왔다. 석실에 있던 사 람들은 숨을 죽이며 돌탁자를 주시했다. 긴장된 순간 속에서 돌탁자가 서서히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더니 시커먼 구멍이 드러났다. 우문한도는 구멍 앞으로 다가서서 밑을 내려다 보았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문 한도는 허리를 펴고 소영과 심목풍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구멍은 밑으로 내려 가는 통로가 분명한데, 역시 내가 먼저 내려 가야겠지요?" "그야 물론 우문선생이 길을 인도해야지요." 소영의 말에 이어 심목풍이 말했다. "우리는 건축학에 대해서는 우문형을 따를 수 없소. 그러니 우문형이 앞장서는 것이 제일 좋겠 소." "그렇게 말씀하시니 응당 내가 길을 안내해야겠구려." 우문한도는 헛기침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발을 디밀었다. "계단이 있군." 우문한도의 모습은 곧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심목풍이 소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대협이 먼저 내려가시오." '흥, 심목풍은 음흉하기 짝이 없으니 방심할 수 없지.'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심목풍의 말에 대꾸했다. "아무래도 심장주께서 먼저 내려가는 것이 좋겠소." 심목풍은 소영의 얼굴에서 눈을 떼어 당노부인과 금화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소.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 두 분께서는 맨 뒤에 오시오." 이 말은 소영을 감시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염려 마세요." "조심해야 되오." 심목풍은 한 마디 내던지더니 구멍 속으로 들어섰다. 소영은 낮은 음성으로 백리빙에게 말했다. "빙아, 빙아는 내 뒤를 바짝 따라 와라." 뻑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곧 심목풍의 뒤를 따라 구멍 속으로 내려섰다. 그 뒤를 백리 빙과 금화부인, 당노부인이 따랐다. 계단을 밟고 내려갈수록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한 걸음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어둠속에서 심목풍의 음성이 들렸다. "우문형! 어째서 불을 밝히지 않으시오?" 그러자 불빛이 번쩍이더니 암실 속이 희미하게 밝혀졌다. 우문한도의 손에 작은 횃불이 들려져 있었다. 계단은 모두 열여덟 층이었다. 우문한도는 이미 돌계단을 다 내려가 있었고 금화부인과 당노부 인은 이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우문형! 같이 갑시다." 심목풍이 말하며 훌쩍 뛰어 내려 우문한도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소영과 세 여인도 곧 계단을 벗어나 우문한도와 심목풍의 뒤를 따랐다. 이 석실은 위에 있는 석실과 크기가 비슷했다. 이들 여섯 사람이 불빛을 이용해 석실을 둘러보 니 한쪽 구석에 두 구의 시체가 앉혀져 있었다. 시체의 하나는 백설같이 흰 수염에 장삼을 입었고 다른 하나는 도포 차림에 나무로 만든 동곳을 머리에 꽂고 있었다. '이 시체 중에 소왕 장방이 있을 것이다.' 소영은 장삼을 걸친 노인의 인중을 살펴보았다. 그의 인중에 검은 점이 하나 있었다. 우문한도가 횃불을 들어 두 시체를 비추어 보더니 입을 열었다. "금궁에 들어온 십대 기인의 시체는 이제 모두 발견되었소. 만일 당노부인의 말이 옳다면 이쪽 의 노인이 장방임에 틀림없소." 당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 사람이 소왕이에요." "그래도 확실히 알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자세히 보아 주기 바라오." 우문한도의 말에 여러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시체의 얼굴로 쏠렸다. 그 틈에 우문한도는 슬그머니 오른손을 내밀어 마주 앉은 시체 사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장방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우문한도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 그러 나 백리빙은 시체의 신분이 누구이든 관심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우문한도의 손놀림을 볼 수 있 었다. 우문한도가 몰래 손을 내미는 것을 발견한 백리빙은 크게 외쳤다. "무엇을 훔치려고 그러세요?" 우문한도는 순간 깜짝 놀랐지만, 더욱 빠르게 손을 움직여 호랑이 가죽을 더듬었다. 이것을 본 심목풍이 즉시 우문한도의 등에 손을 대며 굵직한 소리로 말했다. "우문형! 살고 싶거든 어서 손을 떼시오." 그러자 소영도 재빨리 오른손을 내밀어 심목풍의 명문혈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말했다. "심장주, 유선자의 수라지력을 당신은 아마 알고 있을 거요. 그러나 심장주의 높은 공력으로 이 일격을 당해 낼는지도 모르겠군요." 사태가 이렇게 되자 우문한도는 오른손을 거두며 쑥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어떤 물건이 있는 것 같기에 무엇일까 궁금해서 먼저 볼 생각밖에 없었소. 우리들은 금궁 에 들어올 때 약속하지 않았소? 어떤 물건이든 각자의 운수에 맡기고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 심목풍은 여전히 우문한도의 등에 손을 댄 채 말했다. "우문형의 품속에는 아직 홰가 하나 남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 "그렇소. 과연 심장주의 기억력은 매우 좋군요." "잘되었소. 그 홰에 불을 붙여서 돌침상 위에 놓으시오." "그렇게 하겠소." 우문한도가 들고 있던 횃불은 매우 빛이 약했다. 그것은 아주 가느다란 광솔 나무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우문한도는 품속에서 굵은 홰를 꺼냈다. 거기에 불을 붙이자 석실이 환해졌다. 우문한도가 횃불을 밝혀 돌침상 위에 세워놓자 심목풍이 말했다. "됐소. 우문형은 한 옆으로 비켜 서시오." 우문한도는 아무 말없이 옆으로 비켜 섰다. 그러자 심목풍이 소영에게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소대협은 우리들이 약속한 것을 지키겠지요?" "그야 물론이오." "그렇다면 어서 오른손을 거두는 것이 옳지 않겠소?" 심목풍은 코웃음을 치며 옆으로 비켜 섰다. 소영은 오른손을 심목풍의 몸에서 떼고 돌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돌탁자 위에는 얄팍한 책이 한 장의 종이에 덮여 있는데 그 종이 옆에는 옥으로 만든 자(尺)가 놓여 있었다. "종이에 글씨가 적혀 있군." 소영의 말에 심목풍을 위시한 여러 사람의 시선이 종이 위로 쏠렸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당신은 비록 이곳에 한걸음 늦게 왔지만 이 밀실에 들어올 수 있다니 매우 훌륭하오. 나는 금 궁에 들어오기 위해 삼십 년의 청춘을 흘려 보냈소. 당신도 이곳에 들어오기까지는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오. 당신의 노력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여기에 소왕 장방의 무공책자를 남기겠소. 먼저 금궁에 들어온 사람.> 종이에 적힌 글을 다 읽은 소영은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 다. '내가 이번에 금궁에 들어온 큰 목적은, 장방에게서 잘라져 나간 통소법으로 인해 옥소랑군의 무 공이 높아 그것을 악소채에게 주면 그녀는 옥소랑군을 제압하고도 남을 것이다. 운좋게도 지금 장방의 무공이 수록된 책자가 남겨졌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이다...지금 심목풍과 우문한도, 두 사람의 강적이 있으니 이들은 전력을 다해 이 책자를 차지하려고 들 것이다. 필경 피비린내 나는 일대 격전을 치르게 될 테니...책자를 앞에 두고서도 아직 누구의 것이 될는지 예 측할 수 없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구나.'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에 싸이고 말았다. 긴장한 소영이 가늘게 몸을 떠는 것을 본 백리빙은 근심되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오빠, 겁나요?" 소영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겁날 것이 뭐 있겠니?" "그런데 왜?" "나는 아무 이상도 없다." 백리빙은 손을 내밀어 소영의 왼손을 꽉 움켜쥐었다. "오빠, 만일 우리가 금궁을 빠져 나갈 수 없다면 여기서 죽게 될 거예요. 하지만, 나는 오빠와 함께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즐거운 일이에요." 백리빙은 말을 끝내고 소영의 품으로 몸을 기댔다. 소영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백리빙을 가만 히 떠밀었다. 백리빙의 마지막 몇 마디는 석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소영과 백리빙 에게 시선을 던졌다. 심목풍이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소대협, 이 낭자는 매우 감정이 풍부하고 직감적인데...어떤 인물이오?" 소영은 퉁명스런 어조로 대답했다. "심장주께서는 그런 것까지 물을 필요없소." "흐흥, 그렇다면 묻지 않겠소." 우문한도가 말참견을 했다. "두 분은 지금 그런 것을 가지고 신경쓸 때가 아니오." "난 이런 점을 생각했소. 먼저 이곳으로 들어왔던 사람은 그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오. 그는 우 리에게 장방의 비급책자를 남겨 주었소. 그러나 그는 이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소." "무엇을 생각지 못했단 말이오?" 심목풍이 물었다. 우문한도는 실내에 있는 다섯 사람을 훑어보며 대답했다. "그는 우리 다섯 사람이 함께 금궁으로 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오. 여섯 사람이 한 권의 비급 때문에 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짐작조차 못했지요." 심목풍이 차갑게 말했다. "우문형이 겁이 난다면 장방의 무공비급을 포기하면 되잖소?" 우문한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포기한다 하더라도 이 무공비급은 심장주의 소유가 되지 않을 텐데요." 심목풍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우문형이 포기하면 비급을 얻을 가능성이 그만큼 늘어나는 셈이지." 소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처음 약속한 대로 비급을 각자의 운수에 맡겨 얻고자 한다면 모르지만, 만일 사리 사욕만 내세워 언약을 깨뜨린다면 분명 커다란 불상사가 벌어질 것이다. 우문한도의 무공은 별로 겁낼 것이 못되지만 그는 속이 엉큼하고 금궁에 대해서는 매우 정통하니 커다란 강적임에 틀림없 다.'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문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의 형세로 보아 금궁 속의 모든 물건은 거의 없어지고 남은 것은 장방의 무공비급 뿐이오. 장방은 비록 일대의 기인이며 특히 소법(簫法)에 있어서는 둘도 없이 뛰어났지만 역시 십대 기인 중의 하나에 불과하오." 우문한도는 무공비급에 잠깐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먼저 금궁으로 들어온 사람은 십대 기인이 남긴 비급 중에서 아홉을 가져가고 하나만 남겼소. 우리들 중에 누가 이 비급을 얻든 간에 아무리 무공을 닦아 봐야 그 사람에 비해 구분의 일밖에 안 되오. 더우기 그 사람이 이 무공비급을 베껴 갔는지도 모르니 그렇게 되면 십분의 일의 무공 밖에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이 말을 듣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심목풍은 '우문한도의 말은 맞는다. 아무리 이 무공비급을 차지하려고 싸워 봤자 결국 자그마한 힘을 얻 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급한 것은 무공을 모조리 털어간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 를 찾아 무공을 모두 배우기 전에 가져간 비급을 뺏어야 한다.' 하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우문한도와 심목풍은 이 무공비급에 대해 관심이 약간 덜어지고 있었으나 소영만은 그렇지 않았 다. 그에게는 다른 아홉 개의 비급보다도 소왕의 비급 하나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옥소랑군과 격투할 악소채를 도와주는 길은 이 무공비급을 얻어다 그녀에게 주는 것 뿐이다. 십대 기인의 무공비급 중에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장방의 비급이다. 마침 이것이 여기에 남 겨 있으나 선뜻 차지할 수 없으니 안타깝구나.'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무공비급에 자주 시선을 보냈다. 이때 우문한도는 또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무공으로 견줄 때 아무래도 소영과 심목풍을 당해낼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꾀를 써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심목풍과 소영을 이 금궁 속에 가둘 수 없을까? 그렇게 되면 장방의 무공 비급은 자연 내 손에 들어오게 될 텐데.....' 심목풍, 소영, 우문한도 등은 모두 무공비급을 수중에 넣을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마음속으로 어떤 타산을 하고 있어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우선 장방의 무공 비급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혀낸 다음에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이 말은 세 사람을 동시에 생각에서 깨어나게 했다. 심목풍이 소영을 돌아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금화부인의 말이 옳소. 먼저 장방의 무공비급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 보는 것이 순서이겠 소."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의견에는 찬성이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이 비급의 진부를 가려 내겠느냐 하는 것이 오." 심목풍이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의 의견은 어떻소?" '내가 만일 백리빙을 시켜 비급을 보게 한다면 심목풍과 우문한도가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 렇다고 우리 세 사람 중에 누가 보기도 곤란하고...당노부인과 금화부인 둘 중에서 한 사람이 보 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누가 보든지 상관이야 없겠지요. 그러나, 심장주와 같이 온 사람을 시키지 않으면 당신 마음이 꺼림칙할 테니, 심장주와 같이 온 두 분 중에서 보도록 합시다." "누가 좋겠소?" 심목풍의 물음에 소영은 잠깐 망설였다. '금화부인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심목풍이 금화부인을 아무래도 석연찮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 당노부인을 시키자.'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당노부인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당노부인이 좋겠지만, 심장주의 생각은 어떻소?" 심목풍은 당노부인을 힐끗 보더니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우문형의 의견은?" 우문한도는 소영과 당노부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심장주께서 소대협의 의견에 동의한다면 나도 다른 의견은 없소이다." 심목풍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당노부인에게 말했다. "좋소. 그럼 당노부인께서 장방이 남긴 비급책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 주시오." 당노부인은 말없이 돌침상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두 구의 시체 사이에 있는 종이쪽을 들어냈 다. 그러자 양가죽으로 표지를 싼 책이 한 권 나타났다. 당노부인은 책 표지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그곳에는 <소왕 장방 무공비록(簫王 張放 武功秘錄)> 이라는 여덟 자가 적혀 있었다. 당노부인은 사천 당가의 장문인만큼 비록 여자이긴 했지만 견문이나 지혜가 남자에 뒤지지 않았 다. 또한 무공에 있어서도 무림의 영웅들과 어깨를 겨룰 만했다. '금궁에 들어와서 가장 값진 보물이라고 하면 이 무공비급 하나를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지금 심목풍, 우문한도, 소영이 이 책자에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자칫하다간 내 생명이 그들의 와중에 말려들어 끊어질 염려도 있다. 결코 방심할 수 없지.' 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신변을 경계하면서 얼른 손을 내밀어 책을 집지 않 았다. 그녀는 표지에 있는 제목만 읽고는 얼굴을 심목풍에게 돌리며 말했다. "표지에 장방의 무공비록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니 이 책자는 진짜임에 틀림없어요." 심목풍이 말하기도 전에 우문한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표지에 분명히 씌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 진부를 판단할 수는 없소. 노부인께서 내용 을 한 번 검토해 보시오." 당노부인은 심목풍에게 물었다. "대장주님의 의견은 어떠시오?" 심목풍은 무공비급의 책자를 뚫어지게 보면서 짤막하게 대답했다. "표지를 열어 보시오." 124. 금궁을 나오다 당노부인은 품속에서 사슴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꺼내 끼고서야 표지를 들추었다. 백리빙은 그 모양을 주시하고 있다가 소영에게 속삭였다. "오빠, 저 노부인은 상당히 조심을 하는군요." 소영은 말없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그는 당노부인을 뚫어지게 쳐다본 후 진지하게 말했다. "사천당가의 독약 암기는 무림에서 겁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저 노부인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니 절대로 경시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눈길을 모아 당노부인이 연 표지를 보았다. 그곳에는 <십팔 초 혼천소법(混天簫法)> 이라고 조그맣게 씌어 있었다. 이 비록에 기재된 것은 분명 장방의 절세 무공임이 틀림없었다. 소영은 시력을 집중시켜 그 아래 쪽의 글을 읽으려 하는데 갑자기 우문한도의 장탄식 소리가 들 렸다. "여러분은 무슨 틈을 찾아내셨소?" 심목풍이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무슨 틈이란 말이오?" 우문한도는 당노부인이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저 비록의 표지 글씨와 그 안의 글씨체가 서로 다른 것을 말이오." 심목풍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당노부인에게 다급히 입을 열었다. "당노부인, 표지를 다시 펴 보시오." 당노부인이나 소영은 다같이 그런 것에까지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우문한도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책표지를 유심히 살펴보니 과연 그의 말대로 필체가 틀렸 다. 그 표지에 씌어 있는 아홉 글자는 한 획 한 획 정성 들여 쓴 데 반하여 표지 안의 글씨는 마구 갈겨 써서 언뜻 보아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심목풍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문한도를 쏘아보며 말했다. "우문형이 보는 바로는 이 장방의 무공비록이 가짜란 말이오?" 우문한도는 담담히 웃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것은 심대장주의 생각과 정반대요." "그게 무슨 말이오?" "장방은 무공이 고강하여 정력(定力)이 과인하다지만 그는 죽기 직전에 임하여서는 심중의 격동 이 매우 컸을 것이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이 비록을 썼을 테니 자연 글씨가 엉망일 것 이오. 그런 것으로 보아 저는 이 비록이 거짓이 없는 장방의 책이라 믿는 바이오." 심목풍은 그럴 듯한 우문한도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비록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럼 표지의 필체가 단정한 것은 무슨 이유요?" 우문한도는 조금도 주저없이 그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쓴 것이오. 장방이 그 표지의 글씨를 썼다면 응당 안에도 단정히 썼어야 될 것이 아니오?" "우문형은 우리보다 먼저 금궁을 다녀간 사람이 있다는 것이오?" "그것은 잘 모르겠소. 제가 장방 비록에 씌어 있는 글을 읽어 보아야 알 수 있겠소." 심목풍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다그쳐 물었다. "꼭 비록을 자세히 보아야 되겠소?" "그렇소. 여러분들은 모두 책을 많이 읽으셨을 것이오. 책 속의 흔적을 찾으려면 반드시 세밀하 게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라 믿고 심대장주가 걱정하고 있듯이 이렇게 멀리서 그것 을 보고 어떻게 분별하란 말이오? 여러분들은 시력이 아무리 높다 하여도 이렇게 멀리서 글을 살 필 수 있겠소? 더군다나 글씨도 마구 흘려 쓴 것인데." 심목풍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소영에게 물었다. "소대협, 당신의 의견은 어떻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줘도 무방할 것이오." 심목풍은 더 말하지 않고 당노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노부인, 그 비록을 그에게 보여 주시오." 당노부인은 별로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 비록을 우문한도에게 넘기려 하는데 금화부인의 날카로 운 음성이 들렸다. "걸어 와서 직접 보시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심목풍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렇구려. 수고스럽지만 우문형이 이리로 와서 보시오." 우문한도는 문가에 서 있어서 그가 장방의 비록을 갖고 도망가기가 수월하였다. 더군다나 그가 문 밖으로 나가 나무문을 잠근다면 꼼짝없이 나머지 사람들은 지하실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우문한도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하하하....." 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돌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당노부인에게서 비록을 건네 받고 자세히 표지를 살폈다. 심목풍과 소영은 그가 이런 구실로써 혼천소법의 내용을 읽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 비록은 수십 장이나 되니 앞의 몇 장 정도는 보여 주어도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석실의 분위기는 자못 착잡하였다. 누구 한 사람 입을 열지도 않았고 기침소리도 없었다. 이렇게 잠시 침묵이 흘러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우문한도는 책을 덮었다. 다섯 사람의 시선이 그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우문한도는 가볍게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책은 가짜가 아니오.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 없다는 증거가 있소." 심목풍은 수중에 들고 있는 종이쪽지를 그에게 건네 주며 물었다. "이 종이의 글씨와 비록에 있는 글씨는 어떻소?" 우문한도는 그것을 자세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틀리오." "그럼, 우문형은 무슨 고견이라도 있소?" "나의 의견은 아주 간단하오. 이 책의 글씨는 장방이 직접 썼지만 다 쓰고난 후 누구에게 맡겨 그 사람이 책자로 만들고 또한 표지의 글도 썼을 것이오." 심목풍은 호기심이 지나쳐 입술이 탔다. "내용을 쓸 때와 겉표지를 쓴 시간이 서로 틀린다는 말씀이오?" "그렇소." "그럼 금궁에 들어온 십대 고수들 중에 어느 한 사람이겠군요. 그 사람이 누구겠소. 그 사람은 모두가 같은 처지에 직면하여 있었고 무공도 엇비슷하지 않았겠소? 그런데 장방이 자신이 써 놓 은 무공책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누구에게 부탁하였다면,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손을 쓰지 못하였을 것이오.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으시오?" 심목풍은 오랜 만에 일장을 늘어놓는 것이 자신이 생각해도 대견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사람의 호응을 은근히 기대하였다. 몇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는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을 이었다. "내가 추측키로는 그 고수들의 마지막 심부름을 하여 준 사람은 포일천뿐이라 생각하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포일천이 그들 고수들의 손에 죽었다는 일이오." 심목풍은 우문한도에게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의 생각으로는 포일천이 고수들보다 먼저 죽은 것이 이해가 안 되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한참 동안 응시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심대장주께서 아주 중요한 것을 물으셨소. 그러나 그 화신노인의 죽은 모습을 다시 생각해 본 다면 이 속의 비밀을 알아내기는 과히 어렵지 않소." "그것과 화신노인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심목풍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이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우문한도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 다. "물론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소. 나는 십대 고수들의 죽은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그들 의 눈썹 사이에서 한 가지 이상함을 찾아내었소. 그것은 그들이 죽을 당시 굉장히 수심에 싸여 있었다는 것이오. 그러나 단 하나 화신노인만은 예외였었소." 심목풍의 눈썹이 저절로 치켜졌다. 소영도 의외로 자세한 관찰을 한 우문한도의 지혜에 탄복하 였다.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 화신노인은 스스로 평정을 유지하고 자신을 성불(成佛)로 분장한 것이오. 이것은 그의 정신 수양이 열 명 중에서 제일 높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오. 저의 추측은 이렇소. 아홉 명의 고 수가 남긴 무공비록을 화신노인이 일일이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이오." 그의 긴 이야기를 받아 심목풍이 또다시 물었다. "우문형은 그 화신노인에 대하여 일조의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오?" 우문한도는 뜻없이 싱거운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는 이제 아주 태연히 뒷짐을 지고 돌침상 주변을 왔다갔다 하였다. 우문한도가 입을 열지 않으니 석실 안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곳의 비밀 을 캐낼 능력이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묘한 분위기가 얼마 동안 흐르고 난 뒤 우문한도가 다시 입을 열어 침묵을 깨뜨렸다. "십대 고수들 중에서 아주 뛰어난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형편없는 무공을 지닌 사람도 없었 소. 그들은 모두 제각기 특기를 지니고 있어 서로를 얕볼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정신 수양의 공부만은 얼마간 차이가 있었소." 백리빙은 그의 해박한 견식에 내심 감탄하여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저 사람은 다 같은 강호 사람인데 어떻게 옛날 고수들을 상세하게 알고 있을까?' 그녀는 귀를 기울여 우문한도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그 특유의 굵직한 음성으로 거침없이 계속되었다. "제가 아는 것으로 십대 고수들 중 천인대사의 성질이 가장 나쁜 것으로 아오. 그의 호는 비록 천인이라고 인내를 뜻하지만 본래 성질은 불 같아서 무슨 일이든지 참지를 못하오. 그 중 성격이 가장 온순한 인물은 화산(華山)의 담운청(談雲淸)이오. 그리고 인자한 인물로선 소림의 무상(無相) 대사요, 또한 십대 고수들 중 가장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닌 인물은 화신노인인 수천의(帥天儀) 요." 우문한도의 이야기가 더 계속 될 것인데 갑자기 당노부인이 말을 받았다. "미안하오. 우문선생의 말씀을 듣고 있으려니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구려." 우문한도는 부드럽게 물었다. "부인, 무슨 일이오?" "저는 강호에서 몇 번 들었던 소문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소. 금궁에 들어간 고수는 열 명이 못 된다고 말이오. 그 소문이 진짜인지 뜬소문이었는지는 모르겠구려." 우문한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예의 자신에 차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저도 들었소이다. 그러나 그 소문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지 못하였으니 무어라 단정을 못하겠소." "우리는 지금까지 열 구의 시체를 발견하였으나 그 중에는 소문에서 듣던 인물이 끼어 있지 않 아서 물었던 것이오." "그분이 누구요?" "아미파 중에 장미(長眉)대사요." "아, 그랬었구려. 장미대사는 비단 아미문파의 일대 기인일 뿐만 아니라 십대 고수 중에 끼인 인 물이었소." 그러자 어느 정도 자신의 말에 확신이 생겨 곧 말을 받았다. "그리고 저는 강호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소. 그것은 장미대사의 출신은 원래 소 림이었는데 도중에서 무슨 사정으로 아미로 옮겼다는 것이오. 특히 그의 이름은 십대 고수들 중 에서 제일 정상에 올라 있었다고 하오." 당노부인도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주 길게 끌고 나갔다. 그녀는 뜻밖에 말솜씨가 좋았다. "장미대사는 다른 아홉 고수를 모두 물리쳤으나 천성이 온순하여 그들을 심하게 다루지는 않았 다 하오. 그래서 강호에서는 십대 고수의 무공이 막상막하라고는 하나 필시 장미대사가 으뜸일 것이라고 믿소." 옆에서 듣고 있던 심목풍이 손을 저으며 말참견을 하였다. "그건 조금 틀리는 소문이오. 만약에 장미대사의 무공이 그들 중에서 으뜸이었다면 어찌하여 천 하 제일의 고수라는 칭호를 받지 못하였소? 그런 지위가 얼마나 숭고하고 명예로운 것인데 장미 대사가 그것을 마다하였겠소?" 우문한도가 옆으로 한 발 나서며 말을 받았다. "저도 그런 소문은 들은 것 같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으니 지금은 한낱 전설로 돌릴 수 밖에 없을 것이오." 소영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중 새삼스럽게 스승 장산패와 의부 남일공 그리고 의모 유 선자를 생각해 보았다. '그들 세 사람은 십대 고수를 뽑는 시합에 능히 참석할 수 있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의 은혜와 원한을 생각하고 정과 악을 미리 계산하여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산중에서 은거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었으니 정말로는 그들이 강호의 영웅이다.' 그는 차츰 마음에 짚히는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십대 고수가 무공시합을 하고서 얻은 명성이라지만 그들이 꼭 강호에서 으뜸으로 무공을 지니 고 있다는 것은 단정할 수 없소. 여러분들은 이런 도인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한 사람의 은혜와 원한에 엉켜서 세상에 다시 나타나지 않고 지내는 인물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니고 있는 무공으 로써 세상에 나타나면 십대 고수를 능히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오." 주위 사람들은 하도 오랜 만에 긴 이야기를 꺼내는 소영의 말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들었다. "그들은 자신이 나서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소. 그저 심신에 은거하며 흰구름을 벗삼 아 청송명월을 감상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소. 그들은 명성도 탐내지 않소. 또한 쟁탈도 하 지 않소. 여러분들은 이런 도인이 있다고 믿겠소?" 소영의 깨끗한 눈빛에 회상의 감회가 자욱이 서리었다. 심목풍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말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그대의 스승을 가리키는 것 같소." 소영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스승께서 만약 십대 고수를 뽑는 무술시합에 참여하였다면 오늘날 스승도 십대 고수들 의 틈에 끼었을 것이오." "그것은 유감이로군. 소대협의 스승이 십대 고수들 틈에 끼었다면 지금은 금궁의 고인이 되었을 게 아니오. 그렇게 되었다면 나에게 강적이 하나 줄어드는 것인데....." 소영이 미처 말을 받기도 전에 우문한도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명사의 성명을 알려줄 수 있겠소?" 소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되오. 나는 굳은 언약을 하였소." 우문한도는 더 이상 묻지도 않고 고개를 숙여 얼마 동안 생각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이상하게 빛나며 소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소영은 그의 표정을 보고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알아냈구나.' 우문한도는 그대로 소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저는 짐작할 수 있소....." 소영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곳에서 그런 쓸데 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기로 합시다." 심목풍이 말을 받아 소영의 말에 호응하였다. "그렇소. 소대협의 말대로 지금은 그런 것을 논할 시기가 아니오. 우리는 이제부터 금궁을 빠져 나갈 길을 찾아야 되오. 그리고 우선 제일 먼저 결정해야 될 문제가 이 장방의 무공 책자를 누가 갖게 되느냐가 급하오." 그러자 우문한도도 소영의 스승 이야기는 더 꺼내지 않았다. 그는 들고 있던 무공 책자를 돌침상 위에다 놓았다. "이 안의 글씨와 표지는 분명히 틀리오. 여러분들이 믿든 안 믿든 간에 저의 생각으로는 안의 글씨와 표지의 글씨는 한시에 씌어졌다고 믿소. 그리고 표지를 쓴 사람은 화신노인이라고 주장하 오." 우문한도는 여기에서 말을 끊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는 눈길을 심목풍에게 멈추고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러나 조금 전에 심대장주께서 말한 대로 지금은 장방의 무공비록을 어느 누가 갖게 되느냐를 결정지어야 될 것이오." 심목풍은 자신의 말에 동의하는 말을 듣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켜 있는 불이 꺼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그러므로 우리는 저 불이 꺼지기 전에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이 금궁 안에는 무공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곤 이 한 권의 책뿐이니 모두가 눈독을 들이고 있을 것이오. 그렇다고 이것을 여럿으로 나눌 수도 없지 않겠소. 그러니 우리 세 사람 중에서 어 느 두 사람이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소영이 곧이어 결연히 말을 받았다. "앞으로의 사정이 어떻게 되든 나는 일보도 양보하지 않겠소!" 심목풍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꼭 이 비록을 갖겠다는 것이오?" "만약 다른 인물이 남긴 무공이라면 몰라도 장방의 비록이니 절대로 포기할 수 없소." 우문한도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참견을 하였다. "무엇 때문이오? 꼭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소? 소대협께서 그럴 만한 뚜렷한 이유를 밝힌다면 저는 깨끗이 양보할 수 있소." 소영은 원래부터 거짓말을 못하는 성미라 그의 말에 언뜻 대답을 못하고 당황하였다. '무어라 할까? 솔직히 이야기할까? 아니야.....' 그는 우선 급한 대로 뚱딴지 같은 대답을 했다. "제가 그런 이유를 굳이 우문선생께 밝힐 필요가 없지 않겠소?" 우문한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소영은 무슨 일에 부딪쳐도 항상 냉정하고 사리에 밝았다. 그러므로 그는 강호에서 좋은 정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소영은 얼마간 냉정을 잃고 있었다. 그는 장방의 무공비록을 수중에 넣어야만 악소채를 살릴 수 있다는 그 일념뿐이었다. 그러니 목 숨을 걸고 싸워서라도 수중에 넣을 결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심목풍이 몇 번 헛기침을 하고 카랑카랑한 소리로 말했다. "소대협의 뜻을 짐작하겠소. 당신은 어떻게든지 이 비륵을 수중에 넣겠다는 것이오.....?" 그의 말을 받아 우문한도가 덧붙였다. "만약 소대협이 그 이유를 말하지 않고 약속대로 승부를 건다면 오히려 당신에게 불리하오. 그 렇게 되면 당신은 셋 중에 하나의 기회뿐이지 않겠소?" 소영은 칼날 같은 눈썹을 쉴사이 없이 움직였으며 눈을 빛냈다. 그는 곧 입을 열 것 같았으나 웬일인지 침묵을 지켰다. 얼마 후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각자의 운명에 맡기는 것이 아니겠소. 저는 기회가 어렵더라도 여러분의 뜻에 따르겠 소." 심목풍은 가물가물 꺼져가는 불을 예의 주시하며 내심 생각했다. '소영은 장방의 무공비록을 수중에 넣으려는 결심이 대단하구나. 그러니 내가 다른 방법으로 비 록을 뺏으려 한다면 자연 싸우게 되겠지...더군다나 저 계집이 항시 옆에 붙어 있으니...소영이 중 주이고를 제쳐 놓고 저 계집을 데리고 왔으니 예사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을 게다.' 그는 생각을 길게 끌었다. '그리고 우문한도의 말대로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이 소영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다 는 것이 정말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우문한도의 간계와 교활한 성격은 언제 어느 때 돌변할는 지 모른다. 그러니 내가 소영과 싸운다 해도 그들은 나를 돕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소영과 합세하여 나를 누르려고 할는지도 모르지.....' 이렇게 따져 보니 심목풍 혼자 외톨박이가 된 느낌이었다. 심목풍은 내심 자신의 처지를 저울질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금궁에 들어올 때 약속한 것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암투를 하지 말기로 합시다. 저도 약속을 지킬 터이니....." 우문한도는 그의 말에 적지 않게 의아심을 가졌다. '이상하다. 저 심목풍은 항상 거만하고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성미인데...이곳에 들어 올 때에도 우리 모두에게 자신이 명령하는 조로 말을 하더니 지금은 웬일일까. 상상 밖으로 부드 럽게 스스로 약속을 지키겠다니.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어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우문한도는 눈길을 돌려 소영의 표정을 살폈다. '소영은 저 장방의 무공비록을 꼭 필요로 하고 심목풍은 절대로 그에게 주지 않을 것이니 필시 험악한 사태가 빚어지겠군. 그러나 지금의 상태로 보아선 심목풍이 소영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극 단적인 싸움은 없겠다.' 그는 상대의 심리까지도 파헤치는 재주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말이 없자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러면 빨리 약속대로 도박을 합시다. 과연 이 장방의 무공비록이 누구에게 돌아갈지....." 하다가는 급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는 금궁을 나갈 궁리를 생각하여야 되오." 심목풍은 정말로 꿍꿍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무공이 제일 강하므로 이곳에서 비록을 차지하 지 못해도 밖에서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였다. 그래서 별다른 이견도 없었고 우문한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것을 가지고 괜히 시간만 끌 것이 아니라 속히 해결한 다음 금궁을 나갈 길을 찾읍시 다." 소영이 그의 말을 받았다. "모든 분이 원하는 것이니 속히 도박을 합시다. 우문선생이 중계를 서시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의 앞으로 나섰다. "소대협의 말씀대로 제가 중계를 서겠소. 저는 어느 누구의 편을 들지도 않을 것이니 서로 믿고 도박을 하셔도 될 것이오." "빨리 진행하여 보시오." 우문한도는 일행을 잠시 훑어보고는 천천히 품속에서 무엇을 꺼내어 손에 쥐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빼내고는 그대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이 주먹에는 세 개의 엽전이 들어 있소. 이것은 나도 모르오. 두 분 중에 어느 누가 먼저 짚을 것인가를 상의하시오. 저는 두 분께서 맞추신 다음에 말하겠으니....." 심목풍은 나중의 기회가 있으니 지금의 도박에는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옆으로 한 발 물러서며 소영에게 양보를 했다. "소대협께서 꼭 장방의 무공비록을 필요로 하시니 먼저 맞추시오."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것도 서로 가위 바위 보로 결정지읍시다. 두 분의 양보는 원치 않으니 거두어 들이시 오." "그럼 내가 가위 바위 보에서 졌다고 하겠소." 소영은 가볍게 포권을 하여 심목풍의 양보에 답례하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사양하지 않겠소. 먼저 맞춤을 허물치 마시오." 소영의 태도는 필승의 신념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소대협의 마음대로 하시오." 소영은 잔뜩 긴장된 눈빛으로 우문한도를 노려보았다. 막상 도박으로 비록을 차지하려니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한 마디로 대답했다. "두 개요!" 우문한도의 신색은 차분하여 그에게서 어떤 눈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소영에게서 눈길을 떼어 심목풍에게 돌렸다. "세 개요!" 심목풍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우문한도의 입가에는 펀뜻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선 두 개요, 심대주께선 세 개라고 하였으니 자연 저는 한 개라고 맞추겠소." 그는 내밀고 있던 오른손 주먹을 서서히 펼쳤다. "두 분께선 보시오." 소영과 심목풍은 눈빛을 번뜩이며 그의 주먹이 펴지는 것을 주시하였다. 소영은 대번에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 누님을.....' 그는 머리를 둔기로 호되게 얻어맞은 것같이 머릿속이 욱신욱신 쑤시는 것을 느꼈다. 심목풍이 쓴웃음으로 말을 꺼냈다. "우문형이 이겼소." 우문한도는 빙긋이 회심의 미소를 두 사람에게 보냈다. "두 분의 운수가 나빴던 탓이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돌침상 위에 놓여 있는 장방의 무공이 적힌 비록을 집었다. 그러자 돌연 심목풍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우문형 잘 보관하시오." 우문한도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그의 말을 받았다. "심대장주께선 벌써 이것을 빼앗을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심목풍은 고개를 돌려 소영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소대협이 무척 실망했을 것이오. 내가 만약 손을 써서 우문형의 비록을 빼앗으려 한다 해도 소 대협은 당신을 돕지 않을 것이오." 우문한도도 소영에게 눈길을 돌려 물었다. 소영은 크게 실망한 신색이었고 그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보건데 이 장방의 무공비록은 소대협께 매우 중요한 것 같구려. 그렇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자는 재물을 탐내지 않으며 또한 정당한 승부로 이미 결정된 것에 미련을 두지 않는 법. 우 문선생의 말대로 그것은 나에게 대단히 긴요한 것이지만 비겁하게 힘으로 빼앗을 마음은 추호도 없소. 우문선생은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이미 당신에게 그것을 드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 소." 우문한도는 표정을 밝게 하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하하, 이제는 한 가지가 결정되었으니, 그 다음을 논의합시다." 심목풍이 먼저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이곳은 이미 다른 사람이 한 발 앞서 보았으니 가치가 없어졌소. 그러므로 속히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좋소. 그럼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하고 길을 찾읍시다." 그는 앞서서 성큼성큼 지하실 문가로 걸어갔다. 그 모양을 보고서 금화부인이 몸을 날려 우문한도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문한도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만약의 일에 대비하려는 듯 손을 가슴께로 올렸다. 금화부인은 그를 날카롭게 흘겨 보고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은 우리의 중간에 서시오. 제가 앞서겠소." 말을 마친 그는 과연 앞장을 섰다. 우문한도는 쓴 냉소를 보냈다. '저 계집은 퍽이나 의심이 많구나. 항상 나를 의심하다니.....' 아니꼬운 마음에 우문한도의 얼굴이 잠시 붉어졌다. 그러나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어 그녀의 말 대로 일행의 중간에 섰다. 앞에 금화부인이 나갔고 뒤따라 백리빙, 우문한도가 나갔다. 소영은 우문한도의 뒤에 바짝 붙어 그의 행동을 감시하였고, 한편으로는 뒤따르는 심목풍을 경 계하였다. 여섯 사람이 아무 일 없이 지하실을 나와 다시 대청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조금 전과 별로 달라진 것 없이 담운청의 시체만 그들을 반겨 주는 듯했다. 우문한도는 주위를 훑어보고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여러분들은 먼저 대청을 나가시오. 저는 잠깐 남아서 시체를 복원시켜야 되겠소. 이곳은 일종의 십대 고수들의 묘당이기도 하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목풍이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우문형은 금궁에 남아 장방의 무공비록을 터득하겠다는 말씀이오?" "심대장주께선 의심도 많으시구려. 저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해도 십대 고수만 못하오. 이곳에 남으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런 것을 알면서 어찌 이곳에 남으려고 생각하겠 소?" 그의 변명을 듣고 있던 소영이 손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저는 우문선생이 없어도 금궁을 나갈 수 있소. 이제는 나에게 돌려 주시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소대협께선 무엇을 달라고 하시는지요?" "그렇게 시치미를 뗄 것 없소. 나에게 받았던 금궁의 열쇠 말이오." 우문한도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것 말이오? 소대협은 우리가 금궁에 들어올 때 한 차례의 험악했던 싸움을 기억하시오?" 소영은 그의 엉뚱한 물음에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었다. '이놈은 열쇠를 내놓지 않으려는구나. 그에게 빼앗길 수는 없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되찾 아야겠다.' 그는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그래서요?" "금궁의 열쇠는 그때 잃어 버렸소." 그러자 백리빙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오빠,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에요. 만약 금궁의 열쇠를 돌려 주지 않는다면 그 대신 장방의 무공비록으로써 변상케 하세요." 소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우문한도에게 다가섰다. 우문한도는 경계의 빛을 띠고 몇 발 뒤로 물러섰다. 소영의 표정은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어 어느 때 폭발할지 모르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 의 음성은 조금 떨렸다. "우리가 심대장주를 막았기 때문에 당신은 문을 열 수 있는 시간을 얻은 것이오. 그 절벽에서의 싸움이 비록 험하였다 하여도 나와 동생이 싸웠을 뿐이지 당신은 문만 찾았소. 그리고 석문이 열 렸을 때도 당신은 먼저 들어가 옆으로 비켜나 있었소. 당신이 아무리 지혜가 많다 해도 사실은 변명하지 못할 것이오! 당신은 나를 아주 바보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우문한도는 정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오. 저의 말은 모두 사실이오. 소대협께서 믿지를 않으시니 무어라 자세한 말을 할 수도 없 구려." 소영은 계속 걸음을 옮겨 그를 구석으로 몰았다. 우문한도가 더 뒤로 물러날 수 없는 궁지에 다다르자 소영은 서서히 오른손을 어깨 위로 올렸 다. "우문선생은 약삭빠르고 꾀가 많으니 나는 당신의 변명을 하나도 믿지 못하오. 다만 열쇠만 바 랄 뿐이오. 당신이 정 나를 끝까지 속인다면 심중의 감정이 동하여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오." 우문한도는 막다른 궁지에 몰려 있으면서도 힘없이 말을 받았다. "우리가 금궁에 들어온 이상 그 열쇠는 쓸모가 없게 되었소. 더군다나 이미 이곳을 다녀간 사람 이 있으니 그들도 열쇠를 갖고 있을 게 아니오? 그러한데 내가 어찌 굳이 열쇠를 숨기려는 마음 을 갖겠소. 혹시 그 열쇠가 단 하나뿐이라면 몰라도...나는 절대로....." 소영은 그의 말에 조금 생각해 볼 것이 있었다. '금궁의 신비는 이미 풀렸고 이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몇 구의 시체뿐이니 이후 누가 이곳을 찾 을라구. 그러니 실상 열쇠도 필요없는 것이 아닐까?' 그의 생각이 막 끝나려는데 백리빙의 음성이 들려왔다. "금궁의 열쇠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그것은 엄연히 우리들 것이지 않소? 당신이 만약 그것을 잃 었다면 그에 해당하는 변상을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오. 금궁의 열쇠를 돌려 주든지 그 대가를 주든지 하시오." 우문한도는 난색을 지었다. "어두운 곳에서 잃은 열쇠를 이제 와서 어떻게 찾아내라는 것이오?" "그럼 당신은 우리에게 손해를 보라는 것이오? 그것은 절대로 안 되오. 당신은 열쇠를 찾을 때 까지 장방의 무공비록을 우리에게 맡기시오. 당신이 열쇠를 찾아 돌려 준다면 그 책도 당신에게 돌려 주겠소." 소영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서 내심 우문한도의 간계를 눈치채었다. '우문한도는 필시 금궁의 열쇠를 수중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왜 열쇠를 숨기는지 모르겠는 걸. 그 딴에는 필요가 있어서일 텐데!' 그가 이런 생각으로 막 입을 열려는데 우문한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두 분께선 잃은 열쇠 대신에 장방의 무공비록을 맡기라 하시니 그건 너무하지 않소?" 백리빙이 손을 불쑥 내밀며 말을 받았다. "그럼 금궁의 열쇠를 주세요."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오자 우문한도는 더 버틸 수 없었다. 우문한도는 씁쓸한 웃음을 띠며 품속에서 비록을 꺼내 들었다. "강호에선 언약을 지키는 신용이 제일 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내 잘못으로 당신들의 열쇠를 잃어 버렸으니 응당 변상을 하겠소." 그는 비록을 소영에게 내밀었다. "받으시오. 그러나 당신들 말대로 열쇠를 다시 찾으면, 이것을 돌려 주어야 되오." 소영은 그것을 선뜻 받고 싶었으나 웬일인지 서먹서먹하여 주저하였다. 그러자 백리빙이 손을 뻗쳐 그 비록을 받으려 하였다. 우문한도는 급히 비록을 거두며 말했다. "저는 직접 소대협에게 넘겨 주겠소." 그는 백리빙에게 가벼운 포권을 하여 예를 차렸다. 백리빙은 발끈 토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왜요? 저도 마찬가지 아녜요?" 우문한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틀리오. 소대협은 강호의 기인이고 당신은 낭자요. 그와의 약속은 무겁고 오래 가오." 소영은 어쩔 수 없이 그가 내미는 책을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우문한도는 비록을 소영에게 넘겨 주지 않고 그대로 입을 열었다. "소대협, 만약 내가 열쇠를 다시 찾는다면 약속대로 이 비록을 다시 돌려 주어야 되오." 소영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지요." 두 사람은 조그만 책을 서로 붙잡고 있었다. 우문한도가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부 일언은....." 소영도 신중하게 대답했다. "중천금이오." "좋소. 나는 소대협의 약속을 믿겠소. 당신이 군자이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소. 자, 그럼 ....." 그는 잡고 있던 비록을 놓고 뒤로 두 발이나 물러났다. 소영은 장방의 무공비록을 소중히 품속에 간직하였다.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두 사람의 일을 보고 있던 심목풍이 앙천대소를 하였다. "하하하....." 소영은 그가 여태껏 방관하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라 그리 놀라지 않았다. 침착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심대장주, 무엇이 그리 우습다는 것이오?" 심목풍은 웃음을 그치고는 힐끗 소영을 쏘아보았다. 그는 소영의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고개를 돌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에게 냉랭히 말했다. "우리 먼저 대청을 물러납시다." 세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청을 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백리빙도 소영의 손을 잡아 끌었다. "오빠, 우리도 나가요." 소영과 백리빙이 심목풍 일행을 뒤따랐다. 드디어 대청에는 우문한도만 남게 되었다. 그는 이곳의 기계장치를 거의 알고 있었으므로 여섯 구의 시체를 다시 벽 사이의 밀실로 집어 넣을 수 있었다. 심목풍은 두 부인을 데리고 밖으로 나와 뜰 중앙에 섰다. 소영과 백리빙은 그들과 삼 장 정도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다섯 사람이 뜰에서 약 반 시진쯤 기다리니 우문한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여러 사람을 기 다리게 하였으면서도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이 뒷짐을 지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일행의 앞에 와서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입을 열었다. "교수신공의 건축 기술에 또 한번 놀랐소. 이곳을 만든 지 수십 년이 지났는 데도 기계 장치가 하나도 고장나지 않았구려. 저는 그 여섯 구의 시체를 다시 제자리에 넣어 두느라고 시간이 좀 늦었소이다." 심목풍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유심히 쳐다보고는 무어라 입을 열려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만 두었다. 소영이 그의 말을 받았다. "우문선생은 또다른 일이 있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저었다. "없소이다. 이제 갑시다." 일행은 두 말 없이 그를 뒤따랐다. 우문한도는 품속에서 보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심목풍이 바짝 그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우문형, 우리는 금궁에서 뭐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하였소. 그러나 당신은 쇠를 나무처럼 쉽게 자를 수 있는 보검과 십팔 초 혼천 소법이 적힌 장방의 무공비록을 수중에 넣으셨으니...우문형은 이제 십여 년만 지나면 다시 옛날 장방으로 될 수 있을 게 아니겠소? 그러면 당당히 천하를 호령 하고 무림의 제왕으로 군림하겠소이다." 우문한도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고는 계속 길을 가며 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장방의 무공비록을 소대협에게 맡기는 신세가 되었소. 만약 금궁의 열쇠를 찾지 못한다면 영영 그 비록도 못 찾을 것이 아니겠소." 심목풍은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우문형! 당신은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나는 못 속일 것이오." 우문한도는 그 말에 대꾸도 않고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일행은 묵묵히 그를 따라 처음 들어오던 길로 되돌아 갔다. 우문한도는 이미 길을 익혀 놓은 듯 조금도 주저없이 길을 찾아 나갔다. 몇 번의 꼬부랑 길을 지나자 의외로 빨리 금궁의 입구가 나타났다. 역시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입구에 다다르자 비로소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교수신공은 이 출구에 아주 악랄한 기계 장치를 해 놓았소. 우리는 지금 모두 그가 만들어 놓 은 기계 장치에 생사를 걸어야 되는 것이오. 만약 까딱 잘못하여 그 기관이 움직이는 날이면 우 린 모두 열 명의 고수와 같은 운명에 처하는 것이오."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은 캄캄하여 두 자 앞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을 심목풍이 받았다. "무슨 기계장치기에 그토록 무섭다는 것이오?" "우리 머리 위에는 교묘한 장치로 용수철의 힘을 받고 있는 격침이 있소. 그것은 무려 천 개나 되어 기관을 잘못 건드리면 그 천여 개 독침이 사방 삼 장 안으로 비오듯 쏟아지게 되어 있소. 그렇게 된다면 어떠한 귀신이라도 살아 남지 못하오." 우문한도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섯 사람도 그를 따라 한숨을 쉬지는 않았지만 내심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러고 또 하나가 있소. 그 독침의 홍수 이외에 다른 난관이 있소. 설령 하늘의 도움으로 그 자 리를 피할 수 있어 살아 남는다 하여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오. 이곳은 산꼭대기에서 내려 온 물줄기를 받아 무진장의 물을 보유하고 있소. 그것은 독침이 사라짐과 동시에 터져 무서운 급 류를 내보내오. 그렇게 되면 이 금궁은 모두 물바다가 되어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죽게 되는 것이 오." 심목풍이 잔뜩 겁을 먹은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정말 그렇소?" "좋소. 심대장주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제가 시험해 보겠소." 심목풍은 두 손을 한꺼번에 흔들었다. "아니오, 아니오.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우문형은 어서 금궁의 문이나 여시오. 되도록이면 속히 이곳을 나가고 싶구려." 우문한도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저의 생각으로는 금궁의 문을 여는 것과 기관을 건드리는 것은 동일한 운명이라고 믿소." 소영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하하, 소왕이 남긴 무공을 익힌 소대협과 무공이 뛰어난 심대장주께서 나의 생명을 동시에 노 리니 어찌 내가 살 수 있겠소. 두 분의 무공이 나보다 고강하니 나는 대적할 수가 없는 일 아니 겠소?" 심목풍은 빙그레 웃음을 보냈다. "우문형도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소대협의 속셈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나는 절대로 우문형에게 손을 쓰지 않겠소." 우문한도는 밝은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이오?" "물론 정말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말이라고 믿지 못하겠소." "그럼 우문형은 내가 어떻게 해야 믿겠다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오랫동안 생각하였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땅을 내려다 보면서 어떤 마음의 결 정을 내리는 모양이었다. "심대장주께서 사흘만 여유를 주시오. 그 동안만 나에게 손을 쓰지 않으면 되오. 그동안 물론 백 화산장의 다른 사람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소." "그 후에는?" "사흘이 지나고 말이오? 그때는 당신의 마음대로 하시오." "사흘 후에는 우문형에게 손을 써도 달게 받겠다는 말이 분명하오?" 우문한도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사흘 간의 여유만 있으면 당신을 피할 자신이 있소. 아니 어쩌면 내가 이길지도 모르오. 당신이 너무 자신하기에는 좀 이를 것이오." "흐흐...이제는 제법 큰소리를 치는군. 좋소. 우문형의 조건에 따르겠소." "심대장주가 한 번 약속한 것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우문한도의 말이 막 끝나자마자 돌연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햇살이 굴 속으로 들어왔다. 금궁의 문이 소리도 없이 활짝 열린 것이었다. 문이 열리자 심목풍이 먼저 밖으로 몸을 날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길을 안내하겠소." 그가 몸을 날리는 사이에 금화부인이 소영의 옆으로 다가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동생, 조심해요. 심목풍은 동생을 노리고 있으니...필요할 때는목숨을 걸고 소동생을 돕겠어." 소영은 그녀의 말에 너무나 고마워 무어라 감사의 말을 하려는데, 벌써 그녀는 심목풍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금화부인에 이어 세 번째가 당노부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지팡이를 들고 있다. 이때 시간은 정오였다. 해가 바로 머리 위에 머물고 있었다. 125. 심목풍에게 대항하는 여인들 소영도 그들의 뒤를 따라 막 몸을 날리려는데 돌연 우문한도가 옷소매를 잡았다. "소대협, 제가 몇 마디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소?" 소영은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무슨 말씀이오?" "심목풍이 무엇 때문에 금궁에서 빨리 달려 나갔는지 아시오?" 소영은 그의 말씀을 알았으나 짐짓 반문했다. "모르겠소. 무엇 때문이오?" "그는 자신의 부하를 풀어 계곡의 입구를 봉쇄하려는 것이오. 소대협은 보물을 지니고 있으니 그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래서 우문선생은 나에게 선뜻 장방의 무공비록을 맡기셨군 요." 우문한도는 엄숙한 표정으로 소영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무안의 빛이 어려 있었다. "심목풍과 소대협 사이에서 그것을 보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소. 소대협에게 맡기지 않았더라 면 나는 벌써 심목풍의 암수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당신의 속셈은 나와 심목풍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바라는군요. 당신은 가만히 구경만 하 고 금궁의 보물을 얻자는....." 소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내가 설령 그런 마음을 가졌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지난 일이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생사를 판 가름하는 난관에 부딪쳤소. 그러니 처음과 같이 서로 합심하여 살 수 있는 길을 뚫어 봅시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백리빙이 참지 못하고 불쑥 말참견을 하였다. "당신은 몹시 교활하군요. 벌써 몇 번이나 우리를 배반하였으니 이제는 더 당신을 믿지 못하겠 소. 당신과 이제 손을 잡는다는 것은 마치 호랑이와 가죽을 놓고 흥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우문한도는 조금도 표정이 변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사정은 급박하오. 우리는 뭉치면 살 수 있소. 두 분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지 만 단 둘이 아니오?" "당신은 어떻게 우리 두 사람뿐이라고 단정할 수 있소?" 백리빙의 뚱딴지 같은 물음에 우문한도는 잠시 멍청해졌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응원하는 사람이 있나 보군.' "두 분의 동료가 계곡 밖에 대기하고 있다 하여도 심목풍이 이끄는 부하들보다 적을 것이 분명 하오. 나는 비록 무공은 약하나 머리를 써서 계략을 만들어 내는 데는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하 오. 열 명의 동료보다도 내 지혜가 더 나을 것이오." 소영은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앞으로 사흘 동안은 심목풍이 손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는 왜 두려워할까?' 소영은 의문을 못 참고 우문한도에게 직접 물었다. "당신은 그와 약속을 하였으므로 사흘 동안의 여유가 있지 않소. 그가 손을 안 쓴다고 하였으니 쉽게 골짜기를 나갈 수 있을 텐데 어찌 그러시오?" 우문한도는 이미 그런 물음을 예상했었는지 대번에 말을 받았다. "심목풍은 아무리 약속을 하였어도 믿을 만한 인물이 못되오. 그가 나를 밖으로 내보낼 것 같 소? 그는 시간만 약속했지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약속하지 않았소. 즉 나보고 이곳에서 사흘을 허송세월한 후 곱게 죽으라는 것이오. 그러니까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로 사흘 동안 더 살라는 것이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소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소대협, 당신이 나와 합심한다고 응하면 즉시 장방의 무공비록을 절반 드리겠소."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당신은 우리의 금궁 열쇠를 잃었으니 이제는 그 비록을 달라 할 수 없소." 그러자 우문한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품속에서 금궁의 열쇠를 꺼냈다. 소영이 그 에게 넘겨 주었던 바로 그 열쇠였다. 소영과 백리빙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하였다. 우문한도가 열쇠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것이 맞소?" 소영은 그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대뜸 크게 소리쳤다. "당신은 줄곧 수중에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구려." 우문한도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소대협께선 앞서 약속한 것이 있으니 모른 체하지는 않을 줄 아오." 그가 들고 있는 열쇠를 암암리에 살펴보니 틀립없는 금궁의 열쇠였다. "우문선생, 당신의 꾀에 탄복하였소. 그럼 어떻게 하여 비록에 적힌 무공을 나누어 갖자는 것이 오?" "그럼 언제 이것을 가르겠소?" 소영은 이미 우문한도와 합심한다는 결심을 굳힌 터였다. 우문한도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우선 심목풍의 세력권 밖으로 나간 후에 나누기로 합시다." 하고는 몸을 옆으로 비켜 길을 터주며 말을 계속했다. "소대협, 이제 내려가도 되겠소. 그러나 그들의 암수를 조심하시오." "고맙소." 소영은 짤막한 말과 함께 금궁의 출구를 나가 절벽 밑으로 내려갔다. 우문한도의 말대로 심목풍은 부하를 사방으로 풀어 계곡을 완전히 봉쇄하여 놓았다. 소영은 땅 으로 내려 서자마자 주위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그가 내려선 곳에서 오른쪽으로 금화부인과 당노부인 그리고 주조룡이 보였다. 그리고 왼쪽으로 는 검문쌍영과 강남의 사 공자가 빈틈없는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영은 무엇보다 강남 사 공자가 이곳에 나타나 심목풍을 돕는 것이 이상하였다. 그는 강남 사 공자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 세상이 좁군. 이곳에서 여러분들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였소. 그동안 모두들 안녕하셨소?" 강남 사 공자는 한몸같이 고개를 숙여 답례하였다. "소대협도 안녕하셨소?" 소영은 그들과 형식상의 인사를 주고받은 후 눈길을 돌려 정면에 서 있는 심목풍에게 말했다. "심대장주! 당신은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써 내 앞길을 막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오?" 심목풍은 음흉한 웃음을 소영에게 보냈다. "흐흐흐...이제 금궁을 나왔으니 그동안 금궁에서 약속한 모든 것은 무효가 되었소." "그래서....." 소영의 말에는 살기가 넘쳐 흘렀다. 이때 백리빙과 우문한도가 소영의 옆으로 내려섰다. 심목풍은 그들을 상관치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소영에게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도 자네를 삼제라고 부르고 싶네. 과거의 일은 모두 잊고 지금에라도 백화산장으로 돌아오게." 소영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당신을 도와 악행을 저지르며 강호를 제패하자는 것이오?" "그렇다네. 이 형이 강호를 제패한다고 삼제에게 무슨 해가 있나? 내가 좋아지면 삼제도 더욱 명성을....." "자고로 얼마나 많은 무림 인물들이 그런 생각을 하였겠소. 그러나 소원을 이루었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였소. 당신의 손은 벌써 오래 전부터 죄없는 사람들이 뿌린 피로 물들어 있소. 그리고 일신은 온갖 죄악으로 꽉 들어차 있소....." 말을 하는 소영의 신색은 죽음도 불사한다는 굳은 표정이었다. 듣고 있던 심목풍이 계속 듣기가 거북한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두지 못하겠나!" 소영은 힐끗 눈길을 돌려 주위를 살피고는 코웃음과 함께 다음 말을 꺼냈다. "나는 옛날의 형제였소. 정분을 생각해서 당신을 용서하겠소. 지금이라도 백화산장을 해체하고 다시는 나쁜 짓을 안한다면 내 스스로 당신 수하로 들어가겠소. 그리고 강호의 영웅들에게 일일 이 찾아다니며 당신 대신으로 내가 용서를 빌겠소. 그들도 당신이 마음을 바로잡고 참회한다면 당신의 지난 죄악을 눈감아 줄 것이오." 심목풍은 돌연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웃음은 언제인가 들었던, 상처를 받은 맹수의 울부짖음 같았다. 소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얼마가 지나자 그는 서서히 웃음을 멈추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삼제의 말은 나를 모욕하는 것이군." "그렇소. 당신을 꾸짖는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심목풍은 악당의 두목답게 소영의 말에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소대협, 자넨 이미 험지에 몸을 두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일세. 지금까지 자네가 내 욕을 한 것 으로 보아서는 당장 목을 베고 싶지만 참겠네. 나도 자네를 동생으로 부르던 시절을 잊지 못하네. 그러니 다시 한 번 생사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네. 자네가 목숨을 걸고 싸운다손 치더라 도 이 골짜기를 살아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네. 어떡하겠나?" 소영은 고개를 돌려 백리빙과 우문한도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소영과 등을 맞대고 암암리에 진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적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느끼자 조금 마음이 안정되었다. "지금 당신의 무공은 옛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오. 당신의 무공이 그때 그대로라면 나는 충분히 당신을 대적할 수 있소." 심목풍은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나는 자네의 마음이 돌아설 것을 은연중 기다렸네. 그래서 자네를 도와 몇 번 독수를 비켜나게 한 것이네. 지금 나는 천하의 각 대문파 대부분의 실권을 쥐고 있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내 한 마디 명령이면 강호의 대부분의 문파를 몰살시킬 수 있다는 것이네. 그런데도 자네는 강호의 편 이 되겠나?" 소영은 그에게 대답을 안할 수 없어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의 생각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오. 당신이 침투시킨 첩자는 지금쯤 각 대문 파의 고수들에게 덜미를 잡혔을 것이오." 소영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확실치 못한 것이라 조마조마했다. '저놈이 어떻게 받아 들일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러나 이런 위급한 순간에는 거짓말로라도 상대의 기세를 꺾어야 했다. 소영으로서는 참으로 오랜 만에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의 몇 마디 말은 심목풍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심목풍은 뜻밖의 말에 한쪽 팔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호를 제패하는 데 있어 그것만을 믿었더니.....' 그러나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침투시킨 인물들은 모두 신분을 감추고 있으며 각 문파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데 어찌 그들을 알아낼 수 있을까?" 소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옳지, 상대는 내 말을 곧이 들었구나.' "내가 알고 있는데 어찌 그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겠소." 심목풍은 냉소를 띠었다. "흐흐, 자네는 정녕 나와 적이 되겠다는 것이군. 그것도 영원히 변치 않고....." "당신이 내 권고를 받아 들이지 않는 한 목숨을 걸고 대결하겠소." 심목풍은 눈썹을 치켜 세웠다. "우리는 지금껏 진정으로 자웅을 겨루어 보지 못했다. 오늘에서야 너의 무공을 시험해 볼 기회 가 생긴 것 같구나." 소영은 상황의 흐름이 한바탕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직감하였다. 그래서 짐짓 약함을 보 이지 않으려고 미소로 답했다. "소생 목숨을 걸고 당신의 무공에 맞서겠소." 그러자 등을 맞대고 대치하고 있던 우문한도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심목풍에게 물었다. "심대장주, 금궁에서 나와 약속한 사흘 간의 여유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설마 약속을 어기시는 것은 아닐 테지요?" 그의 말에 제일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금화부인이었다. '저놈은 수작을 부려 도망치려고 하는구나. 그러나 그를 놓아 줄 수는 없다. 그가 이곳에서 나가 면 소영은 한 사람의 동료가 줄어들게 되지. 그를 그대로 묶어 놓아 소영을 돕도록 해야지.' 그녀는 심목풍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시오? 우문선생께선 가시려고 그러시오?" 우문한도는 침착을 잃지 않으려고 괜한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되물었다. "부인께선 저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소?" "잘 물었소. 나는 선생을 마음대로 놓아 줄 수는 없지만 이곳을 마음대로 벗어나는 것은 용서치 못하오." 그녀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말을 이었다. "우문선생께서 저를 이기고 가실 수 있다면 모르지만, 어디 선생 마음 내키는 대로 방향을 잡고 가보시겠소?" 우문한도는 그제서야 그들 뒤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심목풍 이하 금화부인 등 빈틈없이 몇 겹으로 형성된 포위망이 펼쳐 있었다. '아! 이제는 부득이 손을 써서 뚫을 수밖에 없구나. 그러나 상대는 많은 고수와 뒤를 밀어 주는 힘이 있으니 도저히 상대를 꺾을 수는 없다. 소영의 무공이 높다 하여도 심목풍에 대적할 수도 없으니...그를 따르는 낭자가 있어도 상대는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이니 역시 힘이 모자라고.....' 그는 눈길을 돌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우문한도는 전날 오랫동안 백화산장에 머물러 있어서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에 대해 잘 알았다. 그녀들은 비록 심목풍과 함께 행동하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심목풍이 이곳으로 데리고 온 주조룡이나 강남 사 공자는 과히 무공이 높지 않다. 지금 상대는 심목풍 이외에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이 제일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만약, 만약 그녀 들이 태도를 바꾸어 심목풍을 공격한다면 우리쪽도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망성이 있다.' 우문한도는 암암리에 이렇듯 쌍방의 실력과 승산을 계산했다. 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승부의 면으로 본다면 소영쪽이 불리하다. 그렇다고 나 혼자 이곳을 뚫을 수도 없으니 최악의 경우에는 소영과 힘을 합해야겠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이 소영을 도울 희망 도 있으니.....' 그의 이 같은 긴 생각은 잠시 동안 이루어졌다. 마음을 결정하자 어느 정도 배짱이 생겼다. 그는 심목풍에게 다시 다그쳐 물었다. "어떡하시겠소? 나는 심대장주의 대답을 듣고 싶소." 심목풍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우문형! 가고 싶으시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약속을 깨뜨릴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우문한도는 씁쓸하게 웃었다. "심대장주, 고맙소이다. 당신이 소제를 보내 주시겠다니 그 인격을 존중하겠소이다. 그러나 심대 장주 이외에 다른 사람이 소제를 막는다면 어쩌시겠소? 다른 사람에게는 뭐라 말하지 않으시겠 소?" 심목풍은 눈길을 돌려 금화부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금화부인은 이곳 사람이 아니오. 묘강에서 왔으며 백화산장의 인물도 아니오. 더군다나 당신들 사이의 개인적인 원한관계에 참견하고 싶지 않소." "심대장주는 한 마디로 우리의 약속을 깨뜨리겠다는 말씀이구려. 그러시다면 솔직히 말하실 것 이지 무얼 그렇게 핑계를 대시오. 그런 수법은 심대장주가 할 만한 일이 못되오." 심목풍은 담담히 웃었다. "우문선생은 언제나 잔꾀가 많소. 그러므로 금궁에서 소대협과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 무슨 흉 계를 꾸몄을 것이오. 틀림없이 소대협과 힘을 합하여 이곳을 빠져나가자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오. 안 그렇소? 지금 당신을 놓아 준다면 강호에서 고수들을 데리고 올 터이니 어찌 그런 것을 바라 겠소. 당신을 놓아 주기보다는 호랑이를 우리 밖으로 내놓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오. 나는 당신과 의 약속 때문에 직접 손을 쓰지 못할 뿐이오." "심대장주는 너무 큰소리 치지 마시오. 내가 이곳에 남는다면 오히려 소대협을 돕는 결과가 될 뿐이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은 강호에서 존경하고 있는 소대협과 함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시 오. 훗날 강호에서는 당신을 영웅이라고 칭할 것이오. 얼마나 좋은 일이오." 그 말을 들은 우문한도의 표정은 대뜸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에는 말할 수 없이 날카로운 살기가 서렸다. 서로 침묵을 지키며 잠시 대치하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깨뜨리며 우문한도가 천천히 몸을 돌려 소영에게 다가왔다. 그는 품속에서 보검을 꺼내어 소영에게 건네 주었다. "저의 낮은 무공으로는 이 단검을 갖고 있을 자격이 없소. 소대협에게 단검을 드리니 요긴하게 쓰시오. 이 단검은 무예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소지하면 절기한 위력을 지닐 것이오." 소영은 많은 군호들이 보는 앞이라 사양하지는 않았지만 내심으로 꺼림칙하였다. '이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건지려는 뜻이 실패하자 비로소 나를 돕겠다는 거군. 이런 것은 강호 에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비겁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형편으로는 이런 것을 따질 수 없다. 그가 나를 도와준다니 우선 받아 들이자.'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우문한도도 몇 가지 추측을 하였다. '소대협은 나의 비겁한 행동을 탓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에게 사과를 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야지.....' 그는 소영에게 내민 단검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나는 소대협을 돕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심목풍의 인간됨을 알아보기 위함이었소. 심목풍이 과연 약속을 지키는 위인인가 하고 말이오. 이제 그가 자처하듯이 강호를 제패하겠다는 인물이 일개 하찮은 약속을 저버렸다는 것은 실로 수치스러운 일이오. 이 소문은 곧 강호에 퍼져 그의 인간됨을 모두 알게 될 것이오. 소대협께선 다른 생각 마시고 어서 단검을 받으시오." 소영은 마지못하여 그의 단검을 받아 들었다. "우문선생, 감사하오. 제가 이곳에서 죽지 않으면 반드시 선생에게 돌려 드리겠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려줄 필요없소. 나는 검을 사용치 않으니 필요없는 것이오." "공로가 없으면 녹을 받지 않는 법, 그런데 어찌 내가 이런 귀중한 보물을 받을 수 있겠소." "보검은 협사가 지녀야 되고 미인은 영웅에게 시집가야 된다고 하였소. 그러므로 이 단검은 소 대협에게 어울리오." 소영이 그래도 사양하려는 데 백리빙이 말참견을 하였다. "그렇다면 제가 오빠 대신에 감사를 드리겠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면서 정중히 손을 모아 허리를 굽혔다. 우문한도는 의외의 일에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저 계집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나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롭겠군.' 그는 절세의 보검을 아낌없이 소영에게 주면서도 그에게 감사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을 내심 언짢 게 생각했다. 그러나 표면으로는 나타내지 않고 공손히 답례하였다. "낭자 말씀이 너무 무겁구려." 심목풍은 이들이 하고 있는 모양을 주시하고 있다가 소영에게 단검이 쥐어지는 것을 보고는 흠 칫 놀랐다. '저 보검을 소영에게 넘겨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렇다면 조금.....' 그는 요 근래 소영과 몇 차례 수를 나누어 본 경험이 있어 그의 고강한 무공을 족히 알고 있었 다. 더군다나 소영의 상승내공은 무시 못할 경지에 도달하여 초인적인 실력이었다. '그런데 저놈에게 단검이 쥐어졌으니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결과가 되지 않았나! ' 그는 내심 두려움을 느꼈지만 짐짓 냉랭하게 말했다. "소대협, 준비되었나?" 소영은 서서히 단검을 가슴께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다 되었소. 이제 덤벼 보시오." 심목풍은 고개를 돌려 검문쌍영을 쳐다보았다. '우선 저들로 하여금 소영의 단검을 시험하게 하자.' 그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일을 하는 인물이었다. "두 분께선 평생 검을 다루었으니 응당 소대협의 상승 검법을 배워야 되지 않겠소? 우선 두 분 께서 먼저 나가 보시오." 검문쌍영은 소영의 검술을 두려워하였지만 그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죽음의 비장한 각오를 나누었다. '지금 나가면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게 힘껏 싸우다 죽자.' 그들은 따로따로 싸운다면 금방 죽을지 모르나 둘이 한꺼번에 협공하면 몇 수 겨룰 수 있으리라 믿었다. 죽음을 두려워 않고 나서는 사람의 마음은 적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검문쌍영은 일제히 장검을 뽑아 어깨 위로 치켜 세웠다. '그러나 우리쪽의 인원이 많으니 만약 우리에게 위험이 닥치면 도와 주겠지.' 두 사람은 이런 희망도 가졌다. 우문한도는 검문쌍영이 먼저 도전해 옴을 보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심목풍과 소영의 싸움은 생사를 판가름하는 것이다. 만약 소영이 상대에게 화를 당하여 죽게 되면...좋다. 나도 목숨을 바치겠다. 그러나 싸움을 하여 목숨을 잃기보다는 스스로 자결하리라. 그 리고 다행히 소영이 심목풍을 물리친다면 나머지 인물들은 지레 겁을 집어 먹고 도망갈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판가름은 심목풍과 소영의 대결에 달려 있다.' 그는 심목풍의 음흉한 계책도 저울질하여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나오지 않고 검문쌍영을 내보내다니 무슨 속셈이 있는 것 같군.' 우문한도는 뒷걸음질로 소영에게 다가갔다. "소대협, 상대는 우선 당신의 체력을 소모시킬 심산인 것 같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심목풍에게 말했다. "심대장주는 차륜(車輪)전법으로 나오실 모양이구려." 심목풍은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흐...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소." 그 사이에 벌써 검문쌍영이 소영의 일 장 앞에까지 다가왔다. 소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그들을 노려본 다음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문쌍영과 소영의 사이가 거의 반 장 정도 되었을 때 돌연 "잠깐 멈추시오!"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백리빙이었다. 그녀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몸을 날려 소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소영이 무어라 제지하려 는 기색이 보이자 대뜸 입을 열었다. "오빠, 잠깐 기다리세요." 그리고는 검문쌍영에게 눈길을 보내며 냉랭하게 말했다. "두 분께선 저의 오빠와 싸우기 전에 우선 저를 물리쳐야 되오." 검문쌍영은 암중으로 소영과 부딪치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그런데 뜻밖에 여자가 나서니 여 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 '이 계집은 누구인가? 그러나 소영과 맞서는 것보다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제까짓 계집이 얼 마나 높은 무공을 가졌을라고.....' 백리빙을 향해 먼저 추풍검 배백리가 말을 걸었다. "낭자 이름을 대시오." "우리는 지금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하지 않소? 친구로 사귀는 것도 아닌데 어찌 내 이름을 묻 소?" 무영검 담통이 말을 받았다. "그러시오? 낭자께서 그렇게 싸우고 싶으시다면 무기를 드시오." 백리빙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두 분께선 저에게 빌려줄 무기를 안 갖고 오셨나 보군요?" 배백리가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낭자께선 살기가 싫으신 모양이구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갑자기 장검을 내리쳤다. 그의 날카로운 검법은 강호에서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한 줄기 검광을 번쩍이며 사정없이 백리빙의 목을 노렸다. 백리빙이 건방지게 무기도 들지 않고 검문쌍영을 상대하자 우문한도는 적지 않이 걱정 되었다. '저 낭자는 마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호랑이 같구나. 검문쌍영이라 하면 강호에서도 무 시하지 못하는 인물인데...그들의 검법은 바람도 잡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생각으로 그녀의 무모한 행동을 말리려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백리빙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백리빙은 상대의 검이 움직이려는 순간 어깨를 약간 흔들어 공중으로 솟구쳤던 것이다. 배백리는 자신의 재빠른 일격이 빗나가자 내심 흠칫했다. '강적이로구나!' 그가 이런 생각을 갖고 뻗었던 검을 거두려 하였다. 그가 막 몸을 움직이려는데 돌연 검을 쥐고 있던 손목이 마비되며 다시 손가락이 저절로 풀렸 다. "짱그렁!" 배백리가 들고 있던 장검이 땅에 떨어지자 주위의 모든 군호는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배백리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마비된 손목을 쳐다보았다. 손목에는 어느 새 파란 빛을 띤 독침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백리빙은 기묘한 신법으로 몸을 솟구쳐 상대의 일격을 피하고, 상대가 당황하는 기회를 이용하 여 독침을 뻗은 것이었다. 이것은 일순간의 일이었다. 그녀는 땅으로 내려서며 재빠르게 배백리의 장검을 집었다. 백리빙의 놀라운 신법에 정신을 잃고 멍하니 있던 담통은 백리빙이 장검을 집어 드는 것을 보고 서야 제정신을 찾았다. 그는 냉랭하게 독설을 퍼부었다. "야! 이 계집애야. 어디서 함부로 날뛰느냐? 네 비록 한 수는 이겼지만 기어코 목을 잘라 독수리 밥으로 만들겠다." 그의 검법은 조금 전의 상대보다 더 큰 살기를 지니고 있었다. 담통은 연속 삼 장을 공격했다. 그러나 백리빙을 곤경으로 몰아넣지는 못하였다. 우문한도는 두 사람의 싸움을 방관하면서 내심 감탄하였다. '매우 무공이 고강한 계집이로군. 적 하나를 거뜬히 처치하고.....' 그는 백리빙의 분투를 보고 그동안 쌓였던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가시는 것을 느꼈다. 배백리는 자신의 무공을 그리 약하게 생각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여자에게 두 명이 협공하니 틀 림없이 상대를 누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이없게 한 수에 당하고 마니 정말 기 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손목에 꽂혀 있는 독침을 뽑아내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계집애야. 나하고 다시 자웅을 겨루자." 그러나 독침에 찔린 손목이 점점 부어오르고 그 주위가 검게 변색했다. 이제는 오른손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백리빙과 담통의 싸움은 치열하였다. 그들의 싸움을 지켜 보던 심목풍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배백리에게 다가왔다. "바늘에 독이 있는 것 같소?" 배백리는 말없이 몸을 돌려 오른손목을 그에게 보였다. 벌써 그의 손목은 퉁퉁 부어 올라 사람 의 팔 같지가 않았다. 심목풍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백리빙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 바늘에는 맹독이 묻어 있소. 당신은 앞으로 한 시진 내에 그 독이 심장을 파고들어 목숨을 잃게 되오. 독을 제거할 수 있는 약은 나 이외에 아무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오." 심목풍은 흥! 냉소를 치고는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낭자는 말투가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지 않소!" 그리고는 품속에서 조그만 약병을 꺼내 두 알의 영단을 꺼냈다. "이것을 먹어 보시오. 당신의 독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오." "심대장주 당신의 해약은 아무 소용도 없어요. 그 독은 우리 북해 독문의 것이오." 심목풍은 잠시 생각하더니 능글맞은 웃음을 보냈다. "만약 낭자의 말이 맞다면 나는 부득이 낭자에게 손을 쓰겠소. 낭자를 사로잡아 해약을 뺏겠다 는 말이오." 백리빙은 계속 담통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말했다. "당신이 도전을 한다 해도 나를 사로잡지 못할 것이오. 어쩌면 당신이 도리어 내 손에 상할지도 모르오." "정말 건방진 낭자로군." 심목풍은 이렇게 혼자말처럼 내뱉고는 슬그머니 백리빙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재빠르게 소영이 달려 나와 심목풍의 앞을 막았다. 그는 정중히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 다. "심대장주, 이제야 손이 근질근질하시오? 그렇다면 제가 모시겠소." 심목풍은 걸음을 멈추고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에게 말했다. "소대협의 무공이 고강하고 단검을 지녔으니 당신들 둘이서 덤비시오. 나는 저 건방진 계집을 사로잡아 해약을 빼앗아야 되겠소." 우문한도는 그의 말에 언뜻 느끼는 바가 있었다. '심목풍은 자꾸만 소영을 피하는군. 그는 손쉽게 낭자를 누른 후 체력이 소모된 소영을 덮치려 는 수작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심목풍의 계략에 말려 들어.....' 그는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의 행동이 궁금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고 두 여인을 주시하였다. 두 여인은 마치 심목풍의 말을 못 들은 것같이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였다. 심목풍은 양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금화부인에게 다그쳐 물었다. "부인! 저의 말을 못 들으셨소?" 금화부인은 담담히 대답했다. "들었소." 심목풍은 당노부인에게 물었다. "당노부인도 들으셨소?" 그녀도 역시 담담히 대답했다. "들었소." 심목풍의 음성을 약간 높고 거칠어졌다. "두 분께선 못 들은 것도 아닌데 어찌 모른 척하시오?" 우문한도는 내심 개가를 불렀다. '옳다구나. 저들이 먼저 집안싸움을 한다면 더욱 전세는 우리쪽이 유리하다.' 금화부인은 독충을 언제 어느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묘기를 지니고 있었다. 당노부인도 무림 암 기의 으뜸으로 생각되고 있는 고인이다. 금화부인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오늘의 싸움은 오직 심대장주의 개인사정이오. 그리고 당신은 나를 의심하고 있소. 그런데 내가 당신의 말대로 소대협을 상대하여 그를 누른다 하여도 나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오. 이 것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니 굳이 밝히지는 않겠소. 지금 내가 소대협과 싸운 후 기력이 약한 틈을 이용하여 당신에게 당하는 것은 원치 않소." 심목풍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부인은 정말 걱정도 팔자로군요. 두 분은 무공도 고강하고 몸에 절기를 지닌 분인데 어 찌 해치겠소. 두 분은 언제까지나 우리 백화산장의 귀빈이오." 심목풍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놓아라!" 하는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담통이 장검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소영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급히 소리쳤다. "빙아야!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 백리빙은 상대의 장검을 떨어뜨린 기세로 그의 손목을 자를 수 있었지만 소영의 말에 손을 거두 었다. 그녀는 담통을 날카롭게 쏘아보고는 소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배백리를 가리켰다. "빙아야, 저분에게 어서 해약을 드려라." 백리빙은 빙그레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 품속에서 노란색의 영단을 꺼내어 배 백리에게 던져 주었다. "해약이니 어서 먹으시오." 배백리는 조금도 주저없이 그녀의 해약을 받아 먹었다. 심목풍은 배백리가 해약을 먹는 것을 보고 크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표면상 나타내지 는 않았다. 금화부인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심대장주, 정말로 당신이 우리들을 신임한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들어 주시겠소?" 심목풍은 묵묵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두 부인이 지금 나를 배반하면 적에게 무척 유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녀들의 부탁 이 무엇인지 우선 들어 주고 나중에.....' 그는 입가에 듬뿍 미소를 담고 부드럽게 물었다. "부인, 무엇인지 말씀해 보시오." "백화산장의 모든 사람은 지금 당신의 독수에 걸려 있지 않소? 심지어 주 이장주도 말이오. 그 동안 우리는 당신의 숨은 비밀을 거의 알고 있소. 그러니 당신의 악랄한 마음으로 보아 우리를 그냥 놓아 두지는 않을 것이오." 금화부인의 말에는 죽음을 각오한 어떤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무공이 당신만 못하니 죽어도 변명할 말이 없소. 당신은 우리들에게 독수를 뻗쳐 십 일 에 한 번씩 해약을 먹게 만들어 놓지 않았소? 당신이 우리를 신임한다면 나와 당노부인의 독을 풀어 주시오." 심목풍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하하, 그런 불만이 있었으면 왜 진작 말하지 않으셨소?" "내가 만약 진작 이야기하였다면 지금쯤 썩은 송장으로 변했을 것이오." 심목풍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부인께서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나를 곤경에 빠뜨리자는 것이 아니오?" "그렇소. 오늘의 이 기회는 어느 때보다도 좋소. 오늘 미련을 갖고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다시 찾을 수 없을 것 같소." 심목풍은 시선을 당노부인에게 돌렸다. "당노부인도 그렇소?" 당노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화부인과 같은 생각이오." "좋소. 그러나 내가 두 분의 부탁을 들어 주고 싶어도 지금은 그럴 수가 없소." 당노부인이 다그쳐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해약이 없다는 것이오." 금화부인이 나섰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당신을 따라야 된다는 말이오?" 심목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두 분의 독을 제거할 수 없는 것은 아니오." "그럼 어째서 해약이 없다는 것이오?" 심목풍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부인은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두 분의 독을 제거할 수 있는 약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수중에 없다는 말이오. 백화산장에 돌아가면 있으니 내일까지 드리리다." "믿을 수가 없소." 당노부인은 갑자기 품속에서 녹비장갑을 꺼내었다. 그녀는 그것을 왼손에다 끼고 다시 품속에서 조그만 독사를 꺼냈다. "심대장주께선 저의 당문의 절기가 무엇인지 아시오?" "암기가 아니오?" 당노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절반만 맞췄소. 우리 당가의 절기로는 암기도 있지만 그보다 독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오." 그녀는 들고 있는 독사를 가리켰다. "바로 이것이오. 당신이 나에게 독을 썼듯이 나도 독을 써서 피차가 죽음을 택하겠소." 강호를 위협하고 수많은 부하를 부리는 심목풍도 이때만은 가슴이 섬뜩하였다. 우문한도는 그들의 암투를 보고 내심 기쁜 마음이 지나쳐 절로 미소가 흘렀다. 그는 소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소대협이 이런 때에 말을 꺼내 유리한 상황을 무너뜨리기 전에.....' 이런 생각으로 소영에게 바짝 다가가 입을 열었다. "소대협, 강호에는 저런 일이 보통이오. 저들이 암투를 할수록 우리에겐 유리하오." 소영은 무표정하게 우문한도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언제나 거만하고 냉정을 잃지 않던 심목풍도 지금만은 얼굴을 붉히고 씨근거렸다. "두 분은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금화부인은 사태가 험악해짐을 직감하고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그의 급습에 대비하였다. 당노부인도 그를 경계하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이런 경우에는 우리도 못살고 당신도 온전치 못할 것 같소." 126. 백리빙의 순결한 연정(戀情)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긴장이 장중을 감싸고 있을 때,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 다. "심장주께서는 지금의 형세를 한 번 짐작해 보시오. 당신 심장주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 중 누 가 당노부인의 암기를 피할 수 있겠소?" 그녀는 비록 당노부인의 암기만을 들추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소영과 자신도 심목풍을 공격 할 수 있다는 뜻도 포함한 것이었다. 그러자 심목풍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내가 만약 포위를 뚫고 나간다면 두 분은 해독약을 얻기 어려워 독의 발작으로 인해 죽음을 면 치 못할 것이오." 금화부인이 야무지게 받아 말했다. "이것은 무공과 기지와 재주가 합쳐진 한 판의 큰 도박이므로 승부를 가리기 전에는 무슨 결과 와 변화가 있을지 예측할 수 없지요. 대장주는 비록 신용다지(神勇多智)하지만 이런 상황 아래에 서는 반드시 이긴다고 단언할 수 없으며 우리도 꼭 패한다고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심목풍은 코웃음을 쳤다. "말하자면 당신은 도박을 하고 싶다는 것이군요?" "그렇소." 심목풍은 눈길을 당노부인에게 돌리며 물었다. "부인은 어떻소? 역시 도박을 하고 싶으신지요?" 당노부인은 잘라 말했다. "판국이 이렇게 됐으니 이 늙은 몸도 안할 수 없지." 심목풍은 표정이 험악해지며 큰소리로 외쳤다. "좋소! 두 분께서 정 원한다면 나는 상대해 줄 수밖에 없구려."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소영과 우문한도를 쏘아보았다. "그대와 우문한도가 힘을 합친다 해도 내가 포위를 뚫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오." 금화부인이 당노부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돌연 뒤로 다섯 발자국 물러서더니 멈추었다. 심목풍은 앙천대소하며 말했다. "이제 자네는 먼저 그들을 데리고 물러가게." 주조룡은 가볍게 읍하고 강남 사 공자를 데리고 급히 돌아갔다. 금화부인과 우문한도가 대체 몇 사람을 막아야 할는지 미처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이미 주조 령은 군호들을 거느리고 사오 장 멀리로 달려 나갔다. 심목풍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이렇게 나 혼자만 남았으니 여러분 중에서 누구든지 먼저 나오시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 우문한도는 모두 심목풍의 공력이 매우 고강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들이 먼저 손을 댄다면 역시 먼저 그의 반격을 받게 되며 그 반격의 기세는 필시 배산도해(排山 倒海)와 같이 맹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은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을 굳히고 있었으나 역시 한편으로는 꺼려져서 감 히 선수를 쓰지 못했다. 소영은 사방을 한 번 둘러보더니 나직한 소리로 백리빙에게 말했다. "빙아, 멀리 물러서 있거라." 하고는 큰 걸음으로 심목풍을 향해 걸어 나갔다. 심목풍은 엄숙한 얼굴로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 지 않고 두 손을 모두 내린 채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은 것 같았 다. 소영도 감히 바짝 접근하지 못하고 그와 다섯 발자국 정도의 거리에서 멈춘 후 입을 열었다. "대장주, 어서 무기를 드시오." 그러자 심목풍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적수공권으로 그대의 검초와 겨루고 싶소." 소영도 천천히 단검을 거두었다. "그럼 나도 쌍장으로 맞이하겠소이다." 심목풍은 소영의 말에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우리는 서로 생명을 건 결투인데 이미 그대의 손에 있는 무기를 어찌 쓰지 않으려고 하는가?" 소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리 당신의 행위가 만인의 응징을 받아 죽어 마땅한 정도라고 해도 나와 당신 사이는 한때 서로 동맹을 맺었던 사이오. 비록 의리를 끊고 절교를 하였다 해도 남은 정은 아직 미진하니....." 별안간 심목풍이 매섭게 소리쳤다. "닥쳐라!"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의롭지 않지만 나는 과거의 정리를 아주 끊을 수 없으니 만일 당신이 오늘 싸우고 싶지 않다면 해독약이나 남겨 놓고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대는 몇 사람의 힘으로 나를 여기에 잡아둘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이곳을 나간다 해도 내 힘만으로 포위를 뚫고 나갈 것이다." "나와 당신의 싸움은 다른 사람과 관계가 없으니 꼭 싸우고 싶다면 마음껏 손을 써 보십시오." 심목풍은 냉소하며 물었다. "그대는 나에게 정말 한 수를 양보할 작정인가?" "나는 그런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오. 그러나 당신 심대장주가 먼저 손을 쓴다면 자연 그렇게 되 는 거지요." "너무 날뛰지 말고 어서 먼저 공격을 하오." "심대장주께서 신분이 높으시니 그 말에 따르겠소이다." 소영은 말과 함께 오른손을 들어 심목풍의 앞가슴을 향해 일 장을 뻗쳤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 우문한도 등은 소영과 심목풍이 싸움을 벌인다면 필시 석파천경(石破天驚)의 악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긴장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고 두 사람의 싸우는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소영이 쳐낸 장력은 점차로 속도가 느려지며 천천히 심목풍의 가슴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심목풍은 여전히 똑바로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영의 일 장이 심목풍의 가슴에 거의 닿을 순간 심목풍은 돌연 오른장을 재빨리 젖혀 소영의 장력을 맞받았다. 심목풍의 반격은 너무나 빨라 소영이 피하기에는 때가 늦었으므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쌍장이 맞부딪쳤다. 소영은 일순 몸의 균형을 잃어 뒤로 다섯 발짝 물러선 다음 겨우 몸을 가누었다. 심목풍은 두 어깨가 흔들거렸으나 끝내 버텨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군호들의 눈에는 소영의 준수한 얼 굴이 붉게 상기되고 마치 술에 취한 것같이 보였다. 잠시 후 소영은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하고는 말했다. "대장주의 내력은 과연 웅휘(雄揮)하군요." 심목풍은 한바탕 앙천대소를 하더니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그래도 나와 싸울 능력이 있소?" 소영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비록 입은 상처가 가볍지는 않으나 얼마든지 싸울 수 있소." 말끝을 맺는 것과 동시에 비호같이 앞으로 돌진하면서 쌍장을 연속 휘둘러 사 장을 공격했다. 이 사 장은 초식이 쾌속하기 짝이 없어 마치 전광석화와 같았다. 그러자 심목풍은 쌍장을 휘둘러 역시 쾌속한 장법으로 소영의 장을 모두 받아냈다. 소영은 재빨리 몸을 날려 뒤로 여덟 자나 물러났다. 백리빙은 단번에 소영에게로 달려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물었다. "오빠, 상처가 중하지 않아요?" 그때 또다시 소영은 두어 번 비틀거리더니 다시 한 모금의 선혈을 토했다. 그는 성품이 강하여 중상을 입고도 투지는 더욱 격앙되어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걱정마라." 백리빙은 소영이 두 번이나 피를 토하는 것을 보자 내상이 매우 중함을 깨달았다. 그녀는 안색 이 변하여 급히 소영을 부축하며 말했다. "오빠는 상처가 매우 심해요. 더 이상 싸우지 못합니다." 소영은 천 년 묵은 돌버섯을 많이 먹었고 또한 장산패가 건청강기의 상승내공을 전수해 주었으 며 이미 약간의 성취가 있었으므로 인내력이 몹시 강하여 보통 사람과 크게 달랐다. 그는 곧 암암리에 진기를 모은 다음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정의를 위해 악마를 굴복시키고 죽는다면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죽으면 안 돼요. 오빠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 말을 하는 백리빙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소영은 호탕하게 웃으며 타일렀다. "사람이 백 살을 산다 해도 죽음은 면치 못하는 법, 내가 만약 나의 소신대로 행동하다 죽어 무 림에 이름을 남긴다면 무슨 미련이 있겠니? 빙아, 어서 나를 놓아라." 백리빙은 소영을 빤히 바라보며 침통하게 말했다. "오빠의 말이 맞아요. 오빠는 대영웅이며 대호걸이에요. 나는 오빠를 막을 수 없군요." 그녀는 가만히 소영을 놓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심목풍은 여전히 철탑과 같이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심중이 어떤지 예측하 기 어려웠다. 당노부인과 금화부인은 소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도중 자기들이 만 약 손을 써서 그를 도와준다면 필시 그는 불쾌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런데 심목풍은 줄곧 반격을 꾀하지 않고 단지 소영의 장세만을 받아 내었는 데도 놀랍게 소영 의 내부를 손상시켜 연속 피를 토하게 하지 않았는가! 한편 금화부인은 심중에 야릇한 질투심이 일었다. 그것은 백리빙이 소영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정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심 차라리 소영을 죽게 내버려 둔 뒤, 백리빙이 단장의 슬픔 을 안고 애절히 우는 모습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두 사 람은 모두 힘을 아껴 손을 쓰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문한도는 냉정하게 두 사람이 싸우는 형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심목 풍이 소영에게 반격하지 않는 일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심목풍이 속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소영이다. 지금 이때가 바로 소영을 죽일 수 있 는 절호의 기회이거늘 어찌 손을 쓰지 않고 오히려 고의로 소영으로 하여금 숨돌릴 기회를 주어 다시 싸울 능력을 회복시키는 것을까? 심목풍의 위인으로 보아 결코 자비심을 베푸는 것은 아닐 것이니 여기에는 무슨 속셈이 있을 것이다.' 그는 생각을 한 끝에 드디어 세 가지의 원인을 생각해냈다. 첫째는 심목풍이 소영과 같은 고수를 잃고 싶지 않아 그를 굴복시켜 다시 자기가 이용하려는 것 이다. 약물로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자기에게 복종케 하려는 것이다. 둘째는 심목풍도 두 사람이 맞부딪쳤을 때 역시 매우 중한 내상을 입었으나 그의 경력이 풍부하 고 내공 또한 소영보다 강하여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은 반격할 기력이 없어 소영 이 휴식할 동안 운기조식하려는 심산이 아닌가 싶었다. 셋째로는 심목풍이 반격을 가할 때 당노부인, 금화부인, 자기, 백리빙 등이 한꺼번에 덤벼들어 소영의 반격을 옹호한다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 다. 이 세 가지 원인은 모두 큰 가능성이 있었다. 우문한도는 비록 교활하고 지혜가 많았으나 결론 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때 백리빙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뜻이 정녕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어요. 여하튼 오빠가 죽으면 나도 살 수 없어요. 모든 것은 오 빠가 하기에 달렸어요." 그녀는 소영의 상세가 매우 중한 것을 보자 그만 감정이 격동되어 전부터 마음속에 간직했던 말 을 부지중에 입 밖으로 해 버린 것이다. 그녀의 간절한 마음은 목소리로 나타나 애끓는 진정은 구구절절이 듣는 이의 마음을 감동시켰 다. 소영은 백리빙을 뒤돌아 보며 말했다. "빙아, 나를 위해 너무 걱정 마라. 북해의 빙궁에는 어머님이 빙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 니 얼마나 마음이 초조하시겠느냐? 빨리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그는 두 번이나 심목풍과 장력을 겨루어 내상을 입어서 기혈이 치솟아 오장육부가 뒤집히자, 더 이상 싸운다면 결코 무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중원의 무림과 아무런 은원도 없는 순결한 소녀 백리빙을 살육전에 끌어들 인단 말인가. 소영이 이런 생각으로 그녀에게 귀가를 권했다. 백리빙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으나 눈에 서는 주르르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오빠! 지금에 와서도 정말 내 심정을 모르신단 말이에요?" 심목풍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소영이 그토록 대단한 존재일까? 놀랍게도 북천존자의 딸이 마음을 주다니.....' 한편 우문한도는 이 광경을 보자 매우 초조했다. '지금은 바로 생사를 결정 짓는 중대한 시기인데 저들은 어찌 남녀의 사사로운 정을 논하며 마 음을 다른 곳에 두고 있단 말인가? 이것은 심목풍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우문한도는 참다 못해 충고를 했다. "지금 어느 때인데 아녀자와 사사로운 정담을 나누고 있소?" 소영은 펀뜻 정신이 들어 재빨리 심기를 가다듬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심목풍은 우문한도를 쏘아보며 말했다. "우문선생, 오늘의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간에 당신은 나의 일 장을 받을 준비나 하시오." 우문한도는 심목풍이 자기를 극도로 미워하여 살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경 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말했다. "심대장주가 만약 소영의 공세를 반격할 능력이 있다면 지금쯤 소영은 이미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이오." 심목풍은 냉소를 짓더니 왼쪽 소매를 휘둘러 소영을 향해 곧장 달려들며 오른장을 쳐냈다. 소영도 날카로운 기합소리를 지르며 왼손으로 비스듬히 일 장을 쳐내고 오른손으로는 수라지력 (修羅指力)을 쳐냈다. 그는 비록 힘껏 운기하였지만 심목풍의 적수는 못되었다. 그래서 또한 공력 을 두 가지로 나누어 한쪽은 장력으로 항거하고 한쪽은 수라지력을 쳐낸 것이었다. 쌍방의 장력이 마주치자 소영의 몸은 마치 줄 끊어진 연처럼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심목풍도 신음 비슷한 비명소리를 지르고 갑자기 정서(正西)를 향해 달려갔다. 분명 히 심목풍의 장력이 소영을 칠때 자신도 소영의 수라지력에 부상을 당한 것이리라. 절세의 효운 심목풍에게는 일반 무림인물들을 능가하는 심후한 공력이 있어 중상을 입고도 여전 히 장력을 뻗칠 능력이 있었다. 심목풍이 오른팔을 거두었다가 뻗치자 한 줄기의 내력이 내포된 음유지경이 돌연 우문한도를 향 해 뻗어갔다. 우문한도는 심목풍이 소영을 향해 공격하던 기세를 돌연 자기에게 돌리는 것을 보자 속으로 크 게 당황하여 재빨리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한 줄기의 잠력이 눈앞에 닥친 것을 느꼈다. 이 잠력의 기세는 은밀하여 그것이 몸 가까이 닥쳐 와서야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우문한도는 황망히 쌍장을 전력으로 내뻗쳤다. 그러나 그 밀어낸 장력이 심목풍의 암경과 마주 치자 우문한도는 이미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심목풍의 암경은 우문한도의 장력과 마주치자 더욱 강해졌으며 장력을 되돌려 보냈으므로 그는 마침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종내 나자빠지고 말았다. 이런 모든 상황은 극히 짧은 순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심목풍의 오른손이 우문한도를 공격할 때 휘두른 왼쪽 소매 속에서 동시에 네 줄기 싸늘한 섬공이 번쩍이며 당노부인과 금화부인을 노리고 날아갔다. 당노부인은 천하에서 암기를 다루는 데는 일류 명수였다. 그러나 그녀도 손을 밀어 심목풍이 쳐 낸 암기를 받아 들일 수 없어 황망히 옆으로 몸을 돌려 그 두 줄기의 싸늘한 빛을 피했다. 금화부인도 당노부인과 동시에 그 암기를 재빨리 피했다. 심목풍은 장력을 쳐내고 마치 나는 듯 서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러므로 당노부인이 재빨리 암 기를 쳐냈을 때는 이미 그는 사 장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마치 바 람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심목풍과 당노부인이 쳐낸 암기는 획획 바람을 가르며 각기 두 방향으로 날아가 바위에 부딪쳤 다. 폭풍이 지난 뒤 모든 것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저녁 해가 협곡에 비치니 골짜기 속은 더욱 정적 속에 파묻혔다. 이때 갑자기 나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금화부인이 길게 탄식하며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백리빙이 바위에 기댄 채 온몸이 물에 젖은 소영을 안고 나직이 흐느끼고 있었다. 당노부인이 가볍게 한숨 지으며 말했다. "소대협은 상처가 매우 중한 것 같소. 저 계집애가 저토록 슬프게 우는 것을 보니....." 금화부인이 물었다. "북해의 빙궁이란 어디에 있습니까?" "아주 유명한 곳이지요. 당신은 북천존자를 아시오?" "알지요. 저 계집애가 바로 북천존자의 딸이 아닌가요? 그녀의 양친은 모두 무공이 강하여 그 영향을 받아 당신에 중원 무림 인물들도 저 계집애한테까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데 그렇습니 까?" 하고 묻더니 금화부인은 당노부인의 대답도 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가셔서 우문한도를 좀 살펴 보십시오. 이미 숨이 끊어졌나. 만일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 았다면 노부인께서 방법을 강구하여 그를 구해 보십시오." 당노부인은 냉소를 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너무 엉큼하기 때문에 다시 살려 낸다 해도 좋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는 꿍꿍이 속이 많기 때문에 심목풍을 상대할 수 있소. 그의 생명을 구해 준다는 것 은 심목풍에 대한 원수를 하나 더 늘게 하는 셈이오." 노부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당신은 저 소대협을 보살피시오. 앞으로 삼십 년 안에 무림인물이 햇빛을 볼 수 있는가의 여부는 소영의 안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소. 아아! 나는 벌써 그의 공력 내공이 결코 심목풍 의 적수가 아니며 또한 장력을 맞부딪쳐서는 안 되며 나의 추측대로....." 하더니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는데 이 늙은 몸이 자세히 몰라 고견을 듣고 싶소이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이미 기독에 중독되어 심목풍의 손에 죽지 않는다 쳐도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사 실이오. 만약 그때 합세하여 선수를 쳐서 공격을 퍼부어 소영의 한 팔을 도왔다면 어쩌면 지금쯤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 아니오." 금화부인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사정이 그렇게 됐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당노부인은 고소를 짓고 우문한도의 곁으로 걸어갔다. 금화부인도 서서히 백리빙의 앞으로 다가가 나지막한 소리로 타일렀다. "울지 마오." 소영은 심목풍의 일 장을 맞고 비틀거리다가 호수에 빠졌던 것이다. 그때 백리빙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급히 호수로 달려가 소영을 구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소영은 상처가 너무 심했다. 그는 숨이 거의 넘어갈 듯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백리 빙은 크게 마음이 혼동되어 슬픔을 참지 못하고 나직이 흐느꼈던 것이다. 금화부인이 두 사람 곁 으로 다가갔을 때에도 백리빙은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경황없이 울고 있다가 금화부인의 목소리를 귓결에 듣자,꿈 속에서 깨어난 듯 머리를 들 고 맥없이 금화부인을 바라보았다. 금화부인은 몸을 굽히고 오른손으로 소영의 앞가슴을 가만히 짚어 보더니 한참 후에야 차분하게 말했다. "그의 심장은 아직 멈추지 않았으니 아직 살 수 있소. 그런데 낭자는 어찌 그를 구할 생각은 하 지 않고 울고만 있는가?" 백리빙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를 구할 수 있을까요?" "암, 구할 수 있지. 희망이 크지는 않지만 전력을 기울여 구해 볼 수밖에....." 금화부인도 그의 맥을 짚어 보고는 소영이 너무나 심한 중상을 입었다는 것을 깨달앗다. 그러므 로 그녀 역시 소영을 살릴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감히 확고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 였다. 백리빙은 마음속으로 금화부인에게 별로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로부터 소영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듣자 그녀를 보는 눈이 즉시 달라졌다. 백리빙은 금화부인에게 매달리듯 물어 보았다. "저는 마음이 분산되어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인께서는 이분을 살릴 수 있겠 습니까?" 금화부인이 싸늘하게 물었다. "낭자는 나를 믿는가?" "부인께서 만약 우리 오빠의 목숨을 구해 준다면 부인을 믿을 것입니다." "그를 구할 수 있든 없든 급히 손을 써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어서그를 땅에 눕혀요." 백리빙은 곧 소영을 조용히 땅에 눕혔다. 금화부인은 암암리에 운기하여 손을 내밀어 소영의 가슴에 갖다대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내공은 기초가 튼튼해 심목풍과 장력을 겨룰 때 몹시 심한 충격을 받았으나 즉시 공력이 다시 모아져 급소를 보호했으므로 비록 중상은 입었으나 심장은 멈추지 않았소." 그녀는 말을 하며 공력과 내력을 암암리에 운기하여 쉬지 않고 소영의 내상 깊숙이 파고들게 했 다. 이처럼 심한 내상을 치료할 수 있는지는 금화부인 자신도 걱정이 되었으나 다시 여러 말 하기도 멋쩍어 전력을 기울여 치료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생사를 운에 맡겨 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 였다. 그러나 사정은 놀랍게도 금화부인에게 큰 기대를 주었다. 그녀가 치료하기 시작하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소영이 길게 숨을 내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감았던 눈을 번쩍 뜨더니 금화부인과 백리빙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빙긋 미소를 짓고는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아 버렸다. 백리빙은 소영이 의식을 회복한 것을 보자 크게 기뻐하여 외쳤다. "부인! 그가 깨어났어요!" "그렇지! 그는 살아났소." 금화부인도 미소를 머금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백리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 굴에 웃을 때마다 나타나는 보조개가 더욱 매력적이었다. 금화부인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천진난만한 백리빙을 보자 암암리에 생각하였다. '이처럼 아름답고 순진한 소녀라야 소영과 교제할 수 있을 것이다.' 백리빙은 소영이 다시 눈을 감아 버리자 미간에 다시 수심을 담고 물었다. "부인, 그는 다시 눈을 감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지요?" 금화부인은 다시 웃는 낯으로 말했다. "낭자는 오른손을 그의 가슴에 누르고, 내력을 끌어내 그것을 그의 심맥 안으로 스며들게 하오." 그녀는 자기의 손을 천천히 소영의 가슴에서 떼었다. 백리빙은 금화부인의 분부대로 내력을 모아 오른손을 소영의 가슴에 대고 그 내력을 그의 심맥 속으로 스며들게 했다. 그녀는 전력을 기울여 내력을 발휘하였다. 그러자 잠시 후 그녀는 힘에 겨워 얼굴에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잠시 후 소영은 두 팔을 쭉 뻗으며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빙아, 빙아도 좀 쉬어라." 백리빙은 손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빙긋 웃었다. "나는 괜찮아요. 오빠는 좀 어떠세요?" 소영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금화부인이 앞질러 말했다. "말을 하면 못써요"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지 않았다. 금화부인이 백리빙에게 주의를 주었다. "낭자, 지금은 그에게 말을 붙여서는 안 되오. 그는 가능한한 휴식을 취해야 하니까....." 평소에 언제나 쌀쌀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백리빙도 지금은 매우 온순하게 변하여 고분고분 대답 했다. "부인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어요." 금화부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낭자가 보살펴 주시오. 그의 내공이 심후하여 이제 깨어났으니 다른 변화는 없을 것이오. 그럼 나는 가겠소."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걸어갔다. 백리빙은 벌떡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부인은 어디로 가실 작정입니까?" "나는 묘강에서 왔으니 묘강으로 돌아가야지. 죽어도 고향에서 죽어야지요." 백리빙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부인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해요?" 금화부인은 바람에 나부껴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나는 가슴에 웅지(雄志)를 가득 담고 중원 무림에 도전하러 왔었소. 그러나 중원 무림에는 고수 들이 구름같이 많아 나의 무공쯤으로는 무림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러므로 당초 에 품었던 모든 희망은 사라져 버리고 비참한 심정만 남게 되었소." "그렇다고 죽을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금화부인은 처량하게 웃었다. "나도 죽기는 싫소. 그러나 머지 않아 불가불 죽게 되어 있는 걸 어떻게 하오."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아니, 무엇 때문입니까?" "낭자는 꼭 알고 싶은가?" "그렇습니다. 부인은 나를 도와 오빠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저도 제 힘을 다하여 부인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소용없소. 이 세상에는 단지 두 사람만이 나를 구할 수 있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하나는 심목풍이오. 그러나 그와는 이미 정면으로 대적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나를 구해 주지 않을 것이오." "그럼 또 하나는 누구입니까?" "독수약왕! 그러나, 그 사람은 행적이 일정치 않기 때문에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기 힘들 것이오." 금화부인은 눈을 먼 곳으로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를 요행히 찾아낸다 해도 과연 나를 치료해 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오." "그럼 이미 중독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맞아요. 나는 그 심목풍에게 매우 괴상한 독을 몸에 입었소." 백리빙은 상냥하게 위로했다. "세상엔 좋은 약이 많으니 부인은 의원을 찾아 치료하는 것이 어떨까요? 용한 의원을 여럿 찾아 다니면 혹 그것을 해독할 수 있을는지 누가 압니까?" 금화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쓸쓸히 웃었다. "낭자는 내가 독을 사용하는 데 있어 명수라는 것을 모르오?" "몰랐어요. 그러면 독을 다루는 명수라면 해독도 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천하에 활독(活毒)을 사용하는 데는 아마 나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무엇을 활독이라고 합니까?" "낭자는 꼭 알고 싶소?"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 세상 일을 잘 모릅니다. 전에는 줄곧 빙궁에서 살며 위로는 부모님과 아래로는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르고 호강하며 살았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 릅니다. 나는 오빠를 따라 강호에서 활동을 해야 하니 자연 많은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부인께서 는 내가 너무 졸라댄다고 화나셨나요?" 금화부인은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그럼 자세히 설명해 주겠소. 활독이라는 것은 생명이 있는 독물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오. 즉 독사, 지네, 전갈, 독거미 등이 바로 그것이오." "아아! 이제 알겠군요. 그럼 보통 독을 쓰는 사람은 사독(死毒)을 쓰겠군요?" "그렇지! 그러나 이것은 내 추측에 불과하오." "사독은 대부분 활독 몸의 물질로 조성한 것이니 부인께서 활독의 명수라면 사독도 아시겠지 요?" "자연 알지요. 다만 정통하지 못할 뿐이지......" 그때 갑자기 소영이 눈을 번쩍 뜨더니 일어나 앉았다. 그는 금화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님, 누님." 금화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왜 말을 듣지 않소? 어서 누워요." 그러나 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조금 전 암암리에 운기하여 시험해 보니 진기가 이미 통하였으니 누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금화부인은 백리빙을 힐끗 바라보더니 소영에게 말했다. "동생! 동생은 부디 몸조심을 해야 하오. 동생은 이 백리낭자가 얼마나 동생을 생각하는지 아마 모를 거요. 동생에게 만약 무슨 불상사가 있다면 내가 보건데 아마 저 낭자도 정말 살아갈 수 없 을 거요." 그녀의 음성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약간의 질투가 섞인 것도 같았다. 소영이 얼떨결에 백리빙을 바라보자 그녀는 수줍은 듯이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 은 금화부인의 말을 묵인하는 표정이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 지으며 말했다. "누님, 이 동생의 몇 마디 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좋소. 어서 말해 보오." "조금 전 누님이 하신 말씀을 모두 들었습니다. 누님이 묘강으로 돌아가 중원 무림에서 몸을 뺀 다는 것을 나는 감히 말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누님은 결코 가시지 못합니다." "어째서?" "왜냐하면 누님은 기독에 중독되었으며 묘강에는 누님을 치료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중원에 남아 있다고 한들 누가 나를 치료해 준단 말이오?" "최소한 치료할 기회는 있는 것입니다. 누님의 그 죽음을 겉으로는 심목풍을 배반해서 죽게 되 는 것이지만 사실은 나 때문이지요....." 금화부인은 깔깔거리며 그녀의 독특한 그 완세불공(玩世不恭)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고간난유일사(千古艱難唯一死)이거늘, 무엇 때문에 동생을 위해 죽는단 말이오." "숨길 것 없습니다. 조금 전에 나는 누님의 처량한 웃음과 쓸쓸한 표정을 보았습니다. 만약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심목풍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쯤 이미 나는 싸늘한 시체로 변하였 을 것인데 누님이 그를 배반하고 나를 도와주셨기 때문에 심목풍이 두려운 마음이 생겨 감히 싸 움을 길게 끌지 못하고 가 버린 것입니다." "동생의 말이 맞다 해도 동생은 나를 도울 수 없는 일이오....." 금화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백리낭자가 동생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부끄러울 따름이니 앞 으로 저 낭자를 잘 대해 주기 바라오. 그녀는 나이가 어리고 순진하며 나같이 완세불공하지 않으 니 이 누이를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그녀는 말을 마치자 소영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급히 걸어갔다. 소영은 속으로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누님, 잠깐 멈추시오!" 소영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금화부인은 소영이 일어나는 것을 보자 급히 되돌아 오며 말했다. "무엇하러 일어났소? 빨리 앉으시오." 소영은 그녀가 자기를 염려하는 말을 듣자 얼굴에 감동한 표정을 나타내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여자의 성미가 외골수로 과격하여 종일토록 독물을 다루며 살인을 식은죽 먹듯이 하나, 나 소영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목숨을 구해 준 은공이 있으며 정의가 두텁고 위장(僞裝)된 것 같지 않다. 그녀가 나에게 베푼 관심은 매우 깊은 것이다.' 그는 금화부인에게 말했다. "만약 누님께서 가지 않고 이곳에 남는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즉시 앉아 운공조식하겠습니다." 백리빙도 소영의 뒤를 이어 간청했다. "부인, 대답해 주세요." 금화부인은 가볍게 탄식하였다. 127. 상처입은 영웅들 금화부인은 한동안 소영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동생은 빨리 앉아서 운기조식하여 상세가 도지지 않게 해요. 나는 이곳에 남아 기다릴 테니....." "나는 누님을 믿겠습니다." 소영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운기조식하였다. 이때 당노부인이 엄숙한 표정으로 조용히 걸어오며 말하였다. "소대협은 좀 어떻소?" 금화부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혼자서 운기할 수 있으니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문한도는 어떻게 됐습니까?" 당노부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깨어났으나 그는 이미 몹시 중상을 입었소. 나는 그에게 두 알의 내상 치료를 하는 알 약을 복용시켰습니다. 지금 누워서 휴식하고 있으나 그 알약은 별로 증세에 특효한 것이 아니라 효력이 얼마나 있을지 예측할 수 없소. 그러나 이 늙은 몸은 있는 힘을 다 기울였소." 금화부인이 물었다. "당신은 내공으로써 그의 행혈운기(行血運氣)를 도와 주었는지요?" "써 보았소. 그러나 그것이 그의 중상에 도움이 있을지는 모르겠소." 금화부인은 잠시 묵묵히 있더니 말했다. "괜찮습니다. 단지 그의 정신이 깨어났다면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소?" "우문한도는 간사하고 교활해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박식하며 또한 의술에 정통하니 아마 그가 깨어난 뒤 혼자서 필시 자기의 상처를 치료할 방법을 강구할 것입니다." 당노부인은 심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늙은 몸은 이번에 내 자신의 생사와 비참한 결과를 고려치 않고 정식으로 심목풍을 배반하 였소. 그러므로 나는 그의 위인이 음험 악독한 것을 깨달았지요. 우리가 그를 위해 충성을 다하여 도 끝에 가서는 죽음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가장 우리가 중요시 해야 되는 것은 소대 협을 위한 것이오. 지금 각 문파 각방 웅주들은 모두 심목풍의 앞잡이가 아니면 그의 위력에 눌 려 있는 실정이오. 이런 위급한 시기에 만약 무림을 영도할 인물이 없다면 심목풍에게 항거할 수 없을 것이오. 소대협은 비록 무림에 나타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는 이미 무림에서 심목풍을 항거할 수 있는 인물로 공인되어 있소. 그러니 그는 죽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상처도 가능한한 조속히 치료해야 될 것이오....." 금화부인이 곧이어 대답했다. "그의 내공은 매우 정후하고 또한 호신강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는 비록 심목풍의 바 위도 깰 수 있는 장력에 가슴이 울려 연속 두 번이나 피를 흘렸으나 내상의 상처는 별로 중하지 않습니다." 소영은 당노부인의 한마디 한마디를 매우 자세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는 마침 운기조식하 고 있었으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백리빙이 긴 한숨과 함께 금화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그 심목풍도 중한 상처를 입지 않았는지요?" "겉으로 보아서는 아마 그도 부상을 입은 것 같았으나 중하지는 않은 것 같더군. 하여간 동생같 이 심하지는 않은 모양이오." 그러자 당노부인이 대답했다. "아마 그 심목풍의 상처도 가볍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어째서 입니까?" 나도 처음에는 당신과 같은 생각을 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소." "고견을 듣고 싶군요." 금화부인이 말하자 당노부인은 천천히 설명했다. "심목풍이 내심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소대협이오. 제일 미워하는 것도 역시 소대협이지 만...만약 그에게 아직도 소대협과 싸울 기력이 남아 있었다면 간신히 넘어뜨린 소대협을 어찌 그 때 죽이지 않았겠소?" 금화부인은 어깨를 오싹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만약 나였더라도 그렇게 했을 텐데 하물며 심목풍에 있어서는....." 당노부인은 다시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심목풍이 입은 상처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넘어선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 오." "그러나 그의 행공(行功)은 여전히 신속무비하던데요?" 당노부인은 금화부인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고 웃음을 머금고 말하였다. "그는 마지막 남은 진기를 억지로 돋구어 결사적으로 달아난 것이지요." "만약 그의 상처가 중하다면 비록 남은 힘을 다하여 버티었다 해도 그는 아마 그처럼 빨리 달려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노부인은 묵묵히 침묵으로 금화부인의 말을 되새겨 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공이 심후한 사람은 그의 인내력과 그 강력한 내공이 서로 인과관계가 있어 심목풍이 소대협 에게 중상을 입히고 조금만 더 손을 쓰면 소대협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후환을 영절(永絶)하지 못한 점에는 필시 그 나름의 말 못할 고충이 있었을 것이오." 그러자 갑자기 금화부인이 말했다. "만일 당신의 말이 틀림이 없다면 그 심목풍이 제아무리 우리 앞에서는 허세를 꾸미고 힘차게 달려갔지만 얼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이 한정되어 있는 짧은 목숨을 이용 하여 그를 뒤쫓아 죽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노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에 그는 이미 주조룡 등과 합류하였을 것이외다." "심목풍에 대해 나 금화부인은 확실히 약간의 두려움도 갖고 있어 그의 적수가 못됨을 자인합니 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백화산장의 고수들과는 모두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 위에 당노 부인의 독약암기까지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 금화부인의 이 말은 당노부인의 호기를 자극한 듯 곧 동조할 것 같았으나 그녀는 보다 신중한 사람이었다. "부인의 말씀이 옳소....." 당노부인은 소영을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우리가 그의 뒤를 쫓아간 뒤 만약 백화산장의 사람이 이곳에 온다면 백리낭자 혼자서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소?" 그러나 금화부인이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제가 보건데 백리낭자의 무공은 결코 우리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저 낭자 가 동생과 우문한도를 보호한다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녀는 백리빙을 향해 말했다. "아가씨, 소대협을 잘 보호해요. 나와 당노부인은 심목풍을 찾아가 죽이겠으니 만약 삼경 전에 돌아오지 않으면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백리빙은 곧 입을 열었다. "나도 당노부인의 의견에 적극 동의합니다. 심목풍은 비록 오빠를 상하게 했으나 그 역시 우리 오빠의 손에 중상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침착한 걸음으로 금화부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인께서 심목풍을 뒤쫓아 죽이시는 것을 저는 감히 막지 못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부인들이 필요로 하는 해독약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을 제가 드리겠 는데 꼭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금화부인은 백리빙의 말씨와 표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따뜻한 정을 느끼며 곧 대답했다. "무슨 일이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들어 주겠소." 백리빙은 기쁜 듯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께서는 부인을 몹시 걱정하고 계시니 가셨다가 일찍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좋아요! 심목풍은 추격할 수 있건 없건 간에 꼭 삼경 안에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오."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니 당노부인을 돌아보았다. "부인, 우리는 이제 갑시다." 두 사람은 옷자락을 날리며 달려가, 잠깐 사이에 곧 사라졌다. 소영은 당노부인과 금화부인의 대화를 듣고 그녀들이 가려고 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참 운 공이 막바지 중요한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영의 생각으로는 두 사람이 이번에 심목풍의 뒤를 쫓아 그를 죽이지 못한다 해도 혹 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해독약을 조금이라도 구해 온다면 그것은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는 한 가지 길이었기에 더 이상 그들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백리빙은 그들의 그림자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자 곧 몸을 일으켜 우문한도의 앞으로 다가갔 다. 그녀는 몸을 굽히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우문한도는 눈을 꼭 감은 채 땅 위에 누워 몹시 가 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금방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이때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었으므로 한 줄기 석양이 골짜기를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은 누워 있는 우문한도의 얼굴에도 비췄다. 죽은 듯이 창백한 우문한도의 얼굴에는 코와 입 사 이에 핏자국이 있었으며, 그의 상처는 소영보다 더욱 중한 것 같았다. 백리빙은 가볍게 한숨 지으며 섬세한 손을 내밀어 우문한도의 앞가슴을 눌렀다. 그리고 부드러 운 음성으로 그에게 말했다. "우문선생! 내 말이 들립니까?" 그러자 우문한도는 빛을 잃은 두 눈을 뜨고 백리빙을 바라보더니 다시 힘없이 스르르 감았다. 그리고 무엇인지 백리빙에게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쫑긋쫑긋 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아요! 말하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백리빙은 곧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녀는 그의 앞가슴을 통해 내력을 밀어냈다. 한 줄기의 뜨거운 기류가 우문한도의 앞가슴에 스 며들어 경맥을 따라 사지로 퍼져 나갔다. 그녀가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내공은 극히 심후하였기에 내력이 끊임없이 스며들어 우문한도의 혈액순환을 도와주었다. 우문한도의 굳어 있던 사지는 백리빙의 내공촉진으로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이 지나자 우문한도의 창백하던 안색에 한 가닥 핏기가 돌며 마침내 긴 한숨을 몰 아쉬었다. 이것은 공력을 제일 많이 소모하는 치료방법이었다. 백리빙은 계속 내력을 밀어내 한동안 지탱 하기가 너무나 힘에 겨워 땀이 비오듯 하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우문한도의 옷깃 에 떨어졌다. 그녀는 비록 힘에 겨워 피로가 겹쳤으나 우문한도의 얼굴에 생기가 솟아나는 것을 보자 용기가 솟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자기가 힘에 겨워 만약 손을 멈춘다면 나타나기 시작한 효력까지 모두 헛되 게 될까 봐 이를 악물고 억지로 버티었다. 그렇게 다시 한동안이 지나자 우문한도는 입을 떡 벌리더니 한 모금의 선혈을 토했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더니 말을 했다. "아가씨의 구조에 감사드립니다." 백리빙은 이미 힘에 겨워 눈이 핑핑 돌았다. 그러나 우문한도의 음성을 듣고 그가 소생한 것이 반가와 곧 대답했다. "깨어나셨군요." "아가씨의 은혜는 가슴에 깊이 새기고 꼭 보답하겠습니다." 백리빙은 그제야 우문한도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 말하였다. "우문선생! 운공하여 혈액순환시키는 것을 멈추지 마세요. 당신은 운수가 좋았어요. 지금 깨어나 지 않았더라면 나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했을 것이에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그 자리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운공조식하였다. 한동안 꼼짝하지 않고 조식을 마친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골짜기에 어둠의 장막이 깔려 있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바로 곁에는 소영이 미소를 띠고 서 있었으며, 우문한도는 여전히 책상다 리를 하고 앉아 운기하고 있었다. 백리빙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어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 지금이 어느 때쯤입니까?" 소영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초경쯤 됐을 거다." 백리빙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과거에 나는 내 재주가 크다고 자부했었지요. 그러나 지금 나는 다만 아주 미약한 존재라는 것 을 깨달았습니다. 이 정도의 공력과 재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사람 하나 구하는데 이처럼 지치다니 정말 너무 쓸모가 없는 것이군요." 백리빙은 총명한 여자였다. 하나를 보면 둘을 깨달았다. "빙아가 자신의 내력으로 사람을 구한 것은 장한 일이다. 이것은 본시 공력을 제일 소모하는 일 이니까....." 그때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조식하고 있던 우문한도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백리빙을 향해 정 중히 입을 열었다. "내가 겨우 한 가닥 숨만 헐떡이고 있을 때 아가씨의 구원을 받았지요. 만약 아가씨의 공력이 심후하고 강하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싸늘한 시체로 변했을 것입니다." 백리빙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야무지게 물었다. "그럼 당신은 나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우문한도는 공손히 대답했다. "아가씨의 은혜는 백골난망이올시다." 백리빙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좋아요. 그렇지만 저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부탁은 다만 오늘부터 우리 오빠와 적 대시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소대협의 어질고 높은 덕망과 심목풍의 악랄성은 비교하기 좋은 예입니다.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소대협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더구나 이것은 아가씨의 분부이거늘....." 백리빙은 이때 갑자기 그 소왕 무공비본이 생각났다. "우문선생,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아가씨께서 무엇이든지 분부만 내리십시오. 모두 순종할 것이며 물이나 불속이라도 서슴지 않 겠습니다." "정말이에요?" "정말이구 말구요. 절대로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외다." "당신이 가진 그 소왕 무공비본을 우리 오빠에게 주세요. 그리고 다시 돌려 달라지 않겠다고 약 속할 수 있어요?" "좋습니다! 아가씨의 분부를 제가 어찌 거역하겠소이까?" 우문한도의 시원한 대답은 오히려 소영에게 의혹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마 침내 물어보았다. "우문형은 그것이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입니까? 아니면 체면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까? 군자는 남의 애착물을 뺏지 않는 법이니 나는 그 소왕 무공비본을 독점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그러자 우문한도는 돌연 엄숙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틀림없이 진심에서 우러나 하는 말입니다. 그 소왕 무공비본은 지금부터 당신 소대협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뿐 아니라 바로 쇠를 흙같이 자를 수 있는 보검도 함께 드리고자 하 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우문한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는 이미 늙었소이다. 비록 금궁 안 십대 고수들의 무공비본을 모두 얻는다 해도 그 책에 기 록된 절기를 터득하기는 어려울 것 같소이다. 옛부터 지금까지 몸에 절기를 지닌 고수가 많았지 요. 그러나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사람은 보지를 못했지요." 그는 얼굴을 들어 밤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별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계속했다. "금년에 나는 이미 환갑을 맞이했소. 내 늙은 몸은 이미 더욱 높은 무공을 적응해 낼 수 없게 되었소이다. 이번에 이 큰 변을 치르자 더욱 나로 하여금 많은 문제를 생각케 하였지요. 그러니 한 자루의 보검과 그 소왕 무공비본은 냉정한 입장에서 볼때 이미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됩 니다." 백리빙은 그의 말투에 호기가 전부 사라지고 이 늙은 영웅이 울적한 심중을 자위하는 것을 보자 속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문선생, 당신은 과히 늙은 편이 아닌데요?" "그렇습니다. 고금을 통해 많은 무림들의 연령으로 본다면 나도 늙은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 는 무학방면의 기초가 너무 나빠서....." "그러나 당신은 많은 책을 읽으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확실히 많은 책을 읽었지요. 지혜를 논한다면 나는 그 심목풍보다 못하지 않다고 자부합 니다." 그는 눈을 돌려 소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심목풍의 벽공장력이 나를 죽음의 막바지까지 몰아 넣었으나 다행히 백리 아가씨가 나를 죽음 에서 구해냈으니 인간의 정리로 볼 때 이것은 생명의 은인이며, 나는 응당 보답을 해야 하는 것 이고....." 백리빙은 큰소리로 웃으며 우문한도의 말허리를 꺾었다. "내게 보답할 걱정은 마시고 우리 오빠를 도와주세요." "나도 그렇게 할 작정입니다. 나는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소대협을 도와 끝까지 심목풍과 겨루어 보겠습니다. 이것은 천추의 대업이니 온 힘을 기울여 심목풍이 강호를 석권하려는 야심을 꺾어 놓겠습니다. 만약 그가 일단 성공을 한다면 무림은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외다." "만약 우문선생의 도움을 얻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소대협은 지금 이미 무림에서 심목풍을 제거하는 영도자로서 인심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소영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심목풍은 잔학무도하고 엄밀한 조직이 있는 효웅재인(梟雄才人)이며 또한 무공 역시 이 미 최고 정점에 도달하였소. 그리고 그의 심기는 예측키 곤란할 정도입니다. 소대협은 이미 인심 의 경향을 얻었으나 만약 그 사람들을 엄밀히 통솔하지 못한다면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울 것이외 다. 그러니 미미한 존재인 나의 힘이나마 앞으로는 소대협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그는 다시 조용히 숨을 돌리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무림의 문호가 너무 많아 매우 엄밀한 계획이 없다면 짧은 시일 안에 성과를 보기는 힘 들 것입니다. 나 역시 한동안 심사숙고를 한 뒤에야 착수 진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일은 우리의 상처를 속히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약간의 의술을 터득하고 있으므로 소대협께서 만약 나를 신임하신다면 나와 함께 은밀한 곳으로 가서 조용히 휴식하며 약물 치료로 써 회복을 촉진시켜 봅시다." 우문한도는 심기일변하여 적에서 동지로 변했다. 그러나 소영은 악소채와의 약속이 눈앞에 당도 한 것을 생각하자 마음이 조급했다. 그 약속장소인 단혼절벽 밑에서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악전 을 벌일 것을 생각하자 지금 가장 긴급한 일은 소왕 장방의 무공비본을 열심히 연구 터득하여 단 혼절벽 밑에서 옥소랑군과 대적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이것은 소영 혼자만의 비밀이었으므로 자연 말하기가 거북했다. 그는 잠시 주저한 끝에 입을 열 었다. "우문선생의 정리에 감격을 금할 수 없소. 만약 나 소영이 삼개월을 더 살 수 있다면 반드시 선 생을 다시 찾아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우문한도는 약간 의아한 얼굴로 이유를 물으려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곧 입을 다물어 버렸다. 소영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선생의 재지는 벌써부터 제가 감복하여 왔소이다. 내가 심목풍을 대항하려면 반드시 선생이 필 요하니 우리는 나중에 다시 만날 약속을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최소한도 삼 개월 후에야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최소한 삼 개월이 지나야 합니다." "좋습니다. 석 달 뒤 나는 서호 영은사(西湖靈隱寺) 앞에서 한 달 동안 기다리겠습니다. 소대협 께서 만약 한 달이 지나도 오시지 않을 때에는 나는 머리를 깎고 영은사의 중이 되어 다시는 강 호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내가 그 안에 죽지 않는다면 반드시 약속을 이행하겠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약속은 되었으니 나는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이다." 우문한도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포권하고 공손히 절을 한 뒤 돌아서서 걸어갔다. 소영은 그의 발걸음이 질질 끄는 듯하여 내상이 아직 심한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즉시 그를 향하 여 소리쳤다. "우문선생의 행동이 불편한 것 같으니 제가 조금 전송해 드릴까요?" 우문한도는 머리를 돌려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소이다. 나는 이 산을 걸어 나갈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이곳은 소대협도 오래 머물 곳이 못되니 일찍 떠나시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소영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억지로 전송하겠다면 그는 혹 불쾌하게 여길지도 모르니 그의 마음대로 가게 해야겠다.....' 그러나 백리빙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는 아직 떠날 수 없으니 우문선생이 한 발 먼저 떠나십시오." "어째 떠나실 수 없습니까?" "우리는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을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그녀들은 삼경이 되기 전에 이 곳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데요?" "심목풍을 추격하여 죽이러 갔지요." "그 두 사람은 너무 자신의 역량을 과신하였군요. 만약 나의 판단이 틀림없다면 그들은 다시 호 랑이 굴로 들어가 장차 백화산장에 의해 이용을 당할 것입니다." 백리빙이 그의 말을 받았다. "심목풍은 매우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 오빠와 우문선생을 미처 죽이고 달아나지 못할 정도로 다급했던 모양입니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의 무공 또한 매우 강하니 어쩌면 그들은 죽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심목풍이 먼저 주조룡 등 수행해 온 고수들을 보낸 것은 결코 자비로운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 들 수하 고수들이 소대협과 겨룰 때 소대협의 보검에 상할까 두려워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 지요. 그는 패하기 전에 이미 안배를 하여 매복을 놓았을 것이오. 그 심목풍과 같은 인물과 싸우 려면 무공과 지모를 다 갖추어야 합니다." 백리빙이 물었다. "그럼 선생의 말씀은 그녀들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입니까?" "마침 심목풍은 요즘 사람을 쓰려고 하는 때이므로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은 모두 일등의 솜씨들인지라 그녀들을 죽이지는 않고 이용할 것입니다. 그의 손아귀에 한 번 들어간 후면 이용당하지 않고 배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더니, 길게 한숨을 쉬고 백리빙에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기왕 그녀들과 약속을 하셨다면 응당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삼경까지 한 약속이니 그때까지 기다렸다 돌아오지 않거든 더 이상 이곳에 계시지 말고 곧 길을 떠나시기 바 랍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야음 속으로 사라져 갔다. 소영과 백리빙은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었다. 소영은 그제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뜻밖에도 우문한도는 심목풍의 일격으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구나." "내가 보기에 그는 오빠의 인덕에 감동된 것 같아요. 정(正)과 사(邪)를 비교해 보면 자연 크게 다르지요." 소영은 미소 띤 얼굴로 백리빙을 바라보았다. "우문한도는 노모심산(老謀深算)하여 심목풍이 자기를 절치부심 미워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에 만약 그를 죽일 수 있다면 결코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빠는 그를 용서해 줄 수 있어요?" 그러나 소영은 이 말에는 대답없이 돌연 무슨 매우 중요한 생각이 떠오른 듯 걱정된 표정으로 말했다. "빙아, 중주이고는 어찌 됐니?" "저도 기다리는 중입니다. 분명히 그들과 약속을 했는데 어찌 그들이 보이지 않을까요?" "혹시 심목풍의 독수에 걸려 화나 입지 않았는지 걱정이구나." "그럴 리 없어요. 심목풍이 만약 중주이고를 죽였다면 반드시 그 말을 했을 거예요." "네 말도 옳다. 그가 만약 중주이고를 사로잡았다면 필시 중주이고를 인질로 나를 굴복시켰을 것이다. 또한 중주이고를 죽였다면 내 앞에서 자랑했을 게고...그가 아무 말 없는 것을 보니 분명 그들은 서로 만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정말 답답하군요. 내가 분명히 이야기를 했는데 어디로 갔을까요?"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걱정이 되는 듯이 말했다. "그들은 나와 골육지간 같은 사이며 의중생사(義重生死)하는 사람들이니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 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식이 없으니 아무래도 무슨 뜻밖의 사고가 있는 것 같구나." "무슨 뜻밖의 일입니까?" "나도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 같다." 소영과 백리빙이 이런 말을 나누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두 줄기 그림자가 나는 듯 곧장 달려오 는 것이 보였다. 백리빙이 그것을 보자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오빠,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이 돌아오는군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그림자는 그들 앞에 와서 딱 멈추었다. 그리고 앞장 섰던 사람이 말했다. "큰형님! 무사하셨군요." 소영은 반가움을 금치 못하였다. 달려온 사람들은 상팔과 두구였던 것이다. "괜찮소! 두 분은 어디를 갔다 오셨는지요?" 상팔은 그 말에는 대답없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아! 정말 다행입니다." 하더니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소영은 깜짝 놀라 상팔을 부축하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두구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둘째 형님은 중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큰형님의 안부를 매우 걱정하여 억지로 여기까지 참고 달려왔지요. 그러다가 큰형님의 무사함을 보고 긴장이 풀려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 졌지요." 소영은 상팔을 부축해 일으켜 손을 그의 등에 누르고 자기 몸의 진기로 그를 도와 행기활혈(行 氣活血)하게 했다. 그러자 백리빙이 급히 말했다. "오빠는 이제 겨우 기운을 차려 상처가 차츰 아물려고 하는데 어찌 진기를 돕는단 말입니까? 제 가 대신 하겠습니다." 소영은 자기의 힘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하는 수 없이 물러섰다. "그럼 수고 좀 해 다오." 백리빙은 방긋 웃으며 백옥 같은 손을 상팔의 등에 대고 눌렀다. 소영은 두구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우리는 백화산장의 패거리를 만나 한바탕 격전을 치뤘지요. 둘째 형님은 고투 끝에 부상을 입 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버티고 섰던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제일 간단한 말로 경과를 보고하고 자기도 중상을 입은 것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었으나 끝내 쓰러져 버린 것이다. 소영은 황급히 두구를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두형,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구려. 상형이 저렇게 부상하였으니 두형 역시 무사치 않을 것을 미 리 알았어야 했을 것을....." 그는 말하는 한편 두구의 등에다 손을 대고 자기의 진력을 스며들게 했다. 그러자 백리빙이 또 급히 외쳤다. "오빠! 정말 살고 싶지 않으세요?" 소영은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빙아, 나는 지탱할 수 있다." "빨리 손을 떼어요. 내가 이분의 혈기를 돌게 한 후 그를 다시 도와도 늦지 않잖아요." 그러자 소영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빙아, 내 말을 듣거라. 비록 내가 지금부터 다시 무공을 연마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그들을 구 할 것이다. 그들의 상처가 매우 심하니 너는 전력을 발휘해 주기 바란다. 네 정의는 내가 반드시 보답하겠다." 백리빙은 더 이상 막지를 못하고 전력을 발휘하자 진기가 상팔의 내부로 점점 스며들었다. 그녀는 조금 전에 우문한도를 구할 때 이미 내력을 소모하여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 금 다시 전력으로 상팔을 구조하니 힘에 겨워 지탱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이마에서는 다시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소영은 그녀보다 더욱 비참하였다. 그의 몸은 얼마 가지 않아 흠뻑 땀에 젖고 말았다. 중상을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진기가 미처 회복되지 않았는데 이처럼 진력을 쏟으니 벌써 지탱하기 어려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소영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내력을 끌어내어 두구의 내부로 스며들게 하였다. 얼마 후에 겨우 상팔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했다. "형님은 상처가 심하십니까?" 그는 사지(死地)에서 돌아와 쓰러지기 직전에도 소영의 안부를 물었으며 이렇게 다시 소생해서 도 첫마디가 바로 소영의 상세를 묻는 것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그의 진정한 정의가 어떠한 것인 가가 뚜렷이 나타난 것이었다. 백리빙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을 하지 마세요. 그리고 빨리 운기조식하여 그 열린 기혈을 멈추지 않게 하세요. 나는 가서 저 두 아저씨를 도와야 해요." 소영은 상팔의 음성을 들었으나 전력을 운기하여 몸에 남은 마지막 내력을 억지로 밀어내고 있 었기 때문에 입을 열 수 없었다. 백리빙은 길게 한숨을 들이마시며 단전에 넣은 뒤 소영에게 다가갔다. "오빠, 일어나세요. 제가 도울 테니." 이때 소영은 계속 버틸 수 없음을 깨닫고 서서히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백리빙은 얼굴의 땀을 옷소매로 씻으며 다시 조용히 두구의 등에 손을 대었다. 소영은 뒤로 물러났으나 몸을 지탱할 수 없어 눈을 꼭 감고 운기조식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줄곧 두구의 안전이 걱정되어 약간 조식을 하고 다시 눈을 떠 보았다. 백리빙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옷도 땀에 흠뻑 젖어 마치 물에서 나온 사람 같았다. 소영은 그녀가 이미 우문한도와 상팔을 구했는데 지금 또 무슨 여력으로 두구를 구조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급히 말했다. "빙아, 너는 너무 피로할 테니 역시 내가 해야겠다." 백리빙은 암암리에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오빠나 어서 조식하세요. 오빠는 천하 무림 동도를 위해 몸을 보중해 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이미 지친 것 같으니 역시 내가 하는 것이 좋겠다." "내 걱정은 마시라니까요. 나는 비록 내력을 소모하긴 했어도 부상은 입지 않았어요." 소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백리빙의 등에 대었다. 두 사람이 합력하니 열류 (熱流)가 배로 증가되어 두구의 내부로 스며들었다. 두구는 두 사람의 도움으로 응결했던 진기가 풀리기 시작하여 잠시 후 긴 숨을 내쉬며 깨어났다. 소영은 백리빙의 등에 대었던 손을 떼며 부드럽게 말했다. "빙아, 너도 이제 그만 휴식을 하여라." 백리빙은 소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오빤 괜찮아요?"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빙아의 덕으로 우리 형제 상팔과 두구가 살아났다. 너무나 수고기 많았구나."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오빠의 일에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쁩니 다. 그러니 그런 말은 다시 하지 마세요." 그녀는 매우 피곤한 듯 말을 마치자 힘없이 눈을 감고 조식하였다. 소영은 머리를 돌려 상팔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운기조식하고 있었으 며 두구도 몸을 일으키고 앉아 있었다. 소영은 그것을 보자 가만히 생각했다. '빙아는 연속 세 사람을 구했으므로 이미 극도로 지쳤다. 비록 그녀의 내공 기초가 튼튼하다 해 도 회복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한다. 상팔과 두구는 혈기가 이제 겨우 통하였으니 그들 역시 한동안이 지나야 행동할 수 있다. 나 역시 조식하여 체능을 회복해야 하니 우리 네 사람이 이곳에서 휴식하다 만약 적을 이곳에서 만난다면 우리는 고 스란히 전멸하겠구나.....' 소영은 초조하여 더 이상 조식을 못하고 억지로 지탱하여 눈을 감고 있었다. 겉으로는 두 눈을 감았지만 사실은 정신을 집중시켜 사방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을 때 상팔과 두구, 백리빙 등은 모두 내식입정(內息入定)의 경지에 도달했 다. 소영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팔다리를 쭈욱 뻗어 기지개를 켜더니 침착한 걸음걸이로 세 사람의 주위를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원위치로 가서 앉았다. 그는 피곤을 활동의 힘으로 몰아내 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놀랍게도 육중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은 번쩍 정신을 차리고 어둠 속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점점 발소리는 가까와지며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그림자 하나가 서서히 다가왔 다. 그 사람은 삼 장 앞에까지 왔으나 소영은 여전히 누군지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어떤 생각이 소영의 머리를 스쳤다. '다가온 사람이 누구건 간에 그가 상팔과 두구를 상하게 하려는 생각으로 왔다면 큰일이다. 나 는 지금 이 체력으로는 막을 수 없으니 제일 좋은 방법은 그를 더 이상 접근치 못하게 막는 것뿐 이다.' 그리하여 그는 곧 일어나서 그 사람을 향해 마구 걸어갔다.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가까와지자 그제야 그 사람의 면모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몸에 흑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그 노인의 수염과 머리는 이미 백발이었고 얼굴에는 온통 기름과 때로 뒤범벅이 되어 그 형상은 한 늙은 거지와 흡 사했다. 그러나 몸에 걸친 도포는 새 것이어서 그의 신분을 다시 생각케 했다. 얼굴과 옷은 너무나 대조 적이어서 쉽사리 어떤 신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소영은 그 노인 앞으로 다가서며 가로막았다. 그리고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노인장께서는 어째서 어두운 밤에 이 황폐한 곳에 오셨습니까?" 그 노인은 눈을 크게 뜨고 소영을 멀뚱멀뚱 바라보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내게 묻는 건가?" 소영은 기가 차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암만 해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소영은 곧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바로 노인장과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곳에 오셨는지요?" 그 노인은 얼굴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에는 조금 전까지 총총히 빛나던 무수한 별들 이 어느 새 검은 구름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다. 그 노인은 무엇을 보는지 들었던 얼굴을 내리지 않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으며 앞에 서 있는 소영의 존재를 깨끗이 잊고 있는 듯하였다. 소영은 점점 이상한 생각이 가슴에 꽉 찼다. '우리의 지금 상태로 보아서, 나는 먼저 이 노인의 혈도를 찍어야 된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정 신나간 노인에게 그럴 수 있겠는가?' 소영은 다시 마른 기침을 두어 번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노인장! 노인장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넋을 잃고 바라보고 계시지요?" 그 노인이 대답했다. "나는 별을 보고 있다. 저걸 보아라. 저기 저 은은한 은하수를. 견우와 직녀를 갈라 놓아 매년 칠석이 되어야만 겨우 한 번 만날 수 있으니....." 소영은 암암리에 생각했다. '그렇구나. 이 노인은 과연 약간 돈 사람이로군.' 그는 다시 또 물었다. "저렇게 검은 구름이 온통 가렸는데 무슨 은하수가 보인단 말입니까?" 그러자 그 백발노인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보이지 않으면 속으로 생각하지도 못한단 말이냐?" 소영은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만일 속으로 생각한다면 집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무엇 때문에 황폐한 골짜기를 헤매 고 있단 말씀이오?' 그러나 그는 그의 태도가 어딘지 미친 사람 같아 그와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소영은 다시 한 마디 해 봤다. "노인장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하시는 말씀입니 까?" 그 노인은 갑자기 고개를 숙여 똑바로 소영의 얼굴을 주시하며 괴상하게 말했다. "애숭이야, 너는 내 말을 알아 듣겠느냐? 내가 하는 말 말이다." 소영은 다시 어이가 없었다. '당신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 몇 사람 없을 것이오. 그런 사람을 찾아내기도 어렵겠거니와 당신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역시 정신이 돌 아 미친 경향이 있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소영은 성품이 후도(厚道)하였기 때문에 그 노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웃 음을 얼굴에 담고 공손히 대답했다. "노인장의 말씀 속에는 현기(玄機)가 담겨 있어서 자연 알아 듣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백발노인은 호탕하게 웃더니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너는 내 말을 알아 듣지 않았느냐? 애숭이야, 너는 나의 유일한 지음(智音)이로구나! 핫 하...내가 알기로는 이 산골짜기 속에 둔한 소와 멍청한 말들이 여러 마리 있었는데 지금 그것들 은 어디로들 갔느냐?" 소영은 차츰 그 노인의 말에 끌려 들어가서 자기도 모르게 한 발 다가서며 물었다. "노인장께선 백화산장에서 심대장주가 이곳으로 보낸 무인들을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백발노인은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나도 그것들이 어디서 누가 보내 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결같이 모두 둔하고 어리석어 내가 모처럼 들려주는 말도 알아 듣지 못하더구나....." 소영은 들을수록 어이가 없어서 슬그머니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역시 이해를 못하겠는 걸요?'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노인장의 말씀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백발노인은 다시 껄껄 웃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네가 나의 지음이라는 것을 느꼈다." 하더니 소영을 지그시 바라보며 계속 이어갔다. "그들은 가끔 이곳에서 여기저기 두들겨 대기에 언젠가는 이 산 밑의 수맥을 터뜨려 홍수가 밀 려 나와 모조리 빠져 죽을 것이라고 나는 이미 두 번이나 그들에게 알려 그들로 하여금 어려움을 깨닫고 일찌감치 이곳을 떠나도록 경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이 하는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수백 명의 생명이 어찌 아이들 장난 같겠 는가? 그래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번에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여전히 이 해를 못하고 계속한다면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니 나 역시 전력을 다 기울여도 어쩔 수 없다." 128. 노인과 비록 책자 소영은 백발노인의 말을 듣자 섬뜩함을 느꼈다. "노선배께서 신경쓰실 것 없소이다. 그 사람들은 이미 이곳에서 떠나 갔으니까요." 백발노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상팔, 두구, 백리빙을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그들을 쫓아 보냈나?" 소영이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백화산장의 사람들이니 모두 장주의 명령을 받고 이곳을 떠난 것이지 요." "그도 그렇겠군." 백발노인은 소영을 뚫어질 듯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그는 앞을 바라보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영은 생각했다. '저 노인은 진짜 미친 사람이 아니다. 일부러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미치광이로 가장을 했을까? 변장할 마음만 먹으면 다른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변장할 수 있었을 텐데...필경 어떤 뜻이 있기 때문이겠지.' 이때 성큼성큼 걷던 노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리며 소영에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천하에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했는데...너는 그 어린 나 이에 놀랍게도 노부의 행적을 알아차리다니....." 소영은 이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그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나의 지우(知友)가 될 수 있어." 소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어찌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겠소? 나는 당신과 말다툼을 하기 싫어 입을 다물고 있는 것 인데, 당신은 우습게도 나를 친구라 부르며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군.' 소영이 여전히 아무 말도 않자 백발노인이 다시 말했다. "노부는 내일 중토(中土)를 떠나 천축(天竺)으로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생각지 않게도 길을 떠 나기 전에 너 같은 지우를 알게 되다니...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소영은 우습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으나 공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은 저에게 너무 과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젊은이! 만일 노부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자네들은 매우 중한 내상(內傷)을 입었네." 소영은 속으로 놀랐다. '이 노인은 기인이구나. 숨겨야 소용없겠다.'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를 제외한 세 사람 중에서 두 사람이 중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노부가 보건데 저들 세 사람은 모두 성하지 않은 것 같은데 ....." 백발노인은 싸늘한 안광을 빛내며 상팔, 두구, 백리빙 등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은 바위라도 뚫 을 듯 강렬했다. '매서운 눈빛이구나.' 소영은 속으로 노인의 눈빛에 흠칫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부상당한 것은 다만 두 사람뿐입니다. 저 낭자는 우리 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너무 내공의 진 기를 소모했기 때문에 지친 것입니다." "너는 총명한 지우일 뿐만 아니라 매우 솔직한 군자이다. 안타까운 것은 노부의 갈 길이 바빠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으니 너를 만난 것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노인은 말을 끊고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이 노인이 갑자기 또 미친 병이 발작하나?" 소영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노인은 하늘이 흔들릴 듯 요란스럽게 한바탕 웃어대더니 별안간 웃음을 그치며 중얼거렸다. "기왕에 만났으니 늦고 빠름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노부가 어찌 범인의 행동에 얽매이겠는 가!" 소영은 노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노인은 때로는 미친 것도 같지만, 필경 무궁한 학식과 무예를 지니고 있는 것 같구나. 지금 한 말에도 무슨 뜻이 있는 듯한데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으니...역시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노인은 천천히 소영 앞으로 다가서더니. 시선을 백리빙 등의 세 사람에게 던지며 말했다. "노부는 공력을 돕는 영약을 지니고 있다. 만일 네가 노부를 신임한다면 그들에게 약을 먹여라." 소영은 새삼 노인의 얼굴을 살폈다. '이 노인의 눈빛으로 보아 무공이 절정에 도달했음에 틀림없다. 만일노인이 우리를 해칠 마음만 있다면 지금 같은 형세에서는 매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 노인은 우리를 해치려는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는 공손히 대답했다. "노선배님의 은혜는 실로 감당키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의 형세가 매우 각박하니 그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리며 약을 받겠습니다." 노인은 품속에서 작은 옥병을 꺼내 소영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그 병에는 네 알의 약이 남아 있다. 너희들 네 사람이 한 알씩 나누어 복용해라." 소영은 병을 받아 들고 마개를 뽑았다. 그는 한 알의 약을 꺼내 입에 넣어 삼켰다. 그것을 본 노인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젊은이! 네가 먼저 약을 먹는데, 그 약에 어떤 독이 들어 있는지 염려되지도 않나?" 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노선배님께서 후배를 지우로 생각해 주셨으니 만일 약에 극독이 있어 제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유감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과연 감탄할 만한 기개를 지닌 청년이로다. 노부는 곧 서쪽으로 걸음을 옮겨 천축을 유람할 생각이다. 언제 다시 이쪽으로 돌아올는지는 나도 예측할 수 없다. 내일 아침 해 뜰 무렵에 노부 는 길을 떠날 예정인데, 너는 노부를 전송해서 나의 장도를 빛내 주지 않겠느냐?" 소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은 내가 먼저 했어야 하는데 이 노인이 앞질렀구나.' "좋습니다. 후배는 꼭 전송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 만나야 좋을는지 모르겠군요." "허허, 네가 나를 전송한다는 것은 매우 험난한 일이다." 소영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후배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노부는 내일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그런데, 그 배를 타는 장소는 이곳에서 수십 리 떨어졌으며 중간에 높고 험난한 산을 두 개나 넘어야 된다. 너는 비록 내가 준 영약을 복용했으 나 매우 긴 시간 동안의 운공조식이 필요하다."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네가 하늘을 나는 경공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 경이 되어야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 날이 새기 전에 겨우 목적지에 당도할까 말까 하다. 어디 계산 좀 해 봐라. 약속한 장소에 도착할 재간이 있 겠나?" 소영은 정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는 한 번 대답한 이상 전력을 다해서 가겠습니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면 길에 익숙치 못해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는지가 걱정입니다." "그것은 걱정할 것 없다." "걱정할 것 없다니요?" "노부는 너를 위해 한 가지 방법을 강구해서 네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 즉 도중에 길 안내를 하는 표식을 해 두겠다." 소영은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후배는 안심입니다. 후배는 꼭 약속한 장소에 약속 시간 안에 도착하겠습니다." "좋아, 노부는 기다리겠다. 네가 이곳에서 산에 오르면 길을 상세히 가르쳐 주는 표식을 발견할 것이다. 그럼 노부는 먼저 가겠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소영이 공손히 인사했으나 노인은 이미 삼사 장이나 멀리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 다. '아차! 좀 더 정확한 거리를 물어 봐야겠다.' 하고 소영이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백발노인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번개처럼 빠른 경공술이구나. 그런데 노인은 어째서 나에게 전송을 부탁한 것일까? 절세의 무 공을 지닌 기인이 나 같은 애송이의 전송을 받을 만한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소영은 노인이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었다. '아무튼 노인을 전송해 주기로 약속했으니 번복할 수는 없지. 험난한 길을 가야 할 테니 어서 운기조식을 해야겠구나.' 소영은 그 자리에 앉아 운공을 조식했다. 진기를 몸 안에 한바퀴 돌렸을 뿐인데 갑자기 단전에 서 뜨거운 것이 치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열기(熱氣)는 전신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과연 신기한 영단이구나. 그가 나에게 이런 영약을 준 것만으로도 나는 그를 꼭 전송해야겠구 나.' 소영은 몸을 벌떡 일으켜 상팔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 형제는 입을 벌리시오. 내가 줄 약이 있소." 상팔과 두구는 소영의 말을 못 들었는지 꼼짝도 안했다.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그들은 운공조식 의 중요한 고비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소영은 그들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제서야 그들은 서서히 눈을 뜨며 소영을 보았다. 소영은 양손에 한 알씩 약을 나눠쥐며 말했다. "두 분은 말하지 말고 입만 벌리시오." 상팔과 두구는 입을 벌렸다. 소영은 약을 그들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 약은 매우 효력이 신묘한 영약이오. 두 분께서는 얼른 약을 삼키시고 운기를 조식하시오." 상팔과 두구는 머리를 끄덕이며 약을 삼키더니 눈을 감고 다시 운기조식하기 시작했다.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백리빙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빙아, 좀 어떠냐?" 백리빙은 중주이고처럼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다만 내력을 너무 소비해 몹시 지쳐 있었던 것이 다. 그녀는 운공을 조식하자 새로운 진기가 많이 회복되어 중주이고처럼 기진한 상태는 아니었다. 소영이 묻는 말에 그녀는 눈을 살며시 뜨며 생긋 웃었다. "오빠, 난 많이 좋아졌어요." 소영은 약을 그녀에게 주며 말했다. "어서 이 약을 먹어라. 체력 회복에 많은 도움이 있을 거야." 백리빙은 손을 내밀어 약을 받을 생각은 않고 입을 살짝 벌렸다. "오빠, 먹여 줘요." 소영은 당황했다.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입을 벌린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백리빙의 자태는 깨 물고 싶도록 귀여웠다. 소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약을 백리빙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백리빙은 약을 삼키며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조용한 자세로 운공조식에 들어갔다. 소영도 백리빙과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운공을 조식했다. 약효가 체내에서 순환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쯤 운공을 조식해서 진기를 어느 정도 회복한 소영은 상팔과 두구를 돌아다 보았다. 그들은 아직도 운공을 조식하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소영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먹구름은 서서히 흩어지고 별이 드문드문 보였다. '밤이 꽤 깊었구나. 백발노인과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니 지금쯤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소영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중주이고에게 말했다. "상형과 두형! 나는 약속이 있어 곧 이곳을 떠나야겠소. 빠르면 점심 때쯤 늦어도 황혼 무렵에는 돌아오게 될 것이오. 형제들은 인연봉에서 기다려 주시오." 그러자 백리빙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나도 가겠어요." "운기조식을 끝냈어?" "벌써 끝났어요. 기운이 벌써 회복되었는데요." 소영은 망설였다. '그 노인의 성질이 괴팍해서 내가 백리빙을 데리고 간다면 싫어할는지도 모른다. 더우기 중주이 고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으니 백리빙을 이곳에 있게 하여 두 사람을 보호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빙아, 우리가 모두 간다면 중주이고를 누가 보호하지? 백화산장의 사람들이 이미 철수했지만 심목풍이 다지 나타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니 빙아는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백리빙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겠어요. 언제 빙아가 오빠 말을 거역했어요?" 소영은 백리빙의 불쾌한 표정을 보고 마음이 언짢았으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빙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할 것은 없어. 나는 빨리 돌아오도록 노력할 테니...내가 돌아올 때쯤 이면 중주이고의 상처도 많이 아물겠지! 자, 우선 이곳을 떠나자." 백리빙은 언제 화를 냈더냐는 듯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오빠, 언제 나를 데리고 서호에 가서 놀 거예요? 나는 그곳에 가서 뇌봉탑(雷峰塔) 아래의 백낭 자(白娘子)를 만나보고 싶어요." "그것은 다만 전설에 불과한 얘기인데....." "전설이든 사실이든 그 백낭자는 정말 가련해요. 그녀는 일편단심으로 허선(許仙)을 대했는데, 그 매정한 허선은 법해화상(法海和尙)의 말을 듣고 낭자를 뇌봉탑으로 눌러 놓았으니....." 백리빙은 갑자기 전설 속의 주인공이나 된 듯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 흐느낄 듯한 표정이 었다. '빙아가 갑자기 왜 이럴까? 나에게 어떤 암시를 주려고 하는 모양인데...정말 나를 이토록 당황 하게 만들지 말아 주었으면.....' 소영은 가슴에 벅찬 감동을 주체하기 곤란해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그러자 백리빙은 두 줄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푸념처럼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중원에서 한 분의 학식이 높은 선비를 모셔왔어요. 그분은 나에게 많은 학 문을 가르쳐 주었지요. 그 선배는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매우 다정다감한 분이었어요. 이따금 중 원의 전설과 신화를 들려 주었지요. 백낭자의 슬픈 전설도 그때 들은 것인데....." "....." "나는 그 전설을 들으며 백낭자의 어리석음을 비웃었어요. 천하에 미남자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 오직 허선만을 연모하다가 슬픈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가? 나 같으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으로 슬 픈 일생을 보내지 않겠다고....." 소영은 백리빙이 갑자기 전설을 꺼내는 것이 못마땅했으나 그녀의 태도가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 에 싫다는 표정을 감추고 한 마디 물었다. "빙아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백리빙은 눈물에 젖은 커다란 눈으로 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의 나는 남자가 그토록 매정한데 백낭자만이 헌신적인 애정을 바칠 것은 무엇이냐. 백낭자 는 왜 허선을 죽여 버리지 못했을까 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지금 나는....." 백리빙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의 내 생각은 달라졌어요. 역시 백낭자의 일편단심이 이해되고, 여자가 서야 할 곳이 어디 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어요."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빙아, 나이도 어린데 너무 많은 일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아." 백리빙은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고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어 보였다. "오빠, 내가 쓸데 없는 말을 해서 기분 나빠요? 난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고집 이 있어서 큰일이에요. 이런 얘기 하나 들어보겠어요?" "무슨 얘기인지 빨리 해 봐라. 나는 시간이 없으니까....." 백리빙은 눈을 살짝 흘기더니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의 일이에요. 아버지께서 무공을 연구하고 계시는데 나는 마구 떼를 썼어요. 나를 안 고 밖으로 나가 눈 구경을 시켜 달라고요. 아버지는 응낙하지 않았어요. 나는 마구 울어댔죠. 울 다울다 안 되겠길래 아버지가 아끼는 책이랑 골동품들을 마구 부수고 찢어 버렸어요." "그래서?" "생전 한 번도 화를 안 내시던 아버지께서 그때는 불같이 노하셔서 나를 막 때리셨어요. 계집애 가 성질이 사나우면 팔자가 드세다고 하시면서 말예요. 나는 사지를 버둥거리며 목청이 찢어지도 록 울었어요. 온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았어요. 어머님이 달래려고 무진 애를 쓰셨지만 막무가내였 지요. 결국은 아버지가 나를 안고 눈 구경을 시켜 주어 울음을 그치게 만들었어요." 소영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말 고집장이었구나. 그래 커오면서 성격이 달라졌나?" "네, 점점 사물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눈이 뜨이면서 부모님에게 효도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부모 님은 내 어릴 적의 성질을 생각하고 내가 고집하는 일은 무조건 따르셨어요. 그런데, 오빠를 안 뒤부터 나는 사람이 변해진 것 같아요." "어떻게? 착해졌단 말인가?" 백리빙은 씁쓸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줄곧 내 성질을 누르고 오빠의 말에 순종했어요. 내가 어째서 이토록 약해졌는지...하지만 오빠는 늘 차갑게 나를 대하고 ...나는 이따금 이런 착각에 빠져요." "어떤 착각?" "오빠는 허선이고 나는 백낭자이고...언젠가 오빠는 허선이 백낭자를 찼듯이 나를 매정스럽게 버 리고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끝을 흐리며 백리빙은 고개를 숙였다. 소영은 뭉클 치밀어 오르는 애정 같은 것을 의식했다. 백리빙의 어깨를 꽉 끌어 안고 다정한 말 로 어떤 맹세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소영은 감정의 충동을 누르며 일부러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빙아, 무슨 농담의 말을 그렇게 잘하나? 나는 허선이 아니고, 빙아도 백낭자가 될 수 없으니 그런 믿을 수 없는 전설에 우리 두 사람을 관련시키지 말아라." 소영은 백리빙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저 두 사람을 잘 보살피고 있어. 나는 이만 가 봐야겠어." 백리빙은 고개를 들고 큰 눈을 반짝이며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오빤 농담으로 들어요?" "무엇을? 아하! 또 그 얘기구나. 자, 그런 건 마음에 두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다녀와요." "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어." 소영은 흘러내린 백리빙의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고, 양쪽 뺨을 두손으로 감싸 쥐었다가 놓았다. 그러자 백리빙은 얼굴을 붉혔다가 웃음을 띠며 맑은 음성으로 말했다. "기다릴 테니 빨리 다녀와요." 소영은 눈웃음으로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걷는 그의 뒷모습을 백리빙은 꿈을 꾸는 듯 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영은 절벽을 기어올라 산봉우리에 올라 섰다. 그곳에는 과연 한 조각의 비단 헝겊이 돌에 눌 려 있었다. 소영은 허리를 굽혀 비단 헝겊을 집어 들었다. 그곳에는 길을 안내하는 글과 그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노인은 이곳의 지리에 정통한 모양이구나.' 소영은 비단 헝겊에 지시한 방향대로 몸을 움직였다. 도중에도 여러 곳에 지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길은 매우 험했다.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을 기어 오르고 그의 키를 넘는 가시덤불을 헤쳐야 했고 탁류가 흐르는 냇물을 건너고 높은 산봉우리를 넘어야 했다. 소영은 내상을 몹시 심하게 입었고 또 진기를 완전히 회복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얼마 안 가 피 로가 무겁게 엄습했다. '그 노인은 내가 내상을 입고 완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이토록 험준한 길을 달리도 록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는 마음에서일까?' 소영은 되돌아 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를 악물고 앞으로 전진했다. '남아의 일언은 천금보다 무겁다고 했다. 내 어찌 이만한 것을 못 참아 중도에서 포기하고 약속 을 깨뜨릴 수 있겠는가?' 소영은 땀에 흠뻑 젖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쉬지 않고 달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봉우리에 올라 서자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구나. 그런데 앞으로 남은 길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소영은 마음이 다급해져 쉴사이 없이 달렸다. 천신만고 끝에 어느 시냇가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 미 해가 한 발이나 떠올라 있었다. 탁류가 소용돌이 치며 흐르는 시냇물은 넓이가 삼사 장이나 되었다. 평소의 소영이 지닌 무공으 로써 건너지 못할 넓이는 아니었지만, 지금 소영은 몹시 지쳐 있었다. '도저히 뛰어서 건널 수는 없겠다.' 소영은 단검을 뽑아 몇 그루의 작은 나무를 베었다. 그것을 덩굴로 엮어 작은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을 타고 건널 수밖에 없지.' 소영이 강을 건너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하하하, 젊은 놈이 걸음이 몹시 느리군. 만일 네가 이곳에 나타날 것을 노부가 믿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백 리 이상은 갔을 것이다." 소영은 소리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길이 넘는 수풀 사이에서 대로 엮은 한 척의 뗏목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뗏목에는 머리에 나무동곳을 꽂은 노인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푸른도포를 입고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노인의 손에는 죽장이 들려 있었다. 노인이 죽장으로 냇물을 쿡 찔렀다.그러자 뗏목이 화살처럼 빠르게 소영의 앞으로 오더니 우뚝 멈춰 섰다. '노인은 긴 머리를 빗어 올려 동곳으로 다듬었고 얼굴도 매우 숭엄해 보여 마치 신선 같은 모습 이구나!' 소영은 노인의 중후한 용모에 위압감을 느끼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후배는 중상이 채 아물지 않았고 무공이 빈약해 노선배님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습니다."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노부는 네가 최대한의 경공을 발휘했으며 전력을 다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인은 잠시 말을 끊고 시냇물에 눈을 던지더니 다시 이었다. "너는 수중공부(水中功夫)를 할 줄 아느냐?" "못합니다." "이 냇물은 무서운 소용돌이가 있어 수중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더구나 피곤까지 겹쳤으면서 뗏 목으로 건너려고 했다는 것은 죽음을 일부러 택하는 결과인데...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소영은 급류에 시선을 던지며 대답했다. "후배는 이미 노선배님과 약속을 하였으니 그것을 어길 수 없습니다. 모험을 하면서라도 강을 건너려고 한 것입니다." "너는 노부와 만나기로 한 것을 후회하느냐?" "후배가 만일 후회했다면 오는 도중에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니?" "후배는 노선배님이 남기신 지표를 따라 모험을 하며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후배가 보니 다른 안전한 길도 있었습니다. 노선배님이 일부러 험준한 길을 골라서 후배에게 고통을 겪게 하 신 것이....." 노인이 손을 흔들어 소영의 다음 말을 막으며 입을 열었다. "이봐, 청년! 이 세상에 공들이지 않고 되는 일은 없어. 너에게 나는 자그마한 시험을 했을 뿐이 야." 소영은 오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만일 후배가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비록 열 배나 더 험한 길이었다 하더라도 좀 더 일찍 이곳 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하하, 네 말이 맞다. 네가 부상만 당하지 않았다면 어찌 백 배의 험난한 길인들 못 뚫었겠느냐." 소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선배님의 말씀은 후배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뿐입니다." "하하, 너는 지금 매우 지쳐 있군. 어서 눈을 감고 운공을 조식해라. 네가 체력을 회복한 뒤에 다시 얘기하지." "후배는 따르겠습니다." 소영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가 몽롱한 의식 속으로 빠져 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에 심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코끝을 찌르는 향기를 느끼며 소영은 눈을 떴다. 해는 이미 중천에 높이 솟아 있었다. 소영은 부 드러운 풀밭에 누워 있었다. 소영이 누운 곳은 넓이가 불과 오육 장밖에 안 되는 작은 분지(盆地)였다. 사면이 높은 산봉우리 에 둘러 싸여 바람을 막아 주고 있었다. 동쪽 산 가까운 곳에는 대나무에 둘러싸인 한 채의 초가가 있었다. 소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손으로는 품속을 뒤졌다. 소왕의 무공비록은 그대로 간직되어 있 었다. 소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지를 움직여 보았다. 이상하게도 전신이 개운하고 생기가 넘쳐 흘렀다. '나는 분명 시냇가에서 운기를 조식하고 있었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 까무러쳤었지.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와 있을까? 그리고 그 백발노인은 어디로 갔을까?' 소영은 그동안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쳐 왔기 때문에 성격이 매우 침착해져 있었다. 그는 사방 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그 노인의 짓이다. 그런데 그동안 노인은 나를 어떻게 다뤘는지 모르겠군.' 소영은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초가로 눈길을 돌렸다. '저 집이 노인의 거처인 모양이다.' 소영은 초가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땅에는 꽃들이 피어 있었는데 그 종류가 수백 가지는 되 었다. '이 꽃나무들은 본래 이곳에서 자란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옮겨다 심은 것이로구나.' 소영은 초가집의 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소영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후배는 보살핌을 입고 감격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기다렸다가 목청을 높여 말했다. "후배는 이만 물러가야겠는데 노선배님을 뵈올 수 없겠는지요?" 이번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 노인은 천축으로 가겠다더니 이미 떠난 것인가?' 소영은 그런 생각이 들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과 토방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단 하나뿐인 방은 다른 세간은 없고, 나무 탁자 하나와 두 개의 의자뿐이었다. 탁자 위에는 얄팍 한 책 두 권이 놓여 있고 그 책 위에는 종이 쪽지 한 장이 있었다. 소영은 방으로 들어가 종이쪽지를 집어 들었다. <너의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뚫어 주기 위해서 나는 몇 시간 늦게 떠나는 것이다. 이미 작정된 길이라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두 권의 검보신공(劍譜神功)을 남겨 지우로서의 우의를 표한다.> 밑에는 '망년지교―忘年之交'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반 시간만 일찍 깨어났어도 노인을 한 번 더 볼 수 있었을 텐데...이제 훌쩍 떠났으니 언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책의 표지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엽산 검법정록(葉山 劍法精錄)이라 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밑에는 작은 글씨로 <담운청수찬(談雲靑水撰)>이라고 써 있었다. 소영은 자기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눈을 비비고 다시 들여다 보았다. 역시 '엽산 검 법정록' 여섯 자임에 틀림없었다. '금궁에서 우문한도가 어느 백발노인의 시체 앞에서 절을 하며 분명 담운청이라고 했었다. 지금 이 책의 저자도 담운청이다. 그렇다면 금궁에 우리보다 먼저 들어간 사람이 바로 그 노인이었단 말인가?' 소영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노인이 금궁에 들어갔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 고 십대 기인이 남긴 책을 또 얻게 되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 노인은 확실히 기인이다. 이런 기인을 만난 것은 하늘이 주신 행운이었는데 나는 그분의 이 름조차 묻지 못했으니...내가 눈이 먼 때문이겠지만 너무 안타깝다.'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우연히 만난 나를 지우라 칭하고 이런 무공비록까지 남겨 주고도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떠났으 니...정말 도량이 넓은 이인이다." 소영은 떨리는 손으로 담운청의 검법비록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밑에 있는 표지가 드러났다. 그 곳에는 '탄지신공(彈指神功)'이라는 제목과 '소림제자 무상(小林弟子無相) 남김'이라고 적혀 있었 다. 이것을 본 소영은 또다시 놀라며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 말씀이, 소림의 탄지신공은 극묘한 내공의 절초라고 하셨는데, 뜻밖에도 이 비록을 그 노인이 나에게 남겨 주다니.....' 소영은 검법비록을 놓고 탄지신공의 책을 집어 들었다. 첫 장을 들치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 다. <나는 내 생명이 금궁에서 마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다른 고수들이 제각기 책상에 엊드 려 자기들의 무공을 남기려고 하니, 나도 나의 무공을 여기에 수록해야겠다. 후일 금궁에 들어오 는 사람이 이 비록을 가져다 열심히 연구해서 나의 무공 절기가 없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 다.>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교수신공 포일천은 한 채의 금궁을 짓고 당시 무림의 십대 기인을 불러 들여 일망타진하려고 했다. 그는 이들을 죽여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고 했으나 오히려 먼저 죽고 한 권의 무공비록도 남기지 못했으니...남을 함정에 넣으려면 자신부터 들어가야 된다는 말 그대로이군." 소영은 다시 책장에 시선을 던져 읽어 갔다. <나의 무공은 그 깊이와 오묘함에 있어서 다른 문파와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나의 무공은 모 두가 선대 사조부로부터 물려 내려온 것이기에 남길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고심한 끝에 일평생 을 두고 연구한 '탄지신공'의 묘결을 남기기로 했다. 이 묘결은 짧은 기간에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쉽게 저술했다.> 소영은 다시 책에서 눈을 떼었다. '그가 이 탄지신공을 남긴 것은 그가 일생 동안 무공을 연마한 결정체일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얻어 짧은 시간에 그의 절묘한 무공을 얻을 수 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영은 책을 탁자 위에 놓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옷깃을 가다듬고 두 번 큰절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제자는 이번에 스승님의 절기 비록을 얻어 실로 평생 은혜를 못 다 갚을 행운이옵니다. 후일 기회가 있으면 대사님의 절기유서(絶技遺書)를 소림 문중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소영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듯 공손한 예를 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조용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림사의 무상대사는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어느날 그는 열두 사람이 탄지신공을 연습하는 것 을 목격했다. 그들은 어느 고인이 남긴 책을 읽으며 절기를 습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절기는 백 년이 걸려야 습득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열두 사람은 중도에서 모두 물러나고 그 중의 두 사람은 자기들의 무능을 탓하며 자결하고 말았 다. '내가 그것을 습득해야겠다.' 무상대사는 곧 사장(師長:주지)을 졸라 탄지신공을 배우겠다고 했다. "너는 아직 이르다. 다른 무공을 연마하는 것이 오히려 빠르다." 사장은 이렇게 말하며 설득했으나 그는 초지일관,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장은 할 수 없이 허락했다. 무상대사는 곧 석실에 들어가 일체 외계와의 접촉을 끊고 연습에 몰두했다. 거의 잠도 자지 않 고 피나는 노력을 하기 오 년...그러나 그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이 절기를 이기려면 우선 선결돼야 할 일이 있구나. 깊은 내공이 없고서는 절기의 겉모습도 흉 내낼 수 없겠다. 그렇다. 우선 내공의 힘을 기른 후에 다시 연구하자.' 무상대사는 무공의 기초부터 닦기로 결심하고 좌선(坐禪)에 들어갔다. 눈비가 몰아치고 찬바람, 뜨거운 태양이 피부를 가르는 고통을 참으며 삼 년 동안 내공의 힘을 길렀다. 높은 내공을 지니게 되자 다시 탄지신공을 파고들었다. 불철주야, 뼈를 깎는 행공을 하기 오 년, 비로소 그는 탄지신공의 절기를 몸에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장장 십팔 년이나 걸린 고행 끝에 얻 은 절기였다..... 여기까지 읽어온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 탄지신공을 연마하는데 십여 년의 세월을 소비해야 된다면 도저히 내 힘이 미치지 못 하겠다." 소영은 실망을 느꼈으나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읽어 내려갔다. ...이 절기를 배운 뒤에서야 비로소 나는 이 속에 쉽게 배울 수 있는 비결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이 비결만 안다면 절기를 터득하기는 매우 쉬우며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 깝게도 선대 사조부들은 이 비결을 서술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노부는 이 비결을 서술하여 누 구든지 쉽게 탄지신공을 터득할 수 있게 하였다. 난 이 절기가 금궁에 묻히는 것을 원치 않으니, 이 책을 습득한 사람이 절기를 익혀 악을 제거해 줄 것을 부처님에게 비는 바이다. 그 다음부터는 바로 무상대사가 비결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쉽고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소영은 어느 새 그 비결을 읽으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탄지신공은 다만 손가락을 굽혔다가 퉁기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무상대사는 이 하나의 초 식을 수천 마디로 상세하게 풀이하고 있었다. 진기운행법, 경맥법 등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어 소영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놀랍다. 이토록 자세하고 쉽게 풀이하다니...아주 간단하구나.' 소영은 책 속에 정신이 흠뻑 빠져 어느 새 십여 번이나 연습을 했다. 하면 할수록 자신이 생기 고 오묘한 지력의 위력에 놀라기도 했다. 방에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소영은 깜짝 놀랐다. '아차, 내가 너무 시간을 보냈구나. 중주이고와 백리빙이 눈이 빠지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 데.....' 소영은 급히 두 권의 책을 품속에 간직하고 방을 나섰다. 밖에는 이미 황혼이 짙게 깔려 있었다. 더우기 이 분지는 사방에 산이 막혀 어둠이 일찍 찾아들었다. 소영은 급히 산봉우리로 올라가 방향을 확인한 뒤 인연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인연봉 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웠다. 깜깜한 밤중이라 얼른 사물을 분별할 수 없어 소영은 사방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깎아지른 벼랑 가까이에 다다른 소영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거센 바람에 나부끼는 흰 옷자락 을 발견했던 것이다. '백리빙인가?' 소영은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서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빙아냐?" 그러자 흰 옷의 소녀가 몸을 돌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129. 발길을 되돌리다 소녀는 머리를 쓸어올리고 소영에게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오빠, 이제 와요?" 그 소녀는 치마와 저고리로 갈아 입은 백리빙이었다. 신선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소영 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밤바람이 차가운데 절벽 위에 서서 뭐하지?" 백리빙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흰 옷을 입고 있으면 오빠가 얼른 알아볼 것 같기에 갈아 입고 나 왔어요." "만일 내가 하룻밤 동안 오지 않았더라면 빙아는 이 절벽 위에서 밤을 새울 뻔했군?" "그럼요. 오빠가 돌아올 때까지 난 여기서 기다릴 결심이었어요. 만일 오빠가 며칠 안으로 돌아 오지 않았다 해도 역시 난 기다렸을 거예요." 백리빙의 말은 소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토록 굳은 마음을 먹고 있으니...후일 어떻게 대해야 좋을는지 모르겠구나.' 소영은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물었다. "만일 내가 십여 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해도 역시 기다렸겠니?"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난 오빠를 믿으니...오빠는 결코 날 속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십 일 이 아니라 백 일이라도 난 기다릴 수 있어요." 소영은 격동을 누르며 오른손으로 백리빙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가자, 우리는 내일 길을 재촉해야 하니까....."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백리빙이 걸으며 물었다. "오빠는 그 노인을 만났어요?" "만났다. 심목풍은 많은 노력과 시간, 인명을 없애며 금궁에 들어가 십대 기인의 비록을 얻으려 고 했지만 그는 모든 꿈이 깨어지고 헛수고만 했으니...우스운 일이다." 말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한 채의 초가집 앞에 당도했다. 집 앞에는 상팔과 두구가 서있다가 소 영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이제 오시오?" "네, 두 분의 상처는 좀 어떠시오?" 소영이 답례를 하며 묻자 상팔이 대답했다. "형님이 준 영약은 정말 신묘하더군요. 그 약을 복용하고 운기조식을 하니 우리들의 상처는 깨 끗이 완치되었소." "그거 다행이군요." 두구가 말했다. "방에 주안을 마련했으니 어서 방으로 들어가시오. 따끈한 술을 들면 한기가 가실 것이오." "고맙소." 소영은 마침 공복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앞장 서서 방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네 사람분의 음 식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고급의 산해진미였다. '이런 산중의 어디서 이런 음식을 구했을까?' 소영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눈치를 알아차렸는지 상팔이 입을 열었다. "소제가 한 마리의 꿩을 잡아 요리를 만들었는데 형님의 구미에 맞을는지 모르겠군요." 소영은 상머리에 앉아 음식을 집어 입에 넣었다. "솜씨가 좋군요." 소영은 시장기를 느꼈기 때문에 음식의 맛은 특별했다. 맛있게 먹는 소영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 던 상팔이 백리빙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리낭자, 형님이 오셨으니 낭자께서도 음식 좀 드시지요." 백리빙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이 시장기를 메우던 소영은 백리빙을 돌아보며 물었다. "빙아도 아직 밥을 먹지 않고 있었나?" 상팔이 대답했다. "백리낭자는 여태껏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다오." "왜?" "형님이 오면 같이 들겠다면서....." "이건 너무 미안한데! 자 우리 다 함께 음식을 듭시다." 네 사람은 상머리에 둘러 앉아 음식을 먹었다. 모두 배가 고팠으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빈그릇 만 남게 되었다. 식사가 끝나자 소영은 상팔과 두구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상처가 거의 아물어 기운을 회 복한 낯빛이었다. '노인이 준 그 영약은 과연 신묘하구나. 만일 그 약으로 중주이고를 치료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삼사 일은 요양해야 움직일 수 있었을 텐데.....' 소영은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새삼스럽게 그 노인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을 느꼈다. 상팔이 상 위의 그릇을 치우며 말했다. "심목풍도 매우 중한 내상을 입은 것 같소." "상형이 보았소?" "두제와 함께 보았지요. 그의 안색이 송장 같고 숨을 헐떡이고 있더군요. 그는 소제와 두제에게 각각 일 장씩 공격을 했었는데 그때 우리들은 몹시 지쳐 있지 않았겠소? 그런데도 그의 장력이 형편없이 약해 우리들이 받아낼 수 있었소." "그럼, 상형의 내상은 그의 장력을 받아낼 때 입은 것이오?" "그렇소." 소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나의 수라지력에 명중되었는 데도 여전히 장력으로 두 분을 부상시켰으니...심목풍의 내공 의 깊이는 과연 놀랍군요. 무공으로 말하면 무림의 십대 기인에 들 만한데." 소영은 애석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앉아 있던 백리빙이 중주이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치열한 싸움 때문에 피로했는데...다시 또 누구와 싸우게 될는지 모르겠군요." 상팔은 소영과 백리빙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낭자가 전해 준 형님의 명령을 받고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있었소. 형님의 다 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중주이고는 소영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며 숲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공교롭게도 심목풍의 부하 에게 발각되었다. '자칫하다가 소영의 계획을 드러나게 하면 곤란하니 우선 도망가자.' 중주이고는 재빨리 그곳을 탈출하려고 했으나 심목풍의 부하는 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뒤 쫓았다. 쫓기고쫓는 필사적인 경주 끝에 중주이고는 추격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도 백화산장에서 나온 고수들과 부딪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도망갈 수가 없어 악전고투를 치루어야 했다. 십여 명의 적들을 무찔렀으나 적의 수 효는 점점 늘어나 갈수록 불리해졌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두 사람은 죽을 기를 쓰고 좌충우돌, 마구 베고 찌르며 싸워 강적들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숨을 돌린 그들은 "형님이 아직 그 골짜기에 있을 테니 갑시다." 하고 골짜기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골짜기에는 적의 파수대가 즐비해서 뚫기가 여간 힘드는 것 이 아니었다. 네 번째의 파수대까지 통과했을 무렵 중주이고는 다시 주조룡 등의 고수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다시 생사를 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심목풍이 그곳에 나타났다. "...소제와 두제는 심목풍을 만난 순간 죽음을 각오했었지요. 그런데 그는 우리 두 사람에게 각각 일 장씩만 쳐낸 뒤 곧 주조룡 등을 데리고 물러갔소. 우리 두 사람은 그의 일 장에 부상을 입고 억지로 진기를 끌어 모아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오." 상팔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소영이 물었다. "상형은 그가 지친 안색이고 장력이 많이 약해진 것으로 보아 부상당했다는 것이오?" "아니오. 그는 우리에게 일 장씩 공격한 뒤 울컥 피를 토했소. 그는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리더니 부하들을 이끌고 급히 물러갔소. 자기의 부상을 우리가 눈치 챌까 봐 두려워하는 표정이었소." 소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다행히 두 분께서는 무사했군요." "만일 형님이 영약을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쯤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을 것이오." 두구가 이어 입을 열었다. "형님은 중상을 입었으면서도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구원했으니 그 넓은 도량과 의리에 감격합니다." "하하, 우리는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맹세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오?" "형님의 말이 맞소이다." 백리빙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일단 위험을 벗어났는데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그녀는 소영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오빠, 나를 데리고 서호로 가겠다는 약속은 언제 지킬 거예요?" 소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약속한 것이니 지켜야지. 그러나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당한 시기 같은데요." "어째서?" "그걸 몰라서 물어요? 오빠는 천하가 다 아는 인물이므로 늘 바쁜데, 지금은 심목풍이 중상을 입고 있으니 잠깐 동안의 여유가 있잖아요?"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빙아의 말이 맞다. 지금 심목풍은 중상을 입었고, 그의 부하들도 많이 잃었으니 한동안은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 데리고 가는 거죠?" "빙아, 나는 마땅히 승낙해야 옳겠지. 하지만 지금 약간의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서 한 가지 해야 될 일이 있다." 백리빙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는 맥풀린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그토록 중요해요?" "매우 중요하지. 나는 꼭 가야 된다. 빙아, 내가 금궁 안으로 들어간 것은 바로 그녀를 돕기 위 해서다. 내가 지니고 있는 금궁의 열쇠도 바로 그녀가 준 것이다." 백리빙은 뾰로통해지며 말했다. "정성이 지극하군요. 하지만 금궁 안에 십대 기인이 남긴 보물들은 이미 다른 사람이 가져갔잖 아요?" "그렇지 않다. 운좋게도 금궁 안에는 소왕의 무공비록이 남아 있었어. 내가 찾고 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오빠는 소왕의 무공이 십대 기인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해요?" "아니지. 그들의 무공은 모두 비슷했다. 그런데 그녀가 대적하려는 상대방은 소법의 명수다. 그 러니 그녀에겐 소왕의 비록이 가장 필요하며 이것만 있으면 능히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이 다." "그랬군요." 백리빙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는 지금 그 여자를 도우러 가겠다는 말인가요?" "그렇다." "그게 누구예요?" "악소채라는 낭자다." 백리빙은 삐죽해지며 물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아가씨이겠군요. 나보다 훨씬 예쁘지요?"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나의 누님이야." "오빠는 소씨이고 그녀는 악씨인데 어떻게 남매가 되지요?" 소영의 얼굴에 그늘이 덮였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운이모가 아니었더라면...악소채가 나를 집에서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까지 살 수도 없었고, 설혹 살아 있다 하더라도 꼬치꼬치 말라 죽음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겠지." 백리빙이 물었다. "운이모란 또 누구예요? 악소채와 왜 연결을 시키지요?" "운이모는 바로 악소채의 어머님이지. 운이모가 나에게 준 영향은 너무도 크다. 운이모가 아니었 다면 나는 약골의 무명서생에 불과했지." "아! 차라리 오빠가 약골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리빙의 말에 소영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지?" "내가 오빠를 보살펴 줄 수 있었을 테니....." 소영은 피식 웃었다. "빙아의 말대로라면 빙아를 만나지조차 못했을 걸? 만일 우연히 알 수 있었다 하더라도 무명 약 골의 남자와 친구가 되었을까?" "될 수 있어요." "그건 그렇다 치다라도 내가 무명 약골의 서생이었다면 우리가 만날 기회도 없었을 거야." 백리빙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더니 처량한 음성을 입술 사이로 밀어냈다. "오빠는 어디서 악낭자를 만나려는 거예요?" "형산의 단혼 계곡 절벽 밑에서....." "나를 데리고 갈 수 없어요?" "빙아, 그곳은 매우 험준하며 상대방의 무공이 매우 높아 위험하다. 그의 무공은 심목풍에 뒤지 지 않는다. 누님은 나보다 무공이 강한 데도 감히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었어." "흥, 나는 오빠가 왜 나를 데려 가려고 하지 않는지 알아요. 그것은 상대방의 무공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오빠가 악낭자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나를 데리고 가면 악낭자가 기분 나쁘게 생각할 테니까....." 소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띠며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그렇지 않다. 다만 그곳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아무리 위험해도 금궁보다 더하지는 않을 거예요. 또한 상대방이 강하다 해도 심목풍보다는 강 하지 못할 거예요." 소영은 입을 다물었다. 끝내 쫓아갈 뜻을 나타내는 백리빙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다. 중주이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끼어들 입장이 못된 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영이 대답을 않자 백리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 내 말이 맞지요? 그곳은 금궁보다 덜 위험하지요?" 소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참으로 빙아의 고집엔...그곳은 금궁보다 몇 배 위험하고 상대방도 심목풍보다 강하다. 그러나 나는 빙아를 데리고 가겠다." "정말이에요? 오빠는 악낭자가 두렵지 않아요?" 백리빙이 얼굴을 활짝 펴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소영은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악누나는 화내지 않는다. 빙아는 쓸데 없는 생각은 마라." 빙아는 기쁜 나머지 어쩔줄을 몰라 하며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소영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 다. 소영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팔이 입을 열었다. "형님, 우리 두 사람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형산은 매우 험준하고 또한 옥소랑군의 무공이 고강하니 두 분께서는 나를 따라 모험할 필요가 없소." "아무리 위험해도 형님이 가는 곳이면 우리도 가야 옳지 않습니까?"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악소채의 무공이 강하다는 것을 두 분께서는 아시지요?" "물론이오. 악낭자의 무공은 옥소랑군보다 강할는지도 모르지 요." "그러나...그녀는 옥소랑군을 두려워하며 여태껏 살아 왔소." "그것은 옥소랑군의 뒤에 있는 힘을 꺼려서 그랬겠지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옥소랑군의 뒤에 있는 힘...그것 때문에 이번 싸움은 악소채가 불리하오. 그래서 두 분 의 모험을 말리고 싶소." 상팔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 않소. 싸움이 이쪽에 불리하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가서 고난을 같이 하려는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좋소, 갑시다. 그러나 한 가지 약속하시오." "무슨 약속이오?" "형산에 도착하면 절대로 내 말에 따라야 하오. 내가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못 당하 는 적은 두 분도 당할 수 없소." "좋습니다. 우리는 형님의 분부대로 움직이겠소." 네 사람은 곧 행장을 수습해 놓고 휴식에 들어갔다. 이튿날 새벽에 그들은 서둘러 길을 떠났다. 소영은 다급한 마음에서 쉴사이 없이 달렸으므로 다 른 사람들은 그를 따르기에 허덕거렸다. 점심때쯤 네 사람은 형산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과는 아직 두 시진의 여유가 있었다. '옥소랑군은 무공이 높은 동조자들을 데리고 올 것이며 이번 전국을 깨끗이 처리하려고 들 것이 다. 악소채가 그의 제의를 거절하면 한바탕의 결전을 피할 수 없을 텐데...마침 나에겐 세 가지 무 공비록이 있으며 계획보다 이삼 일 일찍 금궁에서 나올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소영은 무상대사의 탄지신공을 연습하려다가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일찍 단혼애에 내려가 누님과 함께 세 권의 책을 펼쳐 놓고 연습하는 것이 좋겠다.' 소영은 중주이고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은 형산의 지세에 익숙하오?" "대강은 알고 있소." 상팔의 대답에 소영이 다시 물었다. "단혼애라는 곳을 아시오?" "압니다. 허지만 그곳은 매우 험난한 계곡으로, 이름 그대로 사람의 혼을 끊을 만하지요." "그럼 나를 안내하시오." "좋습니다." 상팔은 쾌히 응낙하고 앞장을 섰다. 그 뒤를 세 사람이 따랐다. 백리빙은 시종 입을 다문 채 심 각한 표정으로 묵묵히 걷고 있었다.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 잡초가 무성한 분지에 이르렀다. 울 긋불긋한 기세가 매우 황량했고 엉겅퀴가 우거진 풀밭은 매우 넓었다. "이곳이 단혼애요?" "아니오. 이곳은 유명한 사원(蛇園)이란 곳이오." 상팔의 대답에 소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사원? 어떤 이유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소?" "그렇소. 이곳에는 독사들이 수없이 득시글거리고 있지요. 아침이면 독기가 안개처럼 덮였다가 한낮이 되어야 걷힌답니다." "독기라니?" "그것은 독사들이 뿜어내는 것이지요. 밤에 기온이 떨어지면 독기가 안개처럼 기층을 형성하여 덮였다가 햇볕을 받고 사라지는 것이라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초원을 바라보았다. 과연 독사들이 우글거릴듯 무서운 느낌을 주는 풀 밭이었다. "독사들이 우글거린다니 돌아서 다른 길로 갑시다." "돌아가는 것이 안전은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돌아야 될는지 모르오. 내가 알기로는 이 사원을 뚫고 나가야 단혼애에 도착할 수 있소."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사원을 뚫고 나갈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소. 나는 다른 길을 알지 못하오." "좋소. 그렇다면 우린 사원을 뚫고 갑시다." 소영의 말이 떨어지자 두구가 입을 열었다. "형님, 잠깐만....." "두형 왜 그러시오?" 두구는 작은 보따리를 내려 놓더니 무엇인가 뒤적거려 꺼내 놓았다. 그것은 발을 감을 수 있는 가죽띠였다. "나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소. 여기 많은 건량(乾糧)과 네 벌의 발 묶을 것을 가져왔소. 이것은 사원을 지나갈 것을 미리 알고 상형이 준비시킨 것이오." 소영은 상팔을 돌아보며 말했다. "상형은 정말 선견지명이 있군요." "하하, 어찌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겠소? 다만 미력한 힘이나마 형님을 위해 바치려고 늘 머리 를 쓰고 있을 뿐이지요." "아무튼 고맙소" 소영은 가죽띠를 들어 발을 묶기 시작했다. 백리빙과 중주이고도 발에 가죽띠를 감았다. 백리빙의 얼굴은 시종 침울해 있었다. 슬픔을 억지로 깨물고 있는 애수어린 모습을 본 상팔은 '이 낭자는 나이도 어린데 벌써부터 애정의 쓴맛을 느끼고 있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측은하기 도 하군.' 생각하며 일부러 농담기 섞인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백리낭자는 매우 두려운 모양이지요?" 백리빙은 머리를 저으며 나직이 대답했다. "두렵지 않아요." "그럴 리가...무공이 아무리 고강한 여자라도 뱀은 두려워하게 마련인데, 낭자가 정말 두렵지 않 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인데요?" 백리빙은 쓸쓸하게 웃었다. "과거에는 나도 두려워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그건 어째서?"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결국 한 번 밖에 죽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목숨이 아니겠어요? 저는 이미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찌 뱀을 두려워하겠어요?" 상팔은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백리빙의 말 속에는 소영에게로 향한 일편단심이 너무도 역 력히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서운 집념의 낭자로군.' 상팔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앞장을 섰다. "내가 앞장을 서겠소." 소영도 몸을 일으키며 백리빙에게 말했다. "빙아, 빙아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한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백리빙은 몸을 일으켜 발을 두어 번 가볍게 구르더니 대답했다. "한 가지 일을 걱정하고 있어요." "무엇인데?" "그 악낭자가 나를 용납할는지 모르겠어요." 소영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빙아는 악소채의 성품을 몰라. 그녀의 도량과 성품은 남자에 못지 않으니 빙아는 염려 마라." "오빠의 말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겠어요." 백리빙은 여전히 수심에 잠긴 표정을 지우지 않았으나 더 말하지도 않았다. 상팔이 앞에 서고 그 뒤를 백리빙, 소영이 따르고 맨 뒤를 두구가 따랐다. 풀은 매우 무성했다. 어느 곳은 한 길이 넘도록 자랐으며, 구역질이 날 듯한 비린내가 진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 풀밭에 독사가 우글거린다는 것은 생각지 않더라도, 이 지독한 비린내 만으로도 과히 들어서 고 싶지 않은 곳이구나.' 소영은 이따금 풀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백리빙을 찾으려고 고개를 내밀어야 했다. 그녀의 작은 체구는 풀이 가리고도 남았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과 시녀들의 시중만 받으며 귀엽게 자란 백리빙이 나를 따라 나선 뒤부 터 고생이 많구나. 공인들 틈에 끼어 거칠은 남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많은 위험을 겪었고 이제 사원에 들어와 허덕이며 걷는 모습이 정말 가련하구나.' 소영은 백리빙에 대한 동정심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풀 사이로 희끗희끗 보이는 백리빙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빙아, 고되지?" 백리빙은 걸음을 잠깐 멈추고 소영을 돌아보더니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재미있어요. 조금도 고된 줄 모르겠어요." 소영은 성큼성큼 다가가 백리빙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빙아, 나는 지금 빙아가 몹시 고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리고 빙아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려 는 것도....." "난 정말 고되지 않아요. 그리고...악낭자를 만났을 때 그녀가 나를 용납할까 하는 생각이 들 뿐 다른 일은 없어요." "그것은 걱정하지 말라니까. 악소채는 빙아를 좋게 대해 줄 것이야." 이때였다. 상팔이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조심하시오!" 그와 동시에 일 장을 힘껏 쳐내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장풍은 거센 폭풍처럼 앞을 휩쓸어 길길이 자란 풀들을 쓰러뜨렸다. 이 장 앞까지 훤하게 뚫어 놓은 무서운 장력이었다. 상팔이 일 장을 후려치자 붉은 벼슬이 달린 독사 한 마리가 툭 떨어졌다. 상팔은 소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독사는 무서운 독을 지닌 봉관사(鳳冠蛇)라는 것인데, 펄쩍펄쩍 뛰며 사람을 상하게 하는 흉 악한 놈이오. 우리는 방심할 수 없으니 각자 무기를 꺼내 들고 몸을 보호하는 것이 좋겠소." 상팔은 품속에서 금주판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두구도 철필을 꺼내 오른손에 쥐었다. 소영은 단검을 꺼내 백리빙에게 내밀며 말했다. "빙아, 이 단검은 풀속에서 사용하기에 매우 유리하니 받아라." 백리빙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상대협이 앞에서 길을 인도하니 독사들이 모두 놀래서 도망갈 거예요. 이대로 가겠어 요." 소영은 백리빙의 천진난만한 태도에 더 말을 못하고, 바짝 뒤따르며 그녀를 보호했다. 상팔은 주판을 흔들어 금빛 한풍을 쏟아 내고 이따금 장풍을 날려 풀을 쓸어 눕히며 앞으로 전 진했다. 그의 입에서 "조심하시오!" 하는 소리가 튀어 나올 때마다 한 마리의 독사가 시체로 변해 떨어졌다. 그러나 별로 위험을 느 낄 만한 사태는 빚어지지 않았다. 긴장 속에서 넓은 초원을 벗어나자 이번엔 높은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절벽은 발을 붙일 만 한 곳도 없이 매끄럽고 높아 기어 오르려면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소영은 절벽을 바라보며 상팔에게 물었다. "상형, 길이 막히지 않았소?" "단혼애는 이 우거진 사원의 끝에 있음이 틀림없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절벽을 기어 올라 넘어야 한단 말이오?" 이때 백리빙이 절벽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저게 뭐예요?" 소영은 백리빙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깎아지른 절벽에는 이상한 물체라고는 아무것도 발 견되지 않았다. "빙아, 무엇을 보고 그러지?" "사람 같아요." "사람?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냐?" "저기 거대한 바위가 있잖아요? 그 옆에서 번쩍하더니 사라졌어요." 소영은 다시 살펴보았다. 커다란 바위가 절벽에 바짝 붙어 솟아 있는 것만이 보일 뿐 사람의 그 림자조차 없었다. '백리빙의 시력과 내공으로 보아 잘못 보지는 않았을 텐데.....' 소영은 바위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바위와 절벽 사이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이 잡초가 이상하다. 자연적으로 자란 것이 아니고 사람이 일부러 위장하기 위해 심은 것 같 다.' 소영은 풀을 휘어 잡고 뽑아 보았다. 그것은 아무 힘도 안들였는 데도 뽑혔다. 소영은 재빨리 손 을 움직여 잡히는 대로 마구 뽑았다. 풀을 뽑아내자 동굴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상팔이 부르짖었다. "아, 이것이 맞소. 단혼애로 가려면 하나의 동굴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 문이 바로 그 동굴의 입 구임에 틀림없소." 두구가 중얼거렸다. "흥, 놀라운 일이군. 누구든지 단혼애에 들어서면 죽는다는 것을 암시라도 하듯 잡초로 돌문을 막아 놓았으니....." 소영은 돌문에서 시선을 떼어 백리빙을 바라보며 물었다. "빙아, 사람의 그림자를 분명히 보았겠지?" "내 생각에...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그림자예요. 바로 이 앞에서 사라졌어요." "그래? 좋아, 내가 앞장 설 테니 우리 들어갑시다." 소영은 동굴 어귀로 들어섰다. 세 사람이 그의 뒤를 따랐다. 동굴 속으로 들어서자 싸늘한 바람이 피부를 할퀴었다. 동굴은 몹시 꾸불꾸불했지만 바닥은 평 탄했다. '조금도 습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공기가 잘 통하는 모양이군.' 소영은 진기를 모아 가슴을 보호하며 앞으로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어두컴컴한 길을 더듬으며 십 장쯤 나가자 햇빛이 보였다. '벌써 출구에 다다른 모양이구나.' 소영은 걸음을 빨리 했다. 동굴을 빠져나오자 깊은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은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며 짙은 안개에 덮여 있었다. 위로는 까마득한 하늘이 멍석 만하게 올려다 보였다. 계곡은 양쪽 절벽 사이가 사오 장쯤 되고 길이는 십여 장이나 되었다. 땅의 한 조각이 밑으로 풀썩 꺼져 버린 듯한 인상을 주는 깊은 계곡이었다. 소영을 따라 나와 구름과 안개로 덮인 계곡을 내려다 보던 백리빙이 입을 열었다. "오빠, 이 깊은 계곡이 단혼애인가요?" 소영은 상팔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글쎄...상형이 길을 잘못 인도하지 않았다면 이 계곡이 바로 단혼애가 틀림없겠지." 그러자 백리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것은 어쨌든 이상한데요?"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지?" "내가 잘못 보았을 리는 없는데. 아까 그 사람이 바위 뒤로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그 가 바위 근처의 어디에 숨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동굴로 들어왔다면 이 깊은 계곡에 숨었다 는 말이 아니에요?"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요. 그 굴의 넓이는 불과 삼사 척밖에 안 되어 그가 숨을 만한 곳이 없었 는데, 숨을 곳이라고는 이 계곡 뿐일 텐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던 백리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해요. 정말 이상해요. 그 사람이 이끼가 가득하고 높이 백 장이 넘는 이 절벽을 아무런 흔 적도 없이 기어 오를 수는 없을 테고....." 이때였다. 구름이 덮인 계곡에서 낭랑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대협, 이곳을 찾아올 수 있는 것을 보니 과연 놀랍군요.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더니...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신의는 존경할 만하군요. 그러나 우리 아가씨는 생각을 돌려 소대협을 만나 지 않기로 했으니 안타까운 일이군요." 음성은 비록 크지 않았고 계곡에 메아리쳐 웅웅거렸으나 말소리만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여자의 음성이 들리자 백리빙이 눈썹을 파르르 떨며 절벽 끝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소영은 급히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만류했다. "빙아, 가만히 있어." 그는 계곡을 향해 우렁찬 음성을 날렸다. "낭자는 누구요?" 낭랑한 여인의 음성이 대답했다. "소대협은 건망증이 심하시군요. 어찌 벌써 소녀의 음성을 잊으셨습니까?" 소영은 그녀가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다. 잠시 기억을 더듬자 비로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낭자는 소문(素文)낭자요?" 여자가 대답했다. "이제 맞추셨군요. 소녀는 바로 소문이에요." "오랜 만이오. 나의 누님은 그동안 안녕하셨소?" "아가씨는 별일 없으세요. 아가씨는 이미 소대협이 이곳에 오신 것을 알고 있어요. 소대협이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여기까지 달려 오신 것에 매우 감격하고 있어요." "누님은 지금 어디에 있소?" "아가씨는, 아가씨는 생각을 달리해서 소대협을 만나지 않으시겠대요. 그래서 소녀 보고 소대협 을 돌아가시게 하라고 분부하셨어요." "왜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오?" "그건 소녀도 자세히 모르지만 소대협이 이곳에 있는 것이 무익하다고 하시더군요." 이 말은 소영에게 가벼운 실망과 분노를 안겨다 주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소문낭자......" 소영의 말을 끊으며 소문의 음성이 끼어 들었다. "소녀를 그저 소문이라고만 부르시면 됩니다. 낭자라는 칭호는 소녀가 감당하기 벅차요." "낭자, 칭호야 어찌 되었든 잠깐 모습을 나타내 얘기 좀 할 수 없겠소?" "좋아요. 지금 곧 나가겠어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나의 그림자가 계곡 속에서 불쑥 솟아 올랐다. 전신을 푸른 옷으로 감싼 소문이었다. 머리는 두 갈래로 따서 어깨 너머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소문이 계곡에서 불쑥 솟아 오른 것을 보니 절벽에 발 붙일 곳이 있는 모양이구나.' 소문이 나타난 것을 지켜 보던 소영은 한 걸음 그녀 앞으로 나서며 다그쳐 물었다. "악누님은 이 단혼애에 있소?" 소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빙은 빨아들일 듯한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누님은 무엇 때문에 생각을 고쳐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오? 낭자가 그 이유를 나에게 자 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소?" 소영의 음성에는 약간의 흥분기가 섞여 있었다. 소문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 이유는 아가씨께서 소녀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소녀가 생각하기 로는 모두가 소대협을 위해서일 것이에요." "무엇이 나를 위해서란 말이오?" "아가씨는 학문에 매우 능통하셔서 매사에 치밀한 계산을 하시는 분이에요. 소대협이 이곳에 있 어도 아가씨에겐 아무런 보탬이 안 될 뿐만 아니라....." "....." "오히려 소대협에게 화가 미칠까 봐 염려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가씨는 생각을 고쳐 소녀에게 소대협을 돌아가시게 하라고 이르신 거예요. 그러니 소대협은 서운하시겠지만 이대로 가시는 것 이 좋겠어요."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소문낭자,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낭자께서 악누님에게 전해 주지 않겠소?" "무슨 부탁이신지....." "나는 금궁에서 다행히 잔명을 보존해 나올 수 있었소. 악누님이 몹시 보고 싶어 하는 물건을 가져왔는데....." "몹시 보고 싶어 하는 물건이라니 그것이....." 소문은 갑자기 말을 끊더니 소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조금 억양을 높여 물었다. "소대협은 이미 금궁에 들어갔다가 나오셨단 말이에요?" 그녀의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물음에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었다. "그렇소. 요행을 얻어 예정보다 좀 일찍 나올 수 있었소." 소문은 감탄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영의 아래위를 새삼스럽게 훑어보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 다. "놀라운 일을 해내셨군요. 하지만 아가씨는 소녀에게 단단히 부탁했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소대 협을 가시도록 하라고....." 소영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묵묵히 서 있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소. 악낭자가 나를 만나기를 꺼린다면 할 수 없소. 그러나 나는 이대로 돌아가기는 너무 서운 하니 소문낭자가 좀 수고해 주시오. 악누님에게 한 마디 전해 주시오." "한 가지 일뿐만 아니라 열 가지 백 가지의 일이라도 소녀는 아가씨에게 전하겠어요." 소영은 품속에서 장방의 무공비록을 꺼냈다. 그것을 소문에게 내주며 입을 열었다. "이것이 악낭자가 몹시 보고 싶어 하던 물건이오. 실수없이 전해 주기 바라오." 소문은 책을 받아 표지도 보지 않고 품속에 간직하며 대답했다. "염려 마세요. 틀림없이 전해 드릴 테니...그리고 소대협은 우리 아가씨의 호의를 이해하고 서운 하게 생각지 마세요." "누님을 원망할 생각은 없소. 그럼 누님께서 안녕하시길 바라며 나는 이만 작별하겠소." 소영이 인사를 하자 소문도 공손히 답례를 하며 말했다. "소대협께서 이토록 수고를 하시며 천리 길을 달려 왔는데...소녀는 무엇이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소영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려 동굴 속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소문의 음성이 쫓아 들었다. "소대협과 여러분은 부디 조심해 나가세요. 인연이 있으면 다시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소영은 입을 꾹 다문 채 걸음만 재촉했다. 사실 그는 악소채를 만나러 왔다가 그대로 돌아서니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소영의 뒤를 따르고 있는 백리빙, 상팔, 두구 세 사람도 소영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서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백리빙은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악소채가 나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며 받아 들이지 않으면 어쩌나 염려했는데 차라리 잘되었구 나. 오빠도 약이 올랐을 테니 이제 나를 데리고 서호로 놀러 갈 것을 승낙할는지도 모른다.' 백리빙은 이런 생각을 하며, 올 때보다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소영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동굴을 벗어나자 사원이 나타났다. 네 사람은 아직 가죽띠를 발에 동이고 있었고, 한 번 왔던 길 이라 서슴없이 수풀 속으로 들어섰다. "형님, 내가 앞장 서겠소." 상팔의 말에 소영은 "이미 나도 길을 알고 있으니 그럴 필요는 없소." 하고 맨 앞에 서서 풀을 헤치며 걸어나갔다. 상팔은 그 뒤를 따르며 '형님은 몹시 우울해 있는 모양이구나. 자칫 정신을 팔다가 독사에게 물리는 날이면 큰일인 데.....' 이런 염려는 두구도 백리빙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은 성난 사자처럼 거리낌없이 수풀을 헤 치며 달리고 있었다. 사원에서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넓은 풀밭을 단숨에 벗어난 소영은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 보았다. 130. 황야의 무술연마 중주이고는 소영의 심정이 편치 못함을 알고 말을 하지 않았다. 소영이 발걸음을 멈추자 백리빙이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오빠, 내가 오빠에게 해를 입혔군요." "어째서 네가 나를 해쳤단 말이냐?"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그 악낭자는 내가 오빠와 동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불쾌하게 여겨 오빠와 만나지 않으려고 한 거예요." 소영은 픽 웃었다. "빙아는 너무 어린 아이 같은 말을 하는구나....." 소영은 손을 내밀어 백리빙의 손을 잡고 땅바닥에 앉으면서 말했다. "빙아, 너는 내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 줄 아느냐?" "알아요. 오빠는 악낭자를 찾으려는 거지요?" 소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서 그녀를 찾으려고 하며 그녀는 또 왜 이처럼 무서운 곳에서 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아느냐?" 백리빙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좋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다 말해 주지." 며칠 동안 애수에 잠겨 있던 백리빙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오빠는 그녀를 보기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소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야." 소영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어떤 무공이 높은 사람과 하나의 약회(約會)를 정했지. 그 장소는 바로 저 구 름이 감돌고 있는 단혼애야. 저렇듯 험한 곳에서 만나게 되니 그야말로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한바탕의 악투가 벌어질 것이다."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오빠는 그녀를 도우려는 거지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녀와 만나기로 한 사람은 그 무공이 강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거의 십 배에 달하는 원병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악누님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내가 오늘이 있는 것은 악누님께서 주신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 격투가 아무리 위험한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거기에서 벗어 나서는 안 된다." 백리빙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와 같은 사정이 있었다면 그녀를 도와줘야지요." 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 남아서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러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저도 이곳에 남아서 오빠의 벗이 되어 드리겠어요." 소영은 원래 백리빙을 떠나게 하려고 그와 같은 말을 꺼낸 것인데 뜻밖에도 백리빙이 먼저 가로 채고 나섰던 것이다. 소영은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백리빙이 갑자기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내가 이곳에 남아 있어도 오빠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이번의 격투에 우리는 승산이 없으므로 네가 여기에 남아 있으면 크게 위험할 것이다." 백리빙이 얼른 말을 받았다. "오! 오빠가 만약 이번 격투에서 해를 당한다면 나 역시 무사히 살아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아 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 여자가 나에게 이렇게 정을 쏟으니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소영은 백리빙을 설복하여 이 위험한 지역에서 떠나게 할 수 없음을 알고 말을 바꿨다. "빙아, 네가 여기 남아서 나를 벗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나에게 반드시 두 가지의 일을 약속해 야 한다." 백리빙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무슨 일이에요?" "나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함부로 무슨 일에든 나서서는 안 된다." 백리빙은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좋아요. 약속하겠어요." 소영은 시선을 중주이고에게 돌리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이미 적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오. 이곳에 남아 있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으니 가셔서 손불사 노선배님과 무위도장 등에게 이야기나 해 주시오. 그들이 매우 초조하 게 기다릴 것이니....." 두구가 얼른 말을 받았다. "우리들도 무공으로 형님을 돕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상팔도 급히 말문을 열고 나섰다. "형님의 뜻은 그 손불사 노선배님과 무위도장 등에게 형님의 소재를 알려주라는 게 아닙니까?" "그럴 필요는 없소. 다만 그들에게 소영이 편안히 있다고만 전해 주시오. 그리고 이 일이 끝나고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다시 두 분의 행방을 찾겠소." 상팔은 정색을 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형님께서는 천하 무림의 동도(同道)를 위해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린 그만 가 보겠습 니다." 두구가 무슨 말을 하려고 머뭇거렸으나 상팔이 그의 옷자락을 끌다시피하며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소영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백리빙에게 말했다. "빙아, 우리는 은밀한 곳을 찾아 몸을 숨겨야 한다." 백리빙은 반문했다. "무엇 때문에 몸을 숨겨야 해요?" "왜냐구? 몇 가지의 무공을 연습하기 위해서야." 백리빙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제가 오빠를 위해 호위를 해 드리지요." 두 사람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풀밭으로 가서 길 가까운 곳에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아 들었 다. 소영은 거기서 한편으로는 무상대사가 손수 기록한 탄지신공을 연마하고 한편으로는 백리빙과 함께 담운청이 지은 검술을 연구했다. 백리빙과 소영은 검법을 연구하는 틈틈이 꿩이나 산토끼 등을 사냥해서 불에 구워 배를 채우고, 때로는 잣을 따다 까먹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인적이 드물었으므로 이들은 먹고 마시는 외에는 무공을 연습하고 검술을 익히 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두 달 후에는 눈부신 진전을 보였다. 어느날 아침 소영이 잠에서 깨어나 날짜를 손꼽아 보니 이미 약속한 기한이 다 된 것 같았다. 소영은 백리빙을 돌아보며 느닷없이 웃어댔다. 백리빙은 그때 마침 한 마리의 산토끼를 굽고 있다가 소영의 웃는 모습을 보자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왜 웃으셔요?" 소영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깝게도 산중에 거울이 없어 너는 자신의 모습을 비쳐 보지 못하는구나. 너의 흰 옷은 이미 검은 색으로 변해 버렸고 꽃과 옥같이 곱던 아가씨는 어느 새 거지로 변해 버렸구나." 백리빙은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렸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오빠도 텁수룩한 머리에 그 얼굴이 나보다 나은 것도 없군요."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빙아, 요즘 우리는 전심전력으로 무공의 연습과 검술을 익히기에만 힘써 왔으므로 다른 것은 통 잊어 버리고 지났다. 그래서 조금 전에 내가 그 사람과 악낭자의 약속 기일을 계산해 보니 이 미 날짜가 다 되었어. 아마 내일이 아니면 모레쯤일 거야. 그러니 우리도 오늘은 세수를 하고 봉 우리 위로 올라가도록 하자." 백리빙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봉우리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우리는 거기서 교대로 지키면서 그들의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백리빙은 사방의 산세를 돌아 보면서 말했다. "사방의 산세를 돌아 보니 다른 출구는 없을 것 같은데....." 백리빙은 굽고 있던 산토끼를 뒤집어 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서쪽으로 조금 가면 조그마한 개울이 있으니 거기 가서 세수를 하세요." 사실 소영은 무공을 연마하느라고 거의 두 달 동안이나 좌식하는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소영 은 백리빙의 말대로 서쪽으로 향해 조금 달려갔다. 과연 작은 개울이 있었다. 소영은 거기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소영은 본래의 영준한 모습으로 백리빙에게 돌아왔다. 이때 백리빙은 이미 산토끼를 다 구웠다. 소영은 백리빙이 그처럼 고생하는 모습을 보자 언짢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백리빙의 흩어져 내전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며 정다운 어조로 말했다. "빙아, 너는 지난 두 달 동안에 너무도 많은 고생을 겪었구나." 백리빙은 얼굴을 붉히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동안에 무한히 즐거웠어요. 자아, 산토끼가 다 구워졌으니 먼저 잡수세요. 나 는 가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올 테니까." 백리빙은 몸을 일으켜 재빨리 달려갔다. '백리빙은 귀엽게 자란 몸인 데도 불구하고 이 깊은 산중에서 외롭고 처량한 나날을 보냈다. 그 리고 나를 위하여 불을 피우고 먹을 것을 마련했으니 후일 그녀에게 관대하게 대해 주어야겠다.' 백리빙이 어느덧 세수를 하고 돌아왔다. 그녀는 소영이 아직도 구운 산토끼의 고기를 먹지 않고 있는 것을 보자 다급히 말했다. "오빠, 어째서 먹지 않았어요?" 소영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가 돌아오면 같이 먹으려고....." 두 사람은 서둘러 구운 토끼를 먹고 높은 봉우리 위로 올라갔다. "시간이 이미 다 돼 가니 오빠는 시간을 아껴 다시 좌식을 하세요. 내가 호위를 해 드릴 테니 까...특히 그 담운청의 검술을 잘 생각해 보세요." 소영은 악소채에게 비녀 두어 사람 외에는 협조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야 말로 유일한 원조자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옥소랑군이 이번에 만약 동조자를 데리고 오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그가 만일 동조자를 청해 온 다면 틀림없이 무공이 높은 절세 고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의 결전은 심목풍과 그 금궁의 밖 에서 겨루던 것보다도 더 심한 악전고투가 될 것이다.' 소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빙아, 내가 네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겠니?" 백리빙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담담하게 웃었다. "오빠는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내가 언제는 오빠의 말을 듣지 않았던가요?" 백리빙은 사랑스런 웃음을 머금고 소영을 잔잔히 건너다 봤다. 소영은 말을 이었다. "나도 그 점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사정이 좀 달라서 혹 네가 응낙하지 않을까 봐 그러 는 거다." 백리빙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 설마 지금까지 내 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겠지요?" 소영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바로 네가 나를 너무 잘 대해 주기 때문에 이 일에 응낙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백리빙은 아름답고 큰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빨리 말해 보세요." "그건 안 돼. 네가 먼저 응낙을 해야만 내가 말하겠어." 백리빙은 급기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응낙하겠어요." 소영은 앞에 있는 작은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빙아, 이리 앉아!" 백리빙은 천천히 소영의 곁으로 다가가서 소영에게 기대고 앉았다. 그녀는 한없이 따뜻하고 부 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빙아의 무공은 나와 비교해서 어떤가?" 백리빙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야 물론 오빠보다 못하지요." "그렇다면 만일 내가 그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면 빙아도 물론 그 사람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 이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지요." "그러므로 이번 일에는 네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건 알아요. 그러므로 나는 단지 옆에서 오빠를 도와드리려는 것 뿐이에요." 소영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건 안 돼. 너는 나와 함께 갈 수 없어. 만약 그 사람이 나와 악낭자를 죽일 수 있다면 필시 너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백리빙은 말을 가로챘다. "그건 안 돼요. 그 일만은 응낙할 수 없어요."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백리빙을 달랬다. "빙아, 너는 이미 응낙을 해 놓고....." 백리빙은 침통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오빠, 내가 오빠에게 속았군요." 소영은 손을 들어 백리빙의 까만 머리를 쓰다듬으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빙아, 내 말을 들어봐. 그 사람은 악낭자를 매우 미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도 미워하고 있 어. 그러므로 나도 앞일을 전연 예측하지 못하고 있어. 그러나 싸움이 벌어진다면 그야말로 위험 한 국면이 되고 말 거야." 백리빙은 토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만 하세요 이미 다 알아 들었어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지요?" 소영은 고개를 들어 백리빙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들이 오거든 너는 우리가 그동안 무공연습을 하던 곳으로 가 있기 바란다. 내가 만약 살아난 다면 너를 찾으러 갈 것이다. 그러나 하룻밤이 지나도록 가지 않는다면 너는 곧 북해로 돌아가기 바란다." 백리빙의 그 크고 맑은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그녀의 입가에는 쓸쓸한 웃음이 번졌다. "오빠, 나는 거기서 오빠를 기다리기로 약속했어요. 그러나 만약 오빠가 오지 않는다 해도 나는 다시 북해로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어째서?" "오빠가 만약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때는 틀림없이 죽지 않았다면, 부상을 당했을 게 아니에 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오빠가 만약 죽음을 당했다면 난들 어찌 살아서 돌아가겠어요?" 소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빙아, 내가 정말 죽었다고 한다면 너마저 죽는다고 해서 내가 다시 살아날 리 없잖니?" 백리빙은 입술을 꼭 깨물며 대답했다. "그래도 일생 동안 슬픔에 잠겨서 사는 것보다는 나아요." 소영은 무슨 말을 해서라도 그녀를 달래려고 했지만 적당한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백리빙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오빠, 누가 와요." 소영이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한 떼의 무리들이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옥소랑군의 원병이라면 저처럼 많지는 않을 텐데.....'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백리빙에게 나직이 말했다. "빙아, 우리는 마땅한 곳을 찾아 몸을 숨겨야 한다. 저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백리빙은 그 말을 듣자 곧 고개를 끄덕이며 한 그루의 고목 위에 뛰어 올라가 무성한 나뭇잎 속 에 몸을 감췄다. 그러자 소영도 곧 몸을 날려 큰 바위 뒤로 가서 숨었다. 소영이 그들을 자세히 바라보니 맨 앞장 서서 오는 사람은 푸른 옷에 금면(金面)을 한 사람이었 다. 그는 바로 지난날 소영과 그 정원에서 격투를 벌였던 철수인이었다. 보아하니 이들은 옥소랑군 의 약속 때문에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옥소랑군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 철 수인의 뒤에는 두 사람의 흑의를 입은 사나이가 바짝 따라오는데, 그들은 부드러운 침상 하나를 들고 왔다. 그리고 침상 뒤에는 네 사람이 줄을 지어 뒤따랐다. 그 첫 번째는 가사를 입고 손에 불진(拂塵)을 든 중년 여승이었으며, 두 번째의 사람은 호호백발 의 노부인이었다. 세 번째는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었으며, 네 번째는 경장을 하고 외투를 입은 소년이었다. 소영은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이런 생각을 했다. '금면 철수인이 나타난 것을 보면 반드시 옥소랑군도 왔을 텐데 ...어째서 옥소랑군의 모습이 보 이지 않는 것일까?' 소영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에 그들은 산허리의 좁은 길을 돌아 곧장 잡초가 무성한 풀밭으로 내려갔다. 백리빙은 고목에서 뛰어 내렸다. "오빠, 바로 그들이에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어." 백리빙은 순간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 정말 나를 데리고 가지 않을 작정이에요?" 소영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빙아, 너도 보았겠지만 의외로 많은 인원이야. 그러니 사태는 예상한 것보다도 더 험악할 것 같 아. 그러니 너는....." 백리빙은 말을 가로챘다. "바로 그 점이에요. 그들의 인원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도 가려는 거예요." 소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런데 어째서 가려는 거냐?" "그들 모두가 무공이 높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설마하니 내가 그 침상을 들고 가는 두 하인 놈 이야 이겨내지 못하겠어요?" 소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빙아, 내가 너의 무공이 약하다고 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백리빙은 또 말을 가로챘다. "나도 알아요. 오빠는 내가 무서운 격투에 휘말려 상처를 입을까 봐 그러는 거지요?" "바로 그거다."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미 말한 바 있잖아요. 오빠가 만약 죽는다면 나 혼자 살아서 돌아가지는 않는다고...그래 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어요?" 소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렇다면 꼭 가겠다는 거냐?"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단지 오빠가 데리고 가 주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난 이미 오빠와 약속을 해 버린 걸요." 소영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잠자코 있었다. 백리빙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오빠, 허락해 주세요. 나 혼자 그곳에서 기다리려면 오빠의 승패에 관한 조마조마한 생각 때문 에 위험 속에 있는 것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울 거예요." 소영은 이윽고 힘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정 그렇다면 너를 데리고 가겠다!" 백리빙은 활짝 웃는 얼굴을 소영의 가슴에 파묻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음성이 소영의 품에서 메 아리쳤다. "나는 오빠의 마음을 믿었어요. 오빠가 결코 나 혼자만을 그 거친 들판에 내버려 두어 목이 타 게 기다리도록 하지는 않으리라고 ....." 소영은 가슴이 뜨겁게 적셔 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빙아, 내가 너를 데리고 갈 테니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백리빙은 고개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모든 것을 오빠의 분부대로 하겠어요." 소영은 다시 산정으로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봤다. 그들 일행은 이미 그 잡초가 우거진 초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만 무성한 잡풀이 갈라져 누워 있는 것이 그들이 지나간 발자취를 말해 줄 뿐이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빙아, 우리도 이제 가야겠다." 백리빙은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이미 갈 준비가 돼 있어요." 백리빙은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오빠,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어요?" "무슨 일인데?" "오빠는 적을 대하는 데 있어서 너무 악하게도 대하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인정도 베풀지 마세 요. 오빠는 비록 인의(仁義)의 협객이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달라요. 적은 인원이 많고 이 편은 적 으니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적 하나를 더 죽이면 그만큼 적의 저항력은 줄어드는 것이어요." 소영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알았어. 이제는 그만 가보자." 백리빙은 소영의 표정을 훔쳐 보았다. 그의 얼굴은 봄날처럼 활짝 개어 있었다. 명랑하고 호탕한 표정이었다. '악낭자가 오빠의 마음속을 차지한 비중은 나보다도 몇 십배 더한가 보다. 그러기에 저다지도 감개무량해 보이는 게 아닐까?' 그러나 백리빙은 이러한 생각을 결코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산정에서 내려와 풀이 우거진 초원으로 들어갔다. 소영은 천 년 묵은 교피장갑을 끼고 품속의 칼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빙아, 내 머릿속에 두어 가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튼 빨리 가야겠다." 백리빙은 걸음을 빨리 하여 소영과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나에게 알려줄 수 없어요?" "물론 알려줄 수 있지."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조금 전에 그 침상에 누운 사람은 틀림없이 옥소랑군일 것 같아."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침상 위에 누워 있었을까요?" "어쩌면 음모를 꾸미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고, 어쩌면 정말 병에걸려 있는지도 몰라." 백리빙이 더 물어보려고 망설이는데 소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일이란 바로 그 중년 여승에 관한 것이다. 백리빙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년 여승이 또 어쨌다는 거예요?" "나는 악낭자의 사부가 여승인지 도승인지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여승은 출가한 사람인데 어째서 이와 같은 시비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드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 사 건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특별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 초청되어 온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그녀가 악낭자의 사부라면 일이 몹시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녀의 사부가 와서 도와준다면 한 사람의 동조자가 생기는 셈인데 어찌 시끄러워진다는 거예 요?" "정녕 그녀가 악낭자의 사부라면 악낭자는 손을 써서 항거하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일은 결국 남의 처분에 맡기는 결과가 돼 버린다." 백리빙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군요? 사부가 제자를 돕지 않고 외인을 돕다니요?" 소영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악낭자의 사부는 옥소랑군과 친척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빨리 가서 그들과 한바탕 겨뤄야 한다." 소영은 말을 마치자 나는 듯이 빨리 앞장 서서 걸어갔다. 백리빙도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두 사람은 길에 익숙하였으므로 잠시 후에는 협곡을 지나 그 짙은 구름이 감돌고 있는 단혼애에 당도했다. 그들은 시선을 돌려 사방을 바라보았지만 짙은 구름이 덮인 깊은 골짜기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소영이 사방을 살펴본 다음 입을 열었다. "빙아, 그들은 이미 단혼애 아래로 깊숙이 들어간 것 같으니 우리도 빨리 뒤쫓아 가자." 백리빙이 대답했다. "두 달 전에 그 소문낭자가 나타났던 곳에 반드시 발 붙일 곳이 있을 테니 우리는 그곳을 찾아 봐요." 두 사람은 기억을 더듬어 가며 그 구름으로 덮인 낭떠러지 가를 한참 동안 서성거리면서 찾아보 았지만 끝내 발 디딜 곳을 찾아내지 못했다. 소영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빙아, 나는 소문이 이 낭떠러지 위를 뛰어 올라갔다고는 보지 않는데....." 백리빙이 대답했다. "그들 역시 발 디딜 만한 곳이 없었다면 결코 모두 내려갈 수는 없었을 거예요." 소영은 한참 동안 무슨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 그 옥소랑군은 매우 꾀가 많은 사람이므로 그들이 단혼애를 내려간 다음 발 디딜 곳을 파괴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악낭자의 원조자가 들어올 수 없게끔 말이다." 백리빙이 말했다. "오빠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나는 달리 생각해요." 소영이 말을 받았다. "너의 의견을 들어보자." "내 생각에는 옥소랑군이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이 돌아 이 단혼애로 내려가는 길을 파괴했다고 는 보지 않아요....." 백리빙은 잠시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옥소랑군이 오빠를 미워하는 이유는 오빠를 연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소영은 그 말에 가슴이 섬뜩했다. 그러나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어쩌면 옥소랑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르지."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더욱 길을 파괴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건 또 어째서?" "그가 그처럼 많은 원병을 데리고 온 이유는 악낭자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오빠와 대 결하려는 속셈에서일 거예요."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럴 듯한 말이야.' 백리빙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은 매우 지세가 험악한 곳일 뿐만 아니라 이 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더욱이 옥소랑 군은 무공이 지극히 높으므로 시시한 무사들은 그의 안중에도 없을 것이 뻔해요. 그러므로 옥소 랑군은 이미 이곳으로 달려올 사람은 소영 한 사람뿐이라고 짐작하고 있을 것이에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일리가 있군." 백리빙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옥소랑군이라 하더라도 이번 싸움에서 꼭 오빠를 죽이려 할 거예요. 그리하여 악낭 자의 마음이 상하게 되면 후일 다시 방법을 강구하여 그녀를 위로할 거예요."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네 말대로 한다면 그 단혼애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옥소랑군이 파괴치 않았단 말이지?" "내가 보기에는 악낭자가 오빠가 다시 위험 속에 뛰어들 것을 두려워하여 소문낭자를 시켜 그 단혼애 밑으로 내려가는 길을 파괴한 것 같아요." 백리빙은 자신 있는 어조로 스스로의 말을 다짐했다. "정말 그래요. 악낭자는 오빠가 다시 돌아올 것을 예측하여 미연에 방지하느라고 그 길을 파괴 해 버렸어요." 소영은 한결같이 악소채의 안위만을 염려하여 백리빙이 옆에 있다는 것도 잊어 버릴 정도였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골짜기로 내려가서 악소채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골짜기로 내려갈 수가 있단 말이냐?" 백리빙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빠가 낭떠러지 위에서 큰소리로 외치세요. 그래서 결심을 표시하면 오빠를 사랑하고 있는 악 낭자는 사람을 보내서 오빠를 맞이하게 될 거예요." '이것이야말로 궁여지책이로구나.' 소영은 결심을 하자 높은 소리로 외쳤다. "악누님! 동생이 약속대로 왔으니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을 안내해 주시오....." 소영은 연거푸 몇 번이고 고함을 질렀지만 끝내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백리빙은 원래 소영을 비꼬아서 한 말이었는데 정말 소리를 지르자 어쩔 줄을 몰랐다. 드디어 소영은 백리빙을 돌아보며 말했다. "빙아, 끝내 대답이 없다면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절벽을 뛰어 내리겠어." "이 골짜기는 짙은 안개와 구름에 덮여 있어 수 장 밖을 바라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석벽이 깎아지른 듯이 미끄러운데 어디다 발을 붙이고 내려간단 말이에요?" "우리들의 남은 의복이 있으니 그것을 찢어서 줄을 만들어 타고 내려가도록 하자." 백리빙은 더 군말을 하지 않고 등에 메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 놓았다. 그녀가 막 보따리를 풀어 서 옷을 찢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였다. 소문이 낭떠러지 밑에서 올라온 것 이다. 소영은 깜짝 놀랐다. "당신은 어떻게 올라왔소?" 소문은 고운 눈썹을 치켜올리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공자께서는 어째서 여태껏 가지 않았습니까?" 소영도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나의 악누님은?" "별일 없어요." 그녀는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아가씨께선 공자의 그 책을 본 뒤에 공자께 매우 감사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 공자께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는 전음지술을 써서 저를 이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빨리 공자께서 이곳에서 떠나 가시도록 말씀드리라고 했지요. 그리고 공자의 그 소왕 무공비록은 아가 씨에게 약간의 생기를 불러 일으켰으니 공자께서는 이 일에 뛰어들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문 아가씨, 우리가 갈 생각이 있었다면 왜 이 자리에 다시 왔겠소. 아가씨에게 솔직히 말하지 만 나와 이 의동생은 여기서 이미 두 달 동안을 기다려 왔소....." 소문이 말을 이었다. "나도 공자께서 이곳에서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아가씨께서는 굳이 공자께서 이 일에 참여하지 말기를 바라고 있으니 저 역시 빨리 돌아가도록 권고하고 싶을 뿐입 니다." 소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를 참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은 악누님의 뜻일 뿐 그 말을 듣고 안 듣는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소." 소문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제가 공자께 골짜기로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공자께서는 무슨 방법으로 내려갈 수 있단 말입니까?" 소영은 담담하게 웃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방법이 있으니 아가씨는 마음대로 하시구려." 소문은 그 말을 듣자 어리둥절했다. "무슨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백리빙이 대답했다. "우리는 옷을 찢어서 줄을 만들어 내려가려던 참이오." 소문은 다짐하듯 거듭 물었다. "공자께서는 기어코 내려가시려는 겁니까?" 그러나 소영은 초지일관이었다. "물론이오. 악누님이 이곳에 오더라도 나를 막지는 못할 거요!" 소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결코 당신네들을 막을 수 없단 말이지요?" 소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만약 아가씨께서 악낭자의 징벌이 두렵다면 아예 물러서서 우리의 일에 참견하지 마시 오." 소문은 잠깐 동안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골짜기로 내려가는 방법을 알려 주겠어요. 만약 이번 싸움에서 이긴다면 아가씨께 서는 기껏해야 나를 한바탕 꾸짖는 데 그칠 것이에요. 불행하게도 지게 된다면 우리는 아무도 생 명을 부지할 수 없을 테니 결국 아가씨께서도 나를 징벌할 수가 없을 거예요." 소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아가씨께서 도와주시겠다니 감사해 마지 않소. 훗날 악낭자께서 이 일을 추궁한다면 그 책임은 나 혼자 모두 지겠소." 소문은 피식 웃었다. "사실은 매우 쉽습니다. 공자가 만약 조금만 유의해 보았더라면 이미 알아냈을 거예요." 소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주 자세히 살펴보았는 데도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세요." 소영은 고개를 숙여 골짜기를 내려다 봤다. 그러자 일 장 가량 떨어진 곳에 발을 디딜 수 있는 돌계단이 있었다. 소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어찌하여 조금 전에는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소문이 말을 받았다. "조금 전에는 이 돌계단 위를 풀로 덮어 놓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 이라면 쉽사리 찾아낼 수 없는 게 당연하지요." 소영이 잘라 말했다. "지금 이 시간은 금보다도 더 귀한 순간이오. 우리는 여기서 촌각이라도 더 지체해서는 안 되 오." 소영은 말을 마치자 몸을 날려 앞장 서서 내려갔다. 원래 이 절벽에는 칠팔 척의 거리마다 하나의 바위가 튀어 나와 있어 마치 사닥다리와 같이 되 어 있었다. 소문은 백리빙을 돌아보며 말했다. "낭자도 내려가시겠습니까?"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소문은 주의를 주었다. "조심하세요. 튀어 나온 바위를 확인한 뒤에 몸을 날려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백리빙은 소문의 앞에 서서 몸을 날렸다. 131. 피할 수 없는 선택 그 골짜기의 깊이는 삼십여 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짙은 안개와 구름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골 짜기 밑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단숨에 골짜기 밑으로 내려갔다. 짙은 구름이 덮혀 있음으로 인해 아무리 사면을 둘러보 아도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때 소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공자, 서두르지 마세요. 제가 길을 안내하겠어요." 소영은 비록 마음이 조급했지만 길을 알 수 없으므로 하는 수 없이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소문이 뛰어 오더니 남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영이 가운데 서고 백리빙이 소영의 뒤를 따랐다. 약 십 장 가량 걸어갔을 때 소문이 갑자기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 동굴은 입구가 매우 협소하여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안개가 짙었으므로 이 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세 사람이 줄을 지어 들어가서 꼬불꼬불하게 돌아 나가자 갑자기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두 개의 커다란 등잔에 불이 켜져 있었다. 불빛에 바라보니 지름이 삼 장쯤 되어 보이는 석실이 었다. 석실 안에는 의자나 탁자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고 모든 사람들은 맨땅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악소채는 뒷벽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으며 그 곁에는 홍의를 입은 두 비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년 여승과 호호백발의 노부인이 왼쪽에 앉아 있었는데, 그 소년은 외투를 벗어 버 렸고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의 곁에 얼굴에 병색이 역력한 옥소랑군이 바짝 다가앉아 있었다. 그리고 청의를 입은 사람과 침대를 들었던 두 사람이 석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소문이 소영과 같이 석실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들 시선을 돌려 바라보았다. 악소채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소문은 빠른 걸음으로 악소채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 홍의 비녀와 나란히 섰다. 중년 여승은 소영을 힐끗 바라본 다음 시선을 악소채에게로 돌리며 냉랭하게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냐?" 소영은 악소채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소영입니다." 옥소랑군이 말참견을 했다. "바로 내가 말한 그 사람입니다." 그 호호백발의 노부인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마침 잘 왔군. 오늘의 일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으니....." 소영은 사방을 한 바퀴 빙 둘러본 다음 천천히 걸어서 석실의 한 구석에 가서 앉았다. 백리빙은 소영의 곁에 바짝 붙어 다니며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소영은 악소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없었으므로 그 노부인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때 그 중년 여승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악사매, 저 사람이 바로 소영인가?" 악소채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그 중년 여승은 수중의 불진을 한 번 휘두르더니 말했다. "소채, 나는 이미 삼십 년 동안 누구와도 싸워 보지 않았으므로 새삼스럽게 살계를 범하고 싶지 는 않다. 그러므로 이번 일이 어디까지나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란다." 악소채는 씁쓰레하게 웃었다. "저는 무엇 때문에 이렇듯 시끄럽게 다투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호호백발의 노부인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내 손자가 너를 구원하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쯤 해골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배은망덕하다니....." 옥소랑군이 말을 받았다. "할머니, 차근차근 얘기하십시오. 이 일은 악낭자만을 탓할 수도 없으니....." 옥소랑군은 소영을 힐끗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소영이 아니었더라면 이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자 중년 여승이 말을 이었다. "소영, 마침 잘 왔소. 우리 자세한 얘기를 해 봅시다....." 악소채가 갑자기 말을 가로챘다. "이 일은 소영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모든 일은 저 때문에 일어났으니 할 말이 있으면 저에게 해 주십시오." 호호백발의 노부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네 이 배은망덕한 계집애 같으니라구. 내가 너를 해치지 못할 것 같으냐?" 악소채는 고소를 지었다. "후배는 이런 지경에 처해 있으니 난처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차라리 저에게 출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부인이 대답했다. "노신이 너에게 손을 쓰지 않는 이유는 네가 없으면 내 손자의 병을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악소채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옥소랑군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장대협께서는 무슨 병을 앓고 계십니까?" 철수 금면인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상사병입니다. 악낭자께서 우리 공자님에게 냉담해진 후로부터 줄곧 삼 개월 동안 바보처럼 멍 청해졌습니다. 밥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한나절을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앉아 있기가 예사이지 요. 마치 강철같이 단단한 몸으로 용호처럼 날뛰던 분이 불과 삼 개월 동안에 저 모양이 되고 말 았습니다. 저는 감히 아가씨에게 한 마디 물어 보겠습니다. 아가씨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여러 차 례나 구해 주신 은인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속이 편하십니까?" 악소채는 가벼운 탄식을 하면서 옥소랑군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장대협, 무엇 때문에 그다지 괴로와하시는 겁니까? 세상에는 미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장대협 과 같이 준수한 인물과 그 빛나는 가문은 많은 규방의 처녀들이 꿈에라도 그리워하는 선망이 되 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거늘 어찌 저 악소채를 위해....." 옥소랑군은 고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푸른 바다를 건너 봐야만 파도의 위험을 아는 것이오. 지금의 내 마음을 악낭자는 알 리가 없 소....." 백발 노부인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주착없는 소리 작작해라. 장씨 가문에 너 같은 자식이 있기 때문에 선조의 낯에 똥칠을 하는 거야." 옥소랑군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양볼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그 백발의 노부인은 옥소랑군을 한바탕 꾸짖고 난 다음 악소채를 바라보며 냉랭하게 외쳤다. "비록 내 손자가 주착없는 탓이긴 하지만, 만약 네가 그를 유혹하지 않았다면 그도 이렇듯 너에 게 정을 쏟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결국 변신한 너 더러운 계집애를 탓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악소채가 말을 받았다. "노선배님의 그와 같은 말씀은 이 후배를 너무도 모욕하는 말씀입니다." 백발 노부인은 성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를 모욕한다면 또 어쩔 테냐?" 악소채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노부인은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일은 모두가 어떤 결말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반드시 끝장을 내야 할 것입니다." 중년 여승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그야 물론이지요. 저는 사명(師命)을 받들고 왔으니 어떻게 하든 사부님의 체면을 세워드려야 할 텐데...소채, 오늘의 정세를 너는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 내가 올 적에 사부님이 나에게 당부하 기를 네가 장형을 위하여 어떤 배려가 있기를 바랬었다." "사자(師姉)께서는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중년 여승은 부드럽게 대꾸했다. "풍진 세상에는 싸움이 끝날 날이 없지만, 이 언니는 이미 삼십 년 간 인간세상의 싸움에 참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비록 사부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 왔지만, 만사가 잘되어 나가기만 바랄 뿐이다. 결코 불행한 참사를 일으키지 않고....." 중년 여승은 소영을 한 번 바라보고 그의 영준하고 눈부실 정도로 잘난 모습에 정신을 뺏기고 말았다. 옥소랑군도 비록 영준하게 생기긴 했지만 소영에 비한다면 표일한 기운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이 두 사람을 두고 한 사람을 택하라고 한다면 누구든 소영을 택할 것은 틀림없다.' 중년 여승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싸움의 원인은 바로 네가 변심을 했기 때문에....." 악소채는 말을 가로챘다. "사자께서는 어떻게 그렇게만 생각하십니까?" 중년 여승이 입을 열었다. "네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너와 장대협과는 한 가닥 정이 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 실이다." 악소채는 중년 여승을 매우 존경하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동안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악소채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확실히 한동안 교제가 있었어요. 그러나 나는 사전에 장대협에게 언제든지 소영이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판명되는 날에는 더 이상 교제를 할 수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백발 노부인은 그 말을 듣자 옥소랑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준아야,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옥소랑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녀는 분명히 나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회색도포의 노인이 말참견을 했다. "그렇다면 일은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는 소영을 없애면 됩니 다." 소영이 눈을 부릅뜨며 일어서려 했으나 악소채가 만류하는 바람에 억지로 참았다. 백발 노부인은 옥소랑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준아야, 너는 저 더러운 계집애의 생명을 몇 번씩이나 구해 줬을 뿐만 아니라 그 아주머니에게 애걸하여 그녀를 제자로 거두어 들이도록 해 주었는 데도 그녀는 이제 와서 날개가 다 자라니 너 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구나!" 그녀의 이와 같은 몇 마디 말은 그 어투가 매우 강경하였지만 그 말뜻에 있어서는 오히려 처량 한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악소채는 예쁜 눈을 깜빡거렸다. 양볼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두고 말았다. 옥소랑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 모두가 지나간 일들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마십시오. 내 병은 아마 약으 로는 치료하지 못할 것입니다. 악낭자가 이미 변심을 했다면 우리는 이 이상 더 추궁할 것 없습 니다." 옥소랑군은 이때 갑자기 기침을 하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백발 노부인은 처량함과 안타까운 눈으로 옥소랑군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원한에 찬 시선으로 소 영을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하에 미녀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거늘 너는 어찌하여 내 손자와 다투어 악소채를 뺏으려 하 느냐?" 소영은 눈썹을 치뜨며 말했다. "노선배님의 말씀은 잘못입니다." 백발노인은 옥소랑군을 돌아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좋다. 나는 일생 동안 누구에게도 부탁을 해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지금 너에게 한 가지 부탁하 겠다. 당연히 그 보답은 하겠다." 소영은 속으로 그 일이 매우 난처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 다. "무슨 일입니까?" 백발노부인은 강경하게 잘라 말했다. "네가 곧 이곳에서 떠나 주기 바란다." '나는 목숨을 걸고 금궁에 들어갔으며 천리 길도 멀다 하지 않고 이곳으로 달려와서 악누님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내 어찌 쉽사리 이곳에서 떠날까 보냐.....' 백발 노부인은 소영이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거절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먼저 입을 열었 다. "내가 지불하는 대가도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무림에서는 우리 백운산장을 제외하고는 심목풍과 대적할 사람들이 별로 없다." "....."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가령 있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힘이 달려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백운산장 중 의 무공이 가장 강한 세 명의 고수로 하여 너를 도와 심목풍을 대항하게 할 것이며, 꼭 필요하다 면 나도 나서서 너를 도와주겠다. 이 정도면 크지 않느냐?"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목풍과 후배가 대적해야 할 일과 악누님과 영손과의 사이의 다툼은 별개의 것입니다. 이 일 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백발 노부인은 속으로 소영을 몹시 미워하고 원망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악소채와 중년 여승이 석실로 돌아오기 전에 아마도 그 일을 처리하려는 듯했다. 그래서 그녀는 소영의 이야기를 더 들 으려 하지 않고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럼 너는 이 일에 꼭 참견하겠다는 거냐?" "당신네들과 악낭자 사이의 일이 평화스럽게 해결된다면 나는 결코 참견하지 않겠지만, 만약 여 의치 못하여 싸움이 벌어진다면 참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삼절사태는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불어냈다. "악사매, 지금 소대협이 이야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의 사정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까지 지나온 일에 대해서는 따질 필요도 꾸짖을 필요도 없다. 너 또한 적지 않 게 과오를 범했으니 어떻게 처신할 셈이냐? 정리를 외면하여 결국 일을 이 지경에까지 벌여 놓았 으니......" 말을 마친 삼절사태는 처연히 악소채를 건너다 봤다. 악소채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감돌았다. "만약 옥소랑군 한 사람이 이 몸을 만나러 왔다면 제가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그의 크나큰 덕 과 애정을 모르는 척하겠습니까? 하오나 지금 장대협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와서 이 몸을 핍 박하려고 하니 이것은 도리에 어긋난 일인가 합니다." 악소채의 잔잔한 눈동자에 고뇌의 빛이 스며들었다. 조용히 이 말을 듣고 있던 삼절사태가 핀잔을 하였다. "그러나 장노선배께서 손자를 염려하여 오신 것을 나무랄 수야 없지 않느냐?" "하오나 노부인을 제외하고도 많은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까?" 삼절사태는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매는 비록 정이라는 한 글자를 끊을 수는 있겠지. 그러나 사부의 분부를 거역할 수는 없다." 악소채는 이 말에 놀라는 시선을 들었다. "사부께서 제자로 하여금 어찌하라 하셨습니까?" "사부께서는 심산유곡의 도통한 스님임이 틀림없지만 사매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께 서는 누가 뭐라 해도 옥소랑군의 할머니가 아니냐?" 이 말에 악소채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러나 이윽고 평정을 회복했다 "사부님과 사매가 어떤 말씀을 교환하셨는지 말해 주십시오." "사부님께서는 내가 여기에 올때 분부하시기를, 이곳 사정과 형편을 자세히 알아보고 너에게 어 떤 잘못이 없는지 잘 살피라고 하셨다." 악소채의 얼굴은 엄숙하게 변했다. "저는 이미 사실대로 말하였으니 저에게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실 게 아닙니까?" 삼절사태는 소영을 한 번 바라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다. 너는 그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단 말이지?" "사자....." 악소채는 당황하여 급히 삼절사태의 말을 막았다. 그러나 삼절사태는 말을 이었다. 그녀의 음성 에는 싸늘한 냉기마저 감돌었다. "아까 말한 대로 너에게 어떤 고난도 감수할 수 있는 각오가 서 있다면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과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밖의 일은 자연히 해결되게 마련이다." 말이 끝나자 소영을 한 번 바라보고는 차분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황급해진 악소채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다급히 말했다. "사자, 그것은 소영 동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사자는 저의 뜻을 모르고 계십니다." 삼절사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약 소대협이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이때쯤 너는 이미 장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을 것이 다. 지금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소대협이 이 세상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삼절사태의 이 말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것 같았으나 분명히 악소채와 소영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말이 떨어지자 악소채는 갑자기 삼절사태의 앞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소영이 이를 가로막고 악소 채의 팔을 잡아채듯 했다. "누님은 잠깐 물러서십시오. 사태께서 나를 찾으셨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일입니다." 삼절사태는 왼손을 들어 악소채를 제지하며 쌀쌀하게 말하였다. "비켜라! 길을 비켜라! 나는 나대로의 생각이 있느니라." 악소채는 삼절사태의 의중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삼절사태는 소영에게로 돌아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것이 무슨 말인지 당신은 알았소?" "예,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옥소랑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할 텐데...이것이 이 천승(賤僧)이 간절히 바라는 바요." "그런데 사태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이 문제를 풀으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오. 이것은 소대협 바로 당신의 생사에 관한 문제이니까요." 자기의 생사에 관한 문제라는 말에 소영은 쌀쌀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사태께서는 내가 그 사람들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우리 불문지도(佛門之道)에서 벗어 나는 일이며 더욱 그러한 살생은 소승은 원치 않소." 악소채는 앞으로 일어날 지도 모를 어떤 일에 대비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 다. 소영은 삼절사태의 말을 반박하고 난 뒤 그녀가 어쩌면 습격을 가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불의의 일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악소채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쉴새 없이 스치는데 삼절사태는 악소채를 향해 말을 이었다. "네가 만약 사부님의 참뜻을 알고 너의 그릇됨을 뉘우쳐 사자의 처지가 매우 난처해졌음을 안다 면 나와의 싸움은 마땅히 하지 않아야 옳은 일이다." "저는 이미 저의 처지를 모두 말씀드렸고 제가 갈 길을 밝혔으므로 사자께서는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셨을 텐데....." 삼절사태는 말을 가로막았다. "너의 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너의 행동을 그대로 좌시할 수도 없다. 지금 너는 양자 택일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장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느냐, 아니면 싸움을 벌이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악소채는 비로소 그들의 진의를 알았다. 악소채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저는 사자께서 한 발자국만 물러서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오직 그것만이....." "안 된다! 첫 번째 싸움은 반드시 내가 맡아야 한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때 불쑥 얼굴을 내민 것은 소영이었다. "악누님이 그렇게도 사태와 싸우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 싸움을 나에게 양보하는 것이 어떻겠 소?" "쓸데 없는 소리! 이 싸움엔 동생이 관여할 필요가 없어요. 쓸데 없는 곳에서 쓸데 없는 시간만 허송하지 말고 어서 이곳을 떠나 줘요. 소문(素文)아, 네가 대신 이분을 전송해 드려라." 소영은 호탕하게 웃었다. "누님, 일이 이렇게 험악하게 되어 가는데 내가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악소채에게는 천하에 둘도 없는 소중한 소영이다. 사태가 험악하게 변하면 변할수록 한시 바삐 이곳을 떠나게 해야 했다. "누이의 말도 들을 때는 들어야 해요. 이곳은 머무를 곳이 못돼요. 내가 죽기 전에 사자께 부탁 해 동생을 떠나 보내도록 하겠어요. 사자는 나와 오랫동안 같이 지내온 분으로 정분이 두텁고 또 이번 일은 동생과는 전혀 무관하니 나의 청을 거절하지는 않을 거예요." 소영을 아끼는 악소채의 간곡한 말이었다. "누님과의 정분이 두터운 삼절사태께서는 나를 놓아 줄지 모르겠으나 장씨 일파는 용서하지 않 을 것입니다. 내가 단혼애 계곡에서 살아 남는다 하더라도 후일 반드시 그들 손에 잡혀 죽을 것 이니 그때 가서 내가 단신 고전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누님과 함께 싸워 승부를 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만에, 동생은 이미 무림 중의 영웅이오. 천하의 무림들이 동생에게 걸고 있는 기대는 마치 가 뭄에 비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니 비록 죽는다 해도 죽을 때와 죽을 곳이 따로 있는 것이오. 후일 무림정의를 위하여 싸울 생각은 않고 어찌 이와 같은 명분없는 싸움에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오?" 악소채는 자기는 지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림의 영웅인 소영만은 천하의 위인이 되기를 간곡 히 바라는 것이다. 소영을 아끼는 그녀의 집념은 단장의 절규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때였다. "우리가 몇 해 동안 서로 도우며 같이 지내온 정분을 생각하여 선공의 기회를 준다. 자 공격해 라!" 삼절사태의 선전포고였다. 이때 비호처럼 뛰어든 소영이 악소채를 감싸듯 옆으로 밀어붙이며 외쳤다. "누님은 물러나시오!" 마치 철없는 아이를 질책하는 노성과도 같았다. 소영은 지금까지 누이라고 부르는 악소채를 선녀인 양 보아 왔다. 그녀를 알게 된 후부터 지금 까지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말을 무시하거나 거슬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위급을 요하 는 판국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악누님을 위해서라면.....' 그런데 그렇게도 끈질기게 삼절사태에게 도전했던 악소채였으나 소영의 이 일갈에는 순순히 응 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역시 악소채는 소영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한 떨기의 꽃이었다. 악소채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했던 소영은 비로소 마음을 놓고 삼절사태와 대적했다. "나의 누님 악소채는 사태와 함께 동문수학한 사람이오. 그러니 수도 연수로 보더라도 누님은 사태의 적이 될 수 없소."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라 삼절사태는 내심 적잖이 당황했다. 소영은 말을 이었다. "사태께서 그녀와 기어이 싸움을 벌인다면 승부는 명약관화한 일이오. 나는 내 눈앞에서 누님의 죽음을 보기 싫소." 삼절사태는 웃으며 말했다. "소대협, 그것은 쓸데 없는 걱정이오. 마지 못한 판국에 비록 싸움을 할지언정 나는 결코 사매의 목숨을 뺏으려는 것이 아니오. 그녀가 패하면 몇 군데 상처를 입힐 뿐이오." "정히 그러하오?" "나와 악소채는 몇 해 동안을 동문수도한 정분이 있소." "그럼 악누님 대신 나와 싸운다면?" "그때는 각기 자기의 무예를 믿고 승패를 가리는 것이오. 생사를 판가름하는 것이지요." "당신의 무예가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이것은 분명 삼절사태를 비웃는 말이었다. "좋다! 훌륭하다는 그대의 무예 솜씨를 보여랏!" 삼절사태는 자신도 모르게 동굴 뒷편으로 물러나 소영의 거동을 살폈다. 사태는 소영의 열화 같은 기백에 완전히 위압되고 말았다. 동굴 뒤에서 바라보는 사태의 눈에는 나이 어린 소영이 태산처럼 보였다. '만만치 않은 적수다. 나이는 비록 어리나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위인이다.' 이런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사태는 기가 점점 꺾여옴을 느꼈다. 삼절사태는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조용히 말했다. "나와 사매가 싸움을 한다는 것은 수도한 경력과 동도한 정의로 보아 소대협의 말대로 옳은 일 은 아니오. 그러나 소대협이 사매를 대신한다면 원하는 바는 아니나 대적해 주겠소." 기세등등하던 삼절사태는 완전히 풀이 죽은 듯했다. "사태께서 나의 적수가 되어 주신다니 어떤 무술을 택하겠소?"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 대답이 없었다. "장풍, 지풍, 검, 창, 부(斧), 어느 것을 택하겠소?" "권장병도(券掌兵刀)에 한정할 게 아니라 자기가 가진 장기(長技)를 모두 쓰는 것이 좋겠소." 신기의 통달을 자처하던 여승이라 되도록 여러 가지 무예로 경합을 해 보려는 속셈이었다. "좋소! 선공의 기회를 주겠소." "아니오. 내가 양보하겠소." "정히 그렇다면 먼저 실례하겠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소영은 한 손을 들어 손뼉을 딱! 하고 쳤다. 지난 몇 달 동안 소림의 탄지신공법(彈指神功法)과 화산 담운청의 검법을 익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마 정진했기 때문에 신공 검술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내공도 출동하였다. 장세(掌勢)가 손에서 떨어지자 장풍이 일진의 강풍으로 변했다. 절묘한 신기에 득도한 사람은 어떤 싸움에서든 한 손을 내밀기만 하면 상대방의 공법을 알아낼 수 있다. 소영이 일진의 장풍을 일으키자 삼절사태는 이 강적의 기선(機先)을 제어하기 위해 재빨 리 왼손을 들어 이지공법(二指功法)으로 반격을 가했다. 소영의 맥문(脈門)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대단한 솜씨로군!' 소영은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번쩍 들었다. 이지공을 막기 위한 장법이었다. 소영의 장법은 원래 남일공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인데 남일공은 필생의 정력을 기울인 장법의 개 조였다. 장법을 익힌 소영은 그밖에 연환섬전칠십장(連環閃電七十掌)을 새로 창안 연마하여 일약 무림의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삼절사태는 처음 당하는 일이라 일여신기(一如神技)한 이 장법에 적이 놀랐다. '이 위인의 장법에는 당할 도리가 없구나.' 수세에 몰린 삼절사태는 몸을 한바퀴 돌리면서 두어 걸음 뛰어 나가 소영의 일격을 피했다. 소영은 소리쳤다. "미숙한 장법이라 부끄럽소." 말은 노호와도 같았고, 두 손은 번개처럼 움직였다. 쌍장을 연속해서 쳐내는 소영은 어느 새 팔 장의 장풍을 퍼부었다. 이 팔 장의 장풍은 눈 깜박할 사이에 쳐낸 것이라 대적한 삼절사태에게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았다. 팔 장은 섬광처럼 빠르기도 했으나 또한 장력의 강함은 비길 데 없 는 것이었다. 삼절사태는 이미 소영의 적수가 아니었다. 경합을 벌인 지 불과 촌각인데 벌써 수세에 몰린 삼 절사태는 소영의 팔 장을 피하기에 바빴다. 악소채는 기뻤다. 그녀 역시 소영의 장법이 이렇듯 출중한 줄은 미처 몰랐었다. 놀랍도록 무서운 장풍을 계속 퍼붓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흡족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생 겼다. '소영이 혹시나 실수를 하여 삼절사태를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동문수도한 사자와 사매의 정은 끊을 수가 없었다. 노부인 장씨와 옥소랑군을 따라온 여러 사람들은 형세의 귀추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삼 절사태를 제압하는 소영이 있는 한 장씨 일파의 계교는 허사였고 사태가 소영을 사로잡는다는 것 도 가망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한편 소영의 팔 장 공법에 밀려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삼절사태는 소영의 장풍이 잠시 멈춰지자 재빨리 등에 메고 있던 불진(拂塵)을 빼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간 여러 줄기의 그림자가 마치 실오라기처럼 하늘에 가득찼다. 형세가 일변되자 삼절사태는 불진을 높이 들고 입을 열었다. "소대협의 장법은 가상할 만하나 내가 이제 새 공법을 쓰니 조심하오." 소영은 단전(丹田)에 진기(眞氣)를 한 모금 들이키고 재빨리 몸을 돌려 두어 걸음 물러섰다. 소 영의 호신법도 빨랐으나 삼절사태의 불진 공격은 실로 절묘한 것이어서 끝내는 불진 끝에 달린 사포에 소영이 맞아 옷이 찢어지고 살갗이 갈라지며 피가 흘렀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부드러운 것 같은 불진의 사포이나 그 끝이 소영에게 일단 닿았다 하면 옷 이든 살이든 모두 찢어졌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것이었다. 사태의 불진이 이번에는 소영 의 어깨에 명중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삼절사태는 그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자신만만했던 삼절사태의 얼굴에는 다시 두려움과 놀라운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관전하던 장씨 일파와 여러 행자들은 어리둥절했다. 불진으로 소영의 어깨를 내리쳤을 때 불진을 잡은 오른팔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 다. 그것은 소영의 몸에 강한 반탄지력(反彈之力)이 있었기 때문에 불진의 사포를 따라 삼절사태 의 팔로 흘러 들어간 것이었다. 삼절사태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이 어린 나이에 언제 이렇게 훌륭한 호신술을 익혔을까? 이는 실로 무림에서도 보기 드문 재동이라 두려워하는 한편 감탄도 했다. 사실 반탄지력은 호신 술의 극치인 것이다. '안 되겠다.' 삼절사태가 다른 공법을 생각하고 있을 때 소영의 오른손에 번쩍하는 것이 있었다. 칼날이 시퍼 런 단검이었다. 소영은 단검을 움켜쥐고 한 발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 "사태의 초술(招術)이 비범하니 나는 단검을 쓰겠소." 그러나 즉시 반격은 가하지 않고 칼을 겨누어 쥔 채 삼절사태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영의 단검을 든 자세로 보아 검법도 역시 비상하리라 생각한 사태는 "소대협의 사부는 어떤 분이시오?" 소영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마에서 어깨에서 흘러 내리는 피가 옷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싸움을 잠깐 멈춰 주어요!" 소영의 위급함을 보고 참다 못해 달려든 백리빙이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오?" "소녀의 오빠는 너무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렇게 피가 흐르지 않아요? 상처를 동여맬 동안 만 참아 주십시오." 삼절사태가 대답을 하기 전에 노부인 장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싸움을 벌이면 피차 간에 죽고 사는 것은 순간의 일인데 어찌 싸움 도중에 상처를 매어줄 수 있단 말이냐." 노부인 장씨는 삼절사태로 하여금 공격을 계속하게 하고 소영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사실 소영도 불진 공격에는 수세에 긍긍했던 것이다. 그러나 삼절사태는 노부인 장씨의 말을 못들은 척하며 백리빙에게 말했다. "낭자는 소대협과 어떤 사이가 되는 것이오?" "네, 저는 그의 의동생입니다." "알았소. 그의 상처를 매어 주시오." 백리빙은 허리춤에서 꺼낸 가루약을 상처에 바르고 흰 수건으로 상처를 동여맸다. 소영에 대해 남몰래 연정을 불태우고 있는 백리빙인지라 여러 사람들의 눈길 따위는 아랑곳없이 정성을 다하 였다. 악소채는 시종 묵묵히 이 정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백리빙이 이렇듯 넘치는 정을 억제하지 못하는데 반하여 악소채는 그렇지 않았다. 나쁜 일이나 슬픔을 좀처럼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으며 소영에 대한 연모의 정 또한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백리빙의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나 악소채의 정념은 심산유곡에 피어 있는 청초한 백합 과 같은 것이었다. 소영은 여러 사람들의 면전에서 약을 바르며 상처를 매만지는 백리빙이 그리 달갑지 않았으나, 백리빙이 자기를 위해서 싸움을 멈추게 하고 상처를 돌보아 주는 것은 고마웠다. 삼절사태와의 대결에서는 참패를 당한거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처를 동여맨 백리빙은 소영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오빠, 만약 오빠가 오늘 단혼애 계곡에서 죽는다면 악소채 낭자도 결코 혼자 살아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빠가 허락하신다면 나도 이곳에 뼈를 묻고 싶어요. 저승의 반려가 되겠어요. 그러니 마음을 놓고 용기를 내어 싸우세요." 이 말에 소영은 적이 힘을 얻었다. 말을 마친 백리빙은 악소채를 한 번 바라보고는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악소채는 백리빙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시종 담담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백리빙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삼절사태가 소영에게 물었다. "아직도 싸울 생각이 있소?" 소영은 천천히 진기를 단전에 모으며 말했다. "내 비록 무거운 상처를 입었으나 아직도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다시 싸움을 벌이기 전에 사태께 한 가지 말씀 드릴 것이 있소이다." "무슨 말이오?"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이 칼은 날카롭기가 쇠덩이를 흙베듯 하니 사태께선 그리 알고 조심하시 오." 삼절사태는 소영의 오른손에서 번쩍이는 단검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사람의 늠름한 기개는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무예를 익힌 햇수로 보아도 의당 내가 불진과 같은 무기를 먼저 쓰지 않았어야 할 것이었는데 더욱 일격을 가하여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 던가. 아무도 이 사람의 투지를 꺾을 수는 없는가 보다.' "알겠소. 명심하겠소." 삼절사태가 말을 마치자 소영의 단검은 승룡인봉(乘龍引鳳), 섬광과 함께 바람을 끊었다. 그러나 삼절사태의 초술도 만만치 않아 옆으로 비켜 서며 칼을 피하고는 불진을 휘둘러 역습을 가했다. 소영이 적을 노리는 호랑이처럼 긴장하고 있는데 반하여 삼절사태의 초술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소영은 재빨리 삼절사태의 목을 겨누던 단검을 아래로 내리며 불진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빗나가고 말았다. 원래 삼절사태는 내공의 초술이 비범한지라 그녀가 불진을 한 번 휘두르면 부드러운 사포(絲布)는 변화무쌍한 그림자를 펴냈으며 소영의 전신을 뒤덮기도 하였 다. 그러나 소영의 검술도 범상치 않아 정중온기(正中蘊基), 기중장정(奇中藏正)하여 연타를 계속하 는 사태의 불진 공격을 막아냈다. 두 사람이 싸움을 시작한 지 벌써 십여 차례의 경합을 벌였으나 용호 백중은 실로 막상막하여서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삼절사태는 사력을 다하였다. 횡격종타(橫擊從打)하는 그의 공법이 능하긴 하였으나 소영의 단검 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그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불진이 제구실을 못하자 여러 가지 무기로 공법을 시도했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그들은 다시 맞붙어 싸우기를 다섯 차례, 숨을 몰아쉬고 난 사태가 말을 건넸다. "그대는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소?" "나의 스승은 성이 장(莊)이며....." 하고 무심코 말을 내뱉다가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 다. 그는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삼절사태의 질문은 집요했다. "혹시 장산패(莊山貝)가 아니오?" 사부의 이름을 알아 맞추자 소영은 적이 놀랐다. "그러하오. 사태께선 그분을 어떻게 아시오?" 삼절사태의 눈에는 일말의 우수가 깃들어 무엇인가 옛날을 회상하는 것 같더니 곧 표정을 감추 고 쌀쌀하게 말하였다. "그저 이름을 들었을 뿐이오."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진을 휘두르며 다시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소영은 사태의 불진을 가볍게 피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태는 출가 수도한 승려로 어떻게 사부님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생각하면 그리운 사부님이었다. 당장에라도 뛰어가 뵙고 싶은 마음을 억제한 소영은 서서히 반 격의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132. 단혼애의 결투 소영과 삼절사태 두 사람이 맞부딪쳤을 때 소영은 삼절사태의 불진을 단번에 쓸어 버리려고 했 었다. 그러나 삼절사태의 불진은 실로 변화난측하여 십여 합을 겨루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 했다. 오히려 소영은 기선을 제압당해 선공의 기회를 빼앗겨 수세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두 번째 맞부딪쳤을 때 소영은 불진을 꺾어 지구전을 꾀하는 것 보다 빨리 승패를 가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소영이 심신을 가다듬고 역공을 가하기 시작하자 위세는 실로 흉맹무비하여 단검은 절기(絶技) 를 나타내며 맞부딪칠 때마다 불꽃을 튀겼고 각기 상대방의 급소를 노렸다. 소영은 몇 달 동안 화산 담운청에게 사사하여 그의 장기인 단검법을 배웠다. 검술을 배운 지 불 과 수 삭에 정진면려한 보람이 있어 지금은 감히 타인의 추종을 불허 하리만큼 검선(劍仙)의 경 지에 도달해 있었다. 화산 담운청은 화산류(華山流)의 이 검법으로 무림 십대 고수(十大高手) 가 운데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싸움에서도 석파천경(石破天驚)이라 하는 기수(奇手)로 삼절사태를 꼼짝 못하게 궁지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한편 노부인 장씨와 옥소랑군 일파는 소영의 검법이 이렇듯 뛰어남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하였 다. '만약 오늘 단혼애 계곡에서 소영을 처치하지 못한다면 큰 후환이 있을 것이며 또 지금 처치하 지 않으면 다시 처치하기도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소영을 없애 버리기 위한 간교를 짜내는데 여념이 없던 장씨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 기 "얏!" 하는 소영의 기합일성과 함께 단검이 허공에서 호(弧)를 그렸다. 그리고 대여섯 발자국을 물러서 며 숙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소인 물러서겠소이다." 이 말이 홍안소년의 입에서 상대를 조소하듯 우렁차게 울려 나왔다. 노부인 장씨와 그 일파는 손에 땀을 쥐었다.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삼절사태의 손에 들려 있 던 불진은 이미 자루만 남아 있었다. 머리카락같이 부드러운 불진의 사포가 삼절사태 주위에 흩 어져 있었다. 그토록 무섭던 불진이 이제 쓸모없는 한낱 작대기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승부는 끝났소. 소시주가 이겼소." 사태의 음성은 침통하면서도 낭랑하게 들렸다. "사태께서 양보하신 겁니다." 그러나 노부인 장씨가 입을 열었다. "아니다! 아니야! 소영의 보검이 예리하여 비록 불진의 사포를 자르기는 하였으나 사태가 낙패 (洛敗)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을 들은 사태는 노부인 장씨를 향해 말했다. "그럼 선배님께서는 빈니가 칼에 찔려 상처를 입어야만 낙패한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만약 사태가 패배를 자인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오." 사태는 정색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 가지 선배님께 여쭙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오?" "소영의 검법은 그 술수(術數)가 무궁무진하고 첫 번째 두 차례의 경합에서는 더욱 절묘무비하 였는데 노선배님께선 그의 검법의 내력을 알고 계신지요?" "우리 어른께서 작고하기 전에 나와 그분은 천하의 검법과 검사들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 소. 그때 장산패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의 검법이 비록 정기절묘하다고는 하나 원래 검사 의 기질을 타고나지 못한 그는 졸역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소. 그리하여 무림의 십대 고수의 경합 에서도 떨어진 것이오." 노부인 장씨의 말은 장황했다. "난다 긴다 하는 명인들도 둔세은거하는 세상에 제아무리 장산패가....." 삼절사태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노선배님께선 그때 장노선배님이 그를 칭찬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비웃었다고 생각하 십니까?" "칭찬했건 비웃었건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그가 기왕에 무림의 십대 고수 경합에 참여할 것을 포기하였으니 그것은 자기의 무예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삼절사태는 정색을 하며 음성을 가다듬었다. "노선배님, 예전 이야기는 그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애당초 우리는 소영의 검법을 평가하려는 것이었지 장산패 선배님을 헐뜯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노파들의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던 소영은 장산패라는 이름이 그녀들 입에 오르내리자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삼절사태는 노부인 장씨가 나의 사부님을 멸시하는데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렇다면 사태는 사 부님과 잘 아는 사이란 말인가?' 소영은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조금 전 두 번째 싸움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을 때도 그녀는 장산 패를 물었고, 또 장산패라는 말을 하며 침울한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삼절사태는 또 말을 이었다. "만약 저의 판단이 그릇되지 않다면 소영의 검법은 화산파의 검법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소영은 깜짝 놀랐다. '이 여승은 역시 박식한 노파로군. 내 검법이 화산류라는 것을 알아내다니.' 이때 노부인 장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꺼냈다. "화산류의 검법이란 평담무기(平談無奇)한 검류로써, 그 예(藝)가 무당(武堂), 곤륜(崑崙)에 미치 지 못하며 더욱 그들의 기둥인 담운청이 백 년 동안 금궁(金宮)에 갇혀 있는데, 지금 그들의 문중 에는 화산류의 검법을 계승할 사람이 없소. 설령 소영이 화산파의 검법을 배웠다 할지라도 별로 진귀한 것도 놀라운 것도 없는 것이오." "빈니가 이야기한 화산파의 검법은 바로 화산의 정화지학(精華之學)이며 또한 담운청이 왕년에 무림의 십대 고수 경합에서 사용한 검법이올시다. 그리하여 그는 무림 일류의 검사가 된 것입니 다." "그러나 그 담운청은 금궁에 갇혀 있소." "소승이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소영이 금궁에 들어가 담운청의 검법을 배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노부인 장씨는 파안대소하며 말하기를 "허허허, 사태께선 지렁이를 놓고 구렁이라 하고 있소. 수십 년 동안 수학정려한 천하의 검사들 도 금궁엘 들어갈 수 없었단 말이오! 사태는 생각을 고치시오!" 그리고는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소영을 한 번 훑어보고 나서 "설령 소영이 화산 담운청의 검법을 배웠다 하더라도 사태께선 어찌하여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소?" 한 번 이야기를 꺼내면 그칠 줄 모르는 달변의 이 노파라 사태는 말을 받아 주지 않을 수 없었 다. "왕년 장노선배님께서 금궁에 갇히기 전에 가사(家師)님과 함께 화산 담운청의 검법을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장노선배님과 담운청이 한참 동안 경합을 벌인 끝에 하마트면 담운청의 검에 상처를 입을 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노선배님과 가사님은 선당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담운 청의 검법을 여러 모로 분석하며 의논하였습니다. 소승은 그것을 자세하게 들었기 때문에 아직 기억에 새롭습니다." 사태는 옥소랑군의 일파 여러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싸움의 두 번째 경합에서 소영의 단검이 소승의 불진 사포를 잘라 버렸는데 그것은 담운 청의 여러 기검술법(奇劍術法) 가운데에서도 강인하기 비길 데 없는 운효천산(雲曉天山)의 초법 (招法)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이 검법은 그 묘체가 심오하여 천기(天機)가 없으면 아무리 애써 도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담운청이 금궁에 갇힌 뒤 이 초법은 화산파에서 절전(絶傳)되었으므로 소영이 만약 금궁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면 현재 소영이 지닌 초법은 담운청이 남긴 검 보(劍寶)일 것입니다." 사태의 이 말을 들은 노부인 장씨는 또 엉뚱한 말을 꺼내었다. "그럼 만약 소영이 금궁에 들어간 것이 사실이었다면 그는 먼저 우리 가문의 소법(簫法)을 가져 갔을 것이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고 눈길을 소영에게로 옮기며 말했다. "그대의 그 초술은 화산검파(華山劍派) 중의 운요천산류가 아니오?" "그렇소. 사태께선 과연 견식이 넓으시오. 내가 사용한 초술은 바로 운요천산류요."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노부인 장씨가 궁금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공자는 금궁에 들어간 사실이 있소?"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노선배님의 법체(法體)도 보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노부인 장씨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면에는 경련이 일어났다. "그분은 금궁에 갇힌지 수십 년, 다만 살이 흙으로 변하고 뼈는 가루가 되었거늘 그대는 어찌 그분의 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단 말이오?" "그것은 노부인께서 잘 모르는 말씀이오. 첫째, 그 시체가 있는 곳은 사방이 밀폐되어 있었고, 둘째, 몇 분의 노선배님들은 모두 내공이 정심(精深)하였으므로 그들은 비록 죽은 지는 오래 되었 으나 그들의 얼굴은 모두 살아 있는 것처럼, 그대로 있어서 쉽게 누군지를 가려낼 수 있었습니 다." "그게 정말이오?" "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릅니다." "공자가 금궁에 들어갔으니 그때 외계(外界)의 냉기가 흘러 들어 법체가 오손되지는 않았소?" "몇 분 노선배님의 법체는 수십 년이 흘러가도 알아볼 수 있게끔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것입 니다." "그대가 금궁에 들어간 목적은 무엇이었소? 혹시 우리 가문의 소법을 가져간 것은 아니오?" "내가 금궁에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우리보다 먼저 금궁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 니다." "그렇다면 그대보다 먼저 들어간 사람이 우리 장씨 문중의 소법을 가져가기라도 했단 말이오?" "금궁 안의 여러 노선배님들께서 남겨 놓은 무공수록(武功手錄)은 거의 다 남들이 가지고 갔습 니다. 그리고 장노선배님의 소법에 대해서는....." 하며 다음 말을 이으려다 악소채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자 악소채는 허리춤에서 고이 간직했던 소왕의 무공비록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녀는 장노선배님께서 남기신 절세무공을 옥소랑군에게 바쳐 수차 목숨을 건져 준 은혜에 보 답하고 싶습니다." 악소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야말로 청천의 벽력과도 같았다. 소영을 비롯하여 여러 장씨 문중 의 사람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모르고 멍청하게 악소채를 바라볼 뿐이었다. 항상 냉정을 잃지 않던 삼절사태마저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눈이 휘둥그래졌다. 악소채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옥소랑군에게 다가서서 공손히 소왕의 무공비록을 두 손으로 바쳤 다. "옥소랑군, 소녀 비록 옥소랑군과의 혼례를 응낙하지 못하오나 이는 구천에 계신 어머님의 뜻 때문이오며, 결코 낭군의 은혜를 잊은 것은 아닙니다." 옥소랑군은 비록을 받아 들고 묵묵히 서 있었다. 악소채는 말을 이었다. "이것은 옥소랑군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를 여러 번 한 것입니다. 어머님의 뜻과 은혜를 한 데 뒤섞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옥소랑군께서는 조부께선 남기신 절세의 소법을 천하에 널리 퍼뜨려 무림에 그 이름을 길이 남기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되오면 소녀의 조그마한 힘 이나마 바쳐 만분의 일이라도 은혜에 보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옵니다." 옥소랑군 장준은 악소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형형한 안광으로 악소채의 가슴을 꿰뚫기라도 할 것 같았다. 악소채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다시 말했다. "옥소랑군, 영조의 이 유법을 오늘에 되살려 후일 절기를 연마하여 무림에서 명성을 떨친다면 소녀, 여한이 없겠나이다. 옥소랑군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한 길뿐이옵니다." 옥소랑군의 얼굴에서는 신채(神采)가 가시고 눈에서는 신광이 사라졌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옥 소랑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악낭자, 고맙소....."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뒤에 있는 조모 노부인 장씨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는 그만 입을 다 물고 말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은인과 여인, 은혜와 사랑은 이제 깨끗하게 끝장이 난 것이 아닌 가? 이때 노부인 장씨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선부의 유물이니 이 조모에게 돌려 줘도 매한가지다." 하며 손을 내밀었다. 악소채는 노부인 장씨를 가로막고 나섰다. "장노선배님의 유물이 금궁에 있었다는 것은 세인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금궁이란 위난 (危難)과 죽음이 가득찬 곳입니다. 비록 장노선배님의 부인이라 할지라도 이 소법을 계승할 권리 는 없습니다." "그분은 나의 선부이거늘 어찌하여 나에게 그것을 계승할 권리가 없단 말이냐?" 노부인 장씨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 당장에라도 달려 들어 악소채가 받쳐 들고 있는 비록을 가로채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어느 때고 내 손아귀에 들어올 장씨 문중의 가보가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성급한 마음을 달랬다. 악소채는 근엄한 표정으로 소왕 비록을 다시 품속에 넣었다. "노선배님의 말씀이 전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나 모두 옳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노선 배님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요 망칙한 년! 내 말이 도리에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했겠다! 그럼 어째서 선부의 유물을 돌려 주지 않겠다고 버티는 거냐?" 소영이 조금도 동요의 빛이 없이 입을 열었다. "만약 장노선배님께서 금궁에 들어가기 전에 이 비록을 적어, 몸에 지니셨다면 이 유물은 자연 노선배님에게 돌아갈 것이오나, 애석하게도 장노선배님께서는 금궁에 들어가신 후에야 겨우 이 비록을 쓴 것이며, 더욱이 비록을 쓰실 때의 장노선배님은 그 절세의 무공이 실전(失傳)되어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금궁에 들어가 이 비록 을 손에 넣는 사람이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장성이라는 회색 옷의 노인이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그러나 금궁에 들어간 것은 악낭자가 아니지 않소?" 하며 비록을 입수하게 된 경로를 따지고 들었다. 악소채는 소영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 나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내 스스로 금궁에 들어간 것은 아니나, 금궁에 들어간 분이 그것을 나에게 주었습 니다." 그러자 장성은 이제 됐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냉기를 품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 다. "비록은 우리 노주인께서 쓰신 것이니, 우리에게는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소. 악낭자가 끝까지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할 수 없소. 말로써 안 된다면 손을 써서라도 빼앗는 수밖에 ....." 악소채는 담담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장씨 일파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께서 이곳에 올때 나 악소채가 장노선배님의 비록을 몸에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 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오늘 여러분들이 뜻한 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내가 이 자리에 소 왕의 비록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을 것입니다." 옥소랑군의 일파에선 약간의 동요가 일어났다. 악소채는 삼절사태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소녀는 오늘 모든 굴욕을 참아 가며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형 세로 보아 일이 원만하게 풀려 나가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 이상 더 참을 수 없습니다." 삼절사태는 소영과의 경합이 끝난 뒤, 조금 전에 치루어 낸 그와 같은 싸움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것 없고, 정리를 모두 버리고 싸운다면 예상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생각했다. "사매의 생각은 어떠하냐?" "저는 장노선배님의 비록을 옥소랑군에게 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노부인 장씨가 부당한 간섭으로 저를 억압하려 든다면 새로운 싸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삼절사태는 노부인을 바라보며 그녀의 뜻을 물었다. "노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은망덕한 악소채는 나의 손자 옥소랑군을 사경에 몰아 넣고 있으니 만약 악낭자가 마음을 돌 리지 않는다면, 옥소랑군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렵게 되고 따라서 우리 장씨 집안은 대가 끊어 지고 말 것이오. 또 악낭자는 선부의 비록을 내어 놓지 않으니 무슨 낯으로 무림에 발을 들여 놓 겠소." 악소채가 이 말을 듣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녀는 장노선배님의 소법비록을 옥소랑군의 은혜에 보답코자 하였으나, 옥소랑군께서 받지 아 니 하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밖에 보은의 길이 또 있겠습니까?" "그것을 몰라서 묻소? 비록도 비록이려니와 옥소랑군의 목숨이 더 중하오! 낭자는 나의 어떠한 말에도 순순히 응하지 않으니, 남은 방법이란 별도리 없이 선부의 유물을 빼앗고, 낭자를 사로잡 아 무기를 폐한 다음 내 손자의 배필을 삼는 거요." 이 말을 들은 소영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노부인 장씨에게 다가서며 무슨 말을 하려 하였으나 악소채가 이를 막았다. 이때 노부인 장씨가 한 팔을 휘두르니 경장한 젊은이가 출소하여 옥소랑군의 혈도를 찔렀다. 이 광경을 본 소영이 삼절사태에게 말하기를 "사자의 뜻은 어떻습니까? 물론 일이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라겠지요 만약 다시 싸움을 벌인다면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뿐일 것입니다." 소영과 삼절사태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회색 옷을 입은 노인 장성과 남빛 장삼을 입은 철수 인이 악소채의 좌우로 갈라서며 자리를 옮겼다. 또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악소채는 그 장성노인이 한 손을 뒤로 돌려 철소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악소채는 그들에게 시 선을 보낸 채 천천히 허리띠를 늦추어 손을 넣었다. 허리춤에서 그녀의 손이 나왔을 땐 한 자루 의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악소채가 단검을 뽑아 들자 소문과 그의 노비들이 일제히 보검을 뽑아 들었다. 노부인 장씨는 두 개의 쇠망치를 꺼내 들었다. 기이하게 생긴 이 무기를 소영은 처음 보았다. 망치의 크기는 작은 찻잔만 하고 자루 끝에는 흰 색의 끈이 달려 있었다. 쇠망치를 꺼내 든 노부인 장씨는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꼭 십 년 동안 나는 이 탈명금추(奪命金鎚)를 쓰지 않았다. 내 오늘 비로소 이것을 꺼내 들다 니....." 각자 여의(如意)의 무기로 결전의 태세를 갖춘 것이었다. 삼절사태는 노부인 장씨가 왕년에 이름을 떨쳤던 무기를 들고 나서자 생사를 판가름하는 혈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쌍방이 바로 자랑하는 무기를 들고 대치하자, 악소채는 엄숙한 표정을 삼절사태를 바라본 다음 조용히 말했다. "결전은 이제 목전에 다다랐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 바라건데 사자께서는 이 싸 움에 관여하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삼절사태의 얼굴에는 매우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나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는데 들어 주겠느냐?" "말씀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너의 처신에는 나무랄 바가 없었다. 그러니 나를 따라 사문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사부님께 아뢰고 원만한 해결을 바라는 것이 어떻겠느냐?" 악소채는 소영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약 사자의 뜻대로 사문에 돌아가면 이 소영은 어떻게 혼자의 힘으로 당해 내겠습니까?" 삼절사태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무예가 뛰어나 장노부인의 탈명금추가 제아무리 위력을 발휘한다 해도 도저히 이겨내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한 번 노부인 장씨에게 권해 보겠다....." 하고 노부인을 향해 말했다. "노선배님께서는 나의 사매 악소채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들었소." "악소채는 나를 따라 사문으로 들어가 사부님을 뵙고 사부님의 뜻을 따르겠다 하니 싸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나의 동생은 아마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을 거요." 그녀는 눈을 감고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는 비록 나의 지시를 안중에 두고 있지 않지만, 나는 그녀를 존경하고 있으니 악소채를 사 태에게 돌려 주겠소. 석 달 후 백운산장으로 나와 나에게 회답을 주도록 사부에게 전언하여 주시 기 바라오." "소승, 노선배님의 뜻을 어김없이 가사에게 전하겠습니다." 노부인 장씨는 그녀답지 않게 쓸쓸히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면 가사에게 잘 이야기하시오. 이번 일은 우리 집안을 계승하는 중대한 문제이니 옥소랑 군에게 고모가 되는 그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그리고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당신들은 가도 되오." 소영은 손에 단검을 뽑아 든 채 형세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영의 단검에 불진의 사포를 잘리운 다음부터 삼절사태는 그 동자의 위인됨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가볍게 하고나서 노부인 장씨에게 말했다. "소승, 아직 아뢰올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노부인 장씨는 이때 만약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싸움의 결과에 대하여 자기 나름의 판단을 내리 고 있었다. 쌍방이 각기 득의의 무기로 힘을 겨룬다면 승패는 참으로 예측키 어려운 것이었다. 승 패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보다 승산은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삼절사태가 중단 에 끼어 들어 악소채를 데리고 간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악소채가 사태를 따라 사문으로 들어간 다음 전력을 집중하면 소영을 능히 죽일 수 있으니 강적 하나가 제거되면 악소채의 희망도 물거품처럼 꺼져 버리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삼절사태의 청을 들어준 것이다. "또 무슨 말이오? 당신은 악낭자를 데리고 어서 떠나시오." "노선배님께서 기왕에 악낭자를 사문으로 데리고 가라 하셨으니, 오늘의 이 싸움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쌍방 모두 헛되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악소채는 당신의 사매이나 소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소?" 악소채가 사이에 들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장노선배님께서 만약 소영을 먼저 풀어주지 않으면 소녀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노부인 장씨의 얼굴에는 다시 독기가 서렸다. "나는 내 생애에 단 한 번도 남의 고집에 꺾여본 적이 없다." 악소채는 시선을 삼절사태에게 옮기며 말했다. "제가 보건대, 이 문제를 해결하기란 도저히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싸움을 막으려고 사자께 서 많은 애를 쓰셨으나 형세는 악화일로에 있으니 더 이상 속을 상하지 마시고 이 싸움에서 물러 서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삼절사태는 노부인 장씨와 악소채를 번갈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혼 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노선배님께서 나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고 또 소영과의 경합에서도 패하였으니 잠시 이 자리에 서 물러서는 것이 상책인가 보다." 삼절사태는 무거운 발걸음을 석굴 한 모퉁이로 옮겨 놓기 시작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노부인 장씨는 쌀쌀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태는 소영과의 대결에서 패하였지 결코 악소채와 싸워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잖소?" "노선배님께서 기왕에 소승의 권유를 듣지 않으셨으니 더 이상 악소채를 괴롭히기 싫습니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며 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소영이 한 발 다가서며 차분하게 입 을 열었다. "노선배님, 제가 죽으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 아닙니까? 앞으로 이 소영을 죽일 기회가 한 번 은 있을 것이니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줄 아느냐?" 악소채는 가슴이 뭉클했다. 무엇 때문에 소영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소영을 가로막고 노부인 앞에 나섰다. "모든 일은 저에게서 발단되었는데 소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노선배님께서 만약 손을 쓰신 다 해도 저를 상대하심이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또 그 다음날, 내가 죽을 때까지 여기 묶어 둘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백운산 장파들로 하여금 나 소영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연 손을 뗄 것입니다." 그는 점점 열기를 띠었다. "그러므로 누님께서는 나를 도와 만약의 경우 내가 대적하지 못할 때 후진을 쳐서 다시 술법을 써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다고 나서는 것과 다름없는 소영의 이 말이 안타깝도록 애처롭게 들려 악 소채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삼절사태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매는 물러서거라. 소영의 무기(武技)는 결코 너만 못하지 않으며, 또 현재의 판국에선 오로지 소영의 절기(絶技)의 위력을 그녀로 하여금 감득케 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네가 소영과 힘 을 합쳐 같이 싸울 것을 고집한다면 그야말로 참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삼절사태가 비록 소영과 싸우기는 하였으나 역시 사자와 사매 간의 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음양으로 악소채의 신변을 염려하는 것이다. 악소채는 천천히 그 자리에서 물러섰다. 소영은 진기(眞氣)를 모아 단검을 빼어들고 장노부인에게 말하였다. "노선배님, 자, 승부를!" 노부인 장씨는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연삭탈명금추(軟索奪命金鎚)라는 진기한 쇠망치를 좌우 로 휘두르며 소영에게 육박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쥐고 있는 흰색의 줄은 마치 무쇠철사처럼 팽 팽하였고 줄 끝에 매어 달린 탈명금추는 윙윙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바람을 끊을 뿐 소영의 눈에 는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새로운 진기를 돋우며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으나 난생 처음 보는 노부인의 이 금추공법 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신기(神技)로다. 과연 내공이 정심(精深)하구나!' 소영이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다가 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한 발 뒤로 물러서는데, 어떤 그림자가 번개처럼 나타났다. 잿빛 장삼을 입은 장노파의 노복(老僕) 장성이었다. "한낱 풋나기에 지나지 않는 이 아이를 처치하는데 노부인께서 친히 싸움을 임하실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천복(賤僕) 한 사람의 힘으로도 충분하니 노부인께서는 금추를 거두시고 이 일을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러나 교활하면서도 조심성이 많은 노부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 공자의 단검은 날카롭고도 거수동족(擧手動足)이 기민하여 삼절사태의 불진 사포를 베어냈 는데 어찌 그대가 당해 내겠단 말이오?" "천복이 만약 역부족으로 대적하지 못할 때 노부인께서 손을 쓰심이 어떠합니까? 그렇게 하여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성이 철소(鐵簫)를 휘둘러 철수개화(鐵樹開花)의 초법으로 소영의 앞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갔 다. 장성은 상전을 모시는 가복이 정성을 바칠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소영에게 덤벼 들었다. 소영은 단검을 휘둘러 법륜구전(法輪九轉)으로 철수개화를 막아냈다. 소영이 단검을 한 번 휘두 를 때마다 시퍼런 칼날에서는 여러 줄기의 백광이 사방에 퍼졌다. 그러나 장성은 그 자리에서 움 직이지를 않았다. 일진일퇴의 숨막히는 대결이 몇 차례 치루어지자 장성은 소영의 검법이 비범함을 알고 철수개화 를 속공(續功)으로 전개하며 구소(九簫)를 쳐냈다. 장성이 쓰는 수법의 변화는 실로 종횡무진이었 다. 소영은 금궁에서 장방의 비록을 손에 넣긴 하였으나 읽어볼 사이가 없었기 때문에 소법의 변화 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은 자기의 검법에 자신이 있었고 또 날카롭고 단 단한 단검은 철석보옥(鐵石寶玉)도 자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장성의 일소를 잘라 버리려 기 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편 장성은 얼마 전의 싸움에서 소영의 단검이 삼절사태의 불진공격을 무난히 막아내고 끝내는 불진의 사포를 잘라 버린 것을 목격했으므로 조심스레 구소를 연공(連功)했던 것이다. 함부로 철 소를 내밀다가 소영의 단검에 걸리면 큰일이라 변공(變功) 연공으로 소영을 몰아세우려 했다. 그러나 소영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위치를 바꾸지 않은 소영은 장성이 공격을 가해 올 때 마다 날쌘 동작으로 막아낼 뿐 반격은 하지 않았다. 장성의 힘이 빠질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멈추시오!" 이때 장노부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분부이신지?" 노부인 장씨를 돌아보며 말하는 장성은 매우 초조해 보였고 이마의 콧잔등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소법은 훌륭하나 그와 같은 초술로는 도저히 대적이 불가하니 뒤로 물러서시오. 내가 그를 대 하겠소." "노부인, 그 아이의 단검은 날카롭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을 자르고 그 단단함은 무쇠를 흙 베듯 하니 어찌 금추로 당해 내겠습니까? 아무 말씀 마시고 이번 싸움은 끝까지 천복에게 맡 겨 주십시오." "그 아이가 쇠를 흙 베듯 하는 칼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 칼을 상대해서 이겨낼 수 있 는 무기가 무엇이오?" 말을 마치고는 옆에 있던 경장소년(經裝少年)을 향해 말했다. "백운산장의 진산지보(鎭山之寶)를 가져 오너라." 경장소년은 국궁배례하고 등에 걸머졌던 보따리를 내려 놓고, 그 속에서 두 자 길이의 단목(壇 木) 궤짝을 꺼냈다. '아하, 저것이 소문에 듣던 백운산장의 진산지보인가.' 소영이 궤짝을 응시하고 있자니, 그 경장한 젊은이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공손히 뚜껑을 열 어 한 개의 옥척(玉尺)을 꺼내 장노부인에게 바쳤다. 그 옥척은 길이가 약 한 자 일곱 치 가량 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노부인 장씨는 자세를 엄숙히 하고 옥척을 받아 장성에게 말했다. "이 옥척은 견고하기 비길 데 없고 단검을 무서워하지 않으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싸우시 오." 장성은 왼손에 철소를 쥔 채, 오른손으로 옥척을 받아들고 경건히 허리를 굽혔다. "노부인께서 천박한 노복을 이처럼 염려하시어 옥척을 내리시니 오늘 만약 저 소영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기꺼이 이곳에 뼈를 묻어 후은에 보답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발길을 돌려 소영을 향해 걸어갔다. 옥척을 손에 든 장성은 진기가 충천하여 옥척과 철소를 휘두르며 대담한 공법으로 소영에게 덤 벼들었다. 장성의 옥척이 획 하고 바람을 끊으며 소영의 정면을 내리치자 소영의 단검이 번개처 럼 이를 막아냈다. 장성의 제일격은 무승부로 끝났다. 숨을 몰아쉰 장성은 두 번째의 공격을 가했다. 옥척은 예리한 단검에 쨍! 하고 튕겨졌다. 두 번째 경합도 역시 무승부. 장성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등에서 흘러 내린 땀은 그의 장삼을 흥건히 적셨다. 이 옥척이 백련 정강(百鍊精鋼)의 진산지보라고는 하나 소영의 단검과 두 번을 겨루어 승부를 못냈으니 필시는 지고 말 게 아닌가. 승산없는 싸움으로 백운산장 진가의 보물에 상처라도 입힌다면...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성은 점점 기가 꺾여들었다. 세 번째. 갈라져 서 있던 두 사람이 다시 달려들어 단검과 옥척이 맞부딪쳤다. "쨍!"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쌍방은 몸을 돌이키고는 다시 맞섰다. 장성은 나이도 많을 뿐더러 소법에 있어서는 당해 낼 사람이 없다는 원로다. 그런데 동자에게 질질 이끌리자니 관전하는 사람에게도 부끄러웠다. 그 뿐만 아니라 치미는 화를 누를 수 없었다. 세 번째 공격마저 허사로 돌아간 장성은 네 번째 공격에 나섰다. 옥척으로 소영의 단검을 막아내며 철소를 휘둘러 소영의 급소를 찔렀다. 소영이 날쌔게 피하자 장성의 철소는 연거푸 급소를 찔렀다. 소영은 물러섰다. 이때 비로소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고 연 공을 퍼붓는 장성의 초술을 맛본 것이었다. 장성은 물러서는 소영을 뒤쫓아 소영의 정면을 찔러 단 일격에 때려 눕히려고 철소를 휘두르며 소영을 몰아세웠다. 장성이 옥척을 한 번 휘두르자 그 바람소리는 산을 흔들었고 철소가 소영의 급소를 노려 날아갈 때마다 그 소풍(簫風)은 단혼애의 골짜기를 휩쓸었다. 악소채, 삼절사태 그리고 백리빙은 손에 땀을 쥐고 소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천우신조가 없는 한 저 한 자루의 단검만으로 어찌 사투에서 빠져 나 올 수 있단 말인가..... 소영의 몸이 한 번 움직였다. 순간 장성의 철소가 소영의 가슴을 찔렀다. 소영은 날랜 동작으로 왼편으로 비켜서며 한 손을 들고 인지(人指)를 꺾어 지탄(指彈)을 보내니 장성의 철소는 금시에 지탄에 튕겨져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소영의 절기인 탄지신공법(彈指神功法)이었다. 악소채, 백리빙은 뛸 듯이 기뻤고 백운산장파 역시 감탄해 마지않았다. 공세에서 수세로 몰린 장성은 의기소침하여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승부는 이미 정해졌다. 맹위를 부리던 장성의 옥척과 철소는 이제 그 기력을 다한 것이었다. 133. 조건 붙은 승부 소영은 검을 잡고 숙연히 선 채 다음 사태에 대비하였다. 장성은 이때 뒤로 세 발짝이나 물러나서야 비로소 몸을 가누었다. 그의 안색은 백지장같이 창백 해졌다. 그 광경은 보고 있던 장노부인은 내심 깜짝 놀랐다. '필시 중상을 입었을 게다.' 그녀는 장성에게로 다가서며 다급히 물었다. "장성, 상처가 중한가?" 장성은 쇠퉁소를 지팡이 삼아 곧 쓰러질 듯한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노부인, 저 자는 소림파 무상대사의 탄지신공을 익히고 있소이다." 장성은 이 말을 마치고 돌연 선혈을 토해냈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고는 말을 이었다. "저는 왕년에 노주인을 모시고 십대 고수를 뽑는 시합을 본 적이 있었소이다. 그때 소림의 무상 대사가 탄지신공으로써 열세를 만회하였던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노부인께선 저놈의 무공을 얕보지 마시고 십 분 조심하십시오....." 장성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장노부인은 미간을 찡그리고 몇 번 혀를 찼다. 그리고는 대기하고 있는 경장의 소년에게 말했다. "보명환(保命丸) 한 알을 먹이고 편히 눕게 하여라." 소년은 공손히 대답하고는 곧 장성을 업고 석실 모퉁이로 물러났다. 장노부인은 싸늘한 눈길을 소영에게 돌려 뚫어질 듯이 쏘아보았다. 그녀의 흰 머리카락은 바람 에 날려 일부러 풀어 헤친 것처럼 되었다. 마치 무덤 속에서 나온 유령 같은 형상이었다. "소영, 너는 무슨 무공으로 장성을 상하게 했느냐?" 소영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수라지력이오. 그러나 나는 백운산장과 아무런 원한도 없소. 그런 뜻에서 내 목숨을 노린 그에 게 같은 적으로 대하지 않고 그저 전의만 잃게 만들었을 뿐이오. 내 말만 그대로 들어 주었다면 이런 불상사도 없었을 것이며 부인과도 친할 수 있었을 것이오." 그는 말을 잠시 끊고 장성을 바라보았다. 장성은 죽은 듯이 누워 청의소년의 간호를 받고 있었 다. "그러나 그는 충의에 가득차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일일이 이야기하느라고 상세가 심하게 변한 것이오. 상처는 과히 깊지 않으니 이틀 정도만 조식하면 완쾌될 것이오." 장노부인은 냉랭한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당신이 백운산장 사람을 걱정하고 있다는 말이로군." 소영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무어라 반박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의 인내심도 어지간히 수련이 되어 있었다. 장노부인은 다시 경장소년에게 입을 열었다. "옥척(玉尺)을 이리 건네라." 장노부인은 옥척을 받아 쥐고 소영에게 냉랭히 말했다. "너의 무공은 여러 문파의 으뜸 장기를 지니고 있으니 그렇듯 고강할 수밖에...이제 나는 살대로 산 몸이다. 그러니 너는 조금도 인정을 두지 말고 마음껏 손을 써라. 자, 어서 덤벼 보아라." 그녀의 말에는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가 깃들어 있었다. 소영은 추호도 그녀와 자웅을 겨룰 마음이 없었다. "백운산장과 나는 아무런 원한도 없지 않소! 그런데 어찌 나를 괴롭히는 것이오. 나는 노선배를 해치고 싶지 않소. 그러나 정 나를 괴롭히시겠다면 부득이 손을 쓸까 하오. 장노선배님께서 손을 멈추라고 말할 때까지 말이오." 장노부인은 그 말에 비위가 상했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멈추라고 한다더냐?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다." 그는 과히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장노부인과 맞섰다. 그러나 이때 악소채의 말소리가 들렸다. "동생은 물러나오. 내가 장노선배의 수를 몇 수 배울까 하오." 소영은 물러서지 않고 악소채의 말을 받았다. "제가 몇 수 배운 뒤 누님께서 손을 쓰셔도 늦지 않을 것이오." "안 돼요. 빨리 물러나시오." 소영은 은연중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더 우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자리를 물러났다. 악소채는 정중히 포권을 하여 예를 올리고는 청하였다. "장 노선배님....." 장노부인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누가 너의 노선배냐? 네가 싸우고 싶다면 빨리 무기나 뽑아 들어라." 악소채는 그녀의 말에 대꾸도 없이 품속에서 장방의 무공비록을 꺼냈다. 소영과 장노부인은 무 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악소채는 그 비록을 공손히 장노부인에게 주었다. "노선배님,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그녀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공손하였다. 장노부인은 눈을 빛내며 비록을 건너다 보았다. 심중으로는 받고 싶었지만 악소채가 너무나 겸 손하게 대하자 얼른 손을 내밀기가 거북했다. "너는 왜 비록을 내게 주는 것이냐?" 악소채는 여전히 두 손으로 비록을 받든 채 대답했다. "옥소랑군은 지난날 수 차례 저를 구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장가의 무 공이 적힌 비록을 드리는 것입니다." "손자가 곧 죽으려고 하는데 지금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 "노선배님께서 지금 거두어 들이지 않으신다면 다시는 이것을 찾 지 못하실 것입니다. 더군다나 노선배님의 손에 제가 죽거나 상처를 입는다면 이 비록은 강호에 떠돌아 다녀 장가의 명예를 손 상시킬 우려도 있습니다." 장노부인은 그제서야 장방의 무공비록을 받았다. 그녀는 비록을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나는 비록 선부(先夫)가 남긴 비록을 받았지만 너와 화해를 한 것은 아니다." 악소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도 감히 그런 망상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무기를 들어라." 악소채는 손을 저었다. "잠깐만...싸움을 하기 전에 몇 마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빨리 해라." 악소채는 잠시 사이를 두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와 옥소랑군의 원한관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생에게는 얼마 간 원한이 있을 것입 니다. 그것도 그때의 정세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지 일부러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 다. 노선배님께서 지난 원한을 잊지 못하시고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신다면 굳이 변명이나 애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그러나 선배님과 자웅을 겨룬 후부터는 서로 원한관계를 잊기로 해 주 십시오." 악소채의 조리 있는 말에 장부인은 적이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장노부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너의 지금 말은 나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로군." "노선배님께선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저의 말뜻은 백운산장과 우리들의 원한관계를 제 한 목숨 과 맞바꾸자는 말입니다. 제 목숨을 버리는 대신 다시는 원한을 갖지 않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 니다." "그것은 걱정 말아라. 만약 이 싸움에서 네가 이긴다면 백운산장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백 운산장의 후배들이 다시 일어서려면 십 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야 된다. 그러니 너희들은 백운산 장으로 쳐 들어가 남은 제자들을 죽이면 후환도 없어질 것이 아니냐?" 악소채는 미간을 찡그리며 "노선배님....." 하고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장노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를 노선배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와 나는 서로 아무 관계도 없지 않느냐." 하더니 갑자기 부드럽게 표정을 바꾸고는 물었다. "만약 내가 이긴다면 너는 어찌 하겠느냐?" "후배는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네가 죽지 않는다면?" 악소채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되물었다. "노선배님의 뜻은 어떠합니까?" 장노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불쑥 뚱딴지 같은 말을 꺼냈다. "우리 장씨 가문으로 시집을 오는 것이다. 바로 내 손자와 혼인하는 것이지." "그러나....." 장노부인은 별안간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칼을 잡아라!" 그녀는 말을 끝내면서 대뜸 옥척을 휘둘러 악소채를 공격했다. 악소채는 더 이상 말해 보아야 소용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뒤로 몇 발 물러서며 소문에게 다급히 말했다. "네 장검을 다오." 소문은 그녀의 말대로 자신의 검을 뽑아 그녀에게 건네 주며 내심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녀의 허리에는 연검(軟劍)이 있는 데도 어째서 내 장검을 달라는 것일까?' 소문의 검을 빌린 악소채는 조금도 주저없이 상대를 공격할 자세를 취하였다. 그녀의 행동은 소 문의 마음을 갈피를 못잡게 어지럽혔다. 그러나 소영은 어느 정도 그것에 이해가 갔다. '누님은 분명 장방의 무공비록을 깨우쳐 그의 무공을 연마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연검으로는 소 법을 다루기가 힘들어 일부러 장검을 쓰려는 것이다. 바로 장가의 소법으로 장노부인을 상대하려 는 계략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장노부인은 악소채가 검을 잡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두 사람의 견해는 서로 달랐다. 악소채가 설령 양보할 마음이 있었다 하여도 지금은 조금 달라 졌다. 악소채는 장가문하로 시집을 간다는 조건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장노부인의 생각은 꼭 악소채를 손자며느리로 삼고 싶었다. 그러니 자연 서로 일보도 양보할 수 없는 절박한 사정이었다. 만약 장노부인이 잘못하여 죽거나 다치게 되면 이 원한관계는 언제까지나 끝맺지 못할 것이었 다. 더군다나 사부도 그녀와 정분이 깊으니 가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악소채가 그녀에게 당한다면 소영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싸움은 어느 쪽도 이득이 없는 일이었다. 악소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장노부인에게 다가갔다. 장노부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악소채의 행동만 주시하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와졌다. 그러자 장노부인이 먼저 옥척을 뻗었다. 그녀의 옥척이 쉴사이 없이 휘날려 악소채는 뒷걸음질 로 피하기만 하였다. 옥척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옆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는 삼절사태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저러다가 악소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두 사람은 서로 이십여 합을 싸웠으나 악소채는 여전히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악소채가 반격할 힘이 없어서 수세에 몰리는 것은 아니다. 소영은 그녀가 일부러 손을 쓰지 않는 것을 느끼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누님은 분명히 장노부인을 해칠 마음이 없구나. 저렇게 수세로만 몰리다간 어떤 실수를 저지를 지도 모른다. 장노부인의 무공은 절묘하며 수단도 악랄하니.....' 그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외마디의 외침이 들리며 붙어 있던 두 개의 그림자가 떨어 졌다. "야아앗!" 그 외침은 구경하던 군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갈라진 두 사람은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소영의 눈길에는 악소채의 창백한 안 색이 보였다. '당했구나.' 소영은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날려 두 사람 사이로 뛰어 들었다. 그의 마음은 분노로 들끓고 있어 상대를 죽일 수도 있는 마음이었다. 장노부인이 갑자기 끼어든 소영에게 냉랭히 입을 열었다. "소영, 네가 덤비겠다는 것이냐? 좋다. 너희들이 차륜전법으로 공격한다 하여도 나는 조금도 두 렵지 않다." 소영이 대꾸를 하려고 하는데 악소채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동생은 물러나요!" 항상 악소채를 따르는 소영인지라 그녀의 몇 마디 말에 곧 옆으로 비켰다. 장노부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악소채를 쳐다보며 물었다. "악소채, 너는 아직까지 싸울 힘이 있느냐?" 악소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선배님께서 사정을 둔 덕분인지 옥척의 위력이 그리 크지 않아 저는 다시 싸울 수 있습니다." "흐흥, 그것도 반가운 소리로구나. 다시 너와 겨룰 수 있다니 ....." "조금 전에 저는 최선의 힘을 기울였으나 노선배님의 옥척에 일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노선배 의 높은 무공에 감탄할 뿐입니다." 장노부인은 회심의 미소로써 그녀의 말을 받았다. "네가 만약 졌다는 것을 시인한다면 나의 요구를 들어야 된다. 그럼 내 손자의 행복을 위해서라 도 지금까지의 모든 원한관계를 백지로 돌리겠다." 악소채는 담담한 웃음으로 상대의 미소를 받았다. "제가 삼 개월 전이었더라면 노선배님께 반격할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형세가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달라졌느냐?" "저는 노선배를 반격할 절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장가의 소법으로 노선배 님과 승부를 가려 보겠습니다." 장노부인은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그것은 어림없는 수작이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더 어쩔 수 없군요. 저서에는 정묘한 초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방 노선배님의 그것은 모두 금궁에서 만든 기초(奇招)였지요." 악소채는 장가의 소법을 터득한 모양이었다. 장노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나는 장가의 무공으로 패한다면 마음이 가벼울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네가 패한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자결하겠습니다." 악소채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다. 그녀는 눈길을 소영에게 돌렸다. "동생은 나에게 몇 가지 약속을 하겠어요?" "누님의 분부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겠소." 악소채는 빙그레 웃음을 보냈다. "만약 장노선배와 대결하여 내가 패한다 하여도 동생은 절대 복수할 생각은 갖지 말아요. 그리 고 내 시체나 곱게 묻어 주고....." "그건...그건....." 악소채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그쳤다. "응낙하세요. 내가 죽어서도 마음이 불안하지 않게." 소영은 한참 동안 생각을 하고는 무겁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누님의 말대로 하겠소."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 줘요. 그리고 그 재를 가지고 나의 어머님 유해와 나란히 놓아 주세요. 더 하나 욕심이 있다면 동생의 손을 빌려 어머님의 유해와 내 몸이 화한 재를 어느 굴 속에 넣고 봉해 주세요. 필시 어머님의 유해는 아직도 상하지 않았을 것이오." "명심하겠소." 소영은 무표정하게 대답은 했지만 내심으로 말할 수 없는 비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시도 악소채를 잊지 못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생사를 같이했고 또한 그녀 어머님의 유서 로 부부가 될 것을 기약한 사이였다. 악소채도 마찬가지였다. '아! 이런 자리에서 동생과 최후를 나누는구나. 옛날부터 수많은 고비를 넘겨 오늘이 되었는데... 더군다나 동생은.....' 그녀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다음 말을 꺼냈다. "마지막 하나는 바로 소문과 소홍을 돌봐 달라는 것이오. 그녀들은 원래 선배 고인의 제자들이 었어요. 그런데 그녀들 사부가 화를 당하여 죽자 나에게 찾아온 것이오. 그들은 내 종처럼 지내왔 지만 정말은 친자매와 같았소. 만약 내가 죽거든 동생은 그녀들을 잘 보살펴 줘요."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소문이 흐느끼며 말했다. "아씨께서 만약 불행하게 되신다면 우리들도 뒤따라 자결하겠습니다. 그러니 소공자께선 굳이 수고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소영은 고개를 돌려 시녀를 보았다. 소문뿐만 아니라 소홍도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거의 통곡에 가까왔다. 소영은 가뜩이나 수심에 싸여 있었는데 그녀들의 모습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누님의 명을 결코 어기지는 않겠소. 그러나 누님께선 동생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셔야 됩니다. 누님이 죽는다면 최악의 사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동생은 나쁜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르고 정 의를 잃어....." 악소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직 못한 일이 남아 있어요. 첫째는 어머님의 복수요. 어머님의 복수를 않고 어찌 세상을 뜰 수 있겠어요. 동생의 염려대로 최선을 다하여 상대하겠소." "누님께선 남에게 잘못한 일이 없으시니 절대 마음을 약하게 갖지 마시오." 악소채는 그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몸을 돌려 소문과 소홍을 건너다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왜 그리 슬피 우느냐?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어서 울음을 그쳐라." 소문과 소홍은 슬픈 마음이야 한량없지만 악소채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두 시녀들의 울음소리가 멎자 악소채는 그들에게 눈길을 던졌다. "노선배님은 지금 나 하나만을 죽이려 한다. 내가 죽더라도 결코 너희들에게까지 손을 쓰지는 않을 터이니 과히 염려하지 말아라. 더군다나 동생은 인자하고 강호의 무림 중에서 영웅이니 너 희들을 나보다 잘 보살펴 줄 것이다. 내게 대하듯 동생을 잘 따라라." 그녀는 다시 눈길을 돌려 삼절사태에게 입을 열었다. "제가 죽은 뒤 사자는 수고스럽지만 사부님께 전해 주세요. 제가 죽으면서 사부님의 은공과 은 혜에 감사드리더라구요." 삼절사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말을 꼭 전해 주겠다." 악소채는 말하고 싶은 것은 전부 이야기한 다음 천천히 장노부인에게로 다가갔다. 소영과 삼절사태 그리고 두 시녀들은 손에 땀을 쥐고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다. '이번에도 그녀가 지면.....' 악소채는 이 장 정도의 사이를 두고 장노부인과 대치하였다. 그녀는 더 가까이 가지 않고 한참 동안 장노부인을 쏘아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위기는 차츰 살기를 띤 눈 빛으로 변하였다. 이번에는 악소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공격해 보십시오." 장노부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더니 "좋다. 준비되었다면....." 하고 서슴없이 옥척을 뻗어 왔다. 옥척은 은빛을 번쩍이며 악소채의 가슴을 겨냥했다. 악소채는 가볍게 왼쪽으로 몸을 비켜 그녀의 첫 번째 공격을 피하였다. 이번에는 반격을 시도하였다. 조금 전에는 반격없이 수세로만 몰리던 악소채가 대뜸 반격을 시작하자 장노부인은 조금 당황하 였다. '이제서야 제 실력을 발휘할 모양이군.' 두 사람의 싸움은 전보다 더욱 치열해졌고 또한 살기가 충만했다. 장검과 옥척이 맞부딪치는 날 카로운 금속성이 들렸다. 간혹 어느 사람이 질렀는지 가벼운 기합 소리도 들렸다. 두 사람의 술수가 차츰 더해지자 이제 는 싸늘한 검빛과 날카로운 옥척이 휘날리는 것과 같이 보였다. 소영은 가슴이 조마조마하여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처음에는 여전히 악소채가 수세로 몰렸다. 장노부인의 옥척은 종횡무진하여 감히 기회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싸움이 이십여 합을 겨룬 뒤부터는 점차로 정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악소채는 장검을 비스듬히 부여 잡고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세를 바꾸었다. 장노부인의 옥척의 위력은 대단하였으나 악소채의 검초에 부딪쳐 제 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 다. 다시 얼마가 지나 두 사람은 오십여 합을 나누었다. 이제까지 마음을 죄고 있던 소영은 두 사람의 싸움을 주시한 후 마침내 낙관적인 판단을 내렸 다. '이번에는 누님이 이기겠구나. 장노부인이 조금 지친 듯하니 .....' 장노부인은 정말 지쳤는지 날카롭던 옥척이 가끔 빗나가고 있었다. 악소채는 상대의 허점을 눈치채었는지 쉬지 않고 삼 초를 내뻗는 것이었다. 돌연 악소채의 검빛 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허공을 맴도는 듯했다. 보는 사람의 눈길에는 그것이 그냥 허공에 원을 그리기만 하는 것 같았으나 실은 무서운 위력으 로 상대를 오 초나 공격한 것이었다. 검꽃이 연속 번쩍이는 도중 두 사람 사이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앗!" 그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옥척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장노부인의 오른손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악소채는 재빨리 손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겠습니다." 장노부인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의 애통한 소리는 주위에 메아리쳤다. 백발이 바람에 휘날리며, 눈에는 비통한 눈물이 고였 다. "장강의 물결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더니 벌써 나도 늙었구나." 그녀의 말소리는 처량했다. 이미 눈물이 두 뺨을 적시고 있었다. 악소채는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조금 전에 제가 발휘한 검초는 섬전삼소(閃電三簫)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장가의 노선배님 께서 금궁에 갇힌 뒤 만들어 낸 절기 중의 하나이옵니다. 장차 장노선배님께서 그 무공비록을 익 히신다면 가히 천하를 통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후배가 이겼으니 처음의 약속대로 서로의 원한을 잊고 지내야 될 것입니다. 장가의 소법이 다시 백운산장으로 돌아갈 길을 터 놓은 저를 꾸짖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장노부인은 일전에 패한 뒤 그 기력을 되찾지 못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그녀는 잠시 후 고개를 돌려 옥소랑군에게 입을 열었다. "내 부상은 가볍다고 할 수 없다." "할머니, 우린 이곳을 떠나요." 옥소랑군은 비통한 표정으로 한 마디 내뱉고 곧장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노부인은 더 입을 열지 않고 그를 뒤따랐다. 백운산장의 사람들은 일제히 뒤를 따랐다. 악소채는 멍하니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삼절사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매는 이제 어찌할 작정이냐?" 악소채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매는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럼 나를 따라 사부님을 만나보겠느냐?" 악소채는 잠시 생각을 굴린 다음 "사자께선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가 가고 싶지 않아도 반드시 반 년에 한 번은 사부님을 뵈어야 된다. 더군다나 오늘의 일은 네가 증인이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 "사자, 고맙습니다." "사부는 비록 장노부인을 좋아하지 않지만 소왕 장노선배와의 우정은 매우 깊다. 옥소랑군도 장 가의 혈육이니 그가 죽는 것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실 게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사부님을 뵈 옵고 자세한 사정을 말씀드리자는 것이다." 삼절사태는 주위를 훑어보았다. "내가 알기로는 사부께서 암암리에 약초를 수집하여 옥수랑군에게 줄 영단을 만들었다. 그 정도 로 장가 문파와 관련이 깊으신 사부님이니 네가 일보 양보하지 않을 수 없을 게다. 사부님과 충 돌하지 않으려면 미리 사부님께 모든 사정을 알려 드려야 된다." "언니의 염려를 잊지 않겠어오." 삼절사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너는 내 말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 나중에 만나자." 하고는 몸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악소채는 한동안 삼절사태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악소채는 천천히 동굴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녀는 무슨 어려운 생각이 있으면 항시 걸음을 옮기 면서 결정하였다. 잠시 후 소영에게 다가온 그녀의 눈빛은 침울하였다. "동생, 왜 내 말을 듣지 않았어요?" 소영은 의외의 물음에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무슨 말이오?" "나는 동생에게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만약 옥소랑군 혼자였다면 제가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러나 그들은 여러 일행을 데 리고 왔으니 누님 혼자의 힘으로 어찌 당할 수 있겠소. 제가 힘이 되어 주자고 왔던 것인데 그냥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악소채는 당황해 하는 그의 동정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나는 동생이 짧은 삼 개월 만에 금궁을 찾아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어요. 더군다나 무 공이 뚜렷이 증강하였으리라고는 ....." "모든 것이 하늘의 도움과 누님의 은덕이었소." 악소채는 말소리를 낮추었다. "내 동생에게 금궁의 열쇠를 준 것은 나를 따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소. 금궁은 수십 년 동 안 모든 사람이 찾으려고 애썼던 것인데 동생은 삼 개월 만에 찾았구려." 소영은 그녀와 헤어지고부터 금궁에 들어간 일과 또한 나와서의 일들을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악소채는 경악한 빛으로 한참 동안 소영을 쳐다보았다. "동생은 정말 많은 모험을 하였군요." 그녀는 그제서야 생각이 난듯 백리빙에게 눈길을 보냈다. "동생, 이 아가씨는 누구지요? 아직 내게 인사를 시키지 않았군요." 소영이 멋쩍은 듯한 웃음을 띠며 입을 열려는데, 백리빙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백리빙이라 합니다. 악낭자는 처음으로 뵙지만 그런대로 정이 드는군요." 악소채는 그녀의 공손한 말에 내심 기쁜 마음이 생겼다. "아, 백리낭자....." "나는 낭자보다 나이가 아래이니 낭자께서 괜찮으시다면 동생으로 불러 주세요." "좋아요. 그러나 나는 아직도 동생의 가세(家世)를 모르는데요." 백리빙은 방긋 웃고는 말을 받았다. "나는 본래 빙궁에서 자랐어요." "그렇다면 북천존자의....." 백리빙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랍니다." "아, 북해의 공주시로군. 동생의 아버님께선 북해에서 위력을 떨치고 계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어요. 그리고 중원에서도 커다란 명성을 얻고 있지요. 듣자하니 동생의 아버님께선 수하에 무수히 많은 고수를 거느리고 계시다지요?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몇 년에 한 번씩 중원에 나타나 그 위 세를 떨치고 돌아간다던데요. 그것이 정말이에요?" 백리빙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줄곧 그녀의 용모를 살펴보았다. 백리빙은 악소채의 그림같 이 예쁜 얼굴과 우아한 용모에 홀딱 반하였다. 그리고 악소채에게서 느낀 것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겸손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질투심으로 상대를 시기하였는데 저 사람은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으니.....' 백리빙은 부끄러운 생각으로 얼굴을 붉혔다. "나는 가부에 대한 일은 조금도 몰라요. 그리고 가부께서도 중원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안하 시니....." "그렇군요." 악소채는 소영에게 눈길을 돌렸다. "동생은 어떻게 해서 백리 아가씨를 알게 되었소?" 소영은 대답하기가 매우 난처하였다. 원래 악소채를 어렵게 보고 있는 터에 덧붙여 그녀를 알게 된 이야기를 한다면 악소채에게 핀잔 을 받을까 두려웠다. "그건....." 옆에서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그건 제가 온 세상을 헤매며 오빠를 찾았기 때문이에요." 악소채는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물었다. "그럼 동생의 가부께선 알고 계시오?" "아직 모를 것입니다." "아가씨는 혼자서 빙궁을 떠났으니 영존께선 분명 찾아 다니실 것이오. 그러니 어느 날이건 이 일을 아신다면 가만 있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백리빙은 심각한 얼굴로 끄덕였다. "저도 그것은 알고 있어요. 이 일로 인하여 오빠께선 몇 번의 충돌도 있을 것이에요. 그러나 나 는 오빠를 잊을 순 없어요." 소영이 그녀들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나는 벌써 빙아 때문에 북천존자와 맞섰던 일이 있소." 악소채는 깜짝 놀라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동생이 어찌 북천존자와 적이 될 수 있었소?" "나는 그와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으나 어떤 사람에게 구원을 받았소." 악소채는 지혜도 많았고 상대를 보는 안목도 날카로왔다. '저 아가씨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구나. 더 이상 캐물었다간 오히려 화를 만들겠다.' 그녀는 곧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나는 동생을 삼 개월 전에 만났으나 그때에도 자세한 것을 듣지 못했어요. 동생은 날이 갈수록 강호에서 명성이 높아지고 반면에 악명도 높은데 어찌 된 일이오? 동생과 원한을 품고 있는 인물 이 많더군요." "그것은 모두 낭설입니다. 저의 원수는 오직 하나 백화산장의 대장주 심목풍뿐입니다. 그의 세력 이 넓어 강호 어느 곳이든 부하들이 있어 그들이 농간을 부리는 것입니다." 악소채는 얼마 동안 묵묵히 있더니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바로 그것이오. 심목풍은 사방으로 수하들을 풀어 동생을 비방하고 모함하는 것이오. 물론 강호 에 뜻있는 인물들은 그것을 믿지 않지만 몇몇 사람은 그들에 호응하기도 하오. 심목풍이 동생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아 강호에선 오직 동생만이 그에게 대항할 수 있어요." "누님, 나는 그를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가 너무나 악을 조장하니 저도 자연 그에게 반 기를 들고 그를 죽이려는 것이지요. 만약 어느 날엔가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선을 택한다면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있소이다." 악소채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심목풍은 영원히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할 것이오. 이제 남은 것은 그와 동생 두 사 람 중에 어느 하나가 죽는 것뿐이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힘을 다하여 동생을 돕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군요. 나도 어머님의 복수가 남았으 니...그리고 또 하나....." "누님은 아직도 옥소랑군 때문에 고민을 하시는군요." 악소채는 허공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래요. 오늘의 장씨 가문은 그 세력이 넓으며 소왕 장방의 위인됨은 천하가 숭앙하는 바요. 그 리고 백운산장은 언제나 문을 잠그고 있어 강호에 잘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장노부인만은 성격이 포악하여 마음대로 강호에 나다니며 곳곳에 원한을 만들어 놓았어요. 그것을 보고 사부님 이 그녀를 싫어한 것이오." 그녀는 옛일을 생각하듯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장방이 죽자 그녀는 더욱 날뛰었지만 사부님은 옥소랑군을 지극히 사랑하였어요. 옥소랑군은 장노부인의 외손자로서 장준이라는 이름을 숨기었어요. 장노부인은 점차로 그에게서 멀어져 이제 그가 죽는다 하여도 그를 살리려고 손을 쓰지 않을 것이오." "그럼 누님은 그들을 쫓겠다는 것이오?" 악소채는 침묵만을 지켰다. 소영은 얼마 동안 궁리를 하더니 표정이 밝아졌다. "누님 제가 한 가지 방책이 있는데 그대로 하시겠소?" 악소채는 고개를 돌리며 호기심을 보였다. "무슨?" "먼저 제가 누님의 사부에게 찾아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하겠소." "안 되오. 사부는 본시 생소한 사람과 만나기를 꺼려하였어요. 더군다나 동생은 남자니....." 악소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스승은 장방을 제외하곤 무진암(無塵庵)에 남자를 들여 놓지 않아요. 옥소랑군이 스승의 총애를 받는다지만 그도 무진암에는 들어가지 못하였으니까요." "그건 더욱 좋군요. 나는 빙아에게 글을 전하라고 하여 스승을 밖에서 만나면 될 것이 아니겠 소?" "동생은 모든 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군요." 소영은 실망한 빛으로 다그쳐 물었다. "왜 내 말이 틀렸습니까?" "동생이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그 무진암에까지 위력이 미칠 것 같아요?" 소영은 손을 흔들었다. "누님, 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누님은 스승을 만나 자세한 사정 이야기를 못할 것이니 대신 제가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오. 절대 싸움을 한다는 말이 아니니 염려 마시오." 악소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은 비록 나를 제자라 부르지 않는다 하였지만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생각이 많이 변하였 어요. 그래서 이제는 스승 제자로 불리울 정도예요. 동생이 스승을 찾아가 말한다 하여도 그는 듣 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일을 그릇되게 만들지도 모르오."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그럼 누님의 뜻은?" "내가 만나야지." "만약 그가 누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악소채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스승은 나를 보살필 의무가 있으니 그 정도로 해서 손을 쓰지는 않을 것이오." "그래도 믿지 않는다면....." 백리빙도 덧붙여 물었다. "만약 그분이 언니를 용서하는 대가로 옥소랑군과 결합시키려 하면 어떡하지요?" 악소채는 당황하며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녀는 석실 주위를 다시 돌았다. 주위는 과히 넓지 않았지만 그녀가 맴돌며 생각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134. 추한 노파와 장미 소녀 잠시 침묵이 흘렀으나 악소채는 아무 말도 없었다. 백리빙이 입을 열었다. "언니는 아량이 넓고 모질지 못한 분이니...그분이 옥소랑군에게시집가라고 하면 그대로 따르겠 지요?" 악소채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다. "고마와요. 동생과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니...아가씨는 지혜롭고 총 명하니 동생을 많이 도와주겠군요." 백리빙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소영을 흘겨 보았다. "그러나 오빠는 내 말을 듣지 않는 걸요." 소영은 백리빙의 말에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악소채가 미간을 살짝 모으고 입을 열었다. "이 아가씨는 동생을 많이 도울 것이오. 이후부터는 아가씨의 의견도 존중하시오." 소영은 손을 흔들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누님은 빙아의 말을 곧이 듣지 마시오. 나는 언제나 그녀의 말대로 모든 것을 하고 있소." 백리빙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거짓말! 언제 그랬어요?" 악소채는 두 사람의 말에 정이 넘쳐 흐르는 것을 느끼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백리 동생은 비록 북해의 출신이지만 재질은 누구 못지 않아요. 동생은 아가씨를 잘 보살펴 서 로 돕고 지내기 바라오." 그녀는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가 보시오. 난 잠시 이곳에 남았다 후에 뒤따르겠으니." "누님은 무슨 고민이 있군요?" 악소채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니오. 그런 것은 조금도 염려 마시오. 나와 동생은 극히 명예를 중하게 여기지 않소? 동생과 지금까지 지낸 것을 들추어 본다면 모두가 거짓이라고 말할 것이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건강 하게 서로 만나고 있지 않소. 동생이 나와 헤어지기 싫어 하는 것도 짐작해요. 동생은 아직도 할 일이 태산 같아요. 심목풍을 물리치고 강호의 평정을 되찾는 일이오." 그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면서 다음 말을 물었다. "만약 동생이 이모를 죽인 인물을 알 수 있다면 어떡하겠소?" 소영은 두 손을 불끈 쥐며 자신있게 말했다. "운이모는 나에 대해 어머님과 같은 분이니 자연 목숨을 걸고 복수하겠소이다." "내 일도.....?"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죽어도 한이 없소." 악소채는 백리빙을 돌아보고 다시 물었다. "그럼 이 백리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자연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지요." 그러자 악소채는 대뜸 큰소리로 말했다. "됐어요. 이 석실 안에는 우리 세 사람뿐이 아니지만 동생이 모두 참견을 하겠다니 반갑군요. 그 러나 강호의 많은 무리들이 동생을 노리니 어찌 그들과 대적하리....."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번 냉정히 생각해 보시오. 지난 십여 년 동안 동생은 얼마나 많은 고비를 넘겼는가를...이것은 미신 같은 이야기지만 그동안 동생의 목숨을 살리고 일을 도운 것은 하늘의 뜻이라 믿어요."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의 뜻을 알겠소. 이제부턴 행동을 조심하여 기필코 강호의 대계를 구하겠소!" 악소채는 만족한 웃음을 띠었다. "동생이 그렇게 말하니 무엇보다도 기쁘군요. 자, 이제는 나가세요. 동생은 강호에 나타난 한 줄 기 등불이오. 동생이 나 때문에 세월을 헛되이 보냈으니 그 보충을 해야 되지 않겠소? 더군다나 동생이 얼마 동안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오." "누님은 왜 우리와 함께 떠나려 하지 않으시오?" 악소채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나는 조금 전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어요. 내 일은 나 혼자 처리하리라고...조금 전에 있었던 삼 절사태는 나에 대한 정의가 무척 깊으니 틀림없이 스승에게 말씀드렸을 것이오. 그런데 동생이 함께 가면 도리어 곤란을 받게 되오." "그럼 나도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소?" 악소채는 정색을 하였다. "동생! 동생은 아직도 어린애란 말이오? 어렸을 적에 나에게 하던 그대로니...이제는 어엿한 강호 의 영웅이 아니오. 나에게 말하는 것도 떳떳하게 명을 내리는 것처럼 해야 하오." "누님 앞에서는 영원히 동생이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동생으로 임할 것입니다." 악소채는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다그쳤다. "무슨 말인지 빨리 말해요." 소영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고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님께선 제게 한 마디 약속과 다음에 만날 날짜와 장소를 가르쳐 주시오. 그때까지 누님의 소 식이 없으면 저는 천하 영웅들을 데리고 무진암을 찾아가겠소." 악소채는 더욱 크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건...그건....." "누님께서 이 말에 응낙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누님을 따르겠소." 악소채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녀는 석실 안을 돌아 다니기도 하고 두 손을 꼬아 보기도 하였 다. 마음의 결정이 잘 안 되는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백리빙은 내심 갑갑한 마음이 들었지만 두 사람만의 일이라 끼어들지 못하였다.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악소채는 입을 열었다. "좋아요. 오늘부터 반 년 후에 태산 백운관에서 만나기로....." 소영은 즉시 손을 저었다. "안 됩니다. 반 년은 너무 깁니다." "그럼 석 달 뒤에....." 소영은 이것도 마땅치 않았다. "누님께서 스승을 만난다 해도 고작 삼 일이면 충분한데 어째서 그렇게 날짜를 멀리 늦추십니 까?" "나는 은사를 만나 한바탕 입씨름을 벌여야 될 것이오. 그러므로 어쩌면 십 일 아니면 반 년이 지날지도 모르오." "그렇다면 한 달로 합시다. 한 달 내에 누님의 소식이 없다면 난 무진암을....." 악소채는 석실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여기서 무진암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모르오." "바로 그것이 문제요. 이곳에서 무진암까지 가려면 적어도 열흘은 걸리오. 그런데 어찌 한 달의 기간으로.....?" 이번에는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악 언니, 우리 이렇게 해요. 헤어지는 날부터 세어서 한 달 후에 만나기로요. 만약 그때 언니의 소식이 없으면 무진암을 직접 치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기로요. 언니의 신상에 별다른 일만 없다 면 우린 그대로 물러나지요." 악소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안 되오....." 그녀의 말이 나오자 대뜸 소영이 앞으로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난 누님의 말씀이라면 불가능이라도 모두 들었소. 그러나 누님은 이 정도의 일에도 거절하시 니....." 다시 백리빙이 덧붙여 말했다. "만일 이번 약속을 응낙하지 않으신다면 우린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어요." 악소채는 더 어쩔 수 없어 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내일부터 쳐서 한 달 뒤에 만나요. 그러나 하루라도 일찍 와서는 안 돼 요."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기뻐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우린 하루도 어김없이 한 달 뒤에 무진암으로 가겠소." 백리빙이 물었다. "언니, 그 무진암이 어느 곳에 있는지요?" "광서(廣西) 해양산(海陽山) 중에 있으니 그리로 오시오." 소영과 백리빙은 함께 허리를 굽혀 가벼운 예를 올렸다. "누님의 무사를 빌겠습니다." "언니와 다시 만나는 날까지 안녕히 계셔요." 두 사람은 그 즉시 단혼애를 떠났다. 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기울려는 시간이었다. 소영은 걸음을 재촉하며 입을 열었다. "빙아, 나는 아직도 한 가지 일을 명백히 모르고 있다." 백리빙이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누님은 우리와 함께 나오지 않고 어째서 우리를 먼저 내보냈을까?" 백리빙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스것은 그대로의 사정이 있었나 보지요." 소영은 눈길을 돌려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알고 있느냐?" 백리빙은 무엇이 우스운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여자만이 알고 있는 사정일 것이에요."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 다음 말을 이었다. "자꾸 캐묻지 마세요. 그러면 제가 부끄러우니까요." "무엇이 부끄럽다는 것이냐?" 백리빙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였다. 지금 막 넘어가려는 석양의 놀을 받아서인지 그녀의 얼굴 은 홍조로 물들었다. 두 사람의 앞길은 조그만 오솔길이었다. "악 언니를 만나기 전에는 줄곧 미워했는데 오늘 직접 만나보고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고 느꼈어 요."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기에 내 벌써부터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 것은 너 자신이 믿지 않았으니 응당 부끄러워 해 야지." 백리빙은 얄밉게 눈을 흘겼다. "오빠는 이제 모든 이야기를 들었으니 기쁘지요?" "그래, 악누님을 한 번 도왔으니 마음이 기쁘다."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에요." "그럼 또다른 기쁨이 있단 말이냐?" 백리빙은 조금 토라진 표정으로 쌀쌀하게 말했다. "흥! 오빠는 정녕 악 언니의 이야기를 못들었단 말이에요?" 소영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누님이 무어라고 그랬나? 나는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백리빙은 걸음을 멈추고 원망스럽다는 듯 눈을 흘겼다. "오!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잊고 있다니....." 소영은 그녀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점잖게 말했다. "빙아, 그렇게 말꼬리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말고 어서 이야기해 보아라." 백리빙은 그가 정말로 모르는 표정을 보이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악 언니가 단혼 절벽에서 삼절사태에게 이야기한 것이 있잖아요. 가모의 유서에 오빠와 종신을 함께 하겠다고요. 그 이야기는 비록 삼절사태에게 한 것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오빠에게 들으라고 했어요. 그것만 보더라도 언니는 오빠의 아내가 되겠다는 증거가 아니겠어요?" 소영은 그제서야 생각나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생은 무척 나에 대하여 신경을 쓰나 보군. 난 한쪽 귀로 듣고 다른 한쪽으로 흘려 버린 이야기인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 분명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은 지난 옛날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야." 그러자 백리빙이 버럭 큰소리를 질렀다. "오빠는 한 여자의 정조가 얼마나 청명하고 중요한 것인지 아세요?" 소영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그의 표정은 매우 숙연하였다. 백리빙은 그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뜨끔하였다. 소영과 처음으로 만나고부터 지금까지 이런 숙 연한 표정을 보지는 못하였다. '오빠가 무척 화났나 보군.' 그녀는 가느다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빠, 제가 말을 잘못하였어요." "아니다. 너는 조금도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밝혀 둘 말이 있다." 백리빙은 고개를 돌리고 민망한 표정을 감추었다. "누님은 언제까지나 누님이야. 누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나는 조금도 다른 마음이 없 다. 앞으로 어느 누구라도 누님을 모독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는 대번에 웃는 얼굴로 바꾸었다. "빙아, 미안하다. 어서 길이나 가자. 날이 어둡기 전에 황량한 벌판을 지나야 되니." 백리빙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냥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달리는 모습은 마치 제비같이 빨랐다. 벌판을 지나자 백리빙이 물었다. "오빠,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에요?" "인연봉에서 심목풍과 싸운 뒤부터 오늘까지 강호의 사정을 모르겠구나. 오늘 저녁은 아무데서 나 지내고 내일 형양(衡陽)으로 들어가자." "중주이고가 떠난 뒤 필시 강호에도 오빠의 소문을 퍼뜨렸을 거예요. 형산에서 심목풍과 싸웠다 는 것을 말이에요. 우리의 추측이 틀림없다면 이곳을 벗어나는 대로 무림의 인물들과 접촉할 것 이에요. 그러나 그들이 적인지 아닌지를 모르면 어떻게 하지요?"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중주이고는 그렇게 입이 가벼운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조심성이 있기 때문에 결코 우리의 행적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백리빙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오빠는 우리의 행적이 들키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요? 하여튼 앞으로의 길을 조심 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소영은 그녀의 고집에 미소로 응했다. "과연 누님의 말대로 빙아는 기지가 총명하군.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의 행적을 감출 수 있을 까?" 백리빙도 빙그레 웃었다. "과분한 칭찬이에요. 우린 변장을 하는 거예요. 오빠는 강호의 형세를 살피려 하니 자연 본래 모 습을 숨겨야 되지 않겠어요?" 소영은 내심 그녀의 지혜에 감탄했다. '빙아는 예사 여자가 아니로구나.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세상을생각하는 것이 어른 못지 않으 니...내가 강호로 나서는데 이대로 나갈 수가 없지. 그녀의 말대로 변장을 하긴 하겠지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빙아, 변장을 한다면 어떤 것으로 할까?" 백리빙은 미리부터 모든 계획을 세워 놓은 것처럼 조금도 주저없이 대답했다. "오늘 저녁은 그대로 지나고 아침에 도인으로 변장하세요." "너는 설마 너도 도사로 변장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백리빙은 그의 말에 깔깔대고 웃었다. "호호....." "하하하....." 두 사람은 참으로 오랜 만에 유쾌히 웃었다. 백리빙이 말했다. "나는 도동으로 변장하지요. 오빠는 도사가 되고 저는 도동이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 어느 누구라도 알아내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우린 그렇게 변장할 옷이 없지 않는가?" 백리빙은 빙그레 웃음을 보냈다. "걱정 마세요. 산으로 들어갈 때 길가에 도관이 한 채 있는 것을 보았어요. 오늘 저녁은 그곳에 서 옷을 훔쳐요." "군자가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친단 말이냐?" "그럼 그들에게 은자를 조금 주어 사기로 해요." 그제서야 소영은 말없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다시 얼마 동안 달렸다. 이제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 점차 주위는 어둠으로 덮히기 시 작했다. 조그만 야산을 넘어 다시 오솔길로 나서자 백리빙이 "오빠는 금궁에 한 나무상자를 얻었으나 아직 한 번도 열지 않았으니 어찌 된 거예요? 아마 그 속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백리빙은 아직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소영은 마음 한 구석이 꺼림칙하여 그녀를 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어째서 그것을 묻느냐?" "나는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어서요. 요 며칠 동안 오빠는 무공을 열심히 수련하셨으니 그동 안 오빠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워 말을 꺼내지 못했어요." "그 상자 뚜껑에는 볼상이 그려져 있어 아무래도 불경이 들어 있는 듯했다." 백리빙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아니에요. 그 안에는 무공에 관한 아주 중요한 것이 들어 있을 거예요. 그 중주이고가 그것을 잘 보관해 줄는지 궁금하군요." "그들이 언제나 제일 좋아하는 것은 금은보화였다. 그들이 모은재물은 한 나라와 맞설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을 달리 먹고 나를 따르고 있으니 과히 걱정하지 말아 라." 이튿날, 형산으로 들어서는 좁은 길에 두 사람의 도인이 나타났다. 검은 수염을 가슴에까지 드리운 중년 도인과 그를 따르는 도동이었다. 중년도인은 청포를 입고 등에는 비스듬히 장검을 메고 있었다. 그들은 점잖은 걸음으로 산길을 가며 가끔 사방을 두리번거려 주위의 풍경을 살폈다. 두 사람은 십여 리쯤 걸어 네 갈래로 갈라진 길에 도달하였다. 청포도인이 먼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빙아, 빨리 길을 재촉해야 되겠다. 그래야만 형양에 도착할 수 있겠다." 도동이 역시 낮은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저기 사람들이 오네요." 소영이 눈길을 돌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과연 두 필의 말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말은 순식간에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앞에 선 말에는 이십칠팔 세의 청년이 경장 차림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무당파 의 전엽청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뒤의 말에는 수염이 온통 얼굴을 뒤덮은 생김새가 영준한 청년이었다. 소영은 그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종남이협 중의 둘째 등일뢰로군. 저들이 어째서 이곳에왔을까?" 그는 그들이 아침 일찍부터 다급히 길을 간다는 것이 무척 궁금했다. 그는 앞으로 달려오는 말을 가로막았다. 전엽청은 깜짝 놀라며 다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를 태운 준마는 앞발을 높이 들고 긴 울 음소리를 내었다. 말은 급히 멈추었지만 소영의 바로 반 장 앞까지 밀려와 있었다. 등일뢰도 그와 똑같이 말고삐를 잡아 당겼지만, 그의 말은 소영을 옆으로 지나쳐 이삼 장 지나 서야 겨우 멎었다. 전엽청도 그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인지 성질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는 말등에서 소영을 훑어보더니 그대로 거만하게 물었다. "도장께서 제 길을 막는 이유가 무엇이오?" 옛날 같았으면 그는 먼저 손을 쓰고 나서야 연유를 물었을 것이다. 소영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나는 소영이오. 전형께선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오?" 전엽청은 두 눈을 크게 뜨고 펄쩍 말에서 뛰어 내렸다. "예에? 당신이 소대협이란 말이오?" "그렇소. 전형은 벌써 내 음성을 잊었단 말이오?" 전엽청은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소대협은 어째서 이런 도인차림을 하고 있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요." 전엽청은 반가운 마음으로 소영의 손을 잡으려다 다시 멈칫하였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소대협이라고 믿지 못하겠소." 소영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하게 물었다. "전형은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오?" "바로 소형을 찾으려 하는 것이외다." 소영은 내심으로 필시 중대한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소영이오. 저 건너 쪽에 농가가 있으니 그곳에서 내 정체를 보여 드리리다." 전엽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하였다. "그것이 좋겠구려." 네 사람은 소영이 가리킨 농가로 찾아갔다. 그 농가에는 남자들이라곤 보이지 않고 노파와 젊은 여자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남자들은 밭으로 나갔으리라. 전엽청은 노파에게 몇 푼의 은자를 쥐어주고 구석의 조그만 방을 빌렸다. 전엽청은 나타낸 소영의 모습을 확인한 후 너무나 기뻐 와락 소영의 두 손을 잡았다. "반갑소. 소대협을 이렇게 쉽게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소영은 우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소?" "중주이고에게 들었지요. 그들은 소대협께서 산에 있을 것이라고만 했지 장소는 말해 주지 않았 소이다. 그래서 그냥 막연히 떠나 본 것이오. 사형께선 중주이고를 모셔다 달래도 보고 위협도 하 여 보았지만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소. 할 수 없이 사형께선 우리 두 사람을 보낸 것이오." 옆에서 등일뢰가 덧붙였다. "그러나 형산은 수백 리로 뻗어나가 있으며 수없이 많은 봉우리가 있소. 그곳에서 무작정 소대 협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 생각했소. 이렇게 중도에서 만난 것은 정말 하늘의 도움이 올시다." 소영은 다시 도인으로 변장하고는 다음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전형, 어째서 나를 찾소?" "정세가 긴박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소대협을 찾아 나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소영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지금 강호의 정세는 어떠하며 도장께선 어디에 계십니까?" "소대협께서 무이산으로 들어간 후부터 정세는 크게 변하였소이다. 돌연 백화산장의 세력이 넓 게 불어났으며 공공연히 무림동도들과 충돌을 하였소. 그러나 이제는 각대 문파와 각 방주들이 전과 같이 비겁한 생각을 버리기 시작했소. 그들도 이대로 방관만 하다간 모두가 심목풍에게 화 를 당한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신이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소대협께서 백화산장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몇 번 그들을 물리친 소문이 강호에 떠돌 아 용기를 얻은 것이외다." 그는 돌연 음성을 낮추었다. "그리고 또 하나 반가운 소식은 소림파도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는 것이오. 그들은 이십여 고수 들을 암암리에 백화산장으로 보내어 그곳의 염탐을 꾀하고 있소. 아직은 때가 안 되어 잠잠하지 만 들고 일어날 때만 되면 온 강호가 백화산장을 칠 것입니다."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 없소. 강호의 여러 문파 중에 어느 하나라도 심목풍의 첩자가 없는 곳은 드무오. 어떻게 은밀하게 일하든 간에 모두 심목풍의 귀에 들어가고 마니까요." "지금 우리 사형과 손노선배님은 강호의 여러 고수들을 모았소. 소대협께서 형산으로 갔다는 말 을 듣고 행동을 개시하여 호남으로 달려와 지금 악록산에 대기하고 있소." 소영은 입술을 깨물며 잠시 생각을 굴린 다음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좋소. 우선 두 분을 만나 뵙고 강호의 정세를 논의합시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낮은 소리로 다시 일렀다. "호남성에도 백화산장의 인물들이 활동하고 있을 것이외다." 전엽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와 조금 전에 우리는 두 번이나 그들과 싸웠소이다. 그러나 그들은 뒷전으로 물러나 자세 한 것은 모르오. 그러나 우리 사형을 만나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대협께서 모르는 일도 있을 것이외다." "무슨 일인지? 나쁘지 않다면 전형이 대강 이야기해 주시겠소?" "강호에 떠도는 소문으론 사해군주가 심목풍과 결탁했다는 것이오. 그러나 그 소문을 증명할 수 있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소." 소영은 무엇을 느꼈는지 뜻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는지도 모르오. 같은 사람끼리 모인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소이다. 백화산장과 사해군주는 서로 이해관계가 있으니 그럴 가능성이....."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등일뢰가 참견했다. "손노선배께서는 그들이 백화산장과 결탁한 것을 무척 우려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그분은 항시 냉정하고, 무슨 일에도 이성을 잃지 않았소.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매일 수심에 쌓여 있 소이다." 소영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근심에 싸였다. "백화산장과 사해군주의 세력은 매우 거대하오. 그 두 개의 사악한 세력이 한 데 결탁한다면...그 러나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점도 있소이다." "무슨 말이오?" "이제 무림에서 적과 아의 구별이 뚜렷하게 되었소. 그러니 앞으로 한 번 결전을 벌인 후에는 적의 수와 힘을 파악할 수 있소이다. 그런 연후엔 힘을 집중하여 적을 뿌리채 뽑아 버릴 수 있을 것이오." 백리빙이 돌연 입을 열었다. "우리 빨리 갑시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까맣게 잊고 여자의 음성으로 소리쳤다. 전엽청은 깜짝 놀라 무어라 입을 열려다 그만 두었다. 이것을 본 소영이 빙그레 미소를 띠고 말했다.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두 분께 소개시킬 사람이 있소이다." 그리고 백리빙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분은 백리낭자요." 전엽청과 등일뢰가 가볍게 예를 올렸다. 소영은 다시 두 사람을 백리빙에게 소개시켰다. 백리빙의 오른쪽 옆에 앉아 있는 전엽청을 가리키며 "이분은 무당파에 있는 전대협이다." 이어 왼쪽의 등일뢰를 가리켰다. "이분은 종남이협 중의 등일뢰라는 분이시고." 백리빙은 정중한 예로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두 분을 처음 뵙겠어요." 소영은 그들이 묻지 않는 한 백리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하였다. 다행히 두 사람도 그녀에 대하여 더 이상 묻지 않아 내심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는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럼 두 분께선 먼저 가십시오. 저와 백리낭자는 뒤따라 갈 테니, 두 분께서 이곳으로 올때 적 을 만났다니 그들이 누구인가 알아보고 싶군요." "좋소이다." 전엽청과 등일뢰는 곧 밖으로 나가 쏜살같이 오던 길을 되돌아 갔다. 그들의 말은 올 때보다 더 살리 달리는 것 같았다. 소영과 백리빙은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다음에야 길을 재촉했다. 황토길을 걸어 반나절이 지나니 눈앞에 조그만 부락이 나타났다. 작은 부락이라 집이라곤 전부 백여 호뿐이었다. 그러나 부락의 위치가 길가에 있어 길 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술집과 여관 이 몇 개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중에서 제일 크고 깨끗해 보이는 객점을 찾아 들었다. 그곳에는 전엽청과 등일뢰의 모습도 보였다. 객점은 비교적 큰 편이어서 아래위 층으로 손님을 모실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소영은 일층 모퉁이로 자리를 잡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전엽청은 이층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고개를 돌려 소영이 앉 아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객점은 많은 손님으로 들끓었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장사꾼, 팔을 걷어붙인 노동자 그리고 비교적 화려한 옷을 입은 부농의 주 인 같은 사람 등..... 소영은 객점의 구석구석가지 훑어보았지만 무인이라곤 전엽청과 등일뢰 그리고 자신뿐이었다. '무위도장이 호남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백화산장에서 모를 리 없는데.....'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돌연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객점 앞에서 멎었다. 소영은 먼저 눈 길을 돌려 전엽청을 보았다. 전엽청은 무엇을 느꼈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문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객점으로 들어선 사람은 예상 외로 두 명뿐이었다. 그것도 하나는 얼굴에 온통 주름살 투성이인 노파였고 다른 하나는 차림새가 추하였으나 얼굴은 정반대인 소녀였다. 조그만 소녀는 매우 깜찍하게 생겼으며 양쪽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노파는 사방을 둘러 보고는 이층으로 올라가 전엽청과 인접한 곳에 자리잡았다. 노파와 소녀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노파는 아주 추하였고 소녀는 장미꽃보다 예뻤다. 두 사람이 대조적이니까 자연 주위의 술꾼들에게 시선을 받았다. 그녀가 자리를 잡고 앉았으나 객점이 워낙 들끊어 종업원들의 손이 모자라 주문을 청하지 못했 다. 얼마를 기다려도 그들이 오지 않자 노파는 탁상을 세차게 두들겼다. "탕! 탕!"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 노파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이 객점에는 산 사람이 없냐?" 그제서야 객점의 종업원이 급히 달려왔다. "노부인....." 노파는 앙칼지게 외쳤다. "왜? 내가 음식값을 못 낼까 봐 그러느냐?" 그리고는 품속에서 한 덩이 황금을 꺼내어 탁상에 놓았다. "이 정도면 나와 소녀가 먹을 음식값이 되겠지?" 그 황금은 크진 않았으나 열량은 충분히 되었다. '오! 이것만 있으면 이곳에서 반 달 동안은 먹고 잠잘 수 있습니다.' 사환은 내심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겉으로는 공손히 사양하였다. "노부인, 화내지 마십시오. 손님을 미처 몰라 뵈옵고...헤헤헤 ....." 노파는 약간 마음이 가라앉은 듯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빨리 음식을 갖다 주게. 그리고 술도 두 병....." 주위의 손님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 노파가 술을 두 병이나.....' 그러나 이보다 더 놀란 일이 생겼다. 노파는 주위를 돌아 보더니 "오늘 이 할망구의 기분이 매우 좋아 이곳에 들린 손님들의 음식값을 내가 내겠다." 하고, 점원에게 몇 개의 황금을 꺼내 주는 것이 아닌가? 점원은 믿지 못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손님께선 농담도 잘하십니다." "농담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야." "아닙니다. 손님께서 설령 돈이 많으시다 하더라도 이렇게 쓰셔서는 안 됩니다." 노파는 점원을 빤히 올려다 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많은 돈이 있으며 또한 이 돈은 깨끗한 것이다. 절대 피비린내가 안 나는 돈이란 말이야." 135. 뻔뻔스런 약탈자 객점 종업원은 낮은 소리로 노파를 달래려고 했다. 그러나 노파가 큰소리로 호통치는 바람에 난 처한 표정이 되었다. "돈은 할머니의 것이고 어떻게 쓰든 그것도 할머니에게 달렸습니다. 저는 다만 할머니의 분부에 따를 뿐이니 제발 큰소리는 마십시오." 노파는 큰소리로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곳 손님이 몇 명이나 되나? 그 사람들의 식대를 모두 내가 치를 테니 계산해 봐라." 종업원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노파를 훑어보며 말했다. "저는 이 직업에 종사한 지 거의 이십 년이나 되었습니다. 친구들끼리 모여 한 사람이 식비를 지불하는 것은 보았지만, 할머니처럼 처음 보는 사람들의 식비까지 계산하겠다는 분은 이번이 처 음입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지?"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는지 제가 처리하기 곤란하니...잠깐 기다리십시오. 제가 물어보고 오겠습 니다." 종업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술에 곤죽이 되도록 취해 안하무인격으로 떠드는 노파와는 달리 그녀의 옆에 있는 소녀는 씁쓸 한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미 이런 일에는 만성이 된 듯한 태도였다. 백리빙이 노파를 힐끔거리며 소영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오빠, 저 두 사람의 행동은 퍽 대조적이고 괴상하군요. 저 노파가 무엇 때문에 손님들의 식비를 계산하겠다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노파가 사 주는 음식을 먹을 수는 없어요." 소영은 말없이 눈으로만 대답했다. 전엽청과 등일로, 두 사람도 노파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들도 노파의 행동을 수상쩍게 생각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종업원이 다시 나타나자.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노파가 성급하게 물었다. "그래 주인에게 물어보니 무어라고 대답하든가?" "주인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어서 말을 계속해!" "만일 할머니가 꼭 모든 사람들의 식대를 지불하신다면 그대로 받아 들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런 데, 한 가지 물어볼....." "뭐야?" 노파는 성질이 매우 급했다. 종업원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의 신분은 가지각색인데...할머니는 신분의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지불하실 것인지. 또한 손님들이 그것을 받아 들일는지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좋아, 도대체 남의 호의를 받지 않겠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한번 알아봐." 종업원은 실내를 쭉 훑어보더니 큰소리로 물었다. "손님 여러분! 여기 계신 노부인께서 여러분의 식대를 계산해 주시겠다고 하는데, 저의 객점에서 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좋을지 난처합니다. 여러분들 중 노부인의 제의에 반대하는 분이 계신지 요?" 그러자 하나의 굵은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나는 분명치 않은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 뒤이어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가 먹은 식대를 치를 돈은 있다. 석연찮은 호의는 거절하겠다." 소영은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처음 말한 사람은 키가 작고 몸집이 똥똥한 사나이였다. 짧은 두루마기에 긴 바지를 입었으며 흰 대님으로 바짓가랑이를 동였다. 소영은 혼자 중얼거렸다. "사천 지방의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보아 강호에 나선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인 모양이구나." 두 번째 말한 사나이는 키가 크고 간편한 옷차림에 단검을 등에 지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 세쯤 되었고 무림의 인물 같았다. 두 사람의 말이 끝나고 다음에 입을 연 것은 백리빙이었다. "나는 이미 세속을 떠난 몸이라 평소부터 조식(粗食)만 해 왔기 때문에 비용도 얼마 들지 않으 니 다른 사람의 계산을 사양하겠소." 백리빙의 말이 떨어지자 노파는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곁에 있는 소녀에게 말했다. "용아(蓉兒)야, 네가 저분들한테 가서 네 할머니의 호의를 왜 사양하겠다는 것인지 알아 보고 오 너라." 노파의 말은 얼른 들으면 정신병자의 헛소리와도 같았다. 많은 사람들은 노파를 바라보며 정신 병자가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용아라고 불리운 소녀는 공손히 대답하고 일어서더니 사천 사투리를 쓴 사람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그 사나이와 몇 마디 낮은 소리로 주고받더니 다시 키 큰 사나이에게 다가섰다. 그 사나이와도 몇 마디 나누더니 노파에게로 걸어가 맑은 음성으로 말했다. "할머니, 저기 두 분은 면목을 봐서 허락한다고 했어요." 노파가 중얼거렸다. "역시 내가 늙었구나." 노파는 소영과 백리빙에게 시선을 던지며 소녀에게 물었다. "왜 두 분 도사에게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지?" 용아가 대답했다. "할머니, 그분들은 속세를 떠난 사람들이니 싫다면 놔 두세요." "넌 무슨 소리를 하니? 한쪽은 후대하면서 한쪽은 박대할 수 있겠니? 다시 그분들에게 가서 얘 기해 봐라." 용아는 마지 못하는 듯 소영과 백리빙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애교가 철철 넘치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실례하겠어요." 용아의 교태어린 얼굴을 본 백리빙은 질투심이 생겼지만 그것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으며 퉁명스 러운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요?" "소녀의 이름은 용아라고 해요." "벌써 알고 있소." "저의 할머니는 천경의 부호이십니다. 손녀를 끔찍이 사랑하시는데 그만 풍전증(일종의 정신 착 란증)에 걸렸어요." 백리빙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소?" 용아는 백리빙의 너무도 냉정한 태도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지워 버리며 말을 이었다. "심한 증세는 아니기 때문에 때때로 발작하다가 곧 나아지세요." 소영이 말했다. "미안하군요. 우리는 의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당신의 조모님의 병을 봐 드릴 수 없 소이다." "아니...그게 아녜요. 소녀가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저의 할머니는 일 년에 한두 번 증세가 발작 하시는데...평상시에는 매우 온순하세요. 그러나 일단 증세가 발작하시면 마음먹은 대로 하셔야 직 성이 풀리십니다. 그러니 여기 계신 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시려는 호의를 두 분께서는 사양하지 말아 주세요." 그 말은 애원조였다. 백리빙은 가볍게 미소를 띠며 손을 내저었다. "호의를 일부러 거절하려는 것은 아니오. 허나 우린 지금 아무것도 먹을 생각이 없으며 곧 이곳 을 떠날 몸이라고 전해 주오." "그렇지만....." "글쎄, 사양하겠다니까....." 백리빙은 용아의 말을 막으며 손으로 밀어냈다. 용아는 백리빙을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노파의 앞으로 갔다. "용아야, 두 분께서는 허락하셨니?" 노파의 물음에 용아는 고개를 저었다. "속세를 떠난 사람들은 고집이 세어 설복하기 힘들어요." 노파의 안색이 차갑게 변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거절했단 말이지?" "네." "네가 얘기를 잘못 드려서 그런 것이 아니냐?" "저는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분들을 설득시키려고 했어요. 그러나 아무리 애원해도 들어 주지 않 아요." 노파는 코웃음을 치며 소영과 백리빙을 노려보더니 "정 그렇다면 놔 둬라." 하며 품속을 뒤졌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금덩어리 하나를 꺼내더니 그것을 종업원에게 주며 말 했다. "이 금이면 손님들의 식대가 충분하지?" 종업원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황금을 받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계산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럼 어서 저분들에게 음식과 술을 올려라." "네." 종업원은 탁자로 돌아 다니며 음식을 주문 받고 술을 나르며 바쁘게 움직였다. 노파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저기 두 도사를 빼 놓고는 모두 식대를 지불했소." 큰소리로 한마디 하더니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소영은 그녀의 하는 짓이 하도 괴상해 소리를 죽여 웃으며 백리빙에게 가만히 말했다. "이 세상엔 별일도 많고 여러 가지 괴상망측한 병도 많지만...돈을 꼭 써야 하는 병은 듣기도 처 음이군." "오빤 저 노파가 진짜로 인심을 쓰는 줄 알아요?" "글쎄...하는 행동이 이상하긴 하지만 돈을 이미 지불했으니 인심을 쓴 것만은 틀림없지 않은가?" "흥, 오빤 너무 단순해. 저 계집애의 나이가 불과 열너덧 살밖에 안 되었을 텐데 숙성한 여티를 물씬 풍기는 것을 보면, 올바른 교육을 받은 계집애는 아녜요. 우린 저들이 사 주는 음식에 손을 대서는 안 돼요." 소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백리빙이 용아를 쓸데 없이 질투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노파와 용아는 심히 못마땅한 시선으로 소영과 백리빙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적의가 있음을 본 소영은 백리빙에게 속삭였다. "저 노파와 소녀가 우리를 유난히 노려보고 있구나. 우리는 저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조심 해야겠다." 백리빙이 차갑게 말했다. "저 아니꼬운 계집애가 수상한 행동이라도 하려 든다면 나는 아예 죽여 버리고 말겠어요." 칼날을 품은 듯한 백리빙의 말에 소영은 피식 웃었다. '빙아는 평소엔 상당히 온순한데 질투심은 굉장히 강하구나. 악소채와는 대조적인데.....' 이때였다. 갑자기 한쪽 귀퉁이에서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아이구, 배야...야! 이 집 술은 깨끗하지가 못하구나!" 종업원 하나가 급히 그쪽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아마 손님께서는 술을 조금만 잡수셔도 탈이 나는 모양이지요?" 허리에 감색 허리띠를 맨 중년의 사나이는 차림새로 보아서는 마부 같았다. 그는 오만상을 잔뜩 찡그리고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종업원을 금방 때려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무공을 닦지 않은 사람 같은데...공연히 이 집과 시비를 걸어야 이로울 것이 없지.'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곳 저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 던 사람들이 모두 배를 움켜쥔 채 비명과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 갑작스런 변화를 본 소영은 '이상하다.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다니...이 집에서 썩은 음식을 내놓았거나 음식에 약물을 타지도 않았을 텐데 .....' 하고 생각하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때 사천 사람과 단검을 멘 장정도 배를 움켜쥐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 참고 이를 뿌드득 갈며 "으으으....." 하고 신음을 뱉았다. 그들의 얼굴을 땀이 줄줄 흐르고 시뻘겋게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빙아, 차를 마시지 마라!" 소영은 백리빙에게 낮은 소리로 주의를 주고는 전엽청과 등일뢰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들 역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보아 무서운 통증을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객점의 종업원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주인도 안에서 뛰어나와 이 광경을 보며 입을 딱 벌리고만 있었다. 소영은 백리빙을 돌아보며 물었다. "빙아, 몸에 이상이 없니?" "아무런 이상도 없어요." 이때 노파가 질그릇이 깨지는 듯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왜들 그래요? 이 늙은이가 사 드리는 음식은 모두 이 집에서는 최고급의 음식인데....." 복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도 통증이 심해 말할 기운도 없는 모양이었다. 신음도 차츰 속으로 자지러지며 이를 북북 갈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배를 움켜쥔 채 땅바닥에서 떼굴떼굴 구르기도 했고, 탁자를 손톱으로 긁으며 빙빙 도는 사람도 있었다. '저 노파의 농간이 분명하다.' 소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성큼성큼 노파의 앞으로 걸어가며 큰소리로 불렀다. "노부인!" 노파는 소영을 바라보더니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사께서도 이 늙은이가 사 주는 음식을 먹기로 생각을 돌리셨나요?" 소영은 불끈 치미는 화를 누르며 말했다. "노부인이 무슨 수를 썼는지 나는 목격하지 못했소. 하지만 객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일시에 중독시킬 수 있는 그 수법에 빈도가 존경을 금치 못하겠군요?" 노파는 히히...기분 나쁘게 웃더니 쉰 듯한 목소리를 쭈글쭈글한 입술 사이로 밀어냈다. "이 늙은이는 이유없이 독소를 뿌리진 않소." "노부인, 당신은 너무도 뻔뻔스럽군요. 이 객점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노부인과 어떤 원한관계 가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데 무고한 사람들에게 독소를 뿌린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보시 오." "흐흐, 마침 사람들이 조용해져서 우리들이 얘기하기가 좋아졌군." 노파는 말을 마치자 다시 낄낄낄 웃어댔다. 객점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실신상태가 된 채 신음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등일뢰와 전엽청 두 사람은 아직도 실신상태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고통에 겨워 어쩔 줄을 모 르고 있었다. 노파가 한바탕 웃어젖히더니 중얼거렸다. "흐흐흐, 공짜를 좋아하는 무리들은 마땅히 뜨거운 맛을 좀 봐야지." 소영이 노파를 쏘아보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노파가 먼저 말했다. "도사처럼 남의 것을 조금도 탐내지 않는 사람들은 이토록 아무런 고통도 당하지 않게 되잖아 요?" 소영은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만약 빙아가 용아라는 소녀에게 질투심을 품지 않았다면 나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 할망구가 단순한 풍전증의 환자로 알고 음식물을 받아 먹었겠구나. 이런 때에는 빙아의 질투심이 오히려 이로운데.....' 그는 생각을 굴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노부인, 무고한 사람들에게 독소를 뿌린 이유가 무엇이오?" "이유? 흥, 이유고 무엇이고, 저 얼간이들은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이오. 그들이 돈만 내놓는다면 당장 고통이 사라질 텐데....." 노파는 갑자기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사는 이 일에 대해 너무 많이 물었다고 생각지 않소?" 소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노파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 사람들에게서 돈을 걷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이런 방법으로 돈벌이를 하겠다는 것은 처음보는 괴상한 행동이군." 그러자 노파의 곁에 있던 용아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말했다. "호호 처음 보신다니 마침 잘되었네요. 오늘 마음껏 듣고 보세요." 소영은 용아를 한 대 후려갈겨 주고 싶도록 얄미웠으나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틈을 이용해서 재물을 강탈하려는 수작이군요." 노파가 화를 벌컥 냈다. "도사! 말 좀 조심하시오. 나는 절대로 강탈하진 않소. 그들이 스스로 돈을 내놓는 것을 받을 뿐 이지." 이어서 용아가 말했다. "저 사람들은 조금만 지나면 통증이 차츰 사라질 거예요. 그때는 말과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잠깐 동안의 일이에요. 다시 통증이 발작하기 시작하면 그때에는 처음보다 수십 배는 더 괴롭고 자칫하다가는 목숨도 위태롭지요. 그러니....." "....." "저 사람들이 생명을 아까워한다면 스스로 돈을 내놓을 것이고 생명이 아깝지 않다면 한푼의 돈 이라도 더 움켜쥐고 죽으라죠 뭐." 이 음성은 매우 컸다. 일부러 여러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는 용아의 얼굴엔 장난기 같 은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 엉뚱하고도 악독한 사람들이구나.' 소영은 두 사람을 당장 처지하고 싶은 것을 누르며 그들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노파가 일어서며 용아에게 말했다. "용아야, 돈자루 꺼내 와라. 이제는 우리가 돈을 걷을 차례다." "네." 용아는 밖으로 나가더니 베로 만든 자루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가 자루를 식탁 위에 올려 놓자 노파는 히히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용아, 돈을 걷자." 그녀는 느린 걸음으로 전엽청과 등일뢰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제법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두 분은 무공이 매우 높아 신음도 내지 않고 참는데, 혹시 해독약을 사시겠어요?" 전엽청과 등일뢰는 운기를 집중해서 참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노파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의 무공이 고강하니 약값도 좀 비싸게 받아야겠는데....." 그녀는 등일뢰를 주시하며 말했다. "당신에게는 은 백 냥에 약을 주었는데 비싸진 않지요?" 등일뢰는 잡아 먹을 듯한 시선으로 노파를 노려보며 아무 말도 없었다. 노파는 전엽청에게 시선을 옮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처럼 준수하고 씩씩한 기상의 젊은이가 벌써 죽는다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니 은 이백 냥이면 오히려 싼 편이지요?" 전엽청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악물은 이빨 사이로 거칠은 숨만 내쉴 뿐이었다. "두 분이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으니 이 늙은이가 부른 가격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어요." 노파는 용아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용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 용아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얼마 안 남았어요." 노파가 다시 말했다. "이 늙은이가 말을 너무 많이 했구나. 생긴 모습도 추하니까 사람들이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 양이니 용아, 네가 여러분에게 설명 좀 해라. 우리가 어찌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수수방관할 수 있겠니?" 노파의 말을 들은 용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애교가 담뿍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 어르신네들 잘 들으세요. 잠시 후 여러분들의 통증은 멈출 거예요. 그때는 말을 할 수도 있고 몸을 움직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완전히 독성이 사라진 것은 아녜요. 잠시 동안 멈추는 것 뿐이에요. 이 잠시 동안이 지나면 여러분은 더 무서운 통증에 시달리게 되는데 시간이 경과하면 생명까지 잃어요." 그녀는 말을 중단하고 노파를 돌아보았다.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라는 눈짓을 하자 다 시 말을 이었다. "소녀의 할머니는 여러분들을 구할 수 있는 약을 가지고 계세요. 지금부터 제 할머니에게 현금 을 내고 약을 사 가세요. 만일 고통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약을 사지 않으 셔도 좋아요.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다시 통증이 발작하기 시작하면 십중팔구는 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거예요." 소영은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행동이 우습기도 했다. '반죽이 잘 맞고 우스꽝스런 여자들이군. 그런데 이 노파가 독소를 뿌린 것은 분명한데 어느 틈 에 어떻게 독소를 뿌렸을까? 그 수법을 알아내기 전에는 우선 관전이나 하자.' 이런 생각을 하며 노파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데 뚱뚱한 남자 하나가 배를 움켜쥔 채 노파의 앞으로 어기적거리며 다가왔다. "약 한 알만 주시오." 노파는 그 사나이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히죽 웃었다. "당신은 보아하니 돈이 많은 것 같으니 은 백 냥만 내시오." "나는 그렇게 많은 돈을 지니고 있지 않소." "흥! 그렇다고 약값을 깍을 수는 없고...돈이 될 만한 물건이라도 내놓아요." 뚱뚱보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품속을 뒤져 물건들을 식탁 위에 쏟아 놓았다. 옥단추, 금 조각 등을 수북하게 쌓아 놓고 "이것뿐이오." 하며 노파를 쳐다보았다. 노파는 옷깃 속에서 작은 나무상자 하나를 꺼내더니 그 속에서 하얀 환약 한 알을 꺼내 사나이 에게 주었다. 뚱뚱보 사나이는 그것을 받아 삼키더니 금방 얼굴을 활짝 폈다. 약효가 무척 빠른 모양이었다. "제기랄...간밤에 꿈자리가 사납더니 별꼴을 다 당하는군." 사나이는 투덜거리며 횡하니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어기적거리며 일어나더니 노파에게 다가갔다. "나도 약을 주시오." "당신은 오십 냥이오." "나는?" "당신은 백 냥....." 약값도 가지각색이었다. 사람들은 노파가 부르는 대로 돈과 패물을 내놓고 약을 받아 먹었다. 나 가면서 한 마디씩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노파에게 대들어 싸우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약을 사 먹고 나가자 객점 안에는 소영, 백리빙, 등일뢰, 전엽청과 사천 사람 그리고 뚱뚱 하고 키가 홀쭉한 강호 사람만이 남았다. 종업원과 객점 주인은 이 신기한 장사를 한쪽에 웅크리고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자루에 돈과 패물이 가득찬 것을 본 소영은 노파에게 한 마디 던졌다. "노부인, 돈이 그만큼 걷혔으면 충분합니까?" 노파는 소영을 쳐다보며 히죽 웃더니 "만일 도사가 음식을 먹었다면 당신의 약값이 가장 비쌌을 텐데...황금으로 백 냥도 결코 비싸지 않았을 텐데, 아깝게도 내가 사 주는 음식을 마다했으니....." 하며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사천 사람이 죽을 상을 해가지고 노파 앞으로 "내 약값은 얼마요?" "당신? 많지 않소. 오십 냥만 내시구려." 사천 사람은 오십 냥의 은전을 내주고 약을 받아 삼켰다. 이때 통증이 다시 발작하기 시작했는지 강호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숨찬 소리로 말했다. "야...약을 주시오. 나, 나는 얼마요?" "백 냥." 그 사람은 아무 소리도 않고 순순히 백 냥을 내놓았다. 약을 삼키더니 즉시 통증이 멎는지 안도 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쫓기듯 밖으로 사라졌다. 노파가 용아에게 말했다. "용아, 돈을 싸 두어라." 그녀는 용아가 돈자루를 묶는 것을 지켜보더니, 소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도사는 구경하시는 데 상당히 흥미를 느끼시는 모양이구려." 소영은 차갑게 대꾸했다. "구경치고는 해괴했소. 노부인의 행실은 천하에 둘도 없이 악독하군요. 하지만 돈과 생명을 한꺼 번에 앗아가는 강도보다는 약간 나은 편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 "도사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 노파는 소영을 한번 흘겨 보더니 등일뢰와 전엽청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내공으로 이렇게 긴 시간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은 칭찬할 만하군요. 그러나 나는 시간이 없소. 항상 바뿐 몸이라 곧 떠나야 할 텐데...약은 사지 않으시려우?" 전엽청과 등일뢰는 다시 발작한 통증을 참느라고 이를 북북 갈며 노파를 노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두었다가는 두 사람이 죽을는지도 모르겠구나. 아직 노파가 독소를 뿌린 수법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시간이 없으니 .....' 소영은 노파와 전엽청의 사이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노부인, 내가 대신 두 분의 약값을 치르면 어떻소?" 이때 용아는 이미 돈자루를 보자기에 싸 놓고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중주이고가 있었으면 이 두 여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소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노파의 대답을 기다렸다. 노파는 소영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장사를 하는데 꼭 지키는 원칙이 있소." "무슨 원칙이오?" "남이 대신 지불하는 데는 꼭 십 배를 받겠다는...도사가 이 사람들의 약값을 대신 지불하려면 삼백 냥의 십 배인 삼천 냥을 내야 되지요. 금으로 환산하면 삼백 냥...금 돈 삼백 냥이든 은돈 삼 천 냥이든 아무래도 좋아요." "삼천 냥이라...물론 노부인이 부른 값은 터무니없지만 두 분의 몸값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싸군 요." 소영의 말에 노파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그래 이 자리에서 내시겠단 말이오?" "물론 내야지요. 허나 지금 내 수중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소." "그럴 테지요. 도사이니까...그렇다면 값진 보물이라도 대신 내 놓아요." 소영은 품속을 뒤지다가 단검 하나를 꺼냈다. "이 단검은 얼마 주겠소?" 노파는 단검을 훑어보더니 눈을 빛냈다. "흠, 값진 물건이군. 얼마 받겠소?" 소영은 노파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서며 말했다. "노부인이 우선 이 단검의 값어치를 확인해 보고 내가 값을 정할 테니 깎든지 말든지 하시지요." 노파는 단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명검인 줄은 알지만....." "그렇소. 이것은 백 가지의 독을 알아내고 무쇠도 베일 수 있는 명검이오. 명검에는 일정한 값이 없으니, 나는 노부인에게 만 냥의 값을 요구하겠소. 결코 비싸지 않지요?" 노파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결코 비싸진 않군. 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요구할 때가 아니오." "때가 아니라니....." 노파를 대신해서 곁에 있던 용아가 대답했다. "평상시 같으면 그 값은 결코 비싸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할 때니까 값 을 우리가 임의로 정할 수 있어요." 소영은 용아의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낭자께서 어디 값을 정해 보시오." 용아는 노파를 돌아보며 "할머니, 이천구백 냥이면 어때요?" 했다. 노파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천구백 냥으로 정하자." 그녀는 소영에게 말했다. "만일 도사께서 백 냥을 더 내시겠다면 당장 약을 드리지요." 이때 소영은 머릿속으로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노파와 용아가 방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좋은 기회다 생각하고 "두 분은 좀 지나치군요." 하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즉시 두 손을 휘둘렀다. 그의 오른손에 쥔 단검을 곧장 노파를 찔러가며 왼손에서는 맹렬한 장풍이 용아를 향해 날아갔 다. "앗!" 노파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급히 뒤로 오 척이나 물러섰다. 소영의 단검이 그녀의 몸에 닿기도 전에 강한 검세가 날카롭게 가슴으로 파고들어 미처 막아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강적이구나.' 노파는 놀라며 뒤로 물러섰으나, 경험이 없는 용아는 피할 생각도 않고 쌍장을 앞으로 뻗어 소 영의 장풍을 막았다. 두 사람의 장풍이 부딪쳤다. 펑! 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으으....." 하고 용아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전신이 파열되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뒤로 비 틀비틀 물러서다가 탁자에 부딪쳤다. 소영은 두 사람을 동시에 격퇴시킨 뒤 재빨리 손을 뻗쳐 탁자 위에 있는 약상자를 집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돈자루를 들어 문 밖으로 힘껏 던져 버렸다. 돈자루를 던진 그는 약상자를 백리빙에게 던져 주었다. "빨리 약을 두 분에게 먹여라." 소리치며 몸을 훌쩍 날려 용아의 앞으로 달려갔다. 소영이 두 여자를 물리치며 약상자를 집어 백리빙에게 넘겨 주고, 돈자루를 문 밖으로 던짐과 동시에 용아에게 몸을 날린 동작은 매우 빨라 거의 눈 깜짝할 순간에 이뤄졌다. '무서운 놈이다. 동작이 저토록 빠를 줄이야.' 노파는 흠칫하며 소영에게 덤벼들려고 했으나 돈자루가 문 밖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것을 집으려고 뛰어 나갔다. 소영이 돈자루를 밖으로 던진 것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었다. 노파의 정신을 흐트리려는 작 전이 그대로 주효한 것이다. 소영은 용아 앞으로 달려들며 재빨리 오른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때리며 왼손으로는 혈도를 짚었 다. 용아는 소영이 단검으로 가슴을 찌르려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몸을 돌려 피했다. 그러나 그녀는 소영의 오른손만 주의했지 왼손이 혈도를 짚어 오는 것은 미쳐 주의하지 못했다. 소영은 가벼운 동작으로 용아의 몇 군데 혈도를 찍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때 이미 백리빙은 전엽청과 등일뢰에게 약을 나눠 주고 있었다. 돈자루를 들고 노파가 들어왔을 때는 이미 용아는 소영의 손아귀에 덜미가 잡혀 있었다. 그는 들어서는 노파를 보며 말했다. "노부인, 만일 손녀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거든 함부로 망동하지 말고 있으시오." 소영은 용아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댔다. 이것을 본 노파는 급히 돈자루를 놓으며 발악하듯 외 쳤다. "용아를 놓아 줘라. 그 대신 이 돈을 몽땅 주면 되잖아?" 소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당신처럼 돈을 탐낸다고 생각하면 오해요." "돈이 탐나지 않았다면 너는 왜 나에게 덤벼들지 않고 내 손녀를 위협하는 것이지?" "그거야 스스로 생각해 보면 아실 일일 텐데....." "생각해 보면 안다고? 흥, 내가 잠깐 마음을 놓고 너에게 이런 꼴을 당한다만서두...정당치 못하 게 왜 용아를 미끼로 덤비는 거냐?" 소영은 히죽 웃었다. "노부인, 그렇게 언성만 높일 일이 아니오. 차근차근 따져 봅시다." "따지긴 무얼 따져?" "노부인은 독소를 몰래 뿌려 무고한 사람들을 중독시키고 협박해서 부당하게 재물을 탈취했으니 이것은 정당한 일이오?" "어디가 정당하지 못하지? 나는 강탈하지도 않았고 훔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돈을 내었 는데 그것이 왜 부당하지?" "여전하시군요." 소영이 코웃음을 치자 노파는 금방 덤벼들 듯한 자세를 취하다가 풀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재물을 좋아하긴 하지만 약탈은 안했어. 항상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기 때문에 어디에 가든 꿀릴 필요가 없었지." 소영은 노파가 잘못했다고 빌기를 바랬으나, 계속 잘했다고 버티는 것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해 왔지만 당신처럼 뻔뻔스럽고 비양심적이며, 인간의 도리라고는 눈 꼽만큼도 모르는 사람은 처음이오." "흥! 내가 도의를 모른다고 당신이 참견할 이유는 없잖아?" "노부인께서 도리를 외면하신다면 그건 사람이랄 수 없소. 좋소. 나도 노부인에게는 도리에 벗어 난 태도를 취하겠소." 소영은 용아를 잡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녀는 아픔을 견디지 못해 비명을 질렀다. "손을 떼라!" 노파가 소영을 향해 소리쳤다. 소영은 힘을 늦추었다. "노부인, 무슨 할 말이 있소?" 노파는 씩씩거리며 소영을 노려보더니 애원하는 투로 바꾸었다. "도사, 나는 오늘 번 돈을 몽땅 내 주겠소. 내가 번 돈으로 손녀를 사겠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잖 아요?" 소영은 피식 웃었다. "노부인, 미안하게도 나는 금전을 과히 좋아하지 않소." 소영은 시선을 전엽청과 등일뢰에게로 옮겼다. 그들은 이마의 땀을 옷소매로 문지르며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좀 어떻소?" 전엽청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덕분에 괜찮소." "등형은....." 소영이 다시 묻자 등일뢰가 목례를 해 보이며 대답했다. "독성이 완전히 해소되고 이젠 괜찮소." 소영은 시선을 다시 노파에게 돌렸다. "노부인, 이제 노부인께서 담판할 조건조차 없어졌군요." 노파는 입술을 꽉 깨물며 한걸음 다가섰다.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는 손녀의 생명을 희생시켜서라도 당신들을 죽이고야 말 테요." 이때 전엽청이 노파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섰다. 어느 틈에 그의 손에 세 자루의 비수가 들려 있었다. "할멈! 나는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몸이니 생사를 초월했다. 당신이 다시 독소를 뿌리기 전에 많 은 대가를 지불해야 될 걸." 전엽청은 곧 노파에게 비수를 던질 기세였다. 이때 소영에게 잡혀 있는 용아가 급히 입을 열었다. "나를 좀 놔 줘요. 내가 좋도록 흥정하겠어요." 소영은 그녀를 놓아 주는 대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용아는 자지러지듯 비명을 지르며 전 신을 버둥거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파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둘러 보았다. 전엽청, 등일뢰, 백리빙은 이미 노파를 공격할 태 세를 갖추고 있었다. '일이 공교롭게 되어 나에게 불리하구나.' 노파는 용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픔에 못이겨 몸부림을 치며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리고 있 었다. 노파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맥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은 내가 졌군요. 어떤 조건을 내세워 봐요. 그 애를 너무 괴롭히지 말고 어서 말하란 말이 오." 신경질적인 노파의 말을 들으며 소영은 생각했다. '저 노파는 독을 뿌리는 데 있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다. 그것도 한꺼번에 수십 명을 중독시킬 수 있으니 무서운 인물이다. 이런 수법으로 얼마나 많은 무림 인물을 죽였으며 양민들 의 돈을 사기해 먹었는지 모르겠구나.' 소영은 노파를 쏘아보며 말했다. "만일 노부인께서 독소로 무림인물을 죽일 마음만 먹는다면 틀림없이 비참한 참상이 벌어지겠지 요?" 노파는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나는 재물만 벌어 들였지 경박하게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소." "물론 그 말을 믿는다 해도 당신이 어떤 역경에 빠졌을 때에는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독약으로 상대방을 죽이게 되겠지요." "난 그렇게 악독한 짓은 안했소." "하하하...그것이 노부인에게는 조금도 악독한 짓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텐데?" 이 말을 들은 노파는 눈썹을 파르르 떨며 소리질렀다. "내가 생명을 걸고서라도 한번 겨루어 봐야겠구나!" "그래요? 이왕 해 보시겠다면 시간을 끌지 말고 일찌감치 해치우는 것이 훨씬 좋겠지요?" 노파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지로 참느라고 목구멍에서는 꾸륵꾸 륵 소리가 연달아 났다. 소영은 약이 바짝 올라 있는 노파를 일부러 외면하며 등일뢰에게 물었다. "등형, 등형은 견문이 넓고 학식도 풍부하신데...이 노부인과 낭자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소?" 등일뢰는 머리를 저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소." "등형은 오랫동안 강호를 돌아 다니셨는 데도 이 두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면 이 두 사람 은 강호에 나온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이군요." 이때 노파가 소리를 질렀다. "강호에 처음 나왔으면 어떻고 강호에서 늙은 귀신이면 어떻단 말이오? 어서 우릴 보낼 것인가, 어쩔 것인가 결정이나 해요!" 소영은 노파를 바라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건을 말해 보란 말이오. 그러나 요구가 너무 무리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절대 받아 들일 수 없어요. 그땐 생사를 건 싸움이 있을 뿐이지." "하하, 그건 노부인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무리한 요구는 않겠소." 소영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노부인에게 우선 한 가지 조건을 내세우겠소." "어서 말해 봐요." "부인께선 강호를 떠나시오. 오 년 동안만 아무 사람의 편도 되지 말고 강호에 나타나지 않으면 되오." 노파는 낯색이 변했다. "오 년 동안이나....." "그렇소." "그것 말고 또 있어요?" "우선 이 문제를 결정 지어 놓고 다시 얘기합시다." 노파는 눈썹을 모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이 늙은이는 이미 심산유곡에서 십여 년이나 묻혀 지냈으니 오 년쯤 더 살아도 무방하지." "승낙하시는군요. 좋소. 노부인의 언약을 보증하기 위해 우리는 이 소녀를 인질로 삼을 테니 노 부인은 그만 가시오." "뭐야?" 노파가 성난 어조로 소리질렀다. "그건 안 돼. 용아가 없으면...용아를 인질로 삼고 오 년 동안 떨어져 사느니 차라리 내 목숨을 고스란히 바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소영은 노파가 성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노파에게도 가혹한 요구이지만 실상 나에게도 오 년 동안이나 용아를 거느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 소영이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전엽청이 입을 열었다. "만일 이 방법이 못마땅하시면 노부인께서는 해결책을 하나 제시해 보시오." 136. 내기를 내기로 잃다 노파는 전엽청의 말에 낄낄 웃더니 말했다. "나보고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말은 퍽 신사적이군. 좋아요. 우리 공평하게 한 가지 일로써 가부 를 결정하도록 해요." "어떤 방법이오?" 소영이 묻자 노파가 대답했다. "당신들 중에서 한 사람만 나와서 나하고 무공을 겨룹시다. 만일 당신 편에서 지면 용아를 나에 게 돌려 주고, 내가 지면 당신들의 요구대로 용아를 인질로 남겨 두겠어요. 다시 심산유곡에 들어 가 쓸쓸한 오 년 동안을 보내고 용아를 찾으러 오지요." "그거 좋은 방법이오." 소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응하시겠단 말이지요?" "그렇소 응하겠소." "잠깐!" 등일뢰가 끼어 들었다.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소?" 소영이 묻자 등일뢰가 한 걸음 다가 서며 말했다. "시합하는 방법은 분명하게 정해야 하오. 만일 무공만으로 하겠다면 우리가 상대할 수 있지만 독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공연히 당하기만 하는 결과이니까....." "좋은 생각이오. 노부인의 의견은 어떠시오." 노파는 소영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누가 나올 셈이오?" "내가 나서겠소." 소영과 전엽청이 동시에 말했다. 노파는 히죽히죽 웃더니 덕으로 소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도사의 무공이 매우 고강하니 이왕이면 도사의 몇 수 공격초식을 받아 보고 싶군요." "좋소 나도 노부인의 무공을 구경하고 싶소." 소영이 대답하자 노파가 다시 물었다. 우리는 무기로 할까요. 아니면 권장으로 할까?" "노부인께서 택하시오." "나는 무기와 권장을 모두 쓰고 싶은데....." "한꺼번에 무기와 권장을 견주자는 말이오?" "아니지요." "그럼....." 노파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처음에 맨주먹으로 시합하고 백 초 안에 승부가 나지 않으면 무기로 겨루기로 해요." "그래도 승부를 가릴 수 없으면?" "그 때에는 다시 내공의 힘으로 겨루어야지요." "만일 권장의 시합에저 승부를 가릴 수 있다면 나머지 두 가지의 시합은 어쩌겠소?" "그거야 물으나마나한 말이지요. 권법에서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으로 승부는 가려진 것이 지." "좋소." 소영은 용아를 백리빙에게 맡기고 옆으로 두 걸음 비켜 섰다. "자, 먼저 공격하시오." 소영은 도복차림으로 변장하고 있었지만 말투는 자신도 모르게 세속적인 말이 섞여 나오고 있었 다. 노파는 소영을 노려 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기개가 대단하군. 보아하니 당신은 출가한 도사가 아닌 듯한데 강호 사람이오?" "내가 누구이든 노부인께서 상관할 것이 없으니 공격이나 하시오." "그러지." 노파는 어깨를 가볍게 흔들더니 별안간 오른손을 휘둘러 소영의 가슴을 갈겼다. 빠르고 맹렬한 장풍이 폭풍처럼 몰아 닥쳤다. 소영은 재빨리 오른손으로 노파의 장력을 맞받았다. 장풍이 부딪치 자 소영의 어깨가 부르르 진동했다. 노파는 소영의 장풍에 밀려 한 걸음 뒤로 물러 서야 했다. "이 할멈의 내공이 제법 강하구나. 방심할 수 없는데." 소영은 속으로 노파의 공력을 칭찬하며 양손을 동시에 휘둘러 노파에게 맹공을 가했다. 노파는 소영이 공격해 오는 것을 보자 맞받을 생각을 못하고 급히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와 동 시에 오른손으로 반격을 가했다. "노부인의 솜씨가 매우 훌륭하군요." 소영은 그 장풍을 피하지 않고 손으로 받아 내며 왼손으로 반격을 가했다. 노파는 견디지 못하 고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무서운 놈이다. 어떻게 해서든 백 초를 견디어야 다시 무기로 겨룰 텐데....." 노파는 있는 힘을 다해 소영을 공격했다. 그러나 소영은 한 걸음도피하지 않고 노파의 장풍을 맞받으며 날카로운 반격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장풍에 탁자가 날아가고 천장에서 흙모래가 쏟아졌다. "과연 도사의 무공은 놀랍군요." "아직 시초요." 소영은 갑자기 몸을 이리저리 날쌔게 움직이며 연거푸 십여 초를 공격했다. 숨 쉴 사이도 없이 퍼붓는 공격을 노파는 감히 받아 내지 못하고 피해 내는데 전력했다. 노파의 얼굴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소영의 공격을 피해 내기만으로도 지쳐 버린 노파는 이제 소 영이 이, 삼 장만 강한 공격을 하면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말 형편이었다. "졌구나!" 노파가 절망을 씹으며 다음 공격을 피해낼 수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소영이 손을 거두었 다. "노부인, 어떻소?" 파랗게 질린 노파는 헐떡이는 음성으로 물었다. "몇 초가 지났소?" "아흔세 초였소." "그 중에 나하고 몇 초를 정면으로 맞부딪쳤소?" "내가 노부인의 장력을 옆으로 쳐내지 않고 정면으로 받은 것은 꼭 세 번이었소. 그건 왜 묻소?" 노파는 갑자기 고개를 젖히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 웃음은 소영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왜 웃소?" 노파는 한동안 낄낄 웃어대더니 소영을 쳐다 보며 말했다. "내가 도사에게 분명히 말해 둬야 할 일이 하나 있소."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나는 오늘 당신과의 시합에 졌으니 언약을 지키겠소. 그런데.." "그런데 뭐가 어쨌단 말이오? 나는 노부인이 언약을 지키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소이다." 노파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이 늙은이하고 맞부딪친 그 삼 초의 장풍에는 독소가 들어 있소. 지금 당신위 손은 독 으로 덮여 있으니 삼 일 이내로 발작할 것이오. 내가 이대로 산으로 들어 간다면 당신은 죽을 수 밖에 없지요." 이 말은 전엽청 등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백리빙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노부인께서는 한 가지 잊으신 게 있군요." "무슨 일이오?" "당신의 손녀가 내 수중에 있다는 것을 잊으셨군요." 노파가 성난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은 언약을 지킬 것이오. 안 지킬 것이오?" "흐흥, 몰래 독을 뿌렸으므로 자연히 우리도 이 소녀의 목숨을 책임질 수가 없게 되었소." "그건 모순인데.... 처음 시합을 할때 독을 뿌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으니 내가 독을 뿌 린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 텐데....." "애당초 독을 뿌리겠다는 약속도 없었잖소? 당신이 해독제를 내놓지 않으려거든 행여 손녀가 살 아 남으리라고 생각지 마시오." 노파는 이를 뿌드득 갈며 소리쳤다. "만약 당신들이 약속을 어기고 내 손녀를 죽인다면...나는 무림의 많은 사람들에게 독을 뿌려 손 녀의 생명을 보상하겠다." "흥, 악독한 할멈이로군. 당신이 여기서 빠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오. 나는 당신과 손녀를 모두 죽여 버리고 해독약을 꺼내겠소." 백리빙이 약이 올라 소리치자 노파는 낄낄 웃었다. "흐흐... 마음대로 될까? 여기서 이 도사를 빼놓고는 내 상대자 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당신들 이 무더기로 덤벼도 이곳을 충분히 빠져 나갈 수 있는데....." 노파의 빈정거림에 백리빙은 눈에 불을 켜며 곧 덤벼 들려고 했다. 소영이 손을 흔들어 백리빙을 제지하며 노파에게 말했다. "혹시 노부인께서는 내가 중독되어 죽게 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죽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소. 나는 처음 약속을 그대로 지키고 싶은데 노부인의 생각은 어떠신지?" 이 말은 노파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소영이 해독약을 달라고 사정할 줄 알았던 노파는 적이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약속은 지켜야지요." "그럼 약속대로 합시다. 손녀는 우리가 오 년 동안 보호할 테니 노부인은 어서 여기를 떠나시 오." 노파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정말 도사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나요?" "두렵지 않소." "그럴 리가... 그 독은 당신을 이, 삼 일 내로....." "글쎄 이, 삼 일이 아니라 당장 살이 썩는다 하더라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 노부인은 신 경 쓰지 마시오." 노파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소영을 위아래로 훑어 보더니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아무튼 약속은 지켜야 할 테니..... 그럼 이늙은이는 이만 작별하겠소. 오 년 후에 다시 만날 때까지 내 손녀를 잘 보살펴 주기 바라오. 만일....." "......." "내 손녀에게 어떤 사고가 생기는 날이면... 나는 당신들 네 사람뿐만 아니라 강호의 많은 사람 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니 명심하시오." 노파는 눈길을 용아에게 돌렸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정신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있거라." 노파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더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머뭇거리다가 발길을 돌렸다. 노파가 막 객점의 문에 이르렀을 때였다. 밖에서 객점으로 들어오려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이 객점의 문은 좁은 데다가 두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서는 바람에 노파가 나갈 틈이 없었다. 분 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던 노파는 그들을 보자 시비조로 말을 뱉았다. "길 좀 비키시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눈짓을 하더니 오히려 떡 버티고 섰다. 이것을 본 노파가 소영을 돌아 보며 물었다. "이 두 사람은 당신들과 아는 사이오?" 소영이 머리를 흔들었다. "전혀 모르는 분들이오." 노파는 눈에 살기를 띠더니 두 사람에게 차갑게 말했다. "두 분은 누구의 청부를 맡아 나에게 시비를 걸지요?" 말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한 사나이의 면상을 향해 후려 갈겼다. 그 사나이는 왼손을 들어 노파 의 손을 막으며 오른손으로 그녀의 혈도를 찍으려고 했다. 노파는 급히 오른손을 거두며 왼손으로 그 사나이의 오른손을 쳤다. 그러자 그 사나이도 급히 오른손을 거두며 왼손으로 반격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십여 초를 서로 주고받았다. 그 민첩한 동작은 얼른 보기에는 두 사람이 마 주서서 손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다른 한 사나이는 두 사람의 싸우는 것을 지켜 보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소영은 문 앞을 가로막은 두 사람을 훑어 보았다. "생김새나 차림새가 괴상하군. 도대체 누구일까?"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전엽청과 백리빙도 그들을 모르는 듯 한 눈치였다. 그러나 등일뢰만은 표정이 굳어지며 숙연한 자세로 서 있었다. 노파와 회색 옷의 사나이는 여전히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회색 옷의 사나이 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외쳤다. "망할 할멈..... 네 손에 독을 쥐었구나!" 노파는 낄낄 웃었다. "흐흐 그렇다. 이미 네 손에 독이 묻어 있다." 그 사나이는 얼굴에 살기를 떠올리더니 품속에서 옥척(玉尺)을 꺼내 들며 물었다. "해독약은 어디 있나?" "여기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너를 죽이면 해독약을 뺏을 수 있겠군." "흐흐 날 죽이겠다고? 그렇게 쉽지 않을 걸." 그러자 회색 옷의 사나이는 옥척을 높이 치켜 들었다. "뺏을 수 있는지 없는지 한 번 시험해 볼까?" 그는 곁에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삼형, 형은 꼼짝하지 말고 보고만 있으시오." 삼형이라고 불린 사나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옥척을 든 사나이가 다시 노파에게 말했다. "노파! 정체를 밝혀라!" "후후, 자네가 맞춰 보게." "뭐라고?" 옥척을 든 사나이는 잔뜩 노려 보며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무엇을 생각해 낸 듯 눈을 빛 내며 어조를 부드럽게 했다. "혹시 무당노파(巫堂老婆)가 아니오?" 이 말에 노파는 흠칫 놀라는 기색을 띠며 물었다. "내 정체를 아는 당신네들의 신분은 무엇이오?" 옥척을 든 사나이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잘못 보지는 않았군요. 우리는 마파형제(馬波兄弟)요." 그러자 노파는 다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 바로 영남쌍걸(嶺南雙傑)이군요." "노부인, 우릴 치켜 부를 필요는 없소. 강호에서는 우리 형제를 영남쌍걸이라고 부르지만... 허긴 노부인이 우리 형제를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은 없지요." 왼쪽에 있는 사나이가 말하자 노파는 두 사람을 말없이 훑어 보더니 품 속에서 금빛 상자를 하 나 꺼냈다. "내 정체를 알았으니 해독약을 주겠소. 받으시오." 그녀는 상자 속에서 환약 하나를 꺼내 옥척을 든 사람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받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왼쪽에 있는 사나이가 말했다. "받아라. 노부인은 우리와 적이 아니니까." 오른쪽 사나이는 옥척을 집어 넣더니 약을 받아 입에 넣었다. 이들의 거동을 처음부터 지켜 보고 있던 소영은 은근히 경계를 했다. "영남상마와 무당노파가 합세해서 용아를 뺏으려고 한다면 한바탕의 난투극이 또 벌어지겠구나." 옥척을 든 사나이가 약을 삼키는 것을 지켜 보고 있던 무당노파가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서 싸움을 하다가 패하고 지금 나가려던 참인데...영남쌍걸은 길을 좀 비켜 주시오." 왼쪽에 있는 마파가 물었다. "누구에게 지셨소?" 노파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이건 두 분과 상관 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녀는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마파가 길을 막으며 말했다 "노부인은 저희 형제와는 처음 대하지만 소요자와는 잘 아는 사이가 아니오?" 무당노파는 걸음을 멈추더니 물었다. "두 분은 소요자를 아시오? "우리 형제는 바로 소요자의 부탁을 받고 노부인을 마중하러 나온 것이오." 마파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저회 형제는 은거한 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소. 그런데 이번에 소요자의 초청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다시 강호에 나온 것입니다." 무당노파는 한숨을 내쉬며 마파의 말을 받았다. "나도 강호를 떠난 지 벌써 이십여 년이나 지났어요. 그런데 그동안 그 소요자가 나를 다시 강 호에 끌어 내려고 수차 편지를 했더군요. 할 수 없이 소요자의 부탁을 응낙하고 강호에 다시 발 을 디딘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말을 끊고 소영을 힐끗 돌아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이 사람과 싸움을 하여 패하고는 손녀도 인질로 뺏기고 다시 은거생활을 오 년 동안이나 해야 될 입장에 놓인 것이라오." 마파가 말했다. "저의 형제는 소요자의 부탁을 받고 노부인을 마중나가는 길이었는데, 다행히 이곳에 만났군요." "틀렸어. 너무 늦었어." 무당노파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더니 말을 이었다. "이미 모든 것은 끝났어요. 나는 이 사람들과의 약속대로 다시 깊은 골짜기에 묻혀 오 년을 보 내야 돼. 소요자에게 이렇게 전해 주시오. 이 무당할머니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마파가 입을 열었다. "노부인, 그러니까 저 사람들과 내기를 해서 진 것이지요?" "그래요." "그렇다면 염려할 것 없소." "왜요?" "내기를 해서 진 것은 다시 내기를 해서 이기면 되니까. 저희 형제가 내기로써 그들을 이기겠 소." 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소영은 생각했다. '이제 보니 소요자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가 강호에서 자취를 감춰 은거생 활을 하는 많은 악당 무리들을 불러들이니 필연코 강호에 일대 풍파가 벌어지고 말겠구나.' 소영은 은근히 앞일이 염려되었다. '간신히 심목풍의 무리가 조용해질 만하니까 다시 소요자가 흉칙한 얼굴을 내밀다니... 강호에 풍 파가 그칠 날은 없는 것인가?' 이때 마파의 말을 들은 무당노파가 양볼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미 승부에서 졌는데 무슨 염치로 다시 내기를 하겠소." 마파가 음흉스럽게 웃으며 노파의 말을 받았다. "노부인께서는 옆에서 구경만 하고 계시오. 우리들이 손녀도 찾아드릴 테니까......" 그는 소영을 한 번 노려 보더니, 노파에게 물었다. "노부인과 내기를 한 사람은 바로 저 도사이요?" 노파는 겉으로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 기뻐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요." 노파는 얼른 한 옆으로 비켜 섰다. 그러자 마파가 성큼성큼 걸어 오더니 네 사람을 한동안 훑어 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등일뢰에게 말을 걸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등형이지요?" 등일뢰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십오 년 전에 서주(徐州) 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요."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하하하......" 마파는 한동안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인연이 있어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소. 그런데 등형의 일행이 무당부인과 내기를 했다 면서요?" 이 말에 대답을 하려던 소영은, '우리 중에서 등일뢰가 가장 연장자이니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 하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등일뢰는 소영을 곁눈질로 바라 보며 마파에게 대답했다. "두 분 형제는 이 일과 관련이 없으니 말려 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마파가 싸늘하게 웃었다. "하하,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우리는 꼭 간섭을 해야겠소. 어떻게 해서 일이 발단되었는지 좀 설명해 주시오." 등일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가 설명하리다." 사건의 발단을 이야기했다. 처음 노파가 식대를 내 주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한 데서부터 독을 뿌린 일, 소영과 무공을 겨룬 일까지 명료하게 설명했다. "...... 그래서 우리는 약속대로 이 용아라는 소녀를 오 년 동안 인질로 맡기로 한 것이오." 등일뢰의 이야기가 끝나자 마파가 소영을 돌아 보며 물었다. "도사는 어디에 계신지요?" 소영이 대답했다. "천하가 모두 내 집이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소." 이 말을 들은 마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흥, 교만하기 짝이 없는 분이시군요." "교만이라니... 나는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했을 뿐이오. 세속을 떠난 사람은 일정한 거처가 없으 며 또한 모든 곳이 거처이외다." "아무튼 좋소" 마파는 손가락으로 백리빙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소년은 도사의 제자요?" "제자이든 아니든 그것은 당신과 상관 없소이다." "흥, 여전히 안하무인이군요? 도사가 어떻게 나오든 나는 무당 노부인의 손녀를 다시 찾아야겠 소." 소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두 분께서도 빈도와 내기를 하고 싶다는 말이오?" "그렇소." "그건 무엇 때문이오?" "무당노부인과 약속한 것을 취소시키고 노부인의 손녀를 찾기 위해서요." 소영은 마파를 위아래로 훑어 보며 말했다. "좋소 어떤 방법으로 내기를 하시겠소?" 마파는 소영의 질문과는 엉뚱한 말을 했다. "당신의 말투를 보아하니 당신은 출가한 사람이 아니군요." 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나의 신분을 감추고 도사 행세를 하는데 번번이 탄로가 나니 아마도 많이 부족한 모양이 군.' 사실 소영은 도사의 신분에 어울리는 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만 흥분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강호의 말을 쓰게 되니 신분이 감추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등일뢰와 전엽청은 자기들보다 소영의 무공이 훨씬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곁에서 지 켜 보며 소영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마파는 소영과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에 상대의 무공이 매우 높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공이 높은 것만은 사실이다. 교활하고 고강한 무당노파 가 당하지 못하고 물러날 적에야 나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좀 색다른 조건을 내세워 이 사람을 눌러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마파는 소영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내기를 합시다. 그러나 내가 방법을 정하면 당신이 따라서 할 것 같지 않은데... 어쩌겠소?" 소영은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었다. 무공의 시합이야 자신있다고 생각한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대답했다. "방법만 정하시오. 나는 기꺼이 따르겠소." "신기한 방법으로 할 생각인데 ....." "어떤 신기한 방법이오?" 마파는 소영이 자기의 계교에 말려드는 것이 기뻤으나 내색은 않고 말했다. "도장께서 독사를 한 마리 골라 나에게 주면 내가 먹고, 나도 독사를 골라 도장께 드릴 테니 먹 으시오." 소영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상상도 못했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소영이 입을 벌린 채 대답을 못 하자 마파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흐흐흐. 나는 도장께서 못할 것으로 짐작했었지만, 겁을 내시는 정도가 지나치군요." 소영은 야유를 듣자 화가 치밀었지만 눌러 참으며 말했다. "나는 여러가지 방법의 내기를 들어 보았고 또 직접 해 보았소. 하지만 독사를 먹어 승부를 가 린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오." "하하... 도장께서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 이 아니라 직접 먹어 보아야겠 다는 생각이 안 드시오?" 소영은 그 말에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독사를 먹으면 그 독에 내가 죽을 것이 뻔하다. 그러니 독사를 먹기 내기는 내가 지는 것이구 나.' 소영은 어떻게 대답할까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신기한 내기라고 할 수 있소. 독사를 생으로 먹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인데 아마 당신도 먹을 수는 없겠지요?" "난 먹을 수 있소. 도장께서도 먹을 수 있을 것이오. 누구나 독사를 먹을 수는 있으나 그 뒤가 겁나지요. 그러니까 나는 이 겁나는 방법으로 내기를 하자는 것이오." 소영은 구원을 청하듯 등일뢰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그도 묘안이 없는 듯 멍청하게 서 있을 뿐 이었다. "도장께서 이제 와서 시합을 않겠다고 하시진 않겠지요." 마파의 물음에 소영은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난 독사를 먹겠다는 약속을 하진 않았소." 마파는 코웃음을 치더니 득의만면한 얼굴로 말했다. "도장, 조금 전의 그 오기는 어디로 갔소? 만일 도장께서 약속을 취소하시겠다면... 그것은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오." "무슨 뜻이오?" "도장께서 한 마디만 하시면 되지요." "한 마디라니...어떤 말을..... "도장께서 하는 말은 신의가 없어 무책임하게 한 말이니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다고 하시면 되 지요." 이 말은 소영을 너무도 모욕하는 말이었다. 소영은 화를 누를 수 없어 주먹을 불끈 쥐고 곧 덤 벼들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화를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너무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나는 내가 일단 뱉은 말은 취소할 수 없소." "그렇다면 내기를 하시겠단 뜻이오?" "독사를 먹기로 약속하진 않았소." "그래서 어떻게 하겠단 말씀이오? 도장께서 승산이 있는 내기만 골라서 하겠단 말이오?" 소영은 더 참을 수 없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좋소! 합시다. 먼저 당신이 독사를 먹어 보시오." 소영은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고장에는 독사가 없으니 어떻게 하겠소?" 마파는 빙글빙글 웃으며 속주머니에서 작은 자루 하나를 꺼냈다. "내가 이미 준비했으니 그건 염려는 필요 없소." 마파는 자루를 묶은 끈을 풀어 거꾸로 쳐들었다. 그러자 두 마리의 독사가 자루 속에서 기어 나 왔다. 두 마리의 독사는 불과 예닐곱 치밖에 안 되는 길이에 대가리는 세모꼴이고 몸 전체가 순백색이 었다. '무서운 독을 지니고 있을 것 같구나.' 독사를 본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러자 마파가 음흉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한 마리 골라 보시오." 실내에 있는 사람들은 뱀을 보자 모두 표정이 굳어진 채 소영과 마파를 지켜 보고 있었다. 이들 도 독사를 먹는다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뱀을 노려 보고 있던 소영이 마파를 바라 보며 말했다. "당신이 독사를 몸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런 내기는 항상 해 왔던 모양이군." "그거야 어떻든... 뱀은 두 마리 다 생생하게 살았으니 어떤 사기는 없소. 아무튼 이번 내기는 당 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알아 두시오." "무엇이 유리하오?" "만일 당신이 먼저 독사를 먹는다면 당신의 목숨은....." "흥. 당신은 내가 독사를 먹지 못할 것으로 단정하는군요." 소영의 말에 마파는 흐흐 웃었다. "어쨌든 도장께서 독사를 먹는다면 이긴 것으로 하겠소. 먹을 수 있기를 바라겠소. 자, 어떤 것 이든 한 마리 고르시오." 소영은 두 마리의 독사를 유심히 살폈다. 두 마리가 똑같았다. 그는 그 중의 한 마리를 가리켰 다. "이쪽 것으로 하겠소." "그럼 먼저 먹겠소." 마파는 소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독사를 집더니 입으로 가져 갔다. 소영과 전엽청 등은 그 광 경을 눈하나 깜박하지 않고 바라 보고 있었다. 마파는 독사를 입에 넣더니 어적어적 씹어 먹기 시작했다. 마치 무우라도 씹듯 한 마리의 독사를 씹어 먹더니 입맛을 다셨다. 이 광경을 본 사람 을 입을 딱 벌렸다. 특히 백리빙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맛이 있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마파가 소영을 바라 보며 히죽 웃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도장의 차례요." 소영은 입을 꾹 다문 채 독사를 노려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독사의 머리 부분을 꽉 움켜 쥐자 독사는 몸을 꿈틀거리며 빨간 혀를 날름거렸다. 막상 독사를 집기는 했으나 소영은 그것을 입으 로 가져 가지는 못했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워 구역질이 치밀고 있었다. '차마 못 먹겠구나. 그러나 한 번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지. 무림의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내가 개인의 약속도 못 지켜서야.....' 소영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독사를 눈앞으로 치켜 들었다. 숨을 죽인 채 그를 바라 보는 많은 시선들을 의식하며 소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소영이 독사를 입으로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안 돼요!" 날카로운 외침과 동시에 독사를 쳐내는 손이 있었다. 그것은 백리빙이었다. "졌다고 해요!" 백리빙은 다시 날카롭게 외치더니 용아를 끌고 앞으로 갔다. "우리가 졌으니까 이 소녀를 돌려 주겠소." 노파는 아무 소리 없이 용아의 손목을 잡았다. 이것을 본 마파가 땅에 떨어진 독사를 집어 자루 에 넣더니, "그럼 먼저 실례하겠소."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백리빙은 분을 참지 못해 얼굴이 새빨개져서 씨근거리며 말했다. "이번 내기에서 우리가 졌지만 다시 만날 때에는 각오하시오. 그때에는 독사가 아닌 무공으로 정당히 겨룹시다." 마파는 아무 소리도 없이 음침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무당 노파 등이 뒤쫓았다. 그들이 사라지자 소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하오. 이겨서 뺏은 사람을 다시 잃었으니....." "소대협은 너무 상심치 마시오." 등일뢰의 말에 이어 전엽청이 입을 열었다. "독사를 산 채로 먹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오. 영남쌍걸은 어릴 적부터 연습한 모양이오." 등일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어릴 때부터 연습했다고 하더라도 독사의 독소를 위장에 집어 넣을 수는 없는 일이오. 필시 어떤 속임수가 있는 것 같소." 소영이 무거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속임수가 있든 없든 우리가 진 것은 분명하오. 그는 항상 그 방법으로 내기를 하는 모양이오." "그 이야기는 그만 두고..... 우린 이미 졌으니 다음에 만날 때 무공으로 설욕할 생각이나 해요." 백리빙의 말이었다. 그녀는 소영에게 눈길을 던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의 인상과 행동을 보니 무림에 화를 가져 올 사람들이에요. 소요자와 무당노파, 영남 쌍걸 등이 힘을 합치면 수습하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질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들의 뒤를 추격해서 아예 죽여 버리는 것이 좋겠어요. 나쁜 피는 살을 썩게 하 기 전에 뽑아 버리고 잡초는 일찍 제거해야 돼요." 백리빙의 말에 등일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오. 우리는 지금 곧 쫓아 가서 없애 버립시다." 소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행장을 꾸려 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그들을 붙잡고 봅시다." 하고 앞장섰다. 그 뒤를 세 사람이 따랐다. 객점을 나온 네 사람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길을 빠르게 달렸다. 길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고 황량하기만 했다. 네 사람은 무당노파를 찾으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달렸지만 그들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인가도 없는 길은 산굽이와 벌판을 연결하며 어둠만 잔뜩 끌어 안 고 있었다. "길이 몹시 험하고 인가는 아무 데도 없군요." 등일뢰가 지친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무당노파를 쉽 게 찾을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묵묵히 걷던 소영이 입을 열었다. "무당노파는 많은 돈을 버려 두고 간 것을 몹시 원통하게 생각할 것이오. 언제 어디서 튀어 나 와 앙갚음을 할는지 모르니 각별히 조심하시오. 그녀가 독을 뿌리는 솜씨는 귀신도 알아 보지 못 할 정도니까......" 이 말을 받아 전엽청이 입을 열었다. "정말 괴상한 일이오. 나는 객점에 있을 때 처음부터 무당노파와 계집애의 거동이 수상하다고 생각했었소. 그래서 잠시도 쉬지 않고 그들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전엽청은 말을 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린 사방은 기분 나쁘도록 조용하 기만 했다. 전엽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무당노파가 독약을 뿌리는 것을 조금도 눈치챌 수 없었단 말이오. 그 솜씨는 정말 귀신도 곡할 만한 놀라운 솜씨였지요. 그러나...." "......." "독약을 뿌리는 재주가 비상하다고 해서 그녀가 강호를 주름잡을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소." 137. 뺨을 얻어맞은 백리빙 소영의 일행은 이야기하는 사이에 어느새 커다란 나무 밑에 다다랐다. 백리빙이 갑자기 손을 들 며 소리쳤다. "어머나! 저게 뭐예요?" 그 말에 모두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들어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 보았다. 그러자 한 구의 시체가 나무 위에 높다랗게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때 마침 달이 구름속으로 들어가 사방은 어두컴컴하였으나 초인적인 안력을 지닌 그들의 눈에 는 그것이 한 구의 시체임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전엽청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사람의 시체로군요." 등일뢰가 그의 말을 받았다. "누구에게 살해된 게 아니오?" 전엽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소이다. 저 나무는 삼장 높이는 될 것이며 저 시체와 땅 사이도 일 장 오 척이 넘는 데 만약 스스로 자결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 높은 곳에 매달려 있겠소?" 그는 말하며 허리춤에서 칠휴검을 꺼내 손을 뻗치자 단검은 쏜살같이 뻗쳐 갔다. 그의 수법은 정확하였다. 파란 섬광이 번쩍하며 시체를 매달은 밧줄에 명중되었다. 눈깜빡할 사이에 바람을 가 르고 날아간 단검은 신통하게 밧줄을 싹뚝 잘랐다. 밧줄이 끊긴 시체는 곧장 떨어졌다. 전엽청은 몸을 날려 그 떨어지는 시체를 날쌔게 받았다. 그 리고 자세히 그 시체를 들여다 보더니 소스라쳐 놀라며 소리쳤다. "무당 할멈이오!" 그는 이 추하고 괴이한 무당에 대해서 무척 깊은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체 만 보아도 흠칫 놀라 엉겁결에 안았던 시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때 가벼운 소리와 함께 칠휴검이 땅에 떨어졌다. 전엽청의 칠휴검은 다름 아닌 무당파의 선대 장문인이 천산에서 천 년 묵은 한철을 재료로 만든 것이었다. 이 칠휴검은 예리하기 비할 데 없는 지극히 진귀한 단검이었다. 전엽청은 무당노파를 거들떠 보 지도 않고 급히 단검을 주워 들어 허리춤에 꽂았다. 등일뢰와 소영도 무당할멈에 대해서는 역시 깊은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그녀의 시체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등일뢰는 땅에 나가 자빠진 그 시체를 내려다 보고 입을 열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그녀가 어찌 남에게 피살될 수 있소." 소영은 주막에서 이 무당노파와 싸울 때 비밀리에 천 년 묵은 교피장갑을 끼었었다. 그랬었기에 무사히 중독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무당의 시체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교피 장갑을 끼고 서서 히 쭈그리고 앉았다. 소영은 손을 내밀어 그의 코를 눌러 보았다. 백리빙이 이때 큰 소리로 외쳤다. "오빠, 그녀를 건드리지 말아요!" 소영은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그는 계속 그 노파의 코를 눌렀다. 등일뢰는 그 무당할멈에 대한 공포심이 여전히 남아 있어 그녀의곁으로 바싹 접근을 못하였다. 그는 엉거주춤하고 멀리 떨어져서 입을 열었다. "어떻소? 정말 죽었소? 아니면 일부러 죽은 척하는 것이오?" 소영은 똑똑히 말했다. "정말 죽었소이다." 등일뢰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가 그를 죽였을까? 영남쌍마 역시 서로 합세하지 않으면 그녀를 이기지 못할 터인데..... 그녀 를 죽이려면 실로 어려운 일인데 참 이상하구나. 하물며 그녀에게는 손녀가 있는데....." 소영은 시력을 집중해서 자세히 시체의 얼굴을 살펐다. "아니! 이것은 그 할멈의 본신이 아닌 것 같소!" 소영은 흠칫 놀라며 손을 내밀어 노파의 얼굴에서 잠시 더듬거리더니 과연 한 장의 인피가면을 벗겨 냈다. 등일뢰와 전엽청은 흠칫 놀라 자세히 바라 보았다. 인피가면이 벗겨진 얼굴도 역시 노파였다. 전엽청은 치를 떨며 말했다. "그 무당할멈은 과연 성격이 잔인하기 그지없군. 이렇게 꾸미기 위하여 전연 아무 관계도 없는 노파를 죽였으니 참 악독하다." 소영도 결연히 말했다. "언제이든 만나게 되면 절대로 용서해 주지 않겠소." 백리빙이 서서히 다가 오며 물었다. "오빠. 이 사람이 죽은 지 얼마나 됐을까요?" 소영은 자세히 그 노파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별로 오래된 것 같지 않구나." 백리빙은 미소지으며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 노파의 앞가슴에 손을 대었다. "몸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군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등일뢰를 쳐다 보았다. "노선배님의 견식은 매우 넓으시니, 그 무당할멈이 이 노파를 죽여 자기같이 꾸며 나무에 매단 속셈을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등일뢰는 천천히 대답했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다면 그 할멈은 이 시체를 빌려 독을 사용한 것 같소." 이때 별안간 퍽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약간의 분말이 그 노파의 몸에서 나왔다. 소영은 깜짝 놀라 황급히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다. 이때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렇소. 이 몸은 여러분의 몸에 독을 내리려고 하오." 외침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나무 위에서 일행에게로 곧장 떨어져 내려 왔다. 등일뢰, 전엽청. 심지어는 백리빙까지도 이 노파가 독을 사용하는 능력에 대해 마음 속으로 크게 겁을 집어 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설마 그 할멈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이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들은 다급히 호흡을 멈추었다. 나무 위에서 뛰어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무당 노파임을 본 소 영은 분이 치밀어 올라 냉랭하게 소리쳤다. "이 방법은 너무 악독하지 않은가?" 그러자 그 노파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렇다! 나는 원한을 보복하는데 있어 언제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소영이 다시 대꾸했다. "그러나 우리 몸에 독성이 발작되기 전에 너를 죽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당할멈은 냉소를 띠고 빈정거렸다. "흥, 내가 이번에 사용한 독은 발작이 매우 빠른 걸....." 소영은 비호갈이 몸을 날려 곧장 노파에게 달려 들었다. 노파는 재빨리 오른손을 휘둘러 한가닥 의 흰 줄기를 뿌려 냈다. 소영은 미간을 모으고 내력을 운기하여 한 줄기 강력한 일장을 뻗쳤다. 이 일장의 힘은 상당히 맹렬하여 무서운 기세로 노파를 향해 곧장 밀려 갔다. 노파가 방출한 흰 연기가 소영의 강력한 장풍에 걸리자 반대로 노파를 향해 되돌아 갔다. 노파 는 날쌔게 그것을 피했다. 소영은 이 틈을 타서 몸을 앞으로 버밀고 왼손을 가지런히 뻗었다. 그리고 오른손은 재빨리 노 파의 맥박 혈도를 향해 뻗쳤다. 이 노파는 소영의 힘을 알고 있으므로 진기를 들이마시며 몸을 날려 뒤로 다섯 자 물러났다. 소영의 마음에는 곧 살기가 동했다. 그는 손가락을 굽혔다가 퉁겨 내며 탄지신공을 펼쳐 냈다. 한 가닥의 매서운 기풍이 허공을 뻗어 갔다. 무당노파가 막 몸의 중심을 잡고 있는데 소영의 지풍이 다가가 눈깜박할 사이에 노파의 갈비뼈 에 명중되었다. 노파는 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가더니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영이 곧 달려가 그녀의 혈도를 찌르려고 했을 때 갑자기 등뒤에서 연거푸 쓰러지는 소리가 들 렸다. 소영이 흠칫하고 고개를 돌리니 등일뢰. 전엽청, 백리빙이 모두 땅에 쓰러져 있었다. 그 광경에 소영은 잠시 얼떨떨했다. 무당노파의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 왔다. "그들의 독이 이제 발작됐다." 소영이 싸늘하게 물었다. "어째서 나는 무사한가?" "나 역시 지금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노파는 다시 냉랭히 말했다. "그러나 네 내공이 이미 백독이 침입 못하는 경지까지 도달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소영은 암암리에 생각했다. '일개인의 내공이 얼마나 정심하던간에 백독이 침입 못하게 할 수는 없다. 만약 내가 중독되었 는데 발작하지 않는다면 아마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노파를 노려 보며 말했다. "저 세 사람은 중독됐지만 반드시 죽는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소영이 재빨리 오른손을 번쩍 치켜 들어 내려치려는 찰나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 왔다. "제 할머니를 죽이면 안 돼요!" 말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경장차림을 한 소녀가 표연히 내려 섰다. 그녀는 청색 두건으로 머 리를 감쌌으며 등에는 장검을 꽂고 있었다. 그녀의 요염한 얼굴에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빗 이 뚜렷했다. 그녀는 자기가 소영의 적수가 아님을 알고 있는 듯 손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소영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할멈은 독을 즐겨 사용하고. 또한 조심하지 않으니 이 세상에 남겨 두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의 손에 피해를 당할는지 모른다. 그러니 어찌 살려두겠는가?" 그녀는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할머님의 목숨을 끊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당신의 동료들의 생명은 누가 구하나요? 그 들을 구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소영은 냉랭히 대꾸했다. "그대가 아직 살아 있으니 할멈이 죽더라도 그대에게 해독의 능력이 있지 않은가?" 그녀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제가 의지하는 할머님을 죽이는데 당신을 도와 저들의 독을 풀어 줄 것 같아요? "그러나 아마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걸....." 그녀는 성을 발칵 냈다. "출가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비심을 가져야 하는데 당신은 이처럼 마음이 독하고 전혀 도사다 운 마음가짐을 찾아 볼 수 없군요." 소영은 언제나 관대했다. 그는 무당노파가 독을 사용하는 것에 격분하여 순간적으로 악독한 마 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파를 죽여 후환을 없앤 다음, 노파의 손녀딸을 위협하여 해독을 시 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그녀의 무공을 없애 버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 의 날카로운 반항에 부딪치자 갑자기 어리벙벙해져서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놀렸다. "죽이세요. 저의 할머님을 죽인다면 저도 곧 자결하고 말 테니까요. 할머님과 저의 두 목숨으로 당신들 세 목숨과 바꾼다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지요." 소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만약 해독약이 그대들 두 사람의 몸에 있다면 빈도가 그대들을 죽인 후 해약을 찾아 낼 수 있 지 않은가?" 그녀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저 사람들이 걸린 독은 할머님이 여러가지 독약을 혼합해서 제조한 것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그 혼합한 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해독할 수 있어요?" 땅에 앉아 있는 무당노파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암기를 뻗치려는 듯했다. 소영의 탄지신공은 아직 절정에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표적에 정확히 적중하지 못했음을 소영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노파에게 증상은 입혔으나 그녀의 혈도를 찌르지 못했 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녀와 말을 하면서도 유심히 노파의 거동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가 노파가 몸을 일으킨 것을 보고 재빨리 몸을 앞으로 날리며 일장을 때렸다. 소영의 동작은 굉장히 빨랐다. 그 일장은 노파의 오른쪽 팔에 적중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 일어섰던 노파가 소영의 일장에 의해 사, 오 척 밖으로 날더니 땅바 닥에 납작 뻗어 버렸다. 소녀는 오른손에 장검을 뽑아 들었다. 싸늘한 섬광이 번쩍 눈을 쏘더니 곧장 소영을 향해 찔러 왔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그녀의 검끝을 잡았다. 그러나 소녀는 손에 잔뜩 힘을 주어 장검을 비틀었다. 소영의 검을 쥔 손가락을 자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검끝을 잡은 소영의 오른손은 강철로 만들어진 듯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힘껏 장검을 비틀었으나 손가락은 고사하고 검끝조차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소영의 이러한 무공을 보자 적수가 아님을 알고 손에 든 장검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노 파의 곁으로 달려가 엉엉 울었다. 그녀의 음성은 은방울을 굴리듯 아름다왔다. 그리고 그 울음소 리는 계곡을 울리는 두견새의 울음처럼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소영은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뭣 때문에 그리 우는가?" 소녀는 울면서 앙칼지게 소리쳤다. "당신이 우리 할머님을 죽이겠다면 먼저 나부터 죽여요!" 소영은 속으로 뇌까렸다. '이 여자는 참으로 상대하기 어렵군.' 하더니 천천히 그녀에게 대꾸했다. "그대의 할멈은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데 그 말이 맞는가?"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님은 행동이 괴팍할 뿐이에요. 그러나 저의 기억에는 할머님이 정말로 사람들을 죽이는 것 을 보지 못했어요." 소영이 싸늘하게 물었다. "싱것이 정말인가?" 소녀는 울면서 끄덕였다. "거짓말을 한 마디만 했더라도 나는 옳게 죽지 못할 것이에요." 소영은 곧 분명히 말했다. "이제 울음을 그치시오. 나는 그대 할머니를 죽이지 않을테니.." 소녀는 울음을 뚝 그치고 눈물을 닦아 내며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이 한 말은 당신이 지켜야 해요." 소영은 엄숙하게 말했다. "당당한 사내 대장부가 한 말은 반복하지 않는 법이오. 그러나 빈도는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소녀는 얼굴에 가냘프게 웃음을 띠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대는 우선 내 세 명의 동료들을 구하여 그들의 독을 없애 줘야만 나도 비로소 그대들을 무사 히 보내겠소." 소녀는 방긋 웃었다. "그야 물론이지요." 그녀는 손을 내밀어 노파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할머님, 해약을 어디에 두었지요?" 노파는 힘없이 대답했다. "내 몸 왼쪽 세 번째 주머니 속에 있다....." 소녀는 노파의 검은 옥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내의에는 주머니가 무려 수십 개나 달려 있었다. 소영은 암암리에 생각했다. '그녀의 이 수많은 주머니 속에는 해약과 독약이 가득할 텐데 만약 잘못 고른다면 빙아 등 세 사람의 생명을 뺏는 결과가 된다.' 이렇게 생각이 들자 불안해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잘 알아서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소녀는 이미 노파의 세 번째 주머니에서 해약을 끄집어 내었다. 그러나 소영의 말을 듣자 노파 에게 물었다. "할머님! 할머님이 만약 저를 속인다면 비단 할머님이 돌아가실 뿐 아니라 이 노도사가 화를 내 면 이 용아조차 목숨을 잃게 됩니다." 노파는 연속으로 소영의 탄지신공에 일장을 맞아 갈비뼈가 두 개나 부러지고 내부의 기혈이 아 직도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말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노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어찌 너를 속이겠느냐?" 그래서 소녀는 수중의 약병을 소영에게 넘겨 주며 말했다. "가져 가서 어서 동료를 구하세요." 소영은 약병을 받고 서서히 입을 열었다. "세 명의 동료가 깨어나기 전에는 그대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소녀는 이미 소영의 무공에 굴복하여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가라고 명령을 내릴 때 저는 가겠어요." 소영은 서서히 세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세 해약을 꺼내서 각기 세 사람의 입 속에 하나씩 집어 넣었다. 그 해약은 입에 들어 가자 금방 녹아서 목구멍으로 넘어 갔다. 증세에 따라 약을 먹이니 즉시 효력이 나타났다. 알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 사람은 차례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소녀는 노파를 부축하여 일으키며 소영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이제 가도 되지요?" 소영은 그녀에게 천천히 말했다. "서두르지 마시오." 소녀는 과연 움직이지 못하고 노파를 부축했던 양손을 다시 풀었다. 그녀가 자기에게 이처럼 겁 을 집어 먹는 것을 보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그는 눈길을 백리빙과 등일뢰에게 옮기며 말했 다. "여러분, 운기하여 시험해 보시오. 아직도 내부에 독이 남아 있는지....." 등일뢰, 전엽청, 백리빙 세 사람은 그 말을 따라 운기하여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이 입을 열었다. "독이 모조리 제거되었소." 소영은 그 말에 비로소 안심하고 소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자아! 이제는 가도 좋소!" 소녀는 두 손으로 노파를 부축하고 몸을 돌려 서서히 걸어 갔다. 이때 백리빙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을 놓아 주지 말아요!" 그녀는 성급한 나머지 크게 소리쳤다. 자기가 지금 남장을 하고 있음을 망각하고 외쳤기 때문에 완전히 여자 음성이었다. 소영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빙아, 가도록 내버려 둬라. 내가 이미 약속했으니....." 그러나 백리빙은 걸음을 옮겨 재빨리 달려 나갔다. 그러나 몇 걸음 나가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 고 말았다. 소영은 깜짝 놀라 급히 백리빙을 부축해 일으켰다. "왜 그래?" 소영이 다급하게 묻자 백리빙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두 다리가 떨리며 전신에 힘이 없어요." 소영은 크게 놀라서 즉시 소리쳤다. "섰거라!" 그는 진기를 끌어 올려 번개갈이 몸을 날려 단번에 이 장 정도 달려 나갔다. 소영은 경공이 대 단하므로 순식간에 노파와 소녀의 뒤를 따라 붙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소녀를 잡으려 했다. 그 런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현기증이 일어났다. 소영은 눈앞이 아찔하여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소영은 급히 진기를 끌어 올려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소녀는 소영에 대하여 몹시 겁을 먹고 있었으므로 그가 소리쳐 자기를 부르는 것을 듣자 곧 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쫓아온 소영이 갑자기 비틀거리며 몸을 똑바로 서지 못하는 것 을 보자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그때 무당노파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용아야, 어서 가저 저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라." 소녀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네?" "어서 가서 저 놈들을 죽이란 말이다." 소녀는 황급히 물었다. "할머님, 할머님은 그가 누군지 아세요? "알구말구. 너는 손만 내밀면 된다."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그들을 일격해 명중시킬 수 있다 해도 저는 감히 손을 쓸 용기가 없어요." 소영은 오른손을 들어 양쪽 뺨에 갖다 댔다. 그 역시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이 분명했다. 소녀는 노파를 놓고 급히 소영에게 달려 갔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듯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소영은 전력을 다해 발작하는 독성과 항거하고 있었으므로 소녀가 뭐라고 말하는지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백리빙은 몹시 초조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오빠, 왜 그래요? 중독됐나요?" 소영은 백리빙의 날카로운 외침에 놀란 듯 고개를 돌려 그녀를 한 번 쳐다 보더니 풀썩 주저앉 고 말았다. 백리빙은 자기가 지금 남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소영에게 다가와 그의 오른손을 붙잡고 울면서 소리쳤다. "오빠, 왜 말을 하지 않아요?" 이때 등일뢰와 전엽청이 그에게 다가 왔다. 그러나 그들의 걸음 역시 몹시 느릿느릿했다. 그들도 백리빙과 마찬가지로 양쪽 다리에힘이 없었고 걸음을 걷기조차 힘이 들었던 것이다. 무당노파의 까마귀 같은 웃음소리가 연달아 들려 왔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뚝 그치더니 노파 는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강철로 만든 나한이라서 독을 겁내지 않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너는 다만 배공이 약간 정심하여 항독하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조금 강할 뿐이었구나?" 그녀는 속으로 매우 기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때 그 노파 자신도 갑자기 두 손으로 배를 움켜 쥐더니 몹시 아픈 듯이 쭈그리고 앉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녀는 득의만면하여 너무나 방성대소를 터뜨렸기 때문에 조금 전에 부러진 갈비뼈가 다시 쑤셔 왔던 것이다. 등일뢰와 전엽청은 소영의 앞에까지 다다랐다. 원래 두 사람은 마지막 한 입의 원기를 소모해서 까지 소영을 보호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몇 발자국 걸어 나온 후 비로소 희망이 전무 하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제아무리 두 사람이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 해도 도저히 소영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무당노파 역시 대단히 증상을 입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었다. 현재로는 노 파의 손녀만이 아무 탈없이 무사하였다. 등일뢰는 정신을 바싹 차려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낭자. 어서 해약을 내 놓으시오." 소녀는 쓰러진 소영을 힐끗 바라 보더니 물었다. "이 노도사를 구하려구요?" "그렇소. 지금 우리는 세 사람이고 낭자는 혼자이니 힘이 달리고 상대도 되지 않소."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노도사는 구할 수 없어요." "어째서?" "그의 무공이 너무 강해서 그를 살려 내면 우리는 모두 몰살을 당하게 되요." 등일뢰는 암암리에 생각했다. '보건데 이 계집애는 목하의 상항을 아직 잘 모르고 있구나. 한 번 으름장을 놔서 겁을 집어 먹 게 해야 되겠군 그래.' 그는 이렇게 마음 먹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낭자가 만약 해약을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정없이 뺏는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노파가 이때 소리쳤다. "용아야, 그의 말을 믿지 말라. 그들에게는 지금 싸울 힘이 없단다. 너도 손만 들면 즉시 그들을 죽일 수 있단다." 소녀는 정신이 혼란했다. '정말 할머님 말이 옳은가? 아니면 거짓말인가?' 등일뢰는 매우 불안했다. 그도 속으로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이 계집아이가 만약 정말로 손을 쓰면 우리는 항거할 수 없는데 어떡하지?' 그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비록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지만 여전히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냉정한 태도로 태연하게 말했다. "낭자는 그 말을 정말이라고 생각하오. 아니면 거짓이라고 생각하오?" 소녀는 잠시 잠잠히 생각하더니 제 딴에는 타협안이라고 제시했다. "글쎄요. 우리 이렇게 합시다. 우선 우리 둘이서 싸워요. 정말 당신들에게 싸울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해 보게요." 등일뢰는 속으로 흠칫하였으나 여전히 태연한 척 이렇게 물었다. "낭자는 나와 꼭 승부를 가리고 싶소?" "그래요 당신과 먼저 싸워 본다면 자연히 알 수 있으니까요." 백리빙이 이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이 더러운 계집애야. 우리 오빠를 속여서 너희들을 풀어 주게 하고 다시 독약을 사용하여 그를 해치다니 우리 오빠는 인의군자(人義君子)였으니 어찌 너같은 소인배의 비열한 술수를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 그녀는 다급한 나머지 신분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욕을 퍼붓고 떠들어 댔으나 그 음성은 깨 끗하고 맑아 흡사 꾀꼬리의 울음소리 같았다. 소녀는 어리둥절하여 백리빙을 자세히 바라 보더니 마침내 물었다. "당신은 남자요, 여자요?" 백리빙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너와 무슨 상관이냐?" 무당노파는 백리빙의 언사가 날카로운 것을 보자 아픔을 참고 있다가 기어코 한 마디 내뱉았다. "용아야, 따귀를 두 대 갈겨서 그 계집애의 버릇 좀 고쳐 주어라." 이렇게 소리치다가 상처가 다시 쑤셔서 입을 다물고 얼굴을 찌푸렸다. 소녀는 할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 손을 휘둘러 일장을 쳐냈다. 백리빙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마음으로는 비록 피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꼼짝없이 소녀에게 정면으로 뺨을 얻어 맞았다. 백리빙은 다리에 힘이 없어 그만 비틀거 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소녀는 자기의 일장에 이러한 위력이 있음을 보자 매우 기뻤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등일뢰는 백리빙이 소녀에게 따귀를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자 크게 놀랐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 렸다. '내 이런 나이에 만약 저 계집애에게 따귀를 맞게 된다면 죽을 때까지 유감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되자 감히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소녀는 백리빙을 때려 눕힌 후 서서히 소영에게 다가 갔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소영의 수염을 잡더니 웃으며 종알거렸다. "너는 아까 나를 꼼짝 못하게 했지? 그래서 나는 지금 네 따귀를 두 대 갈겨서 분풀이를 해야겠 다." 소영의 수염은 원래 가짜였으므로 소녀가 힘껏 잡아 당기자 대번에 후드득 떨어졌다. 그리고 얼 굴에 바른 변장의 약물도 역시 가짜 수염을 따라 조각조각 벗겨졌다. 소녀는 뜻밖의 사태에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곧 냉소하였다. "흥, 알고보니 그대는 가짜 도사였구나!" 전엽청은 한 자루의 칠휴검을 꺼내 들고 입을 열었다. "낭자, 아직도 해약을 꺼내지 않을 텐가? 정 그렇다면 나보고 독수를 썼다고 원망을 하지 마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큰소리치지 말아요. 당신도 마찬가지로 이미 싸울 힘이 없으니까...." 전엽청은 태연한 척 소리쳤다. "그러나 암기를 발할 수 있는 힘은 아직 있소." 그는 본래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칠휴검을 던지려 했다. 그러나 검을 손에 쥐자 그와 같은 행 동은 대장부가 취할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부지중에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전엽청이 들은 단검에서 한광이 번쩍이며, 상당히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본 소녀는 즉시 오 른손을 내밀어 일장을 뻗쳤다. 전엽청은 전신에 기운이 없고 동작도 느려서 암기를 채 던지기도 전에 소녀의 일장을 맞았다. 소녀의 일장은 전엽청의 오른손을 정통으로 때렸다. 그의 손에 단검은 맥없이 떨어졌고 사람 역 시 빙그르르 돌더니 종내 주저앉고 말았다. 등일뢰는 가볍게 탄식했다. "전형. 우리는 지금 보통 사람의 힘조차 지니고 있지 않은데 어찌 그녀를 상대할 수 있겠소?" 전엽청이 곧 대답했다. "동형의 뜻은 우리가 목을 늘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요?" "그것 말고 또 무슨 좋은 방책이 있겠소?" 전엽청은 탄식을 하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자기의 일장으로 전엽청을 쓰러뜨린 소녀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대들은 천천히 기다리시오. 나는 먼저 이 가짜 도사의 진짜 얼굴을 보아야겠소." 하더니 소영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얼굴의 약물을 벗겼다. 백리빙은 소녀에게 따귀를 맞고 쓰러졌다가 깨어났다. 그리고 소녀가 소영의 얼굴에 바른 약품 을 떼어 내는 것을 보자 애써 일어나려고 노력하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건드리지 말라!" 소녀는 손을 멈추고 백리빙을 돌아 보았다. "왜 그러지?" 백리빙은 다시 필사적으로 외쳤다. "너는 그를 건드릴 수 없어!" 그러나 소녀는 코웃음쳤다. "네가 악을 썼다고 무슨 소용이 있니? 나를 막을 수도 없으면서..... 이 가짜 도사의 진짜 얼굴을 본 후 다시 너의 진짜 모습도 알아 봐야겠구나." 백리빙은 너무 기가 차서 입을 열지 못했다. 소녀는 소영의 도포자락을 찢어 그의 얼굴에 바른 약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영롱 한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준수하기 그지없어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을 만한 미소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소녀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백리빙의 곁으로 다가갔다. "너는 스스로 벗을 테냐? 아니면 내가 벗겨 줄까?" 뻑리빙은 몹시 당황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이러느냐? 소녀는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알아 보려고 그런다." 만약 소녀의 손으로 옷이 벗겨진다면 다시 없는 수치라고 생각한 백리빙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나는 여자의 몸이다." 소녀가 약간 비꼬듯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여자라면 어째서 도사 차림을 하고 그와 함께 다닌단 말이냐?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너 는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백리빙도 지지 않고 말했다. "그는 내 오빠인데 아무 것도 흉할 것이 없지." 소녀는 웃었다. "오, 그래?" 하며 갑자기 눈썹을 찌푸리더니 계속 물었다. . "그렇다면 너희들은 어째서 변장을 하고 노도사로 가장했느냐?" "그것은 원수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소녀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당분간 네 말을 믿어 주마!" 백리빙은 길게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네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겠니?" 처량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소녀는 서서히 물었다. "무슨 부탁인데?" 백리빙은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내 오빠를 구해 줘. 그는 정의의 군자이며 이 세상에서 보기드문 호남아야. 그러니 너는 그를 죽게 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 소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백리빙은 크게 끄덕였다. "그럼, 내 말에 거짓은 하나도 없다." 소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안 돼! 그의 무공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내가 만일 그를 구해 주면 할머님과 나는 그에게 멸시 를 당하게 되니까 안 돼!" 백리빙이 부드럽게 말했다. "팬찮아. 네가 나의 생사를 장악하게 된다면 그로 하여금 너희들의 말에 순순히 복종하게 할 수 있어." 백리빙은 소영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굴욕을 참아 가며 애원하는 것이었다. 소녀는 아직도 완강했다. "그는 우리 할머님을 부상시켰는데 내가 어찌 구해 줄 수 있겠니?" 백리빙은 조용히 말했다. "그는 본래 너와 할머니를 죽일 수 있었어. 그러나 그는 너희들을 용서해 주었지 않니?" 소녀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애원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비로소 할머님의 목숨을 용서해 준 것 뿐이야." 백리빙은 재빨리 파고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역시 너에게 애원하지 않니?" 이때 무당노파가 서서히 다가 왔다. "용아야! 그들을 총서해 줘서는 안 된다." 소녀가 노파에게 물었다.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그들을 죽여야 하지 않아요?"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들을 죽여야지. 호랑이를 살려 두어 후환을 남기게 될 바에야 아주 뿌리를 뽑아야 한 다." 소녀가 가볍게 탄식을 하고 노파에게 말했다. "할머님. 아까 노도사가 우리를 정말 죽이려고 했다면 현재 우리가 이렇게 살지 못했을 게 아니 겠어요? 그때 그가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났지 않아요?" 노파는 흠칫 놀라며 어리둥절했다. "아니! 그럼 너는 그들을 용서해 주겠다는 말이냐?" 138. 포로가 된 소영 소녀는 노파를 바라 보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들의 목숨을 살려 주고, 대신 그들의 무공을 없앨 생각인데 할머님의 의견은 어떠세요?" 무당노파는 소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놈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네 뜻대로 무공을 없앨 수도 있고 목숨을 살려 줄 수도 있 다." 그때 백리빙이 말했다. "저 사람 대신으로 제가 죽겠어요." 노파는 백리빙의 얼굴을 힐끗 바라 보더니 입가에 조소에 찬 싸늘한 웃음을 띠었다. "네가 그 대신 죽겠다고?" "그래요. 당신은 한 사람만 죽일 목적이니 내가 오빠와 다를 바가 뭐 있겠어요." 노파는 냉랭히 말했다. "그놈을 살리려면 너희들 세 명의 목숨과 바꾸어야 한다." 백리빙은 대들었다. "어째서요?" 노파는 차디차게 말했다. "그의 무공은 너무 강해서 일반 사람 한 둘로는 그의 적수가 못되니까 말이다." 백리빙이 또 말을 하려는데 전엽청이 재빨리 나서서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말했다. "노부인께서 세 목숨과 바꾼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의 독을 해제해 주는 것도 포함되었 겠지요?" 한동안 잠잠히 침묵을 지키던 노파는 쾌히 승낙했다. "좋아! 내가 그의 몸의 독을 해독시켜 주겠다." 전엽청은 생각을 정리했다. '무림은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가볍게 한숨을 몰아쉰 그는 결심을 하고 말했다. "좋소. 당신이 먼저 그의 독상을 치료하시오. 그것을 본 후에 나는 자결로써 그 값을 보답하겠 소." 전엽청은 서슴없이 자기의 전정을 토로했다. 노파는 등일뢰에게 시선을 돌리고 천천히 물었다. "인생은 언제든 죽음을 면치 못하지. 자고로 싫어하는 것이 개죽음이오. 그대의 나이는 비교적 많으니 자연 이 일에 동의를 할 것인지 대답해 보오." 등일뢰는 서서히 대답했다. "노부인이 분명히 언약을 지키신다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소." 이 말을 들은 노파는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더니 물었다. "그대들의 말이 모두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오?" 등일뢰와 전엽청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우리의 결심에는 티끌만큼도 거짓이 없소." 시선을 소영의 얼굴로 돌린 노파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 보더니 길게 한숨 지으며 말했 다. "대관절 그가 어떤 인물이기에 그대들 세 명이 자신의 죽음으로써 그의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가?" 전엽청이 대뜸 말했다. "노부인이 이미 응하신 이상 그가 누군지 물으실 필요없이 우리 한 마디로 못박읍시다." 노파는 다시 심술궂게 나왔다. "그대들이 만약 그의 신분을 밝혀 주지 않는다면 나도 그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지도 모르 오." 등일뢰와 눈이 마주친 전엽청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여실히 나타나 있었다. 언제나 총명하고 영리한 백리빙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그가 누군지 알려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것을 밝힌 후에 당신은 꼭 언약을 지 켜야 하며 반드시 그의 독성을 완치시켜 줘야 해요." 노파는 핫핫 웃었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 백리빙은 속으로 그 무당을 지극히 저주했다. 그녀는 마침내 못참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 망할 거지 할망구야! 훗날 내 손아귀에 걸려 들면 기필코 너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서 까 마귀 밥을 만들겠다." 무당노파는 새파랗게 질리도록 노발대발했다. "이 더러운 계집애야! 사내들과 쏘다니는 주제에 너도 큰소리 치지마라. 너도 좋은 계집애는 아 닐 것이다." 노파는 언성을 높이자 다시 상처가 쑤셔서 배를 움켜 쥐고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간신히 고통을 참으며 쥐어짜는 듯이 소리쳤다. "용아야, 저 계집애의 따귀를 두 대 갈겨서 이 할머니의 화풀이를 해다오" 소녀는 백리빙에게 다가 왔다. "할머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으니 할 수 없다." 하며 오른손을 날려 찰싹찰싹 보기 좋게 따귀를 후려 갈겼다. 백리빙은 매섭게 때리는 따귀를 맞자, 이리저리 휘청거렸고 입에서는 시뻘건 피가 쏟아졌다. 몸 의 중심을 겨우 잡은 백리빙은 손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때리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천하의 무림 동도들의 생사가 모두 그 한 몸에 달려 있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한사코 소영을 대신하여 시정을 하자 소녀는 크게 호기심이 생겼 다. "너는 그에게 꽤 깊은 정을 갖고 있구나. 대관절 저 사람이 누구이길래 그러느냐?" 무공을 모두 상실한 백리빙은 소영을 구하고 싶은 일념이 간절했으나 실제로 구해 줄 능력이 없 었다. "좋아, 가르쳐 주지! 그는 무림에서 횃불로 숭앙을 받고 있는 바로 소영이다!" 땅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무당노파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뭣이? 그가 바로 소영이라고?" 백리빙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가 바로 소영입니다." 무당노파는 급히 소리쳤다. "용아야! 어서 그 얼굴에 남아 있는 약물을 모두 닦아 내라." 소녀는 이 말을 듣자 수건을 꺼내 소영의 얼굴에 남아 있는 약물을 깨끗이 닦아 냈다. 노파는 황급히 주머니 속에서 하나의 옥병을 꺼냈다. "용아야! 어서 이 약을 먹여라." 소영의 이름을 밝히자 노파가 당황하여 즉시 약을 써 가며 구하는 것을 본 백리빙은 어안이 벙 벙했다. 그러나 속으로 더없이 기뻐서 전엽청과 등일뢰를 힐끗 보며 웃었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빠의 이름은 정말 쟁쟁하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우리는 미리 오빠의 이름을 말했어야 됐을 것을, 그러면 그들에게 사정할 필요도 없었을 게 아닌가.....' 등일뢰가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정을 알기 전에 낭자는 미리 너무 기뻐하지 마시오." 눈을 돌려 바라 보자 소녀는 옥병을 열어 한 알의 환약을 꺼내더니 소영의 입 속에다 넣어 주었 다. 그 환약은 약효가 지극히 빨랐다. 잠시 후에 소영은 몸을 부스스 일으키더니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백리빙이 급히 소리쳤다. "오빠 정신 들었어요? 몸은 좀 어때요?" 서서히 일어나 앉은 소영은 백리빙을 바라 보며 또렷이 대답했다. "괜찮다. 걱정마라!" 무당노파가 웃으며 물었다. "그대가 바로 소영인가?" 소영은 언뜻 손을 들어 수염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그는 얼굴에 그것이 없어진 것을 알자 어리 둥절했다. 소녀가 나서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 가짜 수염은 내가 벌써 버렸어요." 다시 눈을 백리빙에게로 돌린 소영은 그녀의 얼굴에 손자국이 완연하며 입가에 핏자국이 있는 것을 보자 흠칫 놀랐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빙아! 상처가 대단한가?" 백리빙은 눈물이 글썽했으나 입가에는 미소를 띠었다. "아니에요. 별로 대단치 않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듣고 있던 노파가 냉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소영, 나에게 한 가지 일을 알려다오." 소영은 노파를 바라 보며 천천히 물었다. "무슨 일을 말이오?" 노파는 슬그머니 위협했다. "지금 그대는 세 명의 동료와 마찬가지로 손에 닭 잡을 힘조차 없다." 소영이 차갑게 받았다. "그래서?" 노파는 소녀에게 명했다. "용아야. 소영은 믿지 않는 모양이니 네가 일장을 때려서 깨닫게 하여라." 소녀는 곧 오른손을 들어 일장을 후려쳤다. 소영은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일격을 받았다. 쌍방의 장력이 부딪치자 소영은 너덧 발자국 뒷걸음을 치더니 가까스로 몸을 버티고 쓰러지지 않았다. 소녀는 쌀쌀맞게 말했다. "소영! 이제 우리 할머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겠어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멈의 수단이 매우 악랄하구나. 증독과 동시에 무공을 잃게 되니....." 노파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소영. 그들 세 사람은 모두 네 대신 죽기를 서슴지 않았다. 나는 그들 셋의 목숨과 네 한 목숨 을 맞바꾸는 것에 동의했다. 나는 그때 지극히 우스웠지. 세 사람의 목숨으로써 무공을 잃은 불구 인 그대와 바꾸겠다고 나선데 대해서.... 그러나 내가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을 때에는 네 신분을 몰랐다." 여러 번 끔찍한 생사의 위기를 경험해 온 소영은 아주 침착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담담히 일소 했다. "지금 나를 알게 되었으니 어떻게 처치할 작정이오? 어서 그것부터 말하시지....." 노파는 말했다. "길은 두 개 있는데 하나만 선택해라." "어떤 길인지 말해 보시오." "하나는 내가 너를 죽여서 네 머리를 가지고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네가 순순히 내 말에 복종 해서 나와 함께 두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두 사람이란 대관절 누구요?" "심목풍과 사해군주....." 소영은 암암리에 생각했다. "심목풍과 사해군주를 만나면 역시 죽음밖에 없다." 그러나 태연히 대꾸했다. "노부인은 나를 죽음을 겁내는 소인으로 아시오?" 무당노파는 싸늘하게 웃었다. "너는 영웅이지. 만약 영웅이 아니라면 그들이 나와 손녀를 예빙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영은 냉소를 짓고 싸늘하게 말했다. 심목풍은 육지 오랑캐이고 사해군주는 수상의 해적인데, 그들이 지금 손을 잡고 함께 무림을 주 름잡으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군..." 노파는 곧 그 말을 받았다. "너 소영을 상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들 두 사람은 손을 잡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이 당분간 힘을 합한다 하더라도 머지않아 이해 충돌이 생기면 종내는 저휘들끼리 불꽃 튀 는 싸움을 벌일 것이오. 그때 노부인은 어느 쪽을 도와 줄 것이오?" 소영의 음성은 더욱 엄숙해졌다. "노부인이 독을 쓰는 솜씨는 확실히 대단하오. 그런데 독수약왕과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높소?" 노파는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만약 단지 독을 쓰는 수법만 논한다면 나는 그에게 별로 뒤떨어지지 않지. 그러나 종합적으로 독약을 제조하는 재주에 있어서는 나는 독수약왕의 적이 아님을 스스로 알고 있다." 소영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그 독수약왕과 심목풍의 사이도 매우 두텁소. 심목풍이 각대문파의 추격을 받아 크게 패한 후 동산에서 재기하여 다시 성세를 이룩할 수 있게 된 것은 독수약왕이 있었기 때문이었소. 독수약 왕은 제일공신이라 할 수 있소이다. 그러나 심목풍은 여전히 그의 몸에 암암리에 수작을 부렸지 요. 노부인은 그들의 예빙을 받고 산을 내려 왔지만, 그들은 당신의 독을 사용하는 재주를 빌려 현재 궐기하여 심목풍에게 항거하는 가호의 군협들을 상대하려고 하고 있소." 무당노파는 징글맞게 웃었다. "중요한 것은 너 소영을 상대하는 일이지"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받아 넘겼다. "일단 나 소영이 피살되면 그들의 예빙을 받은 노부인의 가치는 따라서 사라지는 것이오. 심목 풍의 위인이 독랄하니 당신들 조손(祖孫), 두 사람은 두 개의 길밖에 없을 것이오. 하나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피살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왼히 그들의 노예로 예속되어 그를 위해 목숨을 바 쳐야 하는 것이오." 무당노파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떼었다. "심목풍의 위인이 악독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심목풍과 소요자들과 언약이 되어 있다. 이 몸은 너 소영을 상대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일이 성사되는 대로 즉시 산으 로 돌아 간다." "노부인은 어찌 그들이 연약을 준수한다고 장담할 수 있소? 그것은 그렇다 치고 나는 이미 노부 인 수중에 들었으니 당신 마음대로 처치하시오." 이때 백리빙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노부인은 그들의 예물을 받고 하산하였으니 그 예물은 상당히 많겠군요?" 무당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백리빙은 다시 물었다. "모두 무슨 물건들인가요?" "진주가 백 알에다 황금이 만 냥, 그리고 진귀한 옥합과 명화(名畵), 또한 값진 비단, 모두가 진 귀한 물건들이지." 백리빙은 생긋 웃고 제의했다. "우리에게 해독약을 준다면 우리는 그 예물의 갑절을 드리겠어요.."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누구길래 그렇게 큰 소리를 치는 거냐?" "저의 부친의 이름을 노부인은 들으셨을 거예요." 노파는 의아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 보았다. "누군데?" "북천존자예요." 노파는 깜짝 놀랐다. "북천존자가 너의 부친이냐?" "그래요! 당신은 믿지 못하십니까?" 노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 실로 믿기 어렵구나." 소영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만약 지금 이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모은 것을 따진다면 중주이고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 오. 그들은 나와 의형제간이지만 나는 예물로써 목숨을 구하고 싶진 않소! 지금 우리는 항거할 능 력이 없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을 잡든 머리를 자르든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나의 말은 이로써 끝났으니 노부인은 더 이상 나와 이 일에 대해서 논하지 맙시다." 백리빙이 다시 나섰다. "오빠, 오빠는 죽어선 안 돼요" 소영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빙아, 생사는 하늘에 달렸다. 강제로 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가 만약 아까 마음을 조금만 악 독하게 먹고 용낭자의 애원에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조손은 벌써 시체로 변한 지 오래됐을 것이다." 소녀는 갑자기 노파를 바라 보며 말했다. "할머님, 용아도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해도 좋을까요?" "오냐." "아까 내가 소영에게 애원해서 그는 나를 용서해 줬을 뿐 아니라 역시 할머님을 용서해 주었는 데 우리도 지금 그 보답을 해야 되지 않겠어요?" "만약 우리가 소영을 놓아 준다면 백 알의 진주와 만 냥의 황금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진주와 황금을 가져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노파는 웃었다. "나에겐 보배보다 귀한 손녀 너 하나밖에 없다. 나는 너를 위해서 진귀한 보물과 옥합 등을 모 아서 훗날 네가 시집갈 때 혼수로 가져 가게끔 하련다." 노파는 얼굴을 들어 하늘의 숱한 별을 바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풍부한 혼수로써 너를 훌륭한 곳으로 시집 보낼 것이다. 전무후무하게 호 화로운 혼수를 마련해 주겠다." 소녀는 장탄식을 했다. "할머니. 저는 누구에게 시집을 가요?" "그야 물론 내가 선택해야지. 너는 꽃같이 아름다운 데다가 종래에 없었던 호화로운 혼수까지 곁들였으니 너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을 것이다." 소녀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남이 나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해서 제가 그 집으로 시집을 가야 하나요?" 노파는 호탕하게 웃었다. "이 철부지야.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신랑감을한 사람 골라 내야지. 내 마음대 로 말이다." 소녀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할머님이 손녀에게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노파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째서?" "제가 많은 재물을 지니고 있게 된다면 저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사람은 제가 탐이 나서가 아니 라 제가 갖고 있는 재물을 탐낼 것이 아니겠어요?" 노파는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이 할머니는 이렇게 늙었으니 머지 않아 저승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너를 위해 재 물을 남겨 두지 않으면 내가 어찌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겠느냐?" 소녀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할머님, 할머님은 어찌 자신을 위해서 협의의 명성을 남기려고 하지 않으세요. 그 금은보화는 모두 몸 밖의 물건인데 가져서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노파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는 이 할머니더러 무슨 명성을 세우라는 말이냐?"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다. "강호를 진동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큰 일을 하는 것이에요." 노파는 곧 대꾸했다. "이 할머니가 그 일을 지금 하고 있지 않느냐? 강호에서 허다한 사람이 그의 목을 노리고 있지 만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 그런데 이 할머니가 그를 생포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강호를 진동시키는 커다란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심목풍은 나를 쌍수로 환영할 것이다. 이 렇게 되면 할머니의 명성은 즉시 강호에 널리 퍼질 것이며 사람들 입에 쉴 사이 없이 오르내릴 것이 틀림없지." 소녀는 확고한 결의를 표정에 담고 노파에게 말했다. "할머니, 만약 우리가 생포했던 저 소영을 풀어 준다면 마찬가지로 강호를 진동시킬 수 있습니 다." 노파는 안색이 변했다. "그러면 금은보화를 놓치게 된다." "할머니께서 만약 이 손녀딸에게 그것을 남겨 주신다면 저는 그런 부정한 보물들을 결코 갖지 않겠어요." 노파는 잠시 고민하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손녀를 바라 보았다. "한 가지 내가 너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있는데 지금은 불가불 그것을 알려 주지 않 으면 안 되겠구나."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할머님은 항상 우리 조손 두 사람은 서로 목숨처럼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고 하셨는데 저에게 알려서 안 될 일도 있었나요?" 노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비록 심목풍과 소요자의 예물을 받고 하산했으나 사실은 그 들의 협박을 받고 내려 온 것이나 다름 없다." 소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요?" "우리는 이미 심목풍의 암독에 걸려 있단다." 소녀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할머님께서 독에 걸리셨어요?" 노파는 끄덕였다. "내 이런 나이에 독이 발작해서 죽는다 해도 억울할 것은 없지만 너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 "어머! 저도 중독됐어요?" 노파는 탄식했다. "그들은 네가 나의 둘도 없는 보물이며 내 생명보다 더 귀중한 손녀인 것을 잘 알고 있단다. 그 래서 역시 네 몸에도 독을 풀어 넣었단다." "그런데 저는 어째 그것을 조금도 몰랐을까요?" "그것은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독이기 때문에 그렇단다. 바로 독수약왕이 직접 조제한 것인데 독이 발작하기 전까지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지만 일단 독이 발작되면 갑자기 일곱개의 구멍 에서 피가 쏟아져 죽게 되는 것이다." 소영은 이 말을 듣자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 노파의 독을 사용하는 솜씨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것이다. 등일뢰 전엽청 등 일류고수들도 어떻게 독을 풀어 넣었는지 모를 정도지. 그녀의 몸에 백여 개나 되는 주머니 속에는 독이 얼마 나 많이 들어 있는지 모를 정도인데 천만 뜻밖에도 이렇게 독을 사용하는 명수도 역시 독에 묶이 다니.... 세상은 요지경 속이군.....'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할머님이 말씀하신 그 정중한 예의로써 우리를 초빙했다는 말은 저를 속이는 말이었 군요?" "속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예물로써 우리들을 초빙하고 또 한편으로는 몸에 독을 넣어 반드시 나오게끔 수단을 쓴 것이다." 소녀는 소영을 힐끗 되돌아 보더니 다시 노파에게 말했다. "할머님, 할머님은 독을 조제하시는 명수이신데 해독하는 방법을 알아 낼 수 없으셨단 말인가 요?"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그 독약은 독수약왕이 조제한 것이라 이 할머니도 해독할 재주가 없구나." 소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돌려 소영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소대협, 정말 미안하군요. 제 할머님은 연세가 많으시니 할머님께서 독이 발작하여 돌아가시는 것을 저는 차마 볼 수가 없어요.." 소영은 곧 대꾸했다. "모두 자세히 들었소. 낭자의 심정을 나는 이해하겠소이다." 소녀는 갑자기 노파에게 물었다. "할머님, 우리들 몸에 들은 독이 소영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우리가 소영을 놓아 준 다음 심목 풍을 만나러 가도 되지 않아요?"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크게 다르다. 심목풍이 우리들 몸에 독을 넣은 것이나 많은 예물로써 초빙을 한 것도 모두 소영을 상대하라는 데에 바로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어찌 그를 놓아 줄 수 있단 말이냐." 노파는 마음이 무거운 듯 한숨을 쉬더니 계속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놓아 준다 해도 심목풍은 이목이 영민하여 강호에는 도처에 그의 이목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조손의 일거일동은 심목풍의 부하들이 도처에서 암중에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흠칫하며 사방을 둘러 보았다. "어디에 있어요?" 소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용낭자, 당신의 조모님은 당신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소. 그리고 당신들의 입장은 매우 기묘하군 요. 이러한 상황하에선 어쩔 수 없이 당신들을 따를 수밖에 없겠군요. 그러나....." 노파가 곧 물었다. "무엇인가?" "노부인이 협박을 당하고 예물을 받음으로써 하산하게 된 것은 나 한 사람만 상대하라는 것이 오. 그러니 나와 동행인 저들에게는 무관한 일이니 노부인은 각별히 선처하여 저들을 돌려 보내 기 바라오." 노파는 대꾸했다. "그들은 지금 몸이 성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의 무공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소" 그러자 노파는 머리를 저었다. "만약 그들이 무공을 되찾으면 절대로 나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너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정을 하지 않고 동료를 위해 사정을 하는 것을 보니 무슨 흑심이 있는 모양이구나." 소영은 고개를 흔들며 진지하게 말했다. "노부인,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그들이 무공을 회복한 뒤 이곳을 떠나게 하여 절대로 노부인을 해치지 못하도록 당부하겠소." 노파는 소영을 지그시 바라 보았다. "너무 모험적인 일이다. 나는 칼자루를 적이 쥐고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소영은 냉소를 지었다. "노부인, 당신은 무공을 지닌 사람이 일단 무공을 잃으면 얼마나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무공을 잃고 산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계실 줄 아오" 등일뢰가 갑자기 나서며 소리쳤다. "우리들은 소대협과 동행하여 생사를 함께 하겠소. 소영은 그에게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뭐 있소. 심목풍과 소요자는 모두 나에게 원한이 쌓이고 쌓여 그들은 절대로 나를 섣불리 놓아 주지 않을 것이오. 여러분이 동행한다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결과밖 에 되지 않소. 더구나 손불사 노선배님과 무위도장이 모두 당신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소이다." 소영은 다시 눈을 돌려 노파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노부인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데 숨김없이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오." "무슨 일인가 어서 말해 보아라." "이들의 무공은 아직 회복할 가능성이 있소?" "있지. 그러나 너무 시일이 지나면 곤란하다." "그 시일이 대강 얼마쯤 되오?" "약 삼 개월 정도이다." 이때 백리빙이 갑자기 나서며 말했다. "오빠, 저는 오빠와 함께 가겠어요." "좋아. 너는 무림과는 아무런 은원이 없으니 심목풍은 너의 아버님의 위명에 눌려서 너를 해치 지는 않을 것이다." 백리빙은 침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오빠, 만일 오빠가 죽게되면 저 혼자 살아 나갈 것 같아서 그래 요?" 폭풍이 불면 잡초 뿌리의 견고함을 알게 되고 생사의 순간엔 사랑의 두터움을 알게 되는 법이 다. 백리빙의 이 몇 마디 말이 철퇴처럼 소영의 마음을 때렸다. 그는 서서히 그녀를 바라 보며 부드 럽게 타일렀다. "빙아, 빙아는 본래 남과 다툰 일이 없는데 무슨 고생으로 꼭 나를 따라 강호의 시비 속에 뛰어 들려 하느냐?" 백리빙은 방긋이 웃었다. "오빠와 함께라면 불 속으로 뛰어 든다 해도 저는 즐겁습니다." 이때 소녀가 냉랭히 코웃음치며 노파에게 말했다. "할머님, 저 더러운 계집애가 함께 따라 오지 못하게 하세요." 백리빙은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 보았다. 그녀는 소녀의 얼굴에 노기가 등등한 것을 보자 마 음이 오히려 유쾌해져 유유히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머금을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소영은 자기가 이런 꼴로 다시 심목풍을 만나면 절대로 무사할 수 없어 이번에야말로 죽음을 당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앞으로 이 한 가닥 무림의 사악한 세력에 항거하려면 전적으로 손불사와 무위도장의 힘을 빌려 야 한다. 그는 자신의 품 속에 든 화산검보(華山劍譜)와 소림의 탄지신공(彈指神功)등 두 권의 비급이 있 는데 등일뢰와 전엽청에게 넘겨 주어 그들에게 손불사와 무위도장에게 전달하게끔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영은 이렇듯 생각하며 눈을 노파에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노부인, 나는 두 명의 동묘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할 것이 있소. 이 말이 끝나면 당신을 따라 심 목풍과 소소요자를 만나러 가겠으니 허락해 주시오." 노파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나 시간을 너무 끌지 마라." "얼마 걸리지 않소." 소영은 등일뢰와 전엽청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침통한 어조로 말하였다. "죽음은 태산과 같이 무거울 수도 있고 또한 가볍기가 새털과 갈이 무의미할 수도 있소. 두 분 이 만약 나와 함께 죽으러 가겠다면 그것은 값어치 없는 무의미한 죽음일 뿐이요." 등일뢰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우리들이 음식에 중독되어서 소대협으로 하여금 저 무당노파와 충돌케 하지 않았다면 이 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오." 전엽청도 한 마디 했다. "철저히 규명한다면 이번에 화는 제가 원인인 것이오. 그런데 소대협과 백리낭자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했으니....." 소영은 그들의 말을 제지했다.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이니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소? 지금 한 가지 중요한 일이 있는데 두 분께서 반드시 잘 처리하여야 하오." 등일뢰가 물었다. "무슨 일이오? 우리들은 이미 무공을 잃었으니 소대협의 기대에 어긋날 것이오."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을 계획하는 것은 사람이 하고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맡겨져 있소. 두 분께서 전력을 다했다고 자부만 할 수 있으면 되오." 하고 잠시 말을 그쳤다가 한층 목소리를 낮게 하고 말했다. "내게는 두 권의 책이 있는데 수고스럽지만 두 분께서 기필코 그것을 손노선배님과 무위도장에 게 전달하여 주시오." 전엽청이 곧 대답했다.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소이다." 소영은 엄숙한 어조로 이어 말했다. "이 일은 극히 중요한 일이니 필요시에는 두 분께서 변장을 하여 심목풍의 이목을 피하도록 하 시오." 등일뢰는 비장한 결심을 얼굴에 나타내며 대답했다. "물건을 잃으면 사람도 잃을 것이며, 물건이 건재하면 사람도 반드시 건재할 것이외다. 우리들은 목숨을 걸고 최대한의 노력을 하겠으니 소대협께서는 과히 걱정 마시오." 소영이 눈을 돌려 노파의 거동을 살피니 그녀는 이쪽의 일거일동에 전신경을 모으고 살피고 있 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암암리에 그녀의 눈치를 훔쳐 보며 걱정하였다. '내가 만약 두 권의 무공비급을 이들에게 공공연히 전해 준다면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는 지도 모른다. 혹시 노파가 소녀를 시켜 이것을 가져 오라고 한다면 큰일이다. 그러므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노파의 주위력을 분산시켜서 내가 이 책을 건네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해야겠는데.....' 그러나 별다른 뾰족한 수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그는 은근히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때 마침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노파는 언뜻 고개를 돌려 말발굽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 보았다. 바로 그 찰라 재빨리 두 권의 비급을 꺼낸 소영은 눈깜짝할 사이에 그것을 등일뢰의 손에 넘겼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 어 당부했다. "두 분은 부디 조심하시오!" 그는 다시 목소리를 높여 태연히 말을 계속했다. "중주이고에게 내가 나무상자를 하나 맡긴 것이 있소. 두 분이 만약 그들을 만나거든 그들에게 상자를 열어 보라고 하시오. 그리고 그 상자 속의 물건을 그들에게 잘 처리하라고 아울러 일러 주시오." 지금 이러한 상태 아래 이 몇 마디 말을 하자 생사와 이별의 슬픔이 갑자기 그들을 엄습했다. 등일뢰가 침통한 얼굴로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은 길인천상(吉人天相)하니 이번 행차에 틀림없이 무사하리라 믿소이다." 소영은 착잡한 심정을 억지로 감추고 나직이 대답했다. "두 분은 어서 이곳을 뜨시오. 부디 먼길을 몸조심하시오. 두 분의 무운을 빌겠소." 등일뢰와 전엽청은 소영이 자기들에게 왜 빨리 가라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즉시 허리를 굽히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저희들은 이것으로 작별하겠소이다." 그들은 몸을 돌려 총총히 걸어 갔다. 소영은 두 사람을 멀리 보내자 마음이 몹시 홀가분해졌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들이 부디 무사히 길을 재촉해서 무위도장과 손불사에게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이때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 오더니 두 필의 건장한 준마가 노파의 곁으로 접근하였다. 마상의 사람은 훌쩍 뛰어 내려 노파에게 다가 서더니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였다. 소영은 노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 바로 영남쌍걸임을 알자 즉시 그쪽으로 가까이 걸어 갔다. 대마(大魔) 마파가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이것이 바로 구석구석 찾아도 없던 물건을 전혀 힘들이지 않고 뜻밖에 얻는다는 격이지....." 그는 웃다가 눈길을 돌려 다가 오는 소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그리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귀하가 바로 소영이오?" "그렇소!" 마파는 소영의 아래위를 훑어 보더니 다시 거만하게 웃었다. "귀하의 대명은 강호에서 상당히 쟁쟁하여 나는 어른인 줄 알았었소. 그런데 꼬마일 줄은 정말 미처 몰랐는 걸....." 이마가 다음 말을 받았다. "노부인, 우리는 오다가 다른 두 사람이 도망가는 것을 보았는데 가서 잡아 오는 것이 어떨까 요?" 이 말을 듣자 소영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큰일났구나. 이것들이 두 사람을 추격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들의 몸에 지닌 비급이 탄로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일을 잘 하려다가 오히려 그르치게 되는 꼴이 되겠구나. 어쩌면 좋지?' 소영은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내심 몹시 초조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매우 태연한 척 가장을 하 고 냉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애석하게도 내 몸에 독이 침입하여 무공을 모두 잃었으니...." 이 말에 마파가 곧 나서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만약 귀하가 무공을 잃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겠단 말이오?" 소영은 그를 똑바로 바라 보며 두려움 없이 말했다. "그대가 지껄인 공경치 못한 말을 용서치 않았을 것이며 그대들 두 사람을 한 번 잘 가르쳐 주 었을 것이외다." 이마가 이 말에 노했다. "이놈이, 정말! 지금의 처지도 모르고 아직도 건방지게 주둥아리를 놀리는군 그래?" 그러면서 말과 동시에 손을 들어 일장을 휘둘렀다. 소영은 그가 일장을 뻗치는 것을 보았으나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퍽! 소리와 함께 그의 왼쪽 뺨에 적중되었다. 이 일장은 굉장히 강력했다. 세차게 얻어 맞은 소영은 몸이 두 바퀴 나 빙그르 돌더니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소영은 강호에 나온 이래 이러한 창피는 일찍이 당해 보지 못했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 다. "악, 오빠!" 백리빙이 깜짝 놀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달려 왔다. 그녀는 정신없이 손을 내밀어 쓰러진 소영을 부축했다. 소영은 심한 모욕과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속으로 뇌까렸다. "저 무당할멈은 무슨 독약을 썼기에 이토록 전신의 진기를 남김없이 소모시켰을까? 어떻게 되었 기에 전혀 무공을 펼쳐 낼 수 없는지 모르겠군. 만약 저 노파가 크게 일을 벌인다면 전체 무림은 그들 악당의 공세하에 들어 갈 것이다. 이후에 만약 나에게 다시 저들을 쳐부술 기회가 온다면 그녀를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며 주저 않고 죽여 버리겠다." 소영은 속으로나마 이렇게 자기의 울분을 달랬다. 참을 수 없는 모욕과 누를 길 없는 분노는 소 영의 전신을 부르르 떨게 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무공을 잃었으니 그들에게 무슨 수로 대항한단 말인가? 소영은 여러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이를 악물고 자신을 제어하고 있었다. 그는 백리빙이 달려 와 당황히 부축을 하자 겨우 이성을 되찾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암암리에 등일뢰와 전엽청이 사라진 쪽을 보았다. 그들의 모습이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심 다행으로 생각했 다. '제발 저들이 무사히 손불사와 무위도장을 만나 두 권의 비급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139. 영남쌍마의 추행 영남쌍마는 소영이 따귀를 얻어 맞고 맥없이 쓰러지며 자기들에게 모욕을 당했으면서도 아무런 노여움도 나타내지 않는 것을 보자 속으로 감탄했다. '이 소영이란 놈은 나이는 어리지만 수양은 많이 쌓았구나. 참으로 보통 사람이 따르기 어려울 정도로군.' 이때 갑자기 소녀는 소영을 힐끗 바라 보더니 영남쌍마를 향해 야무지게 소리쳤다.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을 때렸지요?" 이마는 얼떨떨해서 물었다. "낭자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오?" 손가락으로 영남쌍마를 가리키며 소녀는 계속 소리쳤다. "그대는 무슨 속셈으로 사람을 때렸는가?" 이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낭자는 내가 왜 소영을 때렸는가 따지는 것이오?" "그래요! 소영은 우리가 붙잡은 포로이기 때문에 그대들은 때릴 자격이 없어요." 마파도 역시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렇소. 소영은 당신들 조손이 잡은 것이오. 그러나 우리 형제가 그를 한 대쯤 갈겼다고 나쁠 것이 뭐 있소?" 소녀는 냉랭히 대꾸했다. "못 때려요! 때린다 해도 우리 조손이 때려야 해요." 마파는 고개를 돌려 이마를 쳐다 보고 무엇인가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마는 역시 무엇인 지 소녀가 알아 듣지 못하는 언어로써 대꾸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썹을 치켜 세운 소녀는 귀를 기울여 열심히 들어 보았다. 그들이 무언가 지껄이기는 하는데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대들은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것인가?" 마파는 냉소를 짓고 눈을 돌려 노파를 바라 보았다. "노부인, 당신의 신체는 건강하구려." 노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몸은 대단히 심한 내상을 입었소이다." 마파는 싸늘하게 웃었다. "우리 형제는 이번에 명령을 받들고 노부인을 모시러 왔소. 그런데 뜻밖에 노부인께서 소영을 사로잡으셨구려. 만약 심대장주와 소요도장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상당히 기뻐하실 것이오." 노파는 얼굴빛이 약간 변하더니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이 몸은 우연히 소영을 만나서 사로잡은 것 뿐이오. 두 분께서 먼 길에 저희 조손을 맞이하러 오셨으니 이것 또한 하나의 크나큰 공로이오. 두 분 역시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마파도 빙긋 웃었다. "노부인께서 이처럼 우리 형제를 밀어 주시니 우리 형제는 더없이 감사하외다. 하지만....." 그러더니 말을 끊고 갑자기 손을 뒤로 돌려 소녀의 오른손을 덥석 끌어 잡았다. 소녀는 매우 영리했지만 그 마파가 갑자기 손을 써서 자기의 맥박을 짚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의 힘이 굉장히 강해서 힘껏 뿌리쳤지만 도저히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파가 소녀의 오른손을 잡는 것과 동시에 이마 역시 손을 써서 노파의 오른손을 잡았다. 노파 는 벌써 그들의 속셈을 알아 차렸다. 그러나 내상이 심해서 이마가 자기의 맥박을 짚어 오는 것 을 보고도 피할 수가 없었다. 마파가 껄껄 웃으며 지껄였다. "소영을 사로잡은 이상에는 너희들 조손 두 사람은 심대장주와 소요도장을 만나러 갈 필요가 없 다." 노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마파가 냉랭히 대꾸했다. "심대장주와 소요도장이 그대들 조손을 부른 목적은 바로 그대들에게 소영을 상대케 하려던 것 이다. 그러나 지금 소영이 이미 잡힌 이상 그대들 조손의 이런 무공은 무림 대사에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단 말이다." 노파가 싸늘하게 말을 받았다. "나는 이미 그들과 이야기가 되어 있다. 소영을 잡은 후 우리 조손은 보물을 얻어서 강호를 떠 나 옛곳에 은거하여 다시는 강호에 일을 간섭치 않는다고 말이다." 마파는 코웃음쳤다. "그대들 조손이 다시 은거하려 했다면 우리가 지금 바로 그곳으로 보내 주마." 그는 이렇게 말하고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소영과 백리빙은 이렇게 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자 속으로 감개가 새로왔다. 그러나 무공이 회복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구할 능력도 없고 또한 이 기회 에 도망칠 능력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파가 분노를 참으로 냉랭히 대꾸했다. "두 분은 우리 조손을 죽이려는 것인가?" 마파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두 사람을 죽인 후 소영을 사로잡은 공로도 우리 형제가 차지할 것이다." 노파가 냉소지으며 말했다. "내가 만약 소영의 독을 풀어 준다면 두 분은 아마 그의 적수가 아닐 것이다." 마파가 먼저 흠칫 했으나 담담히 웃어 넘겼다. "노부인은 때가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노파는 하늘을 쳐다 보며 엄숙히 입을 열었다. "심목풍과 소요도장은 무엇 때문에 이몸을 하산케 했는가?" 마파는 대답했다. "그야 물론 노부인이 독을 즐겨 쓰기 때문이지. 소영과 상대케 하기 위해서 노부인을 하산시킨 것이 분명하지." 노파는 중얼거렸다. "천하에 독을 사용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은데 어째서 꼭 나를 하산시켰는지 모르겠군!" 마파가 노파를 쏘아 보며 말했다. "하나는 노부인이 독을 사용하는 솜씨가 매우 고명하여 보통 사람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둘째로는 당신이 재물을 탐내기 때문에 쉽게 현혹될 수 있으므로 그대를 불러 내기로 결 정을 한 것이오!" 노파는 비웃었다. "이몸이 독을 사용하는 솜씨에는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을 두 분께서는 아시오?" 마파가 큰소리쳤다. "우리 형제는 그대들 조손을 맞이하라는 명령을 받아 왔는데 그것을 모를 리가 있겠소?" "어디 한 번 말해 보구려." 마파가 곧 대답했다. "노부인이 독을 사용하는 솜씨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지중에 중독케 하는 것이오." 그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무엇인가 깨달은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노파가 다시 싸늘하게 말했다. "바로 그것이오. 두 분은 큰 잘못을 범했는데 내가 지적해 내지 않으면 안 되겠구려." 마파가 의아스러운 듯이 물었다. "무슨 잘못이오?" 노파가 비웃음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만약 영남의 사투리로 대화를 하지 않고 갑자기 우리 조손의 기혈을 짚었다면 우리들 은 창졸간에 당했을지도 모르오. 그러면 지금 당신들은 나의 독약의 암습을 면했을 것이오. 그러 나 당신들이 영남말로 지껄일 때 이 몸은 이미 준비를 해서 당신들에게 독을 넣었소." 마파는 크게 웃었다. "그대들 조손의 생명은 현재 우리 형제가 장악하고 있소. 우리가 참혹한 고문방식을 사용해서 해약을 내 놓게끔 하면 되지 않는가?" 노파는 냉랭히 웃었다. "만약 이 몸이 내 놓음으로써 우리 조손의 목숨이 보존할 수 있다면 물론 이에 응하겠소. 그러 나 아깝게도 두 분이 우리 조손을 죽이려는 속셈을 너무 일찍 드러냈소이다." 마파는 말을 받았다. "현재 나는 당신들 조손의 목숨을 보장할 것을 약속 하겠소." 노파는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너무 늦었소! 이몸은 다시는 당신들의 말을 믿지 않겠소." 마파는 이마를 되돌아 보고 말했다. "자네 한 번 운기해서 시험해 보게. 정말 이 요사스러운 노파의 독에 걸렸는지....." "저는 전혀 그런 점을 느끼지 못하였소이다." 마파는 눈을 노파에게 돌리고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조부인이 만약 헛된 말로 위협을 한다면 결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노파는 담담히 웃었다. "우리 조손 두 사람의 목숨을 당신들 형제의 목숨과 바꿀 수 있다니 죽어도 한이 없겠소. 두 분 은 마음 놓고 손을 쓰시오." 마파는 왼손을 내밀어 노파의 혈도를 찔렀다. 그리고 스스로 운기해서 시험해 보았다. 진기가 아무 장해 없이 잘 유통되며 중독된 현상이 나타나지 않자 암암리에 뇌까렸다. "이 노파는 독을 사용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현재는 아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지만 중독이 안 됐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그들 조손과 소영을 모두 내가 장악하고 있으니 빨리 죽이든 늦게 죽이든 매일반이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냉랭히 말했다. "노부인이 아무리 우리 몸에다 독을 내렸다 해도 당신에게는 반드시 해약이 있을 터이니 우리가 스스로 꺼내서 사용할 수도 있지 않소?" 노파는 서서히 대답했다. "내 몸에 지닌 해약은 수백 종이 넘는데 만약 당신들이 그 중에서 해독약을 제대로 고를 자신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우리 조손을 죽이시오" 마파는 냉소를 띠고 물었다. "노부인이 우리 몸에 사용한 독은 얼마 후에 발작하는 것이오?" 노파가 잘라 말했다. "열두 시간 후!" "만약 그때 가서도 우리 형제 몸에 발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두 분이 내리는 징벌은 기꺼이 감수하겠소! " 마파가 노파를 노려 보고 쏘아 붙였다. "좋소 이것은 당신 스스로가 한 말이니 그때 가서 발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의 손녀를 먼 저 죽이겠소." 그는 눈을 돌려 이마를 바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독을 사용하는 양손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게." 이마는 곧 노파의 양쪽 손목뼈를 꺾었다. 노파는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비오듯 흘러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노파는 이를 악물고 고 통을 참으며 한 마디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소영은 암암리에 탄식했다. "이 노파의 위인은 본래 교활하지만 영남쌍마가 그녀보다 더 악독할 줄은 미처 몰랐다. 노파가 손목을 꺾인 고통은 지독할 것이다." 소녀는 자기 할머니의 양쪽 손목이 꺾인 것을 보자 몹시 놀랐다. 그녀는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노파에게 말했다. "할머님!" 그러나 노파는 아픔을 참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이따위 고통이 뭐 크리 대단하냐? 용아야, 울지마라." 소녀는 비록 울부짖는 것은 멈추었지만 여전히 두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노파는 다시 눈길을 마파에게 돌렸다. "내가 지금 당신들과 담판을 하려고 해도 아마 당신들은 이에 응하지 않을 것이오." 마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가 몸에 중독된 현상을 느끼기 전에는 아무런 협박을 당하고 싶지 않소!" "그렇다면 나는 당신들이 발작을 일으켰을 때 다시 담판하는 수밖에 없구려." "그때 우리 형제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당신의 요구를 몇 가지 수락할지도 모르오. 그러나 미 리 밝혀 두겠는데 그 조건이 너무 가혹해서는 안 되오." 노파는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그때 가서 논하기로 하지......" 마파는 다시 이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되니 우리는 조속히 길을 떠나야 하네." 이마는 소영을 바라 보며 대답했다. "그렇소. 이 소영은 강호에 친구가 많으니 도중에 아마 구해 주려는 사람이 많이 나타날 것이 오." "그럼 자네의 뜻으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차라리 그를 죽여서 머리만 가지고 가는 것이 어떻겠소? 머리만 가지고 가서 심목풍과 소요도 장을 만나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이 말을 들은 백리빙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아무런 계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 어 마음이 조급하기만 하고 생각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무슨 댓가를 지불하든지 간에 오빠의 목숨은 보존해야 한다.....' 이때 노파가 고개를 들어 앙천대소를 했다. 마파가 이에 노하여 노파를 노려 보았다. "무엇이 그리 우습소?" 노파는 갈비뼈의 상처가 여전히 대단했다. 한바탕 웃어제치니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가까스로 지탱하고 참으며 마파가 묻기를 기다렸다가 웃음을 그쳤다. "당신들 둘이 너무나 우둔하기에 내가 웃은 것이오. 그러나 내가 그 우둔한 당신들의 계략에 빠 졌으니 한편 생각하면 가소롭기 그지 없구려." 마파는 벌컥 화를 냈다. "우리가 어째서 둔하단 말이오?" 노파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꼭 내가 지적을 해야 알겠소?" 마파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만약 억지로 지껄이는 것이라면 내 손이 너무 지독하다고 원망을 하게 될 것이오." 노파는 태연히 웃었다. "만일 이몸의 말에 일리가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 형제가 전적으로 동조하겠소." 노파는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대들의 견식을 넓혀 주겠소." 노파는 영남쌍마를 지그시 노려 보고 말을 시작했다. "두 분이 지금 소영을 죽여 그의 머리를 들고 심목풍과 소요자를 만나러 간다면 그간에 몇 날 며칠이 걸리지 모르지 않소? 그러면 소영의 머리는 아마 벌써 부패될 것이오. 그러면 심목풍과 소요자가 그 머리를 어떻게 소영의 것이라고 식별할 수 있겠소?" 영남쌍마는 노파의 말에 설복된 듯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파는 그들의 표정을 슬쩍 살피더니 다시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그 소영의 머리를 썩지 않게 잘 처리할 수 있다 해도 잘라 낸 머리는 어디까지나 원 래의 소영과는 꼭 같지 않은 법이오. 나는 이미 소영의 무공을 견식해 봤소. 확실히 대단한 것이 었소. 그런데 당신들의 솜씨로 소영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소?" 마파가 확신을 갖고 대답했다. "우리가 수중에 그의 머리가 들려 있는데 어찌 심목풍과 소요자가 믿지 않겠소?" 노파는 다시 빈정거렸다. "만약 그들이 당신들의 그러한 행동을, 상을 탐낸 나머지 공로를 가장했다고 일축해 버린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아마 당신들이 당하는 비참한 말로는 우리 조손보다 더할 것이오." 마파는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기더니 노파에게 물었다. "일리 있는 말이오. 허나 우리가 소영을 데리고 공공연히 행동한다면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겠 소?" "이처럼 우둔한 당신들이 나를 계교 속에 빠뜨려 넣을 수 있었다니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구 려." 마파는 무당노파의 비웃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내 말은 무슨 다른 좋은 대책이 없느냐는 것이오." "물론 얼마든지 좋은 대책이 있소."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없겠소?" "내가 당신들에게 그것을 알려 줘야 하오?" "우리 형제가 그대 조손의 생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오." "우리 조손이 당신들에 의해 피살된다면 당신들 역시 독이 발작하여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오." 마파가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해야 노부인은 말하겠소?" "당신들은 이 늙은이에게 좀 겸손하게 대하시오." 영남쌍마는 서로 힐끗 쳐다 보더니 일제히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노부인의 고견을 경청하겠소." 노파가 천천히 말했다. "그 소영을 도사로 변장시키고 두 분 역시 얼마든지 변장을 할 수 있지 않소?" 마파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과연 높으신 의견이오." "자, 이제 길을 떠나세." 노파는 두 필의 건장한 준마를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소영은 나의 독약으로 무공을 이미 잃었으니 걸어 가기 힘들 것이오. 그러므로 말을 타고 가게 하시오." "그는 심대장주의 주요한 요인이니 물론 우대를 해 드려야지!" 마파가 말하자 다시 노파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소영에게 심한 부상을 당했소. 내 손녀의 혈도도 찍혔으니 모두 이대로는 걸어 갈 수 없소." 마파는 이 말에 쾌히 승낙했다. "좋소. 그대들 조손은 함께 한 말에 타시오." 그러자 곧 이마가 반대하고 나섰다. "안 되오. 저들 조손을 갈라 놓아야 하오." "참 그렇군!" 그들은 즉시 소영과 소녀를 한 필의 말에 같이 태우고 백리빙과 노파를 함께 태웠다. 노파의 두 손목이 모두 꺾이고 오른쪽 발의 두 군데를 마파에 의해 찔렸지만 왼쪽 발은 아직 이 용할 수 있어 능히 말을 몰 수 있었다. 영남쌍마는 앞뒤에 서서 두 필의 말에 탄 사람을 감시했다. 그들은 야음을 타서 급히 길을 재촉 했다. 그러나 노파가 암암리에 말을 조종하여 속도가 일정치 못하게 하니 걸어서 따라 오는 영남쌍마 역시 덩달아 갑자기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며 조종당했다. 백리빙은 비록 노파와 함께 타는 신세가 됐지만 노파를 몹시 저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녀와 한 마 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건마가 한 곳의 숲 가까이 당도했을 때였다. 노파가 갑자기 왼쪽 발로 힘껏 말을 걷어 찼다. 건 마는 쏜살처럼 내달려 그 숲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이마가 깜짝 놀라 뒤쫓으려 하자 마파가 크게 소리쳤다. "소영과 용낭자가 여기 있으니 그들은 감히 도망가지 못한다. 쫓아가지 않아도 될 터이니 두고 보아라." 한편 숲모퉁이를 돌아서자 건마 위의 노파는 소리를 죽이고 백리빙에게 말했다. "낭자, 내 몸의 오른쪽 호주머니에 옥병이 하나 있소. 병 안의 빨간 환약은 낭자와 소영의 몸에 막혔던 기독이 해독되고 다시 무공을 되찾게 되는 것이오." 백리빙이 미처 대꾸하기도 전에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마파가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그는 말 앞을 가로막으며 냉랭히 소리쳤다. "노부인! 또다시 육체의 고통을 당하기 싫거든 허튼 수작을 하지 마오. 두 필의 건마 사이는 일 장을 초과해서는 안 되오." 노파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소영에게 증상을 입은 데다가 두 손마저 당신에게 꺾였으니 도저히 이 말을 조종할 능력 이 없소. 게다가 이 낭자는 나에게 증오심을 갖고 있어 협력을 하려고 들지 않으니 이 사나운 건 마를 부족한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제할 수가 없소." 마파는 코웃음쳤다. 그리고 눈길을 백리빙에게 돌리고 말했다. "낭자는 만약 온순하게 굴지 않는다면 좋지 못할 것이오." 백리빙은 커다란 눈만 깜박일 뿐 역시 입을 열고 항변하지 않았다. 마파가 길을 비키자 건마는 다시 앞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노파는 슬쩍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영남쌍마가 모두 소 영과 소녀가 타고 있는 말의 앞뒤를 호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그 즉시 백리빙에게 속삭였다. "이 환약은 만들기 매우 어려우며 나에게도 이 한 병밖에 없는 것이오. 낭자는 조심해서 보관하 여 저 영남쌍마에게 발각되지 않게 하시오." 백리빙은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 노파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든 또는 허위이건 간에 지금 나로서는 한 번 믿어 보는 수밖에 없구나." 백리빙은 매우 조심성 있고 세심하였으므로 비록 노파의 해약이 오른쪽 호주머니 속에 있다는 것을 들어 알았지만 섣불리 손을 내밀어 그것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영남쌍마가 암암리에 감시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들어 경솔한 행동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악!" 하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밤하늘에 퍼졌다. 그리고 곧 누군가가 털썩! 말 위에서 떨어지는 소리 가 났다. 노파는 노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내 어런 손녀를 학대하지 마시오." 백리빙은 이때 오른손을 재빨리 움직여 노파의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해약이 든 옥병을 깜쪽같이 꺼내 옷소매 속에 감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소리난 쪽을 바라 보았다. 소녀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백리빙은 속으로 재빨리 생각했다. '저 계집애가 만약에 고의로 말에서 떨어져서 영남쌍마의 주의력을 분산시켰다면 귀엽도록 영리 하구나.' 이때 이마의 욕설이 들려 왔다. "이 더러운 계집애야, 무공을 잃은 것도 아니고 몇 군데의 혈도를 찍혔을 뿐인데 어찌 말 위에 서 굴러 떨어지는 거냐. 분명히 고의로 소란을 피우는 모양이구나." 마파가 그의 말을 받았다. "여보게,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서 우리 우선 저 두 계집애를 요리해 보세." 이마가 핫핫 웃었다. "형님의 말씀이 옳소. 이 두 계집애는 지극히 매혹적이오. 저는 벌써 그럴 마음이 있었지만 감히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오." 마파가 점점 노골적으로 나왔다. "내가 보기에 이 두 계집은 모두 틀림없는 처녀인 것 같군그래." 이마가 징그러운 소리로 대꾸했다. "노파의 손녀는 아직 처녀일지 모르나 저 계집애는 아마 아닐 것이오. 그녀는 밤낮으로 소영과 붙어 다녔는데 어찌 아직도 처녀의 몸을 지니고 있겠소?" 백리빙은 그들 쌍마의 말을 듣자 심증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속으로 정신없이 뇌까렸 다. '지금 전신에 힘이라고는 조금도 없는데 만일 저 두 놈이 흉칙하게 나온다면 죽을래야 죽을 힘 도 없을 것이다. 이 일을 어쩌나?' 그녀는 경황없이 이것저것 생각을 굴려 봤다. 그러다가 문득 옷소매 속에 감춘 약병이 생각났다. 백리빙은 황급히 옷소매에서 약병을 꺼내어 한 알을 그들 몰래 입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녀는 원래 이 약의 빛깔을 확인한 후에 복용하려 했었다. 그러나 영남쌍마의 짐승같은 이야기 를 들은 후 몹시 놀갈 그녀는 암암리에 결심했던 것이다. '아무리 독약을 잘못 먹었다 해도 죽기밖에 더하랴? 저 짐승같은 놈들에게 욕을 보는 것보다야 죽음이 훨씬 낫지.....' 소녀는 일부러 말에서 굴러 떨어진 후 그 기회에 몇 마디 욕설을 퍼부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쌍마의 말을 듣자 공포에 싸여 감히 욕지거리를 하지 못했다. 그녀는 즉시 변명을 했다. "제 양쪽 다리의 혈도가 찍혀서 말안장에 잘 앉을 수가 없군요." 이마는 징그러운 웃음을 입가에 띠고 소녀를 잡아 일으켜 말 위에 올려 주었다. 소영은 영남쌍마의 학대를 직접 당하고 흉칙한 말을 듣게 되자 몹시 분개되었다. 그러나 무공이 독의 억제를 받아 펼쳐 낼 수 없으니 한숨만 땅이 꺼지게 쉬는 도리밖에 없었다. 소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제 할머님이 당신에게 독을 사용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소영은 웃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영남쌍마가 자기에게 품은 증오심이 두 소녀에 게 보다 더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영은 까딱 말을 잘못 하다가는 반드시 참기 어려운 치욕과 호된 구타를 초래할 것임 을 알아 감히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 일행이 다시 십여 리 길을 걸어 나오자 이미 때는 오경이 지나 가고 머지 않아 동이 틀 무 렵이었다. 이마는 갑자기 걸음을 빨리하여 노파가 타고 있는 말고삐를 잡았다. "형님, 저 앞에 사람이 없는 절간이 한 채 있소. 우리 그곳으로 끌고 가 이 두 계집애를 요리한 다음 길을 떠나면 어떨까요?" "좋지. 우리는 먼저 이 두 계집애에게 인생이 어떻다는 것을 터득시켜 준 다음 죽게 하자." 백리빙과 소녀는 그들의 언어가 다시 없이 추잡한 것에 그만 몸서리를 쳤다. 그녀들은 너무나 두려워 아무 정신도 없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마는 앞장 서서 말을 인도했다. 다시 십여 리 길을 나왔을 때 과연 한 채의 절간이 눈앞에 나 타났다. 이마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스스로 말에서 내리겠소? 아니면 내가 거들어 주어야겠소?" 노파가 맨 처음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백리빙, 소녀, 소영의 순서로 연달아 뛰어 내렸다. 이마는 두 필의 건마를 절간 밖에 선 늙은 버드나무에 묶어 두고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절간 안으로 들어 가지 않고 무얼 꾸물거리고 있소? 내가 안으로 일일이 모셔야 되겠 소?" 소영은 힘없이 걸음을 옮겨 절간으로 들어 갔다. 이때 백리빙이 다가와 나직이 말했다. "오빠 몸이 좀 어때요?" 소영은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 "빙아야! 모두 내가 너를 해쳤구나. 너는 네 몸을 각별히 보살피도록 해라." 백리빙은 눈물이 샘솟듯 했다. 그녀는 비장한 음성으로 나직이 대답했다. "오빠의 동생, 이 백리빙은 죽음으로써 저의 몸을 지키겠어요." 이때 마파는 다시 심술을 부렸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소영의 어깨에 일장을 명중시켰다. 소영은 앞으로 곤두박질을 하고 멀찌감치 너댓 자나 밀려 넘어졌다. 백리빙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아이구 오빠!" 소영에게로 달려 갔다. 이때 마파는 왼손으로 백리빙의 오른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힘껏 잡아 채는 바람에 백리빙이 걸친 소매자락이 후드득 찢어졌다. 노파가 이때 재빨리 말했다. "얘야, 냉정을 잃지 말고 운기조식해라." 이마가 재빨리 오른손을 휘둘러 딱! 소리가 나도록 노파의 얼굴을 후려 갈겼다. 그러자 그녀의 입가에는 곧 한 가닥 선혈이 흘러 내렸다. 소영 등 네 사람 중에서는 노파만이 유독 그들에게 반항할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이미 두 손목 이 꺾이고 내부에도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공력은 매우 심후하였기 때문에 얌전히 운기하여 대항할 수 있었지만 꾹 참고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마는 손을 쓱 내밀어 소녀를 잡더니 껄껄 웃었다. "이 계집애야, 네 할멈을 따라서 다니는 게 뭐가 좋으냐? 순순히 요구를 들어 준다면 나는 너를 데리고 천하의 명승지를 두루두루 구경시켜 주마." 소녀는 마음 속으로 몹시 격분했다. 그러나 사지의 혈도를 모두 찍혔으므로 반항할 힘이 없어 묵묵히 노려 보고만 있었다. 이마는 소녀가 입을 다물고 있자 유쾌한 듯이 웃어젖혔다. "네가 순순히 응하지 않으려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폭력을 쓸 수밖에 없지." 그는 징글맞은 얼굴을 하고 성큼 다가와 그녀의 옷을 서슴지 않고 부욱 찢었다. 노파가 질겁을 하고 격노한 소리를 질렀다. "손을 멈춰라!" 이마는 잠시 손을 떼고 돌아다 보며 웃었다. "이 할멈아, 무슨 교훈이라도 내릴 작정인가?" 노파는 백리빙을 흘깃 쳐다 보았다. 그녀는 암암리에 진기를 운행시키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소녀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녀가 해약을 소영의 손에 넘겼으면 좋을 것인데.....' 그러나 마음의 펴정과는 달리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대는 내 손녀를 아내로 삼고 싶은가? 그렇다면 순서를 밟고 서로 상의를 해야 되지 않나? 이 렇게 완력을 쓴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뭐 있겠는가?" 이마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이런 나이인데 당신의 손녀가 나를 좋아할 리가 있겠소? 그건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는 말을 마치고 두 번 다시 노파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계속 소녀의 옷을 강제로 벗겨 갔다. 소녀가 제아무리 반항을 해도 고양이 앞의 쥐 격으로 이마의 야욕 앞에 너무나 무력 했다.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소녀의 웃은 대부분 찢겨져 어둠 속에서 백설같이 흰 살결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그러나 소녀는 눈을 꼭 감고 아무런 반항도 취하지 못했다. 이마가 소녀의 옷을 거의 벗겼을 때 마파도 서서히 백리빙에게 바짝 다가 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다. 백리빙의 진기는 아직 완전히 유통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토록 사태가 촉박하니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갑자기 앙칼진 소리를 지르면서 재빨리 마파에게 일장을 때렸다. 마파는 창졸간에 당하는 일이라 아무런 방비가 없어 하마터면 그 녀의 일장을 정면으로 맞을 뻔 했다. 그는 급히 몸을 날려 일장을 반격했다. 백리빙은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 그와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백리빙은 재빨리 옷 소매 속에서 옥병을 꺼내 소영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오빠 해약을 받으세요!" 백리빙은 말을 하면서 손발을 한꺼번에 사용하여 마파에게 공격을 가했다. 소영은 백리빙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그녀가 던질 옥병을 받지 못했다. 해약이 든 그 옥병은 소영의 손을 스치고 바로 몸 곁에 탁 떨어졌다. 백리빙은 초식이 정묘하므로 비록 진기가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공격은 대단히 맹 렬했다. 순식간에 열세에 몰린 마파는 그녀에게 반격을 가할 수 없게 되자 다급히 소리쳤다. "둘째, 어서 해약병을 집게나." 그러자 이마는 소녀를 버려 둔 채 급히 소영의 곁으로 달려 왔다. 이때 소녀는 앵두같은 입으로 한 모금의 선혈을 뿜었다. 이마와 소녀의 사이는 몹시 가까왔으며 또한 그는 졸지에 당한 일이라 소녀가 뿜어 낸 선혈에 정통으로 맞았다. 소녀는 도저히 반항할 수 없을 깨닫고 암암리에 죽을 결심을 하고 혀를 깨물었던 것이다. 그런 데 백리빙이 뜻밖에 출수를 하였고 마파가 그녀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자 기쁨이 솟 아 올라 입 안에 고인 피를 힘껏 뿜었던 것이다. 이마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이 빌어먹을 년! " 이마는 욕과 함께 소녀를 힘껏 걷어 찼다. 소녀는 혈도가 찍혀 꼼짝을 못했으므로 이마의 맹렬 한 발길질에 채이고 말았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몸이 날려 펑 소리를 내며 담에 부딪쳤다. 노파가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러댔다. "용아야!" 소영은 이 틈을 타서 재빨리 옥병을 주워 그 안에 든 해약을 꿀꺽 삼켰다. 이마는 발로 소녀를 힘껏 걷어 찬 후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더니 다시 소영의 곁으로 달려 왔다. 소영은 해약을 복용한 후 곧 운기조식에 들어 갔다. 노파는 이마가 소영에게 다가 가는 것을 보자 손녀딸에게로 달려 가던 몸을 갑자기 돌렸다. 그 리고 이마의 갈비뼈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박치기를 하였다. 이마는 갈비 사이를 명중당했다. 이번 공격은 노파가 전신의 공력을 다한 것이었으므로 이마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 라져서 절간의 젯상을 들이받았다. 그러나 노파는 증상의 몸이라서 이 전력을 다한 일격은 성공했지만 자기도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어 땅에 쓰러져 기절을 하고 말았다. 한편 백리빙은 마파와 한동안 악투를 벌였다. 그녀는 손발의 기능이 차츰 회복되어 공세가 더욱 맹렬해졌다. 마파는 일개 계집애의 솜씨가 이처럼 대단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기에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그는 반격을 가하려 했으나 힘이 딸렸다. 이마도 연거푸 실패하자 노발대발하여 몸에 진기를 모으고 소영에게 대들며 쉬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늙은 거지 할멈아! 내가 소영을 먼저 해치우고 너의 조손과 승부를 가리겠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오른손목이 마비됐다. 그리고 그의 맥이 누구의 손엔지 잡혀 버렸다. 소영은 내공이 심후하므로 다소 조식을 하자 부분적인 체력을 이미 회복했다. 그러나 그도 영남 쌍마가 쉽게 상대할 적수가 아님을 알고 있어 속으로 은근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래서 감히 섣불리 손을 쓰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이마가 손을 내밀어 잡으러 오는 것을 보자 비로소 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손 혈도 를 짚어 버린 것이었다. 시선을 돌려 보니 백리빙이 주먹과 장력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마음이 다소 놓여서 한편 이마의 혈도를 짚고 한편으로는 계속 운기조식에 들어 갔다. 이때 백리빙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 왔다. "오빠. 좀 나았어요?" 그녀는 마파와 상대하느라고 전력을 모으고 있었다. 소영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소영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나는 괜찮다. 그러니 너도 그 놈을 꼭 붙들어라. 놓쳐서는 안 된다." 백리빙은 소영의 대답을 듣자 몹시 기뻐서 정신이 번쩍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네에, 염려 말아요!" 공력을 다시 가중하여 전부가 치명적인 초식으로써 매 일격마다 모두 마파의 중요한 혈도를 노 렸다. 열세에 몰린 마파는 있는 힘을 다하여 그녀를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영은 이마의 혈도 를 짚은 후 다시 공격을 가하지 않고 눈을 감고 운기조식하였다. 이마는 혈도를 짚힌 후 그것을 물리치려고 하지 않고 순순히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 데 언제까지나 아무런 동향이 없자 눈을 떠서 소영을 쳐다 보았다. 소영이 눈을 지그시 감고 서 서 운기조식하는 것을 보자 순간적으로 마음이 동하여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그는 암암 리에 운기하여 오른팔의 혈도를 봉하고 왼손을 들어 일장을 휘둘러 소영의 가슴을 향해 때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정통으로 들어 맞았다. 소영은 다시 일진의 조식을 취했으므로 공력이 적 지 않이 회복되었고 한편으로 이마는 오른 손목의 혈도를 짚혀 공력이 크게 영향을 받아 장세가 약하였기 때문에 비록 소영을 명중시켰지만 다만 뒤로 한 발 물러서게 하는데 불과했다. 소영은 눈을 뜨고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들은 음험하고 악랄하니 살려 줄 수가 없군." 하며 왼손에 힘을 주어 다섯 손가락을 거두며 이마를 앞으로 잡아 당기며 오른손으로 일장을 뻗 쳐 냈다. 이마는 반신이 마비되어서 피할 능력이 없어 일장을 고스란히 앉아서 받았다. 소영에 의해 천폐(天斃)혈도가 격중되자 골이 깨지며 골수가 쏟아져 나와 그는 비명에 가버리고 말았다. 소영이 왼손을 풀자 이마의 시체는 퍽 쓰러지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백리빙이 주먹과 장 풍으로 몰아치며 마파를 궁지에 빠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파로 하여금 반격을 낼 엄두도 못 내게 했으며 공격을 막기에 급급하도록 공격면에서 열세로 몰아 갔다. 그래서 소영은 큰 걸음으로 절간 입구로 가 높이 소리쳤다. "빙아야! 노파와 용아 낭자를 구하러 가거라. 저놈은 이 오빠에게 인계하고." 백리빙의 성격은 괴팍했지만 소영에 대해서 순종하였으므로 곧 초식을 거두고 물러났다. 소영은 냉랭히 웃었다. "오늘밤은 그대들 영남쌍마의 악이 끝장을 고하는 밤이다. 그대의 아우는 이미 황천길에서 그대 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파는 이마를 힐끗 돌아 보았다. 그러자 그의 시체가 눈에 띄었다. 골이 깨진 것을 보니 겁이 더럭 났다. 소영은 앞으로 한 발 더 나가서 입을 열었다. "마파! 내가 그대에게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먼저 그대에게 일초의 기선을 양보하겠 다." 마파는 소영에 대해서 본시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데 넘어져 있는 이마의 시체를 보자 더욱 혼 비백산하여 넋을 잃고 그 자리에서 서 있었으므로 소영의 말이 귀에 들어 오지 않는 것 같았다. 소영이 격분하여 소리쳤다. "그대가 만약 먼저 출수하기 싫다면 스스로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더 기다릴 시간이 없 으니까." 그러면서 손을 들어 재빨리 일장을 때렸다. 마파가 몸을 날려 피하고 반격을 가하기도 전에 소 영의 제 이장이 또다시 날아 들어 왔다. 소영의 장세가 너무 빨라 연속 여덟 장을 때리도록 마파 는 단 일초식도 막지 못했다. 마파는 빙글빙글 마구 돌더니 끝내 이마의 시체에 발 하나가 걸려 이마 옆에 쓰러졌다. 소영이 왼손을 번개같이 뻗어 가자, 펑! 소리와 함께 마파의 오른쪽 어깨에 명중됐다. 이 일장의 기세는 굉장히 무서워 얻어 맞은 마파는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져 괴로움을 참지 못하며 뒤 로 서너 발 물러났다. 소영이 이미 살기를 품고 있으니 그대로 놔 둘 리가 없었다. 오른손을 다시 마파의 가슴을 때렸 다. 마파는 입에서 선혈을 왈칵 토해 낸 후 몸이 휘청거리더니 마침내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 다. 140. 상천하사(相天下士) 소영은 연거푸 영남쌍마를 죽인 후 서서히 백리빙 곁으로 돌아와 나직이 물었다. "빙아야, 그녀들을 구할 수 있겠느냐?" 백리빙은 고개를 저었다. "암만해도 노파는 가망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몸의 진기를 써서 노파의 명문혈(命文穴)속에 집 어 넣어 봤지만 끝내 반응을 보이지 않는군요." 소영이 물었다. "이 소녀는?" "그녀도 스스로 혀를 깨물어 피를 몹시 흘려서 역시 살려 내기 어려울 거예요. 저도 이미 그녀 의 몇 군데 혈도를 찔러서 지혈을 시켰어요." "아아!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이마의 손에 중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소영은 노파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빙아야, 너는 가서 소녀를 보살펴 주어라. 내가 한 번 공력으로 노파를 잠시나마 깨울 수 있을 지 시험해 보겠다. 우리는 노파를 구할 능력은 없지만 최소한 그녀로 하여금 잠시 깨어나게 하여 서 뒷일을 우리에게 부탁할 수 있게 해 주어야지." 백리빙은 몸을 돌려 소녀를 안았다. 소영은 노파를 부축하고 진기를 모아 오른손으로 노파의 등 심을 누르자 한 줄기 열류가 곧장 노파의 내부로 들어 갔다. 소영은 공력이 심후하므로 백리빙이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곧숨이 끊어질 것 같았던 노파는 소영의 끊임없는 내력을 받아 그 열류가 내부에 스며들자 곧 깨어났다. 노파는 서서히 눈을 떠서 소영을 바라 보더니 힘없이 입을 열었다. "소대협, 이 몸은 그대들을 볼 면목이 없구려....." 소영은 가볍게 탄식을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노부인께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소." "이 몸의 상처는 대단해서 살아날 가망성이 없음을 잘 알고 있소. 사람은 죽을 때 그 마음은 선 량해지는 법이오. 이 몸의 죄악은 죽어 마땅하나 내 손녀 용아만은....." 말을 여기까지 하다가 한동안 기침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다음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심중의 말을 다하고 싶은 듯 억지로 진정시키고 말을 이었다. "나의 용아는 나쁜 일이라고는 추호도 하지 않았소. 그러니 소대협께서....." 이렇게 겨우 쥐어짜며 말하더니 노파는 숨을 몰아 쉬고 애석하게도 숨을 거두어 버렸다. 소영은 다시 내력을 보강해서 열류를 더욱 더 세차게 노파의 내부로 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녀 의 원기는 이미 소멸되어 소영이 능력껏 힘을 썼지만 역시 살리지 못하고 허사가 되어 버렸다. 소영은 안았던 노파의 시체를 내려 놓고 서서히 백리빙에게로 걸어가 가볍게 탄식을 했다. "빙아야! 그 낭자는 좀 어떠냐?" "글쎄요. 아직 모르겠군요." 소영이 암암리에 생각했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무슨 남녀의 구별을 하겠는가?' 소영은 몸을 굽혀 왼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오른손으로 소녀의 얼굴을 돌려 보니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어디에 비할 수 없는 고통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이것은 한 폭의 비 참한 그림이었다. 조손 두 사람 중 하나는 죽고 하나는 중상을 입었으니 그들에게 해를 당한 사람이라도 매우 가 엾은 생각을 갖게끔 하는 것이었다. 소영은 백리빙에게 말했다. "빙아야, 부싯돌을 갖고 있지?" 백리빙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낭자에게 틀림없이 부싯돌이 있을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품을 뒤져 보니 과연 그것을 갖고 있었다. 소영은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다 가 불을 붙인 후 손에 들었다. 소영은 소녀의 두 군데 지혈했던 혈도를 열어 주고 그녀의 입을 억지로 벌려 그 속을 들여다 보 았다. 그녀의 입속은 피와 살덩이로 엉망이며 혓바닥은 이미 대부분이 끊어져 있었다. 선혈은 여 전히 그치지 않고 상처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백리빙은 한숨을 쉬며 몸을 떨었다. "무척 비참하군요." 소영은 다시 소녀의 입을 닫아 주며 말했다. "낭자, 내 말을 몇 마디 들으시오." 소녀는 가늘게 눈을 떠서 소영을 바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상처는 대단하구려. 그러나 구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오. 그렇지만 낭자도 살아나야겠다 는 의지를 굳게 가져야만 우리들의 구원이 빨리 효과를 볼 것이오." 소영이 말을 하는 사이에도 소녀의 입에서는 선혈이 계속 흘러 나왔다. 소영은 소녀의 목덜미에 있는 혈도를 두 군데 찌른 후 다시 말했다. "낭자도 될 수 있는 한 원기를 보호하여 더 이상 힘을 소모시키지 마시오." 소녀는 별안간 오른손을 들어 멀리 한 곳을 가리키더니 다시 목덜미를 가리켰다. 소영에게 자기 의 혈도를 풀어 달라는 시늉을 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몰아 쉬었다. "낭자의 출혈은 대단하니 다시 선혈을 흘려서는 안 되오." 소녀는 오른손을 저으며 눈을 깜박이고 빨리 혈도를 풀어 달라는 듯 몸짓을 했다. 소영은 할 수 없이 그녀의 목덜미의 양 혈도를 풀어 주었다. 소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갑자기 몸을 일으켜 노파의 시체 옆으로 걸어 갔다. 그녀는 시체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소영은 그녀를 부축해 주고 싶었으나 그녀가 불편을 느낄까 염려되어 할 수 없이 가만히 지켜 보고만 있었다. 소녀는 두 손을 내밀어 노파의 장삼을 걷어 올렸다. 이때 날은 이미 밝아 절간의 윤곽이 뚜렷이 나타났다. 노파의 옷속은 모두가 주머니였고 각종의 독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소녀는 수십 개의 약물을 담은 주머니 속에서 옥병을 하나 꺼내더니 마개를 땄다. 그리고 병 속에 있는 약물을 몽땅 입에 넣어 피와 함께 마셔 버렸다. 소영과 백리빙은 양쪽에 멍하니 서서 바라 볼 뿐 그녀의 속셈이 어디 있는지 단정을 지을 수 없 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행동을 저지할 수 없었다. 소녀는 다시 노파의 품 속에서 몇 개의 옥병을 골라 내어 품 속에 넣은 후 손으로 땅바닥에 글 씨를 쓰기 시작했다. "저는 할머님의 시체를 묻을 힘이 없으니 두 분께서 수고를 해 주신다면 그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겠어요." 소영은 쾌히 승낙했다. "그대의 조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영남쌍마 역시 절명했으니, 원수는 갚은 셈이오. 그러니 낭자는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오. 그대 조모님을 장례하는 일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처리하겠소." 소녀는 다시 땅에다 글씨를 썼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소녀는 글을 쓴 후 몸을 일으켜 절간을 나서서 미친 듯이 달려 갔다. 백리빙이 침통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몸에 중상을 입고 육체와 정신이 정상이 아닌 것 같군요. 그녀가 혼자 행동하게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어요? 제가 쫓아 가서 데리고 오겠어요."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가게 내버려 둬라. 그녀들 조손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는데 이 커다란 변화는 그녀에 게 있어서 너무나 충격이 심하였으므로 그녀로 하여금 조용한 곳에서 혼자 마음껏 울 수 있게 하 는 것이 그녀에게는 유익한 일이다." 백리빙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중한 상처를 입고 있어요. 아아! 몸에 중상을 입은 소녀가 슬픔을 안고 황야를 헤매게 되어도 보살펴 주는 사람 하나 없으니 너무나 불쌍해요" 소영은 천천히 말했다. "그녀가 중상을 당했기 때문에 그녀의 강력한 의지에 생명력을 일깨운 거야. 만약 그녀가 하나 도 상처가 없었다면 절대로 이런 침통한 타격을 견디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영은 노파의 시체를 보더니 말했다. "빙아야, 내 말대로 그냥 가게 해라. 우리는 우선 저 노파의 시체를 묻어 주기로 하자." 백리빙도 소영의 권고에 동의하고 그와 협력하여 절간 뒤에다 노파의 시체를 묻어 주었다. 소영이 나자빠진 영남쌍마의 시체를 바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빙아야. 저 영남쌍마의 시체도 묻어 주기로 하자." 백리빙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저 두 사람은 죄악이 너무 많으니 황야에 버려 개에게 먹여야 해요." 소영은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죽으면 원한을 새겨 두지 않는 법이다. 이들 두 사람은 비록 생전에 죄를 많이 지었지만 이제 그들이 죽은 이상 그들을 저주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들의 시체를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반드시 소문이 멀리까지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심목풍이 곧 알게 될 것이니 노파를 이용하여 나를 상대케 하려던 독계가 다시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고 분명히 또 다른 독계를 꾸며 우리를 해치려 고 들 것이다." 백리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오빠의 말씀이 옳아요. 오빠는 저 같은 것보다 몇 배나 훌륭하시군요." 두 사람은 다시 그 영남쌍마의 시체를 묻어 주었다. 매장이 다 끝나자 백리빙은 손에 묻은 흙을 털면서 말했다. "오빠, 우리는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지요?" 소영은 한동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우선 얼굴을 아무데도 내밀지 말고 행방을 숨기며 암암리에 심목풍과 사해군주의 행동 을 탐지하여 그들에 관한 모든 것을 좀더 알아 낼 수 있다면 그들의 앞으로의 동향을 알게 될 것 이다. 그러면 그들을 상대하는 방법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백리빙이 다시 물었다. "우리는 또 변장을 해야 하나요?" "심목풍은 지금 나를 하나의 강적으로 삼고 있으니 그가 각처에 풀어 놓은 염탐꾼들은 아마 모 두 내 화상을 그린 것을 하나씩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장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 의 감시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백리빙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노도사로 변장할 수 없어요." "그럼 이번에 무슨 신분으로 변장을 하지?" 백리빙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중년문사(中年文士)로 꾸미고, 나는 문사의 시중으로 변장을 하면 어떨까요?" "그럼 너는 너무 억울하지 않니?" 백리빙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오빠와 저 사이에 무엇이 억울하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녀는 곧 처량한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훗날 오빠가 악낭자와 결혼을 할때 저를 오빠의 시녀로 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녀는 애써 자기의 심정을 달랬으나 솟아 오르는 격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입가에 는 억지로 웃음을 띠었으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소영은 가볍게 백리빙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빙아야. 그런 말은 하지 말라. 너와 나는 함께 생사를 같이 하며 동고동락하는데 내가 초목이 아닌 이상 어찌 정이 없을 수 있겠느냐? 이 오빠는 평생 너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백리빙이 소영에게 품은 열정은 줄곧 가슴 깊이 간직해 왔다. 그러나 감히 그것을 입 밖에 낼 용기가 없어 이때껏 참아 왔었다. 그녀는 지금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영의 부드러운 말에 감격 하여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백리빙이 자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리자 소영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는 백리빙 의 얼굴을 가만히 치켜 올리고 조용히 물었다. "빙아야. 왜 그래? 울지마, 이제....." 소영이 여러모로 달랬으나 그녀는 더욱 소리 높여 소영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소영이 다시 다정하게 물었다. "빙아야, 무슨 일로 이렇게 슬퍼하는 거냐?" 백리빙은 눈물에 얼룩진 얼굴을 들어 소영을 쳐다 보았다. "저는 서러운 게 아니라 너무 너무 기뻐서 그래요. 오빠가 저에게 이렇게 잘해 주시는데 저는 조금도 오빠의 심정을 몰랐었으니까요." 그녀는 소영의 품에서 벗어나 기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때 솟아오른 아침 해에 비친 백리빙의 얼굴은 먼지와 눈물자국에 얼룩졌으나 햇볕이 반짝이는 그녀의 눈은 기쁨에 넘쳐 빛나고 있었다. 소영은 팔짱을 끼고 그녀의 아름다운 춤을 감상하였다. 백리빙은 춤을 끝내자 돌연 몸을 날려 소영의 품안으로 달려 들었다. 소영은 두 팔을 벌려 자기 를 향해 웃으며 달려 오는 백리빙의 허리를 꽉 감싸 안고 웃었다. "빙아의 춤은 정말 훌륭하구나." 백리빙은 꿈을 꾸는 듯 황홀한 눈으로 소영을 쳐다 보며 말했다. "오빠가 좋아하신다면 제가 매일매일 추어드릴게요." 소영도 끄덕였다. "무림의 혼란이 안정된 다음 나도 너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 음악도 곁들여서 아주 아름다운 너 의 춤을 보도록 해야겠다." 백리빙은 어린애같이 끄덕이며 소영의 품안에서 빠져 나왔다. 그녀는 떠오르는 아침 해와 같이 상쾌한 기분으로 소영에게 외쳤다. "오빠, 이제 그만 갑시다." 그들은 노파의 무덤에 절을 하고 그곳을 떠났다. 정오쯤 되어서 북쪽 장사(長沙)의 큰길에는 중년문사 한 사람과 푸른 옷에 자그마한 모자를 쓴 소동이 나타났다. 이 한 쌍의 주종은 더 말할 것 없이 소영과 백리빙의 변장한 모습이었다. 소영은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백리빙에게 말했다. "빙아! 등일뢰와 전엽청을 유심히 살펴 보아라. 발견한 후 부르지는 말고 우리가 암암리에 그들 을 보호하자." 백리빙도 걱정되는 얼굴로 말했다. "그들은 독이 아직 해독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무공을 잃은 채 혹시 강적이라도 만나게 되면 어 떻게 하지요?" "아아! 영남쌍마가 욕심에 눈이 어두워 큰 공로를 독차지 하려고 노파의 조손에게 독수를 내리 지 않았다면 우리는 절대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백리빙이 방긋 웃었다. "그게 바로 길인천상이라는 것이에요. 오빠는 마음이 인자하시며 의로운 도량을 가지셨는데 만 약 액운을 정말 당한다면 그것은 하늘의 안배가 잘못된 것이에요." 소영이 담담히 말했다. "인과라는 설은 혹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물건은 썩은 뒤에야 벌레가 나오는 법 이라고 느껴진다. 만약 영남쌍마가 과히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절대로 사지에서 벗어나 지 못했을 것이다." 소영은 갑자기 말을 뚝 끊었다.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한 필의 건마가 화살처럼 달려 오고 있 었다. 소영은 그쪽을 주시했다. 말 위에 탄 사람은 무척 키가 작았으며 청색 털모자를 눈썹까지 눌러 쓰고 있어 그의 면모를 알아 볼 수 없었다. 쾌마는 나는 듯이 두 사람의 곁을 스치고 달려가 버렸다. 눈깜짝하는 사이에 쾌마는 이미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소영은 한동안 그것을 바라 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 사람의 승마 기술은 상당히 뛰어나군. 그가 탄 건마 역시 천리마이며 절대 일반 행상인이 아닐 것이니 우리는 각별히 조심해야 되겠다." 백리빙이 바짝 서며 물었다. "심목풍의 염탐군이란 말이에요?" 소영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모르지. 증명되기 전에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 추측으로는 심목풍은 의심이 많은 자라 절대 영남쌍마에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반드시 감시인을 파견하였을 것이다." "오빠의 말씀은, 영남쌍마가 사망한 것을 심목풍 등이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지. 사망한 일을 그들은 아직 모를 것이다. 그러나 영남쌍마가 노파와 만났다는 정보를 알 리는 것인지도 모르지." "오빠는 어떻게 알아요?" "나는 다만 추리해 보았을 뿐이다. 심목풍의 이목은 방방곡곡에 깔려 노파가 음식점에서 독을 사용했고 또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중에는 심목풍의 끄나풀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무림의 사람들은 심목풍만 들추면 모두 겁내지. 그는 마치 모르는 일이 없고 못하는 일이 없다 고 인식하고 있다. 그 원인은 바로 정보공작이 너무나 첨예하게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지금 무림의 모든 문파 속에 그가 매수한 간신이 없는 문파가 없을 정도란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내가 그 사람들을 이제 기억할 수 없는 게 한이다." 백리빙이 말했다. "만약 심목풍이 풀어 놓은 첩자들을 제거해 버린다면 그를 상대하기가 어렵지 않겠군요." "그렇지. 만약 심목풍이 각대문파에 잠복시킨 첩자들과 강호에 배치한 끄나풀을 없애 버린다면 심목풍의 눈을 파내고 귀를 막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이번에 손 노선배님과 무위도장을 만나면 반드시 이 점에서부터 착수해서 멀리 강호의 끄나풀까지도 없애는 방법을 강구해야겠다." 뻑리빙은 무슨 생각엔지 골똘히 잠겨 있더니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쉽지 않은 것 같군요. 오빠가 무슨 수로 그들이 설치한 첩자들의 상황을 알아 낼 수 있겠어요." "이것은 매우 어려운 공작이다. 그러나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는 머지 않아 찾을 만한 실마리가 잡힐 것도 같다. 두서만 찾아 낼 수 있다면 더 깊이까지 파고 들어 뿌리부터 없애 버리는 게 과히 어려운 일은 아니지. 설사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그들의 질서를 크게 혼란케 하여 심목풍의 손발이 닿지 않고 이목이 둔하게 할 수는 있다." 소영은 백리빙을 바라 보고 미소지으며 다시 이어 나갔다. "이 일은 물론 지극히 중요하지만 급할 것은 없다. 기다렸다가 무위도장을 만난 후에 다시 구체 적으로 계획을 짜 보자. 그 무위도장의 지모는 대단하여 보통 사람이 따를 수 없으며 손 노선배 님의 견식은 넓으니 무슨 좋은 방법을 강구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는 말을 나누지 않고 길을 걸어 갔다. 두 사람은 낮에는 걷고 밤엔 묵으며 몇 날을 보냈지만 도중에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리고 또한 유심히 살펴 보았으나 등일뢰와 전엽청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느날 장사의 변두리에 있는 조그마한 고을에 도착했다. 소영은 형세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이 고을은 비록 작은 고을이었지만 북쪽 장사 지방의 중요 한 길목이었다. 그는 심중으로 생각을 굴렸다. '만일 전엽청과 등일뢰가 이미 무위도장을 만나서 일을 설명했다면 무위도장과 손불사가 사람을 보내 반드시 내 행방을 쫓을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의 거주지를 옮겼을 것이므로 급히 그들을 만 나러 갈 필요가 없다. 또한 심목풍은 갑자기 영남쌍마와 노파의 조손이 모두 행방을 감춘 것에 의혹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무슨 혼란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이 기회를 빌려 암 암리에 심목풍의 거동을 살펴 본 다음 계획을 세우기로 하자.' 그는 이렇게 마음 먹고 한 채의 가장 큰 주점을 찾아 들어 갔다.그곳은 마침 점심 때라 손님이 몹시 붐비고 있었다. 소영은 심중에 생각이 있었으므로 주점에 들어 서자 암암리에 모든 손님과 그 안의 장식 등을 살펴 보았다. 북쪽에 있는 창가에 청의를 걸친 중년의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눈에 그가 비치자 어쩐지 직감 적으로 의심이 생겼다. 소영은 즉시 그 사나이를 감시하기에 편리한 자리를 골라서 앉았다. 사환이 차를 날라 오자 소영은 몇 가지 간단한 음식을 주문했다. 잠시 후 소영과 백리빙 앞에는 음식이 나왔다. 소영은 식사를 하면서도 암암리에 그 중년의 사 나이를 살피고 있었다. 소영이 음식을 거의 다 먹어치웠는데도 그 사나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아무런 거동 도 없었다. "나도 그와 마주앉아 계속 버틴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때 돌연 촌아이 하나가 흰 헝겊 족자를 들고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그 흰 헝겊에는 다음과 같은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상천하사(相天下士> 소영은 그 헝겊의 문구를 보자 즉시 손을 들어 촌아이를 불렀다. "꼬마친구. 이리 좀 와 보게." 그 촌아이는 즉시 곁으로 다가 왔다. "손님은 관상을 보시렵니까?" 백리빙은 그 촌아이를 자세히 보았다. 그의 나이는 불과 십이, 삼 세쯤 보였다. 머리털이 덥수룩 하고 얼굴과 손은 때가 절어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그 아이의 모습은 몹시 더럽고 꾀죄죄하여 서 어딜 보나 관상을 볼 줄 아는 사람같지 않아 속으로 매우 의혹을 느꼈다. "오빠가 어찌 이런 무지한 촌동을 믿을까? 혹시 오빠도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고 그러는 것이 아닐까?" 자세히 그 헝겊을 살펴 보았으나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의 운수가 어떤가 좀 봐 주게." 그 아이는 소영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곧 입을 열었다. "손님의 면상은 공후(公侯)가 될 관상이오. 다만 애석하게도 삼살이 끼어 있소이다. 그 삼살을 제거하지 못하면 영원히 출세할 날이 오지 않소. 허지만 소인의 도행이 아직 모자라 삼살을 제거 하는 방법을 알 수가 없군요." 소영은 슬쩍 물었다. "그럼 어느 분을 찾아서 알아 봐야 하는가?" 촌동이 곧 대답했다. "저의 사부님이지요." "영사는 지금 어디 계신가?" "이 고을 밖에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계십니다." 소영이 벌떡 일어났다. "좋아, 자네가 길을 안내하게." 그 촌동은 헝겊을 들고 앞장서서 나갔다. 소영은 그 촌동의 뒤를 따라 주점을 나섰다. 백리빙 역시 소영의 뒤를 따라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주점 밖으로 나오려 하자 갑자기 그 안에서 폭소가 터졌다. 주점의 손님들이 모두 소영 이 촌동에게 속은 것을 조소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백리빙은 발칵 성이 났다. 그녀는 뒤돌아 서서 웃고 있는 몇 사람을 한 번 호되게 혼을 내주고 싶은 층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억지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 촌동은 앞에서서 인도하며 곧 바로 고을을 벗어나 약 이 리쯤 걸어 간 다음 대밭에 가려진 초가집 앞에 도착했다. 백리빙은 사방을 경계해 보았다. 주위는 조용하였으며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도무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급히 소영의 뒤를 바짝 붙어 서며 나직이 물었다. "정말 저 아이의 스승인 관상쟁이를 만나러 갈 생각이세요?" 그러자 소영이 약간 웃었다. "조금 기다려 봐라. 이제 곧 진상이 밝혀질 테니....." 그 촌동은 초가집에 다다라 나무문을 밀었다. "저의 사부님은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소영은 암암리에 운기하여 천천히 초가집 속으로 들어 갔다. 그 집에는 백발이 성성하고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 오는 노인이 안경을 쓴 채 단정히 탁자를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그의 변장술은 비록 고명하나 불쑥 튀어 나온 배를 가릴 수는 없었다. 소영은 한동안 그 노인을 살펴 보더니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상형!" 그 노인은 한 손으로 안경을 벗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당황한 안색으로 외쳤다. "댁은 뉘시오?" 소영은 가짜 수염을 떼고 얼굴에 바른 약물을 닦아 냈다. "나요, 소영이오." 그 노인은 소영을 멍하니 바라 보고 있다가 갑자기 땅에 넙죽 엎드렸다. 소영은 급히 노인을 부 축해 일으켰다. "왜 이러시오. 상형." 그 노인은 바로 상팔이가 변장한 것이었다. 상팔은 흰 수염을 떼어 내고 입을 열었다. "형님이 무당노파에게 생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무위도장과 손 노선배님께서 매우 놀라셨 소. 그 말을 들은 것이 밤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수들과 상의를 하였지요. 그리고 그들은 모두 사방에 풀어 큰형의 행방을 쫓게 했습니다. 과연 큰형은 길인천상이라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무사히 돌아 오셨구려." 소영은 담담히 웃었다. "상형의 이 방법은 참으로 좋았소. 그러나 이것은 너무 우연이었지. 내가 만약 그 주점으로 들어 가지 않고 곧장 장사로 직행했다면 만날 수 없었을 텐데." 상팔을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소제는 이미 열두 개의 족자를 만들어 열두 명의 촌동에게 나누어 주며 장사의 각 주점 속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들고 다니라고 했지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구려! 그런 계획이 있었다면 반드시 만날 수 있었겠군.." 백리빙이 곁에서 입을 열었다. "오빠는 어떻게 그 촌동이 상대협께서 보낸 것임을 알았어요?" 소영이 대답을 하려고 하자 상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분은 누군가 했더니 백리 낭자시구려!" 백리빙이 상냥하게 말했다. "네, 대협께서는 어떻게 나라는 것을 아셨지요?" 상팔은 웃었다. "저도 다만 추측을 했을 뿐이오." 그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백리빙에게 다시 설명했다. "설명을 하기 전에는 보기가 좀 이상하지만 기실 털어 놓고 말한다면 별것이 아니오. 저는 다만 그 헝겊에다 암호를 그린 것이지요. 보통 사람은 알아 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백리빙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방법은 쉬운 것 같지만 이것을 생각해 내어 사용했다니 참으로 좋은 생각이십니다." 소영이 물었다. "장사의 시중은 누가 관할하고 있소?" 상팔이 웃으며 말했다. "두 형제와 무위도장이오." 소영이 다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손불사 노선배님은 어디 계시오?" "손 노선배님은 개방의 몇 명의 무당문하 고수를 이끌고 네 조로 갈라 무당할멈의 행방을 쫓고 있습니다." 소영은 물어 볼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등일뢰와 전엽청은 기묘한 독에 의해 부상당했는데 그것으로 인해 무공을 완전히 잃었소. 그런 데 어떻게 그들은 이처럼 빨리 소식을 이곳에 전달할 수 있었을까?" 상팔이 곧 보고했다. "등일뢰와 전엽청은 지금 장사로 돌아갔는지 저는 아직 모르오. 그러나 무위도장이 저에게 알릴 때 그들은 아직 돌아 오지 않았소. 저는 흉보에 접하자 심신이 매우 혼란해져서 무위도장에게 어 디서 이 소식을 얻었는가 미처 물어 보지도 못했소." 소영은 상팔에게 물었다. "그 손불사 노선배님을 불러들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상팔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무위도장은 아마 그들과 연락방법을 정했을 것이오." "매우 잘 됐군. 상형은 빨리 무위도장에게 통지하여 손 노선배님과 많은 고수를 돌아오게 하시 오. 무당노파의 행방을 쫓지 말고.." 상팔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그 무당할멈은 이미 형님의 수중에서 죽었소?"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노파는 영남쌍마에 의해 피살되었소." 상팔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영남쌍마에게요? 그들은 참 어떻게 되었소?" 소영이 천천히 대답했다. "영남쌍마는 너무나 위인이 악독하므로 제가 처치해 버렸소." 상팔이 물었다. "형님은 무위도장을 만나러 가시겠소이까?" "당분간 만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암암리에 심목풍의 동향을 살펴 볼 생각이오." 이렇게 말한 소영은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살피다가 다시 계속했다. "심목풍이 사해군주와 손을 잡았는데 이 소식을 들었소?" 상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심목풍이 그 자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상세한 것은 아직 모르오." 소영이 물었다. "심목풍의 부하들 활동은 요즘 어떻소?" 상팔이 곧 알려 주었다. "며칠 전에 심목풍이 장사에 한 번 나타났었소. 그러나 곧 사라져 버려 어디로 은신했는지 모르 오. 백화산장 사람들은 가끔 행동이 있었는데 이 양일간에 갑자기 조용해졌으며 동정이 없소이 다."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아마 영남쌍마와 노파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오." 그는 눈을 지그시 한 곳에 못박고 무엇인가 생각을 한 다음 다시 말했다. "나의 추측으로는 심목풍은 반드시 장사에 은밀한 분점(分店)을하나 두었을 것이오. 그러므로 백 리 안에 발생한 일을 살피는 거미줄 같은 첩자는 모두 분점에서 관리하고 있소. 아마 그 역시 심 목풍은 그 분점에 은신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은데....." 여기서 소영은 말을 끊었다. 상팔은 소영을 지그시 바라 보며 물었다. "형님의 뜻은?" 소영은 곧 자기의 의견을 제의했다. "만약 우리가 그들 장사의 분점을 없앨 수 있다면 심목풍으로 하여금 백 리 안에서 이목을 잃게 하는 젓이오. 그들의 지점을 없애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그들 분점의 소재지를 알 수 있다면 그 들의 행동을 억제할 수 있으며 필요시에는 이간의 계책을 사용할 수 있지......" 상팔이 크게 동의했다. "과연 형님의 의견이 옳소. 소제가 즉시 무위도장을 만나러 가서 그와 이것을 연구하여 보겠소 이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그들의 소굴을 알아 보도록 하겠소."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우리 양쪽에서 진행하도록 합시다. 나는 빙아와 함께 여전히 변장을 하고 장사에 잠입하 겠소." 상팔이 건의했다. "제가 수시로 사람을 시켜 형님과 연락하면 어떻겠습니까?" 소영이 천천히 말했다. "긴요한 일이 아니면 자꾸 연락하는 것을 삼가는 게 좋겠소. 백화산장의 사람이 활동을 중지한 것이 아니오. 그들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더욱 은밀해진 것이니까요."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상팔을 찬찬히 바라 보더니 다시 이어 갔다. "내가 여기에 온 사실을 그들이 추호도 눈치채지 말았으면 좋겠소. 상형은 몰래 무위도장과 두 형에게만 알려 주고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일절 알리지 말도록 노력하시오. 소문은 잘 퍼져 나가 니까..현재는 은밀한 상대를 은밀로써 쳐야 하니까요. 그렇게 되면 반드시 심목풍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소." 상팔은 수 개월 동안 보지 못하는 사이에 소영이 상당히 성숙하고 노련해져 있어 지혜로운 안배 가 초인적이라고 느꼈다. 그는 곧 공손히 대답했다. "예, 잘 명심하겠습니다." 소영은 헝겊을 갖고 있는 동자를 흘끔 쳐다 보고 말했다. "이 동자는 소문을 퍼뜨리는 동자인데 그렇다고 옛사람들 같이 이용한 다음에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상형은 저 동자에게 황금을 좀 더 주어서 그들 보고 속히 이곳을 떠나라 이르시오." 상팔은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으니 형님은 안심하십시오." 소영은 다시 변장을 하고 긴 수염을 달았다. 그는 상팔에게 다시 한 마디 더 당부했다. "상형, 이 촌동을 죽여서는 안 되오" 상팔이 곧 부인했다. "제가 어찌 감히...."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그럼 내 먼저 가리다." 상팔은 소영의 뒤를 바싹 따라 나오면서 낮은 음성으로 무위도장과 연구해서 결정한 연락을 취 하는 암호를 해설해 주었다.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그가 말을 끝낸 후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모두 기억겠소이다." 상팔은 약간 웃으며 말했다. "장사의 회선루(會仙樓)와 칠택다원(七澤茶園)은 언제나 백화산장의 사람들이 출입하고 있는 곳 입니다." 소영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대꾸했다. "알았소. 내 먼저 그 두 곳을 들러서 살펴 보기로 하겠소." 상팔은 포권을 하고 공손히 말했다. "소제는 멀리 나가지 않겠소이다." 소영은 백리빙을 데리고 큰걸음으로 걸어 갔다. 그들은 관도에 나오자 천천히 장사정으로 들어 섰다. 그때 백리빙은 육감으로 누가 미행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살펴 보았다. 과연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뒤에서 몸에 검은색 소매 없는 외투를 걸치고 허리에는 녹색 띠를 두른 중년 사나이가 미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영에게 알려 주려고 했다. 그러나 소영이 먼 저 알아 채고 있었으므로 나직이 말했다. "빙아, 뒤돌아 보지 말라. 그리고 아무일 없는 듯 태평한 태도를 취해라." 백리빙은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오빠는 먼저 알고 있었군." 소영은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똑바로 혼잡한 거리를 향해 걸어 갔다. 두 갈래 큰 길에 들어 서자 그곳에는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흰 판에 검은 글씨로 <칠택다원>이라고 씌어 있었다. 백리빙은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제 보니 오빠는 이미 길목조차 기억하고 있었군. 나는 아무렇게나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줄 알았지....' 소영이 고개를 들어 바라 보니 칠택다원의 규모는 상당히 웅장했다. 대문을 지나면 바로 넓다란 정원이었다. 갈대로 엮은 차일이 하늘을 가렸으며 사방에는 화분에 심은 꽃들이 만발하였고 뜰에 는 나무 탁자에 대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있는 것이라 매우 편 리하였다. 문 입구에는 청색 옷에 모자를 눌러 쓴 종업원이 안내를 맡고 있었다. 소영이 그 앞에 다가가자 그 종업원은 허리를 굽실하고 절을 하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두 분께서는 안에 드셔서 쉬고 가십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 좀 안내해 주십시오." 그 종업원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다시 굽실 절을 했다. "손님은 너무 겸허하시군요. 소인이 어찌 감히....."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서북쪽 모퉁이의 분꽃이 만발한 자리로 안내했다. 소영은 눈길을 돌려 주위를 살펴 보았다. 넓고 아름다운 뜰에는 반 이상 손님이 자리하고 있었 는데 오십 명은 넘을 듯했다. 허다한 사람이 차 하나를 주문하고 대나무 의자에 앉았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 고 적지 않은 사람이 몇 접시의 간단한 안주와 술을 주문해서 그것을 둘러앉아 마시거나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훌륭한 환경 속에서 즐기며 휴식할 수 있는 이 칠택다원은 술과 안주 그리고 간단 한 음식 장사도 겸해서 영업을 하고 있는 모양 같았다. 141. 밀실의 회오리 바람 소영은 눈길을 돌려 칠택다원을 훑어 보며 말했다. "여보게. 이 찻집의 뒤에 뜰이 있는가?" 종업원은 연방 허리를 굽실댔다. "예, 예. 있구 말굽쇼. 우리 이 칠택다원은 뜰이 세 개나 됩니다." 그는 무엇이 신나는지 묻지도 않은 것까지 자세히 이야기했다. "이곳에 손님이 꽉 차려면 천 명 이상은 모여야 될 것입니다." "아. 그래? 역시 소문에 듣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군." 종업원은 계속 호들갑을 떨었다. "두 분께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이 곧 차를 올리겠습니다." 종업원은 어지간히 수다를 떨었다고 생각했는지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종업원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다 보았다. "손님, 무슨 분부가 있습니까?" "다른 게 아니라 칠택다원의 명성을 익히 들어, 오늘 구경 좀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있겠 나? 내 자네의 수고비는 톡톡히 줌세." 종업원은 어린애처럼 뒤통수를 긁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칠택다원은 손님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손님께서 어느 뜰에서 차를 드셔도 상관 없으며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럼 자네가 길을 안내하겠나?" 종업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만은 곤란합니다. 이곳의 각 뜰에는 따로따로 손님을 접대하는 종업원들이 있습니다. 손님 께서 그곳으로 가시면 거기에도 종업원이 있으니 아무 염려마십시오." '일개 찻집이 이토록 크고 또한 그 규칙이 엄하니 이상하구나. 오늘 어떻게든지 이곳의 동정을 자세히 살펴야겠다.' 소영은 짐짓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고맙군. 친절히 이야기해 준 대가로......" 소영은 은전 한 개를 꺼내 그에게 쥐어 주었다. 종업원은 황송한 듯 두 손으로 은전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소영도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백리빙은 아무 참견도 않고 그저 소영의 뒤만 따랐다. 두 사람이 조그만 누각을 지나 옆으로 나 있는 대문을 나서자, 눈앞에 다른 하나의 후청이 나타 났다. 그 곳은 앞의 것보다 월등히 크고 깨끗하였다. 더군다나 묘한 것은 모두가 흰빛으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집도 흰빛이고, 안에 장치된 의자나 주방도 희었다. 심지어 찻잔과 수건까지도 통일되 었다. 한 마디로 말하여 손님들의 옷색깔 이외에는 모두가 흰색인 것이다. 소영은 안으로 들어서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아, 정말 멋지다. 마치 궁전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이곳은 필시 칠택다원 중에서 으뜸인 대청일 것이다." 그들이 문을 들어 서자마자 역시 흰옷을 입은 종업원이 다가 왔다. "어서 오십시오." 소영은 그 종업원을 유심히 살폈다. 종업원은 머리에도 흰 수건을 둘렀으며 이십삼, 사 세 정도의 청년으로 무공을 모르는 듯 했다. 소영은 먼저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여기가 전청(前廳)인가?" "예, 그렇습니다. 손님께서는 중청을 찾으십니까?" "응? 중청? 그럼 후청도 있겠군. 내가 처음에 들렀던 곳과 이곳, 그리고 중청, 후청이 있으니 모 두 네 곳의 청이로군." 그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은 별 눈치 없이 앞장을 섰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중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그곳을 나와 동그란 문을 지났다. 중청은 조금 안쪽에 있는 것 같았다. 종업원이 안내하는 곳은 비스듬히 언덕진 곳으로, 양쪽으로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앞청이 이러하니 중청은 더욱 호화로울 것이다.' 종업원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 길만 곧장 따라 가면 바로 중청이 나옵니다." 그가 가리키는 길은 흰 자갈이 가지런하게 깔려 있는 좁은 길이었다. 종업원은 더 이상 머무르 지 않고 다시 전청으로 돌아 갔다. 소영은 자갈길을 걸으면서 자세히 사방을 살폈다. 두 사람이 자갈길을 거의 지날 무렵 돌연 소영의 안색에 이상이 나타났다. 소영은 이곳과 비슷 한 곳을 보았던 생각이 어렴풋이 난 것이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어디서...' 그러나 그 생각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중청은 그 자갈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섯 개의 층계를 올라 간 곳에 있었다. 중청의 모양은 또 달랐다. 그곳은 온통 황금빛 투성이었다. 앞청의 일색처럼 이곳도 금빛으로 모 든 것이 이루어졌다. 소영이 문으로 채 들어서기도 전에 금빛 옷을 입은 종업원이 마중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 서자 재빠르게 주위를 훑어 보았다. 안에는 열 대여섯 개의 탁상이 놓여 있었으나 손님은 단지 몇 개의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소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종업원에게 물었다. "후청을 가려고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되나?" 종업원은 대답을 않고 잠시 두 사람을 쳐다 보았다. "두 분께선......." 종업원은 다음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음. 이 놈이 우리를 촌놈으로 보는가 보군.' 소영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나던 행인이다. 소문에 칠택다원의 후청이 있다기에 한 번 들러 보려는 것이다." 황의 종업원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옵니다. 모처럼 이렇게 찾으셨는데..... 두 분은 때를 잘못 택하셨습니다." "왜 그러나?" "후청의 자리는 이미 꽉 찼습니다. 정 후청을 보고 싶다면 내일 아침에나 찾으십시오." 소영은 입장이 난처해져 무어라 대꾸할 수 없었다. "이곳은 정말 괴상한 찻집이로군. 이왕 여기까지 들어 왔는데 후청을 안 볼 수가 없지. 무슨 수 를 써서라도......" 그는 잔꾀를 생각해 냈다. 상대를 은연중 달래 보려는 것이었다. "귀하께선....." 종업원은 갑자기 바뀐 소영의 말을 다급히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저는 이곳의 종업원이니 말씀을 낮추십시오." 그러나 소영은 생각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말하였다. "귀하께선 이곳에 오신 지 얼마나 되나요?" 종업원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소영이 묻는 말에도 대답도 않고,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손님께서 이곳의 단골이십니까?" 소영은 그가 차츰 자신의 꾀에 걸려든다는 것을 느꼈다. "이 자를 골려 주어야겠군." 이런 생각으로 마음에도 없었던 거짓말을 하였다. "나는 일 년 전에는 가끔 이곳을 들렀었지만 그 동안은 어디에 갔었소. 그 때는 당신의 얼굴을 못 봤는데....." 종업원은 커다란 눈을 껌벅거렸다. "소인은 이곳에 온 지 삼 개월밖에 안 됩니다."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가진다고 하였듯이 심목풍이 이런 찻집을 갖지 않을 리 없지. 더 군다나 칠택다원은 이름난 곳이니 많은 사람이 들를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앉아서 강호의 소 식을 들을 수도 있고 또.....'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후청에 손님이 있다 하니 이곳에서라도 쉬어 가겠소." 종업원은 공손히 허리를 굽신댔다. "예, 예. 그렇게 하십시오." 종업원은 곧 주방으로 사라졌다. 소영은 다시 주위를 훑었다. 넓은 청에 열 대여섯 사람만 있으니 청내는 한산하였다. 어떤 자리에는 너댓 사람이 앉은 곳도 있었고 두 사람이 앉은 자리도 보였다. 그들의 대화는 매우 낮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인품이 고귀 하고 자신을 자제할 수 있는 수양을 갖고 있는 사람들 같이 보였다. 전청의 손님들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종업원이 다시 다가 와서는 물수건을 건네 주었다. 물수건 역시 황색이었다. "손님,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우선 두 잔의 용정(龍井)을 가져다 주시오." 소영은 그 종업원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에게서 어떤 의심스러운 것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종업원은 나무 쟁반 위에 용정 두 잔을 받쳐 들고 왔다. 소영은 전날 찻집에서 당했던 암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탁상에 놓은 용정을 조심스럽게 내려다 보았다. '혹시 이곳에도 독을......' "여보시오. 미안하지만 차를 한 잔 더 가져다 주겠소?" "손님께서는 무엇에 쓰시려는 것입니까? 소인은 두 분뿐이라.." 소영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나는 괴벽이 있어서 그렇소." 종업원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또 한 잔의 차를 가지고 왔다. 소영은 나중에 나온 차를 받아 들고 탁상에 놓인 찻잔을 종업원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당신이 마시시오." 종업원은 손을 흔들며 사양했다. "아닙니다. 어찌 소인이....." 소영은 당황하는 그의 표정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필시 이 차에는 독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반 강제로 종업원에게 차를 권했다. "괜찮소. 이것은 내가 권한 것이니 주인이 보아도 무어라 야단치지는 않을 것이오. 내가 세 잔의 찻값을 치르면 될 것 아니오." 종업원은 소영의 단호한 권유에 할 수 없어 잔을 받았다. 그는 잔을 들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손님께서는 이 찻속에 불순물이 들어 있을까 두려워서지요? 그렇다면 소인이 먼저 먹겠습니다." 종업원은 조금도 주저없이 용정을 한 입에 삼켰다. '정말 아무 탈도 없을까? 우리가 너무 이곳을 의심했나?' 그의 행동은 소영과 백리빙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용정을 한숨에 마신 종업원은 정중히 허리를 굽히더니 곧 주방으로 사라졌다. 주방으로 들어간 그는 한참 동안을 나오지 않았다. 마침 앞의 손님이 종업원을 불렀다. 그러나 주방에서 나오는 사람은 다른 종업원이었다. 소영은 그것을 보고 모든 사정을 알았다.손에 쥐었던 찻잔을 탁상에 놓으며 전음입밀로 백리빙에게 말했 다. "빙아야, 너는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느냐? 종업원이 차를 단숨에 마신 것은 좋았는데 주방으로 들어 가서는 통 나오지를 않는 거다. 그것은 바로 이 찻잔에 무슨 수작이 꾸며져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그들은 비록 틀켰다고는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시 다른 암수로 우리에 게 독수를 뻗치겠지." 말을 하면서도 눈길은 주방을 주시하였다. "이제 일은 시작되었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좀 더 깊숙이 이곳의 비밀을 알아 내고 싶다. 너는 지금 곧 밖으로 나가 상형과 만나거라. 내가 이곳에서 반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밖에 나타나 지 않으면 그들과 상의해서 즉시 이곳으로 들어 오너라." 백리빙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오빠에게 계책이 있어서겠지.' 그녀는 두말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처음과 다른 종업원이 다가 왔다. "손님, 무슨 분부라도....." 소영은 고의로 그에게 싱거운 물음을 보냈다. "아까와 다른 분이군. 당신도 이곳의 종업원이오?" "그렇습니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분부만 내리십시오."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무엇을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아까 그 종업원이 내 심부름을 하였는데 통 보이지 않아 서..... 수고스럽지만 그 사람을 불러다 주겠소?" 종업원은 그대로 서서 다른 말을 하였다. "칠택다원의 일이라면 소인이 잘 알고 있습니다. 손님께선 무엇이 궁금하신지 소인에게 물어 보 십시오.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소영은 그에게 지지 않았다. "좋소. 그럼 당신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듣기로 하지. 그러기 전에 우선 이거나....." 소영은 백리빙에게 놓여졌던 찻잔을 그에게 건네 주었다. 종업원은 대번에 안색이 변하였다. "아닙니다. 이것은 칠택다원의 규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소인이 어찌....." 소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괜찮소. 이것은 내가 산 것이오." 종업원은 그래도 사양하며 자리를 뜨려 하였다. 소영은 재빠르게 그의 왼손목으로 휘어잡고 옆의 자리에 앉혔다. 종업원의 표정은 공포로 크게 일그러졌다. "자, 어서 먹지." 소영의 말이 얼마나 냉랭하였는지 그는 더 이상 사양치 못하고 차를 마셨다. 청내의 손님들이 두 사람의 모양을 보았으나 모두들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손님이 종업원에게 수고한다고 차를 권하는 것이겠지.' 이렇게 얼마 지나지 않는 사이에 중창에서 일하는 다섯 명의 종업원이 모두 소영의 차를 마셨 다. 그들은 소영의 차를 마시고 무슨 약속이나 한 듯, 한결같이 주방으로 사라졌다. 다섯 종업원들은 찻 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소영에게 별 반항도 없이 그것 을 마셨던 것이다. '이곳의 규칙은 엄하구나. 그들이 죽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안하니.... 그리고 이곳에 손님이 있으 니 그들에게 추행을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로군." 잠시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중년의 종업원이 나왔다. 그는 겉으로는 종업원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무공을 지닌 인물 같았다. 그는 곧장 소영에게로 다가 왔다. "손님, 미안합니다. 종업원들이 아직 나이도 어리고 철이 없어서 손님께 폐를 끼친 것 같습니다. 지금 주인님께 야단을 맞고 있으니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오. 정녕 다섯 종업원이 모두 손님께 무례를 저질렀다니 소인은 통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소영은 담담히 웃음을 띠었다. "왜 그러시오?" "저희는 장사하는 것이 본직인데 어찌 손님들께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 다섯이 모두 손님께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는지요? 이제는 그들이 살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주인께서 무척 노여워하시며 대번에 그들을 내 쫓겠다고 하셨습니다. 손님께선....." 그의 말 도중에 불쑥 소영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칠택다원의 사정이 아니오? 어째서 그런 것을 손님과 결부시키려고 하오?" "물론 손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손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니 조 금은 책임을 지시게 됩니다. 손님께선 수고스럽지만 그 다섯 종업원을 위해 주인께 한 마디만 해 주십시오." 소영은 속으로 비웃었다. '이런 흉계로 나를 함정에 몰아 넣으려는 수작이 가소롭군. 이 놈들은 정말로 나를 얕보는구나.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눈이 먼 놈인가?' "저에게 그렇게 큰 책임이 있소?" 종업원은 점차로 다급한 신색을 보였다. "매듭을 풀려면 아무래도 그것을 맨 사람이어야 쉽지요. 손님께선 저의 주인과는 초면이실 테지 만 어디까지나 손님이시니 말하실 수 있습니다." "좋소. 그럼 당신 주인을 이곳으로 불러 오시오. 손님이 주인을 찾는다고 거절할 것은 못 되니 까!" 종업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가로저었다. "아니옵니다. 지금 주인께선 무척 화가 나셨는데 어찌 제가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습니까? 그러 니 손님께서 안으로 드셔서....." 소영은 짐짓 아무것도 모른 체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하지요. 주인은 어디에 있소?" 종업원은 주방쪽을 가리켰다. "내실에 계십니다." 소영은 느릿느릿 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 "주인께서 직접 오시지 못한다니 내가 갈 수밖에....." 종업원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소영의 옆을 바싹 따랐다. "손님의 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리겠습니다. 손님께서 만약 무림의 인물이시라면 틀림없이 어느 한 곳을 주름잡을 분이십니다." 소영은 대수롭지 않은 듯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강호를 떠도는 사람이오. 어찌 한 곳을 주름잡을 힘이 있겠소?" 이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에 벌써 주방의 입구까지 다다랐다. '이들은 찻 속에다 독을 집어 넣을 수 있으니 물론 다른 맹독도 사용할 줄 알 것이다. 적을 얕 보지 말고 조심해야겠다.' 소영은 만반의 준비로 교피장갑도 끼었다. 종업원은 내실 입구에 가서는 휘장을 들쳤다. "자, 안으로 듭십시오." 소영은 암암리에 진기를 모으고 안으로 들어 갔다. 안에는 긴 복도였다. 복도 끝에는 오른쪽으로 조그만 문이 있었다. 소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자세히 훑어 보았다. 그러자 오른쪽으로 난 문에서 냉랭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친구! 이곳으로 들어 올 용기가 있는가?" 그 음성은 카랑카랑하여, 언뜻 생각해서는 상대를 짐작할 수 없었다. "누구일까? 음성은 중년 정도인데....." 주위의 조명은 희미하여 멀리는 잘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자신의 무공을 믿고, 천천히 문께로 다가 갔다. 그가 한 발을 문 안으로 들여 놓자, 돌연 일진의 지풍이 소영의 왼쪽을 기습했다. 그 지풍은 기세가 매우 빨라 소영의 중부혈을 곧장 노렸다. 소영은 재빨리 피했다. 상대의 지풍은 소리도 없이 소영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소영은 잔꾀를 부릴 생각이 났다. '옳지! 그렇게 해 보자.'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 자리에 죽은 듯이 쓰러졌다. 상대가 보기로는 지풍에 요혈을 맞고 쓰러진 것 같았다. 그러나 안에서 냉랭한 음성이 다시 들렸다. "흐흐... 우리를 너무 얕보았군." 소영은 그들이 다가 오는 소리를 들으며 실눈을 뜨고 상대를 보았다. 맨 앞에서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는 상대는 심목풍의 대제자 단굉장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검은 도포에 검은 수건을 머 리에 두른 장한이 따랐다. 검은 도포의 상대는 어찌나 구질구질한지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더군다나 머리에 검은 수 건을 동여 맸으므로 더욱 추하게 보였다. 소영은 그를 유심히 관찰하며, 내심 비웃었다. '저 사람은 필시 변장을 하였나 보군. 그러나 저 정도의 변장술로는 강호 어느 곳에도 내 놓지 못할 실력이다.' 정말 어느 누가 보아도 그의 모습은 꼴불견이었다. 검은 도포를 입은 장한이 입을 열었다. "소장주의 무공을 이제야 짐작하겠소. 조금 전에 뻗은 지풍은 마치 전광석화같아 적으로 하여금 방어할 기회를 주지 않았소. 아무리 상승 무공을 지녔다 하여도 그 일격을 피하지 못할 것이오." 단굉장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받았다. "대사께선 너무 과분한 칭찬을 하시는 것이오. 저의 무공이 높았던 것이 아니라 이 놈을 너무 두려워했던 까닭이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놈을.....,." 소영은 검은 도포를 가리켜 대사라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어렵소. 저 놈은 중이었나 보군. 그래서 검은 수건으로 머리를 싸맸군. 어쩐지 그의 차림새가 눈 에 거슬리더니만....' 흑의장한이 냉랭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받았다. "빈승은 이제 오래 머무르지 못하겠소. 소장주께선 즉시 심대장주께 서신을 올리기 바라오" "대사께선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오늘 밤으로 소생이 스승을 만나 뵈옵고 대사의 글을 올리 겠소이다." 흑의장한은 정중히 포권을 하고는 인사말을 꺼냈다. "빈승은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그렇게 하시오. 스승님께선 강호를 정복한 후엔 대사를 소림사의 주승으로 앉힌다고 약속하셨 소" 흑의장한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담았다. 제깐에는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소장주께서 중간에서 많이 보살펴 주시기 바라오. 그리고 심대장주께 고맙다는 말을 전해 주시 오." 그는 말을 끝내고 곧장 밖으로 사라졌다. 단굉장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가볍게 손바닥을 두 번 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명 의 사나이가 달려 왔다. "이놈을 들고 나를 따라 와라." 단굉장은 그들에게 소영을 들게 하고는 근처에 있는 조그만 밀실로 들어 갔다. 소영은 그대로 두 사나이에게 들려 죽은 듯이 밀실로 들어 섰다. 그 밀실은 한 칸 방보다 약간 컸다. 단굉장은 들려 오는 소영을 뚫어지게 살펴 보고는 두 사나이에게 일렀다. "불을 켜라. 이 놈이 도대체 무엇하러 이곳까지 침입하였는지 알아야겠다." 왼쪽의 사나이가 재빨리 불을 켰다. 소영은 밝혀진 실내는 훑어 보았다. 다행히 단굉장이나 두 사나이가 촛볼에 신경을 쓰고 있어 그의 행동에 장애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은 눈깜짝할 사이였다. 밀실의 벽은 매우 미끄럽게 보였다. '아마 이곳은 쇠로 만들었나보군. 그리고 이곳은 고문실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구나.' 단굉장은 밀실의 문을 닫고 천천히 소영에게로 다가 왔다. 그는 소영의 혈도를 풀어 줄 모양이었다. 소영은 일부러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단굉 장은 소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소영은 혈도에서 이제 막 풀리는 것처럼 긴 하품을 했다. 소영이 눈을 번쩍 뜨고 정신을 차리자 두 사나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소영은 그들이 하는대로 순종하였다. 그러나 암암리에 진기를 모았으며, 만일의 일에 대비하기 위하여 팔분의 공력도 단전에 모았다. 의외로 순종하는 소영의 행동이 우습다는 듯, 두 사나이가 냉소를 띠었다. "흐흐.... 나리, 이놈은 하룻강아지로군요." 단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러나 이놈의 담은 보통이 아니구나." 소영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불초는 여러분을 처음 뵈옵는 것이오. 더군다나 이곳의 명성을 들었기에 구경삼아 손님으로 든 사람에게 어째서 이러는 것입니까?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것이나 아닌지요?" 단굉장은 음흉한 냉소를 띠었다. "내 앞에서 쓸데없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내 눈은 썩지 않았으니 상대를 보는 눈은 틀림없다. 이곳에서 따끔한 맛을 보기 전에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소영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되물었다. "무슨 말을 하라는 것입니까?" "내가 한 마디 묻거든 그것만 대답해라. 그러나 거짓말을 하려면 우선 목숨을 내 놓아라." "물어 보시오. 불초가 알고 있으면 모두 대답해 드리겠소." 단굉장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 소영을 한참 쏘아 보더니 말을 꺼냈다. "너의 성명과 호칭은? 그리고 여기에 무엇하러 왔나?" 그는 계속 다그쳐 물었다. "누구의 부탁을 받았느냐? 아니면 스스로 들어 왔느냐?" 소영은 조금도 서슴없이 대답했다. "불초의 이름은 초동(焦銅)이라고 하옵니다. 강호에선 얼마간 유협하다 칠택다원의 명성이 높아 구경하러 이곳에 왔소이다." 단굉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초동...초동이라. 그런데 그 이름이 처음 듣는 것이로군." 소영은 우선 급한 대로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것을 대었던 것이다. 소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 고 말을 꺼냈다. "불초는 언제나 바다에서 활동하고 있었소이다." "그래? 그럼 너도 역시 같은 선상의 친구로군." 소영은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놈이 잘도 속아 넘어 가는군." "그렇소. 불초는 언제나 바다에서 장사를 하여 생계를 이어 가는 놈이라 강호에선 잘 모를 것입 니다." 단굉장은 돌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바다에서 도적질을 하였나 보군. 난 그런 것에 참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 까지 들어 왔느냐? 너희 장사꾼과는 질적으로 틀린 곳인데......" 소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오. 다만 찻집에 대한 호기심이....." 단굉장은 차츰 온화한 표정이 되었다. 이 몇 마디에 벌써 소영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여기가 어디라고..... 네 놈이 아무것도 모르니까 저지른 일일 테지.' 그는 무척 거만스런 태도로 소영의 어깨를 건드렸다. "야! 너는 몸에 무엇을 지니고 있냐?" "몇 냥의 은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 만약 내가 뒤져서 다른 것이 나온다면?" 소영은 우선 부딪쳐 보기로 하였다. "이 놈들이 내 정체를 알아 내기 전까지는 바보 노릇을 해야겠군." "저는 입고 있는 옷뿐이오." 단굉장은 등 뒤의 촛불을 들어 소영에게 바싹 들이댔다. "이 놈의 몸을 뒤져라." 그가 가까이 댄 촛불 때문에 소영의 모습은 하나도 빠짐없이 밝게 보였다. 두 명의 사나이는 곧 소영의 몸을 뒤져 보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찾지를 못하고 그의 몸에서 손 을 떼었다. "소장주께 아뢰오. 이 녀석은 무기도 없고 별다른 물건도 갖고 있지 않소이다." 단굉장은 눈을 치떴다. "그러냐? 그럼 내가 잘못 본 것 같구나." 소영은 그 말에 내심 뛸 듯이 기뻐했다. '됐다. 조그만 더 참으면 이곳의 비밀을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소장주께선 저를 시비를 걸겠다고 이곳에 들어 온 사람으로 아셨나보군요." 단굉장은 돌연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입 닥쳐라! 너는 이곳에 시비를 걸러 들어 오지 않았다면 어째서 다섯 명이나 되는 종업원을 괴롭혔느냐?" "그것은 그들의 행동과 태도가 너무나 마음에 안 들어서였소. 소위 이런 소문난 찻집에서 일하 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결하고 게으르면 어떻게 됩니까? 괜히 손님만 잃게 되오. 더군다나 그들은 독이 든 차를 내 놓으면서 나에게 눈치를 채게 했소이다. 소장주님께서 저를 의심하였다면 그런 눈치없는 자들에게 일을 시키지 말았어야 됐을 것입니다. 그래서......" 단굉장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하였다. '흥! 네 놈이 나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어디 두고 보자. 뭐 소장주? 흥! 네 놈의 목이 열 개나 된 다 하더라도 내가 손을 썼다 하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소영은 상대가 고분고분 속아 넘어 가는 것에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 얼마 동안을 생각하던 단굉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는 나쁜 뜻을 가지고 들어 온 것은 아니지만 그대로 놓아 줄 수는 없다. 옛말에도 있지 않느 냐. 잡은 호랑이는 다시 산 채로 풀어 주지 않는다고.... 칠택다원은 모든 것이 신비에 싸여 있는 데 이제 네가 알았으니 살 생각은 말아라." 소영은 짐짓 두려움에 몸을 떨며 다그쳐 물었다. "그럼 소제를 어떡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단굉장의 얼굴에 일순 음흉한 표정이 스쳤다. "너를 죽이고 입을 봉해야지. 그것이 너에게는 안 됐지만 우리를 위해서는 달게 죽어야 되겠어." 소영은 이 몇 마디의 이야기에서 앞으로의 모든 사태를 계산하였다. '보아하니, 부득불 일장의 결투가 있어야겠군. 저 놈을 죽이든, 사로잡든 간에 어쨌든 심목풍에게 내 소식을 전하는 결과만 되겠군. 마치 돌을 헤치다 뱀을 건드린 격이다.' 단굉장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영을 바라 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겁내지 말아라. 비록 너를 죽이려 하지만 아주 편안하게....." 소영은 그의 말을 듣고 비통하게 말했다. "소장주님, 한 번만 살려 주실 수 없습니까? 살려만 주신다면 이곳의 종이 되겠습니다." "안 된다. 이미 너는 죽어야 될 몸이야." 단굉장은 돌연 오른손을 휘둘러 소영의 머리를 가격하려 했다. 소영은 비록 내공이 뛰어났다 해 도 그대로 맞을 수는 없었다. 즉시 양팔을 들어 올려 두 명의 사나이의 관절 혈도을 각각 찍었다. 그리고는 왼발을 들어 단굉장의 아랫배를 힘껏 찼다. 이것은 일순간의 일이었다. 또한 소영은 왼쪽에 있는 사나이를 힘껏 끌어 당겨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세워 놓았다. 단굉장이 뻗친 일격은 엉뚱하게도 자기편의 어깨를 후려 쳤다. "퍽!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나이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났다. "아악!" 사나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서는 데굴데굴 굴렀다. 단굉장은 과연 심목풍의 수제자다운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불시의 일이라 자기편을 가격 하였지만 소영이 뻗은 발을 피하여 재빨리 뒤로 두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소영은 다시 나머지 한 사나이에게 장력을 날려 단굉장에게 날아가게 하였다. 단굉장은 곧 침착을 되찾고 자신에게 날아 오는 사나이를 무자비하게 장풍으로 쳐 내었다. 사나이는 두 사람의 장력에 맞아 입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 소영은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다시 일장을 뻗어 상대의 가슴을 노렸다. 단굉장도 오른손을 휘둘러 소영의 장력에 정면으로 맞섰다. "펑!" 두 사람의 장력은 무딘 소리를 내며 충돌하였다. 장력이 층돌하자 가벼운 진동이 일어났다. 단굉장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리고 가슴 속이 울렁거리며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저 놈은? 저 놈......" 그는 품 속에서 조그만 단검을 꺼내고는 다그쳐 물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그의 말은 조금 전과 전혀 달랐다. 소영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염라대왕이다." "염라대왕?"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영은 금용탐조(金龍探爪)의 초식으로 상대의 손을 잡아 채려 했 다. 단굉장은 소영의 일장을 받은 뒤 내심 두려움을 느꼈다. '이 놈은 나보다 월등히 무공이 높구나. 이대로 장력을 겨룬다면 필시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단검을 휘둘러 소영의 금용탐조를 막아 냈다. 그러나 이 일을 어쩌랴. 소영은 힘 안 들이고 그의 단검을 그대로 잡 아 버린 것이었다. 단굉장은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소영을 뚫어 지게 바라 보았다. 소영이 잡은 단도를 아무리 빼려고 해도 안 되었다. "당신은....소영.... ..." 그가 무어라 입을 여는데 소영은 쉬지 않고 손을 써서 그의 보랑(步廊)혈도를 찔러 버렸다. 단굉장은 전신에 맥이 풀리는 것 같은 감각을 일으키며 수중에 들고 있던 단검을 떨어뜨렸다. 소영은 재빠르게 단검을 집어 들고는 그의 가슴을 겨누었다. 단굉장은 이마에 구슬같은 땀을 흘리며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소영은 그의 가슴을 겨눈 자세 그대로 앞으로 걸어 갔다. 밀실은 좁았다. 단굉장은 얼마 못 가서 벽에 부딪치는 결과가 되었다. 소영은 단검을 서서히 옮겨 그의 눈으로 가져 갔다. "나는 벌써부터 이곳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독수도 배웠다. 네가 한 마디만 소리친다면 그 즉시 그 눈알을 빼 버리겠다." 단굉장은 눈길을 돌려 쓰러져 있는 두 사나이를 보았다. 그 중 어깨를 다친 사나이가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옳지! 이 사람에게는 안 됐지만 단굉장의 입을 열게 하려면...' 소영은 단굉장에게 겨누었던 단검을 내려 사나이의 가슴을 후렸다. "으악!" 사나이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그의 피가 단굉장의 얼굴에도 튀기었다. 소영은 단검에 묻은 피를 그의 옷에다 닦았다. 단굉장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크게 일그러졌다. "내가 살인을 배웠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느냐?" "당신은 정말 소대협이지요?" "그렇다. 나는 이미 옛날의 삼장주가 아니다. 이미 심목풍과 의의를 끊고 생사를 겨루는 것이다." 단굉장은 상대가 소영임을 알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강호의 소문으로 소영은 애매하게 살인을 안한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대협은 뭘 알고 싶소?" "이 밀실에는 모두 몇 명이나 있느냐?" 단굉장은 눈길을 돌려 쓰러진 두 사나이를 보았다. "이 곳엔 세 명뿐이오. 그러나 지금은 두 명이 죽고 나 혼자뿐이오." 소영은 다시 단도를 그의 눈 앞으로 가져 갔다. "만약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단굉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밀실은 조그만하니 한눈에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내 뜻은 심목풍과 백화산장을 와해시켜 무림을 좀먹는 화근을 없애는 데 있다. 너도 그에게 모 든 악을 배웠을 터이니 이대로 살려 둘 수는 없다. 더욱이 조금 전에 나를 죽이려 하였으니 너도 살려고는 않겠지." 단굉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부는 생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 법이오. 소대협께서 죽이고 싶으시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그 러나 그런 위협으로써 나를 굴복시키지는 못할 것이오." "흥! 정말로 너도 악에 중독이 되었구나. 이제는 구하려 해도 손을 못 쓸 정도로구나. 나도 너의 스승에게서 사람에게 악랄한 고통을 주는 수법을 배웠다. 오늘은 직접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구 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천천히 고통을 주다가 죽이는 것이지." 단굉장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당신에겐 대협이란 위명이 붙었지 않소. 그런데도 상대를 고문한다니 협명에 오점을 남길 것이 오." 소영은 냉소를 지었다. "그건 상대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다. 그대 스승은 너무나 악독한 사람이니 자연 너에게도 악독 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여튼 지금의 너에겐 한 가지 길밖에 없다." "무슨 길이오?" 소영은 그를 유심히 바라 보았다. "나와 손을 잡고 내 명령에 복종해야 된다." 단굉장은 눈빛을 빛내며 호기심을 나타냈다. "그런 다음에는.....?" "이번만은 살려 보내겠다. 그러나 그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땐 용서 없을 것이다." 단굉장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하였다. 밀실 안은 잠시 고요가 흘렀다. "무슨 일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이때 돌연 밀실 밖에서 낮고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소장주님....." 소영은 낮은 음성으로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나는 한 번 약속한 말은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네가 한 번만 내 말을 듣는다면 약속대로 목숨 을 살려 주겠다. 그러나 수작을 부린다면 부득이 목숨을 뺏을 수밖에 없으니 알아서 결정해라." 단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빙그레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그를 겨누던 단검을 거두었다. "대답해라." 단굉장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누구냐?" 밖에서 조금 전의 그 목소리가 들렸다. "소인은 삼음수(三陰手) 조전이오이다." "조형 혼자요?" "저는 독화정가(毒火井假)와 같이 왔는데 그는 중청에서 기다리고 있소이다." 소영은 손짓으로 그를 들어 오게 하라고 전했다. 단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형, 들어 오시오." 그러자 밀실의 문이 열리며 사람의 그림자가 재빠르게 들어 왔다. 소영은 원래 급습을 하여 혈 도를 찌르려 하였었다. 그러나 조전은 견식이 풍부하고 교활한 인물이라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채 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 서며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는 왼손으로 자신의 앞가슴을 가리고 오른손을 밑으로 내려 상대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들 어 왔다. 조전은 밀실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것을 느끼고는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적이라고 생각 했다. 그의 손은 매우 빨랐다. 안으로 들어 서자마자 소영에게 등을 돌린 그대로 일장을 뻗은 것이었 다. 소영은 그 사이 많은 견식을 넓혔지만 상대의 기습에 대처하는 행동은 아직 서툴렀다. 더군다나 상대가 미리 눈치채고 들어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밀실의 촛불은 문이 열리는 것과 함께 꺼져 버렸다. 소영은 컴컴한 중에도 밀실의 구조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전은 바닥에 쓰러져 있 는 두 시체가 어느 곳에 있는지도 몰랐다. 어두운 밀실에서 두 사람은 심각한 대치를 하였다. 이렇게 얼마가 지났는가 싶었는데 돌연 조전의 인기척이 들렸다. "어?" 그는 쓰러져 있는 시체에 걸려 앞으로 자빠졌다. 소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팔분의 공격으로 조전을 공격했다. 조전은 왼손을 내밀어 소영의 공격을 막아 내고는 동시에 오른손의 권장으로 상대의 배를 쥐어 박았다. 소영은 가볍게 몸을 날려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서로 일격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거센 장풍을 내 뻗었다. 조전은 삼음수라는 호칭을 듣는 것처럼 어느 누구와도 장력으로 상대하면 상대의 손을 상하게 만드는 수를 썼다. 두 사람의 장풍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찬 회오리 바람이 밀실을 휘몰아쳤다. 142. 밀실의 염라대왕(閻羅大王) 소영은 교피장갑을 끼고 있었으므로 제아무리 악랄한 암수라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두 사람의 장풍이 부딪친 진동은 매우 컸다. 조전은 그 진동으로 말미암아 가슴속이 울렁거리며 참지 못할 고통을 겪었다 "윽!"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고 뒤로 세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상대가 누구이기에... 보통 무공을 지닌 인물이 아니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상대의 손이 뻗쳐 왔다. 소영은 상대가 당황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왼손을 뻗어 그의 오른손 혈도를 짚었다. 조전은 장풍의 진동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중이라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혈도를 짚인 것이 다. 소영은 냉랭한 웃음을 띠었다. "흐흐... 조전! 죽고 싶은가, 아니면 살고 싶은가?" 조전은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힘없이 반문했다. "어떻게 하면 죽고 어떻게 하면 살 수가 있소?" "네가 죽고 싶다면 즉시 일장을 보내겠고, 살고 싶다면 내 말을 들어라." 조전은 어느 정도 어둠을 익혔다. 눈길을 돌려 주위를 훑어 보니 단굉장의 처량한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소장주이시오?" 단굉장은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오늘 뜻하지 않게 이런 추태를 보이는구나. 이곳을 빠져 나갈 수만 있다면 조전을 죽여야겠다. 그가 살아서 이런 이야기를 퍼뜨리면 난 강호에서 영영 파묻히고 말겠다.' 이런 생각을 하였지만 당장은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소." 소영은 조전의 혈도를 짚은 손에 점점 힘을 가했다. "우선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 일이 수월하겠구나." 그리고 갑자기 힘을 가하여 조전의 손마디 뼈를 부러뜨렸다. "으으..... 윽!" 아픔을 이기지 못한 조전이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단굉장은 그의 비명소리를 듣자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계속 신음소리를 내던 조전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당신은 뉘시오?" 소영은 조금 전 단굉장에게 하였던 대로, "염라대왕이다." 하며 냉랭한 웃음을 터뜨렸다. 조전은 소영에게서 바른 대답을 듣지 못하겠다고 느꼈던지 눈길을 단굉장에게 돌렸다. "소장주, 이 사람은 누구요?" 조전은 소영에게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단굉장이 있으므로 차마 입을 못 열고 있었다. 단굉장은 내심 신중한 계산을 하였다. '소영이 그에게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체를 숨기려 하는구나. 그런 것을 내가 말할 수 없 지.' "나도 그를 모르오. 다만 염라대왕이라니 그대로 부르시오." 조전은 눈살을 찌푸렸다. "염라대왕? 그 이름은 너무나 듣기 거북한데.... 그런데 이름도모른다니......" 조전은 입을 열었다. "염라대왕님......" 소영은 그 말에 다시 조전의 손목을 힘껏 눌렀다. 조전은 살을 도려 내는 듯한 고통에 더 입을 열지 못했다. 소영은 낮은 음성으로 꾸짖었다. "말소리를 낮추시오." 조전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했다. 그는 다시 단굉장에게 눈길을 돌리고 반 애원조로 물었다. "노장주, 지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소장주께서 좀 가르쳐 주시오." 단굉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의외로 냉정한 말을 꺼냈다. "우리 뻑화산장의 규칙은 엄하여 조금이라도 비밀을 누설시키면 독형에 처하오. 그 독형의 고통 은 지금의 고통보다 몇 배 더한 것이오. 그리고 조형은 우리 백화산장의 비밀을 잘 모르고 있으 니 아마 상대방에게 흡족한 대답을 못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조형은 온전할 것 같소?"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조형은 말을 해도 죽을 것이고 안해도 상대에게 죽을 것이오. 그러니 차라리 자결을 하시오." 단굉장의 이 몇 마디 말은 실로 흉악한 것이었다. 조전을 위로하고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 은 은근한 압력을 불어 넣는 것이었다. 조전은 어이가 없는 듯 입을 벌리고 허공을 바라 보았다. '저 놈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이제까지의 의리를 저버리고......' 그는 분노에 이를 갈았다. "소장주께서는 나를 죽이겠다는 것이요, 아니면 살리겠다는 것이요?" "그것은 조형의 마음에 달려 있소. 상대의 고문을 당해 낼 수 있다면 죽지 않아도 되오." 소영은 또다시 조전의 손목을 비틀었다. 조전의 온 몸은 식은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소영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시각에는 단굉장도 내 수중에 들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에게 묻지 말고 네 마음 대로 결정하여라." 조전은 혈도를 두 군데나 찍혔기 때문에 몸의 진기를 모을 수도 없었다. 그는 비통한 음성으로 단굉장에게 말했다. "소장주, 지금 나는 자결할 힘도 없는 몸이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소영을 바라 보았다. "염라대왕님.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오?" 그는 계속 소영을 염라대왕이라 불렀다. "심목풍은 지금 어디 있느냐?" "그건 잘 모르오" 소영은 눈을 치떴다. "그럼 이곳에 너의 부하들이 몇 명이나 있느냐?" 조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도 잘 모르는 일이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냐?" 소영은 다시 조전의 부러진 팔목을 비틀었다. 조전은 아픔을 견디지 못해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소생은... 이곳의 사람이 아니니.... 정말로.... 자세히 모르오." "그럼 무엇을 알고 있느냐?" "소생은 우리 동행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이오."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말이라도 해 보아라. 너의 일행은 몇 명이고 두목은 누구인지." "일행은 모두 십이 명이오. 신삼괴(申三怪)라는 노선배가 우리를 이 끌고 있소이다." 소영은 눈을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그럼 그 일행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지금 장사성의 서쪽 백운관에 있소이다." 소영은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백운관?" "그렇소. 소생과 정가는 신삼괴의 명령을 받고 이곳으로 온 것이오. 소장주에게 서신을 전하라는 임무요." 그러자 단굉장은 헛기침을 몇 번 하였다. 조전은 그 소리에 위협을 느끼고 다음 말을 꺼내지 않았다. 소영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채고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 당신은 살고 싶지 않은가 보군. 그렇다면....." 그는 발로 단굉장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 찼다. "아이쿠!" 단굉장은 죽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그는 몇 번인가 구르더니 곧 잠잠해졌다. 소영은 일부러 그의 아혈(啞穴)을 걷어 찼던 것이다. 조전은 귀를 기울이고 단굉장의 기척을 듣더니, "죽었나 보구려." 하고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아마 죽었을 것이다. 다음 이야기를 계속해 보아라. 너는 이곳에 와서 단굉장에게 무엇을 주려 고 했느냐?" "신삼괴의 서신이오. 그는 직접 소장주에게 전하라고 하였소." 소영은 손을 내밀었다. "내 놓아라!" 조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품 속에서 조그만 봉투를 꺼냈다. 조전은 봉투를 꺼내면서도 힐끗거 리며 단굉장 쪽을 바라 보았다. 그는 단굉장이 소영의 일격에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굉장은 아혈을 찔려 말만 못했지 죽은 것이 아니었다. 단굉장이 두 눈을 부릅뜨고 조전을 노려 보고 있는 것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소장주가 죽었으니 나중 일은 괜찮겠지. 우선 살고 봐야지...' 소영은 봉투를 받아 쥐고 초를 꺼냈다. "부싯돌이 있느냐?" "있소." "좋아, 그럼 촛불에 불을 붙여라." 조전은 단굉장의 죽는 모습을 보았으므로 감히 거절할 엄두도 못냈다. 소영은 조전이 촛불을 켤때, 열려 있는 밀실 문을 닫았다. 그의 편지의 겉봉투에는 <이 편지를 심대장주께 전해 주시오.> 하고 반듯한 글씨체로 씌어 있었다. 소영은 냉소를 띠며 봉투를 뜯었다. 안의 글씨도 비교적 잘 쓴 솜씨였다. <심대장주께, 대장주의 지교가 세상에 둘도 없으시니 언제나 빈틈이 없소이다. 심대장주의 분부 대로 제가 일을 행하자 과연 계획한 그대로 일이 성공했소이다. 소요자도 이미 고수들을 출동시 켰소. 만약 이대로 일이 순조롭게 되면 불원간 무당파와 불꽃 튀기는 혈전이 있을 것이오.> 편지 내용은 간략하였다. 그러나 그것에 내포되어 있는 뜻은 강호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뜨리 려는 음모가 꾸며져 있었다. 소영은 편지를 봉투에 넣으며 냉소를 띠었다. '흥! 상당히 악독한 간계로군.' 그리고 봉투를 품 안에 집어 넣었다. 조전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염라... 서신은 가져가야 되오" 소영은 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다음 말을 물었다. "너는 이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느냐?" 조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그럼 네가 알고 있는 것에 한해서 애기해 보아라." "저는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소이다." 소영은 그를 바닥에 앉혔다. "너는 한 가지를 알면 한 마디만 하고 두 가지를 알면 두 마디를 이야기하면 살 수 있다." 조전은 살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진 모양이었다. 소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그쳐 물었다. "어떤 방면의 일 말이오?" "너희들의 지난 행동과 앞으로 하려는 것을 말해라." 조전은 잠시의 침묵을 지킨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생은 지위가 낮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소. 단지 신삼괴의 심부름이나 하는 몸이 요." 소영은 더 묻지 않고 내심 궁리를 하여 보았다. '심목풍이 오늘날 뛰어난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그의 고강한 무공뿐만이 아니다. 지해로 강호 에 많은 부하를 만들어 그들로 인해 오늘의 바탕을 만든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끼리는 서로 비밀 을 지켜 아무도 모르게 일을 진행시키니... 이 놈이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는 것도 전연 거짓말은 아니겠군. 그리고 신삼괴라는 놈이 심목풍에게 보낸 글에는 조금의 짐작할 만한 것도 없지 않은 가?'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꺼냈다. "조전! 너도 일생동안 악한 일만 하고 다녀 네 스스로 죽인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모두 죄없이 죽 은 사람 말이다. 그러니 오늘 내 손으로 보답할 시간이 되었나 보다. 상으로 줄까, 아니면 벌로 줄까?" 조전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염라대.... 당신은 나를 죽이려는 것이오?" "그렇다. 왜 죽고 싶지는 않으냐?" "개미도 살려고 발버둥치는데 하물며 인간이 어찌......" '이런 인물은 열 명을 죽여도 심목풍에게는 조금의 타격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송사리만 죽일 게 아니라 그를 이용할 수 있으면......' 소영은 이런 생각으로 짐짓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죽고 싶지 않다면 단 한 번 기회가 있다." 조전은 다급히 말을 받았다. "그 길을 알고 싶소." "그럼 이제부터 내 명령에 따르겠느냐?" "소생이 그에 응한다 해도 당신은 믿을 수 있소?" 소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그야 믿을 수 없지." "그렇다면 소생이 어떻게 해야 믿으시겠소?" "너의 생사를 내 수중에 맡겨라." 조전은 소영에게 바싹 다가 앉으며 다그쳐 물었다. "어떻게 맡겨야 하오?" "내가 너의 경외(經外)혈도를 찔러 놓을 테다.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씩 그것을 풀고 다른 곳으 로 옮겨 짚지 않으면 죽고 말지. 피가 엉겨서 말이야. 기약된 일주일이 지나면 병신이 되고 또 삼, 오일이 지나면......" 조전은 소영의 말을 가로챘다. "그렇게 무섭소?" "내 말을 믿기 바란다. 그것은 닷새 후부터 증세가 나타날 것이니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영은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조전은 그의 무서운 눈빛에 눌려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빙그레 웃음을 보내고는 즉시 그의 일월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는 경외 기혈을 찔 렀다. "이제부터 일주일이다. 잘 명심해 두어야지 목숨을 부지할 것이다." 조전은 온 몸이 가쁜해짐을 느꼈다. "아, 이제야 살 것 같군." 소영은 품 속에 넣었던 편지를 꺼내더니 그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하였다. 단굉장이 아무리 귀를 귀울이고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해도 도저히 불가능했다. 소영은 밀실 문을 열고 조전을 보냈다. 그리고는 단굉장에게 다가가서 아혈을 풀어 주었다. 단굉 장은 아혈이 풀리자 대번에 입을 열었다. "보두 보았소." "보았다구?" "그렇소. 당신이 그를 이용하는 것을 샅샅이 보았소." 소영은 불쑥 장난기가 들었다. "그래, 너는 무슨 생각이 드느냐?" 단굉장은 소영을 유심히 바라 보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초전과 정가는 심부름군에 불과하오. 그리고 그들의 두목인 신삼괴도 본시 무림의 일과는 인연 이 없는 인물이오. 더군다나 당신과 백화산장의 대전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 것이오. 그런 인물 을 믿고 그를 이용하려는 당신의 저의가 의심스럽소." 소영은 쓴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그들을 죽여도 내 일에 아무 보탬이 없기 때문이다. 난 살생을 싫어하니 자연 그를 이용할 수 밖에...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라지만 앞으로 내 명령대로 할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니 과 히 걱정말게." 단굉장은 지지 않고 계속 말을 받았다. "그들의 신분이나 지위로서는 절대로 백화산장의 기밀에 참여할 수 없소. 더군다나 산장의 규칙 은 엄하여 그들이 조금만 눈치를 보여도 그 즉시 참형이오. 당신이 그들을 이용한다는 생각은 아 무리 생각해 봐도 잘못한 일이오. 당신이 그들의 함정에 빠질지도 모르오."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너를 믿기로 하였다." 단굉장은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이오?" "염려마라. 지금 죽이지는 않을 테니... 나의 변장술이 어떠냐?" 단굉장은 새삼스럽게 소영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훌륭하오. 귀신이 곡할 정도요." "그럼 됐다. 너는 내가 누구로 변장해야만 쉽게 심목풍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단굉장은 피식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내가 배신하지 않으리라 믿는 것이오?" "그런 생각은 조금도 말라. 어찌 그런 생각을 안했겠느냐?" 단굉장은 한동안 깊은 생각을 하더니 무엇을 결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이 그런 담력이 있다는 것에 감탄하였소. 불초는 당신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 수 있 소."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그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먼저 한 가지 일이 있는데 사전에 설명할 필요가 있다." "무슨 일이오?" "내가 그대를 따라 그대 스승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마치 호랑이 굴로 뛰어드는 것이다." 단굉장은 냉소를 띠었다. "흐흐.... 두렵다면 그만 두시오." 소영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내가 한 번 결심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다. 역시 후회도 없지. 내가 아 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해도 호랑이 굴로 뛰어드는 것이니 자연 만반의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느 냐?" 지금 단굉장은 혈도가 풀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소영의 상대가 되지 못함 을 알고 손을 쓸 생각을 갖지 않았다. 단굉장은 눈썹을 곤두세우며 다그쳐 물었다. "어떤 준비를 하겠다는 것이오?" "먼저 너의 혈도를 찔러 운기행공을 할 수 없게 만들어야 되겠다." 단굉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하면 당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이오?"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딴 뜻을 가지면 즉시 손을 써서 목숨을 빼앗겠다. 너는 운기를 행공할 수 없으니 자연 피하지도 못할 것이다." 단굉장은 조금도 표정을 변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없소?" "그리고 나의 수법으로 너의 두 기경(奇經)을 점하겠다. 그렇게 되면 열두 시간 내에 경맥이 응 고되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이 때만은 단굉장도 안색이 변하며 흠칫했다. "그건 무엇 때문에?"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하면 네가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아도 꼭 찾아야 되지." 단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당신은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구려." "어떻게 하겠나? 승낙....." 소영의 말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돌연 밀실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쿵쿵....." "당신은 너무 소홀히 일을 처리했소. 당신이 조전을 살려 내 보낸 것이 큰 실수였소."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그 놈은 다시 이곳에 올 담력이 없는 놈이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세차고 빨라졌다. "쿵쿵....." 단굉장은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문을 열어야 되오." 소영은 말없이 단굉장의 오른쪽 맥박을 짚었다. "아니 왜?" 소영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하게. 될 수 있으면 상대를 들여 놓지 마라. 만약 상대가 꼭 이곳에 들어 올 일이 있다 면 내 대신 그의 혈도를 짚어라." 단굉장은 침묵을 지키고 잠시 생각하였다. '지금 그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 편을....' 이때 계속적으로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멎었다. 필시 대답이 없으니 안의 기척을 살피는 것이었 다. 소영은 손짓으로 철문을 열라고 전했다. 단굉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밀실 문께로 다가 갔 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문을 반쯤 열고 재빨리 몸으로 막아섰다. 그러더니 단굉장은 반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난 또 누구시라고... 부인이셨군요." 그러자 밖에서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소장주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계셨소? 내가 그렇게 문을 두드려도 몰랐으니 아마.... 호호......" 말을 채 끝내지 않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여자는 바로 금화부인이었다. 소영은 대뜸 그녀가 금화부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이 금궁을 나와 싸움을 하던 중 심목풍을 죽이겠다고 뒤쫓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그 때는 심목풍을 죽이겠다더니 벌써 마음이 돌변하였나? 심목풍은 마음이 협소하여 한 번 자신을 배반한 사람을 불러들이지 않는 성미인데... 그것 참 이상하다. 혹시 그녀가 아직도.....' "불초는 이곳에서 어떤 친구와 중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소이다. 그만 그 일에 정신이 팔려 부인 의 기척도 듣지 못하였소." "어떤 친구인지 나에게 인사시켜 주시겠소?" 단굉장은 황급히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부인께선 중청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내 곧 이야기를 끝내고 나가리다." 그리고는 철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자 금화부인은 문께로 바싹 다가 서며 철문을 막아 섰다. "소장주, 난 명령을 받고 왔는데 어찌 이렇게 푸대접을 하는 것이오?" 단굉장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누구의 명령이오." "그야 물론 심대장주의 명령이지요." "그래요? 무슨 일이오?" 금화부인은 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우리 안으로 들어 가서 이야기해요 네?"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날려 안으로 들어 서려 했다. 단굉장은 오른손을 이미 못 쓰게 되었으므로 왼손 하나로 그녀의 앞가슴을 향하여 찔러 갔다. 그의 공력은 마치 총알같았다. 그러나 금화부인은 옆으로 몸을 날려 그의 공력을 가볍게 피하고는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소장주! 어째서 나에게 이런 독수를 뻗치는 것이오?" 단굉장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다시 철문을 닫으려 했다. 이번에는 금화부인도 은근히 화가 났다. '어디 막아 보아라!' 그녀는 갑자기 왼손을 휘둘러 거센 장력을 뻗었다. 단굉장은 졸지에 당한 일이라 미처 손도 못 쓰고 뒤로 세 발짝이나 물러났다. 그 틈을 이용하여 재빠르게 금화부인의 몸이 날아 들었다. 두 사람의 싸움으로 인하여 실내의 촛불이 꺼져 버렸다. 단굉장은 그녀가 다시 나가지 못하게 밀실 문을 닫아 버렸다. 그는 금화부인에게 더 이상 반격을 하지 않았다. "내가 굳이 그녀에게 손을 쓸 필요가 없지." 이런 생각을 하는데 돌연 자신의 왼팔에 상대의 손이 닿는 것을 느꼈다. "아차!" 그러나 상대의 매끄러운 손은 벌써 혈도를 짚었다. 단굉장은 무어라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소영에게 이것을 알릴까? 그러면 그가 손을 쓸 터이니 자연히 손을 놓겠지.' 실내는 칠흑같은 어둠이 깔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단굉장은 성급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인, 불초의 왼손을 놓으시오.!" 그것은 일면 소영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 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소영의 기 척을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단굉장은 초조한 마음에 다시 입을 열려는데 금화부인이 먼저 말했다. "소대장주! 너무 엄살 부리지 마시오. 당신의 위풍은 다른 사람에게나 통하지 나에게는 안 되오. 당신은 어째서 내 혈도를 찌르려 했소? 나와 원한이 있단 말이오?" 그리고 단굉장의 손목을 세차게 눌렀다. 단굉장은 아픔을 참지 못해 신음소리를 냈다. "부인... 이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너무하다고? 소장주가 먼저 손을 쓰지 않았소." 또 다시 그녀는 단굉장의 손목을 눌렀다. 단굉장의 괴로운 신음소리는 더 한층 높아졌다. 이때 갑자기 실내가 밝아지며 소영의 냉랭한 말소리가 들렸다. "부인, 손을 놓으시오.!" 금화부인은 깜짝 놀라며 음성이 들린 곳을 찾았다. 소영이 변장하고 있었으므로 금화부인은 상대를 몰라 물었다. '누굴까? 하여튼 적이 틀림 없을 텐데.....' 금화부인은 한꺼번에 두 손을 휘둘러 세찬 장풍을 소영에게 날렸다. 소영은 가볍게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먼저 왼발을 옆으로 크게 내디디며 몸의 균형을 비스듬히 잡고는 허리를 굽혔다. 이렇게 상대의 일장을 피한 다음 손을 뻗어 단굉장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 당겼다. 소영의 방패가 된 단굉장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느라 어쩔 줄을 몰랐다. 금화부인은 양미간을 잔뜩 찡그렸다.그녀는 잠시의 여유도 없이 계속 장풍과 지풍으로 공격했다. 줄잡아 이십여 초를 공격해도 소영은 피하기만 했지 반격을 하지 않았다. 금화부인은 차츰 당황스러워졌다. '상대의 실력이 대단하구나. 십여 초나 손을 써도.....' 그녀는 스스로 손을 멈추고는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뉘시오?" "나 말이오? 난 소영이오." 금화부인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대가 소영이란 말이오?" "그렇소. 부인은 내 음성을 모른단 말이오?" 금화부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소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목소리는 비슷한데....." 소영은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부인은 다시 살아났군요."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지면 죽지 않는 법이오. 그런 것은 이 누이도 직접 겪어 보고 하는 말이니 우연이라 생각지 말아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단굉장이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사이는 매우 가깝군요." 소영은 냉소를 띠었다. "그렇다. 네가 알고 있듯이 그런 적이 아니다. 소장주, 이제 다음 이야기를 진행시킬까? 이 부인 께선 절대로 비밀을 누설치 않는 분이니 안심하게." "금화부인께서 저의 스승 명을 받고 이곳에 오셨다니 필시 중요한 소식이 있을 것이오. 우선 부 인의 이야기부터 듣고.... 혹시 일에 무슨 변화가 있어 장사를 떠났을지도 모르오." 소영은 돌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심목풍이 장사를 떠났다면 너와 약속한 것은 무효가 될 것이다. 그러니 자연 네 목숨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지." 단굉장은 부르르 떨더니 무어라 입을 열려다 고개를 흔들었다. 금화부인은 주위를 훑어 보더니 쓰러진 두 사나이를 가리켰다. "이 사람은 동생이....." 소영은 침묵을 지켰다. "동생은 나와 할 이야기가 많소?" 금화부인은 다시 단굉장에게 눈길을 돌렸다. "소장주의 말대로 대장주는 장사를 떠나려고 하오." 소영은 깜짝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이미 떠났단 말이오?" 금화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떠나 올 때까진 그곳에 있었소." 소영의 표정은 무엇에 쫓기는 사람같았다. "부인은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계시오?" "모르오.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장사를 떠난다고 하였소. 그러니 언제 어디로 떠날지는 모르오." 소영은 단굉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굉장, 그대가 스스로 말해 보아라. 그대를 어떻게 하여야 좋을는지를!" "불초는 당신의 말을 어긴 적이 없소. 조금 전에 부인을 들여 놓은 것을 일부러 한 일이 아니오. 불초의 무공이 부인에게 못 미처 부득이 당한 일이니 그것으로 트집을 잡지 마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의 약속은 아직까지 그 효력이 있는 것이냐?" "물론이오." "좋다. 심목풍이 장사를 떠났다 하여도 그에게 은밀히 침투할 기회는 있을 것이다. 너를 믿어 보 겠다." 하고는 눈길을 돌려 금화부인을 바라 보았다. "부인, 백화산장의 중요한 지위에 있는 고수들도 모두 장사를 떠났소?" "아니오. 장사를 떠난 것은 심목풍 혼자뿐이오." 소영은 다시 단굉장에게 말했다. "심목풍이 장사를 떠났으니 그대는 큰소리 칠 수가 있겠군. 백화산장에 그가 없을 것이니 말이 다." 단굉장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초의 스승은 조그만 일에도 앞 뒤를 가리는 성미요. 더욱이 백화산장의 지위를 논한다면 매 우 복잡하오. 산장에는 불초보다 무공이 강한 인물들이 많은데 어찌 그들을 명령할 수 있겠소. 그 들은 모두 나의 선배요. 당신은 백화산장의 내정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오." "누가 그대에게 백화산장을 지휘하라고 하였나? 그대는 다만 나를 데리고 돌아다니기만 하면 되 는 거야. 바로 장사로 가는 것이지. 그대는 심목풍이 두려워서 나를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그 러나 지금 장사에는 심목풍이 없다지 않았나. 그대는 소장주라는 신분으로 응당 장사를 살펴 볼 권한이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자는 말일세." 소영의 말은 차츰 부드러워졌다. 단굉장은 금화부인을 뚫어지게 바라 보면서 한탄조로 입을 열었다. "아깝게도 금화부인이 불초를 돕지 않는구려. 만약 부인이 나를 도와 준다면 적을 물리칠 수 있 을 텐데..... 지금은 더 어쩔 수 없으니 소대협의 말에 따르겠소." 금화부인은 그의 눈빛을 피하였다. '이 사람은 지금 나를 원망하고 있구나. 언젠가는 그 복수를 할는지 모르니 이 자리에서 알아 들을 수 있게끔 변명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만약 당신과 손을 잡게 되면 틀림 없이 죽게 될 것이오." 단굉장은 눈을 크게 뜨고 다그쳐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소대협의 무공이 고강하여 우리 두 사람이 덤빈다 하여도 별 신통할 것이 없소. 우리 둘이서 그를 곤경에 몰아 넣는다면 그도 무서운 반격을 할 것이오. 그러면 자연 당신이 먼저 죽게 될 것 이 아니겠소?" 단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말에도 일리는 있소." 그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소영을 바라 보았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대협! 당신의 뜻은 불초가 소대협을 모시고 장사에 설치된 요새로 들어 가는 것이지요? 허나 이 일은 신중히 해야 되오. 만약 비밀이 누설되면 불초에게도 불리하지만 당신도 온전치는 못할 것이오." 그의 말은 소영에게 금화부인을 죽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었다. 소영은 그 말을 듣고 일부러 그의 허점을 찔렀다. "그럼 당신은 금화부인을 없애자는 말이오?" 그러자 단굉장은 무어라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었다. "아니오. 그런 뜻이 아니라 소대협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것이오. 그것은 소대협께서 결정지을 문제요." 소영은 담담히 웃었다. "그럴 필요가 없소." 단굉장은 무안한 분위기를 돌리기 위하여 곧이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행동을 개시합니다." "좋소. 그보다 앞서 당신에게 몇 가지 일을 설명해야 될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소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백화산장에서 심목풍을 제외하고는 나와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목숨을 귀하게 여겨 쓸데없는 행동은 하지 마시오. 나는 그대들의 동정만 살피고는 즉시 떠나겠 소. 당신이나 그외 다른 사람도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이오." 단굉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 비밀이 누설되어 소대협에게 불리한 일이 생기더라도 내 탓이 아니면 손을 쓰지 마 시오." 소영은 빙그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도 보는 눈이 있으니 당신의 잘못을 대번에 알 수 있소. 만약 당신에게 잘못이 없는 일이라 면 약속대로 하겠소." 단굉장은 밀실 문으로 다가 갔다. "일이 늦으면 좋지 않으니 어서 떠납시다." 143. 염탐 소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특별히 다른 변장을 하지 않아도 되겠소." 단굉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저 수염을 없애고 경장 차림을 하고서 얼굴을 분장하면 더욱 좋겠지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수염을 떼어 버렸다. 그가 장삼을 벗어 던지자 금화부인이 말했다. "내가 가서 옷을 가져 오지." 금화부인은 가벼운 걸음으로 문을 나갔다. 금화부인이 사라지자 단굉장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대협은 금화부인이 일을 누설시키는 것이 겁나지 않소?" 소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간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의심할 리 없소." "그건 어째서 그렇소?" "첫째, 다른 사람들은 소장주가 백화산장을 배반했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고 둘째, 내가 소장 주와 함께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니까......" 이때 금화부인이 한 벌의 옷을 가지고 들어 왔다. 소영은 그녀가 가져 온 옷을 갈아 입었다. "소장주, 당신은 나하고 어떻게 칭호를 해야 될까?" 소영의 물음에 단굉장이 대답했다. "소대협은 나를 단형이라고 하면 될 것이고 나는 소대협을 백형이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소장주에겐 백가라는 친구가 있소?" "네. 하지만 그는 지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은 없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이 실내에 있는 시체는......?" "그것은 사람을 시켜 치우게 하면 되지요. 자, 이제 우린 갑시다." 단굉장이 돌아서자 소영은 재빨리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는 빠른 동작으 로 두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이제 갑시다." 단굉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소영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자 금화부인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동생은 항상 주도면밀하군. 그렇지만 내가 보호해 주어야겠지?" "필요 없소." 소영이 낮은 음성으로 대답하고 밖을 향해 걸음을 떼어 놓았다. 칠택다원(七澤茶園)을 나섰을 때였다. 앞에 걷던 단굉장이 돌연 오른손을 높이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 옷을 입은 건장한 청년이 나타나 그에게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소장주, 어떤 분부가 계십니까?" "두 필의 말을 준비하게." 청년은 공손히 대답하고 물러섰다. 잠시 후에 두 필의 말을 끌고 청년이 다시 나타났다. 단굉장은 말안장을 잡고 진기를 끌어 모았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예리한 칼날로 쑤시듯 갈비뼈가 따끔따끔했던 것이다. 말잔등으로 올라 타려던 단굉장은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 으며 그대로 섰다. 얼굴에선 땀이 뻘뻘 흐르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과연 소영은 무서운 재주를 지녔구나. 어떻게 혈도를 찍었기에 내가... 이 혈도는 분명 소영이 아니고서는 풀지 못하겠지.' 단굉장은 소영에 대한 감탄과 두려움을 느꼈다. 이때 소영이 다가 서더니 그를 부축해 말 위로 끌어 올렸다. 두 필의 말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큰 길을 돌아 서자 멀찌감치 백리빙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처마 밑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단굉장과 함께 달려 가는 소영을 보고는 백리빙은 알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소영은 왼손을 슬쩍 내밀어 암호를 보냈다. 소영의 신호를 받은 백리빙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즉시 달려 왔다. 소영은 손짓으로 그녀 를 쫓아 오지 못하게 말리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히히힝!" 말은 우렁차게 울부짖으며 쏜살갈이 내달렸다. 소영의 손짓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뒤쫓던 백리빙은 쫓아오지 말라는 소영의 신호에 그 자리에 선 채 사라져 가는 두 필의 말을 바라 보고 있었다. 이때 백리빙의 곁으로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야채 바구니를 막대기에 꿰어 어깨에 맨 사나이 였다. "백리낭자, 우리 저쪽으로 갑시다." 사나이를 힐끗 바라 보던 백리빙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하나의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앉았다. 백리빙이 사나이를 바라 보며 따지듯 물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불렀소?" 사나이는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백리낭자, 나 두구는 쓸데없이 낭자를 부르진 않소." "그럼 무엇 때문이에요?" "낭자는 소대협과 함께 말을 타고 간 사람을 아시오?" 백리빙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그가 누구예요?" "단굉장이라고... 심목풍의 수제자요." 백리빙의 안색이 핼쓱하게 변했다. "큰일 났어요! 오빠가 그들과 함께 돌아다니다니 위험해요. 우리 들이 빨리 뒤쫓아 가야 돼요" 두구는 고개를 저으며 껄껄 웃었다. "하하, 그렇게 조급한 생각은 마시오. 만일 소대협에게 우리의 힘이 필요했다면 따라 오지 말라 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우리는 소대협이 오지 말라고 한 이상 따라갈 필요는 없소." 백리빙이 입을 비쭉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제가 보기에 상팔대협보다 둔한 것 같군요." 그러자 두구가 껄껄 웃었다. "하하, 낭자는 동생이 형보다 나은 예를 보았소? 내가 형님보다 못할 것은 당연하지요." "흥, 당신은 무정하고 멍청하고 결단성이 없고 의리없는 사람이에요." 두구는 어이가 없는 듯 입을 벌린 채 백리빙을 바라 보았다. 백리빙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 올 라 있었다. "이 아가씨의 성질은 지독히도 까다롭군." 두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보고 무정하다는 거나 멍청하다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 들일 수 있는 말이오. 허나 의리가 없 다는 말은 좀 지나친 것 같소." "흥, 당신이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빠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서도 왜 가만히 있지 요?" "하하... 그걸 갖고 의리가 없다고?" 두구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소대협은 무공이 고강하여 우리는 그분의 백분의 일만도 못하오. 그 분이 우리에게 오지 말라 고 했는데 우리가 억지로 뒤쫓아 간다면 일에 아무런 보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 지장이 있을지도 모르오." 하고 말하자 백리빙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파르르 성을 냈다. "흥, 당신하고는 말상대가 되지 않아요. 당신이 안 가겠다면 나 혼자서라도 가겠어요." "잠깐!" 두구가 급히 몸을 일으켜 백리빙의 앞을 막았다. "왜요? 저하고 싸울 생각인가요?" "별말씀을.... 내가 낭자에게 몇 마디 할 말이 있으니 끝까지 들어 주기 바라오." "좋아요. 어서 말하세요. 저는 당신의 교훈을 들을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요약해서 하세요." 두구가 말했다. "좋소. 간단하게 말하겠소. 우선 소대협이 낭자보고 쫓아 오지 말라고 했는데 만일 낭자가 자기 고집만 세우고 쫓아 간다면 소대협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 "그건....." 백리빙은 얼른 대답할 말을 찾아 내지 못했다. "둘째, 소대협은 필시 어떤 계획이 잇을 텐데 만일 낭자가 쫓아 가는 바람에 그 계획이 수초로 돌아 간다면 낭자는 무엇으로 변명하겠소?" 백리빙은 눈을 내리 깔고 잠시 생각하더니, "역시 가지 않는 것이 옳겠군요." 하더니 의자에 앉았다. "물론이오. 우리는 가면 안 되오." 백리빙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저희들이 갈 수 없다 하더라도 암암리에 오빠의 뒤를 밀어 줄 방법을 생각해야겠어요." '이 소녀가 소영을 생각하는 마음은 자기의 생사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설득시키기 매 우 힘든 여인인데......' 두구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무위도장은 지모가 뛰어나신 분이니 우리는 그분을 찾아가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소? 혹시 어떤 좋은 방법이 생각날지도 모르니까......" 백리빙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그럼 어서 가요." 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밖을 향해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 보며 피식 웃던 두구는 걸음을 옮겼 다. 한편, 소영과 단굉장을 실은 두 필의 말은 잠시도 쉬지 않고 질풍처럼 내달렸다. 장사성을 벗어나자 단굉장은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추며 입을 열었다. "우린 먼저 백운관으로 갑시다." "그건 소장주가 알아서 하시오. 하지만 난 한시라도 빨리 백화산장이 장사성에 뻗친 실력을 알 고 싶소. 그래야만 소장주가 한시라도 빨리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잖겠소?" "좋소. 될 수 있는 한 빨리 가도록 합시다." 단굉장은 두 발로 말의 배를 힘껏 찼다. 그러자 말은 화살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두 사람은 곧장 백운관을 향해 달렸다. 백운관으로 들어 서자 말의 속도는 다시 느려졌다. 백운관의 규모는 굉장했다. 드나드는 사람이 줄지었고 문호가 활짝 열려 겉으로 보기에는 심목 풍의 무리가 점거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소영과 단굉장은 말에서 내려 선 후 걸어서 백운관 안으로 들어섰다. 단굉장은 이곳이 매우 낯익은 듯 서슴없이 후전(後殿)을 향해 걸어 갔다. 사진원(四進院)을 지나자 깨끗하고 아담한 과원(跨院)이 나타났다. 육중한 나무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백운관에서도 이 과원만은 별천지의 기분을 주고 있었다. 사람의 기척도 없이 조용하고 집의 생 김새도 매우 우아했다. 단굉장은 문 앞으로 다가 서더니 가볍게 아홉 번을 두드렸다. "이제 보니 이들은 자기들 만의 암호로 문을 열어 주는 모양이구나."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기척이 들리더니 굵은 목소리가 안에서 튀어 나왔다. "누구시오?" 그러자 단굉장이 암호를 댔다. "금풍송상래(金風送爽來)!" 그러자 문이 열리며 푸른 옷을 입은 사나이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단굉장을 보더니 급히 웃음을 떠올리며 허리를 굽혔다. "소장주님께 인사 드립니다." "인사는 필요 없네. 신(申)노대협은 계신가?" "신영대께서는 방금 전서구의 서신을 받고 출타하셨습니다." 단굉장은 안으로 성큼 들어 서면서 다시 물었다. "그럼 누가 있지?" 사나이는 단굉장과 소영이 들어 서자 급히 나무문을 닫더니 단굉장의 뒤를 바싹 따르며 대답했 다. "부영대 공상(孔相)께서 안에 계십니다." "좋아, 가서 알리게. 내가 만나야 될 일이 있다고....." "네, 말씀대로 전하겠습니다." 사나이는 단굉장을 앞질러 안으로 뛰어 갔다. 그러자 단굉장이 낮은 음성으로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께선 보기만 하고 어떤 일이든 참으셔야 되오. 말을 듣기만 하고 같이 말려들진 마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장주는 안심하시오. 나는 입을 다물고 있겠소." 이때 안으로 들어 갔던 사나이와 또 한 명의 중년 사나이가 나타났다. 중년 사나이는 장삼을 걸 치고 있었다. '단굉장이 백화산장에서 누리고 있는 지위는 굉장한 모양이로구나.'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중년의 사나이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중년 사나이는 두 사람 앞으로 다가 오더니 단굉장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공상이 소장주를 뵙소이다." 단굉장은 답례를 하며 말했다. "상형은 안 계시오?" "신영대께선 서신을 받고 가셨소이다. 이 곳은 당분간 내가 맡게 되었소." "아, 그러시오? 노고가 많으시겠소. 그런데 이곳의 사람 수는 몇 명이나 되오?" "신영대를 제외하고 열두 명이 있소이다." 단굉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 사람들이 지금 모두 이곳에 있소?" "조전, 정가 두 명이 파견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있소." 이들은 말하는 동안에 하나의 커다란 방 앞에 당도했다. 소영은 눈치채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사방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이 작은 방에는 갖가지 화초가 자리 다툼을 하고 있었으며 방 양쪽에는 다락방이 붙어 있었다. 방 앞에 다다르자 공상이 단굉장에게 말했다. "소장주, 안에 들어가 차를 드시지요." "고맙소이다." 단굉장은 소영에게 따라 들어 오라는 눈짓을 하고 안으로 들어 갔다. 방은 넓고 깨끗했다. 방으로 들어 선 단굉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물었다. "백운관 안에 근래에 어떤 변화가 있었소?" "신영대께선 수하의 외출을 엄격히 통제하고 계시기 때문에 명령 없이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 갈 수 없소.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외부에 잘 나타나고 있지 않아 변화가 있을 리 없소이다." "그러면 그렇지!" 단굉장은 무릎을 치며 기뻐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말했다. "신영대가 불려간 지는 얼마나 되오?" "한 시진이 좀 못 될 것이오." 단굉장은 소영을 힐끗 바라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소이다. 나는 길을 가다가 이곳을 경과하게 되었는데 궁금하길래 한 번 들러 보았소. 일이 없다면 이만 작별하겠소." 공상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더니 무겹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일이 있었지만.... 소장주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무슨 일이오?" "사해군주에 관한 일이오." 단굉장은 소영을 슬쩍 바라 보았다. 소영은 어서 자세히 캐물으라는 눈짓을 했다. 그러자 단굉장 은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물었다. "사해군주가 어찌 되었소?" "그 사해군주가 소요자를 파견해서 이곳에 들르게 했었소." "이곳엔 왜?" "글쎄요. 그는 신영대와 꽤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약간은 들었소." "그래, 무슨 얘기를 했소?" "그들은 이미 소영을 잡아 가두었다고 하더군요." 이 말을 들은 단굉장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이 병신들아, 거짓말도 유분수지.... 소영이 지금 바로 내 곁에 앉아 있는데 언제 잡았단 말이 냐?' "그게 사실이오? 헛된 소리는 아니겠지요?" "글쎄요... 나로서는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단정지을 수 없 소." "흠, 아무튼 소영이 잡혔다면 그것은 퍽 경하해야 할 일이군요. 그 이외에 다른 일은 없소?" "없소이다." "그럼....." 단굉장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길이 바쁘니 나는 가봐야겠소이다." 소영과 공상도 몸을 일으켰다. 공상은 대문까지 배웅나왔다. "공형, 더 나오지 말고 들어 가시오." 단굉장의 말에 공상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응당 소장주를 멀리까지 배응해야 하겠지만, 신영대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더 나갈 수 없음 을 양해하시오." "괜찮소 어서 들어 가시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단굉장은 답례를 하고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백운관을 나섰다. '믿어지지 않는구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곳이 심목풍의 점거라니.... 아무튼 심목풍 의 수완은 놀랍다.' 백운관을 나서면서 소영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묶어 놓았던 말고삐를 풀고 올라 탔다. 역시 운기를 할 수 없는 단굉장을 소영이 부 축해서 말에 태워야 했다. 말에 올라 탄 소영은 낮은 소리로 단굉장에게 말했다. "소장주는 말솜씨가 좋더군요." "내가 소대협과 언약한 이상 있는 재주를 다 기울였을 뿐이오. 소대협도 나하고 세운 약속을 지 켜 주기 바라오" "그건 염려 마시오. 소장주가 엉뚱한 생각을 않는 이상 나는 절대로 언약을 깨뜨리지 않겠소." 두 필의 말은 서서히 움직였다.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오?" "소대협을 내 사부님이 거처하는 곳으로 안내하겠소." "좋소. 어서 갑시다." 두 사람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단숨에 이들은 이십여 리나 달렸다. 그러자 하나의 농장이 나타 났다. 이 농장에는 여러 채의 초가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집집마다 대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고 곳곳 에 대숲이 많았다. 농장을 빙둘러 울타리를 이룬 것도 대나무였다. 단광장은 곧장 울타리 문앞으로 달려 갔다. 소영도 그 뒤를 바짝 따랐다. 두 필의 말이 울타리 가까이에 이르자 문이 활짝 열렸다. '이 농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방비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의외로 감시가 심한 모양이구나.' 두 사람이 열려진 문으로 들어 가자 좌우에서 두 명의 사나이가 뛰어 나왔다. 그들은 두 필의 말고삐를 하나씩 잡았다. 운기를 할 수 없는 단굉장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는 두 사나이를 둘러 보며 물었다. "대장주는.....?" 왼쪽의 사나이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대장주께선 이미 이곳을 떠나셨습니다." 오른쪽 사나이는 소영을 아래위로 훑어 보고 있었다. 이것을 본 단굉장이 마른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분은 백형이라는 친구인데 대장주를 뵈을 일이 있어서 왔다." 두 사나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필의 말을 끌고 마굿간으로 걸어 갔다. "소대협, 내 뒤를 바짝 따르시오. 이곳은 경비망이 철저해서 자칫하다가는 생명이 위험하오." "단형의 배려에 감사하오." 소영은 단굉장의 뒤를 바짝 따랐다. 이 농장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하며 인기척도 없었다. 나뭇가 지를 흔드는 바람만이 단조로운 음향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었다. 단굉장은 농장 중앙에 있는 한 채의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갔다. 그 집의 울타리 안으로 들 어 서자, 네 명의 사나이가 훌쩍 뛰어 나와 두사람의 앞을 막아 섰다. 네 사람은 단굉장을 보더니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소장주께서 오셨습니까?" "수고들 많소. 대장주께서 나가신 지는 얼마나 되오?" 왼쪽의 사나이가 대답했다. "한 시간도 못 됩니다." 네 사나이는 단굉장에게 매우 공대하면서도 길을 터 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단굉장이 물었다. "지금 누가 있소?" "이장주께서 계십니다." 대답한 것은 왼쪽의 사나이었다. "내가 이장주를 뵈오려고 하는데 통보를 해야 되오?" "소장주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이분은 백형이라고.... 나하고는 아주 절친한 친구요." "소장주와 함께 오셨으니 저회들이 가로막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장주님의 명령이 너무도 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으니 소장주께서 용서해 주시기 바랍 니다." 단굉장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더니 성난 어조로 말했다. "좋아. 가서 보고하시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왼쪽에 서 있던 사나이가 공손히 읍을 하더니 황급히 안으로 들어 갔다. 다른 세 명의 사나이는 여전히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심목풍의 부하들은 모두 충성스럽군! 그러나 저러나 자기 제자까지 출입의 제한을 시키다니 ......' 소영은 세 사나이를 훑어 보았다. 그들은 모두 무공이 배인 몸들이었다. "이장주께서 두 분을 안으로 들이시라는 분부이십니다." 그는 말을 마치더니 세 사나이에게 눈짓을 해서 함께 길을 터 주었다. "들어 갑시다." 단굉장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소영이 바짝 따랐다. 소영은 그 초가 집안에 주조룡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단굉장은 초가집을 옆으로 돌아 더 앞쪽으로 가고 있었다. 초가집을 돌아서자 하얀 자갈이 깔린 길이 나타났다. 길 양쪽은 높이 일 장쯤 되는 대나무 울타 리였다. 그 일 장의 거리마다 경장의 사나이들이 지키고 있었다. '경계가 삼엄하구나.' 자갈길은 길이가 팔 장쯤 되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한 채의 커다란 집이 있었다. 이것 역시 초가집이었다. 큰집의 문앞에는 네 명의 사나이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단굉장을 보더니 일제히 허리 를 굽혀 인사를 했다. "소장주님을 뵈옵니다." 네 사나이는 단굉장에게 공손하게 인사는 하면서도 문을 가로막은 채 비켜 서지 않았다. 단굉장은 네 사나이를 훑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장주에게 한 마디 전해 주시오. 내가 뵙고자 한다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에서 주조룡의 음성이 튀어 나왔다. "조카인가?" 말소리와 동시에 주조룡이 문앞에 나타났다. 그러자 네 사나이가 옆으로 비켜 섰다. 단굉장이 인 사를 하자 주조룡은 머리를 끄덕여 받더니 소영을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주조룡, 오랜만이구나!" 소영은 일부러 그를 마주 쏘아 보았다. 주조룡이 단굉장에게 물었다. "이분은 누구지?" "예. 이 사람의 성은 백가이고 저와는 절친한 사이입니다." 주조룡은 여전히 소영을 바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떻게 오셨나?" 제가 모시고 왔는데 대장주님을 뵈오려고 왔습니다." "자네 사부께선 이미 이곳을 떠나셨는데....." 단굉장은 소영을 힐끗 바라 보더니 주조룡에게 약간 강한 억양으로 말했다. "사숙님, 친구는 사부님을 뵈오려고 일부러 먼 곳에서 왔는데 우리가 너무 냉대하면 제 입장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주조룡은 단굉장을 쏘아 보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좋아, 들어 오시라 하게. 그러나 함부로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거나 기웃거려선 안 되네." 단굉장이 소영을 돌아 보며 말했다. "이것은 우리 장의 규칙이니 백형은 언짢게 생각지 마시오." 소영은 주조룡이 자기의 음성을 알아 차릴까 두려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주조룡은 단굉장과 소영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 보더니 갑자기 고함쳤다. "무엇들 하느냐?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그러자 네 명의 사나이는 허리를 굽실하더니 멀찌감치 물러섰다. '주조룡이 신경질을 부리는 것으로 보아 마음이 과히 편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소영이 이런 생각에 젖어 있는데 단굉장은 한 걸음 앞으로 떼어 놓으며 말했다. "백형은 내가 길을 안내하겠소." 소영은 역시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는 단굉장의 뒤를 바싹 따랐다. 주조룡은 문 곁에 서서 두 사람이 실내로 들어 서는 것을 바라 보더니 뒤따라 들어 왔다. 두 사 람이 방으로 들어 서자 방문을 닫더니 돌연 손을 뻗쳐 소영의 손목을 잡았다. 소영은 주조룡을 경계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왼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앞장 서서 들어 선 단굉장은 주조룡이 소영의 손목을 잡는 것을 보고 속으로 크게 놀랐다. '눈치챈 것이 아닐까?' 단굉장은 소영의 안색을 살폈다. 소영이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는 것을 본 단굉장은 속으로 안 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단굉장은 주조룡을 돌아 보며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주사숙, 왜 그러십니까?" 주조룡이 차갑게 대답했다. "조카, 이 친구는 좀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데....." "어디가 의심스럽단 말씀이오?" "이 친구는 전혀 말을 않는군. 벙어리인가?" 단굉장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는 평소에 누구하고 말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오" "좋아.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몇 마디 말을 시켜 보지." 소영은 주조룡에게 손목을 잡힐 때 속으로는 매우 당황했었다. 그러나 그는 주조룡이 자기를 시 험해 보려는 속셈일 것이라 생각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하여 입을 열 었다. "이장주의 이런 행동이 손님을 맞는 예의요?" 주조룡은 소영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 보더니 손목을 풀어 주며 빙그레 웃었다. "아아, 너무 볼쾌하게 생각진 마시오. 아무튼 실례했소이다." 주조룡은 몸을 돌리더니 앞장 서서 걸었다. 한숨 놓은 소영은 그 뒤를 따랐다. 방을 나서니 복도가 나타났다. 주조룡은 소영을 데리고 어느 방으로 들어 갔다. 창에는 검정색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두 개의 촛불이 방안을 밝히고 있었다. 방은 퍽 넓었다.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데 그 중에 여섯 개의 나무의자에 한 사람씩 조용 히 앉아 있었다. 주조룡은 중앙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으며 단굉장에게 말했다. "자네도 앉게. 우린 마침 매우 중요한 일을 토론하고 있던 참이지." 단굉장은 아무 대답도 없이 빈 의자에 앉았다. 소영도 그 곁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소영은 주조 룡에게 눈치 채이지 않게 방안의 사람들을 살펴 보았다. 몸집이 땅딸막한 노인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저 노인은 신삼괴(申三怪)가 아닐까?' 소영은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노파는 바로 당노부인이었다. 다른 네 사람은 모두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창백하며 혈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네 사람은 팔대혈영화신(八大血影化身)과 차림새나 혈색이 같은데... 이들은 그 팔대화신 중 의 네 사람인가? 팔대화신은 심목풍만이 부릴 수 있다더니 주조룡도 이들을 부릴 수 있단 말인 가?'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주조룡이 입을 열었다. "신형께서 아까 하신 말씀은 틀림이 없겠지요?" 몸집이 뚱뚱한 신삼괴가 대답했다. "틀림없소. 나는 이미 상세한 것을 대장주님께 서신으로 보고했소." "큰형님께선 중요한 일 때문에 갑자기 떠나셨소. 그러나 떠나기 직전에 소제보고 신형과 이 일 에 대해 충분히 의논하라고 하셨소." "나는 소요자와 회담한 후 즉시 한 장의 서신을 만들어 조전과 정가를 시켜 단굉장 소장주에게 일단 전하게 했소. 그것은 소장주가 심장주에게 전하게 하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두 사람을 보내 자마자 심장주께서 보낸 전서구의 서신을 받고 총총이 달려 온 것이오." "그랬군요. 대장주께선 수십 년 동안 보지 못했던 한 분의 절친한 친구가 부르는 바람에 신형의 일은 소제에게 맡기고 떠나신 것이오!" 신삼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소요자와 나는 매우 진지한 회담을 가졌었소. 그는 우리와 손잡기를 원하고 있 소." 신삼괴의 말에 주조룡은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더니 대답했다. "대장주의 지혜와 무공은 우리가 따를 수 없소. 그분이 여기에 계신다면 잠깐 사이에 어떤 중대 한 일이라도 처리할 수 있소. 그러나 나는 다르오. 여러 가지로 심사숙고해서 조금의 실수도 없게 해야 되잖겠소?" "그야 물론이지요. 그런데 대장주께서 떠나시면서 무엇이라고 분부하신 것이 없소?" "매우 급하게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나한테는 한 마디밖에 지시한 것이 없소." "그 한 마디가 무엇이오?" 주조룡은 방안을 한 바퀴 둘러 보더니 대답했다. "대장주의 분부는 별것이 아니었소. 신형이 이곳에 오거든 소요자와 신형이 회담한 내용을 서로 의논해서 처리하라는 분부였소." "그렇다면... 모든 권한은 이장주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오?" 주조룡이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나는 일을 충분히 검토한 끝에 처리하고 있소. 당돌하게 즉흥적으로 처 리했다간 후일 화를 자초하고 싶진 않소." "그야 지당한 말이오. 그럼 이장주께선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시오?" 주조룡이 허허 웃더니 얼른 그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나는 앉아서 이익볼 수 있게 하고 싶소. 그러나 때가 때인만큼 될 수 있으면 신형의 뜻을 따르 겠소. 다만 한 가지 급한 일이 있소." "그것이 무엇이오?" "돌아 다니며 독을 풀어 넣는 일을 당분간 중지해야 하오. 일단 그에게 들키면 원수가 되는 것 이니까.... 대장주가 이곳에 있다면 별문제지만 나는 그를 상대할 수 없소." "나는 이장주의 뜻에 찬성이오." 신삼괴의 말에 주조룡은 머리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럼 됐소. 나머지 일은 계획대로 진행합시다." 신삼괴가 헛기침을 하더니 주조룡의 말을 받았다. "먼저 그와 무당파가 싸움을 벌이도록 할 일부터 의논합시다. 애초 소요자와 무당파가 싸우도록 한 것은 대장주의 계획인데... 이장주께서 독을 사용하는 방법을 변경했으니 자연 이 일도 변경이 있어야 할는지요?" 주조룡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합시다. 우린 소요자가 우릴 신임하도록 만들어야 할 테니......" "......." "신형이 고수들을 이끌고 싸움 장소로 가시오. 소요자가 싸우는 것을 지켜 보고 있다가 승패가 거의 판가름날 때에 손을 써서 그를 도와 주시오. 대장주가 없는 사이에 우리편 사람들이 상하면 곤란하니 기회를 잘 이용하시오." "이장주의 계획은 참으로 주도면밀하오" 신삼괴는 시선을 단굉장에게 돌리며 물었다. "소장주는 이 일에 대해서 어떤 의견이 있으시오?" 단굉장은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서며 대답했다. "저의 사부께서 이미 주이숙에게 모든 일을 일임했고 주이숙께서 훌륭한 계획을 세우셨으니 제 가 앞장을 서겠소." 그러자 신삼괴가 껄껄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허허, 이런 일에 어찌 소장주의 수고를 바라겠소." 이 때였다. 밖에서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이장주님께 아룁니다." 주조룡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금화부인께서 이장주님을 만나 뵙겠다고 오셨습니다." 주조룡이 무엇이라고 대답하기 전에 단굉장이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장주께선 지금 매우 바쁘시오. 그녀를 접견할 틈이 없다고 하시오." "제가 이미 거절했지만 그녀는 중대한 기밀이 있다면서 꼭 이장주님을 뵙겠다고 하십니다." 단굉장이 화를 벌컥 냈다. "지금 중요한 일을 의논중인데 금화부인이 그토록 무례하다니...이것은 우리 백화산장에서 그녀 를 너무 풀어 놔 준 때문이오." 단굉장의 항의를 들은 주조룡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신분이 다르네. 마침 의논이 이미 끝났으니 그녀를 들어오게 해도 무방하지." 단굉장은 더 반대하고 싶었으나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는 금화부인이 나타났다는 것이 충격적인 일이었다. '만일 금화부인이 모든 것을 고자질하게 된다면......' 그는 속으로 매우 불안했으나 그것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주조룡이 밖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들어 오시게 해라!" "네. 명령대로 전하고 곧 모셔오겠습니다." 문밖에서 그 사나이가 물러가는 소리가 났다. 방안의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없이 그녀가 나타나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금화부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방으로 들어 왔다. 그녀는 방안을 한 바퀴 돌아 보더니 주조룡에게 말했다. "이장주는 심장주보다 훨씬 의젓하군요." "부인께선 농담도 잘 하시는구려." 주조룡은 가벼운 웃음으로 받았다. 그러자 금화부인이 다시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내가 한 말을 입에 발린 아첨으로 생각하시나요? 심장주가 있을 땐 나는 이곳에 들어 오기가 퍽 쉬웠어요. 내 집 안방 드나들 듯했어요. 그런데 이장주를 만날 때에는 문밖에서 한참이나 기다 리며 사람이 몇 번 들락날락 해야 되니......" 주조룡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금화부인은 기묘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더 니 단굉장을 바라 보며 말을 걸었다. "소장주, 안녕하세요? 우리들은 꽤 오랫 동안 못 봤지요?" 단굉장은 금화부인이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소영이 태연한 태도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도,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속은 몹시 탈 것이다' 생각하며 불안감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금화부인이 감싸주는 태도로 말하자 은근히 기뻤다. "부인도 안녕하셨소?" 그는 적이 안도감을 느끼며 태연히 응수할 수 있었다. 금화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금화부인에게 말로 한 대 얻어 맞고 얼얼해 있던 주조룡이 입을 열었다. "부인께선 기밀이 있다고 하셨다는데, 무슨 일인지 들려 주시겠소?" 금화부인은 눈꼬리를 삐죽거리며 토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만일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면 이장주께선 아마 나를 만나 주지 않았겠지요?" 주조룡이 어색하게 웃었다. "허허 부인은 항상 말 속에 침을 숨기고 있단 말이야......" 이때 신삼괴가 벌떡 일어서며 주조룡에게 말했다. "나는 먼저 가 보겠소." "가시겠소? 그럼......" 주조룡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삼괴는, "그럼 먼저 실례하겠소." 하며 몸을 돌리더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때 금화부인은 바로 문앞에 서 있었다. 신삼괴가 다가 오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몸을 움직 이지 않았다. 신삼괴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읍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부인, 길을 좀 비켜 주었으면 고맙겠소." 금화부인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한 무리의 화상이 장사성에 들어 서는 것을 보았어요." 신삼괴가 물었다. "무슨 화상이란 말이오?" "화상이면 화상이지 무슨 화상이란 말이 어디 있어요?" 신삼괴는 히죽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주조룡이 금화부인에게 말했다 "그 화상 일행은 몇 명이었소?" "일행은 모두 다섯 명인데 두 명은 늙었고 세 명은 젊었어요. 그런데......" 금화부인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젊은 화상들도 역시 삼십 세는 되어 보이더군요." 주조룡이 다시 물었다. "그 늙은 두 사람의 화상은 몇 살이나 되었소?" "그 늙은 화상은 적게 먹었어도 칠, 팔십은 되었을 거예요." "그들은 혹시 소림사의 승려들이 아니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들이 얼굴에다 '나는 소림사에 있는 중이오.'라고 쓰고 다니지도 않았고 또한 나하고 한 마디의 얘기도 없었는데요." 주조룡은 쓰디쓴 표정으로 웃었다. "부인, 또 농담을 하시는구려." 금화부인은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주조룡을 외면했다. 그러자 주조룡이 얼른 다음 말을 꺼냈다. "부인, 내가 실언을 했소. 한 가지 더 물읍시다." "얼마든지....." "그들이 무공을 익힌 사람들인지 부인은 알 수 있었소?" "내가 보기엔 그들은 모두가 일류급 고수들 같았소." 신삼괴가 끼어 들었다. "내가 짐작컨데 그들은 소림사의 승려들이 분명하오." 금화부인이 신삼괴를 한 번 쳐다 보더니 주조룡에게 물었다. "이 소식을 이장주께선 이미 알고 계셨나요?" "몰랐소. 부인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았소." 금화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요. 우리 백화산장에서는 많은 염탐꾼을 파견하고 있는데 이토록 큰 일을 여태껏 보고 하지 않았다니....." 주조룡이 어색한 웃음을 띠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들의 통보가 부인의 걸음만큼 빠르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소영은 이들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금화부인은 장난을 좋아하고 엉뚱한 짓을 곧잘 하는데 심목풍이 없으니 더욱 의기양양하구나. 그런데 금화부인의 말이 사실일까?' 금화부인은 주조룡의 말을 듣고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럴 리 없지요. 내가 아무리 걸음이 빠르다 해도.... 나는 그들을 본 후에 장사성을 한 바퀴 돌 다가 왔어요. 그들을 백화산장 사람들이 보았다면 이미 연락이 왔어야 할 텐데..... 아마 그 화상들 을 아무도 보지 못했던 모양이지요?" "그럴 리가 없소." 주조룡이 머리를 흔들며 대꾸하자 갑자기 금화부인이 성난 어조로 말했다 "흥, 부하들은 믿고 나는... 좋아요. 그들에게서 연락이 오길 기 다리고 있으세요. 난 말하지 않겠 어요." 금화부인은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이것을 본 주조룡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부인, 걸음을 멈추시오!" 144. 일격에 심장을 멎게 하다 금화부인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며 생긋 눈웃음을 던졌다. "왜 그래요? 이장주님." 주조룡은 금화부인이 갑자기 교태가 섞인 표정을 지으며 묻자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금방 노했다가 교태를 부리며 마음대로 나를 주무르 니....' 주조룡은 기분이 언짢았으나 눌러 참으며 의자에 앉았다. "부인께선 그 화상들이 어디로 갔는지 보셨소?" "난 그들이 성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지,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신삼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부인께선 그들이 모두 높은 무공을 지닌 것이 틀림없다고 했는데, 어째서 뒤쫓아 가지 않았소?" "그 이유는 첫째, 장사성에는 우리 백화산장에서 파견된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걱정할 필 요가 없었고, 다음은 나 혼자서 그들을 놓치지 않도록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소." "만일 금화부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소림사의 화상들임에 틀 림없을 것이오." 신삼괴는 주조룡을 돌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이장주께서 즉시 사람을 보내 뒤를 조사하도록 하시면 좋 겠소" "신형은 바쁜 몸이니 어서 가시오. 이 일은 내가 처리 하리다." 주조룡이 말하자 신삼괴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럼 나는 먼저 실례하겠소. 부인, 길을 좀 비켜 주시오." 금화부인은 신삼괴를 한 번 바라 보더니 말 없이 옆으로 길을 비켜 섰다. 신삼괴는 성큼성큼 걸 어 나갔다. 신삼괴가 나가자 주조룡이 단굉장에게 말했다. "이 일은 조카가 좀 수고해 주어야겠네." "그러지요." 단굉장은 선뜻 대답하고 일어서더니 소영을 돌아 보며 말했다. "백형, 나하고 함께 갑시다."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금화부인은 가로막지 않았다. 집 밖으로 나오자 단굉장은 급히 서둘렀다. "소대협, 빨리 갑시다." 소영도 그와 어깨를 나란히하고 달렸다. 두 사람은 단숨에 오 리나 내달렸다. 진기를 운공할 수 없는 단굉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고 있었다. 밀림이 나타나자 단굉장은 그 속으로 들어 갔다. 숲 속에서 걸음을 멈춘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 했다. "소대협, 내가 언약한 것을 훌륭하게 이행했다고 생각지 않소?" "하하..... 정말 수고하셨소. 나도 약속대로 하겠소." 소영은 가볍게 손을 움직여 단굉장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단굉장은 어깨를 추썩거리고 팔을 휘 둘러 보더니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처음으로 이런 협박을 받으며 또한 기혈을 찍혔었소." "처음이 있으면 두 번째도 있는 법이오. 소장주는 장사성에서 앞으로 행동할 때 조심하기 바라 오. 다시 내가 소장주를 만나지 않도록....." "고맙소. 다음부터 나는 십분 조심하게 될 것이오. 그럼....." 단굉장은 말을 마치더니 몸을 날려 밀림을 벗어나더니 쏜살같이 어디로인가 뛰어 갔다. '단굉장은 나에게 이토록 큰 치욕을 받았으니 그대로 참고 견디지는 못할 것이다. 필경 많은 고 수들을 이끌고 앙갚음을 하려고 달려 오겠지.'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장사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칠택다원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 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소영은 땅거미 속에 서성거리고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백리빙이었다. 백리빙은 두구와 함께 무위도장을 찾아 갔었다. 소영이 단굉장과 함께 갔으니 뒤따라 가서 도와 줘야 된다는 백리빙의 말에, "그럴 필요는 없소. 소대협은 절대 실수가 없는 분이니 낭자께선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하며 무위도장은 백리빙을 말렸다. 백리빙은 무위도장을 설득시키려고 몇 번 사정하다 안 되자 할 수 없이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럼 칠택다원에 가서 소오빠가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위험하니 가지 말라는 무위도장과 두구의 만류에도 백리빙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할 수 없소. 가서 기다리도록 내버려 두고 신변이나 보호해 줍시다." 무위도장은 백리빙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더 말리지 않았던 것이다. 소영은 백리빙이 칠택다원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혼자 서성거리 고 있는 것을 발견한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나왔다. '저 고집은..... 아무튼 눈물겨운 일이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 백리빙과 오 척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 갔다. "빙아!" 백리빙은 소영의 음성을 알아 듣고 몸을 돌리더니 한달음에 달려 들었다. 그대로 소영의 품에 몸을 던지려는 동작이었다. 소영은 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며 백리빙의 손목을 잡았다. 그래도 품에 파고들려는 그녀의 어깨 를 잡으며 소영은 무겁게 말했다. "진정해라. 이곳은 오래 있을 곳이 못 되니 어서 무위도장에게 가자."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소영의 앞장을 서며 정이 담뿍 담긴 음성으로 또렷하게 말했다. "오빠를 보니 장신을 못 차리겠어요." 말을 마치며 백리빙은 급히 달렸다. 그 뒤를 따라가며 소영이 말했다. "빙아, 뛰어가지 마라. 이곳엔 심목풍의 무리들이 깔려 있으니 조심해야 된다." 백리빙은 속도를 늦추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앞에 가면서 잘 살필 테니 오빠는 뒤를 조심하세요. 누구에게 미행당하지 말고요." 소영은 피식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좋아. 그런데 너는 조금 전까지도 어린애 같더니 금방 어른스러워졌으니 웬일이지?" "피이, 오빤 나를 아직까지 어린애로 보는 모양이죠? 아까는 너무 기뻐서 그런 것인데 오빤....." 백리빙은 얼굴이 화끈 달아 올라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소영도 더 말을 하지 않 았다. 두 사람은 갈림길이 많은 큰 길을 계속 걷다가 어느 한적한 골목으로 접어 들었다. 백리빙은 어 느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대문 너머에는 높이 삼 장이나 되는 건조대(乾燥臺 : 빨래를 널어 말릴 수 있도록 나무막대를 받침대 위에 가로질러 만든 것)가 십여 개나 만들어져 있었다. 건조대에는 여러 가지 천이 잔뜩 널려 있었다. '이곳은 염색을 하는 집인 모양이구나.' 소영은 대뜸 알 수 있었다. 이때 백리빙이 가볍게 문고리를 잡아 흔들었다. 그러자 이내 대문이 열리고 이십여 세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나타났다. 청년은 백리빙을 보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옆으로 비켜 섰다. 백리빙은 소영에게 눈짓을 하더니 앞장 서서 들어 갔다. 백리빙은 소영을 이끌고 이 층으로 올라 가더니 하나의 방으로 들어 섰다. 방에는 등불이 높이 걸려 있었다. 등불 밑에는 두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노인이고 다른 하나는 찢어 진 옷을 입은 중년의 사나이였다. 백리빙과 소영이 들어서는 것을 보더니 두 사람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소영이 엉겁결에 인사를 받자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소대협이시오?" "그렇소. 노인은 뉘시오?" 그러자 노인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뿐만 아니라 중년의 사나이와 백리빙까지 웃고 있 었다. 소영은 어리둥절해서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웃는 이유를 알지 못해 물으려고 하는 데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하, 소대협은 그렇게도 눈이 어두우시오? 바로 이 분은 두구이고 빈도는 무위....." 소영은 두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본 후 비로소 그들이 변장했음을 알아차렸다. "아, 바로 무위도장과 두형이구려. 두 분의 분장술은 정말 놀랍소. 내가 조금도 알아 볼 수 없었 으니 말이오." 무위도장이 웃음을 지우며 말했다.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변장술에 뛰어나 우리들을 어리둥절케 하고 있는데, 그들과 상대하자니 우리도 어쩔 수 없잖소?" "물론이죠 자, 우리 앉아서 얘기합시다. 매우 중요한 일을 도장에게 알려드려야겠소." 네 사람은 제각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백리빙은 소영의 곁에 바싹 붙어 앉은 채 얼굴에서 웃음 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 소녀는 흡사 놓아 먹인 말처럼 날뛰며 상대조차 하기 어렵다가 이제 소영이 나타나니 양처 럼 온순해졌구나.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무위도장은 백리빙을 바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영을 쫓아가 도와 줘야 한다고 설 치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백리빙의 태도가 우습기도 했다. 소영은 무위도장과 두구를 둘러 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심목풍의 대영(大營)에서 돌아오는 길이오. 심목풍은 이미 장사성을 떠났고 주조룡이 일을 맡아 처리하고 있더군요. 소요자는 이미 고수들을 파견해서....." 소영이 말을 폭포처럼 급하게 쏟아 놓자 무위도장과 두구는 입을 딱 벌렸다. 소영은 자기가 말 을 너무 급하게 했다는 것을 느끼고 피식 웃었다. "내가 말을 너무 빨리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미처 듣지 못하셨겠지요?" "뭘요. 들을 만하군요." 무위도장이 농담조로 소영의 말을 받자 방안에는 갑자기 웃음꽃이 피었다. "미안하오.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설명하겠소." 소영은 손을 흔들어 웃음을 멈추게 하고 농장에 다녀온 경과를 상세히 들려 주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무위도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소요자와 심목풍이 손을 잡았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군요. 매우 골치아픈 현상이오."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파의 실력은 모두 강대하며 강호를 주름잡는 야심들을 품고 있소. 두 호랑이가 한 동굴에 있게 되면 사이가 좋지 못한 법인데 이들이 손을 잡은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소. 허나 내 생 각으로는.... 소요자가 심목풍에게 굽히고 들어 올 수밖에 없는 어떤 압력을 심목풍이 가한 것 같 소." 무위도장이 무겁게 말했다. "그들이 정말 손을 잡는다면 강호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클 것이오. 우리는 그들이 손을 잡기 전에 훼방을 놓아야 되겠소." "도장의 생각이 옳소. 심목풍과 소요자가 손을 잡으려는 것은 서로간에 어떤 꿍꿍이속이 있기 때문이오. 우리가 방법을 강구해서 그들의 중간에 나서면 그들은 서로 불꽃 튀는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오." "소대협의 생각은 좋은데... 이 일은 막상 손을 대려면 난관이 많소." 무위도장의 말에 소영은 고개를 숙인 채 잠깐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심목풍은 장사성에 있을 때, 독을 풀어 소요자의 무리를 상대할 계획을 세웠었소. 우리들이 소 요자에게 이런 정보를 제공해 준다면 그들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있소. 그런데....." "그런데 무엇이오?" "주조룡이 심목풍 대신 일을 처리하면서 독을 사용하려던 이 방법을 취소했소. 그는 매우 소심 한 사람이기 때문이오." 무위도장은 가벼운 신음을 토하더니 소영에게 물었다. "그 신삼괴란 자는 우리와 소요자 사이에 큰 싸움을 붙이겠다고 했는데... 그건 또 어찌 된 일이 오?" 소영이 대답했다. "내가 신삼괴의 말을 들으니 소요자는 이미 도장이 관장하고 있는 무당파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았소. 주조룡의 계획은....." "......" "소요자와 무당파가 열전을 하고 있을 때 신삼귀가 고수들을 이끌고 와서 무당파를 친다는 것이 오. 그러므로 무당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소요자에게서는 신임을 받겠다는 수작이지요. 그런 데..." 소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도장의 가르침을 바라오." "무슨 일이오?" "장사성에는 심목풍의 소식통이 고루 깔려 있소. 그러나 그들은 도장의 거처를 찾아 내지 못했 소. 그래서 우리는 은근히 좋아했었고 우세를 잡은 것으로 생각했잖소?" "그렇지요." "그런데.... 심목풍에 비해 소요자가 장사성에 펼쳐 놓은 소식통은 대단한 것이 못 되는데.... 어떻 게 도장의 거처를 알아 냈을까요?" 이 질문에 무위도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불가능하오. 소요자의 무리가 이곳을 알 리 없소. 이것은 어떤 꿍꿍이속이 있어 심목풍이 퍼뜨 린 유언비어일는지도 모르오." 이 말을 들은 소영이 무릎을 쳤다. "좋소. 도장은 과연 보통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군요. 나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고 생각은 하면서도 원인을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알겠소." 무위도장은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거야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들의 기습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소. 빈도가 대강 준비를 지시하 고 오겠소." "네, 그게 좋겠습니다." 무위도장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여지껏 잠자코 있던 두구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대협은 무위도장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아시오?" "글쎄.... 잘 모르겠소." "그는 수십 명의 고수들을 여러 조로 편성해서 장사성의 민가에 파견해 놓았소. 그들은 민간인 과 함께 기거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소. 그러나 모두 무위도장의 명령을 받고 일사불란하게 움직 이고 있지요." "심목풍에게 눈치채이지 않겠소?" "그건 별로 염려 없소. 무위도장이 특별히 고른 고수 이외에는 다른 사람은 절대로 활동하지 못 하도록 명령되어 있으니까요. 이 한 채의 삼상대작방(三湘大作房)을 본거지로 삼고 생활을 민간인 과 똑같이 하니까요. 아무리 심목풍의 소식통이 장사성에 깔려 있다 하더라도 발각될 염려는 없 지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무위도장은 무당파의 엄연한 장문인인데, 심목풍 같은 악한 무리들과 상대하는 마당에서는 어 쩔 수 없이 이런 속임수를 쓰는군요." 두구가 말하려는데 발소리와 함께 무위도장이 들어선 것이다. 소영은 무위도장이 모든 방비를 하고 나타났을 것이라 생각하니 약간 마음이 놓였다. 그는 무위도장을 쳐다 보며 물었다. "등이협과 전형은 아직 소식 없습니까?" 무위도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식이 없소. 개방의 손불사도 두 명의 고수들을 이끌고 그들을 찾으러 갔소." 무위도장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실력이 별로 강하지 못해서 남들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소. 그런데 소대협이 이곳에 나타났으니 상황이 달라졌소." 소영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정을 계산해 보면 등이협과 전형은 이미 장사성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그들에게 서 아무 소식이 없으니 불안하군요. 사고나 생기지 않았어야 할 텐데....." 이 때였다. 가벼운 인기척이 방문 앞에서 들렸다. 그와 동시에 방문이 열리더니 공인 차림의 도 동 하나가 방으로 들어 왔다. 들어 온 도동은 무위도장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떤 행인(行人)이 이 집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무위도장의 얼굴에 긴장이 흘렀다. 그는 소영의 얼굴을 한 번 바라 보더니 도동에 게 말했다. "알았다. 너는 나가서 일러라. 어떤 사람이 찾아와 시비를 걸더라도 참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절 대 싸우지 말라고....." "네. 명령대로 이행하겠습니다." 도동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자 무위도장이 방을 휘둘러 보았다. "누가 냄새를 맡았는지도 모르겠소. 우리도 나가 봅시다." 그리고 그는 등불을 불어 껐다. 무위도장이 방문을 열자 캄캄한 복도가 나타났다. 무위도장의 뒤에 소영이, 그 뒤를 백리빙과 두구가 따라 함께 방을 나섰다. 무위도장이 낮은 음성으로 소영에게 말했다. "이 집엔 큰 대청이 있는데 이 대청은 이 집의 중심이 대청에 있으면 사면에서 발생한 일을 자 세히 알 수 있소." 그들은 대청으로 들어 섰다. 대청은 매우 넓었으나 숨을 만한 장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청을 둘러 본 소영이 입을 열었다. "대청이 매우 넓군요. 우리는 이 대청에서 기다리면 되겠소?" "빈도는 이미 수하들에게 명령했소. 모두 몸을 숨긴 채 상대방이 무기를 들고 공격하지 않으면 절대로 먼저 싸움을 걸지 말라고 그런데......" "......." "적이 만일 우리의 거처를 알아 낼 수 있다면 반드시 대청으로 곧장 들어 올 것이오. 우리는 대 청 안에 숨어서 출현한 적들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소." "이 대청은 넓긴 하지만 몸을 숨길 만한 곳이 별로 없는데요?" 무위도장이 소리없이 웃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 마시오. 내가 이미 준비했소이다." "준비라니요?" "동쪽과 서쪽 모퉁이에 비밀문을 만들어 놓았소. 그러나 장소가 너무 좁아 한 사람씩 숨을 수밖 에 없게 되었지요. 그러니 백리 낭자와 두형은 그 비밀문 뒤에 숨으시오. 벽에 걸인 옷걸이에 밖 을 내다 볼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뚫어 놓았소." 백리빙은 망설였다. 그녀는 잠시라도 소영의 곁에서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런 말을 입밖에 내기도 쑥스러워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 놓았다. "우리들은.....?" 소영의 물음에 무위도장은 손으로 대들보를 가리키며 말했다. "좌우 두 개의 대들보 위에 드러누울 수 있소." 소영은 대들보를 쳐다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곳이군요. 그들이 나타났을 때 올라가도 늦진 않겠군요." 백리빙과 두구는 암실을 향해 천천히 걸어 가더니 몸을 숨겼다. 이 때였다. 휙 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팍!" 하고 천정에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부딪쳤다. '흠, 어떤 놈이 동정을 살피고 있구나.' 소영과 무위도장은 가벼운 긴장을 느꼈으나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안광을 빛내며 주위의 동 정에 청각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숨막힐 듯한 무거운 긴장이 얼마쯤 흘렀을 때였다. 돌연 지 붕 위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아래로 뛰어 내렸다. 소영과 무위도장은 진기를 모으고 두 사람을 노려 보았다. 하나는 청색 도포를 입었고 손에는 불진(佛塵)을 들고 있었다. "저것은 바로 소요자구나." 소영은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사나이는 등에 장검을 지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들이 아직 대청에 나타나기 전에 소영과 무위도장은 서로 눈짓을 하며 대들보 위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대들보 위로 뛰어 올라 숨자 소요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이 곳이 틀림없겠지요?" 이 음성은 소영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틀림없는 소요자구나." 소요자의 물음에 검은 옷의 사나이가 대답했다. "틀릴 리가 없소." "만일 무위도장과 손불사가 이곳에 살고 있다면 이토록 아무런 경계가 없을 수 있겠소? 더욱이 손불사는 건방지고 콧대가 높은 위인이라 당장 달려 나와 싸움을 걸 텐데....."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그 두 사람이 오늘 밤 이곳에 없을는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대청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 말에 소요자는 잠시 대꾸가 없더니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먼저 대청으로 들어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 보시오. 만일 사람이 없으면 촛불을 밝히시오." 이 말을 듣고 소영은, '흥, 과연 소요자는 세심하고 교활한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좋소 내가 먼저 들어 가겠소." 사나이가 조심스럽게 대청으로 들어 섰다. 그는 숨을 죽인 채 대청 안을 자세히 살펴 보더니 품 속에서 부싯돌을 꺼냈다. 몇 번 부싯돌을 그어 촛불을 밝히더니 사나이는 다시 대청을 둘러 보았 다. 대청 안에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사나이가 대청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소요 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 무위도장은 매우 교활한 사람이니 대청에 매복장치를 설치했을지도 모르오. 각별히 조심해 서 자세히 수색해 보시오." 사나이는 이 말을 듣더니 칼을 뽑아 들었다. 그는 대청을 돌아다니면서 칼로 쿡쿡 찌르며 사람 이 숨을 만한 곳을 찾았다. 소영은 백리빙이 숨은 암실이 발각될까 봐 여간 마음이 조마조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의 기우였다. 무위도장은 이미 이런 경우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암실로 통하는 비밀문을 매우 교묘하게 만들어 놓았다. 사나이가 아무리 뒤지고 다녀도 발견된 것은 없었다. "아무도 없소. 아마 무위도장은 우리가 나타날 것을 눈치 도망친 모양이오." 사나이가 밖을 향해 말하자 소요자가 가볍게 뛰어 들었다. 그는 대청 안을 한 바퀴 둘러 보더니, "이곳을 똑똑히 살펴 보았소?" 하고 물었다. "네. 사람이 숨을 만한 장소도 어떤 매복장치도 없습니다." "그래요?" "좋아, 그들이 이미 도망쳤다면 아예 이곳을 없애버리는 것이 좋겠군." 사나이가 의아한 듯 말했다. "없애다니요?" "불을 지르시오. 우선 이 대청부터 태웁시다." 이 말을 들은 소영은 깜짝 놀랐다. 그는 대들보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럼 명령대로 불을 지르겠소." 사나이가 손을 내밀어 촛불을 집으려는 찰나였다. 더 참지 못한 소영이 아래로 뛰어 내리며 외 쳤다. "잠깐!" 소영이 나타난 것을 본 두 사람은 흠칫했다. 소영은 소요자를 돌아 보며 차갑게 말했다. "도장, 수단이 너무 졸렬하고 악독하다고 생각지 않소?" 소요자는 소영을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소영은 차갑게 웃었다. "하하, 우리는 서로 사귈 필요가 없으니 이름을 밝힐 필요도 없소." 검은 옷의 사나이가 소영의 앞으로 두 걸음 나서며 외쳤다. "건방진 애송이, 감히 도장에게 무례하구나! 네가 죽고 싶어 눈깔이 뒤집혔느냐? "하하, 그건 내가 할 소리군. 너야말로 한시라도 더 살고 싶거든 당장 뒤로 물러서라." "이게.... 정말 그토록 원한다면 죽여 주지!" 사나이는 칼을 휘두르며 소영의 가슴을 찔러 왔다. 소영은 이미 손에 교피장갑을 끼고 있었다. 사나이가 칼로 찔러 오자 오른손을 내밀어 칼을 잡 았다. 이것을 본 사나이는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칼날을 돌렸다. 소영의 손가락을 끊어 버리려는 생각에서였다. 소영은 빙긋이 웃으며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사나이가 아무리 칼날을 돌리려고 힘썼으나 요지 부동이었다. '강적이구나!' 사나이는 급히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소영이 순순히 놓아 줄 리 없었다. 칼날을 잡은 오 른손을 앞으로 잡아 당기는 것과 동시에 왼손을 휘둘러 맹렬한 일장을 사나이의 심장을 향해 날 렸다. "펑!" 심장에 정통으로 장풍을 맞은 사나이는 뒤로 자빠지며 피를 토했다. 소영이 칼을 잡았을 때 사 나이는 몹시 놀랐으나 칼을 뺏기고 싶지는 않아 칼을 쥔 채 뒤로 물러서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소영이 왼손으로 장풍을 날리리라는 것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뒤에 서 있던 소요자 도 소영이 맨손으로 칼날을 잡는 것을 보고는 흠칫했다. '무서운 놈이다. 도와 줘야겠다.' 소요자는 급히 불진을 휘둘러 소영의 오른팔을 공격했다. 이틈에 사나이가 몸을 피하기를 바랐 던 것이다. 그러나 소영의 동작은 소요자의 공격을 그대로 받을만큼 둔하지 않았다. 재빨리 왼손으로 사나 이의 가슴을 향해 장풍을 날리며 동시에 뒤로 삼, 사 척 물러서서 소요자의 공격을 피해 냈던 것 이다. 사나이가 소영의 장풍을 받고 뒤로 쓰러지자 소요자는 급히 불진을 거둬들이며 한 손우로 사나 이의 팔을 잡았다. '굉장히 빠른 솜씨군.' 소요자는 한 마디 씹어 뱉으며 사나이의 몸을 들어 올렸다. 심장에 손을 대어 보니 사나이는 이 미 죽어 있었다. 소요자는 자기의 일격을 소영이 가볍게 피해 냈으며 일장으로 사나이의 심장을 멎게 한 것을 보 고 내심 몹시 놀랐다. '깔보지 못할 놈이다.' 소요자는 사나이를 내려 놓고 소영을 노려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무공이 대단하구려." 이 때였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대들보 위에서 한 사람이 뛰어 내렸다. 무위도장이었다. 그는 소 요자의 뒤쪽에 서게 된 것이다. 소요자는 또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보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무위도장을 돌아 보며 물 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무위도장은 일부러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빈도가 무위이오. 바로 소형이 찾던 사람이지요." 소요자는 소영을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 분은 누구시오?" 무위도장은 갑자기 차가운 어조로 변하여 대답했다. "당신 자신에게는 물어 볼 입이 달리지 않았소?" 소요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말을 않기 때문에 내가 묻는 것이잖소? 무공을 보니 당신 무위도장보다 못하지 않던데.... 필경 유명한 고수이겠지요?" "하하 소형, 그런 수로 나를 유도하여 넘어가게 하지 마시오. 빈도의 입에서 어떤 정보를 얻어 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하오." 소요자는 몹시 불쾌한 듯 무위도장을 노려 보더니 얼굴을 돌리며 차갑게 물었다. "당신이 이름을 숨기고 있는 것은 대장부의 할 짓이 아니라고 보는데......" "소요자,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 똑똑히 알고 있다." 소영은 잠시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당신 소요자는 지모가 백출하고 무공이 뛰어난 인재라고 할 수 있소. 허지만 심목풍과 비교할 수는 없소." 소요자는 소영의 말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째서?" "심목풍은 당신보다 훨씬 음흉스럽고 악독하오. 당신들은 피차 간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만, 만 일 서로 암수를 쓰기 시작한다면 당신이 그에게 먹힐 것이오." "항, 당신은 어떻게 그리 자세한 것을 알고 있소?" "하하, 다 아는 수가 있소. 나는 당신이 아직 심목풍을 만나지 못한 것까지 알고 있소. 당신들이 서로 손을 잡으려는 것을 중간에서는 신삼괴가 성취시키려고 한다는 것까지도.... ..." 소요자는 무슨 말인가 물으려다 말았다. 소영은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심목풍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당파의 사람을 죽여 처음 만나는 선물로 주려고 했소. 허 나 애석하게도 심목풍은 당신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소. 그는....." "......." "오히려 당신에게 독을 쓰려 하고 있소. 한 번 먹으면 영원히 심목풍의 노예가 되는 독 말이오. 독을 사용해서 당신들 일당을 모두 손아귀에 틀어 쥐려고 하고 있단 말이오." 소오자는 다그쳐 물었다. "그들은 어디서 손을 쓸 생각이오?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소영은 이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자세히 알지 못하며 알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에게 알려줄 수는 없소." 소영의 말에 소요자는 피식 웃었다. 소영은 그가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약간 억양 을 높여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한동안 안심하고 있어도 되오." "그게 무슨 말이오?" "무슨 말이냐 하면..... 심목풍은 수십 년 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려고 어디로인가 갔소. 지금 백화 산장의 일은 모두 주조룡이 맡아 처리하고 있는데 그 주조룡은....." "......." "공로를 세우기보다는 안전하기만을 바라는 소심한 사람이오. 그래서 당신들에게 독을 뿌리는 일은 심목풍이 온 뒤로 미루고 있소. 그러니 당신들은 한동안 마음 놓고 있어도 된단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소요자는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바탕 웃어대더니 소영에게 물 었다. "그래, 그 심목풍은 어디서 옛친구를 만나고 있소?" "흥, 소요자! 당신은 너무 뻔뻔스럽군요. 이곳을 휩쓸려고 나타난 당신이 간단하게 모든 내막을 알기를 원하다니.... 내가 쉽사리 알려 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산이오." "그럼 어떻게 해야 알아 낼 수 있겠소?" "그것은 그만한 대가를 내 놓은 후에라야지. 내가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알려 주고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나에겐 아무 이익이 없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소요자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소영을 노려 보더니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나에게 좀 알려 줄 수 없겠소?" "내가 누구든, 단지 당신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꺼낸 말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오." "난 당신의 말을 못 믿겠소." "그건 왜? 나를 거짓말이나 할 사람으로 보시오?" 소요자는 무위도장과 소영, 시체가 된 사나이를 한 번씩 훑어 보더니 대답했다. "당신이 이름을 숨기고 신분을 감추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의 말을 믿는단 말이오?" 소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흥, 당신이 믿든 안 믿든 그것은 당신의 생사에 관한 일이니 마음대로 하시오. 나에게는 하등의 이해상관도 없는 일이니까....." 145. 일망타진의 결의 소요자는 소영의 신분을 알아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기지가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소 영의 언어 행동 속에서 이 사람이야말로 무공이 매우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소영에게 함부로 출수를 하지 못하고 무위도장에게 돌아서면서 천천히 말했다. "도장의 이 방은 이미 빈도가 인솔해 온 이십여 명의 고수들로 겹겹이 포위되어 있소. 그러므로 만일 빈도가 암호 한 마디만 외친다면 백화산장의 고수들은 곧 나를 도우러 달려 올 것이오." 무위도장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깝게 됐군요. 백화산장의 사람이 이미 당신의 계획을 누설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대비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무당문인이 이곳을 떠나 각자 유리한 장소에서 암암리에 당신의 거동을 감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빈도도 백화산장 심목풍의 악랄한 수단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협의 (狹義)의 길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저도 이젠 독은 독으로, 피는 피로써 대하기로 작정했소이다. 그리고 지금 이 방에 남아 있는 사람은 우리 무당파의 고수들 말고도 몇 분의 무림고수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만약 믿을 수 없다면 한 번 시험해 보시오....." 무위도장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빈도는 당신과 피흘리는 격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소요자가 반문했다. "정녕 당신이 그처럼 완전무결하게 대비해 두었다면 어째서 빈도와의 격투를 원치 않는단 말이 오." 무위도장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것은 심목풍이 당신과 내가 다같이 부상을 입도록 바라고 있기 때문이오. 나는 무조건 그자 가 원하는 일은 하고 싶지가 않소." 소요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장의 말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소." 소영이 냉랭하게 외쳤다. "믿지 못하겠다면 마음대로 한 번 해 보시지....." 소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으흠으흠! 하는 기침소리를 내며 백리빙과 두구가 양쪽 암실문에 서 각각 나왔다. 소영은 이들을 향해 말했다. "두 분은 청문 입구에서 강적이 쳐들어 오는 것을 막도록 하오. 나는 여기서 그 이름도 쟁쟁한 소요자께서 근래 그 무공이 얼마나 증진되었는지 한번 겨루어 봐야겠소." 백리빙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적은 많고 우리편은 적으니 오늘밤에는 마구 손을 휘둘러 사람을 상해해도 되는 겁니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알아서 처리하도록......" 백리빙은 미소지으면서 싹!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을 빼 들고 천천히 청문 입구로 걸어 갔다. 알고 보니 그녀는 암실 속에 숨어 있으면서 거기 한 자루의 장검이 있는 것을 보자 멋대로 그것 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두구는 잠자코 몸을 돌려 청문 입구로 걸어 가서 백리빙과 등을 대고 섰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안쪽을 바라 보고 있었으며 한 사람을 바깥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요자는 여자의 음성을 듣고는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저 놈은 남장한 여자로구나, 그리고 보니 무당파의 인물 외에 다른 무림의 고수들이 있다는 말 이 정말이었구나.' 그렇지만 겉으로는 짐짓 태연을 가장하여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당한 무당파에서 여자까지 끌어 들였다는 것은 정말 뜻밖의 일입니다." 백리빙은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오빠, 저 사람은 말이면 다 말인 줄 알고 지껄이는 모양인데 제가 따귀를 두어 대 갈겨 주겠어 요." 소영은 백리빙의 말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무위도장을 바라 보며 말했다. "이 소요자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으니 남겨 두어야 후환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아주 없애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위도장이 대답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그렇게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겠군..." 소요자는 하하하 하고 큰 목소리로 웃어젖혔다. "위협이 대단하시군. 현재 무림에서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된단 말이오?" 소영도 그 말을 듣자 한바탕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말 한마디 잘했군. 그러고 보니 강적의 우두머리를 대한 것 같으니 우리도 자비를 베풀 수는 없지." 소영의 말은 호기당당했다. 소요자를 죽일 수 있는 자신이 넘쳐 흐르는 말이었다. 소요자는 그제야 약간 놀라는 듯했다. "귀하는 도대체 뉘시오?" 소영은 냉소를 지었다. "자아, 시작해 보시지....." 소요자는 소영이 일장에 흑의인을 쳐 죽이는 위세를 보았으므로 이 사람이야말로 절세의 무공을 지닌 고수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끝내 이름마저 밝히려 들지 않으니 더욱 의아 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소영이 다시 냉소를 지었다. "귀하께서 먼저 출수하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먼저 해야겠소." 소영은 휙 소리를 내며 일장을 날렸다. 그의 장세가 채 닿기도 전에 한 줄기의 암경이 이미 소 요자의 몸에 적중했다. 소요자는 흠칫 놀라서 좌장을 휘둘러 소영의 장세를 막으려 오른손에 들었던 불진을 휙 날려 난 강절두(欄江截斗)식으로 소영의 오른팔을 내리 쳤다 "귀하께서 그다지 자신만만하다니 가르침을 받을 수밖에....." 소영은 오른손을 굽혀 불진을 피하고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전진하며 연달아 쌍장을 날렸다. 바로 남일공의 섬전장법이었다. 소요자는 크게 놀랐다. "당신은 소영?" "바로 그렇소." 소영은 대답을 하면서도 팔장을 쳐 내 소요자로 하여금 수 보 뒤로 물러나게 했다. 소요자는 불진을 들고는 있었지만 소영의 번개같은 속공에 밀려 연방 물러나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역시 강적을 상대해 온 경험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절기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삼초의 반격을 가해 더 밀려나지는 않았다. 백리빙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오빠께서는 무기를 쓰시지 않으니 손해가 아니에요?" 소영은 비록 남일공의 섬전장법의 정수를 이어받긴 했지만 남일공과 같은 산을 갈라 낼 듯한 위 세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무기를 사용하면 승산을 더욱 커질 텐데.....'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바람에 소영의 장세는 약간 느려졌다. 소요자는 그 틈에 반격을 가하여 소영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이때 백리빙이 들고 있던 장검을 던져 주었다. "오빠. 검을 받으세요!" 장검이 번쩍하더니 소영에게로 날아 갔다. 그러자 소요자는 좌장으로 협산초해(協山超海)식으로 소영의 가슴께를 향해 공격했으며 오른손 에 든 불진으로는 백리빙이 던진 장검을 막아 갔다. 그렇지만 소영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곧 오른손을 뻗쳐 소요자의 장세를 맞받으며 왼손의 손가락을 퉁겨 지풍을 쳐 냈다. 한 줄기의 암경이 솟구쳐 올랐다. 이 초식이야말로 소림파 칠십이종 절기 중의 하나인 탄지신공이었다. 소요자는 이 짧은 일 년 동안에 소영이 이다지도 무림을 흔들 만한 심공을 배웠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소요자가 앗차! 하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수중의 불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때 소요자가 불진으로 쳐 낸 일 초는 이미 백리빙이 던져 온 장검을 휘감았지만 소영이 튕겨 낸 탄지신공에 그의 오른팔꿈치가 적중되어 손이 진동되는 바람에 불진과 장검이 동시에 땅바닥 에 떨어지고 말았다. 순간 소영은 재빨리 오른발로써 떨어져 내리는 장검을 차 올려 손으로 낚아채 잡았다. 한편 소요자는 오른팔꿈치가 피격된 후 오른팔 전체가 저리고 아파서 더 이상 싸울 수 없음을 깨닫고 소영에게 부상이라도 입기 전에 얼른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기를 끌어 모 아 몸을 날려 대들보 위로 올라 가며 왼손으로 전력을 다해 일장을 쳐 냈다. 이때 펑! 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며 흙먼지가 일더니 지붕에 큰 구멍이 뚫렸다. 그러자 소요자는 재빨리 몸을 날려 구멍으로 빠져 나갔다. 무위도장도 곧 뒤를 이어 지붕 위로 몸을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사방을 바라 보았지만 이미 소 요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영도 곧 뒤따라서 지붕 위로 올라 갔다. "도장 어느 쪽으로 도망 갔습니까?" 무위도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잡기는 틀렸소.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공이 높다고 자부하던 사람인데 소대협에게 패하여 지붕 을 뚫고 도망갔으니 그 말이 강호에 전해지면 망신을 톡톡히 당할 것이오."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배는 다만 요행이 이겼을 뿐입니다." 무위도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어 보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는 생각되지만 한 가지 물어 보겠소." 소영이 반문했다. "무슨 일입니까?" "소대협이 소요자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 일격은 수라지력이었습니까?"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라지력은 단지 석 자 이내에서 그것도 손이 맞닿아야만 공격할 수 있는 겁니다." 무위도장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사용한 일지는 수라지력이 아니었단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탄지신공을 썼습니다." 무위도장은 어리둥절했다. "탄지신공이라면 소림의 절기....?" "그렇습니다. 바로 소림파의 탄지신공이지요." 무위도장은 고개를 연방 끄덕이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근 백 년 동안 무리에서는 소대협과 같은 기인은 없었소. 한 사람이 양가(兩家)의 장법을 겸비 하는 일도 힘드는 일이거늘 귀하께서는 수대 문파의 절기를 터득했으니 이야말로 강호에서 극히 드물게 볼 수 있는 일이오." 무위도장은 말을 마치자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하늘의 별을 바라 보더니 말을 이었다. "만일 소대협과 같은 특수한 재질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심목풍을 상대할 수 있으 리오!"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과찬이옵니다. 후배는 그저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이러저리 딩굴다 보니 어쩌다가 이만한 성취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심목풍 역시 무림에서 극히 보기 드문 대가를 이룬 사람임에는 틀림 없소. 게다가 그는 뛰어난 부하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기지가 뛰어나고 음흉하기 짝이 없으므로 강호의 각대문파가 방대한 실력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감히 대항을 못하 고 있는 실정입니다." 소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 뿐만 아니라 강호의 문파들은 모두 자기네만 잘 살면 된다는 식으로 일치단결하여 강적을 대항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니 더욱 딱한 일입니다." 이때 무위도장이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옳은 말이오."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남은 방법이란 각파가 혐력하여 심목풍을 상대한다는 것 뿐이오. 제 가 이번에 백화산장의 장사분타에 잠입하여 관찰해 본 결과 심목풍은 확실히 무시 못할 저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소 그러므로 우리의 앞길에 난관이 많을 것이오......" 무위도장은 이 말을 듣자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소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심목풍은 이번에 친히 가서 사람을 만났다고 하니 그 사람은 필시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강적이 한 사람 더 느는 셈이지요." 무위도장이 한참만에 말을 받았다. "그러므로 지금 심목풍이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은 소대협 한 사람뿐입니다. 심목풍이 아직도 대 거 발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우선 소대협부터 어떻게 해치우려는 데 있소. 그래서 나는 이미 손 불사 노선배님과 약속을 했지요. 앞으로 전력을 기울여 소대협을 호위해 주기로 말이오......." 소영은 미소를 지었다. "두 분 노선배님의 그와 같은 생각에는 실로 감격해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호위라는 말만 은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제가 만일 위험에 부딪치지 않는다면 또 누가 모험을 할 사람이 있겠습 니까? 심목풍이 비록 저를 없애려는 마음이 불타고 있겠지만 제가 조심만 한다면 절대로 그의 손 에......." 무위도장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빈도와 손노선배님의 뜻은 소대협께서는 천하 무림 동도를 위해 몸조심하여야 된다는 것입니 다. 심목풍이 당신을 제일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반면에 제일 미워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전력을 경주하여 당신을 없애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뿐더러 그는 원래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소대협께서는 각별히 주의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 심목풍의 무공실력이 소 대협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가 혹시 소대협에게 암수를 쓸까 싶어 그러는 거 지요." 소영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 점에 대해선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소영은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바라 보았다. "도장, 우리가 앞으로 백화산장의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무림의 규칙같은 것은 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도장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소. 독은 독으로, 피는 피로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소영이 말을 이었다. "도장께서도 정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는 오늘밤에라도 곧 공격을 개시합시다." 소영은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 그런데 이 방에는 귀파의 제자가 모두 몇 명이나 됩니까?" 무위도장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열두 사람쯤 될 것입니다." 소영이 다시 물었다. "그 가운데서 무공이 높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다섯 명 정도 추려 낼 수 있을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과 나, 그리고 두구, 백리빙까지 합하면 모두 아홉 명 정도 되니 충분하겠군요." 무위도장이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는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나는 일거에 그 심목풍이 장사에 비치해 둔 일당을 무찔러 그의 이목(耳目)을 없애 버리려 합 니다. 과거엔 우리가 항상 그들에게 선수를 빼앗겨 왔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기선을 잡아 이쪽에 서 공격해 가자는 겁니다." 무위도장은 다시 무슨 생각을 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지금 곧 출동하자는 겁니까?" "제 생각은 빠를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빈도가 곧 사람을 뽑아 오겠습니다." 무위도장은 앞장 서서 지붕에서 뛰어 내려 갔다. 소영도 뒤를 따라 지붕에서 뛰어 내렸다. 백리빙이 곧 소영에게로 다가 오며 물었다. "오빠, 그 소요자를 놓쳤습니까?" "도망가 버렸어....." 소영은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빙아, 가서 무기와 암기를 가져 오너라. 오늘 밤 내가 너를 한 곳으로 인도할 테니 가서 네 마 음껏 사람을 죽이고 싶은대로 죽여 보아라." 백리빙이 반문했다. "어딜 가자는 겁니까?" "오늘 내가 갔던 곳에....." 두구가 천천히 소영에게로 다가 오면서 말했다. "저도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러지요." 이들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는 사이에 무위도장은 이미 다섯 명의 경장한 사나이를 데리고 들 어 왔다. 알고 보니 무당파의 제자들은 사람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변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다섯 사람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등에는 장검을 꽂고 있었다. 소영은 이들을 바라 보며 말했다.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모두가 악독하니 여러분께서도 그들과 겨루게 될 때는 절대 인정같은 것 을 봐 줄 필요가 없습니다." 다섯 명의 사나이는 일제히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소영이 말을 이었다. "그들을 대할 때 이름 같은 것도 밝힐 필요 없습니다. 그럼 제가 길을 인도하겠습니다." 소영은 말을 마치고 앞장서서 달려 갔다. 백리빙과 두구는 소영의 뒤를 바짝 따라 갔으며 무위도장은 다섯 명의 무당제자들을 데리고 맨 뒤에서 따라 왔다. 소영은 이미 낮에 가서 길을 익혀 두었던 터라 이들을 인도해 곧장 그 주조룡 등이 있는 농장의 초가집을 향해 달려 갔다. 반 시진도 채 걸리지 않아서 이들은 초가집 앞에 당도했다.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밤의 장막 속에 덮여 있는 초가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저 초가집 속에는 몇 명의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 있는 것 같소. 그 흡혈귀 같 은 심목풍의 부하 몇 사람 외에도 손꼽을 만한 자는 사천 당가의 장문인인 당노부인이지요. 그녀 는 수십 종의 극독을 바른 암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한꺼번에 밀고 들어 가야만 될 것입니 다." 무위도장은 그 말을 듣자 자기의 무당파 제자들이 당노부인을 당해 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염려 하여 그러는 줄 알고 말했다. "소대협이 모든 명령을 내리시오." 그러자 소영이 대답했다. "제 생각으로는 귀파의 오 명은 집 밖에서 지키고, 도장과 제가 앞장 서서 들어 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무위도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각각 임무를 분부해 주시오." 소영은 다섯 사람을 바라 보며 말했다. "저는 무당의 검진(劍陣)이 무림의 일절(一節)이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들어 왔습니다. 다섯 분 께서는 물론 검술에 다들 익숙하겠지요?" 다섯 사람은 일제히 대답했다. "예, 익숙하옵니다." 소영은 말을 이었다. "그럼 좋습니다. 여러분들은 숲 속에 숨어 있다가 만일 초가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사람이 있거 든 될 수 있는 한 불시에 덮쳐 생포하도록 하십시오. 그야 암기를 쓰든 기습을 하든 여러분의 수 단에 맡기겠습니다. 백화산장의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강호의 규칙같은 것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섯 사람은 일제히 대답을 하고는 옆에 있는 작은 숲 속을 향해 걸어 갔다. 소영은 그들의 등 뒤에 대고 말을 계속했다. "저 초가집 안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든 여러분께서는 나서지 마십시오. 그리고 만일 무공이 높은 사람을 만날 때에는 다섯 분은 검진을 이용해서 적을 상대하도록 하십시오." 다섯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같이 대답했다. "네, 잘 알았습니다." 소영은 다시 두구와 백리빙을 바라 보며 말했다. "적의 세력이 매우 강하니 절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오. 우선 자기의 몸을 방비한 다음 적 을 무찌를 생각을 해야 되오. 나와 무위도장이 앞장 설 테니 두 사람은 뒤따라 오도록 하오. 너무 가까이 따라 오지도 말고 너무 멀리 떨어져도 안 되오. 언제든지 서로 호응할 수 있어야 하니까... 팔 척에서 일 장 오 척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제일 좋을 거요....." 소영은 이번에는 백리빙을 바라 보며 말했다. "빙아, 넌 덤벼서도 안 된다. 만일 강적을 만나게 되면 나를 부르도록 해라." 백리빙은 미소를 지었다. "잘 알았어요." 소영은 무위도장을 바라 보았다. "그럼 들어 갑시다." 한 마디 하고는 소매를 떨치며 초가집으로 곧장 들어 갔다. 무위도장도 몸을 솟구쳐 소영과 나란히 걸어 들어 갔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도장께서는 무기를 꺼내시오." 무위도장은 보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무기를 안 쓸 작정이오?" 소영은 곧 대꾸했다. "내 보검은 품 속에 감춰 두었소. 강적을 만난 다음에 꺼내도 늦지는 않을 거요" 초가집 방문 앞에 이 이들 네 사람의 경공은 뛰어났으므로 순식간에 초가집 방문 앞에이르렀다. 이때 안에서 대갈일성이 들려 왔다. "누구냐?" 소영은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날려 덮쳐 갔다. 순간 차가운 광망이 번쩍이더니 한 자루의 단도가 소영을 향해 날아 왔다. 그러자 소영은 오른 손을 재빨리 내밀어 그 날아 오는 단도의 칼날을 마주잡아 힘껏 밀어젖혔다. 그러자 흑의를 입은 한 사나이가 단도와 함께 밀려 나갔다. 무위도장은 이 광경을 보자 속으로 놀랐다. "손불사라도 저런 식으로 싸우지는 못할 것이다. 소영은 오른손으로는 계속 그 사람을 밀어 내며, 왼손으로는 일장을 쳐 내 그 사람의 앞가슴에 명중시켰다. 순간 그 사나이는 윽! 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나동그러져 죽고 말았다. 소영은 그 단도를 든 사나이를 죽인 다음 번개처럼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다시 두 사람이 땅바 닥에 나동그라져 시체로 변했다. 백리빙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평소에 그다지도 인자했는데 오늘 밤에는 인정사정 두지 않는 것을 보니 이들은 아마 용서받지 못할 악인인 것 같구나. 오빠가 이처럼 독수를 쓰니 나도 사정없이 독수를 써야겠구 나...' 백리빙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품 속에서 한빙침 한 개를 꺼내 들었다. 무위도장도 소영이 갑자기 이처럼 지독한 수법을 쓸 줄은 미처 몰랐으므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정신이 번쩍 나는 듯 소영의 뒤를 따라 행동했다. 두구와 백리빙도 뒤따랐다. 이 초가집은 대청과 대문 사이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대문을 지키고 있던 네 명의 사나이는 소영의 이와 같이 쾌속 절륜한 수법에 의해 눈깜짝할 사 이에 다 죽어 넘어졌다. 실내에 있던 사람들은 문지기들이 쓰러지면서 지른 윽! 하는 비명 소리를 듣고는 소영이 대청문 앞 일 장 정도에 이르렀을 때 일제히 시위소리도 요란하게 화살을 쏘아댔다. 소영은 손에 무기를 들지 않았으므로 그 순간 빗발처럼 날아드는 화살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고 전을 겪고 있었다. 그러자 무위도장이 단숨에 덤벼들어 수중의 장검을 마구 휘둘러댔다. 검빛이 번쩍이는 대로 날 아 오던 화살은 모두 장검에 부딪쳐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 일파의 장문 고수들은 소영의 재빠른 솜씨를 보자 사기가 충천하여 칼을 휘둘러 몸을 보호함 과 동시에 또한 소영을 호위하며 대청의 문 앞까지 밀고 들어 가서 일검에 대청의 목문을 부수어 버렸다. 소영의 동작은 말할 수 없이 빨라 무위도장이 문을 부수자 쏜살같이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 그리하여 일제히 양장을 내밀어 한꺼번에 두 사람을 죽여 버렸다. 무위도장도 소영의 뒤를 바짝 따라 들어 가서는 장검을 날카롭게 휘둘러 두 명의 사나이를 찔러 죽였다. 이때 백리빙과 두구도 바짝 뒤따라 들어 왔다. 이 초가집 대청에는 원래 열 사람의 궁노수가 있었는데 이들의 무공도 약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만 소영 등 네 사람의 살의를 품은 고수에게는 당할 도리가 없어 잠시 동안에 여덟 사람이 죽음 을 당하고 나머지 두 사람도 중상을 입게 되었다. 소영은 여전히 맨 앞에 서서 벽을 힘껏 때렸다. 흙먼지가 풀썩 일어나며 벽이 넘어지자 큰 구멍 이 생겼다. 소영은 속으로 주조룡이 군호들을 모아 놓고 있는 밀실로 쳐들어 가서 주조룡을 생포하거나 적 어도 심목풍의 주구들을 몇 사람 죽일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영은 벽을 뚫고 들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소영이 일장으로 벽을 날려 버리자 갑자기 대갈일성이 들려 왔다. "누구냐?" 이어서 불빛이 번쩍이더니 한 개의 횃불이 나타났다. 소영이 불빛에 바라 보니 맨 한가운데 주조룡이 서 있고 그 뒤에는 네 사람의 홍의를 입은 사나 이가 나란히 서 있으며 또한 그의 왼쪽에는 당노부인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단굉장이 서 있었다. 그리고 횃불을 높이 든 사나이는 주조룡의 앞 삼 척 거리에 서 있었다. 이들이 모두 옷을 그대 로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여태껏 자지 않고 무슨 의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소영의 일행은 그들을 자세히 보았으며 주조룡도 소영을 자세히 훑어 보았다. 이때 소영은 낮의 복장을 그대로 하고 있었으므로 주조룡은 어리둥절해 하는 눈치였다. "단 현질(賢姪), 이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단굉장은 소영이 이 밤에 사람을 데리고 기습해 왔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낮에 입었던 의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으므로 은근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주조룡의 이 질문은 그의 안배가 소홀한 것을 꾸짖는 것이었다. 소영은 적의 주요한 인물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는 것을 알고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단굉장은 정신을 가다듬고 소영의 인피가면을 뚫어지게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백형이오?" 소영은 냉소를 했다. "천만에 나는 백가가 아니오." 주조룡은 이 말을 듣자 갑자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당신은 소영이 아니오?" 소영은 주조룡의 묻는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네들은 내가 누구이든 상관할 바 아니오. 다만 무기를 꺼내서 출수를 하시오." 주조룡은 단굉장을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 보았다. 그러나 강적이 이미 목전에 당도했으므로 그 와 같은 책임을 추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주조룡이었다. 그는 곧 냉랭하게 한바탕 웃어젖혔다. "좋소. 친구가 감히 통성명을 꺼리는 것을 보니 백화산장에 원한이 있는 사람인 것 같구려. 이 곳은 협소하여 손을 쓰기에 불편할 것 같으니 앞마당으로 나가서 싸웁시다." 소영이 대답했다. "당신 주이장주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오. 기실 도망칠 궁리를 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 오?" 주조룡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네 사람의 힘을 믿고 너무 큰소리치지 마시오." 소영은 주조룡을 주시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주조룡의 일행은 과연 소영을 따라 앞으로 천천히 다가 왔다. 그들이 대청으로 나왔을 때 주조룡은 대청 가운데 쓰러져 있는 열 사람의 궁노수를 바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들의 무공은 약한 편이 아닌데 이다지도 순식간에 모조리 쓰러졌단 말인가? 과연 이들 네 사 람은 일류 고수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주조룡은 이때 문득 두구의 철필(鐵筆)로 눈이 갔다. 그러자 주조룡은 갑자기 냉소를 터뜨렸다. "냉면철필 두구! 너 간덩이 한 번 크구나." 두구는 주조룡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자 더 이상 신분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 바로 맞혔다." 주조룡은 다시 시선을 무위도장에게 못박았다. 이윽고 그는 입을 열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무위도장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부는 대답하기를 원치 않소." 주조룡은 그 말을 듣자 하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대답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감히 대답하지 못하는 거지요. 실은 대답하나 마나 요. 나는 이내 당신이 무위도장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무위도장은 냉소를 지을 뿐 역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146. 외팔이 된 마문비 소영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주조룡은 무공의 성취는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지모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을 능가하고 있 다.' 어느새 이들은 앞마당에 도착했다. 주조룡은 자신만만한 듯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횃불을 몇 개 더 밝혀라!" 삽시간에 여덟 개의 횃불이 밝혀졌다. 이 여덟 개의 횃불은 여덟 명의 경장을 하고 칼을 찬 사나이들이 각각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덟 군데로 적당히 나누어 섰다. 주조룡은 백리빙을 자세히 바라 봤다. 아무래도 그 몸집이 작은 것을 보고 남자가 아니라는 것 을 알아 차렸던 모양이다. 주조룡은 백리빙이 남장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 차렸지만 그가 누군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금란이나 옥란이 아닌가 의심해 보기도 했다. 소영은 뜻밖에도 이와 같은 광경을 보자 주조룡이 어딘가 믿는 데가 있는 것 같았다. 십분 주의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위도장을 돌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주조룡은 좀처럼 다른 사람과 대력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번만은 그렇지 않는 것을 보니 어 딘가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무슨 음모가 있을 테니 우리들은 십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무위도장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내가 먼저 도전하겠소." 무위도장은 주조룡을 바라 보며 외쳤다. "주이장주의 이름은 익히 들어 왔소. 오늘 밤 다행히 기회를 얻어 그 절기의 가르침을 받아 볼 까 하오" 주조룡은 냉랭하게 웃었다. "나는 남과 싸우기를 좀처럼 원치 않소." 주조룡은 이렇게 말하고 당노부인을 바라 보며 말했다. "당노부인께서 먼저 수고를 좀 해 주십시오." 당노부인은 지팡이를 내밀며 말했다. "어느 분이 나와 겨루시겠소?" '이 분과 금화부인은 그 인연봉 아래서 심목풍을 죽이려 했는데 이들 두 사람이 다시 백화산장 으로 들어 가게 된 것을 보니 아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들에게 얽매어 꼼짝 못하는구나.' 소영은 이런 생각이 들자 곧 앞으로 나섰다. 무위도장이 막 출전을 하려는 순간에 소영이 느닷없이 뛰어 나갔다. 무위도장은 할 수 없이 관 전할 수밖에 없었다. 당노부인은 지팡이를 쳐들면서 말했다. "이름을 대시오." "저는 소영이오." 당노부인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소영이오?" "틀림없는 소영이오." 주조룡은 비록 마음 속으로 그가 소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정작 소영의 입으로 그 소리를 들으니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주조룡의 뒤에 서 있는 네 사람의 녹의를 입은 사나이들은 무표정했다. 그들은 아예 소 영이 누군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당노부인의 암기가 비록 무서운 것이긴 하지만 소영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이들 홍의를 입은 네 사나이였다. 그래서 소영은 줄곧 그들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영은 이들 네 사람의 돌부처같은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이들이 마치 소상(塑傷)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일종의 약물에 의해서 정신을 박탈당했는지도 모른다." 이때 당노부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조심하시오." 당노부인은 말을 마치자 휙휙! 지팡이를 휘두르며 소영의 머리 위를 향해 내리쳤다. 소영은 지팡이의 힘이 매우 강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분은 이미 백화산장에 깊이 빠져 있구나. 내가 따끔한 맛을 좀 보여 줘야지.....' 소영은 옆으로 몸을 날려 당노부인이 내리치는 지팡이를 피했다. 동시에 오른손을 번개처럼 재 빨리 뻗어 당노부인의 지팡이를 잡아채며 힘껏 앞으로 잡아 당겼다. 이와 같이 상대방의 무기를 마주잡는 수법은 매우 위험한 수법인 것이다. 자기가 틀림없이 이기 리라는 자신이 없는 한 이런 수법은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소영이 이렇게 당노부인의 지팡이를 휘어 잡는 것을 보자 주조룡은 가슴이 섬뜩했다. 뿐만 아니 라 무위도장까지도 속으로, '소영이 너무 자신을 갖는구나.' 하고 은근히 걱정할 정도였다. 당노부인도 소영이 차마 이런 수법으로 공격해 올 줄은 몰랐으므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노부인이 이렇게 당황하고 있을 때 소영이 힘껏 지팡이를 잡아채니 당노부인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려 했다. 그와 동시에 소영은 왼손을 휘둘러 일장을 쳐 냈다. 소영의 이 일련의 동작은 너 무도 빨랐으므로 당노부인은 미처 피해 내지를 못했다. "펑!" 소리와 함께 당노부인의 왼쪽 어깨에 일장이 명중했다. 소영은 그래도 옛 정을 생각하여 그 일 장에 그리 큰 힘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당노부인의 내공으로 거뜬히 당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당노부인은 그 일장에 윽! 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짐과 동시에 손 에 쥐었던 지팡이를 놓치고 말았다. 소영은 지팡이를 뺏음과 동시에 속으로 당노부인이 일부러 양보했다는 것을 짐작하고 곧 대갈일 성을 지르며 주조룡에게로 덮쳐 갔다. 소영은 이때 당노부인이 혹시 극독이 묻은 암기를 쳐 내 무위도장과 백리빙을 해치지나 않을까 하고 은근히 염려했다. 그러나 당노부인이 지팡이를 뺏긴 채 땅바닥에 쓰러진 것을 보고는 그럴 염려는 없다고 생각하 여 호기가 생겼다. 한편 주조룡은 그래도 일파의 장문인인 당노부인이 소영의 단 일초에 패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으므로 그 광경을 보자 두렵기도 하고 한편 의심스럽기도 했다. 주조룡이 이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느닷없이 소영이 또 자기에게로 덮쳐 오는 게 아닌 가! 주조룡은 자기 자신이 절대로 소영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몸을 날려 뒤로 물러서며 손을 들어 흔드니 뒤에 섰던 홍의를 입은 사나이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소영 을 포위했다. 소영은 원래 이들을 경계하고 있었던 터라 곧 단전에 진기를 도로 내리며 멈추어 서서는 지팡이 를 쳐들어 적을 막았다. 이때 무위도장이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조룡, 너의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어째서 늘 비겁하게 여러 사람이 한 사람에게 덤벼 드느냐?" 백리빙도 입을 열었다. "오빠, 제가 돕겠어요." 그녀는 장검을 들고 앞으로 덮쳐 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갸냘프게 들려 여자의 목소리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알고보니 그녀는 워낙 다급한 김에 자신이 남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 버 렸던 것이다. 소영은 이때 앙천대소를 했다. "빙아. 빨리 물러서라!" 백리빙은 이미 네 명의 사나이들 앞으로 다가서며 막 수중의 장검을 휘두르려고 했었다. 그러나 소영이 제지하므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오빠, 저의 도움이 필요 없어요?" 소영은 운기행공을 하여 잔뜩 적을 경계하면서 말했다. "필요 없어. 이들 네 사람이 만약 진짜 사람이라면, 그들을 너무 치켜 주는 셈이 되니까... 안 그 러냐?"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사람이 아니면 뭐예요?" 소영이 대답했다. "심목풍의 혈영화신(血影化身)이지." 백리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물었다. "혈영화신이란 또 뭐예요?" 소영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혈영화신이라는 것은.... 그건 말이야......" 무위도장이 소영의 말을 가로챘다. "그것은 일종의 약물로 사람을 조종하는 것을 말함이오. 말하자면 약물에 중독시켜 놓고 혹독한 훈련을 가하면 혈영화신이 되는 것이오......" 기실은 무위도장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소영이 대답을 하지 못해 쩔쩔매는 것을 보고, 그의 말 을 이어 몇 마디 얼버무렸을 뿐이다. 갑자기 네 줄기의 괴상한 기합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오싹 끼치게 했다. 백리빙은 더 물어 보려다가 혹시 소영의 정신을 흐트러지게 할까 싶어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 다. 이들 네 명의 사나이들은 한바탕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난 다음에 천천히 손발을 움직이기 시작 했다. 소영은 시선을 돌려 이들 네 사람을 바라 보며 한편 높은 소리로 외쳤다. "노장, 저 주조룡을 잘 감시하시오. 도망가지 못하도록... 이 네 사람은 내가 감당할 테니까요......" 무위도장은 소영의 무공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소영이 만일 그 네 명을 당해 내지 못한다면 자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곧 이장 밖으로 물러나서 주조룡을 감시했다. 소영은 이 네 명의 홍의를 입은 사나이들의 손발이 점점 빨리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곧 공격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내 이미 너희들 네 명을 죽이겠다고 마음 먹은 이상 내가 먼저 출수를 해야겠다.....' 소영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수라지력을 암암리에 운기하여 갑자기 오른손을 휘둘러 한 줄기의 지풍을 서남쪽에 있는 사나이를 향해 쳐 냈다. 그러자 한 줄기의 지풍이 곧 그 사나이 의 왼쪽 허벅지에 적중되었다. 그 사나이는 뒤로 사, 오 보 밀려 나서야 겨우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소영의 일격 이 그만큼 맹렬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사나이의 얼굴엔 조금도 고통스러운 표정이 없어 보였다. 마치 그 왼쪽 다리가 자기 몸의 일부분이 아닌 것처럼 태연했다. 그것을 보자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가령 심목풍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이 일지에 적중되었다면 이렇듯 태연자약하지는 못할 것이 다. 그러나 저 사나이는 조금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으니 저들이 도대체 무슨 무공을 연마 했단 말인가?'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며 막 수중의 지팡이를 휘둘러 공격을 가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붉은 그림 자가 번쩍이며 두 명의 홍의를 입은 사나이가 좌우 양쪽에서 덮쳐 왔다. 그러자 소영은 곧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휘둘러 횡소천군(橫掃千軍)초식으로 서북방에서 덮쳐 오 는 홍의대한의 공격을 막으며, 왼손으로는 벽공장력을 내 뻗쳐 동북쪽에서 덮쳐 오는 홍의대한에 게 마주 공격해 갔다. 소영의 이 강한 장력은 동남에서 덮쳐 오던 홍의대한이 오 척의 거리까지 다가 왔을 때 그에게 당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의대한은 즉시 오른손을 휘둘러 소영의 일장을 맞받았다. 두 줄기의 암경이 맞부딪치는 순간 일진광풍이 일어났다. 그리고 소영의 앞으로 덮쳐 오던 그 사나이는 소영의 장력에 밀려 뒤로 일보 후퇴했다. 그러나 소영도 이때 왼쪽팔에 진동을 받아서 약간 저려 왔으므로 부득불 왼쪽으로 휘두르던 지팡이의 장세를 약간 늦추었다. 이때 서북쪽에서 덮쳐 오던 홍의대한이 이미 무기를 뽑아 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한 자루 의 빈철단봉이었다. 그 빈철단봉은 곧 소영의 수중에 있는 지팡이와 맞부딪쳐서 쨍그 렁! 하는 소리를 내며 소영의 지팡이를 밀어 냈다. 이때 네 명의 홍의인이 한꺼번에 소영에게로 덮쳐 왔다. 소영은 대갈일성을 지르며 하는 수 없이 수중의 지팡이를 팽개치고, 재빨리 왼손으로 장풍을 쳐 내 두 명의 홍의인의 진격을 물리치는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품 속에 든 검을 꺼내 들었다. 소영은 그동안 이 네 명의 홍의인과 결투를 벌이면서 그들의 사정을 대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곧 이들은 무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아픔에 대한 감각이 없으므로 일격에 급소를 적중시키기 전 에는 그들과의 대결이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므로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독수를 뻗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곧 일격에 쭉 뻗어 버리도록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네 명은 곧 힘을 합해서 소영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두 명은 무기를 들었고 두 명 은 맨손이다. 소영은 곧 오른손의 단검으로 화산 담운청의 검법을 전개하고 왼손으로는 남일공의 섬전장법을 사용했다. 이처럼 그가 두 손에 각각의 절기를 한꺼번에 휘둘러대니 그 위세야말로 맹렬하기 짝이 없었다. 한바탕 장풍이 소용돌이치고 검빛이 번쩍이더니 네 명의 홍의대한은 금시 소영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격투중에 소영이 갑자기, "찻차!" 하고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순간 선혈이 사방에 튀며 빈철단봉을 든 홍의대한의 오른쪽 팔 하나가 잘려 나갔다. 동시에 그 가 쥐고 있던 빈철단봉 역시 육, 칠척 밖으로 날아 갔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오른팔 하나가 떨어 졌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좌장을 휘둘러 소영에게 장풍을 쳐 냈다. 소영은 그가 한쪽 팔을 잘리고도 공격해 올 수 있는 저력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 다. 소영은 그만 순간 어리둥절해 버렸다. 그 순간 사나이의 좌장은 그만 번개같이 소영의 왼쪽 어깨에 적중되고 말았다. 요사이 소영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공을 연마해 왔기 때문에 내공과 호신강기가 크게 진전을 보였다. 그러므로 그 홍의대한은 소영의 어깨에 일장을 명중시켰지만 오히려 반동을 받아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게 되었다. 소영은 이 일장을 맞자 분노가 끓어 올랐다. '심목풍의 이 혈영화신을 전부 죽여야 한다. 이들을 살려 두었다가는 반드시 여덟 명의 무림 고 수들이 이들과 함께 죽어야 할 운명에 놓여질 것이다. 그렇다. 이들은 무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인간이 아닌 싸움기계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든 이들과 상대함에 있어서 일단 중상을 입혀 놓은 다음에도 이들이 이처럼 맹렬한 반격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만약 나처 럼 호신강기를 연마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들에게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연방 장풍과 검을 휘둘러 이들 대한과 격투를 벌였다. 소영은 이때 살수를 썼다. 소영과 이들에 못지 않게 무위도장과 주조룡도 점점 긴장되어 손에 식은땀을 쥐며 관전하였다. 무위도장은 그 홍의대한이 한쪽 팔이 날아간 다음에도 여전히 공격을 가하는 것을 보자 놀라움 을 금치 못했다. '저들은 무슨 무공을 연마했길래 저다지도 강맹할까?' 이때 주조룡도 소영과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바라 보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소영의 무공은 근래 또 크게 발전했구나. 그 재빠른 동작이란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다.' 이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홍의인이 소영의 일장에 앞가슴을 얻어맞았다. 이 일장은 소영이 팔분의 내경으로 쳐 낸 것이므로 그 홍의인은 심맥이 진동되어 끊어졌다. 그 래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더니 급기야 땅바닥에 쓰러져서 한 입 가득히 선 혈을 토해 냈다. 소영은 다시 쉬지 않고 몸을 번뜩여 다른 두 명의 홍의대한이 협공해 오는 것을 피하면서 철수 개화식으로 검을 휘둘러 그 팔이 잘린 사나이의 목을 향해 찔렀다. 그는 이미 이 홍의대한은 아픔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치명상을 입혀야 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그는 홍의대한의 목을 찔렀던 것이다. 그러자 이 홍의 대한은 팔을 잘려서 많은 피를 흘린 데다가 다시 목에 칼을 맞았으므로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 어 뒤로 벌렁 나둥그러졌다. 그리고는 마치 나자빠진 자라처럼 두 다리와 한 팔로 허우적거리더 니 곧 죽고 말았다. 소영은 이렇게 두 사람의 홍의대한을 죽인 다음에 사기가 충천해서 다시 단검을 휘둘러 한 사람 의 홍의대한을 찔러 죽임과 동시에 왼손으로 탄지신공을 쳐 냈다. 그러자 한 줄기의 암경이 솟아 올라 뻗쳐 나가더니 나머지 홍의대한의 오른쪽 눈을 명중시켰다. 그러나 소영은 이 두 사람의 홍의대한이 비록 명중되긴 했지만 아직도 싸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곧 남은 힘으로 다시 연거푸 사검을 공격했다. 이 사검은 그야말로 담운청의 검록(劍錄) 중에서도 절초였으므로 이 두 사람의 홍의대한은 한꺼 번에 그 예리한 칼날에 급소를 맞고 죽어 버렸다. 주조룡은 크게 믿고 있던 이 홍의대한들이 소영에게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자 크게 놀라서 갑 자기 뺑소니를 치기 시작했다. 무위도장이 냉소를 터뜨리며 외쳤다. "이장주, 도망가기요?" 그는 곧 장검을 휘둘러 주조룡의 앞길을 막았다. 그러자 단굉장이 싹! 하고 장검을 뽑아 들면서 뻔뻔스럽게 외쳤다. "길을 비켜라!" 이때 갑자기 백리빙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너는 무위도장의 상대가 안 돼!" 백리빙은 싹! 하고 칼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찔렀다. 그러자 단굉장은 일검을 휘둘러 백리빙의 검세를 막고 한편 다시 일검을 휘둘러 반격을 가해 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칼을 주고 받으며 격투를 전개했다. 주조룡은 마음이 다급했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이지.....' 주조룡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소영이 단검을 들고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주조룡은 깜짝 놀라서 마치 놀란 토끼처럼 소매 속에서 한 개의 옥척(玉尺)을 꺼내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솟구쳐 오르며 무위도장에게로 덮쳐 갔다. 옥척이 내려쳐지는 순간 무위도장은 장검을 휘둘렀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옥척과 장검이 맞부딪쳤다. 무위도장은 옥척을 막아 낸 다음 다시 두어 번 칼을 휘둘러 반격을 가했다. 이때 두구는 철필을 단단히 쥐고 사방을 감시하고 있었다. 소영은 속으로 백리빙과 무위도장의 무공이 결코 주조룡이나 단굉장보다 못하지는 않다고 생각 하며 칼을 쥔 채 관전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운기조식을 계속했다. 기실 소영은 이들 네 사람의 홍의대한을 죽인 이후, 몹시 피로해 있었던 것이다. 무위도장은 주조룡과 겨루기 시작하자 곧 태극혜검법(太極彗劍法)을 전개하였다. 검빛이 번쩍이는 순간 검세는 강유(剛柔)의 조화를 이루어 순식간에 주조룡을 검세의 범위 안으 로 몰아 넣었다. 또한 백리빙과 단핑장도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기실 단굉장은 소영이 네 사람의 홍의대한을 죽일 때부터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곳 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공격을 가했다. 백리빙은 또한 그의 급박한 공세에 몰려 제대로 반격을 가하지 못하자 매우 초조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오늘 밤에 만약 이 자에게 패하게 되면 오빠를 대할 면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얕잡아 보이게 될 것이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 그녀는 이와 같은 결심을 하고는 죽을 힘을 다해 반격을 시도했다. 한 사람은 도망가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또 한 사람은 위신을 세우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공격했으므로 이들의 싸 움이야말로 다른 사람의 경우보다 한층 더 치열한 것이었다. 격투중에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백리빙의 일검이 단굉장의 앞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단굉장은 그 자리에 쓰러져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백리빙의 무공의 성취는 이미 무림의 일류고수에 비길 만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했으므로 한 동안 단굉장의 급공을 받게 되자 손발이 묶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천천히 정신을 가 다듬어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연거푸 절초를 쳐 냈던 것이다. 단굉장은 그녀의 절초를 이겨 내지 못하고 결국은 앞가슴을 맞아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무위도장도 주조룡으로 하여금 전연 반격할 여지가 없도록 궁지에 몰아 넣었다. 주조룡은 이마에 구슬같은 땀을 흘리며 죽을 힘을 다해 옥척을 휘둘러 무위도장의 장검을 가까 스로 막아 내고 있었다. 이때 백리빙은 장검에 묻은 피를 쓰러져 있는 단굉장의 옷자락에 닦으며 소영을 바라 보고 말했 다. "이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이지요? 내가 죽여도 오빠는 화 안 내겠지요?"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은 심목풍의 제자로 무공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그를 죽이다니... 실로 놀 라운 일이야!" 백리빙도 미소를 지었다. "다 오빠가 가르쳐 준 덕분이에요." 소영은 곧 말을 받았다. "너는 원래 무공이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남달리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 내 덕분이라고 할 수 있느냐!" 소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외쳤다. "주조룡. 네 명의 혈영화신은 이미 다 죽었으며, 당노부인마저 혈도가 찍혀 있고, 단굉장도 죽어 넘어졌다. 그런데 너 혼자서 감히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빨리 무기를 버리고 포박을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저 단굉장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조룡은 죽을 힘을 다해 옥척을 휘둘러 무위도장의 장검을 피하면서 몸을 솟구쳐 소영 에게로 덮쳐 왔다. 그러나 백리빙이 소영을 막아 서며 장검을 휘둘러 연거푸 삼검을 찔렀다. 주조룡은 할 수 없이 다시 옥척을 휘둘러 삼검을 피해 내며 이 보 뒤로 물러섰다. 소영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빙아, 손을 멈춰라. 그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백리빙은 곧 장검을 거두면서 물러서서 소영의 곁으로 갔다. 주조룡은 옥척을 거두어 들이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영,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할 셈이오?" 소영은 담담하게 웃었다. "내가 만약 당신을 놓아 준다면 심목풍은 당신을 의심하지 않겠소?" 주조룡이 대답했다. "나는 그와 십여 년 동안 같이 살아 왔으므로 그가 약간 의심을 할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치 지는 않을 거요." 소영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래도 더 살고 싶은 모양이구려." 주조룡은 나직이 대꾸했다. "개미도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사람이 어찌....." 소영이 말했다. "우리는 한동안 같이 살아 왔소. 그때 당신은 나에게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소." 주조룡이 말을 받았다. "당신이 아직도 옛일을 생각하고 있다니 나는 감격을 금치 못하겠소." 소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잘 대해 준 의도는 어떤 속셈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진정에서였는지... 아무튼 지금 생사의 결정은 당신에게 매어 있소." 주조룡은 냉소를 지었다. "당신은 나에게 포위를 뚫고 나가란 말이오?"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하는데, 지금 당신은 도망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주조룡이 반문했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거요?" 소영은 곧 대꾸했다. "지금 무림에 있어서 심목풍과 백화산칭식 비밀을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 주이 장주요....." 주조룡이 말을 받았다. "당신은 나에게 백화산장의 비밀을 팔아서 생명과 바꾸라는 거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주조룡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했다. "당신은 나를 너무 얕잡아 보는구려." 주조룡은 다시 옥척을 꺼내 들고 싸울 준비를 했다. 백리빙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빠, 제가 처치해 버리겠어요." 백리빙은 말을 마치자 재빨리 두어 걸음 다가 서며 장검을 휘둘렀다. 소영이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빙아, 빨리 물러나라."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어느덧 백리빙은 삼검을 휘둘렀다. 주조룡은 삼검을 피해 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 계집애의 검법은 무위도장의 검법보다도 더 악랄한 것 같구나. 그런데 이 계집애는 누굴까?' 그러나 주조룡은 짐짓 태연한 체했다. "소영, 당신은 왜 나를 죽이지 않소?" 소영은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똑똑히 일러 두겠지만 당신이 정 죽고 싶다면 내가 깨끗이 죽여 줄 수도 있소." 주조룡은 곧 반문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거요?" "당신이 만약 백화산장 내의 모든 비밀을 털어 놓는다면. 나는 전력을 기울여 당신의 생명을 보 호해 줄 것이오. 심목풍에게 절대로 피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조룡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어떤 방법으로?" 소영은 곧 대답했다. "당신을 변장시켜 안전한 곳으로 보냈다가, 내가 심목풍을 죽인 뒤 다시 강호로 나오도록 해 주 겠소." 주조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네들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소." 소영은 그렇지 않다는 듯 강경하게 말했다. "자고로 행악(行惡)을 하는 사람 치고 천벌을 받지 않는 자 없소. 지금 천하의 영웅과 각대 문파 가 이미 깨달은 바 있으므로 심목풍의 무공이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 하더라도 천하 영웅들을 모 두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주조룡은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당신네들은 절대로 우리에게 이 길 기회가 없다는 것이오." 소영이 반문했다. "그건 무슨 이유로?" 주조룡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약간의 내막을 폭로한다면... 백화산장의 실력은 날로 더 강대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 달 내에 강호에는 무서운 변동이 일어날 것이요. 그렇게 되면 각 대문파는 전부가어 쩔 수 없 이..." 주조룡은 예까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소영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계속하시오?" 주조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나는 백화산장의 이장주란 신분으로 강호에 많은 원한을 사고 있소. 그러므로 내가 만 일 백화산장을 떠난다면 강호에는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무수히 뒤따를 것이오. 그렇게 되면 결 국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며 이왕 죽을 바에는 배신했다는 말을 듣지 않고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나을 것이오." 소영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좋소. 당신이 정녕 심목풍이 강호를 제패할 수 있다고 고집한다면 나 역시 더 이상 권하지 않 겠소. 지금 내가 당신에게 독수를 쓸 수도 있지만 과거의 정리를 생각하여 자결을 권하겠소." 이때 깔깔 웃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주이장주를 죽이면 안 되오." 소리나는 곳을 바라 보니 금화부인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금화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너무도 많은 비밀을 알고 있으므로 잘 이용을 해야 되오." 소영이 말을 이었다. "허지만 그가 말을 하려 들지 않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소?" 금화부인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물으니 그가 대답할 리가 있소." 금화부인은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전에 이장주가 적을 심문할 때 고문하는 방법을 몇 가지 보았소. 그렇게 하면 제아무리 장사라도 불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오." 소영이 반문했다. "아주 지독한 고문을 했단 말이오?" 금화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치는군요." 금화부인은 갑자기 손을 내밀어 주조룡의 혈도를 두 군데 찍었다. 고리고 말을 이었다. "결코 죽여서는 안 되오." 소영은 되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그에게 물어서는 헛일이요. 어떤 악랄한 수법으로 그에게 고통을 가하더라도 그는 단 한 마디도 실토하지 않을 거요...." 소영도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알고 있다면 됐소." 금화부인은 다시 당노부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이 당노부인도 저와 함께 어쩔 수 없이 심목풍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니 혈도를 풀어 주 시오." 소영은 금화부인의 말대로 했다.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당노부인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소대협, 감사하오." 당노부인은 몸을 털고 일어서며 소영에게 사의를 표했다. 소영이 말을 받았다. "당노선배님께서는 조금 전에 저와 겨루실 때 고의로 져 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노부인이 대답했다. "이 늙은 몸이 항거해 봤자 십 초 이상을 견뎌 내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오." 이때 금화부인이 말참견을 했다. "이제 그런 얘기를 덮어 둡시다. 그리고 빨리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합시다." "어딜 간단 말이오?" "당신네들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 갑시다." 소영이 낮은 목소리로 무위도장에게 물었다. "도장, 우리가 있던 그 방으로 돌아갈까요?" 무위도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심목풍과 같은 극악무도한 사람들을 대하는 데는 어느 정도 가장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빈 도는 일찍이 깨달은 바가 있지요. 그래서 그 방 외에도 두어 군데 몸을 숨길 만한 곳을 마련해 놓았소." 소영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 하셨습니다. 그럼 곧 떠날까요?" 무위도장이 말을 이었다. "여기다가 어떤 흔적을 남겨 놓는 게 어떨까요?" 금화부인이 대답했다. 이 몇 채의 초가집은 이미 백화산장의 소유인지라, 이 안엔 백화산장의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 이 없소. 그러므로 어떤 위장을 해서 심목풍을 속이려는 것은 심목풍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결과가 되는 것이오. 그러므로 유일한 방법이란 그로 하여금 약간의 단서도 잡지 못하도록 흔적을 없애 버리는 겁니다." 무위도장이 반문했다. "그렇다면 부인께서는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불을 질러서 초가집을 모조리 태워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이 초가 내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하나도 남김없이 태워 죽인다는 것은 좀 지나친 일이 아 닐까요?" 금화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나도 이미 생각해 본 바요. 당신은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므로 사람을 죽이려 하지 않을 거요. 그러니 이 일은 이 누이가 해치우겠소." 소영은 반문했다. "누님은 이미 손을 쓰신 게 아니오?" 금화부인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삼십팔 명의 하인이 있소. 그런데 그중 당신네들이 죽인 사람을 빼 놓고는 다 내가 죽였어요. 지금은 다만 횃불을 들고 있는 여덟 사람만 남아 있는데 저들도 이미 내가 혈도를 찍 어 놓았소." 소영도 맞장구를 쳤다. "백화산장 내의 사람들은 모두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니 소제 역시 그들을 죽이는 데 있어 반 대하지는 않소." 금화부인이 말을 받았다. "거 반가운 말이군요. 그렇게 말하니 내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금화부인은 말을 마치자 다시 오른손을 휘둘러 그 횃불을 들고 있는 사나이들의 사혈을 찍었다. 소영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낮은 소리로 무위도장에게 말했다. "도장, 내게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 백운관 내에 아직도 백화산 장의 고수들이 남아 있을 테니 우리는 이왕 손을 댄 김에 그 장내에 있는 부하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자는 겁니다." 무위도장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소영이 물었다. "왜죠?" "사람을 쏘려면 우선 말을 쏘고, 도둑을 잡으려면 그 두목을 잡으라고 했소. 내가 관찰한 결과로 는 백화산장 내엔 그리 엄밀한 조직 계통이 없는 듯하오. 모든 행동권은 모두 심목풍이 장악하고 있으므로 그 심목풍만 처치해 버리면 백화산장은 그대로 해체되고 말지요." 금화부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 그 원인은 심목풍이 의심이 너무 많기 때문에 딴 사람을 믿지 않았다는 거요. 그래서 부하 들에게 증요한 책임을 맡기지 않고 그가 단독으로 통치해 왔기 때문에 다만 그를 죽이면 전 백화 산장이 마비될 운명에 놓여진다는 것이오." 금화부인은 다시 주조룡을 힐끗 쳐다 본 다음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심목풍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내막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저 주조룡일 거요.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우선 저 주조룡의 입을 통 해 자세한 내막을 알아 낸 다음 우리도 그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거요. 그러므로 신삼괴 따 위의 인물들은 별 큰 작용을 못할 테니 그들에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누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자아. 그럼 우리들은 떠납시다." 무위도장이 말을 받았다. "빈도가 길을 안내하겠소." 무위도장은 말을 마치자 앞장 서서 걸어 갔다. 이때 소영은 두구를 돌아 보며 말했다. "집에 불을 놓으시오." 두구는 네, 하고 대답을 한 다음 횃불로 초가지붕에 불을 질렀다. 짚으로 된 지붕에 불이 붙자 순식간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사방으로 번져 갔다. 소영은 그 초가에 불이 완전히 붙은 것을 보자 백리빙을 돌아 보며 말했다 "빙아, 어서 가자." 백리빙은 미소를 지으면서 소영의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 갔다. 두구는 혈도가 찍힌 주조룡을 안고 백리빙의 뒤를 따랐다. 이때 무위도장은 다섯 명의 무당파 제자들을 데리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한데 모이자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무위도장이 앞장 서서 북쪽을 향해 길을 안내하 면서.... 이들은 단숨에 십여 리를 달려 어느새 강가에 이르렀다. 무위도장이 걸음을 멈춘 다음 연거푸 다섯 번 손바닥을 쳤다. 그러자 노젓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그만 배 한 척이 천천히 강가 풀 숲 속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배 안에는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걸친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 사나이는 이렇게 외쳤다. "하늘은 검고, 땅은 노랗다!" 무슨 암호인 듯했다. 무위도장이 역시 암호로써 대답했다. "백발노부가 고기를 잡기에 바쁘다." 그러자 그 도롱이를 걸친 사나이가 강가에 배를 댔다. 무위도장이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그 사나 이에게 물었다. "이 작은 배에 이처럼 많은 사람이 탈 수 있겠소?" 그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염려 마시고 타십시오." 무위도장이 맨먼저 배 위에 올랐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차례로 올랐다. 그 작은 배는 길이가 불과 이 장, 폭이 오 척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이들이 모두 올라 타자 마 치 가라앉기라도 할 것처럼 기우뚱거렸다. 두구가 말했다. "안 되겠소. 우리 두 패로 나뉘어 탑시다." 그러자 도롱이를 걸친 사나이가 빙그레 웃었다. "괜찮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배를 밀었다. 작은 배는 그가 밀자 아주 평온하고도 빠르게 미끄러져서 잠시 동안에 맞은 편 풀 숲으로 다가 갔다. 그 사나이는 음!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손으로 배를 밀어젖혔다. 순간 배는 강가의 수풀 속으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 갔다. 고개를 들어 바라 보니 이 풀 숲 속에는 고지가 있었는데 사방이 무성한 풀로 에워 싸여져 있어 아주 은밀한 곳이었다. 그 고지 위에는 초가집이 몇 채 있었다. 무위도장이 먼저 배에서 내리자 모두들 따라 내렸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손에 든 무기가 별빛에 번뜩였다. 무위도장이 걸음을 멈추며 포권을 했다. "빈도는 무위라고 합니다. 여러분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왼쪽팔이 없는 사람이 손에는 부채를 들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 무위도장이십니까?" 소영의 시선은 매우 예리했다. 비록 어둠 속에서지만 한 번 보고 그가 마문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영은 뜨거운 정이 솟구쳐 올라 앞으로 총총히 달려 나갔다. "마형, 소제를 알아 보시겠습니까?" 마문비는 원래 경각심이 대단한 사람인지라 뒤로 물러섰다. "당신은 누구요?" 소영은 그제야 자기의 얼굴에 분장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바른 약물을 지우며 말했다. "소제는 소영이오." 마문비는 소영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 본 후 그제야 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저는 소형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소이다." 소영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마형의 왼쪽 팔이?" 마문비는 곧 쥐고 있던 부채를 팽개치고는 남은 한쪽 팔로 소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남자 대장부가 팔 하나쯤 잘린들 어떻습니까?" 마문비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군호들을 바라 보며 말했다. "이처럼 많은 강호의 친구들은 이 마문비가 팔 하나가 없어졌는 데도 버리기는커녕 더욱 애호해 준다오." 소영도 그제야 명랑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마형의 남자다운 기질을 소제는 더욱 존경할 뿐입니다." 마문비는 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좋습니다. 소대협의 그와 같은 말을 들으니 이 마모는 비록 한 쪽 팔이 없어졌으나 기쁘기 한 량없습니다." 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형께서는 저를 동생이라 불러 주시겠습니까?" 마문비가 또 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좋습니다. 소제, 그런데 지금 각대문파의 천하 영웅들은 모두 심목풍을 살려 두면 살려 둘수록 천하의 무림동도들이 안정된 나날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곧 자기 자신만의 안전 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심목풍의 계획을 도와 주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 습니다. 게다가 소제께서 몇 차례 장쾌하게 심목풍에게 대항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더욱 경각 심을 높이게 되었지요. 그게 다 소제의 영향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소영은 겸손해 했다. "너무 과분하신 말씀을 하십니다. 심목풍의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나자 무림 동도들이 각성한 데 불과합니다." 마문비는 빙그레 웃었다. "오호사해(五湖四海)를 통틀어 강호 전체가 소제를 마치 구세주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자고 이래로 소제와 같은 영예를 누린 사람은 강호에 실로 드물었을 것입니다." 마문비는 두구 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분들은 뉘시오?" 소영이 얼른 대답했다. "제가 마형에게 소개를 올리지요." 그러자 무위도장이 얼굴에 발랐던 약물을 닦으며 포권을 했다. "빈도는 무위라 하오" "저는 두구라 합니다." 그러나 금화부인과 당노부인, 백리빙 등은 한쪽에 선 채 잠자코 있었다. 소영이 맨 먼저 백리빙 을 가리키며 소개를 했다. "이분은 백리낭자, 곧 북천존자의 따님입니다." 그러자 뒤에 섰던 군호 중에서 누가, "빙궁 공주!" 하고 외치는 자가 있었다. 백리빙은 생긋이 웃으면서 절을 했다. 소영은 다시 소개를 했다. "이 분은 사천당가의 장문인 당노부인, 그리고 이 분은 금화부인....." 순간 마문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 두 분은 백화산장에 있는 심목풍의 부하가 아니오?" 그 말을 듣자 뒤에 서 있던 군호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군호들도 이미 두 사람의 이름을 들 어서 잘 알고 있는 터라 모두들 흥분하는 듯한 눈치였다. 소영은 곧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높은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잠시 고정하십시오. 이 소모의 한 마디를 들어 주십시오." 지금 소영의 명성은 절정에 올라 있었으므로 그가 한 마디 하자 과연 모두들 조용해졌다. 소영은 다시 크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 당노부인으로 말하면 일파의 지존으로써 어찌 그 심목풍의 일을 도와 주고 싶었겠습니까만 부득이 백화산장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될 딱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소영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심목풍의 수단이 원래 악랄하다는 것은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이지만 사실 심목풍은 당노 부인의 몸에 독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분의 아들과 며느리 손자까지도 인질로 잡아다 놓고 당노부인에게 공갈과 협박을 하면서 자기의 명령을 들으라고 했던 것이오. 하지만 당 노선배님께 서 원래가 정직하고 결백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므로 그동안 수차에 걸쳐 이 소모를 구해 준 바 있 습니다." 마문비는 그제야 당노부인에게 허리를 굽혀 읍을 했다. "저희들이 오해하여 죄송합니다." 당노부인은 탄식조로 말했다. "이 늙은이 마음은 비록 무림의 정의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만 백화산장에 떨어져 사천당가의 명예를 더럽히고 말았군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소영은 크게 한바탕 한숨을 내쉬었다. "금화부인의 사정에 대해선 여러분들은 더욱 모르실 것입니다." 마문비가 얼른 말을 받았다. "나는 금화부인의 악명을 자주 들어 왔습니다. 심목풍이 행악을 하는 데 있어 손발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좋은 사람이란 말이오?" "아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제가 이 분을 절대로 변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림 동도를 암암 리에 제일 많이 도와 준 사람은 바로 이 금화부인입니다." 군호들은 그 말을 듣고 아무도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또 한편으로 소영의 말을 수긍하는 사람도 없었다. 기실 그것은 소영의 말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던 것이다. 147. 백기를 드는 간웅 소영은 모두가 금화부인에게 대하는 인상이 좋지 않음을 보고, "저의 말을 여러분들은 믿지 않으시니 금화부인께서 저를 도와 준 몇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영은 금화부인이 인연봉(姻緣峯) 밑에서 심목풍과 악전고투할 때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하 였다. 소영의 이야기를 듣고 난 마문비는 고마와하는 얼굴로 금화부인을 바라 보았다. "소대협께서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더라면 금화부인을 부당하게 대접할 뻔 했 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그랬으니 용서를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어찌됐건 저는 많은 사람들 틈에 낄 순 없으니까요. 한 가지 나쁜 일을 했어도 나 쁜 사람이고, 백 가지 나쁜 짓을 해도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저는 이미 나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으니 천하의 나쁜 일들을 모두 제게 뒤집어 씌운들 어떻습니까." 금화부인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부인께선 그렇게 생각하실 수가 있겠지만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대장부는 은 (恩)과 원(怨)을 분명히 가려야 하거늘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소영이 기회를 보아 주조룡의 신분을 밝혔다. "이 자는 백화산장의 이장주(二莊主)입니다." "뭐? 주조룡(周兆龍)이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오." "그 놈은 심목풍이 강호에서 악행을 일삼을 때 심가의 손발이 되어 선량한 사람들을 무한히 괴 롭혔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 자로부터 해를 입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소 대협께서 그놈을 사로잡아 왔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여태껏 심목풍을 죽이지 못하 였으니 우선 그 놈을 처치하여 지금까지 쌓인 울분을 풀어 보도록 하십시다." 마문비는 주조룡을 죽이자고 성급히 서둘렀으나 소영이 이를 말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백화산장 안의 비밀은 심목풍을 제외하고는 이놈이 제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그 비 밀을 알아 낼 때까지는 이놈을 살려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소. 과연 그렇소. 백화산장의 비밀은 강호의 형세에 큰 관계가 있으니 그러는 것이 좋겠소.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자들로부터 해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찬성할 것이오." 마문비는 좌중을 훑어 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몇 채의 집이 있습니다. 비록 초가 삼간이나마 비바람을 피할 수 있으니 소대협과 무 위도장은 들어가 쉬도록 하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먼 발치로 초가들을 바라 보았다. "이곳은 매우 은밀한 곳이어서 그전에 제가 귀주(歸州)에 있을 때의 일이 생각나는군요. 옛날의 일입니다. 강물 위에 부주(浮州)를 만들어 놓고 마형과 저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지 요." "이번에 우리가 수중사주(水中沙州)를 찾게 된 것도 거기에 연유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초가로 들어 갔다. "등불을 밝혀라!" 마문비의 말이 떨어지자 두 개의 등잔에 불이 켜졌다. 소영이 방 안을 살펴 보니 마문비의 뒤를 따라 들어 온 사람들은 거의 안면이 있는 군호들이었 다. 다만 그들의 이름이 기억에 잘 남지 않을 뿐이었다. 마문비는 대나무로 만든 걸상을 가리키며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 체면은 그만 차리고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소대협의 무기(武技)는 자타가 공인하니 무 림에서는 혜성과 같은 존재요." "천만에,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소영이 자리를 사양하니 군호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앉기를 권유했다. "소대협, 앉으시오." 소영이 자리에 앉은 다음 마문비는 무위도장을 향해 말했다. "도장의 덕망이 높으셔서 강호에서는 모두가 경앙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대문파(九大門派) 가운 데서 제일 먼저 심목풍과의 싸움을 영도하셨으므로 두 번째로 입좌(入座)하실 분은 무위도장이 올시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한 일이 없으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무위도장이 겸손해 하며 소영의 바로 옆에 앉았다. 마문비는 세 번째 자리를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백리 낭자, 앉으시오." 백리빙은 생긋 웃으며 사양했다. "저는 오빠 뒤에 서 있으면 족합니다." 다음 자리에는 당노부인과 금화부인을 청했다. "당노부인과 금화부인 앉으시오." 당노부인도 자리에 앉기를 사양했다. "아니올시다. 마총타주(馬總舵主)께서 앉으셔야지요. 이 늙은 몸은 많은 죄를 지었는데 어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겠소." 이어 금화부인도, "천첩은 저 주조룡을 다루어야 할 터인즉 앉아 있을 시간이 없는가 하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자리에 앉기를 사양하자 소영이 마문비에게 앉기를 권했다. "마총타주께서 앉으시지요. 사양 마시고." 마문비가 자리에 앉았다. 대나무 걸상 네 개 가운데 한 개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머지의 군호들 은 걸상을 비워 둔 채 모두 땅에 앉았다. 마문비가 좌중을 보며 통성하기를 권했다. "소대협께서 이분들을 다 아십니까?" "전에 한두 번씩 뵈온 적이 있으나 이름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럼 지금부터 서로 알고 지내도록 하시오." 마문비가 제일 가에 서 있는 절름발이 노인을 소개했다. "이분이 파협 상대해(常大海)요." "아, 그렇군요! 이분이 바로 상형, 전에 몇 번인가 뵈온 적이 있는데 참 오래간만입니다." 소영이 반갑게 인사를 하니 그 절름발이 노인도 반가와 마지 않았다. 마문비는 차례차례 군호들을 소개했다. "이분은 신전건곤(神前乾坤)의 당원기(唐元寄)시고 이분은 삼양신탄(三陽神彈)의 육괴장(陸魁章) 이시며 이분은....." 마문비가 소개를 할 때마다 그들과 소영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형문(意形門)의 장문인인 동공성이시고 이분은 남파태극문(南派太極門)의 석봉선(石奉先)이올 시다." 인사 소개가 끝나자 소영은 다시 포권을 하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여러 동지들, 소영이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 군호들은 일제히 답례했다. 마문비는 그 자리에 남아 있던 부하들을 모두 소개했다.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소대협,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군호들과의 안사가 끝나자 이 때를 기다리기나 한 듯이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상냥하게 말했다. "여러분, 인사를 마치셨어요?" "왜 무슨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마문비가 물었다. "지금 우리는 중대한 일을 협의해야 할 때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심목풍이 지금 그의 옛 동료를 만나러 갔는데 그 사람의 무예는 심목풍에 못지 않게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심목풍은 지금 강호의 정세가 자기에게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전면적으로 공격을 가할 것이 틀림 없다고 봅니다." 금화부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것에 불과하며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심목풍을 빼고 는 오로지 저 주조룡뿐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주조룡에게서 어떻게 그 비밀을 캐낼 작정입니까?" "여러분께서 모두가 대협객이시니 지략과 무술을 함께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으나 이번 일만은 저에게 맡겨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좌중의 대소 협객들은 모두 금화부인에게 시선을 모았다. 금화부인은 자기가 주조룡을 다루어 심목풍의 흉계를 캐내겠다는 것이다. 마문비는 소영에게 물었다. "소대협,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주조룡을 다루는 데는 저 금화부인이 제일 적격이라 생각하오." "그렇다면 일은 오히려 잘 되었소... 그럼 금화부인께서 수고를 좀 해 주십시오." 마문비의 응낙하는 말이 떨어지자 금화부인은 두구로 하여금 주조룡의 혈도를 풀어 주게 하였 다. 주조룡은 잠에서 깨어나듯 부스스 눈을 떴다. 금화부인은 주조룡을 내려다 보며 여걸답게 껄껄 웃었다. "주조룡! 너는 우선 이곳에서 도망쳐 나갈 수 있는가 없는가를 잘 생각해 보아라." 주조룡은 그제야 정신을 차려 주위를 살펴 보았다. 모두가 자기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라 넋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주조룡! 똑똑히 보았느냐?" 주조룡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잘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는 너의 그림자도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란 한 번 나면 한 번 죽는 법이오. 이미 십여 년을 살았으니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소." 주조룡의 배짱도 대단한 것이었다.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사람이다." "태평성세에 화를 입어 죽는다면 서러울지 모르나 소인은 많은 죄를 지었으니 내 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오. 여러분께서는 소인을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죽일 것이오. 소인에게는 이미 참살당할 각오가 서 있소." 속과 겉이 다를지는 몰라도 주조룡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화부인은 그런 따위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주이장주께서 선량한 사람들을 잡아다 놓고 고문하는 것을 꼭 두 번 봤지. 그 솜씨 아주 훌륭 하던데... 이 천첩, 어디 한번 그와 같은 방법을 바로 이장주 어른께 써 볼까? 아마 당해 내지 못 할 걸." 이 말을 들은 주조룡은 그제서야 정신이 난 듯 눈알을 굴리며 좌중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께서는 소인을 어쩌자는 것입니까?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마음대로 하시오." 좌중의 군호들은 차가운 시선을 보냈을 뿐 광인의 외침으로 흘려 보냈다. 금화부인이 말했다. "이분들은 모두 너와 이야기하기를 원치 않는다. 네가 갈 길은 두 가지뿐, 무슨 말인지 알아 듣 겠는가?" "말해 보시오. 두 가지 길이 어떤 것이오.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해 주겠다." 금화부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엄숙한 표정을 하고 다시 이었다. "네가 심목풍의 음모를 상세하게 이야기해 준다면 나는 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고이 돌 려 보내 주겠다. 이제 알겠느냐?" 주조룡은 입을 꽉 다문 채 묵묵부답이었다. "너는 내 말을 믿지 않느냐?" "......." 금화부인은 소영을 향하여 말했다. "소대협은 나의 말을 보증해 주겠소?" "물론입니다. 이 소영의 이름을 걸고....." "좋아요. 소대협이 나를 믿는다면 나에게 한 가지 권리를 주셔야겠소." "그밖에 또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요. 소대협이 주조룡에게 내가 이 자리에 모인 군호를 대표해서 주조 룡을 심문하는 것이며 또 내가 주조룡에게 약속한 일을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보장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면 되는 거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조룡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주이장주, 금화부인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은 모두 우리를 대표해서 하는 말이오. 그리고 금화부인이 당신에게 한 약속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이행을 절대 보장하겠소." 금화부인은 앞가슴까지 내려 덮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좌우로 헤치며 주조룡에게 시선을 던 졌다. "주조룡 이젠 내 말을 믿겠느냐?" "말해 보시오." 금화부인은 품 속에서 일곱 치 가량 되어 보이는 뱀을 꺼냈다. 대가리에 붉은 벼슬이 달린 괴상 하게 생긴 것이었다. "이장주, 이 뱀이 보이느냐? 이 뱀은 사독이 강하기가 이를 데 없어 사람이건 짐승이건 한 번 물리기만 하면 황천으로 가게 된다. 한 번 붉은 독기를 쏘여 보겠느냐?" "그만, 그만! 금화부인께서는 내게 무엇을 이야기하라는 겁니까?" 죽음을 각오한 사람도 일단 죽음이 눈 앞에 닥치면 겁이 나는 법이다. 악독한 주조룡 역시 죽는 것이 두려웠다. "좋다. 역시 주조룡은 영리한 사람이다." 소영과 마문비, 그리고 좌중의 군호들에게 차례로 시선을 옮기며 금 화부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 었다. "심대장주는 옛동지를 만나러 갔다는데 그 동지란 어떤 사람이냐?" "내가 말을 해도 부인께서는 믿지 않을 것이오." "여하간 말을 해 보아라." "그 사람이 중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소." "중이라?" "그렇소." "그 중은 어떠한 무기를 가지고 있느냐?" "아직 그 중을 만나 본 일이 없소이다. 그런데 심대장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는 손가락이 하나 없다고 했습니다." "손가락이 하나 없다?" 이 말이 떨어지자 소영은 귀가 번쩍 트였다. 삼성곡(三省谷)에서 있었던 옛일이 머리에 떠올랐 다. 스승 장산패가 어검술(馭劍術)을 써 어떤 중의 손가락을 잘랐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면 혹시 그 중이 아닐까? 마문비가 상대해에게 말했다. "상형께서는 견문이 넓으시니 심목풍과 사이가 가까운 중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 좀 해 보시오." 상대해는 한동안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손가락이 하나 끊어진 중이 누군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소인이 알기로는 그 대사께선 이 수십 년 동안 강호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조룡의 말을 들은 금화부인은 시선을 그에게서 옮기지 않았다. "손가락이 하나 없다니 찾아 낼 수 없지 않겠느냐?" 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음성을 가다듬고 말하였다. "심목풍은 이미 무림의 정세가 그에게 불리하여졌음을 알고 각대문파와 그들 문중 안에서 싸울 계략을 세우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그런 일은 의논한 일은 있었으나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건 어째서 그러냐?" "손가락이 하나 없는 그 대사와 만난 뒤에야 결정될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겠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니 네가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한 다면 곧 돌려 보내 주겠다." "소인, 대략 짐작을 하겠으나 그게 어떤 일입니까?" "지금 심목풍이 세우고 있는 계획이 무엇인지 말을 하여라." "그러나 계략을 세운 당사자 즉 심목풍 이외에는 거기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 습니다." 주조룡은 이야기의 줄거리에서 교묘하게 빠져 나가 좀처럼 그들 일파의 음모를 실토할 것 같지 않았다. "모두 다 이야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아는 대로 말하라." "그저 다그쳐 말하라고만 하시니 소인 매우 답답합니다." "그럼 묻겠다. 심목풍이 각대문파 안에 첩자를 두어 비밀을 탐지해 낸다는 말이 있으며 또 그 첩자들은 모두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이라는데 그들 이름을 알고 있느냐?" 주조룡은 고개를 저었다. "각대문파 안에 첩자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들의 신분이 어떻고, 이름이 무엇인지는 심목풍 이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네가 모른다니 그게 될 말이냐? 너는 이장주가 아니냐?" "소인 마음 속으로 짐작은 갑니다만 확실하다고 장담은 못하겠소이다." "확실하지 않아도 좋다. 아는 대로 말해 봐라. 짐작이 가는 사람의 이름이 무어냐?" "그럼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씀드리겠소이다. 그러면 부인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소인을 돌려 보내 주시렵니까?" 무슨 말이라도 좋다. 거짓말을 한들 제아무리 신통(神通)하다는 금화부인이기로서니 백화산장에 가 보지 않은 이상 속을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라도 목숨을 부지하여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게 상책이다. 주조룡의 속셈은 이런 것이었다. "그야 여부가 있나?" 주조룡은 무슨 대견한 비밀이라도 일러 바치는 듯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소림문파(小林門派)에서 암약하는 첩자들 이름에 법(法)자가 하나 있고, 곤륜문파(崑崙門派)에 잠입한 첩자는 김씨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 본 일이 있소?" 마문비가 물었다. "만나는 봤습니다. 허나 그들은 언제나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르 겠습니다." 마문비는 화를 벌컥 냈다. "그런 말은 하나마나가 아니오. 이름에 '법'자가 들어 있는 중은 소림사에도 한 두 사람이 아닌 데 어떻게 그 사람을 가려 낼 수 있단 말이오?" 주조룡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 물음의 대답은 소림사의 장문인 이외에는 아무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소인 이미 그 중의 이름 가운데 법자가 들어 있다고 밝혔으니 장문인께서 손을 쓰신다면 곧 꼬리가 잡힐 것입니다." "흠....." 말을 마친 주조룡이 무위도장의 얼굴 빛을 살피며 말을 이으려는데 소영이 입을 열었다. "도장, 이장주의 말이 모두 사실이오?" "내가 알기로는 모두 사실인 것 같소." 소영의 시선은 마문비에게 옮겨졌다. "총타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문비는 성품이 섬세하고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라 얼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여 소영에게 되물었 다. "소대협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소영은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후 만고풍상을 다 겪은 마문비가 팔이 하나 잘린 뒤부터는 더욱 여러 군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는 지금까지 언제나 무위도장의 말을 믿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소대협께서 적절히 처리하시오." 마문비는 주조룡에 관한 일을 소영에게 맡기려는 눈치였다. 금화부인은 다시 심문하기 시작했다. "주조룡, 이 말을 들었겠지?" "들었소." "마총타주, 소대협, 무위도장 모두 너의 말을 의심치 않으니 너는 곧 여기서 풀려나게 될 것이 다. 그러니 그 대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무당문파(武當門派)의 첩자가 누군지 말하는 것이 도 리가 아니겠느냐?" 주조룡은 무위도장을 바라 보았다. "도장, 소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귀파문중에 첩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군지는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동문서답식으로 횡설수설이다. "나는 당신의 말을 믿겠소. 본 문중에서 어떤 사람이 백화산장에 들어 갔건 그것은 무관한 일이 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왜냐하면 무당파는 이미 당신네 백화산장파에 쫓겨 강호에 유랑하는 처지에 있으며 무예가 출 중한 몇몇 사람은 내가 측근에 데리고 있고 또 삼원관(三元觀)에 남아 있던 본파의 제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당신네 백화산장파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오. 본파는 후일 반드시 복수할 것이오만 은." "그 일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당파의 고명한 사람들이 모두 빠져 나 갔다는 것은 백화산장에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조룡의 얼굴에는 열기가 가시고 냉정한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 금화부인이 꺼낸 홍관 괴사(紅冠怪蛇)를 보았을 때와는 전연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 다. "심대장주께서는 이롭지 않은 일은 결코 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는 이로움이 눈 앞에 있어야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삼원관에는 단 한 사람의 고수도 들여 보낸 일이 없으며 그곳의 풀잎 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알겠다. 이제 남은 것 한 가지만 더 묻겠다. 그것을 대답하면 곧 돌려 보내 주겠다." 금화부인이 물었다. 주조룡은 수궁하는 눈치로 금화부인을 바라 보았다. "남은 것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심목풍의 음모는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가 언제 어떻게 싸움을 벌이려는지 아는대 로 말해 보아라." "그 대사를 만나기 전에는 석 달 안에 거사할 계획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각파에 침투하고 있는 첩자들과 내응(內應)하며 기독(奇毒)을 뿌리는 것입니다." 무위도장이 무릎을 세우며 이장주에게 물었다. "그 기독이란 어떤 것이오?" "그 독은 한 번 사람이나 짐승의 목으로 들어 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직사하는 무서운 것입니 다." "그 방법은?" "우물이나 음식물에 섞는 것입니다." 백화산장파는 기독공법을 쓰려는 것이었다. 주조룡의 말을 듣고 있던 좌중의 군호들은 모두 하 나같이 놀랐다. 주조룡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계략은 그 대사와 심대장주가 만나기 전의 것이며, 그분들이 만난 뒤에는 시일과 방 법이 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음모가 심목풍과 그 중이 만난 다음 달라진다면 기독을 뿌려 각파문중의 사람들을 파리 목숨 때려 잡듯 하려는 것보다 더 혹독할 게 아니겠는가? "정말 모르느냐?" 그를 노려 보는 금화부인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 모릅니다. 소인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또 하나가 남아 있다." "무엇이 또 있습니까?" "이것은 너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소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금화부인은 음성을 부드럽게 했다. 지금까지 주조룡을 죄인 다루듯 힐책했으나 지금 와서는 그 를 대하는 정도와 언어가 모두 달라졌다. "이장주. 나를 데리고 갈 수 있겠소?" "데리고 간다니, 부인을 말씀입니까?" "주이장께서는 이미 심대장주의 음모를 폭로하였으니 만약 심목풍이 이것을 안다면 주이장주를 살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장주가 백화산장에서 소외되면 너무 쓸쓸하지 않겠소? 이와 같은 일이 탄로나면 이장주와 나는 같이 죽음을 당할 것이니 황천에 가서라도 말벗이 될 게 아니겠 소?" 주조룡은 어안이 벙벙했다. 금화부인이 아무리 술수(術數)가 높은 여걸이라 해도 원수와 더불어 원수의 소굴로 들어 가겠다니 될 말인가? 금화부인이 도대체 어떠한 계교를 부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이없는 일이외다. 부인께서는 무엇 때문에 위험을 자초하는 것입니까?" "내가 백화산장에 들어 간 뒤에 만약 이장주께서 나를 배신하여 심목풍에게 밀고를 한다 해도 그가 당장에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내가 주이장주를 심문하듯 심목풍도 나를 심문할 것이 아니겠소? 그러면....." "부인의 뜻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금화부인은 당노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당노부인의 몸에는 아직 독기(毒氣)가 있어 십여 일 후가 되면 그 독으로 인해 죽게 될지 도 모르오. 나는 아직 할 일을 못 다하여 죽고 싶지 않소. 내 여명을 지탱하려면 몸의 독을 풀 수 있는 해약(解藥)이 있어야 해요. 이장주께서 나의 청을 응낙하신다면 나는 심목풍을 속여 넘길 수 있습니다." "지금 가도 됩니까?" "물론....." 주조룡이 일어서니 금화부인은 손을 흔들며 좌증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들, 나는 지금 길을 떠날까 합니다. 후일 다시 만날 날이 있지 않겠습니까?" 금화부인이 주조룡을 따라 나서자 소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총타주, 영을 내려 주시오." "배를 내어 강을 건너도록 하여라." 마문비의 말이 떨어지자 검은 장삼을 입은 거구의 사나이가 그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떠난 다음 마문비는 소영에게 딴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왜요?" "이곳은 이미 주조룡이 알고 갔으니 혹시 백화산장으로 돌아간 주조룡이 심목풍에게 알리면?" "걱정 없습니다. 설령 그가 심목풍에게 우리의 거점을 알릴지라도 당장에 쳐들어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오?"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심목풍이란 위인은 승산이 없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곳에 우리의 문중의 여러 군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네들에게 대적할 만한 고수 가 없다는 것도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고로 그는 절대 경거망동치는 않을 것이며 주조 룡도 내통(內通)의 의심을 사게함을 두려워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 "소대협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되오. 암중이거(暗中移去)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마음을 놓을 수 있소. 요즘 강호에서는 소대협의 사문(死聞)이 나돌고 있으니 웬일이오? 그와 같은 풍문은 백화산 장과 항거하려는 무림 동도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할 것이니 나는 크게 유감스럽게 생각 되오. 이것은 필시 심목풍의 흉계임에 틀림없소." "그런 소문이 퍼질 만도 했습니다. 언젠가 그들과의 싸움에서 크게 고전을 한 때가 있었는데 아 마 그들 앞에서 사라진 내가 꼭 죽었으리라 믿었겠지요." 소영은 당시를 회상하듯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마문비는 소영에게 그와 같은 위험한 고비를 넘긴 일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 "허, 그런 일이 있었구려. 내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소" "네, 그 때가 바로....." 소영은 무당노파를 만났을 때부터의 이야기를 자세히 하였다. 그의 혈투담을 듣고난 군호들은 실로 경탄을 금치 못했다. "무림 동도에게는 천만 다행한 일입니다. 소대협께서는 봉흉화길(逢凶化吉)하셨으니." 좌증의 군호들이 웅성거릴 때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전형과 등이협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야 할 텐데....." 소영은 그들의 전도를 걱정했을 뿐 등일뢰와 전엽청이 무공 비록을 지니고 있는데 대해서는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군호들이 놀라기 때문이었다. 절름발이 노인 상대해가 소영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문을 열었다. "소대협. 이런 말씀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별말씀을... 저에게 물어 보고 싶다는 건 어떤 말씀인지?" "나는 소대협께서 주조룡을 백화산장으로 되돌려 보낸 일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여러 군호들 가운데서 유독 상대해만이 주조룡을 풀어준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소영은 좌중을 살피듯이 군호들에게 눈길을 보낸 뒤 자기의 견해를 털어 놓았다. "여러분들은 물론 그 주조룡이란 자가 심목풍의 그늘 밑에서 갖은 악행을 일삼아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 왔고 여러분들 가운데도 화를 입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백화 산장으로 금화부인과 함께 돌려 보냈다는 데에 더욱 불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소영은 상대해에게 시선을 옮기며 다시 말을 이었다. "주조룡이 비록 백화산장의 이장주라고는 하나 그의 지략이나 무예로 보면 한낱 졸개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극소한 것입니다. 그는 심목풍이란 거목 밑에서 자란 독버 섯과도 같은 자이므로 쓸모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살려 그를 이용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 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금화부인께서동행한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 입니다." 좌중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잠시 후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마문비가 입을 열었다. "소대협, 과연 옳은 말씀이오." 148. 하안의 새벽 출정 소영의 말은 정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는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조룡에 관한 한 나에게 맡기시 오." 군호들은 일제히 입을 모아 말했다. "과연 그러하오" "어찌 감히 소대협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 그저 부끄럽기만 하오이다." 상대해는 얼굴을 붉히고 말꼬리를 흐렸다. 마문비는 호탕하게 웃으며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 백화산장파를 제외한 무림동도는 한결같이 소대협을 아끼고 존경하는 터인즉 어찌 오 해를 하겠소이까?" 그는 소영이 무림의 영웅임을 다시 강조하고는 다시 군호들에게 말했다. "소대협과 여러 형제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으니 형제 모두 양세(兩世)의 위인(偉人)이라 축 배나 드는 것이 어떻겠소?" 좌중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총타주, 나는 술을 하지 못하오. 핫, 하, 하!" 소영도 즐거웠다. "각자의 주량대로, 그런데 소대협께서 술을 못하시니 안 되었소...... 자, 술상을 차려라!" 이곳은 황량한 곳이었으나 산해의 진미(珍味)가 가득 찬 곳이라 풍요한 술상이 올랐다. 둥근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마문비, 소영, 무위도장, 백리빙, 두구, 신전건곤의 당원기, 삼양신탄의 육괴장, 의형문의 동공성, 남태극문의 석봉선, 거기에 절름발이 협객 상대해, 그리고 당노부인 모 두 열한 사람이 둘러 앉았다. 마문비는 여러 군호들에게 차례로 술잔을 돌리고 나서, "조금 전, 주조룡의 말을 들었으므로 백화산장파의 음모가 어떻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았을 것입니다." 하며 말머리를 꺼내 놓았다. 심목풍의 거사를 막아 내기 위하여 그들에 대응할 수 있는 대비책 을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동공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호에서 많은 문파가 이미 심목풍의 독수에 걸려 망하고 말았습니다. 남태극문의 석봉선도 그 중의 한 사람이올시다. 우리는 하루 속히 심목풍의 흉계를 각 문파에 알려 불의의 화를 면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뜻은 어떻습니까?" 동공성은 자기의 뜻을 밝히고 좌중 군호들을 바라 보았다. 이것은 각 문파를 살리는 가장 중요 한 일이라, 누구보다 가슴을 태우고 있는 사람은 마문비였다. "주조룡은 석 달 안에 거사를 할 것이라 했는데 그 안에 무슨 수로 각문파에게 알릴 수 있단 말 이오? 지금 형편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매우 어려울 것 같으니 어찌 하면 좋겠소? 그들의 음모를 알리지 못하면 필시 참화를 면치 못할 것이오." 군호들로부터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석봉선이,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수수방관하고 있을 순 없소. 각자 임무를 나누어 맡는 것이 어떻 겠소?" 석봉선이 심목풍의 흉계를 각 문파에 알리는 일을 여러 사람이 갈라서 맡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무위도장의 생각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강호의 각 문파들은 거의 심목풍에게 짓눌려 숨도 크게 못 쉬고 그의 명 령에 따르고 있는 형편이라 그들은 불이 발등에 떨어지기 전에는 움직이지 못할 것이며, 또 우리 가 심목풍의 흉계를 알려 준다 해도 곧이 듣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문비의 생각도 이와 같았다. 지금 강호에 흩어져 있는 각 문파는 뿔뿔이 갈라 서서 일관된 지 조를 잃고 있었다. 무위도장의 생각으로는, 심목풍의 흉계를 그들에게 알리는 것보다 그들의 무절제함이 더욱 걱정 이 되었다. "강호에 변갈이 일어날 때마다. 그 원인은 모두 각 문파의 절제없는 난립에 있었소. 만약 몇몇 문파가 좀 일찍, 힘을 합쳐 정의신장(正義伸張)을 하였던들 오늘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이며 심목풍의 세력도 이렇게 팽배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하며 장탄식을 했다. "강호의 각 문파가 정립하며 형세의 귀추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일을 빚어 내게 했다는 마총타주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지나간 이야기를 되풀이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우리 불찰에서 온 소치이니, 앞으로는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소대협께서 심목풍에 항거했던 사실이 강호에 알려졌 습니다. 대부분의 무림동도들이 소대협을 존경하고 있으니 심목풍의 음모를 소대협의 이름으로 각 문파 장문인에게 상세한 서장(書狀)을 전하여 알리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서장의 전사(專使)가 직접 장문인을 만나 다시 자세한 내정(內情)도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첩자의 암약도 미리 막아 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문비도 이 생각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좋은 생각이오... 소대협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좋은 의견이오마는 내 성망(聲望)이 미급(未及)하니 혹시 무림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두렵 소." 그러자 무위도장이 나서서 소영을 추켜세웠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게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무림에서 소대협의 명망은 마치 중천 의 해와 같은 것이오." 그는 소영에게 서장의 전사를 누구로 하는 것이 좋겠는가를 물었다. "무위도장의 의견이 정 그렇다면 그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겠소." 도장은 좌중을 향해 말했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나의 목필이 가히 흉하지 않다고 하신다면 내 곧 서장을 써 볼까 하오. 연 후 소대협께서 필명(筆名)을 하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마문비와 소영, 그리고 여러 군호들은 무위도장에게 서장의 작성을 일임했다. "잠깐만, 내 한 가지 의논할 일이 있소." 여러 사람들은 무위도장으로부터 소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심목풍은 그 재기가 뛰어나 일대의 효웅이기는 하나, 그 용맹함에 못지 않게 간악하기가 비길 데 없소. 그는 십만하산(十萬河山)에 첩자를 밀파하지 않은 곳이 없으며, 강호의 각 문파 내에 일 단 싸움을 벌였을 때 내응할 밀정을 두었으니 그는 이불 속에 누워 있어도 우리들의 일거 일동을 거울을 들여다 보듯 휜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문비는 걸상에서 일어나 어둠 속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우리의 비밀이 백화산장으로 흘러 들어 간 것은 사실이오. 그로 인하여 뜻하지 않게 입 은 화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소." "만일 심목풍의 이목이 되고 있는 첩자들의 명단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이로움이 어디 있 겠습니까? 심목풍의 귀와 눈을 없애 버리면 백화산장은 자연 괴멸될 것이 아니겠소? 그러나 그 명단은 심목풍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하면 좋겠소?" "우매한 생각이나마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어떤 방법입니까? 여러 사람들은 소영에게 시선을 모았다. "다름이 아니라, 백화산장파를 닥치는대로 죽이는 것입니다.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은 한 놈도 남 기지 말고 말입니다. 그런데, 단 한가지....." "그놈들을 모조리 죽여 없앤다?" "그런데 피를 보고 피를 흘리게 되면 살기 위해서 심목풍을 배반하는 놈이 있을 것이오. 우선 그와 같은 놈들을 찾는 것이오. 자기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백화산장의 비밀을 가지고 우리에게 투항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 놈이 많을수록 우리에게 유리하오." 술자리를 벌인 끝이라 거나하게 취해 있던 군호들은 귀가 번쩍했다. 마문비는 무릎을 쳤다. "그것 참 좋은 방법이오. 내 여러 가지 궁리를 해 보았으나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소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밖에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오." "선후책을 숙의하여 즉시 행동으로 옮깁시다." "암, 주저할 때가 아니고 말고!" 군호들은 저마다 찬성의 뜻을 표했다. 소영은 계속했다. "우리가 전력을 다한다면, 심목풍의 조직을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취소한 백화산 장의 세력을 지금의 반 이하로 꺾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방법이긴 하오마는, 심목풍이 그 중과 만난 뒤 그들의 계획을 앞질러 실행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이오? 석달이라는 여유는 그 중을 만나기 이전의 계획인 줄로 알고 있 소." 상대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심목풍이 손가락이 하나 없다는 그 중과 만나면 그들의 계획이 달 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의 계획이 변경되면 시일이 앞당겨지는 것이다. 마문비가 무위도장에게 말하며 서장을 쓰도록 했다. "도장께서 속히 서장을 작성하여 날이 새기 전에 각 문파에 전사를 보내야 하오." 그런데 소영이 또 입을 열었다. "무당 장문인께서는 문장에 조예가 깊어, 그 달필은 가히 각 문파의 장문인으로 하여금 서장의 내용을 믿게 할 것은 틀림 없으나 시일은 임박한데 갈 길이 머니, 때를 맞추지 못한다면 모두가 허사로 돌아 가게 되오. 전사가 도착하기 전에 각 문파가 심목풍의 간계에 걸려 든다면, 우리 십 대 고수가 죽었다 깨어나는 재주를 부려도 그들을 살리기는 어려울 것이오." 소영은 서장을 가지고 가는 전사가 중도에서 변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각 문파에 도착할 수 있 는 방법을 마문비와 의논했다. "내 생각으로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군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을 택하여 백화산장으로 보내어 심목풍과 싸우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동도가 심목풍을 죽이지는 못할지라도, 전사가 무사 히 도착할 수 있을 때까지 그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총타주의 의견은 어떻습니 까?" "소대협의 호담한 성품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나 나의 생각으로는 아직은 그 시기가 이르다고 생 각하오. 우리에게 백화산장파와 정면 대적할 힘이 아직은 없는 것으로 생각되오." "아니오. 그것은 마총타주께서 모르는 말씀이오. 백화산장에서 지금 장사(張沙)에 와 있는 자들 은, 열을 갖다 놓아도 우리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하는 무력한(無力漢)들이니 일심합력으로 힘을 기 울이면 반드시 그놈들을 몰살시킬 수 있소." 마문비는 조심성이 많고 계획이 치밀한 데 비해 소영은 적극적인 행동을 주장했다. 그런데 석봉 선이 또, "만약 심목풍 자신이 장사에 와 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소?" 하며 신중론을 펴는 마문비에 가세하였다. 석봉선은 마문비와는 달리 심목풍에 겁이 났던 것이다. 용기가 없는 사람은 곧 비겁한이다. 소영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심목풍이 강호에서 오늘날과 같은 세력을 백리 밖까지 펴게 된 것은 그의 지 력과 무공이 뛰어나다는 데도 원인이 있겠으나 전적으로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닙니다. 그는 각처 와 각문에 밀정을 배치하여 귀와 눈을 밝히는 손과 발로 썼으며, 묘약(妙藥)을 이용하여 수하들을 짐승부리듯 하며 기반을 굳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목풍이 악랄하게 세력을 뻗게 된 큰 원인 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무림동지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심목풍의 심자만 들어도 겁부터 집어 먹으니 실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영은 석봉선과 여러 군호들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즉. 결과적으로 본다면 우리 무림 동지들이 백화산장파의 힘을 길러 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심목풍이 우리에게 대비하여 모든 태세를 마칠 때까지 우리 무림의 손을 쓰지 않고 그저 방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소영의 음성은 점점 열을 띠어 마치 훈계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미 형세가 결정된 이 마당에 무림의 정기로서 싸워 죽거나, 잡혀 죽거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소영의 말은 군호들의 투지를 불러일으켰으며, 메마른 황야에 단비를 내린 것과 같았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장사의 출전을 맹세하고 나섰다. "소대협께선 어떻게 하시렵니까? 우리는 모두 대협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좋습니다. 여러분들의 각오가 섰으면 싸움이 끝날 때까지 투지를 굽히지 말기 바랍니다." "그럼 준비를 어떻게......?" 마문비가 행동을 개시할 자세한 계획을 물었다. "백운판에는 아직도 한 패의 심목풍의 부하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강호에 배치해 놓은 그 의 밀정망(密偵網)부터 두드려 부수어야 할 것이니, 무위도장과 나는 장사에 펼쳐 놓은 백화산장 파를 제거할 작정입니다. 장사에는 그밖에 두 곳의 거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백운관이고, 또 하나 는 칠택다원(七澤茶園)입니다. 이것이 첫째, 공격 목표입니다. 우리는 이 거점들을 분쇄한 연후에 백운산장의 본거지를 습격해야 합니다. 이번에 우리의 대사가 성공하여 심목풍을 죽이든가 쫓아 버리면 강호는 다시 화평하게 될 것입니다." "좋소. 즉시 행동을 개시합시다." 마문비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들! 자, 출진을!" 군호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소영이 이를 막고 나섰다. "여러분이 모두 다 갈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동지 다섯 사람과 갈 터이니 마총타주께서는 이곳 에 남아 후진을 지키는 게 좋겠소." 다섯 사람의 행동자로 누구를 뽑느냐? 처음에는 모두 가겠노라 우르르 나섰으나 막상 인원이 다 섯 사람으로 한정되자 아무도 성큼 나서지를 않았다. 소영은 답답하여 백리빙과 두구, 마문비에게 우선 두 사람만 추천해 보도록 이야기를 하는데 당노부인이 앞으로 나왔다. "이 늙은 몸이 따르고 싶소. 무림을 위해서 미약한 힘이나마 바쳐 속죄하고 싶으니 소대협께서 내 청을 받아 들여 주기 바라오." 소영은 웃으며 노부인을 달래듯이 말했다. "당치도 않는 말씀을. 이번 출진은 적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야음 기습을 가하는 것이 니, 당노부인께서는 이번 일이 성취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 계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에 금화부 인이 반드시 심목풍의 해약(解藥)을 훔쳐 올 것이니, 노부인께서는 몸의 기독(奇毒)을 풀어 내신 다음, 마지막 결전을 할때 같이 싸우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영이 당노부인의 동행을 만류하고 있는데 그 때까지도 사람을 선출하지 못한 마문비가 물었 다. "소대협까지 모두 다섯 사람이면 족하겠소?" "모두 다섯이면 족합니다. 독(毒)엔 독으로 맞서야 하니까요." "신전건곤 당원기와 삼양신탄 육괴장은 각자 절기(絶技)가 있으니 소대협을 동행하면 많은 힘이 되리라 믿소." "그러나 당형과 육형께서 나와 동행하기를 원하겠는지요?" 소영이 당원기와 육괴장을 바라 보자, 두 사람은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대협께서 우리들의 동행을 응낙하여 주신다면 다시 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마총타주의 뜻이 그렇고 두 분께서 나와의 동행을 원하니 지금 곧 떠나도록 합시다." "네, 그럼 제가 도강(渡江)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하며 당원기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럼, 우리도 곧 떠나야 하겠소." 소영은 마총타주 이하 여러 군호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다음 백리빙과 두구, 육괴장 등을 데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문비의 뒤를 따라 나온 여러 사람들은 저마다 장도에 오르는 이들의 성 공을 빌었다. "소대협, 몸조심하시오." "무운을 빕니다." 여러 군호들은 이들을 전송하며 애석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맙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들 가십시오." 소대협 일행이 강기슭에 이르니 당원기가 이미 배 한 척을 강둑에 대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배 위에 오른 소영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 이미 사경(四更)이 지났으니 새벽녘에야 백운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오." 하며 먼 노정을 걱정했다. 야음 기습은 칠흑같은 밤을 택해야 한다. 날이 밝으면 중과부적이라 도저히 적과 정면으로 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육괴장은 기왕에 때가 늦을 바에는 하루를 더 연장하여 다음날 밤에 기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고 소영에게 물었다. "그러니 우선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아 피로도 풀겸 다음날 밤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떻소?" 소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과히 걱정 마시오. 심야암중(深夜暗中)이 아니라도 날이 새기 전에 기습을 가하면 되는 것이오. 적들이 곤히 잠들고 있을 때라 오히려 새벽이 더 좋소." "새벽 기습은 사전에 탄로될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소대협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당원기가 물었다. "복면을 하면 그들의 눈을 가릴 수 있소." 배 위에서 이런 말이 오고 가는 동안 배는 어느새 강기슭에 다다랐다. 소대협 일행은 백운관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어둠을 헤치고 달리는 이들의 몸은 마치 나는 화살과도 같아, 날이 새기 전 에 백운관을 바라 보는 언덕받이에 이르렀다. 소영이 사방을 돌아 보고 형세를 살핀 다음 나직이 말했다. 저 동북쪽에 있는 과원(跨院)이 백화산장파들이 거처하는 곳이오. 지금도 같이 사용하고 있는지 는 잘 알 수 없으나......" 그리고 당원기와 육괴장에게 지시했다. "두 분께서는 저 과원지붕 위로 올라가 숨으시오. 그리고 반드시 암기(暗奇)를 쓰시오." 당원기와 육괴장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소영은 다시 두구와 백리빙에게 말했다. "두형과 빙아, 우리 세 사람은 복면을 하고 과원을 습격하여 닥치는대로 죽이는 거요. 빙아, 알 겠지?" 백리빙은 지금까지 소영의 곁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따라 다녔다. 죽거나 살거나 그것은 생 각 밖의 일이었다. 백리빙은 검은 보자기를 꺼내어 복면을 했다. 샛별같은 눈이 반짝거렸다. "그럼, 오빠께서 위주선공(爲主先攻)하십시오. 우리 두 사람은 위보상조(爲輔相助)할 터이니..... 이 생각이 어때요, 오빠?" 소영은 백리빙이 용기백배한 모습을 보고 그녀를 치켜주기로 했다. "이번에 네가 위주선공해 보아라. 자신이 있느냐?" 소영의 말이 떨어지자, 백리빙은 대답 대신 장검을 쑥 뽑아 들고 두구에게 말했다. "우선 과원으로 쳐들어 갑시다." 두구는 철필(鐵筆)과 은권(銀圈)을 꺼내 들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가 복면 변장을 해도 이 철필과 은권을 보면 내가 누구인지 다 알 수 있을 걸." "왜? 겁이 납니까?" "천만의 말씀." 두구는 과원을 향해 바람과 같이 치달렸다. 이어 백리빙이 뒤따랐다. 그 뒤를 소영이 쫓았다. 먼동이 트기 시작할 무럽, 세 개의 그림자는 과원으로 들어 섰다. 찰나, 검은 그림자가 앞을 막 았다. 건장한 체구의 경장 무사였다. 이때 돌연 활시위 소리가 울리더니 한 개의 화살이 바람을 뚫고 날아 왔다. 그 화살은 흑의의 사나이의 미간을 꿰뚫고, 과원 기둥에 박혔다. 순간, 과원의 왼쪽 방문이 덜컥 열리며 작딸막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세 사람은 은행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빙아, 저 늙은이가 바로 신삼괴란 자다. 무예가 절륜하니 조심해야 한다." 소영은 단단히 일렀다. 이때 또 시위소리가 나더니, 과원 지붕에서 화살이 날아 갔다. 화살은 신삼괴의 목을 겨누었으 나. 일순 그 화살은 신삼괴의 오른손에 잡혀 있었다. 이 화살은 과원 지붕 위에 숨어 있던 당원기가 쏜 것인데, 그의 궁술은 천하가 다 아는 것으로 시위를 당기는 팔힘이 워낙 강한지라, 한 번 겨냥을 받으면 살아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이 무슨 괴변인가. 신삼괴는 자기의 목을 정통으로 겨누고 날아 오는 화살을 마치 바람 에 날려 오는 나뭇잎을 잡듯이 거뜬하게 한 손으로 받아 낸 것이다. 이때 백리빙과 두구는 은행나무 뒤에서 몸을 드러내고 신삼괴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손에 화살을 받아 든 신삼괴는 형형한 안광으로 백리빙과 두구를 번갈아 훑어 보았다. 그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백리빙에게 말했다. "감히 이 과원에 들어 올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어찌 복면을 하고 왔소?" 신삼괴의 말이 과원에 퍼지니 이 방 저 방의 방문들이 열리며, 저마다 무기를 손에 잡은 팔, 구 명의 거한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그들 가운데는 공상(孔湘)의 얼굴도 보였다. 소영은 신삼괴와 공상이 아직 과원에 있는 것으로 보아 백화산장파는 주조룡이 당한 일을 까마 득히 모르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이때 두구가 소리쳤다. "과원의 여러분들!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살 길을 택하시오. 여러분들의 살 길은 무기를 버리 고 백화산장의 노예로부터 몸을 빼는 일이오. 만약 이 두구의 말을 듣지 않으면 피를 뿌리고 죽 게 될 것이오." 지붕 위에 숨어 있던 두구가 나타나자 신삼괴는 두구에게 말했다. "노인장이 바로 중주이고(中州二賈) 중의 두노이(杜老二)시오?" "그러하오. 이분이 바로 두노이시오." 백리빙이 대답했다. 해가 뜨기 전의 미명이라 더욱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를 눈으로 가리기는 어려운 것을 신삼괴는 백화의 정기로 알아 내는 것이었다. 더욱 백리빙의 음성을 듣고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신삼괴는 백리빙의 정체를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의 목을 가지러 온 사람이오." 백리빙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손을 휘둘렀다. 두 개의 한빙침(寒氷針)이 전광처럼 펼쳐 나갔 다. 그러자 신삼괴는 내력(內力)을 모아 백리빙의 독침을 내리 쳐서 땅에 떨어뜨렸다. 소영이 형세를 바라 보니 적은 이미 사방을 둘러 싸고 포위진을 좁혀드는 것이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우리의 뜻을 펴지도 못할 뿐더러 만약의 경우 적중을 빠져 나가기가 매우 힘 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우선 앞장 선 한, 두 놈의 적을 죽여 포위진을 무너뜨리려 했다. 소영이 오른손을 들어 두 번 손가락을 튕기니 두 줄기의 세찬 바람이 일어났다. 소림파의 탄지 신공이었다. 경풍이 일어나자 포위한 정면 좌우 양쪽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리며 거구의 두 사나이가 쓰 러졌다. 적의 진세(陣勢)를 꺾으려고 이 두 사나이의 치명혈도(致命穴道)를 때린 것이었다. 소영의 소림파 탄지신공을 본 신삼괴는 그 비범한 초술(招術)에 놀라 공상에게 말했다. "공형, 맨 뒤에 있는 소년이 무기(武技)가 제일 가는 모양인데, 우리는 합력하여 그자부터 처치 합시다. 그 탄지신공은 무서운 위력을 갖고 있소." 신삼괴는 소영을 살려 두는 한 과원의 승산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연거푸 손을 휘두 르며 공상과 합세하여 소영에게 다가갔다. 한편 과원 앞뜰에서는 육, 칠 명의 백화산장파가 서릿발같은 장검을 휘두르며 백리빙과 두구에 게 덤벼들었다. 백리빙의 한빙침과 두구의 은권, 철필이 일곱 자루의 칼과 뒤엉켜 싸우고 있을 때 공상은 연자 창(練子槍)을 휘두르며 소영에게 덤벼들었다. 연자창은 외문(外門)의 무기라 그 창의 길이를 줄였다 늘였다 하는 것이 자유자재로 되었다. 그러나 소영은 여전히 맨손으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무기를 꺼내거나 자리를 옮기는 일이 없 었다. 연자창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홍안의 풋나기에게 조롱당한 공상은 화가 치밀었다. "이 건방진 놈!" 공상은 연자창에 내력을 배가하여 다시 소영에게 덤벼들었다. 소영은 공상의 창술이 어떻다는 것을 대개 짐작하고 있었다. 공상의 창끝이 가슴을 겨누고 날아 들자 그는 날쌔게 몸을 옆으로 피하여 왼손으로 창을 쳐 내렸다. 그는 천년교피장갑을 끼고 있었으므로 제아무리 예리한 창끝이 나 칼날도 쉽게 막아 낼 수 있었다. 공상은 수십 년 동안 강호에 살아 오며 가지가지의 싸움을 치러 결코 진 적이 없는 터였으나 이 번처럼 담이 큰 적수는 만나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공상은 연자창을 휘둘러 다시 찔러 들어 갔 다. 그러나 찔러 오는 공상의 창끝보다 소영의 손이 더 빨랐다. 천년교피를 낀 그의 왼손이 가볍게 움직이자 공상의 창끝은 소영에게 잡히고 말았다. 첫 번째는 창을 쳐 내렸으나 두 번째는 창을 잡아 챈 것이다. 그러나 공상도 만만치 않은 창술의 명인인지라 한두 차례의 경합으로 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네가 철사(鐵沙)장갑을 끼고 기공(氣功)을 부린다 해도, 이 연자창의 창날은 당해 내지 못할 것 이다." 공상은 소영에게 잡힌 창을 힘껏 뒤로 잡아 챘다. 소영이 두 팔에 힘을 주어 버티자, 공상은 마 침내 그 자리에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소영이 창대를 움켜 쥔 채 땅 위에 쓰러져 있는 공상을 바라 보고 있는데. 돌연 신삼괴가 비호 처럼 덤벼들었다. 그것은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나꾸어 채듯, 소영을 덮치며 오른손을 펼쳐 태 산압정(泰山壓頂)의 일격을 가했다. 소영은 왼손으로 공상의 창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신삼괴의 초술을 맞받 아 쳐 냈다. 소영의 손이 마주 부딪치며 딱! 하는 소리가 나자, 허공에 튕겨졌던 신삼괴의 몸이 한 바퀴 빙글 돌고는 다섯 자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신삼괴는 공중에 몸이 떠올랐을 때 장풍을 쳐 날렸기 때문에 소영도 한 발 뒤로 밀려났다. 신삼 괴의 장력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공상은 소영에게 잡힌 연자창을 힘껏 잡아챘다. 한 발 뒤로 물러 선 소영이 그 기미를 알고 쥐었던 창끝을 갑자기 놓자 공상은 제 힘에 밀려 비 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화가 치민 신삼괴가 소영에게 외켰다. "무림도상에는 오늘날까지 나의 장풍을 받아 낸 사람은 거의 없었거늘 소공이 끝내 허리를 굽히 지 않는다면 당장에....." 신삼괴가 왼손을 번쩍 들자, "알아 모시겠습니다." 소영은 이 말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 좌우쌍장(左右雙掌)을 연달아 펴 냈다. 신삼괴도 온 힘을 다 하여 두 손을 휘두르며 소영의 장풍을 맞받아 쳤다. 소영의 장법이 번개같아 첫장을 겨우 받아 낸 신삼괴는 팔장으로 그를 맞받아 쌍장의 팔초환장 (八招環掌)이 세찬 바람을 일으켰다. 신삼괴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 내렸다. "귀공의 초술이 비범하오. 나의 연환팔장을 받아 내다니 매우 훌륭한 솜씨요." 소영이 신삼괴를 조소하듯 말하고 다시 그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쳐 냈다. 신삼괴는 제 일장을 받으면 제 이장을 또 쳐 낼 터인즉, 제 이장부터는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몸을 비켜 첫장을 피했다. 신삼괴에게는 그 이상 더 받아칠 힘이 없었고 그것은 소영이 알고 있었다. "어떻소. 신공! 앞으로 나서시오." "당신은 누구요. 이름을 밝히시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소." 소영은 패색이 완연한 신삼괴에게 개과천선할 것을 권했다. "내 말을 귀담아 들으시오. 내가 누구이건 나는 당신에게 한 번 기회를 주겠소. 이 기회는 당신 이 백화산장에서 떠나는 기회요. 지금 백운관은 장사에 모여든 천하고수들에게 둘러 싸여 있소. 당신의 무예가 너무 아까와 당신에게 살아날 수 있는 길을 한 번 더 줄 터이니 곧 백화산장에서 발을 빼시오. 그후의 목숨은 내가 보장하겠소." 신삼괴는 소영의 권유를 일소에 붙였다. "심대장주께서 원래 덕망이 높으시고 마음이 어지시어 함부로 죽이지 아니하며, 너희들에게 이 렇게 화평한 세월을 누리게 한 것은 오로지 너희가 모든 것을 뉘우치고 대세를 정시하여 백화산 장으로 돌아 올 여유를 주려 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대장주의 대은을 저버리고 반기를 들다 니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만약 심대장주께서 백운관의 난동을 아신다면 크게 노하시어 석 달이라는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닷새 안에 대변(大變)을 일으켜, 강호의 각 문파를 전멸시킬 것 이며 따라서 너희들 시체를 묻을 곳도 없어질 것이다." 오히려 소영에게 백화산장에 투항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허풍에 마음이 동할 소영이 아 니었다. "당신은 과연 호담한 사람이오. 함부로 당신네들 장주의 이름을 팔다니. 심목풍은 아직 무림에 변란을 일으키겠노라 자신의 입으로 말한 바가 없거늘 어찌 그와 같은 망언을 함부로 하오?" 소영이 자기의 속을 빤히 들여다 보고 있음을 알게 되자, 다시 눈살을 지푸리며 딴전을 부렸다.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소영과 신삼괴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동안 한쪽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계속되고 있었 다. 칼과 칼이 부딪쳐서 불꽃이 튀겨졌고 피가 마당에 얼룩졌다. "으악!" 흑의경장의 한 거한이 백리빙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한편 신삼괴의 도움으로 소영과의 대결에서 물러난 공상은 자기의 수하들을 종횡무진으로 무찌 르는 백리빙의 초술을 보고 혀를 찼다. '이래선 전멸하겠다. 내가 직접!' 이렇게 생각한 공상은 연자창을 휘두르며 달려 들었다. 백리빙과 두구 모두 무서운 적이었으나 자기의 창술에 자신이 있었는지라, 맨처음 백리빙을 가 슴을 겨누어 일격을 가했다. 백리빙은 장검으로 연자창을 막아 내긴 했으나, 신기(神技)와 같은 창술(槍術)에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백리빙과 두구가 여러 수하들과 합세하여 쳐들어 오는 공상과 싸우고 있는 것을 바라 보던 소영 은 공상의 창술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쉽게 결판이 나지 않을 터이니 그 사이에 신삼괴부터 먼 저 처치하기로 결심했다. 소영은 한 발 두 발 앞으로 다가 서며 신삼괴에게 말했다. "내 이미 말로 귀공을 타일러 봤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니, 자기의 무덤을 스스로 파려는 자와는 이야기하기 싫소. 당장에 황천으로 보내 주겠소." 신삼괴는 뒤로 물러섰다. "당신은 누구요? 이름을 말하시오." "원이라면 가르쳐 주마. 나는 소영이다." "뭐! 소영!" "그렇다. 어서 나서라!" "소영? 음, 알았다. 싸우고 싶다면 싸워 주겠다. 그러나 장권(掌券)에선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이 번에 장력으로 겨룸이 어떤가?" "좋다." 소영은 몸을 날려 일장을 내 쳤다. 신삼괴가 재빨리 이를 받아, 쌍방은 거센 바람을 날리며 숨막 히는 대결을 전개했다. 소영은 내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연 이십 초를 쳐 냈다. 그러나 이것은 빙 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으로 그의 전력은 무한한 것이었다. 신삼괴는 오래 전부터 소영의 위명을 알고 있었는지라, 사력을 다하였다. 이번 싸움에서 죽어도 억울하려니와 살아서 패자가 되어도 고수의 명예가 꺾이는 것이라, 되도록 오래 끌어 무승부로 끝내고 싶었다. 그리하여 공격을 포기하고 수세에서 몸을 보호하며 마지못할 경우에만 소영의 장력을 맞받아 쳤 을 뿐 되도록 장력을 피해다녔다. 쌍방은 순식간에 오십여 초를 쳐 냈다. 소영의 기개는 마치 요원의 불길과 같아 숨돌릴 사이를 주지 않고 연이어 장을 쳐 내었다. "신삼괴! 조심하라!" 왼손으로 천외내운(天外來雲)의 일격을 내려 치며, 동시에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퉁겨서 탄지 (彈指)를 퍼부었다. 이 탄지의 지풍이 신삼괴의 오른쪽 팔꿈치에 명중했다. "핫!" 신삼괴는 연달아 쳐들어 오는 소영의 장세를 막으려 오른팔을 올린 순간 소영의 지풍이 명증된 것이다. 그는 팔꿈치가 저려 올렸던 팔을 힘없이 떨어뜨리고 말았다. 소영의 탄지신공은 소림칠십이절기(少林七十二絶技) 중의 하나인만큼, 그 공력을 연마하면 허공 을 가르거나, 혈도를 막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는 팔꿈치가 으스러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신삼괴는 소영의 장풍 을 피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펑!" 또다시 소영의 장풍이 신삼괴의 왼쪽 어깨를 명중시켰다. "윽!" 신삼괴는 짤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서 몇 발자국 뒤로 비틀거 리며 물러섰다. 이번에 쳐 낸 장풍은 대단한 것이어서, 단 일격에 그의 왼쪽 어깨를 부수어 버린 것이었다. 이때 소영이 연공을 가한다면 그의 목을 끊을 수 있었으나 그는 잠시 장세를 늦추고 신삼괴에게 말을 던졌다. "신삼괴! 숨돌릴 기회를 주겠다. 잠시 쉬어라." 신삼괴는 왼쪽 어깨뼈가 부스러지고 오른쪽 팔꿈치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즉시 손을 쓰고 영 약을 먹는다 해도 한 달 안에는 싸움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공력이 범상치 않 은 위인이라 진기를 모으더니 돌연 몸을 날려 두 길 가량 뛰어 지붕 위로 올랐다. 그가 지붕 위 로 몸을 피하자 이미 활시위소리가 울리며 화살이 바람을 끊었다. 화살을 피한 신삼괴는 발끝으로 지붕을 차자 다시 몸을 날려 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두 번째의 화살이 뒤쫓았으나 퍽! 하고 기왓장에 박히고 말았다. 소영은 신삼괴가 도망치는 것을 쫓지 않았다. 이때 두 개의 그림자가 과원 마당으로 뛰어 내렸다. 당원기와 육괴장이었다. 한편 공상은 여러 수하들과 합세하여 백리빙과 두구를 몰아 세우고 있었으나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아 초조한 가운데 새로운 공세를 취하려는데, 소영에게 쫓긴 신삼괴가 지붕으로 날아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 공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과원의 제일 고수가 소영과의 싸움에 역불급(力不及)으로 도망을 쳤고 그 위에 두 사람의 적수 가 새로 나타났으니 더 이상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당에 뛰어 내린 당원기와 육괴장은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고 백리빙과 두구에게 달려 갔다. 그러자 등뒤에서 소영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두 분께선 수고 안하셔도 염려 없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 "펑!" 소리와 함께 백리빙에게 덤비려던 건장한 사나이가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어 두구의 철필 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소영의 지풍이 연달아 쳐 나가고, 또 백리빙의 장건과 두구의 철필, 은권이 그들을 둘러 싼 흑의 의 경장들을 모두 쓰러뜨려 이제 남은건 연자창을 휘두르는 공상뿐이었다. 공상이 마당 한구석에 몰려 발악을 하는 순간 기회를 놓치지 않은 소영이 비호처럼 몸을 날려 왼손으로 연자창을 나꿔채면서, 껑충 뛰어 공상의 턱을 힘껏 걷어 찼다. 공상은 썩은 기둥 넘어지듯 쿵! 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신삼괴가 너보다 못하여 도망갔느냐? 아직도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겠느냐?" 소영이 그를 죽이지 않으니 공상은 감격해 마지 않았다. 과원의 사람 가운데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자기 혼자뿐 신삼괴는 도망치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 "소대협, 이렇듯 죄 많은 사람을 용서하여 주시니 이 은혜에 어찌 보답하오리까? 그리고 소인 무슨 염치로 강호에 다시 얼굴을 내놓겠습니까?" 말을 마치자 그는 품에서 비수를 꺼내 들고 가슴을 찌르려 했다. 비수를 본 소영이 재빨리 오른 손을 들어 손가락을 퉁기니 비수는 떨어지고 말았다. "공형께서 이미 잘못을 뉘우치셨는데 무엇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시오? 천하엔 산고수 려한 명소가 많으니 공형께서는 조용한 곳을 찾아 여생을 편안히 보내는 것이 어떠하오?" 소영은 공상의 동정을 살피며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공형께서 새사람이 되어 강호에서 함께 살고 싶다면, 내가 천하의 호걸들에게 공형을 반겨 주 도록 힘을 써 보겠소." 소영의 말을 들은 공상, 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천만 감사한 말씀이오. 그러나 여명을 부지한들 며칠 가지 못할 것이오." "기어코 죽겠단 말이오?" "그게 아니오. 실은 칠 일 후가 되면 기독(奇毒)이 온 몸에 퍼져 경맥이 뒤틀려 죽게 되오." "다시 백화산장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소?" 공상은 고개를 저었다. "소생 이미 심목풍의 극악무도함을 알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그리고는 침통한 표정으로 소영을 바라 보았다. "소생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신 소대협의 후은에 보답치 못하는 것이 여한이오." 그는 한 손을 들어 천령요혈(天靈要穴)을 쳐서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소영의 무공으로는 이와 같은 자결을 미리 막아 목숨을 건져 줄 수도 있었으나, 공상 자신이 죄 를 뉘우쳐 죽기를 원했고 또 기독의 발작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가 깨끗하게 죽는 것을 말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원수도 없고 동지도 없는 법이다. 공상의 죽은 모습을 바라 보던 두구가 소영에게 말했다. "큰형님, 이 과원의 사람들은 모두 백화산장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심목풍의 부하가 되었으니, 그들의 시체를 묻어 주는 것이 어떻겠소?" "그리 하오. 그럼 두 분께서 묘중도사(廟中道士)에게 금 한 덩어리를 주고 그들의 시체를 묻어 주도록 부탁하시오. 우리는 묘문(廟門) 밖에서 기다리겠소." 소영이 백리빙을 데리고 묘문에 이르니 두구는 일을 마치고 벌써 와 있었다. 당원기가 물었다. "소대협, 앞으로 남은 일은 무엇이오?" "칠택다원이오. 그러나 그곳은 경계가 엄하니, 적당한 곳을 찾아 숨어서 좀 쉬다가 밤이 오길 기 다려 야습을 하는 것이 상책이오." 칠택다원에 이른 것은 삼경에 가까울 무렵이었다. 그러나 다원 문앞에 가 보니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문 위에 팻말이 하나 붙어 있었다. 그 팻말에는 잠정영업(暫停營業)이라는 네 글자가 씌어 있었다. 소영은 담을 타고 넘어 갔다. 백리빙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라곤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알아 차리고 몸을 피했는가? 방을 모두 뒤져 봐도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칠택다원을 빠져 나왔다. 이 다원은 심목풍이 장사에 배치해 놓은 밀정의 소굴인데 어찌된 일인지 개미새끼 하나 눈에 띄 지 않았다. 이 다원 이외에 몇 군데 있기는 한데, 그곳이 어디 있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이때 당원기가 과원을 괴멸시킨 것만도 큰 성공이니 돌아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 마총타주께서 걱정을 하고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돌아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오. 소대협 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럼 우리 곧 돌아 가도록 합시다." 소영은 이때 갑자기 상팔의 생각이 나 두구에게 물었다. "두형, 상형께서는 지금 수중사주(水中沙州)로 갔겠지요?" "아마 안 갔을 겁니다." "어째서?" "상형은 큰형님을 위해 물건을 지키고 있소." "물건을 지킨다? 그 상자 말이오?" "네, 그 상자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하였소." "그럼 상형은 아직도 그곳에 계신단 말이오?" "아니오 그는 벌써 그곳을 떠났소." 소영은 당원기와 육괴장에게 곧 수중사주로 돌아 갈 것을 당부했다. "당형과 육형은 먼저 가시오. 나는 오늘 저녁 아니면 내일 저녁에 돌아가겠소." 당원기와 육괴장은 포권을 하고 허리를 굽힌 뒤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원기와 육괴장이 돌아간 다음 두구에게 물었다. "상형이 있는 데가 어디오?" "네, 제가 길을 안내 하겠소." 소영과 백리빙이 두구의 뒤를 따랐다. 149. 천축문자의 비밀 두구는 소영을 데리고 두 개의 가도를 지났다. 높고 큰 집의 담앞에 다다르자 소영이 낮은 소리 로 물었다. "이곳이 어디요?" "네, 여기는 장사지부(長沙知府)의 가족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럼 상형이 이 지부에 아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오?" 두구는 사방을 한 번 두리번거리더니 대답했다. "상형이 나에게 일러 준 말이 있소. 백화산장의 무리들이 손을 뻗치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관리들만은 건드리지 않는답니다. 관리들이 자기네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지 않는 한 절대로 먼저 찝적거리지 않는다는군요. 그래서 이 지부 안에 숨겨 두는 것이 가장 안전 하지요." '상팔이 그 상자를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다니..... 필시 그 이면에는 어떤 곡절이 있을 것이다.' 소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를 만날 수 있소?" "이 지부의 뒤뜰에 한 채의 서재가 있지요. 하인이 매일 한 번씩 들어 가 청소를 하는 이외에는 다른 사람은 일체 출입을 않는다는군요." "그래, 상형이 그곳에 있단 말이오?" "네, 상형은 바로 그곳에 있소. 내가 들어 가서 불러 내겠소." 소영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좋소. 관부의 가족들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으니 두형이 가서 불러 내도록 하시오.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소." "그럼 다녀 오겠소." 두구는 몸을 솟구쳐 담을 넘어 갔다. 소영은 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두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 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두 개의 그림자가 담을 넘어 왔다. 나타난 것은 상팔과 두구였다. 상팔은 한 손에 나무상자를 들고 있었다. 왼쪽 팔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소영은 상팔의 왼팔을 바라 보며 물었다. "상형 부상을 당했소?" "네, 가벼운 경상을 입었는데 별로 지장은 없소." "그 부상은 언제 당했소? 일전에 만났을 때에는 아무런 상처도 눈에 띄지 않았었는데....." 상팔이 씁쓸하게 웃었다. "오늘 날이 저물 때쯤에 싸웠었소. 나는 비록 왼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지만 상대방도 조용히 가 진 못했지요." "그는 백화산장의 무리요?" "백화산장의 사람들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소. 허나 그 말씨나 태도로 보아선 아닌 것 같았소." 소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글쎄요. 나도 그 사람의 신분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짐작조차 되지 않더군요." "생김새는 어떻소?" "중이었소." "중.....?" "네, 그게 묘하단 말이오." 상팔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백화산장의 사람들은 온갖 잡종들이 모였으니 중이 몇 사람 있다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 니지요.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중의 신분을 그대로 나타내어 강호를 돌아 다니진 않는데....." "그가 왜 상형과 싸우게 되었소?" 상팔은 손에 들고 있는 나무상자를 한 번 바라 보더니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상자를 뻣으려고 들기에....." "그 상자를......?" 소영은 깜짝 놀랐다. "이상한 일이다. 저 상자는 매우 오래된 것인데... 낡아빠진 상자를 탐내는 자는 분명 무엇인가 깊이 아는 사람이 틀림없다." 소영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다그쳐 물었다. "그 중은 몇 살이나 되었소?" "오십 세는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 금궁의 십대 기인은 전부가 칠십 세 이상이 되었으니 그 중하고는 동배 인물이 아닌데... 그 가 어떻게 이 상자를 알았을까?" "글쎄 말이오. 아무래도 이상하오" "아무튼 우린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갑시다." 그들은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걷자 한 채의 객점이 나타났다. 이 때는 밤이 매우 깊었으므로 거리에 행인도 없었다. 객점의 사환은 불을 끄고 문을 닫고 있었 다. 두구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빈 방이 있겠지?" 사환은 두구와 소영 등을 훑어 보더니 입을 열었다. "독채 하나가 비어 있긴 합니다. 그러나 값이 비싼데요." "알았어. 안내해!" 두구가 말하자 사환은 아무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그들은 사환의 뒤를 따라 들어 갔다. 뒤채는 조용하고 깨끗했다. 가운데 큰 방이 있고 양쪽에 객실 하나씩이 붙어 있었다. 사환은 방에 불을 켜 놓고 자리까지 들여 놓더니, "시키실 일이 있으면 큰 소리로 부르십시오." 하고는 물러 갔다. 그러자 두구는 집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주위의 동정을 살피더니 방으로 들어 왔다. 소영은 상팔에게서 나무상자를 받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상자의 뚜껑 밑에는 불상(拂像)이 조 각되어 있었다. 소영이 상자를 유심히 살펴 보고 있는 모습을 바라 보며 상팔이 가볍게 웃었다. "나는 상자의 먼지를 닦아 내면서 비로소 불상의 무늬를 발견했지요. 이미 두구와는 얘기했지만 이 상자 속에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는 것만은 확실하오." 소영이 상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은 두형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소." "이 나무상자 때문에 나는 무위도장과 마문비 등의 군호들과 떨어져 있지 않을 수 없었소. 왜냐 하면 군호중에 견식이 많은 분들이 있는 만큼 이 상자의 내력을 안다면 곤란하잖소?" "......" "그들이 만일 이 상자를 열어 보자고 조르게 되면 곤란한 일이니까요. 내막을 잘 알아 내기 전 엔 어쩔 수 없이 군호들과 떨어져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나는 이곳에서 소대협과 만난 후 에 이 일을 의논하려고 두구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오." 소영이 말했다. "그건 잘한 일이오. 내 기억으로는 우린 이미 그 상자를 열어 봤으나 이 안에는 다만 양피(羊皮) 의 책이 있을 뿐이오. 그 책에는 알아 볼 수 없는 경문이 적혀 있을 뿐이었소." "그거야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았잖소? 그 경문 내용도 알아 보지 않았고....."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요. 그런데 상형은 왜 혼자서 열어 보지 않았소?"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우리들은 피와 살을 나눈 형제보다 정이 두터운데 어찌 나 혼자서 작은 일이라도 처리하겠소." 소영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다시 한 번 열어 봅시다." 상팔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속에는 한 권의 책이 들어 있을 뿐이었 다. 상팔은 등불을 가져다 상자 속을 비춰 보고 손으로 두드려 보고 하더니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 한 권의 경문뿐인데... 무엇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소영이 눈을 지그시 감고 무엇인가 한동안 생각하더니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상형, 이 나무상자의 아래 위에 불상을 조각할 수가 있었으니 상자 안에도 무슨 조각이나 글자 를 새겨 놓은 것이 아닐까?" "그렇군요." 상팔은 손가락으로 상자 속을 더듬어 보았다. 과연 상자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까끌까끌하게 손 에 감촉되는 것이 있었다. "과연 여기에 무슨 조각된 것이 있는 것 같소." 상팔은 헝겊으로 뚜껑의 안쪽과 상자 속을 더듬거리며 열심히 닦았다. 오래 묵은 먼지가 깨끗이 닦아지니 뚜껑 밑바닥과 상자 바닥에 선명한 무늬가 나타났다. "있소. 분명히 있소." 상팔이 기쁨과 기대가 섞인 음성으로 말하며 상자를 소영에게 내밀었다. 소영은 상자를 받아 탁 자 위에 올려 놓았다. 등불을 바짝 끌어 당겨 상자 속을 자세히 살펴 보니 그것은 무슨 그림같기도 하고 글씨같기도 한 이상한 무늬였다. 꾸불꾸불 그려진 무늬는 도무지 알아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것은 천축의 무늬 같군요. 우린 봐도 모르겠소." 상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소영이 물었다. "상형은 보고도 모른다면서 이것이 천축의 문자라는 것은 어찌 아시오?" "과거에 나는 소림사의 한 분이 천축문자로 된 책을 갖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소. 지금 이 상자와 경문에 있는 것이 그 책의 문자와 매우 비슷하오." "그렇다면 이것이 천축문자인 모양이군요. 허나 천축의 문자를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무니 우린 이 글을 알아 볼 사람을 어떻게 찾지요?" "소림사의 몇 분 고승들은 알고 있겠지만 그 이외에는 이 글을 해독할 사람이 극히 드물 것이 오." 상팔은 무엇을 생각해 냈는지 갑자기 얼굴을 쳐들고 말했다. "혹시 그 중이.....?" "그 중이라니......?" 상팔이 소영을 주시하며 말했다. "나하고 격투하던 중 말이오. 그는 이 상자를 보더니 다짜고짜로 뺏으려고 덤벼들어 강탈하려고 했는데... 그 중은 어쩌면 이 천축문자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오. 상자의 내력을 알고 있거나 천축 문자를 아는 사람이 분명할 것 같소" 이 말에 소영이 떠리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러나 그 중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내 생각에 그 중은 아직 이곳에서 멀리 떠나지 않았을 것이오. 왜냐하면 그는 가기 전에 이 상 자를 몹시 탐내는 눈으로 몇 번이나 돌아 보며 갔으니.... 이 상자를 뺏으려는 생각을 아직 버리지 못했을 것이오." "그 중에게 상형은 얼마나 부상을 입혔소? 중상이오?" "그리 심한 타격은 주지 않았지만 결코 경상이랄 수도 없소." 소영은 입을 다물고 천장을 멀거니 올려다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중은 혹시 천축국의 사람이 아닐까?" 상팔이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보기엔 그는 우리 중원 사람인 것 같소. 그것도 소림사의 출신인 것 같았소." "그가 소림 문중의 무공을 썼단 말이오?" 상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싸움이 붙었을 때 그는 잡다한 무공을 섞어 쓰더군요. 마치 중원의 무공을 할 줄 모른다 는 인상을 주었었소. 그러나 나중에 부상을 당하게 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소림의 무공으로 대 항해 왔소." "백화산장에도 소림의 무공을 쓰는 자들이 있지요? 아마 그 중은 백화산장의 인물일 거요." 소영의 말에 상팔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더니 입을 열었다. "그 중이 아직까지 이곳 장사성에 몸을 담고 있다면.... 그는 이부근의 객점에 투숙했을 것이오." 상팔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중은 이 상자에 탐을 낼 뿐이지, 백화산장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소. 내가 그 의 행방을 찾아 보는 것이 어떨까요?" 소영이 물었다. "밤이 이렇게 깊었는데 어디로 가서 찾아 낸단 말이오?" 상팔은 가볍게 웃었다. "우린 찾아 낼 방법이 있지요." 그는 음성을 낮추었다. "마부, 점원, 파수병들을 상대하기란 매우 골치아프지요. 그들은 대개가 신의가 없고 입이 가벼 우며 또한 융통성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돈만 두둑히 주면 무슨 부탁이든지 들어 주는 사람들이 죠." 그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소영은 상자를 이리저리 살펴 보았지만 역시 괴상한 무늬 이외에는 아무것도 더 발견할 수 없었 다. 잠시 후 상팔이 희색이 만면해서 들어 왔다. "소대협, 우리는 여기서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오." "그것이 무슨 소리요?" 소영이 묻자 상팔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만약 그 중이 장사성을 떠나지 않고 이 부근의 객점에 있다면 한 시진 이내에 소식이 올 것이 오." 소영은 상팔이 꾀가 많고 수완이 좋은 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캐어 묻지 않았다.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사나이 하나가 땀에 흠뻑 젖은 채 뛰어 들어 왔다. 그는 어깨로 숨을 쉬며 급하게 말을 꺼냈다. "나리께서 부탁하신 일을 소인이 알아 냈습니다." "어떻게 되었소?" 상팔이 묻자 사나이가 대답했다. "그 대사께선 대성(大成)객점이라는 곳에 투숙하고 계십니다." "그래 수고했네." 상팔은 품 속에서 금조각 두 개를 꺼내 사나이에게 주며 말했다. "안내 좀 부탁하네." "네. 염려 마십시오." 소영이 상팔에게 물었다. "어딜 가려고?" "그 중을 모시러 가죠. 이 상자에 있는 천축문을 알아 내야 할 게 아니겠소?" 소영은 엉거주춤 일어서며 물었다. "그가 천축 문자를 틀림없이 알고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소?" "글쎄요. 설혹 천축문자를 모르더라도 최소한 상자의 내력은 알고 있을 것 같소." 상팔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더니 말했다. "소대협은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오. 내가 갔다 오겠소." 그러자 두구가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나도 따라가 보겠소." "좋아.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같이 가도록 하지." 두 사람은 사나이를 앞세우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소영은 자리에 앉았다. "저분들은 그 중을 납치하려고 가는 거예요?" 얌전하게 앉아 있던 백리빙이 물었다. "그런 모양이야." 소영은 다시 상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백리빙은 소영이 상자에 정신을 집증시키고 있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말을 시키지 않았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소영은 줄곧 상자만 관찰하고 있었고, 백리빙은 말을 하고 싶어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것을 참고 있었다.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소영은 비로소 상자에서 눈을 떼었다. 백리빙이 문을 열자 두구가 들어 섰다. 두구는 회색 장삼을 걸친 한 사람을 껴안다시피 부축하고 들어 왔다. "다녀왔소." 두구는 한 마디 짧게 말하며 화상을 내려 놓더니 두 군데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중은 오십 세 정도 되었다. '엄중한 계육 속에 있는 정통파의 승려가 분명하구나.' 소영이 화상을 살펴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혈도가 풀린 화상은 벌떡 일어서더니 맥 없이 주저앉았다. '두 다리의 혈도가 찍힌 것을 모르고 무의식중에 일어섰던 것이군.'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상팔이 들어 섰다. 그는 소영에게 목례를 하고는 화상의 곁으 로 다가 갔다. "대사. 저 탁자 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아시죠?" 상팔이 탁자를 손가락질하며 말하자 화상은 상팔과 두구, 소영, 백리빙의 얼굴을 한 차례 훑어 보더니 탁자 위로 시선을 던졌다. 탁자 위에 놓인 나무상자를 발견한 화상이 눈이 번쩍했다. 그는 나무상자를 뚫어질 듯 노려 보 며 무뚝뚝한 소리로 대답했다. "나무상자군요." 상팔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저 나무상자를 뺏으려고 했었지요? 그러나 당신은 분명히 나무상자에 대한 내력을 알 텐데....?" 화상은 나무상자에서 시선을 떼어 네 사람들을 차례차례 훑어 보더니 상팔의 물음과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네 분께서는 무엇을 하는 분들이시오? 나를 왜 끌고 왔소?" 소영은 가벼운 웃음을 띤 채 대답하지 않았다. 상팔이 차가운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대사께선 무관심하고 도가 능통한 모양이지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우리도 아직 대사의 신분을 묻지 않았는데 대사께서 먼저 우리의 신분을 묻다니....." 화상은 상팔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나무상자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을 본 상팔이 물었다. "대사, 대사께선 저 나무상자에 대한 내력과 그 상자에 새겨진 천축문자를 알고 계시겠죠?" "이리 가까이 좀 가져 와 보시오. 똑똑히 한 번 봅시다." 상팔은 탁자를 화상 앞으로 바짝 끌어다 놓고 등불을 밝혀 주었다. 상자의 안팎을 유심히 살피 는 화상의 얼굴에는 점점 흥분한 표정이 떠올랐다. 화상은 상자에 시선을 박은 채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 상자구나. 과연 이 상자야." 이 말은 방에 있던 네 사람에게 커다란 기대와 호기심을 가져다 주었다. 상팔은 탁자를 제자리 에 밀어 놓고 화상에게 물었다. "대사, 이제는 우리가 대사를 이곳으로 모셔 온 이유를 아시겠소?" 화상은 엄숙한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 보며 대답했다. "소승에게 저 상자에 새겨진 천축문자의 내용을 알아 보라고 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렇소. 대사의 힘을 빌려 주시오." 화상은 상팔을 힐끗 쳐다 보더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께서 잘못 생각하셨소. 여러분이 소승을 어떻게 다루든 소승의 입에서는 아무것도 나오 지 않을 것이오. 나무아미타불..." 말하더니 두 눈을 감은 채 금강경(金剛勁)을 외우기 시작했다. 폭풍이 몰아치고 뇌성벽력이 떨어 져도 꿈쩍 않을 자세였다. 화상이 이런 태도로 나오자 상팔은 적이 당황했다. 웬만한 위협이나 사정으로 설득되지 않을 것 같은 화상의 태도에 잠시 동안은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얼떨떨할 뿐이었다. 화상을 노려 보던 두구가 성난 소리로 외쳤다. "대사! 정녕 죽고 싶소?" 화상은 눈을 부릅떠 두구를 노려 보더니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어떻게 죽느냐에 달렸지요." "그렇다면 대사께선 우리 손에 헛되게 죽는 것이 무슨 가치라도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화상은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오. 소승이 우리 대사형(大師兄)을 위해 죽는 것이니 그야 물론 가치있는 죽음이지요." 이 말을 들은 백리빙이 소영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중은 천축문자를 우리에게 해설해 주는 것은 마치 부도덕하고 배신하는 일이라도 되는 듯 말하네요." 소영이 대답했다. "필경 어떤 곡절이 있는 모양이다." 이때 상팔이 화상을 상대로 말을 꺼냈다. "대사는 저 상자 속에 기록된 글이 당신의 목숨보다도 중하다고 생각하시오?" "물론이오. 소승의 하찮은 목숨보다는 열 배, 백 배 더 중하오." "그렇게 중하오?" 화상은 상팔의 말에는 대답치 않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하며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모습을 노려 보던 상팔은 소영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형님, 이제 좀 알 것 같군요." "무엇을 말이오?" "상자 안에는 일종의 기상천외한 무공이 기록되어 있는 모양이오." "그럴 법도 하군."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구가 말했다. "이 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지만 고통은 두려워 할 것이오. 우리는 그의 오음절혈(五陰絶 穴)을 찍어 버립시다." 이 말을 들은 화상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시며 안면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오음혈도를 찍는다는 데에 잠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표정이었다. 화상은 두구를 노려 보며 성난 어조로 외쳤다. "당신네들이 아무리 악랄하고 참혹한 고통을 가할지라도 소승은 한 마디의 대답도 않을 것이오." "흥, 두고 봅시다." 두구는 코웃음을 치더니 오른손으로 화상의 가슴팍을 내리 쳤다. 그러나 그의 손은 소영의 손에 잡혀 버렸다. "우리는 죄 없는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없소." 소영은 두구의 손을 놓고 화상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대사, 이토록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호협한 기품에는 필경 수십 년의 수양이 있었을 것이오. 소생은 존경을 금할 수 없소이다." 화상은 소영의 얼굴을 쳐다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소승을 추켜세워도 소용 없소이다." 그 말에 소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대사는 너무 단순한 생각만 하시는구려. 우리 이 나무상자에 대한 얘기는 치우고 다른 화 제를 꺼내는 것이 어떻겠소?" "그건.... 할 수 있소." "대사께선 소림사의 출신이시오?" 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대사께서 천축문자를 아시는 것을 보니 소림사에서 매우 높은 지위에 계신 모양이군요." "소승은 장경각(藏經閣)에서 경문을 맡아 관리하는 책임자였소." 이 말에 소영은 아하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중이 경문을 맡고 있었다니 학문이 높을 것은 틀림 없구나." 소영은 다시 물었다. "대사께선 이번 장사성에 어떤 볼일이 있어 나오셨소?" "소승은 세 분의 사형과 같이 왔었소. 허나.... 그 세 분은 이미 당신네 손에 죽고 말았소." 이 말을 하면서 화상은 이를 뿌득 갈았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슬픔이 엇갈린 묘한 표정이 떠 오르며 양볼은 계속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영은 화상의 말을 듣고 놀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우리들에게 죽다니....." "흥, 시치미 떼지 마시오. 틀림없이 당신네들이 죽였을 것이오." 소영은 어이가 없어 상팔과 두구를 돌아 보았다. 그들도 소영과 같은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노 기를 띠고 있었다. 소영은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물었다. "우리가 죽였다는 것을 어떻게 단정할 수 있소?" "흥, 당신네들이 아니고선 누가 그토록 야비한 수단을 쓰겠소? 독을 뿌리고 습격하는 것은 당신 네 백화산장 사람들만이 하는 졸렬한 수법이오." "백화산장......? 하하하....." 소영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대사, 그건 잘못 생각이오. 대사의 사형들이 횡사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오. 허나 우리 는 백화산장의 사람이 아니오." "뭐요? 백화산장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면 왜 밤중에 종업원을 가장해서 객점에 뛰어 들었소? 소승은 속임수에 넘어가 혈도를 찍혀 끌려 왔는데 그건 무엇 때문이오?" 소영은 상팔과 두구를 돌아 보며 짐짓 성난 어조로 물었다. "형들이 종업원으로 가장해서 대사를 납치해 온 것이 사실이오?" 두구가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들은 잔꾀를 쓰지 않고는 대사님을 모셔올 수 없을 것 같아서......" 소영이 두구의 말을 끊었다. "그런 무례한... 그런 행동을 했으니 대사께서 우릴 백화산장의 무리로 오해할 수밖에....." 소영은 화상에게 사과의 인사를 하고 두구에게 말했다. "어서 혈도를 풀어 주시오." 두구는 아무 말도 없이 찍었던 화상의 혈도를 풀어 주고 물러섰다. 그러자 소영이 화상에게 읍 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대사, 우리가 너무 무례하게 대했던 것을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소생이 대신 사과드립니다. 대 사는 돌아 가셔도 좋습니다." 화상은 전신을 한 번 움직여 보더니 소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뉘시오?" "저는.... 소영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소영, 당신이 소영......?" 화상은 깜짝 놀라며 부르짖었다. 소영은 가벼운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소생은 분명 소영이외다. 대사께선 믿지 못하시겠 소?" 화상은 소영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바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소승이 소영을 한 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딴 사람에게 생김새를 들어서 대강은 짐작하오. 그런 데 지금 당신의 얼굴은 내가 짐작하고 있는 모습과 판이하오." 소영은 가볍게 웃으며 얼굴에 쓴 가면을 벗었다. "대사께선 자세히 보십시오. 소생의 진짜 얼굴이오." 화상은 소영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 보더니 미심쩍은 어조로 말했다. "비슷하긴 한데....." 소영은 상팔과 두구를 돌아 보며 말했다. "두 분께서도 얼굴에 쓴 가면을 벗으시오. 대사께선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 모양이오." 중주이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면을 벗었다. 가면을 벗은 상팔이 자기의 배를 손바닥으로 두 드리며 말했다. "대사께선 나를 아시겠소?" 화상은 상팔의 불쑥 튀어 나온 배와 얼굴을 훑어 보더니 대답했다. "당신과 저분은 중주이고이시오?" 상팔은 껄껄 웃었다. "하하. 대사께서 아직도 완전히 믿지 못하시는 모양이군요?" "소승은 장경각을 지키느라고 한 번도 강호에 나와 본 적이 없었소. 이번에 소승은 처음 강호에 나왔소이다." "그러시다면 뭘 잘 알아 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요. 그런데 용케도 소대협을 알아 보시 니 장하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몇 분의 용모에 대해서는 소승이 강호에 나오기 전부터 대강 들어 짐작하고 있 었소." 화상은 소영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소승은 비록 강호에 처음 나오긴 했으나 소대협의 대명은 많이 들었소이다." 두구가 말참견을 했다. "대사께서 아무리 많이 들어 왔으면 무엇 하겠소? 중요한 것은 대사께서 우리들의 신분을 믿느 냐 안 믿느냐에 있는 것인데...." 화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소승은 다소 믿어지긴 합니다. 확실히 믿을 수 있다면 몰라도 소승은 아직 여러분에게 저 상자 에 있는 글을 일러드릴 수 없소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분이 증명되면 그 내용을 알려 줄 수 있단 말씀이오?" "그렇소." 상팔은 품 속에서 금주판을 꺼내 들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무기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쓰지 않소. 이젠 대사께서 믿으시겠소?" 화상은 금주판을 한 번 바라 보더니 말했다. "소승은 상팔시주께서 무기 대신 금주판을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소. 그 주판으로 암기를 날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하하 그럼 한 번 시험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소이다." "그렇다면 대사께선 우리를 믿으시겠단 말씀이시오?" "보아하니 여러분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소. 허지만 여러분의 신분을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경문 내용을 섣불리 말씀드릴 수 없소." 상팔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자 속의 경문이 그토록 중요한 내용이오?" "물론이오. 전체 무림의 흥망에 관계되는 것이오." "그 내용은 일종의 무공이오?" "아니오." 이번엔 두구가 물었다. "무공도 아닌데 무엇이 그리 중요하단 말이오?" "조금만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소. 그 경문 내용은 무공의 기록을 숨겨 둔 곳을 설명한 글이오." 상팔이 맥빠진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소대협, 이 대사께서 이토록 세심하니.... 아마 밤이 새어도 얘기할 것 같지 않소이다." 소영은 상팔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화상에게 말했다. "만일 이 상자에 새겨진 경문 내용이 대사의 말처럼 중요한 것.이라면 신중을 기하는 것이 옳을 일이오." 소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화상의 표정을 살피다가 다시 이었다. "대사 일행이 네 분이라고 하셨는데 그 중에 세 분이 백화산장의 무리에게 이미 죽었다니 애석 하군요. 대사는 강호에 처음 나왔다니..... 그 세 분의 사형들이 우리 신분을 증명하기 전에는 대사 는 딴 사람의 증명을 믿지 못하시겠군요." "그렇지요. 소승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증명을 어찌 믿겠소?" "그거 참 곤란한 일이군요. 대사께선 아는 사람이 드물고 우리는 짧은 시간에 대사가 아는 분을 찾아 내기 힘들 것이고....." "......." "결국 후일 우리가 소림사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건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소림사에서도 천축문자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소." "몇 명이나 되오?" "소승까지 합쳐 네 사람뿐인데 그 중에서도 조예가 깊은 사람은 불과 두 사람뿐이오." 여지껏 말 한 마디 않고 있던 백리빙이 물었다. "그 두 명의 조예 깊은 사람 중에 대사도 끼었나요?" "그렇소." 상팔이 물었다. "대사께선 사형들 이외에 아는 분이 누가 있소?" 화상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소승은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어 기억나지 않는군요." "무당파의 장문인 무위도장은 아실 수 있소?"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소." 소영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군요. 대사께선 저 상자 속의 내용을 자세히 기억해 두십시오." "이미 기억해 두었소." "그럼 되었소. 대사께선 이대로 돌아 가시면 됩니다." 상팔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영을 돌아 보았다. "이대로 돌려 보내다니요?" 소영이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사께서 그 내용을 죽어도 얘기 할 수 없다는데 우리가 강제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 니오? 내용을 대사께서 기억했다니 그냥 돌려 보내는 수밖에....." 이분이 우릴 믿지 못하는 만큼 우리도 이분을 믿을 수 없잖소?" "상형, 난 대사를 믿고 싶소. 상형은 이분이 소림사의 도승으로 가장했다고 생각하시오?" "그건 아니지만....." "이분이 소림사의 도승을 가장한 것이 아니라면 더 괴롭힐 필요가 없잖소?" 상팔은 더 말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소영이 정색을 하며 화상에게 말했다. "대사께선 상자 속에 새겨진 내용을 똑똑히 기억해 두셔야 됩니다. 대사가 돌아가신 뒤 나는 이 상자를 없애 버릴 생각이니까요." 이 말은 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화상도 눈이 휘둥그래져서 소영과 나무상자를 번갈아 보더니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그건 무엇 때문이오?" "대사께서 내용을 보시기 전에 나는 이 상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했었소. 이제 그 중요성을 알았으니 버려야지요." "이해할 수 없는데요." "만일 이 상자가 백화산장으로 들어가 보시오. 백화산장에도 천축문자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 들은 곧 내용을 알아 낼 게 아니겠소? 그렇게 되면 무림에 큰 해가 미칠 테니 무림의 안전을 위 해 나는 이 상자를 없애려는 것이오." 화상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소영의 말에 찬성을 하면서도 상자가 없어진다는 사실만은 몹 시 아까운 모양이었다. 화상은 상자로 시선을 둔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상자를 없앤다는 것은 너무도 아까운 일이오." "물론 나도 아깝다는 생각은 있소. 허나 남겨 두는 것이 화가 될지도 모르니 없애버려야지요." 방 안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뜨리고 입을 연 것은 소영이었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화상에게 말했다. "대사께선 여길 떠나신 후 특별히 조심하시오. 왜냐하면 대사는 중요한 비밀을 알고 계신 유일 한 분이시니까요." "그렇다면 소승이 다시 한 번 자세히 봤으면 좋겠소." 상팔이 화상의 앞을 막아 서며 눈을 부라렸다. "무엇이라고요? 소대협께서 성인군자시라 대사를 후히 대하니까 너무 뻔뻔스럽소. 당신은 소대 협의 신분을 확신하면서도 내용을 감추는 속셈이 의심스럽소." 화상이 대꾸하기 전에 소영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상형, 대사에게 상자를 자세히 보도록 비켜 서시오." 상팔은 잠시 망설이다가 백리빙 옆으로 비켜 섰다. 그는 백리빙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리 낭자, 우리는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소." "왜요?" "저 중의 외모는 소림사의 도승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나쁜 사람이 틀림 없소. 우리는 저 자의 음흉한 수단에 넘어간 것이요." "제가 알아 볼 방법이 있어요." 백리빙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상팔은 입을 다물었다. 화상은 상자를 들고 자세히 들여다 보더니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 놓으며 소영에게 말했다. "소승은 모두 기억해 두었소." 소영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대사는 머리 속에 꼭 기억해 두십시오. 그리고 이 장사성에 더 있지 말고 속히 소림 사로 돌아 가시오. 후일 시간이 있으면 우리들이 한 번 찾아 가겠소." "네. 그럼 소승은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화상은 소영에게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더니 몸을 돌렸다. 그는 방을 나서자 뜰에 내려 섰다. 화 상이 나가는 것을 지켜 보며 상팔은 초조함을 느꼈다. 150. 천축의 무공비록 "대사, 잠깐!" 백리빙이 화상을 부르자 소영이 급히 물었다. "빙아, 무슨 일이냐?" "내가 대사님을 모셔다 드리고 오겠어요." 백리빙은 소영에게 생긋 웃어 보이더니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 소 영은 눈썹을 찌푸렸으나 말리지는 않았다. 백리빙이 나가자 소영은 상팔과 두구의 표정을 살폈다. 두 사람은 무거운 표정을 지은 채 무엇 인가 신중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백리빙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돌아 왔다. 소영이 물었다. "빙아. 그 대사는 어찌 되었지?" "갔어요." "공손하게 보내 드렸니?" "만일 싸우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이렇게 멀쩡히 돌아 왔겠어요?오빠를 대할 면목도 없을 테 고....."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화제를 돌려 상팔과 두구에게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그 화상이 천축문자를 알고 있는 것만은 틀림 없을 것 같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상자에 그토록 관심이 크며 상형에게서 상자를 뺏으려고 했겠소?" 두구가 말을 받았다. "형님의 말씀이 맞소." "만일 그 화상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상자를 남겨 두어서는 안 되겠소. 심목풍에게 알릴 경우엔 매우 위험한 일이니까." "형님의 생각은 그 상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소?" "나는 이 상자를 아예 없애 버리고 싶은데......" 그러자 백리빙이 끼어 들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그건 왜?" "그건.... 음.... 왜냐하면....." 백리빙은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우물거렸다. 소영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백리빙을 쏘아 보 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백리빙은 흠칫했다. "무슨 일을 저질렀구나." 소영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날카롭게 외쳤다. "빙아! 네가 그 도승을 죽였구나?" 백리빙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녜요." "솔직히 말해! 그 도승을 어떻게 했지?" 백리빙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일을 열지 않았다. 소영은 그녀가 도승을 죽인 것이 틀림 없다고 생 각했다. 그는 화가 치밀어 올라 백리빙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 섰다. 그러자 그녀가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오빠, 그 중을 죽이진 않았어요. 다만 가벼운 침 하나를 놔 주었을 뿐이에요." "침? 독침을?" "독은 묻지 않았어요. 그러나 중에게는 독침이라고 속였어요. 네 시간 안에 해독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고 속였어요." "그건 왜?" 백리빙이 대답했다. "만일 그 중이 백화산장 사람이라면 되돌아 오지 않겠지만, 백화산장의 사람이 아니라면 틀림없 이 돌아올 거예요" "그건 무슨 소리지?" "그 중이 정말 소림사의 도승이라면 오빠에게 부탁받은 일 때문에 급히 돌아올 거예요" 소영은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추궁했다. "그 도승이 우리가 얕은 꾀를 부렸다고 생각하면 몹시 괘씸하게 여길 텐데...... 그래도 돌아온단 말이냐?" "올 거예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해독약을 얻으려고 달려 올 것이고, 격분했다면 오빠 를 만나 따지려고 올 거예요.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비밀을 미끼로 해독약과 바꾸자는 조건을 내세울 거예요." 백리빙의 말은 그럴 듯했다. 그러나 소영에게는 도무지 꺼림직하게 생각되어 마음이 무거웠다. "네가 아무리 많은 이유를 대도 이번 일은 잘못이야. 심목풍과 그의 부하들을 대할 때에는 수단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겠지만 소림사의 도승에게 그런 방법을 쓴다는 것은 좋지 않아." 백리빙은 조금도 지지 않고 소영의 말을 받았다. "그 중은 오빠가 소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인정하지 않았어요. 경문 내용을 알려 주지 않으려는 수단이 괘씸해요." "그건 나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도승은 매사에 실수하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한 것 뿐이 야." 백리빙이 날카롭게 물었다. "오빠는 그 중이 소림사의 도승이라는 걸 어떻게 단정할 수 있어요?" 이 말에 소영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도 화상이 소림사의 도숭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던 것 이다. "빙아, 만일 그가 소림사의 도승이 아니라면 너는 왜 그를 그대로 돌려 보냈지? 이곳에 다시 나 타나지 않는다는 가정도 세울 수 있잖니?" 백리빙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난 이미 그의 혈도 두 군데를 감쪽같이 찍었어요. 그 중은 한참 가다가 몸에 이상을 느낄 거예 요. 필경 독이 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허겁지겁 달려올 거예요." 백리빙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 중은 자기 사형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달려올 거예요." "빙아, 어쨌든 나는 널 칭찬할 수는 없어. 앞으로는 무슨 일이든 먼저 나하고 의논한 뒤에 하자." 백리빙은 소영이 몹시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크게 나무라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 다. 그녀는 소영에게 눈웃음을 보내며 말했다. "만일 이번 일이 내 잘못이라면 앞으로는 오빠 말대로 하겠어요. 그렇지만 이번 일이 오히려 잘 한 일일 때에는 어떻게 하겠어요?" 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빙아는 나하고 몇 번의 위험한 고비를 함께 넘기며 지내 왔다. 너무 철이 없긴 하지만 나에게 는 분에 넘치도록 잘하는 소녀다.' "그거야 네가 한 일이 옳았다고 관명된 후에 이야기하자." 백리빙은 가볍게 끄덕이더니 소영의 곁에 바짝 앉았다. 그녀는 화상이 얼른 돌아와 주기를 초조 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 그래서 오빠에게 내가 얼마나 영리하고, 오빠를 얼마나 위하는가를 알 려 칭찬을 받아야 할 텐데....." 백리빙은 매우 초조했으나 표정으로는 나타내지 않았다. 백리빙을 바라 보며 소영은, '어쩌면 백리빙이 한 행동이 잘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하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을 품게 되었다. 기실 그도 상자 속의 비밀이 몹시 알고 싶었으나 별 로 좋은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네 사람을 무겁게 누르며 침묵이 깔리고 그 위를 시간이 지루하게 흐르고 있었다. 얼마쯤의 시간이 지나자 돌연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이때 방문은 열려 있었다. 네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방문 밖으로 쏠렸다.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그 화상이 비틀거리며 뜰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숨을 헐떡거 리고 있었다. "빙아의 말대로 틀림 없이 나타났구나."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화상은 바짝 다가 왔다. 얼굴엔 온통 땀투성이었다. 화상은 옷소매로 이마를 문지르고 숨을 씨근대며 소영을 노려 보더니 씹어 뱉는 듯한 어조로 차 갑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소대협을 성인군자라고 하더니 알고 보니 그들은 당신에게 속은 것이군요. 당신 은 심목풍과 우열을 가릴 수 없도록 비열한 위인이군요." 소영은 백리빙을 힐끗 보더니 화상에게 대답했다. "대사께서 갑자기 나를 욕하시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소." "흥, 당신은 나를 보내 주더니 어찌해서 사람을 시켜 나에게 독침을 놓았소? 네 시간 안에 나를 죽게끔 중독시키다니... 대장부가 이토록 비겁할 수가 있소?"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대사께선 중독되지 않았을 텐데요?" 그러자 화상은 버럭 성을 냈다. "뭐요? 내 몸에 지금 독성이 차츰 발작하고 있는데 아니라고 잡아 떼기요?" 백리빙이 입을 열었다. "대사께선 지금 이 분을 소영이라고 믿으세요?" 화상의 눈이 무섭게 백리빙을 노려 보았다. "바로 이 계집이 나에게 독침을 찔렀소."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이 분을 소영이라고 믿느냐 말예요?" 화상은 백리빙과 소영을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그야 물론 믿지." "흥, 그렇다면 대사께선 왜 이분에게 상자 속의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요?" 화상은 얼른 대답을 않더니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흥. 내가 설명해 주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이었지. 알고보니 소영 역시 졸렬한 인물인데?" 알고 보니 소영 소영은 화상이 계속 졸렬하다느니 비겁하다느니 하고 욕하는 것을 듣고도 불쾌한 표정 하나 없 이 태연했다. 백리빙이 몸을 일으켜 화상의 앞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대사는 중독되지 않았어요." 화상은 놀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백리빙을 잡아 먹을 듯 노려 보며 버럭 소리질렀다. "뭐라고? 내 몸에 이미 독이 발작하기 시작했는데... 누굴 놀릴 생각이냐?"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그것은 중독이 아니라 소녀가 대사님의 혈도를 찍었기 때문이에요." 백리빙은 말을 마치자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화상은 깜짝 놀라며 급히 뒤로 물러서려고 했으 나 이미 어깨를 잡힌 뒤였다. "무슨 짓이냐?" 화상이 소리지르는 것도 못 들은 척 재빨리 손을 움직여 혈도를 풀어 준 백리빙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이제 혈도가 풀렸어요. 대사께선 주의해서 침에 찔린 곳을 보세요. 침에 독이 묻었는지 안 묻었 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텐데요?" 화상은 침에 맞은 왼손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아무 이상도 없었다. 중독된 현상이라고는 눈꼽만 큼도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화상은 어리둥절해서 백리빙을 쳐다 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백리빙은 가볍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는 특수한 수법으로 대사의 혈도를 찔렀던 것이에요. 조금만 운기조식하면 곧 회복될 거예 요." 백리빙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대사를 좀 놀라게 했지만... 이 일은 소영 오빠와 아무 상관도 없어요. 오빠는 장난을 할 분이 아니에요. 그 일로 저는 단단히 꾸중을 들었어요." 화상은 어이가 없는 듯 입을 벌리더니, "그랬었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께선 소영 오빠의 신분을 의심했기 때문에 경문의 내용을 얘기하지 않았지요? 그와 마찬가 지로 우리들도 대사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대사가 백화산장의 첩자가 아닌가 시험 하기 위해서 그런 수법을 썼던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소승은 백화산장의 첩자요, 아니오?"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어요." "어째서요?" 백리빙은 다시 미소를 띠었다. "대사가 만일 백화산장의 첩자였다면 이곳에 돌아올 리가 없지요. 대사께서 이곳에 돌아왔기 때 문에 첩자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어요." 화상이 물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데... 소승이 돌아온 것이 무슨 증명이 되 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대사께서 만일 백화산장의 첩자였다면 백화산장의 사람에게 치료를 받으 러 갔을 게 아니에요? 그들은 독약에 대해 잘알고 있으며 가까운 곳에 얼마든지 일행이 있으니까 요." 소영이 백리빙의 앞으로 나서며 손을 모아 쥐고 화상에게 공손히 읍했다. "이 일의 근본 원인이 어찌 되었든 대사께 실례를 저지른 것이 분명하니 소생이 대신 사과드리 겠습니다." 소영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사과하는 것을 대한 화상은 급히 합장을 해서 답례하더니 한숨 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소승 얼떨떨하긴 하지만 당신은 정말 소영인 것 같군요." 상팔이 물었다. "대사께선 소대협의 신분을 어떻게 해야 믿으시겠소?" "소승 이제 완전히 믿었소이다." 화상은 소영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저 나무상자 속에 책 한 권이 있었지요?" "경문 한 권이 있었소." "그것을 소승에게 보여 줄 수 없겠소?" "물론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선 곤란하니 방으로 들어 갑시다." "그게 좋겠소." 소영이 앞장 서서 방으로 들어 가자 화상도 뒤를 따랐다. 상팔, 두구, 백리빙도 들어 섰다. 소영은 품 속에서 경문이 적힌 책을 꺼내 화상에게 건네주었다. 화상은 그것을 받아 들고 처음 부터 자세히 읽어 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화상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책을 읽어 가던 화상이 돌연 한 장을 찢어 냈다. "무공은 바로 여기에 적혀 있소." 소영이 물었다. "거기에도 천축문자로 적혀 있겠지요?" "아니오. 한문으로 적혔소." "이상하군요. 천축문자로 적혀 있어야만 아무나 알아 볼 수 없을 텐데요?" "천축문자를 안다고 해서 모두가 뛰어난 재주를 갖출 수는 없지요. 물론 한문도 마찬가지이고... 그 상자에 적힌 내용은 무공이 숨겨진 것을 알려 준 것인데, 바로 이 책 속에 있다고 적혀 있소." 화상은 찢어 낸 책장을 소영에게 내밀었다. 소영은 그것을 받아 펼쳐 보았다. 깨알같은 한문이 뻑빽이 들어차 있었는데 그 첫줄에는, <심오한 무공의 기초와 탁월한 지혜가 없이는 이 속에 있는 무공을 연마할 수 없다.> 라고 적혀 있었다. 소영은 책장을 내려 놓으며 화상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어떻게 됩니까?" "소승의 법명은 대인(大忍)이라 하오." '흥, 대인? 내가 보기에는 소인대사도 못 되는데.....' 백리빙은 이렇게 생각하며 입을 비쭉거렸다. 소영은 백리빙의 생각을 알아차렸으나 모르는 척하며 대인대사에게 다시 물었다. "대사께선 여기에 적힌 한문을 다 읽어 보셨소?" "소승은 다만 첫줄과 둘째줄만 읽어 보았소." "어느새 이 사람은 두 줄이나 읽었구나."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질문을 계속했다. "여기에 기록된 것이 사실이라고 보시오?" "사실이어야 되지요. 이 경문과 상자가 위조품이 아닌 다음에야........" "이 상자와 경문을 위조하려면 첫째로 천축문자에 능통해야겠지 요?" "그렇소. 허나 이 나무상자와 경문의 위조는 지극히 힘드오."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다시 책장에 시선을 던졌다. '본문에 수록된 것은 무공의 총강(總綱)으로서, 무공이 부족한 사람이 연습하게 되면 불구자가 되기 쉽다. 또한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뜻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어서 깊숙이 함정에 빠져들기만 할 뿐이다. 끝에 가선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한탄하나 이미 헤어나올 수 없게 되고 결국은 모든 것을 헛 되이 잃고 죽음을 부르게 된다. 소영은 책장을 덮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대사께서는 첫눈에 이 나무상자를 알아 보셨으니 놀랍소이다. 대사는 필경 경문의 내력도 잘 알고 계시리라고 믿는데요?" 대인대사는 물끄러미 소영을 바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금궁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이 소림사에 들려 오자 우리 방장(方丈)께선 깜짝 놀라셨소." "왜요?" "만일 십대 기인의 무공이 수록된 책자가 심목풍의 손에 들어 갔다면 백화산장의 세력은 백 배 확대되기 때문이지요. 해서 곧 소림파의 장로(長老)들을 불러 들여 공의회(共議會)를 여셨지요. 소 승도 참가했었소." "소림파는 수백 년을 내려 오며 무림의 많은 분쟁을 해결했던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오. 그러 나 이번 심목풍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던데요?" 소영의 신랄한 질문에 대인대사는 멋적은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우리 장문인께서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요. 소승은 지위가 얕아 그 내막을 잘 모르지만요." "하긴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만......" "소승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 보시오." 대인대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 소림파가 심목풍의 일에 대해 조금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모르시는 말씀이오. 소승이 알기로는 이미 수차에 걸쳐 장로급들에게 비밀 지령이 내려졌소. 그들은 벌써 행동에 들어 갔는 데 워낙 극비리에 하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이 알지 못할 뿐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활동이 있었군요. 그런데 그 소림사의 대회 결과는 어찌 되었소?" "모든 사람들은 심목풍이 금궁에 들어간 것에 대해 모두 놀라며 깊은 우려를 표했었소. 십대 기 인이 정말 금궁에 무공비록을 남겼고 그것을 심목풍이 얻게 되면, 심목풍이 십대 기인의 무공을 모두 지니게 될 것이 아니겠소?"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무림에는 더 큰 풍파가 몰아 닥칠 것은 뻔한 일이지요. 자칫하면 무림의 정당한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심목풍의 악독한 무리들만 들끓게 되죠." "그것은 물론이오. 그래서요....." "소림사에선 우선 임기응변책을 썼지요. 사십 명의 똑똑하고 건강한 청년을 뽑아 그들에게 밤낮 으로 무공을 가르쳤지요."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상팔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소림사가 일단 망한다 하더라도 재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군요?" "그렇소." 이번엔 두구가 말을 꺼냈다. "소림사에서 사십 명의 청년을 뽑아 후일의 터전을 닦는 것과 이 경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소?" "관계가 있소." '그래서 이 대사가 상팔에게서 상자를 뺏으려고 했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상팔, 두구, 백리빙도 소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두구가 다시 물었다. "어떤 관계가 있소?" "대회가 있을 때 소승이 한 가지 안건을 제출했었소. 그것이 바로 이 경문에 대한 것이오." "이 경문은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까?" "그렇소." 대인대사는 책에 시선을 잠깐 던졌다가 소영을 바라 보며 말을 이었다. "빈승은 장경각에서 많은 경문을 탐독했소. 그러다가 한 가지 사건을 발견했소." "그것은?"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 천축지국의 유명한 법사 한 분이 중원에 온 것으로부터 시 작되지요. 그 고승은 소림사에서 경문을 연구했소. 삼십 년 동안이나 한문을 배우고 경문을 연구 하며 장경각에 파묻혀 지냈었지요." 두구가 물었다. "그것이 이 경문에 적힌 무공과 무슨 관계가 있소?" "있지요. 그것이 바로 이 경문에 무공이 기재된 내력이지요." 대인대사는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 보며 말했다. "소승은 아무래도 처음부터 얘기해야만 여러분이 아실 것 같군요." 소영이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 어서 계속하시오." "그 고승은 목목대사(木木大師)라 불리웠는데 소림사에서 굉장한 칭찬을 받으며 지냈지요." 대인대사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 목목대사가 소림사에 들어온 목적은 경문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전혀 엉뚱한 데에 있었던 것이다. '천축국에서 중원으로 새어 들어온 무공비록을 찾는 것이 내 목적이다.' 목목대사는 이 무공비록을 찾기 위해 여러 각도로 자표를 수집하코 수소문을 하며 연구했다. '무공비록은 소림사로 흘러 들어간 것이 틀림 없다.' 그는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문을 연구하겠다는 구실을 붙여 소림사의 장경각에 파 묻힐 수 있었던 것이다. 소림사의 사람들은 학식이 높고 향학열에 불타는 목목대사를 그저 존경하고 칭찬할 뿐이었다. 장경각에 묻힌 목목대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문을 뒤적였다. 십만 권의 경문 가운데서 한 권의 책을 찾아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림사의 몇몇 인재들이 목목대사에게 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한 것은, 목목대사가 소림사에 온 지 이 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좋소 소승이 대사들에게 천축문자를 가르칠 테니 배워 보겠소?" "네, 배우겠습니다." 그들은 천축문자를 가르쳐 준다는 말에 기뻐했다. 사실 소림사에 천축문자를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러나 모두 기초뿐이고 정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목목대사는 이들에게 천축문자를 가르쳐 주며 열심히 뒤졌다. 십년, 이십 년이 지났으나 무공비 록은 찾을 수 없었다. 목목대사는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으나 단념하지 않고 꾸준히 뒤졌다. 십만 권의 책을 거의 독 파했으나 무공비록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헛수고를 한 것일까?' 목목대사는 차츰 자신의 행동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경문을 뒤지는 작업은 쉬지 않았다. 삼십 년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아! 찾았다." 목목대사는 부지증에 소리를 지르며 한 권의 책을 와락 끌어 안았다. 기쁨과 감격으로 인해 그 는 눈물을 흘리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이제 내 일은 끝났다.' 목목대사는 주도면밀한 인물이었다. 무공비록을 그대로 가져 가지 않았다. 자기가 삼십 년 동안 적어 온 일기를 무공비록 대신 남겨 놓았다 "소승은 오 년 전에 장경각에서 옛 서적을 정리하다가 목목대사가 남긴 일기를 발견했지요. 그 래서 그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대인대사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소영이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대사께선 그 무공비록이 한문으로 번역된 것임을 어떻게 아셨으며 금궁에 들어가 있 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었지요?" "소승은 그 비밀을 발견한 후 장경각 안에 있는 천축문자의 경문을 읽기 시작했지요. 자세한 내 막을 연구한 다음에 방장에게 알리려고 말이오. 허나 반 년 동안 헛수고 끝에, 중대한 일을 혼자 알고 있을 수 없어 방장에게 보고했지요." "그래 방장은 대사와 함께 문제 해결에 나섰나요?" 소영의 물음에 대인대사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오. 소승은 오히려 방장을 통해 또 하나의 비밀을 알게 되었소. 그것은 천축국에서 수십 년 동안 수 차례나 사람을 소림사로 보냈다는 것이오." "어떤 사람이오?" "목목대사의 행장을 찾는 사람들이었다오. 그것으로 미루어 목목대사는 소림사에서 무공비록을 내가긴 했으나 천축국으로 가져 가진 않았다는 증거이지요. 은거했거나 누구에게 피살되었다는 증거......." 대인대사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소승은 방장 앞에서 그 무공비록이 미칠 이익과 해를 구구히 역설하여 목목대사의 행방이 어떻 게 되었나 알아 보자고 했지요. 마침내 방장께선 응낙하시고 열 명의 승도를 풀어 수소문했지요." "찾아 냈나요?" "꼭 이 년이 지나서야 목목대사에 대해 알아 냈지요. 그는 소림사를 떠난 직후 산 밑에 있던 장 미대사(長眉大師)에게 납치되었다더군요." "어디로 납치되었소?" "그건 모르오. 그 뒤에 목목대사의 생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허나 소승이 시간을 계산해 보니 그는 이미 죽었음이 틀림없소."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백리빙이 대인대사에게 물었다. "그 장미대사는 어찌 되었어요?" "장미대사는 목목화상을 납치한 후 역시 행방불명되었소. 그러나 그는 강호에 다시 나타나 십대 기인들과 시답을 가졌었다는 소문이 있기도 합니다." 대인대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다른 사람들도 제각기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등불은 침침한 불빛을 뿌리며 가물거리고 있었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이따금 방안의 침묵을 가볍게 흔들어 놓았다. 대인대사는 눈을 떴다. 그는 방을 한 바퀴 둘러 보고 나무상자를 바라 보더니 소영에게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이 나무상자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아시오?" 소영은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모르오." "이 나무상자가 바로 목목화상이 천축에서 가져 온 것이오." 두구가 입을 열었다. "이미 백 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소? 오히려 대사는 상자를 처음 보는 것일 텐데....." 대인대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나무상자에 그 목목화상의 이름이 적혀 있었소. 그렇지 않으면 소승이 어찌 단언했겠소?" 두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대인화상이 소영에게 말했다. "소승이 소대협에게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는데 솔직히 대답해 주실는지요?" "무엇이든 물어 보십시오." "다른 게 아니라.... 이 나무상자를 어디서 얻으셨소?" "금궁 속에서 얻었소." "상자를 얻게 된 경과를 소승에게 얘기해 줄 수 없겠소?" 소영은 선뜻 대답했다. "대사께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얘기하지요." "예, 꼭 듣고 싶소." "그럼 얘기하겠소." 소영은 헛기침을 하고는, 금궁에 들어 가서 나무상자를 얻게 된 경과를 얘기했다. "처음 이 상자를 골라 잡을 때에는 매우 망설였었소. 그러나 이제 생각해 보니 이 상자를 고르 기를 매우 잘한 것 같군요." "물론이오. 매우 잘 하셨소. 만일 이 상자가 심목풍의 손에 들어갔다면 큰일날 뻔했지요." 대인대사는 다시 무엇인가 골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백리빙은 속으로 기쁨을 씹고 있었다. 나무상자를 고르자고 한 것도 자신이고, 침 하나로 대인대 사의 입을 열어 무공비록을 소영에게 얻어 준 것도 자신의 공로였기 때문에, '오빠도 이젠 빙아를 철부지라고 욕하진 않겠지.' 생각하며 은근히 기분이 좋아 있었다. 대인대사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빈승은 목목화상이 남긴 일기와 장미대사의 뒷조사를 해서 얻은 자료, 그리고 이 나무상자를 얻게 된 경과를 종합해서 하나의 추정을 세웠소." "추정을 세우다니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을지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소승의 추측이라는 전제하에 들어 주시 오."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히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대사께서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서 추정한 것이니 우리는 귀를 기 울여 듣겠습니다." "좋소. 허점이 있더라도 들어 주시기 바라오." 대인대사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장미대사는 목목화상이 중원에 온 목적을 벌써 알고 있었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목목화상과 본시 아는 사이로 목목화상을 시켜 소림사에서 무공비록을 훔쳐 내게 하고. 자기는 산 밑에서 기 다리고 있었을 것이오. 어쨌든 장미대사는 목목화상이 내려 오자마자 납치했었지요." 두구가 헛기침을 해서 대인대사의 말을 끊어 놓으며 입을 열었다. "대인대사, 만일 장미대사와 목목화상이 서로 아는 사이라면 무엇 때문에 납치했겠소? 납치하지 않고서라도 무공비록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요?" "그건.... 아무튼 어떤 방법이든 장미대사가 목목화상을 데리고 간 것만은 확실하오. 그 후 장미 대사가 어떤 수를 써서 무공비록을 자기것으로 만들었을 것이오." 이번엔 소영이 끼어 들었다. "그 무공비록의 천축문자로 적혀 있었을 텐데 장미대사가 그걸 어떻게 읽었을까요?" 소영의 질문에 대인대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장미대사는 아미(峨嵋)파의 제자지요. 소승이 아미파의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장미대사도 천축문자에 정통한 사람이라더군요." 상팔이 웃으며 말했다. "대인대사와 같군요." "허허. 소승은 장미대사의 발끝에도 못 미칩니다." 대인대사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더욱이 소승의 자질은 무공을 연마하는 데에 맞지가 않죠. 좋은 스승이 계시지만 소승이 워낙 둔해서.... 허허, 그러나 장미대사는 아미파에 일대 기재(奇才)로서 소승과는 비교할 수가 없소이 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소? 장미대사가 아미파를 대표해서 십대 기인의 서열을 정하는 곳에 참석 했나요?" "소승이 원래 강호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소. 목목화상의 행방을 찾으려다 장미대사에 관한 이야기를 사형들에게 들은 것인데....." "그 장미대사는 확실히 십대 고수의 정명대회(定名大會)에 참석했었다는 것이오. 그러나 그가 매 회마다 참석하지는 않았다더군요." 대인대사는 나무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께서 금궁에서 저 상자를 얻으셨다니, 그것은 장미대사가 금궁에 들어 갔다는 것이 증명 되지요. 물론 그 목목화상도 함께.." 상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미대사에 관한 전설은 소생도 들었소. 여러 가지 구구한 전설이 많지만, 대체로 대사의 말씀 과 비슷합니다." 조용히 앉아 있던 백리빙이 돌연 입을 열었다. "대사는 천축문자에 조예가 깊으시니 경문 속의 한문을 천축문으로 번역해 보세요. 그럼 이 경 문이 목목화상이 가져 갔던 무공비록인지 아닌지 대조해서 알아 볼 수가 있잖아요?" "소승의 말을 여시주께선 잘못 알아 들으셨군요. 천축문의 비급은 이미 목목화상이 가져 갔소" "그렇다면 지금 이 경문에 무공비록이 들어 있다는 것은 어찌 된 일이에요?" 대인대사는 껄껄 웃었다. "허허, 소승이 그걸 어찌 알겠소만, 짐작컨데 장미대사가 기록했을 거요." "목목화상은 어찌 되고요?" "아까 애기했듯이 목목화상이 생사와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소승도 아직 모르오." 백리빙은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이 공손하게 대인대사에게 말했다. "많은 가르침을 주신 대사께 감사드립니다." "허허, 별말씀을... 소승의 방장께서는 금궁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 심목풍만이 들어 갔다고 했었 지요." 대인대사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소승이 강호에 나온 목적은 저 나무상자를 찾는 데 있었지요. 지금 상자가 소대협의 손에 있는 것을 보았으니 소승은 이제 강호를 유랑할 필요가 없게 되었소." 대인대사는 몸을 일으키며 소영에게 합장을 했다. "부디 무림의 질서를 위해 분투해 주십시오. 소승은 물러가겠소이다." 그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더니 돌연 뒤돌아 서며 말했다. "소대협, 소승이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소대협께서 응낙하실는지요?" "무슨 부탁이신지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저 상자를 소대협이 얻으셨으니 경문에 적힌 무공도 소대협께서 배우시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그 상자와 경문은 모두 천축문자로 되었으니 소대협이 갖고 계신다 하더라도 별로 쓸모가 없으실 텐데....." "대사의 뜻은?" "상자와 경문을 소승에게 주어 소림사로 가져 가게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소영은 상팔, 두구, 백리빙을 둘러 보았다. 그들은 소영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표정이었다. "좋습니다. 드리지요." 소영이 응낙하자 대인대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소대협께서는 과연 의협심이 많고 비범한 인물이십니다." 하며 합장배례를 했다. 소영은 경문을 집어 들고 몇 장 들춰 보더니 "경문에 무공을 기록한 것은 넉 장뿐이군요. 만일 이것을 찢어 내면 경문의 값어치가 떨어질 텐 데요?" 하며 대인대사를 쳐다 보았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하면 됩니다." "어떻게요?" "소대협께서 넉 장의 무공비록을 잘 간수했다가 언제 시간이 있을 때 소림사로 찾아 오십시오. 소승이 경문의 부족된 장수를 메울 수 있도록 그때 소대협이 도와 주시면 되잖겠소?" "그렇군요. 좋습니다." 소영은 한문으로 기록된 넉 장의 무공비록을 찢어 냈다. 그런 후 나무 상자에 경문을 담아 대인 대사에게 주었다. "고맙소. 이 은혜 잊지 않겠소." "네, 부디 몸조심해서 가십시오." 대인대사는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상팔은 대인대사가 멀리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 "형님, 만일 저 상자 속에 씌어진 천축(天竺)문자가 무공을 수록한 것이라면, 저 중에게 속은 것 이 아니겠소?" 소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받았다. "거기에 정말로 무공이 써 있다손 치더라도 글씨가 천축문으로 되어 있으니 알 수가 없지 않겠 소. 우리가 아무리 애써 보아야 그 글을 읽을 줄 모르니 오히려 그것이 잘된 일이오. 소림사에 맡 겼다는 대의명분도 서겠고....." 그는 눈길을 돌려 백리빙과 두구를 바라 보았다. 백리빙은 마침 두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빙아야, 두형과 같이 저 도승을 장사성까지 바래다 드려라." 백리빙과 두구는 곧 대인대사의 뒤를 따라 달려 갔다. 소영은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그는 대인대사도 두 사람도 모두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상팔에게 몸을 돌렸다. 상팔은 근처의 조그만 나무에 기대고 서 있었다. "상형. 지금 장사성의 상황을 어떻게 보시오?" "원래는 우리쪽이 수세에 몰렸었지요.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심목풍이 계속 손을 쓰지 않았 소. 그 통에 우리쪽의 인명 피해는 아주 적었소. 그 후에, 형님이 이곳에 와서 그들의 몇 군데 소 굴을 쳐부수니 우리쪽의 사기는 충천해 있소. 일약 수세에서 공세로 뒤바뀐 것이지요."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요. 그러나 심목풍이 무당파나 우리 형제들을 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 해야 되요. 더군다나 이곳에서 그의 부하를 많이 죽였는데도 별다른 소식이 없지 않소? 이것은 필시 흉계가 있다는 증거요." 상팔이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곧 말을 받았다. "그런 것 같소." 소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상팔의 주위를 돌았다. 그는 그렇게 잠시 생각을 하더니 무겁게 입 을 열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닥친 것이오. 내 생각으론 지금 담이 크고 무공이 고강한 몇 사람과 같이 그들에게 손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마침 심목풍의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으 니 이런 기회가 좀처럼 없소. 백화산장은 심목풍만 없으면 오합지졸이오. 그들은 주력이 없는 것 이오. 이때 하늘의 도움으로 마땅한 기회가 만들어진다면......" 상팔은 눈을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무슨 기회를 바라는 것이오?" "첫째로 의외의 일은 사해군주와 소요자가 다시 심목풍과 손을 잡게 된 것이오. 그 두 군데의 세력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을 주는 것이오. 두 파가 심목풍의 수중에 들어 가면 그들은 막강한 힘으로 우리에게 반격할 것이오."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계속 말을 이었다. "두 번째의 일은 심목풍이 자기의 옛친구를 부르러 갔다는 것이오. 나는 그 중이 나의 은사와 의부의 원수라는 것을 장담할 수 없소. 그러나 십중 팔구는 틀림이 없을 것이오." 상팔은 긴 이야기에도 지루한 줄을 모르고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그 중이 누구이든 간에 심목풍이 스스로 먼 길을 찾아 갔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요. 필 시 그 중은 예사 인물이 아닐 것이오. 어쩌면 심목풍보다 무공이 높을지도 모르오." 상팔은 오랫동안 입을 다물 수 없어서 몇 마디 맞장구를 쳤다. "형님 말이 옳습니다." 소영은 옆에 놓인 조그만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의 무공은 요즘에 와서 어느 정도 진전이 빨라졌소. 화산 담운청의 검법을 이미 터득하였으 며 탄지신공도 공력면에서 많은 진전을 보았소. 이제 심목풍과 다시 겨룬다면 틀림없이 그를 꺾 을 자신이 있소. 그러나 우리에게는 운이 없나 보오. 개방의 손노선배님이 이곳에 없으며, 소요자 가 심목풍과 손을 잡았으니... 더군다나 그는 일대의 고수를 데리고 올 터이니 어찌 그를 당해 낼 수 있겠소. 심목풍의 운은 아직도 하늘의 도움을 받는가 보오." 말을 끝맺는 소영의 음성은 비통에 젖어 있었다. 151. 납치당한 공주 상팔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였다. "지금 사해의 영웅과 각대문파가 각성을 하고 있소. 그러니 형님은 심목풍을 죽이려는 생각을 너무 조급하게 갖지 마시오. 무림 내에서 심목풍에게 항거할 세력이 완전히 규합되면 일격에 백 화산장을 부수어 버릴 수 있을 것이오." "상형의 말도 옳긴 하오. 그러나 그 기간 동안이 큰 문제란 말이오." 상팔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 동안이라고요? 그 동안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까?" "심목풍의 악명은 너무나 높아 각대문파들이 마음대로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소. 그들이 각성을 하고 있다지만 정식으로 표면에 나타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오. 그 기간은 아무래도 이 년 정도가 되리라고 생각되오. 우리는 지금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틀린 생각이오. 심목풍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그 동안 무너진 조직계통을 재정비한다는 말이오. 그들의 명령 계통은 실로 놀랄 만하게 세밀하고 엄격하오." 이번에도 소영의 이야기는 길게 계속되었으나 상팔은 조금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주위를 훑어보고는 말을 계속했다. "심목풍이 다시 세력을 규합한다면 그 거대한 조직에 대항할 힘이 없게 되는 것이오. 지금 무림 에서 세력이 제일 강한 파가 소림파와 개방파인데 첩자를 풀어 놓았기 때문에 불원간 큰 분열이 있을 것이오. 더군다나 그는 상대의 크고 작음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강호의 세력을 흡수하고 있 다는 소문이오." 상팔은 소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심각해져 있었다. "천하영웅들을 한데 뭉쳐 우리편으로 만드는 것은 무위도장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오. 무위도장의 무공과 명성으로는 족히 그런 대임을 맡을 수 있소. 그러나 그분은 아직까 지도 심목풍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있소. 그러므로 지금 강호의 긴박한 사정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되오." "그렇다면 형님은 어떤 인물이어야 되오?"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얼마가 지나자 소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 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일에 적격자는 꼭 한 사람뿐이오. 그러나 그가 응하여 줄는지…" "누군데요?" 소영은 무뚝뚝하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우문한도!" 상팔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아, 선기서영의 주인 말이군요." "그렇소. 그와 항주(抗州)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르겠소." 상팔은 적극적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어째서 만나지 못한단 말이오?" 소영은 쓴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그는 출가하여 도승이 되겠다 하였었소. 만일 나와 만나기로 한 날에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는 속세와 인연을 끊고 도인이 될 것이오. 그가 도인이 되었다면 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당 시에는 그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었는데… 그래서 그를 그냥 보낸 것이오. 이제 와서 우리가 다급 하게 되니 그가 무엇보다도 긴요하게 필요하군요. 오늘의 일은 꼭 그가 있어야만 될 것이오." 상팔은 그의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그 우문한도가 정말로 그만한 능력이 있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오. 그는 기지와 지혜가 뛰어나 절대로 심목풍에 뒤지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곧 그 분을 모셔야 되겠군요" "빙아와 두구가 돌아 오면 곧 사주(沙州)로 떠납시다. 그래서 우선 마문비와 무위도장을 설득시 켜야 되겠소." 이 때 밖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와지고 있었다.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밖의 동정을 살폈다. "사원 녀석인가?" 말발굽 소리가 거의 문 앞까지 가까와졌을 때 상팔은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사원의 장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형님, 밖으로 나와 보시오" 상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펀뜻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 상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키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가 문께까지 이르렀을 때 상팔에게 부축을 받은 두구의 모습이 보였다. 두구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단번에 그의 상처가 중상임을 알 수 있었다. 소영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부상이 대단하오?" 두구는 눈을 감은 채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백… 리낭자가…" 소영은 손을 돌려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두형, 말하지 마시오" 그러나 무어라 입을 열려 애썼다. "백…" 상팔이 부드럴게 말했다. "두제, 형님의 말대로 입을 다물게. 이렇게 서두르면 오히려 한 마디도 못하고 죽고 마네." 그제서야 두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다. 소영은 자신의 진기로써 그의 운기를 도와 주며 상처를 살펴 보았다. 두구의 상처는 내상이었다. "누구에게 장력을 맞은 모양이군요." 두구의 코와 입에서는 가늘게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소영의 내력을 받은 두구는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다. 안색도 제 색을 되찾았고 숨도 별 이상 없이 쉬었다. 상팔은 소영에게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형님, 두제의 부상이 심하오." 소영은 계속 그에게 내공을 조식시켜 주면서 말을 받았다. "중상이오. 그러나 때를 잘 맞추어 그에게 내력을 도와 주었으니 목숨만은 건질 수 있소." "어떤 인물이 두제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소영은 돌연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쉬, 소란 피지 마시오." 소영은 한시라도 백리빙의 소식을 알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지금 그가 이야기를 하게 되면 생명이 위험하다. 우선 살리고 나서…' 상팔은 수심이 가득찬 눈빛으로 소영과 두구를 번갈아 보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다. 약 반 시간이 지나서야 두구는 눈을 떴다. 두구는 괴로운 표정으로 사방울 둘러보고는, "휴!"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소영에게 눈길을 돌리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백리낭자는 납치당하였소." 소영의 가슴은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빙아가… 빙아의 무공은 대단하여 그녀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만도 어려을 텐데… 누구일까? 그 녀를 납치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혹시…' 불길한 예감이 스쳤으나 짐짓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두형 괜찮소. 납치되었다니 생명은 보장될 것이오. 그녀를 납치한 인물이 누구요? 서두르지 말 고 천천히 말해 보시오." 두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심목풍을 만났습니다." 소영과 상팔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 "심목풍?" "그렇습니다. 대인 대사를 바래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심목풍의 급습을 받았습니다. 그는 먼저 백리낭자를 잡아 채고 나에게 일장을 뻗었습니다. 너무나 졸지의 일이라 미처 피하지도 못하였 소." 상팔이 바싹 다가앉으며 다그쳐 물었다. "심목풍이 뭐라고 안하던가?" "말했소. 그는 우리의 거처를 알고 있다 하였소. 그러나 자신이 바쁜 일이 있어 이곳으로 쳐들어 오지는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에게 전하라는 말도 있소이다. 앞으로 일 개월 후에는 형님이 찾지 않아도 직접 나타나겠다나요? 그는 나에게 일장을 뻗을 때 죽게끔 하지는 않은 것 같았소. 일부러 손을 늦춘 것이오." 그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두형,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시오. 너무 조급해 하면 몸에 해가 되오." 두구는 숨을 두어 번 몰아 쉬고는 다시 말을 꺼냈다. "심목풍은 소제가 말에 올라 타는 것을 도와 주었소. 그리고는 그 정도의 상처로는 형님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으니 죽지 않는다고 하였소. 그는 형님의 내력의 도움을 받아 한 시진 동안 운기 를 조식해야 된다고까지 가르쳐 주었소. 그 한 시진 동안이면 자신은 멀리 도망칠 수 있다는 것 이오. 형님이 소제의 죽음을 보고 그대로 자신을 뒤쫓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오." 소영은 혀를 찼다. "어허! 모든 것이 그의 마음대로 되는구려." 상팔이 무슨 생각이 난 듯 다급히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그도 한 가지만은 알아 맞추지 못하였소." "무엇이오?" "형님의 공력이 진보됐다는 것이오. 그는 형님이 동생을 살피는데 한 시진의 도움이 있어야 된 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형님은 불과 반 시진 만에 동생을 회복시켰으니 그의 짐작이 틀린 게 아니오." 소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두형이 다행하게 살아 왔으니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오. 심목풍이 두형을 죽이지 않고 보낸 것으로 보아 무슨 계책을 꾸민 것 같은데… 혹시 두형에게 알려준 말이 없소? 그의 행적이나 백 리빙의 행적을 말이오." 두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힘없이 말을 꺼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이 분명 함정인 것을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려 했소." "괜찮소. 어서 말해 보시오." 두구는 큰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매우 신중하여 금시라도 무슨 발작을 할 것 같았다. "심목풍은 백리낭자를 데리고 설봉산(雪峯山)으로 들어 간다고 하였소. 형님이 백리낭자를 만나 려면 설봉산으로 오라고 하였소." 상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그 설봉산의 길이는 천 리에 달하는데 어떻게 심목풍을 찾을 수 있겠소. 그가 어디로 찾아 오 라고 자세한 말은 안했나?" 두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해 주지 않았소. 그러나 그는 형님이 그곳에 오기만 하면 곧 사람을 보내 마중하겠다고 하였 소." "그럼 정말 호랑이굴로 들어오라는 말이로군. 그들은 설봉산의 제일 험한 장소에다 소굴을 만들 어 놓았을 것이 틀림 없소. 그리고 요소마다 자객을 잠복시켰을 것이오. 심목풍이 사람을 보내 마 중하겠다고 하였으니… 좀처럼 그 소굴을 가르쳐 줄 것 같지가 않소이다." 소영은 담담히 웃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심목풍이 무섭다는 것도 바로 그것을 가리켜 일컫는 말이오. 그의 계략은 간단하지만… 그러나 나는 백리빙을 찾으러 그곳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소." 상팔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백리낭자를 구해야지요. 그러나 형님이 혼자 가게 되면 정말로 위험합니다." "내가 혼자 가지 않으면 심목풍이 사람을 보내 마중나오지도 않을 것이오. 그렇다고 우리는 천 리나 되는 설봉산을 뒤질 수 없는 일 아니겠소?" 상팔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 "형님, 그럼 이렇게 합시다. 형님이 먼저 길을 가면서 암암리에 표식을 하기로… 우리는 그 표식 을 따라 형님의 뒤를 따르면 될 것이 아니오." 소영은 가볍게 탄식을 하였다. "심목풍이 어떤 인물이라고 그런 것을 생각지 않았겠소. 도처에 깔려 있는 그의 부하에게 대번 에 들킬 것이오." "아닙니다. 우리는 변장을 하고 뒤따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소영은 그 말에는 더 반대치 않았다. "좋소! 지금의 형편으로서는 딴 방법이 없으니… 그러나 이 일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도리어 역효과가 나오. 상형께선 무위도장과 마문비에게만 이야기하여 주시오. 내 뒤를 따라 오는 사람은 고수로 정선해서 다섯을 초과하지 않게 하시오." "형님은 누구를 지목하시겠습니까?" 소영은 잠시 생각하였다. 그는 내심 다섯 사람들을 손꼽아 보는 것이었다. "손노선배님께서 오시게 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테고… 그리고 무위도장이 온다면 반가 운 일이지만 억지로 무리해서 오진 마시오. 당원기와 삼양신탄(三陽神彈) 육괴장(陸魁章), 그리고 상형, 이렇게 다섯이면 충분하오. 두형은 상처가 심하니 어디 조용한 곳을 물색하여 얼마 동안 요 양을 시켜야 될 것이오. 상형은 마문비에게로 달려가서 모아 놓은 군호들을 잠시 은신케 하도록 전하시오. 앞으로 얼마 동안은 백화산장의 인물들과 충돌을 피해야 될 일이 있소." 상팔은 미간을 약간 찡그리고 물었다. "만일 손노선배님께서 돌아 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오?" "할 수 없지. 한 사람 모자라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오." 소영은 말을 끝내고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우뚝 섰다.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아참, 그리고 또 한 가지, 영은사(靈隱寺)로 찾아가 우문선생에게 이 말을 전하고 도움을 청해 보시오. 내가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하면…" "그분도 설봉산으로 같이 모시고 갈까요?" 소영은 묵묵부답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금화부인도 생각났다. '금화부인이라면 틀림 없이 도와 줄 것이다.' "상형, 수고스럽지만 금화부인을 만나게 되면 그녀에게도 부탁해 보시오." 상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시행할 테니 조금도 염려마시오." 소영은 눈길을 돌려 두구를 바라보았다. 두구는 이제 좀 정신을 차렸는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두형, 지금은 좀 어떠시오?"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겠습니다." 소영은 손을 내밀어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은 아직까지도 많이 있었으나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요양하면 곧 완쾌될 것이오. 아마 설봉산에 다녀 오면 전과 같이 건강한 사람이 되 어 있을 것이오." 상팔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 우리는 특이한 암호를 정해야 하지 않겠소. 형님과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하자면 자연적인 것을 사용할 수밖에… "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쑥덕공론을 했다. 소영의 말대로 자연의 물건들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사람은 먼저 두구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소영은 일각도 지체할 수 없는 몸이라 부득이 두구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 다. 두구는 십분 이해하였다. "형님, 몸조심하십시오. 소제도 몸이 낫는 대로 설봉산으로 달려가겠습니다."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금시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소영은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끼면서 그대로 두구의 곁을 떠났다. '두형! 미안하오. 곁에 있어야 될 텐데…' 소영과 상팔은 일시에 성 밖으로 빠져 나왔다. 두 사람은 수중사주(水中沙州)가 있는 곳까지 달려가 마문비가 설치해 놓은 파수대에 다다랐다. "여기까지 와서 심목풍을 만날 염려는 없으니 어서 가보시오. 난 이대로 설봉산을 찾아 떠나겠 소." 소영은 혹시나 중도에서 심목풍이 나타나 상팔에게도 해를 끼칠까봐 이곳까지 같이 온 것이었 다. 상팔은 소영의 바쁜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만류하거나 입을 열지 않았다. "상형, 수고하시오." 소영은 몸을 돌려 쏜살같이 서쪽으로 달려갔다. 상팔은 멀리 사라져 가는 소영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중도에서 아무 일 없었으면…' 소영은 잠시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면서 백리빙을 입속으로 불러 보았다. '빙아야… 얼마나 고생이 많겠느냐? 심목풍의 악독한 수단에 걸려 뜻하지 않은 고생을 하는구 나. 조금만 참아라. 이 오빠가 목숨을 걸고 너를 구하러 간다.' 소영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요행을 바라며 계속 질주해 갔다. '중도에서 다행히 심목풍을 만날 수 있다면 힘 안 들이고 빙아를 찾을 수 있는데…' 소영은 오직 백리빙을 구해야 된다는 신념으로 하루종일 달렸다. 밤에도 쉬지 않았다. 얼마를 달렸는지 동쪽 하늘이 훤하게 밝아 왔다. '벌써 동이 트는가 보군. 얼마나 왔을까? 아직도 설봉산은 멀었나?' 소영은 싱후한 내공에도 불구하고 전신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잠시 달리니 넓은 길이 나타나고 커다란 기와집 한 채가 보였다. 펄럭이고 있는 휘장으로 보아 음식을 파는 객점 같았다. 소영은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마당을 쓸고 있던 오십여 세쯤 된 노부인이 소영을 맞이했다. "어이구, 웬 손님이 이렇게 일찍 오실까? 어서 오세요." 노인은 좀 수다스런 인상을 풍기었다. 소영은 마루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주인, 먹을 것이 있습니까, 그는 전력을 다하여 밤길을 달려왔던 터라 몹시 배가 고팠다. "예, 예, 있구 말구요. 어서 안으로 들어 가세요." 소영은 그녀가 권하는 대로 대청으로 올라갔다. 주인은 곧 뒤따라 와서는 소영이 자리잡은 탁상을 닦으며 힐끗 쳐다보았다. "손님, 퍽 이르셨습니다." "소생 산길을 지나다 그만 길을 잃었소이다. 그래서 밤길을 달려 이 곳까지 온 것이오." 주인여자는 무엇이 우스운지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 그러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퍽 시장하실 텐데 빨리 식사를 올리지요." "고맙습니다. 주인! 한 가지 물을 것이 있는데…" 주인여자는 이상한 눈빛으로 소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엇인데요?" "이곳이 바로 설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까?" "손님께서 빨리 가실 수 있다면 날이 어둡기 전에는 닿을 수 있어요. 그러나…" 소영은 무엇인가 알아낼 욕심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무엇입니까?" "그 설봉산에는 험한 산봉우리가 수없이 많으며, 그 길만도 천 리나 됩니다. 손님께선 어디를 찾 으시는지요?" '그렇지! 내가 설봉산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우선 설봉산의 위치나 알아 봐야지.' 소영은 내심 싱거운 웃음을 지으며 주인여자의 말에 반문했다. "주인께선 조금 전에 한 말이 설봉산 어디를 가리키는 것이오? 저녁 때까지는 다다를 수 있다는 곳 말이오." 주인여자는 다시 호들갑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손님께서 어디를 묻는지도 모르고… 호호, 저는 설봉산의 지맥을 두고 한 말이지요. 설 봉산의 주봉은 아직도 오백 리나 더 가야 되지요." 소영은 낙심하였다. '내가 여태껏 달려온 길이 이백 리는 족히 되는데 아직도 멀었다니… 심목풍이 빙아를 데리고 이곳으로 왔으면 나보다 늦을 터인데. 그렇다면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주인여자에게 다시 물었다. "주인, 장사에서 설봉산으로 가려면 길이 이곳과 틀립니까?" 주인여자는 소영이 길을 묻는 이야기가 자꾸만 엉뚱한 데로 흐르자 이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손님께선 설봉산 어디로 가려는지를 모르고 있으시지요?" 소영은 쓴웃음을 띠었다. "그렇소이다. 제 친구가 설봉산에서 만나자고 하였지 어느 곳을 정해 주지는 않았소." 주인여자는 동정의 빛을 보였다. "저런저런…그렇게 흐리멍텅한 약속이 어디 있담. 만일 손님께서 설봉산 주봉을 가시려는 길이 라면 잘못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봉이 아니라 칠성담(七星潭)을 찾으신다면 이 길이 맞는 것입니 다." 소영은 가볍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주인아주머니의 견식이 퍽 넓으십니다." 주인여자는 자신을 칭찬하는 소영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했다. "이래뵈도 과거에는 단방(單幇)으로서 오, 륙 개의 성을 돌아다녔었다오. 그곳 칠성담은 아마 열 번을 들렀을 것입니다. 지금은 늙어 그렇게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또한 칠성담을 찾지 못하는 몸 이 되었습니다." "그럼 장사에서 칠성담으로 가려면 꼭 이 길로 가야 된다는 말씀이군요?" 주인여자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 없습니다." 소영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들이 설봉산 주봉으로 갔다면 내가 길을 잘못 들은 것이지. 하여튼 모든 것은 하늘에 맡겨야지. 다행히 심목풍 일행이 칠성담으로 떠났다면 필시 내가 빨리 도착하였을 것이다. 몸도 피곤하니 이곳에서 쉬면서 그들을 기다려 보자.' 소영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것을 본 주인여자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두를 한 접시 들고 왔다. "손님,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십시오." 그리고는 조그만 잔에 차를 따랐다. 소영은 우선 목이 마르므로 찻잔을 들었다. 그가 막 차를 마시려는데 주인여자의 안색이 언뜻 변하는 것을 느꼈다. '아차! 내가 또 실수를 저지를 뻔하였구나. 강호에는 모든 일이 음흉스러운데… 더욱이 심목풍의 마수가 곳곳에 뻗혀 있어 이곳도 혹시…' 소영은 슬그머니 찻잔을 탁상에 도로 놓았다. "주인장, 우리 이야기나 합시다." 하고는 건너쪽의 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에 앉으시오. 아직 손님도 없고 그리 바쁘지도 않은 것 같으니…" 주인여자는 소영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건너쪽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앉자마자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손님께선 무슨 말씀이라도…" "아니오. 무슨 긴요한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심심해서 그러는 것이오. 주인께서도 아 침 일찍부터 분주히 일하셨으니 시장하실 것이오." 소영은 만두 접시를 그녀에게 밀어 주었다. "자! 같이 만두나 드십시다." 주인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가 있나요 저는 장사하는 사람인데…" "괜찮습니다. 이것은 제가 산 것이니 그렇게 사양치 마시오." 주인여자는 다시 소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손님은 퍽 건방지군.' 그녀는 빙그레 웃음을 띠고서 만두를 집어 먹었다. "손님은 이곳을 의심하는 모양이지요? 그렇지요." 소영은 가슴이 뜨끔함을 느꼈으나 짐짓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주인, 이 차도 드시오. 목이 메이면 체하십니다." 주인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손님은… 좋아요, 그렇게 나를 의심하고 있다면…" 그녀는 즉시 그 차를 마셔 버렸다. 소영은 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담담히 미소를 흘렸다. "소생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이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객전에 투숙했는데 그중 하나가 까닭없이 죽었다는 것이오. 그리고 그 객잔의 주인은 죽은 사람의 살로써 만두를 만들었다는 것 이오. 훗날 그 사실이 밝혀지기는 하였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죽은 뒤였소. 그래서 소생도 어디를 가든 조심을 하는 것이오. 주인께서는 너무 허물치 마시오." 주인여자는 얼굴을 붉히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은 표독스러웠으며 눈빛은 잔뜩 살기를 띠었다. "만일 내가 아직도 젊었다면 버릇없는 당신을 혼내주련만. 나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정말 염 치없는 짓이오. 마치 중에게 왜 머리를 깎았냐고 덤비는 것이 아니오?" 그리고 홱 돌아서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영은 그녀의 토라진 모습을 보고 내심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했나 보군, 그 대신 음식값이나 후하게 치러야겠다.' 주인여자는 주방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소영은 남은 만두를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그가 만두를 거의 다 먹었을 즈음 돌연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분명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하나… 둘… 말발굽 소리로 보아 두 필의 말이었다. 첫 번째로 다다른 사람은 우림한 체격에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늙은 노인이었다. 그는 등에다 청강(靑銅)으로 된 일원쌍륜(日月雙輪)을 메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에는 표대(標袋) 를 차고서 가볍게 말에서 내려섰다. 소영은 그 사람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어? 저 사람은…' 상대는 다년간 만나지 못한 초곤산이었다. 왕년에 그는 악누님이 갖고 있는 금궁의 열쇠를 뺏으려고 간섭했던 인물이었다. 둘째의 인물은 청포를 입고 머리를 뒤로 꼬아 튼 사마건이었다. 소영은 그들은 주의 깊게 살피며 내심 이상한 생각을 가졌다. '저 두 사람이 어째서 한데 뭉쳐 다닐까?' 이 때 뒤따라 내린 사마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초형!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갑시다." 초곤산은 사방울 훑어보았다. "사마형을 따라 벌써 보름을 헤매었는데 소영을 찾지 못했으니 어떻게 된 일이오?" 사마건은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제가 무어라 했습니까? 애초부터 그를 찾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소." "사마형은 한 달 내로 소영을 찾을 수 있다고 했잖소?" 사마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그러나 오늘이 며칠이나 되었기에 그토록 따지시오?" 초곤산이 잠시 손을 꼽아보더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십칠 일!" "그것 보시오. 아직 한 달이 되려면 십삼 일이 남았으니 너무 조급히 굴지 마시오." 초곤산은 불끈 화를 내었다. "조급히 굴지 말라니! 그래 십칠 일이나 헤매어도 찾을 수 없는 것을 십삼 일이 남았다고 찾을 것 같소?"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거칠어졌다. 소영은 변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별 관심을 사지 않았다. 그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면서 내심 의아심을 가졌다. '이상하다! 그들이 왜 나를 찾아 다닐까? 그리고 그 동안 초곤산은 어디 있었을까?' 소영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는데 돌연 벼락 같은 소리가 들렸다. "주인장, 주인장! 아무도 없소?" 초곤산은 대문으로 들어서며 주인을 몇 번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초곤산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다시 주인을 불렀다. "주인, 주인장 계시오! 손님이 왔으니 어서 맞으시오." 그래도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초곤산은 얼굴을 붉히며 앞에 있는 탁상을 힘껏 걷어 찼다. "우지끈!" 탁상은 힘없이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다. "내가 일생 동안 사방울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손님 접대를 하는 곳은 처음 보았다. 그래도 나 오지 않으면 모두 부수어 버리겠으니 알아서 해라!" 초곤산의 음성은 조그만 객잔을 쩌렁쩌렁 울렸다. 사마건은 사태의 긴박함을 느끼고 앞으로 나섰다. "정말 좀 이상하군. 초형께선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오. 내 안에 들어가 자세히 알아 보겠소." 초곤산이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알아볼 것도 없소. 내 목소리가 저 안까지 들렸으니 무슨 반응이 있을 것이오." "혹, 주인의 신상에 무슨 화가 미친 것이나 아닌지요?" 그제서야 초곤산도 더 말리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서 들어가 보시오." 사마건은 어깨를 들썩거리더니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사방울 유심히 훑어보았다. 그의 눈길이 대청으로 옮겨져 소영과 정면 으로 마주쳤다. 소영은 얼른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외면하였다. '일이 점점 묘하게 되는군.' 소영의 예감으로는 주인여자가 필시 죽었을 것 같았다. 사마건은 잠시 소영을 쏘아 보고는 몸을 날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주방으로 들어 가고 잠시 후 주방 안에서, "초형, 이리로 와 보시오." 하는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초곤산은 흰 수염을 날리며 번개같이 달려 들어와 주방으로 들어갔다. 초곤산이 들어간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먼저 사마건이 눈살을 찌푸리고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초곤산이 나왔는데 그의 팔에는 주인여자가 들려 있었다. 주인여자는 죽었는지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소영에게 다가왔다. "손님에 한 마디 묻겠소이다." 먼저 사마건이 공손한 포권과 함께 소영에게 입을 열었다. "손님께선 언제 이곳에 오셨소?" 소영은 푹 눌러 썼던 모자를 약간 위로 들어 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소영의 정체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소영은 그들의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주인여자에게로 눈길을 돌리고 되물었다. "죽었습니까?" "아직 죽지는 않았소. 이것은 당신의 수작이오." 소영은 기분이 언짢았으나 꾹 눌러 참았다. "아니오. 제가 어찌 주인에게 해를 입혔겠소." 초곤산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무엇이 아니겠소. 당신은 이 여인의 재산이 탐이 나서 손을 썼을 것이오." 소영은 그래도 화를 누르고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시오? 혹시 주인이 스스로 자결하려는 것이나 아닌지요?" 사마건이 미간을 찡그리고 다그쳐 물었다. "당신은 언제 이곳에 왔소?" "아마 반 시진 정도 될 거요." 사마건은 소영의 앞에 놓인 만두를 힐끗 쳐다보았다. "당신이 이곳에 왔을 때는 주인이 무사했을 것 같은데…" "그렇소. 주인이 차도 갖다 주고 만두도 주었소." "그 뒤로는…" 소영이 다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들에게 보냈다. "그 뒤로 주인이 이 차를 마시고 주방으로 되돌아갔소." 사마건은 소영이 가리키는 주전자를 유심히 쳐다보고는, "그렇다면 이 차가 수상하군." 하면서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독성이 강한 약이 들어 있군. 색깔도 냄새도 없다시피한데 손님은 잘도 알아 내셨소." "원 별말씀을…" "이 주인여자는 아마 당신의 보따리를 탐낸 것 같소. 몰래 차에다 약을 타서 당신을 해하려 했 지만 도리어 자신이 당한 것이오. 그렇지 않소? 당신에게 강제로 먹여서 말이오." 소영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어느 쪽이오?" 소영은 눈길을 돌려 주인여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주인이 스스로 먹었소. 제가 의심을 하니까 자기 스스로 먹어 보인 것이오." 초곤산이 피식 실소를 하며 말참견을 하였다. "주인은 참 어리석군. 자신이 독을 타고 그것을 먹다니…" "아니오. 그녀는 나에게 차를 먹이기 위하여 일부러 그것을 먹은 것이오. 그리고는 해약을 먹으 러 주방으로 갔으나 시간이 늦은 것이지." 사마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당신의 말이 옳군요. 당신은 이 찻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저는 그저 육감으로 알았을 뿐이오. 그러나 그것이 정말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으므로 두 분께 서 오시지 않았다면 아마 저도 이것을 마셨을 것이오." 초곤산이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어째서 당신을 죽이려 했을까요?" 소영은 그들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주인이 죽지 않았다니 깨어나거든 물어 보시구려." "하아, 그것도 그렇군. 우리가 해약을 찾아 그에게 먹였으니 곧 깨어나겠지. 아니, 그보다도 깨우 는 것이 빠르겠다." 사마건은 안으로 들어가서 그릇에 물을 떠왔다. 초곤산은 주인여자를 내려 놓았다. 사마건은 조금도 주저없이 그 찬물을 주인여자의 얼굴에다 끼얹었다. 152. 사현인의 강호 출정 주인여자는 전신을 가볍게 떨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소영과 사마건 그리고 초곤산을 번갈아 보면서 두려움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것은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소영은 담담한 웃음을 띠고 그녀의 말을 받았다. "주인께서 경과를 자세히 이야기하시오. 그럼 우리들도 당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으니까." 주인여자는 두려운 눈빛으로 사방울 두리번거리더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사실 아무리 오십여 세의 노부인이라지만 모르는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주인여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께서 이곳에 오시기 전에 어떤 사람이 찾아 와서는 약을 한 봉지 주었습니다. 손님께서 이 곳에 들르면 찻속에 타라구요. 그 사람은 저에게 협박을…"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갔소." 주인여자는 안방을 가리켰다. "바로 저 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짓을 못한다고 했으나 그 사람의 위협에… 그 사람 은 우리 가족을 인질로 잡아 두고 있었습니다."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사마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사마형! 당신이 주방에서 이 주인을 보았을 때 다른 이상한 것은 못 보았소?" 사마건은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음에 적지않이 놀랐다. "당신은 누군데 내 이름을 아시오?" 소영은 빙그레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소영이오. 바로 당신들이 십칠 일을 찾아도 만나지 못했다는 소영이란 말이오." 초곤산도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당신이 소영이란 말이오?" "그렇소이다." 그러자 사마건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어쩐지 목소리가 비슷하다 했더니…" 그리고는 초곤산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초형, 내 점괘가 어떻소? 하하…" 초곤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믿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묘하군 묘해, 선뜻 믿기가 어렵군." 소영은 할 수 없이 인피가면을 벗었다. "이래도 믿지 못하시겠소." 초곤산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건은 그런 모양을 보고는 또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오늘도 소영을 만나지 못했다면 초형에게 대단한 구박을 받을 뻔하였소이다." 초곤산은 주저없이 소영의 손을 부여잡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소대협 반갑네. 소대협이 어렸을 때부터 이 늙은이는 소대협의 인품을 짐작해 왔었는데 과연…" "아닙니다. 우연히 많은 수난 곡절을 겪게 되어 그 사이에 조금 무공을 익혔을 뿐입니다." 두 사람이 반가운 회포를 풀고 있는 사이에 사마건이 안방으로 날아갔다. 소영은 대뜸 그의 행동 목적을 짐작하였다. '독약을 주었다는 사람을 찾으려는군.' 그러나 초곤산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에게 소리쳤다. "어이, 이 사람! 어디로 가나?" 소영은 그의 다음 말을 막았다. "노선배님, 놓아 두셔도 됩니다. 아마 사람을 찾는 것이겠지요." 초곤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돌연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일시에 밖으로 시선을 보내며 동정을 살폈다. 소영은 재빨리 인피가면을 쓰며 초곤산에게 말했다. "노선배님, 용서하십시오. 아직은 다른 사끝에게 제 모습을 나타내고 싶지가 않습니다." 초곤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자네는 지금 심목풍이 제일 귀찮게 생각하고 있는 강적이니 쉽게 정체를 보일 수 없지." 객잔으로 달려오는 무리는 모두 네 명이었다.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육십 사오 세 되어 보이는 늙은이였다. 그는 청삼을 입고 있었는데 무림에서 사대현(四大賢)으로 불리고 있는 낙양 주문창(朱文昌)이었 다. 그 뒤를 이어 제남 진사정(秦士庭), 금릉 우자청(尤子淸), 그리고 강주 허시당(許時堂) 등 모두 네 명이었다. 초곤산은 강호를 오랫동안 유혈했던 까닭에 그들을 잘 알았다. '음, 강호의 사대현이 무엇하러 이곳에 왔을까?' 그는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인사말을 꺼냈다. "오랜만입니다.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이토록 모이게 되었는지 모르겠소." 앞에 섰던 주문창이 예를 받았다. "아, 곤산형이었구려. 어쩐 일로 이곳까지…" 초곤산은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이 늙은이야 정처 없는 몸이 아니오? 그런데 네 분께선 어디를 가시는 길이오, 아니면 명산을 구경하고 들아가시는 길이오?" "그렇소. 명산을 구경하고 오는 길이오. 우리 네 사람은 항상 뜻이 맞아 강호의 어떠한 시비에도 말려들지 않소. 그저 조용한 세윌을 보내는 것이오." 초곤산도 그들의 지난 행적을 자세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렇지요 네 분의 의명은 강호 모두가 아는 바요 허나 무림에서 발을 빼고 산이나 물을 찾아 조용한 세월을 보낼 수도 없는 실정이 아니오? 요사이는 무림을 떠났던 영웅들이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다시 무림에 되돌아 와서는 아깝게 목숨을 잃고… 모든 영웅들이 그럴진데 유독 네 분만은…" 그들을 가리켜 사대현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강호의 모든 인물들이 한 번씩은 자신의 명성을 위하여 손을 쓰는 법인데 이 네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의를 지키며 강호의 온갖 유혹을 뿌리치는 의협이었다. 주문창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강호의 시비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들의 맹세였소. 그러나 요사이 심목풍이라는 악인 이 나타나 강호를 어지럽힌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강호의 각대 문파가 그를 두려워하며 손은 쓰지 못한다는 것도 한심스러운 일이오. 그런데 소문에 듣기로는 이십 세밖에 안 된 소영이 라는 청년이 단신으로 심목풍에게 도전한다니 정말 그가 참된 영웅이오. 강호의 시비를 외면하던 우리가 그 소영이라는 의협의 용기에 감탄하고…" 그는 눈길을 돌려 세 사람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은 다같이 고개를 덕였다. 주문창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소영이라는 청년이 혼자 나서는데 어찌 방관만 하겠소. 그래서 우리는 칠 일 동안 밤낮을 가리 지 않고 의논한 결과 강호에 나서기로 하였소." 초곤산은 기쁜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럼 네 분께선 심목풍에게 도전한다는 것이오?" 주문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우리들은 우선 그 소문의 진가를 알아보려는 것이오." "그래요? 네 분께선 진가의 판단을 하셨습니까?" 주문창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진사정이 말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결과로는 우리에게 칼을 쥐라는 것이었소. 강호의 혼란을 바라보지만 말고 소영이 라는 대협의 뒤를 따르라는 것이지요." "그럼 네 분께선 강호의 시비에 참견하겠다는 것이군요?" 이번에는 세 번째에 있던 우자청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네 명은 무림의 의를 위해 칼을 잡기로 하였소." 그러자 초곤산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이상한데… 어찌 된 일일까?" 네 번째에 있던 허시당이 물었다. "초형께선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이오?" "무림에서는 네 분이 칼을 들게 되었다는 것을 곧이 듣지 않을 것이오." 주문창이 주위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오. 우린 강호의 정의를 위해 칼을 잡는 것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정식으로 심목풍에게 도전하기에는 아직도 한 가지 일이 남아 있소." "무슨 일이오." "우선 소영이라는 대협을 만나봐야 하오. 그를 만나야 최후의 결정을 내릴 수 있소." 초곤산은 고개를 돌려 소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소영은 미소를 띤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분께선 소대협과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지요? 저에게 할 수 없겠소? 소대협을 만나면 틀림 없이 전해 드리리다." 진사정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오. 이 일은 소영이라는 분에게 직접 물어 봐야 될 문제요." 우자청이 계속 말을 이었다. "곤산형의 말씀은 소대협의 행방울 알고 있는 듯한데…" "자세히는 모르나 찾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렵지도 않지요." 허시당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이미 수개월 동안이나 그를 찾고 있소. 근래에 와서 그가 장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 렇게 찾아온 것이오. 그리고 설봉산의 칠성담이 너무나 아름답다기에 혹시 그곳에서 산을 구경하 지나 않나 하고 가는 중이오." 초곤산은 점차로 난처한 입장에 처하였다. '이들이 소명을 그렇게 애쓰며 찾는데 모른 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소영 은 아직껏 한 마디 말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지 않으려는 것 같군.' 이런 생각을 하고는 짐짓 화제를 바꾸었다. "네 분은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시오. 우선… 안으로 드셔서 차라도…" 그제서야 사대현은 대청으로 올라섰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어느새 준비하였는지 사마건이 따끈한 차를 들고 나왔다. 사마건은 마치 객잔의 주인처럼 거침없이 행동했다. 그는 사대현들의 앞에 찻잔을 내려 놓으며, "황야에 있는 소점이라 차맛이 변변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장하실 테니 곧 만두도 올리겠 소이다." 하고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소영은 속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킬킬거렸다. 잠시 후 사마건은 쟁반 하나 가득 만두를 담아 들고 왔다. 사마건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허시 당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곳의 종업원이 아닌 것 같은데…" 초곤산도 참지 못하고 싱겁게 웃었다. "아니오. 그는 사마건이라고 나의 동행이오." 그리고는 사마건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마형, 인사하시오. 이분들은 강호에서 사대현이라 일컫고 있는 의협들이오." 사마건은 정중히 포권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사마건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을 미처 몰라 뵙고…" 사마건은 중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으며, 사대현도 강호의 왕래가 없었기에 서로 모르고 있었다. 사대현은 다같이 고개를 숙여 답례하였다. 이 때 안방에서 한 노인이 미친 듯이 뛰어 나오면서 소리쳤다. "흑뉴아… 흑뉴아…" 흑뉴아는 바로 주인여자의 이름인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자기 부인에게 무슨 변이 생긴 것을 직감하고 비통하게 부르짖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대청 주위를 살펴 보니 그 주인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노인이 울부짖으며 부르는 소리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애처로움이 담겨져 있었다. 소영은 그의 모습이 측은하다고 생각하는 중에 펀뜻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옳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사마건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소영은 초곤산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말을 꺼냈다. "노 선배님, 저 노인이 불쌍하니 제가 여인을 찾아 보겠습니다." 초곤산도 그 노인의 통곡에 마음이 아픈 듯했다. . "젊었을 때는 부부이고 늙으면 한 몸이라는데 어찌 그가 슬프지 않겠나. 그것 참 좋은 생각일세. 어서 찾아 보게." 소영은 밖으로 나가며 사마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사마건은 즉시 그의 뜻을 알아 채고 사대현에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천천히 드시면서 말씀하십시오. 소생은 저 사람을 도와 주인여자를 찾아 보겠습니다." 초곤산도 어림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으므로 말리지는 않았다. 사마건은 소영의 뒤를 따라 오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저들을 알고 있소." "조금은 아오. 그들은 자신만 믿고 심목풍에게 대들다가 한 번 혼난 적이 있소." 사마건은 소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저 네 사람은 소영을 찾고 있잖소?" "알고 있소. 그러나 그들은 지금 서독(書毒)에 걸려 있소. 지금 그들에게 내 정체를 밝힌다면 또 다시 커다란 논쟁이 일어날 것이오. 난 지금 그들과 논쟁할 시간이 없는 몸이오." 사마건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소형, 당신은 무슨 큰 걱정이 있는 것 같소." 소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꼭 사람을 찾아야 되오." "소형이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제게 가르쳐 주시겠소?" 소형은 그가 점을 잘 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마형, 나는 한 낭자를 찾고 있는데 점이나 한번 쳐주시겠소." 사마건은 빙그레 회심의 웃음을 지었다. "정성이 깃들어야 점괘도 영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소형이 자세히 말해 준다면 나도 정성껏 점을 치겠소이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사마형을 믿고 이야기하겠소."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며 객잔의 뒤로 돌아가니 조그만 초가집이 한 채 보였다. 사마건이 반기며 그곳을 가리켰다. "오, 저기 마땅한 곳이 있군요. 저 초가집에 들어가서 점을 칩시다." 소영은 초가집의 동정을 한 눈에 살펴 보았다. '적이 숨어 있을 것 같지는 않군.' 그러나 만약을 위하여 그는 사마건 보다 앞서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만약에 적이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하면 사마건에게 화가 생길까 염려가 되어서였다. 소영은 온 몸에 진기를 모으고 방으로 뛰어 들었다. 소영의 눈에 언뜻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적인가?'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상대를 주시하며 방어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상대는 객잔의 주 인여자였다. 그녀는 방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소영은 일시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피식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사마건이 곧 뒤따라 들어와서는 방안의 사람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먼저 소영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부인, 두려워마시오. 부인을 해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인의 남편도 무사하니 안심하 십시오." 그 말에 주인여자는 고개를 번쩍 들고 물었다. "정말입니까?" 소영은 주인여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려움에 입술까지 떨리고 있었다. 소영은 우선 품 속에서 금전을 십여 개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자, 받으시오. 이것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시오.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오." 주인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좀처럼 받으려 하지 않았다. 사마건이 옆에서 소영의 말을 거들었다. "부인, 받으시오. 부인이 찻속에 약을 넣은 것은 자의가 아니었으니 죄가 없소. 어서 이곳이나 떠나시오. 그리고 앞으로 이 돈을 밑천 삼아 농사나 짓고 사시오." 주인여자는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른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전…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소영은 그제서야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차, 나에게 독약을 넣게 한 사람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군." 그는 곧 다그쳐 물었다. "부인에게 약을 준 사람은 어떻게 생겼소?" 주인여자는 눈물을 닦으며 자세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다 헤어진 옷을 입었으며 사십여 세쯤 됐습니다. 얼굴은 검은 편이고 눈썹이 아주 짙었어… 그리고 왼쪽 눈썹 밑에 콩알만한 붉은 점이 있었어요." 소영은 더 말하려는 그녀에게 손을 저었다. "됐습니다. 이제 나가 보십시오. 그러나 어디를 가든 간에 우리의 이야기를 하면 안 되오. 우리 보다 부인의 목숨이 먼저 위험할 테니 말이오." 주인여자는 몇 번이나 큰 예를 올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급히 말을 꺼냈다. "사마형, 점이나 쳐주시오." 사마건은 빙그레 웃음을 띠고 품 속에서 점치는 것을 꺼내면서도 다른 말을 하였다. "소형, 이것보다 더 좋은 수가 있을 것이오." "무엇이오?" "만일, 소형에게 독약을 먹이라고 주인에게 협박한 사람을 잡으면 그 보다 더 큰 정보를 얻을지 도 모르오." 소영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우울해졌다. "그러나 그놈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지 않소? 벌써 멀리로 도망쳤을 텐데." 사마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 놈은 틀림없이 이 근처에 있을 것이오. 자신이 시킨 일의 결과를 알려고 말이오. 만 약 소형이 그 약을 먹고 정신을 잃었다면 소형을 데리고 심목풍에게 가려고 했을 것이오. 그리고 만약 실패했을 경우에는 주인을 죽이려고 할 것이오.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지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소형, 이곳에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사마건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밖으로 나가 바람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소영은 그가 어떤 계책을 세웠다는 것을 알았다. '사마건은 강호의 견식은 부족하지만 지혜는 남달리 뛰어난 사람이니 무슨 기발한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르지.' 이런 생각으로 초가집을 나서려는데 대문께로 주인 노인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 노인이 왜 이곳으로 을까? 부인을 아직도 못 찾았나?' 그러나 그가 가까이 온 것을 보고서야 사마건이 변장한 것임을 알았다. 소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사마형이 웬일이오? 별안간 객잔의 주인이 되고 싶었소?" 사마건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별말씀을… 적을 유인하여 사로잡으려고 하오." 적이 근처에 숨어 있다가 사마건을 주인으로 잘못 알고 손을 뻗칠 것이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사마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소영에게 보내고는 번개같이 초가집을 나가 정말 주인 노인처럼 어 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소영은 피식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객잔으로 들어갔다. 대청에서는 아직까지도 초곤산과 사대현들이 만두를 먹고 있었다. 소영이 흔자 들어오는 것을 본 초곤산은 대뜸 입을 열었다. "아니 사마형은 어디에 갔소? 어째 혼자 들어오시오." "곧 돌아올 것입니다. 잠깐 바쁜 일이 있어 어디 좀 갔소. 그러나 먼 곳은 아니니까요." 초곤산은 더 묻지 않았다. 사대현들도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초곤산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그들도 들추려 하지 않았다. 소영은 내심 조마조마하며 한 자리에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마형이 일을 잘 처리할까? 아니면 상대가 의외로 강하여 고전을 면치 못할까?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나섰으니 언제 돌아올 것인가…' 그는 대청을 왔다갔다 하면서 가끔 문쪽을 바라보았다. 약 반 시진이 지나 사마건이 어깨에 웬 사람을 걸머지고 대문을 들어섰다. '잡았구나!' 소영은 기쁜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사마형 그 놈이오?" 사마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깨에 멘 사람을 땅에다 내려 놓았다. 그러자 어디에서 보았는지 주인여자가 달려왔다. 그녀는 주저없이 그 자의 얼굴을 젖혀 보더니 소영에게 말했다. "이놈입니다. 맞아요 이놈이 손님에게…" 소영이나 사마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주인여자는 얼마나 악에 받쳤는지 그의 코를 떼어 버렸 다. 사마건은 더 이상 그대로 놓아두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그녀를 말렸다. "부인, 이제 됐습니다. 어서 이곳을 피하시오." 주인여자는 마지못하여 몸을 일으키곤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마건은 그 자의 혈도를 풀어 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자가 큰 나무 위에 숨어 있다가 나에게 덮치는 것을…" 그 자는 주인여자의 말대로 거지 같은 꼴에, 눈썹 밑에 붉은 점이 있었다.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 클어뜨리고 개방의 제자로 변장하고 있었다. 그 자는 혈도가 풀리자 번쩍 눈을 뜨고는 사방울 두리번거렸다. 소영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여보게, 자네는 백화산장의 장한이 아닌가? 어찌 이곳까지 왔나? 시장한가, 아니편 차를 들려고 하나…" 장한은 날카롭게 소영을 쏘아보더니 다짜고짜 일격을 뻗는 것이었다. 소영은 어깨를 돌려 장한의 일격을 피하면서 그 자의 왼쪽 손목에 있는 완맥을 짚었다. "뚝!"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목의 뼈가 물러났다. 이것은 아주 심한 고통을 주는 수법이었다. 장한은 크게 몸을 뒤척이며 고통스러워했다. "윽!" 장한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정도는 그가 흘리고 있는 식은땀으로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소영은 냉소를 띠고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시간이 없는 사람이다. 너와 길게 논쟁하고 싶지 않단 말이다. 네가 전신에 있는 힘줄이 뒤틀리고, 배가 물러나는 고통을 감수할 수 있다면 말을 안해도 좋다. 나는 팔뿐만이 아니라 너의 어깨, 다리 그리고…" 장한은 그제서야 소영의 높은 무공을 알았는지 입을 열었다. "만일 당신의 말에 순종하면 나를 어쩌시겠소?" "아무 고통 없이 죽게 하겠다." 장한은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난 살고 싶소." 소영은 선심을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대신 네 무공을 없애겠다. 악을 버리고 새 인간이 되도록 말이다." 장한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우선 급한 것부터 물었다. "어떤 사람이 너를 이곳으로 보냈으며, 무슨 이유냐?" "심대장주이고, 소영이 나타나면 독약으로…" 그러자 언제 다가왔는지 주문창이 다그쳐 물었다. "그 소영이라는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장한은 고개를 저었다. "심대장주는 모두 여덟 명에게 여덟 군데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소영은 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너는 소영을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모르는데 어떻게 소영을 찾는다는 것이냐?" 장한은 주위를 훑어보았다. "우리는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이라면 모두 손을 쓰라는 명령을 받았소이다." 소영은 혀를 차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악랄하군. 아무에게나 해를 입히다니… 그들은 언제 이곳에 오느냐?" "누구 말입니까?" "심목풍이나 그 일당 말이다." 장한은 두려운 눈빛으로 소영을 힐끗 쳐다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날이 어둡기 전에 이곳으로 마차 한 대가 지나간다고 하였소. 그러나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 는지는 모르오." "틀림없이 이곳으로 지나가나?" 사마건이 주먹을 쓱 내보이며 말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이면 죽을 줄 알아라." "저는 모든 것을 솔직이 말하였을 뿐입니다." 소영은 그의 손목 뼈를 맞춰 혈도를 풀어 주었다. 장한은 약간 희색을 띠며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백 장쯤 떨어진 곳에 고목이 있습니다. 그 나무에 황색기를 꽂아 놓으면 이 길로 올 것입니다." 그 나무 소영은 눈을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그 황색기가 어디에 있느냐?" "제 품속에 있습니다." 그는 곧 품속에서 조그만 삼각기를 꺼내 소영에게 건넸다. 사마건이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꽂으리다." 소영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 황색기를 건네 주었다. 사마건이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자, 소영은 고개를 돌려 사대현에게 입을 열었다. "네 분께선 소영을 찾습니까?" 주문창이 말을 받았다. "당신은 그의 거처를 알고 있소." 소영은 천천히 인피가면을 벗고는 공손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제가 소영이라고 하오. 네 분께선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신지요?" 그러자 사대현은 눈을 크게 뜨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진사정이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을 바로 옆에다 두고 실례의 말을 하였소이다." 그의 뒤를 따라 다른 세 명도 정중히 예를 보냈다. 주문창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쇠로 만든 신을 신고 닳도록 헤매도 찾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는구려." 소영은 인피가면을 도로 쓰면서 말을 받았다. "미안하오이다. 지금 저는 심목풍과 숨바꼭질을 하는 신세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변장을 하는 것 이니 이해를 바라겠습니다." 우자청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수차에 걸쳐 상의한 결과 소대협을 돕기로 하였소. 그러나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소이 다." 소영은 눈길을 돌려 사대현을 쭉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의 괴상한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는데… 그러나 나를 도와 주겠다니 우선은 믿어 봐 야지.' 그리고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우리 네 사람은 원래부터 명예와… 이익을 따지지 않기로 맹세하였소. 강호에서 어떤 일이 일 어난다 하여도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한 관계치 않기로 했소." 허시당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우린 처음에는 사대현이란 이름을 듣고 무척 기뻐했소이다. 허나 우리가 바라던 강호의 평화는 계속되지 않았소. 그래도 우리가 한 번 맹세한 것을 깨뜨릴 수가 없었소. 그 좋은 방법으로 강호 의 시비가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기로 하였소." 소영은 내심 감탄하였다. '과연 이들은 사대현이란 이름을 들을 만하구나.' "그러나 심목풍이란 자가 너무나 강호를 어지럽히는 것에 우리는 반기를 든 것이오." 옆에서 듣고 있던 초곤산이 맞장구를 쳤다. "옳소이다. 네 분께서는 이십 년만 일찍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오늘의 혼란한 강호는 없었을 것 이오." 진사정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 네 명이 힘을 합한다 하여도 심목풍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오." 소영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것은 과히 염려마시오. 그보다 네 분께선 어떻게 심목풍에게 도전할 것인가를 생각하 였을 것인데…" 허시당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없소이다. 우리가 완전히 계획이 있다면 그토록 애쓰면서 소대협을 찾았겠소?" "그럼 나를 찾아서 무엇을 알겠다는 것이오?" "우린 소대협에게 두 가지를 물어 보려는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물어 보시오. 제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거짓없이 대답해 드리지요." "첫째, 소대협과 심목풍은 어째서 자웅을 겨루는 것입니까?" 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질문은 좀 이상하군요." 초곤산이 말을 받아 끼어들었다. "심목풍은 강호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도처에서 무림 동도들을 아무 이유 없이 살상하고 있 소. 그래서 소대협은 그를 제거하려는 뜻에서 칼을 든 것이오." 그러자 별로 말이 없던 우자청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물론 그것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직접 소대협에게 듣고 싶소이다." 소영은 네 사람을 날카롭게 훑어보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소생은 처음 강호에 들어설 때 심목풍의 죄임에 빠져 백화산장의 삼장주로 있었소. 저는 그곳 이 선을 위하여 일하는 곳이라면 평생이라도 있었을 것이오. 그러나 그곳은 살인과 약탈, 그리고 음모가 뭉쳐져서 만들어진 곳이오. 저는 뒤늦게나마 심목풍의 악랄한 마음을 알고 뛰쳐 나온 것 이오." 주문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의 의문은 풀렸다. 그럼…"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두 번째는 또 무엇이오?" 주문창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만약 심목풍이 소대협을 죽인다면 그것은 무림에 있어서 심각한 위협이며 전체 강호가 암흑에 빠져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소대협께서 심목풍에게 승리를 했을 때에는 과연 어떠한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소영은 담담히 웃었다. "만일 정말로 그러한 날이 돌아온다면 이 무림에서는 더 이상 내가 필요 없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나 소영은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하겠습니다. 솔직이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몇 해 동안 강호 에서 활동을 하며 느꼈는데 강호의 험악함과 속임수 등은 나 소영에게 맞지 않습니다." 주문창은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그리고 진사정, 우자청, 허시당을 손짓으로 불렀다. 그들은 빙 둘러서서 무엇인가 귓속말로 주고받으며 한동안 상의를 하더니 일제히 다가와 소영에 게 공손히 읍을 하였다. 소영은 황급히 말했다. "네 분의 노선배께서 무슨 일이 있으시면 분부를 내려 주셔야지요." 주문창이 네 사람을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저희들 네 사람은 지금부터 소대협의 명령을 받들기로 작정했습니다." 소영이 미처 입을 열기 전에 진사정이 앞질러 말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에 복종을 하겠습니다." 그러자 우자청도 공손히 말했다. "명령만 내리시면 목숨을 바쳐 복종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니 소대협께서 응낙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거절을 하신 다면 그것은 소대협께서 저희들을 신임하시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즉시 자결을 하여 저희들의 결백을 증명하겠습니다." 소영은 조용히 말했다. "너무나 과중한 말씀이라 실로 감당키 어렵습니다. 우리가 손을 잡고 합심하여 무림의 복지를 위해 싸울 수만 있다면 저는 더 이상 기쁠 때가 없습니다." 허시당이 나섰다. "저희들은 한 번 한 말은 꼭 실천합니다. 만약 부하로 써 주시지 않는다면 제가 제일 먼저 결백 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는 오른손을 품속에 넣어 예리한 비수를 꺼냈다. 그는 정말 그것을 자기 가슴에 대며 찌르려 고 했다. 소영은 크게 놀라 소리쳤다. "잠깐! 응낙하겠으니 참으시오." 허시당은 비수를 거두고 결연히 말했다. "저희들은 이제부터 소대협의 부하이니 명을 받들겠습니다. 심목풍이 땅속에 묻히기 전엔 소대 협을 따라 백화산장이 전부 멸망할 때까지 목숨을 바치고 따라 다니겠습니다." 주문창이 꾸밈없이 말했다. "우리는 수개월 동안이나 은근히 염려해 오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바로 심목풍을 없앤 다음 또 하나의 심목풍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해 왔던 것입니다. 권세는 아름다운 여자보다 도 더 눈을 어둡게 하는 법, 우리는 오늘에야 모든 것이 속 시원하게 풀렸으니 참으로 마음이 후 련합니다." 소영은 이들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네 분께서 그런 염려를 하실 만도 하지요. 명리는 실로 무서운 것이라 그것을 쫓던 사람은 모 조리 망했으니까요."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네 분께서 강호의 시비속에 말려들기 전에 저는 한 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문창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심목풍은 일대의 효웅으로 지략이나 무공이 어느 것 하나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소이다. 그는 음험하고 악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종인 만큼 네 분의 군자습성으로는 그에게 적응 키가 어려운 것입니다." 주문창이 대답했다. "그것은 우리도 이미 생각을 해 본 일입니다. 병법에는 잔꾀도 써야 합니다." 소영이 침착하게 말했다. "네 분은 지모나 무공이 모두 일류의 인물이신데 단지 마음이 너무도 넓어 피비린내를 피해 오 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이렇게 호응을 해주시니 필히 무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외다. 그러나 심목풍으로서는 또 다시 네 분의 강적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곁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초곤산이 갑자기 앙천대소했다. "네 분의 대현(大賢)께서 강호를 위해 힘을 바치시겠다니 정말 기쁨을 금할 수 없소. 축하하는 뜻으로 차를 술로 생각하고 석 잔의 축배를 들겠소이다." 하더니 세 번 연달아 차를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153. 혹색 마차의 자객(刺客) 일행의 대화를 흐뭇한 얼굴로 듣고 있던 사마건이 마침내 틈을 내 끼어들었다. "소대협, 시간이 오래되었습니다. 적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안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소영은 부근에 매어 놓은 여섯 필의 건마를 힐끗 돌아보았다. "여러분께서는 우선 저 말을 딴 곳으로 옮기셔야겠습니다." 하자 사마건이 말했다. "저 잡목 숲속에 있는 초가집으로 끌고 갈까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형이 수고 좀 해주셔야겠소." 사마건은 여섯 필의 말을 숲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주문창이 다시 물었다. "소대협의 이러한 준비는 기다려 보시겠다는 의도입니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심목풍이 내 친구를 납치하여 그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나와의 단독 회견을 청해 왔소이다." 주문창은 성의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소대협께서 무슨 명령이든 내리신다면 우리는 곧 행동을 개시하겠습니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사마건이 돌아왔다. 초곤산이 말을 꺼냈다. "심목풍을 상대하는데 있어 각별히 조심해야 되오. 우리는 우선 대책을 세우도록 합시다." 소영이 천천히 말했다. "현재 우리는 사람이 퍽 많으니 은밀하게 행동을 기해야겠소이다." 사마건이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소생에게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습니다만 적용될는지 모르겠군요." "사마형의 고견을 들어 봅시다." 사마건은 나지막하게 자기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초곤산이 제일 먼저 찬성했 다. "그 계획 괜찮군요. 우리 곧 행동을 개시합시다." 잠시 후 그 객잔의 형세는 약간 바뀌었다. 주문창은 그 집주인으로 분장하고 소영과 초곤산은 그곳을 지나던 장사꾼으로 분장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가게 앞에 높이 친 갈대로 엮은 차일 밑에 각각 탁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진사정, 사마건은 그 객잔의 이십여 장 떨어진 큰 고목 위에 숨어서 객잔 안의 형편을 살폈다. 그 큰 나무 위에는 가지와 잎이 무성할 뿐 아니라 그 나무 자체가 아주 높아서 사방 수리(數里) 안의 모든 정경을 감시할 수 있었다. 우자청과 허시당은 객잔 안에 몸을 숨기고 한편으로는 혈도를 찍힌 사나이를 감시하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소영은 초조하고 불안하여 차를 한 모금 마시 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심목풍은 원래 잔꾀가 많으니… 이것 또한 그 자의 고의적인 안배 같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돌연 마차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차 한 모금을 더 마셨다.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마차 한 대가 나타났 다. 그 마차는 사방을 검은 천으로 둘러쳤다. 안에 탄 사람을 남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잠시 후 그 마차는 객잔 앞에 당도했다. 소영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 마차 앞에는 네 명의 사나이가 허리에 칼을 차고 길을 안내하고 있었으며 마차 뒤에는 여덟 명의 수행원도 모두 허리에 칼을 찼으며 그들 뒤에는 두 대의 포장마차가 따랐는데 그 마차는 조 금 작았다. 두 필의 말이 그것을 끌고 있었고 선두에서 네 필이 끄는 검은 마차 보다 그 규모가 좀 작아 보 였다. 초곤산은 마차를 한 번 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일 저 마차가 이곳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의 계획은 무너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했을 때 마차가 객잔 앞에 섰다. 마차에 드리워진 포장이 열리며 검은 옷차림의 노인이 뛰어내렸다. 소영은 재빨리 그 흑의 노인을 훑어보았다. 그 노인은 두 눈에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양쪽 태양혈이 툭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내외겸수(內外兼修)한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 흑의 노인은 마차에서 뛰어 내려 초곤산과 소영을 힐 끗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객점 주인!" 주문창이 곧 대답을 하며 뛰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흑의 노인은 냉랭하게 말했다. "거기에 서라!" 주문창은 그의 말대로 몸을 세우고 물었다. "어디 잘못된 점이라도…" 흑의 노인은 형형한 안광을 내뿜으며 주문창을 노려보았다. "객점 주인의 목숨이 꽤 질기구먼." "보잘 것 없는 체격이지만 아직 튼튼한걸요." 주문창이 대꾸하자 흑의 노인은 이맛살을 찡그리고 말했다. "노부가 오늘 새벽에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 술과 안주를 예약했는데 준비는 다 되었겠지?" 주문창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준비해 놓은 지 오래됐소이다. 자아, 이리 앉으시지요." 흑의 노인은 다짜고짜로 물었다. "내가 아침에 보낸 사람은 지금 어디 갔길래 보이지 않느냐?" "아아! 그 해진 옷을 입고 계시던 나리 말씀인가요?" 그 흑의 노인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 지금 그는 어디 있는가?" "벌써 가셨는데요." "내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가다니!" "소 나으리 성질이 몹시 고약하시더군요. 말끝마다 욕설이라 묻지를 못했습니다." 흑의 노인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 사람 혼자 갔나?" 그러나 주문창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둘이서 갔지요." "또 한 사람은 누구던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기에는 한 십칠, 팔 세 되어 보이는 젊은이와 함께 가시더군요." 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 그러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 때 저는 마침 주방에 있었던 관계로 그 젊은이가 언제 왔는지도 몰랐지요. 제가 주방에서 나오니 그 나리께서는 이미 젊은이와 함께 나가시던데요 그래서 저는 그 두 분의 뒷모습만 보았 습니다." 흑의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좋다. 빨리 술상이나 차려와!" 이 객잔 안에는 이미 술과 안주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객잔 주인인 마누라가 달아나는 바 람에 아직 차려 놓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흑의 노인이 술과 안주를 차려 오라고 하니 주문창은 매우 난처하였다. 그렇지만 그 몇 사람은 이미 계획을 세워 놓은 터라 주문창은 그 계획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나리가 가실 때 시간을 이야기해 주시지 않아 저는 만들어 놓지는 않았습니다." 흑의 노인이 그 말을 받아서 명령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어서 만들어라." 주문창이 말했다. "지금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해도 한동안의 시간이 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면 되겠나?" "아무래도 한 시진은 걸리겠지요?" 흑의 노인은 싸늘하게 말했다. "좋아, 기다려 주마." 그의 이런 대답은 주문창의 예상을 뒤엎었을 뿐만 아니라 손님으로 가장하고 앉아 있던 소영을 더욱 놀라게 했다. '만일 저 포장마차 안에 정말로 빙아가 들어 있다면 여기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겠다고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이번에도 그 심목풍의 잔꾀에 넘어간 것이 아닐까?' 이 때 주문창이 헛기침을 가볍게 하더니 물었다. "일행이 몇 분이나 되시는지요?" 흑의 노인은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소생이 술과 안주를 준비하는데 있어 몇 분인지 알아야 대중할 수 있지 않습니까?" 흑의 노인은 앙천대소를 하더니 서슴없이 말했다. "저 마차에는 여자들이 몇 명 있지." 그는 돌연 주문창의 오른손을 잡았다. 무림사현은 항상 군자의 기백으로 살아 왔던 터라 이러한 암습에 방비를 하지 못한 데다 그 흑의 노인이 손을 재빨리 잡았기 때문에 주문창은 피할 여유도 없이 그만 그에게 오른손 혈맥을 잡히고 말았다. 소영은 그 혹의 노인의 번개 같은 출수를 보고 놀라워했다. '저 사람의 무공이 대단하니 안심을 해서는 안 되겠구나.' 소영은 진기를 모아 주문창의 위기를 구해 주려고 준비를 갖추었다. 이 때 주문창은 놀라며 소리쳤다. "귀하께서는 왜 이러십니까?" 흑의 노인은 껄껄 웃었다. "나의 눈에는 먼지 하나 들어가지 못하느니라. 하물며 너의 그 자잘한 잔재주로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그는 주문창을 노려보고 다시 계속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빨리 네 이름과 정체를 밝혀라! 만일 더 이상 시간을 끌려고 잔꾀를 부린 다면 내 너를 두 토막을 내어 죽일 것이니 똑바로 대어라!" 주문창은 오른 손목을 잡은 손가락이 마치 쇠고리에 걸린 듯이 점점 더 죄어 오자 어쩔 수 없이 운기하여 항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자기의 신분은 이미 탄로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객점 주인 행세를 할 필요 가 없음을 느껴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낙향 주문창이오." 흑의 노인은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물었다. "그럼 무림사현이란 말인가?" "그렇소. 우리들 형제가 다 이곳에 있소." 흑의 노인은 냉연히 말했다. "좋아! 무림의 사대현이 한 때 이름을 날렸는데 그 진실한 무공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 한 번 시 험해 보자." 이렇게 말하며 자기 손에 붙잡힌 주문창의 손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주문창은 반신이 마비되는 듯하여 반격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흑의 노인이 오른손을 치켜 들었다. 석양빛에 그의 손바닥이 검붉게 변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문창은 비록 단 한 번도 무림내의 인물과 겨루어 본 적은 없었으나 그는 수십 년 동안 강호를 왕래하며 무림 안의 발생한 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은지라 그 노인의 손바닥을 보는 순간 놀라 외쳤다. "흑살수 상평!" 흑의 노인은 냉랭히 대꾸했다. "맞았다. 바로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이 때 돌연 윽, 하는 소리를 내며 상평이 주문창의 손목을 잡았던 오른손을 스르르 놓는 것이었 다. 그것은 소영이 주문창의 위기를 보자 암암리에 탄지신공을 발출하여 그 흑살수 상평의 오른손목 의 외관혈을 짚었기 때문이었다. 소영은 기습의 효과를 노리기 위해 전력으로 발출하지는 않았다. 주문창은 짚혔던 혈맥이 풀리자 곧 뒤로 세 발짝 물러서서 상평을 노려보며 그의 동작을 경계하 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른팔의 혈맥을 운기하였다. 상평은 처음에는 암기에 맞은 줄로 착각했다. 그래서 외관혈을 얼른 보았다. 핏자국은 멎었다. 그러나 몹시 부어 올라 있었으므로 크게 놀랐다. '대체 이것은 무슨 공력일까?'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운기하여 피를 통하게 하는 한편 사방울 둘러보았다. 그는 역시 연륜을 쌓은 노적(老賊)이라 강호상의 견문이 상당히 광범위하였다. 그러므로 소영이 앉아 있는 쪽이 바로 자기가 주문창의 왼쪽 혈맥을 잡고 있던 손목을 겨냥할 수 있는 방향이라는 것을 알아 냈다. 그는 곧 경계하며 출수를 하지 않고 천천히 뒤로 너덧 발자국 물러섰다. 그것으로 보아 그가 외관혈에 입은 타격이 몹시 심한 듯했다. 운용을 할 수 있나의 여부를 확인 하기 전에는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였다. 이 때 그 마차를 경호하던 경장의 사나이들이 그 광경을 보고 그 중에 서 네 사람이 우르르 달 려왔다. 상평은 내공이 심후하여 한편 운기하고, 한편 왼손으로 오른손의 외 관혈을 주물렀다. 소영의 탄지신곧은 아직 그 정도가 완전하지 못하였고 또한 전력으로 발출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상평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번 주무르자 피가 원상태로 통하였다. 이 때 칼을 찬 경장의 사나이들은 이미 상평의 뒤에 나란히 서 있었다. 이 네 명의 사나이들은 전부가 대적을 만나 싸운 경험이 많은 인물들 같았다. 그들은 객점에 뛰어 들었으나 소리도 지르지 않았고 함부로 덤비지도 않았으며 다만 상평의 뒤 에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소영은 백리빙이 그 마차 안에 있는지 확실히 확인하기 전에는 섣불리 행동하기가 싫었다. 객점 안은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또한 상평에게 상처를 치료할 기회를 준 것이나 다 름없는 것이었다. 상평은 자기의 상태가 아무 이상이 없음을 느끼자 곧 담이 커졌다. 그는 뒤에 시위하고 있는 사나이들에게 나지막한 음성으로 소영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저기 있는 저자를 잡아 와라!" 싸늘한 광채가 번쩍하더니 동쪽에 섰던 두 명의 사나이가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좌우에서 소영 에게 달려왔다. 상평은 아직도 자기의 오른손목이 어떠한 공력에 의해 일격을 받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므 로 그는 소영에게 슬그머니 겁을 집어 먹고 일부러 부하를 시켜 소영의 무공을 시험해 보려 했던 것이다. 날은 점점 어두워 왔으나 소영은 시력이 특수하여 어둠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두 장정을 흘 겨 보더니 암중에 운기하여 완전히 공격 자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의자에 앉은 자세는 조금도 움 직이지 않았다. 칼을 빼든 두 명의 사나이가 소영에게 다가섰다. 그들은 칼을 높이 쳐들고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순순히 복종을 하겠소, 아니면 우리가 출수를 해야 하겠소." 소영은 태연히 앉은 채 물었다. "두 분은 관부(官府)에서 온 공차(公差;관가나 궁가에서 파견한 사자)이십니까?" 왼쪽에 있는 장정이 입을 열었다. "관부의 공차나 당신을 잡아가 봤댔자 곤장 정도밖에 더 갈기겠소?" 소영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두 분께서는 그보다 더한 벌을 내리시겠다는 것이구려?" "그렇지, 공차는 곤장 정도밖에 치지 않겠지만 우리는 당신의 목을 노린다는 사실을 아셔야지…" 소영은 대뜸 두 손을 한꺼번에 날려 열 개의 손가락으로 두 명이 갖고 있던 두 개의 칼을 동시 에 잡았다. 경장한 두 사나이는 그제야 고인(高人)을 만났음을 깨닫고 칼을 뒤로 잡아 채려고 했다. 소영은 경력을 암운하여 칼을 통해 전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손에 전류가 흐르는 듯 저려 왔다. 그들은 그만 칼을 잡은 손에 힘이 차츰 빠지기 시작했다. 소영은 그 틈을 타서 두 손에 잡은 칼 을 획 잡아 챘다. 주문창은 이미 소영이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을 보고 곧 상평에게 다가서서 냉랭히 말했다. "당신의 흑살장이 산을 가르고 돌을 박살낸다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소! 그러나 그 소문 이 진짜인지 한번 시험해 봅시다." 말과 동시에 오른장을 휘둘러 그의 앞가슴에 일격을 가했다. 상평은 오른손을 즉시 들어 주문창 의 장을 맞받아 쳐올렸다. 펑! 하고 양장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상평은 자기의 흑살장력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일장이 주문창에게 부상까지 입히지는 못하더라도 아파서 펄펄 뛰리라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상평의 예측을 뒤엎었다. 그들의 양장이 맞부딪치자 주문창은 곧 전진하여 다시 일격을 가해 오는 것이 아닌가? 상평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러나 입으로는 태연히 응수했다. "무림사현의 대명이 과연 헛소문만은 아니었군." 다시 장을 휘둘러 두 번째 발출하는 주문창의 장을 맞받았다. 두 사람의 악투는 가열되기 시작 했다. 상평은 역시 흑도 중에서 극히 이름이 나 있는 인물인 만큼 장법의 조예가 깊었다. 그러기에 두 사람의 악투는 흉험하기 짝이없었다. 한편 소영은 그 두 명의 칼을 뺏더니 즉시 그것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동작은 절륜하여 비 록 평범한 초술로 쳐내긴 했으나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두 사나이는 수중의 칼을 빼앗기자 잠시 넋을 잃었다. 그 순간 소영은 재빨리 좌우로 공격을 가 했다. 그러자 그들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으므로 그 칼에 적중되어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소영은 내심으로 백화산장의 사람들을 몹시 저주했었다. 그러나 그 두 명의 생명을 뺏으려고 하 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소영이 매우 힘을 주어 발출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중상을 입어 더 이상 싸울 능력을 잃었다. 소영은 그들을 쓰러뜨린 후 재빨리 몸을 솟구쳐 비호같이 마차를 덮쳐 갔다. 그것을 지키던 두 사나이가 칼을 뽑아 들고 소영의 앞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소영의 신법이 비범하고 쾌속하여 그들은 감히 저지하지 못했다. 소영은 그들 곁을 번쩍 스쳐 곧바로 마차로 접 근했다.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 사물을 분간키 어려웠다. 마차 뒤를 경계하던 여덟 명의 사나이는 검 은 그림자 하나가 마차로 덮쳐 오는 것을 보자 일제히 말에서 뛰어내려 달려 들었다. 소영은 그 사나이에게 번개같이 일장을 때렸다. 그의 암경이 장풍을 따라 곧바로 뻗어 나갔다. 그 사나이는 미처 소영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적중되어 땅에 떨어져 딩굴었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일장을 쳐냄과 동시에, 왼손을 내밀어 그 포장마차의 주렴(珠簾;발을 내린 것)을 들어 올리고 그 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 순간 싸늘한 빛이 번쩍 눈을 쏘며 한 줄기 백광이 마차 속에서 뻗어 나왔다. 소영은 마차와 너무나 밀접하였으며 또한 의외의 공격이라 피할 겨를이 없었다. 그 검빛은 이미 면전에 들이닥쳤다. 너무나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미처 그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소영은 위험을 무릅쓰고 입을 벌 려 그 날카로운 검끝을 꽉 물었다. 이것은 찰나의 방비였고 뒤로 쫓던 두 사나이는 이미 마차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소영은 찔러 오는 검세를 이빨로 무는 동시에 오른손을 내밀어 그 한 자루의 보검을 확 잡았다. 그는 천 년 묵은 교피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보검을 겁내지 않고 그 검을 잡고는 밖으로 힘껏 잡아 챘다. 그와 동시에 경공을 전개하여 공중으로 치솟았다. 마차 안에서 칼을 쓴 자도 공력이 심후하였으 므로 소영은 그 검을 뺏지는 못했다. 그는 뒤를 쫓는 두 명의 칼을 피하기 위해 마차 안에서 뻗친 검을 전력으로 뺏을 겨를도 없었 다. 퍽퍽! 소리와 함께 뒤쫓아 온 두 명의 사나이가 소영을 향해 내리친 칼이 마차의 기둥에 박혔다. 두 명의 사나이는 전력을 다해서 소영에게 칼을 내리친 것이었으나 소영이 공중으로 치솟았기 때문에 마차의 기등을 치고 만 것이다. 그 마차를 끌던 네 필의 건마는 여러 사람이 치고 솟고 엉클어져서 난리를 치자 그만 몹시 놀라서 히잉! 소리를 내지르며 미친 듯이 내달렸다. 건마가 놀라 치달리니 그 속도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순식간에 마차는 수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소영은 그 마차 안에서 검을 찔러 온 자가 백리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마차 안 의 상황을 살피지 못하여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자기에게 공격을 가하는 사나이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고 몸을 솟구쳐 마차의 뒤를 쫓았다. 그는 매우 초조하여 팔보등공(八步登空)이라는 경공술을 발휘하여 마치 하늘을 나는 천마와도 같이 두 번 몸을 솟구침으로써 자기를 쫓던 두 사나이를 뒤로 삼, 사 장 처지게 하고 자기는 마 차와의 거리를 몇 척 정도로 줄였다. 이 때 두 개의 그림자가 마치 병아리를 채어 가는 독수리와도 같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 였다. 이 두 사람은 바로 사마건과 진사정이었다. 그들은 객잔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커다란 고목 위 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 사물이 잘 보이지 않게 되자 내려 오던 차에 어렴풋이 객잔 앞에서 격전이 벌어진 것이 보였기에 급급히 뛰어 내려 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던 중이었다. 사마건은 치닫는 마차를 향해 크게 소리치며 일장을 쳐냈다. 펑!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한 필의 건마가 그의 일장을 맞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그러나 나머지 세 필은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달렸다. 사마건이 비록 내외겸수의 고수이긴 하나 그 마차와 정면으로 충돌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재빨리 몸을 돌려 피했다. 진사정은 잠시 주저하더니 곧 일격을 또 한 필의 말을 향해 쳐냈다. 그 건마는 앞발을 번쩍 치켜 들며 히잉! 하고 울부짖더니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네 필의 말 중 두 필이 나가떨어지니 마차의 속력은 자연 늦어졌고 소영도 마침내 따라 붙었다. 소영이 재빨리 일격을 가하자 다시 한 필의 말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왼손으로 마차의 오른쪽 바퀴를 잡고 힘을 주었다. 달리던 마차가 삐걱, 하고 정지했다. 진사정과 사마건을 본 소영은 재빨리 분부했다. "뒤를 쫓는 사람을 막아 주시오. 그리고 객잔 앞에 두 마차도 놓치지 말고 잡으시오. 이곳은 제 가 맡겠소." 사마건은 곧 몸을 솟구쳐 뒤에 쫓아 오고 있는 몇 사람의 적수를 맞이하러 갔다. 진사정은 약간 흠칫하더니 곧 사마건의 뒤를 따라 달렸다. 소영을 맹렬히 쫓던 사나이들은 사마 건과 맞붙게 되었다. 제일 앞에 섰던 사나이가 단도를 휘둘러 사마건에게 달려 들었다. 그는 살짝 피하며 오른손을 들어 그 사나이의 손목을 잡고 힘껏 비틀었다. 그리고 그 사나이가 든 단도를 뺏어들고 왼손으로는 그의 명치뼈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그 사나이는 윽!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선혈을 토하며 고꾸라졌다. 또 한 사람이 들이닥 치며 사마건의 등줄기를 칼로 찔러 왔다. 그 때 마침 진사정이 들이닥쳤다. 그는 크게 기합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일장을 뻗어 그 사나이 의 칼 잡은 손을 적중시켰다. 그 사나이는 사마건을 겨누었던 칼을 맥없이 땅에 떨어뜨렸다. 진사정은 재빨리 왼쪽발로 그 자 의 불두덩을 걷어 찼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으악 비명을 지르며 팽개친 개구리처럼 사지를 쪽 뻗고 나가 떨어졌다. 두 사람의 솜씨는 무척 날카로왔다. 그것을 보자 뒤쫓아 오던 나머지 사나이들은 그만 넋을 잃 고 말았다. 진사정은 무공이 매우 고강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 누구와 싸워 본 일도 없고 더구나 사람을 죽 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단번에 말 한 필과 한 사람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끊자 크게 놀라 잠시 주저했다. 이 때 사마건은 벌써 뺏어든 칼을 휘두르며 뒤쫓아 온 사나이들에게 달려 들었다. 그는 백화산장의 인간들은 모조리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인정사정없이 마구 칼 을 휘둘러댔다. 진사정은 잠시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곧 머리를 저어 그런 관념을 떨쳐 버리고 사마 건의 뒤를 따라 쳐들어 갔다. 한편 소영은 마차를 강제로 정지시킨 다음 그 마차 안을 향해 일장을 때렸다. 포장마차의 기등들이 일장에 맞아 우지끈 뚝딱, 소리와 함께 곧 부러졌다. 그러자 큰 구멍이 하 나 생겼다. 그 순간 다시 그 안에서 검빛이 번쩍하더니 날카로운 검끝이 소영을 노리고 찔러 나왔다. 소영이 그 검을 피해 몸을 날리는 순간 그 검끝은 다시 안으로 쓱 들어 갔다. 소영은 이 때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 마차 안에 있는 자는 무공이 매우 고강할 것이며 검법에 있어서는 극히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 자가 시종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귀하는 도대체 뉘시오? 어째서 밖으로 나와 겨루길 꺼리는 거요?" 소영은 이렇게 여러번 소리쳤으나 그 속에서는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소영은 이상한 생각 도 들었지만 울화가 치밀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크게 호통을 쳤다. "내가 끌어 내지 못할 줄 아는가?" 그는 마차를 향해 걸어 갔다. 마차 안에 숨은 자가 검법이 매우 고강함을 알고 있는지라 경계를 하며 그 앞에 다가서서 갑자기 그 마차에 내리친 주렴을 걷으려고 했다. 그는 주렴을 들어올려 그 안에 누가 있는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주렴 끝에 닿자마자 안에서 또다시 검끝이 쑥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안에 있는 사람은 소영이 예리한 무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이번에는 곧장 찔러 왔으나 중도에서 다시 검세를 바꾸어 소영의 오른쪽 손목을 겨누고 찔러 오 는 것이었다. 소영이 재빨리 오른손을 거둬 들이 자 그 장검도 동시에 마차 안으로 거두어 들여졌다. 차 안에 있는 사람은 그 포장마차를 자기의 유일한 방패로 삼고 있는지 밖에서 벌어진 격투가 아무리 격렬하고 흉험할지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마차를 끄는 말이 죽었는데도 자기와는 무관하다는 태도였다. 마치 자기는 그 포장 안으로 딴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만 하면 된다는 듯했다. 소영이 연달아 몇 군데 방위를 바꾸어 보려고 할 때마다 그 장검이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그리 고 그 장검이 노리는 곳 또한 치명적인 요소라 피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 자의 솜씨는 고강 했다. 소영은 속에서 끓어 오르던 울화가 점차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와 반비례로 호기심이 크게 일 어났다. 사방울 훑어보니 가까운 곳에 칼이 한 자루 떨어져 있었다. 그 칼을 주워 들고는 마차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귀하의 검법은 과연 고명하구려. 자아! 이젠 나도 좀더 강하게 쳐들어 가겠소이다."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그 마차 바퀴 위로 올랐다. 그러자 안에서도 장검이 기다렸다는 듯이 찔 러 나왔다. 소영은 주워 든 칼을 휘둘러 그 찔러 오는 검을 받아 쳤다.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마차 안에 들어가 보리라 결심했기에 칼을 쓰는 힘이 몹시 맹렬했다. 쇠붙이까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그 장검은 소영의 칼에 밀려났다. 소영은 칼로 상대의 장 검을 밀어 붙이고 좌우로 휘저었다. 그러자 주렴이 절반이나 잘라지고 말았다. 그 나머지 반쪽마저 잘라 내기 전에 그 장검은 다시 찔러 왔다. 소영은 또 갈을 휘둘러 그 장검 을 밀쳤다. 마차 안의 사람은 몸을 숨기고 계속 장검을 찔러대는데 전부 소영의 급소만 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영은 상대의 몸이 보이지 않는 터라 상대하기 매우 곤란했으며 막는 것에 전력을 기울 여야 했다. 쌍방은 연달아 수초를 겨루었으나 소영은 여전히 마차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마음이 싸우 조 급해졌다. 그는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상대의 검세를 대중하여 그 숨은 위치를 짐작하고 푹 찔렀다. 이번에는 그 힘이 맹렬하여 포장 밖으로 나온 장검을 막아 냈으며 그 때 소영은 몸을 솟구쳐 절 반쯤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검광이 번쩍하며 비수 한 자루가 날아 왔다. 소영은 오른손에 칼을 잡고 왼손으로는 날아 오는 비수를 꽉 잡았다. 그리고 재빨리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는 전신을 흑의로 감싼 사람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오른손에 장검을 들고 왼손에는 비수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소영은 왼손으로 그 자가 던진 비수를 받고 오른손의 칼로는 상대의 장검을 막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맞대면하고 힘을 겨루는 형세가 되어 버렸다. 그 자는 오른쏜을 쭉 뻗쳐 장검을 뒤로 빼는 듯했으나 다시 명치끝을 향해 찔러 왔다. 소영은 자기의 앞가슴을 노리고 공격해 오는 장검을 잡고 냉랭히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그 자는 입은 옷만 검은 게 아니라 얼굴까지도 검었으며 이목구비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 나 다만 그의 번들거리는 눈은 확실히 보였다. 흑의의 사나이는 냉랭히 소영의 말을 받았다. "너는 누구냐?" 소영은 조금 얼떨떨했으나 곧 대답했다. "내가 먼저 물었소!" 흑의인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꼭 대답해 줘야 할 의무가 있느냐?" 소영은 냉소를 짓고 말했다. "당신이 대답을 않으면 오늘 우리는 생사 결단을 내야 되겠소. 당신은 무공이 고강하고 검술이 정묘하여 백화산장에서도 일류 고수인 모양이오. 그러니 오늘 내가 당신의 목을 치지 않으면 두 고두고 얼마나 많은 무림 동지들이 당신의 검끝에 쓰러질는지 모르는 일이니까…"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우렁찬 음성으로 계속 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아무 원한도 없는데 내가 당신꼭 목을 친다는 것은 혹 부당할는지 모르오. 그러 나 지금은 무림의 정이 존재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중요한 시기에 처해 있는 만큼 심목풍을 도와 주고 있는 당신을 살려 둘 수 없구려." 그 흑의인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 "대단하시구먼. 나를 손바닥 위에 얹고 공기돌 같이 취급하네그려." 소영이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소. 나는 자신이 있어 하는 말이오." 흑의인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글쎄." "조심하시오!" 소영이 암중 운기하니 그의 내력이 검신과 비수를 통해 전해 갔다. 무림의 인물 중 내공이 정심한 고수가 서로 쌍장을 상접할 때에는 매번 내가의 진력으로 겨루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칼과 창이 겨루는 것보다 치열하지 못한 것 같으나 사실은 형태 없는 격투라 정녕 죽지 않으면 끝을 못 보는 생사를 건 싸움이며 장검과 비수를 통해 내력으로 적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은 더욱 차원이 높은 무공이었다. 그 흑의 노인은 한 줄기 장력이 검과 비수를 통해 전해옴을 느끼자 속으로 크게 진동되어 한편 으로 내력을 운집하여 항거하며 외쳤다. "너는 소영이구나!" 소영도 한 줄기 강한 반격의 힘이 자기가 전하는 내경을 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므로 더욱 운기하여 힘을 주려고 할 때 상대 쪽에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지라 잠깐 멈칫했 다. "당신은 누구요?" 소영이 다급히 물었다. "먼저 소영인지 아닌지 그것부터 대답하오." "알려 줘도 상관 없겠지. 어차피 당신은 오늘 안으로 죽어야 할 사람이니까." 소영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소. 내가 바로 소영이오만 어쩔 작정이오." 그 흑의인은 갑자기 말투가 달라졌다. "귀하는 과연 듣던 대로군요 우리 잠시 격투를 중지합시다. 소생은 몇 마디 할 말이 있으니 그 말을 듣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다시 겨루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소?" "당신의 잔꾀는 두렵지 않소. 어디 우선 들어나 봅시다." 소영이 공격을 멈추었다. 그 흑의인은 천천히 장검과 비수를 거두어 옆에다 놓았다. "당신에게는 백리빙이라는 여동생이 있지요?" 소영은 흠칫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그렇소. 그 백리낭자가 지금 어디 있소?" 흑의인은 여전히 침착한 음성이었다. "이곳에는 지금 없소. 당신이 여기 온 사람을 모조리 죽여도 그 백리빙은 찾지 못할 것이오. 더 구나 그녀의 행방도 알아 내지 못할 것이오." 소영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오로지 당신만이 그 백리낭자의 행방을 안단 말이오?" 흑의인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당신은 머리가 퍽 빨리 돌아가는군요." 흑의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백리낭자를 보고 싶습니까?" 소영은 지난 몇 해 동안 많은 풍파를 겪어 왔기 때문에 적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경험을 얻었다. 그는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 보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냉정한 표정을 유지 하고 천천히 물었다. "그녀를 만나려면 무슨 조건이 있어야 되겠소?" 흑의인은 냉랭히 대답했다. "간단하지요 당신의 친구와 부하에게 일제히 손을 멈추라 하시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쾌마 를 타고 백리낭자가 감금되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면 됩니다." 소영이 코웃음치며 말했다. "심목풍이 쳐놓은 그물에 내가 내 발로 걸려 들게 하려는 속셈이구려?" 흑의인은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 중요한 일을 당신은 생각해 보셨는지요?" 소영은 냉엄히 단정적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당신의 수행인을 모조리 죽일 수 있소이다…" 이 때 무림사현과 초곤산, 사마건 등이 연수협력(聯手協力)하여 이미 대부분의 적을 죽였고 나머 지는 모조리 중상을 입혔다. 주문창은 흑살수 상평을 사로잡았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수행원을 죽인 다음 전부 마차 곁에 모 여 들었다. 그리고 그 검은 포장마차를 포위하고 있었다. 154. 대의명분과 여인의 향기 이 때 초곤산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소대협은 틀림없이 이 마차 안에 있던 사람을 쫓아 갔을 것이오. 나는 그들이 이 포장 안에서 격투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소." 이 말을 듣자 소영은 속으로 웃었다. '천하의 일이란 믿기 어려운 일도 많은 법이라오.' "여러분,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나는 이 마차 안에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좀 나눌 것이 있소이 다." 그러자 사마건이 웃으며 말했다. "초형은 안에서 격투하리라고 믿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안에서 겨룬 것이 사실이니 믿지 않을 수 가 없으시겠구려?" 초곤산은 걸걸하게 웃어젖혔다. "이 늙은 몸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포장마차 안에서 격투를 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이 번에 안계를 넓힌 격이 되겠구려. 하핫…" 소영은 천천히 흑의인에게 말했다. "귀하도 다 들으셨겠지요?" "무엇을 말이오." "당신을 수행하던 친구와 부하들 중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 말이 오." 흑의인은 냉랭히 대꾸했다. "당신의 이러한 행동은 사전에 미리 계획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군. 당신의 수행인은 전부 일류 고수들인 모양인데 아마 그들 역시 당신을 돕지 못할 것이오." 흑의인은 목소리를 더욱 싸늘하게 바꾸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백리낭자의 생사를 불문에 부친다면 몰라도…"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결단을 내려 대답했다. "좋소. 당신의 조건에 응낙하리다." 흑의인은 장검을 집어 들었다. "지금 이 마차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가 이름을 날리고 있는 분들이겠지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그들은 전부가 무공이 탁윌한 고수들이오." 그러자 흑의인은 냉랭히 말했다. "만일 소대협이 간섭을 않겠다면 소생이 저 무림의 고수들과 몇 수 겨루어 보고 싶소만, 어떻 소?" 소영은 이미 그와 십여 수를 겨루어 그의 무공이 매우 고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만일 일대 일로 겨루게 된다면 그를 당해 내기 힘들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백리빙 을 위험한 곳에서 한시바삐 구출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중이 아닌가?' 소영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되었으므로 냉랭히 거절했다. "그만 두시오. 만일 당신이 꼭 겨루어 보시겠다면 나 또한 말릴 수도 없는 문제지요. 그러나 만 일 당신이 저분들을 격노시켜 모두 합력하여 당신을 협공한다면 나 역시 그들을 막아 당신을 도 울 수 없는 문제이니까요." 흑노인은 장검 끝으로 반쪽이 잘려진 주렴을 들어 올리고 재빨리 마차 밖에 둘러선 무림사현과 사마건 등을 훑어보더니 소영에게 대답했다. "보아하니 당신은 그 백리빙의 생사에 대해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요." 소영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오." 흑노인은 검을 검집에 넣고 소영의 앞을 지나서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곧 무림사현과 초곤산 그리고 사마건에게 포위당했다. 소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손을 쓰지 마시오." 이어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사마건은 횃불을 높이 치켜 들고 그 흑의인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얼굴은 옷과 비슷할 정도로 시커먼 색이었다. 그렇다고 얼굴에 검은 복면을 쓴 것도 아니었다. 사마건은 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만일 인피가면을 썼다면 얼굴색이 평범할수록 좋을 텐데 어째서 이토록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른 검은 가면을 썼을까?' 이렇게 생각이 된 그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곳 토박이오?" 그러자 흑의인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나는 가면을 썼는데 당신들 눈에는 보이지 않소?" 초곤산은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 저 사람의 가면을 벗겨 진짜 얼굴을 보는 게 어떻소?" 무림사현이 일제히 찬성했다. "그럽시다. 이 사람이 이처럼 괴상한 가면을 쓴 것을 보니 좋은 사람같지는 않구려." 그들은 곧 출수할 태세를 취했다. 소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여러분 잠깐…" 초곤산이 하하 웃었다. "소대협이 이 사람과 일대 일로 상대해 보겠나?"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친구와 심목풍을 좀 만나러 갈 생각입니다." 주문장이 곧 응했다. "좋습니다. 우리 함께 갑시다." "안 됩니다. 이 친구는 나 혼자만을 데려 가겠다 하오." 초곤산이 즉시 말했다. "그것은 안 되네. 반드시 어떤 계교가 있을 것이니 절대 혼자 가서는 안 되네." 소영이 침착하게 말했다. "꼭 가야만 되는 일입니다. 내 생각에도 심목풍이 함정을 파놓은 것이 분명하다고 짐작이 가지 만 나는 꼭 가야 됩니다." 초곤산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무슨 뜻인가?" 소영은 천천히 대답했다. "만약 내가 가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한 낭자가 심목풍에게 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초곤산이 급히 물었다. "그러나 소대협 혼자의 힘으로 그 낭자를 구해 낼 수가 있겠는가?"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만 일이 이쯤 되었으니 도리없이 모험을 한 번 해봐야겠습니 다." 초곤산은 아직도 궁금한 점이 많아 다시 물으려 했으나 그보다 앞서 사마건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심목풍이 소대협 혼자 오라고 한 모양이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사마건이 곧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동행할 수 없겠군요. 그런데 두 분은 언제 떠나려고 하십니까?" 소영이 즉시 대답했다. "지금 곧 떠나려 합니다." 눈길을 흑의인에게 돌리며 물었다. "당신의 뜻은 어떠하오?" "좋소!" 사마건은 두 필의 건마를 끌고 왔다. 그들은 곧 말 위에 올라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초곤산은 소영과 그 흑의인이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마형, 나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사마건이 웃는 낯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심목풀이 함정을 파 놓은 것을 알면서도 왜 꼭 흔자 가겠다고 고집을 하는지… 물론 심목풍이 소대협이 수행을 데려 가는 것을 제한했기 때문이겠지만…" 초곤산이 분연히 말했다. "우리가 어째서 심목풍의 말에 따라야 하오?" 사마건이 즉시 대답했다. "우리는 듣지 않을 수도 있지만 소대협의 입장으로는 듣지 않을 수가 없는 모양이지요." 초곤산은 무엇인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만약 소대협이 심목풍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그 낭자를 만날 수 없게 될 테니까?" 사마건은 가볍게 한숨 지으며 말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초곤산은 그래도 어딘가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알기는 했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단신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소대협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사마건이 천천히 말했다.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몰래 뒤따르는 길밖에 없지요." 초곤산이 급히 동의했다. "그럼 속히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는 각각 변장을 하고 갑시다." 한편 소영은 흑의인과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두 필의 건마가 전신에 땀을 줄줄 흘릴 때까지 달 려가서야 흑의인은 말고삐를 잡아 당기며 말했다. "여기서 좀 쉬어 갑시다." 소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앞으로 십 리만 더 달리면 말들은 지쳐서 죽고 말 것이오." 두 사람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마주보고 섰다. 흑의인은 형형한 빛으로 소영을 잠시 바라보더 니, "당신 인피가면을 쓰고 있구려!" "그렇소!" "인피가면을 벗어서 진짜 얼굴을 한 번 보여줄 수 없겠소?" 소영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만약 당신도 가면을 벗고 나에게 진짜 얼굴을 보여 주겠다면 나도 응할 수 있소." 흑의인은 곧 동의했다. "좋소."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에 쓴 인피가면을 벗었다. 소영은 재빨리 그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는 나이가 이십 삼, 사세 가량 되어 보였으며 칼날 같은 눈썹에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대단히 준수한 청년이었다. 소영은 암암리에 생각하였다. '그의 검초와 기상으로 보아 강호에서 오래 활약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젊은 청년일 줄 은 미처 몰랐군.' 그 흑의인 역시 소영을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소형, 당신은 나를 알아 보겠소?" 소영은 머리속에 펀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사람은 바로 자기의 이름을 사칭하던 남옥당 이 틀림 없었다. "당신은 남옥당이군요." 남옥당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렇소이다. 잘 알아 보셨군요." 소영은 거침없이 물었다. "남형은 영웅 인물로 알고 있는데 어찌 백화산장에 가담하셨소?" 그러자 남옥당은 냉연히 대답했다. "소형! 당신의 명성은 더욱 방대해졌지만 당신의 적도 그와 정비례로 점점 많아져 간다는 것을 아셔야 되오. 지금 무림에서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동조하고 옹호해 주는 것 같지만 그러나 진심 으로 당신의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얼마 되지 않을 것이오." 그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알기로는 목하 무림 안에서 실력이 제일 강대한 소림사도 이미 심목풍의 선수에 눌려 꼼 짝 못해 당신을 도우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고수를 파견하여 당신과 맞설 것이오." 소영은 속으로 놀랐다. 그러나 표정을 여전히 침착을 유지하여 태연히 대답했다. "심목풍이 각 문파 중에 첩자를 잠입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벌써부터 알고 있소." 남옥당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 "글쎄요 아마 당신이 모르고 있는 일도 많을 것이오." 소영이 진지하게 말했다. "가르침을 듣고 싶소!" 남옥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달 전에 당신이 형산의 단혼절벽 밑에서 백운산장의 사람들과 싸움을 했었지요?" "그런 일이 있었소." 남옥당은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알기로는 백운산장도 이미 백화산장과 손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밖에도 강호에는 알려 지지 않았지만 또 한 분의 무공이 절묘한 인물이 있소이다." 소영은 곧 물었다. "그분은 불승이지요?" "아니오. 젊은 분이지요 나이는 불과 이십 사, 오 세쯤 되는 젊은이입니다." 소영은 갑자기 옛 일이 생각났다. 오 년 전 무산 절벽에 있는 동굴 안에서 구출되었던 일과 그 안에서 병을 앓고 있는 노인을 만났던 일도 생각났다. 그리고 그 뒤 남궁옥을 대신하여 천 년 묵은 버섯을 찾으려 다시 무산에 갔을 때, 그 석동 안의 작은 주인과 겨루었던 일이 환히 생각났다. 소영은 급히 물었다. "그 사람은 무산 절벽에 있는 동굴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오." 남옥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이 알고 계시니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구려." 그는 음성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당신은 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당신과 맞서는지 그 원인을 아십니까?" "그것까지는 모르겠소이다." 남옥당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악소채 낭자 때문이오." 소영의 눈에 신광이 번쩍하더니 다급히 반문했다. "악누님 때문이라구요?" "그렇소!" 남옥당은 이렇게 대답하고 헛기침을 한 번 가볍게 하더니 다시 계속했다. "그 사람들은 전부가 무림의 최고임을 자부하는 고수들이며 전부가 당신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 소." 소영은 앙천대소를 했다. 그리고 비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한 여인을 얻기 위해 대의를 저버리고 그 악당의 수하가 되려 한단 말이오?" 남옥당은 냉랭히 대꾸했다. "우리는 비록 백화산장에 투신하긴 했지만 지위 같은 것은 사양하고 있소이다. 우리는 심목풍과 약속한 것이 있지요. 당신 소영을 죽이는 날 우리와 심목풍과의 약속은 끝이 나는 것이며 그 후 에는 서로 상관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소영은 냉소를 하며 물었다. "당신들은 심목풍을 믿고 있소." "심목풍은 신용할 만한 사람이 못 되지요 그러나 그처럼 믿지 못할 사람과 협력을 하는 데에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오. 그것은 오로지 당신을 증오하기 때문에 죽이고자 하는 것이외다." 소영은 담담히 웃어 넘겼다. "나는 당신들 세 사람을 모두 상대해 보았소. 당신네들의 무공이 고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소영은 다시 껄껄 웃은 다음 계속 말했다. "기실 당신네들은 심목풍과 손을 잡지 않고도 당신들 세 사람이 합력한다면 나를 상대할 수 있 을 텐데…" 남옥당은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는 손을 잡을 수 없소이다." 소영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것은 또 어째서 그렇소?" "우리가 손을 잡고 당신을 죽이게 되면 악소채 낭자는 과연 누가 차지할 것입니까?" 소영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네들이 심목풍과 협력하여 나를 죽인 뒤에는 또 한 번 서로 맞붙어 싸워야겠군 요. 안 그렇소?" 소영은 엄숙한 얼굴로 계속했다. "악소채는 단 한 사람인데 당신들은 세 사람이니 나 이외에도 당신들 중에 누군가가 두 사람 더 죽어 없어져야 되겠구려." '그렇소. 그러나 당신은 우리들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며 또한 악소채가 제일 정을 쏟고 있는 사람이오. 그러니 우리 네 사람 중에서 제일 먼저 당신이 죽어야 합니다. 일은 이미 조용히 해결 할 방법이 없으니 살기 띤 검을 제일 먼저 당신에게 돌린다는 것은 상식이 아니겠소?" 소영은 냉랭히 대꾸했다. "당신네들 계획대로 그 심목풍의 힘을 빌려 나를 죽였다고 칩시다. 그렇게 되면 당신네들 세 사 람 중에서 당신의 실력이 제일 높으니 당신이 먼저 죽게 되겠구려" 남옥당도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당신이 걱정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 무림에서 세력 다툼이나 사랑싸움이나 무공만이 수 단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자신만만한 것 같군요?" "소생은 다 계획이 서 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소형, 제가 왜 이런 것을 당신에게 일러 주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모르겠소이다." "당신에게는 백리빙이 있어 그 아름다움으로 따진다면 악소채보다 못하지 않소. 더구나 목숨까 지 맡겨 가며 당신을 구해준 병약한 남궁옥까지 있으니…" 소영이 말허리를 잘랐다. "나의 사생활에 대해서 당신은 잘도 아는 모양이군요." "상대를 알아야만 이길 수 있지요 그러니 나는 소형의 과거를 똑똑히 알고 있어야 되었지요." 그러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엄숙하게 바꾸어서 다시 계속 말했다. "그 두 명의 미녀가 당신을 모실 터이니 설마 모자라지는 않으실 텐데 악소채까지 차지하시려 고?" 소영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남형, 소인의 자로 군자의 마음을 측량하려고 하지 마시오." 남옥당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군자라구요?" "비록 군자는 못되나 하늘과 땅에 부끄러운 일은 한 적이 없소이다." "당신이 군자든 호걸이든 당신이 지금 처해 있는 환경은 사면초가임이 분명하오. 무당파 사람들 이 당신을 지지해 준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미미한 반딧불에 불과한 것이오. 그러니 어찌 해와 달 에 그 빛을 겨룰 수 있겠소?" 남옥당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당신은 지금 무림에서 대영웅, 대호걸로 공인되고 또한 심목풍을 대항할 수 있는 불빛으로 추 대되고 있지만 만일 당신이 이번에 정말로 군호를 영도하여 백화산장을 물리칠 수 있다면 그것은 천추의 대업이며 만세에 영명을 날릴 것이오." "남형은 잘 알고 계시면서 어찌 친히 만세에 영명을 날리고자 하지 않는지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는 말부터 들어 주시오." "귀를 기울이겠소." 남옥당은 가볍게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만일 소형께서 불행히 실패하여 대업을 이루기 전에 죽게 된다면 전체 무림은 심목풍의 통치 하에 들게 될 것이며 그 때 무림동도의 비참함은 실로 생각하기조차 끔찍할 것이오." 소영은 또다시 말했다. "남형께서는 모든 것을 그토록 훤히 아시건만 어찌 앞장서서 무림의 대업을 이룩하려고 하지 않 습니까?" "소대협을 돕고 싶은 마음은 저에게 태산 같소. 그러므로 나의 부탁 한 가지만 들어 주신다면…"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물론 악소채에 관련된 일이지요."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악소채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오?" "소대협께서 그 악낭자를 나의 배필이 되어 주도록 힘만 써준다면 나는 곧 소대협을 도와 비단 백리낭자를 구해 낼 뿐 아니라 당신과 백화산장과의 대전을 도울 수가 있겠소." 소영은 내심 크게 격노했지만 꾹 참고 있었다. "남형께선 악낭자를 사모하시면 직접 가서 청원을 하셔야 원칙이지 그런 일을 소생이 어찌 도울 수가 있겠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다는 말씀이시겠지요." 소영은 코웃음쳤다. "남형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들은 것 같소. 자아! 그만 우리 떠나도록 합시다." 남옥당이 빈정대듯 말했다. "소형께서는 불이 발등에 떨어지기 전에는 뜨거운 줄 모르는 분이시군요?" "걱정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오나 악낭자에 대해서는 내가 도와줄 수 없구려. 자아, 우리 그만 해 둡시다." 남옥당은 건마를 끌어와서 올라 타고는 냉랭히 말했다. "갑시다. " 채찍을 휘두르니 건마는 쏜살같이 달렸다. 소영은 그의 뒤를 바싹 따라서, 두 필의 말은 유성과 도 같이 질주해 갔다. 남옥당은 길이 익숙한 듯 야밤인데도 거침없이 계속 달렸다. 다시 한동안 얼마쯤 달리자 두 사람이 탄 말들이 갑자기 속력을 줄이는가 했더니 전신에 땀을 흘리며 허덕이는 것이었다. "남형, 이제 말이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모양이오." 그 말이 막 끝나자 남옥당은 말에서 뛰어 내렸고 그가 탄 말은 털썩 주저앉더니 숨이 끊어졌다. 소영은 재빨리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가 타고 온 말도 앞으로 두어 발자국 옮기더니 역시 숨이 지고 말았다. 남옥당은 쓰러진 두 필의 말을 보며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소형, 제 얘기 잘 생각해 보셨소?" "생각해 봤소이다." "소형, 마음을 달리 먹을 수 없겠소?" 소영은 조용히 말했다. "도와 드리지 못해 죄송하오." 남옥당은 싸늘하게 웃으며 소영을 한 번 바라보더니 앞장섰다. "길이나 재촉합시다." 그가 점점 더 빨리 뛰는데 마치 꼬리에 불이 붙은 말과 같았다. 소영은 남옥당의 달리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단숨에 삼십 리쯤 달려 와서야 남옥당이 발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영은 여전히 자기 뒤에 삼, 사 척 되는 곳에서 바짝 따르고 있었는데 얼굴이 평온하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 고 숨도 헐떡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옥당 자기는 숨이 찬 것을 느끼자 암중 운기하여 숨소리를 죽이고 담담히 웃으며 말했 다. "소형의 경공이 몹시 고명하시구려." "과분한 칭찬이오." "나는 상팔과 연도의 암호를 해 놓기로 약속을 했는데 이 남옥당이 이처럼 빨리 달려 조금의 여 유도 주지 않고 달리니 암호를 표시할 수가 없어 큰일이구나. 나의 그 두 형제는 모두 의리에 죽 고 사는 사람들인데 암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쫓아 오는 것을 포기할 리 없을 텐데, 아무데 나 마구 찾아 다니다가 나를 도와 주기커녕 자신들이 위험에 빠질 텐데…" 남옥당의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나는 지금 한 가지 일이 생각났는데 소형에게 미리 일러 드려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오." "내 짐작이 틀림 없다면 소형 뒤에는 필히 따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소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무공이 높을 뿐 아니라 지혜도 비상하구나.' "내 생각에도 그들이 뒤쫓아 올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그것이 별로 이상할 것이 없지 않 소." "저는 그들이 쫓아 올 수 없게끔 딴 데로 유인하려 합니다. 자진해서 걸려들도록 말입니다." '지독한 악종이구나.' 소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냉랭히 대꾸했다. "남형은 자신의 진모가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글쎄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소이다." 남옥당은 싸늘하게 비웃었다. "소형은 애써 겉으로는 태연한 것 같아도 속으로는 몹시 애타고 있는 듯이 보이는군요." 소영은 헛말을 자꾸 해봐야 좋지 않음을 알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남옥당은 소영의 대답이 없자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불렀다. "소형! 생각을 좀 다시 했습니까?" "무엇을 말이오?" "악낭자에 관한 일입니다. 설마 소형께서 정말로 그 악낭자 하나 때문에 천추의 대업을 포기하 지는 않겠지요!" "우리 그 얘기는 그만 합시다." 그러나 남옥당은 짓궂게 추궁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혼란되어 있지요?" 소영은 냉연히 말했다. "나는 이미 분명하게 밝혔소. 당신을 도울 수가 없다고… 천 번, 만 번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오." 남옥당은 사방을 한 번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소형, 이것이 마지막 기회요. 이 기회를 놓치면 소형이 후회를 할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늦었 을 때요." 소영은 더 이상 남옥당을 상대하지 않고 속으로 어떻게 하면 남옥당 모르게 표식을 남길 수 있 을까 생각했다. 남옥당은 싸늘하게 웃으며 소영에게 위협하듯 물었다. "나는 이제 성심을 다해 말씀드렸소. 그러나 소형께서 들어 주시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군 요." 그는 돌연 두 손을 들어 세 번 박수를 쳤다. 캄캄한 숲속에서 네 사람이 다가왔다. 그들 네 사람은 전부 흑색경장을 하고 각자의 등에는 안령도(雁翎刀)를 한 자루씩 메고 있었다. 소영은 재빨리 눈을 돌려 네 명을 번갈아 훑어보았으나 모두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남옥당이 천천히 그들에게 말했다. "네 분께서는 똑똑히 보시오. 이 분이 바로 그 이름이 쟁쟁한 소영이시오."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곧 이었다. "모든 것이 심대장주의 예상했던 대로 이 소대협께서 단신으로 왔지만 뒤에 수행원이 많이 따르 고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시오." 네 명은 일제히 몸을 굽히며 대답하였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 그만 네 분께서는 돌아가시오." 그들 네 명은 일제히 남옥당에게 포권을 한 다음 다시 그 숲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남옥당은 가벼운 헛기침을 하고는 소영을 재촉했다. "우리 그만 갑시다." 소영은 남옥당의 뒤를 바싹 따라갔다. 두 사람의 걸음은 점점 빨라져서 순식간에 십 리 길을 걸 었다. 남윽당은 가볍게 탄식하며 물었다. "소형, 다 보셨지요?" "무얼 말이요." 소영은 말하는 틈을 타서 암암리에 길 옆에다 두 개의 암호를 그렸다. 남옥당은 천천히 말했다. "이 길에는 모두 일곱 군데의 매복이 있는데 전부가 암기의 고수들이지요." "나의 수행원들이 이 길을 찾지 못하면 몰라도 일단 찾았다 하면 지금 나타난 그 자들이 나의 수행원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겠지요." 남옥당은 껄껄 웃었다. "그러고 보니 심목풍이 과연 소형보다는 좀 고명하긴 하구먼." "어째서 그렇소?" "소형은 매복하고 있는 자들이 그 백리빙의 거처를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소영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그 매복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이 지키고 있는 길목만 알고 있을 뿐, 다음 길이 어디로 가는 것 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지요." 소영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남형이 협박하는 수단이 겨우 이렇다는 것을 나는 이제 완전히 파악했소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남형께서 어떠한 악독한 수단이든 전부 쓰시오.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의 협박에 흥미를 잃었소 이다." 남옥당도 냉랭히 말했다. "좋소. 우리 길이나 재촉합시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과연 그 후부터 남옥당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소영의 경공은 유선자에게 배웠으며 그 유선자의 경공은 천하제일이라고 꼽히는 것이었다. 그러 기에 소엉의 경공이 남옥당보다도 훨씬 우세한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소영은 시종 남옥당을 앞 지르지 않고 계속 그의 뒤를 따랐다. 소영은 남옥당의 뒤에서 상팔과 약속한 암호를 길목마다 기입해 놓았다. 그러나 그는 그 암호를 약간 수정했기에 혹시 상팔이 그것을 알아 보지 못할까봐 내심 염려도 되었다. 하지만 우문한도가 보게만 된다면 그 수정한 암호의 비밀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우문한도의 무공이 비록 대국에 아무 도움도 주지는 못하나 그의 재지만은 심목풍의 강적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 일장의 정사결전(正邪決戰)의 큰 싸움에 있어서 우문한도의 두뇌는 확실히 대국을 좌우할 힘 이 있었던 것이다.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며 남옥당의 뒤를 따라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앞에 섰던 남옥 당이 걸음을 멈추었다. 소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남옥당과 부딪칠 뻔하였다. 남옥당은 담담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소형, 여기서 잠시 쉬어 갑시다." "좋도록 하시오." 눈길을 돌리니 햇살이 푸른 잔디의 이슬에 반사되어 마치 천만 개의 보석이 반짝이는 듯 아름다 왔다. 남옥당은 손가락으로 저 멀리 은은히 바라보이는 청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보이는 것이 바로 설봉산(雪峰山)이오." 소영이 대뜸 말했다. "심목풍이 이미 저 설봉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군요?" 소영은 정색을 한 채 입을 다물고 있는 남옥당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자신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155. 감언이설과 독계(毒計) 남옥당은 갑자기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길을 걸어 왔기 때문에 피로했던 것이다. 남옥당은 백리빙을 찾기 전에는 소영이 자기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마 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영은 은근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무 아래 앉아서 나무둥치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쉬기로 했다. 밥 한 끼 먹을 시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타고 오던 흑의인이 남옥당 앞에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매우 공손한 태도로 남옥당에게 절을 한 다음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였다. 남옥당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고 대꾸를 하는 것 같았다. 소영은 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에 흑의인은 다시 말 위에 올라타더니 채찍을 휘두르며 가 버렸다. 남옥당은 흑의인이 멀리 사라져 버리자, 소영에게 말했다. "소형, 우리도 그만 갑시다." 남옥당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 갔다. 소영도 그의 뒤를 따랐다. 남옥당은 소영을 몹시 미워하고 있는 듯 길을 걸으면서 한 번도 소영을 돌아보지 않았다. 소영은 남옥당에게 물어 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남옥당의 태도로 보아 순순히 대답해 줄 것 같지가 않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남옥당은 한 번도 뒤돌아보는 일 없이 단숨에 십여 리를 달려 한 채의 초가집 앞에서 걸음을 멈 췄다. 소영은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남옥당에게 물었다. "남형, 여기가 어디입니까?" 남옥당은 여전히 돌아보지도 않는 채 내뱉듯이 말했다. "객점입니다. 소형은 먼길을 걷고도 시장하지 않습니까?" 소영이 바라보니 초가집 앞에는 작은 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다. 소영은 암암리에 손을 내밀어 그 나무에다 암호를 표시하고 남옥당을 따라 들어갔다. 초가집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고 대청의 팔선탁(八仙卓)에는 이미 향기로운 차와 과일이 준비 되어 있었다. 남옥당은 맨 윗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소리를 질렀다. "게 누구 없느냐?"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한 소녀가 달려 나왔다. 남옥당은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난 뒤 이상한 단어를 내뱉었다. "금옥수토, 동방 제일인!" 미리 정한 암호인 듯했다. 달려 나온 소녀는 청의를 입었는데 키가 크고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곧 남옥당에게 절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그럼 남나리이십니까?" "그렇소. 먼길을 달려 시장하니 빨리 술과 식사를 내오시오." 소녀는 대답을 한 다음 총총히 나가 술과 밥을 차린 상을 들고 들어왔다. 남옥당은 우선 자작자음을 한 다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해지기 전에 소형은 백리낭자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소형의 용기라면 당장 백리낭자를 도 로 뺏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음식을 두둑이 먹어서 기운을 회복해야 할 겁니다." '심목풍은 매우 음흉한 위인이라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이 음식도 먹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 다.' "저는 별로 시장하지 않소. 남형께서나 실컷 드시오.." 소영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남형께서도 그다지 시장하지 않다면 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남옥당은 그 말을 듣자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이어 한바탕 크게 웃어젖혔다. "소형은 이 음식에 독약이라도 넣었을까봐 그러는 거요?" "심목풍의 위인으로 보아 이 음식에 반드시 독을 놓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소." 그러자 남옥당은 품속에서 한 개의 상아(象牙) 비녀를 꺼내서 술과 음식 속에 담그어 시험해 보 았다. 그리고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소형 염려할 것 없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마구 마시고 먹었다. 소영은 비록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지만 끝내 음식을 먹지 않았다. "남나리, 좀 쉬었다 가시렵니까?" 남옥당이 내뱉듯이 대답했다. "필요 없소. 우리는 곧 가겠소." 남옥당은 말을 마치자 곧 일어서서 길을 나섰다. '남옥당의 말마따나 만일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앞으로 견뎌내기가 힘들 것이다.' 소영은 저자를 지나면서 걸음을 멈추고 호떡을 몇 개 사먹었다. 남옥당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소형이 아까 술과 밥을 먹지 않았던 것은 확실히 그 음식에 독이라도 들어 있을까 봐 그랬던 것이군요." 소영이 담담하게 웃었다. "심목풍은 부하 고수들을 억제하기 위해 그들의 몸에 독을 주입시키는 것이오. 물론 그 독은 심 목풍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해약 이외는 제아무리 무림의 일류 의생이라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이오. 그러니 남형은 나를 걱정하기 전에 자신의 몸을 돌보아야 합니다." 남옥당은 소영의 말을 듣자 가슴이 섬뜩했다. 그는 순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곧 태연한 기색을 회복하여 담담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당신이 죽기 전에는 그도 나를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일러준 이상 듣고 안 듣고는 당신의 마음에 달렸소." 남옥당은 걸음을 옮겨 놓으면서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 시간 가량 달려 산밑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많은 산봉우리가 이어져 있는데 한 줄기의 꼬불꼬불한 산길이 나 있었다. 그 좁은 길은 봉우리로 가는 길이었다. 남옥당은 그제야 소영을 돌아보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왔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봉우리를 향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소영도 재빨리 걸어 남옥당의 뒤를 따랐다. 이들이 몇 십 장 가량 갔을 때 남옥당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 갔다. 무성한 녹음 속에 붉은 담모퉁이가 엿보였다. 소영은 울창한 밀림에 이토록 잘 지은 집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 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곧 기와집 문앞에 이르렀다. 나무로 만든 대문 위에 무아소축(無我小築)이라고 쓴 네 글 자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어떤 고명한 분이 수양을 하고 있던 곳을 심목풍이 빼앗은 것이로구나…' 남옥당이 손을 들어 대문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자 대문이 곧 열렸다. 문앞에는 등이 약간 굽은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바로 심목풍이었다. 그리고 심목풍의 왼쪽에는 황색 가사를 입은 노승 한 명이 서 있고, 그 오른쪽에는 금화부인이 있었다. 소영은 잠자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심목풍이 예의 그 큰 손을 내밀면서 미소를 지 었다. "손제, 우리 형제는 오늘 즐거운 이야기를 하면서 정을 나눕시다." 일이 이쯤 되자 소영을 할 수 없이 손을 내밀어 심목풍의 손을 마주잡았다. "심대장주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 소모를 만나려는 겁니까?" "대청에는 이미 맛좋은 술과 음식이 준비되어 있으니 소제는 실컷 먹고 마신 다음에 이야기를 꺼내도 늦지 않소."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예까지 온 이상 이들이 무슨 수작을 하고 있는지 두고 볼 수밖에…' 소영은 심목풍의 안내도 받지 않고 앞장서서 들어갔다. 과연 방안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마련돼 있고, 술잔이 준비되어 있는데 술잔에는 이미 술이 가득 부어져 있었다. 심목풍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소제, 마음대로 한 자리를 골라 앉으시오." 소영은 한 차례 둘러보고 맨 윗자리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심목풍이 주인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황의승은 심목풍의 왼쪽에 앉았으며 금화부인과 남옥당은 오른편에 나란히 앉았 다. 소영은 두 손을 품속에 넣어 천 년 묵은 교피장갑을 살짝 끼고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 올렸다. 심목풍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쭉 들이키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소제, 우선 무엇을 좀 드시오." 소영이 대답했다. "심대장주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어서 말씀하십시오. 저는 시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차려 주신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심목풍은 다시 헛 하고 웃었다. "소제께서 이 형을 대하는 품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 같구려." 소영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심대장주께서는 엉뚱한 말을 하시는 것 같군요…" 소영은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백리낭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녀를 데리러 왔습니다." "백리낭자는 여기에 있소. 그녀는 잘 있으니 안심하시오. 그런데 내가 소제에게 한 가지 물어 보 고 싶은 일이 있는데…" 소영이 말을 받았다. "심대장주께서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은 나에게 어떤 조건을 내걸기 위함이었군요?"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그건 아니오. 꼭 들어달라고 우기는 것은 아니오." "그렇다면 좋소. 무슨 조건인지 먼저 말해 보시오."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소제가 강호를 물러나 이 형과 대적하지 말아 주기 바라오." "내가 만약 거절한다면…" "그렇다면 소제가 백리낭자를 재주껏 구해 나가는 수밖에…" 소영이 시선을 돌려 네 사람을 훑어보았다. "네 분이 한꺼번에 덤빌 작정이오?" 심목풍이 너털웃음을 웃어젖혔다. "그렇지도 않소. 이분들은 모두가 무림의 고수들이오. 소제가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어찌 우리들을 한꺼번에 다 이길 수야 있겠소?" 소영이 반문했다. "그렇다면 차례로 싸우겠단 말씀이오?" 심목풍이 고개를 저었다. "소제가 곳곳에서 나에게 도전해 왔으니 이 기회에 한꺼번에 갚아줄까 하오." "심대장주가 원래 음흉하기 짝이없는 위인임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오. 백리낭자를 잡아간 저 의는 결국 이 소모에게 있었군요. 이제 이 소영이 단신일검으로 심대장주가 쳐놓은 그물 속에 깊 숙이 걸려 들었으니 당신이 만일 오늘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요."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암! 하지만 내 손으로는 직접 죽이지 않겠소." 소영은 시선을 황의화상 및 금화부인과 남옥당에게로 옮겼다. "당신 심대장주가 아니라면 이들 세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겠군요." 심목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세 분은 나의 귀빈인데 어찌 나의 결투를 대신시킬 수가 있겠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소영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꿍꿍이속인지 좀 분명히 말해 주시오." 심목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산속으로 십 리만 더 가면 산곡이 끝나는 데가 있소. 거기가 백리빙이 갇혀 있는 곳이 오." 소영이 물었다. "심대장주는 그 골짜기에다 어떤 매복을 해놓고, 내가 그곳을 뚫고 들어가서 사람을 구해 보라 는 거요?" "바로 맞았소. 내가 그 골짜기 여덟 군데에 매복을 했으니, 당신이 만일 그 여덟 개의 관문을 무 난히 돌파하면 곧 백리낭자를 볼 수 있을 것이오." 심목풍은 말을 마치자 너털웃음을 웃어젖혔다. 소영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백리빙이 누구의 딸인 줄을 알고 있소?" "북천존자의 딸이오." 소영은 말을 이었다. "북천존자의 부하 중에는 많은 고수들이 있소. 그들은 모두 백화산장의 고수들보다 무공이 낫지 않소? 그러므로 당신이 백리빙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킨다면 당신은 새로운 강적을 만드는 셈이 오." 심목풍이 너털웃음을 웃어젖혔다. "그 걱정은 마시오. 나에게도 이미 생각이 있소." 심목풍은 말을 마치자 황의승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제, 저기 앉은 대사를 당신은 모르는 모양인데…" "심대장주가 소개를 해주지 않았으니…" 심목풍이 말을 가로챘다. "그럴 테지요…" 심목풍은 잠시 말을 끊더니 황의화상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분이 바로 현재 소림사의 달마원 주지, 십방(十方)대사요." 그는 자시 소영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이분이 바로 그 이름도 쟁쟁한 소영, 소대협이오." 십방대사는 두 손을 모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대협의 이름은 오래 전부터 흠모해 왔는데, 오늘에야 다행히 뵙게 되었군요." 소영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림파는 무림 동도의 태두(泰斗)로 여겨져 왔거늘…" 십방대사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무림동도들이 모두들 우리 소림파를 그렇게 받들고 있지요. 그러므로 저는 소림의 제자가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영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소림의 제자들은 모두 칭찬받을 만한 가치가 있지만 오직 대사만은 그다지 칭찬받을 만한 사람 이 못 되는 것 같소." 십방대사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성난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쌀쌀한 음성으로 말 했다. "소대협은 입심이 고약하군요." 소영이 대답했다. "대사와 같은 사람에게는 좋은 말로 상대할 필요가 없소." 십방대사는 한 번 냉소를 지은 다음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심목풍이 하하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소제의 태도로 보건데 우리들의 협상은 이미 끝난 것 같소." 소영이 말을 받았다. "그렇지도 않소. 만일 심대장주가 강호를 제패하겠다는 생각만 버린다면, 내가 당장이라도 대장 주를 대신해서 무림동도들에게 당신의 입장을 해명해 드리겠소." 심목풍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 문제라면 백리낭자를 구해낸 다음에 다시 의논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소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드디어 소영은 벌떡 일어섰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좀 인도해 주시오." "소제, 술과 음식을 좀 들고 가는 것이 어떻겠소?"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럴 마음이 없소." 심목풍은 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좋소. 소대협이 그다지도 백리낭자가 보고 싶다면, 나도 더 권하지 않겠소." 심목풍은 말을 마치자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남옥당, 금화부인, 십방대사도 모두 뒤따라서 일어 섰다. 소영은 맨 뒤에 서서 방울 나왔다. 심목풍은 봉우리를 향해 올라갔다. 길이 매우 가파랐다. 비록 나무가 많이 있어 그것을 잡고 오르긴 했지만 워낙 경사가 심한지라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뛰어난 경공을 지닌 사람들이었 으므로 무난히 봉우리까지 오를 수가 있었다. 봉우리 위에서 내려다 보니 절벽 밑에 많은 산봉우리를 꼬불꼬불 돌아 나가는 한 줄기의 골짜기 가 보였다. 심목풍은 그 골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저 골짜기요. 저 골짜기를 곧장 걸어가면 여덟 군데의 매복이 있을 거요. 당신이 그 매복 을 무사히 돌파한다면 백리낭자를 볼 수 있을 것이오." 소영이 내려다보니 골짜기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소영은 심목풍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백리빙이 저 골짜기 끝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저 험 난한 길을 헤치고 가겠소. 더욱이 여덟 군데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 가면서…"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있는 말이오." 이 때 남옥당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참견을 했다. "기실 우리 네 사람이 힘을 합한다면 여기서 당신을 죽이기는 쉬운 일이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네 사람을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네 사람을 이길 수는 없지만 네 사람의 포위를 뚫고 빠져 나가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오. 네 분께서 믿어지지 않는다면 한 번 시험해 보시지…" 심목풍은 빙그레 웃었다. "하하, 됐소. 그만들 하시오." 심목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소제가 제안한 조건은 나도 이미 생각했던 바요. 만일 백리낭자가 그곳에 있다는 확증이 없으 면 당신은 물론 그 험한 길을 가려고 하지 않을 거요."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골짜기는 수십 리나 되는 험난한 길이다. 어떻게 저곳에 백리빙이 있다고 믿을 수 있단 말 이냐?' 이 때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백리빙의 필적을 알고 있소?" "물론 알아볼 수 있소." 심목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은 수가 있소. 소제가 혹시 그녀의 필적만으로도 믿을 수 없다고 할는지 모르니, 그녀의 편지 에 어떤 믿을 만한 물건을 넣어 달라고 하시오. 피차 은밀히 알고 있는 것이면 더욱 좋소. 혹시 누가 위조할는지도 모르니까?" 소영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늘 지니고 있는 귀걸이를 증거로 보내게 하시오." "좋소." 심목풍이 손을 들자, 곧 한 사나이가 손에 커다란 새장을 들고 달려왔다. "비둘기를 보내서 백리빙에게 편지를 전하도록 해라. 그리고 귀걸이를 함께 넣어서 보내 달라고 써라!" 그 사나이는 곧 대답을 한 다음 허리에 차고 있던 보따리를 꺼내어 들었다. 그 보따리 속에는 문방사우(文房四友)가 들어 있었다. 그는 보따리 속에 든 함을 열어서 종이를 꺼내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그것을 심목풍에게 보인 후 곧 접어서 대로 만든 조그마한 새장 안에 손을 넣어서 비둘기의 날개에 매달았다. 그 다음 사나이는 비둘기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심목풍은 미소를 지었다. "소제, 우리들은 여기 앉아서 소식을 기다립시다. 비둘기가 돌아와서 내 말이 정말인가 거짓인가 를 알아보고 가도 늦지는 않을 테니…" 소영은 잠자코 비둘기가 깊은 골짜기를 따라 산봉우리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그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이 봉우리 위에 앉아서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 대 비둘기가 다시 날아 왔다. 이 때 회의인이 벌떡 일어나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비둘기는 높이 쳐든 그의 왼손 위에 내려앉았다. 회의인은 곧 비둘기의 날개 밑에서 편지함을 꺼내 공손한 태도로 심목풍에게 넘겨 주었다. 심목풍은 그 편지함을 받아 열어 보고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 함 속에 귀걸이가 없었느냐?" 회의인이 대답했다. "소인이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만…"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그 함을 이리 줘 보시오. 내가 한 번 찾아볼 테니…" "그거 좋겠소. 직접 찾아 보는 게…" 소영이 함 속을 뒤져 봤지만 귀걸이는 없었다. 그래서 소영은 우선 편지부터 읽어 보았다. "저는 편안히 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으로 잡혀 올 때 귀걸이는 달고 오지 않았습니다…" 틀림없는 백리빙의 필적이었다. 소영은 심목풍이 써보낸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이 필적으로 볼 때 는 백리빙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편지함에다 귀걸이를 넣어 보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오?" "그녀는 원래 귀걸이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물론 편지 속에 넣어 보낼 수는 없는 일이지요."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병법에는 속임수를 써도 좋다고 했지만, 사실 소제의 그 동안의 진전에는 이 형이 감복하지 않 을 수 없소. 앞으로 삼 년만 더 지난다면 그 지모에 있어서 도저히 이형이 미치지 못할 것 같소." "과장이 지나치시군요." 심목풍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다음 웃으면서 말했다. "소제는 언제쯤 떠나겠소." "곧 떠나겠소." 심목풍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더 바래다 주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시오. 그럼 여기서 작별하겠소이다." 소영은 곧 일어서서 진기를 끌어 모으며 그 골짜기로 가는 길을 한참 동안 눈여겨 보았다. 이윽 고 그는 절벽 밑으로 뛰어 내렸다. 이 때 심목풍이 높은 소리로 외쳤다. "소제, 만일 중도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힘이 모자라서 매복한 사람들에게 잡힌다면 그들에게 내 말을 하시오. 그럼 내가 눈깜짝할 사이에 달려가리다." "안심하시오. 심대장주! 내가 만약 백리빙을 구해 내지 못한다면 당 신은 다시는 소영이란 사람 을 보지 못할 거요 다만 그 시체는 볼 수 있을는지 몰라도.." 심목풍은 탄식조로 말했다. "소제, 너무 고집 부리지 마시오." 소영은 그 이상 심목풍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래서 눈깜짝 할 사이에 골짜기 입구에 도착했다. 골짜기 입구는 매우 협소했다. 양쪽에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그 넓이가 칠, 팔 척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골짜기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졌다. 소영이 골짜기 안을 자세히 바라보니 골짜기에는 작은 길조차 없는 것 같았다. 이곳에는 거의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없었다. 이윽고 소영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섰다. 골짜기 안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여러 가지 이름모를 꽃 들도 피어 있었다. 소영은 손에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그는 전에 남악(南嶽) 단혼애에 갔을 때 독사가 우글거리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이 골 짜기에도 독사나 맹수가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뿐더러 심목풍의 말대로라면 여덟 군데의 매복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 기습을 해올는지 모르는 것이다. 또한 그 매복이란 어떤 기관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영은 이십여 장이나 걸어 갔는데도 아무런 매복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오히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산곡이 얼마나 먼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느리게 가다가는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구나. 이 골 짜기의 막바지에 가서 매복이 있다면 차라리 좋겠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사람을 구하는 데 있 지, 결코 싸움을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까.' 소영은 더욱 속도를 내서 달렸다. 몇 개의 후미진 골짜기를 돌아가자 갑자기 경치가 달라졌다. 키가 나지막한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서 길이 막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잡초가 허리에 닿 도록 자라서 거칠기 짝이없었다. 소영은 이 막힌 길이 십여 장 가량 되리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그는 곧 진기를 끌어 모아 특수 한 경공을 발휘하여 풀 위를 스치면서 나뭇가지를 밟고 날 듯이 달려갔다. 과연 이 빽빽이 들어찬 작은 소나무들은 십여 장 정도밖에 뻗쳐 있지 않았다. 또 하나의 후미진 골짜기를 돌자 끝나 버렸다. 소영은 곧 땅에 내려 서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눈앞의 경치를 살펴보니 작은 돌들 이 울퉁불퉁하게 튀어 나와 어수선하기 짝이없었다. '어째 한 사람의 매복도 나타나지 않을까?' 이 때였다. "절세의 곁공을 지닌 것을 보니 소영인 것 같군요?" 소영은 여태껏 매복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오히려 의아심을 가지고 있던 찰나에 이 말을 듣자 정 신이 번쩍 났다. "그렇소. 제가 바로 소영이오. 누구시오, 왜 얼굴을 나타내지 않소." 이 때 큰 바위 뒤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 한 분이 나타 나서 바위 위로 뛰어 올랐다. 노인의 얼굴은 불그스름하며 체격이 매우 건강해 보였다. 소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생면부지의 노인 앞에 공수를 했다. "노인장께서는 성함을 말씀해 주실 수 없습니까?" "노부는 등륜(鄧倫)이라고 하오. 나는 강호에서 은퇴한 지 수십 년이 되므로 무림에서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소."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심목풍은 실로 그 누구도 따라 가지 못할 재능을 가지고 있구나. 어떤 수단을 썼길래 강호에서 수십 년 동안이나 은퇴해 있던 사람을 저렇게 자기 편을 만들어서 이용할 수가 있단 말인가?' 소영은 곧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서는 이미 강호에서 은퇴하셨다고 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강호에 나타나서 무림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려고 하시는지요?" 등륜은 천천히 대답했다. "노부는 백화산장 심대장주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 그를 도와 주기로 한 것이오." 소영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심목풍은 과연 수단이 좋은 사람이군요." 소영은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노선배님께서는 심목풍의 행위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계실 텐데, 일단 강호에서 물러났다면 여 생을 유한(幽閒)하게 마칠 일이지 어찌하여 다시 강호로 나오셔서 그 간악한 심목풍의 일을 도우 려 하오?" 등륜은 미소를 지었다. "소영은 간섭을 대단한 사람이군!" 소영이 말을 이있다. "제가 보긴로는 노선배님은 절대 악인이 아닌 것 같은데 마음을 돌리는 게 어떻겠소." 등륜은 그 말을 듣자 껄껄 웃었다. "만일 노부가 그 권고를 듣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공으로 생사를 판가름하는 수밖에 없지요." 등륜은 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심대장주는 당신의 무공이 비범하다고 누차 말했소. 노부 역시 당신의 언행이 오만하다고는 말 하지 않겠소. 아무튼 당신이 출수를 하시오." 소영은 말을 받았다. "좋습니다. 그런데 노선배님께서는 저와 무기로써 겨루시겠습니까? 아니면 권장(拳掌)으로 시험 해 보시겠습니까?" "노부의 무기는 소매 속에 감추어 두었으므로 수시로 꺼내어 사용할 수 있소. 그러니 당신도 아 예 무기를 드는 것이 좋을 거요." 소영은 진기를 끌어 모아 갑자기 몸을 날려서 등륜이 서 있는 바위 위로 덮쳐 갔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쳤다. "저는 지금도 노선배님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번 겨룬 후에라 도 늦지 않으니 노선배님께서 잘못을 뉘우치시기 바랍니다." 등륜은 소영이 단숨에 자기가 서 있는 바위 위로 덮쳐 오는 것을 보고는 한편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분노가 끓어 올랐다. '이 녀석은 나이가 어린데도 대단한 솜씨를 지녔구나! 먼저 출수를 하여 기선을 잡아야겠다.' 등륜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오른손을 휘둘러 마주 일장을 쳐냈다. 그 일장은 정정당당했다. 조금도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다. 정당한 실력으로 소영의 공세를 막았 다. 소영은 순간 그 바위에서 밀려났다. 엉겹결에 뾰족한 돌 위에 서게 되었다. 더군다나 강하게 덮 쳐 오는 등륜의 장세를 오른손으로 막아야만 했다. 등륜이 이처럼 속임수를 쓰지 않고 옆으로 공격하지도 않으며 정면으로만 상대해 온 것은 소영 으로서는 정말 뜻밖이었다. 그래서 소영은 처음에 예상했던 수법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영은 곧 임기응변으로 두 발을 땅바닥에 딛고 몸을 비스듬히 하여 눕는 자세를 취했다. 소영은 이처럼 불리한 형세에 놓여 있었지만 할 수 없이 그의 장풍을 받아 넘겼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소영의 비스듬한 자세는 다시 비틀거렸다. 소영은 몸을 가누기 위해서 땅을 향해 일장을 쳐냈다. 그리하여 그 반동을 이용하여 소영은 다 시 바위 위로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등륜도 소영의 일장에 진동을 받아 팔이 잠깐 동안 마비되었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는데 소영이 다시 바위 위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등륜은 순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소대협은 과연 듣던 바와 같군요." 등륜은 말을 함과 동시에 다시 일장을 쳐냈다. 소영은 비록 바위 위에 올라서서 아직도 불리한 위치에 서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훨씬 유리한 입장이었으므로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 올려 다시 등륜의 일장을 맞받았다. 등륜의 장세는 점점 세어졌지만 소영의 위치가 아까보다는 유리한 형세에 있었으므로 소영은 몸 을 두어 번 비틀거렸을 뿐 쓰러지지는 않고 뒤로 일 보 정도 물러나기만 했다. 등륜은 정말 뜻밖이라 소영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만일 노부의 일장을 더 받을 수 있다면 무사히 매복을 뚫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 것 이오." 소영은 등륜의 위인이 광명정대한 것을 보자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심목풍의 말을 듣게 된 데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원래는 그를 죽이려 고 했었지만 마음을 다시 고쳐 먹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다시 일장을 쳐내십시오." 이 때 실은 소영에게 반격할 기회가 있었지만 소영은 손을 멈추어 버렸던 것이다. 등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대협의 그 기백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등륜은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 일장은 노부의 전력을 기울인 것이니 소대협께서는 조심하시오." 소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선배님 마음대로 쳐내십시오. 제가 만일 그 일장에 부상을 당한다면 죽어도 원망하지 않겠습 니다." 등륜이 입을 열었다. "좋소. 그렇다면 소대협께서 앞으로 두 걸음 나서시오. 나는 이 일장으로 소대협과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하려고 하니 우리들은 피차가 공평한 입장에서 해야 하오." 소영은 이미 등륜의 이장을 받아 보고 그의 무공이 실로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의 일장은 그가 전력을 기울여 쳐낸다고 했으니 틀림없이 그 세력이 무서울 것이라고 생각했 다. 등륜은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일장을 쳐냈다. '이 사람은 내력으로 겨루려는 것이구나.' 두 사람은 천천히 두 손을 마주쳤다. 순간 두 사람은 장심에 모아 두었던 내력을 천천히 발출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등륜이 이마에서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소영의 머리에서도 김이 무럭무럭 났다. 두 사람은 잠시 그와 같은 싸움을 계속했다. 그러나 갑자기 등륜이 손을 내리면서 뒤로 오 척 가량 물러났다. 소영은 이 틈을 이용하여 등륜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손을 멈추고 천천히 내력을 거두어 들였 다. 등륜이 말했다. "소대협, 가보시오. 이 늙은 것은 적수가 되지 않소." 소영은 포권을 했다. "노선배님께서 양보하셨겠지요." 등륜은 씁쓰레하게 웃으면서 몸을 번뜩여 옆으로 물러났다. 소영은 한 관문을 무사히 지났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재촉하여 걸어 갔다. 소영이 두 개의 산모퉁이를 돌아가자 널찍하던 산곡이 갑자기 좁아지면서 폭이 이 장 정도 되는 한 줄기의 좁은 길이 나타났다. 소영이 골짜기에 들어서자마자 네 사람이 각각 단도를 들고 나타났다. 이들은 검은 수건으로 얼 굴을 가렸으며 경장을 하고 있었다. 소영은 손 닿는 대로 두 개의 소나무 가지를 꺾어 들었다. 한 개는 매우 단단하고 한 개는 연한 것이었다. 소영은 그것을 두 손에 나누어 쥐었다. 이들 검은 복면을 한 네 사람의 눈은 일제히 소영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디도 말은 하지 않았다. 소영은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분은 뭣 때문에 본래의 면목을 나타내지 않는 거요?" 그러나 이들은 묵묵부답이었다. 다만 재빨리 흩어져서 포위 공격을 할 태세를 취했다. 소영은 냉소를 지었다. "네 분이 검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을 보니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떳떳하지 못함을 알고 있는 것 같소. 아마 양심의 가책을 받았던 모양이지요?" 그래도 네 사람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일제히 수중의 단도를 쳐들 뿐이었다. 소영은 이들이 끝내 대답을 하지 않자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네들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벙어리인 것 같구려." 그래도 네 사람은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영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오른손에 든 소나무 가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네 사람도 재빨리 자기의 방향을 맡아 서며 손에 든 단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도광(刀光)이 번쩍이며 사면팔방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소영은 깜짝 놀랐다. '무서운 도진(刀陣)이군!" 소영은 급히 수중의 소나무 가지를 휘둘러 막아 나갔다. 소영의 무공으로 본다면 이 소나무 가지로 무기를 삼더라도 이들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실력이 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도진을 펴서 상대할 줄을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칼에 부상을 당할 뻔했다. 네 사람의 공세는 갈수록 맹렬해져서 급기야 소영을 도망(刀綱)속으로 몰아 넣고 말았다. '만일 이들과 내가 이런 식으로 싸워 간다면 얼마나 긴 시간을 끌지 모른다. 시간을 끌면 끌수 록 나는 불리하다. 그러므로 속히 싸움을 끝내고 심목풍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빨리 백낭자를 구출 해서 돌아가야 한다.' 소영은 수중의 소나무 가지를 버리고 오른손을 휘둘러 탄지신공을 쳐내서 정면으로 공격해 오는 두 자루의 단도를 물리치고 다시 왼손을 휘둘러 뒤에서 쳐들어 오는 한 자루의 단도를 또 물리쳤 다. 소영은 손에 교피장갑을 끼고 있었으므로 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을 솟구쳐 올림 과 동시에 왼손을 품속에 넣어 단검을 꺼냈다. 그러나 이들은 거머리처럼 달라 붙었다. 소영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보자 네 사람도 동시에 뛰 어 올랐다. '무서운 도진이다! 만약 내가 금궁에 들어가기 전에 이들을 만났다면 나는 이미 죽고 말았을 것 이다.' 소영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천구추(千丘墜)의 신법을 전개하여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그 내려서는 동작이 매우 빨랐으므로 일거에 네 자루의 칼을 피할 수가 있었다. 소영은 땅바닥에 내려 서자마자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자세를 가다듬은 다음 갑자기 쏜살같이 앞 으로 달려 나갔다. 네 사람의 사나이는 일제히 허공을 찌르게 되자, 곧 단전의 진기를 내려서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이들 네 사람의 무공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곧 한꺼번에 뛰어 올랐다가 일제히 칼을 쓰기도 하며 또한 한꺼번에 땅바닥에 내려서는 등 그 도진이 질서정연한 것 같으면서도 문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영은 이미 일 장 밖에 가 있었다. 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또 소영에게로 쏠리더니 그들은 또한 일제히 소영을 뒤따랐다. 그들의 도진은 와해되고 말았다. 제아무리 훌륭한 솜씨라 하더라도 이처럼 달려가면서 진을 형 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영은 단검을 다잡아 들고는 갑자기 걸음을 늦추었다. 그러자 네 사나이는 곧 소영의 뒤를 바 싹 접근하게 되었다. 맨 앞장서 오던 사나이가 단도로 신룡일혈(神龍一穴)식으로 소영의 등을 향해 찔렀다. 이 때 소영은 곧 오른손을 뒤로 돌렸다. 한광이 번쩍이며 쨍그렁, 소리 가 나며 그 사나이의 손 에서 검이 떨어져 버렸다. 소영은 그 순간 왼손을 들어 수라지력을 쳐냈다. 한 줄기 지풍이 재빨리 뻗쳐 나가 그 사나이의 오른쪽 허벅지의 환도혈(環跳穴)을 명중시켰다. 순간 그 사나이는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달려오던 힘으로 인해 곤루박질을 치며 쓰러졌다. 소영은 이렇게 한 사람을 거꾸러뜨리자 사기가 충천하여 갑자기 휙 돌아서면서 두 번째의 사나 이를 공격했다. 두 번째의 사나이는 앞에 가던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 은근히 겁이 나서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에 소영이 공격해 갔으므로 그는 엉겁결에 칼을 번쩍 들었지만 눈 깜박할 사이에 소영의 장세에 의하여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그 틈을 이용하여 소영은 다리를 들어 그 사나이의 오른쪽 무릎을 힘껏 걷어 찼다. 순간 그 사 나이의 무릎은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그래서 그는 조금도 더 걷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들 네 사람은 줄을 서서 달려왔으므로 앞의 사람이 부상을 입어 쓰러지자 뒤의 사람은 갑자기 걸음을 멈출 수가 없어서 앞의 사람을 들이받고 쓰러져 버렸다. 이 때 소영은 곧 수라지력을 연발하며 나머지 두 사람의 혈도를 찍었다. 소영은 이렇게 두 번째 매복을 돌파한 것이다. '심목풍의 여덟 매복이 다 이 정도라면 그리 염려할 바가 없기도 하련만.' 소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담대해져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156. 나한승(羅漢僧)들의 의리(義理) 소영이 또 하나의 산굽이를 돌았을 때였다. 싸늘한 바람과 함께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독한 비 린내가 풍겨 왔다. 소영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조그만 잔디밭 위에 수천 마리의 독사가 들끓었다. 그리고 그 우 글거리는 독사의 한가운데에 청삼을 입은 젊은이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좌식을 하고 있었다. 소영은 그 젊은이를 전에 남궁옥(南宮玉)을 구하기 위해서 무산에 갔을 때 본 일이 있었다. 거기서 소영은 그와 싸운 일이 있었지만 그의 정체는 아직도 모르고 있으며 다만 그 젊은이의 아버지가 운이모와 아는 사이란 것만을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 젊은이의 주위에 독사가 우글거렸으므로 소영은 더 접근하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 다. "저는 소영이오! 인사나 나눕시다!" 소영이 외치자 그 젊은이가 천천히 눈을 뜨면서 입을 열었다. "심목풍의 말로는 당신이 금궁에 들어가서 소왕 장방의 소법비록(簫法秘錄)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이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심목풍을 심대장주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구나. 이 사람 은 심목풍을 두려워하거나 존경하는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무슨 조건을 내 걸고 심목풍을 도와 주기로 한 것 같다.' 소영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소." 청삼을 입은 젊은이는 냉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귀하의 무공은 이 년 전보다 훨씬 강해졌겠구려." 소영이 대답했다. "악간의 진전을 보이긴 했지만 그다지 강해졌다고까지 할 건 없소." 소영은 진기를 끌어 올리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소영은 당신을 육 년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청삼을 입은 젊은이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 때 내가 당신을 죽여 버렸더라면 오늘의 이와 같은 화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소영이 말을 받았다. "그 때 저를 벼랑으로 밀어 버린 덕분에 여태껏 살 수 있었습니다." 청삼을 입은 젊은이가 말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의 경우는 다르오. 그 때는 당신의 무공이 보잘것 없어 자비심을 베풀었지만…" 소영은 냉소를 터뜨렸다. "당신은 내가 무공이 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벽 아래로 밀어 버렸소. 기적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 때 죽고 말았을 것이오. 그런데도 자비심이라고?" 청삼을 입은 젊은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기적으로 살아났다고? 그 때 내가 당신을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지 않고 당신의 등에다 일장을 가했다면 당신은 심맥이 끊어져 기적이 열 번 있었더라도 살아나지 못했을 거요." 소영은 성난 어조로 말했다. "거 참 아깝게 됐군요 이제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을 텐데요?" "오늘이 좋은 기회지. 독수약왕이 없어졌으니 말이오. 뱀에게 한 번 물렸다 하면 영락없을 걸." 소영은 비록 무공이 강했지만 그 많은 독사들을 보자 소름이 오싹 끼쳐 오고 기분마저 나빠졌 다. "귀하는 독사를 내몰아서 나를 상대할 셈이오?" 그 젊은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무공이 매우 강하므로 이 독사만으로는 당신에게 이길 수가 없소. 이 독사는 나를 도와 줄 뿐이오." '심목풍이 사진(蛇陣)으로써 나를 상대하라고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독사를 쫓아낼 약을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이 관문을 통과하기가 심히 어렵겠구나.' 소영은 일이 이쯤 된 이상 모험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이미 두 번째 만났지만 아직도 나는 형씨의 이름을 모르고 있는데?" 그 사나이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들은 지금 친교를 맺으려는 것이 아니거늘 이름을 알아서 무엇 하오?" "지금 비록 이름을 감추려고 해도 나중엔 자연히 알게 될 거요." "내가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은 결코 당신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오. 후일이라니 우습군요. 오늘 당신은 독사의 밥이 될 텐데…" 소영은 오른손에는 단검을 꺼내 들고 왼손에는 소나무 가지를 힘있게 쥐었다. "정 그렇다면 더 말할 필요조차도 없소. 귀하는 빨리 출수를 하시오." 사나이는 앙천대소를 했다. "나에게 먼저 출수를 하라고?" 사나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지금 사진 가운데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 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이곳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거요." 소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지금 사진을 펴서 나로 하여금 독사의 공격을 막게끔 해 두고 그 틈에 공격을 가하 려는 악랄한 수법을 쓰려고 하는구나. 그러나 내가 여기서 체력을 너무 소비할 수는 없지. 아직도 다섯 군데의 매복이 남아 있으니까?' 소영은 시선을 돌려 앞길을 바라봤다. 그러나 빠져 나가야 할 길은 너무나 협소했다. 양쪽은 절벽이며 그 사이에 폭이 불과 이 장 정도의 길이 뚫려 있을 뿐이었다. 경공을 써서 날 아 가지 않는 한 빠져 나갈 도리가 없었다. '심목풍이 선택한 지형일 텐데 어디에 빈틈이 있을라구!' 이 때 그 사나이가 외쳤다. "소영, 나는 결코 심목풍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오. 당신과 한 번 겨루기 위해서…" "무슨 까닭으로…" "한 사람을 위해서…" 소영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라니? 누구란 말이오?" "악소채…" 사나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당신이 만약 악소채를 나에게 양보한다면 우리들은 다시 친구로 사귈 수가 있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허튼 소리 마시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소. 악소채가 나의 아내가 되는 것만이 당신이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오." 소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악소채를 아내로 맞이하는 데 있어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더욱이 나에게 양보 를 하라니…" 소영은 정색을 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악소채 낭자를 존경해 왔을 뿐이오. 그녀의 어떠한 결정에도 나는 반대할 권리가 없소." 사나이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러나 악소채는 당신과 결혼을 하라는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유서를 가지고 있소." 소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 유서를 본 일이 없으므로 그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소." 사나이는 진지하게 말을 받았다. "악소채의 말이 참말이든 거짓말이든 그걸 논할 필요는 없소. 다만 당신이 내 요구를 한 가지만 들어주면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백리빙을 구출하는 일을 도와 주겠소." 사나이는 간절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친필로 이렇게만 써 주시면 되는 거요. 당신은 백리낭자와 약혼을 하였으니 악낭자와의 결혼문제는 이후 다시는 꺼내지 말기로 하자고… 내가 여기 문방사보를 준비하고 있으니 당신은 쓰기만 하시오." 소영은 냉소를 지었다. "백리낭자와 나는 약혼을 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악누님도 누님 의사 대로 할 일이지 도대체 그 런 일이라면 이 소영이 관여할 바가 아니오." 그러자 사나이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죽여서 그 목을 잘라 악소채에게 보이는 수밖에 없구려. 그래서 그녀가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 마음을 버리게끔…" "당신에게 만약 그렇게 할 만한 능력이 있다면 한 번 해 보시오. 소영은 죽어도 당신을 원망하 지 않을 테니…" 사나이는 소영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은 오늘 꼭 생사의 판가름을 내야겠군." 그는 말을 마치자 곧 품속에서 피리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는 입에 대고 두어 마디 날카로운 소 리를 불어냈다. 그러자 독사들이 일제히 대가리를 쳐들고 소영에게로 몰려 왔다. 소영은 곧 수중의 소나무 가지를 휘둘러 독사를 쓸어 나갔다. 그러자 독사들은 잘라지기도 하고 대가리가 터져 죽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는 독사가 매우 무서웠으나 몇 번 막대기를 휘두르고 나자 오히려 그것들이 만만하 게 보였다. 독사가 사람을 문다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막 신이 나게 독사를 죽이고 있을 때 갑자기 그 사나이가 다시 피리 소리를 달리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독사가 뛰기 시작했다. 소영은 독사가 자기에게 뛰어 오르기 시작하자 왼손에 들고 있던 소나무 가지를 마구 휘두르며 빙그르르 돌면서 쓸어갔다. 소나무 가지에 내력을 집중시키고 있었으므로 그 힘이 대단하여 독사가 한 번 맞기만 하면 영락 없이 두 동강이로 잘리거나 대가리가 터져 죽어 버렸다. 갑자기 이 때 강한 바람소리를 내며 한 줄기의 암경이 그의 앞가슴을 향해 밀려 왔다. 그 사나 이가 소영 몰래 지풍을 쳐낸 것이다. 소영이 노한 소리로 외쳤다. "빨리 무기를 꺼내라! 너하고 장풍으로 겨룰 시간이 없다!" 소영은 고함을 지르면서 단검을 뽑아 들고 사나이를 향해 덮쳐 갔다. 이 때 소영은 이미 내력을 기울였으므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 사나이는 소영의 무공이 그만큼 성취했는 줄을 미처 몰랐다. 그래서 그 검세를 보자 깔짝 놀 라서 몸을 솟구쳐 올라 피해 버렸다. 소영은 그가 피리를 불어 독사를 지휘하는 기술이 여간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싸움을 끈다는 것 은 결코 이롭지 못할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쉬지 않고 연이어 칼을 휘두르며 공세를 펼쳐 갔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방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속 장풍만 쳐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기실 무 기를 꺼낼 틈도 없었던 것이다. 소영은 이 때 왼손에 든 소나무 가지로 땅을 짚고 힘껏 몸을 솟구쳐 일 장의 높이로 뛰어 올랐 다. 그러자 사나이는 다시 고함을 지르며 왼손에 들었던 독사 두 마리를 소영에게로 내던지며 동시 에 오른손을 휘둘러 일장을 펴냈다. 소영은 이 때 이미 싸울 마음이 없었으므로 오른손의 단검을 휘둘러 날아온 두 마리의 독사를 잘라 버리고는 왼쪽 어깨를 낮추며 강기를 운기하여 그 사나이의 일장을 받아 넘겼다. 이 일장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지만 소영은 다만 몸을 약간 비틀거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소영은 오히려 그 일장의 힘을 이용하여 삼 장 밖으로 피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소나무 가지로 땅을 짚고 몸을 솟구쳐 완전히 사진의 범위를 벗어나 버렸다. 그러 자 그 사나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소영! 왜 생사의 판가름을 하지 않고…" 소영은 천천히 대답했다. "앞으로도 만날 기회가 많을 테니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소." 그는 말을 하면서 앞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말이 끝났을 때 소영은 이미 십 장 밖에 가 있었다. 그 사나이는 뱀을 몰고 쫓아 가고 싶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소영은 단숨에 사, 오십 장을 달 려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 사나이는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는 운기조식을 한 후 다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가까스로 이 관문을 통과했구나. 만약 그를 이기려고 했다면 그는 뱀을 부리고 있으므로 상당 히 오래 끌었을 것이다.' 이 때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소영이오?"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그렇소. 틀림없이 소모요."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으나 눈앞에는 빈 풀밭에 띄엄띄엄 큰 바위가 늘어서 있을 뿐 아무것도 보 이지 않았다. 소영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소리나는 곳이 어딘가 알아 내기 위해서였다. '심목풍의 매복은 갈수록 강해지는군. 앞으로 매복을 뚫고 나가기란 여간 힘들지 않겠는데…' 앞의 세 군데 매복도 모두가 무공이 강한 자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소영은 은근히 겁이 났 다. 강호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적이 두렵 다는 생각을 가져본 것이다. 이윽고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은 경악해 마지않았다. "나는 소영이오! 당신은 어떤 고인이기에 내가 이름을 밝혔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요?" 소영은 기실 심목풍파 같이 음흉하고 간악한 사람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지금 세 번이나 싸움을 치른 후여서 그런지 은근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 때 큰 바위 뒤에서 붉은 가사를 입은 한 화상이 나타나면서 냉랭하게 외쳤다. "소영, 당신은 정말 대담하군요." 소영은 그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챘다. "대사께서는 소림사에서 오셨지요?" 홍의화상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른 바위 뒤에서 또 한 사람의 화상이 나타났다. "그렇소." 그제야 소영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여러분께서는 나한진을 벌이려 하는군요?" 소영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또 다른 바위 뒤에서 화상 한 사람이 나타났다. 소영은 이들 화상이 모두 열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 제일 먼저 나타났던 화상이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는 과연 총명하시군요 소승들은 바로 나한진을 벌이고 있소. 그러나 이것은 그 중에 서 제일 위력이 약한 것이오. 한 번 진속에 들어와서 시험해 보시겠소." 소영은 담담히 대꾸했다. "나한진에 관해서는 나도 조금 아는 바가 있소. 당신 말마따나 이 열두 명이 펴는 나한진은 그 중 제일 사람의 숫자가 적은 것임에는 틀림 없소. 그렇지만 사람의 수효가 적다고 해서 반드시 그 위력이 약하다는 법은 없는 것이오." 이들 열두 명의 화상들은 모두 같은 빛깔의 가사를 입었고 나이도 비슷하게 사십 전후였으며 이 상하게도 복장이나 무기가 똑같은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틀리는 점이 있다면 그들의 목에 걸고 있는 염주의길이였다. 맨 먼저 나타났던 화 상이 제일 긴 염주를 목에 걸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아마 그가 이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는 우리 소림사의 나한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느 정도나 알 고 있는지…" 소영이 대답했다. "기실 나한진의 변화는 아홉 사람이면 충분하지만, 세 사람을 더 쓰는 이유는 어느 방향에서든 한꺼번에 네 사람 이상이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오." 그러자 화상은 껄껄 웃어젖혔다. "소대협은 과연 고명하십니다. 그렇다면 소대협께서 한 번 시험해 보실만도 하군요." 소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호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림사 백 년 이래로 나한진을 뚫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지만 현재 나의 경우는 좀 다를 것이오. 나한진이 아무리 무섭고 살아나올 가망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 는 한 번 겨루지 않을 수 없소." 그 화상은 냉소를 했다. "소대협은 용기가 대단하오." 소영은 정색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저는 출수하기 전에 몇 가지 할 말이 있소." 여러 화상이 일제히 물었다. "무슨 말씀이오." "오래 전부터 소림사는 무림의 태산북두와 같은 존재로서 수백 년 동안 무림의 옳고 그른 것을 도맡아 판단해 왔으므로 무림 동도들은 소림사의 화상이라면 존경해 마지않았거늘 어찌 여러분께 서는 심목풍과 같은 악한 자를 도움으로써 강호의 정의와 맞서려고 하는지?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는 심목풍이 강호의 패권을 잡기를 바라는 거요?" 이들은 소영의 이처럼 정의에 불타는 항변을 받자 부끄러움이 앞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잠 자코 있었다. 이윽고 맨 먼저 나타났던 화상이 입을 열었다. "소승들의 고충을 소대협에게 일일이 이야기할 수는 없소. 아무튼 소대협께서는 마음을 놓으시 고 출수해 보시오." 마음을 놓으라는 말은 은근히 피해 나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영은 가볍게 탄식을 했다. "나는 정말 상상도 못했소. 심목풍이 과연 이처럼 큰 힘을 지녔으리라고는… 그는 악의 무리만 을 통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힘마저 억제하고 있으니…" 그 우두머리 화상이 입을 열었다. "소대협, 빨리 출수하시오. 당신에게는 시간이 없소. 곧 밤이 다가올 테니 당신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손해요." '이 화상들의 말이 부드러운 것을 보니 도무지 적의가 없는 것 같다. 만일 화상들 모두가 한결 같이 저와 같은 마음이라면 이 나한진을 뚫고 나가는 것도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것 같구나.'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한 가지 더 할 말이 있소." 그 우두머리 화상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일이오. 빨리 말하시오." "저의 이 도도는 매우 강해 쇠를 자르기를 진흙 자르듯 하니 조심하시기 바라오." "말씀해 주셔서 고맙소." 소영은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 올리며 외쳤다. "소모가 가오!" 그러자 화상들은 모두 어깨를 흔들어 붉은 가사를 떨쳐 버리고 왼손에 철선장을 한 개씩 들고 나섰다. 소영은 화상들을 한 번 훑어본 다음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팔보등공(八步登空)의 신법을 쓴다면 이들 길을 가로막고 있는 화상들을 뛰어 넘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굳이 이들과 결투를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열두 명의 화상들이 옷자락을 스치는 소리를 내며 소영을 에 워싸고 포위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 열두 명의 화상들은 모두가 고수들이었으므로 나한진에 익숙해 있었다. 순식간에 나한진을 벗어 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더욱 명심했다. 아무리 상대방이 적의를 품지 않고 대한다고 하더라도 이 소림의 나한진은 강호에서 수백년에 걸쳐 이름을 날려온 무서운 진이므로 감히 경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영은 오른손에는 보검을 굳게 쥐고 화산 담운청의 검초 수법을 입 속으로 뇌이며, 왼손에는 잔뜩 공력을 집중하여 손가락을 굽힌 채 언제든지 탄지신공을 쳐낼 수 있게끔 대비하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화상들은 자기를 에워싸고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소영은 은사 장산패가 박학다식했던 덕분으로 천하 각문각파의 무공과 나한진에 대해서 깊이 알 고 있었다. 장산패의 설명에 의하면 자기가 지금 공격해 들어간다면 나한진은 곧 맹렬하게 발동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먼저 저쪽에서 발동을 한다면 그 위세가 완만할 것이다. 그래서 소영은 상대방의 움직임 을 엿보고만 있을 뿐 먼저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승려들은 한바탕 움직이고 난 다음 갑자기 행동을 그 쳤다. '사부의 설명에 의하면 나한진을 벌일 때는 별로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천천히 움직이 기 시작해서 점점 빨라지다가 공세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행동을 멈추었을 까?' 이 때 아주 가느다란 음성이 소영의 귀에 들려 왔다. "소대협, 빨리 출수하시오. 만일 우리들 나한진이 자연 발동한다면 적어도 연 육십사초의 공세가 계속되기 마련이오. 그렇게 된다면 소대협께서는 그 육십사초를 견뎌내기 힘들 거요 그러나 당신 이 먼저 출수하면 형세가 달라지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짧은 시간 안에 끝나게 될 겁니다." '알고 보니 그 우두머리 화상이 나를 놓아 주려는 것이구나. 이러한 비밀을 말해 주는 것을 보 니…' 그는 곧 좌장을 휘둘러 일장을 쳐냈다. 소영은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덮쳐 갔다. 그들은 소영이 덮쳐 오기를 기다렸다가 나한진을 전개했다. 이들은 곧 소영의 장풍을 피하기 위해 좌우로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좌우에서 철선장을 휘두르며 소영을 공격해 왔다. '상당히 빠른 선장이로구나…'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단검을 휘둘러 오른편의 선장을 막고 동시에 몸을 옆으로 일보 날려 서 왼쪽에서 공격해 오는 선장을 피했다. 그 두 개의 선장은 일격을 실패하게 되자 곧 양쪽으로 물러나고, 이어서 뒤따라 오던 세 개의 선장이 덮쳐 왔다. 소영은 재빨리 단검을 휘둘러 암암리에 진기를 운기하여 한 개의 선장과 맞부딪쳤다. 쨍그렁, 하 는 소리와 함께 그 선장이 두 동강이 났다. 소영은 곧 왼손으로 그 반 동강이 된 선장을 집어 들었다. 왜냐하면 이들 화상들은 모두 중무기를 쓰고 있었으므로 소영의 단검이 아무리 예리하다고 하더 라도 그들의 선장과 상대하다가는 검날이 상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그 부러진 선장 동강이를 집어 들었던 것이다. 소영은 자기의 단검이 손상을 받았는지 어쩐지 관찰해 볼 틈도 없이 다시 세 자루의 선장과 맞 서야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갈일성을 외치면서 왼손에 든 반 동강이의 선장을 휘둘렀다. 쨍그렁, 하는 소 리와 함께 한 자루의 선장이 소영의 반 동강이 선장에 부딪쳤다가 떨어져 버렸다. 이 일초는 매우 강했다. 소영은 속으로 과연 소림사 화상들은 듣던 바와 같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들은 한결같이 무공이 높았다. 나한진이 발동하자 그들이 가진 열두 개의 선장 이 물밀 듯이 몰려 왔다. 이들 선장은 실로 변화무쌍하여 마치 수백 개나 수천 개의 선장처럼 조 화를 부리면서 사면팔방에서 공격해 왔다. 소영은 오른손에 검을 쥐고 왼손에 선장을 든 채 전력을 기울여 이겨 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선장의 공격에 몰려 도무지 반격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렇게 싸움을 계속 하다가는 승부야 어쨌든 나에게는 백해무익하다. 그렇다면 당장 악랄한 수 법을 쓰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화상들이 나에게 인정을 베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배신하 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소영이 이와 같은 생각으로 난처한 입장에 있을 때 갑자기 또 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대협, 이대로 싸움을 계속하다가는 당신이 불리하기만 하오. 그러니 사람들의 이목을 막기 위 해 우리들 중의 두 사람에게 부상을 입히시오." 나한진의 공세가 늦추어졌다. '이들은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예의렷다!' 이렇게 생각하고 곧 왼손을 휘둘러 지풍을 쳐냈다. 한 줄기의 지풍이 질풍같이 밀려나갔다. 그게 바로 소림사의 탄지신공이었다.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한 화상이 선장을 떨어뜨렸다. 왜냐하면소영이 그 화상의 오른팔을 향해 지풍을 쳐냈으므로 그 화상의 오른손이 잠시 마비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나한진의 움직임은 더욱 더 완만해졌다. 소영은 그 틈을 이용하여 몰려 오는 선장의 공세를 피해 내면서 다시 오른손으로 가볍게 한 줄 기의 지풍을 쳐냈다. 또 한 명의 화상이 선장을 떨어뜨렸다. 형세가 이쯤 되자 나한진은 흐지부지해졌다. 소영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연랑 검초와 장풍을 쳐내면서 나한진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침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대사께서 양보하셨군요!" 소영은 말을 마치고 몸을 날려 앞으로 달려갔다. 소영의 그 말은 보통의 경우에 말하는 형식적 인 겸사와는 달라 진정이 넘쳐 흘렀다. 소림사의 여러 화상들은 그를 추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라져 가는 소영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영은 부지런히 달려 다시 일단의 계곡을 건넜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목풍이 설치한 여덟 개의 매복이 갈수록 강해진다면 이번에 나타날 매복은 또 어떠한 인물일 것인가?' 그는 네 번의 악투를 거치자 처음 왔을 때의 호탕한 기백은 태반이 감소되었으며 너무 가볍게 심목풍을 평가한 것을 약간 후회했다. 소영은 걸음을 늦추어 천천히 걸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일진의 매복을 뚫으려면 아마 날이 어두워질 것이다. 앞으로 아직 삼진이 남아 있으니 그 것을 모두 돌파하려면 밤이 새겠구나.' 혼자 중얼거리며 달려가던 소영은 갑자기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눈을 사방으로 돌려 살펴 보았 다. 모두가 바위와 초목이라 요기를 할 만한 것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이 일단의 계곡 안에는 한 그루의 작은 소나무조차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소영은 시장기를 달래면서 생각을 돌려 백리빙의 안위를 상기했다. '오늘 내가 이곳에서 설사 죽는다 해도 한은 없다. 그녀는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부모를 떠나 호강을 버리고 나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나에 대하여 비길 데 없는 기대를 걸고 있는데 내가 그 녀를 실망시켜서야 되겠는가?' 생사영욕(生死榮辱)을 초월하니 정신이 저절로 가다듬어져 늠름한 자세로 부지런히 걸어 갔다. 하나의 모퉁이 길을 돌아서자 경치가 다시 일변했다. 이 때 서산마루의 석양이 높다란 산봉우리 에 가려져 두 개의 봉우리 사이로 한 가닥 금빛을 비출 뿐이어서 계곡은 절반은 어둡고 나머지 절반은 밝았다. 이 계곡의 형세는 다른 곳의 계곡과는 크게 달랐다. 이곳에는 괴상한 바위만 수없이 많을 뿐 초 목은 하나도 없었다. 소영은 속으로 다섯 번째의 매복이 이 계곡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행동을 조 심스럽게 가졌으며 오른손에는 단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소영은 계속 네 군데의 매복진을 뚫은 후라 경험이 있었다. 그는 괴상한 바위마다 모두 경계하 며 살펴 보았다. 혹시나 몰래 사람이 잠복하여 돌연 기습을 가하지 않을까 특별히 조심을 하며 걸어갔다. 순간 낭랑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혹 소영이 아니오?" 소영은 흠칫했다. 그러나 곧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소! 바로 내가 소영이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형형한 눈초리로 말소리가 들리는 곳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누구든지 이번에는 기선을 뺏겨서는 안 된다. 그러니 내가 먼저 공격을 해야겠군.' 그는 그 바위와 자기가 선 곳의 거리를 눈짐작으로 재어 보았다. 상대방이 모습을 나타내는 동 시에 즉시 몸을 날려 기습을 가하려는 심산이었다. 그 때 바위 뒤에서 여자가 갑자기 웃음소리를 냈다. "소영, 어서 천천히 걸어 오세요." '그녀가 나보고 천천히 걸으라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나에게 아무런 방비도 못하게 하고 그녀 가 돌연 뛰어 들어 기습을 가하겠단 말인가? 좋다! 그렇다면 이쪽도 비겁한 수단을 한 번 써볼 까? 도대체 누가 손해를 보는지…' 소영은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큰 바위를 돌아가자 아름다운 한 소녀가 책상다리를 하고 그 바위 뒤에 앉아 있었다. 소영의 눈이 그 소녀의 눈길과 마주치자 그만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 버리고 말았다. 누가 이런 곳에서 그녀를 볼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녀는 다름아닌 무당 노파의 손녀 용아였던 것이다. 무용의 맑은 눈빛이 소영을 스쳐 갔다. 그녀는 웃는 낯으로 물었다. "소대협은 저를 모르시겠어요?" 소영은 대뜸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소! 당신은 무용낭자요." "그래요 바로 저예요." 소영은 그녀가 무당노파의 죽음을 목격한 다음 발광한 듯이 달려가던 모습이 흡사 미친 사람과 같았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 이렇게 무사히 살아 있는 것을 보자 반갑기도 하고 묻고 싶은 말도 많았지 만 말하기 곤란하여 참을 수밖에 없었다. 무용은 여전히 정좌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 아름다운 눈으로 소영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영은 무용의 무공이 자기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독을 사용하는 솜씨는 공포감마저 자아내게 할 정도로 놀라운 것임도 알고 있었다. 비록 그의 조모인 무당노파를 따를 수는 없겠으나 어려서부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니 독을 쓰 는 수법은 절대적일 것이다. 그녀가 앉아서 움직이지 않으며 뭔가 결심이 선 듯한 태도였기에소영은 그녀에게 감히 손을 쓰 지 못했다. 무용이 한 마디 탄식을 했다. "저의 무공이 당신과는 거리가 머니 당신과 싸우지는 않겠어요. 그러니 당신은 검을 휘둘러 얼 마든지 저의 목숨을 끊을 수가 있어요." 소영은 가볍게 탄식했다. "심목풍은 낭자가 나의 적수가 아니며, 삼, 사 초식 안에 낭자가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걸 알면 서도 어째서 이곳에 낭자를 배치했을까?" 무용이 담담히 대답했다. "저의 독을 사용하는 수법이 무섭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소영이 급히 물었다. "그럼 낭자는 이미 이 계곡에 독을 뿌렸단 말이오?" 무용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심목풍이 그렇게 하라고 하더군요 만약 내가 독을 뿌렸다면 당신은 중독된 지 오래됐을 거예 요." 소영은 암암리에 운기하여 자기의 몸을 시험해 보았다. "나는 중독된 것 같지 않은데…" 무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것은 제가 심목풍의 명령을 어기고 독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당신이 중독되고 싶다고 해도 그럴 수 없어요." 소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낭자는 어째서 독을 사용하지 않았소? 심목풍이 이 일을 안다면 당신의 목숨을 용서해 줄 것 같소?" 무용은 담담히 말했다. "심목풍과 당신이 저를 죽이는 데 있어 뭐가 달라요? 어차피 나는 죽는 게 이미 두렵지 않으니 까요." 소영이 탄식하며 말했다. "낭자께서 나를 해치고 싶지 않아 독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낭자를 죽일 수가 있단 말이오?" 무용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 해도 심목풍은 나를 반드시 죽일 거예요. 누구 손에 죽어도 마찬가 지지만, 만약 저에게 선택하라면 당신 손에 죽겠어요." 소영은 천천히 말했다. "낭자는 직접 조모님의 최후를 목격했으면서 어째서 심목풍에게 가담하였소?" 무용은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저는 그들에게 잡혀온 것이에요. 그들은 약물로써 나의 미친 병을 치료한 후 나에게 조모의 원 수를 갚으라고 종용하더군요." 소영은 깜짝 놀랐다. "낭자는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과거의 그 참사를 기억할 수 있겠구려. 당신의 조모님은 내가 죽 인 것이 아니지 않소?" 무용이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비단 저의 조모를 죽인 원수가 아닐 뿐더러 저의 조모의 원수를 갚아 주셨지요. 저는 진심으로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낭자는 무엇 때문에 나와 맞서는 것이오?" "당시의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길뿐이었어요." 무용은 쓸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너무나 외롭고 쓸쓸하여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꼈지요. 할머님이 돌아가셨으니 이 세상에 는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어요. 다만 저는 심목풍의 손에 죽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 어요." 소영은 천천히 말했다. "심목풍처럼 교활한 자가 어떻게 낭자를 이곳에 배치했소. "심목풍은 저를 비록 중시하지만 아직 저를 믿지 못하지요. 그는 저의 혈도를 두 곳 찔렀으며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막힌 혈도가 삼 일 후에 반드시 발작을 일으키는데 만일 그의 명령을 잘 따른다면 즉시 나의 혈도를 풀어 주겠다고 하더군요." 무용은 잠시 말을 끊고 먼 곳으로 눈을 돌려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위해 아름다운 저택을 한 채 지어서 오십 명의 시녀를 거느리게 하고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천하의 무림인물이 건드리지 못하는 무림 제일의 여호걸로 키우겠다더군요." 소영은 껄껄 웃으며 물었다. "그래 낭자는 그의 말을 믿소?" 무용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절대로 믿지 않아…" 무용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그는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면 안심을 하겠는데 당신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부 득이 나의 혈도를 찍는 것이라고 했어요." 소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요? 나나 다른 사람이나 똑같은 인간이 아니겠소?" 무용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심목풍의 말로는 당신의 생김새가 여자들이 잘 따르는 형이라 여자가 당신을 보면 반해서 손을 쓸 수 없다고 했어요." 소영은 기가 차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무용에게 물었다. "낭자가 보는 바로는 어떻소?" "저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느낌이 없었어요. 아마 그 때 당신이 늙은 도사 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그 다음 나는 비록 당신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됐지만 그 때 는 서로 적대시하고 있을 때라 유심히 살펴 보지 않았지요. 그러나 지금 당신을 보니 과연 그의 말을 믿게 되는군요." 소영은 어세를 높였다. "낭자의 말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소. 불초의 거동이 경박하기 때문이오?" 무용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너무나 정의파이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천부적인 용모를 빼고도 인협의 도량이 있어 사 람으로 하여금, 특히 여자로 하여금 마음을 쏟아 정을 주게 하지요." 소영은 눈길을 하늘로 돌리며 말했다. "난 그런 느낌이 없소. 낭자의 은혜는 평생토록 잊지 않겠소. 치금 나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무를 시간이 없으니 이만 작별하겠소." 무용이 곧 그의 말을 받았다. "저는 모두 알고 있어요 당신의 마음속에는 백리낭자를 걱정하는 심정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그러나 당신은 나의 일을 처리한 후에 가는 것이 옳지 않겠어요?" 소영이 반문했다. "무슨 일을 처리하란 말이오?" "저를 죽이고 난 다음에 가셔야 해요." "낭자가 만약에 이 바위에 독을 뿌렸다면 나는 지금쯤 중독된 지 오래됐을 거요. 그러나 낭자는 내 생명을 구해 주었소. 정확히 따지면 나의 생명의 은인인데 내가 어떻게 그 은인을 죽일 수 있 단 말이오." "그럼 당신은 다른 사람을 시켜서라도 저를 죽게 하세요."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용에게 물었다. "심목풍은 당신의 어느 혈도를 찍었소? 내가 좀 살펴보고 낭자의 혈도를 풀어줄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봅시다." 무용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심목풍의 말로는 그것이 일종의 독자적인 수법이라 다른 사람은 풀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내가 한 번 살펴 보는 거야 무방할 게 아니오?" 무용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저의 등 뒤 양 어깨 밑에 있어요." 소영은 그녀의 등 뒤의 상처를 살피더니 손을 휘둘러 연거푸 이장을 때렸다. "내가 내공으로 낭자의 혈도를 풀 테니 낭자는 운기하여 호응해 주기 바라오." 무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 번 시험해 보세요." 소영은 무용의 상처를 찾아내 암암리에 진기를 운행하여 내력을 끊임없이 무용의 체내에 보냈 다. 이것이 무용 자신의 운행과 호응하자 전신의 혈액이 순조롭게 돌아갔다. 소영은 무용의 운기 가 중요한 순간에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돌연 오른손을 벌려 그녀의 손가락 두 개를 짚었다. 무용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찌 된 일이에요." 소영은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것은 나의 은사가 전수해 준 혈도를 푸는 방식이오. 전문적으로 각종 기이한 독문 수법에 의 해 찔린 혈도를 해제하는 것이오. 나는 아직 한 번도 이것을 사용해 본 일이 없어서 효과가 있을 지 모르니 운기하여 시험해 보시오." 무용이 그의 말대로 운기하여 시험해 보니 혈도가 기어코 풀어지는 게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감탄했다. "소대협의 솜씨는 정말 고강하군요. 저의 혈도는 이미 풀어졌어요." "잘됐소. 낭자는 이제 혈도가 풀렸으니 심목풍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군요." "저는 도망갈 수 없어요. 아무래도 저의 부탁을 들어주셔야겠어요." 소영은 안색을 고치며 엄숙히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앞에 있는 몇 군데 매복을 뚫고 나갈 자신이 없소. 그러나 나는 이렇게 여기까지 뚫고 왔소. 낭자가 나에게 자꾸 죽음을 청하니 낭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족히 알 수 있소. 그렇다면 어찌 사중구생(死中救生)하려는 용기는 없소?" 무용은 조용히 말했다. "저의 무공이 남보다 못하니 심목풍의 추격을 벗어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낭자의 독을 사용하는 능력이 고명하지 않소. 어째서 그것을 이용하여 적과 싸우지 않 소…" "당신은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독을 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사람의 길이 아니니 조심해서 사 용해야 된다고 말입니다." 소영은 미간을 모았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소녀였다. "그러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면 하등의 나쁠 것이 없지 않소?" 무용은 가볍게 탄식하며 물었다. "소대협은 저 사방의 봉우리 위에서 나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고 있어요…" 소영은 놀라며 대답했다. "그것은 잘 모르오. 그러나 정말 그럴 수 있겠구려." "당신이 나를 도와 나의 혈도를 풀어준 것을 그들은 반드시 보았을 거예요. 지금 내가 무슨 딴 행동을 취한다면 모두 그들의 감시하는 눈 속에 들게 되지요." 여기서 잠시 멈추고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이어 계속했다. "당신이 저를 죽이는 길랄고 또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무슨 방법이오." "저를 데리고 함께 사는 방법이지요." "나는 네 군데의 매복을 뚫고 왔는데 그 매복을 거칠 때마다 점점 그 힘이 강한 것을 느꼈소. 낭자가 나와 동행한다면 스스로 호랑이 입으로 기어 들어가는 격이 되지요." 무용은 갑자기 삐쭉해졌다. "당신은 그 백리낭자가 나를 보면 화를 낼까봐 겁이 나서 그러시는 거로군요?" "아니오!" "그렇다면 당신은 네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군요?" "그것이 아니고 나는 낭자에게는 기회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는 것이오." 무용은 처연하게 웃었다. "좋아요 당신은 잠시 있어 봐요 제가 그 봉우리의 밀림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지켜 주세요, 네?" "좋소. 이 벽은 사 장이 좀 넘지만 우리 두 사람의 힘을 합치면 올라갈 수 있을 것이오." 그는 백 장이 넘는 봉우리 허리의 밀림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낭자가 밀림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솜씨를 발휘하여 독을 뿌려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거 요." 무용은 씁쓰레 웃으며 말했다.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군요." "낭자는 내 양 손에 올라 서시오. 그럼 내가 위로 던질 터이니 낭자도 동시에 종약신법(縱躍身 法)을 사용하시오." 무용은 몸을 날려 소영의 양 손바닥 위에 올라서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만약 제가 죽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저의 가슴에 한 송이 산꽃을 꽂아 주세요. 그러나 시체는 묻지 마세요." 소영은 그와 더 말하고 싶지 않아 양 손에 힘을 주어 크게 소리쳤다. "낭자, 조심하시오." 소영은 양 팔을 한 번 굽혔다가 쭉 뻗치며 힘껏 내던졌다. 무용은 가느다란 허리를 펴고 곧장 절벽에 돌출한 한 그루 소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소영은 암암리에 힘을 모으고 무용을 지켜 보았다. 그녀가 만일 그 소나무를 못 잡고 다시 떨어 질 때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였다. 무용은 허공에서 두어 번 돌더니 두 손으로 소나무를 붙잡았다. 밑에서 보고 있던 소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가 소영의 눈에서 벗어난 채 일 각인 흐르기도 전에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선뜻 고개를 들어보니 무용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타고 곧장 미끄러져 내려 오는 것이 아닌가? 소영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달려가서 무용의 몸을 받아 안았다. 무용의 앞가슴에는 한 개의 화 살이 꽂혀 있었으며 낯빛이 창백했다. 무용은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도망갈 수 없다고 해도 당신은 믿지 않았지요? 이제야 믿을 수 있겠어요?" 소영은 몸을 굽혀 무용의 상처를 살펴 보았다. 화살은 가슴을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소영은 급히 물었다. "무낭자, 이 화살에 독이 있소?" 무용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느낌은 없어요 독은 없는 것 같아요." "낭자, 아픔을 좀 참으시오. 내가 이 화살을 뽑아 내겠소." "아니! 당신은 무엇을 하려고 그러세요?" "만약 낭자의 상처가 생명에 지장이 없다면 낭자의 상처를 감싸주고 떠나겠소." 무용은 고개를 흔들었다. "필요 없어요. 당신에겐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저는 단단히 각오했는데 기왕에 죽음을 면치 못 하는 것이라면 그들에게 변상을 시켜야지요. 최소한 저는 두 명을 죽일 수 있어요. 그것으로써 뼈 에 사무친 복수심을 풀겠어요." 소영은 마침내 그녀에게 항복을 하였다. "상처를 치료하고 함께 갑시다. 나에게 한 팔의 도움도 될 겸…" "정말이세요…" 소영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구 말구요." "백리낭자가 화를 내도 겁나지 않아요?" 소영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녀가 만약 당신이 나를 구하기 위해 심목풍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 화내지 않 을 것이오." 무용은 생기에 차서 외쳤다. "좋아요. 그녀를 만날 때 제가 그녀에게 똑똑히 설명하겠어요." 소영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사전에 낭자에게 분명히 말해 두겠소. 내가 앞길을 짐작하건대 매복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희망은 크지 않소." 무용이 말했다. "저 혼자 여기에 남으면 반드시 죽어요 당신을 따라 간다면 혹 한 가닥 희망이 있을는지도 모르 지요." 소영은 몸을 수그리고 그녀의 가슴에 꽂힌 화살을 손에 댔다. "낭자, 아픔을 참으시오!" 그것을 힘껏 잡아 뺐다. 그러자 동시에 한 줄기 선혈이 소영의 전신에 뿜어졌다. 소영은 가루약을 꺼내서 그녀의 상처에 바르고 붕대를 감아준 다음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었 다. "아프오?" 무용은 고개를 저으며 벌떡 일어났다. "이제 가요!" "앉아서 한동안 휴식을 하고 가야 되지 않소?" 무용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제가 이곳에서 온종일 쉰다 해도 상처는 쉽사리 낫지 않을 거예요 지금 날은 점점 어두워 가는데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지 않아요?" 소영도 저무는 하늘을 쳐다보며 불안한 듯이 물었다. "정말 아무 지장 없겠소?" 무용은 웃으며 힘있게 대답했다. "예, 아무 지장 없어요." 소영은 마침내 결심했다. "좋소! 그럼 지금 떠납시다. 그러나 그 전에 당부할 말이 있소. 내가 누군가와 싸울 때 절대 함 부로 끼어들면 안 되오." 무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 명심하겠어요. 자아, 이제 그만 가요." "낭자는 뒤에 서시오." 그는 무용을 뒤에 세우고 자기가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그들 두 사람은 대략 천여 장을 걸어 나간 후 다시 하나의 움푹 패인 골짜기를 돌아 나왔다. 소영이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나타난 계곡은 시원스럽게 터져 있었다. 그리고 양면 산벽 사이에 는 거리가 천여 장쯤 되는 싸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나타났다. '만약 심목풍이 저곳에다 매복을 설치했다면, 틀림없이 무공이 고강한 인물들일 것이다. 각자 무 공으로 정면충돌을 해보자는 속셈인 모양이군.' 157. 미녀의 참혹한 살수(殺手) 이들이 하나의 골짜기를 들어서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흥! 어서들 오너라." 동시에 네 개의 싸늘한 섬광이 유성처럼 곧장 날아와 소영의 앞가슴과 아랫배를 노렸다. 소영은 양 손을 재빨리 날렸다. 그러자 탁탁, 하는 소리가 나며 날아 오던 물체는 그의 장풍에 부딪쳐 떨 어졌다. 그는 손에 교피장갑을 끼고 있었으므로 무기를 겁내지 않았다. 그래서 날아오는 암기를 손을 뻗 쳐 쉽게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 때 사람의 그림자가 휙 나타나며 네 명의 사나이가 비호같이 달려나와 무용과 소영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 때 또다시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낭자, 어서 오른쪽 암석 뒤로 숨어라." 그 말에 눈길을 돌리니 그 오른쪽 산벽 곁에 하나의 튀어나온 큰 암석이 있었다. 이곳에 매복해 있는 사람은 그 암석 뒤에 숨어 있었다. 무용은 나타난 네 명의 사나이 뒤에 숨으며 급히 말했다. "저는 부상을 당했어요 그의 무공이 매우 고강하니 조심하세요." 날아 오던 암기를 쉽사리 떨어뜨릴 소영은 본래 연자삼초수(燕子三抄水)의 경공을 펼쳐 그녀를 구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사나이들 등 뒤에 숨었고 다시 생각을 달리하여 심목풍의 손 안에 투신하려는 의도를 보이자 즉시 손을 거두었다. '무용은 어려서부터 무노파의 교육을 받고 자랐으므로 성격이 나빠졌으니 어찌 정과 사의 구분 을 할 줄 알겠는가? 이기적이고, 위험을 당하면 변절하는 것이 그녀의 본성인데 정으로 돌아오기 를 바란 내가 어리석고 기대가 너무 컸다.' 그는 타고날 때부터 선량한 성격을 갖고 있었으므로 무용이 다시 적에게 가담하는 것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듯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는 냉랭히 입을 열 었다. "그대들은 이번에 나하고 어떻게 싸울 작정이오?" "그렇소. 일진으로 그대와 진실한 무공으로 승패를 판가름짓겠소." 말과 동시에 커다란 암석 뒤에서 하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고, 얼굴이 넓적하고, 턱이 큰 노 인이 서서히 걸어 나왔다. 소영이 바라보니 이 노인은 생소했으며 일찍이 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었다. 즉시 손을 모아 공 손히 절을 하고 소영은 물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그 노인은 소영의 질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시선을 소영에게 못박고 한동안 살펴보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계속 다섯 관문을 뚫을 수 있었으니 훌륭한 인재로다." 소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투를 들어보니 심목풍의 수하는 아닌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길을 가로막고 있는 네 명의 사나이들 복장은 한결같이 특수한 것이었다. 어떠한 빛깔의 옷이든 가슴에 모두 한 마리의 노란 호랑이 머리가 수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 의 표식임이 분명했다. 다만 소영이 이 표시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애써서 기억을 더듬어 그 표시 내력을 찾아 내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도 스승 장산패가 이 표시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었으므로 알 수가 없었다. 그 노인이 다시 냉랭하게 말했다. "소영,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소영은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당신의 앞가슴에 수놓은 호랑이 머리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몰라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오." 그 긴 수염의 노인은 얼음장같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대같이 어린 나이에는 이 표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오." "내가 알아 볼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나는 귀하들이 절대로 백화산장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다만 심목풍이 초청해 온 사람들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소." 그 노인은 핫하,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대는 비록 경험은 별로 없으나 상당히 총명하군. 심목풍이 나의 사노들을 초빙하는 데 있어 서 풍부한 보수를 준다고 했지만 그것은 내가 응한 주요 원인은 아니다." 소영이 말했다. "심목풍은 콧대가 굉장히 높으며 천하 무림은 거의가 그에게 항복하고 있는데 귀하가 그의 초빙 을 받을 수 있다니 귀하는 분명 유명한 인물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소. 무림에서 심목풍의 이 러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긴 수염의 노인은 껄껄 웃었다. "나는 그대가 똑똑하다고 말했는데 과연 틀림이 없구려."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갑자기 쌀쌀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계속했다. "나와 사도들이 한 좌의 비호진(飛虎陣)을 마련했는데 수십 년 동안에 이 비호진에서 살아 나간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내가 그대를 만난 것도 인연이니 그대가 나의 두 가지 요구에만 응한다면 나는 심목풍의 후한 보수를 사양하고 그대를 통과시키겠다." '만약 기력을 소모치 않고 이 매복을 통과할 수 있다면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소영은 이런 생각으로 대답했다. "귀하께서 나더러 무슨 요구에 응하라는 것인지 먼저 밝혀 주시오? 듣고 나서 고려해 보겠소." 그 노인은 냉랭히 반문했다. "고려해 보겠다고?"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귀하가 제시한 조건이 부당하면 나는 거절할 것이오." "이녀석 봐라! 네가 나의 조건을 고려해 보겠다고?" 노인은 벌컥 화를 내면서 말했다. "그러나 나는 너의 이런 담력이 마음에 들었다. 이전의 전례를 깨뜨리고 그럼 먼저 너에게 알려 주겠다. 이 비호대진은 내 필생의 정력을 들여 연구하여 성공한 것이다. 도합 열 명이 있어야만 비로소. 비호대진의 위력을 절정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홉 명의 제자를 두었을 뿐이라 전체 진용으로 하여금 한 쪽이 구멍나게 되어 강적을 만나면 내가 직접 출진해서 그 진세 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데 나는 이것을 유감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양재(良材)는 구하기 어려운 법이라 나도 역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가 만약 나의 문하로 투신하여 비호진의 결함을 보충하겠다면 나는 너를 통과시키겠다."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두 번째 조건은?" "듣기에는 그대가 계집애 하나를 구하러 간다는데 과연 그런가?" 소영이 곧 대답했다. "그렇소! 귀하가 그것을 어찌 아시오." 노인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심목풍이 그러더군. 나의 문하는 여색을 엄금하니 네가 말약 나의 문하로 들어온다면 내 그대 를 도와 그 계집애는 구해 주겠다. 그러나 그런 후에 그녀를 떠나 보내 이후로는 영원히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 그는 여기서 소영을 지그시 훑어보았다. 말을 잠시 멈추고 껄껄 웃더니 뒤이어 다시 말을 계속 했다. "어떤가? 나의 조건은 너무 간단하지?" 소영은 마주 웃으며 단호히 대답했다. "조건은 비록 간단하지만 나는 응할 수가 없소." 노인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는 듯 재차 물었다. "뭐라고? 응하지 않겠다고?" 소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귀하의 두 가지의 조건을 나는 한 가지도 응할 수 없소." "그대는 세상 살기에 싫증을 느긴 모앙이로군." 그는 손을 흔들며 또다시 다섯 명의 사나이를 큰 암석 뒤에서 불러냈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단검을 꺼내 가슴 앞에 반듯이 세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두르지 마시오. 나는 귀하의 진이 마련된 후에 손을 쓰겠소." 사나이들의 동작은 숙달되어서 암석 뒤에서 달려 나오자 각기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섰다. 그리 고 곧 진세가 완성되었다. 소영은 단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여러분, 조심하시오. 나도 손을 쓰겠소." 그의 표정은 경쾌한 것 같았으나 기실은 강적을 얕보지 못하여 긴장해 있었으며 진기를 몰래 모 아 쏜을 쓰자마자 기선을 장악할 심산이었다. 갑자기 진세에 배치한 아홉 명의 사나이는 각기 한 자루씩 도끼를 빼 들었고 단지 노인만이 빈손으로 진세의 중앙에 서 있었다. 소영은 속으로 계산을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손을 써서 그들 중 두 사람을 부상시켜 적진의 변화운용을 마비시킨다면 혹시 일거 에 통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최소한 이 비호진의 위력을 한동안 감소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 선 두 사나이가 호랑이 대가리인 듯 다섯 자 정도 가까이 다가와서 일제히 큼직한 도끼를 치켜 들었다. 소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흥! 저들은 기필코 내게 기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그는 탄지신공을 펼쳐 그들 중의 한 사람을 먼저 처치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두 마디의 윽 하는 비명 소리를 지르며 선두에 섰던 두 사나이가 손에 든 무 기를 놓치고 아랫배를 움켜 잡으며 주저앉았다. 긴 수염의 노인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봐라! 어찌 된 일이냐?" 두 사나이는 일제히 대답했다. "사부님, 갑자기 복통이…" "어째서 갑자기 복통이 일어났느냐?" 이 때 무용이 한 옆으로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중독되었기 때문이지요." 노인이 흠칫하고 물었다. "네가 어떻게 아느냐?" 무용은 깔깔대며 웃었다. "내가 내린 독인데 내가 모를 리가 있어요." 노인이 격분해서 소리쳤다. "이 못된 계집애야! 내가 먼저 너를 죽이겠다." 무용은 몸을 날려 재빨리 피하며 여전히 웃었다. "당신의 무공이 이중에서 가장 강한 것 같기에 나 역시 독을 가장 많이 사용했지요." 그 노인은 일장을 뻗치더니 돌연 두 눈썹을 찌푸렸다. 더 이상 제 이장을 펼칠 힘이 없었던 것 이다. 흰 수염의 노인은 무용에게 일장을 뻗어낸 후 갑자기 아랫배가 칼로 도려내는 듯이 몹시 아파왔 다. 그 아픔은 무공의 경지에 이르러 고통을 감내하는 인내력이 범인과 같지 않은 노인에게도 이 루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뒤에 나머지 여섯 명도 저마다 무기를 버리고 배를 움켜 잡으며 쭈그리고 앉았다. 갑자기 이렇게 모두 복통으로 신음하는 모양이, 지난날 그 음식점 안에서 본 것과 똑같음을 본 소영은 무용이 독을 사용했음을 알았다. 그는 심중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녀가 정말로 나를 배신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녀가 계략적으로 기회를 노리다가 독을 사용했구나! ' 비호대진의 열 사람 중 아홉 명이 배를 안고 쩔쩔매고 있었다. 오직 그 긴 수염의 노인만이 엄 연한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 다. "소대협, 저들을 죽일까요? 지금 저들은 모두 반항력을 잃고 있어요." 소영은 무용의 얼굴에 시선을 박고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용은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껴 두 볼이 붉게 물들었다. "왜 그렇게 저를 쳐다보세요?" 소영이 가볍게 탄식했다. "낭자는 어느 틈에 독을 사용했소? 내가 어찌 보지 못했을까?" 무용이 웃으며 대답했다. "만약 소대협이 그것을 알 수 있었다면 제가 어찌 다른 사람을 중독시킬 수 있겠어요?" 소영이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낭자는 이미 할머님의 솜씨를 그대로 계승했구려." 무용은 고개를 저었다. 이 때 그 흰 수염의 노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서히 쭈그리고 앉았다. 그의 얼굴은 고통을 참느라고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제자 아홉 사람은 공력이 그 노인보다 못하였기에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실성하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소영이 나직이 물었다. "낭자, 저 사람들은, 이제 죽게 되오?" 무용은 고개를 저었다. "독 때문에 죽지는 않아요 그러나 통증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모두들 자살을 해 버릴 거예요." 소영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독물은 굉장히 지독하군." 무용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영남이마가 저의 할머니를 죽인 후 저로 하여금 강호상의 험악과 공포를 몸소 겪게 했지요 저 의 무공은 스스로의 생명을 보존할 만큼 높지를 못하여 독을 사용하는 방면에 정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므로 제가 독을 사용하는 기술은 그 당시보다 많이 진보되었지요." 땅에 쭈그리고 앉아 고통을 못 이겨 신음하는 열 사람을 바라보며 그녀는 서서히 말을 이었다. "이 자들은 소대협과 아무런 원한도 없고 평소에 알지도 못하는데 어째서 소대협을 죽이려고 했 나요? 그들이 만약 심목풍의 수하라면 생각할 여지가 없겠지만 그들은 그의 수하가 아니며 우리 들과 적대시하는 원인은 순전히 명리를 쫓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들에 의해 우리가 피살되는 것이니 죽이는 수밖에 없어요." 그녀는 몸을 숙여 땅에 떨어져 있는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그녀의 도끼 밑에 하나씩 죽어 갔다. 순식간에 열 명이 머리가 잘리고 골이 반쪽씩 빠개져 딩굴었다.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소영은 암암리에 탄식했다. '이 무용의 마음속에는 격노와 비분으로 가득차 있구나. 훗날 시간을 내어 잘 선도해야겠다.' 무용은 연거푸 열 사람을 죽인 후 손에 든 피묻은 도끼를 던지며 웃었다. "소대협, 이제 그만 가세요." 소영은 그녀에게 말했다. "이 열 구의 시체를 묻어 주고 가는 것이 어떻소." 그러나 무용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요. 이 양쪽 봉우리에는 모두 심목풍의 수하가 매복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지금 우리의 행동을 보고 있으니 우리가 간 다음에 즉시 이 시체를 묻어줄 거예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갑시다." 무용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낭자, 심목풍은 낭자가 백화산장을 배반할 것을 각 매복에게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낭자는 이렇게 쉽사리 성사할 수 있었소. 그러나 한 번은 어떻게 그것이 통했다고 하나, 두 번은 되지 않 소. 그들은 이번에 반드시 낭자의 배반을 나머지 매복진에게 통지할 것이오." 무용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소대협이 무슨 말을 했는지 뜻을 이해할 수 없군요. 쉽게 말해보세요." 소영이 잘라 말했다. "내 뜻은 낭자가 다시는 출수하지 말고 내 뒤에서 구경만 하라는 것이오." 무용은 재빨리 반문했다. "제가 소대협을 도울 기회가 있어도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지요? 분명히 그렇지요?" 소영은 분명하게 말했다. "그건 아니오. 나의 뜻은 다시는 속임수를 쓰지 말라는 것이오. 만약 정정당당히 나를 도와 주면 나는 감격해 마지않겠소." 무용은 가볍게 탄식했다. "그렇게 저를 생각해 주시니 고마와요. 제 할머님이 세상을 떠난 후 대협은 진정으로 저에게 관 심을 표명한 단 한 사람이에요." 소영은 이 말에 흠칫하고 황급히 걸어 나갔다. 무용은 소영의 말대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들은 어둠을 헤치며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계속 걸어갔다. 다시 두 개의 산허리를 돌자 값자 기 귓가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바라보니 눈앞에 나타난 좁은 계곡 속에 한 줄기 벽수가 흐르고 있었으며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양쪽 산벽 사이에 냇물이 흘러 내리면서 하나의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그 넓이는 약 오 장 정도 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 할지라도 껑충 뛰어서 맞은편에 내려 설 수는 없었다. 소영은 가로막은 냇물을 보자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무용은 몹시 의외인 듯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소대협, 당신은 물속에서의 무공을 아시나요?"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무용도 한숨을 쉬었다. "저 역시 몰라요." 소영은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심목풍은 이미 내가 물에서의 무공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니 기왕 이렇게 천연적인 장애를 그가 버려 두고 이용하지 않을 리 없지요." 무용이 물었다. "소대협의 말씀은 심목풍이 이 연못을 이용해서 다시 사람을 보내 우리를 막는다는 말씀인가 요?" "그렇소. 심목풍은 반드시 이 천연적인 장애를 이용해서 악독한 매복을 마련했을 것이 틀림 없 소." 무용은 갑자기 걸음을 옮겨 연못가로 걸어 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한편으로는 손을 들어 손짓을 해 보았다. 소영은 서서히 앞으로 걸어 가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낭자는 무엇을 손짓하고 있소?" "저는 이 연못이 얼마나 넓은지 계산하고 있어요." 소영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낭자가 이 연못을 계산해서 뭘 하려고 그러오?" 무용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저는 이 연못의 깊이가 얼마쯤 되는지 계산을 해 낼 수가없군요. 만약 그것을 알 수 있다면 독을 풀어 넣을 수 있을 텐데…" 소영은 놀라며 물었다. "독을 풀어 넣는다고?" 무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는 이 연못 속에 독을 풀어 넣겠어요. 만약 심목풍이 연못 속에 사람을 매복시켰다면 반드시 제가 풀어 넣은 독에 중독돼서 죽을 거예요."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반대했다. "안 되오." 무용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째서 안 됩니까?" 소영은 천천히 말했다. "이 연못의 물은 샘물을 받아서 이루어진 것으로 몇 년이 되었는지 모르오. 이 연못 속에는 반 드시 많은 고기떼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만약 낭자가 이 연못 속에 독을 풀어 넣는다면 그 고기 떼들은 틀림없이 희생될 것이 아니겠소?" 무용은 쓰디쓰게 웃었다. "당신은 매우 인자하군요.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떻게 그런 고기떼들까지 보살필 수 있겠어요." 소영은 단호히 말했다. "심목풍이 이 근방에 매복을 설치했다 해도 이 연못 속에는 있지 않을 것이오." 무용은 입을 열어 무엇인가 말을 하려 하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 비쳤다. 그 그림자는 여러 개의 나무 기등을 연결하여 그것을 타고 서서히 이 쪽을 향해 다가왔다. '나의 지금 솜씨로 삼 장쯤 뛰어오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저 부목이 연못의 중심까지만 다다르면 즉시 그 위로 뛰어올라 맞은편 언덕으로 가야겠다. 발이 땅에만 닿는다면 그들을 겁낼 필요도 없다.' 그러나 퍼뜩 뒤에 있는 무용을 상기하자 소영은 자기의 계획이 장벽에 부딪침을 깨달았다. 소영과는 달리 무용의 경공으로는 불가능한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형편으로는 그들이 가까이 접근해 오기만을 기다려 다시 작전을 꾸밀 수밖에 없는 노릇 이었다. 소영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들은 이미 가까이 접근했다. 소영은 시력을 집중하여 그것을 바라보았다. 일행은 두 사람이었다. 그 중의 하나는 다름아닌 소요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 소요자는 도포를 벗고 경장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나이가 어려 보였다. 그는 푸른 장삼을 걸치고 송장처럼 빳빳하게 뗏목 위에 서 있었다. 마치 예술가의 뛰어난 솜씨로 조각된 하나의 동상처럼. '저 사람의 모습은 매우 이상한데 도대체 누굴까? 그러나 심목풍에게 매복으로 발탁된 사람이니 깔볼 인물이 아닐 것이다.' 소영은 소요자가 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난 또 누구라고… 이제 보니 소요 도장이시구려 " 소요자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과연 소대협은 무섭구려. 한 눈에 빈도를 알아 보았으니…" 소영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도장이 옷을 갈아 입은 것은 대단치 않소. 당신이 잿더미로 화했다 하더라도 나는 역시 당신을 알아 볼 것이오." 소요자는 여전히 웃었다. "산길은 걷기가 어려워서 도포를 입으면 행동하기가 곤란하오." 소영은 냉소했다. "도장과 사해군주가 기어코 심목풍에게 굴복했구려? 나는 그럴 줄 미처 몰랐기에 실망이 크오." 소요자는 곧 대답했다. "우리는 조건부로 합작을 하는 것이오." 소영은 싸늘하게 쏘아 부쳤다. "심목풍에게 굴복을 했건 그대들이 조건을 내세워 합작을 했건 나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요." 소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떼었다. "도장이 이곳에 무슨 매복을 했는지 내가 어떻게 뚫고 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시오. 나는 당신의 분부만 기다리겠소." 소요자는 소영의 말엔 대답을 않고 눈길을 무용의 얼굴에 박고 입을 열었다. "조모님의 죽음을 빈도는 무한히 유감으로 생각하오." 무용은 냉랭히 대답했다. "당신은 거짓으로 조의를 표하는 거예요, 아니면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해서 그러는 것인가요?" 소요자는 즉시 대답했다. "그야 물론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무용은 비웃었다. "저의 할머님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당신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이제 무슨 소용이 있겠어 요? 당신이 정말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저를 한 번 도와 주는 것이 어때요?" 소요자가 급히 물었다. "낭자를 어떻게 도와 달라는 말이오?" 무용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간단하지요 우리가 이 연못을 건널 수 있도록 당신이 도와 주기만 하면 돼요." 소요자는 냉랭히 말했다. "낭자, 그대는 이 연못의 저편에 오룡대진(五龍大陣)을 마련하고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을 아시오?" 무용이 다그쳐 물었다. "무슨 오룡대진 말이에요?" 소요자는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것은 심목풍이 무림의 고수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가장 자랑으로 믿는 유일한 기진(奇陣)이 오. 그는 그 오룡대진에 적지않은 심혈을 쏟아 넣은 것이오." 소영이 나서며 말했다. "나는 그것을 본 일이 있소. 그러나 뭐 별로 신기한 것도 아니더군요. 다만 기이한 복장을 걸쳤 으며 그 복장에 검과 창(槍)이 들어가지 않는 괴인이 몇 명 있다는 것뿐이더군요." 소요자는 한숨을 쉬고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소대협, 그대는 비록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이지만 지금 당신은 다만 외톨이로 한 사람뿐이 아 니오?" 소영은 그를 지그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도장, 당신의 말속에 담은 뜻을 이해 못하겠군요." 소요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좋소! 빈도는 다시 분명하게 말씀 드리겠소. 지금 이곳에 있어서 소대협은 남의 도움을 가장 필 요로 하고 있단 말이오." 소영은 눈을 돌려 주위를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도장께서 만약 어둠을 버리고 광명을 찾겠다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나는 천하 영웅들에게 잘 말 씀 드리겠소." 소요자는 냉랭히 웃었다. "소대협의 생각은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하구려." 소영은 다시 입을 열어 강조했다. "도장의 속셈은 이해하기 어려우니 분명히 밝혀 주시요." 소요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소대협은 금궁에 들어가셨을 때 무엇을 얻었소?" "한 자루의 강철을 종이 자르듯 하는 단검이오. 나 역시 이 단검이 있기에 비로소. 심목풍의 오 룡대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소요자는 다시 물었다. "그 외에는 또 없소?" 소영은 숨김없이 대답했다. "소왕장방의 무공비록이 또 있소." 소요자가 그의 말을 곧 받았다. "그렇소. 내가 소식을 듣기에도 그 우문한도가 이미 장방의 무공비록을 소대협에게 줬다고 하던 데 그것이 정말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런데 왜 그러시오?" 소요자는 심중의 기쁨을 억누르고 담담히 웃었다. "만약 소대협께서 장방의 비록을 나에게 기증하신다면 빈도는 전력을 다하여 소대협이 백리낭자 를 구하는 일을 도와 드리겠소." 소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암암리에 소요자의 탐욕을 비웃었다. "저 사람은 참으로 욕심이 대단하구나. 그러므로 군자의 수법으로 그를 상대하면 안 되겠다.'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잠잠히 소요자를 바라보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요자는 다시 소영에게 말을 걸었다. "소대협, 신중히 생각해 보시오. 그 백리낭자의 생명이 중요하시오, 아니면 장방의 무공비록이 중요하시오? 얻고 버리는 것은 소대협의 마음에 달렸으니 빈도는 절대 강제로 하지는 않겠소이 다." 소영은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장방의 무공비록은 이미 악누님에게 돌려 주었고 소림의 탄지신공과 화산검법은 등일뢰와 전엽 청에게 주었는데 지금 어떻게 그것을 주겠는가? 그들이 나의 목숨을 빼앗는다 해도 무공비록을 가져갈 수 없으니 내가 이것을 미끼로 하여 소요자를 유인하여 심목풍의 내막을 좀 털어 놓게 하 는 것이 어떨까?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대적하는 데 참고도 될 것이니…' 이렇게 생각을 한 소영은 슬쩍 딴전을 피웠다. "도장의 이목은 과연 민첩하시구려." 이 말에 소요자는 더욱 몸이 달은 듯 급히 말했다.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없으니 소대협의 뜻이 어떠하신지 빨리 말씀해 보시오. 지금 이렇게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니 빨리 결정을 내려 주어야 하겠소."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겨우 심중의 초조함을 진정시켰다. 그는 소요자를 바라보면서 서서 히 입을 열었다. "나는 현재 이처럼 험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도 침착할 수 있는데 나하고 입장이 반대인 도장 께서는 어째서 이다지 급하게 서두르시오." 소요자는 소영의 이러한 태도가 몹시 뜻밖인 듯 소영을 한동안 지그시 쏘아 보다가 입을 열었 다. "귀하는 스스로의 안위를 고려치 않는다 치더라도 백리낭자의 생사가 궁금치 않단 말이오?" 소영은 태연히 말했다. "심목풍이 매복을 설치해 놓고 백리낭자로 나를 유인하여 이곳까지 오게 했는데 내가 백리낭자 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 심목풍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리라 생각하오." 소요자는 비웃듯이 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빈도는 소대협이 무공만 고강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뜻밖에도 소대협의 수양 공부 역시 이 처럼 고심한 경지에 도달해 있구려." 소영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슬그머니 이렇게 말했다. "그까짓 한 권의 무공비록으로 만약 정말로 백리낭자와 내가…" 소영은 무용을 힐끗 보고는 그녀를 덧붙였다. "그리고 또 이 무용낭자의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면 나는 자연 하찮은 한 권의 소왕비록 같은 것은 아끼지 않겠소." 소요자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소영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 다. "보아하니 우리의 이 흥정은 성공할 가망이 매우 크구려?" 소영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렇게 말했다. "소요 도장,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솜씨를 지니고 있는지 그것을 나는 보아야 하겠소." 소요자는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소영은 더욱 이상한 질문을 그에게 했다. "귀하의 무공은 심목풍과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하오?" 소요자는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빈도는 그와 일대 일로 상대한다면 그에게 한 수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소." 소영은 거침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머리는 쓰는 데 있어서는 어떻다고 생각하시오?" 소요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빈도와 심목풍을 비교한다면 아마 막상막하일 것이오." 소영은 슬쩍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는 바로는 도장의 심기와 악독함은 그 심목풍보다 덜한 것 같소. 당신들이 막상막하라 할지라도 지금 양쪽 언덕의 깎아지른 듯한 저 절벽에는 심목풍의 이목이 번뜩이고 있소. 그 깔려 있는 이목들은 도장이 지금 나와 이렇게 흥정하는 것을 보고 도장이 배반한 것을 눈치챘을 것이 오. 그러니 이 사실이 즉시 심목풍에게 보고 됐음을 나는 의심치 않소." 이렇게 말한 소영은 슬쩍 소요자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만일 이 소식에 격분한 심목풍이 도장을 응징코자 했을 때 당신은 스스로를 보살피기 어려울 터인데 어떻게 우리 세 사람을 구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소요자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소대협께서는 무공이 갈수록 강해질 뿐 아니라 머리를 쓰는 데도 역시 크나큰 진보를 이루고 있는 것 같구려?" 소영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여러분의 공이 컸소. 당신들 같이 심기가 뛰어난 고수와 함께 있으니 내 가 진보하고 싶지 않아도 자연 여러 모로 발전을 보게 됐소이다." 소영은 이렇게 말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소요자에게 시선을 고 정시키고 물었다. "소요도장은 어떻게 우리들을 구할 것인지 먼저 그것부터 알려 주시오. 만약 그것이 확실히 가 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인정될 때에 나는 장방의 무공비록을 기꺼이 올리겠소." 소요자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보니 소대협께서는 심목풍에 대하여 역시 많은 두려움을 품고 계시는구려." 소영은 잘라 말했다. "무림도상에서 잔인한 인물을 논한다면 심목풍을 첫 손가락에 꼽지 않을 수 없소. 도장께서 방 금 머리를 쓰는 솜씨는 그와 막상막하라고 자부했지만 실로 나는 믿기 어렵소." 소요자는 분연히 말했다. "소대협께서 한 가지 모르는 일이 있소." 소영이 다그쳐 물었다. "무슨 일을 내가 모르고 있단 말이오." 소요자의 얼굴에는 자존심이 강하게 나타났다. "심목풍은 나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며 빈도는 그것을 이용하여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소대협은 모르고 있단 말이오? 이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아 보이나 사실은 엄청난 것이오." 무심과 유심 그는 오른손을 내밀고 말을 계속했다. "어서 그 소왕의 무공비록을 이리 넘기시오. 빈도가 즉시 이곳을 헤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소." 소영은 시치미를 떼고 반문했다. "무엇을 넘기라는 말이오." 소요자가 답답한 듯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장방의 무공비록 말이오." 소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백리낭자를 아직 보지 못했소. 설사 그녀를 보았다 하더라도 역시 즉각 당신에게 그것을 넘길 수는 없소." 소요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그쳐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소영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우리가 얘기한 것은 우리 세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는 것이오. 우리가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후 정식으로 장방의 무공비록을 도장에게 기증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소요자가 노여움을 누르며 음성을 높여 말했다. "소대협이 이처럼 빈도를 믿지 못하니 빈도 역시 어찌 소대협의 말을믿을 수 있겠소." 소영은 딱 잘라 말했다. "우리는 아무도 신임하지 않기로 합시다. 모든 것은 순서대로 하기로 하고 지금 나는 먼저 이 연못을 건널 생각이오." "좋소! 두 분께서 이 배로 올라 오시오." 소영은 먼저 나지막한 소리로 무용에게 속삭였다. "무낭자, 일단 오릅시다. 모든 것은 내가 상대할 테니 낭자는 입을 열지 마시오. 그리고 쓸데없 는 일에 참견을 삼가시오." 무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이 웃고 배 위로 올랐다. 역시 소영도 그녀의 뒤를 바싹 따라 올라 탔다. "소대협, 장방의 무공비록은 몸에 지니고 있소?" 소영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니 나는 그것을 미리 밝힐 수 없소이다." 소요자가 손을 들어 흔들자 부목으로 만들어진 배가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소요자는 가볍게 기침을 하며 급히 말했다. "우리는 저쪽에 닿기 전에 반드시 이야기를 결정합시다. 만약 흥정이 결정되지 않는다면 맞은편 이 바로 오룡대진이라 소대협은 그곳에 올라가 오 장도 못 가서 그 오룡대진 속에 걸려들 것이 오." "도장은 우리 세 사람을 어떻게 구할 것인지 어서 그 방법을 제시하시오." 소요자가 갑자기 여러 번 기침을 하자 배가 연못 중심에서 뚝 멎었다. 소영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맞은편 언덕과 삼, 사 장 거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는 모험적으로 한 번 시험해 볼 만하였으나 무용은 절대로 맞은편 언덕에 오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용을 버리고 혼자서 언덕으로 뛰어 오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영은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토면하게 될까 열심히 그 방법을 강구했으나 창졸간에 적당한 대 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요자에게 그는 속으로 생각을 거듭하면서 짐짓 침착을 가장하고 말했다. "도장은 내가 물속에서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이렇게 물 한가운데서 수작을 부리오?" 소요자는 고개를 흔들고 나직이 대답했다. "아니오. 소대협은 시력을 집중하여 사방을 보는데 대강 얼마의 거리까지 볼 수 있소?" 158. 무용의 처절한 최후(最後) 이 때 이미 어둠이 깃을 벌리기 시작해 절벽 사이의 깊은 계곡은 앞이 안 보이도록 깜깜했다. 소영은 사방울 두리번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한 오 장 정도는 보이는군요." 소요자는 말했다. "잘 되었구려, 소대협께서 오 장 정도밖에 보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미 우리들이 보 이지 않을 것이니까요." 소영이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것이 도장께서 우리를 구하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소?" "있지요. 빈도는 이미 방법을 생각했소." 소요자는 낮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빈도는 이대도강법(李代挑薑法)을 써서 가짜 소대협을 한 사람 만들어 오룡대진으로 보낼 작정 이오." "설혹 나 대신 오룡대진으로 갈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을 것이오. 지금 이 계곡을 어떻게 빠져 나가고 또 무슨 방법으로 백리빙을 구해 내지요." 소요자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불로 오룡대진을 태우면…" "그럼 가짜 소영도 같이 죽인단 말이오?" "그건 소대협과 관계 없으니 염려 마시오."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백리빙은?" "빈도는 이미 지세를 살펴 보았소. 일단 여기에서 불을 지르면 오룡은 불에 타죽을 수밖에 없소. 뿐만 아니라 심목풍의 진각까지도 태울 수 있소. 그리고 불이 일어나면 백리빙을 데리고 빠져 나 을 사람이 이미 준비되어 있소." "그 사람이 누구요." "그건 빈도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소대협과는 상관 없소이다." 소영은 약간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상관 있다고 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백리빙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없 을 것인가도 알 수 있잖겠소?" "내가 그 사람이 누구라고 말해도 당신은 모를 것이오." 소영은 입을 다물었다. '이 소요자를 어떻게 하든지 사로잡아야 할 텐데… 그래야만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 지. 그러나 소요자의 무공이 고강하니 사로잡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사느냐 죽느냐가 달린 일전을 앞에 두고 나는 극히 조심해야겠다.' 소영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소요자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나를 대신하는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보여 드리겠소." 소요자는 가볍게 세 번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러자 수의(水衣;일종의 잠수복)를 입은 사람이 물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이 사람이 가짜 소영의 행세를 할 모양이구나. 그러나 이거 야단났는데… 적이 불과 두 명뿐이 었는데 또 한 명이 나타났으니…' 소영은 물에 젖은 그 사나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소요자가 헛기침을 하더니 사나이에게 명령했다. "수의를 벗어라!" 사나이는 대답을 하더니 수의를 벗기 시작했다. 소요자는 그것을 지켜 보며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은 원래 준수하게 생겼기 때문에 홉사한 인물도 찾기 힘들지요. 그래서 빈도는 신체가 비슷한 사람을 뽑았소. 오룡은 지금 매우 정신이 혼란해 있소. 거기다 무거운 수의를 입은 가짜 소대협을 얼른 가 려 내지 못할 것이오." 소영은 사나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사나이의 체격은 소영과 비슷했다. '소요자는 매우 치밀하구나.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니…' 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소요자에게 말했다. "물어 볼 말이 있소이다." 소요자가 소영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오?" "소왕장방의 무공비록을 도장께서 손에 넣으면 어떻게 이곳을 빠져 나갈 생각이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소대협과는 의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좋소. 묻지 않겠소. 도장께서 좋을 대로 하시오. 이제 우리는 이곳을 건너 갑시다." 소영이 불쾌한 어조로 말하자 소요자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지금 서로 적의 입장에 놓여 있으니 내가 지나치게 조심한다고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마 시오." 소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도장께서는 그 무공비록을 먼저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지요?" "그건… 내가 그 책을 확인해야 되지 않겠소? 그런 뒤에 정정당 당하게 사람과 책을 서로 교환 하는 것이 원칙이지요." "의논은 좀 후에 합시다." "그건 왜 그렇소?" "이 물을 완전히 건넌 뒤에 얘기해도 늦지 않소." 그러자 소요자는 낮은 웃음으로 말했다. "하하, 소대협께선 수중의 무공을 모르므로 나하고 여기서 다투기 싫다는 말씀이구려." 이 말에 소영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교활한 놈이구나. 그건 그렇고… 난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해보려고 했더니 어째 들킬 것 같구 나.' 소영은 일부러 화를 벌컥 내며 입을 열었다. "도장께서 이 물을 이용해서 나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내가 소대협에게 비급을 좀 보겠다고 한 것은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 니오." "어째서 아니란 말이오?" "만일 소대협께서 이곳에 오기 전에 그 비급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면 나는 무엇을 바라고 더 이상 모험을 하겠소?" 이 말은 사실이었다. '어쩐다지? 이미 탄로가 난 것이니…' 얼른 말을 못하고 있는데 무용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참견을 했다. "볼 필요 없어요." 소요자는 무용을 돌아보며 짜증 난 표정을 띠었다. "당신들은 이미 중독되었으므로 설혹 그 무공비록을 갖는다 해도 배울 시간이 없어요." "뭐라고?" 소요자는 깜짝 놀라며 부르짖더니 다그쳐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못 믿겠어요?" "나는 네 할머니가 독을 뿌리는 솜씨가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까부터 네 손을 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독을 뿌렸 지?" 무용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우리 할머니와 왕래했던 때는 아주 옛날의 일이었지요." 소요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가 서로 왕래한 것은 이미 이십 년 전의 일이야. 아마 그 때는 네가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뭘 안다고 하세요." "그건 무슨 소리지?" "우리 할머니는 그 동안 은거생활을 하면서 새로이 독약 뿌리는 방법을 연구해 냈어요." "무슨 방법인지 몰라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격물전독(隔物傳毒), 즉 칼이나 나무나 옷자락 등 어떤 것이든 이용해서 독을 전할 수 있는 방 법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서로 공격하지 않았는데…" 무용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미련하군요.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지요?" "부목 위에 서 있지." "그거예요. 많은 통나무를 이용해서 당신에게 독을 전했어요." "정말이냐?" "믿지 못하겠거든 운기를 해서 시험해 보세요." "내 몸에 독이 없다고 믿는 것보다는 있다고 믿는 것이 좋을 테니 한 번 시험해 보겠다." 말하더니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이것을 본 무용은 소영에게 아무도 모르게 눈짓을 하 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무용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소요자가 운기조식을 하느라고 눈을 감는 틈을 잡으려고 일 부러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소요자는 몸에 아무 이상도 없다는 것을 알자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깜찍한 계집애, 나를 속이려고?" 무용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내 말은 사실이에요. 한 번 더 해보세요." 소요자는 반신반의했으나 다시 운기를 시험했다. 그러자 이상한 냄새가 코로 스며들어 신경 저 밑바닥에 가벼운 통증이 일어났다. '속았구나!' 소요자는 무당노파의 독 뿌리는 솜씨가 워낙 비상했기 때문에 무용의 말을 믿었다. 그녀가 이런 죄로 속일 줄은 미처 몰랐었던 것이다. 몸에 이상을 느낀 소요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못된 계집애!" 고함과 함께 왼손을 뻗쳐 무용에게 일장을 가했다. 소영은 무용이 눈짓을 할 때부터 이미 그녀가 무엇을 하리라는 것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요자가 무용에게 공격하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소요자가 장풍으로 무용을 향해 때리자 소영은 몸을 약간 틀면서 소요자의 장풍을 옆으로 쳐냈 다. 그러자 무용이 소영에게 주의를 주었다. "소대협! 소요자를 상풍(上風;바람이 불어 오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 해요!" 소요자에게 독을 뿌릴 테니 바람받이로 몰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소요자는 호흡을 중지하 며 상풍쪽으로 움직였다. 그는 상풍쪽으로 움직이면서 공격을 퍼부어 소영을 하풍쪽으로 몰아넣 으려 고 했다. 소요자가 맹렬한 공격을 하자 소영은 번개처럼 몸을 날려 그의 공격을 피하며 오른손으로 반격 을 가했다. '이크!' 소요자는 강한 장풍을 미처 막아내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 때 푸른 옷의 사나이와 검은 옷의 사나이가 소영을 향해 협공했다. '어물거리다간 물에 빠지겠다.' 소영은 오른손을 가볍게 움직이며 탄지신공으로 검은 옷의 사나이를 공격했다. 탄지신공은 수라지력보다 훨씬 강하며 상대방이 모르는 사이에 강한 지력으로 명중시킬 수 있는 데에 그 장점이 있는 것이다. 소영을 향해 장풍을 날리며 접근하던 검은 옷의 사나이는 갑자기 오른쪽 가슴에 심한 충격을 받 았다. "으윽!" 가벼운 비명과 함께 그는 물 속으로 첨벙 빠져 버렸다. 이것을 본 소요자는, '저놈은 육지에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물로 끌어들여 잡을 수밖에 없지.' 생각하며 물로 뛰어 들었다. '흥, 네 놈이 나를 물에 빠뜨려서 굴복시키려고 하는구나.' 알아차리고 재빨리 사나이의 혈도를 찍었다. 사나이는 소영에게 혈도를 찍히면서도 소영을 후려쳤다. 그 장풍은 매우 강했다. '이 놈의 장력은 소요자보다 못하지 않구나.' 소영이 움찔하는 사이에 그 사나이는 재빨리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것을 본 소영은 다시 놀랐다. '저놈이 사용하는 무공이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내가 혈도를 찍었는데도 움직이니… 팔다리에 신경이 없단 말인가?' 소영은 푸른 옷의 사나이의 왼팔을 잡고 혈도를 누를 때 부목이 뒤집힐까봐 강하게 잡아당길 수 가 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잡아당기며 혈도를 찍었던 것이다. 소영은 그 사나이가 물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으나 그 사나이가 물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는, '흥, 그러면 그렇지. 네가 무감각일 수야 없지. 다급하니깐 우선 물로 뛰어든 것이구나.'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이 때 배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뒤집으려고 하는구나.' 소영은 천근추(千斤墜)의 신법으로 간신히 부목을 고정시킨 후 무용을 돌아보며 말했다. "용낭자, 물에다 독을 뿌리시오!" 그는 물 속에 있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무용은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녀는 물 속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소요도장! 당신네 세 사람은 이미 중독되었어요 우리가 물로 뛰어 내리면 당신네들은 죽는 길 밖에 없어요." 소요자가 머리를 물 위로 불쑥 내밀며 무용에게 외쳤다. "우리가 너를 생포하면 해독약을 구할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무용은 빙긋 웃으며 응수했다. "어디 다음대로 되나 해봐요. 소대협, 우리는 저쪽 육지로 뛰어 내려요." 육지와 거리는 눈 짐작으로 불과 일 장밖에 안 되었다. '일 장쯤 뛰어 내리기는 쉬운 일이다. 할 수 없이 져야겠다.' 소요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급히 무용에게 말했다. "나하고 담판하지 않겠느냐?" 무용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담판이요? 글쎄… 하고 싶지만…" "서로 공평하게 하겠다면 나는 응하겠다." "좋아요. 그럼 당신은 물 속에서 이 부목을 저쪽 육지까지 밀어주세요. 그럼 내가 해독약 세 알 을 드릴게요."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무용은 약간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의 형세로 보아 당신은 믿기 싫어도 믿어야 될 텐데요?" 소요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무용을 쏘아 보더니, "좋다. 그 조건을 내가 수락할 테니 대신 보증인을 세워라." "보증인이요? 여기서 무슨 보증인을 세운단 말이에요?" "그 곁에 있는 사람이면 된다." "소대협 말이에요?" "그렇지, 소대협을 보증인으로 세우면 내가 응낙할 수 있지." 무용은 소영을 돌아보고 생긋 웃으며 물었다. "소대협께서 이 용아의 보증인이 되어 주시겠어요?" 소영은 무뚝뚝한 어조로 소요자에게 말했다. "소요자! 당신이 더 이상 간계를 부리지 않고 평안하게 우리를 바래다 주겠다면 내가 보증하겠 소." "좋소. 소대협이 보증해 준다면 나는 믿을 수 있으니까." 소요자의 머리가 물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부목이 건너편 둑을 향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무용의 꾀를 빌어 무사히 물을 건너게 되는구나.' 두 사람은 몸을 날려 육지에 훌쩍 내렸다. 뒤에서 소요자가 물방울을 닦으며 나타났다. 그는 소영과 무용의 앞으로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약속을 어기지 않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소, 소영은 무용을 돌아보며 말했다. "용낭자, 해독악을 소요도장에게 드리시오." 무용은 품속에서 약갑을 꺼내 세 알의 환약을 손바닥에 쏟았다. 이어 그것을 소요자에게 던져 주며 차갑게 말했다. "만일 나의 할머니가 당신의 유혹을 받고 강호에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었 을 거예요 나는 우선은 가슴 속에 이 빚을 넣어 두겠어요." 이 말을 들은 소요자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무용의 시선을 얼른 피하며 소영에게 말을 걸었다. "소대협의 무공이 극도로 진전되어 빈도는 계획이 모두 어긋나게 되었군요." "도장께서는 여전히 이 소영과 담판할 생각이시오?" 소요자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저었다. "빈도는 지금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에 담판이 이루어질 수 없지요." 소요자는 몸을 돌리며 물에다 대고 소리쳤다. "빨리들 올라와라." 그러자 왼팔을 축 늘어뜨린 푸른 옷의 사나이가 검은 옷의 사나이와 함께 걸어 나왔다. 소요자는 그들에게 약을 나누어 주었다. "먹어라!" 그러나 자신은 그대로 한 알의 약을 쥐고 있었다. 이것을 본 소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소요도장, 당신은 약을 의심하고 계신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 보증인은 무엇 때문에 세우셨소." 그제서야 소요자는 약을 입에다 털어 넣었다. "이미 정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두 분께서 독을 더 뿌릴 필요도 없겠지요." 소영은 다시 한 번 피식 웃으며 푸른 옷의 사나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사나이를 훑어보며 소요자에게 물었다. "도장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소?" "무엇이오?" "이 분은 어떤 무공을 닦았는지요." 소요자는 소영이 바라보고 있는 사나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아주 드문 무공이지요. 강시공(疆屍功)이라고 하는…" "예, 그랬었군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우리는 바로 오룡대진으로 가야 할 테니 여기서 헤어집시다." 소요자는 잠깐 이마에 주름살을 잡으며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오룡대진은 매우 흉악한 것이니 몸조심하시오."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가겠소이다." 소요자는 몸을 날려 사라졌다. 뒤를 이어 두 사람도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소영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무용을 돌아보았다. 무용은 별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하 염없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용낭자!" 소영이 부르자 무용은 얼굴을 소영에게 돌리며 대답했다. "예, 왜 그러세요?" "백화산장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이 오룡대진이라는 것을 아시고 계시오?" "오룡대진은 모두 몇 명이에요?" "다섯 사람이오." 무용은 눈꼬리를 초생달처럼 가늘게 하고 웃으며 말했다. "다섯 사람이라면 무엇이 그리 무서워요?" "모르는 소리… 오룡대진의 변화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지만 심목 풍이 오룡대진을 가장 중시하 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오." "오룡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 "오룡 전부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중 한 사람과 격투했던 적은 있었소." "그래요. 어떻게 생겼어요? 왜 사람보고 용이라고 해요?" "그 사람들이 입은 옷은 괴상하게 생겨 번쩍거리며 창이나 칼로도 뚫을 수 없다오." "그래요?" "그뿐만 아니라 심목풍이 마약을 사용해서 그들의 용기를 초인적으로 만든 모양이오. 도무지 죽 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오." "그렇군요." 소영은 하나의 조약돌을 발끝으로 툭 찼다. "용낭자는 그 오룡들을 대할 때 독만 뿌리면 되오." "알겠어요." 소영은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들며 말했다. "갑시다. 용낭자는 무거운 옷을 입었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매우 둔한 것 같구려." "관심을 가져 주어 고맙지만… 괜찮아요." "이번 일은 매우 위험하오. 나는 낭자를 미처 돌봐 줄 틈이 없을 것 같으니 조심해야 됩니다." "예 알았어요." "그럼…" 소영은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며 무용은 속으로 생각했다. '소영은 평소에 항상 호기롭기만 하더니 오늘따라 이토록 세심하게 주의하는 것을 보니, 오룡은 정말 무서운 상대인가 보다. 정신을 똑바 로 차려야겠다.' 두 사람이 십 장쯤 걸어 갔을 때였다. 갑자기 그들의 앞쪽 두 군데에서 불빛이 번쩍하더니 하나 의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이쪽으로 오시는 분이 소영이오?" 소영은 진기를 모아 가슴을 보호하며 대답했다. "그렇소만… 당신은 누구요?" 그러자 바위 위의 검은 그림자가 대답했다. "나는 이름없는 소졸이므로 밝혀도 알지 못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 그 검은 그림자는 바위 뒤로 사라졌다. 그러자 사방에서 십여 개의 횃불이 타오르 며 계곡을 환하게 밝혔다. '흠, 내가 이들과 대결할 필요는 없지. 진세가 발동하기 전에 먼저 뚫고 나가는 것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자 소영은 무용에게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용낭자, 정신 바짝 차리고 이곳을 어서 뚫고 나갑시다." 무용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이 막 뛰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번쩍이는 옷을 입은 두 명의 괴한이 나타나 소영의 앞을 막았다. 소영은 한 걸음 떼어 놓던 발을 멈추면서 무용에게 말했다. "용낭자! 뒤로 조금만 물러 서시오." 무용은 물러서는 대신 두 사나이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번쩍이는 비늘옷으로 두 눈만 빼놓고 전 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손톱을 길게 길렀고 그곳에는 핏빛인 빨간 물이 들어 있었다. '저 손톱에는 독이 있겠지? 정말 무서운 괴물이다. 만일 여러 얘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놀 라서 까무라쳤을 거야.' 두 괴한을 노려보며 이런 생각을 하던 무용은 갑자기 뒤에 있던 손을 앞으로 뻗치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하얀 분말이 괴한들을 향해 소리 없이 날아갔다. 독가루가 날아 오는 것을 발견한 왼쪽의 괴한이 오른손을 들어 번개 같이 내둘렀다. 그러자 강 렬한 장풍이 무용을 향해 곧장 몰아 닥쳤다. 장풍을 미처 피하지 못한 무용은 몸이 한 바퀴 팽그르르 돌았다. 그러나 빨리 균형을 잡아 설 수 있었다. 소영은 급히 뒤로 다섯 자 가량 물러서며 무용에게 말했다. "낭자, 뒤로 물러 서시오. 저들은 두꺼운 경장을 했기 때문에 독을 무서워하지 않는 모양이오." 이 때 오른쪽의 괴한이 소영에게 탄려들었다. 소영은 허리를 굽히며 여덟 자 정도 옆으로 피해 냈다. 왼쪽 괴인이 다시 무용에게로 덤벼들었다. 무용은 당황하여 옆으로 급히 피했다. 그러나 괴한의 공세는 무척 빨랐다. 그의 손톱에 무용의 옷깃이 걸리자, 찌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옷이 찢어 졌다. 아슬아슬하게 옷만 찢겼지 피부는 긁히지 않았다. 무용의 옷이 찢겨지고 흰 살결이 드러나자 그녀는 혼비백산했다. 이 때 소영을 공격하던 괴한이 다시 그녀에게로 덤벼들었다. "낭자! 조심하시오!" 소영은 크게 외치고 급히 오른손을 뻗으며 탄지신공을 발출했다. 급했기 때문에 괴한에게 쫓아 갈 시간이 없었다. 강한 탄지신공을 오른팔에 맞은 괴한은 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 틈을 이용 해 무용은 소영의 곁으로 달려왔다. 탄지신공은 괴한을 부상시키지 못했다. 괴한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소영에게로 덤벼들었다. 소영은 재빨리 공중으로 뛰어 오르며 왼손으로 강한 장풍을 날렸다. 괴한은 정면으로 소영의 장풍을 받아 냈으나 견디지 못하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무서운 적수다.' 소영은 괴한들의 예리한 손톱을 막아 내기 위해 교피장갑을 꺼내 끼었다. 이 때 괴한이 다시 소 영에게 장풍을 날리며 덤벼들었다. '음, 네놈들의 내공이 얼마나 센지 어디 시험해 보자.' 소영은 몸을 피하지 않고 칠성의 공력으로 괴한의 장풍을 맞받았다. 두 사람의 장력이 맞부딪치자, 펑! 폭음이 일어나며 괴한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소영도 어깨에 심한 진동을 느꼈다. '이들과 무작정 싸우다가는 시간만 끌 뿐 이길 가망성이 없겠다. 어떤 묘법을 써서 이들을 물리 칠 수밖에 없겠는데…' 소영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바람을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좌우 양쪽에 세 명의 괴한이 또 나타났다. '드디어 오룡이 모두 출현했구나.' 소영은 다섯 명의 괴한을 노려보며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옷이 찢길 때부터 피한에게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무용은 또 세 명의 괴한이 나타나자 더욱 겁이 났다. "또 세 명이 나타났어요."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소영에게 속삭였다. 소영은 오룡을 노려보며 말했다. "모두 다섯 명뿐이니까 더 나타날 놈은 없소." 소영은 음성을 월씬 낮추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에겐 목숨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 옷매무새를 잘 정리하고 두려움을 잊어 버 려요." 무용은 재빨리 찢어진 옷자락을 잡아맸다. 그러나 피부를 모두 가릴 수는 없었다. '내가 무용을 데리고 와서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고 이토록 가련한 모습으로 만들다니…' 소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무용에게 말했다. "용낭자, 낭자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 잘못이었소." 무용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적이나 상대하세요, 난 자신을 지킬 수 있어요." 무용은 자살하려던 마당에서 소영에게 구원을 받은 후 새삼스럽게 세상이 즐거운 것으로 느껴졌 다. '이분이 날 구해 주셨다. 난 결코 불행하지 않다. 죽을 필요가 없어 행복하게 즐겁게 살 테야.' 그녀는 소영에게로 왈칵 기우는 마음을 가슴 속에 벅차게 끌어 안으며, 언제 죽으려고 했더냐 하는 듯 평화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옷이 찢기고 피부가 드러나자 무용은 두려움에 앞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귀밑이 확확 달아 오르며 가슴은 두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소영은 무용이 두려움과 수치에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용낭자, 오룡도 사람들임엔 틀림 없소. 다만 몸에 이상한 비늘옷을 입었기 때문에 피물처럼 보 일 뿐이오. 납자가 비호대진을 돌파할 때의 그 용기를 다시 살린다면 이 오룡대진도 별것 아닐 것이오." 이 몇 마디는 무용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녀는 얼굴을 활짝 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사람이라면 내가 두려워할 것이 뭐 있어요?" 무용은 양 손에다 독침 하나씩을 꺼내 들었다. 마음이 다소 안정된 듯한 무용의 태도를 본 소영 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 때 다섯 명의 괴한은 두 사람을 포위한 채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었다. 소영은 그들을 훑어 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여러분은 그 두꺼운 비늘옷만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 이 보도는 철을 베고 바위를 가르는 위력을 지니고 있소. 여러분은 미리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소영은 말을 하면서 다섯 사람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은 소영의 말을 듣자 접근하던 걸 음을 중지했다. '흠, 이 단검이 보도라는 것을 알아 보는 저들의 눈은 보통이 아니구나.' 소영은 가벼운 두려움을 느꼈으나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은 이 보검의 위력을 한 번 보시겠소." 말과 동시에 앞을 향해 무섭게 돌진했다. '아무래도 이번 싸움은 고전을 면할 수 없겠구나. 얼른 결판을 내는 것이 유리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먼저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소영이 공격하자 한 괴한이 정면으로 소영에게 덤벼들었다. 그와 동시에 좌우 양쪽에서도 협공 해 들어왔다. 여섯 개의 빨간 손이 각각 다른 방향에서 소영을 찍으려고 덤벼들었다. 소영은 재빨리 발을 구르며 공중으로 뛰어 올라 세 괴한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해 냈다. 공중으 로 솟구쳤던 몸을 단전의 힘을 이용해 급강하 하며 한 명의 괴한을 향해 단검을 휘둘러갔다. "윽!" 괴한은 짧은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손가락 하나가 소영의 단검에 잘려 나간 것이다. 일순간 싸움은 정지되었다. 일장 정도의 거리에서 서로 대치하여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숨막히는 긴장이 흐르고 있을 때 갑자기, "아악!" 고막을 찢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소영은 흠칫 놀라며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소영은 깜짝 놀랐다. 무용이 한 명의 괴한에게 붙들려 있었다. 괴한의 손톱에 긁힌 무용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이놈!" 화가 치밀은 소영은 땅이 흔들릴 정도로 고함을 치며 몸을 솟구쳤다. 그는 괴한에게 덤벼들어 어검술(馭劍術)을 전개했다. 이 어검술은 장산패가 소영에게 전수해 준 검법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검법이었다. 워낙 높은 경지의 내력이 필요한 검법이라 평소 소영은 한 번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검법이었다. 지금 소영은 자신도 모를 사이에 어검술을 전개했던 것이다. 무용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무 의식중에 전개한 검법이 어검술이었다. 소영이 뛰어 오르자 한 괴한은 소영의 등에서 달려들며 공격하고 무용을 잡고 있는 괴한도 정면 에서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소영은 뒤에서의 공격을 느끼자 정면을 찌르던 단검을 돌려 뒤를 찌르는 것과 동시에 몸을 밑으 로 끌어 내렸다. 검광이 공중에 무지개를 그린 순간,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밤공기를 가르며 뒤에서 공격하던 괴한의 몸이 풀썩 떨어졌다. 소영의 단검은 괴 한의 비늘옷을 뚫고 심장 깊숙이까지 파고들었던 것이다. 한 명의 괴한이 시체로 변하자 나머지 네 명은 못박힌 듯 우뚝 서고 말았다. 이 때 무용은 아직도 괴한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그녀는 통증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며 여전히 양 손에 쥔 독침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네 명의 괴한이 일순간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자 무용은 이 틈을 이용해서 괴한을 떼밀며 뛰쳐 나왔다. 무용은 괴한의 손톱에 왼손이 확 잡히는 순간, '이젠 죽었구나!' 하는 절망을 느꼈으나 본능적인 생명욕에 의해 마구 몸부림을 쳤었다. 그러나 괴한의 힘은 완강 했다. 날카로운 손톱을 그녀의 손목 근육에 박은 채 놓아 주지 않았다. 괴한의 손에서 벗어난 무용은 얼른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몸부림치느라 괴한의 손톱에 처참하 게 찢긴 손목은 허연 뼈마디가 드러나 보였다. '이제 난 죽었구나! 도저히 살 가망이 없어.' 무용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무용을 놓친 괴한이 쫓아 왔다. 그녀는 이미 죽을 각오를 했기 때 문에, "소대협! 짧은 시간이었지만 용아는 몹시 즐거웠어요. 인연이 있으면 저승에서 만나요!" 이 때였다. 날카롭고 긴 부르짖음이 밤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 피맺힌 외침과 동시에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독침을 괴한의 눈을 향해 힘껏 던졌다. 괴한은 무용의 이런 반격을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고 거리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피할 겨를이 없었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우뚝 멈춰서더니, "이 계집애야!" 이를 뿌드득 갈며 무용을 두 손으로 잡아 챘다. 동시에 두 손에 힘을 주어 무용을 두 쪽으로 찢 더니 이 장 밖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무용이 괴한의 손에서 벗어났다가 독침을 던지고, 사지가 찢겨 내동댕이쳐진 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소영이 그녀를 구해 주려고 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늦어 있었다. "용낭자!" 눈에 불이 번쩍이는 것을 느끼며 소영은 괴한에게 성난 표범처럼 덤벼들었다. 이 때 독침을 맞 은 괴한은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소영이 이를 갈며 단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도 괴한은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앞이 가물거려 미 처 피해낼 여유가 없었다. 동료가 독침에 맞고 또 소영의 단검에 찔릴 위기에 직면하자 두 명의 괴한이 동시에 소영의 뒤 에서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미 소영의 단검은 독침을 맞은 괴한의 왼팔을 쳐서 잘라 버린 뒤였다. 뒤에서 공격을 가해 오자 소영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돌리며 오른발로 부상당한 괴한의 궁등이를 힘껏 걷어 찼 다. 소영에게 궁등이를 차인 괴한은 이미 피아간을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앞으로 뛰어 나가며 전신 의 힘을 오른손에 끌어 모아 힘껏 앞으로 내뻗었다. 소영만 보고 달려들며 공격하던 한 괴한은 동료의 강한 장풍을 피할 겨를이 없었다. "흑!"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땅에 벌렁 나자빠졌다. 소영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민첩하게 몸을 날려 쓰러진 괴한의 등을 단검으로 찔렀다. 동시에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괴한의 옆구리를 발로 힘껏 내찼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두 명의 괴한이 죽고 한 명이 부상당하니 두 명만이 남게 되었다. 오룡진이 쑥밭으로 변하자 소영은 여세를 몰아 나머지 두 명의 괴한을 향해 덤벼들었다. 159. 불타는 최후의 음모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소영은 가슴이 섬뜩했다. '또 어떤 전법으로 나오려는 수작일까?' 소영은 가벼운 불안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이 때 두 괴한이 훌쩍 몸을 날리더니 어디론가 도 망쳤다. 그러자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던 괴한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철수 명령인가?' 소영이 부상당한 괴한을 추격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횃불이 일제히 꺼져 버렸다. 사 방은 암흑으로 변해 버렸다. 갑자기 계곡이 깜깜해지자 소영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깐 동안에 벌어졌던 혈전이 눈앞에 펼쳐지며 가슴을 무겁게 눌러 오고 있었다. 악몽과 같은 순간이었다. "음…" 소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시계(視界)가 차츰 트이고 일 장 안의 사물을 알아 볼 수 있게 되었 다. 소영은 무용의 시체가 던져진 곳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나를 도우려고 처참하게 죽어간 용낭자의 영혼을 난 어떻게 위로해야 된단 말인가? 오룡, 그놈 들을 모두 죽여 버리기 전에는…" 소영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걸레처럼 땅바닥에 팽개쳐진 무용의 시체가 발 앞에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져 있는 소녀의 시체. "용낭자…" 소영은 목이 콱 메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전신이 후들후들 떨렸다. 가슴속에 표현할 길 없는 허무감과 슬픔이 싸늘하게 밀어 닥치고 있었다. "이 오룡 놈들을…" 소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를 뿌드득 갈며 사방울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어둠속에 거무스르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산과 바위뿐이었다. 하늘엔 별이 차 갑게 반짝이고 있었다. 소영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목구멍으로 치미는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 얼거렸다. "용낭자, 내가 이 원수를 꼭 갚겠소. 하지만 지금 나는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몸. 나는 기 필코 오룡을 죽인 후 용낭자를 찾아와 다시 용서를 빌겠소." 소영은 돌을 주워 모아 시체를 덮었다. 하나의 돌무덤이 완성되었을 때 소영의 마음은 어지간히 이성을 회복하고 있었다. "용낭자, 오룡을 모두 죽인 뒤에 다시 낭자의 시신을 안장하고 위령제를 지내 주겠소." 소영은 돌무덤에 두 번 절을 하고 몸을 돌렸다. 그는 어둠이 덮힌 계곡을 걷는 사이에 다음 사 태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곱 번째의 오룡대진도 이토록 험악해서 무용낭자까지 잃어가며 간신히 뚫었는데… 여덟 번째 에는 어떤 인물이 지키고 있을까?' 소영은 잠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앞으로 뚫고 나갔다. 차츰 무용을 잃은 슬픔과 분노는 가슴 저 안으로 가라앉고 백리빙에 대한 염려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빙아, 기다려라. 나는 어떤 난관이라도 뚫고 기어이 너를 구출하고 말 테다.' 소영은 어느새 삼사 리나 걸어 왔다. 그동안 그의 길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영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 우중충한 밀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밀림은 꽤 넓었다. '지난 일곱 개의 관문은 모두 그 사이의 거리가 한 마장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오룡대진 을 지나 나는 벌써 삼사 마장이나 왔다. 필경 무서운 난관이 닥칠 텐데… 이 밀림속에 어떤 매복 장치가 되어 있겠지?' 소영이 신중하게 밀림을 살피고 있을 때, 갑자기 불빛이 번쩍했다. '나타났구나!' 소영은 불빛이 번쩍인 곳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소영이 있는 곳에서 십 장쯤 떨어진 곳에 커다 란 등불이 있고 그 불빛 아래. <백화산장> 네 글자가 똑똑히 보였다. 소영은 가벼운 기침을 하고 등불을 들고 있는 이에게 말을 던졌다. "당신은 누구요?" 괴한의 체격은 매우 우람했다. 그는 등불을 천천히 들면서 대답했다. "삼제가 일곱 개의 관문을 모두 뚫고 들어 왔으니 과연 그 정묘한 무공에 감탄하였소." 그 음성을 들은 소영은 속으로 흠칫했으나 곧 응수했다. "심장주였군요. 우리는 이미 의와 정을 끊은 지 오래요. 소영은 당신에게 형제의 칭호를 듣고 싶 지 않소." 소영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 마지막 진은 굉장히 험난할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지만, 심장주께서 직접 나올 줄은 미처 몰 랐소." 심목풍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보아하니 소삼제는 이 큰형과 생사를 겨루고 싶은 모양이군." "언제든 한 번은 그 결전을 면할 수 없지요." 심목풍이 찢어진 북을 두드리는 듯한 음성으로 웃었다. "허허허, 나하고 직접 대결할 수 있는 운이 있을는지…" "그건 무슨 소리요?" "삼제는 여덟 개의 진 중에서 일곱 개밖에 못 지났어." "이 마지막 진은 심장주께서 직접 나설 생각이 아니오?" 심목풍이 머리를 흔드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 여덟 번째의 진을 돌파한다면 우리가 결전할 날이 있겠지만 만일 여기서 삼제가 죽는다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지." "좋소. 마지막 진은 어디에 있는지 어서 움직여 보시오." "삼제는 눈앞의 정세를 이상하다고 보지 않소." "앞으로 나를 형제로 부르지 말고 소영이라 부르시오." 심목풍이 껄껄 웃었다. "허허, 좋소. 그럼 나는 당신을 소대협이라 높여 부르겠소." 소영은 둘레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러나 어떤 매복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 골짜기엔 이상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요?" 소영의 말에 심목풍이 대꾸했다. "골짜기엔 괴상하게 생긴 바위와 작은 송림(松林)으로 가득찼잖 소?" "그렇다면 심장주께선 이 송림 속에다 암기 매복을 배치했군요?" "그건 속단이오. 나는 그런 암기 수법을 쓰진 않소." 소영은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어떤 장치가 되었어도 까딱 없소. 팔대혈영화신과 오룡대진을 뚫고 들어온 소영은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소." "자랑하지 마시오. 여기 또 하나의 난관이 남았으니까?" 심목풍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엄숙한 목소리로 이었다. "밀림 속으로 뚫린 꾸불꾸불한 길이 보이오?" "보입니다." "소대협께서 그 길을 백 장쯤 들어가시오. 그러면 돌집이 하나 나타날 것이오." "돌집엔…?" "백리빙이 그곳에 있소." 소영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럼 모든 암기 장치는 그 돌집 속에 있소?" 심목풍은 머리를 저었다. "없소. 소대협은 마음 놓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오." "너무 간단해서 믿을 수가 없군요." "믿든 안 믿든 그건 소대협의 자유요. 나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으니까…" 소영은 심목풍의 속셈을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수긍해 보이며 질문을 계속했다. "그 다음엔…" "돌집 속에 있는 백리빙은 쇠심줄로 손발이 모두 묶였으며 두 군데의 혈도가 찍혔소. 하나 이것 만으로 소대협을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을 거요." 소영이 부르짖었다. "당신은 그녀를 욕보였구나!" "허허, 흥분하지 마시오. 물론 백리빙은 매우 아름다운, 누구든지 욕심을 낼 만한 여인이오. 그러 나 나는 소대협의 명목을 봐서 손을 대지 않았소. 또한 부하들에게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엄명했으니 안심하시오." "사실이라고 믿고 싶소." 심목풍은 갑자기 차가운 어투로 변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의 옛정을 생각해서 몇 마디 충고하겠소." "해 보시오." "소대협은 너무 자신의 무공만 믿지 말라는 것과 안전하게 보이는 곳일수록 위험한 곳이라는 것 을 잊지 마시오. 그럼 조심하시오." 말이 끝나자 등불이 꺼지고 심목풍의 모습도 사라졌다. '어떤 전략으로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것일까? 심목풍은 위인이 간교하니 말로는 매복장치가 없다 고 했지만 안심할 수 없다.' 소영은 꾸불꾸불한 오솔길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길 양편에는 사오 년생의 소나무들이 빽빽하 게 들어서 있었다. 이십 장 정도 들어가도 아무 이상이 없자 소영은 달리기 시작했다. '암기가 튀어 나오려면 나오라지. 어쩌면 심목풍의 말을 믿어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뛰자.' 그는 곧장 화살처럼 칠, 팔 장을 달렸다. 그러자 돌집 한 채가 저만큼에 나타났다. '저 집이구나!' 소영은 돌집으로 뛰어 가면서 큰소리로 불렀다. "빙아! 빙아!" 그러자 집 안에서 반가움에 젖은 백리빙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 백리빙의 음성을 들은 소영은 왈칵 반가움을 느끼며 돌문을 밀었다. 돌문은 힘없이 열렸다. 소영은 문 옆에 걸린 등을 떼어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백리빙은 나무의자에 앉혀진 채 손발이 꽁꽁 묶여 있었다. 소영은 단검으로 쇠심줄을 잘라내어 백리방의 포승을 풀어 주었다. 백리빙은 어깨를 움직여보더니 긴 한숨을 쉬었다. 소영은 백리빙의 몸을 자세히 살펴 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빙아, 그들이 너를 건드렸느냐?" "예." "뭐야! 정말이냐?" 소영이 놀라며 부르짖자 백리빙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빠, 왜 그래? 그들은 내 다리의 혈도를 찍었을 뿐인데…" "뭐야? 난 또…" 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뭔가 다른 것을 염려하고 있었군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 안심해요. 어서 이 혈도나 풀어 줘요." 소영은 백리빙의 다리에 손을 대어 혈도를 풀어 주며 물었다. "심목풍이 강제로 독약을 먹였니?" "아니." 백리빙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대답했다. "심목풍의 인품으로 보아 너를 너무 좋게 대했는데…" "아마 오빠를 너무 무서워했기 때문일 거예요." 소영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게 아니다. 내 생각에는… 그는 필경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이곳으로 유인 하려는 수작일 것이다." 백리빙이 정색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오빠, 심목풍이 나를 인질로 하는 것을 알면서 왜 들어왔어요." 소영은 쓸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냐? 내가 너를 구하러 올 것이라고 심목풍도 확신했기 때문에 너를 인질로 삼은 것이 아니냐? 결국 우리 둘을 한꺼번에 잡아 두자는 계교이겠지." 백리빙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좀 모순된 점을 심목풍에게서 발견했어요." "모순된 점이라니…" "심목풍은 나를 인질로 해서 오빠를 끌어 들이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빠가 이곳에 나타나 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어요." "그건 왜 그랬지?" 백리빙은 가벼운 웃음을 띠었다. "그는 오빠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제 오빠가 이곳에 나타났으니까…" "심목풍은 필경 오빠를 해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 "오빠가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심목풍은 나를 해치지도 못했을 거예요. 오빠의 복수가 두려 우니까요. 그런데 오빠가 스스로 함정에 빠졌으니 심목풍은 우리 두 사람을 해치려고 할 거예요." 소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빙아의 말이 그럴 듯하다. 그러나 나를 원망하지만 말고 어서 운기조식을 해라. 원기를 회복해 서 이곳을 벗어나야지." 백리빙은 고개글 끄덕이더니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녀가 운기조식에 들어가자 소영은 그녀의 등에 오른손을 얹었다. 백리빙은 등에 소영의 손길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그 손길에서 뜨거운 기류가 체내로 들어오는 것을 의식했다. '소영의 내공은 정말 놀랍구나. 이렇게 높은 공력으로 진기전입(眞氣轉入)을 해주니 나는 금방 체력이 회복될 거야.' 백리빙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황홀한 몰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운공이 절정에 달한 것이 다. '아무튼 빙아가 무사하니 다행이다. 들어오는 길이 순조로왔으니 나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겠지 만…' 소영이 적이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석실 안으로 한 줄기 연기가 스며들고 있었 다. 연기를 발견한 소영은 깜짝 놀랐다. '드디어 여덟 번째의 진이 발동하기 시작한 모양이구나!' 연기는 점점 짙어졌다. 뭉게뭉게 스며드는 연기는 석실 구석의 천정에서부터 내리덮이기 시작했 다. '밀림에 불을 지른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기 전에는 벗어나기 힘들겠다.' 소영은 약간 마음이 초조해졌다. 밀림을 벗어나려면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 빙아는 가장 중요한 고비이다. 만일 빙아를 놀라게 하면 위험하다.' 하는 생각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돌부처처럼 굳어진 자세로 백리빙에게 진기를 넣어 주며, 어서 원기를 회복하기를 마음으로 빌고 있었다. 백리빙은 원래 내공이 강하다. 거기에다 소영의 도움을 받으니 얼마 안 되어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백리빙은 은기조식을 끝내고 눈을 번쩍 떴다. 실내에 자욱한 연기를 보더니 그녀의 안색 이 새파랗게 변했다. "오빠! 이 연기를 못 봤어요?" 백리빙은 벌떡 일어서면서 놀란 어조로 물었다. 소영은 백리빙의 등에서 손을 떼며 대답했다. "벌써 보았다." "그런데 왜 나를 깨우지 않았어요?" 백리빙의 얼굴에는 매우 초조해 하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초조하긴 소영도 마찬가지였지만 짐 짓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연기를 발견했을 때 너는 한참 행공의 절정리 도달했을 때다. 너를 놀라게 하면 경맥을 상할 염려가 있었으니까…" 백리빙은 소영의 앞에 바짝 다가서며 정에 겨운 음성으로 가만히 말했다. "오빠는 나한테 그토록 세심한 배려를 하며 돌봐주고 있는데 나는 오빠를 함정으로 끌어들인 장 본인이니 죽어도 눈을 못 감을 거예요." "그런 소리는 치우고 어서 밖에 나가 살펴 보자. 사실 이 석실은 조금 일찍 나가나 늦게 나가나 마찬가지니까 염려할 것은 없다." "그렇지만… 심목풍이 나를 미끼로 오빠를 함정으로 끌어 들였으니 안심이 되지 않아요." "글쎄. 그만 두래도…" "오빠는 뻔히 그것을 알고 불이 붙은 것을 보고서도 나를 깨우지 않았어요." 소영은 약간 짜증이 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심목풍은 분명히 밀림 밖에서부터 불을 질렀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찍 나가나 늦게 나 가나 결국 별 차이가 없다니까…" 소영은 백리빙의 손목을 이끌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밖에 나오자 소영은 지붕으로 뛰어 올랐다. 백리빙의 몸도 함께 끌려 올라왔다. 화염은 이미 하늘까지 태을 듯한 기세로 밀림을 포위하고 있었다. 강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 다. '예상했던 대로 심목풍은 밀림 밖에서부터 불을 질러 공격하고 있구나. 아예 나를 불고기로 만 들 속셈인 모양이지.' '불길이 엄청나구나. 오빠의 무공이 지금의 백 배가 된다 하더라도 이 불바다를 뚫고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까맣게 타죽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모두 나 때문이구나.' 백리빙은 나름대로 그런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우는 것을 본 소영이 물었다. "빙아, 왜 그러느냐? 두려워서 그러느냐?" 백리빙은 눈물에 젖은 얼굴을 소영의 턱 밑으로 바싹 대며 도리질을 했다. "두려워서가 아녜요. 난 아무래도 좋지만… 오빠가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이 곤경을 당하 지 않았을 텐데. 모두 나 때문이에요." 소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빙아, 넌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잖느냐? 나하고 같이 죽으면 한이 없겠다고… 소원대로 되었으 니 오히려 기뻐해야 될 텐데…" 소영의 말을 들은 백리빙은 젖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으응, 오빠와 함께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이에요. 하지만…" 백리빙은 무겁게 한숨지며 말했다. "오빠는 무림의 횃불이에요. 모든 사람이 오빠를 우러러 보며 무림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길 학 수고대하는데… 무림의 정의를 대표하는 오 빠가 벌써 죽어야 하다니…" 백리빙은 드디어 울음을 터뜨렸다. "빙아, 인명은 하늘에 매인 것이다. 심목풍이 내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자, 울음을 그치 고 용기를 가지자. 하늘이 무너져도 한가닥 솟아날 구멍은 있단다." 백리빙은 머리를 끄떡이다가 소영의 품에 와락 몸을 던졌다. "빙아,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진정하여 침착해야 해. 이곳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을 생각해봐." 백리빙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난 찾을 수 없어요. 온통 불바다인데…" "화세는 강하지만 이곳까지 타들어 오려면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된다. 그 동안에 대책 을 세워야지." 소영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궁리하기 시작했다. 소영이 몹시 침착하며, 조금도 겁을 먹거나 당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백리빙도 차츰 마음이 안 정되었다. '언제나 믿음직한 오빠가 옆에 있으니 괜히 불안해 할 것 없다. 설혹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다 하더라도 난 행복하다.' 백리빙은 이런 생각을 하며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갑자기 소영이 입을 열었다. "빙아! 가서 불씨 하나만 만들어 와라." 백리빙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불씨는 왜요?" "지금 내가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져와!" 백리빙은 더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며 지붕 아래로 내려갔다. 소영도 지붕에서 내려 칠팔 장 가량 달려갔다. 그곳에 집채만한 바위가 하나 박혀 있었다. 소영은 바위 위로 올라가 사방을 살펴 보았다. 화염 속에서 짐승의 울부짖음과 나무가 튀는 소 리가 꽤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서둘러야겠다.' 소영이 바위에서 뛰어 내리는데 백리빙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 어디 있어요?" "나 여기 있다. 빨리와!" 소영은 단검을 쥐고 휘두르며 주위의 나무들을 잘랐다. 단검에 의해 잘린 나무들은 모두 장풍으 로 밀어냈다. 이 때의 소영은 흡사 미친 사람 같았다. 이리저리 뛰며 마구 나무들을 쓸어 냈다. 보검과 장풍이 서로 힘을 합하니 그 위력은 엄청났다. 백리빙이 관솔을 엮어 만든 횃불을 들고 소영의 곁으로 달려왔다. 이 때는 이미 사방 일장 둘레 의 나무들을 깨끗이 잘라냈을 때였다. "오빠, 불씨를 가져 왔어요." "그래 잘했다. 너는 빨리 이 나무들을 동쪽으로 옮겨라!" 백리빙은 횃불을 내려놓고 나무를 옮기기 시작했다. 소영은 계속 나무를 자르며 큰 소리로 말했 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 오니?" "북서풍(北西風)이에요." 백리빙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소영이 열심히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무슨 계획이 있기에 저럴 테지.' 생각하고 부지런히 나무를 날랐다. 소영은 서북방의 나무를 베고 백리빙은 그것을 동남방으로 나르는 작업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제 불을 질러!" "예! 알겠어요!" 백리빙은 횃불을 가져다 쌓아놓은 나무에 댔다. 불씨가 닿자 나무는 화닥화닥 기세 좋게 타기 시작했다. '심목풍이 벌써 이곳에 있는 나무들에다 기름칠을 해놨구나.' 백리빙은 횃불을 불길 속에 던지고 다시 나무를 나르기 시작했다. 소영이 이미 서북방 깊숙이까 지 나무를 베어내고 있어 백리빙이 동서로 뛰어다니는 거리가 점점 넓어졌다. 잠시 후, 쌓아놓은 나무가 타오르자 솟아 오르는 연기가 앞이 안 보이도록 자욱했다. 밖에서 타 들어 오는 불길도 점점 가까와지고 있었다. 연기로 덮인 저쪽에서 소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빙아! 숨을 죽여!" 백리빙은 소리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오빠! 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이젠 나무를 못 나르겠어요." "그럼 가만히 거기에 있어! 내가 그리 갈 테니." "예!" 백리빙은 나무를 더 나를 생각을 포기하고 가만히 섰다. 그러자 소영이 그녀의 앞으로 날아왔다. 소영은 백리빙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끌었다. 바위 앞으로 다가서더니 단검으로 땅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백리빙은 연기 때문에 눈을 감은 채 될 수 있는 한 연기를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 때 그 녀의 몸뚱이가 구덩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백리빙을 구덩이에 앉힌 소영은 풀잎을 엮어서 만들어 놓은 큰 부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빙아, 불은 이미 가까이 왔지만 우리는 운공으로 질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된다." 백리빙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죽을 수 없다. 너는 북해빙궁에서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시는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되고, 나는 심목풍의 무리를 없애야 된다." 소영의 음성은 백리빙에게 매우 비장하게 들렸다. 백리빙은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오빠, 나는 힘껏 참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참자. 지금 약간 연기가 가셨으니 눈을 떠 봐라." 백리빙은 살며시 눈을 떴다. 연기를 훨씬 가셔졌고 소영은 부채질로 연기를 계속 몰아내고 있었 다. "오빠는 상당히 치밀하군요." 소영은 여전히 부채질을 멈추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구하러 올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스로 헤쳐나가는 수밖에 없지." "참 훌륭한 생각이에요. 오빠는 나무를 찍느라고 퍽 피곤하지요? 그 부채를 이리 주세요. 내가 부칠게요." 소영은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다. 우리는 이 고비만 넘기면 살 수 있다." 소영은 구덩이 밖으로 나오려는 백리빙의 어깨를 눌러 앉히고 계속 부채질을 했다. 불길은 점점 다가왔다. 강한 서북풍을 타고 맹렬히 덮쳐오는 연기를 부채질로 흩어 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 니었다. 소영이 서북쪽의 나무를 많이 잘라 냈지만 점점 뜨거워지는 연기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대로 가다간 결국 죽고 말겠구나.' 소영은 단검을 백리빙에게 주며 몸으로 그녀의 앞을 막고 앉았다. "빙아, 빨리 구덩이를 더 깊고 넓게 파라!" 백리빙은 소영이 몸으로 막아 자기를 보호해주는 것에 감격해 대답도 못했다. 정신없이 단검으 로 땅을 파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소영이 내공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강한 열기를 언제까지나 견뎌낼 수는 없었다. 전신이 모닥불 을 뒤집어 쓴 것처럼 따끔거리고 숨이 막혔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 소영이 이런 절망을 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목덜미가 섬뜩하도록 차가와졌다. "오빠!" 백리빙이 외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소영은 급히 몸을 돌렸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았다!" 하고 외치고 말았다. 소영의 음성이 벅찬 감격으로 떨려 나왔다. 백리빙이 들어앉아 있는 구덩이의 밑바닥에서 굵은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뿜어 오르고 있었다. 백리빙은 왜 커다란 돌멩이를 안고 있었다. "이걸 빼니까 갑자기 물줄기가 솟아 나왔어요." "그래 이젠 안심이다." 소영은 백리빙에게서 돌덩이를 받아 멀리 팽개쳤다. 그 동안 구덩이는 꽤 넓어졌는데, 콸콸 솟아 오르는 물줄기는 구덩이를 메우고도 남아 밖으로 넘치고 있었다. 소영은 구덩이 속으로 첨벙 뛰어 들었다. 백리빙은 소영의 품으로 파고들며 어린애처럼 소리내 어 울기 시작했다. "기적이다. 빙아, 만일 샘줄기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린 지금쯤 전신에 화상을 입고 물집 투성 이일 것이다." 소영은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백리빙의 머리에다 끼얹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훌쩍훌쩍 울기 만 했다. 물은 계속 넘쳐 흘러 땅을 적시며 졸졸 흘러갔다. 동남쪽의 불길은 차츰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서북쪽에서 몰려오는 불길은 점점 가까워졌지만 물 에 전신을 담그고 있는 두 사람은 호흡에 좀 곤란을 느낄 뿐이었다. 백리빙이 울음이 그쳤다. 그녀는 사방울 한 바퀴 둘러보더니 젖은 얼굴에 웃음을 담고 소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리빙은 갑자기 소영의 얼굴을 끌어당겨 자기의 뺨을 비벼댔다.소영은 당황함을 느꼈으나 그녀 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백리빙은 소영에게서 얼굴을 떼며 입을 열었다. "오빠, 나 감격해서 울었어요." "무얼?" "오빠가 몸으로 열기를 막아준 그 애정에…" "아까는 울지 않더니…" "그건… 그 때는 울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었어요. 물줄기가 탁 터지자 갑자기 오빠에 대한 정 이 샘솟으며 울음이 터졌어요." "빙아, 앞으로 얌전하게 굴면 내가 더 좋게 대해 주겠다." 백리빙은 고개를 끄떡이며 활짝 웃었다. "오빠, 우리는 이제 죽지 않아요. 조금 전에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요." "무슨 생각인데…" 백리빙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말 안할래요." "왜? 나한테도 말 않겠다면 더욱 궁금한데?" "오빠가 들으면 나를 비웃을 테니까…" "비웃지 않을 테니 어서 얘기해 봐." 백리빙은 소영의 눈동자에 시선을 박으며 말했다. "정말 웃지 않을래요?" "그래." "음… 그럼 얘기할게요. 아까 나는 꼭 죽는 줄만 알았어요 그래서 기왕 죽을 바엔…" 백리빙은 다시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떨구더니,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앞으로 절대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귀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너무도 나에게…" 백리빙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소영은 그녀에게 더 추궁하지 않고 표정만 살폈다. 손바닥으로 물 을 찰싹찰싹 두드리며 잠자코 있던 백리빙이 이윽고 얼굴을 번쩍 들며 입을 열었다. "오빠, 나 아까 이런 결심을 했어요." "…" "여지껏 지켜온 순결… 이제 죽는 마당이니 오빠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 되겠다고…" "쓸데없는 생각이야." 소영이 눈썹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백리빙의 얼굴에 서릿발처럼 차가운 기운이 돌았다. "오빠, 화 안 내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물론, 그러나 네 생각은…" "왜요? 내 생각이 깨끗하지 못해서요? 그럼 내가 오빠에 대한 애정을 마음 속에만 꽁꽁 묶어 두 었다가 땅속까지 갖고 가란 말예요?" 소영은 말문이 막혔다. 소영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심장이 터지도록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격동하는 마음을 누르려고 얼굴을 물에 담근 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백리빙은 석고상처럼 굳은 자세로 가만히 앉아 소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모를 당했다는 생각 이 그녀의 표정에 나타나고 있었다. 소영은 백리빙의 양쪽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빙아,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심목풍을 어떻게 무찌르느냐 하는 데 있어." "…" "대장부는 역경에 처했을 때 살아나야 하고 안락할 때에 죽어야 하는 법이다." "…" 소영은 백리빙의 어깨를 잡은 손에 약간 힘을 주며 말했다. "초목이나 바위가 아닌 다음에 인간은 누구나 감정을 지니고 있지. 그렇지만 감정대로만 행동해 선 안 되는 것이 인간이다." "…" "무림의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었다. 이 짐 때문에 나는 항상 조심하고 긴 장해야 되며 감정을 한 가닥도 밖으로 노출할 수 없었다." 백리빙의 얼굴에서 차츰 차가운 기운이 걷히기 시작했다. 소영은 말을 계속했다. "어떻게 하면 무림에 다시 평화가 오도록 만들 수 있을까? 이 사명감 때문에 나는 밤낮으로 머 리를 써아 했고 그 때문에 여지껏 너한테도 소홀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백리빙은 소영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츰 그녀의 입가에서 웃음이 번져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꼬리는 쓸쓸한 그늘이 덮여 있었다. "그 두 가지의 일을 한꺼번에 해나가도 절대로 충돌하지 않아요. 그러나 어쨌든 좋아요 나는 오 빠를 원망할 수 없으니까요." "…" "호호, 나는 전에 많은 여자들을 질투했어요. 그녀들이 모두 오빠를 왕자처럼 받들고 사모하며 따르는 것이 못 견디도록 미웠어요." "…" "그러나 지금은 그녀들에 대한 질투의 감정을 깨끗이 씻었어요. 모든 것을 명백히 깨달았기 때 문이지요." "무엇을 명백하게 깨달았단 말이냐?" 소영이 목쉰 듯한 소리로 물었다. 백리빙은 쓸쓸한 미소를 얼굴에 잠깐 띠우더니 차분한 음성으 로 대답했다. "오빠는 나 혼자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 "악소채, 소문, 무용, 소홍, 그밖에 많은 여자들이 모두 오빠를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어요. 나 역시 그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아요." 소영은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빙아, 참으로 어려운 말도 잘하는구나. 나는 그 많은 여자들에게서 사랑을 받을 만큼 훌륭하지 도 못하고 모두에게 사랑을 줄 만큼 마음이 넓지도 못하다." 백리빙은 가볍게 웃으며 더 말하지 않았다. 불길은 소영이 나무를 베어 버린 곳까지 와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동남쪽의 불길은 이미 사오십 장이나 멀찌기 물러나 있었다.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 여덟 번째의 진도 기적적인 샘줄기 때문에 무사히 통과한 셈인 데… 과연 심목풍은 이것으로 나에게서 손을 뗄 것인가? 아니다. 더 험난한 길이 가로막고 있을 지 모른다.' 소영은 문득 오룡대진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처참한 시체로 변한 무용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 렸다. 소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백리빙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가련하다. 무엇이라고 위로해 주고 싶지만 그러다가는 또 빙아의 마음에 불을 질러 나를 곤란 하게 만들는지도 모른다.' 소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빙아!" "예?" 백리빙은 소영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촉촉히 젖어 있었다. "난 아까 너를 만난 때부터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말하는 것을 깜빡 잊었구 나." "무슨 얘기인데요?" 소영의 음성은 무거워졌다. "무용에 관한 얘기이다." "무용이 왜요?" "그녀는 죽었다." "예?" 백리빙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녀는 소영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다그쳐 물었다. "어떻게 죽었어요?" "오룡과 싸우다가… 아주 비참하게 죽었다." "오룡하고요?" 소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 직전에 그녀가 외치던 소리가 귓전에 쟁쟁했다. 한동안 둘 사이에 슬픔에 가득찬 침묵이 흘렀다. 백리빙이 마침내 눈물에 젖은 눈을 들고는 입을 열었다. "끔찍하군요. 오빠가 구해 주었어야 할 텐데…" 소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허탈한 어조로 말했다. "그랬지. 허나 너무 거리가 멀었고 시간이 늦어서…" 160. 한 우물, 두 남녀 타들어 오던 불길은 매우 거세었지만 두 사람은 냉수에 담겨져 있었으므로 조금도 화가 없었다. 차가운 물은 계속 흘러 내렸고 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거센 불길이라도 물 을 이길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로 불길이 맥을 못 추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있는 근처에만 불이 꺼졌지 뒤 쪽은 아직도 세게 불길이 솟고 있는 것이었다. '아! 이 찬물 때문에 목숨을 건졌구나. 만약 이 물이 없었다면 불에 타 죽거나 뜨거운 열기에…' 소영이 말이 없자 백리빙은 귀여운 웃음을 띠며, 입을 뾰족이 내밀었다. "오빠는 바보예요."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고는 화제를 돌렸다. "오빠는 어떻게 알고 사방의 나무를 베어 버렸어요? 오빠가 베어낸 나무 덕분에 우린 살았는지 도 몰라요. 나는 우리 부모님만 영리한 줄 알았더니 오빠도 보통이 아니예요." 소영은 빙그레 웃음을 보냈다. "오늘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니 새삼스럽게 스승의 은혜가 생각나는군. 내 모든 지혜와 무공은 스승께 받은 것이지." "왜 그런 말을 갑자기…" "내가 사부님을 따라다니며 무공을 연마할 때 사부님께서 종종 무림의 이야기를 하여 주셨지, 각 대문파의 무공을 자세히 가르쳐 주고, 또한 일류 고수들의 지난 행적까지도 말이야. 지금 생각 하니 그 때에 들은 이야기가 많은 도움을 주는구나." 백리빙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있지. 조금 전 이 근처의 나무를 베어 버린 것도 그것에서 알게 된 것이지." 백리빙은 마치 어린애처럼 소영의 팔에 매달려 응석을 부렸다. "오빠, 그 이야기를 해 줄래요? 꼭 듣고 싶어요." 소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 보았다. 심목풍이 지른 불길은 아직도 맹렬한 기세로 타고 있었다. "아직 불길이 꺼지려면 여러 시간이 걸리겠다. 그 동안 심심치 않게 이야기나 하자." 그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빙아야, 어떤 사람이 황량한 초원을 걷던 중 갑자기 초원에 불이 났다고 하자, 그럼 너는 어떻 게 하겠니?" 백리빙은 눈빛을 반짝이며 한동안 생각을 하더니 피식, 부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모르겠어요." "모를 만도 할 것이다.그렇게 되면 먼저 자기 앞에다 불을 지르는 것이다. 건너 쪽에서 밀려 오 는 불길이 자신에게 다가 올 무렵에는 자기가 불을 붙인 자리에 커다란 공지가 생길 것이다. 그 공지로 들어가면 불길을 피할 수 있지. 그럴 듯하냐?" 백리빙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소영은 백리빙의 손목을 꼭 움켜 쥐며 말을 계속했다. "오늘 심목풍이 붙인 불길을 피한 것도 거기에서 얻은 생각이다. 이 곳은 비록 초원과 다른 밀 림이지만 그대신 근처의 나무를 베어 버릴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나는 사부님께 그 이야기를 들 을 때는 그냥 재미로 생각했다. 그러나 훗날을 미리 예견하시고 말씀하신 것이야." "오빠,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어요." 소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무엇이냐?" "오빠가 말한 초원에서의 불은 우연적인 것이고, 오늘의 것은 심목풍이 일부러 지른 불이라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지금은 사방에서 타고 있잖아요." 소영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빙아는 과연 영특한 지혜를 가지고 있군." 백리빙도 따라 웃었다. "호호호… 그러나 오빠에 비하면 아직도 천지 차이에요." "아니다. 너도 당황하지만 않고 생각해 냈다면 이 방법을 알아냈을 것이다. 내가 미리 손을 써서 근처의 나무를 베었다지만 오늘 우리가 목숨을 건진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지. 구태여 말한다면 반은 우리의 힘이었고 반은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지." 백리빙은 정색을 보였다. "오빠, 그것은 이해가 안 되는데요. 어째서 하늘의 도움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오직 오빠의 지혜와 힘으로써 이룬 게 아녜요?"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틀림없이 하늘의 도움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검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어찌 이 많은 나무를 자를 수 있었을 것이냐. 마침 금궁에서 얻은 이 단검은 쇠도 자를 수 있으니 우리에게 실 로 큰 도움을 주었지. 그리고 네가 물줄기를 찾아내지 않았다면 우린 직접적으로 불길에 닿진 않 아도 그 열기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혜와 천운이 모두 맞아떨어져 우리가 살아난 것이 아니겠느냐?" 백리빙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의 도움도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오빠는 길인이니 당연하지요. 더군다나 강호의 운명이 오빠의 손에 달려 있으니 어찌 심목풍의 음모를 물리치지 못하겠어요." 소영은 두 손을 흔들어 짐짓 엄살을 부리는 시늉을 하였다. "빙아야, 이제 그만해라. 너무나 나를 치켜 주니 이제는 주체할 수가 없구나. 너는 너무도 순진 하다." 백리빙은 곱게 눈을 흘겼다. "오빠는… 나는 진심으로 이야기를 한 것인데…" 그리고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다음 말을 꺼냈다. "기왕 하늘의 도움이 있었다는 말이 나왔으니 생각나는 게 있어요. 우린 어느 한 사람에게 제일 먼저 감사를 해야 될 거예요." "그게 누구냐?" "우문한도지요. 그 사람이 오빠에게 단검을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물론, 오빠는 그 를 구해주고 그는 그 대가로 단검을 준 것이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그의 도움도 컸구나. 우문선생은 지혜가 뛰어나 심목풍도 당하지 못하지, 훗날 그를 데리고 심목풍의 꾀에 맞서면 필시 승리를 거둘 것이다." 백리빙은 소영이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것이 무척 기뻤다. "오빠는 항상 무위도장을 칭송하더니 어째서 이제는 우문선생을 좋아해요? 무위도장은 우문선생 보다 지혜가 못하나요?"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 무위도장은 인후한 의인이지만 섭섭하게 지혜는 심목풍만 못하 다." "그럼 우문선생은 그렇지가 않단 말이에요?"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우문선생은 처음에는 나쁜 마음을 먹고 사람을 괴롭혔지. 심목풍이 지금 그 명성을 얻게 된 것 과 백화산장을 건립한 것도 모두 우문선생의 힘이지. 그의 탁월한 지혜와 심목풍의 간악한 성격 이 한데 뭉쳤으니 누가 당할 수 있겠느냐. 더군다나 독수약왕이라는 심목풍의 친구도 백화산장을 중흥한 인물이지, 그러나 지금은 우문한도의 마음에 변화가 생겨 악을 버리고 선을 위해 일하고 있지." 백리빙은 지금까지 궁금해 하던 것을 모두 묻는 것 같았다. "그럼 심목풍이 왜 그를 죽이려 할까요? 그는 백화산장을 세웠고 또한 그 동안 많은 도움을 주 었는데요." 소영은 가벼운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그것은 우문선생이 뜻하지 않게 마음이 돌변했기 때문이다. 바로 심목풍을 배반하고 도전하기 때문이야. 심목풍은 자신이 궁할 때는 상대를 감언이설로 꾀어 이용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자기보 다 무공이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대뜸 제거해 버리지. 자기의 친한 친구라도 말이야. 심목풍이 제거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이지. 그 일례가 심목풍과 우문한도의 사이야."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우문한도는 무공면에서 심목풍을 당하질 못하나 지혜만은 뛰어났지. 그러니까 언제나 심목풍은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며 무슨 트집을 잡으려 했다. 우문한도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지. 그는 자신 이 지닌 지혜로써 백화산장을 벗어나 은거하고 있는 것이야. 그러리까 심목풍은 무공으로, 우문한 도는 지혜로써 서로 대치하는 것이지." 백리빙은 그의 긴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 없이 귀담아 들었다. '그러나 이상한데… 그가 어째서 목숨을 걸고 심목풍을 배반하였 으면서도 서로 손을 쓰지 않을 까? 그리고 심목풍은 그를 죽일 수 있는 무공을 가지고 왜 가만히 있을까?' 그녀는 이런 생각으로 다시 다그쳐 물었다. "왜 대치만 하는 것이에요? 심목풍의 악독한 수법이 가만 있지는 않을 텐데…" 소영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보내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문한도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가 심목풍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도 모두 그의 자 존심 때문이지. 그의 생각은 심목풍이 자신보다 절대 낫지 않다는 것이야. 그렇지만 무공이 약해 섣불리 손을 못 쓰는 것이지. 그리고 심목풍이 얼른 우문한도를 죽이지 못하는 것에도 그런대로 이유가 있지." 이번에도 그의 이야기는 길었다. "심목풍은 부하들의 이목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우문한도를 죽인다면 가뜩이 나 강호에서 인식이 나쁜데 부하들에게도 나쁜 소문이 퍼질 것을 싫어해서지. 그러니까 무슨 수 를 써서라도 우문한 도에게 올가미를 비우려는 게 아니겠느냐? 우문한도가 워낙 약기 때문에 쉽 사리 걸려들지가 않아서지." 백리빙은 그제서야 그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를 이해할 것 같았다. "아! 그랬었군요. 그런 이야기는 심목풍이 해 준 것이에요?"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 스스로 관찰해서 얻은 거지. 금궁에서 있었던 일과 심목풍이 그에게 독수를 뻗쳤던 일 등을 전부 종합해 보아서 만들어 낸 것이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역시 오빠는 대협소리를 들을 만해요. 여자가 아무리 약고 꾀가 많다 하여도 남자보다는 못한 가 봐요." 소영은 빙그레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그렇지 않지. 악누님은 나보다 월등히 나으니까." 그는 이내 화제를 돌렸다. "내가 이렇게 뛰어난 관찰을 할 수 있는 것도 은사의 덕분이지." "오빠의 사부는 견식이 풍부하여 다재다능하였던 것이로군요." "그렇지. 사부께선 나에게 무공을 가르친 것 외에도 의지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마음의 수양도 쌓아주었지. 내가 심목풍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도 모두가 그 덕이야. 마음의 수양은 곧 정신통일 이며 무슨 일에 부딪쳐도 절대 당황하지 않고 두려워 않는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후세에 명성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지." 여기까지 말하던 소영은 갑자기 안색이 변하면서 물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백리빙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소영은 눈살을 잔뜩 찡그리며 품에서 경문을 꺼냈다. "경문이 젖는 것을 모르고 있었어." 정말 경문은 흠뻑 젖어 있었다. 소영은 조심해서 경문을 펼쳐 들고 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백리빙은 물 속에서 나오며 다급히 외쳤다. "오빠! 불 있는 곳으로 가면 위험해요. 아직도 숲이 타고 있으니까 열기가 많아요 이곳에다 펼쳐 놓아도 금방 마를 거예요." "아, 그것도 좋군." 소영은 경문을 근처의 바위에 펼쳐 놓았다. 불길은 아직도 사나워 그 열기가 피부에 스며 들었 다. 두 사람은 다시 웅덩이로 뛰어 들었다. 소영은 물 속에 있으면서도 경문이 다르고 있는 것을 주시하였다. 만약 그 화상의 말이 맞다면 저 경문에 적힌 무공은 일대 기인의 것일 게다. 그는 금궁에 먼저 들어갔으나 이 경문은 찾아 내지 못한 것이다. 장방의 무공비록은 그가 일부러 남겨 놓은 것이 고… 이 때 어디선가 날카롭고 길다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휘익!" 그 소리는 동쪽에서 그치면 다시 서쪽에서 받고 그리고 남쪽에서 이렇게 사방 팔방에서 들려왔 다. 소영은 재빠르게 몸을 솟구쳐 경문을 집어들고 다급히 말을 꺼냈다. "빙아야, 심목풍이 행동을 시작했나 보다. 우린 빨리 준비를 하자." 백리빙도 그 휘파람 소리를 듣고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사태의 긴박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이 말하는 심목풍의 행동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무슨 행동을 할까요?" "심목풍은 지금 우리가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시체를 찾으려고 부하들을 풀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거예요?" 소영은 웅덩이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우선 이곳을 없애 버려야지." "왜요?" "우리는 심목풍에게 약점을 잡히면 안 돼.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불을 피했는지를 알 리지 말아야지, 그리고 우리가 죽었다는 증거나 표식을 남길 수 있다면 더욱 좋지. 하여튼 그들에 게 우리의 생사를 알리지 말아야 돼. 심목풍이 생각하기에도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모르게 말이 야." 백리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영은 주위를 훑어보며 자신의 옷을 만져 보았다. '벌써 말랐구나.' 소영은 경문을 다시 품 속에 넣었다. "빙아야, 우리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아야겠다." "어떻게 해서요?" 소영은 불길이 서서히 꺼져 가는 곳을 가리켰다. "지금 저곳에서는 심목풍의 부하들이 불을 끄고 있다. 그리고 뒤에서는 아직도 불이 거세게 붙 고 있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백리빙은 눈빛을 빛내며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린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 되겠네요." 백리빙은 사방울 두리번거렸다. "타 버린 나무 가지들을 이용하면 되겠네요." "이곳만 불탄 흔적이 없으면 저들이 의심할 것이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모았다. 소영도 분주하게 움직여 많은 재와 나뭇가지를 갖고 왔다. 나뭇가지만 모으니 금세 주위에 쌓였다. 소영은 그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면서, "빙아야, 비켜라. 이 나뭇가지는 바착 말랐기 때문에 불길이 잘 붙을 것이다." 하고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백리빙은 소영에게 바싹 다가서서 다급히 물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소영은 근처의 평평한 곳을 가리켰다. "저곳에 앉아 운기조식이나 하자. 저들의 기척을 듣고 활동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 앉았는지도 모르게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이렇게 얼마나 지나자 갑자기 불 길이 거의 꺼져갔다. 소영은 차츰 꺼져가는 불길을 바라보며 내심 생각했다. '저것은 심목풍의 수작일 것이다. 그의 부하들이 일부러 불을 끈 것이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숨을 수 있는 만큼 움푹 파인 곳을 찾아야지. 그리고 그 위에다 나뭇가지를 걸쳐 놓아 위장을 하는 것이다. 마침 물에 젖은 나무도 있고…" 심목풍 일행이 끄고 있는 불은 이제 거의 다 꺼졌다. 두 사람은 사방으로 구덩이를 찾았다. 사방울 헤매던 백리빙이 무엇을 찾았는지 소리쳤다. "오빠, 이리와 보세요." 소영은 단숨에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우선 구덩이 위에다 생나무를 깔고 총총히 타다 남은 나뭇가지를 덮었다. 겉에서 보면 알 수 없 었으며 일부러 나뭇가지를 들치기 전에는 발각될 염려가 없었다. 안에서는 조그만 구멍으로 밖을 내다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위장을 점검하고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구덩이는 두 사람이 들어갈 만 했지만 서로 무릎이 닿았다. 백리빙은 쑥스러움도 잊고 입을 열었다. "오빠는 우선 운기조식이나 하세요. 내가 망을 보겠어요 적이 나타나면 알릴게요." 소영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주고는 이내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몰랐다. 소영은 그만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자기의 몸을 흔드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며 눈을 뜨니 햇 빛이 틈 사이로 비추고 있었다. 백리빙은 빙그레 미소를 띠며 오른쪽을 가리켰다.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구덩이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심목풍이 서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찾 고 있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주위에 많은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우리를 찾고 있군.' 소영은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 백리빙에게 입을 열지 말라는 시늉을 하였다. 그는 전음입밀로 말했다. "빙아야, 지금 우리가 발각된다면 악투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생사를 걸고 싸워 서는 안 돼. 물러나야지. 난 이곳의 지리를 잘 모르고 있으나 어림으로 짐작은 한다. 서쪽에서 먼 저 불이 꺼졌으니 나무들이 있을 것이고 동쪽은 내가 온 길이지. 그리고 북쪽으로 가면 계곡이니 그곳도 안 된다. 그러니 남쪽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겠다." 백리빙은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역시 전음입밀로 말했다. "오빠는 저보다 지혜가 많으시니 오빠의 뜻을 따르겠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 심목풍의 음성이 들렸다. "도장은 소영이 이곳을 빠져 나갔다고 믿으시오?" "불가능할 것이오. 지하에 밖으로 나가는 굴이 있다면 몰라도…" 도장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은 소요자였다. "그럼 어째서 그의 시체를 찾지 못하는 것이오?" "불길은 몇 시간 동안이나 하늘을 뒤덮었지 않소. 소영이 아무리 날뛰는 놈이라 해도 몸이 녹았 을 것이오." 심목풍은 그래도 못 미더운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놈은 수중에 단검을 지니고 있는데 금궁에서 얻은 것이오. 그것만은 남았을 텐데 어찌 찾을 수 없소?" 소요자가 조금 언성을 높였다. "단검이 얼마나 크겠소. 이 넓은 숲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단 말이오?" "그가 확실히 죽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대장주, 안심하십시오. 빈도의 생각으론 틀림없이 죽었소이다." 그러자 지금까지 말이 없던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아니오. 그것은 틀리오. 소영이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이곳을 빠져 나갔을 것이오." 그녀의 말에 소영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큰일났구나. 금화부인이 나를 돕겠다고 한 말일 텐데 오히려 반대로 되었으니… 그러나 그녀는 우리를 돕는 것이다. 심목풍에게 우리가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필시 내 유물을 찾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숨어 있는 곳도 발견될 위험성이 있다. 금화부인이 저렇게 이야기하니 조금 은 안심이 되는구나.' 금화부인에게 자신의 의견이 묵살당한 소요자는 냉소를 터뜨렸다. "흥, 부인께선 무슨 증거가 있기에 그런 말을 하시는 거요?" 금화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증거는 없소. 그리고 그것은 필요치 않을 것이오. 내 육감을 이야기한 것 뿐이오. 그러나 내 말 이 맞을 것이오." 심목풍인 호탕하게 웃으면 두 사람의 논쟁에 끼어들었다. '그만들 하시오. 사소한 일로 싸울 필요는 없소. 그리고 부인께선 소영과 남매를 맺었다는데 그 것이 사실이오?" 잠시의 침묵이 흐르더니 금화부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것은 왜 묻지요? 나는 그것을 바라고 있지만 그가 누나라고 부르지를 않고 있어요." "나 심목풍은 배반자를 제일 싫어하오. 부인만은 여지껏 눈감아 왔소." 금화부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계속 냉랭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나도 지금까지 그것을 생각해 보았지만 어쩐 일인지를 모르겠소. 왜 나를 살려 두는 것 이오?" 심목풍은 음흉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오." 그리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소영이 죽었다면 가슴이 아프오?" "그렇소이다. 정말로 소동생이 죽었다면 통곡할 정도로 가슴이 아프겠지만 그가 죽었다는 증거 가 나타나기 전에는 믿지 못할 것이오." 소요자는 빈정대는 말투로 물었다. "그럼 부인께선 어떻게 해야 믿으시겠소?" "그의 시체를 보아야지요." 소요자는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그는 벌써 재가 되었소이다." "그의 수중에 지니고 있던 단검이 없잖소." "이 불길은 수십 장의 숲을 태웠소이다. 그 조그만 단검이 땅에 있다 하여도 재에 싸여 찾을 수 가 없을 것이오." 그러자 금화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다음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늘을 찌를 듯한 불길 속에서 살아난다는 것이 쉽지는 않으니까.'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는 몇 번 들어 본 기억이 있는 심목풍만의 것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웃더니 금화부 인에게 입을 열었다. "부인께선 믿는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그러나 금화부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부인, 산장으로 돌아가면 소영의 제사를 차려 주겠소. 부인의 동생이 죽었는데 어찌 보고만 있 겠소." 심목풍은 하나의 강적이 없어졌다는 것이 무척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는 커다란 입을 실룩거리며 연신 웃기만 하였다. 소요자가 가벼운 기침을 하고 말을 꺼냈다. "소영은 죽었으니 대장주께선 한시름 놓았을 것이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시겠소?"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강호에 알려 놓고 일시에…" 심목풍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아차, 내가 실언을 하였구나.' 그리고는 눈길을 돌려 소요자에게 되물었다. "도장께선 어떤 계책이 있소?" "빈도는 전에 약속했던 것을 지켜주길 바랄 뿐이오. 대장주께선 육지를 지배하시고 빈도는 사해 (四海)를 다스리겠소. 그래서 육지와 바다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어 우리들의 천지로 만들자는 것이오." 심목풍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도장께선 사해군주에 미련이 많은가 보오." "빈도는 부탁을 받고 힘을 기울이는 것이오. 강호가 평정된 다음에는 속세를 떠나겠소." "그건 섭섭한 말이군요. 도장과 같이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강호에서 떠난다니…" 소요자는 그의 말이 십분 비웃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흥, 네가 나를…' 그러나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라 짐짓 부드기운 표정을 지었다. "대장주께선 빈도의 말을 믿지 않으시나 보군요. 그러나 이제 곧 강호가 평정될 것이니 그 때 두고 보시오. 빈도는 이미 강호에서 마음이 떠난 몸이오." 심목풍은 여전히 음흉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도장께서 하신 말과 행동이 일치되기를 바라겠소." 그리고는 주위를 한 번 훑어보고 말했다. "자, 이제 돌아갑시다." 그러자 금화부인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대장주께선 소영의 시체토 안 찾는다는 거예요?" 심목풍은 떼어 놓으려던 발길을 멈추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벌써 재가 되었을 것이라 하지 않았소. 재가 된 것을 어떻게 찾겠단 말이오?" 금화부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심목풍을 쏘아 보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대장주께서는 소영이 죽었다고 믿으시는군요."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소영이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하여도 새가 아닌 이상 공중으로 날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 리고 그가 땅속으로 들어갔다 하면…" 금화부인은 사방울 두리번거리며 수심에 싸인 표정으로 말했다. "난 그가 죽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요." 소요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부인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군요. 이런 불 속에서는 쇠덩이도 녹았을 것이오." 심목풍은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흘리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소요자가 바싹 따랐다. 금화부인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심목풍을 뒤쫓아 갔다. 소영은 그제서야 백리빙에게 눈길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빙아야, 너도 들었을 것이다. 지금 심목풍은 우리가 죽은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의 행동은 더욱 주의해야 되겠다. 우리의 모습을 감추면서 말이야." 그리고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빙아야, 배 고프지? 조금만 더 참아라. 날이 어두운 다음에 이곳을 빠져 나가자." 백리빙은 허리를 굽혀 고개를 소영의 품에 파묻었다. "괜찮아요. 이렇게 오빠와 같이 있으면 며칠을 굶어도 배 고프지 않을 것 같아요." 그녀의 볼은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소영은 그것을 뿌리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꼭 부등켜 안은 채 눈을 감고 운기를 조식했다. 두 사람만의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을 것 같은데도 벌써 날이 저물었다. 두 사람은 구덩이를 나와 안에서 결정했던 대로 남쪽 방향으로 잡았다. 두 사람은 이경도 되기 전에 불탄 자리를 벗어났다. 그곳을 벗어나자 다시 울창한 밀림이 나타 났다. 이 밀림은 너무나 울창하여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경공 법으로써 언덕을 넘어섰다. 먼저 백리빙이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오빠, 이곳에서 쉬었다 가요." 소영은 주위를 살펴 보았다. 주위는 아직도 울창한 숲이었다. "그러자꾸나. 나도 피곤하구나." 백리빙은 근처의 바위에 앉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오빠, 배가 고파요." "조금만 더 참아라. 농가를 찾아 마음껏 먹어보자꾸나." 백리빙은 가볍게 웃었다. "오빠는 지금부터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심목풍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난 변장을 해야지. 그래서 그가 강호 무림에 어떻게 마수를 뻗치는지 구경해야지. 그리고 강호에서 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도 알아보고 말이 야." 그리고는 잠시 사이를 두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심목풍은 치밀한 계획으로 강호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던 것인데… 웬일인지 예정을 바꾸어 미리 손쓸 것 같구나." "오빠, 저는 아직도 한 가지 일이 마음에 걸려요." 소영이 눈길을 돌렸다. "무엇이냐?" 백리빙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평시에 부모님께서 소림파를 이야기하던 것을 여러번 들은 기억이 있어요. 소림파의 명성 은 하늘을 찌를 듯하며 많은 고수가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어째서 심목풍에게 대항하지 못할까 요? 소림파를 지금껏 치켜 올린 것이 모두 심목풍의 주목을 끌게 한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게 되 면 자연히 심목풍의 마수가 뻗칠 것이고 서로 싸우게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심목풍은 소림파를 건드리지도 않을 뿐더러 소림파도 심목풍은 외면하고 있으니…"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 말한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이제 소림파도 기울어졌어. 그들도 심목풍과 결탁한 인물이 내부에 잠입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단지 어떤 압력에 눌려 심목풍의 명령을 듣고 있 을 뿐이야." "아, 그랬었군요." 그리고는 소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빠,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듣고 화내시지 않으시겠어요." 소영은 고개만 끄덕였다. 백리빙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죽은 사람이 되어야 되겠어요. 만약에 강호에서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며 심목 풍에게 복수하겠다고 하는 인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도와 주어야지요. 그러나 그 반대로 오빠의 죽음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오빠도 이제는 손을 떼세요. 그래서 악언니를 찾아 심산 에 은거하면서 평온한 세월을 보내요." "좋아. 우선 내려가 보고 다음 일을 결정하기로 하자." 두 사람은 다시 산을 내려 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고 산길을 달리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부러울 정도였다. 마침 도중에 민가를 만나 그 집에서 은자를 몇 냥 주고 밥을 얻어 먹었다. 두 사람은 너무나 피 로했던 까닭에 곤한 잠에 떨어져 아침 늦게까지도 깨어날 줄 몰랐다. 해가 거의 중천에 떠서야 주인이 깨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어떻게 가다 보니 전날 초곤산을 만났던 조그만 객점이 나타났다. 소영은 완연한 농군 차림이었 으며 백리빙은 촌색시로 변장했다. 그리고 빼빼 마른 당나귀를 끌고 있었다. 황량한 곳의 객점이었지만 비교적 손님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그 객점의 바로 문 앞에 있는 고목에 커다란 흰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 깃발에는 붉은 글씨로, <혼이여, 돌아오라.>는 글귀가 써 있었다. 소영은 그것을 보며 의아한 마음이 생겼다. '혼이여, 돌아오라니… 그것 참으로 이상하군.' 객점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흰 천으로 대문을 가로질러 막아 놓았다. '누구 제사를 지내는가?' 대문 위에 조그만 판자가 달려 있는데 몇 자의 글이 씌어 있었다. 자세히 그 글을 읽던 백리빙 은 자신도 모르게, "어머!" 놀라는 소리를 내었다. 그곳에는 나무의 깃발과 같은 글씨체로 <무림대협 소영의 영위> 라고 큼지막하게 써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렇게도 고요하던 객점 안에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흰 옷을 입 고 있었다. 소영은 암암리에 눈길을 돌려 객점을 유심히 살폈다. 흰 옷을 입고서 분주히 움직하고 있는 사 람은 모두 이 삼십 명은 될 것 같았다.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나왔을까?' 소영은 갑작스럽게 모습을 보인 그들을 하나하나 주의깊게 주시하였다. 백리빙은 옆으로 바싹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오빠의 영패예요. 아마 오빠의 제사를 지내려나 봐요. 정말 소식이 빠르군요." 소영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나는 벌써 몇 번이나 제사를 받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백리빙이 소영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해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나귀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막 대문을 들어서려는데 흰 옷을 입은 두 명의 대한이 달려 나왔다. 161. 무림 명등(明燈) 소영의 영위(靈位) 앞에 오는 사람은 흰 수염에 몸매가 가느다란 개방의 장로 손불사였다. 그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손불사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무당파의 전엽청이었다. 그의 표정도 수심에 가득차 있었으며 역 시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소영은 내심 크게 감동했다. '이 사람들은 내 죽음을 크게 슬퍼하고 있구나.' 두 사람은 소영에게 다가오더니 전엽청이 대뜸 물었다. "귀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오?" 물은 사람은 전엽청이었다. 소영은 다급하게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소생은 성이 손이요. 마누라를 집까지 바래다 주는 길이지요." 손불사는 상대가 소영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장사를 하지 않소.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니까 어서 가시오." 소영은 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백리빙은 소영의 뒤를 따르며 흘끔 뒤를 돌아다 보았다. 두 사람은 벌써 객점 안으로 들어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빠는 두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어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변장을 하고 있지만 나는 알 수 있지. 수염이 난 사람은 개방의 장로 손불사이고 그 뒤 는 전엽청이지." 백리빙은 다시 되물었다. "그럼 오빠의 영당 앞에 꿇어 앉아 있는 사람을 아세요?" "아니. 그들은 보지 못했구나." "오빠의 영당에 꿇어 앉아 있는 사람은 오빠의 형제들이어요." 소영은 깜짝 놀랐다. "상형과 두형이 이곳에 있단 말인가?"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들은 슬프게 흐느끼고 있었어요."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나는 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구나." "오빠, 그들이 흐느끼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돌아가서 그들에게만 모 든 사실을 알려주면 안 될까요?"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지금은 큰일을 위해 참아야 된다." "오빠는 그들이 애통해하는 것을 보고만 있겠단 말이에요?" 소영은 다시 깊은 한숨을 지었다. "빙아야, 너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구나. 내가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 자연히 심목풍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계획이 모두 깨질 게 아니냐? 우리는 대의를 위해서 잠시 참 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눈길을 돌려 백리빙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 안에 우문한도의 모습도 보이더냐?" 백리빙은 대답 대신에 되물었다. "오빠는 그 우문한도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시지요?" "그렇다. 역시 우문한도가 우리편에 들어와야만 심목풍의 계략에 대응할 수 있지." 백리빙은 뒤를 힐끗 돌아다보고는 소영의 옷소매를 끌었다. "오빠, 우리 길 옆에 숨어서 그가 오는지 알아보도록 해요." 소영은 의아한 생각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뒤에서 세 필의 준마가 이곳으로 달려 오는 것이었 다. '음, 누가 오는가 보군.' 두 사람은 곧 길 옆으로 몸을 피하였다. 세 필의 준마는 질풍같이 달려와 벌써 객점의 입구까지 다다랐다. 그들은 마문비와 당원기 그리고 삼양신탄 육괴장이었다. 세 필의 준마는 얼마나 길을 재촉했는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백리빙은 가볍게 탄식을 하였다. "아, 모든 사람들이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는군요." 소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또다시 수레바퀴소리가 들렸다. 마차는 온통 흰 천으로 감겨 있었으며 그것을 끄는 두 필의 말에도 흰 천이 씌워져 있었다. 그 마차가 두 사람 앞을 지나는데 휘장 안에서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백리빙은 소영에게 바싹 다가서며 낮게 입을 열었다. "오빠, 저 마차 안에도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타고 있나 보지요?" 마차는 비교적 화려했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사람도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것 같군." "누군데 말을 안 타고 마차로 왔을까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다. 나도 그것을 생각하던 중인데… 마차를 탔으니 여자가아닐까?" "아, 틀림 없어요! 제가 들은 것도 여자의 흐느낌 소리였어요." "너는 알 수 있겠느냐? 나는 조금도 짐작을 못하겠구나." "오빠, 혹시 악언니가 아닐까요?"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 거야. 누님은 지금 자신의 일만도 굉장히 바쁠 거야. 나와의 약속이 있으니 그것을 지키려 고 애쓰고 있을 터인데…" 그러나 백리빙은 무슨 자신을 가졌는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악언니가 이것을 아셨다면 열일을 제쳐놓고 달려올 거예요. 오빠가 죽었는데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객점의 지붕으로 두 사람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은 밑에서 누가 던져 주었는지 한 뭉치의 흰 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지붕 곳곳 에 흰 천을 펼쳐 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니 객점은 온통 흰색 투성이었다. 사람도, 집도, 말도, 마차도… 백리빙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말을 꺼냈다. "강호의 대 장문인이 죽었다 해도 이토록 성대하게 제사를 지내지는 않을 거예요." 마차의 뒤를 이어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흙먼지가 자욱한 것이 아주 길었다.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군, ' 일진의 흙먼지 속에 어렴풋이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모두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이십여 명의 뒤를 바싹 이어 두 대의 마차가 따 르고 있었다. 말에 타고 있는 이십여 명도 모두 똑같은 복장이었다. 아래 위 흰 옷을 입고, 머리에도 흰 수건 을 두르고 있었다. 소영은 눈길을 집중하여 그들을 살펴 보았다. '저자들은 한 사람도 알지 못하겠구나.' 그들은 제각기 특색 있는 병기를 지니고 있었고 모두 침통한 표정들이었다. '저들도 내 제사에 참석하려는 모양이군.' 맨 뒤를 따르는 두 대의 마차에는 흰 비단이 가득 실려 있었다. 백리빙은 내심 엉뚱한 생각도 하여 보았다. '저렇게 많은 비단으로 무엇을 하려 한담? 장사성의 비단 장수가 수지맞았겠는데…' 이십여 마리의 말이 두 사람 옆을 지나치며 날카롭게 쏘아보는 것 같았다. 소영은 그들의 시선 을 피하며 당나귀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순식간에 소영과 백리빙 옆을 지나쳤다. 소영은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객점으로 달려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일까? 그들은 정말로 나를 애도하는 것일까?' 그는 너무나 궁금한 것이 많아서 도저히 발길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빙아야, 우리 무슨 묘안을 짜내어 다시 객점으로 돌아가자. 아무래도 내 제사를 보아야겠다." 백리빙은 밝은 화색을 띠었다. "그래요. 그럼 장사성으로 가요. 거기에서 우리는 흰 옷을 입고 조객으로 변장하면 될 거예요." "네 말대로 하자!" 소영은 끌고 가던 당나귀를 놓아주고 장사성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해가 저물 무렵쯤에야 장사에 도착해 강호 인물로 변장했다. 소영은 흑색의 경장을 입고 얼굴에는 검은 칠을 하였다. 백리빙의 변장은 더욱 그럴 듯했다. 그녀는 몸집이 작기 때문에 노인으로 변장했다. 턱에는 노란 색의 수염을 달고 옷은 촌티가 나는 것으로 입었다. 그리고 바지 댓님을 죄어 매니 영낙없는 촌 노인이었다. 더군다나 허리춤에 길다란 담뱃대를 꽂고 있으니 그 꼴은 가관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 노인이 옥같이 예쁜 낭자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비단가게를 찾았다. 그러나 집집마다 흰색 비단은 매진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른 척하고 길가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날이 저물자 술집의 대청을 몇 개의 등불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백리빙은 대청으로 들어가 벽에 붙어 있는 탁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소영은 청문 옆에 있 는 자리에 앉았다. 아직 때가 일러서인지 별로 손님이 없었다. 그러나 일꾼들이 모두 문께로 나온 것으로 보아 몰려올 손님들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소영은 객점의 주위를 훑어보았다. 대여섯 사람이 음식값을 치르고 문가로 몰려 나왔다. 그들은 모두 무사 차림이었다. 그들의 맨 나중에 섰던 장한이 밖으로 나가다 말고 소영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도 소대협의 장례를 보기 위해 이곳에 왔소?" 소영은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아니… 그렇소이다. 당신도 제사에 참석하려오?" 그 사람은 육십이 다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소대협의 장사는 내일인데, 여기서 영당이 있는 곳까지는 몇 십리 길이오. 당신도 장사를 구경 하고 싶다면 서두르시오. 오늘 밤을 새우며 걸어야 될 것이오." "고맙소이다. 그러나 소생은 아직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소이다." 그 노인은 이상한 눈빛으로 소영을 한참 동안 쏘아 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여보 젊은이, 젊은이는 소대협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단 말이오? 심목풍의 간계에 빠져 불에 타 죽었다는데 우리가 강호 무림의 인물이라면 응당 그의 영전에 무릎을 꿇어야 도리가 아니겠 소?"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소협은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혼자 잘난 척 하였소이다. 그가 강호에 무슨 공적을 남겼단 말이오? 혹시 재미난 구경으로나 가면…" 노인은 돌연 싸늘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젊은이는 아직 강호를 모르는 송사리로군. 당신 같은 사람은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게요. 괜히 영당이 있는 곳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부지하지 못할 테 니까." 노인은 일행이 모두 밖으로 나갔는데도 따라 나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소대협이 강호에 나온 것은 얼마 안 되는 세윌이지만 그의 불굴의 의지는 강호 무림에 정의를 불어 넣어주었소. 약관의 나이로서 심목풍에게 대항하였던 그 기백을 당신은 짐작도 못할 것이오. 당신 같은 사람은 소대협이 지녔던 용기와 의협심을 감히 따르지도 못할 것이란 말이오. 당신은 잘 모르지만 그 동안 잠잠하던 각대문파들도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오." 노인의 말은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소대협이 없었더라면 무림이 벌써 악의 소굴로 화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소. 영웅 은 나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오. 강호의 수많은 영웅들이 어디 나이가 적소? 그러나 이 많은 그 들도 감히 심목풍에게 도전하지 못하였소. 뒤에 숨어서 애만 태웠단 말이오." 노인의 이야기가 심각하였으며 차츰 길어지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았다. "당신은 오늘 운수가 좋았소. 만약 다른 사람에게 그따위 입을 놀렸다면 당신의 입은 벌써 찢어 졌을 것이오. 내 당신을 위하여 충고하겠는데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마시오. 당신은 아직 젊으 니 땅속에 들어 갈 때가 이르오." 노인은 말을 끝내자마자 획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사라지는 그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에서 이토록 나를 생각해 주는구나.' 이 때 객점의 심부름꾼이 다가왔다. "손님, 무엇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진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객점으로 다가오는 소리였다. 말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저들도 내 제사에…? 많은 사람들 같군.' 소영의 짐작이 들어맞았다. 객점으로 들어온 사람은 모두 한결같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리에 앉지도 않고 객점 일꾼에게 묻는 것이었다. "어이, 이곳에 옷을 만드는 사람이 있나?" 맨 앞에 서 있던 사나이가 객점 심부름꾼을 불렀다. 심부름하는 아이는 두려운 눈빛으로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손님께선 무엇을 원하십니까?" "우리는 여덟 벌의 흰 옷이 필요하다. 빠를수록 좋으니 어서 만들어라.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까." "염려 마십시오. 마침 만들어 놓은 옷이 있으니…" 맨 앞의 사나이는 희색이 만면한 표정으로 일행을 둘러보고는 다시 심부름꾼에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우선 뭐 먹을 것 좀 가져와라." 그리고 한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소영은 그들의 동정을 유심히 살피며 막 심부름꾼을 부르려는데 객점으로 노인과 젊은 청년이 들어서는 것이었다. 소영은 들었던 손을 살그머니 내리고 새로 들어온 두 사람을 주시하였다. 두 사람도 역시 무림 의 인물로 장검을 지니고 있었다. 젊은 청년이 소영의 앞으로 지나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이번에 소대협의 장례에 참석하는 사람이 무척 많은가봐요." 노인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단다. 네가 길을 오면서 본 사람들도 모두 영당으로 가는 사람들이지. 두엇보다도 오늘 밤 에 길을 재촉할 사람들이 무수히 많을 게야." "할아버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소대협을 문상하러 가지요?" "그 사람들도 모두 죽은 소대협과 같은 뜻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지. 그는 약관에도 조금의 두려 움도 없이 막강한 세력을 지닌 심목풍에게 도전한 의협이었지. 그래서 강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란다. 소대협은 무림의 영웅들을 깨우친 인물이다. 훗날 백화산장의 발길에 차일 염려가 있으니 미리 손을 쓰는 것이다." 노인은 잠시 사이를 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소대협이 아깝게도 죽었으니 이젠 마지막 결단이 남아 있을 뿐이다. 죽음이냐? 평온이냐? 이번 에 각대문파의 영웅들은 소대협의 장례를 치르고 일제히 분기할 것이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노인과 청년은 식사를 끝낸 뒤 총총히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조금 전의 심부름꾼이 소영에게 다가왔다. "손님 죄송합니다. 너무 소란을 떠는 사람들이라… 손님께서는 소대협의 장례에 참석하지 않을 겁니까?" 그러자 심부름꾼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말을 꺼냈다. "손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소대협의 장례에 참석하십시오. 그분은 애석하게 돌아 가셨으니 꼭 복수를 해야지요. 소인에게 조금이라도 무공이 있다면…"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아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고맙군, 나를 그토록 생각해 주니, 내 그대들 호의에 보답하는 뜻에서 전보다 더욱 분기하여 기 필코 심목풍을 죽이고 말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여보게, 나에게도 흰 옷을 한 벌 구해다 줄 수 있겠나?" 심부름꾼은 연신 허리를 굽혔다. "예, 예, 손님께서 소대협의 장례에 참석하실 것이라면 곧 준비해 오지요." 그리고는 주방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소영은 백리빙을 미쳐 생각지 못했으므로 그를 다급히 불렀다. "여보게, 잠깐만!" 심부름꾼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한 벌이 아니고 두 벌이네, 그리고 하나는 좀 작은 것으로…" 그 아이는 별 의심 없이 그대로 사라졌다. 소영은 객점에서 흰 옷을 구해 입고 밖으로 나섰다. 소영의 뒤를 이어 백리빙이 나타났다. 밖은 완전히 어둠이 깔려 있었다. 소영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빙아야, 그곳에 가면 말과 행동을 특히 조심하여라. 우문한도가 있다면 더욱 말을 말아야 된다. 그리고 혹시 심목풍이 암수를 쓸지도 몰라. 그러니 우리들은 그들의 암습을 미리 방지해야 된다." "어떻게 막는단 말이에요?" "우리는 언제까지나 모르는 사랍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나누어 감시하는 것이야. 만약 행 동이 이상한 자가 있으면 손짓으로 알리는 것이지. 그러나 그 영당에는 한두 사람이 아니니 조심 해야 돼. 괜히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말이다." 백리빙은 더 말하지 않고 즉시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신호를 결정했다. 우선 서로의 신호방법이 결정되자 그 다음이 문제였다. 백리빙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열 었다. "만약 수상한 자를 만나면 어떻게 처리해요?" 소영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한 쪽 눈을 찔끔 감았다. "우리도 암수를 쓰는 것이지. 그가 소란을 피우지 않고 죽을 수 있는 수를 쓰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 모습을 나타내서는 안 되니까."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영의 팔에 매달렸다. "좋아요. 나는 오빠의 말이라면 죽어도 후회하지 않아요." 두 사람은 그 길로 소영의 장례를 지내는 영당으로 달렸다. 그 곳은 완연히 변해 있었다. 사람들이 수없이 대문을 드나들고 있었으며 십여 대의 마차가 길 가에 늘어서 있었다. 특히 객점의 담까지도 모두 흰 천으로 감싸여 있었다. '음, 대단한 장례식이로군.' 대문 양쪽에는 커다란 등불이 달려 있었다. 그 밑에 조그만 천이 달려 있었는데, <혼이여 돌아오라.> 고 씌여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의 약속대로 서로 모르는 척했다. 먼저 소영이 안으로 들어섰다. 대문 옆에 두 사람이 조그만 탁상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탁상에는 먹과 벼루 그리고 붓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두 사람 중에 어느 하나는 조문록을 들고서 무엇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소영은 주저없이 그들 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초곤산과 사마건이었다. 초곤산은 소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공손히 포권을 하고 말을 꺼냈다. "소생은 초곤산이라고 합니다. 귀하께선 문상을 오신 것입니까?" 소영은 그가 자신의 음성을 알까봐 묵묵부답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초곤산은 재차 묻지는 않았다. "귀하께선 걸어서 오셨나 보구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그리고는 소영에게 조문록을 내밀었다. '이처럼 간단하게 조객을 맞으니 필시 심목풍의 부하들도 많이 끼었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며 조문록에다 몇 자 적었다. <상북(湘北) 등대단(藤大丹)> 소영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사마건이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마당 한 구석에는 커다란 천막이 쳐 있었다.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아 겨우 의지할 수 있을 정도 였다. 천막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반듯이 드러누운 사람, 정좌를 하고 앉아서 운기를 조식하는 사람, 서로 잡담을 하는 사람 등… 소영은 그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누가 말을 걸기 전에…'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고 운기를 조식했다. 밤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지만 워낙 내공이 심후하여 피로를 느끼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다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궁금한 마음으로 눈을 떠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빙아는 영리하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어올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온 신경을 천막 문께로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의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 다. 마치 어떤 사람이 일부러 입김을 불고 있는 것 같았다. 소영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바로 소영의 앞에 체격이 뚱뚱한 사람이 앉아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누굴까? 저놈은 생전 처음 보는 놈인데. 혹시 나를 알고서…' 소영은 은근히 화가 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빈 자리가 많이 보였다. '저놈은 무슨 마음으로 이 좁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까?' 소영은 눈빛을 빛내며 상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엇! 저 사람은…' 그는 내심 깜짝 놀랐다. 자기 바로 눈 앞에서 거센 입김을 내고 있는 상대는 바로 주승 반개였다. 반개는 흰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어찌나 더러운지 검은 옷같이 보였다. 얼굴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나 술을 마신 것은 아닌 듯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안 마시고 이곳에 온 것을 보니 그도 진심으로 조의를 표하는구나.' 소영은 눈을 감았다. 다시 얼마쯤 지났을까. 돌연 조금 전과 같은 뜨거운 입김이 온 얼굴에 퍼져 오는 것이 아닌가. 반개가 일부러 소영에게 입김을 부는 것이었다. 소영은 아무 말도 없이 몸을 일으키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반개 대사는 무엇 때문에 나에게 시비를 걸까? 그러나 내가 참아야지. 여기까지 들어와서 그와 다툰다면…' 반개는 소영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곧 뒤따라 일어섰다. 그는 소영이 앉아 있는 옆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참을성이 많구려." 소영은 눈길을 돌리며 냉랭하게 물었다. "왜 그러시는 거요?" "화상은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소영은 계속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오? 소생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안하는 성미요. 더군다나 이런 조객이 된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소." 그러나 반개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당신의 성이 무엇이오?" 소영은 들어을 때 조문록에다 쓴 이름을 대었다. "성은 등이고 이름은 대단이오. 등대단." "아, 등형이시구려. 그래 중원에서 지내셨소. 아니면 장사성…"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아니오. 소생은 항상 초목을 벗삼고 있을 뿐이오." "그것 참 좋소이다. 이 화상도 초목을 벗삼는 늙은이인데… 그런 데 어째서 당신을 보지 못하였 을까?" 소영은 그의 능란한 화술에 감탄하였으니 그에게 뒤떨어지지 않고 말을 받았다. "불가 설법에 의하면 소인은 대사와 대면치 못한다는 것이 있소이다." "아, 그래요? 그럼 당신은 이 늙은 화상을 알고 있단 말이오?" 소영은 그 말에는 대답치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막 안의 대부분 사람들은 옷을 입은 채 자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고 있으니 그들의 안면방해를 하지 맙시다. 대사께서는 아침에도 이야기할 수 있잖소." 반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이 맞소.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소." 그러나 소영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반개도사는 계속 몇 가지를 물었지만 소영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반개는 참으로 끈질기게 물어댔다. 그는 대답도 없는 물음을 자꾸만 보내는 것이었다. 이제는 한 마디의 물음을 계속 반복하였다. 아마 소영이 끝까지 대답하지 않아도 그는 쉬지 않 을 것 같았다. 소영은 할 수 없이 눈을 떴다. "좋소이다. 딱 한 가지만 물으시오." 반개는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소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 늙은이를 알고 있소?" "알고 있소이다. 대사는 강호에서 주승이라고 불리우며 이름은 반개가 아니오?" 반개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는 다시 무어라 입을 열려 했다. 그리나 소영이 눈을 감고 돌아 앉 자 입맛을 몇 번 다시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소영은 그가 천막에서 자취를 감추자 비로소 눈을 떴다. '저 화상은 확실히 보통사람이 아닌 걸.'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천막 문이 다시 열리며 웬 늙은이가 들어왔다. '아! 빙아도 들어 왔구나.' 키가 조그맣고 몸집도 작은 노인은 분명 백리빙이 변장한 것이었다. 그는 백리빙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내심 걱정을 하였다. '그녀에게도 그 화상이 시비를 걸 터인데, 그녀가 반개대사의 행동을 아랑곳하지 않고 참아 주었 으면…' 천막 안으로 들어선 백리빙은 사방으로 눈길을 돌리더니 소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소영은 당황하였다. '만약 그녀가 나에게 아는 체를 한다면 반개에게 탄로가 나고 만다.' 그러나 백리빙은 소영의 건너쪽에 앉아 등을 돌렸다. 소영은 암암리 숨을 내쉬었다. '휴. 빙아도 이제는 제법이로구나.' 그가 안도의 숨을 막 내쉬었을 때 천막이 열리며 반개가 들어섰다. 그는 사방울 두리번거리며 백리빙을 찾는 것 같았다. 백리빙은 쉽게 그의 눈에 띄었다. 반개는 소영의 앞까지 와서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백리빙의 건너쪽에 앉는 것이었다. '과연 일이 닥쳐 왔구나. 제발 빙아가 성질을 참았으면…' 반개의 음성이 들렸다. "귀하께선 어디에서 오셨소이까?" 백리빙은 차가운 눈초리로 반개를 돌아보고는 다시 외면해 버렸다. 그녀는 좀처럼 입을 열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여보시오. 어디서 오셨소? 내 말이 들리지 않소?" 그러나 백리빙은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반개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귀하는 이 화상을 알고 계시오?" 그는 말을 하고 있지만 눈빛은 백리빙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백리빙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면서 눈을 감았다. 그래도 반개는 몇 마디 물었으나 백리빙은 계속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는 입맛을 몇 번 다시고 백리빙의 곁을 떠났다. 소영은 그녀가 입을 열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죄고 있었다. '빙아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면 대뜸에 반개의 의심을 받는다. 더군다나 여자의 음성이니…' 그러나 백리빙은 용케도 그 순간을 참은 것이었다. 반개는 한 번 나가고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 다. 날은 얼마 안 있어 밝아왔다. 아침 햇살이 천막 지붕을 비추자 잠자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났다. 잠시 후 천막 문이 열리고 반개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크게 말했다. "여러분 일어나십시오? 이제 소대협의 장례가 시작됩니다. 어서 향불을 드십시오." 천막 안의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소영과 백리빙도 여러 사람들 틈에 끼 어 밖으로 나갔다. 밖의 모습은 어제 저녁과 또 달랐다. 객점 지붕에는 열 개 정도의 장대가 꽂혀 있고 그 끝에 흰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영혼이여 돌아오라.> 는 글귀가 깃발마다 쓰여 있었다. 객점의 구석구석마다 흰 천으로 씌워져 온통 흰색뿐이었다. 심지어 대문 앞의 나무도 흰 천으로 둘러져 있어 멀리서 보면 흰 누각 같았다. 소영은 사방울 둘러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 죽음이 큰 영향을 주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것은 너무 과분하군.' 천막에서 나온 사람들은 네 줄로 늘어서서 영당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소영의 영당이 있다는 곳은 객점을 뒤로 돌아 넓은 공지에 있었다. 사방에는 높은 기등을 세워놓고 흰 천으로 둘러쳐 놓았다. 그러나 들어가는 문이 네 개나 있는 데 반하여 나오는 문은 보이지 않았다. '저 흰 천으로 이루어진 영당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들어가서 그것부터 알아내야지.' 그는 벌써 영당의 입구까지 다다랐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소영은 그제서야 깜짝 놀라며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다. '벌써 이곳까지 왔군.' 소영에게 인사말을 보낸 사람은 육괴장이었다. 소영은 답례를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 사람은 오늘 주인 행세를 하는군. 이 문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문에서 조객을 맞는 사람도 그렇겠지…' 문을 들어서자 다시 커다란 탁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붓과 흰 비단이 보였다. 그 탁상 뒤에는 무당파의 두 제자가 엄숙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영은 붓을 들어 상북 등대단이라는 가짜 이름을 적었다. 영당의 바닥도 모두 흰 비단으로 깔려 있어 땅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 넓이는 밖에서 보던 것과는 틀려 사방으로 백여 장은 될 만큼 컸다. 어림잡아 천 명은 들어 갈 수 있으리라. 소영의 영위가 마련돼 있는 곳은 쉽게 한 눈에 들어왔다. 그 곳에는 길다란 흰 비단에 붉은 글 씨가 기어 있었다. <천하 제일 의협 소영의 영위> 그리고 그 양쪽에 영장(靈帳)이 내려져 있었다. 소영은 비단 방석 위에 앉아 다시 한 번 영위가 있는 곳을 살폈다. 영위의 맨 꼭대기에 옆으로 비어진 글이 있었다. <무림 명등(明燈)> 소영은 그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슨 큰일을 했다고 이토록 과분한 존경을 받는가? 이렇게 되면 오히려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군.' 잠시 영위 뒤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앞에 선 사람은 몸집이 말랐으며 길고 큰 장삼을 입고 있어 마치 어린애가 어른의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지니고 있는 엄숙한 표정은 그런 웃음을 싹 가시게 했다. 개방의 장로인 손불사였 다. 두 번째 사람은 긴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진 무당의 장문인 무위도장이었다. 손불사가 먼저 두 손을 공손히 가슴께로 올렸다. "저는 개방에 있는 손불사라는 장로이오. 저는 이렇게 늙고 야위어 세상의 환락이 싫어 은거하 고 있던 몸이오. 그러나 심목풍이란 자가 강호를 어지럽히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정의를 위하여 칼을 잡을까 하오." 그러자 군호들 틈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손대협께서 강호의 내일을 위해 저희들을 도와준다는 것을 항상 감사하고 있었소이다." 손불사는 가볍게 허리를 굽혀 그에게 예를 올렸다. "고맙소. 그러나 저는 이미 늙은 몸이오. 진정으로 우리 강호 무림을 구원해 줄 수 있었던 소대 협이…"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손불사와 같이 성망이 높고 인품이 지고한 사람도 흐느끼는데 다른 군호들이 울지 않을 리 없었 다. 삽시간에 장내는 울음바다로 화하여 버렸다. 잠시 후 손불사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소대협을 백화산장에서 본 일이 있었소. 그 때 소대협은 십팔금강과 혈투하는 용기를 보 여 주었소. 진정으로 그런 의협은 이 세상에서 드물 것이오. 저는 이제까기 여생을 보내면서 수많 은 무림 영웅들을 보았소. 그러나 소대협처럼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소이다." 손불사는 긴 한숨을 내쉬고 사방울 둘러보았다. 장내에 모인 조객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심목풍은 갖은 계략을 다 써서 소대협을 자기 편으로 끌려고 하였소. 백화산장의 장주로도 만 들고, 부모님을 납치하려고도 했었소. 그러나 소대협은 불굴의 투지로 계속 그를 위협해 왔던 것 이오." 그는 고개를 돌려 무위도장을 바라보았다. "소대협은 강호에 나선 지 얼마 안 되지만 그동안 무수히 많은 일을 하였소. 여기 무위도장께서 거기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해 드릴 것입니다." 무위도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천하를 칭찬한다면 몰라도 소대협의 지난 일을 말한다는 것은 어렵소이다." 그는 눈길을 돌려 소영의 영위를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는 번개처럼 나타나 모든 사건을 먹구름 헤치듯 해결했소이다. 소대협은 우리의 갈 길을 밝 혀 주었소이다. 그는 비록 심목풍의 간계에 목숨을 잃었지만 큰일을 만들고 갔소이다. 그것은 우 리에게 갈 길을 가르쳐 준 것이오. 여러분! 우리는 그의 복수를 해야 됩니다. 그는 지하에서나마 우리의 분기를 성원해 줄 것입니다." 군호들은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 무엇이 일어날 듯한 기세였다. 무위도장의 비통한 열변은 계속되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의 목전에 닥친 불만 끌 수가 없습니다. 종전처럼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모 른 척해서는 안 됩니다. 물방울은 땅에 떨어지면 깨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백화 산장의 노예가 되시렵니까?" 군호들 틈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맞소이다. 소대협께선 무림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우리라고 가만 있을 수 없소이다. 우리가 심목풍의 적수가 아니더라도 마땅히 칼을 백화산장으로 날려야 됩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군호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외쳐댔다. "복수를 합시다!" "심목풍을 쳐 없앱시다!" "무림 명등 소대협 만세!" "소대협 만세." 소대협 만세로 이어지는 군호들의 외침 소리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장내는 삽시간에 열기 로 가득찼다. 한동안 그대로 군호들을 바라보던 무위도장이 말을 계속했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저와 소대협의 몇몇 친구는 삼 일 후에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였소. 그래 서 여러분들의 의향을 물으려 하는 것이오. 목숨을 내걸고 백화산장에 대항할 분은 이곳에서 삼 일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곳은 삼 일 동안 마음대로 열어 놓겠으니 여러분들의 의사대로 결정하 십시오." 이 때 무당의 제자 하나가 다급하게 다가와 무위도장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무위도장의 안색이 확 변했다. 162. 거짓 장례, 거짓 조문 무위도장은 제자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은 모두 소대협에게 제사를 올린 사람들이며 제가 여러분을 이곳으로 즉시 모이라고 한 것은 여러분이 모두 소대협을 깊이 존경하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오. 지금 개방에 계신 여러분 들이 이곳에 제사를 모시려 왔으니 여러분은 잠시 천막 속에서 휴식하시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 근처에서 거닐며 소일해도 좋습니다. 삼 일 후 정오에 소대협의 복수를 다짐하는 대회가 열리니 참가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이오. 그리고 이 대회에 참석치 않은 사람도 그 때 모이면 그 뜻을 표시한 것으로 치겠습니다." 무위도장의 말이 끝나자 영당 안에 모였던 군호들은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군호들이 몰려 나가자 영당 안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는데 아직도 한쪽 구석에 열 명쯤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소영이 재빨리 그 쪽을 살피니 백리빙도 그 중에 남아 끼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즉시 그곳으로 갔다. 이 때 손불사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그들에게 포권의 예를 올렸다. 그는 무림에서 덕행이 높고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그들에게 포권의 예를 올리니 모두들 당황하여 급히 몸을 숙여 큰절을 하며 말했다. "노선배께서 어찌 저희들에게 이처럼 큰절을 하십니까? 실로 감당할 길이 없소이다." 손불사는 그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여러분이 이 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은 소대협을 애석하게 여기기 때문인 줄 아오. 그러나 심목풍이 바로 이 근처에 무림고수를 데리고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막을 준비를 해야겠 소이다. 여러분, 영당의 서쪽으로 모여서 영당을 지키며 다가올 변고에 대비를 하십시오." 그들은 일제히 그 말에 응하며 영당의 서쪽으로 모였다. 소영과 백리빙도 그 중에 끼어 있었다. 이 때 사마건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개방의 신방주께서 친히 왕림하셨소." 소영은 눈을 돌려 입구를 바라보았다. 오십쯤 되어 보이는 바싹 마른 중년인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 사람의 뒤에는 육십 안팎의 노인이 네 사람 따라 오고 있었다. 그들은 미투리를 신고 회색 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으며 앞가슴에는 한 송이 조화를 꽂고 있었다. 소영은 내심 중얼거렸다. '맨 앞에 마른 사람이 개방의 신방주인 것 같다.' 신방주는 엄숙한 표정으로 소영의 영전에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정중히 몸을 굽히고 큰절을 하 더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때 휘장 안에서 별안간 애절한 주악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향은 무척 처량하여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뒤따라 온 네 명의 노인들은 신방주의 뒤로 약 너덧 자 가량 떨어진 곳에 한 줄로 서 있었다. 신방주가 무릎을 꿇자 수행해 온 네 사람의 노인도 모두 따라서 땅바닥에 꿇어 앞드렸다. 그들이 제사를 마치자 은은히 들려오던 주악소리도 뚝 그쳤다. 손불사는 큰 걸음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방주,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나?" 신방주는 공손히 손불사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사숙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소생은 벌써부터 사숙께서 다시 강호에 나오셨다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사숙을 뵈옵고자 했으나 다만 방중의 사고로 인해서 뵈옵지 못했습니 다." 손불사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 지금은 번거로운 일이 모두 끝났나?" 신방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의 덕분으로 조카는 이미 배반한 놈들을 잡았으며, 방의 규칙에 따라 처치해 버렸습니다." 소영은 내심 고개를 끄덕거렸다. '개방 속에도 간신들이 있었구나. 이제 보니 강호에 풍운이 이처럼 긴급한 이 시기에 중요 인물 들이 시종 보이지 않은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손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나도 마침 자네를 찾던 중이니 우리 가서 이야기 좀 하세." 신방주는 곧 손불사의 뒤를 따라 네 사람의 수행원을 데리고 영위 뒤로 들어갔다. '개방 방주가 이번에 친히 이곳까지 조문을 온 것을 보니 아마 개방의 고수들을 집중시켜 심목 풍과 격전을 준비할 모양이구나.' 이 때 다시 사마건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림사의 고승 세 분이 소대협의 영위에 애도의 뜻을 표하러 오셨소." 소영은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관문을 지날 때 심목풍의 곁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혹시 그들은 정사를 분간 하지 않고 각자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흰 천을 몸에 결친 승려 셋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한 사람 은 육십이 넘은 노승이었고 양쪽에 있는 두 승려는 모두 삼십 안팎으로 보였다. 세 사람은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 그들은 소영의 영전에 다가서자, 합장을 하고 불호를 외우더니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휘장 뒤에서 다시 애도의 주악이 울려 나왔다. 소영이 가만히 귀를 기울여 그 악기의 소리를 들으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 소리는 마치 퉁소 소리와 같았고 비파의 음과도 같았으나 도무지 누가 그것을 연주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승려 셋은 애절한 주악에 맞추어 정중히 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일어서자 주악소리도 따라 그쳤다. 무위도장은 큰 걸음으로 다가가며 환영하였다. 그는 합장을 하며 웃는 낯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세 분께서는 뒤로 들어오셔서 제식(祭食)을 드십시오." 그러자 가장 나이 많은 노승이 애조띤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빈승은 소시주의 대명을 오래 전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었지요. 따라서 마음 속에 깊이 경모하 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세상을 뜨시니… 불초는 그 분을 기어코 한 번도 뵈옵지 못하고 말 았소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무위도장의 뒤를 따라 영위 뒤로 들어갔다. '그 세 분의 승려들은 소림사 안에서 어떠한 신분일까? 무위도장은 그들과 잘 아는 사이인가 보 군. 그러나 사마건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 혹시 일부러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게 아닐까?' 백리빙은 천천이 남들이 눈치채지 않게 몸을 움직여 소영의 곁에 바싹 다가왔다. 이 때 또다시 사마건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명객께서 소대협의 영위를 조상하러 오셨소." 그 말을 듣자 소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것 참 이상이다. 조상하러 온 사람이 어찌하여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을까? 도대체 어떤 인 물인가?' 백리빙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오는 사람마다 유심히 주의해서 바라보았다. 들어온 사람은 청의를 입었으며 또한 흰 헝겊으로 만든 상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천천 히 영당 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소영은 흠칫 놀랐다. 그는 바로 옥소랑군이 아닌가! 옥소랑군은 비록 강호에 날마다 나타났으나 그의 무공이 너무도 고강하여 보통 무림의 인물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는 인피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으나 진짜 얼굴로 나타났더라도 그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 물었다. 옥소랑군은 소영의 영위 앞에 다가서자, 꿇어 앉지도 않았고 예의도 차리지 않았다. 다만 영위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더니 중얼거리는 것이 었다. "소영, 소영 너는 정말 죽었느냐? 아니면 사망을 가장했느냐?" 영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옥소랑군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옥소랑군은 곁에 사람이 있 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이 때 손불사, 무위도장 등은 모두 영위 뒤에 있었으나 그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옥소랑 군의 거동을 간섭하지도 않았다. 한동안 혼자서 중얼거리던 옥소랑군은 갑자기 주위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이 영당의 임자는 누구요?" 영위 뒤에서 흰 수염을 가볍게 나부끼며 초곤산이 걸어 나왔다. "젊은 친구, 무슨 일로 그러시오?" 옥소랑군은 초곤산을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서는 누구십니까?" "이 몸은 초곤산이라 부르오." 옥소랑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명은 많이 들었소이다." 초곤산은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겸손한 말씀이오. 그런데 친구는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소." "초노인장께서는 이 영당의 주인입니까?" "그렇소이다. 바로 제가 담당이올시다." "마침 잘 됐군. 제가 한가지 무리한 부탁을 하려고 하는데 노인장께서 들어 주실는지 모르겠군 요?" "무리한 청이라면 생각컨대 좋은 일은 아닐 것 같구려. 친구가 먼저 이야기해 보시오. 들을 수 있는 부탁인가 어디 봅시다." 옥소랑군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저는 소영의 시체를 직접 보고 싶습니다. 승낙하여 주시겠습니까?" 초곤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것은… 그것은 좀…" 그러자 옥소랑군은 곧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았소이다." 초곤산이 급히 답했다. "친구, 어서 말씀해 보시오. 상세히 말씀해 주시면 더욱 좋겠소이다." 옥소랑군은 천천히 말했다. "저는 소영의 시체를 자세히 살펴 보고 싶소. 만약 그가 정말로 죽었다면 나는 힘을 다하여 복 수를 도와 드리겠소. 그러나 혹 그의 시체가 아니라면…" 초곤산이 다그쳐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소?" 옥소랑군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 영당을 불질러 버리겠소." 초곤산은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친구, 그대의 이름은?" 옥소랑군은 차갑게 거절했다. "나의 이름은 밝힐 수 없소. 노인장께서는 이해해 주시오." 초곤산은 씁쓸하게 웃었다. "친구의 인사는 어느 때는 점잖고 어느 때는 벌컥 화를 내고 불평하니 도대체 친구는 적인지 우 리 편인지 알 수가 없군." 사실상 옥소랑군의 지금 심정은 초곤산의 말대로 매우 모순된 점이 많았다. 옥소랑군의 얼굴은 싸늘하게 변하여 냉랭히 말했다. "노인장, 만일 당신의 담당시간에 번거로운 일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사실대로 나의 묻는 말에 대답을 해주시오." 초곤산은 결심을 한 듯 말했다. "좋소. 나는 사실대로 대답하겠소. 소대협의 시체는 이곳에 없소이다." 옥소랑군의 얼굴이 싹 변했다. "그럼 어째서 죽었다고 이렇게 장사를 지내고 있소?" 초곤산이 천천히 말했다. "그 때 심목풍이 그를 원시림 속에 유인하여 사방에 불을 질렀소. 순식간에 암석과 산천이 모두 재로 화해 버렸는데 어찌 그가 살아날 수 있겠소?" 옥소랑군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고 그가 꼭 죽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 않소?" 초곤산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천하 무림 동도들이 한결같이 소대협의 생환을 기다렸지만 그는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소이다." 옥소랑군이 재차 물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죽었다면 어찌 그의 시체가 보이지 않소?" 초곤산이 되물었다. "하늘을 찌를 듯했던 맹렬한 불길에 모든 암석이 녹아 버렸는데 사람의 시체가 남아 있을 것 같 소?" 옥소랑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불쑥 내뱉었다. "그럼 노인장께서는 소영이 죽었다고 믿으시오?" 초곤산은 숙연히 대답했다. "당연히 살아날 수 없으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지." 옥소랑군은 갑자기 사나운 표정으로 싸늘하게 대답했다. "만약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초곤산은 곧 대꾸했다. "그야 물론 천하무림의 경사이지." 그러자 옥소랑군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흥! 오히려 천하대란의 근원이 된단 말이오." 초곤산은 그를 쏘아 보며 말했다. "나는 여태껏 살아오는 동안 남북을 두루 돌아다니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 보았으 나…" 옥소랑군이 곧 말을 받아 물었다. "나 같은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는 말이오?" 초곤산도 지지 않고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은 보지도 못했거니와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아직 보지 못했소." 옥소랑군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은 늙었소. 늙었기 때문에 머리가 신통치 않지." 초곤산은 화를 벌컥 내며 호통을 쳤다. "젊은이, 나는 소대협의 영당 앞에서 자네와 싸우기를 원치 않네!" 옥소랑군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총명한 생각이오." 그는 그렇게 비웃더니 별안간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는 어떤 사람을 찾고 있소. 노인장께서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의 태도는 금방 이랬다저랬다 하였으므로 많은 경험을 쌓으며 살아온 초곤산은 도저히 그의 빛과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을 찾고 있소?" 그러자 옥소랑군은 급히 물었다. "혹시 노인장께서는 악소채라고 하는 낭자를 알고 있소?" 초곤산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소." 옥소랑군은 눈을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그럼 그 악소채 낭자는 지금 이곳에 있소?" 초곤산이 천천히 대답했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그 악소채 낭자가 소영의 죽음을 들었다면 즉시 이곳으로 왔을 것이라는 것뿐이오." 옥소랑군은 다시 쌀쌀하게 말했다. "내가 묻는 것은 지금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지 없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오." 초곤산은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아직 이곳에 오지 않았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요? 그럼 그녀는 이곳에 꼭 올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초곤산은 슬쩍 말을 피했다. "그야 물론. 그녀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옥소랑군은 벽력같이 소리쳤다. "당신은 늙어서 도저히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구려." 초곤산도 화를 내며 대꾸했다. "내 말은 분명하여 모든 사람들이 잘 알아 듣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만약 영당의 일을 상관하는 사람이 또 따로 있다면 노인장은 제발 뒤에서 쉬시고 그 사람을 내 보내시오." "당신이 만약 조상하러 왔다면 어서 영위에 분향하고, 트집을 잡으러 왔다면 밖으로 나가서 나 와 결판을 냅시다." 군중들 틈에 끼어 묵묵히 듣고 있던 소영은 깜짝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옥소랑군은 무공이 심후하며 퉁소의 수법 또한 악랄하다. 그런데 어찌 초곤산이 그를 상대할 수 있으랴. 만약 정말로 손을 쓴다면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옥소랑군은 고개를 돌려 초곤산을 힐끗 보더니 냉랭히 말했다. "당신을 상대하는 데는 무기가 필요 없지." 그는 초곤산을 바라보며 연이어 말했다. "소영의 생사가 확정되기 전에는 나는 당신들을 적인지 친구인지 결정할 수 없소." 초곤산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다. "자네가 일을 귀찮게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정말 늙은 탓인지 우리는 서로 말을 이해할 수 없구나." 옥소랑군은 딴청을 부렸다. "지금 이곳에 두 사람은 있겠군… 그렇지 않다면 그네들도 심목풍에 의해서 불타 죽었는지…" 초곤산이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오?" 옥소랑군은 잘라 말했다. "중주이고!" 초곤산은 곧 대답했다. "맞소. 그 사람들은 이곳에 있소." 그러자 옥소랑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노인장이 중주이고를 좀 나오라고 해서 나와 만나게 해주시오. 당신과는 더 이상 이야기 할 수가 없군요." 초곤산이 말을 더하려고 했을 때 상팔이 영위 뒤에서 나왔다. 그는 포권을 하고 읍을 하면서 말했다. "초형, 뒤에 가서 쉬시오. 이분이 나를 만나 보시겠다니 나도 그와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소이다." 초곤산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오늘 있던 일은 평생 처음 당하는 일이오." 그는 말을 하며 영위 뒤로 들어갔다. 옥소랑군은 다시는 초곤산을 거들떠보지 않고 눈길을 상팔 에게 돌리고 말했다. "당신은 나를 알겠소?" 상팔은 그를 보며 대답했다. "어디서 본 것 같소이다." "우리는 전에 만난 적이 있소이다. 아마 그 때 나는 가면을 썼을 것이오." "지금은?" 옥소랑군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진짜 얼굴이오." 상팔은 천천히 옥소랑군의 얼굴을 뜯어 보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만약 나의 추측이 틀림 없다면 당신은 옥소랑군일 것이오." 옥소랑군은 싸늘하게 웃으며 상팔에게 말했다. "맞았소이다. 바로 나올시다." 상팔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장형은 무슨 일로 이 상팔을 찾으셨소?" 옥소랑군은 기침을 한 번 하며 진지하게 대응하였다. "당신에게 한 가지 묻겠소이다." 옥소랑군은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소영은 참으로 죽은 것이오. 아니면 죽지 않은 것이오?" 상팔도 엄숙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곳 십 리 내 사람들은 전부 다 흰 옷으로 상복을 입었으며 무림에 있는 동지들은 다같이 그 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있소이다. 우리가 이렇게 영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있는 일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는데 당신이 보기에 진정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죽은 것을 가장하고 있는지 어느 쪽으 로 보이오?" 옥소랑군은 상팔의 이 말을 듣자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그는 정말로 죽은 모양이구려." 상팔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우리는 이렇게 제사를 지내고 있으나 속으로는 그가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터이오." 옥소랑군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 불은 암석까지도 녹였다는데 그가 어찌 살 수 있겠소." 상팔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침울하게 말했다. "우리 무림 동토들은 행운이 있기를 바랄 뿐이오. 그리고 그는 길인천상이니 그 무서운 재난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오." 옥소랑군이 다시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막 입을 열었을 때 갑 자기 사마건이 황급히 달려왔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심목풍이 조상하러 왔소이다." 그의 이 한마디는 청천의 벽력처럼 영당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하였다. 옥소랑군은 앙천대소를 했다. 그는 혼자 좋아서 중얼거렸다. "마침 잘왔다. 잘왔어!" 이 말을 들은 상팔이 싸늘하게 물어 보았다. "당신은 심목풍과 여기서 만나자고 약속하셨소?" 옥소랑군은 곧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부인했다. "아니오, 우연히 만난 것뿐이외다." 상팔이 추궁했다. "그렇다면 어찌 그리 반가와하며 뭐가 그리 잘 됐다는 것이오?" 옥소랑군은 상팔을 쏘아보며 냉랭히 대답했다. "나는 직접 심목풍의 입에서 소영의 죽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오." 이 때 영위 뒤에 드리워진 휘장이 움직이더니 손불사, 무위도장, 그리고 긴 수염이 앞가슴까지 점잖게 늘어져 있고 몸에 상복을 걸친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 나왔다. 소영은 군중 틈에서 그 긴 수염의 사람을 보자 무척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도 역시 왔구나. 이번에 이렇게 영당을 세우고 초혼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는 일은 필시 그의 안배일 것이다. 아마 내 추측이 틀림없을 게다.' 소영이 반가움을 금치 못한 그 긴 수염의 소유자는 바로 선기서여의 우문한도였던 것이다. 손불 사와 무위도장은 상팔의 입을 통하여 소영이 우문한도를 매우 존경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러므로 그들은 우문한도를 매우 정중히 대우했으며 그의 인격을 존중하고 있었다. 무위도장은 우문한도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문형께서 결정하십시오." 우문한도는 사마건에게 눈길을 돌리고 천천히 물었다. "사마형, 그 심목풍은 몇 명의 부하를 데리고 왔습니까?" "주조룡과 금화부인 그리고 남색 옷을 입은 젊은이, 이렇게 모두 네 사람입니다." 우문한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했다. "그들을 들여 보내시오. 그러나 상복으로 바꿔 입혀야 합니다. 그들이 만약 바꾸어 입지 않겠다 고 우긴다면 우리도 전력을 다하여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사마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그렇게 전하지요." 우문한도는 다시 무위도장에게 눈길을 돌렸다. "도형께서는 수고스럽지만 그들을 경계하라고 전면적으로 명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나 절대로 저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함부로 출수하지 말라고도 아울러 분부해 주십시오." 무위도장은 대답을 하고 곧 영위 뒤로 사라졌다. 우문한도는 잠시 옥소랑군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물었다. "장형께서는 심목풍에게 소대협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하시오?" 그러자 옥소랑군은 냉랭히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저는 그링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소이다." 우문한도가 묘한 질문을 했다. "소대협의 생사가 판명되기 전에는 당신과 우리들의 사이는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오. 그렇지 요?" 옥소랑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분명히 말했다. "옳소! 바로 그렇소이다." 우문한도는 재빨리 말했다. "그러시다면 장형은 영당 옆에 잠깐만 앉으시오. 심목풍이 소대협의 영위에 제사를 지낸 다음에 정식으로 소대협의 생사문제를 질문하시는 게 어떻소?" 옥소랑군은 코웃음치며 냉랭하게 말했다. "심목풍은 마음속 깊이 소영을 증오하고 있는데 그의 영위에 제사를 올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우문한도는 옥소랑군을 비웃는 듯이 입가의 냉소를 띠고 점잖게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심목풍은 일개 효웅이므로 당신 장형같이 그렇게 예의를 못 차리는 몰상식한 사람은 아닐 것이외다." 옥소랑군은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격분을 누를 길 없어 발작하려고 했으나 억지로 그것을 누 르며 입가의 냉소를 띠었다. 이 때 우문한도와 손불사는 다시 영위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교대하여 무위도장이 영위에서 걸 어 나왔다. 이 때 마침 사마건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화산장의 대장주 심목풍께서 영당에 왕림하셨소이다." 무위도장이 싸늘하게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전하시오." 무위도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심목풍이 천천히 들어왔다. 소영은 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심목풍은 왼쪽에 주조룡을 거느리고 오른쪽에는 금화 부인을 대동하고 있었으며 그의 뒤를 따르는 남색 옷을 걸친 젊은이는 바로 자기를 사지로 유인 한 남옥당이었다. 천천히 걸어 들어온 심목풍은 재빨리 눈길을 돌려 우선 영당을 슬쩍 살폈다. 그리고 그는 주위 에 고수들이 없는 것을 보자 그제서야 눈길을 무위도장에게 돌리고 서서히 입을 열었다. "도장, 그동안 무고하셨소?" 심목풍이 이렇게 묻자 무위도장은 냉소를 하고 싸늘하게 말했다. "빈도는 몸조심 잘하고 있습니다. 심대장주에게 묻는 수고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심목풍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장, 빨리도 오셨군요. 영당도 우아하고 훌륭하게 꾸몄고…" 무위도장은 정색을 하고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모여 동심협력하여 하룻저녁에 이 영당을 만들었소이다. 장사 고을의 흰 비단은 전부 써서 이곳 십 리 안팎의 사람들은 모두 소복차림을 하고 있소이다. 속담에 많은 사 람의 뜻을 합치면 성도 쌓을 수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소이다." 심목풍은 담담히 말했다. "이 기풍은 참으로 휘황하군요. 아무리 도장께서 다재다능하더라도 아마 이처럼 넓은 기풍은 없 을 것이외다." 무위도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심대장주의 말씀은 무슨 뜻이오. 빈도가 이해가 가지 않소이다." 심목풍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도장께서는 반드시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무위도장은 냉연히 웃으며 잘라 말했다. "빈도는 모르겠소이다." 심목풍은 앙천대소하며 말했다. "제가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잠시 이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오. 우리는 우선 소영의 영위에 제사 를 올린 다음 이야기를 나누어도 늦지 않을 것이외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천천히 소영의 영당 앞으로 다가가서 정중히 읍을 한 다음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했다. 소영은 심목풍이 자기의 영위에 이처럼 큰절을 하는 것을 보자 몹시 뜻밖이라 속으로 어리둥절 했다. 심목풍이 절을 하자 동시에 금화부인과 주조룡 그리고 남옥당 등도 모두 뒤따라 절을 했다. 백리빙은 유심히 금화부인을 주시했다. 절을 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 는 것이 보였다. 심목풍은 절을 한 다음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그는 소영의 영당을 바라보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나보다 오십 년이나 후에 태어났지만 이 형의 생각으론 아무리 꼽아 봐도 당대의 영웅 은 동생과 나뿐일세, 동생이 만약 나와 손을 잡았다면 지금의 무림은 전부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 왔을 것이네. 한 마디 명령이면 강호는 진동될 것이었네, 그렇게 되면 천하의 영웅들은 전부 우리 의 명령에 복종했을 것이며 일개 무림의 맹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정의 임금을 죽인다 해도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었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길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동생은 너무나 젊었고 철이 없었네. 목숨을 유지하고 싶은 일반 무림 사람 들이 동생에게 대협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그 대협이라는 두 마디가 동생을 죽였으며, 자네의 공명을 박탈했네. 그리고 나중에 큰 불에 타 죽는 결과가 발생했네 그려. 동생, 생각해 보게나, 그 러한 죽음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무위도장이 냉랭히 그의 말을 받아 말했다. "소런 말씀 마시오. 그는 청사에 이름을 남기고 죽었소. 천하 무림에 있는 모든 정의의 인사들이 한결같이 그의 죽음을 비통하게 여겼소. 자고로 무림의 많은 영웅, 호걸 중 어느 누가 소영과 같 이 이처럼 영광 속에 죽은 사람이 있었소이까? 그리고 그의 죽음은 마치 몸을 재촉하는 단비처럼 이미 천하의 영웅들을 깨우쳐 주었소이다. 당신의 음모는 성취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당신의 소원 이 성취된다 해도 욕된 이름만 후세에 남길 것이오." 심목풍은 냉소를 쳤다. "도장께선 저에게 너무 무례하시오. 이것이 만일 오전 전에 있었다면 나 심목풍은 벌써 당신의 목숨을 빼앗았을 것이오." 이렇게 말하고 무위도장을 쏘아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소이다." 무위도장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빈도는 심대장주의 적수가 못 되오. 그러나 당신이 손을 쓰는 것을 원한다면 빈도는 서슴지 않 고 상대해 드리겠소." 심목풍은 크게 웃었다. 그리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쏘아 부쳤다. "저는 도장의 그 용기에 깊이 감탄했소이다." 무위도장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 "심목풍은 이미 소대협의 영위에 제사를 올렸으니 만약에 다른 일이 없다면 이제 가도 좋소이 다." 심목풍이 눈길을 돌려 금화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아직도 눈물을 흘리며 멍하니 소 영의 영위만 바라보고 넋을 잃은 사람같이 서 있었다. 그녀의 애통함은 분명 내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 때 남옥당이 냉랭히 무위도장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바로 무당파의 장문인이오?" 무위도장도 역시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장문인이오." 남옥당은 슬며시 시비를 걸었다. "강호에서 당신네 무당파의 검법은 매우 신묘하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전부 사람 을 속이는 말 같구려?" 무위도장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쏘아 부쳤다. "빈도는 당신을 본 기억이 있지만 누군지 머리에 남아 있지는 않소." 이 말은 은근히 당신 같은 것은 기억에 없으며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남옥당이 분연히 눈썹을 치켜 올리며 거칠게 말했다. "나는 남옥당이올시다. 만약에 나를 믿지 않겠다면 당장에 시험을 해도 좋소이다. 나는 백초 안 에 도장을 굴복시킬 자신이 있소." 심목풍은 손을 들어 남옥당을 저지했다. 그리고 무위도장을 향해 말했다. "저는 도장과 자세히 이야기를 하고 싶소이다." 곧 무위도장이 물었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소?" 심목풍이 천천히 말했다. "강호의 대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소이다." 무위도장이 즉시 응답했다. "좋소이다. 어서 말씀해 보시오. 빈도는 경청하겠소이다." 그러자 심목풍은 주위를 한 번 훑어보고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아마 도장은 믿지 않을 것이오. 지금의 강호는 이미 내가 십분의 칠을 장악하고 있소. 내가 명 령을 내리기만 한다면 아홉 개의 큰 문파도 하루아침에 이 심목풍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오." 무위도장이 냉랭히 말을 받았다. "빈도가 알기로는 무림의 많은 동지들이 소대협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였소이다. 그 중에는 구대문파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소이다." 심목풍이 흥! 하고 코웃음쳤다. "그것이 바로 당신들이 이곳에 영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목적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 소. 그러나 당신들은 또 어긋났소이다." "빈도는 뭐가 어긋났는지 도무지 모르겠소." "당신들이 이곳에 모두 모인 것은 마침 나에게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오. 나는 백화산장의 고수들을 전부 풀어 이곳을 포위했소이다. 만약 내가 당신네들을 설복하지 못할 경우에는 불가불 당신들을 전부 이곳에서 죽여야겠소이다." 무위도장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가 이곳에 영당을 세우기 전에 이미 우리는 준비가 되었소. 그러니 심대장주의 마음대로 될 것인지 두고 보아야 될 것이오." 심목풍이 다시 그의 말을 받아 입을 열려 했을 때 갑자기 냉랭한 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만약에 소영이 죽지 않았다면 심대장주는 아마 이렇듯 강렬한 신심(信心)은 없었을 것이오." 흠칫 놀란 심목풍이 소리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옥당은 옥소랑군이 이곳에 있는 줄은 미처 생각을 못했기에 그만 놀라서 앗! 소리를 질렀다. 심목풍이 재빨리 눈치채고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저 사람을 아는가?" 남옥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다시 심목풍은 다그쳐 물었다. "저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바로 백운산장의 작은 장주이며 소왕장방의 손자올시다." 옥소랑군은 그에게 호통을 쳤다. "닥쳐라! 가조(家祖)는 너와 어떠한 사이인지 잊었느냐?" 남옥당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우리 사이는 이미 오래 전에 끊어졌소이다." 심목풍은 손을 저어 남옥당을 저지했다. 그리고 점잖은 음성으로 옥소랑군에게 말했다. "백운산장의 대명은 오래 전부터 들어 온 바이오. 오늘 이렇게 소장주를 만나게 되니 무상의 기 쁨으로 생각하오." 옥소랑군은 쌀쌀하게 대답했다. "겸손할 필요 없습니다. 저는 심대장주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사실대로 말해주기 바 라오." 심목풍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소장주의 말투는 과연 사람을 압박하는군. 만약에 내가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렇게 말한 심목풍은 옥소랑군이 미처 입을 열기 전에 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역시 그 말을 듣고 싶소이다." 옥소랑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문제는 간단하오. 그 소영은 참으로 죽었소?" 그러자 심목풍이 물었다. "정말로 죽었으면 어떻고 가짜로 죽었으면 또 어떻소." 옥소랑군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관계가 매우 큽니다. 나와 심대장주에게는 생사에 관계되는 일이지요." 심목풍은 가볍게 웃어 넘겼다. "몹시 엄중하군. 소장주와 같은 그런 나이에 어찌 그리 가볍게 죽는다는 말을 하오?" 옥소랑군은 날카로운 소리로 호통을 쳤다. "나는 지금 소영이 정말 죽었느냐 그것을 물었소이다." 심목풍은 불쾌한 듯이 잠시 눈살을 찌푸렸으나 곧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정말 죽었소이다." 163. 소복에 감춘 복수심 옥소랑군의 표정이 갑자기 온화해졌으며 그의 눈은 부지중에 빛났다. "그게 정말이오?" 심목풍은 옥소랑군의 표정과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는 것은 보았으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소! 소영은 정말 죽었소. 그런데 왜 그러시오?" "지금 소영의 시체는 어디 있소?" 심목풍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시체는 불에 타 버렸소이다." 이 말에 옥소랑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심대장주께서 그런 말을 하시니 틀림이 없겠지요?' "확실합니다." 심목풍은 이렇게 대답하고 잠시 주저하더니 물었다. "소장주는 내게 소영의 원수라도 갚으려는 것이오?" 옥소랑군은 천천히 대답했다. "소영이 만약 정말 죽었다면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소이다. 그러나 소영의 시체를 보기 전에는 아무래도 안심할 수가 없군요." 이 때 금화부인이 몸을 일으키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이가 그렇듯 젊은데 어째서 말을 똑똑하게 하지 못하오? 당신은 도대체 소영이 죽었 기를 원하는 것이오, 아니면 그가 살아 있길 바라는 것이오?" 옥소랑군은 금화부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나 성숙한 여인의 자태는 뭇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당연히 그가 죽었기를 원하오." 그의 대답에 금화부인도 흠칫 놀랐을 뿐 아니라 옆에서 듣고 있던 심목풍까지도 어리둥절하고 말했다. '이 자는 무슨 꿍꿍이 속을 갖고 있는지 점점 더 모르겠군.' 금화부인은 아름다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물을 필요 없어요. 그는 이미 불에 타 죽었으니까요." 옥소랑군은 갑자기 크게 웃어젖혔다. 그의 웃음소리는 마치 곰이 울부짖는 듯 영당 안을 진동시 켰다. 군중들 틈에 끼어서 이 광정을 바라보고 있던 백리빙은 그 모습이 괘씸도 하고 고소하기도 했 다. '흥! 만약 네가 우리 오빠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더군다나 이곳에 함께 있다는 것을 알면 틀 림없이 기절초풍할 것이다. 지금은 마음껏 웃어라.' 심목풍은 험한 장면을 많이 겪어 온 사람이었다. 그는 냉정한 인물이라 실정을 다 파악하기 전 에는 절대 함부로 발작하지 않았다. 그는 냉랭히 자기 옆에 서 있는 옥소랑군의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랐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 어 물었다. "소장주는 무엇이 그리 우습소?" 옥소랑군은 아직도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대답했다. "내가 웃는 것은 그 소영이 정말 죽었으니 아마 다시는 소영을 가장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 각하고 그랬소." 이렇게 말한 그는 남옥당을 싸늘한 눈초리로 한 번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경멸이 담뿍 서 려 있었다. 남옥당이 소영으로 가장하고 나타났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들은 악소채가 그의 곁에서 떠난 것이 다. 실제로 소영이 나타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래서 옥소랑군은 그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것 을 생각할 때마다 울화가 치밀었다. 이 때 남옥당이 냉랭하게 말했다. "장형, 너무 기뻐하지 마시오. 소영은 죽었지만 나는 아직껏 이렇게 살아 있으니 말이오." "만약에 죽기를 원한다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 남옥당은 벌컥 화를 냈다. "다른 사람들은 장가소법을 무서워해도 나는 무서워하지 않소." 영당에 있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무슨 영 문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소영만이 그들이 벌이는 싸움의 내막을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친척간이면서도 악소채를 사이에 두고 서로 질투하여 양보하지 않았다. 단지 소영 이 이해가 가지 않근 것은 남옥당이 항상 옥소랑군을 무서워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때 옥소랑군이 천천히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냉랭히 말했다. "우리는 이 소영의 영당 앞에서 백 초를 겨루어 보자. 그 백 초 안에 나는 너의 생명을 없애 버 리겠다." 남옥당은 옥소랑군의 무공이 자기보다 높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천천히 걸어 나오 면서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백 초를 겨루어 보자." 그는 옥소랑군을 노하게 만들어 그가 앞뒤 없이 대들어 심목풍과 금화부인이 끼어들 수밖에 없 도록 하여 그를 없애 버리려는 속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는 연적이 하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옥소랑군은 쉼게 출수 하지 않았으며 뒤로 물러서서 자기에게만 도전해 오는 것이었다. 군중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남옥당은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나서야만 되었다. 그는 은근히 심목풍과 금화부인이 나서서 저지해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심목풍과 금화부인은 아 랑곳하지 않았다. 남옥당은 할 수 없이 옥소랑군 앞으로 다가가 장검을 빼어 들었다. 무위도장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곳은 두 분께서 싸울 곳이 아니오!" 남옥당은 심목풍을 뒤돌아보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심목풍은 더 이상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남형, 조금만 참으시오. 후일에도 기회는 많소. 두 분의 은원은 아무 때고 청산할 수 있을 것이 오." 남옥당은 그 틈을 타서 재빨리 물러섰다. 칼을 거두고 천천히 심목풍의 곁으로 돌아왔다. 옥소랑군은 앙천대소하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몇 발짝 걸었을 때 갑자기 사마건이 급히 달 려오며 외쳤다. "여자 손님 한 분이 제사를 올리겠다고 합니다." 무위도장이 말했다. "그분에게 지금 심대장주께서 여기에 계시니 잠시 후에 들어오시라고 하오." 사마건이 곧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말했으나 그 여자손님은 심대장주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더욱 들어오시 겠다고 합니다." 옥소랑군은 영당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사마건의 말을 듣고 즉시 발을 멈추었다. 이 때 무위도 장이 물었다. "그 낭자의 성명이 어찌 되신다 했소?" 그러자 사마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낭자는 악씨 성을 가진 분입니다." 무위도장이 놀라며 물었다. "악소채 낭자가 아니오?" "그것까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무위도장이 곧 말했다. "그 분을 모시도록 하오." 사마건이 곧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청순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를 끼쳐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기품이 단아한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과연 악소채 누님이구나.' 반가움과 놀라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 악소채는 상복을 입고 흰 베를 머리에 두르고 흰 헝겊으 로 된 신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상복을 걸치고 있었으나 몸에 꼭 맞게 입어서 마치 그 옷차림으로 언제라도 싸움을 할 수 있게 준비한 듯하였으며 눈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두 줄기 눈빛은 마치 싸늘한 번개 같았 다. 그녀는 남옥당과 옥소랑군이 이곳에 함께 있을 줄은 미처 생각을 못했었는지, 그 두 사람을 보 자 흠칫하고 놀라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일이었으며 그녀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천천히 영당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영당 앞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또다시 상복에다 장검을 찬 두 소녀가 기척도 없이 영당 안으로 들어서더니 나란히 악소채의 뒤를 따랐다. 그녀들 은 바로 소문과 소홍이었다. 소홍은 항상 붉은 옷을 입기를 즐겼는데 지금은 횐 상복으로 바뀌었으니 더욱 청아하고 아름다 왔고 훨씬 성숙해 보였다. 악소채는 소영의 영위 앞에 무릎을 꿇더니 높은 소리로 애절하게 외쳤다. "소영, 땅 밑에서라도 눈을 뜨고 보세요. 제가 여기 이렇게 왔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모친의 유 언으로…" 이 때 갑자기 무거운, 그러나 의식적인 기침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머리를 돌려 그 쪽을 바라보니 기침을 한 사람은 바로 옥소랑군이었다. 옥소랑군은 악소채의 말을 듣자 즉시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제사를 빙자하여 가슴 에 간직하고 있는 말을 하려는 의도였다. 그녀가 소영의 아내라고 말을 한다면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전부 그 말을 믿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훗날 자기가 그녀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할 때 그녀는 그것을 핑계삼아 자기의 입을 막으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옥소랑군은 일부러 기침을 하며 그녀의 말을 끊었던 것이었다. 악소채는 옥소랑군을 힐끗 바라보더니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높은 소리로 외쳤다. "소첩의 모친은 유언에서 분명히 말했어요. 소첩의 종신을 당신에게 맡기라고…" 옥소랑군은 참다못해 큰소리로 말했다. "악낭자!" 악소채는 냉랭하게 물얼다. "무슨 일이시지요?" 옥소랑군은 그녀에게 천천히 말했다. "소영은 죽었는데 그대는 그의 원수를 어떻게 할 것이오?" 악소채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그의 원수는 기필코 갚아줘야 합니다." 옥소랑군은 슬쩍 이렇게 물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너무나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소." "상관 없어요. 만약 제가 그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는다 해도 땅 밑에서 그이를 만날 수 없으 니까…" 싸늘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바라본 옥소랑군은 담담히 웃었다. "싸우다 죽는다면 결국 그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너무나 억울한 죽음이 아닙니까?" "무슨 고견이라도 있으신가요?" "내 생각에 낭자께서 소영의 원수를 같겠다면 전력을 기울여 원수를 갚아야 하오. 수단을 가리 지 말고 결과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소채는 그의 말을 듣고 약간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다. 그는 별같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떻게?" "소영을 위해서 힘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은 전부 친구로 삼아야 하오. 지금 강호를 두고 말할 것 같으면 나는 낭자께서 제일 먼저 끌어 들여야 할 사람이모." 악소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맞아요. 만약 내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소영의 원수를 갚으려면 당신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적 당한 분이지요." 옥소랑군은 기분 좋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낭자, 과분한 칭찬이시오." 여기까지 말하더니 그는 갑자기 긴 한숨을 쉬며 말을 계속했다. "우리들 사이는 퍽 생소해진 것 같군요." 악소채는 옛정이 다시 생각난 듯했다. 그녀는 다시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당신의 병세는 완쾌되었어요?" 옥소랑군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 물었다. "낭자는 사부를 만나 보셨습니까?" 악소채는 고개를 저었다. "만나지 못했어요." "나의 이 병세도 다행히 우리 조모님의 의술에 따라 영단과 심리적인 요법으로 사지에서 생명을 건졌습니다." 악소채는 그가 심리적인 치료를 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옥소랑군은 계속 말했다. "나의 조모님이 말씀해 준 그 한 마디는 그의 소라단(小羅丹)을 복용한 것보다 더 효험이 있었 소. 그는 내가 무엇을 하던 간에 반드시 건강한 몸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소. 그는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나를 돕겠다는 것이오." 악소채는 자기의 사부님이 전력으로 그를 돕겠다는 말을 듣자 잠시 어리둥절했다. 옥소랑군은 한 번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무서워졌소?" "사부님이 나에게 준 은혜는 산과 같지만 그러나 그는 저의 어머님의 유언을 어기게 할 수는 없 어요." "그것은 나도 알고 있소. 조모님이 나를 도와준다고 해도 꼭 나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가 나에게 몸을 아끼라고 한 말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니오." 악소채가 말을 돌렸다. "장대협의 병세는 빨리 완쾌되었군요." 옥소랑군이 침울하게 말했다. "나의 심정이 편하다면야 우리 조모님에게 영단 기약(奇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악소채는 다시는 옥소항군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소영의 영당 앞에 몸을 숙였다. 그녀는 높은 소리로 말하지 않고 낮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사람들은 다만 그녀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을 뿐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심목풍은 옆에서 냉정을 유지하며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무위도장을 비롯하여 우문한도와 손불사 등은 사전에 대비책을 마련했으므로 그들 역시 표면으 로는 짐짓 냉정을 가장했다. 악소채가 분향을 끝낸 다음 심목풍은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심목풍올시다. 낭자께서 나를 만나시겠다고?" 악소채는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심목풍은 매우 영특한 인물이라서 악소채와 옥소랑군이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그들의 실정을 알 아차렸다. 또한 남옥당을 통해서 약간 그 실정을 들어 알고 있는 바였다. 그 남옥당이 자기에게 온 것도 바로 이 악소채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심목풍의 마음 속에도 벌써부터 악소채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계집애가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는가를 자세하게 살펴야 되겠구나. 사람을 이렇게 반하게 만들 수 있다니…' 그녀의 미모는 청아하고 단정하며 요염한 곳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그녀는 절세의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 악소채가 냉연히 말했다. "심목풍! 당신이 소영을 죽인 깃이 사실이오?" 시목풍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불을 질렀는데 그가 그 불에 타 죽은 것뿐이오." 악소채는 심목풍을 냉연히 쏘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죽인 것이나 불에 타서 죽게 한 것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심목풍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죽기는 똑같이 죽지만 죽는 기분이 좀 다르겠지." 딱소채가 날카롭게 쏘아 부쳤다. "사람을 죽였으면 인명을 배상해야 해요." 심목풍은 그녀의 말에 대해 비꼬는 대답을 했다. "옳습니다. 다만 내자 도대체 누구에게 배상을 해야 할지…" 그러자 악소채가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내가 그를 대신해서 당신에게 복수를 하고 말 테요." 심목풍은 악소채와 말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은 계속 그녀의 아래위를 유심히 훑어보고 있었 다. 그는 그녀가 어떻게 해서 남자들을 매혹시켰는가, 그리고 넋을 잃도록 반하게 할 수 있었는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옥소랑군과 남옥당은 무공의 절기를 지녔을 뿐 아니라 젊고도 영특 하였으며 또한 얼굴이 준수 하고 풍채가 좋았다. 그 두 청년은 일반 소녀들이 꿈에서나 그리는 멋있는 정랑의 상징이었던 것 이다. 그러나 악소채는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들로 하며금 짝사랑으로 고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심목풍은 유심히 살피면서 과연 악소채의 남다른 점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사람의 혼을 잡아 갈 듯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녀의 눈썹 사이에 숨어 있는 절세의 매력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화를 내도 남다른 풍정이 맺히는 것이었다. 심목풍은 한참 동안 악소채를 바라보자, 자기 역시 마음이 두근거리고 그녀에게 쏠리는 심정을 억제하기 어려움을 깨달았다. 그래서 악소채에게 대답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악소채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심목풍! 우리는 소대협의 영당 앞에서 마음 놓고 생사 결판을 짓도록 합시다." 심목풍의 눈에서는 괴상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는 큰소리로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낭자, 당신이 나를 이길 자신이 있으시오?" 악소채는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이길 자신은 없지만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결판을 내보겠소." 심목풍은 담담한 웃음을 얼굴에 띠고 말했다. "나는 한 가지 일이 통 이해가 가지 않소이다." "무슨 일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옆에서 보고 있는 소영의 심중은 몹시 초조했다. '악누님이 어찌 심목풍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정말로 싸우게 된다면 나는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지. 나도 누님을 도와 출수해야 되겠다.' 이 때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소영에게 무슨 매력이 있다고 낭자는 그에게 반하여 같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이 나의 의문이오." "그것은 나의 일이오.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심목풍은 고개를 돌려 남옥당을 힐끗 보더니 악소채를 향해 말했다. "이분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어요. 그러니 어쩌자는 것이오." 심목풍은 껄껄 웃으며, "좋습니다. 이 남형은 악낭자 때문에 백화산장에 들어 오게 되었소. 나를 위해서 일하는 대신에 조건이 한 가지 있었던 것이오." 하고 말하더니 잠시 멈추고 악소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악소채는 그의 말에 개의치 않 았다. 그녀는 코웃음치며 심목풍의 말을 상대하지 않고 차가운 태도로 무시해 버렸다. 심목풍은 악소채가 입을 떼지 않는 것을 보자 할 수 없이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이 남형과 나 사이에 맺은 조건은 그대 악낭자를 잡아서 그의 아내로 삼게 한다는 것이오." 악소채는 싸늘하게 코웃음치며 이번 역시 그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다시 심목풍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그의 조건을 받아 들였으니 낭자는 안심하셔도 될 것이오. 나의 적수가 못 된다 해 도 낭자를 결코 죽이지는 않을 것이니까." 악소채는 냉소를 치며 입을 열었다. "어서 병기를 꺼내시오." 심목풍은 자신있게 말했다. "낭자는 병기를 쓰시오. 나는 빈손으로 낭자를 상대해 드리겠소." 악소채는 허리춤에서 연검을 풀어 내어 막 출수하려고 했다. 그러자 옥소랑군이 별안간 큰소리 로 외쳤다. "악낭자, 손을 멈추시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먼저 그를 상대하겠소." 악소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 어찌 심목풍의 상대가 되겠어요?" 옥소랑군은 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를 이겨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소. 그렇다고 죽음도 내 마음대로 못한단 말입니까?" 악소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것은 또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과 소영은 그런 친분이 없지 않습니까?" 옥소랑군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낭자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나의 생사는 어떻게 되겠소? 내가 만약 낭자보다 먼저 죽게 되어 그대의 동정의 눈물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오."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악소채도 옥소랑군의 이 말을 듣자 감동되었다. 그녀는 긴 한숨과 함께 옥소랑군에게 말했다. "당신의 그 깊은 정은 저의 마음에 새겨 두겠어요. 그러나 소영 때문에 여기서 죽음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소영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대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오." 그는 옥소를 들어 심목풍을 가리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강호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심목풍의 무공이 높다고 하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소. 오늘 당 신의 솜씨를 견학할 수 있겠소? 어서 무기를 꺼내시기 바리오." 그의 말에 심목풍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당시는 소왕 장방의 후손이오?" 옥소랑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이다. 그 신분으로만도 심대장주와 싸울 자격이 있겠지요?" 심목풍은 천천히 말했다. "장형의 가문은 휘장하며 무림의 세도가라고 칭하여도 과언이 아니오. 장형이 나와 싸운다는 것 은 나로써 이해가 되지 않소이다." 옥소랑군이 말했다. "나의 생각과 행동을 어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겠소? 심대장주께서는 어서 무기를 꺼내시오. 당신의 무공을 견학코자 합니다." 그러나 심목풍은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있소. 장형은 악소채에게 무슨 마음을 품고 있소. 소영은 당신의 적 이며 방해물이오. 내가 당신을 대신하여 소영을 없애버렸는데 당신은 나에게 감사는커녕 오히려 싸움을 거는 것이오?" "이것은 소영과 상관이 없는 일이오. 나는 악낭자를 위해서 어쩔 수 없소." 심목풍은 빈정거리듯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만약에 소영이 아직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하겠소?" 그러자 옥소랑군은 흠칫 놀라더니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것은…" 그가 더듬거리는 것을 보자 심목풍은 더욱 싸늘하게 말했다. "만약에 내가 소영을 불에 타 죽게 하지 않았다면 그대와 소영은 같이 자리를 할 수 없는 원수 가 되었을 것이며 악소채도 당연히 소영을 도울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대와 악소채도 같이 있을 수 없는 원수가 될 것이오. 그러나 내가 대신 소영을 죽였는데 도리어 그대와 원수가 됐으니 어 떻게 된 판국인지 알 수가 없구려." 악소채는 심목풍이 이간질의 수단을 써서 옥소랑군을 설복하려고 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옥소랑군이 자기 때문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는 심목풍의 이간수단이 효과를 보아 옥소랑군이 이 일에 간섭하지 않게 되기를 바랬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옥소랑군에게 줄 것이 많다고 느끼고 있었으므로 만약 옥소랑군이 자기를 위해 싸우다 죽으면 그녀의 마음은 더욱 불안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말을 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옥소랑군은 이렇게 말했다. "대장주의 말이 맞습니다. 만약 소영이 이 세상에 살아 있다면 그와 나는 같이 있을 수 없는 원 수지요 그러나 그가 확실히 죽었다면 그는 또한 나의 친구요." 심목풍이 고개를 갸웃하고 그를 바라보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군. 그가 죽었다면 친구가 되다니…" 옥소랑군은 천천히 그에게 설명하듯이 말했다. "간단한 일이지요. 당신이 이 일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렸지요. 가령 당신이 새를 사랑한다면 새 의 등우리도 사랑하게 될 마음이 생길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소영을 다시 질투하고 미워할 필요 도 없소이다." 심목풍은 비로소 알아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을 하니 장형은 꼭 나와 겨루어 봐야 되겠군." "옳소이다. 겨루는 것뿐만 아니라 생사결판을 가려야 할 것이오." 심목풍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이르오." 옥소랑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왜요?" 심목풍이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소이다. 더 생각해 보시라고… 내일 오후에 싸워도 늦지는 않소." 옥소랑군의 눈길이 악소채의 얼굴을 스치면서 말했다. "악낭자의 의사는 어떻소?" 악소채는 머리를 끄덕였다. 옥소랑군이 심목풍을 돌아보며 물어보았다. "내일 어디서 만나겠소이까?" 심목풍이 곧 대답했다. "장형의 의사에 따르겠소. 당신이 좋은 곳으로 정하시오." 옥소랑군이 제안했다. "역시 이곳 소영의 영당 앞에서 만나 생사 결단을 내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그러자 심목풍이 냉연히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일 오후 나는 틀림없이 이곳으로 오겠소이다." 옥소랑군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내일 당신이 오기 전에 이곳에 와서 왕림하시는 것을 영접하겠소이다. " 그러자 심목풍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이만 작별하겠소." 그는 무위도장을 바라보며 합장하고 말했다. "도장께서는 미리 준비하십시오. 나는 내일 오후에 이곳에 와서 장형과 싸운 다음 당신들과도 상대를 하겠소이다." 무위도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빈도는 언제든지 당신의 가르침을 기다리겠소이다. 전송해 드리지 않은 것을 나무라지 마십시 오." "폐는 끼치지 않겠소이다." 그는 말을 마치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무위도장은 심목풍의 일행이 사라지는 것을 보자 비로소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악낭자, 장대협, 영당 뒤에 가서 쉬시오." 옥소랑군은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악소채의 거동만을 살피고 있었다. 악소채가 영당 뒤로 들어 가자 옥소랑군도 뒤따라 들어갔다. 백리빙은 암암리에 전음술로 소영에게 속삭였다. "오빠, 내가 보기에는 암만해도 악언니가 옥소랑군에게 속고 있는 것 같군요. 내가 가서 그녀에 게 오빠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소영은 흠칫 놀라여 급히 손을 내밀어 백리빙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함부로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가만히 두고 보아라." 두 사람은 바로 곁에 가까이 앉았으며 손을 내밀기만 하며 상대방을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다 른 사람의 의심을 받지 않고도 속삭일 수 있었다. 그러나 소영은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다. 우문한 도의 위인됨은 성격이 차분하고 세밀하므로 아마 영당의 주위에 사람을 잠복시켜 이곳에 모인 군 호들의 동정을 살피는지도 몰랐다. 소영은 백리빙의 왼쪽 손목을 잡자마자 곧 손을 놓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곳 영당 안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 밖으로 나가 보자."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백리빙 역시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인기척이 없는 천막을 찾아 들어갔다. 백리빙은 천막 속에 들어가자 주위를 살펴 보았다. 사람의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낮 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우리는 어떻게든지 영당 뒤로 들어가서 살펴 봐야지요." 소영의 눈에서 빛이 번뜩이며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백리빙은 소영이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고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속으로 크게 의아해 하며 다 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옥소랑군은 나쁜 마음을 먹고 있는 모양이며 악언니도 오빠가 정말로 죽은 줄 믿고 있으니 우 리는 어떻게든지 수를 써서 오빠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그녀에게 전해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소영은 천천히 얼굴을 돌리더니 백리빙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윽 고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빙아, 옥소랑군은 악누나를 사랑하고 있으므로 절대로 나쁜 마음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느냐…" 백리빙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데 그것은 또 왜요?" 소영이 대답했다. "옥소랑군의 성격이 약간 편협하고 격정적이지만 치정으로 악누님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는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다." 백리빙이 곧 대꾸했다. "그러나 오빠에게는 기분 나쁜 상대가 아니예요?" 소영이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는 원래 나와 하등의 원수가 될 일이 없는데 단지 악누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는 나를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를 유일한 연적으로 생각하고 미워하는 것이지 다른 감정은 없다." 백리빙은 길게 한숨을 쉬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오빠는 그를 미워하지 않아요?" 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미워하지 않는다." "오빠의 기상은 갈수록 높고 활달해지는군요. 진정으로 저는 오빠를 존경합니다." 소영은 처량한 웃음을 지었다. "옥소랑군과 심목풍이 이곳에서 내일 오시에 만나겠다고 약속을 하였으니 심목풍은 반드시 무슨 조치를 취할 것이다. 우리는 그 내정을 조금이라도 탐지하여 우문한도에게 알려주어 미리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여야 되겠다." 백리빙이 물었다. "나도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내일 오시에 정말로 결투가 벌어진다면 오빠가 나타나서 그들을 도와줄 거예요?" 소영은 천천히 말했다. "그것은 그 때의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 되겠다. 내가 나타나지 않아도 된다면 나타나지 말아야 지." 백리빙은 답답한 듯이 말했다. "나는 오빠가 왜 나타나지 않고 신분을 숨기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요." 소영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나는 심목풍과 여러 차례 싸움을 했다. 많은 무림 동도들이 심목풍에게 겁을 먹고 있었으나 그 들도 나를 따라 점점 호기 있고 용감하게 항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심목풍에게 앙갚음을 하려 던 그 무림의 고수들도 이번 일로 인해 손을 거두고 있다. 결국 그들이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림에서는 다시 그를 꺾으려는 사람이 없게 된다. 필시 그들은 반드시 자신을 보호하기 위 해서 행동할 것이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옳아요. 무림에서는 확실히 그럴 사람이 있어요 저는 그들은 누구라고 지명할 수는 없지만 이 런 생각만은 들어요."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너는 심목풍이 오늘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내는 뜻을 알 수 있겠느냐?" 백리빙은 대답했다. "그는 음모가 귀신 같아서 오빠를 타 죽게 하고는 마음이 극히 불안하기 때문에 오빠의 영당 앞 에 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일 거예요." 164. 의형제의 파산신뢰(破山神雷) 소영은 머리를 흔들며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심목풍만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또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단 말이에요?" 소영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내 시체를 찾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거든… 그리고 이곳에남옥당, 금화부인과 함께 왔으 니 그의 속셈은 뻔한 거야." "무엇 때문에 그들을…" "간단하지. 남옥당은 나를 유인한 장본인이고, 또 금화부인은 심목풍의 밑에 있지만 나하고는 매 우 가까운 사이잖아…" 백리빙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남옥당과 금화부인을 데리고 나타나 심리작전을 쓰려는 거야." "심리작전은 또 뭐예요?" "나를 격분시키고 또 감동시키는 양면작전… 남옥당은 나를 격분시키고 금화부인은 나를 감동시 킬 수 있잖니? 그렇게 되면 내가 뛰쳐 나가리라 생각한 얕은 수작이지."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가 숨는다 해도 그들은 찾아낼 거예… 특히 금화부인은…" "그녀는 내가 죽은 줄 알고 비통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살아 있을 거라는 은근한 기대를 갖고 있을 거야."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심목풍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내 생각에 그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아. 그는 우리가 조문하는 군호들 틈에 끼어 들어온 것을 조 금도 모를 거야. 우리를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거든…" "…" "그는 만일 내가 이곳에 돌아오면 무위도장이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백리빙은 빙그레 웃으며 소영에게 찬사를 던졌다. "우리가 얼마 동안 같이 지내는 사이에 오빠는 하루가 틀리게 무공만 진전된 줄 알았더니, 오빠 는 지혜도 나날이 발전되었군요. 모두들 오빠를 불세출(不世出)의 기인이라고 칭찬이 자자한데 그 말이 맞았어요." 소영은 거북한 웃음을 띠며 머리를 저었다. "무림의 정세가 하도 혼탁하여서 매일 생사의 기로에서 허덕이게 되는 것이 내 위치였다. 그래 서 처음엔 아무것도 생각할 능력이 없고 어리둥절했었는데, 이젠 머리를 쓰지 않고는 안 되겠다 는 절박한 심정에 놓였을 뿐이야." 백리빙은 애교를 담뿍 웃음에 담으며 말했다. "오빠가 갈수록 총명해지는 반면에 나는 점점 멍청해지는 것 같아요."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빙아, 너는 우리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 줄 아느냐?" 이 말은 백리빙을 섬뜩하게 했다. 그녀는 까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왜요? 지금 우리 처지가 아주 위험하단 말예요?" "그렇다. 무림의 정과 사를 가르는 대결전이 눈 앞에 다가왔어." "…" "지금 내 마음은 무거운 납덩이에 눌린 듯 몹시 무겁다. 우리가 만일 자그마한 실수라도 하는 날엔 무림은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고 마는 거야." 백리빙은 약간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게 사태가 급해요?" "그렇다. 그래서 나는 중주이고가 창자가 끊기는 듯한 고통을 당하고, 악누님이 피눈물을 쏟을지 라도 지금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을 작정이다." 백리빙은 눈을 내리뜨고 잠시 무슨 생각인가 하더니 물었다. "오빠가 그런 행동을 하는 데에 무슨 의의가 있어요?" "있지. 심목풍에게 내가 죽은 것으로 믿게 하려는 것이 첫째 목적이다. 내가 죽었다고 믿게 되면 심목풍은 한시름 놓겠지." "…" "그 동안에 나는 숨어서 자유자재로 활동하며 그의 음모와 목적을 깨뜨리는 것이다." 백리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문한도 역시 어떤 묘책이 있을 것이다. 그의 지혜는 오히려 심목풍보다 뛰어나지. 그러나 우 문한도에게 승산이 있는 것은 아냐. 나는 그를 도와줘야 된다." 백리빙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만일 우문한도의 지략이 심목풍보다 강하다면 어째서 승산이 없다는 것이지요." "심목풍은 수십 년 전부터 무림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는 강호의 많은 고수들을 끌어들여 자기 편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요?" "우문한도가 아무리 지략이 출중하더라도 쌍방의 실력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야."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빙아, 우린 잠시 헤어져야겠다." 이 말을 들은 백리빙은 대번에 안색이 변하며 도리질을 했다. "싫어요. 어딜 가려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나도 따라가겠어요." "빙아, 여지껏 내가 설명한 것을 금방 잊어 먹었느냐? 우린 지금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릴 때가 아니야. 자칫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백리빙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빙아, 나 대신으로 이곳에서 한 가지 할 일이 있다." 이 말에 백리빙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악소채는 심목풍의 적수가 아니다. 내일 오전 영당 앞에서 결투에 심목풍이 온다면, 악소채와 옥소랑군은 심목풍에게 당할 거야." "그럼 나더러 심목풍을…" 소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일 오전 중에 내가 나타나지 않거든 빙아는 내일의 그 결전을 저지해야 한다." 백리빙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저지해요?" "조용히 악소채에게 다가가서 내가 죽지 않았으니 심목풍과 결사적인 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고 전하면 돼." 소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이 방법은 쓰지 말아라. 이것은 최후의 방법에만 써야 된다." 백리빙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빙아의 무공은 충분히 자신을 지킬 수 있지만… 너무 성급한 행동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얌전 히 기다려라." "알았어요." 소영은 몸을 일으켰다. 백리빙도 따라 일어났다. "조심해라." "오빠야말로 조심해요."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장막 밖으로 나갔다. 백리빙도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소영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백리빙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운집한 천하 무림의 영웅들은 수백 명에 달했다. 드나드는 사람으로 붐비는 속을 소영은 유유히 걸어나갔다. 우문한도와 무위도장은 조상객 틈에 섞여 심목풍의 첩자가 스며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기도(氣度)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간섭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영이 장막을 출입하는 데에도 아 무런 지장이 없었다. 소영은 장막을 벗어나 곧장 황야로 내달렸다. 소영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백리빙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빨리 돌아와요.' 백리빙은 무인도에 혼자 버려진 듯 쓸쓸한 마음을 안고 몸을 돌려 영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조상객들은 대부분이 영위를 참배한 뒤였고 길이 먼 사람은 채 도착되기 전이어서 영당 안은 매우 조용했다. 백리빙은 천천히 영당 안으로 들어섰다. 한 줄기 모락모락 연기를 떠올리며 향내가 상쾌한 기분 을 불러 일으켰다. 영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리빙은 소영의 영전으로 다가섰다. 소영의 영위를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멀쩡히 산 사람을 두고 엉뚱하게 제사를 지내다니…' 백리빙은 소영의 영위 위에 씌어진 글자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러자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서 속 삭였다. "그것은 다만 흰 천에다 쓴 붓글씨에 불과한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것을 쓰다듬고 있소?" 백리빙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흰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백색 장삼의 노인이 그녀 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문한도로구나. 이 사람의 지략은 심목풍보다 윌등하다고 했으니 내가 입을 열기만 하면 정체 가 금방 탄로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한 백리빙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문한도의 날카로운 눈은 계속 백리빙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백리빙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만일 소영 오빠가 이곳에 있었다면 어떤 방법이 있었을 텐데, 저 눈빛에 아무래도 정체가 탄로 나고 말겠구나.' 백리빙은 마음이 바싹 타올랐다. 어떻게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할까 마음을 졸이던 그녀의 머리 속에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그것을 미처 생각해 내지 못했구나. 벙어리다. 벙어리 흉내를 내면 그들이 나를 억압하 지 못할 것이다.' 백리빙은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키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 었다. "당신은 말을 못하오?" 백리빙은 머리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썼다. '듣긴 해도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본 우문한도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영당 뒤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 영당 뒤에는 많은 무림고수들이 모여 있을 것이 분명하다. 심목풍과 대적할 작전을 세우는 본거지이겠지. 들어가 보는 것도 결코 무익한 일은 아니겠다.' 백리빙은 그렇게 생각하고 머리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녀는 영당 뒤쪽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에 들어서니 매우 좋은 복도가 나타났다. 양쪽 벽은 모두 흰 색이었다. 우문한도가 백리빙의 뒤에서 말했다. "양쪽 벽을 조심하시오. 괜한 호기심으로 벽을 건드렸다가는 매우 곤란한 일을 당할 것이오." 백리빙은 뒤를 돌아보았다. 우문한도는 따라 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왜 따라 오지 않을까? 벙어리 흉내를 내고 있으니 물어볼 수도 없고…' 백리빙이 이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우문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계속 안을 향해 들어가면 되오. 복도를 따라 한참 들어가면 당신을 맞이하려고 나오는 사람과 만나게 될 것이오." '우문한도는 심지가 깊은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나 혼자서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이유는 어 디에 있을까? 도무지 모르겠다.' 생각했으나 역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우문한도에게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는 몸 을 돌렸다. 통로는 매우 꼬불꼬불했다. 어떤 진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백리빙은 통로를 따라 한참 동안 앞으로 뚫고 나갔다. 그러나 통로는 어디까지 연결되었는지 끝 이 보이지 않고 마중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백리빙은 한동안 통로 속을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이 길은 끝이 없구나. 벌써 나는 오 리 길은 족히 걸었으나 역시 이 좁은 통로 속에서 맴돌고 있으니… 분명 나는 어떤 미궁의 진에 빠진 것이다. 소영 오빠가 우문한도를 극구 칭찬하더니 과 연 틀림없구나.' 백리빙은 소영의 사람 보는 눈이 밝은 것과 우문한도의 지모에 새삼 감탄했다. '그러나 저러나 앞으로 얼마나 더 뚫고 나가야 되는 것일까? 내 능력으로 이 진문을 통과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구나.' 이 때였다. 갑자기 옷자락이 펄럭이더니 우문한도가 통로의 한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당신은 수양이 매우 깊구려." 우문한도가 나타난 것을 본 백리빙은 하마터면 말을 할 뻔했으나 급히 목구멍으로 삼켰다. 우문한도가 말했다. "나를 따라 오시오." 백리빙은 우문한도의 뒤를 이, 삼 척의 거리를 두고 따랐다. 우문한도는 몇 번 꾸불꾸불한 모퉁이를 돌더니 어느새 좁은 통로를 빠져 나갔다. '과연 놀랍구나.' 백리빙은 감탄하며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통로를 벗어나자 커다란 장막 두 개가 양쪽에 나타 났다. '광목으로 미진(迷陣)을 장치한 기술이 놀랍구나. 더욱이 한 채의 밀실까지 만들어 놓은 모양인 데, 밖은 며칠 사이에 이토록 어마어마한 규모의 설치를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문한도는 두꺼운 장막을 들치며 백리빙에게 말했다. "들어오시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막 안으로 들어섰다. 장막 안에도 온통 흰색뿐이었다. 흰 천에 덮여 있는 나무탁자 주위로 네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 다. 그 의자의 방석도 흰색이었고 주전자, 찻잔 등도 모두 눈같이 흰색깔뿐이었다. 이미 실내에는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백색 장삼의 손불사와 무위도장이었다. '눈이 시리도록 흰 풍경이구나.' 백리빙은 두 사람을 한 번 둘러본 후 탁자 앞으로 다가가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손불사는 백리빙을 쳐다보더니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요?" "말을 못하는 친구요." "말을 못하다니… 그럼 벙어리란 말이오." "그렇소." 우문한도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더니 나머지 의자에 앉았다. 손불사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백리빙을 아래 위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백리빙은 가슴이 뜨끔했으 나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자 손불사가 불쑥 물었다. "당신은 변장한 것이 아니오?" 백리빙은 가슴이 철렁했으나 여전히 태연한 기색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백리빙의 곁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갑자기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고 했다. 백리빙은 급히 그것을 피해 내며 몸을 일으켰다. 백리빙의 빠른 행동에 우문한도는 흠칫했다. 그 러나 곧 태연해지며 담담하게 웃었다. "허허,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당신은 결코 벙어리가 아니오." '큰일 났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다된 밥에 재를 뿌리게 되겠구나. 내가 이곳에 괜히 들어와서 일 을 그르치게 되면 어쩐다지?' 백리빙은 얼른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우문한도가 제법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과 함께 이곳에 온 사람은 이미 이곳을 떠났소. 당신네들은 아까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줄로 아는데 우리와 얘기한다고 안 될 것은 무엇이오." 이 말을 들은 백리빙은 속으로 흠칫했다. '우문한도는 이미 나와 소영 오빠를 감시하고 있었구나. 이제 아무리 잡아 떼어도 소용 없을 테 니… 정말 이 일을 어떻게 하지?' 백리빙은 마음이 매우 초조했으나 여전히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설혹 심목풍이 보낸 첩자라도 우린 소대협의 장사가 끝날 때까지는 당신을 조금도 상해 하지 않을 테니 그 점은 안심하시오." 손불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우문형, 이 노인이 벙어리가 아닌 것이 확실하오?" 백리빙은 노인으로 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문한도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렇소. 이 사람은 분명 벙어리가 아니오." "좋소. 그렇다면 내가 입을 열도록 하겠소." 말과 동시에 손불사는 오른손으로 백리빙의 왼팔을 잡으려 했다. 백리빙은 재빨리 손불사의 손을 피하며 오른손을 내저어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백리빙이 손불사의 손길을 가볍게 피해 내는 것을 본 무위도장은, '이 자의 무공이 보통이 훨씬 넘겠구나.' 생각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재빨리 몸을 날려 출입문을 막아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누구보다 당황한 것은 백리빙이었다. '소영오빠가 얌전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한 것을 어겼다가 이 꼴을 당했구나.' 백리빙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더 이상 가장할 필요 없소. 내가 이미 말했잖소? 당신이 심목풍의 끄나불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당신을 해치지 않겠다고…" "만일 당신이 아무 의미도 없이 벙어리 행세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당신에게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소." 백리빙이 여전히 대꾸를 하지 않자 손뚤사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당신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겠다면 나는 억지로 입을 열게 할 수밖에 없구려. 예의에 벗어난다 고 나무라지 마시오."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백리빙을 후려갈겼다. 이 일장의 위력은 매우 컸다. 맹렬한 장풍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버티는 데까지 버티어 보자.' 백리빙은 오른손으로 손불사의 일장을 밀어내며 몸을 옆으로 빼돌렸다. 두 사람의 장풍은 허공 에서 가볍게 부딪쳤다가 곧 스러졌다. 손불사는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의 장력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니구려." 말하는 것과 동시에 두 손으로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손불사의 쌍장 공격을 번개처럼 빠르고 무서운 저력을 지녔다. 백리빙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두 손으로 마주 받았다. 손불사의 장력에 비해 백리빙의 장력은 아무래도 약했다. 장풍이 맞부딪치는 순간 그녀의 두 팔 이 찌르르 울렸다. 그와 함께 내장이 뒤집힐 듯 속에서 열기가 부글거렸다. 백리빙이 자기의 쌍장을 받아내는 것을 본 손불사는 크게 놀랐다. '이 사람의 무공은 매우 강하구나.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상대다.' 손불사는 새삼스럽게 백리빙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노인의 무공은 매우 강하구료." 하며 장력을 돋구어 다시 공격했다. 손불사가 쌍장으로 맹렬한 공격을 퍼붓자 백리빙은 재빨리 몸을 날려 손불사의 장풍을 피해 냈 다. 손불사는 숨쉴 틈도 주지 않고 연거푸 삼 장의 공격을 가했다. '큰일났다.' 백리빙은 속으로 부르짖으며 몸을 날렸으나 손불사의 장풍은 이미 몸 가까이에 접근하고 있었 다. '에라! 모르겠다.' 백리빙은 십분의 힘을 발휘해서 손불사의 장풍을 막았다. 서로 장풍이 맞부딪치자, 펑! 요란한 소리가 실내를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장풍의 진동을 견디지 못한 백리빙은 무의식 중 에, "아아!" 비명을 지르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소리를 들은 손불사는 급히 손을 거두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여자였군!" 그는 입맛이 쓰다는 듯 중얼거렸다. 손불사의 장풍을 견디지 못해 주저앉긴 했으나 백리빙은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이 때 우문한도 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무엇 때문에 남장을 하고 이곳에 나타났소?" 백리빙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미 모든 것이 발각된 단계에 이르렀으니 할 수 없구나.' 생각하고 인지를 입술에 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세요." 우문한도는 백리빙의 태도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매우 안전한 곳이오. 낭자는 어떤 말이든 하셔도 무방하오." 백리빙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이들의 적수가 못 된다. 정세가 이렇게 된 이상 이들은 강제로라도 내 정체를 알 아 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 오빠에게 어떤 꾸중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것을 밝힐 수밖에 없겠다.' 백리빙은 이런 생각을 하며 역시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백리빙이에요." 이 말을 들은 세 사람은 모두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부르짖었다. "백리낭자!"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영과 백리낭자가 함께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 는데 갑자기 백리빙이 살아 왔으니 얼른 믿어지지 않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들이 놀라 소리치자 백리빙은 당황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며 나지막하게 외쳤다. "제발 음성을 낮추세요!" 벙벙히 서 있던 우문한도가 음성을 낮추며 물었다. "정말 백리낭자요?" "네, 맞아요." "낭자는 소대협과 함께 있었지 않았소?" "같이 있었어요." 무위도장이 성급하게 끼어 들었다. "낭자는 심목풍의 화공(火功)에 의해 타 죽지 않았소?" "타 죽었다면 제가 어떻게 여기에 오겠어요?" 우문한도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럼 소대협도 타죽지 않았단 말이오?" "심목풍이 나를 태워 죽이지 못했는데 어떻게 소영 오빠를 죽일 수 있었겠어요?" 이 말에 모두들 희비가 엇갈린 묘한 표정들을 지었다. 그들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표정들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납덩이 같이 무거운 침묵이 아니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도록 벅찬 감동이 회오리치는 시간이었다. 이윽고 우문한도가 약간 들뜬 듯한 음성을 밀어냈다. "소대협은 지금 어디에 있소?" "우문선생은 소영오빠가 이미 이곳을 떠났단 것을 알 텐데요?" "그렇다면… 등대단이란 사람이 바로 소대협이었구려?" "맞아요. 오빠는 늘 우문선생의 지모가 뛰어나고 눈이 예리하다고 예찬하더니 역시 다르군요." 이 때 손불사가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낭자는 정말 백리빙이오?" "그렇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아시겠어요?" 우문한도가 손불사에게 말했다. "이 낭자는 틀림없이 백리빙일 거요. 나는 백리빙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소." 손불사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지금 조금의 실수도 없어야 되오. 이 낭자가 진짜 백리빙인지 확인하는 것이 좋겠소." "좋아요 똑똑히 보세요." 백리빙은 얼굴의 수염을 떼어내고 화장을 지워 버렸다. 무위도장이 백리빙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더니 이윽고 감개무량한 듯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 다. "과연 백리낭자임에 틀림없군. 그렇다면 소대협이 무사하다는 것도 명약관화한 일이오." 백리빙이 다시 사방울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제발 음성 좀 낮추세요." 손불사가 갑자기 기쁨에 겨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내가 말했잖소? 소대협은 절대로 일찍 죽을 상이 아니라고…" 빅리빙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늙은 거지 양반! 큰소리로 웃지 않을 수 없어요?" 손불사가 눈에 불을 켜며 백리빙에게 말했다. "이 조그만 계집애가 감히 나를 늙은 거지라고 부르다니…" 백리빙이 앵돌아진 어조로, "좋아요. 마음대로 웃고 떠드세요. 남들이 모두 알도록 광고하세요." 하더니 몸을 홱 돌려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낭자, 화내지 마시오. 어서 저 의자에 앉아 우리 천천히 얘기합시다." "화내지 않게 되었어요?" 손불사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좋소. 다시는 큰 소리로 떠들지도 웃지도 않겠소." 우문한도가 백리빙의 소매를 끌며 말했다. "낭자, 앉읍시다." 백리빙은 마지못하는 듯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녀는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들 앉으세요." 세 사람은 모두 백리빙의 주위에 둘러 앉았다. 그제서야 백리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영오빠가 저에게 단단히 부탁했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오빠가 살아 있다는 말을 누설시키지 말라고…" 손불사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건 어째서요? 설마 소대협이 우리로 하여금 단장의 슬픔을 겪도록 하자는 것은 아닐 텐데…" "오빠에겐 커다란 계획이 있어요. 노선배님들이 단장의 고통을 당한 것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는 계획이에요." 세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무위도장이 탄식처럼 말했다. "심목풍이 지른 그 불은 암석을 녹이고 계곡을 변화시켰으나 소대협과 낭자를 태워 죽이지는 못 했으니…" "오빠는 저에게 새삼 당부하였어요. 잠시 동안만 아무에게도 오빠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지 말라고… 그런데 저는 노선배들에게 말을 해 버렸으니 오빠는 분명 매우 노해서 야단칠 거예요." 손불사가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낭자 그 점은 염려 마시오. 이 늙은이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란 것을 장담하겠소." 백리빙은 씁쓸하게 웃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낭자와 소대협이 무서운 불길 속에서 빠져나온 이면에는 매우 기이하고 험난한 과정이 있었을 것이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일이니 나중에 들어도 늦지 않을 것이고…" "…"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소대협이 어디에 갔느냐는 것이오. 심목풍이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에 온다면 소대협은 혼자이니 우리는 얼른 사람을 보내 그를 맞이해 와야 되겠소." "그건 안 돼요." 백리빙이 반대하고 나섰다. "여기서 사람을 보내 오빠를 맞이한다면 심목풍에게 모든 계획을 노출시키는 결과밖에 안 돼요." "그렇지만…" "그렇지만이고 뭐고 이대로 있으면 돼요. 사실 저도 지금 오빠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다만 중 요한 일을 하러 갔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우문한도가 물었다. "그럼 언제 돌아올는지도 모른단 말이오?" "내일 오전까지 돌아오겠다고 했어요. 악소채와 심목풍의 결전 마당에 도착할 거예요." 백리빙은 더욱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오빠가 살아 있다는 것은 여기 세 사람 이외에 아무에게도 당분간은 비밀로 부쳐야 돼요. 특히 옥소랑군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에요." 손불사가 나섰다. "그건 어렵지 않소. 그러나 중주이고에겐… 그들은 소대협의 참사를 듣고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 만 쏟고 있소. 그들의 애통해 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소. 소대협이 살아 있는 이상 그들에게 더 고통을 줄 필 요는 없잖겠소?"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두 분은… 어떻게 그들을 위로해 보세요." "그들을 위로하는 길은 없소. 오직 소대협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전에는…" "만일 알려 주었다가 후일 오빠가 나를 탓하면 어떡하지요?" "그건 염려마오. 뒷책임은 모두 내가 지겠소." 우문한도가 말을 거들었다. "사실 심목풍은 이미 이곳에 왔다 갔으니 중주이고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해도 큰 지장은 없을 것이오." "오빠는 항상 우문한도 선생의 지략이 뛰어났으며 심목풍을 상대해서 지략을 겨룰 분은 우문선 생밖에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 우문선생이 생각하기에 이 일을 알리는 것이 좋겠어요, 아니면 이 대로 당분간 덮어 두는 것이 좋겠어요?" 우문한도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대협은 나를 너무 치켜 세웁니다. 사실 기백과 풍모는 물론이고 지략에 있어서도 내가 소대 협을 따를 수 없지요." 그는 우선 겸손을 늘어 놓더니 음성을 낮춰 말을 이었다. "중주이고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했기 때문에 몸이 매우 약해졌소. 지금 우리에겐 힘이 필요한데 두 고수가 힘을 못 쓰면 그만큼 손해요. 그러다가 적에게 상하기라도 한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 지요." "우문선생의 말씀대로라면 응당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겠군요." "나는 단지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만 말씀드렸고 결정을 지을 분은 바로 낭자 자신이오." 백리빙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선뜻 말했다. "좋아요. 그분들에게 알려주세요. 그러나 제가 여기에 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우문한도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만일 낭자가 그들과 만나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얘기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지요?" "역시 낭자께서 그들을 만나는 것이 좋겠소." 백리빙은 일이 점점 난처하게 된다고 생각했으나 이왕 내친 걸음이니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다 고 마음을 고쳐 먹고 입을 열었다. "별다른 묘안이 없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내가 그들을 데려 오겠소." 무위도장이 밖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우문한도가 백리빙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오전 심목풍과 악소채의 결투에 대해서 소대협은 어떻게 분부했소." "아무 말도 없었어요 내일 오전까지 이곳으로 오겠다고만 했어요." 우문한도는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더니 실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소대협이 살아 있으니 우리가 세웠던 대책에도 약간의 수정이 필요할 것 같구려." 손불사가 말했다. "소선배의 고견을 말해 보시오." "백화산장의 실력이 매우 강대하긴 하지만, 그것은 모두 심목풍을 주축으로 한 서까래들이오. 우 리가 심목풍만 죽이거나 생포하면 백화산장의 세력은 금방 풍지박산되고 말 것이오."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심목풍을 없애거나 생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내가 생각하기에 심목풍은 반드시 내일 오전 약속을 지키려고 나타날 것이오." "그렇소. 반드시 옵니다." "만약 그가 나타나면 나는 악소채를 도와 악착같이 싸우겠소. 다행히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자 연히 뒷일은 거저먹기가 되잖겠소?" 우문한도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심목풍이 어떤 인물인데… 그는 우리의 생각을 앞지를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내일 이곳에 나타 날 때 필경 많은 고수들을 이끌고 올 것이오. 애초의 내 생각엔 심목풍의 무리를 맞아 암수로 그 들을 제압하여 영당에서 죽이려고 했었소. 그렇게 되면 소대협의 영전에 복수의 잔을 올리게 되 고 무림의 평화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소. 그러나…" "…" "이제 소대협이 살아났으니 이 계획은 좀 고쳐야 될 것 같소." 손불사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당신의 그 계획을 나는 어째서 조금도 모르고 있었소?" 우문한도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계획은 은밀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위도장도 모르고 있소. 나하고 중주이고만이 알지 요." "중주이고는 어떻게…" "이 계획에 그들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오." "지금 우리에게 그 계획을 들려 줄 수는 없소?" 우문한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중주이고가 재물이 풍부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며 심목풍도 그들보다는 적을 것이 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중주이고가 단순히 금은보화만 거두어 들이고 있는 줄 알지 다른 것은 모르지요." "그래서요?" "내 계획도 중주이고가 파산신뢰(破山神雷)를 간직하고 있음을 안 뒤에 세운 것인데… 노선배께 선 백 년 전 파산노인의 행적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그 화약광 말이오?" "그렇소. 그가 이 파산신뢰로 스물 일곱 명의 고수를 몰살시켰던 일이 있었소. 그러나 그 위력이 너무 강해 그의 제자 네 명도 모두 죽었소." "…" "그 파산노인은 혼자 간신히 살았으나 화약 기운으로 인해 반 년 뒤에 죽었지요. 그는 두 개의 파산신뢰를 남겨 두었는데 그것이 중주이고의 손에 들어간 것이지요." "…" "중주이고는 그 독약이 너무 위력이 강해 함부로 사용할 수 없어서 철합 안에 넣어 땅 속에 묻 었답니다. 소대협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들은 복수심에 불타 그것을 파내어 몸에 지니고 있다오." "그 사실을 상팔에게서 들은 뒤 나는 영당에서 심목풍과 함께 죽으려고 했던 것이오." 손불사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알겠소. 중주이고는 파산신뢰를 터뜨려 심목풍과 함께 비장한 최후를 장식하려고 했구려." "그런데 심목풍을 너무 과소평가해선 안 되지 않소? 우리가 폭약을 터뜨리려고 한다는 것을 그 가 눈치챈다면 약삭빠른 그는 재빨리 이곳에서 도망치고 말 테니 말이오." "그야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심목풍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때였다. 장막 밖에서 인기척을 느낀 백리빙이 날카로운 눈을 그곳으로 돌렸다. 들어선 사람은 무위도장과 중주이고였다. 중주이고는 백리빙에게 시선을 못박았다. 그들은 처음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 한동안 백리빙을 살펴 보던 두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안색은 몹시 초췌해 있었다. 특히 두구의 안색은 송장처럼 검붉은 반점까지 나타나 있었다. '얼마나 비통해 했으면 저토록 안색이 초췌해졌을까? 자기 부모나 애처가 죽었다 해도 저렇지는 않을 것이다.' 백리빙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의 앞으로 걸어가며 부드러운 음 성을 입술 사이로 밀어냈다. "두 분께서는 몹시 비통해 하셨군요." 상팔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도록 회오리치는 감격을 누르며 떠듬떠듬 말했다. "지금은 괜찮소. 당신은 분명 백리낭자구려." "네, 그래요." "정말 꿈같은 사실인데… 소대협은 언제 뵈올 수 있겠소?" "내일 오전 중에 만날 수 있어요." 백리빙은 돌연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저는 오빠의 변장한 모습을 가르쳐 줄 수는 없어요. 절대로 오빠를 아는 척해선 안 돼 요." 두구가 얼굴에 경련 같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우린 형님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오. 정말 이제는…" 두구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을 옆으로 돌렸다. '무위도장이 이들에게 대강의 얘기를 한 모양이구나.' 백리빙은 중주이고가 기뻐하는 모습을 대하자 콧날이 시큰해졌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란 생각이 가슴을 적셨다. 우문한도가 미소띤 얼굴로 중주이고에게 말했다. "자, 상형과 두형! 어서 이리로 앉으시오." 상팔이 탁자 앞으로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우문형께서 어떤 가르침이 있소." "조금 전, 손노선배님과 우리의 계획에 대해서 의논했소. 지금 소대협이 살았으니 그 방법을 취 소하는 것이 좋겠소." 상팔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형님이 항상 우문형의 지략을 칭찬했으니 우리는 우문형이 하자는 대로 할 뿐이오." 손불사가 끼어 들었다. "영당의 옥쇄방법을 사용하든 안하든 나는 우선 심목풍을 상대할 방 법을 듣고 싶소." 우문한도가 웃으며 말했다. "별 신통한 방법은 없소. 우리가 심목풍과 함께 죽으려던 방법을 말 씀 드리자면… 나와 상형이 파산신뢰를 하나씩 지니고 심목풍과 싸 우다가 화약을 터뜨려 함께 죽으려고 했던 것이오." "당신들은 일찍 그 방법을 알려 주었어야 되었소. 그럼 내가 그 화약을 지니고 심목풍과 싸울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미 늙었으니 몇 년밖에 더 살 수 없소. 심목풍과 함께 저승에 가면 후 세에 이름이나 남길 게 아니오. 당신들은 아직 젊은데 어찌 가볍게 죽을 수 있소?" 우문한도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노선배님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오. 심목풍과 대결할 만한 무공을 지닌 사람은 노선배뿐이 오. 허나 심목풍을 폭사시킨 뒤에 노선배와 무위도장께서는 할 일이 있소." 무위도장은 이 계획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묵묵히 듣고만 있었고 손불사가 다시 물었다. "그건 무슨 말이오." "심목풍이 죽는다 해도 백화산장이 쉽게 흩어지지 않을 것이오. 그들의 잔당을 없애는 데에 노 선배와 무위도장의 힘이 절대로 필요하오." 손불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듣고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소대협이 살았으니 우린 계획을 어떻게 바꿔야 되지요?" "그것이 바로 내가 여러분과 의논할 일이오." "상의할 필요도 없소. 우문형이 계획을 세워 우리에게 들려주면 되오. 우리가 의견을 보충해서 계획을 보충한 뒤에 밀고 나가면 되지요." 우문한도가 정색을 지으며 말했다. "좋소. 내가 의견을 제시할 테니 여러분께서 지적힐 곳을 찾아 지도해 주기 바라오." 우문한도는 실내의 다섯 사람을 차례로 둘러보더니 이윽고 낮은 음성을 꺼냈다. "소대협이 살았으니 우린 파산신뢰를 쓰려던 계획을 일단 포기합시다. 내일 오전에 심목풍이 이 곳에 나타날 무렵 어쩌면 소대협도 이곳에 있게 될 거요. 파산신뢰를 던져 심목풍을 죽일 수 있 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까지 죽일 필요는 없잖소?" 손불사가 말했다. "이 늙은이 생각엔… 내가 단독으로 심목풍을 넓은 공지로 끌고 가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좋겠 소. 다행히 내가 이기면 파산신뢰를 쓸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 방법은 안 되오. 지금 우리에겐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손선배께서는 가볍게 죽겠다는 말 씀을 하지 마시오. 또한 심목풍은 의심이 많고 교활하기 때문에 선배님의 뒤를 순순히 따르지도 않을 것이오." "우문형, 이 늙은이의 생사에 대해선 너무 염려마시오. 내가 다시 강호에 나선 것은 평안한 여생 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오. 또한 심목풍이내 도전을 받아 들이지 않으리란 생각도 이해되지 않 소." "노선배의 말씀은 모두가 타당하오. 그러나… 모두들 심목풍에 대해 이해가 적군요. 그는 많은 사람들을 교묘하게 다룰 수 있는 수완가요. 그래서 오늘날 무서운 위력을 구축하고 무림을 뒤흔 들게 된 것이오." "…" "그 위인은 몹시 음흉하고 의심이 많아 조그만 실수도 없소. 노선배께서 빈터에서의 싸움을 그 에게 건다는 것은 큰 오산이오." 우문한도의 말에 손불사는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우문형은 심목풍을 너무 신격화(神格化)시키고 있소. 나는 그가 그토록 뛰어난 인물이라고는 생 각지 않소." "노선배께서 제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한 번 시험해 보시오." "좋소. 우문형은 파산신뢰를 나에게 주고 사용법을 알려 주시오." "가르쳐 드릴 수는 있소. 허지만 노선배께서 저에게 한 가지 응낙할 일이 있소." "무엇이오?" 우문한도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망설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만일 심목풍이 노선배의 도전을 받아 들이지 않을 때에는 노선배는 이후로 제 말대로 따라 주 시오. 또한 어떤 내막도 묻지 마시오." 두 사람의 어조는 차츰 흥분을 띠고 있었다. 무위도장은 이들의 언쟁을 말리려고 생각했었으나 두 사람 모두 너무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에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손불사는 잠시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좋소. 나는 심목풍이 도전을 받아들일 것으로 확신하니까."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의 언쟁하는 모습을 지켜 보고만 있던 백리빙이 손불사에게 말했다. "어째서요?" "나의 경험에 의할 것 같으면 무림 사람들은 모두 체면을 존중하오. 더욱이 심목풍은 많은 영웅 들 앞에서 내 도전을 거절할 수 없을 거요. 그것은 나를 두려워한다는 비웃음만 남기게 되니까… " 우문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심목풍은 체면을 가리지 않소." "아니오, 심목풍은 오히려 체면을 중시하오. 만일 우문형의 짐작대로 일이 된다면 이 늙은이는 이후에 당신이 시키는 대로 따르겠소. 우문형이 어떤 일을 추진하더라도 나는 한 마디도 묻지 않 고 따르겠소." "좋소. 그럼 우린 약속했소이다." 백리빙은 어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손불사에게 말했다. "오빠는 늘 우문선생의 지혜를 예찬했어요. 그런데 어째서 우문선생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으 세요?" 손불사는 백리빙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강호에서 이 나이까지 늙어 온 몸인데 그만한 견식도 없을 것 같소? 당신같은 어린 여자 가 무엇을 안다고 참견이오." 백리빙이 약이 바싹 올라 손불사에게 대들려고 했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손을 저어 그녀를 제지 하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는 내기를 하는 수밖에 없겠소."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내일 소대협은 분명 영당에 나타나지만 여전히 신분을 밝히지 않을 것이오. 우리도 소대협의 생환을 남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요. 절대로 소대협의 정체가 탄로나게 해서는 안 되 오." 무위도장이 말을 받았다. "우린 어떤 배치를 해야 되겠지요?" "그렇소. 손선배께서 파산신뢰로 심목풍과 결단하기로 했으니 우선 다른 배치를 해야겠소." 무위도장은 다섯 사람을 한차례 훑어보더니 말했다. 165. 내미지상(內媚之相)의 절세미녀 "무위도장께선 고수를 거느리고 선두에 서는 것이 좋겠소. 심목풍을 따라 온 적들을 상대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형과 두형은…" "…" "손선배를 대신해서 제이대(第二隊)의 고수를 거느려 심목풍을 견제하며 때에 따라서는 파산신 뢰를 사용해도 좋소. 나머지 일은 상황에 따라 내가 적절하게 처리하겠소." "그게 좋겠소." 무위도장과 중주이고가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자 우문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노선배에게 파산신뢰를 드릴 테니 받으시오." 그는 품 속에서 파산신뢰를 꺼내 손불사에게 주었다. 그것은 오리알 정도의 크기에 새빨간 색깔 의 물체였다. '저것이 그토록 큰 위력이 있단 말인가? 겉으로 보아서는 두부나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파산신뢰가 너무도 작은 것에 백리빙은 이런 생각을 했다. 손불사는 그것을 받아 들고 손에 굴 리며 한동안 들여다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이 산을 폭파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니…" 우문한도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노선배께서 그것을 가볍게 쓰지 않기를 바라오." "심목풍과 함께 죽을 수 없는 경우엔 이 폭약을 쓰지 않겠소. 아직 나도 헛되이 죽고 싶지 않으 니까…" 우문한도는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이 폭약은 무거운 충격만 주면 터집니다. 이것을 심목풍에게 던져 폭파시키면 가장 좋겠지요. 그렇지 못할 경우엔 내공을 이용해서 땅에 던지면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것이 있는데… " "…" "이 폭약의 위력이 미치는 넓이는 고작 일 장 이내요. 일 장 밖에서는 부상을 입는 정도에 그치 니 기회를 잘 포착하시오." "알겠소." "내일 오전에 심목풍이 이곳에 도착하면 그는 악소채와 옥소랑군에게 먼저 도전을 받을 것이오." 백리빙이 끼어 들었다. "소영오빠가 이른 말이 있어요." "무엇이오?" "악언니는 심목풍의 적수가 못 되니 소녀에게 최대한 그들의 싸움을 말리도록 하라고 그랬어요." 우문한도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은 내가 적당히 할 테니 낭자는 걱정하지 마시오. 특히 내일 백리낭자는 절대로 함부로 움 직이지 마시오. 소릴 지르거나 해서 우리의 계획이 그르치면 큰일이니까요." "좋아요. 약속하겠어요." 우문한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대협은 요절할 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분이 죽었단 말을 듣고 반신반의 했었소. 그러 나 그 엄청난 불더미 속에서 살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했었소.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이 렇게 살아 왔으니 이건 기적이오. 여러분들도 이제 적이 마음이 놓일 테니 운기조식을 하는 것이 좋겠소. 내일은 한바탕의 치열한 격전이 있을 테니…" 우문한도는 백리빙에게 얼굴을 돌리며 다시 말했다. "나는 이미 낭자를 위해 숙소를 마련했소. 악낭자의 곁방이며 중간엔 한 겹의 휘장이 막혔을 뿐 이오. 낭자는 안심하고 운공을 하시오." 네." "그러나 한 마디의 말도 해서는 안 되오. 악낭자는 매우 귀가 밝아 낭 자의 한 마디로 곧 정체 를 밝혀낼 수 있으니까."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녀는 몹시 배가 고파요. 무엇이든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낭자는 방에 가 계시오. 그럼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다시 변장을 하는 것이 좋겠소." 백리빙은 다시 얼굴에 변장을 하기 시작했다. 약물을 바르고 수염을 달자 노인으로 변했다. 우문한도의 뒤를 따라 나선 백리빙은 꾸불꾸불한 통로를 얼마쯤 지나서 하나의 작은 방에 당도 했다. 백리빙이 들어서자 문은 소리없이 닫혔다. 방에는 나무침상이 한 개 준비되어 있었다. 침상 위에는 흰 이불과 요가 깔려 있었다. '이곳은 영당 뒤의 가장 좋은 방인 것 같구나. 필경 귀인을 맞으려고 준비한 방이다.' 백리빙은 침상으로 가서 걸터앉았다. 그러자 소복한 소녀가 음식상을 들고 들어왔다. 배도 고팠지만 음식 맛도 좋았다. 식사를 끝낸 백리빙은 침상에 앉아 운기를 조식하려고 했다. 그녀가 막 운기조식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악낭자!"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들려왔다. 그것이 옥소랑군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백리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문한도가 나를 이곳으로 넣은 것은 저 두 사람와 얘기를 엿듣도록 한 것이었구나.' 백리빙이 귀를 기울이는데 악소채의 음성이 들려왔다. "장대협이세요?" 옥소랑군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렇소. 내일 심목풍과의 결전에서 우리는 어쩌면 모두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오늘은 우리가 세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밤이오." 옥소랑군의 무거운 한숨이 들리고 다시 말이 이어졌다. "나는 악낭자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어떨는지요?" "들어오세요." 옥소랑군이 들어가는 기척이 들렸다. '악소채가 늘 거느리고 있는 두 시녀는 지금 방에 없나?' 백리빙이 궁금해 하는데 그녀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 옥소랑군이 묻는 소리가 들려 왔다. "두 시녀는…?" "바로 옆방에 있어요." "아, 그렇군요. 그 시녀들은 낭자를 매우 존경하고 있으니 내일 당신이 만일 심목풍의 손에 죽는 다면 그녀들도 따라서 죽겠지요?" "그녀들은 몇 해 동안 나를 따라 다니며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으니 말릴 수 없지만, 장대협은…" "오늘 영당 앞에서 낭자에게 이미 결심을 표명하였소. 이제 더 얘기할 필요는 없잖소." "나는 장대협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아 어떻게 갚을 길이 없군요." 땅이 꺼질 듯한 악소채의 한숨에 뒤이어 옥소랑군이 말했다. "무슨 보답이 있겠소? 이미 우리의 죽음이 임박했는데…" "죽을 줄 알면서도 왜 이 일에 뛰어 들려고 하지요?" "그것이 바로 애정이란 것이오." "허지만… 나는 당신에게 늘 무정하게 대했는데요?" "나는 이미 낭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소." "장대협은 장씨 가문에서 대를 이어야 할 독자예요." "낭자가 죽으면 내가 살 수 없으니 대가 끊어진들 어떻겠소?" "내가 무엇이기에… 나의 어떤 점이 좋으세요?" 옥소랑군이 서글프게 웃었다. "내가 만일 낭자의 좋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면 이토록 짝사랑으로 애태우진 않겠소." 악소채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장대협, 나의 두 시녀는 어때요?"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나무랄 데 없는 여인들이오." "소녀들은 아직 꽃도 피워보지 않았으니 죽이기에 아까와요." 옥소랑군이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낭자는 그녀들에게 아무 일이나 맡겨 어디로 보내는 것이 좋겠소." "이미 내일의 일을 알고 있으니 떠나지 않을 거예요." 악소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매우 신중한 어조로 다시 이었다. "단지 장대협께서 그녀들을 데리고 멀리 떠나는 길밖에 없어요." "내가 그녀들을 데리고…?" "그래요 그 길만이 그녀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어요." 옥소랑군은 화난 어조로 말했다. "알겠소이다. 나더러 그녀들을 맡으라는 것을 보니 낭자는 정말 내 진심을 모르는구려." "그게 아녜요. 장대협이 나에게 주는 정은 마음 깊이 새겨 두고 있어요. 다만 우리가 늦게 만난 것을 탓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내 얘길 마저 들으세요. 비록 나는 소영과 명분으로 얽히진 않았어요. 그러나 어머니의 유언을 거역할 수는 없어요. 그러므로 나는 소영을 남편으로 생각하니 장대협의 정의는 내세에나 보답할 수밖에 없어요." "소영은 악낭자를 두고서 또 백리낭자를 거느렸는데 낭자는 어째서 그에게 애정을 기울이시오?" 다시 악소채의 음성이 들렸다. "소영은 어머니가 유서에 결혼을 허락한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나를 아내로 생각지도 않 아요." "그럼 무엇으로 생각합니까?" "누나나 선배로 생각해요." "만일 소영이 낭자를 누나로 생각하고 우리가 사귀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나는 온 정성과 힘을 다해 그를 도와 주겠소." 옥소랑군은 문득 소영이 죽었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이미 죽었군요." "그래요. 그는 이미 죽었어요. 그러니 나도 이제 따라서 죽어야 해요." 악소채가 비장한 어조로 말하자 옥소랑군이 애끓는 탄식을 했다. "낭자는… 소영의 복수를 해야 하오." "그래요. 나는 소영의 원수를 갚으려는 거예요." "나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소." "무슨 생각이에요?" "우린 무공면에서 심목풍의 적수가 못 되오. 그러니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결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소." "물론이에요. 나는 남편의 복수를 하려는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무엇 때문에 목숨까지 걸고…" 옥소랑군이 허탈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허허, 낭자가 심목풍과 싸우다 죽는다 해도 소영의 원수를 갚은 것은 아니잖소?" "나는 원수를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단념하지 않겠어요." "만일 우리 둘이 힘을 합하면 심목풍을 이길 가망이 있잖겠소?" 악소채가 잔잔하게 웃었다. "이제보니 장대협께선 믿는 것이 있었군." "재수만 좋다면… 나는 고모님에게 영단과 무공을 얻은 적이 있소. 그녀는 자기 필생의 지혜와 노력을 기울인 결정이라고 했소. 나는 그 무공으로 심목풍과 대결할 생각이오." "그러니까 당신은 약간은 자신은 있는 것이군요?" 옥소랑군은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별안간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 었다. "만일 우리가 이긴다면 그것으로 소영의 원수를 갚는 것이지요?" "물론이에요." "소영은 심목풍의 손에 죽었소. 우리가 그 원수를 갚는다면 그도 지하에서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오. 원수를 갚아준 뒤에 우리는 그의 무덤을 만들고 삼년상을 치뤄준 뒤…" 갑자기 옥소랑군의 말을 끊으며 악소채가 괴로운 듯 소리쳤다. "장대협!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나에게 좀 생각할 여유를 주세요. 너무 머리가 무거워서…" "좋소. 그럼 나는 이만 가겠으니 낭자께선 신중하게 생각해 보시오.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소." "네. 안녕히 가세요. 멀리 나가지 않겠어요." 그러나 옥소랑군이 악소채의 방에서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리빙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악소채가 옥소랑군이 제시한 것을 응낙하면, 소영이 멀쩡히 살아 있으니 필경 큰 혼란이 생기겠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악소채에게 소영이 살았다는 것을 알려야겠다.' 백리빙은 이런 생각을 했으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악소채에 대한 질투심이 부글 부글 끓어 오르기도 했다. '그냥 놔둘까? 그럼 악소채는 옥소랑군에게 승낙할 것이고 소영은 자연 나에게로… 아니야. 그 럴 수는 없어. 내가 왜 이토록 야비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무거운 머리를 움켜 쥐고 고민하던 백리빙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알려주자. 그녀에게 소영이 살았다는 것을 어서 알려주자.' 백리빙은 문 밖으로 걸어 나가려 하다가 다시 멈췄다. 소영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불길 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 때였다. 문자락이 펄럭 흔들리더니 옥소랑군의 성난 얼굴이 나타났다. 옥소랑군을 본 백리빙 은 얼른 침상으로 올라가 앉았다. 옥소랑군이 침상 앞으로 걸어오며 격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모두 엿들었지요?" '내가 만일 입을 열면 내가 여자라는 것을 쉽게 알아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백리빙은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키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옥소랑군은 미간 을 잔뜩 찌푸리더니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벙어리요?" 백리빙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옥소랑군이 차가운 미소를 띠며 다시 물었다. "대개의 경우, 벙어리는 귀도 안 들리는데 당신의 청각은 어떻소?" 백리빙은 하마터면 말이 나올 뻔한 것을 급히 삼키며 머리를 끄덕였다. "내 말소리는 매우 낮은데 어찌 당신은 그리 똑똑히 알아 듣소." 백리빙은 속으로 찔끔했으나 머리를 흔들며 잘 알아 듣지 못한 척했다. 그러나 옥소랑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흥, 당신은 잘 알아 듣다가 말다가 하니 분명 벙어리 흉내를 내고 있군." 백리빙은 매우 난처해졌다. '만일 내가 계속 이대로 있다간 옥소랑군이 점점 의심만 커가게 될 것이다. 수를 쓰자.' 이렇게 생각한 백리빙은 두 손을 내두르며 어서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옥소랑군이 코웃 음을 치더니 오른손으로 백리빙의 팔목을 잡으려고 덤벼들었다. 백리빙은 급히 다리를 굽혀 옥소랑군의 손을 피하며 왼손으로 벽을 탁, 쳤다. 악소채의 주의를 끌어 이 위기를 모면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리빙이 가볍게 자기를 피하는 것을 본 옥소랑군은 흠칫 놀랐다. "이제 보니 당신은 정체를 숨기려고 수작을 부렸군." 말을 뱉으며 두 손으로 백리빙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만일 옥소랑군이 전력으로 공격했다면 백 리빙은 매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이는 것보다 백리빙의 정체가 궁금했으므로 가벼운 공격을 한 것이다. 백리빙이 역시 가벼운 동작으로 피하는 것을 본 옥소랑군은 계속 십여 초나 공격을 퍼부었으나 백리빙을 어찌할 수 없었다. "당신의 솜씨를 보니 분명 무링의 일류 고수인데 왜 반격하지 않소?" 백리빙은 악소채가 뛰어 들기를 기다리며 반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악소채가 나타날 기미 가 전혀 보이지 않자, 반격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으나 옥소랑군의 가벼운 공격 초식이 매우 예리한 것을 보고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백리빙이 대답을 않자 옥소랑군은 드디어 공격 수법을 바꾸었다. "귀하, 조심하시오? 나는 열 초 이내에 당신의 생명을 빼앗아 버리겠소." 백리빙은 이미 상대방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옥소랑군의 강한 장풍을 몸을 날려 피해 냈다. 그러나 옥소랑군은 잠시도 여유도 주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백리빙은 삼 초의 공격은 간신히 피해 낼 수 있었으나 사 초의 공격은 피할 틈이 없었다. '부딪치자!' 그녀는 오른손으로 옥소랑군의 장풍을 막았다. 펑! 두 장풍이 부딪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한 걸음씩 물러났다. 상대방의 장력이 의외로 센 데에 놀란 옥소랑군은, "흥, 당신은 나를 얕보는 것 같군요." 하며 다시 공격을 하려고 했다. 이 때였다. "장대협, 잠깐!" 어느새 들어 왔는지 악소채가 방안에 서 있었다. 옥소랑군은 악소채를 보자 금방 얼굴에서 살기를 지우고 미소를 띠며 뒤로 물러났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요?" "이 사람은 우리의 말을 엿들었소. 게다가 벙어리 흉내를 내는 것으로 보아 분명 심목풍이 보낸 첩자 같소." 이 말에 가장 놀란 것은 백리빙이었다. '이 사람은 무공만 높은 줄 알았더니 제법 경계심도 강하구나. 나를 심목풍의 첩자로 알고 악소 채까지 나는…' 백리빙은 두려움을 느꼈으나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백리빙의 얼굴을 뚫어질듯 쳐다보던 악소채가 머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무위도장과 우문한도는 모두 지모가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심목풍의 첩자가 들어오게 놔둘 리도 없고 이곳에 묵게 할 리도 없어요." 백리빙은 악소채의 말에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옥소랑군은 악소채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그 소코 영감과 우문한도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알겠어요. 그러나 내가 보기엔 저 분은 절대로 심목풍의 첩자기 아니예요." "설혹 첩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토록 추하고 기분 나쁜 영감을 낭자곁에 묵게 한 것은 무슨 이 유인지 모르겠소. 나는 가서 그 영감들에게 따져 봐야겠소." "그럴 필요 없어요. 저 분도 소영의 조상객인데… 찾아가서 따진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에요." 그러자 옥소랑군이 풀죽은 어조로 말했다. "좋소. 낭자의 체면을 보아 그 영감들을 한 번 용서해 주겠소." "그래요 그냥 들어가서 주무세요. 우린 내일 한바탕의 격전을 치러야 할 테니 피로하면 안 돼 요." "낭자의 말이 맞소. 내일 심목풍과 싸워야 되니 낭자도 어서 푹 주무시오. 그럼…" 옥소랑군은 가볍게 목례를 하더니 밖으로 걸어나갔다. 옥소랑군이 밖으로 나가자 악소채도 뒤따라 나가려고 했다. '결국 이 틈을 타서 알려 줘야겠다.' 백리빙은 이렇게 생각하고 몸을 날려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백리빙이 앞을 막아서자 악소채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 손을 쓸 자세를 취했다. 백리빙은 급히 몸을 굽혀 글씨를 썼다. '언니에게 긴밀히 할 말이 있어요. 옥소랑군이 들어선 절대 안 됩니다.' 이것을 본 악소채의 얼굴에 긴장한 빛이 스치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동생 백리빙이에요." 악소채는 흠칫 놀라며 백리빙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다시 무엇인가 생각한 듯, "우리 조금 있다가 만나요." 나직하게 말하더니 총총히 밖으로 사라졌다. 백리빙은 악소채의 두 뺨이 약간 붉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악소채에게 있어서 내가 나타난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침착하 고 신중하구나.' 백리빙은 자꾸 격동하는 마음을 안정시키기에 애를 먹고 있었다. '소영의 소식을 그녀에게 알리자!' '안 돼! 알리지 않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다.' '알려야 된다.' '안 된다.' 마음의 갈등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악소채가 조용히 들어 왔다. 그녀의 얼굴은 범할 수 없으리 만큼 엄숙해져 있었다. 악소채는 백리빙을 다시 한 차례 훑어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의 가면을 벗어봐요.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옥소랑군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어떡하지요?" "나에게 이미 준비가 있으니 걱정 안해도 좋아요." 백리빙은 머리를 끄덕였다. 재빨리 얼굴의 약물을 닦아내고 수염을 뜯어냈다. 악소채는 백리빙이 얼굴에 발랐던 약물을 닦아 내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자 가볍게 탄 식을 하며 말했다. "과연 동생이로군!" 그녀는 팔을 벌려 백리빙을 자기의 품 속에 끌어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이 많았지?" 백리빙은 그녀가 맨 먼저 소영의 소식을 물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자기를 위로해주자 가슴이 뭉클했다. "오빠의 기지(機智)로 우리는 심목풍 화진(火陣)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어요." 이 말을 듣자 악소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동생은?" 백리빙이 대답했다. "그는 심목풍의 영당을 섬멸하려는 음모를 알아차리고, 혼자서 심목풍이 이끄는 부하들의 실력 을 알아보러 갔어요." 악소채는 예쁜 눈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어째서 암암리에 나에게 한마디라도 해주지 않았을까? 내가 진작 마음 놓을 수 있게끔 말이야." 백리빙은 곧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그 불길에 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심목풍이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 어요." "뭣 때문에?" "심목풍이 오빠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반드시 다른 조치를 할 것이므로 아예 그가 모르 고 마음 놓고 있을 때 나타나서 심목풍이 손을 쓸 수 없도록 하려는 거예요." 악소채가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소동생은 심목풍과 정면 대결을 하려는 거야?" "오빠의 입으로 직접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 같아요." 악소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그는 늘 사람의 생명을 아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기의 생명은 조금도 아끼려 하 지 않는군." 악소채는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소영과 빙아는 어떻게 그 무서운 불길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지? 정말 놀라운 일이 야. 그 때의 얘기를 좀 들려주렴."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때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악소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정직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 법이라지만 기적같은 일을 용케도 구나." 백리빙이 말했다. "언니께서 여전히 그가 세상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못 들은 것처럼 해 주세요. 그는 저에게 이 사실을 누설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 내 얘기 안하지!" 그녀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건 그렇고, 소동생은 내가 심목풍과 대결하려는 걸 알고 있는지?" "그야 물론 알고 있지요. 언니가 영당에서 심목풍과 그런 약속을 할 때 우리는 그 자리에 있었 는 걸요." 악소채는 그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자기가 소영의 아내의 신분으로 나타났던 사실을 생각하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아! 소동생도 나빠." 백리빙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나무랄 수만도 없어요. 그가 만약 언니를 아는 체했다가는 모든 비밀이 탄로나고 말았을 테니까요…" "그런데 나와 심목풍의 대결에 관해서 소제는 어떻게 생각하지?" 백리빙이 대답했다. "그는 내일 오전 중에 영당으로 돌아온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심목풍과 생사를 건 싸움을 못하 도록 말릴 생각이에요. 그런데 이 동생이 언니를 위해 한 가지 걱정스러운 일이 있어요." 악소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옥소랑군의 상사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백리빙은 악소채의 백옥같이 희고 윤기 있는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무슨 방법인데?" 백리빙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말씀드려도 화내지는 마세요." 악소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해봐요." 백리빙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만약 언니가 소오빠와 빨리 결혼해 버린다면 옥소랑군은 스스로 상사의 정을 단념할 거예요." 악소채도 정색을 하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이미 빙아가 그런 방법을 말할 것이라고 짐작했었는데 과연 내 예측이 틀리지 않았군." 백리빙의 서늘한 눈동자는 진실을 담고 다그쳤다. "왜 그러세요? 이 동생이 얘기한 방법이 틀리기라도 했어요?" 악소채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시 나무 침상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나무 침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빙동생도 이리와서 앉아요. 내가 할 말이 있으니…" 악소채는 손을 내밀어 백리빙의 손목을 잡고 옆에 앉혔다. "내가 영당에서 한 말은 모두 들었겠지?"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내 모친의 유언이었어. 나는 그것을 거역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아서 그와 이러한 명분으로 함께 오래 있을 수가 없었어." "왜 그러세요?" 악소채의 단아한 얼굴에 처연한 빛이 떠올랐다. "나의 모친은 일찌기 금궁의 열쇠를 보전하기 위해서 멀리 망명을 했었지. 그렇지만 워낙 추격 해 오는 자가 많아서 그들과 싸우시다가 부상을 당했지. 우연히 소제의 부모께서 도와주셔서 당 분간은 소가에 머물러 있게 되었지만 끝네는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어. 모친께 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서를 남기셨는데 소영을 내게 맡긴다는 내용이었지."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고인의 유언이라면 명분이 뚜렷한 것인데 왜 사양하십니까?" "그 때 소제는 삼음절맥의 증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결코 이십 세를 넘길 수 없어 보였지. 그 래서 어떤 현숙한 아내를 맞이하더라도 장차 과부로 남겨야 할 운명이었던 거야. 모친께서 그들 에게 은혜를 갚으라는 뜻에서 했던 유언이지. 그리고…" 백리빙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언니, 왜 말을 하다가 중단하세요?" 악소채는 수줍은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내가 그와 결혼해서 소가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주고, 소영이 죽은 다음에는 그 아이와 소영 의 부모를 어디든 안전한 곳에 모신 후 비로소. 모친의 복수를 해달라고 하셨어." 악소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유언을 지키지 못했어. 그 뿐더러 사정이 달라져서 소동생이 기연(奇緣)을 얻어 일신에 절세의 무공을 익히게 되었으니 모친의 유언은 자연적으로 그 실현을 볼 수가 없게 돼 버렸지." 백리빙이 의아하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비록 사정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언니에게 유리하게 된 것이 아니예요? 이제 소오빠의 병도 완치되고 강호를 진동시킬 만한 대협객이 되었으니 두분이 인연을 맺기에 알맞은 시기인 것 같아요." 악소채는 고개를 저었다. "내 모친의 원수를 갚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승에 대한 사랑과 의리의 빚이 아직 남아 있으니 내 어찌 마음 놓고…" "모친 원수를 갚는 일이라면 소오빠께서도 사양할 수 없는 일이에요. 무엇하다면 이 동생이라도 도와 드리겠어요." 악소채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내 모친의 원수는 무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말할 수 없이 기지가 있는 사람이야. 그러므 로 소제가 그 일에 상관한다면 그는 또 한 사람의 강적을 만들어 내는 결과가 돼 버려… 그 뿐더 러 내가 그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해 냈으니 소제가 수고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동생, 내가 이런 일들을 알려주는 뜻이 어디 있는지 알아?" 백리빙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는데요." 악소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빙아가 소영을 잘 모시기 바래요. 이 언니는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아마 그와 오랫동안 함 께 있을 수는 없을 거야. 이 언니는 모친의 유언대로 마음 속에 그를 남편이라고 새겨두긴 하겠 지만 아내의 구실을 다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러니 동생이 언니를 대신해 주어."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는 제가 언니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악소채는 백리빙의 복스런 손을 어루만지면서 말을 받았다. "동생같이 아름답고 총명한 아내라면 그도 부족해 하지 않을 거야." "언니는 잘못 알고 있어요. 그는 언니만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어요. 그는 언니를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는 알 수 있어요." 백리빙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악소채의 손을 힘껏 움켜 쥐면서 분연히 말을 이었다. "그는 언니에게 대해서 불길 같은 열정을 품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열정을 감히 겉으로 표현하 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열정은 갈수록 더 강렬해졌는지도 몰라요. 그건 결코 이 동생이 대신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악소채는 서글픈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래요. 빙아의 말은 모두 진실인지도 몰라. 하지만 빙아가 말했듯이 그는 나를 사랑한다는 말 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 우리들의 정은 어디까지나 누이와 동생간의 정일 뿐이야…"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그는 감히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을 뿐이에요." 악소채는 손을 들어 긴 머리채를 매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어." "그게 누군데요?"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 백리빙은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천천히 말했다. "저는 비록 언니를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언니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어요. 언니의 일이 곧 저와 오빠의 일이에요. 오빠가 심목풍을 죽인 다음에 우리는 다시 힘을 합하여 언니의 복수를 해요." 악소채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흐르 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언니는 동생을 설득시킬 수가 없나봐." 백리빙이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러나 언니, 오해는 하지 마세요. 이 동생의 뜻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어. 나와 항상 함께 있자는 거지?" "네, 바로 우리 셋이 같이 있자는 겁니다." 악소채는 답답하다는 듯 약간 말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 언니는 많은 시비에 얽매어 있어 발길이 닿는 곳마다 반드시 살생이 뒤따르고 있어 요. 그 사실을 동생은 모르지?" "그런 줄은 몰랐어요." 악소채는 가볍게 탄식했다. "동생도 이젠 쉬어요. 무슨 일이든 내일 다시 새롭게 의논하기로 하고…" 악소채는 백리빙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 하룻밤이 쉬 밝았다. 백리빙이 아침까지도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문 밖에서 우문한도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낭자, 일어나셨소?" 백리빙이 대답했다. "네. 일어났습니다. 우문선생님이세요?" 방문에 내려친 휘장이 걷히면서 우문한도가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엄숙해 보였 다. 그의 수중에는 두 장의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악낭자가 낭자에게 편지 두 통을 남겨 놓았소." 백리빙은 깜짝 놀랐다. "악언니는 어떻게 됐어요?" "이미 떠난 지 오래요." "어느 방향으로 갔어요? 빨리 뒤쫓아 가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때가 늦었어요. 악낭자는 이미 두 시간 전에 떠나갔어요." 백리빙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떻게 하면 좋지요?" "낭자는 그녀에게 소영의 소식을 알려 주었소?" "저는 부득불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우문한도가 타이르듯 말했다. "일이 이쯤 됐으니 낭자께서는 조급하게 굴지 마세요. 이 두 장의 편지는 악낭자가 낭자에게 드 린 것이오. 한 통은 낭자로 하여금 소영에게 전해주도록 한 것이고 한 통은 바로 낭자에게 드린 것이오. 우선 낭자께서 편지를 읽어 보세요. 그런 다음에 다시 생각해 봅시다." 백리빙은 두 장의 편지를 받아 들었다. 첫 번째의 편지 겉봉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빙동생, 이 편지는 소영에게 전해 주기 바래요.> 백리빙은 그 편지를 품 속에 간직했다. 그리고 두 번째의 편지가 백리빙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백리빙은 편지를 뜯으면서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장공자는 어떻게 되었어요?" "옥소랑군 말씀이오?" "그래요 그분도 갔어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낭자는 모두 세 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그 중의 한 장은 옥소랑군에게 주라는 것이었어요. 그 래서 저는 먼저 사람을 시켜 그것을 옥소랑군에게 전한 다음 이 편지를 들고 이리로 온 겁니다."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악언니가 옥소랑군에게 준 편지에는 뭐라고 비어 있었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옥소랑군은 그 편지를 받아 읽고 난 후 마치 미친 사람처럼 뛰어 나갔다 는구려." 백리빙은 그 이상 물어 보지 않고 편지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빙동생에게! 이 언니는 사문으로 들어가는 길에 소문을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을 달려왔었지.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심목풍과 결투를 하여 그와 같이 죽는 것도 두려워 않았더니 복이 있는 사 람은 하늘도 아는지라 천만 다행히 소영과 동생이 무사했으니 이 마음 기쁨의 감격을 억제치 못 할 정도야. 또한 이곳에는 쟁쟁한 인재들이 많이 있어 이 못난 언니가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음을 느꼈어. 더욱이 내일 소영이 나타나게 된다면 반드시 옥소랑군은 마음이 변하여 소영과 맞서게 될 것이 므로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던 거야. 그리고 우문선생은 뛰어난 지략을 갖고 있으니 틀림없이 소영을 도울 좋은 방법을 강구할 줄로 알아. 게다가 이 못난 언니는 많은 시비의 원인이 되어 있으며 또한 마음속에는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 으므로 도저히 소영의 곁에서 머물 수가 없는 처지이지. 이 언니가 죽지 않는다면 우리 자매는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야. 그럼 짧은 지면에 많은 사연을 다 적을 수가 없으므로 이만 붓을 놓겠어. 끝으로 몸조심 하기를 바라며 찬바람 부는 밤에… 악소채 씀> 백리빙은 단숨에 편지를 다 읽고 나서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우문한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백리낭자!" 백리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악언니의 편지 사연은 모두 우리 자매간의 사적인 이야기에요."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우문한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낭자는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그리고 좀 쉬면서 정신을 새롭게 하시오. 악낭자와 옥소랑군이 함께 갔으므로 사정이 크게 달라졌소. 소대협은 영웅이며 담이 큰지라 그가 만약 이곳에 있었다 면 목숨을 걸고라도 나섰을 것이오. 앞으로 어려운 고비가 많이 있을 테니 낭자는 몸을 보살펴 두었다가 어려운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할 겁니다." 우문한도는 포권을 한 다음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이 때 백리빙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 우문한도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악언니의 편지에는 선생의 지략이 뛰어나므로 반드시 소오빠를 도와 심목풍을 대항하는 데 큰 힘이 될 거라고 했어요." 우문한도는 미소를 지었다. "악낭자가 저를 너무 추켜 올렸군요." 백리빙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우문선생, 우리 악언니와 소오빠께서는 우문선생을 언제나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어요. 저는 당신의 솜씨를 믿어요." 우문한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 나를 알아 주시므로 저 역시 힘을 다하여 그를 돕고 있습니다."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선생의 가슴 속에는 전략이 가득 차 있으며 선견지명이 있다는데 다른 일에 대해서도 역시 그 와 같은 솜씨를 나타낼 수 있는지요?" "낭자, 무슨 일이신데요?" 백리빙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머리 속에 고민이 가득 차 있어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군요.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요." 우문한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가 낭자의 고민을 덜어 드릴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저를 믿으신다면 한 번 말씀해 보십시오.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낭자를 위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백리빙이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님은 관상도 볼 줄 아시는지요?" 우문한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약간…" 백리빙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소오빠가 요절(夭折)할 상인지 어떤지를 말씀해 보세요." "소대협은 상서로운 상이오. 그래서 저는 이번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소!" 백리빙이 말을 가로챘다. "그렇다면 이후에는 소오빠에게 다시는 그와 같은 위험한 고비가 없겠어요?" "제가 소대협의 관상을 자세히 뜯어 보지 않았으므로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소. 하지만 소대협 의 무공은 강호에 뻗치고 있으니 후일 몇 번의 파란곡절을 겪는다고 해도 쉽사리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백리빙이 대꾸했다. "알았어요. 그는 아직도 많은 위험한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말이군요?" 우문한도는 정색을 하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지요. 천추에 이름을 빛낼 기반을 닦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백리빙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악언니는 어떻게 보세요?" 우문한도는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악낭자에 대해서는 저는 단언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우문한도는 천천히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악낭자는 그 인품이 엄숙하고 농담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하고 있지만 감 히 접근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으며 그 녀의 미소만 한 번 얻으면 죽어도 좋겠다는 정도입니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기실 천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내기도 어려울 만큼 뛰어난 인재지요. 그런데다 또한 무 림의 딸로 태어났으니… 아아! 그녀가 만약 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더라면 한 마을에 물의를 일으 킬 정도로 그쳤을 텐데, 어쩌다가 무림의 딸로 태어나서 이처럼 많은 고수들의 불붙는 혈전을 일 으켜 놓는지…"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그것은 악언니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일 거예요." "그녀와 같은 상을 소위 내미지상(內媚之相)이라고 하지요. 얼핏 보아 그녀는 그다지 아름답다고 는 할 수 없지만 누구든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 마치 빨려 들어가듯 정을 쏟아놓기 마련이 오. 그래서 나중엔 스스로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빠져 들어가고 마는 것이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우문한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다행히 악낭자가 자중하여 낭자들에게 얼음장처럼 차갑게 대하니 망정이지 그녀가 만약 조금이 라도 방탕했더라면 반드시 엄청난 분쟁을 일으켜 놓았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제 그만 이야기를 끝냅시다. 나는 다만 지금 우리들 사이에 주고받는 이야기가 바깥에 새어 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낭자, 아무 염려 말고 마음 놓고 쉬십시오. 심목풍이 오면 제가 사람을 시켜 모시러 오겠습니 다." 그는 말을 마치자 백리빙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백리빙은 우문한도가 나가자 곧 그의 말대로 조식을 하기 위해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 나 머리 속에 천사만려가 떠올라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166. 결전의 징후(徵候) 백리빙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 때였다.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고 바라보니 한 명의 시녀가 장검 한 자루와 한 벌의 흑색 경장을 들고 와서 낮은 소리 로 말했다. "우문선생이 빨리 옷을 갈아 입고 무기를 지니고 영당으로 오시라고 했습니다." 백리빙은 곧 옷을 갈아 입고 보검을 차고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에서는 우문한도와 무위도장, 손불사 등이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백리빙은 곧 그들에게로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심목풍이 왔어요?"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곧 올 겁니다. 낭자께서는 영당의 휘장 뒤에 숨어 있다가 제가 부를 때 나오시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휘장 뒤로 가서 앉았다. 우문한도는 이 영당을 설계하는데 상당히 머리를 쓴 것이었다. 휘장 뒤에는 캄캄하기 이를 데 없어 아무리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그 뒤를 볼 수가 없게 돼 있지만 반대로 휘장 뒤에서는 영 당의 전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환히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문한도가 낮은 소리로 말힌다. "악소채와 옥소랑군은 이미 함께 떠났으므로 현재로서는 손노선배님이 싱목풍에게 도전하는 방 법밖에 없소. 그러나 심목풍이 만약 도전에 응하지 않는다면…" 손불사가 말을 가로챘다. "이 늙은 거지는 지금부터 당신의 지시에 따르겠소."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만약 심목풍이 응한다면 노선배님께서는 조심해서 신뢰(神雷)를 터뜨리십시오." 손불사가 말을 받았다. "그런데 이 늙은 거지는 싸우는 도중에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미처 생각이 들지 않을지도 모르 니 여러분께서 역시 도와주어야 할 것이오." 우문한도는 간단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우문한도는 무위도장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아무래도 도장께서도 나서야 할 것 같소. 하지만 그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되오. 혹시나 그가 갑자기 손이라도 쓸지 모르니까…" 이 때 갑자기 초곤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화산장의 심대장주께서 오셨소이다." 무위도장이 주렴을 젖히면서 천천히 걸어나갔다. 백리빙이 휘장 너머로 바라보니 심목풍이 네 사람을 거느리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금화부인과 남옥당 외에 한 사람은 붉은 가사를 입은 화상이었는데 그는 수중에 한 쌍의 구리 갈고리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청삼을 입은 안색이 창백한 젊은이로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 았다. 무위도장은 합장을 하고 심목풍 일행을 맞았다. "심대장주는 약속을 잘 지키는군요." "이 심모는 좀 일찍 온 것 같소…" 심목풍은 시선을 돌려 사방울 두리번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악낭자는 지금 어디 있소?" "심대장주께서는 꼭 악낭자와 싸워야겠소?" "그건 이 심모의 의견이 아니오. 다만 나의 몇 분 친구들이 모두 악낭자를 만나려 하고 있을 뿐 이오." 무위도장은 안색이 창백한 소년을 힐끗 바라보았다. "여러분들께서 꼭 악낭자를 만나시겠다면 수고스럽지만 좀 기다리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심목풍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남옥당이 말을 가로채고 나섰다. "악소채가 도대체 여기에 있소, 없소?" 무위도장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악낭자와 여러분이 약속을 할 적에 빈도가 보증이라도 섰단 말이오? 마치 빈도에게 악낭자를 내놓으라고 몰아 세우는 듯하니 좀 지나친 것 같구려!" 이 때 손불사가 갑자기 휘장 뒤에서 나타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심목풍, 이 늙은 거지를 알아 보시겠소?" "개방의 장로이시며 일대의 협인이신데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소?" 손불사가 말을 받았다. "원 별말씀을… 이 늙은 거지는 곧 흙으로 돌아갈 나이이며 너무 오래 살았으므로 이제는 산다 는 것이 오히려 지겹소이다. 그래서 내 죽기 전에 무림 동도를 위해서 한 가지 좋은 일을 할 생 각이오." "대명을 날릴 만한 일이라도 있소?" "이 늙은 거지는 먼저 심대장주와 생사의 판가름을 하고 싶소. 서전(序戰)을 벌이잔 말이오. 그 러나 심대장주께서 이 늙은 거지의 도전을 받아 줄 용기가 있을는지…" 심목풍은 의외인 듯 미간을 찌푸렸다. "손형, 나와 싸우고 싶단 말이오?" "그렇소. 그리고 어느 쪽이든 죽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기로 함이 어떻소?" 심목풍은 두 눈에 광채를 번쩍이며 영당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형의 호기에는 탄복했소이다." 손불사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도전을 받아주시는 거요?" 심목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아직 아니오." 손불사는 초조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까닭이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오." 손불사는 화를 벌컥 냈다. "그렇다고 도전에 응하지 않는단 말이오?" "일이 상식에 벗어나는 것을 보니 반드시 무슨 음모가 있을 것이오. 손형이 정녕 싸우고 싶다면 소제는 다른 사람을 지정해서 함께 어울리도록 해 주겠소…" 손불사가 채 대꾸도 하기 전에 심목풍이 홍의화상을 가리켰다. "대사께서 수고해 주실 것이외다." 그러자 홍의화상은 성큼 앞으로 나서며 심목풍을 가로막았다. "귀하가 싸우기를 원한다면 소승이 모시겠소." 손불사는 이런 생각을 했다. '우문한도의 예측은 과연 보통 사람과는 다르구나. 그러고 보니 이 늙은 거지는 진 것이 틀림없 군.' 손불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심목풍! 대가 만일 이 늙은 거지의 도전에 응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강호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거요." 그러자 심목풍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장부는 천추의 대업을 다툴 뿐이지 일시적인 감정에 휩쓸릴 필요는 없소." 홍의화상은 이미 수중의 갈고리를 휘두르며 냉랭하게 말했다. "먼저 소승을 누른 다음 심대장주께 도전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그는 말을 마치자 곧 몸을 번쩍이더니 손불사에게로 육박해 왔다. 그리고는 손을 휘둘러 한 줄 기의 금망(金芒)을 그려내는데 날카롭기 그지없으며 또한 오싹한 살기가 느껴졌다. 손불사는 깜짝 놀라서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화상은 냉소를 터뜨리고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쌍갈고리를 휘둘러 좌우에서 공격해 들어 왔다. 손불사는 재빨리 양장을 쳐냈다. 투 줄기의 강력한 암경이 밀려나가 화상의 공격을 막았다. 이 틈에 손불사가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손을 멈춰라!" 홍의화상은 쌍갈고리를 내리면서 말했다. "소승은 일찍부터 늙은 거지의 이름을 들어왔지만 이처럼 싸움을 겁내는 비겁한 인물인 줄은 몰 랐소." 손불사는 비록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억지로 분을 달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늙은 거지가 심대장주의 말을 들어 보았을 때, 그대는 아직 이 늙은 거지와 싸울 자격이 없 소." 홍의화상은 벌컥 화를 냈다. "먼저 소승을 누른 다음 큰소리를 쳐도 늦지 않소." 손불사는 몸에 산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신뢰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혹시 그 신뢰가 갈고리에 닿아서 폭발할까 겁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돌아서서 휘장 뒤로 들어갔다. 홍의화상이 왼손을 쳐들었다. 값자기 갈고리가 공중에서 맴돌더니 한 덩어리의 금망으로 화해 곧장 기습해갔다. 그러자 무위도장이 장검을 휘둘러 한 아름의 검망이 공중에서 번쩍였다.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며 홍의화상이 던진 갈고리가 장검엔 부딪쳐 밀려났다. 홍의화상이 왼손을 쳐들어 다시 날아오는 갈고리를 잡아 챘다. 눈깜짝할 사이에 이들 두 사람은 각자 자기의 솜씨를 나타냈다. 영당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 은 은근히 칭찬해 마지않았다. 홍의화상은 갈고리를 다시 받아 든 후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무위도장이오?" 무위도장은 장검을 짚고 앉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소. 빈도가 바로 무위도장이오. 그런데 대사의 법명은?" 홍의화상은 역시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승은 일정한 거처가 없거늘 법명은 밝혀서 무엇하겠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현재 무당파 중에서는 도장의 검술이 제일 높다고 하니 소승은 한 번 가르침을 받을까 하오." 무위도장이 대답했다. "대사의 갈고리를 던지는 솜씨가 제법이어서 소림의 절기 회선비발과 흡사한데…" 홍의화상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소림 말고도 천하에는 절기가 많습니다. 도장께서는 손을 쓰시오." 그가 소림의 제자라는 것을 끝내 시인하지 않자 무위도장은 하는 수 없이 장검을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 성명을 밝히려 들지 않으니 우리는 결국 무공으로 승부를 가리는 수밖에 없구려!" 무위도장은 천천히 걸어 나갔다. 이 홍의화상은 솜씨가 비상하였으므로 무위도장은 강적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상대방을 조금도 경시하지 않았다. 그는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더욱 경계를 강화했다. 무위도장은 화상의 앞 삼 보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때 홍의화상은 쌍갈고리를 교차시켜 쳐들었다. 그 모습이 아주 괴상했다. 무위도장은 검을 비스듬히 내밀었다. 그것은 곧 태극혜검 중의 첫머리 초식이었다. 쌍방은 피차가 모두 공력을 집중시키고 있었으므로 일단 초식이 발출되면 무시무시한 일격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막 공격을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불호(佛號) 소리가 들려오며 한 사람이 나타 났다 "도장께서는 손을 멈추시고 뒤로 물러서기 바라오." 무위도장은 그 자세대로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곧 회색 가사를 입을 한 노승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그 노승은 손에 계도(戒刀)를 들었는데 나 이는 예순 가량 되어 보였다. 그는 바로 소림의 고승 정광대사(正廣大師)였다. 무위도장은 낮은 소킥로 물었다. "대사께서 어떤 일로?" "소승은 그 대사가 갈고리를 날리는 법이 제법일 뿐만 아니라 바로 도장의 말씀대로 우리 소림 회선비발이므로 도장을 대신해서 그와 한 번 겨뤄 보려는 거요." 무위도장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빈도가 양보하겠소." 정광대사는 수중의 계도를 눕혀서 앞가슴에 받들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사실은 우문한도가 휘장 뒤에서 영당 안의 상황의 변화를 살펴보고는 암암리에 모든 지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손불사는 이미 휘장 뒤로 들어가 우문한도의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품 속의 폭약을 꺼 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선생의 선견지명에 이 늙은 거지는 탄복할 뿐이조. 이후부터는 선생의 명령에 따르겠소." 손불사는 공손한 태도로 폭약을 우문한도에게 건네 주었다. 우문한도는 미소를 지으면서 신뢰를 받아들였다. "아마 오늘의 싸움에서는 이 신뢰를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소이다. 소대협이 이미 영당에 있소." 손불사는 다시 낮은 소리로 물었다. "어디에 있소? 이 늙은 거지의 눈에는 어째서 보이지 않을까?" "만약 저의 판단이 틀리지 않다면 영당 문 앞에 서 있는 황삼을 입을 노인이 바로 소대협일 거 요." 손불사가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과연 영당 입구에 예순 살 가량 돼 보이는 노인이 죽장을 짚고 서 있었다. 그러나 손불사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무엇을 보고 단정할 수 있소?" 우문한도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죽장을 보시오. 아주 새 것이오. 대나무 밭에서 방금 잘라 온 것 같지 않소? 만약 진짜 노인의 지팡이라면 그렇게 새 것일 리가 없소." 손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탄복했소. 정말 탄복했소." 그러나 손불사는 갑자기 양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심목풍이 알아채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는 아직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소." "그렇다면 심목풍이 선생보다 그 지략에 있어 떨어진단 말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이미 오늘 오전 중에 소대협이 이곳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심목풍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오." 손불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이 때 정광대사는 홍의화상의 앞에 나서며 경멸에 찬 어조로 말했다. "소림파는 무림의 정의를 위해 싸워 왔을 뿐만 아니라 역대의 선사(先師)들 중 이를 위해 뜨거 운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분들이 적지 않소." 홍의화상은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소림파의 일이거늘 소승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그러자 정광대사는 엄숙하게 그를 꾸짖었다. "그대가 만일 얼굴의 인피가면을 벗는다면 내 당장 그대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소." 홍의화상은 역시 그런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승은 날 때부터 이와같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대사께서는 너무 신경을 쓰시지 말기 바라오." 정광은 나직이 염불을 외었다. "그럼 그대의 발법은 소림의 무공이오?" 홍의화상은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불문의 사람은 선장을 사용하지 않으면 계도나 비발 종류를 사용하기 마련이며, 그 장법 이나 발법에 있어서도 역시 별 차이가 없거늘 대사께서는 어찌 저를 무조건 소림의 출신이라고 우기는 거요." 정광대사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대가 정녕 소림사의 출신이 아니라면 소승은 이를 해명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오." 홍의화상은 잠시 어리둥절하는 눈치더니 이어서 곧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소승의 출신을 따지기 전에 그대는 먼저 소승의 갈고리를 누른 다음 얘기를 하시오."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갈고리를 휘둘렀다. 그러자 쌍갈고리는 두 줄기의 차가운 빛을 발하며 정광대사의 좌우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정광대사는 냉소를 한 다음 계도를 휘둘러 지용금련(地勇金蓮) 일초를 쳐내니 검빛이 번쩍이며 곧 장검은 홍의화상의 앞가슴을 향해 찔러갔다. 모두들 이 광경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하는 싸움 방식이구나. 정광대사의 이 한 칼은 이미 급소를 노리고 있 지만 거기에 못지않게 홍의화상의 쌍갈고리도 역시 정광대사를 죽이겠구나…' 무위도장조차도 깜짝 놀라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화상들은 정말 목숨을 내걸고 싸울 셈인가?' 이 때였다. 갑자기 흥의화상이 양 손을 거두며 쌍갈고리를 회수하여 재빨리 두어 걸음 물러났다. 정광대사가 냉소를 터뜨렸다. "그대는 소림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발법은 역시 소림의 것이구려," 홍의화상은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쌍갈고리를 휘두르며 재빠른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금빛을 번쩍이며 종횡무진하게 나는 갈고리 공세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정광대사 역시 재빨리 수중의 계도로써 반격을 전개했다. 두 사람의 동문고수가 한바탕 격투를 전개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홍의화상이 휘두르는 한 쌍의 갈고리가 정광대사를 갈고리 그림자 속으로 몰아 넣은 것 같았다. 그러나 정광대사는 겉으로는 허술한 것 같았지만 기실 홍의화상의 갈고리를 제 어하고 있었다. 보통 강호의 사람들은 이 싸움의 내막을 잘 몰랐지만 무위도장과 같은 역전의 고수들은 정광대 사가 이미 홍의화상의 갈고리를 누르고 초마다 기선을 제압하여 흥의화상의 갈고리는 맥을 못 추 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목풍 역시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심목풍은 곧 양미간을 찡그리며 큰 소리로 외쳤 다. "손을 멈추시오!" 홍의화상은 즉시 힘껏 쌍갈고리를 휘둘러 정광대사의 계도를 막으며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다. 정광대사는 정색을 하면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왜 싸움을 피하는 거요?" "두 분의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을 테니 싸움을 계속해 봤자 피차 상할 따름이오?." 정광대사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심대장주는 눈이 삐었구려! 소승은 이미 승산이 있었는데." 심목풍은 껄껄 너털웃음을 웃어젖혔다. "아, 그랬던가요? 저는 전혀 몰랐구려." 정광대사는 홍의화상에게 시선을 옮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소림 일문은 강호에서 언제나 무림 동도의 존경을 받아 왔으며 역대에 걸쳐 모두 무림 정 의를 수호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생각해 왔소. 무수한 사조(師祖)들이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헌신짝같이 그 보람이 오늘날의 소림을 만들어 놓았소. 그런데…" 이 때 심목풍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가로챘다. "남형, 그대가 가서 이 소림의 고승과 맞서 보시오." 그 말을 듣자 남옥당은 곧 검을 뽑아 들고 정광대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변변치 못한 남옥당은 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싶소." 정광대사는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린 것을 보자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대가 소승과 손을 쓰려고?" 남옥당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소. 대사께선 조심하시오." 남옥당은 말을 마치자 곧 손을 휘둘러 양검을 찔러냈다. 그러자 그의 검끝에서 두 송이의 검꽃 이 밀려 나와 곧장 정광대사의 두 군데의 대혈을 향해 날아갔다. 정광대사는 남옥당의 검세가 놀라을 만큼 빠른 것을 보자 곧 뒤로 물러나서 칼을 휘둘러 맞섰 다. 남옥당은 일단 장검을 휘둘러 기선을 제압하게 되자 속공을 가하여 무수한 검꽃을 뿌리며 끊임 없이 정광대사의 급소를 향해 찔러댔다. 정광대사는 비록 수중의 계도를 힘껏 휘둘러 열세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남옥당의 검세의 변 화는 너무도 괴이했고, 또한 초마다 정광대사의 요혈을 노려 왔으므로 정광대사는 수비에 급급하 여 반격을 가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싸움은 격렬하여 눈깜빡할 사이에 오십여 합을 싸웠다. 남옥당의 검세는 시종 장강대하처럼 밀려 왔고, 정광대사 역시 안간힘을 써서 버티었다. 그러나 정광대사는 이미 기진맥진할 단계였다. 그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비오듯이 흘러내렸다. 우문한도는 휘장 뒤에 숨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백리빙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광대사의 공력은 남옥당에게 뒤지지 않지만, 워낙 휘둘러대는 남옥당의 활발한 검세에는 당 하지 못할 것 같소. 곧 다른 사람과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 이십여 합 내에 반드시 남옥당의 검세 에 상하고 말 것이오." "그렇다면 제가 나가 볼까요?" "소대협이 옆에서 관전하고 있으면서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달리 무슨 속셈이 있는 것 같소. 그러니 낭자는 아직 손을 쓸 시기가 아니오."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그는 어차피 심목풍을 상대해야 할 텐데 그리 쉽게 손을 쓸 수가 있겠어요?" "무위도장이라면 충분히 남옥당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므로, 내 생각 같아서는 그가 나설 것 같 소." 이 때 과연 무위도장이 일어섰다. "대사, 손을 멈추시오." 정광대사는 이미 남옥당의 검세에 몰려 연방 후퇴하고 있던 차에 무위도장의 고함 소리를 듣자 곧 뒤로 물러나려 했다. 이 때 갑자기 남옥당의 냉소가 터져 나왔다. "소대로 물러서시겠소? 너무 싱겁지 않소?" 그는 이렇게 외침과 동시에 갑자기 일초를 쳐냈다. 순간 그 일검은 정광대사의 왼팔을 찔렀다. 정광대사의 왼팔에서 선혈이 뿜어 나왔다. 무위도장은 이 광경을 보자 대갈일성을 하며 재빨리 뛰어나가 장검을 휘둘렀다. 한아름의 싸늘 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것이 바로 무당파 검술의 정화인 태극혜검 중의 성하도괘(星河倒掛)인 일초였다. 이 일초는 숱한 검빛을 유성처럼 번쩍이며 무수한 검꽃을 뿌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눈 뜰 새가 없도록 몰아쳐 갔다. 그러나 남옥당은 장검을 휘둘러 해시신루(海市蜃樓) 초식을 전개하여 한 조각의 검막을 형성하 여 몸을 보호했다. 순간 쨍그렁! 소리를 내면서 두 검이 맞부딪쳤다. 검빛은 사라지고 사람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 다. 남옥당의 장삼이 검에 찢어지고 그의 몸 두어군데 가벼운 상처가 생겼다. 심목풍이 냉랭하게 웃어젖혔다. "당당한 무당파의 장문인이 암기습을 하다니 사람들의 저주가 무섭지도 않소." 무위도장도 역시 냉소를 터뜨렸다. "심대장주께서 차륜전법을 지시한 처사는 옳다고 생각하시오." 심목풍은 두 눈에 광채를 발하며 주위를 살피다가 영당 입구에 서 있는 황삼을 입은 노인에게 멈췄다. 그러나 그는 곧 시선을 다시 남옥당에게 돌렸다. "남형의 상처는 어떻소?" "옷이 찢어지고 약간 긁혔을 뿐이니 아직 싸울 기력이 있소." 남옥당은 말을 마치자 갑자기 앞으로 두어걸음 나가서 검으로 무위도장을 가리켰다. "도장은 이 남모와 결투를 벌일 용기가 있소?" 무위도장은 코웃음을 쳤다. "귀하야말로 이 빈도와 결전을 벌일 용기가 있소?" "물론이오. 만약 도장께서 저와 대결할 용기가 없다면 물러가서 악낭자를 내보내시오." 무위도장은 담담하게 웃었다. "귀하가 여기에 온 뜻은 바로 악낭자를 만나고 싶어서인 것 같지만 애석하게도 악낭자는 귀하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남옥당이 성난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오?" 무위도장은 냉소를 터뜨렸다. "악낭자가 그대를 만나려고 했다면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오." 남옥당의 안색이 돌변했다. "악낭자가 정말 떠났소?" 무위도장이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소. 그녀에게는 그대들과 만나려고 한 약속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갔는지도 모르오. 그 리고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단지 그대들이 보기 싫어서 이곳을 떠났는지도 모르고…" 167. 꼬리를 내리는 여우 남옥당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무위도장과 결투를 하려던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말았 다. 그는 무위도장을 힐끗 바라보고 뒤로 물러났다. 심목풍은 담담하게 웃었다. "남형, 무위도장과 결투는 어떻게 하겠소?" 남옥당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심목풍을 쳐다보았다. "오늘의 싸움은 보통 강호상에서 무술 시합을 하여 이름을 떨치는 것과 그 성격이 다르지 않소? 그런데 굳이 내가 무위도장과 생사를 건 결투를 할 필요는 없지 않소?" "나도 남형이 무위도장과 꼭 생사를 가려냈으면 하는 마음은 없소. 하지만 남형이 그처럼 큰소 리를 친 이상 갑자기 싸움을 그만 두려면 무슨 구실이든 있어야 한다는 거요." 그러나 남옥당은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저와 심대장주께서 처음 약속할 때는 제가 소영을 유인해 오면 심대장주께서는 저를 도와 악낭 자를 사로잡아 주겠다고 했소. 그러나 지금 소영은 이미 죽고 악소채 또한 여기에 와서 조의까지 표했소. 그런데도 심대장주께서는 악낭자를 사로잡아 주기는커녕 도리어 옥소랑군과 도망치게 하 였으니 애당초의 약속과는 결과가 달라졌소. 저는 천하 영웅들의 비웃음을 받아가며 당신을 도와 왔지만 심대장주께선 언약을 지키려 들지 않으니 웬일이오?" 심목풍은 그 말을 듣자 두 눈을 부릅떴다. "목하 소영의 시체를 보지 못했으니 그가 정말 죽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으며, 또한 악소채는 아 직도 이 세상에 살아 있거늘 남형께서 어찌 그다지도 성급한 말을 하시오?" 남옥당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심대장주께서는 애초부터 저와의 약속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 같소. 그러니 저도 심대장주를 위해서 목숨을 걸 필요가 없소." 심목풍은 손은 내저으면서 말했다. "남형이 그렇게 말한다면 나 역시 더 권할 생각이 없소. 만약 남형이 다시 이 시비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는 남형 마음대로 하시오." 남옥당이 다시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잠자코 소영의 영위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소영의 영 위 앞에 조용히 서서 무슨 말인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심목풍은 남옥당의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눈꼴이 사나왔지만 억지로 참고, 시선을 무위도장에 게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남옥당이 도장과 싸울 용기가 없다 하니 제가 도장을 모시고 몇 초 겨뤄 볼까 하오." 무위도장은 비록 자기는 심목풍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거절할 수가 없어 태연하게 대답했다. "좋소. 심대장주께서 원하신다면 빈도는 물론 모시겠소." "좋소. 이 심모가 맨손으로 그대의 무기와 맞서겠소." 무위도장은 심호흡을 하고는 검을 들어 막 출수하려고 했다. 이 때였다. 갑자기 대갈일성이 들려왔다. "도장, 잠깐만 참으시오!" 우문한도가 휘장 뒤에서 느릿느릿 나오고 있었다. 심목풍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미 귀하가 이 일을 주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내 예상이 들어 맞았군…" 우문한도는 담담하게 웃었다. "심대장주께서는 아직도 저를 못 잊고 있는 것 같구려. 그러고 보니 소제가 오히려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요?" 심목풍은 냉소를 터뜨렸다. "그 때 금궁 밖에서는 소영이 그대의 생명을 구해 주었지만 지금 이 세상에는 그대의 생명을 구 해 줄 자가 없을 것 같소. 당신이 아무리 교활하다 해도 오늘만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우문한도는 담담하게 웃었다. "저는 심대장주께서 그 소원을 성취시킬 수 있도록 하겠소." 심목풍은 여전히 코웃음을 쳤다. "우문형은 이 심모가 그대를 죽일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시오?" 우문한도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저는 심대장주께서 물론 이곳에 오실 때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리라고 믿소. 하지만 저 역 시 안배해 놓았소." 심목풍은 갑자기 우문한도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문형이 어떤 놀랄 만한 배치를 해 두었는지 한 번 보고 싶구려!" 우문한도는 물러서기는커녕 도리어 심목풍을 향해 마주 걸어가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의 머리는 비상하게 좋다고 자부하고 있소. 그런데 심대장주께서는 저의 이 머리를 가져갈 용기가 있을는지?" 심목풍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문한도야말로 자기의 일격을 감당해 내지 못할 인물 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그가 오히려 물러나지 않고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자 갑자기 이 상한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우문한도는 미소를 지었다. "심대장주, 왜 또 갑자기 손을 쓰지 않으려 하오?" 심목풍의 두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그는 우문한도를 한참 동안 노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언제나 죽기를 제일 두려워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이처럼 대담해졌소?" "사람은 늘 변하는 거요. 나는 과거에 죽음을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대담하게도 죽음을 필연적인 사실로 받아 들이고 있소. 그대의 무공이면 일격에 나의 심맥을 끊어 놓을 수도 있지만 가소롭게 도 그대의 성격은 의심이 많아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구려." 우문한도가 지금 폭약을 품고 심목풍의 장력을 빌어 그 폭약을 터트려 그와 함께 죽으려 한다는 것을 안 무위도장은 저절로 우문한도 앞에서 머리가 수그러졌다. 일대의 악당 두목인 심목풍은 그 기지가 놀라운지라 무위도장의 표 정을 살펴 본 다음 담담하게 웃었다. "우문한도, 그대가 갑자기 이처럼 대담해진 것을 보니 반드시 무슨 다른 음모가 있는 것 같구려. 일이 상식에서 벗어날 때는 언제나 그 까닭이 있는 법. 노부는 평생을 신중이란 두 글자로 살아 왔으니, 우문선생의 기지는 또 헛탕을 치게 됐군요." 심목풍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두 눈동자는 우문한도의 몸에서 떼지 않았다. 뭔가 알아내려는 듯 한 눈치였다. 우문한도는 드디어 웃음을 터뜨렸다. "심대장주는 과연 총명하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총명하여도 이 우문한도가 갑자기 죽음을 두 려워하지 않는 이유만은 모를 것이오." 그러나 심목풍은 금화부인을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부인, 당신은 백선아를 지니고 왔소?" "물론이오." 심목풍이 말을 이었다. "우문선생 역시 독물을 사용할 줄 아는데, 그대의 백선아가 그를 부상시킬 수 있을는지 잘 모르 겠구려." 금화부인이 말을 받았다. "심대장주께선 제가 시험해 보기를 바라고 있소?" 심목풍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소. 우문한도가 갑자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니 반드시 무슨 내막이 있는 것 같 소. 그는 원래 그러한 호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령 그러한 기개가 있는 위인이었다고 하더라 토 결코 내 손에 쉽게 죽기를 원치 않을 것이오. 그는 반드시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소." 금화부인이 말을 받았다. "무슨 계략일까요?"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그는 나와 함께 죽으려는 계책을 꾸미고 있는 것 같소." 금화부인은 그 말을 듣자 우문한도를 힐끗 한 번 바라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무슨 방법으로 당신을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 하는지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군요?" "우문한도는 매우 음흉한 사람이오. 저는 반드시 그런 음모가 있다고 믿고 있소. 아마도 그는 몸 에 화약을 지니고 있는 것 같소. 그래서 나로 하여금 그 폭약을 격중시키도록 하여…" 심목풍은 잠깐 말을 끊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 었.다. "그가 무슨 계략을 쓰든 그 백선아의 독은 방지하지 못할 테니 당신이 백선아로 그를 상대하면 틀림없을 것이오." 심목풍은 금화부인에게 강제적인 언질을 준 적은 없었다. 재삼 설명하여 설득시켰으므로 금화부 인 역시 이에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곧 오른손을 품속에 넣어 대나무통 같은 물건을 꺼내 들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 다. "우문선생, 이 백선아의 독성이 어떤지 그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상세한 설명은 필 요 없겠지요?" 이 때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무위도장과 손불사는 비로소. 심목풍이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강호에서는 다만 심목풍의 위인이 악독하다고만 들어 왔는데, 말할 수 없이 신중한 인물이군!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자다…' 우문한도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부인은 그 백선아를 생명처럼 중히 여기시니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금화부인은 그 말을 듣자 깔깔 웃어젖혔다. "심대장주의 명령이시리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우문선생께서는 조심하세요." 금화부인은 말을 마치자 오른손을 쳐들었다. 순간 흰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곧장 백선아가 우문 한도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금화부인이 백선아를 던짐과 동시에 한 줄기의 암경이 재빨리 맞 은편에서 날아왔다. 이어서 무위도장이 장검을 휘둘러 일검을 찔러냈다. 그 바람에 백선아는 암경의 저지를 받아 기세가 대뜸 좌절되었으며 급기야는 무위도장의 일검과 백선아가 부딪쳤다. 순간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백선아는 공중에서 원을 그리더니 무위도장의 장검에 달라붙었 다. 무위도장의 장검은 강철을 진흙 베듯 하고, 백 번이나 불에 달궈 만들어진 천고의 신검이라 일 컬어 왔지만 백선아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무위도장의 검에 감겼다. 이 때 심목풍이 갑자기 냉소를 터뜨렸다. "좋소. 개방의 장로와 무당의 장문인이 힘을 합해 한 여류를 상대하는구려! 그대들이 의협의 인 물이라고들 스스로 떠벌이고 있는 처지에 부끄럽지도 않소?" 손불사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이 늙은 거지는 독물만 상대했을 뿐이오." 손불사는 곧 달려나와 일장을 날렸다. "심대장주, 이 늙은 거지와 싸울 용기가 있소?" 심목풍은 곧 오른손을 쳐들어 벽공장력을 뻗쳐내며 말했다. "늙은 거지! 당신은 그따위 잔재주를 믿고…" 순간 혼먼지를 일으키며 두 줄기의 장력이 부딪쳤다. 심목풍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장력을 쳐낸 후 곧 몸을 날려 이 장 밖으로 물러나 버렸다. 손불사는 순간 전신이 진동됨을 느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목풍의 공력은 과연 대단하구나.' 심목풍은 애당초 손불사가 자기에게 도전해 온 것으로 보아 무슨 음모가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장력을 날린 것인데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으로, 무위도장 역시 소영이 괌화부인을 백화산장에 파견해 둔 앞잡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녀의 백선아를 해치고 싶지 않아 곧 손목을 떨치자 백선아는 저절로 장검에서 미끄러져 땅바닥 에 떨어졌다. 그러자 금화부인이 곧 달려나와, 백선아를 주워서 다시 품속에 넣었다. 또한 우문한도는 엄숙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서 맨손의 그 청의소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청의소년은 이곳에 온 후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매우 침착하 보 였으며 옆에서 싸우고 있는데도 전연 무관심한 태도였다. 이 때 문 입구에 섰던 황의 노인이 걸음을 옮겨 대문 입구를 막아섰다. 심목풍은 영당으로 시선을 돌리며 자기가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돌아갑시다!" 그는 앞장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 때 대문 입구에는 관전하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심목풍이 걸어오는 것을 보자 뿔뿔이 옆 으로 비켜났다. 다만 황의노인만이 손에 죽장을 쥐고 문을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 우문한도가 침착한 목소리로 외쳤다. "심목풍! 걸음을 멈춰라." 심목풍은 우문한도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양미간을 찌푸 렸다. "우문한도, 그대의 담이 갈수록 커지는구나!" 우문한도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지금의 처치는 그대가 좌상의 손님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적대관계에 있거늘 심목풍이란 이름을 불러 주는 것도 대접이다." 심목풍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했다. "좋아. 그런데 무슨 할 말이 있나?" 우문한도는 심목풍과 오랫동안 같이 있었으므로 그의 표정만 보고도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 었다. 그래서 심목풍이 지금 잔뜩 노해서 가까스로 분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대협의 생사가 아직 미지수이니 천하에서 심목풍과 단독으로 싸울 사람은 거의 없소." 심목풍이 말을 가로챘다. "알고 있으면 됐소." 우문한도는 말을 계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됐소." 심목풍이 역시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함께 덤벼도 무방하오." 우문한도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심대장주께서 조금 전에 일생 동안 신중하게 살아 왔다고 했소. 그러나 제가 보는 바로는 심대 장주의 이번 계산은…" 심목풍은 말을 가로챘다. "이번 계산은…?" 우문한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는 네 명의 고수만 끌고 오면 족히 우리들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러나 기실 지금 강호에서 그대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목숨을 버리고 대항할 각오가 돼 있으므로 이제는 당신의 위압에 굴복할 사람이 없게 됐소. 소대협이 그대에게 살해된 이후 무림 인들의 감정이 모두 격앙돼 있소. 그러므로 목하 이 영당의 주위에 만도 삼백 명 이상의 무림동 도들이 매복해 있소. 그 중에는 고수라 칭할 수 있는 사람만 하더라도 사, 오십 명을 넘을 것이 오…" 심목풍은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우문한도의 말을 가로챘다. "그렇다면 당신네들은 나를 포위해서 공격할 작정이오?"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심목풍 한 사람만 공격하겠소. 이것 역시 그대가 무림 고수들을 상대할 때 항상 쓰던 수법 중 의 하나요. 당신은 독약으로 그들에게 목숨을 빼앗겠다고 위협하겠지만 우리는 저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을 하는 것이므로 죽어도 여한은 없소." 심목풍은 큰소리를 쳤다. "개가 아무리 많아도 호랑이를 가두어 놓을 수는 없는 법!" 우문한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장 남옥당은 그대의 지시를 받지 않을 것이오. 당신은 그에게 악낭자를 붙잡아서 그의 아내 를 삼아 주겠다고 거짓말을 하여, 그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그대에게 조력토록 한 것이오. 그러나 이미 그 거짓말이 탄로난 이상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할 것이 분명하오." 심목풍이 말을 받았다. "허튼 수작! 그대들이 고의로 악소채를 숨기고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뒤집어 씌울 작정이오?" 여태껏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그 청의소년이 갑자기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심대장주께서는 정말 악소채를 사로잡은 후 남옥당의 아내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소?" 심목풍은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건…" 청의소년은 두 눈썹을 치켜 올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만약 심대장주께서 건망증이 심하지 않으시다면 저에게도 역시 그런 언약을 했다는 사실을 기 억하실 것이오." 항상 교활하기로 이름 난 심목풍도 이번에야말로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그는 짐짓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세상의 미녀들이 하나 둘이 아닐진데 어찌 여러분들께선 악낭자만을 원하는 것이오? 나는 여러 분들의 심사를 이해하지 못하겠소." 청의소년은 눈꼬리를 치켜 뜨며 말을 받았다. "저는 심장주에게 묻는 것이오. 어서 대답을 하시오. 저와 과연 무슨 언약을 했었소?" 심목풍은 우선 여러 사람 앞에서 무안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은 일변하여 청의소년을 진어 삼킬 듯 쏘아 보았다. "내가 그 말을 했다 하여도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악낭자는 하나뿐인데 몇 사람이 다투 니 어찌 된 일이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나에게 그녀를 잡아달라는 부탁이니 어느 누구의 부탁 을 들어 주어야 하는지 모르겠소." 그러자 청의소년은 불끈 성을 내며 음성을 높였다. "군자는 함부로 언약을 하지 않는 법이오. 하물며 심대장주는 천하를 통일할 포부를 지닌 분이. 아니오! 그렇게 마구 신용 없는 언약을 하면 강호의 비웃음을 살 것이오." 그의 이 말은 심목풍의 본질을 꿰뚫었으며 심목풍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그의 교활함은 적시에 발휘되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묘안을 만들어냈다. 그는 곧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꾸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함부로 언약을 하는 것이 아니오. 나에게는 그것에 대처할 묘책이 있단 말이오. 어디 말해 보시오." 심목풍은 잠시 사이를 두고 무겁게 말을 꺼냈다. "내가 악낭자를 잡는다 하여도 그녀는 한 사람뿐 아니겠소? 나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그 녀를 둘로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잖소. 그래서 두 분께서는 어느 한 분이 양보를 하든지…"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청의소년이나 남옥당의 표정은 생사를 초월한 것이었다. 심목풍은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다음 말을 이었다. "어느 한 명이 죽어야 되오. 물론 무공으로 판가름을 하는 것이오. 두 사람 중에서 어느 누구든 승자가 악낭자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오." 청의소년은 쓴웃음을 띠고 말을 받았다. "그 방법도 좋으나 한 가지 흠이 있소. 그것 말고도 불초에게 더 좋은 방법이 있소이다." "그렇소? 무슨 방법이오?" "만약 내가 지금 남옥당을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오?" 청의소년은 오히려 엉뚱하게 되묻는 것이었다. "허허… 노부도 그것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할 수가 없소." 그의 말뜻은 대답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청의소년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심대장주께서 대답하시지 못하신다면 불초가 스스로 결정해야 되겠군요. 그리고 먼저 물어볼 일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소?"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초가 남옥당을 죽인 후에는 틀림없이 악낭자는 내 것이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겠 지요?" "그럴지도 모르오. 강호에는 악낭자를 차지하려는 인물들이 그 사람만이 아닐 테니까. 그러나 그 들은 노부와 원한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오. 그러니 자연적으로 노부가 손을 쓸 것이니 조금도 염려 마시오." "불초는 강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오." 심목풍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청의소년은 머뭇거리기만 하고 좀 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심목풍은 기다리다 못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백화산장의 사람이오?" 청의소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누구요?" "그것은 나중에 말하리다. 먼저 남옥당부터 죽이고…" 그는 남옥당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남옥당은 아직도 소영의 영전에서 넋을 잃고 있었다. "소형! 미안하오. 내 그런 뜻에서 소형을 괴롭힌 것은 아니었소. 지금 생각하니 지난 모든 일이 내 잘못이었구려. 소형, 지하에서나마 편안히 쉬십시오." 그는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애통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닥치고 있는 위험 을 모르고 있었다. 주위에 모여 있는 군호들도 갑작스럽게 변하는 사정을 예의 주시하였다. 우문한도도 뒤로 물러나 청의소년에게 널찍한 길을 터 주었다. 그러나 남옥당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소영의 영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우문한도가 큰기침을 몇 번 하였다. "남형! 조심하시오." 그 소리를 들은 청의소년이 냉랭한 웃음을 우문한도에게 보냈다. "흐흐… 안심하시오. 우문선생께서 염려하시지 않아도 불초는 남옥당에게 암수를 쓰지 않을 것 이오." 그는 정말로 남옥당에게 석자 정도의 사이를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구경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남형! 당신은 소영의 영위에 깊은 애도를 표하는구려. 남형이 그를 유인하여 밀럼으로 넣은 것 이 후회가 되오?" 남옥당은 벌써 우문한도가 경고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렇소이다. 내가 그를 죽음으로 유인한 것을 후회하고 있소." 그러자 청의소년은 무엇이 우스운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는 남형의 적이 아니오? 소영이 죽지 않았다면 당신이 죽었을 것이오. 악낭자를 영 원히 손에 넣을 수 없단 말이오." 남옥당은 냉랭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소. 그러나 악낭자는 당신도 소유할 수 없소. 그 낭자는 하늘나라의 선녀와 같은 존재요. 그녀에게 배필이 있다면 소영이오.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녀의 배필이 될 수는 없소." "그러나 지금은 소영이 죽지 않았소? 그래도 악낭자를 아내로 맞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오?" 남옥당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녀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소." 청의소년의 표정에 갑자기 살기가 서렸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금방이라도 손을 쓸 것 같았다. "그렇소? 남형도 아니고 나도 아니라? 그것 참 묘하군." 그는 돌연 오른손을 날려 남옥당의 가슴께를 일격했다. 남옥당은 옆으로 한 발 비켜서며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였다. 청의소년이 다시 오른손을 휘두르니 번쩍이는 푸른 빛이 쏜살같이 날았다. "흥!" 남옥당은 코웃음과 함께 등에 멘 장검을 뽑아 큰 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쨍그랑!" 남옥당이 장검에 청의소년의 암기가 떨어졌다. 그는 상대의 일격을 막은 후 연이어 두 초식을 공격했다. 싸늘한 빛이 번쩍이더니 검꽃이 사방 으로 튀었다. 청의소년은 몸을 날려 경쾌하게 남옥당의 두 초식을 모두 피했다. 남옥당은 두 초식이 실패하자 전보다 더욱 날카롭게 장검을 휘둘렀다. "이얏!" 외침과 함께 장검을 길게 찔러갔다. 싸늘한 검광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어렵게 상대의 앞으로 질 주해갔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청의소년은 남옥당의 검꽃에 말려들었다. 남옥당은 워낙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 그는 상대가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수십 초를 날 았다. 두 사람의 검이 종횡으로 날랐다. 한 사람은 막고 한 사람은 공격하니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단연 남옥당이 우세하게 보였다. 구경꾼들은 모두 무림의 인물들이지만 두 사람의 날카로운 검초는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남옥당과 청의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만 검광만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서, "앗!" 하는 외마디 비명이 들리더니 이내 검이 멎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훌쩍 떨어졌다. 구경꾼들의 눈에 뜨인 것은 비틀거리는 남옥당과 미소를 띤 청의소년이었다. 남옥당은 잠시 비 틀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청의소년은 차가운 눈빛으로 쓰러진 남옥당을 노려보더니, 심목풍에게 고개를 돌렸다. "불초가 승리를 거두었소이다." 심목풍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노부의 뜻이 아니었소." "흐흐… 그러나 심대장주께서는 반대하시지 않으셨소. 그가 백화산장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것은 맞는 말이오. 어느 누구라도 나 심목풍을 배반하는 사람은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이오." 사방에서 구경하던 군호들은 남옥당이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었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전격 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심목풍이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냉랭히 입을 열었다. "노부가 악낭자를 사로잡게 되면 틀림없이 무형에게 드리리다." 청의소년은 정중히 포권을 하고 말을 받았다. "불초는 먼저 감사드리겠소이다." 그리고는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심목풍은 영문을 몰라 잠시 어리둥절하고는 물었다. "그것이 무슨 뜻이오?" "불초는 삼대장주와 손을 맞잡는 것으로 맹세를 하고 싶소이다. 심대장주께서 오늘 불초에게 약 속하신 것을 훗날 잊지 않게 말이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노부는 일생 동안 누구와도 격장으로써 약속을 한 적이 없지만 좋소. 오늘 그대와 처음 으로 격장 맹세를 하겠소." 심목풍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없는 영광이오. 불초가 처음으로 격장 약속을 하다니 뜻밖의 일이오. 불초 도 언제까지나 이 날을 잊지 않겠소이다." 청의소년은 흔쾌히 일장을 내어 심목풍의 오른쪽 손바닥을 쳤다. 구경하는 사람들 눈에는 그저 가벼운 악수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청의소년의 손과 심목풍의 손이 맞닿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심목풍의 호탕했던 웃음 은 싹 가시고 안색이 무섭게 변했다. 그의 커다란 눈에서는 살기등등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양미간은 비통한 빛을 띠었다. 철의소년은 그의 손바닥을 친 후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말을 꺼 냈다. "대장주께선 전날, 불초의 몸에 엉큼한 수작을 부린 적이 있지요?" 청의소년은 고소를 잃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불초의 기혈을 찌르지 않았었소?" 그러자 심목풍은 별안간 앙천대소를 하였다. "하하… 그것 말인가! 하하…" 그의 웃음은 미친 맹수 같았다. "그부는 항상 지혜가 많은 사람을 존경해 왔소. 그런데 당신은 여러 군호들 앞에서 노부를 망신 주었구려. 노부에게 독수를 내린 그 기지는 감탄할 만하오. 노부는 항상 조심성이 많고 상대를 믿 지 않는데…" 청의소년은 냉랭한 웃음을 지었다. "원 별말씀을. 심대장주의 지혜는 아무도 뒤따르지 못할 것이오. 불초도 그것은 인정하는 바이 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들은 적인가 친구인가?' 구경하던 여러 군호들은 서로 쑥덕공론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무위도장과 손불사도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문한도만은 무엇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심목풍은 담담히 웃음을 띠고 말을 꺼냈다. "무형이 나에게 사용한 독은 어떤 종류의 독이오." 청의소년은 싱글싱글 웃으며 심목풍을 놀리고 있었다. "그 독침은 칠독침이라고 부르오. 급소에 맞지만 않았다면 아마 일 주일이 걸릴 것이오. 그러니 앞으로 일 주일은 아무 탈이 없을 것이오. 만약 심대장주께서 불초의 말을 못 믿고 일 주일을 넘 긴다면 끝내는 생명을 잃고 말 것이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심목풍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일주일이 되기 전에 해약을 먹으면 깨끗이 나을 수 있소." "무형은 그 해약을 지니고 있소." 심목풍의 음성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청의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약이야 있지만 지금 수중에 가지고 있지는 않소." "그럼 어디에 있소?" "한 마리의 독산 몸 속에 숨겨 두었소이다." 심목풍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반문했다. "독사의 몸에? 그게 정말이오?" "불초는 거짓말을 배우지 못했으니 정말로 유감이오." 심목풍은 대단히 다급해진 모양이었다. "그 독사가 다른 사람에게 피살되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불초는 그 해약을 다시 만들 수 있소." "쓸 수 있는 약을 만들자면 그 시일이 얼마나 걸리오?" 청의소년은 손가락 세 개를 꼽아 보였다. "약 삼 일이 걸릴 것이오." "그럼 무형께서 새로 해약을 만드신다면…" 청의소년이 말을 가로챘다. "불초에게 탈이 없고 심대장주께서 약속을 지키신다면 자연 해약이 만들어질 것이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불초도 심대장주께 한 가지 묻고 싶소이다." "무슨 일이시오?" "심대장주께서 불초의 기혈을 짚은 것에 무슨 영향이 있소?" "무형도 그것이 궁금하시오?" 청의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대장주의 수법은 매우 악랄하였소. 불초는 두 시간 동안이나 운기조식을 하였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소." 심목풍은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그것은 노부의 독문 수법이오. 그러니 어느 누가 손을 쓰더라도 그 기혈을 풀지 못할 것이오." 이번에는 묘하게도 청의소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언제 발작이 되오?" "대략 보름은 걸릴 것이오. 만약 보름 사이에 노부가 손을 쓰지 않으면 무형은 피가 굳어져서 죽음을 당할 것이오. 보름이오…" 그제서야 청의소년의 표정이 밝아졌다. "괜찮구려. 불초는 이번에도 심대장주의 간계에 말려드는 줄 알았는데 심대장주께서 불초보다 먼저 목숨을 잃게 되니 조금은 마음이 놓이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무형에게 보호를 받아야 되겠구려. 하하하." 두 사람의 기묘한 암투에 우문한도가 끼어들었다. "두 분께선 아직까지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으셨소?" 심목풍이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오?" 우문한도는 남옥당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남형은 일찍 손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데 어째서 모르는 척하시오? 일부러 그를 죽이려고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오?" 남옥당은 벌렁 자빠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중상으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심목풍은 그제서야 생각난 듯 남옥당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무형이 손을 쓴 것이니 보통 솜씨로는 어려울 것이오." 우문한도는 담담한 웃음을 띠었다. "남형은 비록 우리들의 적이지만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구려." 심목풍은 우문한도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우문형이 언제부터 그렇게 인자해졌소? 혹시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이 아니오?" 그의 말에는 확실히 우문한도를 비웃는 뜻이 들어 있었다. "우문형은 그를 구할 생각이시오?" 우문한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문형은 그를 구할 자신이 있소?" "모르겠소. 그러나 능력껏 노력하는 것이오. 그래도 그의 목숨을 살릴 수 없으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겠소." 심목풍은 냉소를 띠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우문형께선 남의 장사지내주는 직업을 갗고 계신가 보오." 우문한도는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크게 소리쳤 다. "남형을 데리고가 치료해 주어라." 그러자 몇몇이 나와 쓰러져 있는 남옥당을 들고 나갔다. 청의소년은 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흥!" 하는 코웃음과 함께 우문한도에게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불초가 듣기로는 우문형께서 백화산장에 적을 둔 적이 있다던데?" 우문한도는 주저없이 받았다. "그렇소. 당신처럼 심목풍의 사탕발림에 속았었소." 청의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문형의 재주가 비상하다던데요. 학문도 깊고 점술에도 뛰어나며 의리(醫理)까지도 알 고 계신다구요? 더구나 모행기술(五行奇術)에도 능통하시다니 그것이 정말입니까? 불초는 아무래 도 믿지를 못하겠구려." 이렇게 말하는 청의소년의 눈빛은 이상하게 빛났다. 그것을 우문한도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음, 저놈은 손을 쓰려는구나. 그렇다고 내가 미리 일장을 보낼 수도 없고…' 그는 암암리 진기를 모으고 미소로써 대답했다. "원 별말씀을 다하시오. 무형께선 너무나 저를 추켜주시지 마시오." 청의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단정한 말투를 잃지 않으면서 교묘히 우문한도를 놀렸 다. "아니오. 불초는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우문형에게 얼마나 많은 재주가 있는지 알려는 것 이오." "그렇소? 무형은 무엇을 묻고 싶소?" 청의소년은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우문형께서 아마 이것만은 모르고 있을 것이오. 불초가 어떻게 해서 남옥당을 이겼는지…?" 우문한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오.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소. 그러나 알아내려고 하면 전연 모를 것도 아니오." 청의소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냉랭히 말을 꺼냈다. "우문형은 알고 있단 말이오? 불초는 믿을 수 없소. 우문형께선 어디 말씀해 주시겠소? 불초가 무슨 수로 남옥당을 이겼겠소?" "그는 당신의 무공에 다친 것이 아니라 암수에 걸린 것이오." "피차 싸우는데 무공으로 하든 암기로 공격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고 적을 물리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진정한 승자가 아니겠소." 우문한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그러나 당신이 사용한 암수는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이오." 그 순간 청의소년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다른 사람의 암기는 쇠로 만든 것인데 당신 것은 쇠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물건이오." 청의소년은 별안간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우문형은 그 생명체가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오?" 우문한도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놈은 무척 건방지군.' "독사가 아니면 일종의 세소(細小)한 독물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그 이름을 밝힐 수는 없구려." "그렇다면 우문형은 반만 맞추었소. 다른 반은…" 청의소년은 여기까지 말하고 돌연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소매 속에서 조그맣고 검은 물체 가 튀어 나왔다. 그 물체는 일직선으로 우문한도의 얼굴로 덮쳐 왔다. 우문한도는 벌써부터 짐작했던 일이라 재빨리 손을 뻗어 막았다. 그 물체는 우문한도의 얼굴로 덮여 왔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어깨로 붙었다. 그러나 우문한도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일장을 뻗을 때 막았으리라 믿고 있었다. 이 때, 우문한도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우문선생, 움직이지 마세요." 우문한도는 무의식중에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와 동시에 한줄기 은빛이 번쩍였다. 은빛이 우문한도의 어깨를 스치는 순간 검은 물체가 땅으로 떨어졌다. 땅바닥에는 세 치 정도의 지네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청의소년은 몸부림치고 있는 지네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굉장히 독한 바늘이군…" 그는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우문한도는 지네에 꽂혀 있는 독침을 보고 대뜸 백리빙이 구해 주었 알아차렸다. 그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저 지네는 분명 악독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만약 북해의 한독빙백침이 아니었더라면 오늘 목 숨을 부지할 수도 없었겠다.' 우문한도가 이런 생각으로 넋을 잃고 있으려니 청의소년이 버럭소리를 질렀다. "그 낭자가 누구요? 당신은 틀림없이 죽을 것인데 낭자가 구해 주었구려." 그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백리빙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쩌면 좋을까? 우문선생이 하도 위험하기에 엉겁결에 손을 썼지만 심목풍이 나를 모를 리도 없고 또 북해의 독문침을 보고 나를 알아차린다면… 나와 오빠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심목풍이 알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 우리의 생명에도 지장이 있을 것이다. 이거 야단 났네.' 백리빙은 우선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몸을 숨기기로 하였다. 청의소년이 몇 번 반복해서 불렀지만 나서지 않았다. 이 모양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심목풍이 지네가 죽은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한참 동안 지네에 꽂혀 있는 독침을 살피더니 안면이 굳어졌다. "북해의 한독빙백침이로군…" 우문한도는 냉랭히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소. 바로 북해의 독문이오. 과연 심대장주는 견식이 넓소이다. 한눈에 그것을 알아맞추시 니… 심목풍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백리낭자가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이오?" "당신은 북천존자를 두려워하는구려…" 심목풍은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백리낭자가 살아 있느냐고 묻는 것이오." "그녀가 만약 살아 있다면 우리들에게 일대 경사요. 그리고 그녀가 죽었다면 그 외에 누가 또 있겠소? 북천존자가 아니겠소? 그의 딸의 복수를 하려고 벼를 것이오." 우문한도의 이 대답은 지극히 교묘하였다. 상대에게 아리송한 대답을 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북천존자까지 들추어 그를 두렵게 만든 것이었 다. 약기가 하늘같은 심목풍도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는 두려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고는 물 었다. "북천존자가 벌써 이곳에 왔단 말이오?" 우문한도는 냉소를 보냈다. "서로 친구가 아니니 그런 대답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보오. 그렇지 않겠소?" "내 그럴 줄 알았소. 아까 여자의 음성이 들렸는데…" "백리낭자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소대협도 죽지 않았을 것이오." 심목풍은 단호히 손을 흔들었다. "아니오. 절대로 그들은 죽었소. 북해 한독빙백침은 백리낭자 혼자서 만 사용하지 않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상대의 약점을 잡은 이상 그대로 놓치지 않았다. "이 독침은 북해 빙궁의 독문 암기요. 그것은 빙궁 안의 사람만이 익힌 것으로 다른 사람은 지 닐 수도 없소." "그럼 우문형은 저 휘장 뒤에 북천존자가 있다는 말이오?"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그가 와 있다 하여도 좋고 없대도 좋소. 그리고 백리낭자가 죽었다 든가 살았다는 것도 당신 마음대로 생각해 보시오. 나에게서 이 사실을 알아 내려고 한다면 괜히 쓸데없는 심기만 낭비할 것이오. 미안하오이다." 심목풍은 코웃음을 쳤다. "흥! 늙은 것이 아직도 교활하군." "피차 마찬가지지!" 심목풍은 눈길을 돌려 금화부인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지금 몇 가지 독충을 지니고 있소?" "세 개요." "좋소! 우리를 막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그 독충을 날리시오." 그리고는 청의소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무형도 마찬가지요. 노부의 지시에 따라 지니고 있는 암기를 모두 사용하시오." 청의소년은 대답 대신 금화부인을 바라보았다. '저 부인은 각종 독물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다는데. 오늘에서야 그것을 볼 수 있겠군.' 금화부인은 앞으로 홀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심대장주께서는 너무나 흥분하고 계시군요. 적과 친구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독수를 쓰잔 말이 에요?" 청의소년이 말을 받았다. "저는 중원과 묘강이 어떻게 다른 독수를 구사하는가를 보고 싶소. 불초도 부인의 독수를 배우 고 싶소."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훗날 둘만의 시간을 갖고 독수로써 승부를 가릴 수도 있으니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세요." 청의소년은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반가운 말씀이오. 부인의 명성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보지는 못했소. 불초가 강호에 발 을 들여 놓은 이상 불초보다 강한 독수를 지닌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없소." 심목풍이 앞으로 불쑥 나서며 두 사람의 말다툼을 말렸다. "두 분께선 노부의 손님이오. 지금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니오. 오히려 힘을 합하여 적을 물리칠 때요." 청의소년은 음흉스런 미소를 띠었다. "염려 마시오. 부인과 대결은 이미 정해졌지만 날짜는 아직 멀었소. 그러나 떠나기에 앞서 심대 장주와 흥정할 것이 있소이다." 심목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간단한 것이오. 심대장주께선 불초의 기혈을 짚어 약점을 잡으려 했소. 그러나 다행히 불초도 독수를 뻗었으니 서로 약점을 나누고 있는 것이오. 비록 불초에게 유리한 입장은 아니지만 최소 한 비등하게 서로를 이용하고 있소. 더군다나 심대장주께선 많은 적을 눈앞에 두고 있으므로 신 중하게 생각하여야 될 것이오. 불초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확실한 흥정을 하자는 것이오." 심목풍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눌러 참았다. '어디 두고 보자!' 그리고는 짐짓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좋소. 무슨 조건이오? 무형의 마음을 노부에게 보이시오. 노부가 넓은 아량으로 양보할 수도 있 소이다." 청의소년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무겁게 말을 꺼냈다. "첫째, 우리는 언제까지나 친구로서 지내자는 것이오. 그리고 백화산장에서의 지위도 서로 똑같 아야 되오." "그것이라면 과히 어렵지 않소. 노부는 무형을 부하로 생각지 않소." 청의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둘째, 불초가 심대장주를 돕는 것은 무림의 영웅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오. 더군다나 심대장주가 무림을 통치하는 것을 원해서도 아니오. 다만 악낭자를 아내로 맞기 위함이오. 만약 악낭자가 다 시 나타나면 심대장주께선 적극적으로 불초를 도와주어야 하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어렵지 않소. 무형이 나를 돕고 있으니 노부도 자연 악낭자를 잡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청의소년은 무엇이 생각난 듯 다급히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고팜도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되오. 백화산장의 인물들이 다치더라도 그녀에겐 조귿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고 약속하시오." 심목풍은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리다." "심대장주께선 시원스럽게 응하셨으니 불초도 기분이 좋소. 그리고 조금 진에 객화산장에 악낭 자를 차지하려고 다툴 인물이 있다고 하였지요? 그 사람이 누군지를 짐작하시오?" 심목풍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청의소년은 손을 들어 심목풍을 가리켰다. "바로 당신이오." 심목풍은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곧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무형은 농담도 잘하시오. 노부가 이 나이에 어찌 그런 망상을 가지겠소." "아니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불초는 그리 쉽게 심대장주의 계략에 속지 않을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겠소?" 청의소년은 날카롭게 그를 쏘아 보았다. "오직 마음에 달려 있을 것이오." 심목풍의 얼굴에는 잔뜩 노기가 깃들었다. 그는 음성을 높였다. "무형! 농담이 심하오. 노부는 그런 모욕을 받은 적이 없소." 청의소년은 그의 심각한 신색에 더 말을 않고 몸을 돌렸다. "자, 이제 갑시다. 불초가 먼지 길을 뚫으리다." 그리고는 영당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호들은 그의 독수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에 감히 막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독 황의노인만이 입 구에 우뚝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심목풍과 금화부인은 사방을 경계하며 청의소년의 뒤를 따랐다. 청의소년은 황의노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인장! 비키시오!" 그러나 황의노인은 죽장을 짚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노인의 모습은 마치 조각들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청의소년은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며, "흥!" 하고는 소매에서 우문한도에게 날렸던 것과 똑같은 지네를 꺼냈다. 그는 장승처럼 가로막고 있 는 황의노인에게 그 지네를 힘껏 날렸다. "죽어라!" 지네는 황의노인의 얼굴로 곧장 날아갔다. 168. 영웅(英雄) 대 효웅(梟雄) 우문한도는 그 노인이 소영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그러나 청의소년의 지네가 너무나 악독한 것이기에 그가 어떻게 피해 낼는지가 걱정이었다. '아, 저 노인도 지네에게…' 우문한도는 눈을 감아 버렸다. 이 때 군호들 틈에서 경탄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문한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황의노인은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손을 뻗어 자색의 지네를 받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심목풍에 게 던졌다. 청의소년과 심목풍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저 지네를 잡다니…' 심목풍은 비록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황의노인처럼 독지네를 잡지는 못하였다. 그는 칠성의 공력을 모아 날아오는 지네에게 장풍을 날려 중간에서 떨어뜨렸다. "실례했소이다. 귀하도 독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고수임을 미처 몰라 뵈었소." 청의소년은 오른손을 쭉 뻗어 황의노인의 손목을 짚어 갔다. 이 일초는 매우 거세고 빠르기가 번개 같았다. 황의노인은 다시 장승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그는 청의소년의 손이 막 닿으려는 순간에야 손을 슬쩍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짚고 있던 죽 장으로 청의소년의 관절 사이를 찔렀다. 임기응변하는 평탄한 수법 가운데, 이것은 아무도 예기치 못했다. 너무나 뜻밖의 역습이었고 거리가 가까와 상대는 미처 피하지를 못하였다. "앗!" 청의소년은 가벼운 비명과 함께 황의노인의 죽장에 손목을 맞고 말았다. 헌데 이상한 일이었다. 일개 가느다란 죽장으로 그다지 세차게 뻗어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오른팔이 떨어진 듯이 몸부 림쳤다. 청의소년은 고통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었으나 오른팔이 점차 마비되었다. 청의소년은 황급히 뒤로 일장이나 물러났다. 그러나 황의노인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았다. 청의소년의 오른팔은 힘없이 축 처졌다. 안색이 창백했다. 이 모양을 보고만 있던 심목풍은 싸늘한 표정으로 천천히 황의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황의노인의 한 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귀하의 존함은 어찌 되시오?" 황의노인은 대답은 않고 두 줄기 싸늘한 눈빛을 심목풍에게 고정시켰다. 심목풍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귀하는 강호에 견식이 부족한 것 같소이다." 그제서야 황의노인의 입이 열렸다. "그렇소." 그는 한 마디라도 더 할까 두려운지 짤막하게 대답했다. 심목풍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놈은 정체를 숨기는구나.' "귀하께서는 강호에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소생과도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을 것인데 어찌 우리 의 앞길을 막으시오." "소문에 듣기로 그대는 악행을 밥 먹듯 한다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군." 그의 말소리는 괴상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비파를 한 줄 한 줄 튕기는 것 같았다. "그럼 귀하께서는 이 일에 간섭하시겠다는 것이오!" 황의노인은 대답 대신 냉소를 터뜨렸다. "흥!" 심목풍은 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귀하의 성함을 말해 줄 수 있겠소?" "안 되오." 이 때 심목풍이 오른손을 휘둘러 일장을 뻗어냈다. 황의노인도 따라서 맞받아쳤다. 펑! 두 고수가 뻗은 장풍이 충돌하는 소리는 우뢰 같았다. 주위는 온통 싸늘한 바람으로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그 진동으로 거대한 체구의 심목풍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뒤로 몇 발 물러섰다. 황의노인도 뒤로 두 발이나 물러섰다. 이번 공격에 있어서 두 사람은 모두 내력을 사용했다. 심목풍은 냉랭한 웃음을 지었다. "귀하가 어째서 건방진가 했더니 보통 무공을 지닌 것이 아니구려. 다시 내 공격을 받아 보시 오." 그리고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고 거대한 몸을 덮쳐 왔다. 그의 손바닥에서는 날카로운 장력이 뻗쳐졌는데 얼마나 센 힘이었는지 영당 내의 휘장들까지도 흔들거렸다. 황의노인은 이에 지지 않고 왼손으로 일장을 날렸다. 펑! 다시 두 사람의 장풍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충돌했다. 두 사람은 계속 삼 장을 정면으로 나누었다. 구경하고 있던 군호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오! 저 무서운 장력을 피하지도 않고 맞서다니!" "야! 심목풍도 힘이 달리는구나." "저 황의노인은 어떤 인물이기에 저렇게 무공이 높은가?" 심목풍은 삼장을 공격해 낸 후 급히 손을 거두었다. "귀하께서 본인의 삼장을 받아 내셨으니 그 고명을 알겠소이다." "흥! 나도 답례를 하지." 황의노인이 짧게 일갈하고는 죽장을 거세게 휘둘렀다. 심목풍은 날쌔게 옆으로 피하면서 삼장을 피하기만 하였다. 그는 죽장 공세를 피해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소영이로군. 그대는 죽지 않았지? 안 그런가?" 황의노인은 부인도 시인도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는 대답 대신 죽장을 다시 번개같이 휘둘렀다. 심목풍은 피하지도 않고 냉소와 함께 정면으로 왼손을 뻗쳤다. 심목풍의 이와 같은 방어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황의노인의 죽장과 심목풍의 손목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퍽!" 죽장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가닥가닥 쪼개졌다. 장내의 군호들은 이구동성으로 경탄을 내질렀다. "심목풍의 무공은 이미 신의 경지에 가까와 있어 몸이 강철과 같구나." 심목풍은 조금도 고통의 빛이 없었으며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의노인도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죽장을 거두었다가 다시 상대의 가슴을 찔러갔다. 마치 긴 창으로 치르는 형상과 같았다. 그러나 심목풍은 그 자리에서 오른손을 내리쳐 죽장을 막아 냈다. "딱!" 이번에는 분명히 대나무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또다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쇠다! 심목풍이 수중에 쇠를 숨기고 있다." 우문한도는 군호들의 놀람에 호응하여 함께 소리쳤다. "황의노인! 조심하시오. 상대는 양 손목에 쇠를 붙이고 있소이다." 이제는 군호들의 경악이 사라지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림의 많은 고수들이 손목에 팔찌 모양의 강철을 끼고 다녔다. 심목풍은 일장을 막은 후 거대한 신체를 질풍같이 날렸다. 두 사람의 거리는 너무 가까왔기 때문에 죽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황의노인은 왼손으로 일 초를 내어 상대에게 맞섰다. 육박해 들어가던 심목풍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황의노인의 손에 조그만 단검이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목풍은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 역시 너였구나." 황의노인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상대가 말을 하지 않으니 심목풍은 차츰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정말일까? 아닐 게다. 그는 불에 타 죽었는데… 그러나 저 단검을 보면 소영이 틀림없고…' 심목풍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소영은 영웅다운 인물인지라 감히 이름을 바꾸지 않소. 그런데 귀하는 진실을 밝히시지 않으니 분명 소영이 아닌 것 같구려." 황의노인은 단검을 움켜 쥔 채 눈빛만 빛내고 있었다. 그의 입은 천 근에 눌려 있는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황의노인의 이런 표정은 심목풍에게 불안한 마음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들도 영문을 몰랐다. 심목풍은 상대의 확실한 정체를 모르고 있었지만 그가 단검을 쥐고 있는 자세가 더욱 두려웠다. 그 자세는 곧 상승 검법의 맨 처음 자세였다. '저놈이 상승 무공으로…' 심목풍은 더 공격할 생각을 않고 청의소년과 금화부인에게 소리쳤다. "자, 빨리 갑시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거대한 몸을 공중으로 솟구쳐 천막의 지붕을 뚫고 밖으로 사라졌다. 금화부인도 곧 그의 뒤를 따라 찢어진 천막 밖으로 나갔다. 청의소년은 운기를 조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보다 행동이 느렸다. 그는 심목풍이 몸을 솟구 쳐 천막 밖으로 나갔을 때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는 상처를 살필 겨를도 없이 금화부인의 뒤를 따라 몸을 솟구쳤다. "안 된다. 너는 남거라." 황의노인은 그보다 먼저 몸을 솟구쳤다. 두 줄기의 그림자는 지붕에 뚫린 구멍으로 날아갔다. 황의노인은 한 발 앞섰기 때문에 구멍을 가로막으며 밑으로 일장을 날렸다. 펑! 두 사람은 허공에서 일 장을 주고받았다. 청의소년은 역시 힘이 모자랐다. 더군다나 상대는 위에서 거센 장력을 뻗었기 때문에 같은 장력으로 맞섰지만 몸은 땅으로 떨어 지고 말았다. 청의소년이 땅으로 떨어지자 우문한도가 재빨리 혈도를 짚었다. 황의노인은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고는 가볍게 내려섰다. 심목풍을 따라 온 네 사람 중에서 도망간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금화부인이었다. 남옥당은 청의소년에게 부상을 입었고 청의소년은 우문한도에게 혈도를 짚혀 꼼짝 못하고 있었 다. 이제 남은 것은 붉은 가사를 입고 구리 방을을 들고 있는 화상뿐이었다. 무위도장이 재빠르게 장검을 뽑아들고 화상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대사께서는 움직이지 마시오. 대사와는 하등의 원한 관계도 없으니 죽이지는 않겠소." 흥의화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정광대사를 포함하여 소영, 백리빙, 우문한도, 무위도장 등이 포위하고 있었다. 흥의화상은 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자신이 없음을 느꼈다. '아, 늦었구나.' 그리고는 품 속에서 단검을 꺼내어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주위의 모든 군호들이 미처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홍의화상의 표정은 고통을 참는 듯 크게 일과러졌다. 정광대사는 수중에 들고 있던 계도(戒刀)를 버리고 다급히 홍의화상에게로 다가갔다. 홍의화상은 벌써 숨을 거두고 있었다. 정광대사는 손을 뻗어 그의 인피가면을 벗겼다. 정광대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빈도의 동문 사형제로군." 옆에서 보고 있던 무위도장도 뒤따라 긴 한숨을 내쉬고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안 됐소이다. 본문에도 역시 배반자가 있소이다. 대사께서는 그의 시체를 잘 묻어주고 그를 용 서하시오." 정광대사는 방울방울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홍의화상을 한참 동안 내려다 보았다. 황의노인은 가볍게 탄식을 하더니 곧 몸을 돌려 휘장 뒤로 걸음을 옮겼다. 무위도장이나 손불사는 그가 소영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어쩔 줄을 몰라하는 사이에 우문한도가 불쑥 앞으로 나서며 황의노인에게 입을 열었 다. "그인이 길을 안내하겠소이다." 황의노인은 가볍게 허리를 굽히고 말을 받았다. "그맙소." 우문한도는 앞장서서 휘장 뒤에 만들어진 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싱 안에서 두 사람만이 마주보게 되자 우문한도가 대뜸 황의노인의 손을 잡았다. "소대협!" 황의노인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얼굴에 발랐던 약물을 지웠다. 그는 바로 불길에 타 죽었다고 제사까지 지냈던 소영이었다. 그러자 밖으로 소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손불사, 무위도장, 백리빙 등이 정실로 들어왔 다. 손불사는 소영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반가와서 덥석 그를 껴안았다. "그대혈! 역시 그대였군." 소영은 정중히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소영의 목소리는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이었다. 손불사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소대협이 무사한데 어찌 내가 평안치 않겠소?" 그는 실로 오랜만에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무위도장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 등이협과 폐(弊) 사제에게 맡긴 두 권의 책도 빈도가 맡아서 잘 보관하고 있소이 다." 소영은 그에게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도장께서는 그 책을 읽어보시지 않으셨소?" 무위도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빈도는 책 이름만 보았을 뿐 안에 있는 내용은 들추지도 않았소." "왜 읽지 않으셨소?" "빈도는 이제 늙었소. 그런 것은 젊은이가 보는 것이오. 더군다나 빈도는 계속 적에게 대항하였 던 까닭에 그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소."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의 인품에 새삼 감격했소이다. 후배는 언제까지나 도장을 존경하겠소." 백리빙이 앞으로 나서며 얼굴을 붉혔다. "오빠! 제가 잘못했어요." 그녀는 짐짓 울상을 지었다. "무슨 일인데…?" "오빠의 부탁을 어겼어요. 오빠는 나에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런 데… 나는 말해 버렸어요." 소영은 피식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네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원, 별말씀을…"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빙아 너를 나무라지 않겠다." 백리빙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오빠, 조금 전에 영당 안에서 모두 보았지요?" "무엇을 보았다는 것이냐?" "악언니 말이에요. 언니는 벌써 떠나셨어요." 소영은 그제서야 생각난 듯 주위를 둘러보고 다그쳐 물었다. "정말 갔느냐?" 백리빙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언니와 저는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좀 더 기다려 보자고 말렸지만… 그리고 조그만 종 이쪽지만 남겼어요." 소영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럴 것이다. 악누님은 항상 마음대로 행동하니까." 우문한도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지금 긴급한 일로 불초와 소대협이 단독으로 의논할 것이 있소이다. 그러니…" 손불사가 가벼운 기침을 하고 말을 받았다. "무공에는 이 늙은이도 소대협을 따르지 못하오. 그리고 지혜도 우문선생 보다 못하오. 모든 것 이 나보다 나으니 두 분 마음대로 하시오. 우리는 그동안 자리를 비켜 드리리다." 우문한도는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고맙소이다. 잠시면 되니까…" 그리고는 옆에 마련되어 있는 정실을 가리켰다. "소대협, 이곳으로…" 소영은 의아한 생각으로 건너쪽 정실로 들어갔다. 그는 뒤따라 들어오는 우문한도에게 다그쳐 물었다. "우문선생, 무슨 일이시오?" 우문한도는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대협, 가슴 속에 몰려 있는 피를 토하십시오. 그리고 진기를 모으시오." 소영은 눈빛을 빛내며 한참 동안 그를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두 눈을 감 았다. 잠시 동안이 지나자 돌연 소영이 검붉은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우문선생에게는 못 당하겠소. 내가 부상당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소?" 우문한도는 가볍게 미소를 보였다. "소대협의 상처는 그리 큰 것이 아니오. 그리고 이 한 모금의 피는 악낭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 오." 소영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웠다. "우문선생은 무슨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소대협은 이 늙은이를 중히 여기시니 불초도 그에 보답을 하는 것이오. 악낭자와 소대협 간의 일에는 되도록 참견하지 않으려 했지만 부득이하게 되었소." 소영은 그에게 숨은 비밀이 있다고 느꼈다. '필시 그는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나와 악누님간의 일을…' "우문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이신지 어서 가르쳐 주시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옥당이나 옥소랑군은 모두 무공이 고강하오. 그러나 그들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암투를 벌이고 있소. 그 첫 희생자가 남옥당이지요. 그것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소." "무슨…" "불초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소.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응당 있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 오?" 소영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악누님은 항상 언행이 단정하여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소. 옥소랑군이 누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 느 정도 이해가 가오. 그는 누님을 여러번 구해주고 많은 시일을 같이 지냈으니까 말이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은 독이 서린 가시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남옥당과 무공자는 전연 엉뚱한 인물이오. 그들은 누님과 얼마 대면도 없었는데, 그들이 마음대로 누님을 좋아하는 것이니 결코 누님만을 탓할 수는 없지 않겠소." 우문한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니오. 불초는 악낭자를 탓하는 것이 아니오. 소대협께서는 악낭자에게서 보통 사람과 다른 점 을 느끼지 못하였소?"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오.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소." 우문한도는 소영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자세히 생각해 보시오. 그녀를 볼 때마다 그 인상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소이다. 그 인상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가슴 속에까지 파고드오. 그녀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상대의 마음을 따르고 있는 것이오." "글쎄요. 아직 나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군요." 우문한도는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소대협은 아직 나이가 어린 것 같소.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친누이로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까 그녀가 천하 일색이라도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오. 그러나 이제는 소대협에게도 애정이란 것이 생길 무렵이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문선생의 말뜻을 이제 조금 알겠소.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오. 나는 악누님을 나무랄 수 없소." "소생은 관상술을 조금 알고 있소. 악낭자의 얼굴은 내미가 서린 얼굴이오. 그런 상은 천 년에 한 사람이 나올 정도요." "그렇다면 더욱 누님의 잘못이 아니지 않소." "그렇소. 악낭자도 잘못이 없고 남옥당이나 무공자에게도 잘못이 없소. 만약 잘못이 있다면 하늘 이 그런 기상을 내렸다는 것이오. 악낭자의 발길이 스친 곳이면 뭇 남자들이 마음을 억제하지 못 할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우문선생의 말씀도 맞소. 지금까지의 모든 화근이 누님의 미모에 기인하는 것이구 려…" "그렇다고도 할 수 있소. 더군다나 심목풍까지도 그녀에게 정신을 쏟고 있을 정도요." 소영은 이 말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심목풍이… 그 놈까지도 누님을…?' 그의 안색을 대뜸 창백하게 되었다가 곧 붉어졌다. 그는 오랫동안 말을 잊고 있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문선생, 일이 그렇다면 악누님을 어떻게…" 소영은 미처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될 수 있는 대로 강호에 나다니지 말아야 되오. 인적을 끊고 지내면 자연 우리 의 적도 없어질 것이오. 악낭자가 늙으면 그 특유의 매력도, 뭇 남자를 뇌쇄시키는 웃음도 사라질 것이오." 소영은 잠시 희색을 보이더니 곧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좋지만 누님께서는 탈을 듣지 않을 것이오. 더군다나 쾌활한 성격인데 은거해 살 수는 없을 것이… 그렇다고 누님을 가두어 둘 수도 없는 일이고…" "또 한 가지 방법이 있소." 소영은 눈빛을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무엇이오?" "인피가면을 쓰는 것이오. 인피가면으로써 천부적인 미모를 감추는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구려." "자, 이 정도로 끝마칩시다. 그동안 소대협의 기혈은 거의 가라앉았을 것이오. 이제는 잠시 휴식 만 취하면 될 것이오." 소영도 자신의 상처를 알고 있었다. '이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 그는 그대로 앉아 운기를 조식했다. 우문한도는 느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또다른 몇 가지 일이 있지만 그것은 소대협께서 완쾌된 다음에 하기로 합시다." 소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우문선생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현인(賢人)이다.' 그는 천천히 운기를 조식하며 자신이 무아지경으로 빠짐을 느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영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영이 눈길을 드는 것과 동시에 방울을 굴리는 듯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오빠, 이제는 괜찮아요?" 백리빙은 언제 갈아 입었는지 여장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래의 모습을 보니 그녀가 더욱 예뻐보였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 들어 왔느냐?" "조금 전에요. 우문선생이 가르쳐 주었어요. 오빠가 부상을 당했다니까 모두 걱정을 해요." 소영은 빙긋 미소를 보냈다. "괜찮다. 조그만 상처였으니까." 백리빙은 품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오빠, 이것은 악언니가 떠나면서 준 것이에요.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는 오빠에게, 다른 하나는 나에게 준 것이에요." 소영은 다급하게 그 편지를 받았다. <빙동생, 이 편지는 영동생에게 전하여 주기 바람.> 한눈에 보아 악소채의 글씨였다. 소영은 안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영동생에게… 영동생의 이모께서는 유서에 나와 영동생을 부부로 결정하셨어요. 영동생은 변장을 하고 제사에 참석하였으므로 내가 영당 앞에서 말한 것을 모두 들었으리라 믿어요. 나는 비록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영동생의 아내가 될 결심이었어요. 영동생이 만약 죽었다면 응당 그 부인으로서 남편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빙동생에게서 모든 사실을 알았어요. 영동생은 하늘의 도움으로 심목풍의 마수에서 벗어 났다는 것을… 이제는 모든 것이 변했어요. 영동생이 살았다는 것을알기 전에는 남편의 복수를 하려고 했었는 데 지금은 가모의 복수를 할 때예요. 얼마 전 나는 가모를 죽인 범인을 찾았어요. 다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 이에요. 이번에 그와 대결하게 되면 서로 생사를 모르는 판이에요. 이후 영동생을 영영 못 만나게 될지 모르지요. 빙동생은 순결하고 지혜가 많아요. 그리고 그녀는 영동생을 사랑하고 있어요. 만 약 영동생이 나를 생각해 준다면 꼭 빙동생과 부부됨을 약속해야 돼요. 나는 지하에서도 두 사람 의 행복을 빌 것입니다. 붓을 드니 마음이 떨려 더 쓸 수가 없군요. 영동생은 이 누님의 고심을 이해하기 바래요.> 소영은 편지를 다 읽었지만 무슨 뜻인지를 선뜻 간파하지 못하였다. '누님은 나를 원망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간접적으로 표시한 것인가?' 그가 힘없이 편지를 내리니 백리빙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오빠, 언니가 뭐라고 하셨어요?"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보고 너를 잘 대하여 주라는군." 백리빙은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급기야 눈물을 글 썽이기 시작했다. 크게 방울 진 눈물이 분홍빛 뺨으로 흘러 내렸다.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소영은 깜짝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빙아야, 왜 그러느냐?" 백리빙은 어깨를 흔들었다. "저도 왜 그러는지 몰라요. 기쁜 것인지 괴로운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겠어요." 그녀는 마침내 흐느껴 울었다. "악언니는… 오빠와…" 흐느낌 때문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소영은 직감적으로 모든 것을 눈치채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백리빙의 백옥 같은 손을 살며시 잡았다. "빙아야, 이제 울지 말아라. 누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라. 너도 남옥당의 말을 들었지 않느냐. 그는 악누님이 선녀라고 하지 않더냐? 그래서 아무도 누님과 결합하지 못한다고…" 백리빙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심각하게 말했다. "오빠는 악언니의 마음을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무얼 모른단 말이냐?" "악언니는 오빠를 천생 배필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언니도 나처럼 말을 못하는 것뿐이에 요."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쉬는 한숨은 거의 악소채와 백리빙 때문이었다. "빙아야, 너는 누님과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악언니는 여러 가지 말을 했어요. 그러나 오빠와 나에 대한 이야기만 한 걸요." "그래? 누님은 나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더냐?" 백리빙은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언니를 생각지 말라고 하였어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누님이 남긴 편지에도 그렇게 씌어져 있다." "아니예요. 악언니는 비록 그렇게 말하지만 본 뜻은 틀려요." 백리빙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빠, 우리 언니를 도와 원수를 갚도록 해요. 네?"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하였다. "그렇다. 누님을 도와 이모님의 복수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나… 나에게는 그보다 더 큰 강 호의 운명이 매달려 있으니…"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빙아야, 미안하다. 내 마음은 아마 너보다 더 급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무림의 상황은 매우 중 요한 시기에 놓여 있다. 나는 우선 이 일부터 해결해야 될 것이다." "오빠는 악언니의 복수를 돕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아니다. 너는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 지금 강호의 천하 영웅들이 한 자리에 다 모였지 않느냐? 백화산장을 쳐부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때 내가 빠진다면 그들의 사기에도 많은 영향 을 줄 것이다. 빙아야, 너는 강호 무림의 장래를 생각해 보았느냐?" 그제서야 백리빙은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도 하군요. 이곳의 사정도 긴박하니… 오빠는 대권을 쥔 중요. 위치에 있으니 떠날 수도 없고."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내 뜻을 아는 것 같군."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 본 다음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빙아야, 지금 곧 밖으로 나가서…" 백리빙은 그 다음 말도 듣치 않고 불쑥 말을 꺼냈다. "왜 나가라는 거예요?" "밖에 나가서 손노선배와 우문선생, 무위도장을 모시고 오너라." 백리빙은 자신의 경거망동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들과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하여야겠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매우 빠른 결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 백리빙은 고개를 고덕이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소영은 그녀의 뒷모습물 유심히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들어왔다. 백리빙도 맨 뒤를 따르고 있었다. 소영은 주위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여러분, 앉으십시오." 우문한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 우리를 불렀다니 무슨 경사라도 있소?"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들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싶어서입니다." 손불사가 이에 호응했다. "좋지. 그래 소대협은 무슨 좋은 방안이라도 있소?" "없소이다. 그러나 심목풍보다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될 것 같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좋은 생각이오." "나의 뜻은 빠르면 빠를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보오. 우리는 이 길로 심목풍의 소굴을 뒤엎 어 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야 되오." 소영은 눈길을 돌려 우문한도를 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다만 그러기를 바랄 뿐 자세한 계책은 없소이다. 그외 자세한 것은 우문선생께서 직접 수 고해 주셔야겠소." 우문한도는 심각한 표정으로 얼마 동안 침묵을 지켰다. 장내의 모든 인물들은 우문한도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곳에 모여 있는 고수들은 별로 많지가 않소. 만약 백화산장과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우리가 불리하오." 소영이 말을 받았다. "무엇이 불리하단 말이오? 제가 심목풍을 막고 여러분들과 다른 사람들은 나머지를 맡으면 될 게 아니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백화산장을 얕볼 수는 없소. 그리고 소대협과 심목풍은 누가 이길지도 모르오." "그럼 정면으로 싸운다면 승산이 없다는 것이오?" "그렇소." 우문한도는 대답을 하고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교묘한 계책을 세우면 어느 정도의 승산은 있을 것이오." "그럼 우선 금화부인을 만나볼 수밖에 없군요." 옆에서 듣고만 있던 손불사가 끼어들었다. "지금 남옥당이 정신을 차렸으니 그에게 자세한 내막을 캐 봅시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것이 좋겠구려. 그가 말할 수 있소?"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한두 시간이 지나야 되오." "어느 분이 그의 독상을 치료해 주셨소?" 무위도장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어느 분이겠소? 우문선생 이외에 누가 그런 재주를 지니고 있겠소?" 우문한도는 얼굴을 붉혔다. 손불사가 화제를 바꾸었다. "소형제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소대협이 심목풍을 죽이려고 하는데 늣밖에 일이 복잡해지지 않은 것 같소?" "아니오. 조금도 복잡해진 것이 없소. 다만 그가 물러난 여세를 이용하여 계속 밀고 나가자는 뜻 이오. 만약 시간이 지연되면 그에게 방어할 준비를 갖추게 할 뿐이오. 또한 우리는 이곳에 모인 인물 이외에 또 다른 사람이 없지 않소?" 손불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대협의 말에도 일리는 있소. 그러나 이 늙은이는 자꾸만 딴 생각이 드는구려. 소대협이 다른 원인으로 서둘 것이라고 말이오." 소영은 더 숨길 수가 없음을 알았다. "저는 심목풍을 죽인 후 그 뒷일은 여러분께 맡기겠소. 저는 또 다른 일이 있으니 뒷수습을 할 시간이 없소이다." "무슨 일이오?" 이번에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소영에게 쏠렸다. 소영은 힐끗 백리빙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저의 누님이오. 악누님을 도와야 하오." 169. 무공자의 청오공 "이 늙은 몸도 그렇게 생각했소. 아마 그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요." 손불사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소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악낭자는 누구를 찾아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오?" "저도 모릅니다. 그녀는 그것을 밝히지 않았소이다." "천하가 이렇게 넓은데 소대협은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를 뿐더러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오. 이런 식으로는 몇 해를 두고 찾는다 해도 찾아 내지 못할 것이외다." 소영은 남을 속이지 못하는 성품이었으므로 손불사의 추궁을 받자 부지중에 자기의 심중에 있는 말을 해 버린 것이다. 손불사는 가볍게 기침을 한 번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합시다. 내가 나의 개방사람들을 모두 풀어 악낭자의 행방을 쫓도록 하고 그녀의 소식 이 있으면 즉시 소대협에게 알리는 겁니다." 옆에 있던 우문한도가 자기 의견을 말했다. "귀방에서 고수를 몇 명 더 풀어서 암암리에 악낭자를 도와주면 더욱 좋을 것 같소." "좋소. 내 즉시 가서 처리하겠소." 그는 곧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소영은 그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끝내 말을 하지 못했다. 우문한도가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남옥당의 상처가 어떤지 살펴 보고 오겠소." 그는 손불사의 뒤를 따라 걸어나갔다. 그리고 조금 후에 다시 되돌아와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남옥당이 이미 깨어났소. 그는 소대협이 그와 얘기하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더니 정신을 번쩍 차리더군요." 소영이 급히 일어났다. "좋소. 즉시 가서 그를 만나겠소." 남옥당은 창백한 얼굴를 침상에 누워 있었다. "소대협!" 소영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남형, 그냥 누워 계시오." 남옥당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불초는 수차 소대협을 모함했는데 소대협께서는 저를 추호도 적대시하지 않는군요." 소영은 미소를 흘렸다. "지난 일은 이미 지나갔으니 우리는 지금의 일을 논해야 되지 않겠소?" 남옥당의 얼굴에 감격하는 빛이 나타났다. "소대협의 도량이 이토록 넓으신 것을 대하니 실로 이 남옥당은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 소." "나는 남형에게 한 가지 일을 묻고 싶소이다." 남옥당이 곧 응했다. "예, 뭐든지 물으십시오. 알고 있는 한 모두 털어 놓겠소이다." 소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심목풍의 수하에는 대체 고수가 얼마나 있으며 그들의 실력은 어떠한지?" 남옥당은 곧 대답했다. "그 심목풍은 교활해서 자기의 세력과 내정에 판해 극히 은밀히 감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본 인 말고는 아마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아오." 남옥당은 가볍게 헛기칭을 한 번 하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허나 불초가 알고 있기에는 좨 많은 정대문파 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소. 목하 이곳에 운집하여 그의 명령을 받들고 있는 고수 말고도 우습게 볼 수 없는 잠력이 있 습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뜻은 남형께서 심목풍 수하의 특출한 인물들의 이름을 즉, 고수 측에 드는 자들의 이름을 말해주길 바라오." 남옥당이 차근차근 말을 시작했다. "백화산장에 원래부터 있는 사람 외에 심목풍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자는 아까 나를 부상시킨 무 공자이며 또 한 사람 비황검(飛蝗劍)이라는 노인이 있소.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심목풍은 그를 매우 존경하고 있는 것 같았소이다." 우문한도가 옆에서 말을 받았다. "비황검?" 남옥당이 눈길을 그에게 돌리며 대답했다. "그렇소. 그는 비황검이라 불리고 있소." 소영은 비황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 이렇게 물었다. "듣기로는 심목풍이 최근에 한 화상을 만나러 갔다는데 남형은 그것을 알고 계시오?" 남옥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고 그러나 우리는 그 화상을 보지 못했소." "그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남옥당은 고개를 힘없이 저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그가 한 분의 고인을 만나러 갔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오. 심목풍이 직접 만나러 간 것으로 보아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이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 같다.' 소영은 즉시 화제를 돌렸다. "남형, 또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소. 나는 그것이 몹시 이해기 가지 않는데 혹 남형께서 그것 을 알고 계실는지?" "무슨 일이오." 소영은 잘라 말했다. "금화부인이 수차 우리들을 도운 일이 있는데 심목풍은 조금도 모르고 있소." 남옥당은 길게 한숨을 쉰 다음 이렇게 대답했다. "언젠가 불초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심목풍이 금화부인을 나무란 적이 있었소. 그녀가 팔을 밖 으로 뻗친다면… 그리고 그녀의 연령으로는 도저히 소대협의…" 그는 소영을 힐끗 쳐다보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영은 담담히 웃 었다. "괜찮소. 어차피 그것은 심목풍이 한 말이니 남형께서는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만이오." 남옥당은 소영에게서 눈을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불초는 먼저 사과부터 드립니다. 심목풍이 말하기를 금화부인의 나이로는 소대협의 조모가 되고도 남을 것이며 소대협이 그녀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은 허사이니 일찍 심중의 불길 을 죽이라는 권고였소." 그 말에 우문한도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벌써부터 눈치채고 있었소이다." 소영이 그를 돌아보았다. "심목풍은 금화부인에게 정을 두고 있었으므로 거듭 그녀를 용납하였으며 무슨 일이든 얼마쯤은 양보하고 있는 것이오." "그것을 금화부인이 알고 있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으므로 그녀는 그를 겁내지 않는 것이오." "어쨌든 간에 금화부인은 수차 나를 구해 주었으니 그 정의는 실로 불안스러운 것이오. 훗날 어 떻게 그녀에게 보답을 해야 할지…" "소대협뿐 아니라 심목풍과 적대시하고 있는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감사해야 하오." 소영이 벌떡 일어났다. "남형의 상처가 아직 완치되지 않았으니 나는 오래 폐를 끼칠 수 없구려. 다음날 남형의 몸이 어느 정도 나아지거든 다시 와서 오래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남옥당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소영을 불러 세웠다. "소대협!" 소영은 이미 방문을 나서려고 했었으나 다시 몸을 돌렸다. "남형, 무슨 일이오?"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소이다.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뽑아내지 않으려니 괴롭군요." "무슨 일이오." 남옥당이 주저하며 말했다. "악소채에 관해서…" 소영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남옥당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 현재의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소이다." 소영이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남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오?" 남옥당은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소대협은 너무나 그 악낭자에게 무정한 것 같소." 소영은 흠칫하였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알게 된 지 꽤 오래이며 남매 같은 정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무정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오?" 남옥당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남매의 정이 아니라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오. 지금 세상에는 소대협 같은 사 람만이 악낭자의 배필이 될 자격이 있소. 나나 옥소랑군, 그리고 무공자는 모두 자격이 없소. 그 래서 나는…" 소영이 그의 말을 막았다. "남형, 악낭자의 슬기로움은 보통 사람이 따르지 못하오. 모든 것은 그녀 나름의 주장이 있을 것 이오. 그녀가 일단 어떻게 하겠다고 작정한다면 우리가 그녀를 어떻게 돌이킬 수 있겠소? 안 그 렇소?" 남옥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대협의 말씀이 옳소. 악낭자의 일은 누가 대신해서 처리할 수는 없소." 그는 길게 한숨 짓더니 다시 계속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저는 몇 년을 두고 고민했으며 그것을 명백히 터득하지 못했었소." 우문한도가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당사자는 잘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소? 남형은 지금 알았으니 아직 늦지 않았소." 남옥당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는 소영을 바라보았다. "소대협, 제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소대협께서 용납해 주실는지요?" 소영이 다시 미소지었다. "정리에 맞는 것이라면 어찌 응하지 않겠소?" 남옥당은 진지한 목소리로 정색을 하며 말했다. "불초의 상처가 완쾌된 후 소대협의 뒤에서 힘껏 일하고 싶소!" "저의 뒤에서 힘을 바치겠다는 것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오. 남형께서 만약 저와 함께 심 목풍에 대항하겠다면 저는 쌍수로 환영하는 바이오. 너무 겸손치 말기 바라오."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남형이 우리에게 가입한다면 우리의 실력은 적지 않이 증강될 수 있소이다." 남옥당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께서 저를 용납해 주신다니 다시 없는 영광이올시다." 소영은 손을 들어 그를 눕도록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남형, 몸조리 잘하시오. 나는 이만 물러가겠소." 우문한도도 곧 그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왔다. 문 밖에 나온 소영은 돌연 무공자가 생각났다. "그 무공자는 어찌 됐소." "그 사람의 무공이 매우 고강하고 일신이 모두 기이한 독이기 때문에 저는 그의 수족을 움직이 지 못하게 했소." "그를 묶어 놓았소?" "사지의 혈도를 찌르고 사람을 시켜 감시토록 하여 혈도를 풀려고 운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소 이다." "우문선생은 그와 이야기해 봤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그 놈의 성격이 매우 냉혹하고 강하여 설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소이다. 그러므로 제 생 각에는 그를 감금해서 한동안 고통을 준 다음 얘기를 해보려고 하오." 소영이 제안했다. "우리 그에게 가봅시다." 우문한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러나 소대협은 그의 암수를 조심하시오. 그 자는 생각이 매우 깊으며 악독한 점은 심목 풍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오." 소영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잘 알고 있소. 과거에 나는 바로 그놈에 의해 깊은 계곡으로 떨어졌던 것이오. 그 때 천 년 묵은 돌버섯을 먹게 됐었지요. 오늘 그와 세 번째 싸움이오." 그들은 다른 한 채의 자그마할 방으로 들어갔다. 무공자는 침상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침상 양쪽에는 각기 검을 지닌 사나 이가 지키고 있었으며 그들은 무공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공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다. 그는 소영과 우문한도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으나 여전 히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았다. 소영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무형, 좀 어떻소?" 무공자는 그제야 눈을 뜨고 소영을 힐끗 보더니 냉랭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나와 싸운 황의노인은 소형이 변장한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까는 무형이 양보해 주어 감사했소." 무공자는 냉소하며 쏘아 부쳤다. "나는 그 때 그대라는 것을 생각해 냈어야 했소." "이미 지나간 일이니 개의치 맙시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무형과 금후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무슨 일을 나하고 의논한단 말이오." "무형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오?" 무공자는 코웃음치며 차갑게 말을 받았다. "소대협은 나를 어떻게 상대할 작정이오?" "나는 아직 무형을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소." "그렇다면 지금 생각해 보시오. 나는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것부터 먼저 알고 싶소." 소영이 정색을 했다. "그것은 무형의 태도를 봐야 알겠소. 만약 무형이 우리들과 손을 잡고 서로 합력하여 심목풍에 게 항거하겠다면 우리는 매우 환영하는 바이오. 그러나 만약 무형이 거부한다면 달리 생각을 해 야 되니까…" 무공자는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과 합세하기는 어려울 것 같소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오?" "조건이 맞지 않기 때문이오." 소영이 재빨리 물었다. "무형은 무슨 조건을 내걸 작정인데 그러시오?" 무공자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악소채… 만일 누군가가 악소채를 나의 아내로 맞아들이게 해준다면 나는 그가 누구이든 상관 않고 도와주겠소." 소영의 안색이 돌변했다. "악낭자의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소. 무형이 악소채로 하여금 무형에게 사 랑을 느낄 수 있게 할 힘이 있다면 또 모르지만 부모 이외에는 그 누구도 혼인을 마음대로 결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오. 무형의 그러한 조건은 너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무공자는 냉소를 날렸다. "그대는 상관하지 않아도 되오. 그러나 한 가지 일에 응해야 하오." "정리에 부합되는 일이어야 하요." 무공자는 억지를 썼다. "정리에 부합되고 안 되는 것은 알 바 아니오. 허나 그대는 반드시 할 수 있는 일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무공자는 소영을 똑바로 쏘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대는 악소채와의 혼인을 단념하시오." 소영은 일소에 부쳤다. "나는 악소채 낭자와 혼인을 약속한 기억이 없소." 무공자가 곧 반격했다. "그러나 그녀의 모친은 유언장에 그녀를 그대에게 주겠다고 밝혔소." 무공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유없이 이렇게 무리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오." 우문한도가 옆에서 듣다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남에게 혼인을 단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이유없이 행동하는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유없이 행동하는 것이오?" 무공자는 그를 쏘아보며 대답했다. "악소채낭자의 부친이 죽기 전에 친히 나의 부친에게 악낭자를 내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소. 단지 이 일을 모두 증명할 수 없을 뿐이오." 우문한도가 코웃음치며 빈정댔다. "증명할 수 없는 일을 그래 어쩌자고 함부로 지껄인단 말이오?" 무공자는 여전히 우겼다. "악소채낭자의 부친이 일찍 죽었고 나의 부친 역시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떴소. 만약 그녀의 모친 이 아직 건재하다면 증명할 수 있겠는데 불행히도 그녀 역시 세상을 떴구려." "만약 악낭자의 모친이 그 일을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악낭자를 소영에게 주겠다고 유언장에다 명기를 했겠소?" 무공자는 냉랭히 대꾸했다. "그대들이 믿든 안 믿든 이것은 나의 부친이 직접 나에게 알려준 것이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 지나 나의 문제이니 여러분이 관계할 바는 아니며 중요한 것은 심목풍을 상대하는 것이오." 우문한도가 반문했다. "그대는 심목풍을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하오." 무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심목풍이 내 몸에 수작을 부렸는데 그것이 독을 사용했는지 또는 몰래 기경을 찍어 넣 었는지를 모르겠소. 그러나 불초는 같은 방식으로 역시 독침을 한 바늘 찔렀소. 여러분이 직접 목 격한 바요. 그 밖에도 나는 심목풍의 몇몇 수하들에게 역시 암암리에 독을 내렸소." 우문한도가 즉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위험 인물이구려?" 무공자는 냉소를 띠며 대답했다. "불초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심목풍 같은 사람과 왕래를 하자니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 었소." 우문한도가 곧 냉 랭히 말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소. 지금 당신은 우리들의 손아귀에 들었으려 우리는 당장 그대를 사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소." 무공자는 담담히 웃었다. "알고 있소. 그러나 그대들은 심목풍을 상대할 능력이 없소." "그대가 만약 여기에 계속 머문다면 심목풍 역시 마찬가지로 독이 발작되어 죽을 것이 아니오." 무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에 나는 그 심목풍이 반드시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나를 구하러 올 것이라고 믿고 있소." "만약 우리가 지금 그대를 죽인다면 그가 구할 수 있는 것은 한구의 시체뿐이오." 무공자는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여러분은 불초를 너무 허술하게 보고 있소이다." 그 말에 우문한도가 곧 미간을 찌푸리고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무공자가 설명을 시작했다. "만약 여러분이 불초를 죽이면 심목풍은 죽지 않게 될 것이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 독의 해 약을 나의 충실한 부하에게 넘겼기 때문이오. 만약 그 부하가 나의 죽음을 알게 되면 그 해약을 심목풍에게 넘길 것이오. 그렇게 되면 심목풍뿐만 아니라 그의 수하 고수들 역시 한꺼번에 해약 을 얻게 되는 것이오." 그는 소영과 우문한도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나를 죽인 대가이오. 만약 우리의 흥정이 잘 되면 여러분이 구태여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수일 내로 심목풍과 그 수하의 몇 고수들은 모두 독이 발작하여 죽게 될 것이 오." 우문한도가 그를 노려보며 빈정거렸다. "들어보니 당신은 매우 자신만만한 것 같구려." "만약 나에게 자신이 없다면 이렇게 여기 앉아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소?" 우문한도가 다시 냉소하며 쏘아부쳤다. "오독문(五毒門)의 능력은 들어서 알고 있소. 그러나 혈도를 찍힌 상태로 어떻게 이곳을 빠져 나 갈 수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려!" 무공자는 눈을 깜박거리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결단을 내린 듯 그에게 말했다. "좋소! 정 믿지 못한다면 내가 여러분께 보여 드리겠소." 무공자는 눈을 감고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무아의 경지에 들어간 것처럼 그는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우문한도가 답답하여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무공자를 감시하던 두 사나이가 두 마 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들은 급히 쓰러진 사나이들을 굽어 보았다. 이 때 두 사내의 얼굴에 각기 한 마리씩의 푸른 지네가 기어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의 얼굴은 이미 전체가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무공자는 소영과 우문한도가 놀라는 것을 보자 껄껄 웃었다. "이 두 마리의 청지네는 독이 강력해서 독을 묻힌 암기에 못지않소." 소영은 무공자가 체포된 후에도 여전히 독을 펼쳐 감히 사람을 상하게 할 줄은 정말 미처 몰랐 다. 우문한도가 태연을 가장하고 싸늘하게 물었다. "그들은 죽었소?" 무공자는 천천히 대답했다. "한 시간 이내에 구하지 않으면 절망이오." "해약을 가지고 있소?" 무공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 "해약이야 물론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당신들은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를 것이오." "어째서?" 무공자는 입가에 야릇한 냉소를 띠며 천천히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는 해독제라 독으로써 독을 치유해야 하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그대의 혈도를 풀어야만 구해주겠다는 말이군." "그렇소. 우문선생은 과연 사리에 지극히 밝구려." 우문한도는 소영을 힐끗 돌아보고는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우선 사람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니 그의 혈도를 풀어주시오." 우문한도는 오른손을 휘둘러 무공자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소영은 이 기회에 방문 쪽으로 물러 가 암암리에 교피장갑을 꺼내 꼈다. 무공자는 양 팔을 한 번 폈다 오므렸다 하더니 서서히 침상 위에서 내 려왔다. 그는 입속으로 무엇인가 중얼거리면서 오른손으로 가볍게 두 마리의 청지네를 집어 들었다. 그는 그것을 소매 속으로 집어 넣더니 다시 소매 속에서 하나의 옥합을 꺼냈다. 그는 합뚜껑을 열어서 두 마리의 인면(人面)거미를 꺼내 지네에게 물린 두 사나이에게 내려 놓 았다. 두 마리의 거미는 크기가 계란만 하고 몸은 먹처럼 검었으며 머리 위에는 흰 점이 하나 있었다. 거미가 두 사나이를 물자 그들의 얼굴에서 시퍼런 기색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혈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무공자는 거미를 도로 옥합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두 알의 약을 꺼내더니 두 사람의 입 속에 넣어주며 말했다. "이제 곧 그들은 깨어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그들의 생사를 걱정할 필요는 없소. 우리는 다 시 우리들의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그는 눈길을 소영에게 못박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 악소채와 혼인을 거절하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나는 심목풍과 그의 몇몇 유력한 고 수들을 독살시키겠소." 이 말을 듣자 소영은 암암리에 생각했다. '심목풍과의 싸움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아직 필승의 자신은 없다. 만약 심목풍이 갑자기 독이 발작하여 죽는다면 무림의 대국(大局)에 있어서는 매우 큰 보탬이 된다. 그러나 이 자는 나에게 악누님과의 혼인을 거절하는 조건을 내걸고 있으며 그 조건이 수락돼야만 심목풍을 독살시키겠다 고 하니, 이거 참으로 큰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무공자가 말을 계속했다. "한 사람이 고기와 곰 두 가지를 함께 얻을 수 없소이다. 소대협께서는 이름을 이미 만천하에 날려 무림의 사람들로부터 무림을 구하는 샛별로 추앙되고 있으니 천추의 대업을 세우고 싶다면 사정을 희생하는 수밖에 없소이다." 소영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악소채는 이미 이곳을 떠났소. 당신은 이 말을 믿겠소? 아니면 믿지 않겠소?" 무공자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 말이 만약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불초는 믿을 수가 없소. 그러나 소대협께서 하는 말이니 믿을 수밖에 없구려." 소영이 빙긋이 웃었다. "생각해줘서 고맙소. 악낭자는 이미 이곳을 떠났소. 나에게 남기고 간 서신에 의하면 그녀는 모 친의 원수를 갚으러 간다고 했소이다." "소대협은 그녀의 원수가 누군지 아시오?" "서신에는 그것에 대하여 언급한 바 없으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도 적혀 있지 않았소." 무공자는 한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눈을 들어 소영을 지그시 쏘아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 한 말을 모두가 사실이라고 믿어도 좋소?" "그렇소!" 무공자가 다그쳐 물었다. "그녀는 혼자서 갔소?" 소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녀에게는 자매 같은 시녀가 두 사람 있는데 아마 그녀들도 함께 동행했을 것이오." 그 때 우문한도가 소영의 말을 받아 덧붙였다. "그녀를 쫓아간 사람이 또 한 명 있소이다." 무공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게 누구요?" "옥소랑군이오." 무공자의 얼굴이 대번에 싹 변했다. 그리고 그는 한 곳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더니 냉랭히 코 웃음치며 말했다. "언젠가는 그놈도 남옥당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게끔 할 것이오." 이 때 갑자기 무공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글이글 불타는 듯한 눈길을 소영의 얼굴에 박 고 뚫어져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남옥당의 이야기는 제펴 놓고 우선 소대협의 뜻은 어떠시오? 어서 나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주 기 바라오." 소영보다 먼저 우문한도가 나서며 말했다. "이 질문은 당신께서 악낭자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소. 그녀만이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장 본인이라 할 수 있소. 소대협이 지금 응낙한다 해도 일에는 아무런 보탬도 될 수 없는 것이오." 무공자가 냉랭히 말했다. "우리의 흥정은 가망이 없는 모양이구려!" 소영은 냉소를 보냈다. "당신은 이제 또 무슨 독물로 사람을 상케 할 작정이오?" 무공자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띠더니 싸늘하게 내뱉았다. "그대는 나와 악소채 사이의 가장 큰 장애물이니 아무래도 그대를 죽여 화근을 없애 버리는 것 이외에는 달리 좋은 방법이 없을 것 같군." 그는 말과 함께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그러자 녹색빛이 번쩍이더니 곧장 소영을 향해 날아갔다. 소영은 재빨리 오른손으로 그 녹색의 지네를 손에 받아 쥐었다. 그리고 세 토막으로 잘라서 땅 에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 무공자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 부쳤다. "그대에게는 아직도 많은 독물이 있는 모양인데 어디 모두 펼쳐 내 소개해 보시지?" 무공자는 냉소했다. "흥! 그대는 무림의 삼보(三寶) 중의 하나인 교피장갑을 끼고 있군." 소영은 순간 놀랐다. '이놈은 과연 견식이 왜 넓구나. 무시할 수 없는 걸…' "나의 부친께서 그 교피장갑의 피해를 입어 유선자의 수라지력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고 한 적이 있었소." 그러더니 갑자기 그는 소리를 높여 외쳤다. "참, 그 유선자와 그대는 어떻게 되는 사이요?" 소영은 천천히 대답했다. "무예를 배운 은사 중의 한 분이시오. 만일 그대가 부친을 위해 원한을 갚고 싶다면 나 역시 스 승을 대신하여 맞서 주겠소." 무공자는 고개를 저었다. "나의 부친은 나에 대해서 별로 잘해주지 않았소. 만약 그가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육 년 전에 나는 그대의 목숨을 빼앗았을 것이며 오늘날 살아 있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우문한도가 그를 노려보며 한 발자국 나섰다. "만약 그대를 살려두면 우리로 하여금 강적 하나를 더 두게 하는 셈이니 그대를 부득불 죽여야 할 것 같구려." 무공자는 암암리에 진기를 모았다.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침내 단안을 내렸다. "그대의 영존께서 과거에 나의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가 있으니 나 역시 오늘 그대를 풀어주겠 소. 그러니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시오!" 무공자는 크게 놀랐다. 그는 매우 뜻밖인 듯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몸을 돌려 앞으 로 걸어나갔다. 소영은 낮은 음성으로 우문한도에게 일렀다. "우문선생! 경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알리시오. 이 무공자를 공격하지 말라고 말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길을 무공자에게 돌렸다. "소대협은 대인대의(大人大義)하셔서 비록 물 한 방울의 은혜를 입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기필코 샘물의 크기로써 보답하는 분이오. 그러한 견지에서 그데를 불어주는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기를 바라겠소." 무공자는 한 마디 대꾸도 않고 곧장 밖으로 걸어 나갔으며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170. 금검(金劍) 우문한도가 가볍게 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소대협, 심중에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소?" "내가 무공자를 석방한 것에 대해 묻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자의 악독함과 음침함은 심목풍보다 결코 못하지 않소이다. 그를 놓아 준 것은 호랑이를 산으로 보낸 것과 같소이다." 소영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소. 무공자를 풀어주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이미 그 심목풍과 결투를 결행키로 작정했 소." 우문한도가 눈을 빛내며 급히 반문했다. "소대협께서는 직접 심목풍에게 도전을 하실 작정이오?" "그렇소. 우문선생께서 천하 무림에 알려 심목풍으로 하여금 도전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해 주셔야겠소." 우문한도가 곧 대답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오. 그러나 소대협이 혼자서 심목풍을 누를 자신이 있으시오." "대강 생각을 해 보았소. 그의 공력은 나보다 심후할 것이오. 그러나 나의 무공 초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절묘하며 또한 심목풍의 연령은 이미 노령에 접어들어 지구전에는 힘이 겨울 것이 오. 만약 내가 천 초까지 싸움을 연장시킨다면 그는 아마 지탱하지 못할 것이오." 우문한도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소영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호의 대국은 점차 우리들에게 유리하게 변하고 있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러한 극단적인 방법 을 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 "심목풍은 연거푸 좌절을 당했으므로 이미 기가 죽어 있소. 지금은 그가 새로이 강호에 나온 이 래로 가장 암담한 시기일 것이오. 만약 내가 요행히 그를 물리칠 수 있다면 비단 그의 위명을 크 게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더욱이 일장의 큰 선공이 될 수 있소." 우문한도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심목풍은 이미 이달 십오 일을 기해 동시에 서신을 날려 각대문파 속에 잠입해 있는 첩자들에게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라고 지시를 했소. 그 행동이란 각대문파의 영도적 지위를 수중 에 장악하는 것인데 그는 그것을 이미 결정지은 것이오." 우문한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그는 황급히 소리쳤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소? 그 음모가 성공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소영도 단호히 대답했다. "그렇소! 그래서 우리들은 십 오일이 되기 전에 그와 결전을 벌여야 하오." 우문한도는 이번에는 정면으로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드시 결전을 해야만 하겠구려." 하더니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계속했다. "불과 닷새밖에 남지 않았군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래서 나는 우문선생에게 하루 이틀 사이에 심목풍이 나서 서 나와 결전을 벌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오." "좋소. 소생은 능력껏 일을 진행시켜 보겠소." 소영도 얼굴에 긴장이 가득 나타나 있었다. "불초 역시 이틀 밤 안으로 체력을 보강시켜야 하오. 만약 특별한 사고가 없으면 우문선생께서 모든 것을 처리해 주시고 나를 깨우지 말기 바라오." 우문한도는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소대협은 안심하고 휴양하시오." 소영은 가볍게 탄식하며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멈추고 천천히 백리빙의 방으로 들어갔다. "빙아야, 우리는 한 이틀 푹 쉬어야겠다. 체력을 보강하고 무공을 연구하면서 설사 일초 일식을 배운다 해도 노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니?" "무슨 일이 있어요?" "이틀 후에 나는 심목풍과 생사를 결판내는 일대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백리빙이 깜짝 놀라며 소영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심목풍이 오빠의 도전에 응하겠어요?" 소영이 빙긋이 웃으며 백리빙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우문선생에게 심목풍을 출전케 해달라고 부탁을 해놓았으니 그는 이미 손을 쓰기 시 작했을 것이다." "그를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으세요?"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백리빙은 다그쳐 물었다. "자신이 없다면 어떻게 심목풍에게 도전을 하시겠다는 거예요?" 소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요?" "심목풍은 이미 각대문파에 잠입해 있는 첩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장문의 권력을 탈취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의 명령을 받들 수 있게끔 말이다." "그래서 오빠는 그전에 심목풍을 잡으려고 하시는 건가요?" "바로 그렇다." "그러나 오빠 혼자서 심목풍의 적수가 될 수 없지 않아요?" "그래서 네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 한다." 백리빙은 방긋 웃었다. "우리 둘은 생사를 함께 하는 것입니까?" 소영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틀 동안 최대한 체력을 보강하고 무공 을 연마해야 한다." 백리빙은 소영과 함께 결전에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기쁜 듯하였다. 이틀은 눈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이 이틀 동안 소영과 백리빙은 같은 방에서 꼬박 무공을 연습했다. 우문한도는 귀빈을 접대해야 하였으며 또한 소영과 심목풍과의 결투를 안배해야 하였기 때문에 눈코 뜰 새없이 바빴다. 삼 일째 되는 날 오시쯤 소영과 백리빙은 방에서 나왔다. 우문한도와 손불사가 일제히 다가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지금 소대협을 부르려고 하던 참이오." "어떻게 됐소? 일은 잘 마련되었소?" "다행히 명령을 어기지 않았소이다. 내일 오정에 백석파(白石坡)에서 승패를 가리기로 심목풍과 약속이 되었소이다." 백리빙이 나서며 물었다. "백석차가 어디에 있어요? 여기와는 거리는 어떻게 되지요?" 이번에는 손불사가 대답했다. "대략 십여 리는 되지요. 우문선생은 이미 그곳에 사람을 보내서 준비를 시키고 있지요." "매우 잘하셨소! 나와 백리낭자는 아직도 몇 초식의 검법이 완성되지 않고 있으니 지금부터 그 것을 다시 연습해 보기로 하겠소. 내일 오정까지는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그러자 손불사가 돌아서는 소영을 불러 세웠다. "소대협 잠깐만!" "무슨 일이 또 있으신지요?" "내일 오정 소대협은 단독으로 심목풍과 싸울 생각이오?" 손불사가 이렇게 묻자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밖에 달리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소대협, 내가 몇 마디 할 말이 있는데 그것을 들은 후 꼭 기억해주기 바라오." "무슨 일입니까?" "소대협의 나이는 어리며 앞으로 수십 년을 통해 무림상에서 일어나는 가지가지 분쟁은 모두 소 대협이 해결을 해주어야 하니 함부로 생사를 논하지 말기 바라오. 만약 소대협이 심목풍의 적수 가 아님을 깨달았을 때에는 즉시 초식을 거두고 물러서 주시오. 우문선생은 이미 거기에 대응할 안배를 해놓았소." 소영은 신기한 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미 무엇을 마련했다는 말씀이오?" 우문한도가 그의 말을 받았다. "요즘 며칠 동안에 많은 무림동도들이 또다시 이곳에 달려왔소. 그들은 모두 소대협이 불길 속 에서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자 미친 듯이 기뻐하고 있소이다. 소대협이 무림의 정의를 옹호하겠다 고 결심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그들은 모두 감격하여 흥분에 휩싸여 있소이다." 소영이 결심한 듯 잘라 말했다. "내일 그들도 모두 나와 심목풍치 결전에 참석케 하시오. 나를 위해서 사기를 높여줄 수 있으니 까요." "그 중에 중주에서 오신 한 분이 꼭 소대협을 만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나를 대신해서 우문선생이 사절해 주시오. 나 소영이 우쭐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실은 내일 오정의 결전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저는 준비할 것이 많아 그러는 것이오." "그분은 중요한 일로 꼭 소대협을 만나야 한다고 우기고 있소. 나이가 팔십에 가까우며 새하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노인이요. 저는 더 이상 사절할 수가 없소이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곧 만나러 갑시다." "그 노인은 지금 대청에 계시오." 우문한도가 앞장서 걸어갔다. 소영은 우문한도의 뒤를 따라 대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청 안에는 백 명이 넘는 무림동도 들이 운집해 있었는데 모두가 소영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우문한도가 손을 올리자 떠들썩하던 대청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분이 바로 소대협이시오!" 소영은 포권을 하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저의 일 때문에 여러분께서 먼 길을 오셨으니 소제는 지극히 송구할 따름입니다." 군호들은 일제히 이에 대꾸했다. "소대협은 우리 무림에 있어 구원의 별이신데 저희들애 먼 길을 좀 오기로서니 뭐가 그리 대단 하오." 굵직한 음성이 소리쳤다. "길인은 천상의 법, 소대협께서는 변을 당하셨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 저는 그것을 믿지 않았는 데 과연 내 추측이 적중됐소이다." 또 다른 칼칼한 음성이 들렸다. "소대협께서 우리들을 구하기 위하여 마도 속에 뛰어들어 수고해 주셨는데 우리들은 보답을 할 능력이 없으니 응당 일배(一拜)로써 예의를 표시해야 하오." 일호백응(一呼百應), 대청 안에 모여 있던 백 명 이상의 영웅들이 일제히 땅에 엎드려 큰절을 하 였다. 손불사는 이 광경을 보자 탄성을 질렀다. "고금을 통해 이처럼 무림동도의 존경을 한 몸에 모은 사람이 우리 소대협 말고는 아무도 없소." 소영은 군호들이 일제히 큰절을 하는 것을 보자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급급히 땅에 엎드려 마 주 절을 했다. "여러분께서 이렇게 하신다면 나 소영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우문한도가 그의 말을 이었다. "소대협은 기남(奇男)이시니 여러분께서 속된 예의로써 그를 난처하게 하지 마시고 어서 일어나 기 바라오." 과연 이 말은 크게 효력이 나타났다. 엎드렸던 군호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때 하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노인 한 사람이 베옷으로 된 상복을 걸치고 군호들 속에서 걸어나왔다. 그는 천천히 소영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소대협!" 그러나 소영도 공손히 그에게 답례하였다. "고(古) 노선배님이시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고공도(古公道)라 하오." "고노선배님께서는 저에게 무슨 말씀이 있으신지요?" 고공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수십 년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더 못 기다리겠소." 밑토끝도 없는 말에 어리둥절해진 소영이 의아한 낯으로 물었다. "선배님, 무슨 말씀이신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경청하겠소이다." 고공도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한 분의 기인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그의 물건을 한 가지 보관해 왔었소. 그는 저에게 그 를 대신해서 무림에서 공인된 대협을 한 분 선택해서 그의 물건을 기증하라고 했지요. 나는 그 동안 몇 십 년을 두고 그것을 받을 인물을 물색해 왔었소. 그러던 차에 소대협이 나타났소. 소대 협만이 이 물건을 받을 자격이 있소." 소영은 뜻하지 않은 말을 듣자 별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노선배님은 무슨 물건을 보관하고 계십니까?" 고공도는 품에서 노란 비단으로 싼 물건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것은 한 자루의 금검이오. 요기를 소탕하고 무림을 보호하는데 사용하라는 것이외다." 말을 끝내자 양 손으로 그 팜검을 받들어 공손히 소영에게 주었다. 이런 경우 사양을 할 수 없 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소영은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노란 비단을 천천히 풀어 보았다. 그러자 그 속에서 금빛도 찬란한 검집이 드러났으며 두 자도 되지 않는 그 검집에는 고양이 눈알만한 일곱 알의 빛나는 보석이 가지런히 박혀 있었다. 그 검집 속에 들은 검은 볼 것도 없이 단지 이 검집만 보더라도 이미 굉장히 값어치 있는 물건임을 짐작할 수 있었 다. 그것을 본 소영이 검에서 눈을 돌려 고공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검은 너무 고귀하여 소생은 감히 받지 못하겠습니다." 고공도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검은 이미 협사에게 을렸으니 임자가 된 소대협께선 어서 검을 뽑아 보십시오." 소영은 금검의 검집을 들었다. 그리고 솜씨좋게 검을 뽑았다. 한 줄기 싸늘한 한기가 얼굴을 스쳤다. "좋은 검이오. 훌륭한 보검이외다." 소영은 감탄하며 격찬해 마지않았다. 싸늘한 섬광 속에 한 가닥 금빛이 눈을 쏘았다. 한 자 여덟 치의 보검 중간에 한 줄기 금줄이 박혀 있어 눈부시게 빛났다.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마를 항복시키는 금검이 삼백 년 전에 강호에 한 번 출현하여 크게 위력을 떨쳤었소. 육십 사 명의 마두를 쳐 없애서 무림을 계속 팔십 년 동안 평정케 했으며 분쟁도 없게 했었소이다." 그러자 고공도가 곧 그의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우문선생은 과연 견식이 매우 넓으시구려. 이 복마금검(伏魔金劍)은 강호의 마도들을 없앤 후 감쪽같이 사라져 보이지 않아 어떤 사람은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구천을 날아갔다고 했지요. 그러나 사실은 인간 세상에 간직되어 있었소이다. 이 검을 맡긴 사람 은 이 금검이 훌륭한 주인을 만나야 한다고 했소." 그는 이야기를 멈추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음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수명을 다하여 세상을 떠났소." 대청 속에 군호들이 크게 소리쳤다. "당대에는 소대협만이 그 검을 찰 자격이 있소!" 소영이 얼굴을 붉혔다. "여러분께서는 용서하십시오. 제가 무슨 덕이 있다고…" 그러자 고공도가 단호한 말투로 엄숙히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사양할 수 없소이다. 나는 이미 재삼 숙고를 한 후에 결론을 내린 것이니 소대협께서 는 금검을 거두어주시기 바라오." 소영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어, "그럼 소생은 우선 노선배님을 대신하여 보관하겠소이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고공도는 껄껄 웃었다. "이 금검은 나를 수십 년 동안 눌러 편안히 숨 한 번 못 쉬게 했는데 지금 이렇게 주인을 찾았 으니 나의 소원은 이루어졌소." 그는 몹시 유쾌한 듯이 소영을 바라보고 앙천대소했다. 대청을 찌렁찌렁 울리던 그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지더니 그는 그대로 땅에 쓰러지고 말 았다. 소영은 황급히 고공도를 부축해 일으키며 소리쳤다. "노선배님… 노선배님!" 손목을 짚어 보니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는 게 아닌가. 우문한도는 가볍게 탄식을 하며 침울 하게 입을 열었다. "이분은 오랫동안 품어 온 소원을 이루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오. 자아, 보십시 오. 이분의 입가에는 아직도 웃음이 이렇기 남아 있지 않소? 심중의 유쾌함을 알 수 있구려." 군호들의 눈이 일제히 고공도의 죽은 얼굴로 쏠렸다. 과연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사라지 지 않고 입가에 서려 있었다. 소영은 우문한도를 힐끗 돌아보고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우문선생, 될 수 있는 한 장례를 후하게 치르도록 하시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이다." 그는 눈길을 돌려 사방을 한 번 보고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겨러분, 이분께서는 천리를 달려 소대협에게 검을 넘긴 후에야 크게 안심하고 유쾌하게 웃으며 숨을 거두었소. 이것은 한 가지 일을 증명하는 것이오. 하늘에서 굽어 살피는 눈이 있어 우리 무 림동도들의 대난은 곧 사라진다는 징조이오." 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소대협께서 내일 심목풍과 백석파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되어 있소. 이 일은 우리 전체 무림동 도들의 운명에 관계되니 여러분들의 관심도 소대협 못지않다고 생각되오." 군호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우리들은 소대협이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소." 우문한도가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께서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신다니 소대협은 감격하여 더욱 용기백배할 것이오. 내일은 여 러분들도 모두 그 결전장에 나가셔서 우리의 희망인 소대협을 위해 사기를 높혀 주기 바라오. 그 러나 지금 소대협께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하므로 여러분과는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이만 자리를 뜨시게 합시다." 군호들이 일제히 포권으로 대답했다. 우문한도가 소리쳤다. "좋소이다. 여러분과 함께 한 잔 들어서 여러분들을 접대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소." 군호들이 자기를 이렇게 추대하는 것을 보자 소영은 마음이 무거워지고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 다. 그는 즉시 포권을 하고 말했다. "여러분 마음껏 드십시오. 소영은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그러자 대청 안에 군호들티 일제히 포권의 예를 올렸다. "소대협, 몸조리를 잘하시길…" 이 소리를 뒤로 하고 소영은 정실(靜室) 안으로 들어왔다. 백리빙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오빠는 무림동도들의 애호를 한 몸에 지니고 있군요." "그들이 나를 열광적으로 추대하면 할수록 더욱더 나로 하여금 책임의 중대함을 느끼게 하여 어 깨가 무거워지는구나." 백리빙이 방긋 웃으며 그에게 격려의 말을 했다. "쟁쟁한 이름이 그 사람을 오히려 괴롭힌다는 말은 과연 틀리지 않는 말이군요. 내일의 대전에 서 부디 심목풍을 눌러 소원을 이루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소영이 심각하게 말했다. "나는 내일의 가장 어려운 일전은 심목풍과의 일장의 결투가 아니라고 느껴지는구나." 백리빙이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심목풍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에요." 소영이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며 침통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예감만 들 뿐 나 자신이 꼭 어떻다고 결정을 할 수는 없다만 어쩐지 자꾸 그런 생각 이 든다." 그는 품속에서 무공이 기재되어 있는 경문을 꺼내더니 다시 입을 열 었다. "빙아야! 이 책을 잘 보관해라. 내가 만약 내일의 일전에서 불행히 적의 손에 쓰러지거든 너는 이 경문을 꼭 악언니에게 전해주어라." 백리빙은 소영의 손에 있는 그 경문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빠, 정 그런 생각이 드신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세요." "아니 왜?" 백리빙이 비장한 결의를 얼굴에 담고 소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렇게 오래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오빠는 제 마음을 모르세요? 오빠가 죽으면 제가 어 떻게 혼자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이에요?" 소영은 씁스레 웃으며 조용히 말하였다. "빙아야, 나는 너의 마음을 잘 안다. 그러나 이것은 준비에 불과한 것이다. 단독으로 심목풍을 상대하면 나의 승산은 매우 크다. 그러나 우리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되지 않는가? 악누님은 총명하니 그녀의 생각과 지혜는 이 소영 못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감정에 얽매어 그녀로 하 여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진보를 구할 수 없게 할 뿐이다. 만약 그 대인대사의 말씀이 옳다 면 이 경문 속에 기재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이 무공중의 대승의 학문일 게다. 그러니 역시 나의 복수를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무공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연적으로 이 경문을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알겠니?" 백리빙은 멍청히 그를 바라보고 있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빠께서 저의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시면 저도 이 경문을 대신 보관할 수 있어요." "무슨 일인데?" "제가 경문을 악언니에게 주고 다시 오빠의 장지에 돌아와서…" 소영이 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웃으며 말했다.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내 영혼을 벗삼겠다. 이 말이냐?" 백리빙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묘를 다시 열어 관을 뜯고 오빠의 시체 옆에서 자결하여 오빠와 함께 묻히겠어 요." 소영은 이 말을 듣자 가슴속에 피가 들끓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진실로 감동되었다. 그 러나 그는 겉으로는 될 수 있는 한 차분한 빛을 유지했다. "먼저 경문을 보관해라." 백리빙도 선뜻 경문을 받아 품속에 간직했다. "오빠, 어째서 꼭 저더러 악언니에게 전하라고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다른 사람을 시키면 저도 오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아요?" 소영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악누님을 만날 수가 없다." "왜요?" 소영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악누님은 틀림없이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백리빙도 끄덕였다. "악언니는 정말 불쌍해요. 어떤 남자이건 그녀만 보면 모두 반해버리니 말이에요. 악언니는 그것 이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녀는 잠시 시간을 재어 보더니 말을 이었다. "시간이 이르지 않으니 오빠는 휴식을 취해야 해요. 어서 쉬세요." 소영이 대답했다. "나는 몇 초식의 무공을 더 연마해야 하니 나를 일깨우지 마라."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잠시 나갔다 오겠어요." 소영이 그녀를 쳐다보고 물었다. "어디를 가려고 그러니?" 백리빙은 빙그레 웃으며 소영에게 대답했다. "저의 가슴에는 명백치 못한 일이 많아요. 우문선생과 이야기하면 좀 나을까 생각돼요." "빙아야! 허다한 일을 많은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백리빙이 상냥하게 웃었다. "잘 알고 있어요. 저는 우문선생 한 사람과 이야기하겠어요. 다른 사람에게 오빠를 보호하라고 하고 저는 그와 이야기를 하다 오겠어요." 그녀는 소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소영은 그녀의 눈썹 사이에 무슨 걱정거리가 많은 것을 눈치챘다. '요. 며칠 사이에 나는 그녀와 기거를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로 유쾌한 얼굴을 한 것을 하루 도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는 종일 초조해 하였고 나를 위해 무한히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 속에는 일종의 형언할 수 없는 미안한 감이 가득 찼다. 그러나 내일의 결전을 생각하니 이렇게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어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 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조용히 머리 속으로 검초식을 생각했다. 백리빙이 대청으로 걸어 나오자 대청에는 벌써 술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우문한도 와 무위도장, 심지어는 손불사까지 나서며 군호들과 한참 담소하고 있었다. 이것은 호걸들의 친목에 크게 이바지하는 호기있고 열정적인 분위기였다. 이 호기로 들끓는 장 면과 소영이 정실에서 사색에 잠겨 무공의 오묘한 경계를 추구하고 있는 장면과는 대조적인 것이 었다. 백리빙은 대청문 입구에서 한동안 기웃거리다가 가볍게 탄식하며 다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떴 다. 그녀의 심중에는 많은 근심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심각한 고통도 함께 그녀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남에게 털어 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등 뒤에서 갑자기 육중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돌아보니 우문한도가 빠른 걸음 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낭자, 불초를 찾고 있소?"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축중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우문한도는 뜻하지 않았던 일이라 매우 놀랐다. "낭자 무슨 일이 있소? 말해 보시오." 백리빙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다시 침착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저는 선생과 의논을 하고 싶어요. 말해도 좋을까요?" "무엇이건 모두 대답할 테니 낭자는 마음놓고 말씀 하시오. 저를 믿으셔도 무방하오." 백리빙은 잠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러나 저는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군요." 우문한도는 그녀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잠시 묵묵히 있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소대협과 관계되는 일이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는 내일 벌어질 심목풍과의 결전을 걱정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오? 무슨 말이건 어서 말해 보시오." 백리빙이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하기를 내일의 대결에서 심목풍 말고도 또 한 사람의 더욱 강한 적수가 있다고 하더군 요." 우문한도는 흠칫 놀랐다. "대체 그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 백리빙은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는 제게 그것을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우문한도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백리빙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소대협께서 단독으로 심목풍과 대결하게 된다면 내가 보기에는 절대 소대협이 패배하지 않는다고 믿소. 그 심목풍의 공력은 소대협보다 한층 더 심후할지 모르나 그 대신 소대협은 몇가 지의 절기를 몸에 지니고 있소." 그는 여기서 기침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계속했다. "더욱이 그 절기는 각기 특별한 기술이 있어 심목풍으로 하여금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게 할 것 이오. 또한 우리는 충분한 준비를 끝마치고 있으니 과히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되오." 백리빙이 곧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변했어요. 심목풍 말고 또 한 사람의 강적이 있으니 경우가 크게 달라지 는 것이지요." 우문한도가 침착하게 말했다. "소대협께서 말씀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니 우리 역시 알 도리가 없구려, 그러나 내가 이 일을 이미 알게 됐으니 내 능력껏 다시 안배를 할 것이오. 필요시에는…" 그러나 그는 갑자기 말을 끊고 더 이상 계속하지 않았다. 백리빙은 궁금하여 다급히 입을 열었다. "필요시에는 어떻게 할 것이에요?" 우문한도가 천천히 말했다. "소대협은 정의의 상징이오. 무위도장, 손불사 노선배님과 소생 등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소. 그것은 소대협을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백리빙이 근심스럽게 우문한도를 바라보았다. "말은 비록 그렇지만 그는 심목풍과 단독으로 싸우니 또 누가 그를 대신할 수 있겠어요." 우문한도는 미소를 띠었다. "필요시에는 우리가 소대협을 대신해서 죽을 것이며 절대 그를 부상당하지 않게 하겠소." 우문한도는 미소를 띠며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반복했다. "필요시에는 우리가 소대협을 대신해서 죽을 것이며 절대 그를 죽게 하지 않겠소." "그를 대신해서 죽어야 할 사람은 바로 저예요." 우문한도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낭자는 나이가 아직 어려서 꽃 같은데 벌써 살기가 귀찮아졌단 말이오?" 백리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삶에 번뇌를 느끼고 있어요. 그를 대신해서 죽는 길만이 가장 상책인 것 같이 느껴집니 다." 우문한도가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더니 주저하며 물었다. "악낭자 때문이오?" 백리빙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녀와 전혀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이유의 태반은 역시 저의 소윈이에요. 만 약 제가 소대협을 대신해서 죽는다면 저는 영원히 그들 두 사람의 가슴에 살아 남을 것이에요. 안 그래요?" 우문한도는 백리빙을 지그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낭자에게는 항거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데 그것은 타고난 것이오. 여하한 절세의 얼굴도 그 녀와 겨룰 수는 없을 것이오. 만약 소대협이 그녀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나 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오." 백리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들은 상린(祥麟) 위봉(威鳳)이니 하늘이 만드신 한 쌍이에요. 저는 버드나무에 앉은 가련한 제비에 불과할 따름인데 제가 그들 틈새에서 살고 있으니… 소대협이 저를 생각하는 감정 은 역시 사랑보다는 연민의 정일 거예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저었다. "낭자, 나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소." 우문한도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소대협은 남과는 좀 다르오. 그의 타고난 협골의담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한다는 성 격이 있어서 남보다 특출한 성격을 구성하고 있소. 그는 함부로 남에게 감정을 나타내지 않소. 그 러나 그의 심중의 감정은 다른 사람보다 더 뜨겁게…" 그는 얼굴에 진지한 빛을 나타냈다. 그리고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낭자는 이처럼 오랜 시일을 그와 함께 지내면서 밤낮을 벗삼아 왔는데 이같은 경우로 말할 것 같으면 부부나 애인 이외에 젊은 남녀로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소? 소대협의 성격으로는 반드 시 엄하게 구별했을 것이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소. 그것은 그가 심중으로 낭자를 자기의 미 래의 반려자로 시인하고 있기 때문이오." 백리빙은 커다란 눈을 깔빡이며 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이세요?" "제가 언제 낭자를 속인 적이 있소?" 우문한도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계속했다. "낭자가 못 믿겠다면 내 다시 한 가지 일을 설명하겠소." "저는 경청하겠으니 어서 말씀해 보세요." "그는 영당 안에서 악소채의 진심을 말하는 소리를 들었소. 그를 남편으로 인정한다는 말을… 그가 만약 낭자에게 대하여 무정했다면 어째서 그 말을 듣고 낭자와 떨어지지 않으며 장시간 단 둘이만 있었겠소. 지금 천하의 군호들이 이곳에 모여 있으며 그도 또한 가장 어려운 일전을 눈 앞에 두고 열심히 무공을 추구하여 조용히 적을 제압할 방법을 찾고 있는 이 마당에 아무런 꺼리 낌없이 낭자를 자기 옆에 있으라고 했잖소? 낭자가 그를 위해서 무공상의 난제라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곁에 있으라고 했겠소?" 백리빙은 방긋 웃었다. "그의 재질과 지혜는 저로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에요." 우문한도가 곧 받았다. "바로 그것이오. 그럼 그는 어째서 낭자에게 자기 옆에 있어 달라고 했겠소?" 우문한도는 신중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소. 그것은 낭자가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커다란 위로가 되기 때문이오. 사실 그의 마음은 이미 낭자를 떠날 수 없소. 더욱이 이목을 개의치 않고 낭자를 아끼는 경지에 이르 고 있소. 그대들은 밤낮으로 독방에 함께 있으며 낭자 또한 여자의 모습을 되찾아 여자로서 행세 하고 있으니 남들이 밖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보고 있는지 소대협이 생각 안했을 리 있겠 소?" "우문선생은 정말 대단해요. 비단 머리를 쓰는데 일품일 뿐 아니라 여자의 사사로운 속마음도 세밀하게 다스릴 줄도 아시니…" 171. 백석파의 대혈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우문한도를 불렀다. "우문선생!" "무슨 일이오?" "또 다른 일이 있는데 말씀 드려도 괜찮겠어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생각에는 어떠십니까? 나에게 알려 주어도 좋을 것 같소?" "제 생각을 알려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오빠가 아무에게나 말하지 말라는 것이에 요." 우문한도는 눈을 빛냈다. "아가씨! 어느 쪽의 이야기요?" "저 오빠에 관한 이야기예요. 오빠는 내일 싸움에 자신이 없나 봐요. 그래서…" 백리빙은 그 다음 말이 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빠가 말하지 말란 것인데…" 우문한도는 숙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일은 매우 중요하니 숨김 없이 이야기하시오. 소대협이 말하지 말라 하였지만 우리에겐 운 명이 걸린 문제요." "그러나 안심하셔도 돼요. 오빠는 뒷일을 준비해 놓았으니까요." 우문한도는 깊은 관심을 갖고 다그쳐 물었다. "무슨 준비요?" "오빠는 나에게 무공비록을 맡겼어요. 만약 내일 싸움에서 오빠에게 무슨 화라도 있으면 즉시 악언니를 찾으래요. 그래서 그 무공비록을 그녀에게 주고 복수를 부탁해 달라고 했어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소대협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소. 만약 소대협이 죽은 다음에는 그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사 람은 오직 악낭자뿐이오. 그 무공비록을 악낭자에게 준다는 것은 매우 잘한 일이오." 백리빙은 금방 울상이 되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우문한도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쓴 입맛을 몇 번 다시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것은 너무나도 큰 일이라서 저도 얼른 생각이 안 나는구려. 소대협이 내일 싸움에서 패한다 면 강호는 영영 무너지고 마오. 악의 무리에게 짓밟히는 것이란 말이오. 그가 죽으면 모두가 죽는 것이오. 이 늙은이 도 불사신은 아니오. 내 늙은 목숨을 아깝게 생각지 않고 소대협을 돕겠소." 백리빙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선생께서는 빨리 오빠를 도와야 되잖아요. 오빠를 구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을 생각해 보세요. 네?" 그녀가 다급해 하는 것과는 달리 우문한도의 말은 느릿느릿했다. "글쎄요. 저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했습니다만… 심목풍은 만만 치 않은 상대이기 때문에 마음 이 놓이지 않소이다. 그도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을 것이오. 그러므로 이번 싸움은 무공을 겨 루는 것보다 지혜의 대결이 될 것이오." 그는 백리빙을 힐끗 쳐다보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소대협이 무공비록을 악낭자에게 준다는 것도 모두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오. 악낭자가 그 무 공비록을 넘겨 받는다면, 그녀가 강호의 앞날을 책임지게 되는 것이오. 그러나 악낭자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훌쩍 떠나 버렸으니…" 우문한도의 이야기는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소대협은 무공비록을 악낭자에게 줌으로써 다시 그녀의 마음을 돌려 보려는 뜻이오. 악낭자 혼 자 달리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 보니 숨은 뜻이 있었군요." 우문한도는 화색을 띠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나쁜 뜻은 없을 것이오. 아가씨의 말대로 만약에 대비하여 그 이록을 맡겼 을 뿐이오." 백리빙은 얼굴을 붉혔다. "우문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아가씨는 편히 쉬시오. 내일의 일은 내일 생각합시다. 우리는 적의 행동을 살피고 우리의 행동 을 결정할 수밖에 없소. 그리고 우리의 세력이 결코 심목풍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소."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실로 들어갔다. 소영은 여전히 운기조식의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백리빙은 살그머니 그의 곁을 지나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영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소영의 모습은 매우 숙연했다. 그는 백리빙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의 얼굴은 차츰 변했다. 먼저 안색이 변하였고 이어 미간이 찡그려졌다. '오빠는 무엇인가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백리빙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아니, 하루가 지나 버렸다. 다음 날은 먹구름이 해를 가리고 아침부터 비를 뿌렸다. 소영이 정실을 나와 대청으로 나갔을 때는 우문한도를 비롯하여 몇몇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 러나 어젯밤과는 두드러지게 한산하였다. 우문한도는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내어 삭막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오늘 노대협이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무림 동도들이 무려 오백 명이나 모였소이다." 소영은 다소.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래요?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손불사가 대답했다. "이미 우문선생의 지시를 받고 약속 장소로 떠났소. 그들은 십 조로 나뉘었는데 매조마다 오십 명의 무사가 지키고 있소." 소영은 대뜸 이마를 찌푸렸다. "심목풍의 수작이 악랄하거늘 어찌 그들을 먼저 보냈소? 만약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공격을 받 으면 어떡하려고…" 이번에는 무위도장이 말을 받았다. "염려 마시오. 그들 십 개조는 서로 지원할 수 있으며, 매조마다 다시 다섯 명씩 패가 있소. 그 들은 모두 훌륭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오. 더군다나 본파의 몇 제자들을 뽑아 소대협의 친구로 변장시켰소. 중주이고, 종남이협, 전엽청, 사마건, 초곤산, 당문기, 육혼장 등 비교적 무공이 고강한 사람으로 변장시켜 항시 앞뒤로 순시하도록 하였소. 그러니 심 목풍이 선뜻 손을 쓰지 못할 것이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별로 큰 피해는 없을 것이오." 우문한도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심목풍은 소대협과 싸우기 전에는 자기의 체력을 소모하지 않을 것이오." 연이어 손불사가 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소대협, 나는 소대협에게 탄복하고 있소." "무엇 때문입니까 " "소대협이 우문선생을 꼽은 것 말이오. 그 고명한 판단으로 우문선생을 알아봤다는 것만도 오늘 의 승리를 약속한 것이오. 심목풍에 비해 우문선생의 지혜는 결코 뒤지지 않으므로 소대협께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소." 소영은 얼굴을 약간 붉혔다. 손불사는 천천히 다음 말을 꺼냈다. "전에는 심목풍에게 별 관심을 쏟지 않았었소. 그리고 그의 지혜에도 탄복하지 않았소. 그러나 이번에 그가 교묘한 수단으로 무림의 동도를 포섭하는 것을 보고는 크게 감탄하였소. 그는 정말 로 지혜가 하늘 같은 인물이오. 그가 악인이 아니고 다같은 동도라면 무림은 놀랄만큼 번창될 것 인데 아깝게도… 만약 우리에게 우문선생이 없었더라면 우린 꼼짝없이 상대의 간계에 빠졌을 것 이오." 우문한도는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그것은 노선배님의 과분하신 칭찬이시오." 손불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절대로 과장된 말이 아니오. 우문선생은 우리를 지혜로써 살리고 있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무안한 생각을 가지고 곧 화제를 바꾸었다. "자, 시간도 거의 다 되어가니 이젠 가봅시다." 일동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섰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리 많은 비는 아니지만 꾸준하게 오니 조금씩 물이 괴인 곳도 있 었다. 오늘의 대결은 선과 악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중대한 싸움이었다. 다섯 사람은 비를 맞으면서 바삐 길을 재촉했다.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사람이 없 었다. 손불사, 무위도장 그리고 백리빙은 무어라 입을 열어 소영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도 숙 연한 분위기에 말려들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소영은 길을 가면서도 정신을 통일시켰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검초가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싸워 적을 물리쳐야 된다. 그래야만 강호 무림 이 쓰러지는 것을 다시 세울 수 있다.' 다섯 사람의 빠른 걸음은 순식간에 삼십여 리를 달려 대결 장소에 도착하였다. 평시에는 황량하기만 하던 백석파(白石坡)가 오늘은 크게 변해 있었다. 주위는 비를 맞고 서 있 는 군호들로 입추의 여지도 없었다. 백석파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그 이름 그대로 흰돌이 무수히 많이 깔려 있었다. 그 흰돌이 빽빽 하게 들어찬 군호들로 인해 조금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군호들은 대부분이 경장을 하고 제각기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소영이 들어서자 누군가가 우렁찬 소리로 여러 사람에게 알렸다. "소대협께서 당도하셨소." 그 소리에 맞추어 구름같은 군중들의 시선이 모두 소영에게 쏠렸다. 그들은 모두 정중한 예를 표하였다. 소영도 일일이 예로 답하며 그들에게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고맙소이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무림의 장래를 염려하는 뜻에서 모이신 여 러분께 재삼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예의를 올리지 마십시오. 여러분들께서 그러시면 소생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때 군호들 틈에서 싸늘한 광채가 번쩍이더니 소영에게 뻗어왔다. 소영은 악수하던 손을 재빠 르게 풀고 날아 오는 암기를 잡았다. 그것은 기독이 묻혀 있는 유엽비도(柳葉飛刀)였다. "자객이다!" 누군가가 소리치자 군호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죽여라!" "그놈이 누군지 돌로 찧어 죽여라!" 군호들은 일제히 열 개조로 나누어졌다. 그들은 심목풍의 공격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오백여 군호들이 움직이는 것은 일사분란했다. 손불사와 소영 그리고 무위도장은 내심 탄복하였다. '아, 우문선생은 과연 비범한 재질을 지녔구나. 불과 하룻만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데 뭉쳐 놓았으니… 마치 수년간 훈련받은 군사 같구나.' 소영은 수중에 쥐고 있던 암기를 땅에다 버리고 주위를 훑어 보았다. 암기가 날아온 방향에서 한 인물을 찾아 내었다. 그는 경장차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소영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괜찮소이다. 소생은 항상 암기를 당하는 몸이라 이제는 익숙해졌소. 이번에 실패하였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가운데로 나갔다. 사방의 군호들은 소영의 여유있는 태도와 말에 더욱 용기를 가졌다. 소영이 앞으로 십여 보쯤 걸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소대협! 멈추시오." 소영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조금전에 소영에게 암습을 했던 경장 차림의 장한이었다. 그는 어느새 날카 로운 검을 들고 있었다. "당신은 과연 일대의 기협이오. 분명히 내가 암기를 날린 것을 알면서도 몇 마디 말만 하였을 뿐 손을 쓰지 않는구려. 나는 심목풍의 제자요. 그러나 지금 당신을 보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 소." 그는 이십 사, 오 세 정도의 젊은이였다. 장한은 말을 끝마치자마자 들고 있던 비수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그의 가슴에서는 검붉은 피 가 쉴새없이 쏟아졌다. 그는 그대로 잠시 서서 피를 흘리다가 이내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운 사람이로군.' 소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중앙으로 나갔다. 중앙에는 나무를 세워 만든 커다란 원이 있었다. 그것은 천정도 없이 대강 울타리만 띄엄띄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곳이 대결 장소인가?' 소영은 뒤따르고 있던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이것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우리가 만들었소." "그럼 왜 주위에다 울타리를 만들었소?" "그것은 심목풍이 암수를 못 쓰게 만든 것이오. 그 나무들이 있기 때문에 소대협의 눈을 속이지 못한다는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도 하군요." 소영이 그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자 입구 쪽에서 군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왔구나.' 소영이 눈길을 돌려 보니 과연 수십 필의 준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백리빙에게 입을 열었다. "빙아야, 내 부탁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겠어요. 오빠! 몸조심 하세요." 소영은 우문한도에게 눈길을 던졌다. "우문선생, 내가 불행히도 이 싸움에서 패한다 해도 우선은 복수할 생각을 마십시오. 빙동생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 나가기 바랍니다." "안심하시고 싸우시오. 심목풍은 소대협의 적이 못 되오. 오늘 이 싸움에선 틀림없이 심목풍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이오. 조금도 뒷일은 걱정 말고 힘껏 싸워 주시오. 이 많은 사람들이 소대협의 승리를 빌고 있소이다." 소영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는 주위를 훑어 보았다. 심목풍과 그 일행이 백석파에 당도하고 있었다. 심목풍이 제일 앞에 있었고 바로 그 뒤를 따라 붉은 가사를 걸친 중이 보였다. 그 중은 무엇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소영은 대뜸 그를 알 수 있었다. '삼성곡에서 의부에게 무공을 배울 때 방해를 놓던 화상이로군.' 그 중의 왼쪽손에는 세 개의 손가락만 보였다. '의부인 남일공은 무공이 심후하였는데도 그를 물리치지 못했었다. 의부께선 마지막 수법으로 어검술(馭劍術)을 펼쳐 그의 손가락 두 개를 잘랐다. 그 동안 그도 많은 무공의 진전이 있었을 터 인데… 내가 상대키는 매우 어렵겠구나. 심목풍이 이번 제의에 선뜻 응낙한 것도 모두 이 중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소영은 그를 당할 사람은 이곳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기를 생각하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심목풍의 일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붉은 가사를 입은 중의 뒤를 따라 무공자가 보였고 금화 부인도 보였다. 그리고 조금 사이를 두고 산골짜기에서 소영과 장풍을 겨루었던 등륜(鄧倫)이 따르고 있었다. 백화산장의 정예가 모두 나온 것 같았다. 심목풍이 먼저 말에서 내리자 뒤따르던 군호들도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심목풍의 뒤만 따르고 있었다. 심목풍은 항상 거만한 표정이었지만 홍의화상에게는 매우 공손하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화상에게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 먼저…" 홍의화상은 가볍게 웃음을 띠었다. "오늘은 당신이 주인 아니오? 그런데 내 어찌 그 영광된 자리를 빼앗겠소." 당신이 소영을 죽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오. 만약 당신이 그를 당해 내지 못하면 빈 도가 나서겠소." 홍의화상은 별로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장내의 모든 군호들이 그의 무 공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손불사만은 그를 알고 있는 듯 흥의화상을 보자마자 대뜸 안색을 바꾸었다. 손불사는 소영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안 된다. 지금 그에게 말하면 사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심목풍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소영에게 입을 열었다. "자네와의 약속대로 이렇게 당도하였네." 소영은 묵묵부답으로 결투 장소로 걸어갔다. 심목풍도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둥근 원 안으로 들어섰다. 소영은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의 대결은 서로의 생사를 결정 짓는 것이오? 그러니 절대로 상대에게 뻗는 공격을 멈추지 마시오. 자, 당신이 먼저 공격하시오." 심목풍은 냉소를 띠며 주위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는 주위에 모여 있는 수많은 군호들을 보고 내심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십여 년 동안 온갖 수단을 써서 동도를 모았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으지는 못했다. 그러나 소영은 강호에 나온 지 불과 이 년뿐인데 어떻게 해서…' 그는 품속에서 길이가 두 자 정도 되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마치 먹처럼 검은 색을 띠 고 있었으며 단검과도 비슷했으나 비수는 아니었다. 심목풍은 그것을 오른손에 움켜 잡았다. "흥!" 소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심목풍은 쓴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다시 품속에서 금빛이 번쩍이는 단검을 꺼내 왼손에 움켜 잡 았다. 그는 소영을 빤히 쳐다보고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십여 년 동안 무기를 잡아 보지 않았다네. 오늘 생사를 판가름하는 결전이라니 부득 이…" "그러시오?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오이다." 소영은 품속에서 금빛이 찬란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심목풍은 소영이 뽑아든 단검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복마금검(伏魔金劍)이로군." "그렇소. 당신은 이 단검을 알고 있나 보구려…" 심목풍은 긴장된 신색으로 한참 동안 복마금검을 바라보았다. "그 검은 오랫 동안 강호에 나타나지 않던 것인데…" "당신은 이 검을 두려워하오?" "그것은 비록 날카롭고 신비한 위용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쓰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심목풍은 왼손을 휘둘러 단검으로 소영의 가슴을 찔러 갔다. 소영은 그 자리에서 금도를 내리쳐 상대의 일초를 막은 후 재빠르게 역습을 하였다. 그는 상대 의 검초가 변하기도 전에 복마금검을 곧장 뻗어 역시 상대의 가슴을 노렸다. 심목풍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서 있는 그대로 오른손에 들었던 검은 물체로 복마금검을 가볍게 막았다. 복마금검과 검은 물체가 서로 부딪치자, "쨍!"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심목풍은 오른손에 힘을 주고 힘껏 앞으로 밀쳤다. 소영은 뒤로 몇 발 물러서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것은, 저것은 자석이로구나!' 천하고수들의 싸움에는 티끌만한 틈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소영이 뒤로 물러서며 놀라는 기색을 알아차린 심목풍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심목풍은 단검으로 날쌔게 공격을 가했다. 그 단검은 금빛을 번쩍이며 소영의 왼쪽 어깨를 향했다. 그 초식은 매우 날카로왔고 살기를 지 니고 있었다. 우문한도와 그의 모든 군호들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을 했다. '아, 소대협이 화를 당하는구나.' 그러나 소영은 뒤로 물러서서 웃기만 하고 있었다. 장내의 모든 사람은 소영이 어떻게 해서 심목풍의 일 초를 피했는지를 몰랐다. 그것은 다만 일 순간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소를 띠고 있는 소영의 왼쪽 어깨는 붉게 선혈이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 큰 상처는 아닌 듯싶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마주보며 대치했다. "이얏!" 갑자기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소영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는 공중에서 검세를 회전 시키며 두 차례 싸늘한 검광을 흩뿌렸다. 심목풍도 육중한 몸을 솟구치며 일갈하였다. "받아라!" 그는 외침과 함께 단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두 줄기의 섬광이 번쩍이더니, "쨍그랑!"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누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땅으로 내려섰다. 소영은 검날같은 눈썹을 곤두세우고 한 자리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심각하였다. 그 러나 건너 쪽에 내려선 심목풍의 안색은 창백하였다. 그는 눈빛을 빛내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 게 불안한 기색이 보였다. '어떻게 됐을까?' 두 사람의 승부는 아무도 몰랐다. 그들이 공중에서 휘두른 검광 때문에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은 이 장 정도의 사이를 두고 심각한 대치를 하였다. 잠시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소영이 먼저 손을 썼다. 그는 복마금검으로 날카로운 검초를 전개시켰다. 심목풍도 이에 맞서 왼손의 단검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짓쳐나갔다. 소영의 검초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기괴하여 무수한 검영을 내뿜고 있었다. 화산의 담운청 검 법과 각대문파의 장점만 곁들인 검초였던 것이다. 심목풍은 그 날카로운 공격에 점차 수세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중의 검은 자석은 용도가 매우 넓었다. 소영의 단검이 매번 빗나가는 이유도 바로 그 것에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검초는 백여 초를 넘었다. 서로 백여 초를 나누자 아무리 심목풍이 자석에 의용이 넓다 해도 복 마금검을 당해 내지 못했 다. 심목풍이 계속 수세로 몰리자 홍의화상이 앞으로 나섰다. "심대장주! 멈추시오." 그리고는 소영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가 나서 보리다." 심목풍은 때마침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했었다. '옳지 이 기회에…' 그는 소영이 잠깐 주춤하는 사이에 단검을 휘두르며 거세게 덮쳐 왔다. 심목풍은 거센 일격을 보낸 후 소영이 주춤하는 사이에 밖으로 나가 휴식을 취하려 하였다. 그 러나 이번만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피하든가 뒤로 물러설 것으로 생각했던 소영은 그 자리 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소영은 오히려 호통을 쳤다. "심목풍! 도망갈 생각이냐?" 소영은 계속 삼 초를 반격했다. 그의 반격은 복마금검을 휘두르는 것만이 아니다. 삼 초를 날리는 동시에 왼손을 뻗어 탄지신공을 전개했다. 심목풍은 적잖이 당황하여 검은 자석으로 금검을 막으려 하였다. '네가 감히 나를!' 그러나 그의 건방진 생각은 일시에 스러지고 말았다. 소영의 복마금검을 막으려고 검은 자석을 휘두르는데 돌연 어깨가 뻐근해짐을 느꼈다. '당했구나!' 그는 오른손에 힘이 쑥지며 자신도 모르게 자석을 떨어뜨렸다. 소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죽어라!" 외침과 함께 금검을 날쌔게 내리쳤다. 금빛 검광이 한 줄기 직선을 긋는 듯싶자, 심목풍의 오른쪽 팔이 절단되어 버렸다. "으악!" 심목풍의 안색이 금방 새파랗게 질렸다. 잘려진 팔에서는 순식간에 선혈이 솟아 나왔다. 소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흥! 너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리고는 연이어 금검을 휘둘러 상대의 심장을 겨누었다. 심목풍은 이제 사경에 처하게 되었다. 소영의 금검이 거의 심목풍 가슴께로 닿으려는 순간, 돌연 한 줄기의 거센 장력이 뻘어 왔다. 그것은 소영의 허리를 향하고 있었다. 소영은 최후의 일격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우선 그 장력 부터 피해야 했다. 심목풍의 마지막 목숨은 아슬아슬하게 부지한 것이다. 소영에게 장력을 보낸 사람은 바로 홍의화상이었다. 그는 몸을 솟구쳐 올리더니 이내 소영과 심 목풍 사이로 내려섰다. "소대협! 빈도가 맞서 보겠소." 홍의화상은 무작정 공격을 시작하려 했다. 이 때 손불사의 우뢰 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적(賊)화상! 이제는 차륜전법으로 나오겠다는 것이냐?"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날려 안으로 들어왔다. 홍의화상은 냉랭한 코웃음과 함께 손불사에게 일장을 날렸다. 손불사도 그와 정면으로 장풍을 뻗쳐내었다. "펑!" 두 사람의 장풍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그 여파로 생긴 회 오리 바람이 주위의 먼지를 쓸고 지나갔다. 손불사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뒤로 세 발짝을 물러났다. 홍의화상은 소영에게 눈길을 돌리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너는 장산패의 제자이지, 그렇지?" "그렇소! 나도 당신을 본 적이 있소." 홍의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잘 됐군. 내 만약 너를 죽이더라도 그 이유를 모르지는 않겠지?" 소영은 냉소를 지었다. "흥!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대사와 내가 싸운다면 누가 죽을지 모르오. 너무 자신을 갖지 마시오." 홍의화상은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말을 받았다. "흥, 매우 당돌한 말이로군. 장산패가 나와 맞섰어도 그런 말은 못했는데…" 소영은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 온 정신을 검신에다 모았다. '상대는 무서운 적이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싸움이다. 내 이제까지 배우고 닦 은 무공을 힘껏 발휘하여 생사를 결정지으리라.' 홍의차상은 그 모양을 보더니 대뜸 안색이 변했다. "옳지! 네가 벌써 장산패의 어검술(馭劍術)을 터득했구나." 이번에도 소영은 침묵을 지켰다. 이럴 즈음 심목풍과 손불사는 밖으로 나가 각자 동도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손불사는 홍의화상과 장력을 나눌 때 약간의 내상을 받았던 것이다. 밖은 양쪽 동도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틈예서 우문한도가 군호들에게 무엇을 지시하고 있었다. 소영은 그런 것들을 볼 정신이 없었다. 정신과 진기를 모두 복마금검에 모으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노려만 보며 심각한 대치를 하였다. 얼마가 그렇게 지났을까. 돌연 한 가닥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홍의화상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가 몸을 솟구치는 순간, 소영도 삼장이나 높게 공중으로 솟았다. 그리고 나서 금빛의 검초와 붉은 그림자가 허공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검광과 붉은 그림자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동안의 대결 후 먼저 소영이 땅으로 내려섰다. 홍의화상은 뒤따라 내려서더니 곧장 동쪽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가 도망가는 길에는 붉은 피가 떨어졌다. 흰 돌 위에 뿌려진 피는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그 모양을 보던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이 꺾여 버렸다. '아, 나도 다쳤구나.' 그의 희미한 시야에 두 사람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우문한도와 백리빙이었다. 소영은 두 사람에게 들리는 것을 느끼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가 지났는지 수군거리는 인기척을 느끼고 번쩍 눈을 떴다. 소영은 제일 먼저 본 것은 화려하게 수놓아진 천정이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그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는 백석파의 싸움터인 줄로 알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우문한도, 백리빙, 상팔, 두구, 남옥당이 숙연한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 상형과 두형도…' 소영은 중주이고가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반가운 웃음을 띠었다. 중주이고는 숙연했던 표정을 바뀌며 활짝 표정이 밝아졌다. 소영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제일 기뻐한 것은 백리빙이었다. "천지 신명께 감사드립니다. 오빠를 다시 살려 주셨으니…" 소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손을 저으며 만류했 다. "소대협, 움직이지 마시오. 소대협의 내상은 좀 큰 편이오." 소영은 다시 누우며 물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소?" 백리빙이 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꼬박 칠 일 동안이에요." 소영은 깜짝 놀랐다. "꼬박 칠 일 동안이나?"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그렇소. 소대협의 내상을 독수약왕이 고쳐 주었소." "독수약왕도 왔었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왔었소. 이것은 무림 이래 처음 있었던 경사였소. 독수약왕뿐만이 아니라 강호의 각대문파의 장 문인과 각 방의 방주 등 백여 명의 영웅들이 문병을 왔었소. 물론 소림, 화산, 아미 등 구대문파 의 장문인도 왔었소. 특히 개방의 신(申)방주도…" 소영은 마음이 흐뭇해짐을 느꼈다. '나를 위해 온 강호가 나서는구나. 나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는 눈앞에 손불사가 보이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다. "손노선배는 어떻게 되셨소?" 우문한도가 가벼운 기침을 하고 막 대답을 하려는데 등 뒤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그 늙은이 말인가? 죽지 않았네." 소영과 주위의 군호들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손불사가 왼쪽 어깨 밑에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오며 소영에게 말 했다. "소대협은 좀 어떤가?" 소영은 반가운 마음에 호탕한 웃음이 터졌다. "하하… 아마 죽지 않으려는 모양이오이다." 손불사는 침상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당시 소대협의 상처는 너무나 커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네. 모두가 쩔쩔매며 비통에 잠겼을 뿐이었네. 그 때 나도 거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지, 그러나 나는 소대협이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 믿었었네. 나는 죽어도 소대협만은 살 것이라고 말이네." 옆에서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만약 독수약왕께서 때를 맞추어 오시지 않았다면… 그는 오빠이내상을 보더니, 조금만 늦었더 라면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 하였어요. 오빠는 그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깨어나지도 못했을 거예요." 소영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감사를 드려야지. 빙아야, 어서 나 좀 부축해 다오." 여러 사람이 말리는데 또다시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감사할 것까지는 없네." 바로 독수약왕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소영의 침상 곁으로 다가서더니 품속에서 조그만 옥병을 하나 꺼 냈다. "이 병속에는 일곱 개의 영단이 있네. 이것은 하루에 한 알씩 복용하여야 되네. 만약 욕심을 부 려 조금이라도 더 먹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 걸세. 이 약을 칠 일 동안에 다 먹고 나면 거 의 완쾌될 것이니 과히 염려하지 말게." 그는 소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몸이 완쾌되면 내 부탁을 한 가지 들어 주어야 되네." 소영은 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노선배님, 아무 분부라도 좋습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시니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이행하겠습니 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 안심이 되네. 내 부탁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니 안심하게. 몸이 완쾌되면 구궁산으로 가서 내 딸을 만나주게." 소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녀는 왜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까?" 독수약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오게 되었네. 그녀는 구궁산에서 무공을 연마하다가 조금 다쳤다네. 노부는 더 권하지 않겠 네. 소대협이 가든 안 가든 더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일세." 그는 수중에 들고 있온 옥병을 놓고 방을 나가 버렸다. 소영은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했다. 우문한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대협, 마음을 쓰지 말고 편히 쉬시오. 이제는 강호의 평화도 바로 눈앞의 일이오. 강호의 구 대 문파와 각 방이 분기했소. 그들은 남은 잔당을 소탕하기 위하여 지금쯤 백화산장을 공격하고 있을 것이오."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심목풍은 어찌 되었소?" "그의 일행 수십 명은 악을 저주하는 신이 내린 벼락을 맞고 모두 죽었소." 소영은 갑자기 어두운 신색을 하며 다그쳐 물었다. "금화부인도 죽었단 말이오?" 우문한도는 잠시 사이를 두더니 힘없이 대답했다. "죽었을 것이오. 당시 정세가 너무나 긴박하여 그녀에게 알려 줄 틈도 없었소이다." 소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의 시체를 확인하였소?"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 때의 상황은 처참했었소. 상대의 살과 뼈가 풍지박산되어 조금의 형태도 알아볼 수 없게 되 었소. 그런 정세로 보아 심목풍이나 금화부인은 절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오." 이번에는 백리빙이 입을 열었다. "그 심목풍은 간악 무도하여 그런 죽음도 마땅해요. 그러나 금화부인은 엉뚱한 피해를 입은 것 같아서…" 소영은 홍의화상도 궁금하였다. "그는 나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인데…" 우문한도가 가벼운 기침을 하고 대꾸했다. "그는 소대협의 일검을 맞고 많은 피를 흘리며 도망갔소. 아마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병신 이 될 것이오. 그가 목숨을 건진 것만도 천운이라고 생각해야 될 것이오." 그는 신이 난 듯 조금 전에 한 말을 다시 꺼냈다. "구대 문파와 개방에서는 제각기 십여 명의 고수를 내어 심목풍의 남은 잔당을 치고 있소. 그리 고 도망간 홍의화상도 찾고 있으니 곧 자세한 소식을 알게 될 것이오." 손불사가 굵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나무가 쓰러지면 그 위에 있던 원숭이들도 모두 흩어지게 마련일세. 그러니 백화산장도 이제는 그 운이 다하였네. 그리고 또하나 기쁜 것은 강호 무림들이 소대협께 삼면비룡패를 주기로 하였 네." 소영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곧이 듣지 않았다. '설마…' 그는 삼면비룡패의 위용을 알고 있었다. 그 비룡패만 있으면 강호 어디를 가든지 무림을 다스릴 수 있었다. 아무리 천하 영웅들이라 해도 그 비룡패를 소지한 사람의 명령을 따라야 되는 것이다. 소영은 너무나 벅찬 일이기 때문에 무어라 대답을 못하였다.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소이다. 우선 몸이나 완쾌하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부터 소리 지르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형, 소형! 이제 정신을 차렸소?"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마문비였다. "사마건, 당원기, 육혼장이 소영의 영존, 영당을 모시러 갔소. 아마 삼 일 안으로 이곳에 도착할 것이오." 소영은 부모님을 뵈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부터 나왔다. 그는 여러 군호들에게 헛된 눈 물을 보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군호들은 누가 먼저 자리를 비켰는지도 모르게 모두 밖으로 나갔다. 백리빙은 열려진 창문을 닫고 소영의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오빠! 약을 드셔야죠." 방 안에는 이제 소영과 백리빙 두 사람뿐이었다. 백리빙은 다시 말을 꺼냈다. "오빠, 약을 잡수시고 한잠 주무세요." 소영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정을 느끼며 부드럽게 백리빙을 불렀다. "빙아야!" 백리빙은 섬섬옥수를 내밀어 소영의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말하지 마세요." 소영은 그녀의 손을 꼭 부여 잡았다. 그녀의 손은 불덩이 같이 뜨거웠다. 얼굴까지도 붉게 물들 어 더욱 보기가 좋았다. "빙아야, 고맙다. 독수약왕이 언제 이곳에 왔었느냐?" "오빠가 부상당하고 꼭 삼 일 후예요." 소영은 그녀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네가 고생하였겠구나. 내 한 목숨이 무엇이라고…"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오빠는 강호무림을 구한 거예요. 그날 심목풍이 다치지 않았더라면 강호의 각대문파 는 그의 독수에 피를 흘렸을 거예요." 172. 청혼하는 소영 "강호의 각대문파에는 심목풍의 첩자가 숨어 있어 언제라도 독수를 뻗칠 수 있었지. 그들이 일 제히 들고 일어난다면 강호에 미치는 손상은 매우 컸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목숨을 걸고 미리 싸움을 건 거야." "그래요. 나도 오빠의 뜻을 알고 있었어요. 이제는 강호 무림의 영웅들도 모두 오빠의 업적을 찬 양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젠 노골적으로 백화산장에 도전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그럼 각대문파 속에 숨어 있는 심목풍의 첩자들을 찾아냈느냐?"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했어요. 그것이 아직도 큰 골칫덩어리예요. 각대 문파의 장문인들은 그 첩자를 색출해 내는 것을 우문선생에게 부탁했어요." 소영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나 우문선생은 오빠의 상처를 치료하느라 아직 강호에 나가지를 않은 거예요." "우문선생은 첩자를 색출해 낼 확신을 갖고 있더냐?"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몰라요."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은 오랫동안 백화산장에 묵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백리빙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빙아야,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대강 설명해 주겠느냐?" "각대 장문인들이 이곳에 달려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몰라요. 오빠가 부상당한 후부터 줄곧 오빠 곁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마 우문선생께서는 잘 알 거예요." "아니다. 자세한 것은 필요 없다. 나는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야. 그러니까 아무 이야기라도 해줘." 백리빙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을 꺼냈다. "그럼… 우선 오빠의 상처부터 이야기할까요? 오빠를 이곳으로 모시고 와서 우문선생과 몇몇 의 도들이 삼 일 동안을 애써 보았지만 별 효과를 얻지 못했어요. 삼 일째 되는 날 낮에 독수약왕이 찾아왔어요. 그는 오빠의 맥을 짚어 본 후 몇 시간 동안 고민을 하더니 품속에서 단 한 개의 영 단을 꺼냈어요. 그것은 마치 콩알만 하고 초록빛을 띤 것이 었어요. 그것을 먹고도 오빠는 나흘만 에 정신을 차린 거예요."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는 내 상처가 어떻다고 말하지 않더냐?" "그런 말은 없었어요. 저는 줄곧 그의 곁에서 지켜 보았지만 서로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어 요." 소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무공은 조금도 변화가 없겠지?" "나는 그런 것을 모르나 오빠는 원상태로 무공을 유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길 바랄 뿐이다." 소영은 말을 끝내더니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의 무공이 전과 동일한가가 염려되었다. '혹시 내상으로 인하여 내 무공까지도…' 소영은 암암리에 운기를 조식할 기회만 엿보았다. 마침 백리빙이 자리를 뜨고 창가로 갔다. '옳지! 이 기회에…' 소영은 서서히 진기를 유통시켜 보았다. 그의 진기가 가슴에 이르자 돌연 참지 못하는 진통을 느꼈다. 마치 날카로운 비수로 사정없이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소영은 이를 악물고 그 통증을 참았다.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었는지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다행히 백리빙은 아무것도 모르고 창 밖만 내다보고만 있었다. 소영은 큰 숨을 들이마신 후 얼굴에 배인 땀을 씻었다. 소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소리는 무의식중에 낸 것이므로 백리빙에게까지 들렸다. 백리빙은 창 밖을 보던 시선을 소영에게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오빠, 주무시지 않았군요." 소영은 억지 웃음을 띠며 말을 받았다. "잠이 오지 않는구나. 빙아야, 너는 무슨 근심이 있는 듯한데…" "악언니를 생각하고 있어요." 소영은 내심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그쳐 물었다. "누님을 생각하고 있다니…" "언니는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 원수를 찾고 있잖아요? 그리고 원수와 생사를 판가름할 대결을 한다는데 지금 오빠가 움직이지를 못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으니 누가 언니를 도와 주겠어요? 우 문선생께서는 각대문파의 장문인들을 설복시켜 언니를 돕도록 노력하였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다 지 신통치가 않아요. 그리고 오빠와 나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다음 말을 잇지 못하였다. 소영은 어느 정도 그 뒷말을 눈치채었으나 짐짓 다그쳐 물었다. "무엇이냐? 내가 어떻다는 것이냐?" 백리빙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들 사이도 확실한 결정을 지어야지… 나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어요." "무슨 결정이냐?" 백리빙은 쓴웃음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야기할 때가 아니예요. 오빠는 몸이나 편히 쉬세요. 몸이 완쾌되시면 자연 알게 될 테니 까요." 소영은 더욱 궁금하였다. "빙아야, 우리들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너와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우문선생의 지혜가 개입한 다 해도 우리의 일은 결정짓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서 이야기해 보아라. 네가 무슨 결정을 했 느냐?" 백리빙은 우수가 서린 눈빛으로 소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빠, 오빠와 나 사이는 어디까지나 남매지간이에요. 오빠가 나를 돕고 내가 이렇게 오빠 곁에 있는 것도 모두가 남매간의 정일 뿐이에요. 오빠는 역시 악언니와 한 쌍이 되어야 해요. 나는 오 빠의 몸이 완쾌만 되면 즉시 중원을 떠나겠어요." 소영은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로 간단 말이냐?" "집으로 가야지요. 나는 얼음과 눈속에서 살던 몸이니 다시 그 곳으로 가야지요." 소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침묵을 지키러니 미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데려다 주겠다." 그러자 백리빙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건 안 돼요." "어째서?" "나의 가부께선 오빠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고 있어요. 오빠가 만약 나를 데려다 준다면 틀 림없이 싸움을 하게 될 거예요." "싸우게 된다면 너는 어느 쪽을 돕겠느냐?" 소영의 이 물음은 사실 짓궂은 것이었다. 백리빙은 미리부터 그런 물음을 할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빠는 나를 데려다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소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내가 너를 꼭 데려다 주겠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의 영존과 싸움은 하지 않을 것이 다." "안 돼. 저의 아버님은 성격이 괴팍하여 아무도 말리지 못해요. 더군다나 상대의 변명은 전혀 듣 지도 않고요." "그럼 너의 자당께서 나서서 말리시면…" 백리빙은 장탄식을 하였다. "오빠는 어째서 나를 데려다 주려고 하세요?" 소영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빙아야, 자고로 사위를 죽이는 장인을 보았느냐? 너의 영존께서 아무리 불같은 성격을 지녔다 해도 아마 사위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백리빙은 언뜻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잠시 멍하니 소영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럼 나에게 구혼을…" 그녀는 기쁨에 넘쳐 눈물을 흘렸다. 소영은 그녀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을 보고 내심 흠칫 놀랐다. "빙아, 화가 났느냐?"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닦았다. "아니예요. 기뻐서 그래요. 오빠께서 나를 그토록 생각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그녀는 소영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정말 바보였나 봐요." 소영은 손을 돌려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빙아야, 우리 자세한 이야기나 하자. 오늘은 내 마음속에 있던 모든 이야기를 모두 해주겠다. 그러나 듣고서 화를 내지는 마라." 백리빙은 눈물을 말끔히 닦고 단정히 앉았다. "저는 이미 오빠의 아내예요. 남편이 무어라 하는데 어찌 순종치 않겠어요?" "현재는 아직도 남매다. 우리는 부모님이 있으니 먼저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야 돼." 백리빙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우리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을 수 있어요. 다만 오빠의 양친께서 이 못난이를 며느리로 맞 으실는지가 궁금하군요." "그것은 염려 마라. 나의 아버님께서는 이미 명리를 멀리하셨다. 물욕을 모르고 사람을 모두 선 으로 여기시고 있다. 어머님도 역시 사리를 명석하게 판단하실 줄 알아 항상 나를 편들어 주었다. 게다가 너는 예쁘고 지혜가 많으니 오히려 내가 부족할 것이다. 만약 내 부모님들께 허락을 받지 못할 것이었다면 그렇게 실없이 말을 하지는 않았다." 백리빙은 애정이 넘치는 눈빛으로 소영을 바라보며 살며시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은 힘차게 엉켜졌다. "만약 오빠의 부모님들께서 허락치 않으신다면 언제까지라도 땅에 엎드려 허락을 빌겠어요." "우리는 몇 번이나 생사의 고배를 함께 겪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을 이겨 냈다. 부모님들이 이 것을 아신다면 꾸중은커녕 너를 칭찬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양해를 구할 것이 있다." 백리빙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그리고는 이내 무엇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악언니 때문이군요? 그렇지요?" 그녀는 방그레 웃으며 소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안심하세요. 저 역시 오빠와 마찬가지로 언니를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언니가 우리의 사이를 싫어하신다면 미련없이 오빠를 언니에게 양보하겠어요." 그녀는 의자를 끌어 바싹 다가앉으며 말을 계속했다. "오빠는 무공이 고강하고 그 명성이 천하에 알려져 이후 강호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오빠를 찾 을 거예요. 지금은 이렇게 자유스런 몸으로 오빠를 따라서 사방을 돌아다니지만 막상 결혼하고 보면 그렇지 못할 거예요. 나는 시부모님을 모셔야 되고 집안일도 보살펴야 되니까요. 오빠는 강 호로 난가시면 나 혼자 어떻게 살아요. 그러니까 악언니가 함께 있다면 말동무도 되고…" 소영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너는 제법 어른다운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리고 또하나, 너에게 미리 설명해 줄 것이 있다." 백리빙은 눈빛을 빛냈다. "독수약왕의 딸인 남궁낭자의 이야기겠지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너도 들었겠지만 내 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구궁산을 찾아가 야 된다. 그의 딸이 다쳤다 하니 응당 문병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너는 그것을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백리빙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나는 오빠를 믿을 수 있어요. 오빠는 대장부이며 무림의 영웅이기 때문이죠 오빠는 내가 질투 를 하리라 생각하세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다만…" "다만 무엇이냐?" 백리빙은 싱겁게 히죽 웃었다. "다만 내가 오빠의 아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은 괜찮지만 정은 주지 마세요. 악언니를 제외하고 말예요." "염려 말아라. 나는 내 처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다." 소영은 말을 끝내고 돌연 진지한 표정으로 백리빙을 바라보았다. 백리빙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빙아야, 네 스스로 악누님의 이야기를 들추고 또한 주저없이 아내가 되겠다니 난 뭐라고 단안 을 내려야 좋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웃음으로 너의 말을 받았지만 내심으로 많은 생각을 하였 었다. 너는 무엇보다도 이것만은 알아 두어야 된다." 백리빙은 눈빛을 빛내며 들었다. "악누님은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선녀로서 비유한다면 나는 그녀와 감히 어울릴 수도 없다. 남옥당은 이미 모든 것을 깨닫고 누님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옥소랑군은 아직도 누님에게 정을 주고 있으나 그것도 잠시뿐일 것이다. 강호 무림의 모든 남자가 누님을 따르려 하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실증하고 있다…" 백리빙이 소영의 말을 끊었다. "아니예요. 언니가 오빠에게 대하는 것만은 틀려요. 언니는 영전에서 천하 영웅들에게 약속했어 요. 언니는 틀림없는 오빠의 아내라고요. 특히 언니의 모친께서 유서에 남긴 말도 기억하시고 있 을 거예요. 설마 오빠는 악언니의 정을 저버리지는 않으실 테지요." "악누님도 나에 대하여 정을 주는 것 같더냐?" 백리빙은 고개를 긴덕였다. "만약 정을 주고 있지 않다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있겠어요?" "그러나 누님이 나에게 정을 주었다면 그것은 애정이 아니라 동정심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님께선 유서에 누님과 나를 부부로 정하셨지만 정녕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은혜에 보답하고 또 내 건강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희생이었던 것이다." 소영은 처음으로 악소채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오늘에 와서는 그런 보답도 내 몸도 모두 유서와는 달라졌다. 그러니까 그 유서는 자연 무효가 되는 것이야. 악누님은 너무나 비범한 여자로 그 마음대로 살아가야 돼, 나도 그녀를 누님으로 생 각할 뿐 조금의 정도 기울이고 있지 않다." 백리빙은 눈살을 찌푸리며 화제를 바꾸려 했다. "오빠,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 하기로 해요." "왜 너는 내 말을 못 믿겠느냐?" "믿어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이후 정세의 변화에 따라 사정이 변할 수도 있잖아요. 또한 우리 가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예요. 나는 오빠의 마음만 믿고 있을 뿐이에요." 소영은 가볍게 웃었다. "하하… 그래, 그래. 우리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그러나 오늘 너에게 구혼을 했다는 것을 잊지 는 말아라." 백리빙은 얼굴을 붉혔다. "빙아야, 밖에 나가서 우문선생을 불러다 주겠느냐? 내 그에게 몇가지 묻고 싶은 말이 있구나." "오빠는 아직도 몸이 완쾌되지 않았어요. 그런데다가 오늘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셨으니 그만 쉬세요."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우문선생께 아주 급히 물어 볼 말이 있어서 그런다." 백리빙은 더 말리지를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우문한도는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왔다. 그는 침상 가까이로 다가 서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 무슨 분부라도 있으시오?" 소영은 조금 전에 백리빙이 앉았던 의자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제가 몇가지 가르침을 받고 싶소이다." 우문한도는 그 의자에 앉으며 다급히 물었다. "불초에게 무슨… 무엇을 물어 보시려오?" "우문선생께서는 너무나 공손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렇게 목숨을 건진 것도 모두가 우문선생의 덕분인데…"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소대협께서 불초를 여기까지 끌어 올려준 것만도 과분한 일이오. 그 덕분에 강호 무림 에 불초의 명성을 알리게 된 것이오." "우린 피차 서로 돕고 있는 것이오. 그러나 이후부터는 너무 겸손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제가 무안하오이다. 저는 우문형이라 부르고 우문형께선 소제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소?" 우문한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건, 대협이라 부르던 것이 습성이 되었으니…" 소영은 이 말이 우문한도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믿었다. 그는 더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우문형, 저에게 솔직이 말하여 주시겠소?" "무엇을 물으시려오? 불초는 조금도 거짓없이 대답해 드리리다."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심목풍이 정말로 죽었습니까?" "소대협께서는 그 일에 대하여 의문을 느끼시오?" 소영의 신색은 심각하였다. "저는 믿지를 못하겠소. 심목풍이 그리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심목풍의 일행은 모두 죽었소. 그리고 심목풍도 죽었다고 믿고 있소." 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그쳐 물었다. "우문형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우문한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소대협께 숨기지는 않겠소. 불초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지 않소." "어째서입니까?" "현장에서 심목풍의 유물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소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목풍은 구렁이 같은 계략으로 자신의 처신을 생각해 놓았을 것입니다. 그가 도망갈 준비를 해놓지 않았을 리 없지요."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심목풍이 도망가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점이오. 미리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두 명의 부하에게 심 목풍을 감시하라고 하였는데 그들도 못 보았다는 것이오.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의 생사에 관해 확신을 못 갖는다는 말이…" "그렇기도 하군요." 우문한도는 침상 끝을 만지며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우문한도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심목풍의 지혜로서는 과히 어렵지 않게 그곳을 피했을 것이오. 그러나 그의 팔이 잘렸기 때문 에 앞으로는 그의 무공도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오. 이후 다시 소대협과 겨룬다면 몇 수 버티지 못할 것이오." 소영은 워낙 경황이 없어 그 때의 처절했던 대결을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우문형,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말하여 주시겠소?" 우문한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산신뢰(破山神雷)의 폭발 당시 그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소. 그것도 무참하 게 말이오. 모두의 살과 뼈가 걸레처럼 되었을 정도요. 물론 우리 편도 몇이 부상을 당했으나 미 리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었소. 그 폭발이 있은 직후는 이 세상에서 두 번 다시 없어야 될 생지옥이었소. 아비규환의 틈바구니에서 적과 우리 편이 뒤범벅이 되었지요. 그 틈에 심목풍이 도망갔을 것이오." "그럼 무공자는 어떻게 되었소?" 우문한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중상을 입고 간신히 도망쳤소." "우문형께서 직접 보셨소?" "남옥당에게서 들었소."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계속했다. "저는 각대문파의 사긴를 돋우려고 확실치도 않은 말을 하였소. 심목풍이 죽었다고 소문을 퍼뜨 린 것이오. 아직도 심목풍이 두려워 손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소. 강호 사람들은 심 목풍이 죽은 줄로만 알고 이제는 마음놓고 백화산장을 공격할 것이오. 만약 훗날에 심목풍이 다 시 나타난다 하여도 그는 단지 처량한 도망자에 불과하오. 각대문파가 지금 백화산장의 잔당을 쫓는 것은 모두 심목풍이 죽었다고 믿기 때문이오."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우문형의 이야기에 깊은 뜻이 들어 있군요." 우문한도는 멋적은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게라도 수를 써서 우리의 힘을 키을 수밖에 없었소." "그것이 강호를 위하고 인의를 지키는 일이라면 하늘에서도 용서하실 것이오." "소대협은 이제 강호 무림을 위해 혼자서 애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각대문파와 수많은 영웅들이 들고 일어났다는 것을 상기하시오." 우문한도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백화산장이 다시 중흥할 것이란 것은 조금도 생각지 마시오. 지금 백화산장에는 심목풍 이 없으니 오합지졸이오. 그런데 강호의 각대문파가 일제히 쳐들어 가니 아무리 막강한 세력을 지녔던 것이라도 일시에 무너질 것이오. 앞으로 백화산장은 강호에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오." 소영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그러나 제 생각은 조금 틀리오이다." "소대협의 고견을 뒤담아 듣겠소." "심목풍은 아직도 살아 있을 것이며 그의 일부 세력도 건재할 것이오. 각대문파에 침투해 있는 그의 첩자들도… 만약 심목풍의 상세가 좋아져 다시 나타나면 그 남은 세력이 들고 일어날 것이 란 말이오. 그 때는 더욱 잔인한 수법으로 강호를 괴롭힐 것이오." 우문한도는 미간을 크게 찡그렸다. "소대협께서는 지금 하신 말씀이 어느 정도 근거 있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오. 어느 우연한 기회에 땅굴 속에서 살고 있는 무림 인물을 보았소. 그들은 모두 예사 무공을 지닌 것이 아니었소. 그들은 인적이 드문 숲속에 은거해 있으면서 강호 와의 연락을 취하고 있었소. 심목풍의 수하들도 그런 식으로 때를 기다리는 것일 것이오." 우문한도는 어두운 신색을 보였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볼 문제거리요. 저는 지금 곧 각대문파와 개방의 인물들을 만나 상세한 계획을 논의하겠소. 하여튼 이번 기회에 백화산장은 뿌리채 없애 버릴 터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형께서 직접 나서시겠다니 조금은 마음이 놓입니다." 그리고는 우문한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가 두 가지만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사적인데…" "무엇이오? 소대협께서는 서슴지 마시고 분부하십시오." 소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옛부터 화(禍)는 물어도 복(福)은 묻지 않는다고 하였소. 내 상세를 묻지 않을 수 없군요. 우문 형은 의도에 능통하니 분명 내 상세를 알고 있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오랜만에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소대협께선 과분한 칭찬을 하십니다. 저의 의도는 일 푼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흐뭇함이 엿보였다. 소영은 가볍게 따라 웃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우문형,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의도의 영험을 논하는 것이 아니오. 제 무공이 전과 다름없이 건재하는가를 묻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이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한참 동안 할 말을 잃고 있었다. '무공이? 소대협의 무공이 없어졌다면… 안 되지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우문한도는 미친 사람처럼 입을 씰룩이더니 무겁게 말을 꺼냈다. "소대협, 그럼 무슨 불편이라도 있소?" "진기를 순환시켜 공력을 모을 수가 없구려. 약간만 진기를 순환시키면 가슴이 무척 아프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대협께선 혼미상태에서 깨어난 지가 얼마 안 되니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있을 수 있소. 소대협은 바로 가슴에 일장을 맞은 것이니까. 독수약왕이 주고간 영단이 남았으니 우선은 시일을 기다려 봅시다. 그 약을 먹고도 아무런 효험이 없으면…" 우문한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영은 말을 받았다. "알겠소이다. 우문형의 이야기는 제 무공이 원상태로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로구려." 그의 신색은 매우 어두워졌다. 이제까지 듣고만 있던 백리빙이 급히 입을 열었다. "오빠, 너무 섭섭히 생각 마세요. 오빠는 이미 강호에 혁명을 남겼으니 아무런 미련도 없을 거예 요." "나는 무공을 잃었다고 미련을 갖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나에게는 몇 가지 일이 남았으므 로…" 백리빙은 눈빛을 빛내며 곧 말을 받았다. "오빠 대신에 우문선생께서 나머지 일을 처리하실 거예요."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우문형께서는 강호의 여러 복잡한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내 일에 신경쓸 여유 가 없다." 우문한도가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소대협, 무슨 일인지 나에게 말하여 주실 수 있겠소? 저는 몸이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소 대협의 소망을 이루게 하겠소. 더군다나 소대협의 무공이 폐쇄된 것도 아니고… 그러나 다만…"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사실대로 말해 주시오. 무엇이오?" "소대협의 무공은 독수약왕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오." 백리빙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왜요? 그렇다면 그 독수약왕은 오빠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다시 독수를 뻗쳤단 말이에요?" "그가 다시 독수를 뻗쳤는지는 자세히 모르오. 그러나 분명 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소." 우문한도는 눈길을 백리빙에게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낭자는 매우 총명하니 벌써 그 내막을 알고 있을 것이오." 백리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가요. 독수약왕은 암수로써 오빠가 싫더라도 구궁산으로 찾아가게 만든 것이로군요. 그 의 딸을 만나게 말이에요." "그렇소.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직은…" "왜요?" "독수약왕이 주고간 영단이 아직도 여섯 알이나 남았으니 육 일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오." 소영과 백리빙은 다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한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소대협께선 아직도 상세가 완치된 것이 아니니 과로해서는 안 되오. 되도록 말을 줄이고 무리 해서 움직이지 마시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 정중한 예를 올렸다.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편히 쉬도록 하시오." "우문형!"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지요?" "악누님에 대하여 묻고 싶소이다." "저는 그녀가 동쪽으로 달려갔다는 것만 알고 있소이다." "이모께선 나를 친자식처럼 대해 주셨고 누님은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켰소. 이제 내가 이만큼 성 장했으니 누님을 도와야 하겠소. 우문형께선 어디 짐작되는 곳도 없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오. 그러나 전심을 다하여 악낭자의 흔적을 찾겠소. 그동안 아무 걱정 마시고 몸이나 휴양 하시오." 소영은 우문한도의 손을 힘껏 잡았다. "저는 우문형께 모든 것을 맡기겠소. 잘 처리해 주시기 바라오." 그는 말을 끝내고 곧 눈을 감았다. 우문한도는 백리빙에게 다가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낭자, 시간 맞추어 약을 복용해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칠 일의 시간은 순간에 지나쳐 버린 것처럼 빨랐다. 우문한도의 지대한 노력으로 칠 일 동안 조 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소영은 마지막 영단을 복용하자마자 궁금한 마음이 앞섰다. '내 무공이 여전한가?' 소영의 상세는 이미 완쾌되었다.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도 있었고 말소리도 크게 낼 수 있었 다. 그는 운기를 조식했다. 진기가 가슴에까지 다다랐을 때 별로 장애가 없었다. '아! 무공은 괜찮은 것 같구나.' 다시 운기를 조식시켜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진기가 겨드랑이께에 다다랐을 때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앗!" 하는 비명을 질렀다. 전날 가슴께가 아팠던 것처럼 겨드랑이가 아픈 것이다. 양쪽 겨드랑이가 비수로 찔리는 것 같이 통증이 심했다.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 백리빙은 소영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것을 보고 슬며시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소영에게서 심각한 표정을 찾아내고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아! 무공이…' 백리빙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오빠! 좀 어때요?" 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백리빙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함을 지니고 있었다. "빙아야, 이제 나는 끝장이다." 백리빙은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오빠가… 악언니와의 약속도 있는데… 이걸 어쩌나.' 소영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힘없이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멍하니 천정만 바라볼 뿐이었다. 백리빙은 그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하여 무어라 위로의 말도 못하고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녀 는 우문한도가 묵고 있는 거처로 줄달음쳤다. 마침 그는 상팔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문한도는 달려오는 백리빙을 보고 벌떡 자리 에서 일어났다. "낭자! 무슨 일이라도 있소?" "오가… 오빠가 견디어 내지 못할 것 같아요." 상팔은 깜짝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무엇이라고? 형님의 상세에 무슨 변고라도 있단 말이오?" "아니예요. 상세는 이미 다 나았어요." 백리빙이 말끝을 잇지 못하자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무공을 잃었군." "그래요. 오빠는 전날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했지만 막상 무공을 잃었다고 단정하면 아마… 아 마 자결이라도 할 거예요." 백리빙은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우문한도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실내를 왔다갔다 했다. "낭자,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시오. 그래 소대협이 무어라 합니까?" "오빠는 책상다리를 하고 운기를 조식하더니 캄자기 비명을 질렀어요. 그리고는 긴 한숨과 함께 이제는 끝장이다, 라고… 오빠는 마치 혼나간 사람처럼 천정만 바라보고 있어요. 제가 옆에 있다 는 것도 모를 정도예요. 정말 오빠가 불쌍해서 못 보겠어요." 백리빙은 비로소 흐느끼기 시작했다. 173. 그리움으로 병든 소녀 우문한도는 잠시 숙연한 표정으로 고민에 젖어 있더니 백리빙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낭자, 진정하시오. 일은 이미 내가 예측하던 그대로요." "예측하고 있었다니요?" "그렇소. 다만 단정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오. 내 추측이 틀리기를 바랐는데 불행하게도 예측 그대로 되었구려." "무슨 방법이 없겠어요?" "나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백리빙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탄식처럼 말했다. "저는 그의 그런 표정을 처음 보았어요. 슬픔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얼른 보기에 그것은 절망 에서 생긴 평정 같았어요." 백리빙은 말끝을 맺더니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의 무공을 회복시킬 수 있다면…" 우문한도가 무겁게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이 할 수 있소." 상팔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 독수약왕은 천리 길을 멀다않고 달려와 형님의 상처를 치료했으면서 어째서 완전히 낫게 하 지 않았을까요?" 두구가 자기 의견을 말했다. "그 늙은이는 분명 어떤 속셈이 있어 그랬을 것이오. 후한 예물을 준비해 그를 다시 한 번 불러 오면 될 것 아니겠소?" 백리빙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진주나 보석 따위로 독수약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을 거예요." 두구가 말했다. "우리는 천 년 묵은 산삼과 진귀한 명약이 있는데…" 우문한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독수약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예물이 아니오. 그것은 단 한 가지…" "도대체 무엇이오?" 말끝을 흐리는 우문한도가 답답하다는 듯 상팔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우문한도가 짧게 대답했 다. "정이오." 중주이고는 처음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느끼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독수약왕은 떠나기 전에 남궁낭자는 진기가 막혀 움직일 수 없으니 소대협 구궁산으로 오라고 했잖소?" "그랬지요." "그곳에 오든 안 오든 그것은 소대협에게 맡긴다고 말했지만… 소대협이 그곳에 안 갈 수 없도 록 만들었던 것이오." 백리빙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만일 소영오빠가 가지 않으면 무공을 회복할 수 없다는 암시를 준 것이군요." "바로 그렇소." 우문한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소대협도 구궁산으로 가지 않으면 무공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나 소 대협은 독수약왕의 은근한 협박에 끌려 그곳으로 가긴 싫어할 것이오. 때문에 소대협은 가지 않 을 것 같소." "하지만… 오빠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낭자께서 나서야 하오." "제가요?" "그렇소. 현재로선 낭자만이 소대협을 구궁산으로 보낼 수 있소. 낭자의 권고만이 소대협의 마음 을 움직일 수 있소." 백리빙은 미간을 좁히며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좋아요. 제가 권고하겠어요." "고맙소. 소대협을 생각해서 낭자가 힘써 주어야겠소." 우문한도는 음성을 훨씬 낮추어 말을 이었다. "소대협의 한가닥 정이 낭자에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소. 악소채도 그의 정을 끌어 들일 수는 없소. 그 외의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낭자, 마음을 크게 먹으시오." 백리빙은 고개를 숙인 채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독수약왕이 오빠의 무공을 회복시켜 주기만 한다면 저는 오빠가 여자를 아무리 많이 거느 린다 해도 언짢게 생각지 않겠어요." 중주이고는 백리빙의 말에 새삼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백리빙은 그들 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가 구궁산으로 가도록 권유하는 것은 제가 하겠지만 모시고 가는 것은 두 분께서 하셔야 되겠어요." 우문한도가 말했다. "낭자의 생각이 옳소. 소대협을 중주이고가 모시고 가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오." 중주이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리빙이 몸을 일으켰다. "우문선생의 많은 가르침을 입었어요. 저는 그만 돌아가서 오빠를 설득시켜 보겠어요." 다급히 덧붙였다. "소대협에게 구궁산으로 가라고 권고만 하시고 될 수 있는 한 내막을 설명하지 마시오." "알겠어요." 백리빙은 급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상팔이 입을 열었다. "우문형! 독수약왕은 병상에서 헤아나지 못하고 있는 자기 딸을 형님에게 시집 보내려는 생각이 아니오? 그래서 형님의 상처를 치료하는 척하며 어떤 독을 넣은 것이 아닐까요?"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아마 그런 짓을 하진 않았을 것 같소. 다만 상처를 완전하게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인 것으로 생각되오." 상팔이 코웃음치며 분개한 어조로 말했다. "그놈… 형님을 잘못 봐도 유분수지 무공을 회복시켜 준다는 조 건으로 형님을 굴복시키려고 들 다니…" 상팔은 허공에 독수약왕이라도 있는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야! 이 쓸개 빠진 독수약왕아! 네가 만일 정성을 들여 형님의 상처를 치료했다면, 본래 인정이 많은 형님은 몹시 감동해서 오히려 네 딸을 맞아 들일 가능성도 있었는데… 어리석은 것 같으니 라구…" 우문한도는 상팔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더니 얼른 엄숙한 표정으로 바꾸며 말했다. "상형,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하오. 두 분은 독수약왕을 만날 때에 어떤 기분나쁜 일이 있더라도 제발 참아 주셔야 되오." 이 말에 상팔이 공손한 태도로 답변했다. "나는 다만 이곳에서 몇 마디 푸념을 했을 뿐이오. 형님의 무공이 회복될 수만 있다면 독수약왕 에게 절을 몇 번 하라고 해도 하겠소." "하하하, 그런 생각이라면 좋소. 만일 독수약왕이 제시하는 조건이 너무 무리여서 소대협이 고개 를 숙이지 않으려고 하면… 역시 두 분께서 소대쳔을 권고해 주시기 바라오." "그것은 매우 곤란한데요. 형님이 한 번 틀어지면 나는 설복할 자신이 없소." 상팔의 말에 우문한도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무릎을 쳤다. "상형! 이렇게 하시오!" "어떻게요?" "우문한도가 보기에 심목풍은 아직 죽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고." 상팔도 손으로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형님은 다시 투지를 돋을 것이오. 심목풍이 살아 있다는 것은 형 님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문제니까요." "그렇소. 헌데…" 우문한도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불행하게도 심목풍이 정말 살아 있을는지도 모르오." "그럴 리가 있겠소." "글쎄요. 나도 상형의 말이 맞기를 바라지만… 만일 심목풍이 아 직까지 살아 있다면…" 우문한도는 얼굴에 긴장을 떠올리며 분연히 말했다. "전체 무림을 위해서라도 소대협은 꼭 무공을 되찾아야만 하오." 두구가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 형님의 무공을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독수약왕뿐이라는 것을 형님도 알고 있소?" "내 생각엔 총명한 소대협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 을 뿐이지요." "백리낭자가 형님을 구궁산으로 가도록 할 수 았을까요?" "그것은 백리낭자의 수완에 달린 것이오. 이건 내 짐작이지만…소대협이 십중팔구는 승낙할 것 이오." "어째서요?" 우문한도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백리낭자가 소대협에게 쏟는 정은 대단하오. 그녀는 정성을 다해 권고할 것이오. 그리고 소대협 역시 자기가 아직 무공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래서 소대협이 허락할 가능 성이 크지요." "우문선생은 확신하고 있는 듯한 말씀이군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두 분께서는 짐을 챙기시오. 나는 이곳에서 백리낭자를 기다리겠소." "그럼 우린 만반의 준비를 해 두겠소." 상팔과 두구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우문한도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 쉬었다. '사실 나도 자신은 없다. 소영이 과연 구궁산으로 갈까?' 우문한도는 매우 초조한 마음으로, 자주 문으로 시선을 던지며 백리빙을 기다렸다. 한 시진 정도 지났을 무렴에야 백리빙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채 마르지 않았 다. 우문한도는 초조한 마음으로 다급하게 물었다. "낭자, 소대협을 설복했소?" 백리빙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처음엔 가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어요. 제가 울며 애걸하자 비로소 허락하더군요." "낭자, 정말 수고하셨소." 우문한도는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언제 떠나기로 결정했소?" "빠를수록 좋겠지요." "나는 이미 중주이고에게 짐을 꾸리라고 했소. 만일 낭자께서 동의한다면 곧 떠날 수도 있소." 백리빙은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의 상처가 아직 완쾌되지 않아 걸을 수가 없어… 그런데 어떻게 지금 떠나지요?" "물론 무리지요. 허나 나는 사람을 시켜 포장마차를 준비해 놓았소. 깊은 산길에선 가마로 사용 할 수도 있는 것이오." 백리빙은 처연한 기색으로 앉아 있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밖으로 나갔다. 한참 후에 포장마차가 도착했다. 우문한도는 마차를 자세히 점검한 후 소영을 조심스럽게 옮겨 태웠다. 상팔과 두구가 마부석에 나란히 앉자 우문한도와 백리빙은 마차 옆으로 비켜 섰다. "이랴!" 상팔의 채찍이 말 잔등을 갈기자 마차는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중주이고는 계속 마차를 몰았다.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바꾸고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쉬 지 않고 달렸다. 깜깜한 밤길을, 비가 쏟아져 질척거리는 산길을, 뙤약볕이 피부를 태우는 한낮의 들길을 마차는 계속 달렸다. 그렇게 달린 지 며칠 후, 마차는 드디어 구궁산 밑에 이르렀다.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잠깐 말을 멈추게!" 상팔의 말에 두구는 마차를 세웠다. 상팔은 우문한도가 그려준 지도를 한동안 들여다 보더니, "여기서부터는 마차가 다닐 만한 길이 없군." 하며 마차에게 뛰어 내렸다. 두구가 뒤따라 내려섰다. 두 사람의 말을 떼어 내고 가마를 만들었다. 마차가 워낙 작고 가벼웠기 때문에 바퀴와 끌채를 떼어내니 훌륭한 가마가 되었다. 두 사람은 가마를 메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험하고 꾸불꾸불했으며 암석과 밀림 때문에 주 위를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우문한도는 구궁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독수약왕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문한도는 독수약왕이 소영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산 속으로 들어 가는 몇 개의 중요한 길을 지도 위에 상세히 그려 놓았다. 그래서 중주이고가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맬 염려는 없게 했다. 가마에 흔들리면서도 소영은 별로 말이 없었다. 무엇인지 깊은 상념에 잠긴 표정으로 중주이고 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상팔이나 두구도 소영에게 쓸데없는 말을 걸지 않았다. 지도에 명시된 길을 따라 점점 산속 깊 이 파고들 뿐이었다. 점심 때가 가까와질 무렵, 이들은 한 개의 산봉우리에 이르렀다. 앞에서 가마를 메고 있던 상팔 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한 그루의 거대한 소나무 밑에 작은 절이 한 채 있었고 절 옆에는 풀잎으로 지붕을 덮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 그 정자에는 나무탁자가 있었고 두 개의 찻잔과 과일그릇에 과자와 과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상팔은 절과 정자를 유심히 살펴 보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제, 우리 잠깐 쉬었다 가세." "그럽시다. 이왕이면 차나 한 잔 마시고 갑시다." 두 사람은 나무 그늘에 가마를 내려 놓았다. 상팔이 소영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형님, 차를 드시겠소?" 소영은 손은 저으며 대답했다. "난 그만 두겠으니 어서 두 분께서나 드시오." 소영은 가마 속의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졸음이 오니 자겠다는 표시였다. 상팔과 두구는 서로 눈짓을 하고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상형, 이곳은 지도에 그려져 있는 곳과 같군요. 독수약왕은 왜 이런 곳에서 살까요?" "그 우문한도는 독수약왕의 거처를 알지 못하네. 이곳은 분명히 산을 오르내리다 쉬는 곳에 불 과할 거야." "우문한도는 우리더러 어떻게 독수약왕을 만나라고 했지요?" "독수약왕이 우리를 기다리며 찾기를 바라는 것이지." "아하, 그러니까 우리는 재수가 좋기만을 기다리는 거군요." "우문한도는 경솔한 말을 하지는 않네. 우리에게 이곳으로 오도록 지도에 그려 준 것은 나름대 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일세." 두 사람은 정자로 올라가며 주위를 유심히 살폈으나 아무런 이상한 것도 발견치 못했다. "우선 먹고 보세." "그럽시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고 파일을 하나씩 먹었다. 그래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어 정자 아래로 내려 서던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독수약왕이 소영의 앞에서 무엇인가 얘기하고 있었다. "어디 숨어 있었을까요?" "나무 위였겠지." 상팔은 헛기침을 하며 독수약왕을 불렀다. "궁형!" 독수약왕은 얼굴을 돌리더니 웃음을 띠며 말했다. "두 분께서 수고가 많으셨소. 내가 이미 몇 가지의 실과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소." '독수약왕은 이미 우리들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구나.' 상팔은 이런 생각을 하고 가마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남궁형의 거처는 어디요? 이곳에서 멀리 있소?" "바로 부근에 있소. 자아, 갑시다. 이 늙은이가 앞장을 서겠소." 독수약왕은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상팔과 두구도 급히 가마를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독수약왕의 걸음은 몹시 빨랐다. 길이 험한데다 가마를 들었으니 상팔과 두구는 경공을 발휘하 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독수약왕의 뒤를 바짝 쫓았다. 얼마 동안을 달려 거대한 산의 허리에 다다르니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타났다. 대나무 숲 옆에 는 한 채의 기와집이 있었다. "이곳이 내 처소요. 안으로 들어갑시다." 독수약왕은 공손하게 말하더니 먼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상팔과 두구도 망설이지 않고 따라 들어갔다. 가마를 봉당에 내려 놓자 소영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대청으로 올라섰다. 그는 독수약왕이 권하 기도 전에 의자에 앉았다.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집은 매우 깨끗했다. 대청은 물론 마당까지도 말끔히 청소되어 있었다. 소영이 의자에 앉자 독수약왕이 싱글벙글하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 과연 은원(恩怨)을 분명히 하는 의협 인물이구려. 상처가 아직 완쾌되지도 않았는데 곧 구궁산으로 달려오다니…" 소영은 독수약왕을 힐끗 쳐다보고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때 상팔과 두구가 대첨으로 올라와 소 영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소영이 대답하지 않자 독수약왕은 돌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딸애가 소대협을 몹시 보고 싶어 하던데 소대협께서 이토록 친히 행차했으니 분명 놀라 움과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맬 것이오." '정말 아무 기리낌도 없이 잘도 털어 놓는구나. 아무리 딸에 대한 정이 깊다 하더라도 이토록 예의도 모르고 떠벌이다니… 염치도 없고 넉살 좋은 영감이군.' 코웃음을 쳤다. 소영은 전혀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척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 나 독수약왕은 소영의 태도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듯 싱글거리며 안을 향해 소리쳤다. "옥아! 빨리 나와 봐라! 소대협께서 너를 보러 왔다!" 소영은 내색은 않고 있었지만 독수약왕이 제멋대로 떠드는 것이 몹시 비위에 거슬렸다. 당장 욕 이라도 퍼붓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어디 마음대로 지껄여 봐라. 꼴이나 두고 보자.' 이 때 사뿐사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주렴을 들치고 한 소녀가 나타났다. 소녀는 푸른 옷을 입었고 긴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독수약왕의 딸 남궁옥이구나.' 소영은 남궁옥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그 때는 밤이 어둡기도 했고, 독수약왕에게 피를 뽑히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남궁옥은 몸이 좀 가냘프고 안색이 약간 창백했으나 매우 아름다운 용모였다. 남궁옥은 소영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대번에 알아보고 귀밑을 발 그레 물들이더니, 수줍은 미소를 띠며 몸을 숙였다. "소오빠, 이 동생을 아직 기억하고 계세요?" 소영은 몸을 일으켜 답례를 하며 대답했다. "남궁낭자, 그 동안 몸은 좀 좋아지셨소?" 남궁옥은 독수약왕을 힐끗 쳐다보더니 또렷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이신 덕분에 소녀는 죽음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어요. 제 병을 고쳐 주 신 후 아버지는 저에게 무공을 가르쳤어요. 저는 열심히 연마했지만 도중에 그만 부주의로 진기 가 막혔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 성과가 없어요." 소영은 독수약왕을 돌아보았다. 그는 딸과 소영이 친밀하게 대화하는 것이 몹시 즐거운듯 만족 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독수약왕이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분별하기 어렵지만 천하에서 가장 딸을 아끼고 사랑 하는 아버지임엔 틀림없다.' 소영이 이런 생각에 젖어 일종의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남궁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오빠, 요즘은 지내기가 어때요? 평안했어요?" 소영은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강호를 방황하여 발길 닿는 곳에 집을 삼고 있었지요." "그렇다면 너무 고생스럽지 않아요?" 그러자 독수약왕이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바보야! 너의 소대협은 강호에서 제일인자라고 내세우는 만인이 존경하는 영웅이다." 남궁옥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요. 저는 벌써부터 소오빠가 영웅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들 부녀의 대화에 소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한 마디 했다. "부끄럽소이다." 그러자 남궁옥은 가벼운 미소를 소영에게 보내더니 상팔과 두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두 분이 상팔과 두구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어요." 상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낭자는 기억력도 좋군요." 남궁옥은 생긋 웃더니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소영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이것을 본 독수약왕이 상팔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흠, 자리를 비켜 달라?' 상팔은 소영을 한 번 돌아보고, 두구에게 눈짓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형님, 우리들은 우선 물러가 있겠소." 상팔은 소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두구가 따라 나가자 독수약왕이 만족 한 미소를 띠며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 잠깐만 앉아 계시오. 노부가 먹을 것을 좀 가져 오겠소." 소영은 이미 독수약왕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남궁옥과 이야기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자리를 뜨는구나.' 소영은 잠깐 망설였으나 남궁옥의 영롱한 눈동자가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할 수 없 이 독수약왕에게 말했다. "노선배께서 수고해 주시겠소?" 독수약왕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실내에 파른 사람이 없게 되자 남궁옥이 소영의 곁에 있는 대나무의자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오빠는 만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져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니 옥이도 퍽 기뻐요." 소영이 부드러운 웃음을 띠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천하꼭 영웅들은 수시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오. 나는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한 걸음 일찍 발 을 내디딘 것뿐이오."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심목풍은 이미 죽었고 오빠는 앞으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다던데 요?" 소영은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현재로선 확실히 단언할 수 없소. 심목풍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는 아직 의문이오." 남궁옥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깝게도 나는 진기가 경맥에서 갈라지고 말았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열심히 무공을 배워 오빠 를 도와 줄 수 있었을 텐데…" 대청에서 소영과 남궁옥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도 중주이 고와 독수약왕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팔은 우문한도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공손한 어조로 독수약왕을 대하려 하고 있었다. "약왕께선 소대협을 완치시킬 수 있는데도 일부러 손을 중간에서 떼고, 소대협이 이 먼 길을 오 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리움으로 병든 소녀 상팔의 말을 들은 독수약왕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딸애가 소대협을 보고 싶어하며 늘 노부에게 그의 이야기를 해 왔소. 나에겐 하나뿐이며 내 목 숨보다 소중한 딸의 소원을 내 어찌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겠소?" "그렇다면, 약왕의 소원대로 소대협은 이곳에 왔소. 약왕은 어떤 준비가 되어 있소?" 독수약왕은 묵묵히 대나무 숲을 바라보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소대협의 인격에 대해 노부 역시 존경을 금할 수 없소. 당신네들이 이곳에서 삼 일 간만 머물 러 주신다면…" "나는 평생의 의술과 묘약을 총동원해서 그의 질환을 고치겠소. 지니고 있던 무공도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도록 하겠소." 이 말에 상팔과 두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상팔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 하며 입을 열었다. "약왕께서 소대협을 고쳐 주겠다니 지극히 감격할 뿐입니다." 독수약왕은 처량하게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애초의 내 생각은… 소대협과 내 딸이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한 뒤에 그의 내상을 치료해 줄 생각이었소. 그러나…" "…" 이제 소대협과 내 딸이 이야기하는 것을 대하니… 노부는 생각 을 고쳐 먹었소." "그것은 훌륭한 생각이오. 우문한도의 추측과 일치하는군요." 상팔의 말을 바로 뒤이어 두구가 독수약왕에게 물었다. "약왕께서 생각을 고친 이유는 무엇이오." 이 질문에 독수약왕은 얼굴에 그늘을 지었다. "나는 소대협을 대하는 딸의 눈에서 광채가 번쩍이는 것을 보았소. 곧 내 딸이 소대협을 얼마나 흠모하고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오. 그러나, 내 딸애는 성질이 칼날 같소." "…" "만일 내가 억지로 두 사람을 결합시킨 후 나중에 이 사실을 딸이 안다면… 그녀는 평생토록 나 를 저주하며 스스로 그늘 속에 묻혀 지낼 것이오. 당신들은 자식이 없으니 모르지만,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그 자식의 앞날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상팔이 다시 물었다. "약왕의 말씀을 듣고 보니 깨닫게 되는 점이 많군요. 그런데, 약왕께선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 오?" "두 분께서 소대협에게 전해 주시모. 이곳에서 삼 일 동안만 머물러 달라더라고. 삼 일 안에 노 부는 그의 내상을 치료하고 무공을 되찾도록 하겠소." "…" "노부로서도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해야겠소." "무슨 조건이오?" "소대협이 딸애에게 좀 부드러운 태도를 취해 주었으면 하는 부탁이오. 내 딸이 그 동안이라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 "내 딸애는 어려서부터 줄곧 병마와 싸우며 자라 왔소. 그래서 단 하루도 활짝 웃는 얼굴을 못 보았소. 그런데, 오늘 그 애는…" 독수약왕은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소대협이 딸애를 즐겁게 대해 준다면, 반은 노부의 구명지은(求命之恩)에 보답하는 길이고, 나 머지 반은 내 딸애에게 동정심을 베풀어 주는 것이지요. 어떻소? 이 조건이 너무 각박하오?" 상팔과 두구는 잠시 동안 대답을 못했다. 상팔은 독수약왕의 부정에 감동을 금치 못하며 입을 열었다. "혈육의 정이란 깊이가 한량 없구려. 감동을 금치 못하겠소이다. 우리들은 소대협을 힘 닿는 데 까지 설복시켜 보겠소.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무엇이오?" "삼 일 후에 약왕께선 어떻게 하실 작정이며 남궁낭자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그것은… 우리 부녀의 일인 만큼 여러분께서 너무 염려하실 필요는 없소이다." 세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상팔이 침묵을 깨뜨렸다. "약왕에게 몇 마디 듣기 싫은 말을 물어 봐도 괜찮겠소?" "두 분께서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이야기해 보시오. 노부는 끝까지 듣고 성의껏 대답하겠 소." 상팔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물었다. "남궁낭자의 절증이 완전히 치료되었소?" 독수약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대협이 노부를 데리고 가서 찾아낸 버섯을 먹고 완치되었소. 그런…" "…" "내 딸의 명이 기구해 절증이 완치되자마자 뜻밖에도 진기가 경맥에서 갈라져 버렸소." "어째서 그렇게 되었소?" "그것은… 소대협과 관련이 있소." "관련이라니 어째서 소대협과 관련이 있단 말이오?" 독수약왕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말해 보았자 두 분은 아마 믿어지지 않을 것이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좀…" "옥이가 한창 진기를 순환시킬 당시 노부는 무의식중에 소영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보냈소. 이 말을 들은 딸애의 심신이 대뜸 격동을 일으키더니 그만 진기가 경맥에서…" "그런 일도 있소?" 상팔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번에는 두구가 입을 열었 다. "약왕께선 여전히 강호의 일에 대해 관심이 큰 모양이군요." "그렇소. 늘 심목풍의 활동을 주시할 필요가 있었소. 심목풍은 소대협을 가장 두려운 적으로 생 각했소. 그 다음이 바로 노부요. 그래서 나는 항상 강호의 정세를 파악하며 심목풍과 겨를 태세를 갖추어 왔소." 상팔과 두구는 서로 마주 보다가 마침내 상팔이 대답했다. "약왕께선 안심하시오. 우리들은 형님이 이곳에서 삼 일 동안 묵게 할 자신이 있소. 다만…" "다만 무엇이오?" "잠시 동안만 영애를 형님의 곁에서 떨어지도록 해 주시오. 그래야 우리가 형님에게 자세한 설 명을 할 수 있잖겠소?" "그야 물론이지요. 그럼 노부는 우선 두 분에게 감사 드리겠소." 독수약왕은 주먹을 모아서 가슴 앞에 대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상팔과 두구도 급히 답례를 하였다. "별말씀을… 우리들은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할 뿐인데 이런 인사는 감당키 어렵습니다." "아무튼 서로 잘해 봅시다." 독수약왕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에 눈을 주며 두구가 낮은 음성으로 상팔에게 말했다. "독수약왕은 자부심이 강하기로 유명하고, 무림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소." "그렇지." "그런 인물이 자기 딸을 위해 이렇게까지 남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상팔이 가볍게 웃으며 농담처 럼 말했다. "그러기에 우리처럼 홀아비가 제일 좋다는 것일세. 영웅의 사기는 짧지만 자식에 대한 애정은 깊다는 말이 있잖나?" "글쎄요. 그렇게 생각하니 홀아비 신세가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거 너무 삶에 재 미가 없는 것 같아서… 하하하." "허허허, 두제도…" 두 사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어딘지 공허한 울림이 있는 웃음이었다. 독수약왕이 객실로 들어서니 소영과 남궁옥은 한참 재미있게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웃 음이 담뿍 담긴 딸의 얼굴을 본 그는 콧날이 시큰했다. 목이 메이는 것을 느낀 그는 헛기침을 하 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얘야, 너는 약을 먹고 휴식할 시간이다. 소대협께선 이곳에 또랫동안 머무를 예정이니 이제 그 만 물러가거라. 약을 먹고 와서 다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하니까…?" 남궁옥은 독수약왕을 바라보며 빙그레 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저는 지금 정신도 맑고 건강도 좋아요. 한 번쯤 약을 걸러도 괜찮을 것 같아요." "옥낭자, 아버님의 말씀이 옳소. 나는 이곳에 며칠 머무를 예정이니 낭자가 약을 먹고 휴식을 취 한 후에 다시 얘기해도 늦지는 않소." 남궁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짐하듯 소영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오빠는 나를 기다려 주겠어요?" "나는 한 번 말한 것은 어기지 않는 성질이오." 남궁옥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수줍은 미소로 얼굴을 붉히더니 내실을 향해 들어갔다. 독수약 왕은 소영을 힐끔 쳐다보더니 남궁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174. 환각정사 두 사람이 내실로 사라지자 상팔과 두구가 들어왔다. 앞장서서 들어선 상팔이 소영의 곁으로 급 히 다가와 앉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소대협, 우리는 독수약왕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소." "무슨 이야기요?" "그의 딸에 대한 이야기였소." 소영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들으나마나 독수약왕은 무리한 조건을 내세웠겠지요…" "아니오. 매우 간단하오. 너무도 간단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어디 들어나 봅시다." 상팔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꺼냈다. "형님더러 남궁낭자를 삼 일 동안만 즐겁게 해 달라는 요구였소. 이 삼 일 동안 형님의 상처를 치료하고 우리를 돌려 보내겠다고 했소." 소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해 보더니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음, 그 요구는 겉으로 보기엔 매우 너그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악랄하군." 상팔과 두구는 소영의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소영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세상의 어떤 방법이든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를 빚어내오. 독수약왕은 우리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간단한 방법으로 우리를 그의 계획에 말려들도록 하려는 것이오." "형님의 무공은 일사천리로 진전됐고 지혜의 진보도 우리들이 따라갈 수 없소. 그러나 우둔한 소제는 아무래도 형님의 말에 의문되는 점이 있구려." 상팔의 말에 이어 두구가 입을 열었다. "형님께선 될 수 있는 한 자세히 좀 설명해 주시오. 소제 역시 더욱 어리둥절할 뿐이오." "내 얘기를 더 들어 보시오. 독수약왕은 자기 딸과 삼 일 동안만 같이 지내며 즐겁게 해주라는 것이지요?" "그렇소. 그 조건이 무엇이 악랄하다는 것이오?" "만일 삼 일 동안 남궁낭자가 매우 즐겁게 지냈다고 칩시다. 또한 내 병세도 많이 좋아졌다고 칩시다." "형님, 그건 피차가 좋은 일이잖소?" 형님은 남궁낭자를 즐겁게 해 주었고, 형님의 상처도 완쾌된다면 서로 은혜를 입으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 되는데 무엇이 악랄합니까?" "상형께서는 삼 일 동안의 짧은 시간을 남궁낭자와 함께 지낸다고 해서 그녀를 영원히 즐겁게 해 줄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상팔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소영은 씁쓸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남궁옥은 어려서부터 병상에서 신음해 오다가 이제 회복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오. 더욱이 그녀는 지금 진기를 사용치 못하고 있소. 그녀의 몸이 이토록 허약한데…" "…" "삼 일 동안 같이 있는 사이에 남궁낭자가 어떤 즐거움을 느끼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입장 에서 볼 때는 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만 얻게 되는 것이오." 상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알 것 같군요." "이후 남궁낭자가 만일 병세에 어떤 변화라도 있게 된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잖소? 내가 삼 일 후에 떠나게 된 후 그녀가 느낄 절망의식 같은 것… 이로 인해서 그녀가 더욱 나쁘게 된다면 나 는 물론이고 두 분께서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될 것이오." "그렇군요. 소제는 지혜가 미치지 않으니 앞으로 많은 가르침이 있기를 바라겠소." 소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우문선생을 알게 된 이후 한 가지를 배우게 되었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일에 부딪치면 재삼 고려한다는 것이오." 두구가 탄식처럼 말했다. "결국 우리들은 독수약왕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겠군요." 이 말에 소영은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한동안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정(情)의 빚을 갚을 길이 없으니 나 역시 어떻게 결정해야 좋을는지 모르겠군요." 두구가 중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우문선생을 데리고 왔을 텐데…" "운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 우문선생은 비록 우리보다는 훨씬 지혜롭지만, 이런 일은 그분 역 시 결정할 수가 없을 것이오." "독수약왕은 우리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소. 형님께서 어서 결정을 내려야 우리들이 그에게 답을 전하지요." "현재로선 대답할 길이 하나밖에 없는데. 아무튼 우리들은 사전에 확실한 것을 설명하고 그에게 서도 다짐을 받아야겠소." "그렇소. 우리가 매사에 신중을 기해야, 차후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응대할 수 있지요." 소영이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좋소. 두 분께서 독수약왕을 데려 오시오. 내가 이야기하겠소." 상팔이 내실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실 안으로 소제가 들어가기엔 거북합니다. 독수약왕이 나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립시다." "그렇게 합시다."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독수약왕이 내실에서 나왔다. 상팔이 선뜻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약왕, 형님께서 의는하고 싶은 것이 있답니다." 독수약왕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며 소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상팔과 두구가 재빨리 자 리를 피해 주었다. 독수약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노부와 할 이야기가 있소?" "그렇소. 영애에 대한 일이오." "노부는 이미 중주이고에게 얘기해 두었소. 그들이 소대협에게 분명히 얘기를 전했을 텐데요?" "그렇소. 이미 그들에게서 들었소. 그러나 이 일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소. 약왕께서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오. 그래서 나는 약왕과 직접 얘기하려는 것이오." 독수약왕이 입을 열었다. "무슨 가르침인지 노부는 경청하겠소." "만일 내가 영애와 삼 일 간 기거하고도 그녀의 병을 호전시킬 수 없다면 이 모든 일이 헛수고 가 되잖겠소? 또한 내가 영애의 마음을 활짝 피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과 삼 일 동안일 뿐, 그 이후에는 다시 우울한 날을 보낼 것이 아니겠소?" 독수약왕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상형도 이미 그 일을 들추어 내었소. 그러나 노부가 그에게 말했듯이 후일의 일에 대해서는 이 미 생각한 바가 있으며 그것은 우리 부녀에 관한 일이니만큼 소대협과는 별 관계가 없소."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약왕께서는 나의 뜻을 오해하시는군요." "노부는 오해하지 않았소. 나는 나대로의 견해가 있는 것이오. 노부의 의도는… 내 의술이 세상 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딸아이의 병을 치료해 줄 방법도 있소." "그럼 어째서 제 힘을 빌려 삼 일 동안 영애를 즐겁게 해 주라는 것이오?". "그것은 왜냐하면 내 딸은 일생 동안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었소. 나는 그녀에게 다만 삼 일 만이라도 즐거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오." "…" "소대협이 이 일을 하나의 남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고, 노부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생 각해도 좋소. 어떻게 생각하든 노부는 절대로 신경쓰지 않겠소." "소대협이 내 딸을 동정해서 청을 들어준다 해도 나는 그 동정을 달게 받겠소. 다만 노부는 어 떤 경우든 소대협의 응낙을 받고 싶소." "…"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아마 모든 것이 명백해졌을 줄 아오. 소대협이 허락하느냐의 여부를 한 마디로 결정해 주기 바라오." 소영은 묵묵히 듣고만 있더니 비로소. 대답했다. "좀 더 고려할 수 있는 여유를 주시겠소?" "딸애는 아마 두 시진 후에 깨어날 것이오. 그 안에 결정해 주었으면 좋겠소." "좋소. 두 시진 이내에 확실한 대답을 해 드리겠소." 독수약왕은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두구와 상팔이 대청으로 들어왔다. "형님, 어떻게 결정했소?" 상팔은 소영이 대답을 않고 멍하니 있는 것을 보더니 다시 물었다. "독수약왕은 이미 멀리 가버렸으니 말씀해 보시오." 소영은 상팔과 두구를 둘러보며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두 분들은 독수약왕의 사람됨을 어떻게 보시오?" 상팔이 대답했다. "강호에 그의 이름은 높으나 백화산장에 의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목풍에게 가려졌을 뿐이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의 성격과 지혜요." "내가 알기로는 그의 지혜는 매우 높소. 허나 너무 독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요." "애석하게도 우문선생이 없으니…" 소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탄식을 하자, 상팔이 물었다. "형님, 무엇이 잘못된 것이 있소." "독수약왕이 그처럼 지혜가 높고 독선적인 인물이라면 문제는 심각하오." "무슨 말씀인지…" "나는 염려스럽소. 그러나 무엇이 염려되는지를 나 자신도 모르며 막연히 불안하고 염려스러울 뿐이오." 상팔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독수약왕의 조건을 어찌할 생각이오?" "지금 고려 중이오." 이 말을 듣고 상팔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만일 소대협이 이 일을 거절하면 무공을 다시 찾기는 어렵지. 뿐만 아니라 독수약왕이 어떤 독 수를 뻗쳐 소대협의 생명까지 위협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상팔은 우문한도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형님! 우문선생이 이런 걱정을 하더군요." "무엇이오?" "심목풍이 아직도 살아 있을 것 같다는…" "뭐요?" 이 말은 확실히 소영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목쉰 듯한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것이 사실이오?" "글쎄요. 그것이 진짜인지 어쩐지는 나도 모르겠소. 다만 우문선생이…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형님의 무공은 반드시…" 소영은 무거운 표정으로 천정을 노려보더니, 침통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음, 일이 그렇다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시험해 볼 수밖에 없겠구나." "무슨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이오?" "독수약왕에게 가서 내가 이미 허락했다고 전해 주시오." 이 말은 상팔을 몹시 기쁘게 했다. "곧 다녀 오겠소." 상팔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소영이 두구를 바라보며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두형, 내 예감으로이 삼 일 동안을 넘기기가 매우 힘들 것 같소. 독수약왕이 후일을 염려해서 무슨 일을 벌일는지 알 수 없으니… 나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소." "독수약왕이 삼 일 동안에 어떤 수단을 꾸며서 우리들과 상할 것을 염려하시오?"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독수약왕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진 않을 것이오. 그러나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것 같 소." "삼 일 동안 우리가 각별히 조심해서 경계하면 되잖겠소?" 소영이 씁쓸히 웃었다. "경계라니요? 어떻게 경계를 한단 말이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운명에 맡길 수 밖에 없소." 이 때 상팔이 싱글벙글하며 들어왔다. "독수약왕이 우선 형님의 상처부터 치료해 주겠답니다." "그래요." "네, 형님의 말을 그에게 전하니까 그는 곧 형님의 상처를 치료하겠다구요. 열두 시진 후에는 완 전히 무공을 되찾을 수 있답니다." "정말이오?" "독수약왕의 말을 나는 그대로 전하는 것뿐이오." 소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무엇인지 잠깐 생각하더니 두 사람을 둘러보며, "내가 삼 일 동안 이곳에 머물겠다고 허락했으니 두 분도 함께 묵으며 수시로…" 그는 말하다가 얼른 중단했다. 독수약왕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독수약왕은 성큼성큼 들어서더니 소영에게 말했다. "소대협, 노부는 딸이 깨어나기 전에 우선 치료를 해 줄 생각이오." "영애는 언제쯤 깨어날 것 같소?" "두 시진 이내에 깨어날 것이오." "그 짧은 시간에 되겠소?" "노부의 의술로 보아서는 한 시진을 걸려 소대협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꽤 오래 가는 편이오." 소영은 너무도 자신만만한 독수약왕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어떻게 치료할 생각이오?" "지금 설명하려던 참이었소. 소대협은 두 군데 혈맥이 교전되는 관절에 부상을 당했소. 만일 약 물치료를 하게 되면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오. 최소한 삼 일을 잡아야 하며, 길게 끌면 일 년이 걸리오." "빠를수록 좋겠는데요?" "노부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침술로써 치료할 생각이오. 약 열두 시진이 지나면 소대협은 진기를 회복할 수 있소. 그러나…" "그러나 무엇이오?" "소대협이 전적으로 노부를 믿어야 하오. 혈도에 침을 놓을 때 매우 정확해야 하기 때문에, 만일 소대협이 조금이라도 나를 믿지 못해 몸을 움직인다면 큰일이오. 일생을 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 오." 소영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약왕을 믿기 때문에 이곳에 왔는데 어찌 의심하겠소?" "그럼 되었소. 우리 곧 시작합시다." "좋습니다." "노부를 따라 오시오." 독수약왕은 외딴 방을 향해 걸어 갔다. 소영과 상팔, 두구가 그의 뒤를 따랐다. 방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목침상과 탁자가 하나씩 있고 의자 두 개가 있을 뿐 다른 장식품이나 가구는 없었다. 침상에는 하얀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소대협, 침상에 누우시오." 소영은 독수약왕의 지시대로 침상으로 올라가 누웠다. 독수약왕은 품속에서 침주머니를 꺼내 들 며 소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침주머니를 열고 네 개의 침을 꺼냈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침의 길이는 네 치 정도였다. "소대협, 눈을 감으시오." 소영이 눈을 감자 독수약왕이 가볍게 손을 놀려 두 군데의 혈도를 짚었다. 소영은 곧 의식을 잃 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몽롱한 의식 상태에서 헤매다가 소영은 눈을 떴다.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회색의 천정이었다. 소영은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촛불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벌써 밤이구나." 소영이 기지개를 켜려고 팔을 움직이는데 조용한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움직이지 마세요." 소영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남궁옥이었다. 실내에 다른 사람은 없고 남궁옥이 침상 옆의 의자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오빠는 아직도 두 시진이 더 지나야 활동할 수있대요." 소영은 남궁옥의 발그레한 볼을 바라보며 물었다. "낭자의 아버님은 어디 가셨소?" "오빠의 두 형제분과 함께 나가셨어요." 소영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독수약왕은 남궁옥을 삼 일 동안 즐겁게 해 주라는 조건으로 나를 치료해 줬지." 소영은 쑥스러움을 누르며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낭자의 몸은 어떻소?" 남궁옥은 잔잔한 미소를 띠고 긴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군." "참! 내가 깜빡 잊었네요. 오빠는 지금 진기를 운행하면 안 돼요. 두 시진이 지난 후에 약을 복 용하고 나서 비로소. 활동을 해야 해요." "낭자좌 가르침에 감사하오." 남궁옥은 생긋이 웃더니 손가락으로 방의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파란 불길이 솟아 오르고 있는 난로가 있었다. 그런데 그 난로에는 무엇으로 불을 피우고 있는지 연기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커다란 약탕관이 김을 뿜어 내고 있었다. "저 약이 오빠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적당한 열을 가해 여섯 시간을 달여야 약효가 난대 요. 아버지께선 나가시면서 저 난로의 불이 스스로 꺼지거든 약을 오빠에게 드리라고 하셨어요." "고맙소. 낭자! 하지만 낭자도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았는데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야 되겠소? 내 가 이미 깨어났으니 낭자는 가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겠소." 남궁옥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오빠 곁에만 있으면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않아요." "그러나 낭자의 몸이 너무 피로해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쩌겠소?" "괜찮아요. 난 여태껏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먹어 왔지만 남이 먹는 모습은 보지 못했어요. 오빠 의 약 먹는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어요." 소영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약을 먹는 것이 무슨 구경거리란 말이오? 다 마찬가지인데…" "아니예요. 분명히 틀릴 거예요. 나는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지겨워요. 십여 년 동안 약으로만 살아 왔으니…" 남궁옥은 얼굴에 한 가닥 우수의 그림자가 스쳤다. 그것을 발견한 소영은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불끈 치밀었다. "낭자, 낭자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나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소. 그러나 낭자는 많이 좋아졌소. 낭자의 몸은 스스로 아끼시오." "오빠의 말은 알겠어요. 하지만 오빠가 약을 복용한 후에 가겠어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잖소." 남궁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 한 시진이면 될 거예요." "너무 길군요. 그러지 말고…" "안 돼요. 역시 기다려야 돼요." "왜?" "저 탕관 속엔 오빠의 약 말고 내 약도 있거든요." 남궁옥은 갑자기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오빠는 강호를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재미있는 풍물도 많이 보았겠네요?" "그렇지요." "제일 재미있었던 일이 뭐예요?" 남궁옥은 전혀 사회경험이 없이 병상에서만 지내온 소녀였다. 소영은 그점을 불쌍히 여겨 강호의 일이며 남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열심히 들려 주었다. 이야기 에 도취된 남궁옥은 조금도 피로한 줄 모르고 마냥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야기에 열중하던 두 사람은 난로의 불길이 갑자기 꺼져 버린 것을 보고 이미 약을 먹을 시간 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궁옥이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파을 가져올게요." "아니, 낭자는 앉아 계시오. 내가 가져올 테니…" 소영이 일어서려고 하자 남궁옥이 황급히 말렸다. "안 돼요, 아버님이 그러시는데… 약을 복용하기 전에는 오빠는 절대로 몸을 움직여선 안 된다 고 했어요." 소영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남궁옥은 약탕관 속에서 작은 약그릇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접시에 받쳐들고 소영에게로 조심 스럽게 다가왔다. "그지 않을는지 모르겠어요. 조금 식거든 드세요." 소영은 약그릇을 받아 들었다. 약은 파란색의 유리처럼 투명하고 맑았다. 코를 찌르는 향기가 매 우 감미로왔다. '향기로 보아 쓰지는 않겠군.' 소영은 잠시 약이 식기를 기다린 후 단숨에 마셨다. 약은 쓰기는커녕 신비할 정도로 감미로왔다. 소영이 약그릇을 내밀자, 남궁옥이 그것을 받아들며 생긋 웃었다. "쓰지 않았어요." "아니, 조금도… 남궁옥은 약그릇을 탁자 위에 내려 놓고 다시 난로 앞으로 갔다. 약탕관에서 또 하나의 약그릇 을 꺼내더니 그것을 마셨다. "정말 쓰지 않네요." 남궁옥이 생긋 웃으며 침상으로 다가왔다. 이 때였다. 소영은 갑자기 심장에 심한 격동을 느꼈 다. ' 이상하다.' 그 격동은 삽시간에 전신으로 퍼지며 후끈후끈 불을 질렀다. "오빠, 왜 그래요?" 소영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한 남궁옥이 놀라서 물었다. 소영은 눈을 부릅뜨고 남궁옥을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약왕은 무슨 약물을 넣었소?" "저는 잘 몰라요. 약이 어떻게 잘못되었나요?" 원래 몸이 허약한 남궁옥은 겁에 질리자 얼굴이 송장처럼 창백해졌다. 소영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통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어쩐지 약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소. 낭자는 어서 물러가시오." "그럼 아버지가 약에 독약을 넣었단 말이에요?" 남궁옥은 파랗게 질리며 소영의 시뻘건 얼굴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독약을 넣었을까? 오빠를 독살시키면 일평생 딸의 저주를 받으리라고 생 각지 못한 것일까?" "…" "오빠,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조금씩의 즐거움과 고통은 있을 거예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간 간히 즐거운 때도 있지 않겠어요." "…" "그러나 나는 영원한 고통 속에서만 살아 왔어요. 벌써 죽으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애처로와 차마 죽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아버지가 나의 유일한 친구인 오빠에게 독약을 먹이다 니…" 남궁옥은 말끝을 못 맺고 울음을 터뜨렸다. 소영이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물었다. "낭자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오?" "그럴 자격이 나에겐 없어요. 그러나 아버극를 제외하고 내가 마음속 깊이 새긴 사람은 오직 오 빠뿐이었어요. 오빠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오빠를 유일한 친구라고…" "알았소. 낭자! 어서 여길 물러가시오, 제발…" "어디로 가란 말이에요." "멀리 갈수록 좋소. 빨리 밖으로 나가 밖에서 문을 걸어 주시오." 소영은 자기 몸을 주체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충혈된 눈을 애써 감으려고 하다가 다시 떠 남궁옥을 집어 삼킬 듯 노려보았다. '큰일이다. 아버지는 매우 지독한 독을 넣었구나.' 남궁옥은 손을 들어 소영의 이마를 짚었다. 이마는 불덩이였다. 순간 소영이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치워!" 남궁옥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소영은 이마에 구슬같은 땀을 흘리며 고통을 참느라고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오빠, 난 물러갈 수가 없어요. 오빠는 천리길을 멀다 않고 달려왔는데, 아버지가 독수를 쓴 걸 알면서 어떻게 가겠어요…" 소영은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물러가시오." "오빠, 얼마나 괴로우세요? 네? 오빠!" 남궁옥은 소영의 앞으로 다시 다가갔다. 그러자 소영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빨리, 빨리 가! 빨리 없어져!" 소영이 허공으로 손을 마구 휘두르는데 그 손이 남궁옥의 앞가슴을 건드렸다. 순간이었다. 남궁옥은 갑자기 심장이 폭발할 듯한 격정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얼굴이 확확 달아 오르고 입안에 감미로운 침이 감돌았다. '이상하다.' 갑자기 소영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남궁옥은 자석에 이끌리듯 소영에게로 와락 끌 려 갔다. 아주 가까이에서 네 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정열의 불꽃이었다. 뜨거 운 호흡이 상대받의 얼굴에 열기를 뿌리고 심장의 고동소리가 역력히 들렸다. 남궁옥의 손이 소영의 등허리로 돌려지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 안으며 소영의 입술이 남궁옥의 입술을 덮었다. 순간 그들의 육체는 한 덩어리로 되었다. 남궁옥의 옷이 마구 찢겨져 나갔다. 그녀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소영의 품속으로 바싹 바싹 파고들었다. 약물의 힘에 이성을 빼앗긴 두 젊은이는 정욕이 들끓는 도가니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강한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듯 거친 숨결과 뜨거운 신음이 아찔하게 교차되는 너무나도 팎은 순간 공간에 붕 떠올랐던 두 사람이 짜릿하고 쾌적한 춘풍에 실려 서서히 낙하했다. 현기증과도 같은 상쾌한 전율이 전신을 마디마디 훑어 내리며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윽고 입안이 달착지근해지며 전신에 나른한 권태가 번졌다. 아… 감미로운, 살아 있는 육체의 권태… 생후 처음 겪는 젊은 육체의 태풍이 지나자 소영은 그 대로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소영의 얼굴을 바라보던 남궁옥이 부스스 일어났다. 우유빛 피부가 매끄러웠다. 비록 병고에 여 위긴 했으나 곱게 자란 그녀의 희고 고운 살결은 스스로 도취되기에 충분했다. '난 무척 강해진 느낌이야.' 남궁옥은 자신의 필부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다가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찢겨져 나간 옷을 주 워 든 그녀는 그것으로 가슴을 가렸다.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서 급히 자기 침실로 들어갔다. '어른이 되었어…' 그녀는 평소 즐겨 입던 녹색 치마 저고리를 꺼내 입었다. 머리를 빗어 올리고 다시 약실로 들어 왔다. 흩어진 이부자리를 정돈한 다음 품속에서 동경(銅鏡)을 꺼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다른 사람을 보듯 정신 없이 들여다 보던 그녀는 의자에 몸을 앉혔 다. '깊은 갛에 빠지셨구나! 처음으로 나를, 나를 여자로 만들어 주신 낭군님…' 남궁옥은 소영의 잠든 얼굴에 시선을 박은 채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소영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떴다. 남궁옥은 뛰는 가슴을 진정하느라고 애쓰며 겨 우 말했다. "이제 깨셨어요?" 소영은 아무 소리도 없이 남궁옥을 노려보았다. 화끈 달아 오르는 얼굴의 변화를 감추기 위해 남궁옥은 생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제 얼굴에 뭐가 붙었어요?" 소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남궁낭자, 무슨 일이 없었소?" "아니오. 오빠는 깊은 잠에 빠졌고 저는 오빠가 걱정되어 줄곧 옆에서 지켜 보고 있었어요." 소영이 고개를 저으며 침울하게 말했다. "낭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소. 영준의 약물은 나의 기억력까지 흐리게 하는군." 남궁옥은 태연한 표정을 꾸미느라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아마 아버지의 약이 오빠의 정신을 약간 혼미시킨 모양이군요. 이 방에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 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다면 제가 모를 리 있나요?" 소영은 남궁옥을 한참 쏘아 보더니 흠칫 놀라며 말했다. "낭자는 옷을 갈아 입었군요." 남궁옥은 가슴이 섬뜩했으나 태연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네." 소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미 남궁옥이 그의 옷매무새를 고쳤고 방안을 원상태로 정리했기 때문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소영이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뭐가 이상해요?" "내가 꿈을 꾸었나?" 소영은 남궁옥의 물음에는 대답치 않고 여전히 중얼거렸다. 남궁옥은 일부러 장난기 있게 웃으 며 말했다. "오빠, 분명 꿈을 꾼 모양이군요. 제가 줄곧 곁에 있었는데… 아 이, 싱거워! 꿈과 현실을 구분 못하고…" 소영이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낭자는 무사하오?" "난 이렇게 오빠 곁에 있잖아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혹시 내가 낭자를 욕보이지 않았소?" 남궁옥은 다시 얼굴이 달아 올랐으나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에요? 욕보이다니…" "그것 참 이상하군.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절대로 꿈일리가 없을 텐데…" "꿈을 꾸었을 거예요. 만일 오빠가 저를 욕보였다면…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독수약왕의 약물과 관계가 있겠군. 그 약은 사람의 리식을 혼랄시키고 마음을 음탕하게 만들며 엉뚱한 환각까지 일으키나 보다.' 그러나 소영은 아무래도 미심쩍어 자신의 옷매무새며 이부자리 등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이상 한 것은 조금도 발견되지 않았다. 소영은 다소 마음이 진정되었으나 의혹의 그림자를 지워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시선을 남궁옥 의 밀굴에 고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낭자, 내가 그 약을 복용한 후 어떤 태도를 취했소?" "오빠는 그 약을 복용한 후 정신이 몹시 혼란하고 마음이 격동하는 것 같았어요. 저더러 나가라 고 계속 소리쳤어요." "저를 붙들었어요." "아! 그랬지! 아, 그 다음엔 내가 낭자를 침상으로 끌어올렸지." "아녜요. 오빠가 저를 잡는 순간 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빠는 그대 로 깊은 잠에 빠지더군요."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남궁옥의 말이 석연치 않았다. '분명 나는 남궁옥을 포옹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범했다. 그래, 나로서도 처음 느껴 보는 짜릿한 쾌감까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체내에 축적되어 있던 모든 욕망을 한꺼번에 푸는 듯한 뜨거 운 쾌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소영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낭자의 말은 정말이오?" "예." "낭자, 모든 것을 솔직이 말해 줄 수 없소? 나는 도무지 낭자의 말이 석연치 않소." 남궁옥은 소영의 태도에 사실을 모두 얘기하고도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어. 끝까지, 끝까지 숨기는 거다. 만일 지금 모든 것을 사실대로 얘기한 다면 소영은 몹시 노할 거야. 아버지를 추궁할 것이고 나 역시… 그럴 수는 없어.' 남궁옥은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는 저를 그렇게 못 믿어요? 그렇다면 저도 말하지 않겠어요." 마침내 소영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오. 낭자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내가 무엇에 홀린 것 같아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가 없어 그러오." 남궁옥은 웃음이 치밀었으나 억지로 입술을 깨물어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는 오빠가 잠든 것을 보고 곧 제 방으로 갔어요. 옷을 갈아 입고 바로 들어와 줄곧 지키고 있었던 거예요." 소영은 입을 다문 채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아직도 의혹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믿지 못하는구나. 그렇겠지. 허지만 난 가르쳐 줄 수 없어.' 남궁옥은 허물어지려는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오빠는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 같은데… 아버지가 전에 제게 들려 주신 말씀이 있어요." "무슨 말이오." "아버지는 사람을 완전히 공상의 세계로 몰아 넣을 수 있는 일종의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약을 지어낼 수 있다고 했어요. 그 약을 먹으면 완전히 자기를 잃어버리고 만대요." "그런 약을 왜 나에게 주었소?" "그건 오빠가 모르는 소리예요. 그 약은 아무에게나 먹이는 것이 아니래요." "그럼…" "아주 심한 부상을 당한 사람에게 먹이면 놀라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어요. 오빠는 분명 그 약을 먹었을 거예요. 저는… 오빠에게 독약을 먹인 줄 알고 깜짝 놀라서 아버지를 욕했어요." "음… 그럼 낭자가 먹은 약은 어떤 약이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약을 먹자 상쾌했을 뿐 다른 이상은 없었어요." 소영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이 낭자의 말이 맞을는지도 모른다. 독수약왕은 만들지 못하는 약이 없다고 했으니까…" 환각정사 소영의 얼굴에서 의심이 감소된 것을 느낀 남궁옥은 얼른 말머리를 다른 각도로 돌렸 다. "오빠,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하세요. 우선 진기를 순환시켜 보세요. 내상이 치료되었는지 시험 하는 깃이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 소영은 펀뜻 정신이 들었다. '그렇다.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공을 되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이런 생각을 한 소영은 곧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175. 우울한 귀환 남궁옥은 소영이 운기의 균형을 이루며 점점 무아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살며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소영이 깨어났을 때 남궁옥은 밥과 반찬을 준비해 롤고 기다리고 있었다. "소대협, 식사하세요." "이 초가집 안에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버님과 소대협의 두 형제분은 아직 돌아 오시지 않고 지금 이 초가집 안에는 소대협과 제가 있을 뿐이에요." 소영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밥은 낭자가 지은 것이로군요." 남궁옥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예, 처음이라 소대협의 구미에 맞을는지…" "낭자는 아직 몸도 편치 않은데 왜 이런 수고를…" "저도 혹시 쓰러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그래도 꾹 참고 견뎌냈지요. 부엌엔 이미 생선과 육류가 준비돼 있었어요. 그냥 끓이기만 하면 됐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보는 거라 맛이 있을는지가 의문이에요."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정말 수고가 많았소. 나를 깨워 부엌으로 보내야 했었는데…" 소영은 말을 하면서 나무 침상에서 내려 왔다. "소대협은 지금 그 이름도 쟁쟁한 강호의 영웅이신데 어떻게 부엌 같은데 들어갈 수 있겠어요. 제가 비록 몸은 좀 불편하다 하더라도 역시 여자의 몸이니…" 남궁옥은 곧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소영도 남궁옥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아직도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소영은 반찬이 그다지 구미에 맞지 않았지만 그런 내색 없이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였다. 어느덧 밥과 반찬 그릇의 바닥이 드러났다. 소영은 수저를 놓으면서 말했다. "맛이 참 좋군요. 이제 피로할 테니 푹 좀 쉬시오." 남궁옥은 미소를 지었다. "소대협이 이곳에 온 후로는 어쩐 일인지 피로한 줄을 모르겠어요. 오히려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아요." 소영은 맞장구를 쳤다. "거 참 이상한 일이군!" 남궁옥은 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 이상한 원인을 알 것도 같은데… 하지만 꼭 맞는지 안맞는지 모르겠어요." "그 까닭이 뭐요?" "저의 병은 이미 다 나았어요. 그저 몸이 약간 허약할 따름이에요. 아버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 셨으며 또한 저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도 저는 늘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 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막상 일을 해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소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 법한 말이군요. 그렇지만 너무 과로를 해서는 안 되지요." 남궁옥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제가 설거지를 마치고 쉬도록 할 테니, 먼저 대청에 가 계세요." 소영은 남광옥의 그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대하자 마치 그녀가 자기의 아내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삼 일이란 기간은 너무도 빨랐다. 허약하고 가냘픈 남궁옥은 그 삼 일 동안의 기쁨에 들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소영도 힘껏 그녀를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산에 올라 꽃을 꺾어주기도 하고 뜰을 거닐며 달을 즐기기도 했다. 남궁옥은 그토록 부인하는 것을 보자 소영은 점점 독수약왕이 남긴 약물이 일으킨 환상에 불과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용히 앉아 있을 때는 그 순간의 일들이 역력히 머릿속에 되살아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소영은 이것마저도 약물의 작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독수약왕은 과연 약속대로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중주이고와 같이 돌아왔다. 상팔과 두구는 사실 그 며칠 동안에 소영을 매우 걱정했다. 그러나 이제 소영이 무사한 것을 보 자 그들의 걱정도 사라졌다. 독수약왕은 자기의 사랑스런 딸과 소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웃어 제쳤다. "소대협, 그 동안 내 딸을 돌봐 주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 며칠 동안 제가 오히려 영애의 신세를 졌습니다." 독수약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남궁옥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그 동안에 저는 부엌 일을 배웠어요." 그러자 독수약왕은 마치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그녀를 칭찬했다. "대단하구나!" 남궁옥은 연방 생글생글 웃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께서 지어주시는 밥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독수약왕은 껄껄 웃어 제쳤다. "거 듣던 중 반갑구나. 이제부터 네 음식 솜씨 좀 보자꾸나." "하지만 별 맛이 없어요." 독수약왕은 또 하하, 하고 통쾌하게 웃었다. "독수약왕의 딸이 만든 반찬이 왜 맛이 없을라고…" 그러나 독수약왕은 곧 웃음을 거두었다. "얘야, 소대협이 오늘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남궁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삼 일의 기한이 다 되었다는 것을…" 독수약왕은 곧 소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소대협은 언제쯤 떠나실 예정입니까?" 소영은 남궁옥을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 "낭자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곧 출발하려 합니다만…" 독수약왕은 딸을 돌아보며 말했다. "얘야, 소대협이 너의 의견을 물으셨으니 대답을 해야지." 남궁옥은 아름다운 눈동자를 한동안 굴리더니 가볍게 대답했다. "돌아 가시게 하세요." 독수약왕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남궁옥을 바라보았다. "얘야, 네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예, 진정이에요." 남궁옥은 시선을 돌려 소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루 더 붙잡아 봤자 내일이면 또 떠날 게 아니예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남궁옥은 빙그레 웃었다. "급히 떠나시려는 것을 보니 반드시 무슨 급한 볼 일이 있는 것 같은데 하루 더 붙잡는다면 그 만큼 마음만 불안하실 거예요."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궁옥은 다시 독수약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소대협을 배웅해 주세요." 독수약왕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얘야, 잘 생각해 보도록 해라. 소대협이 가신 뒤에 눈물을 찔끔거리지 말고…" 남궁옥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께서는 일세의 영웅이신데, 아버지의 딸인 제가 어찌 한 입에 두 말을 하겠어요." 독수약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 말이 맞다." 독수약왕은 그제야 소영에게 공수를 하며 말했다. "세 분께서 먼 길을 떠나시는데 노부가 전송을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남궁옥은 값자기 홱 돌아서서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낭자, 잠깐만!" 남궁옥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소영은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낭자에게 몇 마디 듣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 동안에 우리는 함께 있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생각되는데 또 무슨 할 말이 남아 있습니까?" 소영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에 가면 언제 다시 돌아 올는지 모릅니다. 삼 일 동안에 낭자에게 많은 신세를 졌습 니다." 남궁옥이 말을 가로챘다. "좋습니다. 할 말이 있으시면 방에 들어가서 해주십시오. 저는 지금 몹시 피로합니다." 남궁옥은 말을 마치자 곧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영은 독수약왕을 향해 포권을 한 다음, 남궁옥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소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낭자, 제가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소영은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이었다. "낭자, 저는 그 동안 낭자를 괴롭힌 것 같아서…" "지난 며칠 동안 소대협은 내게 그런 말을 되풀이 하고 있는데 그 말뜻을 전연 모르겠습니다." 소영은 다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이건 진정에서 하는 얘기입니다만 그 동안에 제가 혹시 무슨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반드시 책 임을 지겠습니다." "소대협에게는 잘못이 없겠지요. 하지만 소대협께선 정조와 절개란 여자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 은 것이라는 걸 알아 주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것을 가볍게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소영은 얼떨떨해서 덮어 놓고 허리를 굽혔다. "낭자의 말이 옳소이다." "대협께서 삼 일 동안 저와 같이 있어 준데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여기 서 삼 일이나 머물러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동안 저에게 있어서는 무척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대협께서는 저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 일으켜 주었습니다." "낭자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는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마음 놓고 가시도록 하세요. 만일 우리들에게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소영은 포권을 했다. "낭자, 몸조심 하십시오. 저는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저는 몸이 불편해서 멀리 못 나가니 양해하십시오." 남궁옥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절을 하였다. "원 별말씀을…" 소영은 맞절을 하고 서둘러서 밖으로 나왔다. 중주이고는 이미 대청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영은 길을 재촉했다. "우리는 얼른 떠납시다." 중주이고는 독수약왕에게로 몸을 돌리며 포권을 했다. "약왕께서 우리들을 이처럼 잘 대해 주신데 대해 감격해 마지않습니다. 훗날 보답해 드릴 날이 있기를 바라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독수약왕은 손을 들어 보였다. "노부는 멀리 전송하지 못합니다." 독수약왕은 말을 마치자 곧 딸이 들어간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 갔다. 소영은 중주이고와 함께 초가를 나섰다. 그는 이미 몸에 진기가 통하고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요 며칠 동안 남궁옥과 같이 있는 바람에 시험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소영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곧 힘껏 달려 보았다. 그러자 중주이고도 전력을 기울여 뒤를 쫓아갔 다. 소영이 십여 리 가량 달려간 다음 고개를 돌려 보니 중주이고가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곧 걸음 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에 중주이고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상팔이 입을 열었다. "형님은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자 소영은 갑자기 남궁옥 생각이 떠을라서 길게 한숨만 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강팔과 두구는 소영의 침통한 표정을 보자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이들은 잠자코 다시 길을 떠났다. 소영은 그 날을 종일토록 우울한 표정으로 한 마디의 말도 하 지 않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질 무렵에야 이들은 구궁산(九宮山)에 당도하여 한 객점을 찾아 들었다. 상팔은 소영의 그와 같은 모습을 보자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 "형님, 무슨 고민이 있습니까?" 소영은 씁쓰레하게 웃었다. "그렇소. 나는 한 가지 의문되는 점이 있소." 소영은 한참 동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일이 너무도 큰 것 같아서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오." 소영이 점점 아리송한 대답을 하자 상괄과 두구도 서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형님 지금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건지요?" 소영은 얼른 둘러댔다. "우리가 서두르지 않으면 언제 장사에 도착하게 될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소." 상팔은 마침내 더 묻기를 포기했다. "아무리 빨리 달리더라도 꼭 일주야는 걸려야 할 겁니다." "두 분께서는 몹시 피로한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소이다." 소영이 얼른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좋소. 밤에는 길에 행인이 없을 테니 우리들은 마음놓고 달릴 수 있지 않겠소. 두 분 의 뜻은 어떠십니까?" 상팔이 끄덕였다. "좋소이다." 상팔은 대답은 마치자 곧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소영과 두구도 따라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세 사람은 경공을 펼쳐 제종신법(提終身法)으로 길을 서둘렀다. 세 사람은 한동안 번개같이 달렸다. 이윽고 중주이고가 숨을 헐떡였다. 소영은 그제야 걸음을 늦 추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예상보다 빨리 장사에 도착했다. 이미 영웅들은 대부분 자기의 갈 길을 향해 흩어져 가고 말았다. 다만 우문한도와 마문비, 초곤산, 사마건, 마원사, 육괴장 등의 한 패만이 아직도 소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소영의 일행을 곧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마문비가 맨 먼저 입을 열었다. "소형의 병세는 어떠하오?" 소영은 포권을 했다. "여러분이 염려해 주신 덕분으로 이미 완쾌되었습니다." "독수약왕의 위인이 비록 정파는 아니지만, 그의 의술만은 천하에서 제일 으뜸가는구먼." 이 때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소대협, 천하 영웅들이 모두 패를 지어 출동하여 그 백화산장의 잔당을 섬멸하러 갔흐니 소대 협은 푹 쉬도록 하시오." 소영은 정색을 하면서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손노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 "손노선배님께서는 개방과 협동하여 출동했습니다. 길면 칠 일 짧으 면 삼 일 만에 꼭 돌아오신 다고 소대협에게 전해 달라고 했소." "그럼 백리빙은 어디 갔습니까?" "백리낭자는 어떤 무공을 연마하기 위해 칠 일 동안 정좌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밀실 한 곳을 비워 그녀에게 제공하고 주위에 엄한 경계를 펴 놓았소이다." 소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선생의 배려는 언제나 용의 주도하십니다." 우문한도는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허지만 소대협께서는 저보다 더 생각이 높으신 걸요." 이들 두 사람의 대화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소영이 우문한도를 칭찬한 이유는 백리빙을 위해 겹겹이 경계망을 펴놓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백리빙이 정좌하고 있는 곳을 밝히지 않는 점에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마문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형께서는 천리길을 달려 오셔서 몹시 피로하실 테니 푹 쉬십시오. 내일은 제가 소형의 무사 함을 축하하는 뜻에서 연회를 베풀겠습니다." 군호들은 모두 그곳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이 때 소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문선생, 잠깐만 머물러 주십시오. 제가 좀 여쭐 말이 있습니다." 소영의 방에는 우문한도만이 남게 되었다. 소영은 우문한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 심목풍이 죽었습니까?"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보기에는 아직 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심한 부상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각대문파의 장문인들과 의논한 결과 심목풍이 미처 활동을 하지 못하는 동안에 백화산장의 부하 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죽여 없애려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방대한 사악의 세력이 다시는 일어 나지 못하도록…"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심목풍의 얘기는 그쯤 해 둡시다. 그런데 제가 우문선생께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습니 다." 우문한도는 반드시 무슨 큰 일을 의논해 올 것이라 생각하여 잠시 긴장했다. "소대협, 무슨 일이오?" 소영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제 생각에는 독수약왕이 제 상처를 치료할 때 무슨 독수를 쓴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가 어떻게 그처럼 짧은 시간에 제 상처를 완치시킬 수 있겠습니까?" 우문한도는 곧 대꾸했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곳에서 소대협을 치료할 때 고의 로 상처가 완전히 치료되지 않도록 미봉책을 쓴 것이며 또 한 가지는 그렇게 하여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서 다시 치료를 받게 될 때 또 한 가지의 독수를 쓰려는 생각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 다." 소영은 다음 말을 이었다. "기실 그 동안의 경위를 말씀 드리면 독수약왕은 저의 혈도에 금침을 놓아 상처를 치료해 준 뒤 중주이고와 같이 떠나가 버렸습니다. 집에는 나와 남궁낭자만을 남겨 놓고…" 우문한도는 소영의 말을 듣자 잠자코 소영을 바라보았다. 소영은 우문한도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남궁옥이 제게 약 한 사발을 달여 주었습니다." 우문한도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약을 복용한 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소영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약을 마시자 저는 곧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마치 한바탕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 습니다." "대략 어떤 꿈이었습니까?" "마치 남궁낭자와 무슨 관계를 맺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우문한도는 그 말을 듣자,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이 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때 남궁낭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남궁낭자는 한 마디로 부인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우문한도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남궁낭자 자신이 부인했다니 아무 일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저의 기억에는 생생하거든요." "그 일에 관해서는 제가 남궁낭자를 직접 만나 보기 전에는 무어라고 단언을 내릴 수가 없습니 다." 소영은 이 순간 어쩔 수 없이 우문한도의 판단에 의존했다. "그렇다면 우문선생께서 구궁산에 가보셔야 된다는 말입니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남궁낭자를 어떻게 만나시려는 겁니까?" "그런 일이라면 독수약왕이 저보다도 더 신중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만일 정말로 무슨 일이 있 었다면 남궁낭자는 혹시 당신을 놓아 주었을지 몰라도 독수약왕은 순순히 보내지 않았을 게 아니 겠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선생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우문한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대협, 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소영은 머리를 내저었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소대협께서는 우선 푹 쉬십시오. 잠시 후 제가 소대협을 백리낭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 겠습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문한도는 자기 처소로 가지 않고 중주이고가 있는 방으로 갔다. 마침 상팔과 두구는 마치 무슨 비밀을 이야기하듯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문한도가 들 어오는 것을 보자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우문선생, 힝님께서 무슨 얘기를 하시던가요?" "제가 여러분에게 그 일을 물어 보려던 참입니다." 상팔이 반문했다. "무슨 일인데요?" "구궁산에서 일어났던 일을 저에게 자세히 일러 주십시오." 상팔은 구궁산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우문한도는 자세히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께서는 편히 쉬십시오." 상팔은 그제야 눈살을 찌푸렸다. "우문선생, 형님께서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우문선생께서 그 동안의 경과를 묻는 것을 보니 무 슨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문한도는 잠깐 망설이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소대협께서는 자신이 구궁산에서 남궁옥에게 무언가 잘못된 일을 저질렀다고 느끼고 있어요." 상팔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물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우문한도는 미미하게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는 가능한 것도 같더군요." 상팔이 한 마디 내뱉었다. "아무튼 독수약왕의 사전의 안배가 있었을 것입니다." "두 분께서는 안심하고 푹 쉬십시오. 그리고 금후 그 구궁산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것입 니다." 상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우문한도는 상팔과 두구의 처소에서 나오자 더 깊은 수심에 잠겼다. 소영과 중주이고의 말을 종합해 보니 그간의 일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소영의 생각이 맞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독수약왕이 무엇 때문에 그런 안배를 했느냐 하 는 것이었다. 독수약왕이 자기의 외딸을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가 강호에 서 명예를 다투기 위한 각축전을 벌이지 않고 있는 대부분의 원인도 그의 허약한 외딸 때문이었 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의 딸을 해하려 할 리는 만무했다. 또한 남궁옥도 그렇다. 삼백육십오 일 하루도 빠짐없이 병상에 누워 있던 소녀가 어째서 그런 일을 당하고도 한 마디의 항의도 없이 오히려 제 편에서 모든 흔적을 감추려고 교묘한 말로 꾸며 댄단 말인가? 그녀는 소영의 잘못을 덮어주기 위해서 마치 소영으로 하여금 꿈을 꾼 것처럼 믿게 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녀야말로 그 병세가 심하고 허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에 굻 주렸던 여자라고나 할까? 언제나 지혜가 샘솟듯 솟아나는 우문한도였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만은 적당한 추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독수약왕의 위인으로 보아 자기의 딸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전대로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닌 것 이다. 그러므로 우문한도는 그 결과가 걱정스러웠다. 다행히도 일이 이것으로 끝나 버린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독수약왕이 보복을 하려든다면 필경 무 림의 일대 기협인 소영의 명예는 만 장의 절벽 밑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소영 자신의 생각인 것이다. 그가 만약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포자기해 버린다면 일대의 기인이 생매장이 되어 버리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와같이 착잡한 생각들이 우문한도의 머리 속에 가득차 있었다. 아무리 심사숙고해 봐도 별다른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룻밤은 쉬 지나갔다. 날이 밝자 소영은 곧 우문한도의 숙소로 찾아갔다. 우문한도는 소영을 반갑게 맞이했다. "우문선생의 단잠을 깨워드려 죄송합니다." "저도 이미 일어나 있었습니다." 소영이 말을 이었다. "우문선생, 수고스럽지만 저를 백리낭자에게로 좀 안내해 주시오."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었다. "제가 그 일을 그만 깜빡 잊고 있었군요. 소대협께서 친히 찾아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자, 그 럼 우리 곧 그리로 가도록 합시다." 우문한도는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았다. 후원은 굉장히 넓은 화원이었다. 그러나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잡초가 무성했다. 우문한도는 그 화원의 한가운데 있는 다 쓰러져 가는 기와집을 가리켰다. 소영은 천천히 기와집 앞으로 다가가서 두 손으로 허물어져 가는 나 대문을 가볍게 밀었다. 백리빙은 마당 한 구석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우문한도는 천천히 대문을 닫은 다음 소영과 나란히 서서 백리빙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 백리빙은 눈을 살며시 떴다. 순간 백리빙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벌떡 일어나 소영에게로 달려왔다. "오빠, 언제 돌아 오셨어요?" 소영은 두 손을 벌려 백리빙을 가볍게 껴안았다. "운기조식이 끝나자마자 그렇게 뛰면 안 되는데…" 백리빙은 우문한도를 바라보며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우문선생께서 보시고 웃으시겠네…" "소대협은 어젯밤 오자마자 낭자의 안부부터 물었지만, 나는 낭자의 연공에 방해라도 될까 싶어 서 오늘 아침에야 이곳으로 안내하였소." "빙아는 지금 무슨 무공을 연마하고 있지?" "이혈신공(移穴神功)이에요." "이혈신공이라… 처음 듣는 말이군." 우문한도가 얼른 말을 받았다. "백리낭자의 집안은 원래 무공의 연원이 깊은 집안이니, 아마 그 이 혈신공도 북해의 절기겠지 요."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이 푸공은 천축에서 나온 거예요. 실은 소림에 묻혀 있던 것입니다." 소영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네가 무위도장으로부터 그 무공이 기재되어 있는 경문을 얻은 모양이구나?" 백리빙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오빠가 구궁산에 가신 뒤부터는 하루종일 할 일이 없어서 그 경문을 읽었지요. 그래서 이혈신공이 퍽 재미가 있고 또한 무공의 기초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익히는 데도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길래 호기심이 생겨 그냥 연마해 보는 중이에요." "그래, 무슨 성과를 보았나?" "그 경문은 매우 몹시 상세하게 적혀 있어 그대로만 연습을 하면 꼭 성과가 있을 것 같아요. 만 약 아무런 성과도 없으면 그것은 경문이 잘못 적힌 탓이겠지요."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며칠이나 더 연습해야 될 것 같으냐?" 백리빙의 표정은 갑자기 진지해졌다. "거기에 기재된 것을 보면 약 일주일은 걸려야 될 것 같지만 하루나 이틀 정도 앞당길 수도 있 을 것 같아요. 저는 그저 장난삼아서 연습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오빠가 일이 있다면 저는 그 만 두겠어요." "기왕에 시작했으니 끝을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나는 며칠 더 기다려도 상관 없으니까." 백리빙은 천천히 품 속에서 탄지신공, 유운검법(流雲劍法) 등의 밀록(密錄)을 꺼내 소영에게 건 네 주었다. "오빠는 항상 바쁜 몸이므로 휴식을 취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잖아요. 무위도장께서 이것을 제 게 전해 주시면서 말씀하셨어요." "무슨 말씀인데?" "오빠도 시간을 내어 이 무공의 비록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하셨어요. 언제든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면서…" 소영은 그것을 받아 천천히 품 속에 넣으면서 말했다. "빙아, 계속 연습을 하도록 해라. 나는 돌아가 있을 테니까."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저도 이제 좀 쉬어야겠어요. 그런데 오빠는 이번에 구궁산에 가서 독수약왕을 만나 완전히 치료를 받으셨어요?" 소영이 대답했다. "독수약왕의 의술은 확실히 뛰어난 데가 있더군. 나의 상세는 이제 완전히 치료되었다." 백리빙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 됐네요. 그렇다면 오빠는 이틀 동안만 푹 쉬세요. 그 동안에 제가 이혈신공을 완전히 터득하면 우리는 이곳을 떠나요." 소영은 백리빙이 남궁옥에 관한 얘기를 꺼낼 줄 알았는데 끝내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자 진해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에 남궁옥을 만났었지…" "남궁낭자는 잘 있어요?" 소영은 천천히 말을 받았다. "응, 잘 있더군. 몸도 옛날보다 건강해졌고, 정신도 훨씬 나아진 것 같더라." "남궁낭자는 몹시 가련한 여자예요. 태어날 때부터 병상에서 떠나지 못하고… 비록 자기 아버지 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의라고 하지만 그녀의 병을 고쳐주지 못하니 딱하지요…" 소영은 곧 말머리를 돌렸다. "빙아야, 무공 연마나 잘해라. 우리는 가봐야겠다." 말을 마치자 소영은 돌아서서 바깥으로 나갔다. 소영과 우문한도는 나란히 걸어서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우문한도는 소영을 그의 방까지 바래다주고는 다시 총총히 그 후원의 기와집으로 돌아왔 다. 백리빙은 마치 우문한도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우문선생, 무슨 분부라도…"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었다. "낭자는 정말 총명합니다. 내가 손짓하는 것을 알아차렸으니…" 기실 우문한도는 소영과 백리빙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슬쩍 손짓을 해서 자기를 잠깐 기다려 달라는 암시를 했던 것이다. 백리빙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선생께서 중요한 얘기를 할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우문한도가 말했다. "낭자의 무공을 연마하는 시간을 너무 뺏을 수는 없으니 간단히 말하겠소. 다름이 아니라 내가 두어 가지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 첫째는 무위도장에 관한 일이오." 백리빙이 말을 가로챘다. "무위도장이 어쨌다는 거예요?" 우문한도는 뒷말을 이었다. "무위도장께서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곳을 떠나게 되어 소대협에게 안부나 좀 전해 달라고 나에 게 말씀하셨는데, 조금 전에 낭자의 말을 들어보니 낭자하고는 좀 더 긴 얘기가 있었던 것 같은 데…"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게도 오빠에게 전해달라는 몇 마디 말만 하셨어요." 우문한도는 말을 이었다. "낭자, 자세히 생각해 보시오. 무위도장이 낭자와 얘기를 나눌 때의 표정이나 어조 따위를… 그 리고 생각나는 대로 내게 좀 자세히 알려주시오." 백리빙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게 그리도 중요해요?" "그렇소. 매우 중요하오." 백리낭자는 군을 지그시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위도장께서는 자기 자신도 이 경문을 몇 장 읽어보았지만 무공의 경령(綱領) 같다면서 도저 히 자기로서는 그 깊은 뜻을 알 수가 없으니 소대협으로 하여금 잘 연구해 보도록 하라고 당부하 셨어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밖에 또 무슨 말이…" "그리고 그분께서는 어떤 노선배님의 부르심을 받아 보알(普謁)에 가야 하므로 소대협을 기다리 고 있을 수가 없다고 하셨어요." 우문한도가 반문했다. "어떤 노선배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요?" 백리빙은 머리를 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일부러 물어 보았지만 대답을 안하시더군요. 대답을 회피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우문한도는 또다시 물었다. "그밖에 또 다른 얘기는 없었소?" "그것뿐이에요." "혹시 그분께서는 낭자와 언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았소?"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우문한도는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낭자에게 몇 마디 일러주겠소." 백리빙은 즉시 다그쳤다. "무슨 일인데요? 보아하니 퍽 중요한 얘기인 것 같은데…" 우문한도는 백리빙의 표정을 한참 동안 살피고 난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소대협의 부담은 너무 크지요. 소대협의 명예와 성취는 그의 연령과 경험을 너무도 넘어서 있 소. 소대협이 비록 초인적인 재질을 지니긴 했다지만 만일 강호의 대란이 없었다면 소대협의 무 공의 성취가 어떠했든 간에 그렇게 짧은 시일 내에 강호 모든 사람에게 숭배를 받는 영웅은 되지 못했을 거요. 심목풍이 저질러 놓은 혼란은 반드시 소대협과 같은 재능을 지닌 영웅만이 평정할 수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심목풍이 소대협의 명성을 촉진해준 결과도 된 셈이지요. 말하자면 심목풍이란 악한이 없었다면 소대협의 명성이 그처럼 빨리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무튼 소대협이 무림에서 이룩해 놓은 업적은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지요. 금후 삼백 년 또다시 그만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으리라 장담도 할 수 있을 정도지만 단 한 가지 소대 협은 나이가 너무도 어려서…" 백리빙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우문선생, 화제의 주위에만 맴돌지 말고 핵심을 꼬집어서 얘기해주세요. 우문선생이 도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 수가 없군요." "내 말은 다름이 아니라 젊은 사람은 경험이 부족하므로 남의 계책에 잘 걸려들게 된다는 것이 오." 백리빙은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선생이 계시잖아요. 우문선생의 박학다식한 능력으로 우리 오빠를 도와주시는데 무슨 잘못이 있을라구요." "허나 나는 종일 소대협의 뒤를 따라다닐 수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그러니 낭자께서 좀 도와줘 야겠다는 겁니다." 백리빙이 반문했다. "저의 무공과 재능은 모두 오빠에게 미치지 못하는 터인데 어떻게 오빠를 도울 수가 있단 말입 니까?" "한 가지 미리 말해 둘 것은 소대협에게 절대로 떼를 쓰거나 말다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 다. 어쨌든 극단적인 행동은 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그에게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드 러운 말로 위로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이상의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무 슨 일이 있든 간에 나와 먼저 상의를 해주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없는 경우에는 토라지거나 하 지 말고 꾹 참아주기 바랍니다." 백리빙은 줄곧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가 설마 제게 용납되지 못할 일이야 할라구요? 우문선생께서는 걱정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 다." 우문한도는 미소를 지었다. "낭자가 잘 납득만 해준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소. 그럼 낭자, 나는 이만 돌아갑니다." 176. 불길한 징조 우문한도는 그 길로 자기 방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무위도장이 그처럼 황급히 떠나 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워낙 용의주도한 인물이므로 그런 말은 소영에게 비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며칠 동안은 소영에게 있어서는 무공치 발전을 기할 수 있는 중요한 휴식시간이 기 때문에 조금도 그의 머리 속에 잡념을 불어넣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문한도는 자신이 품고 있는 의혹을 조금도 소영에게 나타내지 않았다. 이틀 후에 백리빙은 이미 이혈신공을 터득했다. 이번에는 소영이 그 경문에 적힌 무공에 호기심 을 느껴 연마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문한도는 마문비를 반나절 동안이나 설복시켜 다시 소영의 부모를 은밀한 곳에 모셨 다. 그래서 그들 부자의 상면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하여 소영으로 하여금 조용한 마음으로 경문에 적힌 무공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 이 개월이란 세월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때는 이미 소슬한 금풍 이 부는 늦가을이 지나 쌀쌀한 초겨울에 접어들었다. 그 동안 소영은 무공을 연마하느라 두 달이란 세월이 언제 흘러갔는지도 몰랐지만 우문한도만은 하루가 일 년처럼 지루함을 느꼈다. 그는 그 동안에 많은 사람들을 풀어 놓아 강호의 동정을 살피게 했으며 삼 일마다 강호의 동태 를 보고하도록 했다. 또 한편으로는 소영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서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다행히 마문비, 당원 기, 육괴장, 초곤산, 사마건 등 열한 명의 고수들이 남아서 그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긴 했지만, 우 문한도는 끊임없이 들어오는 각 방면으로부터의 보고를 종합 검토 하여 강호에서 바야흐로 큰 변 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다. 그러나 각대문파의 고수들이 연합하여 백화산장의 잔당을 색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목풍의 소식만은 여전히 들을 수 없었다. 우문한도는 이처럼 과도한 정신적인 부담을 혼자 감당해 나가면서도 강호에서 곧 일어나게 될 회오리바람을 남에게 얘기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가 일단 그런 말을 입 밖에 낸다면 곧 소영의 귀에 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갑자기 서북풍이 휘몰아치더니 잿빛 구름이 몰려왔다. 대낮인데도 캄캄할 정도로 먹구름이 손 천지를 덮었다. 한바탕 큰비라도 쏟아질 모양이었다. 이 때 전엽청이 불쑥 나타났다. 우문한도는 곧 전엽청을 밀실로 안내했다. 전엽청은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흐르는 땀방을을 훔 치면서 말했다. "소대협이 이 곳에 있습니까?" 전엽청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런 말을 끄집어 내는 것을 보니 매우 급한 사정이 있어 보였다. 우문한도는 가볍게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지금 한창 두 가지의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중이므로 방해를 해서는 안 되오. 그러니 무슨 일이든 내게 먼저 가르쳐주시오." 전엽청이 곧 말을 이었다. "우문선생께서는 그 동안에 이 마가장(馬家莊)에서 한 번도 떠나시지 않았던가요?" 우문한도는 말했다. "자금도(資金刀) 마장주께서는 이 정원을 천하영웅들이 모일 장소로 제공한 뒤 어디론지 이사를 가 버렸소. 그리고 소대협이 구궁산에서 돌아온 후 몇가지 무공을 연마하는 바람에 나와 마문비, 초곤사 등은 계속 이곳에 남아 있었지요." 이 때 전엽청은 옆에 서 있던 시동에게 손짓을 했다. "너는 나가 있거라." 시동은 곧 대답을 한 다음 물러났다. 전엽청은 그제야 마음 놓고 입을 열었다. "초노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모두들 소대협이 무공을 연마하는 것을 보자 흥이 나서 매일 뒷뜰에 모여 서로의 절기를 겨루 며 무공연습을 하고 있다오." 전엽청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문선생, 저는 사형의 명령을 받들고 왔습니다. 급히 전할 말씀이 있어서요." 우문한도가 반문했다. "심목풍에 관한 소식이오?" 전엽청은 약간 놀라는 기색이었다. "우문선생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가요?" "그저 짐작해 봤을 뿐이오." 전엽청이 말을 이었다. "심목풍은 죽지 않았습니다." "영사형께서 그를 보셨단 말이오?" 전엽청이 고개를 끄닌였다. "네, 봤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심목풍은 사형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문한도가 다시 물었다. "심목풍은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요?" "설봉산에 있다고 합니다. 사형이 본 바로는 그는 매우 건강한 걸음걸이에 상세가 다 나은 것 같더랍니다." 우문한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면 백화산장읜 잔당들을 죽이러 간 각대문파의 고수들도 모두 설봉산에 있소?"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무당파를 제외하고는 설봉산에는 다른 문파의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우문한도가 낮은 목소리로 전엽청에게 말했다. "제 사형의 생각은 우문선생과 꼭 반대가 되는 격이군요." 우문한도가 반문했다. "무위도장께서는 무슨 고견을 말씀하셨는지요?" 전엽청이 말을 이었다. "저의 사형의 의견은 심목풍이 이제 막 상세가 회복되어 뿔뿔이 흩어진 자기의 부하들을 불러 모으려 하고 있으므로, 이 순간에 빨리 손을 써서 그를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천하 고수 중에 오직 소대협만이 그에게 심리적인 위협을 가할 수가 있으므로 소대협이 설봉산에 나타나기 만 한다면, 실은 우리 무당파가 전력을 기울여 심목풍을 물리칠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우문한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영사형의 견해에도 확실히 일리가 있소만, 나의 견해는 조금 다르오." 전엽청은 적이 의아스런 모양이었다. "우문선생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내 생각으로는 심목풍이 상처도 완치되었고 하니 소대협이 아주 무공 연마를 완수한 다음 정식 으로 심목풍을 찾아 가서 결판을 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소." 전엽청은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에 명을 받들고 올 적에 사형께서는 재삼 저에게 당부하기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소 대협과 같이 오라고 했는데 우문선생의 생각이 또한 그러하다니 심히 난처하게 됐군요." 우문한도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전대협의 의견은 어떻소?" "저는 우문선생의 지략에 일찌기 존경해 온 터지만 사형의 명령이 또한 그러하오니 어떻게 해서 든 소대협과 함께 갔으면 합니다." 우문한도가 반문했다. "사형께서는 전대협을 이곳으로 보낼 적에 나와 상의해 보라는 말은 하지 않았소?" 전엽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습니다. 사형께서는 우문선생을 만나서 잘 의논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소이다. 영사형께서 나와 의논해 보라고 한 뜻은 나의 의견을 중시하라는 말이기도 하 오." 전엽청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선생께서는 지금 소대협이 그곳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십니까?" 우문한도는 적이 불쾌한 빛을 보이며 말했다. "영사형께서는 전대협을 이곳으로 보낼 때 나의 뜻이야 어떻든 간에 소대협을 데리고 오라고 하 셨소?" 전엽청이 대답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어쨌든 소대협과 함께 오라고 했습니다." 우문한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전대협, 나는 여러 가지를 신중하게 생각해 봤소이다. 지금 만일 소대협이 설봉산으로 가게 되 면 소대협이 지금 연마하고 있는 무공의 성취에 영향을 끼친 뿐만 아니라 특히 금후의 무림 대국 이 극히 불리하게 되기 쉽지요." 전엽청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적이 무방비 상태하에 있을 적에 일거에 무찔러 버리는데 저희들에게 무슨 불리한 영향이 미치 게 된다는 겁니까?"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소대협이 지금 무슨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내가 보기로는 반드시 심 오한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근 두 달 동안치나 전 신경을 쏟아서 이미 무아지경에 달해 있소이다. 이런 경우는 무공의 연마에 있어서 극히 찾아 보기 힘드는 망아지경이라는 것인 데, 만일 지금 심목풍의 소식을 알린다면 그는 틀림 없이 그 망아의 경지에서 깨어나 마음의 안 정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무공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맙니다." 전엽청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의 뜻은 결국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우문한도는 담담하게 웃었다. "잠깐만 참자는 것이오. 전대협이 돌아 가거든 영사형에게 내 말을 전해 주시오. 될수 있는 대로 그 심목풍과 충돌이 없도록 참고, 그저 몰래 그의 행동만을 감시하라고…" 우문한도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만일 내 추측이 틀림 없다면 심목풍은 반드시 설봉산에 은신처를 마련해 놓고 있을 거외다. 심 목풍의 위인으로 볼 때 그가 백화산장이란 조직 하나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거요." 전엽청은 그 말을 듣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문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또 한 가지 더 있소이다. 이 말을 들으면 전대협은 소대협을 설봉산으로 데리고 가려는 고집이 풀릴 것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소대협의 칼에 상처를 입었으며 동시에 소대협에게도 부상을 입힌 그 화상이 심목풍과 함께 있 을 거라는 점이외다." 전엽청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 화상도 상세가 회복되어 함께 있다면 소대협이 당장 쫓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들 두 사 람의 적수는 될 수가 없을 테니 소용 없는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바로 그 점이오. 그러나 잠시 동안만 더 참아 소대협이 무공의 연마를 성취한 다음이면 더 이 상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내가 몇 마디 물어선 안 될 말인 줄 알면서도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소. 이다. 전대힙이 대답을 안해도 좋소이다. 대답을 해 준다면야 더욱 좋겠지만…" 전엽청이 곧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영사형께서 당신네 무당 고수들을 데리고 설봉산으로 달려간 것은 누구의 부름을 받고 간 것이 오?" 전엽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무림의 선배라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사형께서는 언제든지 어떠한 계획이라도 전부 저에게 알려 주셨는데 이번 일만은 이상하게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우문한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당신네들도 그 무림의 고인을 만나 보았소이까?" 전엽청은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우문한도가 다그쳐 물었다. "당신네들이 그곳에가 있는 시간이 퍽 오래되었잖습니까?" 전엽청의 대답, "그렇습니다. 사형은 한 장소를 지정해 두고 우리들에게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한 달 동안 줄곧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영사형께서 그러시는 걸 보면 반드시 무슨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이오. 그러니 전대협은 먼 저 돌아가기 바라오. 소대협의 무공이 근일 내로 그 성취를 보게 될 테니 과 때가 되면 내가 틀 림없이 소대협과 함께 달려가겠소이다." 전엽청은 망설이는 빛이었다. "제가 돌아가서 사형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솔직이 말씀 드리시오. 내 말을 그대로 전해 주기 바라오." 전엽청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매우 난처하다는 표정이었다. 우문한도는 담담하게 웃었다. "전대협,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전대협이 사실대로 영사형에게 말씀 드리면 틀림없이 양해해 주실 겁니다." 전엽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선생의 뜻이 정 그러시다니 어쩔 수가 없군요. 그렇지만 한 가지 선생께서 시간을 약 속해 주십시오. 언제쯤 오시겠다고…" "그건 저로서는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소대협의 무공 연마가 언제 성공할지 장담할 수가 없으니 까요." 우문한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허지만 제가 보기로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소. 길어야 한 달 정도겠지요." 전엽청은 깜짝 놀랐다. "한 달 후라고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내 생각에는 앞으로 한 달을 더 넘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전엽청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너무 시일이 긴데요." 우문한도는 말을 받았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오. 어쩌면 며칠만에 끝날지도 모를 일이고… 그 무공이 언제쯤 성취되리 라는 것을 한 마디로 얘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전엽청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보니 우문선생께서는 기한을 정할 수가 없다는 얘기군요?" 우문한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보아하니 무위도장이 단단히 일러 보낸 것 같구나. 만일 기한을 정해 주지 않으면 추근거리고 졸라댈 테니 차라리 기한을 정해 주는 것이 좋겠다.' "마음 푹 놓고 떠나시오. 반달 내에 내가 그리로 갈 테니 전대협이 만날 장소를 알려 주시오. 그 리고 내가 한 말을 영사형에게 잘 전하시오." 전엽청은 천천히 품속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서 우문한도에게 건네 주었다. "사형께서는 이미 설봉산의 근거지를 지도로 작성하여 이 봉투에 넣어 두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 도형을 따라 찾으시면 우리들의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문한도는 봉투를 받아 품속에 넣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대협, 빨리 떠나시오. 영사형께서는 당신이 돌아오기를 무척 고대하고 있을 거요." 전엽청은 포권을 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전엽청은 말을 마치자 곧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우문한도는 대문 밖까지 따라 나섰다. "전대협, 편안히 가시오. 멀리 나가지 않겠소이다." 전엽청은 그대로 걸음을 재촉했다. 우문한도는 전엽청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 가 한바탕 긴 한숨을 내쉰 다음 발길을 돌렸다. 원래 침착하기 짝이없는 우문한도는 한 가지 근심이 더 늘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시커멓게 먹 구름이 내리덮인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우문한도가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객실 안의 나무 의자에 소영이 언제 왔는지 앉아 있었다. "소대협, 이곳에 온 지 오래됐소." "이제 막 들어오는 길입니다." 우문한도는 그제야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꼼짝없이 전엽청과 마주칠 뻔했군.' 우문한도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의자 위에 앉았다. "소대협, 무공의 연마는 완성시켰소."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전부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보름 이상은 더 걸려야 될 것 같습니다." 우문한도는 속으로 매우 초조한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소대협, 마음 푹 놓고 무공을 연마하시오. 지금 강호는 평정돼 있으니 소대혐은 염려하지 않아 도 됩니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오늘도 심목풍에 관한 소식은 없습니까?" 우문한도는 말을 이었다. "소대협은 무공을 연마하는 동안 절대로 마음을 딴 데 쓰지 마시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노선배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방이 묘연하오. 여태껏 아무 소식이 없소이다." 소영이 다시 말했다. "조금 전에 제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마음 놓고 무공 연마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문한도가 반문했다. "무슨 일입니까?" 소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손노선배님께서 떠나실 때 분명히 우문형에게 어디 가신다는 얘기를 했을 텐데…"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했소이다." "악낭자를 찾으러 떠났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개방의 근거지로 돌아가서 네 명의 개방고수들을 데리고 악낭자의 행 방을 찾아 떠났습니다." "아직도 못 찾았는지요?" "거기에 관해선 나도 아직 소식을 못들었습니다. 아무튼 개방의 예민한 이목으로도 악낭자를 찾 지 못한다면 아마 이 세상에서 악낭자를 찾을 만한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소영이 되물었다. "손노선배님께서는 이미 악낭자를 찾으신 게 아닐까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만일 그 악낭자를 찾으셨다면 벌써 소식을 전해 왔을 겁니다." 소영이 말을 받았다. "만일 그 소식이 들려오거든 곧 제게 알려 주십시오." "좋습니다. 소식이 있는 대로 곧 소대협에게 보고토록 하겠습니다." 우문한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강호에 이처럼 평온한 세월이 있기란 힘드는 일이니, 소대협은 그 동안에 몇 가지 무공을 연마 하기 바랍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뚠한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로는 강호가 이처럼 조용한 것은 한바탕 대폭풍이 휘몰아쳐 올 조짐이라고 생각합니 다. 머지 않아 더욱 큰 무림의 분쟁이 곧 강호에 펼쳐질 것 같습니다." "그것은 심목풍이 일으킬 폭풍이란 말이지요?" "저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아직 확실한 대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과연 누가 그 폭풍을 휘몰아 올지…" 소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우문형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숨기는 것 같습니다." 우문한도는 곧 말을 받았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하지만 사소한 일들로 소대협의 마음을 어지럽힐 생각은 없습니다." 소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무공을 연마하러 가야겠군요." 소영은 말을 마치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우문한도는 소영이 걸어 가고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 음을 옮겨 방안으로 들어갔다. 우문한도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후 일 주일을 넘겼다. 이 일 주일 동안이 우문한도에게는 일 년 처럼 느껴졌다. 항상 지모가 샘솟듯 솟아 나오는 우문한도도 이 때의 심정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싸여 있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마문비 등의 군호들은 모두 서로의 무공을 소개해 가며 기분이 들떠 있었으므로 우문한도의 이 와 같은 침통한 심정을 알아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란 쉴새없이 흐르는 것이다. 그리고는 일 주일이 또 어느새 지나갔다. 우문한도와 무위도장이 만나기로 약속한 날짜는 바로 내일로 다가왔던 것이다. 우문한도는 오늘 밤에 길을 떠나야만 내일 약속한 시간에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 히 후원을 향해 걸어 갔다. 이 때 초곤산이 마침 자기가 그것으로 인해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자모철담(子母鐵聃)을 군호 들에게 시험해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의 절기를 교환해서 가르쳐 주는 일로 말미암아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피차 서로 의 절기를 배을 수가 있게 되었구나. 초곤산의 자모철담만 보더라도 무림 내에서 초곤산을 제외 하고는 그것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모철담을 사용할 수 있는 고수들 이 상당히 많아지겠구나.' 우문한도는 상팔의 앞으로 다가가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형!" 상팔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더니 곧 벌떡 일어섰다. "우문형!" 우문한도는 나직이 말했다. "우리 다른 사람의 무공 연마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쪽으로 가서 얘기합시다." 상팔은 우문한도의 뒤를 따라 화원의 한 모퉁이까지 왔다. "우문형, 무슨 분부라도 계시는지요? 우리들은 각자의 절기를 남에게 가르쳐 주기도 하며 또한 다른 사람의 절기를 배우기도 하느라고 여념이 없습니다. 그 바람에 우문형에게 한 번 문안도 못 드렸군요."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원 별말씀을…" 우문한도는 가벼운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볼 일이 좀 있어 오늘 저녁에 이곳을 떠나려고 합니다." 상팔은 흠칫 놀라는 기색을 나타내며 우문한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로챘다. "우문형께서 가시다니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잠시 며칠 동안 다녀 올 데가 있어서 그러는데… 오래 걸려 봤자 나흘 후면 다시 돌아올 수 있 을 것이오." 상팔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우문한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께서는 어딜 가시렵니까?" '이 중주이고는 소영을 속이지 않는 사람들이므로 내가 만일 사실대로 얘기해 준다면 곧 소영에 게 알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몇 마디 거짓말을 해야겠구나.' 우문한도는 곧 입을 열었다. "오래 전에 헤어졌던 친구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지금 강호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으니 제가 잠시 없더라도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간다고 하더라도 결코 일주일을 넘기지는 않 을 것입니다." 상팔이 말을 이었다. "선생께서는 우리 큰형님에게 말씀 드렸겠지요."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소대협께선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무공 연습에 열중하고 있으므로 괜히 방해라도 될까 싶어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상팔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의 결정이시니 어련하시겠습니까만 강호의 대국은 아직도 해결해야 할 일이 많으니 우리 형님께서 선생의 절세적인 재능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선생은 약속대로 꼭 돌아와 주셔야 합니 다."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내 나이 이미 환갑에 접어들었으나, 소대협께서는 아직 무림의 정의를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고 있거늘, 내 전력을 기울여 죽을 때까지 소대협을 보좌할 테니 상형께서는 마음 놓으시기 바랍니 다." 우문한도는 긴 한숨을 내쉰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간 뒤에는 상형과 두형이 좀 수고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우문한도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강호는 평정돼 있고 이곳 마가장은 더욱 조용하지만 우리는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떠난 후 상형께서는 소대협의 신변을 보살펴 주기 바랍니다. 이 마가장이 주위에는 삼십 리 밖에 제가 매복을 해놓았지만 만약 일류 고수들이 쳐들어 온다면 그들의 능력으로는 발견해 내지 못할 우려가 많습니다." 상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안심하십시오. 하지만 속히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제가 이 무거운 중책을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되도록이면 빨리 돌아 오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할 말씀은 제가 이곳을 떠났다는 사실 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마시고 비밀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상팔은 그 말을 듣자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문형은 정말 옛친구를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상세한 얘기는 제가 갔다 와서 상형에게 자세히 일러 드리겠습니다." 우문한도는 말을 마치자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곧 간단한 행장을 차린 다음 길을 떠나기로 했다. 밤을 새워 걸어 가야만 내일의 약속 시 간에 늦지 앉을 것 같았다. 우문한도가 채 십 리도 가기 전에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어졌다. 우문한도는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펴 보았다. 주위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없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큰나무 밑에 가서 앉으떠 품속에서 전엽청이 준 봉투를 꺼냈다. 우문한도가 봉투를 뜯어 보니 그 안에는 간단히, <칠성담(七星潭), 쌍송암하(雙松岩下)> 란 일곱 글자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우문한도는 다 읽고 난 다음 곧 편지를 태웠다. 이 때였다. 갑자기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나무 위에서 번개같이 내리덮쳐 타고 있는 편지 를 낚아 채는 것이 아닌가? 우문한도는 깜짝 놀라서 왼쪽 팔을 들어 일장을 쳐내고 오른손으로 재빨리 타고 있는 편지를 날 려 버렸다. 그러자 덮쳐 온 사람은 몸을 가눈 다음 뒤로 오 보 정도 물러났다. "우문선생!" 우문한도는 어리둥절하며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우문한도는 순간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그 사람은 백리빙이었다. 백리빙은 생긋 웃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안에 무슨 비밀이 적혀 있길래 선생께서는 그다지 신중히 다루시나요." 우문한도는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낭자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지요?" 백리빙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선생님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고…" 우문한도가 다그쳐 물었다. "누구의 명령을 받았단 말이오?" "그야 물론 소오빠의 명령이지요." 우문한도는 약간 언성을 높여 말했다. "소대협께서는 정말 저를 감시하라고 하셨습니까?" 백리빙은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제가 말을 너무 빨리 하느라고 빗나가고 말았어요. 선생을 감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을 보호하라고 하셨어요…" 우문한도는 말을 가로챘다. "감시든 보호든 간에 그것은 말이 다를 뿐이고 어쨌든 대협께서는 나를 못 믿는다는 게 아닙니 까?" 백리빙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 절대로 오해하지 마세요. 소오빠께서는 선생에 대한 신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선생 에게 더 없는 관심을 갖고 계시답니다. 그리고 오빠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선생님은 지금 여러 가지 고민을 간직하고 있으시면서 혹시 오빠의 무공연마에 지장을 줄까 싶어서 그 일 들을 오빠에게 얘기를 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문한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소대협의 관찰력은 정말 대단하군…"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빠는 선생님의 거동을 주의해 보라고 했는데 과연 오빠의 짐작이 들어 맞았군요." 우문한도는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대협이 그토록 저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시니 감격해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돌아 가셔서 소대협에게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제가 옛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길면 칠일 짧으면 나흘 안에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라고…" 백리빙은 그 말을 듣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오빠는 선생 혼자서 모험을 하시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나는 단지 옛친구를 만나러 갈 뿐인데 모험은 무슨 모험입니까? 낭자는 가서 과렇게 말을 전해 주십시오." 백리빙은 단번에 거절했다. "안 돼요. 저 혼자서 따라 가는 것도 아닌데요." 우문한도는 어리둥절했다. "또 누가 왔단 말이오?" 백리빙은 여전히 생글거리며 말했다. "선생께서는 모든 일을 귀신같이 알아 맞추시는데 이번에도 제가 누구와 같이 왔는지 한 번 알 아 맞춰 보세요." 우문한도는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겼다. "소대협께서 친히 오셨습니까?" 백리빙은 나무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빠, 내려 오세요. 우문선생께서 이미 알고 계시니…"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무성한 나뭇잎 속에서 소영이 뛰어 내려 왔다. "저는 우문선생께서 무엇인가 저를 속이고 있다고 짐작을 생각했는데 과연 내 추측이 들어 맞았 군요."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소대협의 생각도 점점 더 세밀해지는군요." 이 때 백리빙이 불쑥 말참견을 했다. "우문선생께서 이토록 혼자서 비밀리에 떠나시는 것을 보니 반드시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것 같군요?" 우문한도는 소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대협께서 이미 제가 볼일이 있어서 이곳을 떠난다는 것을 알아 맞춰으니 또한 제가 무슨 일 때문에 간다는 것까지 알아 맞춰 보십시오." 소영이 말을 받았다. "소제는 아직 우문선생과 같은 선견지명이 없습니다." "틀려도 상관 없으니 한 번 알아 맞춰 보시지요?" 소영은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무위도장께서 무슨 소식을 주었나 보지요." 우문한도는 그제야 하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웃어젖혔다. "잘 알아 맞추셨습니다. 제가 바로 그 무위도장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무위도장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설봉산에…" 소영이 말을 이었다. "그분이 사람을 보내 선생을 모시러 왔습니까?" "그분은 애당초 사람을 보내 소대협을 모시러 왔습니다. 그러나 소대협께서는 한창 무공을 연마 하고 있는 중이라 혹시 방해라도 될까 싶어 제가 보름 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돌려 보냈습니 다. 그런데 그 날짜가 되었으므로 제가 가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신의를 어길 수는 없 는 거니까요…" "무위도장께서 제게 사람을 보낼 때는 반드시 중요한 일이 있어서일 텐데요…"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그보다도 제가 먼저 소대협에게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소대협께서 제게 솔직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연마하던 무공은 완전히 터득했습니까?" 소영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록 정통하지는 못했지만 적을 맞아서 사용할 수는 있을 정도는 됩니다." 우문한도는 말을 이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당시 소대협께서는 이십 일 가량 더 걸려야 된다고 했는데 이제 겨우 십사 일밖에 되지 않았잖습니까?" "그러니 아직도 능란하게 사용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런 무공은 터득만 해 두면 언제 어디서 라도 숙달이 되도록 연습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꼭 마가장 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 습니다." 우문한도가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저도 더 이상 속이지 않겠습니다. 심목풍이 설봉산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합 니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전엽청이 저에게 알려 준 얘기론 심목풍의 상처가 완전히 다 나았다고 하더군요." 소영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문선생께서는 어쩌시려는 겁니까?" "솔직이 말해서 심목풍이 완치되어 설봉산에 나타난 데는 많은 내막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우문선생께서 우선 가서 정세를 살펴 보겠다는 겁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선생 혼자서 가신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우문한도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위도장께서도 도와 주실 거고 또한 이번에 제가 그리로 가서 적을 만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혜로써 대항하지 절대로 힘으로 대항하지는 않을 겁니다." 소영은 미소를 지었다. "우문선생께서는 우리 두 사람을 데리고 가시면 안 됩니까?"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소대협께서 만일 이 길로 마가장을 떠나시게 되면 그곳에는 영소하는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만 일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는 일대 혼란이 빚어지지 않겠소이까?"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떠나 오면서 이미 서신 한 장을 남겨 놓았습니다. 만일 무슨 변고가 일어났을 때는 마총 타주에게 사건의 수습을 부탁해 놓았으며 또한 초곤산 선배님과 사마건형이 옆에서 도와 주도록 모든 안배를 해 놓았습니다." "소대협께서 이미 여기까지 오셨으니 다시 돌아가라고 권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단지 선생께서는 저의 무공연마에 방해가 될까봐 저를 속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점에 대 해서는 제가 이미 상관이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니 만약 그 일 말고도 또 다근 이유가 있 다면 저는 굳이 동행하겠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우문한도는 담담하게 웃었다. "단지 소대협께서 저의 응낙이 있기 전에는 출수하지 않겠다는 대답만 해주시면 됩니다." 소영이 말을 받았다. "좋습니다. 그것만이라면 약속해 드리지요." 우문한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전엽청과 암호로써 연락해 두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암암리에 행해야 합니다. 곧 변 장을 하고 가면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소대협께서는 무림 동도들에게 천하 영웅이란 추앙을 받 고 있는 터에 변장이란 좀 어울리지 않겠지만…" 소영이 말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정의의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그까짓 건 상관할 것도 없습니다."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백족지충(百足去蟲)은 쉽게 죽지는 않는 법, 더구나 심목풍은 완전히 죽지 않았으며 전엽청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모든 행동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해 서는 지금부터라도 변장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소영이 힘차게 말했다. "좋습니다. 모든 것은 우문선생의 계획대로 진행하지요." 세 사람은 변장을 했다. 그리고 두 패로 갈라져서 갔다. 두문한도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 그 아까운 수염을 반이나 잘라 버리고, 돈 많은 상인의 차림을 했다. 소영은 시골뜨기로 가장하여 우문한도와 십 장의 거리를 유지하며 걸어 갔다. 백리빙은 우문한도와 동행을 했다. 그러고 보니 제아무리 뛰어난 기지를 가진 심목풍이라 하더 라도 얼른 알아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세 사람은 이렇게 감쪽같이 변장을 하고는 보통 걸음으로 걸어 갔다. 혹시 너무 빨리 달리다가 는 눈치라도 채일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밤이 되자 이들은 걸음을 재촉했다. 이들은 밤새껏 달려 오경 무렵에야 한 산골짜기에 이르렀다. 우문한도가 길 옆에 있는 밀림을 가리키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칠성당은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우리는 정오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 다. 그런데 만약 심목풍이 정말 이 칠성당 부근에 있다면 우리들은 앞으필 거동에 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문선생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밀림 속에 들어가서 잠시 쉬었다. 그러나 날이 밝자 곧 일어서서 칠성당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세 사람이 부지런히 달려서 십 여 리쯤 갔을 때 길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이들은 다시 오 리 가량 더 달려가서 낮은 산봉우리 밑에 이르렀다. 거기 봉우리 밑의 넓은 풀밭에는 수십 대의 마차와 근 백 필이나 되는 말들이 있었다. 알고 보니 칠성당으로 올라 가자면 마차와 말은 더 이상 올라 갈 수가 없었으므로 모두가 여기 서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백리빙은 낮은 목소리로 우문한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 여기는 퍽 복잡한 곳이네요." 우문한도는 길을 걸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소. 이곳이 사람들의 눈에 발견된 지는 이미 백 년이 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정작 사람들 이 모여들게 된 것은 십여 년 전부터의 일이지요. 게다가 산으로 큰길이 트인 후로부터는 사람들 의 왕래가 급격히 불어났지요. 저는 십 년 전에 이곳에 한 번 와 본 일이 있지만 그 때 보다도 지금은 몇 배나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진 것 같소." 이들은 어느새 봉우리 위에 올라 섰다. 갑자기 눈앞의 경치가 달라졌다. 봉우리 뒤에는 넓은 분지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인파가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칠성당은 북두칠성마냥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모두가 한 줄기의 개울로 연결되어 있 었다. 우문한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백리낭자, 조심하시오. 될 수 있는 한 말을 피하고…" 우문한도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백리빙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 올려 우문한도의 뒤를 바짝 따랐다. 칠 성당이 점점 가까와졌다. 푸른 못물이 보였다. 한 개의 성담(星潭)이 오무(백오십 평) 이상의 넓이 를 가졌으며 일곱 개의 성담을 연결하는 개울에는 푸른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북쪽에 있는 성담의 한쪽에 절벽이 높이 솟아 있는데 그 절벽 위에는 푸른 소나무 가 빽빽이 서 있었다. 그뿐더러 성담 위에는 무수한 조각배가 떠 있었으며 간간이 작은 놀잇배가 성담을 열결하는 계 류를 왕래하기도 했다. 우문한도는 못 가에 서서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곧 손을 흔들어 작은 배 한 척을 불렀다. "우리 이 배 좀 빌립시다." 그는 한 꾸러미의 은자(銀子)를 내밀었다. 사공은 매우 기뻐했다. 그 돈이면 새 배를 사고도 돈이 남는 것이다. 사공은 연방 싱글벙글 웃으며 배에서 내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백리빙도 곧 배 위에 올라 탔다. 우문한도가 말했다. "배를 저어 칠성담을 한 바퀴 돕시다." 백리빙은 잠자코 노를 저었다. 배는 천천히 계류 위로 미끄러져 갔다. 이 칠성담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이 천연의 계류에 있었다. 이 계류는 비단 같이 떨어져 있는 일곱 개의 성담을 연결해 줄 뿐만 아니라 그 굴곡이 더욱 신비스러웠다. 이들이 두 개의 성담을 지나가자 계류는 갑자기 정북방의 절벽이 있는 곳으로 구부러져 들어갔 다. 백리빙은 쉬지 않고 배를 저었다. 그리고 우문한도는 연방 주위의 풍경을 살피고 있었다. "저쪽 가에 배를 대시오." 백리빙은 우문한도가 손짓하는 곳을 바라보니 두 그루의 잣나무가 못 가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우문한도가 나직이 말했다. "제가 부르기 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낭자께서는 못둑으로 올라오지 마시오." 백리빙은 무슨 영분인지 알 수 없어 궁금하기 짝이없었지만 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여 응낙했 다. 우문한도는 곧 배에서 내려 천천히 못둑으로 올라갔다. 177. 돌아온 절세고인 백리빙은 배에 남아서 우문한도가 돌아 오기를 가슴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문한도 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백리빙은 기다리다 못해 몸을 날려 그 바위 뒤로 가 보았다. 바위 뒤에는 우문한도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나. 백리빙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거 큰일났구나. 우문선생이 납치를 당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무공도 약한 편은 아닌데 어 찌 이토록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머리를 돌려 못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눈에 띄는 것은 오가는 배뿐이고 소영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총명한지라 이릴수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만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녀는 곧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 모아 몸을 솟구쳐 올려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무 위에는 아무 런 매복도 없었다. 백리빙은 나무 꼭대기로 올라 가서 사방을 내려다 보았다. 십여 장이나 높은 절벽 아래 푸른 집 한 채가 보였다. '우문한도가 만일 납치되어 갔다면 저 집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가저 동정을 살펴 본 다음 어떤 이상이 발견되면 곧 다시 이곳으로 와서 우선 소영을 만난 다음 대거 수색을 해 보 리라.' 백리빙은 이런 결심을 한 다음 곧 나무 위에서 뛰어 내려 와 푸른 집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가 보니 그 집은 한 채의 농가였다. 지붕 위에 청등(靑藤)이 잔뜩 엉겨 있어 위에서 볼 때는 꼭 지붕이 풀더미처림 보였던 것이다. 싸리문이 활짝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방문도 채 닫히지 않아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디는 흔적 이 역력했다. 백리빙은 헛기침을 한 번 크게 한 뒤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 계십니까?" 순간 안에서 매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빙아야, 들어오너라." 그 음성은 바로 백리빙이 제일 믿음직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소영의 음성이었다. 백리빙은 곧장 달려 들어갔다. "오빠도 여기 계셨군요?" 방 안에는 몇 개의 대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소영과 무위도장 그리고 전엽청과 운양자 등이 앉 아 있었다. 무위도장이 약간 몸을 굽히며 백리빙을 맞이했다. "낭자도 이리 앉으시오." 그러나 백리빙은 우문한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무위도장의 인사에 답례도 잊은 채 입을 열었 다. "오빠, 우문선생이 보이지 않네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무위도장과 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이란다."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다들 알고 계셨던가요?" "어떤 사람에게 납치되어 가는 것을 보았지요." "그 분이 저더러 부르기 전에는 절대로 올라 오지 말라고 하더니 기 어코 혼자서 납치를 당하셨 군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소영의 옆에 가서 앉았다. 소영은 백리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빙아야, 너무 서두르지 마라. 무위도장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이 심목풍에게 잡혀간 것은 아니란 다." 백리빙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심목풍 외에 또 다른 적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무위도장이 말을 받았다. "대단한 역량을 지닌 사람이긴 한데 아직까지는 적인지 우방인지 잘 분간을 못하겠습니다." 백리빙이 반문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우문선생을 잡아 가게 됐습니까?" "우문형께서는 빈도와 보름달의 기한을 약속했는데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지요. 그래서 며칠 전 부터 사제 몇 사람이 번갈아서 그곳으로 마중을 나갔었지요. 그러나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 틀림 없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약간의 안배를 해두었는데…" 백리빙이 말을 가로챘다. "당신네들이 만나기로 한 장소가 바로 그 두 그루의 잣나무 밑이었나요?" "그렇습니다. 그곳은 몹시 조용하고 사람의 왕래가 뜸한 데다 높은 나무와 큰 바위가 있어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마춤이지요. 헌데 오늘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이미 어떤 사람이 먼저 와 있었어 요."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무위도장은 느릿느릿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었지요. 그 사람은 책 한 권을 들고 그곳에 앉아서 읽고 있었는데 그도 마치 사 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빈도는 그 자를 딴 데로 쫓아 보내려고 했지만 적당한 방법이 그 당시에 생각나지 않더군요." 백리빙이 되물었다. "그후 어떻게 됐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심목풍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을 도장께서는 어떻게 장 담할 수가 있어요?" 무위도장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 후 저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저의 무당 문하들에게 지시를 내렸어요. 당신네들을 중도에서 모셔 오라고. 그러나 당신네들이 훌륭한 솜씨로 변장을 하고 오는 바람에 알아 볼 수가 없었다오. 게다가 전사제의 말에 의하면 우문선생 혼자서 오실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여러분들을 놓치고 말았지요. 그래서 나는 이거 큰일났다고 생각하며 곧 나의 얼굴에 분장했던 약물을 닦아 버리고 못 가에서 배회했지요. 그러다가 다행히 소대협을 만나서 그 약속한 장소로 허둥지둥 되돌아 왔지만 이미 때가 늦었어요." 백리빙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우문선생이 납치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던가요?" "보았지요."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그런데 왜 뒤쫓지 않았어요?" 소영은 품속에서 박쥐 모양으로 생긴 물건을 꺼냈다. "이렇게 생긴 괴상한 암기에 밀려나고 말았지, 나와 무위도장이 절벽 밑까지 쫓아 갔을 때 그 자는 우문선생을 옆구리에 끼고 절벽 위로 뛰어 올라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그러면서 이런 암 기를 쳐냈는데 그 때 마침 내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천 년 묵은 교피 장갑을 끼고 이것을 받 아냈지…" 백리빙은 소영과 무위도장이 우문선생이 납치되어 간 경과를 태연히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문선생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데 저들이 저처럼 태연할까?' 이 때 무위도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자는 소대협께서 맨손으로 자기가 던진 박쥐표를 받아내는 것을 보자 탄복하며 오늘 저녁 초경 무렵에 그 절벽 밑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소." 백리빙이 반문했다. "도장께서는 그 자의 말을 믿습니까?" "이 절벽 위로 올라 가서 숲으로 가는 길은 두 줄기밖에 없소. 빈도는 이미 사람을 보내고 통로 를 지키게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소대협께서 이미 약속을 했으므로 오늘 밤에 만일 그 자가 약 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산에 불을 질러 버리겠소. 그 숲은 사방 오만 리는 족히 될 넓이지 만 마른 잡초와 낙엽과 덩굴이 많으므로 잘 탈 것입니다." 백리빙은 그 말을 듣자 심목풍이 자기네들을 태워 죽이려고 하던 것이 생각나서 소름이 오싹 끼 쳤다. 백리빙은 소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빠, 그들이 꼭 올까요?" "나와 무위도장이 재삼 생각해 봤지만 그들은 절대로 불맛을 보려고는 하지 않을 거야." 백리빙이 다시 물었다. "오빠는 어떻게 그들이 심목풍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을 단언할 수가 있어요?" 소영이 대답했다. "어쨌든 그들이 우리의 적이라면 나를 해치려 할 텐데…" 무위도장이 말을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만약 심목풍의 부하라면 이미 우리들에게 손을 썼을 것입니다." 이 때 갑자기 선부(船夫)차림을 한 사나이가 들어와서 무위도장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 잣나무 밑 바위 옆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생긴 인물이냐?" "가벼운 도포를 입은 노인입니다. 거리가 워낙 멀어서 그 모습을 똑똑히 달아 볼 수는 없었습니 다." 무위도장이 소영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들의 추측이 틀림 없소. 그는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 나타난 노인이 바로 그 들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자 소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제가 가 보고 오겠습니다." 무위도장이 말을 받았다. "빈도의 생각에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소대협께서는 이미 오늘 밤에 약속을 하였으 니 좀 더 두고…" 소영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된다고 했소. 도장께서는 계획대로 일을 진행 시키십 시오. 제가 가보고 오겠습니다." 소영은 다시 백리빙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여기서 무위도장의 분부에 따르도록 해라." 백리빙이 나직이 대답했다. "요즘 저의 무공이 많이 발전했어요."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알고 있어. 그러나 두 사람이 모험할 필요는 없어. 나는 이미 무위도장과 적을 상대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 놓았으니 너는 무위도장의 분부에 따르기만 하면 돼." 소영은 말을 마치자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무위도장이 입을 열었다. "이 박쥐 모양을 한 암기의 입엔 독침이 가득 들어 있소. 그래서 서투른 사람이 손으로 막든, 무 기로 막든 잘못 건드려서 이 쇠박쥐를 진동시키면 곧 독침을 뿜어 내게 마련이오. 만약 소대협께 서 받아내지 않았더라면 빈도는 아마 이 박쥐의 입에 든 독침에 상했을 것이오." 백리빙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사라져 가는 소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 었다. "도장, 우리 가서 오빠를 도와 줘야 하지 않겠어요?" 무위도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우리는 한 번의 실수는 하였을 망정 두 번 다시 실수를 해서는 안 되오. 빈도는 이미 중요한 길목마다 사람을 안배해 놓았으니 그가 어느 쪽으로 가든 우리의 감시망을 빠져 나가기는 힘들 것이오."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만약 그가 우리 오빠를 해치게 되면 어떡하지요?" "소대협의 무공을 당해 낼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백리빙은 걱정스런 모습이었다. "그들이 무공을 한다면 물론 우리 오빠를 해치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강호의 인물들은 모두가 지 모를 많이 쓰므로 그들이 혹시 암암리에 기습을 할까 두렵습니다." 무위도장이 말을 이었다. "낭자께서 그다지 마음을 놓지 못하겠다면 내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백리빙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무슨 방법인데요?" "집 뒤에 소 한 마리가 있으니 낭자께서 목동 차림을 하고 소를 타고 가게 되면 소대협과 그 자 가 의심을 품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백리빙은 그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도장의 방법은 과연 고명하십니다. 제가 곧 변장을 하겠습니다." 잠시 후 백리빙은 목동 차림을 하고는 소 위에 올라 탔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 잣나무 밑으로 향해 소를 몰았다. 한편 소영은 나는 듯이 달려 그 잣나무 아래로 갔다. 거기에는 과연 흰 수염을 가슴까지 늘려뜨린 한 노인이 서서 주위를 살펴 보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이 가까이 가는 데도 이 노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소영은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소영을 힐끗 바라보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영이 만약 이 때 인피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멋적어서 붉어진 얼굴이 드러났을 것이다. 소영은 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선배…" 노인은 소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곧 몸을 돌리며 물었다. "이 노부에게 할 말이 있나?" "그렇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이곳에서 누굴 기다리고 계십니까?"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너는?…" 소영은 역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후배는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누구의 명을 받들고 왔느냐?" 소영은 이미 무위도장과 계획을 짜 놓은지라 웃으면서 대답했다. "노선배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의 명령을 받고 왔습지요." 그러자 노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소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분은 저기 보이는 저 푸른 집안에 계십니다. 노선배님께서는 저를 따라 오시지요." 그러자 노인은 화를 버럭 냈다. "그가 직접 나를 모시러 올 일이지 거가 그를 찾아 가야 한다고… 나는 지금 천 리 길을 멀다하 지 않고 여기까지 왔거늘 그는 나를 완전히 잊었단 말인가?" 소영이 대답했다. "그건 두 분 사이의 일이니 제가 감히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말씀을 직접 만나서 하십시오." 노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노부가 가서 만나 보도록 하지." 이들이 막 걸츰을 옮겨 놓으려는데 사람의 그림가가 번쩍이더니 유성처럼 달려오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소영의 앞으로 다가와서 길을 가로막았다. 소영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는 사십 정도 되어 보이는 보통 체격이었으며 긴 바지에 단삼 (短衫)을 입고 있었다. 그의 몸차림의 매우 경쾌해 보였으며 눈에는 광채가 번쩍이고 어디로 보나 내외의 공력을 겸비 한 고수 같았다. 이 때 그 흰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차가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또 누구냐?" 사나이는 소영을 한 번 힐끗 바라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람을 맞으로 온 사람입니다만 노선배님께서는 노인은 소영을 한 번 바라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소영은 이미 이 노인이 절기를 지닌 고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만일 노인과 맞붙게 된다면 많은 시간을 끌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겉으로는 시치미를 딱 떼고 모르는 척하고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달려 온 사나이가 소영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분은 노선배님의 동행이 아니십니까?" 노인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도 명을 받들고 노부를 마중 나온 자냐? 무슨 연극들을 하고 있는 거냐?" 사나이가 소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이 노선배님을 모셔 오라는 명령을 받고 온 사람이오." 사나이가 말을 이었다. "이 노선배님이 뉘신지 당신은 알기나 하오?" 소영은 속으로 어차피 손을 쓰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저는 알고 있소만 당신에게 알려 줄 수가 없소이다." 그러자 사나이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허튼 수작 마라!" 사나이는 말을 마치자 갑자기 몸을 날려 소영을 향해 일장을 쳐냈다. 소영은 곧 좌장을 들어 사 나이의 일장을 맞받으며 입으로는 냉랭하게 외쳤다. "귀하가 이렇게 사람을 해치려는 저의는 어디 있소?" 두 장이 맞부딪치자 펑, 하는 소리가 났다. 순간 그 사나이는 진동을 받아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갑자기 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한 번 겨루어 보아라. 누가 이기나. 이 노부는 이기는 자를 따라가리라." 사나이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소영에게로 덮쳐 오며 주먹을 휘둘러 공격을 가해 왔다. 소영도 오른손을 휘둘러 마주 공격해 갔다. 한바탕 악투가 벌어졌다. 그 사나이는 무공이 대단했으며 따라서 공세 또한 맹렬했다. 그러나 소영의 무공은 지금 초인적인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므로 장풍을 휘두르고 지풍을 퉁겨 내자 가볍게 그의 맹렬한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사나이는 단숨에 이십여 초를 공격해 갔지만 소영은 거뜬히 그것을 막을 수 있었다. 노인은 소영이 막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는 것을 보자 이렇게 외쳤다. "왜 공격을 하지 않느냐?" 소영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제야 반격을 개시하여 불과 삼 초 만에 그 사나이의 혈도를 찍어 버 렸다. 노인은 그 광경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소영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저는 소영이라 하옵니다." 노인이 소영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당신이 바로 현째 강호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소영이오?" "제가 바로 보잘것 없는 소영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내가 아는 소영은 멋이 있고 남아답게 생겼다고 들었는데, 당신 같은 그런 용모가 어 찌…" 소영은 얼굴을 가렸던 인피가면을 벗어 버렸다. "노선배님께서 들으신 소영과 닮았습니까?" 노인은 소영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렇군. 비슷한 것 같은데…" 값자기 노인의 안색이 일변했다. "아아, 그렇군. 자네는 노화상의 초청을 받고 와서 그를 도와 주려 하는구먼!"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후배는 쌍방을 다 모릅니다. 그러니 누구의 초청을 받고 왔을 리가 없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이곳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었습니다." 노인이 반문했다. "그건 무슨 말인가?" "제 친구가 이곳에서 누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어떤 사람이 제 친구를 노선배님으로 오 인하여 데리고 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입니다." 노인은 그제야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었구먼!" 노인의 음성은 갑자기 또 냉엄하게 변했다. "듣자하니 자네가 금궁에 들어 갔다고?" 소영은 어리둥절했다. "그렇습니다만…" 노인이 물었다. "금궁의 건축 솜씨가 어떻던가?" 소영은 노인이 값자기 금궁의 얘기를 꺼내자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건축의 솜씨가 기묘하고도 정교하더군요." 노인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음, 이 노부의 솜씨도 그 정도면 대단하지?" 소영은 그 말을 듣자 마치 머리를 쇠망치로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소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인을 자세히 뜯어 보았다. "노선배님께서…" 노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건축은 이 노부의 솜씨일세." "그렇다면 포일천 노선배님이시군요?" "그렇지, 바로 노부야." 소영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노선배님께서는 금궁 속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던가요?" 포일천은 천천히 말을 받았다. "자네는 여태껏 자기가 파 놓은 무덤에 자신이 묻혀 죽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소영은 가벼운 탄식을 했다. "노선배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그 금궁을 건축한 것은 그 십대 고수들 열 명을 일망타진하려는… " 포일천은 탄식하듯 말을 받았다. "열 명이 아니라 그 장미화상까지 합하면 모두 열한 명이지, 단지 무림에 열 명이라고 잘못 알 려졌을 뿐이야." 노인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노부는 단지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보려 한 것이지. 그래서 출구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들이 거 의 그 안에서 죽어 버릴 줄이야…" 소영이 물었다. "거의가 그 안에서 죽어 버렸다니 그렇다면 살아 나온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장미화상 한 사람뿐이지." "노선배님과 장미화상 두 분이 그 안에서 빠져 나오셨다면 어찌하여 금궁 안에는 또 열 구의 시 체가 남아 있는 것입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그렇지. 그 중의 한 사람은 노부의 제자야. 그가 내 대신 금궁에서 죽었지." 소영은 그제야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맞군요. 그런데 노선배님께서는 금궁에서 빠져나온 후 수십 년 동안이나 강호에 출현 하지 않으셨다가 이번에 나오신 것을 보니 아마 무슨 큰일이 있으신 것 같군요." 노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노부가 십대 고수를 금궁에 생매장하고 나서는 강호는 노부의 천하라고 생각하고 한창 흥이 나 있는 판에 장미화상이 돌연 노부를 찾아올 줄이야."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그래서 두 분께서는 한바탕 겨루셨나요?" 포일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직이 말했다. "그렇지, 그는 노부에게 마음이 검고 비겁하니 영웅 자격이 없다고 욕설을 퍼부었지. 그가 금궁 에서 죽어간 고수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해서 한바탕 악투를 벌였었지. 결국은… 둘 다 부상을 당 했지만…" 소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믿을 수 없는데요?" 포일천이 말을 받았다. "너는 나이가 너무 어리므로 우리가 다투고 할 때는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포일천은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노부는 장미화상과의 격투에서 실은 패한 셈이지, 그러나…" 소영이 말을 가로챘다. "노선배님이 암수를 써서 장미태사를 부상시켰단 말씀입니까?" 포일천은 그 말을 듣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네 말이 맞았다. 노부는 장미대사가 이겼다고 마음 놓고 있는 틈에 독가루를 그에게 끼얹었지." 소영은 탄식을 했다. "장미대사께서 노선배님을 악랄하고 비겁하다고 한 말이 맞는군요." 포일천은 소영의 질책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미대사는 독가루에 중독되자 미친 듯이 도망을 가버렸다. 그 후 나도 수년 동안이나 용양을 한 끝에 다시 상세를 회복했지. 그후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장미대사의 독을 풀어 주려고 해 독약을 가지고 그를 찾아 나섰지만 도무지 그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지." 포일천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노부는 실망한 나머지 외딴 곳에 한 채의 집을 짓고 방안에 틀어 박혀 세월을 보내며 다시는 강호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노부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되면 말라 죽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오 히려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노부의 건강은 좋아지며 무공 또한 커다란 진전을 보인 것 같았 네." 소영이 말을 받았다. "그런데 노선배님께서 이번에 그 집을 버리고 나온 뜻은 무엇입니까?" "작년에 노부는 장미화상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지. 오늘 여기서 만나자는… 그래서 노부는 편지를 받은 칠 일 만에 그 집을 버리고 강호로 나왔지, 왜냐하면 언제든 한 번은 그 집에서 나 와야 할 테니까. 하루라도 빨리 난가서 강호의 동정이나 살펴 볼 양으로 말이야. 그래서 자네의 쟁쟁한 이름도 듣게 되었지." 소영이 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장미대사를 만나시면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포일천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노부가 구대 고수를 생매장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악랄한 수법으로 장미대사마저 부상시켰으니 그가 나를 칼로 저민다 하더라도 달게 받아야지. 허지만 노부가 그 동안에 정진한 무공은 죽기 전에 한 번 증명해 보여야지." 소영은 포일천의 말이 장미대사와 생사의 판가름을 해보겠다는 뜻임을 곧 알 수 있었다. 포일천은 긴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나. "노부가 수십 년 동안 조용한 가운데서 터득한 무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장미대사와 대결하는 수밖에 없지. 지금의 무림에서는 그 적수가 없을 테니까…" 소영이 되물었다. "노선배님의 말씀을 들어 보니 장미대사와 한 번 겨루어 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포일천이 대답했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 허지만 노부는 다만 무공을 시험해 보고자 할 뿐이야. 그 다음에 이 기든 지든 자결을 할 작정이니까." '이 노인은 과연 괴팍스러운 성격을 지녔구나.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감히 예측도 못할 정도 로…' 이 때 목동 한 명이 소를 타고 소영에게로 다가오다가 소영을 몇 번 바라본 다음 방향을 돌려 멀어져 갔다. 포일천은 그 목동을 뚫어지도록 바라본 다음 말했다. "저 목동은 무림인의 변장임에 틀림없다." 소영은 이미 그 사람이 백리빙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노인은 굉장한 안력을 지녔구나.' 소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노선배님께서는 저의 신분을 아셨으니 제가 이번 일에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자연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나이는 진짜 노선배님을 마중 나온 사람입니까?" "그렇지. 노부가 어서 그의 혈도를 풀어 줘야겠구나." 포일천은 곧 허리를 굽혀 그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 사나이는 비록 혈도를 찍혀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귀로 들을 수는 있었다. 그래서 그 동안에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혈 도가 풀린 다음에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소영이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지금 장미대사를 만나러 가실 생각입니까?" "그렇지." 소영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후배가 한 가지 염치 없는 부탁을 해야겠는데 들어주시겠는지요?" "무슨 일인데? 어서 말부터 해보렴." "노선배님께서 장미대사를 만나실 때 후배는 저의 친구 몇 사람과 함께 노선배님의 뒤를 따라 선배 고인들을 배알하고저 합니다." 포일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부는 응낙할 수가 있지만 장미대사가 너희들을 만나 주려는지가 의문이구나." 소영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노선배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저희들은 따라 갔다가 만일 장미대사가 거절하면 다시 돌아오겠 습니다." 포일천이 반문했다. "친구가 몇이나 되며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들인가?" "무당 장문인 무위도장과 운양자, 전엽청 그리고 북천존자의 공주 백리빙입니다." 포일천은 다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좋아, 노부가 데려 가지. 하지만 그 장미대사가 만나지 않겠다 해도 나를 탓하지는 말아라." 소영은 매우 기뻤다. "빙아야! 빨리 이리로 오너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수십 장 밖에서 소를 타고 있던 목동이 돌연 소등에서 뛰어 내려소영에게로 달려왔다. "저 사람은 누구냐?" 포일천이 물었다. "백리낭자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노선배님께 말씀 드린…" 포일천은 백리빙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존(令尊) 북천존자는 노부와 잘 알지." 소영이 얼른 백리빙에게 말했다. "이 분은 포일천 노선배님이시다. 빨리 인사를 올려라." 백리빙은 곧 포일천에게 큰절을 했다. "노선배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포일천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소영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이제 그만 가볼까?" 소영이 난처한 듯 말했다. "무위도장 등 세 사람이 동행해야 할 텐데요."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지?" "저 푸른 집에 있습니다. 노선배님께서도 저리로 가셔서 차 한 잔 드시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 까?" 포일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장미대사가 참아 낼는지?" 그는 시선을 사나이에게로 돌렸다. "자네가 장미대사의 명을 받들고 노부를 마중 나왔나?" "예, 그렇습니다. 후배가 노선배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포일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장미대사께서 거처하고 계시는 곳이 여기서 먼가?" "십 리도 채 못 됩니다. 저 산에만 오르면 당도할 수 있지요." 포일천이 다시 물었다. "노부가 이들에게 잡혀 있는 것을 그도 보았겠지?" "예, 그럴 겁니다." "그럼 됐어. 노부가 잠시 쉬었다가 가도 괜찮겠지." 포일천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정 겁이 난다면 먼저 돌아가서 장미대사에게 노부가 잠시 어디 들렀다가 가겠다고 하더라 고 말씀 드려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와 같이 가도 좋다." 사나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도 노선배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좋아, 우리 들렀다가 가도록 하지." 포일천은 앞장서서 푸른 집을 향해 걸어갔다. 무위도장 등은 소영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라 반색을 하며 소영을 맞이했다. 소영은 무위도장에 게 속삭이듯 말했다. "도장, 이 분이 바로 금궁을 건축하신 포일천 노선배이십니다." 무위도장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면 이 분이 바로 교수신공…" "바로 맞았습니다." 무위도장은 곧 일어나서 포일천을 향해 포권을 했다. "실례했습니다." 포일천은 미소를 지었다. "원 별말씀을,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이니 당신이 노부를 몰라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이 때 운양자와 전엽청도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포일천은 황급히 말했다. "장미대사가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서 길을 안내하거라." 포일천은 따라 온 그 사나이에게 손짓을 했다. 그 사나이는 곧 앞장서서 걸었다. 이 때 소영은 무위도장에게 나직이 말했다. "도장, 따라 가서 구경 좀 합시다. 제가 응낙을 받았으니까." 무위도장은 기쁜 표정이었다. 사나이를 따라 포일천, 소영, 무위도장, 백리빙, 전엽청, 운양자의 순서로 열을 지어 걸어 갔다. 이윽고 이들은 절벽 위의 숲 있는 곳에 이르렀다. 숲속 깊숙이 자리잡은 홍루(紅樓)의 일부분이 엿보였다. 포일천이 흥루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저 안에 계신가?" "그렇습니다." 이들은 걸음을 서둘러 곧 밀림 속에 있는 홍루의 문전에 이르렀다. 사나이가 포일천을 돌아보며 말했다. "노선배님께서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들어가서 보고를 하고 오겠습니다." "갔다 오너라." 사나이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퍽 조용하고 쓸쓸해 보였다. 결코 사람이라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소영이 무위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장께서는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렀으니 홍루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겠지요?" 무위도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끄러운 얘기오만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도 이 집이 있다는 것은 몰랐소. 오늘 비 로소 와 보게 된 것이오." 소영이 말했다. "이 집은 몹시 괴상하게 지었군요. 보통 사람이 사는 주택 같지는 않습니다." 이 때 포일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람이 살기엔 몹시 불편한 집이군!" 이 때 그 사나이가 다시 나왔다. "장미대사는 계신가" "예, 노선배님께서 빨리 듭시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영이 사나이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들어갈 수 없소?" 사나이가 대답했다. "제가 말씀 드렸더니 노선사(老禪師)께서 소대협은 후배 중의 총아(龍兒)이시니 잘 대접해 드리 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소영이 말을 받았다.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사나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여러분들의 얘기를 했던 바 모두 만나 보시겠다니 여러분들도 함께 드십시오." 대청 안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포시주이십니까?" 포일천은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대사, 그 동안 안녕하셨소?" 포일천은 천천히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소영도 뒤따라 들어갔다. 대청 안에는 도포를 입고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노승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흰 눈썹이 길게 자라 감은 두 눈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노승의 뒤에는 서른 대여섯 살 가량의 청의인이 서 있었으며 그 오른쪽에는 우문한도가 앉아 있었다. "소대협, 포시주 모두들 앉으시오." 포일천이 먼저 나무의자에 앉자 소영과 무위도장 등도 모두 따라 앉았다. 소영은 우문한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문선생, 별고 없으셨습니까?" 우문한도는 미소를 지었다. "예, 소대협의 덕분에… 그런데 저의 실수가 오히려 전화위복이되어 노선사님을 찾아 뵙게 되었 군요.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장미대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이 늙은이에게 강호의 정세를 알게 해주었지." 소영은 장미대사를 눈여겨 바라보았다. 그의 긴 눈썹은 눈을 덮고 있었으며 긴 수염은 또한 땅 바닥에까지 닿을 정도였다. 그리고 양쪽 볼에는 상처 자국이 있었는데 마치 예리한 칼로 살을 도려낸 것처럼 움푹 파여 있 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눈은 그대로 감은 채였다. 포일천이 돌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포모는 이 날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소. 노선사께서 이렇게 저를 부른 것은 틀림없이 옛 빚을 갚으시겠다는 게 아닙니까?" 장미대사가 입을 열었다. "노승은 원래 주인의 예를 갖추려고 했지만 포시주께서 그토록 바쁘시다면 생략하는 수밖에 없 겠구려." 포일천이 대답했다. "강산은 변해도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오. 저는 아직도 그 급한 성미가 남아 있소. 그러나 노 선사께서는 먼저 저를 부른 이유부터 설명해 주시오." 장미대사는 즉시 대답했다. "노승은 부처님의 무변한 불법에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저의 가슴 속에 맺힌 원한의 덩어리를 풀어 버릴 수가 없구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수십 년 동안 그것 때문에 불안을 느껴 왔습니다. 원래 자결을 해야 만 옳았을 일이지만 노선사께서 아직도 세상에 살아 계시리라고 믿은 노승은 어쩔 수 없이 죄많 은 목숨을 이어가며 노선사의 탁견(卓見)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아, 노승이 우문시주에게 들은 바에 의하떤 당금 강호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소. 만일 장산패, 남일공, 유선자가 합력하며 소대협을 길러 내지 않았던들 오늘날의 강호는 참 혹한 정경이 되고 말았을 거요. 모든 것이 다 인과응보라 그 화근은 수 십 년 전 포시주가 너무 도 공명심을 가졌던데 기인하는 것 같소." 장미대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지난 일을 회상하는 듯했다. 이윽고 그는 말을 이었다. "포시주께서도 아시겠지만 그 십대 고수들은 처음부터 그 무공의 고하가 가려졌던 것이오. 허지 만 이들은 시종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 왔소. 바꾸어 말한다면 그분들이 영원히 승부를 가려내지 않음으로써 각자가 모두 자기의 강렬한 신념과 자부심에 살 수 있었던 것이오." 178. 삼십 년의 은원 포일천은 장미대사에게 십대 고수들끼리 무예를 겨루었으나 서로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는 경 위를 듣자 곧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나는 아직도 많은 점이 명백치 않습니다. 나는 한 번 장방의 퉁소에 상할 뻔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낙세(落勢)를 바꾸어 나에게 그 위기 를 모면할 기회를 주어 나로 하여금 불패(小數)의 기록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나는 무림대회에 참가한 십대 고수가 대부분 이런 경험이 있음을 믿는 바이오. 모든 사람의 체 질과 배움은 모두 다르니 우연히 한두 번 막상막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혹 있을 수 있는 일이 지만 만약 연속으로 시합을 벌인 뒤에도 여전히 승패 불명의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것은 응당히 믿을 수 없는 일일 것이오." 포일천은 연속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알겠습니다. 이제야 명백히 알겠소이다. 이것은 모두 대사께서 암중에 도운 힘이겠군요. 아아! 사실 이 때 우리 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모두 당신의 무공이 가장 높다고 이미 인정하고 있었지, 다만 그것을 모두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화신노인 사천의는 우리들 십대 고수가 고의로 당신을 경원한다고 말하였을 뿐이지요." 장미대사는 담담히 대답했다. "나는 그 시합에서 이겨 천하 제일 고수라는 명예를 얻고 싶지 않았소이다. 무공을 비교하는 시 합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 십대 고수의 무예를 겨루어 명성을 다투는 거동은 온 강호에 대한 진압작용이며 사악한 무사들로 차여금 감히 망동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지요. 그 러나 뜻밖에 포시주께서 호승지심(呼勝之心)의 일념으로 금궁을 건축하여 일거에 고수들은 그곳 에 가두어 죽게 하였으니…" 포일천이 그의 말을 가로 막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대사, 더 이상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제 죄를 알고 있소이다." 그는 고뇌에 찬 눈빛으로 장미대사를 지그시 바라보고 물었다. "대사, 어떻게 나를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시오." 장미대사가 오히려 반문했다. "포시주의 준비는 어떻습니까?" 포일천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죄를 기다리는 몸이라 다만 대사의 분부만을 기다릴 뿐이올시다." 장미대사는 곧 추궁했다. "그렇다면 포시주는 남이 죽이기만 기다린다는 것입니까?" 포일천은 약간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저에게는 확실히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한 가지 심원이 있는데 대사께서 허락 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장미대사는 조용히 말했다. "어서 말해 보시오." 포일천이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요 몇 년 동안 저는 자신의 무공 성취가 한 인간의 한계를 돌파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천하를 둘러보자 단지 장미대사만이 나의 마음에 강적임을 알 수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결코 도 피할 마음은 없소이다. 다만 대사께서 저에게 솜씨를 시험해 볼 기회를 주신다면 무상의 기쁨이 겠습니다. 만약 제가 불행히 패망하여 대사의 손에 상하게 된다면 대사는 그들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고 요행히 제가 승리하게 되는 마당에는 이 몸은 즉시 자결로써 사죄를 하려고 하는데 대사 의 뜻은 어떠신지 모르겠군요." 이 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암암리에 생각했다. '저 포일천의 말투는 광기와 교만이 가득차 있구나. 그의 진정한 뜻이 어떤지 참으고 예측하기 곤란하군 그래.' 그러자 장미대사의 말소리가 곧 들려왔다. "포시주는 결국 나하고 무예를 겨루고 싶다는 뜻이구려?" 표일천이 그의 말을 받았다. "무예를 겨루자는 말은 합당치 못하며 오히려 저로서 감당할 수 없소이다. 저는 단지 제가 수십 년 쌓아 온 성취를 한 번 시험해 보았으면 싶은 심정뿐입니다." 장미대사가 결연히 대답했다. "좋소. 나는 포시주의 요청을 받아 들이겠소." 그러자 포일천은 고개를 돌려 소영과 무위도장을 힐끗 바라보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사와 무공을 인증(人證)하려 하니 여러분께서는 멀리 떨어져 주십시오. 자칫 잘못하다가 는 말 못할 화를 입게 될 터이니 부디 조심해 주시기 바라겠소." 소영이 곧 대꾸했다. "무방합니다. 우리는 대청의 한 모퉁이에 모여 서서 두 분이 무공을 겨루는 것을 보겠소이다. 우 리는 결코 두 분께서 승부를 가리기 전에는 손을 써서 폐를 끼치지 않겠소이다." 포일천은 이 말에 껄껄 웃으며 큰소리를 쳤다. "아직 어린 나이에 자네 말투는 매우 당돌하군. 나와 장미대사의 이번 시합은 다른 때와는 달라 곁에 사람이 있으면 위험하네. 예를 들어 말할 것 같으면 자네들이 일장 안에 앉아 있다면 곧 나 의 권풍에 상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네." 소영이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신호하자 부위도장, 운양자, 전엽청, 우문한도 등은 모두 일어났 으며 소영은 역시 몸을 일으켜 대청의 한모퉁이로 걸어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다음 포일천에게 말했다. "권각(拳脚)에는 눈이 없으며 사정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바이오. 만일 우리가 노 선배의 권풍에 상한다면 그것도 운명이니 우리는 결포 후회하지 않겠소이다. 어서 마음 놓고 겨 루어 보십시오." 포일천은 퉁명스럽게 경고했다. "그럼 여러분들은 자중하기 바라오." 그는 눈길을 돌려 장미대사를 향해 말했다. "대사,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무예를 겨루면 좋을까요?" 장미대사는 흰 눈썹을 약간 꿈틀하더니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 원칙이오." 이 때 소영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이 대청 안에 들어온 뒤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 장미대사가 눈을 뜨지 않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러자 포일천이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렸다. "대사는 눈을 앓고 있소이까?" 장미대사는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이 독분으로 기습을 했을 때 먼 것이지요. 나의 얼굴에 있는 이 흉터와 실명한 두 눈은 말 하자면 모두 당신이 하사한 선물이지요." 포일천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왕년의 일에 대해서 나는 대단히 깊은 후회를 하고 있소이다. 대사께서 두 눈을 실명하여 사물 을 볼 수 없으니 이 무공은 겨를 필요가 없겠소이다." 그러자 장미대사가 숙연한 안색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이 수십 년 동안 나는 바람소리를 듣고 위치를 식별하는 무예를 익혔으니 당신을 능히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하오." 포일천도 냉랭히 대꾸했다. "그렇게 말하시는 것을 보니 제가 공연히 걱정을 한 셈이구려." 소영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속으로 이렇게 혼자 생각을 가다듬었다. '포일천은 저렇게 거만하여 모든 것을 안중에 두지 않으니 괘씸하구나. 저 장미대사는 두 눈을 실명하였으니 싸우게 된다면 크게 손해를 볼 것이다. 만일 장미대사께서 지탱을 못하고 열세에 몰리게 된다면 나 소영은 그를 도와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이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번복하여 뱅뱅 돌았으나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 때 장미대사가 오른손을 들어 휘저으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가거라. 만일 내가 불행을 당해도 너희들은 나를 위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곧 그들 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도록 하여라!" 장미대사의 뒤에 서 있던 청의인은 이 말을 듣자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대청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청의인이 나간 뒤 장미대사는 비로소 안심이 된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포시주, 어서 시작하시지요." 포일천은 즉시 사양했다. "대사께서 두 눈을 실명하셨으니 제가 어찌 선수를 쓸 수 있겠소이까? 역시 대사께서 출수하십 시오." 그러자 장미대사는 즉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당신의 말대로 하겠소이다." 장미대사는 재빨리 오른손을 휘둘러 포일천에게 일격을 가했다. 이 때 그들 두 사람의 거리는 너덧 자 정도였으며 장미대사의 장풍은 서서히 밀려났다. 또한 장 지 역시 포일천에게 닿지 못했다. 장미대사의 첫 번째 일격은 다만 허공을 때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포일천은 오히려 긴장하여 오른손을 신속히 내밀어 장미대사의 장세를 향해 맞받아 쳐냈 다. 두 사람의 장세는 동시에 허공에서 멎었다. 그들의 장풍이 서로 마주치자 포일천의 장삼이 세차게 펄럭였으며 마치 격동하는 파도같이 일렁 거렸다. 장미대사의 눈을 덮다시피한 흰 눈썹은 바람도 없는데 가볍게 날렸다. 이 때 우문한도가 소영에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소대협, 저 두 사람은 내력을 겨루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영은 단정히 앉아 포일천과 장미대사를 바라보며 우문한도의 묻는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문한도는 곁눈질로 그러한 소영을 보자 그가 전신의 공력을 모아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출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더 이상 소영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소영은 여러 모로 생각을 거듭해 보았다. 이 포일천은 잠재의식 속에 천성적인 악랄한 성격이 도사리고 있어 언제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만약 정말로 이 시합에서 장 미대사를 이긴다면 아마 자결하여 속죄하겠다는 언약을 어길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자기의 생각을 돌리고 우쭐하여 자기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는 생각에 도취하여 버린다면 일은 더욱 복잡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영의 생각으로는 지금 심목풍 하나만으로도 이미 무림을 어지럽게 뒤엎어 놓았는데 만약 또 다시 설상가상으로 사리를 따지지 않는 포일 천까지 강호를 어지럽힌다면 더욱 불상사를 야기할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영은 포일천이 장미대사를 이길 경우 즉시 전력으로 손을 써서 신속한 거동으로 포 일천을 굴복시켜야 된다고 마침내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 다만 두 사람이 허공에서 상대하여 마주친 수장(手掌)이 갑자기 부르르 떨기 시작 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포일천이 돌연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장세를 거두어 들인 뒤 입을 열었다. "대사의 무공이 고강함에 나는 순순히 나의 패배를 자인하며 내가 비록 죽는다 해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양 손을 들어 자기의 천령요혈(天靈要穴)을 찍을 기세였다. 그러자 장미대사가 황급히 저지했다. "포시주는 빨리 손을 멈추시오." 아마도 그들은 내력을 거룸에 있어 승패를 가려낸 모양이었다. 포일천은 손을 멈추고 껄껄 웃으며 물었다. "대사께서는 아직도 저에게 무슨 분부가 있으시오?" 그의 표정에는 정말 확고한 결심이 서 있는 듯하였다. 장미대사는 다그쳐 물었다. "포시주는 진정 자결로써 과거의 죄를 사죄할 작정이오." 포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저는 수십 년 동안 줄곧 이것을 번복하여 심사숙고해 왔던 것입니다." 장미대사가 엄숙한 어조로 만류했다. "당신이 그 금궁을 건축하여 구대 고수를 그곳에 싱매장하였고 또한 내가 생각하건데 당신이 그 방대한 공사를 진행할 때 얼마나 많은 인명이 그 골사에 희생됐는지 모를 것이오. 그러니 당신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열 번은 죽어 속죄해도 오히려 부족하오. 그러나…" 포일천은 말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입니까?" "당신은 죽기 전에 어째서 무림을 위하여 한 가지라도 좋은 일을 하고 죽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 는 것이오?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당신이 저지른 죄과를 조금이라도 감할 수 있으며 또한 무림을 위해 조금이라도 공을 남기는 것이 아니겠소?" 포일천이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장미대사는 기침을 한 번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는 조금 전에 우문시주와 당금 강호의 정세를 이야기한 바 있소이다. 그리하여 심목풍과 또 한 사람 불문의 역도인 금광대사가 절세의 무공을 이용하여 강호에서 해로운 짓을 자행하고 있다 는 것을 알았지요.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는 당신께서 만약 수십 년 동안 쌓은 무공으로 그들 두 악인을 처치한 다음 자결을 한다면 반드시 무림을 위해 대단한 공로를 남기게 된 것이라고 여겨 지는군요." 포일천이 촌 그의 말을 받았다. "대사께서 아직 이처럼 건재하시니 이 일에는 아마도 제가 필요치 않을 것 같소이다." 그러나 장미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두 눈이 실명되어 행동이 불편하오. 또한 그들 두 사람의 행동은 매우 음흉스러워 내가 온 천지를 돌아다녀 그들은 잡아 뿌리를 뽑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내 힘으로는 그들의 종적을 찾을 수 없을 것이오." 포일천은 잔시 묵묵히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번쩍 고개를 들더니 힘차게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저는 대사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장미대사의 장엄한 표정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천하의 무림동도들을 대신하여 포시주에게 감사를 드리겠소이다." 그는 공손히 합장을 하고 절을 하였다. 포일천은 곧 포권하여 답례를 하며 감개 어린 말투로 대 답했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포일천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넓은 천지에서 나는 그들을 어떻게 찾는다는 말입니까?" 장미대사가 곧 그의 말에 대답했다. "포시주께서는 이미 은거한 지 오래며 수십 년 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당신으로 하여금 그들의 행방을 찾게 한다는 것은 자연 어려운 노릇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포시주를 위하여 준비를 다 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시주에게 약간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포일천이 담담히 대답했다. "저는 기왕 응낙하였으니 무슨 부탁인들 두려워하겠습니까?" 장미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포시주께서는 소대협 등과 동행하십시오. 심목풍과 금광대사의 행방은 그 들이 책임지고 추적하여 그들의 거처를 찾아낸 다음 곧 포시주에게 통보할 것이니 당신은 다만 적을 상대하여 그들 원흉을 처치하면 되는 것입니다." 포일천은 눈길을 돌려 소영을 바라보며 빙긋 웃고 말했다. "장미대사의 말씀은 내게 자네의 명령에 따르라는 말이군." 소영은 재빨리 대답했다. "아닙니다. 노선배님은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장미대사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노선배님의 신공 을 빌어 강호의 홍물을 제거하는데 있어 대수롭지 않는 일에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으시니 우리 들이 그런 하찮은 일을 맡으라는 것뿐입니다." 포일천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참으로 말을 잘 하네 그려?" 그는 눈길을 돌려 장미대사를 향해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저는 이미 모든 것을 응낙하였으니 대사는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저는 그 심목풍과 금 광대사를 처치한 후 곧 자결하겠소. 그럼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그는 포권의 예를 올리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장미대사가 그의 등 뒤에서 말했다. "멀리 나가지 않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벌써 멀리서 포일천의 음성이 들려 왔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우문한도가 소영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어서 그의 뒤를 쫓아 갑시다." 소영과 백리빙도 과의 뒤를 급히 따랐다. 그러나 무위도장과 운양자, 전엽청 등 세 사람은 포일 천의 뒤를 따르지 않고 대청 안에 남아 있었다. 포일천은 단숨에 붉은 벽돌의 기와집을 뛰어 나 온 다음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뒤를 바싹 따라오는 소영과 우문한도를 돌아보며 물었다. "심목풍과 금광대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문한도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노선배님, 심목풍의 행적은 매우 음흉하여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포일천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 "자네들은 심목풍의 행방조차도 찾아내지 못하니 어찌 남과 승부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우문한도는 웃으며 말했다. "만약 그 심목풍과 금광대사가 극히 다루기 쉬운 인물이라면 노선배님께 수핀를 끼치지도 않았 을 것입니다." 포일천은 그 말에 매우 흥미를 느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이 그의 종적을 찾았을 때 나에게 한 마디만 알려 주면 되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노선배님께서는 산을 내려가 잠시 휴식을 하십시오. 저희들은 늦어도 내일이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습니다." 포일천이 다시 반문했다. "어디로 가서?" "장사의 마가장(馬家莊)입니다. 우리가 널리 천하에 파견한 소식통들이 밤을 가리지 않고 소식을 그곳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소영은 심중으로 생각했다. '무위도장은 이미 전엽청을 파견하여 심목풍이 바로 이 근처에 있다고 알리지 않았던가? 우리가 마가장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택하는 격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우문한도가 워낙 측략이 대단하여 이 말에는 필시 다른 뜻이 있음을 알고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그들이 산 아래 초가집으로 돌아가자 무당제자들은 뜨거운 차를 대접했다. 우문한도는 찻잔을 들고 입을 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이 차를 드시고 정실에 드시어 휴식을 취하시고 힘을 기르십시오. 그리고 그들 을 처치하는 데만 전념하면 되니 다른 하찮은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포일천도 찻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나는 비록 그 장미대사에게 자네들을 도와 준다고 응락했지만 그러나 이 일을 무기한 끌어 갈 수는 없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한 달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네. 만약 한 달 안에 자네들이 심목 풍과 금광대사의 행방을 여전히 찾아 내지 못한다면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네." 우문한도가 즉시 대답했다. "과럼 저희들은 노선배님의 분부대로 한 달 안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두 사람의 행방을 찾아 내겠습니다." 포일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켜 정실로 들어갔다. 우문한도는 그가 정실로 들어간 것을 본 다음 나지막한 음성으로소영에게 속삭였다. "무위도장은 결코 자원해서 홍루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며 그곳에 남는 이유는 필시 장미대사의 가르침을 받을 것일 테니, 우리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행동을 해야 될 것이오." 소영은 목소리를 죽여 나직이 대꾸했다. "나도 역시 이상함을 느꼈습리다. 장미대사께서 무당 문파의 사람을 남겨 놓는 뜻이 무엇인가 를…" 우문한도는 다시 자기의 의견을 속삭였다. "나의 추측으로는 무위도장이 마가장에서 이리로 온 것도 아마 그 장미대사가 불렀기 때문이 아 닌가 생각이 되오." 소영도 그의 말을 받았다. "장미대사는 아미 출신이니 만약 그가 남의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면 응당 아미 제자를 불러야 할 것인데 어째서 무위도장을 찾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대답했다. "장미대사는 비록 지난 수십 년 동안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는 무림 일에 대하여 여전히 잘 알고 있소. 각대문파의 장문인을 살펴 보자 재지와 인품이 무위도장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기 에 자연 그를 첫손가락에 꼽았을 것입니다. 이해관계를 따질 때 내가 장미대사라 해도 중요한 일 은 무위도장에게 맡길 것입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우문형의 분석은 매우 지당하외다. 무위도장 등이 돌아오면 반드시 놀랄 만한 소식을 알려 줄 것입니다." 우문한도도 함께 웃었다. "어쩌면 심목풍의 행적은 벌써 장미대사의 감시하에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길 바라겠소이다. 일격에 심목풍을 섬멸할 수 있다면 곧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의 슬하에서 안심하고 효도하게끔 강호에서 물러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영이 이 말에 우문한도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마 무림동도들이 소대협이 강호를 쉽게 물러나도록 가만 있지는 않을 것이외다." 소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그럴까요? 대적은 이미 제거하였고 나 또한 무슨 문파를 조직한 일도 없으니 진퇴는 무 림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터인데요?" 우문한도가 차근차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소대협은 파도 속의 기등처럼 광란을 막을 수 있어 무림으로 하여금 처참하고 암담한 나날을 극복하게 하였소이다. 이 혁혁한 공로나 불후의 영명은 이미 당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림 의 영웅으로 추대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소대협이 은퇴를 하든 어쩌든 간에 무림의 동도 들은 만약 조그만 일이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필시 소대협의 거처를 찾아 가서 지시를 받을 것이 니 어찌 한가히 생활을 즐길 수 있겠소이까?" 백리빙은 장난기가 어린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깊이 숨어 그들로 하여금 찾지 못하도록 하면 되지요." 그들 몇 사람은 이렇게 담소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심으로 모두 초 조하게 무위도장 등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족히 두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무위도장이 전엽청과 운양자를 데리고 총총히 돌아왔다. 무위도장은 합장을 하고 말했다. "두 분을 너무 기다리게 하여 죄송합니다." 소영이 그의 말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 우문선생과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우문한도가 정색을 하며 무위도장에게 말했다. "도장께서는 분명히 중요한 일을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이지요?" 무위도장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빈도는 많은 일을 두 분께 알려 드리려고 하오." 그는 천천히 앉으며 눈길을 돌려 문 앞에 지키고 서 있는 무당파의 제자들을 힐끗 바라본 뒤 입 을 열었다. "너희들은 물러 가거라!" 입구에서 지키고 있던 제자 두 사람이 곧 포권을 한 채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운양자와 전엽청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스스로 그 자리를 물러 갔다. 무위도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했다. "포노선배님은?" "지금 정실에서 휴식하고 계십니다." 우문한도가 이렇게 대답하자 무위도장은 나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장미대사께서는 유언을 하시고는 곧 세상을 뜨셨소." 이 한 마디는 마치 철퇴처럼 소영과 우문한도의 마음을 때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멍청히 무위 도장을 바라보며 건을 잃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위도장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장미대사께서는 숨을 거두기 전에 빈도에게 몇가지 일을 알려 주었소이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계속했다. "첫 번째 일은 소대협과 내가 그를 대신해서 한 가지 일을 해달라고 하였소이다." 소영이 급히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무위도장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그는 나와 소대협으로 하여금 포일천을 감시하여 만약 그가 심목풍과 금광대사를 죽인 뒤에도 자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나와 소대협이 합력하여 그를 처치하라 하였소." 소영은 또 한 번 흠칫하며 물었다. "그가 심목풍과 금광대사를 죽일 수 있다면 우리가 어찌 그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무위도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므로 장미대사는 우리에게 별안간 기습을 하도록 지시했소이다." 그의 말에 소영은 눈을 크게 떴다. "암살을?" 무위도장도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대답했다. "장미대사가 이렇게 당부를 하니 나는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해 드리는 수밖에 없구료." 소영은 즉시 눈살을 찌푸렸다. 무위도장이 곧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빈도는 이미 이런 일이 소대협을 난처하게 할 줄 알았소이다. 그러나 그 장미대사의는 만약 포 일천이 자기의 죽음을 안다면 결코 자살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소. 그 때에는 심목풍과 금광 대사를 죽였다 해도 또 다시 강호에 일대 화근덩어리를 남겨 놓게 된다고…" 소영이 그의 말을 가로막고 물었다. "그 포일천이라는 위인이 그다지도 악독합니까?" 무위도장이 역시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장미대사의 말에 의하면 그 포일천은 결코 포악무도한 악인은 아닙니다. 만약 그가 정말 나쁜 사람이라면 수십 년 전에 벌써 장미대사의 손에 죽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우문한도는 그들 말에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는 이 일을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소영은 마음속으로 포일천이 비록 별실에서 휴식을 하고 있으나 그의 심후한 공력으로는 아무리 자기들의 음성이 작다해도 그에게 들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문한도의 말을 이어 곧 입을 열었다. "도장, 우리는 나중에 다시 이 일을 의논합시다." 그리고 손가락에 찻물을 찍어 탁자 위에다 글씨를 썼다. '정말 그렇다면 다만 장미대사의 유언대로 행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가 이렇게 썼을 때 밖에서 전엽청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선배님, 실내로 들어가 앉으십시오." 그러자 포일천의 웃음소리가 들리며 곧 그의 말이 뒤따랐다. "보건대 영사형은 방금 무슨 중요한 일을 상의하는 것 같은데 내가 들어가면 아마 달가와 하지 않을 걸?" 소영은 속으로 허를 내둘렀다. '이 사람은 과연 의심이 대단하구나.' 전엽청은 곧 거침없이 대답했다. "아니올시다. 저의 사형께서는 노선배님을 한 자리에 모시려고 했으나 정실에 휴식중이시라 노 선배님께 폐를 끼칠까봐 주저하며 결정을 못한 것입니다." "정말 그런가?" 포일천은 서슴없이 실내로 들어왔다. 무위도장과 소영, 우문한도는 일제히 몸물 일으켜 공손히 포권하며 말을 했다. "노선배님, 어서 이리로 오셔서 앉으십시오." 포일천은 약간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여러분들도 앉으시오." 그는 먼저 자리에 앉아 눈길을 무위도장에게 돌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강호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 당신은 아직 무당장문의 자리를 계승하지 않았을 때이지요?" "예, 그 때 빈도는 아직 무예를 배우고 있었지요." 무위도장이 공손히 대답하자 포일천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천하를 눈여겨 볼 때 나와 함께 강호에서 활동했던 사람은 실로 몇몇 없소." 무위도장은 여전히 공손했다. "노선배님은 덕망이 높고 정중하여 저의들 후배가 매우 경모하고 있던 중 오늘 이렇게 만나 뵙 게 되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포일천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당신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기를 바라오." 소영은 암중에서 생각했다. '이 사람은 과연 호전적이며 남과 무공을 겨루기를 즐기는구나.' 포일천은 손을 들어 긴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계속했다. "장미대사가 우리를 먼저 보낸 것으로 보아 생각컨대 분명히 도장과 무언가 상의한 일이 있었겠 군." 무위도장은 지모가 비상하여 보통 사람이 그를 따를 수 없었다. 그는 태연히 미소를 입가에 홀 리고 즉시 대답했다. "장미대사께서 저에게 지시하시기를 여러 문파가 만약 앞으로 강호에서 아무 일 없기를 바란다 면 필시 방법을 강구하여 문파간의 편견을 없애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포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대사는 마음속에 제세지원(濟世之願)을 지니고 있으니 나에게 비하면 매우 고명하구려." 무위도장은 곧 말을 받았다. "장미대사께서는 노선배에 대하여 무한한 존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포일천이 눈을 빛내며 즉시 다그쳐 물었다. "그는 뭐라고 내 말을 하였소?" 무위도장은 슬며시 그를 치켜세웠다. "장미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포노선배님은 협의인이시라 기왕 그에게 응낙하였으니 반드시 심 목풍과 금광대사를 처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것은 내가 이미 승낙한 것이니 재론할 필요도 없소. 그러나 나에게는 다소. 이해가 잘 안 가 는 점이 있소이다." 포일천이 이렇게 말하자 무위도장이 곧 반문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포일천은 기침을 하고 지그시 무위도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장미대사의 무공은 나보다 오히려 고명하거늘 어찌 자신의 손으로 심목풍과 금광대사를 박살하 지 않고 이처럼 천리에 떨어져 있는 나를 불러 왔는지 모르겠구려." 무위도장이 조용히 대답했다. "장미대사께선 심중에 선기를 지니고 계시니 후배들은 예측을 못하겠습니다." 소영이 갑자기 그들 말틈에 끼어들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장미대사와 수십 년을 알고 지냈으리 그분에 대한 이해가 우리들보다 필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추측하기에 별로 어렵지 않으실 텐데요." 포일천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왕년에 십대 고수들은 내가 그들의 성격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으나 오로지 장미대사의 성격만 은 약간 이해를 할 수 없었소. 그는 몸에 절세의 무공을 지니고 있어 십대 고수를 격패시키는 것 은 마치 누워서 떡 먹기였으나 어쩐 일인지 그늘 손을 쓰지 않더군." 소영이 재빨리 대꾸했다. "노선배님께서도 그 장미대사의 속셈을 추측해 내지 못하셨는데 저희들이 감히 어떻게 알 수 있 겠습니까?" 포일천은 두 줄기 눈빛을 소영에게 돌리고 지그시 바라본 뒤 말했다. "내가 이번에 강호에 나와 바로 들은 소문에 의하면 자네가 지금 무림에서 제일 존경을 받고 있 는 인물이라던데 그러면 자네는 최소한 오십 대쯤은 되어야 할 텐데 뜻밖에 자네는 약관의 젊은 이구먼." 그의 말투 속에는 암암리 노기(老氣)가 스며 있었다.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노선배님께서는 너무 칭찬을 하십니다." 이 때 전엽청이 쟁반을 받들괴 들어와 한 잔의 향차를 올렸다. 포일천은 찻잔을 받아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찻잔을 놓으며 말했다. "듣자하니 자네가 지금 심목풍과 싸움을 한 유일한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 소영이 곧 받아 말했다. "저는 단지 한 가닥의 상장지기(象莊之氣)를 믿었지, 원래 무공은 심목풍의 적수가 못 됩니다." 포일천은 눈길을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다. "자네는 그와 몇 번이나 싸워 보았는가?" 소영은 약간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대략 너덧 차례 됩니다." "그럼 이상하군." 소영이 의문을 담은 눈으로 포일천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기왕에 그의 적수가 안 된다면 그렇게 여러 차례 싸움을 했으면서도 어째 아직 살아 있 을 수 있었는가?" 소영은 미소로 대답했다. "제가 다만 운이 좋아서 죽음에서 매번 도망칠 수 있었지요." "운이라는 것이 어찌 그리 자주 있겠는가?" 소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므로 장미대사께서는 포노선배님을 모셔다가 심목풍과 금광대사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 다. 그것은 저에게 그런 재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포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에 일리가 있군." 그는 무위도장의 얼굴로 눈길을 돌려 말을 계속했다. "그 심목풍은 지금 어디에 있소? 나는 너무 오래 기다릴 수 없소." 무위도장이 대답했다. "빈도는 이미 사람을 파견해서 심목풍의 행방을 찾도록 하였으니 어쩌면 삼사 일 후에는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포일천은 거만하게 대꾸했다. "좋소! 한 달을 기한으로 하여 그 기한이 지나면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소." "좋습니다. 그럼 선배님의 분부대로 한 달을 기한으로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한 달안에 심목 풍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때는 노선배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희들은 결코 붙잡지는 못합니다." 포일천은 사방을 쓰윽 훑어보더니 말하였다. "이 한 달 동안 그럼 나는 이 초가집에서 소식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오?" "이곳은 너무 초라하여 빈도 등은 이미 소대협과 상의하여 장사 근교의 마가보(馬家堡)로 모실 까 합니다." 포일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좋소! 우리는 언제 행동을 할 것이오?" "우문선생이 사람을 시켜서 몇가지의 진미요리와 미주(美酒)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보내오면 노선배님께서 잡수신 뒤에 우리는 곧 행동을 하겠습니다." "배려가 매우 고맙소. 나도 이곳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소." 그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무위도장이 물었다. "노선배님은 어디를 가시려고 하십니까?" "나는 칠성담의 경치를 구경하고 싶소." "빈도는 운양사제를 시켜 노선배님을 안내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운양자가 급히 다가와서 말했다. "제가 노선배님의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포일천도 할 수 없이 운양자의 뒤를 따랐다. 179. 반토막의 옥비녀 무위도장은 두 사람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자 나직한 음성으로 전엽청에게 말했다. "자네는 문 옆에 지키고 있다가 저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는 즉시 우리에게 알려 주게." 전엽청이 대답하고 곧 몸을 돌려 나갔다. 무위도장이 그에게 덧붙여 말했다. "조심하게, 포노선배님은 의심이 많으신 분이니 그에게 눈치채지 않도록 주의하게." 무위도장은 소영, 백리빙, 우문한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우문한도가 물었다. "도장께서는 제가 사람을 보내서 술좌석을 마련케 했다고 하셨는데 무위도장이 빙과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이미 빈도가 사람을 시켜서 처리토록 하였으니 우문선생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우문한도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도장께서는 매우 깊은 걱정이 있는 듯합니다." "세 분께서도 어서 앉으십시오. 빈도는 재삼 생각을 한 뒤 심중에 품은 생각을 미리 이야기하기 로 결정했소. 장미대사는 빈도에게 적당한 기회를 봐서 말하도록 하였지만 지금은 결코 그 적당 한 시기라고 할 수 없소." 우문한도가 물었다. "그런데 미리 말해도 무방할까요?" "빈도의 생각으로는 소대협과 우문선생의 지혜로 어쩌면 일찍이일이 해결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토록 엄중합니까?" "빈도는 간단히 경과를 설명하겠으니 세 분께서 전반의 내정을 이해하여 도움이 있으시기 바랍 니다." 소영이 그의 말을 받았다. "경청하겠으니 어서 말해 보십시오." 무위도장이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빈도가 마가장을 떠나 칠성담으로 온 것은 바로 장미대사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소." 우문한도가 물었다. "도장께서는 우리가 기다리기 전에 장미대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 까?" "없습니다. 빈도 등이 이곳에 온 후 장미대사는 줄곧 우리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던 것이오. 빈도 는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 곳에서 기다렸소이다. 그 사이에 자연 짜증도 났었으 나 우리는 조용히 참아 오다가 오늘에서야 장미대사를 만날 수 있었으며 겨우 그의 은밀한 사연 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오." 우문한도가 다시 질문을 했다. "장미대사는 어째서 그토록 늦게 여러분과 만났을까요?" 무위도장이 대답했다. "아아! 말하자면 매우 비통한 일입니다. 장미대사는 몹시 엄중한 내상을 입었으나 그의 수십 년 쌓은 정심한 내공의 힘을 빌어 억지로 상세를 누르며 꼼짝 못하도록 하여 오늘의 이 소원을 이룬 뒤 겨우 손을 떼고 죽어간 것입니다." 우문한도가 물었다. "그는 금궁에서 부상을 입은 뒤 지금까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 상세가 이제 발작한 것입니까?" 무위도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우리를 초청한 다음 날 밤 어떤 자와 싸움을 해서 발작을 한 것이오." 우문한도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것은 바로 최근의 일이로군요?" "그렇소. 보름도 되지 않은 일이오." 소영이 물었다. "누가 이곳에 장미대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한 누가 그와 대전할 만한 사람이 있단 말입 니까?" "천축의 한 고승이라 하오. 두 사람은 한바탕 싸움을 벌인 후 그 고승은 장미대사의 손에 죽었 지만 장미대사 역시 부상을 입었으며, 그 상처가 몹시 중하였기에 그는 우리를 이곳에 초청하여 포일천과 회담하기 전에 그 시일을 이용하여 검술을 우리에게 지도할 계획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 소. 그것은 그가 모든 정력을 모아 자기의 생명을 연장시켜 오늘의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오."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랬군요." 무위도장이 천천히 소매 속에서 흰 비단에 싼 두루마리를 꺼내며 말했다. "소대협, 이것을 보시오." 소영이 그것을 받아 들고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무위도장이 말했다. "장미대사가 남긴 검초이오. 또한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준비했던 검법이오." "이것을 제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소대협은 검법이 절묘하여 우리가 이해 못하는 점을 해독할 수도 있지 않소이까?" 소영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두루마리를 펴서 두어 번 훑어보고 말했다. "단지 삼 초의 검법뿐이군요." "옳습니다. 장미대사도 빈도에게 말하긴를 여기에 적혀 있는 검법은 무당태극혜(武當太極慧) 중 의 삼검 절학이니 우리의 무당 검법을 도로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것뿐이라고 했소." "그 장미대사는 과연 심지가 깊은 분이군요. 그런데 그가 어디서 귀문의 삼검 절학을 찾았을까 요?" "금궁 안에서 빈도의 스승으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그렇군요." 소영은 천천히 두루마리를 무위도장에게 넘겨 주며 말했다. "이것은 도장께서 보관하십시오. 후일 도장께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으면 저는 함께 연구해 보겠습니다." 무위도장이 그것을 받아 품 안에 넣으며 말했다. "장미대사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이 삼 초의 검법은 태극혜검에 귀입한 뒤 곧 그 검의 위력을 몇 배 더 증가시켰다 하오. 그것은 이 삼검법이야말로 그 검법 중의 정수라는 것이오." "도장께 축하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빈도뿐 아니라 소대협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외다." "저와 관계가 있다니요?" "장미대사께서 악소채의 말을 들추었으니 소대협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닙니까?" "악누님이 어쨌습니까?" "장미대사는 비록 강호에서 활동을 과히 안했지만 가끔 강호의 일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으므로 그가 알고 있는 일은 적지 않습니다." 소영은 악소채의 일을 항상 걱정하고 있었기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그쳐 물었다. "악누님이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장미대사는 악낭자를 들출 때 세심모사도 들추었소. 그러나 빈도는 아무리 머리를 짜보아도 그 세심모사가 어느 곳에 있는지 생각해 내지를 못하겠소." 소영은 심중으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그 장미대사가 혹시 우리 악누님이 그 세심모사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렇소. 악낭자는 잠시 그곳에 기거하고 있다 하오. 장미대사는 자세한 말을 안했으나 빈도의 추측으로는 우리가 포일천을 처치하지 못할 때 그 세심모사의 여주인에게 부탁하라고 하는 듯하 였소. 장미대사는 또한 나에게 반토막의 옥비녀를 주며 말하기를 만약 세심모사의 여주인이 응낙 하지 않을 때 이 반토막의 비녀를 주라고 했소." 우문한도가 입을 열었다. "이 반토막의 옥비녀를 주면 세심모사의 주인이 응낙한단 말입니 까?" "아마 그럴 것이오. 그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으며 빈도 역시 더 이상 묻지 않았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심모사라? 그런 이름은 생전 듣지 못한 것이군요." 소영은 무위도장과 우문한도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곳을 압니다." 무위도장이 말했다. "소대협께서 아시면 됐습니다. 만약 필요하면 하는 수 없이 그곳의 주인을 찾아갈 수밖에 없소 이다." 소영의 뇌리에는 악운고의 유채를 맡길 때 만났던 노파를 생각했다. '그럼, 그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강호에서 은거한 기인이란 말인 가?' 무위도장이 말을 이었다. "그 장미대사가 나에게 말하기를 만약 우리의 힘만으로 포일천을 상대할 수 있다면 그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했소." 우문한도가 물었다. "그 반토막의 옥비녀는 어떻게 하고요." "은밀한 곳에 묻어 버리든지 강물 속에 던져 버리든지 할 것이오." "그 반토막의 옥비녀가 세심모사의 주인으로 하여금 강적을 상대하도록 응낙을 받아 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평범한 물건은 아니거늘 어찌 아무렇게나 버릴 수 있습니까?" "나도 우문선생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장미대사에게 물어 보았소." "그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그분은 이 반토막의 옥비녀는 원래 평범한 물건이지만 그 가치의 기준은 사람에게 있다고 하더 군요. 또한 그것은 한두 사람에게 국한되어 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그 가치는 사라진다고 했소." "이것은 일종의 신물(信物)이며 장미대사와 세심모사 주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빈도도 그렇게 생각하오." 소영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도장, 심목풍의 행적은 아직도 도장의 감시하에 있는지요?" 무위도장이 마리를 저었다. "심목풍은 한 번 모습을 나타낸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이곳을 떠났단 말입니까?" "빈도의 생각으로는 그는 아직 이 부근에 있으며 떠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 부근은 산이 높고 우거져 만약 우리에게 단서가 없다면 무턱대고 산 속을 뒤질 수가 없는 노릇이오." "빈도의 추측으로는 심목풍은 이곳에서 한 개의 분타(分舵)를 경영하며 그 인원수는 적지 않다 고 봅니다. 양식도 그곳에서 조달하는 모양이며 그들은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소." "심목풍은 매복의 명수인데 도장께서는 어째서 그가 이 칠성담 부근에 매복을 설치하지 않았다 고 보십니까? 어쩌면 이미 도장의 행적은 심목풍의 이목에 들었을지 모릅니다." 소영의 이 말에 무위도장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말했다. "소대협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빈도에게는 다른 견해가 있소이다." 우문한도는 묵묵히 두 사람의 논변을 듣고 있었다. 무위도장은 말을 다시 계속했다. "그 견해를 들려 주십시오." "칠성담은 이 산중의 한 풍경에 불과하여 무림의 인물인 이곳에 오는 일은 거의 없어 심목풍의 지략이 아무리 높다 해도 그가 이곳에까지 매복을 설치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소. 내가 이곳에 온 뒤에 제자 열 명에게 행상과 어부로 변장케 하여 사방에 배치시켜 놓고 행적이 수상한 자를 감시 토록 했는데 아직 그런 인물을 발견치 못했소." "도장께서 그렇게 말하시니 염려 없군요. 그런데 도장께서는 언제쯤 심목풍을 찾아 낼 수 있다 고 봅니까?" "그것은 확정하기 어렵소. 빈도의 짐작에 그들이 먼젓번 조달한 양식이 다 떨어질 때가 되었으 니 사, 오 일 안에 응당 다시 나타날 것으로 생각되니 열흘은 넘기지 않을 것으로 보오." 우문한도가 말했다. "소대협은 그 세심모사에 한 번 가보고 싶으시군요?" "그렇소. 내가 그곳에 가길 희망하는 것은 악누님을 만나고 또한 악운고의 유체를 보기 위해서 입니다." 무위도장이 그의 말을 받았다. "소대협은 여기서 그곳까지 왕복하는데 며칠이나 걸린다고 보십니까?" "순조롭게 갔다온다면 칠 일 내지 십 일이면 갔다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변고를 만난다 면 알 수 없지요." 무위도장은 난처한 눈길을 우문한도에게 돌렸다. "우문선생은 이 일에 무슨 고견이 있소?" "내 마음 속에는 두 가지의 명백치 못한 일이 있으니 무어라고 할 수 없군요." "무슨 일인데요?" "하나는 포일천이 정말 장미대사의 말대로 심목풍과 금광대사를 처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포일천의 무공이 그들을 당해 낼 수 있는지, 이것들을 해결한 뒤 소대협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포일천의 무공을 논한다면 수십 년 전 무림에서 뛰어난 고수 중의 하나이며 심목풍과 금광대사 는 얼마 전에 부상했으니 과히 힘들지 않을 것이오." "만약 심목풍과 금광대사가 합세하여 공격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빈도도 그것을 생각해 보았소. 정말 그렇게 되면 빈도는 두 사제와 협력해서 포일천을 돕겠소." "포일천이 도장의 안배를 들을 것 같습니까?" "빈도가 그것을 미리 말하지 않으면 될 것이며 결전장에서 정세를 그렇게 이끌어 볼 것이오." "도장께서 그런 계략이 있어 포일천이 그것을 응낙한다면 소대협이 이곳에 남아 있든 없든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오." "장미대사의 말대로 포일천이 장미대사의 죽음을 안다면 그 후의 일이 문제지요. 그러나 그는 장미대사의 죽음을 한 달 내에 알지는 못할 것이오." "포일천은 의심과 질투가 대단하고 또한 남의 감언을 좋아하므로 그는 수시로 마음이 변하니 이 점을 도장께서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장미대사는 그를 나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질투심이 많고 변절하기 쉬운 두려운 존재요. 만약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금궁 의 참사를 빚어내지는 않았을 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소영이 말했다. "우문선생의 말이 옳소." 무위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도가 걱정하는 것은 포일천이 심목풍과 금광대사를 죽인 뒤에 변심한다면 나의 힘으로는 그 를 굴복시킬 수 없는 것이오." "무엇 때문에 꼭 그의 목숨을 뺏는단 말입니까? 차라리 그를 포섭하여 좋은 일을 하게 하는 것 이 어떻소?" 소영의 이 말을 우문한도가 받았다. "장미대사가 죽은 줄로 그가 안다면 고삐가 풀린 말처럼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위험 인물 입니다." "장미대사가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것이므로 빈도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문한도가 소영에게 향해 말했다. "소대협도 급히 세심모사에 가야 되겠군요." "나도 정세를 보니 역시 한 번 갔다 와야 될 것 같소." "지금의 상태로는 심목풍을 죽이는 데 소대협의 도움이 필요 없으니, 내가 이곳에 남아 있을 테 니 소대협은 백리낭자와 함께 그곳에 갔다 오는 것이 어떻습니까?" "우문형의 지략이 절세의 것이니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러므로 빈도는 소대협을 붙잡지 않겠 소."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만약 세심모사에 아무 변고가 없으면 곧 돌아오겠소." 우문한도가 말했다. "소대협은 다시 이곳에 돌아올 필요가 없소. 나는 이곳의 소식을 모두 마가장에 보낼 것이오." "여러분은 몸조심하십시오." 소영은 백리빙과 함께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무위도장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우문한도에게 말했다. "그 얽매인 정사가 영특한 인물을 파멸시키지 말기 바라겠소." "파멸할 리는 없겠지만 그 복잡한 여인들의 애정 사이에서 그는 무척 고심하고 있소." 그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소영과 백리빙은 길을 재촉하여 이튿날 해질 무렵, 세심모사에 당도했 다. 세심모사는 칠성담과 불과 이백여 리 떨어져 있었다. 이곳은 인적이 매우 드문 곳이었다. 먼 산에 숲이 우거지고 봉우리의 기복이 심하며 멀지 않은 대나무 숲속에 한 채의 초가집이 보 였다. 소영은 육 년 전에 악소채를 따라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노파의 차가운 모습이 눈 에 생생했다. 옛곳에 다시 오니 머릿속에 추억은 새로와 그 노파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것은 세심모사 안에 는 삼척동자도 들어온 적이 없었다는 냉랭한 비꼬움이었다. 그는 백리빙을 돌아보며 말했다. "빙아! 저 집의 여주인은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 하니 네가 들어가서 내 대신 일을 해다오." "무슨 일인데요?" "그곳에 닿기 전에 다시 말하자. 만약 그 여주인의 생각이 변해서 나를 들어오게 할지도 모르니 까." "그 여주인은 젊은가요?" "늙고 괴상하며 사람을 냉랭하게 대하니 넌 많이 참아야 한다." 그들 두 사람은 푸른 대나무 숲을 돌아가 그 초가집 앞에 당도했다. 나무 문이 확 닫혀 있고 냉 기가 도는 것은 육 년 전과 다름없었다. 소영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한참 후에 집 안에서 낮은 음성이 났다. "누구요?" 소영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말했다. "후배 소영이 왔소이다." 집 안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외객을 만나지 않으니 귀하는 돌아가시오." "후배는 이곳에 사람을 찾으러 왔으니 노선배님께서 관례를 깨뜨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나무문이 삐걱 열리며 백발이 성성하고 쪼그라진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그녀 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백리빙은 그 노파를 보는 순간 흠칫하고 놀랐다. 노파는 싸늘하게 물었 다. "누구를 찾소?" "악소채 낭자를 찾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눈을 번쩍 뜨더니 백리빙을 싸늘하게 쏘아 보았다. "너는 누구냐?" "후배 백리빙입니다." "이곳에 그녀는 없다." 노파는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소영은 다시 문을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 "저는 그녀가 이곳에 있는 줄 압니다. 노선배님은 어찌 천 리 밖에서 온 사람을 이토록 박대하 십니까?" 그러자 나무문이 다시 열렸다. "내가 이곳에 없다면 없는 줄 알아라!" "악운고의 유체는요?" "악운고의 유체는 여기에 있다." "후배는 악운고의 유체를 뵙고 싶습니다." "세심모사는 남자를 들여놓지 않는데 너는 그 예를 깨려고 하느냐?" "후배는 악운고에게 은혜가 깊은데 근 칠 년 간이나 그 유체를 뵙지 못했소. 그러니 노선배님께 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나는 관례를 깨뜨릴 수 없다." "허락을 얻는 방법 외에 집 안에 들어갈 다른 방법은 없는지요?" "방법은 하나 있으나 네가 그런 재간이 있는지…" "무슨 방법입니까?" "무공으로 내가 그어 놓은 금지를 돌파하는 것이다." "아아! 어찌 제가 노선배님과 싸움을 하겠습니까?" "어려움을 알면 물러서는 게 상책이다." 다시 덜컥 문을 닫았다. 소영은 진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말했다. "정 그 길밖에 없다면 그렇게 하지요." 소영이 나무문을 향해 일장을 쳐 내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부서지며 흩어졌다. 그러자 음산한 냉소가 들려왔다. "대담하구나." 한 줄기의 강력하기 짝이없는 장력이 재빠르게 밀려왔다. 소영은 오른손을 들어 재빨리 그것을 막았다. 그러나 그 장력은 마치 살을 가르는 기세와 같아 소영은 저절로 뒤로 물러났다. 그는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 노파는 대단한 내력을 갖고 있구나.' 이 때 날은 차츰 어둡기 시작했다. 소영이 노파를 바라보니 오른손에는 여전히 죽장을 짚고 있 었다. 그 놀라운 장력은 왼손으로 쳐낸 것이 분명했다. 소영은 포권을 하고 말했다. "노선배의 장력에 후배는 감탄합니다." "너의 그 나이로 놀랍게도 나의 일 장을 받아 내다니 참으로 뜻밖이로군." 소영은 이 말에 공손히 절을 했다. "후배가 오늘날 이처럼 된 것은 모두 악운고의 덕분입니다. 후배는 수 년 간 그 은인인 악운고 를 뵙지 못했으니 선배님은 예를 깨뜨려 주시기 바랍니다." 노파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좋다! 네가 나의 일장을 훌륭히 받아 냈으니 나는 너에게 반 시진만 은덕을 베풀겠다. 시간이 되면 즉시 이곳을 떠나되 만약 오래 끌면 나를 무정하다고 탓하지 마라." 소영은 뜻밖에 반 시진이라는 긴 시간을 얻어서 매우 기뻤다. "노선배님의 각별한 호의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후배에게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꼬마야! 너는 갈수록 양양하구나." "후배와 함께 온 낭자가 있는데 저와 함께 들어 가게 해주십시오." "흥, 너는 많은 여자 아이를 알고 있구나? 그렇지?" 소영은 흠칫했으나 곧 부인했다. "많지 않습니다." "너를 따라 온 저 아이는 너와 어떻게 되느냐?" "그녀는 북천존자의 딸입니다." 노파는 화를 벌컥 냈다. "나는 너와 그녀가 어떤 사이냐고 물었지 누구의 딸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후배와 생사를 같이한 벗입니다." "너희들의 사이는 좋으냐?" "남매와 같지요." "너는 악소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좋아합니다." "얼마나 좋으냐?" "그녀를 누님으로 매우 존경합니다." 노파가 머리를 끄덕였다. "좋다! 그 아이도 들어오게 해라. 그러나 너희들이 함께 들어온다면 나는 시간을 단축하겠다. 나 는 너희들이 물러날 때를 알려 주겠으니 들어가라. 악운고의 시체는 바로 서쪽 방에 있다." 노파는 말을 마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선배님, 감사합니다. 빙아, 들어가자." 백리빙이 급히 걸어 오며 말했다. "저는 밖에서 기다려도 되는데요. 제가 들어가면 시간이 줄어 들잖아요." "너는 나를 따라 함께 악운고의 유체를 뵈어야 한다. 내가 오늘이 있기까지는 모두 악운고의 은 덕이다. 시간이 촉박하니 어서 들어가자. 초를 갖고 있느냐?" "있어요. 우문선생이 길을 나서면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마침 잘 됐군." 그들은 서쪽 방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백리빙이 켜든 촛불을 들고 안을 살피니 소 나무로 된 영대(靈臺)가 벽에 바짝 붙어 있고 두 개의 휘장이 늘어져 있었다. 백리빙은 그 안의 등잔에 불을 당겼다. "이 휘장 뒤에는 분명히 악운고의 유해가 있겠군. 나는 수 년 간 뵈옵지 못했는데…" 소영은 그 휘장을 젖혔다. 그러자 그 안에서 소복을 입은 악소채가 걸어 나왔다. 소영은 한동안 멍하니 악소채를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누님!" 악소채는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로 답했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이 때 백리빙은 급히 다가오며 말했다. "언니, 저는 언니가 무척 그리웠어요." 백리빙은 사뿐히 큰절을 했다. 악소채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백리낭자, 어서 일어나요. 내가 어찌 이처럼 과분한 큰절을 받을 수 있겠소. 감당하기 어렵습니 다." 180. 신풍방주의 정체 악소채는 온통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소영은 그녀의 변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백리빙이 입을 열었다. "언니, 오빠와 나는 무척 언니를 보고 싶어 했어요." 악소채는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감사해요." 그녀의 말은 매우 겸손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은 소영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악소채는 냉랭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 "우리는 이렇게 만났으니 이제는 이곳을 떠나세…" 소영은 악소채의 냉랭함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거기에 대해 더 말하지 못하고 앞에 놓여 있는 영 대(靈臺)를 가리켰다. "저 영대 안에는 운이모의 법체(法體)가 놓여져 있습니까?" 악소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나는 이미 옮겨 놓았소. 동생의 마음이 변했으니 그것을 볼 필요가 없잖소." 소영은 점점 그녀의 이야기가 엉뚱하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누님, 이곳의 주인은 나에게 운이모의 법체가 있다고 말했소. 그가 누님을 속이지는 않았을 터 인데요." "주인이 동생을 속였겠지." "아니오. 누님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오." 악소채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동생을 속이지 않아요. 내가 고인의 시체를 서상(西廂)에서 옮긴 것을 홍노선배가 모르고 있기 때문이에요."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누님께선 운이모의 법체를 어느 곳으로 옮겼습니까? 저를 데리고 그곳으로 갈 수 있겠지요?" 악소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동생은 이미 마음의 등불이 꺼졌으니 운이모의 법체를 볼 면목이 없을 것이오. 두 사 람은 어서 이곳을 나가세요. 내가 문까지 전송하겠어요." 소영은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누님께서는 나를 쫓으려고만 하시는데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오?" 소영의 표정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잔뜩 화를 담고 있는 표정이었다. 옛날에는 악소채의 어떠한 말이나 행동에도 고분고분 순종하던 소영이었다. 악소채는 소영의 미간에 떠오르는 노기를 보고 가슴이 섬뜩함을 느껴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띠 었다. "미안해요. 난 동생을 아직도 옛날의 어린애로 착각해서… 동생 도 성인이니 응당 자세한 내막 을 말해 주겠어요." "말해 보시오. 이 동생이 귀를 기울이겠으니…" 악소채는 잠시 사이를 두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홍노선배님의 승낙을 받고 그의 계승자가 되어야 해요. 그러므로 앞으로는 이 세심모사에 서 지내야 되는 것이지요." "누님은 운이모의 복수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나는 홍노선배님께 지난 일을 자세히 들었어요. 왕년에 내 아버지를 해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어머니의 손에 죽음을 당했으며 어머님께서 비록 중상을 입으셨다지만 상대를 모두 죽이고…"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벽호(長壁湖)의 혈전에서 운이모는 원수를 갚은 것이로군요." "그래요. 어머님은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적을 유인한 것이지요. 어머님이 금궁의 열쇠를 세상에 내보인 것도 모두 계략이 있었던 것이오. 원수들이 모이자 일부러 배에까지 유인하여 혈전을 벌 인 것이에요. 그래서 원수는 죽고 어머님은 중상을 입었지요." "그런데 그 홍노선배가 어떻게 그것을 자세히 알고 있을까요?" 악소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지난 과거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지요. 노선배는 그날 밤 어머니를 도와 적과 싸웠다는 거예요.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원수도 못 갚을 뻔했지요. 그리고 그 배를 불태워 없앤 것은 흔적을 없애기 위함이었어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누님은 이모님의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래요. 나는 벌써 이곳을 찾아 홍노선배에게 물어 봤어야 되었을 것이었소. 진작 이 사실을 알 았더라면 강호를 뛰어 다니며 겹겹이 번뇌를 만들지 않았을 터인데. 이 세심모사에서 편안하게 마음을 갖고 은거할 수 있었을 것이란 말이에요." 소영은 빙그레 웃음을 띠며 포권을 했다. "누님, 심중의 근심이 걷히고 이제는 번뇌를 잊게 되셨으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악소채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강호에는 은혜와 원수가 쉬지 않고 엉키고 있소. 난 어디까지나 여자의 몸이므로 그 거센 물결 을 감당할 수 없음을 느끼오. 그러므로 다시는 강호에 나가지 않을 결심이오. 이 세심모사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서면 나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이곳에서 어머니의 법체를 보살피며 조용히 삶을 끝내려 하오." 그녀는 눈길을 돌려 소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동생은 어린 나이에 강호에 협명을 날리고 있소. 앞길이 창창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이후부터는 나를 누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동생도 성인이니 자신이 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특히 백 리 동생을 잘 대해 주고 다시는 이 곳을 찾지 마세요. 난 동생을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니까요." 그녀의 긴 말이 끝나자마자 백리빙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언니! 제가 몇 마디 할 말이 있어요. 이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니…" 악소채는 미미하게 웃음을 띠었다. "무슨 말인지, 서로 헤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백리빙은 소영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 말을 꺼냈다. "오빠는 언니를 아내로 생각하고 있어요. 비록 말은 없었지만 언니를 깊이 사모하고 있단 말이 에요." 악소채는 소영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침착하게 말했다. '소생은 행복한 사람이오. 이렇게 마음 좋은 백리 동생을 데리고 있다니 동생은 응당 백리 동생 을 부인으로 맞이해야 될 것이에요." 소영은 무어라 말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언니! 제 말을 들어 보세요. 제가 열이나 된다 하여도 언니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오빠도 그것 을 잘 알고 있어요. 언니는 이왕 원수를 잊으셨으니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 째서 오빠와 저를 멀리하시려고 하세요? 오빠는 언니를 부인으로 결정하시고 있으신데요. 더군다 나 오빠의 영당에서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요. 오빠의 부인이라고요. 제게는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부인하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정이 좀 틀린 것이에요. 지금이라도 동생이 죽으면 난 그의 부인이 될 수 있어요. 그 의 부인으로서 그가 못다한 일과 원수를 갚을 수도 있는 것이오. 그러나 동생이 살아 있으니 응 당 백리 동생이… 앞으로는 동생을 낭군으로 생각하고 전보다 더 가깝게 지내요." 백리빙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만약 오빠가 응낙한다 하여도 저는 반대예요." 악소채는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어찌하려는 것이오?" "나는 언니에게서 한 가지 대답을 듣고 싶어요." "무엇인데?" 백리빙은 악소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언니가 오빠의 부인이 되겠다는 약속이오. 언니는 가모의 유언도 잊으셨단 말이에요?" 악소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백리 동생은 어떻게 하겠어요?" "언니가 묻는다면 거짓 없이 대답하겠어요." 그녀는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오빠에 대하여 정이 깊을 대로 깊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오빠곁을 떠날 수는 없어요. 그러 나 결코 언니와 오빠의 혼인을 시기하거나 방해하지는 않겠어요. 오빠나 언니가 승낙하신다면 첩 이라도 되겠어요. 만약 그것이 안 된다면 종이라도 좋아요. 오빠나 언니를 만날 수 있게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악소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리 동생의 뜻을 알겠어요. 두 사람의 정이 그렇게 깊으니 나도 축하를 하겠어요. 나는 이미 속세를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이에요. 홍노선배님의 제자가 되어 이 세심모사를 이어받는 것이오. 이제는 남의 부인이 될 수도 없어요. 그러나 내 가슴 속에는 언제까지나 두 사람이 새겨 있을 거 예요." 그녀는 말을 끊고 잠시 생각하더니, 조금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이렇게 합시다. 원래 이곳은 외부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지만 특별히 두 사람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문을 열지요. 그래서 두 사람과 함께 얼굴을 보고, 지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끔 말이에요. 어떠세요?" 오랫동안 듣기만 하던 소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님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천하가 안정되기 전에 또다시 한바탕의 재난이 있을 것이오. 누님께서 이 곳에 은거하신다 하여도 그 재난을 피하지는 못하오." 악소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고 있어요. 홍노선배님께서 옥소랑군을 상하게 하셨으니 분명 그분을 불러 내겠지요." 소영은 깜짝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홍노선배님도 그 일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어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보시고 계신지요?" 악소채는 앞으로 흘러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대답했다. "홍노선배님께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세심모사에서 백 장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하셨어요. 강 호에서 어떠한 변화가 생기고 무림이 모두 뒤바뀌는 분쟁이 생긴다 하여도 그분에게는 하등의 관 심도 없어. 그러나 이곳에까지 그 일이 밀려 온다면 부득이 손을 쓸 것이오. 세심모사의 백 장 이 내에까지 들어섰다면 말이에요." 소영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홍노선배님은 이번 분쟁에 대해 누님을 책망하지 않았어요?" 악소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었어요." "만약 장노부인이 많은 고수를 거느리고 이곳을 침범해 온다면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내가 보기에는 홍노선배님이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분도 어느 정도 자신 을 갖고 있어요." 악소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너희들은 너무 오래 머물고 있다." 소영도 눈살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말을 받았다. "제가 아직 못한 말이 있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밖에서 다시 냉랭한 노파의 음성이 들렸다. "안 된다. 나는 항상 두 말을 안한다. 두 사람은 즉시 물러나라. 만약 내 말을 어긴다면 할 수 없이 손을 쓰겠다." 소영은 그 소리를 듣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악소채에게 정중히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누님, 몸을 보중하십시오. 다음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겠습니다." 악소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히 말했다. "좋아요. 하여튼 어서 이곳을 떠나도록 해요. 괜한 일로 다치지 말고요." "누님, 걱정 마십시오. 저는 저대로의 생각이 있습니다." 소영은 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악소채는 밖으로 나가는 소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는 상념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뜨거운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소영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마침 소영도 고개를 돌렸다. 소영은 악소채가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는 것을 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 는 처지였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세심모사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백리빙이 바짝 옆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오빠! 화났어요?" 소영은 짐짓 미소를 보였다. "아니 난 아무렇지도 않아." "오빠는 거짓말을 하시고 있어요, 그렇지요? 무엇인가 가슴에 숨기고 있어요."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백리빙은 다시 말을 꺼냈다. "오빠는 언니의 말이 너무 무정하다고 생각하세요?" "누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잘못하지 않았어. 오히려 누님을 괴롭히는 우리가 잘못이지. 그러나 누 님의 태도가 조금 차갑다고 느껴져." 백리빙은 손으로 가슴을 짚으며 말을 받았다. "저와 관계된 일인가 봐요."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거예요. 언니는 나를 원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나 때문에 오빠에게 냉랭하게 대 했어요." "빙아는 너무 깊이 생각해서 탈이야. 누님은 이미 자기 갈 길을 결정했다고 했잖아. 이제는 어느 누구도 누님의 마음을 돌릴 수 없어." 백리빙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오빠는 언니를 이해해야 돼. 언니의 처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두 사람이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벌써 초가집을 둘러 싸고 있는 대나무 숲까지 다다 랐다. 그들이 막 오솔길로 접어 들려는데 돌연 징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안색이 변하며 나직이 외쳤다. "신풍방(神風幇)이다!" 백리빙도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우문선생의 말이 틀림 없다. 악누님의 절세 미모는 뭇 남자들에게 화를 일으키는구나. 누님이 어디로 가든 그 미모 때문에 끝없는 흉사가 뒤따르는 것이다." 그 사이에 흰색을 띤 거대한 그림자가 멀리 보였다. 소영은 길 가운데에 우뚝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았다. 백리빙은 소영에게서 비장한 표정을 보고 걱정된 눈빛을 보냈다. "오빠! 어쩌려고 그래요?" "신풍방은 강호에서 그리 좋은 일을 안하는 편이다. 그러니 틀림없이 무슨 꿍꿍이 속이 있을 것 이다. 오늘 이 기회에 신풍방의 음흉한 내막을 알아내고 말 테다." 이 때 다시 요란한 징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두 사람이 소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신풍방의 단전개도(壇前開道)로 있는 이귀(二鬼)였다. 하나는 철판 좌비요, 다른 하나는 원홍 방횡이었다. 좌비는 오른손에 낭아봉(狼牙棒)을, 방횡은 양쪽 손에 상문장(喪門杖)을 들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여덟 명의 장한이 무섭게 생긴 신상을 둘러메고 있었다. 그리고 신상을 호위하는 듯 앞뒤로 십여 명의 흑의 사나이가 섰다. 소영은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빙아야, 이곳이 세심모사에서 얼마만큼 떨어진 곳이냐?" 백리빙이 뒤를 힐끗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백 장 밖이에요." "그것 마침 잘 됐구나. 우린 여기서 저들을 막기로 하자." 백리빙은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소영의 표정에서 살기를 느끼고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신풍방의 이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소영에게 바싹 다가섰다. 그들은 길 가운데 우뚝 서서 움직 일 줄 모르는 소영을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소영은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냉랭한 말을 보냈다. "두 분께선 며칠 더 살고 싶으시다면 어서 발길을 되돌리시오. 그리고 귀 방주에게 내 말을 전 해 주시오. 앞으로 다시 귀신같은 행동으로 강호를 괴롭히면 용서치 않겠다고 말이오." 좌비는 멍청한 시선으로 소영을 바라보았다. "귀하의 말이 좀 귀에 거슬리오이다." 방횡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우리를 몰라 보는 것으로 보아 분명 강호의 하룻강아지로군. 어디 귀하의 이름이나 들 어봅시다." 소영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우리는 몇 번 만났던 기억이 있는데, 두 분께서는 어찌 그리 건망증이 심하시오?" 좌비가 눈살을 찌푸리고 말을 받았다. "무림에는 많은 동도들이 있소. 그들을 어찌 다 기억하겠소?" "좋소. 그럼 소영이 말하더라고 하시오." 방횡이 눈을 크게 뜨고 다그쳐 물었다. "당신이 소대협이란 말이오?" "그렇소." 좌비가 한 발 나서며 물었다. "소대협께서는 혹시 세심모사에서 나오시는지요?" 소영은 엉뚱하게 묻는 좌비에게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는 울컥 치미는 분노를 느꼈다. "두 분께서 말을 안 듣는다면 할 수 없이 내가 해야지." 그리고는 큰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좌비가 소영의 앞길을 막아섰다. "소대협! 멈추시오." 소영은 재빨리 왼손을 내밀어 좌비 수중의 낭아똥을 움켜 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좌비의 아랫배를 힘껏 걷어 찼다. 좌비는 졸지에 당한 역습이라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비명과 함께 데굴 데굴 굴렀다. 그는 신음소리만 낼 뿐 일어날 줄을 몰랐다. 방횡은 눈 깜짝할 사이에 좌비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역시 소문에 듣던 바로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양쪽 상문장을 맹렬히 휘두르며 소영에게 달려 들었다. '어디 내 맛을 보아라.' 소영은 가볍게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다. 소영이 다시 반격하려는데 백리빙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방횡이 채 전세를 가다듬기도 전에 거센 일장을 뻗었다. 방횡은 백리빙을 너무 경시하였다. '저 계집애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러므로 백리빙이 역습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었다. 백리빙이 뻗은 일장은 보기 좋게 방횡의 등줄기에 명중하였다. "억!" 방횡은 비명과 함께 머리를 땅에 처박고 쓰러졌다. 그의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입은 온통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빙아야, 너는 이곳에 남아서 길을 지키고 있거라. 만약 신풍방의 방주가 나타나더라도 조금도 두려워 말고 침착하게 행동하거라."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도 조심하세요." 소영은 빙그레 미소로써 대답하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신풍방의 신상은 거대하고 무섭게 생겼다. 소영은 그 신상을 흘끔 바라본 후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귀하는 이런 괴물 모양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오. 괜히 애쓰지 말고 어 서 정체를 보이시오." 신상을 호위하던 십여 명의 사나이들은 모두 장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의 명성을 듣고 두려워서인지 방주의 명령이 없어서인지 달려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자 흥칙한 신상 안에서 은방을을 굴리는 듯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당신이 소영이오?" "그렇소. 우리는 이번 말고도 몇 번 만나지 않았소?" "당신은 강호 무림에서 우러러 보고 있는 영웅이구려." 소영은 냉소를 지었다. "흥! 말재주가 좋군요. 당신은 그 안에서 무얼 하시오? 오랫동안 있으면 갑갑하지도 않소?" "…" 신상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소영은 의아심을 갖고 유심히 신상을 살폈다. '필시 무슨 암수를 쓰려는 것이겠지.' 그의 생각이 막 끝나자마자 신상의 커다란 눈이 움직이며 붉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마 치 소영에게 덮쳐 오는 것 같았다. 소영은 옆으로 삼 장이나 비켜 섰다. 그러자 신상 속에서 간드러진 웃음이 흘러 나왔다. "호호호…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것은 단지 당신을 자세히 보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소영은 노기 띤 표정으로 버럭 소리 질렀다. "당신은 나를 놀리는 것이오? 당신의 모습이나 어서 보이시오. 무엇 때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 는 것이오?" "나는 이곳에서 자랐으며 이곳에서 죽을 것이오." 소영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설마 당신은 그 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겠지요?" "나는 십사 세에 방을 계승받아 오늘까지 십이 년 동안을 이곳에서 살았소이다." 소영은 잠시 멍청해졌다. '십이 년 동안이나…" "그럼 당신도 밥을 먹소?" "호호… 나도 사람인데 왜 밥을 안 먹겠어요." 소영은 더욱 크게 의아심이 생겼다. "어떻게 그 안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은 신상의 큰 입을 못 보았소? 그 입으로 모든 것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어요." 소영은 자세한 것을 묻고 싶었지만 필요 없는 시간을 끌기 싫었다. "방주께서는 밖으로 나오시겠소?"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것을 묻소?" 소영의 대답도 듣기 전에 신상 안에서는 다음 말이 나왔다. "이 좁은 신상 속에서 십여 년을 살았는데 어찌 나가기가 싫겠어요? 그러나…"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신은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구려?" 그러자 신상을 호위하고 있던 사나이 중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방주님, 우리 방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됩니다." 소영은 얼른 눈길을 돌려 입을 연 상대방을 보았다. 그는 바로 심풍방의 단전호법(壇前護法)으로 있는 초혼수(招魂手) 상명(常明)이었다. 소영은 그에게 싸늘한 눈길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명성은 많이 들었소. 당신네 신풍방이 이렇듯 괴상하고 선을 모른다면 내가 직접 상대 하겠소. 저 신상에 갇혀 있는 방주라는 여인도 필시 당신네들의 수작에 말려 들었을 것이오. 내 우선 당신부터 그 죄의 대가를 치러 주겠소." 그러나 상명이 먼저 거센 장력으로 공격했다. "죽어라!"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장력과 함께 소영의 손목을 짚으려 했다. 소영은 신풍방의 방주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이미 교피장갑을 끼었다. 상명이 뻗쳐온 장력을 정면으로 맞서며 몸을 옆으로 돌리고 그의 명치께를 가격했다. "펑!" "윽!" 장력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상명이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상명은 안색이 파랗게 변하며 맥없이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자 호위 장한들이 일제히 덤벼 들었다. 소영은 주위를 둘러싼 장한들을 여유 있는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흥! 별것 아니군.' 그는 천천히 진기를 끌어 모았다. 진기는 양쪽 손으로 잔뜩 몰렸다. 칠팔 명의 사나이들과 소영과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얏!"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소영이었다. 그는 동에서 북으로, 북에서 다시 남으로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그가 한 번 스쳐간 곳은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장한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한 마디로 추풍낙엽이었다. 칠팔 명의 장한은 제대로 손도 못 써 보고 모두 중상을 입거나 혈도를 찍혔다. 이 모양을 본 나 머지 장한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하였다. 소영은 도망가는 사람을 뒤쫓지 않았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려 다른 상대가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신상 앞으로 다가갔다. "방주는 들으시오. 지금 방주를 따르던 장한들은 모두 부상당하거나 도망쳤소. 만약 이대로 놔둔 다면 필시 당신은 굶어 죽을 것이오." "그러나 본방에는 다른 고수들이 많아요. 비록 겁장이들이 도망을 쳤다지만 다시 나를 구하러 올 거예요." "그럼 그들이 오기 전에 당신의 목숨을 빼앗겠소." 신상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조금 큰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어찌 신상을 부술 수 있소? 이 신상은 바위보다 더 단단한 것이라오. 더군다나 당신은 신상에 일 장 가까이도 못할 것이오." 소영은 눈빛을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왜 그렇소?" "이 거대한 신상의 사면에서는 암기를 발사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어요. 그 암기는 모두 극 독이 묻어 있으며 한두 개가 아니오. 한 번 나가면 수십 개가 되어 아무리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 라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만약 그 암기가 조금이라도 몸에 스치면 당신은 무사하지를 못할 것 이오." 소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크게 의아심을 가졌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이런 비밀까지 말해 주는 것일까?" 그는 직접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방주께선 먼저 경고를 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소? 나를 위협하려는 것이오?" "믿지 못하겠다면 한 번 시험해 보시지."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절대 독침이 없다고 믿소." 그리고는 암암리 운기하여 온 몸에 강기를 퍼뜨려 천천히 신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거의 신상에 닿을 무렵이었다. 돌연 신상의 입에서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물체가 소영에게 덮쳐 왔다. 소영은 몸을 피하지도 않고 재빠르게 허리를 굽혀 그 암기를 피해 냈다. 그는 암기가 머리 위를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무작정 앞으로 내달았다. 소영은 신상 밑에 당도하자마자 십 성의 공격으로 신상의 머리에 일장을 날렸다. 그가 암기를 피하고 신상 밑으로 다가 선 것은 눈깜짝할 순간이었다. 더구나 일 장을 날린 것은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펑!" 거대한 신상은 소영의 장풍에 맞아 옆으로 쓰러졌다. 소영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그 신상 바로 밑에 바싹 엎드렸다. 과연 방주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말대로 넘어진 신상에서는 수많은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달빛을 받아 검게 빛나는 암기들이 허공을 뚫고 나가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땅에 엎드린 채 내심 감탄했다. '이렇게 많은 암기가 날으니 정말 어느 누구라도 당해 낼 수는 없지. 만약 나도 그 사실을 몰랐 었다면 지금쯤 암기에 맞아…' 잠시 지나자 신상의 몸에서 나오던 암기가 저절로 멎었다. 소영은 살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신상에게서 삼 장 정도 몸을 날렸다. 그가 땅에 내려 서자, 그곳에는 어느새 왔는지 백리빙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오빠! 괜찮아요?" 소영은 신상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오빠, 저 신상 안에 방주가 있지요? 만약 그녀 부하들이 마음을 달리 먹고 버려 둔다면 그녀는 굶어 죽겠네요." 소영은 백리빙을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우리가 어찌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그녀를 상대해요?" 소영은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그녀 스스로 나오게 하겠다. 그녀가 계속 꾀를 부린다면 우리도 방법을 강구해야지." "어떻게?" "아주 쉬운 방법이지. 그녀가 안 나오겠다면 신상에다 불을 지른다고 위협하는 것이지." 백리빙은 가볍게 맞장구를 쳤다. "됐어요. 그렇게 하면 그녀가 안 나올 수 없을 거예요." "저 신상에는 아직도 많은 암기가 들어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쏟아지는 암기를 당해 내지는 못 하니 너는 여기에서 엄호나 하여라. 직접 부딪쳐 보마." 백리빙은 빙그레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조심하세요." 소영도 빙그레 웃고는 신상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신상에서 일 장 정도 사이를 두고 큰소리로 외쳤다. "방주 들으시오! 당신은 이제 나에게 잡힌 몸이니 만약 당신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온다면 목숨만 은 살려 주겠소. 그러나 계속 죄를 부리고 나오지 않는다면 내 손에 목숨을 잃을 것이오." "당신은 무슨 수로 나를 밖으로 나가게 만들겠소?"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려 백리빙을 보았다. 백리빙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빨리 말하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소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근처의 나무를 모아다 신상에다 불을 지르겠소." 이 말은 분명 방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낭랑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조금 전에도 말하지 않았소. 그리고 당신도 말했었고요. 난 마음대로 이곳을 나가지 못한단 말 이오." "나는 믿지 못하겠소." "그럼 하는 수 없군요. 당신 생각대로 태워 죽이세요." 소영은 다시 백리빙을 바라보았다. 백리빙은 앞으로 다가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 그녀의 말이 정말인가봐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신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내가 당신을 도와 신상을 부순다면 어쩌겠소이까?" "그것은 불가능해요. 이 신상의 껍질은 매우 단단하여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뚫을 수 없어 요." "방주, 잠깐만 기다리시오. 내가 꺼내 드리리다." 소영은 품 속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것은 금궁에 들어 있던 것으로서 쇠라도 쉽게 가를 수 있는 단검이었다. 그는 신상으로 올라 가서 머리에서부터 밑으로 단검을 내리그었다. 신상의 껍질은 북 소리를 내며 쉽게 갈라졌다. 소영은 다시 한 번 반복해서 긋고는 먼저 자리로 내려섰다. "방주는 어서 나오시오. 신상의 껍질을 잘라 놓았으니 그 안에서 조금만 힘쓰면 밖으로 나올 수 있소." 신상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영은 그녀가 믿지 못하고 힘을 안 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말하려고 막 입을 떼려는데 돌연, "펑!" 소리와 함께 신상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 속에서는 청의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둠 속이라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청의소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소영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정중하게 예의를 표하고 맑은 음성 으로 말했다. "소대협! 감사합니다." 소영은 가벼운 예로 답하고는 다그쳐 물었다. "낭자가 바로 신풍방의 방주요?" 청의소녀는 머리카락을 궁등이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대답했다. "일개 방주라고는 하나 이렇게 갇혀 있었던 몸이기 때문에 별로 달갑지 않소이다." "낭자는 여자의 몸으로 더군다나 어린 나이에 어떻게 방주가 되었소?" 청의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영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것이 제일 궁금한가요?" "그렇소. 귀방에는 인재가 많을 터인데…" 청의소녀는 쓴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저의 아버님께서 처음으로 방을 세우셨어요. 그러나 아버님은 불구자였기 때문에 제대로 일을 못하셨지요. 그런 때문인지 저에게 방주 자리를 물려 줄 때 이렇게 신상 속에다 가둔 것이에요." 백리빙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당신의 부하들에게 배반을 당하면 어떡하오? 황량한 곳에다 당신을 내려 놓으면 꼼짝 없이 굶어 죽게 되지 않겠소?" 청의소녀는 백리빙을 유심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방중의 몇몇 고수들은 제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어요. 그들의 몸에는 독성이 있는 고약이 붙 어 있어서 칠 일에 한 번씩 그것을 갈아 붙여야 돼요. 만약 칠 일을 넘기면 그 자리가 썩게 되고 나중에는 목숨을 잃게 되지요. 그 고약의 제조 방법은 저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일종의 독고약이로구려. 그럼 이제부터는 어쩌겠소? 신상도 부서졌으니 다시 들어갈 수 도 없는 일 아니오?" 청의소녀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 소영과 백리빙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에 관심을 기울였다. 얼마 후 청의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방주 자리를 원치 않았어요. 그러나 저는 신상 안에 갇혀 있는 폼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이 일을 해 온 것이에요. 그 동안 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이제 뜻하지 않게 소대협의 구원을 받았으니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어요." 그녀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세상을 이렇게 보는 것도 십여 년 만이에요. 이렇게 마음껏 움직이고 마음껏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는 심산에 은거하여 조용한 삶을 찾겠어 요. 그리고 신풍방도 해체하겠어요."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낭자! 고맙소. 낭자를 구해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소. 나는 신풍방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지만 하나도 묻지 않겠소. 낭자의 행운을 빌 뿐이오." 청의소녀는 흐느껴 울었다. "소대협께선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제 힘껏 노력하여 신풍방을 해체시키겠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한참 동안 소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있던 청의소녀는 아무 말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백리빙은 사라지는 그 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그녀가 불쌍하군요." 그리고는 소영의 손을 힘껏 잡았다. "오빠는 정말 강호에 없어서는 안 될 영웅이에요. 불과 한 시진도 안 돼서 거대한 세력의 신풍 방을 해체시키다니…" 소영은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백리빙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뜨거운 시선이 한데 어울렸다.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가까와졌다. 누가 먼저 다가서는지도 몰랐다. 그들의 몸이 막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두 사람의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을 방 해했다. 백리빙이 깜짝 놀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울리는 소리예요?" 소영은 주위를 살피더니 다급히 대답했다. "오늘 밤에 일대 혈전이 벌어질 것 같군. 세심모사에 큰 변이 생기겠단 말이야. 어디 무슨 일인 가 볼까?" 그는 백리빙을 이끌고 근처에 있는 큰 나무 위로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이 나무 위로 몸을 숨기자마자 몇 개의 사람 그림자가 질풍같이 달려왔다. 181. 끈덕진 집념 앞장선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백운산장의 장노부인이었다. 장노부인 뒤에는 회색 옷을 입은 노인과 남색 장삼을 입은 금면 철수인(金面鐵手人)이 따랐다. '역시 장노부인은 성질이 급하구나. 옥소랑군이 조금 상했다고 고수를 데리고 찾아 오다니…'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 사람들은 모두 똑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모두 젊어 보였고 청삼을 입었으며 등에 장검을 꽂고 있었다. 소영은 그들을 주시하며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그들은 모두 일곱 명이나 되었다. 회의 노인이 먼저 쪼개진 신상을 발견했다. 그 노인은 신상을 자세히 살펴 보고는 근처에 넘어 져 있는 장한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한참 동안을 살피던 회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노부인에게 입을 열었다. "모두 신풍방의 인물들이오." 장노부인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을 받았다. "그 할망구는 나에게 분명히 말했소. 세심모사에서 백 장 밖의 일은 절대로 손대지 않겠다고… 이것은 필시 악소채의 짓일 것이오." 회의 노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만약 세심모사의 주인이 악소채를 내놓지 않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정말 그런다면 세심모사를 불태워 없앨 수밖에…" "부인, 이것은 제가 쓸데없는 걱정인 것 같지만… 우리가 세심모사의 주인과 싸운다 해도 별 승 산은 없을 것입니다." 장노부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장성! 당신은 지금 몇 살이나 되었소?" "예, 저는 이미 칠십이 넘었소이다." "그래요? 그럼 이제 죽어도 한이 없겠구려." 장성은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언성을 높였다. "부인께서 저를 그렇게 보십니까? 제가 목숨이 아까워서 그런 말을 했는 줄로 아십니까? 저는 다만… 다만…" 장노부인은 다급하게 다그쳤다. "무엇이오? 다만 무엇이란 말이오?" 장성은 잠깐 사이를 둔 다음 무겁게 입을 열었다. "노주인께서 금궁에 갇힌 뒤부터 우리 백운산장은 기울기 시작했소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정예 제자들을 모두 이곳에서 잃는다면 백운산장의 운은 끝장이 나는 것이외다." 장노부인은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이길 수도 있지 않소?" 장성은 눈길을 돌려 신풍방의 신상과 쓰러져 있는 장한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저것을 보십시오. 신풍방이라 하면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방이 아닙니까? 더구나 그곳은 많은 고수들이 있는 곳인데… 불과 한 시진 사이에 모두 전멸을 당하고 신상은 부서졌지 않았습니까. 이것만 보아도 상대의 무공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장노부인은 수중의 죽장으로 땅을 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정 두렵다면 어서 도망가시오! 막지 않겠소." 장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오이다. 노부가 어찌 이 자리를 피하오리까. 다만 백운산장의 장래를 위하여 좁은 소견을 말하였을 따름입니다."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더 말을 마시오." 장성은 어두운 신색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큰아씨께서 노주인의 사랑을 생각해서 이곳에 와 주셨으면…" 장노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할 필요 없소. 큰아씨는 이미 세외(世外) 고인이 된 몸이오. 이런 사적인 일에 어찌 그녀의 도움을 바라겠소." "아닙니다. 큰아씨는 비록 불문에 몸을 담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도련님을 아끼고 있습니다. 더군 다나 노주인님께서 생전에 그녀를 극진히 사랑해 주셨으므로 절대 모른 체는 안할 것입니다." 장노부인은 싸늘하게 쓴웃음을 띠었다. "다 쓸데없는 생각이오. 그녀가 우리를 도우려 했다면 벌써 이곳에 나타났을 것이오."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큰 걸음으로 세심모사로 향했다. 장성은 고개를 무겁게 젓더니 뒤에 대기하고 있는 일곱 명의 대한들에게 무어라 지시하였다. 그는 지시를 한 다음 주위를 둘러보고는 금면 철수인과 함께 쏜살같이 장노부인의 뒤를 따랐다. 일곱 명의 대한들도 오 장 정도의 사이를 두고 뒤따랐다. "오빠, 저들은 정말로 세심모사의 주인에게 시비를 걸려는 거예요?" "그렇다. 원인은 모두 악누님에게 있지만 저들이 기왕 우리에게 발각되었으니 모른 체할 수도 없지 않느냐. 더구나 신풍방을 누님이 죽인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 사이에 장노부인은 세심모사에 당도하자 서슴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죽장으로 대나무 울타리를 크게 두들겼다. "여보시오! 주인 계십니까?" 잠시 지나자 대나무 문이 삐걱 열리며 세심모사의 주인 얼굴이 나타났다. "누구시오?" 장노부인은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홍언니! 나도 몰라 보는구려." "아, 백운산장의 장부인 아니오? 웬일이오? 이런 밤중에…" "아무 일도 없다면 홍언니를 찾았겠어요. 홍언니가 내 손자를 다치게 했나요?" 홍노파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죽었소?" "조금만 늦게 손을 썼더라면 죽었을 것이오." 홍노파는 쓴 미소를 띠었다. "다행이군. 그가 살아서 돌아간 것도 내가 자비를 베푼 것이지." 그녀는 장노부인의 일행을 쭉 훑어보고 냉랭히 말을 이었다. "난 이미 강호의 어떠한 시비에도 손을 떼었소. 그러나 세심모사 백 장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용서치 않소. 더구나 내 승낙도 없이 침범한 사람은 그대로 살려 보내지는 않는단 말이오." 장노부인은 어깨를 약간 으쓱해 보였다. "홍언니, 우린 악소채를 데리러 왔어요. 그녀만 내주면 즉시 이곳을 물러나겠소." "당신은 이곳이 우리집이라는 것을 잊으셨소? 나는 한 번 거두어 들인 사람은 절대로 남에게 빼 앗기지 않소." 노부인은 눈빛을 번뜩이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래요? 그럼 손자를 위해 복수를 하는 것도 탓하시려오?" 홍노파가 노기 띤 표정으로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장성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홍노부인, 이 소인이 몇 마디 하겠소이다." 홍노파는 의아한 눈빛으로 장성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시오?" "예, 백운산장의 노주인을 모시고 있었던 장성이라는 종입니다. 수십 년 전에 노주인을 따라 다 니다가 홍부인을 만난 적이 있소이다." "그래 무슨 할 말이 있소?" 장성은 눈길을 돌려 장노부인을 힐끗 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홍노부인, 우리 노부인과는 수십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닙니까?" 홍노파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나에게 복수를 한다고 온 것이군." "노부인께서는 악낭자만 찾으면…" "당신의 손자는 내가 상해했는데 어찌 엉뚱한 사람을 찾으시오. 그가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면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오." 장노부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장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도련님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은거해 있는 악낭자와 우리 도련님은 이미 약혼한 사이였소이다. 그런데 낭자께서 그만 변심을 하시고… 그러니 옛날의 정리를 생각하 시어 악낭자를 우리에게 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홍노인은 싸늘하게 반문했다. "이제 이야기를 다 했소?" "그렇소이다. 우리 백운산장의 체면도 좀 세워 주십시오." 홍노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알고 지냈던 정리를 생각해서 금지구역으로 들어온 것은 불문에 붙이겠소." 그리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장노부인은 죽장으로 문을 두들기며 다급히 소리쳤다. "나오시오!" 그러자 홍노파의 음성만이 새어 나왔다. "내 인내에도 한계가 있소. 장부인은 너무 심하게 다그치지 마시오." "장가 유일의 후계자가 당신에게 화를 당한 것을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 "당신은 너무 옹졸한 생각만 하는구려. 내가 왜 당신의 손자를 미워하겠소. 그가 하도 건방지고 귀찮게 굴길래 조금 혼을 내준 것뿐이오. 당신을 보아서 목숨을 부지하게 한 것이란 말이오. 내 다시 한 번 더 참고 그냥 들어가리다." 장노부인은 거친 숨을 내쉬더니 수중의 죽장을 힘껏 휘둘러 문을 부수어 버렸다. "우지직!" 대나무로 엮어 만든 문이라 쉽게 부서졌다. 그러나 홍노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노부인은 다시 휘두르려던 죽장을 거두고 큰 소리로 외쳤다. "홍노파는 어찌 비겁하게 몸을 숨기시오. 내가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 하시오?" 그러자 안에서 홍노파의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그럼 당신은 어쩌시겠소?" "두 갈래 길이 있소. 하나는 당신이 순순히 악소채를 내놓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승부를 겨루는 길이오." "꼭 그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오?" 장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둘 중에 어느 하나요." "나는 이미 악소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거두어 들였소. 한 번 맹세한 것이니 첫 번째 것은 불 가능하오." 장노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그쳐 물었다. "그럼 두 번째 길을 택하겠단 말이구려." 세심모사 안에서는 여전히 냉정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당신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오?" "흥, 나는 도와줄 사람들을 데리고 왔소." 안에서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가벼운 냉소가 들렸다. "흐흐… 그 일곱 명의 젊은이들이오?" "그렇소." 이제까지 한 마디도 없었던 금면 철수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도 있소이다." 홍노파는 다시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 모두 열 분이로군." "당신도 악소채와 두 명의 여종까지 합하면 네 명이 아니오?" 그러자 홍노파는 늙은이답지 않게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아니오. 난 혼자서 열 분을 상대하겠소."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부서진 문으로 홍노파가 다시 모습을 보였다. 장노부인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서서, 다가오는 홍노파를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는 잔뜩 살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와지자 일곱 대한들이 일제히, "쨍!" 소리와 함께 장검을 뽑아 들고 홍노파를 에워 쌌다. 일곱 장검은 달빛을 받아 푸른 색으로 빛나 고 있었다. 홍노파는 십 명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큰소리 칠 만했다. 그녀는 길다란 죽장으로 계속 몇 초를 휘둘렀다. 그녀의 죽장이 지나치는 곳에는 날카로운 소리 가 들리며 포위망을 죄어들던 대한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일곱 명의 대한 중에서 제법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두 명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두 대한은 서로 눈짓을 보내더니 검을 앞으로 내밀어 천천히 홍노파에게 다가갔다. 홍노파는 서 있는 그대로 두 대한을 노려 보더니 돌연, "죽어라!" 하는 외침과 함께 몸을 굽히며 죽장을 휘둘렀다. 두 대한도 장검을 휘둘렀다. 한 대한은 홍노파의 가슴을 노렸으며 또 한 대한은 옆구리를 찔러 갔다. 그러나 홍노파가 몸을 낮추는 바람에 두 검날은 허공을 가로지르고 말았다. "악!" "으악!" 두 대한의 검이 허공을 찌른 것과 동시에 외마디 비명이 드렸다. 홍노파의 죽장이 대한들을 한꺼번에 가격한 것이었다. 소영은 가법게 고새를 끄덕이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저 노파의 무공은 이미 초인적인 경지에 달하고 있으므로 열 명을 상대한다 해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린 장노부인의 원병이 오기까지는 나서지 말자." 백리빙은 빙그레 웃음을 띠고 소영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일곱 명의 대한은 제대로 손도 못 써 보고 두 명이 쓰러지자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홍노파는 그 여세로 다시 두 명의 대한을 쓰러뜨렸다. 홍노파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연이어 일곱 명의 대한을 쓰러뜨린 후 죽장을 거두고 한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장노부인은 침통한 표정으로 홍노파에게 입을 열었다. "먼저 내개 나서서 당신과 자웅을 겨루어야 될 것이었는데 … 당신의 유성비운(流星飛雲) 검법이 강호에서 제일 빠르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였소." 홍노파는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싸움에서 한 수를 잘못하면 그것은 패배가 되는 것이오. 이제 당신이 믿고 있던 일곱 검진이 모두 쓰러졌으니 당신의 운도 마지막이오. 그러나 이 늙은이는 더 이상 살생을 하고 싶진 않소. 더구나 당신과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니 그냥 돌려 보내겠소." 장노부인은 노기에 가득차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그런 동정은 필요 없소. 당신이 악소채를 내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생결단을 내야 할 것이오." 홍노파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장부인! 나는 당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소." 장노부인은 그 말을 듣고 수중에 들고 있던 죽장을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옥척(玉 尺)과 단검을 꺼내 양 손에 나누어 들었다. 그녀는 왼손에 쥔 옥척을 크게 휘두르며, 곧장 홍노파 의 가슴에 일격을 가해 갔다. 홍노파는 가볍게 몸을 날려 뒤로 일 장이나 물러났다. 그녀는 옥척과 단검을 서로 핀차시키면서 계속 십여 초를 휘둘렀다. 홍노파는 반격할 생각도 않고 그저 십여 초를 피하기만 하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장부인! 나는 이미 십여 수 이상을 양보하였으니 피차의 정리는 끝난 것이오. 이제부터는 나도 반격을 하겠소." "흥! 당신 마음대로?" 홍노파는 눈을 치뜨며 죽장을 치켜 들었다. 장노부인은 옥척과 단검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헛점만 노리며 천천히 원을 그렸다. 두 사람의 대치가 극에 달하여 서로 맞부딪치려는 순간, "잠깐 멈추시오." 장성의 다급한 음성이었다. 장성은 언제 뽑아 들었는지 장검을 움켜 쥐고 두 사람 가운데로 뛰 어 들었다. 그는 장노부인에게 가벼운 예를 올린 후 홍노파에게 눈길을 던졌다. 홍노파는 의외의 방해자가 장성이라는 것을 알자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시오?" 장성은 긴 한숨을 쉬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 노주인께서는 금궁에 갇힌 몸이 되었고, 큰아씨는 속세가 싫어 불 문에 귀의한 몸이오. 백운산장을 지키고 영도할 분은 오직 노부인 한 사람뿐이오. 그런데다 장씨 문중에 유일한 후계자인 도련님을 당신이 상해했으니 어찌 노부인의 역정을 사지 않겠소? 이 모 든 것을 십분 이해하셔서 이후로도 그리 허물치 마시기 바라오. 저는 이미 늙은 몸이라 죽음 같 은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소. 다만 백운산장의 앞날에 오명이 생길까 두려울 뿐이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장씨 집안의 종으로 이제까지 살았으니 죽을 때도 장씨 집안과 같이 죽겠 소. 그러니 당신은 이 점을 이해해 주시오." "아, 좋소. 마음대로 하시오." 홍노파는 쉽게 대답을 했다. 장노부인은 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두 사람의 말이 끝나자마자 쉴새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그녀의 검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옥척도 달빛을 받아 은은한 빛을 발하며 허공에 큰 원을 그렸다. 장성은 장검을 머리 위로 치켜 세우고는 홍노파의 허점만을 노리며 바싹바싹 다가섰다. 홍노파는 죽장으로 옥척과 단검의 공격을 막아내며 반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좀처럼 반 격의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검을 치켜 들고 접근하는 장성 때문이었다. 장성은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일류 고수급에 끼일 만큼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홍노파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 가슴이 뜨끔함을 느꼈다. '저 놈은 보통 무공을 지니지 않았구나.' 그녀는 차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장성의 검세도 날카롭게 허공을 뚫었다. 홍노파는 다시 십여 초를 수세에 몰렸다. 그녀가 수세에 몰리자 장노부인의 옥척은 더욱 거세게 휘날렸다. 옥척과 단검, 그리고 장검이 한 꺼번에 휘날리자 주위는 온통 검영(劍影)으로 뒤덮였다. 세 사람의 모습은 그저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검영 속에서 돌연,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과 비명소리가 멎는 것과 함께 장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장검은 바로 장성의 것이었다. 장성은 오른손목을 움켜 쥐고 검영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의 표정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장노부인은 장성이 오른손을 일격당한 후 뒤로 물러서자 내심 조바심이 생겼다. '이제 일대 일이로군. 나 혼자서는 그녀를 당해 낼 수 없는데…' 그녀는 이런 생각으로 최후의 힘을 다하여 무섭게 상대에게 덮쳐갔다. '그녀가 죽지 않으면 내가…' 그녀의 옥척이 번쩍 빛나며 상대에게로 뻗쳐 나갔다. 소영과 백리빙도 그녀의 옥척이 홍노파의 가슴을 꿰뚫으리라 생각했다. 구경하는 사람들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옥척을 쓰는 장노부인까지도 자신을 갖고 일 격을 뻗은 것이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의 정적 속에 희뿌연 검영만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검영이 사라지자 그곳에는 모두가 놀랄 이변이 생겼다. 공격하던 장노부인이 왼손을 파르르 떨 려 옥척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장성은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대성통곡을 했다. "이제 백운산장도 마지막이로구나. 이대로 죽는다면 어찌 눈을 감을 수 있단 말이냐." 장노부인은 들고 있던 옥척을 스스로 땅에 떨어뜨렸다. 그녀의 손목에는 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홍노파는 일 초가 성공하자 더 이상 공격하지는 않고 뒤로 물러섰다. 순간 생각지 않게 장노부 인이 역습을 했다. 그녀는 아픔을 참으며 오른손의 단검으로 홍노파의 가슴을 향해 짓쳐들었다. 이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홍노파는 장부인이 일격을 맞고 다시는 손을 못 쓰리라 믿고 있었으므로 돌연 뻗쳐 오는 단검을 막을 틈이 없어 피하지 못했다. 단검이 거의 가슴께로 다다랐을 때에야 황급히 몸을 돌렸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단검은 비록 가슴을 빗나갔지만 어깨를 깊숙이 스친 것이었다. 홍노파의 왼쪽 옷소매는 금방 선혈로 물들었다. 홍노파는 어깨의상처를 힐끗 바라보고는 쓴웃음 을 지었다. "장부인, 이제는 되었소. 나는 죽장으로 일격을 가했으며 당신은 단검으로 피를 보았지 않았소. 그러니 서로 무승부로 하고 여기서 헤어집…" 장노부인은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냉랭히 말을 받았다. "안 되오. 당신이 죽지 않으면 내가 이 자리에 뼈를 묻겠소." 그녀는 단검을 휘두르며 다시 홍노파에게 덮쳐 갔다. 장성은 사태가 긴박함을 느끼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노부인 안 됩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악!"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장성은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장노부인은 마치 나무토막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홍노파는 얼굴 가득히 살기를 담고 장노부인에게 달려들었다. "어디 네 소원이 정 그렇다면 이곳에서 죽어 보아라." 그녀가 죽장을 번쩍 쳐들고 막 내려치려는데 홀연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잠깐만 참아 주시오." 홍노파는 깜짝 놀라서 죽장을 슬그머니 거두었다. 대나무 숲 속에서 두 명의 여승이 모습을 나 타냈다. 앞장선 여승은 월백승포(月白僧袍)에 허리에는 승대(僧帶)를 두르고 있었다. 대번 고귀한 여승임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수중에는 말총으로 만든 조그만 불진(拂塵)을 들 고 있었다. 그 여승의 뒤를 바싹 따르고 있는 사람은 청포에 장검을 든 삼절사태였다. 소영은 갑자기 나타난 여승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저 여승은 분명 장방의 여동생이겠구나. 그리고 악누님의 은사이기도 하고…' 홍노파는 그 여승을 보자, 대뜸 안색이 변하며 정중히 예를 올렸다. "장대낭자께서…" 여승은 합장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무아미타불! 아니오. 소승은 이미 불문에 몸을 담은지 십여 년이 되었소. 장대낭자라고 부르 지 마시오. 소승의 법명은 망정(忘情)이옵니다. 망정이라고 불러 주시오." "망정이라고 하시지만 아직도 인정은 많으시군요. 좀처럼 속세에 나오지 않으시더니 오늘은 어 인 일로 세심모사에까지…" 망정사태는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망정이라지만 결코 친분을 끊지는 못하고 있소. 빈니가 이 일에 간섭하는 것은 바로 장부인 때 문이오. 그녀를 용서해 주시겠소?" 홍노파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태께서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이런 불상사도 없었을 것을…이 늙은이를 섭섭하게 하는 것 은 그녀가 단검에 독을 묻혀 암수를 쓴 것이오. 나는 부득불 한 쪽 팔이 잘리게 되었소이다." 망정사태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쓰러져 있는 장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장노부인은 정신을 잃고 있었다. 망정사태가 그녀의 맥을 짚어 보더니 삼절사태에게 입을 열었다. "기혈이 막힌 모양이다. 그 노란 영단을 한 알 복용케 하라." 삼절사태는 품 속에서 영단을 꺼내 장노인의 입속에다 넣었다. 망정사태는 가볍게 혀끝을 차며 땅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주워 들고 유심히 살펴 보았다. 어두 운 밤이지만 달빛이 있어 단검에 묻어 있는 독을 식별할 수 있었다. 망정사태는 눈살을 찌푸리고 단검을 멀리 집어 던졌다. 그러자 홍노파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증거물이 없어졌으니 이제는 우기지도 못하겠구려." "홍시주, 오해 마시오. 증거물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장부인 이 독검을 썼다는 것은 실로 장 씨 가문에 수치입니다. 그래서 그 독검에다 화풀이를 한 것뿐이오." 홍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태께서는 인품이 뛰어나오이다. 늙은이가 존경해 오던 보람이 있구려." "홍시주!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무엇이오? 사태의 부탁이라면 힘 닿는 데까지 돕겠소." 망정사태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악소채를 한 번 만나 보고 싶소. 그녀를 만나 보고는 그대로 돌아서겠소." "좋소이다. 그 정도의 부탁이라면 과히 어렵지 않소." 그리고는 몸을 돌려 초가집 안으로 들어갔다. 망정사태는 그제서야 눈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장성에게 눈길을 멈추고 다정히 물었다. "당신도 부상했나 보구려?" 장성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예, 그만… 팔이 부러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물러가 쉬시오." 장성은 넙죽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큰아씨, 감사하옵니다." 망정사태는 눈길을 돌려 일곱 명의 대한이 쓰러져 있는 곳을 유심히 보았다. 잠시 동안 그곳에다 시선을 고정시키던 망정사태는 밤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망정사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허공에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이란 것이 명리보다 백 배나 강하구나!" 잠시 후 세심모사 문전에 악소채의 모습이 보였다. 삼절사태(三絶師大)가 차가운 어조로 악소채를 꾸짖었다. "악소채! 너의 배짱은 갈수록 커지는구나. 스승이 이곳에 도착했는데도 네가 감히 절을 하지 않 으니…" 악소채는 망정사태의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정중하게 큰절을 했다. 그러자 망정사태가 손을 흔 들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망정사태는 얼굴 근육을 실룩거리며 비웃더니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 네가 누구의 문하이건 나는 너에게 한 가지 묻겠다."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준아는 너를 나에게 데려다 주고, 수차례나 네 목숨을 구해 주었다. 우리가 그 동안의 정을 생 각지 않는다 치더라도 너는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잊진 말아야 한다. 은혜에 보답을 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악소채가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보답하겠습니다." "그것은 매우 듣기 좋은 답변이군, 지금 준아는 너 때문에 숨이 넘어 가려고 하는데… 너는 어 떻게 보답할 준비를 했지?" "저는 그를 위해 한 알의 영약을 준비했습니다. 이 약으로 그의 중병을 고칠 생각이었습니다." 망정사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약으로는 구하지 못한다. 그는 마음의 병으로 누워 있다. 마음의 병은 마음의 약으로 고쳐야 된 다." "저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그를 치료하겠습니다. 만일 그의 병을 고칠 수 없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구명지은에 보답하겠습니다." 망정사태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너는 죽지 않아도 된다." "은정(恩情)이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으니, 저는 생사를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 구명지은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이 때였다. 홍노부인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빠르게 말했다. "소채야. 너는 나의 후계자가 될 것을 응낙했는데 어찌 함부로 죽는다는 말을 하느냐?" 악소채가 홍노부인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스승님, 지금 제자는 매우 난처합니다." "나도 안다. 그러나 너는 이미 나의 문하에 들어왔으니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그러자 망정사태가 홍노부인을 쏘아 보며 말했다. "홍노부인, 노승은 서로 화기를 상하며 비극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홍노부인과 서로 약속을 하 고 싶은데요." "좋아요. 말하시오." "악소채 스스로 결정하게 하되 악소채가 결정하기 전에 우린 그녀에게 세 마디씩만 물읍시다. 그녀가 자기 의견대로 하도록 맡기는 것이지요. 그럼 먼저 홍노부인께서 말하십시오." 홍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악소채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채야, 너는 나에게 애걸을 하며 문하로 거두어 달라고 했지?" "그랬습니다." "나는 너에게 이미 응낙했으며 너는 나의 후계자가 되기로 했지?" "예,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예, 제자는 알고 있습니다." 홍노부인은 만족한 웃음을 띠며 망정사태에게 말했다. "사태, 나는 이미 소채와의 문답을 끝냈으니 다음은 사태께서 물을 차례입니다." 망정사태는 악소채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험악한 표정으로 악소채를 쏘아 보며 물었다. "나의 무공은 어떠하냐?" 악소채는 섬뜩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매우 고강합니다." "나는 홍노부인과의 충돌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이 한 줌의 분노는 소영에게 풀어야겠다." 이 말을 들은 악소채는 깜짝 놀라며 외치듯 말했다. "소영은 이 일과 관계가 없습니다." "너는 은혜를 보답하지 않고 오히려 원수로 생각하니 모두 그와 관련이 있어서이다. 이 빚은 자 연 소영에게 갚겠으며 너희들은 이곳 세심모사를 떠날 수 없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홍노부인이 크게 외쳤다. "당신은 이미 세 마디를 물었소." 망정사태는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악소채가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안 됩니다. 그건 안 돼요!" 삼절사태가 앞으로 나서며 망정사태에게 말했다. "스승님, 소영의 부모는 아직 살아 있으니 우리가 복수를 하기에 매우 좋아요. 그들에게 슬쩍 손 만 쓰면 되고, 홍노부인은 세심모사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우린 아무도 꺼려할 것이 없 어요." 악소채가 삼절사태 앞으로 나서며 애걸했다. "언니, 이것은 소영과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의 부모와는 더군다나 무관한데 어찌 무고한 사람 들에게 손을 쓰려는 것이에요? 소영의 부모님은 무림인물도 아닌데…" "이 일은 홍노부인과 무관한데 홍노부인이 오히려 참견을 하고 있잖니?" "그건 소녀가 그 분의 후계를 계승하기 위해 문하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삼절사태는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스승님은 지금 불문에 귀의하셨지만 그러나 장준의 이모잖니?" "언니, 그건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언니는 줄곧 나를 사랑해 왔는데…" "내가 너를 아무리 사랑한다 하더라도 이미 어쩔 수 없다." 홍노부인이 끼어 들었다. "망정사태, 당신네들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지 않소?" 삼절사태가 말했다. "나는 홍노부인과 언약한 일이 없으니 말을 얼마든지 하든 간에 그건 별로 신경쓸 일이 못 되 오." 악소채가 홍노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스승님, 제자가 저분들과 얘기를 명백히 하려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홍노부인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악소채는 삼절사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언니는 속으로 나를 매우 미워하고 있겠군요?" "너는 홍노부인의 후계를 맡기로 했으니 뒤가 튼튼하겠구나. 내가 너를 미워한다 해도 할 수 없 잖니?" 악소채는 삼절사태를 바라보다가 결심한듯 머리를 동여맸던 두건을 풀었다. 그 머리를 본 순간 모두 깜짝 놀랐다. 그녀의 삼단 같던 고운 머리는 한 올도 남아 있지 않고 빡빡 깎여 있었다. "옛날 스승님께서 저에게 불문의 사람이 아니니 삭발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허나, 나는 방방곡곡에서 많은 화근을 일으킨 것을 깨닫고 머리를 자르기로 결심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장대 협의일에 관해서 다른 사람보다 언니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장왕의 소법을 그에게 돌려 주었으니 이미 은원은 깨끗이 청산된 거예요. 만일 내가 시집을 간다고 하면 그건 당연히…" 모든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며 악소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소영이에게 가야 해요. 어머니의 유서에 그런 명령이 있었고, 또한 처음 장준과 내가 사귈 때에 도 네 사정 이야기를 모두 들려준 뒤였어요. 그도 나의 이런 내막을 알고 교제한 것이니까요." 묵묵히 듣고 있던 삼절사태가 망정사태를 돌아보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스승님, 악소채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망정사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악소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가 만일 정으로 대한다면, 나는 이미 삭발을 했으니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어요. 그러나 언니가 무공으로 나를 다스리겠다면 나는 목을 내밀어 죽음을 청하겠습니다." 삼절사태가 다시 망정사태를 돌아보며 말했다. "스승님, 우린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망정사태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을 본 악소채가 품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며 이 렇게 말했다. "나에게 어떤 죄가 있다면, 그것은 조물주가 나의 얼굴을 남보다 예쁘게 만든 탓이에요. 만일 내 얼굴을 추하게 만들었다면 장준대협이 나를 연모하는 마음이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나는 얼굴을 뭉개어 모든 화근을 없애고 여러분의 분을 풀리게 하겠어요." 악소채는 말을 마치고 나서 비수를 자신의 얼굴에 대었다. 그 때 홍노부인이 재빨리 손을 휘둘 러 악소채의 손을 쳤다. "쨍그렁!" 악소채의 손에서 비수가 땅에 떨어졌다. 이 때 한 줄기의 그림자가 유성같이 날아들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비호처럼 나타난 사람에게로 쏠렸다. 그것은 흰 옷을 입은 소영이었다. 악소채는 소영을 보자 미간을 찌푸리며 화난 어조로 말했다. "동생은 아직 가지 않았군요." 소영은 홍노부인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후배는 먼저 노선배님께 사과를 드려야겠습니다." 소영은 말과 함께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홍노파는 답례도 없이 싸늘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냐?" "후배가 너무 방자해서 세심모사 밖에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세심모사 밖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 "아닙니다. 그들은 노선배님을 향해 몰려오고 있습니다." "누구냐?" "신풍방입니다." "신풍방?" "예, 후배가 그의 호법을 상하게 했고 신상을 부수었으며 나마지는 모두 도망쳤습니다." "신풍방과 나는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세심모사를 침범한단 말이냐?" 소영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없이 망정사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선배님, 소영이 처음 뵙겠습니다." "소대협의 이런 예를 감당하기가 어렵군요." 소영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 사태님의 말씀은 이미 널리 들었습니다. 이제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나를 찾아 오셨으니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망정사태는 소영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나하고 싸우려고 하나?" "사태님께서 저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하셨는데 제가 여기에 있으니 사태께선 어떻게 할 작정입 니까?" "너무 건방지군." "나는 사태님이 도를 닦은 고승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태님은 정에 못 이겨 손을 떼지 못 하고 있지요? 그러나 사태님은 이왕 손을 내밀었으니 반드시 결론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나를 죽이면 모든 문제는 깨끗이 해결되고 만일 일이 잘못되어 내가 이기면 사태님도 그만 단념하시는 것이 좋잖습니까?" 망정사태는 얼굴빛이 약간 홍조를 띠며 차갑게 말했다. "자넨, 정말 내가 손을 대기를 원하는 모양이지?" "사태께선 만일 나의 일전을 수락하지 않으면 다시 암자로 돌아갈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망정사태는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묵묵히 소영을 노려보던 망정사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영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삼절 사태에게 물었다. "소영의 무공은 어떠하냐? 만일 떠도는 말대로 그의 무공이 고강하다면… 몇 수 겨뤄보고 싶다." "스승님, 소영의 무공은 매우 높고 심오합니다. 제자가 그와 겨룰 때에도 그의 무공은 탁월했는 데 그 동안 얼마나 더 진보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망정사태는 머리를 끄덕이며 시선을 악소채에게 돌리며 말했다. "너는 물러나거라! 너하고는 관계 없는 일이니까…" "스승님, 소영과 겨루어서는 안 됩니다." 악소채의 말에 망정사태는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무엇 때문이냐? 내가 그를 부상시킬까 두려워서냐? 아니면 내가 그에게 부상을 당할까 해서 그 러느냐?" "그 누가 이기든 제자는 모두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됐다. 알고 있으니 너는 그만 물러서거라." 악소채는 자기가 망정사태를 설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뒤로 몇 걸음 물러 섰다. 악소채가 물러서자, 망정사태는 소영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번 일에 대해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볼 수 있소." "악누나가 장형의 마음을 상하게 한 데에 대해서 나는 마땅히 사과할 의무가 있습니다." "매우 영웅답군요. 시비로 논한다면 나는 당신과 싸워서는 안 되오. 그러나 이왕 정은 끊을 수 없는 것이고, 견문도 익힐 겸 아무래도 결과를 봐야겠소." "후배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받을 것은 받고 줄 것은 주는 것이 마땅하지요." "나는 당신과 조건을 얘기하고 싶소." "어떤 조건입니까?" "만일 내가 패한다면 나는 이미 모든 심력을 기울여 손자를 위한 것으로 간과하고 더 캐묻고 덤 비지 않겠소. 그러나 만일 내가 이긴다면…" "그 땐 어떻게 하실 준비가 있으신지요?" "만일 당신이 패한다면 악소채가 우리 장씨의 며느리가 되어야겠소." "그것을 어찌 이 후배의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당신이 만일 이길 자신이 있다면, 어찌 그녀가 응낙하지 않겠소?" 말없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홍노부인이 끼어 들었다. "악소채는 이미 나를 따르기로 약속했소. 소영과 악소채가 모두 응낙한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응낙할 수 없소." 이 말에 망정사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서두르지 마시오. 내가 소대협과 싸워 이긴 뒤 당신과 싸워도 늦지는 않으니까…" 그러자 홍노부인이 화를 발끈 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소영보다 나중에 싸워야 된단 말이오?" "당신이 꼭 먼저 나서겠다면 할 수 없이 응낙해야겠군." "좋아요. 우리가 먼저 겨룹시다. 내가 당신을 이긴다면 소영이 나설 것도 없어지니까…" "좋지요. 내가 패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암자로 돌아가서 다시 나오지 않겠소. 나는 이후 아무런 일에도 간섭하지 않을 테니 자연 이 일도 해결되는 것이지요." 홍노부인은 죽장을 쳐들며 앞으로 나서다가 문득 멈추었다. "이제 우리가 서로 싸우게 되면 둘 중의 하나는 상하게 될 테니… 한 가지 일을 우선 명백히 알 고 싶소." "무엇이오?" "신풍방과 나는 생전에 원한을 맺은 일이 없는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세심모사를 침범하려 했지 요?" "그것은 나도 모르오." "당신이 안다 해도 말하지 않겠지요?" 그러자 망정사태는 뒤돌아보며 외쳤다. "장성(張成), 이리 오시오!" 장성이 급히 달려오며 물었다. "망정사태, 무슨 분부라도…" "당신네들이 신풍방을 청해 왔소?" "노부인께서 청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소영이 끼어 들었다. "신풍방을 청했다면 분명 다른 사람도 또 있겠군요?" 장성이 소영의 말에 대답을 않자 망정사태가 날카롭게 물었다. "또 누굴 청해 왔소?" "그것은 모릅니다." "장성! 솔직히 말해요!" "저는 시, 실로…" 장성은 더듬거리며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이 때 뒤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를 추궁하지 마시오! 물으려거든 나에게 물으시오." 182. 다시 찾은 무림평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음성과 함께 나타난 사람은 장부인이었다. 이것을 본 장성이 급히 손을 흔 들며 그녀를 만류했다. "노부인께서는 상처가 매우 중하여 움직이는 것은 무리입니다." 장부인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늙은 몸이니 죽은들 무슨 유한이 있겠소?" 망정사태가 서글픈 표정으로 장부인을 바라보았다. 장노부인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악소채 때문에 준아가 미치고 상했으니 이 올케가 어찌 편안할 수 있겠소? 또한 일이 다급하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망정사태는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많은 영웅호걸들이 정 때문에 상해 왔으니 나도 어쩔 수 없군요." 장부인의 말투는 힐난하는 어조로 바뀌었다. "준아의 생명을 구해 놓지 않고 당신은 어찌 나보고 구천에 가서 당신의 오빠를 대하라는 것이 지요? 나는 기어이 이 일을 성취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녀는 홍노부인에게 눈을 돌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상한 것은 바람기가 있는 악소채를 보호하는 사람이 도처에 있는 것이오. 우리의 홍언니까지 도 왕년의 정을 돌보지 않고 악소채를 옹호하니…" 홍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그녀의 어머니는 나의 의딸이니 따지고 보면 악소채는 나의 외손녀입 니다. 당신의 손자가 이곳 모사까지 쫓아와 행패를 부리려 하니 내가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 소?" "흥, 그런 억지는 얼토당토 않은 말이며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합니다." "나는 이미 당신에게 많이 양보했소. 다시 말을 불손하게 하면 내가 살인을 못할 줄 아시오?" 홍노부인의 말에 장부인이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은 이길 자신이 있소? 나의 시누이가 돕지 않는다 해도 오늘 밤 나는 이 세심모사를 초토 로 밟아놓고 말겠소." "당신네 백운산장의 몇 사람으로?" "두고 봅시다." 장부인은 다시 소영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자네도 왔군, 그것 잘 됐다. 이걸 보고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 크고 작은 원한 을 모두 한데 모아 해결하게 되었군." 망정사태가 장부인의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올케, 무슨 말을 하고 있지요? 또 청한 사람이 있다는 것인가요?" "있지요. 내가 얘기했잖아요? 정에 매어 하는 내 행동을 너무 탓하지 마시라고요." "누굴 청했습니까?" "시누이님, 좋은 사람은 못 됩니다. 시누이처럼 좋은 사람이라면 올케를 도우려고도 않을 테니까 요." 망정사태는 거의 숨쉴 여유도 주지 않고 다그쳐 물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나에게 얘기해 줄 수 없나요?" "난 지금 얘기하기 싫은데요." "올케, 당신은 나쁜 일을 해선 안 돼요." "흥, 장가의 후계가 끊기고 백운산장이 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되겠군요." 망정사태는 갑자기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탄식처럼 말했다. "올케님, 우리가 악소채를 굴복시킨다 해도 그것은 마음까지 정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준아와 악소채 둘 중에서 왜 하필이면 준아만이 심중의 상처를 입어야 합니까?" 장부인의 칼날 같은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 망정사태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무거운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금부인, 소대협과 약속했습니다. 이번에 영문도 모르고 망동을 해서 나는 수십 년 쌓 아 온 수양을 깨뜨리고 말았지만, 그러나 준아를 위해 나선 것이니 후회는 않으렵니다. 하지만…" "…" "내가 이미 손을 댔드니 남이 참견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올케님께서 오늘 초청한 사람들은 모두 돌려 보내 주십시오." "그렇다면 시누이께서 홍노부인과 소영을 이길 자신이 있나요?" "싸우기 전에 자신이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장씨가족의 사사로운 일 때문에 남 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됩니다." "시누이는 마음에 인자로움이 꽉 차 있으니 이 일전의 승패에 관심 두지 말고 곧 돌아 가십시 오. 결코 쉽사리 끝날 일은 아니니…" 장부인의 싸늘한 말에 망정사태는 격동의 빛을 얼굴에 미며 언성을 높였다. "올케님은 꼭 유혈참극을 빚을 작정이군요?" "홍노부인과 소영을 죽이지 못하면 준아는 영원히 악소채를 얻지 못하며, 얻는다 하더라도 그녀 가 기회를 노려 도망칠 우려가 있잖아요? 그러니 홍노부인과 소영을 죽일 수밖에…" "올케의 고집에 나는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군요." 장부인은 이 판국에 망정사태가 훌쩍 떠나 버리면 매우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더 말하지 않 았다. 그러자 망정사태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올케님, 어서 그들을 막아요!" "늦었소. 그들을 막을 수 없어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오?" 장노부인은 메마른 어조로 대답했다. "심목풍, 무공자…" "무공자(巫公子)?" "무산 오독문의 전인이지요." "그들 뿐이오?" "또 한 분 홍의화상이 있어요. 그분은 신분이 매우 높으며 소영의 사부인 장산패와도 일단의 시 비가 있었다더군요." 그러자 돌연 삼절사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장산패가 아직 살아 있었군요." 소영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직 살아 있으며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은사시오." "나도 알고 있소." 삼절사태의 이 말은 칼로 베어내듯 매우 차갑고 날카로왔다. 소영은, '사부가 찾아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바로 이 여자가 아닐까?' 소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상대방의 너무나 차가운 태도에 입을 다 물었다. 사실 삼절사태는 바로 장산패의 정인(情人)이었다. 장부인이 장산패란 말을 꺼내자 그녀는 마음 이 매우 격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삭발하고 수행한 지 오래되어 선공이 매우 깊었으므로 곧 평 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망정사태는 삼절사태와 소영을 둘러 본 뒤 다시 장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올케님, 그들은 매우 악한 사람들인데 당신은 어떻게 그들과 사귀게 되었지요?" "준아를 위해서요." 이 때였다. 몇 사람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달려 오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몸집이 크고 등이 굽은 심목풍이었다. 그 뒤를 한 명의 화상과 무공자, 금화부인, 독수약왕이 따라 왔다. 독수약왕을 발견한 소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불렀다. "남궁 노선배님!" 독수약왕은 소영을 보더니 껄껄 웃었다. "하하, 노부는 당신네 정의의 인물들과 어울릴 수 없어 역시 심대장주와 합세키로 했소이다." 소영은 화가 불끈 치밀어 욕설을 퍼부으려다 가까스로 참았다. 심목풍이 장노부인에게 말했다. "부인은 부상을 입으셨군요." "홍부인의 손에 부상당했소." "그래요? 그렇다면 조금 있다가 내가 부인을 위해 복수해 주겠소." 심목풍은 음침하게 낄낄 웃더니 이번엔 망정사태에게 말했다. "망정사태이십니까?" "그렇소." 이 때 홍의화상이 망정사태에게 말을 걸었다. "장낭자, 아직 소승을 기억하겠소? 옛날 장방이 낭자를 데리고 와서 소승과 한 번 만난 적이 있 지요. 그땐 소승의 나이 이십 세도 안 되었고 낭자는 열 살도 못 됐었지요." "나는 기억나지 않는군요." "하하, 몇 십 년이 지났으니 우리 모두 늙었군요." "나는 법호가 망정이라 합니다. 옛날의 일은 이미 깨끗이 잊었소." 홍의화상은 안색이 변하며 금방 망정사태에게 덤벼들 기세였으나, 심목풍의 눈짓을 받고 그대로 참는 눈치였다. 망정사태는 새로 나타난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장력인에게 말했다. "올케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려는 생각입니까?" 장부인은 동문서답하듯 말했다. "당신은 망정암으로 돌아가 이곳의 일에는 참견할 것 없어요." "내가 만일 당신이 이토록 많은 무리를 끌어들였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면 결코 당신의 일에 참 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늦진 않았소. 당신은 기왕에 손들 대지 않았으니 조금도 손해는 없었잖아요?" 소영은 두 노파의 언쟁에 관심 없는 표정을 지으며 홍의화상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저 화상은 분명 검에 맞아 한 쪽 팔이 잘렸는데 지금은 말짱하구나. 이상한 일이다.' 소영은 홍의화상의 손목을 유심히 살폈으나 넓은 도포자락이 손목까지 덮었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두 팔이 그대로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상한 일은 또 있다. 홍의화상은 분명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텐데 지금 그는 나에게 전혀 무관심한 태도이니…' 이 때 망정사태가 성난 어조로 장부인에게 다시 항의를 퍼부었다. "백운산장은 강호에 흩어져도 되지만 유구히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올케님의 이런 행동 은 바로 백운산장의 명성을 더럽히려는 것뿐입니다." 무공이 심후한 망정사태도 지금은 더 이상 자기의 격동하는 심정을 억제키 어려운 듯 얼굴에 경 련이 일었고, 뭇 사람들의 눈에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안색이 변해 가고 있었다. 장부인도 이미 망정사태의 붉으락푸르락하는 모습을 눈치채고는 어조를 높여 말했다. "시누이님, 당신은 중외의 고수이니 이 올케로서도 당신을 이 일에 끌어 들이고 싶은 생각은 손 톱만큼도 없소. 또한 지금 나의 동조자들이 당도하였으니 시누이님은 이 일에 참견하실 필요가 없게 되었소." 망정사태는 장부인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시선을 심목풍에게 돌리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 장가의 일에 여러분이 수고하는 것을 나로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심독풍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요?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소이다." 망정사태는 언성을 높였다. "우리 장가의 일에 귀하와 귀하신 여러분들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심목풍은 여전히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신니와 어떤 약속이 있었는지 기억을 못하겠는데요." 심목풍은 망정사태를 무시하듯 말을 계속했다. "나는 장부인과 약속이 있는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소. 따라서 장노부인께서 한 마디의 말 만 하신다면 우리는 즉시 돌아가겠습니다." 망정사태는 홱 고개를 돌려 장부인을 쏘아 보며 말했다. "올케님, 이것은 당신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당신이 한 마디 하십시오. 올케의 말 한 마디로 그 들은 즉시 돌아갈 것입니다." 장부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누이님, 나의 권고를 받아 주시오. 시누이님은 돌아가시오." 망정사태는 길게 한숨을 네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심목풍은 그들의 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영을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 "장부인께서 저를 청하실 때 소대협이 이곳에 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어째 서…" 소영은 무엇이라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때를 맞춰 왔다고 설명하려 했으나 그것은 장부인을 위해 해명을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지 않았다. 장부인은 소영을 돌아본 뒤 서서히 말하였다. "그것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심목풍은 장부인의 말을 가로막듯이 재빨리 말했다. "생각컨대 벌써 부인이 이곳으로 복수하러 올 줄을 알고 악낭자가 소영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되오." 소영은 그들이 악소채를 들추어 내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이 악낭자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그렇다면 소대협은 우연히 왔단 말이오?" "옛말에도 있지 않소?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그러자 심목풍은 비웃듯이 말했다. "요컨대 소대협은 매우 자신이 있는 것 같군." "나는 오늘 밤이 우리들의 마지막 일전이기를 바라오." 소영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심목풍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물었다. "당신이 죽지 않으면 바로 내가 죽는 것이오." 심목풍은 서서히 말하였다. "오늘 저녁 기왕 그를 만났으니 생사를 가려낼 수 있게 되었소." "나도 오늘은 기필코 생사를 가려낼 수 있기 바라겠소!" 소영도 날카롭게 심목풍을 쏘아 보며 말했다. 이 때 장부인이 말을 막으며 나섰다. "우리가 얘기한 대로 당신네들은 먼저 홍노부인을 상대하여 악소채를 빼앗아낸 뒤 다시 소영을 상대하십시오." 홍노부인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 "좋소. 당신네들은 이미 세심모사를 침범하였으며 그것은 곧 나를 향해 도전해 온 것과 같으니 당신네들은 먼저 나를 때려 눕힌 뒤 소영을 상대해야 할 것이오." 심목풍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홍노부인께서 이렇듯 일전을 요구하시니 나는 사전에 명백히 해 둬야 할 일이 있소." "이 늙은이가 귀를 기울여 듣겠소." 심목풍은 매우 여유가 있는 투였다. "오늘 우리들의 싸움은 보통 어디서나 있는 명예를 건 싸움이 아니라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이 오. 헌데 무슨 강호의 도의나 규칙 또는 술법의 정도니 비도니 하고 따질 것이 있겠소? 각자 자 기의 신통한 기지와 술법을 발휘하여 최후까지 싸우는 것뿐이오." 홍노부인이 그 말을 듣자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네들은 많은 사람을 몰아다가 비도를 발됐해서 우릴 총격하겠다는 것이오?" "그렇소. 군공발휘를 세외하고 이 많은 독물을 지닌 금화부인과 오독문의 무공자와 또 구환비를 지닌 비운대사가 출전할 것이오." 소영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보니 이 홍의화상은 법명이 비운이로구나.' 그러자 망정사태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네들은 전혀 강호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단 말이오?" "당신의 올케께서 우리를 청하여 도와 달라고 할 때, 강호의 규칙대로 처사하지 않고 수단을 가 리지 않으며 단지 악소채를 빼앗기만 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기 때문이오." 심목풍은 고무줄을 튕겨 올리듯 재빨리 지껄여 댔다. 망겅사태는 안색이 변하여 장부인을 돌아보고 소리쳤다. "올케님, 당신이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어요?" 장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내가 그런 말을 했어요." 망정사태는 길게 한숨을 토해 내고 탄식조로 말했다. "선형(先兄)께서 강호에 세운 명예를 당신이 매장시키려 하는 거요?" 그녀는 눈을 들어 홍노부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홍시주님, 우리가 싸우기로 한 약속을 여기서 끝맺읍시다." "좋소! 당신의 체면을 보아서 나와 백운산장의 원한은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하겠소." 그러자 장부인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너무 늦었소. 당신이 악소채를 내놓지 않는 이상 그렇게 되지를 않을 것이오." 심목풍이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안 됩니다. 우린 장부인과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홍노부인이 악소채를 내놓는다고 응낙하더라 도 부인은 중도에서 발을 뺄 수는 없소." 장부인은 멍하니 서서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말 난처한 일이었다. "장부인, 난처할 것 없습니다. 나는 결코 악소채를 내놓지 않을 테니…" 홍노부인이 싸늘한 시선으로 심목풍을 바라보고 말했다. "심대장주, 우린 시작을 해도 되겠소? 내가 먼저 나서겠소." 죽장을 들어 심목풍의 앞가슴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 갔다. 심목풍은 훌쩍 몸을 피하며 왼손으로는 한 자루의 자척(磁尺)을 뽑아들고 오른손엔 한 자루의 단검을 빼들었으나 즉시 반격을 가하지는 않고 높은 음성으로 장부인을 향해 소리쳤다. "부인은 많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왔습니까?" 장부인은 마주 소리쳤다. "나를 제외하고 노복인 장성이 있습니다. 다른 일곱 명의 검수는 이미 홍노부인의 손에 죽고 말 았소." 심목풍은 불만이란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쳤다. "당신의 시누이인 망정사태는 무공이 고강하여 능히 홍노부인을 상대할 수 있으니 부인이 손을 쓰도록 명을 내리십시오." 그러나 장부인은 고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오." 홍노부인도 잠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듣느라고 선공을 하지 않았으며 망정사태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멈칫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당신네들 장가의 일이며 우리는 단지 부인의 초청에 응해서 도우러 온 것뿐인데 설 마 우리보고 목숨을 건 격투를 하도록 당신네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이미 홍노부인과 일전을 겨루다가 상처를 입어서 크게 상하긴 했지만 그러나 나도 독이 묻은 검으로 그를 찔렀으므로 지금쯤 그 독이 퍼지기 시작했을 테니 홍노부인도 고통을 당할 것 이오. 따라서 심대장주는 그녀를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장부인이 말하자 심목풍이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그 말은 당신의 시누이인 망정사태가 이 싸움에 뛰어 들지 않겠다는 뜻이오? 결국 우릴 돕지 못하겠다는 말이군!" 그러자 망정사태가 싸늘하게 쏘아 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맞소. 나는 결코 당신들을 돕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당신들의 적이 되겠소." 심목풍은 망정사태의 말에 그만 실색하고 말았다. 흠칫 몸을 도사리며 말했다. "무엇이라구? 당신은 옥소랑군의 생사까지도 상관치 않겠다는 것이오?" "장가의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 하더라도 나 망정사태는 무림의 청명을 버릴 수 없소." 망정사태는 고함을 쳤다. 심목풍은 치미는 화를 억제치 못하고 붉으락푸르락 변색되다가, 그만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소! 장부인이 청해서 온 좋은 동조자군!" 장노부인은 난처했지만 어떤 결론을 내려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음성을 높여 소리쳤다. "시누이님! 당신이 우릴 돕지 않아도 좋아요. 비록 그렇다라도 우리와 결코 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니 이대로 돌아 가십시오." 그러나 망정사태는 꼼짝하지 않고 오히려 단호하게 부르짖었다. "올케! 우리 장가의 일을 제가 스스로 해결하려는데 어째서 올케도 저들을 돌아가도록 책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기왕에 내가 여기까지 도우러 왔는데 어찌 쉽사리 돌아가겠소?" 심목풍이 빈정거리듯 말하자, 망정사태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건 당신이 여기 온 것을 결코 우리 장가의 일을 돕기 위해서만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 로 증명하는 말이오." 이 때까지 망정사태의 태도를 관찰하던 홍노부인은 이미 망정사태가 심목풍을 돕기 위해 싸움에 뛰어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간파하고는 강적이 하나 줄어들었다고 생각하자 약간 여유있는 태도 로 몸을 굽히고 일변 날카롭게 선공을 가하며 말했다. "심목풍! 나는 오래 전부터 너의 악행을 익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맹세한 일이 있기 때문 에 너를 찾아가 무림을 위해 오늘에야 이렇듯 네 스느로 찾아 왔으니 나는 무림의 정도를 위해서 라도 좋은 일을 하게 됐다." 그는 말을 끝내는 동시에 죽장을 들어 질풍같이 그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심목풍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자척을 휘둘러 죽장을 막으며 즉시 반격을 가했다. 순간적으로 악투가 전개되었다. 그 때 돌연 악소채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소문과 소홍이 초가집 안에서 질풍같이 달려나 와 한 자루의 경검을 악소채에게 넘겨주고 동시에 자신들도 등 뒤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소영도 서서히 품 안에서 한 자 여덟 치 길이의 복마금검 한 자루를 꺼내 들고 기세를 가다듬어 적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며 적과 자기편의 형세를 가늠해 보았다. 만일 홍노부인이 심목풍을 상대할수 있다면 자기는 비운화상을 상대하고 악소채와 소문, 소홍이 전력을 다하여 금화부인, 독수약왕을 상대하며 또한 백리빙이 무공자를 상대한다면 억지로라도 싸움은 막상막하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망정사태가 어떻게 나올는지가 의문이었다. 망정사태가 끝까지 손을 써서 심목풍 편을 돕지 않는다면 승패 의 열쇠는 자기와 금노부인이 상 대하는 적과의 승부에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때 코를 찌르는 비린내와 함께 각종 독물들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망정사태가 수중의 불진을 휘둘러 대며 고함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독물을 때려 죽이며 소리쳤 다. "빨리 피하시오. 저들은 이미 암중에 독물을 방출했소." "사부님, 모사 안으로 들어가 피하십시오." 악소채가 잇달아 소리쳤다. "소문, 소홍은 장부인을 보호하여라." 장성은 곧 장부인을 소문에게 넘겨 주고 몸을 돌려 정면으로 가로막고 섰다. 이 때 각종의 독물이 일제히 모사를 향해 돌진해 왔다. 악소채와 망정사태, 그리고 삼절사태는 각기 무기를 휘둘러 독물을 격파하였다. 장성까지 합세했다. 이들의 무술은 비범하여 독물들은 비록 수가 많았으나 허사였다. 단 하나도 그들을 뚫고 모사를 향해 돌진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들을 물러서게 하지도 못했다. 소영은 복마금검을 움켜쥔 채 옆으로 두어 걸음 옮겨 서며 홍노부인에게 말했다. "노선배님, 독물이 사방에 둘러 싸여 공격해 오니 이대로는 오래 싸울 수 없겠습니다. 우린 일단 모사 안으로 물러가서 잠시 대책을 세우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금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독물을 쳐냈다. "너는 물러가고 나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말아라." 홍노부인은 죽장을 바싹 움켜 쥐고 더욱 맹렬히 공격해 들어갔다. 소영은 이 노부인의 성미가 정말 괴상스럽다고 생각하며 금검을 휘둘러 그녀를 도와 가까이 다 가오는 독물을 격살해 냈다. 그 때 돌연히 비운화상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헛, 소영 너는 내게 일검을 명중시켰지만 나는 일진의 구환비발로 갚아 주겠노라."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가 두 손을 들어 힘껏 뿌리자, 돌연 두 줄기의 금빛이 맴돌며 소영을 향 해 질풍처럼 닥쳐 왔다. 소영이 급히 금검을 휘두르자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불꽃이 퉁겼다. 그리고 어떤 쇠붙이가 땅에 떨어질 듯하다가 마치 날개가 돋힌 듯 다시 떠올라 회전하여 덮쳐 왔다. 이제 보니 비운대사의 이 구환비발은 구발로 만들어진 발진으로, 일단 쳐내면 다시 내력을 돋구 어 회전하며 손가락을 조종하여 연속적으로 적을 격타해 내는 무기로써 확실히 무림에서는 일절 에 속하는 것이었다. 소영은 순식간에 연환비발에 둘러싸여 도저히 막아 낼 수도 없었거니와 몸을 빼낼 수는 더욱 없 었다. 소영은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독수약왕의 음성이 가늘게 들려왔다. "대사님, 제가 한쪽을 돕겠습니다." "좋소!. 당신은 왼쪽에서 소영을 공격하시오." 그러나 비운대사는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돌연 두 눈이 핑 도는 것을 느끼고 몸을 앞으로 굽히 는 순간, 심하게 비틀거리다가 붉은 선혈을 왈칵 토해 내고 말았다. 그것은 독수약왕이 암중에 전신의 공력을 집중시켜 일장을 비운대사의 등에 내리친 것이었다. 비운대사는 마침내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을 느끼고 선혈을 토해 내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비 운대사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의 내공도 누구 못지않은 것이었으므로 쉽게 고꾸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내장이 뒤집히고 뼈마디가 부서지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어느 틈엔가 몸을 뒤채이며 독수약 왕에계 덮쳐들어 일장의 맹공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의 장력은 무시무시했다. 광풍처럼 뻗어나간 장력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독수약왕에게 부딪쳐 갔다. 독수약왕은 그가 돌연한 반격을 가해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으므로 간신히 피하면 서 손을 들어 비운대사의 장력을 옆으로 쳐내기에 바빴다. 마치 폭음소리와 같은 펑! 소리가주위를 뒤흔들며 땅을 뒤엎듯 저편으로 퉁겨져 나갔을 때 비운 대사는 더 견디지 못하고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비운대사가 쓰러지자 비발도 그 위력을 잃고 소영의 금검에 부딪혀 떨어지고 소영은 가볍게 몸 을 날려 비운화상을 향해 덮쳐 갔다. 금검을 들어 비운화상을 내리치자 싸늘한 불꽃속에서 비릿한 선혈이 사방으로 튀어올랐고 비운 화상의 머리가 곧장 일 장이나 멀리 날아가 버렸다. 소영은 곧 이어 몸을 훌쩍 날려 독수약왕에게 다가갔다. "노선배님…" 독수약왕의 몸에는 이미 여러 마리의 독사가 엉키어 온몸을 물어 뜯고 있었다. 소영은 급히 금 검을 휘둘러 독사들을 격살하고 독수약왕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 때 갑자기 한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큰나무 위에서 질풍같이 내려오며 소영의 곁으로 달려 들었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전세를 살피던 백리빙이었다. 장내에는 엉뚱한 사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무공자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목 처럼 땅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금화부인이 귓가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소리쳤다. "이제 심목풍 한 사람뿐이오." 무공자가 죽어 넘어지자 그가 조종하던 독물은 위력을 잃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소영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숙연히 독수약왕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노선배님, 안심하시고 상처나 치료하시면서 내가 심목풍을 죽여 노선배님의 원한을 풀어 드리 는 광경이나 구경하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소영은 몸을 솟구쳐 금노부인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금노부인, 제게 한 번만 양보해 주십시오. 심목풍은 제가 처치하겠습니다." 이 한 마디의 말에는 호기가 넘쳐 흘렀고 힘이 있었다. 금노부인은 소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장을 공격하고 훌쩍 몸을 날려 저만큼 물러났다. 소영은 금검을 움켜 쥐고 심목풍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백 초 안에 당신의 목숨을 빼앗겠소." 소영은 심목풍의 대답도 듣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육박해 들어갔다. 두 사람이 맞붙자 형세는 험악하게 변해 갔다. 돌풍이 일어나며 소영의 금검이 찬란한 빛을 발 하면서 심목풍의 주위를 둘러싸고 차츰차츰 그 간격을 좁혀 갔다. 심목풍은 마치 금빛 찬란한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홍노부인이 이 광경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토해 내고는 망정사태에게 넌지시 말했다. "심목풍의 무공은 결코 나보다 하수가 아니었소."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나오니 우린 이미 늙었나 봅니다." 망정사태는 두 사람의 격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때 홍노부인이 돌연 소홍의 손에서 장검을 뺏아 든 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의 왼쪽 팔 을 뚝 잘라냈다. 이를 본 악소채가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사부님!" 그러나 홍노부인은 남담히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며칠 더 살고 싶어 팔을 잘랐다. 이번 싸움에서 나는 이미 운기가 다하여 폐혈할 능력이 없어 독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 없구나." 망정사태도 당황해서 영단을 꺼내 홍노부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악소채는 급히 약물을 가져다가 홍노부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 때 돌연 천지를 뒤흔드는 고함소리와 함께 싸늘한 금빛이 확 퍼졌다간 홀연히 사라지며 심목 풍의 거대한 몸집이 반으로 쪼개져서 고목처럼 쓰러졌다. 검빛과 함께 심목풍에게서 떨어진 소영 은 삼 장이나 뒤로 물러섰다가 검을 팽개치고 독수약왕에게로 달려갔다. 이 때 금화부인이 뱀의 독을 제거하는 두 알의 약을 독수약왕에게 먹이고 있었다. 악소채, 망정 사태, 홍노부인도 모두 몰려들었다. 독수약왕의 얼굴엔 이미 검은 그림자가 덮혀 왔고 그의 고통에 찬 미소가 더욱 비감해 보였다. "천하에 나를 구할 수 있는 약은 없소. 나는 평소에 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므로 이제 죽는다 해 도 아무런 여한은 없소이다." 독수약왕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망정사태가 몸을 굽히며 그를 위로하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개과천선하였으니 장차 성불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한시바삐 꼭 할 말이 있소. 지금 나의 이 한 모금 호명지기는 수시로 흩어져 가고 있으 니…"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악소채 아가씨…" 악소채는 독수약왕이 자기를 부름에 깜짝 놀랐다. "노선배께서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 "내 주머니에 편지가 한 통 있소이다. 빨리 읽어 보시고 내 부탁을 들어 주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악소채는 독수약왕의 주머니를 더듬으며 말하였다. 그의 왼쪽 주머니에서 편지가 한 통 나왔다. 겉봉에는 <악소채 낭자 친전(親展>이라고 씌어 있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니 아가씨께서 응낙하실 줄 믿소…" 독수약왕의 입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독수약왕은 소영에게 눈길을 돌렸다. "한 가지, 내가 대신 처리한 게 있소." "무슨 일입니까?" "포일천이오. 나는 그의 몸에 독을 입혔소. 아직 반달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이오. 그는 단번 에 아홉 명의 고수들을 묻어 죽였으니 그를 독살시켰대서 심한 것은 아닐 거요."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 위인은 너무나 음흉했습니다." "내가 이번 일에 성공한 것과 다시 심목풍의 신임을 얻게 된 것은 모두 금화부인의 공로였소. 그녀는 당신을 위해 심목풍에게 몸까지 바쳤소…"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눈을 감고 말았다. 소영이 너무 뜻밖의 사실에 놀라 금화부인을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뒤였 다. 소영은 독수약왕의 시체를 보며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노선배님의 일생동안 남기신 공과는 남들이 평가하겠지만 나 소영에게 남겨주신 은의는 매우 두터운 것입니다. 당신이 이 일대의 무림동도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반드시 후에 영달이 있 을 것입니다. 후배는 감히 당신의 시체를 거두어 들이지 못합니다." 하며 홍노부인을 향해 포권하여 예를 보이고 말을 이었다. "노선배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후배는 이제 그만 떠나겠소이다." 홍노부인은 소영의 소맷자락을 부여잡듯 간곡히 말했다. "천하영웅들이 점심 때면 이곳에 당도한다는데 어찌 자네는 그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건가? 만나 고 헤어짐이 좋을 것 같구나." 그러나 소영은 머리를 저었다. "악의 거두를 이미 제거하였으니 천하에는 일단 태평한 나날이 있을 텐데 후배가 그들과 만날 필요가 있겠습니까?" 소영은 말을 마친 뒤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백리빙이 소영을 따르며 말했다. "오빠는 이제 금검도 필요 없습니까?" "악의 무리가 이미 제거됐으니 금검도 필요가 없다." "설마 나도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백리빙이 웃으며 물었다. 소영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백리빙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빙아는 빙아의 아버님을 만나 나와의 사이를 잘 말씀드리도록 해라. 만일 빙아의 부모님께서 우리들의 내정을 허락하신다면 내년 추석날 만나기로 하자. 나는 그 날 화산 설봉에서 오경까지 빙아를 기다리겠다. 만일, 오경이 지나면 영영 빙아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백리빙은 눈물이 글썽한 모습으로 소영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모두 쾌히 응낙하시리라 믿어요. 그리고 오빠의 말도 꼭 믿고 있으니 우린 내년 추석날 화산설봉에서 오경이 되기 전에 만나요. 잊지 않겠어요." 그 때 악소채는 한쪽으로 물러서서 독수약왕의 편지를 재빠르게 읽고 있었다. <저의 딸, 남궁옥이 소영의 아이를 잉태했소. 딸년이 입 밖에 내지 않아서 저도 몰랐었고, 소영 도 모르고 있소. 약하게만 자라온 딸이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고 생각하니 이 늙은이는 감격스 럽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나, 늘 이 애비에게 의지하고 살아온 아이가 혼자서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이 되오. 악낭자는 소영의 누님뻘이 되고, 또 소영과도 각별한 사이이니 내 딸을 맡기고 싶소. 부디 거두어 주시고, 저의 말로(末路)를 보아서라도 잘 보살펴 주시기 바라오. 고맙소.> 악소채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흘렀다. 웬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옴을 느꼈지만, 그녀는 남궁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두가 소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 강호는 전에 없이 조용해졌다. 소영이 떠나 버린 후 천하영웅들도 각자 흩어져 제 갈 길을 찾아 갔고, 심목풍이 없어진 강호는 태평성대를 맞이했다. 모두가 소영이 어디로 떠났는지를 몰랐다. 다만 백리빙만이 가슴 속으로 그 날을 기다릴 뿐이었 다. 조용한 가운데도 세월은 흘러 추석을 맞이하는 가을밤의 보름달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그 달 빛을 받으며 화산설봉으로 오르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만남을 기대하며 가까와지는 두 그림자는 소영과 백리빙이었다. <완결>